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빠른 정산
흑의 장막이 걷혀간다.
도시를 드리웠던 그림자가 걷히고, 맑은 하늘의 태양이 도시를 비추기 시작했다.
장막 바깥에서 대기하던 수많은 길드들과 방송국 인원들이 도시를 향해 걸어 들어 온다.
대피소에 피난해 있던 시민들도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흑암의 장막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본래 재앙으로 끝났어야 할 죽음의 물결은, 무명 한 명에 의해 무사히 종료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중심부.
빌딩의 옥상.
"한 건 해결."
가브리엘은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며 한 손으로 브이 표시를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옆으로 루시퍼가 내려앉았다.
"멍청아, 그러다 카메라에 찍힌다. 주인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짓은 하지 마라. 죽여버릴테니까."
"나는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고 했을 텐데."
"이 자식이······."
가브리엘은 원래 이런 관심종자였다. 루시퍼는 가브리엘을 무시하고선 건너편의 사최헌을 바라봤다.
사최헌은 얼음 결정을 손에 쥔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루시퍼를 보고 있었다.
"······."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기엔 듣는 귀가 있었다. 천이령 헌터와 불멸의 길드원들까지.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님의 힘에 놀랐나?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지. 너희 인간들은 앞으로 더 굉장한 걸 보게 될 거다."
괜히 하는 허세가 아니었다.
주인 주강혁은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았다.
배울 스킬도, 얻게 될 힘도 지금 단계에서 왈가왈부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가 될 것이다.
"악마 처치의 대금. 조만간 받으러 갈테니, 창고에 있는 아이템들이나 잘 닦아 놓으라고."
그 말과 함께 옥상의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루시퍼가 멈춰섰다.
"아, 참."
루시퍼는 사최헌이 들고 있는 얼음 정령왕의 심장을 가리켰다.
"그거, 안 썼으니까 그만한 값은 쳐주는 거겠지?"
그 말에 멈춰 있던 사최헌이 피식 웃었다.
"······물론이다."
무명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
사최헌의 입장에서도 어떻게든 부여잡아야 하는 끈이었다. 그런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다.
가볍게 뒤쪽으로 손을 흔든 루시퍼가 건물 아래로 뛰어내리려는 순간.
"자, 잠깐! 무명님!"
급하게 건물을 건너온 천이령이 루시퍼를 멈춰세웠다.
"저도, 저도 무명님처럼 강해지고 싶어요! 염치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게도 그 강함의 비결을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사최헌의 시선이 천이령에게 잠시 머물렀다.
'천이령.'
그녀의 가족은 마인(魔人)에게 몰살당했다.
천이령의 유일한 트라우마이자, 그녀가 끝없이 강해지고자 하는 근원적 이유.
마인을 향한 복수심.
실제로 그러한 복수심은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천이령은 대한민국 최후의 5인으로 남는다.
"강해지고 싶나?"
천이령의 부름에 답한 것은 가브리엘이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팔 굽혀 펴기 백 번, 윗몸 일으키기 백 번, 스쿼트 백 번, 달리기 10km 이걸 매일 하면 돼."
"예? 그건 너무 쉬운······."
옆에 있던 루시퍼가 가브리엘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이, 인간 꼬맹이. 이 녀석의 말은 무시해라. 정 강해지고 싶다면 옆에 사최헌한테라도 물어보던가."
"자, 잠깐만요!"
천이령이 미처 붙잡기도 전에 루시퍼가 가브리엘을 끌고 건물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
천이령은 아쉬운 듯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채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하긴,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뻔뻔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번 죽음의 물결에서 천이령 자신은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무명의 힘 앞에 그저 감탄하고 있었을 뿐.
"천이령."
보다 못한 사최헌이 한마디를 했다.
"······그놈은 무명이 아니다."
"네?"
"무명의 부하 같은 거지."
"에이, 설마요. 저렇게 강한데. 무명이 아니라고요? 그 파바박 죽이는 것도 했잖아요."
"······."
사최헌은 거기서 말을 줄였다.
진짜 무명은 본인도 본 적이 없었으므로.
"엥, 무명이 아니었던 거예요?"
"하긴 무명이 빵 봉투를 쓰고 다닐 리가 없지."
"확실해, 길드장은 진짜 무명을 본 적이 있는 거야."
뒤에서 숨죽이고 있던 길드원들도 한마디씩 해왔다.
"······."
사최헌은 과거의 회귀 속에서 봤던 그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불멸 길드의 첫번째 실패였다.
사최헌을 포함한 불멸은 도시를 지켜내지 못했고. 도시는 영구동토가 되어 무기한 폐쇄.
절망, 좌절, 무기력······.
스스로에게 실망한 표정으로 되돌아가던 길드원들의 표정을 사최헌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와 정반대.
떠들썩하기만 하다.
"길드장, 진지하게 무명 만나고 싶은데요."
"바보야. 철저하게 신분을 가리는데 우리랑 만나 주겠어?"
"진짜 아쉽네."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의 얼굴에 그늘은 없었다.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대피소의 시민들도, S급 헌터들도.
아무런 피해 없이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이들은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거다. 다가올 멸망에 저항하는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피어날 확률이 있다.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다.'
사최헌은 얼음 결정을 품 안에 다시 집어 넣었다.
이번에 사용하지 않은 아티팩트는 미래를 위한 조커 카드로 다시금 활용될 수 있으리라.
시스템의 튜토리얼 단계에서 일어난 죽음의 물결 완전 공략.
사최헌이 몇 번이고 좌절했던 시점이었다.
'······부족한 건 압도적인 힘이었던 건가.'
무명이라는 존재는 특별했다.
그간의 회귀 속에서 처음으로 나타난 존재.
무엇이 그의 존재를 떠오르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게 하나 있다면,
무명(無命)이라는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음을 준비하지."
"가시죠, 길드장."
"뒤풀이는 찜질방 어떻습니까."
뒤돌아서는 사최헌을 따라 길드원들이 움직였다. 생각에 잠겨 있던 천이령도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런 빌딩의 반대편.
흑색의 까마귀와 백색의 비둘기가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 * *
"빌어먹을, 빌어먹을······. 말이 안 되잖아."
여기에 헝클어진 금발을 붙잡은 마인(魔人) 한 명이 있었다.
마인 사회의 책사(策士) 로란드.
이번 죽음 물결의 흑막이자 기획자였다.
사전에 빌런 한종우에게 마기 조각을 심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헌터들의 혼란을 유도하고, 그걸로도 모자라 마기의 원천을 죽음의 물결에 사용했건만······.
결과는 대실패였다.
죽음의 물결 바깥에서 상황을 살피던 로란드의 이마에 검은 핏줄이 도드라졌다.
'극심한 손해다. 대체 이 실패를 어떻게 해야 넘길 수 있을지.'
이번 일에 로란드는 마기의 원천을 소모했다.
원천이란 시스템을 교란하는 마기의 집합체. 마인 기술의 정수라고도 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 것을 허무하게 날려 버렸으니.
그 손해는 로란드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젠장!'
무명(無命).
그 두 글자를 떠올리니 이가 갈리는 듯했다.
물론 그의 출현은 염두에 두고 있었다.
대한민국 땅에서 가장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인물. 월드보스와 강림한 악마를 처치한 정체불명의 헌터.
문제는 압도적인 숫자의 마물들을 그리도 간단하게 제압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는 것.
빠득.
로란드는 이를 악물었다.
'크윽.'
결과는 어찌 되었든 상위 마족에게 보고를 해야 했다.
마인들의 목표는 현세의 탈환.
그들은 자연스럽게 인간들을 집어 삼키고자 했다.
강압적인 지배와 무자비한 파괴는 필연적으로 영웅을 출현케 한다. 피지배민족은 영웅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저항은 거세진다.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마인 사회의 8할이 소멸한 '치욕의 밤'은 그렇게 일어났으니.
시스템이 있는 한 그런 일은 계속해서 벌어진다.
마인 사회의 상층부는 그러한 일을 원하지 않았다.
화르륵-.
어둠 속에 있던 그의 손에서 짙은 마기가 피어올랐다.
마기는 각각 얼굴 없는 마인의 형체를 띄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 로란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더구나.
- 동방의 작은 나라 하나를 어쩌지 못한다는 게······.
- 그에게 책사라는 직무가 버거웠던 게 아닌지요.
노기를 띈 음성들이 번갈아 로란드에게 닿았다. 로란드는 고개를 숙인 채 보고를 시작했다.
"작전은 완벽했습니다. 헌터들의 혼란을 유도하고, 죽음 물결을 극도로 심화시켰습니다. 다만······. 무명(無命)의 강함을 과소평가했습니다."
로란드의 음색은 떨리고 있었다.
- 마기의 원천을 그리 허무하게 날리다니.
- 현세에 가용 가능한 원천의 개수는 한정되어 있거늘.
- 뼈저린 실책이군요. 쯧쯧.
"사도 두 개체가 출현했습니다······. 그리고 권능에 가까운 기적이 죽음의 물결에 나타났습니다. 부디 선처를."
변명에 가까운 보고였다.
그러나 정말 억울했다.
전략 자체가 통하지 않는 상대였다.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은 힘은 모든 전략을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 책사라는 자가 이리도 무능해서야.
- 작전부터가 허술했던 게 아닌지요.
- 그를 최하급의 지위로 격하 시키시겠습니까?
로란드의 몸이 크게 떨려왔다. 악다 문 이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근육은 경련을 일으킬 지경.
최하급이라 함은 노예.
가축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신분이었다.
그곳에서부터 아득바득 기어 올라온 그였다.
그 시궁창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었다.
- 하지만 무명(無命)이라는 자의 힘이 예상외였던 것도 사실.
- 현시점에서 예측할 수 없는 수준인 것도 맞지요.
- 한 번 쓰고 버리기에 로란드는 아까운 패입니다.
그 목소리 하나하나에 로란드는 온 정신을 집중했다. 그들의 한마디에 자신의 운명이 달렸으므로.
- 한 번 더 기회를 주는 건 어떤가요.
- 아무리 무명이 예측불허의 존재라지만, 결국은 현세(現世)에 속한 인간 아니겠습니까?
- 현세는 첫걸음조차 떼지 못한 갓난아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최상위 마인들 중 하나가 로란드의 이름을 불렀다.
- 고개를 들거라, 로란드.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열 명에 달하는 최상위 마인들의 형상.
그들 중 하나의 손에 검은 열쇠 하나가 나타났다.
-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 대한민국에 공포를 새겨주고 무명(無命)이란 자를 처단해라. 그가 영웅이 되기 전에 모두에게서 잊히게 하라.
열쇠를 받아든 로란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 [ 아티팩트 ] 마(魔): 종말의 열쇠 』
단순한 열쇠가 아니었다.
각종 악마의 봉인을 해제하는 것은 물론, 현세에 잠든 초전설급의 마수조차 불러올 수 있는 아티팩트.
"가, 감사합니다. 목숨 바쳐 맡은 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열쇠를 받아 든 로란드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절망에 짓이겨졌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 이것이 마지막 기회.
- 로란드 뿐이 아닙니다. 한국의 협회장. 이번 일이 실패하면 마인 사회에선 그 책임을 당신에게 물겠습니다.
