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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55-60

55화 시작

"큭······. 빌어먹을, 빌어먹을!"

칠죄종 질투.

소년은 만신창이였다. 너덜너덜해진 옷은 피투성이였고, 팔 하나는 반쯤 비틀려 있었다. 온몸이 성한 데가 없었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중상.

가브리엘과 청룡.

그리고 귀환자 호영.

질투는 이 셋에게 처참하게 패배했다. 비오는 날 먼지 나듯 두들겨 맞았다.

이 세계에 멸망을 불러와야 했을 종말의 사도가 개처럼 맞았다. 그 치욕스런 사실에 질투는 몸을 떨었다.

사도는 이해하겠는데,

거기에 끼어든 인간은 뭐란 말인가.

심지어 그자는 무명조차 아니었다.

"퉷. 젠장."

입가에 고인 핏덩이를 뱉어내면서 질투는 걸음을 옮겼다. 발을 질질 끌면서라도 도망쳐야 했다.

질투는 무명의 눈에 띄지 않게 종말의 성전을 빠져나온 뒤,

SS급 게이트에서 곧장 탈출했다.

도망친 장소가 어느 나라인지도 모른다.

그저 살기 위해 도망쳤을 뿐이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억울해서 죽을 수 있겠냐? 칠죄종이 고작 인간 하나한테 농락 당한다는 게······.'

질투는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 질투, 칠죄종의 강림을 늦춰라.

무명에게 최후를 맞이한 나태의 기억이 흘려들어 오고 있었다.

강림을 늦춰라?

"젠장."

인정하기 싫지만 그나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벌써 두 번째 칠죄종이 죽었다.

인류의 멸망은 가속화된다.

이르면 오늘 아니면 내일.

튜토리얼은 종료될 것이다.

현세(現世)의 제한 또한 한 차례 풀리겠지.

강림을 늦춘다면 칠죄종은 더욱 강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나타날 수 있으리라.

"빌어먹을!"

질투는 홧김에 나무에 머리를 박았다. 쿠웅-! 머리에 부딪힌 나무가 그대로 쓰러졌다.

이제는 하다 하다 무명의 눈치를 봐야 한단 말인가.

나태가 죽었으니,

칠죄종 소환의 권한은 질투에게 넘어왔다만.

"······칠죄종인 내가 벌레처럼 숨어 있어야 한다는 거냐."

동이 떠오르고 있었다.

숲의 어둠 속에서 망토를 두른 인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 그 예언자냐."

"예, 맞습니다. 기억하시는군요."

예언자의 별.

현세의 예언자 집단이었다.

눈가리개를 쓴 금발의 여성, 엘리스 그레인저. 그녀는 고개를 기울인 채 입을 열었다.

"무명을 자극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하, 인간의 말 따위를 듣겠냐."

질투는 성치 않은 몸을 끌면서 예언자를 지나쳤다.

지나쳤다고 생각했는데, 엘리스는 다음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무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언에 귀를 기울였다면, 최악의 상황은 피했을 겁니다."

"닥쳐라, 인간. 나불나불 시끄러우니까!"

콰앙-!

질투의 마력이 바위에 부딪혔다. 엘리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반대편의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뭐가 되었든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무명은 당신들의 힘으론 막을 수 없습니다."

투둑.

질투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예언자, 그렇게 잘 났다면 네가 말해봐라. 내가 어떻게 했어야 무명을 쓰러뜨릴 수 있었는지."

"모릅니다. 무명은 이레귤러. 그에 대한 예언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알 수 없다.

한 명의 인간에게 초월적 힘이 주어졌을 때, 세계는 어떠한 양상으로 흘러갈 것인가.

그 답을 알 수 없기에 예언자의 별은 칠죄종의 행보를 늦추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는 무의미했다.

교만과 나태가 죽었고,

무명(無命)은 이제 명백한 세계의 흐름이 되었다.

[ 하, 아무것도 모르면서 내게 설교질이냐. 좋은 말로 할 때 눈앞에서 사라져라. ]

질투의 목소리에는 격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질투를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건 어렵습니다. 당신의 역할은 이제 끝났으니까요. 그냥 물러설 순 없을 것 같습니다."

그녀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질투의 귓가에 닿았다.

"뭐? 인간 놈들이 칠죄종을 우습게 보는구나. 내가 아무리 다쳤어도, 네 놈 따위는······."

사륵.

아침의 햇살이 비쳐온다. 어둠이 밝혀지고, 숲속에 모습을 감추고 있던 예언자들이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한두명이 아니었다.

흑색의 망토를 걸친 수십의 예언자들이 칠죄종 질투를 향해 다가왔다.

"이 새끼들이······."

허공에 맺힌 마력 탄환들이 예언자들을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아지랑이처럼 일렁일 뿐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들은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마법을 행사하고 있었다.

수십 명의 예언자가 일제히 손을 들어 올렸다.

아아-.

주문을 외우는 그들의 목소리가 숲속으로 퍼져나갔다.

촤르륵!

허공에서 솟아난 금빛의 사슬이 질투의 팔을 옭아맸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질투는 이미 전투에서 힘 대부분을 소비했기에.

촤륵, 촤르륵-!

"크아악!"

금빛 문자열과 함께 솟아난 사슬은 질투의 사지를 결박했다.

"내가, 내가 무명도 아닌 인간에게······!"

질투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쓰러졌다.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냐?!"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예언자의 별 수장인 엘리스 그레인저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엘리스는 무감히 질투를 내려다보았다.

더 이상 질투에게 바라는 건 없다.

상황이 바뀌었다.

"우리는 당신을 무명에게 넘길 거니까요."

무명이 이 세계의 흐름이 되었다면,

그 흐름에 올라탈 뿐이다.

* * *

종말의 성전은 붕괴되었다.

이어지는 SS급 게이트 공략은 아주 수월했다.

반나절이 지난 시점에서 미국이 합류.

"멜리사가 마인?"

"뭔가 오해가······!"

"그래, 지금까지 제일 열심히 한 멜리사가 마인일 리가······."

사최헌의 항마력이 마인의 본래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크아악!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냐!"

미국, 일본, 한국.

세 나라의 헌터들이 이미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마인 혼자서 뭔가를 해볼 상황이 아니었다.

"······정말이었나."

"우리가 오해했군."

"미안하다."

일본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미국도 마인을 처치했다. 그런 소동이 벌어지는 사이.

『 대한민국 & 일본 & 미국이 5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 세 국가가 혜택을 받습니다. 』

『 해당 국가에 속하는 모든 헌터의 능력치가 2% 증가합니다. 』

5관문이 공략되었다.

루시퍼, 가브리엘, 청룡 그리고 귀환자 호영.

콰아아앙—!

칠죄종도 박살낸 마당에,

이들에게 SS급 게이트의 난이도는 문제가 아니었다.

뒤늦게 보스의 방에 도달한 미국의 헌터들은 경악했다.

"크하하! 한국에는 괴물들만 있는 건가?"

미국의 랭킹 1위, 히어로 데릭은 호탕하게 웃었다.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무명의 전투는 보지 못했지만, 바닥에 쓰러진 와이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들은 강하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5관문은 SS급 게이트의 마지막이었다.

보스였던 와이번이 죽음을 맞이하며, 게이트는 완전히 공략되었다.

『 SS급 게이트 공략되었습니다. 』

『 최고 기여도를 달성한 국가에게 혜택이 주어집니다. 』

- 각성자의 숫자가 늘어납니다.

- 행운 : 낮은 확률로 보상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고오오-!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형성되었다. 귀환자 호영은 보상도 줍지 않은 채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이게 말이 되나."

"SS급 게이트를 뭐 이렇게 쉽게 공략을······."

"무명 헌터님, 혹시 미국에 오실 일 있으시면 꼭 저희 길드로."

각국의 헌터들이 감탄사를 내뱉는 가운데.

데릭은 아쉬운 듯 또다시 입맛을 다셨다.

"이거 아쉽구만. 무명이 활약하는 걸 두 눈으로 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공략도 같이 했다면 좋았을걸."

"······."

일본의 하야토는 지친 눈으로 데릭을 바라보았다.

무명과 같이 공략?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무명은 이미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세계급의 일본의 헌터들조차 무명의 발목을 붙잡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전부였으니.

하야토는 측은한 눈빛으로 사최헌을 바라봤다.

'한국의 헌터들도 쉽지 않겠군.'

이제부턴 무얼하든 무명과 비교당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물론 사최헌은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철저하게 다음 계획을 세울 뿐이었다.

칠죄종 둘이 죽었다.

튜토리얼의 종료까지 길어야 이틀.

무명 덕분에 칠죄종을 쓰러뜨릴 수 있었지만, 그만큼 멸망의 시기가 빨라지는 건 막을 수 없었다.

사최헌은 헌터들과 함께 와이번의 사체를 수습했다. 와이번의 소재는 고급 아이템을 만드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수습을 마친 사최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불멸은 먼저 빠져나가겠다. 무명, 곧 연락하지."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대비책을 세우고 싶었으나, 보는 이들이 많아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순 없었다.

사최헌은 자신의 길드원들과 함께 게이트 바깥으로 나갔다. 천이령을 비롯한 청명 길드도, 미국과 일본의 헌터들도 차례차례 게이트 바깥으로 향했다.

"무명! 조만간 직접 만나러 가겠다!"

데릭은 당당하게 선언했고.

"곧 만날 일이 있을 거다."

하야토도 그리 말했다.

각국의 헌터들이 무명을 지나쳐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선망, 경외, 두려움, 감탄, 호기심······.

헌터들의 눈빛에는 여러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무명에게서 흘러나오는 격은 조금 더 강해져 있었다. 자리의 누구도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모든 헌터들이 빠져나간 뒤에야 사도들은 긴장을 누그러뜨렸다.

"후우, 드디어 다 나갔네."

루시퍼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쉬운 전투는 아니었다. 침몽의 영역에서 받은 데미지가 누적되어 있기도 했고.

"폼 잡고 있느라 힘들었어."

가브리엘은 아예 바닥에 엎어졌다. 칠죄종 질투와의 전투 또한 녹록지 않았다. 승리는 했지만.

"딱히 폼 잡고 있을 필욘 없었는데."

주강혁의 말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미지 메이킹 필수."

"맞습니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시대에서 주인님의 위상은 하늘과 같을 테니까요."

청룡도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뭐······."

본인들 선택이니까.

주강혁은 눈앞의 시스템 메시지로 시선을 옮겼다. 헌터들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조용히 보상을 확인하고 싶었으니까.

칠죄종 나태를 처치하고 받은 공략의 수준은 신화+.

『 보상 목록 』

- [ 신화 + ] 종말의 상자

- [ 신화 ] 궁극기 초기화권

- 칠죄종의 편린(★) x 1

- 칠죄종 나태의 혼(UR)

- 3,000,000 Coin

- 전설의 증표 x 5

익숙한 구성이었다.

칠죄종의 편린은 이걸로 3개.

한 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모였다.

집에 돌아가서 사용해 보면 되겠고.

'궁극기 초기화권까지.'

현 시점에서 대기시간 444일을 넘어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초기화권이 유일하다.

나태를 처치하면서 즉살을 사용했다.

남은 고유스킬 초기화권은 2장.

궁극기를 사용할 수 있으면 부담이 덜어진다.

거기에 더해 새롭게 획득한 신화+급의 아이템까지.

『 [ 신화+ ] 종말의 상자 』

- 아이템을 집어넣어 1회 강화할 수 있습니다.

- 신화+급, 성유물+급 이하의 아이템만 강화할 수 있습니다.

- 한 번 사용하면 사라집니다.

외관은 검은색의 상자였다.

"전용 장비는 강화가 안 되려나."

