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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 90-95

90화. 종말의 괴수(1)

시야가 하얗게 물들었다.

원로에게 다친 사최헌과 호영을 미처 살필 새도 없었다.

이어서 나타난 것은······.

기억이었다.

'여기는······?'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이 갈라져 있었다. 거대한 행성이 성큼 다가와 있다. 그마저도 파괴되어 하늘에 흩어져 있다.

흩어진 파편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고 있다.

고오오—.

반대편의 하늘 위로 보이는 거대한 블랙홀을 향해서 행성이 삼켜지고 있었다. 그 웅장함에 절로 숨이 삼켜질 정도. 

'대체 어디지.'

그러한 하늘 아래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반쯤 무너진 건물의 잔해. 한때, 찬란한 문명을 이뤘던 도시는 완전히 파괴 되어 황폐해져 있었다.

"여기까지인가······."

기억 속의 나는 망연히 중얼거렸다. 옆구리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메꿔지지 않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멸망한 세계.

사도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내 앞에는 잔해에 몸을 기댄 남자 한 명이 있었을 따름이다.

사최헌.

그가 있었다.

"······이 세계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사최헌은 착잡한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그의 상태도 좋지 않았다. 한쪽 팔목은 잘려 있었고, 복부는 무언가에 관통 되어 있었다.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진다.

죽음이 임박한 것처럼 보였다.

"다시 시작한다면······. 다를지도 모른다."

사최헌은 핏물 섞인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다시 시작한다니.'

이해가 안가는 말이다.

아니, 애초에 이 기억부터가 이상하다. 

눈 앞의 두 사람은 틀림없는 나와 사최헌이지만, 나는 한 번도 이 상황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사도들의 말대로였다.

있었던 적 없는 기억이 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설마 미래는 아니겠지.'

기억 속의 세계는 완전히 끝장난 것처럼 보였다.

미친 적들이 자꾸 나타나기는 해도 이 정도로 박살 날 것 같지는 않은데. 

"······이번이 몇 번째라고 했지?"

"7번째다."

또다른 나의 물음에 사최헌은 힘겹게 대답했다. 그는 떨리는 숨과 함께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마. 더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도할 때마다 더 나아지고 있다."

"그런가."

기억 속의 나는 착잡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도들이 조금만 협력해줬다면 좋았을 텐데······."

"강혁······. 그놈들은 인류의 편이 아니다. 상위 존재란 놈들은, 결코 인류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그래도 나는 시도할 거다."

사최헌은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는 그런 놈이지······."

"그러니까 날 조금만 더 도와줘라. 다음에는 조금 더 강해질 수 있게. 이 능력을 키울 수 있도록."

기억 속의 나는 검집에서 검 한자루를 꺼냈다.

당연히 무명검이라고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무명검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였다.

새까만 검이었다.

"다음번에는 꼭 즉살(卽殺)의 끝을 보고 싶거든."

"욕심도 많군······. 약점을 찌르면 죽는다. 그 정도면 충분한 거 아닌가?"

'······.'

나는 미간을 좁혔다. 

약점을 찌르면 죽는다니.

즉살치고는 다소 약하다.

기억 속의 나는 씩 웃었다.

"원래 약점을 찔리면 죽는 게 당연한데 뭘. 아직 멀었지."

"뭐, 그것도 그런가."

사최헌도 미소 지었다. 그의 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끝을 직감한 사최헌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꼭······."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들고 있었다.

사최헌의 고개가 꺾이기 전, 기억 속의 나는 나지막이 말했다.

"부디 다음 세계가 네 회귀의 종착역이 되길."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진다. 세계가 암전되었다.

기억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상당히 짧다.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기억 속의 나는 분명히 말했다.

회귀(回貴)라고.

'설마.'

눈치가 있으면 알 수밖에 없다.

사최헌은 회귀자였던 거다. 

그제야 비어있던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 내게는 예언과 비슷한 능력이 있다.

사최헌은 내게 그리 말했었다. 그 비슷한 능력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건 회귀였다.

'따지고보면 있어도 이상하진 않잖아.'

일곱 개의 별.

거기에 환생자도 있고, 귀환자도 있는데 회귀 자라고 없겠는가. 회귀자 사최헌.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회귀 전의 세계에선 사최헌과 내가 아는 사이였단 건가?

기억 속의 장면으로 봤을 땐 거의 소울 메이트가 따로 없었다.

최후를 함께하는 전우 그 자체. 

'근데 그런 것치고는 딱히 살갑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사최헌의 속을 읽을 수 없으니 모르는 거다만.

어려울 건 딱히 없다. 나중에 적당히 물어보면 될지도.

다만, 무명검이 왜 이 기억을 보여준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팅-!

어두운 시야 속에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무명검에 담긴 첫 번째 기억을 확인하셨습니다. 』

『 1차 해방(解防)에 성공하셨습니다. 』

이어서 눈앞으로 고유 스킬의 창이 떠올랐다.

『 고유 스킬 : [EX] 즉살(卽殺) 』

- 지정된 생명체 하나를 살해합니다.

치직, 치지직—!

간결한 문장의 단어 하나가 노이즈를 일으키며 변화하기 시작했다.

『 고유 스킬 : [EX] 즉살(卽殺) 』

- 지정된 대상 하나를 살해합니다.

'생명체'라는 단어가 '대상'으로 바뀌었다.

그게 끝이었다.

'진짜 끝?'

시야가 점차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물론 아직 모른다.

뭐가 달라졌을지는 능력을 점검 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뭔가가 달라졌겠지.'

속단하기에 이르다. 

『 2차 해방(解放)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지배자의 전령 처치 - 0 / 1 』

새롭게 떠오르는 메시지와 함께 본래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 * *

기억은 꽤 오래 재생되었지만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원로와의 전투가 끝난 직후 그대로였다.

"크윽······."

사최헌은 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명검을 손에 쥔 채로다. 기억 속의 사최헌이 괜히 겹쳐 보인다. 

"이겼나."

부상은 호영 쪽이 더 심각했다. 가슴 한복판에 구멍이 세 개가 뻥 뚫려 있었다. 원로의 마기 손톱에 당해 생긴 상처였다.

그러나 아픈 내색 하나 없이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인간들이여, 모두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게나. 가만히 있으면 내 태양이 그대들을 치료할 걸세."

하늘 위엔 주작의 궁극기로 만들어낸 따스한 태양 떠 있었다. 햇빛이 두 사람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피가 멎고 상처가 빠르게 아물어 간다. 

생명에 지장은 없는 듯하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기가 막힌 전략이었네요."

루시퍼가 의기양양하게 걸어왔다.

조금 전까지 원로의 제어종식을 맞고 바닥에 쓰러져 있었으면서.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해준 덕분에 이겼다.

왠지 나만 멀쩡하니까 괜히 머쓱하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선 사최헌에게로 향했다.

"······괜찮나?"

뭐라고 할까.

기억을 봐서인지 내적 친밀감이 조금 생겼다.

사최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괜찮다."

상처가 주작의 궁극기 덕분에 빠르게 치유되고 있었다.

"그보다 이 시기에 원로를 쓰러뜨렸다는 건······. 네 생각보다 의미가 클 거다."

사최헌의 모호한 말이 이제는 이해가 간다.

지금까지 세계를 구하려고 몇 번이고 회귀를 반복한 거겠지.

다만, 사최헌은 직접 회귀를 언급한 적은 없었다. 

'······회귀를 숨길 이유가 있는 건가?'

사최헌이 회귀자라는 건 사도들도 모르는 모양이었고. 뭔가 사정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로 드리무어가 쓰러진 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흑색의 큐브 하나가 땅 위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 [ 종말 ] 태초의 원념 : 제어종식 』

1회에 한해 시스템을 마비 시킬 수 있습니다.

- 소비 아이템 (사용시 드리무어의 영혼이 소비됩니다.)

큐브의 구멍을 통해 새하얀 영혼이 보인다. 나중에 요긴하게 쓸 법한 효과다. 

보상은 그게 전부였다.

게이트는 원래 정해진 보상이 있지 않으니. 이걸로 만족해야겠지.

"이제 어쩔 셈이지?"

얼추 회복을 마친 사최헌이 내게 무명검을 건네주었다. 스릉-. 나는 무명검을 받아 검집에 넣었다.

어쩔 거냐니.

딱히 별생각은 없다.

쳐들어오려고 하니 막았을 뿐이고.

오히려 내가 묻고 싶다.

"원로가 죽으면 마계에선 어떻게 반응하지?"

내 물음에 사최헌이 잠시 멈칫했다.

기왕 회귀자라는 걸 알았으니, 팍팍 질문을 던져야지.

"현시점 인류는 1페이즈다.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드리무어가 죽었으니 원로급이 직접 움직이긴 힘들테지. 다만······."

사최헌은 고민하다 답을 내놓았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현세를 부수려 할 거다."

이 놈의 마계.

아예 쳐들어가서 박살을 내놓을 수도 없고.

······아무리 강해졌어도 그건 무리겠지.

돌아가서 대책을 생각해 보는 수밖에 없다.

사도들에게 내가 본 걸 알려주기도 해야 하고.

"그러면 돌아갈까."

나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주인님, 원로급도 처리 했으니 조만간 마계를 정복하는 건 어떨까요?"

"우리가 최소한 종말급은 되어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종말급이 되면 됨."

"오, 소울 이터에 별이 깃들었네요. 이제 봤습니다. 고품질의 영혼만 구할 수 있다면······."

