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신화급
집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소파에 몸을 기댔다.
"끄, 끝났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축하 폭죽을 터트립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무사귀환에 기뻐합니다. 』
여기까지 어떻게 걸어왔나 모를 정도다.
집을 지키고 있던 케로가 쫄래쫄래 걸어 나와 내 손을 핥아댔다.
"케로, 밥 줄게······."
가브리엘은 개사료가 든 봉지를 들고 비척비척 걸어가다가 그대로 푹 쓰러졌다. 개밥그릇에 머리를 박았다.
손에 들고 있던 사료가 쏟아졌다. 케로는 그걸 좋다고 주워 먹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이 지쳐 쓰러질 정도였다. 교만과의 전투에서 전력을 다했다는 거겠지.
"참 나. 그 정도로 지쳐서야. 사도의 체면이—."
털썩.
루시퍼는 몇 걸음을 더 걷고 쓰러졌다.
"윽."
"됐어. 쉬어. 명령이야."
"하지만 식사가······."
"배달하면 되는데 뭘."
나는 억지로 일어나려는 루시퍼를 말리고선 배달 어플을 켰다.
"······감사합니다."
루시퍼는 엎어진 채로 고개를 움찔거렸다. 그만큼 힘든 전투였다는 거겠지.
종말의 사도 칠죄종 교만.
그녀는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도 시간을 끄는 게 최선이었을 정도로.
'내가 가지 않았다면······.'
확실히 위험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는 목숨을 잃었을 수도 있고. 종말의 성전 내부에 있는 헌터들은 죄다 쓸려나갔을 거다.
'말도 안 되게 셌잖아.'
설명으로 들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루시퍼와 가브리엘 두 명이서도 운이 좋으면 이긴다고 했지만.'
전혀 그런 수준이 아니었다.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조금은 걸러 들을 필요가 있을지도.'
두 사람이 일부러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닐 거다.
아마 잘 모르는 거겠지.
성좌로서 군림하던 때와, 직접 현세에 내려와 판단한 적의 강함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격투기를 TV로 보는 것과 직접 링 위에 오르는 건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을 테니까.
'어쩌면 실제 힘이 너무 강해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본래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소유한 힘의 규모가 초월적이었던 만큼, 현세에서의 전투력을 가늠하는 게 어려울 수 있었다.
그 부분은 이제 인지했다.
"······."
나는 소파에 기댄 채로 시선만 움직여서 시스템 창을 바라봤다.
『 궁극기 : 극야도래(極夜到來) 』
- 고유 스킬 '즉살'의 광역화
- 처치한 적에 따라 격의 상승
- 특수 능력 : 오버 드라이브 (10초)
*궁극기 재사용 대기시간 - 444일
궁극기의 재사용 시간은 444일이란 무지막지한 시간이었다.
"루시퍼, 궁극기는 쿨타임 감소가 적용 안되는 거야?"
"음······. 그렇습니다."
바닥에 대짜로 뻗은 루시퍼가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정보 제한을 가늠한 모양이었다.
"궁극기를 위한 아이템이 따로 있습니다. 초기화권도 마찬가지일 거고요."
"현시점에서 구할 방법은 없겠네."
"예, 궁극기를 소유하고 계신 것도 전 세계에서 주인님이 유일하실테니까요."
유일하면 뭐하겠나.
쿨타임이 너무 긴데.
나는 시스템 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잘만하면······.'
『 해당 공략의 수준이 신화(神話)급에 해당합니다. 』
『 시스템이 공략 수준에 걸맞는 보상을 탐색합니다. 』
이번 종말의 사도 처치 보상은 신화급이다.
신화급 초기화권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죽음의 물결 때처럼 시스템의 확장을 기대해 본다.
마침 그때였다.
파직, 파지직-!
허공에서 붉은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오.'
설마 보상인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죽음의 물결 때도 보상은 이른 시기에 정산되었으니까.
스파크는 이내 잠잠해지더니, 보상을 띄워 올렸다.
『 보상 목록 』
- 칠죄종의 편린(★) x 1
- [ 신화 ] 종말의 귀걸이
- 3,000,000 Coin
- 칠죄종 교만의 혼(UR)
- 전설의 증표 x 5
『 시스템 기능 추가 』
- 전설+급의 보상에서 신화급 보상이 출현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 경험치 1.5배
- 일일 레벨업 제한이 약 30% 상승합니다. ( 12 → 15 )
뭐가 되게 많다.
"꽤 많네."
"저도 봐도 괜찮겠습니까?"
힘겹게 몸을 일으킨 루시퍼가 내 쪽을 바라봤다.
"꽤 괜찮네요."
검은 돌멩이 하나랑 귀걸이가 나타났다. 나머지는 이미 익숙해진 코인과 영혼석, 전설의 증표다.
『 종말의 편린(★) 』
- 현재 기능이 제한된 아이템입니다.
- 편린을 모아 시스템의 제한을 일부 해제할 수 있습니다.
"이건······."
교만을 처치하고 드랍 되었던 돌이다.
이걸로 두 개가 되었다.
루시퍼가 간단히 설명했다.
"영구적으로 제한을 해제하는 아이템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리미트 브레이커 같은 건가?"
"아뇨, 그 정도로 강하진 않고······. 0.2 리미트 브레이커 정도 되지 않을까요?"
두 개로는 쓸 수 없는 모양.
더 모아야 쓸 수 있는 것 같으니 챙겨두면 되겠지.
다음은 아이템이다.
『 [ 신화 ] 종말의 귀걸이 』
- 영혼 장착
- 치명적인 일격을 받았을 때, 3초간 피해 면역이 됩니다. (영체화)
- 쿨타임 7일
붉은 보석이 박힌 귀걸이.
설명을 읽어 내려가는데 심상치 않다.
방어 아이템이었다.
"와, 이건······. 좋은데."
내가 가장 문제 삼는 건 돌연사다.
이번 교만 때도 그렇고 적들의 수준이 항상 높았다.
인지하지 못한 순간에 날아오는 공격.
이건 나한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러나 이 아이템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강한 적을 만나더라도 한 번의 기회가 생긴다.
'3초간의 피해 면역.'
이 사이에 적에게 즉살을 사용할 수도 있을 테고.
"축하드립니다, 주인님. 이번 아이템은 의미가 크네요."
"오. 주인, 득템 축하."
가브리엘도 누운 채로 박수를 짝짝 쳤다. 그만큼 괜찮은 아이템이었다.
다른 보상은 코인과 전설의 증표.
칠죄종 교만의 혼까지.
- 칠죄종 교만의 혼(UR)
기존의 혼의 등급은 SSR(Super Special Rare)이었는데, 이번 혼은 UR(Ultra Rare)다.
"영혼 등에 쓰긴 뭔가 아까운데."
"몇 가지 활용법이 있는데, 일단 아껴두시죠."
"활용법이 뭔데?"
"흑마도주술로 전투 인형에 혼을 담는다거나, 아니면 케로와 융합······."
케로랑 섞는다니······.
"극악무도. 인간 말종."
가브리엘이 휙하고 케로를 낚아채더니, 루시퍼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케로 또한 루시퍼를 향해 낮게 으르렁거렸다.
"무, 물론 농담입니다."
루시퍼가 급하게 주워 담았다.
농담하는 눈빛이 아니었다는 건 둘째치고.
거기에 더해 시스템의 기능 추가도 쏠쏠한 부분이었다.
- 전설+급의 보상에서 신화급 보상이 출현할 가능성이 생깁니다.
앞으로 보상에 신화급 보상이 추가된다.
'이게 제일 기대가 되는걸.'
물론 확률적이라는 걸 봐선 운이 따라야 하는 것 같다.
나머지는 다음과 같았다.
경험치는 1.5배.
최대 레벨업 제한은 15.
"이 정도면 훌륭하네."
이미 충분히 배부른 보상이다.
"으음, 슬슬 대형 성좌들이 꼬일 법도 한데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누가 흐름을 막나······."
미간을 좁힌 루시퍼가 진지하게 중얼거렸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현 상황에 만족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아쉬워합니다. 』
뭐, 조만간 들어오지 않을까.
이렇게 보상 확인은 끝이 났다.
보상 덕분에 피곤함도 조금 가시는 듯 했다.
"그런데 말이야······."
아까부터 신경쓰이는 게 있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 베란다로 향했다.
하늘 위에선 심상치 않은 기류가 요동치고 있다. 묘한 스파크가 먹구름 사이에서 튀어 올랐다.
"아침보다는 나아졌는데. 그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네."
종말의 사도가 나타난 뒤로 대기의 흐름이 바뀌었다. 나는 뒤를 돌아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지금까지 나는 한 발자국 떨어진 장소에서 상황을 바라보았다. 악마 처치, 죽음의 물결, 케로베로스까지도 방 안에 있었고.
그러나 이번 종말의 성전에선 내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 결과 명백해진 사실이 있다면.
"이대론 안 돼."
나는 약했다.
다른 헌터가 보면 무슨 소리냐며 길길이 날뛸지도 모르겠다. 즉사 기술을 가진 주제에 뭐가 약하냐며.
하지만 위험했던 건 사실이다.
"이번으로 끝이 아니잖아. 맞지?"
내 물음에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칠죄종보다 더한 적이 나타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이번 칠죄종만 해도 그렇다.
영혼 랜턴이 고쳐지지 않았더라면,
사최헌과 천이령 헌터가 없었더라면.
나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강해져서 나쁠 건 없으니까."
예언자의 별에서 보여줬던 환상.
멸망한 세계의 모습이 떠올랐다. 종말의 사도를 막지 못했으면 정말 그렇게 됐을지도 모른다.
강해지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었다.
쿨타임 감소 아이템을 모으고, 새로운 스킬을 익히고 더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뭐, 막 필사적으로 수련을 하겠단 건 아니지만.
즉살의 능력을 낭비하고 있는 것도 아까우니까.
심지어 내 경우엔 극한까지 강해질 필요가 없다.
'최소한 적의 공격을 보고 피할 수 있을 정도만 되어도 된다.'
그 정도만 되어도 모든 싸움에서 확정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
정확히는 구경꾼 수준만 되어도 절대적 강자로 군림할 수 있다는 뜻.
이 얼마나 사기적인 능력이란 말인가.
"주인님,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얻어오겠습니다."
기운을 조금 되찾은 루시퍼가 그리 말했다.
"그래도 범죄는 조금······."
"범죄 행위 반대."
"아뇨, 왜 둘 다 그런 눈으로······. 저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법과 도덕 정도는 준수할 줄 아니까요."
나는 피식 웃고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일이 남았잖아."
"중요한 일이라 하심은?"
"돈을 벌어야지."
내 등급은 이제 막 A가 되었다.
본래 목표로 했던 S까지는 사흘 정도가 더 걸릴 거다.
그러나 이번 공략으로 신화급 아이템을 손에 넣었다.
'종말의 귀걸이.'
피해면역이라는 사기적인 옵션.
안전에 대한 대비는 한시름 놨다.
급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깃털을 사용해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내 쪽으로 부르면 그만이고.
'협회의 마인들은 정리되었고, 사최헌 헌터도 안전하다고 선언했으니······.'
안전에 대한 문제는 거의 해결되었다.
나는 인벤토리의 목록을 살폈다.
마정석과 아이템들이 상당히 쌓여 있다.
흑 이무기를 잡고 얻었던 망멸검도 여전히 있고.
"이제 협회 측에서 내 뒤를 봐줄 수 있다고 했잖아."
