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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 10-20

#010. 당위적 첫걸음 (3)

도적 토벌을 마치고 갑자기 소집된 회의.

그리고 그곳에서 발표된 나의 포부.

"그리고 조만간 병력을 모아 시하브 토후국을 정벌할 계획입니다."

정벌(征伐).

"영주님, 정벌이라 하시면...?"

"예, 시하브 토후국의 영토를 점령하고 완전히 멸망시키는 것이 목표입니다."

그래, 정벌이다.

단순한 교전이나 약탈이 아닌 진짜 전쟁.

정식으로 선전포고하고 시하브 토후국이 멸망할 때까지 싸우는 총력전.

갑작스럽고 파격적인 선언에 당연히 가신들은 엄청난 충격에 빠져 머뭇거리고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야 그렇겠지.

이미 영주가 둘이나 전장에서 전사했는데 나까지 정벌을 운운하니까.

까딱하면 니카로스 남작령은 멸망이다.

다들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정확히는 이미 멸망의 길목에 서 있다는 게 더 맞겠지만 말이야.'

하여간.

어차피 영주가 될 거면 진작 될 걸 그랬어.

'...아닌가. 의도한 건 아닌지만, 이거 패륜적인 발언인가. 차남이 바로 영주가 될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어쨌거나 나는 그런 웅성거림 속에서도 당당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한 게 아니니까.

이미 시하브 토후국에 선전포고할 명분은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오히려 까딱하면 명분에 실리를 잡아먹힐 정도로.

제논을 죽인 것만으로도 이미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셈인데, 그에 더해 도적단을 매수해 마누엘의 죽음까지 사주했다니.

만약에 이걸 참고 넘어간다면 니카로스 남작령의 위신이 땅을 뚫고 나락까지 처박힌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이 변방에서 얕보인다는 것은 곧 파멸이나 다름이 없다.

벌써 오늘의 사례가 이 사실을 증명한다.

도적들이 갑작스럽게 습격한 이유도 전부 만만한 호구 니카로스를 남들보다 먼저 털어먹기 위함이었으니까.

이 야만의 땅에서는 만만해 보이는 순간, 그냥 그날부터 모두의 맛집이 탄생했다는 것을 축하하기 위해 곧바로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할 거다.

마누엘이 무리한 원정을 감행한 것도 같은 맥락.

절대 걔가 감정적인 바보라서 그런 게 아니다. 전부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현재 똑같은 딜레마에 빠져 있고.

"시하브 토후국의 정벌하는 것은 이제 우리의 사명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을 마냥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다.

어디서도 구하기도 힘든 명분이 이미 나의 손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분명한 진실이니까.

아무리 이 일대가 상대가 이교도라는 이유만으로도 1년 365일 내내 서로 성전을 선포하며 치고받는 마굴이라지만, 그래도 명분의 유무는 상당히 중대한 문제다.

'딱히 특별한 이유도 없이 이웃을 공격하고 정복하면 당연히 주위의 모두가 그 호전성을 우려하고 경계할 테지만, 합당한 명분이 있다면 그러한 인식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거든.'

게다가 그게 살해당한 가족의 복수와 도적단 사주 응징이라는, 같은 월광교도조차 함부로 부정하기가 어려운 명분이라면 더더욱.

최소한 이번 전쟁으로 괜히 반 니카로스 연합군 같은 끔찍한 무언가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렇기에 바로 지금이.'

선전포고하기 최적의 때라는 것이다.

요컨대 지금의 상황은 몹시 날카롭고 예리한 양날검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다름없는 셈.

까딱하면 나를 벼랑 끝으로 밀어붙이고 있긴 하지만, 적 하나만큼은 무엇보다 확실하게 베어 넘길 수 있는 그런 검 말이다.

'그래, 명분이 우리를 벼랑 끝으로 몬다면.'

까짓거 벼랑 끝에서 뛰면 되지.

아주 높이높이 뛰어올라서 아예 벼랑 건너편까지 건너가 버리면 문제 될 게 아무것도 없잖아?

웃기는 말장난 같아도.

'각력만 훌륭하면 못할 것도 없어.'

어차피 살아남기 위해서는 과감해져야 한다.

싸워야 하고, 정벌해야 하고, 집어삼켜야 한다.

그게 누가 되었든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니까.'

이 변방이라는 대지 그 자체에.

아니면 머지않아 나타날 동방의 정복자에게.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대놓고 싸워 마땅한 이유를 만들어주다니. 이게 기회가 아니면 뭔가.

시하브 토후국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1라운드 상대다.

당연히 우리 니카로스보다는 강하지만 애초에 이 일대에 니카로스보다 약한 세력은 없으니까.

'있었으면 진작에 망했겠지.'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거다.

시하브 토후국을 정벌하고자 하는 나의 선택은 무척이나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돌아가신 전 영주님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는 것은 무척이나 당연하고 바람직하지만... 그래도 조금 더 심사숙고한 뒤 다시 결정하는 것은 어떠십니까?"

"그렇습니다, 영주님. 시하브 토후국을 정벌하는 마땅히 우리 니카로스의 사명으로 삼기 충분한 일이지만, 지금은 시기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영주님의 안전입니다. 영주님은 발란티스 가문의 마지막 후예입니다. 시하브 놈들이 먼저 쳐들어오지도 않은 지금, 벌써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수는 니카로스의 모든 신민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금은 이 마음만 잊지 않고 더 힘을 비축해 와신상담할 때가 아닐지...."

가신단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곤조곤 아주 반대가 열렬하다.

"...."

아예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실제로 융단폭격을 맞으니 좀 어지럽다.

- 복수를 선언하는 어린 영주의 심정도 이해한다.

- 이게 합당한 선택이라는 것은 안다.

- 우리도 당장에라도 복수하고 싶다.

- 하지만 솔직히 이대로 싸우면 질 것 같아.

- 너까지 죽으면 진짜 멸망이야.

- 그러니까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요약하면 결국 이런 뜻.

전 영주이자 가족의 복수라는 명분이 너무 합당해서 가신들도 대놓고 반대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말 속에 담긴 속뜻은 너무나도 뻔하다.

뭐, 이해할 수는 있다.

아직 니카로스가 얼마나 바람 앞에 등불 상태인지 알 수 없을 테니 저런 반응도 당연하겠지.

'그래도 만약에.'

지금 나의 자리에 제논이 앉아 있었어도 이렇게 거세게 반대했을까?

저들은 결코 전쟁 그 자체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가신단 대부분이 바로 그 전쟁을 통해 제논과 함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베테랑들이니, 싸움 따위를 두려워할 리는 없다.

그저 나라는 애송이가 진두지휘할 원정과 전투.

그 승리를 믿지 못하기에 반대하는 것뿐.

근본적인 원인은 결국 신뢰 부족이라는 거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원작에서부터 영지라는 게 그렇게 말 잘 듣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이걸 다잡는 것도 당연히 영주인 내가 해야 하는 일.

나는 그 모든 반대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가볍게 웃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물론 저도 당장 쳐들어가겠다는 건 아닙니다. 조금 있으면 농번기가 다가오기도 하고. 대략 반년에서 1년 정도는 준비한 뒤에 선전포고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원래 이런 영지의 대대적인 사업에서 '지금'의 범위는 상당히 넓다.

명분이란 것의 유통기한이 제법 길기도 하고.

그래, 나도 위험은 감수하되 무리할 생각은 없다.

어디까지나 승리와 생존이 목표지, 괜한 만용으로 영지를 말아먹거나 죽고 싶어서 안달 난 게 아니거든.

"그렇다면 시기는 적절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시하브 토후국은 우리 니카로스보다 큽니다. 영주님의 승리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전면전 자체가 영지에 너무 큰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말을 한 것은 바로 집사장이었다.

나의 승리 자체는 의심하지 않지만, 영지에 가해질 부담을 걱정한다니.

저 아저씨 말은 참 그럴듯하게 한단 말이지.

'사려가 깊은 건지, 소심한 건지, 아니면 그냥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인지.'

그래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다.

시하브 토후국도 소국이지만 그래도 니카로스보다는 영토나 인구가 1.5배 정도 많다.

당연히 소수 정예의 기사단만으로 전면전은 불가능.

그런 시하브 토후국과 제대로 붙어보려면 영지의 주민들을 대대적으로 징집해야 할 텐데, 그러면 일단 이겨도 한동안 경제가 흔들리는 건 피할 수 없다.

당연히 지면 순식간에 파멸이고.

'이기는 건 좋지만, 피로스의 승리는 나도 사절이야.'

역시 제일 좋은 방안은 농번기와도 관계없이 싸울 수 있는 상비병의 규모를 지금 이상으로 더 많이 늘리는 방법뿐이지만, 슬프게도 지금 니카로스 남작령에 그만한 군을 만들고 유지할 만한 돈은 없다.

검은 매의 기사단 하나를 운용하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휠 지경이니까.

그렇다면 결국 남은 방법은 하나뿐.

"징집병은 최소화하고 빈자리에 용병을 고용해서 채울 계획입니다. 이러면 영지의 부담도 줄이고 정면승부에서 밀리지도 않겠죠."

오직 전쟁만을 위해 존재하는 친구들을 한시적으로 고용하는 수밖에.

이런 나의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집사장이 당황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떠듬떠듬 반응했다.

"화, 확실히 용병을 고용하면 주민에게 가는 부담이 줄어들 겁니다. 하지만 영주님, 니카로스에 그만한 돈은...."

- 용병은 비싸다.

- 그리고 니카로스에 그만한 돈은 없는걸?

재무 담당으로서 하기 그다지 당당한 말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게 집사장 잘못은 절대 아니다.

그냥 니카로스 자체가 부유한 영지가 아닐 뿐.

여기가 부유하고 비옥한 땅이었으면 애초에 변방이 아니었겠지.

물론 그 정도야 이미 나도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도 뱉은 말인 만큼 해결책도 있고.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돈은 빌리면 됩니다."

전쟁의 제1 원칙.

따서 갚으면 된다.

내 말에 집사장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경악했다.

마누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고 온 이후로 저 정도로 놀라는 건 처음 본다.

'뭐, 집사장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겠지.'

여기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중앙은행이 있는 세계가 아닌걸. 이 세계의 경제가 그 정도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돈을 빌린다는 건, 당연히 사채업자와 만난다는 뜻.'

사채업자에 대한 인식은 무척 나쁘다.

사채업자들은 모두 이교도니까.

정확히는 내가 돈을 빌릴 수 있는 사채업자는 이교도뿐이라는 거다. 이 세계에서는 같은 종교를 믿는 사람한테 사채업을 하면 안 되거든.

전반적으로 여기 문화가 이렇다.

노예 제도도 그렇고, 일단 기본적으로 나빠 보이는 건 같은 신앙의 동포에게 하면 안 된다는 풍조가 있다.

나아가 아예 엄격한 법으로 규정해놓을 때도 있고.

'예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나쁜 걸 막을 거면 아예 막지 뭘 이렇게 애매하게 구는지.'

어쨌든 그렇다고 내가 월광교 터번쟁이 놈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건 또 아니다. 애초에 월광교랑 싸우겠다고 월광교 신자에게 돈을 빌리는 것도 우스운 일.

분명히 이 동쪽 변방의 주역은 십자교와 월광교지만, 그렇다고 대륙에 종교가 이 둘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럼 제국의 사채업은 누가 주로 하는가?

신목천칭교(神木天秤敎).

이 천칭교를 국교로 하는 번듯한 국가가 없어 천칭교 신자 대부분이 세계 곳곳에 퍼져 사는 편이었다.

그리고 제국에서 사채업을 하는 주류가 바로 이 천칭교 신자들이고.

종교적으로 십자교와 월광교만큼 사이가 나쁜 건 아니라 그럭저럭 함께 어울려 살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절친한 사이는 또 아닌, 그런 조금 껄끄러운 관계.

'그런데 그런 껄끄러운 놈들과 주로 돈 문제로 만나게 되면 걔들 인식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사채업자들에 대한 이미지가 수직으로 하락할 수밖에. 사실 여부를 떠나 기본적으로 사람을 파멸시키는 악마의 고리대금업자 취급이다.

그런 끔찍한 고리대금업자를 상대로 따서 갚으면 된다니 집사장이 저렇게 경악하는 것도 어쩔 수 없지.

'아니, 어쩌면 빌리는 것 자체가 난관일지도 몰라.'

물론 아무리 니카로스 남작령이 변방의 작은 영지라지만, 나도 엄연히 패권국의 귀족이자 영주다.

신용은 충분히 있으니 한두 푼 빌리는 것은 절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지금 빌려야 하는 것은 전쟁을 위한 군자금.

그것도 그냥 전쟁이 아니라 니카로스의 명운을 건 전쟁이다.

제가 제 영지를 걸고 전쟁을 한판 떠야 하는데요. 돈 좀 빌려주실래요? 이기면 갚을 수 있어요. 지면 몰라.

'...이러면 어떤 사채업자가 넙죽 돈을 빌려줄까.'

그런 배경이 있기에 당연히 집사장뿐만 아니라 다른 가신들 또한 엄청난 우려를 표하며 나를 말리려 했다.

하지만 나는 이런 어려운 조건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추하게 다 큰 어른이 뻔한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그냥 합리적인 자신과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돈을 빌릴 자신과 전 재산을 화끈하게 올인하기에 아주 합리적인 이유가 말이야.'

그래, 이 전쟁은 일종의 도박이다.

'그리고 도박이지만 내가 이길 수밖에 없는 도박이기도 하지.'

원래 도박이란 알고 있는 게 많은 놈이 이기는 법이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테이블에서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놈이다.

#011. 당위적 첫걸음 (4)

회의는 그럭저럭 끝났다.

유감스럽게도 우리 가신들은 나의 '따서 갚기' 계획이 얼마나 합리적인지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지. 고작 한 번의 논의만으로 모두를 설득할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

물론 나도 가신단의 지지를 받는 게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당연히 마음 같아서는 한 명 한 명 붙잡고 차분히 설득한 뒤에 모든 일을 진행하고 싶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는걸.'

뭐가 되었든, 지금은 행동부터 할 때니까.

항상 강조했지만, 동방의 정복자가 정확히 언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그런 무작위성이야말로 <마이트 앤 로열>의 특징.

당연히 나로서는 2년, 3년 계속 뒤로 밀릴수록 좋지만, 그게 원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니.

정말 최악의 경우 당장 다음 달에도 나타날 수 있다.

'그래도 그나마 위안이 있다면 정복자가 등장하자마자 무작정 제국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는다는 거지.'

아무리 대단한 정복자라고 해도 역시 처음에는 신흥 세력이자 도전자, 루키의 입장.

세력의 발흥지 역시 제국과 맞닿은 국경 지대가 아닌 월광교 영역 깊숙한 곳이니, 자연스레 정복자의 첫 상대는 같은 월광교 소왕국들이 된다.

'그러니까 저 멀리 동쪽에서 들려오는 소문만 잘 놓치지 않고 잘 듣고 있으면, 정복자의 칼끝이 대충 언제쯤 제국으로 향할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

이건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사실이다.

월광교끼리 싸우는 게 특별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애초에 제국의 입장에서는 다 그놈이 그놈인 이교도 세력이라고 묶어서 부르긴 하지만, 종교가 같다고 꼭 서로 사이가 좋다는 법은 없으니까.

세부적인 종파와 교리의 문제도 있고, 실질적인 영토 문제도 있고, 야심 가득한 월광교 국가끼리 치고받고 싸울 이유야 널리고 널렸다.

애초에 딱 깔끔하게 제국 vs. 월광교, 이런 이분법적인 구도로 정리가 되었다면 지금 이 시대가 난세라고 불리지도 않았겠지.

'그렇다고 엄청 여유로운 상황인 건 또 아니고.'

아쉽게도 동방의 정복자와 맞서 싸울 왕국들이, 그다지 오래 버티지는 못할 것 같거든.

지금까지 수없이 원작을 플레이해봤으니 안다.

'진짜 괴물이야, 걔는.'

정복자의 세력 확장과 함께 세계 지도가 실시간으로 점점 물드는 속도는, 게임이어도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물며 지금은 게임도 아닌 현실이니까.'

그러니까 아무튼 결론은.

지금부터 부지런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

따라서 그런 의미에서 내가 내뱉은 말에, 키로스 경은 이렇게 반문했다.

"에우스페나 공작령에 다녀오실 계획이라고 하셨습니까?"

에우스페나 공작.

제국 동부를 다스리는 대영주.

그리고 나, 니카로스 남작의 직속 주군.

나는 분명 제국의 귀족이지만, 사실 엄연히 따지면 황제의 봉신은 아니다.

황제의 봉신은 공작이고, 나는 그 공작의 봉신이지.

쓸데없이 복잡하고 이상한 구조지만, 봉건제라는 게 원래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돌아가는 물건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나는 그런 에우스페나 공작이 다스리는 땅에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가장 먼저 키로스 경에게 밝혔다.

"확실히 에우스페나 공작님에게는 우리 니카로스와 변방을 지킬 의무가 있기는 하지요. 영주님께서 직접 방문하셔서 구원을 요청하면 공작령에서도 쉽게 무시하지 못할 겁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우려가 되는군요."

"괜찮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명분일 뿐이니까요."

"명분이라고 하시면...? 그렇다면 공작님을 방문하는 게 본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지난 회의 때도 이야기가 나왔을 만큼, 이런 영지의 위기 때 직속 주군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럴 때 도움받으려고 평상시 주군의 질서와 통치에 따르고 봉신으로서 조세까지 바치는 거니까.

- 야, 내가 거기까지 직접 통치할 여력은 없다.

- 그러니까 네가 거기 눌러앉아서 나한테 공물도 바치고 부하 좀 노릇 해라. 대신 무슨 일 생기면 내가 너 지켜줄게.

자릿세 뜯는 조직폭력배의 행태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 같지만, 이런 계약이야말로 봉건제의 본질.

'하지만 계약이란 게 항상 지켜지는 건 또 아니거든.'

바로 그게 문제다.

"그렇습니다. 지금 공작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미 키로스 경도 잘 알고 있으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영감님도 다 알잖아요?

나는 그런 표정과 함께 순순히 대답했고.

"...."

키로스 경은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공작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또 공작은 도와주는 게 당연한 일이다.

나도 인정하고 키로스 경도 인정하고 다른 가신들도 인정하는 보편적 상식이자 주지의 사실이지.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이 썩어 문드러져 가는 바할리아 제국에는 가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무뢰배도 존재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나의 주군인 에우스페나 공작이라는 게 가장 슬픈 점이고.'

그 사실을 에우스페나 출신인 키로스 경이 모를 리가 없다.

"...확실히 부정하기는 어렵군요. 그렇다면 에우스페나는 달리 어떤 목적으로 방문하시는 건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공작에 도움을 요청하는 게 무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에우스페나에는 어째서 방문하는가?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는 의문을 키로스 경은 물었고.

"도움을 구하러 가는 건 맞습니다. 에우스페나에는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지요."

나는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에우스페나.

제국 동부에서 가장 거대한 도시.

당연히 사람도, 그 사람에 따라오는 사건도 이 주위에서 가장 많은 지역이다.

원작의 고인물에게 이만한 무대가 또 있을까.

"따로 떠오른 묘안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내가 웃으며 말하자, 키로스 경은 마치 재밌는 이야기라도 들은 듯 따라 웃었다.

"묘안이라고까지 하면 너무 거창하고, 소소하게 염두에 두고 있는 것 정도는 있습니다."

제논도 죽고, 마누엘도 죽었다.

인재도 없고, 가진 기반조차 미약하다.

이대로라면 니카로스는 그 어떠한 변수도 없이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길밖에 없다.

특별한 우행을 벌이지 않아도 그냥 알아서 픽 죽어 버리는 게 이 슬픈 영지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변수를 가져와야지.'

이 니카로스 바깥에서 말이야.

'초조해하지 말고, 차근차근, 할 수 있는 것부터.'

지금은 씨앗을 뿌릴 때다.

"허허,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역시 제가 에우스페나까지 호위해 드려야겠지요?"

