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아브락사스(1)
사최헌 헌터가 놀랍다는 듯 이쪽을 쳐다보았다.
"많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상당히 많군."
나를 선택한 성좌들이 수는 총 72.
내 주변을 메운 별빛에 눈이 부실 정도다.
이윽고 새로운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 성좌를 선택하여 화신 계약을 맺으십시오. 』
"화신 계약?"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청룡이 즉시 설명했다.
"화신 계약을 통해 성좌의 힘을 일부 이용할 수 있는 겁니다."
청룡은 내 주위를 맴도는 별 중 하나를 골랐다.
"가령, 여기 맹렬한 불꽃이라는 성좌의 힘을 받아들이면 강력한 불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성좌들은 자신의 힘을 빌려주어 명성을 드높이고, 플레이어는 그들의 힘으로 시련을 돌파한다.
그런 원리라는 듯하다.
자연스레 한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화신 계약은 한 명의 성좌하고만 맺을 수 있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따라서 신중히 고르는 게 유리하죠. 하지만 잘만 고른다면······.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힘을 손에 넣으실 수 있을 겁니다."
루시퍼와 가브리엘은 내 가까이 다가와 별들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이 녀석은 탈락."
"가능하면 돈 많고 지원 빵빵한 녀석으로······."
나는 시스템 창의 스크롤을 내렸다. 죽음과 관련된 성좌들이 많다. 청룡도 고심하며 내 주변을 살폈다.
『 성좌 '이계 규율'이 자신 있다고 소리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자신을 어필합니다. 』
검은 별의 주인은 맨 처음부터 있던 원년 멤버지.
이계 규율은 계속 있기는 했는데 응원 담당이었고.
『 성좌 '죽음의 인도자'가 10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
『 성좌 '사신'이 5만 코인을 후원합니다. 』
"···돈을 주기 시작했는데?"
"어떻게든 주인님의 관심을 끌고 싶은가 봅니다."
문제는 내가 보기엔 그놈이 그 놈이라는 거다.
성좌의 별명만 보고는 그 정체를 알 수가 없다.
"주인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대충 추려봤는데 확인해보시죠."
루시퍼가 손을 휘젓자 별 몇 개가 앞으로 나왔다.
『 성좌 '지하세계의 왕'이 근엄하게 당신을 바라봅니다. 』
"우선 지하세계의 왕은 명계의 신으로 불리는 하데스일 겁니다. 성좌 중에서도 최상급이라고 볼 수 있죠."
"하지만 주인이 최상급하고 계약을 맺는 건 좀······."
"예, 가브리엘 말대로 입니다. 장단점이 있죠. 주인님을 쥐고 좌지우지 할 가능성이 큽니다."
다음 별은 붉은색이었다. 이번에는 청룡이 설명을 했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두 눈을 반짝입니다. 』
"이 친구는 제 동료입니다. 사신수 주작. 그래서 나중에 주인님의 사도로 강림할 확률이 큽니다. 주인님께 폐를 끼칠 가능성도 적고요. 후원도 받아내기 좋아서 무난하죠. 다만, 돈이 많지는 않습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두 손을 모읍니다. 』
"처음부터 있었던 약소 성좌인데, 계약 해지가 쉽다는 장점이 있죠. 체험판으로 써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설명이 너무 짧다며 불평합니다. 』
거기까지 말한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지금 주인님께선 성좌들의 힘이 크게 필요하진 않으니까요."
이후 몇 가지 선택지가 더 주어졌지만 큰 차이는 없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선택지가 많아지니 고르기가 더 어렵다.
청룡이 몇 가지 설명을 보태었다.
"자신과 계약을 맺은 인간이 활약할수록 성좌들도 득을 보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주인님과 맺으려고 혈안인 거죠."
나는 100% 활약을 할 것 같으니까.
"성좌들에 현세(現世)에서의 명성은 힘과 자원이 되거든요."
"흠······."
그렇다면 내가 골라야 할 성좌는 누구인가.
나는 좁히고 있던 미간을 폈다.
"꼭 지금 고를 필요는 없는 거 잖아."
나와 계약을 맺고 싶다면, 그에 맞는 성의를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내가 갑이니까.
* * *
사최헌은 성좌 하나를 골라 계약을 마쳤다.
『 성좌 '잊혀진 시대의 영웅'이 계약에 만족합니다. 』
타차원의 성좌로 이름도 기억도 바래져 가는 구시대의 성좌. 그러나 사최헌에게 있어서는 최강의 성좌였다.
사최헌의 특기 공간검(空間劍)을 마스터 시켜 줄 유일한 존재였으므로.
'나는 끝났고.'
사최헌은 고개를 들어 무명을 바라보았다.
70여개의 별빛.
처음 겪는 일이었다.
자신도 최대 20개의 별빛을 받아봤을 따름이다.
그러나 질투 같은 감정은 들지 않는다.
무명이 벌여 온 일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니까.
오히려 궁금할 뿐이었다.
'무명, 넌 어떤 성좌를 선택할 거냐.'
성좌와의 계약은 막대한 힘을 부여하지만 그에 따라 플레이어의 방향성이 달라진다.
가령 악(惡) 성향의 성좌와 계약을 했다면, 사람을 해칠 때마다 많은 힘을 받게 될 수도 있다. 그런 플레이어는 더 많은 힘을 위해 악을 행하게 된다.
대륙 정복에 실패했던 성좌는 정복을 종용할 것이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했던 성좌는 복수를 유도할 것이다.
'힘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다.'
튜토리얼 이후의 세계가 더욱 혼란스런 이유였다. 지켜보기만 했던 성좌들이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인간과 상위 존재들의 의도가 현세에서 이리저리 뒤섞이게 된다.
사최헌은 무명을 응시했다.
계약을 마치면 별들은 떠날 것이다.
다른 계약 대상을 찾으러.
그런데 한참이 지나도 별들은 그대로였다.
루시퍼가 무어라 무어라 중얼거린다. 엿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내용이 궁금해 사최헌은 걸음을 한 발자국 옮겼다.
"자, 우선 여러분의 성의를 좀 보겠습니다. 코인 좀 팍팍 쏩시다. 오, 뱃사공님 50만 코인 좋습니다."
"······?"
"쿨타임 아이템 가지고 있는 성좌 없습니까? 고유 스킬 초기화권도 괜찮고."
샤르륵—!
허공에서 아이템 하나가 떨어졌다.
『 [ 전설+ ] 초속의 반지 』
- 쿨타임 감소 25%
- 도약 Lv.3, 이동속도 Lv.3, 캐스팅 Lv.3
"쓰읍, 이걸로는 약한데. 지금 주인님 아이템 안 보입니까? 신화급이에요. 전설+급으로 비비기는 좀······. 일단 뱃사공 이름 적어두겠습니다."
루시퍼가 꼬깃꼬깃한 종이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는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
지금 성좌들을 상대로 흥정을 하고 있는 건가? 아니, 정확히는 수금을 하고 있었다.
계약을 하지 않고 그걸 빌미로 성좌들에서 아이템을 뜯어낸다. 생각은 해 본 적 있었다. 이전 회귀에서 그리 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좌들의 반응은 시원찮았다.
'계약할 생각이 없다면 다른 헌터를 찾으면 그만이다.'
성좌들은 자존심이 높다. 인간 하나에게 아이템까지 줘가며 매달리는 일은 드물다.
약소 성좌들은 후원할 자원이 부족하고,
강대한 성좌들은 굳이 인간 하나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런데, 무명의 주위를 맴도는 별들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주인님께서 쓸만한 장화가 없는데······. 쿨타임 달린 걸로 뭐 어떻게 안 되나?"
오히려 아이템을 제공하고,
코인을 후원한다.
샤아아-!
『 [ 전설+ ] 바람 정령의 가죽신 』
- 방어 + 60
- 바람 정령의 가호를 받아 모든 속도가 다소 증가합니다.
- 쿨타임 감소 20%
- 질주 Lv.3, 낙하 Lv.3
"아주 좋아요. 자, 그러면······. 1차 선택은 이번 시련이 끝나갈 때쯤에 하겠습니다. 물론, 후원은 그때까지 열려 있으니까. 아무쪼록 알아서들 해주시길."
루시퍼가 적당히 마무리를 했다. 별들은 오히려 서로 후원을 하고 싶어서 난리였다. 주위를 반짝이는 저 모습을 보라.
사최헌은 벌려진 입을 그제야 다물었다. 솔직히 감탄했다.
'이거야 원.'
평범한 인간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좌들의 고고한 자존심보다 무명의 가치가 높았고, 본디 성좌였던 루시퍼가 성좌들의 행동 방식을 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앞으로 일주일은 더 끌어도 괜찮습니다. 이 기간은 성좌들이 쓸만한 인간을 본격적으로 탐색하는 기간이기도 하고요."
루시퍼의 설명은 실제로도 정확했다.
『 성좌 '이계 규율'이 자신의 가난함에 한탄합니다. 』
"저희도 찬찬히 살펴보면서 어떤 놈이 가장 도움이 될까를 판단하면 되겠죠."
주강혁도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도 하나 잘 뒀더니, 아이템이 넝쿨째 굴러 들어 온다.
『 [ 전설+ ] 초속의 반지를 착용합니다.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25%(3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12일 → 9일 』
반지는 최대 3개까지만 착용 가능하다. 시스템의 규칙이 그러했다.
이후로는 착용해도 능력치가 오르지 않는다.
[ 유니크 ] 흐름의 별반지
[ 전설+ ] 초속의 반지
이제 반지의 자리는 하나 남았다.
나는 곧바로 장화도 신었다. 시원한 바람이 발 전체로 퍼져나간다. 커다랬던 장화가 사이즈에 맞게 변화했다.
『 [ 전설+ ] 바람 정령의 가죽신을 착용합니다.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20%(1.8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9일 → 7.2일 』
이제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7일로 줄어 들었다.
44일이었던 대기 시간이 7일로.
'사건이 끊이질 않으니 기다려서 쓸 일은 없겠지만······.'
아이템을 더 모으면 1일까지도 줄여볼 만하다.
물론, 그보다 줄이는 것도 분명 가능할 거다.
룬이나 쿨타임 감소와 관련된 버프가 있을 테니까.
제일 기분 좋은 점은 성좌들한테 공짜로 아이템을 뜯어냈다는 거겠지.
아이템에 더해 320만 코인까지.
상당히 쏠쏠하다.
"근데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왜 이제서야 성좌들이 온 거지?"
활약은 이전부터 있었다. 사최헌은 여러 개의 별을 데리고 다니는 데에 비해 나는 두 개가 끝이었다.
"주인님을 향한 링크가 의도적으로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주인님을 끝내 찾지 못했고요."
청룡이 대답했다.
"나도 어렵게 찾아왔어."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이번 성좌 선택에서 많은 성좌들을 끌어모았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주시성 등록을 요청합니다. 』
이 녀석은 청룡의 동료라고 했지.
나는 주시성 등록을 허가했다.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만세를 부릅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주시성 등록을 신청합니다. 』
주시성 등록은 10명까지다.
나중에 마음에 드는 녀석들로 해줘야겠지.
고오오—!
주강혁은 도시 상공의 검은 알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크기의 알이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고 있다.
