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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0 - 100

100화. 현자(1)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마족의 힘은 강대했고 인류가 가진 힘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무고한 생명이 전장에서 갈려 나가고, 제국의 정점이라 불렸던 자들이 하나 둘 쓰러져감에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제국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지는 속도를 늦추는 게 최선이다. 버티다 보면 언젠가 희망이 생길 거라는 믿음 아래에서 황제는 전선을 유지해 왔다.

이 상황을 역전하려면 무언가 다른 게 필요했다. 

마족을 몰아내기 위한 빼어난 기술,

혹은 불세출의 천재.

최소한 둘 중 하나는 필요했다.

그런데.

"이바르크 지역에서 마족을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했답니다."

"알벤 공작의 특무대가······!"

"특무대가 해냈습니다!"

갑작스러운 희소식이 들려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

"검은 땅 중심부, 마기의 핵이 완전히 파괴된 것을 정찰병들이 확인했습니다."

특무대가 마기의 핵을 파괴했다.

마기의 핵은 마족의 에너지원이자, 그들이 통상 마법계에서 끝없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원천이었다.

마기의 핵이 위치한 장소에는 고위계층의 마인들이 대거 포진해 있을뿐더러, 각종 병기와 마물들로 채워져 철통 같은 방어를 자랑했다.

절대로 뚫을 수 없는 요새라고 생각했건만.

'이, 이렇게 간단하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보고가 들려올 때마다 황제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윤타르 지역 탈환에 성공했습니다!"

"말콘 지역에 있는 마족 토벌에 성공했답니다!"

"기, 기상이변으로 모크사의 마족들이 쓸려나갔다고 합니다!"

"거대한 화염의 구가 모든 것을 태웠다는 보고가······!"

오랜 기간, 교착 상태에 빠졌던 전장에 승리가 찾아오고 있었다. 

단순한 승리가 아니다. 마족을 소멸시키고 검은 땅을 정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황제는 보고를 들으면서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게 정말이란 말인가? 꿈이 아니라?' 

무슨 수를 써서도 없앨 수 없던 마족이 이리도 간단히?

그것도 이렇게 단시간 내에.

"정말로 제대로 된 사실인가?"

마족의 교란 작전이 아닌지 의심될 정도. 그러나 각각의 전장에서 마법으로 찍힌 사진을 보내왔다.

검게 물들어 있던 땅이 완전히 초토화 되어 있었다.

인마대전이 종식되어 간다.

몇 년에 걸쳐 벌어졌던 전쟁이 단 이틀 만에 정리되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군······."

황제는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심장이 계속해서 두근 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신하들에게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이윽고, 황궁에 알벤 공작의 특무대가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들이 알현실로 오고 있었다.

"들여보내라."

황제는 숨을 가다듬고 그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과거 황제 또한 손에 꼽히는 제국의 강자로 군림했었다. 지금은 전장에 나가지 않지만, 그 지혜와 경험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눈앞의 상대를 보면 그 강함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대체 어떤 자들이길래.

인마대전을 하루 만에······.

끼이익—.

알현실의 문이 열리며 다섯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그들을 살피는 순간 황제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까지 숱한 강자를 만나왔기에 더욱 잘 알 수밖에 없었다.

'하, 이들은······.' 

제국의 제일검조차 이들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 하리라.

황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황제의 위엄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대들이 기나긴 인마대전을 끝냈다. 사실상 마족은 궤멸 되었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검은 로브를 둘러쓴 인물은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도 굳이 그에게 예법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에게선 살기와는 다른 위압감이 풍겨나오고 있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듯한 느낌마저 들게 하는······.

알벤 공작의 특무대?

웃기는 소리였다.

이들은 인간이 아닐지도 몰랐다.

황제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대들이 원하는 것은 이미 전해 들었다. 성과 영지를 주고 치하하겠다. 조만간 작위도 수여하도록 하겠다. 그대들은 이 전쟁의 영웅이다. 제국의 정점으로서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겠다."

"오." 

뒤쪽에 있는 훤칠한 키의 남자가 들썩였다. 성과 영지에 기뻐하는 것처럼 보였다. 맨 앞의 검은 로브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인마대전을 끝냈다는 증표가 필요합니다."

"······. 그걸 가져와라."

황제가 명령하자, 알현실의 바깥에서 신하 한 명이 무언가를 들고 왔다. 붉은 쿠션에 놓인 황금빛의 천.

손수건이었다.

황가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물건이었다. 이 국가를 위험에서 구한 자에게 건네라는 선조의 유언이 담긴 물건.

황제는 손수건을 손에 들고 마력을 불어 넣었다. 황가의 피를 가진 자만이 새길 수 있는 증표였다.

샤아아—.

금빛의 문자열과 상징이 황금빛 손수건에 깃들기 시작했다. 한낱 천에 불과했던 손수건이 아이템으로 변화했다.

『 각인 : 영웅의 증표 』

- 인마대전을 종식시킨 자에게 수여하는 증표

- 아스문드 제국 황제의 각인이 새겨져 있다.

황제는 손수건을 눈앞의 검은 로브에게 전해주었다.

무명은 확실하게 손수건을 전달받았다.

현자 아스펠트에게로 향하는 열쇠가 손에 들어왔다.

* * *

그 시각, 마계.

흩어졌던 원로들이 다시 마(魔)의 성전으로 모이고 있었다. 로브를 둘러쓴 원로들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장례식장이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이게 무슨······. 아니, 이게······."

회랑을 걸어가던 제 4원로 유그람이 말을 더듬었다. 다른 원로들도 충격에 빠져 있긴 마찬가지였다.

"다섯 원로가 벌써 당했단 말이오?"

"무명(無命)에게······?"

회의장으로 향하는 원로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마계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원로.

총 다섯 개의 이능을 가지고도 무명에게 패배했다.

실상은 허무한 죽음이었지만, 살아남은 원로들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섯 원로와 전력으로 부딪혀서 승리했다는 것 아닌가."

"미, 미친······. 그딴 놈을 우리가 어떻게 이겨? 미친 거 아니야?"

유그람의 옆으로 다가온 제 8원로 릴리에의 목소리도 떨리고 있었다.

소수의 원로들은 어느새 두려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다섯의 원로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여기에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뿐이 아닐세. 릴리에. 원로들이 얼마나 빠른 시간에 당했는지를 생각해보게."

"······그건 그냥 미친 괴물이잖아."

직접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무명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머쥐었을 거다.

"이 회의에 의미가 있는 거야······?"

"치욕의 밤보다 더한 마계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을지도 모르지."

그리 중얼거리면서도 릴리에와 유그람은 회의장으로 향했다.

회의장의 화려한 의자에는 7명의 원로가 남아 있었다. 13명에서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휑한 모습이었다.

"이, 이럴 순 없는 거잖아."

릴리에가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다른 원로들도 눈빛이 공허해진 것은 마찬가지였다.

나머지 원로들은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이었기에, 그런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졌다.

무명 토벌을 주장하던 5 원로가 죽었다.

이 자리의 더 이상 누구도 무명(無命)을 인간 '따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벅, 저벅······.

정장을 걸친 마족이 테이블 바깥으로 걸어 나왔다.

"애석하게도, 다섯 원로가 동시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무명은 명백한 이레귤러. 원로의 손에서 벗어나 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제 1원로 사가트.

그는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잿빛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뒤, 날카로운 눈으로 원로들을 둘러봤다.

"마족의 정점께서 은둔하신 지금, 저희끼리 정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무명(無命)을 포기할 건지 아니면······."

무명을 억지로라도 없애고자 할 것인지.

그러나 답은 이미 나와 있는 것 같았다. 원로들은 애먼 곳만 바라보며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상황을 지켜보죠. 마족의 정점께서 직접 움직이시지 않는 한, 저희도 섣불리 나서지는 않는 게 좋을 테니까요."

사실 다른 방법도 있었다. 

화해나 휴전.

그러나 마인들, 그것도 원로급에 해당하는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죽임당하거나, 죽이거나. 그 들에게 그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정점을 찾아 뵙······." 

사가트가 그리 일단락을 지으려는 때였다.

고오오오—!

성전 내부로 에너지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 점에서 소용돌이치던 에너지는 게이트가 되었다.

허락 받지 않은 누군가가 성전에 침입하고 있는 것이었다.

"누구냐?!"

"침입자?" 

원로들이 다급하게 마기를 끌어 올렸다. 게이트 속에서는 한 남자가 바깥으로 나왔다.

콰아아-! 

원로들은 무명 때문에 한껏 예민해져 있던 상태. 문답무용. 그들은 곧장 마기를 쏘아냈다.

수백 발의 마탄과 마창이 남자를 노리고 쏘아졌다.

그러나.

파슷, 파스슷!

원로들이 쏘아낸 모든 마기가 일순 허공에서 스러졌다.

원로들이 굳어졌다. 마기 자체가 소멸했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무, 무슨······?"

"잠깐만요. 인사도 안 했는데, 공격은 조금 곤란하네요."

게이트 속에서 나타난 것은 안경을 낀 금발의 남자였다. 남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혼돈의 전령입니다. 마계의 여러분들에게 좋은 제안을 하러 왔어요."

남자의 말에 원로들이 일제히 술렁였다.

혼돈의 전령이 나타났다. 지배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동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계는 고도로 발달한 차원이지만······. 결국에는 혼돈의 영역에 속한 일개 차원에 불과했다.

그런데 왜 오랜 시간 동안 조용하던 지배자가 이제 와서 움직인단 말인가.

그 답은 뻔했다.

"무명(無命). 여러분도 죽이고 싶죠? 지배자께서도 그리 생각하시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현세에 등장한 전대미문의 존재, 무명의 처치.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우리 손을 잡는 건 어떨까요?"

* * *

"여기다."

쏴아아아—.

폭포가 떨어지는 아름다운 계곡.

폭포를 뚫고 나아가자 숨겨진 장소가 나타났다. 낡은 오두막 위로 한줄기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이 장소를 찾으려면, 먼저 증기 기술계의 장인을 만나서 잊혀진 고대 장치를 되살려야 한다."

사최헌은 뚜벅뚜벅 걸으며 말했다.

"고대 장치는 고대신을 모시던 유적에 있고, 그 유적을 돌파한 뒤 되살린 장치에서 기억을 추출해야 하지."

"······."

"기억이 담긴 메모리를 초지능계의 분석 안드로이드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면 암호가 나오는데······."

"오케이. 알았어. 알았다고."

루시퍼가 사최헌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이 오두막을 발견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거 아니야."

"맞다. 결과적으론 통상 마법계로 돌아오게 된다."

"개고생 안 하게 해줘서 고맙네. 됐나?"

우리는 그 기나긴 과정을 사최헌 덕분에 축약할 수 있는 거였다.

"딱히 감사할 필요는 없다."

"쯧." 

사최헌은 그리 말하며 오두막으로 다가갔다. 루시퍼는 혀를 차면서 그 뒤를 따랐다.

나는 청룡에게 물었다.

"현자에 대해서 더 아는 건 없어?"

"제가 아는 건 오래전의 정보입니다. 감안하고 들어주세요. 하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지(全知)의 능력을 소유해 중위 존재들까지 그를 찾아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도 사람들이 찾아와서 귀찮아서 숨었다고 했던가.

"특이한 인물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만······.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오두막에는 짙은 먼지가 쌓여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단순하게 버려진 집으로 밖에는 안보인다.

"무명, 이쪽으로."

사최헌은 서재의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파스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책이 먼지가 되어 흩어진다. 나는 그 옆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내 품에 있던 황금빛 손수건이 빛나기 시작했다.

샤아아—!

강렬한 빛이 오두막 전체로 퍼져나갔다. 눈부신 섬광 속에서 주변의 풍경이 점차 변해가기 시작했다.

오오. 

『 잊혀진 차원의 틈새로 진입합니다. 』

우리를 마주한 것은······.

거대한 서고였다.

수많은 책이 책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어디를 둘러봐도 책으로 가득하다. 그 광경에 잠시 압도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거대한 도서관은 처음이다. 

