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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 20-25

20화 소규모 기적

약 10분 전.

슈우우—!

[ 이거 상당한 크기네요. 거리가 있는데도 이만한 크기라니. ]

까마귀로 변신한 루시퍼는 죽음의 물결이 활성화 된 장소로 향했다.

도시 하나를 뒤덮은 흑색의 장막.

밤하늘처럼 새까만 겉표면 때문에 바깥에선 내부를 살필 수 없었다.

루시퍼의 아래쪽에는 상당수의 길드가 모여 있었다.

"우리가 진입 해도 되는 거 맞아? S급들도 사전 미션에 실패했다면서."

"대기해.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와. 협회의 지시를 기다리자."

"우리 길드도 대기다."

대부분의 길드가 진입을 꺼리고 있었다.

"죽음 물결이 시작됐으니 내부는 마수들로 득실거릴 거야."

"성급하게 들어갈 게 아니야. 이럴 때일수록 침착하게······."

내부의 상황을 아예 알 수 없는 데다가, S급들이 사전 미션에 실패하며 죽음의 물결이 심화되었다.

안에선 어떤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을지 짐작할 수 없으니.

[ 음······. 이 장막 말인데요. ]

장막을 유심히 지켜보던 루시퍼가 내게 말했다.

[ 외부와의 통신을 차단하는 형태네요. ]

"그러면 시야 공유도 해제되는 건가?"

내 물음에 루시퍼는 단박했다.

꽤 자랑스러운 듯한 목소리였다.

[ 그 부분은 문제없습니다. 제 능력은 위계가 다르거든요. 간단히 말하자면 차원이 다른 거죠. ]

장막에 들어가도 시야 공유는 끊기지 않는단 거다.

그렇다면 안심이다.

출발해라, 루시퍼.

[ 진입하겠습니다. ]

푸화악-!

루시퍼가 연기 같은 흑색의 장막을 뚫고 들어갔다. 도시의 상공에서 전체적인 상황이 한눈에 들어왔다.

도시 전체가 잿빛에 휘감겨 있었다. 그런 무채색의 도시 곳곳에 마수들이 득실대고 있었다.

그어어······.

크르르······.

일일이 세는 게 불가능한 수였다. 심지어 그런 놈들이 순찰대처럼 무리 지어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와, 장난 아니게 많네.'

그때 루시퍼가 내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 저쪽에 엄청난 수의 마수가 몰려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번 가볼까요? 상당한 경험치가 될 겁니다. ]

그중에서도 마물들이 특히 모여 있는 장소가 있었다. 벌레처럼 우글우글 거린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로.

[ S급 헌터도 하나 있네요. ]

슈우우—.

까마귀는 날개를 펼치고서 마수들이 득실대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친 듯이 마수를 학살하는 S급 헌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콰앙—! 콰앙!

작은 키에 인상적인 보랏빛 마력.

마법과 검술이 혼재한 전투 방식.

'천이령 헌터잖아.'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S급 랭킹 3위에 도달한 천재.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얼굴이었다.

[ 저 인간이 주변의 마수들을 여기로 끌어 온 것 같습니다. 몰이사냥이라도 하는 걸까요? ]

루시퍼는 사람의 모습으로 변했다. 품 안에서 빵봉투를 꺼내 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얼굴이 팔리면 이후가 귀찮으니.

'······사냥 중이라고?'

루시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했지만, 내가 보기엔 엄청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는 것 같은데.

"잠깐, 사냥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사냥이겠냐?

S급 헌터들은 사전 미션에 실패했다.

느긋하게 사냥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다.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두르는 천이령 헌터의 모습엔 여유가 없었다.

[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

어쩌긴 뭘 어째.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단 도와."

[ 알겠습니다. ]

내 말과 동시에 루시퍼는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콰아아앙—!

루시퍼의 마도광선이 마물의 무리를 덮쳤다.

* * *

그리고 다시 현재.

스으으······.

도로는 초토화 되었고 근처의 마물들은 전부 증발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레벨이 세 번 올랐다.

이제 내 레벨은 53이다.

이 구간부터 레벨을 올리기 정말 힘들다고 들었는데.

'이 속도면 순식간이겠네.'

그때였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천이령이 휙 뒤를 돌아봤다. 입술을 살짝 깨문 천이령이 루시퍼를 향해 다가왔다.

뭔가 마음에 안 들었나?

설마, S급 헌터인 자신이 처음 보는 사람한테 구해져서 상처를 입었다거나.

무슨 말이 나올까 살짝 긴장한 그때.

천이령은 말했다.

"무명, 진짜 무명이에요?!"

천이령은 눈을 반짝이며 루시퍼를 향해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루시퍼는 빵 봉투를 쓴 채 침묵했다.

[ ······이 꼬맹이 뭔가 착각하고 있나 본데요. 뭐라고 답할까요? ]

루시퍼를 보고 무명이라고?

잠깐 당황하긴 했지만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그럴 수 있어.'

천이령 입장에선 그리 보일만 했다.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천이령 [ 524 점 ]

- 2위 : 무명(無命) [ 314 점 ] (New!)

- 3위 : 김석호 [ 302 점 ]

- 4위 : 강지연 [ 250 점 ]

내게도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판이 떠올라 있었다.

루시퍼가 잡은 마수는 내가 잡은 것으로 카운트된다.

루시퍼가 마수를 없앨 때마다 무명의 점수가 쑥쑥 올라가니 누가봐도 '루시퍼 = 무명' 공식이 성립할 수밖에.

'괜찮겠지.'

딱히 착각한다고 나쁠 건 없다.

무명(無命) 자체는 신비주의일 필요가 없다. 내 신상이 밝혀지지 않는 게 중요한 거지.

"우선 네가 무명인 걸로 하고, 상황부터 파악하자. 참고로 저 사람은 랭킹 3위 천이령 헌터야."

[ 알겠습니다.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

장막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알아내야 했다.

"인간, 아니 천이령 헌터. 지금 상황이—."

루시퍼가 질문을 던지려는 그때.

"저 완전 팬이에요. 영상 백 번도 넘게 돌려 봤어요. 진짜 리스펙트. 싸인 한 번만 해주면 안 돼요?"

천이령은 주섬주섬 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 내밀었다. 그것을 잠시 바라보던 루시퍼가 내게 물었다.

[ ······. 어떻게 할까요? ]

"대충 해주고 물어봐."

천이령 헌터가 무명의 팬이라니.

신기하면서도 멋쩍은 광경.

새삼 무명이 유명하긴 하구나 싶은데.

아니, 그보다.

둘 다 위기감이 너무 없는 거 아니야?

루시퍼는 종이를 받더니 슥슥 무언갈 적었다. 알 수 없는 글씨였지만 얼핏 보기엔 멋드러진 싸인이었다.

"오오, 감사합니다! 설마 무명의 싸인을 받은 건 내가 처음인가?"

싸인지를 받아든 천이령은 믿기지 않는지 자기 볼을 꼬집어보기까지 했다.

루시퍼는 질린 듯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지금 상황은 어떻게 된 거지? 사전 미션 실패?"

"아, 네. 알려드릴게요."

천이령은 싸인지를 품에 넣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S급 헌터들이 실패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마수들이 조직적으로 대피소를 습격하는 바람에 온전히 미션에 집중 할 수 없었어요. 처치해야 하는 엘리트 마수들은 절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요."

