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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3 - 23

* * *

"뭐란거야, 저 자식 갑자기 고백을 하는데요?"

루시퍼가 역겹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

죽여서 언데드로 만들어버리겠단 의미겠지. 원로 드리무어도 그렇고 어째 생각하는 방식이 다 비슷한가보다. 

상상만해도 끔찍하네. 물론, 패배할 거란 생각은 안 든다. 

고고고고—!

본 와이번과 흑골 부대를 전부 처치하자, 드디어 제하자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의 땅 위로 뼈다귀가 솟아난다. 온갖 종류의 뼈가 급속도로 성장해 숲을 이루기 시작했다.

굉장히 기괴한 모습이다.

"마무리는 두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천이령과 사최헌을 뼈 숲에 남기고서 청룡 폼으로 변한 청룡에 올라탔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불평했다.

"왜 나한테는 안 타? 이거 편애야."

비둘기인채로 그런 말을 해도······.

발 하나도 간신히 걸칠만한 크기인데.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시퍼가 발을 내밀었다.

"오냐, 내가 타주마."

루시퍼가 새하얀 비둘기의 위에 발을 올려두려는 찰나.

휙, 콕콕콕콕!

발길질을 재빨리 회피한 비둘기가 루시퍼의 다리를 마구 쪼아댔다.

"어쭈, 종말급 사도한테······."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청룡이 둘을 무시하고서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어디선가 날아온 불길한 바람과 악취가 얼굴에 맞닿는다.

공중으로 올라오자 아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졌다.

평지였던 땅 위에 수많은 유해가 솟아올라 있다. 태초급 사도의 등장만으로 지형이 판이하게 뒤바뀌었다. 

거대한 거인의 가슴뼈가 지면 위에 놓여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드래곤의 뼈나, 거대 동물의 유해로 보이는 것도 놓여 있었다. 

"이렇게 뼈가 많은데······. 왜 소환하지 않은거지?"

"소환하자마자 박살날 게 뻔하니까요."

"······뭐, 그렇겠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자,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검은 불길이 미친듯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후웅—.

태초급 사도의 격(格)이 전신을 엄습해 온다. 어찌저찌 견딜만하다.

"조금 더 접근하겠습니다."

청룡은 태연하게 말했다.

사도들은 격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성좌인 그들은 이미 최상급의 격을 소유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 신수, 청룡을 언데드로 만들 수 있다라. 그래, 그리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다. 주작에 악마, 천사까지! ]

광기에 젖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중에 떠올라 있는 제하자르. 그의 손짓 한 번에, 지면에 있던 뼈들이 일제히 조립되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촤르르륵—!

무수한 뼈가 모여 뱀의 형상을 이룬다. 뱀은 아가리를 쩌억 벌린 채 청룡을 향해 돌진해 왔다.

'······부술 수 없다.'

뱀의 형상에 분명하게 흑색의 기운이 깃들어 있다. 뼈만 있었다면, 혹은 저 자체가 마물이었다면 쉽사리 부쉈겠지만.

'마법으로 분류되는 건가?'

마력이 담긴 마법은 파괴하지 못한다. 그게 지금의 내가 가진 약점이었다.

콰아아아—!

청룡은 허공에서 한 번 더 빠르게 가속했다. 가까스로 뱀의 아가리를 피해냈다.

청룡의 머리에 선 루시퍼가 창을 들어 올렸다.

"뭐든, 오라고! 다 부서줄테니까!"

[ 원한다면 그리 해주마! ]

쿠구구구—!

이번에는 일곱 개의 뼈 기둥이 솟아 올랐다. 아니,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보이는 모든 시야에서 기둥이 솟아오른다. 그것들은 각각의 형상이 되어 청룡을 향해 쇄도했다.

두 개의 달 아래, 거대한 뼈 기둥이 한점을 향해 보여들고 있었다. 그 하나 하나가 빌딩에 맞먹는 크기다.

"위로는······?!"

"위쪽도 막히고 있습니다!"

피할 길도, 피할 수 있는 장소도 없는 공격.

"그러면 방법은 하나네."

나는 루시퍼를 바라봤다.

"역시 주인님, 저랑 같은 생각이시군요."

고오오—!

루시퍼의 창 끝으로 짙은 기류가 형성되었다.

『 사도 '루시퍼'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흑암(黑暗) : 종말의 밤 』

주작의 스태프에서도 찬란한 광휘가 휘몰아쳤다. 가브리엘이 눈을 반짝이며 청룡을 내려다봤다.

"청룡, 드디어 브레스를 쓰는 거야?"

"아뇨. 루시퍼 선배와 주작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맞는 말이다.

콰아아앙—!

루시퍼의 흑마력과 주작의 화염이 뼈로 이뤄진 기둥을 꿰뚫었다. 강한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정면이 열렸다.

청룡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앞으로 돌진했다.

[ 무명, 네 놈에 대해선 전부 파악하고 있다. ]

빠져나오자, 그 앞에는 제하자르가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 기운을 갑옷처럼 두른 놈의 주변에는 뼛조각들이 띠가 되어 흐르고 있었다.

마치 토성의 고리처럼.

[ 보이지 않으면 죽이지 못하고 마법은 파괴하지 못한다. 안 그런가? 이미 네 수는 전부 읽혔단 말이다. ]

날카로운 뼛조각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한다. 투두두두—! 정면으로 나선 가브리엘이 창을 회전 시켜 뼛조각을 튕겨냈다.

그러나 튕겨나간 뼛조각은 공중에서 크게 폭발했다.

콰앙-! 콰앙!

청룡이 몸부림치며 허공에서의 체류가 불안정해졌다. 나는 청룡을 밟고 하늘 위로 뛰어 올랐다.

신화급의 육체 능력으로부터 뿜어지는 힘찬 도약력.

[ 피해 면역 아이템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다! ]

제하자르의 등 뒤에서 나타난 척추가 촉수처럼 쇄도해 왔다.

"주인님!"

내 옆으로 바짝 붙은 루시퍼가 창으로 척추의 궤도를 틀어냈다. 하나, 둘, 셋. 세 개의 척추를 쳐냈지만, 결국 루시퍼의 어깨 죽지가 꿰뚫렸다.

그러나 괜찮다.

나는 확실하게 제하자르에게 다가갈 수 있었으니.

[ 예컨데 죽이지 않을만큼의 충격을 준다면······. 아이템은 발동하지 않는 거겠지. 안 그런가? ]

촤아악—!

다시금 새로운 척추가 나를 향해 쇄도해 온다. 카가각—! 나는 무명검을 들어 척추를 흘려냈다.

일순.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듯한 착각이 든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이전에도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전투에 극한으로 집중했을 때.

그 순간에만 발휘되는 무언가.

내 시선이 향한 것은 제하자르의 뒤편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푸른 선 하나가 그어진다.

나는 저 선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사최헌이 공간검으로 그어낸 공간상의 균열. 공간에 새겨진 균열의 틈으로 천이령의 모습이 드러난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천이령은 단검을 휘둘렀다.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새하얀 기운이 넘실거리는 절대적인 기운.

진(眞) 항마.

내가 사용하는 것을 단 한 번 보고서 익혀낸 것이었다.

촤아아악—!

제하자르에게 상처를 남기자마자 잠시 열렸던 균열이 닫혔다.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진 항마의 기운이 제하자르를 잠식하기엔 충분했다. 제하자르가 두르고 있던 검은 마력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 어느 틈에······! ]

그를 두르고 있던 뼛조각의 띠도 허공으로 흩어졌다.

놈의 얼굴이 이제는 잘 보인다.

[ 그래봤자 나는 죽지 않는다! 내게는 생명의 그릇이 있으니! ] 

"그거?" 

- 생명의 그릇은 파괴 되었다네! 

현자로부터 들려 오는 목소리. 

당연하지만 사최헌과 천이령이 파괴해두었다. 두 사람도 놀고 있었던 게 아니니까. 

[ 거, 거짓말······! 잠깐! ] 

제하라즈의 얼굴은 공포와 경악에 물들어 있었다.

전력 외라고 생각했던 사최헌과 천이령에게 이 정도로 당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 못했던 거겠지.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을 발휘합니다. 』 

푸콰아아악!

제하자르는 죽는 순간까지 알지 못했을 거다.

한순간의 실수.

한순간의 방심이 절명을 부른다는 것을.

이 싸움에서 유리한 건 언제나 나 뿐이다.

쿠구구구······.

뼈로 이뤄졌던 거대한 숲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지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사도 제하자르가 목숨을 잃었다는 증거였다.

나는 허공에서 떨어져 내리면서 제하자르가 남긴 별빛을 손에 쥐었다.

'이걸로 남은 혼돈의 게이트는 한 개.'

대마법사가 있다던가.

거기만 해치우면 마계의 정점을 마주하게 된다.

천이령이 그렇게 복수하고 싶어 하는 적이자, 현세를 몰락시키고자 하는 마계 침략의 원흉.

쿠웅—!

나는 지면에 착지했다. 수십 미터 상공에서 떨어졌지만 전혀 충격이 없다. 신화급 육체니 당연한가.

"이제 다음으로 가볼까."

나는 손에 넣은 별빛을 확인했다. 이걸로 루시퍼를 종말+까지는 등급업 시켜줄 수 있겠지.

그리 생각하며 손을 펴보는데.

『 [ 2★ ] 인과의 붉은 별빛(소모품) 』

- 사도의 등급을 2단계 상승시킵니다.

"어라······?"

2단계짜리가 나타났다.

태초급 사도(1)

'2단계 등급 상승이라니······.'

이거면 루시퍼가 단숨에 태초급 사도로 발돋움 할 수 있을 정도다. 

손에 쥔 인과의 별빛에 감탄하고 있는데 

『 성좌 '시체의 왕'이 분노합니다. 』 

『 성좌 '만물을 손에 쥔 자'가 이를 악뭅니다. 』

패배자들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화가 난 듯 허공을 맴도는 두 성좌를 향해 나는 피식 웃었다. 

"별빛은 잘 받아간다." 

『 성좌 '이계 규율'이 패배자들을 깔깔 비웃습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승리에 기뻐합니다. 』

『 일부 성좌가 당신에게 후원합니다. + 4 플래티넘 코인 』 

성좌였던 그들은, 자신이 패배할 거라고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겠지. 

덕분에 허를 찌르기 쉬웠다.

"지, 진짜 쓰러뜨렸네요! 다행이다!" 

저 멀리서 천이령 헌터가 달려 오고 있었다. 사최헌도 뒤쪽에서 천천히 걸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이번 승리의 일등 공신이다. 

"라이프 베슬의 파괴. 아주 좋았다. 마지막 공격도 훌륭했고."

나는 천이령 헌터를 향해 칭찬 담긴 말을 건네었다. 천이령은 배시시 웃으면서도 멋쩍은지 뒤통수를 매만졌다. 

"별 거 아닌데요, 뭘. 그냥 시키는대로만 했을 뿐인걸요." 

"아냐, 주인님 말씀이 맞아. 훌륭했다, 꼬맹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어느새 다가온 루시퍼도 천이령에게 한마디를 건넸다. 그런데 녀석의 어깨에 난 상처가 심상치 않다. 

투둑, 투두둑······.

붉은 피가 계속 쏟아진다. 나를 보호하려다 어깨에 치명상을 입은 것이다. 

"루, 루시퍼님? 괜찮아요?" 

천이령이 쪼르르 달려가 루시퍼를 살폈다. 루시퍼는 저리 가라는 듯 손을 휘저었다. 

"별 거 아니야. 이 정도면 빵 먹으면 나아." 

"빵······?"

뒤이어 도착한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빵을 먹는다고 상처가 나을 리가 없잖아. 같은 표정이다. 

천이령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빵 먹으면 나으니까요. 제가 가진 거 드릴까요?"

"오, 땡큐." 

사최헌의 표정이 한층 더 구겨졌다. 

"다들 제정신인가? 빵을 먹는다고 나을 리가······. 여기에 제대로 된 포션이 있다. 이걸 써라."

"냠."

포션을 건네기도 전에 루시퍼가 조화의 빵을 뜯어먹었다. 상처 부위는 빠르게 재생되어 회복되었다. 

흐르던 피가 멎고 새살이 돋아났다. 찢어진 루시퍼의 의복은 금세 마력으로 복구 되었고.

조화의 빵이 가진 효과 덕분이었다.

"뭔······." 

사최헌이 그 자리에 굳어졌다. 고개를 돌린 루시퍼가 차게 식은 눈으로 포션을 바라봤다. 

"뭐야? 그 허접한 포션은." 