"예, 맞습니다. 마인들이 사라졌으니까요. 협회에서 주인님을 적극적으로 도우려 할 겁니다."
사최헌 헌터는 어차피 은신처의 주소를 알고 있고.
믿을만한 인물이라는 것도 가브리엘을 통해 검증된 상태.
"슬슬 아이템을 제대로 판매해볼까 생각하는데."
강해지는 것과 별개로,
건물주의 꿈은 아직도 건재하니까.
* * *
종말의 성전 공략은 대형 길드들 사이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 헌터 커뮤니티 - S급 게시판 』
- 진짜 무명 본 썰 푼다!! [ 999,999 Coin ]
- 와, 차원이 다름. 그냥 말도 안 돼요.
- 무명 팬클럽 가입함.
- 국가 권력급? ㄴㄴ 이 정도면 세계 권력급.
- 대체 이 사람들 뭘 봤길래······.
복귀한 대형 길드의 헌터들은 들떠 있었다.
"무명 헌터가 혼자서 최상급 게이트를 공략했다니까요."
"마이클, 그쪽이 진짜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다 죽기살기로 막고 있는데, 무명이 따악!"
근처의 지인들에게 무명의 활약을 말해주는 건 기본이요, 돈을 받고 정보를 팔기도 할 정도였다.
종말의 성전 공략 자체는 큰 기사거리가 되지 못했다.
피해를 입은 길드는 전무한 수준. 공략 시간도 짧았다. 외부에선 협회의 예측이 과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외부의 사람들이 보기엔 무난한 공략처럼 보였다.
내부를 확인한 사람이 없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거였지만.
어쨌든 그런 무명의 소식은 해외의 길드들에게도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미국 랭킹 3위 길드 '뉴 헤븐'.
"한국의 무명이라는 헌터가 그렇게 대단하다는데."
"지금 그런 데 신경 쓸 여유가 있어? 서부에 미친 괴물이 나타났는데."
"뭐라고 했지. 칠죄종(Seven Deadly Sins)? 그러니까 그거랑 똑같은 괴물을 무명이 한 방에 잡았다니까."
"무슨······. 소문 좀 걸러 들어."
"아니, 한 방은 아닐지 몰라도 진짜로······."
일본 랭킹 1위 길드 '무겐'.
"하야토, 한국에 대형 신인 소식 들었어?"
"들어는 봤다. 이번에 한국과 미국에서 나타난 번개랑 관련이 있는 건가."
"물론이지. 심지어 그 중심에는 무명이 있었대."
"알아볼 가치는 있겠네."
중국 랭킹 2위 길드 '협객'.
"스승님, 한국에서 굉장한 헌터가 나타났답니다!"
"쯧쯧. 뭘 그리 호들갑을 떠는게냐. 강해봤자 얼마나 강하다고."
"앗. 관심 없으시면 물러가겠습니다."
"······관심이 없다고 한 적은 없다."
"후후, 한 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리고 한국의 랭킹 1위 길드 '불멸'.
샤아아-.
어둠에 잠긴 길드장실 내부로 금색의 빛무리가 모여들었다. 빛무리는 흑색의 망토를 두른 여성이 되었다.
"무명(無命)의 편에 서기로 결정하신 겁니까?"
예언자의 별, 엘리스 그레인저.
반가면 속 그녀의 잿빛 눈동자가 어둠 속 사최헌을 향했다.
"그쪽은 프라이버시란 개념이 없는 건가. 최소한 노크는 하고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넓은 창으로 밤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사최헌은 바쁜 일정이 막 끝난 참이었다.
공략 기자 회견을 마치고, 협회를 정리하고, 앞으로 있을 분란의 싹을 미리 잘라 두었다. 심지어 마인 로란드의 심문까지 했다.
사최헌은 언짢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스 그레인저. 용건만 빠르게 말해라."
예언자의 별.
그들의 목적은 인류 멸망의 저지.
실제로 초반부엔 목표를 공유한 적도 있었다. 같은 것을 목표로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러나 결국엔 갈라설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사최헌은 시스템에 의한 멸망을 막아내고자 했다. 인류 전체가 존속하지 못한다면 멸망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반면 예언의 별은 선택 받은 소수의 인간을 살려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했다. 시스템을 막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단 판단이었다.
멸망의 저지냐,
인류의 존속이냐.
사최헌은 전자를 골랐다.
예언의 별은 후자를 고른 거고.
물론 이것은 나중의 일이다.
끝에 다다랐던 사최헌과 달리 예언자의 별은 이 세계의 진정한 끝을 모른다.
지금의 예언자의 별은 정말로 멸망을 저지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칠죄종 질투가 강림 했습니다."
이미 로란드를 심문하고 들었던 이야기였다. 교만의 행동 패턴이 그렇기도 했고.
각 칠죄종이 소환 가능한 종말의 사도는 1명씩.
"너무 이른 시기에 찾아온 종말의 사도지만······. 무명이 교만을 처치한 덕에 여유가 생겼습니다. 인류는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죠."
심지어 칠죄종은 서로에게 협력적이지도 않다. 따라서 대비할 시간은 있었다.
책상 앞으로 다가온 엘리스가 허공에 선을 그었다.
"사최헌, 그대에게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지식을 전하겠습니다."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나타난 북두칠성이 금색으로 빛났다.
"미래를 바꿀 일곱 개의 별."
일곱 별.
이미 질리도록 들은 이야기였다.
인류 측에 나타날 7인의 강자.
멸망한 미래에서도 최후까지 살아남아, 막대한 영향력을 끼칠 존재들이었다.
사최헌도 회귀자가 아니었다면 흥미롭게 들었을 이야기였다.
"한국은 특별한 나라에요. 그 중 셋을 소유하고 있으니까요."
엘리스는 손가락으로 사최헌을 가리켰다.
"그리고 당신은 그 중 하나입니다."
"잠깐, 하나 묻지. 무명은 일곱 별에 포함되나?"
"······아뇨."
엘리스의 대답은 약간 늦어졌다.
"왜지?"
일곱 별에 해당하는 인물들은 압도적 강자였다. 상황에 따라 멤버가 바뀌기도 했다.
무명은 그들을 뛰어넘는 강자.
당연히 포함될 거라 생각했는데.
엘리스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에겐 세계를 멸망시킬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영웅이 아닌 악(惡)이 될 수 있기에.
무명은 일곱 개의 별이 될 수 없었다.
"흐음."
사실상 예언자들이 멋대로 정한 직책.
아무래도 상관 없었으나 상당히 흥미로운 정보긴 했다.
사최헌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 의견. 무명에게 잘 전달해두겠다."
"어······."
잠깐의 침묵이 감돌았다.
드물게 예언자의 말문이 막힌 것이다.
당황했나. 이런 반응은 처음이었다.
사최헌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예언자는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3일 내에 두 번째 별이 한국에 떨어질 겁니다."
사최헌도 이번 소식은 넘겨 들을 수 없었다.
두 번째 별은 보통 고정되어 있다.
그 녀석이 벌써?
일러도 너무 일렀다.
아니, 종말의 사도가 나타났을 때부터 예정된 흐름인가?
문제는 무명과의 충돌이었다.
그 둘이 부딪혔을 때, 무슨 일이 생길지는······.
"위치는?"
"제주도입니다."
"무명은 그때 어디에 있지?"
"무명(無命)은 이레귤러. 예언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그건 새로운 정보였다.
사최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러니 이후의 일은 그대에게 맡기겠습니다. 예언의 전달은 끝났습니다. 궁금하신 게 없다면 저는 돌아가겠습니다."
사최헌은 엘리스를 구태여 붙잡지 않았다.
사륵.
엘리스가 금빛 가루와 함께 모습을 감췄다. 원래 그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어두운 방에 홀로 남은 사최헌.
그가 다시금 바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제주도라······."
마물이 득실대는 지옥의 땅.
두 번째 별.
그 미치광이 녀석의 시작 장소론 괜찮았다.
한동안은 제주도에서 나올 일 없을 테니.
당장은 무명과 마주할 일이 없을 거다.
* * *
다음날 아침.
푹 쉬고 일어난 나는 사도들을 확인했다.
"문제 없습니다."
"회복 끝."
사도들의 회복력은 경이로웠다.
잘 먹고 잘 자고 일어났더니 컨디션이 회복 되었다. 시험 삼아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했는데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물론, 보상이 있는 건 아니었고 직접 스톱워치로 잰 기록이었다.
교만에게 패배해서 그런지 아주 이를 갈고 있었다.
"그러면 점심에 아이템 처리만 끝내고 바로 갈까."
나는 단말기를 확인했다.
오늘 점심에는 사최헌과의 미팅이 있다.
아이템을 팔아 넘길 중요한 자리였다.
이게 끝나는 대로 곧장 움직일 예정이다.
어제 곰곰이 생각해 봤다.
강해지기 위한 기초.
그건 레벨업이다.
그렇다면 효율적으로 빠르게 레벨을 올리는 법은 뭘까.
외부의 소동은 최대한 피하고 싶다.
인스턴스 게이트를 가자니 코인 소모가 극심하다. A등급 인스턴스 게이트는 훨씬 더 비쌀테고.
레벨업에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
"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음껏 날뛰면서 힘을 가다듬고 싶어."
사도들의 의견도 반영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와 있었다.
누구도 오지 않는 장소.
그리고 아주 마물이 많은 장소라면 더욱 좋다.
공교롭게도 대한민국에 그러한 땅이 하나 있었다.
"제주도로 간다."
나는 당당히 선언했다.
41화 거래
"주인님께서도 가실 겁니까?"
루시퍼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가려고."
나도 간다 제주도.
언제까지고 집에만 있을 순 없다.
안전은 보장되지만, 실력이 늘지 않는다. 마물들을 마주하며 쌓이는 경험도 분명히 있을 거다.
"드디어 주인님을 태우고 날 수 있겠군요."
"주인, 내가 비둘기로 변해서 날개처럼 로브를 붙잡을게."
어떤 방식으로든 괴악한 모습이잖냐.
영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하겠지만.
아직은 아니다.
- 무명, 네가 머무는 은신처에는 숨겨진 방이 있다.
나는 벽면에 서서 단말기를 내려다봤다. 액정 스크린에는 사최헌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내가 먼저 아이템을 판매하고 싶다고 말하자, 곧장 답이 돌아왔다.
- 벽을 일정한 속도로 네 번 두드려라.
쿵, 쿵, 쿵, 쿵.
메시지에 있는 대로 따라 했다.
스르르······.
아무것도 없던 벽 위로 직사각형의 선이 떠올랐다.
"사최헌 이 지독한 인간. 비밀 방을 숨겨놓다니."
루시퍼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문을 열자 내부에는 온갖 도구들이 즐비해 있었다.
로프, 기름, 세제, 방독면, 통조림 심지어는 총과 탄알까지. 선반 위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심지어 그 내부가 상당히 넓었다. 공간 마법과 보존 마법이 동시에 부여된 모양. 먼지 한 톨 쌓여 있지 않다.
"진짜 세계 멸망이라도 대비해둔 수준이네."
"그, 그러게요. 하하."
어색하게 웃는 루시퍼를 뒤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 세 번째 선반의 꼭대기에 아공간 주머니가 있을 거다. 거기에 아이템을 담아오면 될 거다.
『 아공간 주머니(★) 』
척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주머니다.
"창고 공간도 널찍한데, 여기에서 아이템을 옮겨 담으면 되겠다."