- 허허, 그거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게 있다면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조차 가능하리라.
- 로란드, 이 기회조차 이례적인 것이다. 두 번은 없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로란드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열쇠를 목에 걸었다.
'무명(無命). 한낱 인간인 네가 어디까지 할 수 있나 보자고.'
* * *
까악.
구구-!
반지하의 창문을 통해 새 두 마리가 들어왔다.
흑색의 까마귀와 새하얀 비둘기였다.
'가브리엘이 비둘기인가.'
얌전하게 바닥에 내려앉은 루시퍼와 달리, 비둘기는 내 주변을 두 바퀴 돌고서 착지했다.
샤아아-.
옅은 빛과 함께 비둘기는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했다.
긴 금발과 차가운 표정을 가진 미인이었다. 그야말로 천사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외모였다.
"주인, 만나서 매우 반가워."
가브리엘은 내 두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분명 처음 보는데 왠지 모르게 엄청 낯이 익은 기분이다. 성좌였을 때부터 봐서 그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고생하셨어요."
원래 성좌였다보니 괜히 존댓말이 나가게 된다. 가브리엘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반말로 부탁해."
본인이 원한다니까 반말하지 뭐.
"그래."
"후우."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가브리엘.
"그럼 잘 부탁해. 쮸인."
"쮸인?"
"주강혁 주인이니까 줄여서 주주인. 더 줄여서 쮸인."
"······."
한순간 정신이 혼미해졌다.
"쮸인은 개뿔. 주인님, 그냥 무시하셔도 됩니다."
참다못한 루시퍼가 가브리엘을 무시하고서 내게 말했다.
"관종이라고 생각하시면 편합니다. 사람 열받게 하는데 타고난 놈이니까요."
"덤벼, 전설급 사도."
관심종자.
줄여서 관종.
콕콕콕콕.
비둘기로 변한 가브리엘이 루시퍼를 무진장 쪼기 시작했다. 루시퍼는 그걸 또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있고.
오케이.
둘 다 독특한 성격이란 건 알겠다.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어쨌든 죽음의 물결이 잘 해결 되서 다행이네."
헌터 인생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긴장이 풀리자 확 피곤한 기분이었다.
하얀 빵 덕분에 음식을 섭취할 필요가 줄었다.
덕분에 실질적으로는 방바닥에 앉아있기만 했다만.
시야 공유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가, 피곤하다.
"잘 해결 된 수준이 아니죠. 주인님의 활약이 눈부셨습니다."
"주인 최고."
이번만큼은 꽤 잘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템도 거의 남김없이 썼고.
백색의 여명이 아니었다면 사최헌 헌터가 도시를 통째로 얼려버렸겠지.
다만, 조금 의문스러운 부분이 있다.
'사최헌 헌터는 처음부터 죽음의 물결이 실패할 거라 생각했던 건가?'
사최헌은 시작부터 얼음 결정을 들고 왔다. 협력하지 않으면 그 즉시 도시를 얼리려는 것처럼 보였다.
실패하는 게 확정이라는 듯한 뉘앙스.
'뭐, 최상위 헌터니까 이유가 있었겠지.'
그런 것보다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죽음의 물결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무명(無命) [ 99,999 점 ]
- 2위 : 천이령 [ 825 점 ]
- 3위 : 김석호 [ 742 점 ]
- 4위 : 강지연 [ 707 점 ]
무명의 스코어는 가히 압도적.
『 보상을 정산합니다. 』
파직, 파지직—!
떠오른 메시지 창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스파크가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에도 보상을 늦게 주려나."
루시퍼와 가브리엘도 시스템창을 보기 위해 내 양옆으로 다가왔다.
"시스템도 생각이 있으면 빨리 줄 겁니다."
"성좌 백색의 여명이 보상을 기대하는 중."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사실 죽음의 물결이 종료된지 시간이 꽤 되긴했다.
지난번 악마 처치 보상은 꼬박 하루를 기다려야 했으니.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죽음의 물결도 끝났겠다, 가브리엘도 새로 왔겠다. 맛있는 거나 사먹으러 갈까?"
"오오, 좋다."
"저는 완전 찬성입니다."
현금도 10억이나 있겠다.
못 사먹을 음식이 없다.
특별한 날인데 기왕이면 젤 비싼 걸로.
"소고기 먹으러 가자."
"오예!"
"가브리엘 넌 복 받은 줄 알아라. 나때는 돼지고기부터 시작이었는데."
"벌써 라때가 나온단 말이야?"
"그럼요. 위계질서는 또 철저하게 지켜야······."
나도 제대로 먹어본 적 없는 소고기로 파티하러 가보자.
그렇게 출발하려는데.
『 성좌 '이계 규율'이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두 개의 알림이 떠올랐다.
"새로운 성좌는 언제나 환영이야."
"오, 한 명은 유명한 성좌네요. 화산의 대장장이. 진명(眞名)은 말할 수 없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유명한 대장장이입니다."
가브리엘과 루시퍼가 내 주변으로 떠오른 별빛을 보고 한마디씩 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대장장이라면 떠오르는 게 있다.
헤파이스토스.
그런 유명한 성좌도 있구나 싶다.
하긴, 타락천사 루시퍼도 있고 천사 가브리엘도 있는데. 뭔들 없겠어.
"이계 규율은?"
"글쎄요. 처음 들어보는 성좌인걸로 봐선 빈털터리겠죠······. 이름부터 가난해 보이네요."
"인정."
『 성좌 '이계 규율'이 사도의 무례함에 주먹을 치켜듭니다. 』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호탕하게 웃습니다. 』
성좌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여차하면 아이템을 후원받을 수도 있고.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존재감을 나타냅니다. 』
나한테 전 재산을 올인한 검은 별의 주인도 잊지 않았다.
"이제 진짜 가자. 이 근처에 소고기 맛집이 있으려나."
"주인님과 함께라면 길바닥에서 구워 먹어도 좋습니다."
"그건 좀······."
그래도 고깃집에서 먹어야지.
나는 맛집을 검색하려고 스마트폰을 들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아래로 떠오른 기사들이 보인다.
안볼래야 안 볼 수가 없다.
보이는데 어떻게 해.
대충만 쓱 훑어봤다.
- 전세계 최초 '죽음의 물결 완전 소멸'
- 무명(無命) 등장, S급 헌터들의 증언 잇따라.
- 국가권력급 헌터 '무명(無命)'
- 불멸 길드 '투입 될 필요도 없었다.' 무명 덕.
- 죽음의 물결 완전 공략, 한국의 승리
기사 대부분에 무명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
"오오, 역시 주인."
"대한민국은 주인님께 감사해야 할 겁니다."
내 옆으로 고개를 바싹 붙인 가브리엘. 루시퍼도 화면을 보겠다고 내 쪽에 달라붙었다.
두 사람한테도 스마트폰을 사줘야 할 것 같다. 내 명의로 개통해도 되는 거고.
우선 기사는 나중에 보고 맛집부터 검색하자.
그렇게 스마트폰의 자판을 두드리는 순간이었다.
파직, 파지직—!
"또 무슨······."
불평을 하려다가 말았다.
이번에는 시스템의 알림이었다.
『 죽음의 물결 보상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
『 해당 이벤트에서 당신의 기여도가 압도적입니다. 』
오래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업적이 이번에는 빠르게 정산 되었다.
『 존재할 수 없는 업적! 』
『 다수의 성좌들이 해당 업적에 당황합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측정불가(Unknown) 』
『 시스템이 과부하를 인지합니다. 』
『 시스템이 해당 시퀀스를 수정합니다. 』
파직, 파지직—!
다시 허공에서 솟아난 붉은 스파크.
이윽고 시스템이 나타낸 메시지창은 이러했다.
『 시스템이 인과를 비틀어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미래현현(未來顯現) : 시스템의 기능을 일부 해제합니다. 』
"뭐, 뭐라냐."
미래의 기능을 일부 해제한다고?
"두근 두근."
"이런 건 저도 처음 봅니다."
두 사도도 자리에 멈춰 시스템창을 바라보았다.
샤아아—!
새로운 형태의 보상이 정산되기 시작했다.
26화 아티팩트(수정)
『 죽음의 물결 기여도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측정불가(Unknown)'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파직, 파지직—!
허공에 새겨진 스파크와 함께 공간이 일그러졌다.
백색의 여명이 첫 번째 후원을 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
『 현시점에서 습득 불가능한 물품을 보상 목록에 추가합니다. 』
- 사도 강화석
- 사도 전용 장비 조각
- 궁극기 습득권
- 성좌 거래권
- 화신 계약권
- 최상급 룬
···
『 전설 등급의 공략에서도 해당 보상을 습득할 수 있습니다. 』
『 보상의 습득 확률은 공략 수준에 따릅니다. 』
이것저것 많이 추가되었다.
지금 주는 건 아니고 차후 공략에서 보상으로 등장할 수 있다는 뜻.
'아직 보상을 받아낼 미궁이나 인스턴스 게이트가 남아 있기는 한데.'
현재 D등급 이하의 인스턴스 게이트와 미궁을 전부 전설급으로 공략한 상태.
나머지 C등급 이상의 장소에서는 전부 보상을 받아낼 수 있다.
'전부 공략하면 그 뒤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이 보상 목록은 미래에 추가되었을 리스트란 뜻이다.
'미래에 뭔가가 더 늘어난다는 건가?'
그때, 흥분한 건 루시퍼가 말했다.
"사도 강화석. 이건 반드시 얻어야 합니다. 사최헌은 따위로 만들 정도로 강해질 자신이 있습니다."
"원한다고 나오는 게 아니니까. 나오면 너한테 써줄게."
보상은 랜덤이다.
"오늘부터 주인님을 향해 기도하겠습니다."
루시퍼의 표정은 진지했다.
"주인, 전설+보다 더 강해지면 달도 파괴 가능해."
가브리엘도 나름의 어필.
루시퍼는 전설급.
가브리엘은 전설+급.
루시퍼가 간절해질 정도의 차이가 있는 걸까.
어쨌든 보상은 끝나지 않았다.
『 시스템의 일부 제한이 해제됩니다. 』
- 최대 레벨 제한 해제 [ 150 → 175 ]
- 일일 최대 성장 가능 레벨 20% 증가 [ 10 → 12 ]
- 경험치 1.3배 적용
- 인스턴스 게이트 경험치 제공
"이건 꽤 좋은데."
레벨에 한계가 있다는 건 방금 처음 알았다. 150레벨 제한이 175레벨 제한이 되었다.
지금 레벨이 66니까 당장은 관계없는 이야기지만.
그 아래부터가 진짜배기다.
- 일일 최대 성장 가능 레벨 20% 증가 [ 10 → 12 ]
"앞으로 하루에 12까지 레벨업이 가능하단 거잖아."
"묘하게 쩨쩨하네요. 기왕 하는 거 제한을 풀어주면 좋았으련만."
그랬으면 S급도 벌써 찍었으려나.
사실 일일 레벨 제한을 신경쓰며 레벨업하는 헌터는 없을 거다. 즉살이 있는 내 경우가 특이한 거고.