성좌 선택도 얼추 끝났으니 이제 시련을 끝낼 차례였다.
『 1페이즈 : 첫번째 시련 '아브락사스' 』
『 누구든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
시스템은 노이즈와 함께 메시지를 뱉어냈다.
어떤 소설에서 보았던 유명한 문구였다.
『 알에서 깨어난 존재는 해당 버프를 획득합니다. 』
- 물리 피해 감소 99%
- 마법 피해 감소 99%
- 방어력 999% 증가
- 공격력 999% 증가
주강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터무니없네.'
서울의 빌딩 크기만한 괴수가 알에서 깨어나는 것만으로도 위협적이다.
그런데 저런 버프까지 달고 나온다면······.
서울이 멸망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시스템이 무작정 세계를 파괴하려는 건 아니었다. 언제나 살아남을 방법 정도는 제공해준다.
『 전국 각지에 게이트가 생성되었습니다. 』
『 숨겨진 게이트를 공략하고 괴수의 버프를 제거하십시오. 』
『 부화율 : 00.0% 』
이 부화율이 100%가 되면 괴수가 알을 까고 나온다는 거겠지.
그때, 사최헌이 주강혁의 옆으로 다가왔다.
"어렵게 생각할 거 없다. 알이 깨어지면 괴조(怪鳥)가 나타난다. 놈을 없애면 첫 번째 시련은 클리어다."
"그런가."
"그거 쉽구만. 주인님, 이번 시련은 바로 끝내드리겠습니다."
루시퍼가 난간을 밟고 올라섰다. 손 위에서 형성된 전용 무기가 광선을 쏘아냈다.
번쩍!
콰아앙-!
거대한 흑색 알의 표면에 폭발이 일었다. 알은 끄떡없었다. 루시퍼의 눈이 찡그려졌다.
콰앙! 콰앙! 콰앙!
자욱한 연기가 알의 표면으로 피어올랐다. 거대한 폭발이 솟아올랐으나 흠집조차 없었다.
"······뭐 저리 단단하냐."
힘이 쭉 빠진 루시퍼가 난간에 기댔다.
허기가 찾아올 정도로 쐈는데 소용없었다.
사최헌이 고개를 저었다.
"저 상태에서 파괴는 불가능하다."
이전 회귀에서 누군가가 시도해 본 일이었다.
"그리고 만약 껍질을 벗겨낸다고 해도 재앙이 나타날 뿐이다."
온갖 버프를 떡칠한 괴물이 지상에 강림하게 된다.
모든 피해를 99% 감소시키고, 공격력과 방어력이 10배씩 올라간 진짜 괴수.
전 인류가 달려들어도 쓰러뜨릴 수 없다.
나타나는 순간 멸망 확정이다.
공략 방법은 정해져 있었다.
"전국에 총 4개의 게이트가 나타났을 거다. 게이트 하나를 공략할 때마다 버프를 하나씩 지울 수 있다."
버프가 완전히 사라진 괴조는 그나마 상대할만하다.
한국의 헌터들이 총공세를 펼치면 아슬하게 잡아낼 정도. 지금은 무명이 있으니 단숨에 처치하겠지만.
"다행스럽게도 게이트의 위치는 미리 파악해 두었다."
"그것도 조사로 한 거냐?"
"조사와 예언이다."
루시퍼의 비아냥에 사최헌은 무표정하게 답했다.
1페이즈의 테마는 '설화 도래(說話到來)'. 현세의 온갖 이야기가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그나마 첫 번째 시련은 쉬운 편이다.
게이트의 위치만 미리 안다면, 괴물이 막강한 힘을 가진 채 부활하는 건 막아낼 수 있으니까.
회귀자인 사최헌은 전 세계에서 나타날 게이트의 위치를 죄다 꿰고 있었다.
해외의 인맥을 통해 그 정보도 뿌려 놓았다.
'성좌 계약으로 헌터들의 수준도 한 층 높아졌을 테니 공략이 실패할 일은 없다.'
그 중에는 이미 성좌의 화신체가 된 자들도 있을 거다.
성좌의 힘 그대로를 이어받는 것이 화신체 계약이다.
해지가 불가능한 대신 막강한 힘을 낼 수 있게 된다.
시련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족놈들······.'
마기의 원천을 빼앗긴 마인들이 이대로 물러설 리가 없다. 그들은 집요한 종족이었다.
'슬슬 최상위 마족들이 직접 나타날 거다.'
마인들에겐 파벌이 나뉘어져 있다.
지금까지는 온건파가 득세했지만, 앞으로는 과격파가 윤곽을 드러낼 거다.
어쩌면 칠죄종에 버금가는 재앙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그걸 사전에 막을 방법은······.
'없군.'
지금의 사최헌에겐 없었다.
바뀐 미래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
회귀자의 유일한 약점이었다.
물론 대비는 할 수 있다.
최상위 마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나올지 정도는 예상할 수 있으니까.
허나, 바뀌어가는 건 마족들 뿐이 아닐 거다.
앞으로 더 많은 게 바뀔 것이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정확히는 무명이 등장하고나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이후의 세계가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사최헌은 마음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만약 무명조차 실패한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
아니, 무의미한 가정이다.
사최헌은 억지로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에 집중해야 했다.
무명(無命)은 이번 회차에만 유일하게 존재한다.
다시 회귀했을 때, 무명이 존재하리란 보장이 없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무명,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주겠다."
고개를 들어 올린 사최헌이 무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손에 들린 단말기를 내밀려는 순간이었다.
"없앨 수도······."
지금까지 조용히 흑색의 알을 응시하고 있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없앨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뭘 말하는 거지?"
사최헌은 무명이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서울 상공에 고요히 떠오른 거대한 흑색 알.
"알을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
사최헌은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다른 회차의 세계.
게이트를 전부 찾아내지 못한 인도에선 알을 부수려고 시도했었다.
그리하면 이른 시기에 괴수가 출현하며 힘이 약화될 거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알은 부서지지 않았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부화할 뿐이었다.
그들이 약했던 게 아니다.
인도에는 파괴의 신 '시바'와 계약을 맺은 헌터가 있었다. 그런데도 파괴되지 않았다. 알은 시스템의 보호를 받고 있을 확률이 컸다.
사최헌은 여전히 무명이 가진 힘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저 무언가 강한 힘을 사용한다는 것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뿐.
"우선은 게이트부터 차근차근······."
그대로 고개를 돌리려던 사최헌이 멈칫했다.
무명은 여전히 흑색의 알을 주시하고 있었다. 로브 너머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집중력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리고 실제로 주강혁은 집중하고 있었다.
'될 것 같은데.'
희미한 죽음의 기운.
그건 어디에나 존재했다.
동시에 크기나 양에도 제한이 없었다.
늘리고자 하면 늘려지고 펼치고자 하면 펼쳐진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집중을 유지한 채 기운을 움직이는 게 좀처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익숙해지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령이 생기자 금방이었다.
'······됐다.'
결국 주강혁은 희미한 죽음의 기운으로 거대한 알 전체를 뒤덮는 데 성공했다.
"설마, 진심인가?"
무명을 바라보던 사최헌이 눈동자가 커졌다.
무명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일이었다.
죽음의 기운으로 감쌀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 되었든 죽일 수 있으므로.
61화 아브락사스(2)
"정말로 알을 부수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사최헌이 재차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죽음의 기운이 완연하게 알을 뒤덮고 있다.
'즉살을 사용하면 그 즉시 처치할 수 있겠지.'
죽음의 기운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모든 걸 뒤덮지는 못한다.
바위, 땅, 물, 빌딩과 같은 무기물은 기운을 튕겨 낸다. 살아 있는 게 아니니 죽일 수 없다는 이치다.
반면 생명체가 아니지만 살아 움직이는 마물에게는 죽음의 기운이 덮인다. 인형, 골렘, 석상 등의 마물들이 그 예시다.
어쨌든 저 거대한 알에게는 죽음의 기운이 덮인다.
'확실하게 마물 취급이라는 거지. 아니면 생명체 취급이거나.'
죽이려면 죽일 수 있다.
알을 통째로 처치하면 막대한 보상을 획득할 수 있을 거고.
하지만 나는 즉살을 발휘하지 않았다.
"내일로 미루겠다."
『 여러 성좌들이 당신의 발언에 반신반의 합니다. 』
『 소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도발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흥미진진하게 바라봅니다. 』
내 한 마디에 성좌들이 메시지를 쏟아냈다.
관심을 받는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성좌들의 수가 늘어난 게 체감이 된다.
당장 알을 없애지 않을 거다.
두 가지 이유가 있다.
'경험치가 낭비된다.'
첫 번째로 이미 오늘치 레벨업을 다했다. 칠죄종 탐욕을 처치한 게 오늘 정오였다.
지금은 밤하늘이 떠오른 시간대.
몇 시간만 기다리면 내일이 된다.
내 레벨은 163.
저 알의 경험치를 독식한다면 곧 최대 레벨에 도달할 수 있을 거다. 현시점 달성 가능한 최대 레벨은 175. 운이 좋다면 최대 레벨의 제한이 해제될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두 번째 이유로 남은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 한 장뿐이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1
- (신화급) 궁극기 초기화권 x1
궁극기 초기화권이 남아 있다곤 해도, 비상용으로 한 장 가지고 있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으니까.
"그런가.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내 선택에 사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련 시작과 동시에 알을 처치하는 건 시스템의 설계에서 벗어난 일이니. 확실히 위험성이 있다."
나랑은 다른 이유였다.
위험성?
"대리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
"뭐야, 너. 대리자에 대해서도 알고 있냐?"
사최헌의 말에 옆에 있던 루시퍼가 반응했다.
"대리자란 시스템의 균형을 수호하는 존재입니다. 일종의 심판 같은 거죠. 이야, 정보 제한이 풀리니까 살 것 같네요."
루시퍼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주인님이 알을 파괴한다고 해도 대리자는 나타지 않을 겁니다. 시련을 공략하는 건 플레이어의 의무니까요."
"그 대리자라는 건 얼마나 강해?"
내 말에 루시퍼가 잠시 멈칫했다.
"그, 그렇네요. 뭐라 말하기 애매하네요. 싸우는 일이 별로 없거든요."
"말 그대로 심판에 가깝다. 중위 존재로 취급되니, 일반적인 인간의 능력으론 범접할 수 없겠지만······."
나를 바라보는 사최헌의 두 눈이 깊어졌다.
"너라면 없앨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아니, 싸울 생각으로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이야기를 지켜보던 청룡이 정리에 나섰다.
"지금 성좌들이 매우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으니 대리자가 개입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알을 언제 부술지는 주인님의 선택입니다."
사최헌과 루시퍼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듯 했다.
그렇다면야.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하나 더 얻고 나서 잡아도 늦지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인벤토리에서 랜턴을 꺼내 쥐었다.
흑색과 흰색이 뒤섞인 혼돈의 랜턴은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다.
『 [ 아티팩트 ] 혼돈(混沌) : 소울 이터 』
가브리엘의 말에 따르면······.
기적은 내게 필요한 물건을 선사하고,
균열은 내가 원하는 물건을 내뱉는다.
그리고 혼돈의 랜턴은 기적이 아닌 균열을 만들어낸다.
