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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85-90

85화. 현세 침공(2)

'······무명(無命)의 존재가 미래를 뒤바꾸고 있다.'

사최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했다.

인류는 무명이라는 강력한 패를 얻게 된 대신, 멸망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게 되었다.

그렇게 찾아온 예정된 미래 '현세 침공'.

'마인들의 원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듭된 회귀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일들이 존재했다. 사최헌은 그것을 회귀의 변곡점이라 불렀다.

극복해낸다면 인류는 한 발 나아가지만, 실패하게 된다면 인류의 미래는 나락으로 치닫게 된다.

현세 침공은 그러한 변곡점이었다.

'그만큼 마인 측에서도 무명을 강력한 적으로 여기고 있단 뜻이다.'

본래대로라면 현세 침공은 4페이즈 이후에 시작되는 후반부의 사건. 그게 1페이즈에 나타난 거다.

사최헌은 테라스에 위치한 사도들을 살폈다.

'······전원이 무기를 든 건가.'

루시퍼에게서 느껴지는 기운도 한층 강해져 있었다.

"뭐야, 뭘 봐?"

"······."

특히 주작 같은 경우에는 가늠하기 힘든 수준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다. 이 정도 무력이면 원로와도 겨뤄볼 만한가? 확신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사최헌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무명의 전력을 모른다.'

전장의 균열 속에 들어간 무명은 묵시록의 기사를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사로잡기까지 했다.

직접 물어보긴 했지만, 그때마다 루시퍼가 방해 해온 탓에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다.

- 드디어 네 놈이 진짜로 정신을 차렸구나. 주인님의 활약상이 듣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알려주마.

루시퍼의 주관적인 찬사가 혼재된 무명의 무용담은 이해하기조차 힘든 무언가로 변해 있었으므로.

하지만 결론은 명확했다.

'묵시록의 기사를 쓰러뜨렸다면······. 원로와도 맞붙어볼 만 하다.'

이미 현세 침공이 발발한 상황.

무명을 돕는 것 말고는 딱히 제대로 된 해결 방법도 없었다.

"잠깐, 기다려라. 설명은 듣고 가야 할 것 아니냐."

사최헌은 어딘가로 출발하려는 사도들을 붙잡았다.

"별거 있나. 마계에 쳐들어가서 마인들의 원로를 쳐부수면 되는 거 아니야?"

"그게 가능하면 부디 그래 줬으면 좋겠군."

루시퍼가 강한 것은 맞지만, 마계에 단독으로 쳐들어갈 정도는 아니다.

루시퍼는 인상을 쓰면서도 사최헌을 바라봤다.

"쯧, 그래서 뭐. 그놈들이 어떤 식으로 침공을 해온다는 건데?"

사최헌은 무명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차피 결정권은 무명에게 있으므로.

"침공이라고 했지만······. 복잡할 건 없다."

사최헌은 손가락을 펼쳤다. 다섯이다.

"전 세계 5군데에 열린 게이트를 동시에 공략하면 된다. 난이도는 SSS급에 달할 거고."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난간에 다가선 무명의 시선은 바깥에 있었다.

저 멀리 도로 위에 떨어진 악마종 아스타로트가 발버둥치고 있었다.

헌터들이 일사분란하게 달려들었다. 시민들이 빠르게 대피한 덕에, 피해가 최소화된 상태로 공략될 것 같다.

"게이트를 통해 마계의 군세가 넘어오게 될 거다. 일종의 게이트 브레이크가 될 거다."

사최헌은 진지하게 말했다. 마계의 군대가 현세의 땅을 밟는 광경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했다.

루시퍼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끼어들었다.

"잠깐, 그런 대규모 간섭이 가능할 리가 없잖아. 대리자는 뭘 하고?"

"······네 놈은 정말 성좌가 맞나?"

"마족 놈들 특수 능력까지 내가 전부 알아야 하나? 주인님 앞이라 참으려 했는데, 안 되겠다. 덤벼라 인간. 산산조각 내주마."

"이, 이러지 말게나. 지금 급한 일이 있지 않은가!"

주작이 사최헌과 루시퍼 사이로 끼어들었다. 키가 작아 버둥댄다는 느낌이지만 효과는 있었다.

사최헌은 목을 가다듬고서 설명을 계속했다.

"마인 원로 드리무어의 고유 능력 때문이다. 단순히 설명하자면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능력이지."

정리하자면 5개의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하면 진짜 침공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쿠웅—!

저 멀리 악마종 아스타로트가 마침내 쓰러졌다. 꿈틀대던 날개가 움직임을 멎었다.

"악마종의 소환은 현세에 잔존한 마인들의 소행이다. 조금이라도 게이트를 공략할 전력을 줄여보겠다는 의미겠지."

사최헌의 설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5개의 게이트. SSS급 난이도.'

주강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SSS급이라면 지난번에도 공략한 적이 있다. 다만, 현세의 수준에선 굉장한 난이도다.

등장하는 마물의 레벨은 250이상.

반면 인류의 최대 레벨은 200.

주강혁 자신의 레벨도 225.

마인 측의 의도가 다분하다.

'각 게이트에 사도들을 한 명씩 배치하면 끝이다. 사도 없이 혼자 공략해보라는 뜻인가.'

단순히 침공이 목적이라면 6개나 7개로 하는 게 나은 거 아닌가? 어쩐지 도발하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뭐······.'

주강혁은 검집에 담긴 무명검을 살짝 꺼냈다. 새하얀 도신이 햇빛을 반사해 번쩍였다. 검에서 옅은 진동이 느껴진다.

원로를 살해하는 걸로 1차 해방이 가능하다고 했던가.

우연이라기엔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남은 시간은?"

"지금 당장 움직여야 늦지 않을 거다."

어쨌든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쪽에서도 몇 가지 보험을 두고 싶은데. 준비해줄 수 있겠나?"

그렇다면 철저하게 때려 부술 뿐이다.

* * *

대한민국, 이름 모를 산.

소나무가 울창한 산등성이.

"······여기입니다. 진짜 같이 공략하고 싶은데, 너무 아쉽습니다."

유지훈은 정말 아쉬워하고 있었다.

봉인이 풀린 72 악마들이 전세계에서 날뛰고 있는 지금, 공간이동 능력자인 유지훈을 필요로하는 곳이 많았다.

"이제 가라."

사최헌은 단호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갈 겁니다. 너무하네요, 정말. 그럼, 길드장님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무명님 그리고 천이령 헌터님."

공간이 일렁이더니 유지훈 헌터가 사라졌다.

고오오—.

모두의 시선이 눈앞의 거대한 게이트로 향했다. 

칠죄종의 게이트만큼이나 짙고 불길하다.

"그, 근데 공략 인원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천이령 헌터가 불안한지 물어왔다.

실제로 적다.

사최헌 헌터, 천이령 헌터 그리고 나.

이렇게 세 명 뿐이니까. 

'사도들을 보낸 게이트는 문제가 아닌데, 오히려 여기가 문제라고 해야 하나.'

사람이 너무 없으니까 왠지 불안한데.

사최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설명했다.

"소수 정예가 낫다. 공략대를 꾸리면 애꿎은 희생만 늘어날 테니. 그만큼 현세를 방어할 전력도 감소하는 거고."

"······되게 확신 하시네요?"

"조사하면 다 나오거든. 그리고 우리 말고도 누가 더 올지도 모르지."

사최헌 헌터가 대충 얼버무리면서 게이트 내부로 다가서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흙바닥이 나무와 함께 쓸려나가면서 작은 산사태가 일어났다. 흙먼지가 치솟아올랐다.

"우, 우와앗?!"

그 충격에 천이령이 가까스로 자세를 잡았다. 나도 날아갈 뻔했다. 아이템을 잘 갖춰둬서 다행이다.

흙먼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상처로 가득한 상반신을 드러낸 귀환자 호영이었다.

"돕겠다."

한마디뿐이었지만 상당히 든든했다. 내가 고개를 돌리자, 호영은 시선을 휙하고 돌리고선 게이트로 걸어갔다.

"그때, 그 엄청 쎈 사람!"

천이령 헌터도 면식은 있었다. 지난번에 SS급 게이트를 같이 공략하기도 했고.

"그럼 다 모인 것 같으니 들어가겠다."

사최헌 헌터는 미리 알고 있었던 모양.

이로써 사실상 대한민국 최대 전력이라고 볼 수 있는 4인이 집결했다.

그리 익숙한 조합은 아니지만 왜인지 낯설지가 않다.

몇 번 공략을 같이 해봐서일까. 

"무명님. 최선을 다해서 서포트 할게요."

나는 천이령 헌터와 함께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내부는 보랏빛으로 된 동굴이었다.

『 SSS급 게이트 : 마(魔)의 동굴 』

『 보스 처치 - 0 / 1 』

『 해당 게이트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

왜 소수 정예가 낫다고 했는지 알 것 같다.

동굴 내부가 넓지 않다. 공략대가 온다 하더라도, 전투에 참가 가능한 인원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온다."

어둠 속을 꿰뚫어 본 호영이 그리 말했다.

철컥—.

[ Lv. 274 ]

동굴 내부에서 보랏빛 갑주를 걸친 기사가 걸어 나왔다. 한순간에 주변의 공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놈의 손에는 랜스가 들려 있었다. 원뿔 형태의 창으로 말을 타는 기병들이 사용할 것 같은 모양새다.

기사의 몸에선 짙은 마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투구 안쪽으로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광화 마족이다. 이성이 없는 대신 상당히 강력하지."

사최헌 헌터가 검을 들어 올리는 순간, 기사가 땅을 박차고 돌진해 왔다. 쩌어엉—! 동굴 전체를 울리는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저도 갈게요!" 

그림자처럼 달려나간 천이령 헌터의 쌍검이 허공에서 랜스와 맞부딪혔다.

사최헌 헌터도 계속해서 검을 휘둘렀다. 공간이 통째로 베어지며 푸르스름한 잔상이 새겨진다.

철컥—! 철컥!

기사는 기괴한 움직임으로 모든 공격을 피하는 동시에 맞받아쳤다. 콰앙! 뒤쪽으로 밀려난 사최헌이 혀를 찼다.

"호영, 네 놈은 그대로 있을거냐?"

"내가 상대하기엔 너무 약하다."

호영은 무표정한 얼굴로 귀를 후볐다.

"쯧, 마음대로 해라." 

사최헌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서 다시 전투에 참전했다.

귀환자 호영. 

참 특이한 사람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가 할 일을 한다.

먼저 기사의 움직임을 살폈다.

'전부 읽어낼 만하다. 기상천외한 동작은 없고. 직선적인 움직임이다. 다만, 레벨 자체가 높다.'

기사의 레벨은 274.

나보다 레벨이 훨씬 높다. 내 주력 기술인 약자멸시가 통하지 않는다.

원래대로였다면 '즉살'을 사용해야만 처치할 수 있는 상대.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 [ 종말+급 ] '라그나로크 : 에인헤랴르'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모든 능력치가 1단계 상승합니다. 』

내겐 SSS급의 신체 능력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힘이 있다. 

콰아앙—!

나는 빠르게 땅을 박차고 쏘아지듯 달려나갔다.

손에 들린 무명검에는 이미 죽음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

『 '검술 Lv.15'를 발휘합니다. (에인헤랴르) 』

섬전처럼 뻗어나간 무명검이 기사의 갑옷을 베어냈다. 그 순간, 무명검에 담겨져 있던 죽음의 기운이 기사의 내부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푸화아악—!

