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환상종
던전 안에 있는 케로베로스를 바깥으로 끌고 나오겠다는 루시퍼의 야심찬 계획.
"방금 뭐라고······?"
사최헌 헌터의 경악한 표정이 생생하다.
악마를 뛰어넘는 적 환상종 케로베로스. 확실히 그걸 끌고 나온다는 건 무모하기 그지없는 발상이다.
악마만으로도 대한민국이 위험에 빠진다고 했었으니까.
케로베로스는 오죽하겠는가.
우선 사최헌 헌터는 극구 반대.
반면 가브리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퍼. 이달의 우수사원."
찬성하는 모양.
[ 물론, 모든 선택은 전적으로 주인님께 맡기겠습니다. ]
하지만.
그건 잡을 수 없을 때의 이야기다.
나에겐 즉살(卽殺)이 있다.
마침 가지고 있는 초기화권은 총 세 장.
케로베로스의 머리가 세 개인 것도 커버 가능하다.
"괜찮을 것 같은데."
이전과 달리 내 능력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새로운 수급처까지 찾은 마당에 최대한 이득을 보는 게 낫지 않을까.
물론 사최헌 헌터는 극구 반대했다.
"마인(魔人)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꼴이다. 자칫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말이야. 만약에 잡는다면? 암, 굉장한 보상이 되겠지."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의 특성상 난이도가 어려울수록 보상은 커지니까. 안 그래?"
이전 악마를 처치할 때와 같은 논리.
"틀린 말은 아니다. 보상은 크겠지. 최초의 환상종 처치일 테니. 허나, 이번엔 다르다."
그러나 사최헌은 흔들리지 않았다.
"케로베로스와의 싸움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거기에 마인이 얽혀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도 하고."
"뭐, 네 녀석의 의견은 사실 상관없다. 주인님의 판단이 전부일 뿐."
"······길게 말하지 않겠다. 루시퍼. 케로베로스를 마주하고 다시 판단해라."
두 사람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콰과과과—!
대동굴 내부의 공동에서 쏟아지는 불덩이와 마법의 칼날들.
케로베로스가 던전 내부로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사최헌과 루시퍼는 그러한 공격 세례를 각자의 방법으로 뚫으며 전진했다.
"주인, 나는 지지 않을 자신 있어. 던전 내부에서라면."
가브리엘은 자신의 몸을 성력(聖力)으로 두른 채 허공을 나아갔다. 날아오는 마법들을 아예 무력화 시키는 수준이다.
과연 전설 +.
사최헌이나 루시퍼에 비하면 힘든 기색 하나 없다.
콰가가각-!
"어쨌든 보상이 커지는 건 맞잖아. 그렇게 따지면 악마 때는 뭐가 달랐나?"
"일단 눈앞에 집중해라, 사도."
루시퍼는 사최헌을 쫓아다니면서 계속 쫑알대고 있었다.
애초에 특수 던전을 조기에 발견하고 안내해 준 건 사최헌 헌터다. 그의 의견을 묵살하긴 그렇다.
루시퍼도 그걸 알아서 저러는 거겠지.
'사최헌 헌터만 설득하면 괜찮을 것 같은데.'
사최헌 헌터를 설득할 명분이라······.
루시퍼 일행은 원거리에서 쏟아지는 지옥불과 마법 세례를 뚫고서 대공동에 도달했다.
"1등."
가장 먼저 도착한 가브리엘이 바닥에 가볍게 착지했다.
신화 속 마수의 모습은 과연 웅장했다.
높은 공동을 가득 채운 흑색의 거체.
머리 세 개가 내뿜는 붉은 안광.
케로베로스의 입가에서 뚝뚝 떨어지는 침.
그르르르······.
직접 마주했다면 온몸이 떨리지 않을 수 없는 비주얼이었다.
"월드 보스와 비교하면 곤란하다. 무명. 한 번 상대해보고 다시 생각해 봐라. 이 녀석을 던전 밖으로 꺼내는 게 과연 맞을지."
사최헌은 무기를 들어 올리며 말을 이어갔다.
"케로베로스의 왼쪽 머리는 지옥염을 뿜는다. 중앙의 머리는 능력치 제약과 함께 마법 무기를 소환하고, 오른쪽의 머리는 마법을 사용한다."
"한 쪽씩 맡으면 되겠네! 난 왼쪽이다!"
"난 오른쪽."
"잠깐, 설명 안 끝났다······!"
사최헌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좌측과 우측으로 달려들었다.
콰아앙—!
루시퍼의 흑색 광선이 좌측 대가리를 강타하고.
뻐어억!
가브리엘의 성력이 담긴 주먹이 오른쪽 머리를 올려 쳤다.
"큭, 내 말을 들을 거라 생각한 게 잘못이었다."
서걱—!
사최헌도 어쩔 수 없이 공간검을 내질렀다. 공간을 양단하는 푸른 선이 중앙의 머리를 갈라냈다.
케로베로스의 거체가 크게 기우는가 싶던 순간.
파직, 파지직—!
전신에서 검은 마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케로베로스는 광포한 기세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툭, 투두둑!
놈의 몸을 구속하고 있던 흑색의 사슬이 죄다 끊어졌다. 속박에서 풀려난 케로베로스가 포효했다.
그 굉음에 사최헌과 루시퍼가 크게 밀려났다.
그러나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뭐야."
케로베로스의 머리를 확인한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하나도 안 통한다고······?"
케로베로스의 머리를 둘러싼 보랏빛 보호막이 루시퍼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낸 것.
케로베로스에게 실질적인 데미지는 없었다.
사최헌이 혀를 차며 말했다.
"말했잖나. 일반 보스랑은 다르다. 케로베로스에게 데미지를 입히려면 기다려야 한다. 놈이 지칠 때까지."
『 환상종 케로베로스가 명계의 영혼을 불러옵니다. 』
『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의 이동 속도가 크게 저하됩니다. 』
"뭐냐, 이건······."
바닥에서 솟아나는 보랏빛 영혼들이 루시퍼와 사최헌의 신체 일부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사도라면 알고 있지 않나?"
"큭, 이렇게 심할 줄은······."
고오오오—!
대동공의 사방팔방으로 무수한 마법의 창이 떠올랐다. 창 위로 이글거리는 보랏빛 지옥염이 셋을 노리고 떨어지기 직전.
사최헌이 루시퍼를 향해 말했다.
"첫 번째 패턴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중심에서 3초, 벽쪽으로 5초, 다시 중심에서 4초. 전력으로 달려라."
사최헌 헌터가 유물을 통해서 조사한 케로베로스의 공격 패턴.
"젠장······."
루시퍼는 마지못해 승낙했다. 루시퍼의 공격은 지금 케로베로스에게 통하지 않는다.
"다섯 번째 패턴까지 피하면 케로베로스를 공격할 기회가 생긴다. 움직여라, 사도!"
"명령하지 마라. 건방진 인간아. 내게 명령할 수 있는 건 주인님 뿐이다."
그래도 지금은 사최헌이 시키는 대로 해야지 어째.
내 생각에 루시퍼가 곧장 사념을 보내왔다.
[ 큭, 알겠습니다. 같이 가자, 사최헌! ]
'근데 이렇게까지 강하단 말이야?'
악마 벨리알을 잡을 때는 그래도 공격이 먹혀들어 가는 느낌은 있었다.
지금은 루시퍼의 마도 광선이 아예 통하지 않는다.
사최헌조차 공격하길 포기하고 회피에 전념하고 있다.
악마와는 격이 다른 보스.
사최헌이 그리 걱정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으음······.'
나는 손목에 찬 팔찌를 확인했다.
『 [ 아티팩트 ] 리미트 브레이커 』
제한을 해제하는 건 패턴을 전부 회피한 다음, 마수가 지쳤을 때가 베스트다.
'하지만 던전 바깥으로 꺼내려면······.'
우선은 눈앞의 상황에 집중해야 했다. 운이 좋다면 아이템 없이 공략 가능할 수도 있으니.
그때였다.
고오오—!
허공을 수 놓은 수백 자루의 마창(魔槍)이 땅으로 쇄도하려는 찰나.
뻐어억—!
우측에서 강력한 분쇄음이 들려왔다. 수백의 마창 위로 타오르던 불길이 흔들릴 정도의 강렬한 충격.
쿠우웅!
케로베로스의 우측 머리가 시원하게 바닥에 내다 꽂혔다. 짙은 분진이 공동 위로 솟아올랐다.
"응?"
"무슨······."
급하게 중심으로 이동하려던 루시퍼와 사최헌의 시선이 한쪽으로 집중되었다.
보스의 보호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단 회피해서 패턴을 견뎌내야 할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음."
그곳에는 성력을 주먹에 두른 가브리엘이 있었다. 가브리엘은 주먹을 치켜들며 말했다.
"방어막째로 패면 될 듯."
마치 대단한 걸 발견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 * *
가브리엘의 활약은 눈부셨다.
콰아앙—!
케로베로스의 패턴이고 나발이고 중요치 않았다. 가브리엘이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케로베로스는 크게 휘청거렸다.
한 대, 두 대, 세 대, 네 대를 때려박자, 보스가 준비하던 패턴이 흐트러지고 보호막도 희미해졌다.
"훌륭하다, 사도!"
"드디어 밥값을 하는구나!"
사최헌과 루시퍼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광선과 검격을 퍼부었다.
크허어엉-!
케로베로의 절규가 던전 내부에 크게 울려퍼졌다.
물론 케로베로스도 당하고만 있진 않았다.
콰과과광!
다양한 마법과 저주가 두 사도와 사최헌을 덮쳤다.
기본적인 맷집 자체가 일반적인 보스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거기에 더해 짙은 마기가 케로베로스의 부족한 힘을 보충해주고 있다.
장기전으로 간다면 케로베로스에게도 승산은 있을지 몰랐다.
그리하여 상황은 호각.
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로란드의 마음이었다.
"젠장, 던전 브레이크만 일으켰더라면······!"
마인(魔人) 로란드는 절규했다.
던전 바깥으로 대피한 그는 숲의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호각이어선 안된다. 아직 무명 놈은 나오지도 않았단 말이다!'
그의 손에 들린 아티팩트 '종말의 열쇠'의 기운이 본래보다 아주 살짝 옅어져 있었다.
현재 현세의 시스템상 난이도는 '튜토리얼 후반'.
인정되는 난이도는 전설+까지.
따라서 환상종 케로베로스와 같은 초전설급 마수의 소환은 막대한 자원을 소모해야 했을 뿐더러 그 힘도 제한된다.
물론, 아티팩트는 여전히 강대한 힘을 품고 있다. 그저 사용한 자원이 로란드 개인이 감당하기엔 너무 과도했을 뿐.
'크윽, 실패하면 끝장이다.'
로란드는 떨리는 손을 붙잡고 차분히 주변을 둘러보고자 했다.
'무명. 무명은 어디에 있지? 분명 이 근처에 와 있을 거다.'
우선 던전 내부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바깥이었다.
환상종을 처치하는데 직접 오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마기로 강화된 로란드의 두 눈이 일대를 훑었다. 그러나 어떠한 반응도 포착되지 않았다.
'없어. 아무리 봐도 없는데. 왜 이렇게 불안한거냐.'
죽음의 물결에서도 진짜 무명의 모습은 포착하지 못했었다.
아마 최고 등급 수준의 은신.
혹은 정보 교란계 스킬.
어느 쪽이든 로란드의 수준으로는 밝혀낼 수 없단 소리였다.
'······말도 안 돼. 그만한 차이가 있단 말인가?'
이것이 로란드의 심지를 꺾는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마인의 책사인만큼 그의 능력은 탐색과 교란에 특화 되어 있었다.
특기만 따지고본다면 SS급 이상.
그런데도 무명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
무명이 현세의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단 의미.
'틀렸다······.'
그렇다고 섣불리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 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털썩.
