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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1 - 21

* * *

제 1원로 사가트.

본래는 단정한 정장을 걸치고 다니는 그였지만, 지금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허억, 허억······."

넥타이는 풀어헤치고, 앞섬도 제대로 여미지 못한 채 정신없이 뛰어가고 있었다. 흐트러진 그의 머리가 바람에 흩날렸다.

"젠장, 젠장!"

혼돈의 전령을 따라간 6원로가 당했다.

이걸로 남은 원로는 자신 혼자뿐이었다. 전부 무명(無命)의 손에 끝장난 것이다.

모든 원로가 마계를 비울 수 없다는 핑계로, 사가트만이 마계에 남았다.

그러나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13명 중 12원로가 죽었다. 고작 인간, 아니 이제는 고작 인간이 아니다. 무명은 명백한 마계의 적이었다.

'혼돈의 전령이 오기 전에······. 마계의 정점을 찾아뵈어야 한다.'

마계의 정점은 현재 어디에 있는가?

알 수 없다.

그러나 찾아야만 했다.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이자, 태초의 마족들을 창조해낸 유일한 마족이다. 중위 존재들도 그를 함부로 하지 못한다고 들었다.

사가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총동원했다. 정점이 있을 만한 장소를 모두 뒤지고 다녔다.

그러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걸까.

"차, 찾았다······." 

사가트는 마침내 어느 변두리 행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고오오오—.

이 행성의 달은 두 개였으나, 그 중 하나는 반파되어 하늘 위에 무수한 파편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러한 달의 아래.

마계의 정점이 서 있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뜨린 은색의 장발. 흑색의 코트를 걸친 그의 모습은 뒷모습만으로 강한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정점이시여······. 마계에 큰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사가트는 그의 앞에 섰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원로 12명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감히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억울했다.

처음부터 정점이 함께했다면 이러한 참사는 없었을 테니까.

"······."

조용히 달을 바라보던 마계의 정점은 검을 들어 올렸다. 은색의 도신이 달빛에 번뜩였다.

잠시 후.

쿠구구구구—!

달 위에 미세한 선 하나가 새겨졌다. 그 선을 따라 달의 먼지가 치솟기 시작했다. 반으로 나뉘어진 달의 위로 계속해서 균열이 새겨졌다.

쿠과과과과!

마침내 달은 무수한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첫 번째 달이 그러했던 것처럼, 두 번째 달도 같은 최후를 맞이했다.

그 모습을 감상하듯 지켜보던 마계의 정점이 검을 내렸다.

"정점이시여······."

사가트는 고개를 조금 들어 앞을 내다보았다.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단순히 달을 파괴해서가 아니다. 그 안에 담긴 능력이 이전에 마주했을 때와는 차원이 달라져 있었다. 

마계의 정점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검붉은 화상이 선명했다. 그러나 눈빛은 한없이 날카로웠다.

[ 내게 무엇을 원하느냐. ]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 사가트는 숨이 막히는 듯한 압박감을 받았다. 커허억—. 사가트가 입에서 붉은 피를 쏟았다.

쿠웅!

그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누군가가 그리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다.

사가트는 바짝 엎드린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의 격(格).

원로인 자신과 이만한 차이가 있다니?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차이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만한 차이가······? 

사가트는 쥐어짜듯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에서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무명이란 인간을······. 없애야 합니다."

[ 이유는? ]

"그자가 언젠가는 마계를 절멸로 몰아갈 것이기에······. 정점이시여 부디······."

사가트가 고개를 조아리는 그 순간.

고오오오—!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일그러진 허공에서 게이트가 생성되더니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저벅, 저벅. 

안경을 쓴 금발의 남자.

혼돈의 전령이었다.

그는 태연하게 내려 땅에 발을 디뎠다.

"혹시나 해서 따라와 봤는데······. 역시 있었네요."

사가트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는 정점이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소리쳤다. 

"네, 네 놈 때문에······! 원로들이 전부 죽었다. 네가 원로들을 죽게 만든 거야!"

"오해할만한 말은 하지 말죠. 무명(無命)을 죽이고 싶다면서요. 판을 깔아줬잖아요. 실패한 건 그쪽입니다."

전령은 싱긋 웃고서 고개를 돌렸다. 정점의 격 앞에서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얼굴이었다.

"마계의 정점. 좋은 제안 하나 할까 하는데. 어떤가요?"

* * *

나머지 게이트 탐사는 다른 헌터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먼저 복귀했다.

"잠깐, 이 자식 몇 개를 먹은 거야?"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집 식탁에는 아이스크림 포장지가 널려 있었다. 현자는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먹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 중요한 말을 하고 있는데, 끊지 말아주게."

현자는 현장을 중계하고 있었다.

"마계의 정점과 혼돈의 전령이 지금 막 만났네. 전령이 협력하자고 제안을 하고 있군. 마계의 정점은 특이한 인물이지. 과연 설득할 수 있을지."

라디오 중계를 듣는 기분이다.

혼돈의 전령은 곧장 마계의 정점을 만나러 간 모양이다.

"오, 갑자기 싸우기 시작했네. 혼돈의 전령과 마계의 정점이 박빙이군. 다만, 우세한 건 마계의 정점인데. 어이쿠, 혼돈의 전령이 행성의 절반을 날려 버렸네."

"······."

"이 인간 그냥 지어내는 거 아니야?"

루시퍼가 미심쩍은 눈으로 아스펠트를 바라봤다. 아스펠트는 코웃음을 쳤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상상력이 비루해서 말이지. 지금 벌어지는 일은 100% 사실일세. 전투가 길어질 듯하니,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자고."

꽈악.

아스펠트는 원로들의 영혼을 손에 쥐었다. 6개의 영혼이 한 곳으로 압축된다.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영혼이 변화했다.

『 [ ★ ] 영혼의 정수 』

그렇게 나온 아이템.

『 랜턴 '소울 이터'가 격하게 반응합니다. 』

랜턴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맛있게 보이나? 나는 아스펠트에게서 영혼의 정수를 받아 랜턴으로 가져갔다.

스르륵.

랜턴이 순식간에 영혼의 정수를 빨아들였다.

"정제된 영혼은 무엇보다 훌륭한 연료이기도 하지."

아스펠트의 자신만만한 말.

그 자신감에는 이유가 있었던 걸까.

그리고 그 순간.

파직, 파지직—!

허공에서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빠지직! 허공에 새겨진 균열에선 거센 바람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소울이터가 시스템에 균열을 새깁니다. 』

『 영혼의 순도가 기적을 일으키기에 적절합니다. 』

『 최대 레벨 상승 + 30 』

『 현재 레벨 : Lv. 270 / 320 』

최대 레벨의 상승. 

『 (특수) 일일 레벨 상승 제한이 해제됩니다. 』

그리고 일일 레벨 상승 제한의 해제. 

이제 더 이상 레벨이 가로막히지 않게 되었다. 

"그만한 일을 한 거지. 마계의 정점이란 자들을 처치했으니." 

아스펠트는 웃으며 말했다. 

심지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 (특수) 종말 이후의 새로운 등급이 해제됩니다. 』

새로운 등급이 열렸다.

그리고······. 

아직 균열은 닫히지 않았다. 

초고속 성장(1)

"다음 등급이라······."

영혼의 정수를 흡수한 소울 이터가 시스템에 이변을 일으켰다.

『 신규 등급 [ 태초(太初) ]가 해금되었습니다. 』

『 플레이어 '무명'만이 해당 등급의 아이템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

종말 다음은 태초였다.

"태초 등급. 하늘과 땅이 생겨난 처음. 모든 것이 시작된 시기의 순수하고 근원적인 힘을 품고 있다고 보면 되네."

어느덧 아이스크림을 전부 먹어치운 현자 아스펠트가 설명했다.

아직 아이템을 얻은 게 아니라, 등급 제한만 해제 된 거지만. 

"종말급보다 더 강할 걸세. 그보다 더 신기한 건······. 그 랜턴이군."

아스펠트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랜턴 소울 이터를 바라봤다. 흑색과 백색이 뒤섞인 장식이 달린 랜턴.

한 번 성장하고 난 뒤로 성능이 확연히 좋아졌다. 시스템의 레벨이 확장되는 것도 그렇고.

"전에 없는 새로운 아티팩트니 소중히 하는 게 좋을 거야. 시스템에 영향을 끼치는 아티팩트는 많지만, 균열을 초래하는 아이템은 많지 않거든."

『 랜턴 소울이터가 현자의 칭찬에 만족합니다. 』

지금까지의 성능만 봐도 사기적이긴 했다.

가브리엘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고개를 돌리니 가브리엘이 자신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가져왔어."

"그래, 그래."

형태가 많이 바뀌긴 했지만, 덕분에 요긴하게 잘 쓰고 있다.

나는 피식 웃고선 다시 현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중요한 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마계의 정점과 혼돈의 전령은 어떻게 되었지?"

EX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마계의 원로들을 대다수 물리쳤다. 이걸로 지긋지긋하게 현세를 노리던 녀석들의 기세도 꺾였으면 좋겠지만.

그리 쉽게 끝나진 않을 거란 느낌이 든다.

"흐음. 하······."

현자는 잠시 눈을 감더니 탄식을 내뱉었다.

"아직 전투가 한창이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듯하군. 하지만 이 둘이 손을 잡는다면 매우 곤란하단 말이지. 이 부분에 대해선 내가 어떻게든 해보는 수밖에."

"어떻게든 해본다니?"

"다른 지배자들을 만나고 와야겠군. 만나줄지는 모르겠지만." 

현자는 다 먹은 아이스크림의 막대기를 슥 들어 올렸다.

"그동안, 자네는 편히 쉬고 있어도 상관없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종잡을 수 없으니. 필요한 일이 생기면 내 이름을 부르게나."

현자는 동네 산책이라도 가는 듯 손을 흔들어 게이트를 열고선 내부로 들어가버렸다.

"이, 이 자식······. 자기가 먹은 걸 그대로 두고 갔습니다. 현자라는 놈이 예의를 밥 말아 먹었나."

루시퍼는 부리나케 달려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윤이 나게 테이블을 닦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아스펠트는 쉬고 있으라고 했지만, 가만히 있기엔 시간이 아깝다.

"시스템을 종식 시키려면 결국 영역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거잖아."

나는 인벤토리에서 조화의 빵을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피로가 씻은 듯이 가시며 체력이 회복되었다. 딱히 지친 건 아니었지만 다음 일정을 소화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니. 

그런데 루시퍼가 굳어졌다. 

"주인님···. 식사를 빵쪼가리로 대체하시면 건강에 안 좋습니다."

진짜인가? 

아니,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게 문제가 아니니까. 

지배자가 되기 위해선 우선 중위 존재가 되어야 한다.

지배자가 되는 것보다는 쉽다.

1. 종말급의 능력치 달성.

2. 종말급의 격(格) 소유.

3. 행성 파괴급의 업적.

이 세 가지를 달성한 채로 다른 중위 존재를 처치하면 된다.

마지막 조건이 조금 걸린다. 

"근데 중위 존재는 엄청 강한 거 아니야······?"

"모든 중위 존재가 지배자처럼 강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때쯤 되면, 주인님을 능가할 적은 거의 없다고 보셔도 됩니다."

묵시록의 기사도 중위 존재지만 쓰러뜨리긴 했고.

"마물 같은 중위 존재도 있으니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개중에는 진짜 없어져야 마땅한 놈들도 있거든요." 

청룡은 싱긋 웃으며 설명했다. 웃으면서 말하기엔 살벌한 내용이다만.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리춤에 랜턴을 단단히 동여매고선, 사도들을 둘러보았다.

우선은 강해져야 한다. 

"그러면······. 목표가 잡혔으니 움직여 볼까."

아스펠트는 쉬라고 했지만, 레벨업 제한이 해제된 지금 해야 할 일이 있다.

* * *

불멸 길드.

지하의 수용소.

"이봐, 마인들. 내가 굉장한 소식을 알아왔다!" 

어린 소년이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수용소로 들어왔다. 칠죄종 질투였다.

그의 등장에 수용소에 있던 마인 셋의 시선이 모였다.

"뭐냐······."

구속구를 착용한 최상위 마인 가논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일입니까?" 

함께 갇혀 있던 중위 마인 자칼 또한 조심스레 물었다. 상위 마인 로란드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벽에 뒤통수를 대고 있었다.

이들 모두 사최헌에게 잡혀 들어 온 포로.

질투는 씩 웃더니, 마인들에게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방금 네 놈들이 신처럼 따르던 원로 여섯이 죽었다. 불멸에서 잠시 귀환한 사최헌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른 원로들도 다 죽었다던데?"

"뭐, 뭐?"

그 말에 가논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그럴 리가······. 그분들이 무명에게 졌다는 겁니까?"

중위 마인 자칼은 하늘이 무너진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칼은 이곳을 빠져나가면 마계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반면 이미 마계의 대역 죄인이 된 로란드는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아니, 오히려 미소를 띄었다.

"그래, 차라리 전부 파괴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빌어먹을."

"그 말······. 진짜냐?"

최상위 마인 가논도 충격받기는 마찬가지였다. 무명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혼돈의 전령에게 귀뜸을 받았다.

원로들과 함께 무명을 잡기 위해 움직일 거라고.

그런데 그 계획이 실패한 것이다.

"끄응······."

혼돈의 지배자만 믿고 있는데, 무명(無命)은 그조차도 넘어서려하고 있단 말인가.

세 마인이 각자의 고민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가운데.

"아주 반응이 재밌어."

질투는 그런 마인들의 모습을 보며 끌끌 웃었다. 패배자들이 꼬리를 내린 채, 절망하는 모습이란 참으로 별미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냐?"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질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았다.

"감히 누가······."

"나다."

"끄억!"

루시퍼가 즉시 질투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흑마력이 실린 공격에 질투가 머리를 붙잡고 주저앉았다.

"네, 네 놈······!"

죽일 듯이 노려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무언가를 하진 않았다.

상위 존재가 되는 법에 대해 알려준다는 청룡과의 계약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보다 단순한 문제가 있었다.

더 이상 칠죄종 질투는 루시퍼를 이길 수 없었다.

"어쭈, 뭘 봐. 눈깔아. 주인님 오신다. 처신 잘해." 

"크윽······."

맨 처음 질투가 이 땅에 강림할 때는 분명 비등한 전투력이었다. 하지만 루시퍼는 신화급에 올라섰다. 

이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종말의 사도라 불렸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추락하다니······. 질투는 눈물을 머금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벅, 저벅.

검은 로브를 뒤집어 쓴 무명이 앞으로 걸어왔다.

뒤쪽에 있던 마인들도 숨을 죽인 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아니, 감히 고개를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원로들을 처치하면서 무명의 격(格)은 한층 강해져 있었으므로.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이렇게 강해진 거냐······.'

칠죄종 질투가 입술을 깨물었다.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였다.

아무리 시스템의 보조가 있다지만.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무명이 무미건조하게 입을 열었다.

"나머지 칠죄종을 사냥할 거다. 따라와라, 질투."

그 무게 서린 음성에 질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리는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로 향했다.

현재까지 현세에 강림한 칠죄종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교만, 나태, 질투, 탐욕.

총 넷이었다.

이제 남은 건 분노, 색욕, 식탐.

이렇게 세 칠죄종이 남아 있다.

지금까지 칠죄종을 미리 잡지 않은 건, 단순히 경험치 제한 때문이었다. 칠죄종이 아니더라도 잡을 게 많았으니까.

"청룡. 가져왔어?"

