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균열(1)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지켜봅니다. 』
게이트 내부로 들어가자 황량한 공기가 우리를 맞이했다.
"공기가 나빠."
가브리엘이 불평했다.
동의하는 바였다.
이곳 전체에 흑색의 안개가 깔려 있었다.
심지어 하늘은 잿빛이고, 땅은 회색빛. 그 위로 앙상한 가지 뻗은 나무들. 나뭇잎조차 흑색이었다. 숲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데 공기가 좋을 턱이 없다.
팅-!
『 SSS급 게이트 - 흑무왕의 땅 』
▶클리어 조건
- 흑무왕 처치 0 / 1
- 다섯 부하 처치 0 / 5
- 흑색의 군사 처치 0 / 5000
나는 클리어 조건을 확인했다. 처치해야 하는 마물의 수가 상당하다.
'원래는 혼자 공략해야 하는 인스턴스 게이트인 걸 감안하면······.'
무지막지한 난이도인 셈이다.
심지어 내 현재 레벨은 175.
SSS급 게이트의 레벨이 250대인 걸 생각하면, 시스템의 대리자가 얼마나 무모한 요구를 했는지가 보인다.
"흑무왕(黑霧王). 들어 본 적 있습니다. 인간이길 벗어나 무력 하나로 세계의 정점에 오른 폭군입니다."
주변을 둘러보던 청룡이 입을 열었다. 나는 살짝 놀라 되물었다.
"흑무왕이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라고?"
"예, 그렇습니다. 모든 게이트는 한때 존재했던 세계의 조각이거든요. SSS급 게이트는 더욱 커다란 파편이고요."
청룡이 계속 말했다.
"물론, 현시점에서 정말로 존재하는 세계는 아닙니다. 세계 자체가 조각조각 나누어졌으니까요. 파편이 재현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죠."
"죄다 가짜라는 거 아냐. 공략하고 나면 사라지는."
루시퍼는 간단하게 정리했다. 청룡은 씁쓸한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가짜는 아닙니다. 세계에 종속된 자들이 영혼이 매여 있으니까요."
"그게 그거 아닌······."
그때였다.
쿠구구구······!
지축을 울리는 발굽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안개 속에서 앙상한 나무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있었다.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온다.
"멧돼지."
"엄청나게 큰 놈입니다."
"잡으면 고기 파티를 해도 되겠는데? 고기가 맛있을지······."
거대 멧돼지 한 마리가 미친 듯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지형지물을 죄다 박살 내면서 말이다.
"이쪽으로 오는데?"
"잡죠."
[ Lv.264 ]
레벨은 높은 편이다.
보통 인스턴스 게이트는 레벨이 낮게 설정되는데 대리자가 열어준 거라 그런지 레벨이 높다.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멧돼지를 보고도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평범한 헌터였다면 당장 숨고 봐야 했지만, 이쪽은 평범하지 않은 놈들로만 구성되어 있으니까.
"내가 잡을래."
가브리엘이 앞으로 나섰다. 성력의 새하얀 빛이 주먹을 타고 고고히 흘렀다.
쿠구구구!
거대 멧돼지가 지척까지 도달했을 때.
가브리엘은 가볍게 정권을 내질렀다.
쩌어엉!
충격파가 터져 나오며 옅은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먹에 부딪힌 멧돼지의 뒷다리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꾸에에엑! 쿠웅!
돼지 멱따는 소리와 함께 멧돼지가 땅에 떨어졌다. 자욱한 잿빛 먼지가 피어올랐다.
즉사였다.
『 성좌 '죽음에서 돌아온 전사'가 호쾌한 한방에 만족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가브리엘의 활약을 좋아합니다. 』
『 해당 성좌가 100 코인을 후원합니다. 』
나는 성좌들의 메시지를 한쪽으로 치워놨다.
" 내 주먹에 산산조각나지 않다니······. 평범한 멧돼지는 아닐지도."
가브리엘은 손을 털어냈다. 루시퍼가 득달같이 달려와 멧돼지를 확인했다.
"간혹 타차원의 마물들 중에 맛이 좋은 놈들도 있습니다. 지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죠."
루시퍼의 손끝에서 뻗어나간 흑마력이 멧돼지의 내부를 헤집고 마정석을 뽑아냈다. 이어서는 고기를 몇 점 떼어내고 있었다.
슈우우—.
멧돼지에게서 빠져나온 새하얀 영혼 하나가 랜턴으로 들어왔다. 이제 90%가량 채운 것 같다.
랜턴 소울이터가 부르르 진동했다. 기뻐하는 건가?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든다.
멧돼지 한 마리로 꽤 많이 찼다.
SSS급 게이트에 있는 영혼의 질이 좋은 모양.
'내 경험치도 엄청나게 올랐네.'
거의 레벨업 직전이다.
아직 오늘 올릴 수 있는 레벨이 8정도 남아 있으니 이곳에서 전부 채우고 갈 수도 있겠지.
'꿀이긴 하네.'
이 정도 효율을 낼 수 있는 사냥터는 전세계를 뒤져봐도 없다. 이제 막 SS급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한 참이니까. 어딜가서 SSS급 마물들을 잡겠는가.
게다가 공략이 끝나면 종말+급 무기까지 얻게 된다.
여러모로 손해 볼 게 없는 공략이긴 하다.
"퉷. 크윽, 주인님, 이 고기는 못 쓰겠습니다. 대신 어금니는 챙길만합니다. 소재로 팔면 돈이 꽤 될 것 같거든요."
"내가 잘라서 넣을래."
가브리엘이 손날치기로 어금니를 잘라 아공간 주머니에 담았다. 사최헌 헌터의 창고에서 가져온 걸 아직까지 유용하게 쓰고 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전투부터 마정석 회수까지.
'편하네······.'
사도들이 뚝딱뚝딱 전부 해주니까 진짜 편하다.
흐뭇하게 멧돼지 도축을 구경하고 있던 그때였다.
『 인지 Lv.5가 발휘됩니다. ( 보석 : 나태 ) 』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위협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이쪽을 바라본 채 발걸음 멈춘 소년 하나.
"흐, 흑무왕의 부하를 없앴다니······?"
소년은 입을 벌린 채 우리들과 멧돼지를 번갈아 보았다.
- 다섯 부하 처치 1 / 5
지금 확인해보니 카운트가 하나 오르기는 했다.
소년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호, 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사례는 제대로 하겠습니다!"
그 말에 멧돼지를 해체하던 루시퍼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이봐, 인간 꼬맹이. 우리 몸값이 얼마나 되는 줄 알고······."
"일단 들어 볼까?"
"아, 물론이죠. 역시 이야기는 듣고 봐야하는 법."
내 말에 루시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재빨리 말을 바꿨다.
"주인님의 은혜에 감사해라. 네 상상보다 몇만배는 굉장하신 분이니까."
* * *
소년은 저항군이었다.
흑무왕의 폭정에 맞서 세계를 탈환하려는 단체의 일원.
평소와 다름없이 정찰 중이었는데 우리를 발견했단다.
"굉장해요. 사실 꿈을 꾸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에요! 다섯 부하 중 하나를 한 방에! 아니, 진짜 말도 안돼요!"
소년은 본부로 귀환하면서 계속해서 재잘댔다.
"진짜 궁금했는데, 혹시 진짜 천사이신건가요?"
소년은 가브리엘의 날개를 보고서 말했다.
"눈썰미가 굉장한 걸."
가브리엘은 천연덕스럽게 날개를 으쓱였다. 그 모습은 누가봐도 천사이긴 하다.
"역시! 처, 천사를 뵙는 건 처음이에요."
소년은 우리가 다섯 부하 중 하나를 잡은 거라고 했지.
"······그 멧돼지가 중간 보스 격이었다는 거잖아."
한 방에 죽어서 잡몹일 줄 알았는데.
하긴, 사도들이 보통 강력해야지.
멧돼지의 레벨은 264.
단순 레벨로만 따져도 칠죄종보다 한참 낮다.
칠죄종의 레벨은 500을 넘기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레벨이 전부가 아니다.
같은 레벨의 고블린보다 오크가 강한 것처럼. 종족 본연의 능력에 따라 그 힘은 달라진다.
거기에 헌터가 개입하면 또 달라진다.
'같은 레벨이라면 대개 헌터가 강하다.'
시스템의 스킬과 고유 능력을 활용하는 헌터는 이름처럼 마물을 사냥하는 사냥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사도들은······.'
예외다. 그들은 존재 자체가 강하다.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데도 압도적인 기량을 발휘한다.
SSS급 게이트의 중간 보스 정도로는 어려운 축에도 속하지 못한다.
"이 꼬맹이를 따라가는 게 의미가 있나?"
루시퍼의 중얼거림에 청룡이 대답했다.
"대략적인 지리와 흑무왕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면 나쁘지 않죠. 5,000명만 잡는 게 아니라 사냥을 좀 더 지속하려면 정보는 필수입니다."
SSS급 게이트는 상당히 넓었다.
숲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흑색의 안개로 뒤덮혀 있어 정확한 지리가 파악되지 않는다.
"귀찮게 됐네."
심지어 루시퍼의 기운 포착도 흩트리는 안개였다.
저항군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가면 편하게 공략이 가능할 거다. 남은 빵을 아껴 먹으려면 무작정 가는 것보단 이게 효율적이다.
"다 왔습니다!"
소년은 우리를 어느 낡은 저택으로 데려갔다. 저택의 정문에는 철제 보호대를 걸친 병사들이 있었다.
병사들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리를 경계했다. 무기를 반쯤 들어 올린 채로 물었다.
"알푼, 그 사람들은 누구냐?"
"이, 이 분들은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무려 다섯 부하 중 하나를 때려잡은 엄청난 실력자라고요!"
"저 사람들이······?"
"그렇다니까요. 정확히는 저분이 잡았지만요."
소년은 조심스레 가브리엘을 가리켰다.
실제로 사냥을 한 건 가브리엘이었으니까. 경비병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대장께 보고 하고 오겠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때, 대문 너머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대, 대장!"
"위험합니다. 흑무왕의 끄나풀일 가능성도······."
"그럴 리가있나. 다섯 부하 중 하나를 잡았는데."
대장이라고 불린 여성은 한쪽 눈에 안대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삶이 쉽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듯 목덜미와 팔 곳곳에 흉터가 가득했다.
"금발의 소녀에게서 예언을 하나 받았지. 조만간 영웅들이 찾아올테니 극진이 대접하라더군. 순백과 흑색의 날개 그리고 검은 로브. 이들이 세계를 구할 거라던가."
예언을 받았다.
대장은 그리 말했다.
"음, 혹시 저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나요?"
청룡이 슬그머니 손을 들어 올렸다.
* * *
우리는 별다른 신분 증명 없이 저택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항군은 낡은 저택을 판자로 덧대어 기지로 쓰고 있었다.
"예언자 집단에서 미리 준비해놨나 봅니다. 그런데 왜 제 이름만 쏙 빼놓은 건지······."
"일처리가 깔끔해서 좋네. 그게 아니었으면 저항군 놈들을 때려 잡으면서 정보를 얻어야 했을 텐데."
"근데 어떻게 한거지?"
여기는 게이트 안이다.