"한 번 사용해 볼까."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뽑고 움직여도 늦지 않으리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라면 말이지.
* * *
마인 사회.
그들은 불안정한 마계를 존속시키기 위해, 다른 차원을 침략하고 지배하고자 했다.
"하,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마인의 역사 이래 이런 일은 처음일세."
"마기의 원천 13개를 인간 하나에게 도둑맞다니."
커다란 원형의 테이블을 중심으로 8명의 마인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들 모두는 최상급 마인이었으며,
마계의 시작부터 함께한 태초의 존재들이었다.
마인 사회의 최고위층.
마계는 그들을 원로라고 불렀다.
"현세의 총책임자인 최상위 가논. 이 자리에 있는가?"
원로의 부름에 회의장의 거대한 문에서 젊은 마인 하나가 걸어나왔다.
쿵-!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남성 마인은 그대로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제 불찰입니다. 어떠한 죄든 달게 받겠나이다."
사방에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원로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현세의 무명(無命)이라는 인간이 그리 설치고 다닌다지. 결국엔 네 놈이 영웅을 키워낸 셈 아닌가?"
머리를 박은 가논은 입술을 씹었다.
무명이란 자가 그리 강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책사 로란드에게 종말의 열쇠를 맡긴 것이 최악의 실수였다. 거기서부터 모든 것이 꼬였다.
로란드는 무명에게 케로베로스를 먹이로 던져준 걸로도 모자라 칠죄종까지 불러왔다.
교만, 질투, 나태가 차례대로 쓰러졌다.
탐욕이 강림했었다는 정보도 입수했다. 강림과 동시에 사라진 기운까지도 확인했다.
'무명이 칠죄종 사냥을 다니고 있다.'
그것도 훔쳐 간 마기의 원천을 사용해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땐, 최상위 마족인 가논조차 식은땀을 흘려야만 했다.
결과적으로는 원로회에 불려오게 되었으니.
"마인의 정체가 발각되어, 인류의 경각심도 점차 커져가는 추세······."
"사실상 인류 지배 계획은 실패인 셈입니다."
"특단의 조치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군요."
마인들은 현세를 페이즈3까지 끌고 가서 그 과실을 취해야만 했다.
가장 좋은 건 페이즈3에 도달했을 때 인류가 마인의 지배하에 놓이는 것.
하지만 이제 그런 걸 따지기엔 너무 멀리 왔다.
"가논, 무명의 제거를 최우선으로 해라. 그가 인류의 영웅이 되기 전에 싹을 잘라야 한다."
"······."
"무슨 수를 써도 괜찮다. 인류의 절반까지는 죽어도 용서하겠다. 무명을 없애라."
"알겠습니다."
바닥에 엎드린 가논의 입꼬리가 조용히 올라갔다.
사실 바라던 바였다.
열등종에 불과한 인간들을 상대로, 마인들은 너무 오랜 시간 눈치만 보아왔다.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니.
마인들의 파벌은 두 개다.
과격파와 온건파.
온건파는 시스템이 깃든 세계를 자연스럽게 집어삼키고자 했다. 그편이 피해와 부작용을 최소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지난 몇천 년간 꾸준한 성과를 내어왔고, 그들이 주류였다.
반면 과격파는 힘으로 세계를 손에 넣고자 했다.
열등종을 노예로 삼아 부리면 시스템을 유지한 채 과실을 수확할 수 있지 않은가.
그간 마인들의 내부에서 꾸준히 있어왔던 주장이었다.
그리고 가논은 과격파의 일원이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군.'
원로들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거리낄 건 없었다. 미적지근한 방식에 열불이 나던 찰나였다.
현세를 담당하는 최상위 마족 3명 중 2명이 온건파인 까닭이었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원로들은 그리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논의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쿠웅-.
원로회를 빠져나온 가논은 곧장 마인들에게 짙은 사념을 보냈다.
[ 현세의 마인들이여. 들어라. 아브락사스의 알을 부화시켜라. 정체가 발각되는 걸 두려워하지 말고 움직여라. ]
무명(無命).
놈이 칠죄종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라면,
그보다 강한 것을 불러들이면 그만이다.
* * *
치직, 치지직—.
"발견했습니다. 붉은색의 특수 게이트입니다."
일본의 헌터 하나가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이걸로 두 번째 게이트였다.
"어디서 나온 정보라고 했죠?"
- 일본 측 음양사로부터 얻어낸 정보입니다.
"효과 한 번 확실하네요."
사최헌이 뿌려 놓은 정보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
- 공략대가 준비되는대로 보내겠습니다. 내부에 화염 속성 마물들이 주를 이룬다는 정보도 있기에.
"대기하겠습니다."
아브락사스의 알은 도쿄에서 나타났다.
수도였기에 자칫하면 궤멸적인 피해가 예상된다. 내부의 괴물이 버프를 두르고 태어나기라도 한다면······.
일본의 헌터는 몸을 떨었다.
상상만해도 끔찍했기에.
물리 및 마법 피해 99% 감소.
공격력 방어력 999% 증가.
게다가 빌딩 하나를 우습게 넘기는 크기다.
도쿄는 물론이고 일본 전역이 불바다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국의 무명 정도 되면 그런 놈도 막을 수 있으려나."
"글쎄요. 아무리 그래도 저대로 태어나면 힘들지 않을까요?"
그런 잡담을 나누고 있던 찰나였다.
스륵-!
일행 중 누군가가 게이트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누구도 반응하지 못했다.
"방금 들어 간 거 누구야?"
"다이스케? 다이스케가 없는데?"
"뭐야, 그 녀석······!"
헌터 몇이 게이트 속으로 들어갔다. 화악-. 뜨거운 열기가 그들을 덮쳤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열기 속에서 다이스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게이트 내부를 뛰어가고 있었다.
"다이스케! 멈춰!"
그 말에 다이스케가 잠시 뒤를 돌아봤다. 그를 쫓으려던 헌터가 자리에 멈추어 섰다.
"왜, 그래요?!"
"빨리 쫓아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자, 잠깐······."
다이스케의 눈동자는 붉게 빛나고 있었다.
"저 녀석 마인이야."
"예? 마인이라고요?"
"SS급 게이트의 공략대에도 마인이 있었다고 했잖아."
붉은 눈.
그건 마인의 특징이었다.
SS급 게이트가 공략된지 겨우 하루.
사회에 스며든 마인들을 제대로 축출할 시간이 있었을 리가 없다.
다이스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게이트로 들어와서 뭘 어쩌겠다는 거지······?"
일본의 헌터들이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쿠구구구—!
게이트 전체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쏴아아—. 하늘에서 불덩이가 비처럼 쏟아졌다.
불덩이 하나 하나가 홍염을 두른 마물이었다. 땅에 내려앉은 놈들의 울음소리가 게이트 내부에 울려 퍼졌다. 무수한 마물들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서야 헌터들은 깨달았다.
"게이트 브레이크······. 게이트 브레이크를 노리는 거다."
"마물들이 절대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아!"
"공략대, 지금 당장 공략대를!"
정신을 차린 헌터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홍염의 마물들이 파도가 되어 헌터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거 놔!"
"뜨거워! 뜨겁다고!"
"위험해!"
마물들의 근육이 비대화 되어 있었으며, 두 눈은 붉게 빛나고 있었다.
콰득, 콰드득!
화르륵! 화륵!
마기를 두른 마물들의 총공세를 몇 명에 불과한 헌터들이 막아낼 방법은 없었다.
그르르—!
홍염의 마수들은 새까맣게 타버린 헌터들을 지나 게이트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숨겨져 있던 숲 위로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다.
"부, 불이다! 마물까지?!"
"멍청아, 게이트 브레이크잖아!"
"당장 지원을!"
거대한 화마(火魔)가 침엽수로 가득찬 숲을 삼켜가기 시작했다.
『 홍염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 [ JP ] 아브락사스의 알의 부화율이 증가합니다. 』
비단 한 군데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방금 협회의 간부께서 게이트로 들어가셨습니다."
"예? 가신다는 말씀도 없으셨다고요?"
"자, 잠깐······."
콰아아아-!
게이트가 붕괴하며 쓰나미 같은 파도가 쏟아져 나왔다. 그 물살을 타고 나온 괴어인들이 삼지창을 들어 올렸다.
『 청수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 [ JP ] 아브락사스의 알의 부화율이 증가합니다. 』
이와 같은 일들이 다른 장소에서도 발생하고 있었다.
『 녹풍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 황토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
대다수의 게이트에서 동시 발생한 게이트 브레이크.
『 [ JP ] 아브락사스의 알의 부화율이 증가합니다. 』
알이 급격한 속도로 부화하기 시작했다.
쩌저적, 쩌저적—!
도쿄의 상공에 떠오른 거대한 흑색의 알이 깨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쪼개지는 듯한 굉음에 건물에 있던 시민들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일본의 1위 길드 '무겐'.
"잠깐, 어떻게 된 거냐. 지금 부화했다간······."
길드장 하야토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재빠르게 건물의 옥상으로 뛰쳐나갔다.
길드원들도 잽싸게 그 뒤를 따랐다.
알을 바라보는 모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알이 쪼개지고 있었다.
『 부화율 : 98.8% 』
빠르다.
너무 빠르다.
지금 부화했다간,
절대로 막을 수 없다.
네 가지 버프가 동시에 중첩된 비정상적인 마물.
절대로 막을 수 없는데,
알은 멋대로 부화를 시작했다.
쩌어억-!
괴조(怪鳥)의 부리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 순간, 섬뜩한 기운이 도쿄에 내려앉았다. 하야토의 팔 위로 솜털이 오소소 솟아났다.
저건 재앙 그 자체였다.
꿀꺽.
하야토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허리춤에 찬 칼집에 손을 올렸다.
"막는다."
"예?"
"화신 계약.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해라."
놀란 눈을 한 길드원들을 향해 하야토가 말했다.
"다들 정신 차려! 우리가 막아야 한다니까?! 선택지가 없어!"
하야토는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등 뒤로 영험한 기운이 안개처럼 퍼져 나왔다.
『 화신 계약을 활성화합니다. 』
『 당신은 '츠쿠요미'의 화신(化身)입니다. 』
『 전설 속 달의 기운이 당신에게 깃듭니다. 』
일본에 존재하는 달의 신 츠쿠요미.
검을 쥔 손에서 눈부신 달빛이 솟아올랐다. 콰앙! 하야토가 박차고 나간 건물의 옥상 위로 금이 새겨졌다.
"뭐, 뭐야. 보이지도 않았어."
"길드장 언제 저런 힘을······."
S급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는 속도였다. 부길드장이 재촉하듯 소리쳤다.
"화신 계약이라잖아. 너희도 있을 거 아니야!"
그 일갈에 길드원들이 정신을 차렸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은 각자 무기를 쥐고서 각자의 성좌를 불러들였다.
까아아아아—!
괴조의 소름끼치는 울음소리가 도쿄 전역에 울려 퍼졌다. 놈이 부수고 나온 알은 허공에서 사라졌으나.
쿠우웅-!
괴조는 그대로 도심 위에 떨어졌다.
쿠구구구. 콰과과광!
