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종말의 기록(2)
"무명이 오고 있다······. 생각은 있는 거겠지?"
최상위 마인 가논.
그는 한탄하듯 말했다.
붉은 사막에 존재하는 유일한 오아시스의 한가운데였다.
싱그러운 풀과 나무가 어우러지는 천혜의 자연. 가논의 주변에는 온갖 금은보화가 널려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기쁘지 않다.
'젠장,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 없구만.'
가논은 오아시스의 호수를 통해서 현세(現世)의 일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상황은 마인과 묵시록의 기사에게 좋지 않아 보였다. 아니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쁘다.
전장에서 막대한 포인트를 벌어들인 무명이 균열을 만들어 이쪽으로 넘어왔다.
"······어쩌자고 직접 문을 연 거냐?"
가논은 불평하면서도 묵시록의 기사 '정복'의 눈치를 살폈다. 정복은 자신의 붉은 말을 쓰다듬고 있었다.
정복의 외관은 그야말로 전사였다. 탄탄한 근육과 커다란 키. 눈에서 발하는 안광은 마인인 가논조차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알고 싶나? ]
그가 입을 열자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이제는 익숙할 때도 되었건만, 가논은 온 몸이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묵시록의 기사는 중위 존재다.
가논이 직접 소환하긴 했으나 존재로서의 격이 달랐다. 존재의 각 계층 사이에는 넘어설 수 없는 벽이 있다.
지금 상황에선 이야기를 제대로 나눌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였다. 그러나 가논은 만족할 수 없었다.
'아니지. 아니야. 내가 부려야 할 수족에 불과한 놈한테 내가 왜······.'
묵시록의 기사를 소환할 때 사용했던 진(眞) 종말의 열쇠는 마인 기술의 정수가 담긴 아티팩트였다.
묵시록의 기사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명령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까득.
가논이 이를 악물었다.
'청룡 그 놈 때문에······.'
소환 직전에 마법진의 구조가 바뀌었다. 그 탓에 뭔가가 뒤틀린 게 분명했다.
'그나마 날 나름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다는 게 다행인 점이라니.'
묵시록의 기사는 가논을 오아시스로 데려왔다. 대리자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 하에 유폐 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잘 생각해보니 보호는 보호였다.
그때, 정복이 재차 입을 열었다.
[ 당황할 필요 없다. 일부러 무명을 불러들인 것이니. ]
"일부러?"
정복이 격을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가논은 목소리를 쥐어짜내야만했다.
[ 시스템에 결함이 발생했다. 대리자는 제 손으로 그리 만들고서도 상황을 묵과했다. ]
정복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평온했다.
[ 너무 이른 시기에 진정한 종말이 내려왔기 때문이겠지. 전장에 소환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건 최악의 상황이지. 따라서 나는 이곳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어줬다. ]
그러니까 무명이 포인트를 사용해서 묵시록의 기사를 끌어내기 전에, 그냥 문을 열어줬단 이야기였다.
"무명을 마주하는 일 없이 처리하겠다고 하지 않았나?"
[ 무명을 쓰러뜨리기 위해선 몇 가지 조건이 선행 되어야 한다. ]
정복은 가논의 질문을 무시하고서 말을 이었다. 사실 묵시록의 기사는 현 상황을 자세히 파악하고 있었다.
전지(全知)의 권능 덕분이었다.
으레 시스템의 심판자들이 부여 받는 힘이었다. 칠죄종 중 일부도 불완전하게나마 가지고 있었다. 묵시록의 기사가 소유한 전지의 권능은 그보다 위계가 더 높다.
그 덕에 정복은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 칠죄종들은 교만하고 멍청했지만 영 틀린 것도 아니었다. 무명이 죽는다면 현세의 멸망은 확정될테니. 무명에게 매달리는 것도 틀린 판단은 아니다. ]
"그래, 문제는 무명을 어떻게 없애냐는 거잖아······."
칠죄종들이 사냥감으로 전락했다. 아브락사스의 괴조가 우습다는 듯이 격파 당하고, 최상위 마인 몬타쥬는 아무것도 못하고 죽었다.
그 과정에서 무명이 고전했다는 이야기는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정복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설명을 이어갔다.
[ 첫째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 ]
"근데 여기까지 쳐들어왔으니, 이제 끝난 거 아닌가?"
[ 둘째로 영혼을 제공하지 않을 것. ]
"그건 무슨 말이지? 그런데 붉은 사막에 널린 게 영혼 아니었나?"
가논은 오아시스 바깥을 바라봤다. 수많은 영혼들이 적색의 모래 위로 솟아나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 이들은 내가 소유한 영혼이다. 무명의 것은 될 수 없다. 따라서 앞서 말한 두 가지를 지키면 패배할 일은 없다. ]
정복은 자신의 말 위에 올라탔다.
[ 그들의 능력으론 우리를 절대 찾을 수 없다. 찾고자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장소이기에. ]
그는 등에 매고 있던 대검을 하늘 위로 뻗었다.
이곳은 정복의 기사가 만들어낸 고유 영역. 정복의 기사가 주인으로 군림하는 이 세계에서 패배를 상상하기란 불가능했다.
[ 자, 이제 환영인사를 시작할 차례다. ]
사막의 오아시스에서 검은 진흙들이 솟아 올랐다. 쏴아아—! 꿀렁이며 하늘 위로 떠오른 무수한 진흙들이 이내 무명 일행을 향해 날아갔다.
* * *
황량한 붉은 사막.
달도 별도 떠있지 않지만 묘하게 밝다. 모래에서 솟아오르는 영혼들의 빛 때문일까.
영혼에 랜턴을 가까이 대봤지만 반응이 없다. 랜턴 소울 이터가 아쉬운 듯 가늘게 진동했다. 삼킬 수 없는 종류의 영혼인 모양이다.
후우웅-.
불어오는 바람에 로브 자락이 흩날렸다.
"일단 들어오기는 했는데······. 묵시록의 기사를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사도들과 함께 균열로 들어 왔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냥 황량한 사막이 뿐이다.
『 붉은 기사의 영역 』
간결한 메시지만이 떠올랐을 뿐이다.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데. 문제는 놈이 어딨냐는 거다.
"주변을 확인하고 오겠습니다."
"부탁할게. 위험한 게 있으면 바로 사념을 보내줘."
청룡이 검은 밤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나는 옆에 서 있는 루시퍼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흐음."
녀석은 미간을 좁힌 채 붉은 모래를 움켜 쥐었다.
스스스······.
손아귀에서 모래가 빠져나간다. 루시퍼에게만 보이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루시퍼는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거 좋지 않은데요."
"왜?"
"일반적인 게이트는 등급이 존재합니다. 등급을 나누는 동시에 제한을 두는 거죠. 간혹 변칙적인 개체가 튀어나올 때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렇죠."
"그러면 여기의 등급은 어느 정도인데?"
루시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등급이 없어요. 제한이 상당히 많이 풀려 있다는 거죠."
"전장 속에서 열린 균열이니 사실상 이중 게이트나 다름 없었을 걸세."
주작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전 칠죄종 때와 같은 원리가 적용되는 모양이다.
"어려울 거 없어. 묵시록의 기사를 찾아서 없애면 공략 성공. 미션 클리어야."
가브리엘이 간단하게 정리했다.
묵시록의 기사가 사라지면, 바깥의 시련도 클리어 된 것으로 간주될 거다. 대륙 하나가 사라지는 비극도 인류끼리의 분쟁도 일어나지 않겠지.
"······근데 진짜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는데."
끝없는 사막만이 이어져 있을 뿐이다. 주변을 살피고 내려온 청룡도 고개를 저었다.
"높은 고도에서 확인해 봤는데 끝이 보이지 않습니다. 아예 숨어 있을 작정인 걸수도 있습니다."
전장이 유지되는 15일.
묵시록의 기사가 대륙이 붕괴될 때까지 시간을 끌 수도 있다.
그리되면 곤란한 건 내쪽이다.
"사최헌 헌터한테 도움을 요청해볼까."
나는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딱히 통신이 통제되는 상황은 아니니, 어렵지 않게 전장에 있을 사최헌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 균열에 들어 왔더니, 붉은 모래 사막 뿐이다. 묵시록의 기사가 있을 장소가 궁금하다.
돌아온 답장은 이러했다.
- 모른다. 나는 예언과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거지, 예언자가 아니다. 균열 내부의 일에 대해선 대체적으로 모른다고 보면 된다.
사최헌 헌터가 모르는 게 다 있네.
"사최헌 놈.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되네요. 조사라도 좀 열심히 해두지."
"뭐, 묵시록의 기사가 갑자기 나타나기도 했으니."
어쩔 수 없는 거겠지.
"쯧, 딱히 보이는 기운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예 없는 것 같은데요. 주작, 성좌였을 때 본 거 없냐?"
"전장을 미리 봤던 것 말고는 없네. 묵시록의 기사를 쓰러뜨릴 비책은 있으나, 그것도 적이 나타나야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상한 부분에서 막혀버렸다.
적을 찾지 못해서 공략할 수 없다라.
"잠깐."
나는 불현듯 떠올렸다. 사최헌 헌터의 메시지가 힌트가 되었다.
"도움을 줄만한 사람이 있을지도."
"······저희가 모르는 인맥이 있었던가요?"
"너희도 대충은 알 걸."
나는 뜸들이지 않고 답을 말했다.
"예언자의 별."
예언자가 아니라서 답하지 못한다면, 예언자를 불러오면 해결 될 문제 아니겠는가.
칠죄종 교만이 나타나기 전.
예언자의 별이 꿈을 통해서 내게 접촉해 왔었다. 그들의 수장인 엘리스 그레인저는 이렇게 말했다.
-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예언자의 별을 강력히 염원해주세요.
염원.
그 사실을 사도들에게 전하자, 청룡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가능할 것 같네요."
"원리······?"
"주인님 정도 되는 분의 염원은 그 자체로 미래를 바꿀 가능성이 있습니다. 예언으로 그 변화를 읽는 거겠죠. 꽤 흥미로운 방식입니다."
청룡은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예언 능력만으론 균열까지 올 방법이······."
밑져야 본전이라고 일단 해볼까.
나는 눈을 감고 예언자의 별을 떠올렸다.
예언자의 별.
도움이 필요하다.
그것도 상당히.
어디에 있을지도 모를 묵시록의 기사를 찾아 사막을 샅샅이 뒤지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나는 그리 염원한 뒤에 천천히 눈을 떴다.
내 눈 앞에서 루시퍼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예언자 족속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요. 허풍이 좀 심하긴 합니다. 여기가 어딘데 겨우 염원 하나로······."