그리 말하는 천이령은 이를 악물고 있었다.

"방금도 대피소 근처에 과도하게 모여든 마물들을 제가 끌고 왔던 거에요. 문제는······."

그어어—!

크르르······.

도로를 통해 마물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천이령은 한숨과 함께 단검을 들어 올렸다.

"죽음의 물결이 이제 시작이라는 거죠."

"그래. 이해했다."

루시퍼는 짧게 답하고선 손을 우두둑 꺾었다.

[ 아무래도 다른 누군가가 죽음의 물결에 개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각성자일 수도 있고, 다른 존재일 수도 있습니다. ]

"찾을 수 있겠어?"

주변을 크게 한 번 둘러본 루시퍼가 혀를 찼다.

[ 마물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그 속에 숨어 있는 거라면 분간이 어렵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

루시퍼의 시선이 근처의 건물 너머로 향했다.

쿠구구구.

땅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첫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

『 충분한 수의 마수를 제거하지 못하면 죽음의 물결이 더욱 심화됩니다. 』

그와 동시에 천이령이 들고 있던 특수 무전기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치직, 치지직!

- 천이령, 천이령 헌터. 괜찮아?

"어, 언니?!"

- 대피소로 말도 안 되는 수의 마물들이 오고 있거든?! 가능하면 도움······.

쿠우웅!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굉음과 함께 묻혀버렸다.

메시지를 받은 천이령의 얼굴이 굳어졌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천이령이 고개를 들어 루시퍼를 바라봤다.

"무명 헌터님. 도와주실 수 있나요?"

현재 대피소는 실시간으로 습격받고 있다.

바깥의 길드들은 진입을 망설이고 있고.

들어왔다고 한들, 마수의 물결에 압도당할 거다.

'규모가 상상 이상이야. 하지만······.'

루시퍼의 시야 속 마물들의 레벨이 보인다.

[ Lv.52 ]

[ Lv.55 ]

[ Lv.62 ]

[ Lv.59 ]

···

[ Lv.64 ]

현재 이곳에 나타나는 마물들의 레벨은 50초반부터 60 중반까지.

그리고 지금 내 레벨은 54다.

레벨을 60까지 올리기만 한다면······.

나 혼자서 대부분의 죽음의 물결을 정리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답은 나왔다.

"돕자."

대피소를 지키고 마수 웨이브를 막아 레벨업을 하기로.

* * *

13번 대피소.

콰앙! 치이익!

어디선가 날아온 독액이 특수 무전기를 박살 냈다.

"이런."

"누님,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아."

S급 헌터 강지연은 부서진 무전기를 버리고서 창을 들어 올렸다.

"신경 쓰지 말고 마수부터 막아!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예, 누님!"

강지연 헌터가 동료에게 소리쳤다. 그녀의 현란한 창술이 눈앞의 마수들을 도륙 냈다.

그러나 끝이 없다.

베어내도 베어내도 놈들은 끝없이 돌진해 왔다. 고블린, 오크, 늑대, 놀, 지네 마수······.

퉤엣-! 퉤엣-!

심지어 뒤쪽에 자리를 잡은 벌레 마수가 독액을 박격포처럼 쏘아내고 있었다.

치이익! 치익!

지독한 산성 독액이 대피소의 외벽을 녹였다. 장비가 갖춰져 있다고는 하나 귀찮기는 마찬가지였다.

'큭, 앞이 잘 안 보여.'

놈들은 대피소의 입구를 노리고 집요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야. 죽음의 물결이 뭐 이래? 이딴 걸 대체 누가 하라고······.'

꽉 깨문 강지연의 입술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고작해야 C급 언저리인 마물들을 상대로 고전하고 있다니.

허나 마수들이 평범하지 않다.

놈들에게 스며든 음습한 기운 때문인가?

"말이 되냐고! 잡몹들이 세기는 오지게 세다니까?!"

최근 들어 시스템의 이상현상이 빈번하다던데.

이것도 그런 맥락일지도 몰랐다.

"누님, 지원이 올 때까지만 버텨봅시다!"

"큭, 올지 안 올지도 모르는 지원?"

지원이 와도 오히려 휩쓸릴지 모른다.

S급인 자신들도 고전하는 난이도니.

"올 수 있는 S급들은 이미 다 여기에 있을걸. 게다가 사최헌이라도 오면 모를까. 결국 우리가 버텨야 해!"

콰과과—!

강지연의 창이 회전하며 눈 앞의 마수들을 갈아냈다. 잠시 동안 길이 생겨났지만, 금방 새로운 마수들로 막혀버리고 말았다.

'큭.'

지원이 온다고 이 마물의 파도를 뚫을 수 있을 리가.

어중간한 지원으론 무의미한 희생만 늘어날 거다.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죽음의 물결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24시간만 버티면 된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장막은 걷히고 마수들의 생성도 멈출 것이다.

숨을 들이마신 강지연이 창을 크게 뻗으려는 찰나.

"?!"

콰아아아—!

공중에서 쏟아진 흑색의 마력 줄기가 땅을 갈랐다. 산산조각난 마수들의 살점이 미친 듯이 튀어 올랐다.

"누, 누구?!"

강지연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빵 봉투를 쓰고 있는 남자 하나.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분명했다.

저 남자가 마물들을 소각했다.

콰앙-! 콰아앙!

몇 번 더 시원하게 쏟아진 마력 광선 앞에 마물들은 사정없이 녹아내렸다.

"언니! 괜찮아요?!"

얼떨떨한 강지연의 앞으로 천이령이 뛰어왔다. 천이령은 들뜬 표정으로 강지연에게 말했다.

"언니, 저 사람. 무명이에요!"

"어? 뭐?"

"랭킹 못 봤어요?"

정신이 없어서 기여도 현황을 살필 시간도 없었다. 시스템의 현황판은 살핀 강지연 헌터의 눈이 커졌다.

"진짜잖아······."

그야말로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사실 영상 속에서 봤던 것하곤 조금 달랐다.

폭발하듯 마수를 처치한 영상과 다르게 루시퍼는 마도 광선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런 걸 신경 쓸 정신이 아니었다.

실제로 현황판의 점수는 올라가고 있었으니까.

"누님, 저게 뭔 괴물이랍니까."

"그러게."

사최헌 헌터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마물들이 그야말로 낙엽처럼 쓸려갔다.

보는 사람의 속이 다 시원할 정도로.

강지연과 그의 동료는 어처구니가 없단 표정으로 루시퍼의 사냥을 지켜보았다.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아, 13번 대피소 근방의 마수들의 씨가 말랐다.

저벅, 저벅.

땅으로 내려온 루시퍼가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여전히 빵봉투를 머리에 쓴 채였다.

"가, 감사합니다."

"무명 헌터님. 덕분에 한숨 돌렸습니다."

그러나 빵봉투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뭔가 이유가 있는 아이템이겠지 넘겨짚을 뿐.

스윽.

루시퍼는 천천히 다가와 조용히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 모습에 강지연 헌터와 천이령이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의미지?

돈이 필요한 건가?

혹은 아이템?

강지연 헌터가 다급하게 주머니를 뒤지려는 찰나.

"먹을 거 없나?"

빵봉투 속의 루시퍼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나는 눈앞에 떠오른 메시창을 확인했다.

이로써 레벨은 57.

엄청난 속도의 레벨업이었다.