로란드는 바닥에 주저 앉았다. 몸을 타고 오르는 절망감에 어쩌지도 못한 채 땅에 머리를 박았다.
'케로베로스를 바깥으로 꺼낼 수만 있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스템의 속박에서 벗어나 초전설급의 화력을 발휘하는 케로베로스라면 충분히 무명을 상대할 수 있었을텐데.
손에 쥔 아티팩트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해도 최하위 마족으로 격하. 버러지나 다름없는 삶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손으로 종말을 불러 일으킨다면.
로란드가 그리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어?'
던전 내부를 훤히 볼 수 있는 로란드의 시야로 이상한 광경이 포착되었다.
콰아아앙—!
흑색의 사도에게서 돌연 검은 섬광이 치솟았다.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흑색의 마력이 폭풍처럼 던전을 뒤덮었다.
가공할 힘과 함께 던전 내부에 막대한 폭풍이 휘몰아쳤다. 사최헌조차 휩쓸어 버릴만큼 강대한 힘이었다.
'뭐······?'
사도의 제한이 풀렸다.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에게 아직 허용되지 않은 시스템의 규칙이 깨부서졌다니.
로란드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사도에게서 흘러나오는 끝없는 흑마력은 케로베로스를 억압했다.
콰아앙-!
케로베로스의 좌측 목이 사도의 날카로운 광선에 잘려 나갔다.
콰아앙!
초고압 초고출력의 흑마력이 레이저 커터처럼 우측 머리를 잘라냈다.
케로베로스에게 남은 머리는 하나.
'아, 안돼······.'
무명도 아니고,
고작 그 사도에게 이렇게 허무하게?
로란드의 얼굴이 창백해지는 바로 그 순간.
로란드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응?'
흑색의 사도가 축 늘어진 케로베로스를 끌고가기 시작한 것이다.
흑마력에 의해 만들어진 사슬이 거침없이 지옥의 문지기견을 끌어 당겼다.
쿠구구구구······.
진동하는 던전의 대동공을 지나,
대동굴의 통로를 향해.
사도는 케로베로스를 던전 밖으로 끌고 나가려 하고 있었다.
'뭐, 뭐냐. 어째서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뭘 위해서? 자신의 힘을 과시라도 하려는 건가?
당황스럽긴 하나 얼마든지 환영이었다.
던전 내부에 마기는 충분히 모였다.
이 상황에서 케로베로스가 던전 밖으로 나가게 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케로베로스의 제한이 풀리게 된다.
'하, 어리석은 사도 하나가 멸망을 자초하는구나!'
로란드의 입가에 함박웃음이 터져 나왔다.
케로베로스는 바깥에 나오는 순간, 순식간에 모든 머리를 재생할 거다.
재생된 머리는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화력으로 지상을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고.
'최고다. 마신께서 나를 돕는구나.'
그리고 그러한 케로베로스의 제어권은 로란드에게 있었다.
이제 곧 케로베로스가 던전의 바깥으로 꺼내진다. 로란드의 입가에 미소가 짙어졌다.
'사도여, 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다.'
케로베로스가 밖으로 나오는 순간, 로란드는 종말의 열쇠를 사용할 예정이었다.
사도가 예상한 것을 아득히 뛰어넘는 괴물이 탄생할 것이다.
'네 놈들의 오만이 이 세계를 멸망으로 이끄는 것이다.'
무명조차 집어삼킬 혼돈이 현세에 도래하리라.
『 보스 '환상종 케로베로스'가 던전을 벗어났습니다. 』
『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합니다. 』
콰아아—.
검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거대한 마기. 막대한 인과가 케로베로스에게 부여되는 바로 그 순간.
로란드의 입가가 찢어질 것처럼 벌려졌다.
『 시스템이 해당 존재에 대한 제한을 해제합니다. 』
『 해당 보스의 등급은 초전설(超傳說)급입니다. 』
"그래!"
희망에 부푼 로란드가 자리에서 일어난 바로 그때였다.
푸화아악—!
케로베로스가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어?"
*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현재 레벨 : Lv.66 → Lv.78 』
『 일일 레벨 제한을 달성하셨습니다. 』
순식간에 치솟는 레벨업 알림.
『 공략 수준 '초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빛과 함께 내 앞으로 쏟아지는 보상들.
초전설급에 걸맞게 아주 다양하다.
무기 조각에, 방어구에, 무슨 개 목걸이 같은 것도 있고······.
더욱 기분 좋은 것은 따로 있었다.
'한 번.'
삼두견(三頭犬) 케로베로스.
영락없이 3개의 초기화권을 소모해야 할 줄 알았는데.
'즉살 한 번으로 잡았다.'
아직 내 손에는 고유 스킬 초기화권 두 장이 남아 있었다.
31화 악마
사최헌은 눈을 떴다.
'왜 내가 바닥에······.'
정신을 차린 사최헌이 몸을 일으켰다. 던전 내부가 아니었다. 던전의 바깥, 풀로 덮인 땅 위였다.
어느 틈에 의식을 잃었던 거지?
사최헌은 멍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분명 던전의 대공동 안에서 케로베로스와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가브리엘의 주먹이 케로베로스를 방어막째로 타격, 본래 피해야 할 패턴이 사라졌었다.
사최헌 자신과 루시퍼가 공격을 퍼부어가며, 케로베로스가 점차 힘을 잃어가는 순간이었다.
- 이대로면 그냥 잡아버리겠는데······. 주인님, 그걸 부탁드립니다.
루시퍼는 분명히 그리 말했다.
사최헌이 미처 답하기도 전,
폭발적인 흑마력이 대공동을 뒤덮었다.
그건 분명 루시퍼의 것이었다.
'······제한이 풀렸었다.'
사도의 힘을 제한하고 있던 시스템의 억지력이 사라졌다.
'설마 무명이 그 아티팩트를 손에 넣은 건가?'
사최헌은 기가 찼다.
제한을 해제하는 아티팩트가 존재하긴 했다. 허나, 지금 단계에선 절대로 손에 넣을 수 없는 기물.
'죽음 물결의 보상 말고는 감이 안 잡히는군.'
달성 기여도 99,999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생각하면 가능한 일이었다.
하여튼 사최헌은 루시퍼의 홍수 같은 흑마력에 휩쓸려 정신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는 루시퍼 그놈이 일부러 자신을 압박한 거겠지.
제한을 해제한 사도의 힘은 지금의 사최헌에게는 버거웠다.
'말보다 직접 보여주는 게 빠르단 건가.'
어처구니가 없어서 화낼 기운도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명료했다.
던전을 이루던 거대한 석문은 사라졌다.
케로베로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붉은 피가 땅을 흠뻑 적셔 놓았다. 케로베로스의 것으로 추정되는 털 조각들이 사방팔방에 흩어져 있었다.
하늘은 맑았다.
케로베로스의 기운으로 보이는 건 주변 어디에도 없었다.
환상종 케로베로스는 죽었다.
'······이게 말이 되나.'
사최헌은 쓰게 웃었다. 앞에서 걱정했던 자신이 우스워질 지경이었다.
사최헌은 떠올렸다.
회귀 전에 있었던 일을.
튜토리얼이 종료된 세계에서 명계의 문이 열렸었다. 지옥의 문지기 케로베로스를 막기 위해서 전세계 헌터들이 달라붙어야 했다.
유럽의 도시 몇 개가 파괴되고 나서야 케로베로스는 쓰러졌다.
그때 비하면 약화된 케로베로스라곤 해도, 지금 헌터들에겐 재앙이나 다름없는 존재였을텐데.
"하······."
사최헌은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뭐야, 일어났냐. 인간? 약해 빠져고는."
루시퍼는 얄궂은 미소와 함께 사최헌의 어깨를 두드렸다. 하여간 얄미운 놈이었다.
"잠시 눈 좀 붙였다."
"그래? 평생 자지 그랬어."
"그러기엔 할 일이 많아서."
무명의 전력은 사최헌의 예상 밖이었다.
예측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강함을 측정하고자 하는 게 우스울 정도일지도 모른다.
회귀자인 사최헌의 경험으로도 재단되지 않는 규격 외 강자.
'그렇다곤 해도 그 힘이 언제까지 통할지는 모르는 거다.'
앞으로 나타날 적들은 무명만큼이나 상식을 뛰어넘은 존재. 무명의 힘이 통하지 않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돌발 행동은 곤란······.'
그리 생각하던 사최헌이 자리에 굳어졌다.
사최헌의 앞에는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라 있었다.
케로베로스 처치에 대한 보상.
사최헌의 기여도는 2위였다.
루시퍼의 표현을 빌리자면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격이지만, 보상을 받는 것은 변함없다.
"무명······."
보상을 읽어내려가는 사최헌의 눈이 커졌다.
이번 회차에서 달라지게 되는 것은 무명뿐이 아니었다. 무명과 접촉한 회귀자 사최헌의 운명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다.
"넌 최고다."
그리고 지금 이곳에서.
사최헌의 미래가 크게 바뀌었다.
* * *
그리고 멀리 떨어진 장소.
운명이 크게 바뀐 또 하나의 존재가 있었다.
마인 책사 로란드.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로란드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다. 케로베로스가 즉사한 순간 로란드는 등을 돌렸다.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괴물. 괴물이다.
무명은 말도 안되는 괴물이었다.
'느껴지지도, 무언가 보이지도 않았다.'
고위계 탐색 마법을 소유한 로란드였다. 그런 로란드가 무명의 기척도, 공격의 방법도 느끼지 못했다.
오래전, 최상위 마인의 비기를 엿보았던 적이 있었다. 이해는 못할 지언정 한없이 압도되는 강렬한 힘이었다.
그러나 무명의 경지는 한 차원 위였다.
2차원의 존재가 3차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듯.
로란드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것은 마인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힘이었다.
어째서 한낱 인간이,
일개 개인에 불과한 자에게 저런 힘이 주어진 건지.
로란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엄격했던 시스템의 제한은 무얼하고 있단 말인가. 저런 인간의 존재야말로 결함이거나 오류인 게 분명했다.
공포에 질린 로란드는 공간을 뛰어넘어 도망쳤다.
죽음의 물결에 연이은 두 번째 실패.
마인 사회는 이 실패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었다.
실패한 마인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로란드는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그냥 돌아갈 순 없다.'
이제부터는 생존의 문제였다. 마인의 암살대와 상위 마인들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이전과는 달랐다.
『 [ 아티팩트 ] 마(魔): 종말의 열쇠 』
로란드의 손에는 종말의 열쇠가 있었으므로.
'윗대가리들의 염려? 그딴 거 알 바 아니다.'
한낱 열등종의 영웅을 두려워하는 상층부에는 질렸다.
이미 무명이라는 강력한 존재가 나타난 이상, 결론은 하나였다.
'내 손으로 종말을 직접 불러오겠다.'
칠죄종(七罪宗)의 강림.
머지않아 튜토리얼은 종료되리라.
로란드는 자신의 선택을 의심하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선 정말 무슨 짓이라도 해야했으므로.
* * *
"······내가 멍청했다. 무명. 감사의 인사를 하지. "
시스템 창을 확인한 사최헌 헌터가 갑작스레 그리 말했다.
"뭐야, 좋은 보상이라도 얻었나?"
루시퍼가 비릿한 미소와 함께 이죽였다. 사최헌 헌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화낼 줄 알았는데.'
루시퍼가 동의 없이 기절까지 시키고, 케로베로스를 밖으로 꺼내서 처리했으니까.
물론 나도 확신이 없었다면 하지 않았겠지만.
살짝 양심의 가책이······.
"가겠다."
그런데 사최헌 헌터는 매우 만족한 표정이었다.
"이번 일은······. 반드시 보상하겠다. 어떤 형태로든."
그런 말까지 직접 꺼낼 정도였으니. 왜 기절시켰냐, 잘못되면 어쩔 뻔했냐의 이야기는 일절 없었다.
오히려 보상을 해준다고 하니.