눈조차 뜨지 못한 어린 새가 몸을 뒤척일 때마다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 [ JP ] 활성화된 버프는 다음과 같습니다. 』
- 물리 피해 감소 99%
- 마법 피해 감소 99%
- 방어력 999% 증가
- 공격력 999% 증가
그런 놈의 움직임을 억제하듯 사방에서 검격과 마법이 쏟아졌다.
괴조와 비교하면 작디 작은 헌터들의 공격이었다.
효과가 없진 않았다.
괴조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느려졌으니까.
그러나 피해를 줄 순 없다.
그저 막을 뿐이다.
"막아라, 우리가 무너지면 끝장이다!"
하야토의 고함에 일본의 헌터들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그와 같은 일이.
여러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 * *
"자, 잠깐······. 이거 큰일난 거 아니야?"
TV를 보고 있던 주강혁의 눈동자가 커졌다.
- 현재 5개 국가에서 아브락사스의 알 동시 부화.
뉴스를 통해서 다른 국가의 상황이 생생히 전해지고 있었다.
일본, 미국, 영국, 호주, 인도.
[ 주인님, 무슨 일이라도? 느낌이 심상치가 않네요. ]
청룡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혼 파밍 좀 시키려고 제주도에 보내놨는데, 그 사이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
"다른 나라에서 알이 부화했다는데."
[ 정말입니까? 한국은 괜찮나요? ]
"······일단 한국은 괜찮아."
나는 베란다 밖으로 서울 상공을 내다보았다.
아직 부화할 조짐은 하나도 없다.
부화율도 1% 정도고.
[ 저는 여기서 계속 사냥을 하고 있겠습니다. 랜턴의 영혼을 채워야하니까요. ]
그건 맞다.
어차피 청룡이 온다고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우리나라도 아니고 해외의 일이니까.
"전세계에서 갑자기 부화했다라. 칠죄종의 짓은 아닐 테고······. 주인님, 일단 드시면서 생각하시죠."
루시퍼가 야식으로 준비한 콘치즈를 내 앞에 내려두었다. 게임방에 들어가 있던 가브리엘은 어느새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오, 출출했는데. 아주 훌륭해."
"네 놈 먹으라고 만든 거 아니다. 주인님이 드셔야 제주도에 있는 청룡이 사냥을 원활히······."
가브리엘이 포크로 그릇을 찍으려하고, 루시퍼는 그릇을 든 채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거의 전투를 방불케 하는 움직임이다.
"······."
둘이 너무 태평하니까 괜히 내가 호들갑 떠는 것 같잖아.
"국외의 일이니까요. 역시 도움을 먼저 요청하기 전까지는 나서지 않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오, 먹어라 먹어."
"오예."
루시퍼가 포기하고선 콘치즈 철판을 테이블에 내려놨다.
'그건 그래.'
사실 루시퍼의 말이 맞다.
여기서부턴 국제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
마수를 잡으면 그 보상은 결국 나한테 들어오게 되니까.
어찌 보면 해당 국가의 성장 기회를 뺏는 게 된다.
멋대로 나서는 게 오히려 방해일 수도 있고.
그때였다.
띵동, 띵동, 띵동-.
현관문의 벨소리가 강박적으로 울리고 있었다. 인터폰으로 보이는 사람은 사최헌 헌터였다.
나는 재빨리 로브를 둘러썼다.
"뭐냐, 층간 소음 정도는 참아라."
루시퍼가 현관문을 열어줬다. 사최헌은 진지했다. 옷도 전투복 그대로였다. 검집을 그대로 차고 있었다.
"농담할 때가 아니다. 마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TV를 보고 있었나. 그렇다면 이야기가 빠르겠군."
TV의 뉴스를 확인한 사최헌이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조금 억지일지도 모르겠다만······. 아니, 쉽지 않겠지."
사최헌은 관자놀이를 짚은 채 말을 이었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무명. 버프를 두른 괴조를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지?"
얼마나 버틸 수 있냐고?
그건 사도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얀 빵이 이제 3개 남았으니까요. 장기전이 되면 불리합니다. ]
청룡은 그리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사최헌은 입술을 콰득 씹었다.
"그런가. 역시······. 너에게도 쉽지 않은 건가. 하지만 막지 못한다면 인류는 여기서 끝장······."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곧바로 오해를 정정했다.
"대신 처치하는 건 가능하다."
"······?"
"버티는 건 어려워도 처치하는 건 쉽다는 말이다."
사최헌의 고개가 기울었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눈빛.
5마리의 괴조.
한 번에 잡을 방법은 있다.
거기에 더해 한국의 알까지.
나는 궁극기 초기화권을 꺼내 들었다.
"상황만 적절하게 준비된다면."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능력을 궁금해 합니다. 』
『 소수의 성좌가 당신을 의심합니다. 』
『 소수의 성좌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대박의 징조를 느낍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버프가 중첩된 괴조도 얼마든지 죽일 수 있다."
62화 아브락사스(3)
사최헌은 지난 과거를 떠올렸다.
1회차의 세계.
회귀의 능력을 깨닫기 이전.
대한민국은 죽음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도시가 마비 되었다.
마인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공고히 했고, 한국은 마인의 손아귀에 놀아나기 시작했다.
1페이즈가 시작되고도 제대로 된 공략이 될 리가 없었다.
- 숨겨진 게이트를 공략하고 버프를 제거하십시오.
게이트 하나를 찾지 못했다.
괴조(怪鳥)가 풀려났고 서울은 쑥대밭이 되었다. 많은 사상자가 나왔고 서울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예언자의 별은 그때의 사최헌에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들은 정보를 독점한 채 자신들의 정체를 숨겼다.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졌었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한 번 파괴된 세계는 쉽게 복구 되지 않는다.
죽은 사람들은 살아나지 않고,
그들이 했어야 마땅한 일들은 이뤄지지 않으니까.
'이번 회차에서 한국은 안전하다.'
미리 마인들을 제거해 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와 같은 참사가 다른 국가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4가지 버프가 중첩된 괴조는 누구도 잡을 수 없다.'
공략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브레이크가 일어난 게이트를 깔끔하게 정리하면, 게이트 공략으로 인정되어 괴조의 버프를 벗겨낼 수 있다.
그때쯤이면 각 도시가 얼마나 파괴 되었을지······.
'마인들의 움직임을 대비하지 못했다.'
사최헌은 스스로를 자책했다.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명에 의해 미래가 바뀌었고, 마인들의 행동은 여지껏 없던 패턴이었으니까.
'······다시 시작해야 하는가.'
사최헌은 고심이 깊어졌다.
그러나 다시 회귀했을 때,
무명이 존재한다는 보장이 없었다.
여러 번의 회귀를 거듭했지만 무명(無命)의 등장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쩌면 엄청난 우연이 만들어낸 결과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런 고민이 무색하게.
무명은 간단히 말했다.
"원한다면 모든 괴조를 전부 죽일 수도 있다. 국제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개입이 가능하다면."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단호한 말투.
사최헌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뭐?"
"거 참, 귀 먹었어? 주인님께서 다 해결하실 수 있으시다잖냐."
루시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명의 능력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없는 듯한 눈빛이었다.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알을 처치할 정도로 강한 건 알겠지만, 괴조의 방어력은 그보다 훨씬······."
사최헌은 무명의 힘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압도적인 강함으로 적을 처치하는 것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거듭된 회귀 속에서 무명과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자는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각국의 허가, 가능한가?"
무명은 언제든지 없앨 수 있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 자신감에 사최헌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다."
튜토리얼 이전부터 사최헌은 많은 준비를 해두었다.
전세계 각국에 사최헌의 인맥들이 널려 있다.
미래를 아는 회귀자는 그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줄 수 있었고, 그 하나하나가 인맥으로 발전했다.
상황 자체도 그럴싸 했다.
'한국의 알은 아직 부화하지 않았다. 다른 국가가 도움을 요청한다면 한국이다.'
물론 이 모든 건 괴조를 처치할 수 있다는 가정 하에 의미가 있는 일이었지만.
"다른 준비는 필요 없나? 우선 공간이동 능력자인 유지훈을 불러 오겠다."
각국을 돌아다니려면 한시가 바빴다.
그러나 무명은 고개를 저었다.
"괴조가 출현한 각국을 살필 수 있는 다수의 모니터. 그것만 준비해준다면 충분하다."
무명의 말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모니터?
고작 그걸로 괴조를 처치할 수 있단 말인가?
사최헌은 재차 물었다.
"정말 그거면 되나?"
믿지 않는 게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을 뿐.
지금까지 무명의 활약을 두 눈으로 보아왔음에도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떤 헌터가.
보스를 처치할 때 모니터를 요구하겠는가.
그러나 무명은 전에 없이 진지한 목소리였다.
"된다."
* * *
쿠우웅—!
미국 뉴욕.
빌딩의 크기에 비견 되는 괴조의 거체가, 한 명의 인간에게 가로 막혔다.
"우오오오오!"
미국 랭킹 1위, 히어로 데릭.
콰과과—!
그의 가공할 힘이 괴조의 전진을 막았다. 괴조에 비하면 작디작은 크기였지만 신체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괴력은 무시할 게 못 되었다.
데릭이 성좌 계약을 맺은 대상은 '헤라클레스'.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그리스 신화 속 영웅.
그 신화적인 힘이 데릭을 통해 발현되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몸을 부딪힌 충격에 괴조가 휘청거렸다. 놈의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울려퍼졌다.
데릭은 빌딩의 벽면을 박차고, 다시 한 번 괴조에게로 돌진했다.
쿠우웅-!
큰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괴조가 비틀거리는 사이, 미국의 헌터들이 포위망을 형성했다.
"데미지는 줄 수 없다! 움직임을 저지할 수 있는 스킬만 사용해!"
"사슬로 다리를 묶어라! 놈을 구속해!"
"놈이 다시 일어난다!"
괴조에겐 현재 4개의 버프가 중첩된 상태.
물리 & 마법 피해 99% 감소.
공격력 & 벙어력 999% 증가.
놈에게 피해를 입히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 정도는 가능했다.
"후우······."
"데릭, 괜찮겠어?"
땅에 착지한 데릭을 향해 동료 헌터가 걱정스런 목소리를 내었다.
"괜찮아, 괜찮아. 이 정도야 별 거 아니다!"
이미 온 몸이 만신창이었다. 그가 자랑하던 육체 곳곳이 피멍으로 물들어 있었다.
화신 계약의 막대한 힘을 아직 데릭의 육체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데릭은 디디고 있던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콰아앙-! 바닥 위로 무수한 금이 새겨지고, 크레이터와 같은 구덩이가 생길만큼의 충격.
허공에 떠오른 데릭은 괴조를 마주했다.
'진짜 괴물인가.'
전력을 다해 공격했음에도 생채기 하나 입지 않았다.
데릭도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을 쓰러뜨리긴 커녕, 흠집조차 낼 수 없다는 것을.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놈의 전진을 조금이라도 막는 것 뿐이었다.
콰아앙—!
괴조가 가볍게 날개짓을 하자 강력한 폭풍이 형성되었다. 데릭은 폭풍을 뚫고서 괴조의 머리에 착지했다.
"크으윽!"
괴조는 데릭을 무시하고서 몸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저 한 번의 몸짓에 불과했지만, 그 파괴력은 무시무시했다.
쿠구구구!