"오오. 이거야말로, 아카식 레코드에 버금가는 지식의 보고 아닌가."

책의 제목을 살피던 주작이 눈을 빛냈다. 청룡도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벅, 저벅—.

"오셨군요."

서고의 한쪽에서 흰색의 로브를 걸친 노인이 걸어 나왔다.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이었다. 

"현자 한 번 만나기 더럽게 어렵구만. 이봐, 현자."

루시퍼가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그러나 노인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 분의 제자입니다. 아스펠트님을 찾아오셨군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뭐야. 근데 폼은 왜 잡고 난리야."

루시퍼가 차게 식은 눈을 했다.

젠장, 나도 현자인 줄 알았네. 

"이, 이 책 가져가면서 읽어도 되겠는가?"

"물론입니다. 다 읽으시면 아무데나 던져 놓으시면 자동으로 정리가 될 겁니다."

우리는 제자라는 사람을 따라갔다. 미로처럼 얽힌 서고를 빠져나가자 로비와 같은 장소가 나타났다.

밝은 빛이 비쳐드는 둥근 유리창.

그 아래 책을 잔뜩 쌓아두고, 유리창 아래의 공간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가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흑색의 머리카락, 온몸에 달린 고급스러운 금색 장신구.

호쾌한 이미지의 청년이지만, 풍겨오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다. 이번에는 진짜로 범상치 않았다.

아무래도 이 사람이 진짜 현자인 모양.

"하암."

남자는 늘어지게 하품하더니 이쪽을 바라봤다.

"그대가······. 무명(無命)이렸다."

현자는 목을 두둑 꺾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그러고 나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 눈빛에는 왠지 모를 절대적인 자신감이 느껴진다. 

"나는 뭐든지 알고 있다. 그러니 뭐든지 물어보거라."

이제 질문을 던질 차례다.

현자(2)

현자는 뭐든지 말해주겠다고 했다.

"······."

그러나 사최헌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현자는 모든 질문에 답해주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답하고 싶은 질문에만 답한다.

현자를 처음 찾아왔을 때, 사최헌은 엄청난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 이제······. 이 기나긴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때가 왔다. 현자여, 대답해라. 

사최헌은 홀로 인마대전을 종식 시키고 증표를 얻어냈다. 그 이후의 시련도 돌파했다. 4페이즈가 넘은 시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시각에도 현세는 멸망으로 치닫고 있었지만.

현자를 만나기만 한다면, 다음 회귀 때 현세를 구할 활로가 열릴 것이다.

사최헌은 그리 믿으며 현자의 도서관에 발을 들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은 냉담했다.

- 그대의 차원은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다. 다른 질문을 받겠다.

두 번째 방문.

- 알려준다고 한들 달라질 게 없다. 다른 질문을 해라.

세 번째 방문.

- 미안하지만, 일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회차의 마지막에서.

아스펠트는 사최헌을 찾아왔었다.

- 내 예상보다는 훨씬 강한 인간이었군. 그대는 상당히 흥미로워. 조금 더 도움을 줄 걸 그랬나.

붉게 물든 하늘, 부서진 행성의 파편이 은하수가 되어 흐른다. 블랙홀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요동치고 있었다.

현자는 그런 세계의 아래에 서서 산책하듯 유유히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사최헌은 절규했다.

- 대답해라! 시스템을 막아낼 수 있는 거냐?! 이 붕괴를, 이 세계의 종말을······!

아스펠트의 답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 막을 수 있다.

알려주지 않겠다는 것에서 막을 수 있다로.

- 하지만 그대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그의 입에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무명을 앞두고선 다른 대답을 할 것인가.'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다면 여기까지 찾아온 의미가 없으니까.

사최헌은 눈앞의 아스펠트를 조용히 응시했다.

아스펠트는 태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식사나 하면서 이야기 하지. 마침 배가 고팠으니."

그를 따라 이동한 장소에는 호화로운 식사가 차려진 테이블이 있었다.

"밥이나 먹으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닌데."

아스펠트는 루시퍼의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물으러 왔지?"

"현자라면서 그것도 모르나?"

"미리 알면 재미가 없지." 

현자는 씩 웃으며 자리에 앉아 식기를 들었다.

"내게는 모든 걸 알 수 있는 전지(全知)의 능력이 있지. 하지만 말이야. 이 세상의 모든 걸 안다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야."

현자는 스테이크를 한 조각 입에 넣고 삼켰다.

"사람에 따라 저주일 수도 있지. 이 능력을 통제할 때까지, 나는 광인(狂人)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모든 정보가 의미를 가지진 않는다. 필요하지 않은 정보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오랜 시간, 아스펠트는 정보의 격류에서 휩쓸려 나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운이 없었다면 미쳐버렸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리 된 사람이 절대 다수였다. 

그러나 그는 전지의 능력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고, 지금은 현자라 불린다.

"지금은 내가 알고자 하는 것만 알 수 있지. 여러모로 그게 편하니까. 자, 그대들도 먹게. 그대들 국가의 말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던가."

현자는 다시 우물우물 식사를 시작했다.

"주인님, 독은 없습니다."

청룡이 주강혁의 그릇에서 음식을 슬쩍 맛보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밥이나 먹으려고 온 게 아니다.

주강혁은 수프를 뜨려던 숟가락을 멈추고선 입을 열었다.

"현세에서 시스템을 종식할 방법을 알고 싶다."

그 말에 현자도 스테이크를 썰던 나이프를 멈추었다.

"······무명. 그대의 등장은 내가 보기에도 놀랍다네. 마계의 원로를 아무렇지 않게 쓸어버릴 정도이니. 굉장하고말고."

현자의 가라앉은 눈이 무명을 향했다.

"그 힘의 근원은 이 세계의 본질과 맞닿아 있지. 그것이 유례없는 폭발적인 성장을 불러일으키고 있어."

"그게 나도 궁금했네. 주인의 그 힘은 대체 뭐란 말인가?"

샐러드를 먹던 주작이 끼어들었다.

현자는 잠깐 미간을 좁히더니, 나이프를 들어 올렸다.

"그냥 그런 힘일세. 이 세계에는 이유가 없는 힘도 존재하는 법일세. 내가 전지의 능력을 얻게 된 것처럼. 나는 그걸 세계의 오류라고 보고 있네."

세계의 오류.

"이 세계에 새겨진 근본적인 결함이, 누군가에게 과한 힘을 부여하고 마는 게 아닐까 하는······. 뭐, 추측일세."

"현자 맞아? 모든 걸 다 안다며."

루시퍼의 불평하는 소리에 현자가 피식 웃었다.

"보는 시점과 주관에 따라 달라지는 답도 있는 법이지."

왠지 점점 사짜 느낌이 나는데.

주강혁은 미심쩍은 눈으로 다시 현자에게 물었다.

"······시스템을 종식 시키는 법을 물어봤을텐데."

"그래. 그랬었지."

고기를 뜯어먹던 사최헌도 현자를 주시했다.

"이걸 보게나."

샤아아—.

현자는 대답 대신 손에서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가벼운 빛과 함께 정육면체의 푸른 큐브가 나타났다.

현자는 그것을 손 앞으로 내밀었다.

"이 큐브를 파괴할 수 있을 때, 그 답을 주겠네."

"이깟 큐브."

옆에 앉아 있던 루시퍼가 큐브를 낚아챘다. 꽈아악—. 그대로 주먹에 넣고 힘을 주었다.

루시퍼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데도 큐브는 부서지지 않았다.

"뭐야, 이거······?"

겉보기엔 평범해 보이는데 말도 안 되는 강도였다. 현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큐브에는 무수한 차원의 묘리가 담겨 있었다. 단순히 힘으로 부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스템을 종식 시킨다는 건, 그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는······."

현자가 포크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파사삭-.

큐브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주강혁의 손에 들어간지 3초만에 파괴 되었다.

지금까지 태연함을 유지하던 현자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그의 두 눈동자가 커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이 벌려졌다.

"이, 이럴 리가?"

그의 시선이 무명에게 고정되었다.

"야, 너 현자 아니지."

루시퍼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 * *

일단 아스펠트는 현자가 맞다.

사최헌이 그렇다 하니까.

하지만 현자라고 해서 모든 걸 다 아는 건 또 아니었나 보다. 현자 아스펠트는 테이블에 떨어진 큐브 파편과 주강혁을 번갈아 바라봤다.

"굉장해. 굉장하군. 설마, 그대의 힘은 내 지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힘이었단 말인가?"

그런 그의 얼굴에서는 환희마저 느껴졌다.

"그래서 시스템을 종식 시키는 방법은······?"

"그래, 알려주겠다. 알려주고말고. 따라오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스펠트는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향했다. 무슨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뀐다. 일행 모두가 다시 그를 따라 움직였다.

방 중심부에 유리 구슬이 있는 방이었다.

"간단히 말하지. 해당 차원에서 시스템을 종식 시키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손가락을 들어 올린 아스펠트의 목소리는 상기 되어 있었다.

큐브를 부순 게 그렇게 감명 깊었던 모양.

"영역의 지배자가 되면 된다네."

중위 존재인 지배자.

그들은 범차원을 다스리는 군주다.

"그 혼돈, 질서, 심연······. 이런 영역의 지배자가 되라는 말인가?"

"그렇다네. 보통은 불가능하지. 이룰 수 없는 꿈이야."

중위 존재는 선택 받은 자만이 될 수 있다. 초월적인 재능과 능력을 부여 받은 자에게만 기회가 주어진다.

"정말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지. 그때쯤이면 그대가 구하려던 인류는 진작에 멸망했겠지. 아니면, 그대가 더 이상 세계를 구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그건 무슨 말이지?"

"사람의 가치관과 신념은 시간에 따라 변한다네. 중위 존재로 향하는 여정 속에서 그대의 인격과 윤리관은 닳고 닳아 결국 다른 존재가 될 걸세."

사최헌은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배자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째서 아스펠트가 질문에 답하지 않았던 것인지.

사최헌이 답을 알았다고 한들 이룰 수 없었던 목표다.

하지만 회귀를 거듭한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사최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시스템의 종식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세계의 구원을 위해서다.

사최헌은 이미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회귀를 반복할수록 정신이 마모 되어 간다. 누군가를 죽이고 살리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조차 있었으므로.

첫 번째 회귀와 비교하면 사최헌은 자신은 많이 변해 있었다.

마찬가지로, 중위 존재가 되기 위해 아득한 세월을 보낸다면······. 분명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라면 가능하고 말고. 무명. 엄청난 단시간에 중위 존재가 되는 게 가능하다네."

아스펠트는 환한 미소와 함께 무명의 어깨를 잡았다.

"아니지, 정정하지. 그대만이 가능하네. 범차원 어디를 뒤져도, 그대와 같은 인물은 없을 테니까."

중심부에 있던 유리 구슬에서 푸른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허공에 상을 맺었다.

각각의 원들이 서로 끝없이 연결되어 있다.

이것이 범차원의 지도였다.

"지배자가 되려면 필요한 조건이 있다네. 그대의 이름이 전차원에 널리 알려져야 하며, 다른 지배자들의 견제를 막을 수준의 강대한 힘이 필요하지."

명성과 힘.

"쉽게 말하자면······. 범차원 규모의 명성, 태초급의 강함, 차원 멸망 규모의 사건. 이 세 가지가 모여야 한다네."

아스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이쪽에서 도와주겠네. 대신······. 자네의 힘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게 해주면 좋겠군."

목적은 그거였던 모양.

뭐, 딱히 나쁠 것도 없다.

하여튼 예상했지만 쉬운 조건은 아니었다.

"지배자가 되면 시스템의 종식이 가능하단 말이지."

"그렇다네. 그러니 강해지게. 누구도 그대의 세계를 넘볼 수 없도록."

나는 사최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배자가 되는 게 빠를지.

아니면 인류가 다 같이 시스템을 극복하는 게 빠를지.

"그게 유일한 방법이다."