사최헌 헌터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만간 한국에 숨어든 마인(魔人)을 축출해내겠다. 걸리적 거리는 놈들을 제거하고, 협회를 장악하면 무명 네 활동 범위도 넓어질 수 있을 거다."
예?
루시퍼도 황당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거, 사최헌 인간. 이야기 좀 같이 합시다. 뭐란 거야?"
"이제 그럴만한 힘이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쪽이 요구했던 것들은······."
사최헌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하나 꺼내 던졌다.
"······?"
가브리엘이 받아 들었다.
겉보기엔 스마트폰인데 조금 더 두껍다.
"통신 단말기다. 나와 유일하게 연결되는 회선이다. 도청이나 감시로부터 자유롭다. 연락할 게 있다면 여길 통해 메시지를 보내라. 그럼 가겠다."
콰앙-!
사최헌은 그대로 모습을 감췄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강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뭐야. 저 놈. 지 할말만 하고."
루시퍼는 혀를 찼다.
사최헌 헌터도 나름의 생각이 있는 모양. 대체 얼마나 좋은 보상을 얻었길래······.
사실 이쪽도 도움을 받은 건 마찬가지다.
케로베로스의 존재에 대한 정보는 사최헌을 통해서 얻었으니까.
나는 내 앞에 있는 시스템 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 환상종 케로베로스를 처치하셨습니다. 』
『 기여도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초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사도 전용 무기 조각(黑) x 1
- 사도 전용 무기 조각(白) x 1
- 사도 강화석(★) x 1
- [ 펫 ] 명계견의 목걸이
- [ 레전더리+ ] 명계 갑주
- 케로베로스의 혼 SSR x 1
- 전설의 증표 x 3
'오······.'
과연 초전설급.
일단 무기 조각을 하나씩 받았다.
그리고 사도 강화석.
명계견의 목걸이와,
레전더리+급의 갑주까지.
강한 마수를 잡은 만큼 리턴이 상당했다.
'잠깐. 드롭템은 어디 갔어.'
그런데 이번 케로베로스에게선 드롭 아이템이 나오지 않았다. 그 부분을 루시퍼에게 물어보았다.
[ 아, 그건 불완전하게 소환된 놈이라 그럴 겁니다. 마기로 억지로 끄집어내다 보니 발생한 소실이겠죠. 실제 케로베로스보다는 약하기도 했고요. ]
불완전 소환된 개체라 그렇단다.
"근데 그 마인 말이야. 빨리 안 막으면 위험한 거 아니야?"
이번 사건의 원흉은, 지난 죽음 물결과 마찬가지로 마인.
초 전설급 마수를 소환하는 마당에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사최헌 헌터에 말대로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었다.
[ 이 녀석 말대로입니다. 꽤 성가신 놈들이라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기도 힘들고요. ]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 뭐, 저희 입장에선 솔직히 놔두는 게 이득입니다. ]
아니, 그래도 놔두는 건 좀.
[ 케, 케로가 폭발······. ]
가브리엘은 여전히 케로베로스의 사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중이었다.
"펫으로 분류되는 아이템을 얻긴 했는데."
[ 헐. 매일 산책도 시키고, 밥도 매일 주고, 목욕도 자주 시킬게. ]
급화색이 도는 가브리엘.
"그래, 다들 고생했으니 돌아와."
그리고 마인 문제는 일단 놔두자.
사최헌 헌터가 마인을 찾아낼 거라고 말한 걸로 봐선······. 뭔가 방법이 있는 듯 한데.
이미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당장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건 없으니.
[ 예, 바로 복귀하겠습니다. ]
[ 당장 갈게 ]
아이템 확인이나 마저할까.
『 [ 레전더리+ ] 명계 갑주 』
- 방어력 + 410
- 데미지 감소 Lv.5
- 영혼 장비
내 앞에는 뼈로 만들어진 갑옷이 놓여 있었다. 보랏빛을 띈 갑주에선 은은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을 부러워합니다. 』
'잠깐만······. 데미지 감소 Lv.5?'
아이템을 확인하던 내 눈이 커졌다.
'미쳤구만.'
아이템에 붙을 수 있는 스킬의 최대 레벨은 3.
이라고 현재까지는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명계 갑주의 스킬은 그보다 높은 5였다.
'최고 레벨의 스킬이 붙은 아이템.'
참고로 아이템의 스킬은 가장 높은 것만 적용된다. 중첩이 되진 않는단 의미.
『 데미지 감소 Lv.5 』
- 받는 데미지를 25% 감소시킵니다.
압도적인 방어력과 최고의 스킬이 합쳐졌다.
현존하는 최강의 방어구인 셈이다.
애초에 '레전더리+'에 해당하는 방어구가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니.
스윽.
나는 갑옷을 착용해 봤다.
『 영혼 장착 아이템입니다. 』
『 아이템의 능력만이 적용됩니다. 』
『 방어력이 상승합니다. 184 → 594 』
몸에 스며들듯 사라졌다. 아이템을 착용했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것과 동일했다.
'영혼 장착이 이런 뜻이구나.'
나는 팔을 슥슥 움직여 봤다.
갑옷 때문에 움직임에 제약이 생기지 않는다. 무게도 느껴지지 않고.
『 현재 방어력 : 594(+89) 』
- 방어구 마스터리 Lv.3 [ 적용 중 ]
물론 방어력은 그대로 적용.
압도적인 방어력이 갖춰졌다.
당장 S급 던전에 가도 될 정도로 단단해졌다.
'미쳤네.'
이제 생존은 확실히 보장된다.
웬만한 공격에도 끄떡없을 거다.
다음으로는······.
『 사도 강화석(★) 』
- 사도의 등급을 한 단계 상승시킵니다.
- 전설 이하 등급에만 사용 가능합니다.
루시퍼가 그렇게 원하던 사도 강화석이 나와버렸다.
"루시퍼 기뻐해라."
[ 설마. 주인님. 그게 나온 겁니까? ]
"나왔어. 사도 강화석."
기뻐하는 루시퍼.
"돌아오면 사용해보자."
[ 예, 알겠습니다! ]
루시퍼까지 전설+가 된다면 전력은 확실히 강화될 거다. 이미 가브리엘의 강함은 두 눈으로 확인했으니까.
『 [ 펫 ] 명계견의 목걸이 』
- 케로베로스의 영혼을 담아 사역할 수 있습니다.
다음 아이템은 이거다.
한마디로 마수를 키운다는 건데.
헌터들 중에서도 펫을 소유한 사람이 꽤 있다. 다만, 이런 대형 보스를 펫으로 삼은 경우는 거의 없다.
있어봤자 해외에 하나 둘 정도.
초전설급의 마수를 펫으로 두는 사람은······. 현 시점 내가 유일하겠지.
'나쁘지 않겠어.'
전투력은 보장되어 있겠고.
두 사도가 자리를 비웠을 때 유용할 거다.
이건 가브리엘이 오면 사용해보도록 하면 되고.
"그러면 이제······."
나는 허공의 또 다른 시스템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 미션을 클리어 하셨습니다. 』
- 목표 : 환상종 케로베로스 처치 1 / 1
- 보상 : 적혈(赤血) -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
화산의 대장장이가 줬던 미션이 훌륭하게 클리어 되었다.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당신의 활약에 경악합니다. 』
『 성좌 '이계 규율'이 쉬운 미션에 허탈해 합니다. 』
왜 쉬운 게 어때서.
아니지. 내 기준에 쉬운 거고. 실제로는 결코 간단히 깰 수 있는 미션은 아니었다.
샤아아—!
붉은 빛이 내려앉더니 적당한 크기의 망치로 변했다. 손잡이 부분이 붉은 천으로 감싸 쥔 망치.
『 [ 레전더리 ] 적혈(赤血) -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 』
잡아보니 착하고 감기는 게 뭐든지 수리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다.
'이걸 들고서······.'
터억.
『 [ 성유물 ] 부서진 영혼등 』
- 완전히 부서져 쓸 수 없는 영혼등입니다.
나는 영혼등을 인벤토리에서 꺼내서 바닥에 놓았다.
'수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하나.'
망치를 쥐고서 영혼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수리한다는 느낌으로.
퉁, 퉁.
영혼등이 빛을 내며 변화······하지 않았다.
아무 반응이 없다.
퉁퉁퉁.
앞뒤 옆을 다 두드려봐도 마찬가지다. 고쳐질 기색은 없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마."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스킬 습득을 권장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항의합니다. 』
관련 스킬을 얻어야 하는 거였다.
어쩐지 그냥 순순히 주더라.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새로운 미션을 제안하려 합니다. 』
새로운 미션을 깨면 스킬을 알려 주겠다 이건가.
망치는 일종의 체험판이었던 거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였다.
루시퍼의 사념이 들려왔다.
[ 주인님, 그 놈이 주는 미션은 무시 하셔도 됩니다. 성좌 놈들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끝이 없거든요. 처음부터 그럴 꿍꿍이였던 겁니다. ]
"근데 대장장이 스킬을 구할 방법이 딱히 없잖아."
장인 계열 헌터들 같은 경우,
절대 쉽게 스킬을 전수해주지 않는다.
장인을 찾아서 직접 맡긴다는 방법도 있긴하지만, 성유물급을 간단히 고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 예, 아마 평범한 수리 스킬로는 절대 못 고칠 겁니다. 무려 성유물이니까요. ]
"그러면?"
[ 아주 천재적인 자질을 지닌 대장장이가 필요합니다. ]
당장 떠오르는 건 명품 아이템을 생산하는 공방 '엘'.
그곳의 장인들은 최고 등급의 아이템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아이템 공방이기도 하고.
수많은 헌터들이 그곳에서 아이템을 얻고자 줄을 선다.
현실적으로 내겐 어렵다.
돈도 많이 들 테고. 예약 순서가 내게 올 것 같지도 않고.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루시퍼는 이때를 위해 준비해왔다는 듯 말을 꺼냈다.
[ 천이령. 그 꼬맹이가 있잖아요. 그 녀석의 자질은 전투 뿐만 아니라 모든 분야에 통용됩니다. ]
랭킹 3위 천이령 헌터.
그녀는 올마스터였다.
가지고 있는 자질은 천부적이었고.
[ 대장장이 스킬을 배워오라고 하면 될 겁니다. 상당히 괜찮은 게 나올 겁니다. 무명의 제자가 되고 싶다 했으니 그걸로 꼬셔보죠. ]
······너 악마냐.
[ 하하, 그 정도까진 아닙니다. 칭찬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
쑥스러운 듯한 루시퍼의 목소리.
맞다.
얘 타락한 천사였지.
32화 요구
불멸 길드, 훈련장.
"아직 약해. "한참 부족하니까. 따라가지 못하는 것도 당연해."
콰앙, 콰앙—!
천이령 헌터의 주먹이 훈련용 인형에 꽂힐 때마다 흑색의 마력이 불꽃처럼 터져나왔다.
루시퍼에게서 배운 흑마도의 기초만으로도, 천이령의 출력은 30%이상 증가했다.
콰아앙—!
그러나 천이령은 부족하다는 듯 훈련용 더미를 두들겼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더 위협적으로.
- 천이령, 넌 여기에 남아라.
환상종 케로베로스의 출현.
사최헌은 의도적으로 천이령을 데려가지 않았다.
케로베로스를 소환한 것은 마인이다. 그 연관성을 깨달은 천이령은 폭주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인은 강한 상대였다. 랭킹 3위인 천이령이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로.
특히, 천이령이 복수하고자 하는 마인은 더욱 강했다.
콰아앙—!
천이령의 주먹이 불멸 길드의 훈련장을 진동 시켰다. 바깥의 창문을 통해 몰래 구경하던 길드원들이 쑥덕거렸다.
"우와······. 훈련장 부서지겠는데요."
"우리가 뭐 잘못한 거 없지?
"대충 들었는데 길드장이 천이령 헌터만 쏙 두고 갔대요."
