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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 95-100

95화. 회귀자(1)

"이게 무슨······. 상황인거지?"

불멸 길드로 복귀한 사최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프랑스에 나타난 종말의 괴수 '지즈'를 처치하고 돌아온 참인데, 길드의 로비를 무명의 사도들이 점거하고 있었다.

"아, 왔냐? 음료수 맛있네."

소파에 삐딱하게 걸터 앉은 루시퍼가 캔을 흔들었다.

"······자판기가 돈을 먹었어."

쿵쿵, 가브리엘은 자판기를 두드리고 있고. 주작은 집중해서 TV를 보고 있었다.

그런 어수선한 상황에서 눈에 들어 온 건, 최상위 마인 가논이었다. 가논은 새하얀 도력으로 꽁꽁 묶여 있었다. 옆에 있는 청룡이 눈인사를 했다. 

"가논을 붙잡은 건가······?"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무리 그래도 최상위 마인을 아무렇지 않게 데려왔을 줄이야.

여기가 현세라 그렇지 다른 차원에선 왕 한 자리씩 하는 놈들이 최상위 마인이다.

"종말의 괴수가 세 마리나 나타났던 건, 네 놈의 짓이었나?"

사최헌의 물음에 가논이 얼굴을 찡그렸다.

"네 놈은 또 뭐냐? 인간 주제에 나를 함부로······. 끄으윽!"

청룡의 도력이 더욱 강하게 가논을 옥죄었다. 청룡은 싱긋 미소 지었다.

사최헌은 자연스레 고개를 돌려 무명을 찾았다.

콜라를 마시고 있던 무명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레비아탄이 있는 곳에 가논이 나타났다. 지배자로부터 존재은닉의 능력을 얻었다던데."

"······그래서였나. 근데 이 녀석을 왜 여기로 데려온 거지?"

"사최헌 네게 물어볼 것도 있고, 집에는 가둬둘 곳도 없으니."

"있다. 감옥이 있을 텐데."

사최헌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무명은 잠시 멈칫했다.

······대체 그 집엔 없는 게 뭐야. 

물론 내색하진 않았다. 

사최헌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쁘지 않다. 가논이 있으면, 현세에 숨어든 마인들을 뿌리까지 박멸할 수 있을테니까."

지난 최상위 마족의 습격 사건 이후로, 많은 수의 마인들이 제거되었지만 아직 소수의 마인들이 남아 있었다.

현세 침공 때, 악마들을 부활시킨 게 바로 소수의 마인들이었다. 위협 요소를 전부 제거할 가능성이 생겼으니 아주 좋다. 심문은 사최헌의 특기이기도 했고. 

그건 그렇다치고. 

"무명."

사최헌은 로비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마침 사최헌도 무명에게 전할 말이 있었다.

"만약 이 세계에서 시스템을 없앨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믿겠나?"

『 다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젓습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코웃음을 칩니다. 』

메시지로 보이는 성좌들의 반응은 그러했다.

스윽.

루시퍼가 사최헌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도 마침 그 이야기를 하러 온 건데. 사람이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 모양인가?"

"너희도······?"

"자세한 이야기는 조용한데 가서 하자고."

조용한 장소.

성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이리라.

"빨리 열어. 주인님께서 많이 궁금해하시니까."

* * *

"음, 여기가 포로 수용소인가 보네요."

청룡은 가논을 데리고서 사최헌이 알려 준 지하층으로 갔다.

지하에 있는 수용 시설이었다.

"감옥치고는 쾌적하네요."

이전에 칠죄종 질투를 사로잡았을 때 온 적이 있었다.

가논은 몇 가지 구속구를 추가로 장착했다. 사최헌이 이런 방면으로 미리 준비를 해둔 모양. 

"나, 날 이런데 가두겠다는 거냐?"

"예, 맞아요."

마기를 제어하는 팔찌와, 발찌를 차고나니 영락없는 죄수의 모습이었다.

가논은 최상위 마인이다. 위험도가 높은만큼 구속구도 높은 등급의 아이템이었다. 

"여기인가보네요." 

청룡은 방 하나에 들어가서 틈 사이로 가논을 밀어 넣었다. 사람 크기에 딱 맞는 구멍이었다.

기이잉—.

고순도의 마정석이 작동하며 가논을 속박했다. 히든 피스에 해당하는 아이템이었다. 사최헌은 이런 아이템을 잘도 가지고 있었다. 

성능은 훌륭했다. 

"크윽." 

이렇게 되면 아무리 최상위 마족이라고 해도 움직일 수 없다.

"나를 이런데 가둬두고서······. 무사할 것 같으냐?!"

"물론이죠."

"혼돈의 지배자께서 분명······."

"그랬으면 이미 무언가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까요?"

아직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가논은 버리는 패였을지도 모른다. 

"뭐, 너무 심심해하진 마세요."

그때, 바깥에서 발소리가 들려 왔다. 수용 시설에 미리 잡혀 있던 포로들이었다.

"가, 가논님······?"

"최상위 마족까지 잡혔으니. 이건 글렀네."

두 마인이 가논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위 마인 자칼과 마인 책사 로란드.

자칼은 이전에 SS급 게이트에서 칠죄종 나태를 돕다가 붙잡혔다. 로란드는 칠죄종을 이 땅에 불러온 책사였다.

"로란드—! 이 빌어먹을 새끼야!"

가논은 이를 드러내며 소리쳤다. 어느 때보다 분노한 목소리였다.

따지고보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로란드였다. 책사인 로란드가 케로베로스를 불렀고, 칠죄종을 불러 무명을 키웠다.

결국 묵시록의 기사조차 무명을 막지 못하게 되었다.

"네 놈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는거냐?! 기회까지 한 번 더 줬건만!"

"쯧. 같이 잡혀 들어 온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금발의 로란드가 귀를 후비며 답했다. 그의 눈동자도 퀭했다. 로란드는 어차피 마인 사회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건 가논도 마찬가지였다.

"하하! 아주 재밌네? 떨거지들끼리 모여 있으니까 진짜 웃기는군."

뒤쪽에서 누군가가 웃음을 터트렸다.

어린 소년의 앳된 목소리였다.

그 정체는 칠죄종 질투였다.

마인들의 시선이 모였다. 그러자 질투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뭘 꼬라봐. 나는 너희 버러지들하곤 다르지. 나는 자의적으로 협력하고 있는 거니까." 

질투는 한참을 웃었다.

딱히 다르지 않아보이는데. 청룡은 그 말을 속으로 삼켰다. 

"보세요, 심심하진 않겠죠? 그러면 포로끼리 마음껏 얘기 나누면서 계세요."

청룡은 씩 웃더니 두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그대로 방 안을 빠져나갔다.

가논은 고개를 떨궜다.

"크윽, 내가······. 마계의 최상위 존재인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냐."

"무명을 너무 얕본 게 잘못이겠죠."

방 안의 의자에 앉은 로란드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가논은 즉시 눈을 부라렸다.

"네 놈만 아니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다!"

"나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무명이 그렇게 강할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싸, 싸우지들 마시죠. 같은 마인끼리 싸워서 뭐합니까?"

중위 마인 자칼이 옆에서 중재에 나섰다.

대역죄인이 된 가논과 로란드하곤 다르게, 자칼에겐 미래가 있었다.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다가 잡혀 온 것이었으므로.

"너도 괜히 헛된 희망 품지마라." 

로란드는 혀를 차며 벽에 몸을 기댔다.

"인간 예언자가 하나가 내게 말하더군. 내 행동이 마계에 절멸을 선고할 거라고······. 만약 그게 진짜라면, 자칼 너도 돌아갈 곳은 없게 되는 거다."

"왜, 왜 그런 불길한 말씀을 하십니까······."

"로란드, 꼴도 보기 싫으니 내 앞에서 꺼져라."

가논이 으르렁거렸고 로란드는 코웃음을 쳤다.

그 모습을 보고 질투가 재밌다는 듯 끌끌거렸다.

한마디로 패배자들의 모임이었다. 무명에게 휩쓸려 낙오된 자들이 모이는 장소이기도 했고.

에휴. 

가논은 절망스런 마음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빌어먹을.

어디서부터 잘못 되었던걸까.

그리 한탄하려던 순간이었다.

고오오—.

수용소 방 안에 이상 기류가 나타났다. 허공에 생겨난 자그마한 틈새에서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뭐, 뭐야?"

질투가 눈을 찡그리는 그때.

저벅-.

보랏빛 게이트가 열리더니 누군가가 걸어나왔다. 동그란 안경을 걸친 신비로운 분위기의 남성이었다. 

가논이 숨을 들이켰다. 

"호, 혼돈의 전령이시여."

가논만이 그 남자를 알고 있었다.

"여, 역시 구하러 오셨군요. 미, 믿고 있었습니다!"

가논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러나 전령은 고개를 저었다.

"이런······. 무명(無命)을 견제하랬지, 언제 무명한테 꼴아 박으랬나요? 최상위 마인은 먹이사슬의 포식자가 맞지만, 그 위도 있다는 걸 알아야죠."