"주인님은 아이템만 꺼내주시면 됩니다. 옮기는 건 저희가 하겠습니다."
인벤토리를 차지하고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마정석과 아이템들을 꺼내 옮기는 작업이 이어졌다.
엄청난 양이었다.
와르르-.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하며 쌓였던 마정석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도구를 써야지."
"오."
가브리엘이 쭈그려 앉아 열심히 줍는데, 루시퍼가 삽을 들고 왔다. 삽으로 퍼야 할 정도의 양이었다.
"다 팔면 진짜로 건물 하나 나올지도 모르겠는데."
나는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건물주의 꿈이 진짜 눈앞에 있다.
* * *
아공간 주머니의 끈을 입에 문 까마귀가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구구.
그 뒤를 새하얀 비둘기가 따랐다.
가브리엘의 눈은 대상의 진위를 판별한다. 이런 거래 장소에선 더더욱 필요한 능력이었다.
우중충한 하늘 위로 날아오른 두 마리의 새가 향한 곳은 어느 카페였다.
건물 한 채가 통째로 카페였다.
인적이 드문 곳에 있어서일까, 손님은 없었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카페의 문을 열어젖혔다.
내부에는 사최헌이 차를 마시며 기다리고 있었다. 루시퍼는 카페를 둘러보며 말했다.
"너무 개방된 공간인 거 아냐?"
"이 건물에는 관련자만 있다. 비밀스런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지."
사최헌은 혼자가 아니었다. 옆에는 선글라스를 낀 남성이 있었다.
"옆에 그 사람은?"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협회장 대행 유진철이라고 합니다. 무명 헌터님의 사도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남성은 선글라스를 벗고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긴장한 기색이 있었지만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무명의 정체를 알게 되는 건, 나와 유진철 본부장. 이렇게 둘이다."
사최헌은 차를 홀짝이고선 그리 말했다.
"믿을 수 있는 인물이다. 신상을 보호하려면 협회 측의 도움은 필수적이니."
"흐음."
두 사도의 시선이 유진철 본부장을 훑었다.
어제 종말의 성전 앞에서 브리핑을 하던 인간이었다.
좀처럼 보기 드문 올곧은 인간이다.
가브리엘의 심리 측정 결과도 양호했다.
[ 강단이 있으면서 의리가 두텁고, 입이 무거운 사람. 신념이 확고해서 자신의 손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유형이야. 자신이 맡은 일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해내는 사람······. ]
무서울 정도의 성격 분석이었다.
그만한 검증이면 충분했다. 주강혁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따라와라."
사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오르자 한쪽 공간에 스태프 전용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새하얀 공간이 나타났다.
"이 안에서라면 누가 들을 염려는 없을 거다."
"돈을 얼마나 쏟아부은 거야?"
루시퍼가 기겁할 정도의 설비. 방은 온갖 마법적 장치들로 가득했다. 차단, 은폐, 방음 등등.
루시퍼와의 시야 공유까진 차단되지 않았다.
방 한쪽에는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터억.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아공간 주머니를 올려놨다.
오늘의 목적은 아이템 판매 및 그 대금을 받을 계좌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무명의 정체도 이 둘에겐 밝힐 예정이었다. 그래야 앞으로가 편해질 테니.
"뭐, 길게 끌 거 없이 빠르게 진행하자고."
루시퍼가 품 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무명의 신상이 담긴 명세서였다.
사최헌은 조심스럽게 그 종이를 받아 들었다.
종이를 살핀 사최헌이 중얼거렸다.
"평범하군. 기이할 정도로."
"저도 확인하겠습니다."
다음 차례로 유진철도 확인했다. 심호흡한 유진철이 단말기를 통해 협회의 정보를 검색해냈다.
단말기엔 협회의 데이터 베이스가 담겨 있었다.
그리하여 나타난 결과는.
- E등급 헌터 주강혁.
등록한지 이주일도 지나지 않은 헌터였다.
유진철 본부장의 눈이 커졌다. 내색하지 않으려곤 했지만, 예상조차 못한 이름이었다.
'E등급 헌터······?'
협회에서도 무명을 찾아 헤매었다. 마인의 주도하에 실시된 탐색이었지만 그렇다고 허투루 조사한 건 아니었다.
주강혁은 협회의 무명 예상 명단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사최헌도 믿기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등급을 숨길 수도 있나보군."
"뭐······. 주인은 대단하니까."
옆에 있던 가브리엘이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퍼가 황당하다는 듯 가브리엘을 흘겨봤다.
사최헌은 잠시 고민했다.
정말로 각성한지 얼마 안 됐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귀가 들어맞는 일도 있었다.
무명이라는 닉네임이 이제서야 부상한 이유.
미궁의 기록을 이제서야 갈아치우기 시작한 이유.
하지만 그렇다기엔······.
무명은 너무 강했다.
"어쨌든 확인했다."
사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지금 이 자리에서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으니까.
"기왕 이렇게 된 거 주인님께서 가족들의 신상도 보호해주면 좋겠다고 하시는데."
"믿을 수 있는 자들을 선별해서 그리하겠다."
사최헌에게 무명이 누구였냐는 이제와서 중요치 않았다.
무명(無命)의 협력을 얻는다는 것 자체가 큰 기회.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으니까.
"무명에 관한 정보는 협회 측에서도 극비 사항으로 취급될 거다. 아이템을 판매한 대금은 계좌로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사최헌의 시선이 루시퍼에게로 고정되었다.
"무명을 직접 만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나한테 하면 되잖아."
"그건 어렵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하겠다고 하시네."
"······기다리겠다."
아이템을 처리는 불멸을 통해 될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현금이 아니라 계좌를 통해 대금이 지급 될 것이고. 지급된 금액은 적절한 세탁 과정을 거칠 예정이었다.
"필요한 게 있으시다면 언제든 연락 주시면 됩니다. 협회는 무명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의사가 있습니다."
유진철 본부장이 명함을 내밀었다. 루시퍼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쪽은 마인 때문에 바쁠 텐데도 용케 나왔네."
"현시점, 무명 헌터보다 중요한 용건은 없다는 판단입니다."
유진철의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뭐, 그렇겠지. 주인님이 최우선이라······. 마음에 들어."
만족스럽게 미소지은 루시퍼가 재차 입을 열었다.
"그리고 건물 하나만 알아봐 줄 수 있나?"
"건물? 거점으로 쓰려는건가."
"뭐, 그런 셈이지. 지금의 은신처도 나쁘진 않지만."
사최헌이 고개를 갸웃했다.
건물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었다.
세계가 멸망하면 돈은 휴지조각이 된다.
부동산이 남아나지 않게 될 테니.
사최헌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내가 소유한 건물을 싸게 양도하겠다. 최상층이 거점이 될 수 있도록 특별히 세팅해두겠다. 서울이면 되겠나?"
"그래. 근데 가격이 얼만데?"
"1200억 정도면 될 거다."
"······."
예상을 뛰어넘는 금액에 루시퍼가 잠깐 굳어졌다.
장을 실컷 봤을 때 드는 돈이 20만원이니까.
1200억이면 60만 번······.
주에 한 번이라고 쳐도 인간이 1만 년을 넘게 살아갈 수 있는 돈이다.
물론, 주인님께서 작정하신다면 금방 모으겠지만.
주강혁도 충격받긴 마찬가지였다.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 전부 팔아도 그 정도는 안 될 거다. 애초에 주강혁이 생각했던 건물은 이렇게 거대한 게 아니었다.
적당히 작고 아담한 건물 하나였는데.
사최헌은 아예 빌딩을 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너무 비싼데."
루시퍼는 떠오른 감상을 그대로 뱉었다.
"더 싸게도 줄 수 있지만, 실제 소유주를 바꾸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밑작업이 들어가야 하니까."
사최헌은 담담하게 말했다.
"400억 정도면 되겠지. 무명(無命)에게 돈은 문제가 아닐 테니."
"뭐, 그거야 그렇지······."
루시퍼가 짐짓 태연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1,200억짜리가 400억이 되었다.
무지막지한 돈인 건 변함 없었다.
잠깐 동안 이어진 침묵.
먼저 말을 꺼낸 건 사최헌이었다.
"돈은 나중에 줘도 상관없다."
"그래? 진짜지. 그렇다면야 뭐. 무르기 없기다."
루시퍼가 잽싸게 제안을 낚아챘다.
[ 주인님,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
루시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돈은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세계가 멸망한다면 돈도 안 갚아도 될 테니까. 실로 악마적인 발상이었다.
"그래, 빠르게 준비해두지."
그걸로 오늘의 대담은 끝이었다.
"앞으로는 어쩔 셈이지?"
사최헌이 마지막으로 루시퍼에게 물었다. 테이블에서 꾸벅 졸고 있던 가브리엘도 고개를 들었다.
"제주도로 갈 건데."
"제주도······?"
제주도란 말에 사최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유진철 본부장이 우려를 표했다.
"제주도가 방치된지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내부에 뭐가 있을지는 완전히 미지수······."
거기까지 말하다가 말았다.
유진철 본부장도 알고 있었다.
무명(無命)에게 위험하다니.
그것만큼 바보 같은 말도 없을 테니까.
루시퍼는 말을 이어갔다.
"거기에 마물이 아주 잔뜩 있다며. 그래서 말인데······."
루시퍼의 눈빛이 변했다.
옆에 있던 가브리엘도 바짝 다가왔다.
"뭐, 지원해 줄 거 없나? 예를 들면."
"헬기 좀."
"그래, 헬기 내놔."
사도들은 뻔뻔하게 요구해 왔다.
* * *
투두두두—!
헬기의 날개가 세차게 회전했다.
불멸의 로고가 박힌 전용 헬기 두 대가 나란히 서울 상공을 가로질렀다.
마정석 제련 기술로 특수 제작된 최신식 헬기였다. 헌터들을 제주도까지도 빠르게 이송하기엔 적합했다.
첫 번째 헬기에는 나와 루시퍼, 가브리엘이 탑승했다.
"이야, 흔쾌히 빌려주네요. 사최헌 녀석 고분고분해져서 아주 마음에 듭니다."
루시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거의 뜯어내다시피 한 거지만.
그쪽에서도 정말 흔쾌히 허락해줬다.
"협회 측에서도 오케이 했으니 마음껏 사냥하면 되겠네."
나는 망토와 가면을 착용한 채로 헬기에 탑승했다.
으르르······.
옆자리에선 가브리엘이 케로를 꼭 붙잡고 있었다.
"걔를 여기까지 데려와?"
"집에 놔두면 불쌍해. 밥도 못 먹잖아."
"진짜 강아지랑 헷갈린 거 아니냐? 그놈 케로베로스야. 무슨 밥을 못 먹어."
루시퍼의 핀잔에 가브리엘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밥은 알아서 찾아 먹을 것 같긴 하다.
물론 데려가서 훈련시키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다. 이미 A급은 간단히 씹어먹을 정도로 강해 보이지만.
"불멸 쪽에서 필요한 준비는 다 해준답니다. 텐트 설치부터 거점 마련까지. 몽땅 저 잡부들한테 시키죠."
루시퍼가 엄지로 뒤쪽의 헬기를 가리켰다.
"아니, 잡부라기엔······."
두 번째 헬기에 타고 있는 건 불멸의 최정예들.
"너무 유명한 사람들인데."
초 엘리트 집단이다.
뒤쪽의 헬기에는 불멸의 길드원들과 천이령 헌터가 타고 있었다.
