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완성
일본의 공략대 60인.
이 중에 마인이 있다는 사최헌의 발언.
"그러니까 우리 일본 헌터들 중에 마인이 숨어 있다는 건가요?"
"그렇다."
당연히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일본의 헌터들은 노골적으로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저기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마인 하나 구별 못 할까 봐?"
"한국 협회가 마인들에게 점령 당해서 예민한 건 알겠는데······."
일본도 마찬가지로 3개의 길드가 합쳐진 형태였다. 각 길드의 인원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동료였다.
그런데 이들 중에 마인이 있다니.
물론 제일 화를 내는 건 중위 마인 자칼이었다. 미야모토 타케시라는 이름으로 몇 년을 보낸 S급 헌터.
"무, 무슨 근거로 우리 중에 마인이 있다는 거야? 무례한 것도 정도가 있지. 게다가 사람 협박하는 것도 아니고 이건 무슨······."
자칼은 침을 튀기며 화를 냈다.
사최헌은 담담하게 설명했다.
"한국만 해도 그리 많은 마인들이 숨어 있었는데, 일본에는 한 명도 없으리란 보장이 있나?"
"······."
일본의 헌터들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실제로 일본은 마인들에 대한 직접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협회와 정부의 권력이 공고했거니와, 한국의 일이라고 강건너 불구경하고 있었기에.
그러나 불편한 기색은 숨기지 않고 있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마인 자칼의 언성이 한층 높아졌다.
"너희들 중에 마인이 없다는 보장도 없는 거 아닌가? 대한민국이야말로 마인 밭이었잖나. 수상한 걸로 따지면 흑색 로브로 전신을 감춘 인간이 더 수상하지. 안 그래?"
자칼은 무명을 삿대질했다.
이번에는 한국 헌터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무명(無命)이 마인이었으면 한국은 진작에 멸망했을 거다.
양측 헌터 간의 다툼이 커지기 직전.
사최헌은 익숙하다는 듯 끼어들었다. 양손을 들고서 항마(抗魔)의 힘을 피워올렸다.
화륵.
오색찬란한 불꽃이 손을 타고 일렁였다.
"마인 색출은 어렵지 않다. 악수를 하는 걸로 충분하다. 대한민국의 마인들도 이것으로 찾아냈으니 효과는 보증하지."
뒷부분은 거짓말이었지만 일본 측을 설득하기엔 좋았다.
악수 정도야 어렵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불쾌한 기분은 지울 수 없었다.
그때, 일본의 랭킹 1위 하야토가 가운데로 슬쩍 걸음을 옮겼다.
"한국 헌터들 먼저 체크를 시작한다면 받아들이지."
팀원들의 기분까지 고려한 승낙이었다.
"분란을 사전에 제거하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리하지 않을 이유가 없겠지. 더욱이 3관문부터는 양국의 신용이 필수적이다. 함께 공략을 하게 되는 거니까."
하야토의 말에 일본 헌터들 대다수가 납득하는 듯했다.
그러나 납득하지 못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정확히는 마인 하나가 있었다.
"그, 그딴 걸로 마인을 구별할 수 있다고? 제정신이냐? 한국 놈들이 괜한 트집을 잡을지 누가 알아?!"
"미야모토, 귀찮을지 모르지만 그냥 해주자고."
"혹시 알아 우리 중에 마인이 있을지."
'그러니까 그게 나라고 이 새끼들아!'
미야모토의 얼굴이 붉어졌다. 자신이 마인인데 이대로 악수를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한국 측 헌터들의 체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하야토의 중재에 따라 일본의 헌터들도 차례차례 체크했다.
그리고 마침내 미야모토의 차례가 되었다. 이를 악문 자칼, 미야모토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난 못해. 기분이 더러워서 못 하겠다 이말이야."
"결백하다면 문제 없는 거겠지. 미야모토 악수를 해라."
"뭐, 뭐야. 내 이름까지 알아?"
사최헌은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그때였다.
"이렇게까지 싫어하는데, 이 녀석은 좀 봐주면 안될까?"
일본의 헌터들 중 하나가 미야모토를 두둔했다. 다른 헌터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야모토는 절대 마인이 아니야. SS급 게이트에서 제일 열심히한 게 누군데."
"핏줄이 보랏빛으로 도드라지고, 안구가 검게 변할 정도로 열심히했다니까? 그게 어떻게 마인이야."
아주 명확한 마인의 특징이었다.
"호오."
사최헌이 묘한 미소를 지었다. 미야모토가 황급히 헌터의 입을 틀어막았으니까.
"아, 알았으니까 제발 닥쳐! 하여튼 협조 못해. 알겠어?"
기세가 등등해진 미야모토가 소리쳤다.
무겐의 길드장, 하야토가 턱을 매만졌다. 그의 눈동자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야모토가 마인이라는 증거가 있나? 없다면 그를 강제하긴 어려울 것 같은데. 만약 근거 없이 몰아붙인 거라면 이쪽도 그냥 넘어가긴······."
"있다."
무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는 듯했다. 주변의 풍경이 녹아내리고 무명만이 유일한 존재로서 부상한다.
그런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저자가 무명······. 소문으로 듣던 것보다 존재감이 상당하다.'
하야토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현시점 유일한 격(格)의 소유자 무명.
그의 발언은 주목하고 싶지 않아도 주목하게 되며,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된다. 범인(凡人)은 그 존재감을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격이란 그런 것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무명이 한쪽 팔을 들어 올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콰앙—!
뒤쪽에서 강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뒤쪽에 앉아 있던 귀환자 호영이 일본 헌터측으로 달려 들었다.
일본의 헌터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천이령이 앞으로 나섰다.
평소랑 달리 사나운 표정이었다.
"그 사람은 우리도 못 말려요."
"그게 무슨······."
발버둥치는 미야모토를 호영이 짓누르고 있었다. 미야모토는 소리를 꽥꽥 질렀다.
"놔, 놓으라고 이 새끼들아!"
일본 헌터들이 당장이라도 호영을 향해 무기를 휘두를 것 같은 상황.
사최헌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다.
스륵.
항마의 힘이 호영에게 부여되었다. 호영의 몸을 타고 흐른 항마력은 그대로 미야모토에게 닿았다.
투둑, 투두둑······.
인간의 피부가 벗겨지고 보랏빛 살이 드러난다. 새하얬던 안구가 검게 변하고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머리에서 돋아난 작은 뿔까지.
"미, 미야모토 너······!"
"마, 말도 안돼!"
"미야모토가 마인이라고?"
"지금까지 그렇게 열심히 했던 게 전부 연기?"
누가봐도 의심할 여지 없는 마인(魔人)이었다.
"젠장······."
푸쉬이—!
미야모토의 주변으로 보랏빛의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중위 마인 자칼은,
칠죄종 나태의 권속.
그로부터 부여 받은 힘은 '수면'이었다.
"미, 미야모토······."
"믿었는데······."
털썩, 털썩.
연기를 들이마신 일본의 헌터들이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드르렁, 드르렁.
딱 달라 붙어 있던 호영도 코를 골며 잠에 빠져버렸다. 사최헌도 황급히 입을 막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진짜 마인이었다니. 그것도 미야모토가?"
어느 틈엔가 뒤쪽으로 물러선 하야토가 중얼거렸다. 분노한 자칼이 소리쳤다.
"열등한 인간 따위가 마족의 계획을 망치려 들어? 네 놈들 전부 죽여주마······!"
보랏빛 연기는 빠르게 확산되었다. 향기를 맡는 즉시 깊은 잠에 빠지는 일종의 수면 유도제.
화악-!
한 쌍의 검은 날개가 연기를 걷어냈다.
"열등한 인간이라. 하위 존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나?"
루시퍼의 입가에 비웃음이 어렸다.
"용기 있는 발언이야."
뒤이어 날개로 연기를 몰아낸 가브리엘도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 이런 재미가 있네요. 분수를 모른다는 게 이런 건가요?"
청룡까지 흥미 가득한 눈빛으로 자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거를타선이 없었다.
자칼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이, 이런 젠장······!'
사도 셋.
그들의 전력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뭐가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무명의 발목을 잡으려던 거지, 정면 승부하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사도들의 중심에는 무명이 서 있었다.
살아야 한다.
일단 살아남아야 했다.
"웃기지마라—!"
고함과 함께 자칼의 주위로 50여체의 마물들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전력을 끌어낸다면, 도망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으리라.
도망치는 게 아니다. 이대로는 개죽음일 뿐이었다. 차라리 동료들을 모아서 돌아온다면······.
그러나.
푸확—! 푸화악—!
"뭐, 뭐야."
마물이 소환되지 않는다. 검붉은 핏조각과 마수의 살점만이 허공에서 튀어 오를 뿐이었다.
광장의 바닥에 붉은 피가 깔렸다.
실패한 건가?
자신의 소환술이?
그럴 리가.
"이,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자칼의 얼굴이 괴상하게 구겨졌다.
이번에는 손가락을 튕겨 마물을 소환했다. 그러나 결과는 똑같았다.
푸화악—!
핏빛 살점과 내장이 튀어올라 자칼의 얼굴에 묻었다.
이럴 리가 없었다.
푸확-! 푸화악-!
소환은 성공하고 있었다.
마기가 빠져나갔다.
느낌도 실패한 느낌이 아니었다.
푸확—!
그러나 마물은 나타나지 않는다.
'설마.'
일순, 오싹한 기운이 그의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새하얗게 질린 자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소환이 되지 않는 게 아니다.
푸확, 푸화악-!
마물을 불러들이는 족족 무명에게 제거당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 가공할 속도로.
무명(無命)은 보란 듯이 소환수들을 죽이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는 힘이었다.
뚝, 뚝······.
자칼을 흠뻑 적신 마물의 핏방울이 바닥의 웅덩이로 떨어졌다. 넋을 놓은 사람처럼 서 있던 자칼이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오, 오해가 있는 게 아닐까요?"
당연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오해 같은 소리하고 있네."
뻐억-!
루시퍼의 발차기가 자칼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 * *
"의심해서 미안하다. 미야모토가 마인일 줄은 몰랐다. 사과하지."
무겐의 길드장 하야토가 고개를 숙였다.
지금은 인류의 힘을 하나로 합쳐야 할 때였다.
SS급 게이트가 붕괴했다간 해당 국가는 괴멸적인 피해를 입게 된다.
일본의 헌터들도 말이 없었다.
자신들의 실수로 마인을 데려갈 뻔했으니.
"뭐, 괜찮은 거 아니에요? 어쨌든 잘 해결 됐잖아요. 아우, 간만에 꿀잠도 자고 아주 좋네."
한국 랭킹 2위 채아린이 기지개를 펴듯 팔을 뻗었다. 그녀는 뒤쪽의 새하얀 문을 쳐다봤다.
무명과 사도들이 마인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사최헌도 함께 들어갔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채아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기왕 한 배를 탄 거 잘 부탁해요. 이제부터 같이 놀랄 일만 남았으니까요."
"······놀랄 일?"