우리가 가장 먼저 들어왔고.
무슨 수로 저항군과 미리 접촉했단 말인가.
청룡이 답했다.
"아마 시간에 관련된 능력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언자들 중에는 종종 있거든요. 하지만 왜 저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걸까요."
청룡은 그 부분이 섭섭했는지 벌써 세 번째 말하고 있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말해둘게.
청룡도 빼놓지 말라고.
집무실에 도착하자, 대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10년에 걸친 전투.
현시점 저항군은 거의 궤멸 직전이었단다.
"필요한 게 있다면 뭐든 지원하겠네. 흑무왕을 없앨 수만 있다면······. 어떤 비용을 치르든 각오가 되어 있네."
대장의 시선이 루시퍼에게 향했다.
"내 영혼을 거둬가도 좋네."
"뭐야, 필요 없어. 왜 날보고 이야기하는 거야? 아니지, 그렇게 원한다면······."
루시퍼의 시선이 내가 든 랜턴으로 향했다.
······그건 좀.
나는 앞으로 나서서 입을 열었다.
"흑무왕에 대한 정보를 이쪽에 전부 넘겨주는 걸로 충분하다."
"그걸로 괜찮겠나?"
"그렇다."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내주고 말고."
대장이 탁상 위의 종을 울리자, 잠시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병사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자료를 한가득 들고 왔다.
"흐음, 이거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촤르륵-!
소파에 걸터앉은 청룡이 빠르게 자료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흑무왕의 위치는 파악을 해뒀네요. 병사들의 위치나 지형도······. 이쪽으로 진입해서 쓸어버리고, 다섯 부하는 불러들이는 걸로 하죠."
작전은 별거 없었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보이는 놈들을 죄다 쓸어버리는 것.
초조한 모습으로 우리를 지켜보던 대장이 고개를 들었다.
"병력은 얼마나 필요한가? 지금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은······."
"아니, 필요 없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대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사실이다.
병사가 없는 게 더 편하다.
"충분합니다."
"그러면 바로 가겠다."
"괜찮겠나? 조금은 쉬었다가······."
나는 몸을 돌려 저택을 빠져나왔다.
정보를 얻어냈으니 더 이상 여기에 볼일은 없다.
"저 사람들이 그렇게 강하다고······?"
"부탁드리겠습니다."
"흑무왕을 부디 무찔러 주십쇼!"
지나오며 마주친 사람들은 믿는 사람 반, 못 믿는 사람 반이었지만 딱히 상관없다. 우리는 흑무왕을 처치하는 대로 바로 떠날 거니까.
우리는 저항군의 본부를 나와, 어느 절벽의 위로 이동했다.
"여기면 될 것 같습니다."
청룡이 미리 봐둔 장소였다. 청룡은 절벽의 끝자리로 이동해 눈을 감았다.
고오오—.
상서러운 기운이 청룡의 몸을 감싸고 돌기 시작했다. 청룡의 이마에서 사슴의 뿔이 나타났다.
이 절벽의 아래.
1천에 달하는 흑무왕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다. 지금은 흑색의 안개에 가려져 보이지 않지만 저항군의 정보에 따르면 그러했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어렴풋하게 기운이 느껴집니다."
루시퍼의 확인도 끝났다. 이제 청룡의 차례다.
파아아!
청룡의 손아귀에서 쏘아진 기운이 잿빛 구름이 가득한 하늘에 닿았다. 그러자 일대의 하늘이 열렸다.
쏟아져 내리는 태양빛이 검은 안개를 지워내기 시작했다.
"뭐,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거냐!"
"어째서 흑무왕의 은총이 사라진거냐?!"
갑작스런 이상현상에 우왕좌왕하는 흑무왕의 군대들.
청룡은 두 손을 합장하듯 모았다.
그러자.
콰아아아—!
하늘 위로 모여든 기운이 구름을 형성에 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단순한 비가 아니었다. 거대한 물기둥이었다.
막대한 양의 물이 병사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폭우를 만난 개미떼처럼, 병사들은 물의 급류에 휩쓸려갔다.
콰과과과과—!
끝도 없이 쏟아지는 물이 강처럼 범람하기 시작했고, 거세게 소용돌이치며 병사들을 몰아냈다.
"으아아아-!"
"커허억! 이게 무슨···!"
"다들 뭔가를 붙잡아라!"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르르, 꽈광!
하늘에서 쉴 새 없이 내리치는 천둥번개에 병사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갔다.
그 어떤 강한 병사도 쏟아지는 자연재해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무엇에 당하는지도 모른 채 목숨을 잃어갔다.
청룡은 기상(氣象)을 다룬다.
일찍히 인류가 두려워했고 숭상해 마지 않았던 자연. 그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이것이 신화급 사도의 본 면목.
"인정하긴 싫은데, 꽤 한단 말이야."
"저는 다수를 상대하는 데 특화 되어 있을 뿐인 걸요. 두 선배님에 비하면 한참 모자릅니다."
루시퍼의 칭찬에 청룡이 고개를 저었다.
가브리엘은 근거리.
루시퍼는 원거리.
청룡은 다수 특화인가.
슈우우—!
병사들의 수많은 영혼이 백색의 궤적을 그리며 허공으로 날아오른다.
나는 랜턴을 들어 올렸다.
랜턴 소울이터는 눈부실 정도로 많은 영혼들을 죄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이윽고, 탐욕스럽게 영혼을 빨아들인 소울이터가 크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 소수의 성좌가 당신의 아이템에 관심을 가집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사도 소환권이 나오길 바랍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균열의 성능을 궁금해합니다. 』
이어지는 건 랜턴의 시스템 메시지였다.
『 '혼돈(混沌) : 소울 이터'가 영혼을 충분히 섭취했습니다. 』
『 세계에 균열을 생성합니다. 』
쩌저적-!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금이 새겨졌다. 투명한 공간이 파편처럼 튀어나왔다. 그렇게 부서진 틈 사이로 보랏빛 공간이 일렁인다.
끝을 알 수 없는 심연.
무한하게 뻗은 그 내부에서.
콰아아—!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 섭취한 영혼의 질이 좋습니다. 보상의 등급이 최대치가 됩니다. 』
『 신화+급 아이템을 지급합니다. 』
투욱!
『 [ 신화+ ] 궁극기 초기화권(특수) 』
- 궁극기의 쿨타임을 초기화합니다.
- 궁극기의 쿨타임을 영구적으로 50% 줄입니다.
나타난 것은 궁극기 초기화권.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 균열이 추가적으로 아이템을 생성합니다. 』
아티팩트가 되며 생긴 소울이터 고유의 효과였다.
투두둑!
몇 개의 아이템이 더 떨어졌다.
『 전용 무기 조각(白) x 1 』
『 전용 무기 조각(淸) x 1 』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그리고 거기엔······.
마지막 백색 조각이 있었다.
"나왔다!"
가브리엘이 기뻐하며 내게 달라 붙었다.
드물게 들뜬 목소리였다.
『 전용 무기 조각(白) 5 / 5 』
『 백색 무기 조각을 다섯개 모으셨습니다. 』
『 조각을 합성해 전용 무기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
가브리엘의 전용 무기 그 다섯번째 조각이 모였다.
"······여기가 내 최고지점."
신이 난 가브리엘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가브리엘의 주변으로 막대한 빛의 기류가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끝으로 형성되는 백색의 창 하나.
콰악-.
창을 움켜쥔 가브리엘의 손 위로 뻗어 나오는 막대한 성광(聖光).
잘은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폭군 흑무왕.
그는 오늘 자신이 쌓아온 모든 걸 잃게 될 것이다.
66화 균열(2)
가브리엘은 자신의 손 위로 형성된 빛무리를 움켜쥐었다.
파직, 파지직—!
주변을 맴돌던 스파크가 일시에 떨어져 나갔다. 이윽고 새하얀 창대를 뽐내는 성스러운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 빛의 창 : 브류나크 』
다섯 갈래로 나누어진 창끝은 무엇이든 꿰뚫을 것처럼 날카로웠다.
본래 이 창의 주인은 따로 있다. 켈트 신화에 나오는 빛의 신이 그 주인이나······.
마음에 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브리엘이 사용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뭐라할 사람은 없었다.
성좌의 위상은 유명세에 달렸다.
가브리엘은 모르는 이가 없는 최상위 성좌.
그런 그녀의 손에 빛의 창이 들어 왔다.
창을 쥔 순간, 전신에 활력과 성력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마저 느껴진다.
가브리엘이 옅은 미소와 함께 땅을 박차고 나가려는 그때였다.
'······?'
기묘한 위화감이 가브리엘을 감쌌다.
비슷한 광경, 동일한 일행들의 모습이 환시처럼 아른거렸다.
- 한순간도 쉴 시간은 없습니다. 멸망으로부터의 구원. 저는 단 일초도 낭비할 수 없습니다. 인간 따위가 제게 명령하지 마십시오.
환시 속 가브리엘은 딱딱한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다. 초조한 듯 무언가에 쫓기듯 조금도 쉬지 않은 채 달려나간다. 마물을 가르고 창을 휘두른다.
'뭐야.'
가브리엘의 고운 미간이 좁혀졌다.
외관은 틀림없는 자신이었으나,
하는 말은 완전 딴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인생의 좌우명이 '즐기면서 살자'인데.
심지어 이건 평생 바뀐 적 없다.
근데 저 가브리엘은 대체 뭐란 말인가.
특히 주인을 무시하는 태도는 경악스러웠다.
인간 따위라니. 제정신인가. 두드려 패주고 싶을 정도다.
'사라졌다.'
어렴풋이 떠오른 환상은 이내 사라졌다. 그런 가브리엘을 주의 깊게 보고 있던 루시퍼가 말을 걸어왔다.
"설마, 너도 봤냐?"
"너도라는 건······?"
"그······. 아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주인과 청룡이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주인이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괜찮은 거야? 설마 전용 무기의 부작용?"
"아냐. 음······. 만화를 너무 많이 봤나 봐."
가브리엘은 그리 둘러대고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 힘을 보여줄게. 청룡, 흑무왕의 성채는 어딨어?"
"아, 잠시만요."
가져온 지도를 살핀 청룡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오케이."
가브리엘은 창을 쥔 손을 뒤로 뻗었다. 탁, 타앗. 그리고선 도움닫기를 하더니, 그대로 전방을 향해 창을 내던졌다.
가벼운 동작이었으나.
후우웅—!
주변으로 바람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창에 둘러진 성력이 유성우의 꼬리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흑색의 안개를 가르며 창을 허공을 나아갔다.
창이 목표로 한 장소는 흑무왕의 성채.
걷혀진 안개 사이로 성채가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은 이미 점처럼 보인다.
성채와의 거리 또한 엄청나게 멀다.
그러나 창은 성채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자그마한 먼지가 피어오르더니,
성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쿠구구구······.
모래성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오랜 시간을 버텨왔을 흑무왕의 성채가 허무하게 부서지고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콰과과광!
가브리엘의 성력이 빛 기둥처럼 솟아올라 하늘에 닿았다. 성채의 남아 있는 잔존 병력까지 일소하는 강력한 일격.
"······오."