헬기의 창문에 다닥다닥 붙어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 꼬맹이도 타라고 했습니다. 몇 가지 실험해 볼 게 있거든요. 지난번 일도 그렇고 꽤 도움이 될 겁니다."
천이령 헌터라면 환영이다.
영혼등의 수리 덕분에 교만을 처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저쪽에서도 가르침(?)을 받고 싶어 하니 괜찮겠지.
"사최헌 헌터는 바쁘다고 했지."
단둘이서만 할 이야기라는 게 뭘까.
뭐,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투두두두—!
얼마 지나지 않아, 특수 헬기가 제주도 상공에 진입했다.
검은 땅 위로는 마물들이 득실거리고 있었다. 각종 매체에서 가끔식 보던 모습 그대로다.
한때는 유명한 관광 명소였던 제주도가 이제는 인간이 발이 닿지 못하는 완전한 마경으로 변해 있었다.
"와, 이건 인간들이 손 쓰기 어려울 만 했네요."
루시퍼가 혀를 찼다.
마물들 때문에 내리는 건 자력으로 내려야 했다. 반대편의 헬기에서 불멸의 길드원들이 떨어져 내렸다.
먼저 뛰어내린 건 가브리엘.
콰앙—! 착지한 장소에서 빛과 불길이 크게 치솟으며 마물들을 몰아냈다.
"주인님,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루시퍼가 한 팔로 나를 안고서 뛰어내렸다.
수많은 마물들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먹이가 떨어지나 기다리는 모습.
뻔뻔하게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놈도 있다.
크르르르!
크아아아!
죽음의 물결 때보다 심각하다.
레벨 대가 더 높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콰아앙—!
한 발 앞서 케로와 떨어진 가브리엘이 마물들을 몰아냈다. 발차기 한 번에 우수수 튕겨져 나갔다.
콰과과과—!
어느새 케로베로스로 변한 케로 또한 사정없이 마물들을 찢어발겼다.
땅에 내려온 직후, 마찬가지로 땅에 착지한 불멸의 길드원 중 하나가 다가왔다.
"와, 와우······. 거점으로 삼을 포인트까지 길을 안내하겠습니다! 따라와 주세요!"
공간 지배자 유지훈.
그의 손짓에 따라 앞쪽으로 가상의 선이 생겨났다.
"방향을 참고하시면 될 겁니다! 길은 저희가 열겠습니다. 예상 시간은 약 1시간입니다."
루시퍼가 손을 앞으로 뻗었다.
"주인님, 제가 하겠습니다. 뭐, 귀찮게 이것저것 할 필요 없이 바로 뚫으면 되는 거잖아요."
콰아아앙—!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발사된 흑색의 레이저가 대지를 불태웠다. 레이저가 지나간 경로의 마물들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최, 최고네요."
유지훈이 감탄과 함께 멍한 표정이 되었다.
"이, 이게 아니지.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예상 시간은 5분입니다!"
예상시간이 확 줄었다.
유지훈 헌터의 손짓에 투명한 벽이 생겨났다. 마물들의 접근을 막아내는 임시 방벽이었다.
동시에 나아갈 길이기도 했고.
크르르르-!
그아아!
커헝, 커헝!
마물들이 잔뜩 벽면에 달라붙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이를 지나가면 그만이다.
'······확실히 편하네.'
저기를 쭉 따라가면 거점으로 삼을 포인트라는 거지.
"가시죠, 주인님."
"케로, 가자."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내 뒤를 따랐다.
"그래."
나는 그리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영혼 등을 꺼내 들었다.
『 '순백(純白) : 무결한 영혼등'이 영혼을 수집합니다. 』
칠죄종 교만을 처치하며 신화급 보상이 추가 되었다. 기적인만큼 보상이 나올 확률도 높을 거다.
'어디 한 번 신화급 보상을 노려볼까.'
제주도 공략이 끝나기 전에 한 번은 나오리라.
나는 랜턴을 들고 마물들의 파도를 향해 걸어 나갔다.
42화 폭업
현세에 숨어든 타차원의 존재 마인(魔人).
- 허, 이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입니까?
- 한국의 마인들이 전멸이라니.
- 심지어 칠죄종 교만까지 당했다는 건······.
"종말의 열쇠를 무의미하게 소모한 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천한 것에게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지요."
상위 마인 팔란은 개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의 협회장은 그만한 대가를 치룬 겁니다."
그의 주변으로 떠오른 14개의 그림자.
현세 정복의 구심점이 되는 15명의 마인들이었다. 본래 16인이었으나, 한국의 협회장이 죽은 탓이었다.
대다수가 상위 마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 무명(無命)을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것만은 확실하지 않은가요.
- 누군가는 총대를 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크흠······.
- 허허······.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 뿐이었다. 최상위 마인이 나서주길 바라는 분위기였다.
한국의 마인들이 전부 썰려 나갔다.
심지어 종말의 사도 교만까지 처치했다.
무명은 이미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아티팩트 '종말의 열쇠'는 마인들이 꺼낼 수 있는 사실상 최강의 패. 그렇게 소환된 종말마저 패배했으니.
상위 마인들이 직접 나서긴 불가능했다.
쯧쯧.
상위 마인 팔란은 혀를 찼다.
- 뭘 데려가도 무명의 먹이가 될 뿐입니다.
- 자칫하면 무명의 성장을 가속하는 게 아닐지······.
- 이레귤러의 출현을 두려워 해야 하지 않습니까. 이래서야, 무명을 걷잡을 수 없게 될 겁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자는 없었다. 그들은 무명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
최상위 마인들의 입 또한 무거웠다.
팔란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마인의 정체가 까발려진 마당에 이대로 숨죽이고 있을 필요가 있는지요?"
마인들이 인간 사회에 숨어 들었다.
그런 비밀이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좀 더 적극적으로 움직인다면 방법이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 진정하시지요. 마인들의 신분은 들키지 않습니다.
- 앞으로 어줍잖은 회동만 금지하겠습니다.
- 권력을 키워 멸망의 때를 대비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사태를 지켜보겠다는 태도였다.
그때, 누군가가 화제를 돌렸다.
- 그러고보니 미국에도 칠죄종이 강림했다는 게 정말입니까?
- 당장은 칠죄종의 문제가 더 시급하지요.
현세에 강림한 칠죄종.
이 또한 큰 문제였다.
"음,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만. 칠죄종이 불러오는 혼란이 우리에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팔란은 미간을 좁힌 채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칠죄종은 종말을 부르고자 한다.
통제가 불가능하단 문제가 있지만, 상황 자체는 마인들의 권력을 강화하기엔 충분했다.
이미 사회 곳곳에 스며든 마인들이었다.
명백한 외부의 적만큼 인간들을 선동하고 멋대로 주무르기 좋은 소재도 없었다.
-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 그러면 섣불리 행동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 그렇지요. 그러면 당장은······.
그림자들이 동의를 표하는 그때였다.
푸확-!
그림자 하나의 머리가 뽑혔다. 검은 피가 화면 속에서 분수처럼 솟구쳤다.
"무, 무슨······?"
- 뭐, 뭡니까?
마인들의 당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이 신성한 회의에 대체 누가 훼방을 놓을 수 있단 말인가.
"누, 누구냐—!"
누군가가 그림자 속의 목을 들어올렸다. 회의에 난입한 정체불명이 괴한이었다.
이어지는 통신에서 들려오는 건 앳된 소년의 목소리.
- 아아, 잘 들리나? 쥐새끼 같은 마인들아.
통신을 확인한 소년은 14인의 마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 나는 칠죄종 질투다.
팔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각 마인들의 거처는 극비 사항이었다.
그걸 이렇게 쉽사리 뚫다니.
팔란은 다급하게 출구를 확인했다.
- 마인들아. 긴 말 않을게. 지금부터 나한테 협력해라. 칠죄종 전원을 강림시키려고 하는데······. 나 혼자선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거든."
종말의 사도는 협박하듯 읊조렸다.
회의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질투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 대답을 해, 버러지들아. 물론 거절한다면 마인 사회부터 절멸이다.
상위 마인들이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계속해서 침묵이 이어지는 가운데.
입을 꾹 닫고 있던 최상위 마인의 입이 열렸다.
- 무명(無命)을 처치해 줄 수 있다면 협력하겠다.
종말의 사도를 상대로 협상이라니.
그 대담함에 상위 마인들이 숨을 삼키는 찰나.
- 오, 그거 꽤 괜찮은 이야기를 하는데.
칠죄종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질투는 죽은 마인을 치워내고, 그 자리에 걸터앉았다.
소년의 그림자가 허공에 맺혔다.
- 어디 천천히 이야기를 한번 나눠보자고.
칠죄종과 마인의 협력.
전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적 없는 기묘한 동맹이었다.
* * *
콰아아아—!
루시퍼의 마도 광선 한 방에 길을 가로막던 마물들이 찢겨져 나갈 때마다 길드원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와, 마력의 농도가 우리랑은 차원이 달라."
"마나 제한이 없는 걸까?"
불멸의 길드원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빵봉투. 저 분이 무명 헌터님의 소환수 같은 거란 거잖아."
"소환수의 마력은 원래 소환사에게 달려 있는데······."
"무명님도 그에 못지않게 강하시단 거겠지."
황폐화 된 제주도.
한때 아름다운 관광지로 여겨졌던 제주도는 이제 마물의 땅으로 변모했다.
무너진 건물들, 비정상적으로 부풀어오른 마수의 둥지, 검게 변해 버린 거리.
"이제 다 왔습니다. 두 분 덕분에 엄청나게 수월했네요."
공간 능력자 유지훈이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점이 될 포인트는 어느 공터였다. 그나마 주변에 마물의 수가 적은 장소. 사최헌이 짚어 준 포인트였다.
"무명님하고 제주도 공략이라니."
"길드장 처음 만났을 때보다 떨리네."
"테, 텐트 설치할게요!"
"얘들아, 천천히. 천천히 해."
유지훈이 길드원들을 진정 시켰다.
오늘은 종말의 성전을 공략한 바로 다음날이었다.
본래라면 휴식을 가질 시간.
그러나 불멸 길드의 절반이 여기에 모였다.
- 무명을 도와 제주도 공략할 인원이 필요하다.
사최헌 길드장은 가고 싶은 사람만 가라고 했다.
- 무명 헌터님이랑 제주도 정화라니.
- 이건······. 무조건 가야지.
- 내가, 내가 갈거니까. 다 비켜요.
종말의 성전에서 무명의 활약을 직접 봐서일까.
길드원들이 경쟁하듯 손을 들어 올렸다. 결국 가위바위보로 결정된 5명만 올 수 있었다.
'다들 너무 과하다니까.'
랭킹 1위인 불멸이다.
어느 정도의 예의와 매너는 지켜야한다.
너무 헤벌레 하는 건 좋지 않다.
그리 생각한 유지훈은 종이를 움켜쥐었다.
'······싸인 받고 싶다.'
헌터로서 강자를 동경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 자신도 사최헌 길드장의 강함에 반해 여기까지 왔으니까.
그러나 무명은 한 차원 다른 존재였다.
예를 들자면 아이돌들의 아이돌 아닌가. 헌터들의 헌터 같은 느낌.
유지훈의 시선이 멀리 떨어진 무명에게로 향했다. 천이령 헌터와 두 사도와 함께 뭔가를 하고 있다.
무명이 걸음을 옮기자, 흑색 로브가 가볍게 흩날렸다.
'위압감이 장난 아니네.'
별것 아닌 행동을 하는데도 멋있어 보인다.