"숨만 쉬어도 SS급 게이트가 공략되는 마법이죠."
채아린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시선이 한쪽에 있는 천이령에게로 향했다.
"그때 그 기운하고 비슷했어. 틀림 없는 마인(魔人). 물어봐야 해."
천이령은 그리 중얼거리고 있었다.
한편.
『 [ 아티팩트 ] 분단의 아공간 』
사최헌이 펼친 아공간 속.
"무명, 네 말대로 된다면 좋겠다만······."
"주인님을 의심해?"
지금부터는 무명과 사도들이 머리를 맞대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크허억······."
정신을 잃고 쓰러졌던 마인 자칼이 눈을 떴다. 맨 처음 그의 시야에 들어 온 건 사도들과 무명이었다.
"흐, 흐어억!"
파바박-!
앉은채로 다리를 움직여 벽으로 도망간 자칼. 그는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가 이내 굳어졌다.
도망갈 곳은 없었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냐."
침을 꿀꺽 삼킨 자칼이 물어왔다. 루시퍼가 귀찮다는 듯 대답했다.
"권속의 계약을 확인해 봐라."
"뭐?"
자칼은 다급히 팔뚝을 살폈다. 낙인이 희미해져 있었다. 권속 계약이 끊어져 있단 증거였다.
예상했던대로였다.
분단의 아공간에선 권속의 계약이 일시적으로 끊어진다. 현세와의 연결을 차단한다는 특성 때문이었다.
반면 사도들은 멀쩡하다.
- 이거야말로 진짜 충신이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루시퍼는 그리 말했지만,
계약이 아니라 소환이니까.
그건 그거고.
무명은 품 안에서 검은 구슬 하나를 꺼내들었다.
"이걸로 권속의 계약을 해제해라."
"자, 잠깐 그건······."
자칼의 눈동자가 커졌다.
무명의 손에 들린 건 마기의 원천이었다.
확실히 저게 있다면 권속의 계약을 끊어낼 수 있다.
"다른 생각을 한다면 즉시 죽이겠다."
격이 서린 무명의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자칼은 힘겹게 침을 삼켰다.
그 말 그대로였다.
무명은 자신을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다.
"시,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마기 원천을 전부 흡수해도 사도나 무명급으로 강해질 순 없다. 그랬다면 칠죄종한테 마인들이 설설 기지도 않았을 거다.
마기의 원천의 주된 사용처는 '간섭'이다.
기존의 시스템을 비틀고, 다른 방향으로 유도해 원하는 바를 이뤄내는 간섭.
그 힘을 사용하면 권속의 계약 정도는 끊어낼 수 있었다.
츠즈즛—!
검은 기운이 자칼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하는 김에 겸사겸사 회복도 좀 하려는 생각이었는데.
서걱—!
사최헌의 검이 자칼의 팔을 잘라냈다.
"권속 계약을 끊어내라고 했을텐데."
사최헌은 혀를 찼다.
"끄아아악!"
바닥을 뒹굴뒹굴 구르는 자칼.
"아픈 척해도 소용없다."
"지, 진짜 아프단 말입니다!"
"시킨 일만 해라."
"아, 알겠습니다."
팔은 마기로 충분히 재생 시킬 수 있었다.
외팔이 된 자칼이 다시 일어나 구슬을 들어 올렸다.
츠즈즛.
이번에야말로 낙인이 사라졌다. 권속 계약이 없어졌다. 자칼에게도 나쁜 상황은 아니었다.
장기말로 쓰다가 버려질 게 뻔했으니까.
"에휴, 난 마인 사회에 반기를 드는 짓은 못합니다."
자칼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무명은 물끄러미 자칼을 내려다보았다.
기가 죽은 자칼이 재차 말했다.
"······조금 밖에는 못합니다."
"칠죄종 나태에 대해 묻고 싶다. SS급 게이트에서 무슨 준비를 했는지도."
"마, 말씀드리겠습니다."
무명은 뒤쪽의 가브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브리엘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줘, 주인. 거짓말 탐지기 온이야."
"거짓말 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진실."
"지, 진짭니다."
자칼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사도들과 무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돌아간다면 분명 의미가 있을테니.
칠죄종이 실패한다고 해도 괜찮다.
마족의 위대한 계획은 그대로 진행될 테니까.
자칼은 스스로에게 그리 변명했다.
"칠죄종 나태는 아주 만반의 준비를 했습니다."
권속도 아니게 되었다.
거리낄게 없었다.
자칼은 아는 걸 전부 불기 시작했다.
"네 번째 관문부터 그놈의 부하가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심지어 다섯번째 관문부터는 놈이 종말의 성전을 펼친 채 기다리고 있죠."
그 말에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이중 던전이다. 머리를 좀 썼군. 던전 속의 던전. 이 경우엔 이중 게이트가 맞겠지. 내부의 게이트는 난이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할 터."
SS급 게이트 속에 만들어진 종말의 성전.
"대기 시간도 필요 없었을테고. 대신 SS급 게이트가 소멸하면 함께 소멸하게 되어 있다. 의외로 해결은 쉬울지도 모르겠군."
사최헌도 모든 미래를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특히 마인과 칠죄종이 결탁한 SS급 게이트.
이건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무명이 없었다면 회귀를 선택했을지도 모를만큼의 고난도 공략.
따라서 마인의 회유가 필수적이었다.
"SS급 게이트만 공략하면 종말의 성전은 자동으로 사라진다라."
루시퍼가 되뇌었다.
자칼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할 겁니다."
"왜."
"조, 종말의 성전의 위치가 그래요."
자칼이 고개를 들었다.
"5번째 관문에서 6번째 관문으로 가는 길목에 정확히 놓여 있죠. 종말의 성전이 사라지지 않으면 SS급 게이트는 공략할 수 없을 겁니다."
"공략되지 않은 게이트는 결국 붕괴하게 될테고."
사최헌은 한숨을 내쉬고선, 무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 다음부터는 무명에게 달려 있었다.
무명은 재차 확인했다.
"모든 네 번째 관문에 나태의 부하가 배치되어 있다?"
"예, 그렇습니다."
"얼마나 강하지?"
자칼은 금방 답을 내놨다.
"뭐, 뻔합니다. 현재 인류의 수준으론 전부 죽을 겁니다. 각국에 저희 마인들도 숨어 있으니까요."
"······."
시간이 별로 없었다.
각 국가의 상위 60인이 죽고, 게이트가 붕괴된다면. 세계는 유례없는 대혼란에 빠지게 된다.
답은 즉시 나왔다.
"다른 헌터들이 네 번째 관문에 도달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종말의 성전에 있는 칠죄종을 없앤다."
이른바 속전속결.
말도 안되는 작전이었지만,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자는 없었다.
인류 최대 난이도인 SS급 게이트.
심지어 그 안에 생성된 종말의 성전까지 단숨에 공략한다니.
누가봐도 불가능해 보이는 작전.
그러나 그곳을 공략하는 자는 무명(無命)이다.
"최단 기록 타임 어택. 난 준비 됐어. 주인."
"신기술도 익혔겠다, 나태의 미간에 한 발 제대로 박아주겠습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의지를 불태웠다.
"파, 파이팅입니다?"
눈치를 보던 마인 자칼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그, 근데 저는 어떻게 되나요?"
* * *
나는 사도들과 함께 아공간을 빠져나왔다.
일본과 한국 헌터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슬슬 익숙해지는 기분이다.
귀환자 호영, 저 사람은 계속 자고 있고······.
"출발하자."
"예, 가시죠."
설명은 사최헌에게 맡겨두면 될 거다.
사최헌도 마인 자칼과 함께 아공간에서 나왔다. 자칼은 항마가 부여된 사슬로 꽁꽁 묶여 있었다.
"너. 마인."
"우왁, 뭐냐. 인간 꼬맹이."
천이령이 자칼에게 다가가 멱살을 잡았다. 사최헌은 말리지 않았다. 천이령은 분노하고 있었다.
"얼굴에 상처를 입은 마인을 알고 있어? 마인의 정점이 대체 누구야? 뭐든 좋아. 전부 말해."
"상처? 무슨 말이냐? 마인의 정점은 한 분 뿐인데······."
뻐억, 뻐억-!
"크아악, 나 같은 중위 마인이 정점을 뵈었을 리가 없잖냐?!"
살벌한 소리는 계속해서 울려퍼졌다. 마인을 향한 증오심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천이령은 가브리엘에게 배운 성력으로 마인을 야무지게 줘패고 있었다.
내가 신경써야 할 건 저쪽이 아니다.
나는 세 번째 관문으로 향했다.
내 뒤를 세 명의 사도가 따라왔다.
일본의 헌터들이 도착했기에 거대한 문은 자연스럽게 열려 있었다.
'정보는 충분히 수집했다.'
칠죄종 나태.
놈의 특징과 사용하는 기술까지.
모두 사최헌으로부터 전해들을 수 있었다.
'남은 건 전력으로 놈을 제거할 뿐이다.'
『 다크 드레이크의 영혼(SSR) 』
세 번째 관문의 어둠 속을 나아가며, 나는 랜턴 위로 SSR급의 영혼을 집어넣었다.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전설+급에 해당하는 기적이 발현됩니다. 』
샤아아—!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일대가 환하게 밝아졌다.
끝없이 펼쳐진 넓은 복도는 군데군데 무너지고 크게 박살나 있었다.
키에엑!
그어어!
끄에에!
그 틈새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 번째 관문이 제시한 미션은 '학살'.
『 많은 수의 마물을 처치하십시오. 』
『 처치한 마물의 수 : 0 / 7,000 』
일정 수의 마물을 잡아야 다음 관문으로 향하는 문이 열린다. 내게는 그리 어렵지 않은 미션이다.
스스스······.
어둠을 헤치고 퍼져나갔던 빛이 점차 사그라들었다.
'잠깐.'
그러나 내 손에는 분명하게 그 형태가 남아 있었다.
『 사도 전용 무기 조각(黑) x 1 』
'······모였다.'
『 흑색 무기 조각을 다섯개 모으셨습니다. 』
『 조각을 합성해 전용 무기를 제작할 수 있습니다. 』
루시퍼의 전용 무기 그 다섯번째 조각이 모였다.
『 성좌 '이계 규율'이 호쾌한 액션을 기대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환한 미소를 짓습니다. 』
"드디어! 주인님,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루시퍼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흑색의 기류가 루시퍼의 손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턴 전투가 아닌 일방적인 사냥이 될 거다.
51화 돌파
우우웅—!
주강혁의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온 다섯 개의 검은 조각이 서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진동하던 조각은 흑빛의 꼬리를 그리며 루시퍼에게로 향했다.
『 다섯 개의 조각이 하나로 합쳐집니다. 』
『 흑색 사도의 전용 무기가 완성됩니다. 』
스륵—.
다섯 개의 조각은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한 자루의 창으로 변화했다.
"성좌가 가장 애용하던 무기. 그 형상의 일부가 여기에 나타나는 거야."