마수들이 많이 나오는만큼 경험치가 오르는 속도도 차원이 달랐다. 월드 보스를 잡은 게 아닌데도 이 정도 속도라니.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빠른 성장에 만족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

'······다른 헌터들은 레벨 올리기 엄청 힘들겠는데.'

RPG 게임을 생각하면 이해가 빠를지도 모른다.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몬스터를 잡아야 한다.

한 땀 한 땀 정성스럽게.

그것과 비교하면 나는 날먹이다.

이제 3레벨만 올리면 60이니까.

다른 대피소 한두 개만 돌아도 목표치가 달성 될 것 같다.

[ 주인님, 음식은 제가 스스로 섭취할테니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배를 어느 정도 채우면 바로 다음 대피소로 출발하겠습니다. ]

루시퍼는 근처의 편의점을 털고 있었다.

우적 우적.

도시락, 삼각김밥, 샐러드, 핫바 할 것 없이 전부 먹고 있었다.

이에 대한 비용은 S급인 강지연 헌터가 내준다고 했고.

- 처, 천천히 드셔도 돼요.

- 무전기로 연락했는데, 다른 대피소는 조금 여유가 있대요. 그렇게 급하게 안 먹어도······.

첫번째 웨이브만 버텨낸다면,

이후로는 다른 길드의 지원이 도착할테니 한결 수월할 거다.

'문제는 그 사령탑이란 놈인데.'

마물들을 조종하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

우선은 급한 불부터 끄고 루시퍼가 숨어 있는 놈의 기운을 찾아내는 게 최선이겠지.

'나도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할까. 아니면······.'

다음 계획을 생각하던 찰나,

잠시 잊고 있던 아이템이 떠올랐다.

'루시퍼가 마수를 엄청 사냥했으니 경험치 뿐만 아니라 영혼도 분명히 쌓였을 텐데.'

나는 인벤토리에서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 [ 성유물 ] 백(白):금이 간 영혼등 』

바로 그 순간이었다.

샤아아아—!

'윽!'

눈이 부실 정도의 백광(白光)이 랜턴을 향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섬광탄을 맞은 것처럼 시야가 하얘질 정도.

'뭐야.'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무수한 수의 영혼이 랜턴을 향해 모여들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소규모 기적이 발현 됩니다! 』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습득합니다. 』

『 두 번째로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

『 소규모 기적이 발현됩니다! 』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습득합니다. 』

그러한 환상적인 장면의 끝에서,

'한 번에 두 번 연속이 된다고?'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2 』

총 두 번의 기적이 발휘되었다.

21화 빌런

새하얀 빛무리 속에서 일어난 소규모 기적.

기적은 총 두 번 일어났다.

루시퍼가 처치한 영혼들이 순식간에 랜턴을 2번이나 채웠던 것이다.

샤아아—.

빛무리가 잦아들자 내부에 잠든 황금빛 티켓이 모습을 드러냈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2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을 1회 초기화합니다.

'효과 장난 아니네.'

지난번 F급 미궁 공략에서 얻은 것과 합하면 이제 초기화권은 총 3장이다.

즉살을 세 번 연속으로 사용할 수도 있단 거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행운에 감탄합니다. 』

만족스럽게 티켓을 주워 드는 그 순간이었다.

쩌저적-. 쨍그랑!

백색의 유리 부분이 파편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랜턴의 내구도가 다한 모양이다.

본래 금이 가 있었기도 하고.

"······아쉽네. 원래 몇 번 못 쓰는 거였겠죠?"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숫자 1을 표시합니다. 』

원래는 1번 정도였단 건가?

"그러면 운이 좋았던 거네요."

어쨌든 두 번 연속 터졌다. 한 번에 다량의 영혼의 모여서 가능했던 걸지도.

물론 이제는 사용이 불가능해 보인다.

'원형은 남아 있는데.'

잘하면 고쳐 쓸 수 있지 않으려나.

나는 괜히 아쉬워서 부서진 랜턴을 들어 올렸다.

"······혹시 이거 나중에 수리도 되나요?"

안 되려나?

너무 양심이 없긴 하다.

어쩔 수 없지라며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오."

진짜로 수리가 된다니.

역시 성유물이라 그런가 뭔가 달라도 다르다.

일단 가지고 있자.

자세한 수리 방법은 나중에 물어보면 되겠지.

그보다 다시 죽음의 물결에 집중해야 했다.

"루시퍼, 지금 상황은 어때?"

[ 아, 주인님. ]

내 말과 동시에 루시퍼가 시야를 공유해 왔다. 루시퍼는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날고 있었다.

[ 이제 몇 번 정도는 여유롭게 전투가 가능할 겁니다. 편의점에 있던 컵라면이 맛있던데요. 바삭바삭한 게. ]

"······그거 뜨거운 물 부어서 먹는 건데."

[ 젠장, 어쩐지. 이상한 눈으로 보더라. 왜 아무도 말을 안 하지. ]

아무래도 루시퍼가 받았다던 현세의 지식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게 분명하다.

[ 하여간 지금은 10번 대피소로 이동 중입니다. 위태로운 대피소부터 해결 하는게 나을 것 같아서요. ]

그리 말하는 루시퍼의 뒤쪽에서 천이령 헌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명 헌터님, 제가 전력으로 서포트할게요!"

"필요 없다니까."

"아뇨,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저 랭킹 3위 천재 헌터 천이령입니다!"

천이령은 당차게 소리치며 루시퍼의 뒤꽁무니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딱히 떼어놓을 이유도 없다.

천이령 헌터는 강자다.

있으면 도움이 될 거다.

[ 솔직히 별로 필요 없습니다. ]

반면 루시퍼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 S급 헌터들이 제 생각처럼 강하지 않더군요. 왜 그런가 생각해 봤는데, 사최헌 그놈이 일반 S급 헌터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한 거였습니다. ]

사최헌은 랭킹 1위다.

국제적으로도 통용되는 실력이긴 한데.

역시 압도적이라고 말할 정도인가.

[ 사최헌하고 비교하면 여기 있는 인간들 전부 가소로운 수준입니다. 일단 나타난 마수부터 정리하겠습니다. ]

그어어—!

크르르르!

10번 대피소는 건물의 주차장과 이어져 있었다.

다수의 마물들이 그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누군가의 명령을 받은 것처럼 체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콰앙! 콰아앙!

루시퍼는 주저하지 않고 마도 광선을 발사해 마물을 제거해나갔다. 뒤쪽에서 따라붙은 천이령 헌터도 마력 탄환을 난사했다.

투두두두!

두 명의 총공세에 마수 무리가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놈들의 피와 살점이 주변으로 비처럼 쏟아졌다.

'좋아.'

나는 눈을 의식적으로 꾹 감았다 떴다.

얼마 전에 알아낸 공유 시야에서 벗어나는 방법이었다.

'경험치는 확실하게 오르고 있다.'

직접 확인한 시스템 창에서 경험치가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금방 60레벨이 될 거다.

약 십 분 후.

루시퍼와 천이령 헌터의 활약에 힘입어 근처의 마물들이 깔끔하게 제거되었다.

"와······. 지, 진짜 무명이십니까?"

"요즘 화제의 헌터한테 도움을 다 받아보네. 감사합니다."

"찐 무명은 다르다니까요. 제가 데려왔어요."

10번 대피소를 지키던 두 명의 S급 헌터가 감사 인사를 표했다. 천이령도 옆에 서서 괜스레 자랑스러운 듯 가슴을 폈다.