키로스 경은, 현재 유일하게 나의 시하브 토후국 정벌 계획에 반대하지 않는 원로 가신은, 나에게 괜한 부담을 더 주지 않겠다는 듯이 그저 웃으며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만을 물었다.

'역시 눈치 빠른, 착한 영감님.'

하지만 마지막 말만큼은 잘못된 예상이다.

"제가 영지를 비운 사이에 도적 잔당의 토벌을 맡기고 싶습니다."

***

"그 뭐더라, 이름이 게르만이었던가?"

"제르만입니다, 영주님!"

감옥으로 오니 바로 이번에 포로로 붙잡은 도적단의 부두목이 보인다.

저쪽도 나를 발견하자마자 철창에 몸통박치기라도 하듯이 달려드는 모습이 흡사 고대하던 주인을 발견한 강아지와 비슷하다.

"어, 어떻습니까! 제가 드린 정보는 전부 진실이었지요? 여기서 꺼내주시기만 한다면 앞으로도 계속 영주님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그,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더 자비를...!"

"조용히."

"네, 넵!"

봉사는 무슨.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내 집을 털어먹으려고 온 살인강도범 일당 주제에 김칫국을 아주 벌컥벌컥 들이마시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그걸 다 검증했겠느냐. 아직도 네가 준 정보는 불확실한 추측에 불과해."

"그, 그런...!"

정황을 보면 아마 옳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리고 개인적으로 옳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불명확한 사안이지.

"그러니까 하나씩 확인을 해봐야지. 너도 같이."

"저도 같이... 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녀석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기색으로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을 무렵, 내 등 뒤에서 키로스 경이 나타났다.

"히이이이익!"

진짜 엄청 기겁하네.

자기도 저지른 죄를 자각하고 있어서 그런가.

제르만인가 하는 부두목을 노려보는 키로스 경의 얼굴은 그야말로 살벌했다.

그야 그렇겠지.

저 녀석은 이 땅을 약탈하기 위해 침범한 도적일 뿐만 아니라, 전 영주인 마누엘을 죽인 원수 중 한 명이기도 하니까.

아무리 쟤가 결정권자가 아니었다고 해도, 니카로스에 대한 애정이 깊은 키로스 경으로서는 당장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이란 거다.

"키로스 경이 이끄는 부대가 네가 말한 본거지라는 곳으로 가서 잔당을 소탕하고 시하브 토후국에서 받았다는 대가를 회수할 예정이다. 너도 그 부대와 동행해서 길 안내를 하도록."

"그, 그, 그 키로스 경과 말입니까? 어, 어째서 제가...?"

"네가 알려준 정보니 당연히 네가 동행해야지."

뻔한 질문을 하고 있네.

부두목의 표정이 급속도로 절망에 물든다.

하지만 전혀 불쌍하지는 않다.

"그러니까 너도 슬슬 나와서 준비해라. 그걸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내려온 거니까. 간수들, 저 녀석을 끌어내도록."

"알겠습니다, 영주님!"

"으, 으아아, 으아아아...."

나의 명령에 감옥을 지키던 간수들이 즉시 부두목을 끌어내서 데리고 간다.

녀석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돼지처럼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끌려가고 말았다.

역시 눈치는 제법 있네.

이 상황에서 저항해봤자 죽거나, 죽도록 얻어맞을 뿐이었겠지.

그렇게 사라져 가는 부두목 제르만의 뒤를 유심히 지켜보던 키로스 경은, 마치 지나가는 이야기를 하듯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소굴을 소탕하고 나면 저자의 이용 가치도 다하겠군요. 그렇다면 그 즉시 목을 베어도 괜찮겠지요?"

살벌해라.

어조만 담담하지, 내용은 아주 살기등등이야.

확실히 저 녀석은 마지막으로 남은 도적단의 간부다. 다른 수뇌부들은 전부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으니까.

심지어 두목은 아예 전장에서 키로스 경이 직접 목을 베어 버렸고.

그러니 아예 저 녀석까지 깔끔히 죽여 버리고 손수 마침표를 찍겠다는 키로스 경의 심정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건 조금 더 고민해보자고요.

"키로스 경의 의견이 그렇다면 그것도 괜찮겠지만, 개인적으로 저는 조금 더 이용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말입니까? 아무리 봐도 죽어 마땅한 쓰레기입니다."

가차 없네.

하지만 나도 동의한다.

지은 죄가 너무 크긴 해.

"그에게는 이번에 붙잡은 포로들의 대표 역할을 맡겨 볼까 합니다."

"영주님의 판단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과연 제대로 된 통제를 할 수 있을까요? 다른 포로에게 저자는 혼자 살겠다고 모두를 배신한 변절자나 다름없습니다."

이것도 맞는 말이고.

잔챙이들이 자세한 사정까지 모두 알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간부들은 죄다 처형당할 동안 혼자 살아남은 부두목을 보고 그 정도도 유추하지 못할 리는 없지.

이미 저 녀석의 인망은 나락이다.

"그래서 그런 겁니다. 포로들에게는 마음껏 물어뜯을 수 있는 장난감을 하나 쥐여주면, 괜한 반항을 할 생각은 덜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무슨 의미인지 이해했습니다."

당연히 포로를 부려 먹는 동안 괜한 소요가 발생하는 것은 막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대표를 중심으로 완전히 규합되어 단체로 저항하는 일도 바람직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공식적인 배신자를 아예 통솔자로 임명해 버리면, 우리를 향할 불만의 화살을 분산시킬 수 있지 않을까?

저 자식은 뭔데 배신자 주제에 완장 차고 대장인 척 으스대는 거지?

이런 생각이 들게 하면 성공이란 거다.

원래 다른 누구보다도 앞잡이가 제일 밉상으로 보이는 건 인간의 본능이니까.

당연히 중간 관리자 신세가 된 부두목은 우리랑 포로 사이에 끼어 죽어 나가겠지만.

'거기까지는 내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닌걸.'

전부 그 녀석의 업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제가 책임지고 저자의 숨통을 붙여서 돌아오겠습니다."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그냥 소소한 구상에 불과하지, 그렇게까지 중요한 인물은 아닙니다."

쟤한테 대표 자리를 맡긴다고 해도 꼭 내 구상처럼 된다는 보장도 없으니까.

오히려 공공의 적 때문에 나머지 놈들이 똘똘 뭉쳐서 반항할 수도 있는 거고.

그러면 뭐 어쩔 수 없다.

관리 못 한 책임으로 부두목을 반항의 주동자랑 같이 치워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지.

그러니 살고 싶다면 알아서 잘해야 한다, 부두목아.

"허허,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 니카로스의 아들들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병사들 역시 다치지 않게 제가 잘 이끌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키로스 경께서 맡아 주신 임무인걸요. 그런 걱정은 처음부터 하지 않고 있습니다."

좋아.

이걸로 내가 처리해야 할 일 하나는 일단락했다.

갑작스럽게 우리와 시하브 토후국 사이에 끼어든 도적단인 만큼, 도적 떼의 소굴에도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

'키로스 경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도 믿을 수 있지.'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 소탕에도 아예 동행하고 싶긴 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많지 않은 만큼 남들에게 맡길 일은 맡겨야 한다. 나의 몸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제 당장 신경 쓸 일은 한 가지뿐.'

키로스 경이 소탕에 나서는 동안.

나는 에우스페나로 간다.

가서 친구를 잔뜩 사귀고 와야지.

#012. 부패의 도시 (1)

"주인장, 계십니까?"

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도어벨이 짤랑짤랑 울린다.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니, 내부에 가득한 고즈넉한 분위기가 나를 반겼다. 쌓여 간 세월이 그대로 담겨 있지만, 허름한 느낌은 또 아니었다.

관리를 열심히 했다는 게 그대로 느껴진다.

"뭐야, 손님이냐?"

그리고 그런 공간의 중심에, 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쭈글쭈글한 피부와 부리부리한 눈.

짙고 굵은 눈썹과 커다란 매부리코.

기본적으로 심술이 가득해 보이는 인상.

마지막으로 대머리.

어떻게 봐도 친절한 인상은 아닌 노인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반갑습니다, 가스파르 님. 근방의 니카로스 남작령을 다스리는 영주,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고 합니다."

"영주? 남작?"

너 같은 애송이가?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누가 봐도 이런 의미가 내포된 의문을 표하며 인상을 잔뜩 찌푸리는 이 할아버지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이다.

가스파르.

에우스페나에 거주하는.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그래, 니카로스라. 기억나는군. 언뜻 이야기를 듣긴 했지. 근 20년 동안 영지를 다스리던 기존의 영주가 죽고, 그리고 그 장남도 죽고, 새파랗게 어린 차남이 뒤를 이었다고 말이야. 네가 그 애송이로구나."

"정확합니다. 소문이 굉장히 빠르게 퍼졌군요."

내가 제국의 귀족이라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무례하고 오만불손하기 그지없는 말투.

제국의 다른 평범한 영주라면 진작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지만, 적어도 나는 괜찮다.

이 노인이 이런 인간이라는 건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알고도 내 발로 직접 찾아왔으니까.

가스파르라는 사람을 호칭하는 별명은 무수히 많지만, 지금 내가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은 단 두 가지뿐이다.

"끌끌, 소문? 기대가 과하구나, 꼬마야. 너희 야만적인 변방 시골 영지에 관한 이야기가 무슨 화제라고 여기까지 퍼지겠느냐? 그냥 내 귀가 밝은 것뿐이다."

동부 최대에 천칭교 사채업자이자 정보상.

돈벌레를 넘어 돈귀신이라고 불리는 요괴.

이교도라는 처지로 인해 원래 천칭교 사람들이 제국의 체제와 다소 따로 노는 아웃사이더 느낌이 강하긴 하다.

딱히 귀족을 존경하지도 공경하지도 않고 말이야.

네가 귀족이어도 제국의 귀족이지, 우리 귀족이냐.

대충 이런 심리.

"하하, 역시 익히 들은 위명대로입니다."

하지만 가스파르의 오만함은 단순히 그런 수준이 아니다. 저 영감님의 안하무인인 성격은 그냥 천성이다. 나이를 심하게 잘못 먹었는지 괴팍함만 가득하다.

"흥, 웃기는 소리를 하는구나. 위명은 무슨, 내 욕만 잔뜩 들었겠지."

물론 가스파르가 이렇게 오만방자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당연히 그만한 굴 자격이 있기 때문.

저 할아버지의 성질머리가 더럽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앞뒤 분간 못 하고 미쳐 날뛴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거든.

"그럴 리가요. 이 근방을 가득 채우는 가스파르 님의 힘을 아는 자들은 모두, 위명이라는 표현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가스파르라는 인간의 힘은 바로 대를 이어온 사업에서 비롯된 막대한 자금과 정보력.

난세인 만큼 양지의 실력자도 많고 음지의 실력자도 많은 세계지만, 가스파르처럼 양지와 음지를 가리지 않고 활약하는 거물은 또 드물다.

'동쪽 변방인 에우스페나에 거주함에도 수도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뻗치고 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그가 보유한 무형의 힘 앞에서 지방의 약소 영주라는 직위는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끌끌, 어린 것이 혓바닥 하나는 잘 놀리는구나."

아마 단순히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제대로 비벼보려면, 어디 공작 정도는 데려와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에게 이 할아버지 이상으로 도움이 될 사람은 없다는 거지.

"그래, 어찌 되었든 내가 누군지 이미 알고 직접 찾아온 것 하나는 마음에 든다, 꼬마야. 귀족이고 나발이고, 한 푼이 아쉬워 나를 찾는 비렁뱅이 주제에 시건방지게 구는 놈들이 요즘 어찌 많은지."

그렇게 잠시 투덜거린 가스파르는 곧이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용건으로 이 돈귀신의 가게까지 방문했느냐? 역시 돈이겠지?"

"부정하기는 어렵군요."

"뻔하지. 그렇다면 얼마가 필요한지 어디 한번 네 입으로 직접 말해보아라. 내 친히, 그리고 특별히 긍정적으로 검토해주마."

얼마라.

필요한 돈은 제법 많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전면전을 위한 군자금이니까.

'과연 그걸 그대로 얘기하면 빌려줄까?'

한눈에 봐도 지금 가스파르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건 진실인 것 같다. 아마도 영주인 내가 직접 방문한 게 생각보다 더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한 모양.

하긴.

원래 사람이라는 것은 나이가 먹고 배가 부르게 되면 자연스레 명예와 위신이라는 걸 추구하게 된다.

당연히 가스파르라는 노인에게도 예외는 아니고.

아마 저 삐뚤어진 할아버지는 언제나 귀족이랍시고 으스대던 고귀한 족속들이, 한낱 돈 때문에 이교도 평민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그런 만족감을 느끼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저런 긍정적인 태도도 이해할 수 있다.

'하여간. 진짜 고약한 할아버지야.'

어쨌거나 그렇게 생각하면 쉽게 돈을 빌리는 것도 기대해볼 만하다.

"음, 사실 아마 가스파르 님께서 생각하신 것보다는 많은 돈이 필요할 듯합니다."

"허, 내 생각보다? 날 무시하는 건지, 아니면 그만큼 어이가 없는 소리를 하려는 건지. 변방 애송이 주제에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필요한 게냐?"

문제는 그것도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라는 것.

"전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청하고 싶은 것은 그 군자금입니다."

얘기를 듣자마자 가스파르의 표정이 괴상하게 변한다.

뭐, 그야 그렇겠지.

- 나는 아주 작고 낙후된 영지의 영주에요.

- 우리보다 더 강한 국가와 전쟁을 벌일 거예요.

- 영지의 명운이 달린 총력전입니다.

- 전쟁하게 거금을 빌려줘요. 이기면 갚을게요.

- 당연히 지면 멸망할 테니까 못 갚는 거 알죠?

노골적으로 말하면, 내가 내걸 조건은 사실상 이 수준이니까.

"...진담으로 하는 소리냐?"

되지도 않는 소리를 들었다는 저 반응이 당연한 거다.

단순히 리스크가 너무 크다고 할 수준을 넘었다.

이 정도면 아예 십중팔구 돈을 시궁창에 버리는 행위라 생각할 테지.

"이거, 생각보다 훨씬 정신이 이상한 꼬마였구나."

합리적인 사채업자가 이런 상황에서 돈을 내줄 리가.

그러니까.

"그러니까 돈 얘기는 조금만 있다가 하죠. 사실 그 전에 달리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를 쌓아가보자고요.

나는 아주 제정신이야.

"허, 돈귀신이랑 돈 얘기가 아니면 무슨 얘기를 해? 설마 구걸이라도 하려는 게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거라면 제가 다른 얘기라고 하지도 않았겠지요."

애초에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가 이곳까지 직접 방문한 거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의 의도로.

원작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를 만나는 건데, 설마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왔을 리가 있나.

따라서 나는 입을 열었다.

친근한 미소와 함께.

다짜고짜 돌직구로.

"손녀분께서 위독하시죠?"

그리고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방 안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구나."

아니, 단순히 분위기만 바뀐 것이 아니다.

마치 괴담 속의 한 장면처럼 정말로 순식간에 공간이 어두워지고, 날 위협하듯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왜 갑자기 그 이야기를 입에 올렸지? 원하는 게 뭐냐? 협박이냐?"

시종일관 투덜대기만 하던 괴팍한 노인은 이제 없다.

지금 내 앞에 명백히 존재하고 있는 것은, 제국의 암흑 속에 발을 걸치고 있는 늙은 거물이다.

"글쎄, 생각이 짧은 애송이라면 한 번쯤 그런 헛짓거리를 꿈꿔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닌 듯하구나."

가스파르는 시리도록 살벌한 기세로 나를 노려보았다.

'...역시 사납네, 노인네.'

아마 지금 내가 자신을 위협한다고 여기고 있겠지.

그렇다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가.

나도 예상했던 반응 중 하나긴 하다.

"그러니 어서 말을 해보아라. 내 너를 당장에라도 찢어놓기 전에."

하지만 이미 예상을 했음에도 어느새 나도 모르게 두 주먹 안이 땀으로 흥건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솔직히 엄청나게 긴장된다.

지금 내 목숨을 위협하는 살해 협박이 결코 허언도, 허세 따위도 아니라는 것을 나도 아니까.

'저 양반은 실제로 저지를 수 있는 유형의 인간이야.'

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웃어?"

나는 여전히 웃었다.

갑작스레 약점을 노출당해 사납게 이빨을 세운 맹수 앞에서도 선명히.

딱히 억지로 짓는 웃음은 아니었다.

나도 죽음의 위기 앞에서 실실 웃을 정도로 얼빠진 인간은 아닌걸.

그러니까 웃을 수 있는 이유야 간단했다.

"제가 치료를 도와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대화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으니까.

그 사실을 명백히 알고 있으니까.

저 맹수는 절대로 나를 물어 죽이지 못한다.

그걸 알면 자연스럽게 웃음을 나올 수밖에 없지.

치료를 도와줄 수 있다는 내 말에 가스파르는 마치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멈칫했다.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뭐?"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제가 손녀분의 치료를 도와드리겠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든지 다시 얘기해줄 수 있으니 마음껏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개소리."

실제로 이런 내 마음이라도 읽은 것처럼 가스파르는 내 말을 그렇게 일축하면서도 질문을 쏟아냈다.

"네가 어떻게? 날고 긴다는 의사를 모두 불러도 원인조차 찾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병을 네가 어떻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냐? 네가 그들보다 더 뛰어난 의사라도 된다는 소리야?"

"물론 제가 의사는 아니죠. 하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역린을 들킨 가스파르는 여전히 사나웠지만 조금 전만큼의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화의 주도권이 완전히 이쪽으로 넘어온 것을 확신한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애초에 그건 병이 아니니까요."

사실 대출은 부가적인 목적일 뿐이었다.

'그것도 당연히 중요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 이 대화에 비할 바는 못되지.'

나는 처음부터, 아직 알 수 없는 진실을 알고.

그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곳까지 찾아왔다.

진짜 얼마나 친절해.

"너,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구나. 원하는 게 뭐냐?"

과연 노회할 대로 노회한 상인이구나.

내가 완전히 헛된 소리를 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가스파르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까지는 당연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리 판단해놓고도 사랑하는 손녀의 치료 방법이 아니라 나의 의도와 이해득실부터 먼저 따지다니.

저 한결같은 태도에 내심 감탄이 나왔다.

물론 그저 좋은 의미의 감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호하지만 말이야.

나는 차근차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이야기에 앞서, 오해하지는 말아주십시오. 정말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것뿐이니까. 저는 그 원인과 아무 관련도 없고, 딱히 가스파르 님에게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하는 것도 아닙니다."

"흥, 그렇다면 단순한 선의라도 된다는 것이냐?"

가스파르는 그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냉소적으로 대꾸했지만, 나는 그저 비시시 웃을 뿐이었다.

"비슷하죠. 제가 원하는 건 그냥 원활하고 합리적인 대출과 장기적인 거래...."

나는 잠시 뜸을 들여 가스파르를 힐끗 봤다.

어서 빨리 말해보라는 초조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래, 드디어 인간미가 조금 보이네.

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돈귀신이라도 손녀에 관한 거래에서까지 초연한 태도를 계속 고수할 수는 없는 모양이야.

"...그리고 가스파르 님과의 우정 한 스푼. 이게 전부입니다. 이 정도면 그저 순수한 선의라 표현해도 되지 않을까요?"

그 대답에 계속 사나운 태도를 고수하던 가스파르도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당돌한 녀석."

한 스푼의 우정이라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저 할아버지는 분명히 다 이해를 했겠지.

"어지간히도 비싼 걸 사려고 하는구나. 그래, 조건을 수락하겠다. 제대로 된 대답만 한다면 말이야. 그러니 이제 어디 한 번 그 치료법을 들어보자."

물론 그렇게 실소했다 한들, 가스파르의 사나운 기세는 여전히 남아있다.

슬슬 나의 이야기에 진지한 흥미는 느끼고 있지만, 아직 완전히 신뢰하는 것은 또 아니겠지.

"대신 알아두거라. 만약 지금까지 괜한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면, 내 이름을 걸고 결코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야."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 무형의 기세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걱정하지 마시죠."