거리가 멀어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스템 메시지의 숫자는 분명히 올라갔다.
『 다섯 부하 처치 3 / 5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도 올랐고. 뭔가 많이 죽기는 한 모양. 다만, 흑무왕의 카운트는 오르지 않았다.
『 소수의 성좌가 파괴적인 힘에 만족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감탄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흑무왕은 살았나봐."
가브리엘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손끝에 모여든 빛의 기류는 다시금 창이 되었다.
"이번에는 없앨게."
가브리엘은 진지하게 그리 말했다.
* * *
"다섯 부하 중 하나가 처치되었답니다."
"멧돼지 그룩. 그놈이······?"
까맣게 물든 알현실.
잿빛의 털가죽을 걸친 남자가 왕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흑무왕(黑霧王).
그는 이 세계에서 절대적인 패자로 군림하는 존재였다. 일찍이 인외의 길을 걸어 전세계를 죽음으로 물들인 장본인.
이제 세계는 그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런데 아끼는 부하 중 하나인 멧돼지 그룩이 죽었다니.
혼자서도 도시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병기 같은 녀석이었다. 놈의 몸통박치기 하나면 거대한 성조차 폭삭 내려앉거늘.
"저항군 버러지 놈들에겐 그럴만한 여력이 없을 텐데. 숨겨진 패가 있었나?"
흑무왕의 얼굴엔 불편하단 표정이 역력했다. 그의 신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방인들의 짓으로 판명됩니다."
"쯧, 이방인이라······."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를 그리 부르곤 했다. 허나, 대부분이 하찮은 수준이었다. 우연히 차원의 흐름에 빨려들어 온 존재들.
"다섯 부하들을 전부 보내서 처치해라. 아니, 이제 넷인가. 상관 없다. 귀찮은 싹은 일찌감치 잘라내는 게 좋겠지."
이들만 처치하면 더 이상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을 인간은 없다. 인류의 지배가 머지않은 것이다.
'이 날을 위해 인간이길 포기했다.'
마물의 힘을 받아들여, 지금은 인간이기보다 마물에 가까운 상태. 그러나 그만큼의 힘을 얻었다.
그들의 병사들 또한 인외의 길을 걷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고기를 먹고 피와 내장을 취한다.
그러나 흑무왕은 힘을 위해 주저하지 않았다.
이 세계를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시스템으로부터······.'
그러나 생각이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권력이······.'
무엇을 위해 이 세계를 지배하고자 했는지.
어째서 인간이길 포기하고 학살극을 벌여가며 여기까지 온 것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허나, 개의치 않았다.
이 세계 전부를 얻는다.
그 맹목적인 목표를 떠올리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흑무왕이시여, 현재 절벽 지대 아래에 주둔하던 부대가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입니다."
"놈들이 먼저 움직인 건가. 병력은 어느 정도지?"
저항군들도 합세했을 터.
이번이 그들의 총공세일 가능성이 컸다.
신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 그것이. 네 명이라는 보고가 있습니다."
"네 명?"
흑무왕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고작 네 명으로 이 몸의 군대를 돌파하겠다는 것인가?"
제정신으론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물화한 병사들은 일반적인 인간에 비하면 몇 배나 강하다.
그들 전부를 네 명이서 뚫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신하는 흑무왕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예······. 허나 그들의 능력이 심상치 않습니다. 듣자 하니 날씨를 다루는 것 같습니다. 현재 홍수와 번개에 병사들이 쓸려나가고 있습니다."
"마법사인가."
흑무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 멀리 흑안개가 걷어진 장소가 보였다.
"마법사라면 근접전을 치뤄라. 다섯 부하들은 아직 멀었나?"
"예, 한 명을 제외하고 이미 출발한 상태입니다."
"그래, 최대한 빠르······."
흑무왕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의 시야 한켠에 새하얀 섬광이 나타났다. 성채를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빛무리.
찰나의 순간, 본능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늦었다.
콰아아앙—!
막대한 충격이 성채 전체를 뒤흔들었다. 균열이 새겨진 성채가 차례대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으아악! 이, 이게 무슨······!"
신하가 소리를 질렀다.
흑무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흑무왕의 시선이 성채에 꽂힌 빛의 창으로 향했다.
'저 거리에서······. 창 한 자루로 성을 노렸다는 건가?'
심지어 믿을 수 없는 위력이었다.
쿠구구구—!
성채가 붕괴한다. 흙먼지가 솟아오르고, 거대한 잔해와 함께 바닥이 내려앉는다.
"!"
아직 끝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빛의 폭발은 성채 전체를 가루로 만들었다.
* * *
가브리엘은 창을 연거푸 던졌다.
세 번 정도 던졌음에도 흑무왕은 죽지 않았다. 가브리엘이 포기하고서 창을 내렸다.
"······도망갔나."
거리가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격하는 게 아닌한 맞추기 어려운 모양이다.
어쨌든 흑무왕은 SSS급 게이트의 보스니까.
"먼저 가서 한바탕하고 있을게."
가브리엘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콰과과과—! 빛의 섬광이 연달아 치솟아오르고 지축이 크게 흔들린다.
가브리엘은 불도저처럼 병사들을 밀고가고 있었다. 땅구르기 한 번에 지반이 솟아올라 산사태처럼 병사들을 집어삼켰다.
빛의 창은 다섯 갈래로 나뉘어 땅에 박혔고, 동시에 빛의 기둥이 되어 주위를 잿더미로 만들었다.
혼자서 탱크처럼 밀고 나간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수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병사 하나 하나의 레벨이 240 수준인 걸 감안하면 가브리엘의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
『 다수의 성좌가 사도의 능력에 경악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만족스러워합니다. 』
"전용 무기를 들면 신화급 수준의 출력이 나오는 것 같네요. 두 분이 신화급 사도가 되었을 때 또 얼마나 더 강해질지가 기대되네요."
청룡은 그리 말하며 내게 구름을 둘러주었다. 낙하 속도를 늦춰주는 기술이었다.
"주인님, 저도 근질근질해서 안 되겠습니다."
루시퍼도 흑색의 창을 들고서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도 청룡과 함께 절벽을 내려왔다.
하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허기가 이전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찾아온다.'
가브리엘이 전용 무기를 들면서 허기가 더욱 심해졌다.
그만큼 소모하는 에너지가 많다는 거겠지.
게이트 공략이 끝나면 하얀 빵을 제대로 만들어 둬야겠다.
'천이령 헌터가 제빵을 배우러 갔으니까······. 문제없겠지.'
듣자 하니 프랑스로 갔다던데.
혼자만 보내려니 조금 미안한걸.
돌아오는대로 루시퍼나 가브리엘에게 새 기술을 전수해주라고 해놔야겠다.
"네, 네 놈들은 대체 뭐하는 놈들이냐!"
"이런 힘이 가능할 리가 없다······."
"크아아악!"
병사들은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몰려왔다.
콰앙! 콰과광!
좌측으로는 루시퍼의 흑마도 광선이.
우측으로는 가브리엘의 폭격이.
정면으로는 청룡의 폭풍이 몰아치고 있다.
"이 몸은 흑무왕의 다섯 부하 중 하나—."
콰앙-!
무언가 덩치 큰 병사가 나타났는데, 가브리엘의 발차기에 그대로 날아갔다. 벽에 처박힌 병사가 고개를 떨궜다. 놈의 투구가 굴러떨어졌다.
투구가 벗겨진 얼굴을 보니 마물과 인간의 혼합체였다. 여기 있는 병사들 전부가 그랬다.
'게이트 내부의 일은 관심 없지만······.'
이렇게까지 해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걸까.
세계를 지배해서 무엇이 그리도 좋은 건지.
나는 모른다.
'근데 왠지 찜찜하단 말이야.'
이곳은 이미 끝난 세계였다.
청룡의 말에 의하면, 시스템에게 사로잡힌 세계의 일부가 재구성되어 나타난 것이라는데.
그 뜻은 현세(現世)도 언젠가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말 아닐까?
'시스템을 막지 못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상념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스으으—.
돌연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에 짙은 흑안개가 내려 앉았다.
콰아앙-!
무언가가 땅에 거칠게 착지했다. 가브리엘은 곧바로 땅바닥에 창을 꽂았다. 콰아아. 거세게 피어오른 성력이 흑안개를 몰아냈다.
안개가 사라진 자리, 너덜너덜해진 남자 하나가 있었다.
[ Lv.283 ]
SSS급 게이트의 마물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높은 레벨을 가진 존재. 이 사람이 나타남과 동시에 병사들의 움직임도 멎었다.
일대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흑무왕.
이 자가 흑무왕이다.
"네 놈들은 뭐냐······."
흑무왕은 분노를 억누르며 물어왔다. 그의 몸 상태는 엉망이었다. 옷은 찢겨지고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으며, 털가죽도 거의 벗겨져 있었다.
"무엇이 목적이냐. 이방인 주제에 대체 왜 나를 방해하는 것이냐."
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문답이 의미가 있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게이트를 공략하려면 우리는 흑무왕을 반드시 처치해야 하니까.
그러나 왜인지 대답하게 된다.
"네가 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것처럼, 나 또한 너를 멸하고자 할 뿐이다. 그뿐이다."
"오, 주인님."
내 말에 루시퍼가 의외라는 듯 날 돌아봤다.
너무 폼 잡고 말했나.
왜인지 몰라도 로브만 쓰면 말투에 힘이 들어간다.
그런데, 흑무왕은 이상한 소리를 했다.
"네 놈들은 지배자가 보낸 사자(使者)인가?"
"지배자?"
"나는 네 놈들의 규약을 넘지 않았다. 혼돈도 심연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제 와서······!"
그러고보니 시스템 메시지에 떠오른 적이 있었다. 괴조를 처치하고 난 뒤에 떠오른 메시지.
- 혼돈과 심연의 지배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슬쩍 사도들을 돌아보자 다들 시선을 회피한다.
"크흠, 큼."
"으으음."
정보 제한이 걸려 있나보다.
사최헌한테 물어보면 말해주려나.
"절대로 포기하지 않겠다. 네 놈을 죽여서라도 나는 이 세계를 손에 넣을 것이다!"
그리 소리친 흑무왕의 몸에서 흑색의 안개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동시에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도, 도망쳐!"
"왕께서 진짜 흑무를 펼치신다!"
"다, 다들 떨어져!"
콰아아아—!
미친듯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하는 흑색의 안개.
"크윽."
나는 손을 들어 올려 앞을 막았다. 거센 강풍이 몰아치고 있다. 즉살을 사용하려면 놈이 모습을 감추기 직전인 지금이 기회였다.
처억.
그때, 가브리엘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주인, 내가 할게."
저벅, 저벅.
가브리엘은 흑색 소용돌이를 무시하고서 흑무왕을 향해 다가갔다. 이어지는 동작은 간결했다.
뻐억!
가벼운 라이트 잽.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화아악-!
일순 모여들었던 안개가 한순간에 흩어졌다. 멍한 표정의 흑무왕의 얼굴이 드러났다.
"뭔······!"
퍼버벅!
가브리엘의 연타가 흑무왕의 머리를 흔들었다. 흑무왕은 급하게 흑안개를 끌어내려고 했지만.
뻐억!
