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종말의 성전
"웃기지 마라."
협회장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열등한 인간 따위가 감히······. 마인들에게 칼을 들이미는가."
마인(魔人).
그들은 현세에 시스템이 출현했을 때부터 인간 사회에 스며들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현세의 에너지를 모두 뽑아 마기로 치환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인류를 발아래 두고 막대한 자원을 뽑아내야 하는 침략 작전이었으므로.
시스템은 인류를 플레이어로 규정했다. 다른 차원에서 온 마인들은 마물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이 세계는 플레이어에게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
플레이어가 사라진다면 시스템은 소멸한다. 멸망도 멈추게 된다. 게이트의 등급도, 마수의 마정석도 더는 나오지 않게 된다.
마인들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인류가 성장하기를.
'우리의 작전은 완벽했을 터······. 인류 측에서 마인의 존재를 아는 이는 극소수다.'
플레이어를 억압한다면 반드시 통제할 수 없는 이레귤러가 등장하게 된다.
수많은 차원을 지배하며 내려진 결론이었다.
'분명 문제는 없었을 텐데.'
어째서 눈앞의 인간은 항마의 기운을 두르고 있단 말인가. 무명(無命)이란 명백한 이레귤러는 왜 나타났단 말인가.
눈앞이 잠시 흐려지는 듯했으나 협회장은 정신을 바로 잡았다.
"고작 이런데서 당할 것 같으냐?"
협회장의 이마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가공할 마기가 전신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투둑, 투두둑—!
인간의 껍질이 떨어져 나가며 보랏빛 피부와 붉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기껏해야 잔재주다. 항마의 힘이 있다 한들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다!"
무형의 마기가 촉수와 같은 형상을 이루기 시작했다. 고농도의 마기가 문어의 발처럼 협회장의 등 뒤로 돋아났다.
콰아앙—!
촉수처럼 휘둘러진 수십의 마기가 폐공장을 휩쓸었다.
콰과과과!
어떤 촉수는 뭉툭하게 지면을 강타했고, 어떤 촉수는 뾰족한 창이 되어 폐공장의 벽면을 꿰뚫었다.
카가각—!
촉수 하나를 받아낸 사최헌의 검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사최헌이 눈이 찡그려졌다.
'큭.'
상대의 접근 자체를 막아내는 위압적인 공격이었다.
마인들은 체내에 마기를 저장한다. 상위의 마인일수록 더 많은 마기를 압축해 소유한다.
촉수 세례는 폭풍처럼 거세졌다. 사최헌이 몸에 두른 항마를 밀어낼 정도로.
"항마의 힘 따위. 더 짙은 마기로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협회장의 입가가 비틀려 올라갔다.
짙은 마기가 꼬리처럼 휘둘러졌다. 후웅—! 사최헌이 그대로 벽면에 처박혔다.
폐건물 한쪽에 방치되어 있던 자재가 산산조각나며 솟구쳤다.
"크억—!"
사최헌의 입에서 피가 솟구쳤다.
마인은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그들은 현세에 시스템이 도래하기 이전부터, 힘을 키워 온 강자였다. 인간의 몸으로 상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
"사최헌! 약한 주제에 나대지 말고 멀리서 버프나 걸어라!"
허나, 그 상대가 항마(抗魔)를 두른 사도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최헌을 향해 소리친 루시퍼는 여유로웠다. 전설+가 되며 강화된 능력치 덕이었다. 거기에 더해 항마의 힘까지 둘렀다.
힘이 들 리가 없었다.
콰앙, 콰아앙!
루시퍼는 미친 듯이 밀려오는 촉수들을 간단히 쳐냈다. 항마의 힘을 온전히 쓰기 위해선 근접전을 해야 했음에도 여유로웠다.
가브리엘도 평온한 표정이었다.
"약해."
촉수들을 박살내며 전진하는 가브리엘. 성력과 항마의 힘이 둘러진 주먹 앞에 촉수가 두부처럼 흩어졌다.
아무리 많은 촉수를 퍼부어도 소용없었다.
"알았다. 루시퍼."
루시퍼의 말을 적극 수용한 사최헌이 뒤쪽에서 손을 들어 올렸다. 항마의 기운이 두 사도에게 부여되기 시작했다.
버프를 주는 데 전념하니 오히려 위협적이었다.
협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사최헌!"
랭킹 1위 사최헌.
놈을 위협으로 느낀 적은 없었다.
협회와의 마찰은 있으나, 오히려 고분고분한 편에 속했다.
오히려 초장기에는 자신과의 거래를 통해 불멸의 입지를 다지기까지 했다.
실리와 이득을 추구하는 놈.
다루기 쉽다고 생각했다.
잘하면 마인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 거라고도 생각했다.
전부 착각이었다.
놈은 날카로운 칼날을 품고 있었다.
"큰 실수를 하고 있는 거다! 마인이 없다면 대한민국은 존속할 수 없다! 곧 다가올 미래를 네 놈은 모르고 있는 거다!"
다급해진 협회장이 회유하기 시작했다.
"글쎄."
사최헌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대화가 통하는 눈이 아니었다.
협회장이 이를 악물었다.
사최헌 하나였으면 어떻게 해볼 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도 둘이 붙은 이상 답이 없었다.
협회장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크윽, 사도들이여. 네 놈들은 긍지도 없는 거냐? 무명(無命)은 고작해야 인간 아니더냐. 그깟 하위 존재에게 고개를 숙이고도 부끄럽지 않냐는 말이다!"
최악의 수였다.
콰아앙—!
콰과과과—!
마기의 촉수가 소멸하는 속도가 두 배가 되었다.
"내 주인은 우주 제일 강하신 분. 주인님께서 내 주인이라는 것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없다."
"상위 마인 주제에 건방져."
루시퍼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가브리엘도 마찬가지였다. 가공할 속도로 촉수가 사라져갔다.
마침내 마기의 촉수가 전부 흩어졌다. 두 사도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더 이상 없다.
콰아앙-!
가브리엘의 어퍼컷이 협회장이 턱을 강타했다. 성력과 항마력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크허억!"
뻐어억!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루시퍼의 무릎이 협회장의 복부를 강타했다.
뻐억, 뻐억! 퍼버버벅!
다시 가브리엘의 라이트 훅, 루시퍼의 짓밟기.
투두두두두—!
이어지는 것은 일방적인 구타였다.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이 협회장을 엄습했다.
"크어어억-!"
직접적으로 내다 꽂히는 항마의 힘 탓에 협회장은 쌓아둔 마기를 온전히 발휘할 수 없었다.
땅속에서 솟아오른 수십의 마기는 힘없이 흩어졌다.
협회장의 부릅뜬 눈이 사도들의 뒤를 향했다.
'항마의 힘만 아니었다면······.'
사최헌은 사도들의 뒤에서 얌전히 항마의 힘을 부여하고 있었다. 협회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항마를 이제 막 다루기 시작한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는 농도였다. 심지어 타인에게 부여까지 한다니?
하지만 원인을 따지자면······.
무명. 이 모든 게 무명 때문이었다.
죽음의 물결도, 환상종의 처치도, 지금 자신을 두들겨 패고 있는 사도들도 전부 무명이 한 짓이었다.
'무명은 도대체 어디서 튀어 나온—.'
그것이 협회장의 마지막 생각이었다.
콰드득—!
가브리엘의 정권이 협회장의 심장을 꿰뚫었다. 주먹에서 피어오른 항마의 기운은 마인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타오를 것이었다.
털썩.
대한민국의 전복을 노리고, 협회장의 자리에 숨어든 마인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툭툭.
"용케 마인들이 모이는 시점을 알아냈다?"
손에 묻은 피를 털어낸 루시퍼가 말했다.
이 마인들은 실제로 무명(無命)을 노리고 모여든 놈들이었다. 협회장을 처리하기 전에 몇 놈에게서 얻은 정보였다.
"말했잖나. 정보원이 있다고."
드디어 한숨 돌린 사최헌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협회장의 비서였다. 그녀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자칫하면 죽을 뻔했는데요. 검격에 너무 자비가 없는 거 아닌가요."
뻔뻔하게 그런 말까지 하고 있었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저 여자도 마인이잖아. 협력자였다고?"
"······이쪽도 마인이 싫거든요. 구역질이 날 정도로요."
비서는 금이 간 안경을 올려 쓰며 말했다.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지."
사최헌은 담담하게 말했다.
협회장의 비서는 인간과 마인의 혼혈이었다. 마인에게 멸망 당한 차원의 후손이기도 했다.
따라서 회유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욕망과 상처를 읽고,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회귀자의 특기였므로.
"칠죄종은 안 나왔어."
가브리엘은 뻥 뚫린 폐공장의 하늘을 바라봤다. 먹구름이 낀 밤하늘 아래로 잠시 밝은 달이 드러났다.
폭풍전야라고 하던가.
"차라리 나타나 주는 쪽이 좋았는데 말이야."
루시퍼가 입맛을 다셨다.
사최헌은 눈을 찡그렸다.
나왔더라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상상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듯했다.
"어쨌든 덕분에 편하게 마인을 제거할 수 있었다. 오늘 저녁부터 모든 언론이 마인에 관한 보도를 시작할 거다."
대한민국에 숨어 있던 타차원의 종족. 마인(魔人).
그들이 벌였던 각종 악행과 벌일 예정이었던 계획이 낱낱이 까발려질 것이다.
모아왔던 자료는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사최헌은 사도들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협회는 이제 완전히 깨끗해졌다. 단언하지. 더 이상 대한민국에 무명에게 위협이 될만한 단체는 없을 거다."
* * *
나는 소파에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케로를 쓰다듬으면서.
그냥 그랬을 뿐인데······.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오른다.
아무것도 안했는데.
『 일일 성장치가 최대에 달했습니다. Lv. 86 → Lv.90 』
'응?'
쭉쭉 오르던 레벨은 결국 성장 최대치를 달성하고서야 멈춰섰다. 이제 A급 헌터까지 단 10레벨 남았다.
'뭐야······.'
사실 이유는 뻔했다.
밖에 나간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마수를 잡은 거겠지. 하지만 이만한 수의 마수를 어디서 잡았을지가 의문이다.
'설마 제주도?'
완전한 마수의 땅이 된 제주도.
S급 헌터들도 버거운 지역이라고 들었는데.
전설+급의 사도라면 충분히 사냥 가능할지도.
거기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나 몰래 초과근무까지 하다니.
이 무슨 충신들이란 말인가.
한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종말의 사도가 그렇게 위험한 존재인가.'
레벨까지 급하게 올리려는 걸 보니.
그르르······.
내 무릎에 올라온 케로가 낮게 으르렁댔다. 나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TV로 시선을 옮겼다.
- [ 속보 ] 대한민국 협회장의 정체 마인으로 밝혀져
- 익명의 제보, 헌터 협회 마인(魔人)들이 장악
- 길드 단체, 협회 측에 입장 표명 요구
급한 속보가 줄줄이 올라오고 있었다.
사최헌 헌터가 말했던 대로다.
미리 듣지 못했다면 나도 꽤 놀랐을 거다. 협회에 마인들이 숨어 있었다니.
충격적인 소식이지만, 내가 찾는 내용은 아니었다.
종말의 사도에 관한 보도는 일절 없었다.
'혹시나 해서 주시하고 있었는데.'
가급적이면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처리하는 게 좋지만, 먼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손쓸 방법이 없다.
아쉬운 상황이다.
슥슥.
케로의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고 있자니, 어쩐지 졸음이 몰려 온다. 심신을 안정 시키는 효과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소파가 푹신해서인가.
몰려오는 졸음에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돌아올 때까지 잠깐 눈 좀 붙일까 싶어서.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새하얀 공간에 있었다.
안개가 짙게 낀 무(無)의 공간.
'뭐야?'
명백한 이상 현상.
나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시험 삼아 꼬집어 본 볼은 무감각했다. 당황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 아—."
안개의 너머에서 검은 인영(人影)이 나타났다. 안개가 걷히며 인영이 윤곽이 완전히 드러났다.
"들리시나요?"
검은 망토를 두른 여성이었다. 금으로 장식된 반가면. 체구가 작은 금발의 외국인이었다.
한국어가 매우 유창했다.
"먼저 밝히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혹여, 무명(無命) 그대가 날 죽일 수 있다고 해도 잠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그대에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 놓은 여성의 목소리는 상당히 무미건조했다.
그러나 분명 말했다.
무명(無命)이라고.
"무슨······?"
"제 소개를 먼저 해야겠죠. 내 이름은 엘리스 그레인저. 예언자의 별에 대해서 들어 보셨나요? 저는 그곳의 수장입니다."
예언자의 별.