놈은 산산조각이 나며 흩어졌다.

스치기만 해도 즉사.

내가 해놓고도 어처구니없는 위력이다.

이거라면 즉살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SSS급 게이트 공략이 가능하다.

"와, 와우."

"······원래 손도 안 대고 죽일 수 있던 거 아니였나?"

감탄하는 천이령 헌터와 달리 사최헌은 오히려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게 즉살은 고유 스킬인데 쿨타임이 있어서 초기화권을 소모해야 해서, 대신 죽음의 기운을 담아서 죽이면 노 코스트입니다.

······라고 설명하긴 구차하니 적당히 얼버무리자.

"경우에 따라 다르다."

"그런가." 

내 말에 사최헌 헌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하긴, 내 생각보다 고도로 복잡한 기술이겠군. 단순하게 보는 것만으로 적을 죽일 수 있을 리가 없을 테니······."

"······."

나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영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

* * *

"뭐야, 너무 쉽잖아."

루시퍼는 펼쳤던 날개를 다시 접었다. 처음 등장했던 기사는 어이없을 정도로 약했다.

영국에 생성된 게이트.

내부는 일직선으로 된 던전이었다.

회색빛의 벽돌과 드문드문 횃대가 붙어 있는 틀에 박힌 던전.

"방심하기엔 아직 이르다네. 구조가 극도로 단순화 되었다는 건, 다른 부분에서 특이점이 존재한다는 뜻이니."

루시퍼와 함께 던전에 들어온 것은, 환생자 아이작.

그리고 동료 3명. 

아이작의 시선이 던전을 훑었다.

사실 방금 전 등장했던 기사만해도 결코 약하지 않았다. 일반 마물 주제에 레벨이 270이나 되었으니.

보스의 레벨은 미친 듯이 치솟아 있을 게 분명했다.

'따라오기는 했지만, 보조 이상은 하기 어려울 것 같구먼.'

계속해서 길을 따라 나아가자, 이번에는 마족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 양측에 붉은 뿔을 가진 남성 마족.

귀족의 옷을 걸친 그는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최상위 마족 라덴차—."

"곧 죽을 놈의 이름 따위 관심 없는데."

루시퍼는 단칼에 말을 끊었다.

"현세가 그렇게 만만하냐? 하여간 내가 성좌로 복귀하는 때가 네 놈들이 멸망할 때일 줄 알아라."

그러나 최상위 마인 라덴차는 침착했다.

"사도여. 무언가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라덴차의 발치에서 시꺼먼 마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여기는 게이트 안이다. 한없이 마계와 비슷한 구성을 가진 장소. 현세와 비교하면 곤란할 거야."

[ Lv.322 ]

마족의 머리 위에 떠오른 레벨은 322.

"모두 모이게나! 저 자는 던전 전체를 폭발시키려 하고 있네."

아이작이 다급히 소리쳤다.

대마법사쯤 되면 주변의 흐름을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았으므로.

동료 몇이 아이작을 향해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그런데 마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무슨 소리냐."

라덴차의 눈썹이 올라갔다.

루시퍼를 상대할 마기를 끌어모으려던 것 뿐이었는데.

인간들의 반응이 호들갑이었다. 

루시퍼가 씩 웃으며 앞으로 창을 겨눴다. 

"대마법사 맞네. 아주 정확하게 봤어."

강대한 기운이 루시퍼의 주변으로 넘실거렸다.

"내가 그러려고 했거든."

주인님께선 공략에 손속을 두지 말라고 하셨다. 구조를 파악했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단순한 구조라면 더욱 좋다.

파직, 파지직—!

루시퍼의 창 끝으로 응축된 흑마력이 모여 들었다. 다음 순간, 막대한 에너지가 방출되며 던전을 휩쓸었다.

콰아아아—!

최상위 마인 라덴차조차 그대로 쓸려나갈 수준의 위력.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던전 전체가 벌겋게 달아 올랐다. 

"무, 무슨······. 방금 그 마물이 통째로?" 

"적이 증발했는데, 아이작. 내가 본 게 맞아?" 

"맞다네. 그만 흔들게나." 

동료들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질 줄을 몰랐다. 

아이작의 눈동자도 흔들리긴 마찬가지. 

'······역시 다르군. 마력의 낭비가 없어.'

상위 존재가 마력을 다루는 것을 처음으로 봤다. 흑마력도 작동 방식은 마력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어떠한 힘이든, 마법으로 발현되기 위해선 일정 부분의 손실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러나 루시퍼의 흑마력은 100%의 효율로 외부에 발현되고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야말로 현실을 왜곡한 기적.

아이작은 그 힘의 작동 방식을 눈에 담아두고자 했다.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기 위한 그의 성장욕에는 끝이 없었으므로.

"자, 다음은 누구냐. 숨어 있지 말고 빨리 나와라."

루시퍼는 창을 앞으로 겨누며 소리쳤다.

같은 시각.

콰과과과—!

4개의 게이트가 비슷한 방식으로 격파되고 있었다.

사도들의 힘은 압도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

주강혁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순조로운데······.'

게이트가 공략되어 감에 따라 주강혁의 주변으로 새하얀 기운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무명 헌터님, 주변으로 뭔가가 모여들었어요. 그 랜턴은······. 제가 고쳤던 거 맞죠?"

천이령이 랜턴을 알아봤다.

모습이 변하긴 했지만 한 번 고쳐 본 경험이 있어서일까.

"으음, 잘 모르겠네요. 지금은 작동을 안하는 건가요? 고장난 건 아닌 것 같은데."

허리춤에 차고 있던 랜턴 소울 이터에게로 영혼이 맴돌고 있었다.

본래 영혼은 금방 흩어지기 마련이나, 최상위 마인과 같은 존재의 영혼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 듯 하다.

"영혼 탐식자인가."

깜짝이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서 랜턴을 유심히 바라보던 호영이 입을 열었다.

"성장 중인 모양이군."

"······."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응시하고 있자니.

호영이 선뜻 말했다.

"비슷한 기물을 여러 번 봤다. 원한다면 성장을 빠르게 끝내게 해주겠다."

"······?"

그거야 원하던 바다.

영혼을 계속해서 수집해야 초기화권이 수급이 원활해지니까. 영혼이 계속해서 낭비되는 것도 아깝고. 

그런데 호영의 입에서 나온 방법이 꽤 충격적이었다.

"때리면 된다." 

네? 뭐라고요?

86화. 현세 침공(3)

"······?"

때리면 된다.

귀환자 호영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리 말했다.

스윽.

나는 괜스레 랜턴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이게 가전 제품도 아니고······. 그리고 요즘은 가전제품은 섬세해서 때리면 고장난다.

"때려서 해결될까요? 괜히 부서질 것 같은데."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천이령 헌터도 우려를 표했다.

지금까지 내가 보아 온 호영은 그야말로 파괴적인 힘을 가진 야차였다. 그런 주먹으로 랜턴을 두드리면 산산조각이 나서 흩어지지 않을까.

호영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한 물리적인 타격이 아니다. 영혼의 공명이다. 할 거라면 내게 맡겨라. 당장 깨어나게 해줄 테니."

꽤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그때, 앞쪽에서 동굴 너머를 주시하던 사최헌 헌터가 돌아왔다.

"랜턴이라면 맡겨도 좋을 거다. 겉보기엔 거칠어 보여도 호영의 지식은 다차원을 망라하니까."

그리 말한 사최헌이 몸을 돌리려다 한 소리를 더했다.

"······그리고 무명을 제외한 둘은 조금은 긴장감을 가져라. 원로의 강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랜턴을 고치는 건 중요한 일인걸요? 아마도요."

천이령은 그리 말하면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꽤 중요하다. 스킬 쿨타임 초기화권이 보급되느냐가 사용할 수 있는 즉살의 횟수를 정하니까.

'죽음의 기운을 다룰 순 있다고 해도 아직 부족하다.'

SSS급을 뛰어넘는 적을 상대하려면 초기화권이 많은 편이 좋다. 그게 설령 마인 원로라고 해도. 

"그래서 할 건가?"

호영이 재차 물어왔다.

내 고민은 길지 않았다.

"하지."

주위를 맴도는 영혼이 아깝기도 하고. 빨리 성능을 강화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그럼 시작 하겠다."

내게서 랜턴을 가져간 호영이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건네주는 순간 랜턴이 옅게 떨려왔지만, 성장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암, 그렇고 말고. 

후웅—. 콰아앙!

높이 들어 올린 호영의 손날이 그대로 낙하했다. 바닥에서 강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

손날을 내려친 바닥이 깊게 패였다. 그러나 랜턴에겐 닿지 않았다. 타격 순간 랜턴이 빙글 굴러서 피했다.

역시 에고 아이템이라 그런가.

호영은 무감하게 말했다. 

"버릇이 없군."

콰득-!

호영이 랜턴을 발로 고정했다. 그대로 무릎을 굽힌 호영이 다시금 손을 들어 올렸다.

까아앙!

호영의 손날이 랜턴을 내리쳤다. 청아한 타격음이 동굴 내부에 울려 퍼졌다. 대기가 공명하듯 메아리쳤다.

영혼의 공명.

전신을 뒤흔드는 듯한 공명음이었다.

호영은 타격을 멈추지 않았다.

까앙, 까아앙! 사정없이 랜턴을 내리쳤다.

"랜턴의 수리가 끝나는 대로 출발하지."

사최헌은 동굴 너머의 어둠 속을 초조하게 바라봤다.

"이미 설명했었지만, 원로는 시스템을 마비 시킬 수 있다. 경우에 따라 스킬이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놈에게 시간을 주는 건 좋지 않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에 설명해 준 내용이었다.

"근데 그러면 어떻게 싸워요?"

"스킬 없이 싸우면 된다."

천이령의 물음에 사최헌은 간단히 대답했다.

"애초에 소수 정예로 게이트에 들어 온 이유 중 하나다. 시스템의 보조 없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헌터는 별로 없으니."

"아하, 스킬 없이."

천이령 헌터는 이해한 모양.

나도 대강은 알았다.

귀환자 호영은 시스템의 보조 없이 막대한 괴력을 발휘한다.

천이령도 혼돈의 힘을 자유롭게 다루고. 사최헌도 공간검의 달인이다.

나도 스킬 없이 무명검을 다룰 수 있으니 파훼법은 존재한다.

'제일 좋은 건, 시스템이 마비되기 전에 즉살로 모든 걸 끝내는 것.'

그게 안 된다면 준비해둔 비책을 꺼내야겠지만.

까아앙—!

다시 한번 청아한 타격음이 울려 퍼지고. 파스스. 흠씬 두들겨 맞은 랜턴이 진동을 멈췄다.

쩌적, 쩌저적······.

랜턴을 두르고 있던 백색과 흰색의 장식품들이 하나둘 떨어지더니, 마침내 랜턴의 형상이 변하기 시작했다.

『 랜턴 '소울 이터'가 성장을 맞이합니다. 』

『 해당 아이템에 별이 깃듭니다. 』

랜턴의 유리를 타고 은하수가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랜턴 전체에 은은한 별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 [ ★ ] 혼돈(混沌) : 소울 이터 』

- 영혼을 섭취하여 균열을 생성합니다.

- 이제 시스템 상의 권한을 일부 해제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의 전용무기처럼 별이 추가되었다.

뭐가 달라진 거지?

그리 생각하는 순간.

덜컥.

랜턴이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녀석은 공중에서 몸체를 마구 흔들었다.