놈의 날개에 닿은 빌딩이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시민들이 미리 대피했기에 망정이었다.
데릭은 전력으로 괴조의 머리를 내려쳤다.
콰앙! 콰앙!
물리력이 작용하며 괴조의 머리가 휘청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괴조는 강하게 머리를 털어냈다.
슈우웅, 콰과광!
그대로 튕겨져 나간 데릭이 부서진 빌딩의 잔해에 처박혔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데릭은 피를 쏟아냈다.
그는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재앙이나 다름 없는 흑색의 괴조.
'······얼마나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게이트 브레이크가 정리되면 버프가 사라질 거란 정보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쯤이면 뉴욕의 30%는 박살나고도 남을 거다.
'지원도 올 리는 없다 이건가.'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시련이었다.
그러나 이대로는 안된다.
데릭 자신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다른 헌터들이 얼마나 버틸지는 미지수. 그는 포션을 입 안에 때려 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치직-, 치지직—.
그때, 단말기에서 희망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현재 한국에 지원을 요청 중에 있다. 조금만 버텨라, 데릭.
그 말에 데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국?
한국이라면 무명(無命) 헌터가 있는 나라 아닌가.
SS급 게이트에서도 대활약을 펼친 헌터.
그러나 데릭은 그 활약을 직접 보진 못했다. 영상을 통해 대충이나마 파악하고 있을 뿐.
"저런 괴물도 잡을 수 있나?"
데릭은 상념을 털어내고서 자세를 잡았다. 괴조가 다시 움직이려하고 있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해 막는다.
미국을 위해.
자신을 위해.
단지 그 뿐이었다.
* * *
"더 이상 가망이 없습니다."
"탑 랭커에 속하는 헌터들을 투입했는데도, 저지가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곧 뚫릴 거고요."
"차라리 게이트 브레이크를 정리할 헌터들을 지원 받는 게······."
5개 국가 모두가 난리였다.
미국, 일본, 영국, 호주, 인도.
자국의 피해가 명확해진 상황. 각국의 협회와 관련 단체들은 결정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다른 국가에 지원 요청을 합시다."
"게이트 브레이크만이라도 막아야 해요."
지원은 공짜가 아니었다.
불리한 조건을 걸고 두 국가 간에 이뤄지는 협상이었다.
그러나 다소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지원 요청을 해야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대도시 하나가 궤멸하게 생겼으니, 이것저것 가릴게 아니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는 건, 대한민국 정도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게이트 공략 도중이라 여력이 없을 겁니다."
"러시아 놈들 우리가 도와줬던 건 벌써 잊었나?"
문제는 국가가 5개나 된다는 것.
헌터들의 수는 한정 되어 있다.
지원이 온다고 해도 유의미한 결과가 나타날지는······.
"이대로 두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건가."
일본의 협회장은 망연한 얼굴로 빌딩 바깥을 내다 보았다. 멀리 떨어진 도심 위로 커다란 불길이 치솟는 게 보였다.
지원은 불렀다.
남은 건 답장을 기다리는 것 뿐.
"한국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그······."
잠깐 머뭇거리던 비서가 입을 열었다.
"······보스를 직접 처치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같은 시각.
한국에 지원 요청을 했던 5개 국가는 전부 같은 연락을 받았다.
- 무명이 괴조를 없앨 수 있다.
처치할 수 있단 말인가?
저 괴물을?
긴가민가하면서도 그들은 승낙했다.
보스를 당장 없앨 수 있다면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저 빌어먹을 괴수가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게 생겼으니.
"일본부터······."
"아니, 미국부터!"
"한국과 연줄이 닿는 사람 없나?"
모든 국가가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미국의 헌터들도 완전한 수세에 내몰렸다.
쿠우웅—!
"크허억!"
바닥에 내려꽂힌 드렉이 붉은 피를 토해냈다. 팔과 다리가 너덜거리고 있었다.
치유 스킬을 가진 헌터들이 다급하게 모여들어 드렉을 치료했다.
콰과과과-!
괴조의 부리가 빌딩 하나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하늘 위로 퍼져나갔다.
드렉은 망연한 표정으로 괴조를 바라보았다.
포션을 들이 붓고 힐과 버프를 받으면서도 괴조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게 최선이었다.
"여기까지인가······."
그마저도 한계에 봉착했다.
드렉은 처음으로 한계를 느꼈다.
S급 게이트를 처음으로 공략할 때도, SS급 게이트에 다다랐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탈력감이었다.
시스템의 힘은 강대했다.
인류는 그 앞에서 무력할 따름이었다.
튜토리얼.
지금까지는 정말로 튜토리얼이었다.
게이트를 공략하고 보상을 얻고.
레벨업을 하고 능력을 강화하고.
한때는 시스템이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인류가 한 단계 도약할 절호의 기회라고.
그러나 지금에 와선 명백했다.
시스템은 그저 적응할 시간을 준 것에 불과했다는 걸.
『 소수의 성좌가 데릭을 비웃습니다. 』
『 소수의 성좌가 데릭을 응원합니다. 』
『 성좌 '12과업의 달성자'가 당신을 주시합니다. 』
성좌의 힘을 받았음에도 극복되지 않는 거대한 차이.
키에에엑—!
데릭이 바닥에 주저 앉은 사이, 괴조의 입으로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저건 막을 수 없었다.
막았다간 그대로 가루가 되어 산화하리라.
"무명 헌터는 왔나······?"
데릭은 지친 눈빛으로 동료들에게 물었다.
동료들은 고개를 저었다. 괴조가 출현한 국가는 5개가 넘는다. 미국과의 거리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와주리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뚜둑, 뚜두둑.
데릭은 관절이 끊어지는 고통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치기는 했지만 체념하진 않았다.
"데릭, 위험해. 이제 그만······."
"아니, 아직 할 수 있어."
"데릭!"
데릭은 뛰어오르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그의 다리 근육이 비대하게 팽창하고, 전신의 혈류가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콰아앙-!
압축된 마력과 근력이 데릭을 로켓처럼 쏘아 올렸다. 데릭은 괴조의 턱을 노리고서 날아올랐다.
괴조의 입에서 마력이 방출 되기 전에, 턱을 강타해서 궤도를 바꿔낼 셈이었다.
데릭은 전신의 힘을 끌어 모았다.
설령 몸이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리 각오하며 괴조와 충돌하려는 순간이었다.
푸화아악—!
빌딩에 맞먹는 괴조가 폭발했다.
거기엔 아무런 전조가 없었다.
"?!"
방향을 틀어 빌딩에 착지한 데릭은 고개를 돌려 괴조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기이할 정도로 고요해진 도시.
괴조의 핏자국과 살점만이 주변을 빨갛게 메우고 있을 뿐.
괴조가 죽었다?
설마.
그 괴물이 이렇게 쉽게 죽을 리가 없었다.
다급해진 데릭이 단말기를 들어 올렸다.
"괴조는 어디에 있지?"
단말기에서 들려 온 목소리에서도 당황이 느껴졌다.
- 바, 반응 소실입니다. 사라졌어요.
무슨 짓을 해도 처치할 수 없을 것 같던 괴물이 사라졌다.
데릭은 그제서야 자신이 보았던 영상 하나를 떠올렸다. 분명 영상 속의 마물들은 이런 식으로 목숨을 잃었었다.
"무명······?"
하지만 이번 상대는 아브락사스의 괴조였다.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 진짜배기 괴물.
"정말로 쓰러뜨렸단 말인가······?"
데릭과 미국의 헌터들이 그 답을 알아내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US] 첫번째 시련 '아브락사스' 클리어 』
『 국가 순위 2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99.9% ]
- 2위 : 데릭 밀러 [ 0.03% ]
- 3위 : 마커스 브라이언 [ 0.018% ]
기여도를 나타내는 메시지엔 무명의 이름이 분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마찬가지로 일본.
『 [JP] 첫번째 시련 '아브락사스' 클리어 』
『 국가 순위 3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99.9% ]
- 2위 : 오쿠데라 하야토 [ 0.035% ]
- 3위 : 아카가와 미라이 [ 0.023% ]
"무, 무명인가······."
채앵.
일본 1위 랭커 하야토는 손에 쥐고 있던 일본도를 내려놨다. 온 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탈진하듯 쓰러졌다.
영국, 인도, 호주.
"사, 살았어!"
"무명, 무명 만세!"
"하아······. 다행이다······."
각국의 헌터들은 환호했다.
살아남았음에 안도하며.
피해가 커지지 않았음에 기뻐하며.
막아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재앙이 정리 되었다.
* * *
『 [KR] 첫번째 시련 '아브락사스' 클리어 』
『 국가 순위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 ★ ] 부화하지 않은 존재를 처치하셨습니다. 』
『 [ ★ ] 다섯의 괴조를 처치하셨습니다. 』
『 전무후무한 업적이 세워졌습니다. 』
『 당신의 활약이 아카식 레코드에 영원불멸 새겨집니다. 』
『 혼돈과 심연의 지배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
『 질서와 천상의 지배자들이 당신의 존재를 확인합니다. 』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오른다.
나는 사방에 존재하는 모니터를 찬찬히 훑어봤다. 각 나라에 나타난 괴조를 비추던 모니터였다.
마치 해커의 방을 연상케 하는 장소. 사최헌의 집에는 이런 특수한 장소가 당연하다는 듯이 존재했다.
'보이기만 하면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게 설령 모니터 너머라고 해도 말이다.
우수수.
내 손에서 찢긴 궁극기 초기화권의 잔해가 떨어져내렸다.
『 궁극기 극야도래(極夜到來)가 활성화 중입니다. 』
- 즉살이 다수의 적을 처치합니다.
- 초래한 죽음의 수만큼 일시적으로 격이 상승합니다.
- 특수 능력 : 오버 드라이브를 발동할 수 있습니다.
궁극기를 발휘하고, 특수 능력 '오버 드라이브'를 발휘하자 죽음의 기운은 더욱 선명해졌다.
괴조에게 기운을 덧씌우는 건 쉬웠다. 알에 기운을 씌우는 것보다 간단했다.
'여기서부턴 간단하다.'
오버 드라이브 상태에선 10초간 즉살의 쿨타임이 초기화 된다. 초기화권을 쓸 필요도 없었다.
모니터 상의 모든 괴조를 처치하면 끝.
혹시 몰라 나름의 순서를 정해두었는데 그러길 잘했다. 한국의 순위가 1위로 잡혀있으니 만족스럽다.
나는 손을 마저 털어냈다.
이제 내게 남은 것은 고유 스킬 초기화권 1장 뿐이다.
이 부분은 청룡이 제주도에서 열심히 영혼을 모으고 있으니 괜찮겠지. 궁극기 초기화권도 노려볼만 하다.
어쩌면 보상에서 나올지도 모르고.
파직, 파지직—! 파직!
『 시스템이 보상을 정산 중에 있습니다. 』
한꺼번에 많은 괴조를 잡아서일까.
이번에도 정산에는 시간이 걸릴 기세였다.
스파크가 한층 더 심해졌다.
"그러면 돌아가겠다."
몸을 돌려 사최헌의 방을 빠져나가려는데.
"······."
"?"
사최헌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입을 살짝 벌린 채 이해할 수 없단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입을 달싹거리다가,
마른 침을 삼킨 사최헌.