이 또한 사최헌 헌터가 말했던 단체였다. 예언자들이 모여서 만든 비밀스러운 조직.
예언의 힘은 이미 각성자 연합을 통해 조금이나마 경험했다.
"예언으로 날 찾아낸건가요?"
"오해하지 마세요. 나는 그대의 정체를 모릅니다. 그대가 무명이란 것만 알 뿐.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목소리엔 감정이 없었지만, 무언가를 극도로 조심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이제 보니 꿈 속의 나 또한 로브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엘리스는 안개 속에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본래 당신과 직접 접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종말의 사도가 출현하기 전까지는요."
"종말의 사도······."
확실히 위험한 놈이란 건 알겠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웬 비밀조직까지 신경 쓸 정도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종말의 사도를 막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아도 막긴 할 거였는데."
"그대가 막지 못한다면······. 이 세계는 멸망할 겁니다."
"세계가 멸망한다고요."
나는 그 말을 생각 없이 중얼거리다가 굳어졌다.
갑자기 스케일이 너무 큰데요?
세계 멸망이라니.
그때, 내 눈앞으로 어떠한 환시(幻視)가 스쳐 지나갔다.
피처럼 붉게 물든 하늘, 검은 구름이 흘러가는 세계.
무너진 빌딩들, 파괴된 거리, 녹이 슨 채 방치된 차량들.
인간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시야가 한 번 바뀌자, 이번에는 익숙한 땅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들도, 마을의 거리도 전부 내가 아는 곳이었다.
'저기는······.'
내가 살던 고향이다.
엄마와 동생이 있을 아파트.
내가 살아 온 거리.
과거에 내가 다녔던 학교.
마찬가지로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파괴된 도로의 틈새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 있을 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확정된 미래는 아닙니다.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았고, 무수한 분기가 존재하죠. 이 또한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엘리스는 몇 가지 환시를 추가로 보여줬다.
마인, 인류, 마물들이 끝없이 싸우는 전쟁터. 물론 그 배경은 현세였다.
소수의 인류만이 살아남아, 황폐한 땅을 나아가는 모습.
대부분이 세계의 멸망과 관련 있었다.
"종말의 사도가 불러올 수 있는 멸망의 일부입니다."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
물론 예언자의 별에서 내게 만들어진 환영을 보여줬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비슷한 답이 나온다.
루시퍼와 가브리엘에겐 제한이 걸려 있다. 그런 녀석들이 크게 당황했다.
말할 수 없었던 걸 거다.
멸망 수준으로 심각한 상황이란 걸.
그리고 종말의 사도.
놈의 이름에도 떡하니 나와 있지 않은가. 으레 그럴 듯한 이름이 붙는 게 아니라······.
종말을 불러오는 사도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나는 관자놀이를 짚었다.
잠깐의 계산이 끝났다.
이렇게 말하는 건 건방져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해볼 만 한 것 같은데요."
내겐 즉살(卽殺)있다.
현재 초기화권도 있고.
"종말의 사도가 어디에 있는지 예언으로 알아낼 수는 없는 건가요?"
위치만 밝혀진다면 사전에 제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엘리스 그레인저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참고로 이 꿈은 단방향 메시지입니다. 일방적인 대화죠. 질문에 답할 순 없습니다."
"······."
그걸 먼저 말했어야죠.
지금까지 꽤 그럴 듯하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나. 그게 착각이었다고?
"종말의 사도 측에서도 예언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정보를 얻어내는 건 현 시점에선 어렵습니다. 다만······."
아무리 봐도 대화가 되는 것 같은데.
"예언자의 별은 그 외에 대부분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도움이 필요하다면 예언자의 별을 강력히 염원해주세요."
염원?
"무슨 일이 있어도 예언자의 별을 찾아내겠다고 염원한다면, 저희가 도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스는 그리 말하고서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새하얀 안개가 더욱 짙어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목적은 종말의 저지. 그대가 인류의 편이라면 부디 망설이지 않기를."
아득히 멀어져 가는 그녀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나는 꿈에서 깨어났다.
할짝, 할짝.
케로가 내 얼굴을 핥아대고 있었다.
잠시 방금 전 꿈에서 있었던 일을 멍하니 떠올리다가 고개를 들었다.
꿈이라기엔 너무나 생생한 기억.
당연하지만 예언자의 별에서 내게 접촉한 것이다.
사최헌은 그들을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이용하라고 했었지.
"······도와주겠다라."
종말의 사도는 그만큼 강력하다는 거였다.
세계가 멸망해버릴 정도로.
'오반데.'
아니, 아직 건물도 못 샀다.
헌터가 되어서 이제 꿀 좀 빨아보려고 했는데 세계 멸망이라니?
세계가 멸망하면 부동산이고, 돈이고 전부 휴지조각이 되는 거다. 건물을 사서 일찍 은퇴하겠다는 내 꿈은 영영 물거품이 되는 거고.
절대로 안 된다.
그때, 집의 현관문이 열리며 사도 둘이 들어왔다.
루시퍼의 양손에는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고, 가브리엘은 게임팩을 들고 있었다.
"주인님,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특히 루시퍼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가지고 계신 아이템. 이제 전부 처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 마침 뉴스에도 나오고 있네요. 협회에 위험 요소가 사라졌습니다."
위험 요소가 사라져?
제주도가 아니었다.
마인을 처치하고 온 거였나.
"협회 측에서 기를 쓰고 무명의 신상을 보호해 줄 겁니다. 믿을 만한 인물을 찾아서 거래하는 법도 있고, 아니면 제 계좌를 만들어서 운용하는 방법도 가능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드리겠습니다."
"잠깐."
폭풍처럼 말을 쏟아내는 루시퍼를 멈춰 세웠다.
아이템 판매.
루시퍼의 명의로 계좌 개설.
신상 보호까지.
다 좋다.
근데 이건 물어봐야겠다.
"종말의 사도 못 잡으면 어떻게 돼?"
"어······."
"진짜로 세계가 멸망해?"
그대로 굳어진 루시퍼와 가브리엘.
대답은 없었다.
"네 아니오 둘 중 하나로 말할 수 있어?"
루시퍼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정말 미세하게. 정말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기진맥진해진 루시퍼가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아? 이전처럼 열나는 거 아니야?"
"아, 괜찮습니다. 힘이 조금 소모되었을 뿐입니다. 진짜입니다."
어쨌든 반응을 보니 명확하다.
이것으로 확정되었다.
실패하면 세계 멸망.
그 앞에선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
돈이고 뭐고 무의미하게 되는 거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된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종말의 사도를 찾아내자고 하려던 그때였다. 베란다 밖으로 자색의 섬광이 번뜩였다.
"또 다른 칠죄종?"
"그건 아니야. 느낌이 달라."
나는 가브리엘과 함께 베란다로 향했다. 가브리엘의 손가락이 향한 장소.
도심의 한 곳에서 보랏빛 기둥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모이는 막대한 먹구름까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종말의 성전입니다."
뒤쪽으로 다가온 루시퍼가 설명했다.
"칠죄종이 만들어내는 최고 난이도의 게이트. 이 나라의 헌터들은 반드시 저곳을 공략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뒷말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답은 뻔했다.
나는 기둥이 솟아오른 장소를 응시했다.
종말의 사도.
놈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발견하고 처치한다.
"무조건 막아야지."
전력을 다해서 종말의 사도를 막아내겠다.
36화 시작
베란다를 통해 보이는 밤하늘.
고오오—.
멀리 떨어진 장소로 보랏빛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에 소름이 끼쳐 온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잠잠하던 이유가 있었군요."
마인들 측에 나타날 법도 하다고 생각했더니, 아예 다른 쪽에서 일을 벌이고 있었다.
칠죄종에 속하는 '교만'치고는 빠른 속도였다.
그들의 성격과 특성은 이름으로부터 비롯한다. 칠죄종은 인간을 타락으로 이끄는 감정에서 유래했으므로.
"종말의 성전······. 이번에는 쉽지 않을지도."
가브리엘의 심각한 목소리에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 케로베로스 때를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초고난이도의 게이트가 출현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는 건······."
주강혁은 마른침을 삼켰다.
"실패하면 대참사라는 거잖아."
게이트를 공략하지 못하면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내부의 마물들은 차원이 다르게 강해진다.
종말의 사도도 또한 마찬가지일테고.
"네, 대참사겠죠."
루시퍼는 주강혁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협회 측에 있던 마인들을 제거 하고 왔으니, 한국 내부의 분란은 없을 겁니다."
"뭐, 그건 다행인데······."
그때, 가브리엘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주강혁에게 내밀었다.
"주인, 이거 봐."
SNS상에서 글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 지금 하늘 엄청 이상한데, 서울에 뭔일 난 거 아님?
- 죽음의 물결 끝난지 얼마 됐다고······.
- 진짜 흉흉하네. 무슨 기둥 같은 게 보임.
- 대한민국이 마인 밭이었다잖아. 놈들 짓 아냐?
TV에선 여전히 마인들에 대한 뉴스가 보도 되고 있었다.
"두 사람 다. 지금 컨디션은 어때?"
바깥을 내다보던 주강혁이 물었다.
"예, 가볍게 한 탕하고 왔을 뿐입니다. 준비 운동을 했으니 움직이기엔 딱이죠."
"나도."
종말의 사도를 처치하기로 결정한 이상, 미적거릴 필욘 없었다.
"우선 루시퍼가 저 종말의 성전을 확인해 줘. 교만이 보이면 곧장 내게 말해줘."
"예, 알겠습니다."
까마귀로 변한 루시퍼가 베란다를 통해 날아 올랐다.
만약 루시퍼가 종말의 사도를 마주친다면 오히려 좋았다. 보이는 즉시 즉살을 발휘할 뿐이다.
"음, 너희 둘이랑 비교했을 때 종말의 사도는 얼마나 강해?"
"운이 좋다면 이기지만, 승부는 장담 못해."
"제한을 해제 해도?"
주강혁은 검은색 팔찌를 매만졌다.
B급 게이트를 공략하고 나온 보상은 총 두 개였다.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그리고 스킬 습득권(전설+).
아이템 쿨타임을 초기화하면 다시 사도의 제한을 해제할 수 있을 거다.
"모두 고려했을 때. 비등해."
이어지는 가브리엘의 답은 단호했다. 그만큼 종말의 사도가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 정말 성가신 적입니다. ]
종말이 성전으로 향한 루시퍼에게서 텔레파시가 들려왔다.
전설+가 되면서 속도도 한층 빨라진 모양. 벌써 보랏빛 기둥이 보이고 있었다.
[ 들어가 보겠습니다. ]
푸화악!
보랏빛 안개로 이뤄진 기둥을 뚫고 들어가자, 내부에는 거대한 문이 위치하고 있었다.
이전 케로베로스의 문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였다.
정체 모를 뼈로 이뤄진 보랏빛의 문.
지옥으로 향하는 문이 있다면 저렇지 않을까.
『 종말이 현세에 강림합니다. 』
『 성전 개방까지 12:45:32 』
루시퍼가 성가시다는 듯 혀를 찼다.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종말의 성전이 취할 수 있는 형태는 여러가지였다. 이건 그 중에서도 번거로운 축에 속하는 방식이었다.
[ 문을 꽁꽁 걸어 잠군 이상 당장은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
시간이 될 때까진 무슨 수를 써도 열 수 없다. 시스템이 인정한 부분이니.
종말의 성전을 공략하지 못한다면 튜토리얼이 바로 종료될 것이다. 막아낸다고 해도 가속화는 막지 못한다.
종말이 다가올 것이다.
종말의 사도가 나타났다는 건 그런 의미였으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세계의 멸망이 머지 않았다. 루시퍼는 주위를 활공하며 사념을 보내왔다.
[ 그래도 교만 측에서 저희 정보를 모른다는 건 다행입니다. ]
실제로 정체를 숨긴 것이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교만은 주강혁에게 바로 찾아왔을 것이다.
'주인님께 리스크를 지게 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
마주하는 순간.
죽느냐 죽이느냐의 싸움이 될테니.
[ 어찌되었든 내일이 결전이 날이 될 겁니다. ]
루시퍼의 말대로였다.
주강혁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대비해야겠지."
즉살은 강력한 힘이지만, 변수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은 처치하지 못한다. 만일을 대비해 할 수 있는 건 해둬야 한다.
찌이익—!
나는 인벤토리에 소유하고 있던 전설+급의 스킬권을 사용했다.
『 전설+급에 해당하는 스킬을 습득합니다. 』
오색찬란한 빛과 함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 전설+ ] 지고의 정신 』
- 정신계 스킬 저항력이 압도적으로 상승합니다.
- 상대의 격에 저항할 수 있습니다.
"지고의 정신······."