자세를 단단히 잡은 가브리엘의 주먹이 명중할 때마다, 안개는 간단하게 흩어져 버린다.
"실패한 세계의 망령이."
뻐억, 뻐억!
"주인의 앞을 가로막으려 해선 안 돼."
뻐억-!
오른 주먹이 흑무왕의 복부에 정통으로 꽂혀 들어갔다. 흑무왕은 입가에서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커허억-!"
땅에 쓰러진 흑무왕은 믿을 수 없단 표정이었다.
"내가, 내가······ 이 세계에서 가장 강한 존재일텐데······. 분명······."
압도적인 차이였다.
반항 한 번 할 수 없을 정도로.
도망치려던 일대의 병사들이 그대로 굳어졌다.
흑무왕은 살기어린 눈빛으로 가브리엘을 올려다 보았다.
"나는, 세계의 정점이다. 그런 내가 왜······."
푸욱-!
가브리엘은 무감한 표정으로 창을 그 앞에 꽂았다.
"나도 내 친구들 사이에선 제일 쎄."
그 말을 끝으로 빛기둥이 솟아올랐다.
콰아아아—!
닿은 자리의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강렬한 빛기둥.
흑무왕은 재가 되어 흩어졌다.
『 흑무왕 처치 1 / 1 』
"흐, 흑무왕께서 당하셨다······!"
"도, 도망쳐!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다들 도망쳐라!"
흑무왕의 최후를 목격한 병사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머저리 같은 녀석들, 왕의 복수를 해라!"
"여기서 승리한다면 왕좌는 내 것이 되겠지."
"크하하! 얼간이들,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다섯 부하 중 3명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도망치는 병사들을 죽이고, 자신의 정예병들과 함께 이쪽으로 돌진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하게도 우리의 승리였다.
『 SSS급 게이트 - 흑무왕의 땅 』
▶클리어 조건
- 흑무왕 처치 1 / 1
- 다섯 부하 처치 5 / 5
- 흑색의 군사 처치 5000 / 5000
『 모든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은 '신화급'입니다. 』
"끝났네요."
청룡이 주변을 둘러봤다. 마물 병사들의 시체로 가득하다. 별로 기분 좋은 광경은 아니다.
그래도 공략이 끝나서 후련하긴 하다.
"이야, 뭐. 대리자 놈이 내 준 게이트도 별거 없는데요?"
"몸풀기에 딱이었어."
반나절쯤 걸렸나. 진짜 빠르게 공략하긴 했다. 본래 S급 게이트도 일주일에서 보름은 잡고 공략하는데. 비정상적인 속도이긴 하다.
꼬르륵.
"큭, 근데 너무 배고픈데."
허기 때문에 배가 등가죽에 달라 붙을 것 같다.
최대한 참아서 하얀 빵 하나를 아꼈다.
전투가 다 끝났는데 먹기는 아까우니까.
"돌아가면 바로 식사 준비하겠습니다. 아니면 여기서 먹을까요? 이렇게 빨리 끝날 줄은 예상 못했네요."
"아니야, 돌아가서 먹자."
굳이 게이트 안에서 먹을 필요는 없으니까. 시체들 사이에서 먹기는 싫다.
"어떤 음식으로 할까요?"
"나는 치킨이 좋아. 피자도."
"저는 물고기 요리가 좋습니다."
"네 놈들 의견은 안 물어봤어."
사도들이 차례차례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로 나아갔다.
나는 절벽 위를 올려다보았다.
공략을 끝낸 게이트 속 세계는 지속되는 걸까?
알 수는 없지만, 흑무왕이 사라졌으니 저항군들은 한결 편해지겠지.
이전보다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다.
"···웅님!"
그대로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는데.
"영웅님! 감사합니다!"
"진짜, 정말로 감사합니다!"
"영웅이시여! 영원토록 기억하겠습니다!"
절벽 위쪽에서 사람들이 깃발을 마구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도와주러 오지 말라했는데 끝내 도와주러 온 모양.
"······."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선 게이트로 걸음을 옮겼다.
『 SSS급 게이트를 공략하셨습니다. 』
『 공략 수준에 따른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당신의 활약에 흥미를 느낍니다. 』
『 소수의 성좌가 당신의 강력함에 경의를 표합니다. 』
샤아아—!
『 [ 종말+ ] 해당 아이템이 진정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
종말+급 보상을 둘러 싸고 있던 외피가 빛나기 시작했다.
이제 진짜 보상을 확인할 차례였다.
67화 종말급
"쯧, 빌어먹을. 준비할 게 더럽게 많구만."
과격파 마인 가논.
그는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하기 위한 밑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땅을 좀 더 파라. 인간들의 피로 구덩이를 채워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부하 마인들에게 명령을 내린 뒤, 시가에 담뱃불을 붙였다. 가논은 마기로 태운 지독한 연기를 들이마셨다.
그는 다른 손에 든 열쇠를 내려다보았다.
『 [ 아티팩트 ] 묵시록 : 진(眞) 종말의 열쇠 』
이게 있으면 현세에 진짜 종말을 불러들일 수 있다.
묵시록의 4기사.
묵시록이란 인류의 성서에 기록된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4기사는 세계에 재앙을 불러올 최후의 존재들이고.
'칠죄종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재앙이지.'
짙은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는 가논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묵시록의 4기사가 있다면, 무명(無命)에게 대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리라.
칠죄종은 통제에서 벗어났지만, 그건 칠죄종을 소환한 책사 녀석이 무능해서 발생한 일이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지상에 강림시킨다면······. 묵시록의 4기사를 통제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정말 쓸데없이 돌아왔다.
칠죄종은 강력한 적인 것은 틀림없으나, 최상위 마인들이 고개 숙일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물론 1대1은 전면전은 어렵겠지만······.
지금까진 온건파 놈들의 의견을 따르느라 입을 다물고 있었을 뿐.
온건파가 내놓은 결과는 처참했다.
마기의 원천은 빼앗기고,
칠죄종은 사냥감이 되었다.
무명의 성장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마인들의 정체까지 까발려졌으니. 쯧.'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
'그것도 이제는 끝이다.'
가논 자신이 4기사의 통제권을 잡는 순간 인류는 울며불며 마인의 바짓가랑이를 잡게 될 것이다.
"빠르게 움직여라.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아나?"
시가를 뻑뻑 피우던 가논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마인들이 마기를 다루는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묵시록의 4기사를 소환하려면 밑작업이 많이 필요하다.
현세에 존재하는 종말의 유물을 구해야 한다.
또 전세계에 오망성이 되는 지점에 적절한 좌표를 찍어야 한다. 지금 하는 작업이 좌표를 찍는 작업이었다. 제물로 필요한 인간의 수도 보통이 아니다.
그때였다.
"가논, 이대로라면 순조롭게 소환할 수 있겠군. 우리측의 준비도 끝났다."
온건파의 최상위 마인 몬타쥬가 가논에게 말을 건넸다. 가논은 혀를 차며 답했다.
"무명이 움직이기 전에 끝내야 한다. 지금쯤 대리자에게 심판을 받아 어떤 식으로든 제약이 생겼을 테니까."
대리자에게 심판을 받았을 때.
과도하게 힘을 사용한 무명은 분명 약화되었을 거다.
이 타이밍에 묵시록의 4기사가 나타난다면?
무명은 분명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패배할 거다.
몬타쥬가 감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좌표의 준비도 바로 끝내도록 하지."
"유물은?"
"진작에 준비 되었다네."
마인들의 정체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상황이긴 하나, 아직 인류 측에서 활동하는 마인들은 다수였다.
기업이나 정계와 연결되어 있는 자들도 있었다. 유물의 수집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럼 조만간 보도록 하지."
스륵.
몬타쥬는 머리에 쓰고 있던 중절모를 흔들고선 사라졌다. 카악, 퉤. 가논은 몬타쥬가 사라진 자리에 가래침을 뱉었다.
'무능한 놈.'
저 놈 때문에 도대체 얼마나 돌아가야 하는 건지.
가논이 눈을 부라리며 시가를 다시 입에 무는 순간이었다.
쩌적, 쩌저적-!
허공에 균열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균열이 새겨진 공간이 유리조각처럼 떨어져 내렸다. 그 보랏빛 틈새 사이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괘, 괜찮으십니까?"
"저건······?"
"됐다. 땅이나 파라."
가논은 부하 마인들이 이쪽으로 달려오려는 걸 제지했다. 균열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명의 소녀였다.
대리자.
검은 눈가리개를 한 금발의 소녀.
『 대리자(알파)가 최상위 마인 가논을 마주합니다. 』
그녀는 시스템 메시지로 의지를 전해왔다.
"뭐냐, 왜 여기에 나타난 거냐? 무명은 어쩌고."
가논은 미간을 좁힌 채 혀를 찼다.
대리자의 심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조율, 배제, 조정.
현재 무명의 강함은 도를 지나쳤다. 아브락사스의 괴조를 다섯 마리나 동시에 처치했다.
배제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배제가 적절한 답이라고 생각된다면 대리자는 검을 빼 들고 플레이어에게 공격을 가한다.
'아무리 무명이어도 대리자를 이기진 못하겠지.'
어떤 판결이 내려졌는지는 당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답은 대리자로부터 금방 들을 수 있었다.
『 해당 플레이어에 대한 조율은 끝났다고 말합니다. 』
가논의 얼굴이 구겨졌다.
조율?
겨우 조율로 끝났단 말인가?
칠죄종을 사냥하고, 세계가 극복해야 할 1페이즈의 시련을 '개인'이 끝내 버리는 미친 괴물이 무명이란 말이다.
가논은 어처구니가 없어 물었다.
"무슨 조율 말이냐? 겨우 그 정도로 끝날 사안이 아니란 말이다. 시스템의 붕괴를 초래할만한 일이다."
『 무명은 시스템의 적법한 절차 아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
『 성좌들의 적법한 투표를 통해 시스템이 조율을 재조정했습니다. 』
성좌 투표?
최상위 마인인 가논도 들어나 본 이야기였다. 허나, 그들을 만족시키는 건 하늘에 별따기다.
성좌들은 그 수만큼이나 제각각이니까.
그런데 무명은 성좌들까지 설득 시켰단 말인가.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다.
"조율, 조율은 어떻게 됐나? 무슨 내용이었지?"
가논이 재촉하듯 물었다. 대리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시스템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 대답할 의무가 없습니다. 』
대리자인 알파가 한낮 하위 존재의 질문에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가논은 일방적으로 물어왔다.
"설마, SSS급 게이트 공략이나 미궁 공략 같은 걸 조율이랍시고 한 건 아니겠지?"
대리자가 살짝 멈칫했다.
아무래도 정답인 것 같았다.
가논의 얼굴색이 변했다. 순수하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머, 멍청한 놈······! 무명한테 SSS급 게이트 공략이라니 포상이냐?"
『 대리자(알파)가 당신의 발언에 불쾌함을 드러냅니다. 』
이는 최대치의 조율이었다.
우선 대리자의 심판은 해당 '사건'에 대해서만 작용한다.
과거의 일은 심판의 대상이 아니다.