"예, 여기 있습니다."

청룡은 아공간 주머니에서 마기의 원천을 꺼내어서 질투에게 건네줬다. 이전에 질투에게서 빼앗았던 게 아직도 한참 남아 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원천을 받아든 질투가 앞으로 걸어나갔다.

"너희들 엄청나게 강해졌군······."

"쓸데없는 소리 말고 소환이나 해."

"쯧."

루시퍼의 말에 질투가 혀를 차며 마력을 내뿜었다. 녀석의 보랏빛 마기가 마법진을 그리 시작했다.

『 종말의 사도가 지상에 강림합니다. 』

밝은 빛이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다. 질투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 참고로······. 2페이즈가 되었으니. 칠죄종은 더욱 강해졌을 거다? 계약대로 소환은 하지만, 녀석들의 행동까지는 내가 어떻게 못하니까."

"그렇군. 충고 고맙네."

"오, 이제 진짜 우리 편인 듯."

주작과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반응이 아니자, 질투가 질색을 했다.

"뭔 소리야, 내가 왜 너희 편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소환은 계속 되었다. 콰아앙—! 보랏빛 낙뢰가 지면을 태우며 새로운 칠죄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정체는 빼빼마른 장신의 남성이었다. 그는 퀭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 드디어 이 허기를 채울 때가 되었는가······. 질투. 훌륭하도다. 나를 위한 식사를 준비해두다니. ]

칠죄종 식탐.

칠죄종끼리 연결된 기억을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아직 확인하지 않은 모양이다.

[ 좋은 식사 거리가······. ]

푸화아악—!

『 '칠죄종 : 식탐'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이 신화(神話)급에 해당합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신화 ] 끝없는 허기

- 칠죄종의 편린(★) x 1

- 칠죄종 식탐의 혼(UR)

- 3,000,000 Coin

- 전설의 증표 x 5

미처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식탐은 최후를 맞이했다.

"2페이즈라 강해졌다고 하지 않았나?"

"어우······."

루시퍼가 이죽이며 질투에게 재차 물었다. 질투는 질린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도 가파르게 상승.

『 현재 레벨 : Lv. 289 / 290 』

『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단숨에 19 레벨을 올렸다.

정확히 현자가 말했던 수준의 경험치다.

지금 레벨대에서 이 정도의 레벨업이면 아주 훌륭한 편이다. 애시당초 250을 넘는 사람이 나뿐이니.

한숨을 내쉰 질투가 내게 물었다.

"오늘은 여기서 끝이냐?"

"아니."

나는 지금까지 아껴두고 있던 칠죄종의 영혼을 손에 쥐었다.

교만, 나태, 탐욕, 식탐.

네 영혼을 차례대로 랜턴에게 먹였다. 최대 레벨 제한을 해제하기 위해서 가장 효율이 좋은 방법이었다.

『 최대 레벨 상승 + 25 』

『 최대 레벨 상승 + 25 』

『 최대 레벨 상승 + 25 』

『 최대 레벨 상승 + 25 』

총 네 번의 최대 레벨이 상승했다. 소울 이터의 내부의 새하얀 기운도 거의 끝까지 차올랐다.

『 현재 레벨 : Lv. 289 / 390 』

그리하여 상승한 최대 레벨은 총 100.

이제 390레벨까지 마음 놓고 올릴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더 이상 일일 레벨 제한에 구애 받지 않아도 된다.

"다음 소환을 시작하지."

내 말에 청룡이 마기의 원천을 재차 질투에게 건네었다. 다시금 보랏빛 낙뢰가 치며 소환이 재개되었다.

『 종말의 사도가 지상에 강림합니다. 』

[ 그대, 나와 함께 한다면······. ]

푸화아악—!

『 '칠죄종 : 색욕'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질투 네 놈이 감히! 우리를 배신하고 인간들의 편에······. ]

푸화아악—!

『 '칠죄종 : 분노'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

순식간에 두 칠죄종이 목숨을 잃었다. 이걸로 모든 칠죄종의 처치가 끝났다.

『 현재 레벨 : Lv. 321 / 390 』

이렇게 얻은 영혼들도 다시 랜턴에 사용하여, 최대 레벨을 성장시켰다.

『 최대 레벨 상승 + 50 』

『 현재 레벨 : Lv. 321 / 440 』

"무서운 놈들······."

질투마저 그리 중얼 거릴 정도였다.

칠죄종은 미리 처리해 두어야 했다. 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미리 없애두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강림하게 되어 있다고 하니.

"흐음, 조금 느리네요."

"더 빠른 사냥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폭업이 필요해."

레벨업을 지켜보던 사도들이 한마디씩 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다.

하지만 현세에는 이제 더 이상 사냥을 할만한 장소가 없다. 새로운 시련이 시작되지 않는 한 보스급의 괴수도 없을 테고.

하지만······.

"갈만한 곳이 있지."

막대한 경험치 배율을 자랑하는 사냥터. 계속해서 쏟아지는 마물들을 처치할 수 있는 장소.

그런 곳이 딱 있지 않은가.

바로 전장(戰場)이다.

1페이즈 2번째 시련에서 열린 특수 필드. 묵시록의 기사를 지금까지 살려 놓은 이유기도 했고.

이곳에서 부족한 레벨을 채울 거다.

"전장으로 가자."

"역시 주인님께서는 다 생각이 있으셨군요."

"폭업 사냥터······!"

이용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이용해야지.

이 마지막 사냥을 끝으로, 전장을 닫을 생각이니까. 

초고속 성장(2)

"사실 플레이어는 반칙 같은 존재일세." 

플레이어(Player).

시스템이 내려앉은 차원에서, 시스템에 의해 각성한 자들을 이르는 말이다.

튜토리얼 단계에서 인류는 스스로를 헌터(Hunter)라고 불렀으나, 점차 플레이어란 단어가 퍼져 현재는 혼용되는 상태다. 

"누군가의 입장에서 보면 플레이어는 불합리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네."

마물을 잡으면 경험치를 얻는다.

플레이어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다른 차원의 존재들에겐 그렇지 않았다.

"범차원에서 제일가는 기적이라봐도 무방하지."

따지고보면 부자연스러웠다.

마물을 쓰러뜨린다고 해서 사냥꾼이 강해지겠는가.

경험이나 숙련, 지혜는 쌓일지 몰라도 사냥꾼의 신체 능력 자체가 성장하진 않는다. 반면 플레이어는 마물을 잡기만 해도 레벨이 오르며 강해진다. 

"스킬은 또 어떻고."

생전 마법에 입문한 적 없는 사람이 스킬을 습득했다는 이유만으로 고등급의 마법을 발현한다.

검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하던 사람이 검의 달인에 버금가는 검술을 선보인다.

시스템이 없는 자의 입장에선 불합리의 극치였다. 

"아이템은 더욱 말도 안 되는 물건일세."

장비를 착용한 것만으로 능력치와 특수한 능력을 부여받는다.

다른 차원에도 아이템의 개념은 존재하나, 플레이어만큼의 이점은 누리지 못한다.

"그러니 인류는 축복받은 거라고도 볼 수 있다네. 인간의 몸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를 단번에 넘어서게 되었으니. 물론······. 저주라고도 할 수 있지."

그러나 시스템이 내려앉은 차원에는 어김없이 시련이 발생한다. 세계는 점차 멸망을 향해 나아간다.

축복인 동시에 저주.

시스템의 축복으로 강해졌던 자들조차 대부분은 차원의 멸망과 함께 목숨을 잃는다.

"쉽게 강한 힘을 얻을 수 있는 대신······. 막대한 리스크를 짊어지게 되는 거라고도 볼 수 있겠네."

주작은 그리 말했다.

2페이즈가 되며 시스템의 정보 제한이 더 너그러워진 탓일까. 더 많은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과거 성좌였던만큼 사도들도 아는 게 많았다. 

주강혁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플레이어라는 이 이점을 활용해야 했다. 

동시에 단점을 없애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은······. 레벨업을 해야겠지." 

현재 주강혁의 레벨은 327.

SSS급.

이 다음 등급인 전설급은 레벨 500.

'종말+급 아이템인 에인헤랴르 덕분에 전설급이 되면, 나는 한 단계 더 높은 육체 능력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전설 다음의 등급은 신화(神話).

사도들과 다름없는 능력치를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이걸로도 모자라.' 

중위 존재가 되려면 종말급의 신체 능력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시스템을 종식 시킬 수 있다. 

갈 길이 멀다.

플레이어라는 이점을 활용해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 수밖에. 

『 전장에 입장합니다. 』

주강혁 일행은 묵시록의 기사가 만들어 냈던 전장으로 향했다. 넓은 필드의 중심부에 높게 솟아오른 흙벽이 있다. 

저 내부가 주강혁이 만들어 놓았던 고효율 사냥터였다.

『 전장의 특수 효과를 받습니다. 』

- 경험치 배율이 극도로 증가합니다.

- 각종 능력치 보너스가 주어집니다.

일행은 사냥터를 향해서 걸음을 옮겼다. 전장 전체의 지형이 주강혁에 의해 재편성 되어 있기에, 편하게 중심부까지 갈 수 있었다.

"잠깐. 누구십니까? 여기서부터는······. 무명 헌터님의 땅입니다. 허락된 분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입구 부분에 다다르자 어떤 남성 헌터가 일행을 제지했다.

사냥터에는 검증된 사람만 들여보내도록 되어 있었다. 꽤 비싼 이용료도 받았지만 헌터들은 앞다투어 사냥터를 이용했다.

주강혁이 요청했던 대로였다.

사최헌과 예언자의 별에게 맡겨두었던 일인데.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예언자의 별인가?

주강혁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자, 잠깐. 이분이 무명 헌터시잖아······."

"뭐?"

옆에 있던 다른 헌터 하나가 동료를 나무랐다. 그는 잽싸게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사냥터를 이용하고 있는 헌터는 없습니다. 편히 사용하셔도 됩니다."

사냥터로 향하는 길이 활짝 열렸다.

하긴, 뒤에 특이한 녀석들을 잔뜩 데리고 있는데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한 거다. 

내부로 들어가며 루시퍼의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고레벨의 헌터들 대다수가 전장을 이용했습니다. 전장으로 번 돈만 해도 빌딩 한 채는 구매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게 얼만데?"

"1700억 가량 됩니다."

주강혁은 진짜냐고 되물으려다가 참았다.

루시퍼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돈이 엄청나게 벌렸다. 하긴, 전세계에서 전장을 이용하기 위해 비용을 지불했을 테니까.

헌터들은 대개 돈이 많기도 하고.

취준생이었을 때는 꿈조차 못 꿨을 돈이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벌어둘까.

"그 돈으로는 전에 말했던 대로 건물 한 채 더 구매하는 걸로 하자."

"훌륭하신 선택입니다."

통상 마법계에 성과 영지도 얻어두지 않았던가. 건물이 늘어가는 걸 보니 괜스레 뿌듯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된다. 

기분은 좋은데 마음은 그리 편치 않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세계가 멸망하면 끝이니까.

사최헌이 돈에 큰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그래서겠지. 

그런 미래가 오지 않도록 어떻게든 수를 써야 한다.

크르르······.

전장의 한가운데. 사냥터에는 드레이크들이 밀집해서 돌아다니고 있었다. 

외관은 드래곤과 비슷하지만 크기는 코뿔소만하고, 전투력도 훨씬 약하다.

지금까지는 이 정도 마물로 충분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주강혁은 손을 들어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전장에서는 포인트만 있다면 내부를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다. 

포인트는 묵시록의 기사와의 전투에서 천문학적으로 벌어들였으니 문제없다. 

『 전장에 출현하는 마물의 종류를 변경합니다. 』

포인트를 사용해 전장 내부의 마물을 바꾸었다.

『 최대 레벨의 마물을 소환합니다. 』

[ Lv.300 ]

[ Lv.300 ]

쿠구구구······.

드레이크들의 사이에서 진흙으로 이뤄진 골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콰앙—! 골렘의 주먹질 한 방에 드레이크가 나가떨어졌다. 굉장한 위력이었다. 

그에에엑! 

갑작스런 적의 출현에 광분한 드레이크들이 골렘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골렘의 단단한 외갑 앞에 놈들의 이빨은 무의미했다.

콰앙! 쿠웅!

마구잡이로 드레이크를 패대기치는 3m의 진흙 골렘.

물론 그조차도 사도들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 번에 쓸어버리자."

"맡겨만 주시죠. 주인님."

"대형 마법은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하게나. 흙벽이 무너지면 마물들이 탈출할 테니."

"때려잡는 거라면 전문임."

사도들이 일제히 마물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과과과—!

가브리엘이 창을 가볍게 휘두르자, 눈앞의 마물들이 폭풍처럼 쓸려나갔다.

콰앙! 콰앙! 콰앙!

검은 깃털을 흩뿌리며 날아오른 루시퍼 또한 하늘에서 마물들을 정확히 요격했다.

주작과 청룡도 이에 질세라 마물들을 사냥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은 가파르게 올라간다.

경험치는 충분하다.

다만······.

"골렘은 영혼을 주지 않으니, 다른 마물로 바꿀까."

소울 이터의 보상도 제대로 챙겨야 하니까.

* * *

"무명 헌터의 사냥을 직접 볼 수 있다니······."

"임마, 너는 비켜 무명 헌터가 누군지도 못 알아봤으면서."

"요즘 하도 사칭이 많아서 그럴 만도 하잖아."

입구를 지키던 헌터 두 명이 슬쩍 머리를 내밀었다. 사냥터 내부를 지켜보던 그들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콰아앙, 콰과과과—!

흑색과 백색의 마력이 뒤엉키고, 붉은 불길과 푸른 파도가 번갈아가며 마물들을 삼킨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자연 재해였다.

꿀꺽.

침을 삼킨 헌터의 커진 눈이 줄어들 줄 몰랐다.

사냥을 지켜보는 헌터들의 레벨도 결코 낮지 않았다. 이들도 전장에서 200레벨을 달성한 실력자였다.

"아이작도 이 정도는 했던 것 같은데?"

"에이, 절대 아니지. 차라리 사최헌이······."

"그건 진짜 아니고.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저런 능력은 못 얻겠지." 

그들이 정신을 못 차리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였다.

스륵.

그들의 등 뒤로 누군가가 나타났다. 인기척 하나 내지 않았기에 헌터들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다. 

"큼."

헛기침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거기에는 흑색의 로브를 두른 엘리스 그레인저가 있었다.

"기, 길드장님."

"언제 오셨습니까?"

두 남자가 바짝 긴장하며 허리를 꼿꼿이 폈다. 엘리스는 목례로 그들의 인사를 받고서 사냥터로 걸음을 옮겼다.

"!" 

내부로 걸음을 한걸음 옮기자마자, 강렬한 기류가 느껴졌다. 펄럭. 그녀가 머리에 눌러쓰고 있던 로브가 벗겨질 정도.

'언제 이렇게······.'

특수 게이트에 나타난 원로들을 처치했단 이야기는 들었다.

마계의 원로들.

엘리스도 그 존재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예언되는 무수한 가능성 중, 원로들이 현세를 지옥으로 만드는 미래도 있었으니까.

엘리스는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 

여기에 온 이유도 앞으로 벌어질 일을 전하기 위해서 였다. 

'훨씬 강해졌네요. 아니······. 지금도 강해지고 있나요.'

이미 인류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 넘었다.

인류 전체가 달려든다고 무명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답은 명확했다. 

NO. 절대 이길 수 없다. 

만약 무명(無命)이 인류의 적으로 돌아선다면 인류에겐 방법이 없다.