"경험치도 더 준다네."
거기에 더해 경험치 1.3배.
"인스턴스 게이트 경험치 제공?"
이건 굉장히 크다.
바깥에 나가지 않고서도 레벨을 올릴 수 있단 거니까.
게다가 다른 헌터들은 받을 수 없는 혜택을 나만이 받는다고 생각하니 더욱 훌륭하다.
그런데 여기까지 오니 의심이 확신이 된다.
"근데 이것들 전부 미래의 기능이라고 했잖아. 왜 굳이 경험치를 퍼주고 레벨 제한을 늘려주는 거지?"
"나, 날카로운 지적이십니다."
"여, 역시 주인."
루시퍼는 시선을 피한 채 볼을 긁적였다.
"······미래에는 그럴만한 일이 일어나는 거겠죠."
"이것도 제한이야?"
"예. 그렇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루시퍼는 나를 똑바로 바라 본 채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인님만큼은 무사하실 거란 겁니다."
묘하게 의미심장하네.
뭐, 그때를 위해서 열심히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비축해두면 문제없을 거다.
파직, 파지직—!
"아직도 보상이 더 있어?"
시스템의 보상은 끝나지 않았다.
『 시스템 기능 제한 해제 』
- 주시성이 아닌 성좌의 후원이 가능해집니다.
- 성좌 미션 기능이 사용 가능해집니다.
- 코인 거래소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나쁘진 않다만.'
첫 번째는 반길만한 변경 사항이다. 성좌들의 후원이 유용하단 건 이미 체감 중이니까.
두 번째는 성좌를 통해 미션 받기.
"인터넷 방송처럼 미션을 받고 후원을 받는 건가?"
"맞아."
마지막은 코인 거래소 이용인데.
의미가 있나 모르겠다.
'거래소가 있어도 나밖에 이용할 수 없는 거 아닌가.'
어쨌든 여러가지 기능이 해제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지막 보상이 떠올랐다.
『 측정불가급에 해당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현시점에서 습득 불가능한 [ 아티팩트 ] 지급
- 칭호 '죽음의 지배자' 습득 (공격력 + 44%)
- 당신에게 미미한 격이 깃듭니다.
아티팩트와 칭호 수여.
샤아아—.
검은빛과 함께 내 앞으로 검정색 상자 하나가 나타났다.
『 [ Unknown ] 아티팩트 상자 』
- 해당 시점에서 습득할 수 없는 아티팩트가 담겨 있습니다.
- 교환 및 양도 불가
"상자를 여는 건······."
상자를 들어 올리는데 루시퍼와 가브리엘의 눈빛이 느껴졌다.
꼬르륵.
가브리엘의 배에서 난 소리였다.
"······."
잠깐의 침묵.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금강산도 식후경이랬으니까.
나는 스마트 폰으로 검색한 소고깃집을 지도 어플에 찍었다.
* * *
무명(無命)이 죽음의 물결을 공략했다.
죽음의 물결에 참여했던 S급들의 증언을 토대로 기사가 계속해서 올라왔다.
대한민국의 인터넷은 뜨겁게 달아올랐다. 무명이 언급되지 않는 커뮤니티가 없을 정도.
- 무명 혼자서 죽음의 물결을 끝냈다던데?
- 지금 S급들 SNS 난리 났음. 다 무명 이야기임.
- 이 정도면 자연재해급 헌터다.
- 사최헌 이제 퇴물 다 됐네 ㅋㅋㅋㅋ
- 무명 클라스 미쳤다!
- 무명 얼굴 본 사람들도 있다던데.
ㄴ 인터넷에 가짜 사진 엄청 많음
ㄴ ㄹㅇ 궁금하네
ㄴ 일반인들은 볼 일 없겠지.
- 죽음의 물결 종료는 정말로 세계 최초. 무명이 세계에서도 먹히는 탑급 랭커라는 의심할 여지 없는 증거임.
ㄴ 무명 팬클럽이세요?
ㄴ 정보가 너무 안 풀림.
- 진짜 무명은 빵봉투를 쓰고 있다.
ㄴ ? ㅋㅋㅋㅋ
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ㄴ 이 사람 꾸준하네.
이제 대한민국에선 무명을 모르면 간첩 소리를 들을 정도.
너튜브의 월드 보스 처치 영상이 다시금 폭발적인 조회수를 기록하고, 한국 협회에 무명(無命)에 대한 문의가 끊이질 않았다.
"저희도 모릅니다. 파악이 안돼요!"
"예, 현재 최대한 빠르게 알아보고는 있으나······."
비상이 걸린 건 협회 뿐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유수의 길드들과 각종 단체에서도 무명을 찾고자 했다.
"무명하고 접촉했던 S급 헌터들. 그 사람들 중심으로 뭔가 정보를."
"죽음의 물결 공략에 참여했던 헌터들 연락 안 닿아?"
"S급 전용 헌터 게시판부터 훑어봐. 쓸만한 정보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국내 뿐만이 아니었다.
해외의 언론에서도 무명의 죽음의 물결 공략에 대한 소식을 다루기 시작했다.
- The Wave of death, World first Clear!
- 韓国のハンター無命,死の波を完全攻略
- 韩国称霸死亡之波
새롭게 떠오른 대한민국의 절대 강자 무명(無命).
좋든 싫든 그의 이름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러한 불길은 대한민국의 헌터 커뮤니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 S급 헌터 게시판 ]
실제로 S급에 도달한 헌터들만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 상의 게시판이었다.
- 무명은 국가 권력급이 맞습니다. 그냥 차원이 다름.
- 이번에 진짜 큰일 날 뻔했는데, 무명 덕분에 살았습니다.
- 빵봉투 그 사람이 무명 맞죠? 마력이 거의 무한 같던데.
- 무명 최고! 오늘부터 무명 팬클럽 가입합니다.
S급 헌터이기에 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무명(無命)의 강함은 압도적이었다.
자신들이 꾸역꾸역 막아내던 마수를, 찰나의 순간에 소멸시키는 장관은 이해 가능한 영역이 아니었다.
- 그냥 말도 안 되던데요. 솔직히 S급 헌터 다 달라붙어도 못 이길 듯.
ㄴ 에이, 그건 좀.
ㄴ 진짜예요. 거기 계신 분들은 다 공감하실 걸요.
ㄴ 무명 봤는데······. 대박인 점이 [ 999,999 Coin ]
ㄴ 아놔. 저기요. 왜 이러십니까.
- 무명 헌터 보신 분?
ㄴ 유료 코멘트 [ 10,000,000 Coin ]
ㄴ 이건 너무 한 거 아니에요? 현금으로 1억인데.
ㄴ S급인데 1억 없어요?
- 무명 헌터 본 썰 풉니다. [ 5,000,000 Coin ]
- 무명 목격 썰 저도 풀게요 ㅎ [ 4,000,000 Coin ]
그리고 대한민국 서울의 어느 주택.
"으으······. 쓸모 있는 정보는 하나도 없네. 내 돈!"
커뮤니티를 검색하던 천이령은 침대에 드러누웠다.
하기야, 무명(?)과 가장 근처에 붙어 있던 것은 천이령 본인이었다.
'아니, 그 사람이 무명이 아니라고? 그렇게 강한데?'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천이령의 고유 능력은 올 마스터(All Master).
거기에 겸비한 특유의 재능 덕에 천이령은 한 번 본 스킬을 그대로 베껴올 수 있었다.
배우지 못할 것이 없고,
해내지 못할 것이 없는 능력.
'하나도 모르겠어.'
그러나 빵봉투의 기술은 전혀 읽히지 않았다. 자신의 수준을 몇 단계는 뛰어넘은 마력 구현 능력이었다.
'근데 그 빵봉투가 무명이 아니면, 대체 무명은 얼마나 센거야?'
무명 특유의 즉살(卽殺).
천이령의 눈엔 그저 현상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사과가 땅에 떨어지고, 해가 떠오르고 지는 지극히 당연한 현상.
죽어야 할 것이 죽었다.
그렇게밖에는 느껴지지 않았다.
'무명처럼 강해질 수만 있다면······.'
천이령은 일종의 경외감을 느꼈다.
'진짜 무슨 짓이든 할 텐데.'
강해지기 위해서라면 전재산도 아깝지 않았다. 무명의 시그니처 기술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 흑색의 마도광선만 배워도 좋으련만.
'잠깐.'
천이령은 문득 떠올렸다.
'분명 그 빵봉투가 사최헌 헌터한테 아이템을 받으러 간다고 했었지.'
벌떡.
침대에서 일어난 천이령은 즉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집 안에서 혼자 고민해 봐야 소용없었다.
천이령은 다짐했다.
불멸에서 무명(無命)을 기다린다.
그리고 제자로 받아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 * *
치이익—!
불판에서 빠르게 익어가는 소고기.
잘 익은 고기를 젓가락으로 집어 입 안에 넣자, 농후한 감칠맛과 함께 고기가 사르르 녹아내린다.
"와······. 진짜 맛있다."
소고기 집에 와서 먹어 볼 일이 없었다.
그래서 몰랐다.
소고기가 이렇게 맛있는 줄은.
이래서 돈 많이 벌어야 한다고 했던 걸까.
"최곱니다."
"최고."
루시퍼와 가브리엘도 무진장 만족한 얼굴이었다.
냠냠, 와구와구.
고기를 익히자마자 먹기 바빴다. 불판 몇 개를 갈아치웠는지 모를 정도.
"제 인생 고기입니다. 나중에 이 고깃집을 인수하시는 거 어떻습니까?"
인수할 것까지야.
그냥 사먹으면 되는데.
"주인, 현세에 와서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어."
그야 그게 네 첫끼니까.
뭐, 맛있게 먹는다면 됐다.
100만원 넘게 나왔지만, 뭐 어떤가. 그 자리에서 5만원짜리 20장으로 계산했다. 현금으로 주니 가게 주인은 좋아하는 눈치.
루시퍼와 가브리엘이 배를 두드리며 가게 밖으로 나왔다.
"이야, 진짜 잘 먹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매일 먹으면 좋을 듯."
이 기세로 성장하고 돈을 번다면 매일 못 먹을 것도 없다.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돌아온 단칸방.
"음······."
고급스런 식당에서 돌아와서 그런가.
어쩐지 반지하 단칸방이 대비되는 느낌.
단칸방에 세 명이 있으려니 약간 비좁게 느껴진다.
"이사를 가면 좋을 것 같은데."
당장 이사하기가 마땅치 않다.
가지고 있는 돈은 몽땅 현금이고.
S급 헌터가 될 때까지 기다려도 된다지만.
그때 루시퍼가 슬쩍 제안 해왔다.
"······사최헌한테 맡겨 보는 건 어떻습니까?"
"사최헌 헌터?"
"예. 어차피 아이템 판매 대금을 받으러 가야 하니,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사최헌 헌터는 100% 믿을 수 있는가.
내가 잠시 고민하자, 루시퍼가 가브리엘의 뒷덜미를 잡아왔다.
"이 녀석을 데려가겠습니다. 가브리엘은 발언의 진위나 인간의 선악을 구분할 수 있거든요. 제가 다른 존재의 기운을 읽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런 유용한 능력이 있었다니.