오히려 다그치듯 말했다.

그때였다. 

털썩.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격 앞에 자칼이 쓰러졌다. 자칼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몸을 덜덜 떨었다.

"크윽."

로란드는 무릎을 꿇어야만 했다.

질투는 팔짱을 낀 채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한 격조차 남자의 일부에 불과해 보였다. 그러나 남자의 존재만으로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가논은 다급하게 말했다.

"구, 구해주실 겁니까?"

"아뇨. 그건 어려워요. 제가 너무 강해서요. 자그마한 움직임도 대리자에게 들킬 거에요. 그건 좋지 않죠. 그러니 새 명령을 주겠습니다."

남자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가논을 바라봤다.

"무명에게 협력하는 척하면서, 그의 정보를 최대한 캐내세요. 혼돈의 지배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요."

"아, 알겠습니다······."

"그 말을 하러 온 거에요. 운이 좋다면 모르죠."

남자는 씩 웃으며 게이트를 향해 돌아섰다.

"당신도 혼돈의 전령이 될 수 있을지도요. 아, 그리고 여기서 들은 건······. 비밀입니다."

그 순간, 남자의 말이 맹약이 되었다. 로란드와 자칼, 질투조차 그 맹약의 대상이었다. 어긴다면 목숨을 잃게 되는 절대적인 계약.

스륵.

이내, 남자와 게이트가 함께 사라졌다.

수용소에 적막이 감돌았다.

"대, 대체······." 

"지배자의 전령이 왜 여기에······." 

가빠진 호흡을 가다듬는 마인과 칠죄종 질투. 

여기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으음······.'

방 바깥에 몸을 기대고 있던 청룡.

마인들끼리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해 엿듣고 있었건만.

어쩌다보니 맹약의 대상이 되었다. 

전령이 왔던 것을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 전령도 그걸 알고서 맹약을 건 걸지도 모르지만. 확실히 지금 단계에서 지배자의 전령은 위험했다. 

'그래도 나쁘지 않네요.'

가논에게 전해지는 정보를 적절히 조절한다면······.

그래서 가논을 전령까지 키울 수 있다면.

이쪽도 상당한 이득을 거둘 수 있을지 모른다.

* * *

사최헌은 가지고 있던 간이 아공간을 펼쳤다.

『 외부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

새하얀 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나는 사최헌과 마주보고 자리에 앉았다. 사도들은 내 뒤에 섰다.

"그래서하고 싶은 말이란 건 뭐지?"

사최헌은 그리 물었다.

나는 질질 끌지 않고 바로 말했다. 

"사최헌, 너는 회귀자다."

"······."

사최헌이 굳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단도직입적이었나?

"뭘 보고 그렇게 생각한 거지? 환생자, 귀환자는 있어도 회귀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추측이 아니다."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무명검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여기에 잠든 기억을 확인했다. 이전 회차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했다. 너는 멸망을 막지 못했고, 다시 회귀했다."

"더 자세히 말해 봐라."

나는 기억에서 봤던 것들을 이야기 했다.

우리 둘이 마지막까지 노력했지만 실패했고, 사최헌이 회귀를 결심하는 상황이었다.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그게 무슨······. 소리지?"

그런데 뭔가 반응이 달랐다.

"······?"

"내가 너와 동료였다고? 그럴 리가." 

사최헌은 턱을 괸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적이 길게 이어졌다. 꽤 오래 시간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사최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우선 내가 회귀자라는 건 인정하겠다. 더 이상 숨겨봤자 의미가 없을테니. 물론 네게만 말하는 것이다. 비밀로 해줬으면 한다."

그 말에 사도들이 웅성거렸다.

"진짜 회귀자가 있었음."

"이, 이럴 순 없네."

"봐봐, 그럴 수 있다고 했잖아. 내가."

나는 사도들을 조용히 시켰다. 사최헌은 미간을 좁힌 채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너를 처음 본다. 거듭된 회귀가 있었던 것도 이제와서 숨길 필요는 없겠지. 그러나 무명(無命) 너는 없었다."

사최헌은 그간 자신이 겪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거기에는 내가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아예 없다.

나야말로 혼란스럽다.

"······그렇다면 이 기억은 뭐지?"

존재하지 않는 기억이라니.

무명검은 무슨 기억을 보여준 거란 말인가. 

결국 알아내기 위해선 두 번째 해방 퀘스트를 끝내는 수밖에 없나? 지배자의 전령을 처치하고 다음 기억을 봐야 한다.

그때였다. 

사최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거기에 답을 줄 수 있는 존재를 알고 있다. 범차원의 현자 아스펠트라고. 혹시 알고 있나?"

청룡이 말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알고 있다면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겠군. 운이 좋다면 그 자에게 시스템의 종말을 멈출 방법까지 들을 수도 있을 거다."

사최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품 안에서 붉은 결정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번 종말의 괴수를 처치하면서 얻은 지즈의 심장이다."

"나도 챙겨두긴 했는데."

"아주 좋다. 게이트를 열 때 쓸 수 있을 거다."

레비아탄의 심장은 청록색을 띈 결정이었다.

"회귀자의 장점은······. 남들이 모르는 미래의 일을 알고 있다는 점이지."

사최헌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봤다.

"나는 대현자가 숨어 있는 차원을 알고 있다. 특정한 촉매를 사용하면 된다. 게이트를 열 수 있는 기술도······."

회귀자.

이 세계를 이미 한 번 경험한 존재.

그런 사람이 동료라는 것은······.

"내가 알고 있다."

거의 치트나 다름 없다.

96화. 회귀자(2)

시스템의 연이은 시련.

세계는 착실하게 멸망을 향해 다가서고 있다. 더 이상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새로운 단체의 설립이 필요합니다. 시스템의 시련은 더 이상 국가 하나의 문제가 아닙니다."

"동의합니다. 자칫하면 나라 하나가 순식간에 붕괴할 겁니다."

각국의 정상들도 심각성을 인지했다.

"초국가적 길드의 창설을 제안합니다. 국가에 구애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야말로 인류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때입니다."

본래대로라면 제대로 된 합의가 이뤄질 리 없는 회의였다. 

외부의 전력에 의존하면 국가의 자체적인 전력도 약해지고 만다.

또한 초국가적 길드라고 한들, 동시에 위기가 발생한다면 어느 나라를 우선적으로 지키겠는가. 여러모로 합의를 보기 힘든 안건이었다. 

그러나.

"찬성합니다."

"찬성하겠습니다."

"우리도 찬성을······."

물밑 작업은 오래전부터 이뤄지고 있었다.

"그러면······. 엘리스 그레인저를 필두로 한 초국가적 길드의 발족을 허가하겠습니다."

예언 단체 '예언자의 별'.

예언의 능력을 필두로 한 그들은, 각국의 정·재계에 긴밀히 파고들어 오랜 시간을 준비해 왔다.

그들의 진짜 예언 능력은 현세의 고위층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미래를 알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많은 것을 바꿀 수 있었으므로.

세계가 그들의 의도 아래에 움직이기 시작한다.

- 초국가적 길드 '세이비어(Savior)' 설립.

- 세이비어의 수장 '엘리스 그레인저'

- 세이비어는 국가에 구애 받지 않는 공략 활동을······.

해외와 국내의 언론들은 준비되어 있었다는 듯 기사를 쏟아냈다.

무수한 플래시 세례가 터지는 기자회견장.

흑색의 로브를 쓴 엘리스 그레인저가 있었다. 그녀의 눈은 문양이 새겨진 눈가리개로 가려져 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음을 상징하는 심볼이었다.

"세이비어는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수면 밑에서 암약하던 예언자의 별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예언 능력을 필두로 앞으로 발생할 각종 시련을 대처해나갈 것이다.

TV를 보고 있던 주강혁도 잠깐 놀랐다.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네."

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국을 주도로 종말대책위원회가 설립 되었단다. 위원회에서는 기존의 국가 단위로 이뤄지던 랭킹 시스템을 전세계로 통합.

국제 헌터 랭킹을 발표했다.

『 국제 헌터 랭킹 』

1위 : 무명(無命) [ EX ]

2위 : 사최헌 [ SS+ ]

3위 : 아이작 클라크 [ SS+ ]

···

최상위권에 위치한 헌터들은 다 아는 이름이었다. 일곱 개의 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위쪽에 몰려 있다.

"주인, 주인이 1위야."

가브리엘이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뭐, 예상된 결과였다. 다만 옆에 있는 등급이 조금 신경 쓰인다.

'EX급······?'

내 실제 등급은 SS급인데.

살펴보니, 전투력 측정 불가로 판단하고 규격 외 헌터로 판단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런거라면 뭐.'

1위라고 딱히 더 좋은 것도 없잖아.

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가브리엘이 새로운 소식을 물어다 줬다.

"최상위권의 헌터는 VVIP로 취급받고,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한대. 그래서 논란이 꽤 많음. 다소의 범법 행위도 눈 감아 주는 듯."

······그래도 되는 건가?

물론,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긴 하다. 실제로 시스템의 시련 이외에도 크고 작은 사건이 끊이질 않고 있다.