"······그런거였나. 그래서 빵을 먹었던 거였어. 그런 거였군."

사최헌은 그제서야 이해간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최헌한테도 하나 줄까. 나는 품에서 빵을 한 개 꺼내 사최헌에게 건네었다. 

"하나 줄테니 아껴 써라. 한 입 씩 먹어도 충분할 거다."

"고맙······군."

사최헌은 엉겁결에 빵을 받아들었다. 손에 쥐자 빵의 정보가 보이기 시작했는지,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다가 사최헌은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대량 생산은 할 수 없나?"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밖에 없어서." 

대량으로 만들어 팔면 돈을 쓸어 담는 건 일도 아니겠다만. 천이령이 혹사 당하게 된다. 대화를 들었는지 천이령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 각오하고 있을게요. 이 또한 수련······!"

"아니, 딱히 그럴 필요는 없는데." 

주먹을 불끈 쥐며 각오를 다지는 천이령. 대량생산은 수련이 아니라 노동착취다. 

어쨌든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잠시 흩어졌던 사도들도 슬그머니 도착했다.

나는 모든 사도가 모인 것을 확인하고서 입을 열었다.

"이제 남은 혼돈의 게이트는 하나. 대마법사의 게이트인데······. 공략 전에 이걸 보여주고 싶어서 말이야." 

『 [ 2★ ] 인과의 붉은 별빛(소모품) 』

- 사도의 등급을 2단계 상승 시킵니다.

나는 손을 펼쳐 사도들에게 별빛을 보여주었다. 

은은한 붉은 빛이 감도는 별. 

주작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별을 살폈다. 

"2단계라니." 

"제하자르가 가지고 있던 인과가 그만큼 크고 복잡했다는 의미겠네요. 시스템은 그만한 보상을 하니까요."

청룡의 말대로 제하자르는 무수한 해골 병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놈의 등장과 함께 지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 뼈들. 

그것들이 되살아나서 게이트를 빠져나갔다면? 

"······." 

상상하는 것만으로 등골이 오싹해진다. 

뭐, 해치웠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고. 그보다 중요한 건 이걸 어떻게 쓰느냐다. 

"이걸 누구에게 사용할까." 

나는 사도들을 한 번씩 둘러봤다. 

주작이 작은 키로 손을 번쩍 들었다. 청룡은 팔짱을 낀 채, 모호한 미소만 짓고 있었고, 가브리엘은 내쪽으로 아예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나는 조용히 가브리엘을 밀어냈다. 

"미안. 사실 정해져 있었어. 루시퍼에게 쓰는 게 제일 낫겠지."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뒤쪽에서 폼 잡은 채 돌에 기대고 서 있던 루시퍼가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부익부 빈익빈 반대···! 이래서는 평생이 지나도 신화급 사도를 벗어날 수 없어······. 자, 다들 나를 따라해." 

가브리엘이 나머지 사도들의 호응을 유도했지만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주작도 들었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고. 청룡은 고심하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저는 주인님의 선택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태초급 적을 상대하려면, 이쪽도 태초급 사도가 있어야겠죠. 그 편이 가장 합리적이기도 하고요." 

"아쉽지만, 그 편이 지금 상황을 타개하기엔 최선이라고 생각하네." 

주작마저 한 발자국 떨어져서 섰다. 

"헐." 

혼자가 된 가브리엘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가급적 균형을 맞출 생각이니 너무 실망할 필욘 없다고 보는데. 

나는 루시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본격적으로 성장할 준비가 된 루시퍼가 무릎 한 쪽을 꿇은 채 내 앞에 앉았다. 

흡사 기사 서임식의 한 장면. 

예전에도 이런 자세로 등급을 올렸었지. 

'이번에는 단번에 태초급으로······.' 

종말급으로 격상할 때, 새로운 기억은 나타나지 않았다. 

'매번 기억을 보여주는 건 아니란 말이지.'

전용무기를 손에 쥐었을 때, 신화+급이 되었을 때. 그 두 번만 루시퍼에게서 기억이 흘러나왔었다. 

'규칙이 있는 건가?' 

모르겠다. 

하지만 이번에 태초급으로 격상하면 기억이 보일 거라는 느낌이 든다. 어디까지나 느낌이지만. 

샤아아—. 

손바닥 위에 놓았던 붉은 별빛이 루시퍼를 향해 흘러 들어간다. 파직, 파지직!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주변이 붉은 노이즈로 물든다. 

『 흑의 사도 '루시퍼'의 등급이 2단계 격상합니다. 』 

『 강렬한 인과의 변동이 발생합니다. 』 

메시지가 떠오르는 동시였다. 

고오오······.

루시퍼에게서 퍼져나온 붉은 기운이 순식간에 나를 휘감았다. 아니, 나뿐만이 아니었다. 

"우왓?!" 

"이건······." 

천이령과 사최헌에게도 붉은 기운이 감돌았다. 시야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풍경이 일시에 바뀐다. 

다음 순간.

나는 멸망한 세계에 있었다. 

* * *

이전에 봤던 기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붉게 물든 하늘에는 반파된 행성의 파편이 흐르고, 달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거대한 블랙홀이 하늘 반대편에서 요동친다. 

그러나 발을 디딘 장소는 틀림없는 지구였다. 

내 앞으로 세 명의 사람이 보인다. 

나, 사최헌 그리고 천이령.

"끄윽······." 

내가 아는 모습보다 한결 성장해 있었다. 미래에는 저런 모습이 되는구나. 다만, 단순히 감탄하기엔 상황이 심각했다. 

천이령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녀의 손에 들린 단검은 칼날 밖에 남지 않았고 스태프는 흉하게 꺾여 있었다. 

나와 사최헌의 꼴도 말이 아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건물의 잔해에 몸을 기대고 앉아 있다. 특히나 내 눈빛은 체념한 것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모두의 앞에는······. 장발의 남자가 있었다. 은빛의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다. 

[ 씨앗을 거두러 왔다. ]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씨앗?'

남자의 앞에 무릎 꿇은 천이령은, 피를 쏟아내면서도 일어나려고 애쓰고 있었다.

"너······. 너만은 절대로 용서 못해······!"

두 눈을 부릅 뜬 천이령의 눈동자에선 지독한 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설마, 저 녀석이 마계의 정점?' 

천이령의 가족을 살해했다던 원수. 

그녀는 부러진 칼날을 손에 들고서 삐걱이는 몸을 움직였다.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복수의 대상을 향해서.

그러나 거기에는 어떠한 특별함도 없었다. 

지금의 천이령과 같은 천부적인 재능도 눈에 띄는 기교도 없다. 그저 간절함 하나만으로 부러진 칼날을 휘두르는 것처럼 보인다. 

스윽. 

마계의 정점은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해냈다. 터억, 마계의 정점은 검의 손잡이로 천이령의 목덜미를 쳤다. 

털썩. 

천이령이 그대로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한 것 같았다. 

정점의 손아귀에서 짙은 마기가 피어 올랐다. 

천이령의 가슴 팍에서 검은 장미가 피어 오르더니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천이령이 허공으로 띄워졌다.

마계의 정점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 그릇은 준비 되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펄럭—!

흑색의 깃털과 함께 루시퍼가 내려 앉았다. 12쌍의 날개, 머리 위에 떠오른 분명한 헤일로까지.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허공에서 다리를 꼬았다. 

[ 마계의 무지렁이 치고는 썩 즐겁게 하는구나. ] 

[ 현세에 볼 일은 끝났다. 다른 이들은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

[ 내게 명령하지 마라. 하등한 존재야. ]

[ ······. ]

둘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짙은 마기의 안개가 몰려오더니, 마계의 정점은 천이령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루시퍼 녀석. 

완전히 악당이다.

잠시 마계의 정점과 손을 잡았던 모양. 

이제 남은 것은 루시퍼와 나 그리고 사최헌 뿐. 

루시퍼는 턱을 괸 채 말을 이었다. 

[ 생각해봤단 말이지. 어째서 고작 인간에 불과한 네 놈이······. 나를 불러낼 수 있었던 건지. ] 

녀석의 시선은 쓰러진 나에게로 향해 있었다. 

여기서 한 가지 사실이 밝혀진다. 

과거의 회차에서도 루시퍼를 부른 것은 나였던 거다. 

추측해보자면 소환은 했지만 통제를 못했다거나?

[ 네 덕분에······. 천계의 끝자락에는 닿았다. 곧바로 추락해서 이꼴이지만 말이야. ] 

루시퍼는 자신의 날개를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뜯겨진 흔적이 있었다. 

이전 기억에서 루시퍼는 천계의 정점에 서고 싶단 말을 했었다. 도전했다가 실패한 모양새다. 

"그래서······. 아직도 나를 돕고 싶다는 생각은 안드나?"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도 루시퍼를 설득하려 하고 있었다. 지면에 내려 온 루시퍼는 저벅저벅 걸어와 내 앞에 섰다. 

콰악. 

루시퍼는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움켜 쥐었다. 

[ 나는 명령 받는 게 싫다. 누군가에게 속박되는 게 죽어도 싫단 말이야. ] 

무지막지한 살기가 흐른다. 투욱, 루시퍼는 이내 내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러고선 돌아섰다. 

[ 뭐, 대단한 이유라도 있나 싶었지만. 결국 별 거 없었군. 네 놈이 나를 부른 건 순전한 운이였던 거다. ] 

화악. 

날개를 펼친 루시퍼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그냥 내 최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장소.

부서진 건물의 잔해 사이에서, 나와 사최헌은 다가오는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이 몇 회차라고······?" 

기억 속의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사최헌에게 물었다. 사최헌은 쇳소리와 함께 대답을 토해냈다. 

"······10번째다." 

"망했네."

"망했지." 

사최헌은 자조하듯 쓴웃음을 지었다. 

나는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른 행성의 파편이 구름처럼 흘러가는 세계. 

거대한 블랙홀은 당장이라도 지구를 집어 삼킬 듯 거대해져 있었다. 

"희망은 보이나?" 

"달라졌다. 조금이지만······." 

사최헌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기억 속 나는 고개를 젖히며 피식 웃었다. 

"네가 고생이다." 

내 위로에도 불구하고 사최헌의 얼굴에는 그늘이 깊어졌다. 

"방법이 있는지 모르겠다. 무슨 짓을 해도······. 사도들은 협력하지 않고, 시스템의 종말은 멈추지 않는다. 대체 뭘 어떻게 해야······."

그 말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소리를 했다. 

"······배가 고프네. 먹을 거 없냐?"

나는 다친 몸을 이끌고 사최헌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주강혁······."

사최헌의 부상은 더욱 심각했다.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빵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겠네. 뭐, 대단한 거 말고. 편의점에서 파는 빵 있잖아. 그거라도······."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유언치고는 황당한 말이었지만, 왠지 의도가 짐작이 간다. 누구도 아니고 또 다른 나니까. 

10번째 회귀.

사최헌이라고 한들 제정신으론 견디기 힘들지도 모른다. 

나는 사최헌이 가진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니면 죽기 직전이라 헛소리한 걸 수도 있고. 

낸들 알겠나. 

"다시······. 다시······."

사최헌은 그리 중얼거리며 자신에게로 향한 검을 들어 올렸다. 

푸욱-!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화아악. 

시야가 암전되더니, 물감이 번지듯 본래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시간은 흐르지 않은 듯했다.

"허억—!" 

"큭—!" 

사최헌과 천이령이 동시에 숨을 뱉어냈다. 두 사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이번에는 이 둘도 기억을 확인한 건가? 

청룡이 곧장 내게 다가왔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이번에는 어떤 기억이었습니까?" 

미처 입을 열기도 전이었다. 

"잠깐, 주인. 루시퍼가 심상치 않아." 

가브리엘이 앞쪽을 가리켰다. 바로 앞쪽에서 검은 흑마력이 루시퍼를 중심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고오오—! 

"크윽······." 

루시퍼는 팔로 흑마력을 가려야 할 정도로 강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었다. 

녀석의 머리에서 작은 뿔이 자라난다. 날개가 돋아나고, 머리 위에 희미한 후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뜬, 루시퍼의 눈에선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 이 힘······. ] 

루시퍼의 목소리에는 격이 서려 있었다. 녀석은 천천히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보았다. 

[ 그래, 잊고 있었다. 나는 루시퍼······. 칠흑의 사도이자, 악마들의 왕······. ] 

거센 기류가 폭풍처럼 터져나온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한 느낌. 

그러고보니 기억을 되찾았을 때, 루시퍼의 힘도 일부 해방되었었지. 설마, 이번에는 기억에 영향을 받아서······? 