사최헌은 그리 답했다.

페이즈가 진행되며, 구조적으로 막을 수 없는 시련이 나타나게 될 거다.

시스템이 인간들을 서로를 죽이게 만든다거나, 전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조건을 단다거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가 지배자가 되는 게 빠를지도 모른다.

"······."

그냥 건물주가 되어서 은퇴하는 게 내 목표였는데. 어쩌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범차원의 지배자라.

기존의 목표에서 규모를 조금(?) 늘리면 그만이다. 마침 통상 마법계에서 성과 영지도 얻었겠다. 차원마다 건물을 두면······.

노후 걱정은 없겠네.

그래, 까짓꺼 하지 뭐.

"받아들이지."

나는 아스펠트의 손을 마주잡았다.

"내 흥미를 끈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 그대는 행운을 손에 잡은 거나 마찬가지일세. 기대해도 좋을 걸세."

아스펠트는 씩 웃으며 말했다.

잠깐.

그런데 하나 더 물어볼 게 있었다.

"이 검을 봐줄 수 있나?"

"검?"

나는 무명검을 아스펠트에게 보여주었다. 현자라고 하니, 이 정도만 봐도 뭔가 알지 않을까?

"이건······. 어디에서 나온 거지?"

"보상으로 얻었다."

"내력이 안 보인다. 신기하군. 모든 아이템에는 역사가 있기 마련인데······. 이 검은 누가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 검이군."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아스펠트.

"그러면 이전 세계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이전 세계? 세계는 하나다. 성좌들의 맹약에 의해 한 줄기로 흐르지. 그보다 그 검을 더 보여주겠나?"

"······."

사도들하고 똑같은 답을 한다.

여기까지 모르면 그냥 모르는 건데.

자세하게 설명한다고 알 것 같지도 않다.

'현자도 모르는 지식이라니. 말이 되나.'

상위 존재인 사도들조차 몰랐으니, 어찌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지(全知)라며. 그 능력에도 한계가 있다는 건가?

달라붙는 아스펠트를 밀어내며 무명검을 검집에 집어넣는 그때였다.

치직, 치지직—!

노이즈와 함께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주, 주인······! ]

현세에 놔뒀던 가브리엘이 보내온 사념이었다. 꽤 다급한 목소리였다.

'모바일 아이템 강화하다가 실패했어? 아니면 캐릭터 뽑기 하다가 폭망했거나.'

[ 아니, 그런 일로는 연락하지 않아. 눈물은 삼키겠지만. 어쨌든 현세가 심상치 않음. 주인이 돌아와 봐야 할 듯. ]

내가 고개를 들자, 현자 아스펠트도 심각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마계와 혼돈의 전령이 손을 잡았군."

아스펠트가 손을 젓자 눈앞에 게이트 하나가 솟아났다. 아스펠트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극복하기만 한다면 이건 기회라네. 그대의 능력을 크게 강화할 기회."

EX급 게이트(1)

고오오오—.

서울 상공.

하늘에 거대한 게이트가 열렸다. 구멍이 뚫린 것처럼 주변의 대기가 내부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대한민국 헌터 협회.

"어떻게 할까요? 대피령을 내릴까요?"

안경을 올려 쓴 여비서가 협회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아니, 아직 아니야. 괜한 혼란만 불러일으킬 수 있어."

심각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보고 있던 유진철 협회장이 입술을 깨물었다.

'대한민국에만 생긴 초대형 게이트라니.'

하필이면 대한민국만 콕 집어서 나타났다.

마계의 상황을 모르는 유진철 협회장 입장에선 억울할 법도 했다.

투두두두—!

저 멀리 헬기들이 날아다니며 게이트 주변의 영상을 찍고 있었다. 국내 언론 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의 헬기도 보인다.

그러나 유진철이 심각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문제는······. 무명 헌터가 부재중이라는 거다."

현재 무명의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단 두 명뿐.

한 명은 사최헌이었고,

다른 하나는 유진철 협회장 본인이었다.

단말기를 통해 무명에게 직접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연락은 진작 했었다.

돌아온 메시지가 이러했을 뿐.

- 주인은 지금 현세에 없음. 일단 불러보겠지만 언제 올지 모름.

더불어 사최헌 헌터도 자리를 비운 상태.

만약, 무명이 돌아오지 못한다면······.

"상당히 곤란해. 아니, 아주 곤란해. 게이트 위력 측정은 끝났어?"

"예, 방금 막 끝났다네요."

비서는 각종 수치가 적힌 태블릿을 내밀었다.

협회에는 게이트의 출현을 사전에 알아내고, 등급을 구별 짓기 위한 최첨단 장비가 존재했다.

1페이즈가 시작된 뒤로도 협회는 계속해서 게이트를 찾고 적절한 길드를 알맞게 배치해 왔다.

여러 사건이 있었음에도 대한민국이 아직 멀쩡히 돌아가는 건 협회가 건재했기 때문. 마인 협회장을 제거하고 한국 내의 마족 끄나풀들이 빠르게 제거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잠깐······."

수치를 살피는 유진철 협회장의 미간이 좁혀졌다.

말도 안되는 수치였다.

지금까지 현세에 등장한 모든 게이트 중에 가장 강력하다.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 있다.

"이건 SSS급 수준도 아니잖아. 그보다 더 높아."

그래프 상의 수치가 요동치고 있었다. 오랜 시간, 협회에서 일해 온 유진철조차 처음 보는 그래프였다.

새로운 등급을 신설해야 할 판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 그 위의 단계가 무엇인지 모른다.

유진철 협회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EX급 게이트. 그렇게 발표해야겠어. 시민들도 대피시키고."

"괜찮으시겠어요? 불안이 고조될 텐데요."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야."

공략 여부도 불투명하다.

아니, 무명이라고 한들 저만한 에너지를 내뿜는 게이트를 공략할 수 있을까?

유진철 협회장은 고집부리지 않았다.

"우선, 최상위 길드들 대기만 시켜. 무명이 돌아오는대로 공략을 시작해야 한다. 그게 끝이 아니야."

최초의 EX급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는 순간, 대한민국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동맹 국가에 지원을 요청해야 한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창 밖으로 시선을 옮긴 유진철과 비서는 흠칫 놀랐다.

빵봉투를 둘러쓴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퍼가 창밖에서 말했다.

"주인님이 돌아오셨다. 괜히 엄한 놈 부르지말고, 지금부터 불러주는 명단에 대해서만 지원을 불러. 오케이?"

"그, 그런데 왜 직접······?"

협회장은 단말기를 손에 쥐고서 툭툭 가리켰다. 루시퍼는 확 얼굴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위대하신 주인님의 뜻을 헤아리려고 하지 말아라. 지나가는 길에 겸사겸사 찾아온 거니까 명단이나 받아 적어."

* * *

루시퍼가 돌아왔다. 한 손에 든 검은 봉다리에는 아이스크림이 한가득이었다.

"주인님, 돌아왔습니다."

"내 메로나."

"쯧, 옜다."

가위바위보에서 패배한 루시퍼가 아이스크림 심부름을 다녀왔다. 물론, 중요한 건 아이스크림이 아니다.

나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까먹으며 물었다.

"협회에는 제대로 이야기했어?"

"예, 말했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일곱 개의 별을 중심으로 해외 헌터들을 불러올 겁니다."

집 안에는 당연하지만 현자 아스펠트도 있었다.

"······그대들, 상당히 태평하군. 아이스크림이라니. 아무리 그래도 게이트 내부에는 원로들과 혼돈의 전령이 기다리고 있을텐데."

"어차피 헌터들이 모일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니."

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 건네었다. 포장지를 유심히 바라보던 아스펠트가 조심스레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신묘한 맛이군."

"현자라더니, 아이스크림도 처음 먹나?"

"모든 걸 안다고 모든 경험을 해 본 건 아니지. 지식과 경험은 다르니."

아스펠트는 루시퍼의 비아냥을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그때, 옆에서 조용히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던 사최헌이 벌떡 일어났다.

"이럴 게 아니라, 2페이즈를 대비해서 준비할 일이 있다. 당장은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테니, 공략 때 다시 오겠다."

"······고생했다."

"뭘."

내 말에 사최헌은 어깨를 으쓱인 뒤, 현관을 통해 바깥으로 나갔다.

아스펠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게이트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면 더 물어보게."

현자 아스펠트.

그가 가진 전지(全知)의 능력은 가히 사기적이었다.

말 그대로 모든 걸 알 수 있었다.

현재에 관해서라면 말이다.

게이트의 구조는 물론이고, 내부에 배치되어 있는 원로의 위치와 순서. 각 원로들의 약점과 공략법까지.

적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싸운다는 게 바로 이런 거였다.

다른 나라의 헌터들을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레벨업도 하고, 아이템도 챙겨가게 시켜야겠지. 사람이 많을수록 유리한 구간도 있고.'

이번에 열리는 게이트는 워낙 방대하고 넓은 데다가 아이템도 굉장히 많다는 게 현자의 말이었다.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지.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생긴다네. 혼돈의 전령은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지만, 거기엔 대가가 따르지."

혼돈의 전령은 초대형 게이트를 열고 현세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대신 막대한 대가를 지불했다.

또한, 게이트 내부가 상상을 초월한 난이도인만큼, 엄청난 아이템이 나오게 되어 있단다.

'인류 전체가 한층 더 강해질 찬스인거지.'

물론, 공략 실패시에는 그대로 인류 멸망이다.

"······근데 대리자는 왜 간섭하지 않는거지?"

내 질문에 아스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합당한 의문이군. 하지만······. 이번에는 정당한 게이트의 출현이라고 볼 수 있지."

"정당?"

"이제 2페이즈가 시작되지 않는가. 그 테마는 신화초래(神話招來)."

아스펠트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내려두며,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부턴 성좌들의 힘이 강해질 시간이네. 그리고 혼돈의 지배자는······.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성좌. 오히려 성좌들보다 유리한 점이 있지."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한 번 보게나.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금방 알게 될 테니."

* * *

불현듯 전 세계 플레이어들의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치지직—!

『 시스템이 2시련(묵시록의 기사)을 잠정 공략 상태로 간주합니다. 』

『 1페이즈가 종료되었습니다. 』

- 1시련 : 아브락사스의 알

- 2시련 : 묵시록의 기사(전쟁)

- 3시련 : 종말의 괴수

『 최고 기여자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

- 1시련 : 무명(無命)

- 2시련 : 무명(無命)

- 3시련 : 무명(無命)

『 다수의 성좌들이 키플레이어의 등장에 환호합니다. 』

『 더욱 많은 성좌들이 현세로 모여듭니다. 』

1페이즈가 끝났다.

그러나 시스템의 종말은 계속된다.

『 2페이즈가 시작됩니다. 』

그 테마는 신화초래(神話招來).

지금까지는 방관자나 조력자에 가깝던 성좌들의 권한이 대폭 강화된다.

『 플레이어의 최대 레벨이 250까지 개방됩니다. 』

『 성좌들의 시스템이 추가로 개방됩니다. 』

『 현세(現世)에 미치는 성좌들의 힘이 강화됩니다. 』

이것이 한층 더 현세를 어지럽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허나, 지금 당장 집중해야 할 것은 초대형 게이트.

고오오—.

소용돌이치는 게이트의 아래.

대한민국 유수의 길드들이 모여들었다.

1위 불멸.

2위 청명.

3위 창공.

"이거 공략할 수 있는 거 맞겠죠?"

"전 세계 최초 EX급 게이트잖아. 공략만하면 역사에 이름 하나 남기는거고. 아니면 뭐······."

"역사에 이름은 무명만 남지 않을까요?"

주변으로 설치된 임시 천막 아래 플레이어들이 공략을 준비하고 있다.

그들 모두 180레벨 이상을 달성한 고등급 플레이어였다. 무명이 열어준 전장이 덕을 톡톡히 보았다.

"이거 무명 헌터도 참가하는 거겠죠?"

"고마운 사람이지. 덕분에 많이 강해졌어."