실제로 무명으로부턴 묘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죽음의 물결 이후 소유하게 된 미미한 격 덕분이었다.
고심하던 유지훈은 종이와 펜을 손에 쥐고선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앞에 서자 나오는 말은 지극히 사무적인 내용이었다.
"불멸에서 근방의 마물들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편히 쉬고 계셔도 됩니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떨려서 안될 것 같았다.
"응? 됐어, 됐어. 마물을 물리는 결계를 칠 거거든."
빵봉투가 그럴 필요 없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빵봉투는 마력을 담은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그러니까 꼬맹아. 이 술식을 그대로 흑마력으로 재현하는 거야. 심상 속에서 한 치의 오차도 있으면 안 돼."
"으으······."
"못하겠으면 포기해라."
"그래도 해볼게요."
복잡한 그림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천이령 헌터에게 무언가 가르치고 있는 것 같았다. 천이령 헌터의 눈에 보랏빛 이채가 감돌았다.
"흑마력을 마력처럼 전신으로······. 이렇게······."
몇 분 정도 지났을까.
고오오—.
거점의 바깥을 경계로 원형의 장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벽은 점점 크기를 늘려 반구의 형태로 주변을 감쌌다.
"후우······."
천이령의 전신에서 식은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천이령은 바닥에 탈진하듯 쓰러졌다.
"그래, 쓸모가 있다니까."
"내 성력도 가르칠래."
"조, 조금만 쉬면 안 될까요?"
루시퍼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퍼는 흑마도의 정점에 달한 존재.
해내지 못할 일이 없었지만, 문제는 시스템의 제한이었다.
시스템이 일정 수준의 기량을 발휘하는 걸 억지로 막고 있었다.
'이런 방법도 나쁘진 않네.'
천이령을 통해 제한을 우회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직접 발현은 어렵다. 하지만 술식과 같은 정보 전달은 제한이 다소 널널했다.
'하긴, 인간 중에 구현할만한 능력을 가진 놈이 없을테니.'
알려준다고 해도 온전히 힘을 발휘하긴 힘들 거다.
그런데 천이령 이 꼬맹이는 그걸 곧잘 해낸다. 현세에 없는 개념이나 지식도 빠르게 흡수해 적용할 줄 알았다.
한마디로 쓸만했다.
"응? 뭐야. 불멸 가이드. 할 말이라도 있나?"
루시퍼의 앞에 유지훈이 멈춰 서 있었다.
"어······."
멍한 얼굴이었다.
유지훈은 공간 능력자다. 주변의 공간 전체를 세세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부터 근처의 마물들이 일행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먹이의 냄새를 맡은 것처럼.
그런데 결계가 펼쳐진 순간부터 주위를 맴돌던 마물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어느 마물도 결계에 다가오려 하지 않았다.
마치 상위 포식자의 영역에 다가서지 않듯.
모든 마물들이 결계를 피해다니기 시작했다.
낮은 등급의 마물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주변의 마물들은 죄다 S급에 달하는 고위험 개체들이다.
'심지어 천이령 헌터가 했다고······?'
한마디로 절대적 안전지대.
이게 있다면 게이트에서 몰려드는 마물들을 상대로 생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음."
루시퍼의 시선이 충격받은 유지훈의 손으로 향했다. 그 손에 꼬깃꼬깃 들려 있는 종이와 펜.
"뭐야, 너도 싸인 받고 싶은 거냐?"
루시퍼가 종이와 펜을 억지로 빼앗아서 종이에 슥슥 그었다. 대충 싸인한 종이를 유지훈의 셔츠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때였다.
"응······?"
숨을 돌리고 있던 천이령의 무언가 떠올린 듯 고개를 기울였다.
저 장면을 어디서 봤는데.
천이령은 품 안에 고이 넣어뒀던 싸인지를 꺼내 확인했다.
"······."
종이엔 루시퍼의 싸인이 적혀 있었다.
지난번에 무명한테 받은 싸인.
그건 빵봉투한테 받았던 거였다.
* * *
불멸에서 설치해 준 텐트는 완벽했다.
내부에는 공간 마법이 걸려 있어 호텔이나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결계 설치도 끝났다고 했고.'
거점을 중심으로 마수들을 사냥해나가면 될 거다.
제주도가 넓으니 전체를 정화하긴 좀 어렵고.
레벨만 충분히 올리는 걸 목표로 하면 되겠지.
"주인님, 준비 끝나셨으면 바로 가시죠."
"주인, 최선을 다해 보호할게."
나는 두 사도와 함께 경계 바깥으로 향했다. 케로는 가브리엘이 옆구리에 끼고 있다.
천이령은 결계를 설치하느라 마력을 너무 많이 소모했는지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잠꼬대로 싸인이 어쩌구 했던 것 같은데.
"너무 혹독한 거 아니야?"
"에이, 완전 널널합니다. 이 정도도 못하면 제자 될 생각은 버려야죠."
루시퍼가 어깨를 으쓱였다.
불멸의 길드원들도 저 멀리서 따라오고 있었다.
"그러면 가볼까."
결계 바깥으로 걸음을 내딛자, 텁텁한 기운이 훅 끼쳐왔다.
그르르르······.
마물들이 떼거지로 모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쉽사리 다가오진 못하고 있었다.
"빠르게 오늘 할당량을 채우겠습니다."
"누가 더 많이 잡나 대결이야."
"그거 좋지."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뛰쳐나갔다. 이어서 폭격 수준의 굉음이 천지를 울렸다.
콰과과과—!
정말 폭탄이 터지듯 솟아오르는 땅. 마물들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랜턴에 영혼이 모이는 속도도 나쁘지 않다.
크어어—!
조그맣던 강아지가 순식간에 머리 세 개 달린 괴수가 되어 지면을 박찼다.
콰과과!
주변에 있던 마물들이 날카로운 발톱에 찢겨나갔다.
케로베로스는 내 주변을 맴돌며 날 보호하고 있다.
[ Lv.132 ]
[ Lv.126 ]
'120후반부터 130초중반.'
주변의 마수들은 S급에 근접한 놈들 뿐이다. 모습이나 형상도 참 다양했다. 늑대, 벌레, 쥐, 불꽃을 두른 도마뱀 등등.
놈들의 움직임은 칠죄종에 비하면 보잘 것 없었다.
'죽음의 기운······. 다시 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혹시나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마물들을 주시했다.
물론 기운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지금까지와는 다른 힘이었어.'
궁극기 극야도래의 특수 능력 '오버 드라이브'.
효과가 발휘된 10초 동안.
나는 죽음의 기운을 다룰 수 있었다.
'연습을 하고 싶어도, 궁극기 쿨타임이 워낙 길어야지.'
마물들은 아예 내 쪽으로 다가오려하질 않았다. 케로가 다가오는 놈들을 찢어버려서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격 때문인가.'
몸을 보호하기엔 더없이 좋은 능력이었다.
나는 케로베로스의 호위를 받으며 마물 사냥을 지켜봤다. 마물이 천지라 사냥 효율이 정말 좋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경험치 1.5배가 적용 중입니다. 』
어느덧 현재 내 레벨은 104.
사냥 개시 20분 동안 2레벨이 올랐으니, 나쁘지 않은 속도다.
아니, 다른 헌터들이 보면 기겁할 속도다.
A급부터 S급까지의 레벨업은 지옥 같은 인고의 시간이랬으니까.
하지만 제주에는 마물이 가득하고 나는 경험치 독식이 가능하다. 남들에겐 힘든 일이 내겐 쉽다.
오늘의 목표는 114.
'제주도에 오길 잘했네.'
마수들이 끝없이 쏟아지고 있다. 일반 길드들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이.
"무명님!"
그때, 내쪽으로 불멸의 길드원들이 다가왔다. 케로를 의식해서 천천히 다가왔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유지훈 헌터가 입을 열었다.
"출발 전에 길드장한테 들은 정보가 있어서요. 혹시 쿨타임 아이템에 관심이 있으신가요?"
끄덕.
"마침 이 근처에 쿨타임 감소 아이템이 있다고 합니다."
유지훈 헌터는 차분하게 설명했다.
제주도에는 총 8 개의 던전이 존재했다. 사람이 발길이 닿지 않는 동안 던전은 더욱 강력해졌단다.
단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보상으로 주어지는 아이템도 마력이 축적되어 강해졌을 확률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어떻게 보상을 미리 아느냐는······. 저희 길드장님이 조사하셨다고 합니다."
"우리 길드장의 조사는 대단하지."
"뭘 물어만 보면 조사했대. 근데 또 그게 신기하게 다 맞는다니까."
뒤쪽에서 길드원들이 거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최헌 헌터가 조사광이긴 하지.
"7번 던전에 있을 확률이 높다는데, 아마 7번 던전에 있을 거에요. 길드장이 말한 건 보통 그렇거든요. 안내하겠습니다."
유지훈 헌터를 필두로 불멸의 길드원들이 전진했다. 다가오는 마수는 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는 편하게 호위를 받으며 전진했다.
'쿨타임 감소 아이템까지 얻을 수 있다라.'
불멸의 도움을 받길 잘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일으킨 빛과 폭발이 드문드문 터져나왔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하나 더 올랐다.
제주도 공략.
무지하게 편하다.
생각했던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고.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까지 제주도를 정화하지 못했던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유지훈 헌터는 손가락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를 가리켰다.
마물의 둥지.
죽음의 물결에서보다 크고 거대한 구체가 땅에 박혀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징그러운 생김새였다.
"오랜 시간 방치된 제주도는 일종의 고독(蠱毒)상태가 되었거든요. 마물들이 서로 잡아먹기를 반복하고, 그렇게 살아남은 녀석들끼리 또다시 경쟁하고······."
유지훈은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 결과 고도로 발달한 여왕이 나타났답니다. 그리고 그 여왕의 산하에 있는 마수들이 바로 하이퍼 엘리트라고 불리는 개체들이죠."
한마디로 갈 때까지 갔다는 의미다.
"협회에 속한 마인들은 그걸 알고 저희한테 공략 허가를 내주지 않은 거겠죠. 놈들이 더 강해지길 바라면서."
난이도 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견제가 있었던 모양.
"그래도 무명님이 계시니까 안심······."
설명을 이어가던 유지훈이 그 자리에서 덜컥 멈춰섰다. 뒤따르던 길드원들이 유지훈에게 부딪혔다.
"왜 그래?"
"갑자기 왜 멈췄어?"
"화장실?"
"아니, 그게 아니라······."
유지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근방의 마물들이 죄다 이쪽으로 오고 있어요."
"설마 여왕이야?"
길드원 하나가 재차 물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겁에 질려서 도망친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다시 거점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드드드······.
땅 위로 미약한 진동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새까만 마수의 파도가 몰려오고 있었다. 그 뒤로 엄청난 흙먼지가 먹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유지훈을 비롯한 모든 헌터들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 주인님, 마수 놈들이 단체로 미쳤나 봅니다. 뭐야? ]
[ 마수들이 우리를 무시하고 있어. ]
나는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향해 속으로 말했다.
'둘 다 돌아와. 오는 길에 보이는 마수들 죄다 쓸어버리면서.'
[ 후퇴인가요? ]
'아니.'
마물들이 끝없이 쏟아지는 상황. 일반적인 길드가 빽빽하게 밀려드는 마수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하지만······.
나에겐 좋다.
몰이사냥을 하게 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지.
'이쪽으로 도망쳐 오는 마물들 전부 때려 잡는다.'
