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세 번째
"후우······."
사최헌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입고 있던 옷은 찢어지고, 장비도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몸이 성한 구석이 없었다.
조금 전까지 특수 던전을 공략하고 있었던 탓이다.
'던전의 난이도가 급격히 올라갔다.'
회귀자로서 많은 아이템과 스킬들을 선점했음에도 불구하고, 공략은 가까스로 이뤄졌다.
혼자서 공략했다지만 확실히 어려워졌다.
이전 회차와 비교하면 급격한 난이도 상승이었다.
'종말의 사도 등장 이후, 멸망의 흐름이 가속화되고 있다.'
던전과 게이트의 난이도 상승.
특수 마물들의 잦은 출현.
비정상적인 던전 브레이크의 급증.
인류의 두 번째 별에 해당하는 '귀환자'의 등장도 그런 이변의 일종이었다.
사최헌은 숲속의 나무에 기대어 검은색 단말기를 확인했다.
이 특수 단말기는 던전 내부에서도 사용할 수 있지만, 메시지를 보내는 정도가 한계였다.
'귀환자 호영.'
결국 무명과 접촉한 모양이었다.
무명이 제주도로 향할 때부터 예상된 접촉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너무 일렀다.
일단 귀환자에 대한 정보를 보내 두긴 했지만.
길드원들로부터 다시 상황을 보고 받아야 했다.
"후우······."
잠깐 숨을 고를 시간이 필요했다. 사최헌의 일정은 거의 초단위로 이뤄지고 있었다.
미래를 위한 포석을 준비하고,
혹시 모를 위험을 제거하려면 몸 하나로는 부족할 지경이었다.
사최헌은 짧은 휴식을 만끽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일곱 개의 별.'
예언자의 별에선 인류 최강의 자리에 오를 7명을 미리 선발했다.
그 중 하나가 귀환자 호영이었다.
42개의 차원을 순례하고 살아 돌아온 인간.
그가 깨달은 진리는 힘이었다.
힘 없는 자는 죽었고,
힘 있는 자는 살아남았다.
그 명백한 진리 속에서 호영은 끝없는 강함을 추구했고, 그 결과 그에 걸맞은 힘을 소유하게 되었다.
사최헌이 보기엔 어처구니가 없을 따름.
'모든 것을 힘으로 해결하려 드는 미친 놈.'
힘으로 모든 게 해결 되었다면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 말하면 호영은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그 또한 힘이 부족해서라고.
어쨌든 현시점에서 놈이 소유한 힘은 가히 막강하다. 사최헌 본인조차 어쩌지 못할 정도로.
'골치 아프군.'
그 이유인 즉슨 간단하다.
현세(現世)의 '인간'에게는 시스템의 제한이 적용되지 않는다.
인간은 시스템의 유일한 플레이어다. 개인이 막강한 힘을 소유하고 있어도 강제적인 제한이 발생하는 일은 없다.
대신 레벨과 등급이 성장의 한계가 될 뿐.
현시점 최대 레벨은 150.
아이템과 스킬의 최대 등급은 사실상 전설 수준.
반면 귀환자 호영은 레벨과 스킬 없이 차원을 떠돌며 힘을 축적했다.
레벨에 의존하지 않고 몇백 년에 걸쳐 쌓아 올린 순수한 무력.
여기에 제한은 발생하지 않는다.
그가 비정상적인 힘을 소유할 수 있는 이유였다.
'무명이 질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만.'
무명과 호영.
그 두 사람이 전력으로 충돌하게 되면 제주도가 지도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사최헌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며 길드원들에게 통신을 연결했다.
"괜찮나? 지금 바로 그쪽으로 향하겠다."
- 아, 길드장님!
공간이동 능력자 유지훈이 연락받았다.
"싸움은 어떻게 되고 있지?"
- 결투요? 무슨 결투요?
지금쯤이면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일 거다. 거절해도 싸움을 걸어 온다. 호영은 그런 놈이었다.
그런데 유지훈의 목소리가 너무 차분했다. 주변의 소리도 고요했고.
미간을 좁힌 사최헌이 다시 물었다.
"귀환자와 무명이 충돌하지 않았나?"
- 충돌이요?
이어지는 유지훈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 도망갔어요.
"도망? 누가."
- 귀환자가요.
"그럴 리가."
- 진짜에요. 무명님이 여왕을 한 방에 처리했더니, 들고 있던 아이템도 남겨두고 도망쳤어요.
사최헌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호영이 도망이라니.
그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단어도 없었다.
상대가 아무리 강해도 끝까지 덤벼드는 게 그놈이었다. 아니,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좋아했을 거다.
그런데 도망이라니.
"진짜로 도망쳤다고······?"
사최헌은 못 믿겠다는 듯 중얼거렸다.
* * *
미국, 어느 숲속.
"우리가 직접 움직여야 할 정도 라니. 중위 마인이 언제부터 심부름꾼이 된 거냐?"
"그만큼 보안이 중요하다는 거겠지. 마인 측에서도 이번 임무에 아는 자는 손에 꼽을 거다. 극비니까 입 단속 잘해."
두 마인이 배낭을 짊어진 채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가방에 들어 있는 것은 '마기의 원천'.
마인들의 핵심 에너지원이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배낭 하나에 열 개 가량의 원천이 들어 있었다.
국가 하나에 1개의 원천이 보급된다는 걸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나라 하나 쯤은 그대로 멸망시킬 수 있을 양인 건 확실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기의 원천을 한군데로 모으는 건 너무 위험한데."
"높으신 분들의 생각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나. 조용히 걷기나 하지."
두 마인은 인적이 드문 숲 속을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숲 깊숙이 들어오자, 옅은 빛이 보였다.
그 빛을 향해 나아가자 모닥불이 나타났다.
모닥불 앞에는 어린 소년이 앉아 있었다.
"오, 왔어? 내려놔."
소년은 나이와 어울리지 않는 비릿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두 마인은 명령 받은 대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마인 중 하나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마인도 아닌 것 같은데······. 원천을 어디에 쓰려고 그러는 겁니까?"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나왔다. 소년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동료들을 불러 모아야지. 종말의 사도를 불러내려면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거든."
소년은 씩 웃으며 답했다.
칠죄종 질투.
그는 칠죄종 전원을 현세에 강림시키고자 했다. 이미 죽은 교만은 어쩔 수 없겠지만.
"꽤 모았네. 근데 이걸로도 부족해."
배낭을 확인한 질투가 입맛을 다셨다.
"부족하다뇨······? 현세에 있는 거의 모든 마기의 원천입니다만."
마기의 원천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여기 모인 것도 전세계의 원천을 끌어 모은 수준이었다.
극한으로 압축한 마기가 바로 원천.
이러한 원천은 마계에서만 생산된다.
본래는 하나로도 행성을 멸할 수준의 에너지 덩어리다. 그러나 현세로 넘어오는 도중에 막대한 손실이 일어난다.
마계에서도 무한정 보낼 순 없는 자원이었다.
소년은 씩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알아. 그래서 하는 말이야."
서걱—!
질투의 손짓 한 번에 운반책들의 목이 달아났다. 몸뚱이를 잃은 목이 풀숲을 굴렀다.
"뭐, 이걸로도 두 명은 너끈하게 부르겠지만."
만족스런 미소와 함께 질투가 가방을 향해 손을 뻗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전조는 없었다.
콰아아앙—!
별안간 푸른 낙뢰가 떨어졌다.
숲 전체가 선연한 청광(靑光)에 휩싸였다. 질투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큭, 뭔?!"
막대한 에너지가 범람하며 질투를 휘감았다. 초고밀도의 에너지가 근방의 나무와 풀을 새까맣게 태웠다.
막대한 충격파가 일대로 퍼져나갔다. 숲 전체의 나무가 일제히 흔들리고, 강한 바람이 폭풍처럼 뻗어나갔다.
그뿐이 아니었다.
쏴아아아—!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구냐?!"
질투가 눈을 비비며 소리쳤다.
방금 전, 낙뢰로 인해 질투의 시야는 완전히 마비 되어 있었다. 그냥 번개가 아니었다. 마력이 실린 섬광이었다.
'설마, 마인 놈들이 판 함정?'
질투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멍청한 짓이었다.
놈들은 뒷감당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들려오는 것은 생판 다른 목소리였다.
"성좌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내려다 볼 수 있거든요. 악인의 범죄도, 선인의 선행도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죠."
스륵.
무언가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질투의 입가가 비틀렸다.
"누가 종말의 앞에서 성좌를 논하는 거냐?"
질투는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찔렀다. 파괴된 눈이 빠르게 재생되며 시야가 뚫렸다.
그리하여 앞에 나타난 것은······.
"그쪽하고 같은 사도입니다. 하지만 태생이 다르죠. 나는 자유로운 성좌였으나, 그쪽은 시스템에 종속된 저주 받은 존재."
푸른 비늘로 만들어진 아대를 양손에 찬 청년.
쏴아아—!
그의 눈동자는 빗속에서도 푸른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진청(眞靑)의 사도였다.
현세에 강림한 사도는 흑과 백.
이 둘 뿐이었다. 적어도 질투가 아는 건 그러했다.
명백한 도발에 질투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무명의 새로운 사도냐?"
"글쎄요?"
청년은 사람 좋게 웃었다. 손에는 배낭이 들려 있었다. 마기의 원천이 가득 담긴 바로 그 배낭.
"이 새끼 손버릇 봐라?"
질투가 이를 악물었다.
콰아아앙—!
질투는 곧장 진청의 사도를 향해 달려 들었다.
"와우. 무서워라."
진청의 사도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질투의 마력 칼날을 피해냈다.
"얼마나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질투는 조소했다.
숲의 뒤쪽으로 거대한 상처가 새겨졌다.
"사도들의 능력치는 잘 알고 있지. 흑과 백 둘이 덤벼도 교만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는데, 넌 혼자잖아."
질투의 말에 청년이 몸을 기울이며 답했다.
"나는 신화급 사도에요. 그쪽하고 싸우면 승률은 5할."
"신화급. 그래서 여유로운 건가?"
"아뇨, 성격이 그런 거죠."
"잘도 나불대는구나."
질투가 혀를 찼다.
귀찮은 게 늘었다.
교만이 죽으며 무명의 힘이 증대된 건가?
사실 상관없었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덤벼."
질투의 도발에 청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불확실한 확률 싸움은 안 좋아해서요. 승률이 5할이면 운이 좋으면 그쪽이 이긴다는 거잖아요."
"하, 자신 없다는 소리를 길게도 하네?"
"하지만······. 여기서 도망친다면 성공률은 100%겠죠. 안 그래요?"
청년의 손에는 마기의 원천이 가득한 배낭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질투의 눈동자가 커졌다.
"너······!"
"네, 도망칩니다. 원한다면 따라와도 됩니다. 무명(無命)과 신화급 사도를 동시에 상대하고 싶다면요."
청년은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쏴아아—!
쉼 없이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구름 위로 한 마리의 청룡(靑龍)이 날아올랐다.