[ 오, 정신계열 최고의 방벽입니다. 격에 대한 저항력까지 있으니 최고네요. 종말의 사도를 상대로도 유효할 겁니다. ]
격이란 상위 존재들이 소유하는 기운. 격이 없는 존재는 여기에 항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단 설명이었다.
지난 죽음의 물결을 클리어하며 주강혁도 약간이나마 격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는······.
"최대한 빨리 종말의 사도를 처치하자. 다른 길드 신경 쓸 것 없이."
내일이 되어봐야 알 수 있었다.
* * *
다음날이 되자, 뉴스에서도 종말의 성전에 대해 보도하기 시작했다.
서울 중심부에 출현한 보랏빛 기둥.
물론, 대한민국 내에 마인들이 숨어 있었단 사실에 비하면 크게 다뤄지지는 않았다.
- 서울 시내, 최상위 등급 게이트 출현.
- 최상위 길드 모두 전면 공략에 나서
- 역대급 규모의 게이트 등장, SS급의 가능성은?
최상위 등급의 게이트는 종종 출현해 왔다.
S급 게이트와 변종 게이트의 출현은 이미 대중에겐 일상이었다. 마인들에 비하면 화제성은 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집된 최상위 헌터들은 심각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최상위 게이트 공략은 일종의 사업.
평소엔 입찰을 통해 길드가 결정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 헌터 커뮤니티 - S급 게시판 』
- 지금 무슨 난리래요? 5대 길드 전부 소집이라뇨.
- 이 난리에 협회 측에서 강하게 요청했다네요.
- 마인들 소굴이라면서 괜찮은 거 맞아요?
- 유진철 본부장이 진두지휘 중이라는데요.
현재 협회는 각성관리 본부장 유진철에 의해 진두지휘되고 있었다.
협회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고, 동시에 게이트 공략까지 진행해야 하는 바쁜 상황.
- 과거 S급 게이트 출현 이후로 처음 있는 일임.
- 죽음의 물결 끝난지 얼마 됐다고······.
- 무명 오나요? 무명 보고 싶은데.
그런 급박한 상황 속에서.
깡! 깡! 깡!
지방의 장인 공방.
그 중 한 곳에서 망치를 두드리는 한 소녀가 있었다.
'이게 아니야.'
모루 위에서 붉게 달아오른 검이 순식간에 복구되었다. 그러나 소녀는 이게 아니라는 듯 검을 내팽개쳤다.
'이 정도 수준으론 안 돼.'
천이령은 스킬을 연마하고 있었다.
-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리 스킬을 익혀와라.
사도는 그리 말했다.
잠도 자지 않고 밤을 새며 망치를 두들겼다.
고작 하루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그녀의 수준은 이미 최상급 대장장이와 어깨를 견줄 정도가 되었다.
공방을 빌려준 대장장이들도 눈을 떼지 못하고 창문으로 천이령을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왜 나한테 대장장이 일을 맡긴 걸까?'
망치를 들면서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그 의문이 천이령의 머릿속을 계속해서 맴돌았다.
'아니, 몰라도 돼.'
중요한 건 최고의 스킬을 익혀오는 거였다. 그게 된다면 제자로 받아준다고 했으니까.
강해져야만 했다.
마인에게 살해 당한 가족의 복수를 위해서.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선연히 떠오른다.
어둠에 잠긴 거실, 마루바닥에 흥건한 피를 밟고 서 있던 마인(魔人).
- 하찮은 인간아. 너는 씨앗이 될 거다. 마(魔)의 재림을 위해 분노하거라.
마인의 눈은 심연처럼 깊었다. 무저갱과 같은 항거불능의 힘이 천이령을 압도했다.
- 나는 마인(魔人)의 정점에 선 존재.
뒤늦게 검을 뽑았으나 소용 없는 짓이었다.
- 언젠가 네가 개화하길 기다리겠다.
당시의 천이령은 A급 헌터. 그러나 S급이었다고 한들 달라졌을 것 같지 않은만큼의 차이였다.
천이령은 큰 상처를 입고 쓰러졌고, 정신을 차렸을 때 어깨에는 검은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가족 모두가 살해 당한 그 집에서 천이령은 다짐했다.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캉! 캉! 캉!
천이령은 이를 악물고 망치를 내려쳤다. 망치를 든 손이 아려오고 있었다.
슬슬 한계였다.
'여기서 더 좋아질 순 없어.'
처음 겪는 일이 아니었다.
천이령의 성장은 언제나 폭발적이었다. 그것이 검이든, 활이든, 마법이든.
그러나 그 이후가 문제였다. 그 수준이 어느 궤도에 오른다면, 성장은 자연스레 느려지고 말았다.
'뭘 어떻게 해야······.'
천이령은 모르지만 그 이유는 명확했다.
현세의 제약 때문이었다. 그녀의 능력은 현세의 기술과 현세의 상식 선에서 이뤄진다.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지점도 한정 되어 있었다.
무아지경으로 무기를 두드리던 천이령.
무언가가 그녀의 머리를 번뜩이고 지나갔다.
'어쩌면······.'
자신에게 내려준 숙제가 단순히 수리 스킬을 익혀오는 게 아니었다면.
깡! 깡! 깡!
이 단순한 울림 속에 무언가 중요한 게 있지 않을까.
'분명 이유가 있을 거야.'
거듭된 망치질 속에서 천이령은 그런 답을 내놨다. 천이령이 망치질이 가속하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를 가져오라고 했다.
무명의 압도적인 강함을 떠올린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필이면 나여야만 하는 이유.'
지구상에 훌륭한 장인들은 널렸다.
공방 엘의 장인들은 세계의 정점. 대한민국에도 훌륭한 장인들은 많다.
그러나 무명 정도 되는 인물이, 굳이 천이령 자신을 콕 짚어서 지정했다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거야.'
그리 생각한 천이령의 눈가에 이채가 돌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걸 뛰어넘으려면.
그리고 올마스터(All Master)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화르륵—.
천이령의 손 위로 흑색의 불길이 솟았다.
『 스킬 '흑마도(黑魔道):형상조작'을 발휘합니다. 』
루시퍼가 천이령에게 전수한 흑마도는 현세에 없는 작동 방식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이 천이령의 수리 스킬에 깃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해.'
이 정도론 부족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쏟아부어야 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력의 운용, 힘의 조절, 호흡의 강약······.
천이령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융합하고자 했다. 오색찬란한 불똥이 그녀의 망치에서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있으면······."
가능성을 확인하자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천이령의 상식이 뒤바뀌고 있었다.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적절하게 배합하고 융합한다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리하면 완성될지도 모른다.
궁극의 수리 스킬이.
심상치 않은 기류가 소용돌이치는 공방의 창문.
까마귀 한 마리가 내려 앉았다. 입가엔 쪽지를 문 채로였다. 수리 스킬을 익히는대로 종말의 성전으로 오라고 할 예정이었는데.
"······?"
잠시 멍하니 공방 내부를 바라보던 까마귀의 고개가 기울었다.
"뭐냐, 저거."
상상치도 못한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 * *
『 종말이 현세에 강림합니다. 』
『 성전 개방까지 0:41:06 』
서울 시내, 보랏빛 기둥의 앞.
대한민국 유명 길드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2위 길드 청명(淸明).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준비된 천막 아래, 길드원들이 긴장한 얼굴로 입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채아린 선배님, 아이스 아메리카노 드세요."
"땡큐."
"그나저나 이번엔 공략 규모가 대단하네요."
"그러게. 급하게 모인 것치곤 역대급이야."
랭킹 2위 채아린.
베이지색 자켓을 걸친 그녀는 청명의 길드장이었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신 채아린은 길드원들을 둘러보았다.
"이령이는 못 온데?"
"휴가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온다고 문자 오기는 했어요. 그런데 최근 불멸에 있다는 소문이······."
이하연 헌터의 말에 채아린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사최헌 그 인간이······. 우리 순진한 이령이를 꼬드긴 건 아니겠지?"
헌터계에서 사최헌은 나름 악명 높았다. 유능한 싹만 귀신 같이 홀려서 불멸로 데려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자, 자세한 건 몰라요."
"가뜩이나 골치 아픈데. 구내 식당 개선 해준다고 붙잡아 봐."
"이미 말했죠······."
불멸이 밥이 맛있긴 하다.
채아린이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어디 홀랑 넘어갈만큼 아둔한 애는 아니었다. 아닌가, 약간 순진한 면이 있는 것 같기도······.
'에휴, 모르겠다.'
천이령의 트라우마는 깊다.
겉으로는 멀쩡한 척하지만,
쉽게 메꿔지는 부분은 아니었다.
채아린은 고개를 들어 다른 천막을 확인했다.
현재 이 자리엔 한국의 5위 길드까지가 모여 있다.
1위 불멸.
3위 유성.
4위 패공.
5위 기린아.
그 중 제일 신경 쓰이는 건 1위 불멸이었다.
'으음······.'
천막 아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불멸 길드원들은 여유로웠다. 대충 살펴보니 이전보다 아이템이 더 좋아졌다.
넘어설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항상 간발의 차로 차이를 벌려간다.
채아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만약에 무명 헌터를 우리 길드에 넣을 수 있다면······.'
길드의 판도도 완전히 뒤바뀔텐데.
채아린이 후배 이하연에게 물었다.
"무명 헌터에 관한 소식은 없어?"
"저희쪽 사람들이 미궁 근처에서 대기 중이라는데, 코빼기도 안 보인데요. 뭐, 워낙에 신출귀몰하니까요."
노리는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그때, 이하연 헌터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이번 공략 괜찮을까요? 자료를 보니까, 경고 문구가 엄청나던데요."
"협회 측에선 용케 그런 정보까지 준비했더라."
채아린은 손에 든 패드를 조작했다.
협회 측에서 꽤 자세한 자료를 보내왔다. 마인 사태 때문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거라 생각했건만.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만큼 실패하면 안 되는 공략이란거겠지."
첫 S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가 그랬고 이번이 그러했다. 하긴, 실패해도 되는 공략 따윈 없었다.
그때였다.
협회장 대행, 유진철 본부장이 길드들의 앞으로 나섰다. 한숨도 못 잤는지 퀭한 얼굴이었다.
"급한 소집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자료로 확인하셨겠지만, 이번 게이트는 지극히 위험합니다."
그럼에도 목소리엔 힘이 실려 있었다.
"실패한다면 대한민국의 멸망까지 생각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자리에 있는 헌터들 사이로 침묵이 가라앉았다.
보랏빛 기둥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여지껏 마주한 적 없는 위협이었다.
그것도 수도 한복판이니.
"하지만 으레 그래왔듯, 넘어설 수만 있다면 인류가 한층 강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공략에 앞서 협회에서 추가적으로 조사한 사실을 몇 가지 전달하겠습니다."
이어지는 브리핑은 상당히 유용했다.
'협회가 이 정도로 열성적인 적이 있었나.'
채아린은 새삼 놀랐다.
마인들이 어지간히 협회의 발목을 잡긴 한 모양이었다. 협회장도 마인이었던 마당이니.
브리핑이 끝날 즈음이었다.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무명이다."
"무명이 왔어."
"저 사람이 무명 맞아?"
"여자는 누군데?"
몇몇 S급 헌터들이 탄성을 질렀다. 주변이 소란스러워지자, 채아린도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모든 헌터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빵봉투를 쓴 남자와 얼굴을 빛으로 가린 여성이 걸어왔다. 그들의 걸음걸이에는 묘한 여유가 있었다.
미간을 좁힌 채아린이 옆의 후배에게 물었다.
"진짜 무명 맞아?"
"빵봉투잖아요. 죽음의 물결에서 봤어요. "
"옆에 여자는?"
"무명의 동료로 추정 중이에요."
채아린은 죽음의 물결에 참여 하지 않았었다.
더욱이 빵봉투가 진짜 무명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이도 별로 없다. 기껏해야 불멸의 길드원들 정도.
모두의 시선이 루시퍼에게 꽂혔다.
반대로 루시퍼도 주변의 헌터들을 낱낱히 살피고 있었다.
'쓸만한 인간은······. 몇 명 없구만.'
칠흑의 사도가 되며 더 자세하게 헌터들의 기운을 살필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에 사최헌보다 강한 인간은 없다.
허나, 몇 인간들의 잠재력이 꽤 뛰어났다.
사최헌은 잠재력으로 보면 평범했다.
어떻게 저런 놈이 저렇게 강해진 건지.
저벅, 저벅.
앞으로 걸어간 루시퍼는 사최헌의 옆자리에 삐딱하게 걸터 앉았다. 가브리엘도 쫄레쫄레 그 뒤로 갔다.
헌터들의 탄성이 터졌다.
"헐."
