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연회(3)
갑작스런 폭발로 엉망이 된 연회장. 테이블은 부서지고 샹들리에는 반파되었다.
스르륵.
복도와 연결된 통로에서 찐득한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검은 액체는 이내 부풀어 오르더니 마족의 형상이 되었다.
"아아······.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쳤군."
마족은 뻔뻔하게 그런 소리를 해댔다.
"다들 경계 늦추지마."
"마족이 어떻게 여기에······?"
"설마, 헌터들이 전부 모이는 이 시점을 노리고?"
그러나 이곳은 최정상 헌터들이 가득한 장소.
폭발이 일어난 상황에서도 헌터들은 침착했다. 그들은 인벤토리에서 각자의 무기를 꺼내 마족에게 겨눴다.
"이거야 원. 예상했던 것보다 방비가 잘 되어 있군. 조용히 오고 싶다만, 진입 방해 마법이 여간 성가셔야지."
마족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헌터들의 살기가 느껴지는 현장의 중심.
"나는 최상위 마족 몬타쥬라고 하네. 무명(無命)과 이야기를 나누러 왔네만."
"마족······. 무슨 꿍꿍이지?"
"좋은 말로 할 때 돌아가라."
연회장의 헌터들이 한마디씩 했다. 명백한 적의 속에서 몬타쥬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착각하지 말게나. 무명을 제외하면 이 자리에서 날 상대할만한 인물은 없으니."
그 말이 도발처럼 들려서 였을까.
"웃기지마, 네 놈······!"
콰앙-!
헌터 중 하나가 검을 들고서 최상위 마인에게 달려 들었다. 마력의 기류가 날카롭게 뻗어나가는 그 순간.
카앙.
최상위 마인 몬타쥬는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공격을 막았다. 검날이 몬타쥬의 손에 붙잡혔다.
검을 쥔 헌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약소 성좌와 계약을 맺었나보구만. 하찮기 짝이 없는 힘인데······. 겨우 그 정도로 달려 들었다니."
몬타쥬는 비웃듯이 말했다.
연회장에 있던 헌터들이 멈칫했다. 방금 검을 휘두른 헌터는 인도 랭킹 3위에 해당하는 강자다.
결고 약자가 아니었다.
인류의 수준에선 최정상에 속하는 인물.
몬타쥬는 남자를 가볍게 밀어냈다.
토옹—.
허공에서 검은 물결이 일더니 헌터가 튕겨져 나갔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그러나 그 속도가 점차 가속 되더니.
콰아앙—!
"커허억!"
인도의 헌터가 벽면에 처박혔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동료들이 포션을 들고 그에게로 달려갔다.
몬타쥬는 중절모를 고쳐 쓰고선 시선을 옮겼다.
무명이 있는 3층 높이에 위치한 방으로.
"목을 베어 죽일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네. 나는 학살극을 버리러 온 게 아니라 대화를 하러 온 걸세. 알겠나?"
마족이 대화를 청해왔다.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대화라.'
확실히 드문 일이었다. 칠죄종만큼은 아니지만 마족들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 놈들이다.
그들은 인간을 벌레나 가축처럼 여긴다.
무분별하게 숲을 파괴하려는 벌목꾼들이 숲에 사는 동물들과 대화하려 들겠는가.
'무명(無命)이 만들어낸 변화다.'
허울 뿐이지만 그런 제안 자체가 이례적이다.
다만······.
정말로 대화인가?
대화만을 노리고 나타난 것인가?
그럴 리가.
사최헌은 뒤쪽의 무명을 향해 말했다.
"최상위 마인들은 몇천 년 단위로 살아 온 놈들이다. 가지고 있는 힘도 상위 마인들과는 비교가 안되지."
당장의 무력이 칠죄종보다 강하진 않을 거다. 1대1이라면 칠죄종이 높은 확률로 이기겠지.
허나, 더욱 까다로운 상대였다. 행동 패턴이 거의 정해져 있는 종말의 사도와 달리 마인들은 계략과 정치에 능했으니까.
'놈들이 소유한 실제 힘은 차원이 다르다.'
현세(現世)에서 그들의 힘은 약화 되어 있다. 사도들이 그러하듯 시스템 제한이 존재하는 것이다.
"마인은 자신들의 본진인 마계에선 수십 배의 힘을 낼 수 있다."
사최헌은 조용히 말했다.
"현세에서도 몇 가지 조건이 갖춰지면······. 마계와 흡사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눈앞의 최상위 마인이 본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몬타쥬란 최상위 마인에 대해선 잘 알고 있었다.
인류의 지배를 맡은 3인의 최상위 마족.
몬타쥬, 가논, 튜란테르.
이들의 방식에 대해선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할 수 있었으니까.
"대화라. 재밌는 말을 하는군."
사최헌은 건물 전체를 훑었다. 그의 두 눈이 건물에 퍼져 있는 지독한 마기를 포착했다.
결론은 나왔다.
사최헌은 무명에게만 들리도록 전음을 보냈다.
- 몬타쥬는 건물 자체를 마계화할 생각이다.
* * *
[ 본체가 아니야. 어쩌면 건물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
계속해서 가브리엘과 의견을 나누는 중이였다.
본체였다면 한 번에 끝날 일이었으나,
분신이라면 잡는다고 해도 죽지 않는다.
성가시기 그지 없는 적이었다.
심지어 이 건물 자체를 마계화 하려고 하는 모양.
'마계화를 하면 뭔가 달라지는 건가?'
[ 마인은 마계에서 자신의 힘을 온전히 발휘 가능. 진짜 마계가 아니니 한계가 있겠지만, 몇 배는 더 강해질 거야. ]
강해진다고 하면······.
[ 3.5 칠죄종 정도? ]
꽤 강해지는데.
나는 그렇다고 쳐도 헌터들이 휘말리면 큰일이다. 사최헌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창문틀에 발을 걸쳤다.
- 나는 건물을 살피고 오겠다. 마계화에는 필시 많은 마기가 소모 된다. 현세에 마계를 불러 오려면 많은 마인들이 협조해야 한다는 뜻이지.
사최헌은 품 안에서 반짝이는 아이템 하나를 내게 슬쩍 보여줬다.
- 이 힘을 역추적하면 현세에 있는 마인들의 위치를 찾아낼 수 있을 거다. 그러니······.
역추적.
현세의 최상위 마인들을 일망타진할 기회였다.
- 시간을 끌어주면 좋겠다.
사최헌은 그리 전음을 보낸 뒤 연회장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들은 확실히 문제다.'
칠죄종의 소환도 그렇고.
이번 아브락사스 괴조도 그렇고.
전부 마인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본래대로였다면 극복할만한 시련이 극악의 난이도로 변질 되었다.
'빈 말이 아니라 내가 없었다면······.'
세계가 반쯤 폐허가 되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닌가. 내가 있어서 마인들이 더 활개를 치는 건가?'
하여튼 막아야 되는 건 틀림 없다.
이어지는 시련은 더 어려울텐데, 마인들의 방해까지 받으며 진행할 순 없다. 내 능력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무명, 대화에 응할 건가? 싸우겠다면 내가 돕겠다."
미국의 헌터 데릭이 내게 물었다. 그의 팔 위로 두꺼운 근육이 꿈틀 거린다.
미국의 헌터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데릭, 우리는 물러나는 게 나을지도 몰라. 괜히 무명에게 걸리적 거릴 수도 있으니까."
"흠, 무명 네 결정에 따르지."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다."
가브리엘도 호위로 붙어 있다.
루시퍼와 청룡은 없지만.
게다가 종말+급 아이템인 에인헤랴르도 있고. 치명적인 일격을 1회 흘려주는 종말의 귀걸이 덕분에 의문사 당할 일은 없다.
최상위 마인과 얼굴을 맞대는 게 가능하다.
"그리 말한다면······. 아래에서 주시하고 있겠다."
"언제든지 도움을 요청하면 달려 오겠다."
그들 뿐만이 아니었다.
연회장의 헌터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언제든 달려올 태세였다.
미국의 헌터들이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고.
끼이익.
방문이 열리며 중절모와 수트를 걸친 마족이 들어왔다. 본체가 아닐텐데도 마기가 상당하게 느껴진다.
에인헤랴르로 강화된 신체 능력은 단순히 힘 뿐만이 아니다.
감각을 포함한 인지 능력 자체가 상승했다.
"무명. 우선 대화에 응해줘서 고맙다는 말부터 하고 싶군."
몬타쥬는 능글맞은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그 외관은 중년처럼 보인다.
가브리엘은 불만스런 표정으로 내게 사념을 보내왔다.
[ 거짓말이야. 새빨간 거짓말. ]
"먼저 오해를 한 가지 바로 잡겠네. 첫 번째 시련에서 아브락사스의 알을 부화시킨 건 우리가 아닐세."
"······?"
"이번 일은 마인 쪽에서도 과격파가 벌인 일이라네. 마인의 파벌은 둘이니 말일세. 온건파와 과격파. 나는 온건파고."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은 건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지금 벌어지는 모든 일들은 무명(無命) 그대 때문에 일어나는 일일세."
몬타쥬는 중절모를 벗어 옷걸이에 올려두었다.
"정확히는 마기의 원천 때문이지. 그만한 양이 있으면 행성 하나도 우습게 멸망 시킬 수 있다네. 자네의 생각보다 가치 있는 물건이야."
몬타쥬는 소파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과격파가 득세할 수 있었던 것도 마기의 원천이라는 핵심 기재를 빼앗겼기 때문일세."
"그렇다면 칠죄종의 소환은?"
"그건 사고였네. 한국의 책사로 활동하던 중위 마인 하나가 독단으로 치룬 일이지."
"SS급 게이트에서 마인들이 칠죄종에게 협력한 건?"
"우리도 칠죄종에게 협박 당해서 어쩔 수 없었네."
아주 변명이 다채로웠다.
[ 거짓말 스킬이 장난 아닌 듯. ]
"과격파가 움직인 것도 마기의 원천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욱 큰 일이 하나 있다네."
잠시 텀을 둔 뒤, 몬타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묵시록의 4기사. 과격파는 묵시록의 4기사를 이 땅에 강림시키려고 하고 있다네. 자네는 모르겠지만 칠죄종보다 위험한 존재네."