아니, 그렇지 않다.
왔으니까. 루시퍼의 뒤쪽에 분명히 있었다.
로브와 눈가리개를 착용한 금발의 예언자.
엘리스 그레인저.
그녀는 원래부터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존재했다. 원래의 배경처럼 자연스레 녹아들어 있었다.
"뭐, 뭐야?"
"진짜 왔네요."
"시, 신기하군."
사도들이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엘리스는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명(無命). 이번에는 그쪽에서 찾아주셨군요. 진심이 통한 것 같아 기쁩니다."
* * *
무명의 미래는 예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만들어낼 파장을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따라서 엘리스는 미래를 읽고 이곳에 도달했다.
"안내하겠습니다."
엘리스는 자신을 부른 용건조차 묻지 않았다. 그저 자연스레 주강혁 일행을 안내했다. 그 점이 한층 더 믿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뭐, 신기하긴 하네."
루시퍼도 못내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자의 별은 칠죄종 질투를 사로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으니, 당장은 도움이 된다는 걸 부정할 순 없었다.
"대체 무슨 능력인겐가?"
"비밀입니다."
주작의 물음에 엘리스는 딱 잘라 말했다.
"예언자의 별의 목적은 인류 멸망의 저지. 큰 틀에서 저희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당장은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거야 그렇네만···."
주변의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사막 계속해서 사막이다. 그러나 나아가는 방향은 계속해서 바뀐다. 엘리스는 마치 길이 있는 것처럼 나아갔다.
뒤따라오던 루시퍼가 주강혁에게 속삭였다.
"뭔가 편하긴 하네요. 이 참에 예언자 사도를 하나 더 뽑으시죠."
"그게 원한다고 되나."
"계속 뽑다보면 나오지 않을까요."
"소환 가능한 사도의 수에는 한계가 있을 거란 게 내 추측일세. 어쩌면 벌써······."
그때였다.
엘리스가 돌연 멈춰섰다.
"뭐야, 네비게이션이 고장났는데요?"
루시퍼가 진지하게 말했다.
"······곧 마물들이 나타날 겁니다. 제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규모입니다."
엘리스는 담담히 말했다.
"뭐야, 설마."
주위를 둘러봐도 마물이 나타날 낌새는 없다. 그러나 사도들은 새까만 하늘 위로 무언가가 날아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후두두둑—! 쏴아아—!
검은 진흙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붉은 사막의 모래 위로 검은 진흙이 쌓여 간다.
가브리엘의 성력이 우산처럼 펼쳐져 불순물들을 막아냈다.
쏴아아—!
땅에 떨어진 검은 진흙이 점차 형상을 갖추어 간다. 그들은 군세가 되어 일어섰다.
쿠구구—.
주강혁 일행을 둘러싼 엄청난 수의 진흙 병사들.
"이 자식들이 어딜?"
"주변부터 정리하겠습니다."
사도들은 각자의 힘으로 근처의 병사들을 파괴했다.
"순식간에 포위 당했어."
창으로 진흙 병사를 꿰뚫은 가브리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청룡은 적의 강함을 금세 파악해냈다.
"···하나 하나가 아까 게이트에서 봤던 전령하고 비슷한 수준입니다."
"뭐, 이딴 난이도가 다 있어."
루시퍼가 눈을 찡그렸다.
그때, 엘리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최대한 힘을 들이지 않고서 돌파할 수 있는 방향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엄청난 수의 마물이다.
그 하나하나의 강력함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고.
직접 상대하기보단 약점을 돌파하는 것이 빠르리라.
그러나 루시퍼는 고개를 저었다.
"글쎄."
"······?"
"주인님은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 같은데."
루시퍼가 눈짓으로 주인을 가리켰다.
'······.'
주강혁은 진흙 병사가 쓰러지는 순간 떠오른 메시지를 놓치지 않았다.
『 마물을 처치하셨습니다. + 54,320,302pt 』
이곳은 전장의 내부로 취급되고 있다. 막대한 양의 포인트가 여전히 쏟아져 들어오는 게 그 증거였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획득하셨습니다. 』
포인트에 더해 경험치까지 준다.
하루가 지나며 레벨업 제한도 사라진 상황이다.
주강혁의 손에는 검은 보석이 들려 있었다.
티켓 쪼가리도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전장에서 보스를 처치했을 때, 그 영혼으로 랜턴 '소울 이터'의 보상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얻은 보상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중 하나가 각성석이었다.
샤아아—!
주강혁의 손에서 검은돌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사도 각성석(신화급)을 사용합니다. 』
『 흑의 사도 루시퍼의 등급이 한단계 상승합니다. 』
줄곧 전설+에 머무르던 루시퍼의 등급 상승이 이뤄졌다. 반짝이는 검은 기류가 루시퍼의 몸을 감쌌다. 루시퍼의 날개가 갈라지며 한쌍의 날개가 추가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 청색 무기 조각을 다섯개 모으셨습니다. 』
『 조각을 합성해 전용 무기를 제작합니다. 』
청룡의 전용 무기 또한 완성되었다. 푸른 빛이 청룡의 손 앞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무슨······."
엘리스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예지해 두었던 미래가 연거푸 뒤바뀐다.
무수한 가능성들이 닫히고 새로운 가능성이 고개를 들이민다. 급속도로 변하는 미래에 엘리스 그레인저는 당혹감을 느꼈다.
그 과정이 복잡성으로 뒤얽힌 탓에 미래가 읽히지 않는다. 엘리스는 이마를 부여 잡은채 가까스로 말했다.
"돌파하기엔 적의 수가 너무 많아요. 무작정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그런 엘리스를 향해 루시퍼는 이죽이며 말했다.
"난 말이야. 항상 생각하거든."
검은 오러가 루시퍼를 감싸기 시작했다. 루시퍼는 자신의 창을 정면으로 들어 올렸다.
고오오—!
삽시간에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막대한 에너지가 루시퍼의 창 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면······. 그건 힘이 부족한 거라고."
다음 순간, 창 끝에서 쏘아진 강대한 일격이 공간 전체를 뒤흔들었다. 새까맣던 밤 하늘이 일순 밝게 빛날 정도로 강력한 공격이었다.
81화. 종말의 기록(3)
콰아아아—!
막대한 에너지가 루시퍼의 창끝에서 쏘아졌다. 흑색의 마도광선이 끝없이 이어진 붉은 사막을 횡단했다.
폭풍과도 같은 기류가 일행을 덮쳤다.
'이 무슨······!'
엘리스는 날아가지 않기 위해 바짝 몸을 숙여야만 했다.
적이었던 진흙 병사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뜨거운 열선이 그어졌다.
파직, 파지직.
일그러졌던 공간 위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엘리스의 입이 저도 모르게 벌어졌다. 예언의 능력을 갖춘 엘리스였기에 알 수 있었다.
방금 그 광선은, 자그마한 국가 하나를 가로지를 만큼의 범위였다.
무수한 미래를 엿보며 스스로 감정이 메말랐다고 생각했다. 어지간한 일에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이 상황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흑색의 사도 루시퍼는 무명(無命) 개인이 소유한 소환수다.
이만한 수준의 출력은 통상적으로는 나올 수 없다.
아니, 없어야만 했다.
시스템은 균형을 맞추고자 노력하고, 일개 개인은 그러한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그러나 무명은 보란듯이 그런 한계를 무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엘리스는 숨을 삼키고서 주변을 인지했다.
아직 끝이 아니었다.
붉은 사막을 새까맣게 뒤덮은 진흙 병사들.
그 수는 헤아리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 하나하나의 힘은 인류 최고 전력인 일곱 개의 별들과 맞먹는 수준.
'큭.'
엘리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뒤로 펼쳐질 미래는 무엇인가. 습관적으로 확인하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무명과 연관되어 있으면 늘 그러했다.
"아직 놀라긴 이른데요."
그때, 엘리스의 뒤편에서 푸르른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상서로운 기운을 두른 청룡이었다.
청룡의 손에는 청색의 여의주가 들려 있었다. 늘상 짓는 청룡의 산뜻한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무기를 손에 쥔 선배님들이 이런 기분이었군요."
루시퍼와 같은 신화급.
그리고 전용무기까지 손에 넣었다.
본디 성좌로서의 위상은 루시퍼보다는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사도로 소환된 순간부터 힘의 출력을 가르는 것은 등급이다.
한마디로 선배인 루시퍼와 같은 위력을 보여줄 수 있단 뜻.
청룡이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막대한 도력이 뿜어져 나오며 일대를 물들이려는 찰나.
"······!"
청룡의 앞으로 어떠한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무언가 정신에 간섭한 것처럼 노이즈가 차오른다.
기억······?
그러나 무언가 다르다.
폐허가 된 건물들과 무너진 대교. 인류는 멸망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한 도심의 한 가운데.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청룡 자신이 있었다.
- 내가 부름을 당했다고 해서, 그대가 주인이 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나는 이 상황이 썩 달갑지 않거든요.
대화를 나누는 대상은 놀랍게도 주강혁이었다. 건물의 잔해에서 몸을 일으킨 주강혁은 만신창이였다.
- 너라면 이 비극을 간단하게 막을 수 있을텐데······. 그 조금의 힘을 보내는 게 그렇게도 싫다는 거냐?
지금의 주인과는 판이한 표정이었다. 얼굴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청룡이 아는 주강혁은 조금 얼빠진 면이 있지만, 기억 속의 주강혁은 한없이 필사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 한낱 인간이 하늘을 움직이려 드는 이 상황이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청룡은 싸늘한 미소와 함께 도력을 끌어 올렸다.
수많은 건물의 잔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무슨······?'
기억을 확인한 청룡은 기겁했다.
마치 주인과 싸움이라도 벌이려는 것 같지 않은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존재한 적 없는 기억이다.
주인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존재할 수도 없고.
'다른 세계의 가능성? 그럴 리가 없죠.'
기본적으로 시간 축은 하나뿐이다.
삼라만상을 통틀어 이 세계에는 하나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분화하거나 되풀이되는 일은 결코 없다.
그건 오래전부터 약속된 시스템 상의 맹약이었으므로.
그렇다면 이 기억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합류한 예언자 때문에 생긴 이변?
"정신 차리게, 청룡!"
주작의 외침에 청룡이 정신을 차렸다. 눈앞에 보이던 환상이 거품처럼 사라졌다.
"괜찮은 겐가? 왜 넋을 놓고······."
걱정스러워 하는 주작. 그러나 가브리엘과 루시퍼는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루시퍼가 먼저 물었다.
"너도 본 거구만."
"설마 선배님들도······?"