『 랜턴 '소울 이터'가 무식한 방법에 분통을 터트립니다. 』

동시에 모두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 말했어요!" 

천이령 헌터가 감탄했다. 

에고 아이템이던 소울 이터의 말문이 터졌다. 

"성공했군."

호영은 씩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고오오—.

또한 허공을 맴돌던 최상위 마인의 영혼이 랜턴에게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이번에 형성된 것은 균열이 아니었다.

『 최대 레벨 제한을 15 상승시킵니다. 』

새롭게 변화한 소울이터는 시스템에 간섭할 수 있게 되었다.

* * *

같은 시각, 다른 SSS급 게이트.

루시퍼와 아이작은 일직선의 던전 내부를 나아가고 있었다.

"봐봐, 최상위 마족도 별거 없구만. 어디 상대가 될만한 놈 안 나오려나."

루시퍼의 여유로운 걸음걸이와 달리 아이작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방금 처치했던 적이 최상위 마족이었으니, 이번에는 또 뭐가 나올지······.'

일직선으로 된 통로.

그리고 순차적으로 배치된 적.

아무리 봐도, 마족 측에서 무명(無命)의 전력을 측정하려는 걸로 밖에는 안 보였다.

'물론 측정 당하기엔, 사도의 강함이 워낙에 예측불허하다만······. 내 입장에선 그 활약을 옆에서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지경이군.'

환생자 아이작은 루시퍼로부터 상당히 깊은 영감을 받고 있었다. 

상위 존재의 마력 활용은, 인간의 이해를 아득히 뛰어넘어 있으므로.

현재 아이작의 경지는 8서클.

인간으로서 오를 수 있는 사실상 최대의 경지였다. 9서클은 반신이라 부르며 10서클은 신의 영역이니 논외였다. 

아이작은 스킬 없이도 다양한 마법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진짜 강자였다. 아이작은 루시퍼를 바라보며 이전의 전투를 떠올렸다.

'제한 때문에 출력이 제한되어 있다지만, 마법의 구조 자체는 아득한 상위 지식이구먼.'

루시퍼의 옆에서 전투를 보조하는 것만으로도 배워가는 게 많을 듯했다.

평생 이룩하지 못했던 9서클의 경지.

어쩌면 이번 생에는 닿을 수 있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였으니.

"믿고 따르겠네."

"응? 뭐. 아무래도 좋은데, 괜히 걸리적거리지나 말라고."

저벅. 

그런 아이작과 루시퍼의 앞으로 또 다른 적이 나타났다.

"뭐야, 마기가 장난 아닌데. 마족은 아닌가?"

그런데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그으으······. 그으으······."

분명 인간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존재였다.

흘러내리는 짙은 마기가 안개처럼 깔리고 있다. 붉은 안광이 이쪽을 향했다.

바로 그 순간.

콰아앙-!

30m가 넘는 거리가 단숨에 좁혀졌다. 동료 헌터들은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콰드득! 헌터 한 명의 팔이 뽑혀 나갔다.

"뭔······."

미간을 좁힌 루시퍼의 볼가로 붉은 피가 튀었다.

"끄아아악!"

동료 헌터가 비명을 질렀다. 아이작의 대처는 빨랐다. 

"제이콥!"

외침과 동시에 나타난 아이스 스피어가 마기로 뒤덮인 인간을 꿰뚫었다.

푸욱, 푸욱, 푸욱!

세 발이 연달아 꽂혔음에도 마기 인간의 움직임은 멎지 않았다. 더욱 격렬하게 발악할 뿐이었다. 쩌저적-! 놈의 몸을 고정한 얼음창이 부서지려는 찰나.

루시퍼의 창 끝에서 강렬한 폭발이 치솟았다. 굉음과 함께 던전 전체가 흔들렸다.

마기로 뒤덮인 인간은 그대로 밀려 나가 던전의 바닥에 처박혔다. 공격을 받고도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뭐야, 버텼다고?"

루시퍼의 눈썹이 올라갔다.

"제이콥, 정신 차리게!"

"끄으윽······!"

아이작은 인벤토리에서 포션을 꺼내서 상처에 들이부었다. 파직, 파지직—! 상처 부위로 노이즈가 치솟을 뿐, 포션이 듣지를 않는다.

"뭐, 뭐야? 왜 포션이······?"

"다들 진정하게. 잊었는가? 원로가 시스템을 마비 시킨다고 하지 않았던가. 걱정 말게. 내 마법은 통할 테니."

샤아아—.

아이작의 회복 마법이 닿고 나서야 팔이 뜯긴 헌터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아이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선 루시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마족의 죄인일세."

"그게 뭔데?"

죄인(罪人).

"마계에 죄를 지은 타차원의 영웅들일세. 그런 자들이 원로의 장난감이 되어 개조당한 거네."

"호오."

그 말에 루시퍼가 흥미롭다는 듯 시선을 옮겼다.

"드디어 상대할만한 적이 나타났다는 거 아니야."

"자, 잠깐—! 기다리게나!"

루시퍼는 날개를 펼친 채 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악-! 흑색의 창이 죄인의 가슴을 꿰뚫었다.

"이대로 흑마력을 꽂아 넣어주······. 응?"

그러나 뭔가 이상했다.

파직, 파지직—!

주변으로 노이즈가 일렁이며, 전용 무기가 말을 듣지 않는다. 흑마력이 모이지 않는다. 죄인의 팔이 루시퍼를 향해 뻗어졌다.

타앗.

루시퍼는 반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설명해라, 마법사."

"죄인에게 원로의 능력이 깃든 모양이네. 이 경우에는······."

아이작이 뒤늦게 설명했다.

"제어종식(制御終熄).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고유 능력일세."

"쯧, 그걸 진작에 말했어야지."

"직접 보는 건 나도 처음인지라."

아이작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맺혔다.

그는 떠올렸다.

머나먼 차원, 어느 제국의 수도가 함락되는 광경을. 무너진 건물들과 타오르는 불길.

융성하던 제국을 멸망시킨 것은 단 하나의 죄인(罪人)이었다.

흑색의 거인은 마기를 연기처럼 쏟으며 전진했다.

대륙의 내로라하는 마법사들도 속수무책이었다. 소드 마스터들의 검도 무용지물이었다.

그 누구도 막아내지 못했고,

대륙 하나가 그렇게 검은 땅이 되었다.

'그때와는 다른 종류지만······. 섬뜩하긴 마찬가지구려.'

아이작은 입술을 씹었다.

죄인은 마계의 비밀 병기. 그게 여기에 나타났다는 건, 마인 측에서도 상당히 진심이라는 뜻이었다.

『 스킬 '체인 라이트닝'을 발휘합니다. 』

파지직-!

아이작의 손끝에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푸른 전격이 대기를 찢으며 쏘아졌다.

전격에 당한 죄인이 몸을 비틀었다. 잠시뿐이지만 움직임이 멎었다. 효과가 있다. 

아이작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다행히 스킬은 통하는군. 다만, 저 손에 닿으면 시스템이 일시적으로 정지되는 듯하네."

"쯧, 귀찮게."

루시퍼는 창을 던져 버리고선 오른손을 펼쳤다. 흑색의 광선이 죄인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

무기는 없어도 가공할 위력이다.

"큭."

그러나 죄인은 기괴하게 몸을 비틀어 광선을 피해냈다. 심지어는 잔상을 남기며 루시퍼를 향해 돌진해 왔다.

[ Lv.??? ]

레벨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이작은 재빨리 루시퍼에게 보호막을 부여 했다. 쩌저적-! 두터운 보호막이 일시에 깨어졌으나, 잠깐의 시간은 벌었다.

루시퍼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콰아앙—!

양손에서 뿜어진 마도 광선이 죄인을 날려 보냈다. 튕겨 나간 죄인은 바닥을 쉴새 없이 구르며 밀려 나갔다.

"무슨 움직임이 저래?"

루시퍼가 혀를 내둘렀다. 

"사도인 그대는 더 조심해야 할 걸세."

"내가? 인간들과 달리 나는 시스템에 목 매이지 않아서 말이야. 공격 몇 번 받는다고······."

"그 뜻이 아닐세."

아이작은 쓰러진 죄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대는 스킬로 불러진 존재가 아닌가. 제어종식의 영향을 크게 받을 걸세. 스치는 순간, 팔 하나는 못 쓰게 될지도······."

"그런거였나. 마족 놈들 치고는 머리 좀 굴렸군. 뭐, 상관 없다."

루시퍼는 양손을 펼쳤다.

"원거리에서 끝장내면 되잖아."

루시퍼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이작의 보조는 시의적절했다. 전투 센스가 나쁘지 않았다. 환생자라고 했던가, 보기보다 마법을 잘 다룬다.

술식의 전개와 시전 속도가 쓸만한 수준이었다. 인간들끼리 일곱 개의 별이니 뭐니 이름 붙인 게 우습다고 생각했는데. 아이작은 예외였다. 아니, 그 호영인지 뭔지 하는 놈도 예외고. 사최헌은 허접한 거 맞고. 

시덥잖은 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었다. 

루시퍼는 짧게 말했다. 

"마법으로 내 화력을 보조해 봐라."

"알겠네. 내 최선을 다하지."

콰아아아-!

흑색의 마도광선의 주위로 아이작의 푸른 마력이 나선을 그리며 덧씌워졌다. 위력도 속도도 한층 증가했다. 이 정도면 죄인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실제로 죄인은 이쪽으로 쉽사리 접근해오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다른 사도들이었다.

[ 주, 주인. 헬프. 공격이 안 통함. ]

근접전을 주로 하는 가브리엘은 어쩔 수 없이 적과 접촉해야 했다. 그러나 접촉하는 순간 해당 부위는 통제 불능이 된다.

[ 주인님, 면목 없습니다만······. 이쪽도 상당히 곤란해졌습니다. 상성이 안 좋네요. ]

청룡에게서도 앓는 소리가 나왔다. 저쪽은 원거리 공격을 던지는 죄인인 모양. 

[ 이쪽은 할만하다네. 다른 쪽만 해결하면 될 것 같네! ]

유일한 신화+급인 주작만 승기가 잡힌 듯했다.

가브리엘에게는 시야 공유가 있지만, 청룡에게는 시야공유가 없다.

사도끼리 도와주러 가고 싶어도 어려운 상황이다. 

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각 게이트는 동시 공략되어야 했으니까.

그때, 주인 주강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그걸 꺼내.

* * *

"드리무어님, 예상대로 죄인들이 사도들을 상대로 선전하고 있습니다."

머리를 길게 기른 여성 마인이 고개를 숙였다.

보고를 받은 원로 드리무어는 자신의 하얀 수염을 쓰다듬었다.

"흐음······."

원로 드리무어는 자신의 서재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드리무어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책을 넘겼다.

온갖 종류의 책으로 가득 채워진 서재.

창밖으로는 새까만 우주의 공간이 내다보인다.

행성 그리고 별들이 아로새겨진 광활한 공간.

무명 일행이 공략 중인 SSS급 게이트와 이어진 차원의 틈새였다. 

드리무어의 은신처는 그 안에 존재했다.

드리무어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상위 존재라고 한들, 지상에 내려온 순간부터는 한낱 미물. 천적 앞에선 어쩔 수 없는 법이지."

드리무어가 게이트에 풀어 놓은 죄인들은 오랜 시간 정성 들여 키운 씨앗들이었다.