처음에는 그런 미래를 두려워했었다. 무명만큼은 예언에서 벗어나 있다. 그를 중심으로는 미래를 예언할 수 없다.

'그 점이 유일한 문제······.'

그러나 안심되는 점이 있다면, 무명은 자신의 이득을 위해 무소불위로 힘을 휘두르지 않는다는 것.

하고자했다면 진작에 세계를 손에 넣었을지도 모르는 자다. 그런 존재가 이 세계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힘을 손에 넣은 권력자는 결국 변질하기 마련인데도. 

'결국 무명을 믿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엘리스는 그리 되뇌며 무명을 향해 다가갔다. 

"무명, 다음 시련에 대해 예언하겠습니다."

엘리스의 부름에 무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 로브 너머로 어떠한 표정이나 의도도 짐작되지 않는다. 

"거대한 운석이······. 지구에 충돌할 거에요."

그러나 엘리스는 전하고자 했다.

"이번에는 막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계의 멸망을. 

* * * 

사냥이 끝났다.

도중에 엘리스 그레인저가 다녀가기는 했지만, 그거 말고 다른 특이점은 없었다.

『 현재 레벨 : Lv. 401 / 500 』

나는 적당한 나무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반나절만에 80레벨을 올렸다. 이 정도면 마물을 학살하다시피한 수준이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경험치 상승폭이 굉장히 미미하다는 것.

"여기서부터는 진짜 안 오르네."

"너무 수준 낮은 마물을 잡으면 경험치가 대폭 감소 됩니다. 레벨이 비슷한 마물을 잡는 게 가장 효율이 좋죠."

청룡이 설명했다.

새로운 사냥터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였다.

『 [ ★ ] 오의 파편 x 1 ( 3 / 5 ) 』

『 [ 신화+급 ] 사도 강화석 x 1 ( 4 / 3 ) 』

균열이 열리는 빈도 수도 줄었다.

『 랜턴 소울 이터가 고품질의 영혼을 원합니다. 』

두 번 열리고 끝이었다.

그래도 티켓 여러장과 업그레이드 재료를 얻기는 했다.

"그래서······. 사도 강화석이 나왔는데."

강화석 조각이 세 개가 모이자 붉은색의 보석 하나로 변화했다.

신화+급 강화석이다.

누구에게 먼저 써줘야 하나.

"······."

다들 조용히 나만을 바라보며 눈치를 보고 있다. 이미 신화+급인 주작은 누가 될지 궁금하단 표정이고.

나는 결정을 내렸다.

"그냥 순서대로하자."

루시퍼가 제일 먼저 왔으니 루시퍼부터.

"주인님. 현명하신 혜안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이 한 몸 불살라 주인님을 보필하겠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

"바로 통상 마법계부터 점령하고 오겠습니다."

아니, 거기는 좀 놔둬라.

"다음 시련을 생각하면, 루시퍼를 강화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기는 하네."

나는 그리 말하며 루시퍼를 향해 강화석을 들어 올렸다. 

엘리스 그레인저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 운석이 충돌할 겁니다.

엘리스 그레인저는 우리에게 다음 내용을 미리 알려줬다. 이는 현자도 모르는 미래의 일이었다.

- 운석 내부에 들어 있던 미지의 생명체들이 지구 전역으로 퍼지게 됩니다.

운석 충돌.

멸망하면 언제나 떠오르는 유명한 소재 중 하나였다. 허나, 지금의 나에겐 그리 문제로 느껴지지 않는다.

-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 운석의 크기가 상당히 큽니다. 시스템의 시련인만큼, 지구가 아예 파괴되는 일은 없겠지만······.

- 2페이즈 두 번째 시련은 쉽게 통과할 수 있겠어.

 일단은 알겠습니다.

엘리스는 미심쩍은 듯 하면서도 돌아갔다.

운석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금 중요한 건 레벨업이다.

레벨을 올릴 다른 사냥터를 어디서 구하냐는 건데, 현자나 사최헌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자, 그러면 사용한다."

나는 루시퍼를 향해 강화석을 사용했다. 샤아아—. 붉은 기운이 루시퍼의 머리에 내려 앉는다.

『 흑의 사도 '루시퍼'에게 사도 각성석을 사용합니다. 』

『 해당 사도가 신화(神話)+급으로 격상합니다. 』

붉은 기운이 검게 변하며 루시퍼의 전신을 뒤덮기 시작했다. 일순, 루시퍼의 머리에 흐릿한 고리가 맺혔다가 사라졌다.

"주인님, 이 느낌은······."

고개를 들어 올린 루시퍼가 나를 바라보는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시야가 한순간에 바뀌었다. 무명검의 해방 퀘스트를 달성했을 때와 같은 기묘한 감각이었다.

'주인님. 이건······?'

'너도 보여?'

루시퍼의 사념이 느껴진다. 나와 같은 기억을 보고 있다는 의미였다.

고오오—.

붉은 하늘 위에 고고히 떠오른 루시퍼.

루시퍼는 12장의 흑색 날개를 펼치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흑색의 후광, 헤일로가 선명히 떠올라있다.

루시퍼는 지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정말로 지긋지긋한 인간들이구나. ]

그 오만함이 향하는 장소에는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사최헌 그리고 또 다른 나.

둘 다 만신창이가 된 상태로 루시퍼를 마주하고 있었다.

"너를 소환한 건 나다. 한 번이라도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없는 거냐······?" 

나는 팔 한쪽을 부여 잡은 채, 간곡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퍼의 태도는 냉랭했다.

[ 말했잖냐. 나를 불러냈다고 해서 주인이 된 줄 착각하지 말라고. 네 놈은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다. 감히 누구에게 명령을 하는 거냐? ]

한없이 차가운 눈빛.

[ 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으마. 그러나 현세 따위 알게 뭐냐. 이제부터 나는 천계를 탈환하고 정점에 설 거다. 내 오랜 숙원을 이룰 때가 왔으니. ]

이윽고 루시퍼가 든 창에서 한 줄기의 선이 뿜어져 나왔다. 

"루시퍼—!"

나와 사최헌은 루시퍼를 향해 달려 들었다. 그러나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 대충 봐도 알 수 있다. 루시퍼와 나 사이에는 어마어마한 격차가 존재했다. 

츠즈즛!

순식간에 사최헌의 팔이 잘려 나갔다. 털썩.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실선에 사최헌이 쓰러졌다. 

"크윽!"

털썩. 그런 사최헌을 보호하려다 나도 비슷한 꼴이 되고 말았다. 루시퍼의 공격에는 자비가 없었다. 

무자비하게 공격을 퍼부으면서도 입가의 사악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 

'주, 주인님. 이건 다 날조입니다. 날조라고요!'

'날조는 아닌 것 같은데······.'

털썩.

사최헌은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치명상을 입은 내꼴도 비슷했다. 피웅덩이에 잠긴 사최헌이 나를 향해 중얼거렸다.

"다음 번에는······. 다음 번에는 분명히······."

사최헌은 허망한 눈빛으로 그리 말하며 죽었다. 

이런 일이 정말로 있었던 걸까.

다소 이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소환수는 주인의 말에 거역할 수 없는 것 아니었나? 

거부하게 되면 패널티가 생겼을텐데. 

기억 속의 루시퍼는 그런 게 하나도 없는 양 행동하고 있다. 

지금의 루시퍼와는 너무나 다르다. 

이번 기억은 거기서 끝이었다.

파직, 파지직—!

시야의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어오른다.

동시에 생각지도 못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 루시퍼의 숨겨진 해방 조건이 드러납니다. 』

초고속 성장(3)

기억.

신화+급으로 격상된 루시퍼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또 다른 기억이었다.

"주인이여, 괜찮은가?"

"설마 새 기억인가요?" 

나와 루시퍼가 비틀거리자, 주작과 청룡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루시퍼는 심각한 표정으로 재차 내게 확인했다. 

"주인님······. 방금 그건······."

"그래, 새로운 기억이었어."

사최헌과 나는 루시퍼와 맞서 싸우고 있었다.

루시퍼는 일말의 자비 없이 사최헌과 나를 공격했다. 마치 그 둘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생각해보면 사최헌은 사도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지.'

루시퍼가 처음 나타났을 때의 태도도 그렇고.

사도란 본디 친밀한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루시퍼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더욱이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루시퍼의 숨겨진 해방 조건이 드러납니다. 』

『 해방 : 루시퍼의 기억 확인 ( 23% ) 』

새롭게 등장한 해방 조건.

'기억을 확인할수록 해방률이 올라가는 건가.'

사도가 전용 무기를 손에 쥐었을 때. 

그리고 신화+급으로 격상했을 때도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기억을 깨우는 특정 행동이 있는 거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 기억을 숨겨 두었다. 그리 보는 편이 정확하리라. 

사실은 누가 이걸 숨겼나. 그게 제일 궁금했던 건데. 현자도 모른다고 하니 계속해서 기억을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오, 주인님. 뭔가가 달라졌습니다."

그때, 루시퍼가 몸 위로 흑색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이전과는 다르다. 흑암의 기운에 별빛이 섞여 있다.

루시퍼는 그 기운을 동그랗게 빚더니,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 사역마 : 데빌아이 [ Lv. 290 ] 』

동그란 눈에 날개가 달린 마물이었다. 얼핏 박쥐 같기도 한 녀석은 루시퍼의 어깨에 앉았다.

"사역마입니다. 기억을 확인하면서 능력의 확장이 이뤄진 모양입니다."

"제한 해제랑은 다른 건가?"

"제한 해제가 사도로서의 출력을 강화하는 거라면, 이건 제 본질에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입니다."

뭔가 모호한 설명이다.

"성좌였을 때의 전능에 가까운 능력을 조금 더 잘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할까요."

루시퍼는 사역마를 한 마리 더 만들었다. 두 사역마를 주작과 청룡의 어깨에 올렸다.

"귀, 귀엽구려."

주작은 어깨에 앉은 사역마를 쓰다듬었다.

"이제 두 사도를 통해서도 시야 공유가 가능할 겁니다."

루시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건 굉장하다.

내친김에 바로 확인해보았다.

눈을 지그시 감자 청룡과 주작의 시점에서 시야가 확인 된다. 

"오, 좋은데?"

지금까지 청룡과 주작을 통해선 시야를 볼 수 없던 게 은근한 약점이었는데. 잘 되었다.

"주인님께서 마음에 들어하시니 다행입니다."

루시퍼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근데 한 가지 의문인 게 있다.

"······기억 속의 너는 천계의 정점에 오르겠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그 목표는 유효한 거야?"

세계가 반복된 거라면 루시퍼의 목표도 그대로일 터.

"헐." 

가브리엘이 어이없다는 듯 루시퍼를 쳐다봤다.

"예? 제가요?"

루시퍼도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켰다. 이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딴 귀찮은 짓을 왜 합니까. 지금은 주인님을 보필하겠다는 목표 말고는 없습니다. 물론······. 과거에 적개심이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정말 오래전의 일입니다."

굉장히 억울해하고 있다.

"그 기억이 뭔지는 몰라도. 절 음해하려는 것 하나는 확실합니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본래 루시퍼는 타락한 천사. 신과 천계에 대해 강한 분노를 드러내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싶은데······.

이것도 기억을 확인하다보면 답을 알게 되겠지.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대충 확인이 끝났으니 이제 슬슬 전장을 닫을까."

기억에 관해선 추측만 난무할 뿐이니 이 정도로 해두고. 

나는 마지막으로 전장을 확인했다.

사실 전장을 며칠 더 유지해도 괜찮지만, 혼돈의 전령이 어떻게 나올지 우려된다. 변수는 사전에 차단해 두는 게 좋으니까.

"주인님, 여기에 있습니다."

청룡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유리통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잠든 것처럼 눈을 감은 묵시록의 기사 '전쟁'이 있다.

"이제 전장을 닫을게." 

엘리스에게는 미리 의사를 전해 두었다. 전장 입구를 지키던 헌터들도 철수한 상태.

나는 유리통을 든 채로 즉살을 발휘했다.

푸화악—.

『 묵시록의 기사가 처치되었습니다. 』

『 1페이즈 두 번째 시련이 클리어 되었습니다. 』

『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

1위 : 무명(無命) 99.9%

···

..

.

『 보상을 지급합니다. 』 

* * *

고오오—!

전 세계에 눈에 띄는 이변이 발생했다. 지금까지 줄곧 하늘 위를 차지하고 있던 거대한 검이 사라졌다. 바람에 씻기듯 가루가 되어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정말로 사라졌다."

"저 성가신 게 드디어 없어졌네."

"그래, 위원회에서 했던 말이 진짜였다니까?"

6개의 대륙 중 하나가 붕괴 될거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물론 예언자의 별에서는 각종 언론을 통해 검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고해 왔다.

초법적 길드 세이비어도,

새롭게 설립된 종말대책위원회에서도.

줄곧 인류는 안전하다고 말해 왔다. 

그러나 누군가가 전해주는 사실을 믿는 것과 직접 목격하는 건 완전히 다른 일. 검이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인류가 손 쓸 도리 없던 재앙을 무명 한 사람이 극복해낸 것이다. 

- 국제 헌터 랭킹, 무명 한 단계 상승. EX+급으로 지정

- 대한민국의 무명 헌터 독보적 1위

- 무명, 시련의 근원 자체를 제거하는데 성공

이번 사건을 기점으로 사람들의 반응도 크게 달라졌다.

- 진짜 무명이 해결하는구나.

- 미친 ㅋㅋㅋㅋㅋ 진짜 전설이다.

- 무명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정말로 무명만 믿자. 무명님 믿습니다!

보유 포인트가 가장 낮은 대륙이 파괴되는 게 본래의 규칙. 

그러니 가장 낮은 포인트를 보유하고 있던 오세아니아 대륙에서 무명은 거의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오세아니에서 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에서도 무명을 영웅시 하는 이들이 크게 늘었다.

- 그래, 무명은 다 생각이 있다니까?

- 와, 이걸 전 세계를 구해버리네.

- 아예 시련을 삭제시키는 게 말이 됨?

- 클라스가 그냥 다르네 ㅋㅋㅋㅋ

각종 매체에서도 무명에 대한 보도를 끊임없이 내보냈다.

무명을 고깝게 보던 사람들조차 태도를 바꿀 지경.

전 세계가 무명에게 열광하는 건 당연했다. 

"오오, 주인. 인터넷에서 엄청난 인기야."

"현실에서도 반응이 좋습니다. 여론이 바뀌는 건 순식간이네요."

물론, 무명 본인은 담담했다.

"그거 다행이네."

현세가 평화로웠으면 모를까. 지금 같은 상황에선 딱히 기뻐하기도 그렇다. 인기가 커질수록 신원을 숨기고 활동하길 잘했다는 생각 뿐이다. 

우우웅······.

그때, 스마트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동생한테서 온 전화였다. 수화기 너머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되게 간만에 통화하는 느낌이다.

- 방금 뉴스 봤어? 대박. 무명이 하늘에 떠 있던 검을 전부 없애버렸다는데?

"봤지."

- 오빠가 불멸에서 일한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무명 헌터 만난 적 없어?

"있어."

거의 매일 만난다. 

무명이 나니까. 

- 대박, 무명 헌터 싸인 좀.

얘는 뭘 자꾸 싸인을 받아 오래.

지난번에 사최헌 헌터 싸인도 받아서 가져다 줬었는데. 

- 레벨은 많이 올렸어? 아니다. 지난번에 이사왔을 때가 E급이었으니까. 뭐, 비슷하겠네. 