[ 주인, 상당히 위험. 주인은 괜찮은데, 지구가 위험해. ]
묵시록의 4기사라는 말에 가브리엘의 사념이 다급해졌다. 칠죄종 때보다 반응이 크다.
"소환이 머지 않았지. 칠죄종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정한 종말이 찾아올 걸세."
"그래서······."
"마기의 원천을 돌려준다면, 묵시록의 4기사는 소환될 일 없을 걸세. 온건파는 직접적인 멸망을 원치 않으니."
몬타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물론 그만한 대가는 지불하겠네. 쓸만한 아티팩트도 있고, 원한다면 금은보화로 제공하도록 하지. 원하는 걸 말만하게나."
마인들의 목적은 명확하다.
인류를 지배하는 것.
당장은 이득이 되더라도, 나중에 수작을 부려올 게 뻔하다. 지금만해도 그렇다.
대화를 하는 척하면서 건물을 마계화 시키려 하고 있지 않은가.
"거절한다면?"
몬타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건 협상을 위한 자리가 아닐세. 자네의 선택지는 오직 '한다' 뿐이지."
쿠구구구······!
건물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건물 내부의 벽면 위로 보랏빛의 기운이 물감처럼 번져나간다.
연회장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짙은 자색이 건물을 채우고, 축축한 액체가 흘러나온다. 그 자리에서 촉수가 빠르게 돋아났다.
"이 건물은 마계화 되고 있다네. 현세와는 분리된 장소가 되어 오도가도 할 수 없게 되었지."
몬타쥬의 눈이 붉어졌다.
"나는 무명 네 놈을 풀어주지 않을 거다. 그 사이에 묵시록의 4기사가 부활하여 현세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는 일이고."
처음부터 이렇게 나올 생각이었던 거다.
나는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마기의 원천을 넘겨줄 일은 없다."
푸슉—!
가브리엘의 창이 몬타쥬의 심장 부근을 꿰뚫었다. 몬타쥬의 입에서 피가 쏟아졌다.
"인류에게서 손을 떼겠다고 맹세하면 생각해볼 수도 있고."
"크흐흐······. 상관 없다네.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만 답을 내놓으면 충분하니. 언제든 마음이 바뀌면 말하게나. "
몬타쥬의 분신은 그대로 검은 액체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연회장을 보았다.
벽면에서 촉수가 자라나고, 그림자와 같은 마물들이 기어나오고 있었다.
콰악, 콰앙! 콰드득!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그림자 마물들과 맞서고 있다.
"주인, 어떻게 할까?"
"마계화에서 벗어나려면······."
"건물 어딘가에 위치한 마계의 핵을 부숴야 해."
마침, 연회장으로 돌아온 사최헌 헌터가 나를 향해 전음을 보내 왔다.
- 필요한 정보는 전부 얻었다. 몬타쥬의 본체도 이 건물에 있고, 마계의 핵도 어딨는지 알아냈다.
그러면 남은 건······.
고개를 들어 올리는 그때였다.
팅—!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성좌로부터 미션이 도착했습니다. 』
『 성좌 '죽음의 지배자'가 미션을 제안합니다. 』
- 난이도 : 신화+ 이상
- 목표 : 최상위 마인 '몬타쥬' 처치 0 / 1
- 보상 : 신화급 장비 선택권 및 다량의 코인
『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미션에 동참합니다. 』
『 보상이 증대됩니다. 』
『 보상 : 신화+급 장비 선택권 및 플래티넘 코인 』
성좌들로부터 도착한 미션이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이 마인을 쳐부수길 원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
'오.'
굳이 미션을 걸지 않아도 할 일이었지만,
미션이 걸리니 의욕이 샘솟는다.
'장비 선택권이라······.'
여기에다가 미국 헌터들로부터 받은 가방 속 아이템까지 합하면, 즉살의 쿨타임을 하루로 줄이는 것도 가능하리라.
물론, 일본에게서 받은 쿨타임 부여 티켓도 사용하고.
'몬타쥬라고 했었나.'
인류의 위협 그 자체인 최상위 마인.
그런 놈이 제 발로 찾아왔다.
"가브리엘, 출발하자."
뭐가 되었든 그냥 보낼 생각은 없다.
71화 백광(1)
건물의 중심부.
"크윽······."
최상위 마인 몬타쥬가 얼굴을 찡그렸다.
분신이 죽었다.
분신이지만 감각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통증은 그대로 전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한 번에 당할 줄이야.'
백색 사도의 창은 빠르고 간결했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은 최적의 동선으로 분신의 심장을 관통했다.
'상관 없다. 협상에 응하지 않을 거라곤 예상하고 있었으니.'
몬타쥬는 건물 전체와 동화되어 있었다. 하반신이 벽면에 녹아 들어가 상체만 내민 채였다.
그를 중심으로 검은 액체가 건물 전역으로 퍼져 있다.
건물의 외부는 현재 검은 액체로 완전히 뒤덮여 있다.
현세와의 완전 격리.
건물의 마계화를 위한 첫번째 단계였다. 헌터들이 연회에 집중하는 사이 차근차근 벌어진 일이었다.
'마계화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성공하기만 한다면 무명을 상대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마계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몬타쥬 정도의 최상위 마인이나 가능한 특수한 능력이었다.
수준 높은 기술과 다량의 마기가 결합되어야 가능한 최상급 능력이었다.
현세(現世)에서 제한 당했던 힘을 마음껏 방출할 수도 있다. 마족 사회에서 오랜 기간 전해져 내려오는 편법이었다.
'지금이 온건파에게 남겨진 유일한 기회다.'
몬타쥬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마인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한마음 한뜻은 아니었다.
'가논이 대리자에게 습격당해 어수선한 지금보다 더 좋은 타이밍은 없을테니 말이야.'
과격파 가논은 대리자에게 팔 다리를 빼앗겼다. 물론, 마인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놈은 아득바득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하고자 할 것이다.
'과격파가 득세할 거고 그때부터 온건파는 설 자리를 잃겠지.'
표면상으론 소환에 협력하고 있었지만 실제 마음은 달랐다.
그렇게 밀려날 바에는, 직접 무명을 만나 마기의 원천을 회수하는 것이 나으리란 판단이었다.
'대화는 실패했지만, 승리의 가능성은 충분하고 말고.'
정보는 꽤 모여 있다.
각지의 마인들이 무명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했다. 빈 부분은 많지만 무명이라고 해서 전능한 건 아니다.
아브락사스의 괴조가 동시 처치 되었을 때는 섬뜩했다만.
놈은 무적이 아니다.
인간에 불과한 존재란 건 틀림 없다.
'상황도 해볼만하고 말고.'
무명이 데려 온 사도는 고작 한 명.
마계화가 시작되며 건물은 외부와 철저히 격리 되었다. 사도를 불러올 수도 없을 터.
흑과 청의 사도가 없다면 승산은 이쪽에 있었다.
몬타쥬는 벽에 매달린 채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잘 안 되어도 상관 없다.'
무명의 발목을 잡아 끄는 것만으로 공적이 된다.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할 시간을 벌었다는 변명도 될테고.
직접 무명을 상대할 자신도 있었다.
'타이밍이 아주 적절했어. 스파이를 심어 두길 잘했지.'
인류가 마인에 대해 경계하기 시작했으나, 그들에겐 마인을 판별해 낼 기술이 아직 없다.
그러니 인간 측에 배신자가 있단 건 상상도 못했을 거다.
마인이 인간을 파고들기란 쉬웠다. 열등종의 욕망과 갈망을 채워주는 건 마인에게 있어 손쉬운 일이었으니까.
몬타쥬는 어둠 속에서 숨죽여 웃었다.
'이미 마계화가 시작된 이상······. 막을 방법은 없을 거다.'
그런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별빛이 모여들었다. 플레이어가 아닌 마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런 별빛.
수많은 성좌들이 몬타쥬를 바라보고 있다.
그에게 걸린 현상금은 계속해서 높아져만 간다.
성좌들은 그의 최후를 바라고 있었다.
그 사실을 몬타쥬는 모르고 있다.
* * *
"나는 지하에서 마계화를 늦추고 있겠다."
사최헌은 양 손 위로 항마력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그 사이에 마계의 핵을 부수고, 최상위 마인을 처치하면 해결 된다."
어려울 거 없는 공략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목표 : 최상위 마인 '몬타쥬' 처치 0 / 1 』
『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미션에 동참합니다. 』
『 보상으로 받게 될 플래티넘 코인이 증가합니다. 』
성좌들은 한시라도 빨리 몬타쥬가 처치 되길 바라는 듯했다. 가브리엘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인들은 성가셔. 내가 좋아하는 플레이어의 활약을 방해하고,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성좌들 대부분이 불호."
그래서 성좌들이 얼른 없애라고 난리인 거였나.
"지금부터는 시간 싸움이다. 13층에 마계의 핵이 있을 거다. 그걸 파괴하면 벗어날 수 있다."
"잠깐."
사최헌의 말을 듣고 있던 헌터들 사이에서 누군가가 손을 들어 올렸다.
"무명이 간다면 나도 참가하겠다."
2m가 넘는 거한 데릭이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무명과 함께 공략이라니, 이런 행운을 놓칠 순 없지."
"······도움이 필요한가?"
사최헌은 날 바라보더니 전음을 보내왔다. 주변에는 들리지 않는 은밀한 소리였다.
- 너 정도 되는 강자라면 데릭조차 걸리적거릴 수 있다.
뭔가 오해를 하고 있나본데.
내가 그 정도로 강하진 않다.
혼자서 무쌍을 찍고 다 부수고 다닐 정도는 아니다.
'남은 빵은 두 개다.'
게다가 지금은 루시퍼와 청룡의 소환이 막혀 있다. 검은 깃털과 푸른 비늘을 사용해도 반응이 없다.
[ 차원 자체가 격리된 상황이라 건너오지 못하는 듯. ]
공략대를 꾸려가면 내 힘의 사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거다.
"함께 가지."
그리 말하자, 데릭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내게 다가왔다.
"오, 아주 좋아.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거야. 성좌와의 동화율이 더 높아졌기도 하고."