"이번 일로 빚을 진 것도 있으니, 웬만해서 거절은 안 할 겁니다. 다른 꿍꿍이가 있냐가 문제죠."
정체를 들키지 않고 집을 얻을 수가 있으려나. 내 소유의 집일 필욘 없다. 당분간 지내기만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사최헌 헌터쪽에서 내 편의를 상당히 봐줘야 하겠지만.
"거절당하면 그냥 새장 두 개 사오겠습니다. 주인님께서 편안히 계실 수 있으실 겁니다."
"아니, 그렇게까지는······."
엄청 좁은 것도 아니다.
나름 지낼 만 하다. 여기서 한 명 늘어나면 힘들겠지만.
물어나 보면 좋을 거다.
"그러고보니 가브리엘은 어떤 능력이 있어?"
아까 말한 것 외에도 능력을 알아두면 좋겠지.
잠시 고민하던 가브리엘이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만화책 보기, 게임하기, 뒹굴거리기, 과자 먹기, TV보기."
"그건 그냥 네 놈이 하고 싶은 거겠지."
"······시야 공유, 비둘기로 변하기, 근접 전투도 가능. 루시퍼보다 강함."
루시퍼랑은 완전히 반대 성향이다.
기본적으로 할 줄 아는 건 거의 비슷한 모양.
근접 전투와 원거리 전투의 차이 정도.
'그래도 두 명이니,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어졌어.'
둘 다 시야공유가 가능하니, 한쪽은 월드 보스를 공략하면서 다른 쪽은 미궁을 공략하는 것도 가능할 터.
악마급의 보스도 이제는 쓰러뜨릴 수 있을지 모른다.
전력이 단순하게 계산해도 두 배가 되었으니까. 실제론 가브리엘이 전설+이니 그 이상일 테고.
"가브리엘의 전투는 내일 C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하면서 확인해보면 되겠네."
나는 목을 가다듬고서 다시 말을 이었다.
"사최헌 헌터에게 아이템을 받고부터는 본격적으로 움직여 볼 생각이야."
"본격적이라 하심은?"
루시퍼가 내게 물었다.
현재 내가 소유한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총 세 장.
"초기화권에 여유가 있으니 강한 보스를 적극적으로 노려봐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매우 현명하신 판단입니다. 빠르게 보상과 아이템을 쓸어 담아, 인류의 정점으로 향하시죠."
이제 즉살에 대해서 감이 온다.
그냥 개사기 능력이다.
얻게 된 이상 최대한 활용해주는 수밖에.
이번 죽음의 물결에서 무명(無命)은 사최헌 헌터의 호감을 사는데 성공했다.
'본인 입으로 정보를 제공해줄 의향이 있다고 했고.'
잘하면 쿨타임 감소 아이템에 대한 정보나,
숨겨진 보스의 위치를 얻을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걸 잊으면 안 되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흑색의 상자를 꺼내 들었다.
『 [ Unknown ] 아티팩트 상자 』
- 해당 시점에서 습득할 수 없는 아티팩트가 담겨 있습니다.
- 24시간 내에 개봉하지 않으면 소멸합니다.
새까만 색깔의 상자 하나. 그 안에선 보랏빛 기운이 스멀스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열게."
"좋은 아이템이 나오길 기대하겠습니다."
"······초레어템의 예감."
아티팩트란 강력한 성능을 지닌 아이템이다.
기존의 등급 체계에서 벗어난 사기적인 아이템.
성유물이 상징적인 의미가 크다면, 아티팩트는 그야말로 사기적인 능력의 총집합체.
아이템에 체계를 정리한 너튜브에는 그렇게 나와 있었다.
'죽음의 물결을 공략하고 나온 아이템인데.'
분명 그만한 값어치를 할 거다.
딸깍.
나는 뚜껑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막대한 양의 보랏빛 광채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샤아아—.
보랏빛 기운이 사라지자 칠흑처럼 어두운 팔찌 하나가 남았다.
『 [ 아티팩트 ] 칠흑 : 리미트 브레이커 』
- 둘 중 하나의 능력을 사용합니다.
1. 임시 레벨을 30 획득합니다. (10분)
2. 지정한 대상의 '제한'을 한 단계 해제합니다. (3분)
- 재사용 대기 시간 [ 7일 ]
첫 번째 능력은 이해가 쉽다. 임시로 레벨 30을 얻는 거다.
그런데 두 번째 능력이 뭔가 달랐다.
- 지정한 대상의 '제한'을 한 단계 해제합니다. (3분)
"제한 해제?"
시스템의 제한을 의미하는 건가.
그리 추측하며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뒤쪽에서 가브리엘과 루시퍼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27화 창고
"그 아티팩트를 손에 넣으셨군요. 축하드립니다."
"엄청난 행운."
두 사도의 목소리는 확실히 들떠 있었다.
『 성좌 '이계 규율'이 두 눈을 반짝입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감탄합니다. 』
그렇게 좋은 아이템인가?
『 [ 아티팩트 ] 칠흑 : 리미트 브레이커 』
아이템의 능력은 다음과 같았다.
두 가지 능력 중 하나를 쓸 수 있다.
1. 임시 레벨 30 획득 (10분).
2. 대상의 제한 해제 (3분).
대기 시간은 7일이다.
나는 다시 아이템의 정보를 살피고선 물었다.
"제한을 해제 시킨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이야?"
"아, 그건 저희 같은 사도급의 존재에게 해당되는 이야깁니다."
내 말에 루시퍼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설명을 시작했다. 꽤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와 가브리엘은 시스템에 의해 출력을 제한당한 상태입니다. 실제 힘은 차원이 다르죠."
그거 허세로 하는 소리가 아니었구나.
"그런 제한을 한 단계 해제한다는 겁니다. 이 제한의 단계에 대해선 현시점에서 제한이라 설명해드릴 수 없지만······."
"금칙사항이에요."
옆에 있던 가브리엘이 존댓말까지 써가며 맞장구쳤다.
"사용하신다면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게 되실 겁니다. 부디 제게 써주시길."
"전설+급에게 한 표를."
두 사도의 강력한 어필.
"사도의 등급하고는 다른 거야?"
"아예 다른 개념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기본적인 출력이 등급이라면······. 제한 해제는 본래 힘의 개방이라고 할까요."
제한 해제.
일시적으로 사도를 강화하는 능력이란 거겠지.
솔직히 지금도 무지하게 강한데 여기서 더 강해질 수가 있다라.
'장난 아니겠네.'
참고로 제한에 대한 정보는 헌터 커뮤니티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쪼록 현시점에 획득할 수 없는 아티팩트인 건 맞는 듯하다.
슥.
나는 흑색의 팔찌 리미트 브레이커를 팔목에 찼다.
『 현재 소유한 흑(黑)의 개수는 3개입니다. 』
- 흑 : 사도 소환
- 칠흑 : 데빌 펜던트
- 칠흑 : 리미트 브레이커
『 흑의 기운이 강화됩니다. 』
흑색의 아이템이 하나 더해지며 기운이 강화되었다.
지난번 미궁에서 확인했듯 흑의 기운이 짙어지면 방어에 도움이 된다.
"주인, 흰색 아이템을 모으면 더 좋아."
"어허, 주인님께 어울리는 색은 당연히 흑색이지. 이 녀석 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각자가 좋아하는 색깔이 있는 모양.
근데 딱히 흑색을 모으려고 모은 게 아니다.
하다 보니 모인 거지.
'기왕 이렇게 된 거 흑색을 중점적으로 모으는 것도 괜찮겠네.'
나는 반지하의 창밖을 바라봤다. 어느새 해가 저물었는지 길가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어쨌든 오늘 다들 고생했어. 자칫하면 죽음의 물결 때문에 큰 일 날 뻔했는데, 두 사람 덕분에 잘 끝났어. 보상도 엄청나게 받고."
"아닙니다. 주인님에 비하면 저는 한 것도 없는데요."
"주인 캐리."
나는 피식 웃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농담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거다.
"그러면 오늘은 이만 쉬자."
내일부터 또다시 바빠질 테니.
각자의 쉬는 방법은 다양했다.
루시퍼는 화장실 청소를 하기 시작했고, 가브리엘은 내가 사온 과자를 먹으며 TV를 봤다.
나는 너튜브와 헌터 위키백과를 탐색하며 정보를 수집했다.
언젠가 다 쓸 일이 있을 테니까.
길었던 하루는 그렇게 끝났다.
다음날 아침.
보글보글.
이른 아침부터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루시퍼가 변함없이 일찍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오늘은 된장찌개입니다."
"오······."
아침까지 준비해주는 소환수라.
루시퍼에 대한 호감도가 쑥쑥 오른다.
"야, 비켜."
밥상을 들고 온 루시퍼가 자고 있는 가브리엘을 발로 툭툭 건드렸다. 눈을 반쯤 뜬 가브리엘이 물었다.
"내 밥은?"
보면 볼수록 가브리엘이 낯이 익었다.
왜 이렇게 익숙하나 했는데······.
내 여동생이랑 하는 행동이 비슷하네.
"네 놈한테 줄 게 있을 리가. 나가서 구해다 먹든지 알아서 해라. 주인님, 어서 드시죠."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밥상에 밥 그릇 세 개가 올려져 있었다. 내 시선을 의식한 루시퍼가 변명하듯 말했다.
"제가 두 그릇 먹을 겁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의 일정은 정해져 있었다.
『 인스턴스 게이트(C)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 소모 비용 : 50,000 Coin 』
『 해당 게이트는 공략 실패시 자동 소멸합니다. 』
『 해당 게이트는 1인 전용입니다. 』
바로 C급 인스턴스 게이트 공략.
가브리엘의 전력도 확인할 겸 해서 였다. 겸사겸사 보상도 얻고.
『 C급 게이트 - 리자드맨 서식지 』
▶ 클리어 조건
- 리자드맨 처치 0 / 70
- 리자드 소서러 처치 0 / 1
게이트에 들어서자 후덥지근한 습기가 몰려왔다.
"덥네."
"그러게 말입니다."
눈앞에는 정글이 펼쳐져 있었다. 온갖 덩쿨 줄기와 수풀이 빽빽한 말 그대로의 밀림이었다.
"시원하게 할 수 있어."
가브리엘이 선뜻 먼저 앞으로 나섰다. 시원하게 해주는 마법 같은 거라도 쓸 수 있는 건가?
부시럭.
그때 밀림의 수풀 속에서 리자드맨 하나가 튀어나왔다. 창을 들고 있고 가죽 갑옷까지 걸친 인간형 리자드맨.
[ Lv. 62 ]
놈은 우리를 발견하고 혓바닥을 낼름 거렸다. 리자드맨이 들고 있던 창을 던지는 자세를 취하는 찰나.
호흡을 들이마신 가브리엘이 나지막이 말했다.
"천마신공(天魔神功)."
잠깐, 뭐라고?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천마신공이면 무협에 나오는 그거?
"그냥 멋있어 보이는 말을 가져다 붙인 걸 겁니다. 100%입니다."
내 놀란 표정을 확인한 루시퍼가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뭐야, 그런 거였나.