E급은 무슨 SSS급이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지. 

당장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지내는데 문제 없지?"

"물론. 뭐, 세상이 뒤숭숭하긴 하지만 그건 원래도 그랬고. 근데 오빠 돈을 왜 이렇게 잘 벌어? E급 헌터 검색해 봤는데 이 정도는 아니라던데······."

"사최헌 헌터가 내 재능을 알아본 거 아니겠냐." 

"에이. 뻥이 심하네."

그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동생은 못했던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 빌딩 장난 아니야. 오빠도 봤지. 지난번에 악마 나왔을 때. 헌터들 죄다 우르르 몰려가서 악마 패버리고······."

그 뒤로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가지 했다.

"하여튼 덕분에 잘 지내고 있어. 라고 엄마가 전해 달래. 그리고 가끔은 내려와서 밥도 먹고 가래. 할 말은 다 했고. 그럼 끊는다?"

"그래, 그래." 

마물 출현이 잦아지는 가운데 이 빌딩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안전한 장소라고 볼 수 있다.

빌딩 자체가 요새나 다름없다고 했었지. 사최헌이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어낸 건물이니까.

당분간은 안심할 수 있을 거다.

"그러면 아이템 정리부터마저 끝낼까." 

사도들에겐 잠깐의 휴식 시간이다.

가브리엘은 게임기로 게임을 하고 있고, 주작은 소파에 기대어 독서를 하고 있다. 루시퍼는 청소, 청룡은 TV를 유심히 보고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도 각자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케로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지만. 뭐, 알아서 잘 있겠지. 집이 워낙 넓어야지. 

나는 인벤토리의 아이템들을 꺼냈다.

『 종말의 편린(★) x 3 』

나머지 칠죄종 셋을 잡고 나온 조각이었다.

종말의 편린은 제한을 일부 해제시켜준다. 

샤아아—.

세 개의 편린을 하나로 합치자 제한이 조금 더 해제 되었다.

『 제한 해제율 』

- 0.04 [ 정상 ]

죽음의 기운이 더욱더 선명해졌다.

이 수치가 1이 되면 모든 제한에서 자유로워진다.

아직 한참 멀기는 했지만······.

이건 나뿐만 아니라 사도들에게도 적용되니 길게 봐야 한다. 최대치가 되면 사도들이 성좌 본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건데.

그때를 위해서라도 종말의 편린을 차곡차곡 모아 둬야겠지.

칠죄종을 잡고 나온 나머지 아이템들은 내가 쓰기 애매한 것들 뿐이었으므로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다음은 묵시록의 기사를 잡고 얻은 아이템인가.'

파직, 파지직—.

인벤토리에서 꺼내드는 것만으로 스파크가 일어난다. 사실 태초급을 기대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던 모양. 그래도 종말+급이면 뭐가 되어도 좋다. 

나타난 것은 검은색 책 한 권이었다.

『 [ 종말+ ] 예언 : 묵시(默示) 』

- 스킬 습득서

- 대상의 정보를 꿰뚫어 봅니다.

지극히 단순한 설명이다. 

종말+급이 맞나 싶을 정도로.

스킬 습득서인가. 

이걸 사용하면 스킬을 습득할 수 있다. 이제는 돈이 궁하지 않으니 어디에 팔 필요도 없다. 그냥 내가 써야지. 

나는 곧장 습득서를 사용했다.

『 신규 스킬을 습득합니다. 』

『 [ 종말+ ] 스킬 '예언 : 묵시 Lv.1'를 획득하셨습니다. 』

"오, 그 스킬은······. 최고 등급의 통찰 계열 스킬입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있던 루시퍼가 내 시스템창을 확인하고선 다가왔다. 가브리엘도 관심을 가지고 게임기에서 시선을 옮겼다. 

"한 번 저한테 써보시겠습니까?"

"그래."

『 [ 종말+ ] '예언 : 묵시 Lv.1'을 발휘합니다. 』

사용법은 간단했다.

보고 싶은 대상을 정하면 대상의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렇게 나타난 루시퍼의 레벨은······.

『 흑의 사도 루시퍼 (신화+급) [ Lv.??? ] 』

레벨이 안 보이는데.

스킬 고장 난 거 아니야?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사도는 레벨이 없거든요. 급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신화+급이면······. 아마 875정도 일겁니다."

레벨 500부터가 전설.

750부터 신화.

1000부터 종말.

새삼 느끼지만 사도들은 무지하게 강한 거구나.

"잠깐, 그러면 원로들은?"

"1천은 가볍게 넘겠죠."

"······." 

나는 그런 놈들을 아무렇지 않게 잡아 왔던 건가.

원로들이 기겁하는 이유를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약하디 약한 슬라임이 인간을 학살하고 다니면 그건 그것대로 공포일테니까. 뭐, 굳이 따지자면 그런 느낌일까. 

나머지 아이템들은 코인과 전설의 증표였다.

전설의 증표가 상당히 많이 쌓였으니 슬슬 교환을 하고 싶다. 

성좌와의 교환권을 하나 얻었던 것 같은데······.

그리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허공에 별안간 게이트가 나타났다. 그 안에서 걸어나온 것은 현자 아스펠트였다.

"깜짝이야. 말 좀 하고다니지?" 

루시퍼가 짜증을 냈다. 아스펠트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날 바라봤다. 

"그 사이에 레벨업을 해뒀을 줄이야. 전장이란 방법이 있었나. 아주 좋아. 그런데 좋은 소식과 안좋은 소식이 있네. 안좋은 소식부터 전하겠네."

"보통은 뭘 들을 건지 물어보지 않나?" 

현자는 루시퍼를 무시하고선 검지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마계의 정점이 혼돈의 전령과 손을 잡았네. 조만간 쳐들어올 거야. 페이즈2의 세 번째 시련에 맞춰 오겠지. 별로 놀라지 않는군."

예상은 했던지라 충격은 덜하다. 

"좋은 소식은······."

현자 아스펠트가 살짝 비켜섰다. 그러자, 게이트 내부에서 새하얀 날개를 지닌 남자 하나가 걸어 나왔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떠 있는 링. 헤일로가 남자가 천사라는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헐."

가브리엘이 숨을 들이켰다.

현자 아스펠트는 씩 웃으며 새로운 인물을 소개했다.

"질서의 전령이 우리를 도와주기로 했네. 이름은······. 산달폰. 그대들과 같은 사도일세."

지원(1)

사도란 무엇인가.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은 고위 존재가 지상에 현현한 상태를 이른다네."

현자 아스펠트는 사도에 대해 그리 설명했다.

"즉······. 산달폰도 그대들과 다르지 않은 사도라는 거지."

반짝이는 금발, 새하얀 의복과 여러 장의 날개. 머리 위의 후광까지. 산달폰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산달폰은 틀림없는 천사였다. 그것도 상당히 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는.

'기억 속의 루시퍼가 12장의 날개와 검은 후광을 가지고 있었지.'

산달폰의 날개는 6장이다. 천사들은 강해질수록 날개가 여러 장으로 나뉘는 듯하니 대충 봐도 강한 게 느껴진다. 

나는 새로 얻은 스킬 '묵시 : 예언'을 사용해 산달폰의 능력을 확인했다.

『 멸악의 사도 '산달폰' (태초+급) [ Lv.? ] 』

레벨은 나오지 않으나 등급은 확실하게 표시된다. 태초+급이면 루시퍼보다 3단계가 높다.

전설, 신화, 종말, 태초. 

이런 순서이니 지금으로서는 아득한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선배, 이런 곳에서 뵙네요."

산달폰은 사람 좋게 웃으며 가브리엘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가브리엘의 표정이 좋진 않았다.

"무슨 꿍꿍이야?"

그녀는 고운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산달폰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꿍꿍이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천계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한 몸 불사르고 있을 뿐이죠."

"굳이 질서의 전령 밑에서? 수상해."

따지고 보면 호랑이가 늑대 밑으로 들어간 셈.

근데 아마 산달폰 쪽에서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선배야말로 그딴 하등한 인간 아래에서 잘도 계시는군요."

푸슉—!

가브리엘의 창이 산달폰의 머리 옆을 꿰뚫었다. 잘려나간 금발이 조금 흩날렸다. 

"주인은 달라."

보기 드문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산달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조용히 손을 들어 창을 치워낼 뿐.

힘을 준 가브리엘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산달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이렇게 약한 선배는 처음이네요. 정말······. 보호해주고 싶네요."

"돌아가면 넌 죽었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지자 현자 아스펠트가 중재를 나섰다.

"자자, 다들 적당히 하지? 어쨌든 산달폰은 우리를 도와주러 온 거니까. 그는 질서의 전령이기도 하고."

"간단한 안부 인사였습니다. 그보다······."

산달폰은 아스펠트를 무시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이번에는 루시퍼를 향해서였다.

"증오스러운 존재가 여기에 있었네요. 알고는 있었지만, 얼굴을 직접 보니 화가 치미는군요. 당장이라도 당신의 사지를 찢어 멸하고 싶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참겠습니다. 아시겠죠?"

명백한 적의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하."

루시퍼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녀석은 내게 사념을 보냈다.

[ 주인님, 저 녀석 죽이죠. 질서의 전령이니 해방 퀘스트도 하고 일석이조네요. ]

······해방 퀘스트가 가능은 하겠다만, 아스펠트가 동맹으로 데려왔는데 굳이 적을 늘리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내가 고개를 젓자 루시퍼가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 큭, 저 싸가지 없는 놈. 어쨌든 나중에 손 봐주겠습니다. ]

산달폰은 앞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본론을 꺼냈다. 

"혼돈의 전령이 마계의 정점과 결탁했습니다."

계속해서 방관을 고수하던 질서의 지배자가 움직이게 된 계기. 

혼돈의 전령은 본격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그게 확실시 되었다. 

"질서의 지배자는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오랜 기간 유지되어 왔던 4 영역의 균형이 깨어지려 하고 있으니까요." 

『 질서의 지배자가 고개를 끄덕입니다. 』

"그래서 우리는 무명(無命)을 도와 질서를 유지할 생각입니다. 이 부분은 현자의 설득에 넘어갔다고 해두죠."

저쪽에 마계의 정점이 있다면, 이쪽에는 무명(無命)이 있다는 느낌. 

도와준다니 딱히 거절할 이유는 없다.

목적이 같다면 협력할 수도 있는 거니까. 

산달폰은 휙하고 나를 돌아봤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마계의 정점에게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잘나신 천사께서 없애주면 되는 거잖아. 질서의 전령이라며?" 

루시퍼의 비아냥에 산달폰이 얼굴을 구겼다.

"아직 전령끼리의 직접적인 충돌은 불가능하기에. 무명, 그쪽이 직접 쓰러뜨려야 합니다. 다만······."

산달폰은 재차 강조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안됩니다. 주어진 기간 동안 최대한 강해져야 합니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

원로들을 쓰러뜨리는 것도 그리 쉽진 않았다.

결과적으로는 간단하게 끝나긴 했지만, 사도들과 호영의 도움이 없이 나 혼자서는 불가능했을 거다. 

치직, 치지직—.

산달폰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노이즈가 어느새 게이트를 형성했다.

"레벨을 올리기 적합한 장소를 알고 있습니다. 슬슬 현세가 비좁게 느껴질 겁니다. 질서의 영역에 좋은 사냥터가 준비되어 있으니 거길 사용하죠."

동맹으로부터의 전폭적인 지원.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여기보다 좋은 사냥터는 없을 겁니다."

산달폰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그리 말했다.

* * *

대한민국에 형성되었던 EX급 게이트.

"또 찾았다!"

"여, 여기에 신화급 아이템이 있는데?!"

"돌았군. 여기 전체가 보물창고나 다름없어."

그 내부에선 아직도 헌터들이 중심부를 탐사를 하고 있었다.

원로들이 사라지자 난이도는 급격히 낮아졌다.

나타나는 마물은 눈에 띄게 약해졌고, 숨겨져 있던 유적이나 폐허가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럼에도 공략 난이도는 SSS급 이상.

실력에 자신 있는 헌터들만이 탐사에 나설 수 있었다.

푸슉, 푸슉—!

그 안에서도 두각을 드러내는 자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천이령 헌터였다.

단검을 들고서 거침없이 달려나가는 천이령. 그녀가 단검을 휘두를 때마다 섀도우 비스트가 빠르게 쓰러져갔다. 

"괴, 굉장한데. 이령이 페이스에 못 따라가겠어."

"섀도우 비스트를 일반 마물처럼······."

같은 청명 길드의 길드원들도 한마디씩 감탄을 내뱉었다.

길드장인 채아린은 눈물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큰다더니. 흑, 벌써 다 컸네. 너무 강해졌어. 더 이상 가르칠 게 없다."

"길드장이야말로 몸은 괜찮아요? 거대 괴수한테 잡아 먹혔었잖아요."

"몇 번을 말해. 난 거기서 무명 구경만 했다니까? 그보다 이령이가 무리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채아린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천이령을 바라봤다.

푸슉, 콰과과—!

천이령은 게이트에 들어 온 뒤 쉬지도 않고 사냥에 전념하고 있었다. 손에 들린 빵쪼가리만 먹으면서. 최고급 요리를 먹어도 모자랄 판국에 겨우 빵쪼가리라니.

"큭, 돌아가면 맛있는 걸 사줘야지." 

채아린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먹는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이 몰두하고 있다.

"빵만 먹으면서 저렇게 열심히 하다니······. 길드장, 저희도 본받아야겠네요."

"새삼 반성하게 되네. 저희도 바로 나가죠."

"제일 어린 이령이가 열심히 하는데, 이렇게 있을 순 없지. 갑시다!"

"······그래, 가자." 

쉬고 있던 길드원들이 자극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채아린도 기세 좋게 검을 들며 달려나갔다.

하읍.

천이령은 조화의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즉시 체력과 피로가 씻은 듯이 날아간다. 포만감까지 차오른다. 

'내가 만들었지만······. 말도 안 되는 성능이야.'

최상급 포션 저리가라 할 정도의 효과다. 이게 있다면 휴식을 취하지 않고서 전투를 이어갈 수 있다. 심지어 맛도 훌륭하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해.'

천이령은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성장에 대한 갈증. 

이번 특수 게이트의 보스는 마족이 틀림없었다. 그 불길한 마기를 자신이 알아보지 못 할 리가 없었으니까.

다만, 아득한 차이를 느꼈다. 원로의 기운이 바깥으로 방출되었을 때. 천이령은 한순간이지만 크게 압도되었다. 

'여전히 싸움에 끼는 것조차 불가능해······.' 

이전 원로 때도 그랬고, 

이번 원로 때도 그러하다. 

더욱더 강해져야만 했다.

이대로라면 가족을 죽인 마인에게 제대로 된 복수도 못 하고 허무하게 끝날 테니까. 아니, 무명(無命)님이 한 방에 죽여 주실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걸로 괜찮은 걸까? 

천이령은 결론을 내렸다.

마물을 잡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복귀할게요."

천이령의 말에 달려 나가던 길드원들이 멈춰서서 한마디씩했다.

"그래, 이제 돌아가서 쉬어도 돼."

"너무 열심히 안해도 되니까, 돌아가서 편히 쉬어."

"고생했어, 이령아."

채아린도 천이령의 손에 어깨를 얹었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다. 따뜻한 사람들이었고.

고마운 마음은 항상 가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필요한 것은 안락한 보금자리가 아니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게이트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바깥에는 기자들이 한가득이었다.

"천이령 헌터다!"