"우연이라고 넘기기엔 걸린단 말이지. 아, 주인님.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우선은 눈앞의 놈들부터······."
그랬다. 아직 전투가 한창이었다.
무명의 걱정스런 눈길이 느껴졌다.
청룡은 싱긋 웃으며 여의주를 들어 올렸다.
"제가 심려를 끼쳐드렸네요. 별거 아닙니다."
청룡은 정신을 가다듬고서 여의주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 막대한 도력이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힘을 방출하는 순간.
콰아아—!
푸른 안개가 바다가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거대한 안개의 해일이 사막을 덮쳤다. 무수한 병사들이 파도에 휩쓸려 떠밀려 나갔다.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다. 대상을 분해하고 무력화 시키는 거대한 도력의 분출이었다.
"······브레스를 뿜을 줄 알았는데."
가브리엘이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청룡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그것도 나중에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브레스?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엘리스의 입이 한층 벌어졌다.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조금 전 일격은 도시 하나를 가볍게 휩쓰는 규모의 공격이었다.
알고는 있었다.
무명과 사도들이 강하다는 것을.
앞으로 더욱 강해질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그런데도 놀라웠다.
'······여전히 개인에게 주어지기엔 너무 큰 힘이지 않은가요.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고, 운명의 흐름은 무명을 중심으로 흐르고 있으니.'
엘리스는 무명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과 얼굴은 로브 속에 철저히 가려져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떠한 감정인지조차 볼 수 없다.
심지어 빵을 꺼내 여유롭게 씹어먹기까지.
'······.'
과연 같은 인간인가 싶은 수준이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엘리스는 입술을 씹었다.
'이제는 정말로 막을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막으려 하면 막으려 할수록 성장은 가속된다. 온갖 인과가 거듭해서 쌓여간다. 복잡하게 얽힌 매듭조차 무명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을 단칼에 끊어버릴 힘이 무명에겐 있으니까.
'부디 무명의 존재가 인류에게 재앙으로 다가오지 않기를······.'
엘리스가 복잡한 심정으로 있는 사이.
주강혁은 만족스럽게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조화의 빵은 한 번만 먹어도 30분 간 포만감이 유지된다. 덕분에 아주 편하다. 전투는 사도들에게 맡기면 충분하다.
『 Lv.200을 달성하셨습니다. 』
『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오, 나이스.'
전장의 포인트도 빠르게 쌓여가고 있다. 쌓이는대로 전장의 혜택을 최대치로 올렸다.
- 힘 능력치를 10.0 배 상승시킵니다.
- 민첩 능력치를 10.0 배 상승시킵니다.
···
- 스킬 데미지를 5.0 배 증가시킵니다.
- 데미지를 5.0 배 증가시킵니다.
- 소환수의 능력치를 5.0 배 증가시킵니다.
'전장의 혜택도 죄다 챙겨야지.'
이곳 기사의 영역도 전장으로 취급되는 모양이니까. 묵시록의 기사와의 전투를 대비해 쓸 수 있는 건 전부 사용했다.
사도들이 사막의 병사들을 빠르게 제거해 나간다. 조급해 할 필요는 없었다. 조만간 만나게 될 것이다.
'묵시록의 기사······.'
이쪽이 직접 찾아가든, 놈이 이쪽으로 찾아오든.
* * *
"처, 처참하게 지고 있잖아. 이봐, 정복······. 듣고 있나? 네 놈의 병사들이 죄다 박살 나고 있다고······!"
사막의 오아시스.
호수를 들여다보던 가논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사도들이 강해지기도 했거니와,
전장의 혜택이 겹쳐지니 놈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심지어 무명 일행은 예언자를 대동해 오아시스까지 찾아내려 하고 있었다.
[ 당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
묵시록의 기사 정복은 말에 올라탄 채 가논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안광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 이 영역 전체가 나의 세계다. 무엇이 두려운지 모르겠군. ]
가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물론, 종말의 기사가 강력한 것은 맞다.
진(眞) 종말급에 해당하는 중위 존재.
마인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중위 존재를 사용해 여러 차원을 멸망시켰다. 가논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무명(無命)은 전대미문의 존재였다.
마족의 역사를 통틀어도, 저런 규격 외의 존재가 나타났던 적은 없다. 이따금 등장했던 타차원의 영웅들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튜토리얼에서 칠죄종을 박살내고,
1페이즈에서 묵시록의 기사의 영역에 들어와 깽판을 친다니.
'젠장.'
가논은 얼굴을 찡그렸다. 최상위 마족인 자신조차 그리 할 자신은 없었다.
[ 너는 이곳에 있어라. ]
정복의 음성이 낮게 깔렸다. 검은 진흙이 끈처럼 솟아나 가논을 속박했다.
"뭐, 뭐냐?"
[ 네 놈이 죽으면 곤란하다.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어라. 내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을 두 눈에 새기거라. ]
묵시록의 기사는 대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 군세여 일어나라. ]
드드드······.
그 말에 사막 전체가 살아있는 것처럼 진동하기 시작했다. 내부에 품고 있던 검은 진흙들이 방울 방울 솟아오른다.
쿠웅! 쿠웅!
그것들은 거인이 되어 지상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한 거인들이 끝도 없이 몸을 일으킨다.
지금까지가 단순한 환영 인사에 불과했다면, 이제부터는 진짜 전쟁의 시작이었다.
[ 나는 멸망 시킨 세계의 영혼을 이 땅에 길들였다. ]
붉은 모래 속에 솟아 하늘로 올라가는 무수한 영혼들.
[ 그 힘을 사용할 때가 되었다. ]
무수한 영혼이 묵시록의 기사를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밤하늘을 통해 영혼들이 기사를 보호하듯 둥글게 뭉쳤다.
눈부신 빛이 오아시스를 뒤덮었다.
가논이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묵시록의 기사는 적색의 보호막으로 보호되고 있었다.
붉은 보호막 위로 수많은 영혼이 강물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미친······.'
얼마나 많은 차원의 영혼들이 사용된 건지 가늠이 안 갈 정도였다. 시스템이 도래한 이후로 모아온 천문학적인 양의 영혼들.
묵시록의 기사는 찬란한 방어막 뒤에 모습을 숨겼다.
[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라. 무명을 끝낸 뒤에는, 네가 원하는 현세의 종말이 찾아올 테니. ]
방어막 너머에서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땅을 박차고 날아 올랐다.
묵시록의 기사가 밤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그는 적색의 별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 뒤를 거인의 군세가 뒤따른다. 대지가 끊임없이 울린다. 사막이 요동치는 듯하다.
묵시록의 기사가 사라진 뒤에야 가논은 입을 열었다.
"나는 종말이 아니라 지배를 원하는 거다만······."
그러나 지금은 검은 끈에 꽁꽁 묶인 채였다. 무슨 짓을 해놨는지 마기를 끌어 올려도 풀 수가 없었다.
탈출을 포기한 가논은 호수를 들여다보았다.
'그래, 뭐가 되었든 무명에게 복수할 수 있다면······. 상관 없다.'
잃어버린 팔과 다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심지어 이번에 묵시록의 기사가 패배한다면, 무명에게서 도망치더라도 대리자에게 무슨 조율을 당할지 모른다. 아니, 그 전에 마인 사회에서 제명 당하겠지.
'뭐가 되었든 이겨야 한다······.'
가논은 이를 악문 채 호수를 응시했다.
* * *
[ 강하구나, 무명. ]
묵시록의 기사는 자신의 붉은 사막을 내려다보았다.
무명의 사도들이 휩쓸고 간 자리에는 무엇 하나 남아 있지 않았다. 진흙 병사들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사막의 지형 자체가 바뀌어 있었다.
그러나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뒤를 따르는 거병 군단은 패배를 모른다. 설령 사도들이라고 해도 쉽게 상대할 수 없을 강함이다.
적색의 말이 허공을 내달렸다.
정복은 머지않아 무명과 그 일행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 보스 등장."
"저게 묵시록의 기사입니다."
"비겁하게 보호막 뒤에 숨어 있다니, 부끄러운 줄로 알게나."
사도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었다.
긴장감 하나 없는 그들의 목소리에 정복은 미간을 좁혔다. 몇 천 년만에 불편한 감정이 올라온다.
그들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묵시록의 기사인 자신을 한낱 마물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듯했다. 참으로 오만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 성좌들이여, 그대들의 주인은 이 자리에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
붉은빛의 보호막을 두른 묵시록의 기사가 입을 열었다.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고 사막 전체가 옅게 진동했다.
그 격을 직접 마주한 엘리스의 무릎이 잠시 꺾였다.
중위 존재의 격은 하위 존재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러나 무명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전장의 혜택 덕분일지도 몰랐다. 허나, 그 점이 정복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고오오—!
붉은 사막 위로 모래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수많은 진흙 거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 남길 말은 있는가. ]
묵시록의 기사가 다시 물었다.
그러나 무명으로부터의 답은 없었다.
콰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광선이 정복의 보호막을 강타했다. 공중에서 강력한 폭발이 치솟았지만, 보호막에는 흠조차 나지 않았다.
[ 대화를 할 생각은 없다는 걸로 알겠다. ]
보호막을 구성한 영혼들이 끝없이 흘러가며 공격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 보호막이 있는 한 무명은 자신을 죽일 수 없다.
"······무슨 방어막이 저러냐."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해가 가지 않는 단단함이었다.
"지불한 대가가 클수록 강해지는 걸세. 그런 영혼들로 이뤄진 방어막이니, 쉽게 뚫리지 않을 수밖에."
주작은 간단하게 설명했다.
"뭐가 되었든 쳐부수면 된다는 거 아니야."
"시도는 해 봐야겠지."
[ 하. ]
정복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 쉽게 부서질 방벽이었다면, 애초에 직접 무명의 앞에 나서지도 않았으리라.
[ 나를 어찌 그다지도 우습게 보는가. 싸움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 사이에 현세는 종말을 맞이할 것이고. 네 놈들이 할 수 있는 건 죽음을 기다리는 것 뿐이다. ]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지."
"전력으로 가보죠. 현세가 아니니까, 주변을 신경 쓸 필요는 없겠죠. 그 점은 오히려 좋네요."
무기를 거머쥔 사도들이 앞으로 나섰다.
사도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콰아아아—!
어두운 밤하늘을 새하얗게 물들이는 공세였다. 직접적인 공격을 받지 않음에도 거병들은 차례차례 무너져갔다. 전장의 혜택과 사도들의 무력이 합쳐지며 막대한 시너지가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호막만큼은 파괴되지 않는다.
루시퍼의 마도광선에도.
청룡의 도력 앞에서도.
