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묵시록(3)
혼돈의 랜턴 '소울 이터'는 현재 90%가량 채워져 있었다.
지난 SSS급 게이트 공략 덕분이다.
"제주도의 남은 마물을 소탕하면 다 채울 수 있을 것 같은데."
내 말에 청룡이 선뜻 먼저 나섰다.
"어렵지 않겠네요. 제가 가서 나머지 마물들을 소탕하고 오겠습니다."
"안 쉬어도 괜찮겠어?"
당연하지만 사도도 피로를 느낀다. 최상위 마인과 전투를 벌인 직후라 휴식이 필요할 텐데.
청룡은 고개를 저었다.
"전 회복이 빠른 편이거든요. 대신 선배들만큼 출력이 강하진 않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의 마물들을 처리하는 건, 동네 산책 정도의 느낌이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본인이 그렇다면야.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청룡이 베란다를 통해 빠져나갔다. 푸른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광경은 언제봐도 웅장하다.
"꼬맹이, 빵을 만들 준비는 됐나? 굉장히 중요하니까 정신 바짝 차려라."
"연습은 충분히 했어요. 맡겨만 주세요."
"실패하면 재료가 날아가니까, 한 번에 성공해야 되거든."
"재, 재료가 많이 비싼가요?"
"이것저것 따지면 한 번에 100억원 정도인가."
뒤쪽에선 루시퍼가 천이령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빵 한 번에 100억이면, 천이령 헌터에게도 싼 가격은 아닌 모양이다.
"성공해야 해. 꼭."
루시퍼는 되뇌이듯 말했다. 천이령은 살짝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 괜히 부담을 주고 그래.
재료는 다시 모으면 그만인데.
우리는 복도에 있는 조리실로 향했다. 고급 호텔의 주방처럼 최신식 설비가 마련된 장소였다.
철제로 이뤄진 베이킹 작업대 앞에 선 천이령.
"준비는 됐어요. 각오도 됐고요."
그녀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범상치 않은 기백이 느껴진다. 최상위 헌터는 빵 하나 만들 때조차 최선을 다하는 법인가.
나는 재료가 담긴 아공간 주머니를 천이령에게 건네었다.
가브리엘이 앞으로 나섰다.
"지금부터 네가 만들 건 천계의 하얀 빵이야."
가브리엘이 레시피에 대해 설명하는 사이, 나는 핵심 재료를 구매하기 위해 시스템 창을 열었다.
『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 x 1 』
- 거래 가격 : 5천 5백만 코인
- 게시자 : 천계(天界) 구품천사 류엘
『 5천 5백만 코인을 소모해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를 구매하시겠습니까? 』
괴조를 잡아 3천만 코인도 벌었고, 이번 최상위 마족을 처치하고 플래티넘 코인까지 25개 얻었다.
플래티넘 코인은 개당 1천만 코인이니, 대략 최근에 얻은 것만 해도 2억 8천만 코인이다.
코인은 넉넉하다.
'겸사겸사 다른 아이템도 구매할 게 있나 살펴봤는데······.'
사용처를 알 수 없는 재료들의 판매가 대부분이었다. 일반적인 아이템은 거래되지 않고 있다.
아직 거래소가 제대로 활성화되지 않은 걸지도.
나는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를 구매했다.
샤아아-.
새하얀 빛과 함께 영롱한 빛깔의 초록 잎사귀가 나타났다. 가브리엘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하얀빵의 핵심재료야."
"화, 확실히 느낌이 달라요."
잎사귀를 손에 쥔 천이령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럼 시작할게요."
베이스가 되는 밀가루에 청룡이 모아온 재료들이 차례대로 섞였다. 새벽녘의 이슬, 메마른 백색 가지, 달빛을 머금은 꽃 등등.
모든 재료가 조화롭게 섞여 들어간다.
천이령은 능숙하게 반죽을 치댔다. 그녀에게서 30년을 수련한 명장이 모습이 아른거릴 정도다.
'빵을 배운지 하루 만에 저렇게 됐다는 거잖아.'
내 표정을 확인한 루시퍼가 조용히 말했다.
"쓸만하죠? 저 녀석의 고유 능력은 올마스터입니다. 시스템에 의해 재능이 발현된 케이스인거죠. 성장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니 계속해서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런 재능을 가진 천이령 헌터를 빵이나 만들게 시키다니.
"괜히 미안한걸."
"아뇨, 서로서로 이득입니다. 어차피 재능이 아무리 커도 현세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릇이 아무리 크다한들 담을 내용이 없으면 무의미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 꼬맹이는 계속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 수단이 전투가 아닐 뿐이죠."
"그렇다면 다행인데."
천이령 헌터는 고도의 집중력으로 빵에 성력을 불어 넣기 시작했다. 화아악-! 새하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였다.
"음, 훌륭해."
그 모습에 가브리엘이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라면 하얀빵이 그대로 재현될 것이다.
4번째 사도를 소환하면 에너지의 소모도 무지막지하게 늘어날 테니 빵이 있고 없고가 전투의 양상을 뒤바꿀 거다.
그때였다.
화륵!
돌연 천이령의 오른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주변을 잡아먹을 듯 커지는 검은 불길.
"잠깐. 이건 아니야. 이건 하얀 빵이······."
가브리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러나 천이령은 이미 고도의 집중 상태.
터억.
루시퍼가 가브리엘의 팔목을 붙잡았다.
"지켜봐라. 대단한 게 나올테니."
가브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나를 바라봤다. 멈춰달라는 뜻인가?
하지만 천이령 헌터도 생각이 있는 모양이다. 일단은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콰아아아—!
천이령 헌터의 양손에서 뿜어져 나온 성력과 흑마력. 두 개의 기운이 조화롭게 합쳐지고 있었다.
"으아아······."
"오오······!"
허망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브리엘과, 만족스럽게 웃는 루시퍼.
새하얀 빛과 새까만 어둠이 조리실을 가득 채웠다.
이윽고 나타난 빵의 모습은.
『 [ Uknown ] 혼돈(混沌) : 조화의 하얀빵 』
◇ 포만감
- 한 입 먹는 것으로 포만감을 가득 채운다.
- 30분 동안 포만감이 절대 감소 되지 않음.
◇ 회복 및 강화
- 체력과 부상을 회복 시킨다.
- 능력치를 1%~20% 상승 시킨다.
- 디버프 및 저주 면역
새하얀 빵 위에 검은 기운이 영롱하게 흐른다.
천이령 헌터가 새롭게 창조해낸 아이템이어서 그런 걸까. 등급은 측정 불가인 언노운(Uknown)이다.
'······효과가 굉장한데.'
일단 척봐도 기존보다 훨씬 강화된 효과였다.
'한 입 먹으면 포만감이 가득 찬다. 여기까지는 똑같은데. 그 뒤가 다르다.'
30분 동안은 포만감이 감소되지 않는다.
이 부분이 중요했다.
'그 상태에선 능력을 아무리 써도 괜찮다는 말이잖아.'
극단적으로 사도 네 명이 동시에 궁극기를 써도 괜찮다는 뜻.
'거기에다가 회복 효과까지.'
자세한 회복 효과는 사용해봐야 알겠지만, 어지간한 포션 뺨치는 수준이지 않을까. 디버프 면역과 능력치 강화 효과는 보너스다.
"주인, 이건 아니야."
"왜? 효과는 좋은데."
"······마치 김치에 물 부어서 먹는 거랑 똑같은 거야."
예시가 미묘해서 이해가 잘 안 간다.
근데 느낌은 대충 알겠다.
"따끈할 때 드셔 보세요."
천이령 헌터는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내며 말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나는 천이령 헌터에게도 빵을 한조각 건넸다.
"감사합니다."
만든 건 천이령 헌터인데, 감사할 것까지야.
어디 나도 맛 좀 볼까.
빵을 입에 가져다 넣자, 고소하면서 달콤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약간 쌉싸름하면서도 담백한 그 맛이 중독적이다.
"······맛있네."
먹자마자 기운이 솟아난다. 피로가 싹 가시는 느낌.
『 능력치가 15% 상승합니다. 』
거기에 더해 능력치의 상승까지.
"지, 진짜 맛있어요."
빵을 한 입 먹은 천이령 헌터도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피로 회복 효과도 확실한 모양.
"훌륭해."
"엄청 잘됐네요. 다행이다······."
"고생했어."
"아뇨, 주인님. 별거 아닌데요. 뭘. 그냥 굴리니까 알아서 하던데요."
"······아니, 너 말고 천이령 헌터."
"가, 감사합니다."
우리들끼리 시끌벅적하자, 한발자국 물러서 있던 가브리엘이 슬쩍 다가왔다.
"으음······."
가브리엘은 미간을 좁힌 채 빵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순간 그녀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가브리엘의 감상평은 이러했다.
"분하지만 맛있어."
* * *
하늘이 점차 붉어지고 있다. 전 세계 사람들이 알 수 있는 이변이었다. 피처럼 물든 하늘을 보면 누구나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종말, 종말이 오고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종말이 오고 있어요."
"신을 믿고 죄를 뉘우치십시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길거리에 사이비 종교가 늘어났다.
튜토리얼이 종료되고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각종 설화와 전설이 지상에 강림했다.
기존의 안정적이었던 세계가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SNS상의 반응도 불안감으로 가득하긴 마찬가지였다.
- 이번에는 또 무슨 일이 일어나려고······.
- 하늘이 이상합니다.
- 대한민국은 부럽네, 무명이 있으니까 걱정 없잖아.
- 진짜 멸망하려나? 지금부터 병뚜껑이라도 모아야 하나.
ㄴ 그걸 왜 모아요.
ㄴ 세계가 멸망하면 화폐 대신 쓴다던데.