"이령 헌터, 한 마디만 부탁드립니다!"

"이번 게이트 공략에 대해서······!"

천이령은 무수한 플래시 세례를 지나쳐서 집으로 향했다. 가야할 곳은 명확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 빌딩의 최상층으로 향했다. 

무명(無命)의 거처.

천이령은 떨리는 마음으로 벨을 눌렀다. 안에서 들어오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왔나, 꼬맹이." 

철컥, 끼익. 문은 열려 있었다. 

"현자 놈이 정확하기는 하네. "

집 안에는 루시퍼가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소파의 윗부분에 걸터 앉아 있었다.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찾아냈다."

"네?"

"마계의 정점. 찾았다고." 

그 말에 천이령은 심장이 덜컥 내려 앉는 듯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증오의 대상. 가족을 몰살한 범인. 이렇게 빨리 찾아낼 줄은 몰랐다. 

"그런데 너무 강해. 이대로 가면 개죽음이야. 너나 나나."

"······."

루시퍼조차 이기지 못하는 적이라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쉬운 적이 아닐 거라고.

천이령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래도, 그래도 싸우고 싶어요."

아니, 최소한 물어보기만이라도 하고 싶다. 

왜 죽였냐고.

씨앗이 무엇이냐고.

어째서 나냐고······. 

"그래, 그렇게 말할 줄 알았다. 그 눈빛. 아주 마음에 들어."

루시퍼는 씩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특별한 수업을 해야겠지."

* * *

『 두 번째 시련이 잠정 공략되었습니다. 』

마계의 원로들과 혼돈의 전령의 합동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마계는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인류는 자그마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시스템은 묵묵히 나아간다.

정해진 결과를 써내려가기 위해서.

『 2페이즈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

모든 헌터들의 눈앞으로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미국의 초고층 빌딩.

그 옥상에는 소수의 헌터가 모여 있었다.

예언자의 별에 해당하는 인물들과 사최헌 헌터였다. 

"제가 여기에 있을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죠?"

엘리스 그레인저가 태연하게 서 있는 사최헌에게 물었다.

"감."

사최헌은 일찌감치 특수 게이트에서 나와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세 번째 시련이 나타나는 것을 관측하기 위함이었다.

이번 시련부터는 전세계가 다 함께 움직여야만 했다.

현시점, 예언자의 별이 쥐고 있는 권력은 막강하다. 이들을 설득하는 것이 곧 세계를 움직이는 일. 

따라서 사최헌은 이곳에 왔다.

『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

『 [ 현세 ] 대종말 : 운석충돌 』

고오오오—.

간만에 청량하던 하늘 위로 운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구에서도 훤히 보일 만큼 커다란 크기다.

그것이 지상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일설에 따르면 공룡을 멸종 시켰다는 소행성의 크기가 약 10km. 눈앞의 운석은 그것보다 훨씬 거대했다.

인류를 멸망시키기엔 차고 넘치는 크기.

사최헌은 담담히 운석을 응시했다.

'충돌하면 최소 인류의 절반이 죽는다.'

과거 수차례의 회귀 속에서 딱 한 번, 운석이 지구에 떨어진 적이 있었다.

직격당한 대륙은 그대로 침몰.

거대한 흙먼지가 솟아올라, 하늘을 어둡게 물들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땅 위에서 인류는 힘겨운 삶을 이어가야만 했다.

마물들이 득세해 지옥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 운석에 깃든 이상한 기운이 현세에 스며듭니다. 』

제일 귀찮은 것은 이것이다. 쨍그랑—! 빌딩의 아래쪽에서 몇 사람이 창문을 깨고 뛰어 내렸다.

운석은 치명적인 기운을 내포하고 있다. 소수의 사람들이 이 기운에 반응한다. 미치거나, 각성하거나, 죽거나. 셋 중 하나다.

타앗, 스륵—.

엘리스가 조용히 손을 뻗자, 뒤쪽에 로브를 두르고 있던 사람들이 뛰쳐나갔다. 추락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함이었다.

"이상 기운은 곧 제거될 거다."

사최헌은 담담하게 말했다.

이에 대한 대비는 해두었다. 거대한 운석을 직접 파괴하는 건 어렵지만, 그 힘을 약화시키는 일은 가능하다.

- 캐나다, 게이트 공략 완료.

- 중국, 게이트 공략 끝.

- 인도도 끝이에요.

인이어를 통해 동료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 지정된 게이트를 클리어해 이상 기운이 차단됩니다. 』

엘리스가 사최헌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벌써······?"

"글쎄."

사최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엘리스의 예언은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기에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거고.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엔 이르다.

운석을 파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 과거에는 사최헌이 직접 운석을 깨부쉈지만······.

'성장이 부족하다. 페이즈의 진행이 너무 빨라.'

여기에서부턴 무명(無命)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그때, 엘리스가 휙하고 고개를 돌렸다.

화아아악-! 

드넓은 창공을 질주하는 한 마리의 불새가 보였다. 

주작이 도착했다.

처억.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한 주작이 옥상에 내려앉았다. 그녀는 붉은 보석이 박힌 스태프를 들고서 중얼거렸다.

"주인이여, 보상은 이 몸이 챙길테니 마음 놓고 사냥에 전념하시게."

"혼자인건가요?"

"혼자면 안 되는가?"

엘리스는 미심쩍다는 듯 말했다. 그렇게 경고했는데 사도 한 명을 보냈을 뿐이라니. 

스윽.

반면 사최헌은 자연스럽게 길을 터주었다.

"부탁하지······." 

굳이 직접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 정도 시련으로는 더 이상 무명(無命)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지원(2)

"여기는······."

질서의 전령, 산달폰이 만들어낸 게이트를 통과하자 아름다운 숲이 펼쳐졌다.

숲 전체가 햇살에 반짝여 성스러운 느낌마저 준다.

『 질서의 영역 : 잊혀진 고대신의 숲 』

『 해당 차원은 전설급입니다. 』

- Lv.450 이상의 마물 등장

- 속성 : 진(眞) 항마

종말+급 스킬인 '예언 : 묵시'의 효과가 자동으로 발현되었다.

다른 차원의 세세한 정보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기에서 사냥을 하면 된다는 건가?"

내 물음에 산달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레벨대에서 가장 괜찮은 사냥터라고 생각합니다. 일종의 던전이기도 하고요."

산달폰은 손가락으로 숲 너머를 가리켰다.

"중앙에 있는 무너진 신전에서 고대신을 깨워서 보상을 챙길 수도 있습니다. 진 항마(抗魔)의 기운이니, 마계의 정점을 상대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항마는 마족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사최헌도 항마의 힘으로 마족을 처리했었고.

진(眞) 항마라는 건 그보다 상위의 힘이겠지.

"물론, 거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가능한 일이지만요."

산달폰은 싱글싱글 웃으며 우리를 지켜봤다. 그러자 가브리엘이 눈을 가늘게 뜨고선 물었다.

"왜 안 가고 우리를 지켜봐?"

"혹시 모르잖아요. 질서의 영역 안이라고는 해도······. 혼돈의 전령이 쳐들어 올 수도 있거든요. 그리고 무명(無命)의 능력을 직접 눈에 새기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참고로 현자 아스펠트는 따라오지 않았다. 정말로 전투는 특기가 아닌 모양이다.

"그럼 출발해 볼까."

나는 무명검을 빼들고선 숲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진 항마는 겸사겸사 얻는 거고 중요한 건 레벨이다. 레벨을 올려야 등급이 올라가니까.

"오, 그 검은······. 원로를 쓰러뜨렸을 때 썼다던 검이군요. 외관상으론 특별해보이지 않는데."

산달폰은 나를 관찰하면서 뒤따라왔다.

"주인님!"

그때, 뒤늦게 따라온 루시퍼가 쫓아왔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천이령 헌터한테 이야기는 제대로 하고 왔어?" 

천이령 헌터 덕에 랜턴도 고쳤고 조화의 빵도 얻었다.

이쪽도 얻은 게 있으니 약속대로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내 제자로 삼을 순 없어도 루시퍼의 제자로 할 순 있을테니까.

루시퍼는 자신만만하게 미소지었다.

"꼬맹이한테는 제대로 미션을 주고 왔으니 걱정안하셔도 됩니다. 그보다······."

녀석은 얼굴을 와락 구기더니 산달폰에게 시선을 옮겼다.

"구경할 거면 멀찍이서 해라, 멍청한 천사."

"악마 주제에 제게 말 걸지 말라고 했었을텐데요. 역겹습니다."

"이 새끼가······."

두 사람을 중재하는 건 다름 아닌 가브리엘이었다.

"뒤로 가."

"넵, 선배가 그리 말씀하신다면."

가브리엘의 한마디에 산달폰이 뒤쪽으로 쭉 빠졌다. 가브리엘의 말은 잘 듣는다.

내가 알기로 가브리엘은 4대 천사에 해당한다. 천계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속해 있다.

산달폰은 그보다는 아래다.

말을 잘 듣는 게 당연할지도. 

"주인님, 마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청룡의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외침과 동시에 내 시야에도 생명의 기운이 보였다.

이윽고 숲 속에서 마물이 튀어나왔다.

콰앙—! 끼에엑!

믿기지 않는 속도로 돌진 해오는 은빛 원숭이 한 마리.

『 은빛 원숭이 [ Lv.543 ] 』

나는 적힌 숫자를 보면서 잠시 굳어졌다. 게이트에 들어서며 미리 정보를 확인하긴 했지만······.

'원숭이가 레벨이 543?'

일전 제주도에서 만난 여왕의 레벨이 300 중반이었음을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다.

심지어 저 원숭이는 일반 마물처럼 보이는데. 

타앗.

나는 달려오는 원숭이를 향해 달려나가 검을 휘둘렀다.

끼에엑-!

은빛 원숭이는 괴성과 함께 몸을 꺾었다. 녀석은 유연한 몸놀림으로 검을 피했다.

이어서 놈의 긴팔이 나를 향해 휘둘러졌다. 콰앙-! 나도 몸을 틀어 피해냈다만 심상치 않은 공격이었다.

지면이 폭발하듯 솟구쳐 올랐다.

한순간이지만 분명히 봤다. 원숭이의 팔에 새하얀 항마의 기운이 둘러져 있었다. 몸에 기운을 씌운 것이다.

나도 저 정도로는 못하는데. 

'현세의 마물들과는 진짜 차원이 다르네.'

슥—.

나는 적당히 검을 휘둘렀다. 굳이 피하지 않아도 될만한 간격으로, 힘을 싣지 않고서.

일종의 페이크였다.

아니나 다를까 은빛 원숭이는 내 공격을 받으며 달려 들었다. 검날은 어깨를 조금 스쳤을 뿐이다.

일반적인 전투였다면, 원숭이 녀석이 우위를 점할만한 상황이었지만······.

무명검에는 죽음의 기운이 담겨 있다.

끼엑······?!

푸화아악!

은빛 원숭이는 그대로 폭발하며 목숨을 잃었다. 닿기만 하면 한 방이다. 스쳐도 한 방이고. 

『 레벨이 상승합니다. 』

원숭이의 레벨이 높았던만큼 경험치도 아주 풍부했다. 

짝, 짝.

뒤쪽에 멀찍하게 떨어져 있던 산달폰이 박수를 쳤다.

"이야, 역시 무명(無命)인가요. 레벨 차이는 우습다는 듯 돌파해버리네요.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의 시선이 숲 너머로 향했다.

스으으······.

숲의 어둠 너머로 보이는 수십 쌍의 안광. 

아직도 저 안에는 강력한 마물이 득실 거리고 있단 뜻이었다.

"······오히려 좋은데." 

나는 무명검을 재차 손에 쥐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가브리엘이 알아서 궁극기를 발휘했다.

『 사도 '가브리엘'이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백광(白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 주변 마물의 상태를 정상화 합니다. 』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540이었던 마물의 레벨이 378으로 확 내려간다. 다른 마물들의 레벨도 마찬가지였다.

『 현재 레벨 : Lv. 402 / 500 』

나는 눈 앞에서 일렁이는 수십의 기운들을 향해 말했다.

"죽어."

푸화아악—!

생명의 기운으로 만연하던 고대신의 숲에 죽음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 * *

결국에는 영역 다툼이자 영토 싸움이었다.

'혼돈의 지배자가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단 말이죠.'

그간의 불문율을 깨고서 다른 차원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무명(無命)을 없애기 위해서라지만, 그건 표면적인 이유에 불과했다. 그걸 빌미로 다른 영역을 침범할 가능성이 컸다.

적어도 질서의 지배자는 그리 생각하는 듯했다.

'······이쪽은 무명을 키워서 오히려 맞불을 놓는다.'

산달폰은 생각에 잠긴 채, 눈 앞의 무명 일행을 지켜보았다.

'흐음······.'

콰아아아—!

청룡의 도력이 지면을 솟게해 숨어 있던 마물들을 끄집어 냈다.

루시퍼는 공중에서 흑마력을 쏘아 은빛 마물을 저격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는 것 같진 않았다.

"이 놈들이 가진 항마 때문에 공격이 온전히 통하지 않습니다. 쯧, 성가시게."

"저런······. 뒤에 가서 산달폰이랑 놀면 되겠네." 

가브리엘이 루시퍼를 향해 이죽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산달폰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아, 가브리엘 선배.

언제보아도 아름답군.

그런 놈이 어째서 하등한 인간과 함께 하고 있는 건지······. 

심지어 악마들의 왕까지······. 

산달폰은 잠시 넋놓고 가브리엘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무명. 무명을 확인해야 했다.

'이곳을 사냥터로 추천한 건 이유가 있지.'

항마유적계.

이곳의 마물들은 선천적인 항마력을 타고난다. 다른 차원에 떠도는 항마의 아류랑은 다르다.

진 항마를 지닌 존재는, 마(魔)와 관련된 모든 것에 저항력을 가진다.

'대부분의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루시퍼의 흑마력이 통하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흑마법도 일종의 마법이니까.

무명을 관찰하기엔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무명의 성장 가능성을 생각하면, 지금 정보를 모아두는 게 가장 좋을테니 말이야.' 

동맹이 영원하리란 법도 없다. 상황에 따라 무명을 이용해야 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에는 처리해야 할 수도 있고. 

푸확, 푸화악-!

은빛 마물들은 무명을 마주치는 순간 즉사했다. 멀리 숨어 있던 마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산달폰의 눈이 가늘어졌다. 

'흐음······.'

항마력도 일체 통하지 않는다.

'확실히 듣던대로야. 신기하긴 하군.'

성좌로서 살아왔던 산달폰조차 처음 보는 힘이었다. 정확히는 의지만으로 다른 존재를 살해하는 힘이다.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다지만 너무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 힘이 어디까지 통할까.'

숲 초입을 지나자 넓은 공터가 드러났다. 콰아앙—! 이번에는 은빛의 고릴라가 침입자를 막기 위해 뛰어왔다.

우어어! 

놈의 우렁찬 울음소리가 숲 전체를 울렸다. 

레벨은 626.

준보스급에 속하는 개체였다.

등급으로 따지자면 전설+급.

심지어 은빛 고릴라는 선천적으로 강한 개체다.

같은 레벨의 원숭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동일한 레벨의 고블린과 인간이 같을 수 없듯이. 

'특히 저 고릴라는 은빛의 수호자라는 이명을 가진 엘리트 마물.'

무명은 여기까지 오며 많은 마물을 처치했다. 강한 능력에는 강한 패널티가 따르기 마련. 분명 뭔가 패널티가 존재할 것이다.