슉.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가브리엘이 손을 앞으로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가공할 위력의 풍압이 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콰아아앙—!
내지른 주먹에서 터져나온 기운이 밀림을 꿰뚫었다. 강력한 소용돌이와 함께 눈앞의 시야가 뻥 뚫렸다.
덩쿨, 수풀, 나무, 리자드맨 할 거 없이 죄다 날아갔다.
후덥지근했던 밀림의 습기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일격.
"와우······."
그 자리를 메꾸듯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콰앙-!
가브리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땅을 박차고 쏘아져 나갔다.
콰앙-! 쿵! 쩌억! 쿠웅!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밀림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하늘 높이 치솟는 흙과 연달아 터져 나오는 굉음.
평지가 된 밀림 속에서 리자드맨들이 혼비백산하며 도망치는 게 보였다.
『 리자드맨 처치 56 / 70 』
'루시퍼의 특기가 원거리 폭격이라면, 가브리엘의 특기는 근접전인가.'
쿠우웅-!
가브리엘이 땅을 발로 찍자, 지반과 함께 리자드맨들이 하늘 위로 떠올랐다.
거기서부턴 내 눈으로 좇는 게 불가능했다.
새하얀 섬광이 번뜩이며 허공을 가로지르더니 순식간에 리자드맨들을 정리하는 모양새.
"장난 아니네."
"가브리엘은 주로 성력(聖力)을 활용합니다. 물론 대단한 건 아닙니다. 저도 흑마력을 사용해 저런 식으로 할 수 있으니까요."
무기가 없이 맨손으로 저 정도다.
전용 무기가 있으면 훨씬 강력하다는 거 아니야. 궁극기도 쓸 수 있는 거고.
마침 보상 목록에 추가되었다고 하니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
스륵.
"주인 봤어?"
가브리엘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로 돌아왔다. 흐트러진 모습도 일절 없다.
리자드맨의 서식지는 철저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눈앞의 풍경도 밀림이 아니라 거의 평지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잘 안 보였다.
너무 빨라서.
하지만 무진장 강하단 건 알겠다.
나는 조용히 엄지를 치켜 올렸다.
초토화된 밀림의 뒤쪽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 C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사도 전용 무기 조각 x 1
- 전설의 증표 x 1
* * *
마인의 책사 중 하나인 로란드.
"후우."
그는 대한민국 어느 시골의 산에서 히든 던전의 입구를 발견했다.
'이제 마지막 던전이다.'
묵은 낙엽을 치워내자 오래된 나무 문이 드러났다. 로란드의 입가가 비릿한 미소로 번들거렸다.
'히든 던전들을 매개로 하면 충분히 불러낼 수 있겠지.'
그의 손에 쥐어진 흑색의 열쇠에선 마기가 끝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 [ 아티팩트 ] 마(魔): 종말의 열쇠 』
파직, 파지직—!
검은 스파크가 튀어 오르는 열쇠를 억지로 히든 던전의 입구에 밀어 넣었다.
"크윽!"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이 그를 덮쳤지만, 로란드는 가까스로 정신을 부여잡았다.
그는 필사적이었다.
죽음의 물결이 무명 하나의 손에 의해 공략되었다.
무명의 활약은 그 뿐이 아니었다.
이전부터 전조는 있었다.
월드 보스를 한 번에 처리.
인류에게 재앙을 선사했어야 할 악마조차 격파.
'악마 정도로는 무명을 처리할 수 없다.'
심지어 사도까지 두 마리 데리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종말의 열쇠는 악마의 봉인조차 해제할 수 있는 아티팩트지만, 악마를 소환한다고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무명에게 보상이나 떠먹여 줄 뿐이겠지.
'더욱, 더욱더 강한 마물이 필요하다.'
열쇠를 쥔 로란드의 손에서 핏줄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 '환상종 : 칠흑의 케로베로스'의 소환이 준비되었습니다. 』
『 해당 마수의 등급은 초전설(超傳說)급입니다. 』
초전설급의 대형 마수, 지옥견 케로베로스.
명계의 문지기인 녀석이라면 무명과 대등히 겨룰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엔 실패해선 안 된다."
쿠구구구—!
강한 진동과 함께 산골짜기 위로 거대한 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쿨럭.
로란드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무명(無命)이라는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
"반드시, 반드시 쓰러뜨리겠다."
그리 중얼거리는 로란드의 눈 위로 붉은 안광이 피어올랐다.
* * *
그 시각 불멸 길드.
"천이령 헌터 진짜 집에 안 간데요?"
"무명 헌터 볼 때까지 절대 안 갈 거라 했다는데."
"안 깨웠다고 뭐라 하는 거 아니겠지?"
"아까 점심 미리 먹었대. 무명 올까봐."
불멸의 길드원들이 다 함께 지하의 구내식당으로 내려왔다.
천이령 헌터는 위층에서 자고 있었기에 놔두고 내려온 상황.
"무명 헌터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데."
"길드장이 뭔가 알고 있는 거 아니에요?"
"······."
"우리한테 말해주기 싫은가 봐."
바로 어제 천이령이 짐을 싸들고 불멸 길드에 온 참이었다. 당분간 공략 예정도 없겠다 아예 눌러앉을 예정인 모양이었다.
여성 길드원 하나가 사최헌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길드장, 괜찮을까요? 청명 길드에서 항의하진 않겠죠?"
"글쎄······."
사최헌도 고심 중이었다.
천이령은 멸망 후반까지 활약하는 중요 인물이었다.
여러 번의 회귀 속에서 항상 자신의 역할은 톡톡히 하는 강자.
사실 이번 죽음의 물결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뤘어야 했는데, 그 자리를 무명이 대체 해버렸다.
'천이령을 대신할만한 인물은 없다.'
힐, 탱킹, 딜링, 버프까지 모든 게 한 번에 가능한 인간은 올마스터 천이령이 전세계에서 유일했으니까.
'결과는 오히려 좋다.'
이번 죽음의 물결로 얻은 이득이 훨씬 컸다.
여러 헌터가 목숨을 건졌으며 사회적인 혼란도 최소화 했다.
다음 시련도 그다음 시련도 더 많은 헌터가 도전하게 될 거다.
'최대한 많은 헌터를 더 좋은 환경으로 데려갈 수 있었다.'
반복된 회귀 속에서 사최헌은 깨달았다.
혼자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바꿀 순 없다.
자신만이 강해진다 한들 결국 살아남는 것은 사최헌 하나뿐이.
그래선 의미가 없다.
세계를 멸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기 위해선, 재능과 가능성을 가진 이들이 최대한 많이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천이령은 그런 소중한 헌터 중 한 명이었다.
'그냥 돌려보내긴 아쉽다. 이 참에 내쪽에서 성장을 봐주는 것도 괜찮겠지.'
천이령의 성장을 돕는 건 그리 어렵진 않을 거였다.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고.
"당장은 길드에 머물면서 훈련을 함께······."
그리 말하려던 사최헌이 갑자기 굳어졌다.
"길드장?"
"왜 그래요?"
미동도 하지 않는 사최헌.
길드원 하나가 사최헌의 눈앞으로 슥슥 손을 저었다. 그제야 사최헌은 미간을 좁히며 정면을 가리켰다.
"저쪽?"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본 길드원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있을 수 없는 게 있었다.
"아앗! 빠, 빵봉투!"
"무, 무명?!"
"쉿, 조용히 해. 다른 사람들 듣잖아."
"무명은 아니고 무명의 사도랬어."
불멸의 길드원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들의 앞에는 빵봉투를 뒤집어쓴 남자와.
빛으로 얼굴을 가린 여성이 식판을 들고 있었다.
사최헌은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흑의 사도 루시퍼.
백의 사도 가브리엘.
이 두 사도가 구내 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서 있었다.
루시퍼는 태연자약하게 답했다.
"응? 뭐하긴. 밥 먹는데. 꽤 하더군. 배울 점이 아주 많아. 주인님의 식단에 응용할 수 있겠어."
"고기 많이. 야채 조금."
가브리엘의 식판에는 고기가 듬뿍 쌓여 있었다. 두 번째로 먹는 중이었다.
루시퍼는 당연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찾아올 거라고 했잖아. 뭘 새삼스럽게 놀라."
아무리 그래도 바로 다음날이 될 줄은 몰랐다.
구내식당에서 배식을 받고 있을 거라곤 더더욱 생각 못했고.
사최헌은 한숨을 내쉰 다음 다시 물었다.
"무명은 오지 않았나?"
"오지 않으셨지만, 여기 함께 계신거나 마찬가지다. 그 분의 명령으로 내가 여기에 왔으니."
스윽.
루시퍼는 반찬이 가득 담긴 식판을 식탁에 내려놓고선 의자에 걸터 앉았다. 루시퍼가 젓가락으로 사최헌을 가리키며 말했다.
"약속했던 대로 아이템의 판매 대금을 받으러 왔다."
맡겨 놓은 것처럼 당당한 태도.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최헌, 불멸의 창고를 열어라."
28화 안내
나는 루시퍼와 가브리엘을 불멸 길드에 보내놨다.
'악마 처치의 대금을 받아와야 하니까.'
- 사최헌과 협력해도 괜찮을지 확인해 볼게.
가브리엘은 그리 말하며 불멸 길드로 향했다.
가브리엘에게는 선악을 가리고, 발언의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했으니.
사최헌이 믿을만한 사람인지 확인할 수 있을 터.
물론, 사최헌은 대외적으로도 훌륭한 헌터다. 만나본 결과 나쁜 사람이란 생각은 안 들고.
'그래도 확실히 해두는 게 좋겠지.'
당장은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상황이기에, 사최헌 헌터를 통해 이것저것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을 거란 판단.
나는 루시퍼가 차려 놓고 간 밥을 먹으며 아이템을 확인했다.
『 전용 무기 조각(黑) 1 / 5 』
- 흑색 사도의 전용 무기 파편
C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으로 나온 보상이었다.
총 다섯 개를 모아야 했다.
가브리엘의 것까지 만들려면 총 10개는 필요하단 의미. 남은 던전 다 합쳐도 그 정도는 모으기 힘들 거다.
성좌와의 교환이나 후원으로도 얻을 수 있다고는 하는데······. 그 기능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
'하긴 모조품이 그만한 성능이었으니까.'
나는 가브리엘이 죽음의 물결에서 보여줬던 활약을 떠올렸다.
진짜 전용무기는 그것 이상이겠지.
모으기 힘든 만큼의 가치는 있을 거다.
'강해져서 나쁠 건 없지.'
딱히 헌터 랭킹 1위를 노릴 생각은 없지만.
요즘같이 흉흉한 시기에 힘이 있어 나쁠 건 없다.
열심히 건물주가 되었는데, 내 건물이 월드 보스한테 무너진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다.
힘이 있다면 그런 참사는 막을 수 있을 테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나는 연결 되어 있던 공유 시야를 확인했다.
- 적의 식단을 확인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니까요.
- 주인, 직접 먹어보고 후기를 남길게.
어이없는 이유로 구내 식당을 습격한 두 사도.
현재도 식탁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중이었다.
'잠깐 안 본 사이에 어떻게 된 거야.'