채아린은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를 바닥에 쏟았다.
사최헌과 무명의 커넥션이 진짜였다니.
정말로 사최헌하고 아는 사이였다.
주변이 크게 술렁였다.
물론 루시퍼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인간이 너무 많아. 얘네 다 죽을 수도 있을텐데."
루시퍼는 낮게 깐 목소리로 사최헌에게 물었다.
"도움이 될 거다. 무명이 우리를 돕는다는 전제하에. 모든 작전은 그렇게 맞춰져 있다."
"크으, 뭘 좀 아는구만.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루시퍼가 이죽였다.
사최헌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지금 공략은 무명의 도움이 없다면 성립할 수 없었다. 아니, 종말의 사도라는 적 자체가 그런 식이었다.
"무명, 이번 공략에 확실히 참전하는 건가?"
"운이 없다면."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사최헌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혀졌다.
그 시각 주인 주강혁은······.
멀지 않은 카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창밖을 바라봤다.
건물들 사이로 솟아오른 보랏빛 기둥이 선명하게 보인다.
'칠죄종 교만은 전지(全知)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했지.'
어젯밤 루시퍼와 가브리엘에게서 정보를 긁어 모았다.
'정신계 침습 능력도 있고.'
사기 소리가 절로 나오는 적이였다.
칠죄종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웬만해선 마주치는 순간 바로 끝나겠지만.'
지금까지의 적들과는 다르다.
'최악에 대비해야 한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나더라도 종말의 사도만큼은 막아야 했다.
씁쓸한 아메리카노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 00 : 00 : 00 』
『 종말의 신전이 개방됩니다. 』
끼이익—!
소름끼치는 소리가 도시 전역으로 울려퍼졌다.
루시퍼의 시야 공유를 통해 똑똑히 보였다.
보랏빛 안개와 함께 서서히 문이 열리고 있었다. 불길한 기운이 안개처럼 흘러나와 헌터들을 감쌌다.
이곳을 넘어서면 칠죄종 교만의 영역이었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마른 침을 삼킵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좋은 결과를 기대합니다. 』
『 다수의 성좌가 해당 이벤트에 집중합니다. 』
100명이 넘는 길드원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걸음을 떼었다.
그리고 당당하게 그들의 중심을 가르는 두 사도가 있었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주인님."
"갈게."
콰아앙—!
두 사도는 땅을 박차고 쏘아지듯 문으로 돌진했다. 휘몰아치는 광풍에 다섯 길드가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
멀리서 불어 온 바람이 주강혁이 있는 카페의 창문을 두드렸다.
싸움이 되어선 안 된다.
얼마나 더 빠르게 교만을 발견하느냐.
단지 그 뿐인 승부가 되어야 했다.
37화 기적
『 첫 번째 시련이 시작됩니다. 』
거대한 문 내부로 들어선 헌터들을 맞이한 것은 드넓은 성전이었다.
성스러운 느낌은 없었다.
전체적인 색조가 보라색이었다. 동시에 음습한 기운이 낮게 깔려 기이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좌우로 늘어선 거대 기둥들과 저 멀리 보이는 커다란 관문.
"이런 장소는 또 처음이네."
"무지하게 넓잖아."
"저기 봐. 마수들이······!"
그어어어—!
크아아아—!
멀지 않은 곳 마수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거인의 형상을 한 보랏빛 식물이 30체.
[ Lv.156 ]
[ Lv.162 ]
그 하나하나가 보스급에 달하는 수준.
자색 로브를 걸친 마인(魔人)들의 수 또한 일백을 넘겼다.
바깥의 마인들과 달리 이들은 이성이 없는 마물에 불과했으나, 그 힘만큼은 진짜였다.
쿵, 쿵, 쿵!
괴성을 지르며 달려오는 식물 거인이 지축을 울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슈우우—.
허공을 수놓으며 쏟아지는 마법의 세례까지.
위압감이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맞서는 이들은 대한민국의 최정예.
"불멸 길드가 최전방에 서겠다."
사최헌과 길드원들이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걸음에는 여유로움이 묻어 있었다.
'칠죄종 교만의 성전인가.'
마수들의 종류와 성전의 생김새를 가늠하던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이미 앞서 나간 루시퍼와 가브리엘.
두 사도 또한 보자마자 알아차렸을 거다.
'그나마 나은 편이라고 해야할지.'
인류의 힘으로 온전히 공략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힘 닿는데까지는 해봐야 했다. 사최헌의 명령에 뒤에 있던 길드원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갑니다!"
콰과과과—!
청염의 마법사 신아윤이 쏟아낸 청색의 화염탄이 지면에 박히자, 푸른 화염이 화산처럼 치솟아 올랐다.
"마법들은 제가 막을게요!"
콰아아아—!
공간 능력자 유지훈에 의해 공간의 일부가 찢어지더니 쇄도하는 마법들을 집어삼켰다.
이어지는 불멸 길드의 화려한 연계 공격.
"와······."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헌터들이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여지껏 대중에게 공개된 적 없는 기술이었다.
"구경하고 있을 때 아니야! 정신 차리고 움직여요!"
"오케이!"
"우리도 움직이죠!"
채아린의 일갈에 청명의 길드원들이 무기를 들고 앞으로 전진했다. 2위 길드 청명이 불멸의 오른편에 섰다.
수백의 화살이 허공을 가르며 쏟아졌다. 길드 측의 마법이 마인들의 마법과 부딪히며 폭발했다.
전방에선 식물 거인들과의 근접전이 펼쳐졌다. 육중한 갑옷을 걸친 전사 계열의 헌터들이 거칠게 마수들을 압박했다.
카가각—! 쾅! 콰앙!
"다리를 노려!"
"크으윽!"
"부상자는 뒤로 빠져!"
화아악!
식물 거인의 머리에 달린 꽃봉오리에서 보랏빛 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가루를 들이마신 헌터들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숨을 참아!"
"으윽, 머리가······."
일순 머리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혼탁해졌다.
"힐러들 빨리 치료 부탁해!"
"위험해!"
콰과과과!
길게 뻗어진 채아린의 성검이 채찍처럼 지면을 강타했다. 식물 거인과 가루를 밀어내는 일격.
헌터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전장은 혼란스럽기 그지 없었다.
교만의 특기는 매혹과 교란. 그 힘의 일부를 소유한 마물들 탓에 헌터들은 온전히 힘을 발휘하기 어려웠으니까.
그때였다.
헌터들 중 하나가 소리쳤다.
"무명이 돌아온다!"
헌터들의 시선이 잠시 동안 허공에 모였다.
빵봉투를 쓴 루시퍼가 돌아오고 있었다.
반면 루시퍼는 벌레 씹은 듯한 표정이었다. 빵봉투 때문에 그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젠장.'
곧장 칠죄종을 처치할 생각이었는데, 각 시련을 가로막은 관문이 예상보다 훨씬 단단했다.
부숴서 뚫는 것보다, 마수를 처치하고 관문을 여는 게 빠르단 판단이었다.
[ 주인님, 아무래도 여기에 있는 마수들을 잡으면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
[ 우리 힘을 소모 시키려는 작전인듯. ]
[ 이 성전은 칠죄종 교만의 것입니다. 근데 놈의 행동이 제가 아는 것과 조금 다르네요. 원래 문이란 문은 활짝 열고 다니는 놈인데······. ]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흑색의 광선이 빛을 발했다.
콰아아앙—!
[ 어차피 이깟 놈들 금방 쓸고도 남습니다. ]
식물 거인 5체와 20명 가량의 마인들이 그대로 증발했다.
가브리엘도 가세했다.
발로 내려찍은 지면이 솟구치며 수십의 마수들이 그대로 떠올랐다. 이어지는 가브리엘의 정권에 마물들이 삭제되었다.
그것이 처음 5초 만에 벌어진 일.
이어지는 둘의 활약은 헌터들의 입을 벌어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콰과과과—!
S급 마수들을 상대로도 거침없는 모습이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미소 짓습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호쾌함에 만족합니다. 』
"미, 미친······."
"저런 게 같은 인간이란 말이야?"
"뭐 저러냐."
처음으로 사도들을 목격한 헌터들이 허탈한 숨을 들이켰다. 목숨 걸고 싸우는 자신들이 바보 같아질 정도의 강함.
"강하긴 한데. 무명은 아니지 않아?"
채아린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소리예요, 선배. 저게 무명이 아니고서야······."
"아니, 진짜 무명은 훨씬 박력 있다고 해야 하나."
채아린은 무명에 의해 월드보스가 죽는 걸 직접 목격했다.
더욱 압도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진심을 다하지 않고 있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죠. 아앗, 앞쪽이 비었어요! 다들 집중해요!"
사도들 덕분에 사람들의 숨통이 크게 트였다.
"대단하긴 하네. S급 마수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채아린은 감탄하며 말했다.
이대로라면 공략은 어렵지 않을 것만 같았다.
* * *
종말의 성전 중심부.
칠죄종 교만은 자색(紫色)의 왕좌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왕좌는 총 두 개였다. 오른쪽 왕좌에는 마인 로란드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젠장.'
로란드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인 사회로부터 살아남고자 소환한 칠죄종이었다. 그러나 이래선 본말전도였다.
살아남긴 했으나 교만의 노리개나 다름없으니.
'하······.'
하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선택지가 없었다. 교만에게서 도망치려한다면 그 즉시 머리가 터져 죽을 거다.
돌아가더라도 마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리라.
뭐가 되었든 되돌릴 수 없었다.
[ 그래요, 로란드. 되돌릴 수 없죠. ]
격이 담긴 목소리에 로란드가 흠칫 몸을 떨었다. 칠죄종이 가진 전지(全知)의 능력 탓에 생각이 전부 읽히고 있었다.
[ 걱정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당신은 이 세계가 멸망한 뒤에야 죽을 거예요. ]
교만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올랐다. 매혹적인 미소에 로란드의 정신도 멍해졌다.
교만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왕좌에 앉아 있는 한, 성전 내부의 상황 전체를 눈에 둘 수 있었다.
[ 무명은 나타나지 않는 걸까요.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걸까요. ]
교만은 로란드에게서 기억을 읽어냈었다.
따라서 자신이 강림하기 이전의 상황도 전부 파악했다.
월드 보스 처치에서도,
죽음의 물결에서도.
그리고 환상종 케로베로스를 처치할 때도.
무명은 한 번도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흑의 사도 루시퍼.
백의 사도 가브리엘.
그 둘에 대한 전력은 대강 파악이 되었다. 본디 유명한 성좌들이었기에 얼굴을 가린다고 숨겨질 게 아니었으니까.
[ 로란드, 생각을 해봐요. 마인의 책사라면서요. ]
"그······. 글쎄 말입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멍하니 있던 로란드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선 답했다. 그걸 알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거다.
멍청한 대답에 교만이 미소지었다.
[ 나는요. 무명이 보고 싶어요. 이치를 뛰어 넘은 힘을 가진 인간이 도대체 누구인지. 그 내부를 일일이 뜯어보고 싶다는 거예요. ]
그 섬뜩한 말에 로란드가 몸을 떨었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도 그리되는 게 아닐까 하고.
[ 성좌로 군림하는 두 개의 별을 어떻게 지상에 강림시켰는지. 그 막대한 힘의 원천이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
종말의 사도이기에 알 수 있었다.
무명(無命)의 힘은 명백히 이질적이다. 시스템의 제한을 우습게 보는 꼴 아닌가.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보고 싶네요.'
이대로라면 무명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교만은 부드럽게 손짓했다. 그녀의 손에서 뻗어나간 보랏빛 안개가 성전의 내부로 퍼져나갔다.
끼이익—!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각 시련을 막고 있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사도를 불러들여야 했다. 교만은 무명이 나타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을 만들고자 했다.
"너, 너무 위험한 거 아닙니까? 사도 둘이랑 무명을 동시에 불러 들이다니······."
로란드가 기겁하며 말했다. 무명한테 당할 대로 당한 로란드는 겁에 질려 있었다.
교만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가가 고혹적인 호선을 그렸다. 로란드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 로란드. 그대는 내 힘의 끝을 본 적이 없잖아요. ]
그리 말하는 교만은 자신의 패배를 상정하지 않는 듯했다.
손끝에서 뻗어나간 보랏빛 안개가 자욱하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성전 전체로 그녀의 기운이 퍼져나갔다.
[ 한가지 가정을 해볼게요. 무명(無命)은 처음부터 한 번도 나타났던 적 없었던 거 아닐까요? 그렇다면······. 이 자리로 불러내는 건 어렵지 않을지도 몰라요. ]
왕좌에서 일어난 교만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 무명의 얼굴, 그대도 궁금하지 않나요? ]
* * *
첫 번째 시련은 무난하게 클리어.