"헐, 왜 그랬대. 잠깐. 너 뒤에······."
"내 뒤?"
길드원 한 명의 뒤로 그림자가 드리웠다.
"비켜라."
"아, 넵."
빵봉투를 쓴 루시퍼가 있었다. 루시퍼는 바짝 굳은 길드원들을 지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위잉—!
자동문이 열려도 천이령 헌터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콰앙! 쾅! 쾅!
검은 마력의 기류가 훈련용 인형을 쉴틈 없이 타격했다. 그것을 바라보던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이 꼬맹이 뭐야.'
불안정해 인간은 다루기 힘든 흑마력은 벌써 여기까지 제어했다.
천이령의 잠재력은 인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잘 키우면 쓸만한 칼이 될 법했다.
루시퍼는 묘한 미소와 함께 천이령을 불렀다.
"야, 꼬맹이."
"······엥. 벌써 공략 끝났어요? 이렇게 빨리?"
루시퍼를 돌아보는 천이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루시퍼는 손에 쥐고 있던 망치를 던졌다.
"무명(無命)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했지."
쿵.
망치를 받아든 천이령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 [ 레전더리 ] 적혈(赤血) -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 』
루시퍼는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대장장이의 수리 스킬을 배워와라."
뜬금 없는 제안이었다.
대한민국의 전투 랭킹 3위인 천이령 헌터에게 장인계 스킬을 배워오라니.
그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요구였다.
경우에 헌터로서의 자존심마저 짓밟는 그런 요구.
"······네."
그러나 천이령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망치를 손에 쥔 채 조용히 열의을 불태울 뿐.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고 정했다.
무명의 강함은 상상을 아득히 초월해 있다.
그의 부하—사최헌의 말에 따르면 사도—에게 배운 흑마력만으로도 이만큼이나 강해졌다.
그리고 그런 사도가 직접 하는 말이었다.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이 기회를 쓸데 없는 질문으로 날려 먹고 싶지 않았다.
호오.
루시퍼는 턱을 매만졌다.
그는 천이령의 눈동자에 깃든 감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힘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조차 가리지 않으리라.
썩 마음에 드는 태도였다.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수리 스킬을 익혀와라. 그러면 다음 수업을 하겠다."
"최선을 다할게요."
천이령은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그래야지. 주인님께 도움이 되는 일이니."
루시퍼는 뒤쪽으로 무심하게 손을 쓱 흔들며 훈련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주강혁이 있는 반지하 단칸방.
펫 소환 아이템인 명계견의 목걸이를 사용하려 하고 있었는데.
띠링-.
"주인, 문자가 왔어."
가브리엘은 사최헌으로부터 받았던 단말기를 주강혁에게 건네줬다.
단말기는 추적도 도청도 되지 않는 특수한 아이템이었다. 사최헌과의 통신만을 지원하는 통신 도구.
띠딕.
스마트폰 비스무레한데 액정이 터치가 안 된다.
조작이 어렵진 않았다.
옛날 피처폰처럼 버튼을 눌러 조작하면 됐다.
거기에는 주소가 쓰여 있었다.
"벌써 왔네."
사최헌이 말했던 은신처 중 한 곳이었다. 여기서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짐도 별로 없으니 이사는 금방 끝날 터.
"주인, 안전한지 먼저 확인하고 올게. 케로를 부탁해."
가브리엘은 목걸이를 내게 건네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고로 아직 소환 안했다.
이윽고 비둘기 한 마리가 반지하의 창문을 빠져나갔다.
"일단 이삿짐부터 챙길까."
펫은 이사가고 나서 소환하는 게 낫겠지.
개목걸이를 인벤토리에 넣은 주강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한 번 둘러봤다.
눅눅하고 퀴퀴한 반지하.
빈 말로도 쾌적하다고 하기 힘든 곳이었다.
취업을 하고 난 뒤에 벗어나리라 마음 먹고 있었는데. 사람 일은 참 모르는 법이었다.
'드디어······.'
가브리엘의 능력을 통해 사최헌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는 건 파악했다.
'여길 뜰 수 있다.'
이제 이곳 반지하 단칸방에서 벗어나,
새로운 보금자리로 이사할 시간이었다.
* * *
헌터 협회 본사.
각성관리본부 본부장 유진철.
"그러니까, 대형 반응이 있었는데 그게 어떻게 오류라는 겁니까?!"
콰앙—!
유진철은 부협회장실의 문을 거칠게 닫고 나왔다.
말이 안 통하는 상황이었다.
협회의 장비가 이상 수치를 감지했다. 이전 월드보스나 죽음의 물결에 이상 되는 강력한 대형 반응.
하지만 위쪽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현 시점에 존재할 수 없는 수치라며 일축하고자 했다. 문제가 발생하면 그때 해결해도 늦지 않는다는 어처구니 없는 소리까지.
'젠장, 내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네. 내가 이상한 건가? 사람 돌겠군.'
당장이라도 협회 측에서 사람을 파견해, 주변 지역을 봉쇄해도 모자를 지경인데.
오류 같은 소리하고 있네.
진짜라면 인근 지역은 쑥대밭이 되고도 남을 거다.
"빌어먹을 노인네들."
유진철은 진심으로 분노하며 건물을 내려갔다. 부하 직원 하나가 유진철의 옆에 따라 붙었다.
"본부장님, 왜 그러십니까. 하필이면 흉흉한 시기에."
"니 새끼도 똑같아. 그게 오류면 시발, 아휴. 말을 말자."
"어디가세요! 본부장님!"
이 놈은 협회장 연줄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다 같은 놈들이었다.
"따라오지마. 경고했다. 나 혼자 머리 좀 식히게."
유진철은 부하를 거칠게 밀어 붙이고선 건물 바깥으로 나섰다.
치익.
입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협회가 언제부터 이런 고집불통 집단이 된 건지.
유진철은 짙은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지하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죽음의 물결 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판단이었다.'
무명(無命) 헌터가 아니었으면 어떤 참사가 빚어졌을지. 상상만해도 끔찍했다.
그런 걸 막기 위해 협회가 있는 거 아닌가?
'지금의 협회는 뭘 위해 존재하는 건지······.'
협회의 몸집은 비대하게 커지고 있다. 기회만 되면 대한민국을 집어 삼킬 것처럼.
한국의 위기를 이용하려는데 혈안이 된 것 같기도 하고.
툭툭.
유진철은 깊은 한숨과 함께 담뱃재를 털어냈다.
벌컥.
유진철은 지하 주차장에 놓인 차 문을 열어 젖혔다.
'직접 확인하고 오는 수밖에 없겠어.'
이번에 나타난 대형 반응은 심상치 않은 수준이었다. 정말 오류라면 상관 없겠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유진철 본부장은 차라리 직접 움직이고자 했다.
두 눈으로 보고 괜찮다는 걸 확인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으므로.
'괜히 다른 애들까지 엮이게 할 필욘 없고.'
그리 생각한 유진철 본부장이 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이었다.
덜컥.
누군가가 거세게 차 문을 잡았다.
"······?"
"갈 필요 없습니다."
유진철이 미간을 좁히며 돌아보는 순간이었다. 그 누군가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들어 올렸다.
"이미 정리 되었으니까요."
목소리의 정체는 사최헌 헌터였다.
어디 바닥에 구르고 온 사람처럼 옷이 꼬질꼬질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정리 됐다뇨. 사최헌 헌터. 그게 무슨······."
"유진철 본부장. 지금은 몸을 사릴 때입니다."
사최헌은 유진철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사최헌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각성관리 본부장 유진철.
그는 마인이 정리된 대한민국을 이끌 인재였다. 멸망한 세계 에서도 끝까지 협회를 일으켜 세운 불세출의 지도자였다.
진심으로 인류를 위하는 몇 없는 인물.
사최헌이 믿을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협회를 마인들이 점거한 지금은 제대로 힘을 못 쓰고 있지만.
마인들이 사라지게 된다면, 협회에 이만한 재목은 없을 거다.
'죽게 둘 순 없다.'
만약 이대로 던전이 일어난 지점으로 향했다면 유진철은 살해 당했을 것이다.
사최헌 헌터는 바닥에서 주워든 담배꽁초를 유진철에게 건넸다.
"때를 기다리시죠. 대신 몇 가지 조언을 드리겠습니다. 이제 곧 협회장에게 전화가 올 겁니다."
"예?"
우우웅-.
유진철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협회장에게서 직접 걸려 온 전화.
유진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최헌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받으시죠. 오늘 하루 병가를 내겠다하면 더 좋겠네요."
유진철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 했다.
앞으로 있을 미래를 위해서라도.
* * *
평범한 빌라 단지.
그 중 하나에 사최헌의 은신처가 있었다.
생각보다 평범한 위치에 있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뭐, 이런 것 같군요."
외관은 정말 평범한 빌라다.
주차장도 있고 차도 놓여 있다.
"각종 마법이 걸려 있네요. 추적 마법 파훼나, 침입자를 경계하는 스킬이 심어져 있습니다. 광적이라고 해도 좋을 수준입니다. 아직 활성화 되어 있진 않습니다. 등록하는 방법은······."
루시퍼가 마력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은은한 파동이 일었다.
"이제 들어가셔도 됩니다. 꽤 괜찮네요. 아무거나 준 건 아닌가 봅니다."
나는 가브리엘과 함께 빌라의 내부로 들어갔다. 보내준 주소는 빌라의 2층이었다.
비밀번호를 누른 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집 내부가 드러났다.
"오오······. 바깥에서 볼 때보다 넓은데?"
"엄청난 시설."
내부는 비어 있지 않았다.
각종 가구와 소품들로 깔끔하게 인테리어 되어 있었다.
TV는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비교도 되지 않게 크고.
방은 총 세 개에 화장실은 두 개.
거실과 부엌도 넓직하다.
"허, 공간계 마법까지 적용되어 있네요. 바깥에서 볼 때보다 훨씬 넓습니다. 사최헌 이 놈. 돈이 남아도나 봅니다."
필요한 물품들은 전부 준비되어 있었다.
TV, 전자렌지, 냉장고, 에어컨, 컴퓨터까지 최신형이 아닌 것이 없다.
"주인. 여기에 게임기가 있어. 최신 타이틀도 가득."
"주인님, 냉장고에 신선도 유지 룬이 붙어 있습니다. 재료도 한가득이고요. 주방 디자인이 무슨. 큭, 이 놈 뭘 좀 아네."
감탄 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런 좋은 곳을 그냥 넘겨줬단 말이야?
반지하 단칸방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천국 같은 곳이다.
약 32평.
나는 거실에 놓인 소파에 드러누웠다. 가브리엘도 벌써 자기 집인양 소파에 기대었다.
"진짜 좋다."
물론 내 집은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쾌적할 수가 있나.
아 참, 여기서 끝이 아니다.
"두 사람 다 잠깐 이리 와 볼래?"
나는 가브리엘과 루시퍼를 불러 모았다.
둘이 집 점검을 하는 동안,
나는 스마트폰을 두 개 추가로 개통해 두었다.
"둘한테도 스마트폰이 필요할 것 같아서."
현세에 강림할 때 기본적인 지식은 들고 온다지만, 이후로 발생하는 지식들을 얻으려면 스마트폰이 필수다.
하나씩 있으면 편하겠지.
나는 스마트폰을 두 사람에게 건네줬다.
"주, 주인님······.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압도적 감사."
"그리고 돈도 필요하면 과하지 않은 선에서 각자 가져다 써."
나는 루시퍼가 들고 온 검은 돈가방을 가리켰다.
"주인 최고. 복지 최고. 21세기 전무후무한 화이트 기업."
"황송합니다. 밥값 제대로 하겠습니다. 오늘 뭔가 드시고 싶으신 거 있으십니까?"
기뻐하는 둘을 보고 있으니 괜스레 뿌듯하다.
진지하게 말하자면 복지가 좋은 건 아니다.
······월급도 안 주는데 뭘.