주작의 불기둥을 맞고도.
흠집조차 나지 않는다. 무수한 영혼들이 묵시록의 기사를 지키듯 감싸고 있었다.
거대한 크레이터가 사막 한 가운데 생겨났다. 일대의 지형이 판이하게 뒤바뀌는 공격이 쏟아졌지만, 보호막은 그대로였다.
"쯧······."
루시퍼가 혀를 차며 무명의 앞에 내려앉았다. 무명의 뒤에 서 있던 엘리스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영혼 보호막. 축적된 역사와 희생이 지극히 방대해서 뚫어낼 방법이 없을지도 모르죠."
"시덥잖은 소리나 할 거면 돌아가라. 예언자."
"······."
엘리스는 침묵했다.
사도들의 그 강한 공격이 통하지 않을 정도다. 보호막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많은 차원이 희생되었을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애시당초 묵시록의 기사는 4페이즈에나 나타날 존재.
차라리 현세였다면 나았을 거다. 시스템의 제한이 존재했을테니까. 1페이즈에 걸맞는 조정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여기는 기사의 영역이었다. 따라서 기사에겐 제한이 존재하지 않는다.
묵시록의 기사가 무명을 의식해 보호막 속에서 나오지 않는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콰과과과—!
거병들을 몰아내는 주작과 가브리엘. 다시금 날아오른 루시퍼가 청룡과 함께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엘리스는 고개를 돌려 무명을 바라봤다.
그녀의 역할은 무명을 묵시록의 기사 앞으로 데려오는 것 뿐.
그 뒤는 모두 무명에게 달려 있었다.
"······."
빵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은 무명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루시퍼 궁극기를 발휘해."
그 효과는 모두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하는 것.
물론 그것만으론 부족했다.
무명은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저 방어막. 확실하게 영혼들로 이뤄져 있는건가?"
그는 엘리스에게 확인하듯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언을 통해 확인한 미래에서 습득한 정보였다. 틀림 없었다.
"알았다."
그리 말한 무명은 칼집에서 검 한 자루를 뽑아냈다.
눈부시게 새하얀 도신을 지닌 검 하나.
『 사도 '루시퍼'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흑암(黑暗) : 종말의 밤 』
루시퍼가 궁극기를 발휘하며 사도들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고 주변의 공간이 눈에 띄게 왜곡된다. 그러나 여전히 보호막을 뚫기엔 부족하다.
스스스······.
무명의 주위로 죽음의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곳 사막에도 죽음의 기운이 만연했다. 그 기운을 검 위로 모은다.
고오오오—.
무명의 주변으로 죽음의 기운이 미친 듯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들을 제어해 검에 부여하는 일은 너무도 쉬웠다.
오래 전부터 해온 일처럼 능숙하다. 무명검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저게 영혼으로 이루어진 보호막이라면······.'
그 실체는 무수한 영혼의 집합.
따라서 무명은 확신했다.
'그렇다면 무명검으로 죽일 수 있을 거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무명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콰앙-! 전장의 혜택으로 향상된 능력치의 보정을 받아 쏘아지듯 날아 올랐다.
[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대로 둘 순 없지. ]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병들이 던진 무기가 무명을 향해 쇄도했다.
콰과과—!
그러나 그 공격이 무명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화아악! 주작이 만들어낸 화염이 비처럼 쏟아지는 무기들을 집어삼켰다.
이번에는 보호막 속에서 반월형의 검기가 쏘아져 나왔다. 주작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가브리엘 양!"
콰아앙-!
"청룡."
가브리엘은 무명을 향해 날아드는 검기를 쳐내며 후배의 이름을 불렀다.
화아악! 청룡이 타이밍에 맞춰 도력을 쏘아 보냈다. 강한 돌풍이 일며 무명을 강하게 밀어 올렸다.
"선배님!"
이번에는 허공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퍼가 무명을 붙잡았다.
"주인님! 이대로 보호막까지 보내드리겠습니다!"
루시퍼는 있는 힘껏 보호막을 향해 무명을 내던졌다.
콰아아아—!
가공할 속도로 가속한 무명은 순식간에 보호막 앞에 도달했다. 붉은색의 보호막 위로 수많은 영혼들의 흐름이 똑똑히 보인다.
무명검에 두른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솟아올랐다.
'찌른다. 그대로 박아 넣는다.'
주강혁은 모든 힘을 다해 검날을 보호막에 찔러 넣었다.
콰악.
[ 소용없다. 보호막을 뚫을 방법은······. ]
정복의 메마른 목소리가 들려 오는 바로 그 순간.
화아아악-!
무슨 짓을 해도 뚫리지 않던 보호막이 사라졌다.
끊임없이 흐르던 영혼의 물결이 일시에 재가 되어 흩날렸다.
뻥 뚫린 시야 속으로 붉은 말을 탄 남자가 보인다.
그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잘 보인다.
보호막이 뚫릴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한 얼굴.
한순간,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허나, 느릿한 시간 속에서도 묵시록의 기사는 빠르게 움직였다.
붉은 말이 달려온다. 기사의 대검이 무명을 향해 쇄도했다.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인지를 초월한 압도적인 움직임.
그러나 무명은 망설이지 않았다.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죽어."
그는 눈앞의 적을 향해 분명하게 말했다.
82화. 전장의 사냥터(1)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이었다.
인류는 오랜 시간 다가올 종말에 대해 고민했고 또 두려워했다.
신화와 종교, 설화와 구전······.
종말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곳에서도 빠지지 않는다. 인간이란 동물은 언제나 가슴 속에 최후에 대한 공포를 품고 살아가는 것이다.
종말에 대한 공포.
그것이 묵시록(默示錄)의 기사를 존재하게 만들었다.
그 어떤 차원도, 묵시록의 종말 앞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들은 계시의 강림에 두려워했으며 살아남기 위해 발악해야 했다.
- 죽여라,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젠장, 나도······.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하지만······!
- 결국에 살아남을 수 있는 게 우리뿐이라면······.
무수한 종족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많은 차원이 분쟁 속에서 사라졌다.
묵시록의 기사 정복.
그가 걸음을 내디딘 땅 어디에나 피와 전쟁이 만연했다.
마땅히 겨눠져야 할 칼은 서로에게로 향했고, 끝없는 전쟁 속에서 스스로를 인류라 불렀던 자들은 서로를 원망하며 죽어갔다.
페이즈 4.
묵시록의 도래.
이 시련을 쉽게 극복한 차원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극복하더라도, 소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을 뿐이었다.
붉은 사막에 묶인 영혼들의 수가 그 증거였다.
현세에 강림했을 때.
묵시록의 기사는 승리를 의심치 않았다.
'매우 이른 시기다. 현세의 인류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으니, 나를 막을 자도 없다.'
현세는 그가 멸망시켜 온 무수한 차원 중 하나에 불과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딱 하나뿐.
'무명(無命).'
무명이란 이름을 가진 변칙적인 존재. 허나, 이 정도의 변칙은 언제나 있어 왔다.
영웅이란 이름으로 칭송받는 존재들.
송곳처럼 튀어나와 세계를 구할 명운을 짊어진 자들.
그들의 최후는 어떠했는가?
말할 것도 없다.
비참했다.
시스템의 거대한 흐름 앞에 그들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만했다. 운 좋게 살아남는다 해도 황폐해진 세계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묵시록의 기사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끝마치지 못한 적이 없으며, 시스템은 그들에게 자비를 행사하지 않으므로.
무명(無命)은 스스로 기사의 영역에 발을 디뎠다.
시스템의 맹점을 파고들었다고 생각했겠으나, 실상은 무명이 제 무덤을 판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곳은 묵시록의 기사 '정복'이 구축한 고유의 영역. 이 안에서 정복의 한계는 사라진다.
무한에 가까운 병사를 일으킬 수 있으며, 영혼 보호막의 방어력은 한계를 모르고 치솟았다.
무명은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보호막을 뚫을 수 없으며, 그동안에도 세계는 시시각각 멸망을 맞이할 것이다.
그리 자신했다.
근거는 충분했다.
그가 무너뜨려 온 무수한 차원.
그 경험들이 명백히 답을 내려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어째서.
화아아악—!
고작 하나의 인간에 불과할 존재가······.
이토록 간단히 자신의 방벽을 꿰뚫는단 말인가.
자신이 이룩해 온 멸망의 성과를, 이토록 간단히 짓밟는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할 기적이었다.
수많은 영혼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한 번 죽음을 맞이했던 영혼들이, 다시금 죽음을 맞이하며 소멸했다.
이윽고 무명의 입이 움직인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전력을 다해 내달렸다.
묵시록의 기사는 다급하게 검을 내질렀다.
푸확-!
대검은 무명을 꿰뚫었다.
애시당초 그만한 격차가 있었던 것이다.
무명의 능력으론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을 만큼의 차이가.
희열감과 함께 묵시록의 기사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명은 죽지 않았다.
[ ······! ]
무명의 몸이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꿰뚫었다고 생각했던 대검은 그에게 아무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 종말의 귀걸이가 치명적인 일격을 감지합니다. 』
『 영체화하며 3초간 피해 면역이 됩니다. 』
무명은 피하지 못했던 게 아니다.
처음부터 상관없었던 것이다.
피할 필요도 막을 필요도 애초부터 없었던 거다.
묵시록의 기사는 검을 떨구었다.
여기서부턴 어떤 발버둥도 무의미하리라.
이토록 무력한 최후를 맞이했던 적이 있었던가.
묵시록의 기사가 쓴웃음을 삼키는 그 순간.
무명으로부터 최후의 선고가 내려졌다.
푸화악!
그 선고는 어느 때보다 잔인하고 차가웠다.
* * *
"허어억······."
오아시스에서 호수를 들여다보고 있던 마인 가논.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뭔 일이 일어난 거야?"
믿을 수가 없었다. 묵시록의 기사가 자랑하던 영혼 방어막이 단번에 꿰뚫렸다.
마계에서 전투하더라도 저건 뚫어낼 자신이 없었다. 그만큼 많은 인과가 부여된 보호막이었다.
투둑, 투두둑······.
그때, 가논을 속박하고 있던 검은 진흙이 떨어져 나갔다. 속박에서 벗어난 가논은 곧장 몸을 일으켰다.
'······.'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가논은 한동안 멍하니 호수를 바라보았다.
묵시록의 기사가 쓰러졌다. 영상이 투영되던 호수의 표면 위로는 이제 자신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가논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도, 도망을······."
도망을 친다면 어디로?
자신이 말하고도 우스웠다.
진 종말의 열쇠까지 사용한 마당에 패배는 용납되지 않았다. 마계 측의 지배 계획 자체가 어그러지는 대참사였다.