두 번째 시련을 돌파하는 중이었다.
끼이익, 콰아앙—!
요란스런 소음과 함께 각 시련을 막고 있던 문이 열렸다. 20m가 넘는 거대한 문이 완벽하게 내부를 드러냈다.
"뭐야, 문이 열렸어?"
"갑자기 전략을 바꿨어."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문 너머를 바라봤다.
도발하듯 활짝 열린 문.
그러나 한창 전투 중이었다.
콰앙-! 콰과광!
백여 명이 넘는 헌터들과 격돌하는 수 백의 마수들. 마수들은 뱀들로만 이뤄져 있었다.
키가 2m가 넘는 뱀들이 미친듯이 몰려 들었다. 흑색의 뱀들의 머리에는 붉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놈들이 뱉어내는 독에 닿은 헌터는 즉시 혼란에 빠졌다.
헌터들은 혼란에 빠진 헌터와 마물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상태 이상을 치료할 수 있는 힐러들이 바빠졌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뱀들의 공격은 다양했다.
후열에서 독을 뱉어내는 놈들과,
전방에서 전사처럼 돌진하는 놈들.
콰과과—!
월드 보스에 필적하는 거대한 뱀 열 마리가 사방을 휘젓고 있었다.
첫번째 시련보다 거세진 난이도에 헌터들은 전선을 유지하는 게 고작이었다.
열린 문을 바라보던 사최헌이 사도들을 향해 말했다.
"······무명, 지금이다."
마력이 담긴 그의 음성이 혼란스런 전장을 뚫고 전해졌다.
[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함정일 수도 있습니다. ]
모든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루시퍼가 물어왔다. 나는 여전히 카페에 앉아 있었다.
"······함정이어도 교만을 마주할 수 있다면 괜찮지."
하지만 어째서일까.
어쩐지 찜찜한 기운을 지울 수가 없다.
너무 쉽다.
이대로 교만을 찾아서 없애면 끝.
'쉬우면 좋은거지만.'
지금까지 상대했던 적들은 그럴만했다.
그들은 내가 누군지 알지 못했고, 내 능력에 대해도 가늠하지 못했었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교만에겐 전지(全知)의 권능이 있다고 했다.
[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현 시점에선 권능 또한 제약을 받으니까요. 알아낼 수 있는 사실도 일부일 겁니다. ]
"그러면······."
루시퍼에게 무어라 명령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화아악—!
공유된 시야 속으로 거센 안개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보랏빛의 운무(雲霧)가 시야 전체를 뒤덮었다.
치직, 치지직—!
"뭐야. 이 안개는······."
"풍압으로 밀어낼 수가 없어."
당황한 사도 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시야 전체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치직였다.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 주인님. 보이십니까?! 종말의 사도가 나타났습니다. ]
루시퍼의 사념에도 노이즈가 잔뜩 끼어 있었다.
칠죄종이 나타났다고?
그러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으면 즉살을 사용할 수 없다.
[ 큭, 아무래도 공유 시야가······. 혼선이 생긴 것 같습니다. 가브리엘 네 쪽에서 시도—! ]
콰아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헌터들의 비명과 루시퍼의 신음성이 들려왔다.
[ 내가 교만을 끌고 깊숙이 들어갈테니까, 공격부터 막아내! 이대로가다간 인간 놈들 전멸이다. ]
[ 주인, 루시퍼의 제한 해제를 부탁해! ]
급박한 목소리만이 들려 올 뿐이다.
보이지 않는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을 사용합니다. 』
나는 은색의 티켓을 찢었다.
『 아티팩트 '리미트 브레이커'를 사용합니다. 』
『 칠흑의 사도 '루시퍼'의 제한을 일시적으로 해제합니다. 』
격렬한 폭발음과 함께 공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이즈는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시끄러운 소음의 사이로 명료한 음성이 들려왔다.
[ 무명, 그대가 직접 종말의 성전을 방문하길 기다리고 있을게요. ]
파앗.
그것으로 끝이었다. 공유 시야가 어두워졌다. 루시퍼와의 연결이 완전히 끊겼다.
"······."
나는 고개를 들어 종말의 성전이 있는 장소를 바라보았다. 보랏빛 기운이 거세게 방출되고 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다.
반면 머리는 차갑게 식어간다.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즉살의 약점은 처음부터 명확했으니까.
사도의 시야 공유가 끊어진다면, 멀리 떨어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끼이익-. 덜컹.
나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빠르게 카페의 계단을 내려갔다.
건물의 골목을 지나며 망토와 가면을 착용했다.
'운이 좋다면 루시퍼랑 가브리엘이 이길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제한 해제의 시간은 딱 3분.
가브리엘이 말하길 전력은 비등한 수준.
운이 좋다면 이길 수 있다고 했다.
'세계멸망을 운에 맡길 수 있겠냐.'
즉살은 무적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잡을 수 없다.
시야 공유가 끊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카페에 앉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 점을 생각해보면 이번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이 된다.
'내가 성전 내부로 들어가면 된다.'
* * *
"으, 이미 다들 들어간 건가."
천이령은 뒤늦게 성전 앞에 도착했다. 종말의 성전 근처는 어수선했다.
"연락이 끊겼다고?"
"노이즈가 너무 심해서 연결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보스급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나타났다고······."
각 길드 관계자들이 급하게 소리치고 있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종말의 성전 외부는 활짝 열려 있었다.
천이령은 성전 안으로 뛰어들려다가 멈춰섰다. 공방에 떨어져 있던 쪽지 때문이었다.
천이령은 꾸깃한 쪽지를 다시 한 번 펼쳐 확인했다.
- 종말의 성전 앞에서 대기할 것.
그렇게 쓰여 있었다.
'하긴. 무명 헌터가 참가했으면 내가 들어갈 필요도 없겠지.'
천이령은 망치를 든 채로 자리에 멈춰섰다. 대기하라고 했으니까 대기한다. 지금의 천이령이 할 일이었다.
청명의 천막 아래에 앉아 있을까 고민하던 도중이었다.
저벅, 저벅.
흑색의 로브를 두른 인물이 성전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은신?'
천이령은 탐지 스킬 덕에 은신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로브의 안쪽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아이템 때문일까.
이 사람의 성별도, 얼굴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흑색의 로브는 천이령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어째서일까.
어렴풋한 경외감마저 느껴졌다.
그런데도 그 느낌이 어쩐지 익숙했다.
"무, 무명······?"
그리 중얼거린 천이령을 향해 흑색의 로브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 [ 성유물 ] 부서진 영혼등 』
고장난 랜턴 하나.
랜턴을 확인한 천이령은 깨달았다.
'설마.'
왜 수리 스킬을 배워 오라고 했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이걸 고치려고 한 거였구나.
"해볼게요. 맡겨주세요."
랜턴을 받아든 천이령은 망치를 들어 올렸다. 평범한 망치가 아니었다.
『 [ 레전더리 ] 적혈(赤血) -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 』
불카누스라 함은 신화 속 대장장이.
효과는 확실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숨을 들이마신 천이령은 모든 힘을 다해서 망치를 내려쳤다. 천이령의 손 끝에서 맺힌 오색찬란한 빛이 랜턴에 닿았다.
타앙—!
맑은소리와 함께 부서진 영혼등이 빛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여들었으나.
그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샤아아—!
거센 백광(白光)이 영혼등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기에.
천이령이 만들어낸 현세 최고의 수리 스킬이 영혼등을 고쳐내고 있었다.
잦아든 빛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 [ 성유물+ ] 순백(純白) : 무결한 영혼등 』
오색찬란한 빛을 띠는 영혼등이었다.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일으키는 자태.
"와아······."
멍하니 영혼등을 지켜보고 있던 천이령. 자신이 고쳐놓고도 믿을 수 없는 영롱함이었다.
그녀를 향해 무명은 한 마디를 했다.
"고맙다."
영혼등을 손에 쥔 주강혁은 성전을 향해 걸음 옮겼다.
『 [ 성유물+ ] 순백(純白) : 무결한 영혼등 』
- 영혼을 수집합니다. [ 0 / 10,000pt ]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면 기적을 행사합니다.
- 기적 : 전설+급의 보상
천이령에 의해 재탄생한 영혼등은 한차례 강화 되어 있었다.
스윽.
주강혁은 인벤토리에서 영혼 하나를 꺼냈다.
『 흑 이무기의 영혼(SSR) 』
금의 간 영혼등은 보스의 혼을 흡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무결한 영혼등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다.
스르륵.
랜턴은 영혼을 그대로 흡수했다. 랜턴 내부로 백색의 빛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화아악—!
영혼등이 다시금 찬란한 백광을 발했다.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전설+급에 해당하는 기적이 발현됩니다. 』
파직, 파지직.
그리하여 허공에 나타난 흑색의 티켓은.
『 [ 전설+] 칠흑 : 궁극기 습득권 』
현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는 보상.
찌이익!
주강혁은 망설이지 않고 티켓을 찢었다.
38화 교만
갑작스런 종말의 사도 교만의 출현.
제한이 해제된 루시퍼가 가브리엘과 함께 교만을 성전 깊숙한 곳으로 끌고 갔다.
헌터들만이 덩그러니 놓여진 상황.
'좋지 않다. 무명은 이곳에 와 있지 않은 건가?'
사최헌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관문은 활짝 열려 있지만, 헌터들은 그곳을 지나칠 수 없었다. 수많은 마물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에.
두 번째 시련.
수백에 달하는 마수들이 헌터들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성가신 것은 거대 뱀.
바실리스크 아종.
콰아앙—!
놈들의 머리에는 핏빛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교만의 문양이었다. 헌터들의 정신에 간섭하는 성가신 효과였다.
놈들의 몸짓 한 번에 헌터들의 진형이 크게 붕괴되었다.
비명과 고함 소리가 저주 받은 성전 내부에 울려 퍼졌다.
카가가각—!
사최헌의 공간검이 거대 뱀을 반으로 갈라냈다.
"쯧."
기력을 꽤 많이 소모하고서 한 마리를 처치했다. 이래선 끝이 없었다.
전황이 바뀌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길드장! 공격이 거의 안 통해!"
"방벽 전개는 했지만, 이대로는······."
"청명 길드 쪽, 무너지지 않게 막아!"
분투하는 길드원들의 앞으로 사최헌이 달려나갔다.
콰앙!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사최헌의 주변의 공간으로 셀 수 없이 많은 푸른 선이 그어졌다.
'난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조각난 마물들이 주변으로 비산했다. 그러나 끝이 없었다. 사최헌조차 버거운 수준의 물량.
다른 길드들에겐 오죽하겠는가. 자리를 잡고 버틴 것만으로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사최헌은 이를 악물고선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한국의 헌터들에겐 너무 이르다.'
종말의 성전은 본래 이 시점에 나타날 던전이 아니었다.
튜토리얼도 끝나지 않은 플레이어에게 보스 처치를 강요하는 수준.
후우웅—!
그때, 앞쪽으로 활짝 열린 거대한 문을 통해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성력(聖力).
흑마력(黑魔力).
두 가지 힘이 뒤섞인 강풍이었다. 저 멀리 신전의 깊숙한 곳에서 사도들이 칠죄종과 교전하고 있단 증거였다.
"우리가 뚫리면 곧장 던전 브레이크다. 온 힘을 다해서 막아야 한다!"
사최헌이 크게 소리쳤다. 마력이 실린 음성이 모두의 귓가를 울렸다. 몇 헌터들이 화답하듯 포효했다.
버틴다.
전선을 유지한다.
공략할 필욘 없었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다.
현시점, 한국의 헌터들의 강함은 뻔했다. 그들에게 종말의 성전을 공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게 막고 버틴다. 지금의 헌터들에겐 그게 최선이다.'
따라서 종말의 성전을 공략할 방법은 단 하나였다.
무명(無命).
그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
도박이나 다름없을지도 모르는 수. 그러나 그게 유일한 방법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무명의 힘을 직접 목격한 사최헌이기에 확신했다.
'무명, 언제 나타날 거냐······!'
어쩌면 이미 교만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전투가 최대한 빨리 끝나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콰과광-! 쿠웅-!
전선이 밀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
"유성 길드 전원 방어 진형으로 전환한다!"
사최헌의 공간검, 채아린의 성검 그리고 유성 길드의 얼음 마법이 작렬했다.
무수히 많은 마법들이 흩날리고.
보랏빛 갑옷을 입은 마물들과 헌터들이 격돌했다.
콰과과과—!
마수들 뒤편의 바닥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교만의 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로브를 걸친 고혹적인 자태의 여인.
분신의 이름은 교만의 사제.
분신이지만 그 능력은 치명적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정신을 빼앗는 악질적인 놈이었다.