어느새 주변에 불멸 길드원들이 죄다 앉아 있었다.
사최헌의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좀 봐라.
그러거나 말거나 사도 둘은 식사에 열중이었다.
"기, 길드장님. 어떻게 하죠?"
"일단 밥이나 먹지."
"괜히 긴장되는데요."
불멸의 길드원들, 그 면면을 나는 알고 있다. 인터넷에 이름만 검색해도 나오는 유명인들이니.
순간이동 능력자 유지훈.
청염의 마법사 신아윤.
천혜의 성녀 주나린.
그 외 두 명까지.
전부 랭킹 30위권의 강자들이다. 인터넷 상에선 이들이 일부러 랭킹을 올리지 않는 거란 말도 있던데.
문제는 분위기가 얼어 붙어 있단 것.
이 눈치 없는 사도 두 명 때문이겠지.
불멸 길드원들은 루시퍼와 가브리엘의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다. 사최헌만 묵묵하게 젓가락질을 했다.
길드원들의 젓가락질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 그러면 가보겠습니다."
"천이령 헌터한테 알려주러 가자."
"길드장 우리는 쉬고 있을게요. 무명 헌터한테 싸인 좀······."
"야, 눈치 챙겨."
결국 길드원들이 먼저 식판을 들고 물러났다.
"······."
잠시후 조용히 식판을 비운 사최헌도 일어났다.
"따라와라. 창고를 열어주지."
"잠깐, 기다려. 이것만 먹고 가자."
"별점 5점."
그렇게 숨 막히는 식사가 끝났다.
사최헌은 두 사도를 데리고 불멸의 중앙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는 지하로 향했다.
"원하는 아이템이 있나?"
"한번 보고 결정하지."
"그래, 마음대로 해라."
지하에는 굳게 닫힌 철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라기 보다는 방공호 같은 느낌.
세계가 멸망해도 여기는 멀쩡할 것 같다.
사최헌이 손을 대자 마력을 인식하여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드러난 창고는······.
"오, 꽤 괜찮게 꾸며 놨는데."
루시퍼가 감탄할 정도.
'눈이 부실 지경이네.'
영화 속에 나올 법한 구조였다.
벽면에는 온갖 최상급 아이템이 장식되어 있고, 유리로 된 장식장에는 각종 무기와 장신구가 즐비했다.
각 장식장에선 푸른 마력이 은은하게 흘러나와 아이템의 품질을 유지해주고 있었다.
심지어 어지간한 박물관 뺨치는 크기다.
"여기에는 유니크급 이상의 아이템들이 모여있다. 레전더리급은 내부로 들어가야 한다."
이만한 규모인데 유니크급만 모아둔 거였다니.
인터넷에 떠도는 소문 이상의 창고였다.
[ 진실. ]
사최헌을 지긋이 응시하던 가브리엘이 내게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발언의 진위를 가리는 능력.
사최헌에게도 유효한 모양.
"여기에 눈독 들이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다. 아무에게나 개방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둬라."
은근한 자랑.
[ 진실. ]
이라고 생각했는데 팩트인건가.
"이 창고에는 나와 길드원들이 모은 모든 아이템이 모여 있다."
[ 거짓. ]
거짓말탐지기가 따로 없다.
잠깐, 거짓말이라고?
[ 뭐? ]
참고로 전달되는 사념은 루시퍼도 공유하고 있다. 루시퍼가 곧장 사최헌에게 물었다.
"여기에 있는 게 전부는 아닐 테고. 어딘가에 더 대단한 게 숨겨져 있는 거구먼?"
그 말에 사최헌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예리하군. 무명의 지적인가? 아직은 여기까지다. 지금은 보여줄 생각이 없다."
[ 진실. ]
됐어, 가브리엘.
이제 필요할 때만 알려주면 돼.
[ 응. ]
사최헌을 따라 다음 섹터로 이동하자, 레전더리급으로 도배된 장식장이 나타났다.
장식장이 훨씬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되어 있다.
이게 다 얼마냐.
무기는 종류별로 있고 소비 아이템부터 재료까지 빈틈이 없다. 마치 멸망이라도 대비하는 수준이다.
내가 사용할만한 아이템은 보이지 않는다.
무기는 지금 가지고 있는 망멸검이면 충분하고, 방어구도 당장 급한 건 아닌지라.
일단 무난한 옵션을 챙기는 게 좋겠지.
"쿨타임 감소 아이템으로 챙기자."
[ 예, 알겠습니다. 제일 좋은 놈으로 가져오겠습니다. ]
현재 즉살의 쿨타임은 26.3일.
이걸 최대한 줄이는 게 당장의 목적이다.
창고를 슥 훑어보던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쿨타임 관련 아이템이 낫겠어."
"쿨타임 감소라. 비싼 걸 원하는군. 이리 와라."
사최헌은 곧바로 손짓했다. 따라붙은 루시퍼가 운을 띄웠다.
"이쪽이 소유한 다른 아이템들도 처리해줬으면 하는데."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현금으로 지급하기엔 한계가 있다."
"왜."
"불멸은 1위 길드. 주어지는 혜택만큼 견제와 감시를 받고 있다. 현금 지급은 어려워도 교환이라면 환영이다."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한테 필요 없는 아이템들을 바꾸기만 해도 이득이니까.
회중시계가 들어 있는 유리 장식장.
그 앞에 선 사최헌이 잠금을 해제하며 입을 열었다.
"무명, 너에겐 감사하고 있다. 죽음의 물결을 성공적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건 네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불가능했을 거다."
"네 놈도 주인님의 위대함을 깨달았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다."
[ 진실. ]
과대평가다.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니고.
근데 괜히 입꼬리가 올라가네.
사최헌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가브리엘이 말을 이었다.
[ 사최헌. 본래 선한 인물이었으나 현실에 좌절.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영웅. 필요하다면 희생도 감수할 수 있음. 근데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이 마음 한 켠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듯······. ]
어디까지 꿰뚫어 보는 거냐.
심리테스트 뺨치는 급인데.
[ 믿어도 뒤통수는 안 칠 것 같아. ]
뭐, 그렇다고 한다.
[ 참고로 주인은 현세 최강의 존재가 될 가능성을 품은 무궁무진한 잠재력의 헌터. ]
나한테 아부해도 딱히 해줄 게 없는데.
하여튼 사최헌 헌터는 믿어 볼 법 하단 거다.
루시퍼는 자연스레 입을 열었다.
"사최헌, 기왕 이렇게 된 거 하나만 더 부탁하지. 한동안 머물 집 한 채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준비해주지. 내가 사용하려던 은신처 중 하나니 쓸만할 거다."
"뭐······."
너무 순순히 승낙하자 오히려 루시퍼가 당황한 모양새였다.
"그만한 일을 했으니, 나도 보답할 뿐이다."
사최헌은 장식장에 놓인 회중시계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무명 네가 정체를 숨기고 싶다면 나도 굳이 캐낼 생각은 없다. 나름의 이유가 있을테니."
금색으로 빛나는 회중 시계가 루시퍼에게 건네졌다.
『 [ 레전더리 ] 금빛 회중 시계 』
- 포켓 아이템 (인벤토리에서 효과 ON)
- 쿨타임 감소 35%
지금까지 얻은 아이템 중 가장 높은 감소 수치였다. 같은 레전더리급인 데빌 펜던트보다 10% 높다.
그야말로 쿨타임 감소를 위한 아이템.
심지어 인벤토리에 넣어두기만 해도 효과가 발휘 된다. 루시퍼는 씩 웃으며 회중 시계를 받아들었다.
"꽤 괜찮네."
"현존하는 쿨타임 아이템 중 제일 좋은 걸 거다."
"나중에 교환할 아이템을 가지고 또 와도 된다는 거지?"
"얼마든지."
아이템을 받은 루시퍼는 가브리엘과 함께 창고 바깥으로 향했다.
창고의 거대한 철문 바깥으로 나간 루시퍼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뭐해? 안 오고?"
사최헌 헌터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가지."
루시퍼의 말에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던 사최헌 헌터가 뒤늦게 발걸음을 떼었다.
* * *
'그냥 가는 건가.'
사최헌의 선택은 일종의 도박이었다.
불멸을 찾아온 사도 둘.
그 둘에게 불멸의 창고를 개방했다.
현시점에서 사도 둘의 무력은,
사최헌 자신과 비등하거나 그 이상.
불멸의 창고를 털길 원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으리라.
'······어디까지나 거래로 끝났다.'
딱히 별다른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순수하게 거래에 의해 아이템을 받으러 왔을 뿐.
무명(無命)은 결코 악인이 아니었다.
그 행보로 보나 지금 상황으로 보나 명백한 인류의 편.
'그만한 힘을 손에 쥐고도······. 멋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인가.'
무명의 존재는 명백한 오버 밸런스.
경우에 따라 강압적인 태도로 나올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아군이라는 건가.'
사최헌은 무거웠던 가슴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았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루시퍼의 질문이 이어졌다.
"사최헌, 협회를 믿지 말라고 했었지."
"그래, 위험한 존재들이 섞여 있다."
"설마 마인(魔人)?"
"그래, 현시점에선 극비 사항이니 누설하지 말도록."
"너야말로 어떻게 안 거냐."
사최헌은 얼굴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답했다.
"조사했다."
자신의 회귀를 숨기기 위해서 늘상 하는 말이었다. 사최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루시퍼가 한마디했다.
"각성자 연합때도 그렇고······. 조사를 참 잘하네."
비꼬는 듯한 말투였지만, 사최헌은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칭찬 고맙군."
사최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무명, 너도 날 쉽게 믿지 못한다는 걸 안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그 때문일 테고."
비웃음을 머금은 사도의 표정. 그 너머에서 무명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방법은 없다.
그러나 사최헌은 말을 이었다.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내쪽에서도 협력하겠다. 내가 가진 정보망을 활용하면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사최헌 또한 조심스러웠다.
몇 번의 회귀 끝에 도달한 새로운 가능성.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세계를 구할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고 그리 맹세했기에.
"그래? 너무 협조적으로 나오니까 오히려 의심스러운데."
"그건 사도 네가 하는 말인가. 아니면 무명이······."
치이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거, 거기 잠깐만요!"
천이령 헌터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윽, 저 꼬맹이는."
"가짜 무명님!"
루시퍼는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들리지 않는 것처럼. 천이령은 다시 진지하게 루시퍼를 불렀다.
"빵봉투님."
"윽."
그래도 돌아보지 않자 가브리엘이 루시퍼의 목을 억지로 꺾었다. 그제서야 루시퍼가 목을 매만지며 답했다.
"뭔데."
천이령 헌터는 각오와 함께 입을 열었다.
"무명 헌터님.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죽음의 물결에서 하지 못한 말이었다.
이 말을 하려고 불멸 길드에서 주구장창 기다렸다.
하루뿐이긴 했지만.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부디 저를 제자로 받아주세요!"
* * *
"곤란해. 아주 곤란해."
천이령 헌터는 아예 루시퍼한테 찰싹 달라 붙었다.
"절대 안 놓을 거에요. 제발요! 진짜 조금이라도 괜찮아요. 강해지는 법을 알려주세요!"
"놔라."