가브리엘은 부럽다는 듯한 시선으로 루시퍼를 바라봤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틀림없는 진품이야.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사도의 전용 무기니까."
파직, 파지직—!
제한을 의미하는 스파크가 사정 없이 튀어 올랐다. 그러나 전용 무기는 시스템의 인과 아래 만들어진 정당한 무기.
파앙-!
루시퍼가 흑색의 창을 손에 쥐는 순간, 주변을 감돌던 스파크가 일시에 걷어졌다.
돌이킬 수 없는 타천의 증거로,
루시퍼는 자신의 창에 이름을 새겼다.
『 [ ★ ] 타천(墮天)의 창 : 루치페르 』
사도의 전용무기가 마침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동시에 검은 흑마력이 불길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거지."
루시퍼의 입가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순수한 기쁨에서 나온 웃음이었다.
오랜 전우를 되찾은 것처럼 부족했던 부분이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손에 착 달라붙어, 마치 신체의 일부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가벼운 전능감이 루시퍼를 타고 올랐다.
지금이라면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주인님, 보여드리겠습—."
루시퍼가 창을 들어 올리는 바로 그 순간.
"-?"
루시퍼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일종의 데자뷰.
혹은 강렬한 기시감.
- 귀찮다고. 고작해야 인간 따위한테 이 몸이 협조 하겠냐. 정 원한다면 고개라도 조아려 보던가.
불현듯 어떠한 장면이 루시퍼의 뇌리를 스쳤다. 짧은 단락에 불과했지만 지금 이 자리, 이 멤버, 주인님까지······.
기억인가?
그럴 리는 없다.
주인님을 향해 불경한 소리를 내뱉는 자신이라니.
죽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짓을 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루시퍼, 괜찮아?"
"까마귀, 정신차려."
툭툭, 가브리엘이 루시퍼의 뺨을 두드렸다. 루시퍼는 그 팔을 밀어내고 주인님께 말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정말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초고속 공략에 전념해야 하는 지금, 진짜인지 가짜인지도 모를 상념에 잠겨 있을 시간은 없다.
우선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고오오—.
루시퍼의 창 끝으로 흑색의 구체가 모여들었다.
넓게 펼쳐진 성채의 복도는 군데군데 부서져 있었다.
무너진 바닥의 틈새에 숨어 있는 마물들과, 떨어져 내린 천장의 구조물에 자리 잡은 마물들.
무수한 마물들이 어둠 속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 수는 자그마치 7,000 마리.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성채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을 것이다.
"제 힘을 보여드리기엔 그 대상이 너무 약하지만······. 준비 운동으로는 나쁘지 않겠네요."
날개를 펼친 루시퍼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전용 무기를 쥔 순간부터 한 쌍의 날개가 늘어 있었다.
고오오-.
루시퍼는 창을 앞으로 뻗었다. 피잉-! 창 끝에서 부풀었던 흑색 구체가 쏘아졌다.
빠르게 날아간 구체는 저 멀리 복도의 중간쯤에 안착했다. 그 순간, 구체를 중심으로 막대한 기류가 형성되었다.
콰아아아—!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 거센 바람이 구체를 향해 몰려 들었다. 일대를 휩쓰는 폭풍.
키에엑!
크에에!
틈새에 숨어 있던 마물들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갔다. 거센 기류에 저항하며 기어오던 마물들도 이내 튕겨져 나갔다.
"!"
주강혁의 발 또한 떠올랐다. 청룡과 가브리엘이 주강혁을 붙잡아 주었다.
S급에 도달한 신체 능력으로도 버티기 힘든 수준.
"이게 전용 무기의 위력?"
"아뇨, 이제 시작입니다."
청룡은 싱긋 웃으며 말했다.
"······?"
가까스로 무게 중심을 잡은 주강혁이 고개를 들어 올린 그때였다.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치솟았다.
콰아아아앙—!
귀청이 떨어질 듯한 굉음과, 주변을 집어 삼키는 막대한 폭발이 복도 전체로 퍼져나갔다.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강력한 충격이었다.
귀가 먹고 눈이 멀 것 같은 폭발.
'무슨······.'
그러한 파괴의 현장 속에서.
촤르륵—!
『 마물 1,000 마리를 처치하셨습니다. 』
『 마물 2,000 마리를 처치하셨습니다. 』
『 마물 3,000 마리를 처치하셨습니다. 』
···
『 마물 7,000 마리를 처치하셨습니다. 』
주강혁은 시스템 창이 빠르게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 * *
무명이 3관문으로 향한 직후.
"무명 혼자서 3관문을 공략할 거란 말씀이신겁니까?"
사최헌에게 설명을 들은 일본의 헌터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본 랭킹 1위 하야토도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무모합니다."
"무명의 영상을 봤을텐데요."
"이건 경우가 다릅니다. 저희도 돕겠습니다."
하야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일본의 헌터들도 걸음을 옮겼다.
"거참, 가봤자 할 것도 없다니까요."
"말리지는 않겠지만······."
한국의 헌터들이 말렸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순 없었다.
일본 측에는 마인(魔人)이 숨어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일본의 헌터들은 미야모토를 철석같이 인간이라고 믿어 버렸다.
한국에서 마인을 색출해내자고 하지 않았더라면······.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명을 혼자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일본의 헌터들이 3관문으로 향했다.
사최헌은 굳이 말리지 않았다.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갈 뿐. 마인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알아낸 천이령도 걸음을 옮겼다.
"무명이 대단하다는 건 압니다만, 이건 SS급 게이트입니다."
하야토는 뒤따라오는 사최헌을 향해 말했다.
"작은 사고가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고요. 적어도 무명이 힘을 온존할 수 있도록······."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거센 바람이 그들을 빨아들일 듯 불어왔기 때문이다.
"다들 무기로 몸을 지지해라."
하야토는 침착하게 명령했다.
콰악, 콱!
주변의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땅에 박은 채 버텼다. 천이령은 흑마력을 사용해 지면에 몸을 고정했고, 사최헌은 그냥 버텨냈다.
"크윽, 3관문의 시련인 건가?"
"이 정도는 뭐······."
형성된 기류가 심상치 않았다.
일본 헌터들이 눈을 찡그렸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었다.
"방어막을 펼쳐야 할 겁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던 사최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콰아아아—!
강력한 폭발이 몰려왔다. 3관문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폭발이었다.
지면과 벽면이 솟구쳐 오르고, 마물들을 일시에 재로 만들어 버리는 뜨거운 열기.
"방어막!"
쩌적, 쩌저적-!
일본의 S급 헌터들이 펼친 방어막 위로 무수한 금이 새겨졌다. 폭발에 직접 닿은 것도 아닌데 이만한 위력이었다.
금이 간 보호막 사이로 새어 나온 폭발의 충격이 보호막 안쪽까지 휘몰아쳤다.
S급 헌터들의 전신이 떨려오는 충격이었다.
"크윽, 무슨······?"
눈을 찡그린 하야토가 의문을 표했다. 사최헌을 바라보며 설명을 요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사최헌은 시선을 피했다.
무명(無命)이 무슨 짓을 했다는 건 안다.
하지만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흑마력은 아마도······. 루시퍼 사부의 힘."
뒤쪽에 있던 천이령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게 무명 본인의 힘도 아니란 건가······?"
하야토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헌터의 시대.
시스템은 인류가 쌓아 올린 무력을 부정했다.
총과 미사일 등의 열병기로는 게이트를 공략할 수 없었다.
헌터들은 칼과 창 같은 냉병기를 들고 게이트로 뛰어들었다.
창과 갑옷을 걸친 과거의 병사들처럼 헌터들은 마물을 사냥했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헌터들이 각자의 능력을 펼쳤지만, 결국 냉병기를 활용한 국소적인 전투에 지나지 않았다.
마물을 사냥하기 위해선 직접 전장에 나서야 했고.
헌터 본인은 목숨을 걸고 전투를 펼쳐야만 했다.
하지만 이건.
이건······.
그야말로 폭탄이었다.
현대전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방적인 폭격이자, 무지한 마물들을 상대로 하는 무자비한 말소.
콰아아아—!
폭발의 여파가 지나가자,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글거려야 할 마물도, 3관문을 이루고 있던 성채의 흔적도 전부 재가 되어 사라져 있었다.
그야말로 초토화.
폭격을 맞은 듯한 상황이었다.
콜록, 콜록.
새까만 재와 먼지를 뒤집어 쓴 일본의 헌터들이 먼지를 뱉어냈다. 그들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무어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감탄조차 나오지 않는 수준.
이건 개인이 낼 수 있는 그런 화력이 아니었으니.
그런 그들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대한민국&일본이 3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 두 국가가 혜택을 받습니다. 』
『 체력 및 마나 회복률 5% 상승 』
『 스킬의 습득이 5% 쉬워집니다. 』
하야토는 벌어진 입을 닫았다. 얼굴에는 까만 재가 묻었고, 머리카락도 완전히 엉망이었다.
"그."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하야토가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의 무명(無命).
소문이 부풀려졌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국의 헌터들에 대해선 으레 부풀려 말하게 되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건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수준이지 않은가.
"···얌전히 돌아가겠습니다. 도와준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네요."
하야토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 * *
종말의 성전.
마인 자칼의 말대로, 칠죄종 나태는 5관문 초입에 성전을 배치했다.
거대한 문이 5관문으로 이어지는 통로 자체를 막고 있었다.
그러한 성전의 끝자락.
칠죄종 나태는 고풍스런 방 안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어느 명망 높았던 공작가의 집무실을 본뜬 방이었다.
"차의 향이 좋군."
나태는 여유롭게 찻잔을 홀짝였다.
그의 외양은 피곤이 짙은 중년 남성의 모습이었다. 눈밑까지 내려온 다크 서클이 남자의 인상을 한층 음울하게 만들었다.
마호가니 원목으로 만들어진 탁상에는 체스의 말들이 놓여 있었다.
헌터들의 위치와 상황을 실시간으로 나타내는 기물이었다.
"지금이 한가롭게 차나 쳐드실 시간이신가?"
가죽 소파에 몸을 기댄 또 다른 칠죄종 '질투'. 소년의 모습을 한 그는 사납게 비아냥댔다.
질투는 벌떡 일어나서 원목 탁상 앞으로 다가왔다. 쿵, 양 손을 탁상 위에 거칠게 내리쳤다.
"1초 만에. 빌어먹을 사도가 1초 만에 3관문을 돌파했다고."
3관문이 돌파 되었다.
말도 안되는 속도로.
나태는 차분히 정정했다.
"정확히는 5분이지."
"마물들이 1초 만에 싹다 뒤졌는데 뭔. 7천 마리가 1초만에 증발했는데 차가 목구멍으로 넘어가나?"
질투의 비아냥에도 나태는 무표정했다. 질투는 화를 참지 않았다.
"심지어 숨어든 마인들은 무명(無命)의 발목이라도 잡겠다고 SS급 게이트를 인간 대신 공략해주네?"
일본 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국가에 속해 있는 마인들이 무명과 만나기 위해 전력으로 관문을 통과하고 있었다.