[ 바로 다음으로 이동하겠습니다. ]

"쉬, 쉬지도 않고 가는 거에요?!"

무전으로 들었던 위급한 대피소가 두어개 더 있었다. 루시퍼는 옷에 넣어뒀던 초코바를 집어 삼키며 나아갔다.

7번 대피소.

콰아앙—!

"미, 미친 진짜 무명입니까?!"

"와, 화력 개쩌네. 팬임다, 무명님!"

3번 대피소.

콰앙! 콰아앙!

"허억, 허억······. 덕분에 살았습니다."

"저희 쪽은 상성이 안 좋았는데. 감사합니다."

S급 헌터들은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맨날 TV로만 보던 사람들을 마주하니 기분이 색다르네.

일단 한숨 돌릴 틈은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이 사태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우에엑······. 진짜, 이제 진짜 못 움직이겠거든요."

루시퍼를 뒤따라오던 천이령 헌터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퍼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우적, 우적.

루시퍼는 에너지바를 씹어 먹으며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 주인님, 제 시야를 봐주시죠. ]

루시퍼의 시선이 향한 장소는 도시의 중심부였다.

높게 올라선 빌딩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빌딩 하나.

'와, 무슨 마수가······.'

그곳에 어마어마한 수의 마수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마치 벌레 떼가 달라붙은 것처럼 말이다.

[ 슬슬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루시퍼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 마물들의 수가 많아지면 으레 등장하는 마물의 둥지입니다. 마물들을 조종하는 자도 저 내부에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

지금 이 사태는 마물들이 대피소를 조직적으로 공격하며 생긴 것이다.

마물의 사령탑을 제거한다면 이후의 죽음의 물결을 수월하게 풀어갈 수 있겠지.

나는 지나간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Lv.57 → Lv.60 』

『 일일 성장치가 최대에 달했습니다. 』

최대 레벨은 이미 달성되었다.

약자멸시를 사용하면 대다수의 마수를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범위 제한 때문에 내가 현장에 도착해야 가능하겠지만.

"으아······. 저 할 말이······. "

루시퍼의 시선에 천이령 헌터가 들어왔다.

굉장히 지쳐 보이는 모습.

무어라 중얼거리는데 잘 안 들린다.

그냥 두고 가긴 그런데.

"루시퍼, 천이령 헌터한테 먹을 거라도 좀 줘."

[ 음······. 알겠습니다. ]

투욱.

루시퍼는 선심 쓰듯 바닥에 초코바를 던졌다. 그걸 바라본 천이령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니, 공손하게 줬어야지."

[ 헉. 죄송합니다. 주인님. 다, 다시 줄까요? ]

기분 나쁘다고 화내는 거 아니야?

랭킹 3위의 천재 헌터 천이령이다.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을지도.

루시퍼에게 무어라 명령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덥썩.

천이령이 초코바를 쥐어들었다.

"감사합니다! 먹고 힘낼게요."

천이령 헌터의 눈동자는 반짝이고 있었다.

환한 미소와 함께 감사의 인사까지.

그걸로 괜찮은 거였나?

[ 이상한 꼬맹이네요. 잠재력은 꽤 있어 보이긴 하는데. 그보다 마수들이 점점 많아지네요. 지금 이 순간에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

루시퍼는 그리 말하며 도시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마수들이 우글우글한 빌딩.

마수들의 둥지.

저곳에 사령탑이 있으리라.

레벨은 충분히 올렸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는 없었다.

"가보자."

나는 루시퍼에게 말했다.

* * *

마물들로 점철된 빌딩의 옥상.

츠즈즈즛!

츠즈즛!

그 상공 또한 날벌레 마수들로 새까맣게 뒤덮여 있었다.

수많은 날벌레 마수들이 모여든 모습은 마치 검은 안개와 같았다.

"하아, 그래. 이런 게 힘이지. 힘이고 말고."

그러나 옥상의 정원만큼은 깨끗했다. 벌레들은 질서 정연하게 정원의 바깥만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원의 중심.

빌런 한종우가 있었다.

사사삭-!

사사삭-!

한종우의 몸 위를 수십 마리의 지네 마수들이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한종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모를 거다."

오히려 양팔을 벌린 채 자신의 힘에 취해 있었다.

마물 사역(魔物使役).

지상에 존재하는 마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부릴 수 있는 한종우의 고유 능력이었다.

눈을 감으면 생생히 느껴졌다.

도시 전체에 존재하는 마물들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둥지 속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마물이.

그는 이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물결, 이곳이야말로 내게는 천국이지.'

마수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은 실로 유용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헌터들을 농락하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그러나 마물사역의 능력은 생각보다 유용했다.

사고로 위장해 아이템을 빼앗는 것이 좋았다. 마물을 조종해 타인을 죽이고 보험금을 타내는 것이 좋았다. 능력으로 헌터들의 우위에 서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마물을 조종할 수 있는 자가 가장 활약하기 좋은 장소는 어디인가.

바로 죽음의 물결이었다.

마수가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만큼 한종우의 힘은 강해진다.

"각성자 연합 놈들은 멍청한 짓을 했어."

굳이 눈에 띄는 악마 강림에 손을 댔다가 화를 입지 않았던가.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다.

세계는 스스로 멸망하고 있었다.

법과 윤리가 붕괴하고 기존의 권력이 새롭게 재편성 될 것이다. 멸망한 세계의 왕이 되는 것은 결국엔 각성자이리라.

"나는 참 운이 좋단 말이지."

한종우는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이러한 비밀은 스스로 알아낸 게 아니었다. 지명 수배당해 은둔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온 자가 알려준 사실이었다.

- 이 세계는 붕괴하고 있다. 힘의 조각을 남겨두겠다. 신시대의 왕이 될 그대를 위해서.

그 남자에게서 받은 힘의 조각이 만들어낸 효과는 대단했다.

A급 정도에 머물던 한종우의 힘이 S급으로 증대되었다.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파직, 파지직—!

검은 마기가 한종우의 전신을 휘감기 시작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전능감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른바 마인화(魔人化).

그는 인간이기를 저버리고 힘을 선택했다.

"아주 좋아. 좋고말고."

그 결과는 심히 만족스러웠다.

인간성을 대가로 도시 전체에 이르는 마수들을 제어하게 되었으니까.

만족스럽게 도시를 바라보던 한종우가 가볍게 손짓했다.

츠르릇.

사마귀를 닮은 마수 하나가 시민 하나를 끌고 왔다. 이어서 서른 마리에 달하는 벌레 마수들이 시민들을 물고 왔다.

"사, 살려주세요······."

"제, 제발 부탁드립니다."

"엄마, 엄마······."

흐느끼는 인질들을 바라보며 한종우는 미소지었다. 그는 죽음의 물결 현황판을 쓱 둘러 본 뒤, 인질 중 하나를 끌고 왔다.

"무명이 나타났다. 너희들에겐 잘된 일이지. 안 그래?"

"무, 무명······."

그 말을 들은 시민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참 대단하더군. 대피소 네 개를 거의 혼자 처리했으니까. 다른 헌터들과 비교해도 정말 강해. 어떤가 이제 좀 희망이 드나?"

"제발, 제발······."

"끌끌끌."

한종우는 비웃음과 함께 공포에 질린 시민 한 명을 벌레 마수들의 앞에 던졌다.