질투는 차마 그 뒤를 쫓지 못했다.
하필이면 청룡이다.
진심으로 도망친다면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대량의 마기 원천을 빼앗긴 질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네 놈은 반드시 죽이겠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고래고래 악을 쓰며 저주를 퍼붓는 게 최선이었다.
* * *
제주도 2일차가 되었다.
결계가 설치된 캠프는 매우 안락했다. 덕분에 푹 자고 일어나 사냥에 전념할 수 있었다.
『 [ 전설+ ] 청(靑) : 쾌속의 벨트 』
- 속도 + 15%
- 쿨타임 감소 30%
- 신속 Lv.3, 회피 Lv.3, 반응속도 Lv.5
귀환자 호영이 떨어뜨리고 간 아이템은 전설+급이었다.
"일부러 아이템을 버리고 간 거니, 주인님께서 가지셔도 괜찮을 겁니다."
루시퍼의 말로는 미끼(?)처럼 던진 거라던데. 어쨌든 던전을 공략하고 아이템을 얻은 건 귀환자다.
일단 쓰다가 나중에 만나면 돈 주고 사든가 하면 되겠지.
커다랬던 벨트를 허리춤으로 가져가자 내 허리에 맞게 줄어들었다.
『 [ 전설+ ] 청(靑) : 쾌속의 벨트를 착용합니다.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30%(5.1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17.1일 → 12일 』
쿨타임이 2주 안쪽으로 들어왔다.
아이템 뿐만 아니라 룬도 모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최헌 헌터를 통해서 구해봐야겠다.
- 적(赤) 여왕벌의 혼(SSR)
어제 여왕을 잡고 획득한 영혼도 있다. 일단 킵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랜턴에 넣어서 사용하면 되겠지.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우중충하다.
종말의 사도가 나타난 뒤로 줄곧 저 상태다.
심상치 않다.
꼭 뭔가가 일어날 것 같지 않은가.
"일단은 사냥이나 계속해보자."
내실을 잘 다져놔야, 미래에 뭐가 생겨도 대응이 가능해질 테니.
귀환자는 아예 사라져서 보이질 않는다.
루시퍼 말로는 내륙으로 간 것 같다는데.
저 거리를 헤엄쳐서 도망쳤다는 게 된다.
별 사람이 다 있다.
"오늘 사냥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루시퍼가 다짐과 함께 날아 올랐다. 케로베로스도 그 뒤를 따라 달려 나갔다.
가브리엘은 결계 안쪽에서 천이령에게 성력을 가르치고 있었다. 잘만 풀리면 능력치 버프나 경험치 버프를 걸어줄 수도 있단다.
콰과과과-!
"무명님! 이쪽에도 마물들이 많이 있습니다!"
"마수들을 그쪽으로 몰고 가겠습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길드원들의 도움을 받아 사냥은 수월했지만, 레벨이 오르는 속도는 눈에 띄게 느려져 있었다.
어제가 특이한 거였다.
막대한 수의 마물들이 모여들었으니까.
휴식과 사냥을 반복하며 반나절 가량 사냥에 매진했다. 랜턴에서는 흑색 조각 하나와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이 나왔다.
그리하여······.
『 레벨 132를 달성하셨습니다. 』
『 일일 성장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
『 축하드립니다. S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레벨 130을 넘어서며 S급 헌터가 되었다.
'드디어.'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주인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겠습니다."
루시퍼가 내 옆에 내려앉았다. 천이령에게 스킬을 전수한 가브리엘도 내게 다가왔다.
"초고속 레벨업이야. 역사에 남을 업적."
『 성좌 '이계 규율'이 레벨업을 축하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을 축하합니다. 』
이어지는 축하 메시지.
그때였다.
우중충했던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푸른 하늘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루시퍼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하늘까지 주인님의 성장을 축하 하나봅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가브리엘이 하늘을 가리켰다. 푸른 하늘을 유유자적하게 비행하고 있는 푸른 청룡 한 마리가 있었다.
"어······."
한 번도 실제로 청룡을 본 적은 없지만.
누가 봐도 청룡이었다.
불멸의 길드원들도 변화에 눈치챘다.
"처, 청룡이 왜······?"
"설마 월드 보스? 하필이면 여기에?"
"잠깐, 잠깐. 이쪽으로 오는데?"
청룡은 내가 있는 장소를 향해서 내려왔다. 곧게 솟은 사슴의 뿔과 새하얀 수염. 여의주는 없었지만,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이 넘쳤다.
청룡은 어느덧 청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내 앞에 착지한 청년은 가방을 두 개 매고 있었다. 녀석은 나를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주인님, 처음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진청의 사도 청룡이라고 합니다."
내게 인사를 마친 청룡이 뒤쪽의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선배님들, 후배가 인사드립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90도의 직각 인사였다.
"오, 세 번째 사도는 청룡인가. 인사성이 바르네. 일단 합격."
루시퍼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신화급 사도라 질투할 줄 알았는데, 딱히 그렇진 않은 모양.
"드디어 막내 탈출이야."
가브리엘도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막내였던 적도 없잖아.
"그보다 급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칠죄종 질투가 현세에 강림했습니다."
청룡은 그리 말하며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가방 속에는 검은 구체가 가득했다.
"아마도 마인들과 결탁해 다른 칠죄종을 불러들일 속셈이었던 것 같은데······."
와르르.
배낭 속에서 구체들이 굴러나왔다. 겉면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딱 봐도 범상치 않은 물건이었다.
"그 에너지가 되는 마기의 원천을 제가 몽땅 훔쳐 왔습니다."
응? 훔쳤다고?
마기의 원천을?
"이제 이걸로 뭘 할지는······."
청룡은 산뜻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주인님께 달렸습니다."
46화 SS급 게이트
『 마기의 원천 (★) 』
가방 속에 들어 있는 검은색 구슬들.
도합 23개로 마기의 원천이라 불리는 마인들의 핵심 에너지원이었다.
그걸 청룡이 칠죄종으로부터 훔쳐 온 거고.
다만, 마기의 원천에 대해 이야기 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칠죄종 질투가 강림했다고?"
"예. 교만이 질투를 소환했습니다."
어쩐지 찜찜하더라니.
칠죄종은 여전히 큰 위협이었다. 현시점에서 종말의 사도를 상대할 수 있는 헌터들이 몇이나 될까?
없을지도 모른다.
"잠깐만, 교만이 질투를 소환했다면······. 질투도 다른 칠죄종을 소환할 수 있단 거잖아."
"맞습니다. 심지어 질투는 칠죄종 전원을 소환할 생각이었습니다."
청룡의 설명에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지금 시점에서 전원 강림은 불가능할 텐데? 시스템이 허락할 리가 없어."
"예, 그래서······."
청룡은 배낭 안의 마기의 원천을 바라봤다.
"마인과 손을 잡고 시스템의 제한을 넘어서려고 했던 거겠죠. 막대한 마기를 사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하여튼 그 마기의 원천이란 게 우리 손에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 이걸로 할 수 있는 일은······."
"우선 칠죄종의 소환입니다."
칠죄종을 직접 소환할 수 있다라.
이전 악마 벨리알 소환 때와 같다.
잡을 수만 있다면 막대한 보상이 된다.
'잡으면 문제 없지만······.'
하지만 당장은 위험하다.
칠죄종을 확실하게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만약 도망이라도 치면 그건 그거대로 대참사니까.
칠죄종 질투가 난입할 수도 있다는 문제도 있고.
청룡이 어깨를 으쓱였다.
"물론, 마기의 원천만 가지고 소환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저희는 칠죄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 적절히 가공만 한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루시퍼의 시선은 뒤쪽을 향해 있었다. 마물을 잡는 천이령 헌터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했다.
"칠죄종은 미리 잡아 두면 좋아. 언젠가는 전부 나타나게 되어 있으니까."
가브리엘도 동의하는 모양.
"칠죄종이 강림했을 때의 부작용은 어쩔 거야?"
"그건 괜찮을 듯."
"이미 한 명이 강림한 상황이라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도들끼리 알아서 이야기를 나눈다.
유능한 부하 직원들을 둔 느낌이다. 세 번째 사도 청룡도 자연스럽게 그 사이에 녹아들어 다행이고.
'그러면······.'
충분한 힘을 기른 뒤 칠죄종 사냥에 나선다.
그런 방향으로 가면 문제 없을 것 같다.
문제는 없다.
문제는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스케일이 너무 커졌어.'
내 꿈은 적당한 건물 하나 사서 은퇴하는 거였는데.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종말의 사도가 나타나 버렸다. 놔뒀다간 세계가 혼란에 휩싸일 게 불 보듯 뻔하고.
'······칠죄종 질투부터 처리하고 생각하자.'
그때였다.
띠리링—.
스마트폰으로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다. 헌터 협회에 등록된 모든 헌터들에게 보내진 메시지였다.
- 서울 도심, SS급 게이트 출현까지 24시간. 긴급 지원 요청.
조금 떨어져 있던 불멸의 길드원들에게도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런데 길드원들한테는 내용이 더 있었던 모양.
"드디어 올 게 왔나."
"이틀 전에는 종말의 성전. 내일은 SS급 게이트라고?"
"전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할 예정이라는데."
"진짜 세상이 어떻게 되려나.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네."
전세계에서 동시 발생이라.
심상치 않았다.
사도들의 얼굴도 올 게 왔구나 싶은 얼굴이었다. 청룡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긍정적으로 볼 부분도 있습니다. 많은 경험치와 훌륭한 보상을 노려볼만하죠. 주인님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나는 우중충한 하늘을 바라봤다. 청룡에 의해 잠시 걷혔던 구름이 다시 메꿔져 있었다.
"공략이야 그렇다고 쳐도 칠죄종이 문제입니다."
루시퍼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괜찮을 것 같다.
이제 사도는 총 세 명이다.
심지어 한 명은 신화급.
"나타나면 잡아야지."
우위는 이쪽에 있다.
두려워해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칠죄종이다.
"나타날 수 밖에 없을거야."
마기의 원천을 돌려 받기 위해서라도 놈은 움직일 거다.
* * *
사최헌은 최고의 무장을 갖춘 채 걸음을 재촉했다.
귀환자 호영.
무명에게서 달아난 그가 어디로 향했을지는 뻔했다.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가야할 곳은 정해져 있는 법이니.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장소.
이제는 폐허가 된 마을.
한때는 꽤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었지만, 과거에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대다수가 죽음을 맞았다.
헌터 협회도 길드의 체계도 세워지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
귀환자는 그곳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과거 자신들의 가족이 있었을 주택.
그가 악착 같이 살아 남고자 했던 이유.
이제 거기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사최헌은 호영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저벅, 저벅.
가져온 흰색 국화를 집의 어귀에 내려두었다.
잠시 눈을 감고 묵념.
호영은 말이 없었다. 고요히 가라앉은 적막 속에서 사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좋은 분이셨다. 마지막까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셨지."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인연이란 것이 신기해서,
사최헌도 아는 사람이었다.