"배, 배신인가······?!"

가브리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가브리엘은 나를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진정해라. 

루시퍼는 가브리엘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짓더니 말을 이어갔다. 

[ 그리고 무명(無命)님의 충실한 종. 제 1 오른팔, 전 세계의 2인자······. 동시에 태초급 사도. ]

역시 배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휴······."

"후, 다행." 

청룡과 주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브리엘도 가슴을 쓸어 내렸다. 

[ 다시 태어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기억에서 봤던 저는 부디 용서해주시고······. ]

루시퍼는 성공적으로 태초급 사도가 되었다. 루시퍼는 전에 없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 어떤 일이든 본부만 내려주시죠. 주인님께서는 아무것도 안하셔도 됩니다.] 

번쩍—! 

루시퍼의 뒤로 번개가 내리치며 일대가 환해졌다. 존재만으로 날씨를 바꾸는 기백. 과연 태초급이라 할만하다. 나는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어디······.

"태초급 사도의 힘 좀 볼까."

태초급 사도(2)

제 3 혼돈 게이트.

이집트 카이로, 거대한 피라미드의 앞.

기이잉—. 콰앙—!

2m 크기의 골렘의 양손에서 마력 포탄이 쏘아졌다. 쩌저적! 거센 폭발과 함께 헌터들이 형성한 보호막에 금이 거미줄처럼 새겨졌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헌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골렘이 무슨······?"

"뭐, 저런 위력이 다 있어?"

마력 포를 쏘아대는 골렘뿐만이 아니었다. 쿵, 쿵! 지축을 울리며 돌진해 오는 골렘들이 방어막을 두드렸다.

쩌적, 쩌저적!

"방벽 전개 제대로 해!"

"구역 바깥으로 못 나가게 막아!"

"더럽게 단단해서 공격이 안 통해!"

피라미드 일대는 혼돈 게이트에 의해 침식되어 있었다. 지면이 보랏빛으로 변하고, 정체불명의 수정과 식물들이 자라나는 상황.

『 필드 : 혼돈계 』

- 마물의 능력치가 증가합니다.

-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 존재의 능력치가 감소합니다.

마물은 한층 강해지고 헌터들은 약화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발생한 던전 브레이크.

"크윽, 뚫렸다! 젠장. 틀어막아!"

"내 팔, 내 팔이!"

"끄아악!"

200레벨 언저리의 헌터들로는 막아내기 버거운 게 당연했다.

[ Lv.542 ]

골렘의 머리에 박힌 보석이 붉게 점멸했다.

콰앙! 콰앙!

골렘의 주먹이 한 번 휘둘러질 때마다, 지면을 뒤엎을 정도의 충격이 헌터들을 덮쳤다.

한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힘든데 그러한 골렘이 30여기에 달한다. 헌터들은 포기 직전이었다.

전선은 붕괴했다. 보호막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더, 더는 못 버텨!"

"무명(無命)은 아직 멀었어? 그거 말고는 답이······."

"지원이다, 지원이 왔어!"

절망적인 상황이 이어지던 그때.

누군가가 소리쳤다.

헌터들의 얼굴에 순간 희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무명?

그러나, 헌터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새하얀 로브를 맞춰 입은 세이비어였다.

헌터들의 얼굴이 구겨졌다.

"큭, 이봐······. 그쪽들로는 못 막아!"

"조심해, 골렘들이 날뛰기 시작했어!"

"이래선 붕괴는 못 막아······!

노골적인 불평 속에서, 세이비어 소속의 헌터 열 명이 전장에 뛰어들었다.

골렘 한 개체가 세이비어를 노리고 달려들었지만, 세이비어의 움직임은 조직적이었다.

"이쪽이다, 골렘!"

"여기다!"

우선 앞에서 시선을 끄는 사람 둘. 두 사람의 도발 스킬이 골렘을 끌어들였다.

타앗, 콰드득!

동시에 골렘의 공격을 피해 뒤로 돈 인물 셋이 골렘의 연약한 부분에 검을 박아넣었다.

콰과광!

이어서 원거리에서 공격을 퍼붓는 마법 계열 헌터까지. 골렘의 몸체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쿠웅!

골렘은 이내 육중한 몸뚱이를 땅에 뉘었다. 

순식간에 한 마리가 처치되었다. 

말 한마디 없이 발휘되는 환상적인 팀워크.

모두 예언자의 별에서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예언 덕분이었다. 세이비어는 지시에 따라 정확하게 움직였다. 무너졌던 방어선이 재구축 되기 시작했다. 

"뭐야, 꽤 하잖아······. 큭, 여기 이쪽도!"

"아직 많이 남았어!"

헌터들도 그제서야 무기를 들고 다시 일어섰다. 

제 1, 제2 혼돈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세이비어가 게이트 앞의 혼란을 잠재우는 것처럼 보였다.

잠시 동안은 말이다.

"잠깐, 저거 뭐야?!"

게이트의 바로 앞으로 빠져나온 골렘이 이동식 포대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참극은 순식간에 일어났다. 

자리를 잡은 골렘의 포신을 통해 응축된 마력 포탄이 발사되었다.

콰아앙—!

주변을 초토화시키는 강력한 폭발.

방어구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헌터들은 그대로 의식을 잃거나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런 공격이 연달아 쏟아졌다. 

"크아악!"

"젠장······."

안전한 장소에 자리를 잡은 세이비어는 무사했지만 또다시 방어선이 붕괴되었다.

고오오-. 

재정비를 할 틈도 없이 다시금 골렘의 포신 위로 방대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바닥에 쓰러진 헌터 하나가 소리쳤다.

"어떻게 좀 해봐······!"

"저걸 못 막으면 끝장이야."

"세이비어는?" 

그러나 세이비어의 일원들은 주춤대기만 할 뿐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10여기의 골렘을 뚫고 마력 포탄을 쏘는 골렘을 처치한다?

예언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언자들의 입에서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세이비어의 일원들이 쓰러진 다른 헌터들을 업고 자리를 떠나려던 바로 그때였다.

콰아아아—!

검은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거센 흑색의 기운이 폭풍처럼 피라미드 근처를 뒤덮었다. 피하거나 벗어날 수 있는 종류의 재해가 아니었다.

"뭐, 뭐야? 마물의 짓인가?"

"크윽, 아무것도 안 보여!"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

세이비어도, 헌터들도 한 발자국도 뗄 수 없었다. 항거할 수 없는 짙은 흑마력이 그들을 감쌌다.

그야말로 자연재해.

쿠구구구······.

흑마력은 골렘들에게 더욱 가혹했다. 지면에 다리를 고정했던 골렘들이 점차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윽고 하늘에서 짙은 격이 서린 음성이 내려왔다.

한없이 오만하고, 깔보는 듯한 목소리.

[ 인간들 치고는 잘 버텼다. 주인님께서도 기뻐하실 거다. ]

어둠을 뚫고 번뜩이는 붉은 안광.

그 광경은 누가보아도 강대한 마물의 출현.

휘몰아치는 격 앞에 헌터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존재만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격(格).

헌터들의 얼굴이 끝없는 절망으로 물들었다.

"허어억······."

"트, 틀렸어."

"여기서 끝인가."

세이비어와 헌터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눈을 질끈 감는 바로 그 순간.

[ 기껏 구해주러 왔구만, 반응들이 왜 이래? ]

루시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헌터들을 내려봤다. 공간이동 능력자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빨리 왔건만 왜 다들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군단 말인가.

뭐, 상관없었다.

[ 주인님께서 살려주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무명(無命)께 감사해라. ]

루시퍼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흑마력의 소용돌이가 골렘들을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콰과과과과—!

마치 블랙홀이 모든 것을 빨아들이듯.

대포의 형태를 한 골렘도, 헌터들을 향해 돌진하던 골렘도. 무엇하나 할 것 없이 블랙홀의 중심부로 빨려들어갔다.

콰아앙—!

이윽고 그 중심부에서 강력한 빛 기둥이 솟아 올랐다.

루시퍼가 상황을 정리하기까지는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 하루에 세 번, 아니 만 번씩 주인님을 향해 절하도록. ]

루시퍼는 헌터들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 * *

제 3 혼돈 게이트 내부.

『 고대문명도시 : 고대마법연구지 』

무명 일행이 그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제 3 혼돈 게이트의 외부를 루시퍼가 말끔히 정리해준 덕분에 진입은 쉬웠다. 무명 일행은 평범하게 걸어서 게이트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여기가 마지막 게이트인거죠?"

천이령이 단검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골렘들이 빠져나왔던 게이트다. 주변에 뭐가 있을지 몰랐다.

물론 천이령이 긴장할 필요는 없었다.

[ 꼬맹이, 그냥 쉬어라. '태초급' 사도인 이 몸께서 곧바로 공략해줄 테니. ]

한껏 어깨가 올라간 루시퍼가 앞으로 나섰으므로. 주강혁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목소리에 힘 좀 빼줄래?"

"앗, 크흠. 저도 모르게."

그제서야 루시퍼가 자신의 격을 숨겼다. 

목을 가다듬은 루시퍼가 날개를 펼치고서 날아올랐다.

"어쨌든 주인님께선 주무셔도 괜찮습니다. 시야 공유는 유지할 테니 심심하시면 시청하셔도 됩니다."

"······그 정도야?"

"물론입니다. 허풍이 아닙니다. 믿어보셔도 됩니다."

주강혁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봤다.

상형문자가 새겨진 블록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오래된 유적지처럼 신기한 구조물이 늘어서 있다. 과거 고대문명이 번성했던 도시의 흔적이 남아 있다. 

물론, 이 게이트에서 제일 중요한 건 저기에 있다.

멀리 떨어진 장소에 기다랗게 솟은 탑이 보인다.

'저기에 대마법사가 있으려나.'

고대의 대마법사 융허. 

놈은 태초급 사도이다. 

물론 같은 태초급이라고 해도 루시퍼는 궁극기로 제한을 1단계 해제할 수 있다. 그 차이만해도 상당히 압도적일 거다.

여차하면 시야 공유를 통해서 즉살을 발휘할 수도 있고. 이번에는 루시퍼를 믿어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디 한 번 맡겨볼까."

주강혁의 허락이 떨어졌다.

태초급이 된 루시퍼의 힘이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골렘을 처치한 정도로는 그 힘을 가늠하기 힘들다.

"감사합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아, 물론 그 전에······."

루시퍼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

유적지의 곳곳에서 흑마력이 촉수처럼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기이잉, 기잉! 솟아오른 흑마력에 휘감긴 골렘들이 마구 발버둥치고 있었다.

기습을 하기 위해 숨어 있었던 놈들이었다.

루시퍼는 가소롭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콰아앙—!

흑마력이 즉시 골렘들을 박살 냈다.

"오." 

"그러면 진짜로 다녀오겠습니다."

루시퍼는 별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선 허공을 쏘아지듯 날아갔다.

날아간 자리를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까마귀 녀석. 너무 기고만장해졌어."

뭐, 어떤가.

즐기게 놔두자.

루시퍼가 사라진지 몇 초나 지났을까. 콰아앙—! 멀리 떨어진 탑이 반파되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고고고—.

심지어 맑았던 하늘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하늘의 태양은 여전히 밝은데도 하늘은 검게 물들어 간다.

콰아앙! 

이어서 막대한 규모의 폭발이 연달아 터져 나왔지만, 천이령 헌터가 곧장 펼친 결계 덕분에 이쪽에는 여파가 전혀 없다.

일행 모두가 그 광경을 우두커니 서서 바라봤다.

"태초급이 장난 아니긴 하네."

이 정도면 굳이 주강혁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었다. 

"편하긴 하네요. 선배에게 모든 것을 맡긴다는 죄책감은 있습니다만······."

청룡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깐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브리엘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감자칩을 꺼내 봉지를 뜯었다.

와삭, 와삭.

"생각이 바꼈어. 신화급 사도로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태세전환 한 번 빠르네.

어쨌든 루시퍼 덕분에 우리는 한가해졌다.

진짜로 아무것도 안해도 될 것 같다.

'혼돈의 전령이 가세하거나 하면 나도 나서야겠지만······. 일단 주변에는 안 보이고.'

만약 있었다면 루시퍼나 다른 사도들이 먼저 알아챘을 거다.

그때였다.

"다들 서 있지 말고 앉아라."

뒤쪽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던 사최헌이 우리에게 말했다.

뒤를 돌아보니 휴대용 버너를 중심으로 간이 의자가 인원수에 맞게 펼쳐져 있었다.