심지어 기사의 영역 바깥으로 나가는 즉시 대리자가 달려들 것이다.
대리자들은 가논을 집요하게 추적해 올 것이다. 이번에는 팔 다리를 잃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게 확실하다.
"무명. 무명······."
가논은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오아시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복수심조차 들지 않는다. 아련한 공포심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묵시록의 기사로도 막지 못했다.
이제 무엇으로 무명을 없애야 하는가?
심지어 놈은 더욱 강해질 거다. 묵시록의 기사를 처치한 보상이 무명을 더욱 성장시킬 거다.
현세의 수준에 머물렀던 무명이, 차원적인 규모로 강해질지도 모른다.
아니, 이미 그만한 수준이리라.
이번 사건의 내막을 무명도 파악하고 있다. 만약 그의 화살이 마계로 돌려진다면?
원로들은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가논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뭐가 되었든 괴물을 키워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 된 건지.
가논이 머리를 부여잡은 채 사막을 방황하고 있을 때였다. 사막의 언덕 너머로 흑색 로브를 걸친 인간이 걸어오고 있었다.
"허, 허어억······."
가논은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최상위 마족으로서의 체면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대항할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묵시록의 기사와의 전투가 그만큼 충격적이었기에.
무명 측의 전력은 그만큼 압도적이었다. 무명은 단 한 차례도 물러서지 않았고 파죽지세로 기사를 처치했다.
"무명······."
고개를 떨군 가논이 자포자기하듯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위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뇨, 나는 무명이 아닙니다."
"······?"
신원미상의 남자는 로브를 벗었다. 금발 아래 동그란 안경과 훤칠한 얼굴이 드러났다.
"누, 누구냐······."
"저는 평범한 인간입니다. 제가 모시는 분이 심상치 않을 뿐이죠."
"모시는 분?"
남자는 싱긋 웃으며 가논에게 말했다.
"혼돈의 지배자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세요."
"호, 혼돈의 지배자라면······."
답하는 가논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지배자는 또 다른 중위존재였다.
묵시록의 기사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지배자들이 가지는 위상은 묵시록의 기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다.
묵시록의 기사들은 시스템에 묶인 종속체지만, 지배자들은 범차원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불리므로.
이 세계는 수많은 차원으로 이뤄져 있다.
마계, 문명계, 마법계, 현세······.
이러한 차원들을 모두 묶어 범차원(汎次元)이라고 부르는데, 범차원은 또다시 네 가지 영역으로 분류된다.
혼돈, 심연, 질서, 천상.
지배자들은 각 영역의 정점으로서 군림한다.
그들이야말로 의심할 여지 없는 범차원의 주인.
'존재한다는 건 알았지만······. 마족의 기록으로도 몇천 년 전에 나타났던 게 전부인데.'
가논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나, 나를 왜?"
"저야 모르죠. 위대하신 지배자님의 생각을 저 같은 일개 부하가 어찌 알겠나요."
남자는 그리 말하면서 손가락을 뻗었다. 토옥. 허공에 잔물결이 일며 보랏빛의 게이트가 생겨났다.
가논은 흠칫했다.
틀림없는 게이트였다.
남자는 시스템을 자유롭게 조작하고 있었다. 마인의 기술력으론 뭘 어떻게 해도 간섭까지가 한계였다.
"안 갈 거예요? 이대로 있다가 죽고 싶으면 말고요."
"아, 아니. 가겠다."
밑져야 본전이었다.
지배자의 영역이라면 대리자의 추격도 피할 수 있을 테고, 이대로 있다가 무명에게 죽는 것보단 나을 테니.
그러나 막상 걸음을 떼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가논이 망설이자 남자는 검지로 안경을 올려쓰며 웃었다.
"아, 잘은 모르지만······. 지배자께선 무명(無命)을 없애고 싶어 하시거든요. 이번 일로 확신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가시죠."
그제서야 가논은 마른침을 삼키고선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지배자라면 다를지도 모른다.
아니, 달라야만 했다.
현세 지배의 총책임자로서 모든 게 틀어진 지금, 지배자가 내민 손은 가논에게 내려온 유일한 동앗줄이었으므로.
지배자는 절대적인 존재다.
설마 무명이 지배자보다 강하겠는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말도 안되고 말고.'
그러나 가논은 어째서인지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 * *
묵시록의 기사 '정복'은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릿했던 시야가 선명해진다.
푸르른 녹림과 에메랄드 빛의 호수.
은신처인 오아시스였다.
분명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정복은 살아 있었다.
"일어났냐? 오, 월척."
모래 바닥에 걸터앉아 낚시를 하고 있던 루시퍼가 고개를 돌렸다. 낚싯대로 낚아 올린 금강석 물고기가 허공에서 퍼덕이고 있었다.
"오아시스 전체가 보물창고던데? 호수에 풀어둔 물고기만 해도 이게 얼마야."
[ 놈······. ]
정복은 곧장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몸이 없었다.
자세히 보니 자신은 투명한 유리 상자에 담겨 있었다. 루시퍼가 유리를 툭툭 쳤다.
"쯧, 징그러우니까 움직이지 마라."
[ 내게 무슨 짓을 한거냐. ]
"주인님께서 베푸신 잠깐의 자비다. 아니지, 형벌인가?"
보는 이에 따라 다소 섬뜩한 광경이었다.
정복은 머리만 남은 채 유리 보관함에 담겨 있었다. 그대로 안광만 번뜩이고 있으니 호러가 따로 없었다.
[ 내게 뭔 짓을 한거지? ]
"모른다. 주인님의 능력은 알면 알수록 신기한 부분이 있어서."
[ ······. ]
정복은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몸은 복구되지 않았다.
마력을 불러올 수도 없고 시스템에 접근할 수도 없다.
없어진 것은 몸뿐만이 아니었다. 묵시록의 기사를 이루고 있던 근간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저 살아 있을 뿐.
"다들 이리 와 보시죠. 정복이 깨어났습니다."
루시퍼가 크게 손짓하자, 사도들과 무명이 다가왔다.
"보물이 한가득."
가브리엘은 호수에서 발견한 보물들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금 목걸이에 금 반지, 금팔찌, 금 귀걸이까지. 아주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이걸 가지고 가서 게임에 현질할거야."
"잠깐, 차원 고고학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물건들이 많다네. 잊혀진 차원들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기회인데 그냥 파는 건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그리 말하는 주작의 배낭은 각종 보물로 꽉 차 터지려 하고 있었다.
[ ······보물을 노린 건가. 가져가라. 네 놈들에겐 그럴 자격이 있으니. ]
정복은 한탄하듯 말했다.
영악한 술수였다.
묵시록의 기사인 정복이 죽으면 이 공간도 닫히게 된다. 하지만 어떻게든 살려만 둔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공간은 계속해서 유지된다.
이 안에 있는 재보를 마음껏 탐할 수 있다.
이번에는 오아시스를 둘러 보던 청룡이 물었다.
"열심히 찾아봤는데 아이템은 없네요. 숨겨둔 건가요. 아니면 원래 없는 건가요?"
[ 필요가 없으니 모으지 않았을 뿐이다. ]
"그렇게 치면 금은보화도 쓸데없지 않나요."
[ 없는 건 없는 거다. 있었더라도 이 세계가 닫힐 때 효과가 사라진다. ]
"가브리엘 선배님, 진심인가요?"
"응, 진짜인 듯."
참으로 집요한 놈들이었다.
[ 보물을 챙겼으면 어서 나를 죽이고서 보상을 취해라. ]
"그건 어렵겠는데."
입을 연 것은 무명이었다. 정복은 미간을 좁혔다.
[ 네 놈들에게 협조할 생각은 없다. 나는 칠죄종과 달리 여한 따위 없으니. 애초에 내겐 다른 기사들을 부를 능력이 내겐 없다. ]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이 미묘했다.
"딱히 부려먹을 생각도 없는데."
"칠종이면 모를까, 묵시록의 사기사를 소환하는 건 이쪽도 좀 그래서."
[ 그렇다면 왜 날······. ]
무명은 시스템 창을 열고선 말을 이었다.
"지금 네가 처치되면 곤란하거든. 그 뿐이다."
『 보유 전장 포인트 : 999,999,999 』
정복이 불러들였던 진흙 거병들을 처치하며 포인트는 끝을 모르게 올라가 있었다.
최대치를 넘겨 보유한 포인트가 표시되지 않을 정도다.
무명은 차갑게 말했다.
"네가 죽으면 전장도 종료되겠지. 나는 그래도 상관없지만······."
포인트를 활용하면 전장의 여러가지를 바꿀 수 있다. 전장 전체의 경험치 배율이나, 마물의 수, 헌터들에게 적용되는 버프까지.
붉은 사막에 들어서고 나서 주강혁은 줄곧 생각했다.
'······이대론 끝이 없어.'
강한 녀석을 쓰러뜨렸더니, 더 강한 녀석이 나오고. 그놈을 쓰러뜨리니까 이번에는 미친 듯이 강한 놈이 나온다.
주강혁 자신은 계속해서 강해지는데,
인류가 이 흐름을 따라오지 못한다.
나름 인류 최강이었어야 할 일곱 개의 별이, 기사의 전령을 간신히 막는 정도였으니까.
'나 혼자 전부 막는 건 좀······.'
혹여나 무명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빌딩이 무너져 있다거나 아예 세계가 멸망했다거나.
최소한 그런 일은 없어야 했다.
인류가 적을 상대로 버틸 수는 있어야 한다.
남은 전장의 유지 시간 14일.
"나 말고 다른 헌터들도 강해질 시간을 주려고 하는데."
시스템 창을 조작했다.
포인트를 사용해 전장의 혜택을 사용했다.
『 일부 전장의 전체 경험치 배율이 증가합니다. 』
『 전장에 출몰하는 마물의 수가 증가합니다. 』
『 마물의 체력이 약화합니다. 』
막대한 포인트가 소모되며 전장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전장의 설정값들이 무명 한 명에 의해 뒤바뀌고 있었다.
『 지형 변화를 사용합니다. 』
『 입장 조건을 설정합니다. 』
지형이 뒤바뀌고 출현하는 마물들도 삽시간에 변화한다. 그들이 뱉어내는 경험치도 차원이 달라진다.
"경험치 이벤트. 게이머들이 가장 고대하던 시간이야."
가브리엘이 눈을 빛냈다.
"물론, 사냥터를 아무나 쓸 수 있는 건 아니고······."
주강혁은 뒤쪽에 있는 예언자의 별 엘리스를 바라봤다. 뿐만 아니라 사최헌이나 사도들도 있다.