콰득, 콰드득.

벌레들이 사람을 뜯어먹는 섬뜩한 소리. 그마저도 상공에 있는 벌레들의 날갯짓 소리에 금세 묻혀버렸다.

한종우는 뒤쪽의 인질들을 향해 선심 쓰듯 말했다.

"좋은 소식을 들려줄까? 무명 그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벌레들의 시야를 통해 한종우는 도시 전체의 일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무명이 온다.

좋은 소식이었지만 거기에 반응하는 인질은 없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고 있을 뿐.

"유감스럽게도 무명은 죽을 거다. 사최헌이 와도 마찬가지야. 이 마수의 군세는 지구상의 누가 와도 막을 수 없고말고."

한종우는 건물의 난간 위에 올라섰다.

"마물의 군세는 전국으로 퍼져나갈 거고······. 세계가 멸망하면 더욱더 많은 마물들이 내 휘하로 들어오겠지."

양팔을 펼친 한종우가 마물들을 향해 전투 명령을 내렸다.

"와라, 무명! 상대해주마."

그 한마디에 건물 전체를 감싸고 있던 무수한 벌레 마수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츠즈즈즛!

벌레 마수들의 감각이 한종우에게 전해져 왔다.

무명은 허공을 날아 옥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빵봉투를 뒤집어쓴 이해할 수 없는 모습.

그러나 한종우는 겉모습만 보고 방심하지 않았다.

콰아아아······.

새까맣게 모여든 날벌레 마수들이 순식간에 무명을 둘러쌌다. 이것으로 무명의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사사삭—!

한종우의 턱짓에 몸 위를 기어 다니던 지네 마수들이 서로 모여 구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네 마수로 만들어진 방어막이 형성되었다.

"무명! 공격할 테면 해봐라! 옥상에는 30명의 인질이 있다. 네 놈의 공격에 인질들이 죽어도 괜찮다면 말이다!"

한종우는 그 안에서 마력을 담아 소리쳤다.

'이 우위는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책략에 자신이 있었다.

인간의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

헌터도 마찬가지다.

S급 헌터도 절대적인 초인은 아니다.

마력, 기력, 체력.

한정된 자원을 전부 소모하면 헌터라고 한들, 무능력한 인간에 불과하다.

반면 죽음의 물결은 끝없이 마수를 뱉어낸다.

대피소를 지키는 많은 수의 S급 헌터들도, 랭킹 3위인 천이령도 마수의 대군 앞에서 주저앉히지 않았던가.

무수한 마수를 사용한 소모전으로 간다면 무조건적인 승리가 가능하리라.

"이제 나를 막을 자는 없다!"

한종우는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 * *

막대한 수의 날벌레가 루시퍼를 순식간에 감쌌다.

위이이잉—!

츠즈즈즛!

벌레 마수들이 소용돌이치는 중심.

"어떻게 할까요, 주인님."

루시퍼는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투두두두······.

날벌레 마수들의 뾰족한 입이 끊임없이 루시퍼를 쪼아대고 있었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버티기 힘든 지속적인 공격.

팅, 팅, 팅!

물론 루시퍼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흑색의 날개를 펼쳐 마수들의 공격을 방어했다.

아프긴커녕 가렵지도 않은 수준이었다.

본인 말로는 일주일 동안 있어도 괜찮다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 저 놈 인질을 잡고 있다는데요. 큰소리치는 것치고는 비겁한 수를 쓰는 놈입니다. ]

루시퍼의 말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인질.

실제로 저 빌런의 전략은 유효했다.

루시퍼는 함부로 마력을 방출하거나 마도 광선을 쏠 수 없었다.

자칫하면 빌딩째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아니면 인질들이 크게 다치거나.

그대로 뚫고 나간다는 작전은 비슷한 이유로 불가. 한종우가 먼저 인질에 해를 가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빌런이······."

각성자의 힘을 이용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고 다니는 자들.

통칭 빌런.

엘리트 마수 같은 거였다면 빠르게 끝났을텐데. 인간이 되니까 오히려 까다롭다.

자칫하면 인질들이 목숨을 잃을 거다.

'이렇게 된 이상 방법은······.'

내가 직접 가는 건 어렵다.

저 정신나간 인간의 강함도 정확히 파악된 게 아닌데다가, 빌딩에 오르려면 루시퍼가 나를 데리고 날아다녀야 한다.

지금 내 수준으론 현장에 가도 짐덩이다.

애초에 시간 안에 저기까지 갈 수가 없다.

그러니 결론은 하나다.

[ Lv.64 ]

[ Lv.58 ]

[ Lv.61 ]

···

[ Lv.52 ]

루시퍼의 주변을 둘러싼 마수들의 레벨은 전부 65 이하.

현재 내 레벨은 60.

이미 충분히 레벨이 오른 상태이지만.

최대한 많은 수의 마수를 제거하는 게 안전할 거다.

"루시퍼, 잠깐만 기다려. 내가 해볼게."

나는 인벤토리에서 물약 하나를 꺼내 들었다.

『 경험치 비약 [ 유니크 ] 』

- 다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경험치 제한을 무시합니다.

은은한 노란빛을 띠는 액체가 담긴 포션병.

이런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 아껴두고 있었다. 필요한 때에 레벨이 부족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여기에 적힌 다량의 경험치가 어느 정도냐는 건데······.'

D급 미궁을 전설(傳說)급으로 공략하고 받은 아이템이다. 나쁘지 않은 수준일 거라고 믿는다.

딸칵.

물약의 마개를 열고서 원샷을 때렸다.

맛은 어느 음료수랑 비슷했다.

맛은 아무래도 좋다.

효과가 중요했다.

'부디.'

전신 위로 은은한 빛이 감돌기 시작했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빠르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그렇게 상승한 레벨은.

『 Lv.60 → Lv.66 』

6개.

죽음의 물결에 있는 모든 마수들보다 내 레벨이 높아졌다.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약자멸시로 모든 마수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하하하-! 무명! 네 놈은 그 안에서 죽는 거다!"

루시퍼의 시야를 통해 빌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력이 담겼는지 상당히 또렷하게 들려 온다.

[ 저 버러지가······. ]

'아직 끝이 아니야.'

그러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남았다.

스킬의 범위.

내 약자멸시는 나를 중심으로 100m까지만 통한다. 내가 직접 죽음의 물결로 향하지 않는 한 마수를 처치할 순 없다.

'하지만······.'

나는 인벤토리에 있던 아이템 하나를 꺼내 들었다.

『 악마의 눈 [ 레전더리 ] 』

- 일시적으로 스킬의 적용 범위를 '국가' 단위로 확장합니다.

이게 있다면 이야기 달라진다.

악마 벨리알을 처치하고 얻은 보상 '악마의 눈'.

나는 아이템을 손에 꽉 쥐었다. 둥근 눈동자의 촉감이 손 위로 전해진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무쌍을 기대합니다. 』

투철한 정의심 같은 건 없다.

목숨 걸고 빌런과 싸울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고,

다른 헌터들처럼 몸을 던져가며 사람들을 구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해결할 수 있는 위험을 두고도 모른 체할 만큼 무감하지도 않다.

콰득!

『 악마의 눈을 사용합니다. 』

『 '즉살 : 약자멸시'의 범위가 '국가' 단위로 확장됩니다. 』

『 이제 대한민국 전체에 당신의 스킬이 닿습니다. 』

약자멸시의 범위가 대한민국 전역으로 확장 되었다. 이제 내 능력이 닿지 못하는 장소는 대한민국에 없을 거다.