투욱.

사최헌은 주전자를 꺼내서 버너에 올렸다. 주전자는 순식간에 끓기 시작하더니 증기를 내뿜었다.

"저만한 규모의 싸움에는 끼어들어봤자 방해만 될 테니까."

사최헌은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찻잔을 꺼내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차를 우려냈다.

"······."

"······뭘 그렇게 보는 거지?"

"아니, 준비성 철저하네 싶어서."

보통 던전에 캠핑 세트를 들고 오나?

따지려다 관뒀다. 

하긴, 기왕 쉴 거면 제대로 쉬어야지.

털썩.

주강혁은 사최헌이 준비한 의자에 앉았다. 주강혁이 앉자 사도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마시멜로를 구울래."

가브리엘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시멜로를 꺼내들었다. 어디선가 주워온 나뭇가지를 꽂아서 버너에 굽기 시작했다.

달콤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나도 하나 괜찮겠는가?"

"저, 저도요."

"받아." 

가브리엘은 주작과 천이령에게도 마시멜로를 나눠줬다. 

청룡도 사최헌에게서 받아든 찻잔을 홀짝였다.

사도들은 기본적으로 천성이 느긋하다. 긴장감이 없다고 해야 하나. 내 안전이 확보 되기만 하면 한없이 마이페이스인 경향이 있다.

"······."

이렇게 보니까 진짜 캠핑 온 것 같네.

잠깐, 진짜 이래도 되나?

주강혁은 잠시 눈을 감아서 루시퍼의 상황을 확인했다. 

쾅, 콰앙! 대마법사가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있었다. 

- 크아악!

대마법사의 비명이 절절하다. 

심지어 루시퍼는 궁극기를 사용한 상태. 싸움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였다. 반항 한 번 못하고 대마법사 쪽이 밀려나고 있었다. 

······괜찮겠네.

주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참에 조금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두 개의 게이트를 연달아 공략하느라 다들 지쳤을테니. 

그때, 정면에서 사최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명(無命). 네게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리 말하는 사최헌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사최헌은 품 안에서 수정 하나를 꺼내더니 가볍게 던졌다.

우웅. 

수정은 버너의 위에 떠올랐다.

『 반경 10m의 공간이 아공간화 됩니다. 』

『 더 이상 성좌들의 눈이 닿지 않습니다. 』

『 해당 공간이 비전투지역일 경우에만 효과가 발휘됩니다. 』

역시 그냥 휴식만 취하려고 의자를 펼친 건 아니었던 모양.

사최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홀짝이고선 주강혁을 바라봤다.

"그 기억은······. 대체 뭐였던 거지?"

역시 사최헌도 기억을 봤던 거였다. 

* * *

고대의 대마법사 융허.

그는 태초급의 사도로서 이 세계에 강림했다.

아득히 먼 옛날 소멸했던 자신의 연구 시설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현세의 무명(無命)이란 인간을 처치하기로 계약했다. 

자신이 패배할 거라곤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웨펀마스터 간타가 당했을 때도, 네크로맨서 왕 제하자르가 당했었을 때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고대의 마법은 만물의 근원이었다. 어떠한 힘에도 대항할 수 있는 초월적인 능력이기도 했다.

반면 무명이란 인간의 약점은 명확했다.

놈은 물체를 파괴할 수 있으나,

마법까진 파훼하진 못했다.

따라서 가볍게 끝장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데 왜.

대체 어째서.

콰아아앙—! 콰과과광!

지금 자신이 일방적으로 두드려 맞고 있단 말인가.

[ 커허어억—! ]

융허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 뭐냐, 겨우 이 정도냐?! 겨우 이 정도로 현세에 발을 들인거냐?! ]

루시퍼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흑마력을 난사했다. 휘몰아치는 흑마력의 격류 앞에서 융허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까스로 고대 마법을 발휘한다고 해도······.

와장창—!

루시퍼의 흑마력이 고대의 마법을 통째로 깨부술 뿐이었다. 콰과과과—! 그 충격에 융허의 연구시설이 지반째 무너져 내렸다.

애당초 융허에게 승산이 없는 싸움이었다.

같은 태초급이라고 하나 루시퍼는 최상위 성좌다. 반면 융허는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성좌였고.

흑마력이 칼날처럼 쇄도했다. 융허의 신체로는 견디기 힘든 충격이 연달아 몰려왔다. 

[ 이이익—! ]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마법을 펼쳤지만 소용 없었다. 마법을 시전하는 족족 흑마력에 의해 분쇄당하는데 뭘 어쩌겠는가.

[ 네 놈은 주인님을 마주할 자격조차 없다. 여기에서 죽어라. ]

루시퍼는 차가운 눈빛으로 창을 들어 올렸다.

주인님의 목숨을 노리고 현세를 침공했을 놈.

그런 놈에겐 일말의 자비조차 사치였다.

콰아아아—!

루시퍼의 창 끝에서 공간을 찢는 흑마력이 쏘아졌다.

* * *

굉음과 함께 저 멀리에서 흑색의 빛 기둥이 솟아올랐다. 뒤이어 눈부신 섬광이 치솟고 거센 후폭풍이 일대를 뒤집어 놓았다.

"오." 

이때까지 보았던 것 중에 가장 큰 폭발이었다.

물론, 결계 안에 있는 우리는 멀쩡했다. 멀리 떨어져 있기도 했고.

잘 키운 루시퍼 덕분에 호강한다.

그래, 매번 열심히 싸웠으면 한 번 정도는 쉽게 넘어가야지.

나는 사최헌이 건네줬던 차를 홀짝였다.

"······맛있네."

따스한 기운이 전신에 스며든다. 차 끓이는 스킬이라도 있는 걸까.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다.

"질문에 답해라, 무명." 

사최헌은 물었다.

그 기억은 뭐였냐고.

아마 동일한 기억을 봤던 거겠지.

사실 나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가 모르는 과거가 존재한다고 봐야겠지."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태초급 사도(3)

"잊혀졌던 과거라고?"

사최헌은 못 믿겠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지."

물론 사도들도 극구 부인하기는 했다. 성좌인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과거가 있을 리 없다면서.

그렇다면 만들어진 기억인가?

그럴리가. 

그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기억은 사도들이 전용 무기를 쥘 때마다 등급을 올릴 때마다 나타났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명검으로부터 떠오른 해방 퀘스트까지.

『 2차 해방(解放)의 조건 』

『 지배자의 전령 처치 - 0 / 1 』

심지어 무명검은 유일하게 죽음의 기운을 두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누구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단순히 우리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기억을 심어놓은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기억을 확인할 때마다 전투력의 상승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기억을 알려주려 하고 있는 쪽에 가깝지. 무언가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 흑의 사도 해방 : 루시퍼의 기억 확인 ( 35% ) 』

이번에 루시퍼의 새로운 기억을 확인하며 해당 조건도 퍼센티지가 올라갔다. 23%에서 35%로.

시스템에 깃든 어떠한 의도가 해방을 향해 유도하고 있다.

'마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것처럼······.'

원로 처치. 그 다음에는 전령 처치.

"어째서 우리에게 그런 기억을 보여줬는지는 계속해서 확인해 봐야 할 문제겠지만······. 적어도 거짓 같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내 말을 들은 사최헌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혼란스럽군. 하지만······. 조금은 이해가 간다. 설마, 그래서 내 기억 속에 무명(無命) 네가 없던 거라면······."

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그의 기억 속엔 내가 없다고 했다. 몇 번이고 이 세계를 반복하면서도 단 한 번도 나를 만난 적이 없단다.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내 능력을 생각하면 모를래야 모를 수 없으니까.'

사최헌은 머리를 헝클이더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봤다.

"그렇다면 내 기억이 전부 거짓이라는 건가? 그 기억들이?"

"아니, 그렇게까지는 말한 적 없는데."

나는 그냥 우리가 봤던 기억이 잊혀진 과거라고 말하려던 것뿐이다. 

그때였다.

"잠깐, 지금까지 나눈 말대로라면······. 사최헌 아저씨는 회귀자?"

그 말에 천이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제 와서 놀라긴 너무 늦은 사실이다. 물론 천이령에겐 방금 알려주긴 했지만. 하읍. 가브리엘이 천이령의 입에 마시멜로를 물려줬다.

천이령은 마시멜로를 우물우물 씹어 삼킨 다음에 재차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저도 할 말이 있어요. 제가 봤던 기억. 무명님이 말했던 거랑은 달랐거든요. 저는······. 마계의 정점이 저를 끌고 간 다음을 봤어요."

"다음 기억을 봤다고?"

"네."

기억 속에서 마계의 정점은 쓰러진 천이령을 데리고 사라졌었다. 천이령은 그 이후를 본 게 확실했다.

"그놈은 저를 죽이지 않았어요. 지하 감옥 같은 곳으로 끌려갔는데, 거기에는 저와 같은 '씨앗'이 많이 있었어요."

"씨앗?"

"그놈이 그렇게 불렀어요. 거기서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 있었는데······."

천이령은 거기까지 말하다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저는 죽었어요.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고요."

별로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갑자기 분위기가 숙연해지자, 천이령이 재빨리 손을 흔들었다.

"아뇨, 아뇨. 근데 그 기억에서 되게 여러 기술들을 볼 수 있어서 저는 오히려 좋았달까······. 엄청난 도움이 됐어요."

자기가 죽어가는 기억을 보면서도 기술을 익혔다는 소리였다. 자신의 죽음조차 성장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의미. 역시 천이령 헌터도 보통 사람은 아니다. 

'마계의 정점이라.'

뭐,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볼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마계의 정점에 대해선, 현자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을지도."

"잊혀진 과거에 대해서도 이미 물어봤나?"

"물어봤지만 모른다던데."

"영 쓸모가 없군."

사최헌이 혀를 찼다.

그래도 마계의 정점에 대해선 알겠지.

"아스펠트가 지금도 우리를 보고 있으려나?"

나는 버너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보석을 바라봤다. 저게 성좌의 시선을 막아준다지만, 루시퍼의 사념은 멀쩡하게 작동했다.

현자의 능력도 통할 거다.

- 응? 나를 찾았는가? 아쉽게도 하나도 못 들었네. 현세에는 꽤 재밌는 것들이 많군. 견문이 넓어지는 기분이란 말이지. 그래, 이쁜이들. 오래 기다렸나?

예상대로 곧장 아스펠트로부터 텔레파시가 도착하긴 했는데.

"······."

뭐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그때였다.

콰아아앙—!

유적의 한쪽으로 무언가가 추락했다. 너덜너덜해진 로브를 걸친 노인이었다. 

고대의 대마법사 융허.

[ 으아아아아—! ]

놈은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우리는 안중에도 없는듯 하늘을 향해 고함을 내질렀다.

강대한 격이 결계를 뚫고 우리 쪽을 휩쓸었다. 천이령의 의식이 잠시 끊기며 쓰러지려는 것을 주작이 붙잡아 주었다.

융허의 포효는 계속되지 못했다.

콰과과과광—!

하늘에서 폭격하듯 쏟아진 무수한 흑마력의 탄환이 융허를 덮쳤다. 자욱하게 솟아오르는 흙먼지. 먼지가 걷힌 자리, 융허의 눈은 이미 뒤집혀져 있었다. 

[ 끄으윽······. 내가······. 내가 이다지도 허무하게······. ]

털썩.

융허의 무릎이 꺾였다. 최후를 맞이한 융허의 신체가 재가 되어 흩날리기 시작했다.

태초급 사도끼리의 전투.

그 승자는 루시퍼였다.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

어둡게 물들었던 하늘이 맑게 개고 있었다. 루시퍼는 별 일 아니라는 듯이 귀환했다. 

"주인님, 끝났습니다."

"고생했어. 덕분에 편하게 잘 쉬었어."

"뭐, 별거 아닙니다. 다음에도 맡겨만 주시면 전부 해치우겠습니다."

루시퍼의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하다. 태초급이 되어서 좋기는 좋은 모양.

머리에 자라난 뿔도 그렇고, 희미하게 떠오른 헤일로도 그렇고. 태초급 사도라는 느낌이 물씬 난다.

"그러면 보상을 확인할까."

나는 아직도 따뜻한 차를 마지막으로 홀짝이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쉽다 쉬워. 루시퍼를 태초급 사도로 만들기를 백 번 잘했다. 

고오오—.

융허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인과의 별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 [ ★ ] 인과의 녹색 별빛(소모품) 』

- 아이템에 별을 하나 부여합니다.

아쉽게도 이번에는 사도의 등급을 올리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까비.'