해외의 인터넷에선 걱정이 산더미였다. 도심이 괴조에게 파괴 당할 뻔했단 건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대한민국의 무명이 아니었다면 위험했다.
각 국가의 수뇌부도 명백히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반면 한국은 조금 달랐다.
- 응, 우리는 안전해 ㅋㅋㅋㅋㅋ
- 대한민국에는 무명이 있다고.
- ㄹㅇ 국가권력급 헌터임. 말이 안 돼.
- 무명이 사는 빌딩 근처로 이사하려고 생각중이다.
- 무슨 일 생겨도 무명이 해주겠지.
무명이라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헌터가 존재한다. 그 사실이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 협회.
유진철 협회장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붉은 하늘은 괴이쩍으나, 다른 국가에 비하면 좋은 상황이다. 그러나 안주하고 있을 순 없었다.
"헌터들이 다른 곳에 신경쓰지 않고,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우리의 할 일이지만······."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다보니 쉽지 않다.
헌터들의 동요도 상당하다.
성좌와의 계약을 통해 강해진 헌터들이 있는 반면, 선택받지 못해 격차가 벌어진 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었다.
"인류가 살아남으려면······. 개인의 무력만으론 어려운 상황이 올 거다."
"동의해요."
협회장의 말에 소파에 앉은 그의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마인의 혼혈로 인류의 편이었다.
"무명 헌터는 압도적으로 강하지만, 난 한 사람에게만 한국의 운명을 맡기는 건 무책임하다고 생각하거든."
유진철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협회 측에서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한 발자국만 삐끗해도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무책임하지는 않죠. 무명은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보세요. 제주도의 마물이 벌써 70% 이상 토벌 되었어요. 개인이 해냈다곤 믿기지 않는 수치죠."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명은 해냈다. 제주도를 마물로부터 되찾았다.
"레벨은 이미 최고수준에 도달했을텐데······. 심지어 무상으로 제주도의 마물들을 처치해주고 있는 거잖아요."
본래대로라면 억만금을 들여도 해결하지 못할 일이다. 무명은 그걸 아무런 대가 없이 해주고 있었다.
"그거야 맞지. 무명 헌터를 절대 놓쳐선 안되는 것도 맞아."
유진철 본부장은 헛웃음을 흘렸다.
"협회 차원에서 무명에게 줄 수 있는 편의는 모두 제공할 거다. 아니, 그 이상의 것도 해줄 수 있어야겠지."
당장은 어렵더라도 향후에는 확실하게 도울 수 있을 거다.
세계가 위험에 빠질수록 협회의 입지는 넓어질 수 밖에 없다.
마인들이 점거 하고 있었을 때는 또 다른 위협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더 옳은 방향으로 협회를 이끌어가기만 한다면 헌터들의 행보에 박차를 가해줄 수 있으리라.
그때였다.
"잠깐만요······."
비서의 시선이 창밖의 하늘로 향했다. 뒤를 돌아본 유진철 협회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붉게 물든 하늘 위로 거대한 무언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늘에 나타난 검의 형상. 그건 아득하게 큰 크기였다.
"아······."
그 웅장함에 저도 모르게 경외감을 느낄 정도.
스케일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류가 만들어낼 수 있는 구조물의 크기를 아득히 벗어났다.
동시에.
띠리링—! 띠리링—!
협회의 전화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시작 된 건가."
유진철이 수화기를 받아 들려던 그때.
누군가가 협회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들어 왔다. 남자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혀, 협회장님! 두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 * *
콰아아아—!
청룡이 만들어낸 홍수가 마물들을 일시에 쓸어넣었다. 마물들은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와 함께 바다에 가라앉았다.
[ 주인님, 확실히 체감이 됩니다. 전력을 다해도 지치지 않는 수준입니다. 최고네요. ]
새로운 빵의 효과는 뛰어났다.
힘을 써도 써도 줄지 않는 느낌이다.
청룡은 제주도의 마물들을 남김없이 처치했다. 그가 일으킨 천재지변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마물은 없었다.
"후, 이걸로 끝이네요."
청룡은 하늘로 날아올랐다. 제주도 전체를 정화하는데 성공했다. 깔끔해진 제주도를 보니 썩 만족스러웠다.
절반쯤은 청룡 혼자 잡은 셈이기도 했고.
[ 이제 복귀하겠습니다. ]
청룡이 복귀하는 사이.
서울, 무명의 빌딩.
『 '혼돈(混沌) : 소울 이터'가 영혼을 충분히 섭취했습니다. 』
『 세계에 균열을 생성합니다. 』
"나왔다."
주강혁은 균열 속에서 아이템을 얻어내고 있었다. 참고로 천이령 헌터는 돌려보냈다.
『 [ 신화+ ] 스킬 습득권 』
『 전용 무기 조각(淸) x 1 』
『 사도 강화석(신화) x 1 』
'오케이. 원하는 아이템이 나왔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후원을 끝마칩니다. 』
바닥에는 맹렬한 불꽃이 보낸 후원이 널려 있었다. 자기가 나올 걸 확신하는 듯한 후원이다.
특히 장비 조각이 널려 있었다.
"전용 무기는 아직 못 보내나 봅니다. 후원에도 제한이 있거든요. 모든 물건을 보낼 순 없거든요. 이전에 가브리엘이 모조품을 보낸 것도 그래서였고요."
루시퍼는 그리 설명했다.
그래도 장비 조각이 3개나 된다. 2개 정도는 금방 모을 수 있을테니 아주 좋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대기 중입니다. 』
티켓을 찢으려다 멈칫했다.
이래 놓고 스킬 습득권에서 사도 소환이 안나올 수도 있다. 아니면 다른 사도가 소환될 수도 있고.
'뭐, 상관없나.'
나는 스킬 습득권을 찢었다.
그렇게 나타난 스킬은······.
『 [ 신화+급 ] 적혈(赤血) : 사도소환 』
사도 소환이었다.
"적색이네요."
"높은 확률로 주작?"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한마디씩 했다.
굳이 시간 끌 것 없었다.
나는 곧바로 스킬을 사용했다.
"사도 소환."
콰아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에서 불벼락이 내리쳤다. 벼락이 떨어진 장소는 옥상이었다.
건물 전체가 가볍게 떨려온다.
"가보자."
"쓸만한 녀석이면 좋겠는데요."
"후배가 하나 더 늘어서 좋아."
사도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팅—!
내 앞으로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이 시기에 떠오를 내용은 하나밖에 없다. 드디어 올 게 온 거다.
『 특수 시련 : 묵시록(默示錄) 』
『 정복의 기사가 지상에 강림합니다. 』
『 두번째 시련이 해당 시련으로 대체 됩니다. 』
『 여섯 개의 대륙에 종말의 검이 형성됩니다. 』
고오오—!
거대한 검의 형상이 하늘에 맺히기 시작했다.
『 특수 미션을 완료하고 종말을 저지하십시오. 』
『 미션 실패시 해당 대륙이 파괴됩니다. 』
미션에 실패하면 검이 떨어져 대륙을 부순다. 그런 의미였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메시지다.
"······까다로운 상대인 건 틀림 없습니다."
"비겁하게 숨어서 싸우려고 하는 듯."
우리는 멈춰서서 하늘에 떠오른 검을 바라봤다.
"묵시록의 기사는 분류상 중위 존재라고 불립니다. 칠죄종보단 한 단계 상위의 존재죠."
루시퍼는 담담히 설명했다.
"아마 주인님의 능력도 어느 정도 간파했을 가능성이······."
그때, 위쪽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잠깐. 이 몸을 소환 해두고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화르륵-.
내 앞으로 가벼운 불길이 일더니 누군가가 내려앉았다.
그 외관은 머리를 뒤로 묶은 붉은 머리의 소녀. 비단으로 만든 옷을 몸에 걸치고 있다. 언뜻 천이령과 비슷한 나이처럼 보인다.
"주인이여. 걱정말게나. 묵시록의 기사를 막을 비책을 이 몸이 가져왔다네."
사신수(四神獸) 주작.
그녀는 가슴을 활짝 편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76화. 전장(1)
가논이 눈을 떴을 때, 그곳은 현세(現世)가 아니었다.
"끄으윽······."
붉은 모래 바람이 불어 오는 사막이었다. 그러나 달도 별도 없는 새까만 하늘이었다.
"여, 여기는······?"
최상위 마인 가논.
그는 진(眞) 종말의 열쇠를 이용해 종말의 기사를 불러오고자 했다. 분명 외딴 섬에서 소환 의식을 끝낸 기억이 있었다.
"크윽!"
가논이 머리를 부여 잡으려 했으나 팔이 없었다. 다리도 없었다.
두통 탓에 기억이 흐릿했다.
'그래, 마지막 순간에······. 마법진의 술식이 혼선을 일으키며 폭발했었다.'
까득.
빌어먹을 청룡 때문이었다. 놈이 술식에 무슨 짓을 한 게 틀림 없었다. 단순하지만 꽤나 치명적이었다.
소환에는 성공했지만,
통제권을 가져왔는지가 불분명했다.
츠즈즛······.
가논은 마기로 팔 다리를 형성했다. 그것을 의수 삼아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촤르륵, 철컥.
"큭, 이건 또 뭐냐."
웬 사슬이 가논의 심장으로부터 뻗어나와 있었다. 사슬은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이 따위 사슬······."
곧장 마기로 사슬을 잘라내고자했으나 사슬에는 생채기조차 남지 않았다. 이상할 정도의 단단함이었다.
아무런 마법적 장치도 되어 있지 않은 사슬이다. 자신이 부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콰아앙!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사슬은 그대로다. 가논의 미간이 구겨졌다.