나중에 한 달 지나면 줘도 괜찮을지도.
잠깐, 얼마를 줘야되나.
따지고보면 S급인 사최헌보다 몸값이 비싼 용병인 셈인데.
뭐, 나중에 생각하자.
오늘은 C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하고 케로베로스까지 잡았다. 레벨도 최대한 올려 놨고.
그렇게 달성한 내 레벨은 78.
B급까지 단 2레벨 남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F급 헌터였는데 말이다.
진짜 S급까지 얼마 안남았네.
"그리고 이걸 잊으면 안 되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색 개목걸이를 꺼냈다.
"오오."
"집 지키라고 하면 딱 되겠습니다."
가브리엘의 들뜬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퍼도 나름 쓸모를 생각하는 것 같았고.
『 [ 펫 ] 명계견의 목걸이 』
- 케로베로스의 영혼을 담아 사역할 수 있습니다.
이 목걸이에.
『 케로베로스의 영혼(SSR) 』
영혼을 가져다 넣는다.
파아아—!
검은빛과 함께 강아지의 형상이 빚어졌다. 빛은 순식간에 검정 강아지 한 마리로 변했다.
왕!
겉모습은 그냥 강아지다. 머리가 세 개 달려 있지도 않고.
"변신계 펫이네요. 평소에는 이런 모습이겠지만, 여차하면 본래의 모습을 되찾을 겁니다."
"귀여워."
가브리엘이 케로베로스를 주워들었다. 그대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강아지를 쓰다듬는 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
매우 만족하는 표정.
으르르! 으르르!
그런데 품 안의 강아지는 난리를 치고 있었다. 몸부림치면서 가브리엘의 손가락을 마구 물어뜯고 있었다.
"편안한······. 휴식······."
약간 실망한 것 같은데.
"이름을 정해줘야 하는데. 그냥 케로라고 부를까?"
"가브리엘이라고 짓는 건 어떻습니까."
"케로가 별로면 생각해둔 다른 이름도 있어."
가브리엘은 강아지를 억지로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세 마리의 개보다는 네 마리의 치타가 되라는 의미에서 포치타."
"······. 그냥 케로로 하자."
"케로, 좋네요."
케로는 사납게 발버둥치며 가브리엘의 품을 벗어났다.
"쯧, 겨우 짐승 한 마리 길들이지 못해서 앞으로 주인님을 모실 수 있겠어?"
비웃음을 머금은 루시퍼가 케로를 들어 올렸다.
아르르, 콰득, 콰드득!
아까보다 심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육 좀 해도 되겠습니까? 잠깐 인스턴스 게이트 좀 열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너무 사납다.
이래서야 펫으로 쓰기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루시퍼의 품을 벗어난 케로가 내 쪽으로 뛰어들었다.
"헉."
"주인님, 위험—!"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케로를 잡아채려고 한 그 순간.
끼잉, 끼잉.
내 품에 안긴 케로가 세상 편안한 모습으로 머리를 비볐다. 늑대였던 놈이 한 마리의 순한 양이 되었다.
"내가 주인이라서 그런가?"
아까 봤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한낱 개새끼조차 주인님의 위대함 앞에는 고개를 숙이는군요."
"케로는 개새끼가 아니야. 그저 적응할 시간 필요한 것 뿐."
왕.
이후로 몇 가지 시켜보니 말귀를 잘 알아듣는다.
앉아, 누워, 빵, 굴러, 물어 등등.
따로 훈련하지 않아도 전부 가능했다.
'하긴, 마수였는데.'
이러면 문제 없다.
전투력을 내일 확인해보면 될 거다.
'아무리 못해도 나보단 세겠지.'
초전설급의 마수였으니까.
펫이 되어도 비슷할 거다.
"오늘은 이제 쉬자."
나는 케로를 내려 두고선 푹신한 소파에 몸을 완전히 기대었다.
TV를 틀고서 채널을 돌렸다.
가브리엘은 케로를 길들여 보겠다고 바닥에서 실랑이 중이고, 루시퍼는 주방으로 가서 음식을 만들기 시작했다.
에어컨에선 시원한 바람이 쏟아지고 있다.
'쾌적함이 차원이 달라.'
역시 랭킹 1위의 은신처다.
다음에 만나면 루시퍼를 통해서 감사 인사를 꼭 해야지.
'아, 맞다.'
나는 잊고 있던 아이템을 떠올렸다. 루시퍼가 집에 오면 바로 알려주려고 했는데 이사하고 케로를 소환하느라 잠시 까먹었다.
『 사도 강화석(★) 』
- 사도의 등급을 한 단계 상승시킵니다.
- 전설 이하 등급에만 사용 가능합니다.
케로베로스를 처치한 보상으로 얻은 검은색 보석.
"루시퍼, 사도 강화석 쓰자."
한마디 했을 뿐인데 루시퍼가 휙하고 내쪽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기다리고 있었던 듯 하다.
"드, 드디어."
"이걸 쓰면 전설+ 가능한거지?"
끄덕.
루시퍼는 고개를 위아래로 느릿하게 움직였다.
"지금 쓰자."
"그, 그래도 식사 준비는······."
옆에서 감자칩을 먹던 가브리엘이 몸을 일으켰다.
"나 컵라면 잘 끓여."
"그건 절대 안돼. 오늘 저녁은 수육이다."
매우 단호했다.
"뭐 어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지 않아?"
"그거야 그렇습니다만······."
루시퍼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주인님, 부탁드리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인 루시퍼.
기사의 서임식 같은 장면이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강화석을 루시퍼의 앞으로 가져갔다. 짐짓 엄숙한 표정을 짓고서 아이템을 들어 올렸다.
『 사도 강화석(★)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사용하겠다."
『 강화석을 사용해 사도의 등급을 높힙니다. 』
화아악—!
검은 결정이 깨어지며 흑색의 기운이 루시퍼를 휘감기 시작했다.
전설급과 전설+급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제한 해제도 차원이 달라질 거다.
전설급이었던 루시퍼가 제한을 한 단계 해제한 것으로 그만한 출력이었는데.
전설+급의 제한해제는 얼마나 강력할까.
루시퍼의 주위를 뒤덮은 검은 기운이 점차 잦아들려는 찰나였다.
『 인벤토리에 소유한 '전용 무기 조각(黑)'이 강화에 반응합니다. 』
우웅-!
인벤토리에서 빠져나온 무기 두 조각이 루시퍼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루시퍼에게 감돌던 기운이 한층 더 진해지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고 그 순간.
"헐."
케로를 돌보던 가브리엘의 고개가 한순간 루시퍼에게 고정 되었다.
『 해당 사도와 관련된 유물이 크게 반응합니다. 』
『 사도 루시퍼의 강화에 특수 보너스가 붙습니다. 』
뭔가가 일어나고 있었다.
33화 강적
"연락 두절입니다."
마인 로란드는 실패했다.
환상종을 소환해 무명(無命)을 차지하고자 했던 로란드의 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거대 반응 소실. 환상종은 던전과 함께 완전히 사라졌고, 책사 로란드도 답이 없네요."
"허, 이거야 원."
비서의 보고를 듣는 노인의 얼굴이 구겨졌다.
"기껏 기회를 줬건만 그런 식으로 일을 그르치다니."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 구성철.
그는 인간의 모습으로 위장한 마인이었다. 동시에 한국을 담당한 마인들의 수장이기도 했다.
구성철을 보좌하는 여자 비서 또한 마인이었다.
"최하위 마족 출신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신 게 아닌지요."
"그건 자네가 잘 몰라서 하는 소릴세. 밑바닥부터 올라 온 놈들이야말로, 다시 추락하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법."
어쨌든 결과는 실패다.
로란드는 아티팩트인 종말의 열쇠와 함께 자취를 감췄다.
열쇠에는 여러 장치가 되어 있다. 로란드의 지식으론 기껏해야 악마를 몇 더 부르는 정도겠지.
'문제없을 거다.'
찾아내기 또한 어렵지 않다. 아티팩트인 종말의 열쇠에는 위치를 추적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었다.
로란드가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열쇠를 버리진 않았을테니.
"암살대를 보내거라. 열쇠를 회수하고, 로란드는 최하위로 격하. 마계의 끝자락에 처박아라."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로란드는 영원한 고통 속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고작해야 인간 헌터 하나를 처리 못해 이 지경이라."
협회장은 언짢은 기색이 역력했다.
마인 사회에서는 로란드의 실패를 추궁할 것이다. 그 책임은 한국의 마인들에게로 향할 거고.
'후우.'
이번에는 협회장을 포함한 상위 마인들이 직접 나서야 할 차례였다.
문제는 무명(無命)이 어디에 있는지 마인들도 모른다는 것.
많은 헌터들의 정보가 등록된 협회에서조차 무명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누군지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나?"
노기 섞인 협회장의 음성. 패드를 넘기며 정보를 찾는 비서의 눈썹이 올라갔다.
"무명의 소재 파악 자체가 쉽지 않습니다. 미등록자라는 이야기도 있고, 빌런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죽음의 물결 계획이 성공하기만 했어도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혼란 수습을 명분으로 협회의 권한은 강화 되었을테니까.
헌터들의 데이터를 주기적으로 최신화하고, 시스템 상의 닉네임을 등록하도록 법을 신설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전에 말해 둔 건 어떻게 됐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비서가 앞쪽으로 홀로그램을 띄웠다.
"무명의 후보가 될만한 인간들을 조사한 리스트입니다. 헌터들 중에서 급성장을 보이는 자들이 그 대상입니다."
홀로그램에 표시된 사진들을 살피는 협회장의 눈이 가라앉았다.
B-A급들의 강자.
드문드문 S급도 있다.
모두 급성장을 보이는 유망주들이었다.
그중에는 이미 붉은색으로 빗금이 쳐진 자들도 있었다.
마인의 손에 당한 자들이었다.
"사고를 가장해서 처리하면 빠르게 없앨 수 있겠지."
협회장이 손가락을 뻗어 몇 인간을 지목했다.
"저도 그 부분을 생각하고 있던 참입니다."
마침 현세는 튜토리얼 후반부다. 시스템의 이상 현상이 두드러지는 지금, 사고의 건수가 많아진다 한들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이 명단에 진짜 무명 주강혁은 없었다.
"다른 건들은 어떻게 됐나."
협회장이 손짓하자 비서가 페이지를 넘겼다.
제거 목록은 더 있었다.
협회의 움직임에 방해가 되거나, 마인의 존재를 알아차린 자들도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진행 중입니다."
그 대답에 협회장은 의자에 몸을 푹 기대었다.
"문제는 시간일세. 다 처리하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나?"
"최소 한 달은 있어야······."
"쯧."
비서의 말에 협회장은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달?
위쪽에서 기다려 줄 리가 없다.
그랬다간 협회장 자신을 포함한 한국의 상위 마인들이 줄줄이 갈려 나갈 거다.
"로란드가 실패한 이상 이쪽도 움직임을 취해야 하는 법이지. 현재 한국에 있는 마인들을 전부 소집하게."
"기한은 언제로 할까요?"
"내일 저녁이면 되겠군. 간만의 회동이 될 걸세."
무명(無命).
그를 잡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번거로울 뿐.
무명은 최근 있었던 대형 이벤트에는 빠지지 않고 얼굴을 드러냈다. 그럴싸한 일만 터트리면 무명은 분명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함정이다.
무명을 상대하는 것은 상위급에 속하는 다수의 마인들. 무명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못하고 죽어갈 것이다.
사도가 둘 있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인간의 소환수로서 힘이 제한되어 있는 사도들과 달리, 마물로 취급되는 마인들의 제한은 더욱 널널했으니까.
"무명만 처치하면 한국의 변수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
지팡이를 쥔 협회장의 손에선 짙은 마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마침 적기였다.
연이은 월드보스와 비정상적인 죽음의 물결.