그야 자신이 있으니까.

"그건 저주입니다."

이 테이블에서 원하는 것을 따서 나갈 자신이 말이야.

#013. 부패의 도시 (2)

"그건 저주입니다."

"허, 저주?"

이미 수차례 강조했던 이야기지만 가스파르는 딱히 생긴 것과 다르지 않은 인간이다.

'괴팍하고, 욕심 많고, 냉혈하고, 오만하지.'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런 가스파르조차 그저 평범하고 인심 좋은 할아버지가 되는 상대가 딱 하나 있다.

그게 바로 그의 손녀 옐레나.

아들 부부가 사고로 일찍 죽으면서 남긴, 가스파르의 현재 유일한 혈육.

그리고 그 옐레나는 지금 병상에 누워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분명히 손녀분께서 쓰러진 지 1년, 아니, 2년 정도 되었나요?"

"정확히는 1년하고 8개월, 16일이 더 지났지."

"그렇군요."

"그리고 6시간 30분 정도를 더하면 딱 맞을 게다."

"...친절한 답변, 감사합니다."

쓰러진 것은 <마이트 앤 로열>의 시작 시점 이전.

아무리 무작위성 요소와 전개로 가득 찬 게임이지만, 시작 시점 이전의 상황만큼은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 이건 이 세계에서도 변하지 않을 명백한 사실이겠지.

나의 모든 계획은 이 사실을 기반으로 설계되었다.

"가스파르 님이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미 동원했다는 것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부유한 가스파르는 아끼는 손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지극정성으로 돌봐주었지.

은밀하게 수소문하여 몸에 좋다는 비약을 전부 찾아서 먹이고, 제국 전역에서 뛰어나다는 의사들은 죄다 불러들이고 검진하게 하고.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줬다.

물론 대놓고 요란하게 방도를 찾은 건 아니다.

암흑가와 걸쳐 있는 가스파르의 입장 상, 혈육의 아픔은 필사적으로 숨겨야 할 약점이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어설프게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절대로.

'그야말로 돈 하나만큼은 넘쳐나는 양반이니까.'

충분히 그 모든 과정을 비밀리에 진행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모든 시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것 역시 알고 있습니다."

"...."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간신히 악화하는 속도를 늦췄을 뿐, 치료는커녕 옐레나가 쓰러진 원인조차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따라서 지금도 가스파르는 사방팔방 손녀의 병을 치료할 방법을 찾고 있다.

이것이 내가 아는.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 가스파르의 퀘스트 배경 설정.

"...그래,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정확히 알고 있구나."

그리고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 이상의 미래까지 알고 있고 말이야.

'옐레나는 앞으로 몇 년을 더 앓는다.'

그녀의 생존에는 플레이어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만약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진행하여 개입하지 않는다면, 옐레나의 결말은 하나뿐이니까.

"그러니 그만큼 너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

의심이 가득한 태도로 나를 노려보는 가스파르의 얼굴 위로, 옛 기억이 덮어 씌워진다.

'아직도 눈에 선한걸.'

모니터 너머로 본, 손녀의 죽음을 결국 이겨내지 못하고 모든 사업을 정리한 채 쓸쓸히 잠적하는 가스파르의 얼굴이 말이야.

'뉴비 때는 퀘스트 진행 방법을 몰라서, 그 장면을 정말 수도 없이 봤었지.'

물론 그건 지나간 날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지금의 나는 이미 그 치료 방법을 알고 있으니까.

"저주... 웃기는 소리지. 설마 내가 그런 가능성도 떠올리지 못했을 줄 아느냐?"

그리고 바로 그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 오늘 이 성격 나쁜 할아버지를 찾아온 거니까.

그렇지만 내가 다시 입을 열기도 전에, 가스파르가 먼저 거칠게 말을 내뱉어 쏟아냈다.

"옐레나가 앓아누운 지 벌써 2년이 다 되어 간다. 당연히 저주에 걸린 것인지 아닌지 이미 확인을 했고. 그런데 인제 와서 그게 사실 저주라고? 대체 나를 얼마나 멍청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냐? 설마 고작 그런 얄팍한 기만으로 감히 나를 등쳐먹을 생각을 한 게냐? 만약 정말로 그렇다면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겠구나."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고, 점점 격양되는 어조.

물론 나는 이성적이고 아량이 넓은 21세기 교양인인 만큼, 도와주러 온 사람에게 되레 성을 내는 저런 반응 역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손녀라는 약점을 들키는 것.

무시당하고 얕보이는 것.

하나만 건드려도 분노를 참지 못할 역린을 두 개나 동시에 공격당했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 영감님도 화가 날 수밖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저 역시 가스파르 님이 저주 여부를 확인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것까지 알고 있다고? 근데 그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해?"

하지만 조금만 진정하고 잠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영감님.

"그렇지만 말입니다. 그 확인을 누가 했습니까?"

정말로 중요한 건 바로 이거거든요.

여기서부터 오류가 발생했다면 모든 검증은 무의미해지니까.

"...뭐?"

마치 바람이 빠지듯, 바보 같은 가스파르의 반문이 방에 울려 퍼진다.

그래, 이 세상은 판타지다.

따라서 당연히 비과학적 저주 역시 실존한다.

애초에 마법사와 마법이 대놓고 존재하는데 저주의 존재 따위가 무슨 대수일까.

그러니까 저주라는 것도 그저 체계가 있는 마법의 일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외적인 인식이 많이 안 좋긴 하지만, 어쨌든.

마법의 한 종류답게 일반적으로 저주를 걸 수 있는 것은 마법사뿐이며, 반대로 저주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마법사뿐.

게다가 마법사 간의 수준도 천차만별이라 아무리 마법사라고 해도 자신보다 더 뛰어난 고위 마법사가 교묘하게 건 저주는 간파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다.

'저주라는 것이 그렇게 드물지 않은 세상인 만큼, 당연히 가스파르도 마법사를 통해 옐레나가 아픈 원인이 저주인지 아닌지 진작 확인을 했지.'

마법사가 무척이나 귀하고 오만한 고급 인력이라고는 하지만, 가스파르도 절대 평범한 인물은 아니니까.

어지간한 저주는 다 감지할 수 있을 만큼 뛰어난 마법사를 구하는 것도 저 영감님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시 한번 말해보아라."

실제로 단순히 구하는 것을 넘어, 아주 오래전부터 아예 자신의 밑에 부하로 두고 있을 정도지.

굳이 저주 확인이 아니더라도 마법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할 수 있으니까. 특히 암흑가에서는 더욱더.

따라서 옐레나의 증상은 이미 그 가스파르의 전속 마법사가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 끝에 저주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려주었고.

그래, 바로 그 점이 문제야.

"아마 가스파르 님과 함께하는 마법사의 이름이... 그래, 미르코였던가요? 분명히 그런 이름이었죠."

거기까지 말한 나는, 가스파르를 똑똑히 바라보며 아주 간결한 질문 하나만을 던졌다.

그를 믿습니까?

그리고 나의 질문이 끝나자마자 멍해져 있던 가스파르의 얼굴이 마구 일그러졌다.

"웃기는 소리. 미르코는 벌써 나와 수십 년을 함께한 심복이다. 그 녀석이 나를 속일 이유가 없어."

"하하, 설마 가스파르 님이 그런 대답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넉살 좋게 웃었다.

이 할아버지가 왜 이러신담.

"사람을 믿지 않는다는 말이야말로 최고의 칭찬이다."

"너...."

"이게 가스파르 님의 입버릇 아니었습니까?"

영감님도 설마 이 말을 타인에게서 들을 줄은 몰랐나 봐요.

이 세상에서는 아직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지만 <마이트 앤 로열> 속에서는 수도 없이 출력되었던 그 문장을 내가 입에 담자, 마치 망치로 머리라도 맞은 것처럼 가스파르의 안색이 바뀐다.

"사실 그냥 속였다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죠. 아예 그 사람이 범인이니까."

"...!"

그리고 동시에 그의 눈빛까지 서서히 바뀐다.

눈앞의 내가 아닌, 더 먼 곳으로 시선을 향한다.

어느새 이 늙은 상인은 진지하게 내가 말한 가능성을 셈하고 있었다.

나는 재촉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가스파르와 미르코가 얼마나 긴 인연인지.

가스파르가 어쩌다 미르코를 거뒀는지.

미르코가 그동안 얼마나 믿음직한 수족이었는지.

그리고 그런 그가 어째서 모시던 주인을 배신했는지.

자세한 전말 역시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가스파르 스스로 고민해야 할 사정이지, 지금 내가 입을 열 부분이 아니니까.'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던 가스파르는.

"그래, 적어도 한 번은 확인해볼 가치가 있겠구나."

마침내 계산을 끝냈는지 다시 나를 향해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래서 증거는 어디에 있지?"

증거.

드디어 예상하던 질문이 나왔다.

이 순간 나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스파르 설득의 핵심.

그 중요성을 명확히 인지하면서 나는 아주 자신 있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뭐?"

응, 진짜 없어.

당연히 가스파르는 무척이나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 되었지만, 나는 정말로 당당했다.

"말했지 않습니까. 저도 그저 우연히 알게 된 것이라고. 그러니 제가 직접 제공해 드릴 수 있는 물리적 증거는 따로 없습니다."

갑자기 게임 속 세계에 빙의해서 원작의 설정을 달달 꿰고 있다는 것도 분명히 우연의 일종이긴 하잖아.

거짓말은 안 했다.

"...제정신으로 대답하는 게냐? 내가 말했지. 만약 괜한 헛소리를 한 것이었다면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다고. 설마 이 상황에 이르러서도 장난을 치는 건 아니라고 믿겠다."

"물론 맹세해도 좋습니다. 절대 장난이 아닙니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다.

이 만남이 있기 전부터.

가스파르와 연을 쌓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아주 오랜 시간 진지하게 고민했다.

내가 당연히 바깥세상에서 게임 속으로 떨어진 빙의자라고 밝힐 수는 없다. 그딴 소리를 하고 다녀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받겠지.

하지만 나는 저 영감님의 돈과 힘이 꼭 필요하다.

거지 같은 영지의 주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서.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원작 게임이라는 정보의 출처를 밝히지 않고 이 의심 많고 괴팍한 할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의 합리적 해답이 바로 이거다.

"사실 어차피 가스파르 님께서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지 않습니까. 그저 지금까지 의심하지 못했던 것뿐이지."

굳이 내가 설득할 필요가 있나?

그저 가능성만 제시하면 저 의심 많은 할아버지가 알아서 다 검증할 텐데?

"허."

만약 이 세상이 정말로 게임 그대로였다면 절대로 이따위 방법으로 문제를 풀어나갈 수는 없었겠지.

게임이라는 것은 곧 시스템에 묶인, 자유롭지 못한 공간을 의미하니까.

아무리 뛰어난 자유도를 자랑하던 <마이트 앤 로열>이라고 해도 게임인 이상 이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지.

오직 미리 정해진 조건을 만족했을 때만 퀘스트를 발견하고 진행할 수 있는 게 당연.

이건 게임의 상식이나 다름없다.

'그렇지만 여기는 현실인걸.'

여기는 게임이 아닌 현실이다.

그 명백한 사실은 질리도록 느끼고 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런 제약도 존재하지 않지.

애초에 퀘스트라는 틀 자체가 없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다짜고짜 모든 과정을 다 무시하고, 그냥 정답을 내밀어도 아무 문제가 없지 않을까?

요컨대, 이 모든 것은 철저하게 계산된 대답이다.

정말로.

"물론 저도 다짜고짜 당장 제 말을 믿어 달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여전히 웃으며, 나는 멍한 얼굴의 가스파르를 뒤로 한 채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내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끝났거든.

괜히 여기 남아있어봤자 방해만 된다.

남은 것은 순수하게 저 할아버지의 몫.

지금은 아무래도 생각의 정리가 필요하실 테니.

고맙다는 인사는 나중에 천천히 받지요.

"이틀 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거래 이야기는 그때마저 하지요."

저 영감님 능력에 이틀이면 충분하고도 남을 거다.

"잠깐."

그렇게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는데.

가스파르가 진지한 표정으로 날 불러 세웠다.

다행히도 나를 향한 분노와 의심 같은 감정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 빈자리를 대신 채우는 것은.

"그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정보의 출처, 밝힐 생각은 없겠지? 설령 백만금을 준다고 해도?"

지독할 정도로 진지한 상인의 얼굴뿐.

'정말, 마지막까지 한결같으신 분이야.'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질문이 너무 뻔하다.

내가 대답할 말도 이미 다 예상하셨을 텐데.

"물론이죠."

그 짧은 대답만 남겨두고.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가게를 나왔다.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도어벨이 짤랑짤랑 울렸다.

아주 청량하게.

#014. 부패의 도시 (3)

가스파르의 가게에서 나오자, 맞은편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던 한 청년이 곧장 나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왔다.

"영주님! 나오셨군요! 몸은 괜찮으십니까! 그 무례한 영감탱이가 괜한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정말 가슴을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온갖 호들갑을 쏟아내는, 짧은 갈색 머리칼의 젊은 남자.

"괜찮습니다, 아르센 경. 그냥 손님으로 가게에 방문한 것뿐인데 제가 해코지당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상대가 그 가스파르이지 않습니까...!"

검은 매의 기사단 소속.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의 몇 안 되는 정식 기사.

네오파이트, 아르센 경이다.

평소 나를 바로 옆에서 보좌하던 키로스 경은 유감스럽게도 도적 잔당 토벌로 무척 바쁘다.

지금쯤 아마 부두목이었던 배신자 제르만과 함께 신나는 소탕 파티를 벌이고 있겠지.

"제가 제국과 에우스페나의 사정에 그리 정통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 노인네에 대한 악명만큼은 정말 질릴 정도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키로스 경을 대신하여 이번 에우스페나 방문 동안 내 호위를 책임지게 된 게 바로, 이 기합이 잔뜩 들어간 아르센 경.

"하하, 악명이라니. 친절하신 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말도 잘 통하고."

"...네?"

솔직히 나는 얘에 대해 잘 모른다.

일단 고정 네임드 캐릭터 출신은 아니다. 그러니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데이터는 없다.

게다가 내가 티베리오스의 몸에 빙의한 직후, 그냥 무의미한 백수 차남으로 살던 시절에는 키로스 경 말고 다른 기사들과 따로 개인적인 교류를 하지 않아서 이 세계에서 쌓은 사적인 친분 또한 없다.

그런 아르센이 이렇게 영주의 호위 담당이 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키로스 경의 추천 덕분.

- 아직 젊지만, 자질이 제법 괜찮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관심을 쏟고 있는 후배지요. 이 늙은이의 빈자리 정도는 충분히 채울 겁니다. 그리고 평생 니카로스에서만 나고 자란 친구라,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게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판단도 있습니다.

- 허허, 사실 다 떠나서 이왕이면 젊은이는 젊은이와 어울리는 게 더 좋지 않겠습니까?

'...대충 이런 말을 했었지.'

그래, 꼭 고정 네임드 캐릭터가 아니더라도 뛰어난 인재는 이 세상에 많다.

굳이 젊은이들끼리 어울리라는 실없는 소리는 제쳐두더라도, 키로스 경이 보증할 정도로 재능 있는 인재라면 그것만으로도 친하게 지낼 이유가 되지.

그렇기에 나도 선선히 추천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돈귀신과 말이 잘 통했다니, 그랬다면 안심이지만... 어쨌거나 무탈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 싹싹한 태도의 젊은 청년이, 키로스 경의 말대로 정말 평생을 니카로스에서만 나고 자란 토박이인걸.

제국의 다른 영지였다면 토박이라는 게 그다지 유의미한 특징을 아닐 테지만, 적어도 우리 니카로스 남작령에서만큼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야, 니카로스의 토박이들 대부분은.

'바로 초대 영주 제논 발란티스가 정복한 대초원의 자식들이니까.'

요컨대, 니카로스를 지탱하는 핵심 무력.

거친 자연이 낳은 태생적 전사라는 증명.

그들 각 개인의 무력을 고려해도, 그리고 영지의 정치적인 구도를 고려해도, 어느 쪽으로 봐도 영주로서 이런 토박이들과 친분을 쌓은 건 중요한 일이다.

그게 이렇게 미래가 창창한 젊은 신예라면 더더욱.

그러니 이번 기회에 친하게 지내보자고요, 아르센 경.

"그러고 보니 생각보다 훨씬 일찍 나오셨습니다. 협상이 잘 진행되었는지, 혹시 여쭤봐도 괜찮겠습니까?"

순진하고 순박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아르센.

확실히 생각보다 빨리 나오긴 했다.

'하긴 자세한 계약 조건은 아예 꺼내지도 않았으니까 당연한 일인가.'

방금 막 친하게 지내보자고 다짐한 만큼, 당연히 나도 친절하게 대답해줘야겠지.

"하하, 그런 것 정도는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계약은 이틀 뒤에 다시 하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가스파르 님에게 시간이 조금 필요한 것 같군요."

"건방진! 역시 어린 시절부터 듣던 악명이 전부 사실이었군요! 감히 한낱 졸부 주제에 영주님을 기다리게 하다니!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영주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제가 당장 그 이교도 돈벌레에게 아주 본때를...!"

연이어지는 굉장한 호들갑.

아무래도 아르센은 내가 가스파르의 괴팍한 장난질에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괜히 상대방의 기를 죽이기 위해 쓸데없이 기다리게 만든다거나 뭐 그런 거. 확실히 흔한 수법이긴 하다.

'나 대신 화내주는 건 진심으로 고맙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건 헛다리.

가스파르 영감님은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니까.

굳이 따지면 친절한 내가 그를 배려해 준 셈이지.

"괜찮습니다. 그런 게 아니니까 아르센 경도 진정하시죠. 정말로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슬픈 이야기지만.

'아마 일대일로 싸우면 네가 패배하지 않을까...?'

물론 무력만 놓고 보면 가스파르는 그냥 평범한 노인일 뿐이다.

딱히 마력을 다루는 기사도, 마법사도 아니지.

하지만 봤잖아.

날 위협할 때 실시간으로 대기가 떨리고 요동치는 그 광경을.

그건 바로 아티팩트의 힘이다.

뛰어난 마법사들이 만든 마도구(魔道具).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스파르의 고정 장비만 해도 하나 같이 말도 안 되게 비싸고 성능 좋은 물건들뿐이다.

무력이 없는 할아버지라도 건장한 하급 기사 하나 정도는 순식간에 조져버릴 수 있을 수준으로.

그러니까 마음만 받을게, 아르센아.

고작 이런 일로 널 잃으면 너무 허망하지 않겠니.

"으음! 알겠습니다! 영주님의 자비심에 다시 한번 감탄했습니다!"

어쨌거나.

일이 상당히 잘 풀렸다.

만약 이 세계가 정말로 시스템의 제약에 묶인 게임이었다면 훨씬 더 복잡했겠지.

먼저 가스파르와 거래를 하며 상당한 친분을 쌓고.

가스파르의 입을 통해 손녀가 아프다는 푸념도 듣고.

저택에 방문해 옐레나의 상태도 보고.

능력치를 높여서 병세의 이상한 점을 알아차리고.

사실 저주를 앓고 있다는 증거까지 확보하고.

마침내 이런저런 과정을 다 거쳐.

가스파르의 전속 마법사인 미르코를 향해.

미르코, 범인은 바로 당신이야!

이렇게 선언하는 장면까지 도달해야 한다.

'진짜 장난 아니게 복잡하고 불편한 짓거리지.'

게다가 이 과정을 다 진행하기 전에 옐레나가 죽는다면 모든 것이 헛수고가 되거든.

'심지어 정확히 언제 죽는지도 몰라.'

<마이트 앤 로열>은 매 회차 바뀌는 난수에 따라 세부적인 요소들이 조금씩 바뀌니까.

잔인하게도 옐레나의 수명까지 그런 무작위적 요소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한창 열심히 퀘스트를 깨다가 예고도 없이 옐레나가 죽어 버려 모든 게 수포가 되면, 진짜 말도 못 하게 허무하지....'

물론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퀘스트를 완수하면, 가스파르가 플레이어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긴 한다.