흙먼지를 털어낸 사도들이 내 뒤를 따랐다.

* * *

게이트의 끝, 차원의 틈과 이어진 문 앞.

"돌아오려면 멀었겠죠?"

모아 헌터가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이작은 진지하게 답변했다.

"원로는 마계에서 거의 신에 가까운 존재일세. 마계의 역사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지. 역사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길지. 무명이 강하다곤 하나, 현세는 이제 걸음마 단계의 문명이니 어찌 될지는···."

아이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과거 대마법사였던 시절, 아이작은 수많은 차원을 내다보았다. 마계에게 저항하고도 살아남은 종족은······. 사실상 없었다.

하물며 원로급이 직접 나섰으니 그 힘은 상상을 초월하리라. 아이작은 신중하게 말하며 바닥에 불을 피웠다.

"전투는 길어질 걸세. 못해도 일주일은 걸리겠지. 길면 한 달 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는 게 내 판단이네."

아예 인벤토리에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우리의 역할도 중요하네. 게이트가 붕괴하고, 마계의 적들이 넘어오면 빨리 현세에 알려야 하니."

그때, 지금껏 조용히 있던 천이령 헌터가 입을 열었다. 고심 끝에 뱉은 질문이었다. 

"얼마나 강해져야 전투에 합류할 수 있을까요."

"원로와의 전투 말인가? 글쎄······."

아이작이 미간을 좁혔다.

대마법사인 자신조차 쉬이 장담할 수 없었다. 최소한 9서클 반신의 영역에는 올라야 가능하리라.

그래도 인류는 특별한 위치에 있다.

시스템의 플레이어라는 것은, 다른 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이 빠른 성장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물을 사냥하기만 해도 레벨이 오른다.

보상을 얻기만 해도 강한 스킬을 얻는다.

돈으로 아이템을 사기만해도 강해진다.

깨달음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

노력이 곧 성과로 이어진다.

다른 세계에선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소한 SSS급의 다음 단계는 되어야 한다네."

아이작은 어림잡아 말했다. 레벨을 올리는 것뿐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넘어서기 위해선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그 답에 천이령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참 멀다.

SSS급은 250레벨.

그 다음 단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한참 멀었던 거다.

그럼에도 도달하겠다. 반드시 도달하고 말겠다.

아니, 마인의 정점과 마주하려면 그걸론 부족하다.

그 너머에 반드시 다다르겠다. 

천이령은 그리 다짐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다들 쉬고 있게나. 말했잖나. 오래 걸릴 걸세. 내 대마법사로서의 커리어를 걸고······."

아이작이 헌터들에게 재차 말하고 있던 그때였다.

쿠구구구······.

별안간 돌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모든 헌터가 긴장하며 무기를 들어 올렸다.

아이작도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스태프를 쥐었다.

"늦게 온다고 하지 않았어요?"

"······뭔가가 잘못되었을 수도 있네. 가령 도망쳐 왔다거나."

그 말에 헌터들의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돌문 내부의 빛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샤아아—.

다행히 무명 일행이었다.

아이작이 빠르게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건가?"

"이겼다."

호영이 무감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자리에 있던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버, 벌써?"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지?"

"1시간도 안 됐는데······."

"아이작, 오래 걸린다면서요?"

"대마법사의 커리어를 건다더니. 별 거 아니었네."

"아, 아무리 그래도······.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아이작이 당황하며 물었다.

"주인님께선 다 방법이 있다니까."

사도 루시퍼가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헌터들을 지나쳤다. 아이작의 시선이 사최헌에게로 향했다. 설명 좀 해달라는 표정이었다.

사최헌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것을 재차 확인했을 따름이었다.

무명이 왜 이렇게 강한지.

어째서 원로급을 단번에 살해할 수 있는지.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 건지.

'정말 모르겠군.'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사최헌의 회귀 속에 무명(無命)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 * *

시스템 메시지가 이어졌다. 

『 다수의 성좌가 원로의 최후에 깊은 감격을 받습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무명을 후원하고자 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결과에 흡족해 합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코인을 후원합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무명(無命)과 계약을 맺고 싶어 합니다. 』

『 4 영역의 지배자들이 무명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집니다. 』

『 질서의 지배자가 부드럽게 미소 짓습니다. 』

『 혼돈의 지배자가 불만을 표합니다. 』

『 심연의 지배자가 폭소를 터트립니다. 』

마계의 원로가 죽었다.

이 사실은 마계뿐만 아니라 전차원을 뒤흔드는 소식이었다.

원로의 죽음에 마계는 격분했으며,

상위 존재들은 새로운 영웅의 출현에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명(無命)이라는 이레귤러가 불러일으킨 격풍이, 현세를 향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러한 태풍의 중심.

『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

『 종말의 괴수 베헤모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

"······아직 두 번째 시련이 진행 중인 거 아니었나."

게이트 바깥으로 나온 주강혁이 사도를 향해 물었다.

쉴 틈도 없이 다음 시련이 시작되고 있었다.

91화. 종말의 괴수(2)

원로 드리무어의 현세 침공을 막아내는 사이.

세 번째 시련이 시작되었다.

"대리자는 어디에 있냐? 이거 안 되겠네. 따지든가 해야지."

루시퍼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사최헌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북극에 가면 불러낼 수 있다. 원한다면 위치를 알려주지."

"좋아, 당장 따지러 간다."

"잠깐만 기다려."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루시퍼를 멈춰 세운 건 무명이었다. 

"시련이 겹치는 게 원래 가능한 일인가?"

무명은 사최헌을 향해 물었다. 답을 할만한 사도들도 많은데, 사최헌을 콕 짚어서 말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련을 이미 돌파했다고 결론 내린 거다. 묵시록의 기사가 네 손에 있으니."

사최헌은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페이즈가 진행될수록 여러 시련이 겹쳐서 나타나곤 했으니까.

다만, 1페이즈에 시련이 겹치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무명에 의해 예정된 미래가 뒤죽박죽이 되어간다는 뜻이었다. 회귀자인 사최헌에게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니었다. 점점 더 미래를 예상할 수 없게 되니. 

'결국 끝까지 가보지 않는 한, 이 상황이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는 건가.'

우우웅—.

그때, 공간이 일그러지며 공간이동 능력자 유지훈이 나타났다.

"예정보다 엄청나게 일찍 끝나셨네요. 지, 진짜로 쓰러뜨린 건가요? 그 마계의 원로인가 뭔가를."

"그래."

"설마 생각보다 약했다거나."

"아니, 무명이 비정상적으로 강했지."

"여, 역시."

사최헌은 그런 유지훈을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다른 국가의 헌터들은 각자의 게이트를 통해 돌아갔다. 무명 일행을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건 사최헌, 호영, 천이령이었다.

"마무리가 된 것 같으니 가겠다."

호영은 산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로가 죽었으니, 조만간 새로운 놈들이 나타날 거다. 그때까지 힘을 기르고 있으마."

콰아앙—!

큰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흙먼지가 일행을 뒤덮었다. 루시퍼가 혀를 찼다.

"저 인간 놈 진짜. 저 놈도 언젠가 손 봐줘야 되는데."

"주인님, 흙먼지를 털어드리겠습니다."

콜록, 콜록.

기침을 한 유지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다들 빌딩으로 돌아가시는 거죠?"

공교롭게도 모든 사람이 같은 빌딩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사최헌은 일행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떼었다.

"나는 볼 일이 있다. 너희들끼리 돌아가라."

"잠깐."

"왜 그러지?"

주강혁은 사최헌을 멈춰 세웠다.

무명검의 기억 속에서 봤던 광경.

이에 대해 사최헌에게도 묻고 싶었기에.

다만······.

의도적으로 회귀자인 걸 숨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을까.

여기에선 말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지."

해야 할 일이 있다고 하니.

"알겠다. 나중에 시간을 내도록 하겠다."

사최헌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상황을 지켜보던 유지훈이 한발자국 다가왔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 * *

돌아오는 건 순식간이었다. 유지훈 헌터는 다른 일 때문에 곧장 이동했고, 주강혁은 사도들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빌딩의 최상층, 이제는 익숙해진 집에 도착.

왕-!

케로가 꼬리를 마구 흔들며 다가왔다. 청룡은 현관에 신발을 벗어 놓으며 말했다.

"왠지 오랜만에 보는 기분인데요."

"무슨 소리야. 내가 매일 밥도 주고 산책도 시켰는데."

가브리엘이 가장 먼저 케로를 안아 들었다. 케로는 여전히 난리를 치면서 가브리엘을 마구 깨물었다.

물론 신화급으로 격상된 가브리엘에게는 귀여운 애교 정도겠지만. 루시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잘 쳐줘야 SS급인 마물을 뭐하러 키우나. 사료값만 들지."

"귀여우니까 상관없어."

귀엽기만한 게 아니다. 케로 정도면 집 지키는 데에는 차고 넘친다. 사료값 정도로 키울 수 있으면 이득이지. 나는 그리 생각하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끝났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뉘었다. 장인 공방 엘에서 만든 제품이라 그런지 기분이 노곤해진다.

끝났다고 하기엔, 세 번째 시련이 진행 중이다.

나는 리모콘을 들어 TV를 켰다.

- 현재 아프리카 케냐 지역에 초거대 생명체 베헤모스가 출현했습니다. 케냐 정부에서는 현재 상황을 파악 중에 있으며······.