루시퍼를 태초+급으로 올리려고 그랬는데 아쉽게 되었다. 

별빛의 종류도 여러가지인 모양.

나는 별빛을 손에 쥐었다. 뭐, 이건 이거 나름대로 나쁘지 않다.

'사용처는 정해져 있다.'

내가 가진 아이템 중에서 가장 특이하면서도, 가장 뛰어난 성능을 보유하고 있는 것.

『 [ 신화+ ] 무명검(無命劍) 』

스릉. 

나는 무명검을 검집에서 꺼냈다.

신화+급으로도 사용하는 데 불편은 없었지만 앞으로 상대할 적은 더욱 강할 거다.

'혹시라도 검이 안 통하는 일은 없어야지.'

별이 부여된 아이템은 기존의 등급 체계에서 벗어나게 된다. 아티팩트와 같은 특수 아이템 취급이다.

사도들의 전용 무기가 1성급이었고 영혼랜턴인 소울이터 또한 1성급이다. 그 성능은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고. 

나는 별빛을 사용했다.

『 인과의 녹색 별빛을 '무명검'에 사용합니다. 』

『 무명검에 별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

반짝이며 녹아든 녹빛이 무명검을 덮었다. 샤아아—. 강화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겉보기엔 크게 다를 게 없는데.

뭔가 달라진 건가?

"오오······."

"이건 확실히 달라졌네요."

어느새 내 주변으로 모여든 사도들이 무명검을 구경하고 있었다.

『 [ ★ ] 무명검(無命劍) 』

- 공격력 + 1400

수치가 크게 상승하긴 했지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다.

'사용해보면 알겠지.'

나는 검을 쥐어 보았다. 그립감도 무게도 이전과 변함없다.

'잠깐. 확실히 다르다.' 

하지만 죽음의 기운을 부여하는 순간, 그 차이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전보다 더 많은 죽음의 기운이 부여된다.

고오오······.

죽음의 기운이 검의 크기를 넘어서까지 부여된다. 검에 마력을 두르는 검기처럼 죽음의 기운이 뻗어진다.

"보, 보기만해도 위험해 보이는데요?"

정신을 차린 천이령이 무명검을 보고선 몸을 움츠렸다.

"이게 보여?"

"네, 잘 보여요."

검에 맺힌 죽음의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모양.

나는 시험 삼아 무명검을 휘둘러 보았다.

콰아앙—!

검기에 닿은 유적의 일부가 그대로 파괴된다. 검이 직접 닿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체감상 검의 크기가 30% 가량 늘어난 느낌이다. 

이거 잘만하면 검기를 쏘아보낼 수도 있으려나?

뭔가 연습하면 될 것 같기도 한데.

다만, 연습이나 하고 있을만큼 시간이 넉넉치 않다.

슬슬 게이트 클리어 메시지가 떠오를 때도 되었고.

아니나 다를까, 시스템 메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팅!

『 제 3 혼돈 게이트를 클리어하셨습니다. 』

『 세 개의 게이트를 모두 공략하는데 성공했습니다. 』

- 최고 기여자 : 무명(無命) 99.99%

『 혼돈의 에너지가 현세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

『 2페이즈 최후의 시련이 현세에 강림합니다. 』

『 진(眞) 혼돈의 강림까지 남은 시간 : 24 시간 』

태초급 사도들을 전부 해치웠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들의 패배를 양분 삼아 새로운 혼돈이 찾아올 예정이었다.

진 혼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다.

마계의 정점.

그가 직접 현세에 강림하게 될 것이다.

청룡이 씁쓸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태초급의 사도를 쓰러뜨렸다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현세에 그에 상응하는 힘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하게 되죠."

시스템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할만하지?

그럼 이것도 막아봐.

막지 않아도 멸망.

막으면 더 큰 재앙이 찾아온다.

무슨 가불기가 따로 없네.

물론, 이 기가 막힌 난이도의 배후에는 혼돈의 전령이 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녀석을 없애지 않는 이상, 이 재앙은 끝나지 않을테지.

나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그러면 이제 혼돈의 전령을 처리하러 가야겠지."

세 번째 게이트까지 클리어된 지금.

항의할 타이밍이 있다면 지금 뿐이다.

당연히 항의할 대상은 혼돈의 전령이 아니다. 

"시스템의 대리자를 만나러 갈 시간이다."

* * *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북극.

이번에도 공간이동 능력자 유지훈의 도움을 받았다.

- 자, 장난 아니게 바빠요. 그래도 무명님이 최우선입니다. 여러분만 믿고 있을게요! 

24시간의 카운트다운 때문에 전 세계가 난리인 모양. 우리만 옮겨주고선 곧장 사라져버렸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눈보라를 뚫고서 북극을 나아갔다.

"여기에 정말로 대리자가 있단 말이야?"

루시퍼는 못 믿겠다는 듯 사최헌에게 물었다.

"못 믿겠으면 돌아가라."

"돌아갈 것까지는 없고······."

그건 그렇고, 꽤 춥다. 천이령은 양 팔을 붙잡고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추, 추워요······."

"내 쪽으로 붙게나. 화염 마법을 응용해서 체온을 올리는 마법을 가르쳐줄테니."

주작이 친절하게 보온 마법을 알려줬다. 곧이어 주변으로 따뜻한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몇 번 와봤으니 틀림없다. 이쪽이다."

사최헌은 익숙하다는 듯 길을 안내했다. 그러고보니 혼자서만 방한구를 걸치고 있네. 준비성 철저한 건 알아줘야 한다.

사최헌은 아무것도 없는 지점에서 스마트 워치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다. 여기에서 시스템에 충격을 주는 행위를 하면······. 대리자를 불러낼 수 있다."

"충격을 주는 행위?"

"예를 들면, 소멸과 생성을 반복하는 두 아이템을 충돌시키는 거다."

사최헌은 설명과 동시에 보석 두 개를 꺼내들었다.

"내가 가진 아이템은 이게 마지막. 따라서 이번이 마지막 호출이다."

타닥, 타다닥!

사최헌은 두 개의 보석을 부싯돌처럼 부딪혔다. 치직, 치지직—. 반응이 있었다. 허공에 노이즈가 생성된다.

두 보석은 사라졌다가 나타났다를 되풀이했다.

무슨 원리인지는 모른다. 사최헌이 알아서 잘하고 있는 거겠지. 역시 회귀자가 동료니까 편하다. 

사최헌은 진득하게 그걸 반복했다. 어깨에 눈이 소복히 쌓일 무렵, 노이즈가 강해졌다.

치직, 치지직—!

짙은 노이즈와 함께 금발의 소녀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성공이었다.

검은색 천으로 눈을 가린 금발의 소녀. 대리자 알파. 천칭과 검을 양손에 든 그녀가 땅 위에 사뿐히 발을 디뎠다.

『 대리자 알파가 잦은 호출에 의문을 품습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그녀의 의사를 대신해 표현한다.

"이번에는 내 용건이 아니다."

사최헌은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말할 차례였다.

"혼돈의 전령이 부당하게 시스템을 조작해, 현세를 침공하고 있는데. 이대로 놔두는 게 맞아?"

『 대리자 알파가 해당 시퀀스에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

마인이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했을 때는 칼같이 나서더니, 이럴 때는 침묵한다.

'예상은 했다.'

현자에게 듣기로 혼돈의 전령은 시스템을 조작하는 권능을 가지고 있단다. 따라서 대리자는 현 상황을 부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긴다는 건데. 

"지금의 난이도는 누가봐도 불공정한데."

『 대리자 알파가 고개를 젓습니다. 』

『 현재 시스템의 난이도는 적절한 상태입니다. 오히려 무명(無命)의 존재가 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할 가능성이······. 』

나는 대리자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건 내가 현세에 남아 있을 때의 이야기잖아. 근데 난 불공정한 게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거든. 벌써 태초급 사도를 셋이나 어거지로 잡았다고. 계속 이런 식이면······."

나는 내 주위를 돌고 있는 성좌들을 가리켰다. 

시스템은 성좌들의 의견에 좌지우지 된다.

사실상 그들이 유일한 관람객이며 손님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러한 성좌들을 가장 많이 보유한 플레이어다.

『 당신을 주시하는 성좌의 수 : 452 』

마계의 원로를 차례차례 격파하고, 태초급의 사도까지 세 명 처치한 시점에서 내게 붙은 별의 수는 헤아리기 힘들 정도.

"성좌들 데리고 잠깐 다른 차원에 갔다 올까하는데. 그래, 통상 마법계가 좋겠네. 영지도 있고 성도 있으니까. 잠시 쉬다 오지 뭐."

물론 실제로 그럴 마음은 추호도 없다. 

내 빌딩을, 아니 고향을 버리고 떠난다니 상상할 수도 없지만······. 대리자가 내 속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다녀오면······. 뭐, 현세는 쑥대밭이 되어 있겠지만 말이야. 마계의 정점을 지금 인류가 어떻게 버텨? 지구가 통째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은데."

"이야, 제가 성좌였다면 무지 화가 났을 것 같은데요."

"화로 끝나면 다행이지. 시스템 자체를 갈아 엎자고 나서는 성좌도 있을 걸. 밸런스가 안 맞잖아."

"인정. 말도 안 되는 망겜."

옆에서 사도들이 한마디씩 거뒀다. 전(前) 성좌들의 말이라 실감나는 건 덤이었다.

『 ······. 』

대리자 알파가 고장난 것처럼 굳어졌다.

나는 쐐기를 박았다.

"어려운 부탁 안할게. 직접 살펴봐. 혼돈의 전령은 도를 넘었어. 시스템을 조작하고, 나 하나를 잡자고 시스템의 근간을 뒤흔들고 있다니까?"

틀린 말은 하나도 없었다.

'제발, 통해라.'

혼돈의 전령을 어떻게든 처리하긴 해야 했다.

이대로 놔두면 다음에는 또 뭘 데려올지 모르니.

모두가 숨죽여 대리자를 지켜보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침묵하던 대리자가 시스템 메시지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 대리자 알파가 해당 시퀀스의 적합성을 재심사합니다. 』

과연······.

『 2페이즈 네 번째 시련에 중대한 결함을 발견합니다. 』

『 해당 시련에서 조작의 흔적을 감지했습니다. 』

『 부당한 난이도에 대한 항의를 수용합니다. 』

통했다.

『 하위 존재 '혼돈의 전령'을 조율하고자 합니다. 』

역시 말로 하면 안되는 게 없다니까. 오오. 뒤쪽에 있는 사도들의 입에서도 감탄이 터져나왔다. 

치지직, 치지직—!

알파가 손에 든 천칭이 기울어졌다.

거대한 노이즈와 함께 알파가 어디론가 모습을 감췄다.

성공이었다.

대리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혼돈의 전령을 향한 '조율'이 이루어질 시간이었다.

범위 무한 즉사기로 초월급 헌터 122화

범위 무한(1)

혼돈의 전령.

그의 이름은 하렌.

단정한 금발의 실눈, 동그란 안경을 걸친 그의 모습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저벅, 저벅.

그는 길게 이어진 회랑을 걸어나가며 말했다.

"무명만 사라진다면, 지배자님이 계획에 차질이 생길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다곤 해도 일을 너무 크게 벌린 거 아니야?"

하렌의 옆을 따라 걷던 소녀가 반문했다. 긴 흑발을 늘어뜨린 소녀의 눈동자는 혼돈으로 일렁거리고 있었다.

"너······. 죽을지도 몰라. 무명 일행이 대리자를 불렀어."

혼돈의 지배자.

눈앞의 소녀를 달리 부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이미 현세(現世)를 관조하고 있었다.

무명이 협박으로 대리자를 움직였다. 일반적인 플레이어에게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무명(無命)을 둘러싼 인과가 크게 요동치고 있다.

수많은 성좌가 그의 뒤를 따르고, 다른 영역의 지배자들도 동조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현세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그러나 소녀의 경고에도 하렌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

"대리자도 한 번은 막을 수 있죠. 그 시간이면 무명을 죽이기엔 충분하고요. 그리고 만약 제가 실패하더라도······. 결국 무명은 죽게 될 겁니다."

무명은 강하다.

물론 단순히 강한 자라면 범차원 전역에 널려 있다.

하지만 무명과 같은 힘을 소유한 자는 극히 드물었다.

즉살(卽殺).

알면서도 대응할 수 없다. 알면서도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단순한 능력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무명은 지금 이 순간에도 능력을 발전 시켜나가고 있다.

지금 손을 써두지 않으면 막을 수 없으리라. 