그는 힘겨운 목소리로 내게 물어왔다.
"무명······. 대체 정체가 뭐냐? 정말로 인간이냐?"
괴물이라도 보는 듯한 표정이다.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경악한 얼굴.
······정체가 뭐냐니.
내가 인간인지를 묻는 건 아닐테고.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언젠가 루시퍼가 했던 말을 빌려서.
"인류의 편."
정확히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길 간곡히 바라는 사람이다.
63화 대리자(1)
괴조가 사라졌다.
허무하리만치 간단하게.
그러나 그 사실에 허탈해하는 이는 없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쉴 뿐.
꿀꺽, 꿀꺽.
"푸하!"
물이든 페트병을 통째로 비워낸 드렉이 길거리에 드러누웠다.
뉴욕의 거리가 파괴되어 있었다. 금이 간 거대 전광판과 쩍쩍 갈라진 도로. 거리를 굴러다니는 건물의 파편까지.
난장판이었지만 충분히 복구 가능한 수준이었다.
'이 정도로 끝났으면 기적이고 말고.'
월드 보스와 각종 마물의 출현이 늘어나며, 인류의 복구 기술도 발전해왔다.
뒷정리를 전담으로 하는 헌터도 존재했다. 청소 스킬과 건물 복구 스킬을 익힌 전문가들.
그들에게 맡기면 시민들은 금방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게이트 브레이크도 순조롭게 진압되고 있는 모양이야. 산불도 잡히고 있는 데다가, 많은 헌터가 자원해서 돕고 있거든."
동료의 말에 드렉은 잘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괴조가 처리된 시점에서 사소한 문제였다.
"무명 헌터. 직접 만나고 싶은데, 어떻게 미국으로 초대할 수 없나?"
몸을 일으킨 드렉이 동료에게 말했다.
"국가 차원에서 무명에 대한 보상이 있을 텐데."
"오, 그거 좋네. 우리 길드의 보물 창고를 열어 주자고. 성대한 파티도 겸해서. 대련도 하고, 음식도 먹고."
"무명이 초대한다고 해서 올지는······."
동료가 궁금한 건 그런 부분이 아니었다. 동료의 시선이 빌딩을 향했다.
괴조의 핏자국이 짙게 남은 빌딩의 벽면.
무명은 괴조를 한 방에 처치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버프 4개를 동시에 두른 괴조는, 마법 및 물리 피해 99% 감소시킨다. 방어력이 증대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전 세계 헌터들이 동시에 덤벼들어도, 생채기가 났을지 의문인 괴물인데······.
무명의 공격은 어째서인지 통했다.
"대체 뭐였던 거야? 화신 계약? 드렉, 넌 뭐라도 봤을 거 아니야."
"흐음······."
드렉은 턱을 매만졌다. 온 몸이 욱신거리는 탓에 깊게 생각하긴 어려웠다. 원래 분석을 잘하는 편이 아니기도 했고.
"무명의 기운은 못 느꼈다."
분명 SS급 게이트에선 상당한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원거리 공격?
그건 더 말이 안된다.
고민을 지속하려던 드렉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머리 아프게 묻지 마. 어쨌든 무명이 굉장하다는 건 틀림 없잖냐."
드렉은 진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명이 필요로 하는 아이템이 있는지 알아봐. 그걸 가지고 한국에 가든, 무명을 부르든 할 테니 말이야. 꼭 만나고 싶거든."
그 시각, 일본.
일본 랭킹 1위 하야토를 비롯한 헌터들은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 괴물이 한 번에······."
"여기 뿐만 아니에요, 길드장. 다섯 국가의 괴조를 동시에 처치했다는데요."
그 소식에 자리에 있는 헌터들의 시선이 모였다. 단말기를 든 헌터에게로.
"설마."
"아뇨, 진짜에요."
"하."
하야토는 허탈한 웃음과 함께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차원이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무명의 힘이 남다르다는 건 SS급 게이트에서 이미 느꼈다.
하지만 화신 계약을 맺으며 조금은 따라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건 어림도 없는 수준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하면 그런 게 가능한 거야?"
"무, 무서울 정도인데."
"같은 인간 맞아?"
동료 헌터들은 질렸다는 기색이었다. 하야토는 그런 동료들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짜 괴물은 따로 있었구만."
"괴조보다 더한 괴물이 한국에 있었던 거네요."
"뭐랄까, 괴물과 친하게 지낼 방법이 있으면 좋겠는데."
이제 막 첫 번째 시련을 넘겼을 뿐이다.
시스템은 계속해서 시련을 제공할 것이다. 이번과 같은 위기도 찾아올 테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무명 헌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는 거지."
압도적인 강자 무명.
그와 친분을 쌓아두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좋으리라.
"전 세계가 동시에 위기에 처했을 때, 무명이 어딜 먼저 돕겠어?"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는 쪽부터 돕지 않겠는가.
그 말에 동료 하나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전 세계를 동시에 도와주지 않을까요?"
"······."
하야토는 대답하지 못했다. 진짜 그럴 것 같아서. 하지만 만약이라는 상황도 있지 않겠는가.
무명은 신이 아니니까.
"지금부터는 소리 없는 전쟁이다. 각 국가간의 무명(無命) 쟁탈전이라는 거지. 조금이라도 호감을 사려면 최대한 좋은 아이템을 준비해야겠지."
영국, 호주, 인도······.
그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무명으로부터 환심을 사기위해 적극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세계의 언론 또한 앞다투어 기사를 쏟아냈다.
- 한국의 헌터 무명, 5 국가의 괴조 동시 처치
- 세계 최초 SSS급 헌터의 등장?
- 시련 돌파, 인류 최강의 헌터 무명
- 세계 헌터 연합, 무명(無命)을 세계권력에 준하는······.
[ 인기 ] 무명, 아브락사스의 괴조 처치 (미국)
- 조회수 1.2억 회 #좋아요 342만
[ JP ] 첫 번째 시련 돌파 영상, 무명 추정 (괴조)
- 조회수 1억 회 #좋아요 266만
ㄴ 한국이 부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
ㄴ 무명의 팬클럽 가입했다. 무명은 신임.
ㄴ 헌터의 역사를 새로 쓰는 중
ㄴ 다른 헌터들 쩔쩔매는데, 그걸 한 방에?
ㄴ 캬, 이게 무명 클라스
너튜브의 반응도 폭발적이었다.
세계에 무명의 이름이 확실하게 각인 되는 순간이었다.
* * *
어느 대부호의 거대 저택.
"그러니까······. 무명이 괴조를 전부 처치했다고."
그곳에 세 명의 마인이 모여 있었다. 이들은 평범한 마인이 아니었다.
현세의 지배를 담당한 최상위 마인들.
"예, 예······. 그렇습니다. 모든 국가가 별 다른 피해 없이 이번 시련이 종료될 것으로 보입니다."
방으로 들어 온 중위 마족이 고개를 숙인 채 그리 말했다.
"그래! 내가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나!"
최상위 마인 튜란테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온건파에 속한 마인이었다.
"섣불리 손을 쓸수록 무명의 힘만 커질 뿐이다. 마계 전체를 위협할 영웅이 태어나기라도 바라는 건가?"
같은 온건파인 최상위 마인 몬타쥬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흥."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가논이 코웃음을 쳤다. 과격파에 속하는 인물이지만, 현시점 주도권은 가논에게 있었다.
원로들로부터 '무엇을 해서라도' 무명을 처치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므로.
"그러면 그냥 기다리자는 건가? 무명이 스스로 힘을 키울 때까지?"
가논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칠죄종과 협력한다는 네 놈들의 작전도 결국 무명의 힘을 키워주는 꼴 아니었나?"
무슨 수를 쓸 때마다 무명은 강해진다.
가만히 있어도 무명은 강해진다.
마인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지금 당장 최상위 마인 3명이 한국으로 돌진하기에도 늦었다.
얼마 전, 무명은 칠죄종을 '사냥'했다. 강림했던 칠죄종의 기운이 등장과 동시에 사라진 것을 포착했다.
무명은 이미 인간의 수준이 아니다.
따라서 가논은 서두르지 않았다.
"무명의 행보는 이미 시스템의 기준을 넘어섰다. 괴조 다섯과 알 하나를 동시에 처치."
"설마······."
"그래, 내가 겨우 괴조를 부화시키는 걸 작전이라고 불렀겠나?"
가논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대리자가 나타날 거다."
시스템의 대리자.
그들은 시스템의 균형을 수호한다.
현세(現世)는 하나의 거대한 게임 판이다.
신화와 전설들이 노닐고 성좌들이 판돈을 거는 게임.
그리고 그러한 게임에서,
부정행위나 과도한 힘을 가진 존재는 제재당하기 마련이다.
"대리자들이 무명의 행보에 제한을 걸 거다. 그때가 마족이 전면적으로 움직일 때가 될 거다."
처음부터 계획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괴조가 이렇게 빨리 죽을 줄은 몰랐다. 인류의 피해가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전무한 수준.
그러나 그럴수록 좋다.
대리자의 등장이 빨라질테니.
가논을 바라보는 온건파 마인들의 눈이 달라졌다.
"다 계획이 있었던 거군."
"대리자를 이용한 견제라. 충분히 가능해."
가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마지막 쐐기를 박아넣으려면 한발자국 더 움직여야 하겠지."
가논의 손끝에 걸린 열쇠가 빙글 돌려졌다.
『 [ 아티팩트 ] 묵시록 : 진(眞) 종말의 열쇠 』
이번 작전을 위해 마계에서 받아 온 마병기였다. 열쇠를 확인한 온건파 마인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네 놈······!"
"제정신이냐?"
"원로들에게 허락을 받은 사안이다. 네 놈들은 입 다물고 구경이나 해라."
가논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칠죄종으로도 불가능하다면, 더욱 거대한 종말을 불러 올 뿐이다. 열쇠로 소환할 대상은 정해져 있었다.
묵시록의 4기사.
인류는 이 세계에 진정한 종말을 불러 올 존재를 목도하게 될 것이다.
* * *
드디어 최대 레벨을 달성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63 → Lv.175 』
『 축하합니다. SS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 도달 가능한 최대 레벨을 달성하셨습니다. 』
『 현세(現世) 최초로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성장을 축하합니다. 』
튜토리얼이 종료되며 인류의 최대 레벨도 올라갔다. 모든 헌터들은 175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장 먼저 최대치에 도달한 건 나다.
"레벨 따위로 주인님의 성장을 규정할 수 없는데 말이죠."
"만렙 축하해, 주인."
집으로 돌아오니 사도들이 축하해줬다.
'의미가 크다.'
이제 게이트에서 나타나는 일반 마수는 전부 약자멸시로 처치할 수 있다. 그뿐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헌터들이 나보다 레벨이 낮다.
빌런이나 극악무도한 범죄자가 나타난다고 해도, 손쉽게 대처 가능하다.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게 조금 걸리지만.'
그래도 내 목숨을 노리고 오는 상대라면 어쩔 수 없다. 검을 휘두른단 건, 베일 각오도 되어 있다는 것일테니.
"근데······. 사최헌 너는 왜 따라왔냐."
루시퍼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사최헌을 바라봤다. 어느새 우리 집까지 따라왔다.
약간 지친 얼굴이었다.