"아쉽게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전용 장비는 성(星)급으로 취급되거든요."

그건 또 무슨 분류인지.

그렇다면 사용처는 정해져 있었다.

"무결한 영혼등을 강화하는데 사용하면 되겠네."

가브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서, 성유물을 종말의 상자에 넣는 건 조금······."

"어허, 주인님께서 강해지시는데 무슨 상관이야?"

"백색 아이템이 사라져버려······."

종말의 상자에 아이템을 넣으면 색깔이 바뀌거나 성질이 달라지는 모양.

청룡에게 시선을 돌리니 녀석은 어깨를 으쓱였다.

선배들 앞이라 말을 아낀다는 건가.

하지만 강화 자체는 성립하는 모양.

집에 가서 바로 넣어봐야지.

다음으로는 시스템 기능 추가다.

『 시스템 기능 추가 』

- 신화급 보상 습득시 신화+급 보상 습득 가능

- 일일 레벨업 제한이 약 33% 상승합니다. ( 15 → 20 )

- 코인 거래소의 거래 범위가 '다세계'로 확장됩니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눈을 반짝입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볼을 긁적입니다. 』

레벨업 제한이 20이 되었다.

의미 있는 상승이다.

지금 내 레벨은 143.

내가 달성 가능한 최대 레벨은 175다. 빡세게 레벨업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이틀이면 만렙 달성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벌써 최대 레벨······.'

이 정도만 되어도 SS급 게이트에 있는 일반 마물을 죄다 쓸어버릴 수 있다.

비정상적으로 레벨이 높은 보스 마물을 제외한다면 내 적수가 없는 셈이다.

나는 다음 목록으로 시선을 옮겼다.

- 코인 거래소의 거래 범위가 '다세계'로 확장됩니다.

'코인 거래소의 기능도 추가됐나.'

성좌들은 이쪽에 반응한 것 같다. 거래 범위가 다세계로 확장된다는 건 무슨 말이지?

나는 시험 삼아 코인 거래소를 열어보았다.

『 코인 거래소를 오픈합니다. 』

- 검색 범위 : 다세계

『 원하는 품목을 검색해 주십시오. 』

'오.'

이전에 열었을 때와 다르다. 그때는 분명히 텅텅 비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원하는 품목을 검색해 달란다.

"가브리엘, 그 천계의 하얀빵 말이야. 재료 하나만 말해줄래?"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

나는 불러준 그대로 입력했다.

팅—!

『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 x 1 』

- 거래 가격 : 5천 5백만 코인

- 게시자 : 천계(天界) 구품천사 류엘

- 설명 : 굉장히 구하기 힘들었습니다.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하.'

다세계라는 게 이런 뜻이었나. 코인 거래소의 기능은 단순히 현세(現世)에서의 교환이 전부가 아니었다.

"천계면, 가브리엘이 원래 살던 곳인가."

"맞아. 오, 제한이 조금 풀린 듯."

가브리엘은 자기가 대답하고서도 살짝 놀란 말투였다.

그런데 5천 5백만 코인은 상당히 선 넘는 가격 아닌가.

칠죄종 나태를 잡고 얻은 코인이 3백만.

지금 내가 보유한 코인이 6백만 언저리인데.

"구품천사면, 제일 낮은 계급의 천사입니다. 5천 5백만 코인? 이 자식 간덩이가 부었네."

어느새 다가온 루시퍼가 혀를 찼다. 참고로 사도들도 내 시스템창을 볼 수 있다.

"······연락할 방법이 없어."

가브리엘이 미안한 듯 말끝을 흐렸다.

미안할 거까지야.

이제 성좌도 아니니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해당 아이템의 가격이 원래 이 정도일 수도 있고.

"천계 쪽 성좌들을 통해서 연락을 넣는 방법도 있을 겁니다. 물론, 천계의 성좌가 있다는 가정하에 가능한 일이지만요. 근데······."

의견을 말하던 청룡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돈으로 사면 되지 않나요? 현세에서 백만 코인이 현금으로 1억 정도인걸로 알고 있습니다."

5천 5백만 코인이면 55억.

"잎사귀 하나에 55억은 좀······."

"그렇죠?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때, 루시퍼가 번뜩였다는 듯이 손가락을 튕겼다.

"천이령이 슬슬 수업료를 내야 했던 것 같은데."

가브리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은 진짜 악마임."

가브리엘도 안 된다는 말은 안 한다.

······일단 보류다.

55억이나 뜯어내기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어차피 곧 돈이 들어오니까."

제주도 공략에 대한 정산과 SS급 게이트 공략에 대한 정산까지. 상당한 돈이 될 거다.

다른 아이템도 몇 가지 더 검색해보고 방법을 찾아보자.

그래도 코인 거래소 자체는 흥미로웠다.

현 시점에서 얻을 수 없는 아이템을 미리 얻을 수 있는 것 같으니까.

"대충 보상 확인은 끝났고······."

마지막으로 확인할 게 남았다.

"루시퍼, 나태에게서 떨어진 아이템도 있었지?"

"물론입니다."

루시퍼는 품 안에서 보석 하나를 꺼내 내게 건네었다.

『 [ 신화+ ] 보석 : 나태 』

- 포켓 아이템

- 마력 Lv.5, 인지 Lv.5, 초감각 Lv.5

- 스킬의 범위 100% 증가

단순하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오오.'

인지 스킬과 초감각 스킬은 귀중하다.

내게 가장 필요한 스킬이기도 하다. 적을 확인하고 즉살로 처치하면 그만인 입장이니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스킬의 범위까지 증가.

『 즉살:약자멸시의 범위가 증가합니다. ( 200m → 400m ) 』

그간 조금 부족하다고 느꼈었는데.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후."

이것으로 보상 정리는 대강 끝났다.

강화할 아이템과 사용할 아이템이 몇 가지 남긴 했지만, 그건 집에 가서 해도 늦지 않을 테니.

나는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당히 지쳤다. 격렬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여러모로 에너지를 많이 소모했다.

"나가면 바로 케로부터 챙겨야 해."

"돌아가면 바로 식사 준비부터 하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루시퍼 선배님을 돕죠."

루시퍼가 빵봉투를 머리에 썼다. 가브리엘이 얼굴 위로 새하얀 빛을 만들어냈다. 청룡은 새하얀 수증기로 앞을 가렸다.

나는 사도들과 함께 SS급 게이트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우웅-.

풍경이 일렁이며, 주변의 시야가 완전히 뒤바뀐다. 이윽고 익숙한 도시의 정경이 나타났다.

찰칵, 찰칵-!

끝없이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자들.

"무, 무명이다!"

"무명 헌터님!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고 들었는데, 한마디 가능할까요?!"

안전요원들이 기자들을 필사적으로 막고 있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들어올 때는 해가 떠 있었는데,

어느새 밤하늘이 되어 있다.

우중충한 밤하늘 위로 구름이 소용돌이 치듯 맴돌고 있다.

'······.'

심상치 않다.

이전보다 더 불길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게이트를 벗어나 걸음을 떼려는 바로 그 순간.

파직, 파지직—!

『 현세(現世)의 튜토리얼 종료까지 24시간 남았습니다. 』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튜토리얼 종료······?"

주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도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올 게 왔다는 표정이었다.

튜토리얼의 종료.

고작 한문장에 불과한 메시지였지만, 그 한문장이 전세계에 불러올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지금까지는 튜토리얼에 불과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시스템은 그리 말하고 있었으므로.

56화 소울 이터

집에 도착해서 하루를 쉬었다.

'다들 고생했지.'

식사 준비를 하겠다는 말과 달리 루시퍼는 오자마자 쓰러졌다. 가브리엘과 청룡도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칠죄종 나태 그리고 질투와의 전투.

교만 때와 비교하면 쉽게 이겼지만, 편한 전투는 아니었다. 몸을 크게 사용하진 않았지만 나도 꽤 지쳤고.

'사최헌 헌터 덕분에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네.'

종말의 성전에 대한 정보 덕분에 당황하는 일 없이 나태를 쳐부술 수 있었다. 침몽의 영역도 수월하게 돌파했고.

'죽음의 기운도 볼 수 있게 되었지.'

제한 해제가 끝난 지금은 안 보이지만.

'그래도 생명체가 아닌 마물도 처치할 수 있게 된 건 크다.'

골렘, 인형 그리고 언데드까지.

생명체를 넘어 비생명 마물도 약자멸시와 즉살로 처치할 수 있게 되었다.

'즉살의 약점 하나가 극복된 거니까.'

이번 SS급 게이트 공략 자체가 성장의 발판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앞으로의 방향성도 크게 달라질지 모른다.

이후로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체력을 회복했다.

청룡이 온 기념 파티도 겸해서 아주 많이 시켰다.

이제 배달 음식은 미친 듯이 시켜도 돈 걱정은 없기도 하고. 실컷 먹고 마셨다.

그렇게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주인, 인터넷이 우리 이야기로 가득해."

가브리엘은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의 스크롤을 넘겼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루시퍼가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구수한 된장찌개와 스팸 굽는 냄새가 부엌에서 흘러나온다.

청룡은 TV의 뉴스를 확인하고 있었다.

뉴스 속 아나운서의 아래로 자막이 흘러간다.

- SS급 게이트 최초 공략, 대한민국 세계 1위 달성.

이번 공략으로 대한민국은 여러 혜택을 받게 되었다.

경험치, 드롭률, 회복량, 보상 증가, 각성자 증가······.

- 무명 헌터의 눈부신 활약으로 대한민국이 전 세계를 제치고 당당히 1위로 공략을 마쳤습니다. 당시 공략에 참가 했던 헌터들은 무명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화면에 다른 헌터들의 인터뷰 영상이 떠오른다.

- 함께 공략에 참가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무명 헌터 리스펙트합니다.

- 전 세계가 깜짝 놀랐을 겁니다. 무명 헌터는 지금까진 없었던 종류의 헌터입니다.

- 장난 아니라니까요. 직접 보셨어야하는데.

"한국 내에서 주인님의 명성이 상당하군요.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도 시간 문제일 것 같습니다."

청룡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뉴스를 주시하고 있었다.

종말의 성전이나 칠죄종에 관한 내용은 없다.

게이트 공략 중에 있던 일은 보통 공개되지 않는다. 특히 SS급 게이트 같은 경우는 공략 자체가 길드의 노하우기도 했고.

- 무명이 진짜 대박이었다던데.

- 아는 사람이 S급 헌터인데, 무명 혼자서 찢었다고 함.

ㄴ 혼자서 SS급 게이트를 어케 찢음? 그건 좀.

ㄴ 월드 보스도 한 방에 잡는데 뭘 ㅋㅋㅋ

- 미국, 일본 인터뷰한 거 보셈. 무명이 혼자서 공략 다 한 거 맞음.

인터넷에서도 반응이 뜨거웠다.

세계 최초의 SS급 게이트를 대한민국이 1위로 공략한 것은 대단한 일이 맞다.

하지만······.

- 튜토리얼 종료가 대체 무슨 말임?

- 협회에서는 침착하게 기다리라던데.

- 지금까지 이런 적 한 번도 없었잖아.

- 세계 멸망의 징조인가?

『 현세(現世)의 튜토리얼 종료까지 13시간 남았습니다. 』

전세계 각성자들의 앞으로 떠오른 튜토리얼 종료 메시지.

이또한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고 있었다.

나한테는 이게 더 크게 느껴진다.

- 여기까지가 튜토리얼이었으면 이 뒤가 진짜란 거야?

- 얼마나 어려워지려고 이런 메시지가······.

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더 어려워지겠지 정도의 추측이 전부였다. 죽음의 물결이나 월드 보스 같은 이벤트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주강혁은 고개를 들었다.