츠즈즈즛!

공유된 시야를 가득히 메운 벌레 마수들.

쉴새 없이 날개짓하는 마수들을 향해서 나는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어라."

22화 강함

- 가겠다.

무명은 그 말만을 남기고서 떠나버렸다.

무수한 마수들이 우글대는 빌딩을 향해.

미처 붙잡을 새도 없었다.

"잠깐······!"

천이령은 그 뒤를 따라가려고 했으나 미처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마수가 많은데 망설이지도 않는 거야?'

연이은 전투.

천이령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들 정도로.

무엇보다 천이령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무명(無命)의 뒤를 따라가 봤자 발목을 붙잡을 뿐이란 걸.

"으······."

카득.

천이령은 루시퍼가 던져 준 초코바를 베어 물며, 빌딩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을 부릅뜨고서 빌딩을 주시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가, 가버렸는데요?"

"아무리 무명이라도 마수가 저렇게 많은데······."

10번 대피소를 지키던 S급 헌터 두 명도 심각한 표정으로 루시퍼가 향한 빌딩을 바라보았다.

빌딩 전체를 뒤덮은 마물들의 수는 역대급이었다. 오랜 기간 헌터 생활을 해 온 S급 헌터들도 처음 보는 광경.

"심지어 이 마수 놈들. 레벨이랑 다르게 더럽게 강하다고요."

젊은 S급 헌터가 손에 묻은 마물의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아무리 사전 미션에 실패했다지만, 이건 너무 가혹했다.

이번 죽음의 물결에 등장하는 마수의 레벨은 50 - 60 수준. 그러나 S급인 그들도 수가 쌓이면 막는 데에 급급할 정도였다.

"우리도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나이든 S급 헌터가 미간을 좁혔다.

물론 현실적으론 어려웠다. 아직도 대피소를 향해 마수들이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죽음의 물결은 끝없이 마수를 뱉어낸다.

바깥에서 지원이 올 때까지 꼼짝없이 자리를 사수해야 했다.

"이령아, 너라도 가봐야 하는 거 아니냐?"

"아뇨."

젊은 S급 헌터의 말에 천이령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했다.

"아마 무명 헌터는 진짜 실력을 발휘하지도 않았을걸요."

"그래도 마물의 수가 저렇게까지 많으면······."

천이령은 빌딩을 주시했다.

영상 속 무명은 월드 보스를 단번에 처치했었다.

흑색의 마도광선 같은 건 쓰지도 않고.

그렇다면 이번에도 분명히 같은 힘을 보여줄 거란 확신이 있었다.

그때였다.

"마수들이 반응하기 시작했어요."

빌딩 근처에 있던 마수들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날벌레와 같은 마수들이 공중의 한 지점을 향해 떼거지로 모여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잡아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어, 위험한 거 아니에요?"

젊은 S급 헌터가 말했다.

단순한 전투가 아니었다. 공중에서 벌어지는 난투였다. 저만한 수에 둘러싸이면 시야는 차단되고 방향을 분간할 수 없게 된다.

"이럴 게 아니라—."

S급 헌터가 특수 무전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천이령은 그 손을 막았다. 두 눈은 여전히 빌딩에 고정한 채로.

지금.

지금이었다.

천이령의 눈동자가 주변의 풍경을 빨아들일 듯 이채를 띄는 바로 그 순간.

푸화아악—!

날벌레 떼처럼 달려들었던 마수들이 일제히 가루가 되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어?!"

"무슨······."

저 하나 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이자, S급 헌터들을 몰아세웠던 마물.

그 수많은 마물들이 빌딩의 높은 곳에서부터 빠르게 산화해 간다.

콰아아아—!

항거할 수 없는 죽음의 폭풍이 빌딩 전체를 휩쓸었다.

어지럽게 산개한 마수들이 일시에 무(無)로 되돌아가는 광경.

키이에엑-!

그아아아-!

지상을 채우고 있던 마수들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마수들은 자신들의 울음소리와 함께 최후를 맞이했다.

"······."

천이령은 그 모든 광경을 두 눈에 생생히 담았다.

언젠가 영화에서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다.

잿빛의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수많은 생명체들. 그 허무하면서도 경이로운 상황이 지금 여기에 재현되고 있었다.

마수들로 득실거렸던 빌딩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기까지 걸린 시간은 1분 남짓.

꿈을 꾸나 싶을 정도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뭐, 뭔······."

"이게,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S급 헌터 둘이 말을 더듬을 정도.

이들 뿐만이 아니라 다른 대피소의 헌터들도 비슷한 반응이리라.

이윽고 산산조각 난 마수의 조각들이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실려 도시를 덮쳤다.

후두두두······.

비처럼 쏟아지는 마수들의 파편. 놈들의 피와 체액 또한 도시 전역에 흩뿌려져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 모든 것을 응시한 천이령이 중얼거렸다.

"이게 진짜 무명의 힘·····."

압도적인 강함.

그녀가 꿈꿔왔던 이상적인 강함이 여기에 있었다.

* * *

무수한 수의 벌레 마수들이 산화되어 흩어진다. 살아 움직이던 생명체들이 먼지와 다름없는 무기물이 되어 쓸려나갔다.

"뭐······?"

그 상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빌런 한종우였다.

마물 사역자 한종우.

"아니, 이럴 리가. 이럴 수가 있나······?"

그의 눈동자가 커졌다.

한종우는 마물들이 사라져가는 것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 모든 마물을 조종하고 있었던 그였기에 가능한 일.

이 참상 전체가 더욱 확실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이런 일이 가능하다고······?'

빌딩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마물의 둥지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자신의 군대나 다름없던 놈들이 전부 사라졌다.

무명 저놈이 무언가를 했단 건 분명하다.

그러나 규모가, 범위가 차원이 달랐다.

'어떻게, 어떻게?'

인질들이 있는 빌딩은 조금의 피해도 입지 않았다. 그 많던 마물들을 죽이면서도 주변에는 일절 피해를 주지 않은 것이다.

"그래봤자 인질을 구하진······."

한종우는 급하게 인질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인질들 주위에 명령할 마수가 하나도 없었다.

옥상에 있던 사마귀 마수들 모두가 산산조각이 나서 땅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주강혁의 약자멸시의 기능 중 하나인 '분류' 덕이었다. 광범위한 공격에 이은 두번째 기능이었다.

이미 공중의 마수들을 처치하며 시험까지 끝낸 상황.

주강혁에겐 인간을 제외한 마수의 처치가 어렵지 않았다.

"무, 무명—!"

악에 받친 한종우가 벌레로 된 보호막 속에서 소리쳤다. 그의 눈은 돌아가기 직전이었으며, 입가에는 피거품이 맺혀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랭킹 1위의 사최헌이 오더라도.

이런 식으로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세계를 뒤덮었을 마물 군단이 고작 한순간에 증발한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개같은 새끼가!"

한종우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루시퍼가 있었다. 루시퍼는 허공에 유유히 떠올라 한종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끄럽군."

경멸이 담긴 음색이 한종우의 귓전을 때렸다. 8할 이상의 전력을 한순간에 잃어버린 한종우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무슨, 무슨 짓을 한 거냐 도대체!"

콰아앙!