품에서 꺼낸 랜턴 위로 마물의 영혼이 모여들었다. 어느새 최대치를 달성했다.
그 영롱한 빛의 색채 안쪽에서.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전설+급에 해당하는 기적이 발현됩니다. 』
나는 염원했다.
신화급 보상.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게 필요한 건······.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을 획득하셨습니다. 』
이것도 나쁘진 않다.
찌이익—!
나는 티켓을 시원하게 찢었다. 조각난 티켓이 바람에 흩날려 흩어졌다.
이어지는 아티팩트의 발동.
아티팩트의 능력은 두 개다.
하나는 제한 해제.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임시 레벨 상승.
이번에 발동할 능력은 두 번째 효과다.
『 아티팩트 '리미트 브레이커'를 발동합니다. 』
『 임시로 레벨 30을 획득합니다. (10분) 』
발동과 동시에 피어오르기 시작한 팔찌의 검은 기운.
『 현재 레벨 : Lv.135 』
나는 정면의 무수한 마물들을 바라보며 자그맣게 외쳤다.
"죽어."
푸화악—!
폭업의 시간이다.
43화 진청(眞靑)
푸화악—!
주강혁을 중심으로 반경 200m.
쫓기듯 몰려온 마수의 파도가 산산조각이 나며 부서졌다. 붉은 피와 마수의 살점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레벨이 높아 처리되지 않은 몇 마리의 마수는, 케로베로스의 먹잇감이 되어 붉은 피를 쏟아냈다.
그어어!
크아아아!
마수들은 동료의 죽음에도 아랑곳 않고 돌진해 왔다. 놈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죽음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심지어 주강혁의 격을 무시할 정도로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확실히 마수들이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느낌인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주강혁은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콰과과과—.
200m의 반경에 닿는 순간, 그곳을 경계로 마수들이 사정없이 갈려나갔다.
"이, 이 거리에서 직관이라니. 진짜 오길 잘했다."
"대체 무슨 원리야? 마법도 아니고, 물리력도 아니고······."
"너 그 말만 벌써 다섯번째야. 그냥 봐."
불멸의 길드원들이 서로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한시라도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 무명에게 집중했다.
주강혁은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7번 던전은 여기서 직진입니다."
넋을 놓고 바라보던 유지훈이 정신을 차리고 설명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감동하고 있었다.
불멸 길드가 랭킹 1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냥과 공략을 거쳤던가.
때로는 몰이 사냥을 하기도 하고, 많은 수의 마수를 처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길드장도 이렇게는 못 해.'
사최헌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함이 있었다.
물론 사최헌 길드장은 대단한 인물이다. 존경할만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의 무력에 반해서 불멸에 들어오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무명에게는 사최헌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지금 눈앞의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권.
대체 이 세계의 누가,
어떤 헌터가 이런 광경을 만들어낼 수 있단 말인가.
"야, 유지훈. 정신차려. 침 흘리겠다."
"스읍, 말 걸지마요. 감동 중이니까. 공략 끝나기 전까지 싸인 꼭 받아야지."
"못 받는다에 천만 원."
그때, 두 사도가 하늘을 날아 복귀했다.
'주인님이 아티팩트로 레벨을 올리신 건가.'
빵봉투를 쓴 루시퍼의 눈썹이 올라갔다.
끝없이 몰려드는 마물의 흐름 속.
마물들이 홍해처럼 갈라지고 있었다.
루시퍼가 보기에도 상당한 장관이었다.
"주인님, 돌아왔습니다."
"마정석을 엄청 주웠어."
가브리엘의 손에는 빵빵한 아공간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무명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콰과과과—!
시선을 전방에서 뗄 순 없었다. 미친 듯이 마수가 몰려들고 있었으므로.
"나도 도울게."
"저도 보조하겠습니다."
두 사도가 무명의 양쪽으로 내려앉았다.
"······기공파."
피슈웅-! 콰앙!
가브리엘의 성력이 마력탄처럼 쏘아졌다. 성력이 부딪힌 장소에서 가벼운 폭발이 일어나며 마수들이 녹아내렸다.
"어때, 내 신기술?"
가브리엘은 뿌듯한 미소로 물었다.
"그냥 성력 덩어리를 발사했을 뿐이잖냐."
루시퍼도 곧장 마도 광선을 사용했다. 무명의 범위가 닿지 않는 곳까지 휩쓰는 공격이었다.
'거점의 결계는 무난하고.'
루시퍼가 슬쩍 뒤쪽을 바라봤다. 거점의 결계는 잘 작동하고 있었다. 결계는 멀쩡할 것 같았다.
다시 루시퍼가 주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로브 너머의 표정은 보이지 않지만, 주인의 기운을 어느 정도 읽어낼 순 있다.
'주인님은······. 침착하시다.'
흔들림이 없다.
솔직히 조금은 걱정했었다.
교만과의 전투가 있었던 게 바로 어제였다. 주인님께서 처음으로 강적을 마주한 날이었고.
실제로 주인 주강혁은 죽을 뻔했다.
그러나 조금의 동요조차 없다.
이미 잊어버린 듯한 기색이다.
'멘탈적으로 튼튼하다고 해야 하나.'
정신계 스킬 '지고의 정신'의 효과도 있겠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벨리알 때도, 죽음의 물결도, 종말의 성전도 그렇다.
특히 종말의 사도와 마주했을 때.
주인님은 당황했었다고 말했지만······.
'전혀 그래보이지 않았지.'
루시퍼가 보기에는 달랐다.
교만을 마주한 주인님의 기운은 고요했다.
지금도 주인은 깊게 집중한 채로 전방의 마물들을 쳐부수고 있다. 한순간도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부족한 건 나다.'
루시퍼는 이를 악물었다.
자신과 가브리엘이 교만을 물리쳤다면, 애시당초 주인이 나설 필요도 없었을테니까.
원인을 따지자면 시스템의 제한.
그 탓에 루시퍼의 출력 자체가 감소 되어 있었다. 루시퍼가 혀를 찼다.
'전용 장비만 있었어도 그깟 교만 한 방에 처리했을 텐데.'
현재 주강혁이 소유한 장비 조각은 다음과 같았다.
전용 장비 조각(흑)은 2개.
전용 장비 조각(백)은 1개.
5개가 모아야 장비가 완성되니 꽤 남았다.
완성만 된다면 막강한 힘과 궁극기를 소유하게 될 것이다.
'······.'
루시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주인님께 기댈 게 아니다.'
신화급 강화석이 나오거나, 종말의 편린을 모으면 제한이 조금 더 해제될 순 있겠지.
그러나 주인님께서 무언가 해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맞는가?
그렇지 않다.
루시퍼의 충의가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제한 내에서 더 강한 힘을 낼 방법을 찾아야 한다. 편법이 되었든, 우회가 되었든 간에.'
주인님을 더욱 안전하게 보필할 수 있도록.
콰아앙!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쏘아진 흑색의 마력이 한층 기세를 더했다. 물론 실질적인 위력은 변함없었다. 여러 방법을 시도해 봐야 했다.
루시퍼가 골똘히 고민에 잠긴 사이,
무명(無命) 주강혁도 자신만의 고민에 빠져있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빠르게 상승하는 레벨.
마물들을 휩쓸듯 처치하면서도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
'궁극기의 특수 효과 오버드라이브. 그건 보이지 않는 기운을 보게 해주는 거랬지.'
죽음의 기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존재할지 모른다.
그저 보이지 않을 뿐.
'그렇다면······.'
잘만하면 기운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주강혁은 미간을 좁힌 채 집중했다.
스륵.
희미한 기운이 시야를 스쳐지나가는 듯 했으나, 이내 사라져버렸다.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이런 식이었다.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네.'
스킬과 기술은 상호 보완적이다.
헌터가 검술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그것은 스킬이라는 명확한 형태로 보상된다.
천이령이 루시퍼의 흑마도술을 배운 것처럼, 익힌 기술은 스킬이 된다.
반대로 스킬북이나 스킬 습득권을 사용했다면, 헌터는 숨 쉬듯 자연스레 그러한 기술을 체득하게 된다.
고등급의 스킬 습득권이 높은 가치를 지니는 이유였다.
살아생전 무기를 잡아 본 적 없더라도, 스킬 하나만 제대로 얻는다면 무기의 달인이 될 수 있으니까.
'노력하면 될 것 같기도······.'
죽음의 기운을 보는 게 노력으로 가능한 부분인가?
모른다. 알 수 없다.
즉살의 능력을 가진 것은 주강혁 자신뿐이었으니.
나아갈 길도 성장의 방법도 스스로가 찾아내야만 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가파르게 상승한다.
마물들이 몰려 와준 덕분에 사냥 효율은 최고였다.
대한민국 어느 게이트, 어느 미궁을 가더라도 이 정도 몰이 사냥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루시퍼와 가브리엘, 케로베로스가 끊임없이 마수를 사냥하고.
『 경험치 1.5배가 적용됩니다. 』
시스템의 경험치 보정도 받으니 말도 안 되는 레벨업 속도였다.
리미트 브레이커의 효과가 끝난 뒤로는, 루시퍼와 가브리엘에게 전방을 맡겼다.
『 일일 상승 최대 레벨에 도달하셨습니다. 』
『 현재 레벨 : Lv.117 』
레벨은 빠르게 최대 상한에 도달했다.
'오늘치 레벨은 다 올렸나.'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한 주강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S급 헌터까지 남은 레벨은 단 13.
'레벨은 능력치의 토대가 되니까.'
레벨이 오르면 모든 능력치가 조금씩 상승한다.
신체적인 능력도, 인지적인 능력도 이전보다 좋아질 수밖에 없다.
'마수들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게 한결 편해졌어.'
적을 보고 죽이기만 하면 되는 주강혁에게는 무엇보다 확실한 성장 수단이었다.
Lv.102부터 117까지.
단순 수치만으로도 10% 이상 강해진 거니까.
따라오던 불멸 길드원들도 각자 방향을 정해 마물을 없앴다. 그들에게도 마물들은 소중한 경험치였다.
물론, 무명과 사도들이 처치하는 수에 비하자면 적은 수였지만.
"근데 우리 되게 도움 안된다."
"마정석 잘 줍고 있지?"
"지훈이가 공간 마법으로 쓸어 담는 중."
"뭔가 적응 안되지만······."
"이런 공략이라면 백 번도 오지."
불멸 길드원들은 무명의 뒤에 딱 붙어서 따라왔다. 그때, 길드원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영혼등을 가리켰다.
"무명님. 랜턴이 빛나고 있어요."
허리춤에 매고 있던 랜턴이 영혼등의 빛이 충만해졌다.
성유물+등급의 무결한 영혼등.
이전보다 뛰어난 효과지만, 그만큼 모아야 되는 영혼의 포인트가 늘어났다.
최소 월드 보스의 영혼 하나.
혹은 상당한 수의 마물 영혼을 필요로 한다.
처음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는 랜턴이 거의 차올라 있었다. 종말의 성전에서 모아 온 영혼들이 남았기에.
두 번째 기적의 발동에는 시간이 좀 걸렸다.
그래도 준수한 속도였다.
주강혁은 랜턴을 들어 올렸다.
'다 찼나.'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전설+급에 해당하는 기적이 발현됩니다. 』
샤아아-.
내부에 있던 빛이 눈부시게 쏟아져 나왔다.
아마도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지 않을까.
그리 생각하고 있던 찰나.
파직, 파지직—!
새하얀 빛 위로 붉은 스파크가 감돌았다.