영상을 통해 거대한 네발짐승의 모습이 보인다.

그 크기가 가히 압도적이다. 머리 부분은 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수준. 산이나 다름없는 크기다.

'없애려면 당장 없앨 수도 있지만······.'

시련을 빨리 끝내면 다음 시련이 찾아올 뿐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마수의 토벌 권한은, 마수가 출현한 나라에 있다. 무명(無命)이 한국의 헌터라는 게 알려진 이상, 멋대로 처치하는 것도 곤란하다.

'다른 헌터들도 기여도를 쌓을 시간을 줘야 할 테고.'

이전 전장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 혼자 전 세계를 전부 지킬 순 없다. 다른 헌터들도 성장해 줘야 한다.

"그러고보니 해방은 어떻게 되었는가?"

TV를 응시하던 주작이 내게 물었다.

그래, 사도들에게도 이야기 해줘야 했다.

"그거 말인데."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비밀에 관심을 가집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귀를 기울입니다. 』

듣는 귀가 많다.

지금까지는 문제 없었지만, 사최헌이 굳이 회귀를 숨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조용히 이야기 할만한 장소가 있으면 좋을 텐데."

지난번에 사최헌이 사용했던 아공간처럼. 근데 그런 장소가 집에 있을 리도 없고······.

"있어."

케로에게 사료를 부어주던 가브리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있다고?"

"응, 내가 발견했어."

우리는 가브리엘을 따라 복도를 이동했다.

복도로 이어진 수많은 방들. 다시 봐도 미로 같다. 나도 아직 그 쓰임새를 전부는 모르고 있는데. 

가브리엘은 그 복잡한 방을 잘도 나아갔다.

"심심할 때 탐험했어." 

탐험해야 할 정도의 넓이라는 건가. 

그리고 마침내 육중한 철문으로 가로막힌 방 하나가 나타났다.

"이런 방도 있었네요." 

청룡은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겉부분에 룬어가 쓰여 있는데, 정말로 정보 차단을 위해 만든 방입니다. 사최헌이라는 그 인간. 정말 작정하고 만들어 놓았네요. 심지어 단어가 아니라 문장을 적어 놨으니······."

"효과는 확실하단거지?"

"예, 외부와의 완전 차단입니다. 성좌들도 이 안은 들여다볼 수 없을 겁니다.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엔 딱이죠."

사최헌 헌터의 집념이 느껴진다.

집 안에 어째서 이런 방이 있는가?

어째서 공간 확장 마법을 부여해가며 복도와 방을 늘려 놓았는가.

거기에 대한 답도 이제는 명확하다.

세계가 멸망하니까.

이미 몇 번의 회귀를 겪은 사최헌은, 이곳을 인류 최후의 거점으로 삼을 생각이었던 거다. 

"이만한 물건을 헐값에 샀으니 엄청난 이득이네요. 숨겨진 기능이 얼마나 더 있을지."

루시퍼는 흡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사최헌이 선의로 넘겨줬다는 게 보인다. 뭐, 전생에 열심히 산 내 덕분 아닐까? 나조차 모르는 사최헌과의 연줄 덕분인거지. 

철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가자, 새하얀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거기에 고급 목재로 만들어진 테이블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 다수의 성좌가 아쉬움에 □□□······. 』

성좌들의 메시지도 더 이상 출력되지 않는다. 확실히 바깥과 차단 되었다.

두런두런 의자에 앉은 사도들.

모두의 시선이 내게 집중 되었다.

"큼큼." 

나는 목청을 가다듬고서 입을 열었다. 

핵심부터 말하자면.

"사최헌은 회귀자야."

* * *

내 충격 발언을 들은 사도들의 표정은······. 

미묘했다. 

"회귀자······. 라고요?"

"그럴 리가 없네."

"이상하네요."

"불가능."

사도들의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각자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리고만 있다.

솔직히 이해가 안간다.

"환생자에 귀환자까지 있는데 회귀자가 어때서."

"그게······. 그것만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말에 답한 건 청룡이었다. 녀석은 검지를 들어 올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한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성좌들의 맹약 아래, 시간선은 하나뿐."

청룡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시간은 역행할 수도, 다른 시간선으로 분열될 수도 없습니다.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자 약속이니까요. 더욱이 회귀(回貴)란 기적은 이 세계 전체를 다시 쓰는 초월적 규모의 변화."

다른 사도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런 어마어마한 일이 있었다면, 상위 존재인 저희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상위 존재인 우리를 뛰어넘는 세계의 변동은 있을 수 없다네."

그렇다면 내가 본 건 뭐란 말인가.

"아직 끝이 아니야." 

나는 무명검이 보여줬던 기억에 대해서 설명했다. 사도들의 반응이 한층 더 미묘해졌다.

"으음······. 우리가 전용 무기를 잡고 보았던 기억과도 일치하고 있네만."

주작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기울였다.

"애초에 그 기억부터가 이상하죠."

"존재하지 않는 기억."

가브리엘과 청룡도 모르겠단 표정이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사최헌이 회귀자일 수도 있고, 우리도 몰랐던 과거가 있을 수도 있는 거지."

루시퍼가 삐딱하게 입을 열었다.

"따지고보자면 주인님의 능력은 이해가 가나?"

"그거야, 그렇죠······."

"성좌들도 모르는 힘이 존재하는 거야."

"그게 구조적으로 가능한가요?"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모르는 힘이라는 거지."

"사최헌 본인에게 물어보면 끝날 일이 아닌가?"

"글쎄요, 답해주지 않을지도 모르죠. 알려줄 거였다면 진작에 말했을테니까요."

사도들이 내놓은 결론은 '모르겠다'였다.

"역시 자세한 걸 알려면······. 두 번째 해방을 노리는 수밖에 없구려."

주작의 시선이 내 허리춤의 무명검으로 향했다.

『 2차 해방(解放)의 조건 』

『 지배자의 전령 처치 - 0 / 1 』

"지배자의 전령을 처치하면 다음 해방이야."

"······."

사도들이 잠깐 동안 정적에 휩싸였다.

그러다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지, 진짜인가요?"

"무명검이 미친 게 분명해."

"지배자의 전령? 현세 멸망 시킬 일 있나."

격한 반응에 내가 의아해질 지경이다. 원로까지 이긴 마당에 못 이길 것도 없지 않나. 

지배자의 전령이라는 게 뭐길래.

"이 무명검에 귀신이 들린 게 틀림없네. 가져다 버리고 오겠네."

"우선 지배자에 대해서부터 설명해야겠죠······. 이미 그들로부터 메시지도 받으셨을 겁니다."

다시 청룡의 설명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상위 존재를 제외하면 가장 강한 존재. 

그게 지배자고···. 그러한 지배자의 충실한 부하가 전령이란다. 

마치 사도들처럼. 

* * *

같은 시각, 태평양.

콰아아—!

특수 제작된 모터 보트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갔다. 마력만 불어 넣어 준다면 험난한 파도도 쉽게 넘을 수 있는 모델이었다. 

"그러니까, 종말의 괴수가 하나가 아니란 말이죠?"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시스템은 베헤모스만 언급했잖아요."

모터 보트에 타고 있는 건, 청명 길드의 길드장 채아린이었다. 옆에 있는 건 협회의 사람이었다.

"일본 측에서도 확인을 나갔다가 벌써 몇 척이나 침몰당했답니다. 자, 잠깐만요. 빠릅니다. 너무 빨라요!"

"빨리 가야죠."

채아린은 모터 보트에 마력을 불어 넣었다. 마정석의 에너지가 폭발하듯 쏘아지며 속력을 냈다. 보트는 물수제비치듯 튕기며 쏘아져나갔다. 

우우웅—!

한순간, 얇은 막을 통과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계의 내부로 들어 온 모양이었다. 파도가 거세지고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바깥에선 보이지 않던 거대한 생명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세, 세상에······!"

협회 직원이 보트의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눈동자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채아린도 침을 꿀꺽 삼켰다. 

『 종말의 괴수 레비아탄이 출현합니다. 』

쿠우우우—.

날개 없는 용이 바다 속에서 거체를 일으켰다. 그 크기가 상상 이상으로 거대하다. 놈의 몸에서 대량의 바닷물이 쏟아지며 주변으로 거대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진짜 하나 더 있네요."

채아린은 모터 보트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검 위로 새하얀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이건 혼자서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구조 요청은요?"

"하, 하고 있어요! 안 통해요! 저 장막을 지나온 뒤로부터!"

채아린은 이를 악물었다.

"보트 단단히 잡고 있어요. 일단 발악은 해볼 텐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그녀의 성검이 끝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레비아탄의 크기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꽉 잡아요!"

"으아아아!"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콰아앙—!

아가리를 벌린 레비아탄이 모터 보트를 통째로 삼켰다. 채아린이 휘두른 검격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레비아탄에 비하면 보트는 겨자씨 한 알보다 작았으니. 

바다의 혼돈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았다. 그아아아—! 레비아탄의 울음소리가 천지를 울리는 듯했으나, 그 소리는 바깥에 닿지 않았다.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결계가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애시당초 이상한 상황이었다. 

한 마리만 존재해야 할 종말의 괴수가 한 마리 더 나타났다. 도저히 정상적인 상황이라고 볼 수 없었다.

외부의 개입이 아니고서야 일어날 수 없는 일. 

"크하하하-. 그래 그거다!" 

레비아탄의 머리 위에는 올라탄 누군가가 크게 웃고 있었다. 