그들 하나 하나가 차원을 대표하던 영웅들이다. 물론 오랜 세뇌와 마기의 주입 끝에 과거와 같은 생기는 잃었다만.

그릇이 훌륭하니 사도들과 맞서기엔 충분할 터.

더욱이 드리무어 자신의 능력인 '제어종식'과 합쳐져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소환된 존재인 사도들은 쉽게 반항할 수 없다.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구나."

그러나 아직 정보가 부족하다. 여기서 더욱 정보를 취합해야 했다. 무명의 능력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낱낱이 알아내야만 했다.

묵시록의 기사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면 좋았으련만. 현세의 총책임자 가논이 도망쳐서 생긴 정보 공백이 아쉬울 따름이었다.

"죄송합니다. 가논을 제대로 주시했어야 했는데······." 

"상관 없다. 죄인을 통해서 쓸만한 정보를 건져내면 그만이니."

"전투를 길게 끌면서 양질의 정보를 뽑아낼 수 있을 듯합니다. 현 상황을 유지하겠습니다."

사도들과의 전투를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특히 무명의 전투가 어떻게 될지가 관건.

드리무어가 느긋하게 책장을 넘기는 순간이었다. 게이트 속의 광경이 드리무어에게 전해졌다.

"음······?"

수세에 몰린 사도 청룡이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전투에 도움이 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캠코더. 

무언가를 찍는데 활용되는 물건이었다.

마정석이 박혀 있어 게이트 간의 통신까지 지원하는 물건으로 보였다.

청룡은 죄인과 전투를 지속하는 대신, 카메라에 죄인을 담았다.

반면 가브리엘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뒤로 물러나 지그시 적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푸화아악—!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죄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폭발했다. 무명의 기술이 발휘된 것이었다.

"허어······."

드리무어가 언짢은 듯 신음을 내뱉었다.

심지어 죄인의 영혼조차 되돌아오지 않았다. 강력한 블랙홀에 흡수되는 것처럼 게이트를 빠져나가 무명에게로 향한다.

죄인들의 짙은 영혼이 무명에게로 모여들었다.

드리무어의 주름이 한층 깊어졌다. 미간을 잡은 드리무어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남은 죄인의 수는 얼마나 되지?"

"10명 남짓합니다."

죄인이란 일종의 전략 병기였다.

한 마리만 있어도 어지간한 나라는 멸망 시키는 수준의 전략 병기. 그런 죄인 네 마리가 동시에 터져나갔다.

고민되는 순간이었다.

보내봤자 개죽음을 맞을 뿐인가.

아니면 소모전으로 이어가야 하는가.

무명의 힘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드리무어의 눈이 깊어졌다.

죄인을 사용하지 않으면 게이트만 공략당할 뿐이다.

게이트는 이곳 차원의 틈새로 이어진다.

드리무어는 만일을 대비하고자 했다.

최상위 마인들 모두가 무명을 우습게 보고 격침당했다. 묵시록의 기사도 쓰러진 마당에 무명을 우습게 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만약 무명(無命)의 힘이 진짜라면······.

반드시 사로잡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만 했다.

"전부 투입해라."

드리무어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올라갔다.

그 시각.

『 '혼돈(混沌) : 소울 이터'가 영혼을 충분히 섭취했습니다. 』

『 [ ★ ] 세계에 균열을 생성합니다. 』

쩌적, 쩌저적-!

막대한 영혼을 흡수한 랜턴 소울이터가 균열에서 아이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

플래티넘 코인,

사도 강화석까지 우르르 쏟아져 나온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것처럼.

『 다수의 성좌들이 즐거워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새로운 죄인의 출현을 알립니다. 』

『 랜턴 '소울 이터'가 영혼 포식을 기대합니다. 』

"오······."

이번에는 아이템이 복사되고 있었다.

87화. 현세 침공(4)

공간이 유리처럼 깨어졌다. 균열의 내부로 우주의 공간이 엿보인다. 그 내부에서 아이템들이 튀어나왔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6 』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x 1 』

『 [ 신화급 ] 연결된 강화석 x 1 』

『 최대 레벨 상승 + 10 』

균열 속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별빛이 섞여 반짝거리기까지 한다.

"예쁘다······."

천이령이 두 눈을 반짝였다.

나는 아이템들을 집어 들었다. 즉살 쿨타임을 초기화 시켜주는 티켓 여섯 장과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그리고 강화석까지.

『 달성 가능한 최대 레벨 : Lv.240 』

거기에 더해 최대 레벨 제한까지 상승했다. 성장한 소울 이터의 효과가 제대로 체감된다.

"별빛이 깃든 아이템은 흔하지 않다. 특히 지금 시점에선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을 거다. 그렇다곤 해도······. 굉장한 효과군."

사최헌도 감탄하며 잠시 동안 균열을 응시했다. 나는 시스템 창으로 눈을 옮겼다. 

『 현재 레벨 : Lv. 230 / 240 』

죄인을 처치하며 230 레벨을 달성했다.

여태껏 막혀 있던 최대 레벨 제한도 빠르게 해제되고 있다.

'레벨업을 할 수단은 많다.'

아직 칠죄종도 전부 처치하지 않았고 묵시록의 기사도 남았으니 경험치가 부족할 일은 없다.

'최대한 레벨 제한만 많이 올려놓으면 된다.'

약자멸시를 사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레벨은 능력치를 종합적으로 올려준다. 내 체급과 직결 된다는 뜻.

'종말+급 아이템인 에인헤랴르의 효과는 신체 능력을 한 단계 올려주는 것.'

지금은 SS급이니 SSS급의 육체가 적용된다. 

SSS급이 되면 그다음 단계가 된다는 건데.

SSS급에 해당하는 레벨은 250.

거기에 도달하면 그 다음은 뭘까.

[ 그 다음 등급은······. 아쉽게도 정보 제한이 걸려 있습니다. ]

청룡의 대답은 그랬다.

'그보다 지금은.'

나는 강화석을 집어 들었다. 지금까지 봤던 강화석과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 [ 신화급 ] 연결된 강화석 』

- 사도의 등급을 한 단계 상승시킵니다.(최대 신화급)

- 대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거리에 관계없이 사용이 가능합니다.

보란 듯이 사기템이 나왔다.

『 백의 사도 가브리엘에게 사용하시겠습니까? 』

본래 강화석은 근처에 있는 사도에게만 사용 가능했었는데.

『 랜턴 '소울 이터'가 뿌듯하게 고개를 듭니다. 』

나는 허공을 두드려 가브리엘을 강화했다.

『 백의 사도 가브리엘의 등급이 한단계 상승합니다. 』

『 백의 사도가 신화급으로 격상되었습니다. 』

[ 오, 주인. 힘이 솟아올랐어. ]

[ 벌써 신화급으로 올라왔다고? 주인님, 가브리엘 놈한테는 너무 이른 힘입니다. ]

[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 까마귀 너는 이제 죽었다. ]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사념으로 투덕거렸다. 지난 일주일간, 루시퍼가 가브리엘을 어마무시하게 놀리긴 했다만······.

이 녀석들 긴장감 없네.

사최헌의 마음이 조금 이해가 간다.

"무명, 성좌들의 메시지는 확인했겠지. 드리무어가 죄인들을 추가로 투입한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략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죄인들의 영혼을 회수하면, 아이템이 불어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죄인과 전투를 시작하기에 앞서 할 일이 있다. 

"고맙다. 덕분에 랜턴이 깨어났다."

나는 호영에게 감사를 전했다. 호영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날 살려준 은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곱씹고 있자니, 앞쪽에서 큰 진동이 느껴졌다. 콰아앙—! 어둠을 뚫고 흑색의 구체가 포탄처럼 쏘아져 왔다.

말 그대로 거대한 포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최헌이 즉시 반응하여 달려나갔다. 

꽈앙!

사최헌 헌터의 검이 흑색 구체를 막아냈다. 구체의 크기는 사최헌과 엇비슷했지만 보통의 힘이 아니었다. 

"큭, 이건······."

사최헌 헌터가 검과 함께 밀려났다. 콰과과—! 땅바닥에 긴 자국이 생겨났다.

"저도 도울게요!"

천이령이 허공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혼돈의 기운을 두른 천이령의 쌍검이 포탄을 막아내려 했으나 쉽지 않았다.

"큭, 엄청나게 무겁······."

천이령과 사최헌이 양측에서 달라붙었음에도 구체의 힘이 더 강했다. 두 사람이 밀려난다.

[ 주인, 이쪽에도 구체가 있어. 매우 두들겨 패는 중. ]

[ 아까와 같은 죄인일세. ]

[ 마기 보호막인가요? 모두 조심하세요, 손아귀에 닿으면 마찬가지로 시스템이 마비됩니다. ]

사도들도 시끄러워졌다.

보호막이 있으니 즉살은 통하지 않는다. 이전 묵시록의 기사와 동일한 방식이다. 이쪽의 공격이 간파되고 있는 건가? 

아니면 단순한 실험일지도 모르고.

'보호막을 부순 사도부터 시야 공유나 캠코더를 켜. 지금부터 잡담은 금지다.'

죄인.

사도들도 비등하게 상대할 정도의 적이다. 

인간끼리만 모여 있는 이쪽은 상대적으로 위기다. 

'보호막을 없애지 못하면, 즉살의 발휘는 불가능하다.'

묵시록의 기사를 처치했던 건 보호막이 영혼으로 되어 있어서였다. 영혼은 죽일 수 있지만, 순수한 마기 방어막 그 자체는 없앨 수 없다.

잠깐 고민에 잠긴 사이.

"내가 나설 차례군."

뚜두둑.

지금껏 움직이지 않고 있던 호영이 목을 풀었다. 눈을 깜빡였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콰아앙—!

땅을 박차고 나간 것만으로 거센 기류가 터져 나왔다. 날아가지 않기 위해서 몸을 숙여야 할 정도였다.

말도 안되는 상황이었다. 

내 육체 수준은 SSS급이니까.

내가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땐, 이미 호영의 맨발이 죄인의 보호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콰아아아—!

로브 자락이 휘날리는 격풍 속에서.

쩌저적, 쩌억!

사최헌과 천이령도 어쩌지 못한 보호막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충격에 죄인이 뒤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타앗. 호영은 발돋움 한 번으로 튕겨져 나간 죄인을 곧장 따라 잡았다.

호영의 맨발이 죄인을 내려찍었다. 쿠웅-! 바닥에 꽂혔다 튕겨 나온 죄인을 다시 마주하는 것은 호영의 뒤돌려차기였다.

콰앙-!

죄인은 반항 한 번 못하고 어둠 너머로 날려졌다.

"저 사람, 인간 맞아요······?"

뒤쪽으로 굴러 온 천이령 헌터가 못 믿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조금 전 충격에 함께 바닥을 굴렀던 사최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순수한 육체 능력으로는 인간이 아니지. 내가 아는 인간 중에선 제일 강하다."

사최헌은 몸에 묻은 흙을 털어냈다.

놀랍기는 나도 마찬가지다. 아니, 너무 강하잖아.

사도 수준으로 강한데.

'······제주도에서도 전력을 발휘했던 게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호영이 패배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묵시록의 기사의 전령을 유일하게 처치한 것도 호영이었고.

"으어어어—!"

어둠 속에서 죄인의 괴성이 들려 왔다. 다시금 죄인이 호영을 향해 돌격해 왔다. 반격을 위해 주먹을 치켜든 호영의 움직임이 멈춘 건 그때였다. 

"!"

콰앙!