이들의 힘을 빌리면 위험한 사람들을 사전에 걸러낼 수 있을 거다. 빌런이나 악인들까지 강해지면 곤란하니까.
잘만 된다면 세계가 멸망할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겠지.
[ ······. ]
정복은 어처구니가 없어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살려 둔 이유가 전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니. 이놈들은 자신의 골수까지 뽑아 먹을 셈이었다.
그 지독함에 정복은 할 말을 잃었다.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전장을 사냥터로 사용한다라. 헌터들이 줄을 설 겁니다. 한 사람당 얼마나 받을까요?"
낚시대를 집어 던진 루시퍼가 씩 웃었다.
"······."
"루시퍼는 수전노."
사도들의 싸늘한 시선에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뭐야, 왜 그래. 당연히 돈 받아야지. 우리는 땅 파서 장사해?"
실로 악마적인 발상이었으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잘만 되면 건물 하나를 새로 올리고도 남을 겁니다."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바닥에 떨어져 있던 금화를 들어 올렸다.
83화. 전장의 사냥터(2)
"그러니까······. 다른 헌터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전장을 조정하겠다는 건가?"
우리는 전장으로 돌아와 곧장 사최헌에게로 향했다. 그는 불멸 길드와 함께 사냥 중이었다.
검을 내리고선 땀을 닦아낸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고 지금 그 유리통에 들어 있는 건 묵시록의 기사고······. 내가 지금 제대로 파악한 게 맞나?"
못 믿겠다는 듯이 몇 번을 되물었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일인가.
보다 못한 예언자의 별 엘리스 그레인저가 앞으로 나섰다.
"무명 일행이 묵시록의 기사를 격파하는 걸 제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동시에 포로로 사로잡기까지 한 겁니다."
"······이해했다."
사최헌은 얼굴을 쓸어내리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엘리스에게로 향했다.
"인류의 도움이 되는 헌터들을 선별해달라는 거군. 이 여자와 함께 말이지."
"특별히 이번만 협력하겠습니다."
"도움이 딱히 필요 하진 않다만."
"그건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째 둘의 사이가 좋아 보이진 않는다.
"무명 헌터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협력할 일은 없겠죠. 일곱 개의 별 중 하나이나 사최헌 헌터는 비예언자니까요."
엘리스는 마지못해 협력한다는 듯한 뉘앙스였다. 사최헌 헌터도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사최헌 헌터에게 예언 비슷한 능력이 있다는 건, 대외적으론 비밀이니.
사최헌 헌터는 나를 돌아봤다.
"걱정 마라, 무명. 적절한 인물들을 가려내겠다. 네 말대로 인류 측의 전력을 보강할 기회다."
"인류 멸망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있으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차저차 협력하기로 한 모양.
가급적이면 두 사람을 통해 교차검증 되는 편이 좋을 테니까.
루시퍼도 앞으로 나왔다.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인간들은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놈들도 신화급 사도인 제가 맡을테니 주인님께선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녀석은 신화급이란 말을 굳이 강조했다. 하긴, 루시퍼만 있어도 대적할 헌터가 없긴 하다.
"반발하는 자들이 있겠지만······. 그 점에 대해선 문제없겠군."
사최헌도 납득했다.
"그러면 바로 준비하겠다."
"저희도 움직이겠습니다."
사최헌과 예언자의 별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최헌은 바삐 어딘가로 연락을 취하더니 불멸의 길드원들을 데리고 어딘가로 사라졌고, 엘리스도 연기처럼 모습을 감췄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전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 사냥터부터 만들어둘까."
나는 시스템 창을 조작해 전장의 중심부를 조정했다.
『 포인트를 사용해 전장의 지형을 변화시킵니다. 』
『 다량의 포인트를 사용해 새로운 기능이 해제됩니다. 』
예상보다 세부적인 조정이 가능했다. 포인트를 쓰면 쓸수록 많은 기능이 해금되는 형식이다.
홀로그램으로 이뤄진 맵이 나타났다.
전장 전체가 나타난 지도다.
허가되지 않은 헌터들이 진입할 수 없도록 거대한 격벽을 세운다. 쿠구구구······. 여기에서도 옅은 진동이 느껴진다.
『 지정한 개체의 출현을 0으로 합니다. 』
먼저 중앙의 고난도 마물들을 없앤다. 이후 새로운 마물들로 내부를 채워넣는다.
적당히 고등급 드레이크 같은 걸로 채워 넣었다. 이건 입장하는 길드에 따라 다르게 설정하면 되겠고.
『 해당 지역의 경험치 배율을 증가시킵니다. 』
『 경험치 배율이 50.0배에 도달했습니다. 』
포인트를 투자하자 끝도 없이 경험치 배율이 증가한다. 이 이상으론 오르지 않는다. 시스템 상의 최대치인 모양.
기사의 영역에서 마물을 많이 처치한 덕분에 포인트 걱정은 없다.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직 끝이 아니지.'
개인 혜택을 사용하면 최대 레벨도 올릴 수 있다.
『 최대 레벨이 225로 상승합니다. 』
포인트를 더 투자해도 오르지 않는다. 레벨은 여기까지가 최대치인 모양.
아쉽긴해도 현세의 최대 레벨이 175인걸 감안하면 충분히 높은 수치다.
"그러면 가장 먼저 우리가 사용해 볼까."
사냥터가 잘 완성되었는지 테스트도 해 볼 겸.
그리고 가장 먼저 사용하게 해주고 싶은 사람이 한 명 있다.
* * *
전장의 중심부.
거대한 흙벽으로 둘러싸인 지역.
내부는 평지였지만 드레이크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아아아—!
콰득, 콰드득!
서로 영역 다툼을 하느라 난리였다.
날개가 없는 드래곤, 그 중에서도 하위 호환이라는 평가를 받는 드레이크지만 그 강함은 SS급에 달한다.
본디 무리를 짓지 않는 습성이지만,
무명에 의해 포인트로 강제 소환 되어 뒤엉키고 있었다.
"와우······."
천이령 헌터는 조심스레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여기서 마물을 잡으면 경험치가 50배라고요······?"
"그래, 너 지금까지 마물 잡을 시간이 없었을 거 아니야. 주인님께서 특별히 사용하게 해주셨으니 감사한 줄 알도록."
루시퍼는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제빵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오오—.
천이령 헌터의 양손에 흑색과 백색의 기운이 맺혔다.
대장장이 기술에 이어서 제빵까지.
전투와는 하등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천이령은 그곳에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본디 합쳐질 일 없던 성력과 흑마도술의 융합.
"사실은 조금 의심 했었어요."
눈 앞의 마물을 바라보던 천이령이 문득 입을 열었다.
"왜 나한테 대장장이 기술을 배우라고 했던 걸까. 제빵 기술을 배우라고 했을까. 정말 의미가 있는 걸까."
"······."
"하지만 결국 다 의미가 있었던 거였죠. 이제는 의심하지 않을게요."
루시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물론이지. 위대하신 주인님께선 다 생각이 있으시니, 너는 그대로 따라오기만 하면 되는 거라고."
처음에는 그저 부려 먹을 생각뿐이었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이야기가 다르다.
"꼬맹이, 네 노력이 보답받을 때다. 시작해라."
"네!"
루시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이령 헌터가 땅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콰앙-! 콰과과-!
흑색과 백색의 기운이 폭발하듯 몰아치며 드레이크 무리를 덮쳤다.
쌍검을 든 천이령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드레이크의 질긴 가죽이 종잇장처럼 잘려 나갔다.
'재능은 훌륭하다니까.'
루시퍼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지금까지 대장장이 기술과 제빵 기술을 익히느라 전투는 뒷전이였지만, 이번 사냥으로 천이령은 확실히 보상받을 것이다.
콰아아앙—!
175 레벨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압도적인 경험치와 마물들의 높은 밀집도 덕분이기도 했으나, 천이령 헌터의 기술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세에는 존재하지 않는 능력인 성력과 흑마도술. 그리고 그 두 개를 융합한 혼돈의 기운까지.
천이령의 재능은 그 모두를 자유자재로 다루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독식까지 되니 레벨업이 느릴 수가 없었다.
"사냥터 성능은 확실하네."
이어서 무명이 도착해서 사냥을 시작했다.
사냥이랄 것도 없었다.
주작이 사냥터에 불덩이를 하나 던져 넣으면 충분했다.
콰아아아—!
거대한 불기둥이 내부에 있는 드레이크를 잿더미로 만들어냈다. 사냥이 아닌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레벨은 미친 듯이 치솟아 215에 도달했다. 이미 일일 레벨업 최대치를 달성했기에 오늘은 여기까지였다.
"슬슬 다른 헌터들이 오는군요."
청룡이 입구 쪽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사냥터에 진입한 것은 미국의 헌터들이었다.
미국 랭킹 1위 히어로 데릭과 2위 심록의 안드레를 포함하는 최강자들.
"슬슬 오는 건가. 여기는 제가 맡겠습니다. 주인님께선 돌아가서 편히 쉬시길."
품 안에서 꺼낸 빵봉투를 얼굴에 걸친 루시퍼가 날개를 펼쳤다.
"자자, 인간들아. 사용료는 제대로 내고 들어오는 거겠지."
"······머리에 뒤집어쓴 그건 뭔가?"
그런 루시퍼를 주작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게 있답니다. 저희는 슬슬 돌아갈까요."
청룡이 주작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 * *
나는 사도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몸을 뉘었다. 푹신한 걸로도 모자라 정신적인 피로가 녹아내리는 듯한 느낌이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하루가 너무 길었다. 바깥은 완전한 어둠에 잠겨 있다.
물론 육체적인 피로감은 없다. 종말+급 아이템 에인헤랴르의 육체 강화에 조화의 하얀빵의 피로 회복 효과가 있으니.
정신을 보조해주는 스킬 '지고의 정신'까지 있다곤 하나, 지치지 않을 수 없는 일정이었다.
습관적으로 리모콘을 틀어 보려는데, 가브리엘이 내 손을 붙잡았다.
"지금은 안 보는 게 나을지도."
"왜?"
그리 묻기는 했지만 대충 알 것 같기도 하다. 무명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거겠지.
"정확히는 반반. 좋아하는 사람 반, 싫어하는 사람 반."
"묵시록의 기사가 죽고 전장이 사라지면 여론도 바뀔 텐데 뭐."
나는 묵시록의 기사가 담긴 유리통을 슬쩍 봤다. 약간 징그러워서 천으로 덮어놨다.
자신의 최후를 인정한 듯 조용하다. 어차피 묵시록의 기사가 죽고 시련이 끝나면 다들 괜찮다고 할 거다.