그가 바로 또 다른 종말의 괴수를 불러온 범인이었다.

"무명(無命), 반드시 죽여주마······!"

그 자의 정체는 다름아닌 최상위 마인 가논이었다.

묵시록의 기사를 소환했으나 처참하게 패배한 마인.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심연의 지배자를 만나고서 새로운 힘을 얻어 다시 현세로 돌아왔으므로.

"드리무어님의 원수를 이 가논이 갚아주겠다!"

그는 핏발을 세우며 소리쳤다.

92화. 종말의 괴수(3)

두 번째 해방의 조건은 '지배자의 전령 처치'다.

사도들은 말도 안 된다며 극구 반대에 나섰다. 칠죄종이나 묵시록의 기사 때보다 거센 반응이다.

청룡은 반대의 이유를 30분간 설명했다.

"······정리하자면 범 차원을 지배하는 중위 존재. 그게 바로 지배자인 겁니다. 심지어 지배자는 차원 하나쯤은 가볍게 지워 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 지금의 주인님껜 위험합니다."

스케일이 거창하긴 했지만 이해하기 어렵진 않았다.

이 모든 차원은 4개의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영역을 다스리는 것이 지배자.

국가를 다스리는 군주처럼, 범차원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령이란 지배자의 뜻을 전하는 사도. 따라서 함부로 죽일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전령이 처치당하면 지배자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으니까요."

청룡은 검지를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더불어 중위 존재는 성좌들처럼 세계를 관음할 수 있습니다. 최악의 상대죠. 주인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는 거니까요. 지금 저희가 있는 방은 외부와 차단되고 있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지배자들은 성좌처럼 메시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혼돈, 심연, 질서, 천상.

각각의 지배자들이 이미 나를 주시하고 있단 의미. 

"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다과라도 준비해 오겠습니다."

루시퍼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이해는 했어. 그러면 무명검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퀘스트를 준 거지?"

"무언가 의도가 있다고밖에는 볼 수 없다네. 나는 의심해야 한다고 보네. 결과적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만 하고 있지 않은가."

주작은 눈을 가늘게 뜨고서 내 허리춤의 무명검을 노려봤다.

"주인님의 행동을 유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치고는 원로 처치를 조건으로 건 타이밍이 꽤 정확했는데 말이야."

무명검이 퀘스트를 주고 나서 근시일 내에 원로 드리무어의 현세 침공이 발생했다.

단순한 우연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다.

네 사도가 모두 전용 무기를 해금해야만 해방을 조건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내 예상대로라면 조만간 지배자의 전령을 처치할 일이 생긴다는 건데. 

"위험한 조건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래도 무명검에 기억을 숨긴 존재가 저희의 편이라는 가정하에 말씀드리자면······."

계산을 끝낸 청룡이 심각하게 말했다.

"저희가 확인한 기억이, 그리고 앞으로 확인하게 될 기억이 생각보다 엄청난 비밀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전 회차의 기억들.

성좌들도 회귀에 대해선 몰랐다고 하니 엄청나다면 엄청난데.

한 가지 의문은 지울 수 없다.

"그냥 사최헌 헌터한테 직접 물어보면 끝나는 거 아닌가?"

"오, 주인. 천재적인 발상."

"이 몸도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네.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없으니."

가브리엘과 주작이 맞장구를 쳤다. 청룡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최헌이 순순히 말해주기만 한다면 말이죠."

그때였다.

밖으로 나갔던 루시퍼가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퍼를 훑어본 가브리엘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과자는?"

다과를 가지러 간다던 루시퍼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먹을 건 비둘기 네 놈이 직접 가져다 먹어라. 아니, 그게 아니라. 주인님. 꼬맹이가 찾아왔습니다."

"꼬맹이면······. 천이령 헌터?"

"예. 아무래도 세 번째 시련과 관련 있는 것 같습니다."

나는 로브를 뒤집어썼다.

"들어와라. 꼬맹이."

루시퍼 그리 말하며 슥 비키자 기다리고 있던 천이령 헌터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살짝 초조한 얼굴로 손에 스마트폰을 쥐고 있었다.

"무명님.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해요. 청명 길드의 채아린 헌터라고 알고 계시죠?"

알고 있다.

공략도 같이 했었다.

천이령 헌터가 청명의 길드원이기도 하고.

입술을 지그시 깨문 천이령이 입을 열었다.

"언니가 방금 실종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저한테는 가족처럼 소중한 사람인데······. 염치 없지만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채아린 헌터라면 대한민국의 랭킹 3위.

SS급 헌터인데다가 전장의 사냥터까지 이용해서 레벨도 충분할 거다.

그런 사람이 실종 되었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란 뜻.

사도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천이령 헌터는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뭐, 답은 뻔하다. 

"도와줄게."

"가, 감사합니다! 진짜로요!."

천이령 헌터에게는 이것저것 시키면서 도움도 받았고. 저렇게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다.

천이령 헌터의 얼굴이 한결 나아졌다.

"일본 너머의 태평양······. 그 부근에서 신호가 사라졌다고 해요. 어, 어라?"

손에 든 스마트폰의 화면을 내게 보여주려던 천이령 헌터가 굳어졌다.

"신호가 안 통해요. 고, 고장 났나? 아, 안 되는데."

그······. 뒤로 두 발자국 가시면 됩니다. 

* * *

프랑스 파리.

콰아아아—!

도시 전역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건물의 창문이 깨어지고, 거리의 가로등들이 뽑힐 듯 휘청거린다. 

"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당장 대피소로 대피해!"

"큭, 바람이 너무 거세······!"

빠앙—. 빠앙—. 빠앙—.

어디선가 날아 온 간판과 쓰레기통에 부딪힌 자동차들이 요란하게 경보음을 뱉어냈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거리의 시민들은 안전한 장소를 찾아 대피했고, 건물 안의 사람들은 안전한 자리에 웅크렸다.

창문 바깥으로 소용돌이 치는 하늘이 보인다. 종말이 성큼 다가온 듯한 모습에 사람들은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 종말의 괴수 지즈가 출현합니다. 』

파리의 각성자들 모두가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도심 어디에도 괴수의 모습은 없다.

"뭐야?! 대체 어디에서······?"

"종말의 괴수라고? 아프리카에 나타났던 거 아니었어?"

"시민들의 대피부터 도와!"

프랑스의 길드들이 빠르게 모여들었지만 괴수의 위치가 보이지 않기는 마찬가지. 

폭풍은 비를 동반했다.

쏴아아아—!

거센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시야까지 가려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도래하고, 인류는 큰 발전을 이뤘다. 그러나 날씨와 같은 자연 현상까지는 막아낼 방도가 없다.

"젠장.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 너머를 보았음에도, 감지되는 것은 없었다. 폭풍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종말의 괴수의 짓이 틀림 없는데. 알면서도 막을 수 없다니. 

저벅, 저벅.

혼란스런 헌터들의 사이로, 우의를 걸친 한국의 헌터가 걸어왔다. 신원을 가리는 아이템을 두르고 있었기에 그를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와보길 잘했군."

사최헌 헌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잿빛 하늘을 바라봤다.

종말의 괴수 지즈.

성서에도 짤막하게 언급되는 종말의 괴수였다.

땅의 베헤모스, 바다의 레비아탄 그리고 하늘의 지즈.

놈은 거대한 새였다. 아브락사스의 괴조에 비교하는 게 우스울 수준의 재앙. 이 폭풍조차 놈의 날개짓이 만들어내는 부산물에 불과했다. 

그때였다.

"뭐, 뭔가가 나타났다—!"

누군가가 크게 소리쳤다. 마력이 실린 외침에 헌터들의 시선이 허공으로 향했다. 거대한 알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빌딩 하나를 가볍게 넘는 크기였다.

"떨어지지 못하게 해!"

"당장 부숴!"

"젠장, 저런게 갑자기 어디서······!" 

헌터들의 대처는 신속했다. 온갖 마법과 화살이 알을 노리고 쏟아졌다. 어두운 하늘을 수놓는 형형색색의 빛 무리.

허공에서 파괴하면 없앨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알이 깨어지면 막대한 양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건 도시 전체를 뒤집어 삼키는 홍수로 번지고 만다. 

탓, 타앗.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사최헌이 건물의 지붕을 고속으로 달려나갔다.

『 성좌 '잊혀진 시대의 영웅'의 기술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

『 당신의 성장 속도에 성좌가 대단히 만족합니다. 』

고오오—!

사최헌의 검 위로 모인 보랏빛 기운이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렸다.

마인 원로와의 싸움. 사최헌은 전력을 다 했지만, 원로에게 공격이 스쳤던 게 전부였다.

실력의 차이도 있겠지만 무명검이 무거웠다. 특기인 공간검을 발휘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그러나 원로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

사최헌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자신을 가로막고 있던 껍질 하나가 깨부서지는 감각. 정확히는 내재 되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그 당시에는 긴가민가 했지만, 여기까지 오니 확실해졌다. 

'물론 아직 멀었다.'

무명의 검으로 공간검을 발휘하는 건 아직도 멀게만 느껴진다. 무명(無命)과 사최헌 자신의 격차가 여전히 지대하단 뜻이다. 몇 번에 걸친 회귀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만큼.

그러나.

지금이라면 종말의 괴수를 막아내는 것쯤은 할 수 있으리라.

『 스킬 '공간검 Lv.15'를 발휘합니다. 』

『 다수의 아이템에 의해 효과가 증대됩니다. 』

『 성좌의 힘이 당신에게 깃들어 있습니다. 』

서걱—!