무슨 사고가 생긴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운이 좋다면 사최헌을 비롯한 한국의 핵심 인물들까지 한 번에 처리할 수 있을 걸세."
* * *
『 사도 강화석이 성공적으로 적용 되었습니다. 』
『 흑(黑) 사도 소환의 등급이 한 단계 상승합니다. 』
『 전설(傳說) → 전설+(傳說) 』
루시퍼를 감싸고 돌던 검은 기운이 가라앉았다.
『 전용 무기 조각의 효과로 색(色)이 덧 입혀집니다. 』
『 '칠흑(漆黑) : 사도 소환'으로 스킬이 업그레이드 됩니다.』
『 사도의 스킬이 일부 개방됩니다. 』
날뛰던 전용 무기 조각들 또한 잠잠해졌다.
슥슥.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퍼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손을 가볍게 쥐었다 펴본 녀석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확실히 달라졌습니다."
썩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색의 수준도 칠흑으로 강화된만큼 출력도 훨씬 강화 되었고요."
"어느 정도로?"
"동급인 전설+의 가브리엘보다 30% 넘게 강해졌습니다."
루시퍼는 소파에 기대고 있는 가브리엘을 가리켰다.
"말도 안 돼······."
가브리엘은 충격받은 표정으로 감자칩을 먹었다.
"기운을 읽어내는 능력도 한결 강화 되었습니다. 적의 레벨이나 강함의 수준을 한층 더 정확하게 읽어낼 수 있죠. 거기에 더해서······."
루시퍼는 다시 부엌에 걸어 둔 앞치마를 둘렀다. 입가에 자신만만 미소를 띤 채였다.
"이제 음식을 만드는데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굉장한 건가?"
일부 특수한 헌터들이 그런 조리 관련 스킬을 익힌다던데. 게이트나 던전 공략 때 상당히 유용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깜짝 놀라실 겁니다. 주인님은 이제 제가 만든 음식 말고는 드실 수 없는 몸이 되실 겁니다."
그건 좀······.
루시퍼가 도마 위로 식칼을 들어 올렸다.
"오늘 저녁을 드셔 보시면 바로 체감이 되실 겁니다."
타다다다다—!
당근과 야채가 비현실적으로 튀어 오르며 그릇에 담기기 시작했다. 영화나 만화에서나 볼 법한 연출이다.
이게 스킬의 힘인가.
'요리 기술이 좋아서 나쁠 건 없지.'
곧 있으면 고등급의 게이트나 미궁을 공략하게 될 거다. 대부분의 공략이 일주일에서 이주일은 걸린다.
그때,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면 사기 진작의 효과가 있을 거다.
'스킬로 만든 음식은 능력치를 올려주기도 한다던데.'
여러모로 궁금하다. 주방에서는 금방 좋은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저절로 입가에 군침이 고인다.
요리는 부가적인거고.
'어쨌든 전설+가 됐으니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을 거다.'
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내일부터 다시 미궁 공략인가······."
C급 미궁부터 공략할 생각이었다.
지금 레벨은 78.
80레벨이 B급이다.
이 구간부터 레벨업이 매우 더디다고 한다. 다수의 헌터들이 B급에 머무르는 이유기도 했다.
충분한 경험과 힘을 쌓은 헌터들만 A급에 도달할 수 있다.
S급은 보통 꿈의 등급으로 여겨진다. 그 정도만 되어도 대부분의 길드에서 모셔가려고 안달인 수준이니까.
그때였다.
"주인, 이거 봐."
가브리엘이 내 쪽으로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에는 미궁 근처의 사진이 떠올라 있었다.
"지금 미궁 근처에 길드하고 기자들이 많아."
사진 속에는 미궁 주변으로 각종 길드들과 방송국 차량이 포진해 있었다.
- 무명(無命) 미궁 공략 중이라던데?
- 온갖 길드에서 무명 기다리는 중
- 무명 오나? #미궁 #무명 #전설
'그럴 때가 되긴 했지.'
미궁에는 랭킹이 남는다
F, E, D급 미궁 랭킹엔 무명의 이름이 남아 있다. 소문이 퍼지는 게 당연했다.
무명이 미궁을 공략 중이라고.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후원 아이템을 가리킵니다. 』
그러고보니 이게 있었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로브를 꺼냈다.
『 [ 레전더리 ] 이름 없는 자의 로브 』
- 착용자의 모든 정보를 감춥니다.
- 하루 한 번, 전설급 이하의 간파계 스킬을 방어합니다.
검은 별의 주인이 후원해 준 아이템.
문제는 은신과는 다르단 거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은신 아이템은 B급 이하의 탐지 스킬 밖엔 막아주지 못하고.
"이게 있어도 소동이 일어나는 건 똑같을 것 같은데."
"주인을 향한 무수한 악수의 요청이 올 거야···."
분명 근처엔 고등급의 헌터도 있을 거다. 한 명한테만 걸려도 길드들과 방송국 기자들이 미친 듯이 몰려들게 뻔하다.
물론 방법은 있다.
"인스턴스 게이트부터 공략하자."
마침 코인도 쌓여 있겠다.
반복해서 공략하면 레벨업에는 문제가 없다. 보상은 못 얻어도 경험치는 계속 얻을 수 있다.
그리 계획을 짜고 있으려니.
"돼지고기 수육과 보쌈김치 완성입니다."
루시퍼가 요리를 끝냈다. 주방의 테이블 위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수육과 김치가 놓여 있었다.
"오오, 고마워. 루시퍼."
"오예."
"끼잉-!"
"잠깐, 개새끼. 갑자기 친한 척이야. 네 몫은 없다. 어딜 주인님 식사하시는데 자연스럽게 끼어들고 있어."
루시퍼는 그리 말하면서도 작은 밥그릇 하나를 내려놨다.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린 루시퍼가 경고했다.
"천천히 드셔야 합니다. 물론, 주인님 정도 되는 분의 정신력이라면 문제 없겠지만······."
이렇게까지 밑밥을 깔 정도라고?
'먹어볼까.'
젓가락으로 수육과 김치를 한 번에 집어 입으로 가져왔다.
바로 그 순간.
번쩍—!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치는 듯한 충격이었다.
베란다의 창을 통해서 보랏빛 섬광이 번뜩였다. 어두운 저녁 하늘을 가르는 짙은 번개.
일순 주방 전체가 자색으로 물들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뭐야······?"
수육 때문이 아니었다.
내 미간이 좁혀졌다.
진짜로 번개가 내리쳤다. 일반적인 번개는 아니었다.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지 않았으니까.
무엇보다 이것과 비슷한 광경을 나는 이미 본 적이 있다.
바로 사도의 강림.
그때도 분명 이런 번개가······.
우당탕탕.
누가 먼저랄 거 없이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베란다를 향해 뛰쳐나갔다.
녀석들은 난간을 붙잡고 심각한 표정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미, 미친······. 이건 말이 안되는데······."
"너무 빨라. 마인의 짓?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짓을? 놈들은 현세를 손에 넣고 싶은 거지, 통째로 파괴하려는 게 아닐······. 잠깐 제한이 풀렸는데?"
나는 둘을 향해 다가섰다.
"저게 뭔데?"
내 말에 잠깐 굳어져 있던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한이었던 정보가 풀린 듯한 느낌.
"이 세계에 강림하는 존재들에는 모티브가 존재합니다. 그것이 유명하고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쳤을수록 대개 강하죠."
루시퍼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진지했다.
케로베로스를 상대할 때조차 여유롭던 루시퍼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칠죄종(七罪宗). 7개의 근원적인 죄악. 악을 불러 일으키는 일곱 가지 감정······. 아마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교만, 탐욕, 질투, 분노, 색욕, 식탐, 나태.
루시퍼는 이들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종말의 사도가 강림했습니다."
* * *
콰아앙—!
보랏빛 번개가 산 위로 내리쳤다.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근처의 나무와 바위, 땅이 일시에 소멸하며 거대한 크레이터를 남겼다.
콰가가가—!
일대를 짓누르는 강렬한 기운에 로란드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고 몸을 지탱했다.
"해, 해냈다. 해냈어······!"
파스스—.
마인 로란드의 손에 있던 아티팩트 '종말의 열쇠'가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거라면······. 무명에게도 이길 수 있을 거다.'
케로베로스가 무명에게 즉사 당한 순간.
로란드는 필사적으로 살아남을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종말의 열쇠를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땅에 잠든 솔로몬의 악마 두 마리를 소환.
곧바로 칠죄종의 강림을 시도했다.
그 결과 로란드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쿨럭."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기가 역류해 온몸의 핏줄이 터진 탓에 전신이 멍 투성이였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지친 상태.
그러나 성공했다.
칠죄종, 종말의 사도 '교만'.
그녀를 불러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가 해냈다. 내가 해냈단 말이다!"
로란드에게 맡겨진 종말의 열쇠는 일종의 전략 병기였다.
각종 제약과 잠금이 걸려 있어 일반적인 마인이라면 한정적인 기능만을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란드는 일반적인 마인이 아니었다.
밑바닥 중의 밑바닥.
최하위 마족부터 기어 올라온 존재.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그였다.
그가 가진 모든 지식과 힘은 종말의 열쇠를 활용하기에 충분했다.
"······이거라면 살아남을 수 있어."
그런 로란드의 뒤쪽으로 두 마리의 악마가 서 있었다.
푸르카스.
안드라스.
근육질을 한 인간의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뒤로 돋아난 악마의 꼬리 위로 짙은 마력이 타오르고 있었다.
둘 다 최상위 악마종이었다.
이전 무명이 쓰러뜨렸던 벨리알조차 뛰어넘는 힘을 가진 존재들.
"나를 잘 보호해라. 칠죄종은 내 명령을 듣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
로란드는 두 악마에게 명령을 내린 뒤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보랏빛 낙뢰가 떨어진 자리.
자욱하게 솟아올랐던 흙먼지가 걷히고 있었다.
그 내부에서 모습을 들어낸 것은 고혹적인 자태의 여인이었다. 검은 머리를 허리까지 기른 장발의 여성.
칠죄종 교만.
[ ······이리도 이른 시기라니. 대체 어떤 어리석은 생물이 종말을 자처한 걸까요. 마인? ]
그녀의 목소리에는 격(格)이 담겨 있었다. 그 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로란드의 무릎은 당장이라도 꺾일 듯 했다.
"종말의 사도여. 내게 복종해라."
로란드는 눈을 부릅뜬 채 교만을 불렀다.
종말의 열쇠에 의한 소환이었다. 소환 대상은 소환자를 섬기도록 제약이 걸린다.
제대로 소환되었다면 분명······.
푸확-!
푸확-!
그의 뒤쪽으로 서 있던 최상위 악마종 둘이 그대로 폭발했다.
악마의 살점이 로란드의 얼굴에 튀었다. 발치로 흘러든 악마의 피가 로란드의 발을 적셨다.
로란드의 두 눈이 커졌다.
보이지 않았다.
느껴지지도 않았다.
최상위 악마종이 그대로 폭사했다.
무명(無命)을 상대했을 때와 같은 무력감.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전신이 미친 듯이 떨려 왔다.
저벅, 저벅.
뻣뻣하게 굳어진 로란드를 향해 교만이 걸어왔다. 그녀는 손등으로 로란드의 얼굴에 묻은 핏조각을 쓸어내렸다.
[ 내가 복종하는 게 아닙니다. ]
매혹적인 미소와 함께 교만의 입이 열렸다.
[ 로란드, 그대가 내게 복종하세요. 나는 그대와 같은 추악한 자를 좋아한답니다. ]
로란드는 한마디도 답할 수 없었다. 교만이 그의 답을 원하지 않았기에 입이 열리지 않았다.
[ 스스로가 살기 위해 멸망을 자처하는 어리석은 존재를······. 나는 아주 좋아해요. ]
교만의 부드러운 손이 로란드의 볼가를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스스슷.
교만과 로란드의 주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내려앉았다.
"로란드, 무슨 짓을 한 거냐!"