그런 상태로 과연 은빛의 수호자도 쉽게 이길 수 있을까?

산달폰이 흥미롭게 지켜보려던 찰나.

무명은 빵을 베어물었다.

그게 전부였다. 

푸화아악—!

고릴라는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뭐야. 방금 빵은 왜 먹은 거지?'

산달폰은 미간을 좁혔다. 빵의 형태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았다. 천계에 있는 하얀빵이랑 비슷하다.

'······그래봤자 허기를 채워주는 게 전부일텐데?'

무명의 행동이 해석되지 않았다.

즉살급에 해당하는 능력의 대가가 고작 허기라는 것을, 산달폰은 알아챌 수 없었다. 

'배가 고프다고 해도 전투 중에 굳이 음식을 먹나? 아니면 먹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산달폰은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모르겠군.'

뭐, 원로까지 처치한 마당에 전설+급을 한 번에 죽여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 뒤로도 일행은 일대의 마물들을 쓸어버리며 전진했다. 

"솔직히 수상쩍었는데, 되게 좋은 사냥터네요."

"엄청난 레벨업 속도."

"찝찝한 놈이긴 한데, 일은 제대로 하는 놈인가 봅니다."

"저기, 다 들립니다만."

산달폰은 애써 미소를 만들어 붙였다.

사실 어처구니가 없는 수준이었다. 최소한 조금은 고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행은 파죽지세로 무너진 고대 신전에 도착했다. 여기가 숲의 최중심이었다. 군데군데 무너져 폐허가 된 신전의 중앙에는 비석 하나가 있었다.

웅장하게 솟은 돌. 그 위에는 복잡한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산달폰이 설명했다.

"이 돌이 고대신을 봉인하고 있는 비석입니다. 이걸 파괴하면 봉인이 해제 됩니다. 이어서 고대신을 처치하면······. 진 항마의 힘을 빼앗아 올 수 있죠. "

산달폰은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봉인석의 파괴는 쉽지 않을 것이다. 

평범한 봉인석이 아니다. 진(眞) 항마의 기운이 깃든 돌이다. 자신조차 특별한 방법을 사용해야 할 정도의 단단함이므로.

"이까짓 봉인 해제쯤이야, 우습죠. 제가 한 번 해보겠습니다."

팔을 걷어 붙인 루시퍼가 앞으로 나섰다.

콰앙-, 콰과광! 콰과과과—!

온갖 공격을 쏟아 부었지만 봉인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허억, 허억······. 뭐가 이렇게 단단해······?"

루시퍼가 숨을 몰아 쉬면서 뒤로 물러났다.

"풋."

"웃었냐?"

"실례, 웃긴 생각이 나서."

산달폰은 천연덕스럽게 잡아 떼었다. 이어서 가브리엘과 청룡도 도전해보았지만 봉인석은 멀쩡했다.

"너무 단단해."

가브리엘이 살짝 부어오른 주먹을 흔들었다. 

산달폰은 씩 웃으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뭐, 어쩔 수 없겠네요. 정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도와드리죠. 특히 가브리엘 선배가 부탁해주신다면······."

그리 말하며 힘을 끌어 올리려던 순간. 

콰아아앙—!

고대신을 봉인하고 있던 비석이 폭발했다. 비석은 산산조각나며 흩어졌다. 산달폰의 머리 위에도 돌 부스러기가 잔뜩 떨어졌다.

"······뭔가요? 누가 한거죠?"

산달폰은 무명의 정확한 능력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무명은 1차 해방을 통해 물체 파괴의 능력을 얻었다. 그러나 이 능력은 성좌들과 지배자들만이 알고 있을 뿐이었다.

이는 전적으로 질서의 지배자가 정확히 설명해주지 않은 탓. 

산달폰이 처음으로 당황했다.

그걸 본 가브리엘이 뻔뻔하게 자신을 가리켰다.

"내가 했음."

"예? 서, 선배님이?"

고오오오—!

고대신의 봉인이 풀리며 막대한 기운이 신전 중앙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강혁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레벨업 + 87 』

『 최대 레벨 + 80 』

고대신의 숲에서 87 레벨을 올렸다. 최대 레벨도 충분히 올렸고.

산달폰이 꿍꿍이가 있어 보이긴 했지만, 알려준 사냥터의 성능만큼은 확실했다.

『 현재 레벨 : Lv. 488 / 590 』

벌써라고 해야 할까.

SSS급을 넘어설 때가 다가왔다.

『 잊혀진 고대신 '진 항마'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쿠구구구······.

지면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봉인석이 위치하고 있던 자리에서 엄청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고대신이 나타날 것 같은 긴박한 상황.

주강혁이 무명검을 들어 올리는 그때였다. 

[ 주인! ]

주작의 목소리였다. 

[ 잠깐 도움이 필요해졌네! 지금 가능한가?! ] 

현세에서 운석을 막기로 했던 주작의 다급한 사념이 전해져 왔다. 쿠구구-! 자욱한 은빛의 안개 속에서 거대한 골렘의 모습을 한 고대신이 나타났다. 

"지금?"

주강혁이 다시 물었다. 

지원(3)

현세(現世).

『 2페이즈 - 세 번째 시련 』

『 대종말 : 운석충돌 』

운석이 지구를 향해 낙하하고 있다. 하늘에 새겨진 운석은 어느 지역에서나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엘리스 그레인저.

"주작, 정말로 당신 혼자서 막을 수 있다는 건가요?"

그녀는 걱정스러운 투로 주작에게 물었다. 주작은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답했다.

"물론일세, 이 몸의 화염으로 태우지 못할 것은 없으니. 보고 있게나."

주작이 들어 올린 스태프 위로 붉은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찬란하면서도 따스한 광휘가 휘몰아치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아—!

홍염의 불길이 쏘아졌다. 불길은 한 마리의 불새가 되어 창공을 질주 했다.

공기를 잡아먹으며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내 거대한 새 한 마리가 되어 운석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엘리스의 목소리에 약간의 감탄이 묻어 나왔다.

저만한 위력이라면 도시를 가볍게 불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운석을 파괴하는 것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이윽고 주작이 쏘아낸 불새가 운석과 충돌했다. 콰아앙—! 하늘에서 검은 흙먼지와 붉은 화염이 뒤섞였다.

멀리 떨어진 빌딩의 옥상인데도 강한 바람이 후폭풍처럼 몰아쳐왔다.

'이게 사도······.'

현시점 지구상의 어느 인간도, 이만한 규모의 마법은 사용할 수 없으리라.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폭발을 지켜봅니다. 』

"후후, 남은 뒤처리는 그대들에게 맡기겠네. 이 정도면 이 몸도 할만큼은 한 것 같으니 이제 물러나······."

주작이 뿌듯한 표정으로 몸을 돌리려다가 멈춰섰다. 엘리스 그레인저가 주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기, 운석이 그대로입니다만."

감탄 했던 게 부끄러워지는 기분이었다. 

"흠······."

운석이 부서지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주작의 눈동자가 조금 흔들렸다.

"최, 최대 출력이었는데······. 이상하구려."

"잠깐만요, 이상하다는 말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저게 충돌하면 지구는······."

엘리스도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처음에는 원래 단단하다. 시스템이 쉽게 돌파할 수 있게 뒀을 리가 없지."

사최헌은 담담히 말했다.

"운석 출현과 동시에 현세에 이상현상이 발생했을 거다. 그것들을 제거하면 운석의 강도를 낮출 수 있다." 

다만, 그 위치는 랜덤이다.

"엘리스, 네가 소유한 예언자의 별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면 충분히 돌파 가능할 거다." 

신화+급 사도로도 파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만. 

"······무명 헌터는 지금 어디죠?"

엘리스는 주작에게 물었다.

"주인은 지금 바쁘다네, 내 선에서 일단 끝내보려고 했건만. 운석은 저 자의 말대로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 듯 하구려."

주작은 약간 침울한 표정이었다. 멋지게 끝내고 주인에게 칭찬 받고 싶었는데. 주작의 어깨가 축 내려가는 그때였다.

사뿐.

누군가가 빌딩의 옥상에 착지했다. 로브를 걸친 외부인.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었다.

이 장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더 있다니?

외부인은 쓰고 있던 로브를 곧장 벗었다. 그 안에서 천이령 헌터의 얼굴이 드러났다.

"천이령······?"

사최헌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특수 게이트 안에 있던 게 아니었나.

천이령은 품 안에서 흑색의 티켓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잘하면 지금 부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건······."

"전재산을 투자해서 샀어요."

궁극기 획득 티켓.

2페이즈에 들어서며 헌터들 사이에서도 티켓의 조각이 드롭되기 시작했다.

천이령은 시중에 있는 궁극기 티켓 조각을 모두 구입해 왔다. 아는 인맥과 가진 재산을 총 동원해서.

루시퍼의 조언 때문이었다.

- 강해지고 싶다면······. 가진 모든 걸 활용할 줄 알아야지. 가진 돈은 전부 투자해라. 우선은 궁극기부터.

돈 따위 아무래도 좋았다.

더 강해져서 마계의 정점에게 복수만 할 수 있다면.

찌이익—!

천이령이 들고 있던 궁극기 티켓을 찢었다.

『 플레이어 '천이령'이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그녀가 가진 재능은 차원에서도 손꼽히는 수준.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데 천부적인 능력을 타고난 것만은 틀림 없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기술을 탄생 시키기도 했으니······.

현 시점, 천이령이 다루지 못할 기술과 능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 재능개화(才能開花) : 현상재현 』

『 해석 가능한 타인의 능력을 재현합니다. 』

천이령은 손에 쥔 단검을 뒤로 뻗었다. 고오오—! 홍염이 소용돌이 치듯 단검의 뒤로 모여든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흑과 백.

그 두 힘이 합쳐진 조화의 기운이 단검의 표면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기운을 더할 수록 단검이 납덩이처럼 무거워졌다.

"크으윽······."

팔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에도 천이령은 단검을 놓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서 단검에 힘을 더한다. 새하얀 도력이 천이령의 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그리고 마침내.

파아앙—!

천이령의 단검이 운석을 향해 쏘아졌다.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사도들의 힘이 모두 뒤섞인 궁극의 일격.

콰과과과—!

그 충격파에 일대의 건물들의 창문이 연달아 깨졌다. 사최헌과 엘리스, 주작은 그 공격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힘찬 궤적을 그리며 레이저처럼 쏘아진 단검은.

운석에 정확히 꽂혔다.

쩌적, 쩌저적—! 운석을 두르고 있던 정체 불명의 방어막 위로 거대한 균열이 새겨졌다.

투명한 보호막의 파편이 반짝이며 허공으로 퍼졌다. 콰아앙! 폭발과 함께 운석의 주변에서 파편이 떨어졌다.

"나, 나는 여기까지······."

천이령은 비틀 거리다가 그대로 푹 쓰러졌다. 엘리스가 그녀를 부축했다.

"잘했네, 이령양!"

콰앙, 콰앙!

주작은 홍염을 쏘아 운석의 파편을 요격했다. 운석의 크기가 줄어들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운석은 거대하다. 콰아앙-! 본체에는 홍염이 통하지 않았다. 주작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아니, 상성 문제인가? 아니면 난이도의 증가······?" 

"잠깐, 그렇게 넋 놓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보호막이 파괴된 운석은 더욱 빠르게 낙하하기 시작했다. 고오오—! 운석이 눈에 띄게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점차 그 크기가 막대해져 간다. 이대로 가다간 현세와 충돌하고 말 것이다.

"무명은 지금 어디죠? 한시라도 빨리······."

"으아."

우왕좌왕하던 주작이 결국 결단을 내렸다. 주인 없을 때 단번에 처리하려고 했는데. 결국 주강혁에게 사념을 보내기로 결정. 

"주인! 잠깐 도움이 필요해졌네! 지금 가능한가?!"

본래였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주작에게 시야 공유의 능력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끼잉.

주작의 옆에 딱 붙어 있던 루시퍼의 사역마가 어깨 위로 올라왔다. 눈동자 마물. 녀석은 운석을 노려보았다.

그 시야는 주인에게도 공유되고 있을 것이다. 

"후."

그제서야 주작은 냉정을 되찾았다. 

"인간들이여, 당황하지 말게나. 저런 운석 정도는 주인님께 아무것도 아닐세."

해방을 마친 주강혁은 생명체 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물체까지 없앨 수 있으니까. 

심지어 보호막까지 사라졌으니 주인님이 운석을 파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어째 기다려도 운석이 파괴되지 않는다.

"······파괴되지 않는데요?" 

엘리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라?"

설마 충돌하나? 

주작의 이마로 식은땀이 흘러 내리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한 발 느리게 운석이 폭발했다.

무슨 짓을 해도 부서지지 않던 운석이 단 한 방에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졌다. 

파괴된 운석이 무수한 파편이 유성우가 되어 지상으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광경은 사뭇 아름다웠다. 

"다, 다행일세."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주작.

"이거야 원······." 

엘리스도 지친다는 목소리였다. 무명만 끼면 예언이 들어먹질 않으니 일희일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옆에 있던 사최헌을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미동도 없다. 

"그쪽은 놀랍지도 않은 건가요." 

"놀랐다." 

"······." 

사최헌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난간 위에 발을 걸쳤다.

"아직 끝이 아니다. 흩어진 파편들 중 일부가 지상에 떨어져 마물들을 쏟아낼 거다. 그 마무리를 할 시간이다."

운석 충돌은 막았지만 세번째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 * *

운석의 파괴?

어렵지 않다.

시야 공유를 통해서 운석을 확인하고, 죽음의 기운을 끌어 모아 부수면 되는 간단한 일이니까.

'레벨이 없는 운석은 아무리 커도 별 거 아니지.'

무엇보다 주작을 현세에 놔둔 판단이 유효했다.

고대신의 출현과 타이밍이 겹쳐져서 잠깐 놀라기는 했지만······.

결국 파괴는 성공했다. 

그보다 지금은 고대신이다. 

콰아아아—!

무너진 신전의 중심부에서 은빛의 안개가 증기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큭, 안개 때문에 뭐가 안 보입니다."

"연막 작전을 펼 작정인가 보네요."

루시퍼와 청룡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은빛 안개 자체로 진(眞) 항마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안개에 닿는 순간, 마력이 약해지는 게 느껴진다.

특히 루시퍼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젠장, 뭐 이런 힘이 다 있냐?"

"나는 멀쩡함."

"저도 멀쩡한데. 타락한 종자에게는 버겁나보네요."

가브리엘과 산달폰이 루시퍼에게 한마디씩 했다.

"네 놈······. 언젠가 반드시 죽인다. 아니, 비둘기 너도 다같이 싹 다."

"은빛의 안개 담아가면 필승인데. 까마귀의 약점 발견함."

나는 고개를 들어 고대신이 있을 장소를 바라보았다.

'은빛 안개 속에 숨을 생각인가.'

보이지 않는다. 생명 반응도 없다.

고대신도 원로와 마찬가지로 신(神)이니 당연한 건가.

촤르륵—!

그런 안개 속에서 낡은 쇠사슬이 날아 왔다. 쇠사슬의 앞부분에는 날카로운 칼날이 달려 있어 맞으면 치명상이 될 거다. 

그 속도는 내가 반응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피할 수가······!' 

그때였다.

카앙—!

찬란한 광휘가 번뜩이더니 가브리엘이 주먹으로 사슬을 쳐냈다. 녀석은 연달아 날아오는 사슬도 간단하게 쳐냈다.

"주인, 내가 보호할게. 내 뒤에 바짝 붙어."