그 할아버지의 능력을 고려하면 충분히 감수할 가치가 있는 수고긴 해.

그래도 지금 내가 하는 말의 요점은, 굳이 안 해도 될 수고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 그런 과정을 다 밟을 필요가 있나?

범인을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진짜 현실이라면 그냥 가서 알려 줘도 되잖아?

그래서 정말로 알려주었다.

오늘 직접 이곳까지 와서.

만약 이 모든 게 다 게임이라면 이런 편법만큼 재미없는 짓은 또 없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여기는 진짜 현실이고 나도 무지 필사적인 상황이거든.'

방법을 가릴 여유 따위는 없다는 거다.

오히려 게임보다 시작 상황이 훨씬 안 좋으니, 당연히 수단 역시 훨씬 효율적인 걸로 골라야지.

그리고 다행히 그 첫 단추가 잘 풀렸다.

아주 예쁘게.

이제 남은 건 전부 가스파르의 몫.

나는 범인을 알려준 것만으로 역할을 다했다.

이틀이면 충분하고도 남겠지.

아마 벌써 가스파르의 검은 손길들이 사방팔방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을까?

따라서 나는 이틀 동안 적당히 내 할 일 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

아주 간단하네.

"일단 숙소로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영주님!"

그리고 당연히 이틀 동안 할 일 역시 미리 다 계획을 해놓았다.

내 영지가 당장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처지인데.

언제 또 이 먼 에우스페나까지 올 수 있을 줄 알고.

온 김에 할 수 있는 일은 죄다 몰아서 하고 가야지.

"그런데 역시... 물론 제가 함부로 논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에우스페나까지 왔으니 공작님을 한 번 뵙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마침 적절한 순간에 아르센이 걱정된다는 듯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에우스페나까지 왔는데 아직도 공작을 만나지 않는 게 우려가 되는 모양.

옳은 지적이지.

충분히 할 수 있는 걱정이다.

일단 니카로스 역시 에우스페나 공작령에 속한 땅이고, 나는 에우스페나 공작의 직속 봉신이니까.

일반적으로는 굳이 공작과 만나기 위해 온 게 아니라도, 한 번 얼굴을 비추는 게 마땅한 예의다.

따라서 나는 아르센의 지적을 겸허히 수용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당연히 찾아뵈어야죠."

단지 그게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말이야.

공작.

동서남북, 제국 네 개 변방의 실질적인 지배자들.

그렇기에 그런 중요한 인물과 만난다면, 당연히 그에 걸맞은 준비를 먼저 갖춰야 하는 게 맞지.

"그렇지만 그 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일단 숙소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죠."

아주 철두철미한 준비를 말이야.

***

낮에 가스파르의 가게에 방문했다가,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어느새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런 어둠 속에서, 나는 굳이 더 어두운 거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영주님,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목적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도 어디까지나 전해 들은 내용일 뿐이지만, 야밤의 에우스페나는 무척이나 위험한 곳입니다. 심지어 이렇게 평민의 복장을 하시고...."

나를 호위하는 아르센은 분명 합리적인 걱정을 했다.

안전을 생각하면 확실히 이런 행동에는 문제가 있지.

그렇지만 마음 아프게도,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다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명하는 건 조금 어렵지만, 아마 이 외출이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르센이 지금 하는 그 걱정이 바로, 내가 이런 위험한 시간에 평민 복장을 하고 에우스페나를 떠돌아다니는 이유 그 자체라는 것뿐.

그래, 이미 몇 번씩이나 암시한 사실이지만 사실 지금의 에우스페나는 그다지 상태가 썩 좋지 못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지금의 에우스페나가 어떤 곳인지, 현 에우스페나 공작이 어떤 인간인지 아주 잘 알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고.'

당연히 직접 만나고, 서로 알고 지내는 건 아니다.

에우스페나에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저 원작 게임을 통해 수도 없이 접해봤을 뿐.

현 에우스페나 공작.

고정 네임드 캐릭터.

나태공(懶怠公) 리칸도스 코투니오스.

한 마디로 표현해서.

'지독한 한량.'

본인이 주체적으로 엄청난 악정을 펼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놀기 좋아하고 통치에 아예 관심이 없다.

'당연히 직속 봉신들에게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지.'

본래 공작은 휘하 봉신들에게서 세금을 받는 대신 그들을 지켜줘야 할 의무가 있으나, 현 에우스페나 공작은 단 한 번도 그 의무를 지킨 적이 없다.

공작령 아래에 있는 니카로스나 다른 영지들이 아무리 침략받아도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인 양 아무런 지원도 하지 않았고, 자연스레 제국을 향한 동쪽 이교도 왕국의 약탈은 더욱 활개를 쳤다.

'그리고 공작이 먼저 봉건 계약을 대놓고 무시하자 봉신들 역시 사실상 공작을 무시하기 시작했고.'

이미 나를 비롯한 에우스페나 공작령 밑에 있는 영주들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짓 못 할 짓 다 해가며 각자도생하는 중이었다.

'이 동쪽 변방에서 제국의 질서는 무너진 지 오래야.'

여러 소왕국으로 분열된 월광교 놈들이나 각자도생하는 제국의 영지들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로.

그러니 나태한 공작이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봉신들의 영지도 이 모양인데, 아예 직접 다스리는 에우스페나는 어떻겠는가?

실질적으로 지금 에우스페나를 다스리는 것은 공작의 몇몇 욕심 많은 고위 가신들. 그리고 그놈들은 또 자기들끼리 권력 다툼에 빠져 정신이 없고.

공작령 전체에 부정부패가 만연해지는 건 당연지사.

자연스레 영지의 치안까지 처참히 붕괴했다.

보통 이 정도 상황이면 아무리 위세가 높은 공작령이라고 해도 중앙의 황실에서 개입하겠지만....

'슬프게도 현재 황실도 멀쩡한 상태가 아니거든.'

진짜.

뭐 이렇게 나라에 멀쩡한 곳이라고는 없는지.

웃기지도 않아.

"이런 곳에 찾으시는 분이 계신다는 말씀입니까...?"

따라서 아르센의 우려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야밤에 그런 처참한 치안을 자랑하는 도시를 귀족티도 내지 않고 평민 복장을 한 채 단둘이서 마구 쏘다니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일부러 인적이 드물고 으슥한 곳만 골라서.

솔직히 언제 어디서 이상한 놈들에게 습격당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영주님, 제 뒤에 계십시오."

바로 이렇게 말이야.

거리를 떠돌던 나와 아르센이 마침내 으슥한 골목까지 진입하자, 머지않아 곳곳에서 스멀스멀 몇 놈이 기어 나와 우리를 앞뒤로 포위하기 시작했다.

표정을 굳히며 나를 자신의 등 뒤로 돌리는 아르센.

그의 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걸린 검으로 향한다.

순식간에 무척이나 심각한 분위기가 펼쳐지지만.

"뭐야, 너희? 못 보던 놈들인데? 뜨내기들이냐?"

그렇기에, 나는 오히려 이 상황이 달가웠다.

그야.

'마침내 내가 찾아다니던 친구들을 만났으니까.'

그래, 찾았다.

나는 이 상황을 위해 굳이 이곳까지 왔다.

내가 찾던 친구들이 바로 이런 친구들이었다.

'흉기를 꺼내 들고 사이좋게 시시덕거리는 추레한 인생 장 불량배 친구들 말이야.'

거봐.

오래 안 걸릴 거라고 했지?

"여기는 왜 왔어? 꼬락서니를 보니 돈 좀 있는 놈들 같은데, 뭐야. 놀러 왔냐? 웃기는 놈들이네, 이거."

아니, 나도 일하러 온 거야.

그건 그렇고 나름대로 평민처럼 입는다고 입었는데 쟤들이 보기에는 여전히 부티가 제법 나는 모양이었다.

'역시 21세기 문명인의 지성미는 숨길 수 없는 건가.'

보는 눈이 있는 인생 막장인걸.

"이놈들! 이분이 감히 어떤 분이신 줄 알고!"

표정이 더욱 딱딱히 굳은 아르센은, 어느새 검을 완전히 뽑아 들어 놈들을 겨누고 있었다.

"한 번만 기회를 주겠다. 살려줄 때 순순히 꺼져라."

상대가 열 명이 넘었지만, 아르센은 무척 당당했다.

'그래, 주눅 들 이유 자체가 없지.'

그렇지만 저 불운한 불량배 친구들은 아르센의 건장한 체구와 돌처럼 단단한 근육을 보고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놈들이 망설임 없이 거리를 좁힌다.

위협이 서서히 다가온다.

아주 좋다.

'이 상황의 마무리는 어떻게 짓는 게 좋을까. 그거 하나만 조금 고민이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전개였다.

그렇기에 모든 상황을 빼놓지 않고 주시하며, 나는 느긋하게 고민했다. 심각함은 없었다. 당연히 심각할 이유 자체가 없었으니까.

다만 매우 슬프게도.

이다음 전개만큼은 내가 예상한 게 아니었다.

"와, 이 새끼 봐라. 요즘은 야만인 새끼들이 사람 말을 다 하네. 야, 이 원숭이야, 그러면 우리도 마지막 기회를 하나 줄게. 가진 거 다 내놓고 원숭이답게 발가벗고 꺼져. 그러면 특별히 목숨은 살려준다."

쓰레기 중 하나가 거침없이 혀를 놀린다.

이미 놈의 눈에 이지(理智) 따위는 없었다.

"...!"

아.

이건 조금, 심각할지도.

불량배들이 동시에 킬킬거리고.

아르센은 입을 반대로 입을 꽉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직감적으로 판단을 내렸다.

'이거는.'

절대로 그냥 넘어가서는 안 되겠다.

"아르센 경."

"네, 영주님."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원래는 남의 영지에서 일을 벌이는 만큼, 조금은 신사적인 방향으로도 상황을 해결할 생각이었지만.'

이제 그런 생각 따위는 전부 잘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 넣어버렸다.

"죽이는 건 안 됩니다."

요컨대.

'딱 죽이지만 마라.'

나는 명확한 목소리로 이렇게 명령했고.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아르센 역시 명확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했다.

바로 그게 신호가 되었다.

"저 새끼들 조져!"

검을 든 아르센과 단검을 든 강도 무리가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든다.

양아치들이 손에 쥔 날붙이는 더럽고 형편없었지만, 그래도 사람의 살점을 찢기에 부족함은 없다. 그리고 그 사실을 증명하듯 이미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다수의 적.

검을 휘두르기에는 다소 좁은 골목.

지켜야 할 대상인 나라는 존재.

객관적으로 아르센에게 불리한 요소는 정말로 많았다.

그렇지만.

"뭐, 뭐야! 저 새끼 뭔데!"

"이, 미친!"

결국에는 고작 그 정도 지엽적 요소일 뿐.

그따위 하찮은 사실이 결과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야, 아르센 경은 기사니까.'

그리고.

"저거, 괴물이잖아!"

단련되지 않은 일반인이 아무리 무리를 짓는다 한들, 마력으로 육체를 강화한 기사라면 순식간에 죄다 썰어 버릴 수 있으니까.

생명체로서의 종 자체가 아예 다르다는 느낌.

지금의 아르센은 그야말로 토끼 무리를 사냥하는 사자와 다르지 않았다.

"사, 살려...!"

그리고 그는 그 압도적인 우위를 허투루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고.

피가 튀고,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골목을 울린다.

아르센의 검에는 자비가 없었다. 정말로 딱 죽지만 없는 선 안에서, 그는 철저하게 상대를 박살 냈다.

당연히 놈들의 저항에는 그 어떤 의미도 없었다.

"으, 으, 아."

"끄으, 어."

"아파, 아파...."

그 결과가 바로 이것.

바닥에 쓰러져 고통을 마음껏 맛보고 있는 얼간이들.

고작 47초.

아르센이 11명의 강도를 모두 부수는 데 걸린 시간.

'...키로스 경이 칭찬한 이유가 있네.'

도망칠 수 있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015. 부패의 도시 (4)

아르센이 어리석고 천박한 강도 놈들을 한 치의 자비도 없이 정리한 뒤, 나는 바로 그렇게 제안했다.

"치안 부대로 가죠."

치안 부대.

굳이 비교하자면 일종의 경찰.

나처럼 선량한 시민이 도시 안에서 그만 강도 사건을 당해버리고 말았으니, 치안 부대를 찾아가 보호를 요청하는 건 그야말로 상식적인 선택.

하지만 살벌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싹 다 지워버리고, 다시 평소와 같이 싹싹한 모습으로 돌아온 아르센은 이런 나의 제안에 무척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영주님, 에우스페나의 치안 부대는 그다지 믿을 만한 곳이 못 됩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당연히 그 점은 나도 안다.

애초에 난데없이 주민인지 쓰레기인지 모를 놈들이 튀어나와 강도질할 정도로 끔찍한 치안을 자랑하는 도시인데, 치안 부대가 멀쩡하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

'그냥 말만 치안 부대지, 사실상 또 다른 무장 범죄 조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제대로 된 사건 처리 따위는 기대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무방비한 차림으로 뒷골목을 돌아다닌 것과 똑같은 맥락. 치안 부대가 멀쩡하지 않기 때문에 치안 부대로 향하는 거다.

이 또한, 공작과 만나기 전에 갖춰야 할 준비니까.

그렇게 아르센의 우려 속에서, 우리는 마침내 골목에서 가장 가깝던 치안 부대에 도착하였고.

"어이, 정지. 용건이 뭐냐. 여기는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순수하게 태만과 짜증으로만 이루어진 경비병의 심드렁한 얼굴과 마주하고 말았다.

'이게 병사인지, 아니면 동네 양아치인지.'

에우스페나의 현실이 여기서도 여실히 드러나네.

물론 나는 신사적인 교양인인 만큼, 이런 교육 덜 된 말단 병사에게도 친절하고 조리 있게 설명해줄 수 있다.

거리에서 강도 사건을 당해 이곳까지 찾아 왔다고, 과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차근차근.

그러나 무척이나 불운하게도.

"...아, 별 같잖은 일로 이 시간까지 귀찮게 구네."

이런 나의 따뜻한 마음씨는 또 다른 불친절을 불러오는 결과밖에 낳지 못하였다.

"알겠다. 나중에 한 번 조사해볼 테니 이제 가라."

강도당한 시민을 보는 병사의 시선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저 눈빛.

마치 사람을 귀찮게 하는 잡상인이나 날벌레 따위를 내쫓는 듯한 저 손짓.

말로는 조사해본다고 하면서 자세한 사정 청취는 시작조차 하지 않는 저 태도.

그래, 뭐.

이게 이 동네 치안 부대의 평균이지.

'무슨 생각인지 안 봐도 뻔해.'

우리는 여전히 평민 복장이고, 이곳 현지인답지 않게 치안 부대를 믿고 신고까지 했으니까.

지금 경비병의 눈에는 여기 사정을 잘 모르는, 뒷배 없는 뜨내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 이딴 일은 이 도시에서 비일비재하니까 괜히 외지인 주제에 귀찮게 하지 말고 눈치껏 꺼져라.

요컨대 대충 이런 생각.

'하여간.'

새삼스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상식이 무너졌다는 말밖에 안 나온다. 원래 살던 양식 있던 세상이 그립다.

'하지만 상대가 개념 없이 군다고 선량한 나까지 똑같이 굴 수는 없는 노릇.'

말이 안 통하면, 인내심을 가지고 한 번 더 말하면 될 뿐. 그게 바로 모범적인 문명인의 태도다.

게다가 다행히도 지금의 나에게는 그런 둔재에게도 판단력을 쏙쏙 집어 넣어줄 수 있는 우수한 교사가 함께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바로 이렇게.

"대체 얼마나 영주님의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이지? 지금 네 눈앞에 계신 분은 니카로스 남작님이시다. 마땅한 예를 갖춰라!"

"뭐, 뭐? 남작...?"

여태껏 나의 등 뒤만을 묵묵히 지키고 있던 아르센이 더는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온다.

비록 상대가 정식으로 공작령에 소속된 병사이기에 때문에 검을 뽑지는 않았지만, 그 단련된 육체에서 자연스레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 자체가 곧 경비병의 목을 겨누는 칼날과 마찬가지.

참으로 만족스러운 모습이다.

'신분 과시와 위협이 조금 들어가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그냥 귀여운 수준이지.'

우리는 합리적인 요청을 했을 뿐인걸.

"아니, 그, 이건, 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는지 합리적 요청을 견디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으며 당황하는 우리의 경비병 친구.

상당히 꼴사나운 광경이었지만 나는 재촉하지 않았다.

"...."

그저 이글거리는 눈빛을 끝없이 발사하는 아르센을 말리지만 않았을 뿐.

"아, 아!"

그 덕분에 이제야 겨우 상황 파악이 된 건지, 아니면 단순히 아르센의 위협에 기가 꺾인 건지.

"죄, 죄송합니다! 제가 감히 귀족님을 몰라뵙고...! 그, 그러니까 지금 바로 안으로...!"

사색이 된 경비병이 겨우 무언가 적극적으로 해보려는 듯 분주히 움직인다.

하지만 됐다.

처음부터 말단 따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보다는 상급자를 만나고 싶군."

대장이나 데려와.

지금 당장.

***

"부하의 무례한 행동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립니다. 교육을 철저히 하지 못한 제 책임입니다."

"나도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평소와 다른 복장으로 방문한 부분이 있으니, 너무 신경 쓰지는 말게."

헐레벌떡 부대 안으로 들어간 경비병이 데리고 나온 사람은, 바로 치안 부대의 부대장이었다.

대장은 오늘 급한 업무로 자리를 비웠다나 뭐라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부대에 남아있는 인원 중 가장 상급자가 나온 셈이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안쪽으로 들어가시죠. 지금부터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확실히 부대장은 멍청한 말단 경비보다는 그래도 제대로 된 예의와 품위 같은 걸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런 면모는 어디까지나 겉껍데기에 불과.

그 속 알맹이까지 제대로 드러나게 된 것은, 유감스럽게도 바로 이 직후였다.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부대장의 안내에 따라 부대 안으로 진입하던 나, 그리고 그런 나를 호위하는 아르센.

부대장은 내 뒤를 따르던 아르센의 얼굴을 잠시 확인한 뒤, 순식간에 나와 아르센의 사이를 가로막았다.

"죄송합니다만, 이 자는 출입이 제한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예상치 못한 상황.

귀족인 내가 표정을 굳히며 물었지만, 부대장은 감정이 담기지 않은 표현으로 태연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이 자는 야만인이지 않습니까? 아무리 남작님의 호위라고 할지라도, 출입을 허용할 수는 없습니다."

보안상의 이유입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는 부대장을 보며, 나는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

진짜.

강도들의 차별 발언을 들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 망할 놈의 도시는 왜 죄다 이 모양인지.

"아르센 경은 야만인이 아닌, 정당한 바할리아 제국의 시민일세. 그리고 내가 직접 다스리는 영지의 주민이기도 하고. 이런 무례는 참기 힘들군."

솔직히.

이런 상황들이 이렇게 연이어 펼쳐질 거라고는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니카로스 남작령이, 동쪽 가장 변방의 개척지가, 그리고 그 초원에서 오래전부터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제국에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아예 게임 클리어까지 해봤는데 설마 그런 중요한 배경 설정도 모를까.

하지만 단순히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이렇게 현실로 직접 체감해보는 것은 확실히 느낌이 달랐다.

'그것도 기분이 아주 더러울 만큼 많이.'

사실 왜 예측하지 못했냐는 물음에, 굳이 변명하고자 하면 거리야 많다.

니카로스에 대한 이런 차별 의식을, 나는 지금까지 단순히 게임 속 단편적 이벤트로만 겪어봤을 뿐이니까.

그리고 나의 영혼과 기억이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의 것인 만큼 제국 시민들이 이렇게 쉽게 외모만으로 원주민들을 구분하고 차별할 수 있으리란 걸 몰랐으니까.

'하지만, 결국 결론은 내가 안일했을 뿐이란 거지.'

입맛이 썼다.