호영의 고개가 사최헌을 향했다. 가라앉은 눈 속으로 옅은 슬픔이 느껴진다. 그러나 잠시 뿐이었다.
콰아앙—!
호영은 다짜고짜 사최헌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순간적으로 검을 꺼내 막은 사최헌이 크게 밀려났다.
무작정 휘두른 주먹은 아니다.
사최헌이 강자라는 것을 이해했기에 휘두른 주먹이었다.
호영은 말도 없이 달려들었다.
카가각—!
놈의 주먹과 사최헌의 칼날이 부딪히며 불똥이 피어올랐다.
호영을 설득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미친 놈이지만, 행동의 원리는 어렵지 않았다.
콰앙! 쾅!
최선을 다해 놈과 맞부딪히면 된다. 전력으로 의지를 부딪힌다. 그거면 충분했다.
놈은 전투를 통해 타인을 이해한다.
백 마디 말 대신에 한 번의 주먹질이면 되는 놈이었다.
콰아앙—!
일대의 지형이 파헤쳐지고, 버려진 건물이 파편이 되어 무너져내렸다.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더럽게 세군. 이 시점이라면 종말의 사도와 견줄 정도일지도 모르겠어."
심지어 호영은 진심을 내는 게 아니었다.
사최헌이 필수 아이템과 온갖 스킬들을 소유한 회귀자임에도, 지금의 호영을 넘어서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사최헌이 호영을 넘어서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했다.
어쨌든 사최헌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호영을 설득하기 위해선 그리 해야만 했기에.
쾅! 콰과광! 콰앙!
'어처구니가 없는 힘이다.'
검을 휘두를 때마다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강자를 도망치게 만든 무명(無命).
대체 뭘 어떻게 하면 그게 가능한 건지.
전투는 1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콰아앙!
지면의 흙이 크게 솟구쳤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최헌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허억, 허억······."
더 이상 전투는 불가능했다. 호영은 쓰러진 사최헌을 향해 다가왔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네 놈의 의지는 확인했다. 이상을 관철하는 집요한 끈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네 태도는 쓸만하다. 합격이다."
합격인가.
이전 회차에선 불합격이었는데.
뭐가 달라지긴 한 모양이었다.
사최헌이 호영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온 몸이 욱신거렸다.
"사최헌이다."
"그런가. 나는 이름을 버렸다."
"······?"
사최헌이 호영을 바라봤다.
"왜 그러지?"
"이름이 없다고?"
"그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인지.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분명 호영이라는 이름이 있을텐데.
······설마 무명한테 패배해서?
"겨우 자신의 목숨 하나 보전하려고 도망친 패배자에게 이름은 필요하지 않다."
아무래도 맞는 것 같았다.
호영의 시선은 다시 자신이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방금 전 전투로 절반쯤 내려앉아 있었다. 그러나 대문 앞에 놓여 있던 국화만큼은 멀쩡했다.
호영은 느낄 수 있었다.
가족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마을 습격한 마물들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 있었기에.
"궁금했다."
호영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가족들이 살아 있을지. 날 기다리고 있을지. 날 기억하고 있을지. 비굴하게 도망쳐서라도 확인해야 했다."
42개의 차원을 떠돌면서도, 수백 년의 삶을 살아오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돌아올 고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갑작스레 사라진 나 때문에 그들의 삶이 고통스러웠을까 두려웠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것이 호영을 여기에 다다르게 했다.
"그렇다면 그 고통이 전부 보상 받을만큼 행복하게 만들어 주고 싶었건만······. 아쉽게 되었다."
사최헌이 들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이제 미련은 없다."
호영은 쓸쓸히 몸을 돌렸다.
그런 호영을 사최헌이 말로 붙잡았다.
"잠깐, 어디 가는 거냐."
"죽으러 간다.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니니. 마지막으로 가족들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었다. 감사의 표시를 했으나, 그걸로 만족할 인물이 아니겠지."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무명(無命)을 말하고 있단 건 알 수 있었다.
'뭔······.'
사최헌이 미간을 짚었다.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사최헌은 아무 말이나 쥐어 짜냈다.
"그······. 그런 식이면 나도 방금 내게 목숨을 빚진 게 된다."
"다르다."
"다르긴 뭐가 다르단 거냐."
"다르다."
젠장, 말이 통하는 놈이 아니다.
이대로 보내도 괜찮을까?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른다.
죽여주지 않는다고 싸움을 걸지도 모른다.
시스템의 튜토리얼 막바지.
SS급 게이트가 나타난 지금.
변수는 최대한 줄여 둬야 했다.
사최헌은 고심 끝에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는 그 자는 설마 검은 로브를 착용하고 있나? 사도를 데리고 있고."
"그렇다. 알고 있는 건가?"
"잘 알고 말고. 잠깐만 기다려라."
사최헌은 단말기를 사용해 무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건 루시퍼였다.
- 뭐야, 주인님 바쁘시다. 용건은 문자로 해라.
루시퍼의 목소리에 호영의 눈썹이 올라갔다.
사최헌은 전화가 끊길까 빠르게 말했다.
"우연히 귀환자를 만났는데, 무명에게 목숨을 빚졌다는군. 다시 돌아가서 죽고 싶다는데. 무명의 의견을 묻고 싶다."
- 뭔, 개소리······가 아니라. 아하. 대충 이해했다. 잠깐 기다려라.
눈치 빠른 루시퍼가 대충 알아챈 모양.
"······."
잠깐의 정적.
호영의 시선은 단말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치직, 치지직.
단말기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색무취의 특징이 없는 음성이었다.
틀림없는 무명의 목소리였다.
- 살아라.
내용은 간결하고 명료했다.
툭.
단말기의 통신이 끊어졌다.
"······."
사최헌은 호영을 바라보았다.
호영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 따위는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건가."
그러나 그게 꽤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무슨 오해를 하는건지.
사최헌은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그래, 무명이 말한대로다. 그리고 그 무명은 인류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 너도 관심이 있다면······."
"사최헌이라고 했나. 하나 묻지. 내 가족을 죽인 건 뭐라고 생각하지?"
호영은 사최헌의 말을 끊고서 물어왔다. 그러나 딱히 상관 없었다. 오히려 하고 싶은 말이었으므로.
사최헌은 간단히 답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은 명확했다.
"시스템."
지금까지의 사고도.
인류의 멸망도.
앞으로 닥쳐올 재앙도.
이 세계의 시스템이 만들어낸 종말이다.
"그런가. 복수하기에 적절한 대상은 아니군."
호영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의 달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그리 말하며 호영은 걸음을 옮겼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최헌에게 말했다.
"무명에게 전해둬라. 은혜는 꼭 갚을 테니, 내 이름 호영을 기억해두라고."
은근슬쩍 이름이 다시 생겼다. 호영은 그대로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미친 놈······.'
아주 그냥 제멋대로다.
사최헌은 혀를 차며 호영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지켜봤다.
본래 호영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다. 자신이 인정하지 않은 자의 말은 죽어도 듣지 않는다.
그게 아무리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더라도 말이다.
'합격이 아니라 만족이란 평가를 받아야 했다.'
그제서야 설득이 가능했던 게 호영이다.
그러나 무명(無命)덕에 그 고집이 한 풀 꺾였다. 무명을 마주하고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
'이른 시기에 호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류에겐 희소식이었다. 이것이 어떤 식의 나비효과를 불러 일으킬진 지켜봐야겠지만.
'할 수 있는 준비는 모두 끝냈나.'
남은 건 내일 SS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것뿐.
'칠죄종이 나타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무명(無命)에게 칠죄종의 출현을 알리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곧 SS급 게이트가 나타나기 때문.
이때 해외에서 칠죄종과 무명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면······.
SS급 게이트의 공략이 실패로 이어질 수 있었다.
이것을 회귀 없이 설명할 수 없었다.
사최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언젠가는······.'
무명(無命)을 도와 인류의 멸망을 막기 위해선, 언젠가 자신의 회귀를 밝혀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아니었다.
* * *
신화급 사도의 힘은 한 차원이 달랐다.
콰과과과—!
거센 비폭풍이 마물들을 하늘 위로 날려 보냈다. 지면이 홍수가 난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벼락이 끊임없이 내리쳤다.
청룡은 그 모든 것을 지휘하며 설명했다.
"저는 날씨와 원소를 다룰 수 있습니다. 선배님들처럼 시야 공유는 불가능하지만 빠르게 이동이 가능하고요."
청룡으로 변하면 어디든 빠르게 날아다닐 수 있단다.
이 부분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제 제주도는 기본이고 다른 나라도 마음껏 오갈 수 있게 된 거니까.
"큭, 까마귀라 죄송합니다."
"거대 비둘기가 될 수 있게 노력해볼게."
괜한 승부욕을 불태우는 루시퍼와 가브리엘. 청룡은 그런 둘을 향해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실제 선배님들의 힘에 비하면 저는 발끝도 못 미치는 수준인 걸요. 그리고 두 분은 더 중요한 일을 해주시니까요. 저랑 비교하실 게 아닙니다."
"이 자식······. 마음에 드는 걸."
"말을 착하게 해."
"좋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냥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했을 뿐입니다."
청룡이 합세하며 전력도 크게 향상 되었다. 분위기도 좀 좋아졌다.
티격대격하는 가브리엘과 루시퍼 사이에 한 명이 생겨서 그런가.
투두두두—!
그때, 저 반대편으로 불멸의 헬기가 도착했다. 천지가 요동치는 이쪽 날씨와 달리, 반대편은 맑고 화창하다.
"다섯 분 다 괜찮으시겠어요?!"
불멸의 유지훈이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청룡이 있으니 이제 이동에 제약이 없다.
"그럼 내일 SS급 게이트 공략때 뵙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무명님, 최고였어요!"
헬기에서 몸을 내민 길드원들이 열렬히 손을 흔들었다.
헬기는 그렇게 제주도를 떠나갔다.
잠깐 다섯 분?
천이령을 두고 갔잖아.
천이령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기진맥진해서 텐트에 쓰러져 있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의 주입식 교육이 이뤄진 탓이었다.
뭐, 괜찮겠지.
청룡도 있고.
휴가랬으니까.
"오늘치 레벨업은 끝났지만, 아직 끝이 아니야. 제주도에 있는 마물들을 최대한 처치하고 보상을 챙겨야 하니까."
나는 무결한 영혼등을 들어 올렸다.
SS급 게이트에 칠죄종이 나타날 거다.
어쩌면 해외의 마인들도 참가할지 모른다.
마기의 원천이 몽땅 여기에 있으니.
스킵한다는 선택지도 없다.
"현 인류의 실력으로 봤을 때, 주인님께서 꼭 참여하셔야 합니다."
청룡은 그리 말했다.
각 국가의 주요 도심에 생겨난 SS급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면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거다.
"그럼 어쩔 수 없지."
서울에는 사최헌 헌터한테 구입하기로 한 빌딩도 있다. 뭐가 되었든 게이트를 공략해야 하는 상황.
그러니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최대한 많은 아이템을 준비해 SS급 게이트를 완벽하게 공략하는 것.
"시작하자."