협회장 구성철이 보낸 암살대였다. 종말의 사도 칠죄종에 관한 정보는 극비였다.
일부 상위 마인과 최상위 마인만이 알고 있는 비밀.
암살대의 누구도 칠죄종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단지 무언가 심상치 않다고 짐작할 뿐.
"종말의 열쇠를 멋대로 사용한 건 아니겠지?"
"네 놈은 이제 최하위로 격하될 예정이다."
"괜한 반항 하지 말고 순순히······."
마지막 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푸확-!
푸확-!
푸확-!
5인의 암살대의 머리가 일제히 폭발했다. 그러한 참상 속에서 로란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희열을 느꼈다.
마인들의 암살대조차 칠죄종의 앞에선 무력했다.
[ 음······. ]
교만은 로란드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눈빛만으로 정보를 읽어냈다.
권능에 속하는 전지(全知) 계통의 능력.
[ 무명(無命). 재미난 인간이 있네요. ]
무명이라는 이름 두 글자에 로란드의 몸이 흠칫 떨려왔다.
[ 로란드, 걱정 말아요. 그대는 끝까지 살아남아 나와 함께 종말을 목도하게 될 겁니다. ]
교만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로란드의 귓가를 속삭였다.
[ 그 무엇도 남지 않은 현세에서. 당신은 가장 최후에 죽는 마인이 될 거예요. ]
보랏빛 안개가 두 사람을 감쌌다. 짙어진 안개는 달빛 아래 불길하게 피어올랐다.
"종말의 사도!"
콰아앙—!
쏘아지듯 날아온 루시퍼가 산 위에 불시착했을 때.
이미 교만과 로란드는 모습을 감춘 뒤였다.
34화 마인 회동(수정)
"······벌써 모습을 감췄나."
루시퍼가 급히 도착한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산 정상 주변은 초토화 되어 있었다.
종말의 사도가 강림한 지점에는 풀 한 포기 남아 있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워낙에 약삭빠른 놈이니까요. 바로 처치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루시퍼는 그리 말하며 두 눈으로 산 근처를 빠르게 훑었다.
칠죄종의 기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전설+가 되면서 강화된 시야로도 찾을 수 없다니.
이미 완전히 자취를 감춰버렸다.
- 그 종말의 사도라는 녀석이 그렇게 위험해?
"예, 굉장히 위험합니다. 칠죄종의 강림은······. 좋지 않습니다."
루시퍼가 설명할 수 있는 건 거기까지였다.
빌어먹을 제한 때문에 종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었다.
'튜토리얼도 안 끝난 시기에 칠죄종이라니.'
칠죄종의 강림은 시스템의 종말을 가속화 시킨다. 그들이 종말의 사도라 불리는 이유였다.
세계는 더욱 빠르게 멸망의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단순 무력도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놈들은 멸망을 위해 태어난 존재니까요."
루시퍼의 시선이 저 멀리 바닥에 쓰러진 시체들로 향했다. 시체들에겐 목이 없었다. 루시퍼가 눈을 찡그렸다.
마기가 짙은 걸로 봐서 이들 전부 마인이었다.
칠죄종에게 당한 거였다.
"마인(魔人)들이 아무리 멍청해도, 종말의 사도를 직접 부를 생각을 하다니······."
멀지 않은 곳에는 붉은 피와 살조각이 널려 있었다. 죽음의 잔재 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악마종이었다.
악마들로 칠죄종을 어떻게 해볼 심산이었던걸까?
뻔한 결과였다.
심지어 칠죄종은 시스템의 제한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 그들은 멸망 자체를 인도하는 시련이므로.
인간의 편으로 불러진 루시퍼와는 출발점부터가 달랐다.
"칠죄종의 성향은 혼돈 악. 놈들의 목적은 오로지 세상의 파멸뿐입니다. 최대한 빠르게 제거하는 걸 추천 드립니다."
주인 주강혁이 있다면 문제 될 건 없다.
문제는 칠죄종을 어디서 찾아내냐는 것인데.
그때였다.
쿠웅-!
정상으로 누군가가 착지했다. 다름 아닌 사최헌 헌터였다.
급하게 도착한 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설마. 무명이 종말의 사도까지 불러낸 것인가?"
사최헌의 말에 루시퍼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사최헌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그렇게 보일 수도 있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네. 잠깐. 넌 종말의 사도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거냐?"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않나?"
맞는 말이었다.
"사최헌. 종말의 사도의 위치를 알게 되면 바로 연락해라. 주인님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니."
"무명, 네가 칠죄종을 이길 수 있다는 거냐?"
사최헌의 시선이 어딘가에 있을 무명을 향했다.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거냐? 문제는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인간이 죽느냐 뿐이지. 그러니 제때 연락해라."
루시퍼는 검은 날개를 펼쳤다.
"주인님, 우선 복귀하겠습니다."
시야 공유를 해제하고, 날아오르려는 순간.
"잠깐 기다려라."
사최헌이 루시퍼를 불러세웠다.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뭐냐. 3초 준다."
돌아가서 주인님의 식사를 보필해야 했다.
"내일 밤, 마인들의 회동이 있다. 한국을 담당하는 마인들이 무명(無命)을 없애기 위해 판 함정이다."
사최헌은 담담하게 말을 꺼냈다. 루시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감히 마인 놈들이 주인님을 노리고?
"확실한 정보냐?"
"마인 측에 정보원이 있다."
사최헌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역으로 급습해 마인들을 쓸어버릴 예정이다."
"네 놈 혼자? 죽고 싶어 환장했나. 마인들이 엿 같긴 해도 인간한테 당할 정도로 약하진—."
화륵.
사최헌의 손끝으로 오색찬란한 불길이 솟아 올랐다. 루시퍼의 말문이 막혔다.
"케로베로스를 처치한 보상으로 얻은 힘이다. 이거라면 혼자서도 충분히 마인들을 제압할 수 있지. 다만······."
사최헌은 하늘에 떠오른 달을 바라보았다. 검은 구름이 달빛을 가리기 시작했다.
"칠죄종의 출현 가능성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내 힘으론 칠죄종을 이길 수 없다. 무명, 네 힘을 빌리고 싶다."
루시퍼는 답하지 않았다.
"네게도 나쁜 이야기는 아닐 거다. 협회와 정재계에 깊숙이 스며든 마인들을 박멸할 기회니. 운신의 폭이 한결 넓어질 거다."
실제로 사최헌은 협회를 장악할 생각이었다.
그러한 협회를 통해 무명은 계속해서 정체를 숨긴 채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최소한의 인물에게 정체를 들키는 건 고려해야겠지만. 그 대신 아이템의 처리나 자금의 자유로운 운용이 가능해지리라.
"대답은?"
사최헌은 루시퍼의 대답을 기다렸다.
실패의 가능성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무명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시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주인님은 안 듣고 계시다."
"뭐?"
이미 시야공유를 해제한 상태였다.
하지만 한국에 있는 마인을 몰살 시킬 계획이라니. 그건 좋았다. 죽음의 물결도 그렇고 가뜩이나 눈엣가시였는데.
"근데 꽤 구미가 당겨."
루시퍼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맺혔다.
"특별히 이번만 도와주마. 물론 공짜는 아니고."
* * *
다음날 아침.
쾌적한 집 안에서 깨어났다. 반지하 단칸방과 비교하면 천국이나 다름없다.
푹신한 침대와 부드러운 이불.
방마다 설치 된 공기 청정기와 에어컨까지.
익숙하지 않은 집이지만 정말 잘 잤다.
잘 잤지만 한편으론 심란한다.
'수육은 말도 안 되게 맛있었지만······.'
갑작스레 나타난 종말의 사도가 문제다.
루시퍼까지 경고할 정도라면,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위험이라는 건데.
끼익.
방문을 열고 나왔다. 이미 부엌에는 아침부터 일어난 루시퍼가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가브리엘은 아직 자고 있는 것 같다.
"아,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좋은 아침."
"바로 식사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끼잉.
나는 거실의 소파에 앉았다. 케로를 쓰다듬으며 따사로운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싶었지만······.
"엄청 우중충하네."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하늘은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스마트폰의 일기 예보와는 완전히 딴판이다.
"당분간은 이런 날씨가 유지 될 겁니다. 크게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사최헌이 알아서 찾겠죠."
"뭐······."
루시퍼의 설명에 따르면,
이쪽에서 찾아낼 방법은 없단다.
골치 아픈 상대였다.
허나, 한 번 모습을 드러내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끝이다.
즉살(卽殺).
대상이 생명체이기만 하다면 내 적수는 되지 못 할테니.
"종말의 사도는 시스템이 인정하는 마물입니다. 물론, 살아 있는 생명체고요. 없앨 수 있다면 보상은 확실할 겁니다."
그리 말하며 루시퍼는 다시 후라이팬을 붙잡았다.
"나타나기 전까지는······. 내 할 일 하고 있어야겠지."
레벨업 그리고 보상을 챙기는 것.
종말의 사도와의 전투를 대비해야 한다.
나는 소파에 몸을 푹 기댄 채로 스마트폰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SNS상에서 제일 인기 있는 키워드는 무명이다. 어젯밤의 번개는 평범한 사람들이 보기엔 이상 기후에 불과했겠지.
'미궁에 아직도 몰려 있네.'
어제와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의 미궁이란 미궁에는 사람들이 깔려 있었다.
아예 텐트를 치고 숙박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
무명 챌린지라나 뭐라나.
'어쩔 수 없지.'
문제 될 건 없다.
레벨업은 인스턴스 게이트로도 가능하니까.
시스템의 기능 제한이 해제되며 이제 인스턴스 게이트에서도 경험치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보상은 나중에 회수해도 되는 거고.
당장은 급하지 않다.
벌컥.
그때, 가브리엘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녀석은 부스스한 머리로 테이블 앞에 앉았다.
"오징어 덮밥?"
"오징어 덮밥은 무슨. 주는대로 먹어라."
루시퍼는 접시를 테이블로 가져왔다.
오늘 아침은 오므라이스였다.
나도 테이블에 앉아 숟가락으로 한 입 푸는데.
"뭐냐. 이거. 왜 이렇게 맛있냐."
이 세상 오므라이스 맛이 아니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달걀과 볶음밥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가브리엘도 말없이 숟가락으로 오므라이스를 퍼먹고 있었다. 케로도 밥그릇에 아예 머리를 파묻을 기세다.
『 훌륭한 요리를 섭취하셨습니다. 』
『 포만감이 조금 더 오래 유지 됩니다. 』
『 24시간 동안 체력이 3% 증가합니다. 』
효과까지 붙는 요리라니.
"오늘 위해 지옥에서부터 연마했습니다. 입에 맞으신다니 다행입니다."
내 반응에 루시퍼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런 음식이라면 진짜 매일 먹고 싶다.
훌륭한 아침 식사를 끝낸 뒤.
"종말의 사도가 나타났다지만······. 할 일은 변함없지."
준비를 마친 나는 인스턴스 게이트를 열었다.
『 인스턴스 게이트(C)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 소모 비용 : 50,000 Coin 』
현재 내 레벨은 78.
C등급 상위에 속하는 레벨이다.
인스턴스 게이트는 자신의 등급까지만 열 수 있다. B급 게이트를 열려면 레벨을 하나 올려야 한다.
"우선은 레벨업부터 해두자."
우우웅—.
거실 바닥 위로 보랏빛의 게이트가 열렸다.
"칠흑의 사도 루시퍼. 전설+의 전투력을 바로 보여드리겠습니다."
루시퍼는 자신만만하게 몸을 풀며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가브리엘이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날 돌아봤다.
"주인, 다음 강화석은 언제 나와?"
"그건 나도 모르지."
"나한테 써줘. 앞으로 분리수거도 잘하고, 음식물 쓰레기도 잘 버리고, 케로 산책도 매일 할게."
"······생각해볼게."
다음 강화석은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겠지.