한종우에게서 강한 마기가 터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빌딩의 최하층에 숨겨져 있던 날벌레 떼가 상층부를 향해 쇄도해왔다.

루시퍼는 가볍게 고개를 내려 마수를 확인했다.

많은 동작은 필요 없었다.

그저 시야 속에 마수를 담을 뿐.

푸화아악-!

수백 마리로 이뤄진 날벌레 마수의 군집이 한순간에 격파되었다.

"끄허어······."

그 광경을 목격한 한종우가 숨넘어갈 듯한 소리를 냈다.

압도적인 걸 넘어 파멸적인 격차.

"더 숨겨 둔 마수는 없나?"

루시퍼는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빵봉투 속의 눈동자가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빨리 불러. 죽기 싫으면."

주인 주강혁은 레전더리급 아이템 악마의 눈을 사용했다. 해당 아이템에 의해 스킬의 범위가 전국으로 확장된 지금.

루시퍼의 시야에 닿는 모든 장소가 '즉살:약자멸시'의 범위였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어······!"

한종우의 발악.

츠즈즈즛-!

건물 속에 숨어 있던 날벌레 마수들이 일제히 날아 올랐다. 루시퍼를 향해 쇄도하는 날벌레들.

그러나 소용없었다.

푸화악-!

푸화악-!

루시퍼가 가볍게 주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마지막까지 긁어모았던 마수들이 전멸.

"끄허어어······."

한종우가 경련하며 쇳소리를 뱉어냈다.

"끝?"

"우, 웃기지 마! 아직 안 끝났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

일반인들 따위 마수가 없어도 직접 없애버리면 그만이다.

물론 루시퍼가 그 모습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어딜!"

쾅!

번개처럼 쇄도한 루시퍼의 발차기가 한종운의 벌레 보호막을 강타했다. 한종운은 보호막과 함께 옥상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크허억!"

방어막을 뚫고 들어오는 충격에 한종운의 입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루시퍼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인질의 안전이 확보된 지금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없었다.

콰앙! 콰아앙!

마도광선이 벌레 보호막을 연달아 강타했다. 허공에 떠올랐던 한종우는 보호막째로 지면에 처박혔다.

쿠웅!

루시퍼의 마도 광선은 멈추지 않았다.

콰아앙—!

한 번에 30%의 방어막이 날아갔다.

콰아앙—!

60%가량의 지네 방어막이 짓이겨지며 폭발했다.

필사적으로 벌레들을 끌어 모아도 소용 없었다.

"거, 거짓말. 내 방어막이······."

한종우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 Lv.94 ]

[ Lv.96 ]

[ Lv.93 ]

한종우가 소유한 지네들의 레벨은 90 수준.

이 녀석들은 죽음의 물결로부터 나온 게 아니었다. 한종우가 본래 직접 사역하던 마수들이었다.

파직, 파지직-!

심지어 한종우로부터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벌레들을 뒤덮고 있었다.

그 강도는 최소 S급 이상.

사최헌을 상대로도 막아낼 자신이 있었다.

"왜 안 통하는거냐······!"

콰앙-! 콰아앙!

그러나 루시퍼의 마도 광선은 한종우의 방어막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내 마수들이!"

몸 속의 벌레들을 끌어다 써봤자였다.

일방적인 공격 앞에 한종우는 버티고 서 있는 게 최선이었다. 몸속의 벌레가 바닥 날 때까지.

'쯧······.'

광선을 쏘아내는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눈앞의 인간 하나 처치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마기인가.'

빌런 한종우가 두르고 있는 기운은 명백한 마기(魔氣)였다.

'마인 놈들은 어느 차원을 가나 수작질이구만.'

그제서야 대강 이해가 갔다.

일개 헌터가 이만한 규모의 마물들을 통제할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마물들이 레벨대 이상으로 강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뒷배경에 마인(魔人)이 암약하고 있었다.

'마기의 조각을 심어둔 건가. 그놈들 하는 짓은 매번 똑같구만.'

마기는 마인들의 힘이다.

다른 종족이 소유하게 되면 일시적으로 큰 능력을 다룰 수 있게 되지만 그 끝은 파멸뿐이다.

"크아아악-!"

끝없이 벌레를 뽑아내던 한종우에게서 고통스런 비명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검은 스파크가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파직, 파지직—!

전형적인 마인화(魔人化)의 증상.

마기에 의존해 힘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

파괴된 보호막 속에서 드러난 한종운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 Lv.156 ]

쩍쩍 갈라진 보랏빛 피부, 이마에 돋은 뿔, 적색의 안광. 이성을 잃은 채 폭주하는 한 마리의 마물이었다.

이제 한종우는 이성을 잃은 채 폭주하게 될 것이다.

[ 주인님. 이 녀석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즉살까지 사용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 선에서 처리 가능합니다. ]

뚜두둑.

루시퍼 또한 손을 꺾으며 흑색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 * *

뒤이어 벌어지는 전투는 완전한 소모전이었다.

콰앙-! 콰아아—!

루시퍼의 흑색 광선과 빌런 한종우의 마기가 끊임없이 격돌하며 연이은 폭발을 일으켰다.

전투는 루시퍼가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원거리에서 끊임없이 쏟아지는 광선 앞에 한종우는 제대로 된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허기가 장난 아니란 거야.'

나는 루시퍼의 전투를 바라보며,

미리 시켜둔 배달 음식을 먹었다.

콰득-!

후라이드 치킨의 닭다리를 뜯었다.

악마 벨리알 때와 마찬가지로 포만감이 곧 에너지가 되는 상황.

바쁘다.

먹느라 바쁘다.

심지어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다.

끝없는 허기가 뱃속을 울리고 있다.

당연했다.

약자멸시로 잡은 마수의 수만 해도 셀 수 없다.

거기에 더해 루시퍼가 마도광선을 무제한으로 쏘아대고 있었다.

꿀꺽.

다른 걸 할 틈이 없다.

이쪽에서 에너지를 보충해주지 못하면 루시퍼 쪽에서 제대로 된 전투를 할 수 없다. 아니면 그 전에 내가 쓰러지거나.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먹방을 응원합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생각에 잠깁니다. 』

이 부분에 대해선 딱히 해결 방법이 없다.

열심히 배달 음식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는 수밖에.

치킨 한 마리와 피자 반 판을 순식간에 해치운 그때였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마음을 굳힙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두번째 선물을 후원합니다. 』

『 해당 성좌의 격이 인과를 비틉니다. 』

두번째 후원 메시지가 떠올랐다.

샤아아—!

새하얀 빛무리가 내 앞으로 내려앉았다.

'······두번째 후원?'

좋긴한데 더 좋은 타이밍이 있지 않나.

그리 생각한 건 잠시뿐이었다.

아이템을 확인하자마자 성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이건.'

빛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새하얀 빵 무더기가 있었다.

『 [ 성유물 ] 천계의 하얀 빵 x 10 』

- 한 입 베어 물면 포만감이 최대가 됩니다.

- 24시간 동안 저주 면역

지금 내게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아이템이라기보단 식량에 가까웠지만.

"백색의 여명님. 나이스."

덥썩.

나는 곧장 빵 한 덩이를 집어서 한 입 베어 물었다.

맛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빵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콤하고 시원한 맛.

그런 부드러운 빵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 당신의 포만감이 최대가 됩니다. 』

『 24시간 동안 저주 면역이 됩니다. 』

순식간에 배가 불러왔다.