대리자가 나타난 것은 1시련이 비정상적으로 공략되었기 때문이지, 무명 자체를 조율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더욱이 무명은 적법하게 1시련을 돌파했다. 따라서 내릴 수 있는 조율에는 한계가 있었다.
SSS급 인스턴스 게이트는 최대치의 조율이었다.
인스턴스 게이트는 개인이 혼자 공략해야 한다. 외부로부터 어떠한 도움도 받을 수 없다.
플레이어는 상당한 리스크를 짊어지게 된다.
이 이상의 조율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성좌들이 기를 쓰고 반대하고 있기도 했고.
"무명은 칠죄종을 혼자 잡았다고!"
가논은 분통을 터트렸다.
그 부분은 고려되지 않았다.
애초에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대리자 알파가 입을 열었다. 여기에 온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파직, 파지직—!
『 대리자(알파)가 마인 가논에게 조율을 제안합니다. 』
알파가 내민 검 끝으로 시스템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불길함을 느낀 가논이 뒷걸음질 쳤다.
"어, 어이······."
『 최상위 마인 가논은 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할 존재를 불러오고자 합니다. 』
대리자는 현세에 모습을 드러낸 뒤, 천천히 시스템의 기록을 살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이 원흉을 알아냈다.
『 첫번째 시련에 대한 인위적인 개입으로 현세의 균형을 붕괴 』
가논은 부하들을 시켜 1시련에 존재하는 아브락사스의 알을 모두 억지로 부화시켰다.
무명이 다섯의 괴조를 처치해야 했던 건 따지고 보면 가논이 원인이었다. 그 탓에 대리자가 눈을 뜨게 되었고.
그리고 지금도······.
『 타차원의 아티팩트로 현세에 진(眞) 종말을 사전 소환하고자 함 』
시스템의 의도에서 벗어나 묵시록의 4기사를 불러내고자 하고 있다.
『 당신은 시스템 상에서 벗어난 존재입니다. 』
『 당신은 플레이어가 아닙니다. 』
시스템의 입장에서,
무명(無命)은 적법한 플레이어였으나,
가논은 비겁한 행위를 사용하는 비정상적인 존재였다.
『 제안된 조율은 세 가지 입니다. 』
◇ 최상위 마도기관에 대한 영구적인 손상
◇ 양 팔, 양 다리에 대한 시스템 상의 손상 및 100년 간 심연의 고통 부여
◇ 진(眞) 종말의 열쇠에 대한 파괴
메시지를 확인한 가논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거냐······! 내가 왜······!"
첫 번째는 마인으로서의 지위 격하.
두 번째는 지옥 같은 고통.
세 번째는 마인으로서의 삶을 포기하는 수준.
뭘 선택하든 지옥이었다.
"이, 이런 미친······!"
가논의 얼굴이 기괴하게 구겨졌다.
그러나 자업자득이었다.
그는 대리자를 불러낸 값을 톡톡히 치르게 되었다.
『 대리자(알파)가 당신의 대답을 재촉합니다. 』
그 모습을 보며 대리자는 약간의 만족감을 느꼈다.
무명의 사도들에게 당했던 치욕을 여기서 씻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에.
확실한 건 가논을 지켜줄 성좌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 * *
샤아아—! 투둑, 투두둑!
강렬한 빛과 함께 종말+급 아이템에 붙어 있던 껍질이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은······.
황금색의 팔찌였다.
『 [ 종말+ ] 라그나로크 : 에인헤랴르 』
- 전사의 힘이 깃들어 신체 능력이 1단계 향상됩니다.
- 사용하는 무기에 따라 Lv.15 수준의 스킬이 지급됩니다.
아이템의 효과만 보면 단순하기 그지없다.
'이게 종말템······?'
사최헌의 말대로라면 1페이즈는 날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고 했는데.
나는 아이템의 스크롤을 내렸다.
- 설명 : 라그나로크(종말)을 대비해 오딘이 직접 선별한 최강의 전사들, 그들의 이름은 에인헤랴르. 기뻐하라, 당신은 영광스런 전사의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으니.
그러니까 이 아이템을 착용하면 오딘의 전사로 만들어준다는 것 같다. 오딘은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이고. 나도 그 정도만 알고 있다.
"오, 주인. 득템이야."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운도 따르시는군요. 종말급 중에서도 애매한 것들이 많거든요."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드립니다. 종말급 중에서도 제일 쓸만한 놈입니다."
청룡이 미소와 함께 설명했다.
"우선 신체 능력 향상. 현재 주인님은 SS급의 신체를 가지고 계십니다. 여기서 한 단계가 오르면······."
"SSS급이라는 거야?"
"네, 맞습니다."
나는 팔찌를 왼손에 착용했다. 오른손에는 리미트 브레이커를 착용하고 있으니까.
『 종말+급의 아이템을 착용하셨습니다. 』
『 당신의 격이 미미하게 상승합니다. 』
황금빛 팔찌가 왼손에서 반짝였다. 전신으로 황금빛이 점차 퍼져나간다. 활력이 샘솟고 피로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 당신의 신체 능력이 SSS급으로 향상됩니다. 』
항상 1단계 상승이니, 내가 SSS급이 된다면 그다음 등급의 신체를 소유하게 된다는 말이다.
"신체 능력은 모든 공격의 근간이 되니, 낼 수 있는 출력 자체가 달라지는 거죠. 만약 사최헌 헌터가 이 팔찌를 얻었다면, 괴조 한 마리 정도는 어찌저찌 처치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버프를 둘둘 두른 괴조를 때려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성좌와의 화신 계약까지 마친 상태라면······. 시련 따위 순식간에 돌파할 수 있을 겁니다."
청룡은 그리 말하면서 나를 바라보았다.
"주인님의 경우에는 한층 더 특별합니다. 신체 능력이 상승한다는 건 모든 기초 능력이 오른다는 의미죠. 잠시 훈련장으로 와보시겠습니까?"
잠깐만.
집 안에 훈련장이 있었어?
"잠깐, 그 전에. 밥 좀 먹고 하자."
"아, 죄송합니다. 아이템이 좋은 게 나와서 저도 모르게 흥분했네요."
종말+급 아이템 때문에 잠시 잊었는데, 여전히 허기가 극심하다. 내 요청에 루시퍼가 재빨리 부엌으로 향했다.
"빠르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식사 준비는 빠르게 끝났다.
그제서야 살 것 같다.
빵이 하나 남았으니 최대한 아껴먹어야지.
우리는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 뒤,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긴 복도를 몇 번 꺾어 들어가자 정말로 훈련장이 나타났다. 체육관 뺨치게 넓은 공간이었다.
"내구 마법까지 완벽합니다. 여기라면 어느 정도까지는 날뛰어도 문제없겠네요. 사최헌 이놈 얼마를 들인거야."
주변을 세세하게 살핀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바로 시작하겠습니다. 절 봐주시죠."
내 앞에 선 청룡은 가볍게 뜀뛰기를 시작했다. 콰앙-! 땅을 박차고 쏘아져나간 청룡이 반대편 벽에 달라붙었다.
다시 벽을 차며 날아올랐다.
좌우로 왔다갔다 움직인다.
그걸 빠르게 반복하기 시작했다.
콰아아—!
그 충격에 거센 질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본래대로라면 거의 보일 리 없는 엄청난 속도의 움직임이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졌다.
'······제대로 보인다.'
신체 능력이 SSS급 수준으로 향상된 지금, 청룡의 움직임을 시선으로 따라가는 게 가능해졌다.
처억.
땅에 부드럽게 착지한 청룡.
"훈련장이 부서질까 봐 전력은 아닙니다만. 대충 느낌이 오셨죠?"
청룡은 곧장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전력으로 손을 휘두르겠습니다. 제가 손가락 몇 개를 들어 올렸는지 봐주시면 됩니다. 한 번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부웅-! 콰아아-!
신화급 사도의 진심이 담긴 손 휘두르기. 그것만으로도 거센 강풍이 훈련장을 휩쓸었다.
청룡은 어느새 주먹을 숨기고 있었다.
"몇 개였습니까?"
"······네 개."
"정답입니다."
청룡이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지었다.
"모든 게 보인다는 것은······. 더 이상 현세에서 주인님을 막을 사람은 없다는 뜻입니다."
보이면 죽일 수 있다.
그 말은 보이기만 하면 패배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나는 가볍게 훈련장을 돌아봤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몸이 가볍다. 그러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신체가 되었다.
청룡의 테스트는 끝나지 않았다.
"가볍게 주먹을 내지르겠습니다. 막아주시면 됩니다."
"자, 잠깐."
미처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청룡이 주먹을 뻗어왔다. 잔상을 남기며 뻗어오는 주먹들.
이런 근접전은 해 본 적도 없다.
막을 수 있을 리가······.
탁, 타다다닥!
있었다.
파바바박!
청룡이 뻗어오는 손을 자연스럽게 막아내고 흘려냈다. 손과 손이 교차하며 계속해서 부딪힌다. 그 과정이 뇌에 새겨진 듯 출력된다.
『 현재 착용하고 있는 무기는 '맨손'입니다. 』
『 박투술 Lv.15를 발휘합니다. (에인헤랴르) 』
공손히 두 손을 모은 청룡이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선 레벨이 있는 스킬이 없으시지만, 현시점 인류의 스킬 최대 레벨은 10입니다."
약자멸시에는 스킬 레벨이 따로 없다.
하지만 레벨이 존재하는 스킬들도 있다.
그리고 그 제한은 10.
"그걸 감안하면 무기를 쥐는 순간, 주인님께서는 세상에서 무기를 제일 잘 다루는 사람이 되시는 겁니다."
물론 무기 스킬 하나만 가지고 승패가 결정되진 않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생초짜에게 Lv.15 수준의 스킬을 지급한다. 그것도 인류의 수준을 뛰어넘은.
이것만으로도 무지막지한 효과인 건 틀림 없다.
"······사기 맞네."
"그럼요. 이제 주인님을 막을 존재는 없다고 봐도 됩니다. 어지간해서는요."
우리는 미로 같은 복도를 지나 다시 거실로 돌아왔다.
베란다에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줄곧 우중충했던 하늘이 간만에 푸른 빛을 띠고 있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제 좀 쉴까 했는데 루시퍼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천이령 좀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답답해서 안 되겠습니다. 제빵 기술 하나 만들어 오는데 하루 종일 걸리네요."
진짜 하루 밖에 안 됐는데.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까마귀가 된 루시퍼가 베란다 바깥으로 날아 올랐다.
청룡도 베란다로 향했다.
"저는 하얀 빵에 필요한 재료를 수급해오겠습니다. 현세에 여러 전설이 나타난 지금이 수확 타이밍입니다. 사람들은 아직 재료의 중요성에 대해 모를 테니까요."
녀석은 미꾸라지로 변해서 베란다를 빠져나갔다. 가브리엘은 슬그머니 눈치를 보더니 바닥에 떨어진 아공간 주머니를 주워들었다.
"······나는 불멸에 SSS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얻은 템들을 팔고 올게."
가브리엘까지 가버렸다.
믿음직한 성좌들이 알아서 다해주니 좋다.
다들 좀 쉬어도 될텐데.
너무 열심이다.
마치 세계가 멸망할 것처럼······.
젠장.