푸른 궤적이 하늘의 끝과 끝을 양단했다. 사최헌이 그어낸 거대한 선은 괴조의 알 또한 베어냈다.

주변의 공간이 유리처럼 깨어지고, 아득한 크기의 균열이 생겨났다.

콰아아아—!

알이 깨어지며 쏟아져야 할 막대한 양의 물이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간에 새겨진 틈새가 끝없이 쏟아지는 폭포를 집어삼킨다.

"뭐, 뭐야······?"

"크기가 무슨······."

"하, 하마터면 저 많은 물이 여기로 떨어질 뻔했다는 거 아니야."

놀란 헌터들은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터억.

사최헌은 바닥에 착지했다.

괴조는 공중 어딘가를 맴돌고 있을 터. 그러나 그 기운이 포착되지 않는다. 사최헌이 아는 본래의 시련과는 다른 부분이었다.

'외부 세력인가?'

무명에 의해 미래가 바뀌었다. 짐작 가는 놈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은 변함없었다.

'괴수를 쓰러뜨린다. 그게 불가능하다면, 무명(無命)에게 놈을 보여준다. 혹은 사도를 기다리거나.'

사최헌은 단말기를 사용해 메시지를 보냈다.

프랑스 혼자만으론 감당하기 힘든 시련이다. 여러 국가의 헌터가 동시에 달려들어야 간신히 공략 가능한 대상이다.

다만······.

'지금 컨디션이라면 해낼 법도 하다.'

방금 전의 일격으로 깨달았다. 운이 좋다면 무명의 도움 없이 괴수를 처치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스륵.

그런 사최헌의 옆으로 검은 로브를 두른 여성이 나타났다.

예언자의 별, 엘리스 그레인저.

"인사는 필요 없겠죠. 축하합니다. 원로를 정말로 처치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녀는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처럼 말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무명이 했겠죠."

"······."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몇 번을 만나도 거슬리는 여자였다.

사최헌은 엘리스를 무시한 채 검 위로 기운을 끌어 올렸다. 엘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원로를 처치하면서 미래가 크게 바뀌었습니다. 인류의 수명이 조금 연장 되었죠."

"그거 듣던 중 좋은 소식이군."

"괴수 처치. 도와드리죠."

"······."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최헌은 내심 놀랐다. 직접 협력하겠다는 말을 꺼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이것도 무명이 만들어낸 변화인가?

"공중으로 단숨에 날아 올라서 괴조를 노린다. 무언가가 모습을 감추게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내부로 들어가야 처치할 수 있다."

사최헌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잠깐만요, 그건 너무 무모합니다."

엘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는······." 

엘리스는 다른 길을 제시하려 했다. 사최헌은 미간을 좁혔다. 예언자라고 해도 모든 걸 꿰뚫는 건 아니다. 여기서는 속전속결이 낫다. 

사최헌은 떠올렸다.

이럴 때, 그 건방진 사도는 뭐라고 했었더라.

사최헌은 있는 힘껏 조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쫄리면 빠져라."

* * *

콰아아—!

호화로운 요트가 물살을 가르며 전진한다. 해안까지는 청룡을 타고 이동했지만, 바다부터는 요트로 이동하기로 했다.

"요트를 타야 합니다. 적이 누군지 모르는 이상, 저희도 최대 전력을 내야 하니까요."

맞는 말이었다.

요트는 유사시에 발판이 되어 줄 거다.

"나도 동감일세."

주작도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신호가 사라진 지점을 향해 이동해야 했다. 빨리 가야하는 건 변함 없다.

청룡의 손짓 한 번에 강한 바람이 요트 뒤쪽을 밀어주기 시작했다. 도력 또한 안개처럼 피어나며 요트를 전진시켰다.

콰아아—!

속도는 가히 압도적.

천이령 헌터는 능숙하게 결계를 펼쳤다. 이전에 제주도에서 펼쳤던 결계보다 한층 업그레이드 된 기술이었다.

거센 바람이 사라지고 요트가 안정화 되었다.

"오, 나이스. 꼬맹이." 

띠링. 

그때, 사최헌 헌터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 프랑스 상공에 또 다른 종말의 괴수 '지즈' 출현. 시야를 차단하는 보호막이 존재한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연락하겠다.

"프랑스에도 종말의 괴수가 나타났다는데."

"그렇다면 바다에 있는 건 높은 확률로 레비아탄일 겁니다."

청룡이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종말의 괴수라는 모양.

"왜 갑자기 한 번에 세 마리나 출현 한거야?"

"자세한 건 가봐야 알겠지만······. 누군가가 의도한 거겠죠."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래선 끝이 없다. 원로를 처치했더니, 쉴 틈도 없이 무언가 일이 터진다.

마인을 잡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다.

근본적으론 시스템을 어떻게든 해야 한다.

"시스템을 멈출 방법은 없는 거야? 시스템을 극복한 다른 차원이라던가. 있을 거 아니야."

"그 부분에 대해선 정보 제한이 있습니다."

청룡이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까지 사도들의 반응으로 봤을 때, 멸망은 확정된 듯했다. 방법이 있었으면 언질이라도 줬으려나.

"사실 저희 성좌들도 모든 차원의 일을 소상히 알고 있지는 못합니다. 관심 없는 일에 대해선 거의 모르는거죠. 다만······."

청룡은 잠시 말을 고르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뛰어난 지식을 가진 인물을 하나 알고 있습니다. 범차원의 현자, 아스펠트. 정보 제한이 여기까지는 허락되는 모양입니다."

"그 사람은 어디에 있는데?"

"숨겨진 차원에 있는 걸로 압니다. 찾기 쉽지 않죠. 특히 현세의 기술로는 많이 어렵습니다. 게이트를 열 수 있어야 하거든요."

"배울게요."

그때, 천이령 헌터가 입을 열었다.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낼 수만 있다면······. 제가 배울게요. 게이트를 만드는 방법."

"그거 좋네요."

청룡이 빙긋 웃었다. 천이령 헌터는 눈에 띄게 초조해하고 있었다. 그녀는 바다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우선 종말의 괴수를 처치하고, 게이트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겠네."

잠시 사라졌었던 주작이 태연하게 나타났다.

주작은 수영복을 걸치고 있었다. 튜브도 하나 들고 있고. 어디 갔나 했더니 옷을 갈아입고 온 거였다.

"······우리 놀러 온 거 아닌데."

"호, 혹시 모르지 않나. 바다에 갑자기 빠질지도 모르고. 바닷속에서 싸워야 할 수도 있네."

이러려고 요트 타다고 한 거야? 

치이익—.

루시퍼는 한술 더 떠서 갑판 위에서 바베큐를 굽고 있었다. 내가 눈치를 주자 루시퍼가 변명했다.

"요트에 음식 재료가 있어서요. 그대로 두는 건 아깝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채아린이라는 여자."

녀석은 고기를 뒤집으며 입을 열었다.

"살아 있을 겁니다. 레비아탄의 뱃속에서요. 그 안이 꽤 넓거든요. 아마 섬 같은 게 있을 겁니다."

"저, 정말인가요?"

"그래. 같은 계열이니까. 대충은 안다고."

천이령 헌터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가브리엘은 진작에 선배드에 누워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다. 청룡은 어깨를 으쓱였다. 하긴, 따로 놀러 온 적도 없으니, 바다에 나온 김에 기분 낸다고 뭐라하기는 그렇다. 

사실 쉬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

"그래, 너도 좀 쉬어."

나는 천이령 헌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천이령 헌터도 현세 침공을 저지하는 공략에 참여했다.

그게 바로 오늘이다.

"······네, 그러면 잠깐 쉴게요."

천이령 헌터는 비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쉬면서도 여전히 바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30분 뒤.

요트가 보이지 않는 막을 지나쳤다.

뭔가가 바뀌었다는 건 바로 알 수 있었다.

"도착인가." 

고오오—. 쏴아아아—.

잔잔하던 파도가 거세지고, 날씨가 사나워지기 시작했다. 갑판 위로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허공에서 누군가의 외침만이 들려 올 뿐이었다.

[ 제 발로 왔구나, 무명—! 오지 않으면 네 놈의 나라를 박살 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구나! ]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격이 섞여 있으나 원로와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몸을 숨기고 있는 건가?

거센 풍랑에 요트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저놈은 날 아는 것 같은데.

"누구냐?"

아예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 나를 모르는 거냐······? ]

약간 충격받은 듯한 목소리.

"최상위 마족 가논입니다. 묵시록의 사기사를 소환했던 놈이죠."

"아하."

옆에 있던 청룡이 설명해줬다. 모를만도 했다. 돌이켜보면 직접 마주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청룡도 묵시록의 기사의 소환을 방해할 때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 크윽, 나는 네 놈에게 복수할 이유가 차고 넘친단 말이다. 네 놈 덕에 나는 팔 다리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기어야만 했다. 마계에서 버림 받고 오갈 데 없는 실패자가 되었단 말이다! ]

가논의 목소리는 분노로 떨리고 있었다.

근데 그거 자업자득이잖아.

[ 심지어 네 놈은 내 스승이자, 마계의 원로이신 드리무어님까지 죽였다. 무명······! 너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끝장내고 말겠다. ]

"무슨 수로?"

빗 속에서 불판을 닦고 있던 루시퍼가 고개를 들었다.