"그렇다면 우선 검증 절차를 진행하겠습니다. 남작님께서 먼저 입장해 주시기 바랍니다. 검증이 완료되면 호위도 곧바로 남작님께 안내하겠습니다."

이 지경이 되도록 이따위 소리만 지껄이는 부대장.

얘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상황이 이해가 안 되나? 나는 에우스페나 공작님을 모시는 봉신일세. 그리고 그런 내가 여기 공작님의 도시에 습격을 당했고.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내 호위를 떼어놓겠다고?"

그래,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처음부터 치안 부대에 '나쁜 일'을 당하러 왔다.

굳이 제 발로 으슥한 골목까지 기어들어 가서 강도를 당한 거랑 똑같다. 나는 속으로 몇 가지 계략을 꾸미고 있고, 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런 소소한 사전 작업이 있어 줘야 하니까.

그리고 이 부패한 도시의 사정과 생태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만큼, 철저히 피해자의 포지션을 유지하면서도 '나쁜 일'을 당할 계획과 자신 역시 있었다.

'그렇지만 그 계획이 이렇게 불쾌한 대우를 소재로 쓰는 건 아니었거든.'

차라리 내가 무시 받는 일이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지만, 이런 건 결코 내 스타일이 아니다.

바로 그게 문제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는 상부에서 내려온 지침입니다. 부디 협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내가 노기 섞인 어조로 쏘아붙이자, 그제야 조금 태도를 바꿔 움츠러드는 부대장. 그렇지만 막상 입으로 내뱉는 말에는 여전히 한 치의 양보도 없다.

'이쯤 되면, 단순히 차별 의식만이 관건이 아니네.'

공작의 직속 휘하 봉신.

그리고 치안 부대의 부대장.

당연히 권력의 우위는 내 쪽에 있다.

아무리 내가 약소 영지의 영주라지만, 파출소장 한 명도 이기지 못할 수준은 아니니까.

당연히 이 부대장 역시 그 사실은 잘 알고 있겠지.

그걸 알면서도, 고작 원주민 좀 깔보겠다고 객기 부리는 멍청이는 당연히 아니라고 믿는다.

"만약 협조를 거부한다면?"

"저희도 남작님을 보호해드리기 어렵습니다."

"요컨대 축객령이군."

"...."

그런 고로 이 자식이 끝까지 이렇게 나온다는 건, 당연히 나보다 더 강한 권력을 지닌 인간의 의중이 반영되었다는 의미.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현 에우스페나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고위 가신의 일각이자, 군부를 지배하는 자의 의중 말이다.

그래, 그 정도면 나 같은 약소 영주의 말 정도는 너끈히 씹을 수 있지. 나도 이해한다.

머리로는.

그렇기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솔직히 계획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어쨌거나 나는 '나쁜 일'을 당하러 왔고, 계획과는 다르지만, 이것도 '나쁜 일'이 맞긴 하니까.

그러니 이번 일도 충분히 잘 활용할 수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나에게 더 유리한 부분도 있다.

그러니 이대로 그냥 순순히 발을 돌려 나가도, 거시적 관점에서는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뜻.

그렇지만, 언제나 이성이 모든 걸 결정하지는 않는다.

"...."

나는 고개를 돌려, 등 뒤에 있던 아르센을 바라봤다.

본인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빠져, 잔뜩 얼굴을 굳힌 우리 니카로스의 젊은 기사.

그래,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나조차도 예상 못 했는데, 니카로스 남작령 바깥으로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라는 얘는 당연히 더 예상 못 했겠지.

'...얘는 괜히 나 호위하러 에우스페나까지 따라왔다가 거지 같은 경험만 하네.'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왕이면 책임지고 수습해야겠다는 생각도.'

나는 반사적으로 지금 이 자리의 구도를 살폈다.

지금 우리 바로 곁에 있는 것은 치안 부대의 부대장과 병사 몇 명이 전부.

제법 긴박한 대치 상태긴 하지만, 딱히 우리를 물리적으로 견제하고 있지는 않다.

그에 반해 우리는 나와 아르센, 두 명.

수는 훨씬 더 적지만 저쪽에서 제일 강할 부대장조차 정식 기사는 되지 못한, 나와 비슷한 수준의 무력을 보유했다고 가정하면 오히려 우리가 압도적으로 유리하다.

그래,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뒤엎을 수 있다.

'물론 그런 짓을 해서 내가 얻을 이득은 딱히 없지.'

물론 죽이지는 않을 거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영지 치안 부대를 난데없이 뒤집어놓는 게 정치적으로 유리할 리가 없다. 심지어 그 '남의 영지'가 내 직속 주군인 공작의 영지라면 더더욱.

당연히 순수한 피해자의 입장을 차지하는 것도 몹시 어려워진다.

'하지만 감당 못 할 정도냐면, 그건 또 아냐.'

작은 소란은 언제나, 더 큰 사고를 벌여 덮을 수 있는 법이니까.

'부하를 향한 모욕을 그저 가만히 참고 넘긴다.'

오히려 쉽지 않은 일은 이쪽이다.

난 이미 니카로스 남작령의 영주가 되기로 맘먹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니카로스 전부가 내 아래에 있는 셈.

'그만한 권리를 챙기겠다 해놓고, 의무만 덜렁 유기할 수는 없잖아.'

이건 그저 기본적인 교양인의 도리 문제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허리춤의 검으로 서서히 손을 뻗어갈 무렵.

"...영주님, 숙소로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동안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던 아르센이, 갑작스레 입을 열었다.

"아르센 경?"

뭐라 쉽게 더 말을 잇지 못하는, 괴로움 가득한 표정.

"...."

그 얼굴을 보니, 나도 어느샌가 뜨거워진 머리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래.

본인 의견이 그렇다면야.

우리는 곧 치안 부대를 떠나 나왔다.

***

치안 부대를 나오고 머지않아.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센이 문득 말했다.

"죄송합니다, 영주님."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그런 사과를 입에 담으며.

"...대체 아르센 경이 사과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아르센은 그저 피해자일 뿐이다.

이 부패하고 못 배워먹은 도시의 피해자.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아르센은, 어째 다른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저로 인해, 불필요한 소란에 계속 휘말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영주님의 행보에 폐를 끼친 것 같습니다."

이것 참.

오늘 하루 어이없는 말들을 참 많이도 들었지만, 방금 이 말이 그중에서도 최고다.

내가 인정한다.

아르센은 본인의 임무를 대단히 훌륭하게 수행했다.

'호위 임무도 완벽하게 해냈고, 무엇보다 내가 정신줄 놓고 사고 칠 뻔했을 때 말려주기까지 했지.'

그런데 폐라니, 너무 말도 안 돼서 웃음도 안 나온다.

"...."

그런 고로.

웃음도 안 나와서, 그냥 가만히 생각이란 걸 했다.

'기분 더러운 일을 상당히 많이 겪긴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계획하던 일들은 전부 순조롭게 잘 풀렸어.'

나는 공작의 직속 봉신이자 정당한 에우스페나의 방문객으로서 거리를 걷다가 강도를 당했고, 심지어 보호를 요청한 치안 부대에서도 쫓겨났다.

내 일지만, 내가 생각해도 불쌍할 지경.

그리고 그 덕에 나는 목적을 달성했다.

순수한 피해자라는 입장을 차지하겠다.

바로 그 목적을, 그야말로 완벽히.

'그러니 이제 당연히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지.'

신선한 재료를 다 모아놓고 썩힐 생각은 없다.

당연히 즉각 써먹으려고 모은 거니까.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완전히 해가 지고 까맣게 어두워지긴 했지만, 아직 아슬아슬하게 잘 시간은 아니다.

"아르센 경."

"네, 영주님."

그러면 당연히 나도 벌써 하루를 끝낼 필요는 없고.

"숙소에 돌아가기 전에, 한 곳 더 들립시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 말씀입니까?"

응, 지금 바로.

"아무래도 아르센 경이 이상한 오해를 하는 모양이라, 최대한 빨리 알려주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게 말씀이신지...?"

낮 동안 가득했던 호들갑은 전부 어디로 가고, 어느새 이렇게 우울함만 잔뜩 뿜어내는지.

그러니 네가 오늘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내가 직접 현장에서 보여줄게.

"에우스페나의 집사장, 페트로스 님의 댁으로 가죠."

나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당황하던 아르센이 황급히 뒤를 따른다.

그래, 어차피 가능한 신속하고 은밀하게 진행할수록 좋은 일이다.

늦은 시간에 방문한 건 그냥 양해를 구하면 된다.

내가 나쁜 말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걸.

게다가.

'그냥 참고 넘어가는 건 나도 어렵다고 했잖아.'

나는 한번 다짐한 건 지킨다.

어지간하면.

#016. 부패의 도시 (5)

에우스페나 중심가의 한 저택.

크기와 규모만으로도 충분히 주인의 권세를 보여줄 수 있을 정도로 으리으리한 그런 저택.

늦은 밤.

나는 바로 그 저택의 문을 두드렸고.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니카로스 남작님."

그 안에서 한 사내와 만날 수 있었다.

희미한 등불만을 켜놓은, 어두운 응접실.

그리고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불쾌하다는 티를 내지 않고, 흔쾌히 악수의 손을 뻗는 저택의 주인.

나는 남자의 굳은살 하나 없는 손을 맞잡으며, 자연스럽게 그의 모습을 살폈다.

한눈에 들어오는 밝은 금발 머리와 선한 인상.

자연스레 묻어나는 친절한 미소와 친근한 태도.

그리고 중년의 나이임에도 군살 하나 보이지 않는 몸과 관록을 더해주는 멋들어진 수염까지.

마치 그림으로 그린 듯한, 누가 봐도 호감인 외모를 자랑하는 중년의 남성.

그래, 이 사람이 바로.

"저도 만나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갑작스럽게 늦은 시간에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어떻게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페트로스 코투니오스.

"하하, 사실 저도 조금 놀라긴 했습니다. 하지만 에우스페나의 집사장으로서 먼 길 오신 손님을 문전박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이니,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에우스페나의 집사장.

드넓은 공작령의 모든 내정을 총괄하는 자.

선대 공작의 동생이자, 현 공작의 숙부.

'그리고 그 어떤 사실보다 중요한.'

현 에우스페나의 권력을 양분 중인 두 실세 중 한 명.

그렇다.

나는 바로 이 인간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다.

오직 이 자리만을 위해, 오늘 하루 내내 그 많은 일을 벌여온 것이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역시 소문으로 듣던 페트로스 님의 친절함이 결코 거짓이 아니었군요."

"이거, 부끄러운 말씀을."

나의 의례적인 찬사에도 정말로 쑥스럽다는 듯 입가를 가리는 페트로스 집사장.

이렇게만 보면 누가 봐도 사람 좋고 소탈한 아저씨일 뿐이지만, 놀랍게도 이 사람은 대단한 권력자가 맞다.

그것도 다름 아닌.

'부패한 쓰레기 권력자.'

나는 맞은편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이 도시에서 겪은 행복한 추억들을 하나하나 되새겼다.

누누이 말했다시피 지금 공작령은 나태한 공작이 아닌 그 밑의 고위 가신들이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

'그리고 그 고위 가신 중에서도 가장 정점에 있는 것이 바로 두 사람이고.'

그 두 사람 중 한 명이.

집사장 페트로스 코투니오스.

'요컨대 이 멋쟁이 아저씨가, 지금 이 도시의 개판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범인 중 한 사람이라는 말이지.'

단순히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끔찍한 도시를 만든 거라면 그래도 어찌 변명의 여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심지어 그런 것도 아니다. 제국 동부 최대의 도시가 이 꼴로 전락한 것은 순전히 권력자들의 욕심 때문이다.

'그야말로 악질 중의 악질이야.'

이 끔찍하고 끈적한 진상을 다 알게 되면 자연히 이런 사람과 함께하는 게 인간적으로 꺼려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말이야,'

사실 그런 건 지금 전혀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남작님이 우리 에우스페나에 방문 중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습니다.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저희가 먼저 모셨을 텐데. 정말 아쉽습니다."

그래.

이 인간이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뻔뻔한 소리를 지껄이든 말든.

정무에 관심이 없는 공작과 자신의 집사장이라는 지위를 이용해 공작령의 모든 자금줄을 홀로 좌지우지하고 있든 말든.

에우스페나 공작령의 공적인 예산이 사실상 저 인간의 비밀 저금통처럼 쓰이고 있든 말든.

그리고 그 저금통이 철저히 페트로스 개인의 사치를 위해 사용되든 말든.

굳이 그런 걸 따지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니다.

이건 내가 개입할 일이 못 된다.

'...솔직하게 말해서, 당장 내 목숨과 영지의 미래가 바람 앞의 등불 신세인데, 거기까지 신경 쓰라는 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인으로서 나는 합리적인 우선순위를 따질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 고로, 지금 중요한 것은 단 두 가지뿐.

"그래서, 어떤 일로 이렇게 저의 집까지 방문하셨습니까? 중요한 용건이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 인간이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과.

"아폴로니아."

"...네?"

나도 이 인간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아폴로니아 경을 견제할 힘이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오직 그게 전부다.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

그 다섯 글자 이름을 듣고, 페트로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이름은 다름 아닌 페트로스의 단 하나뿐인 적수의 것이었으니까.

페트로스는 분명 에우스페나의 금권(金權)이라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독점하는 권력자지만, 놀랍게도 그런 그에게도 정적은 있다.

'아폴로니아 경.'

에우스페나의 기사단장이자 총사령관.

전대 공작의 오른팔.

공작령을 다스리는 두 실세 중 하나.

병권(兵權)의 주인.

이 도시에서 페트로스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그렇기에, 절대로 외부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페트로스는 그런 그녀가 두려웠다.

언제 그녀가 부리는 병사라는 이름의 깡패들이 자신의 저택 담을 넘을지 걱정이 되어 참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나타난 애송이 영주가 갑자기 그녀의 이름을 꺼내니,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처음에는 그저 허허 웃으며 부정했다.

"제가 아폴로니아 경을 견제한다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무슨 말씀인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저와 아폴로니아 경은 함께 에우스페나의 번영을 위해 일하는 동료일 뿐입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페트로스의 역린 그 자체.

이미 두 사람 사이의 극심한 권력 다툼이 에우스페나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사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외부인에게까지 대놓고 떠들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부정에도 애송이 남작은 태연했다.

"다소 갑작스러웠다는 것은 저도 인정하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지금부터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듯, 더욱 노골적으로 태도를 바꿨다.

"그렇지만 어차피 페트로스 님도 이미 전부 알고 계신 것 아니었습니까? 저를 여기까지 이렇게 들여보내 주신 걸 보면 말이죠."

- 어차피 이미 다 알고 이 만남을 허락한 거잖아?

니카로스 남작은 명백히 그렇게 묻고 있었다.

"...."

그리고 그 갑작스럽고 어쩌면 무례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페트로스는 곧바로 부정하지 못했다.

그 틈에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그래도 일단 간단한 설명을 먼저 드리자면... 슬프게도 저는 오늘 이 도시에서 강도를 당했습니다. 그걸로도 모자라, 치안 부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그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는 일까지 겪었지요."

"...무척, 네, 몹시 가슴 아픈 비극이군요."

슬프다는 표현과는 달리, 오히려 즐겁다는 듯 막힘 없이 튀어나오는 니카로스 남작의 목소리.

어색하게 내뱉은 페트로스의 위로에도 그는 오히려 작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페트로스 님이 정확히 어디까지, 어떻게 알고 계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 정도는 이미 다 알고 계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니카로스 남작은 페트로스를 똑똑히 바라봤다.

"...."

그러나 페트로스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대신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물 뿐이었다.

솔직히.

이게 갑자기 다 무슨 상황인지, 페트로스는 쉽사리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 진실을 먼저 말하자면.

페트로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에우스페나의 방문한 외부의 귀족이 강도를 당했다.

그 귀족은 곧장 치안 부대에 보호를 요청했지만, 언쟁 끝에 조금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고 얼마 안 있어, 스스로 니카로스 남작이라고 밝힌 청년이 자신을 찾아왔다.

청년은 만남을 요청하며 중요한 정보가 있다 밝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빠짐없이 다 알고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큰 윤곽만큼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깔린 페트로스의 눈과 귀들이 언제나 이야기를 물고 왔으니까.

니카로스 남작의 말이 옳다.

만약 아무것도 몰랐다면.

강도 사건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면.

중요한 정보가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랬다면 이런 야만스러운 시골구석의 애송이 남작 따위에게 결코 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겠지.'

이게 담백한 진실이었고, 니카로스 남작은 바로 그걸 정확히 지적했다. 그렇기에 페트로스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애송이는 도대체 뭐지?'

의문은 그거였다.

도대체 열악한 변방 영지의 영주 따위가 어떻게 이렇게까지 에우스페나의 내부 사정에 정통하고, 이렇게까지 확신해서 말할 수 있는 걸까.

'아폴로니아를 견제할 힘?'

당연히 원한다.

그리고 저 애송이를 이용하면 실제로 얻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애초에 그걸 바라고 이 만남을 허락한 거다.

하지만 페트로스가 순수하게 원하고 있던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시골 귀족을 잘 구슬려 단물만 빼먹는 것이었지, 저렇게 수상한 방문자에게 난데없이 자기 속셈을 다 털어놓은 상황이 아니었다.

동등한 협상 따위는 애초에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페트로스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가뜩이나 에우스페나 안에 그의 약점과 실각을 노리는 승냥이들이 득실거리는 페트로스였기에 더욱더.

그러나 니카로스 남작은 그런 고민에 빠진 페트로스의 침묵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홀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오히려 그런 고민을 대신 해결해주겠다는 듯 더 명쾌한 어조로 말했다.

"가슴 아픈 비극이라고 표현하셨죠? 맞는 말씀입니다. 이만한 사건에 난데없이 휘말렸으니, 당연히 제 가슴은 슬픔으로 찢어질 지경이지요."

하지만 말입니다.

그는 한 호흡 쉬고, 배시시 웃었다.

"우리처럼 현명한 사람들에게는 어찌 보면 꼭 나쁜 일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치 페트로스의 고민을 모두 꿰뚫고 등을 떠미는 듯한, 당장 한 편이라도 된 것처럼 떠드는 남작의 물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페트로스는 결국 그 묘한 압박감에 참지 못하고 그렇게 되묻고 말았고.

"뜸은 충분히 들인 것 같으니 이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그렇게 되물으며, 마침내 오늘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남작과 똑똑히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금빛 눈동자.

마치 높은 하늘을 찢어 나는 매.

그런 매의 눈과도 비슷한.

예리하고 환한 황금색 눈동자.

그 눈으로 여태껏 시종일관 페트로스를 바라보고 있던 니카로스 남작이, 지금 명확한 제안을 건네고 있었다.

"원하는 게 있습니다. 그러니 페트로스 님께서 제가 원하는 걸 제공해주신다면, 저 역시 이번 사태로 아폴로니아 경을 공격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페트로스 님도 이걸 원하고 저를 저택에 들인 것이지 않습니까?

당돌하고 노골적인 제안.

건방지고 무례한 질문.

페트로스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갑자기 이런 어이없는 상황에 부닥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허."

그러나 화를 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가장 먼저, 마치 한숨을 토해내듯 웃었다.

흡사 무언가 명쾌한 답을 깨닫기라도 한 듯.

그리고 그렇게 웃었기에, 그 뒤에 이어질 말도 망설임 없이 꺼낼 수가 있었다.

"그냥 마냥 어린 풋내기 영주님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잘 돌아가시는군요?"

마침내 페트로스가 가면을 아주 살짝 벗었다.

***

그러게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것뿐이었는데.

이 아저씨는 왜 이렇게 뺐던 거람.

'이제야 좀 이야기가 되겠네.'

굉장히 피곤한 과정을 겪은 끝에, 겨우 페트로스가 제대로 된 협상을 시작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누가 괜히 찔리는 거 많은 부패 권력자 아니랄까 봐, 더럽게 조심스럽게 군다.

'하지만 굳이 그런 수고를 한 보람은 있어.'

애초에 모든 건 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으니, 코앞에서 조금 더 고생했다고 투덜거릴 수야 없다.