'사도나 몇 명 더 소환 더 할 수 있으면 좋겠네.'
많아서 나쁠 게 없단 생각이 든다.
일손이 많으면 각자의 부담도 줄어들테니.
나는 소파에서 잠시 눈을 감았다. 딱히 잠은 오지 않는다.
종말급 아이템을 착용하고 나니 피로가 싹 사라져 졸립지도 않다. S급 헌터들은 가끔씩만 수면을 취해도 된다고 들었는데.
SSS급 헌터가 되었으니 잠을 아예 안자도 괜찮은 걸까. 나는 살포시 눈을 뜨고서 시스템 창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공략 보상이 있었다.
『 인스턴스 게이트 공략 보상(신화+급) 』
- [ 신화+ ] 무명검
- 전설의 증표 x 1
무명검이라.
이름이 내 닉네임이랑 똑같다.
뭐, 흔히 있는 이름이긴 하다.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으면 무명(無名)이라고 쓰는 법이지.
나도 그런 의미에서 설정했던 닉네임이었고.
'이건 내가 쓸까.'
에인헤랴르의 보정을 받으면 검도 수준급으로 다룰 수 있을 테니. 호신용으로 하나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 신화+ ] 무명검(無命劍) 』
'······?'
허공에서 나타난 검을 손에 쥐려는데, 메시지창에 새겨진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름만 같은 게 아니라,
한자까지 똑같았다.
'진짜 무명(無命)이잖아.'
68화 연회(1)
무명검은 동양식 검이었다.
'무명검(無命劍)이라······.'
내 별명과 완벽히 똑같은 검이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디자인은 단순했다.
눈부시게 새하얀 도신과 흑색의 손잡이. 검집 또한 까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외관상의 특이한 점은 없다.
'······.'
나는 홀린 듯 검의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에 부드럽게 달라붙는다. 처음 쥐는 데도 익숙한 기분이다.
종말+급 아이템인 에인헤랴르의 보정이 있으니 당연한건가.
도신을 살펴보니 무언가 자그맣게 글자가 새겨진 흔적이 있었다. 상당 부분 지워져 글자를 알아볼 순 없었다.
'······훈련장이 여기였지.'
나는 검을 들고서 집 안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복도가 복잡해서 방금 왔었는데도 못 찾을 뻔 했다.
우우웅-.
훈련장 벽에 설치된 패널을 사용하자, 훈련용 인형인 더미가 바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불멸의 길드에나 있을 법한 훈련 시설이었다. 나는 내심 감탄하면서 더미의 앞으로 이동했다.
'휘둘러볼까.'
검은 한없이 가벼웠다.
『 무명 검술 Lv.15 (에인헤랴르) 』
서걱—!
검을 휘두르자 허공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더미를 대각선으로 베어냈다. 내가 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공격이었다. 베어낸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일련의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서걱, 서걱-! 서걱!
나는 한동안 더미를 상대로 검술을 사용했다.
베는 맛이 좋다. 착착 감긴다고 해야 하나.
'쓸만하네.'
공격력도 단연 탑급이다. 호신용으로 하나 들고 있어서 나쁠 건 없겠지. 사도들이 있으니 내가 직접 나설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쩐지 마음이 가기도 하고.
나는 무명검을 검집에 넣고선 허리춤에 매었다.
연습은 이 정도면 됐다.
'보상 확인은 끝났고······.'
스윽.
거실로 돌아오면서 랜턴 '소울이터'를 확인했다. 랜턴에 차오른 새하얀 영혼은 90% 정도였다.
'영혼을 진짜 무지막지하게 먹네.'
물론 그만한 값어치는 한다.
균열은 내가 원하는 아이템을 뱉어낸다. 현시점 궁극기 초기화권을 확정적으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경로이기도 하고. 거기에 쏟아내는 다른 아이템들까지.
'SSS급 게이트의 마물들을 거의 때려 잡았는데도 이 정도.'
그래도 90%만큼 채웠으니 제주도의 나머지 마물들을 정리하면 한 번은 더 채우겠지.
'제주도를 정리하면 이제 다른 나라로 가야 하나······.'
마물에게 점령된 땅이 제주도만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국가들도 비슷한 실패를 한 번씩은 겪었기에.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나는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 현재 레벨 : Lv. 183 』
오늘치 레벨을 최대까지 채웠다.
레벨업은 이제 걱정이 없다. 여차하면 칠죄종을 하나 더 소환해서 잡으면 되는 일이니까.
SSS급에 해당하는 마정석도 많이 챙겼고,
그건 지금 가브리엘이 불멸에 팔러 갔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건······.'
나는 소파에 앉아 정보창을 확인했다.
『 즉살(卽殺)의 쿨타임 7.2일 』
쿨타임 아이템을 최대한 모아서 쿨타임을 7.2일까지 줄였다. 하지만 아직도 한참 부족하긴 마찬가지다.
하루가 멀다하고 사건 사고가 터지는 탓에 쿨타임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1일까지 줄여 볼 만한데.'
사최헌 헌터에게 쿨타임 감소 아이템을 구해달라고 말해두긴 했는데 어떻게 됐나 모르겠다.
가격이 비쌀뿐더러 매물도 없다.
특히 레전더리 이상의 아이템은 더더욱.
'쿨타임 감소 룬 같은 경우도 꽤 희귀하지.'
초반에 먹었던 룬은 전설급 공략에서나 나오는 희귀한 룬이었다.
전설급 공략을 할 정도면 유망주란 의미고 나오는 룬은 죄다 먹어 치우는 게 당연하니까.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경우가 허다한 거다.
'어디 템 나올 구석 없나.'
나는 집 바깥의 테라스로 향했다. 미니 정원처럼 꾸며진 식물들을 지나 난간에 몸을 기대니 도심이 내려다보인다.
익숙한 무리가 빌딩으로 다가오고 있다.
불멸의 길드원들이었다.
사이가 좋아 보인다. 서로 떠들면서 빌딩으로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푸드득-.
하늘에서 새하얀 비둘기가 테라스에 내려앉았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가브리엘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벌써 아이템은 팔고 온 건가.
"주인, 아이템은 넘겨주고 왔어. 가치를 확인해서 연락 줄 거래. 그리고······."
가브리엘은 빌딩 아래의 불멸 길드원들을 내려다봤다.
"저 사람들도 여기에 이사 올 거래."
"아하."
말했었지만 두 팔 들고 환영이다.
한국 최고의 헌터들이 온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다. 월세도 잘 낼 거 아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대대적으로 홍보해서 유명 헌터들을 거주하게 해야 하나. 대한민국에서 가장 안전한 빌딩을 만드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월세도 무지막지하게 받을 수 있겠지.
"주인, 헌터들을 수집해서 인류 최강의 요새를 만드는 거야."
가브리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모양. 아니, 약간은 다른가.
하여튼 오늘 일정은 딱히 없다. 경험치는 최대로 올려놨고, 첫 번째 시련 클리어에 SSS급 게이트 공략까지 끝났으니.
하늘도 수상한 조짐은 없다.
"주인, 덤벼."
가브리엘은 진지하게 그런 소리를 했다. 대련이라도 하자는 건가 싶었는데 가브리엘은 거실의 게임기를 가리켰다.
오, 그거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잠깐, 너무 잘하는데. 잠깐만."
"토끼는 사자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이야."
"천계에도 게임기가 있었나?"
커다란 TV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가브리엘과 격투 게임을 하고 있자니, 누군가가 우리 집의 벨을 눌렀다.
인터폰을 통해 사최헌이 보였다.
길드원들이 이사 온 김에 떡이라도 돌리려는 건가 했는데. 로브를 쓰고 문을 열자 사최헌이 용건을 말했다.
"5개 국가에서 비공식적으로 네게 사례를 할 예정이다. 저녁에 전 세계 최상급 헌터들이 참여하는 가벼운 모임이 열릴 건데, 참석하겠나?"
전혀 가벼운 모임 같지가 않아 보이는데요.
거절하려는데 사최헌의 뒷말이 나를 붙잡았다.
"쿨타임 아이템에 대해서는 미리 말해뒀다."
"아이템만 받을 순 없나?"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다들 직접 아이템을 건네고 싶어하고 있다. 너와의 교류가 목적이겠지."
그렇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쿨타임 아이템을 공짜로 얻을 수 있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가겠다."
나는 간결하게 답했다.
* * *
프랑스에 제빵을 배우러 떠난 천이령 헌터.
그녀는 곧장 유명한 제빵사를 만나 수련에 들어갔다. 언어의 장벽은 천이령에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어조차 스킬로 익혀버리면 그만이었으니까.
"한국의 유명 헌터가 왜 여기까지 와서 제빵 스킬을 배우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프랑스엔 생산계 스킬을 익힌 장인들이 많았다.
전투를 원하지 않거나,
단순히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부류였다.
"돈이 문제가 아니에요. 빵에 대한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몇 달은······."
콧수염을 기른 제빵사는 천이령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지인의 추천으로 받아주기는 했지만, 어차피 단순 재미 삼아 제빵 기술을 익히러 온 것이리라. 빵 만들기 체험이나 하고 돌려보내면 그만이겠지.
그리 생각했는데.
"이렇게 하면 되나요?"
"······?"
천이령은 단 한 번 본 것을 완벽히 구현해 냈다. 빵 반죽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 모양을 잡고 적절한 시간 동안 오븐에서 완벽하게 구워냈다.
단순히 따라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마력을 적절히 조율해 최고품질의 빵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빵은 제빵사 자신의 것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처,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고요?"
제빵사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 일을 두 세 번 반복하고 나서야, 결국 제빵사는 주방을 하루 동안 천이령에게 빌려주었다. 가르쳐 줄 것도 딱히 없었다. 워낙 순식간에 익혀버려서.
천이령은 하루 종일 반죽을 만들고 빵을 구웠다. 마력의 농도를 세심하게 조절하며 최고의 빵을 만들고자 했다.
'왜 빵을······. 만들라고 한 걸까?'
열심히 빵을 만들고 있으면, 어김없이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대장장이 스킬은 무명의 랜턴을 수리하는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제빵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아니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를 공략할 때 무명이 무언가를 꺼내 먹는 걸 본 적이 있었다.
새하얀 빵.
'설마 무명님이 빵을 좋아하나······?'
별로 납득 되는 이유는 아니었다.
천이령은 그런 생각을 하며 제빵을 계속했다.
적절한 배합을 생각하며 이스트와 밀가루를 섞는다. 최적의 물 온도를 맞춰서 반죽에 넣고 치댄다. 발효 과정은 마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 굽는 것도 마찬가지다.
마력의 세세한 컨트롤이 더욱 중요했다.
천이령은 쓸데 없는 잡념을 털어냈다.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분명 의미가 있을 거야.'
대장장이 스킬을 익힐 때도 그랬다.
이유가 없어 보여도 그때의 경험은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
천이령은 흑마력을 스킬에 입히고 적용했다. 그 결과 흑마도술을 사용한 궁극의 대장장이 스킬이 탄생하지 않았던가.
이후 천이령은 모든 스킬에 흑마력을 입힐 수 있게 되었다.
하나의 스킬에 모든 걸 쏟아붓는 방법도 알았다.