지난 며칠만 해도 그렇다.

멸종 되었던 산군 호랑이가 태백산맥에 나타나고, 페허가 된 옛 마을을 도깨비가 점거하기도 했다. 비슷한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1페이즈의 테마는 '설화도래(說話到來)'.

잊혀졌던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물론, 죄다 해로운 마물인 건 아니었다.

개중에는 이로운 영물도 있다고 한다만. 

'쩝.'

나는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검 한 자루가 하늘을 가득 메우고 있다. 6개의 대륙 위로 떠오른 칼날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전장 종료까지 7일.'

안전하게 6일차 쯤에는 묵시록의 기사를 처치할 예정이다.

'지금까지는 서막에 불과하다고 했지.'

회귀자인 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그러했다. 시련을 거듭하며 클리어하는 건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페이즈가 진행될수록 세계는 바뀔 거다.

"그렇게 둘 순 없지."

『 종말의 괴수 '베헤모스'가 처치되었습니다. 』

『 세 번째 시련이 종료되며 곧 2페이즈가 시작 됩니다. 』

고오오—.

어두운 밤하늘이 맹렬하게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더욱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1페이즈가 이 정도였다.

대체 2페이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삐빅.

단말기가 울렸다.

사최헌으로부터의 메시지였다.

- 무명, 다른 차원으로 가는 게이트가 완성되었다.

* * *

불멸 길드.

복잡하게 생긴 기계가 연구실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옆으로 직사각형 형태의 프레임이 놓여 있다.

"왔나? 무명. 마무리가 끝났다."

드라이버를 사용해 나사를 조인 사최헌이 땀을 닦아냈다.

"휴, 구조를 이해하는 게 조금 힘들었지만, 어떻게든 됐어요. 마력 회로를 재구성하는 건 익숙하거든요."

옆에는 천이령 헌터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예전에 줬었던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가 들려 있었다.

"아, 주인님. 오셨나요? 엄청나게 순조로웠습니다."

"예상보다 빠르게 진척되었다네. 가논이 돕겠다고 나서지 뭔가."

한쪽 구석에는 삐딱하게 앉은 최상위 마인 가논이 있었다. 녀석은 수갑을 찬 채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어차피 나는 마계에도 돌아갈 수 없다. 현세 지배에 실패한 대역죄인이니, 너희들한테 붙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아주 수상하다.

죽어도 협력은 안 하겠다던 놈이.

뭐, 그건 그거고.

마기를 사용할 수 있는 가논이 협력한 덕분에 게이트 생성 장치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주작이 기지개를 켰다.

"마기는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는 힘이라네. 대부분의 귀찮은 작업을 없애주니 유용하다고 할 수 있지."

"믿을 수 있는 건가?"

"이 몸과 청룡, 사최헌 인간까지 검증을 마쳤으니 괜찮다네."

그리 말한다면 뭐.

"그러면 바로 작동 시키겠다."

사최헌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계장치의 위쪽에 있는 붉은색 버튼을 눌렀다. 구우웅-. 기계가 진동하며 알 수 없는 파장이 은은하게 퍼져나갔다.

이내 오른쪽의 사각 프레임에 보랏빛 일렁임이 생겨났다. 틀림없는 게이트였다.

"여기엔 레이아탄과 지즈의 심장이 소모되었다."

사최헌은 기계의 중심을 가리켰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붉은색과 푸른색 보석이 반짝이고 있다.

"게이트를 여는 건 1회 뿐이다. 이후로는 새로운 소재가 필요하다."

재료는 정 급하면 포인트로 구매할 수도 있으니 괜찮다. 

우리의 목적은 차원 어딘가에 숨어 있는 현자 아스펠트를 찾아내는 것.

그가 시스템을 종식 시킬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니까. 동시에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도 물어볼 예정이다.

"그런데 그 현자라는 사람이 그렇게 지혜롭나?"

"전지(全知)의 권능. 현자는 그걸 거의 온전한 형태로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만나 볼 가치는 충분하다고 봐야겠지. 

"주인."

가브리엘이 선뜻 나서서 현세에 남기를 자처했다.

"나는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현세도 지키고, 케로 산책도 시키고, 게임 일퀘도 하고 여차하면 시야 공유도 가능하니까."

"일퀘?"

"일일 퀘스트. 밀리면 보상을 못 받아. 게이머로서는 참을 수 없는 손해."

스마트폰 게임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어차피 한 명 남겨둘 생각이긴 했다.

"그래, 그러면 부탁할게."

나는 그리 말하고선 인공 게이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좌표는 미리 설정해 두었다. 내가 안내 하겠다."

사최헌이 가장 먼저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나는 사도들과 함께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시야가 일렁이며 주변의 풍경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부디, 현자라는 사람이 우리의 궁금증을 해결해 줄 수 있길 바란다.

* * *

천이령, 사최헌.

그리고 세 명의 사도.

나를 포함해 6명이 발을 디딘 곳은 천막의 내부였다.

"여기는?"

펄럭-.

천막을 들추고 나가자, 넓게 펼쳐진 평원이 보였다. 그러한 평원의 위에 무수한 병사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전진하고 있었다.

와아아아—!

병사들의 거센 함성이 여기까지 들어 온다.

그 숫자는 수 천, 수 만?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많다.

그들은 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천막은 전장이 내다보이는 언덕에 설치되어 있었다.

사최헌이 천막 바깥으로 나오며 설명했다.

"통상 마법계. 이곳을 이르는 말이다. 한창 전쟁 중이지."

게이트를 통해 다른 차원으로 건너 온 것이다. 사최헌은 몇 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여기는 진짜 존재하는 차원이다. 공략 대상인 시스템의 게이트와는 다르다."

흔히 말하는 SS급 게이트나, SSS급 게이트 내부의 세계는 진짜가 아니다. 지난번에 공략했던 흑무왕의 성채도 재구성된 세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진짜다.

우리 현세와 마찬가지로 실제로 살아 숨 쉬는 차원.

바람에 피냄새가 실려 온다. 비명과 고함이 쉴 틈 없이 휘몰아친다. 눈앞의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 것이다.

"누구랑 싸우고 있는 건데?"

"마족이다."

루시퍼의 물음에 사최헌이 대답했다. 여기도 마족인가. 

"나를 따라와라."

사최헌은 능숙하게 우리를 안내했다. 마치 와 본 적이 있는 것처럼. 회귀자니까 실제로 와 봤겠지만.

천막의 뒤로 돌아가자 더 큰 천막이 보였다.

험악한 인상의 병사 둘이 천막을 지키고 있었다.

"뭐, 뭐야. 네 놈들은 뭐냐?"

"신분을 밝혀라!"

두 개의 창날이 사최헌의 목을 향해 들이 밀어졌다. 복장이 판이하게 다르니, 수상한 사람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사최헌은 태연하게 품 안에서 종이쪼가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알벤 공작 휘하의 특무대다. 2황자를 뵈러 왔을 뿐이다."

"어······."

종이에 새겨진 인장을 확인한 경비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 알벤 공작님의 특무대면······. 그 귀신들?"

"몰라뵀습니다. 2황자께서는 안에 계십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순식간에 태도가 바뀌었다. 

알벤 공작 특무대가 뭐길래. 

그보다 저런 걸 미리 준비해 온 사최헌이 더 기가막히다.

덕분에 우리는 천막 내부로 아주 손쉽게 들어올 수 있었다.

"이봐, 사최헌. 우리는 현자가 만나고 싶은 건데. 이런데서 귀찮게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루시퍼가 불평하자 사최헌이 코웃음을 쳤다.

"현자가 왜 잊혀진 차원으로 잠적했는지 아나?"

"몰라, 인간의 생각 따위 알게 뭐냐."

"귀찮아서다. 사람들이 하도 그를 찾아대니, 귀찮아서 검증된 인물만 접촉할 수 있도록 해놨지."

여기에 온 것도 그러한 절차 중의 하나인 모양.

"그 첫 번째가 인마대전을 종식 시키고 황제의 증표를 받는 것이다."

사최헌의 말에 루시퍼가 혀를 차며 답했다. 

"쯧. 오케이, 알았다. 황궁은 어디냐."

이 녀석, 황궁에 쳐들어가서 증표를 가져올 생각이다. 사최헌은 질린다는 듯한 눈으로 루시퍼를 쳐다봤다. 

"인마 대전을 끝내지 않으면 의미 없다. 황제의 증표에는 의념이 담기니까."

그게 지금 황자를 만나러가는 이유였다.

천막 내부의 천막을 몇 개 지나자, 융단이 깔린 고풍스런 방이 나타났다. 높은 의자에 앉은 황자가 보였다.

금발의 잘생긴 청년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해 보인다.

"그래, 알벤 공작의 특무대라고?"

2황자는 미간을 좁힌 채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황실의 예법을 따르지 않는 우리가 탐탁치 않다는 표정.

사최헌도 굳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뭔진 몰라도 알벤 공작의 위세가 대단한 모양.

사최헌은 본론부터 말했다.