공략대를 꾸리기로 결정하자, 다른 누군가도 손을 들어 올렸다.
"나도 함께 갈 수 있겠나? 개인적으로 호기심이 생겨서 말일세."
환생자 아이작이었다. 얇상한 인상의 그가 내 앞으로 걸어왔다.
사최헌이 말한 일곱 별 중 하나.
대마법사라고 했었지. 나도 실력이 궁금하긴 하다.
"나도 참가하겠네."
이어서 일본의 하야토까지 참가.
연회에 참가한 5개국 중에서 미국, 일본, 영국의 최강자들이 모였다. 딱히 더 참가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인도 3위가 최상위 마인의 분신에게 당해서 이기도 했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방해나 될 거야."
"저 멤버에 내가 끼는 건 좀······."
"아이작은 치료 마법도 쓸 수 있다면서."
"그러면 이미 완벽한 파티네."
끼어들 자리가 없다는 게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면 부탁하겠다. 추가 전달 사항이 생기면 단말기로 보내겠다."
사최헌은 그 말을 남기고서 비상구의 계단을 내려갔다. 급하게 구성된 공략대도 계단을 통해 위층으로 올라갔다.
나와 가브리엘을 포함해 총 5명.
데릭, 아이작, 하야토까지.
현시점 인류의 최강자들만 모아둔 파티다.
평범한 게이트 공략이었다면 드림팀인 수준.
"무명과 함께 공략이라, 두근거리는군. 이런 기분은 S급 게이트를 처음 공략 할 때 이후론 처음이구만."
데릭은 흥분한 듯 주먹을 쥐었다. 내 힘이 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다. 그리 대단한 건 없는데.
"마계화도 흥미롭고, 무명 그쪽의 힘도 궁금하네. 최선을 다할테니 잘 부탁하겠네."
아이작도 내가 궁금해서 온 거였나. 마법사라서 그런가, 탐구열이 대단해 보인다.
"······우리가 가는 의미가 있나?"
하야토는 반신반의하며 우리의 뒤를 쫓았다. SS급 게이트에서 루시퍼의 활약을 목격 했었으니, 그런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루시퍼가 없다.
'전용 무기를 든 가브리엘이 있으니 괜찮겠지.'
최상위 마인을 처치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놈들이 있는 한 인류는 바람 잘 날이 없을테니.
마인 때문에 세계 정세가 불안해지고,
경제가 흔들리고, 집값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하여간 좋을 게 없다.
쿵쿵.
데릭이 계단을 오르며 벽면을 두드렸다. 지금 우리가 위치한 장소는 본래 어떤 호텔인 모양이었다.
"흐음, 던전화도 함께 진행된 것 같군."
"건물을 부수고 단번에 올라가는 건 어렵겠구려."
아이작이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공략의 전문가들이라 그런가.
발상부터가 남다르다.
"마음껏 싸울 수 있어서 오히려 좋을지도."
가브리엘은 그리 중얼거렸다.
1층의 복도는 아주 엉망이었다.
"윽."
하야토가 눈을 찡그렸다.
검은 액체가 꿈틀거리며 벽면을 채우고 있었으며, 촉수나 이상한 식물들이 군데군데 자라 있었다.
이런 징그러운 풍경이 마계라면, 놈들이 다른 차원을 지배하려는 것도 이해는 간다.
"흥미로운 현상일세. 다른 차원에도 이와 같은 환경이 조성된 땅이 존재하곤 한다네. 마족들의 씨앗은 어디에나 있군."
"그러고보니 환생자라고 했던가?"
데릭은 우직하게 걸어가며 물었다.
아이작이 환생자인 건 딱히 비밀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명 헌터들 사이에선 꽤나 퍼진 이야기 같았다.
"그렇다네. 내가 살던 세계에도 마인이 있었는데, 다소 차이는 있으나 그들이 거주하는 환경과 꽤 비슷하군."
아이작은 미소와 함께 답했다. 이 상황이 즐거운 듯한 표정이었다.
"이런 환경에 거주하는 마물은 대개 정해져 있는데······."
그때였다.
아이작이 걸음을 멈췄다.
그르르······.
복도의 꺾이는 부분에서 지독한 마기와 함께 마수 한 마리가 걸어나왔다.
늑대의 형상을 한 그림자였다. 정확히는 검은 액체로 이뤄진 마수였다. 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어 위압감이 상당했다.
아이작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마침 나왔군. 섀도우 비스트라고 하는 마수일세. 심연에도 서식하는 개체인데, 저 정도 농도면 꽤나 강하겠군."
[ Lv.243 ]
상당한 레벨이었다.
하야토의 미간이 좁혀졌다.
"보스인가?"
"아니, 잡몹일세."
아이작은 단호하게 답했다.
현재 인류의 레벨은 150대에 머물고 있다. 특수한 개체나 보스급에 해당하는 마물들만이 규격외의 레벨을 소유하곤 한다.
엘리트도 보스도 아닌 잡몹의 레벨로선 불가능한 수치였다.
"레벨은 숫자에 불과하지. 안 그런가?"
콰아앙—!
데릭은 그 말과 동시에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그의 우악스런 주먹이 섀도우 울프의 미간에 꽂혔다.
섀도우 울프의 고개가 비정상적으로 꺾였다.
[ 저 사람의 성좌는 헤라클레스야. 그래서 힘이 엄청 쎈 듯. ]
공기를 울리는 훌륭한 타격이라고 생각했으나, 섀도우 비스트는 쓰러지지 않았다. 놈의 눈이 번뜩였다.
"뭐? 이걸 버텨?"
섀도우 울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놈의 등줄기에서 솟아난 날카로운 칼날 촉수가 데릭을 향해 쇄도했다.
파바바박!
자판기와 의자가 산산조각났다. 무수한 조각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가까스로 공격을 피해낸 데릭의 두 눈이 흔들렸다.
"내 공격이 안 통해?"
자신의 공격이 먹히지 않았다는 게 충격이란 표정.
그때였다.
콰과과과!
허공에서 생겨난 무수한 마력의 탄환들이 섀도우 비스트를 덮쳤다. 자욱한 연기가 솟아 올랐다.
"물러서게나, 마법으로 해결해야 할 놈들이니."
앞으로 손을 뻗은 아이작이 마력을 조작했다. 그의 몸 주변을 맴돌던 푸른 얼음과 붉은 화염이 한줄기가 되어 쏘아졌다.
강한 폭발이 터져나왔다.
콰아앙-!
그때, 폭발을 뚫고서 섀도우 비스트가 뛰어 올랐다. 몸체에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지만 기동력은 그대로였다.
놈의 등줄기에서 칼날이 쏘아지려는 찰나.
"아인 체 돌 하만."
아이작은 침착하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주변으로 마법진 네 개가 형성되었다.
콰득! 콰득!
마법진에서 솟구친 얼음의 기둥이 섀도우 비스트를 꿰뚫어 포박했다. 놈의 칼날은 바닥에서 솟구친 화염의 기둥이 녹여버렸다.
"섀도우 비스트의 가장 성가신 점은······. 아예 산산조각을 내지 않으면 계속해서 부활한다는 점일세."
고오오—.
아이작의 앞으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차자자작! 바람은 순식간에 칼바람이 되어 섀도우 울프의 몸을 산산조각 냈다.
그제서야 섀도우 울프가 처치되었다.
아이작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강력하긴 하지만 수가 많은 편은 아닐세. 그리 자주 등장하는 마물도 아니고, 무리를 짓지도 않는다네. 하지만 성가시지."
제대로 된 마법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단순히 스킬이 아니라 정말로 정교한 기술을 보는 기분이다.
"마법이 좋긴 하군. 하지만 다음 번엔 내가 잡겠다."
데릭은 팔짱을 낀 채 미간을 좁혔고,
하야토는 단순히 감탄한 표정이었다.
"그래그래, 어쨌든 이틈에 빨리 다음층으로 올라가세."
아이작이 그리 말하며 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화악.
복도 전체에 음습한 기운이 내려 앉았다. 벽면에서 그리고 복도의 천장에서 섀도우 비스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르르—.
앞과 뒤가 섀도우 비스트로 꽉 막혔다. 놈들의 붉은 눈동자 여러 쌍이 동시에 빛나고 있었다.
데릭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리를 짓는 경우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보통은 그런데······. 이런 경우는 또 처음보는군. 사령탑이 있어서인가?"
아이작은 곤란한듯 말했다.
그때, 단말기에서 사최헌 헌터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 그쪽 상황은 어떻지? 지금쯤이면 8층엔 올라갔겠군. 마계화를 막고 있긴 하지만 오래 버틸 순 없다. 13층까지······.
치직, 치지직—!
단말기에서 터져나온 노이즈가 사최헌과의 연락을 끊어냈다.
"······."
8층이요?
지금 1층인데요.
다른 헌터들의 시선이 내쪽으로 모였다.
"무명, 이제 자네 차례네. 내가 처치할 순 있으나······.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네."
"드디어 볼 수 있나. 무명의 진심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헌터들의 관심 어린 눈빛이 쏟아진다.
빨리 돌파해야 하는 상황.
섀도우 비스트의 레벨은 내 레벨보다 높다.
궁극기 초기화권은 남아 있지만 궁극기를 써도 문제다.
오버드라이브의 유지 시간은 10초 뿐.
즉살의 쿨타임 제한이 사라지는 시간이 그 정도란 뜻이다.
눈 앞의 적을 제거해도, 윗층의 적이 남는다. 그 시간 안에 13층에 오르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고······.
그렇다면 답은 한가지 뿐이다.
"가브리엘."
나는 가브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응, 알았어."
가브리엘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광창을 들어 올렸다. 창의 끝에서 새하얀 빛줄기가 새어나온다.
가브리엘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는······."
콰아앙-!
가브리엘이 창을 땅에 내려찍자, 성스러운 파동이 주변의 음습한 기운을 크게 밀어냈다.
가브리엘의 주변으로 터져나온 찬란한 백광이 복도를 뒤덮었다.
『 사도 '가브리엘'이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백광(白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주인의 시간이야."
콰아아아—!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상태를 정상화합니다. 』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는 오른손과 함께 흑색의 팔찌를 들어 올렸다.