"튜토리얼이 종료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성좌인 사도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정보 제한도 꽤 풀린 모양이고.

"본격적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현세에 신화와 전설이 도래하고, 인류가 극복하기 어려운 시련이 주어질 겁니다."

청룡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은 이 정도입니다. 페이즈가 시작 되어야 더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끄덕끄덕.

가브리엘도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보다도 훨씬 어려워진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걸 안다고 해도 준비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때였다.

띠링-!

단말기가 울렸다.

'오.'

제주도와 SS급 게이트 공략에 대한 정산이었다.

망멸검을 포함한 아이템이 약 44억.

제주도에서 160억, SS급 게이트 공략으로 89억이었다. 마정석과 드랍된 아이템을 모두 판매한 가격이 그러했다.

전부 합쳐서 293억.

이 중에서 아이템 판매 대금 44억이 내 계좌로 들어왔다. 입가에 피어오른 미소가 가시질 않는다.

"말도 안 되는 금액이네······."

44억만해도 굉장한데,

앞으로 250억 가량이 더 들어올 거란다.

모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 금액이다.

현실 감각이 완전히 사라지는 수준.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주인님, 뭔가 좋은 일이라도······?"

"돈 들어왔거든. 44억이나."

"오,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주인님께서 가지게 되실 것들에 비하면 새발의 피 아니겠습니까. 지구가 주인님의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루시퍼는 얼굴색 하나 바뀌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그런 야망은 없는데.

아침 식사의 메뉴는 훌륭했다.

된장찌개와 스팸, 계란 프라이.

하얀 쌀밥까지.

가브리엘은 자신의 몫을 덜어 케로의 밥그릇에 올려주었다.

나는 밥을 먹으면서 사도들에게 말했다.

"우선 천계의 하얀 빵을 수급해야 해."

튜토리얼이 종료되면, 나와 사도들이 힘을 쓸 일은 더욱 늘어날 거다. 도중에 허기 때문에 쓰러지는 일은 없어야 하니까.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만 있으면, 나머지 재료는 비교적 구하기 쉬운 듯 했다.

문제는 잎사귀가 55억이란 거다.

코인으로 따지면 5천 5백만 코인.

"천사 놈들, 돈에 환장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요."

"그 정도면 싸게 파는 거야."

루시퍼의 말에 가브리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거래소에 내가 가진 물건을 팔아도 되는 거잖아."

"맞습니다."

"전설의 증표. 이거 얼마 정도 할까?"

나중에 성좌들과의 교환에 사용되는 증표다. 꽤 쌓여 있지만 당장은 쓸 데도 없는 물건이니.

"잠깐, 이거 가격이······."

거래소에 전설의 증표를 검색했더니, 5천만 코인에 거래되고 있었다.

전설의 증표 하나에 5천만 코인이었다.

'이 정도로 비싼 거였단 말이야?'

매물은 없어서 못 파는 수준이었고.

"1개만 팔자."

칠죄종 하나만 잡아도 5개가 나오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현금하고 교환하는 건 피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왜?"

"······뒤로 갈수록 전설의 증표의 값어치가 커질 겁니다. 돈의 가치는 급락할 확률이 높고요."

청룡은 말끝을 흐렸다.

튜토리얼 이후의 이야기인 모양.

염두에 둬야겠다.

나는 거래소에 전설의 증표를 하나 올렸다.

띠링-!

『 거래소에 '전설의 증표 x 1'를 올립니다. 』

『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

『 5천 5백만 코인이 지급되었습니다. 』

"빠르네."

올리자마자 팔렸다.

시세보다 10% 비싸게 올렸는데도 즉시 팔렸다.

덕분에 천상 월계수의 잎사귀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잎사귀가 하나 있으면 빵은 10개 만들 수 있어."

10개···.

"씨앗을 살 걸 그랬나."

"천계의 토양에서만 자라는 게 단점. 대신 300년 밖에 안 걸림."

그래도 빵 문제는 대략 해결되었다.

어차피 나중에는 현금으로 사면 그만이다.

돈도 충분히 벌리고 있고.

"나머지 재료도 돈으로 해결할 수 있어 보이고."

이후로는 천이령 헌터에게 제빵 기술을 익히게 하고 레시피를 알려주면 끝.

나는 거래소에서 잎사귀를 구매하려다 멈칫했다.

"근데 빵 하나에 50억이 맞아···?"

"천계의 특산품. 어디서도 구할 수 없어."

거래소에서도 팔리지 않는 물품이긴 했다.

옆에 있던 청룡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체제가 없으니까요. 천계의 빵은 특별합니다. 주인님께서 빵을 섭취하시는 걸로 저희도 포만감을 느끼거든요. 에너지의 압축률이 다르다고 할까요."

비싼 가격만큼의 성능이란 뜻이었다.

"루시퍼 선배님은 흑마력, 가브리엘 선배님은 성력, 저는 도력을 사용합니다. 각기 다른 힘을 한 번에 보충해주는 아이템은 그 빵이 유일할 겁니다."

물론 평범한 음식을 먹어도 회복되지만 천계의 빵을 먹으면 그 효율이 차원이 다르단다.

루시퍼가 전용 무기의 힘을 난사하고,

사도 전부가 제한이 해제된 상태에서도 동시에 날뛸 수 있는 건 빵 덕분이라는 설명.

"역시 만들어두는 게 좋겠네."

뭐, 돈은 금방 벌리니까.

『 현세(現世)의 튜토리얼 종료까지 13시간 남았습니다. 』

나는 시스템 창을 다시금 확인했다.

아침 식사도 끝났겠다 어제 얻었던 보상을 사용할 차례였다.

종말의 편린과 종말의 상자.

"보상을 쓰시는 건가요?"

"저도 구경하겠습니다."

루시퍼와 청룡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다가왔다.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던 가브리엘도 슬쩍 고개를 돌렸다.

우선 종말의 편린부터.

『 종말의 편린(★) 』

- 현재 사용 가능한 아이템입니다. ( 3 / 3 )

- 편린을 모아 시스템의 제한을 일부 해제할 수 있습니다.

교만을 잡고 두 개.

나태를 잡고 하나.

나는 조각 세 개를 하나로 합쳤다.

샤아아—!

흑색의 기류가 형성되더니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겉보기엔 다를 거 없지만.

'오, 보인다.'

죽음의 기류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제한을 해제한 상태가 아닌데도 말이다.

'이건 굉장한데.'

『 제한 해제율 』

- 0.02 [ 정상 ]

동시에 새로운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리미트 브레이커로 올릴 수 있는 수치가 0.1입니다. 편린으로 0.02를 올렸으니 20% 정도 올랐네요."

루시퍼가 자연스레 설명했다.

"저희가 발휘할 수 있는 힘도 늘었습니다."

사도들까지 강해졌다라.

성능 장난 아니네.

무엇보다 죽음의 기운이 상시 보이게 된 게 마음에 든다.

스륵.

나는 눈앞에 떠오른 죽음의 기운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조금 희미하긴 해도 사용하는데는 문제없다.

'나중에 이것저것 시험해 봐야겠어.'

다음으로는 종말의 상자를 사용할 차례였다. 검은색 상자를 소파 앞의 테이블에 올렸다.

"오, 기대가 됩니다."

"어떤 걸 강화하실 겁니까?"

모든 사도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 되었다.

사용할 아이템은 정해져 있다.

『 [ 성유물+ ] 순백 : 무결한 영혼등 』

내 밥줄이나 다름없는 랜턴이었다.

그러고보니 가브리엘로부터 받은 아이템들은 하나 같이 유용했네.

"가브리엘 고마워. 덕분에 잘 썼다."

"으, 백색 아이템이······."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미처 말리지는 못하는 모양.

반면 루시퍼는 상당히 기대하는 얼굴이다.

"아이템의 색깔이 그렇게 의미가 있어?"

"예, 보통 같은 색의 아이템과 스킬을 끌어 들이게 되거든요. 넓게 보면 주변 인물이나 미래에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청룡의 설명은 그러했다.

뭐, 어쩌겠는가.

이미 흑색 루트를 탔는데.

『 종말의 상자를 사용하시겠습니까? 』

나는 영혼등을 종말의 상자에 집어넣었다. 효과는 그 즉시 발휘되었다.

콰아아—!

상자 주변으로 맹렬한 어둠이 내려 앉았다. 쩌적, 쩌적—. 상자의 외벽이 벗겨지며 내부에서 하얀 빛이 새어나왔다.

생물이 알에서 탈피하듯 상자가 떨어져나갔다.

떨어진 조각들은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나타난 것은.

흑색과 흰색이 뒤섞인 기묘한 형상의 랜턴이었다.

『 [ 아티팩트 ] 혼돈(混沌) : 소울 이터 』

- 영혼을 섭취하여 세계에 균열을 생성합니다.

- 균열 : 신화급 보상을 지급하고, 추가로 아이템을 생성합니다.

설명은 영혼등이랑 비슷한데.

나오는 보상이 한 단계 올라갔고 추가 아이템 생성이 붙어 있다.

한 번에 여러개를 얻을 수 있단건가?

그런데 아이템을 확인하는 루시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주인님. 이 녀석 대박입니다."

"대박?"

"예, 이유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루시퍼는 랜턴을 툭하고 건드렸다.

그러자 랜턴이 부르르 진동했다.

다시 한번 툭 건드리자, 진동이 한 층 격렬해졌다.

왕! 왕!

케로가 갑자기 짖기 시작했다. 멀찍히 떨어져서 짖기만 한다. 두려워하는 듯한 느낌.

루시퍼는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에고 아이템입니다. 자의식이 있다는 말이죠. 잘만 구슬리면 원하는 보상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가브리엘도 유심히 랜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적도 필요한 걸 주는데. 그래도 혼돈이면 만족."

기적은 그런 원리였던 모양.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

어떤 성능인지는 직접 사용해봐야 알 것 같다.

이걸로 아이템 정리는 끝났다.

종말의 편린으로 스펙업.

종말의 상자로는 아이템 업그레이드까지.

알차게 써먹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S급 헌터가 된 지금.

장비도 충분히 갖췄고 궁극기 초기화권도 있다.

할 일은 명확하다.

"도망친 칠죄종 질투를 빨리 잡아야겠지?"

"동의합니다."

"동의."

루시퍼와 가브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또 다른 칠죄종을 소환하면 귀찮아진다.

그리고 나 말고는 잡을 사람도 없다는 게 제일 문제.

애꿏은 피해자가 나오기 전에 없애야 한다.

"마기의 원천이 이쪽에 있는 한, 힘을 비축해서 습격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럴 바엔 이쪽에서 먼저 공격하는 게 낫겠죠."

동의하는 바였다.

"근데 그냥 잡아서 없애기 보다는······."

사도들에게 의견을 제시하려던 그때였다.

띠링—!

단말기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사최헌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 칠죄종 질투를 붙잡았다. 불멸에 방문할 수 있겠나?

질투가 붙잡혔단다.

* * *

서울 중심부, 불멸(不滅) 길드.

"이거 풀어, 이 개새끼들아!"

질투는 유리창 너머에 속박되어 있었다.

금색의 사슬이 질투를 칭칭 감고 있었다. 더욱이 사최헌이 가지고 있던 봉인 아이템에 의해 사지가 결박된 상태.

탈출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무명은 곧 올 거다."

사최헌은 턱을 매만졌다. 그 옆에는 예언자의 별의 수장 엘리스 그레인저가 있었다.

"협조에 감사드립니다. 무명과 접촉점이 없어 곤란했거든요."

"곤란한 거 치곤 당당하게 말하더군."

"······."