내 말에 맞춰서, 세 명의 사도가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녀석들의 공격이 지축을 울리는 순간.
샤아아—!
무결한 영혼등 위로 막대한 영혼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냥은 자정이 넘어서도 계속 되었다.
* * *
그렇게 다음날 아침.
결전의 날이 밝았다.
"가볼까."
나는 사도들과 함께 청룡의 위에 올라탔다.
"천이령, 일어나. SS급 게이트 공략이다."
"네? 버, 벌써 아침이에요?"
"출발이야. 가는 동안 성력 복습해야지."
어쩐지 북적북적하다.
[ 출발하겠습니다. 잘 붙잡아주세요. ]
청룡이 우중충한 하늘을 뚫고 구름 위로 시원하게 날아올랐다.
준비는 끝났다.
이전에는 우리가 끌려가는 입장이었다면······.
이제는 우리가 칠죄종을 게이트로 불러들일 차례다.
47화 세 개
미국의 어느 연구소.
마인들이 점거한 단체의 건물이었다.
"으아아! 내 마기의 원천들······. 대체 어쩔 거냐!"
질투는 길길이 날뛰었다. 주변 연구 장비와 가구들이 죄다 파괴되어 있었다.
질투는 마인들의 연구소 하나를 아예 박살 내놓았다.
부랴부랴 상위 마인 팔란이 파견되었다. 치열한 회의 끝에 결정된 일이었다.
"무명(無命)을 죽이고 다시 빼앗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습니까."
팔란은 벌레 씹은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노인이 소년에게 고개를 숙이는 기이한 광경.
사실 팔란의 지위 또한 낮지 않았다.
현세(現世) 16 마인 중 하나로서 지도자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칠죄종 질투에 비하면 없는거나 마찬가지인 힘. 팔란은 그저 속으로 욕지거리를 뱉을 뿐이었다.
'마인 측도 궤멸적인 피해란 말이다. 이 빌어먹을 꼬맹아.'
전 세계의 원천을 거의 싸그리 모아왔다.
그런데 그걸 날려 먹어? 애시당초 장소와 일시를 지정한 것도 질투 본인이었다.
심지어 마인 탓을 하기까지.
"방심했어. 젠장. 방심했다고."
질투는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무명의 사도가 강림해서 원천을 강탈해 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대체 누가 그런 생각을 한단 말인가.
그 청룡 놈의 실실 웃는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열이 뻗쳐 올랐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상위 마인 팔란이 그를 달래듯 말했다.
"무명은 분명 SS급 게이트 공략에 참가할 겁니다. 그때를 노리시지요."
"되겠냐? 나혼자 되겠냐고."
"······."
신화급 사도 청룡.
그 밑으로 두 명.
게다가 무명의 힘은 아직까지도 불명확하다.
빠드득.
팔짱을 낀 채 이를 갈던 질투가 결정을 내렸다.
"우선 다음 칠죄종부터 강림 시켜야겠어. 젠장, 쓸데없이 내 힘을 써야 되잖아. 따라와라, 마인."
"예······."
질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칠죄종을 강림 시키려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해야 했다. 교만은 그걸 무릅쓰고 질투를 불러낸 것이다.
교만은 그걸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을 거다. 인류의 수준은 그 정도라고 자만했다.
그 결과 무명에게 일방적으로 유린당했다. 종말의 사도치고는 볼품없는 최후였다.
'젠장, 마기의 원천이 있으면 에너지를 대신할 수 있는데 말이야.'
마기의 사기성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만한 양이면 시스템의 제한도 어느 정도 넘어설 수 있다. 칠죄종의 전원 강림도 얼마든지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걸 죄다 도둑맞았으니.
작전은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원천을 되찾아야 해. 그러려면······."
질투는 팔란과 함께 사막 지대로 향했다. 모래 바람이 불어오는 사막의 한가운데에서 칠죄종을 불러들였다.
콰아앙—!
보랏빛의 번개가 떨어져 내렸다. 불길한 기운이 구름처럼 드리운 가운데 중년의 남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스스······.
지팡이를 손에 쥔 중년 남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아, 너무 이른 시기에 부른 거 아닌가?"
남성의 목소리에는 노곤함과 지루함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칠죄종(七宗罪) 나태.
그런 그를 바라보며 질투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었다.
"죽여야 할 인간이 하나 있다. 칠죄종의 기록 보관소를 확인해 봐."
"죽여야 할 인간이라니. 죽이지 말아야 할 인간이 어디에 있다고."
"개소리 말고."
나태는 느릿하게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칠죄종의 경험과 지식은 공유된다.
교만이 경험했던 무명(無命)에 대한 지식이 나태에게로 스며들었다.
나태의 짙은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이 인간은······. 특별하군."
"그렇지?"
두 칠죄종의 대화를 지켜보는 상위 마인 팔란은 착잡했다.
'칠죄종이 둘이라.'
원천을 빼앗긴 게 차라리 다행일지 몰랐다.
마인들의 목표는 칠죄종과 다르다.
칠죄종은 종말을 원한다.
반면, 마인들은 지배를 원한다. 지배 계획에서 인간들은 살아 있어야 한다.
현재의 협력은 일시적이다.
무명(無命)을 처치하기 위해서 이뤄진 임시 동맹일 뿐.
그때, 고심하며 서 있는 팔란을 향해 질투가 입을 열었다.
"현세에 숨어든 마인들이 있을 거 아니야? 최대한 SS급 게이트에 투입 시켜. 이번에야말로 무명의 숨통을 끊어 놓을테니까."
"그리 하겠습니다."
"표정 관리 안해?"
팔란이 억지로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붙였다.
그제서야 질투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두고보자고."
종말의 사도는 이로써 두 명.
그러나 섣불리 무명 앞에 나설 생각은 없다. 신중을 기해 놈을 완벽히 제거할 예정이었다.
'무명. 어디 한 번 발버둥 쳐봐라.'
질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었다.
무명만 잡으면 된다.
그러면 인류의 멸망은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이다.
* * *
나는 제주도에서 사냥하며 얻은 모든 아이템들을 확인했다.
제주도에 도착한 뒤, 랜턴으로 모은 아이템들의 총정리였다.
'제주도로 가길 잘했어.'
사냥의 결과가 상당히 만족스럽다.
결과적으로 내 손에 남은 아이템들이 상당했다.
우선 전용 장비 조각 총 3개.
흑색 2개.
백색 1개.
청색 조각은 나오지 않았다.
이로써 내가 소유한 조각의 개수는 다음과 같다.
- 사도 전용 무기 조각(黑) x 4
- 사도 전용 무기 조각(白) x 2
조각은 총 5개를 모으면 전용 무기가 완성된다.
'루시퍼의 전용 무기까지 앞으로 1개인가.'
그것도 가품이 아닌 진품이다.
위력이 기대가 되는 부분.
'운이 좋다면 SS급 게이트에서 완성될 수도 있겠어.'
그게 끝이 아니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과 쿨타임 초기화권까지 충분히 쌓았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3
- 쿨타임 초기화권 x1
신화급 보상이 더 나오지 않은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신화급 사도인 청룡이 나왔으니까 더 바라면 욕심이겠지.
'SS급 게이트를 공략하기엔 최적의 상태야.'
『 현재 레벨 : Lv.140 』
심지어 어제보다 8레벨을 더 올렸다.
사도들이 특히 고생했다. 내가 자고 있는 동안에도 사냥을 지속해줬으니까.
[ 주인님, 이제 곧 도착입니다. ]
청룡이 구름을 뚫고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도심의 한가운데, 보이는 것은 거대한 크기의 SS급 게이트였다.
약 20m의 게이트 주변으로 상당한 인파가 몰려 있었다. 카메라를 든 기자들과 방송국의 차량이 주변을 메우고 있다.
그뿐이 아니었다.
투두두두—!
방송국의 헬기 여러 대가 주변 상공을 배회하며 방송을 송출하고 있었다.
"인간들도 이번 게이트 공략의 중요성을 아나 봅니다. 벌레처럼 바글바글하게도 모여들었네요."
루시퍼가 그리 말했다. 사람한테 벌레라니. 상위 존재가 보기엔 그런 느낌인가.
"인터넷도 난리 났어요! 게다가 지금 저희 생중계되고 있어요."
"나도 볼래."
"비켜라, 가브리엘. 주인님의 시야를 가리지 마."
천이령이 스마트폰을 들어 보였다. 너튜브 라이브 방송에서 커다란 청룡이 지상으로 내려가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전 세계에 동시적으로 생겨난 게이트.
어쩌면 국가적 위상을 드높일 기회.
이것만한 이벤트가 없기는 했다.
와아아-!
청룡은 부드럽게 땅 위에 착지했다. 사람들의 시선 전체가 이쪽으로 모여 들었다. 환호성이 들려 온다.
"무명, 무명이다!"
"진짜 무명이 나타났다!"
"청룡을 소환수로 부리는 거야?"
"절대 놓치지 마!"
찰칵, 찰칵—!
기자들의 카메라가 연신 플래쉬를 터트렸다. 엄청난 관심이 내게로 집중되고 있었다.
어느샌가 루시퍼는 빵봉투를 걸치고 있었다. 가브리엘도 빛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청룡의 아래로 차례차례 내려간다.
정체를 숨겨주는 로브 덕분에 부담스럽지는 않다. 사진을 아무리 찍혀도 내 얼굴이 드러날 일은 없다.
'로브를 받아놔서 다행이네. 제일 요긴하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뿌듯해합니다. 』
앞으로도 얼굴은 무조건 숨기고 살아야겠다.
그리 다짐하며 길드들이 대기하는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뒤를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따르고.
그 뒤를 천이령과 수증기로 얼굴을 가린 청룡이 따랐다.
케로도 그 뒤를 늠름하게 따라왔다.
"저기 귀여운 강아지는 뭐야?"
"어디서 들어 온 거야? 내쫓아."
지나가던 개 취급인가.
그때였다.
"무명님!"
남자 한 명이 급하게 내게로 다가왔다.
협회장 대행 유진철.
"오셨습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간략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깍듯하게 인사를 한 유진철 본부장이 브리핑을 시작했다.
"알고 계시겠지만 SS급 게이트는 전 세계에서 동시에 열릴 겁니다. 입장할 수 있는 건 60인까지입니다."
60인까지?
그건 처음 듣는 이야기다.
"협회에선 랭킹 3위까지의 길드로 공략대를 구성했습니다. 각 길드에서 상위 20명의 헌터가 참여하는 형태입니다."
유진철의 말에 루시퍼가 고개를 기울였다.
"랭킹 순으로 나열하는 게 나은 거 아냐?"
"이전에 비슷한 시도가 있었는데, 결속력이 부족하다는 반응이 있었습니다. 이번 공략은 실패하면 안 되기에······."
유진철이 시선을 옮겼다. 여기는 완전한 도심 한가운데다. 시스템이 작정을 하고 정한 것 같은 위치였다.
"무명님께선 불멸 소속으로 공략하시게 될 겁니다. 다만, 길드장을 따라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공략해주시면 됩니다."