그 부분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니.
- 어? 음, 그렇지. 의도했고 말고. 그래, 꼬맹아. 잘 간파했구나. 다 의도가 있었던 거지.
루시퍼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의미가 있었던 거다.
그렇다면 제빵에는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천이령은 재빠르게 간파해냈다.
'이번에는 그것보다 뛰어난 기술을 원하는 거겠지.'
단순 흑마도술만으론 부족한 더욱 빼어난 기술.
그 힌트는 가브리엘로부터 배운 성력에 있었다.
『 스킬 '성력(聖力):형상조작'을 발휘합니다. 』
샤아아—.
천이령의 손끝에서 뻗어 나온 새하얀 빛이 반죽을 휘감기 시작했다.
여기까지는 기존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려면.
콰아아—.
검은 기운이 천이령의 손에서 뿜어져 나왔다.
『 스킬 '흑마도(黑魔道):형상조작'을 발휘합니다. 』
흑백의 두 기운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이 둘은 서로를 튕겨낸다. 강한 반발력이 작용해 합쳐질 수 없게 한다.
마치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가능한 건 아니다.
천이령 자신의 마력이 개입한다면 이 둘을 중재할 수 있다. 성력과 흑마력 모두 그 근간은 천이령으로부터 나오고 있기에.
콰아아아—!
거센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주방의 도구들이 마구 흔들리고, 덜컥 열린 천장에서 식기들이 와장창 떨어져 내린다.
천이령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강한 반발력에 팔이 찢어질 것처럼 느껴진다. 심장을 쥐어짜내는 격통이 전신을 엄습한다.
그러나 천이령은 멈추지 않았다.
강해져야 했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마인.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마인의 정점.
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선 더욱 더 강해져야 했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가족들이 받았을 공포에 비하면······.
이따위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콰아아앙—!
검은 연기와 함께 폭발이 터져나왔다. 폭발은 주방 전체를 휩쓸었다.
바깥에서 제빵을 지켜보던 제빵사들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콧수염을 기른 제빵사의 표정이 망연자실해졌다.
까악—.
반대편 창문으로 까마귀 한마리가 내려앉았다.
환풍구를 통해 연기가 빠져나가고 있다.
까마귀 루시퍼는 연기 속의 형상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벌써 뭔가 해낸 건가.'
타고난 재능.
천이령의 재능은 차원 전체를 두고 보아도 손꼽을 정도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하다.
재능만으로는 정점에 오를 수 없다.
그 재능을 제대로 꽃 피우기 위해선 조건이 필요하다. 좋은 배경, 좋은 스승, 적절한 고난과 역경······. 누군가는 그런 것들을 대겠지만.
루시퍼는 다르게 생각했다.
복수심.
악마에게 영혼조차 팔아넘기겠다는 의지. 복수를 위해서라면 생명을 불태우고, 무모한 도전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맹력한 각오.
천재를 성장시키는 건 그러한 복수심이다.
천이령을 키워볼만하다고 생각하는 이유였다. 재능이 있어도 각오가 절절하지 않으면 소용 없는 법이니까.
'······근데, 진짜 뭐지.'
어떤 미친놈이 성력과 흑마력을 뒤섞는단 말인가.
그런 끔찍한 짓은 루시퍼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흠결 없고 완벽한 흑마력을 성력이라는 불안정하고 밋밋한 힘과 합치다니. 이단도 이런 이단이 없었다.
'뭐, 발상은 칭찬해주마.'
연기가 완전히 가시자 테이블에 쓰러진 천이령이 보였다.
빵은 폭발에 날아갔는지 온데간데없었다.
루시퍼는 까마귀인 모습 그대로 테이블에 다가섰다.
천이령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오셨군요······."
"······."
"아, 아닌가. 그냥 배고픈 까마귀인건가?"
"나다."
"아하······."
폭발에 휘말려 새까만 재와 밀가루를 동시에 뒤집어쓴 천이령.
그녀는 품 안에 있던 빵을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빵을 지켜낸 모양이었다.
고오오—.
빵. 평범한 모닝빵이었다.
하지만 빵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범상치 않았다.
흑과 백의 조화.
절대 섞일 일 없다고 여겼던 두 힘이 균형을 이루며 빵 안에서 공존하고 있었다.
스며 나오는 기운은 루시퍼조차 본 적 없는 형태였다.
콕.
까마귀가 부리로 빵을 쪼았다.
"······."
까마귀의 눈동자가 커졌다.
맛을 음미하던 까마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합격이다."
제빵을 배워오라고 했는데,
그걸 뛰어넘는 무언가를 해버릴 줄이야.
천계의 하얀빵?
재료만 갖춰진다면 그게 우스울 정도의 성능이 될 거다.
"잘했다, 꼬맹이."
그 말에 천이령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다, 다행······."
털썩.
천이령은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 *
건물 바깥으로 나가자, 새까만 리무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가브리엘과 함께 리무진에 올랐다.
평생 탈 일 없는 차일 줄 알았는데. 승차감이 훌륭하다. 음료수도 준비되어 있고. 간단한 다과도 있다.
부우웅-.
모임이 있는 연회장을 향해 리무진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사최헌은 익숙한 듯 의자에 몸을 기댔다.
"가기 전에 미리 소개해둘 사람이 있다. 옆에 놓인 테블릿을 확인해봐라."
리무진 내부에서 마주 앉은 사최헌이 테블릿을 가리켰다.
테블릿을 꺼내 살피자 거기엔 유명 헌터들의 사진이 있었다. 다들 어딘가에서 한 번씩 봤던 외국인들이다. TV에서든 인터넷에서든.
"그 중에서도 눈 여겨봐야 할 것은 일곱 개의 별이다."
"일곱 개의 별?"
"예언자의 별에서 지정한 인류의 구원자다. 전 세계에 일곱 명있지. 이들은 인류가 멸망해도 최후까지 살아남을 자들이다."
사최헌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선 하나가 나고, 다른 하나가 귀환자 호영이다."
"주인도 그 중 하나?"
"아니, 네 주인은 일곱개의 별이 아니다."
"왜."
가브리엘의 미간이 좁혀졌다. 사최헌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그게 궁금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그 테블릿을 보면······. 그래 그 사람이다."
장발의 영국인 한 명이 있었다.
나이는 20대쯤.
"그 자가 환생자 아이작이다."
"환생자라면?"
"본래 어느 제국의 대마법사였다. 죽고 나서 현세에서 다시 태어난 거지. 실제로는 7백살쯤 될 거다."
환생자라.
하기야, 귀환자도 있는 마당에 환생자라고 없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그리고 요주의 인물이 하나 있는데······."
사최헌은 테블릿을 넘겨 사진을 보여줬다.
어느 여성의 사진이었다.
미국인이었다.
"이 자는 최상위 마인과 연결된 인류의 배신자다. 갑작스럽게 열리게 된 만큼, 이번 모임에서 꿍꿍이가 있을 수도 있다."
이 사람은 엄청나게 유명한 S급 헌터인데······.
마인들이 얼마나 깊게 현세에 뿌리 내렸는지 알 법하다.
"높은 확률로 이번 모임에 최상위 마인이 나타날 수 있겠지만, 무명(無命) 네가 있으니 문제없겠지."
사최헌의 눈빛에서는 깊은 신뢰가 느껴졌다.
"······."
신뢰해주는 건 좋다. 좋은데.
저기요, 그 말을 제일 먼저 했어야죠.
69화 연회(2)
리무진은 한적한 숲속으로 들어갔다. 누구의 발길도 닿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장소.
리무진이 멈추어 섰다.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휑한 장소였다. 적막한 침묵 속에서 나무들이 스치는 소리만 난다.
무명은 가브리엘과 함께 리무진에서 내렸다. 사최헌도 우리를 뒤따라 내렸다.
주변을 확인한 사최헌이 품 안에서 쐐기돌 하나를 꺼내 바닥에 꽂았다.
"여기다. 갑작스레 열리게 된 모임인만큼 보안 유지가 철저해야 했다. 전 세계 최상위권의 헌터들이 모이게 되니까."
우우웅—.
허공으로 직사각형의 포탈이 나타났다.
게이트와 비슷하지만 내부가 청아한 푸른색이다.
"지정된 좌표와 연결된 포탈이다. 차 안에서 내가 했던 말은 기억할거라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연회는 다섯 개의 국가에서 무명을 만나기 위해 요청한 비밀 모임이었다.
허나, 최상위 마인이 연회를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 헌터들 중에 마족의 끄나풀이 있기에.
"그 여자를 잡아 최상위 마인들을 추적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
사최헌은 미간을 좁혔다.
마인들은 악의 축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첫 시련을 화려하게 망치지 않았던가.
4중 버프를 두른 아브락사스의 괴조는, 무명이 아니었다면 막을 수 없었다. 많은 사상자를 낳고서 인류를 궤멸로 몰아넣을 뻔했음에 틀림 없다.
한국의 마인들은 전부 몰아냈으나,
세계에는 아직 마인들이 암약하고 있다.
이들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하면 계속해서 비슷한 일이 생길 거다.
'과거와 상황이 달라졌다. 무명을 두려워한 마인들이 과감한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
무명이 없던 회귀 전에는 온건파가 득세했다. 하지만 연이은 그들의 실패로 과격파가 고개를 들었다.
'놈들이 어떻게 나올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번 연회 또한 회귀자인 사최헌이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했다.
물론, 무명의 강함은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그에게만 의지할 순 없다. 인류의 멸망을 막아내려면 자신도 부단히 움직여야만 했다.
"그럼 출발하지."
사최헌은 잠시 무명을 바라보다가 포탈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아악—.
한순간에 시야가 바뀌며 연회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붉은 융단과 화려한 샹들리에가 놓인 연회 장소.
"이제 다 끝났구나, 한숨을 내쉬는데 괴조가 한순간에 죽었다니까요."
"정말 궁금하긴 합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쓴 건지. 본인에게 물어봐도 알려주진 않겠죠."
"그럼요, 그게 다 영업 비밀인데요."
"곧 세계 헌터 랭킹이 발표될 거라던데."
"1위는 보나마나 무명 헌터겠죠?"
"그 사람이 아니면 오히려 논란이······."
미리 도착한 헌터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화려한 드레스와 멋진 정장을 걸치고 있었다.
드레스 코드가 따로 있진 않았다. 자신의 무장을 걸친 헌터들도 있었다.
여러 국가의 사람들이 섞여 있음에도 대화를 나누는 데 지장이 없었다. 중심부 설치된 해석 마법 덕분이었다.
주강혁은 연회장을 살폈다.
'살다 보니 이런 데를 다 오게 되네.'
먹음직스러운 만찬들이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다. 잘 훈련 받은 웨이터들이 돌아다니며 음료와 술을 나눠주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악단이 고급스런 클래식을 연주하고 있다. 그 선율이 조명과 함께 연회장에 깔려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소가 그대로 있었다.
"잠깐, 저기······."
"무명 헌터님이다."
"무명님이시잖아."
헌터들이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 미리 확인했던대로 유명한 헌터들 뿐이었다.
5개 국가에서 모여든 정상급 헌터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인도.
미국의 랭킹 2위 심록의 안드레.