『 리미트 브레이커를 발동합니다. 』
시스템 메시지를 띄워 올리며 아티팩트가 발휘 되었다.
리미트 브레이커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다.
하나는 제한을 해제하는 것이다.
이건 이미 사도들을 통해서 여러번 써먹은 방법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발휘할 능력은 그게 아니다.
또 다른 하나의 능력.
『 임시 레벨을 30 획득합니다. 』
『 이제 당신의 레벨은 213입니다. 』
임시 레벨의 획득이다.
나는 눈 앞의 섀도우 비스트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내 시선에 놈들이 본능적으로 움츠려들었다.
그들의 레벨은 모두 30%씩 내려간 상태.
달리 말하자면······.
놈들 모두가 내 약자멸시 범위에 들어왔다는 거다.
나는 놈들을 바라본 채 입을 열었다.
죽어.
그걸로 충분했다.
72화 백광(2)
찰나의 순간이었다.
푸화악—! 푸확!
무명이 바라보는 방향에 존재하는 섀도우 비스트가 줄줄이 터져나갔다.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상황이었다.
'······보고도 못 믿겠구만.'
아이작의 눈동자가 커졌다.
환생자 아이작은 일부러 힘을 아꼈다.
번거로운 척 했지만 섀도우 비스트를 처치하는 것은 아이작에겐 손쉬운 일이었다.
전생에 쌓아 올린 막대한 양의 마력과 마법 숙련도. 현생에선 더욱 이른 시기에 높은 경지에 오른 그였으니까. 그럼에도 실력을 숨긴 이유는 하나였다.
'무명의 실력이나 보려고 했건만.'
아브락사스의 괴조가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티끌만한 마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
'대단한 힘이야.'
그 사실이 아이작의 학구열을 더욱 불타게 만들었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라.
이는 지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스킬이 발동되기 위해선 무언가 에너지가 필요하건만, 무명의 힘은 그걸 보란 듯이 무시하고 있다.'
무명은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의 흑색 로브자락이 휘날렸다. 한순간 섬뜩한 느낌이 아이작의 등줄기를 훑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푸화아악-!
아이작의 뒤편에서 이빨을 드러내던 섀도우 비스트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정말 굉장하군. 연구 주제로 삼고 싶을 정도일세."
아이작의 얼굴 위로 허탈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명이 무어라 아주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자 마물들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도 가까이서 두 눈으로 보고 나니 조금이나마 윤곽이 잡히는 듯 했다.
'언령? 권능? 아니 그보다 근원적이고 고차원적인 힘이다.'
제국에서 천 년을 넘게 살아왔던 환생자 아이작. 그가 이룬 성과는 단순히 마법적 발전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른 차원들을 들여다보는 일에도 능통했다.
수많은 차원을 보아왔기에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뭐라고 정의해야 할까.'
무명이 시선을 옮길 때마다 섀도우 비스트들이 터져나갔다.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힘이었다.
물리력도 마력도 깃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의념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세계에 작용한다.
'이능?'
한두 번 본다고 가늠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콰과과과—!
덕분에 무명을 포함한 일행은 미친 듯이 달려 나갈 수 있었다. 섀도우 비스트들이 계속해서 달려들었지만 놈들은 장애물조차 되지 못했다.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굉장하군, 무명!"
데릭은 감탄하면서 뒤를 따라왔다. 하야토는 이미 해석하길 포기하고 침묵하며 달리고 있었다.
아이작은 언젠가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숨이 턱 막혀올 정도로 강대한 능력과 해석조차 불능케 하는 지배적인 힘.
'굳이 따지자면 지배자들의 힘과 비슷하다.'
심연과 혼돈을 다스리는 지배자들.
그들의 권능은 이와 비슷한 면이 있었다.
세계를 변화시키고,
법칙 자체를 뒤흔드는 힘.
완전히 똑같진 않지만,
그나마 비슷한 걸 찾자면 그러했다.
'그게 어째서 이런 개인에게 깃들어 있는가······.'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아이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유야 간단했다.
무명(無命)의 태생이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각성자가 손에 쥘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범상치 않은 핏줄을 타고났을 가능성이 있다. 아이작 자신조차 환생자인 마당에 다른 사람이 혈통을 타고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지배자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이해가 간다.'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푸확, 푸화악—!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으므로.
'앞으로 더욱 가깝게 지낼 필요가 있겠어.'
아이작은 마른침을 삼키며 생각했다.
* * *
1층, 2층, 3층을 가볍게 돌파.
나는 전속력으로 땅을 박차고 달렸다.
눈앞에 보이는 마수를 싸그리 처치하며 한 층 한 층 올라갔다.
건물에 마계화가 진행되며 엘리베이터와 연결된 통로 자체가 막혀 버렸다. 계단도 한 층을 오르면 반대편 복도의 계단을 이용해야 했다. 결국 모든 층을 일일이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문제가 되진 않는다.
'범위는 400m 그리고 내 시야에 보일 것.'
거기에 더해 나보다 레벨이 낮을 것.
그 조건만 충족 된다면 적은 나를 이길 수 없다.
"매복이다, 조심해라 무명!"
아이작이 소리쳤다.
복도의 꺾어지는 부분에 섀도우 비스트 여러 마리가 숨어 있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속력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이전이었다면 미친 짓이나 다름 없었겠지만······.
'확실하게 보인다.'
꺾어진 통로의 오른편에 대기하고 있던 섀도우 비스트들이 내 쪽으로 달려들고 있다.
그 광경이 슬로우모션처럼 두 눈에 새겨졌다.
'확실하게 보여.'
종말+급 아이템 에인헤랴르의 효과로 인해 내 신체 능력은 SSS급에 달한다.
먼저 보고 말할 수만 있다면.
푸확, 푸화악—!
마물들은 내 적수가 될 수 없다.
심지어 가브리엘의 궁극기에 의해 레벨이 낮아진 상태니까.
섀도우 비스트들의 끈적한 액체가 바닥을 적셨다. 나는 지체하지 않고 다시 달려나갔다.
이번에는 벽면에서 촉수가 뻗어져 온다.
서걱—!
나는 무명검을 휘둘러 촉수를 베어냈다. 촉수는 깔끔하게 잘려나갔다. 무명검 자체로도 신화+급에 속하는 최상위 아이템이다.
콰과과과—!
가브리엘은 벽면을 부수듯이 하며 달려나가고 있었다.
함정이나 예상치 못한 변수를 제거해주는 중이었다.
가브리엘에겐 최대한 힘을 아낄 것을 지시했다.
'허기 관리를 해야 한다.'
가브리엘은 궁극기 사용까지만.
이후로는 내가 약자멸시를 사용하는 편이 효율이 압도적으로 좋다.
덥썩.
나는 하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걸로 이제 남은 빵은 1개 하고 2/3개. 어쩌면 아슬아슬 할 수도 있다.
'최대한 아끼고 싶었는데.'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다.
최대한 속전속결로 끝내는 수밖에.
그래도 좋은 일도 있다.
'허기를 견디는 힘이 크게 올라갔다.'
능력 사용에 따른 패널티인 지독한 허기.
에인헤랴르 덕분에 육체가 강인해지며 함께 허기 내성도 올라갔다.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게 이런걸까. 배가 고픈 건 여전하지만 견딜만하다. 더 한계까지 몰아붙인 다음에 먹어도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자니, 왠지 모르게 뒤쪽에서 데릭이 기뻐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명, 역시 육체의 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은 건가?! 아주 빠르군!"
그게 그렇게 보이나.
"아이템을 꼈을지 단련했을지 자네가 어떻게 아나?"
아이작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타박했다. 데릭은 굴하지 않고 말했다.
"아니, 느껴진다. 뛰어난 영웅의 육체가 무명에게서 느껴진다."
데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는 눈이 정확하긴 하다.
영웅의 육체를 얻은 건 사실이니까. 아이템이지만.
데릭은 크게 소리쳤다.
"무명과의 첫 전투인데 이대로 꼴사나운 모습만 보이고 끝낼 순 없지!"
콰앙-!
데릭은 전력을 다해 뛰어올랐다. 눈 앞의 섀도우 베어를 향해 드롭킥을 날렸다. 공기를 찢는 강렬한 일격이었다.
푸화악-!
그러나 아쉽게도 섀도우 베어는 이미 약자멸시의 시야에 들어 온 상태.
섀도우 베어가 검은 액체가 되어 흩어졌다.
콰아앙!
목표를 잃은 데릭은 그대로 호텔의 화분을 쳐부수며 바닥을 굴렀다. 흙을 머리에 뒤집어 쓴 데릭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훌륭한 협동 작전이었다."
"······."
데릭은 별 거 아니라는 듯 흙을 털어내고선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 성좌 '12과업의 달성자가 이마를 짚습니다. 』
신기한 사람이 참 많다.
그르르······.
크르르······.
곧이어 섀도우 비스트들이 전방을 빽빽하게 가로막았다. 그 수가 세기 힘들 정도로 많다. 떼거지로 보낼 정도면 꽤 수세에 몰렸다는 걸로 봐도 되겠지.
"부탁하겠네 무명."
아이작은 턱을 매만지며 그리 말했다. 데릭과 하야토도 나를 바라보고 있다. 정상급 헌터들이 나만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다.
어쨌든 기대에 부응해주는 수밖에.
죽어.
그 한마디에 죽음의 물결이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콰아아아—.
음습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복도가 순식간에 정화 되었다.
"영국 길드에 스카웃 하고 싶은 정도야."
"아니, 들어 온다면 우리 길드가 낫겠지."
"······무명을 담을만한 길드가 있을까요."
이제 그 길을 달려 나가기만 하면 된다.
* * *
몬타쥬는 침음을 삼켰다.
'빠르다. 너무 빨라. 예상이 하나도 들어 맞질 않는군. 내가 무명을 너무 우습게 본 건가?'
섀도우 비스트가 무명의 발목조차 붙잡지 못할 줄은 몰랐다. 섀도우 비스트는 환상종에 속하는 상급 마물이다.
그 종류 또한 다양하다.
들개, 늑대, 곰, 사자, 악어······.