"높은 확률로 대리자가 움직일 거다. 내가 있으면 도움이 될 거다."
"주인님께서 적법하게 처치하셨는데 뭘."
"나도 그럴 줄 알았다만, 내 상상 이상으로 네 주인이 강하더군."
사최헌은 근처의 의자에 걸터 앉았다.
"아, 그리고 물어 볼 것도 있다."
"뭐지?"
"이 건물에 세입자를 들이려고 하는데 괜찮겠나? 우선은 불멸 길드의 헌터들부터다."
사최헌은 잠시 고민하다 다시 입을 열었다.
"건물을 비워두면 월세를 받을 수 없을 거 아닌가."
월세라.
그건 매우 중요한 문제다.
현재 건물은 텅텅 비어 있는 상태다. 우리 가족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당연하지만 비워두면 아무런 이득이 없으니.
"그 건은 맡기겠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리 말했다.
잠깐, 불멸의 헌터들이 이사를 오는 거라면······.
'좋은데?'
강력한 헌터들이 빌딩에 살고 있다면, 홍보도 되고 집값도 오르고 월세도 올려 받을 수 있고.
우리 가족도 안심할테고.
그리고 무엇보다 건물도 아주 안전해질 거다.
집이 파괴되는데 두고 보고 있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잘 부탁하지."
나는 사최헌을 향해 말했다. 어쩐지 로브만 걸치고 있으면 말투가 딱딱하게 나온다.
"그래, 다른 입주자들도 알아보겠다."
"그래서 언제까지 여기 있으려는 거냐."
"대리자가 나타날 때까지. 손님한테 음료도 없나?"
루시퍼의 타박에도 사최헌은 꿋꿋했다.
그래, 음료수라도 가져다줘라.
건물도 준비해주고, 집도 휘황찬란하게 꾸며준데다가 세입자 모집까지 해줬는데. 사최헌 헌터는 손님이고 말고.
"쯧, 먹어라."
"고맙군."
내 눈빛에 루시퍼가 마지못해 냉장고에서 오렌지 주스를 통째로 꺼내서 내놓았다.
『 보상이 정산중입니다. 』
시스템 창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 다수의 성좌들이 시스템에게 항의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불만을 터트립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미간을 좁힙니다. 』
성좌들도 보상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효과가 있는 걸까.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시스템 창으로부터 강렬한 스파크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효, 효과가 있네?'
『 해당 공략의 수준 : 측정불가(Unknown) 』
『 시스템이 과부하를 인지합니다. 』
이전 죽음의 물결을 공략했을 때와 같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때도 분명 측정 불가급이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파직, 파지직—!
측정불가로 쓰여진 부분이 노이즈에 의해 벗겨지기 시작했다.
"페이즈가 시작되면서 시스템의 등급 제한도 해제된 모양인데요."
루시퍼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것은.
『 해당 공략의 수준 : [ 종말(終末) ] 』
유니크, 전설, 신화 그리고······.
"종말."
신화+급 위에 존재하는 새로운 등급이었다.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 현시점에서 해당 보상은 현세(現世)의 균형을 붕괴시킬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
『 혼돈 성향의 성좌들이 크게 열광합니다. 』
『 질서 성향의 성좌들이 우려를 표합니다. 』
성좌들도 덩달아 난리였다.
『 성좌 '이계 규율'이 환호합니다. 』
『 성좌 '명계의 왕'이 상황을 지켜봅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기대에 차 있습니다. 』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사도 소환을 기대합니다. 』
다들 한마디씩 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내오는 통에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 나는 귀찮은 메시지들을 한켠으로 치워두었다.
루시퍼가 눈을 찡그렸다.
"대체 뭘 주려고 이렇게까지 밑밥을 까는 거야."
"종말급이면 1페이즈 이후에 나오는 시련들은 가볍게 돌파 가능한 성능이다."
사최헌도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때,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시스템이 플레이어 무명(無命)에게 제안을 제시합니다. 』
『 해당 시퀀스의 중대성을 인지하여 대리자를 파견합니다. 』
"뭐야, 진짜 대리자가 나오네."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그 말에 사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최헌은 검집을 움켜쥔 채로 말했다.
"무명, 대리자는 적이 아니다. 잡아도 보상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왜 검을 잡고 계신거죠?
"게임으로 치면 운영자. 운영자를 부른 거야."
가브리엘은 묘하게 들뜬 얼굴이었다.
파직, 파지직—!
붉은 스파크가 허공에서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간이 홀로그램처럼 분화하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열린 암흑의 공간 속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앗.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은 것은 한 명의 소녀.
검은 천으로 두 눈을 가리고 있었으며, 길게 늘어뜨린 금발은 어쩐지 익숙한 모습이었다.
"예언자의 별······?"
순간 그런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그곳 수장인 엘리스 그레인저의 맨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어쨌든 분위기가 상당히 비슷했다.
치직, 치지직.
소녀의 주변으로 공간이 노이즈가 낀 듯 흐릿해졌다 선명해졌다를 반복했다.
"1페이즈에 대리자라니. 이거야 원."
사최헌은 그리 중얼 거리면서도 검집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
대리자는 벙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소리는 전해지지 않았다. 대리자의 의지는 시스템 메시지가 되어 나타났다.
『 대리자(알파)가 보상을 다시 제안합니다. 』
『 종말급 보상을 획득하는 대신 SSS급 게이트(인스턴스) 공략 』
『 신화+급 보상을 다수 획득하고 현상 유지 』
메시지창을 살피던 내 눈이 가늘어졌다.
종말급 보상으로 얻으려면 혼자서 SSS급 게이트를 공략해야 한다. 감당 가능하냐는 무언의 협박이 느껴진다.
무서우면 신화+급 보상을 받아.
이런 식의 협박인 것 같은데.
"혹시 SSS급이면 레벨이 어느 정도지? "
"250이다."
사최헌의 말에 나는 다시 시스템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SSS급 게이트의 마물들은 영혼의 질도 높을 거다. 경험치도 막대할 거고, 마정석의 수준도 차원이 다르겠지. 운이 좋다면 아이템도 드랍되고.
나는 혹시나 내가 놓친 게 있을까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같았다.
'······이거 개꿀 아닌가?'
64화 대리자(2)
대리자의 제안은 이러했다.
종말급의 보상을 받고 SSS급 게이트를 공략하거나, 신화+급의 보상을 다수 획득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하란 말이었다.
무명은 그럭저럭 만족했으나.
"잠깐, 아까부터 이해가 안 가는데."
루시퍼는 그렇지 않았다. 팔짱을 낀 루시퍼가 살기 어린 눈으로 대리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님은 시스템의 규칙을 단 하나도 어기지 않았을 텐데?"
불만을 느끼는 건 루시퍼만이 아니었다.
『 다수의 성좌가 해당 제재에 불만을 느낍니다. 』
『 소수의 성좌가 분노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난동을 부립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부당함에 미간을 좁힙니다. 』
성좌들도 동참하듯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주인님께선 첫 번째 시련을 정당하게 돌파했다. 잡으라고 해서 잡았을 뿐인데, 합당한 보상 대신 제재라니. 이게 맞나?"
루시퍼의 눈매가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그 위압감에 움츠러들 법도 했지만, 눈가리개를 한 금발의 소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자그마한 입을 움직여 의지를 전할 뿐.
『 해당 결정은 대리자의 권한에 따릅니다. 』
『 대리자는 현세(現世)의 균형을 바로잡을 의무가 있습니다. 』
"그러니까 그 균형이란 게 뭐냐 이거잖아."
루시퍼가 따지는 사이.
사최헌은 검집 위에 올렸던 손을 살며시 내렸다.
'단순한 조율로 확정이 난 모양이군.'
본래 대리자는 3페이즈가 넘어서야 등장한다. 과열된 성좌들의 열기를 잠재우고, 현세가 곧장 파괴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시스템 때문에 인류가 멸망 위기에 놓이는데, 대리자는 현세의 소멸을 막기 위해 나타난다니.
어찌 보면 지독한 일이었다.
간신히 살아남은 인류에게는 그 조율이 마치 희망처럼 보이므로.
'1페이즈에 대리자가 나타나는 일 자체가 처음이다.'
사최헌은 눈을 가늘게 뜬 채 대리자를 바라보았다.
대리자 알파(α).
대리자의 종류는 여러가지다.
기본적으로 알파, 베타, 감마.
겉보기엔 무미건조한 인형 같아도, 각자의 성향이나 성격이 확연히 다르다.
'알파는 소극적이지만 주로 조율을 제안한다. 다만, 기존의 것을 깎아내려는 성향이 짙다.'
게임으로 치자면 너프를 선호한다.
운영자 측이 과도한 힘을 가진 캐릭터의 능력치를 깎아내는 걸 의미한다. 알파는 그런 식의 조정을 선호한다.
줬던 걸 빼앗지는 않는다.
스킬이나 아이템의 성능이 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주어지기 전에 조율한다.
사최헌은 무명을 바라보았다.
"······."
로브 속에 가려져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기분이 좋을 리가 없다.
당연하다.
루시퍼의 말대로 무명은 순수한 자신의 힘으로 시련을 돌파했다.
합당한 보상을 해줘도 모자른 마당에 SSS급 게이트를 공략하라며 협박이라니.
사최헌의 눈이 깊어졌다.
'···방법이 하나 있다.'
1페이즈가 막 시작된 지금.
수많은 성좌가 몰려든 상태.
성좌들의 메시지까지 파악할 순 없지만,
그들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이 보인다.
무명의 주변으로 모여든 별빛들이 불규칙적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무명."
사최헌이 앞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좌 투표를 신청해라."
그 말에 여태껏 부동자세였던 알파가 사최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대리자 알파가 당신의 지식에 의문을 가집니다. 』
그걸 어떻게 알고 있냐.
그리 묻는 듯했다.
물론 답해줄 필요는 없었다. 무명이 사최헌을 돌아봤다.
"성좌 투표?"
"그래, 플레이어에겐 그럴 권한이 있다. 일종의 이의 신청이지."
시스템의 조율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플레이어는 성좌들의 투표를 받을 수 있다. 현 시점의 인류가 알 수 없는 지식이었으나 사최헌은 회귀자.
그리고 그러한 정보의 이점은 이 세상에서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리하여 무명이 입을 열었다.
"······성좌투표를 신청하겠다."
상위 존재들의 의견을,
시스템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 * *
『 성좌 투표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 찬성 : 0 / 반대 : 82 』
『 만장일치 』
『 절대 다수의 성좌가 해당 조율에 반대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무명의 보상을 바랍니다. 』
압도적인 표 차이로 이의 제기에 성공했다.
"이게 되네······."
오히려 루시퍼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보통 대리자가 나타나는 페이즈 3 이후에 진행되는 '성좌 투표'는 엉망진창이다.
성좌들은 공평한 것에 관심이 없다.
이미 자신의 플레이어를 정한 성좌들은, 그들의 이득이 되는 방향에만 투표한다. 더 많은 세력을 가진 사람이 승리하게 되는 셈.
만장일치는 불가능에 가깝다.
'이건······. 대단하군. 성좌를 고르지 않은 덕분인가.'
사최헌도 만장일치는 처음 보았다.