모르는 사람들보다는 불멸이 훨씬 낫다.
이번에 길드원들이 얼굴을 익히기도 했고.
"부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유진철은 그리 말하며 물러났다. 이내 고함을 치며 열성적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방금 전이랑은 완전 딴판이다.
"근데, 넌 안 가냐?"
루시퍼가 천이령을 바라보며 말했다. 천이령은 아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갈 거예요. 이제 슬슬 갈 때가 되긴 했죠. 그래도 무명님, 보조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천이령은 가볍게 눈을 감고서 두 손을 모았다. 그러자 새하얀 빛이 내 쪽으로 스며들었다.
『 성력(聖力)이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
『 모든 능력치가 20% 상승합니다. 』
『 경험치가 1.3배 상승합니다. 』
버프였다.
그것도 상당한 수준.
내가 알기로 이만한 성능을 내는 버프는 거의 없다.
"내가 가르쳤어. 대단하지?"
가브리엘이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사도는 제한 때문에 스킬을 쓸 수 없다.
천이령을 통한 편법이었다.
상당히 쏠쏠하다.
나는 천이령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나중에 뵐게요!"
천이령은 만족하며 청명의 길드로 돌아갔다.
"그러면······."
우리는 불멸로 향한다.
불멸의 천막 아래에는 익숙한 얼굴들이 모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무명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으, 음료수라도 드실래요?"
불멸이 길드원들이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유지훈만이 침착하게 안내했다.
"필요한 물품들은 미리 준비해 놨습니다. 이번 공략은 최소 일주일에서 보름이 예상되거든요."
각종 유용한 생존 용품이 들어 있는 배낭이 도열 되어 있었다. 총 네 개. 사도의 인원수대로 준비되어 있다.
"이제 곧 입장입니다."
"길드장님은 아직도 안 오셨어?"
"뭐, 곧 오겠지. 지각은 안 하는 사람이니까."
나는 불멸의 천막에 앉아 게이트를 바라봤다.
『 카운트 다운이 종료됩니다. 』
『 SS급 게이트가 활성화 됩니다. 』
우우웅—.
기이한 소음과 함께 게이트 내부의 색깔이 조금 더 밝게 변하기 시작했다.
게이트가 완전히 활성화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거 뭐야?!"
"어디?"
콰아앙-!
하늘에서 떨어진 반나체의 남성. 그가 떨어진 자리의 도로 위로 커다란 금이 새겨졌다.
"저, 저 사람은······."
길드원 하나가 음료수를 뿜었다. 제주도 공략에 참여했던 길드원들이 전투 태세를 갖췄다.
루시퍼와 가브리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진정해라."
그때, 천막이 뒤쪽에서 사최헌이 나타났다. 사최헌은 곧장 내게 말을 건넸다.
"난폭하긴 하지만 결국 도움이 될 거다. 무명 네 덕에 말이다."
"······."
"이름은 호영이라고 하더군."
아하.
어제 단말기로 통화했던 걸 말하는 건가?
딱히 내가 한 건 없다.
죽고 싶다길래 한 마디 해준 게 다인데.
사최헌은 꽤 흡족스런 표정이었다.
콰앙-!
호영은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그대로 땅을 박차고 게이트로 들어갔다. 게이트에 거센 파문이 일렁였다.
강한 돌풍이 불어오며 로브가 흩날렸다.
돌발적인 입장.
계획되지 않은 사고였다.
『 입장 가능 인원 : 1 / 60 』
대중들에겐 재밌는 이야깃거리였고,
기자들에겐 좋은 기삿거리였으며,
누군가에겐 슬픈 소식이었다.
"나 입장 못해······?"
왼편의 천막 아래 있던 랭킹이 제일 낮은 헌터 한 명이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 * *
SS급 게이트로의 입장이 시작되었다. 좌우로 늘어선 기자들의 무리를 지나 각각의 길드가 걸음을 옮겼다.
선봉은 불멸의 사최헌.
나는 그 뒤에 서 있었다. 슬며시 뒤쪽을 바라보자 유명한 헌터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새삼 순식간에 올라왔다는 생각이 든다.
F급에서 S급까지.
실제로 순식간에 올라왔기도 하고.
그러나 여기서 보는 풍경은 또 다르다. 59인의 S급 헌터들이 공략을 시작하는 풍경은, TV나 영상으로 보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들의 긴장감과 비장한 각오가 분위기에서부터 느껴진다.
실패하면 안 되는 공략.
그러한 상황이 주는 무게감은 차원이 다르니까.
'쉽게 공략되었으면 좋겠는데.'
거기에 칠죄종의 방해까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괜히 긴장된다.
나는 각 길드를 미리 눈에 넣어뒀다.
협력하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으니까. 잘 살펴둬야겠지.
참여하는 길드는 총 세 개였다.
길드 랭킹 1위 불멸(不滅).
설명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사최헌을 필두로 한 국내 최고의 길드.
길드 랭킹 2위 청명(淸明).
길드장은 성검의 소유자 2위 채아린.
세간에서 추측하는 채아린의 고유 능력은 용사다. 물론, 본인은 밝히지 않았다.
랭킹 3위인 올마스터 천이령이 속한 길드이기도 하다.
길드 랭킹 3위 패공(霸功).
패공의 길드장은 랭킹 6위 이창현이다. 거인화 능력을 갖춘 전사로서 잘 알려져 있다.
플래시 세례와 사람들의 함성 속에서 총 59명의 헌터가 게이트 내부로 발을 디뎠다.
주변의 공간이 일렁이고 이내 시야가 뒤바뀐다.
이제는 익숙한 감각이었다.
『 SS급 특수 게이트 - 종말 이전의 세계 』
성의 내부였다. 회색빛이 감도는 벽면과 바닥. 그리고 그 중심부에는 커다란 분수가 위치했다.
긴장한 헌터들 사이로 적막이 내려 앉았다. 분수에서 졸졸 흐르는 물소리만이 들려 온다.
"지금은 괜찮을 겁니다. 이 공간은 안전지대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진짜는 저 곳부터겠죠."
적막을 깬 사최헌이 앞쪽을 가리켰다.
그 앞에는 세 갈래 길이 있었다.
- 인내
- 분노
- 무시
각각의 길 위에는 시스템의 메시지이 떠올라 있었다. 각 길의 특징을 나타내는 듯했다.
『 제 1관문 : 돌파 』
『 세 개의 길을 모두 공략해야 다음 광장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
『 해당 공략에는 국가별 랭킹이 적용됩니다. 』
『 랭킹에 따라 국가별 혜택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선 건 사최헌이었다. 그는 바닥과 길에 남은 부서진 흔적을 살피더니 내게 말했다.
"호영은 중앙으로 갔다. 넌 어디로 갈거지?"
나한테 묻는 건가.
주변이 고요하다 싶어 돌아보니, 60명 가량의 헌터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모여들어 있었다.
"······."
모두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우 진지한 눈빛으로,
내 선택을 기다린다.
그랬다.
무명(無命).
이 두 글자가 가지는 무게는 더 이상 가볍지 않다.
[ 세 번째 통로에서 느껴진 기운이 제일 강한 것 같습니다. ]
[ 동의. ]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사념을 보내왔다.
그렇다면 정해졌다.
가급적이면 제일 강한 쪽을 내가 공략하는 게 맞겠지.
[ 헐. ]
[ 뭐야, 왜 그래? ]
[ ······실수로 케로를 두고 왔어. ]
[ 잘됐네. 솔직히 그 강아지가 여기 올 정돈 아니지. 이제 진짜 애완동물이나 다름 없네. ]
[ 선배님들, 조금 있다가 몇 가지 확인할 게 있는데요. ]
[ 뭐야, 너 시야 공유 안 된다며. ]
[ 가까운 거리로 사념을 보내는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
······이 녀석들 시끄럽다.
위기감이 하나도 없잖아.
분위기를 좀 읽어라.
어쨌든 세 번째 통로인 '무시'.
이쪽이 괜찮아 보인다.
스윽.
나는 손가락을 세 개 펼쳤다.
그러자 헌터들이 일제히 술렁이기 시작했다.
"와, 역시······."
"그렇게 할 수도 있었네요."
"SS급 게이트에서 이런 자신감이라니."
나는 눈을 찡그렸다.
뭐야, 3번을 고른 게 뭐 어쨌다는 거야.
사최헌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사최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미소지었다.
"세 개를 한 번에 공략한다니. 욕심도 많군."
48화 초고속
1관문 세 번째 길 '무시'.
넓은 복도가 길게 이어진 장소였다.
벽면은 성채의 회백색 벽돌로 이뤄져 있었으며, 군데군데 밝은 횃불이 붙어 있어 어둡지 않았다.
그런 복도를 나아가는 것은,
대한민국 3위 길드 패공(霸功).
패공의 길드장 이창현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무명이 얼마나 강한지, 그 부하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알고 있다만."
이전 종말의 성전.
패공 길드도 무명의 활약을 직접 보았다.
무명의 부하들은 삽시간에 마물들을 해치웠고, 무명이 등장함과 동시에 공략은 종료 되었다.
그들이 느끼기엔 그러했다.
"하지만 무명(無命)이 전부 다 해버린다고 능사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성장도 막히게 되니까."
이창현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무명이 모든 경험치를 독식한다면, 다른 헌터들은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으니까.
"음, 그런가? 그러면 너희들끼리 해보던가."
이창현 길드장의 옆에 서 있던 루시퍼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이해해주니, 고맙군."
루시퍼는 의외로 순순히 물러났다. 이창현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찝찝했다.
사도 세 명은 각각의 길로 나뉘어졌다.
첫 번째 길에 청룡.
두 번째 길에 가브리엘.
그리고 이곳 세 번째 길에 루시퍼.
무명은 예고했던대로(?) 세 갈래의 길 전부에 사도를 보냈다.
1관문은 모든 길이 공략되어야 비로소 열린다. 사도가 있으면 공략이 실패할 일은 없기에.
드드드······.
복도의 끝에서 마물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무시의 길에서 나타난 병사들은 오크 정예병이었다.
깃발을 등에 멘 오크 정찰병 둘.
패공의 길드원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뭐야, 오크들인가."
"첫 관문이니 어렵진 않다는 건가."
"몸풀기에는 딱 좋겠어."
오크라면 질리도록 상대해본 경험이 있었다.
신체적인 능력은 강하지만 기술은 뛰어나지 않은 종족이다. 레벨이 높다고 종족의 체질이 개선되는 건 아니었다.
철컥, 스릉.
길드원들이 무기를 들어 올리는 찰나였다.
『 세 번째 길 : 무시 』
『 오크들이 고통과 두려움을 무시합니다. 』
심상치 않은 메시지가 떠올랐다.
"고통을 무시한다라."
"그래봤자, 마물······."
"잠깐, 꽤 많은데."
그리 얕잡아 보려던 길드원이 굳어졌다.
정찰병의 뒤쪽.
무시의 길 끝에서 오크들이 가득 몰려오고 있었기에.
쿵, 쿵, 쿵.