'······사슬이 단단한 게 아니다. 내가 계약에 얽매여 있는 거다.'
그제서야 가논은 고개를 들었다.
끝없이 펼쳐진 붉은 모래 사막. 흐릿한 형상들이 바닥에서 차례차례 솟아나고 있었다.
그건 영혼이었다.
무수한 영혼들이 땅에서 떠올라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광경이었으나, 가논의 얼굴은 한층 구겨질 뿐이었다.
현세가 아니다.
마계도 아니다.
그렇다면······.
파스스.
한줄기 바람이 일더니 붉은 모래가 일어난다. 모래는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탄탄한 근육을 가진 붉은 말이 한 마리 나타나고, 그 위로 한 명의 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갑옷 위에 적색의 로브를 두른 거한. 로브의 안쪽으로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대검을 등에 얹은 채 가논을 내려다보았다.
"무, 묵시록의 기사여······."
가논은 떨리는 의수로 진 종말의 열쇠를 들어 올렸다. 소환이 제대로 성립했다면 통제할 수 있어야 했다.
가논은 최상위 마족이다. 축적해 온 마기는 마왕급에 해당하니, 세계 하나를 지배할 수준이다.
그러나.
[ ······. ]
묵시록의 기사가 입을 열자, 가논의 손에서 종말의 열쇠가 툭하고 떨어졌다.
말만으로 대지가 울리고 공기가 떨려 온다. 수많은 영혼들이 몸부림치며 올라간다.
가논은 영혼이 신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몸이 쥐어짜이는 듯했다.
"커허억-!"
거친 숨을 토해낸 가논이 충혈된 눈으로 묵시록의 기사를 올려다보았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여기는 고유 영역이다.
묵시록의 기사가 만들어낸 그의 세계.
쇠사슬이 끊어지지 않는 것은, 묵시록의 기사가 그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버둥은 무의미했다. 가논이 마기로 만들었던 팔과 다리도 흩어졌다.
[ 보호······. ]
묵시록의 기사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그 말은 불분명했다. 전신을 뒤흔드는 격통 아래 가까스로 몇 마디를 주워들었다.
"보호······? 보호하고 있단 말이냐? 나를?"
의도는 명확했다.
시스템의 대리자로부터,
무명(無命)으로부터.
묵시록의 기사는 가논을 보호하고자 했다.
가논의 눈이 찡그려졌다.
"하아······. 필요 없다. 이딴 보호는······."
[ 필요하다. ]
그 말 한마디에 가논이 입에서 검붉은 피를 쏟았다. 묵시록의 기사는 가논의 쇠사슬을 붙잡았다.
시스템은 이번에도 가논을 응징하고자 할 것이다.
이번에는 팔 다리가 아니라 목숨을 앗아가리라.
그리되면 소환의 매개가 끊어진다.
묵시록의 기사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 보아라, 멸망에는 다른 말이 필요치 않다. 무명(無命)을 마주할 일없이 종말은 도래할 것이니. ]
붉은 말의 기수, '전쟁'은 쇠사슬과 함께 말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말은 투레질과 함께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저항없이 끌려가는 가논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묵시록의 기사조차 무명을 직접 마주하지 않으려 하는건가?'
인간.
고작해야 인간를,
묵시록의 기사조차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그러나 자세히 묻지는 못했다.
가논은 묵시록의 기사가 두려웠으므로.
* * *
"귀여워."
가브리엘이 주작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이거 놓아라, 나를 어린애 취급하지 말거라!"
주작은 마구 발버둥치면서 가브리엘에게서 벗어났다. 신화+급의 사도라 그런가, 비교적 간단하게 빠져나왔다.
"하지만 내가 언니야."
"······."
"성좌로서의 격도 높은데."
"음······."
주작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가브리엘에게 다가갔다.
"천계의 성좌들과 사이 좋게 지낼 수 있다면 이 정도야 괜찮겠지. 토끼는 서열이 높은 사람을 쓰다듬어 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 생각하면 뭐······."
주작을 유심히 지켜보던 루시퍼가 심문하듯 물었다.
"그래서 쓰다듬어지는 거 말고 특기는 있나?"
"기본적으로 청룡과 유사하다네. 불을 전문적으로 다룰 수 있지."
사도 한 명이 추가 되었으니 운용의 폭이 넓어졌다.
신화+급이라는 것도 잊으면 안된다.
'등급이 하나 오를 때마다 사도의 강함도 차원이 달라지니까.'
전투 능력은 나중에 차차보도록 하고.
지금은 그보다 중요한 문제부터다.
"그래서 묵시록의 4기사를 막을 비책이란 건 뭐야?"
"잠깐 기다리시게나. 정보의 제한 때문에······. 잠깐이면 되네."
주작의 말대로 조금 기다리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당신의 지역은 '아시아(Asia)'입니다. 』
『 첫번째 특수 미션 : 전장 』
『 전장에 진입하여 포인트를 획득하십시오. 』
『 가장 적은 포인트를 획득한 대륙은 멸망합니다. 』
간단하면서도 소름끼치는 메시지였다.
주작은 팔짱을 낀 채 설명을 시작했다.
"이에 붉은 말이 나오더니, 그 위에 탄 자가 이 땅에서 평화를 없애며 서로 죽이게 하여 큰 칼을 받았더라."
"성서의 구절인가?"
"맞네. 붉은 기사를 뜻하는 구절이지."
주작은 손 끝으로 불꽃을 만들었다. 불꽃은 말을 탄 기사의 형태가 되었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그래도 자비로웠네. 눈 앞의 적만 없애면 모두가 살아갈 수 있었으니까."
게이트는 공략하면 사라진다.
월드 보스도, 죽음의 물결도 마찬가지다.
그 어떤 이벤트도 직접적으로 인류끼리의 다툼을 불러일으키진 않았다.
"하지만 붉은 기사는 다르다네. 미션부터가 분쟁을 초래하기 적절하지 않은가."
포인트 최하위권에 속하게 된 대륙은 가차 없이 멸망한다. 거대한 칼날이 그대로 낙하하여 대륙을 쪼갤 것이다.
- 세상이 멸망해도 주인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루시퍼의 말은 그런 뜻이었나.
내가 있는 한 대한민국은 멸망하지 않을 거다.
그러나 다른 나라, 다른 대륙은 가차없이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질 것이다. 여기에 구원의 길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허나, 좌절할 필요는 없다네. 이 몸이 성좌일 때 최대한 조사해서 내려왔으니. 응?"
그때, 붉게 물든 하늘 위로 청룡이 도착했다. 청룡은 가볍게 테라스에 착지했다.
"주작, 여기서 다시보니 반갑네요."
"아, 그래······. 뭐랄까. 반갑네."
주작의 반응이 왠지 떨떠름하다. 아니 시선을 잘 못 맞춘다고 해야 하나. 일부러 회피하는 듯한 느낌.
"왜 그래? 둘이 친한 거 아니었어?"
"그러게요?"
"시, 신경쓰지 말게나."
주작은 황급히 말을 돌리고선 나를 바라봤다.
"하여튼! 묵시록의 기사를 막기 위해선 전장으로 향해야 하네."
특수 게이트 전장(戰場).
여기에서 제일 낮은 포인트를 얻은 대륙은 끝장이란다.
우선 가볼 수밖에 없다.
견적은 그때 내봐도 늦지 않는다.
'······.'
이대로 두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니.
* * *
세계 전체가 동요하고 있었다. 일반 시민 뿐만 아닌 헌터들과 각국의 정상들까지.
"포인트를 못 모으면 이대로 끝장이라는 거야?"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서 다른 대륙을 죽이란 거잖아."
"마물이 아니라, 우리끼리 경쟁하라고?"
"헌터들이 전장에 진입하는 걸 금지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장으로 향하는 게이트는 헌터 개인이 직접 열 수 있습니다."
전장으로 향하는 걸 막을 순 없다.
헌터들을 감시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국가 차원에서도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찾아내야만 했다.
"제재를 통해서 헌터들이 진입하지 못하게 해야······."
"상호 협정을 맺는 수밖에 없습니다."
"해당 국가의 헌터들을 어떻게든······."
시스템의 거대한 횡포 앞에 인류는 무력했다.
따지고보면 처음부터 그러했다. 인류는 한 번도 시스템의 우위에 선 적이 없었다.
그들이 만들어주는 게이트를 공략하며,
그곳에서 나오는 부산물을 이용했을 뿐.
결국 나오게 될 결론은 하나 뿐이었다.
"우선 전장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장의 점수는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을테니까.
수많은 헌터들이 전장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발빠르게 움직인 것은 중국의 1위 길드 '중화(中華)'.
『 동쪽 전장 : 초목 지대 』
"아시아권은 안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무명이 있으니까요."
"대륙 하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최소한 우리는 살아야하지 않겠습니까."
『 전장에 처음 진입하셨습니다. 』
『 전장에선 목숨을 잃지 않습니다. 』
"목숨을 잃지 않는다고?"
중국의 헌터들이 미간을 좁혔다.
『 또한 습득한 포인트로 혜택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
- 경험치 증가
- 능력치 증가
- 레벨 제한 해제
- 마물 소환
- 아이템 소환
이어지는 메시지에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이거 대박인데요?"
"살아남기만 하면 제대로 이득을 볼 수 있단 거니까요."
"잠깐, 그런데······."
헌터들 중 하나가 시스템 창을 가리켰다.
『 포인트 습득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마물 사냥
- 각성자 처치
『 각성자 처치시 해당 각성자가 소유하고 있던 포인트 전부를 획득합니다. 』
"이거 완전히 싸우라고 판을 깔아준거나 마찬가지구만."
목숨을 잃지 않는다.