『 낮은 확률로 신화급 보상이 출현합니다. 』
『 [ 신화(神話) ] 스킬 습득권 』
이윽고 새까만 티켓 하나가 주강혁의 앞으로 나타났다.
"······."
언젠간 나올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근데 이렇게 빨리 나오다니.
최고다.
주강혁은 눈앞의 티켓을 거머쥐었다.
"뭐, 뭔가요?"
"괜히 알려고 하지 말자."
"옆에 마수!"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센스 있게 날개로 시야를 가려줬다. 불멸의 길드원들은 랜턴의 빛밖에는 보지 못했다.
"편하게 사용하셔도 됩니다."
"새로운 스킬. 기대돼."
두 사도가 몰려드는 마수들을 대신 처치하기 시작했다.
'신화급이라.'
그것도 스킬 습득권이다.
스킬에 관해 생각해서 그런가.
주강혁이 곧장 티켓을 찢으려는 그때였다.
콰아아앙—!
고막을 찢는듯한 강렬한 파공음이 울려퍼졌다.
"······!"
고개를 들자, 저 멀리서 엄청난 흙먼지가 폭발하듯 피어 오르고 있었다.
콰아아아—!
솟구친 흙먼지는 해일처럼 밀려왔다. 정체불명인 폭발이 일으킨 후폭풍이었다.
"주인님, 제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
"날개 뒤로."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자신의 날개를 크게 펼쳐 주강혁을 보호했다. 강력한 모래 먼지가 일대를 휩쓸며 지나갔다.
날개로 보호되고 있으나 강한 바람은 여전했다.
로브의 자락이 미친 듯이 흩날렸다.
숨을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였다.
"크르르······."
케로베로스조차 안간힘을 쓰며 바닥에 달라 붙어야 했다. 불멸의 길드원들은 갑작스런 재난에 익숙한 듯 방어막을 펼쳤다.
스스스······.
이윽고, 폭풍이 잦아들고 두 날개가 걷어졌을 때.
주강혁의 시야에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장소.
새까만 점들이 무수하게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아니, 점이 아니었다.
그 하나 하나는 점이 아니라 마물이었다.
주강혁이 무어라 입을 떼기도 전에.
중력을 거슬러 솟구쳐 오른 마물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마물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푸화악-! 퍽! 푸확! 푸확!
날개 없이 추락한 마물들은 지면에 부딪혀 터졌다. 마물의 피가 옅은 파도가 되어 밀려왔다.
마물들의 추락음이 끝없이 제주도 전역에 울려퍼졌다. 기이하다 못해 섬뜩할 지경이었다.
"여왕?"
가브리엘의 물음에 뒤쪽에 있던 유지훈이 황당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아뇨, 아뇨. 무슨 여왕이 종말의 사도도 아니고······."
"제주도에 우리가 모르는 괴물이 있던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해요."
"하필이면 7번 던전이 있는 방향······."
침을 꿀꺽 삼킨 유지훈이 무명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 폭발의 진원지를 살피는 루시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기 있는 거 인간입니다."
전설+급이 되며 향상된 기운 감지 능력 덕이었다. 하지만 제주도에 인간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다.
오히려 섬뜩하다.
"아, 잠깐만요!"
유지훈이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길드장이 말했었거든요. 이상한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요. 아무래도 이게 이상한 일 맞겠죠?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애초에 불멸 길드원들이 여기로 보내진 이유였다.
유지훈이 연락을 취하는 동안, 루시퍼가 하늘 위로 날아 올랐다.
"금방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루시퍼는 빠르게 활공해 폭발의 진원지로 날아갔다. 곧이어 루시퍼의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 진짜 인간입니다. 그런데······. ]
다시금 강한 파공음이 들려왔다.
[ 큭, 무슨 힘이! ]
루시퍼의 사념은 더 이상 전해지지 않았다. 무언가 파괴되는 듯한 굉음만이 울려퍼질 뿐.
"······."
사념을 전할 새도 없이 전투가 치열하단 의미이리라.
"주인, 아무래도 나도 가세해야 할 것 같아."
가브리엘의 말에 주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여기서부턴 마물이 없다.
마물들이 죄다 반대 방향으로도 망쳤기에.
콰앙-!
가브리엘이 땅을 박차고 날아갔다.
주강혁도 걸음을 빨리하다가 이내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불멸의 길드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주강혁의 미간이 좁혀졌다.
'정말로 사람? 그렇다면 왜 제주도에 혼자 있는 거지?'
설마 루시퍼를 적이라고 착각하나?
그때, 뒤쪽에서 불멸 길드원들이 소리쳤다.
"무명님!"
"그 사람 정체 알아냈어요!"
"귀환자라는 것 같아요!"
스마트폰을 확인한 유지훈이 무명을 향해 말했다.
귀환자.
익숙한 단어였다.
"다른 차원에 떨어졌다가······. 온갖 고생을 하고 돌아온 사람인거죠. 들어 보셨죠?!"
들어 본 적 있었다. 행방불명 된 사람이 다른 차원에서 몇십 년을 보내고 돌아온 그런 이야기.
해외에서 유명한 사람이 몇 있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 목숨을 건져 돌아왔을 뿐이었다. TV에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푸는 게 전부이기도 했고.
저런 무지막지한 존재가 되어서 돌아온 사람은 여태껏 없었다.
"길드장이 보낸 메시지를 보니까 최소 10개 이상의 차원을 순례한 사람이라는 것 같습니다! 세계 최초인 셈이죠!"
콰아앙—!
바로 앞에서 전신을 울리는 굉음이 터져나왔다. 저릿해진 공기 사이로 전신의 솜털이 쭈뼛 섰다.
귀환자라면 그나마 괜찮다.
게다가 한국인이면 말이 통할 거 아닌가.
어떻게 말로 잘 설득하면······.
"문제는 다른 차원을 오랜 시간을 떠돌아서 대화가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유지훈 헌터가 뒤늦게 소리쳤다.
젠장.
그것도 조사한 건가?
묻고 싶은 맘이 솟구쳤지만 참았다.
길드원들은 당연하다는 듯 믿고 있는 표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찌이익—!
주강혁은 고민 없이 티켓을 찢었다.
진짜로 말이 안 통할 경우도 대비는 해둬야 할테니까.
『 신화급 스킬 습득권을 사용하셨습니다. 』
찢어진 티켓의 사이로 강렬한 흑색의 기운이 치솟았다.
기운은 그대로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가급적이면 쓸만한 스킬이 나오길. 상대를 죽이지 않고 해결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아직 진짜 적인지 아닌지 확실치 않으니까.
그런 염원 속에서 나타난 스킬은······.
『 진청(眞靑) : 사도 소환 』
세 번째 사도를 부르는 스킬이었다.
44화 귀환자
공중으로 날아오른 루시퍼가 마주한 것은.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뭔······.'
제주도의 마을 하나를 통째로 날려 먹은 듯한 규모였다. 조금 전의 충격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마치 운석이 떨어진 것 같은 구덩이.
마물의 사체가 빼곡하다. 구덩이의 중심부는 피로 이뤄진 호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산처럼 쌓인 마물의 시체 위에 인간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인간. 틀림없는 인간이다.'
근육과 상흔으로 가득한 상반신을 드러낸 남성.
허름한 반바지는 피에 푹 젖어 있었으며, 더벅머리의 안쪽으로 맹수와 같은 눈빛이 엿보였다.
으득, 으드득.
남자는 무언가를 뜯어먹고 있었다.
흑색 마물의 팔로 보이는 부위였다. 그냥 마물이 아니었다. 딱딱한 외갑에 묘한 마력이 깃들어 있다.
아마 불멸 길드원들이 말했던 하이퍼 엘리트 개체.
틀림없었다.
저 인간이 방금 전 충격파를 일으킨 장본인이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인간은 분명한데, 기운이 이해가 안 가는군.'
몇백 년은 우습게 산 듯 진하게 일렁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주변을 삼킬 듯 타오르는 불길과도 같은 기세다.
100년 남짓한 수명을 가진 인간이 가질만한 기운이 아니었다.
'잠깐.'
루시퍼의 시선이 남자가 어깨에 걸친 물건으로 향했다.
남자는 어깨에 두꺼운 허리띠를 두르고 있었다. 제대로 된 아이템의 착용 방식이 아니었다.
루시퍼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이템의 정보가 보였다.
'쿨타임 감소 아이템이잖아.'
주인 주강혁이 필요로 하던 아이템.
'저게 7번 던전의 보상인 것 같은데.'
주위를 둘러봐도 7번 던전이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던전을 공략하고 아이템을 챙긴 게 분명했다.
루시퍼가 시야 공유를 활성화하려던 찰나였다.
'!'
마물을 뜯어먹던 남자의 시선이 루시퍼를 향했다. 남자의 맹수 같은 눈빛이 루시퍼에게 닿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남자가 중얼거렸다.
"사도?"
다음 순간, 남자의 맨발이 허공에 있는 루시퍼를 내리찍었다. 예비동작 따윈 없었다. 300m 이상의 거리가 단숨에 좁혀진 것이다.
"큭?!"
루시퍼의 눈으로도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했다.
콰아앙—!
루시퍼는 바닥으로 내려꽂히듯 추락했다. 착지한 땅이 움푹 파이며 바닥에 고여 있던 마물의 피가 튀어 올랐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공격을 막아낸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막기는 막았지만 어처구니 없는 괴력이었다.
"뭔, 인간 따위가 이따위로······."
힘이 예사롭지 않다. 아니 그런 말로도 부족했다.
콰앙—!
순식간에 따라 붙은 남자가 주먹을 내질렀다. 그 충격에 루시퍼가 비틀거릴 정도였다.
남자는 주먹을 휘두르며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수백 년만에 돌아온 고향!"
콰앙-! 콰앙-!
"사도 따위한테 인류가 멸망하게 두지 않겠다!"
연이은 주먹질에 루시퍼의 표정이 구겨졌다.
뭔가 오해를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말을 꺼낼 틈이 없었다.
'우선 때려눕히고서······.'
루시퍼가 반격을 시도하려는 그때였다.
콰아앙-!
어디선가 날아온 백색의 섬광이 남자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가브리엘의 드롭킥이었다.
콰과과—!
남자는 그대로 튕겨 나갔다. 사정없이 땅을 구른 뒤, 크레이터의 한쪽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 몸 등장."
가브리엘이 루시퍼의 옆으로 사뿐하게 내려앉았다. 루시퍼는 언짢은 듯 입을 열었다.
"······괜히 방해하지 말고 꺼져. 나혼자도 충분하니까."
"이런. 너무 강한 척은 하지마. 약해 보이니까."
"이 비둘기가 진짜······."
"근접전은 나한테 맡겨. 2대1로 두들겨 패면 승리 확정. 위험을 감수할 필요 없음."
그 말에 루시퍼가 무어라 말하려다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남자의 힘은 비정상적이었다. 인간이 낼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더욱이 주인님이 근처에 계신 상황.
쓸데없는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확실하게 압도할 수 있다면 그리할 뿐.
투둑, 투두둑······.
땅속에 처박혔던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몸에 묻어 있던 흙이 후두둑 떨어졌다.
"사도가 둘이라. 첫 시작으론 나쁘지 않겠어."
그리 중얼거리는 남자는 아주 멀쩡했다.
가브리엘의 공격을 정통으로 맞았음에도 상처 하나 없었다. 멍이 들지도 생채기가 나지도 않았다.
"미리 말해두지만, 우리는 인류의 편이야."