어느덧 복도를 가득 메운 오크들의 행렬.
놈들의 철제 갑옷 위로 마력이 감돌고 있었으며 날카로운 도끼 위로는 푸른 마력이 타올랐다.
열은 맞춰 진군하는 모습은 마치 군대나 다름없었다.
크어어어—!
오크들의 함성이 쩌렁쩌렁하게 복도를 울렸다. 놈들은 두려움을 잊은 채 헌터들을 향해 달려왔다.
일종의 광폭화 상태나 다름없었다.
"탱커들 정면에서 받아쳐!"
길드장 이창현이 직접 방패를 들고 전진했다. 이창현의 고유 능력은 거인화.
콰아앙-!
순식간에 3m가 넘는 크기로 거대해진 이창현이 거대한 방패로 오크들을 막아냈다.
다른 탱커들이 빈 틈을 메우고, 그 사이로 정확하게 마법과 화살이 날아가 꽂혔다.
콰아앙—! 푹, 푹!
마법이 광범위한 폭발을 일으켰다. 미처 처리 되지 않은 오크들의 미간을 화살이 꿰뚫었다. 달려든 오크들이 그대로 목숨을 잃었다.
랭킹 3위 길드다운 정석적인 공략법이었다.
그러나 오크들도 만만치 않았다.
취이익! 취익!
오크들은 동료의 시체를 밟고서 전진했다.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였다.
오크들은 끝없이 밀려왔다. 팔이나 다리를 잘라내도 소용없었다. 놈들은 고통을 무시하고 전진했다.
"딜러들! 왼쪽이 비었다! 탱커 교대해!"
"부상자는 뒤쪽으로 바로 빠져!"
미처 처리하지 못한 오크들이 조금씩 헌터들을 파고들었다.
공략을 개시한지 3분.
겨우 그것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열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창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큭, 오크 하나 하나가 강하고 질기다.'
이곳에 모인 자들 모두 140레벨을 넘긴 강자들.
셀 수 없이 많은 공략을 해 온 베테랑이다.
그러나 마물들의 체급이 상당했다.
SS급 마물다운 강력함이었다.
패배하진 않겠지만 소모전이 되는 건 피할 수 없었다.
"후퇴, 일단 후퇴하면서 전열을 가다듬자!"
"후퇴! 장벽을 세워!"
헌터들이 그리 소리치는 순간이었다.
콰아아앙—!
뒤쪽에 서 있던 루시퍼가 날아오르며 광선을 쏘아냈다. SS급 오크들 수십 마리가 마도광선에 그대로 녹아내렸다.
패공의 길드원들이 멍하니 루시퍼를 바라봤다.
후퇴하지 않고도 전열을 가다듬을 시간이 생겼다.
턱 막혀 있었던 숨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언제 다 잡을래? 기회는 충분히 줬으니까. 이제부턴 내가 뚫는다. "
루시퍼는 비웃음과 함께 말했다.
"네 놈들 뒤치닥 거리나 하는 건 사양이거든."
콰과과과—!
압축된 흑색의 마도 광선이 다시 한번 시원하게 오크들을 갈라냈다.
* * *
두 번째 길 '분노'.
공략을 담당한 길드는 랭킹 2위 청명(淸明).
"아니, 우리가 할 게 없네······."
길드장 채아린이 볼을 긁적였다.
이미 누가 지나간 흔적이 가득했다. 마수들의 시체가 넓은 복도에 즐비했다.
청명 길드는 남은 마물들을 뒷정리하는 걸로 충분했다.
『 두 번째 길 : 분노 』
『 등장하는 마물들이 분노 상태에 돌입합니다. 』
나타난 마수들이 평소보다 날뛰곤 있었지만, 수가 워낙 적어서 처리하기 어렵진 않았다.
"아까 게이트로 혼자 뛰어든 사람이 이렇게 했단 말이지. 진짜 괴물인가······."
채아린이 허탈하게 입맛을 다시는 그때.
"언니, 그 사람 귀환자래요. 차원을 몇십 개는 거쳐 왔댔나."
간만에 복귀한 천이령이었다. 채아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비둘기는······."
"무명 헌터님의 사도에요."
천이령의 머리에는 흰색 비둘기가 얹혀 있었다.
구구.
"아하. 아까 그분."
채아린은 잠시 비둘기를 바라보다, 이내 천이령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렇게 잠시 물끄러미 천이령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천이령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묘하게 자신감이 넘친다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분위기가 있었다.
고작 며칠 안 봤을 뿐인데.
불멸에서 엄청 특훈 했나?
천이령은 씩 웃으며 손에 든 단검을 핑그르 돌렸다.
"그렇게 보여요? 사실 저 완전 강해졌거든요. 빨리 싸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해요."
"무명 헌터랑 관련 있는 거야?"
불멸 길드에 갔다던 천이령은, 오늘 무명과 함께 청룡을 타고 나타났다.
"그건······."
천이령이 무어라 대답하려는 순간.
"우왓, 마정석이랑 아이템을 몽땅 남기고 갔는데?"
"길드장님, 이리 와 봐요! 대박이에요!"
뒤쪽의 길드원들이 난리가 났다.
채아린은 마지못해 고개를 돌렸다.
"뭐가 그렇게 대박인데······. 나 지금 중요한 이야기······. 잠깐. 전설+? 지, 진짜 대박이네? 이걸 두고 갔다고?"
채아린의 입에 함박 미소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몰라도, 천이령의 얼굴은 한결 밝아져 있었다.
그거면 된 거 아닐까.
* * *
첫번째 길 '인내'.
"넌 새로운 사도인가?"
사최헌이 물었다. 청룡은 웃으며 대답했다.
"맞아요. 아, 저도 그쪽 위에서부터 봐서 잘 알고 있어요. 성좌들한테 인기가 많잖아요. 수상할 정도로요."
사최헌의 주변으로 많은 수의 별이 반짝이고 있을 터.
물론 사최헌은 답하지 않았다.
화제를 돌릴 뿐.
"3관문 즈음에는 다른 국가의 헌터들과 조우하게 될 거다. 보아하니, 그런 구조로 이뤄진 게이트다. 빨리 공략할수록 유리할테고."
다만, 이번에는 국가별 랭킹 시스템이 존재했다.
달리 말하면 국가간의 경쟁이 생겼다는 의미.
"상당히 자세히 아시네요?"
청룡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사최헌은 다시 말을 돌렸다.
"문제는······."
"칠죄종이다."
"그렇죠. 언제쯤 나타날까요."
"네 말대로 칠죄종이 마인들과 접촉했다면. 지금쯤 각국의 헌터들 사이에 마인이 숨어들었을 거다."
"겨우 마인으론 상대가 안 될텐데요?"
사최헌은 고개를 저었다.
"칠죄종의 권속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칠죄종은 권속을 소유할 수 있다. 일종의 직속 부하.
권속은 칠죄종의 힘을 일부 계승하는 존재였다.
대신 칠죄종의 명령을 거부할 수 없지만.
권속이라면 다소의 혼란을 불러올 수 있을 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칠죄종도 계략이 있겠지. 물론, 그 점을 역으로 노리면······."
"칠죄종을 오히려 불러낼 수도 있겠죠."
둘이 죽이 잘 맞네.
사최헌과 청룡의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무명이 고개를 끄덕였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현재 레벨 : Lv.143 』
SS급 게이트에 존재하는 마물들의 경험치는 더욱 풍부했다. 제주도보다 빠르게 레벨이 올랐다.
영혼등에 백광이 차오르는 속도도 더 빠르다.
'칠죄종······. 지금의 전력이라면 이길 수 있다.'
신화급 사도 청룡.
거기에 귀환자 호영.
호영 그 사람은 동료라기엔 애매하지만······. 사최헌 헌터의 말대로라면 인류의 편.
이 둘이 추가된 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진다.
주강혁은 고개를 들어 전방의 마물들을 바라봤다.
마물들이 움직임이 더욱 생생하게 시야에 담긴다. 레벨이 오르며 향상된 인지 능력 덕분.
현재 주강혁은 의심할 나위 없는 S급.
'확실한 능력만 하나 더 있다면 좋을텐데.'
랜턴의 빛은 반쯤 차올라 있었다.
SS급 게이트엔 아직 사냥할 마수가 많이 남아 있다.
새로운 힘을 손에 넣을 기회도 그만큼 있으리라.
* * *
게이트 공략은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이는 모든 국가가 동일한 내용이었다.
1관문, 세 갈래길.
순조로운 대한민국과 달리 다른 국가들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일본 1위 길드 '무겐'.
"젠장, 더럽게 세잖아. 난이도가 제정신이 아니구만."
"그러면 SS급 게이트가 애들 놀이터인 줄 알았어? 크윽!"
"앞쪽 틀어막아! 죽을 각오로 뚫어내!"
입장 인원은 60명.
세 개의 길드가 각각의 길을 나아갔다.
한 군데라도 뚫지 못하면 관문은 열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이다.
"무리하게 공략하려 하지 말아라! 고작해야 첫번째 관문이다. 최대한 피해 없이 넘어가야 한다!"
무겐의 길드장 하야토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난이도였다.
길 하나당 20명.
반면 나타나는 마물의 수는 수백에 달하며 버프까지 걸려 있다.
한 명도 죽어선 안됐다.
입장 인원은 60명이 끝.
추가 인원 투입이 불가하다.
전멸 당해도 바깥에서 지원은 올 수 없기에.
'이렇게 살 떨리는 공략은 처음이다.'
공략에 실패한다면 도쿄가 마물천지가 될 것이다.
"길드장, 전설+급 아이템이 나왔어!"
"지금은 소유권을 따질 때가 아니다, 제일 적합한 사람한테 건네줘라!"
최상위 게이트는 처음 나타났을 때가 가장 공략하기 어렵다.
헌터들의 장비가 갖춰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SS급을 공략해야 비로소 그에 걸맞는 장비가 드랍된다.
공략을 거듭할수록 게이트의 난이도가 쉬워지는 이유였다.
그러나 이 처음을 극복하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
헌터들의 무기와 마물들의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성채 복도를 끊임없이 울린다.
하야토는 침착하게 판단을 내렸다.
'최소 3일. 늦으면 6일. 그만한 시간은 필요하다.'
일본이 아슬아슬하게 공략을 이어나가는 반면, 미국은 꽤 여유롭게 공략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미국 길드 랭킹 3위 '뉴 헤븐'.
"크하하! 덤벼라, 마물들아! 내가 상대해주마!"
"맙소사, 데릭! 너무 앞에 나갔어. 돌아와!"
"괜찮아, 괜찮아! 별거 아니라고!"
콰앙! 콰아앙!
데릭의 주먹 한 방에 마물들이 뭉텅이로 쓸려나갔다. 데릭의 움직임에는 거침이 없었다.
그의 육체는 합금보다 단단했으며, 신체 능력은 다른 헌터들을 압살할 정도로 강력했다.
그야말로 전장의 히어로(hero).
그가 가진 고유 능력의 명칭이기도 했다.