엘리스는 답하지 않았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사최헌은 내심 놀랐다.

'힘이 빠져 있었다곤 해도, 칠죄종을 잡아 올 줄이야.'

예언자의 별은 무력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 시기에 이만한 힘을 소유하고 있단 건 새로운 정보였다.

"정말로 무명에게 이 녀석을 넘기겠다는 건가?"

"예, 저희 예언자의 별은 무명 헌터의 편에 설 생각입니다."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진심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래도 일단은 무명과 친분을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그때였다.

"저런 꼬맹이가 칠죄종이라구요?"

급하게 호출을 받고 달려온 천이령. 무명의 답장에 천이령을 불러달란 말이 있었다. 무명이 자신을 찾는다는 말에 천이령은 한달음에 불멸로 달려왔다.

"외관은 중요치 않습니다. 아직 어린 그대가 강인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요."

옆에 있던 엘리스가 답을 대신했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천이령에게 머물렀다 떼어졌다.

"그대는 얼굴에 상처가 난 마인을 찾고 있을 겁니다."

"······?"

순간 천이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야, 당신."

"예언자의 별. 예언자 집단이다."

"아······."

사최헌의 설명에 천이령은 납득했다.

얼굴에 상처가 있는 마인.

천이령의 가족을 몰살한 그는 복수의 대상이었다.

마인에게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답만 돌아왔다. 마기로 신체를 재생할 수 있는 마인에게 상처가 있을 리 없다고도 했다.

하지만 예언자라면······.

천이령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찰나.

"칠죄종을 붙잡다니, 사최헌. 네 놈이 드디어 쓸모 있는 일을 해냈구나. 아주 훌륭해.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자동문이 열리며 루시퍼가 나타났다. 무명과 사도들도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온 루시퍼는 천이령의 앞에 멈추어 섰다.

"오, 꼬맹이. 너는 지금 당장 출발해야겠다."

"출발이요?"

"최고의 제빵 기술을 배워와."

"예? 제, 제빵이요?"

천이령의 두 눈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무명은 두 사람을 지나쳐 유리창의 앞으로 다가갔다.

칠죄종 질투가 정말로 사로잡혀 있었다.

"···예언자의 별에서 질투를 붙잡았다."

사최헌은 그리 설명했다.

"찾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질투를 어떻게 할지는 당신에게 달렸습니다."

엘리스의 말대로였다. 과연 예언자인가.

질투를 찾으러 나서려는 순간 연락이 왔으니까.

무명은 유리창으로 한걸음 더 다가섰다. 묶인 채 발버둥치던 질투가 문득 굳어졌다.

"무, 무명······? 무명이 왔나?!"

안쪽에서 이쪽은 보이지 않을 거다. 소리도 들리지 않을테고. 그러나 질투는 무명의 격을 느꼈다.

잠시 질투를 바라보던 무명이 입을 열었다.

"이대로 처치해도 상관없지만······."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칠죄종을 강림 시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인조차도 종말의 열쇠가 있어야 했다. 천이령 헌터가 마기를 배운다고 해도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그렇다면.

질투를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녀석이라면 어렵지 않게 다른 칠죄종을 불러들일 수 있을 거다.

물론 칠죄종은 위험한 존재다.

인류를 종말 시키기 위해 성전을 만들고 재앙을 불러오니까.

따라서 지금까지는 칠죄종을 막기 위해 움직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달칵.

무명은 마이크의 버튼을 눌렀다.

"질투, 너에게 거래를 제안하겠다."

이번에는 우리가 칠죄종을 사냥할 차례였다.

57화 사냥

거래를 제안하겠다.

무명의 그 말에 사최헌의 눈이 커졌다.

'칠종을 상대로 거래라니.'

칠죄종은 대화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거듭된 사최헌의 회귀 속에서 칠죄종은 종말에 미친 존재였다.

오로지 멸망을 위해 파괴하고 살육했다. 인류는 막대한 손실을 입고서야 가까스로 칠죄종을 쓰러뜨릴 수 있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그들은 인류를 하찮은 벌레쯤으로 여겼으므로.

'물론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칠죄종은 엄청나게 이른 시기에 강림했다. 튜토리얼이 시작하기도 전이다.

무명을 제외하면 인류에게 저항력은 없었다.

그런데도 칠죄종은 패배했다.

교만은 무명을 마주하자마자 죽었고,

나태는 침몽의 영역을 펼쳤음에도 패배했다.

질투는 무명의 사도들에게 패배해 도망쳤다.

아니, 도망마저도 실패해 예언자의 별에게 잡혀 왔다.

'······이 상황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다만.'

특히 예언자의 별이 칠죄종을 잡았다는 것부터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질투의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을 것이다.

'거래가 통할지 모르겠군.'

그들은 종말을 원한다.

종말 이외의 어떤 것도 교섭 재료가 될 수 없었다. 나태조차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였을 정도니까.

"거래? 개소리하지마라. 날 붙잡았다고 아주 우습게 보나 본데······."

사최헌의 예상대로 질투의 반응은 거칠었다. 온몸이 꽁꽁 묶인 상태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다.

유리창 너머의 질투는 아직까지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무명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죽이겠다."

"······."

까득.

유리창 안의 질투가 이를 악물었다.

살기 어린 눈빛으로 정면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에 실핏줄이 터져 나왔다.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의외의 반응이었다.

그냥 죽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질투의 반응은 나태와는 달랐다.

죽인다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살고 싶어서?

그때, 뒤쪽에 있던 청룡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청룡은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했다.

"질투, 그쪽은 날 모르겠지만, 나는 그쪽을 좀 알거든요."

"닥쳐!"

그 말에 질투가 더 크게 발버둥쳤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잖아요. 맞죠?"

멈칫.

몸을 비틀던 질투가 굳어졌다.

"하, 네 놈이 뭘 안다는 거냐."

"나는 성좌였고, 그쪽은 시스템에 종속된 대리자. 모르는 게 이상하죠. 안 그래요?"

청룡은 불멸 길드에 오기 전에 일행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 칠죄종을 붙잡았다면, 녀석한테 다른 칠죄종을 소환하게 하는 건 어때?

- 말이 통할 놈들이 아닙니다. 죽으면 그만인 놈들인데요. 파괴를 즐기는 놈들입니다.

- 잠시만요.

무명의 말에 루시퍼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청룡은 번뜩였다는 듯 말을 꺼냈다.

- 질투라면······. 교섭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엥, 어떻게?

- 원하는 게 있는 자는 설득하기 쉬운 법이죠.

질투는 전투 도중에 도망쳤다. 자존심조차 버리고서. 구질구질하게.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온존하기 위해서.

이는 칠죄종답지 않은 일이었다. 칠죄종에게 죽음은 없다. 또 다른 세계에 시스템이 도래하면 그들은 다시 나타나게 된다.

나태가 담담히 죽음을 받아들인 이유였다.

물론 종말의 성전을 펼쳐서 도망칠 수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질투는 끝까지 살아남고자 했다.

꾸역꾸역 다친 몸을 이끌고 도망쳤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종말의 사도, 참 애석한 존재죠. 세계의 종말을 위해 자유의지를 빼앗긴 하위 존재."

"큭, 닥치라고 했을텐데. 네가 뭘 안다는 거냐."

"잘 알죠."

그리고 그 목표를 청룡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상위 존재가 되고 싶은 거잖아요. 시스템의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된 존재가 되려면······. 그냥 죽을 순 없겠죠."

그 말에 질투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멍해졌다.

"뭐, 뭐야. 네가 어떻게······."

"봤다니까요. 나는 내려다보길 좋아하거든요."

청룡은 태연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주인님을 도와준다면, 상위 존재가 될 방법을 알려드리죠."

* * *

결과부터 말하자면,

질투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받아드릴 수 밖에 없는 제안이었다.

'허.'

사최헌은 감탄했다.

'칠죄종과의 교섭이 가능했다니.'

살짝 충격을 받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인간 측에선 질투가 만족할만한 대가를 제시할 수 없었다.

칠죄종에게 인간은 파괴해야 할 대상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성좌라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위잉-.

열린 문을 통해 질투가 끌려 나왔다.

청룡은 보란 듯이 질투를 속박한 끈을 잡아 들었다.

- 그런데 상위 존재가 되는 방법을 막 알려줘도 되는 거야?

주강혁의 질문에 청룡은 가볍게 대답했다.

- 저희한테 그리 대단한 정보는 아니거든요. 알아도 못하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을 끌기 딱이죠.

- 시간을 끌기 딱이라니?

- 시스템의 정보 제한 때문에 말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 그러면······.

- 네, 그 제한이 풀릴 때까지 질투를 부려 먹을 수도 있단 뜻이죠.

혹시라도 청룡이 죽으면 정보는 영원히 얻을 수 없다.

질투는 전전긍긍하며 무명을 도울 수밖에 없으리라.

- 이야, 좋은데? 후배 하나 제대로 뒀구만. 아주 악마 같은 발상이야.

루시퍼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 모두 주인님 덕분입니다. 주인님이 아니었다면 성좌인 제가 사도로 강림할 일은 없었을 테니까요.

청룡은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칠죄종을 고분고분하게 만들었다는 건 대단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뭘하면 되는데?"

속박된 질투가 무명을 향해 두 눈을 치켜떴다.

"어쭈, 눈 안 깔아?"

빠악.

루시퍼의 주먹이 질투를 내리쳤다.

"끄아악! 이 개새끼가!"

질투는 길길이 날뛰었지만, 속박된 상태인지라 별 위협은 안된다.

"칠죄종을 협력하게 만들다니. 이거야 원."

사최헌은 충격받은 듯 중얼거렸다.

이해가 되지 않는 그림이었다.

하지만 걱정할 것도 없었다.

무명은 충분히 강하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충격적이었다.

"마기의 원천을 사용해 칠죄종을 사냥할 거다."

무명은 그리 말했다.

그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

사최헌은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 있던 예언자의 별도 굳어졌다.

"그, 그래서 날 꺼낸 거냐? 이 미친놈들······."

칠죄종 질투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무명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브리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가브리엘은 아직 공략되지 않은 미궁을 공략하고."

"오케이."

이번에는 천이령을 향해서.

"천이령 헌터에겐 제빵 기술을 부탁하지."

천이령은 의아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이 질투와 대화를 하던 사이,

천이령은 예언자의 별로부터 마인의 정점에 대해 들었다.

- 당신은 알아도 이길 수 없으며 찾아낸다고 해도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그 자는 천이령의 상상 이상으로 강한 존재였다.

그가 이 현세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튜토리얼 이후.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를 위해 강해져야만 했다.

'이번에는 제빵인가.'

대장장이 다음으로 이어진 주문.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요구였지만, 진짜 무명의 제자가 되기 위해선 물불 가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배운 것만해도 엄청난 것들 뿐이었다.

여기서 더 강해질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것이다.

"네. 배워 올게요."

천이령은 그러한 다짐 속에서 대답했다.

"그러면 이제 출발할까."

저벅, 저벅.

무명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사도들과 칠죄종이 따라 움직였다.

"잠깐······. 나도 가겠다."

사최헌도 그의 뒤를 따랐다.

튜토리얼 이후에 대한 대비는 얼추 끝이 났다.

혹시 모를 칠죄종 사냥의 사고를 대비하는 게 나으리라.

스륵.

예언자의 별 엘리스 그레인저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질투를 넘겼으니 할 일은 끝났다.

전대미문의 칠죄종 사냥.

실패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러니 예언자의 별 또한 다가올 튜토리얼 이후를 준비할 뿐이었다.

* * *

전국각지에 위치한 미궁.

거기에는 여전히 취재진들과 헌터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경기도의 C급 미궁.

그곳에도 헌터들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다.