죄인의 주먹이 호영의 뺨에 꽂혔다. 콰과과—! 풀썩. 땅을 파헤치며 굴러온 호영은 그대로 우리 앞에 쓰러졌다.

"······."

천이령과 사최헌의 얼굴에 의문이 새겨졌다. 

"뭐, 뭐예요? 갑자기? 할만한 거 아니었어요?"

"뭐냐. 제어 종식은 네게 안 통하지 않나?"

귀환자 호영은 처음부터 스킬에 의존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 보여준 모든 게 순수한 피지컬이란 의미.

근데 왜 갑자기 공격을 멈췄지?

궁금하긴 나도 마찬가지다. 

퉷.

입 안의 흙을 뱉어낸 호영은 엄지로 뒤쪽을 가리켰다. 까득. 이를 악문 호영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죄인의 얼굴이. 내가 아는 얼굴이다."

* * *

귀환자 호영.

그의 삶을 귀환자라는 한마디로 축약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처음부터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남들이 헌터의 시대니 뭐니 난리를 칠 때도 묵묵히 학업을 이어 나갔다.

그 덕일까.

대기업은 아니지만 괜찮은 기업에 취업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남부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다고 기뻐했다. 가족들의 고생도 끝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호영이 정신을 차렸을 때, 그의 앞에 펼쳐진 것은 울창한 대삼림이었다. 시공의 뒤틀림이 호영을 다른 차원으로 끌고 간 것이었다. 

호영은 살아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은 채, 수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대삼림의 자연은 호영을 강인하게 만들었다.

영양가 넘치는 과일,

뛰어난 효과를 가진 약초,

맹수들은 위협적인만큼 귀한 소재를 지니고 있었다.

인간은 없었다.

동물들과 교감하며 맹수처럼 지냈다.

영역의 지배자가 되기까지 20년의 시간이 걸렸다.

숲의 맹수들에게 인정받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대삼림 전체를 돌아다녔다. 주워 먹은 약초들은 영험했고, 그 덕에 호영은 젊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숱한 죽음의 위기가 있었다. 그러나 호영은 끈덕지게 살아 남았고 대삼림의 지배자가 되었다.

여기까지가 110년.

숲의 중심부에 숨겨져 있던 유적에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갈 방법을 알아냈다.

호영은 유적에 잠든 신령들과의 교감을 통해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귀환이라고 생각했다.

꿈에 그리던 집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영을 맞이한 건 괴물로 가득한 불모의 땅이었다. 70년이 흘렀다. 괴수의 피와 심장은 호영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차원을 넘나드는 괴수를 우연히 처치했다. 42년이 지났다. 다른 차원이 호영을 맞이했다. 58년이었다. 집은 아니었다.

다음 차원.

그리고 다음 차원.

또다시 다음 차원······.

돌아올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사무치게 돌아가고 싶었으나, 호영은 돌아갈 수 없었다.

인간.

그는 고작 인간에 불과했으므로.

차원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은 손에 꼽는다. 위대한 대마법사조차 다른 차원을 탐색하는 수준에 그친다.

하물며 차원을 넘어, 자신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일은 상위 존재의 도움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다.

호영은 자신이 내딛는 땅마다 새로운 역사를 새겼다.

한때는 마물을 토벌한 국가의 영웅이었고, 어떨 때는 제국에게 핍박받은 망국을 일으켜 세운 대장군이었다.

용을 쓰러뜨린 드래곤 슬레이어, 누명을 뒤집어쓴 반역자, 정신이 반쯤 나간 기인, 주먹 하나로 세계를 평정한 초인······.

그리고 어느 때는, 한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이기도 했다.

"아이솔. 그는 나와 피를 나눴던 형제다."

호영은 무심하게 어둠 너머를 바라보았다. 죄인이 붉은 안광을 흘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 얼굴이 썩 익숙했다. 

호영은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에게 나라를 맡겼고, 나는 떠났었다."

그가 직접 일군 국가도, 등을 맞대고 싸웠던 동료조차도 호영을 붙잡을 순 없었다. 호영에게는 그저 수많은 차원 중 하나였으므로.

"······그런데 왜 이런 꼴이 된 거냐."

까드득.

호영은 죄인을 바라보며 이를 꽉 물었다. 그의 잇몸에서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강하게.

"그, 그러니까. 아저씨가 어느 세계의 왕이었는데, 저 죄인이 동료였다는 거죠?"

"맞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호영이 두고 온 동료는 마인의 실험체가 되어 있던 것이다.

"호영, 어떻게 할 거지?"

사최헌은 착잡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죄인을 본래의 모습을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짙은 마기에 의해 오염된 죄인은 무슨 짓을 해도 본래대로 되돌아갈 수 없다.

"······." 

호영은 눈앞의 죄인을 응시했다. 

사최헌은 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호영의 입에서 어떤 답이 나올지는 이미 알고 있었으므로.

"적어도 내 손으로 보내주겠다. 그래도 되겠나?"

호영은 그리 말했다.

공격을 멈춘 것은, 무명에게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동료였던 자를 자신의 손으로 묻어주기 위해서.

주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호영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죄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아앙—! 콰앙!

살 떨리는 소리가 동굴 전체에 울려 퍼진다. 거센 충격파가 동굴을 울린다. 지면이 흔들리고, 동굴의 돌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린다.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옛 동료를 향한 호영 나름대로의 예우.

호영은 다가오는 공격을 피하지 않았고,

죄인은 삐그덕거리는 몸을 쉼 없이 움직였다.

"자기 손으로 옛 동료를 죽여야만 한다니······."

싸움을 지켜보는 천이령이 입술을 씹었다. 마인 놈들은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다른 차원을 침략하는 걸로도 모자라 실험체로 취급하기까지.

이 모든 것은 마족의 정점.

천이령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그로부터 생긴 일이다.

천이령이 다시금 복수심을 되새기는 가운데.

풀썩.

호영과 주먹을 주고받던 죄인이 실이 끊긴 인형처럼 쓰러졌다. 호영은 조용히 자신의 옛 동료를 내려다보았다. 

스르르-.

오랜 시간 속박되어 있던 죄인의 영혼이 자유를 되찾았다. 붉은빛의 영혼이 랜턴을 향해 끌려들어 오기 시작했다. 주강혁이 나지막이 말했다.

"소울이터."

『 랜턴 '소울 이터'가 주강혁의 의지에 대답합니다. 』

붉은색의 영혼은 주강혁의 앞에서 몽글몽글하게 맺혔다. 그걸 보고 있던 사최헌이 품 안에서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걸 사용하면 영혼을 보존할 수 있을 거다."

영혼은 자그마한 유리병에 담겼다.

주강혁은 호영에게 다가가 유리병을 건네었다.

"······."

유리병을 응시하던 호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콰득-!

호영은 건네받은 유리병을 깨뜨렸다. 내부에 있던 영혼이 다시 소울 이터에게로 이끌려 간다. 호영은 영혼을 랜턴에게 몰아넣었다.

"잠깐······."

"영혼 탐식자에게 먹힌 영혼은 소멸되지 않는다. 새로운 인과가 되어 범 차원을 순환하지."

붉은빛의 영혼이 랜턴에게로 슥 빨려 들어갔다.

"죽은 동물의 시체가 자연의 일부가 되듯 말이다. 그러니······."

호영은 씩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서글픈 미소였다.

"무명, 네게 맡기겠다."

『 흡수한 영혼의 수준이 뛰어납니다. 』

『 적색(赤色)의 영혼을 흡수합니다. 』

영혼을 흡수한 소울 이터는 티켓 여러 장을 뱉어냈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 한 장 그리고······.

붉은색 스킬 습득권 한 장.

『 [ 신화+ ] 적혈(赤血) : 생명 인지 』

- 사용시 해당 스킬을 습득합니다.

- 생명체의 기운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티켓의 정보를 살피는 주강혁의 눈이 커졌다. 

'생명 인지······.' 

성능에 관해선 물을 것도 없다. 신화+급의 스킬이니까. 티켓을 찢자 붉은 기운이 내게로 스며들었다.

스으으—.

주강혁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불꽃이 일렁인다.

살아 숨쉬는 생명체의 기운이 그런 식으로 보였다. 

어둠에 잠겨 있으나 분명하게 느껴지고 보인다. 

루시퍼도 이런 느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건가?

샤아아. 

이윽고, 사최헌의 검이 빛을 발하며 어둠을 밝혔다.

마기의 보호막을 두른 두 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실체가 주강혁에게는 똑똑히 보였다. 

보호막의 내부에서 타오르는 생명의 기운이.

죽어.

주강혁이 자그맣게 입을 벌려 말했다. 

푸화아악—!

즉살은 보호막을 무시하고 발휘되었다. 보호막 내부의 죄인이 폭발하듯 터졌다. 지킬 대상을 잃어버린 보호막은 안개처럼 흩어졌다. 

끝이 아니다. 

주강혁의 손 끝에서 찢어진 티켓의 조각이 빛이 되어 흩어졌다.

푸화아악—!

다른 한 마리도 마찬가지의 결말을 맞는다.

당연했다.

이제는 보호막 너머의 본질을 꿰뚫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훌륭하군······."

그 광경을 지켜보던 호영이 양손을 털어냈다. 호영은 무감하게 말했다.

"복수의 대상을 하나 더 늘리겠다. 시스템 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가족을 죽인 것이 시스템이라면,

형제나 다름없던 친우를 죽인 것은 마인 원로다.

"원로 드리무어. 네 놈만큼은 반드시 죽이겠다."

호영의 두 눈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88화. 현세 침공(5)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죄인을 쓰러뜨린 것은 사도들이 아니라 헌터들로 구성된 우리쪽이었다. 

사실상 호영 혼자서 죄인을 격파한 셈이다. 죄인이 한때 호영의 동료였다는 사실에 숙연해지긴 했지만, 어쨌든 격파 되었다.

『 [ 신화+ ] 적혈(赤血) : 생명 인지 』

소울 이터에게 삼켜진 영혼은 스킬이 되어 내게 남았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죄인은 기본적으로 '제어종식'이란 고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이능.

순수한 무력을 사용하는 호영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사도들에겐 다르다. 

스치는 것만으로 기능이 정지 되니까. 

'아직 사도들의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나는 사도들의 상황을 살피고자 했다. 품 안에서 꺼낸 조화의 빵을 한 입 베어 물고서 속으로 말했다. 

'지금 상황은 어때. 각자 보고해줘.' 

그에 응답하듯 사도들이 사념을 보내왔다. 

[ ······이 죄인 놈 더럽게 성가십니다. ] 

루시퍼의 짜증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슬슬 보호막에 금이 같으니, 그 틈을 봐서 부탁드리겠습니다. ] 

눈을 지긋이 감았다 뜨자, 루시퍼의 시야가 공유된다. 

슈우우—! 곡선을 그리며 쏘아진 여섯 개의 마력 탄환이 마기 보호막을 두드렸다. 

루시퍼와 함께 있는 환생자 아이작의 솜씨였다. 콰아앙! 마기 보호막에서 푸른 꽃이 피어났다. 

[ 마법사. 그거다. 마력의 운용은 그렇게 하는 거라고. 재능은 그럭저럭이구만. ] 

이어서 루시퍼가 창을 들어 올렸다.

잠시 동안 기능 정지되어 있던 전용 무기가 정상으로 돌아온 모양. 

[ 마지막 일격을 꽂아 넣겠습니다. ] 

그럴 필요는 없다.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을 발휘합니다. 』 

푸화아악—!