그래, 강도에게 습격당한 것도, 치안 부대에서 문전박대당한 것도, 이 저택에 이렇게 찾아온 것도 전부 하나로 연결된 일이다.

'이렇게 해야만 이 욕심쟁이 아저씨와 동등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으니까.'

요컨대, 아폴로니아라는 공공의 적을 두고 함께 협력할 수 있으니까.

나는 처음 이 도시에 올 때부터 이 양반과 손을 잡을 생각밖에 없었다.

'물론 이렇게만 표현하면 내 꿍꿍이의 제물로 바쳐지는 아폴로니아가 불쌍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말했잖는가. 이 끔찍한 도시가 이 모양이 된 데 제일 큰 책임이 있는 게 바로 최고 부패 권력자 두 명이라고.

아폴로니아 역시 그중 한 명일 뿐이다.

'게다가 그게 전부가 아니지.'

몇 번 언급했다시피 아폴로니아는 에우스페나 병권의 주인이자 군부의 수장.

그 말인즉슨, 오늘 나와 아르센이 겪은 치안 부대의 그 무례한 처사 역시 아폴로니아의 책임이 있다는 거다.

'아니, 단순히 책임이 있다는 수준을 넘어서.'

그냥 주원인이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

그야. 고작 부대장 따위가 영주의 요청을 대놓고 씹을 정도로 개념 없이 군 건, 전부 아폴로니아의 영향과 지시 때문일 테니까.

그래, 그 여자의 원색적 이민족 차별.

실제로 현실에서 당해보니 아주 진저리가 난다.

'망할. 진짜로 외부의 적들만 차별하면 또 몰라, 아르센은 정당한 제국 시민이자 내 주민이라고.'

다시 생각하니 또 화나네.

어쨌든 그렇기에, 아폴로니아를 공공의 적으로 삼는 건 나로서도 꺼릴 게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폴로니아에 대한 분노를 속으로 되새기고 있으니, 머지않아 페트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뭐, 좋습니다. 이야기를 해보죠."

아까보다는 조금 덜 가식적인 태도로.

고작 그 정도의 변화일 뿐인데도, 그의 인상이 순식간에 확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쪽이 그나마 더 본모습에 가깝겠지.

"이번 사태로 아폴로니아 경을 공격하는 데 직접적인 도움을 드리겠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건 제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맞습니까?"

네가 생각하는 그런 뜻이 도대체 뭔데.

좀 대놓고 말해봐라. 답답해 죽겠네, 이 쓰레기야.

속으로 그리 불평하면서도, 나는 막힘없이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가 직접 공작님 앞에 출두하여 증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호오."

그래, 내가 오늘 겪은 일은 단순히 페트로스와 만나기 위한 계기에만 가치가 있는 게 아니다.

귀족이 강도 사건을 당할 정도로 치안 관리를 형편없이 했다.

사건에 대한 수사도 전혀 진행하지 않았다.

나아가 그 피해 귀족을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괜한 트집만 잡다가 치안 부대에서 쫓아냈다.

당연히 이 모든 것은 결국 모든 군을 총괄하고 도시의 치안을 책임지는 아폴로니아의 책임으로 귀결된다.

'아무리 부패한 공작령이라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수 있어.'

물론 그동안은 비슷한 일이 있어도 잘 덮었겠지.

군에 대한 그녀의 통제력이 절대적인 만큼, 그 어디에도 빌미를 주지 않고 아예 없던 일로 잘 만들었겠지.

도시 안에 눈과 귀가 널린 페트로스조차 내가 직접 찾아오기 전까지는 증거가 없어 아무것도 못 하고 있던 걸 보면, 아폴로니아가 내부단속을 얼마나 잘 하는지는 안 봐도 뻔하다.

'하지만 피해 당사자가 대놓고 공작의 성까지 가서 입을 나불거린다면?'

심지어 그녀의 가장 큰 정적인 페트로스가 작정하고 준비해서 그 증언에 가세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치명적인, 정치적 일격.

아폴로니아로서는 작은 손해를 피하려고 사건을 덮다가 더 큰 손해를 보게 되는 셈이다.

그러니 페트로스로서는 이 이상 원하는 게 없을 거다.

잘만 하면 그녀의 군에 대한 영향력을 깎아낼 수도 있겠지. 난 그가 필요한 것을 제대로 들고 찾아왔다.

'원래 남의 집에 방문할 때 선물 챙겨가는 건 기본 예의니까 말이야.'

이런 내 생각대로, 페트로스는 확실히 달가워했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저야 더 바랄 게 없지요. 하지만 조금 걱정되기도 하는군요. 남작님이 원하시는 게 뭔지... 도저히 감이 안 잡혀서 말이죠.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순수하게 기쁨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얼굴값 못하고 욕심이랑 의심만 쓸데없이 많은 아저씨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의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하여간.

걱정 좀 내려놔라.

나 같은 신사가 무리한 요청을 할 리가 없잖아.

"하하, 사실 특별한 건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건 진심으로 좋은 거다.

그것도.

나와 페트로스, 두 사람 모두에게.

"페트로스 님과 장기적으로 우정을 나누는, 그런 친구 관계가 되고 싶군요."

그래, 말했잖아.

애초에 나는 이 도시에 새로운 친구들을 잔뜩 사귈 생각으로 온 거라고.

그러니까 너도 내 동맹이 되자.

#017. 부패의 도시 (6)

장기적으로 우정을 나누는 친구 관계가 되자.

즉, 동맹을 맺자.

"허."

나의 이 제안에, 페트로스는 곧장 난색을 보였다.

"글쎄요. 물론 저도 남작님께서 가져오신 이 귀중한 정보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공작령 차원에서 오늘 겪으신 끔찍한 일에 대한 배상을 해드리고, 섭섭하지 않은 대가를 내어드릴 의향도 있지요. 하지만 우정이라.... 저 같은 늙은이가 남작님처럼 젊은 청춘과 어울리는 게 과연 적절한 일일지...."

쓸데없이 말이 길지만, 결국 핵심은 아주 간단하다.

- 그래, 확실히 너의 공이 있긴 있으니까 보상금 정도는 충분히 지급할 수 있다. 넉넉히 챙겨줄게. 그런데 그걸 넘어서, 아예 나랑 동등한 동맹까지 맺자고? 그건 너무... 주제넘은 요청 아니니? 네가 뭐라고?

명백한 괄시와 거절의 의미.

물론 예상했던 반응이지만, 그래도 실제로 들으니 상당히 짜증 난다.

'...자기는 독립 영주도 아닌 일개 부패 관료일 뿐이면서. 사람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고 하네.'

하지만 대놓고 반박하는 건 또 애매하다.

무척 괘씸하긴 하지만, 그래도 냉혹한 현실만 따져 생각하면 저 쓰레기 아저씨가 아예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공작령의 절반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와 변방 약소 영주랑 비교하면, 아무래도 전자가 전반적으로 더 세긴 하지.'

하지만 틀린 말이 아니라고 해서, 그게 온전히 다 맞는 말이라는 뜻은 또 아니다.

'아무리 권력이 많다고 한들, 페트로스가 정말로 에우스페나의 모든 걸 지배하는 공작은 아니니까.'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그에게는 분명히 결핍된 부분이, 변방의 한낱 약소 영주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 근시안적이고 욕심만 많은 아저씨에게 친절한 설명을 덧붙여주었다.

"하하,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우려입니다. 하지만 저도 이번 일만을 가지고 이런 제안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면 달리 어떤...?"

내가 당당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하자, 페트로스가 의문을 표한다.

잘 생각해봐.

어떻게 보면 뻔하잖아.

"말했지 않습니까?"

아폴로니아 경을 견제할 힘이 필요하지 않냐고.

그래.

난 처음부터 이 말을 건네며 페트로스를 찾아왔다.

"힘이라니. 이번 사건을 공론화하고, 남작님께서 직접 증인으로 참석한다. 이게 바로 아폴로니아를 견제할 힘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

분명히 이 아저씨에게 괜찮은 무기가 될 거다.

하지만.

"그럴 리가요."

내가 고작 그 정도 단발적인 사안만 가지고 동맹 같은 소리를 운운할 리는 없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시시한 사내가 아니다.

훌륭한 거래를 위해서는, 상대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제시할 줄 알아야 하는 법인걸.

'그리고 페트로스가 지금 원하는 것은 아주 뻔하고.'

무력, 병사, 병력, 군대, 병권....

요컨대 아폴로니아는 가지고 있지만, 페트로스에게는 없는, 가장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힘.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그렇게 선언할 수 있었다.

"유사시 아폴로니아 경과 군사적 충돌이 발생했을 때, 우리 니카로스 군이 페트로스 님을 위해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무슨...!"

아폴로니아가 군을 들고일어나는 최악의 상황 때.

내가 직접 지원 병력 파견을 파견해주겠다고.

'그래, 이게 바로 페트로스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고, 동시에 내가 제공해줄 수 있는 거래 상품이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다.

에우스페나의 두 최고 권력자.

페트로스와 아폴로니아.

분명 공작령의 권력은 이 두 명이 양분하고 있다.

이건 객관적 사실이다.

아니, 엄밀히 따져보면 페트로스가 조금 더 많을 수도 있고. 금권이라는 것은 그만큼 유용한 힘이니까.

'하지만 아폴로니아에게는 언제든 여차하면 모든 판을 엎고 들고일어날 힘이 있어.'

바로 그게 문제다.

에우스페나의 모든 병력은 사실상 아폴로니아의 사병이나 다름없다.

그녀는 마음만 먹는다면 공작의 성까지 무혈입성이 가능할 정도로 군대를 단단히 통제하고 있다.

'그저 정치적 뒷감당이 두려워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있을 뿐이지.'

그러니 페트로스로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는 거다.

궁궐 같은 집에서 사치를 즐기면 뭐 하나.

당장 턱밑에 칼날이 바짝 들어와 언제든 찌를 수 있다고 위협당하고 있는 상황인데.

물론 부패한 페트로스도 두뇌라는 게 존재하는 만큼, 이 상황을 여태 바보처럼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용병도 고용하고, 몇몇 군인들을 매수해 군부에 자기 세력을 키우려고 시도하고, 집사장이란 직위를 이용해 예산을 틀어막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이미 동원했지.

'하지만 애석하게도 구도 자체를 뒤집지는 못했어.'

페트로스가 부릴 수 있는 핵심 전력인 용병들은 어디까지나 영지의 외부인.

아무리 페트로스가 돈이 많다고 해도 에우스페나의 정규군과 정면으로 붙을 만한 병력을 장기간 유지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 된다.

게다가 그만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아폴로니아를 대놓고 자극할 위험이 크고.

그저 평상시 신변을 보호하는 정도가 한계겠지.

그리고 군부를 이간질하는 것도 절대 쉽지가 않았다.

기사 아폴로니아에게는 업적과 명망이 있으니까.

'지금은 그저 에우스페나를 좀먹는 부패 권력자 중 한 명일 뿐이지만, 그녀는 평민 출신으로 수습 기사 시절부터 공작령을 위해 봉사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야.'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오직 능력과 실적만으로 꼭대기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군부의 아이돌.

공작의 친족이라는 금수저를 타고 난 페트로스와는 배경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그러니 기껏해야 페트로스가 얻은 것은 조악한 정보망 정도가 전부.

오늘 어떤 귀족이 공작령에서 강도를 당했다는 것 정도는 알지만, 그게 정확히 누구인지는 모를 정도의 애매한 그런 영향력.

바로 그런 와중에 내가 무력으로, 유사시 군사적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제안한 거다.

엄밀히 따지면 니카로스와 에우스페나가 완전히 남남인 관계도 아니니, 용병대를 고용하는 것보다 그림도 훨씬 예쁜 건 덤이고.

그러니 이렇게 훌륭한 제안이 세상에 어디 있어?

그렇지만.

"하하, 마음은 감사하지만...."

이 욕심쟁이 쓰레기 아저씨는 여전히 마음을 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너무 무리하시는 것은 아닙니까? 가뜩이나 니카로스 남작령은 변방의 최전선을 수호한다는 중요한 책무 또한 맡고 있는데."

- 공작령 수준의 분쟁에서 날 도와주기에는 니카로스 남작령이 너무 허접하지 않니?

이번에는 이런 뜻이구먼.

웃는 얼굴로 못 하는 말이 없네, 얘는.

하지만 그 점은 나도 겸허히 인정한다.

지금의 니카로스는 공작령의 권력 다툼이라는 커다란 판에 직접 개입하기에 다소 부족한 감이 있긴 하지.

그렇지만.

"저는 시하브 토후국 정벌을 준비 중입니다."

"네?"

그것도 이제 곧이다.

"전쟁의 준비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이번에 에우스페나에 방문한 것도 그 준비를 위함이 제일 크지요. 머지않아 페트로스 님께서도 승전보를 들어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당황하는 페트로스.

하지만 나는 그저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소식을 꺼내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 아마 그때 즈음이면 페트로스 님께 필요한 기준을 충족하는, 그런 니카로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시하브 토후국은 니카로스 남작령보다 넓은 영토를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그 땅을 전부 온전히 흡수할 수 있다면 우리의 체급은 단숨에 두 배 이상으로 뛴다.

'물론 문화와 종교가 다른 이교도의 땅인 만큼 완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어쨌든 평범한 변방 남작령 수준은 분명히 넘을 테지.

그러니까 이건 내가 이 아저씨에게 특별히 기회를 주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지금 나에게 미리 선을 댈 기회를.'

전도유망한 이 티베리오스 코인을 저점에서 매수할 기회를 말이야.

"...이것 참, 다소 당혹스럽군요."

짧은 침묵이 지나고.

페트로스는 다시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물론 지금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처럼 들린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네, 실례가 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조금 그런 감이 있군요. 남작님께서는 승리를 확신하십니까? 절대로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떻게 승리를 확신하냐고.

그렇겠지.

남은 문제는 결국 이거 하나다.

페트로스는 무력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저 내가 가진 힘을 의심하고, 내가 앞으로 가지게 될 힘을 의심할 뿐.

'그렇다면.'

그 의심만 해결하면 거래 성립이라는 얘기 아닌가?

이제 다 왔다.

"승리를 확신하지도 못하고 전쟁을 준비하는 바보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나는 자신 있게 웃었다.

물론 안다.

이런 멋있는 호언장담도 나와 나의 계획에 대해 모르는 페트로스에게는 그저 공허한 말로 들릴 뿐일 것이다.

의심을 지울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러니까 저도 페트로스 님의 답변을 재촉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아무 문제 없다.

"머지않아 드러날 승전보를 들으시고 답을 주셔도 됩니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결과가 증명할 테니까.

"오늘의 대화는 제가 페트로스 님에게 이런 호의를 품고 있다... 그저 그런 뜻을 전달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부담 없이 이해해 주시면 아무래도 제 마음도 편할 것 같군요."

이건 어디까지나 장기적인 협력을 위한 거래 조건.

어차피 당장 필요한 이득은 강도 사건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재촉할 이유는 전혀 없지.

"...."

페트로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솔직히 말하면, 저로서는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제안인 것 같군요. 오히려 너무 조건이 좋아서 도리어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그야 그렇겠지.

필요한 것도 내어줄 수 있다고 하고, 못 믿겠다고 하니까 직접 결과로 보여주겠다고 하고, 대답은 그 이후에 해도 된다고 했으니까.

내가 생각해도 너무 좋은 조건들이다.

의심이 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저는 어디까지나 진심입니다."

"...."

하지만 정말 숨겨진 나쁜 의도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나는 더불어 살아가는 미덕을 아는 교양인이니까.

"그러면 조금만 더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제가 일방적으로 호의를 받기만 하면 불편한 성격인지라... 그 장기적인 우정이란 걸 통해서, 남작님께서 정확히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듣고 싶군요."

진짜 의심 많은 아저씨 같으니.

하지만 나는 이런 질문에도 당당히 대답할 수 있다.

"딱히 특별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니카로스 남작령은 에우스페나에 속한 영지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외부 활동을 하면서도 공작령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지요. 그런 부분에서 에우스페나에 계신 페트로스 님의 작은 배려만을 기대할 뿐입니다."

- 나 전쟁하는 거에 괜히 간섭하고 방해만 하지 마.

우스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나는 수없이 원작을 플레이해봤으니 안다.

'이 상식 없는 공작령 놈들이 얼마나 휘하 봉신들에게 패악질을 부리는지 말이야.'

뇌물과 상납을 노골적으로 밝히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따로 언급할 가치도 없다.

국경 방비에 대한 지원은 일절도 없으면서, 휘하 봉신들이 적극적으로 공세에 나서면 왜 허락도 안 받고 설치냐고 꼬투리나 잡지 않으면 다행일 정도니까.

저거 실제로 당해보면, 게임인 걸 알아도 말도 안 되게 짜증 난다. 하물며 여기는 현실인걸.

진짜 상상도 하기 싫다.

'사실상 제국 동쪽 지방의 멸망을 가속하는 최악의 빌런은 여기 에우스페나라는 평가가 커뮤니티에서 괜히 도는 게 아니거든.'

그러니까 니카로스의 영주로서 그 변수와 위험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돕지 않을 거라면 그냥 가만히 있어라.

차라리 그게 도와주는 거다.

거기에 더해서 앞으로 쌓일 나의 성과와 위업을 이 일대에 널리 퍼뜨리는 확성기 역할까지 해주면 더할 나위 없고.

어때, 전혀 어렵지 않지?

"애초에 니카로스처럼 작은 영지가 페트로스 님께 바라는 것이 뭐가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물론 그런 기본적인 것을 넘어선, 더 거창하고 으리으리한 큰 그림도 하나 있긴 하지만.

'뭐, 벌써 김칫국을 마실 필요는 없지.'

그건 나중에 천천히 다시 검토해보자고.

어쨌거나 지금은.

"작은 배려만으로 점차 확장될 니카로스 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남는 장사 아닙니까?"

일단 이것만 먼저 생각합시다.

아저씨.

나는 페트로스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을 제시했고, 무리한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얼마나 합리적이야.

원래 거래라는 것은 상부상조하는 것이다.

"...."

페트로스는 고민했고.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지만, 난 여유롭게 기다렸다.

당연히 그가 결국 승낙할 것을 확신하니까.

"...좋습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먼저 남작님의 승리를 기원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웃었다.

완벽해.

이제 공작의 성을 한 번 다녀와 줄 수 있겠어.

***

"아."

그 뒤로, 구체적인 배상금과 증언 방법이 포함된 세부 협상까지 마침내 모두 끝낸 뒤.

나는 깜빡한 게 떠올랐다는 듯 그렇게 입을 열었다.

"이번 제안과는 별개로, 혹시 제가 개인적인 부탁 하나만 먼저 드려도 괜찮을까요?"

"음? 글쎄요.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도 되겠습니까?"

아폴로니아 견제 차원에서 보면 딱히 아저씨에게도 나쁜 일은 아니니까. 이왕이면 꼭 들어줬으면 하는데.

그야.

"오늘 저와 갈등을 있던 치안 부대의 부대장, 그분에게는 따로 특별한 조치를 더 해주시면 합니다."

역시 이건 그냥 넘어가기 좀 그러니까.

아르센 경을 모욕한 그 자식 말이야.

나의 부탁에 페트로스는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곧 입꼬리를 씩 올렸다.

"물론입니다. 그런 부탁은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

"...."

니카로스 남작령의 기사, 아르센은 침묵했다.

쉽게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페트로스의 저택, 그 내부의 응접실, 한구석.

주군인 티베리오스를 호위해야 한다는 책무가 있기에, 아르센은 그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든 과정을 다 보고 들을 수가 있었다.

협상 내내.

'솔직히.'

아르센은 티베리오스라는 한 인간에 대해서는 그다지 많은 감정을 품고 있지 않았다.

물론 충성은 다하고 있다.

그는 기억이 가능한 가장 어린 시절부터 니카로스 남작령의 주민이었고, 기사의 꿈을 품어 단련해왔다.

존경하는 키로스 경에게 직접 교육받고 배웠다.

충성은 기사로서 그야말로 당연한 미덕이었다.