"기회를 주신다면 이바르크 지역의 마족을 전부 몰아내겠습니다."

"하, 무슨 소리를 하려 하나 했더니."

2황자가 미간을 좁혔다.

"이바르크가 교착 상태에 빠진 지 벌써 6개월째다. 우리의 적은 악명 높은 상위 마인 몰타르고. 우린 놈에게 소드 마스터 다섯을 잃었다."

상황이 좋진 않은 모양.

"알벤 공작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든 숟가락을 얹어 볼 생각만 한단 말인가? 꼴도 보기 싫다. 꺼져라."

2황자는 머리를 부여잡더니 소리쳤다. 

"······." 

우리는 그대로 천막 바깥으로 쫓겨났다. 사최헌도 별 저항없이 순순히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에선 여전히 전투가 한창이다. 

"푸하핫, 꺼지라는데?"

루시퍼가 배를 움켜쥐고 웃음 터트렸다. 사최헌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걸로 2황자는 우리가 누군지 알았을 거다. 얼굴 도장을 찍은 걸로 충분하다. 이제 남은 건······."

사최헌이 나를 바라봤다.

이제 내 차례라는 뜻이었다. 

사최헌 헌터, 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사최헌을 따라오니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거침없이 쭉쭉 나간다고 할까. 사최헌이 아니었으면 현자를 어떻게 찾아야할지 감도 안 잡히니까. 

그러면. 

나는 저 너머 전쟁이 일어나는 장소로 시선을 옮겼다. 마물과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다. 마물들의 레벨은 240을 넘지 않는다. 생각보다 강해서 살짝 놀랐지만······.

"어려울 건 없지."

나는 앞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리춤에 달려 있는 소울이터가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마침 자정이 지나며 레벨업 제한도 풀렸겠다. 거리낄 것이 없다. 

자, 파밍의 시간이다.

97화. 회귀자(3)

2황자의 천막.

"알벤 공작의 특무대라면, 귀신 같은 자들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보좌관은 특무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과거 수많은 전장에서 소리소문없이 활약한 전투의 귀재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제국의 통일에 엄청난 기여를 했단다. 

"과거에 날고 기었다고 한들, 마인을 상대로도 통할 거라고 생각하나?"

황자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저었다.

이바르크 지역은 6개월째 교착 상태다. 지역 하나를 놓고 뺏고 뺏기는 점령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특무대 하나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알벤 공작의 의도가 뻔히 보였다. 그 포동한 너구리 같은 영감. 적당히 그럴싸한 부대를 파견해서 황실에 생색이나 내려는 거겠지. 

인마대전이 길어지며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놈들이 너무 많아졌다.

황자가 한숨을 내쉬는 그때, 병사 하나가 보고를 하러 들어 왔다. 

"알벤 공작의 특무대가 전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뭐? 쯧." 

2황자는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상관 없다. 나는 허락하지 않았다. 죽게 놔둬라.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는 부대라니. 알벤 공작은 제정신인건가?"

상위 마인의 목이라도 베어오지 않는 한 달라질 건 없다. 

그러나 상대인 몰타르는 교활하고 음습한 놈이다. 동시에 소드마스터 다섯을 잡아먹은 괴물.

특무대는 전장에서 아무런 공도 세우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을 것이다.

2황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특무대에 관한 건 이제 되었다. 그보다, 남은 전력에 대해서 파악을······."

2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천막의 바깥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 왔다. 전장으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는 장소인데도 선명하다.

"뭐냐." 

황자의 얼굴이 굳어졌다.

"마인 측의 새로운 병기인가? 그게 준비되려면 아직 멀었다고 하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일단 나가서 확인을······."

"내가 직접 하겠다."

마인의 병기는 기상천외했다. 현 제국의 기술로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강하기도 하고.

자칫하면 전선 자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있었다.

황자는 빠른 걸음으로 천막을 빠져나왔다.

"무슨······."

황자의 시야에 흑색의 버섯 구름이 들어왔다. 황자가 생전 처음 보는 규모의 폭발이었다. 함께 피어오른 흙먼지에 전장의 상황이 보이지 않을 정도. 

콰아아아—!

이내, 후폭풍이 일대를 휩쓸었다. 강력한 바람에 황자는 날아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말도 안 된다.' 

황자의 눈동자에 절망이 아로새겨졌다.

'대체 마족이 언제 이런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단 말인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병기였다. 전설로만 전해 내려오던 초대형 마법. 그것과 견주어도 될 만큼 끔찍했다.

후폭풍이 끝난 뒤. 

털썩.

2황자는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절망에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고개를 숙였다. 차마 고개를 들어 눈앞을 볼 자신이 없었다. 병사들이 전멸했을 게 뻔했다. 

"······틀렸다. 가망이 없다. 나는 어떤 낯짝으로 아버지를 뵈어야 한단 말이냐." 

보좌관도 어안이 벙벙하긴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 공격.

그 규모로 보건대,

병사들은 전멸했을 것이다.

저만한 병기를 마인 측에선 계속 숨겨오고 있었단 뜻. 

"이, 이러실 게 아닙니다. 빨리 퇴각을······!"

"놔라, 돌아간다고 한들!"

황자와 보좌관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때였다.

화아악—!

갑작스레 시원하고 청량한 바람이 몰려왔다. 바람의 방향은 반대였다. 황자가 있는 언덕에서 전장으로 내달리듯 불어왔다.

전장을 뒤덮었던 흙먼지가 걷히기 시작했다. 황자와 보좌관의 눈이 점차 커졌다. 

"어······?"

"벼, 병사들이 살아 있습니다?"

전장의 상황이 한 눈에 들어 왔다. 병사들은 멀쩡했다. 폭발의 후폭풍에 휘말려 진형이 무너져 있기는 했지만. 그게 다 였다. 

쑥대밭이 된 건 오히려 마인 측의 땅이었다.

새까맣게 득실대던 마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새까맣게 탄 자국만이 지면에 셀 수 없이 남아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냐?"

황자는 보좌관을 잡고 흔들었다. 보좌관이라고 알 턱이 없었다. 이내, 관측병 중 하나가 경악하며 소리쳤다.

"트, 특무대였습니다. 특무대가······!" 

"뭐······? 특무대?" 

믿을 수 없는 말에 황자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 * *

루시퍼의 마도 광선이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멀리서 던진 흑색의 구체였지만 위력은 확실했다.

『 다수의 성좌들이 압도적인 힘에 열광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폭발은 예술이라며 극찬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화끈함에 만족합니다. 』

"뭐, 별거 없네요."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였다. 

간단하다고는 해도 허기가 극심해진다. 나는 조화의 빵을 베어물었다. 빠르게 포만감이 차오른다.

방금 공격으로 전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마물의 무리가 단번에 처리되었다.

"제가 정리를 잠깐 하겠습니다." 

청룡이 일으킨 바람이 전장의 흙먼지를 걷어내기 시작했다. 나는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 레벨이 5 상승합니다. 』 

레벨 다섯 개가 한 번에 올랐다.

『 현재 레벨 : Lv. 250 / 250 』

최대 레벨 제한 때문에 레벨 업은 여기까지. 하지만 끝이 아니다. 많은 마수를 처치한만큼 막대한 양의 영혼도 흡수하게 되니까.

슈루루루—.

전장에서 피어난 무수한 영혼들이 한 줄기의 흐름이 되어 랜턴을 향해 흘러들어 온다.

『 랜턴 '소울 이터'가 즐거워합니다. 』

그렇게 흡수된 영혼은 균열이 되어 보상을 뱉어낸다.

『 최대 레벨 상승 + 25 』

『 현재 레벨 : Lv. 250 / 275 』

우선 시스템적인 보상.

랜턴이 성장하며 새롭게 추가 된 기능이다.

여기에 더해 랜턴이 하나로 응축된 아이템을 뱉어냈다.

『 [ 신화+급 ] 사도 강화석 ( 1 / 3 ) 』

『 고유 스킬 쿨타임 초기화권 』

『 플래티넘 코인 x 3 』

『 전설의 증표 x 1 』

신화+급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강화석인 모양. 

세 조각을 모아야 한다는 게 걸리지만, 신화+급 사도의 위력은 주작처럼 차원이 다를 테니 이해가 가는 부분이다.

"······내 생각보다 사도들이 훨씬 강하군."

사최헌이 중얼거렸다. 

"루시퍼가 들으면 좋아하겠는데."

"방금 그 말은 취소하겠다."

이제는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질 법도 한데. 

우리는 병사들이 있는 전장을 지나갔다. 

병사들은 죄다 아연실색한 표정이었다.

땅에 주저앉은 병사, 눈을 감고 기도문을 읊는 병사, 멍하니 서서 정면을 바라보는 병사······. 방금 전 폭발의 위력에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우리는 그들을 지나쳐 마인의 검은 땅으로 향했다.

"대장격인 마인을 처치해야 끝이다." 

평원의 너머에는 검게 물든 숲이 있었다.

그 숲으로부터 검은 마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국은 여태껏 여기까지 도달한 적이 없었던 모양. 

우리는 숲 내부로 발을 디뎠다. 