[ 엇. ] 

루시퍼의 창 끝에서 흑마력이 쏘아지기 직전. 내 즉살이 죄인을 터트렸다. 시야 공유를 통해서도 똑똑히 보였다. 

마기 보호막 속에서 일렁 거리는 죄인의 기운이. 

[ 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새로운 기술을 익히신 거군요. ] 

대상을 포착하기만 한다면 즉살은 어김없이 발휘된다.

"이렇게 쉽게 잡을 수 있었던 거라면, 왜 개고생을······."

[ 인간, 주인님을 의심하지 말지어다. ] 

아이작이 허탈하게 손을 떨어뜨렸다. 

나는 다음 사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시야 공유가 되는 두번째 사도는 가브리엘이다. 

[ 주인, 그래도 같이 온 인간이 생각보다 쓸모 있음. ] 

가브리엘은 도망다니고 있었다. 

콰과과과—!

죄인의 보호막에서 솟아오른 손아귀가 던전의 벽면을 긁으며 집요하게 가브리엘을 쫓아온다.

그걸 헌터 한 명이 막아서고 있다. 

"······혹한의 정령이여. 그대의 냉기로 적의 발이라도 좀 붙들어라! 젠장, 젠장!"

갈색 피부의 여성이 소리를 지르며 죄인이 뒤를 쫓았다. 게이트 내부인 덕에 언어는 해석되어 들린다. 아니, 해석이 없었어도 왠지 알았을 것 같다. 

저 사람도 일곱 개의 별 중 하나였다.

출신지는 오세아니아의 어딘가랬던가.

이름은 모아. 

정령사였다. 

본래 정령들은 간곡히 부탁해야 할 정도로 까다롭다고 들었는데, 모아 헌터는 명령을 넘어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하늘빛의 정령들이 일사분란하게 죄인을 막아선다. 새하얀 서리가 마기의 보호막을 꽁꽁 얼렸다. 

"됐다!" 

[ 주인, 내가 성력을 모아서 쏠 게. 에네르기 ㅍ······. ] 

가브리엘이 쫙 펼친 양손을 붙혀서 성력을 쏘아내려는 찰나. 

푸화아악—! 

내 즉살이 먼저 발동했다. 

죄인은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 오, 나이스. ] 

"무, 무명 헌터가 한 번 더 도와준거죠? 다행이다······." 

모아 헌터가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어쨌든 가브리엘 쪽까지 빠르게 정리가 끝났다. 

청룡과 주작 쪽도 확인해보자. 

두 사도는 시야 공유가 없다. 따라서 특수한 캠코더로 영상을 전해 받고 있었다. 나는 단말기를 확인했다. 

[ 이쪽은 문제 없네. 마기 보호막은 벗겨두었고 죄인도 움직이지 못하게 불태우는 중일세. ]

활활 타오르는 죄인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남은 건 청룡인데.

유감스럽게도 영상을 통해서는 생명의 기운이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기운은 보이는데. 스킬의 한계인가.

그런데 예상만큼 고전하고 있진 않은 모양이었다. 

[ 저와 함께 들어온 중국의 하오란 헌터······. 꽤 강하네요. 제가 보조하고 있다곤 해도 무공의 수준이 높습니다. ]

청룡이 캠코더를 들어 올렸다. 

쩌엉—! 

중국의 의상인 창파오를 걸친 하오란 헌터의 주먹이 마기 보호막을 강타했다. 단단하던 보호막이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 조합이 꽤 좋아요.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제대로 가르침을 받은 무인입니다. 마음에 드네요. ] 

하오란 헌터의 스승이 유령이랬나. 

어느새 청룡의 여의주가 부채로 변해 있었다. 부채를 휘두르자 직선으로 쏘아져나간 도력이 일렁이는 보호막을 꿰뚫었다. 

화아악—! 

일순 마기 보호막이 걷혔다. 

그 순간을 놓칠 내가 아니었다. 즉살을 발휘했다. 

푸화악-! 

죄인은 그대로 폭사했다. 

[ 후, 감사합니다. ] 

이걸로 앞길을 가로막는 모든 죄인들이 사라졌다.

"······." 

다시 눈을 뜨자 사최헌과 천이령 헌터가 긴장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쪽은 공략에 성공한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답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랜턴 소울 이터를 향해 새하얀 영혼들이 모여들고 있었으므로. 

나는 사최헌을 향해 물었다. 

"게이트의 끝을 빠져나가면 원로를 만날 수 있는 건가?" 

"그래. 놈은 차원의 틈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다만······."

사최헌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조건 원로를 처치할 필욘 없다. 게이트를 닫는 것만으로도 현세 침공은 저지했다고 볼 수 있으니." 

"아니. 무조건 죽일 거다." 

불쑥 다가온 호영이 말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사최헌은 호영을 무시하며 덧붙였다.

* * * 

낡은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멎었다. 원로 드리무어는 자신의 새하얀 수염을 쓸어내렸다. 

"남은 죄인은 투입하지 말거라."

탐탁치 않은 눈빛이었다. 

"예, 그리 하겠습니다." 

긴 머리의 마인이 고개를 숙였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죄인들이 허무하게 쓰러졌다. 패배는 상정했으나, 대단한 정보를 얻어내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보호막까지 꿰뚫는가."

무명은 도중에 성장했다. 

그리 보는 게 맞았다. 

드리무어의 주름이 깊어졌다. 

소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성장의 근간은 랜턴으로부터 나온다. 영혼을 흡수하는 랜턴. 

'별빛이 깃든 아티팩트라.' 

드리무어는 깃펜을 손에 쥐었다. 책장으로부터 빈 책 한 권이 날아왔다. 드리무어는 그 위로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갔다. 

"무명의 행적은 철저하게 기록 될 거다. 변칙성이 있는 만큼 좋은 실험체가 되겠지."

일개 인간에게는 과분한 힘이다. 원로인 자신조차 근원을 모르는 종류의 기적이라니. 

드리무어는 이것을 기회라고 보았다. 

무명의 힘을 이해할 수만 있다면 마인들의 세계는 뒤바뀐다. 마계가 범차원의 지배자로서 우뚝 솟아오를 기회였다. 

'지배자들조차 가늠하지 못할 막강한 힘이 될 것이다.'

어쩌면 드리무어 자신이 직접 마인의 정점에 도전할 수 있으리라. 

드리무어의 목적은 현세 침공뿐만이 아니었다. 

'보면 볼수록 탐나는 과실이군.' 

본래 원로가 직접 현세를 침공하는 일은 꽤나 성가신 일이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시스템은 균형을 수호하고자 한다. 외세의 침략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다. 

마인들이 번거로운 음모와 계획을 세우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시스템상의 종말인 칠죄종, 묵시록의 기사를 이용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했다. 그렇지 않으면 강한 제재가 따라오므로. 

제어종식이란 이능이 아니었다면 드리무어 또한 직접 움직이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힘. 그건 태초의 마족만이 간직한 고유한 능력이었다. 

그런 드리무어조차도 현세에 발을 뻗으면 약화된다. 시스템의 제한은 대상을 가리지 않으므로. 그러니 드리무어는 기다리고자 했다. 

마계와 근접한 차원의 틈새에서. 

"무명(無命), 네 놈의 유일한 약점이 있다면······. 그건 네 놈이 무지하다는 것이다."

현세에 속한 인간에 불과한 무명. 

그는 원로의 강함도 마계의 무서움도 그 무엇 하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니. 

펜을 내려둔 드리무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명령했다. 

"이쯤하면 정보의 수집은 끝났다. 단죄의 사슬을 준비해라. 이제 사도들을 죽이고 무명을 손에 넣을 것이다."

* * *

나는 소울 이터의 보상을 회수했다. 

'보상이 장난 아니네.' 

이제 궁극기 초기화권이 두 장이 되었다.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은 이제 총 5장이 되었다. 

제일 중요한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무려 11장이 되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막대한 양의 경험치도 내게로 흘러들어 온다.

질 좋은 영혼을 흡수한만큼 그 보상도 막대하다. 

『 최대 레벨 상승 + 10 』

치직, 치지직—. 

시스템 창이 허공에서 스파크를 일으켰다. 

『 현재 레벨 : Lv. 245 / 250 』 

『 일일 상승 최대 레벨(20)에 도달하셨습니다. 』

아쉽게도 5가 부족해 SSS급에 오르진 못했다. 그러나 이 정도면 충분하다. 예상했던 것보다 상황이 좋다. 

원로를 상대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끝났다. 

"이 문을 지나면 차원의 틈새라는 거죠." 

천이령 헌터가 침을 꿀꺽 삼켰다.

게이트의 끝자락, 거기에는 커다란 문이 자리잡고 있었다. 

문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이 보랏빛을 띄고 있다. 

"마계어다. 연결된 문을 동시에 해제해야 열 수 있다." 

문을 슬쩍 살펴 본 호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마계어까지 알아요? 아저씨 은근 지능캐네요." 

"살다보면 배우게 된다. 그보다······. 어떻게 미리 알았던거지?"

호영의 눈썹이 올라갔다. 사최헌 헌터는 어깨를 으쓱였다. 

"마인들에 대해서 많이 조사했다." 

"호오. 굉장하군."

"······칭찬은 감사하게 받지." 

나는 사도들을 확인했다. 

[ 저희도 도착했습니다. 말씀 주시는대로 문을 열겠습니다. ] 

[ 나도 도착. ] 

루시퍼와 가브리엘 뿐만 아니라 다른 둘도 도착했다. 사최헌의 설명에 따르면 차원의 틈새로 향하는 문이다. 

나는 문에 달린 레버에 손을 올렸다. 

철컥—. 

다른 게이트에 있던 사도들도 동시에 레버를 당겼다. 문에 있던 문자들이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게이트의 문자열이 시스템에 의해 해석되어 나타난다. 

『 SSS급 게이트 공략이 완료 되었습니다. 』 

『 최대 기여자 '무명(無命)'에게 선택권이 주어집니다. 』 

『 1. 게이트 공략을 완료하고 게이트 종식 』 

『 2. 해당 통로를 개방하여 히든 게이트를 생성 』 

사최헌이 원로를 쓰러뜨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던 건 이 뜻이었다.

여기서 고를 수 있었다. 이대로 돌아갈지 아니면 나아가서 원로를 마주할지. 

내 선택은. 

당연히 후자다.

여기까지 와놓고 돌아간다는 선택지는 없다.

물론 충분한 대비도 되어 있다. 

사도들과 긴밀히 대화를 나눈 결과. 

지금의 내 능력이라면 충분히 원로를 쓰러뜨릴 수 있다는 결론이 났으므로. 

쿠구궁—. 

차원의 틈새로 향하는 돌문이 열렸다. 마계와 한없이 가까운 공간. 여기서부터는 나 또한 긴장을 늦출 수 없다. 

새하얀 빛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답답했던 동굴의 풍경이 한순간에 뒤바뀐다. 

나는 어느새 탁 트인 행성에 발을 딛고 있었다. 잿빛의 땅, 고개를 들자 별이 가득한 우주의 공간이 보인다. 

'여기가 차원의 틈새.' 

마치 달에 와 있는 것 같다. 

"주인님!" 

"오, 만났다." 

"모이니 안심이 되는구려." 

옆을 보니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사도들이 보였다. 녀석들은 곧장 내쪽으로 달려왔다. 

사최헌은 상황을 정리했다. 

"여기서부터 천이령은 빠진다. 다른 헌터들도 현세에서 대기다."