영국의 랭킹 4위 철혈의 아멜리아.
일본 랭킹 7위 인형술사 하나코.
하나 같이 쟁쟁한 인물들 뿐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핀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괜찮아. 대부분이 주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어. 어떤 헌터는 주인의 열렬한 팬이야. 나머지도 궁금해하고 있고."
가브리엘에겐 내면을 살피는 능력이 있다. 전용 무기를 쥐며 이 능력도 한층 강화된 모양.
주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호의적이라고 하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흐음, 당신이 무명인가."
그때였다.
헌터들이 나를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저벅, 저벅. 누군가가 당당한 걸음으로 내 쪽을 다가왔다.
"영상으로 봤던 것보다······. 느낌이 있군."
거친 인상의 여성이었다. 드레스 바깥으로 드러난 탄탄한 근육이 그녀가 제대로 단련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영국의 헌터 이자벨 메이어.
그녀는 나를 시선으로 한 번 훑은 뒤 입을 열었다.
"독대하고 싶은데. 특별한 선물을 주고 싶어서 말이야."
사최헌의 인상이 굳어졌다.
가브리엘은 내게 사념을 보내왔다.
[ 이 사람은 100% 마족의 끄나풀이야. ]
* * *
"순서가 정해져 있다. 영국의 순번을 기다리면 될 텐데."
사최헌이 까칠하게 답했다.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고 싶어서 말이야."
"다섯 국가의 독대가 끝난 뒤로 하지."
"한국의 랭킹 1위 사최헌이었지. 아니, 이제는 2위인가. 네 놈은 무명의 매니저라도 되는 건가?"
이자벨이 도발하듯 물었다.
사최헌이 다시 입을 열어 답하려는 찰나.
"무명 헌터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직접 보고 싶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헌터들이 죄다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쯧."
이자벨이 물러섰다. 가브리엘은 몰려드는 헌터들을 가로막았다. 그러자 한층 더 난리가 났다.
"오오, 영상에서 봤습니다. 아름다우신 분."
"그쪽은······. 무명 헌터의 애인입니까?"
"아니면 소환수?"
"진짜 천사인가요?"
"비밀."
가브리엘은 은근 상황을 즐기는 것 같았다.
모든 헌터가 모여든 건 아니다. 소란에도 불구하고 한쪽에서 조용히 음식과 음료를 먹는 이들도 있다.
물론 시선은 내 쪽으로 향해 있지만.
사최헌은 이런 소란이 익숙하다는 듯 나를 한쪽으로 안내했다.
"헌터들과의 교류도 좋겠지만 아이템을 받는 게 먼저다. 준비된 방으로 이동하지."
나는 사최헌을 따라 이동했다. 헌터들은 아쉬워하면서도 나를 보내줬다.
계단을 오르고 긴 복도를 이동하자 방 하나가 나왔다.
"여기서 기다리면, 예정된 순서로대로 각국의 헌터들이 방문해 올 거다. 먹고 싶은 게 있다면 말해라."
"떡볶이랑 치킨이랑 피자."
가브리엘이 잽싸게 말했다.
사최헌은 미간을 좁히고선 한쪽에 비치된 벨을 눌렀다. 웨이터가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나한테 말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리고 아마 떡볶이는 없을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고풍스럽게 꾸며진 방의 창문으로 연회장 전체가 내려다 보였다. 저쪽에선 여기가 안 보이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첫 번째 시련이 오늘이었는데 다들 용케 모였다.
"널 보고 싶어 모인 자들이다. 친분을 쌓아두면 훗날 도움이 될 거다. 헌터들의 권력은 날이갈수록 강해질테니."
인맥을 쌓는다는 느낌인가.
잠시 커피를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자니,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국의 헌터분들께서 입장하십니다."
이어서 문이 열리며 영국의 헌터들 다섯이 걸어 들어왔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건 장발의 남성이었다.
환생자 아이작 클라크.
그는 700년을 살았던 대마법사였다. 그의 깊은 두 눈이 나를 향했다. 얼굴은 20대인데 어쩐지 연륜이 느껴진다.
"만나서 반갑네. 그대가 아니었으면 아브락사스의 괴조가 영국을 반쯤은 파괴했을 걸세."
한술 더 떠서 말투도 꽤 특이했다. 실제 말투가 그런건지 해석 아이템 때문인지. 하여간.
나는 아이작이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가 흘린 미세한 마력이 느껴졌다.
"실례. 습관인지라. 그런데 꽤 놀랍군. 신체 단련도 게을리하지 않은겐가."
아이작의 눈이 커졌다.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뒤쪽에 있던 헌터가 아이작을 말렸다.
"할배, 무명 헌터님을 상대로 뭔 짓이야."
"크흠."
일행은 아이작이 환생자라는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대중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다.
"사과하겠네."
헛기침을 한 아이작은 품 안에서 작은 반지 하나를 꺼내 들었다. 아름다운 문양이 새겨진 청색 반지였다.
『 [ 신화 ] 청(靑) : 쾌속의 고리 』
- 쿨타임 감소 40%
- 신속 Lv.5
"최초의 SS급 게이트 공략 이후로, 새로 나타난 SS급 게이트에서 건졌다네."
별 거 아니라는 듯 말하지만 대단한 일이었다.
새로 나타난 SS급 게이트를 하루만에 공략했단 소리였으니까. 세간에서 대마법사라고 불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뭐, 이건 그냥 받아두게. 내가 관심있는 건 그게 아닐세. 그대의 능력이지."
탁자 앞에 아이템을 내려 놓은 아이작이 말을 이었다.
"권능에 대해서 알고 있는가? 어쩌면 자네의 힘과 가장 닮아 있을지도 모르겠군."
거기에 대해선 가브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야."
"자네는······?"
"나는 무명님의 오른팔."
"평범한 인간 같지는 않아 보이는군. 그래, 권능이 아니라면 뭐지?"
"몰라. 나도 처음 봤으니까."
"흐음,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
아이작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그냥 스킬 쓴 건데요.
그리 말할 순 없어서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이후의 내용은 감사인사와 영국에 오면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 [ 신화 ] '청(靑) : 쾌속의 고리'를 장착합니다. 』
『 즉살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7.2일 → 4.3일 』
반지가 손가락에 딱 들어간다.
40%나 감소 되었다.
쿨타임이 눈에 띄게 줄어 들었다. 흡족스런 미소가 피어난다.
'그냥 이야기만 들으면 된다니. 개꿀이네.'
『 착용 가능한 반지 아이템이 최대치에 달했습니다. 』
효과를 받을 수 있는 반지는 3개까지다.
어찌보면 당연했다. 한 손에 반지 20개씩 끼고 다니는 걸 시스템이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착용할 수 있는 전체 아이템의 총량도 정해져 있다.
'결국에는 상위 아이템을 많이 얻는 게 중요하단 거겠지.'
영국의 헌터들이 방을 나가고 호주, 인도의 헌터들이 차례로 들어 왔다.
호주는 영약을 준비해 왔다.
『 [ 전설+ ] 쿨타임 감소의 영약 』
- 1시간 동안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60% 감소합니다.
나쁘지 않다.
가지고 있으면 어딘가 쓸 일이 있겠지.
인도는 룬을 구해왔다.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괴조를 일격에······. 굉장하시더군요. 보는 입장에서는 정말 경악스러웠습니다."
그것도 세 개나.
『 쿨타임 감소의 룬 x 3 』
룬은 영구적으로 스킬의 쿨타임을 감소 시켜준다.
고유스킬의 경우에는 10%가 감소 된다.
큰 감소량은 아니지만 아이템이 없어도 영구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 특수하다.
『 쿨타임 감소의 룬을 3개 사용하셨습니다. 』
『 즉살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4.3일 → 3.2일 』
쿨타임이 착실하게 줄어간다.
다음으로는 일본이었다.
"무명, 그 쪽에겐 큰 도움을 받았다. SS급 게이트 공략 때도 그렇고. 늘 신세만 지게 되는군."
랭킹 1위 하야토.
그는 고급스런 상자를 내놓았다. 상자를 여니 티켓 하나가 들어 있었다.
"이번에 최초로 등장한 형태의 아이템이다."
『 [ 전설+ ] 아이템 옵션 부여권 』
- 쿨타임 감소 30%
- 50% 확률로 아이템에 해당 옵션이 추가됩니다.
- 기존의 옵션과 중첩되지 않습니다.
이건 확률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아이템이었다. 붙기만 한다면 엄청난 이득이다.
'쿨타임 감소 효과가 없는 종말의 아이템에 사용하면 되겠네.'
일본도 감사 인사를 전하고선 물러갔다.
그리고 대망의 미국.
콰앙-!
"무명!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신장 2m, 근육질의 영웅 데릭. 그는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미국 헌터들은 그를 말리는 걸 포기한 모양새였다.
"크하하, 드디어 만나게 되었군."
그는 나를 잡고 세게 악수했다. 악수를 하는 손에서 강한 힘이 느껴졌다.
"오, 예상외로 엄청난 육체군. 로브 속에 그런 신체를 숨기고 있을 줄이야. 이거 점점 더 기대가 되는구만."
종말급 아이템인 에인헤랴르의 효과였다. 오딘의 전사들과 같은 육체 능력을 손에 넣게 해주었다.
그렇다고 온몸이 근육으로 갈라진 건 아니다.
그냥 능력치만 올랐을 뿐이다.
'다른 헌터가 느끼기엔, 신체 자체가 튼튼한 것처럼 보이는 건가?'
인사치레를 한 데릭은 호방한 웃음과 함께 테이블에 검은 가방을 내려놨다.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가져왔으니 열어봐라."
그는 가슴을 편 채 당당히 말했다.
대체 뭘 가져왔길래······.
그리 생각하며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턱.
데릭이 내 손을 붙잡았다.
"그 전에 한 가지 제안이 있다."
"······?"
"나와 대련하지 않겠나? 네 강함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히는 전투에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법이니까. 전력으로 와라."
주먹의 대화.
그거 귀환자 호영이 할 법한 말인데.
"아니······."
애초에 대련이 성립하나?
내가 전력을 내면 그쪽은 죽는다.
힘 조절이 불가능한 능력이다.
아니, 에인헤랴르가 있으니까 대련 정도는 가능한가?
근데 그걸 원하는 걸 아닐 테고······.
결국 거절하려고 입을 여는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연회장 쪽에서 강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그 충격파에 우리 방의 유리창이 산산조각나며 부서졌다.
콰아아아—!
가브리엘의 날개가 내게로 날아드는 파편을 막아주었다. 화악—! 사최헌의 검술이 주변의 연기를 일시에 걷어냈다.
"시작되었나."
사최헌은 미간을 좁힌 채 중얼거렸다. 미국의 헌터들도 심각한 표정으로 연회장을 내다보았다.
"뭐냐, 이 기운은······."
"지독한 기운이다. 농도도 장난이 아니야."
"정보가 새어나갔나?"
"조심해라, 내부에서 엄청난 기백이 느껴진다."
미국의 헌터들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기세였다.
'······.'
스윽.
나는 조용히 테이블에 놓인 흑색의 가방을 챙겼다.
상황이 급박해도 챙길 건 챙겨야지.
70화 연회(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