시간을 끌기엔 최적화된 놈들이었다. 생명력이 뛰어난 건 물론이고 재생 능력까지 가지고 있다. 특히 재생 능력은 트롤 이상이다. 살 한 덩이만 남아 있어도 금방 부활하는 놈들이다.
심지어 사도조차 걸리적거리게 할 다양한 능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 섀도우 비스트들이 무명의 앞에서 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재생은 꿈도 못 꿀 정도로 산산조각이 났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6층, 7층, 8층, 9층······. 초고속으로 뚫고 올라오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몬타쥬의 얼굴이 점차 굳어졌다.
'마계화만 제대로 진행되었어도······.'
진작에 건물 자체가 마계가 되었어야 했는데.
'이 빌어먹을 인간 놈이······!'
건물의 아래쪽에서 올라 오는 짙은 항마력이 마계화를 늦추고 있었다. 대체 무슨 짓을하면 항마력을 마인과 견줄 정도로 다룰 수 있단 말인가.
'큭, 그래도 이제 조금이다.'
마계화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콰아앙—!
13층의 문이 부서졌다.
"체크 메이트."
가브리엘이 그리 중얼거렸다.
문 앞에는 무명과 일행들이 서 있었다.
결국 그 모든 마수들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돌파하고 온 것이었다.
"······."
건물의 벽면에 몸이 고정된 몬타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상황이 안 좋았다. 지금 이 상태에선 제대로 된 반격도 할 수 없었다. 마계화를 하기 위해 힘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몬타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잠깐 기다리게나. 내가 죽으면 묵시록의 4기사를 막을 수 없게 된다. 네 놈들의 세계가 멸망하게 될 건데. 그래도 괜찮다는 건가?"
시간을 조금만 더 끌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내가 마기의 원천도 포기하겠네!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하는 장소도 알려주겠네! 그러니 잠시······."
거기까지 말을 하던 몬타쥬가 멈칫했다.
말로 구슬려 볼 상대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눈앞의 적은 무명(無命)이다.
그에게 대적하고자 했던 자들 전부가 어떻게 되었나.
그 최후를 몬타쥬는 잘 알고 있었다.
'하, 너무 성급했던 건가······.'
아니, 계획은 훌륭했다. 제 시간에 건물을 점거했고 현세와 분리하는데 성공했다. 거기까진 완벽했다. 마계화에만 성공했더라면 양상은 달라졌을 거다.
무명에게만 정신이 팔려 다른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게 패인이었다.
저벅, 저벅.
무명은 검을 든 채 몬타쥬를 향해 다가섰다.
"아, 안돼.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몬타쥬가 소리쳤다. 몇 천 년을 살아온 최상위 마인인 자신이 이다지도 허무하게 최후를 맞이한다니.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로브 속 무명의 눈빛이 언뜻 보인 듯했다.
한없이 차갑고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기에는 어떠한 자비심도 보이지 않았다.
무명 주강혁은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13층에 올라 몬타쥬를 마주하고나서부터 기이한 감각에 휩싸여 있었다.
'즉살을 사용하면 바로 끝나는 일이지만······.'
어째선지 무명검에서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검은 미세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무언가를 전해주고자 하는 듯.
스으으—.
주강혁은 주변에 만연한 죽음의 기운을 끌고 왔다.
죽음의 기운으로 덮을 수 있는 건 마물(魔物)에 한정된다. 생명이 없거나 이미 죽은 시체에는 통하지 않는다.
기운을 덮어씌우고자 해도 튕겨나간다.
그것이 정상이다.
물질에 죽음의 기운을 씌우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무명검은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
맹렬한 기시감이 주강혁을 휘감았다. 머리로는 거부해도 무의식적으로 몸이 움직인다.
몇 번이고 해봤던 것처럼.
주강혁은 죽음의 기운을 무명검에 입혔다.
스륵.
그러자 놀랍게도 검 내부로 죽음의 기운이 빨려 들어갔다. 기운을 흡수한 무명검의 칼날 위로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
무엇을 해야 할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마인의 최후를 지켜봅니다. 』
앞으로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콰아아아-!
고래고래 소리치는 마인의 주변으로 촉수가 솟아났다. 가공할 속도로 쇄도하는 촉수들. 서걱—! 주강혁은 그것들을 어렵지 않게 베어냈다.
베어진 촉수들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잘려진 부분부터 빠르게 타들어 가며 사라진다.
에인헤랴르의 검술 스킬을 발휘하며 무명은 한층 더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콰과과과! 파아앙!
막대한 마기가 폭발하듯 솟구쳐 나왔지만 뒤쪽에서 날아 온 가브리엘의 광창이 마기를 일소했다.
더 이상 무명과 최상위 마인의 사이를 가로막는 건 없다. 무명은 검을 들어 올렸다. 매끄럽고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동작이었다.
푸욱—!
발악하듯 소리치는 최상위 마인을 향해 검을 찔러넣었다.
죽음의 기운이 둘러진 칼날이 마인을 꿰뚫는 바로 그 순간.
푸화아악—!
몬타쥬는 최후를 맞이했다.
검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무명은 한동안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
『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신화+급 장비 선택권 및 플래티넘 코인을 획득합니다. 』
『 플래티넘 코인의 수량을 정산 중에 있습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화끈한 처치에 감탄합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화신으로 삼고 싶어 합니다. 』
쏟아지는 메시지의 틈바구니에서.
'이건······.'
무명은 자신의 검을 내려다보았다. 신기하게도 피가 묻지 않은 새하얀 도신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무명검(無命劍).
단순히 이름만 같은 게 아니었다.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죽음의 기운이 깃드는 칼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기운을 두른 무명검으로 대상을 찔렀을 때······.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사용하지 않고 즉살을 사용할 수 있었다.
73화 묵시록(1)
마계화가 풀려간다.
사아아—.
건물을 뒤덮었던 검은 액체들이 재가 되어 흩어진다. 끈적한 피막이 사라지며 창문으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마계화의 근원이었던 최상위 마인 몬타쥬는 확실하게 죽었다.
"그 한 번으로 해치운 겐가······."
아이작은 흥미롭다는 듯 중얼거렸다. 흥미롭다는 것을 뛰어넘어 경이로웠다.
일반 마인도 아니다.
최상위 마인을 단칼에 처치했다.
'이해하려고 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힘이구먼.'
현세에서 태어나기 이전, 그러니까 환생 전에도 마인들을 접할 기회가 꽤 있었다.
최하위부터 최상위까지 두루두루 만나보았다.
마인들은 지배욕이 강하며 스스로가 상위종이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실제로 마인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강하지.'
인간의 신체는 한 번 잘리면 복구가 어렵다. 현세에선 스킬이나 아이템 같은 시스템의 도움을 받지 않고선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마인들은 신체의 수복이 자유롭다.
마인에게 주어진 축복과도 같은 힘 '마기(魔氣)' 덕분이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기를 다루며 다른 종족은 상상도 하지 못할 기적을 발휘한다.
마법사가 일생에 걸쳐 도달할 기적을, 마인들은 가뿐히 뛰어넘곤 한다.
그뿐이 아니다.
'기본적인 내구력, 마기에 대한 뛰어난 적응력, 수 천 년을 살아가는 수명까지······.'
그쯤 되면 자신들을 특별한 종족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중에서도 최상위 마인은 더욱 특별했다. 오랜 시간 축적해 온 마기와 빼어난 경험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다른 차원에선 마왕급에 해당하는 놈들이 최상위 마인들이다.'
시스템의 지배하에 있는 현세의 일부를 마계화한다? 웬만한 존재는 꿈조차 못 꿀 기술이었다.
그런데 그런 최상위 마인을 무명은 단칼에 처치했다.
잡몹을 처치하듯 대수롭지 않게.
'아무리 마계화 도중이었다곤 해도 어려운 일이다. 내가 일격을 날렸어도 성공률은 5할에 그쳤을테니.'
최상위 마인은 심장을 꿰뚫려도 죽지 않는다.
우습다는 듯 신체를 복구하며 더 강한 마기를 끓어 올릴 뿐이다.
그러나 무명의 검이 놈을 꿰뚫은 순간.
놈은 깔끔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마인 특유의 뛰어난 신체는 복구되지 않았으며,
마기를 끌어 올려 저항하는 일조차 하지 못했다.
그 점이 아이작의 눈에는 신기하게 보였다.
'그 힘의 근원이 무엇일까. 이거 궁금해 미치겠군.'
그냥 묻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다. 특히 성좌들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간단히 끝났군. 너무 간단해서 싱거울 정도야. 참 이렇게 쉽다니."
데릭은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매만졌다.
"이거 창피하구만."
일본의 하야토 또한 그런 데릭을 바라보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무명이 아니었다면 개죽음을 당했을 거다.
하야토 자신과 데릭의 공격은 일반 마물인 섀도우 비스트에게 통하지도 않았다.
무명은 강했다.
그것도 말이 안되게.
알고 있었지만 새삼 뼈저리게 느껴졌다.
'······수행이 아직도 부족한 건가.'
하야토는 방금 전 무명의 찌르기를 떠올렸다.
그 장면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깔끔하고 군더더기가 없긴 했지만 정말 단순한 찌르기였다. 그렇게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겨우 그런 게 아닐 거다.'
그 찌르기엔 하야토 자신이 모르는 묘리가 숨겨져 있었을 거다.
얼마나 아득한 차이가 있길래, 그 편린조차 살피지 못하는 것일까.
하야토는 깊은 한숨과 함께 입술을 깨물었다.
'더욱 강해져야 한다. 일본의 1위로 만족할 게 아니라. 그 위를 보아야 한다.'
이번 경험을 통해 절실하게 느꼈다. 인류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자신이 쌓아 올린 탑이 얼마나 부실한지를.
의도치 않은 자극에 두 헌터가 의욕을 불태우는 사이.
무명 주강혁은 시스템 창과 자신의 검을 번갈아 살피고 있었다.
'이게 되네······.'
시험 삼아 죽음의 기운을 움직여 보았다.
움직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종말의 편린을 사용해 시스템의 제한을 조금 해제한 이후로 기운의 조작엔 익숙해졌다.
먼저 가브리엘의 창에 덧씌우려고 시도했다.