"난 목숨까지 바칠 준비 됐습니다."

"무명은 니가 누군지도 모를걸?"

해외의 헌터들도 차례차례 모이기 시작했다.

영국의 대마법사 아이작.

중국의 권법가 하오란.

뉴질랜드의 정령술사 모아.

미국의 히어로 데릭.

전세계가 참여하는 최대 규모의 공략이었다.

지원을 거부하는 나라는 없었다. 오히려 한국에 지원을 나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다.

"무명은 어디에 있지?"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을걸."

무명(無命)과 안면을 틀 유일한 기회.

동시에 그런 무명이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조금이라도 빚을 지워둘 수 있는 기회였다.

연락받은 해외의 헌터들은 앞다투어 한국으로 달려왔다. 헌터들이 공략 준비에 한창인 그때였다.

콰아앙—!

별안간 하늘에서 사람이 떨어졌다. 도로에 진한 균열이 새겨질 정도로 폭력적인 착지였다.

"뭐, 뭐야?"

"저 사람은······."

"그때 그 사람이잖아."

귀환자 호영.

그의 얼굴을 아는 몇몇 한국 헌터가 중얼거렸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였다.

콰아앙!

호영은 땅을 박차고 상공의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는 도약이었다.

"마, 말려야 되는 거 아니야?"

"자살인가······?"

"원래 저런 사람이라는데요?"

웅성거림이 커지려는 찰나.

팅! 팅! 팅!

플레이어들의 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혼돈의 지배자가 현세(現世)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칩니다. 』

『 2페이즈 첫 번째 시련이 변경됩니다. 』

『 2페이즈 : 마계 강림 '6원로' 』

『 이 땅에 마(魔)가 도래했으니, 그 최후는 멸망 뿐이리라. 』

노이즈와 함께 떠오른 메시지.

그와 동시에 게이트에서 검은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양의 액체는 지면에 닿자마자 기화되어 연기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다.

서울의 지면이 검은 땅이 되어가고 있다.

같은 시각, 미리 천막 안에 들어와 있던 주강혁도 상황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정당하다는 건 이런 말이었나."

2페이즈부터 성좌들은 현실에 간섭할 수 있게 된다.

대가를 지불하고서 마물을 소환하거나 미션을 걸 수 있다. 게이트를 생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이런 대규모 변경은 사실 성좌들로도 힘들지. 혼돈의 지배자는 시스템의 조작과 불완전 성좌로서의 힘을 동시에 발휘한 거라네. 흔한 일은 아니야."

아스펠트는 턱을 괸 채, 흥미롭다는 듯 말했다.

"······미션을 바꿀만큼 나를 없애고 싶다는 건가?"

"그런 셈이지. 혼돈의 지배자는 새로운 지배자의 탄생을 두려워하고 있거든."

딱히 지배자가 되어서 뭔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이 세계를 시스템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고 싶어질 뿐이다. 하지만, 굳이 현세를 위협해 온다면······.

가만히 처맞고만 있을 생각은 없거든.

"······."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시간이 되었다. 

"출발하지."

"나는 전투에는 영 소질이 없으니, 응원하겠네. 바깥에서 망을 볼 사람도 필요하지 않은가. 사념을 보내는 건 나도 가능하니 걱정할 필요는 없고."

아스펠트는 그리 말하며 탁자에 놓인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이곳 음식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는 사도들과 함께 천막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와아아—!

바깥에선 함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뭐 대단한 거라도 있나? 그리 생각하며 걸어 나가는데.

"무명, 무명!"

"팬이에요!"

"무명!"

사람들이 무명의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시민들은 전부 대피시켰고, 남아 있는 기자는 소수다.

이들 전부 헌터라는 이야기.

"주인님의 인기가 대단한데요? 드디어 인간 놈들이 눈을 떴나 봅니다."

루시퍼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흡족스러운 듯 미소지었다. 가브리엘도 브이표시를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과, 과한 관심이구려."

주작은 붉은 로브를 푹 눌러썼다.

······환호 받을 만큼 딱히 한 것도 없는데.

세간에 알려질 만한 건, 아브락사스의 알을 깨준 거랑 전장에서 사냥을 하게 해준 것 정도다.

그것도 돈 받고 하게 해준 건데.

"묵시록의 기사를 잡았다는 소문도 헌터들 사이에선 상당히 퍼졌을 겁니다."

청룡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루시퍼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흥분한 목소리였다.

"사람이란 무릇 강자에게 끌리기 마련. 그리고 주인님은 명실상부한 이 세계의 최강자죠. 그러니 환호하지 않고 배기겠습니까?"

그건 너무 오바고.

뭐, 기분은 나쁘지 않지만······.

가면과 로브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 그랬으면 고개를 못 들었을 것 같거든. 

게이트에 가까워지자, 흘러나오는 마기가 한층 더 강해져 있었다.

내부에서 폭포처럼 흘러내리는 마기.

이건 시간 제한을 의미한다.

그러나 괜찮다.

내부에 대한 정보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시간은 충분하다.

고오오—.

들어가기 전, 나는 게이트를 바라보며 죽음의 기운을 모아봤다. 즉살이 사물에게도 통한다면······. 어쩌면 게이트를 없애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파아아.

그러나 죽음의 기운은 덧없이 흩어져버렸다.

지금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가능할지도 모른다.

실험은 이만하면 됐다.

타앗—.

나는 땅을 박차고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내 뒤를 따라 사도들이 게이트 내부로 몸을 던졌다.

서울 도심의 광경이 일순 변하며, 게이트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 특수 게이트 : 잊혀진 마계의 땅 』

『 공략 조건 - 원로 처치 0 / 6 』

검게 물든 땅이 끝없이 펼쳐진 장소.

이곳은 마계다.

그르르르······.

검은 땅을 뚫고서 흉측한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Lv.264 ]

[ Lv.279 ]

[ Lv.269 ]

그 레벨대가 상당히 심상치 않다. 여기가 게이트의 초입이라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주변 정리지."

마계는 결국 현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그렇다면 이쪽도 그에 상응하는 답을 줄 때다.

마계를 완전히 침몰시킬 공략의 시작이다. 

EX급 게이트(2)

"우선은 준비운동부터."

나는 가볍게 팔을 쓱쓱 움직이고서 마물들을 바라봤다.

붉은 눈으로 침을 뚝뚝 흘리는 맹수들. 완전히 마기에 잠식되어 있을뿐더러 마정석이 몸을 뚫고 튀어나와 있다.

그 수가 수십 마리에 달한다.

평범한 헌터였다면, 저 안에 달려드는 건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겠지만······.

타앗—.

나는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 [ 종말+ ] 라그나로크 : 에인헤랴르 』

『 신체 능력이 1단계 향상됩니다. 』

『 당신의 신체 능력이 전설(傳說)급으로 향상됩니다. 』

콰아아.

SSS급에 오르며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움직임이 가능해졌다. 마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나는 놈의 앞에 도달했다. 

뻐억—!

이어지는 발차기.

아무런 기교도 기술도 없는 발차기지만, 에인헤랴르의 효과 덕분에 스킬 보정이 들어간다.

푸화악—!

거센 충격파와 함께 마물이 폭발했다.

즉살을 사용한 게 아니다.

물리적인 힘만으로 마물을 제압했다.

뻐억, 뻐어억!

기세를 몰아 두 마리를 그 자리에서 끝장냈다. 

'이게 전설급의 신체.'

눈앞의 마물들은 SSS급 수준이다. 무투에 자질이 있는 것도 아닌 내가 마물을 압도하고 있으니, 새삼 에인헤랴르의 사기성이 느껴진다.

'역시 종말급 아이템이야.'

아우우!

다른 마물들이 일제히 하울링을 하기 시작했다. 검은 땅을 뚫고 마물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래봤자 다.

나는 약자멸시를 발휘했다.

『 현재 레벨 : Lv. 270 / 275 』

다섯 원로를 처치하며 막대한 경험치를 습득.

20 레벨을 더 올렸다. 일일 레벨 성장에 가로막혀 이 정도였지만······.

마물들을 처치하기엔 충분하다.

[ Lv.264 ]

[ Lv.279 ]

[ Lv.269 ]

푸화악—! 푸화악—!

내 레벨보다 낮은 마물을 약자멸시로 처치. 

나보다 레벨이 높은 놈들은 무명검으로 가볍게 절단.

"저희도 도와드리겠습니다."

"넓은 범위를 장악하는 거라면 내게 맡겨 주게."

청룡과 주작도 가세했다.

콰과과과—!

새하얀 도력이 마물들을 공중으로 띄워 올리고, 초고온의 불길이 대지를 뒤덮었다.

정리는 순식간에 끝났다.

"오케이, 이 정도면 됐어."

나는 주변을 한 번 둘러봤다. 마물은 아예 없고. 검은 땅의 마기도 불길에 태워져서 정화 되었다.

이 주변을 중심으로 기지를 세울 예정이다.

'이번 공략은 시간이 꽤 걸릴 테니.'

초대형 게이트와 가까운 이곳을 거점으로 활용하면, 보급도 원활하고 큰 문제는 없을 거다.

"그러면 어느 원로부터 처리할까."

나는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봤다.

현재 이 게이트 끝자락에는 6 원로가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있지 않고, 각자의 섬에 머물며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이들 모두를 처치해야 게이트가 소멸한다.

'현자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13원로 중에 6원로인데.'

여기에 있는 원로까지 처치한다면 마계에는 원로가 하나밖에 안 남는다.

사실상의 마계의 붕괴.

······이렇게까지 목숨을 걸고 달려들 일인가?

이해가 안 가지만, 이유까진 알 필요 없다. 놈들이 다급한만큼 우리도 절박하다. 멸망을 앞에 두고 있는 건 현세니까. 

그때였다.

샤아아—.

허리춤의 랜턴이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 

『 랜턴 소울 이터가 원로들의 영혼을 전부 소화했습니다. 』

쩌적, 쩌저적.

허공에 새겨진 균열 속에서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다섯 원로의 영혼을 흡수했던 만큼 상당한 퀄리티다.

『 [ 종말 ] 네메아의 사자 가죽 』

- 영혼 장비

- 방어력 + 1200

- 모든 방어력이 두 배가 됩니다.

- 신화급 이하의 창과 칼의 데미지를 99% 감소시킵니다.

"종말급 아이템인가."

입가에 미소가 절로 생긴다. 

에인헤랴르, 격의 증표에 이어서 세 번째 종말급 아이템이다.

"오, 주인. 득템했구나. 축하."

"주인님께서 한층 더 안전해지셨다니."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웅이자 신 헤라클레스가 착용했다고 알려진 사자의 가죽이었다.

'······말도 안되는 효과네. 방어력 두 배에, 창 칼 면역.'

종말급 아이템의 효과는 그 하나하나가 압도적으로 강력하다. 한 피스를 맞출 때마다 차원이 다르게 성장하는 느낌이다.

나는 사자 가죽을 둘러썼다. 따뜻하면서도 강인한 기운이 느껴진다. 

스르륵.

아이템은 착용과 동시에 모습을 감추었다. 영혼 장비인 덕에 거추장스럽지 않은 게 장점이다.

『 [ ★ ] 오의 파편 x 1 ( 2 / 5 ) 』

『 [ 신화+급 ] 사도 강화석 x 1 ( 2 / 3 ) 』

나머지 보상도 좋고. 

"자, 그러면······."

아이템도 갖췄으니 이제 공략에 박차를 가할 차례다.

나는 단말기를 들어 올려 협회장에게 음성 통신을 걸었다.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 이제 들여 보내셔도 됩니다."

* * *

"······인간들이 슬슬 게이트에 진입하고 있습니다."

"무명, 무명은 어디에 있어?"

"그게······."

검은 성채의 꼭대기.

제 8원로 릴리에.

그녀는 붉은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늘어뜨린 마족이었다. 불안함에 손톱을 깨물던 릴리에가 최상위 마족을 밀어냈다.