"······진짜 무명이 오는 거 맞아?"

"온다니까요. 현재 무명은 F, E, D 미궁까지 공략한 상태. 언젠가는 그 위를 공략하지 않겠어요?"

신입 기자와 선배 기자는 미궁 앞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문제는 정말로 언제 올지 모른다는 것.

"SS급 게이트 공략도 끝났으니 슬슬 나타나겠죠."

신입 기자는 확신에 찬 듯 말했다. 선배 기자도 그리 연차가 높진 않았다. 두 사람이 미궁에 배정된 이유였다.

신입은 아주 열성적이었다.

최대한 자리를 비우지 않으려고 식사도 전부 김밥으로 때울 정도였으니까.

"한 번이라도 직접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대로 모습을 보인 건 SS급 게이트였지."

"진짜 아쉬워요. 그 자리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래도 미궁에 나타나기만 하면 최소한 특종은······."

글쎄.

선배 기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SS급 게이트 공략이 어제였다.

튜토리얼 종료인지 뭔지로 어수선한 지금.

무명이 미궁에 나타나도 기사가 될지는······.

그때였다.

화아악-!

하늘에서 하얀 깃털이 떨어졌다.

누군가가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순백의 날개와 허리까지 오는 금발을 기른 천사.

대기하고 있던 기자들과 헌터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 아름다움까지 가려지는 건 아니었기에.

"와아-!"

"무, 무명의 동료?"

"천사님이다!"

"무명 헌터도 온 거야?"

찰칵-! 찰칵-!

다급한 셔터 소리와 함께 헌터들이 웅성거렸다.

가브리엘은 천사라고 불리고 있었다.

동굴로 들어가려던 가브리엘은 잠시 멈춰서 뒤를 돌아보았다. 눈에 보이는 카메라에 손을 들어 올렸다.

브이.

기자들의 셔터 소리가 더욱 빨라졌다.

"우와앗, 대박, 대박입니다!"

"아니, 대박이랄 것까지 있나······."

호들갑을 떠는 신입 기자와 선배 기자.

가브리엘 나름의 팬서비스였다.

가브리엘은 그러고나서 미궁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나, 둘.

땅을 박차고 가속하기 시작했다.

콰과과과—!

SS급 게이트의 마물조차 씹어먹는 사도의 무력이 C급 미궁을 뒤흔들었다.

공략은 단숨에 끝났다.

『 C급 미궁 던전이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뛰어난 업적! 』

『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공략을 눈여겨 봅니다. 』

『 랭킹 점수를 계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204 점 ]

- 2위 : 사최헌 [ 786 점 ]

- 3위 : 천이령 [ 531 점 ]

『 보상이 지급됩니다. 』

- [ 유니크 ] 꿰뚫는 기세의 창

- 전설의 증표 x 1

가브리엘은 눈앞에 떨어진 보상을 주워들었다. 사최헌에게서 얻어 온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미궁 바깥으로 나와서 시세 검색까지.

"8억을 벌었어."

그리 중얼거리면서 주인한테 메시지를 보냈다. 춤추는 곰돌이 이모티콘도 같이.

"천사님, 이쪽 한 번만 봐주십쇼!"

"사인 한 장 부탁드려도 될까요?!"

"무명님은 혹시 어디에···!"

콰앙-!

인파에 둘러싸여 있던 가브리엘이 하늘 위로 뛰어 올랐다. 날개를 펼친 채 다음 미궁을 향해 활공했다.

C급 미궁을 공략했으니 이제 B급 미궁을 공략할 차례였다.

* * *

남아메리카 아마존.

무명 일행은 수풀이 우거진 밀림을 지나고 있었다.

"큭, 이 자식 방금 8억을 벌었다는데요."

스마트폰을 확인한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묘한 경쟁 의식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는거야? 하여튼 허튼수작 부리기만 해봐."

루시퍼의 신경질적인 목소리에 질투가 눈을 찡그렸다. 여전히 봉인구를 착용하고 있는 상태였다.

"수작은 무슨, 칠죄종을 소환할 수 있는 장소는 원래 정해져 있는 거라고."

교만은 한국 서울에.

나태는 중국 고비 사막에 있었다.

질투는 미국 그랜드 캐니언에 있었고.

그리고 수작을 부려봤자, 무명에게 제압당할 게 뻔한데 그러겠는가.

"그, 그런데 같은 칠죄종끼리 배신해도 괜찮은 건가요?"

불멸 길드의 공간 능력자 유지훈도 함께였다.

유지훈의 공간 이동을 통해 브라질까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한 번에 오진 못하고 몇 번에 나눠서 이동했지만 비행기에 비하면 압도적인 속도였다.

질투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쯧, 인간도 아니고 동료 의식 같은 게 있겠냐. 목표가 같으니 협력하는 거 뿐이다. 기억의 링크도 끊어 놓았으니 이 몸이 손해 볼 일은 없고."

그리 말하며 나아가던 질투가 휙하고 뒤를 돌아봤다.

"그보다 약속은 지키는 거겠지?"

"물론이죠. 성좌의 약속은 목숨보다 무거운 법이니까요."

청룡은 어깨를 으쓱였다.

"젠장,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질투는 찜찜해 하면서도 걸음을 옮겼다. 달리 방법이 없었으므로.

그래도 상위 존재가 되는 방법을 알아내기만 한다면 남는 장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솟은 유적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다. 여기에서 소환할 수 있어."

질투가 평탄한 발판 하나에 올라서서 말했다.

청룡은 매고 있던 아공간 배낭에서 검은 구슬을 꺼내 들었다. 마기의 원천이었다.

사최헌은 굳어진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튜토리얼 종료까지 반나절도 남지 않았다.

이 기간은 현세에 신화와 전설이 내려앉는 시간이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쿠구구구—!

아마존이 밀림 속에서 긴 목을 가진 공룡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유지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에, 엥?! 뭐, 뭔가요?! 던전 브레이크?"

여기뿐만이 아니다.

지금쯤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 거다.

사최헌이 칼집에 손을 얹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화악—!

거대한 용각류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사최헌이 한 게 아니었다. 무명의 솜씨였다.

무명은 별거 아니라는 듯 유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사최헌은 검집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튜토리얼이 끝나가며 세계의 경계가 불안정해지는 거다. 게이트나 던전으로 분리되어 있던 타차원과의 영역이 흐릿해지는 거지."

"하아,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유지훈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그래. 이제 소환할 거니까. 집중해라. 인간들아."

질투는 말을 더듬었다.

방금 폭발에 살짝 기가 죽었다. 무명의 능력을 눈앞에서 직접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직접 상대하지 않은게 천만 다행인 수준이었다.

"시작한다."

마기의 원천을 손에 든 질투가 유적에 손을 얹었다.

고오오오—!

거센 마기의 격류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주변의 나무와 덩쿨들이 크게 흔들리고, 밀림의 숲속에 숨어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에휴,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이건 뭐 무명 앞에 칠죄종을 가져다 바치는 수준이었다.

칠죄종의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다.

그게 중요하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질투는 그리 한탄하면서도 소환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보랏빛의 번개가 유적 한 가운데로 내리쳤다. 강력한 충격파가 일대를 휩쓸었다.

지면이 새까맣게 타오르고 주변의 나무가 잿더미가 되어 흩어지는 고밀도의 에너지.

청룡과 루시퍼가 무명을 보호했고,

유지훈의 공간 방어막이 사최헌을 보호했다.

연기가 사라진 자리.

흑색의 갑옷을 걸친 남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금발을 쓸어 넘기며 미소지었다.

[ 아아, 이른 시간이구나. 너무도 훌륭해. 종말이 세계를 뒤덮기에 이보다 좋은 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 ]

칠죄종 탐욕.

그는 강림과 동시에 앞선 칠죄종의 기억을 확인했다.

[ 흐음~. ]

꽤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현인류의 힘은 약하다.

이제 막 튜토리얼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반면.

인류 측에서 강력한 대적자가 나타나 칠죄종 교만과 나태가 죽었다.

그 대적자의 이름은 '무명(無命)'.

칠죄종조차 어찌하지 못할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

[ 아주 좋아. ]

더더욱 쳐 죽이는 맛이 있으리라.

무명만 죽이면 인류의 멸망은 확정이니까.

스윽.

탐욕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동자에 흑색의 로브가 담겼다.

아주 익숙한 로브였다.

칠죄종의 기억 속에 있던 바로 그 로브.

[ 어. ]

탐욕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소환되었다는 건 그래도 비교적 안전한 장소라는 뜻 아닌가?

그런데 왜 칠죄종 최대의 적이 저기에······.

무명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소환된 지금은 어찌보면 가장 무방비한 상태였으니까.

[ 자, 잠깐. ]

탐욕이 미처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죽어."

무명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58화 징조

튜토리얼의 징조는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영국 네스호에서 네시가 실제로 발견됐다고요?"

"중국에선 원숭이들이 단체로 손오공의 후예라며 들고 일어났다니. 이게 무슨······."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예요, 산에 영물들이 나타났답니다. 스스로를 산군이라고 칭하면서 사람들을 쫓아냈다고."

전설과 신화가 도래한다.

도시 전설과 가담항설이 실재하게 된다.

가장 빠르게 소식이 퍼진 인터넷 커뮤니티도 난리였다.

- 우리 동네 숲에 고블린 나타났다. 던전 브레이크도 아닌데 미쳤네. 민가로 내려오면 큰일인데.

ㄴ 때려죽여야지 뭘 어째

ㄴ 일반인이 마수를 어떻게 잡냐.

- 슬라임 발견해서 사진 찍었다. 근처에 무슨 일 났냐?

ㄴ 지금 전국에서 난리임

ㄴ 집 밖으로 안 나가는 게 나음

ㄴ 그건 호들갑이지

ㄴ 전세계가 다 그런 것 같은데.

- 튜토리얼 끝이 보통 일이 아닌가 본데.

ㄴ 이러다 멸망하는 거 아냐?

ㄴ 이거 완전 아포칼립스 도입부 아니냐고ㅋㅋ

ㄴ 헌터들 몸값만 엄청 오르겠네.

ㄴ 지금 주변에 각성하는 사람들 많던데.

본래 게이트 내부에만 있어야 할 마물들이 바깥에서도 발견되고 있었다.

띠리링—. 띠리링—.

대한민국 협회에도 신고 전화가 끊이질 않고 있었다.

"예, 저희도 확인된 부분이 아니어서요."

"지금 제대로 된 원인을 파악 중에 있습니다."

"별다른 이상 징후는 포착되지 않았고요······."

다행인 점이 있다면, 대한민국의 협회는 마인들로부터 깨끗하단 점이었다.

"접근 금지 시키고, 협회 측 헌터들 파견해서 상황부터 확인해."

협회장 대리 유진철 본부장.

"게이트랑 다르게 모든 마물이 적대적이진 않은 것 같으니까. 위험성이 높은 장소가 있으면 길드를 파견해서 토벌하면 되고."

SS급 게이트 공략이 바로 어제였다.

그 마무리를 제대로 지을 틈도 없이 튜토리얼 종료 메시지가 떠올랐다.

국가 곳곳에서 나타나는 마물들과 정체불멸의 존재들.

이들을 파악하고 관리하는 건 협회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대응 못하면 나중은 없을 수도 있어. 오늘 안에 상위 길드에 연락 돌리고 하위 길드에 협조 요청도 보내놔."

유진철 본부장은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본부장님, 이거 드시고 하세요."

"아, 그래. 고맙군."

안경을 쓴 비서가 포션 한 병을 내밀었다. 포션의 치유력은 일반인에게도 통한다. 비싸서 문제지.