그때, 시선을 의식한 가브리엘이 입을 열었다.
"주인, 이번 내 활약을 별점으로 매겨줘."
"왜 그런 짓을······."
"그런 대결이야."
주강혁이 모르는 사이에 루시퍼와 내기라도 하는 모양.
"5점."
적당히 답하며 죽음의 기운을 움직였다. 예상했던 대로 죽음의 기운은 밀려났다.
무생물에겐 기운을 씌울 수 없다.
타겟으로 지정할 수 없단 의미다.
그러나 무명검에는.
스륵.
죽음의 기운이 놀랄만치 빠르게 흡수된다. 심지어 검기처럼 일렁거리기까지 한다.
이것을 휘두르면 대상을 죽일 수 있다. 최상위 마족을 찌르는 감각은 즉살을 쓰는 감각과 일치했다.
괜히 누가 닿을까 기운을 흩트렸다.
주강혁은 심각한 표정으로 인벤토리를 살폈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 2장이 그대로 있고, 즉살의 쿨타임도 아직 줄어들지 않았어.'
정리하자면,
공짜 즉살이 생겼다.
그리보는 게 타당했다.
물론 근거리 한정이지만,
즉살은 즉살이니까.
'검이 닿는 범위 내에서라면 고유 스킬 없이도 적을 죽일 수 있다라.'
물론 적에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이 난점이다. 보통 즉살로 처치하는 적은 강력한 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그래도 비장의 기술이 하나 있어서 나쁠 건 없지.'
주강혁은 다시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 미션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 최상위 마인 '몬타쥬' 처치 1 / 1
『 다수의 성좌가 미션 후원에 참여했습니다. 』
『 보상으로 지급되는 코인의 수량이 크게 증대됩니다. 』
샤아아—.
『 신화+급 장비 선택권을 획득합니다. 』
『 25 플래티넘 코인을 습득합니다. 』
허공에서 티켓 하나와 25개의 코인이 쏟아졌다. 주강혁은 잽싸게 코인을 잡아채 인벤토리에 넣었다.
향상된 신체능력이 요긴하다.
신화+급 장비 선택권은 이름 그대로다. 신화+급 중에서 원하는 아이템을 지정해 얻을 수 있다.
'이건 쿨타임 감소 아이템으로 바꾸면 되겠고.'
플래티넘 코인은 기존 코인보다 더 크고 영롱한 빛을 띠고 있다.
『 플래티넘 코인 』
- 1개당 1천만 코인의 가치를 지닙니다.
- 지니고 있으면 행운 수치가 상승합니다.
"······주인. 최고의 아이템을 얻었네."
가브리엘이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최고의 아이템······?"
"응, 행운은 확률이 개입하는 모든 사건에 적용되거든."
아까 일본 헌터들에게서 얻었던 아이템 옵션 부여권이 떠오른다. 50% 확률로 쿨타임 감소 옵션을 더해주는 거였지.
"나중에 꼭 빌려줘."
가브리엘은 주강혁에게 신신당부했다. 근데 최고의 아이템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주강혁이 수상쩍게 쳐다보자 가브리엘이 설명을 덧댔다.
"모바일 게임 뽑기 할 때 필요해."
"······."
뭐, 닳는 것도 아니니 상관없다만.
어쨌든 가브리엘에게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던 모양이다.
『 성좌들 사이에서 당신의 평판이 상승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미션 성공에 흡족해 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축하 메시지를 보냅니다. 』
성좌들이 메시지가 쏟아졌다. 일일이 읽기도 힘든 수준이다. 메시지를 대충 살피고선 한쪽으로 치워놨다.
그때, 생각에 잠겨 있던 아이작이 내게 말했다.
"상황은 일단락된 것 같으니 다시 연회장으로 가시게나."
주강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이었다.
"자, 잠깐. 저기 뭡니까?"
하야토가 바깥을 가리켰다. 창문 너머의 하늘에서 정체불명의 검은 물체가 날아오고 있었다.
"마인의 후속 병력······?"
아이작이 급하게 마법을 펼쳤다. 푸른 마나가 보호막을 형성하며 건물 전체로 퍼져나갔다.
콰아아앙—! 와장창!
그러나 검은 물체는 아이작의 보호막을 그대로 쳐부수며 건물 내부에 불시착했다.
아이작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급조한 방어막이라곤 하나,
이렇게 쉽게 깨어질 녀석은 아니었다.
최소한 상위, 아니 최상위 마족이 여기에 나타났다고 보는 게 맞았다.
심지어 강대한 힘이 느껴졌다.
조금 전 최상위 마인이 우스울 정도의 기운.
"최상위 마인일세, 모두 물러나게나!"
아이작의 양손에 마나가 피어올랐다.
그러나 하야토가 멈칫했다.
"잠깐······. 마인이 아니라······."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검은 물체에는 웬 여자애가 매달려 있었다. 게다가 검은 물체는 꿈틀대더니 몸을 일으키기까지 했다.
흑색의 날개와 흑발의 남성.
그 모습은 굉장히 익숙했다.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그 정체는 다름 아닌 루시퍼였으므로.
* * *
"이 빌어먹을 마인 놈들, 싸그리 잡아다 멸망시키든지 해야겠습니다. 감히 주인님을 가두고 마계화를?"
루시퍼는 길길이 날뛰며 분노를 표출했다.
그런 루시퍼의 등에는 천이령이 매달려 있었다.
"으에엑······. 소, 속이 안 좋아요."
"인간이 견디기엔 속도가 너무 빨랐나."
"잠깐, 잠깐만 쉴게요······."
아무래도 루시퍼는 전속력으로 날아 온 모양이었다.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여기가 어딘지는 몰라도.
[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
곧이어 청룡의 텔레파시도 내게 전해졌다.
문제 없다.
[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지금은 아프리카입니다. 재료의 수급이 끝나는 대로 곧장 복귀하겠습니다. ]
청룡은 침착하게 설명하고선 다시 할 일을 하러 갔다. 뭐, 이미 다 끝난 마당에 호들갑 떨 것도 없다.
"전부 제 불찰입니다. 앞으론 24시간 주인님 곁에 붙어 있겠습니다. 정말 큰일 날뻔했습니다."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있는데 큰일이 날 리가 없잖아. 주인도 5점이라고 인정했어."
"100점 만점에 5점일게 뻔하군. 그리고 네 놈만 있었다는 게 가장 불안한 점이었다."
"넌 여기에 없었으니까 0점이야."
두 사도가 유치한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아이작이 머리를 짚으며 물어왔다.
"······아군인 모양이구먼. 이제 끝났다고 봐도 되는 건가?"
"그렇다."
아이작의 물음에 답한 건 내가 아니었다.
어느샌가 사최헌 헌터가 13층에 올라왔다. 피곤한 얼굴이었다. 마계화를 막느라고 지하에서 고생했던 모양.
"뭐야, 네 놈. 지금까지 뭘하다가 나타난 거냐?"
루시퍼가 애꿎은 사최헌을 째려봤다. 사최헌은 익숙하다는 듯 담담히 대답했다.
"마인 측에 있던 헌터를 포박하고, 마계화에 힘을 보태던 마인들의 위치를 파악했다. 마족의 끄나풀은 영국의 이자벨이었다."
"정말인가?"
아이작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말이다."
"······이유는 뭐라고 하던가."
영국은 아직 마인들을 완전히 배제하지 못한 상황. 인간 스파이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사최헌은 담담히 답했다.
"죽은 이를 살려준다고 했던가. 자세한 건 직접 물어보면 될 거다. 하도 난리를 쳐서 붙잡는 데에 꽤 고생했다."
"그랬던 거였나······."
아이작은 씁쓸하게 웃었다. 짚히는 부분이 있어 보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게 남았다."
간단하게 상황을 설명한 사최헌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묵시록의 4기사. 최상위 마인이 그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들었다."
"묵시록의 4기사? 설마 내가 아는 그놈들?"
루시퍼의 표정이 덩달아 심각해졌다.
사최헌의 눈빛은 진지했다.
"당장 소환을 저지해야 한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 수도 있다. 딱 잘라 말하지. 현 인류는 묵시록의 4기사를 막을 능력이 없다."
* * *
최상위 마인 가논.
"크흐윽······! 개 같은······."
그는 아득바득 구덩이를 기어나왔다. 마기로 빚어낸 팔과 다리가 익숙치 않아 몇 번이고 땅에 머리를 처박았다.
가논의 눈동자 위로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눈에는 광기가 어렸다.
"무명, 네 놈은 반드시 죽인다."
시스템의 대리자에게 조율을 당한 참이었다. 무명에게 당하고 와선 화풀이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팔과 다리를 잃었다.
마인이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시스템의 지배하에 놓인 현세에서 대리자에게 저항하는 건 불가능했으므로.
바닥을 기는 가논이 앞으로 누군가가 다가왔다.
"가논. 꼴이 우습군."
현세의 책임자 중 하나인 튜란테르였다. 귀족의 정복을 걸친 그는 가논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었다.
퉷.
"동정하러 온 거냐? 이따위 팔다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몬타쥬가 죽었다."
"뭐?"
가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튜란테르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가논에게 건네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무명이 올 거라 예상되는 장소에서 무언가를 시도하다가 죽었다. 정황상 시간을 끌려고 했던 것 같다."
가논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받아 쥐었다. 마기로 이뤄진 의수는 조작이 쉽지 않았다.
몬타쥬의 희생.
의외였다.
온건파인 그에게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으니까.
"몬타쥬······."
마인 사회는 철저한 위계질서에 의해 돌아간다. 그러나 같은 급의 최상위 마인끼리의 사이는 나쁘지 않다.
그리 쉽게 당할 놈은 아니었을 텐데.
튜란테르는 가논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가 없는 동안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할 준비는 마쳐두었다."
"너, 넌 소환에 반대하는 게 아니었나?"
"현세의 지배에 실패하는 것보단 낫겠지."
튜란테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몬타쥬의 희생을 허무하게 날려 보낼 생각은 아니겠지?"
스윽.
가논은 의수를 들어 올려 마기를 피워올렸다. 담배에 불이 붙었다. 진한 마기가 전신으로 스며들자 정신이 한결 명료해졌다.