"대단한 칠죄종 납셨어. 안 그래? 종말이 아니라 구원을 하러 오셨네요. 아주. 야, 지금 당장 명령부터 수정해. 권속들한테 인간들이나 죽이라고 그래."
"아니지, 질투. 상황을 이용하는 거다."
나태는 느긋하게 차를 홀짝였다.
"4관문에 배치된 내 인형들을 생각해 봐라. 어차피 인류는 그 앞에서 가로막히게 되어 있다."
마인의 활약에 힘 입어 빠르게 공략을 마친 인간들은 4관문에서 전멸할 예정.
"다급해져야 하는 건 무명이다. 우리는 시간을 끌다가, 그 조급함을 노리면 되는 거고."
이제 곧 4관문에 있던 인형들이 무명을 마주할 거다. 나태는 느긋했다.
"교만과 달리 나는 다른 칠죄종 소환에 힘을 빼지 않았다. 심지어 이중 게이트 속에 있지."
발휘할 수 있는 힘 자체가 다르단 의미였다.
"인형들은 종말의 성전에서 만들어져 밖으로 나갔다. 그 하나하나가 사도급의 강함을 지닌 건 틀림 없지."
질투는 대꾸하지 않은 채 눈썹을 찡그렸다.
더 해보란 의미였다.
"사도들의 발목을 묶으면 그 다음은 무명의 차례다. 우리는 놈의 능력을 하나하나 해체하듯 음미하고 분석할 거다."
나태는 다시금 차를 마셨다.
씁쓸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능력의 정체와 한계를 알아낸 뒤에는, 천천히 압박하면 충분하다. 무작정 힘으로 부딪히는 건 피곤할 뿐이란 거지. 알겠나?"
나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는 그 순간이었다.
파삭-!
체스판 위에 올려져 있던 기물 하나가 박살났다.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파삭, 파삭-! 세 개의 기물이 산산조각이 났다.
그 하나 하나가 칠죄종 나태가 자랑하는 전투 인형들이었다.
"······?"
나태는 전투 인형이 보내온 사념을 통해 상황을 읽을 수 있었다.
- 고작 인형? 이걸로 우릴 막겠다는 거냐?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지금이라면 죄다 쓸어버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흑색의 사도가 소리치고 있었다.
"이상하군."
교만과의 전투에서 사도들의 전투력은 이미 파악했을 터. 새로운 신화급 사도의 전투력까지 고려한 배치였다.
최소한 시간은 끌었어야 했다.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이래선 아무런 분석이 못 된다.
지극히 곤란했다.
사도들이 고전해야, 무명은 자신의 힘을 더 많이 사용할테고 그만큼 칠죄종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뭐야. 전투 인형이 왜 이렇게 빨리 죽어. 이것도 예상한 거냐?"
질투가 물었다.
나태의 미간이 처음으로 살짝 좁혀졌다.
"조용히 해라."
나태는 기물들을 재차 배치했다. 다른 4관문에 있던 전투 인형들을 무명쪽으로 보냈다.
그리고 얼마지나지 않아.
파삭, 파사삭—!
전투 인형들이 죄다 파괴되었다.
"뭔······."
나태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무명이 한 짓이 아니다.
순수하게 사도 한 명한테 당했다.
이어지는 시스템 메시지.
『 대한민국&일본이 4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잠깐만. 4관문 돌파 됐으면."
당황한 질투가 말을 더듬었다.
나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4관문이 돌파 되었으면, 다음은 5관문.
그리고 5관문으로 향하는 광장에는······.
종말의 성전이 있었다.
콰아아앙—!
거센 진동이 종말의 성전을 뒤흔들었다. 이어서 루시퍼의 기세등등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칠죄종, 지금이라도 항복하면 곱게 죽여주마!"
무명 그리고 사도들.
그들의 공략은 빨라도 너무 빨랐다.
52화 궁극
콰아아앙—!
루시퍼의 마도광선이 종말의 성전에 직격했다. SS급 게이트 내부의 돌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전용 무기를 손에 쥔 루시퍼의 출력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성전의 입구는 멀쩡했다.
"칫, 더럽게 단단하네."
루시퍼가 혀를 찼다. 청룡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종말의 성전으로 향하는 문을 살폈다.
기이한 문양이 새겨진 거대한 문.
그리고 주변으로 나타난 성전의 형상.
"시스템에 의해 보호되고 있네요. 게이트와 같은 취급일 겁니다."
게이트는 물리적인 방법으론 사라지지 않는다.
내부의 보스를 처치하거나 미션을 클리어하는 등, 올바른 방법으로 공략했을 때만 소멸 된다.
종말의 성전도 마찬가지다.
내부에 존재하는 보스 칠죄종을 처치하기 전까지는 굳건하리라.
"그래도 경고는 되었겠지."
"역시 제 뜻을 헤아려주시는 건 주인님뿐이십니다."
내 말에 루시퍼가 씩 웃으며 창을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덜그럭, 덜그럭.
성전의 문틈으로 갑주를 걸친 목각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들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 Lv.330 ]
[ Lv.325 ]
[ Lv.332 ]
놈들의 레벨은 비정상적으로 높았다. 제주도에 마주했던 여왕과 비슷한 수준이다.
여왕은 마물의 정점이었다고 쳐도, 이놈들은 그냥 잡몹에 불과할 텐데.
"이중 게이트에서 빠져나와서, 일시적인 던전 브레이크의 효과를 얻은 걸 겁니다."
청룡은 당연하다는 듯 설명했다. 루시퍼는 가소롭다는 듯한 표정으로 인형들을 노려봤다.
"뭐야, 아까 파괴한 놈들이랑 다를 것도 없잖아."
"맞습니다. 무기를 소유하신 루시퍼 선배님께 상대가 안 되는 것도 사실이죠."
어째 무기가 없었다면 쉽지 않았을 거란 말처럼 들린다.
콰앙-! 콰아앙-!
루시퍼의 창끝에서 쏘아진 마도광선이 인형들을 꿰뚫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가브리엘이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녀석은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주인님, 백색의 무기 조각이 필요해."
실제로 가브리엘은 전투에 영 참여하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가 강하다기보단, 무기를 손에 넣은 루시퍼가 보이는 걸 죄다 부수고 있어서였다.
가브리엘은 한숨을 뱉어냈다.
"빨리 모으지 못한다면 나는 공기가 될지도······."
"공기?"
"쓸모없게 된 동료는 금세 잊혀지기 마련이거든. 공기처럼 존재감이 옅어지는 거야. 전문 용어로 공기화."
이 상황에 무슨 소린가 했네.
백색 무기 조각도 완성까지 2개 남았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금방 나올거라고 본다.
더욱이 가브리엘의 궁극기는 적의 레벨을 낮춘다. 위조품으로도 그만한 위력이었는데, 진품은 얼마나 강할지. 존재감이 옅여질 일은 없다.
"주인님, 그 녀석 헛소리는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콰앙!
루시퍼가 여유롭게 인형 하나를 마무리했다. 청룡도 앞으로 나서서 다가오는 인형을 걷어냈다.
강한 마력의 기류가 휘몰아쳤다.
로브가 바람에 휘날렸다.
루시퍼와 청룡의 활약에 힘 입어 인형들은 3분만에 죄다 박살났다.
이제 종말의 성전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는 마물은 없었다.
나는 걸음을 옮기며, 인벤토리에서 빵 하나를 꺼냈다.
『 [ 성유물 ] 천계의 하얀 빵 』
빵을 적당한 크기로 한 입 베어 물었다.
에너지의 보충이다.
입 안으로 달콤 시원한 맛이 퍼져나갔다.
동시에 지독한 허기가 사라지고 포만감이 차오른다.
'이제 남은 빵은 네 개.'
죽음의 물결 이후로 급할 때마다 먹다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사도가 셋이 되면서,
허기가 찾아오는 속도도 빨라졌다.
출력이 강해지면 그만큼 에너지도 많이 소모되는 게 틀림 없다.
루시퍼가 전용 무기를 들고서 벌써 세 입은 베어 물었으니.
"빵을 더 구할 수는 없으려나?"
나는 가브리엘에게 물었다.
아직 여유가 있지만 미리 구해둘 수 있으면 좋다.
"음, 재료만 구하면 더 만들 수 있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인데, 네가 만들 수 있는 거야?"
"아니, 천이령이."
가브리엘이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SS급 게이트를 공략하면, 그때부터 가능할 거야."
가브리엘은 그리 말했다.
시스템의 새로운 기능이 풀리거나, 새로운 재료가 나타난다는 의미겠지. 그렇다면 안심이다.
SS급 게이트의 공략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종말의 성전.
이곳을 클리어 해야 다음이 생긴다.
"그럼 들어간다."
"가시죠, 주인님."
"칠죄종을 빠르게 처치하고 이 공략에 종지부를 찍는 겁니다."
나는 종말의 성전 내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동시에 사도들도 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종말의 성전에 입장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해당 이벤트에 집중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을 응원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을 주시합니다. 』
이제부터 칠죄종의 영역.
여기서부터가 본방이다.
* * *
『 종말의 성전 - 첫 번째 시련 』
『 엘리트 마수 처치 0 / 7 』
내부는 교만 때와 같은 성전이었다.
양측에 거대한 기둥이 늘어선 거대한 성전.
다른 점이 있다면, 천장 위로 거대한 톱니바퀴와 기계 장치들이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 정도.
후우.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 입장한 헌터는 나 혼자다.
현재 내 레벨은 143.
인류의 최대 레벨이 150이란 점을 떠올리면 상당한 수치다.
'다만······.'
이번에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칠죄종 교만은 문을 열어젖히며 나를 불러들였지만, 나태는 철저하게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칠죄종은 방어하고, 나는 공략해야 한다.'
놈은 계속해서 인형들만 보내 오고 있었다. 마치 나를 테스트 하듯이.
'즉살의 약점은 명확하다.'
보이지 않는 것은 죽이지 못한다.
생명체가 아닌 것은 죽이지 못한다.
- 칠죄종은 기억을 공유한다. 교만과의 전투에서 무언가를 깨달았을지도 모르지.
사최헌은 그리 말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즉살의 원리를 대강은 눈치채고 있다는 뜻이려나.'
아니면 단순히 날 경계해서 일수도 있다.
여기서부턴 정보전이 된다.
내가 취할 행동은 하나다.
'능력을 최대한 사용하지 않으면 그만이야.'
성전의 끝자락, 7체의 인형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각각의 인형들은 이전과 달리 제대로 무장하고 있었다.
칠흑의 갑주와 대검을 걸친 목각 인형이 3개체. 화려한 지팡이와 로브를 두른 목각 인형이 4개체.
"또 목각 인형인가. 슬슬 짜증나는데."
"이번에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퍼는 창을 앞으로 겨눴고, 자세를 잡은 청룡의 아대 위로는 푸른 빛이 맴돌았다.
『 엘리트 마수 처치 0 / 7 』
시련에서 제시하는 목표를 클리어하지 않으면 다음 시련으로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이것은 시스템이 설정한 게이트의 법칙. 무시할 수 없다.