"나를 따라오면 된다."

사최헌은 지리를 알고 있는 것처럼 나아갔다. 복잡한 숲길을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척척 걸어갔다.

"오, 저기 보이네요." 

루시퍼도 말했다. 

내 스킬 생명 인지에도 기운 하나가 포착된다. 

계속해서 나아가자 낡은 오두막 하나가 나타났다. 

콰앙-!

사최헌이 발로 문을 강하게 찼다. 문이 박살나며 오두막 내부가 드러났다. 거기에는 수정구를 든 마인 한 명이 있었다. 

[ 이, 이런 미친놈들······! 네 놈들은 대체 어디서 온 거냐?! ] 

상위 마인 몰타르.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놈의 주변으로 마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몽글몽글한 마기 탄환이 맺히려 하고 있었다.

공격을 하게 둘 순 없다. 

『 [ 종말 ] 경외의 표식의 효과를 받습니다. 』

『 서사(敍事)급의 격을 방출합니다. 』

나는 내가 지닌 격을 사용했다. 영웅 등급에서 한 단계 올라가 서사급에 도달한 격. 

[ 꺼흑?! ]

그 즉시 몰타르가 쏘아내려던 마기가 사그라들었다. 몰타르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서걱-!

사최헌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몰타르를 베어냈다.

[ 크아악! ]

쓰러진 몰타르가 바닥에서 발버둥쳤다.

격(格)의 효과가 생각보다 좋다.

상위 마인한테 이 정도면 일반 마물들은 거의 꼼짝도 못 한다는 걸테니까. 

[ 네, 네 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

서걱—.

사최헌이 항마력이 담긴 검을 휘둘러 마무리를 했다.

사최헌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쪽에 몰타르가 모아 둔 보물 상자가 있다. 챙길 거면 챙겨라."

사최헌의 말대로 벽 속에 금이 가득한 상자가 숨겨져 있었다.

몰타르가 제국으로부터 약탈한 보물들이었다. 

"그리고······. 몰타르를 처치한 증표는 이거면 충분하겠지."

사최헌은 놈의 팔까지 잘라서 아공간 배낭에 넣었다.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뭘 해야 할지 전부 알고 있는 느낌이다. 

"이야, 사최헌. 너 생각보다 쓸모 있네." 

보물상자를 품에 앉은 루시퍼가 흡족스럽게 웃었다.

"이 세계에서 정보는 힘이고 곧 격차다. 나는 그걸 조금 더 잘 알고 있을 뿐이고."

사최헌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답했지만······.

이거 상상 이상으로 편한데? 

* * *

이바르크 전선.

6개월간의 교착 상태가 해방 되었다.

제국 입장에선 쌍수 들고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답 없던 인마대전의 실마리가 잡혔으니까. 

하지만 2황자는 쉽사리 믿지 못했다.

"특무대? 웃기지 마라······. 이런 게 가능했으면 알벤 공작이 진작에 나라를 뒤엎었을 거다."

우리는 몰타르를 처치하고서 곧장 2황자가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머리가 엉망이 된 2황자가 우리를 괴물 보듯 바라보고 있었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냐? 원하는 게 뭐냐?"

"말씀드렸다시피 알벤 공작의 특무대입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는 사최헌.

"못 믿으시겠다면 알벤 공작을 직접 불러 확인하셔도 됩니다."

"기, 기다려라."

2황자는 급하게 사람을 보내, 알벤 공작을 데려왔다. 천막에 공간이동 마법진이 있어 금방 왔다.

알벤 공작은 살이 포동포동하게 찐 전형적인 귀족이었다.

"그, 그러니까 제 휘하의 특무대가······. 이바르크 지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일 터. 생전 처음 보는 놈들이 부하라고 주장하고 있으니.

"크흠."

식은땀을 흘리던 알벤 공작은 눈치를 보더니 목을 가다듬었다.

"마, 맞습니다. 2황자께 힘을 보태고자 제가 파견했습니다. 음, 그렇고 말고요."

"무슨······. 지금 처음 보는 사이 아닌가?"

"아뇨, 아뇨. 잘 알고 있습니다. 그야, 제가 직접 키운 특무대니까요."

알벤 공작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사최헌은 여기까지 내다 본 걸테고.

"정말이란 말인가?"

"예,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 진실입니다!"

심지어 가문의 명예까지 걸었다.

정황상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는 게 불가능하기도 했고. 

이마를 짚은 2황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우리를 바라봤다.

"어쨌든······. 고맙다. 그대들 덕분에 제국의 숨통이 트였다. 알아보지 못해서 미안하군."

진심이 어린 눈빛이었다. 

"알벤 공작, 그대의 특무대라면 인마대전의 결과를 바꿀 수 있을 걸세. 앞으로도 계속 힘을 빌려줄 수 있겠나?"

그 말에 알벤 공작이 땀을 삐질 흘리더니, 우리 쪽을 바라봤다.

현자를 만나려면 인마대전을 종식 시켜야 하니 어차피 도와줄 예정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서야 알벤 공작이 고개를 돌렸다. 

"무, 물론입니다. 있는 힘껏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알벤 공작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나 싶었는데.

"근데."

그때, 루시퍼가 앞으로 나섰다.

"이 정도로 공을 세웠는데, 우리한테 떨어지는 건 뭐 없나?"

그 말에 주작과 청룡이 굳어졌다. 사최헌도 미간을 좁혔다. 분위기 좀 읽어라. 그런 느낌. 

"왜. 얻을 건 얻어가야지. 또 나만 나쁜 사람 만드네."

억울하다는 표정의 루시퍼.

나도 동의한다.

근데, 2황자 앞에서 대놓고 말하기엔 좀.

"하하······."

2황자가 쓴웃음을 터트렸다. 상당히 무례하기는 했어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하긴, 눈앞에서 그만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걸 두 눈으로 직접 봤는데 당연하지. 나였어도 지적 못하겠다. 

"그대들의 공은 크다.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 봐라."

결국 허가가 떨어졌다.

루시퍼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어디 남는 성 하나만 줬으면 좋겠는데. 주인님께서 건물을 좋아하시거든." 

이 녀석 충신이었다.

98화. 원로(1)

"성이라······. 성만 원하는 건 아닐 테고. 영지를 원하는 건가?"

미간을 좁힌 2황자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울 것 없다. 이후로도 제국에 충성을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기도 했다. 인간과 마족의 전쟁, 인마전쟁이 길어지며 제국은 점차 기울고 있는 상황.

그런데 그 종지부를 찍을 유일한 실마리가 나타났다.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잘 부탁하겠네."

2황자는 알벤 공작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 예. 물론입니다."

알벤 공작은 손수건으로 식은땀을 꾹꾹 찍으며 답했다.

"뭐야, 당장 주겠다고는 안하네. 어쨌든 그 약속 어길 생각은 안하는 게······. 컥."

주강혁이 황급히 루시퍼의 발을 밟았다.

아무리 그래도 2황자한테 너무 무례하다. 한 나라의 왕자인데.

루시퍼가 목을 험험 가다듬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기대하고 있겠다······요."

2황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제국 입장에선 동앗줄이나 다름없는 상황. 사소한 무례 따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그럼 물러나겠습니다."

알벤 공작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우리를 데리고 천막 바깥으로 나섰다.

바깥에 묘하게 병사들이 늘어 있었다. 그들의 고개는 다른 방향에 있지만, 시선은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듯 했다.

"저 사람들이 특무대······."

"야, 쳐다보지마." 

"오늘 있었던 일, 다른 부대 놈들한테 말하면 믿기나 할까?"

"믿겠냐? 보고도 안 믿기는데."

"마족 놈들, 이제 다 뒤졌다."

주강혁 일행은 그들을 지나쳐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천막으로 향했다. 마법진에 올라서자 새하얀 빛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바뀌었다.

어느 고풍스런 저택의 내부였다.

"······."

잠시 말없이 서 있던 알벤 공작. 식은땀은 물론이고, 그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져 있었다.

털썩.

알벤 공작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눈앞의 의자에 걸터 앉았다. 알벤 공작이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까스로 쥐어짜낸 듯한 목소리였다. 

"여, 여러분은 대체 누구십니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사최헌이 해줄 거다.

"인마대전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신의 사자다."

"그런 분들이 성이나 영지는 왜 필요로······."

"······."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해오던 사최헌의 말문이 막혔다.

신의 뜻이라고 밀어 붙이기엔 루시퍼가 너무 속물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주강혁이 손을 들었다.

약간 도와줄 수 있으려나.

"보여줘라. 루시퍼."

"알겠습니다."

화아악-!

루시퍼가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숨기고 있던 날개를 드러냈다. 흑색의 날개가 펼쳐지며, 검은 깃털이 떨어진다. 검은 후광이 미약하게 드러났다.

루시퍼의 붉은 눈동자가 형형하다.

그 모습은 두말할 나위 없는······.

"아, 악마······!"

알벤 공작이 자지러졌다. 끼익, 쿵. 알벤 공작이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갔다. 그는 두려워하면서 벽면에 딱 달라붙었다.