그러한 조건이 헌터들의 가책을 덜어주고 있었다. 평소라면 절대로 행하지 않았을 살인도 행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은 마지막에 이르러 사라진다.
문제는 그때가 되면 최하위권 대륙에 속한 헌터들은 이성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는 것.
그들은 멸망 당하지 않기 위해 발악하고,
다른 대륙의 헌터들은 그들을 막기 위해 살인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인류의 전력만 줄어드는 셈이다.
그러나 당장 중국의 헌터들에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봐봐, 다른 대륙도 점수가 오르고 있잖아."
"결국 늦어지면 우리만 손해보는 거야."
중국이 헌터들은 사냥을 시작했다. 누군가가 시작하면 쫓기듯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런 구조였다.
마물들의 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중심부로 갈수록 더 강한 마물이 있는 것 같은데."
"빨리 안쪽으로 들어가서 사냥하는 수밖에."
중국 헌터들이 숲에 숨어든 오크 부락을 정리할 때 즈음이였다.
"응?"
"왜 그래?"
"저게 뭐지?"
헌터 하나가 숲의 안쪽을 가리켰다.
하늘에서 불줄기가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다. 별똥별처럼 지면에 추락한 불줄기는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앙—!
홍염이 밝은 빛을 터트리며,
숲 전체에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주변의 나무와 땅을 새까맣게 그을리는 강력한 폭발이었다.
"크윽, 뭐야?!"
"저런 규모의 폭발이 갑자기 왜?"
"무슨······."
중국의 헌터들의 입이 벌려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 아시아(Asia)의 점수가 상승합니다. 』
『 비정상적인 속도로 점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
아시아의 점수가 미친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인물은 정해져 있었다.
무명(無命).
그와 그의 사도들 뿐.
콰아앙—!
콰아아아—!
같은 시각 서쪽, 북쪽, 남쪽 에리어에서도 이와 같은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가브리엘, 루시퍼, 청룡이 전력을 다해 마물을 사냥하고 있었다.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과감한 결단에 만족합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선택에 깊은 우려를 표합니다. 』
무명은 쏟아지는 성좌들이 메시지를 무감하게 바라봤다. 이내 미친듯이 올라가는 포인트로 시선을 옮겼다.
'주작의 말대로라면······. 충분히 멸망을 막을 수 있다.'
이렇게 얻은 포인트로는 혜택을 구매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무명이 노리고자 하는 항목은 명확했다.
[ 마물 소환 ]
- 사용한 포인트에 따라 마물을 소환합니다.
운이 좋다면 묵시록의 기사를 이곳에 끌고 올 수도 있으리라.
77화. 전장(2)
눈발이 휘몰아치는 북극.
치직, 치지직—!
짙은 노이즈와 함께 금발의 소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대리자 알파.
눈 가리개를 한 금발의 소녀였다. 천칭을 손에 든 그녀는 사뿐히 내려 앉았다.
거기에는 방한구를 걸친 사최헌이 있었다. 꽤 오랜 시간을 기다렸는지 전신에 새하얀 서리가 내려 앉아 있었다.
"대리자 알파."
사최헌이 입을 열자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알파는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불러낸 건지. 본래 대리자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현세에 소환된다.
『 대리자 알파가 호출에 의문을 품습니다. 』
"방법이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조율이 필요할 뿐이다."
담담히 말하는 사최헌의 눈빛은 심각했다.
"묵시록의 4기사가 현세에 강림했다. 그것도 마인에 의해 부활 되었다. 너도 알고 있을텐데?"
『 일부 부적절한 행위가 관측 되었으나, 현재 조율 대상을 찾을 수 없습니다. 』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조율 대상을 찾을 수 없다?'
묵시록의 4기사의 짓일 확률이 컸다. 소환의 주체인 마인을 어딘가에 숨겨놨을 거다.
하지만 사최헌이 노리는 건 처벌이 아니었다.
이미 묵시록의 기사가 강림한 마당에 최상위 마인 하나를 죽인다고 이번 미션이 끝나는 건 아니니까.
'최소한 대륙 하나가 파괴된다.'
대륙 하나가 파괴되고도 종말의 검은 5개가 남는다. 전 대륙이 파괴되진 않더라도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건 불 보듯 뻔하다.
사최헌은 이를 악물었다.
'회귀는 마지막 수단이다.'
무명(無命)이 존재하는 유일한 회차.
이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 먹을 순 없었다.
『 대리자 알파가 당신의 용건을 묻습니다. 』
마인의 조율이 문제가 아니었다.
서둘러 특수한 아이템들을 모으고, 시스템 상의 사소한 균열을 일으켜 대리자를 불러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금 이대로라면 인류는 어처구니 없게 멸망한다. 이제 막 1페이즈가 시작된 현세는 급속도로 붕괴될 거다."
시스템의 조율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건 성좌들을 위한 것이다.
현세(現世)라는 게임판 안에서 그들이 게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불안정한 요소를 없애고, 규칙에서 벗어난 자들을 처벌한다.
인류가 빠르게 멸망한다면 시스템에게도 좋을 것이 없다.
따라서 사최헌은 대리자를 설득하고자 했다.
"전장의 보상을 대폭 높여야 한다. 인류 성장의 발판이 될 수 있도록."
『 대리자가 해당 제안의 타당성을 묻습니다. 』
"실제로 다수의 성좌들이 불만을 쏟아내고 있지 않나? 그리고 무엇보다······."
사최헌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지금의 양상은 문명계(文明界)와 비슷하다. 해당 차원만큼 엉망인 최후를 맞이한 곳도 없었을텐데. 그때의 실수를 반복하려는 건 아니겠지?"
문명계.
한때 시스템이 도래했던 또다른 세계였다. 마찬가지로 마인들이 판을 쳤고, 온갖 멸망이 도래하더니 최단 시간만에 소멸되었다.
다수의 성좌들과 지배자들이 격렬하게 분노했고, 결국 시스템 전체가 마비되는 블랙 아웃 현상으로 이어졌다.
『 소수의 성좌가 '사최헌'의 지식에 의문을 가집니다. 』
대리자 또한 고개를 기울였다.
지금 시점에선 손에 넣을 수 없는 지식이었다. 예언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러나 사최헌은 그들의 의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할거지? 이대로 두고 볼 건가?"
중요한 건 어떻게 알았냐가 아니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이냐다.
문명계와 똑같은 전철을 밟아선 안된다는 사실을 재차 떠올려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 회귀에 딱 한 번.
대리자 알파를 설득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대개······.
『 대리자 알파가 당신의 의견에 수긍합니다. 』
『 전장의 보상 시스템을 대폭 상향합니다. 』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
* * *
사최헌이 만들어낸 효과는 곧장 나타났다.
『 전장에 참여한 플레이어는 포인트를 통해 혜택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
『 선택 가능한 혜택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
"스승님, 혜택이 상당히 좋아졌는데요?"
"어느 부분이 말이냐?"
"전체적으로 말도 안되게 상향 됐어요. 직접 보세요."
중국의 헌터, 하오란과 그의 스승은 눈 앞에 보이는 마물들을 쳐부수며 전진했다.
"이 놈아, 그게 스승한테 할 말이냐?"
"아, 스승님의 노안을 깜빡했네요. 그런데 시스템 창은 시력이랑 관계 없지 않나요?"
콰앙-! 쾅!
여유로운 대화였지만 그들은 쉴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숲을 빠르게 나아가며 마물을 제거하는 몸놀림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파악!
나뭇가지를 발판 삼아 뛰어오른 하오란이 리자드맨의 머리를 강타했다. 푸확! 놈의 머리가 그대로 터져나갔다.
하오란의 신형이 곧바로 사라졌다.
"키에엑?!"
"크에에!"
퍼엉! 퍼버벅!
숲 속에 숨어 있던 마물들은 고개를 두리번 거리다 최후를 맞이했다. 놈들의 수준으론 하오란을 따라잡을 수조차 없었다.
스승과 하오란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획득한 포인트는 경험치 배율에 사용하겠습니다."
하오란은 빠른 속도로 달려나가면서도 능숙하게 시스템 창을 조작했다.
『 혜택 경험치 배율 상승을 선택하셨습니다. 』
『 경험치 배율이 4.3배로 증가됩니다. 』
"오, 효율이 말도 안 되게 좋아요. 왜 갑자기 배율을 상향해 준거지?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되겠네요."
"수준에 맞는 사냥터까지는 조금 걸리겠구나."
"전장이 엄청나게 넓긴 하네요."
전장의 중심부로 갈수록 더 강한 마물들이 출현한다. 마치 단풍이 드는 것처럼 붉은 기운이 점점 짙어지고 있다.
"대륙 하나가 사라지는 건······. 큰일이지만 능력을 성장 시키기엔 이만한 장소도 없네요."
하오란은 잠시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올라 뒤쪽을 바라봤다. 수많은 헌터들이 전장에 들어서 사냥을 하고 있다.
여기엔 등급을 가리지 않는다.
F급부터 S급까지.
싸울 수 있는 자라면 모두가 전장에 참여하고 있다. 자신의 대륙을 지키기 위해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죽지 않고 마물을 사냥할 수 있단 것도 매력적이고."
전장에 들어선 헌터는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게 된다.
하오란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대륙을 인질로 잡지만 않았어도 엄청난 호재일텐데."
초창기인 지금에야 사냥을 하는 분위기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전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스승님, 저희가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겠죠?"
"······인간이 손바닥으로 강물의 흐름을 막을 수 있겠느냐."
막을 수 없다면 그 흐름에 올라타야만 했다. 그래야만 도태되지 않을테니까.
"그렇겠죠. 그럼 계속해서 가시죠."