'어렵지는 않을 거다.'
나는 철저하게 사도들로만 종말의 성전을 공략할 생각이었다.
그 의도를 읽어낸 걸까.
전투가 시작되려는 찰나, 성전에 음울한 목소리가 드리웠다.
[ 반갑다. 무명(無命). 나는 칠죄종 나태다. 내 성전에 온 걸 환영한다. ]
"우리가 인사나 나눌 사이는 아니지 않나?"
콰앙-!
루시퍼의 창끝에서 흑색의 섬광이 쇄도했다. 고도로 압축된 흑마력이 눈앞의 인형을 덮치기 직전.
스윽.
로브를 두른 목각 인형이 고개를 삐걱이며 스태프를 들어 올렸다.
츠즈즛—!
마도광선이 빛과 함께 소멸했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방금 전까지 상대했던 인형들과는 뭔가가 달랐다.
"쯧."
인형들의 기운을 살핀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주인님, 이 인형들 지금까지랑은 다릅니다. 영혼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도 그냥 영혼이 아니라······."
[ 알아보는가. 이들은 내가 다른 차원에서 수집한 영혼이다. ]
나태는 담담히 설명을 시작했다.
[ 한때 융성했던 마탑주의 혼, 대륙을 호령했던 전사의 혼, 세계를 구하고자 몸부림 쳤던 영웅의 혼······. ]
목각 인형에 깃든 영혼들.
그것들은 칠죄종 나태가 직접 수집해 온 것들이었다.
[ 모두 세계의 정점이라고 불렸던 존재들이다. 그런 이들의 영혼이 내 손아귀에 있는 것이다. ]
나태는 자랑스레 말했다.
[ 칠죄종은 멸하지 않는다. 세계를 거듭하며 다시 태어나고, 새로운 종말의 역사를 써내려가지. 너희들이 존재하는 현세(現世) 또한 그 무수한 세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
"······."
시스템이 나타난 세계에서,
칠죄종의 등장은 필연적.
[ 이르던 늦던 종말은 결국 다가오게 되어 있다. 인간 하나가 발버둥쳐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지. ]
종말은 결국 다가온다라.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일곱체의 인형들이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그들의 칼날에선 오러가 피어오르고, 스태프에선 막강한 마력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그들의 영혼 하나 하나가 과거에는 명망 높은 영웅이었다.
그럼에도 멸망 했다.
그뿐 아니라, 칠죄종 나태의 손에 사로잡혀 영원토록 고통받고 있다.
나태가 하고자 하는 말은 명확했다.
[ 무명(無命). 무의미한 발버둥을 멈추고 다가오는 종말에 몸을 맡겨라. 종말 이전의 삶을 즐겨라. 그리하는 편이 효율적이지 않은가. ]
어차피 죽을 거니 포기해라.
그런 개소리를 길게도 말하고 있었다.
'······.'
하지만 칠죄종은 그리 만들어진 존재였다.
마물들이 파괴와 살육을 추구하듯,
인간들이 생존과 번영을 추구하듯,
칠죄종은 멸망을 노래하고 종말을 불러들일 뿐이다.
그런데 사도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너 진심이냐?"
루시퍼는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이었다.
다른 사도들도 비슷한 표정이었다.
"웃기네."
루시퍼가 어이없단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주인님, 성좌로서 오랜 시간 수많은 세계의 흥망을 지켜봤지만. 이런 적은 처음입니다."
"처음이라니?"
"칠죄종이 나태가 제대로 된 대화를 시도한 상대는 주인님이 처음이란 뜻입니다. 내용이야 둘째치고요."
옆에 있던 가브리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 놈들 많이 쫄리는 듯."
"본래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게 보는 놈입니다. 이름인 '나태'처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녀석인데. 흥미롭네요."
청룡도 미소 지었다.
[ ······웃기는 소리를. ]
열 받았나?
콰앙—!
나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인형들이 땅을 박차고 달려 들었다. 그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움직임이었다. 전투가 개시 되었다.
루시퍼의 창끝에서 여러 갈래의 마도 광선이 쏘아졌다. 동시에 로브를 걸친 인형들의 마법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콰과광!
청룡의 팔목 보호대 위로 푸른 전기가 치솟았다. 대검을 든 인형과 청룡의 주먹이 부딪히며 섬광이 터져나왔다.
카각, 카가각!
청룡은 사방에서 날아드는 검격을 신묘한 움직임으로 막아냈다. 세 마리의 인형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위쪽에선 공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허공을 빠르게 날아다니며 흑마력을 퍼붓는 루시퍼. 그가 상대하는 인형은 4개.
마법과 오러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폭발하고, 비산한다.
나는 그들의 움직임을 시야에 담으려고 노력했다.
'······간신히 보인다.'
모든 전투를 소상히 파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형체를 가늠하고 상황을 눈에 넣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콰앙-! 쾅!
"주인은 내가 보호할게."
내 옆에 딱 붙은 가브리엘이 날아온 마탄들을 쳐냈다. 가브리엘은 내 주변 2m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나를 엄호했다.
콰앙!
청룡을 상대하던 검사 하나가 내쪽으로 포탄처럼 쏘아져왔다.
카가각—!
"어딜!"
가브리엘의 성력과 인형 검사의 오러가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가브리엘의 오른발이 검사의 발목을 쳐냈다. 무게 중심이 무너진 검사의 가슴팍에 오른 주먹이 꽂혔다.
콰앙-!
크게 밀려난 검사 인형.
덥썩!
"선배, 나이스입니다."
알맞은 위치에서 검사의 목덜미를 청룡이 잡아채선 다른 인형들을 향해 내던졌다. 인형들이 잠시 주춤하는 찰나, 청룡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가 번개가 되어 인형들을 강타했다.
콰과광!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다.
결착은 쉽게 나지 않았다.
"이 새끼들, 날파리 같기는······!"
"선배님, 조심하세요. 한 놈이 빠져나갔습니다!"
분명히 사도가 유리한 것은 맞다.
하지만 압도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는 아니었다.
이 상황에서 칠죄종이 나타난다면 전세는 확실하게 기울 거다.
그럼에도 칠죄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당연하다. 칠죄종도 나를 경계하고 있을테니까.
[ 무명, 움직이지 않을 건가? 4관문에 도달한 인류는 인형을 돌파하지 못하고 전멸할 거다. ]
나태의 음성이 재촉하듯 울려퍼졌다. 이것으로 확실해진다.
칠죄종의 목적은 내 능력을 확인하는 것.
아직 4관문에 배치한 인형이 몇 기 남은 모양이다.
인류의 헌터들이 그곳에 도착하면 어쩌면 전멸 당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문제 없다.
"······."
어차피 헌터들이 4관문까지 도달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마물 7천 마리.
마인이 가세해 있어도 잡으려면 한참 걸린다.
그 정도 시간이면 칠죄종을 처치하고도 남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움직이지 않는 게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거다.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인형은 어차피 못 잡아.'
인형은 생명체가 아니다.
즉살이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현재 소지한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3장.
무조건 칠죄종을 잡는데 사용되어야 한다.
쓸데 없는 곳에 낭비해선 안된다.
물론 이 사실을 칠죄종에겐 들켜선 안 되고.
그러니 뻔뻔하게 나가자.
"직접 움직일 필요성을 못 느끼겠군."
긴장되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거짓말이 자연스레 내뱉어졌다. 따지고보면 영 없는 말을 지어낸 것도 아니다.
'루시퍼.'
정말로 내가 나설 필요가 없다.
내게는 사도들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주인님."
내 눈빛을 확인한 루시퍼가 창을 들어 올렸다.
고오오--!
창끝으로 막대한 흑마력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짧은 순간, 밝았던 성전 위로 어둠이 내려 앉기 시작했다. 루시퍼를 중심으로 빛은 사라지고 어둠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전용 무기.
그 대단함은 단순히 사도의 능력을 올려주는 데에만 있지 않다.
진짜 능력은 사도의 진정한 힘을 개방하는데 있다.
진정한 힘은, 단연 궁극기를 의미한다.
『 사도 '루시퍼'가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흑암(黑暗) : 종말의 밤 』
화아악-!
루시퍼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강대한 흑마력이 종말의 성전 일대를 뒤덮었다. 파직, 파지직-! 검은 스파크가 끝없이 퍼져나갔다. 인형들이 잠시 굳어지고, 청룡도 공격을 멈춘 채 뒤를 돌아봤다.
일순 찾아온 암전.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루시퍼의 목소리가 성전 내부로 똑똑히 울려 퍼졌다.
"두려워해라, 칠죄종."
루시퍼의 뒤로 떠오른 흐릿한 흑색의 후광이 기이한 광경을 자아냈다.
어둠이 어둠을 비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루시퍼만이 은은한 빛을 내며 떠올랐다. 눈을 뜬 루시퍼의 눈동자에 보랏빛 이채가 번뜩였다.
이어서 떠오른 시스템의 메시지는 단 한 줄 뿐이었지만······.
『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그것으로 충분했다.
53화 한계돌파
시스템 제한(制限).
현세에 강림한 사도들은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는 당연한 조치였다.
성좌 수준의 상위 존재가 현세에 그대로 강림하면 세상은 쑥대밭이 되고 말테니.
시스템은 언제나 균형을 추구하고,
정해진 법칙 아래에서 흘러간다.
따라서 제한을 해제한다는 것은 어지간해서는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사도의 궁극기는 더욱 특별할 수 밖에 없었다.
제한을 해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수단 중 하나였기에.
『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
루시퍼의 손끝에서 퍼져나간 암흑이 성전을 뒤덮었다.
화륵.
암흑 속에서 동료들의 기운이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의 성력이 새하얀 불꽃이 되어 일렁였다. 청룡의 푸른 기운 또한 잔잔하게 타올랐다. 청룡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맺혔다.
"제한이 해제된다는 게 이런 기분이군요. 몸에 달려 있던 모래주머니를 떼어 놓은 듯하네요."
낮게 깔린 어둠 속에서도 적의 모습은 더욱 생생하게 보였다. 인형의 윤곽선이 오히려 뚜렷하게 떠올랐다.
파슷.
푸른 선 하나가 곧은 궤적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목덜미를 가격당한 인형이 갑주와 함께 산산조각 나며 흩어졌다.
청룡은 그 뒤편으로 가볍게 착지했다.
애먹었던 인형이 단번에 처리 되었다.
콰드득-!
가브리엘도 달려드는 인형 하나의 옆구리를 가격했다. 인형의 허리춤에서 성력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허공으로 날아오른 루시퍼는 손가락을 뻗었다. 손끝에서 쇄도한 고압의 마도 광선이 인형을 꿰뚫었다.
콰아앙—!
로브를 두른 인형들이 급히 스태프를 휘둘렀지만 소용 없었다. 흑마력은 그들의 마법조차 꿰뚫었다. 박살이 난 인형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7체의 인형들.
긍지 높은 전사와 명망 높았던 마법사들의 혼을 담은 그릇이 처참하게 부서져 내렸다.