이런, 가브리엘을 데려올 걸 그랬나.

그랬으면 효과 직빵이었을텐데.

사최헌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악마라니. 엄연한 신의 사자다. 전능하신 테미아스께서는 악마조차 수하로 부리시니까."

"그,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신의 사자도 현실에 머무는 이상 돈은 필요하다."

"그, 그런 억지가······." 

"못 믿겠나?" 

이 세계의 신의 이름을 대면서 둘러대었는데 신통치 않다. 

알벤 공작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긴 했다.

여전히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사최헌은 혀를 차고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누군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알벤, 네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거다. 인마대전의 종식은 알벤 공작의 특무대에 의해 이뤄질테니. 네 이름은 오랜 시간 역사에 새겨질 거다. 그뿐이 아니다."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쥘 수 있다. 알벤 하기에 따라 제국의 2인자가 될 수도, 경우에 따라 제국의 정점이 될 수도 있는 기회. 

사최헌은 그리 설명했다. 

알벤 공작이 머릿 속으로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제국 통일 이후로 살집이 붙긴 했어도, 날카로운 판단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알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돕겠습니다."

어차피 이들이 협박을 해 온다면 답이 없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받아들이는 게 상책이었다. 

그때,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루시퍼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잠깐, 뭐든지?"

식은땀을 닦는 알벤 공작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 * *

그 시각, 마계.

상위 마인 몰타르가 죽기 직전에 보낸 메시지가 마계에 도착했다.

"통상 마법계에 비정상적인 충격 발생. 신화급에 준하는 폭발이라고 합니다."

"무명(無命)으로 추정되는 인간들이 나타났다는 보고입니다."

통상 마법계에 무명이 나타났다.

그렇게밖에 볼 수 없는 보고였다.

해당 소식은 원로들의 귀에도 들어갔다.

원로들은 급하게 한 자리에 모였다.

최근 들어 세 번째 회의였다. 몇백 년에 한 번 열릴까 말까한 회의가 계속해서 열리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드리무어까지 목숨을 잃은 마당에 무명은 마계 최대의 적이나 다름 없게 되었다. 

"······당최 이해할 수가 없군. 현세를 벗어나?"

"함정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무슨 꿍꿍이가 있지 않고서야."

원로들의 입장은 신중했다.

이미 원로 하나가 무명의 손에 죽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갔을 텐데도 허무하게 패배했으니.

"멍청한 소리 하고 있구만. 함정은 무슨? "

"당장 무명을 없애야지! 이건 기회야! 안 그런가?"

원로들 간의 입장차이가 극명한 가운데.

"크하하—!"

털코트를 걸친 마인이 호탕하게 웃었다. 그의 커다란 체격에서 나오는 웃음소리가 성전의 회의장을 울렸다.

콰앙!

그는 테이블에 주먹을 내리쳤다. 테이블이 산산조각이 나며 튀어 올랐다.

원로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남자는 더욱 크게 소리쳤다.

"우습구나! 마계의 원로라고 불리는 자들이, 고작 인간 하나에게 우왕좌왕하는 꼴이!"

제 3원로 프암.

다른 마인들보다 두 배는 큰 체격을 가진 원로였다. 그는 주먹을 움켜쥐고선 말을 이어갔다.

"드리무어가 죽었다. 태초의 13 마족 중 하나가 죽었단 말이다. 이런 치욕은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원로들은 마계의 살아 있는 신이다.

황무지나 다름없던 검은 땅을 키워내고, 압도적인 문명을 이룩한 것은 모두 원로들의 덕택.

마족들은 이들을 숭상해 마지 않는다.

그런 상징적인 존재가 인간 따위에게 목숨을 잃었다. 마계의 근본 자체가 뒤흔들리는 일이었다.

"무명이 현세의 보호에서 벗어난 지금이 기회다. 나는 무명을 죽이러 가겠다. 따라올 자는 있는가?"

몇 원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다른 원로들은 우려를 표했다.

"프암, 만약 실패하게 된다면 마계는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될 거요."

"원로 하나하나가 마계의 중요한 구성요소라는 걸 잊지 마시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마계의 정점께서는 대체 뭘하고 계시단 말인가······."

프암은 그런 원로들을 향해 콧방귀를 뀌었다.

"같잖은 소리는 집어치워라. 인간에게 겁 먹은 패배자들아. 나서지 않을 거면 입 다물고 응원이라도 하란 말이야."

더 이상 새어 나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무명의 싹을 지금 끊어내야 한다."

무명의 성장 속도는 경이로운 것을 넘어 비현실적이었다. 만약 이 성장이 계속된다면······.

원로들로는 걷잡을 수 없게 되리라.

그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마계는 이미 무명과 척을 지고 있다. 당연했다. 마계는 현세를 지배하고자 했으며 계속해서 무명을 압박해 왔으니까.

무명의 힘이 강대해진다면 마계를 멸하고자 움직일 가능성도 있다. 

"그래, 그대들이 함께 해준다면······. 충분하겠군."

프암을 제외하고 4인의 원로가 일어났다. 프암은 그들의 면면을 훑은 뒤 씩 미소를 지었다.

"지금 당장 통상 마법계로 향한다."

원로 5인이 동시에 움직이는 전대미문의 사태.

그러나 무명에게는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다.

더욱이 무명이 현세를 벗어난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드리무어와 달리 원로들은 시스템의 제한을 벗어날 길이 없으므로.

"목표는 무명의 토벌이다."

프암의 눈동자가 흉흉하게 번뜩였다.

* * *

"······이게 다 필요한 건가?"

사최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이지. 보기만해도 사기가 올라가지 않냐?"

루시퍼는 팔짱을 끼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탄 마차 뒤로 여러대의 마차가 이동 중이다.

뒤쪽의 짐마차에는 보물 상자가 한가득이었다.

"내가 달라했나? 공작이 먼저 말했잖아. 뭐든지 필요한 게 있다면 돕겠다고."

"뭐, 틀린 말은 아닌데······."

나는 볼을 긁적였다.

"통상 마법계의 보물들을 살펴보는 건 또 다른 재미일세."

마차의 옆자리에 앉은 주작은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예전부터 과거의 보물이나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은 것처럼 보이긴 했다.

통상 마법계에서 얻은 보물들을 다 합치면 건물 한 채는 더 살 수 있을지도.

나는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제국의 마지막 도시가 보인다. 넓은 평원의 끝으로 희미하게 검은 산맥도 보인다.

"거의 다 왔나 본데."

제국은 마족의 검은 땅을 마주하고 싸우고 있었다.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다.

검은 땅은 나날이 커져가고 있고, 그에 따라 전선도 계속해서 확장되어 간다.

막대한 물자와 병력이 인마대전에 투입됨에 따라 제국의 재정은 나날이 악화되고 있단다.

백성들의 민심도 심상치 않고 승리를 확신할 수도 없는 그런 상황.

"근데, 현자 아스펠트는 하필이면 왜 이 국가를 구하라고 한거죠?"

청룡이 사최헌에게 물었다.

"나도 모른다. 다만······. 그만큼 귀찮은 일이란 거겠지. 경우에 따라 마계에서 추가 병력이 붙기도 하니."

특히 지금 시점에서 마계는 나를 잡겠다고 단단히 벼르고 있을테니. 

따라서 우리의 전략은 속전속결.

"검은 땅의 중심으로 들어가서 마기의 핵을 부수면 끝이다."

땅이 검게 변한 원흉.

동시에 마인들에게 끝없는 마기를 보충하는 에너지원.

우리는 아예 본진에 쳐들어가서 난장판을 만들기로 결정한 것이다.

"핵을 파괴하면 인마대전은 끝나게 되어 있다."

우리가 탄 마차가 도시로 들어섰다. 

도시의 거리에는 신문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호외요, 호외!"

"인마대전을 끝낼 영웅이 나타났답니다!"

"알벤 공작의 특무대?"

"전쟁 영웅들이 속해 있던 곳이잖아."

제국에서도 작정하고 홍보에 나서기로 한 모양. 전선에 있는 병사들에게 희망은 중요한 문제니까.

신문을 아예 뿌려 버리네.

여기는 중세 비슷한데 생활 양식은 그것보다 더 발전해 있었다. 마법이 있어서 그런가.

끼익.

마차는 도시의 성 앞에 멈춰섰다.

영주가 곧장 우리를 마중나왔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특무대 여러분! 환영 파티를 준비했······."

"곧장 움직일 거니 필요 없다."

사최헌이 단박에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환영 파티란 말인가. 

"보물 하나라도 없어지면 도시째로 소멸시킬 줄 알아."

루시퍼는 단단히 엄포를 놓았다.

보물이 담긴 마차를 맡기고선, 우리는 도시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거대한 성문을 지나치자 흑색의 마기가 안개처럼 밀려 온다.

"청룡. 부탁할게."

"네."

여기까지는 마인들이 최대한 늦게 우리의 존재를 알도록 일부러 마차를 타고 왔지만······.

이제부턴 상관 없다.

청룡이 푸른 빛과 함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청룡의 위에 올라탔다.