"물론이다."
가논의 눈동자가 한층 붉어졌다.
무명에 대한 증오가 한층 더 깊어지는 듯했다. 팔 다리를 잃은 걸로도 모자라 몬타쥬까지 당했다니.
고작 인간 하나에게 마계 전체가 우롱당하고 있다. 마계의 역사상 이토록 치욕스러운 순간이 있을까.
튜란테르의 말대로 소환에 필요한 준비는 완전히 끝나고 있었다.
"종말의 열쇠만 꽂아 넣으면 강림이 시작될 걸세."
두 마인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외딴섬으로 향했다.
가논과 튜란테르는 거대한 마법진 위에 올랐다. 마법진 전체가 피로 새겨져 있었다. 가축의 피가 아닌 인간들의 피였다.
여기뿐만이 아니다.
세계 각국의 숨겨진 장소에 이와 같은 마법진이 그려져 있다. 각 꼭짓점을 이으면 지구를 바탕으로 하는 마법진이 완성된다.
이 섬은 그 중심이었다.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거대 규모의 술식이었다.
『 [ 아티팩트 ] 묵시록 : 진(眞) 종말의 열쇠 』
가논은 손에 쥔 아티팩트를 들어 올렸다.
"무명, 이것도 막는다면 인정하겠다."
마법진의 외곽에서 막대한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거센 마기가 주변에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일대의 바다가 성난 파도를 일으키고,
강력한 비바람이 휘몰아친다.
먹구름이 낀 하늘 위로 번개와 천둥이 번갈아 터져 나오고 있었다.
가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과연 묵시록의 4기사.
소환이 임박한 지금. 그 존재만으로도 막대한 이변을 불러일으키는 듯했다.
그러나 옆에 서 있던 튜란테르는 다르게 생각하는 듯했다.
"가논, 열쇠를 사용한 건가?"
"아니, 아직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이곳으로 막대한 에너지가 모여드는 것은 맞다.
하지만, 기상까지 변화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묵시록의 4기사는 아직 소환되지 않았으니까.
이건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가논—! 빨리 열쇠를 사용해라!"
튜란테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뭐?"
가논의 시선이 하늘에 고정되었다. 이내 그의 입이 벌려졌다.
콰아아—!
까맣게 낀 먹구름의 사이,
휘몰아치는 폭풍우 아래.
시야 한켠으로 푸른 청룡이 내려오고 있었다.
74화 묵시록(2)
묵시록(默示錄).
성서의 마지막 예언서로 인류의 멸망을 담은 책이다.
그 중에서도 묵시록의 4기사는 이 땅에 최후의 심판을 불러 오는 존재로서 알려져 있다.
"칠죄종이 인류가 규정한 7개의 죄악이라면······. 묵시록의 4기사는 말 그대로 종말을 불러오는 존재다."
칠죄종과는 태생 자체가 다르다.
4기사의 존재 의의는 애초부터 종말을 위한 것이다. 그 위세나 강함은 칠죄종과 차원을 달리 한다.
사최헌은 떠올렸다.
인류가 철저하게 유린 당했던 과거의 기억을.
전세계 대륙의 절반이 소멸했다. 천재지변이 세계를 덮쳤고, 얼마 남지 않은 인간들은 고통 속에서 죽어갔다.
묵시록의 4기사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공포를 사최헌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일반적인 마물과는 궤를 달리한다.'
묵시록의 4기사는 종말 그 자체였다.
'본래대로라면 4페이즈가 넘어서 등장해야 할 존재니.'
물론 무적은 아니었다.
거듭되는 회귀 속에서 사최헌은 방법을 찾았고, 실제로 승리를 거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건 4페이즈의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훨씬 시간이 지난 뒤에나 가능한 일이란 뜻이었다.
지금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다.
대항할 물자나 대비책이 거의 전무하다.
아직 나타나지 않은 아티팩트와 아이템들, 스킬들과 능력을 생각하면 지금4기사를 상대한다는 것은 시기상조.
사최헌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렇게 이른 시기에 묵시록의 4기사가 소환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마인들이 상당히 다급해졌다는 의미기도 했다. 무명이 미친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기도 했고.
"사최헌 헌터, 아직 정해진 건 없지 않나? 성서에 나타난 멸망의 상징이긴 하나······. 시스템으로서 이 땅에 나타날 때 어떤 모습일진 모르는 거니까."
환생자 아이작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그러나 사최헌은 단호하게 답했다.
"예언자들로부터 들었다. 인류의 멸망을 고려해야 하는 수준이다."
자리에 있던 다른 헌터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 주인님, 아슬아슬하게 도착했습니다. 의식이 치뤄지기 직전입니다. ]
그때, 주강혁이 청룡으로부터 사념을 받았다.
"사최헌, 방금 청룡이 최상위 마인들을 발견했다."
"예상이 맞아서 다행이군······."
몬타쥬의 마계화에는 여타 마인들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사최헌은 그걸 역추적해 마인들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걸 토대로 추측한 의식 장소였다.
가장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건 마침 재료를 수집하느라 근처에 있던 청룡이었다.
[ 의식이 치뤄지기 직전입니다. 열쇠만 꽂으면 묵시록의 4기사가 강림할 겁니다. ]
사념을 함께 듣고 있던 루시퍼가 말했다.
"어차피 소환 될 거라면······. 차라리 지금이 나을 수도 있지. 시스템의 제한을 받게 될 테니까."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제정신인가? 무명은 이길지도 모르지. 하지만 인류가 궤멸적인 피해를 입을 거다."
여기까지 큰 피해 없이 도달할 수 있었다. 과거와 비교하면 더 많은 헌터들이 살아 남았다.
그러나 묵시록의 4기사가 나타나면, 애써 지켜 온 것들이 모두 무너져 내릴 것이다.
"잡으면 되잖아."
"또 그 소리인가? 아무 피해 없이 잡을 수 있다면 동의하겠다. 하지만······."
사최헌과 루시퍼의 말싸움이 길어지려는 찰나.
"잠깐, 뭐가 되었든 우선은 의식부터다."
무명이 입을 열었다.
의식은 이미 벌어지고 있었다. 여기부터 해결해야 했다. 의식을 막을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못해도 뭔가 조치를 취해야 했다.
"청룡, 최상위 마인을 상대로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되지?"
무명은 그리 물었다.
* * *
어느 외딴 섬.
콰아아아—!
강력한 폭풍이 섬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선 최상위 마인 둘과 청룡.
콰드득!
나무가 뿌리채 뽑혀 나가는 위력의 바람이었다. 청룡이 만들어낸 기상 이변이었다.
"크으윽······! 대체 어디까지 방해를 하려는 거냐?!"
종말의 열쇠를 손에 든 가논이 소리쳤다. 또 다른 마인 튜란테르는 마기를 내뿜으며 청룡에게 달려 들었다.
"가논! 소환해라! 내가 이 사도를 맡겠다!"
최상위 마인 튜란테트로부터 마기가 터져나왔다. 파아앙-! 일시에 폭풍을 걷어내는 강대한 마기였다.
'······.'
청룡은 잠자코 그 둘을 바라봤다.
마인들 중에서도 뛰어난 편에 속하는 자들이다. 한 명이 칠죄종만큼 강하진 않지만, 둘이 한꺼번에 덤비면 확실히 까다롭다.
그리 되면 승률은 3할 정도일까.
대신 한 명씩 상대한다면 이길 가능성은 7할까지 오른다.
[ 한 명을 없애려고 하면 없앨 수 있지만. 묵시록의 4기사가 지상에 강림하는 건 막기 어려울 것 같네요. ]
콰아앙-!
튜란테르와 청룡이 맞부딪혔다. 흑색의 마기와 푸른 도력이 충돌하며 막대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지면이 뒤엎어지고 바위가 산산조각나는 수준의 충격파였다.
"뭐가 되었든, 이미 늦었다!"
가논은 종말의 열쇠를 바닥에 내려 꽂으려 했다. 화아악-! 청룡의 도력이 빛살처럼 뻗어나가 가논의 팔목을 붙잡았다.
"크으윽-!"
가논의 눈가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열쇠를 쥔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마기로 만든 의수가 아직 익숙치 않은 탓이었다.
콰아아-!
청룡의 전투는 묘기에 가까웠다. 탄환처럼 날아오는 튜란테르의 마기를 요리조리 피하며 가논을 견제했다.
콰앙!
가논이 도력에 튕겨져 나가고, 어느새 다가온 튜란테르의 발차기에 청룡이 바닥을 굴렀다.
재빨리 자세를 잡은 청룡은 튜란테르의 주먹을 아대로 흘려내며 복부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뻐억! 튜란테르가 비틀거리는 사이, 다시 한 번 도력을 이용해 멀리 떨어진 가논의 다리를 붙잡았다.
가논은 열쇠를 꽂지 못한 채 바다에 처박혔다.
개싸움이 따로 없었다.
그런 싸움이 한동안 이어졌다. 치고 박고 부수고 밀어내고 구르고······.
청룡은 입가를 닦아내며 생각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소환을 막긴 어렵다.'
전력을 내는 최상위 마인을 상대하면서 열쇠의 사용까지 저지해야 했다. 주인님의 리미트 브레이커는 당장 쓸 수 없는 상태.
심지어 청룡에겐 시야 공유 능력이 없다. 그게 가능했더라면 최상위 마인 둘 정도는 주인님께서 가볍게 처치하셨을텐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청룡의 시선이 마법진으로 향했다.
'그렇다면 소환을 비트는 것 정도는······.'
콰아앙-!
압축된 마기가 청룡을 강타했다. 청룡은 바닥에 자국을 새기며 크게 밀려났다.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은 지워지지 않았다. 활성화 된 마법진을 바꾸려면 도력을 불어 넣어야 한다.
놈들에게 들키지 않게.
마법진의 술식이 바뀐 줄도 모르게.
술식의 수정은 어렵지 않다. 청룡이 본래 가지고 있는 풍부한 지식 덕분이다.
문제는 어떻게 자연스럽게 하느냐다.
"크윽······."
따라서 청룡은 부상을 연기했다. 팔 한 쪽을 부여 잡고서 얼굴을 찡그렸다.