하오란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때였다.
콰아아앙—!
전장의 중심부에서 거대한 폭발이 터져나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오란과 스승이 이동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발생한 폭발이었다.
저곳에 있는 것은 아마도 무명(無命).
공기가 저릿할 정도의 폭발이다.
"스승님."
하오란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스승에게 말했다.
"손바닥이 아니라 포크레인이 오면······. 막을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 대륙간 점수 현황판』
1위 : 아시아 [ 94.4% ]
2위 : 북아메리카 [ 3.2% ]
3위 : 유럽 [ 3.1% ]
지금 이 순간에도 아시아의 점유율은 끝을 모르고 오르고 있다. 무명이라면 무언가 다른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따악-!
스승의 지팡이가 하오란의 머리를 내리쳤다. 마력이 담긴 공격에 하오란이 머리를 쥐어쌌다.
"으, 왜 때리십니까?"
우리야 같은 대륙이니 그러려니 하지만······. 다른 대륙의 헌터들이 봤을 때 무명의 독주가 어떻게 느껴지겠나?"
"치사하다고 느끼겠죠."
하오란의 스승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무명, 그 자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상황에선 그를 시기하는 자가 늘어날 수밖에 없겠지."
"신경이나 쓸까요?"
"······이 놈이 자꾸 말대답이야."
하오란은 스승의 지팡이가 떨어지기 전에 냉큼 달아났다.
* * *
덥썩.
나는 조화의 빵을 베어 물었다. 고소한 맛이 입 안에 퍼진다.
'맛있어.'
그와 동시에 포만감이 차올랐다.
'게다가 효과는 말도 안되고.'
먹는 순간 전신에 활력이 도는 기분이다.
그뿐이 아니다.
콰아앙—!
사도들은 최대 출력의 기술을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있었다. 주작이 불러낸 거대한 붉은 구슬이 지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 올랐다. 주변을 새까맣게 재로 만들어버리는 강대한 일격이었다.
『 포인트를 습득합니다. +423pt 』
『 포인트를 습득합니다. +646pt 』
···
『 포인트를 습득합니다. +575pt 』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계속해서 쌓여 간다.
"주인이여 어떤가? 이 일대의 마물들은 얼추 처리한 것 같네."
주작이 텐트 근처로 내려왔다.
나는 엄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훌륭해."
신화+급의 화력은 차원이 달랐다. 무기가 없어도 전용 무기를 든 루시퍼만큼의 출력을 가뿐하게 뽑아내고 있다.
『 적(赤) 전용무기 조각 x 3 』
심지어 자기 무기 조각까지 미리 후원하고 왔으니, 조만간 전용 무기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닐세. 이 정도는 이 몸이 가진 능력의 일부에 불과하니. 그보다 포인트는 많이 모였는가?"
나는 포인트를 확인했다.
『 보유 전장 포인트 : 5,294,352 pt 』
약 오백만 포인트다. 전장이 개시 된지 얼마 안됐음을 감안하면 엄청난 수치다.
전 방위로 보내 놨던 사도들도 다시 불러 들였다. 내부로 갈수록 강한 마물이 서식하고 있으니 중앙에서 사냥하는게 효율도 오를 거다.
'랜턴에 영혼도 차오르고 있고.'
전장 자체가 이득이 되는 상황이다.
"포인트로 다른 혜택을 좀 구매할까."
"나쁘지 않다고 보네. 어차피 하루 이틀에 끝날 일이 아니니."
그러고보니 혜택이 강화가 되었다는 메시지도 좀 전에 떠올랐었다.
일시적으로 능력치를 올려주거나.
아이템 획득 확률을 올려주거나.
『 전장 경험치 배율을 강화합니다. → 10.0 배 』
『 전장 아이템 획득 배율을 강화 합니다. → 10.0 배 』
『 포인트 획득 배율을 강화합니다. → 3.0배 』
이만큼 포인트를 써도 남는다.
『 막대한 포인트를 소모하셨습니다. 』
『 특수 혜택 상점이 오픈됩니다. 』
『 특수 혜택 상점 』
- 배율 조정
- 전역 축복
- 출현 빈도 조정
- 지형 변경
'어디보자.'
『 배율 조정 』
- 사용한 포인트에 따라 일부 전장의 경험치 배율을 조정합니다.
『 지정 축복 』
- 사용한 포인트에 따라 전장 일부에 축복을 부여합니다.
『 출현 빈도 조정 』
- 사용한 포인트에 따라 전장 일부의 마물 출현 빈도를 증가 시킵니다.
내가 전장의 설정을 건드릴 수 있다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건가.'
대강 느낌이 온다. 전장의 영토를 차지한 다음에 자신들의 땅을 강화하라는 의미겠지. 당장 쓸 일은 없다.
어차피 내 목표는 전장에서 승리하는 게 아니다.
[ 마물 소환(업그레이드 됨) ]
- 사용한 포인트에 따라 마물을 소환합니다.
나는 본래 사용하려고 했던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대량의 포인트를 사용하면 전장에 균열을 초래할 수 있다는 거지?"
"맞네. 전장 자체는 그리 견고한 세계가 아니니 말일세. 성좌였을 때 전장을 미리 살펴볼 수 있어서 다행이네."
전장이 견딜 수 있는 마물의 강력함은 제한 되어 있다. 그걸 뛰어넘는 적을 소환하게 되면······.
어쩌면 묵시록의 4기사 본인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문제는 포인트가 얼마나 필요하냐는 건데."
"이 몸의 분석에 따르면 13일차 즈음에는 필요한 포인트가 쌓일 걸세."
주작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전장은 보름간 열린다. 13일이면 아슬아슬하다. 실패한다면 뒤가 없기도 하고.
"우선 이 기능을 알아봐야 하니까, 마물 한 마리만 소환해 볼까."
소환했는데 갑자기 이상한데 튀어나오는 것도 곤란하니까. 그 방식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 마물 소환을 사용합니다. 』
나는 500pt를 사용해 마물을 한 마리 불러냈다. 새빨간 빛무리가 한 곳에 모여들더니 마물로 변화했다.
크르르······.
섀도우 비스트였다.
주작은 손 끝에서 작은 불꽃 하나를 만들어내더니, 섀도우 비스트에게 던졌다.
섀도우 비스트가 내 쪽으로 달려드는 것과 동시였다.
화르륵—!
강렬한 화염이 섀도우 비스트를 휘감았다. 놈은 발버둥치다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엄청난 위력이었다.
'미국 랭킹 1위도 못 잡는 녀석인데······.'
하긴 거대한 불기둥을 쉼 없이 만들어내는 수준인데. 이제와서 사도의 힘에 놀라기도 그렇다.
마물 소환에 대해선 대강 파악했다.
내가 지정한 장소에 마물이 소환된다.
'13일인가.'
전장에 균열을 초래하기 위해 필요한 포인트를 모으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일단 모아봐야겠지.'
그리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시스템 창을 넘기는 그때였다.
『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532pt 』
"잠깐."
"왜 그런가, 주인이여."
500pt로 소환한 마물을 잡았는데 532pt를 받았다. 32pt가 이득이다.
시험삼아 마물을 하나 더 잡았더니 비슷한 포인트가 들어왔다.
'업그레이드 때문인가?'
나는 포인트를 투자해서 포인트 획득 배율을 강화시켰다. 상당히 많은 포인트가 들었다.
『 포인트 획득 배율을 강화합니다. → 5.0배 』
그렇게 하고나서 마물을 다시 소환했다.
"다시 잡아볼래?"
"잡는거야 어렵지 않다만······."
화르륵.
주작의 불길에 500pt짜리 마물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그렇게 떠오른 메시지는 다음과 같았다.
『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824pt 』
획득하는 포인트가 말도 안되게 증가했다. 주작도 내 의도를 깨닫고선 놀란 눈이 되었다.
"포인트가 복사가 되는데······?"
몇 가지 우연이 겹쳐서 일어난 기적이었다.
78화. 전장(3)
전장의 중심부.
적색지대(赤色地帶).
"포인트를 쉽게 벌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복사 버그······!"
"제대로 적용만 된다면, 단시간에 포인트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겠네요."
불러들인 사도들이 모두 도착했다. 나는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했다.
"마물 소환으로 마물을 잡으면 약 1.5배의 포인트를 돌려받게 돼. 다른 일 할 필요 없이 마물만 잡으면 되는 거지."
"주인의 말이 맞다네."
옆에 있던 주작이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헌터들이 발견하기 전에 빨리 꿀 빨아야 해."
가브리엘은 왜인지 묘하게 초조해 보였다. 게임의 버그랑 비슷하다고 생각해서인가?
"아뇨, 그 부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턱을 매만지던 청룡이 말했다.
"일반 헌터들이 달성하기엔 조건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주인님의 포인트 배율은 5배니까요."
5배를 달성하기까지 필요한 포인트의 양은 약 3백만 포인트.
"대충 계산해도 일반 헌터들은 꿈도 못 꾸는 양입니다."
"적색지대 안쪽은 300 포인트씩 퍼주는데도?"
내 물음에 청룡이 잠깐 속으로 계산하더니 입을 열었다.
"예. 그놈들의 레벨은 200이 넘습니다. 일반 헌터들은 접근조차 어렵죠. 그런 놈들을 1만 마리가량 사냥해야 하니까요."
생각해보면 500포인트로 소환했던 마물이 섀도우 비스트다. 미국 1위인 데릭조차 잡지 못한 마수.
그런 마물들이 우글우글한 것이 전장의 중심부다.
"현시점에선 우리밖에 사용할 수 없다는 거네."
"맞습니다."
"막대한 포인트로 마물을 소환한 뒤, 처리가 가능한 것도 결국 우리 밖에는 없을걸세."