루시퍼가 무시하고 걸어가자 천이령 헌터가 질질 끌려갔다. 애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제자라니······.'
천이령 헌터는 랭킹 3위다. 누구 밑으로 들어갈 레벨이 아니다.
미쳤다고 제자로 받겠는가.
"제발요. 강해지고 싶어요! 자신 있어요! 돈이라면 드릴게요!"
"돈?"
그 말에 루시퍼가 흥미로운 듯한 목소리를 했다.
설마 수락하려는 건 아니지?
게다가 알려 줄 것도 없다.
즉살이랑 약자멸시는 그냥 스킬이고.
[ 제가 가르쳐 주겠습니다. 어차피 따라하지도 못할 겁니다. 적당히 하나만 알려줘도 남는 장사입니다. ]
"따라와라, 꼬맹이."
그 말에 천이령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역시 돈이면 안되는 게 없구나."
천이령 헌터가 이상한 상식을 배워가잖아.
"훈련장으로 가시죠!"
천이령은 신이 나서 루시퍼와 함께 훈련장으로 이동했다. 먼저 훈련장으로 들어가 버린 둘.
가브리엘과 사최헌이 그 뒤를 따라 걸었다.
"······."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 주인, 빨리 명령을. ]
가브리엘도 매우 어색한 듯한 모양새.
가브리엘을 통해 뭐라도 물어봐야 할까.
'정보를 제공해주겠다고 했지. 뭘 물어볼까.'
가장 필요한 건 쿨타임 감소 아이템에 관한 정보였다.
그게 있으면 초기화 쿠폰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
'협회에 있는 마인에 관한 것도 신경 쓰이긴 해.'
죽음의 물결을 난장판으로 만들만큼의 힘을 지닌 존재다. 그런 놈들이 협회에 들어 와 있다는 건······.
'대한민국도 안전하지 않구나.'
인터넷에만 있는 음모론 같은 건 줄 알았는데.
각성자 연합도 그렇고 별 게 다 있다.
그때였다.
"예언의 별에 대해서 알고 있나?"
훈련장에 난 유리창을 보던 사최헌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 들어."
"너한테 물은 게 아니다. 무명에게 물었다."
"······."
가브리엘이 굳어졌다.
[ ······주인, 나 매우 수치스러워. ]
충분히 공감한다.
나도 공감성 수치사 할 것 같거든.
예언의 별?
나도 모른다.
처음 듣는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는데도 사최헌은 설명을 시작했다.
"예언자들로 구성된 단체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이 그곳에 속해 있지."
"각성자 연합 같은?"
"아니, 완전히 다르다. 빌런이 아니다. 그들은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들일 뿐이지."
이것도 소문이 진짜인 케이스였다.
예언 능력을 가진 헌터는 매우 희귀하다. 한 번 각성하면 비밀스런 단체가 접근해 온다는 인터넷의 소문이 진짜였던 모양.
사최헌은 내게 충고하듯 말했다.
"조만간 그들이 널 방문할 거다.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칠 존재에겐 미리 접촉하는 게 그들의 방식이니."
"만나면?"
"될 수 있는 한 그들을 이용해라. 그들도 널 이용하려 할테니."
그때였다.
콰아앙—!
훈련장의 격벽이 크게 진동했다. 훈련장 내부는 시커먼 연기로 가득 차 있었다.
[ 어······. ]
그 안에서 당황한 루시퍼의 사념이 전해져 왔다.
[ 주인님······. 이 꼬맹이 천재인데요? ]
천재 맞아.
천재 헌터 올마스터 천이령.
괜히 돈 뜯어 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야?
[ 아뇨, 아뇨. 진심으로 뭘 가르쳐도 3초 컷이에요. 이 정도 수준의 천재는 차원 규모에서 찾아도 없을 정도입니다. 데려다 키우죠. ]
이 무슨 태세전환이란 말인가.
그리고 키우긴 뭘 키워.
나 한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루시퍼랑 천이령 헌터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사최헌 헌터의 스마트폰이 울려왔다.
* * *
"실례."
훈련장 복도에서 멀어진 사최헌이 전화를 받아들었다.
정보상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사설로 활동하지만, 협회나 여타 정보 기관에 뒤지지 않는 정보력을 가진 자였다.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전해주는 정보에 사최헌은 미간을 좁혔다.
"그게 진짜인가? 환상종이 서식하는 던전이 발견 되었다니?"
거듭 확인했지만 돌아오는 답은 같았다.
정보상은 해석 및 탐색 스킬의 대가.
던전의 정보를 미리 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 환상종 : 케로베로스
그러한 초전설급 마수가 잠든 던전이 발견 되었다는 이야기.
그것도 대한민국에서.
사최헌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지금 시기에 일어난 적 없던 일이다.'
케로베로스는 대한민국의 전설이 아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명계의 문지기다.
벨리알과 같은 악마는 그 뿌리의 특성상 전 세계에 퍼져있지만, 이 녀석은 아니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명계의 삼두견을 대한민국에 불러들였다는 뜻.
'마인(魔人)인가.'
사최헌은 어렵지 않게 그 내막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미래가 바뀌었다.'
무명(無命)이 바꾼 운명의 흐름이,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형태로 가속하고 있었다.
"알겠다. 정보에 대한 값은 따로 지불하겠다."
그리 말하며 전화를 끊는 순간이었다.
사최헌의 뒤로 그림자 두 개가 드리웠다.
"환상종. 그런 맛있는 놈을 혼자 먹으려는 건 아니지?"
"독식 반대."
루시퍼와 가브리엘 두 사도가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사최헌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환상종은 악마를 악마 따위로 만들어 버릴 재앙의 존재다. 네 녀석도 알 텐데."
"알고 말고. 그러니까, 그게 좋다는 거지."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사최헌의 어깨를 붙잡았다.
"무조건 안내해."
29화 미친 소리
"좋아, 준비는 완벽해."
마인 책사 로란드.
그는 입가가 찢어질 듯 미소짓고 있었다.
크르르르—!
거대한 유적의 아래.
마기의 사슬에 묶인 환상종 케로베로스가 몸부림 치고 있었다. 월드 보스에 비견되는 거체였다.
콰앙-! 쿠웅! 쿵!
놈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던전의 땅과 구조물들이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그럴수록 마기의 사슬은 놈을 더 강하게 결박했다.
"쓸데 없이 힘 빼지말고, 근처의 인간이라도 씹어 먹어라."
크르르!
저항하던 케로베로스는 이내 제물로 놓인 인간들을 씹어 먹기 시작했다.
으득, 으드득.
주위에는 인간의 피와 시체가 즐비했다.
인간의 영혼이 제물이 되어 케로베로스에게 마기를 불어 넣고 있었다.
각성하지 못한 인간은 연약하다. 그러나 그 영혼만큼은 신체에 비해 강인해 연료로써 의미가 있었다.
"하루 아니 반나절만 있으면 완성 되겠어."
로란드의 목적은 고의적인 던전 브레이크였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마수는 기존보다 훨씬 강해진다.
케로베로스에게 깃든 마기가 과충전되면 놈은 자연스레 던전을 박차고 나갈 것이었다.
바깥으로 풀려난 케로베로스는 인간들로선 감히 손 쓸 수 없을만큼 강해지리라.
'무명······. 네 놈조차도 결코 쉽게 막진 못할 거다.'
로란드는 이를 악물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죽음의 물결에서 보았던 절망적인 광경이 다시 재생되는 듯 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마물을 일소하는 불가해한 기적.
로란드의 힘으론 막는 것도 그 자리에서 나서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거다.'
환상종 케로베로스. 이 놈을 던전 밖으로 끄집어내기만 한다면, 인류에겐 필시 재앙이 될 터.
'인류는 여기에 절대로 대처할 수 없다. 무명이라고 할지라도.'
현세는 튜토리얼 단계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시점 인류의 최대 레벨은 150.
던전을 벗어난 케로베로스의 레벨은 300에 달할 것이다.
막아낼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게 맞았다.
로란드가 종말의 열쇠를 손에 쥔 채 숨죽여 웃는 그때였다.
저벅, 저벅.
던전의 한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로란드의 눈이 커졌다.
이곳에는 자신과 제물들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을 터.
"누구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인간이었다.
금으로 치장된 검은 반가면을 쓴 여성.
흑색 망토를 두른 그녀는 나지막히 입을 열었다.
"마인(魔人) 로란드."
로란드의 얼굴이 굳어졌다.
"뭐냐. 인간이 어떻게 여기에."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마인의 존재를 아는 것은 극소수의 인간들 뿐. 로란드의 이름을 아는 것은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답무용.
한순간 끌어모은 로란드의 마기가 여성을 향해 쇄도했다.
쾅.
마기는 여성에게 닿지 않았다. 기이한 궤적으로 꺾여 지면을 때렸을 뿐이었다.
"뭔······."
"적대할 거 없습니다. 나는 예언자의 별입니다. 마인의 책사쯤 되는 인물이라면 우리에 대해 들어 보았겠죠."
차분한 목소리가 로란드의 귓가에 울렸다.
"열등한 인간들이 모여 만든 단체 따위에게 관심 없다."
예언자의 별.
현세의 인간들 중에서 예언 능력이 있는 자들이 모여 만든 비밀 단체.
고작해야 인간들의 조직.
열등종의 발버둥으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로란드는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미래의 흐름이 크게 뒤바뀌는 지금. 당신은 이 세계에 종말을 불러 오려하고 있습니다."
로란드의 미간이 뒤틀렸다.
"본론부터 말해라, 예언자. 그래서 어쩌겠다는 거냐? 네 놈들의 알량한 힘으로 날 막아보겠다는 거냐?"
"재앙은 스스로 강림할 겁니다. 세계는 지워지고, 혼돈이 모든 것을 지배하겠죠. 그대에게 충고하겠습니다."
여성의 말에는 짙은 마력이 실려 있었다.
"무명(無命)을 자극하지 마세요. 그대의 손에 마인(魔人)의 절멸이 달려 있습니다."
"허?"
로란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 여자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한단 말인가?
마인의 절멸? 고작 인간 따위가?
"그딴 개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로란드의 비아냥에도 여성은 무미건조하게 답할 뿐이었다.
"믿지 않아도 상관 없습니다. 예언은 전해졌고, 우리는 우리의 방식대로 종말을 대비할 뿐."
스륵.
여자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공간이동은 아니었다. 환영도 아니었다. 로란드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였다.
"뭔······."
로란드는 자신의 얼굴을 쓸어 내렸다.
툭, 투둑.
그의 이마에 핏줄이 돋아났다.
이제는 하다하다 별 벌레까지 달라 붙는다니.
"열등종 따위가 감히 누굴 상대로 훈수를 두는거냐."
예언 따위 자신을 막을 구속구가 되지 못한다. 무명을 잡고 반드시 마인 사회의 정점에 오르리라.
로란드가 그리 마음 먹는 순간이었다.
커허엉-!
케로베로스가 크게 짖었다. 공기가 떨려오는 살벌한 포효. 그건 던전 바깥의 침입자를 향한 것이었다.
"응?"
로란드의 눈동자가 커졌다.
"벌써 왔다고······?"