뭐, 그때 가서 생각해 볼 일이었다.
"우리도 들어가자."
게이트 공략은 일사천리였다.
우선 케로의 전투력도 체크해 볼 겸 게이트로 데려갔다.
콰아앙—!
"오."
본래 케로베로스의 형태로 변한 케로가 게이트 내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루시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S급 헌터만큼은 되는 듯 하네요."
C급 게이트 공략에 걸린 시간은 불과 5분.
경험치는 35%가량 차올랐다.
현재 레벨을 감안하면 엄청난 속도다.
'완전 독식에 경험치 1.3배인 내가 이 정도인데······.'
다른 헌터들은 오죽할까.
다들 각성 초기의 등급에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다. 한 번 정해진 등급은 바꿔내기 매우 어렵다는 게 이래서였다.
"몇 번 더 부탁할게."
"이번엔 저한테 맡겨 주십쇼."
C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6번 가량 공략하자, 80레벨에 도달할 수 있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Lv.79 → Lv.80 』
『 축하드립니다. B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이제 헌터로서 당당히 자리매김할 수 있는 레벨이 되었다. 하위 등급의 헌터들이 간절히 바라는 위치.
그러나 나에겐 아직 부족하다.
목표는 S급 헌터.
아니, 가능하면 최대한 레벨을 높여 놔야 한다. 그만큼 약자멸시로 잡을 수 있는 적이 늘어나는 거니까.
'80레벨이 되었으니, 이제 B등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열 수 있다.'
이어서 바로 B등급 게이트 공략.
『 인스턴스 게이트(B)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 소모 비용 : 150,000 Coin 』
15만 코인.
코인의 소모 비용이 확 뛰었다.
이제부턴 부담이 되는 비용이다. B등급부턴 게이트의 난이도도 대폭 상승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수의 수가 엄청 많은 건 두말할 것도 없고.'
그만큼 경험치를 많이 독식할 수 있으니 내게는 좋은 일이다.
"가보자."
『 B급 게이트 - 오크 정예병 』
- 오크 정예 처치 0 / 200
- 오크 주술사 처치 0 / 15
- 그레이트 오크 처치 0 / 1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낡은 성채가 놓여 있다. 오랜 기간 관리되지 않아 금이 가고 이끼 낀 성벽.
취이익.
취익-.
그 틈새로 오크들의 모습이 보인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고기를 뜯어먹는 오크들.
[ Lv.84 ]
[ Lv.83 ]
이전에 원시 부족의 형태를 하고 있던 오크들과는 다르다.
취이익.
녹이 슨 갑옷을 걸치고 가죽 허리띠를 두른 오크들은 훈련된 병사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처리하겠습니다."
루시퍼가 한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취익?
취이익!
인기척에 오크들이 일제히 이쪽을 돌아봤다. 날카로운 철제 무기를 들어 올리는 오크들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콰아아앙—!
루시퍼의 손에서 뻗어나간 흑색의 마도 광선이 놈들을 덮쳤다.
파스스······.
눈앞에 있던 오크들은 흔적도 남기지 않고 증발했다. 낡은 성벽에 동그란 구멍이 크게 새겨졌다.
거센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저릿해진 공기에 피부가 아려올 정도다.
이전보다 강해졌다는 게 확 체감 된다.
"주인님, 보셨습니까? 제가 이 정도 입니다."
"믿고 있었다."
나는 엄지를 치켜 올렸다.
가브리엘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성채로 뛰어들었다.
콰앙! 콰과광!
낡았던 성채가 차례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크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재앙.
취이이익—!
오크들의 절규가 성채에 울려퍼졌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내가 할 일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그 광경을 지켜보는 것 뿐이었다.
"······초고속이네."
공략까지는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타난 보상은.
『 B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 x 1
- 스킬 습득권(전설+) x 1
- 전설의 증표 x1
'오.'
아이템 쿨타임 초기화권과 스킬 습득권까지.
이번엔 대박이었다.
리미트 브레이커를 한 번 더 쓸 수 있고,
새로운 스킬까지 얻을 수 있게 되었으니.
"다시 열게."
이후로 계속해서 B급 게이트를 반복 공략했다. 마수들이 불쌍할 정도로.
중간에 점심도 먹고 휴식도 충분히 취했다.
그렇게 총 7번의 공략이 끝났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는데."
이제는 코인이 부족하다. 쏟아지는 마정석과 아이템 때문에 인벤토리도 확장했으므로.
『 현재 레벨 : 86 』
그리하여 도달한 86 레벨.
어마무시한 속도인 건 변함 없다.
월드 보스나 환상종이 날먹이었던거지.
"다들 고생했어."
나는 집 안 소파에 푹 쓰러졌다. 가브리엘도 양 옆으로 폭 쓰러졌다. 루시퍼는 쉬지도 않고 앞치마를 맸다.
"씻고 나서 저녁을 준비하겠습니다."
"아니, 너도 좀 쉬어."
"이게 쉬는 겁니다. 진심으로요."
루시퍼는 단호했다.
그렇다면야. 말리지 않는다.
나는 사최헌이 건네준 단말기를 확인했다. 연락은 없었다. 바깥은 여전히 먹구름 탓에 우중충했고.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
어디 코인 나올 데 없나.
허공에 떠오른 별빛으로 시선을 돌렸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빈 손을 들어 올립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파산 직전이라며 눈물을 흘립니다. 』
후원이 올 기색은 없다.
코인을 구하러 다녀야 하나.
'그러고보니······.'
새삼스럽지만 맨 처음 월드보스를 잡았을 때, 흑 이무기가 드랍 아이템을 뱉었을 거다.
'높은 확률로 기여도 2위인 불멸이 챙겼겠지.'
그걸 빌미로 사최헌에게 코인을 받을 수 있을 것 같기도하다.
고민하는 찰나, 부엌에 있던 루시퍼가 내게 말했다.
"아, 저녁에 잠시 장을 보고 오겠습니다."
"주인, 나는 당근 거래를 해야 해."
공교롭게도 두 사도가 외출 예정이었다.
"주인,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써."
가브리엘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백색의 깃털을 내게 건네었다. 지난번에 루시퍼가 줬던 흑색 깃털과 같은 용도였다.
사용하면 가브리엘을 즉시 소환할 수 있을 거다.
사최헌의 은신처인만큼 위험한 일은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당근이면, 중고 거래?"
"응. 악의 조직을 처단하는 게임. 반드시 사야해."
그리 말하는 가브리엘의 눈에는 이채가 떠올라 있었다.
이 녀석······.
게임을 진짜 좋아하는구나.
* * *
서울 근교.
버려진 폐공장.
어두운 하늘 아래, 마인들이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오늘 저녁에 한국의 마인들에게 소집 명령이 떨어졌다.
목적은 무명을 끌어들여 처치하는 것이었으나······.
"빌어먹을, 대체 뭔······. 종말의 사도를 부르다니. 그 천한 것이 대체 무슨 수로······."
한국 마인들의 우두머리인 헌터 협회장 구성철.
그의 얼굴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다.
그 또한 검은 세단을 타고 목적지로 향하는 도중이었다.
"진정하시죠. 아직은 수습 가능한 단계입니다."
운전자인 마인 비서가 그를 위로했다. 그러나 구성철의 마음은 심난했다. 심난한 것을 넘어 괴로웠다.
"종말의 사도는 윗선에서 개입해야 할 중대 문제일세. 우리의 손을 떠났다고. 운이 없다면 관련된 자들의 목이 달아날 거야."
"협회장님께서 해오신 게 있으니 쉽게 내치진 않을 겁니다."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었다.
구성철은 머리를 부여 잡았다.
"이번 회동에서 반드시 무명(無命)을 처리해야 할 걸세."
실패한다면 한국이 마인들이 싹다 물갈이 될지도 모른다.
"종말의 사도는 잊으시고, 지금은 무명을 잡는데 집중하죠."
"그래, 그래야겠지."
끼익.
검은 세단이 폐공장의 앞에 멈추어 섰다. 차에서 내리는 협회장의 표정은 결연했다.
폐공장의 위로 마인만이 볼 수 있는 검은 마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이만한 수가 모였다. 전례없는 규모였다. 이들 하나 하나가 S급을 뛰어넘는 존재다.
무명을 제거하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협회장은 그리 생각하며 폐건물로 발을 내디뎠다.
찰박.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어두컴컴한 폐공장의 내부. 뜨뜻한 액체가 협회장이 발을 적셨다.
"······무슨."
"위험합니다!"
콰아앙—! 새하얀 검기가 협회장의 머리 부근을 스쳤다. 비서가 몸을 던지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것이다.
"괜찮으십니까?"
"그래, 그것보다······."
협회장의 시선이 폐공장 안쪽으로 향했다.
"무명······?"
어두운 공장의 내부.
순백의 마력으로 찬란하게 타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무명은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사, 사최헌? 네 놈이 여길 어떻게······."
협회장의 눈이 커졌다.
여기에 있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해가 안 가는 건 따로 있었다.
따악—!
협회장이 손을 튕기자 마기가 건물 전체로 퍼져나가며 빛을 뿜어냈다. 어두웠던 공장 내부가 밝아졌다.
"네 놈 그 힘은······."
공장에 마인의 시체가 즐비했다. 그들에게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바닥을 완전히 적시고 있었던 것이었다.
"허!"
협회장이 숨을 토해냈다.
인간 하나가 마인들을 도륙 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랭킹 1위의 사최헌.
특히나 그의 행보는 협회장으로서 줄곧 주시하고 있었다.
인간치고는 강한 편이 맞다. 그러나 사최헌이라고 한들, 마인의 강함을 뛰어넘을 순 없었다.
마인들은 다른 차원에서부터 힘을 쌓아 온 존재였으므로.
그런데 그 상식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최헌의 눈빛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협회장, 내가 모르고 있을 거라 생각했나?"
그리 말하는 사최헌의 몸에서는 일렁이는 새하얀 마력.
찬연히 타오르는 백광(白光).
오색찬란한 빛을 내는 마력은 바로.
"하, 항마(降魔)······."
항마의 기운.
마인들의 절대적 약점이었다. 협회장의 입이 벌어졌다.
본래대로라면 구할 수 없는 힘이었다.
왜냐.
항마(降魔)의 힘은 초전설급의 스킬.
튜토리얼을 지나 시스템의 첫번째 페이즈에서나 드물게 얻을 수 있는 비기였으니까.
그런데 사최헌은 가지고 있었다.
'설마······.'
무언가 떠올린 협회장이 굳어졌다. 까드득. 그의 이가 세게 갈렸다.
로란드! 빌어먹을 로란드!
그놈이 범인이었다.
로란드가 소환한 환상종 케로베로스.
놈은 초전설급이었으니까.
"사최헌, 네 놈은 죽음을 자처한 거다."
협회장의 눈이 붉어졌다. 몸 주위로 검은 기운이 쏟아져나왔다.
아무리 항마의 기운이 있다고 한들,
사최헌 하나라면 어찌해볼 법했다.
그리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콰앙-! 쿠웅!
사최헌의 양옆으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빵봉투를 쓴 남자와 빛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
사도였다.
"이거 굉장한데. 항마를 두르니까, 마인들이 꼼짝도 못하는구만."
"말했잖나. 쉬울 거라고."
사최헌의 몸에서 흘러나온 항마의 기운이 루시퍼와 가브리엘의 몸도 감싸고 있었다.
"사최헌, 넌 주인님 방향으로 매일 열 번씩 절해라. 아니, 백 번씩."
"고려해보지."
사최헌이 들어 올린 검 위로 백색의 기운이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했다.
뚜두둑.
"저열한 하위 존재 주제에 주인님을 해치려 하다니. 간도 크구나."
손을 푼 루시퍼는 협회장을 똑바로 마주했다. 그의 몸 위로도 항마의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그 죄. 경험치가 되어서 갚아라."
빵봉투 속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였다.
35화 종말의 성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