주작은 단언하듯 말했다.
실제로 그렇다.
포인트를 복사하려면 소환한 마물을 잡아야 성립된다. 일반 헌터들은 엄두를 내기 힘들다.
심지어 낮은 수준의 마물을 다량으로 처치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루에 소환 가능한 마물의 수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50회 정도로 넉넉한 편이지만 포인트를 충분히 벌긴 어렵다.
즉, 강한 마물을 소환해서 처치해야 빠르게 포인트를 불릴 수 있다는 거다.
나는 마물을 소환하려다가 팔을 멈췄다.
"마지막으로 걸리는 게 있는데 말이야."
"어떤 부분인가요?"
"······대리자가 나타나는 거 아니야?"
"맞아, 운영자가 패치할 수도 있어."
대리자.
시스템의 균형을 맞추는 존재.
아브락사스의 괴조 5마리를 잡았을 때도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나타나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아뇨, 이건 오히려 저희 쪽에서 할 말이 있는 부분입니다."
뒤쪽에 있던 루시퍼가 씩 웃으며 말했다.
"괴조의 올바른 공략 방법은 4개의 게이트를 먼저 없애는 것이었죠. 그런 규칙에서 벗어났기에 대리자가 나타났던 겁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시퍼 입가의 비릿한 미소가 짙어졌다.
"저희는 정당하게 시스템의 의도에 따라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게 만약 문제라면, 시스템 자체가 결함이 있다는 건데······. 그건 오히려 저희가 보상 받아야 할 문제죠."
하여간 나타나기만 해보라는 듯 단단히 벼르고 있는 표정이었다.
"더욱이 주인님을 주시하는 성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 다수의 성좌가 루시퍼의 말에 동의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대리자를 성가셔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에게 전재산을 걸었다며 응원합니다. 』
루시퍼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괜찮겠지.
다만, 성좌들이 언제까지 내 편을 들어 줄지는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이다.
전재산을 베팅한 검은 별의 주인과 달리 다른 성좌들은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달리할 수 있을테니까.
나는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면 이 일대부터 정리해줄 수 있어? 마물을 소환하려면 주변이 널찍한 게 좋을 테니까."
"물론일세, 화구(火球) 한 방이면 깔끔하게 끝낼 수 있다네."
"잠ㄲ—."
말릴 새도 없었다.
콰아아앙—!
주변의 대기마저 태울 듯한 강렬한 열기가 눈앞에서 솟구쳤다.
* * *
"우왓, 뭐냐. 저거."
"불기둥······?"
그 시각, 전장의 외곽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헌터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면이 옅게 흔들렸다. 멀리서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부신 홍염이었다.
헌터들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전장의 중심부에는 대체 무슨 괴물이 있길래······."
"무명이 그곳에서 사냥한다고 하던데."
"아무리 무명도 저런 공격을 맞으면 죽을 것 같은데."
"앞에 온다!"
대화를 나누던 헌터들은 이내 눈 앞의 마물에게 집중했다. 이들은 프랑스 헌터였다.
헌터들은 눈 앞의 마물을 향해 각자의 공격을 날렸다. 화살, 마법이 쇄도하고 방패를 든 헌터가 아울베어의 시선을 끌었다.
푸욱—!
미끄러지듯 앞으로 달려나간 헌터의 검이 아울베어의 심장을 꿰뚫었다.
『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6 』
"겨우 6점······."
"아까에 비하면 훨씬 낫지 뭐."
숲 속에서 눈을 번뜩이는 수십 마리의 아울베어들. 본래라면 들어오지도 않았을 깊은 숲 속이다.
"그래도 목숨을 잃을 일은 없으니, 최대한 사냥하다가 돌아가자고."
"여기까지 왔으면 손해 볼 것도 없으니까. 최소한 경험치는 벌어서 돌아가야지."
죽음에 대한 면역.
이 특수한 상황이 헌터들은 더욱 용감하게 만들었다. 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헌터들이 평소보다 깊은 장소로 향했다.
더 많은 경험치와 포인트를 얻기 위해서.
"어느 세월에 포인트를 모으냐."
"능력치 증가부터 찍으면 한결 수월해."
"전장이 겨우 15일 밖에 안 열리는데 그런 걸 뭐하러 찍어."
헌터들은 포인트를 활용해서 스스로를 성장시키면서 점차 내부로 향했다.
전장의 좀 더 깊숙한 장소.
영국의 환생자 아이작도 마찬가지였다.
"마력의 농도가 조금 부족하구만. 더 들어가세나."
아이작은 태연했지만 그의 동료들은 살짝 불안해하고 있었다.
근처의 마물들이 이미 S급이 훌쩍 넘는 강함이었다.
"이봐, 아이작.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무슨 문제인가. 어차피 죽을 일이 없는데. 사전검증도 끝났다면, 두려워할 건 없지. 무엇보다······."
그때였다.
쐐애액—!
하늘을 활공하던 거대한 독수리 한 마리가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보랏빛으로 오염된 놈은 온 몸이 녹아내려 흉측한 생김새였다.
아이작은 침착하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우우웅—! 파바바박!
수 십 개의 매직 미사일이 동시에 쏘아졌다. 푸욱-! 푸욱-! 달려든 독수리 마수의 몸에 수십 개의 구멍이 생겨났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매직 미사일은 푸른 궤적을 그리며 숲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력이 느껴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다.
매직 미사일은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의 미간을 꿰뚫으며 화려한 선을 만들어냈다.
"오우······."
동료들은 굳어진 채 아무말도 못했다. 아이작은 인자하게 웃으며 팀원들을 다독였다.
"내가 있지 않은가. 걱정말고 나아가세나."
그제서야 동료들도 긴장을 살짝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그들은 잡담을 나누며 중심부로 향했다.
"아이작이 영국인으로 환생해서 다행이야."
"나도 자네들과 만날 수 있어 행운이라고 생각하네."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 하려는 게 아니었는데. 하여간 최소한 유럽이 꼴등할 일은 없을 거 아니야."
"크흠."
"지금 상황으로보면······. 꼴찌가 유력한 건 오세아니아인가."
오세아니아 대륙은 여섯 개의 대륙 중 가장 인구가 적다.
"국제적으로도 오세아니아를 대피 시키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던데."
"자기네 대륙 아니라고 막말하는 거지."
"무명은 완전히 독주 중이고······."
동료들의 잡담을 가만히 듣던 아이작이 미간을 좁혔다. 아이작의 기감에 누군가의 마력이 느껴졌다.
"무명을 규탄하는 사람도 있다던데."
"상황이 이러니 결국 누구 탓을 할 수밖에."
"잠깐."
아이작이 일행을 멈춰세웠다. 아이작은 땅을 향해 손을 짚었다. 쿠구구······. 마법으로 형성된 녹색의 줄기가 땅을 뚫고 어딘가로 향했다.
"커헉, 뭐야?!"
"웬 줄기가······!"
잠시 뒤, 숲 안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작이 만들어낸 줄기에 사람들이 사로 잡혔다.
쿠구구구······.
줄기는 다시 땅굴을 통해 사람들을 아이작 앞으로 데려왔다. 약 다섯 명 정도 되는 인원 모두가 복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설마 우리를 노리고?"
일행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제 막 전장이 열린 참인데, 벌써부터 포인트를 노리고 살인하려는 사람들이 생겼을 줄이야.
하긴, 불가능한 건 아니었다.
일반 게이트에서도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미치광이들은 늘 있어왔으니까.
"오해다! 너희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다. 크윽, 이게 왜 안 풀리는거야. 겨우 줄기 따위가······."
하지만 줄기에 꽁꽁 묶인 복면의 사내는 억울하단 목소리였다. 아이작은 깊은 눈으로 사내를 바라봤다.
그들의 복장은 누가봐도 살수의 것이다.
"우리가 아니라면 누굴 죽이려던 겐가?"
아이작의 냉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과 동시에 줄기에서 가시가 솟기 시작했다.
살수의 옷이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말 할 리가 없었다. 전장에선 죽어도 죽지 않으니까.
"죽이지 않고 고통을 주는 방법은 많다네."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러자 줄기의 끝부분이 살수의 몸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끄, 끄으윽! 마, 말하겠다."
"두목!"
"괜찮다. 어차피 상관없는 일일테니."
그제서야 살수의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거센 숨을 토해내며 자신들의 목표를 말했다.
"우리는 무명을 죽이고······. 포인트를 가져올 거다."
무명을 죽인다.
그 말에 아이작의 얼굴이 멍해졌다.
"지금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전장의 하늘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것은 그때였다.
불온한 기운이 먹구름 이뤄 전장의 중심부를 가린다.
아이작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살수들조차도 중심부를 바라봤다.
쿠구구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진동이 대지를 울렸다. 스산한 바람에 나뭇잎이 흩날리고, 끈적한 기운에 숨이 턱 막혀 온다.
높이 솟은 중심부의 나무들 사이로, 거대한 괴수 한 마리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아아아아—!
소름끼치는 놈의 울음소리가 전장 전체로 퍼져나갔다. 저토록 거대한 몸집은 처음이었다. 현세에도 나타난 적 없는 개체였다.
이곳이 전장이어서 살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 아이작 저건 대체······?"
그 충격적인 광경에 모두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괴수의 앞에서 거대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났다.
콰아아앙! 콰앙! 콰아앙!
하늘에서 낙하하는 홍염의 구체와, 흑색의 광선, 백색의 섬광 그리고 청색의 번개까지.
괴수의 몸이 점차 기울어간다. 괴수가 불쌍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폭격이 퍼부어지고 있었다.
저런 일이 가능한 건 한 명밖에 없다.
무명(無命).