가브리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상대는 어쨌든 말이 통하는 인간이다. 종말의 사도처럼 무작정 세계를 멸망 시키려는 괴물이 아니다. 대화가 통한다면 그리해야 했다.
"호오. 증거는?"
남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곧 우리의 주인이 올 거야."
"아니. 틀렸다."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을 반쯤 가린 머리카락 속에서 광기 어린 눈동자가 번뜩였다.
"진정한 대화는 주먹으로 나누는 법. 네 힘으로써 의지를 관철해라. 승자만이 진실을 가릴 수 있으니, 그 외의 증명은 전부 부질 없다."
루시퍼가 눈을 찡그렸다.
'뭐란거야. 미친 놈인가.'
반면 가브리엘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좋은 대답이다!"
남자의 눈 위로 붉은 이채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남자의 신형(身形)이 눈 앞에서 사라졌다.
콰아앙—!
가브리엘이 양손으로 남자의 주먹을 받아냈다. 주변으로 거센 기류가 터져나왔다.
예상을 뛰어 넘는 충격에 가브리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콰앙-! 쾅! 쾅!
그렇게 시작된 전투.
주먹을 부딪칠 때마다 강렬한 충격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루시퍼도 거리를 벌리고 흑마력을 끌어 모았다.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남자가 이쪽을 죽일 듯이 공격해오고 있었으니.
거리를 벌린 루시퍼는 곧바로 흑마도 광선을 쏘았다.
남자는 손날로 광선을 쳐냈다. 콰아앙! 굴절된 광선이 지면을 꿰뚫었다.
이어지는 공방 속에서도 남자는 밀리지 않았다.
루시퍼의 흑마력을 모두 쳐내면서, 가브리엘에게 유효타를 넣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나?'
종말의 사도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남자는 그야말로 괴물이었다.
루시퍼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 이 딴 놈이 다 있어.'
이해할 수가 없었다.
시스템이란 놈이 밸런스를 밥 말아 먹었나.
인간이 뭐 이따위로 강하단 말인가.
'빌어먹을 제한.'
남자는 제한의 구속 따위 받지 않는 듯 했다.
반면 루시퍼는 제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니, 변명이나 다름없는 생각이었다.
당장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조금 더 강한 공격이 필요했다.
남자가 받아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공격이.
그러나 꺼낼 수 있는 흑마력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최대 출력을 사용해도 남자는 가볍게 쳐낼 뿐이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양이 문제라면 질을 높이면 되는 거 아닌가.
이론은 있다.
다만 실패하면 신체의 손상을 각오해야 했다.
한 대라도 맞았다간 그대로 몸 안에서 흑마력이 폭발하리라.
'하려면 가브리엘이 시선을 끌어주는 지금이다.'
고오오—.
루시퍼는 몸 안의 흑마력을 고도로 압축하기 시작했다. 남자의 공격을 일일이 회피하면서 압축하고 또 압축했다.
필연적으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시스템은 이것을 용인할 것인가?
모른다. 해봐야 알 수 있었다.
루시퍼의 전신으로 검은 기운이 아지랑이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심지어 가브리엘이 두드려 맞고 있었다.
"아무리 화났어도 구경만 하는 건 좀······!"
다급한 가브리엘의 목소리.
"시끄러워. 다 이유가 있다고."
루시퍼가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더 이상의 압축은 어려웠다.
지금 루시퍼의 신체 능력으론 여기까지다.
그러나 충분하다.
"지금······!"
한 점에 고도로 압축된 흑마력이 방출되었다.
일점돌파(一点突破).
오른손에서 뿜어져 나온 가공할 흑마력은 주변의 공간을 일그러뜨리며 쇄도했다.
"?!"
남자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지만 막아낼 수 있는 일격이 아니었다.
콰아아앙—!
정통으로 맞았다.
남자는 그대로 크레이터의 측면에 처박혔다.
쿠웅!
땅과 충돌한 그 자리에 중간 크기의 크레이터가 생겨났다. 주변의 땅으로 거미줄 같은 금이 새겨졌다.
피어오르는 흙먼지 속 남자의 고개가 꺾였다.
"이건 너무 했나."
힘 조절을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효과는 확실했다. 루시퍼의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갔다.
제한을 우회할 또 다른 방법.
'압축'.
최대 출력으로 난사하던 흑마력이 1이라면.
한 점에 압축한 흑마력의 위력은 6 이상.
준비 시간이 소모되지만 위력만큼은 확실하게 증대되었다.
제한이 한 단계 풀린 상태라면, 칠죄종에게도 치명타를 가할 수 있을 정도다.
"이제 주인님께 보고를······."
"아니, 아직."
가브리엘이 정면을 가리켰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남자가 몸을 떨고 있었다.
"흐흐, 좋구나. 그래, 그거다."
심지어 감격한 듯한 목소리였다.
"그걸 맞고도 멀쩡하다고······?"
멀쩡할 리가 없었다.
흑마력이 적중하는 순간, 남자의 몸에 구멍이 생기는 걸 보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남자의 몸에는 아무런 상처가 남아 있지 않았다. 루시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재생? 아니면 불사?"
"자, 네 놈들의 각오는 잘 알았다. 그 정도로 진심이라면, 이쪽도 진심을 내야겠지."
남자의 전신으로 붉은 기운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아직도 더 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심지어 지금까지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투.
"가브리엘, 준비해라."
루시퍼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농담이 아니었다. 남자의 기운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후우."
가브리엘이 숨을 고르고 자세를 잡았다. 가브리엘의 성력이 아지랑이처럼 피어 올랐다.
내려앉은 공기 속에서 감도는 긴장감.
씩 입꼬리를 올린 남자의 발이 떼어지려는 바로 그 순간.
"머, 멈춰요!"
"우리는 적이 아닙니다!"
"그쪽하고 싸우고 싶지 않아요!"
크레이터의 위쪽에서 나타난 불멸의 길드원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그 중앙.
검은 로브와 반가면을 쓴 남자, 무명(無命)이 있었다.
* * *
무명.
아니, 주강혁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
『 [ 신화 ] 진청(眞靑) - 사도 소환 』
- 진청의 사도를 소환합니다.
소환했다.
분명히 소환했는데.
사도가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예상 못한 건 아니었다.
짐작 가는 데가 있었다.
'소환 장소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다.'
루시퍼는 어느 야산에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루시퍼가 적절한 장소를 고른 거일 테고.
가브리엘도 마찬가지다.
죽음의 물결 속에 강림했지만, 그건 성좌로서 지켜보던 가브리엘이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
'진청의 사도도 분명 어딘가에 소환은 됐겠지만.'
이 근처가 아니다.
본인의 의지로 어딘가 다른 곳에 떨어졌다. 그렇게밖에는 추측되지 않는다.
결과야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
'······.'
따라서 지금의 상황은 자력으로 해결해야 했다.
'대화가 통하려나?'
주강혁은 크레이터 내부에 있는 남자와 두 사도를 바라봤다.
상반신을 탈의한 근육질의 남성.
저 사람이 귀환자였다.
그것도 열 개 이상의 차원을 거쳐 온 사람.
겉으로만 봐도 야수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모른다.
겉모습만 보고 대화가 안 통할 거라 단정 짓는 건······.
[ 주인님, 이 자식은 말이 통하는 놈이 아닙니다. ]
[ 주인, 대화로는 안될 듯. ]
두 사도의 사념에서 절절함이 느껴졌다.
'스읍.'
대화는 안 통하나.
눈앞의 상대가 적이라면 지금 당장 즉살을 사용하는 게 맞다. 하지만 상대는 인간이다.
고향에 돌아온 귀환자.
- 대화는 어려울지 몰라도, 상황을 설명하면 인류의 편에 설 가능성은 높을 거다. 귀환자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곤 하니.
사최헌 헌터는 마지막으로 그런 메시지를 남겼다. 바쁜 일이 있는지 그 이상의 연락은 없었지만.
"대화를······."
주강혁이 그리 말을 꺼내는 순간.
"대화는 없다."
남자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남자의 시선이 무명에게 고정 되었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조심."
그 틈을 타서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무명의 양측으로 내려앉았다. 뭐가 되었든 주인을 보호한다면 이 싸움은 패배하지 않을 테니.
"호오."
그 모습을 본 남자의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인간을 따르는 사도라. 단순 기만으로 꺼낸 말은 아니었나. 좋다. 하지만 여전히 내 대답은 같다."
남자는 무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말이 아닌 힘으로 직접 보여봐라. 오랜 시간, 다른 차원을 떠돌며 내가 깨우친 사실은 말에는 아무런 무게가 없단 것이다."
남자는 미치광이처럼 소리쳤다.
"그러나 힘에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그 사람이 살아 온 일생과 가치관이 오롯이 그 안에 녹아 있을 수밖에 없다. 검 한 자루를 휘두르더라도 그 이력은 변치 않으니."
타인의 능력을 보고 모든 것을 판가름한다.
수많은 차원을 거쳐 오며 체득하게 된 남자의 능력이었다.
"그러니, 보여 봐라."
남자는 가슴을 펼친 채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주강혁에게는 실로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
죽여주세요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물론 남자는 모를 것이다.
죽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주강혁에게는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없다는 것을.
주강혁이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드드드드······.
대지가 옅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주변의 대기 또한 떨려왔다. 일대에 옅은 마력이 내려 앉았다. 진동의 근원은 하늘이었다.
남자의 위로 그림자가 짙어졌다.
"응?"
고개를 올리자 그곳에는 거대한 여왕벌이 있었다.
전신에 붉은 마력의 갑주를 두른 마물.
제주도의 정점으로 군림해 온 마물의 지배자
"여, 여왕······!"
"자, 잠깐만. 한 사람으로도 벅찬데."
불멸의 길드원들이 술렁였다.
그러나 여왕의 등장은 예정된 일이었다.
여왕벌의 충직한 부하들이 남자에게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의 부하였던 무수한 마수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에 분노한 여왕벌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 Lv.342 ]
대한민국에 출현한 어떤 마수보다 높은 레벨을 지닌, 마물의 정점이 남자를 향해 노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태연했다.
여왕의 등장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단 태도였다.
"신경쓰지 마라. 중요치 않다. 그보다 네 힘을······."
남자가 무명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푸화아악—!
마물들이 여왕이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조각난 외피와 녹빛의 체액이 터져나왔다.
마물의 조각을 뒤집어 쓴 남자는 그 자리에 굳어졌다.
"······?"
남자는 분명히 보았다.
여왕벌이 죽는 순간을.
보았기에 이해했다.
이해 했으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여왕의 흔적과 무명을 번갈아보았다.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더니, 뒤돌아 여왕이 죽은 자리로 다가섰다.
쿡.
땅을 찍어서 맛을 봤다가 마물의 체액을 핥았다. 그래도 뭔가 이상한지 얼굴을 찡그렸다.
휙.
남자가 무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입을 달싹이다가 볼을 긁적였다.
이내 결심을 굳힌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콰아앙—!
바람과 같은 속도로 땅을 박차고 사라졌다. 그 자리에서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어, 어떻게 된거죠?"
"어디로 간거야?"
"······?"
혼란 속에서 입을 연 건 루시퍼였다.
일대를 훑어본 결과, 남자의 기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답은 뻔했다.
"······도망간 것 같은데요."
무명의 힘을 확인한 귀환자.
그의 선택은 도주였다.
바닥에는 남자가 버리고 간 쿨타임 감소 허리띠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45화 세 번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