일순 남성 헌터들의 눈이 풀렸다.
"디버프 해제 스킬!"
"바로 써!"
헌터들이라고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버프 계열 헌터들이 재빠르게 디버프 해제 스킬을 사용했다.
교만의 사제가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 무명은 어디에 있나요.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인간 모두 죽을 텐데요. 사도들은 물론이고요. ]
그녀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사최헌의 이마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무명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날 수 없는 사정이 있는건지.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건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기다려야 했다. 그가 현 상황의 유일한 타개책이었으므로.
'여기서부터가 고비다.'
교만의 사제의 매혹은 계속될 거다. 상당수의 헌터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사최헌이 각오하며 검을 움켜쥐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는 가운데.
오로지 사최헌만이 그 존재를 느꼈다.
뒤쪽으로 강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사최헌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수와 뒤엉켜 싸우는 헌터들의 사이로, 검은 로브를 걸친 누군가가 걸어오고 있었다.
처음 마주했지만,
사최헌은 어째선지 알 수 있었다.
진짜 무명.
무명이 나타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와 동시에.
푸화아악—!
죽음의 해일이 수백의 마수들을 덮쳤다.
* * *
성전 내부로 들어 온 나는 빠르게 내부를 나아갔다.
첫 번째 시련이 벌어졌던 장소를 지나, 두 번째 시련이 위치한 장소로.
헌터들과 마수들의 격전지.
온갖 마법이 난무하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전장.
경험한 적 없는 전투의 열기가 성큼 다가왔다.
긴장은 되지 않는다.
심장은 뛰지만 여전히 머리는 차갑다. 어째선지 모든 게 더욱 명료하게 보인다. 의외로 체질인걸까.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마물들을 살폈다.
[ Lv.145 ]
[ Lv.152 ]
···
[ Lv.161 ]
종말의 성전에 존재하는 모든 마수들의 레벨은 나보다 높다.
내 레벨은 90.
지금의 내겐 뛰어넘을 수 없는 격차다.
레벨이 낮으니 약자멸시는 통하지 않는다. 고유 스킬 즉살로 잡을 수 있는 마물은 한 마리고.
그러나 문제없다.
"죽어."
나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처치될 리 없는 마물들이 핏조각이 되어 폭발했다. 눈에 닿는 모든 마물들이 그대로 폭사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눈앞으로 떠오르는 레벨업 알림.
나는 시스템창을 한켠으로 치웠다.
'지금이라면 가능하다.'
『 궁극기가 발휘된 상태입니다. 』
『 칠흑 : 극야도래(極夜到來) 』
『 극야도래의 효과는 총 세 가지입니다. 』
『 첫 번째 효과 』
『 고유 스킬 '즉살'이 다수의 적을 처치합니다. 』
후두둑.
내 손아귀에서 고유 스킬 초기화 티켓의 조각들이 흩어졌다.
궁극기가 유지 되는 동안 즉살은 여러 적을 한 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수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레벨이 아무리 높다하더라도.
"무, 무명이다!"
"잠깐만 무명은 저 문 너머로 향했던 거 아니야?"
"그러면 저 사람은······?"
마수가 사라진 지금.
다섯 길드의 헌터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모였다.
대부분의 마물들이 사라지며 헌터들에게 여유가 생겼다. 나는 그 사이를 천천히 걸어갔다.
『 두 번째 효과 』
『 초래한 죽음의 수만큼 일시적으로 격이 상승합니다. 』
헌터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물러났다. 그 누구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못했다.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
저벅, 저벅.
나는 그들의 사이를 빠르게 가로질렀다.
지금도 저 내부에선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교만을 상대하고 있을 거다.
승부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
빠르게 합류해 교만을 발견하고 처치해야 했다.
"무명."
그때, 사최헌이 내 쪽으로 붙었다. 그의 눈빛은 결연했다.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사최헌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전력으로 서포트하겠다. 도움이 필요할진 모르겠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하다.
필요하고말고.
궁극기가 있으나,
나는 S급 헌터들에 비하면 약하다.
교만에 비하면 턱없이 약할 테고.
멀리서 날아오는 마법 세례를 막아낼 재간이 없다. 모든 경우의 수에 대응할 수 없다.
"저, 저도 도울게요."
뒤쪽에서 쫄래쫄래 따라오던 천이령도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나는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열려 있는 문의 안쪽에서 다수의 마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단 것처럼 소리쳤다.
[ 무명! 틀림없이 그대가 무명이렸다! ]
[ 그래, 드디어 직접 나타났군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
[ 이 건방진 사도들의 숨통을 끊고서······. 얼굴을 직접 마주할테니까요. ]
웬 노출이 심한 여자 여럿이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칠죄종 교만의 분신들이다. 만만치 않으니 조심······."
"죽어."
내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
푸화아악—!
교만의 분신들이 일제히 목숨을 잃었다.
사최헌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분신이라고 해도 생명체인 것은 변함없는 모양.
"괜한 걱정이었나. 직접 봐도 말도 안되는 기술이군······."
사최헌이 어처구니 없단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와, 와우······."
옆에 있던 천이령도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 102를 달성하셨습니다. 』
『 일일 성장 최대치에 도달했습니다. 』
『 축하드립니다. A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교만의 분신이라고 했었나.
본체가 종말의 사도인만큼 그 분신들도 상당히 강력했던 모양. 엄청난 속도로 레벨이 올랐다.
그뿐이 아니었다.
『 [ 성유물+ ] 순백(純白) : 무결한 영혼등 』
손에 쥔 랜턴으로 보랏빛 영혼이 끝없이 스며들었다. 분신에게도 영혼의 일부가 깃들어 있던 것 같다.
영혼등의 내부로 모인 빛이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전설+급에 해당하는 기적이 발현 됩니다. 』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눈 앞으로 떠오른 초기화권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을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사최헌과 천이령.
천이령은 자랑스런 표정으로 사최헌에게 말했다.
"저거 내가 고친 거예요."
"네가 고쳤다고?"
사최헌이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둘을 무시하고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번째 시련의 문을 넘어서자 세 번째 시련 장소가 나타났다.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백에 달하는 마물의 군세. 놈들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타오르고 있었다. 눈은 벌겋게 빛나고 있다.
그 중간에 새까맣게 타오른 듯한 길이 생겨 있었다. 아마 제한이 풀린 루시퍼가 만들어낸 길이겠지.
콰앙-! 쾅!
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사최헌의 검이 번뜩이더니 공격을 쳐냈다.
사최헌이 중얼거렸다.
"······피할 가치조차 없다는 건가?"
단순히 반응을 못한 거였다.
뭐가 보여야 피하죠.
카앙, 캉!
천이령의 단검에서도 오색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녀도 어렵지 않게 공격을 받아쳤다.
"무명님이 우리를 믿고 있다는 거죠. 맞죠?"
"······."
나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대응하기 힘든 공격을 두 사람이 막아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 한마디에 눈앞을 빽빽하게 가로막고 있던 마수들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다.
푸화악—!
핏빛 폭발이 붉은 장미처럼 일대를 장식했다.
이것으로 세번째 시련을 막고 있던 마수들의 장벽이 사라졌다. 이제 다음 장소로 향하는 문을 막는 건 아무것도 없다.
강처럼 흐르는 마물들의 피를 밟고서 전진했다.
나는 로브를 휘날리며 달렸다. 사최헌과 천이령도 내 옆으로 따라붙었다.
마수들의 영혼이 영혼등으로 스며들었다. 가득 채울 정도는 아니었다.
『 헬 하운드의 영혼(SSR) 』
나는 앞으로 나아가며 보스급 마수의 영혼을 랜턴에 집어넣었다. 찬란한 빛과 함께 허공에서 아이템이 모습을 드러냈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이제 남은 초기화권의 갯수는 2개다.
사최헌의 눈썹이 구부러졌다.
"정말로 천이령 네가 고쳤다는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천이령은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노력의 산물이에요."
"이틀도 안 됐을 텐데."
나는 다음 영혼을 랜턴에 집어넣었다.
『 벨리알의 혼(SSR) 』
이번에는 악마를 처치하고 얻은 영혼이었다. 다시금 랜턴이 빛을 발했다.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x1 』
내게 필요한 아이템이 주어졌다.
운이 아닐 것이다.
단순한 보상 지급이 아니라 기적의 발현.
기적이란 이름이 괜히 붙은 게 아니겠지.
찌이익—!
나는 곧장 티켓을 찢었다.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을 사용합니다. 』
이어서 아티팩트의 사용.
『 아티팩트 '리미트 브레이커'를 사용합니다. 』
『 백의 사도의 제한을 해제합니다. 』
여전히 시야 공유는 불가능했지만, 내 사도들이 교만과 전투중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이따금씩 성전의 내부에서 거센 바람이 불어왔기에.
아마도 교전의 후폭풍.
콰아아아—!
제한을 해제하자마자 거센 기류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익숙한 기운이다. 가브리엘의 성력이겠지.
"우앗······."
"두 번째 제한 해제. 좋은 타이밍이다. 교만도 이쪽에 신경쓰진 못할 거다."
세 번째 문을 넘어서자 기다란 통로가 나타났다.
직감적으로 느껴진다.
이 통로의 끝에 다다르면 칠죄종이 있겠지.
『 칠죄종 교만의 격(格)이 각성자를 압도합니다. 』
그때, 사최헌과 천이령의 발걸음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사최헌의 표정도 묘하게 불편해보인다.
천이령은 죽으려하고 있고.
"윽, 이 느낌은······. 어디선가······. 무명님은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은 거에요?"
"상위 존재의 격이다. 무명의 뒤로 서라. 격의 없는 자가 억지로 버티려고 하면 몸이 망가진다."
두 사람과 다르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궁극기 극야도래의 두번째 능력.
처치한 적의 수만큼 내 격(格)은 상승한다.
그 덕분이었다.
어째선지 격을 다루기는 어렵지 않았다. 격을 쏟아낼 방향만 인지하고 있다면, 아군을 보호하는 것도 가능했다.
천이령 뿐만 아니라 사최헌도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후우, 살 것 같네."
"미리 말하겠는데, 천이령. 교만과 직접 대적할 생각은 절대 하지 마라. 격이 없는 자는 상위 존재와 맞설 수 없으니."
"그쪽은 격이 있어요?"
"아니. 없다."
"뭐야, 뭐라도 되는 줄."
"······."
어쨌든 두 사람 다 한결 편안해진 움직임이 되었다. 사최헌이 전방을 가리켰다.
"저기만 통과하면 교만이 있을 거다."
통로의 끝에는 보랏빛 광채를 내뿜는 관문이 있었다.
가로막고 있는 것은 없었다.
아마도 교만의 격이 최후의 시련이었을 거다.
지금의 내게는 아무런 장애물이 아니다.
사용할 수 있는 즉살의 횟수는 2번.
궁극기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나는 품 안에서 흰 빵을 꺼내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허기가 가시며 포만감이 차올랐다.
'교만을 보이는 즉시 처치한다.'
나는 관문의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 *
신전의 끝자락에 도착한 나는 고개를 들었다.
나타난 것은 판타지에 나올 법한 알현실.
사도와 칠죄종의 전투로 인해 폐허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 끝에는 두 개의 왕좌가 있었다. 그러나 왕좌는 둘 다 텅텅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종말의 사도는······.
자연스레 시선이 위쪽으로 향했다. 알현실에는 천장이 없었다. 그저 보랏빛 안개로 가득 메워져 있을 뿐.
콰아앙—!
하늘에서 무언가가 추락했다. 강한 파공음과 함께 지면을 강타한 것은 루시퍼였다.
"크윽······."
엉망진창이 된 루시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나를 바라보는 루시퍼의 눈동자가 커졌다.
"주, 주인님."
그때, 다시 한번 굉음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 추락한 것은 가브리엘이었다.
"으······."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낸 가브리엘은 나를 바라봤다. 제한 해제는 풀려 있었다.
"미안. 못 이겼어."
그 무표정함이 어딘가 씁쓸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잘 버텼다.
내가 올 때까지 잘 해줬다.
[ 아아, 여기까지 오다니. 사도들을 몰아 붙인 보람이 있네요. 가급적이면 전부 죽이고 싶었는데······. ]
천장에서 교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당히 귀가 간지러운 목소리였다.
"주인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 스킬 '지고의 정신'이 발휘됩니다. 』
『 정신계 스킬에 대한 저항력이 발휘됩니다. 』
정말로 귀가 좀 간지러운 것 빼고는 괜찮다.
[ 어라, 나름대로 저에 대해 방비책을 세우고 온 건가요. 이거 기쁘네요. ]
멋대로 착각까지.