"비켜. 내가 직접 볼테니까."

"아, 알겠습니다."

성채의 망원경으로 확인한 중앙에는 인간들이 바글바글거렸다. 인간들은 가져온 물자를 풀고 텐트를 세우고 있었다.

중심에서 결계를 만들어 거점을 만들 생각인 모양.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저딴 인간들은 손짓 한 번이면 먼지로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무명이다. 릴리에는 망원경을 이리저리 움직여 무명을 찾았다.

"찾았······."

일순, 릴리에는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무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듯했기에.

아니, 보일 리가 없다.

원로들이 위치한 요새에는 강력한 결계가 작용하고 있으므로. 외부에선 내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릴리에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준비는 완벽해. 이길지는 모르겠지만."

각 요새는 원로들의 특성에 맞게 방비 되어 있었다. 심지어 마계와 99.9% 동일한 환경이다.

혼돈이 전령이 만들어낸 이 세계는 그리 작용하고 있었다.

'요새 바깥으로 벗어나진 못하지만······. 그 정도 패널티는 감수해야겠지.'

그러나 릴리에는 불안함을 숨길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무명과 전면전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원로 다섯이 한꺼번에 당했는데 무슨 수로?

회의장에 있던 다른 원로들도 비슷한 생각이었을 거다.

허나, 혼돈의 전령은 이렇게 말했다.

- 이대로 방관하면······. 무명(無命)은 언젠가 지배자가 되어 이 세계를 다스릴 겁니다.

- 그 세계에 과연 마계가 존재할까요? 아니죠. 심지어 무명이 당신들을 용서하더라도 마계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 혼돈의 지배자께서 당신들을 절멸시킬 거거든요.

그 이유란 간단했다.

- 당신들이 무명을 키웠잖아요? 책임을 져야죠.

남자의 부드러운 미소와 대비되는 광기 어린 눈빛이 아직도 선명했다.

원로들은 동맹을 강요받았다.

그리고 사지로 내몰린 것이다.

"이럴 때 마계의 정점은 대체 뭘 하고 계시는 건지······."

그분만 돌아왔다면 이런 꼴은 나지 않았을텐데.

잠적한 이후로 아무도 그의 행방을 모른다. 

그때였다.

푸슈우우—!

릴리에와는 반대편에 있는 요새에서 녹 빛의 섬광이 터져나왔다. 

"······시작됐나."

제 4원로 유그람은 마도학자였다.

그의 마도병기가 기동하기 시작했다.

슈우우우—.

수십 갈래의 녹빛 궤적이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나아간다. 

원로는 요새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그게 게이트 내의 규칙이었다.

그러나 유그람은 그 규칙을 살짝 비틀었다. 자신이 직접 나갈 수 없다면, 내부에서 공격하면 그만이라고 했던가.

유그람의 마도병기들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무명을 죽이진 못해도, 인간들은 확실하게 처치할 수 있으리라.

* * *

어두운 하늘을 수 놓는 녹광.

물자를 옮기고 있던 헌터들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였다.

"공격이다!"

"방어 마법 최대 출력으로 전개해!"

"격추 가능해?"

"잠깐만, 저 사람······!"

적의 공격을 보자마자, 하늘 위로 날아오른 건 환생자 아이작이었다.

"다들 전력을 다해서 방어막을 구축하게!"

아이작은 양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공송골 맺혀 있었다.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공격이 날아오는구먼.'

아이작은 저 녹색 섬광을 본 적이 있었다. 전생에서 그가 다른 차원을 구경할 때였다.

어느 융성한 제국이 있었다.

그들은 마인조차 몰아낼 정도로 뛰어난 마법적 지식과 무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고, 마인들을 추방했다

인간의 세계가 왔다고 기뻐하고 있던 그때.

별안간 공간이 열리더니 녹색의 섬광 하나가 떨어졌다.

수도에 떨어진 섬광은 순식간에 제국 전체를 뒤덮었다.

상상을 초월한 폭발이 터져나왔다.

섬광이 잦아든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국가 하나가 그렇게 허무하게 멸망한 것이다.

'조잡한 무장을 갖춘 원시인이 무장한 기사를 이길 수 없듯, 기사가 대마법사를 이길 수 없듯······.'

마계와 다른 차원에는 그만한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는 방법이 없다.

'죽어도 막아내는 수밖에······!'

심장 주변을 회전하는 서클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이작은 최대한의 마기를 끌어내 거대한 창을 만들어냈다.

고오오오—.

순수한 마나로 이뤄진 창.

파아앙!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서 쏘아냈다. 마나의 창이 허공에서 수십 갈래로 갈라지며 녹색 섬광들을 향해 쇄도했다.

콰과광! 콰아아앙!

명중했지만 완벽히 소멸시키진 못했다. 흩어진 섬광의 파편이 근방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녹색이 궤적이 빗줄기가 되어 쏟아진다.

'아니, 분열이라니!' 

아이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게 떨어진다면 피해는 돌이킬 수 없으리라.

"무명······!"

다급해지니 찾을 사람은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무명이라고 한들 저걸 막을 수 있을까?

그때였다.

"덕분에 한결 수월하겠네요."

청룡이 뒤쪽에서 바람과 함께 날아왔다. 그의 눈동자에 푸른 이채가 깃들었다.

화아아악!

동시에 막대한 풍랑이 녹빛 섬광들을 몰아냈다.

콰과과광—!

하늘에서 서로 부딪힌 섬광이 막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일순, 태양이 생겨난 것처럼 주변이 환해졌다.

동시에 격류가 태풍처럼 휘몰아친다.

"크윽."

청룡의 도력이 폭발의 범위를 최소화했음에도 이 정도다. 심지어 모든 충격을 막진 못했다.

쩌적, 쩌저적—! 헌터들이 만들어낸 방어막 위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도 어찌어찌 막기는 했다.

"일단 한 차례는 막았는데······."

우우웅—!

동쪽의 요새에서 다시금 녹색 섬광이 쏘아졌다. 다시 정비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몰아쳐 온다.

도력을 다시 끌어모은 청룡이 마도병기가 있는 동쪽을 바라봤다.

"이 다음은 주인님께 맡기겠습니다."

* * *

제 8원로 유그람.

"그래, 쏴라. 계속해서 놈들을 공격해. 무슨 생각으로 다른 인간들을 데려온 건지 모르겠군."

투웅, 투웅, 투웅—!

요새 근방의 마도 병기들이 차례대로 녹광을 쏘아 올렸다. 기이한 대포의 형태를 한 병기였다.

마계의 첨단 기술력으로 만들어낸 파괴 무기였다. 이 무기가 무릎 꿇리지 못한 차원은 지금껏 없었다.

"이 폭격에 무명까지 겸사겸사 죽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 그것의 준비는 끝났나?"

"현재 마기 충전율 94%입니다."

"준비가 끝나는대로 쏴버려."

명령을 받은 최상위 마족이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을까요? 다른 요새가 휘말릴지도 모릅니다."

"걱정마라. 원로들은 그 정도론 죽지 않는다. 무명만 잡으면 되는 문제 아니냐."

"아, 알겠습니다."

원로들을 무사할 것이다. 원로를 보조하던 마족들은 죄다 죽어나가겠지만.

파직, 파지직—.

요새의 중심부 검은 탑의 형상을 한 포탑으로 스파크가 치솟고 있었다. 고대의 유물과 마계의 지식의 정수를 합쳐 만들어낸 준(準) 초월급 병기다.

원로라도 직격으로 맞으면 무사할 거라 장담할 수 없는 무기.

"반드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유그람은 그리 중얼거렸다.

마계의 운명이 달린 승부였다.

승리를 위해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걸 가져왔다.

"95%"

"96%"

"97%"

카운트 다운이 이어지던 그때, 다른 보고가 들어왔다.

"요새에 백색의 사도가 출현했습니다!"

"······내가 상대하겠다." 

유그람은 망설이지 않았다. 창문을 통해 곧장 빠져나갔다. 몸에 마기 보호막을 두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백색의 사도가 유유히 허공을 날고 있었다. 

유그람은 소리쳤다. 

[ 백색의 사도여······! 건방지구나, 신화급에 불과한 네가 홀로 나를 상대할 수 있다고 보느냐? ]

어차피 끝이다. 

"98%!"

"99%!"

준초월 병기의 충전이 완료되기 직전이었다.

곧 행성 하나를 집어 삼킬 거대한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유그람이 승리를 확신하는 그때였다.

가브리엘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푸콰아아악—!

발밑의 마도 병기들이 일제히 산산조각이 나며 분해 되었다. 병기의 파편과 부품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뭣?!" 

천문학적인 자원을 들여 만든 병기가 일시에 파괴되었다. 누가 공격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파괴 되었다.

스윽.

이번에는 가브리엘의 시선이 요새 중심부로 향했다. 

휙.

"설마······."

유그람의 고개가 다급하게 돌아갔다. 

단 하나 뿐인 준초월 병기를 향해서.

아니나다를까. 

푸콰과과과—!

거대한 흑색의 탑이 형체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계 기술의 집약체이자, 마계 최후의 병기가 단번에 파괴되었다.

[ 이, 이게 무슨······! 그럴 리가. 무명(無命). 네 놈의 능력은 살해인 것이······? ] 

세차게 흔들리는 유그람의 눈동자.

"메롱." 

유그람은 재빨리 가브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가브리엘은 도망친 뒤였다.

[ 저, 저······! ] 

쿠구구구······.

지면이 요동치기 시작한다. 검은 탑에 충전되었던 막대한 양의 마기가 일제히 에너지를 방출하고 있었다. 도망칠 순 없었다. 원로는 요새 바깥으로 나갈 수 없다. 

[ 어째서냐—! ] 

유그람이 절규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든 마도 병기가 허무하게 박살났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능력은 살해가 아니었단 말인가?

콰아아앙!

강렬한 섬광이 유그람의 요새를 집어삼켰다. 그의 절규도 폭발과 함께 삼켜졌다.

EX급 게이트(3)

콰아아앙—!

마도병기의 내부에서 고도로 압축되던 마기가 폭발했다.

내부와 외부를 차단하는 결계 때문에, 폭발은 바깥으로 빠져나가지 못했다.

본디, 중앙을 향해 쏘아졌어야 할 병기의 에너지가 내부의 마족들을 쓸어버렸다.

고오오······.

뜨겁게 달궈진 땅 위로 다시금 가브리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기를 부수고 결계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침착한 표정으로 엎어져 있는 원로 유그람을 바라보았다.

작열하는 땅 위에 남아 있는 것은 유그람이 유일했다. 높이 솟아올라 있던 성채도, 병기도, 마족들도 무엇하나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유그람이 초췌한 눈으로 비척거리고 있을 뿐.

[ 내 병기를······. 어떻게 부순 거냐······. ]

준초월급에 속하는 마도병기였다.

고대 무기와 마계 기술이 합쳐져 만들어진 신무기.

심지어 그 고대 무기는 본래 초월자를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고대의 기록이 소실되어 본래 위력은 낼 수 없었다지만, 원로에게 큰 타격을 입히기엔 충분했다.

마계의 신이라 불리지만,

그들은 진짜 신이 아니다.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그들은 결국 하위 존재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병기의 폭발은 원로에게 치명적이었다. 

[ 끄으윽······. ]

유그람을 둘러싸고 있던 마기 방벽이 희미하게 깜빡인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로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가브리엘 너머의 무명을.

[ 우리가 쓰러진다고 해도······. 마계의 정점께서 네 놈을 살려두지 않을 거다. 혼돈의 지배자 또한······. 무명 네 놈을 노리고 있으니······. ]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푸화아악—!

가브리엘의 시야 공유를 통해 즉살이 발휘되었다.

유그람은 그렇게 최후를 맞이했다.

보라색의 영혼 한 줄기가 긴 궤적을 그리며 날아간다.

가브리엘은 뒤를 돌아 자신의 주인에게로 향했다.

『 첫 번째 원로가 처치되었습니다. 』

『 원로 처치 ( 1 / 6 ) 』

유그람이 처치되었다.