"세계 1위가 걸려 있는데, 이런데서 망설일 수 있겠나?"
허공으로 날아오른 데릭은 건치를 드러내며 씩 웃었다. 콰앙! 그가 땅에 착지하자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나왔다.
뒤쪽에 있던 길드원들은 질렸다는 표정이었다.
"데릭은 왜 저렇게 흥분했어?"
"들어 오기 전에 미공개 영상을 하나 입수했는데. 그걸 보고 저러나?"
"뭔 영상?"
"한국의 무명이 종말의 성전을 초토화하는 영상."
"······."
데릭은 불도저와 같은 기세로 마물들을 휩쓸며 나아갔다.
단순히 영상을 보고 흥분한 게 아니었다.
예언자의 별이란 단체에서 이번 게이트의 구조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그 말대로라면,
전 세계의 강자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된다.
게이트를 빠르게 공략할수록,
초반에 만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정보였다.
'대체 얼마나 강한지 어서 빨리 만나보고 싶군.'
콰아앙-!
데릭의 주먹에 모인 마력이 방출되며, 전방의 마물들을 곤죽으로 만들었다. 데릭은 파죽지세로 마물들을 밀고 나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굉장한 속도였다.
'아주 좋아.'
데릭은 이쪽 길을 빠르게 정리한 다음, 곧장 다른 길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미국 내에서도 데릭이 독보적인 헌터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대로라면 6시간이면 충분하겠군.'
이대로라면 1관문을 세계 1위로 통과할 수 있으리라.
데릭이 그리 자신하며 미소짓는 순간이었다.
『 대한민국이 최초로 1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 대한민국이 시스템의 혜택을 받습니다. 』
"······뭐?"
SS급 게이트 공략 개시 30분.
전세계의 헌터들을 경악하게 만드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국이 벌써 1관문을 클리어했다고?"
"무명이 확실히 대단하긴 한 모양이네······."
"아무리 그래도 이게 말이 되나?"
거기까지였다면 모르겠으나.
"응?"
팅—!
1분도 지나지 않아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대한민국이 최초로 2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 대한민국이 추가적인 시스템의 혜택을 받습니다. 』
2관문 돌파.
그 충격적인 소식에.
"왓 더······."
Fuck.
자리에서 굳어진 데릭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49화 영향
1관문 세 갈래 길은 어렵지 않았다.
사도 세 명을 나눠서 보낸 전략이 유효했다. 긴 복도를 30분만에 공략할 수 있었으니까.
"무명 헌터는 직접 나서지도 않았는데, 이 정도라."
"그냥 즐겨. 힘 안 들이고 공략하니까 좋잖아."
처음에는 불만스러워하던 패공 길드도 순순히 납득했다.
마수의 부산물을 일정 부분 떼주는 걸로 합의했기 때문이다. 대신 사도가 처치한 마물의 뒤처리를 부탁했다.
"여기 마정석 챙겨가!"
"이 소재는 귀한데, 운이 좋구만."
"SS급 게이트에 소재가 넘쳐흐르네."
공략하며 소모해야 할 자원을 생각하면 패공 길드는 오히려 이득인 셈.
쿠구궁—.
세 갈래 길의 끝에 다다르자 발판이 올라왔고, 그걸 밟자 다음 관문으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 세계 최초로 1관문을 돌파하셨습니다. 』
『 대한민국이 제 1관문 랭킹 1위를 달성합니다. 』
『 제 1관문 : 국가 랭킹 』
- 1위 : 대한민국 [ 33분 15초 ]
- 2위 : - - -
- 3위 : - - -
모두의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창.
거기엔 대한민국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 대한민국이 시스템의 혜택을 받습니다. 』
『 혜택 1 : 대한민국 각성자에게 경험치 10% 추가 』
"제일 먼저 도착한 의미가 있었네요."
"국가 전체의 성장률이 달라지는 거니까, 이건 의미가 꽤 크겠네."
2관문의 휴식 지점에 도착한 헌터들이 각자 탄성을 자아냈다.
혜택은 대한민국 전체에 적용된다. 대한민국 헌터들의 경쟁력이 올라가게 되는 셈.
"인간들이 주인님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할 텐데 말입니다."
루시퍼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은혜랄 것도 없다. 사도들이 한 거니까.
"앞으로 마수를 잡을 때마다 10%씩 주인님께 돈을 내게 하는 건 어떨까요."
루시퍼가 턱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을 잘도 한다.
그때였다.
콰아앙—!
앞쪽에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헌터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 제 2관문 : 증명 』
『 보스를 처치해 힘을 증명하십시오. 』
광장 너머의 거대한 문.
그 문의 틈새에서 들려온 폭발음이었다.
다음 시험이 시작되는 장소였다.
"······아까 먼저 들어갔던 사람이 있었죠."
"귀환자라고 했었나?"
"혼자서 보스를 상대한다니, 미쳤나. 구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1관문의 마물들조차 쉽지 않았다. 사도들이 대부분 공략하긴 했지만, 마물들과 검을 맞대본 헌터들은 알고 있었다.
SS급 게이트에 걸맞는 새로운 난이도였다.
심지어 보스를 혼자서.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짓이었다.
그러나 사도들은 알고 있었다.
저 미친 인간이라면 보스 정도는 잡을 거다.
"저 자식이 선수를 쳐?"
"막타라도 치러 갈래."
루시퍼가 즉시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그 뒤를 가브리엘과 청룡이 따라나갔다.
[ 주인님,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
화아악-!
강한 돌풍이 헌터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성력, 마력 그리고 새로운 힘이 뒤섞인 바람이었다.
이윽고, 2관문 공략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대한민국이 최초로 2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도, 돌파라고?"
그 광경을 바라보던 헌터들의 입이 벌어졌다.
"이거야 원······."
"그냥 미쳤다는 말밖에는 안 나오네."
"우리 그냥 나갈까."
나와 면식이 있는 불멸의 길드원들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무명님."
"다른 나라 헌터들은 지금쯤 놀라 자빠졌을 걸요?"
"대박입니다."
딱히 내가 한 건 없다.
사도들이 다 했지.
어쨌든 SS급 게이트를 날먹으로 공략하는 건 사실이다.
대한민국의 헌터들은 털레털레 걸어서 다음 관문으로 향했다.
본래 상대했어야 할 보스는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도 남지 않았다.
"주인님, 가시죠. 편안하게 길을 닦아 놨습니다."
"그 사람. 또 달려가 버렸어."
아이템은 각 길드에 골고루 분배되었다. 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각 길드에서 대금을 지불할 예정이란다.
딱히 내가 쓸만한 아이템은 없었으니, 돈으로 바꾸는 게 낫겠고.
『 다크 드레이크의 영혼(SSR) 』
그래도 보스의 영혼은 건졌다.
'다크 드레이크였나.'
드레이크면 드래곤의 유사종이다. 드래곤만큼은 아니어도 상당히 강력한 개체라고 알고 있었는데.
불쌍할 정도로 순식간에 해체당했다.
그리하여 도착한 3관문.
이전과 마찬가지로 넓은 광장에 분수대가 놓여 있었다.
"이곳 분수대의 물은 피로를 회복 시켜준다.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마시도록."
"아, 예······."
사최헌이 헌터들에게 설명했지만, 딱히 마시는 사람은 없었다. 피로한 사람이 없었던 탓이다.
사최헌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동료들에게로 돌아갔다.
『 대한민국이 최초로 2관문을 돌파했습니다. 』
『 제 2관문 : 국가 랭킹 』
- 1위 : 대한민국 [ 0분 57초 ]
- 2위 : - - -
- 3위 : - - -
『 대한민국이 추가적인 시스템의 혜택을 받습니다. 』
『 혜택 2 : 아이템 드랍률 10% 추가 』
2관문 돌파에 걸린 시간은 57초.
"F급 게이트도 이런 식으로는 공략 못할걸."
"무명과 같은 나라에 있다는 걸 감사히 여기자."
"그래, 그래. 차라리 이게 낫지."
헌터들은 그리 말하며 광장의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부터는 대기해야 했다.
『 제 3관문 : 협력 』
『 다른 국가과 협력하십시오. 』
『 다른 국가의 헌터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련이 시작되지 않습니다. 』
3관문의 광장에는 뒤쪽으로 문이 하나가 더 있었다.
아마 그쪽에서 다른 국가의 헌터들이 합류하는 방식인 듯 한데, 문제는 우리가 너무 빨리 넘어왔다는 것.
"그래서 저 사람은 대체 누구야?"
"싸우는 건 못 봤는데."
"미친 사람 아니야?"
"S급은 넘는 것 같은데······."
헌터들도 슬슬 호영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열리지 않는 세 번째 관문의 문 앞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은 남자. 상반신을 드러낸 호영은 여전히 반바지 한 장만을 걸치고 있었다.
왠지 모를 분위기에 섣불리 다가서는 사람은 없었다.
'뭐······. 괜찮겠지.'
나도 굳이 다가가지 않았다.
괜히 싸움이 걸려 올까 봐.
"무명님! 텐트 설치 끝났습니다!"
"어서 쉬세요!"
불멸 헌터들이 텐트를 서로 만들어준다고 난리였다. 피식 웃으며 텐트로 가려하는데, 사최헌이 나를 붙잡았다.
"무명."
꽤 진지한 표정이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잠시 괜찮겠나?"
안 될 거 없었다.
갑작스럽긴 하지만.
아니,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틀 전에도 사최헌이 나와 독대하길 원했으니까.
끄덕.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최헌이 품 안에서 정사각형의 큐브 하나를 꺼내 던졌다.
직사각형이 문틀 하나가 생기더니, 그 안으로 새하얀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둘이서만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
그 말에 뒤쪽에 있던 루시퍼가 사최헌을 노려봤다.
"주인님하고 둘이서만? 그것도 아공간 속에서? 무슨 꿍꿍이냐."
"저도 듣고 싶은데요. 안 되겠죠?"
청룡은 반대로 굉장히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사최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명이 들어야 할 이야기다."
사최헌은 그리 말하며 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는데, 루시퍼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깃털을 사용해주시면 됩니다. 맹약에 의한 강제 소환이니, 웬만한 공간은 뛰어넘을 수 있으니까요."
그 말을 듣고 있던 청룡도 푸른색 비늘 하나를 내밀었다.
"저도 하나 드리겠습니다. 사최헌 헌터랑은 별개로요. 사최헌 헌터는 위험한 인물은 아니니까요. 위급하실 때 소환해주시면 됩니다."
청룡의 비늘도 받았다.
"개인적으론 사최헌 헌터의 이야기가 궁금하긴 합니다만. 주인님이 말씀해주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그리 대단한 말은 아닐 것 같은데.
나는 사최헌 헌터를 따라 아공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내부는 흰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전 아이템을 거래할 때랑은 다른 느낌이었다. 흰 공간의 표면에 알 수 없는 무늬가 떠다닌다.
'아마도 룬 문자.'
먼저 들어 온 사최헌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여긴 아티팩트의 내부다. 이곳에서의 말은 현세(現世)로는 누출되지 않는다."