엘리트급에 해당하는 마물이라고 한들, 제한을 해제한 사도의 힘과 비교하면 나약하기 짝이 없으니.
스르륵—!
인형들이 속박하고 영혼이 해방되었다. 몽글몽글하게 떠오른 영혼들은 그대로 주강혁의 랜턴 위로 빨려 들어왔다.
오랜 시간 속박당해 찢기고 빛바랜 영혼들.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이 선고되는 순간이었다.
영혼등 위에서 밝은 빛이 샘솟았다. 주강혁은 눈앞으로 떠오른 조각을 손에 쥐었다.
[ 하. 이것 참. 영혼마저 강탈한단 말인가. ]
영혼을 빼앗긴 나태에게서 노기 어린 음색이 들려온다. 그러나 음성을 보내올 뿐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처억.
바닥에 내려앉은 루시퍼가 무명의 오른편에 섰다. 가브리엘이 왼편으로 걸음을 내딛고, 청룡이 그 뒤를 따른다.
"가시죠, 주인님."
펼쳐졌던 어둠이 거두어졌다.
파직, 파지직—!
그러나 궁극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루시퍼의 뒤로 흐릿하게 떠오른 흑색 후광이 그걸 증명하듯 빛났다.
『 엘리트 마수 처치 7 / 7 』
『 첫 번째 시련을 클리어하셨습니다. 』
끼이익—!
굳게 잠겨 있던 시련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루시퍼는 정면을 향해 창을 들어 올렸다.
"칠죄종, 딱 기다리고 있어라. 박살을 내줄 테니까."
섬뜩한 루시퍼의 목소리가 성전에 울려 퍼졌다.
[ ······. ]
칠죄종으로부터 답은 없었다.
루시퍼의 궁극기 제한 시간은 약 30분.
종말의 성전을 공략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콰과과과—!
세 사도는 파죽지세로 치고나갔다.
주강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주변을 응시하며 성전의 내부를 나아가는 게 전부였다.
『 두 번째 시련이 공략되었습니다. 』
두 번째 시련을 가로막고 있던 식물형 마물들은 통째로 태워졌다.
『 세 번째 시련이 공략되었습니다. 』
세 번째 시련에서 기다리고 있던 골렘들도 상대가 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놈들은 돌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마침내 칠죄종이 기거하는 방으로 향하는 복도가 나타났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 단 5분.
순수하게 이동하는데에만 시간이 걸렸을 따름이다.
[ ······사도만으로 여기까지 도달하다니. ]
보스의 방으로 향하는 복도에는 보랏빛의 기운이 짙게 깔려 있었다.
여기가 칠죄종을 만나기 위한 최종 시련이었다.
[ 올 수 있다면 와봐라. 무명. 내게 닿으려면 네가 가진 모든 힘을 펼쳐야 할 거다. ]
주강혁은 복도로 향하는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 앞에는 짙은 안개가 깔려 있었다.
루시퍼가 시험 삼아 흑마력을 방출해 보았지만, 내부를 가득 메운 안개는 사라지지 않는다.
- 침몽의 영역. 나태를 처치하기 위해서 거쳐야하는 최종 관문이다.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지가 공략의 성패를 결정하게 될 거다.
사최헌은 그리 말했다.
'들어가면 잠들게 되는 장소.'
저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권속이었던 마인이 사용했던 수면의 안개와 비슷했다.
그러나 저 안에선 상위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
들어가게 되는 순간,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작용한다.
이는 종말의 성전을 공략하는 헌터가 겪어야 할 시련.
'여기에 진입하면 칠죄종 나태도 잠이 드는 건 마찬가지.'
하지만 현시점 강림한 칠죄종은 총 두 명이다.
나태와 질투.
내가 잠에 빠지면,
질투가 모습을 드러낼 거다.
그렇다고 전진하지 않을 순 없다.
이곳을 넘어가지 않으면 칠죄종을 마주할 수 없으니까.
칠죄종에게는 방어전.
나와 사도들에겐 공성전이 되는 셈.
"뒤는 맡길게."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청룡과 가브리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한이 해제된 둘의 눈빛에는 자신감이 감돌고 있었다.
"맡겨만 줘."
"주인님이 무사하실 수 있도록 반드시 보호하겠습니다."
이 둘이라면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다.
"가자, 루시퍼."
"예."
나는 루시퍼와 함께 안개 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그래, 그럴 수밖에 없겠지. ]
항거할 수 없는 졸음이 쏟아진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호흡이 느려진다. 전신을 감도는 나른함에 눈 앞이 흐려진다.
인간의 커다란 욕구 중 하나인 수면욕이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몇 걸음 걸어나갈 수 있었던 건, 내가 가진 지고의 정신 덕분이겠지.
기우뚱-. 몸이 기울고, 바닥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의식의 끈이 희미해지는 바로 그 순간.
화악-!
나는 꿈속에서 눈을 떴다.
* * *
『 최종 시련 : 침몽의 영역 』
주강혁은 넓은 평원의 한 가운데 누워 있었다. 눈이 닿는 모든 장소에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낙원.
"주인님. 괜찮으십니까?"
고개를 돌리자, 먼저 몸을 일으킨 루시퍼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푸른 하늘 아래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끝없이 펼쳐진 꽃들의 화원.
그러나 그 위로 떠오르는 메시지는 의미심장했다.
『 30분 동안 생존하십시오. 』
『 남은 시간 - 00 : 29 : 41 』
최종 시련에 도달한 헌터가 받는 메시지였다.
사냥이나 처치가 아닌 생존.
그 시간도 겨우 30분 남짓.
본래 종말의 성전을 공략했어야 할 헌터들은 전부 최상급의 실력을 지닌 랭커들이다.
그런 헌터들에게 30분 생존이라니.
얼핏보면 헛웃음을 터트릴만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주강혁은 알고 있었다. 사최헌으로부터 미리 들었기에.
생존.
그 두 글자는 결코 가볍지 않다.
침몽의 영역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엄청난 시련이란 뜻일테니까.
[ 드디어 직접 얼굴을 마주하게 되어 기쁘군. ]
허공에서 칠죄종 나태가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철저하게 모습을 숨기던 것과는 반대였다.
퀭한 두 눈을 한 중년의 남성.
그의 복장은 중세의 귀족처럼 단정했다. 나태는 목 부근의 넥타이를 고쳐매며 무명을 내려다보았다.
[ 아, 바로 죽이지는 않는 건가? 이거 친절하군. ]
"······."
그의 목소리에선 격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강혁조차 고개를 들어 놈을 똑바로 보는 것이 어려웠다.
[ 여기는 침몽의 영역이다. 나태의 끝은 영원한 잠으로 완성된다는 나의 그런 소망이 반영된 장소지. ]
나태는 무명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웠다. 본체가 아닌 분신이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심지어 분신을 만들어내는 건 나태의 권능이 아니었다. 분신 생성은 교만의 특기였지, 나태와는 결이 다른 능력이었다.
그럼에도 나태는 어렵지 않게 분신을 내세웠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하나였다.
이곳은 꿈의 세상.
나태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가상의 장소이기에.
[ 아, 꿈속이라고 방심해선 안 된다. 이곳에서 목숨을 잃으면 실제로 죽게 되니까. ]
나태의 입꼬리가 기괴하게 비틀렸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땅 속에서 무수한 인형들이 기어나왔다.
[ 침몽의 영역을 펼칠 수 있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다. 칠죄종도 제한에 묶이는 신세인 건 매한가지란 말이지. 그러니 빨리 끝내도록 하겠다. ]
얼굴이 없는 마네킹과 같은 목각 인형들. 그들 중 하나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콰앙—!
루시퍼의 창과 인형의 팔이 맞부딪혔다.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평원의 꽃들이 일제히 흔들렸다.
"크흑?! 뭔······."
공격을 받아낸 루시퍼의 눈이 커졌다.
평범한 인형인데,
말도 안 되는 힘이었다.
창을 쥔 루시퍼의 손이 부들부들 떨려오고 있었다.
[ 왜 그러지? 흑색의 사도.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지 않았나? ]
나태가 손가락을 튕기자, 루시퍼와 마주한 목각 인형의 뒤쪽으로 흑색의 날개가 돋아났다.
얼굴 없던 인형에게 피부가 입혀지고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 왔다. 그 모습은 영락없는 루시퍼였다.
모습뿐만이 아니다.
콰아앙—!
지면을 뒤흔드는 막대한 흑마력의 폭발.
나태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침몽의 영역에서 나는 전능하다. 네 놈이 자랑하는 무기도, 이곳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란 뜻이지. ]
거리를 벌린 인형의 손끝에서 수 갈래의 마도 광선이 발사되었다. 창을 들어 올린 루시퍼도 그에 맞서 광선을 발사했다.
그러나 침몽의 영역에서 승자는 정해져 있었다.
"크으윽······!"
루시퍼가 그대로 튕겨져 나갔다. 궁극기를 활성화 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상대가 안 된다. 전용 무기도, 제한의 해제도 허무하게 떨어져 나간다.
공중에서 쇄도하는 무수한 흑마력의 광선. 콰과광! 연이은 폭발과 함께 루시퍼가 바닥을 굴렀다.
[ 무명, 네 사도가 죽어간다. 이래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셈인가. ]
나태는 조롱하듯 말했다.
루시퍼는 창을 땅에 박고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수많은 인형이 주변을 둘러 싸고 있었다.
그 하나 하나가 루시퍼에 필적하는 강자다.
적어도 침몽의 영역에선 그러했다.
전용 무기를 들었음에도,
제한을 한 단계 해제했음에도 이길 수 없다.
"뭐, 이런 사기 같은······."
그러나 30분만 버티면 최후의 시련을 클리어 되고 침몽의 영역은 해제된다. 그것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고오오—.
나태의 손아귀로 붉은 마력이 모이고 있었다.
드드드······.
강대한 마력의 흐름이 일대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비켜, 이 새끼들아. 주인님!"
[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 셈인지. ]
루시퍼가 창을 휘두르며 주인을 지키러가고자 했으나, 인형들이 그걸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인형들의 거센 공격이 쏟아졌다.
[ 무명(無命), 무언가 공격할 수 없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
무명은 여전히 조용했다.
로브 속 무명의 표정은 읽어낼 수 없었으나, 나태는 확신을 얻었다.
없앨 수 있다면 진작에 그리했을 거다.
없애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칠죄종 교만을 처치한 무명.
그가 가진 힘은 결코 개인이 소유할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그것이 칠죄종의 경계를 불러 일으키고, 마인들의 두려움을 일깨웠다.
허나, 그 본질은 인간에 불과하다.
시스템에 종속되고 얽매이는 헌터.
무엇이 무명을 굳어지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해답을 내리기엔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무명은 자신의 힘을 발휘할 수 없단 것.
보라, 자신의 사도가 위험에 빠진 순간에도 그저 방관하고 있지 않은가.
고오오!
마침내 나태의 손바닥 위로 적색의 구체가 완성되었다.