공격이 효과가 있자 튜란테르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지금이다, 가논! 꾸물거리지말고 불러내라! 이 놈은 내가 맡겠다!"
튜란테르가 전신으로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의 마기가 칼날이 되어 청룡을 향해 쏟아졌다.
콰과과과—!
그것이 되려 청룡에게는 연막이 되어 주었다. 칼날을 어렵지 않게 피해내며 청룡은 발끝에 도력을 집중했다.
공격을 회피하며 조금씩 마법진의 구성을 변경해 나갔다.
'중요한 건 인류가 대처할 시간을 버는 거다.'
선배 루시퍼는 주인님만 살아 계신다면, 인류 따위 아무래도 좋다고 하셨다.
하지만 청룡의 생각은 달랐다.
'주인님께선······. 인류의 파멸을 바라지 않으신다.'
- 사람들이 전부 사라지면 월세는 누구한테 받아?
지나가듯 말씀하셨었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가볍지 않으리라.
'법과 질서가 지켜지는 세상.'
시스템이 도래한 세계에서 추구하기엔 쉽지 않은 목표였다.
시스템은 종말을 불러오고, 페이즈가 진행될수록 기존의 관념과 규정들은 쉽게 무너지고 만다.
수많은 세계의 종말을 직접 보아 온 청룡이기에 더욱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인님은 분명히 말씀하셨다.
월세를 받고 싶다고.
멸망 앞에 무너진 세계가 아닌, 올바르게 작동하는 이 세계 자체를 지키고 싶단 말씀 아니겠는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시도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츠즈즛—!
발끝으로 모인 도력이 마침내 마법진의 일부를 수정했다.
고치는 건 어렵지 않다.
남은 건 들키지 않기를 바랄 뿐.
콰과과과!
쏟아지는 마력의 격류 속에서 청룡은 못 이기겠다는 듯 물러났다. 흑색의 연기를 뚫고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큭, 저항이 거셉니다. 일단 후퇴하는 수밖에······."
주인에게 말하는 것처럼 중얼거리자, 청룡을 상대하던 튜란테르의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네 놈의 주인에게 전해라! 이제 곧 세상의 종말이 찾아올 거라고!"
완전히 해냈다는 표정이었다.
마법진의 중심에 서 있던 가논이 지면에 열쇠를 완전히 꽂아넣었다. 우우웅—! 마법진이 빛을 발하며 가동 되기 시작했다.
모른다.
마인들은 바뀐 마법진에 대해서 조금도 생각치 못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청룡은 유유히 하늘을 날아 떠났다.
[ 주인님, 복귀하겠습니다. ]
청룡이 시야에서 멀어지고,
의식이 시전되는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섬 하나를 통째로 일소하는 강력한 폭발이 터져나왔다.
* * *
대한민국, 무명(無命)의 빌딩.
"죄송합니다. 시간 벌긴 했지만 소환에는 성공했을 겁니다."
"아냐, 고생했어. 그게 어디야."
"면목 없습니다."
청룡은 그리 말하며 허리춤에 묶어 두었던 아공간 주머니를 내려놨다.
안에는 천계의 하얀빵을 만들기 위한 재료가 담겨 있었다.
"하늘이 점점 붉어지고 있어."
가브리엘은 소파에 앉아 바깥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루시퍼가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붉은색이면 두번째 기사인가."
"이번에는 정식 소환이 아닌만큼 순서도 뒤바뀐 모양입니다."
"순서가 있어?"
내 물음에 청룡이 답했다.
"본래 백, 적, 흑, 청의 순서입니다. 봉인된 두루마리를 풀 때마다, 멸망이 다가오는 거죠."
어째 익숙한 색깔 배치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
느낌상 다음 사도 소환은 이 녀석일 것 같은데. 청룡의 동료면 주작이겠고. 적색이다.
그러면 우리 쪽에서도 묵시록의 4기사와 똑같은 색이 맞춰진다. 우연치고는 기묘하다.
나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비는 해야겠지."
사최헌은 소식을 듣자마자 어디론가 사라졌다. 각국의 헌터들도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연회치고는 뒷맛이 씁쓸했다.
첫번째 시련을 넘었나 싶었더니, 또다시 그걸 뛰어넘는 위협이 나타났으니까.
"인류가 단결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청룡은 그리 말했다.
"그랬으면 좋겠네."
마인이라는 외부의 세력도 있으니, 우리끼리의 내분은 최대한 피하는 게 좋다. 물론 그 부분은 높으신 분들이 알아서 하겠지.
그때, 루시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료도 대강 모였으니 꼬맹이를 불러 오겠습니다."
"이사 중인 거 아니야?"
"금방 끝날 거라고 했습니다. 딱히 가구도 별로 없다던데요."
천이령 헌터는 빌딩에 도착하고 나서 빠르게 마음을 굳혔다.
- 저, 저도 여기 살래요! 살아도 될까요?!
불멸의 길드원들도 이사 온 마당에 안될 것 없었다. 랭킹 3위인 천이령 헌터가 건물에 들어오면 안전 확보도 되고 홍보도 된다.
그리하여 현재 천이령 헌터는 이사 중이었다.
루시퍼가 천이령 헌터를 부르러 갔으니 나는 내 할 일을 하자.
"연회장에서 얻은 아이템부터 정리할까."
나는 인벤토리에서 티켓 한 장을 꺼냈다.
『 [ 전설+ ] 아이템 옵션 부여권 』
나는 옵션 부여권을 종말의 귀걸이에 사용했다.
『 50% 확률로 쿨타임 감소 옵션을 부여 합니다. 』
『 사용하시겠습니까? 』
물론이다.
사용하자 종말의 귀걸이에 가벼운 빛이 감돌았다.
『 플래티넘 코인이 행운을 불러 옵니다. 』
『 옵션 부여에 성공하셨습니다. 』
종말의 귀걸이에 쿨타임 감소 옵션이 붙었다.
『 즉살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3.2일 → 2.2일 』
쿨타임이 이틀로 줄어들었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철컥.
미국 헌터들에게서 받아온 검은색 가방을 열었다.
"오······."
내부에는 둥그런 환약 하나가 들어 있었다.
『 [ 신화 ] 신속의 환단 』
- 소비 아이템
- 영구적으로 쿨타임 감소 30%, 이동속도 30%
- 10년간 건강한 신체를 유지할 수 있게 됩니다.
- 환단은 하나만 섭취 가능합니다.
소비 아이템이란 걸 감안하면 말도 안되는 효과였다.
쿨감 30%. 이속 30%.
게다가 10년간 건강하게 지낼 수 있단다.
'먹으면 감기도 안 걸린다는 거 아니야.'
미국 헌터들이 자신만만해한 이유를 알겠다.
우적우적.
나는 환단을 씹어서 삼켰다.
지독하게 쓰다.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주인, 콜라도 같이 먹어."
가브리엘이 콜라를 가져다 주었다. 몸에 좋은 걸 먹는데, 뭔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지만······. 먹으니까 한결 낫다.
『 즉살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2.2일 → 1.5일 』
이제 쿨타임은 하루 하고도 반나절.
대망의 마지막 티켓이 남았다.
『 [ 신화+급 ] 장비 선택권 』
최상위 마인 몬타쥬를 쓰러뜨리고 미션 보상을 받은 물건이다. 티켓을 찢자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 필요한 아이템을 말씀해주십시오. 』
"제일 좋은 쿨타임 감소 옵션이 붙은 아이템. 가급적 내가 없는 부위로. 다른 능력치는 상관 없고."
거의 모든 부위에 아이템을 장착하고 있긴 하다.
펜던트, 갑옷, 어깨보호대, 반지, 벨트, 신발, 반지, 팔찌 등등······.
샤아아—.
조건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허공에서 아이템이 형성되었다.
『 [ 신화+급 ] 시공 관찰자 』
- 쿨타임 감소 50%
- 추가 쿨타임 감소 10%
- 마력 Lv.7
'효과가 미쳤네······.'
아쉽게도 반지였다. 워낙 끼고 있는 장비가 많아 어쩔 수 없는 모양.
반지는 세 개까지만 낄 수 있으니 하나를 빼야 한다.
흐름의 별반지, 초속의 반지, 쾌속의 고리.
현재 장착하고 있는 반지는 이 세 개인데. 그 중 제일 안좋은 게 흐름의 별반지다.
『 [ 유니크 ] 흐름의 별반지 』
- 쿨타임 감소 10%
- 마력 Lv.3
비교해보니 시공 관찰자가 완벽한 상위 호환이다.
나는 두 반지를 바꿔꼈다.
곧이어 떠오르는 메시지창.
『 즉살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1.5일 → 18시간(0.75일) 』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드디어······.'
즉살의 쿨타임이 하루 안쪽으로 들어왔다. 꾸준히 쿨타임 아이템을 노려온 보람이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무료로 즉살을 사용할 수 있다니.
꽤나 감격스러운 순간이다.
운용의 폭도 훨씬 넓어지겠지.
"언젠가 초단위로 줄일 수도 있으려나?"
"앞으로 주인님께서 얻으실 아이템들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무적이나 다름 없긴 하겠다만.
"그러면 다음으론······."
나는 현관문을 바라보았다. 루시퍼가 천이령 헌터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여, 여기가 무명님의 집······. 괴, 굉장해요. 근데 집 안에 빵을 만들 장소가 있다고요?"
"그래. 왠진 모르겠는데, 다 있어."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였다.
청룡과 최상위 마인의 교전에서 결국 빵이 전부 소모 되었다. 꽤 오래 먹긴 했다. 그게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거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랜턴 소울이터를 들어 올렸다.
"천이령 헌터가 빵을 만들어주는대로 바로 움직이자."
묵시록의 4기사가 그렇게 강력하다면.
이쪽에서도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겠지.
랜턴에 영혼을 가득 채워서 사도 소환권을 뽑을 예정이다. 균열은 내가 원하는 보상을 불러오므로.
"다음 사도를 소환할 때가 됐어."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당신의 선택에 환호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후원을 쏟아 부을 준비를 합니다. 』
불러올 것은 주작이다.
······아마도.
75화. 묵시록(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