역시 근접전에선 가브리엘이 깡패다. 이렇게 듬직할 수가. 나는 가브리엘의 뒤로 따라 붙었다.

사슬 뿐만이 아니었다. 은빛 안개의 일부가 늑대의 형상이 되어 사도들을 향해 달려 들었다.

"안개 때문에 공중에서 속도가 제대로 안 나는구만." 

"지상전으로 한정하는 수밖에요."

루시퍼와 청룡은 하늘을 나는 걸 포기하고 바닥에서 전투를 지속했다.

사슬을 쳐내고, 은빛 안개를 몰아내고, 다시 사슬을 쳐내고. 그 과정이 반복이다. 그러나 쉽사리 앞이 뚫리지 않는다. 

콰앙—!

"이 정도면 거의 원로급입니다."

도력을 끌어모아 안개 늑대를 쳐낸 청룡이 말했다. 루시퍼를 비롯한 사도들이 힘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야, 고대신이 생각보다 강하네요?"

안개 바깥에서 산달폰의 깐족 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명(無命)은 아직 필요하니 살려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도들은 굳이 필요 없거든요. 가브리엘 선배 말고는 전부 죽었으면 좋겠네요."

"저 자식······!"

"뭐, 울며 불며 살려달라고 한다면 생각은 해보겠습니다만."

가브리엘이 앞장 서고 있지만 안개를 나아간다는 느낌이 없다.

생각보다 쉽지 않다. 

카앙-! 카앙!

쇠사슬을 쳐내는 가브리엘의 하얀 피부 위로 새빨간 피가 맺혔다.

"괜찮아?"

"빵 먹으면 1초만에 나아."

그거야 그렇다만.

교착 상태가 오래되면 좋을 게 없다. 어쨌든 사도들은 나를 지키면서 싸워야 하고, 적의 위치조차 파악되지 않으니. 

이럴 때 사용하라고 있는 게······.

현자다.

'아스펠트. 우리가 상대하고 있는 고대신의 위치는?'

- 오, 언제 내게 말을 걸까 기대하고 있었지. 알려주겠네. 이미 한 배를 탄 사이지 않은가. 자네 능력의 끝이 궁금하기도 하고.

아스펠트는 기꺼이 답을 주었다.

- 자네의 앞에 있다네. 쭉 전진하게나.

그냥 정면에 있다는 건데.

문제는 쉽사리 나아갈 수 없다는 거다.

놈의 사슬이 너무······.

'그래.'

거기까지 떠올리다가 깨달았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지.' 

촤르륵—!

약자멸시로 사슬을 부수면 된다. 

단순하지만 명료한 해결책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

사슬을 파괴하려면 죽음의 기운을 모아야 한다. 

그런데 죽음의 기운을 모으는 것보다 사슬이 빠르다. 

'동체 시력이 부족하다. 인지 능력도 부족하고.'

사슬 위로 기운을 모았을 즈음에는 사슬의 공격이 끝난 뒤다.

이래선 전진할 수 없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시스템의 가호를 받는 플레이어는 여러 방법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 

'그 중 첫번째는 레벨을 올리는 것.'

나는 팔찌의 효과를 발휘했다.

샤아아—.

『 [ 아티팩트 ] 리미트 브레이커를 사용합니다. 』

『 임시 레벨 30을 획득합니다. (10분) 』

『 현재 레벨 : Lv. 518 / 590 』

순식간에 레벨 30이 상승하며 500을 돌파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 임시 레벨을 통해 등급이 상승합니다. 』

『 축하드립니다. 전설(傳說)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레벨이 오르면 등급이 상승한다.

그리고 등급이 상승하면······.

『 [ 종말+ ] 라그나로크 : 에인헤랴르 』

『 해당 아이템의 효과로 신체 등급이 1단계 상승합니다. 』

『 이제 신화(神話)급 신체 능력을 소유합니다. 』

"주인······?"

내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부터가 달라진 느낌이다.

나는 무명검을 쥐고 가브리엘의 앞으로 걸어나갔다. 

촤르륵—!

맹렬하게 쇄도해오는 사슬의 궤적이 이제는 명확하게 보인다. 나는 그것을 무명검으로 베어냈다.

푸콰악!

무명검이 닿는 순간. 사슬이 파편이 되어 터져나간다. 열 갈래의 사슬이 나를 향해 쇄도하지만 문제 없다.

조용히 입을 열어 죽음을 부른다.

콰과과과과!

말 한마디에 사슬이 녹아내렸다.

뒤늦게 은빛 안개가 늑대가 되어 달려오지만······. 

타앗. 타다다다.

무시하고 달려 나가면 그만이다. 내가 앞을 완벽하게 뚫어내자 청룡과 가브리엘도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화아악—!

짙은 안개를 뚫고 나아가자, 마침내 고대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은 석상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문자를 몸에 새긴 석상.

『 고대신 : 진(眞) 항마 [ Lv.1340 ] 』

- 종말(終末)+

실제로 원로와 필적할 정도로 강한 게 맞았다.

산달폰은 그걸 알면서도 우리를 여기로 데려 온 거겠지. 하지만 나쁘지 않다.

잡을 수 있다면······.

그저 먹이에 불과하니. 

[ ——! ]

고대신에게서 뻗어나온 무수한 사슬과 날카롭게 쇄도하는 은빛의 안개가 나를 노리고 쏟아진다. 

놈의 마지막 발악.

그러나 무의미하다.

고대신은 나를 마주했고,

승부는 이미 결정 된거나 마찬가지니. 

"죽어."

나는 고대신을 향해 즉살을 발휘했다

혼돈 침식(1)

고대신의 몸체가 폭발했다.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던 돌조각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화아악—!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은빛 안개가 일시에 걷어졌다. 고대신이 죽음을 맞이한 자리에는 은빛 구슬만이 덩그러니 떠 있다.

주강혁은 구슬 향해 다가섰다.

『 [ 아티팩트 ] 진(眞) 항마 』

- 소유자에게 영구적인 진(眞) 항마력을 부여합니다.

짧은 설명이지만, 진 항마의 능력이 어떤지는 방금 전투를 통해 확실히 깨달았다.

루시퍼조차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을 정도.

마계의 정점과의 전투를 대비하면 상당히 쓸모 있는 물건이었다. 

스르륵.

구슬을 손에 쥐자 몸으로 녹아들듯 스며들었다. 항마력을 발휘하고 싶다고 생각하자 은빛 안개가 몸을 가볍게 감쌌다.

'제대로 쓰려면 숙련이 필요하겠는데.'

고대신처럼 밖으로 힘을 방출하는 건 엄두도 못 내겠다. 그러나 체내에 진 항마의 힘을 보유하고 있기만 해도 효과는 충분할 거다.

"고대신을 이렇게 간단히······. 재밌네요. 혼돈의 지배자가 경계하는 이유를 조금 알겠네요."

뒤쪽에 있던 산달폰이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고대신은 약하지 않다.

이들은 과거, 태초의 마족과 동일한 시대에 태어났던 자들.

차원을 넘나드는 힘을 가졌으나 혼란을 일으켰기에 질서의 지배자에게 봉인 당한 존재다.

'그 당시 질서의 지배자는 고대신이 너무 강해서 봉인시켜두었다고 했었지.' 

물론 굉장히 오래전의 일이다.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고대신이 가진 힘은 티끌만 한 수준이지만······. 귀찮은 상대라는 건 확실했다. 

진(眞) 항마의 힘 때문만이 아니다. 고대신은 고유 영역을 생성해 무명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승부는 장담할 수 없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승부는 거기까지 가지도 못했다.

고대신이 제대로 된 반항을 하기도 전에, 무명의 힘이 놈의 숨통을 끊었으므로.

이전의 전투도 눈여겨 볼만했다.

무명은 날아오는 사슬 자체를 파괴했다.

마물뿐 아니라 적의 공격까지도 파괴할 수 있다니. 

'미친 능력이군.'

산달폰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면 볼수록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오랜 기간 은둔 생활을 추구하던 현자가 괜히 관심을 가지는 게 아니었다. 그럴만한 힘이었다.

산달폰은 손을 내밀었다.

"친하게 지내죠."

"이제 와서? 주인님께 다가오지 말아라."

루시퍼가 손을 탁하고 쳤다. 산달폰도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이봐, 지옥의 찌그레기. 나는 도와주고 있는 거라니까요. 한 번만 더 무례하게 굴면······."

"싸움 금지."

가브리엘이 중재에 나섰다. 그 한마디에 산달폰은 미간을 펴고서 밝은 미소를 지었다.

"음, 저답지 않게 잠깐 흥분했네요. 어쨌든 고대신까지 처치했으니 이제 돌아가시죠."

"다른 데 더 없어?"

"사냥터를 물색하는데는 시간이 필요하거든요. 이래 보여도 엄선해서 고른 사냥터니까요. 그래도 레벨업은 충분히 하셨을 거 아닌가요?" 

가브리엘의 질문에 산달폰은 친절히 답했다.

'확실히 레벨업을 엄청나게 하기는 했어.' 

그렇지 않아도 주강혁은 시스템을 확인하고 있었다.

『 현재 레벨 : Lv. 503 / 590 』

리미트 브레이커의 효과가 끝났지만, 레벨은 여전히 500을 넘는다. 고대신을 잡으며 얻은 경험치 덕분이었다.

주강혁은 허리춤의 랜턴을 들어 올렸다.

하늘을 맴돌던 영혼이 랜턴에게 흡수되었다.

『 최대 레벨 + 30 』

『 현재 레벨 : Lv. 503 / 620 』

여기서 끝이 아니다.

쩌적, 쩌저적.

허공에 자그맣게 새겨진 균열에서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 보상 목록 』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x 1

- [ ★ ] 오의 파편 x 1 ( 4 / 5 )

- [ 신화+급 ] 사도 강화석 x 1 ( 2 / 3 )

오의 파편도, 사도 강화석도 하나만 더 모으면 사용할 수 있겠다.

고대신도 잡았고 레벨도 올리고 아이템도 회수했겠다. 할 일은 다 한 셈이다. 

"그러면 돌아갈까."

이제 마계의 정점과의 전투를 준비하러 가야할 것이다. 

* * *

천이령은 눈을 떴다.

누군가의 무릎을 베고 있는 감각이었다. 천이령은 황급하게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덮고 있던 담요가 흘러내렸다. 

"여긴······."

그녀의 눈앞에는 무릎을 꿇은 주작이 보였다. 주작이 쓰러진 천이령을 데려와 담요도 덮어주고 보살펴주고 있었다. 

"내 주인의 거처일세. 너무 무리하지 말게나. 네 가지 힘을 동시에 사용했으니 몸에 부담이 갔을 걸세."

맞아, 나 기절했었지.

궁극기 한 번 쓰고.

천이령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괜히 얼굴을 가렸다.

"빠, 빵 먹으면 괜찮아요."

"오, 꼬맹이 일어났냐? 말했던대로 했다면서."

그때 루시퍼가 걸어왔다. 앞치마를 두른 채 한 손에는 거품기로 달걀을 휘젓고 있었다.

"아, 예. 했어요. 이 다음은 어떻게 하면 되죠?"

"우선 요리를 도와라."

"잠깐, 이령 양은 아직 회복을 더해야 한다네." 

"빵 먹으면 낫는다잖아. 따라와라." 

천이령은 품 안에서 빵을 베어먹고선 진지한 눈빛으로 답했다. 

"요리도 수행인건가요? 최선을 다할게요." 

"아니, 이건 그냥 저녁 밥 준비다. 슬슬 큰 싸움이 있을 건데,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싶거든." 

"그, 그렇군요."

천이령은 루시퍼의 뒤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루시퍼는 계속해서 달걀을 휘저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네 재능은 현세에 국한 되어 있었지."

천이령의 이명은 올마스터(All Master).

그러나 그녀의 성장은 더뎠다.

아무리 불세출의 천재라 한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기란 어려우니까. 현세의 환경으로는 천이령의 잠재력을 전부 끌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다르다.

흑, 백, 적, 청.

네 사도들이 다루는 힘을 전부 다룰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들의 힘은 범차원에서도 손에 꼽히는 상위의 힘이고.

이토록 단시간에 모든 힘을 익힐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천이령의 재능 덕분이다.

"이제 현세의 수준을 뛰어넘었다고 봐도 되겠지. 하지만······. 넌 여전히 시스템에 종속되어 있는 상태다. 아, 넌 이거 썰어라."

천이령은 대파를 받아 들었다. 식칼을 쥐고서 빠르게 썰어갔다. 타다다다. 요리사 못지않은 현란한 손놀림이었다. 동시에 시스템 창을 살폈다. 

『 궁극기 쿨타임 : 99일 』

이번에 사용한 궁극기 '재능개화 : 현상재현'.

해석한 능력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힘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엄청난 쿨타임이 존재했다.

거의 3달에 달하는 쿨타임이다.

'이래선 다시 쓰지도 못해.' 

치이익—.

루시퍼는 이제 프라이팬에 달걀을 굽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활용하는 건 좋다 이 말이지. 플레이어의 특권이니까. 주인님의 경우에는 그게 최적의 길이기도 하고." 

주인 주강혁은 각성한지 얼마 안 되었다. 이 경우에는 시스템을 사용하는 게 훨씬 유리하다. 꽤 자주 놀랄만한 집중력을 보여주지만 천이령처럼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경우는 아니다. 

가진 능력이 다르다고 할까.

"하지만······. 너는 시스템에서 벗어나야 한다."

"벗어나다뇨?"

"그 웃통 벗고 돌아다니는 미친놈 하나 있잖아."

"아, 호영 아저씨?"

루시퍼는 정성스레 구운 계란말이를 접시에 담으며 답했다.

"그래. 그놈은 스킬은 안 쓰잖아. 그리고 꼬맹이 네 놈도 지난번에 경험했을 거 아니야.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적을 처치하는 법." 

"아······."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원로 드리무어를 상대할 때 수하 중에 그런 적이 있었다. 그때도 스킬 없이 마력을 끌어내 싸웠었다.

루시퍼는 젓가락으로 천이령을 가리켰다.

"궁극기도 그런 식으로 써야지. 그것만 되면 넌 괴물이 될 거다." 

* * *

마계의 정점.

그는 절벽에 올라 황폐화 된 행성을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고오오······.

혼돈의 전령과의 전투로 행성 하나가 반파 되어 있었다.

갈라진 대지 사이로 뜨거운 용암이 흘러 나오고, 무너진 행성의 일부가 우주 공간으로 흩어지고 있다.

그러나 조용하다.

동시에 더없이 고요했다.

이 행성에도 분명 셀 수 없이 많은 생물과 지성체가 살았을텐데. 지금은 그저 생명 하나 없는 죽은 행성에 불과했다.

마계의 정점은 그러한 적막함을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그의 은빛 장발이 흩날렸다. 허공에 열린 게이트 속에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여기 계셨던 건가요?"

찰랑거리는 금발과 동그란 안경을 쓴 남자.

혼돈의 전령이었다.

"간만에 날뛰었더니 온 몸이 쑤시네요. 전투는 영 체질이 아니어서요."

그는 마계의 정점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거절할 줄 알았는데 왜 마음을 바꾼 건가요? 검을 맞대었더니 피가 끓어오르기라도 한 건가요?" 

원로들이 학살당할 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사내다. 

이토록 쉽사리 협조를 받을 수 있을 줄은 혼돈의 전령도 예상치 못했다. 

마계의 정점은 조용히 검을 들어 올렸다. 서슬 퍼런 칼날이 옅게 진동했다.