각자의 결계 속에서 무명을 기다리는 원로들의 동요 또한 커졌다.

"······유그람이 벌써 당했어. 쉽게 당할 놈이 아닌데."

"흠, 사도들 수준으로는 병기를 파괴하기 불가능할 텐데요."

"혼돈의 전령! 생각은 있는 거겠지?"

요새 간의 통신은 실시간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원로들을 총괄하는 것은 혼돈의 전령.

그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원로들에게 답했다.

"유그람이 몇 가지 정보를 남겼어요. 무명(無命)의 힘이 더욱 강해진 모양이에요. 적이 되는 대상 뿐만 아니라······. 이제 무생물조차 그 힘의 대상이 됩니다."

원로들이 다시금 술렁였다.

혼돈의 전령은 차분히 그들을 다독였다.

"걱정 말고 하던 대로 하세요. 무명은 인간입니다. 이기지 못할 괴물이 아니에요. 여러분은 마계를 이끄는 원로고요."

원로들의 힘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요새 내부라면, 무명을 이기지 못할 것도 없다.

혼돈의 전령은 그리 판단하고 있었다.

한편, 인류 측.

게이트의 중심부. 

게이트에 발을 들인 플레이어들은 거점을 형성한 뒤 주변 탐사에 나섰다.

"폭격이 사라졌네. 무명이 뭔가 한 건가?"

"무명의 사도들이 움직이던데."

"어쨌든 이제 수월하게 공략할 수 있겠어."

유일하게 바깥을 공격할 수 있던 유그람의 마도 병기가 파괴되었다.

플레이어들은 편하게 공략에 나설 수 있었다.

검게 물든 땅에는 여러 지형지물이 존재했다. 폐허, 지하, 협곡······.

등장하는 마물의 레벨은 높았지만, 일곱 개의 별에 해당하는 플레이어들을 필두로 인류는 빠르게 영역을 넓혀갔다.

"이곳의 돌조각을 반대편 구멍에 끼워 맞추면 될 것 같은데?"

"무너진 폐허에서 마기의 핵을 발견했다!"

"동쪽에서도 마기의 핵을 찾았다고 합니다."

인류의 헌터들을 내부로 들여 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단순히 레벨업과 아이템 파밍 이외에도, 그들의 존재가 공략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 시스템으로 형성된 모든 게이트는 공략할 수 있네. 아무리 어렵더라도 말이지. 시스템의 관리하에 놓인 이상 공략 가능성은 존재해야 하거든.

현자는 그리 말했다.

푸콰악!

게이트 내부 곳곳에 놓인 마기의 핵을 파괴할수록, 원로들의 힘은 약화되어 갔다.

마계의 핵을 드러내기 위해선, 곳곳의 퍼즐을 풀어야 했는데 이런 자잘한 일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맡기는 게 나았기에. 

푸콰아악!

마기의 핵이 4개째 파괴되었을 때, 검은 바위에 걸터앉아 있던 무명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랜턴 '소울 이터'가 최상위 마족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

『 최대 레벨 상승 + 15 』

『 현재 레벨 : Lv. 270 / 290 』

최대 레벨이 또다시 올랐다.

하지만······.

'일일 레벨 제한이 문제야.'

이미 오늘 하루 분량인 25를 올려버렸다. 하루가 지나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레벨업은 불가능하다.

물론, 해결할 방법은 있다.

정확히는 현자에게서 알아냈다.

『 랜턴 '소울 이터'가 영혼을 보존합니다. 』

- 원로 유그람의 영혼(UR)

여섯 원로의 영혼을 모두 모은 뒤, 영혼을 합성하면 더욱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낼 수 있단다. 그 균열을 통해 운이 좋다면 일일 레벨 제한을 해제할 수 있고. 

"그러면 다음은······."

원로를 쓰러뜨리는 순서도 꽤 중요하다.

첫 번째가 마도 병기를 소유한 유그람이었고, 두 번째는 검사인······.

"주인님, 그 미친 인간 찾았습니다."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루시퍼가 바라보는 방향, 상반신을 드러낸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귀환자 호영이었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서 두 번째 요새로 향하고 있었다. 비누방울처럼 만들어진 흑색 결계의 내부로 쑥 들어갔다.

"음. 명복을 빌어주죠."

루시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혼자서 원로를 상대하러 들어갔다. 루시퍼가 보기엔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짓이겠지.

하지만 모른다.

"승률은?"

- 유감스럽게도 나는 예언가가 아닐세. 다만 호영이라는 인간······. 꽤 강하다고 볼 수 있겠군.

"우리도 가야지."

두 번째 원로의 특성상, 사도들만 보내놓을 순 없다. 나는 빠르게 땅을 박차고 달려 두 번째 요새로 향했다.

"에이, 그놈은 혼쭐 좀 나야 하는데." 

"왜?" 

"너무 기고만장합니다." 

"······." 

딱히 별 이유는 없는 모양. 

결계를 지나치자 내부가 훤히 드러났다.

콰아아앙—!

들어가자마자 호영의 주먹과 원로의 검이 맞부딪혔다. 

막대한 에너지의 충돌. 

엄청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큭."

주변의 땅이 갈라지고, 뒤편의 커다란 성채가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거센 후폭풍이 지면을 타고 몰려왔다.

고작 주먹과 무기를 맞대었을 뿐인데, 이만한 충격파다.

원로는 전신에 마기를 두르고 있었다. 마기가 불길처럼 일렁인다. 그가 쥔 대검도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래선 즉살이 통하지 않는다. 

'내 즉살을 의식하고 있는건가.'

콰아아앙—!

다시금 호영과 원로가 격돌하기 시작했다. 공간 전체가 흔들리는 파괴적인 싸움이었다.

"뭐야, 저 인간······."

"저희 예상을 훨씬 웃돌게 강하네요. 볼 때마다 놀랍니다."

"원로랑 1대1로 맞설 수 있단 말인가······. 이 정도면 인간이라고 보기엔 힘들겠군."

사도들이 한마디씩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만큼 호영은 강했다.

[ 인간 주제에 건방지구나! 네 놈은 내 상대가 아니다! ]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원로의 목소리.

『 태초의 마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

『 이능 : 외력방지(外力防止) 』

원로를 향해 흑마력을 쏘아 보내려던 루시퍼가 멈칫했다. 창 끝에 모인 흑마력이 1m를 넘지 못하고 흩어졌다.

"쯧, 귀찮게 굴기는······."

원로 카그랄의 이능은 '외력 방지'.

원거리 기술을 무효화하는 능력이다. 바깥으로 나아가는 힘을 죄다 약하게 만든다.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하다면, 이쪽도 근접전으로 응수한다. 

"가브리엘."

"오케이."

내 한 마디에 가브리엘이 쏜살같이 날아 원로에게로 향했다.

뻐억—!

호영이 주먹이 원로의 안면을 강타했다. 그러나 원로도 지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호영은 곡예를 부리듯 허리를 뒤로 꺾어 검을 피했다.

퍼버버벅—!

이어지는 근거리난투.

"영웅 등장."

그 중간으로 가브리엘이 끼어들었다. 뻐억—! 가브리엘의 발차기가 원로의 대검을 쳐올렸다.

그 틈을 파고든 호영의 어퍼컷이 작렬. 가브리엘의 창이 물 흐르듯 움직이며 쉴 틈 없이 원로를 공격했다.

[ 하찮군! ]

원로의 대검이 가브리엘의 창을 쳐냈다. 단순한 허세는 아니었던 모양. 콰아앙—! 가브리엘이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그 한 번에 호영도 크게 밀려났다.

마기가 원로의 전신을 두르고 있는 이상 즉살은 통하지 않는다. 내가 휘두르는 무명검으론 마기를 뚫을 수 없을 것 같고.

그러나 방법은 존재한다.

우선은 제한의 해제. 

『 리미트 브레이커를 사용합니다. 』

『 가브리엘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 사도 '루시퍼'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모든 사도의 제한이 1단계 해제됩니다. 』

가브리엘의 제한이 2단계 해제되었다. 

동시에 나는 원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크하하하-! 그래, 무명! 직접 와라! 단칼에 죽여주마! ]

웃음 짓는 원로를 향해 땅을 박차고 나아간다. 무너진 지면을 건너 가브리엘과 합류.

원로의 검이 크게 휘둘러지려는 찰나.

나는 무명검을 가브리엘에게 던졌다. 척! 콰앙—! 무명검을 손에 쥔 가브리엘이 허공을 박차고 다시 한번 가속했다.

[ ! ]

죽음의 기운이 휘몰아치는 무명검.

일격 필살의 무기가 근접전의 귀재인 가브리엘의 손에 들렸다.

잠깐이지만 원로의 검이 흔들렸다.

아무리 마족의 정점이라고 한들, 여기에 다다르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원로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즉살(卽殺). 

단 한 번의 실수가 모든 것을 앗아가는 긴박한 상황.

상대해야 하는 건 무명인가.

아니면 무명의 검을 든 가브리엘인가.

정답은······.

뻐어억—!

뒤편에 있던 호영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혼신의 힘이 실린 일격이었다. 공간 주변이 깨어지며 투명한 파편이 흩날렸다. 

[ 커허억—! ]

원로는 검붉은 피를 쏟아냈다. 원로를 두른 마기의 불길이 크게 흔들리며 모습이 조금 드러났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즉살을 발휘했다. 가브리엘이 든 무명검이 원로를 꿰뚫은 것 또한 그와 동시였다.

푸화아악—!

『 두 번째 원로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원로 처치 ( 2 / 6 ) 』

녀석은 단말마조차 내뱉지 못한 채 사라졌다.

타앗.

나는 땅 위에 착지했다. 주변의 땅이 엉망이었다. 이마에 흐른 땀 한 방울을 슥 닦아냈다.

『 랜턴 '소울 이터'가 영혼을 보존합니다. 』

- 원로 카그랄의 영혼(UR)

이걸로 영혼은 두 개째다. 

나는 아이템 초기화 티켓을 찢었다. 리미트 브레이커의 쿨타임을 다시 초기화했다.

이제 다시 전투에 들어갈 수 있다.

"다음으로 갈까."

"물론이다. 파트너."

호영은 아주 자연스럽게(?) 내 옆에 섰다.

* * *

"카, 카그랄······!"

폭발이 일어났던 첫 번째 요새와 달리, 두 번째 요새의 전투는 모든 원로들에게 생생히 중계되고 있었다.

근접전에선 따라올 자가 없다고 여겨진 카그랄이 졌다. 원로들의 사기는 바닥까지 떨어졌다.

"나, 나는 못 이겨. 저 괴물을 어떻게 이기란 말이야?"

제 8원로 릴리에는 손톱을 물어 뜯었다.

당장이라도 게이트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었다. 태초의 마족으로서의 자긍심이나 자존심? 그딴 게 중요한가. 이제 죽게 생겼는데. 

릴리에는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 살아온 만큼 삶에 대한 집착도 커져 있었으므로. 

도저히 이길 수 있단 생각이 안 들었다.

그때였다. 

스륵.

그녀의 뒤쪽으로 혼돈의 전령이 나타났다. 그는 인기척도 없이 릴리에의 뒤로 다가섰다.

"아뇨, 이길 수 있습니다. 보기보다 대단하지 않아요."

"끄, 끄아악! 깜짝이야."

릴리에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이내 가슴을 쓸어내린 릴리에가 얼굴을 찡그렸다.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저걸 보고도 대단치 않다는 소리가 나오나?

"개, 개소리 하지마. 원로 7명을 박살 냈는데, 대단하지 않다고? 그러면 니가 가서 싸우면 되겠네!"

"그건 곤란해요. 시스템의 대리자들이 대거로 깨어날 거에요. 그러면 승산은 0%고요."

혼돈의 전령은 천천히 성채의 창문으로 향했다.

"진정하고 무명의 움직임을 살펴봐요. 전설급이에요. 겨우 전설급. 최상위 마족보단 강하지만······. 원로에 비할 바는 아니죠."