콰아아아—!

순식간에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청룡.

흑색의 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위치까지 왔다. 아래를 유심히 내려다보던 사최헌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저기다."

"저기라고 하면 어떻게 알아?"

"······높게 솟아오른 두 나무 사이다."

실제로 반구형의 무언가가 꿈틀 거리고 있었다.

주작과 루시퍼가 각자의 전용 무기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면 시작하겠네."

"그냥 주변을 완전히 박살 내면 되는 거잖아."

고오오—! 퉁, 퉁, 퉁!

주작의 앞으로 모여든 초고열의 구체가 떨어져내렸다. 루시퍼도 마찬가지였다. 창끝에 압축된 흑색 구체가 차례차례 떨어져 내린다.

슈우우―! 

전투기가 폭탄을 떨구듯.

붉은색과 흑색의 마력 구체가 떨어져 내린다. 

그렇게 떨어진 구체가 지면에 닿는 순간.

콰아아아앙—! 콰과과광! 

막대한 폭발이 연달아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대에 존재하는 마인과 마물을 잿더미로 만드는 폭발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훅 끼쳐 온다.

사도들의 무자비한 폭격.

이만한 폭발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존재는 몇 없을 거다. 

콰과과과--! 

얼마나 공격을 쏟아부었을까.

『 마계의 핵을 파괴했습니다. 』

마침내 시스템이 메시지를 떠올렸다.

우리는 전투조차 없이 승리했다. 

* * *

고오오—.

공간이 일그러지며 털 코트를 걸친 남자가 나타났다.

제 3 원로 프암.

"······마인들이여. 이 몸이 도착했도다."

그는 눈을 감은 채로 양 팔을 벌렸다.

원로는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 기다리고 있던 마인들의 환호성이 들려왔어야 했건만.

"······."

조용했다.

너무도 조용했다. 통상 마법계에 올 거라는 언질도 미리줬건만. 마중 나오는 이가 아무도 없다니?

불쾌한 기색과 함께 프암은 눈을 떴다.

그런 프암의 눈에 나타난 것은.

"무슨······."

새까맣게 타버린 대지였다. 꺼지지 않은 불길이 아직도 땅을 태우고 있었다.

화륵-. 

땅에 스며 들어 있어야 할 마기도 모두 불길에 태워졌는지 남아 있지 않았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불에 탄 땅 뿐이었다.

마인들이 만들어낸 구조물도, 병기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고오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다른 원로들이 지면에 발을 내디뎠다.

"뭐야, 여기 있던 마인들은 어디갔어?"

"······마기의 핵이 있어야 할 자리 아닌가?"

"벌써 무명이 왔던 거냐?"

이런 짓이 가능한 건 무명 밖에는 없었다. 신화급 사도를 거느렸으니 이 정도야 간단하리라. 원로들은 별 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봤다. 

죽은 마인들에 대해서도 무감했다. 

어찌되었든 패배했다면 실패자다. 

그것이 마인들의 사고 방식이었으므로. 

그때였다. 

원로 하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무명이 왔었던 게 아니라 아직······."

원로들은 간과하고 있었다.

이곳에 아직 무명이 남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애초에 그들은 무명을 토벌하러 왔지만, 무명을 바로 마주할 생각은 없었다.

우선 무명의 동향을 파악한 뒤 움직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한 장소는 마침 무명이 폭격을 쏟아붓던 장소. 

원로들은 무명에게 제 발로 걸어온거나 마찬가지였다.

대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단순한 방심이었고, 어디까지나 인간을 상대한다는 인식의 차이에서 발생한 실수였다.

무명이 정말로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이러한 사소한 차이는 아무래도 좋았을 거다. 

아무리 강대한 검격이라고 한들, 원로를 단칼에 죽일 순 없다. 

그것도 5명이나 되는 원로가 동시에 죽는 일은 결코 일어날 수 없다. 

따라서 잠깐의 방심이 만들어낼 변수따위 존재하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무명과의 싸움에선 그 사소한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마련이었다.

"모습을 숨겨라—!"

제 3원로 프암이 뒤늦게 소리쳤다. 콰아아—! 그 말에 원로들이 다급하게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러나 그들이 반응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게 늦었다.

무명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으므로.

푸화악—! 푸화아악—! 푸화아악—!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이 원로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99화. 원로(2)

푸화아악—!

검붉은 피가 비산하며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투둑, 툭.

제 3장로 프암. 그의 털코트 위로 피가 튀었다. 그가 방금 전 공격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원로였다.

그의 두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허······.'

프암은 보랏빛 결정 방패 뒤에 몸을 숨기는 데 성공했다.

오랜 시간을 살아 온 원로들은 일반적인 생명체가 아니다. 그들의 몸은 마기로 이뤄진 영혼체(英魂體).

무명의 생명 인지가 통하지 않는다. 몸을 숨기기만 한다면 무명은 원로들을 죽일 수 없었다.

'이토록 허무하게······. 내 동료들이 사라졌단 말이냐?'

프암을 포함한 4 원로 또한 그걸 알고 있었다. 앞서 무명을 상대했던 원로 드리무어가 남긴 기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통상 마법계에 도착한 바로 그 시점. 무명(無命)이 대기하고 있을 거라곤 예상할 수 없었다.

전투 감각을 유지하고 있던 프암만이 빠르게 방패를 들었고, 살아남았을 따름이다.

'빌어먹을.'

원로들이 가진 힘은 실제로 강대했다. 국가나 대륙 하나는 손쉽게 지워버릴 만큼의 강함.

다섯이나 모였다면 행성 하나를 없애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콰득.

프암은 이를 악물었다.

'고작 인간 하나를 상대하는데······.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원로들이 마계의 신으로 군림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발톱과 이빨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뎌져 있던 것이다.

그것이 잠깐의 방심을 낳았고,

돌이킬 수 없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 무명—! ]

프암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대기를 울렸다. 고오오오—! 포효하듯 외친 함성에 일대의 땅에서 검은 마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의 시선은 하늘을 유영하는 청룡에게 향해 있었다.

[ 너는 사라져야 하는 존재다! ]

프암은 두 눈으로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무명의 공격은 그런 힘이었다. 작용하는 기전이나 원리가 존재하지 않는 무형의 힘이었다.

고고고고!

주변으로 끓어오른 마기가 프암을 뒤덮었다.

이내, 보랏빛 결정으로 이뤄진 갑옷이 모습을 드러냈다. 순수한 마기로 이뤄진 갑옷은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있었다.

프암이 대(對) 무명용으로 준비해 온 무구였다.

솟아오른 마기가 대검이 되어 프암의 손에 쥐어졌다. 프암은 가볍게 대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아—!

마기로 이뤄진 오러가 방출되며 반월형의 거대한 참격이 쏘아졌다.

"위, 위험······!"

청룡의 위에 타고 있던 주작이 소리쳤다.

압도적인 속도로 참격이 쇄도해 오고 있었다. 

청룡의 모습인 상태에서는 피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 움직여서 피할 순 없었다. 파앗-! 청룡은 빠르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터억-! 

루시퍼가 사최헌을 붙잡고, 주작이 무명을 붙잡았다.

콰아아아—!

참격이 아슬아슬하게 일행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참격이 지나간 자리에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크윽!"

신화급 사도들마저 튕겨내는 강력한 충격이었다. 콰앙! 루시퍼는 사최헌과 함께 지면에 꽂혔다.

주작은 주강혁을 껴안은 채로 땅에 추락했다.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준 것이다.

"주, 주인 괜찮은가?"

[ 현세에 쥐 죽은 듯 있었다면, 목숨이라도 보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주제를 모르고 나왔으니······. 네 놈은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

갑옷을 걸친 프암으로부터 흑색의 마기가 끝없이 솟아오른다. 하늘에 닿을 듯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마기.

흑색으로 물든 땅이 요동치고, 푸르렀던 창공이 잿빛으로 변해간다.

"무명, 전면전이 되는 건 좋지 않다. 드리무어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낸 사최헌이 무명을 향해 말했다. 

이전에 드리무어를 상대했던 것은 차원의 틈새였다. 현세의 게이트와 이어진 장소였다.

마계와 가깝다지만, 어쨌든 현세의 제한이 존재했다.

반면 통상 마법계는 다르다.

여기에는 제한이 작용하지 않는다.

원로는 80%가까이 본래의 힘을 낼 수 있다.

"무명, 듣고 있나?!" 

"······." 

그러나 무명은 답하지 않았다. 

무언가에 골똘히 집중한 듯, 프암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콰아아아—!

마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다.

다시금 프암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반월형의 참격이 막대한 에너지를 머금고 날아온다.

"주인이여, 꽉 붙잡게!" 

주작이 무명을 붙잡고서 뛰어올랐다.

참격이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간다.

"끄아아!" 

"조심하세요!" 

콰앙! 충격파에 튕겨져나간 주작과 무명을 청룡이 받아냈다. 

"고, 고맙네." 

콰아아앙—!

참격은 멀리에 있던 산맥과 부딪혔다. 산 하나가 반으로 나뉘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솟아올랐다.