하렌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날벌레들이 영롱한 불꽃에 이끌리듯······. 무명을 향해 더 많은 존재들이 모여들 테니까요."

무명의 존재 자체가 현세의 종말을 가속 시키고 있다. 현세는 결국 무명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그 비유대로라면 너는 날벌레가 되는데?"

"지금이 아니라면 정말 벌레가 될지도 몰라요. 저는 그게 두렵습니다. 그래서 한 발 더 먼저 나선거죠."

하렌은 자신의 검지를 들어 올렸다.

"범차원을 혼돈에 몰아넣기 위해서라면······. 더 큰 혼돈을 불러올 각오도 해야 하는 거니까요."

치직, 치지직—!

그가 말을 끝마치는 순간이었다. 허공에 새겨진 짙은 노이즈 속에서 금발의 소녀가 튀어나왔다. 혼돈의 전령이 제대로 대응을 하기도 전에, 대리자가 달려들었다. 

콰아앙—! 콰과과광!

『 대리자 알파가 혼돈의 전령 '하렌'에 대한 조율을 실시합니다. 』

대리자는 하렌을 붙잡고서 회랑을 모조리 박살 냈다. 길게 이어진 기둥과 벽이 모조리 박살나며 흙먼지를 쏟아냈다.

스스스······.

혼돈의 전령을 벽면에 처박은 대리자가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눈가리개 너머로 그녀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어머."

혼돈의 지배자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난 모르는 일이야."

콜록, 콜록.

"이거야 원······. 너무 과격하네요."

흙먼지 속에서 하렌이 몸을 일으켰다. 단정했던 머리는 엉망이 되었고 그의 동그란 안경에는 금이 새겨져 있었다.

"대리자, 조율이라뇨. 나는 어긴 게 없어요. 균형을 잡아야죠. 무명에게 지금의 난이도는 너무 쉽잖아요. 겨우 그런 걸로 성좌들이 즐거워 할까요?"

미간을 좁힌 하렌은 억울하단 표정으로 읍소했다.

『 대리자 알파가 조율을 실시합니다. 』

대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문답무용으로 주먹을 휘둘러 올 뿐. 시스템의 규칙 아래 휘둘러지는 주먹은 반드시 명중했다.

콰앙-! 콰앙! 쾅!

공격이 닿을 때마다 하렌의 주변으로 노이즈가 일렁거린다.

그러나 넘실거리는 혼돈의 기운이 대리자의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해내고 있었다.

퉷,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낸 하렌이 눈을 떴다. 그의 몸에서 뻗어나오는 혼돈의 기운이 일대를 빠르게 잠식했다.

"조율은 피할 수 없겠네요. 무명. 그렇게 일찍 죽는 게 소원이라면 그리 해주죠."

콰아앙—!

하렌의 눈동자 위로 이채가 떠오른 순간. 그의 손아귀에서 뻗어 나온 혼돈의 기운이 대리자를 밀쳐냈다.

삽시간에 공간이 뒤집히더니, 조작의 권능이 대리자의 몸을 굳어지게 만들었다.

혼돈의 전령 하렌.

터억!

이번에는 그가 대리자의 목을 거칠게 붙잡았다. 치직, 치지직—! 하렌은 미친듯이 치솟는 노이즈 속으로 대리자를 밀어 넣었다.

『 대리자 알파가 조율 거부에 따른 비상 시퀀스를 발휘합니다. 』

대리자 또한 시스템의 권한을 발휘해 하렌을 끌어들였다. 하렌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려 혼돈의 지배자를 바라봤다.

"혼돈의 지배자시여, 그저 지켜보시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범차원은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을 향해······."

대리자로부터 뻗어 나온 노이즈가 빠르게 하렌을 뒤덮기 시작했다. 그의 발부터 무릎 이윽고 전신이 노이즈에 집어삼켜진다.

"더 큰 혼돈으로 물들기 시작할 겁니다."

치직.

짧은 노이즈와 함께 하렌은 혼돈계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 * *

『 혼돈의 지배자가 불만을 표시합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항의합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경고합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에게 야유합니다. 』

"뭐야, 왜 이렇게 스팸을 보내."

나는 메시지창을 한쪽으로 치워버렸다. 메시지를 보니 대리자가 잘 하고 있는 모양이다.

타닥, 타닥.

우리 일행은 타들어가는 모닥불 앞에서 손을 쬐고 있었다. 보온 마법을 받긴 했어도 시각적인 효과는 무시 못 한다.

대리자의 조율이 끝날 때까지 할 것도 없고.

"혼돈 측의 목표는 명확하다."

사최헌은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범차원의 지배자가 되는 것. 오랜 기간 나뉘어 있던 4 구역을 하나로 통합하고 범차원에 혼돈을 불러올 생각이다."

"그 과정에 내가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거고?"

"그렇지."

실로 단순했다.

범차원을 하나로 통일하려는 계획.

현세는 그걸 위한 발판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고작 그런 이유로 주인님을 노린단 말이야? 고작 범차원을 지배하겠다고?"

잠자코 듣고 있던 루시퍼가 얼굴을 와락 구겼다. 성좌인 루시퍼가 보기엔 무의미한 싸움처럼 보이는 모양.

사최헌도 루시퍼를 따라 미간을 좁혔다.

"좋건 싫건 현세는 지금 소용돌이의 한가운데다. 그 시기가 앞당겨졌을 뿐이지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그리고 네 놈이 그런 말을 하는 건 염치가 없어도 너무 없군."

"나? 내가 왜."

"······."

사최헌은 대답 없이 루시퍼를 노려봤다.

아마 회귀 전에 뭔가 있었던 모양이다. 내가 확인한 기억만해도 그랬다. 루시퍼는 누가봐도 악당이었다.

"천이령, 고기 굽기의 천재."

"에헤헤, 별거 아니에요."

"이것도 구워보게나."

어쨌든 모닥불에 이것저것 구워 먹으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그때였다.

치직, 치지직—!

허공에 짙은 노이즈가 일더니, 무언가가 튕겨져 나왔다. 콰과과과! 설원에 쌓인 눈이 폭발하듯 튀어 올랐다.

『 대리자 알파가 조율 실패를 알립니다. 』

"······이런 경우가 자주 있다고 했나?"

내 물음에 사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예언 비슷한 능력에 의하면 그렇다. 시스템 조작은 전령이 가진 권능이니."

그 예언 설정 아직도 밀고 나가고 있었나.

『 다수의 성좌들이 사최헌의 예언에 신기해합니다. 』

이 정도면 거의 대놓고 말하는데도 아무도 회귀자인 줄 모른다니. 알고보니 순 억지다. 성좌들의 맹약 아래 회귀는 없댔으니 그럴 만도 한가?

"엄청난 기운이 느껴진다네."

"혼돈의 전령도 같이 넘어왔나봅니다."

일행 모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기를 들어 올렸다. 나도 손을 털고서 일어났다.

고오오오—!

눈발이 솟아오른 자리에서 막대한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주변의 눈을 보랏빛으로 물들이는 짙은 기운.

『 혼돈 침식이 심화됩니다. 』

『 혼돈 속성을 소유하지 않은 존재의 능력치가 대폭 감소합니다. 』

혼돈 게이트 앞에서 보았던 침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혼돈이 잠식한 땅 위로 정체불명의 식물과 기하학적 모양의 광물들이 자라난다.

『 대리자 알파가 활동을 정지합니다. 』

조율 실패.

거기에 이은 활동 정지까지.

투욱—.

넘실거리는 혼돈의 기운 속에서 대리자가 튕겨져 나왔다. 그녀는 보랏빛 눈 위에 풀썩 쓰러졌다.

천이령이 다급하게 달려가 대리자를 살폈다.

"괘, 괜찮아요?!"

"애초에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활동을 정지했을 뿐이다. 그보다 앞을 봐라."

사최헌은 앞을 가리켰다.

끝없이 타오르는 보랏빛 혼돈의 기운. 그 내부에서 새하얀 안광이 번뜩였다.

[ 무명. 이런 식의 조우는 제가 원했던 형태는 아니지만······. ]

혼돈의 전령.

지금까지 끈질기게 원로들을 부추기고, 마계의 정점까지 끌어들인 흑막.

[ 이렇게 된 거 대리자가 활동을 재개하기 전에 끝을 보겠습니다. 다시 일어나서 권한이 강화되면 상당히 귀찮거든요. ]

직접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돌풍처럼 불어오는 탁한 기운에 로브의 자락이 흩날린다.

'크윽, 격이 장난 아니네.'

보자마자 숨이 턱 막혀 오는 기분. 원로들을 상대하며 상당한 격을 쌓았는데도 이 정도다.

그러나 물러설 순 없다.

사최헌과 천이령을 보호해줘야 한다.

"잘 봐."

천이령 헌터의 눈에 혼돈을 담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그녀의 재능은 혼돈마저 집어 삼킬테니까.

사최헌은······.

지금은 훌륭한 서포터니까. 지켜줘야지.

나는 빠르게 혼돈의 전령을 훑었다.

'즉살 대책은 완벽하게 세우고 왔나.'

혼돈의 기운 탓인지 생명의 기운은 포착되지 않는다. 다만 종말급 스킬인 '예언:묵시'만큼은 정확하게 발휘된다.

『 혼돈의 전령 '하렌' [ Lv.1968 ] 』

- 태초+급

'······레벨이 어마무시하네.'

그 레벨은 이미 이해의 범위를 아득하게 넘어 있다. 인류 전체가 덤벼든다고 한들 이기리란 보장이 없다.

콰아아앙—!

예고 없이 날아온 혼돈의 기운을 루시퍼의 창이 막아냈다.

"이 새끼가······. 다짜고짜 공격을 한다 이거지?"

[ 고상한 싸움을 기대했으면 미안하게 됐네요. 이쪽도 일분일초를 다투고 있거든요. ]

쿠구구구······.

튕겨져 나간 공격의 일부가 북극의 얼음을 갈라놓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위력이다.

'······.'

태초급까지는 어찌어찌 보였는데.

뭐, 태초+급은 공격이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 내 레벨은 590.

신체 능력은 신화급.

종말급 아이템을 둘러서 구색은 맞췄지만, 이 싸움에 끼어들기엔 턱없이 모자른 전투력이다.

반면 루시퍼는 다르다.

『 리미트 브레이커의 효과로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 궁극기의 효과로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루시퍼도 태초급 사도인데다가, 제한까지 2단계 해제했으니 그 상대는 충분히 되고도 남을테니까.

'그걸로 끝이 아니다.'

대리자의 실패는 사최헌을 통해서 어느 정도 예견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에 따른 대비책도 준비해 놨다.

『 질서의 지배자가 혼돈의 현세 침범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

조율에는 실패했지만, 대리자는 혼돈의 전령을 현세로 끌어들였다. 혼돈의 전령은 어쨌거나 현세에서 힘을 개방했고.

그렇다는 것은.

『 질서의 지배자가 현세에 전령을 파견합니다. 』

고오오오—!

허공에 돌연 생겨난 소용돌이가 또 다른 천사를 내뱉었다.

새하얀 검을 든 반짝이는 금발의 사내.

질서의 전령 산달폰이었다.

『 멸악의 사도 '산달폰' (태초+급) [ Lv.? ] 』

"오, 산달폰."

"가브리엘 선배,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나머지는 뭐 아무래도 좋고요. 그런데 꽤 좋을 때 불러주셨네요."

산달폰은 그 말만하고선 눈앞에서 사라졌다. 새하얀 섬광이 번쩍이더니, 어느샌가 혼돈의 전령에게 검을 내지르고 있었다.

백색과 자색.

두 기운이 충돌하며 막대한 스파크가 튀어올랐다. 혼돈의 전령이 이죽이듯 말했다.

[ 질서의 전령! 괜찮겠어요? 그쪽이 참전했다는 건, 다른 영역의 전령들도 얼마든지 현세에 강림할 수 있다는 건데요. ]

"그러라고 하죠."

콰과과과—!

얼음이 갈라지고 그 틈에서 혼돈의 기운이 불길처럼 솟구쳐 오른다. 태초+급의 적은 거대한 자연재해나 다름없다.

이대로 가다간 북극이 남아나질 않겠는데.

"덤벼, 이 자식아! 이제야 좀 체급이 맞는구만. 지금까지 주인님을 피해서 돌아다니느라 아주 재밌으셨겠어?!"

루시퍼도 곧장 가세.

[ 큭······. ]

혼돈의 전령의 기세가 눈에 띄게 줄었다.