무명 본체는 사도들에 비하면 훨씬 약하다.

지금까지의 패배는 무명을 얕잡아 봤거나,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긴 일일 뿐이었다.

"그리고 원로가 죽을 때마다, 우리의 정보도 늘고 있잖아요."

"너, 너······! 우리를 실험쥐로······!"

"오해하지 마세요. 도와주는 거라니까요?"

『 세 번째 원로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원로 처치 ( 3 / 6 ) 』

『 네 번째 원로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원로 처치 ( 4 / 6 ) 』

그런 릴리에의 앞으로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

릴리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처음부터 잘못 되었을지도 모른다.

"도와준다고······?"

원로들의 잘못된 대처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따지고보자면 마계가 괴물을 키워낸 거다.

"누, 누가 봐도 이미 망했잖아······?"

쿠구구구—!

릴리에가 위치한 성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자신의 차례였다.

EX급 게이트(4)

제 8원로 릴리에.

쿠구구구······!

그녀의 요새가 붕괴하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무명의 즉살은 이제 물체에도 작용하므로. 

"어떻게 벌써?!" 

요새의 붕괴 따위 원로에겐 아무것도 아니다. 허나, 순식간에 두 원로가 당했다는 사실이 릴리에를 당혹케 했다.

그녀는 옆에 있는 혼돈의 전령을 재촉했다.

"이봐! 이대로 가면 나는 개죽음이야! 뭐라도 좋으니까 뭐라도 좀 해봐!"

릴리에는 전신에 마기를 둘렀다. 흑색의 마기가 스멀스멀 피어나 갑옷처럼 변했다.

잠시 고민하던 혼돈의 전령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직접 나서는 건 안 된다니까요. 대신 이렇게 하죠. 그쪽 하기에 따라 좋은 결과가 나올 거예요." 

동그란 안경을 올려 쓴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연보랏빛의 신비로운 기운이 릴리에를 감쌌다.

파직, 파지직—!

『 제 8 원로 릴리에 』

『 해당 존재를 일시적으로 플레이어로 규정합니다. 』

릴리에의 눈동자가 커졌다.

혼돈의 전령은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다.

게이트를 형성하고 판을 깔아준 게 혼돈의 전령이었으니까. 

하지만 시스템에 속하지 않은 자를 플레이어로?

설령 마계의 정점이 온다고 한들 이런 일은 불가능했다. 

"혼돈의 지배자님과 성좌 계약을 맺으세요. 막대한 힘이 당신에게 깃들 겁니다. 이 정도면······. 무명과 맞붙어볼만 하겠죠?"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성좌 계약을 제안합니다. 』

『 해당 성좌를 주시성으로 삼고 계약을 맺으시겠습니까? 』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는 릴리에가 침을 꿀꺽 삼켰다.

성좌 계약은 막대한 힘을 부여 한다. 플레이어 입장에선 거의 리스크 없이 강력한 힘을 얻을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 정도면 정말 할만했다.

아니, 무명이 아니라 마계의 정점이 와도 할만할지도 모른다.

어차피 방법이 없다.

이미 게이트에 발을 들인 이상 퇴각은 불가능.

무명(無命)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마계에 미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좋아. 하겠어."

릴리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 혼돈의 지배자와의 성좌 계약이 맺어졌습니다. 』 

성좌 계약이 체결되는 즉시, 혼돈의 기운이 릴리에의 전신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릴리에의 주변으로 검보랏빛 기운이 치솟기 시작했다. 혼돈의 기운이 주변의 공간을 집어삼킬 듯 검게 물들였다.

붕괴하던 요새의 잔해가 허공에 고정되었다. 요새가 있던 자리 전체가 릴리에의 영역이 된 것이다. 

이거라면 이길 수 있다.

그녀의 눈이 붉게 빛났다.

"그러면······. 무운을 빌겠습니다."

혼돈의 전령은 가볍게 손을 흔들고서 사라졌다. 릴리에는 자신의 힘에 취해 있느라 대답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아. 혼돈의 지배자는······. 이렇게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릴리에는 두 눈을 감았다.

끓어오르는 혼돈의 기운이 주변을 잠식해간다. 이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또렷하게 느껴진다.

무너진 성채의 잔해, 요새의 장벽, 제 8원로를 상징하는 깃발······.

그리고 붕괴에 휩쓸린 최상위 마족.

릴리에를 따르는 부하들이었다.

그들은 살아 있다.

"흐음······.' 

꽈악.

릴리에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수십에 달하는 최상위 마족의 주변에서 검보랏빛의 손아귀가 솟아 나왔다.

"리, 릴리에님!!"

"크아악!"

"어, 어째서?!"

콰득, 콰드득—!

손아귀는 최상위 마족들을 사정없이 짓이겼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눈앞으로 떠오르는 무수한 레벨업 메시지.

여기에는 일일 상승 제한도 존재하지 않았다. 혼돈의 전령이 부여한 플레이어의 권리는 일시적인 대신 강력했기에.

"그래, 이거야······."

릴리에는 희열을 느꼈다.

고작 누군가를 살해하는 것만으로 레벨이 오른다니.

이 얼마나 쉽고,

이 얼마나 치사한 일이란 말인가.

무명의 미친 듯한 성장의 배경에는 시스템의 도움이 분명히 존재했다.

원로들이 무수한 시간 동안 공들여 쌓아 온 힘을, 무명은 간단히 무시하고 있었으니. 

그 이유는 시스템 때문이었다.

"······질 것 같지가 않아."

콰아아아아—!

혼돈의 기운이 요새 바깥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별빛을 담은 검보라빛의 기운. 그건 무척이나 아름답지만 파괴적인 힘이었다.

"무명, 어디에 있든······. 그대로 끝장내줄게."

원로는 요새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이 이번 게이트의 규칙이었으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원로 릴리에는 더 이상 마물이 아닌 플레이어였으므로.

* * *

제 8 원로의 요새에서 터져 나온 파괴적인 기운. 그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주변의 공간을 잠식해오기 시작했다.

"혼돈의 기운일세! 막을 수 있겠는가?"

주작이 소리쳤다.

기운이 주변 공간을 장악하게 되면 골치가 아팠다. 청룡이 여의주를 들어 올렸다.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오색찬란한 빛이 여의주에서 쏟아져 나왔다.

『 춘하추동(春夏秋冬) : 봄 』

청룡의 궁극기가 발휘되며 일대의 땅이 도력으로 채워졌다. 검은 땅이 정화되고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난다.

『 해당 영역 내에 존재하는 아군의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

공간이 잡아 먹히는 것을 최대한 막아야했다. 

[ 무명. 개인적인 원한은 없지만, 너는 마계에 지대한 손실을 입혔어. 절대로 살려둘 수 없다. ]

쿠구구구······. 

"저, 저기!"

주작이 왼편을 가리켰다. 

혼돈의 기운이 거대한 드래곤의 형상을 하고서 퍼져나갔다. 그러나 무명 일행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반대편 다른 원로의 요새를 향해서 뻗어나갔다. 

콰아아아—!

혼돈의 기운을 빚어진 드래곤의 머리가 마지막 원로의 땅을 휩쓸었다.

"가, 같은 편을······." 

"마족 놈들이 뭐 다 그렇지." 

요새를 삼키자 혼돈의 기운이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같은 원로와 마족들을 죽여 성장한 것이다.

[ 원로끼리의 살해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지만······. 지금이라면 정점께서도 용서해주실 거야. 이게 아니라면 이길 수가 없는데. 안 그래? ]

멀지 않은 곳에 붉은 눈을 번뜩이는 릴리에가 있었다. 이제 그녀는 마(魔)의 화신이었다. 

주변의 공간이 일제히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붕괴한 지반이 천천히 부유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보스를 맞이한 느낌이었다.

"······."

쏟아내는 격에는 무명조차 숨이 턱 막혀 올 정도였으니.

"주작. 부탁할게." 

"걱정 말게!"

무명의 명령에 주작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주작의 몸 위로 거대한 화염이 솟아난다.

"이번에는 이 몸도 전력을 낼 테니."

이내, 그녀의 스태프 끝에서 붉은 섬광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붉은 레이저가 혼돈의 기운을 태우며 쇄도했다.

신화+급의 전력을 다한 일격.

[ 음, 이제야 알겠어. ]

릴리에는 가볍게 손을 들어 올렸다. 혼돈의 기운이 끈적하게 보호막을 형성했다. 붉은 섬광과 혼돈의 기운이 충돌했다. 

푸쉬이익!

혼돈의 기운이 섬광을 빨아들였다. 가벼운 연기가 나왔을 뿐 피해는 없었다. 주작이 미간을 좁혔다. 믿을 수 없단 표정이었다. 

"최, 최대 출력이었건만······."

심지어 제한이 한 단계 해제된 상태다. 청룡의 궁극기 덕에 능력치도 1.5배인 상태.

이 정도면 신화+급을 넘어 명실상부한 종말급이다. 

그런데 그 공격이 단번에 막혔다.

[ 이제야 혼돈의 전령이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이제 알겠네. 강하지 않아. 너희들은 강하지 않다고. ] 

릴리에는 여유롭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이전의 당황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져 있었다.

콰아앙!

허공에서 솟아난 손아귀가 주작을 쳐냈다. 주작은 그대로 땅바닥에 내다꽂혔다.

"주작······!"

궁극기를 전개하고 있던 청룡이 미간을 좁혔다. 안전지대를 형성해야 해서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 나는 괜찮네."

주작이 허리를 붙잡으며 일어났다.

다음 타자는 루시퍼와 가브리엘.

"주인님, 저희가 시선을 끌겠습니다."

"동시에 가자."

흑색과 백색의 빛이 쏜살같이 쏘아져 나갔다.

가브리엘은 곧장 궁극기를 전개했다. 새하얀 빛이 일렁인다. 

『 백광(白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 어림없어. ]

콰과과과과—!

사방팔방에서 쏟아지는 마기와 혼돈의 기운. 그것들은 탄환, 포탄, 레이저가 되어 두 사도를 노리고 쇄도했다.

릴리에는 땅에 가볍게 착지해서 두 사도의 공격을 받아냈다.

[ 느리고······. 약하고······. 뻔하고. ]

가브리엘의 창을 손가락으로 쳐내고, 루시퍼의 흑마력 광선을 가볍게 고갤 틀어 피해 낸다.

투두두두—!

릴리에의 등 뒤에서 솟아난 수십 갈래의 마기의 촉수가 끊임없이 가브리엘을 몰아붙였다.

"너무······. 강해."

"뭔?!"

루시퍼의 뒤쪽에서 나타난 손아귀가, 루시퍼를 낚아챘다. 콰아앙-! 그대로 휘둘러진 루시퍼가 지면에 쳐박혔다.

"다들 조심하게!"

다시 일어난 주작이 마법을 펼쳤지만, 그녀가 애써 만들어낸 태양조차 혼돈의 기운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콰앙, 쿠우웅! 뻐억!

전투는 계속된다.

가브리엘은 두들겨 맞으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이 창을 멈추게 되면 뒤쪽의 주인이 위험해지기에.

청룡도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혼돈의 기운이 퍼져나가는 걸 막지 않으면 주인이 위험해진다.

주작과 루시퍼도 혼신의 힘을 다해 공격을 퍼부었으나, 혼돈의 기운이 모든 공격을 허무하게 삼켜버리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패색이 짙은 상황. 

그때였다. 

저벅.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고 있던 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청룡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무명을 바라봤다.

"주인님."

"괜찮아."

주강혁은 걸음을 떼었다.

혼돈의 기운과 마기가 뒤섞인 극악의 환경으로 직접 발을 디뎠다. 화악-! 검은 기운이 전신을 타고 올라 오려고 한다.

원로는 강하다.

본래부터 강했다.

그저 즉살(卽殺)이라는 힘 덕분에 쉽게 물리쳐 온 것뿐.