정보 차단 아티팩트란 의미였다.
사최헌은 위쪽을 가리켰다.
"다만, 성좌들까지 막아주진 않는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을 바라봅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대담을 주시합니다. 』
성좌들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 둘은 여전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를 독대하고자 한 것은 미리 말해 둬야 할 것이 있어서다."
사최헌은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너도 알고 있었겠지."
안다니. 뭘 말하는 거지?
짐작조차 안간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사최헌은 담담히 말했다.
"내게는 예언과 비슷한 능력이 있다."
"······."
"예언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그에 준하는 능력이다. 미래의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힘이지."
전혀 몰랐는데.
아니, 전혀까지는 아닌가.
생각해보면 사최헌 헌터는 수상할 정도로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루시퍼가 물어볼 때마다 '조사했다' 한마디로 퉁치긴 했지만. 돌이켜보면 조사로 해결하기 어려운 일 투성이었다.
'처음부터 루시퍼가 사도란 것도 알고 있었지.'
마인, 케로베로스, 칠죄종······.
귀환자에 대한 것까지 꽤 상세하게 알고 있었다.
아무리 조사를 잘해도 그 모든 걸 알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게 예언의 능력이었다면,
대강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지금 이 타이밍에 왜 이걸 내게 밝히는 건지.
그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칠죄종이 나타나며, SS급 게이트의 등장 시기가 빨라졌다. 지금의 인류는 자력으로 이 시련을 돌파할 수 없다. 무명(無命). 네 협력이 필수적이다."
"······."
"그러니까 지금부터 말할 것들은 최대한 믿어줬으면 한다."
그리 말을 마친 사최헌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즉, 지금부터 할 말은 예언 없이 성립하지 않는 이야기란 거다.
그 모든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이 유사 예언인거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최헌이 입을 열었다.
"이번 게이트에 나타날 것은 칠죄종 '나태'다."
새로운 칠죄종이었다.
청룡이 만난 것은 질투.
반면 사최헌은 나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나태에 관해 설명하겠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칠죄종 나태.
그의 능력과 성격.
가지고 있는 힘의 크기까지도.
사최헌은 정확하게 설명하고자 했다.
예언이나 예측이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큼.
"네가 쓰러뜨릴 수 있는 상대인지 판단해라. 없다면 함께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거기에 인류의 명운이 달렸으니."
사최헌은 그리 말했다.
인류의 명운(命運).
나도 대강은 알고 있지만.
알면서 여기에 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 * *
"무명이 대단하긴 한가보다."
"한국은 얼마 전까지 우리랑 비슷한 수준 아니었냐? 대체 어쩌다가."
"잡담하지 말고, 앞에 마물이나 신경써!"
콰득, 콰드득!
콰앙! 쾅!
두 번째 관문 공략 메시지가 SS급 게이트에 있는 모든 헌터들의 앞으로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그냥 괴물이었다.
1관문 약 30분.
2관문 약 1분.
대체 뭘하면 그런 결과가 나온단 말인가.
일본의 헌터들은 반쯤은 체념한 상태였다. 1위는 글렀고, 상황을 보아하니 2위도 어려워 보였다.
'나약한 인간 놈들아, 벌써 포기하면 어쩌자는 거냐.'
중위 마인 '자칼'이 인상을 구겼다.
그는 현세에 스며든 마인들 중 하나였다. 심지어 일본의 S급 헌터로, 자국에선 꽤 이름 날리는 존재였다.
'끄으윽!'
치이익-!
그의 팔뚝에 새겨진 '나태의 문양'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칠죄종 나태의 명령은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 무명을 방해해라. 불가능하다면 죽어라.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라. 네 놈들이 바삐 일할수록 나는 나태해질 수 있으니.
'이 빌어먹을 칠죄종······!'
개같은 소리를 명령이랍시고 잘도 해놨다.
자칼은 이를 악물었다.
'마기의 원천을 되찾아야 한다. 그게 아니면 어차피 끝장이다.'
그 무명이 마인들의 원천을 몽땅 강탈해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칼은 분통을 터트렸다.
사실상 현세의 지배 작전이 망한거나 다름 없었으니까.
'아직 기회는 있다.'
최상위 마인으로부터의 명령이 떨어졌다.
- 칠죄종의 부하가 되어라. 마족의 미래를 위해서.
자칼은 칠죄종이 권속이 되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마족의 번영을 위해서라면 얼마든 희생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예상은 했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무명의 공략이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이러다간 무명 얼굴도 못 보고 끝날지도 몰랐다. 3관문, 4관문도 순식간에 돌파 될 거다.
2위로 들어가 대한민국과 합류해야만 했다.
그게 아니면 국물도 없다.
그러나.
"크으윽! 이 마수들 더럽게 세!"
"일단 버티자! 버티면서 힘을 온존해!"
"부상자는 뒤로 빠져!"
일본 놈들의 공략이 아주 지지부진했다.
'진짜 지랄하고 있네, 이 새끼들! 왜 이렇게 약한거야?'
자칼은 속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이대로가면 무명과 접촉하게 되는 건 다른 마인이 될 거다.
그럴 순 없었다.
그랬다간 어깨에 새겨진 권속의 낙인이 자신을 태워 죽일 것이다. 아니면 반병신으로 만들던가.
'놈의 발목이라도 붙잡아야 한다. 뭐라도 성과를 보여야 한다.'
우선은 대한민국과 합류해야 했다.
그것만이 살길이었다.
"다들 비켜라!"
고오오—!
자칼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기를 끌어냈다. 자칼의 특기는 소환술. 그의 주변으로 10여체의 소환수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어어어—!"
"크에에!"
미친 듯이 달려가는 오우거와 리자드맨들. 놈들은 눈앞의 마물들을 파죽지세로 몰아냈다.
콰과과과!
엄청난 위력이었다.
"미, 미친······! 미야모토! 굉장한데?!"
"미야모토가 각성했다! 길을 열어!"
"뭐야, 너 어제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잖아."
놀란 눈을 한 헌터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다 꺼져, 이 허접한 새끼들아!'
자칼의 일본 이름이 미야모토였다.
헌터들은 자칼의 속도 모른 채 연신 감탄을 해댔다.
"미야모토! 믿고 있었다!"
"50개체? 그것도 상위 마물들로······."
"굉장해······!"
"비켜, 다른 길도 내가 전부 공략한다—!"
악에 받친 자칼이 고래고래 소리쳤다.
그의 몸에서 뻗어 나온 마기가 마물들을 둘러쌌다.
마기에 오염된 마수들의 눈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놈들의 전신 위로 근육이 크게 도드라졌다.
콰과과광—!
자칼이 소환한 강력한 마수들이 1관문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권속 계약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마기의 원천을 되찾기 위해서.
중위 마인 자칼은 최선을 다해 게이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호오.'
그를 바라보는 무겐의 길드장 하야토의 눈썹이 올라갔다.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혀있었다.
'무명(無命)······. 존재만으로 다른 헌터의 각성을 끌어낸다는 건가.'
과연 대단한 사내다.
하야토는 그리 중얼거렸다.
* * *
"허억······. 허억······."
경이로운 속도였다.
미야모토 타케시의 각성.
한계를 뛰어넘은 활약 덕에 일본은 국가랭킹 3위로 1관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야모토의 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야모토, 그만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닥쳐! 저놈은 내가 쓰러뜨린다!"
미야모토의 기백에 주변 헌터들은 혀를 내둘렀다. 미야모토의 얼굴 위로 보랏빛 핏줄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눈동자 위로도 핏줄이 터져나왔다.
인간으로서의 변신이 풀리고 마인으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내는 중이었지만, 타인이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인류를 위해 저렇게까지 헌신하는구나.
다시봤다 미야모토.
미야모토 대단한 녀석.
찬사와 칭찬이 끊이질 않았다.
'시끄럽다, 이 빌어먹을 인간 놈들아.'
자칼은 그 소리를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보스를 쓰러뜨렸다.
쿠웅—!
자칼의 손짓에 맞춰 소환수들이 일사불란하게 공격을 펼친 결과였다.
『 일본이 제 2관문 랭킹 2위를 달성합니다. 』
"흐어억······. 후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은 자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냈다. 다른 나라를 제치고 2위를 달성했다.
"미야모토, 고생했다!"
"최고였어. 이 새끼, 언젠가 해낼 줄 알았다니까!"
"진짜 잘했다."
헌터들이 자칼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대단해. 다시 봤다. 뺀질 거리는 줄로만 알았는데.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랭킹 1위 무겐의 길드장까지 다가와 한마디를 건넸다.
"······."
이제 대꾸할 기운조차 없었다.
자칼은 헌터들과 함께 터벅 터벅 걸어 2관문을 통과했다.
그리하여 나타난 3관문.
분수대가 위치한 광장.
그곳에는 대한민국의 헌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칼을 괴롭히던 어깨의 낙인이 이제서야 조용해졌다. 목표로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자칼의 시야에 흑색의 망토를 두른 인물이 보였다.
'저 놈이 무명인가. 격이 조금 느껴지는 걸 빼면 대단치는 않아 보이는데······.'
무명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질리도록 들었다. 최근 각국의 헌터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무명의 옆에는 흑색과 백색의 사도가 나란히 서 있었다. 거기에 청색의 사도까지.
발목을 잡는 것조차 쉬워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괜찮다.'
3관문부터는 칠죄종의 손길이 닿는 지역이다.
전투 상황이 되고 난전이 시작된다면 방해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자칼의 능력은 소환술이기도 하고.
아직 권속의 능력은 발휘하지도 않았으니까.
'우선은 쉬면서 마기를 회복한다.'
"미야모토 괜찮나? 조금 쉬어. 넌 그럴 자격 있다."
"쯧, 그래. 뭐. 고맙다."
미야모토는 그리 말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때였다.
"일본의 헌터분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한국의 랭킹 1위 사최헌이 앞으로 걸어나왔다.
게이트 내에서 언어의 장벽은 허물어진다.
정확히는 각성자인 플레이어끼리의 장벽이 사라지는 것.
환영 인사라도 해주려는 건가.
자칼은 비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뭐가 되었든 지금은 휴식을 취해야 했다.
"갑작스럽지만, 지금부터······."
그냥 인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어차피 인간끼리 뭘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2관문까지 연이어 돌파하느라 죽을 지경이었다. 변신도 풀릴 뻔했으니.
자칼이 거의 바닥에 눕다시피 한 그 순간.
저벅.
무명이 한 발짝 앞으로 걸어 나왔다.
"······."
무명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무명의 격(格)이 전신을 옥죄는 듯 주변을 압박해왔다.
'뭐, 뭐야?'
누워있던 자칼 또한 멈칫했다.
별 거 아닌 격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인간치고 상당한 격이었다.
일본의 헌터들이 모두 굳어지는 것은 당연했다.
숨 막힐듯한 적막이 광장에 내려앉았다.
그러한 적막을 뚫고서.
사최헌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부터 일본 헌터들 사이에 숨어 있는 마인을 색출하겠습니다."
자칼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 시발 뭐?'
50화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