[ 무명. 그대의 진짜 실력을 보여주세요. 분신 몇 잡은 걸로는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으니까요. ]
천장의 보랏빛 안개를 뚫고 8개체의 분신이 내려왔다.
저 중에 본체가 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시야 공유를 끊은 것은 의도적이었을까? 지금도 안개 속에 모습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분신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죽어."
푸화아악—!
내 짧은 말 한마디에 8개체의 분신이 그대로 즉사했다. 분신에게 깃들어 있던 영혼의 편린이 영혼등에 깃들었다.
『 스킬 습득권(전설+) x1 』
[ 정말 흥미롭네요······.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
교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놈의 알량한 머리로 뭘 알겠냐?! 가브리엘 협력해라."
"······협동 공격이야."
그때,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보랏빛 안개 속에서 수차례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콰과과과—!
보랏빛 마력 파편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파편들은 지면을 끝없이 두드렸다. 바닥이 파헤쳐지고 솟구쳐 오르는 강력한 충격.
내 뒤에 있던 사최헌과 천이령이 파편들을 계속해서 걷어냈다.
[ 정말로 모르겠어. 그 힘이 원리는 하나도 모르겠지만······. 방금 그걸로 한 가지를 알아냈어요. 나는 똑똑한 편이거든요. ]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상대하면서도, 교만의 목소리는 여유로웠다.
그런 교만은 결정적인 말을 뱉어냈다.
[ 나는 이 안에서 절대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 어떻게 나올 건가요, 무명? ]
재밌어 죽겠다는 듯한 말투였다.
"······."
종말의 사도가 알아챘다.
내 능력의 비밀을.
즉살이 가진 약점 중 하나를.
"무명. 내가 도울 게 있다면 말해라."
"저도 최대한 도울게요."
사최헌과 천이령이 다급하게 물어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괜찮다.
궁극기 '극야도래'에는 총 세 가지 능력이 있다.
첫 번째가 즉살의 광역화.
두 번째가 격의 축적.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특수 능력.
『 세 번째 』
『 특수 능력 : 오버 드라이브(Over Drive) 』
『 반경 200m에 존재하는 모든 기운을 파악합니다. 』
『 즉살의 쿨타임이 사라집니다. 』
특수 능력의 발현.
『 유지 시간은 10초입니다. 』
그것을 염원함과 동시에 내 눈동자 위로 짙은 광채가 떠올랐다.
[ 약점은 전부 파악했어요. 그렇다면 남은 건······. ]
가려진 안개 속에 숨은 교만의 형태가 똑똑히 보인다. 그 무엇보다 검고 짙은 기운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다.
교만은 깔깔대며 웃고 있다.
안개로 모습을 감춘다.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방법이다.
허나, 지금의 내게는 보인다.
교만의 짙은 기운뿐만 아니라······.
그녀를 향해 모여드는 죽음의 기운까지도.
칠흑과도 같은 빛이 내 시선에 따라 어지러이 움직인다. 어둡지만 밝게 흐르는 유체와 같다.
찰나의 순간, 교만의 중심부를 향해 죽음의 기운이 모여 들었다.
감각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이다.
"죽어."
그대로 교만의 팔 한쪽이 폭발했다.
'······!'
한순간, 교만의 심장에 모였던 죽음의 기운이 팔 쪽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즉살은 적중했다.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화아악—!
보랏빛 안개가 걷히며 교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한쪽 팔을 움켜잡은 교만이 짧은 탄식을 토해냈다.
[ 뭐······? ]
교만의 얼굴은 당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반면 내게 당혹감은 없다. 요동치던 심장도 이제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서늘한 시선으로 교만을 주시했다.
상관 없다.
여기서부터 궁리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교만이 살아남기 위해서 발버둥쳐야 할 차례다.
『 즉살의 쿨타임이 사라집니다. 』
나는 그저 담담히 입을 열어 죽음을 부를 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압도적인 우위에 서 있으니.
39화 부분 살해
칠죄종 교만.
그녀는 자신의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다.
마인 로란드가 걱정스런 기색을 내비칠 때도, 그로부터 무명에 대한 정보를 읽어냈을 때도.
'이렇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인간이 있다니.'
흥미롭단 표정으로 상황을 즐길 뿐이었다.
'무명의 가치는 사도에 있지 않죠.'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상대하는 것조차 버겁지 않았다. 종말의 성전은 교만의 안방이나 마찬가지였다.
콰앙—! 콰과광!
끝없이 생성되는 분신들과,
교만의 뛰어난 파괴 마법이 두 사도를 압박했다.
'무명은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해올까요.'
전투를 벌이는 도중에도 교만의 흥미는 오직 무명에게만 있었다.
마침내 무명이 종말의 성전 내부로 들어왔을 때.
'드디어.'
교만은 크게 흥분했다.
교만의 예상이 맞았다.
무명은 처음부터 종말의 성전에 없었던 것이었다.
사도들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역시 그런 거였어요.'
교만이 사용한 매혹의 안개는 모든 통신을 가로막았다. 그게 사도가 사용하는 상위 위계의 통신일지라도 말이다.
결국 내부의 상황을 알 수 없게 된 무명이 직접 행차한 것이다.
[ 목줄이 꿰인 짐승들이여, 그대들의 주인이 왔네요. ]
"!"
그 말에 두 사도들은 답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빛내며 달려들 뿐이었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보겠단 발악이었다.
콰아앙—!
허공에서 솟은 보랏빛 식물의 줄기가 두 사도를 향해 쇄도했다. 가공할 파괴력에 알현실이 무너져 내렸다.
압도적으로 빠르고, 압도적으로 강했다.
교착 상태가 길어질수록 루시퍼와 가브리엘의 몸에 상처가 늘어갈 뿐이었다.
무명이 두 번째 시련을 통과했다. 시련에 존재하던 모든 마수가 목숨을 잃었다.
'흐음.'
그 원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 있던 것들이 간단하게 목숨을 잃었다.
물리적인 힘이 아니었다.
마법적인 힘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권능이냐?
아니,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기나긴 세월, 여러 차원 속에서 거듭하며 부활해 온 교만이었다.
한 번 보는 것만으로 가볍게 밝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교만의 미간이 좁혀지는 그 순간이었다.
"뭘 그리 골똘히 생각하시나?"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루시퍼가 이죽였다. 그 손에는 검은 마력이 맺혀 있었다.
[ 어림없어요. ]
교만이 가볍게 손을 휘적이자, 그녀의 뒤쪽에서 식물의 줄기가 빠르게 뻗어 나왔다.
"크으윽."
루시퍼가 차마 반응하지 못할 속도였다. 줄기는 루시퍼의 발목을 잡고 휘둘렀다.
콰과과과—!
루시퍼는 벽면에 처박힌 채로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가브리엘도 상황은 비슷했다.
"으윽!"
분신들의 마력이 가브리엘을 몰아붙였다. 끝없이 쏟아지는 폭발 속에서 가브리엘은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제한 해제가 없는 사도 둘은 교만의 상대가 아니었다.
더욱이 무명이 직접 찾아왔으니 적당히 상대 할 이유도 없었고.
[ 어디 한 번, 무명의 반응을 볼까요? ]
여유롭게 미소 지은 교만이 손짓했다.
무명을 향해 분신을 보냈다. 영혼의 일부가 담긴 분신체였다.
정보를 얻어내기엔 최적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푸화악-!
분신체들이 아무것도 못 하고 사라졌다. 교만의 입가가 비틀렸다. 반응이고 뭐고 없었다.
[ 흐음······. ]
그녀가 잠시 고민하는 사이, 돌연 가브리엘의 제한이 풀렸다. 막대한 성력이 방출과 함께 가브리엘이 돌진해 왔다.
투두두두-!
교만은 식물의 줄기로 공격을 막아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힘의 원리를 밝히는 건 어려워 보였다.
무명을 잡아서 실험이라도 하지 않는 한.
교만은 가브리엘의 몰아치는 공격을 요리조리 피하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인간이 사용하는 스킬. 분명 한계가 있을 텐데요.'
현재 교만이 소유한 전지(全知)의 권능은 제한적이었다. 사도를 통해 무명의 약점을 읽어내는 건 불능.
여기서부턴 예상과 추측이었다.
'무명은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처치하지 못하는 게 아닌지?'
사도와의 연결이 끊어지자 무명이 출현했다.
두 번째 시련에서 모든 마물이 살해당한 건 아니었다. 시야에 닿지 않는 몇 마물은 살아남았다.
분신들이 처치된 순간은 무명의 앞에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렇다면 대처하기란 쉽죠.'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교만은 자신의 주변으로 매혹의 안개를 불러들였다.
콰과과과—!
볼 일이 없어진 사도들을 죽일 듯이 공격했다. 식물과 파괴 마법이 어지러이 휘몰아치며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몰아냈다.
[ 간만에 재밌었네요. ]
제한 해제의 유지 시간이 3분이란 건 확인했다. 무명이 도착할 때 즈음엔 끝날 것이었다.
무명에 대한 대처도 어렵지 않았다.
안개 속에 숨어 분신을 통해 확인해보면 될 일이었다.
콰아앙-!
그렇게 무명이 도착했을 때 사도 둘은 알현실의 바닥에 떨어졌다. 두 사도의 체력은 고갈되었다.
교만은 안개 속에서 숨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무명을 포함한 두 명의 인간.
'시험해보죠.'
내려보낸 분신들이 안개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그대로 즉사했다.
교만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한 자신이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 나는 이 안에서 절대로 나가지 않을 거예요. 이제 어떻게 나올 건가요, 무명? ]
남은 것은 무명을 어떻게 가지고 노느냐였다. 교만의 얼굴에 참을 수 없이 즐겁다는 표정이 짙어지는 바로 그 순간.
푸화악—!
교만의 팔이 날아갔다.
* * *
팔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을 때, 교만이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매혹의 안개를 뚫어 봤단 말인가?
그게 가능하다면 왜 처음부터 자신을 공격하지 않았단 말인가.
'건방진······!'
그것이 교만에게는 어설픈 만용처럼 느껴졌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의도적으로 팔을 노렸다고 밖엔 생각할 수 없었다.
교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팔 하나 따위.
다시 만들어내면 그만이었다.
피격과 동시에 안개를 끌어모아 팔을 재생하려고 했으나.
'재생이 안돼······?'
팔 근처에 느껴져야 할 기운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교만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동시에 직감적으로 느꼈다.
다음 공격은 피할 수 없다.
무명(無命)의 눈은 차가웠다.
한 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죽······."
무명의 입이 열렸다.
그 찰나의 순간.
교만은 움직였다.
움직여야만 했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테니까.
콰아아아—!
교만의 근처에서 솟아오른 보랏빛 식물 줄기가 빛살처럼 쇄도해 왔다.
가공할 속도였다.
주강혁이 반응하기엔 너무 빠른 속도.
바닥에 쓰러진 사도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나가려고 했으나, 그들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늦었다.
주인과의 거리가 너무 벌어져 있었다.
저곳에 닿을 때쯤이면, 식물의 줄기가 주인을 꿰뚫었을 것이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은 인물이 있었다.
사최헌.
그의 몸에서 붉은 기류가 쏟아졌다. 한순간에 과부하 상태로 돌입한 사최헌이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저 직감이었다.
지금 이 순간.
무명을 지켜야 한다는 직감이 사최헌을 움직이게 했다.
특수 아이템의 발동과 동시에 팽창한 근육이 타오르고, 마력 회로가 달아오르는 과부화 상태가 이어졌다.
사최헌의 검이 공간에 한줄기의 푸른 선을 아로새겼다. 주강혁을 향해 뻗어 줄기는 그 선을 넘지 못하고 좌우로 갈라졌다.
콰아아앙—!
무명에게 쏟아지는 공격은 막아냈다. 그러나, 정면에서 공격을 받아낸 거대한 충격을 사최헌이 대신 받아야 했다.
사최헌의 입가에서 붉은 피가 쏟아졌다.
종말의 사도가 내뿜는 격을 무시한 대가였다.
그러나 그 한 수가 승부를 결정 지었다.
무명의 즉살이 발휘되었다. 두 글자의 짧은 시동어가 완성되었다.
푸화악—!
교만이 반대팔이 날아갔다.
[ 허윽! ]
가공할 충격이 교만을 덮쳤다.
무명은 멈추지 않았다.
자비 없는 공격이 휘몰아쳤다.
푸화악—!
두 다리가.
푸확-!
복부가.
푸화악—!
심장이.
붉은 피와 함께 허공으로 비산했다.
[ 읍······! ]
머리만 남은 교만이 허공에서 숨을 들이켰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광경.
'아······.'
그녀는 짧게 탄식했다.
결국 끝까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힘이 무엇이었는지.