그대로 들이키자 피로가 싹 가신다. 빈 병을 내려놓은 유진철이 쓴웃음을 지었다.

"아주 전세계가 제정신이 아니군."

"예, 정말요. 그나마 한국은 나은 편이에요."

징조는 있었다.

알아채지 못했을 뿐.

월드 보스, 죽음의 물결, 종말의 성전까지.

무명(無命)이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의 타격은 상당했을 거다.

심지어 사최헌 헌터의 말에 따르면, 무명 덕에 마인 색출까지 가능했다고 하니.

한국에 무명이 있어 다행이란 말밖엔 나오지 않는다.

"협회에 마인들이 없다는 것만 해도 다행이지."

덕분에 협회는 독자적인 기관으로서 올바르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상황에선 협회의 권한은 커진다.

"저 보고 하시는 말 아니죠?"

여성 비서는 안경을 올려 쓰며 짓궃게 물었다. 그녀는 사최헌에게 협력했던 마인으로, 인류의 편에 가담했다.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느냐 그게 중요할 뿐이지.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

유진철 본부장은 고개를 저었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농담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튜토리얼이 끝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있죠."

비서는 난간에 몸을 기대며 입을 열었다.

"강자가 살아남는 세계. 그건 변하지 않을 거예요."

튜토리얼 이후의 세계에선,

오로지 강자만이 모든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 * *

아마존 밀림.

푸화악-! 탐욕이 서 있던 자리에 핏자국만이 너절하게 남았다.

탐욕은 강림과 동시에 죽었다. 무명의 능력이 그를 단번에 처치했다.

허무한 최후였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칠죄종이고 뭐고 없네요."

"깔끔하네요. 흠잡을 데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감탄하며 박수를 쳤다. 아부성 발언이 섞인 멘트였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허."

질투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칠죄종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적 없던 죽음이었다.

칠죄종(七罪宗) 탐욕.

다른 세계에선 종말의 사도로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었던 존재였다. 그는 타인의 능력마저도 탐욕스럽게 취하며 인류를 절망에 빠뜨려 왔었다.

그런 존재가 등장과 동시에 퇴장했다.

'이런 미친 힘이 다 있나······. 뭘 어떻게 한 거야?'

질투의 등줄기로 한줄기 식은 땀이 흘렀다. 질투의 시선이 무명에게 닿았다.

흑색의 로브를 두르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웃고 있을지,

아니면 담담한 표정일지.

질투조차 확인할 수 없다.

둘 다 소름 끼칠 것만 같았다. 저게 정녕 인간이 맞단 말인가.

'무명과 직접 싸우질 않길 잘했다······.'

질투는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직접 보고나니 확신할 수 있었다.

무명(無命)을 죽여?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칠죄종 전원이 떼로 달려든다고 한들,

그저 무명에게 제물을 가져다 바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거다.

"그러면 이제 돌아가지."

무명이 몸을 돌렸다. 흑색의 로브가 그의 움직임을 따라 흩날렸다.

"이제 소환은 충분한 거냐?"

질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교만, 나태, 탐욕이 죽었다.

이제 남은 칠죄종은 세 명이다.

탐식, 색욕, 분노.

아직도 셋이 남았다.

무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늘은 이걸로 충분하다."

무명의 눈앞에는 시스템 메시지가 잔뜩 떠올라 있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Lv.143 → Lv.163 』

『 일일 상승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칠죄종 하나를 잡은 것으로 20에 달하는 레벨을 한 번에 올렸다.

『 경험치 1.5배가 적용 됩니다. 』

『 국가 혜택 : 경험치 + 5% 』

이는 막대한 양의 경험치였다. SS급 게이트에 들어가 사냥을 하더라도 단시간에 얻긴 불가능한 양.

그걸 1초만에 얻었다.

이동 시간을 생각해도 남는 장사였다.

『 보상 목록 』

- [ 신화 ] 종말의 칼날

- 칠죄종의 편린(★) x 1

- 칠죄종 탐욕의 혼(UR)

- 3,000,000 Coin

- 전설의 증표 x 5

보상은 기존과 비슷하다.

시스템의 확장은 없다.

'난이도 차이인가.'

나태는 SS급 게이트 속에 종말의 성전을 열었으니 그럴만하다.

탐욕은 나오자마자 죽은 거라, 난이도도 쉽게 책정되는 모양.

그렇다고 칠죄종이 뭔가 일을 벌이기까지 기다렸다가 잡기도 어려웠다. 얼마나 많은 피해가 나올지 모르니까.

메시지 확인을 끝낸 주강혁이 고개를 들었다.

'경험치를 다 채웠으니, 오늘은 여기까지.'

고유 스킬 초기화권도 이제 1장 남았다.

칠죄종을 잡으려면 즉살을 사용해야 한다. 놈들의 레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탓이다.

'만약을 대비해 1장은 남겨둬야지.'

새롭게 초기화권을 획득할 때까진 칠죄종 사냥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질투가 어디에 도망가는 것도 아닐 테니까.

"질투는 당분간 불멸에서 데리고 있어 주면 좋겠는데요."

청룡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최헌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 잘 가둬놓겠다. 필요할 때 꺼내 쓰면 되겠지."

"어, 어이. 인간. 웃기지마. 난 물건이 아니다."

질투는 여전히 구속구를 착용한 상태였다.

"칠죄종과의 타협은 없다. 나는 무명이 아니다. 네 놈은 봉인해서 아공간에 넣어두겠다."

사최헌의 기억 속 칠죄종은 무자비한 파괴와 살육을 일삼는 괴물이었다.

놈의 손에 동료들이 찢겨 죽은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매, 맹약을 하겠다. 평범한 인간처럼 지낼테니까, 어떻게 좀······."

봉인 당하기는 죽어도 싫은 모양. 무(無)의 공간에서 의식만이 떠다니게 되는 거니, 그럴만도 했다.

"할 거면 이 자리에서 해라."

"그래, 한다고. 젠장."

질투의 주변으로 보랏빛 기운이 모여들었다. 기운은 룬 문자의 형상이 되더니 질투에게 스며들었다.

"나 질투는 일체 파괴적인 행위는 하지 않겠다. 인류를 향한 어떠한 적대적인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맹세는 질투의 심장에 새겨졌다.

"이 정도면 괜찮겠네요. 무해한 칠죄종이라니. 말 만들어도 웃기는 조합이기는한데."

청룡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질투는 얼굴을 찡그린 채 청룡을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했다. 이제 상위 존재가 되는 방법을 내놔라."

"지금은 말 못한다니까요. 제한이 해제 될 때, 그때 알려드리죠."

"크윽······."

분노에 몸을 떠는 질투.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무해한 칠죄종이라.

잠시 고민하고 있던 사최헌이 고개를 들었다.

"무명, 질투가 맹약에 하나 더 추가하게 할 수 있겠나?"

"어떤?"

"내 명령을 들었으면 좋겠는데."

스윽.

무명은 청룡을 바라봤다.

청룡은 미소와 함께 질투를 응시했다.

"내가 인간의 아래로 들어가란 소리냐? 약속이랑 다르잖아."

"싫으면 어쩔 수 없죠. 전 약속을 지켜야 하니까요. 하지만 저희 주인님은 어떻게 생각하실지······."

능청스럽게 볼을 긁적이는 청룡.

무명의 시선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질투의 낯빛이 흑색이 되어간다. 여기서 죽으면 정보고 뭐고 없었다. 다음 생에 청룡이 사도로 강림한다는 보장은 더더욱 없고.

"이야, 너 악마 소질 있다니까."

"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크윽······."

질투는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나 칠죄종 질투는, 인간 사최헌의 명령에 복종할 것을 맹세하겠다······."

맹약이 활성화 되었다.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칠죄종의 족쇄에서 벗어나, 상위의 존재로 발돋움하는 것. 그건 질투의 오랜 염원이자 유일한 소망이었다.

청룡은 그것을 정확하게 캐치했을 따름.

결과적으로 서로가 좋은(?) 상황이 되었다.

사최헌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고맙다. 무명."

지금까지 칠죄종으로서 종말을 불러 오려고 했다면······.

이제부터는 인류를 위해 개처럼 구를 시간이었다.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칠죄종."

사최헌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 * *

"후우······. 별 일 없이 끝나서 다행이네."

나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몸을 눕혔다. 푹신한 소파에 긴장감이 싹 가시는 느낌이다.

루시퍼는 돌아오자마자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고, 청룡은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확인했다.

노트북은 원래부터 놓여 있던 물건이었다.

나도 스마트폰으로 기사를 확인했다.

- 미궁에 등장한 무명의 천사

- 무명(無命), 미궁 공략 재개시?

- 미궁에 모습을 드러낸 천사의 정체는······?

가브리엘이 미궁 공략을 잘하고 있는 모양이다.

나는 다른 기사를 확인했다.

- 튜토리얼 종료 직전, 전 세계 이변 발생

마물이 나타나고, 관광지나 일부 저명한 장소에 마력이 흐르기 시작했단다.

반면 게이트의 생성은 줄어들었다.

그에 따라 헌터들도 바빠졌다.

대한민국은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협회 측에서 빠르게 대처한 덕분이다. 다른 나라는 대부분 상당한 패닉에 빠진 상태.

기사 몇 개를 살피던 나는 미간을 좁혔다.

"사최헌 헌터의 말대로 심상치 않긴 하네."

집으로 돌아오기 전, 불멸에서 사최헌 헌터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튜토리얼 이후의 정보.

사최헌은 상당히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예언과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른 능력이라.

뭐, 그건 중요하지 않다.

튜토리얼이 종료되면,

위험한 지역이 더 늘어날 거랬지.

이럴 게 아니다.

"여보세요."

나는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동생은 경기도 외곽에 거주하고 있다. 엄마는 마트에서 일하시고 동생은 아직 대학생이다.

"나야 잘 있지. 위험한 거? 하나도 없어."

그냥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칠죄종 정도.

응, 그거 말곤 없었다.

괜히 다 말해서 걱정시킬 필요는 없다.

어차피 믿지도 않겠지만.

"거기는 괜찮아?"

엄마와 동생이 사는 지역에도 마물이 출현했단다. 근처의 길드가 빠르게 출동해 정리한 덕에 피해는 없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더 많아질 거랬지.'

"아무래도 둘 다 잠깐 올라와 있어야 할 것 같아. 최소한 상황이 정리될 때까지는. 응? 그 단칸방에서 어떻게 다 같이 사냐고?"

나는 시선을 들어 집을 둘러봤다.

단칸방과 비교하면 훨씬 넓고 쾌적한 은신처.

하지만 여기도 가족 모두가 살기엔 좁다.

머물게 될 장소는 여기가 아니다.

진짜 안전한 장소는 따로 있다.

"다 있어, 다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올라와. 돈 걱정도 안 해도 돼. E급 헌터가 돈이 어딨냐고? 나중에 설명할게."

나는 주소를 불러준 뒤 전화를 끊었다.

돈도 천 만원을 즉시 송금했다.

당장 1억도 넘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지만, 너무 놀랄까봐 일단 천 만원만 보냈다.

그때였다.

벌컥—!

"이 몸 등장."

가브리엘이 현관문을 요란하게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원래는 새하얬는데 약간 꼬질꼬질해져 있었다.

그래도 무표정한 얼굴은 의기양양했다.

"고생했어, 가브리엘."

"오, 선배님. 돌아오셨군요."

"잠깐, 흙 묻은 발로 들어오지 마라. 청소 중이잖냐."

쓱쓱.

루시퍼가 청소기로 가브리엘이 떨어뜨린 흙을 빨아들였다.

가브리엘은 루시퍼를 무시하고 내 앞에 아공간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C, B, A, S급 미궁을 전부 1등으로 공략했어. 보상은 다 합쳐서 67억원쯤 될 듯."