빛과 암흑이 하늘을 번갈아 물들이고, 지면을 뒤엎는 강렬한 기운에 말도 안되는 폭풍이 휘몰아친다.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충돌이다.

천이령 헌터가 소리쳤다.

"괘, 괜찮을까요?!"

"쟤네는 괜찮은데, 우리가 안 괜찮을듯."

쿵! 어디선가 날아 온 얼음 덩어리를 머리에 뒤집어쓴 가브리엘이 무감하게 말했다.

여기서 끝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싸움의 무대가 현세가 되면 곤란하다. 태초+급의 출력이면 농담이 아니라 행성 하나가 날아가고도 남을 거다.

나는 쓰러진 대리자를 흔들었다.

"기능 회복은 아직 멀었나?"

나는 슬쩍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 다수의 사도들이 시스템의 정상화를 요구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시스템에 코인을 후원합니다. 』

『 일부 성좌가 시스템 복구에 코인을 후원합니다. 』

다행히 성좌들이 기대했던대로 움직여주고 있다.

아직까지 성좌들은 내 편이다. 아직은 지구가 쑥대밭이 되길 원하지 않는 것 같고.

"일어나려나?"

내 말에 구경하던 가브리엘이 진지하게 답했다.

"두들겨 패면 더 빨리 깨어날지도."

"대리자가 전자제품도 아니고······. 일어났다."

치직, 치지직.

『 대리자 알파가 활동을 재개합니다. 』

『 기능 정지에 불쾌함을 표합니다. 』

『 혼돈의 전령 '하렌'에 대한 조율을 재개시합니다. 』

대리자가 몸을 일으켰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대리자를 붙잡았다.

"잠깐, 조율을 어떻게 하려는 건지는 몰라도.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들어 볼래?"

그대로 날 무시하려던 대리자가, 내 주변에 맺힌 별들의 숫자를 보고선 다시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시스템 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2페이즈 최후의 시련. 진(眞) 혼돈 강림까지 22시간 남았잖아."

혼돈의 전령이 기획한 바에 따르면, 강림하는 혼돈은 마계의 정점이 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건 이상하지 않은가.

최후의 시련의 보스는 누가봐도 혼돈의 전령이 되어야 했다. 녀석이야말로 혼돈의 영역에서 온 혼돈 그 자체니까.

"혼돈의 전령을 최종 보스로 조율해줘. 많은 건 안 바랄게. 게이트 안에 넣어서. 그 뒤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리자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 대리자 알파가 해당 조율로 충분하냐고 되묻습니다. 』

애시당초 혼돈의 전령을 조율하라고 난리쳤던 건 나였다.

"그래, 조율에 실패하고······. 기능정지까지 당했지만, 그 정도면 그냥 만족할게. 마침 루시퍼하고 산달폰도 도움을 주고 있으니까. "

그런 내가 그걸로 괜찮다는데 뭐라하겠는가.

성좌들을 등에 업은 지금에만 할 수 있는 제안이다. 페이즈가 진행되고, 시련이 격화되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없을 거다.

그러니 이 기회를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

"사실 다 필요 없고 혼돈의 기운을 잠깐이라도 없애주면 제일 좋은데."

『 대리자 알파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

이건 안된다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럼 최종 보스로 조율해줘. 그건 되지?"

대리자는 잠시 고민하는 듯 멈춰섰다. 숨 막힐 듯한 정적이 잠깐 동안 흐른 뒤.

이어지는 대리자의 대답은······.

『 대리자 알파가 해당 제안을 승낙합니다. 』

『 알파가 시스템의 관리자 권한을 한 단계 상승 시킵니다. 』

오케이였다.

치직, 치지직—.

대리자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노이즈가 한층 더 짙어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공간을 도약한 대리자가 혼돈의 전령을 향해 뛰어들었다.

[ 큭, 이렇게 빨리 회복했다고요······? ]

콰아아아—!

여기에 반항하듯 혼돈의 전령으로부터 공간을 찢는듯한 기운이 방출되기 시작했다.

"그쪽하고 협력하는 건 죽어도 싫지만······."

"닥치고, 검이나 들어!"

산달폰의 검과 루시퍼의 창이 양측에서 쇄도하며 혼돈의 전령을 압박했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앗—!

『 시스템이 해당 개체의 조율에 성공했습니다. 』

『 2페이즈 최후의 시련이 수정 되었습니다. 』

대리자의 손이 닿았다.

막강한 기세를 내뿜던 혼돈의 전령의 모습이 사라졌다. 주변을 감싸던 혼돈의 기운도 씻은 듯이 모습을 감추었다.

치직, 치지직······.

『 곧이어 2페이즈 최후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

『 진(眞) 혼돈의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

『 공략 실패시, 현세가 혼돈으로 뒤덮입니다. 』

시스템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쾌재를 불렀다.

"······됐다."

여기까지 왔으면 다 왔다.

게이트에 들어갔으면 그 순간부터는 뭐가 되었든 마물 취급이다.

사도는 아니더라도, 혼돈의 전령쯤 되면 시스템은 그에 합당한 보상을 할 테고······.

우리는 그걸 주워먹기만 하면 되는 거지.

"이제부터 본격적인 공략 시작이다. 루시퍼 출발. 산달폰도 여기까지 와놓고 발 뺄 생각은 아니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 온 산달폰이 내 앞에 착지했다. 질서의 지배자가 파견까지 보냈기에 돌아갈 것 같진 않다. 

"무명, 그쪽은 바로 게이트로 향할 건가요? 뭐가 되었든 공략은 바로 속행되어야 합니다. 놈이 게이트를 빠져나올 가능성도 있거든요."

"나?"

뭐, 당연하게도······.

"게이트 바깥에서 지켜봐야지."

드디어 길었던 싸움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다. 

물론, 정정당당하게 혼돈의 전령과 싸워주는 일 따위는 없을 거다. 

내 즉살은 범위 무한이니까. 

범위 무한 즉사기로 초월급 헌터 123화

범위 무한(2)

치직, 치지직—!

혼돈의 전령은 텅 빈 공간으로 내팽개쳐졌다. 

"······."

그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과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공간이 빠르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고르지 않은 지면이 눈 앞에 펼쳐지고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이 시야를 메꿨다. 

시스템은 하렌을 게이트의 보스로 지정했고 그에 따른 적절한 차원을 배정해 부여한 것이다. 

"이렇게 허무하게 당할 거라곤 생각 못했는데요······."

하렌은 금이 간 안경을 올려 썼다. 스르륵, 그의 손끝을 타고오른 자색의 기운이 안경을 말끔히 고쳐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언젠가 시스템에 의해 멸망했던 차원이 구현되어 있다.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이래서 속전속결로 끝을 보려고 했던 건데."

범차원에 속한 존재인 이상, 시스템의 권한을 100% 무시할 순 없다.

대리자를 상대로 잠깐 시간을 벌었으나 결국 대리자는 권한을 높여 다시 대응했다.

치직, 치지직······.

그의 오른손에서 짙은 노이즈가 일었다. 

시스템 간섭에도 레벨이 존재한다. 혼돈의 전령이 소유한 간섭의 수준은 레벨 1. 반면 대리자는 레벨 2 수준의 권한을 사용했다.

이 게이트를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름 치밀하게 준비를 했다는 건가요.'

하렌의 입가가 비틀렸다.

재차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바닥 위로 혼돈의 기운이 뻗어나갔다. 

쿠구구구······.

게이트를 나가거나 외부에 영향을 끼칠 순 없어도 내부에 간섭하는 건 가능했다.

시스템 조작의 권능이 일대의 경관을 바꾸어 놓기 시작했다. 지면 위로 솟아난 무수한 기둥이 기이한 광경을 연출했다.

하렌이 위치한 장소 또한 공중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가 자리한 기둥이 이 게이트의 내부에서 가장 높은 곳이 될 예정이었다. 

화아악—.

넘실거리는 혼돈의 기운을 내뿜은 하렌을 주위로 세계가 빠르게 잠식 되어 간다.

맑았던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고, 지면에서도 자색의 기운이 불길처럼 일렁거린다. 행성 하나를 뒤덮고도 남을 기운이 게이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아쉽게 됐네요. 잘만 했으면 지구 전체를 집어삼켰을 수도 있었을텐데.' 

현세에는 여전히 제한이 존재했다. 

혼돈의 전령은 치밀한 밑작업을 준비해 온 이유기도 했다. 

게이트를 통해 원로들을 투입하고, 다른 차원의 사도를 불러 들여 시스템의 제한을 조금씩 넓혀 왔다.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마계의 정점이 현세에 강림하는 것으로 그의 시나리오가 완성될 예정이었다.

그것을 무명이 중간에 비틀었다.

무명은 한발 빠르게 대리자를 불러 혼돈의 전령인 하렌을 조율하려 했고, 결과적으로 그 시도가 성공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미간을 좁힌 하렌은 혀를 찼다.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대응이 빠르네요. 현세의 지식으론 대처는 커녕 시스템에 종말을 막는데 급급한 게 정상일텐데.'

현세는 튜토리얼이 끝난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 세계의 인간이 비밀스런 차원에 은둔하던 현자를 불러오고 대리자를 이용해 조율을 강제한다니.

누군가가 뒤를 봐주는 게 아니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 수준.

'하지만 혼돈의 지배자께서 그런 말씀은 없었죠. 정말로 무명의 배후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건데.' 

지금까지 무명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전제 하에 움직여왔다.

그가 가진 능력은 무서울 정도로 위험하지만, 무명 그 자체는 하나의 인간에 불과할테니까. 

그러나 그가 보여준 행보는······.

하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무의미한 추론이죠.'

혼돈의 전령으로서의 계획은 이미 실행 되었다.

현세의 밸런스는 이미 무너져 내리고 있다. 무명의 힘은 비대해졌고, 시스템은 더 이상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또 질서의 전령이 가담하며 오랜 기간 이어져왔던 네 영역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다른 영역의 지배자들도 현세를 향해 마수를 뻗쳐 올 것이다. 

그만큼 시스템의 게임이 벌어지는 현세는 매력적인 과실. 

혼돈의 전령의 역할은 그 물꼬를 트는 것이었다. 

'제가 할 일은 종지부를 찍는 것 뿐.'

이제 하렌에게 남은 일은 게이트의 보스로서 무명을 상대하는 것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스륵······.

게이트의 입구에서 다른 존재의 기척이 느껴졌다. 높이 솟은 기둥의 꼭대기에서 하렌은 두 팔 벌려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공간 전체에 울려퍼졌다.

[ 어서오시죠, 무명! 머지 않아 나를 게이트에 가둔 것을 후회하게 될 겁니다. 오히려 시스템의 방해 없이 현세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되었······. ]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어가던 하렌이 멈칫했다. 

[ ······? ]

게이트 내부로 들어 온 기운은 총 다섯이었다.

모두 사도였다.

거기에 무명(無命)은 없었다. 하렌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졌다.

[ 들어 올 생각조차 없다는 겁니까······? ]

혼돈의 기운이 들끓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지면의 틈 깊은 곳에서 괴수들이 땅을 뚫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혼돈으로 만들어진 괴수들에겐 영혼도 자아도 없다. 더 큰 혼돈을 향해 움직일 뿐. 빠득. 이를 악물었던 하렌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오히려 좋죠. 철저하게 망가뜨리고 게이트를 붕괴시킬 뿐입니다. ]

전신을 혼돈의 기운으로 감싼 하렌의 안광이 번뜩였다.

* * *

공간 전체에서 휘몰아치는 혼돈의 기운.

게이트 내부는 이미 혼돈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부탁하겠네, 루시퍼군."

"부탁드리겠습니다. 루시퍼 선배님."

"아쉽지만 신화급 사도라서 이만 퇴장할게."

주작, 청룡, 가브리엘은 게이트 입장과 동시에 궁극기를 발휘했다.

『 세 명의 사도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범위 내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태양빛에 닿은 아군을 회복 시키고 적의 능력치를 50% 낮춥니다.

- 아군의 능력치를 50% 상승시킵니다.

이어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 

혼돈의 전령 입장에선 격노할만한 일이었다. 

"가브리엘 선배님께선 존재만으로 완벽하시니 괜찮습니다."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 이미 갔구만."

"말 걸지 말아주시죠, 빌어먹을 타천사."

게이트에 남은 건 루시퍼와 산달폰 뿐이었다. 산달폰은 혀를 차더니 땅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쯧, 그쪽 도움 따위 없어도 혼돈의 전령 따윈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개가 짖나?" 