그는 혼돈의 전령을 향해 검을 겨눴다.

"마계의 일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다만······. 때가 되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시네요. 독특하신 분이라더니. 뭐, 상관 없습니다." 

혼돈의 전령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서 답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으로 게이트 몇 개가 더 생겨났다.

고오오—.

"약속했던대로 당신을 도울만한 사도들을 데려왔거든요."

각각의 게이트에서는 세 명의 인물이 걸어 나왔다.

"네크로맨서의 왕, 유간트."

"만물을 다루는 웨펀 마스터, 간타."

"반신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 알테인."

그들은 하나 이상의 차원을 지배했던 영웅이자 잊혀진 성좌였다.

혼돈의 전령은 양 팔을 펼쳤다.

"모두 사도에요. 굉장하죠?"

그러나 마계의 정점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하늘을 응시할 뿐이었다.

혼돈의 전령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무명(無命)은 막으러 올 수밖에 없어요. 그에겐 지켜야 할 세계가 있으니까요. 우리는 그걸 노리는 겁니다." 

* * *

콰앙—!

신화급의 육체를 손에 넣게 되었다.

내 신체 능력은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 있다. 이 육체에 적응도 할 겸 가브리엘과 훈련장에 와 있다.

"오, 좋아. 주인."

퍼버버벅—!

나는 빠르게 주먹질을 하며 가브리엘을 향해 파고들었다. 그러나 가브리엘은 가볍게 주먹을 쳐냈다. 그것도 전부. 벽이 느껴지는 솜씨다. 

"자, 장난 아니네······."

"후후."

에인헤랴르의 스킬 보정이 들어갔는데도 한 대도 제대로 맞출 수가 없다.

등급만 두고 본다면 같은 신화급 육체다.

그런데도 상당한 차이가 난다.

"아마 스킬이 부족해서 그런듯."

가브리엘이 간단히 설명했다.

"주인이 레벨업을 다른 스킬들이 따라오지 못함. 보통은 여러 스킬을 얻기 마련인데 주인은 딱히 전투 스킬이 없어."

맞는 말이었다.

딱히 저절로 스킬이 생기는 경험을 못해 봤다. 단순히 재능이 부족한 걸지도 모르고. 

"하지만 주인의 전투 스타일을 생각하면 굳이 의미 없을지도." 

그거야 그렇다. 

즉살이 있으니 적이 보이기만 한다면 상관 없다.

그런 점에서 신화급 육체는 사기적이다. 

동체 시력도 신체의 능력도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그러면 이제 주인이 피해봐."

슈슈슉, 슈슉—!

녀석의 주먹질에 말도 안되는 풍압이 깃들었다.

'보인다. 확실하게 보여.'

그래도 가브리엘의 공격이 전부 보이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눈으로 따라잡는 것조차 불가능했었는데. 

'나도 차원이 다르게 성장했어.' 

그때와 비교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물론 피하기는 버겁다. 지금도 가브리엘이 어느 정도 봐주고 있는 거겠지. 되도록 근접전은 피하는 게 낫겠다. 

그렇게 훈련장에서 훈련을 마치고 거실로 돌아오니 맛있는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아, 주인님! 어서 오시죠. 식사를 준비했습니다."

"마, 맛있게 드세요!"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다.

달걀말이부터 수육, 삼겹살, 불고기 각종 반찬까지.

천이령 헌터도 저녁 준비를 도와준 모양이다.

조만간 마계의 정점과의 전투가 있을 것 같다. 그때를 대비해서 맹훈련이라는데, 식사 준비도 훈련에 포함이 되는 건가? 뭐, 루시퍼가 알아서 하겠지. 

"오, 맛있겠군. 잘 먹겠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현자 아스펠트가 테이블 앞에 착석했다.

"뭐야, 먹을 거면 돈 내고 먹어."

"여기 있네."

"어······."

현자는 왠 보석 하나를 꺼내서 루시퍼에게 건네었다. 진짜 줄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보다 이제 혼돈의 전령이 움직이기 시작했네. 그 사실을 전하러 왔네." 

현자는 밥을 한 숟가락 입에 넣으면서 말했다. 

메시지가 떠오른 것은 그와 동시였다.

치직, 치지직—!

『 2페이즈 네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

『 종말 : 혼돈침식(混沌侵蝕) 』

- 등장하는 세 개의 게이트를 모두 저지하고 보스를 처치하십시오.

- 세계가 혼돈에 물들기 시작합니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시련이다.

그러나 현자는 짚어주듯 말했다.

"혼돈의 전령을 처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세." 

『 2차 해방(解放)의 조건 』

『 지배자의 전령 처치 - 0 / 1 』

그 말을 이해하기라도 한 걸까.

무명검이 옅게 떨려왔다.

혼돈 침식(2)

"지금 현장에 나와 있는 이수민 기자입니다. 보시다시피 주변은 아수라장인데요. 크윽, 잠시만요!

기자의 화면이 흔들린다.

카메라는 혼돈의 게이트가 나타난 방향을 촬영했다. 게이트에선 보랏빛과 분홍, 녹색이 어지러이 섞여 회전하고 있었다.

"게이트를 중심으로 주변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헌터 협회는 해당 게이트의 등급을 EX+급으로······."

2페이즈 네 번째 시련.

혼돈침식(混沌侵蝕).

게이트를 중심으로 주변의 땅이 회색으로 오염되고 있었다. 정체불명의 식물들과 광석들이 빠르게 자라나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카메라를 바라보며 말하던 기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꺄악!"

쩌억—!

어디선가 나타난 괴생명체가 기자와 카메라맨을 향해 아가리를 벌렸다. 괴생명체의 이빨이 두 사람을 찢어 놓기 일보 직전의 순간. 

촤아악! 

새하얀 로브를 두른 헌터의 검이 괴생명체를 반으로 갈랐다. 괴생명체는 녹색의 피를 쏟으며 쿵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가, 감사합니다."

바닥에 주저앉은 기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새하얀 로브를 걸친 헌터들은 죄다 흰색의 가면을 쓰고 있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다수였다.

저벅, 저벅.

백색 로브의 헌터들은 가면을 고쳐 쓰고서는 혼돈의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이비어(Savior).

전 세계의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설립된 초법적 길드였다. 그들의 실력은 누가보더라도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었다. 

그들 중 하나가 불평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직 운석도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는데, 네 번째 시련이라니."

혼돈 게이트의 주변으로 건물에 큼지막하게 박힌 운석 파편이 보였다. 기이한 주황빛을 띈 운석에서도 마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키에에엑!

영화에나 나올 법한 에일리언의 모습이었다.

"이놈들이 혼돈 게이트에 영향을 받아서 더 날뛰잖아. 젠장, 이거 뭐 적당히 해야지."

"언제는 시스템이 우리를 봐줬나? 어이, 곧 온다. 준비해."

남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물들이 운석 조각 밖으로 기어나오기 시작했다.

세이비어의 일원들이 각자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들은 로브 안쪽으로 새하얀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특수한 인이어까지. 

성난 괴생명체들이 물 밀듯 밀려들었지만 누구 하나 당황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인이어를 통해 예언이 전해지고 있었으므로. 

- 오른쪽으로 세 발자국, 그리고 한 발자국. 전진해서 휘두르기입니다. 느긋하게.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인이어의 지시를 따르자 어느덧 남자의 눈앞에는 목이 잘린 마물이 펄떡이고 있었다. 

"그래, 이거지."

세이비어의 헌터에게는 실시간으로 예언이 전해진다. 그것도 한 사람 당 한 명의 예언자가. 

"우리는 지지 않는다."

"다 죽여 버리자고."

"예언이 있는 한 이제 우리 세상이라는 거지."

세이비어의 기세는 오를 때로 올랐다. 그들은 마물들을 가볍게 처리하며 전진했다.

그리고 세이비어가 활약하는 도시의 건물 옥상. 그들의 활동을 높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 그레인저가 입을 열었다. 

"예언은 만능이 아닙니다. 헌터들에게 확실하게 전해주세요."

그녀는 흑색의 로브를 휘날리며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엘리스는 실질적인 세이비어의 수장이었으므로. 그녀는 앞이 가로막힌 반가면을 쓴 채로 혼돈의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기운이 요동치고 있었다.

미래가 크게 변하고 있다.

저 내부에 있는 것은 인류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무언가였다.

'사실상 예언의 한계는 명확하죠.'

미래를 안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다가올 재난을 피할 순 있어도 재난 그 자체를 없애는 일은 불가능하다.

세이비어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다.

인류의 혼란을 줄이고 주변 상황을 정리하는 정도까지.

지금 세이비어는 게이트의 입구를 정리하는 것 정도가 최선이었다. 내부의 재앙은 결코 막을 수 없다. 

'대비조차 불가능한 재난이라니.'

사람들이 전부 대피해 텅텅 비어버린 도시. 마물과 싸우는 세이비어. 그들의 새하얬던 로브가 점차 피에 물들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지구 전체가 이런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한 미래를 막기 위해 예언자의 별이 존재하지만······.

'무명(無命). 결국 그 한 사람에게 기대는 수밖에 없는 걸까요. 그걸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건······. 내게는 너무 무책임하게 느껴집니다만.'

엘리스는 불길하게 요동치는 게이트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 * *

"즉, 귀찮은 일은 죄다 세이비어가 해줄 거란 뜻이다. 넌 게이트를 공략하는 일에만 신경쓰면 된다. 무명."

사최헌은 무표정하게 말하더니, 빈 밥그릇을 루시퍼에게 건네었다.

"두 그릇 같은 한 그릇 분량으로."

"밥 많이 달라는 걸 어렵게도 말하······. 가 아니라. 이 새끼 뭘 자연스럽게 식탁에 앉고 난리야?"

루시퍼가 사최헌의 밥그릇을 뺏어 들더니 주걱에 묻은 밥풀을 털어 사최헌의 앞에 두었다.

"······."

사최헌은 네 번째 시련이 시작됨과 동시에 우리 집에 방문했다.

요점은 명확했다.

네 번째 시련인 혼돈 게이트를 공략해 달라는 것이었다.

"엘리스 그레인저가 만든 단체인 세이비어는 전세계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네게 협력할 수도 있을테고. 여러 잡다한 업무는 그쪽에 맡겨두는 게 좋을 거다. 다만, 세이비어가 주변 정리는 하더라도 게이트 공략은 결국 네가 맡아줘야 한다."

사최헌은 그리 말하며 밥풀 몇 개를 주워먹었다. 배가 고팠던 모양.

"꽤 긍정적이라 볼 수 있겠지. 본래 예언자의 별과는 협력이 불가능했으니까. 지금은 네가 중간다리 역할을 해줬기 때문에 협력이 가능해진 거고."

회귀자인 사최헌이 경험했던 과거에서 예언자의 별은 결코 협력적이지 않았단다. 

참고로 현자 아스펠트 덕분에 거실에서의 대화는 성좌들에게 유출되지 않는다. 집에서 놀고만 있었던 건 아닌 모양.

"······사최헌 헌터한테도 밥 좀 줘."

나는 루시퍼에게 말했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밥은 먹어야지.

"쯧, 주인님께서 말씀하시니 특별히 주겠다."

"고맙군. 잘 먹겠다."

달그락, 달그락.

묘한 정적 사이로 젓가락이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려온다.

네 명의 사도.

그리고 사최헌, 아스펠트, 천이령까지 합석해서 밥을 먹는 기이한 상황. 나는 로브를 쓴 채로 밥을 먹고 있었고.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최헌이었다.

"언제까지 얼굴을 숨길 셈이지······?"

"······."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특히 천이령 헌터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고 있다.

물어볼 줄 알았다.

여기까지 왔으면 딱히 숨길 이유도 없다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로브를 벗을 타이밍을 놓쳤다.

"설마 얼굴에 엄청난 상처가 있다거나?"

천이령 헌터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사최헌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생김새가 부족한 거라면 걱정할 거 없다. 매력을 올리는 건 어렵지 않으니. 아프로디테를 설득하는 것 정도는······."

"하, 사최헌. 무슨 망언을 하는 거냐. 주인님은 미남이시다."

"맞네, 주인은 잘 생긴 편에 속하지."

루시퍼와 주작이 맞장구를 쳤다. 괜히 더 부담된다. 

옆 자리의 아스펠트는 끌끌 거리며 웃고 있다.

현자라서 이미 알고 있다는 거겠지.

"······."

이런 분위기인데 부담스러워서 얼굴 공개를 하겠냐고.

나는 재빨리 화제를 전환했다.

"그보다 혼돈 게이트에 대해서 할 이야기가 있지 않나?"

네 번째 시련인 혼돈 침식.

실시간으로 현세가 오염되고 있다. 내부에서 기다리는 존재들은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는 것이 현자의 말이었다.

"이번에 상대할 적은 자네들과 같은 사도들이지. 그리 유명한 자들은 아니다만. 외딴 차원의 전설이었거나, 그곳에서 추앙받는 신이었거나. 그런 셈이지. 그 구성은······."

현자는 허공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잔물결이 치며 사도들의 형상이 그려졌다.

"네크로맨서, 웨펀마스터, 반신급 마법사.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그렇다."

"놈들의 등급은?"

"태초급."

마물로는 처음 등장하는 등급이었다.

원로들이 종말+급이었는데, 얘네는 한 단계 더 높구나. 

현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단순 레벨로 따지자면······. 1500 이상일테지."

"하아, 파워 인플레가 매우 극심."

가브리엘이 한숨 쉬는 시늉을 했다.

'차이가 엄청나기는 하네.'

지금 내 레벨이 503이다.

500부터 전설급.

750부터 신화급.

1000부터 종말급.

그리고 마지막 1500부터 태초급에 해당한다.

'단순 수치로 세 배 차이라.'

사도들도 신화급이니 두 단계 차이가 난다. 

뭐, 레벨만 따지고서 전투의 승패를 정하는 건 무의미하다.

내게는 즉살(卽殺)이 있으니. 

굳이 따지자면 1레벨 때 152 레벨의 보스를 잡았기도 하고. 원로들하고 차이도 극심했는데 그리 어렵지 않게 잡았던 걸 생각하면 할 만하겠지. 

중요한 건 레벨의 차이가 아니라 전략의 유무일 거다. 

즉살 덕분에 상황만 적절하게 갖춰진다면 일방적인 싸움이 가능할테니까. 

"처치에 성공한다면······. 태초급 보상과 막대한 경험치를 손에 넣을 수 있을테니. 도전해 볼만하고말고. 전략은 생각해봐야겠지만."

현자는 씩 웃으며 말했다.

맞는 말이다.

도망친다고 도망칠 수 있는 상대고 아니고.

"그만한 적이라면 동시 공략보다는 하나씩 빠르게 공략하는 게 나을 거다."

묵묵히 젓가락질을 하던 사최헌도 입을 열었다. 

신화급인 사도들을 따로 배치 해봤자 역효과다. 그럴 바에는 그냥 다같이 하나씩 차례대로 공략하는 게 낫다는 거겠지. 

"가장 먼저 처치하기 좋은 건······. 웨펀 마스터다."

사최헌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내가 놈의 약점을 알고 있으니. 참고하면 될 거다."

약점이라.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회귀자에 현자까지.

거기에 사도들까지 머리를 맞대는데 없던 전략도 생겨날 수밖에. 

"우선은 네 번째 시련을 돌파를 최우선으로. 최적의 수를 생각해보자."

놈들이 다신 현세(現世)에 얼씬거릴 생각조차 안 들도록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