[ 끝이다, 무명. ]
* * *
'침몽의 영역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그 안에서도 시스템은 작동하니까.'
사최헌은 그리 일러주며 아이템까지 건네 주었다.
『 분절의 목걸이 』
'이걸 사용하면 될 거다. 아공간으로 대피해서 시간을 끌어라. 그 공간에선 침몽의 영역이 약화될 거다.'
나태가 들으면 경악할만한 아이템이었다.실제로 침몽의 영역에서도 인벤토리는 그대로였다.
사최헌이 준 목걸이도 그대로 존재했다.
목걸이를 사용한다면 어렵지 않게 최종 시련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주강혁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전방에 시선을 집중할 뿐.
'희미하던 기운이······. 짙어졌다.'
루시퍼가 궁극기를 활성화 하고 나고부터였다.
- 범위 내 모든 아군의 제한을 1단계 해제합니다.
주강혁의 눈에 죽음의 기운이 보이기 시작했다.
궁극기의 특수 능력을 활성화 했을 때만 보이던 기운. 그것이 희미하게 보이고 있었다.
'제한의 해제가 내게도 영향을 미친 건가?'
범위 내 모든 아군.
거기에는 주강혁도 포함되어 있었다.
막연히 추측할 뿐이었다.
답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주강혁은 죽음의 기운을 움직이고자 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기운은 금세 흩어져 버렸기에.
그러나 시도하면 시도할수록 기운은 짙어졌다.
침몽의 영역에 들어섰을 때부터 죽음의 기운이 선명해졌다. 기운의 조종도 한층 쉬워졌다. 눈앞의 인형들과 나태를 대상으로 주강혁은 죽음의 기운을 움직였다.
'인형은 무생물······.'
죽음의 기운을 움직여 가져다대려고 해도, 기운은 미끄러지듯 인형을 빗겨 나갔다.
하지만 주강혁은 재차 시도했다.
'만약 죽음의 기운을 덧씌우는 게 가능하다면······.'
그러나 시간이 용납하지 않았다.
칠죄종 나태의 손아귀에 모여든 적색의 구체가 당장이라도 쏘아질 것 같았으니까.
'큭,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았는데.'
그제서야 주강혁은 고개를 들었다.
'나태.'
막아내는 방법은 여러가지였다.
즉살을 발휘하면 당장의 위기는 모면할 수 있다. 하지만 초기화권이 소모 된다.
리미트 브레이커로 루시퍼의 제한을 해제할 수도 있었다. 두 단계의 제한을 해제한 루시퍼는 정말 강할테니까.
주강혁은 둘 다 선택하지 않았다.
분절의 목걸이를 사용해 도망치는 것도 생각치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 옮겨 나태를 향해 시선을 고정 시켰다.
죽음의 기운이 나태를 덮었다.
생명체인 나태에게는 간단하게 죽음의 기운이 드리운다.
이 상태에서 즉살을 발휘한다면 분신은 단번에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러나 고유 스킬인 즉살까지 갈 필요도 없다.
'꿈 속에 등장하는 마물들은······.'
인형들과 나태의 분신들에겐 보이지 않았다.
마땅히 보여야 할 레벨이.
'레벨이 없다.'
레벨이 없다면 0으로 취급된다.
자취방에서 잡았던 바퀴벌레가 그러했듯.
따라서 눈 앞의 나태를 잡는 건 어렵지 않았다.
주강혁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죽어."
푸화악—!
나태의 분신이 산산조각이 나며 폭발했다. 놈이 모으고 있던 마력의 구체가 땅 위로 느릿하게 떨어져 내렸다.
"크윽, 주인님!"
인형들에게 가로막혀 돌아오지 못하는 루시퍼.
주강혁은 품 안의 깃털을 사용했다.
『 흑색의 사도를 불러옵니다. 』
순간적으로 공간이 일그러지며, 루시퍼가 단번에 주강혁을 향해 넘어 왔다.
나태가 들고 있던 붉은 마력의 구체가 지면과 맞닿았다.
그 순간 거대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과과과—!
루시퍼가 창을 들어 올려 공격을 상쇄했다.
로브와 머리카락이 충격파에 미친듯이 휘날렸으나, 덕분에 피해는 없었다.
[ 그래, 그거다. 무명! ]
나태의 감탄과 함께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인형들이 점차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강혁은 손에 분절의 목걸이를 쥔 채 인형들을 살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한다면.
그리 뇌되이는 바로 그 순간.
스륵—!
죽음의 기운이 인형에게 덧씌워졌다.
"됐다."
드디어.
앓던 이가 빠진듯 속 시원했다.
주강혁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맺혔다.
루시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강혁에게 말했다.
"됐다니, 무슨 말씀······."
그 뒤로는 쉬웠다.
덧씌워진 죽음의 기운을 주변으로 퍼트리기만 하면 됐으니까.
고오오—.
죽음의 기운이 주강혁의 의지대로 인형들을 뒤덮었다. 전염병처럼 퍼져나간 기운은 확실하게 인형들에게 입혀졌다.
주강혁의 주변으로 모여든 인형들.
그들에겐 레벨이 없다.
침몽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환상이기에.
하지만 즉살(卽殺)은 생명체만을 대상으로 할 수 있다.
무생물인 인형에게 즉살은 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주강혁은 느낄 수 있었다.
인형들에게 만연한 죽음의 기운.
그렇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윽고 주강혁의 입이 움직였다.
"—."
죽음을 고하는 두 글자가 작게 울려퍼졌다.
일순 침몽의 영역에 침묵이 가라앉았다. 삐걱거리던 인형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콰과과과과—!
무명을 포위하듯 둘러싸던 인형들이 일제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파편을 산산이 흩뿌리며 최후를 맞이하는 인형들. 그들의 조각이 비처럼 쏟아져내렸다.
투두두두-.
그 죽음은 생명체와 다를 바 없었다.
"······주인님?"
그 광경을 목도한 루시퍼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생물을 대상으로 하던 즉살이, 무생물을 대상으로도 발동했다. 그 원리를 루시퍼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이 순간.
무명(無命)은 시스템의 제한을 뛰어넘었다.
54화 나태의 끝
"안개가 사라졌어."
"예, 침몽의 영역은 한 번만 발휘되니까요."
가브리엘과 청룡이 안개가 사라진 복도로 달려갔다.
전개된 영역은 한 번만 기능했다.
사기적인 능력인만큼, 몇 번이고 펼칠 수는 없다.
"그러면 주인을 안전한 장소로-."
"선배님, 위험합니다!"
두 사도가 잠에 빠진 주강혁과 루시퍼를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쉬익-!
어디선가 날아온 마력 탄환. 주인을 노리고 쏘아진 공격이었다. 가브리엘은 즉시 반응해 손날로 쳐냈다.
제한이 풀린 상태라 어렵지 않았다.
콰앙!
탄환이 닿은 자리에서 큰 폭발이 터져 나왔다.
[ 쯧, 한 번에 보내버리려고 했는데. ]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자 어린 소년 하나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청룡은 곧장 그 정체를 알아봤다.
"칠죄종 질투입니다."
[ 그래,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
질투는 살기를 띤 채 청룡을 노려봤다. 청룡은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답했다.
"중요한 물건이면 간수를 잘했어야죠. 안 그런가요?"
질투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 마기의 원천은 어디에 있냐? ]
"대답할 거라 생각해서 물은 건 아니겠죠."
[ 좋아, 일단 그 팔다리부터 떼어주마. 그런 다음 바닥 위로 질질 끌고 다니는 거야. 그러면 좀 겸손해지겠지. 안 그래? ]
질투의 몸 위로 보랏빛 기운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가브리엘과 청룡은 제한이 풀린 상태다.
심지어 청룡은 신화급 사도.
전투력으로만 따지면 질투와 엇비슷할지 모른다.
하지만 질투에게 상황이 나쁜 건 아니었다.
[ 하지만 잠든 주인을 지키면서 싸우는 건 어렵겠지. 안 그래? ]
누군가를 지키면서 싸우는 것만큼 효율이 떨어지는 일도 없었다.
질투는 손가락 위로 자그마한 구체를 생성했다. 구체는 소리 없이 쏘아졌다. 마치 총알처럼.
쉬익-!
탄환은 무명을 정확하게 노리고 쏘아졌다.
한 발, 두 발, 그리고 세 발.
콰앙! 콰앙! 콰앙!
청룡이 푸른 팔목 보호대로 탄환을 쳐냈다.
"······."
예상대로 청룡은 주강혁의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질투의 미소가 짙어졌다.
[ 크하핫, 그래! 어디 이것도 막아봐라! ]
이번에는 연발이었다. 손끝에서 피어난 탄환이 연속적으로 쏟아져나왔다.
투두두두—!
"제가 막겠습니다."
앞으로 나온 청룡이 양 팔목을 들어 올렸다.
주위로 푸른 방어막이 형성되며 탄환 세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위력이 만만치 않았다.
'이중 게이트라 질투의 제한도 다소 풀린 건가.'
청룡은 입술을 깨물었다.
가브리엘에게 혼자 맡기기엔 위험했다. 이 정도 화력 속에서 루시퍼와 주인 둘을 지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점을 눈치챈 걸까.
가브리엘이 청룡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 파랑 물고기. 날 믿고 질투를 쥐어패고 와."
"파, 파랑 물고기······. 일단 알겠습니다."
가브리엘에게 생각이 있는 듯했다.
그렇다면.
콰과과—!
청룡이 양팔을 좌우로 크게 펼쳤다. 푸른 파동이 주변의 공간으로 퍼져나가며 잠시나마 질투의 탄환을 상쇄했다.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청룡.
[ 네 놈이 돌았구나! 주인을 버리고 덤비겠다는 거냐?! ]
질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리쳤다. 질투의 손끝에서 부풀어 오른 구체가 빠르게 쏘아졌다.
지금까지가 탄환이었다면,
이번에는 포탄급에 해당하는 크기였다.
콰아아-!
주변의 공기를 가르며 쇄도한 포탄이 가브리엘의 지척까지 도달했다.
가브리엘은 침착하게 판단했다.
'두 사람을 동시에 지킬 순 없어.'
그렇다면 답은 간단했다.
'하나를 버리자.'
가브리엘은 잠에 빠진 루시퍼를 들어 올렸다.
콰아앙—!
루시퍼에게 직격한 마탄이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거센 폭발이 주변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프렌드 실드. 동료를 방패로 삼는 비장의 기술이야."
스스스······.
그러나 공격은 확실하게 막아냈다.
전용 무기를 손에 쥔 루시퍼.
잠에 들긴 했지만 녀석의 궁극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 내구도는 가히 신화급.
루시퍼가 예상보다 튼튼해서 다행이었다.
청룡이 감탄하며 소리쳤다.
"그런 방법이···. 역시 선배님이십니다!"
한달음에 질투에게 근접한 청룡이 푸른 전격을 뿜어냈다. 콰앙! 그에 맞서는 질투가 마력을 일으켰다. 충돌한 자리에서 거센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 하, 무슨······. 그래 봤자 바뀌는 건 없다. 네 놈 하나 정도로 날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나? ]
"글쎄, 해봐야 알겠죠?"