[ 크하하-! ] 

가논은 가소롭다는 듯 웃어재꼈다. 

[ 네 놈들은, 내가 누구의 밑으로 들어갔는지 모를 거다. 바로 혼돈의 지배자께서 나를 거두어주셨다. 나는 그 분의 수하가 되기로 했다. ]

혼돈의 지배자.

사도들이 일순 굳어졌다.

그 단어가 가논에게서 나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혹시 몰라 물었다. 

"가논이 지배자의 전령은 아니지?"

"예, 아닙니다. 하지만······. 수하도 까다롭긴 마찬가지입니다."

청룡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허공을 응시했다.

여전히 가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종말의 괴수 레비아탄도 마찬가지다.

빗발이 거세질 뿐.

"어쨌든 놓칠 수 없겠는데."

두 번째 해방으로 이어지는 열쇠.

그게 가논이라는 뜻이다.

물론 채아린 헌터도 구출해야 하고.

스릉-.

나는 무명검을 뽑아 들었다. 여러모로 이득이다. 레비아탄을 잡고 보상까지도 챙길 수 있을테니까.

"바로 끝내자."

여기서부터는 속전속결이다.

93화. 종말의 괴수(4)

거센 풍랑이 휘몰아친다.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요트가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쏟아지는 비바람을 맞으며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마계의 원로도 주인님의 손에 목숨을 잃었는데, 고작 최상위 마인 따위가 뭘 할 수 있다는 거지?"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얼굴이었다. 허공에서 가논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빗소리를 뚫고 들어오는 쨍한 목소리였다.

[ 보고도 모르겠나? 혼돈의 지배자께서 선사해주신 이 힘이면 가능하다. 가능하고말고. ]

촤악-! 촤아악-!

근처의 바닷물이 첨벙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퉁, 퉁! 천이령 헌터가 펼쳤던 결계에 무언가가 계속해서 부딪혀 오고 있었다.

푸확!

날아오른 가브리엘이 내지른 창에 무언가가 꿰뚫렸다.

"은신이 주특기인가봐."

투욱.

가브리엘이 창을 털어내자, 괴물의 모습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해수어였다.

첨벙, 첨벙!

하나 둘이 아니었다. 바닷속에서 무수한 해수어들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보이지 않는 물고기에 의해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주변으로 막대한 양의 해수어가 모여든 게 틀림없다.

해결하기란 어렵지 않다.

"내게 맡기게나."

오른손에는 튜브를, 왼손에는 스태프를 들어 올린 주작이 눈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뜨거운 불길이 요트의 바깥으로 원을 그리듯 퍼져나갔다.

화르르륵—!

작열하는 불꽃이 달려드는 해수어 모두를 불태웠다. 투둑, 투두둑.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며 무해해진 해수어가 갑판 위에 마구 떨어졌다.

청룡도 여의주를 들어 올렸다.

먹구름이 걷어지며 푸른 하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가 일시에 멎고, 거센 바람도 잦아들었다.

날씨는 우리의 영역이다.

[ 어림없다! 레비아탄, 해일을 일으켜라! ]

소용돌이가 거세지며 요트가 그대로 끌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엄청난 크기의 해일이 요트를 집어삼킬 듯 솟아올랐다.

루시퍼는 창을 들어 올렸다.

"뭐, 이 별거 없네요."

콰아아—!

창끝에서 쏘아진 강력한 광선이 해일의 중앙을 뻥하고 꿰뚫었다. 퍼엉! 청룡이 만들어낸 폭풍 같은 기류가 요트를 포탄처럼 쏘아냈다.

"으아아—!"

천이령 헌터가 난간을 붙잡고 소리쳤다. 거센 중력에 나는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요트는 해일을 통과해 날아올랐다.

[ 무, 무슨······. ]

가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리는 찰나, 사도들이 요트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루시퍼의 마도광선이 다시금 쏘아졌다.

콰아앙—!

엄청난 규모의 폭발과 함께 연기가 솟아오르며 레비아탄의 윤곽이 드러났다.

투우웅!

다시 요트가 바다에 착지했다.

'보였다.'

나는 즉살을 발휘할 준비를 했다. 실종된 채아린 헌터가 내부에 있어도 상관없다. 즉살은 대상을 구분할 수 있으니까.

레비아탄을 죽이면 자연스레 바깥에 나오게 될 거다.

즉살을 발휘하려던 그때였다.

"주인이여, 잠깐만 기다리게나! 형상으로 보건데 저 레비아탄은 특수 개체일세."

주작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특수 개체?"

"동종의 마물이어도, 특히 빼어난 존재가 있지 않은가. 심장을 채취할 수만 있다면······."

[ 그래, 내가 특별히 골라왔다. 아주 특별한 놈을. 네 놈들을 박살 내기 위해서. ]

고오오—.

기류가 압축되는 듯한 공기의 흐름이 느껴진다. 보이지는 않지만, 레비아탄이 무언가 하려 하고 있었다.

'심장이라.'

즉살을 사용하면 대상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폭발한다. 심장을 챙기려면 사도들을 사용해 죽여야 한다.

문제는 내부에 헌터들이 있다는 것. 괜히 잘못해서 사도들의 공격이라도 맞으면 대참사다.

"아쉽지만······."

"범차원의 현자. 그가 숨어 있는 차원을 열 때, 종말급 괴수의 소재가 있어야 할 걸세."

주작이 다시 강하게 주장했다.

터억-.

갑판에 착지한 루시퍼가 나를 돌아봤다.

"그러면 저희도 내부에 들어가는 건 어떨까요? 그 안에서라면 심장도 확실하게 채취할 수 있을 것 같고요."

어차피 필요한 물건이라면 얻어 두는 게 좋긴 한데.

"저 마인은 이 몸이 맡고 있겠네."

주작이 튜브를 들고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 다 들린다! 무시해도 적당히 해야지. 이 빌어먹을······! 레비아탄 발사해라! ]

콰아아아—!

허공에서 푸른 브레스가 쏟아져 나왔다. 이에 맞서는 주작의 붉은 불길이 치솟았다. 두 불길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레비아탄의 불길이 먼저 꺼졌다. 

청룡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즉시, 격렬한 기류가 치솟으며 요트를 띄워올렸다. 콰아앙-! 요트가 레비아탄의 입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 무, 무슨······?! ]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콰아아앙—!

레비아탄이 요트와 바닷물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청룡이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잘 들어 왔네요." 

"내가 불을 밝힐게." 

가브리엘이 성력으로 불꽃을 피워내자 주변이 밝아졌다. 바닷물과 함께 요트가 레비아탄의 식도로 넘어간다.

"우아아아—!"

난간을 꼭 붙잡은 천이령 헌터가 소리쳤다. 거대한 폭포나 다름없는 절벽을 넘어 요트가 그대로 수직 낙하했다.

풍덩-!

식도를 빠르게 내려 온 우리는 또 하나의 바다를 마주했다.

* * *

"······구조가 올까요?"

안경을 쓴 협회의 여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옆에는 청명 길드의 길드장 채아린이 앉아 있었다.

타고 온 모터 모트의 모습은 비교적 온전했다. 동력부가 고장나긴 했지만 가라앉지는 않았다.

채아린은 무심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무명 헌터가 오면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데요. SSS급 게이트를 막으러 갔다고 했었으니까······. 망했죠 뭐."

"하······."

협회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통째로 삼켜진 건 다행이지만, 살아나갈 방도가 없다.

"탈출 시도를 하긴 했는데 전혀 안 먹히네요. 아무리 그래도 너무 튼튼해요. 뭐, 이런 괴물이 다 있는지. 하긴, 그러니까 종말의 괴수겠죠?"

채아린은 검을 휘두르는 걸 포기하고 노처럼 만들어 젓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유 능력인 성검은 자유자재로 늘어나는 빛의 검이었다.

문제는 레비아탄의 위가 무지막지하게 단단하다는 것.

잘라내기는커녕 기운만 뺐다.

"통신은 완전히 끊겼고······."

그래도 채아린 헌터는 포기하지 않았다. 검으로 물살을 저으며 나아갔다.

"운이 좋으면 꽤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여기에 사는 마물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 걸 먹으면서 살면 되지 않을까요? 잠깐, 저거 섬 아니에요?"

투욱.

계속해서 노를 젓다 보니, 모터 보트가 땅에 닿았다. 채아린 헌터는 조심스레 섬에 발을 내디뎠다.

튼튼한 땅이었다.

"어, 진짜로 살 수 있을지도?"

주변에 나무 같은 것도 자라 있었다. 괴수의 뱃속에 생태계가 자리 잡고 있는 기이한 현상.

"내려봐요. 근처에서 먹을만한 열매를······."

"히, 히이익!"

그때, 땅에 내려온 협회 직원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나무 앞에는 새하얀 백골이 놓여 있었다. 여기서 죽은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었다.

"쩝."

아무리 채아린이라지만 백골까지 확인하고 나니 괜스레 소름이 돋았다.

구조의 가능성은 있다.

무명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게 아니면 죽은 거나 마찬가지고. 

앞서 왔었던 일본 헌터들은 여기에 있으려나?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반대편 부근에서 폭발과 함께 강한 빛이 솟아났다. 쿠구구구! 바다의 표면이 크게 흔들리며 지진이 일어났다.

"어라?" 

아무래도 레비아탄이 몸부림치고 있는 듯했다.

"지, 지원이 온 걸까요?"

"설마 뱃속으로 지원을 왔겠어요?"