"왜요. 난 아직······." 

천이령이 거부하려던 찰나.

루시퍼가 나섰다. 

"꼬맹이, 넌 아직 나설 때가 아니다. 마인의 정점을 잡을 때가 되면 그땐 확실히 알려줄테니까. 죽으면 복수고 뭐고 없잖냐." 

"······알았어요." 

천이령은 마지못해 뒤돌았다. 

"역시 후방에서 기다리는 게 낫겠죠? 솔직히 아슬아슬했다고 해야 하나······." 

"사부님께서도 돌아가길 원하시니, 여기서 발을 빼겠습니다." 

모아 헌터와 하오란이 뒤쪽으로 물러났다. 그들의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생각보다 부상자가 많았다. 

죄인과의 전투가 쉽지 않았다는 거였다. 

"여긴 거의 마계나 다름 없지 않은가. 구미가 당기기는 하지만······. 목숨을 낭비하고 싶진 않으니." 

아이작도 상황을 파악하고 빠졌다. 

원로를 상대하러 나아가는 건 호영과 사최헌. 그리고 나와 사도들뿐이다. 

"어이, 사최헌. 안 돌아가도 되겠어? 나중에 살려달라고 빌어도 난 안 구해줄 거다." 

루시퍼가 능글 맞은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세상이 멸망해도 그럴 일은 없을 거다." 

사최헌도 준비한 아이템을 사용한 모양이다. 몸 위로 검푸른 기운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저 멀리 새하얀 건물 하나가 보인다. 요새처럼 생긴 건물에서 강력한 마기가 터져나오더니 이쪽을 향해 무언가가 떨어졌다. 

쿠웅-! 쿠웅-!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착지한 것은 날렵하게 생긴 골렘이었다. 총 여덟 기체. 

"마계의 기술로 만들어진 전투 기계다."

사최헌이 곧장 설명했다. 

루시퍼는 창을 들어 올렸다. 

"아직도 이런 걸로 주인님을 시험하려 든단 말이야?" 

"전투 기계의 등급은 신화급이다." 

"이 허접해 보이는 놈들이 나랑 동급이라고······?"

고오오—!

멀리 떨어진 요새의 위로 마기가 치솟았다. 지금까지 본 적 없는 막대한 마기가 한 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원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생명의 기운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나는 보랏빛의 티켓을 찢었다. 

『 궁극기의 쿨타임이 초기화 됩니다. 』

『 궁극기 극야도래(極夜到來)를 활성화 합니다. 』

도처에 깔린 죽음의 기운이 전투 기계를 파고 든다. 

"모습을 드러내라. 원로 드리무어." 

그 말과 동시에 기계들이 전부 파괴되었다. 콰과과과—. 무수한 파편이 되어 아무런 기능을 하지 못하는 돌덩이로 변한다. 

모든 사도가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시스템의 대리자가 해당 전투를 주시합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을 지켜봅니다. 』 

『 질서의 지배자가 당신을 바라봅니다. 』 

내 주변으로 별들이 내려 앉는 순간, 나는 정면을 응시했다. 

어째서 마인 놈들은 현세를 노리는 건가. 

반드시 묻겠다. 묻고 한마디 해주겠다.

이 땅에서 사라지라고.

그러고도 물러나지 않겠다면. 

나는 전력을 다해 네 놈을 쓰러뜨리겠다. 

이건 내 건물······. 

아니, 현세를 지키기 위한 싸움이므로.

89화. 현세 침공(6)

백색의 요새.

그 위로 솟아난 거대한 흑색의 구체. 검게 달아오른 천체. 그건 마치 태양과도 같았다. 

[ 왔는가, 무명. ]

그 속에서 짙은 음색이 흘러나왔다.

그저 말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콰아아—!

지면 위로 거센 폭풍이 일어난다. 옅은 진동이 땅 위로 울려 퍼졌다. 묵시록의 기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압감이 전신을 엄습했다.

"······윽."

자연스레 미간이 좁혀진다.

"괜찮으십니까? 금방 익숙해지실 겁니다. 주인님께서도 격을 소유하고 계시니까요."

청룡이 나를 부축했다.

사도들은 하나같이 멀쩡했다.

사도는 상위 존재다. 제한 때문에 격을 밖으로 꺼낼 순 없어도 내재한 격은 차원이 다를테니까.

"이 시기에 겪기엔······. 조금 뼈저리군."

사최헌의 부릅뜬 눈가에 핏발이 섰다. 내상을 입었는지 입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루시퍼가 비웃음을 머금었다.

"어이, 사최헌. 지금이라도 돌아가라니까. 겨우 원로의 격도 못 견디면서 뭘 어쩌겠다고."

"원로는 마계에서 살아 있는 신으로 불린다. 현신(現神)급이니 상당한 지위다."

"그래서 뭐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거냐?"

"지금 현세에서 이걸 견딜 수 있는 인물은 몇 없다. 무명, 호영 그리고 나뿐이지."

사최헌은 자랑스레 말하며 입가의 피를 닦아냈다. 루시퍼는 피식 웃으며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 알아서 해라. 난 주인님 말고는 지킬 생각 없으니까."

사최헌과 달리 호영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그는 무감히 멀리 떨어진 흑색의 태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끌끌끌.

기이한 웃음 소리가 지면을 타고 흐른다. 원로 드리무어는 웃고 있었다.

[ 무명, 네 무지함에 실소가 지어지는구나. 차원의 틈새가 어떤 곳인지는 알고 발을 들인 것이냐? ]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진 않았다.

드리무어는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 현세와는 한층 멀고 마계와는 한층 가깝다. 네 놈 인간들을 보호해줄 시스템이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

흑색의 태양에서 짙은 마기가 흘러나왔다.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린 마기가 지면을 적셨다.

쿠구구구—.

지면 위로 커다란 금이 그어졌다. 이윽고 금을 따라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땅 위로 붉은 용암이 차오른다.

놈의 마기가 지형 자체를 뒤바꾸고 있었다.

[ 혹여 나를 사냥할 생각으로 여기에 왔느냐? 그리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나를 게이트의 마물과 동일시 했다면 그것은 큰 실수다. ] 

도발하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흑색의 태양을 똑바로 바라보며 답했다. 

"그런 것치고는 잘도 숨어 있네."

화악-. 불온한 기류가 나를 덮쳐왔다.

왠지 모를 분노가 느껴진다.

"오, 주인. 나이스 도발."

가브리엘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 정도야 뭐. 애초에 팩트잖아.

당당하면 마기에서 나와서 덤볐겠지. 

[ ······마계의 역사가 얼마나 되었는지 아느냐. ]

드리무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 자그마치 1억 년에 달한다. 그에 비하면 인류의 역사는 한없이 작고 초라하지. 유인원이나 다름없던 역사를 전부 합쳐도 400만 년이 되지 못한다. ]

갈라진 땅이 허공으로 부유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발 딛고 있던 땅이 불안정해진다.

근처의 땅에서 불길이 솟아오른다.

세계의 종말을 떠올리게 하는 광경.

[ 나는 마계의 시작부터 존재한 태초의 존재. 그러니 우스울 따름이다. 백 년 남짓한 수명을 가진 인간의 몸으로 내게 덤벼든다는 것이. ]

노인의 음성이 행성 전체에 울려 퍼졌다.

[ 길게 말하지 않겠다. 그 차이를 깨닫고 후회해라. 무명. ]

의미심장한 목소리였으나,

사도들은 노골적으로 야유를 보냈다.

"1억 년? 고작 1억 년? 지금 누구 앞에서 주름잡냐. 저거 진짜 웃긴 놈이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레전드."

"새파랗게 어린 하위 존재가 재밌는 말을 하는구만."

"재밌네요. 신선합니다. 누가 보면 마계만 제대로 된 문명인 줄 알겠네요."

웃겨 죽겠다는 반응이었다. 

······너흰 대체 몇 살이길래.

사도들이 무기를 쥐었다. 콰앙-! 녀석들은 허공에 떠오른 지면을 밟고 날아올랐다.

원로가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이쪽도 대항할 차례다. 사최헌과 호영도 앞으로 달려 나갔다.

콰과과과과—!

흑색의 태양이 수백 개의 흑염을 방출해냈다. 까만 불덩어리들이 가뜩이나 엉망진창인 지면을 두드렸다. 자그마한 메테오가 끝없이 쏟아진다. 

"시스템을 마비 시키는 불꽃이다. 닿으면 안 된다!"

사최헌이 소리쳤다.

"큭, 또 귀찮은 짓을."

"아주 성가셔."

사도들은 불평하면서도 각자의 공격으로 흑염을 격추 시켰다.

나도 치솟는 불길과 폭발을 뚫고서 달려 나갔다.

드리무어의 긴 연설을 들어줬으니, 이제는 내가 물을 차례였다.

"드리무어. 한 가지 묻겠다. 어째서 현세를 침공하려 하는 거냐."

* * *

콰앙—!

땅 덩어리가 불덩어리에 잠식되어 흩어진다. 나는 새로운 발판을 찾아 도약했다.

에인헤랴르로 강화된 신체 덕에 생각하는 그대로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엄청나게 많이도 떨어지네. 이건 위험···!' 

물론 흑염 덩어리가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콰앙-! 내 쪽으로 날아오는 흑염을 루시퍼가 허공에서 간단히 격추 시켰다.

"주인님, 제가 엄호하겠습니다."

"드리무어를 둘러싼 마기를 벗겨내야 한다. 가능하겠나?"

공간검으로 흑염을 베어낸 사최헌이 소리쳤다.

"나는 마기 보호막을 뚫어내겠다. 그 뒤는 알아서 해라."

공중의 땅을 밟으며 겅중겅중 뛰어나간 호영이 그리 말했다.

호영 혼자서 그게 되려나? 실패해도 사도들의 공격을 한 점에 집중하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두가 일제히 나아간다.

쏟아지는 불길을 피하며, 무너져 내리는 대지를 밟으며 흑색 태양을 향해 전진한다. 

[ 어째서 침략하냐고 물었는가. 특별히 알려주겠다. ]

드리무어의 차분하게 대답했다. 

[ 마족이야말로 우월한 종족이기 때문이다. 모든 차원을 손에 넣고 다스릴 권리가 있는 유일한 종족이기도 하지. ]

뭘 당연한 걸 묻고 있느냐는 듯한 어투.

[ 가져야 할 것을 가질 뿐이다. 원망하려거든 열등한 종족으로 태어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라. ]

그것이 원로 드리무어의 답이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칠죄종이나 묵시록의 기사 같은 놈들을 소환해왔다는 거냐."

애초에 제대로 된 이유 따위를 기대하진 않았지만. 

너무한 답이었다. 

드리무어는 한가지 설명을 덧붙였다.

[ 그리 슬퍼할 필요 없다. 현세는 마계의 에너지원이 되어 새로운 인과를 부여하게 될 테니. ]

에너지원? 인과? 

"주인, 마계의 목적은 에너지의 보급에 있네."

콰아앙! 붉은 화염이 수십 개의 흑염을 불태웠다. 주작의 화염이었다. 주작은 그대로 내 옆에 착지했다. 

"쉽게 비유하자면, 마계는 에너지 고갈 상태일세. 차원을 유지하는데 드는 에너지를 다른 차원으로부터 착취하는 것이지."

정보 제한이 풀린 모양.

한마디로 다른 차원을 약탈해서 살아간다는 거 아닌가. 