가브리엘은 손에 쥐고 있던 파편 하나를 내밀었다.

"백색의 조각도 얻었어."

이제 백색의 조각도 4개가 되었다.

하나만 더 있으면 전용 무기의 완성이다.

"잘했네."

나는 미소와 함께 말했다.

이야, 67억을 숨 쉬듯 벌다니.

이걸 현금으로 다 바꾸고, 정산도 전부 받으면 내 계좌에는 360억이 들어오게 된다.

······이제 은퇴해도 되지 않을까?

물론 아직 조금 이르다.

사최헌이 내게 넘긴 도심의 1,200억짜리 빌딩.

400억에 판다고 했으니 그만큼은 벌어놔야겠지. 대출을 받아도 갚아야 하는 건 마찬가지일테니까.

그때였다.

띠링-.

- 무명, 새로운 거주지가 완성되었다. 주소는 이전에 말했던 그대로다. 요새화도 완벽히 끝마쳐놨으니 마음에 들 거다.

사최헌으로부터 도착한 메시지.

'오케이.'

가족들에게 보낸 주소가 바로 저 빌딩이었다.

근데 요새화라는 말이 묘하게 걸린다.

왜 빌딩이 요새가 될 필요가 있는 걸까.

건물이 필요하다고는 했지만 거기까진 부탁한 적이 없다.

떠올려보면 불멸의 창고도 지하벙커 같았다. 지금 내가 있는 은신처도 내부에 숨겨진 창고가 있었고······.

이쯤 하면 둔해도 눈치챌 수밖에 없다.

사최헌은 멸망을 대비하고 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우선은 그 요새화했다는 빌딩부터 살펴보러 가야겠다. 1,200억짜리인 바로 그 빌딩.

"얘들아, 이사를 가야겠는데."

나는 사도들을 향해 말했다.

벌써 이 집에 정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나중에 사도가 더 늘어나게 된다면 지금 집도 좁아지는 순간이 올테고.

빌딩 관리를 하려면 주인인 내가 빌딩에서 사는 게 나을테니까.

"오, 새로운 빌딩 말씀하시는 거라면 바로 가겠습니다."

루시퍼는 최신형 청소기를 손에 든 채였다.

"게임기랑 만화책은 가져가야 해."

가브리엘은 은신처에 있는 게임기를 아공간 주머니에 쑤셔 넣고 있었고.

"저는 온천이 있었으면 좋겠네요."

청룡만 유일하게 빈손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씩 웃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그래, 일단 가보자."

* * *

예언자의 별, 엘리스 그레인저.

그녀는 높은 건물의 옥상에 올라 있었다. 거센 강풍에 그녀의 로브가 휘날렸다.

파직, 파지직—!

『 튜토리얼 종료까지 6시간 남았습니다. 』

『 시스템이 의식이 일부 활성화됩니다. 』

『 플레이어 '무명(無命)'을 주시합니다. 』

『 다수의 초월자들이 현세(現世)로 모여듭니다. 』

『 이제 곧 첫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

하늘을 올려보던 엘리스는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곧 칠죄종을 뛰어넘는 위협이 현세에 강림할 겁니다."

지금까지는 튜토리얼 불과했다.

여기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무명(無命), 그대는 어디까지 막아낼 수 있을까요."

엘리스의 금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막아내지 못한다면 멸망.

그뿐이리라.

59화 러브콜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30층짜리 고층 빌딩.

"와······. 무슨."

휘황찬란하다는 걸 넘어서 번쩍번쩍하다. 건물의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봐야 할 정도였다.

강화 유리로 된 건물의 외관은 각종 재해나 마물로부터 안전하단다.

"이거 맨 처음 제시했던 1,200억도 거저 준거나 다름 없어 보이네요."

스마트폰과 빌딩을 번갈아보던 루시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근데 그걸 400억에 후려쳤다는 거잖아.

"사최헌 그 녀석. 돈이라면 썩어날 테니 부담가지지 않으셔도 됩니다. 돈도 나중에 줘도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맞아."

가브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건 좀······."

이만한 호의를 베풀었는데, 될 수 있으면 돈은 빨리 주는 게 맞지 않나 싶다.

게다가 빌딩의 요새화인지 뭔지도 했다던데. 온갖 게 다 있던 사최헌의 은신처를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 들었을 거다.

사람이 양심이 있지.

"저도 돈은 최대한 늦게 주는 게 맞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어차피 사최헌 헌터가 소유한 개인 재산은 아마 천문학적일테니까요."

옆에 있던 청룡도 그런 소리를 한다.

······이 녀석들 지난번부터 비슷한 말을 했었지.

대충 짐작이 간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루시퍼를 바라봤다.

"세계가 난장판이 되면 얼렁뚱땅 떼먹겠다는 거 아니야."

"역시 주인님의 혜안은 누구도 따라올 수······. 아뇨. 그런 거 아닙니다."

루시퍼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지만, 대충 그런 느낌인 모양.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돈이 종잇조각이 돼버릴지."

청룡은 씁쓸하게 웃었다.

"뭐, 그거야 세상이 멸망할 때의 이야기잖아. 하여튼 여기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것 같고. 일단 내부로 들어가자."

나는 이삿짐이 든 아공간 주머니를 든 채 빌딩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사도들이 내 뒤를 따랐다.

"오오."

가브리엘이 감탄을 터트렸다. 1층 로비도 외관만큼이나 깔끔하고 멋들어진 인테리어였다.

엘리베이터도 4대나 있다.

"우리가 살 장소는 최상층 펜트하우스랬지."

나는 30층으로 향하는 버튼을 눌렀다.

왕-!

가브리엘의 품에 안겨 있던 케로가 신이 난 듯 짖었다.

사실 기존에 살던 은신처도 훌륭했다. 하지만 사도가 늘어나고 식구들이 많아질 걸 대비해 더 넓은 장소가 필요하다.

띵!

엘리베이터는 29층에서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고 나타난 것은 종이 박스를 옮기고 있던 사최헌이었다.

"왔나. 최상층을 둘러보면 될 거다."

나는 로브와 가면을 걸치고 있었다. 이제 딱히 사최헌 앞에서 얼굴을 숨길 필욘 없지만, 굳이 드러낼 이유도 없으니.

루시퍼의 눈이 즉시 가늘어졌다.

"뭐야, 네 놈이 왜 여기에 있어?"

"무명에게 전달해뒀을텐데."

그러고 보니 사도들한테 말하는 걸 잊었다.

"나는 아래층에서 살 거다. 월세도 지불할 거고. 본래 거주 목적으로 건설된 빌딩은 아니지만, 현재 각 층마다 호실을 나누어 준비 해뒀으니 살기엔 문제 없을 거다."

"아니, 그러니까 네 놈이 왜 여기서 사냐고."

루시퍼의 질문에 사최헌은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현시점 지구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라고 생각하지?"

"뭐? 그거야 당연히 주인님께서 계신······."

루시퍼는 말을 하다 멈추고 씩 미소를 지었다.

"이야, 네 놈 뭘 좀 아는구만. 주인님께서 계신 여기가 제일 안전한 장소지. 그래, 특별히 허락한다."

루시퍼가 사최헌 헌터의 어깨를 툭툭 쳤다. 사최헌은 무표정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마침내, 사최헌 헌터가 루시퍼를 다루는 방법을 알아낸 건가.

사최헌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위로 올라가서 구경부터 하고 와라. 네 가족들도 도착할 예정이랬으니."

그랬다. 어머니와 동생도 이곳으로 불렀었다.

두 사람이 오기 전에 집을 둘러보고 짐도 풀어놔야겠지.

엘리베이터의 문이 다시 닫혔다.

청룡이 검지를 들어 올렸다.

"좋네요. 사최헌 헌터가 거주하면 집값도 오를테니까요."

"사최헌이 문제냐? 주인님이 계신 집이니 인류 전체가 이곳으로 몰려들려 할 거다."

과장이 심하다고 넘기기엔,

그럴 법도 한 이야기였다.

······소문 안나게 조심해야겠네.

최상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열리자마자 넓은 현관이 나타났다.

"와아."

감탄이 절로 나오는 크기였다. 과하지 않으면서도 고급스런 가구들이 거실과 주방을 채우고 있었다.

타다다다.

케로도 제 집 안방처럼 거실을 뛰어다녔다.

TV의 크기도 차원이 달랐다. 대체 몇 인치인지. 내가 봤던 TV 중에서 제일 크다.

거실의 창문 밖에는 정원과 수영장이 있었다. 정원에는 고풍스런 식물과 분재들이, 수영장 옆에는 바베큐장까지 딸려 있다.

"주인, 여기 게임장이 있어······! 만화방도······!"

도착하자마자 복도의 방 하나로 들어갔던 가브리엘이 방에서 고개를 쑥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다가가서 확인했는데, 규모가 차원이 다르다.

"진짜네."

방 내부에 복도가 또 있었다.

좌측에는 게임방이 오른쪽 방에는 만화책이 가득한 서고가 있었다.

만화책만 있는 건 아니었다. 각종 책이 가득하다.

나는 바깥으로 나와 건물의 구조를 다시 살폈다.

여기에 이만한 시설이 들어갈 수 있을 리가······.

"마법으로 확장한 건가. 대단하네."

"주인님, 여기 굉장하네요! 식재료가 끝도 없습니다. 앞으로 마트에서 장은 안 봐도 되겠는데요?"

부엌 쪽에서 루시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영화에서나 보던 서늘한 식재료 창고가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야채, 햄, 고기, 통조림, 라면 박스 등등.

"길러 먹을 수 있게 온실도 있습니다."

"집이 아니라 거대한 시설 수준인데. 관리가 되려나."

"물론입니다. 제게만 맡겨주시죠. 흑마법의 정점이 저 아니겠습니까. 청소 따윈 눈 감고도 할 수 있습니다."

정점까지 되어서 청소 마법이라니······.

흑마법이 울겠는데.

나는 기뻐하는 루시퍼를 놔두고 식재료 창고를 빠져나왔다. 부엌이 나왔다.

"사최헌 헌터는 대체 무슨 건물을 준거야······."

진짜 세계가 망해도 몇십 년은 거뜬히 버틸 것 같다.

그런 내 앞으로 상반신을 탈의한 청룡이 지나가고 있었다. 수영복 바지에 흰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

"아, 온천탕도 발견해서요. 주인님도 가시겠습니까? 피로가 쫙 풀리실 겁니다."

"아니, 나는 괜찮아. 편히 쉬어."

오늘은 칠죄종도 잡았고, 미궁도 공략해 두었다. 레벨도 최대치로 올렸겠다. 이후의 일정은 없다.

튜토리얼의 종료만 기다리면 될 뿐.

그런데 진짜로 없는 게 없다.

'작정하고 준비했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사최헌 헌터도 보통은 아니다.

나는 거실에 있는 소파에 몸을 눕혔다. 나는 이거면 충분하다. 심신이 안정되고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다.

편해도 너무 편한데.

"응?"

『 [ 명품 ] (EL) 최고급 가죽 소파 』

- 견습 드워프의 솜씨로 만들어진 소파

- 피로 회복에 상당한 효과를 지닌다.

혹시나 해서 시선을 집중하자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거, 공방 엘의 작품이잖아.'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아이템 공방 '엘'. 이 소파는 그곳의 장인들이 한땀한땀 만든 사치품이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두드렸다.

······3억.

이 소파 하나가 3억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명품 가구가 가득한 거실, 최신식 기구와 식재료 창고가 갖춰진 주방, 넓은 정원과 수영장에 날 잡고 탐험해야 할 정도로 넓은 복도.