협회 직원과 채아린이 폭발이 난 지점을 보고 있을 때였다.

쏴아아아—.

어디선가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트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어라? 진짜로?"

"누, 누굴까요?"

그 앞에는 익숙한 얼굴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언니!"

천이령 헌터.

그리고······. 무명이 있었다.

* * *

루시퍼가 위벽을 뚫고서 심장을 찾아 움직였다. 내부에서 확인하고 움직였으니 애꿎은 피해자가 생길 일은 없을 거다.

- 저기 살아 있는 사람이 있는 것 같은데.

레비아탄 내부로 들어오자 생명 인지 스킬이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어둠을 뚫고 타오르는 불꽃 두 개가 보인다.

곧장 요트를 끌고 가보니 섬 위에 채아린 헌터가 있었다. 천이령 헌터는 요트에서 뛰어내려 채아린을 끌어안았다.

"지, 진짜 왔네요? 게이트 공략은 어쩌고요?"

채아린 헌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끝났습니다."

"이, 이렇게 빨리요? SS급도 몇 주는 걸리는데······. SSS급을 하루 만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딱히 오래 걸릴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게이트 자체가 현세 침공을 위해 직선으로 되어 있기도 했고.

"언니,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물론이지."

옆에 있던 협회 직원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내게 고개를 숙였다.

"무명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저 멀리 불꽃 몇 개가 더 보인다. 일본의 헌터들도 실종됐었다고 하던데. 그 사람들인가?

'배에 태워서 나가면 되겠네.'

그때였다.

콰과과과—! 물 속에서 무언가가 매우 빠른 속도로 물살을 가르며 쇄도 해오고 있었다.

푸확!

수면을 뚫고 올라 온 마물의 생김새는 기괴했다. 상반신은 물고기, 하반신은 인간. 어인(魚人)이었다.

카아앙—!

가브리엘의 창이 놈의 삼지창과 부딪혔다. 카앙, 캉! 두 무기가 연달아 부딪히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주인, 이 마물 꽤 강해. 엘리트 개체일지도."

가브리엘이 요트를 부수지 않으려고 힘 조절을 하고 있다.

나는 가브리엘의 옆으로 달려들었다.

푸욱—! 푸화악!

무명검을 박아넣자 어인은 그대로 폭발했다. 놈의 썩은 살점이 역한 냄새를 풍긴다.

평범한 어인이 아니었다.

좀비화 되어 있다. 생명의 기운이 보이지 않던 이유였다.

"아무래도 청소를 조금 해야겠는데."

들어와보길 잘했다. 레비아탄을 없애면 내부에 있는 이 놈들이 바다로 풀려 났을테니까. 차라리 지금 없애는 게 낫겠다.

루시퍼가 심장을 찾으려 몸을 헤집는 사이, 가브리엘이 수면의 움직임을 포착하며 창을 던졌다.

콰과과과—!

대량의 물과 함께 좀비 어인들이 쓸려나갔다. 무시무시한 위력이었다. 

"무, 무명!"

"감사합니다!" 

반대편 섬에 있던 일본의 헌터들도 구조했다. 몇 마디 한국어를 제외하곤, 죄다 일본어로 말해서 뭐라고 말하는지는 모르겠다만.

대충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가논은 바깥의 주작과 대치하고 있을 거고. 

"청소 끝."

[ 이쪽도 심장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수거하겠습니다. ]

[ ······가논은 여전히 모습을 숨기고 있다네. 찾아낼 방법은 없는가? ]

보이지 않는다는 게 꽤 성가시다.

그럼에도 방법은 있다.

요트에 구출한 사람들을 모두 태웠다. 구조 작업도 끝났으니 이제 종말의 괴수를 쓰러뜨릴 차례다.

[ 채취하겠습니다! ]

루시퍼와 청룡이 심장을 떼어낸 순간.

그어어어어—!

레비아탄이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위 속의 바닷물과 함께 물살이 크게 출렁였다. 그러나 배가 뒤집힐 정도는 아니다.

아직 레비아탄이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

바로 이 순간.

"죽어."

나는 저 멀리의 위벽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을 발휘합니다. 』

푸화아아악—!

시야를 가로 막고 있던 생물의 장벽이 단숨에 붕괴한다. 레비아탄의 파편이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시야가 탁 트였다. 

"우앗?!"

"자, 잠깐!"

찰나의 순간, 요트는 레비아탄의 위액이었던 바닷물과 함께 공중에 떠올랐다. 헌터들이 동시에 난간을 붙잡았다. 

지금이 기회였다.

가논은 이 근처에 있을 거다.

나는 죽음의 기운을 크게 펼쳤다. 내가 바라보는 시야 전체로.

[ 무명—! ]

가논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죽음의 기운에 닿는다면 분명 저항이 있을 것이다.

화아악!

죽음의 기운이 순식간에 일대의 공간을 메웠다.

그 한부분이 명확하게 일렁였다. 생물에게 기운을 덧씌울 때의 감각처럼.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가논의 위치를 알아냈다.

『 종말의 괴수 '레비아탄'을 처치하셨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종말(終末) 』

『 기여도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레비아탄 처치'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세계 멸망급의 대업적! 』

『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공략에 만족합니다. 』

『 보상을 지급합니다. 』

쏟아지는 메시지창과 동시에, 

화아악-! 주작이 쏘아낸 화염의 창이 가논을 꿰뚫었다.

94화. 종말의 괴수(5)

"어, 어떻게?!"

가논의 눈동자에 경악이 어렸다.

바깥에서 적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던 주작의 불꽃이 가논을 완벽하게 꿰뚫었다.

'내가 보이지 않을 텐데.'

주작은 주강혁이 가리킨 방향만으로 가논의 위치를 파악해낸 것이었다. 

"커허억······."

가논은 검보랏빛 피를 토해내며 허공에서 추락했다.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혼돈의 지배자를 직접 만났다.

지배자로부터 하사받은 힘 '존재 은닉'.

이건 태초의 마족들이 가지고 이능과 동일했다. 무슨 수를 써도 적이 자신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드는 사기적인 능력. 심지어 대리자조차 떨쳐 낼 수 있는 힘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허무하게 간파되었다.

콰악—!

허공에서 솟아난 흑마력의 손아귀가 가논을 붙잡았다. 날개를 펼친 루시퍼는 가논을 자신의 앞으로 끌고 왔다.

"그런 잔재주로 주인님한테 상대가 될 거라 생각했나?"

"끄으윽."

온몸이 으스러지는 듯한 압박감이었다. 가논은 눈을 부릅뜬 채 루시퍼를 노려봤다.

풍덩—!

레비아탄이 사라지며 허공에 떠올랐던 요트가 바다에 떨어졌다. 청룡이 제때 도력으로 붙잡아 가라앉지 않았다.

후두두두.

레비아탄의 살점이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바닷속의 마물들이 살점을 먹기 위해 머리를 내밀었다.

요트에 있던 헌터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 살았다."

"또 마인이 범인이었던거야?"

채아린 헌터가 질린 듯한 눈으로 가논을 바라봤다. 구조된 일본 헌터들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 이제 통신도 통해요!"

협회 직원이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머지않아 일본 측의 구조대가 도착했다. 한국 쪽에서도 헌터들이 배를 타고 왔다.

"길드장!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아니 다친 데 없다니까."

"이령아, 너는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가장 먼저 달려 온 것은 청명 길드의 사람들이었다. 천이령은 주강혁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명님이 도와줬어요."

종말의 괴수 레비아탄.

구름에 닿을 듯한 압도적인 크기의 괴수였다. 무명이 아닌 일반 헌터들이 왔었다면 손조차 쓰지 못했을 정도로.

레비아탄의 뱃속에 있던 좀비 어인들은 어떻고. 놈들은 사도인 가브리엘과 맞붙을 정도로 강력했다.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무명은 그 모든 일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끝냈다. 이 세상 어떤 헌터가 와도 방금처럼은 못할 거다. 

하마터면 소중한 사람을 잃을 뻔했다. 채아린은 방황하던 천이령을 잡아 준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직접 표현한 적은 없지만···.

"여러분은 함께 안 가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협회 직원이 요트 위의 사도들과 무명을 향해 물었다. 루시퍼가 휘휘 손을 저었다.

"주인님께선 따로 볼 일이 남았다고 하신다. 너희 인간들끼리 돌아가라."

"저, 저는······."

"꼬맹이, 너도 돌아가라. 필요한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까. 조만간 또 바빠지게 될 거다."

루시퍼는 천이령 헌터까지 요트에서 내보내고 나서 갑판으로 돌아왔다.

갑판에서는 가논을 중앙에 놓고 심문이 한창이었다. 주강혁이 루시퍼에게 물었다.

"다들 갔어?"

"예, 사람들은 돌려보냈습니다."

흑마력에 사로잡힌 가논은 뿌드뿌득 이를 갈고 있었다.

"무명······!"

"네 놈은 머리가 안 좋나? 질 게 뻔한 싸움인데, 왜 온 거냐?"

루시퍼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물었다.

원로도 패배한 싸움이다.

지배자로부터 뭔가 얻은 것 같기는 한데, 그 정도로 전력차를 뒤집을 순 없다.

가논은 핏발 선 눈으로 대답했다.

"혼돈의 지배자께서 나를 보내셨다. 나는 이제 그분의 수하니. 명령을 따르는 게 맞지 않겠어?"

뻐억-!

루시퍼의 주먹이 가논의 얼굴을 강타했다.