그리고······.
딱히 여론을 신경 쓰진 않는다.
오해해도 그러려니 한다.
청룡이 화제를 돌리려는 듯 입을 열었다.
"이제와서 하는 말이지만 주인님께서 보호막을 파훼하셨을 때 상당히 놀랐습니다."
"아, 그거."
"······그리고 공격받으셨을 때도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피해 면역 상태를 만들어 주는 귀걸이가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였으면 일단 물러났겠지만."
보호막을 파괴한 건 운이 좋았다.
기사의 보호막이 영혼으로 이뤄졌다는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죽음의 기운을 직접 씌울 순 없었지만······.'
무명검에 사기(死氣)를 담아 찌르는 건 가능했다.
생명체가 아닌 인형이나 언데드여도 죽이는 게 가능하다면, 유령과 같은 영체도 죽이는 게 가능할 테니까.
"그것보다 지금 문제는 이거야."
나는 랜턴을 꺼내 들었다.
『 [ 아티팩트 ] 혼돈(混沌) : 소울 이터 』
영혼을 섭취해 아이템을 뱉어내는 아티팩트.
"영혼을 너무 많이 먹였나. 아까 사냥터에서부터 미동도 안 해."
드레이크를 아무리 잡아도 영혼을 먹지 않는다. 모여야 할 영혼들이 죄다 흩어졌다.
주작이 흥미롭다는 듯이 랜턴을 살폈다.
"······진화하려는 걸 수도 있다네."
"진화?"
"이 랜턴은 에고 아이템이지 않은가. 상당한 양의 영혼을 흡수했으니 성장하는 걸세."
나는 가브리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브리엘이 줬던 아이템인데 뭔가 알지 않을까 싶어서.
"몰라···. 뭐야, 그게······. 내 랜턴 돌려줘······."
예전하고 반응이 비슷하다. 업그레이드를 거치며 가브리엘도 완전히 모르는 아이템이 된 모양.
랜턴이 일시정지 하긴 했으나, 필요한 아이템은 거의 얻어 놓긴 했다. 전장에서 잡은 보스와 마물들의 수가 상당했으므로.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5 』
『 궁극기 초기화권 x 1 』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x 3 』
나머지는 대부분이 플래티넘 코인이었고.
그 외에 특별한 아이템은······.
『 성좌 거래권 x1 』
성좌 거래권 정도일까.
『 다수의 성좌들이 자신과의 거래를 종용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자신이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
당장 쓸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 모르니 물어보자.
"······종말급 아이템 있어요?"
『 다수의 성좌들이 시선을 회피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파산할 일 있냐고 되묻습니다. 』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필연적으로 많은 대가를 필요로 하네. 물론 나는 주인에게 전재산을 투자해 미리 후원을 해두었지."
주작은 그리 말하며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주작이 여기 올 때 미리 후원해뒀던 아이템들이었다.
"이 물병은 어떤 물체든 완벽하게 보관해주는 보온병일세."
"좋은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대단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병에 든 불꽃은 절대 꺼지지 않는 불꽃일세. 껴앉고 자면 따듯하고 또 무한한 에너지원이고······."
"흐음······."
우리들의 애매한 시선에 주저리 주저리 설명을 덧붙이던 주작이 고개를 떨궜다.
"······가난해서 미안하네."
딱히 뭐라고 하려던 건 아닌데.
주작이 미리 보내둔 것 중에 당장 의미 있는 건 무기 조각 정도다.
『 사도 전용 무기 조각(赤) x 5 』
주작이 직접 3개를 후원했고,
랜턴의 보상으로 2개를 추가로 얻었다.
'조각은 전부 모았는데.'
이제 무기를 만들 수 있다.
전용 무기 하니까 기사의 영역에서 사도들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 괜찮은 겐가? 왜 넋을 놓고······.
- 너도 본 거구먼.
- 설마 선배님들도······?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전용 무기를 얻었을 때 뭘 봤던 거야?"
"나도 궁금하네."
유일하게 전용 무기가 없는 주작도 고개를 들었다. 청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다른 세계의 환상이라고 할까요. 전용 무기를 쥐는 순간, 주인님과 반목하는 제 모습이 보였습니다."
청룡은 그때 보았던 것을 상세히 설명했다.
대충 멸망한 세계에서 내가 청룡하고 싸웠다는 듯 하다.
"나도 비슷했어. 직접 싸우진 않았지만, 주인을 무시하는 느낌. 나랑 성격도 완전 딴판."
가브리엘도 비슷한 환상을 본 듯했다.
"정황상 주작도 전용 무기를 들게 되면 비슷한 환상을 보게 될 것 같습니다."
"······."
우연이라고 그냥 넘기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
나는 허리에 차고 있던 무명검을 살폈다. 검의 이름은 틀림없는 무명(無命)이다.
이것도 우연인 것 같지가 않다.
결론은 간단했다.
"주작의 전용 무기를 만들어주면 비슷한 환상을 더 볼 수 있다는 거잖아."
마침 조각 다섯 개가 전부 모였다.
주작이 전용 장비를 획득한다면, 모든 사도가 무기를 갖추게 되는 셈. 무언가 달라지는 게 있을지도 모르고.
"준비 됐어?"
나를 포함한 사도들의 시선이 주작에게로 모였다. 주작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고개를 들었다.
"······준비 됐네."
『 다섯 개의 조각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
『 적색 사도의 전용 무기가 완성됩니다. 』
신화+급 사도의 전용 무기가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무기를 손에 쥔 주작은 대체 얼마나 강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84화. 현세 침공(1)
화아악—!
붉은 화염이 주작의 주변으로 휘몰아친다. 맹렬하지만 뜨겁지는 않은 적색의 기운은 이내 지팡이가 되었다.
새빨간 옥석이 박힌 스태프.
터억.
주작은 기쁜 마음으로 스태프를 움켜쥐었다. 그녀의 전신 위로 일어난 불길이 이내 로브를 형성했다.
"굉장히 강해진 느낌이기는 하나, 딱히 기억 같은 건······."
주인과 사도들의 시선에 주작이 볼을 긁적이는 그 순간이었다.
"······!"
뇌리에 박히듯 어떤 기억이 스며들었다.
붉은 하늘, 끝없이 타오르는 대지 아래.
주작 자신이 있었다.
건물의 잔해 위에 올라선 그녀는 고고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 사내를 깔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흐름이 아닐세. 그대들은 놀이판 위의 기물에 지나지 않는다네.
사내의 몸은 불길로 타오르고 있었다. 극심한 작열감에 몸부림치면서도 남자는 입을 열었다.
- 무엇이 그렇게 어렵다는거냐. 무엇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는 거냐. 네 놈들 성좌는······!
섬뜩한 눈빛이 주작을 향했다. 그러나 주작은 벌레 보듯할 뿐이었다.
지독한 불길이 다시금 남자를 덮쳤다.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남자의 이름은 주강혁이었다.
- 인류에게 그만큼의 가치는 없다네. 현세는 셀 수 없이 존재하는 수많은 차원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대 또한 그 일부에 지나지 않으니.
'뭐, 뭐란 말인가? 이 기억은.'
청룡은 환상이라고 에둘러 말했지만, 주작이 생각하기에 이건 기억이었다.
오랜 시간, 잊고 있었던 기억을 되새기는 듯한 감각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은 없었네.'
주인을 벌레 보듯하는 자신의 모습은 경악스러웠다. 심지어 불로 주인을 공격하는 것도 자신이었다.
"정신차려, 주작."
"으아아."
정신을 차리니 가브리엘이 주작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애초에 기억 같은 거라 깊게 빠져들 것도 없었다.
"일단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도 보였네."
주작은 자신이 보았던 기억을 사도들과 주인에게 설명했다. 자신의 의견도 덧붙였다.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네만······. 모든 사도들이 비슷한 기억을 보았지 않은가. 실제로 있었던 일일지도 모르네."
"주작이 생각하기엔 환각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거군요."
청룡은 흥미롭다는 듯 팔짱을 꼈다.
"하지만 있을 리가 없는 기억이죠. 주인님과의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만약 이게 환상이라면······. 미래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네. 반면 기억이라고 한다면······. 한층 더 복잡해지는데."
주작은 스스로도 반신반의 하며 답을 내놨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존재했다던가. 라는 건 역시 말이 안되겠지."
주작은 스스로 말하고서도 쓴 웃음을 지었다.
"네, 이 세계에 회귀(回歸)는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청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좌들의 맹약 아래, 세계는 단 하나 뿐. 그렇게 정했어."
가브리엘이 주강혁에게 설명하듯 말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주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전혀 모르겠네."
과거의 기억도 아니고,
미래의 예언일리는 더더욱 없고.
하필이면 왜 전용 무기를 얻었을 때만 보이는 걸까.
"역시 지금으로써는 단서가 부족하다고 밖에는······."
청룡이 마무리를 지으려는 그때였다.
"······주인님. 검이 빛나고 있습니다."
"응?"
주강혁이 검집을 내려다보자 무명검에서 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주강혁은 천천히 검을 끄집어냈다.
파직, 파지직—.
주변의 공간에 노이즈가 새겨진다. 노이즈와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특수한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무명검에 새겨진 인과가 요동치기 시작합니다. 』
무명검이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또다른 메시지 하나를 띄워 올렸다.
『 1차 해방(解放)의 조건은 다음과 같습니다. 』
『 마족 원로 살해 - 0 / 1 』
"이건······."
본디 시스템의 메시지에는 적혀져 있지 않은 기능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단순히 생각하면 기능이 추가된다는 것 정도겠지만. 이번에는 뭔가가 다르다. 사도들의 기억도 그렇고.
"근데 마족 원로가 뭐냐."
* * *
묵시록의 기사 '정복'의 죽음.
현세의 총책임자 가논의 실종.
소식은 빠르게 전해졌다.
마인 사회에도 한 차례 격풍이 불었다.
차원 지배에 불만을 품은 종족은 많다. 그러나 그들의 의견은 철저히 묵살된다.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명(無命)이라는 인간의 등장은 예외적이다. 압도적인 힘을 필두로 마계의 계획을 백지로 만들어가고 있다.
웅장하게 꾸며진 마족의 성전.
수 억 년에 달하는 마계의 역사를 자랑하듯, 벽면에는 거대한 조각상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내부로 새하얀 수염을 기른 마인이 걸음을 옮겼다.
"허허, 고작 인간 하나 때문에 원로 회의라니."
"가논, 그 아이도 모습을 감췄던데."