아직 선택되지 못한 성좌들이 무명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만장일치를 찍었다는 결론이다.
"······."
『 대리자 알파가 적지 않게 당황합니다. 』
알파는 잠시 굳어졌다.
현세(現世)에서의 첫 조율 작업.
그녀 나름이 합리적 판단으로 내민 제안이었건만.
성좌들이 단체로 들고 일어났다. 시스템 상에서도 항의가 빗발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경우는 정말로 처음이었다.
상위 존재들이 단체로 한 명의 인간을 두둔하다니?
무명(無命).
이 플레이어가 대체 무엇이길래.
지상에 내려오며 무명에 대한 정보는 획득했다. 무명은 시스템의 규칙 아래에서만 활동했다. 그 점이 더욱 난해했다.
그러나 그 힘이 막대하다.
지금은 아니지만 향후에 불균형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내려진 제안이었는데······.
"이봐, 성좌들이 난리가 났는데. 그대로 있어도 괜찮겠어?"
루시퍼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브리엘도 뒤쪽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장일치에는 이 두 성좌의 영향도 있었다.
면식이 있는 성좌들에게 죄다 투표를 강요했으니까.
무명은 조용히 대리자의 답을 기다릴 뿐이었고.
"······."
성좌 투표로 정해진 의견에는 따라야 한다.
시스템이 정해둔 규칙이었으니까.
더욱이 성좌들의 항의가 빗발친다.
잠깐의 침묵 끝에 대리자의 입이 열렸다.
『 대리자(알파)가 보상을 다시 제안합니다. 』
『 해당 보상에는 성좌 투표의 결과가 반영되었습니다. 』
새롭게 제시된 제안.
『 둘 중 하나의 보상을 선택하십시오. 』
- SSS급 게이트(인스턴스)를 공략하고 종말+급 보상 획득
- 종말급 보상을 획득하고 현상 유지
보상의 등급이 한 단계씩 올라갔다.
종말급의 보상을 지급하고,
SSS급 게이트를 공략한다면 종말+급을 지급한다.
무명에게 그만큼의 리스크를 짊어지게 하는 것이니 의미는 충분히 있었다.
"그래, 이게 맞지."
"옳게 된 나라야."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이걸로 끝은 아니지?"
그런데 루시퍼는 끝낼 생각이 없어보였다.
"······?"
"네가 조율에 실수한 거잖아. 안 그래?"
루시퍼가 성큼 다가섰다. 쿵. 벽을 짚은 루시퍼가 대리자를 내려봤다.
"나는 괜찮은데······. 성좌들이 화가 많이 났어. 이대로 입 싹 닫고 끝내면, 항의 메시지 때문에 시스템에 과부하가 걸릴지도 모르겠는데."
루시퍼가 뒤쪽의 성좌들을 가리켰다. 무명의 주변을 맴도는 별빛들이 매섭게 반짝인다. 루시퍼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보상을 더 내놔. 첫 제안에 실수한만큼 사죄의 의미를 담아서. 그러면 성좌들도 잠잠해지지 않겠어?"
"······."
무시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시스템은 성좌들의 요청을 무시할 수 없다.
반쯤은 억지였지만, 적절한 제안을 제시하지 못한 것은 결국은 대리자의 책임이었다. 시스템 또한 빠른 정정을 촉구하고 있었다.
『 대리자(알파)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알파는 처음으로 지독하다는 감정을 느꼈다.
* * *
"이야, 아주 풍성하네요."
루시퍼는 함박 미소를 지었다.
- [ 신화+ ] 영혼검 : 깨어난 자
- [ 신화+ ] 천근활
- [ 신화+ ] 몽환 갑주 : 데이드리머
바닥에는 신화+급 아이템들 총 3종이 떨어져 있었다. 대리자로부터 뜯어낸 물건이었다.
바닥에 코인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약 천만 코인 정도.
'루시퍼가 우리 편이라 다행이구만.'
대리자한테서 직접 뜯어낸 보상이었다. 보상을 지급하고, SSS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만들어낸 대리자는 그대로 사라졌다.
나는 아이템들로 시선을 옮겼다.
검, 활, 갑옷.
'갑옷은 내가 쓰고, 나머지는 팔면 되겠다.'
지금끼고 있는 갑옷은 레전더리+급이다. 신화+급으로 올릴 때가 되었다.
나는 갑옷을 제외한 검과 활을 사최헌에게 건네줬다.
"부탁하겠다."
무기를 받아든 사최헌의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급 아이템이라. 현시점에서 최고 등급의 무기인 건 틀림 없다. 다른 곳에 팔기보단 둘 다 불멸 길드에서 구매하겠다. 가격은······."
잠시 고민하던 사최헌이 고개를 들었다.
"돈으로 받을 건가?"
물론이었다.
하지만 사최헌의 생각은 다른 듯 했다.
"너도 알겠지만 페이즈가 시작된 뒤로는 이런 고난이도의 시련이 계속해서 이어질 거다. 현금이 가치를 잃는 경우도 생길 수 있다."
상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현금이 무의미하게 된다라.
그제서야 나도 번뜩 떠오른다.
'······돈을 갚지 말라는 게 이래서였구나.'
루시퍼와 청룡은 최대한 돈 주는 걸 미루자고 했었지. 그 이유가 확실하게 밝혀졌다. 세계가 멸망하면 돈을 갚지 않아도 될 테니까.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진짜 악마적 발상이네.'
반대로 사최헌은 내가 손해를 볼까봐 걱정해주고 있었다.
"신화+급 아이템의 가치는 얼마 정도지?"
"200억 정도일 거다. 두 개니까 400억쯤 되겠군."
"그걸로 건물에 대한 빚을 갚겠다."
"진심인가?"
사최헌의 400억원도 안 갚긴 뭐하니까.
다들 세계가 멸망할 것처럼 굴지만, 잘만하면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빚은 청산하고 가자.
애초에 이 건물 설비 자체가 400억이 넘는데.
사최헌은 무기 두 개를 챙기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흡족한 표정이었다.
"빚은 갚은 것으로 하고, 남은 비용은 이 건물을 강화하는데 사용하도록 하겠다. 이 돈이면 빌딩 전체에 마법 방벽을 설치할 수 있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다.
"어차피 인류의 최후의 거ㅈ······. 아니, 내가 사는 집이기도 하니 부담가질 필요 없다."
방금 굉장히 의미심장한 단어가 지나간 것 같은데. 인류의 최후의 거점이라던가.
사최헌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나는 이제 가보겠다. 대리자의 일도 정리되었고, 시련도 정리 되었으니 당분간 문제 없겠지. 마인에 관해서 조사해야 할 일도 있고. 이번 일은 내 불찰도 있다."
사최헌은 루시퍼가 줬던 오렌지 주스를 통째로 들고선 우리 집을 빠져나갔다.
"후우."
나는 그제서야 로브를 벗고 편히 소파에 누웠다.
'첫 번째 시련치고는 어려웠어. 아니 어려운 수준이 아니지.'
전세계에서 알이 부화했다.
농담이 아니라 궁극기 초기화권이 없었다면 세계가 박살 날 뻔했다.
'마인이랬나.'
사최헌의 집에 갔을 때 얼핏 들었다. 이번 일의 배후에는 마인들이 있다고.
한국에는 없지만 마인들 전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를 노리고 있다.
'마인들에 관한 문제는 사최헌 헌터가 정보를 알아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겠고.'
나는 보상목록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보상목록 』
- [ 종말+ ] ????
- 30,000,000 코인
- 전설의 증표 x 18
의외로 단촐하지만 알찬 구성이다.
우선은 종말+급 아이템.
대리자의 제안에서 내가 선택한 것은 첫번째였다.
- SSS급 게이트(인스턴스)를 공략하고 종말+급 보상 획득
따라서 종말+급의 아이템은 거실의 SSS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까지 활성화되지 않는다.
'사도들하고 함께하면 게이트의 공략은 어렵지 않을 거다.'
거기에서만 나오는 보상도 얻을 수 있을테고.
다음 보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3천만 코인과 전설의 증표 18개.
괴조 한 마리당 500만 코인에다가, 전설의 증표 3개인 셈이다.
칠죄종은 5개를 줬었는데 이름값 차이일지도 모르겠다.
『 시스템 기능이 추가됩니다. 』
- 최대 레벨이 200까지 확장됩니다.
- 성좌의 메시지 기능이 업그레이드됩니다.
여기에 시스템 기능 추가까지.
최대 레벨 확장은 알겠는데······.
메시지 기능 업그레이드는 뭘까.
『 성좌 '맹렬한 불꽃'이 자세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되어 기뻐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상세 메시지의 비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합니다. 』
바로 알 수 있었다.
성좌들의 표현이 길어지고 자세해졌다.
지금까지 이모티콘만 보낼 수 있었다면 가벼운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게 된 느낌.
『 성좌 '이계 규율'이 시스템의 횡포에서 벗어난 당신에게 축포를 쏩니다. 』
모든 성좌가 보낼 수 있는 건 아니고, 내가 선택한 성좌만 자세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조언을 받을 수 있단 건 장점이다.
어차피 종말+급 아이템을 제외하면 보상은 짜투리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새로운 갑주를 걸쳤다.
『 [ 레전더리+ ] 명계 갑주의 장착을 해제합니다. 』
『 [ 신화+ ] '몽환 갑주 : 데이드리머'를 장착합니다. 』
- 방어력 + 650
- 데미지 감소 Lv.7, 치명 방지 Lv.7, 흘리기 Lv.7
- 영혼 장비
기존에 쓰던 명계 갑주보다 방어력이 50%가량 높다.
이만한 수준의 장비는 전세계 어디에도 없으리라.
준비는 끝났다.
나는 품 안에 있던 푸른색 비늘을 꺼냈다. 청룡에게 받아두었던 물건이다.
『 마력 Lv.3를 발휘합니다. (흐름의 별반지) 』
가볍게 마력을 불어넣자, 비늘이 청아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샤아아—!
제주도에 있던 청룡이 상서러운 기운과 함께 소환되었다.
"사냥은 열심히 했는데······. 랜턴은 아직도 반응이 없었나요?"
나는 새로운 랜턴 소울 이터를 들어 올렸다. 80% 정도는 차오른 것 같다.
업그레이드로 효과도 좋아졌지만 그만큼 필요로 하는 영혼이 늘어났다.
"괜찮아. SSS급 게이트에 들어가면 영혼은 충분히 모일 테니까."
"상황은 선배님들께 들어서 파악했습니다."
청룡이 내 뒤로 서고, 루시퍼가 창고에서 식재료가 가득 든 아공간 가방을 가져왔다.
"종말+급 아이템······. 기대가 됩니다. 빨리 공략해버리죠."
가브리엘도 들뜬 얼굴이었다.
"백색의 조각. 하나만 더 모으면 전용 무기."
잊지 않고 있었던 모양.
다음 랜턴 보상으로 나올 확률이 매우 높다.
기대해도 좋겠지.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공략을 주시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공략 성공을 기원합니다. 』
남은 하얀 빵은 두 개 반이다.
하지만 게이트를 공략하기엔 충분하다.
"그러면 가볼까."
공략 속도는 언제나와 같다.
"초고속으로."
공략이 끝나면 종말+급의 아이템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되리라.
65화 균열(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