"그런데 이 건물이 통째로 400억이라."

거저로 넘겨준 거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넘겨준 건 아니겠지.'

나는 커다란 창을 열고서 베란다로 나갔다. 우중중한 하늘 아래,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정체 모를 기운 섞인 바람이 불어온다. 어지러이 얽힌 먹구름 주변으로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나는 건물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서울의 거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여전히 많은 사람이 거리를 오가고 있다.

'······건물 사고 은퇴하려고 그랬는데.'

이제부턴 월세만 받고 살아도 평생 먹고사는데 지장 없다. 지장 없는 수준이 아니다.

진짜 부자다.

여유롭고 느긋하게 지내면서 삶을 만끽하면 된다. 헌터 따위 당장 때려치워 버리면 그만일지도 모른다.

"······."

하지만 여기까지 왔으면 알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도들의 반응도,

사최헌 헌터의 대비도.

칠죄종의 이야기도.

모두 한 가지로 수렴한다.

세계는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예언자의 별이 보여줬던 멸망한 세계의 환영.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문명이 파괴되고 인류가 사라진 미래. 자칫 잘못하면 그런 미래가 있을 수도 있으리라.

그런 미래만큼은 막아야 했다.

'딱히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사최헌 헌터처럼 숭고한 사명도 없고,

예언자의 별처럼 거창한 계획도 없다.

'그냥······.'

멸망하지 않았으면 한다.

인류가 멸망하면 건물이고 뭐고 없지 않은가.

월세를 내줄 사람도 없다.

돈도 부동산도 휴지조각.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일 뿐이다.

"세계가 안정될 때까지만······. 열심히 할까."

나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 튜토리얼 종료까지 4시간 남았습니다. 』

* * *

"엄마, 오빠가 각성한 게 언제라고 했지?"

"글쎄. 이제 2주 정도 지났을걸."

주강혁의 어머니 윤이순,

그리고 여동생 주강연.

두 사람은 캐리어를 끌고 서울에 도착했다.

"흐음, 근데 E급 헌터가 돈을 그렇게 잘 버나."

"엄마도 그게 걱정이야. 계약금 전부 보냈을까 봐."

천 만원.

어쩌면 주강혁의 계약금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소 잘못 준 것 같은데."

주강연은 스마트폰으로 지도상의 주소를 거듭 확인했다. 빌딩이 너무 컸다. 오빠가 이런데 산다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갔다.

E급 헌터의 벌이도 대충 검색해보고 왔다.

이제 보름 정도 된 오빠가 대체 무슨 돈이 있어서······.

단칸방에서 빌딩으로 이사를 한단 말인가.

'설마 나쁜 사람들이랑 엮인 거 아니겠지?'

그러고보니 최근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이따금 눈에 띄었다.

마치 감시하는 것처럼.

물론, 가까이 다가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굉장히. 굉장히 수상쩍은 일이었다.

어쩌면 오빠는 가족을 빌미로 협박을 당하고 있는 걸지도.

주강연이 고심하는 그때.

그녀의 엄마가 빵집을 가리켰다.

"얘, 저기 사람 많다."

무슨 빵집에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강혁이 빵 좋아하는데. 저거라도 사갈까?"

"저거 기다렸다간, 오늘 안에 못 갈 것 같은데."

주강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이 왜 저렇게 많나 해서. 잘 보니 벽면에 큼지막하게 포스터가 있었다.

- 무명의 동료가 쓴 빵봉투! 그 가게 맞습니다.

그런 홍보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 그 빵봉투?

주강연은 납득했다.

무명에 대해선 주강연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인터넷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특히 빵봉투를 쓴 남자는 무명의 동료 중 하나로, S급 헌터를 아득히 뛰어넘는 실력자였다.

그렇다고 빵까지 인기 있을 일인가.

주강연은 고개를 저으며 엄마의 등을 밀었다.

"빨리 가야 해. 이제 곧 튜토리얼이 끝난다잖아.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저 사람들은 왜 이렇게 태평해?"

튜토리얼 종료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메시지가 각성자들에게만 보이기도 했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몇몇 숲이나 산에서 마물들이 출현하긴 했지만 도심의 치안은 변함없었다.

하지만 주강연은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꼈다.

'오빠가 빨리 오라는 것도 그렇고. 각성자들 사이에서만 도는 소문이 있는 걸지도 몰라.'

캐리어를 바리바리 싸 온 것도 그래서였다.

대학교도 다니고 있는 사람한테, 그냥 올라오라니. 엄마도 직장이 있는데.

그래서 이번 주말만 머물다 갈 생각이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주소는 여기가 맞는데······. 그냥 들어가도 되려나?"

주강연은 빌딩 앞에서 주강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내려갈게, 기다려.

목소리는 평범했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잠시 기다리고 있으니 주강혁이 빌딩 1층으로 내려왔다.

"두 사람 잘 왔어. 엄마도 오느라 고생했어."

"흐음······."

"왜 그래?"

주강연은 주강혁의 차림새를 훑었다. 옷은 평범한데 어깨 양쪽에 비둘기랑 까마귀를 얹고 있었다.

"능력이 마술사야?"

"아니."

"그러면 동물술사? 알았다. 드루이드!"

"······설명하자면 복잡해."

잘 보니까 왠 미꾸라지 한 마리도 주강혁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

"시끄럽고 빨리 와."

주강혁은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두 사람이 거주할 장소는 28층.

최상층만큼은 아니지만 호화롭게 설계된 거주 공간이었다.

주강연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엄마도 못 믿겠다는 듯이 주변을 둘러본다.

"당분간은 여기서 살면 돼. 필요한 게 있으면 이 연락처로 보내면 알아서 다 준비해준다는데······. 밖으로 나갈 때는, 보디가드가 붙을 거고."

"말도 안돼. 대체 어디 길드에 들어갔길래 이렇게까지 대접해줘?"

동생의 말에 주강혁은 볼을 긁적였다.

"불멸."

"부, 불멸? 오빠가 불멸에 들어갔다고?"

"들어간 건 아니고 정확히는 협력 관계 같은 거야."

대한민국에서 불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어, 엄마 왜 울어?"

엄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당황한 주강연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줬다.

"너무 기특해서. 잘 됐다. 진짜 잘 됐어."

만년 취준생이던 아들이 한국 최고의 길드와 협력한다. 기쁜 게 당연했다.

주강혁은 테이블에 앉아 잠깐 동안 가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대학교? 지금은 휴학중. 근데 오빠 진짜 대박이네. 동물들로 마법 쓰는 거 보여주면 안 돼?"

"그건 안 돼."

건물이 날아간다.

"엄마, 이제 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무리 그래도······."

"진짜로요."

건물에서 나오는 월세만 받아도 3대가 먹고살 걸요.

"며칠 전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주위를 기웃거리는거야. 나는 오빠가 나쁜 짓이라도 저지른 줄 알았지."

"그건 아마······."

협회에서 파견한 보디가드일 거다.

내가 신변 보호를 요청했었으니까.

근황 이야기도 나누고,

나도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요약해 말해줬다.

재능을 인정받아서 불멸에 스카웃 되었다.

뭐, 그런 식으로.

내가 무명이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았다.

무명이란 이름은 어그로가 크게 끌린다.

괜히 가족들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혹시 무명도 만나봤어?"

"······아니."

"아직 E급 헌터니까 어려우려나. 그래도 만나면 싸인 무조건 받아줘."

천이령 헌터도 그렇고 다들 싸인에 왜 그렇게 목을 매는 건지.

"내 싸인이나 해줄게."

"아니, 오빠 싸인은 필요 없는데요."

"나중에 후회할 텐데."

"그러면 그때가서 받지 뭐."

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간만에 가족들을 만나니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올라가봐야 했다.

"나는 위쪽에 있으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몸조심해. 위험한 일은 나서지 말고."

엄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사최헌 헌터 싸인은 가능해?"

동생은 진지한 얼굴로 그리 물었다.

* * *

나는 로브를 걸치고서 옥상의 전망대로 올라왔다.

"가족분들은 잘 만나고 왔나."

전망대에는 사최헌 헌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으로 펜트 하우스가 최상층이지만, 여긴 그 위쪽으로 설치된 전망대였다.

서울의 상황을 파악하기에는 좋았다.

여기서 우리 집은 내려다보이지 않는다.

마법적인 장치가 되어 있는 듯하다.

사도들도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주인이 동물술사······."

"비둘기까지는 괜찮은데, 미꾸라지는 좀 아니지."

"선배님들, 굉장한 오해가 있네요. 미꾸라지가 아닙니다. 미니 용이에요."

"그게 용이면 나는 피닉스일 듯."

나는 사도들과 함께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 1분 후 튜토리얼이 종료됩니다. 』

우중충한 먹구름 사이로 검은 구체의 끄트머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주변으로 모여드는 막대한 양의 흑색 전류.

"튜토리얼의 종료와 동시에 새로운 페이즈가 시작된다."

사최헌은 설명했다.

"1페이즈는 또다시 여러 단계의 시련으로 나뉜다."

"예언 능력 치고는 자세히 아는 게 수상하다니까."

"이제 저희의 제한도 풀려갑니다."

사도들이 사최헌의 설명에 끼어들었다.

루시퍼는 난간 위에 발을 얹었다.

"첫 번째 시련 이전에, 빅 이벤트 하나가 있습니다."

루시퍼는 사최헌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그의 주변을 맴도는 열 몇 개의 별빛들을.

그때였다.

쿠구구구—!

대기가 저릿하게 떨려온다. 굉음과 함께 먹구름 속에 숨겨져 있던 암흑의 구체가 내려왔다.

구체라기보단 알에 가까운 형태.

고오오—.

거대한 크기는 빌딩 하나에 맞먹었다. 그런 알이 서울 상공에 떠올랐다. 추락하게 된다면 일대를 쑥대밭으로 만들 수준의 질량을 품은 채였다.

『 튜토리얼이 종료됩니다. 』

『 첫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

시스템은 담담히 메시지를 띄워 올렸다.

『 다수의 초월자들이 현세(現世)로 모여듭니다. 』

『 이제부터 성좌들이 제약 없이 지상을 내려다봅니다. 』

화아악—!

우중충했던 하늘 위의 구름이 일시에 거둬졌다. 어두운 밤하늘이 나타나고, 천상의 별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 1페이즈 시작에 앞서 성좌들이 플레이어를 선택합니다. 』

사최헌 주변을 맴돌던 열 몇 개의 빛이 눈부시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성좌들은 자신의 이름을 대변할 인간을 찾는 겁니다."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여 줄 화신(化身)."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말했다.

"튜토리얼이 맛보기였다면 지금부터는 본격적인 경쟁이 시작되는 거죠. 지상에서도, 그리고 하늘 위에서도."

청룡은 손가락을 펴 하늘을 가리켰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익숙한 이름의 두 성좌가 가장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쏴아아-!

밤하늘에 맺힌 수많은 별빛이 내게로 향했다. 얇은 빛줄기가 되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 성좌 '죽음의 영혼'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 성좌 '맹렬한 불꽃'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 성좌 '사신(死神)'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 성좌 '죽음의 인도자'가 당신을 선택합니다. 』

···

『 성좌 '지하세계의 왕'이 당신을 선택합니다. 』

무수한 별들이 빛이 되어 내게로 다가왔다. 지금까지 막혀 있던 통로가 뻥 뚫린 것처럼 밀려왔다.

그리하여 도착한 메시지의 수는 72개.

『 총 72개의 제안이 도착했습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

『 당신은 가장 많은 성좌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

『 무명(無命)의 이름이 성좌들 사이에 퍼져나갑니다. 』

그들은 나를 향해 열렬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60화 아브락사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