그런데 거기에 혼돈의 전령이 힘을 보태었다. 사도들이 전력을 다해도 이길 수 없는 상대가 탄생했다.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러니 그에 맞는 대응을 해야했다. 

주강혁은 품 안에서 아이템 하나를 쥐고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나갔다. 

[ 여기까지 올 필요도 없어. 거기서 끝내줄게. ]

주강혁의 주변으로 마기의 칼날이 나타났다. 콰아앙-! 그러나 루시퍼와 주작이 곧장 공격을 쏟아부었다.

릴리에를 향해 공격하는 걸 포기하고, 주강혁을 엄호하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주강혁은 계속해서 앞으로 걸어나갔다.

[ 무슨 꿍꿍이인지 몰라도······. 거기 멈추는 게 좋을 거야. ]

쿠구구구구······.

혼돈의 기운이 솟아나며 드래곤의 머리가 되었다. 요새를 집어 삼켰던 것처럼 무명을 씹어먹으려 하고 있었다.

쩌어억—!

거대한 아가리가 무명을 덮치기 위해 벌려졌다. 콰앙, 콰아앙! 루시퍼와 주작의 공격에도 끄덕치 않는다.

"주인님!"

"주인!"

두 사도가 주강혁을 구하러 오려던 찰나. 주강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아아앙—!

돌연 나타난 호영의 발차기가 혼돈의 기운을 떨쳐냈다. 드래곤의 형상이 기운이 한 번에 흩어졌다.

"좋은 타이밍이군."

바닥에 착지한 호영은 그리 말했다. 루시퍼는 아연실색했다.

"뭐야, 네 놈 언제 그렇게 강해진 거냐······?"

"나는 약했던 적이 없다."

"상성이란 거겠죠."

청룡이 간단히 정리했다. 호영의 호위가 붙자 주강혁은 더 여유롭게 전진할 수 있었다. 

콰과과과—!

빗발치는 마기의 세례 앞에서 주강혁은 계속해서 나아갔다. 섣불리 빠르게 달려나가진 않는다. 사도들과 호영이 적의 공격을 충분히 요격할 수 있도록.

[ 멈추라고 했을텐데.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라면······! ]

그리 말하면서도 도망은 가지 않는다. 가브리엘이 그녀를 붙잡고 있어서? 아니, 릴리에에게도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저벅, 저벅.

다시금 걸음을 옮기는 바로 그 순간.

릴리에의 붉은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 그 자리에서 죽게 해주지. ]

그녀의 경고는 허풍이 아니었다.

일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전에도 몇 번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고오오······.

들끓던 마기와 혼돈의 기운이 해일처럼 치솟았다. 그것들은 각자 무수한 마물의 형상이 되어 주강혁 자신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바실리스크, 드래곤, 드레이크, 레비아탄······.

사도들의 경악한 얼굴이 보인다. 여태껏 무표정하던 호영의 표정에도 균열이 새겨졌다. 

그러나, 주강혁은 한없이 침착했다.

패배는 상정하지 않았다.

질 리가 있나.

이쪽에는 현자가 있고,

회귀자가 있는데.

적의 노림수는 처음부터 꿰뚫고 있었다.

이 다음부터는 간단하다.

그저 계획했던 대로 아이템을 사용할 뿐.

샤아아—.

주강혁이 왼손에 들고 있던 흑색의 큐브를 사용했다. 

『 [ 종말 ] 태초의 원념 : 제어종식 』

1회에 한해 시스템을 마비 시킬 수 있습니다.

- 소비 아이템 (사용시 드리무어의 영혼이 소비됩니다.)

맨 처음, 원로 드리무어를 처치하고 얻었던 아이템이었다.

그 효과는······.

시스템의 마비.

『 태초의 원념이 발휘됩니다. 』

『 이능(異能) : 제어종식(制御終熄) 』

파아아앗!

일대를 뒤덮고 있던 새까만 기운들이 일시에 걷어졌다.

새까만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솟아난 것처럼, 어둡던 주변이 맑게 걷혔다.

[ 뭐······? ]

뻥 뚫린 시야 속에서 릴리에의 당황스런 목소리가 들려 온다. 여전히 마기의 갑주 속에 있어 그 얼굴은 볼 수 없지만.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부탁하지."

제어 종식은 일대의 시스템을 마비 시킨다. 따라서 지금은 양 측의 시스템이 마비 되었다.

이 시점부터 어느 쪽이 유리한가를 살펴보자면.

아니, 이 시점에 누가 제일 강하냐고 묻는다면······.

"기대에 부응하겠다."

그건 당연히 무명검을 든 호영이겠지. 

처억. 

어느덧 호영의 손에는 무명검이 들려 있었다. 그 위로 진한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 시, 시스템이 없다고 달라질 것 같아······? ]

릴리에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급격하게 자신감이 사라진 목소리였다.

콰앙! 호영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원로에게 달려 들었다.

[ 나는 마계의 원로이자, 태초의 마족······! ]

릴리에의 마기가 칼날처럼 쇄도했다.

콰아아아—!

그러나 호영은 몸을 사리지 않았다. 쏟아지는 마기를 정면으로 받아내며 돌진했다. 복부가 꿰뚫리고, 허벅지가 베여도 그대로 전진. 불도저처럼 나아간다. 

[ 자, 잠깐······! ]

그리고 마침내.

콰드득—!

호영은 릴리에의 어깨에 무명검을 박아넣었다.

마기의 갑주를 단번에 쳐부수는 강력한 찌르기였다.

EX급 게이트(5)

『 여섯 번째 원로가 처치 되었습니다. 』

『 원로 처치 ( 6 / 6 ) 』

『 특수 게이트의 공략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게이트 내부의 모든 헌터에게 같은 메시지가 나타났다.

그들은 게이트 공략도 잊고서, 멍하니 원로의 요새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명이 이긴 건가······?"

요새 주변을 스멀스멀 잠식하던 마기가 잦아들었다. 그 크기가 어찌나 거대했던지, 중심부에 있는 헌터들에게도 보일 정도였다.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도 잔뼈가 굵은 이들이었다. 보통 상황이 아니었다는 건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자칫하면 끝장날 뻔했네."

"우리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을 것 같은데."

"이 게이트의 난이도는 대체 뭐야······?"

던전처럼 놓여 있는 폐허들과 구조물들. 

그곳에서 나오는 마물들은 265 - 300 사이의 마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놈들은 잔챙이에 불과하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원로를 처치해야 했으니. 

그들은 아마도 게이트의 보스와 같은 존재.

중심부의 헌터들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응원할 뿐. 

"후우······. 우리도 쉬자고."

"그래, 공략되었으면 된 거지."

"큭, 무명을 돕고 싶었는데."

"네가? 꿈도 크지."

게이트 곳곳에 산재하는 마기의 핵을 파괴하는 것만 해도 쉽지 않았으니까. 

서걱—.

섀도우 비스트를 베어낸 사최헌이 고개를 들었다.

"이겼나."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놀라움이 가시질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원로들은 명실상부한 마계의 최고위층.

여러 번의 회귀 속에서도 이토록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적은 없었다. 원로들은 언제나 강적이었고, 인류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하는 존재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고작 2페이즈 초반에 죄다 죽었다.

'미래가 또다시 바뀔 거다. 마계는 더 이상 정상 기능을 하지 못할 테니.'

현자가 가세하며, 무명은 현재의 정보를 모두 손에 넣게 되었다. 

'설령 지배자가 온다고 하더라도······. 준비만 잘한다면······. 붙어 볼 만할지도 모른다.'

사최헌은 그리 생각하며 눈앞의 마물을 베어 넘겼다.

고오오—.

헌터들이 들어 왔던 초대형 게이트의 색깔이 변화했다.

클리어가 완료되었다는 의미였다.

게이트의 공략 조건이 달성되었지만, 아직 탐사되지 않은 지역이 존재했다.

혼돈의 전령이 마계의 땅 일부를 거의 그대로 옮겨 오며 그에 대한 대가로 각종 아이템과 보상이 잠든 게이트가 되었다. 탐사할 가치는 충분했다. 

"쿨타임 감소 아이템 찾았습니다!"

"무명 헌터에게 줄 선물로 남겨두자고."

국내와 해외의 길드들은 계속해서 공략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여섯 번째 원로를 처치한 자리.

주강혁 일행이 있었다. 

"후······. 이겨서 다행일세."

"이번에는 상대는 조금 강했을지도."

가브리엘과 주작은 서로 등을 맞대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모두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섯 번째 원로를 이기기는 했지만 다들 지쳤으므로. 주강혁만 멀쩡하고 나머지는 만신창이였다. 

"도움이 별로 못 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루시퍼도 근처의 솟아오른 땅에 걸터앉아 있었다. 전력을 퍼붓다시피 했는데도, 원로인 릴리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주인님이 소유하고 있던 아이템으로 시스템을 마비 시키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아냐, 충분했어. 너희가 날 엄호해준 덕분에 원로의 근처까지 다가갈 수 있었던 거니까. 제어종식에는 범위 제한이 있었고."

주강혁은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제어 종식이 없었다면 애초에 싸움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방법을 시도했을 것이고.

벌떡.

가부좌를 틀고 맨바닥에 앉아 있던 호영이 몸을 일으켰다.

"이겼으니 돌아가겠다."

"어······."

주강혁이 무어라 붙잡을 새도 없이 쏜살 같이 사라져 버렸다.

"뭐, 상관없나." 

주강혁은 뻗었던 손을 내렸다.

특이하기는 한데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은 안 든다. 어차피 곧 볼 일이 다시 생기겠지.

주강혁은 시스템 창으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 랜턴 '소울 이터'가 영혼을 보존합니다. 』

- 원로의 영혼(UR) x 6

릴리에가 없앴던 원로의 영혼도 소울 이터로 흘려들어 왔다. 그리하여 6원로의 영혼을 모두 모았다.

- 대단하군.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대단해. 마계의 원로들 11명을 혼자서 쓸어버리다니. 지배자의 자질은 충분하고도 남아. 아니,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고말고. 후후. 

현자 아스펠트의 사념이 전해져 왔다. 그는 즐겁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 돌아오면 영혼을 조합해 주겠네. 그게 첫 발자국이 될 걸세.

영혼을 조합해 소울이터에게 먹이면 일일 레벨 제한을 해제할 수 있다고 했다.

그것만으로도 숨통이 크게 트일 것이다.

촤르륵—!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행보에 주목합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크게 감탄합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경악합니다. 』

『 선(善) 성향의 성좌들로부터 3 플래티넘 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

『 악(惡) 성향의 성좌들로부터 5 플래티넘 코인을 후원 받았습니다. 』

성좌들이 메시지가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자신의 선택에 만족합니다. 』

전 재산을 걸었다던 검은 별의 주인은 매우 좋아하고 있었고.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의 화끈함에 미소 짓습니다. 』

비교적 초반부터 함께했던 이계 규율도 만족하는 모양.

그러나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성좌들의 반응이 아니었다.

『 질서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큰 관심을 가집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불쾌한 표정을 드러냅니다. 』

지배자들의 반응이다.

"이 놈 뻔뻔하게 메시지까지 보내고. 안 꺼져?"

루시퍼가 주강혁 주변의 별들을 향해 소리쳤다.

『 혼돈의 지배자가 코웃음칩니다. 』

"이 자식이. 넌 죽었다. 성좌로 돌아가기만 해봐. 아니, 멀리 갈 것도 없지. 현세에서 끝장내주마."

『 혼돈의 지배자가 사도를 도발합니다. 』

주강혁은 그런 루시퍼를 보며 볼을 긁적였다.

메시지로 싸운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않다.

다만, 놈들의 태도는 확실하게 알았다. 

현자의 말에 따르면 이번 일의 주동자는 혼돈의 지배자다.

원로들을 독촉해서 현세를 침공하게 했단다. 

그것이 실패했으니,

이제 어떻게 나올지가 문제다.

다만, 이제는 우리도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현자가 합류한 이상 적의 정보는 우리 손아귀에 있으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