그가 데리고 있던 사도들.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그때 그대로였다.
아이작의 고개가 다시 살수들을 향해 돌아갔다.
그는 재차 물었다.
"······무명을 죽이겠다고?"
순수하게 이해가 안되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 * *
첫 번째로 소환된 괴수 '아르겐티노'.
소환 전에 중심부의 마물을 제거해서 포인트를 벌어들였다. 그렇게 모인 300만 포인트를 사용해서 괴수를 소환.
약 500만 포인트를 획득했다.
"이야, 덩치만 컸지 별거 없네요. 다음 마수도 바로 사냥하시죠."
"······입에서 레이저라도 쏠 줄 알았는데."
레이저는 무슨. 너희들이 마물이 공격할 틈도 없이 쥐어팼잖아. 괴수는 찍소리도 못하고 죽었다.
덕분에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었다.
'압도적으로 강하네.'
새삼 사도들이 얼마나 괴물 같은 능력치를 가지고 있는지 떠올리게 된다.
"주인이여, 나를 칭찬해라. 머리를 쓰다듬으면 좋다."
주작은 뿌듯하단 표정으로 내 앞에 다가왔다.
"어린 애 취급하지 말라고 했던 거 아니었나······?"
"당연히 주인은 예외다. 빨리 칭찬해다오."
"그, 그래. 잘했네."
쓱쓱 대충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기뻐하는 듯 모양새다.
······역시 사도들 중에는 정상이 없구나.
청룡이 정상인이라 잠시 잊고 있었네.
나는 조화의 빵을 뜯어 먹었다. 천이령 헌터가 만들어 준 훌륭한 빵이다. 한 입으로 피로와 허기가 싹 가신다.
"주인님, 혹시 빵만 먹기 질리시면 제가 샌드위치로 만들어보겠습니다. 마침 일대에 훌륭한 채소들이 많거든요."
루시퍼는 어느 틈엔가 채소까지 채집해왔다. 수상쩍은 생김새의 채소들이었다.
"고기는 마물의 것을 쓰면 되겠죠."
"아니, 그건 좀······."
그래도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는 것 자체는 괜찮은 아이디어다.
이제 빵 수급은 비교적 쉽게 되니까. 요리로 만들어도 효과가 유지된다면 상관 없다. 아무리 맛있다지만 빵만 먹으면 역시 질릴테고.
나는 가볍게 어깨를 풀고선 중심부의 공터를 바라봤다.
"그러면 바로 두 번째 마물을 잡아볼까."
계산해본 결과.
8번 정도만 잡으면 1억 포인트가 모인다.
이게 복리의 힘이라던가.
"저는 준비 됐습니다."
"전력으로 갈게."
"소환하시게나."
전용 무기가 있는 사도들은 무기를 들어 올렸고, 나머지 사도들은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소환하는 마물들은 죄다 보스급이었다. 허나 사도들과 비견될 정도는 아니었다.
두 번째 보스도 쉽사리 격파.
세 번째 보스도 간단하게 격파 되었다.
파직, 파지직—!
이변이 일어난 것은 네 번째 마물을 소환했을 때였다.
79화. 종말의 기록(1)
종말의 징조가 하늘에 떠올랐다.
각 대륙 위에 생겨난 6개의 종말의 검.
전 세계가 혼란에 빠졌다. 갑작스레 다가온 멸망에 대비가 된 나라가 있을 리가 만무했다.
각성하지 못한 일반인들은, 그저 자신의 대륙이 살아남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든 운명이 결정되는 전장에 대한 관심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온갖 언론이 전장에 대한 소식을 전했다.
- 아시아 1순위 2순위 북아메리카······.
- 무명의 독주, 누가 막을 것인가?
- 세계 최고의 길드 전장 참전 선언.
내부의 상황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건 아니었으나, 모든 각성자가 드나들 수 있는 전장의 특성상 정보는 빠르게 전달되었다.
대륙 하나의 붕괴가 결정된 거나 마찬가지인 가운데, 인터넷 또한 뜨겁게 달아올랐다.
- 아시아가 압도적인 1위? 든든하다. 같은 아시아인으로써 마음이 놓인다.
- 무명 덕분에 최소한 대한민국은 안 망할 듯 ㅋㅋㅋ
- 다른 나라는 무명한테 사례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닌지?
아시아 대륙의 사람들 대부분이 환호했다. 자신의 대륙이 살아남는데 싫어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다른 대륙 사람들은 반응이 갈렸다.
- 무명 독주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 강한 사람이 포인트를 모으겠다는데, 무슨 상관. 그럼 무명보고 가만히 앉아 있기라도 하란 말?
- 결국에는 생존이 걸린 문제임. 누가 뭐라고 하겠음.
아시아를 제외한 그 어디든 최하위권이 될 수 있었다. 보름 내에 자신의 대륙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의 협회에도 전화가 빗발쳤다.
각국의 정상들과 정·재계 인사들이 무명에게 줄을 대보겠다고 안달을 내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면 비방 혹은 항의의 목적이던가.
"이거 끝이 없군."
한참 동안 전화를 받던 협회장 유진철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괜찮겠어요? 아예 잠적하는 것도 방법이에요. 한동안 사라졌다가 사태가 진정되면 짠하고 나타나는 거죠."
"그걸 말이라고······."
비서의 말에 유진철 협회장이 미간을 좁혔다.
"제일 난감한 건 이거야. 우리도 무명 헌터의 의도를 모른다는 거지."
"뻔하지 않나요? 한국을 지키려는 거겠죠."
"아니, 그런 것 치고는 너무 과해."
유진철은 단호하게 말했다.
전장의 상황은 협회의 헌터들을 통해 유진철에게도 전해지고 있었다. 무명은 압도적인 차이를 벌리며 포인트를 모으고 있다.
다른 헌터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쓸데없이 이목을 끌 뿐더러, 대륙 멸망의 원흉이라는 오명을 쓸 수도 있는 일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해도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
'차라리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유진철은 그리 추측했다. 옆에 서서 태블릿을 확인하던 비서는 안경을 고쳐 쓰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사최헌 헌터가 전장으로 진입했다네요. 무명의 의도를 알아 올 수도 있겠죠."
"딱히 상관없어."
"예?"
"무슨 의도이든 상관없다고."
유진철은 딱 잘라 말했다. 다시 수화기가 요란스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어떤 선택이든 무명에게 부담이 가지 않게 최선을 다한다."
페이즈가 시작되며 시스템상의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갔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런 시련에 대응할 수 있는 건 누구인가.
결국에는 무명뿐이다. 한국의 협회장으로서 최후까지 그를 저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유진철은 그리 다짐하며 수화기를 들어 올렸다.
* * *
치직, 치지직—!
돌연 노이즈가 하늘 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네번째 보스를 소환한 직후였다.
『 묵시록의 기사가 '무명(無命)'을 최대의 적으로 규정합니다. 』
『 전쟁의 전령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
콰아아앙!
주작의 화염이 보스를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1700만 가량의 포인트가 한 번에 들어 왔다.
그러나 사도들의 관심은 그쪽에 있지 않았다.
『 전령에 의해 살해당한 플레이어는 부활할 수 없습니다. 』
루시퍼의 표정이 구겨졌다.
전쟁의 전령이 나타났다.
이들이 죽인 플레이어는 살아나지 않는다.
"의도가 너무 빤히 보이는데요.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보겠다는 수작으로밖에 안 느껴지네요."
『 다수의 성좌들이 크게 분노합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시스템의 불공정함을 규탄합니다. 』
허나, 시스템은 응답하지 않는다.
이전과 달리 조율의 문제가 아니었다.
묵시록의 기사는 시스템의 일부다. 본래부터 멸망을 위해 태어난 존재나 다름없다.
목적에 맞게 행동하는 묵시록의 기사를 제재할 명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욱이······.
『 소수의 성좌들이 상황을 흥미롭게 지켜봅니다. 』
『 극소수의 성좌들이 학살을 기대합니다. 』
일부 성좌들은 무명의 편일 순 있으나 인류의 편은 아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이 세계를 관망하기 위해 군림하는 자들이니.
루시퍼는 혀를 차고선 날개를 펼쳤다.
"놈들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공교롭게도 딱 4명입니다. 동, 서, 남, 북. 에리어의 외곽입니다. 저희 사도들이 갈라지면 주인님을 공격해 보겠다는 심산일 수도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날아오를 기세였다.
사람들을 살리려면 1분 1초가 급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건데, 소환된 전령들은 강하다.
인간들이 죽는 건 알 바 아니지만,
주인은 이런 걸 두고 볼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반면 주강혁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를 방해할 정도면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거잖아. 오히려 확신했어."
이어서 사도들에게 지시했다.
"네 방위로 한 명씩 출발하고, 나는 청룡과 함께 이동할게. 포인트 복사는 전령을 처치하고 난 뒤 해도 늦지 않으니까."
루시퍼와 가브리엘은 시야 공유가 가능하고, 주작은 신화+급에 해당하니 주강혁은 청룡과 함께 움직이길 택했다. 기습의 위험도 줄어드니 일석이조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자."
주강혁은 청룡의 위에 올라탔다.
각 사도들이 빠르게 흩어졌다. 허공을 가르며 나아가면서도 루시퍼는 언짢은 듯 표정을 구겼다.
'상당히 강한 놈들이다.'
묵시록의 기사가 보낸 놈들이니 이해는 간다.
다만 인간들이 얼마나 버틸지가 문제다.
기운으로만 보건데 대치 상황이 이어지고는 있는 것 같은데. 길어봤자 10초일까. 정확히는 알 수 없다.
기운만 보고서 승부의 행방을 예측하는 건 어렵다. 승패까지는 알아봐도 초단위로 세세하게 파악할 순 없다.