하지만 그 충성은 그저 '니카로스 남작'을 향하는 것이지,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는 개인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 지금까지는.

전부 봤다.

어린 주군이라고 영지의 가신들조차 믿지 않는 영주가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협상의 자리를 마련했다.

페트로스라는 공작령의 거물을 상대하면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고, 오히려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나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막중한 협상의 순간 속에서, '개인적인 부탁'까지 하며 아르센의 복수를 하고자 했다.

그걸 전부 봤다.

"...."

물론 아직 확정된 건 없다.

협상도 복수도, 결과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더 기다려봐야 안다.

하지만.

그런 결과 따위와는 별개로.

이미 아르센은 티베리오스 발란티스라는 한 인간을 바라보고 있었다.

#018. 친구와 적 (1)

에우스페나 공작의 알현실.

"반갑군, 니카로스 남작."

그 중심에 앉아 계신 한 남자.

"에우스페나에 온 걸 환영하네."

다시 말해 이 공간의 하나뿐인 주인께서는, 몹시 나른하다는 기색을 조금도 숨기지 않으셨다.

'...아니, 저건 나른하다는 것을 넘어 귀찮다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니터 너머 그래픽이 아닌 실제 현실에서 대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그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공식적인 직함과 이런 공간과는 관계없이, 그저 순수하게 얼굴을 보고 눈에 담은 것만으로도.

"그대가 이번에 겪은 사고에, 깊은 유감을 표하지."

나태공(懶怠公).

리칸도스 코투니오스.

놀랍다면 놀라울 사실이지만, 나태한 인간이라는 한심한 별명과 달리 이 금발 머리의 사내는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멀쩡했다.

젊고 잘 생겼으며 육체도 건장.

머리까지 윤기 나고 찰랑거리는 게, 딱 봐도 잘 먹고 잘 사는 도련님이라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하긴. 숙부인 페트로스도 얼굴 하나는 잘생겼으니까.'

그렇지만 그 모든 장점이 무의미해질 만큼.

"그러면 구체적인 이야기는 집사장에게 듣도록 하게."

눈빛은 무척이나 혼탁했다.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던가.

공작은 정말로 영혼 한 점 없는 말투로 형식적인 말을 나열할 뿐이었다. 직접 앉아 있는 이 상황과 이 자리에조차 그 어떤 흥미와 관심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는 이만 들어가 보겠네."

그리고 고작 그게 끝이었다.

겨우 네 문장을 말했을 뿐인 공작은 진심으로 피곤하다는 듯 하품을 내뱉으며 알현실을 떠났다.

"고생하셨습니다, 공작님. 편히 쉬십시오."

남은 것이라고는 집사장 페트로스가 내뱉는, 고생하셨다는 말도 안 되는 메아리뿐.

'...진짜.'

이미 원작 지식을 통해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긴 하지만, 실제로 보니 새삼 놀라웠다.

'진짜 말도 안 되는 폐급이네, 저 양반.'

소집된 공작의 가신들은 이미 익숙하다는 듯 모두 태연하게 해산 중.

이런 게 여기 일상인 건가.

말도 쉽게 안 나온다.

"니카로스 남작님도 고생하셨습니다."

그 와중에 에우스페나의 집사장 페트로스가 공작의 배웅을 끝내고 나에게 다가왔다. 이 순간만큼은 나도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 고생이라뇨. 아닙니다."

"천하의 니카로스 남작님도 당황하신 모양이군요."

페트로스는 다 이해한다는 듯이 씩 웃고는 내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사실 이렇게 알현실로 나오시는 것 자체가 드문 일입니다. 오늘도 제가 특별히 요청을 드려 겨우...."

진짜 미친 영지다, 여긴.

마가 낀 건가? 왜 멀쩡한 게 아무것도 없지?

"정말 페트로스 님의 고생이 많습니다."

"하하,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요."

"...."

대충 의례적으로 내뱉은 말에 마치 기다렸단 듯 냉큼 되돌아온 대답을 듣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부패 사범 주제에 보람찬 일을 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 짓지 마라, 이 아저씨야.'

너희 영지 꼴을 보고도 그런 웃음이 나오니?

사실상 너도 주범이잖아.

"오늘 이렇게 성까지 방문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일이 잘 풀렸습니다."

...그래, 뭐.

사실 지금 에우스페나가 대체 얼마나 처참한지, 그리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지금은 이런 것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긴 하다.

페트로스의 말처럼, 지금 중요한 건 모든 게 잘 풀렸다는 그 사실 하나뿐.

어젯밤에 페트로스에 저택에 방문하고, 나는 약속대로 오늘 바로 공작의 성으로 왔다. 정확히는 페트로스가 먼저 내가 당한 강도 사건을 공작에게 알리고, 유감 표명과 보상을 위해 나를 성으로 불렀다는 형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오자마자 본 게 바로 저 나태한 공작님이고.

페트로스도 일이 잘 풀렸다고 말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미리 작성해준 탄원서를 바탕으로 내가 도착하기 전부터 순조롭게 아폴로니아 측에 압박을 가했던 모양.

하긴. 잘 나타나지도 않는다는 공작을 꺼내 왔을 정도면 공론화는 하나는 확실히 성공한 모양이지.

정말 훌륭한 속전속결이야.

부패 사범 주제에.

"아닙니다.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걸요. 당연히 서로 필요할 때 도와야지요."

"역시 남작님과 대화를 하면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미리 협의한 대로 이번 건에 대한 보상... 아니, 배상은 제가 확실히 니카로스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페트로스는 음흉한 웃음과 함께 덧붙였다.

"그리고 어제 말씀하신, '그자'에 대한 처분도 순조롭게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페트로스는 그자가 정확히 누구인지 명시하지 않았지만, 굳이 직접 듣지 않아도 어차피 답은 뻔했다.

치안 부대의 부대장.

아르센과 나에게 모욕을 준 그 친구.

"...세심한 배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하하, 별말씀을!"

이건 확실히 배려가 맞다.

물론 페트로스가 딱히 나를 위해 대단한 손해를 감수해준 것은 아니다.

아폴로니아의 개인적인 혐오와 방침에 충실하게 따랐을 뿐인 부하가 이렇게 순식간에 모가지가 날아가는데도, 정작 그 아폴로니아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 이런 사실 자체를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녀를 향한 정치적 압박이 되긴 하니까.

'하지만 굳이 이것 외에도 다른 방법은 많지.'

페트로스가 미리 생각해두던, 그에게 가장 효율적인 압박 방법이 따로 있을 수도 있다. 그 상황에서 오직 내 부탁대로 방법을 정한 것이고.

따라서 나는 아주 조금 입꼬리를 더 올렸다.

'그래, 우리 계속 이렇게만 하자.'

나는 페트로스가 아폴로니아랑 대립하는 걸 도와주고, 페트로스는 공작령에서 내 정당한 권리를 보장해 주고.

서로 배려하고 상부상조 챙겨주니 더할 나위가 없지.

'물론 이렇게 페트로스가 서서히 아폴로니아를 압박하다가 아예 이겨 버리면 그건 또 곤란하긴 해.'

내 도움이 더는 필요 없어진다는 의미가 되니까. 그러면 이 거래도 거기서 끝이다.

'하지만 이건 역시 지금 하기에는 다소 이른 걱정.'

아폴로니아도 절대 만만한 상대는 아니니까.

오히려 한참 열세이던 페트로스가 이제야 겨우 약간의 승산을 챙긴 것에 가깝다.

그렇게 주인 떠난 알현실 한구석에서, 나쁜 아저씨랑 사이좋게 꿍꿍이를 꾸미고 있던 도중.

"니카로스 남작."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참.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려 목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아폴로니아 경."

길게 기른 흑발과 붉은 눈을 지닌 여인.

에우스페나의 총사령관.

고정 네임드 캐릭터.

자신이 무관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성안에서도 갑옷을 입고 있는 아폴로니아. 자연스럽게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철컥거리는 소리가 알현실에 울려 퍼졌다.

아폴로니아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며, 얼음처럼 차가운 표정을 한 채 나에게 다가왔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나?"

그녀는 다짜고짜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페트로스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먼저 나섰다.

"이보게, 아폴로니아. 지금 남작님은 내가 응대하고 있네. 이건 조금 경우가 아니지 않나?"

음, 밉상인 페트로스가 하는 말이지만, 분명히 틀리지 않은 정론이기도 하다. 대화 중에 갑자기 끼어든 건 분명 아폴로니아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폴로니아는 그런 정론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끝날 때까지 기다리지."

"...어디서 말인가?"

"여기서."

"여기서?"

"그래. 같은 질문을 두 번 하지 마라."

"...."

그녀의 뻔뻔한 태도에 페트로스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나도 똑같이.

아니, 저희가 나누던 이야기에 선생님 뒷담화도 포함되어 있었거든요. 이러시면 많이 곤란한데요. 대화를 마음 편히 못 해요

'아니, 애초에 그게 목적인 건가.'

나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녀의 모습을 자세히 살폈다.

아폴로니아가 올해로 대략 30대 후반 정도 됐던가.

권력의 실세치고는 상당히 젊은 편이지만, 그녀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에우스페나의 깃발을 들고 전장에 나섰다는 걸 고려하면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아도 괴리감이 들기는 했다.

실제로 그녀를 보니 기껏해야 20대 초중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족히 20년 가까이 젊어 보이는 셈.

마력을 다루는 기사나 마법사의 노화가 원래 남들보다 조금 느리다고는 하지만, 아폴로니아는 유독 더 그런 경향이 강한 것 같았다. 내 머릿속 이미지와 조금도 다르지 않던 공작과는 반대로, 단순히 게임으로 볼 때와는 느껴지는 인상이 살짝 다를 정도로.

'신기한 일이야.'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재밌는 일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조금 그렇고.

그렇게 아폴로니아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업데이트하며, 다시 평소의 흐름을 되찾은 내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급한 용건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잠깐 정도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페트로스 님도 괜찮으시죠?"

"...하하, 물론이지요, 남작님."

무능한 페트로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찌그러졌으니 직접 나설 수밖에. 이 돈에 미친 부패 사범 아저씨만 믿고 있을 수는 없다.

"반갑습니다, 아폴로니아 경. 이렇게 다소 불미스러운 일로 만나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그래, 나도 진심으로 유감이다."

새삼 드는 생각인데.

'이 양반 말이 좀 과하게 짧네.'

상당히 건방져. 군인이라고 그런 건가.

비슷한 직급인 페트로스도 나랑 상호 존대하는데.

물론 페트로스의 존댓말은 전부 기만과 위선에서 비롯된 산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잖아.

아닌가.

"그래서 하고자 하시는 이야기가?"

"니카로스 남작은, 그쪽 편을 들기로 한 건가?"

"...."

조금 돌려 말하면 어디 덧나니.

같은 천생 군인인 키로스 경도 이거보다는 훨씬 부드럽게 말하거든.

"흠흠, 이보게. 편이라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나."

옆에 있던 페트로스도 당황했는지 헛기침을 한다.

하여튼, 저렇게 대놓고 묻는 걸 보니 이미 다 알 거 다 알고 온 것 같은데, 거기에 대고 부정하는 것도 별 의미는 없겠지.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부끄럽군요. 그저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처지끼리 돕고 지내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나는 그저 영양가 없는 말만 뱉어냈다.

그리고 굳이 따지자면 나는 처참한 치안 관리와 응대, 사건 은폐로 인해 아폴로니아한테 먼저 피해를 본 입장.

속된 말로 선빵을 맞았다 이거다.

그러니까 내가 페트로스 편에 붙어도 너는 따질 처지가 아니잖아?

나는 그런 시선으로 아폴로니아를 바라봤고.

"흠."

그녀는 그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무래도 고민이 제법 많아 보였다.

그럴 만도 하지.

나와 페트로스의 동맹이 정치적으로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아직 가늠이 안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런 침묵도 잠시.

"제논 발란티스가, 전대 니카로스 남작이 전사하는 순간에 함께했다고 들었다."

아폴로니아는 여전히 속내를 읽기 어려운 차가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화 주제를 바꾸는 솜씨가 정말 환상적이네.'

깜빡이라도 좀 켜자.

"그렇습니다. 저도 곁에 있었지요."

"조의를 표하지. 그는 훌륭한 기사였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여전히 표정 하나 없어 쉽게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분명히 아버지께서도 옛 전우의 애도를 반기실 겁니다."

"...알고 있었군."

아폴로니아가 조금 더 표정을 굳힌다.

내가 모르리라 생각했던 걸까.

제논과 아폴로니아.

두 사람 모두 <마이트 앤 로열>의 고정 네임드 캐릭터인 만큼 당연히 둘에 대한 배경 설정 역시 존재한다.

'그리고 존재하는 설정이라면 당연히 나도 알고 있고.'

생각해보면 완전히 뜬금없는 화제 전환은 아니다.

'제논은 에우스페나의 기사였으니까.'

몰락 귀족 출신으로 오직 검 한 자루만 들고 일어나 힘을 쌓았고, 마침내 그 실력을 인정받아 기사로서 전대 에우스페나 공작을 섬기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나 최전선에서 투쟁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서.

그 헌신 끝에 하사받은 영지가 바로 니카로스 남작령.

제논 발란티스가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정복한 땅.

그 당시에 제논과 함께 한 동료 중에는 바로 우리의 키로스 경도 있었고.

"설마 제논이 내 얘기를 했을 줄이야."

바로 눈앞의 이 여자도 있었다.

변경 지대에 배치된, 그리 비중이 크지 않았던 캐릭터들이었던 만큼 자세한 일화까지 알려주지는 않지만 분명 제논과 아폴로니아가 만나는 상황에서만 뜨는 고유 대사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적어도 그냥 얼굴만 알고 스쳐 지나가던 직장동료 관계는 아니었겠지.

"...존경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니까요."

"재밌군."

그래서.

과연 갑자기 제논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

순수한 의미의 추모?

글쎄, 옛 전우였던 만큼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저 여자도 만만치 않은 정치인인걸.

저 돌직구 같은 말투만 봐서는 믿기 힘들겠지만, 애초에 군부의 수장이라는 자리가 정치적 계산 없이 차지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위치는 결코 아니다.

따라서 나는 자연스럽게 내심 여러 가능성을 신중하게 셈했다.

하지만 이런 내 추측과는 달리 아폴로니아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

그저 내 얼굴만을 뚫어지게 쳐다봤을 뿐.

아무런 표정도 없이.

상당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지만, 나는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렇게 한참을.

"이보게, 아폴로니아...? 그렇게 계속 보면 남작님께서 부담스러우실걸세."

결국, 보다 못한 페트로스가 조심스레 말리고 나서야.

"제논이 자식 농사 하나는 제대로 지은 모양이야."

그녀는 마침내 입을 열며, 쳐다보는 것을 멈췄다.

'...도무지 무슨 속셈이었던 건지 종잡을 수가 없네.'

하지만 캐묻지는 않았다.

대신 그저 옅은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질문에 대답해 줘서 고맙네."

그리고 그런 나의 대답에, 어째서인지 처음부터 지금까지 마치 얼음처럼 조금의 흔들림도 없던 아폴로니아의 두 입꼬리 역시 살짝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보고도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

"그러면 조심히 돌아가게, 남작."

그러나 내가 신기루 같은 미소를 재차 확실히 확인하기도 전에, 그녀는 마치 이제 모든 용건이 끝났다는 듯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나타났을 때와 똑같이.

마치 바람처럼.

나는 결국 오직 나에게만 들릴, 그런 작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그녀의 등을 보고 의례적인 작별 인사만을 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럼 아폴로니아 경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 순간.

아폴로니아가 잠시 발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되겠나?"

그녀는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로.

"물론입니다."

"어제 굳이 평민처럼 차려입고 사고 현장 주위를 돌아다닌 이유는 뭔가?"

그렇게 물었다.

"...."

역시.

내가 말했잖아.

정치적 계산이 없는 여자가 결코 아니라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헤아렸다.

'이유. 글쎄, 이유라.'

그리고 그저 언제나처럼.

"그냥,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다고만 말하겠습니다."

넉살 좋게 웃었다.

그녀가 이미 정답을 다 알고 묻는 것 같아서.

그래, 아마 그거 맞을 거야.

나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내가 처음부터 모든 걸 설계해 너의 발밑에 함정을 팠어.

그거 맞아.

"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만나지."

내 미소를 등에 붙인 채.

아폴로니아는 정말로 떠나갔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내며.

***

공작 성 방문을 끝낸 다음 날.

에우스페나 방문 3일째.

나는 다시 가스파르의 가게로 향했다.

"네 말이 맞았다, 애송아."

가게에 들어가자마자, 가스파르는 잔뜩 무게를 잡으며 다짜고짜 그렇게 얘기했다.

"다행이군요. 일은 잘 해결되었습니까?"

물론 못 알아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그래, 미르코였나 하는 그 전속 마법사가 범인이 맞았다는 말이겠지.

"그래... 그 녀석, 이제 다시는 설치지 못할 거야."

영원히 말이야.

"...."

당연한 결말이라면 당연한 결말.

원작에서도 가스파르는 절대로 미르코를 용서하지 않았으니까.

"그럼 손녀분의 건강도?"

"그건 조금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확실해지겠지. 그렇지만 녀석이 범인이 맞았으니 곧 쾌유할 수 있을 게다. 다른 마법사가 와서 고비는 넘겼다고 진단도 했고."

다행이네. 역시 일 처리가 빠르다.

이틀 만에 증거를 찾고, 조지고, 다른 마법사까지 불러와서 확인해보고.

영감님 부지런하신 거 하나는 알아줘야 해.

대충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가스파르가 갑자기 비통한 얼굴로 푸념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전부 다 의도하고 나에게 접근했던 모양이야. 오래전 내가 그 녀석의 가족을 죽였다고 하더구나."

그래.

이것도 이미 알고 있는 사정이었다.

"복수 같은 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흔히 있는 일이야. 당연히 각오도 했고. 그렇지만 설마 수십 년 동안 웃는 얼굴로 그 모든 증오를 숨기고, 내 옆에서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니. 나도 그런 독종은 정말 처음이었다."

가스파르는 단순한 대부업자가 아니라, 암흑가에 걸쳐 있는 거물인 만큼 사람 죽는 일에도 수없이 얽혀 있다.

심지어 이 일은 집안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가업이었으니까, 당연히 원한의 업도 훨씬 더 깊겠지.

그리고 그런 수많은 원한 중.

뛰어난 마법사가 될 정도의 재능과 원수 앞에서도 감정을 억누르고 헤실헤실 웃을 수 있는 독기를 겸비한 녀석이 하나 있었을 뿐이다.

'평생을 바쳐 충실한 측근으로 살면서, 오직 단 한 번의 기회만을 노리던 그런 녀석이.'

그저 그게 전부인 이야기.

"게다가 내가 아니라 내 손녀를 노리다니, 가족의 죽음에는 가족의 죽음이라는 게지. 심지어 들키지 않고 조심스럽게 일을 진행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서서히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내 손녀를 보며 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더구나."

미르코가 이미 마법적 저주가 아니라고 확인을 해주었지만, 혹시나 가스파르가 나중에라도 다른 마법사를 데려와 다시 검진할 가능성도 있다.

그럴 때를 대비해 들키지 않게 아주 조금씩 서서히 마법적으로 간섭했겠지. 자기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마법사는 감히 낌새조차 눈치챌 수 없게 말이다.

필요성과 개인적인 욕심이 일치했다.

이거다.

"어쩌면 내 아들도 그 녀석이...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그렇게 말하며 가스파르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확실히 미르코라는 마법사는 수십 년 동안 그를 모셨고, 가스파르의 아들 부부는 수년 전에 사고로 죽었다.

거기까지는 원작에서도 확실히 나오지 않아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아예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불쌍한 척하셔도 제가 어떻게 이 정보를 알았는지는 안 알려 드릴 겁니다."

안 통한다, 이 할아버지야.

나는 단호하게 대꾸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 너무한 태도긴 하지만, 절대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라서 그런 건 아니다.

나는 공감과 위로의 미덕을 아는 교양인이다.

그저.

"귀염성이라고는 없는 꼬마구먼."