루시퍼도 경쟁하듯 뛰어들었다. 콰과과—. 혼돈의 괴수들이 아가리를 벌리고 두 사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루시퍼와 산달폰은 공중에서 자유롭게 궤도를 바꾸며 쾌속으로 전진했다.

가장 높은 장소에 있을 혼돈의 전령을 처치하기 위해서.

같은 시각.

진(眞) 혼돈 게이트의 바깥.

고오오오—.

게이트를 빠져 나온 사도들도 바로 무명에게로 복귀할 순 없었다.

크어어!

그르르!

가아아아!

진(眞) 혼돈 게이트가 위치한 장소는 대한민국 서울. 

일대는 완전히 혼돈에 침식 되어 마물을 끊임없이 뱉어내고 있었다. 흉측한 벌레부터, 여러 동물이 혼합된 듯한 기이한 마물까지.

콰아앙—!

그야말로 혼돈이라고 부를만한 마물들이었다.

"마물이 이렇게 많다니······. 이 몸은 좌측을 맡겠네!"

주작의 화염이 혼돈 마물들을 일시에 불태웠다. 청룡과 가브리엘도 눈 앞의 마물들을 차례차례 정리하며 길을 뚫었다.

"무명 헌터의 소환수들이다!"

"큭, 이번에는 한국인건가?"

"거참, 전 세계가 정신이 없네."

대한민국의 헌터들도 속속들이 집결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眞) 혼돈 게이트로 진입할 엄두는 못 낸 채 주변을 정리하고 있을 뿐.

그마저도 가까스로 이뤄지는 일이었다.

"무명은 안 온 건가?"

"내부로 들어 간 거 아니야? 어차피 무명이 아니면 저 게이트 공략할 사람도 없어."

"우리 역할은 서울을 지키는 거다!" 

"많은 거 할 필요 없어! 무명이 게이트를 공략할 수만 있도록 해!" 

검과 창을 든 헌터들이 눈 앞의 혼돈 마물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 Lv.758 ]

[ Lv.782 ]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전설+급에 해당하는 압도적인 레벨.

그들 하나 하나가 일반 헌터들에겐 보스급 그 이상이었다.

콰과과과—!

도로가 붕괴되고 마물의 발길질 한 번에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수 십의 헌터가 모든 공격을 쏟아부어야 간신히 막을 정도. 

대한민국에서 내노라 하는 길드가 전부 모여들었다. 

"청명 길드, 천이령 지금 합류했어요!"

"이령아!"

대한민국 2위 길드 청명. 그들도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혼돈 마물을 막아내고 있었다.

캬아악—!

거미의 형태를 한 마물이 보랏빛 기운이 뒤섞인 독액을 뱉어냈다. 마력 보호막조차 뚫어내는 독액이 사방으로 퍼지려는 찰나.

"사, 살려······!" 

쓰러진 헌터를 향해 천이령이 달려 들었다. 

"현상 재현, 웨펀 마스터······."

재빠르게 땅에 떨어져 있던 대검을 쥐어든 천이령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음 순간, 독액을 통째로 집어 삼키는 베어 가르기가 발현 되었다. 

콰아아—!

혼돈의 마물을 통째로 베어 넘기는 참격.

쩌어억. 

지대한 레벨 차이에도 불구하고, 거미 형상의 혼돈 마물이 반으로 갈라졌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는 하나 틀림 없는 성좌의 기술이었다. 그 위력도 효율도 일반적인 스킬과는 차원이 달랐다. 일반 마물 따위는 압도하고도 남았다. 

"저, 저걸 한 방에?" 

"정신차리고 우리 모두 이령이한테 집중해야 해!" 

"천이령 헌터한테 버프 올려!"

"오케이!"

길드장 채아린 헌터의 외침에 따라 길드원들이 일제히 지원을 퍼부었다.

부드러운 빛무리가 천이령을 감쌌다. 능력치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상승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타다다다—!

마물들이 있는 한복판을 향해 달려나가는 천이령의 눈에 이채가 맺혔다.

"현상 재현, 혼돈······."

고도의 집중력으로 뛰어 오른 천이령의 양 손에는 단검이 들려 있었다.

콰아아—!

쌍단검의 끝에서 자색의 기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순간적으로 크게 가속한 천이령은 마물들의 사이를 자유롭게 누볐다.

가볍게 땅을 박차고, 곡예를 넘듯 마물을 지나치고, 브레이크를 잡아 마물의 미간에 단검을 박아 넣는다.

콰과과과과!

압도적인 움직임과 파괴력에 천명의 헌터들조차 잠시 넋 놓고 바라볼 정도. 

"이, 이령이 맞아?"

특히 길드장 채아린은 말까지 더듬었다.

이틀도 채 안 지났는데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으니까. 

크어어—!

그아아!

천이령과 사도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마물의 수는 늘어나고 있었다.

다른 국가의 헌터들도 빠르게 도착하고는 있으나, 혼돈의 침식 속도가 예상보다 너무 빨랐다.

"큭, 이대로 가다간······. 서울 전체가 침식 당하겠는데."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우리는 버티는 것 말고는 없어!" 

혼돈의 침식 자체를 막아낼 방법은 현시점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진(眞) 혼돈 게이트를 공략해야 끝날 일이었다.

"루시퍼와 산달폰. 이 둘로는 혼돈의 전령을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이 없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옥상 위.

무명과 함께 상황을 주시하던 사최헌이 말했다. 

"사도들이 궁극기를 써주고 나왔는데도?" 

"그걸 감안해서 이길 확률은 50% 정도다." 

사최헌은 그리 단언했다. 주강혁은 재차 물었다.

"혼돈의 기운을 벗겨낼 방법은?"

"현시점 인류가 가진 방법으로는 없다."

혼돈의 전령은 즉살(卽殺) 방지 대책을 거의 완벽하게 가지고 있다.

짙은 기운으로 몸을 둘러 모습을 감췄고 영혼을 소유한 마물도 절대로 내보내지 않고 있다. 아주 철두철미하다. 

주강혁은 잠시 눈을 감아 루시퍼의 시야를 확인했다.

[ 주인님, 조금만 더 있으면 놈에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달폰 이 새끼, 길 막지 말라니까! ]

콰앙, 콰과과과—!

뭔가 폭발하고, 거대한 괴물이 산달폰의 검에 찢겨 나가는 게 보이긴 한다. 루시퍼의 흑마력이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다. 자연재해나 다름 없는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저기가 게이트 안이라는 게 다행일 따름이다. 

다시 눈을 뜬 주강혁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현시점 인류의 방법으로는 역부족이라. 

"그렇다면 현시점에 인류가 가지지 않은 방법으론 가능하다는 거잖아."

50% 정도에 그치는 승리 확률을 100%로 만들 수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만 했다.

사실상 진(眞) 혼돈 게이트를 막아내지 못하면 현세는 끝장이니까.

"그게 무슨 말이지?"

사최헌이 되물었다.

주강혁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영혼 랜턴을 들어 올렸다.

"혼돈의 전령은, 내게 제물이 될만한 마물을 소환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잡을 마물이 없는 건 아니지."

그리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아니다.

"예언자의 별. 도움을 줬으면 좋겠는데."

나는 예언자의 별을 불렀다.

스륵, 마치 처음부터 옆에 있었던 것처럼 검은 로브를 쓴 금발의 소녀가 나타났다.

엘리스 그레인저.

예언 단체의 수장이자 세이비어를 이끄는 지도자. 그녀는 처음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것처럼 나타났다.

"사최헌 그쪽도 있었나요. 무명이 가는 자리에는 빠지질 않는군요."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군." 

짧은 대화를 나눈 엘리스는 다시 주강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멸망을 막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협력하죠."

그녀는 감정 하나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주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준다면 망설일 것도 없다. 

"지구에 존재하는 보스급 마수들을 찾아서 내게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엘리스 그레인저는 내게 태블릿 하나를 건네었다. 망설이는 동작 하나 없다. 나에 대한 걸 예언하지 못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어렵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예언자의 별이 동시에 움직이면 쉽습니다. 문제는 처치할 수 있느냐겠죠." 

"가급적이면 가장 강한 놈들로." 

지구 곳곳에 존재하는 보스급 마물들. 1페이즈 신화도래와 함께 깊숙한 곳에 자리잡은 마물들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런 놈들을 제거하는 동시에 영혼을 획득할 계획이었다.

별로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태블릿의 액정 위로 수많은 영상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넓은 호수에서 머리를 들어 올리는 거대한 괴수, 산의 허리에서 몸을 일으키는 암벽거인, 절벽 위로 날아오르는 삼족오, 사막에서 솟아오르는 데스웜······.

모두 현세에 전해지던 설화와 도시전설들에 기인한 마물들이다.

'남아 있는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6장.'

예언자의 별이 찾아낸 마물의 수가 훨씬 많다.

하지만 상관 없다.

'궁극기를 사용하면 되니까.'

찌이익.

나는 한 장 남아 있던 궁극기 티켓을 찢었다.

이것으로 궁극기의 쿨타임이 초기화 되었다. 나는 바로 궁극기를 발휘했다.

『 궁극기 극야도래(極夜到來)를 활성화 합니다. 』

『 즉살이 다수의 적을 처치할 수 있게 됩니다. 』

"오버 드라이브."

궁극기의 특수 능력 오버 드라이브. 전신에 가벼운 보랏빛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 10초간 즉살의 쿨타임이 사라집니다. 』

나는 태블릿의 영상을 바라보며 즉살을 발휘했다. 그 대상은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을 발휘합니다. 』

푸확, 푸화악—!

약간의 딜레이를 거쳐 영상 속의 마물들이 그대로 터져나간다.

"······."

엘리스는 잠시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바라보았다. 대리자와 마찬가지로 그 너머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었다.

"볼 때마다 어처구니가 없군."

사최헌은 솔직한 감상평을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즉살의 범위에는 제한이 없으니 영상 속 마물들이 내 공격을 피할 길이 없을 뿐이다. 나는 테블릿을 엘리스에게 돌려 주었다.

"자, 그러면 기다려볼까."

"무엇을?"

엘리스의 물음에 나는 하늘을 가리켰다.

고오오—!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른 수 십의 영혼이 나를 향해 날아온다.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영혼들이 마치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 랜턴 '소울 이터'가 기쁘게 영혼을 포식합니다. 』

영혼들은 알 수 없는 인력에 이끌려 랜턴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렇게 차곡차곡 흡수된 영혼은 이내 새로운 기적을 낳는다.

『 충분한 수의 영혼이 모여들었습니다. 』

『 랜턴 '소울 이터'가 최선을 다해 영혼을 흡수합니다. 』

쩌적, 쩌저적—!

허공에 생겨난 균열.

노리는 건 말하지 않아도 소울이터가 알아서 하겠지. 아니, 혹시 모르니 말해 본다.

"오의 습득권."

지금 시점에 남은 건 그거 하나 밖에 없잖냐.

『 랜턴 '소울 이터'가 당신의 의지에 답하고자 노력합니다. 』

노력 말고 결과로 보여주자.

지금까지 기대를 배신한 적은 없었으니까.

나는 반신반의하며 결과를 기다렸다.

콰아아—!

허공에 열린 균열로부터 별빛 섞인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그리고 그 내부에서 쏟아진 보상은······.

- [ ★ ] 오의 파편 x 1 ( 5 / 5 )

- [ 신화+급 ] 사도 강화석 x 1 ( 3 / 3 )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잭팟이었다. 

『 오의 파편 5개를 전부 획득하셨습니다. 』

『 파편이 하나의 원석으로 재구성 됩니다. 』

『 [ ★ ] 오의 원석 』

- 지정한 대상이 오의(奧義)를 습득합니다.

오색찬란한 빛깔을 띤 원석이 내 손에 쥐어졌다.

사도들의 말에 따르면 오의란 일종의 필살기.

궁극기가 능력 강화의 개념이라면, 이건 적을 죽이는데 특화된 공격기인 셈이다.

"이거라면······."

옆에서 나를 지켜보던 사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곧바로 오의 원석을 사용했다.

물론 나한테 쓰는 건 너무 도박이다. 무슨 능력이 나올지 알 수 없으니까.

반면 루시퍼는 자신의 오의를 알고 있다.

전용 무기와 궁극기가 무엇인지 알고 있던 것처럼.

[ 주인님, 드디어 왔군요······! 준비는 되었습니다. ]

확신이 넘치는 루시퍼의 목소리.

"루시퍼, 준비됐나?"

나는 지체 없이 오의 원석을 사용했다.

우리에겐 고작 기술 하나가 더해지는 수준이지만, 혼돈의 전령 입장에서는 기겁할만한 소식이 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