'뭐가 되었든 버티고만 있어라.'
그 뒤는 알아서 해줄테니까.
* * *
북쪽 에리어(Area).
유럽 대륙의 헌터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전령은 노이즈와 함께 불현듯 출현했다.
"하급 헌터들은 당장 도망쳐!"
"아이작이 막고 있는 지금이 기회야!"
북쪽의 전령을 막아내는데 유효한 역할을 한 건 아이작 덕분이었다.
일곱 개의 별 중 하나인 환생자 아이작.
콰아아아—!
그의 등 뒤로는 8개의 거대한 마법진이 형성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서 쏟아지는 다채로운 마법이 전령을 가까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무명을 죽이겠단 미친 놈들을 정리하고 왔더니, 이번에는 무슨 괴물이란 말인가.'
아이작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거야 원, 내가 막는 게 고작이라니.'
적은 검은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이었다. 대충 빚어진 것 같은 형상인데, 내포한 에너지는 차원이 달랐다. 대마법사였던 자신이 힘겨울 정도였다.
'허윽······.'
공중에서 충돌한 마력이 빠르게 소진 되어 간다. 지금까지 비축해 온 마력으로도 감당이 안되는 수준이었다.
'가급적 성좌의 힘은 쓰지 않고 싶었건만.'
한 번 계약을 맺으면 이후가 귀찮게 된다. 비단 현세에만 있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위대한 마법사 멀린, 그대의 힘을 빌려주게."
영국 아서왕 전설의 마법사 멀린. 마법사 중에서 그의 이름 정도면 상당히 쓸만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방대한 마력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몇 초를 벌었을 뿐이지만.
그 몇 초로 수백 명의 헌터가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아이작이 마른침을 삼키는 그 순간.
콰아아앙—!
흑색의 마도 광선이 전령을 강타했다. 전령은 큰 폭발과 함께 튕겨져나갔다.
"그때 주인님하고 있었던 마법사인가? 칭찬해주마. 인간치고는 꽤 하네."
때마침 도착한 루시퍼였다.
"······상위 존재에게 칭찬을 받다니, 이거 오래 살고 볼 일이구먼."
아이작이 쓰게 웃었다.
성좌의 힘을 빌리고서야 가까스로 막아낸 전령을 저 사도는 단번에 날려 버렸다. 하지만 허탈해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루시퍼가 앞으로 나섰다.
"다시 온다. 쓸만한 것 같으니 기회를 주마. 날 보조해라."
"알겠네. 그리하지."
뭉개졌던 검은 진흙이 다시 인간의 형체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비슷한 시각. 남쪽 에리어.
전장에 들어 온 사최헌은 가까스로 전령을 막아냈다.
'벌써부터 전령이 나타난 건가.'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혼비백산이 되어 대피하는 헌터들을 뒤로 보내고서 사최헌은 검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
사최헌이 베어낸 공간이 찢어지듯 열렸다. 전령이 쏘아낸 진흙이 무기가 되어 쏟아졌으나, 죄다 찢어진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성좌 '잊혀진 시대의 영웅'이 당신의 성장에 만족합니다. 』
사최헌의 성좌는 공간검의 창시자다. 덕분에 공간검에 한정해 가공할 위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전령을 베어내기만 하면 이길 수 있다.'
허공을 박차며 달려든 사최헌이 전령을 베어내려 했다. 그러나 갑옷을 걸친 전령은 자신의 검으로 대응했다.
쩌어엉—!
검과 검이 부딪힌 허공 위로 균열이 새겨졌다. 몇 번이고 검이 부딪혔지만 결과는 같았다.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직 부족한 건가.'
팔 하나 쯤은 내줄 각오로 상대하지 않으면······.
사최헌이 그리 각오하는 순간.
뻐어억!
전속력으로 날아 온 가브리엘의 양발이 갑옷 전령을 강타했다. 쩌엉! 땅에 처박힌 전령의 주변으로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가브리엘 드롭킥."
가브리엘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하······."
긴장감 없는 한마디에 사최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어쨌든 이 상황에선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었다. 사도가 반갑게 느껴질 줄이야. 몇 번이고 회귀하고 볼 일이었다.
사최헌은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포인트를 그렇게 많이 모아서 뭘 할 셈이지?"
"묵시록의 기사를 잡을 거야."
"그건······."
사최헌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할 수도 있겠군."
워낙에 말도 안되는 일이라 시도할 엄두를 못 냈던 거지. 무명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나 우선은 눈앞의 전령을 처리하는 게 먼저였다.
"내가 베어낸 공간에 전령을 던져 넣으면 우리의 승리다."
"내가 창으로 꿰뚫을 테니까, 공간을 베어내. 그러면 승리 확정이야."
"······."
생각처럼 협력이 쉬울 것 같진 않았다.
인류가 단숨에 무너질 거라 여겼던 사도들의 생각과 달리, 인류 측에도 영웅이라 부를 인간들이 존재했다.
일곱 개의 별.
환생자 아이작.
회귀자 사최헌.
이른 시기에 예언자의 별이 손꼽은 인류의 희망. 그들은 인간 중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소유한 존재였다.
마찬가지로 주작이 향한 서쪽 에리어에도 일곱 개의 별 중 한 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콰앙, 콰아앙!
흉터 가득한 상반신을 드러낸 야차(夜叉).
귀환자 호영이 전령을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 패고 있었다.
뚜둑, 뚜두둑.
호영은 전령이 두르고 있던 방어구를 뜯어내고, 그걸로도 모자라 전령을 갈갈이 찢어내고 있었다.
주작이 도착했을 땐 이미 상황이 종료된 직후였다. 주작은 순수하게 감탄했다.
"자네, 익숙한 얼굴이군. 귀환자라곤 해도 전령을 이길 정도라니. 이건 예상외의 전력······."
그때, 중얼거리는 주작을 향해 호영의 고개가 돌아갔다. 맹수 같은 눈이 주작에게 고정 되었다.
호영은 길게 말하지 않았다.
"덤벼라."
"······나는 무명 헌터의 사도일세. 딱히 적이 아닌······. 자, 잠깐! 그대 따위는 한 방에 죽는다니까? 이럴 시간이 없네!"
마지막 동쪽 에리어.
푸화악—!
주강혁의 검이 전령을 꿰뚫었다. 전령은 폭발하듯 흩어졌다. 죽음의 기운이 서린 무명검은 즉살과 같은 효과를 내기에.
『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34,023,309pt 』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들어 온다. 영혼은 없었다. 검은 진흙은 순수한 에너지 덩어리였기에.
청룡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하십니다. 솔직히 깜짝 놀랐습니다."
"네가 움직임을 봉쇄해줘서 그런데 뭘. 그리고······."
주강혁은 뒤를 돌아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중국의 헌터 하오란이 있었다. 그는 볼을 긁적이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아이고, 스승님. 그래도 살았잖아요. 화내지 마세요. 무명 헌터를 직접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이야. 네? 도망치라고요? 아뇨. 아무리 그래도 은인인데······."
전령을 잠시나마 붙들어준 건 하오란이었다.
그런데 하오란은 누가봐도 혼자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강혁은 청룡에게 속으로 물었다.
'······이중인격?'
워낙에 헌터들 중에 특이한 사람이 많으니. 환생자도 있고 귀환자도 있는데 이중인격이야 없겠는가.
[ 글쎄요, 제가 한 번 물어보겠습니다. ]
청룡은 싱긋 웃으며 하오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서슴없이 물었다.
"혹시 정신적인 문제가 있으신가요?"
아니, 미친 놈이세요?
주강혁이 청룡에게 기겁하는 순간.
"아, 놀라셨죠. 종종 오해 받곤 합니다. 유령이라고 해야 하나······. 제게는 스승님이 보이거든요. 만져지기도 하고요."
하오란은 뒤통수를 긁적이며 답했다.
"아윽, 말하지 말라고요? 이미 늦었는데요."
뭔가에 맞은 것처럼 움찔거리기까지 한다.
그제서야 청룡은 이해했다는 듯 손뼉을 쳤다.
[ 한 사람의 몸에 두 개의 영혼. 범차원적 규모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죠. ]
그런 거였나.
어쨌든 하오란 덕분에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주변 일대는 풀 한 포기 없는 흙바닥이 되어 있었다.
싸움이 상당히 격렬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강혁은 하오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사도들을 불렀다.
전령 처치에 아예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전령 하나당 3천만 포인트.'
이제 1억 이상의 포인트가 모였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다.'
묵시록의 기사가 이런 식으로 방해를 해온다면 이쪽도 방법이 있다. 주강혁은 가지고 있던 티켓 한 장을 찢었다.
『 궁극기의 쿨타임이 초기화 됩니다. 』
『 궁극기 극야도래(極夜到來)를 활성화 합니다. 』
『 특수 능력 '오버 드라이브'를 발동합니다. 』
『 포인트를 소모하며 마물을 소환합니다. 』
보스의 소환.
동시에 처치를 반복한다.
죽음의 기운을 두른 무명검을 사용하기엔 위험한 작업이었다. 소환 장소는 지정 가능해도 마물의 형태는 일정하지 않으니까.
푸확! 푸화악!
오버 드라이브가 발휘되는 시간은 10초. 하지만 그거면 충분하다.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차오르기 시작한다.
동시에 방대한 양의 영혼이 랜턴 위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쩌적—! 쩌저적—!
허공에 거대한 크기의 균열이 생겨났다.
묵시록의 기사 '정복'에게로 향하는 단 하나의 길.
그리고 여섯 대륙 위에 떠오른 종말의 검을 사라지게 할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80화. 종말의 기록(2)
"무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