이길 필요는 없다.
무명이 깨어날 때까지 버티는 걸로도 충분했다.
청룡과 질투가 다시 한번 맞부딪히려는 그때였다.
타다다다다-!
복도 바깥의 장소에서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맨발로 빠르게 질주하는 듯한 그런 소리였다.
정면을 바라본 질투의 눈이 찡그려졌다.
[ 뭐야, 인간? ]
틀림없는 인간의 기운이었다.
어떤 멍청한 인간이 주제를 모르고 종말의 성전에 발을 들였다.
질투는 신경 쓸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청룡의 내려찍기를 한 손으로 흘려내고, 오른손을 복부에 꽂아 넣는다.
그 과정에서 강한 마력이 방출되며 반경 50m의 공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어줍잖게 이 영역으로 들어온다면 그 결과는 죽음뿐이었다.
현시점, 인류의 수준은 S급.
그 정도 무력으론 이 싸움에 끼어드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청룡과 질투가 만들어내는 충격만으로도 전신이 파괴될테니까.
그렇다.
이것은 신화급을 뛰어넘은 자들의 전투.
인간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콰아앙-!
몇 번의 충격이 이어지고, 다음 차례에 청룡이 질투의 정권을 양손으로 막아냈다.
'지금이다.'
질투의 왼손 위로 막대한 마기가 타오르는 바로 그 순간.
질투의 시야 속으로 맨발이 나타났다. 싸움의 여파에 휘말려 사라졌을 거라 무시한 인간의 발이 질투의 옆통수에 적중했다.
[ ?! ]
콰아앙—!
어마무시한 위력이었다. 질투는 그대로 수십 미터를 튕겨 나갔다. 부서진 바닥이 솟아오르고, 먼지가 짙게 피어났다.
쿨럭.
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질투가 피를 토해냈다. 질투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 뭐, 뭔······. 인간이······. ]
상반신을 드러낸 인간.
별다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강했다.
그 한 방에 칠죄종인 질투가 비틀거릴 정도였으니.
"나에겐 무명에게 진 빚이 있다."
귀환자 호영이 전투에 가세했다.
[ 너, 뭐냐······. ]
질투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뭐하는 놈인지는 몰라도···.
이건 위험했다.
그것도 상당히.
* * *
'네 힘을 보여 봐라, 무명.'
칠죄종은 시스템이 존재하는 세계에 어김없이 강림한다.
그 시간대에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종말의 사도로서 거듭하며 세계를 멸하고자 해왔다.
침몽(寢夢)의 영역.
그건 나태가 자랑하는 오의이자 필살기였다.
운 좋게 살아남는 자는 있었어도, 침몽의 영역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인간은 없었다.
'영역 내에서라면 나는 지지 않는다.'
꿈속에서 생성되는 하수인들은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강함을 타고난다. 심지어 여기엔 제한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꿈이기에.
그 사기적인 힘에 시스템조차 30분의 제한을 둘 정도.
그런데.
'부서졌다?'
나태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콰과과과—!
무명과 루시퍼를 둘러싸고 있었던 인형의 무리가 일제히 박살났다. 살아 움직이던 인형들이 파편이 되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무슨 수를 쓴 거지?'
드디어 무명이 움직였다.
그러나 떠오르는 의문은 여전했다.
나태는 즉시 마물들을 만들어냈다.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무수한 인형의 군세. 인형들은 훌륭한 마법이 인챈트 된 갑주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무명을 향해 접근할 수 없었다.
콰과과과—!
반경 200m.
무명이 나아가는 길 위에 존재하는 인형들이 사정없이 파괴되고 있었다.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물리력도, 마법도 아니다.
대체 무슨 원리란 말인가?
차라리 권능에 가까운 힘이었다.
'교만의 당황이 이해가 되는군······.'
나태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곳은 침몽의 영역.
이 안에 발을 들인 존재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달려서 운 좋게 살아남는 것만이 방법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무명(無命) 저 인간은 마물을 사냥하듯 나아고 있단 말인가.
솟아난 골렘도, 오염된 정령도, 무기를 든 마족조차도.
그 무엇도 무명을 막을 수 없었다.
"나태, 숨어 있지 말고 나와라! 침몽의 영역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거잖아. 안 그래?"
기세가 등등해진 루시퍼가 소리쳤다.
침몽의 영역 내에도 본체가 존재한다.
여기서 목숨을 잃으면 죽는 것은 나태도 마찬가지.
'······무명은 지금 여기서 반드시 죽여야 한다.'
나태의 본체는 침몽의 영역 지하에 숨겨져 있었다.
절대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침몽의 영역이 사라지면 숨을 수조차 없다. 무명은 종말의 성전 깊숙이 들어 올 것이다.
'지금 막아야 한다.'
침몽의 영역에서도 압도하지 못하는데, 현실에서 무명을 쓰러뜨릴 방법이 있을 리가 만무했다.
'······원거리 공격을 해야 한다.'
무명의 공격이 닿는 범위는 반경 200m.
그 바깥에서 공격한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방법을 떠올린 나태가 양손을 들어 올렸다.
평원의 곳곳에서 로브를 입은 인형들이 기둥과 함께 솟아올랐다.
인형의 머리 위로 태양과도 같은 밝은 구체가 떠올랐다.
콰아아—!
인형들이 쏘아낸 대형 마법이 무명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피할 방법도 피할 장소도 없는 그런 공격이었다.
거대한 폭발이 평원을 뒤덮었다. 소환해두었던 인형들조차 재로 만들어 버리는 무시무시한 폭발.
그러나.
연기가 사라지고, 평원의 흙바닥이 드러난 자리에 무명은 없었다.
[ 뭐···? ]
무명은 아공간으로 간단히 대피했다.
사최헌이 건네주었던 아이템을 사용해서.
[ 그런 잔꾀까지 준비해 왔다는 거냐? ]
처음부터 나태가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던 것이다.
"하······."
침몽의 영역에 생겨난 아공간 하나.
나태는 꾸역꾸역 인형을 소환했지만,
아공간이 돌파 당하는 일은 없었다.
침몽의 영역에서 벗어난 아공간에서는,
루시퍼조차 제압할 수 없었다.
"이거야 원."
그렇게 30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 30분 동안 생존에 성공하셨습니다. 』
『 침몽의 영역이 폐쇄됩니다. 』
『 최종 시련을 돌파하셨습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열광합니다. 』
『 무명(無命)의 활약이 아카식 레코드에 새겨집니다. 』
* * *
"······."
땀에 흠뻑 젖은 나태가 잠에서 깨어났다. 고급스런 의자에서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후······."
그는 탁상에 팔을 올린 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계획은 완전히 실패했다.
무명을 궁지에 몰아넣고, 그 힘을 파악해 침몽의 영역에서 승리를 거머쥐었어야했는데.
이겨야 할 장소에서조차 패배했다.
'질투는······. 도망쳤군.'
잠이 든 무명을 습격하는 것도 여의치 않았던 모양. 종말의 성전을 개시한 것은 나태다. 질투는 충분히 바깥으로 도망칠 수 있다.
두 사도가 동시에 덤볐는데도 졌다라.
나태는 차갑게 식은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른 시기에 강림했다.
성공할 거라 자신했다.
무명만 쓰러뜨린다면 인류는 멸망했을테니까.
허나, 그 한 명을 이기지 못했다.
알아낸 것도 얼마 없다.
다른 칠죄종이 나타난다고 한들, 무명을 쓰러뜨릴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칠죄종의 기억 보관소.
거기엔 질투의 기억도 있었다.
- 다른 칠죄종을 이 세계에 불러들여선 안 됩니다.
금발의 예언자는 막 강림한 질투에게 그리 말했었다. 질투는 그 말을 단순한 헛소리로 치부했지만.
- 무명이 이 세계에 진정한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나태는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영 틀린 말은 아닐 수도 있겠군.'
나태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무명을 막을 수 없게 될 거다.'
칠죄종인 자신이 죽으면 시스템은 그에 걸맞은 보상을 무명에게 지급할 것이다.
이미 무명은 칠죄종을 압도할 정도로 강하다.
그런 이에게 주어지는 막대한 보상이라니.
다른 칠죄종이 나타나도 무명에겐 제물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질투, 칠죄종의 강림을 늦춰라. 그편이······."
나태는 최후의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나 곧 깨달았다.
마기의 원천.
그 대부분이 이미 무명의 손에 있었다.
뭐가 되었든 칠죄종의 소환은 막을 수 없단 뜻이었다.
"이미 글렀나."
나태는 그리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끼이익-. 쿵!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
나태는 퀭한 눈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흑색의 로브를 쓴 무명과 세 명의 사도가 있었다.
나태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 입을 열었다.
"무명, 내 패배다."
나태는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발악할 기운도 없었다. 몸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미 패배는 확정되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칠죄종은 시스템이 도래하는 세계에선 언제나 모습을 드러내니까. 다만······."
나태는 찻잔을 매만졌다.
"결국 종말은 도래할 거다. 너와 네 사도들은 살아남을지도 모르지만 이 세계는 붕괴하겠지. 그때, 네 놈의 선택을 기대하겠다."
그것이 나태의 마지막 말이었다.
푸화악—!
무명의 입이 움직이고,
나태는 즉사했다.
『 '칠죄종 : 나태'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종말의 성전이 완전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이 신화+급에 해당합니다. 』
떠오르는 메시지가 그걸 증명한다.
"이겼어."
"고생하셨습니다, 주인님."
"거, 죽을 놈이 폼 한번 더럽게 잡네."
루시퍼는 혀를 차면서 나태가 앉아 있던 탁상으로 향했다. 드랍된 아이템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으윽."
몸을 숙이던 루시퍼가 휙하고 뒤를 돌아봤다.
"······근데 왜 이렇게 몸이 쑤시는거지. 나 자는 동안 너희가 뭐 했냐?"
"제한 해제의 후유증이 분명함."
"이야, 저도 허리가 쑤시는 게 후유증이 확실하네요."
가브리엘은 눈 하나 깜짝 않고 그렇게 말했다.
청룡도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 주인, 루시퍼를 방패로 쓴 건 비밀이야. ]
가브리엘의 사념이 주강혁에게만 전해졌다.
주강혁은 피식 웃으며 눈앞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 시스템이 공략 수준(신화+)에 걸맞은 보상을 탐색합니다. 』
파직, 파지직—!
메시지 주변으로 터져 나오는 붉은 스파크.
신화+.
새로운 등급의 보상을 획득할 차례였다.
『 다수의 성좌들이 당신의 활약에 감탄합니다. 』
『 타차원의 성좌들이 현세에 유입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승리에 환호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칠죄종을 비웃습니다. 』
주강혁은 몸을 휙 돌려, 성전의 바깥으로 향했다.
"SS급 게이트의 공략을 끝내러 갈 차례야."
아이템의 확인은 공략과 동시에 해도 충분했다.
55화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