"불쌍한 놈. 대리자의 추격은 쉬이 피할 수 있는 게 아니건만. 어차피 마계에 가논의 자리는 없다만."
"상황이 오히려 재밌게 돌아간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런 노인의 옆에 선 것은 젊은 여성 마인이었다. 그녀는 노인에게 스스럼 없이 말을 놓았다.
노인은 그것을 타박하지 않았다.
"지루하던 찰나에 잠깐의 여흥은 되겠지."
오히려 끌끌 거리며 미소를 지을 뿐.
마인의 성전 깊숙한 곳에 발을 들일 수 있는 것은, 13인의 원로와 마계의 정점 뿐.
원로라 불리는 이들은 모두 태초의 마족이라고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마계의 형성과 동시에 존재해 온 살아 있는 신.
외양은 그들에게 장식품이나 다름 없었다. 그저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 중 하나에 불과했다.
뒤를 돌아보니 11인의 원로들이 회의장을 향해 걸어 오고 있었다.
한 명도 빠짐이 없다.
그들도 새로운 소식에 흥미를 느꼈으리라.
원로들이 하나 둘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높은 천장 아래, 보랏빛 광원이 눈부시게 타올랐다.
원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현세의 지배 계획이 크게 틀어졌다는 소식은 알고 계실테고요."
검은 턱시도를 걸친 마인이 손가락을 튕겼다.
"무명(無命). 우리가 늘 경계해 왔던 이레귤러의 출현이죠."
마인들은 차원을 지배할 때, 지나치게 억압적인 방식을 사용하지 않았다. 억압은 필연적으로 반항을 부르고 종족의 영웅을 만들어내므로.
시스템의 성질이 그러했다.
성좌들은 영웅에 열광하게 되고, 영웅은 막대한 힘을 얻으며 성장하게 된다.
원로들은 알면서도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 그들의 개입은 대리자를 부르게 되므로.
대리자의 권한은 절대적.
원로들조차 항거할 수 없는 세계의 규칙이다.
따라서 마계는 온건한 지배를 사용해 왔다.
최상위 마인들 사이에선 온건파니 과격파니 파벌이 나뉘는 행태가 보였지만, 원로들이 보기엔 시답잖은 논쟁이었다.
대리자와 시스템의 제한이 존재하는 한, 마계 측에서도 신중한 입장을 보일 수밖에 없다.
원로 중 하나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이쯤에서 포기하고 놔두는 건 어떻겠습니까. 묵시록이 기사까지 당한 마당에······."
"인간 하나한테 겁먹어서 현세를 포기하자니, 자네 언제 그리 겁쟁이가 되었나?"
"틀린 말도 아니지. 치욕의 밤을 떠올리게나."
치욕의 밤.
그들이 억압하던 종족의 영웅 하나가 결국 마계까지 쳐들어 와 마족 전체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 영웅이 질서 영역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원로들만이 알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원로들의 언성이 점차 높아졌다. 그들은 활발히 의견을 주고 받았다.
이토록 뜨거운 의견이 나누어졌던 게 얼마만이란 말인가.
수염을 기른 원로가 흡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의견이 나뉘는군요. 저는 문제가 없다고 봅니다만."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는 일은 없어야 하네. "
"그러면······. 투표로 정하겠습니다."
마계의 정점은 현재 부재중이다.
무명을 놔둘 것이냐.
무명을 없앨 것이냐.
이 자리에 있는 원로들에게 달린 결정이었다.
원로들은 제각기 손을 들었다.
13명의 원로들 중 조치에 찬성하는 자가 7. 반대하는 자가 6이었다.
결과는 나왔다.
"그렇다면 책임자를 정할 차례인데······."
수염을 기른 원로 그리무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세 지배 작전의 전권은 내가 이어 받겠네. 승리한다면, 현세의 지배권을 내게 넘기게나."
반대하는 자는 없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대리자로부터 무사할 수 있는 마족이 있다면, 그리무어가 유일했으므로.
* * *
일주일이 지났다.
하늘에 떠오른 거대한 검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럼에도 한국은 변함없이 돌아간다. 도시를 지나는 차들도, 거리를 거니는 행인들도 큰 차이가 없다.
- 무명(無命)이 방법을 찾았다던데?
- 무명이 해결할 거라는 소문이 있음.
ㄴ 그게 말이 됨? 하나 멸망하는 건 확정인데 ㅋㅋㅋ
- 대륙 붕괴를 저지할 거라고, 관계자한테서 들음.
- 그걸 믿나.
해외에서는 무명의 독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시위를 하기도 했다지만······.
어차피 전장이 종료되면 사그라들 문제다.
"주인님, 오늘도 사냥터가 아주 성황입니다. 이대로라면 건물 하나 새로 지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루시퍼가 싱글벙글 웃으며 테라스로 나왔다. 쟁반에 차가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왔다.
테라스엔 수영장도 있고 썬베드도 있어 일광욕을 즐길 수 있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기는 하지만 기분이 중요하니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쉴 수 있을지 몰라······.'
최대 레벨 225는 진작에 달성했다.
장비도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지금보다 좋은 걸 구하긴 어려웠다. 지금 끼고 있는 것들이 워낙 성능이 좋다보니.
매일 사도들과 훈련을 하고 있기는 한데, 효과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마인 원로를 없애라는 퀘스트가 있기는 한데······.'
그건 사실상 마계에 쳐들어가라는 무리한 요구지 않은가.
따라서 나는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루시퍼에게서 시원한 커피를 받아 쭉 들이켰다. 씁쓸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진다.
'나쁘지는 않은데.'
어찌저찌 일곱 개의 별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200 레벨까지 도달. 나도 225 레벨을 달성했다.
기사의 영역에서 가져 온 보물들도 판매가 진행 중이니, 재산은 착실하게 쌓여가고 있다고 봐도 된다.
'······이제 은퇴만 하면 완벽하다.'
그러나 시스템의 시련은 아직 1페이즈다. 사도들의 반응을 보면 페이즈가 계속 이어질 게 분명했고.
"시스템은 목적이 대체 뭐길래 이러는 거야?"
꼭 인류의 멸망을 봐야 속이 시원하겠다는 것 같다. 루시퍼는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 그러게요? 이거 참. 정보 제한이 얄밉네요."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옆에 앉아서 책을 읽던 청룡이 몸을 일으켰다.
"오히려 알고 나면 조금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중요하진 않은 문제다.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다.
"······끝낼 수 있는 건 맞아?"
"······."
이번에는 청룡과 루시퍼 둘 모두 대답하지 않았다.
루시퍼조차 이 세계를 구하겠다곤 하지 않았다. 세계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무사할 거라고만 했지.
괜히 분위기가 가라앉는다.
"카, 카르페디엠! 지금을 충실하게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은가······!"
수영장에서 튜브를 타고 놀던 주작이 급하게 소리쳤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 최고 등급의 소환수. 뽑기로 뽑았어. 축하해줘."
내 옆에 있던 가브리엘도 말을 돌리려는게 보여서 짠하다. 거짓말이라도 하면 될텐데. 다들 너무 솔직한 거 아닌가.
아니, 진짜로 못 막는 건가?
"지금과 같은 세계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주인님께서 통치하는 세계는 있을 수 있겠죠."
진지하게 그리 말하는 청룡과 루시퍼.
"아니, 그런 미래는 별로 원하지 않는데······."
그때였다.
별안간 공중에서 나타난 무언가가 빌딩을 향해 쇄도했다.
콰앙-! 콰아앙!
연기가 치솟았다.
그러나 건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배리어로 보이는 방어막이 날아 온 마력 포탄을 완벽하게 막아냈다.
빌딩을 요새로 만들었다는 사최헌의 말은 진짜였다.
"뭐, 뭐야."
나는 로브와 가면을 걸치고서 난간으로 향했다. 사도들도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였다.
저 멀리 날개를 단 거대한 악마가 부유하고 있었다.
『 [ 29위계 ] 아스타로트 』
『 솔로몬의 악마가 지상에 강림했습니다. 』
악마의 뒤쪽으로 다시금 검붉은 마력 덩어리가 모여들고 있었다. 누가봐도 빌딩을 부수려 하고 있었다.
"악마종이 왜 여기에······?"
원래는 세계 곳곳에 봉인 되어 있었던 놈들이다. 이전에 처치했던 벨리알이 그렇고.
"루시퍼, 당장······."
사도들에게 공격을 지시하려던 찰나였다.
"미친 마물이 우리 집을 부수려한다!"
"저건 또 뭐야?! 악마?"
"당장 공격해! 우리 집은 무조건 사수해!"
건물의 아래쪽에서 헌터들이 뛰어나왔다. 창문으로 뛰쳐나 온 헌터들도 있었다.
"유지훈 헌터님, 공간이동 부탁해요!"
"잠깐만요, 천이령님! 이제 갑니다!"
건물이 타격 받자, 쏟아져 나온 헌터들이 공중의 아스타로트를 향해 우르르 달려들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니 그 면면들이 꽤 익숙했다.
불멸, 청명, 패공······.
국내 유수의 길드원들이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쿠우웅—. 콰과광!
헌터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아스타로트는 삽시간에 허공에서 침몰했다.
"이거 저희가 나설 필요도 없겠는데요."
그 광경을 바라보던 청룡이 허탈하게 미소지었다.
"언제 저렇게 이사 왔대."
"소문이 꽤 난 것 같습니다. 무명이 사는 빌딩이라고. 그렇게 알음알음 계약을 하다보니 꽤 모였네요."
빌딩 자체가 헌터들로 무장되고 있었던 셈.
그때였다.
쿠웅-.
사최헌 헌터가 테라스에 착지했다. 평소와 다름 없는 날카로운 인상이지만, 목소리에 다급함이 묻어 있었다.
"야, 이 미친······. 신발 안 벗어?"
"무명."
루시퍼가 사최헌에게 달려 들었지만, 사최헌은 무시하고서 나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현세에 봉인 되어 있던 악마종이 일시에 풀려나고 있다. 이게 가능한 수는 하나 밖에 없다."
당분간 평화롭나 했더니 바로 일이 생겼다.
"마인 원로 그리무어에 의한 현세 침공이다."
사최헌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뜻이겠지.
잠깐, 마인 원로?
"······마침 잡아야 하기는 했는데."
"무슨 말인가? 원로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주일이면 꽤 오래 쉬기는 했다.
사도들이 내 주위로 모여들었다.
모두가 전용 무기를 들고 있다. 뿜어져 나오는 기세도 이전과 비교하면 차원이 다르다.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어디 들어나보자. 왜 이렇게 현세를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인지."
지금까지는 항상 대처하느라 급급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85화. 현세 침공(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