무명이 어째서 이다지도 강한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니,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떠오르는 생각은 한가지였다.
그저······.
건드려선 안 될 것을 건드렸다.
자신의 교만함이 죽음을 자초했다.
그뿐이었다.
푸화악—!
교만의 머리가 폭발했다.
교만의 뒤로 캐스팅 되고 있던 수많은 파괴 마법들이 허공에서 사그라들었다.
파사삭—!
주변으로 뻗어졌던 식물의 줄기가 단숨에 메말라 부서졌다. 종말의 성전을 가득 메우고 있던 불길한 안개도 일시에 사라졌다.
교만이 죽었다.
『 '칠죄종 : 교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종말의 성전이 완전 공략되었습니다. 』
『 보상을 정산합니다. 』
침묵 속에서 천이령이 입을 열었다.
"이, 이긴 거에요?"
"그래. 무명이. 해냈다."
사최헌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사최헌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쿨럭.
그의 입가에서 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과부화 상태에 더해 교만의 격을 온몸으로 받아낸 탓이었다.
스윽.
그런 그를 향해 무명이 덤덤하게 손을 내밀었다.
사실 주강혁이 느끼기엔 찰나와 같은 순간이었다.
무언가 날아오고, 번쩍이고, 폭발하고.
A급 헌터가 되었음에도 가늠할 수 없던 상황.
그러나 사최헌이 목숨을 걸고 공격을 막아줬다.
그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무명······."
잠시 내밀어진 손을 바라보던 사최헌. 그가 무명의 손을 마주 잡았다.
부축을 받아 일어난 사최헌이 입가를 닦았다. 루시퍼와 가브리엘도 주강혁을 향해 다가왔다.
둘 다 성한 몸은 아니었다.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단 뜻이었다.
"주인님, 고생하셨습니다."
"다행이야······."
무명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종말의 사도는 쓰러졌다. 당장의 위기는 극복했다.
알현실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저벅, 저벅.
무명은 그 앞으로 걸어갔다.
종말의 사도가 죽은 자리에 놓여진 검은 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을 살피는 무명의 시야에 잊고 있던 존재가 들어왔다.
알현실의 왕좌 뒤편.
"······."
그곳에는 정신이 나갈 듯 겁에 질린 로란드가 있었다.
* * *
미국, 애리조나.
대협곡의 중심부.
"어라, 교만이 벌써 죽었네."
중성적인 외모의 소년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바위에 앉아 있는 소년으로부터는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짜 웃기네. 무명? 심지어 인간 한 명한테 당했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리 묻는 소년의 주위에는 사지가 분해된 인간들이 널려 있었다. 희미한 숨이 붙어 있는 헌터 하나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대답을 안하네. 짜증나게."
소년은 옆에 놓인 돌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튕겼다. 돌은 그대로 헌터의 머리를 관통했다.
칠죄종(七罪宗) 질투.
종말의 사도는 필연적으로 다른 종말의 사도를 불러온다.
성전 구축 이전에 칠죄종 교만이 질투를 현세에 불러들였다.
한 명의 칠죄종은 필연적으로 다른 칠죄종을 소환하게 된다.
그러나 그 수는 인당 한 명까지.
시스템이 허락하는 한계였다.
질투가 눈을 떴을 때 주변엔 온통 헌터들 뿐이었다.
S급 헌터랬나 뭐랬나.
질투는 죽은 시체들의 사이에서 스마트폰을 찾아냈다.
꽤 재밌는 물건이었다.
"여기 인류의 발전 수준은 꽤 재밌네. 별걸 다 만들었어. 다른 세계랑은 다르구만."
질투는 중얼거리면서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무명(無命)에 대한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딱히 쓸모 있는 정보는 없었다.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조금 유명할 뿐.
"멍청한 여자지만, 정보는 제대로 기록해 놨네."
진짜 정보는 방금 죽은 교만으로부터 얻을 수 있었다. 정확히는 칠죄종들이 공유하는 기억의 보관소에서.
교만의 죽음은 꽤 값졌다.
"굉장히, 굉장히 흥미로워."
무명의 능력은 굉장했다.
그런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쉽게 종말을 불러올 수 있을까.
부러운 걸 넘어 질투가 난다.
"칠죄종 질투여."
"응?"
바위에 드러누운 질투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정체를 아는 인간이라니. 뭐, 뻔했다.
"예언자냐?"
"예, 그렇습니다."
반가면과 흑색의 망토를 두른 여성. 예언자의 별 수장 엘리스 그레인저였다.
질투는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누구 죽이지 마라, 뭐 하지 말라, 이거 하지말라. 예언자들은 늘 그런 식이지. 안 그래?"
"······."
혀를 찬 질투가 예언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금부터 네 입에서 나오는 순서대로 무조건 다 죽인다."
"다른 칠죄종을 이 세계에 불러들여선 안 됩니다."
"오케이, 칠죄종 다 죽인—다가 아니라."
소년은 바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주변이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가 왜 그 말을 따라야하지?"
상위 존재의 격이 주변을 뒤덮었다.
그러나 예언자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부탁하건데 무명(無命)을 자극하지 마십시오."
"아하, 무명. 무명부터 죽여달란 소리구나."
엘리스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무명이 이 세계에 진정한 종말을 가져올지도 모릅니다."
"······?"
잠깐의 침묵.
이내 질투가 웃음을 터트렸다.
"푸핫, 머리가 어떻게 됐나? 인간 따위가 종말을 가져올 수 있겠냐?"
엘리스는 질투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종말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대의 존재 의의도 사라지죠."
"야, 꼬맹이. 쓰잘데기 없는 선문답은 관두고."
"꼬맹이······."
질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엘리스를 향해 다가섰다. 질투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칠죄종 전부를 깨울 거다. 인류에게 똑똑히 전해라. 이제 튜토리얼은 끝이고 종말의 시대가 올 거라고. 뭐, 시간이 조금 걸리긴 하겠지만."
질투의 말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 시대에 칠죄종 전원이 강림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붙으니.
예언자가 동요하길 기대한 말이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담담히 대답했다.
"무명을 막을 수 없게 될 겁니다."
"······더 좋은데?"
광기 어린 표정의 소년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예언자의 머리를 터트려 버릴 요량이었으나.
"도망갔나."
예언자가 모습을 감춘 뒤였다.
"무명······."
어이가 없었다.
도대체 뭐하는 놈이길래.
아니, 대강 알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대체 왜 현세의 예언자가 칠죄종보다 무명을 두려워하고 있단 말인가.
"어디 한번 보자고."
질투는 이를 악물었다.
* * *
성전 내부.
두 번째 시련이 있었던 장소.
"그 사람이 진짜 무명······."
"뭘 어떻게 하면 마물들이 한순간에 사라진 거야."
"패공 길드 분들 괜찮으세요?!"
다섯 길드는 남은 마물들을 어렵지 않게 정리할 수 있었다.
사최헌 헌터는 절대로 내부로 진입하지 말란 말을 남기고 떠났다. 괜히 걸리적 거리지 말라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일단 기다리죠."
"그래요, 괜히 방해되느니."
지금은 다섯 길드가 대기 상태.
'대기에 의미가 있나. 만일의 사태가 일어나도······. 무명이 못 막은 걸 우리가 막을 순 없을 텐데.'
청명 길드의 길드장 채아린이 허탈한 숨을 뱉어냈다. 채아린은 뒤쪽의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빵봉투는 무명이 아닌 것 같다고 했지?"
"선배의 직감이 맞았네요."
"밥 사."
"그, 그런 내기 한 적 없잖아요······."
농담을 하면서도 채아린은 아까 전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명이 보여준 활약이 잊혀지질 않았다.
이전 월드 보스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는 진짜 차원이 달랐다.
이 자리에 모인 건 대한민국 최상위 랭크의 헌터들이다.
그런 헌터들이 간신히 버티던 마물을 단번에 처리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모두의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칠죄종 : 교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 종말의 성전이 완전 공략되었습니다. 』
『 보상을 정산합니다. 』
"진짜 같은 인간 맞나."
채아린의 혼잣말에 이하연 헌터가 조심스레 추측했다.
"어쩌면 괴물일지도 몰라요. 아니면 외계인일지도. 마인도 숨어 있는 마당에, 외계인이 없으란 법이 있겠어요?"
"에이, 그건 너무 갔다. 외계인은 좀······."
"너, 너무해······."
시답잖은 잡담을 나누던 그때였다.
웅성거리던 헌터들이 일제히 잠잠해졌다. 무언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시선이 관문으로 향했다.
"······."
두 번째 관문에서 무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금빛 자수가 수 놓인 검은 로브를 걸친 존재.
남자인지, 여자인지. 성별조차 알 수 없다.
헌터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자리에 굳어졌다. 성전에 낮게 깔린 침묵. 항거할 수 없는 힘이 그들을 짓누르는 듯했다.
저벅, 저벅.
무명은 조용히 헌터들의 사이를 지나쳤다.
무명에게서 흘러나오는 격(格)이 헌터들을 압도하고 있었다. 절대 다수의 헌터들이 최초로 경험하는 힘.
그 앞에서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
두 사도 그리고 사최헌과 천이령을 대동한 무명은 천천히 헌터들의 시야에서 멀어졌다.
주강혁 일행은 어느덧 바깥으로 향하는 문 앞에 다다랐다.
바깥으로 나가기 전.
사최헌이 검은 큐브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마인 로란드를 가둔 아티팩트였다.
"이 자는 내가 데려가 심문하겠다. 그리고······."
사최헌은 마인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천이령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참고로 입었던 내상은 포션으로 이미 치유 되어 있었다.
사최헌은 잠시 말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다시 한 번 네게 빚졌다. 감사의 인사를 하지."
"뭘, 세상 혼자 다 짊어진 것 같은 말을 하고 그러냐. 앞으로 주인님이 계신 방향으로 천 번씩 절해라."
루시퍼가 옆에서 이죽였다.
"생각해 보겠다."
사최헌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이어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천이령이 입을 열었다.
"무명님. 연락 기다리고 있을게요. 뭐든지 시켜만 주세요."
당차게 말한 천이령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어째 이전보다 열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주강혁은 무어라 말하려다 말았다.
무명(無命)에게 걸쳐진 기대감이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컸다. 괜히 아무말이나 하는 것보다는······.
그냥 고개나 끄덕이자.
주강혁은 대답 대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최헌과 천이령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생겼다. 두 사람은 먼저 성전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사도들도 맘 편히 입을 열었다.
"면목 없습니다, 주인님."
"이기고 싶었는데······."
까마귀와 비둘기로 변한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주강혁의 어깨에 앉았다.
"아니, 둘 다 잘했어."
실제로 둘이 칠죄종을 막아주지 않았더라면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른다.
처음 즉살이 빗나갔을 때 당황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교만이 피한 게 아니다. 내 조준이 엇나갔던 거야.'
오버 드라이브.
10초 남짓한 짧은 시간.
주강혁은 죽음의 기운을 다룰 수 있었다. 이러한 기운의 컨트롤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러나 첫 번째 즉살을 제외하면,
기운은 정확히 주강혁의 의도대로 움직였다.
'부분 살해.'
팔, 다리, 심장을 순차적으로 없앤 것은 주강혁의 의지.
'즉살에 강한 물리력도 생겼었지.'
안개를 몰아내고 교만을 휘청이게 했다. 오버 드라이브의 숨겨진 기능이었다.
급박한 상황에서 시도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였다.
'조금 더 써볼 수 있으면 확실할텐데······.'
주강혁은 그리 되뇌며 가면의 스킬을 발동시켰다. 이 자리에서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니었으므로.
『 아이템 스킬 '은신 Lv.2'를 발휘합니다. 』
Lv.2의 은신이 둘에게도 적용되었다.
"나가자."
무명은 그대로 성전을 빠져나왔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기자에겐 무명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을 지나쳤다. 완전히 멀어지고 난 뒤, 사도들에게 주변을 확인하게 한 다음 아이템을 해제했다.
"후우······."
그제서야 주강혁은 여태껏 쌓여 있던 긴장감을 뱉어냈다. 긴 한숨이었다.
온몸에 진이 쫙 빠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해냈다.
해냈으면 그걸로 된 거다.
여전히 우중충한 하늘 아래, 태양빛이 잠시 드러났다. 햇빛을 바라보던 주강혁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 해당 공략의 수준이 신화(神話)급에 해당합니다. 』
『 다수의 성좌들이 대한민국을 주시합니다. 』
『 시스템이 공략 수준에 걸맞은 보상을 탐색합니다. 』
파직, 파지직—!
걸음을 옮기는 주강혁의 주변으로 붉은 스파크가 튀어오르기 시작했다.
40화 신화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