[ 왜 그러고 있지 무명? 날 없애 봐라. 그럴 수 없나? ]

콰앙, 콰앙!

프암이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사도들의 공격이 빗발쳤지만, 그의 속도를 따라잡기엔 역부족이었다.

[ 대답해 봐라, 무명! ]

프암은 순식간에 무명의 앞까지 도달했다.

"주인님—!"

"주인!"

"이 새끼가!"

루시퍼가 창을 들고 프암의 앞을 가로막았다. 콰과과—! 흑마력과 마기가 부딪히며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이미 궁극기는 펼쳐졌다.

아티팩트인 리미트 브레이커의 효과도 발휘했다.

총 두 단계의 제한 해제.

그러나 루시퍼만으로는 막기 힘들 정도였다.

청룡과 주작이 양측에서 프암을 향해 달려들었다.

사최헌은 이 싸움에 낄 수조차 없었다. 그만한 격차가 존재한다. 

대검을 막아선 사도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잠깐의 힘겨루기가 이어지는 상황.

[ 네 놈들로는 나를 막을 수 없다! ]

프암은 주저하지 않았다.

태초의 마족이 가진 이능(異能).

존재와 함께 부여받은 힘.

그것을 발휘했다.

『 태초의 마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

『 이능 : 단기접전(單騎接戰) 』

화아아악—!

일순, 정전이 된 것처럼 일대의 공간이 새까맣게 바뀌었다.

무기를 들이밀던 루시퍼도, 청룡도, 주작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 칠흑 같은 세계에는 오로지 단둘만이 존재할 수 있으므로.

능력을 발휘한 프암 자신과.

그 대상이 되는 적 '무명(無命)'.

1대1의 싸움에서 살아남은 존재만이 이 공간을 빠져나갈 수 있다.

[ 이제 쓸데없는 방해꾼이 없으니, 끝을 볼 수 있을 거다. ]

프암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줄곧 조용하던 무명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포기할 생각은 없나?"

* * *

무명검의 1차 해방.

 『 고유 스킬 : [EX] 즉살(卽殺) 』

- 지정된 대상 하나를 살해합니다.

이제 생명체가 아닌 '대상'을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게 무슨 뜻일까.

처음에는 헷갈렸지만, 의미를 알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제 죽음의 기운이······. 물건에도 깃들잖아?'

본래 물건에는 기운을 덮을 수 없었다.

기운이 바깥으로 튕겨나갔기 때문이다.

무명검에만 기운을 입힐 수 있었다.

그런데 1차 해방 이후에는, 죽음의 기운이 물건에 깃들기 시작했다.

푸콰악-!

죽음의 기운을 씌운 물건은 마찬가지로 살해할 수 있었다. 이것을 통상 마법계에 오고 나서 깨달았다.

'물건을 살해한다라······.'

수명이 다한 물건이 폐기처리 되듯.

물체에도 죽음을 부여해 살해한다.

해방을 통해서 능력이 확장된 것이다.

제 3원로 프암과의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도, 나는 프암의 갑옷에 죽음의 기운을 부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향상된 신체 능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 [ 종말+ ] 라그나로크 : 에인헤랴르 』

『 신체 능력이 1단계 향상됩니다. 』

『 현재 당신의 등급은 SSS급입니다. 』

『 당신의 신체 능력이 전설(傳說)급으로 향상됩니다. 』

SSS급 다음은 전설이었다.

250레벨을 달성한 순간부터 내 신체 능력은 전설급이 되었다.

따라서 원로의 움직임을 쫓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원로를 바로 처치할 수 없다는 거였지.'

보랏빛 결정으로 이뤄진 단단한 갑옷. 저걸 부수지 않는 한 내 즉살은 적에게 닿지 않는다.

무명검을 찔러 넣기엔 적이 너무 강하다.

드리무어와 달리 프암은 근접전이 특기인듯 했으니까. 검이 닿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따라서 확실한 방법을 쓰기로 했다. 

'방어구를 부순다.'

그걸 위해 계속해서 프암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농도의 마기로 형성된 갑옷 위에 죽음의 기운을 씌우는 건 쉽지 않았다.

계속해서 공격이 날아오는 와중에 차근차근 기운을 쌓아야 했다. 

결과는 완전 성공. 

사도들이 시간을 충분히 끌어 준 덕분에 가능했다. 

나는 프암의 갑옷에 죽음의 기운을 완전히 덧씌울 수 있었다.

[ 하하! 포기하라고 했느냐? ]

프암은 웃음을 터트렸다.

[ 수세에 몰린 것은 무명(無命) 네 놈이다. 차라리 울면서 자비를 구했다면 생각이나 해봤을 것을. ]

그는 대검을 들어 올렸다. 검에 부여된 마기가 액체처럼 뚝뚝 떨어져 내린다.

[ 네 놈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드리무어를 죽였고, 나와 함께 했던 동료 원로들까지 죽였다. ]

그건 좀 어이가 없는데. 

"너희들이 쳐들어오지만 않았으면 죽일 일도 없었잖아."

[ 무명, 이건 전쟁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느냐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 누군가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 전쟁. ]

마인이랑 대화를 나누려던 게 실수였다. 애초에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그랬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겠지. 

프암은 나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 그래, 그런 거군. 두려운 건가? 확언하지. 지금 이 자리에서 나는 승리했다. ]

콰아앙—!

프암이 땅을 박차고 쏘아지듯 달려왔다. 보이기는 하지만 가공할 속도다. 눈으로 간신히 쫓는 게 최선이다.

상관없다.

죽음의 기운은 이미 놈의 갑옷에 부여되어 있다. 입을 움직여 의념을 내뱉기만 하면 끝이다.

"죽······."

일순, 달려오던 프암이 가속했다. 예상치 못한 속도로 그의 검이 내 신체를 꿰뚫었다.

『 종말의 귀걸이가 치명적인 일격을 감지합니다. 』

『 영체화하며 3초간 피해 면역이 됩니다. 』

그러나 나를 죽이진 못한다. 

템빨이 이래서 좋다. 

죽어.

단어가 완성되며, 놈의 갑옷을 채우고 있던 죽음의 기운이 폭발했다. 프암의 갑옷이 산산조각나며 터졌다.

[ 크아악! ]

갑옷 속에 있던 프암의 모습이 드러났다.

큰 소리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겁에 질린 그의 표정이 잘 보인다.

"죽어."

나는 즉살을 발휘했다.

푸화아악—!

그것으로 끝이었다.

원로라고 한들. 

그 최후는 다른 적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 *

『 다수의 성좌들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강함에 경악합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광소를 터트립니다. 』

『 질서의 지배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꼴 좋다며 원로들을 비웃습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마계 토벌을 주장합니다. 』

마구 쏟아지기 시작하는 성좌들의 메시지.

어둡게 물들었던 세상 또한 점차 원래대로 돌아온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주인, 다행이네!"

주작과 청룡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딱히 아무렇지도 않다.

아이템 덕분에 다친 곳도 없고.

드리무어 때랑 비교하면 훨씬 쉬웠다. 

"생채기가 있는데요? 큭, 마족놈들······. 나중에 종족을 통째로 멸하겠습니다."

루시퍼는 면밀히 내 몸을 살피며 분노했다.

"원로와의 전면전에서도 이겼다는 건가."

사최헌은 경악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사최헌의 어깨를 툭 쳤다.

"네가 준 정보가 도움이 됐다."

프암의 이능은 단기접전. 1대1에 최적화 된 능력이다. 대상이 누구든 상관없이 자신의 전장으로 끌어들이는 능력.

사최헌으로부터 원로들의 능력을 미리 들어 둔 덕택에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원로 정도는 상대해도 된단 생각이 든다.

샤아아—.

『 랜턴 소울이터가 태초의 원념을 흡수합니다. 』

원로 프암의 영혼이 내 쪽으로 날아왔다.

드리무어 때와 달리 원로들은 영혼만을 남겼다.

『 랜턴 소울이터가 태초의 원념 5개를 동시에 흡수했습니다. 』

『 막대한 인과가 소울 이터의 내부에서 요동칩니다. 』

『 해당 영혼을 소화하는데 다소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

마구 진동하던 소울이터가 다시 잠잠해졌다.

영혼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이기는 했다. 원로급의 영혼을 다섯 개 먹인 적은 이번이 처음이지 않나.

대신 조금만 기다리면 좋은 보상이 나오겠지.

"그러면······." 

나는 고개를 들었다.

마기로 검게 물들었던 땅이 점차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 태양빛에 닿은 마기가 반짝이며 증발하고 있었다.

마기의 핵도 파괴되었고.

우리가 할 일은 일단 다 했다.

통상마법계의 인마대전도 곧 종식될 것이다. 나는 몸을 돌려 도시쪽을 바라봤다.

"이제 제국의 황제한테 보고하러 돌아갈까. 가는 김에 전장 몇 개도 아예 박살을 내놓고."

이만한 성과를 냈으니 이제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을 거다.

성과 영지를 내놓으라고.

물론, 현자 아스펠트도 만나러가야하고.

100화. 현자(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