"눈 착하게 안 떠?"

"고작 폭력 따위에 굴할 것······."

뻐억, 뻐억—! 퍼버벅!

"그만, 그만!"

얼굴이 곤죽이 되고 나서야 가논이 항복했다. 흑마력이 담긴 주먹이라 뼛속까지 깊게 울리는 모양.

"주, 죽일 거면 죽여라. 하지만 나는 혼돈의 지배자의 수하. 날 죽인다면······."

"안 죽일 건데."

주강혁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심각한 상황이다.

시스템의 시련은 시시각각 어려워진다.

마계에선 대놓고 현세를 쳐들어 오려하고, 이제는 혼돈의 지배자까지 마수를 뻗쳐 오고 있다.

이대로는 안된다.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보를 뽑아낼 때까지는 안 죽일 거야."

주강혁의 눈짓에 청룡이 아공간 주머니에서 유리 상자를 꺼내 들었다.

유리 상자에 들어 있는 것은 '묵시록의 기사'의 머리통.

"뭐, 뭔······."

그것을 확인한 가논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평생 박제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협조하는 게 좋을 거야."

주강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 말했다.

* * *

나름 고분고분해진 가논이 여러 사실들을 털어 놓았다. 

그 중 제일 중요한 건 이거였다. 

"······혼돈의 지배자가 주인님을 노리고 있다라."

청룡은 내 주변에 떠오른 별빛 중 하나를 노려보았다.

『 혼돈의 지배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굳이 의도를 숨기려는 것 같지 않다.

"차단 기능 없어? 계속 달고 다녀야 하는 거야?"

"아이템을 만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완벽한 차단은 어렵습니다. 현세는 시스템의 영향 아래 있으니까요."

혼돈의 지배자는 왜 나를 굳이 노리는 걸까. 

"말했잖나! 나도 모른다고!"

주먹을 들어 올린 루시퍼를 보며, 가논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전장이 현세가 된다면, 지배자라고 해도 쉽게 영향을 끼칠 순 없거든요."

『 성좌 '이계 규율'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시스템은 현세를 종말로 이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시련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외부로부터 현세를 보호하기도 한다.

"전령을 보내지 않고 굳이 가논을 보낸 것도 그 이유일 겁니다."

시스템의 제한 때문이다.

"즉, 현세에서라면 주인님은 최강인거죠. 지배자의 전령이라고 한들, 이곳에 끌고 올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는 건가.

그래도 우두커니 기다리기는 좀 그렇다.

"······가논은 왜 보낸 거지?"

"크흐흐······. 아직도 모르겠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가논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종말의 괴수는 총 세 마리다. 네 놈은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는 사전에 또 다른 괴수를 대륙에 보내놨다. 지금쯤이면······."

"아는데."

"응?"

"안다고."

나는 스마트폰을 살폈다.

프랑스에 나타난 종말의 괴수 지즈. 녀석은 사최헌이 상대하고 있는 듯하고.

아프리카에 나타난 베헤모스도 순조롭게 토벌 중인 모양이다. 케냐 정부에서는 곧장 전 세계에 지원을 요청했다.

일곱 개의 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을 필두로 전투가 한창인 모양.

전장을 거치며 인류도 강해졌다.

"괴수가 세 마리나 되니. 인류에겐 보상도 세 배인 셈이지."

"그럴 리가······."

가논은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무명, 네 놈은 논외라고 쳐도. 인류가 괴수를 막을 정도로 강할 리가······."

중얼거리는 가논을 내버려두고서 나는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대충 물어 볼 건 다 물어 봤고." 

보상을 확인할 차례다. 

『 추가 시련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

『 종말급에 해당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 종말 ] 경외의 표식

- [ ★ ] 오의 파편 x 1

- 플래티넘 코인 x 5

- 전설의 증표 x 5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종말급 아이템이 메인이다. 

나는 경외의 표식을 먼저 살폈다.

『 [ 종말 ] 경외의 표식 』

- 격(格)을 한 단계 상승 시킵니다.

- 격의 수준을 표시합니다.

붉은 물감이 허공에 떠올라 있다. 손을 가까이 대자 표식이 손등으로 흘려들었다.

『 현재 영웅(英雄) 수준의 격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

『 격이 한 단계 상승하여 서사(敍事) 수준이 됩니다. 』

『 현재 격의 수준 : 서사(敍事) 』

서사라면······. 대서사시 할 때 그 서사인 모양.

"주인님께서 소유하신 격이 이 세계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각종 소문과 이야기를 불러 일으킨다는 의미죠."

청룡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격이 높아지면 좋습니다. 후에 등급을 업그레이드 할 때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

무언가 스스로 느끼는 위세가 달라졌다고 해야 하나. 확실히 뭔가가 달라졌다. 시험 삼아 가논을 향해 격을 흘려 보냈다.

"끄으윽······."

털썩.

가논의 무릎이 꺾였다. 필사적으로 저항하고 있는지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고개가 떨어지려는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다.

'통한다.' 

최상위 마인에게도 통하는 수준이다.

그 아래의 마물들에겐 효과가 더 확실할 거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 [ ★ ] 오의 파편 x 1 』

- 오의(奧義)를 획득할 수 있는 파편 ( 0 / 5 )

- 사도나 소환수에게도 사용 가능

"이건?"

"일종의 필살기입니다. 무협의 성명절기와도 비슷한 개념이죠."

"궁극기랑은 다른 거야?"

"궁극기가 대개 능력치의 증폭으로 이어진다면, 오의는 강력한 공격 기술입니다."

내 궁극기 극야도래는, 즉살 효과를 강화해준다. 다른 사도들의 궁극기도 비슷하다. 제한을 해제하거나, 레벨을 낮추거나.

궁극기와 달리 오의는 아예 강력한 공격인 모양.

"있으면 좋겠네."

얼마나 강하려나.

"국가 하나를 순식간에 절멸 시키는 정도의 위력일 겁니다."

"······."

앞으로 상대할 적을 생각하면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나는 습득한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러면 이제 돌아갈까."

그리 말하려고 하는데 튜브에 쏙 들어 가 있는 주작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가브리엘도 수영복 차림이었다.

"주인. 조금만 놀다 가면 안 되겠는가?"

"놀자."

"······." 

틀린 말은 아니다.

바다에 나온 건 처음이기도 하고.

여기까지 왔는데 조금 놀다갈까.

"가논은 제가 확실히 붙잡아 두겠습니다."

청룡도 그리 말한다.

"쯧, 이 녀석들. 놀 생각만 가득해선."

그리 말하는 루시퍼도 스노클링 마스크를 끼고 있었다.

이 녀석들 처음부터 이러려고 요트 타자고 한 거 아니야? 어쩐지 강력하게 요트를 타자고 하더니. 

나는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다른 괴수들의 공략은 순조로운 것 같고,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쉴지 모르니.

"그럼 잠시 놀다 갈까. 물론 자리는 옮겨서."

여기엔 레비아탄의 피가 흥건하거니와 주변에 마물들이 너무 많다.

* * *

쿠우우웅—!

하늘의 괴수 지즈가 반으로 나뉘어져 떨어졌다. 

"후우······."

사최헌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프랑스의 상공에 있던 지즈는 눈 덮인 산맥에 추락했다. 일대의 산이 붕괴하고 땅이 크게 울렸다. 그러나 인명 피해는 없다. 사최헌이 의도적으로 지즈를 몰아넣은 덕이었다.

전투는 어렵지 않았다. 장막의 내부로 들어가니 지즈의 모습이 보였기에. 가논의 존재은닉이 완벽하지 않은 탓이었다. 

물론, 엘리스 그레인저의 도움도 있었다.

"생각보다 도움이 되는군."

"당연합니다. 그보다 그쪽의 성장이 놀랍네요. 종말의 괴수를 혼자서 처리할 수 있을 줄은······."

사최헌이 착지한 자리에선 푸른 호수가 한눈에 보였다. 푸르른 초목과 숲 또한 보인다.

"강해졌다라······."

바닥에 걸터앉아, 잠시 경치를 바라본 사최헌이 작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달라졌다.

무명과 함께 원로를 처치한 뒤로, 낼 수 있는 힘의 한계가 크게 늘어났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힘의 해방이었다.

"무명의 미래는 예측할 수 없다고 했던가?"

"예, 그렇습니다."

사최헌은 미간을 좁혔다.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사람도 있나?"

"제가 대답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

"딱히 숨길 이유도 없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은 한 배를 탔으니까요. 예언이 통하지 않는 건 무명(無命)이 유일합니다. 지금까지는요."

사최헌은 턱을 매만졌다.

무명만이 특별하다.

거듭된 회귀 속에서 처음 나타났고, 그와 함께 할 때 비로소 미래가 바뀐다. 예언자조차 예측하지 못하는 존재.

이 의문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범차원의 현자 아스펠트.'

그를 찾아낸다면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전부가 아니다.'

사최헌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무너져 내리는 세계에서, 아스펠트에게 절규하듯 물었었다.

- 대답해라! 시스템을 막아낼 수 있는 거냐?! 이 붕괴를, 이 세계의 종말을······!

-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그대의 힘으론 불가능하다. 헛된 희망에 불과하다. 따라서 내가 입을 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사최헌은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런 대답을 들어야만 했다. 무려 세 번이나. 

'하지만 내가 아니라.'

무명이 그를 마주한다면.

어쩌면 다른 답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95화. 회귀자(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