상대가 저 영감님이라서 그런 것뿐이지.

피도 눈물도 없는 건 내가 아니라 가스파르다.

실제로 내가 단호하게 선을 긋자, 가스파르는 순식간에 태세를 바꿔 투덜거렸다.

조금 전까지 내 앞에 있던 비탄에 빠진 노약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직 어린 녀석이라서 감정에 좀 호소해 보았는데 씨알도 안 먹혀, 정말. 뭐 이런 녀석이 다 있는지."

"그래도 시도는 좋았습니다. 아, 그리고 연기력도."

분명히 슬픈 이야기는 맞다.

가스파르야 업보라지만 어린 손녀는 무고하지 않은가.

나도 저 할아버지 입에서 나온 것만 아니었어도 이렇게 칼같이 대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절대 내가 쓰레기인 게 아니야.

"징그러운 녀석."

내 객관적인 평가에 가스파르는 질색했다.

"어쨌거나, 이제라도 범인이 밝혀져서 다행이군요."

"그래, 다행은 다행이지."

그러나 입으로는 다행이라고 하면서도 가스파르의 얼굴은 아직 펴지지 않았다. 그리고 나 역시 그 이유를 뻔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제, 계산할 시간이구나."

역시 직업이 직업인지라 셈이 빠르시네.

아주 마음에 들어.

먹은 게 있으면 뱉는 것도 있으셔야지.

#019. 친구와 적 (2)

"솔직하게 말해서, 이번에 자네가 해준 일은 엄청나게 고마운 일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녀의 목숨이 달린 건이었으니."

분위기와 화제가 바뀌고.

가스파르는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별말씀을요."

"자네는 돈을 빌릴 수 있게만 해달라고 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그만한 돈을 그냥 줘버려도 좋을 정도지."

아무리 니카로스가 작은 영지라지만 그래도 군대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군자금을 대신 부담해줄 수 있다니.

역시 통이 크시네.

"그러니 다시 한번 묻겠네. 돈, 필요 없나?"

"...."

그 제안을 듣고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은 맞다.

약소한 영지는 언제나 자금이 부족하고, 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많은 걸 시도할 수 있으니까. 나도 당장 이것저것 추진하고픈 사업이 한 둘이 아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 돈을 그냥 꿀꺽할 수는 없지.'

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렇게 확신했다.

그 이유도 정말로 간단하다.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을 만큼.

"감사한 제안이긴 하지만 정중히 거절하겠습니다. 그 돈을 그대로 받아버리면, 아무래도 제가 가스파르 님께 남긴 마음의 빚이 퇴색되지 않습니까?"

그래.

당장 이득에 눈이 멀어 황금알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면 쓰나.

'예정보다 빠르게 각종 사업을 추진할 수 있다는 장점보다도, 그냥 단순하게 이 영감님 한 명이 줄 수 있는 이득이 더 크다는 거야.'

물론 빠른 도입의 장점이 작다는 건 아니다.

그저 이 영감님과 쌓을 인맥의 가치가 그 이상으로 훨씬 귀하고 가치 있을 뿐이다.

그게 전부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마음만 받겠습니다."

따라서 나는 그저 능글맞게 웃었고.

"진짜 징그러운 꼬마."

가스파르는 질색했다.

'질색할 정도는 아니지 않나.'

이건 조금 마음이 아픈걸.

나도 마음이 여린 사람인데.

아무튼, 그동안 누누이 말했지만, 이 영감님은 평범하게 돈만 빌려주는 대부업자가 아니다.

정확히 표현하면 대부업자 겸 정보상 겸 만능 중개업자에 더 가깝겠지.

'제국 전역에 펼쳐진 그의 거미줄은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만든다고 소문이 자자할 정도.'

그러니 상식적으로 그런 영감님 상대로 돈만 받고 퉁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어?

"...미리 말해 두지만, 무리한 부탁은 못 들어줘. 나는 무척이나 바쁜 몸이야. 그러니 호구 잡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게다."

아쉽게도 가스파르 본인도 그 사실을 아주 잘 자각하고 있는지 질색하던 표정을 바꿔 조금 정색했다.

하긴.

이 오만하신 구두쇠 할아버지 성격이 어디 가겠어.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영감님.

저도 정도를 아는 놈이니까.

"그리고 마음의 빚인가, 그거 자네가 자네 입으로 대놓고 말하면 내 고마움이 있다가도 달아나지 않겠나?"

가스파르는 조금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지만, 나는 이 점에 있어서만큼은 매우 당당했다.

"그래서 지금 달아나셨습니까?"

"이 뻔뻔한 녀석."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냥 하는 말은 아니다.

내가 알고 있는 가스파르의 성격을 생각하면 괜히 본심을 숨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뻔뻔한 게 낫거든.

거래 조건이 아예 대놓고 투명하게 드러날 정도로.

그리고.

"애초에 딱히 불공정한 거래도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누가 보면 내가 불쌍한 대머리 할아버지를 등쳐먹는 줄 알겠어.

저 의심 많은 할아버지는 아직 못 믿는 눈치였지만.

나는 원래 대단히 양심적인 사람이다.

"제가 말한 건 우정입니다, 우정. 그리고 당연히 우정은 갑을 관계가 없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고요."

"그 말은...?"

또다시 가스파르의 눈빛이 휙 바뀌었다.

누가 돈귀신 아니랄까 봐.

역시 자기 이득에는 아주 귀신 같다.

"가스파르 님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저도 물론 도와야죠.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일지 지금부터 확답할 수는 없지만, 이번 같은 일이 또 있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눈썹을 으쓱거렸다.

이번 같은 일.

즉, 가스파르도 알아차리지 못한 아주 귀중한 정보를 내가 먼저 슬쩍 건네주는 일.

이미 실적으로 내가 가진 정보의 가치를 증명했으니.

정보상인 가스파르로서는 매우 매우 구미가 당기는 조건일 수밖에 없지.

"이 녀석, 어린 것이 주둥이 하나는 잘 놀리는구나."

실제로 괴팍한 가스파르는 겉으로는 여전히 퉁명스러워 보였으나, 솔깃하다는 속내를 감추지는 못했다.

'그야 진짜로 합리적인 거래니까.'

상부상조.

얼마나 좋은 말이야.

따라서 나는 당당하면서도 조용히 대답을 기다렸고.

"...좋다. 네 조건을 받아들이지."

짧은 고민 끝에 가스파르 역시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그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두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대답으로 에우스페나에 방문한 모든 목표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

진짜 너무 고생했다.

"후후, 감사합니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글쎄. 그건 두고 봐야 알겠지...."

허허, 이 할아버지가 속고만 사셨나.

저는 항상 진심입니다.

"일단 네가 요청한 돈부터 네 영지로 보내 놓으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야."

좋아.

계약이 성립됐으니 일단은 군자금 문제부터.

에우스페나에서 진행한 다른 용건들도 물론 성공하면 장기적으로 아주 좋은 일지만, 그중에서도 대출은 당장 해결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최우선 사항이다.

당장 돈이 없으면 전쟁을 못 해요.

전쟁을 못 하면 우리 영지는 말라 죽어요.

아, 너무 무섭다.

"그건 그렇고 벌써 공작 성에서 한탕 한 모양이구나."

그렇게 상상 속 공포에 홀로 벌벌 떨고 있으니,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가스파르가 화제를 바꿨다.

그 소식을 벌써 들었다니.

역시 거물 정보상.

나는 웃음으로 긍정을 대신했다.

"쯧, 웃지 마라. 정들라."

"정들면 좋은 거 아닙니까?"

"좋기는 무슨."

까탈스러운 영감님.

손자뻘인 상대한테 이렇게 매정하게 굴다니.

"어떻게 구워삶은 건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페트로스와 관계를 맺은 건 잘한 일이다. 썩 멀쩡한 놈은 아니지만 그렇게 멍청한 놈도 아니니까."

평가가 제법 박하다.

불쌍한 페트로스.

하지만 생각해보면 전부 자업자득인걸.

쓰레기 같은 페트로스.

"뭐, 나까지 털어먹은 걸 보면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

"털어먹다뇨. 그냥 서로서로 돕는 거지요."

"웃기는 소리 그만하고. 일단은 당장 네가 벌일 전쟁부터 응원하마. 거기서 네가 이겨야 나도 내 돈을 제때 돌려받지."

감동이다.

이렇게 진심이 가득한 응원의 한 마디라니.

"돈 떼먹힐 일은 없을 겁니다. 투자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히 기다리시지요."

"혓바닥 놀리는 솜씨만큼 싸움도 잘해야 할 텐데."

가스파르는 눈을 가늘게 뜨며 혀를 찼지만, 나는 그저 웃었다.

"하하, 믿지 못하는 것도 사실 무리는 아니지요. 그러니 그냥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처음부터 자신이 없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거니까.

"아, 맞다. 그런 의미에서 이제 그냥 영감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뭐? 도대체 뭐가 그런 의미냐?"

"자꾸 가스파르 님, 가스파르 님 하면 너무 정이 없지 않습니까? 이제 저희는 자타공인 나이를 초월해 우정을 나누는, 절친한 친구 사이인데."

애초에 자기도 계속 나 보고 자꾸 애송이니 어린것이니 했으면서 뭘.

"...미친놈, 알아서 하여라."

가스파르는 체념했다는 듯, 한 손을 휘휘 저었다.

이렇게 기꺼이 허락해주시다니.

역시 개방적이셔.

"그렇다면 영감님, 일단 친구로서 뭐 하나만 먼저 부탁합시다."

"이 녀석이 벌써 이 늙은이를 부려 먹는구나."

너무 그렇게 빼지 마시고.

"사람 하나만 찾아 주십시오."

아주 중요한 일이니까 노력 좀 해주세요.

제가 잘 되면 영감님도 좋잖아요.

***

시하브 토후국의 궁전.

지금 그곳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했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초조.

"지난 원정이 처참히 실패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설마 또다시 전쟁을 준비하는 것인가? 완전히 미쳤군."

당혹.

"하! 아비와 형을 잃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건가?"

조소.

"어린것이 정말로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군요!"

분노.

"단순히 비웃고 끝낼 일이 아니다. 말했다시피 누가 봐도 미친 도박이야. 분명히 믿는 구석이 있겠지."

의심.

"뭐가 되었든, 그런 미친 짓을 하면서까지 전쟁을 원한다면... 그 목표는 오직 한 곳뿐일 겁니다."

걱정.

시하브 토후국의 가신들이 웅성거리며 각자의 의견을 교환했다.

온갖 감정들이 뒤섞여 만들어진 혼란 속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시하브 토후국의 주인이자 에미르, 말릭 이븐 바흐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래, 목표로 한다면 바로 우리겠지."

에미르 말릭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신들 앞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럴 수는 없었지만.

원래라면 이런 고민을 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니카로스 남작령의 지난 원정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간 지 아직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았고, 또다시 전면전을 벌이는 건 그야말로 미친 짓이니까.

'니카로스 남작령은 작은 영지에 불과하다. 더 이상의 여유는 없을 테지.'

조금이라도 더 삐끗한다면 영지는 완전히 파멸.

니카로스 남작령이 이걸 모를 리가 없다.

따라서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미치지 않았다면.

추가 원정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을 행위에 불과하다.

그런 걱정 따위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리석은.'

그래.

미치지 않았다면 말이야.

하지만 미칠 이유가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그것도 다름 아닌 복수라는 이름의, 끔찍하고 질척거리는 감정에 미쳐버릴 이유가.

니카로스 남작령의 전 영주들.

현 영주의 아버지와 형을 죽여버렸다.

시하브 토후국이.

고작 일 년도 안 되는 동안.

모조리.

시하브 토후국은 현 니카로스 남작에게 있어서 말 그대로 불구대천의 원수.

'전쟁을 일으킨다면 분명 목표는 우리다.'

따라서 말릭은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절대로 말릭이 원한 상황이 아니었다.

시작은 분명 그저 국경지대에서 언제나 있던 약탈과 소규모 분쟁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사소한 분쟁에 설마 적국의 영주가 직접 나설 줄이야.

'...그리고 선봉에서 싸우다가 그대로 눈먼 화살을 맞고 덜컥 죽어버릴 줄이야.'

당연히 그의 죽음에 연민 따위를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간악한 이교도요, 신앙의 적일 뿐이니까.

하지만 처음부터 죽일 작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제논이 죽고 그 뒤에 미쳐 날뛸 후계자를 상대하는 일 따위는 전혀 원하지 않았다.

니카로스 남작령이 눈엣가시 같은 존재인 것은 맞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일대의 시국이 너무나도 혼란스러우니까. 지금은 숨을 죽이며 힘을 비축할 때라고 에미르 말릭은 판단했으니까.

그래, 총력을 다해 다투는 전면전은 아직 이르다.

따라서 예상했던 대로 죽은 영주의 장남은 그의 자리를 물려받고 시하브 토후국을 향해 복수를 선포하자, 말릭은 외부의 힘을 끌어들였다.

인근의 대규모 도적 떼라는, 자신들과는 전혀 관련 없어 보이는 제3의 세력을.

이렇게 하면 니카로스의 주의를 분산시키며 그들을 저지할 수 있겠지. 도적을 고용하는 데 쓴 돈이 아깝기는 하지만, 전쟁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게 붉은바위 도적 떼는 니카로스의 원정군을 급습했고, 그 결과가 바로 제논의 장남, 마누엘 발란티스의 전사였다.

분명히 이건 반길 일이다.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어 적의 사기를 꺾고 전력에도 큰 손해를 입힌 셈이니, 시하브 토후국 입장에서 꺼릴 이유가 없다.

하지만.

'...설마 그 머저리 도적놈들이 과욕을 부려 니카로스의 영역까지 침범할 줄이야.'

그리고 그대로 궤멸해 토벌당해 버릴 줄이야.

아마 지금쯤 니카로스 남작령도 그 도적들과 시하브 토후국 사이의 거래에 대해 눈치챘을 것이다.

'망할.'

그 사실만 떠올리면 말릭은 정말로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분명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승냥이가 주제도 모르고 이빨을 드러낸다면, 응당 그 이빨을 전부 뽑아버리는 게 옳다.

그래서 그렇게 했을 뿐이다.

'그렇지만.'

모든 과정이 의도치 않게 꼬여.

그 마땅한 행위의 결과가 이 끝없는 복수의 향연일 뿐이라면 제아무리 신실한 말릭이라고 해도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말릭이 고뇌하던 중, 회의장에 있던 한 신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함께 공멸이라도 하자는 것일까요...?"

"...."

완전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최근 일어났던 끝없는 분쟁은 분명 니카로스 남작령을 한계까지 몰아붙였지만, 시하브 토후국이라고 절대로 멀쩡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승리했다고 한들 군대를 소집하고 교전을 한 것만으로도 국력은 소모된다. 심지어 시하브 토후국이 언제나 피 한 방울 흘리진 않고 이기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제논 발란티스가 전사한 그 전투에서 시하브 토후국도 적지 않은 손해를 입었다. 영주를 죽였다는 사실을 제쳐 두고 병력의 손실만 고려한다면, 사실 그 전투는 시하브 토후국의 패배에 더 가까울 정도였으니까.

"하!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가 고작 남작령 따위와 공멸한다니, 체급부터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건 옳은 말씀이지만 우리의 적이 니카로스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바로 그게 문제지요!"

다른 신하 하나가 공멸이라는 의견에 거세게 반대했지만, 곧 또 다른 반박이 들어왔다.

지금은 난세다.

제국에나, 월광교 소왕국들에나.

차별 없이.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이 그저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이합집산을 반복하는 야생의 시대.

따라서 연이은 니카로스 남작령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한 시하브 토후국은, 그저 모두에게 탐나는 사냥감으로 전락할 뿐이다.

당연히 그 '모두'에는 이웃한 다른 월광교 국가들도 포함된다.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게 곧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시대니까.

"그래, 공멸이라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말릭은 신하들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실 야생에서는 흔한 이야기 아닌가. 맹수가 사냥에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생긴 상처가 덧나 결국 그 맹수도 머지않아 숨이 끊어지고 만다는 이야기.

에미르 말릭은.

시하브 토후국은 오직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렇기에.

"판을 키워야겠다."

말릭은 시하브 토후국의 주인으로서 결심했다.

"판을 키운다고 하시면...?"

"무의미한 소모만을 반복할 수는 없지.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우리도 얻는 것이 있어야 해."

신하들의 조심스러운 의문에 말릭은 하나씩 자신의 구상을 설명했다.

"니카로스 남작령에 대항해 동맹을 형성한다."

일단 체급을 더 키울 필요가 있다.

"주군, 외람된 말씀이지만 고작 남작령 따위를 상대로 동맹을 구한다면 우리 시하브의 위신이 다소 손상될 것 같습니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 대외적으로는 니카로스 남작령이 아닌 바할리아 제국 그 자체... 최소한 에우스페나 공작령에 대항하는 게 목적이라고 표명해야겠지."

같은 신을 믿는다는 게 곧 같은 편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지만, 반대로 말해 반드시 적이라는 의미 또한 아니다.

신앙심에 불타는 녀석들, 또는 탐욕과 야망이 넘치는 녀석들도 분명히 있다. 그렇기에 거대한 제국을 적으로 규정한다면 동맹을 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동맹이 성립되면 놈들의 침략을 먼저 격퇴한 뒤, 그대로 곧장 동맹군과 함께 니카로스 남작령으로 진격하여 정복한다."

"제국의 땅을...!"

말릭의 구상에 신하들이 소리죽여 경악을 표했다.

단순한 약탈이 아닌 정복이다.

변방이라지만 엄연한 제국의 영토를 목표로 한.

"과연 그 상황에서도 제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아무리 바할리아 제국이 현재 사실상 반신불수의 환자 상태라지만, 분명히 일대의 최강국인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약탈당하든 말든 방치되고 있는 변방도 아예 영구적인 점령을 목표로 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언제든 중앙 차원의 보복이 들어올 수 있다.

여태껏 그런 위험성을 감수한 것은 그나마 일대에서 제법 세력을 떨치는 국가들뿐. 당연히 소국인 시하브 토후국은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렇지만.

"동맹을 더 키우면 된다. 처음에는 소극적인 놈들도 우리가 승리를 반복하고 니카로스를 점령한다면 하나둘씩 가세하겠지. 그렇게 되면 저 둔중한 제국 놈들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 될 터."

지금 시하브 토후국에는 명분이 있다.

제국의 침략을 받았다는 명분이.

시하브 토후국과 니카로스 남작령.

누가 먼저 잘못을 했냐.

누가 더 큰 잘못을 했냐.

이런 사소한 것은 지금 같은 시대에 큰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제국의 일부인 니카로스의, 황금십자교의 침략을 받았다는 그 사실 자체.

이는 얼마든지 성전(聖戰)이 될 수 있는 소재다.

"위험하다는 것은 안다. 도박과 다를 게 없지. 그러나 이대로 광증에 빠진 니카로스의 우행에 휘둘릴 수도 없는 일이다."

위기를 기회로.

진부한 이야기지만, 지금은 가장 필요한 이야기였다.

이번 사태를 키워 조금이라도 제국을 굴복시킨다면, 명분과 업적을 모두 채운 시하브 토후국은 분명 일대의 맹주가 될 수 있다.

말릭 이븐 바흐람은 확신했다.

"알겠습니다, 주군. 곧바로 내용을 정리해 주변국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서둘러야 한다. 니카로스의 애송이가 언제 선을 넘을지 몰라."

시하브의 주인이 결정했으니 이는 곧 시하브의 결정이었다. 신하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며 말릭은 홀로 다시 한번 차분히 계획을 검토했다.

그래, 이 방법뿐이다.

중앙이 움직인다면 최악.

에우스페나 공작령만이 움직인다면 그래도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물론 아무도 나서지 않는다면 더 바랄 것도 없이 최상의 결과다.

말릭도 야망이 있는 사내다.

질 생각은 없다.

니카로스 남작.

보잘것없는 영지와 그 땅의 애송이 영주.

복수심 따위에 미쳐버린 어린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는 이미 제국 전체를 바라보고 있었다.

#020. 친구와 적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