빨라도 너무 빨랐다.
협회 측에서 던전의 위치를 숨겨주기로 약속 되어 있었다. 일반적인 헌터들이 알아낼 방법은 없다고 봐도 무방.
로란드는 눈을 감고서 던전 외부를 살폈다.
'우연? 아니, 그럴 리가.'
바깥에 도착한 자들은 너무도 익숙한 놈들이었다. 로란드의 입가가 파르르 떨려왔다.
'무슨 수로 이렇게 빨리 발견 한거냐······.'
던전 바깥에 도착한 것은 다름 아닌 사최헌.
그리고 두 명의 사도였다.
* * *
던전으로 향하기 전, 가브리엘은 집에 들러 내게 아이템을 건네줬다.
『 [ 레전더리 ] 금빛 회중 시계를 착용합니다.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35%(9.2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26.3일 → 17.1일 』
'9일이나 줄었다.'
이제 쿨타임은 약 17일.
본래 쿨타임이 44일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감소했다. 2주 정도만 기다리면 된다는 거니까.
'이제는 진짜 기다려서 쓸만도 하다.'
별 일 없다는 가정하에 그렇지.
문제는 자꾸 별 일이 생긴다는 거고.
'악마종을 뛰어 넘는 마물이 나타났다니······.'
나는 가브리엘의 공유 시야로 시선을 옮겼다. 가브리엘이 목적지였던 어느 산골에 내려 앉았다.
"도착했나."
"에이, 그 꼬맹이 떼어놓느라 기운 다 썼네."
사최헌과 루시퍼가 기다리고 있었다.
참고로 천이령 헌터는 억지로 두고 왔다. 아직은 위험하다는 루시퍼와 사최헌의 판단이었다.
특히 사최헌이 극구 반대했다.
랭킹 3위도 올 수 없는 던전이라니.
나도 자연스레 긴장이 된다.
땅에 착지한 가브리엘은 정면을 바라봤다.
"엄청난 마기."
그들의 앞에 놓여진 것은 우뚝 솟은 석문(石門).
알 수 없는 문자와 벽화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게도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는 게 보인다.
파직, 파지직-!
죽음의 물결에서 보았던 흑색의 스파크가 문을 휘감고 있다. 저게 마기란 말이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마인(魔人)의 수작이다. 빠르게 정리하는 게 최선이다."
사최헌은 간단히 설명하고선 루시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명. 너도 함께 하고 있는 건가?"
"물론. 우리와 함께 계시다."
사최헌의 물음에 루시퍼가 답했다.
함께 하는 중이긴 하다.
집에 있긴 하지만.
'직접 가도 내가 딱히 할 건 없으니까.'
내 현재 등급은 C급.
반면 상대는 악마 벨리알보다 위험한 지옥의 마수 케로베로스다.
가봤자 발목만 잡을 게 뻔하니 즉살이나 잘 써주는 게 나을 거다.
그때였다.
"사최헌, 넌 이제 돌아가라."
사최헌의 옆에 선 루시퍼가 손을 휘휘 저었다. 사최헌이 미간을 좁혔다.
"무슨 소리지?"
"괜히 주인님 밥상에 숟가락 얹을 생각하지 말고 가란 뜻이지. 너 없어도 케로베로스 한 마리 처리하는 건 별 거 아니거든."
이곳의 위치를 알려준 게 사최헌 헌터다.
그냥 가라고 하는 건 좀······.
봐봐, 사최헌 헌터도 기가 찬다는 듯 웃지 않는가.
"악마 때와는 차원이 다른 난이도다. 자칫하면 대한민국 전체가 불바다가 될 거다. 한 사람이라도 더 있는 게 낫다."
"거 참 필요 없다니까."
그때였다.
"나는 자신이 없어."
옆에 있던 가브리엘이 뜬금 없이 그렇게 말했다. 루시퍼와 사최헌의 시선이 모였다.
"?"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 와놓고.
그런 표정.
가브리엘은 한 손을 질끈 쥔 채 태연하게 말했다.
"질 자신이."
그 즉시, 루시퍼가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사최헌, 저 멍청이는 무시해라."
"······진입하지."
『 성좌 '이계 규율'이 고개를 절레 절레 젓습니다. 』
루시퍼와 사최헌이 나란히 던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처음으로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한 게 아닐까.
* * *
『 [ 특수 ] 던전 : 열화 명계의 유적 』
던전의 내부는 거대한 동굴이었다. 동굴의 벽면에 신전의 기둥과 벽화들이 파묻혀 있는 느낌.
루시퍼가 손으로 벽면을 훑으며 나아갔다.
"던전인데 마수가 없구만."
"미완성된 던전이다. 의도적으로 설계된 결함이지. 이걸 만들어낸 마인이 던전 브레이크를 의도하고 있는 거다."
사최헌의 설명은 그러했다.
던전이 붕괴하지 않은 지금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에 공략에 나섰다고 할 수 있었다.
사최헌 헌터의 정보망이 대단하다고 밖에는······.
'케로베로스를 잡는 건 좋다고 쳐.'
악마 처치를 뛰어넘는 보상에 막대한 경험치까지 얻을 수 있을 거다.
즉살이 있는 한 승리는 예정되어 있다고 봐도 좋겠지.
그러나 현재 내가 가진 즉살권은 3개.
케로베로스는 머리가 세 개 달린 신화 속의 괴물이다.
"왠지 즉살 한 번으로는 해결이 안 될 것 같은데."
[ 확답은 못 드리겠네요. 머리 하나 하나가 생명체로 취급되는지, 아니면 통틀어서 하나의 심장을 가진 생물로 취급될지는······. ]
만약의 경우에도 3장을 한 번에 써야한다는 건 꽤 부담이다.
이제 파밍처도 얼마 남지 않았다.
C, B, A, S급 미궁.
B, A, S급 인스턴스 게이트.
이렇게 총 7곳.
다른 곳에서 수급한다고 한다면······.
"그러고보니 영혼 랜턴 말이야. 고칠 수 있는 방법 없을까?"
성좌였던 백색의 여명이 가브리엘이 되었으니 물어보기 수월하다.
[ 고칠 수 있어. 헤파이스토스한테 후원 해달라고 하면 돼. ]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성좌명 '화산의 대장장이'.
신들의 무기와 장신구를 만들어 준 전설적인 대장장이다.
그런 성좌라면 영혼 랜턴을 고칠 도구도 가지고 있겠지.
아마 듣고 있을 것 같은데.
『 성좌 '이계 규율'이 후원을 기대합니다. 』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고개를 젓습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째째함에 실망합니다. 』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분노 합니다. 』
말을 꺼내기도 전인데 성좌들끼리 난리가 났다.
전설의 증표로 교환하는 건 아직 안 되는 것 같고.
'아쉽지만 뭐.'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 성좌 '화산의 대장장이'가 미션을 제안합니다. 』
- 난이도 : 전설 이상
- 목표 : 환상종 케로베로스 처치 0 / 1
- 보상 : 적혈(赤血) - 불카누스의 보조 망치
미션이 떠올랐다.
시스템이 개방되며 새로 생긴 기능인가.
케로베로스를 못 잡을 것 같진 않은데.
이러면 그냥 주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 성좌들의 성격은 각자 다양하거든요. 주시성은 성좌당 1명만 등록할 수 있기도 하고. 제안을 하긴 애매하니 간을 보겠다는 거죠. ]
[ 오히려 좋아. ]
[ 아니면 다른 의도가 있을 수도 있는데······. 크게 상관 없을 것 같습니다 .]
날로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수리 도구로 랜턴을 고치면, 당분간 즉살 초기화권 수급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다.
괜히 의욕이 생긴다.
"주인."
일행의 뒤를 따라가던 가브리엘이 내게 물어왔다. 조금 들뜬 목소리였다.
"멍멍이 잡아서 길러도 돼?"
멍멍이?
설마 케로베로스를 말하는 거냐.
루시퍼가 정색하며 답했다.
"멍청아, 현 시점에서 환상종은 길들일 수 없다. 그리고 살려두면 주인님의 보상이 사라지잖냐."
"이름은 케로로 정했어."
그 이름은 좀······.
그때였다.
우뚝.
유적을 나아가던 사최헌이 돌연 자리에서 멈춰섰다.
"뭐야, 왜 잘 가다가 멈추고······."
"온다. 알아서 막아라."
저 멀리 녹색의 횃불이 일렁거리는 중앙 공동.
보랏빛 불꽃이 파도처럼 밀려 오고 있었다.
타앗.
가브리엘이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가며 순백의 날개를 둘렀다.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불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오, 나이스."
"루시퍼, 지금부터 케로베로스의 영역이다. 그리고 무명."
사최헌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케로베로스의 공격은 일반적인 마수를 생각하면 안 된다.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보스니."
"거기에 주인님 없는데."
"······."
사최헌은 루시퍼를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을 거다. 케로베로스가 지친 타이밍에만 한시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 있을테지."
"뭐야, 그걸 어떻게 알아?"
"어느 유물을 조사했다. 다른 세계에서 흘러 들어 온 유물의 일부에 적혀 있던 사실이다."
그 말을 들은 가브리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온다!"
그러나 자세히 물을 시간은 없었다.
콰아앙—! 콰과과과—!
보랏빛 마력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창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으니까.
눈으로만 봐도 엄청난 공격이었다.
사최헌과 루시퍼는 미친듯이 뛰어다니며 창들을 피했고, 가브리엘은 허공으로 떠올라 날개로 창들을 튕겨냈다.
[ 난 전설+급. ]
빗발치는 공격 속에서도 가브리엘은 여유로웠다.
[ 그렇게 여유로우면 앞에서 와서 막아주던지! ]
[ 가브리엘님 부탁합니다라고 해야지. ]
[ 그렇겐 죽어도 못하지. ]
물론 그렇다고 루시퍼에게 공격이 버거운 것은 아니었다.
주변의 바닥이 초토화 되었지만 루시퍼와 사최헌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았으니까.
"이틈에 전진하지."
"잠깐."
"뭐지?"
루시퍼의 부름에 사최헌이 뒤돌아봤다.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는데. 아무래도 지금 말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뭐지?"
"네 입장에서 미친 소리 하나만 하겠다."
"······?"
사최헌이 미간을 찌푸렸다.
[ 현재 주인님은 던전 바깥에 계십니다. 그 말은······. ]
그 이야기를 할 줄 알았다.
현재 사도들과 나는 다른 공간에 있다.
즉살은 아마 통할 것이다. 거리 제한이 없으니까.
하지만 중요한 게 하나 남았다.
[ 경험치를 획득하실 수 없다는 거죠. ]
그 말대로다.
경험치는 얻지 못한다.
경험치를 얻으려면 같은 차원에 있어야 한다. 던전은 분리된 차원으로 취급되는 듯 했고.
까마귀가 된 루시퍼와 함께 던전을 공략했던 이유기도 하다.
"시간이 없다. 뜸들이지 말고 말해라."
사최헌의 재촉에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케로베로스를 바깥으로 꺼낼 거다. 한마디로 의도적인 던전 브레이크지."
그 미친 소리에 사최헌 헌터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안봐도 뻔했다.
30화 환상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