[ 사도여, 그건 부차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

콰아앙—! 거대한 흑염이 지면을 강타했다. 땅 위로 흑색의 불꽃이 파도처럼 다가온다.

서걱! 촤아악!

사최헌의 검이 공간을 갈랐다. 허공에 일직선으로 푸른 선이 그어지며 눈앞의 흑염이 홍해처럼 갈라졌다.

그 사이를 달려가며 물었다.

"현세를 포기할 생각은?"

[ 하—! 무명!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

드리무어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그런 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다.

답은 확인했으니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다. 나는 도력으로 날아오른 청룡을 향해 말했다.

"청룡, 주작. 궁극기다."

* * *

사신수(四神獸).

주작, 청룡, 백호, 현무.

이들은 동서남북 사방을 다스리는 계절의 신이다. 동양에서 기원한 신적인 존재지만 그 기원은 불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만큼은 인류의 역사에 확실하게 각인 되어 있었다.

그 시작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국 고대국가의 무덤에 백호와 청룡이 그려져 있을 정도. 더욱이 사신수의 모습이 그려진 사신도는 한국, 중국,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발견된다.

성좌의 힘이 크면 클수록 그 힘은 강대해지고 모든 차원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니 사신수의 격 또한 높을 수밖에 없었다. 

동방의 청룡(靑龍).

『 사도 '청룡'이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그가 다스리는 계절은 봄이다.

『 춘하추동(春夏秋冬) : 봄 』

샤아아—.

안개처럼 펼쳐진 청룡의 도력이 닿은 땅 위로 푸릇푸릇한 싹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메말라 있던 잿빛의 땅이 푸르른 초목으로 뒤덮인다. 형형색색의 꽃이 피어나고, 나무가 자라난다.

『 해당 영역 내에 존재하는 아군의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

푸른 기운이 신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사도들, 호영, 사최헌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그 대상이다. 

모든 능력치 50% 증가.

간단하지만 강력한 능력이었다.

콰아아—!

루시퍼의 창 끝에서 쏘아진 마도광선이 허공을 찢으며 나아갔다. 그 크기도 두께도 차원이 달라졌다.

"이건 꽤······. 의미가 있군."

사최헌의 움직임도 크게 달라졌다. 서걱-! 서걱-! 사최헌은 거침없이 허공의 흑염을 베어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남쪽의 주작(朱雀).

그녀가 다스리는 계절은 여름.

『 춘하추동(春夏秋冬) : 여름 』

고오오—.

주작의 스태프 위로 모여든 불꽃이 점차 몸을 불려간다. 자그마했던 구체가 순식간에 거대해졌다.

한여름의 타는 듯한 태양의 그녀의 머리 위에 있었다.

『 태양이 유지되는 동안, 아군의 체력이 계속해서 채워집니다. 』

『 적의 능력치를 50% 감소시킵니다. 』

우리에겐 따뜻한 햇살이다. 청룡이 만들어낸 초목이 더욱 싱그럽게 피어난다.

그러나 적에게는 작열하는 뙤약볕이 되어 쏟아진다.

미친듯이 쏟아지던 흑염 덩어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흑염 자체가 가늘어지더니 결국 크기도 절반이 되었다.

[ ······재밌군. ]

언제까지 재밌을지 한번 보자.

"루시퍼, 가브리엘."

나는 둘의 이름을 불렀다. 그에 응답하듯 두 사도가 무기를 들어 올렸다.

"보여드리겠습니다."

"맡겨만 줘."

궁극기는 총 네 개다. 

『 흑과 백의 사도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백광(白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 흑암(黑暗) : 종말의 밤 』

『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이로써 모든 사도의 궁극기가 발휘되었다.

잿빛의 땅에 깃들어 있던 음습한 마기가 일시에 걷어졌다.

[ 더욱더 확신이 드는구나. 한낱 인간이 어찌 그리 강대한 힘을 소유한단 말인가. 네 놈을 붙잡아 확인하고 말겠다. ]

드리무어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목소리에 섞인 원로의 격은 더 이상 아무런 위력도 가지지 못했다.

퍼센트로 깎아내리는 레벨과 능력치. 

원로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 많은 힘을 잃게 된다.

터억. 

모두가 어느덧 흑색의 구체를 앞두게 되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원로의 공격 방식이 바뀌었다. 

콰과과과—!

구체에서 뻗어 나온 검은 촉수가 다시금 땅을 갈라놓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이쪽도 만만치 않다.

청룡의 도력이 촉수를 쳐내고 주작의 화염이 그대로 촉수를 불사른다. 사도들이 무기를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막대한 양의 마기가 떨어져나갔다. 

"닿지 않으면 그만이야."

창에 두터운 성력을 두른 가브리엘 또한 가볍게 촉수를 끊어냈다. 기세가 오른 사도들이 점차 드리무어를 압박해 나간다. 제한 해제까지 받았으니 당연하다.

"원로여, 우리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네."

주작의 홍염이 레이저가 되어 쏘아졌다. 푸화악-! 마기의 구체가 크게 깎여 나갔다.

콰앙-! 콰과과광!

루시퍼와 청룡도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거대했던 흑색의 구체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 그래, 훌륭하구나. 아주 훌륭해. ]

드리무어는 이 상황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았다. 

[ 마계가 아닌 차원의 틈새라고는 하나, 나를 여기까지 몰아붙이다니. 인정하겠다. ]

"오, 뻔한 대사."

가브리엘이 코웃음을 쳤다.

[ 그러나—! ]

이내, 드리무어의 격앙된 외침이 터져나왔다.

[ 시스템 아래에서 기적을 빌리고 있을 뿐인 네 놈들은 여기까지다! ]

『 태초의 마족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합니다. 』

『 이능(異能) : 제어종식(制御終熄) 』

파직, 파지직—!

검은 스파크와 노이즈가 공간 전체를 뒤덮었다.

마침내 원로 드리무어가 자신의 필살기를 꺼내들었다. 일대의 시스템이 빠르게 마비된다. 우려하던 결과였다. 

스킬이 발현되지 않는다.

동시에 스킬에 의해 소환되었던 사도들이 굳어졌다.

"크윽······."

"모, 몸이 안 움직여."

"윽."

사도들이 풀썩 풀썩 자리에 쓰러져간다. 공중을 날던 루시퍼도 풀숲에 처박혔다.

사기 소리가 절로 나오는 능력이다.

다만, 발동되었던 궁극기의 효과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다. 사도들의 궁극기는 스킬이 아닌 현상 그 자체이므로.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차례다. 

서걱—!

사최헌이 촉수를 자르며 앞으로 뛰쳐나왔다. 

"제어종식은 강력한 힘이다. 하지만 그 리스크도 막대하지. 드리무어 네 놈도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안 그런가?"

[ ······. ]

드리무어는 답하지 않았다.

흑색의 구체 속에서 조용히 마기의 촉수를 뽑아낼 뿐.

콰아앙—!

내 옆에서 무언가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호영이었다. 사도들의 궁극기 덕분에 한껏 강화된 그의 맨발이 흑색의 구체에 닿았다.

발 끝에서 일어난 충격파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주변을 찢어발기는 듯한 폭발이 일어났다. 막대한 폭풍이 타격 지점에서 퍼져나갔다. 

아주 잠깐의 힘겨루기.

[ 바뀔 것은 없다. 인간의 힘으로 뚫을 수 있을만큼 얕지 않다. ] 

"아니, 뚫는다." 

그러나 이내 호영이 만들어낸 충격이 흑색의 마기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원로를 두텁게 지키고 있던 마기가 벗겨졌다.

[ 뭣······?! ]

그 중심부에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이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의 붉은 눈이 나를 향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그저 황망한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놈은 이어질 즉살을 두려워하고 있다. 

허나, 즉살은 스킬.

제어 종식이 펼쳐졌으니 즉살을 발휘할 순 없다. 아쉽게도. 

그 사실을 눈치챈 드리무어가 안도하며 소리쳤다.

[ 스킬이 없다면 죽이지 못하는 건가! ]

원로의 오른팔 위로 마기가 모여들더니 큼지막한 손을 형성했다. 푸욱—! 마수(魔手)의 손톱이 호영을 꿰뚫었다. 보이지도 않는 빠르기였다. 

붉은 선혈이 비산했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드리무어가 웃음을 터트렸다.

[ 검을 사용하는 것은 이미 보았다. 변수가 있다면 그게 유일하겠지. ]

드리무어 주변으로 마기의 창이 떠오른다. 공간을 완전히 일그러뜨릴 정도로 응축된 창.

나는 검집에 손을 올리고서 걸음을 떼었다.

[ 끝이다! ]

드리무어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놈에게 남은 유일한 변수는 내가 휘두르는 칼일테니까. 

하지만······.

내 검집에는 검이 없다.

무명검은 내 손에 있지 않다. 

드리무어가 창을 쏘아내려는 바로 그때였다.

[ ——! ]

공간을 가르고 도약한 사최헌이 드리무어의 뒤편에서 나타났다. 드리무어의 반응은 빨랐다.

푸우욱-!

드리무어의 손끝에서 가시처럼 돋아나온 마기가 사최헌을 꿰뚫었다. 사최헌의 입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 웃기지도 않는 기습이구나! ]

드리무어가 조소했다.

사최헌이 휘두른 검은 드리무어의 살갗을 조금 스쳤을 뿐이었다. 드리무어를 꿰뚫기엔 턱없이 모자랐다. 그럼에도 사최헌은 분명하게 말했다. 

"닿았다."

닿았다고.

[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다는······. ]

드리무어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저 조금 닿았을 뿐이다.

피부가 살짝 벗겨진 정도의 미미한 상처.

회복력이 뛰어난 마인에겐 아무것도 아닌 수준의 상처.

이내 드리무어의 시선이 사최헌이 쥔 검으로 향했다.

거기엔 소름끼치도록 새하얀 도신이 번뜩이고 있었다.

[ ······. ]

무명검(無命劍).

사최헌이 들고 있는 검은 무명검이었다. 

오로지 무명검만이 죽음의 기운을 받아들이며 그 검에 닿은 적은 대상이 누구든지 죽음을 맞이한다.

누가 휘두르냐는 처음부터 중요하지 않았다. 

무명검이 닿았다. 

그 사실만이 전부였다. 

[ 어, 어째서—. ]

드리무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허공에 맺혔던 마기의 창이 재로 변해 흩날린다. 주변을 가득 메우고 있던 지독한 마기도, 백색의 요새도 회색빛의 재가 되어 허공으로 점차 흩어진다.

[ 원로인 내가 겨우······. 이런 식으로······. 끝난단 말인가······? ]

그것이 드리무어의 마지막 말이었다.

푸화아악—!

『 SSS급 게이트의 히든 보스가 처치되었습니다. 』

『 제어종식(制御終熄)의 효과가 사라집니다. 』

원로 드리무어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겼나······." 

드리무어가 가로막고 있던 자리, 우주 공간의 저편으로 저 멀리 푸른 행성 하나가 보인다. 지구와 몹시 닮은 행성.

이것으로 끝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인들의 야욕은 끝이 없어 보였으니까.

그러나······.

우선 한 발자국은 내디뎠다.

그리 봐도 되겠지.

팅-!

『 마족 원로 살해 - 1 / 1 』

『 1차 해방(解放)의 조건이 달성되었습니다. 』

제어종식이 끝나며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퀘스트의 달성. 이어지는 건 보상의 시간이었다.

『 무명검에 담긴 기억의 편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

90화. 종말의 괴수(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