배달 음식에 손이 안 갈 정도로.

"끄윽."

효과가 장난 아니다.

압도적인 포만감이 전신을 지배하는 느낌.

'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지배하던 허기가 싹 사라졌다.

"이거라면 당분간 음식을 안 먹어도 되겠는데요."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뿌듯한 미소를 짓습니다. 』

"후우."

이제 배달 음식에서 눈을 떼고 온전히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다. 나는 공유 시야로 시선을 옮겼다.

"상황은······."

루시퍼의 압도.

'그냥 이기고 있네.'

악마조차 박살내는 루시퍼의 광선이 마인화한 빌런을 폭격하고 있었다.

[ 주인님, 갑자기 힘이 샘솟는 기분입니다. 뭔가 하셨습니까? ]

루시퍼의 들뜬 사념이 내게로 전해졌다.

별 거 안했다.

그냥 빵을 먹었다.

[ 이제 바로 끝내겠습니다. ]

천계의 빵이 대단하긴 한 모양이다.

고오오오······.

루시퍼의 왼손으로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일순간에 모여든 흑색의 기운이 방출되며 쏘아졌다.

일점집중(一點集中) 마도광선.

고밀도의 흑(黑)마력이 루시퍼의 손끝에서 발사되었다.

콰아아앙-!

뜨거운 열기와 폭발이 도로 한복판에서 터져나왔다.

연기가 흩어진 자리.

마도광선을 직격으로 맞은 빌런의 전신은 너덜너덜 해져 있었다.

"끄으으······."

빌런은 끝까지 발악하며 손을 뻗었다. 놈의 몸에서 지독한 마기가 연기처럼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바뀌는 건 없었다.

푸스스······.

마인화한 빌런은 검은 연기와 함께 재가 되어 흩어질 따름이었다.

* * *

잠시 빌런을 응시하던 루시퍼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인간이길 포기한 자의 말로는 허무한 법이었다. 뭐, 애초에 인간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놈이었다만.

"인간을 백 명은 족히 죽인 놈이었습니다. 죽어 마땅한 놈이었습니다."

빌런 놈이 소유하고 있던 기운은 악독하기 그지없었다. 동족살해로 영혼에 새겨진 악기(惡氣)는 결코 지워지지 않으니.

루시퍼는 고개를 들어올렸다.

"예. 주인님, 이제 마지막 정리를 하겠습니다."

옥상에 잡혀 있던 인질들을 대피소에 보내주고, 남은 마수들을 정리하면 할 일은 다 했다.

사령탑을 잃은 마물들은 더 이상 조직적으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마기도 곧 정상화될 겁니다. 마물들도 레벨에 걸맞은 수준이 되겠죠."

나머지는 현세의 헌터들에게 맡겨도 괜찮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옥상으로 향하던 루시퍼가 멈칫했다.

"주인님, 혹시 기여도 보셨습니까?"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맺혀 있었다.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무명(無命) [ 76,354 점 ]

- 2위 : 천이령 [ 825 점 ]

- 3위 : 김석호 [ 564 점 ]

- 4위 : 강지연 [ 496 점 ]

무명의 점수만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다른 헌터들과 비교하면 압도적인 격차였다.

'이 시점에 이런 점수라. 내가 성좌였을 때도 본 적 없는 수치인데.'

죽음의 물결은 점수에 따라 보상이 달라진다.

'악마 처치보다 보상이 더 좋겠어.'

최소 전설+급 이상의 보상은 예정되어 있다.

시스템이 여기에 어떤 평가를 덧붙일지 또한 기대가 되는 부분이었다.

'응?'

루시퍼가 만족스럽게 턱을 매만지던 그때였다.

'뭐야.'

루시퍼의 시야에 누군가의 기운이 잡혔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주인님을 제외하고 인간 중에선 그나마 봐줄 만한 기운.

'사최헌 놈이잖아.'

랭킹 1위 사최헌이 죽음의 물결이 벌어지는 장막 속으로 들어와 있었다.

먼 거리지만 마물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었기에 구분은 어렵지 않았다.

'다 끝나고 나타나는 건가. 굼뜨긴.'

주인님의 역사적인 활약 장면을 못 보다니. 불쌍한 놈 같으니라고.

사최헌 놈에게 격의 차이가 뭔지를 각인 시켜줬어야 했는데 말이다.

루시퍼는 고개를 절레 절레 젓는 그 순간이었다.

"!"

루시퍼의 뒤쪽에서 짙은 마기가 느껴졌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인(魔人).

어쩌면 이번 사건의 흑막.

그러나 루시퍼가 뒤를 돌았을 때 그 기척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고난도 공간계 마술이었다.

마인의 수준이 꽤 높다는 의미.

행방을 쫓는 건 무의미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푸쉬이—!

빌런 한종운이 최후를 맞이한 자리에서 검은 마기가 솟아나기 시작했다.

"······."

놈의 타락한 영혼을 제물 삼아 치솟는 연기. 연기는 빠르게 솟아 흑의 장막 위로 퍼져나갔다.

사전에 알았다고 해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애초부터 그런 식으로 설계 되어 있던 거니까.

"이런 식으로 나온다 이건가."

이제부터 죽음의 물결 전체를 마기가 장악하기 시작할 것이다. 더욱더 강하고 높은 레벨의 마수가 등장할 터.

"주인님. 어제 얻으셨던 전설+ 스킬 습득권 말입니다."

검은 연기를 잠시 바라보던 루시퍼가 주인에게 말했다. 지금까지와는 판이하게 다른 진지한 목소리였다.

"곧 쓰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23화 두 번째

"사최헌이다!"

"불멸 길드가 왔다!"

S급 헌터들의 사전 미션 실패 직후.

협회는 헌터들에게 대기를 명령했다. 이어서 랭킹 1위 사최헌을 호출했다.

명백한 난이도 급증에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은 대한민국에 사최헌 하나뿐이라는 판단이었다.

목표는 위험에 빠졌을 S급 헌터들과 시민 구출.

그리하여 사최헌을 포함한 불멸 길드 전원이 죽음의 물결에 입성했다.

『 첫 번째 웨이브가 종료되었습니다. 』

『 이제 곧 두 번째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

"우리 너무 늦게 온 거 아니야?"

"아무리 생각해도 협회 측의 결정이 너무 느렸어."

"길드장은 화나지도 않아요?!"

불멸의 길드원들은 불평하며 잿빛 도시를 나아갔다.

이미 첫 번째 웨이브가 끝난 상황.

지원이라기엔 너무 늦은 입장이었다.

그러나 사최헌은 무표정했다. 화내기는커녕 묵묵히 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전부 예정된 일이었다.

'협회장은 죽음의 물결이 더욱 심화되길 원했을 거다.'

현재 대한민국 헌터 협회의 협회장은 마인(魔人).

그들은 멸망이 찾아온 현세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삼고자 했다.

'죽음 물결의 실패가 놈들에겐 기회다. 협회의 힘을 공고히 하고, 한국을 놈들의 손아귀에 거머쥘 기회.'

물론 마인들의 예상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불멸의 길드원들을 데려온 것이니.

"다행이야. 생각보다 잘 버티고 있었어."

"방금 연락 받았는데, 모든 대피소가 무사하대."

특수 무전기로 대피소와 연락을 주고받은 길드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또한 사최헌의 예측을 벗어나지 않는 일이었다.

'S급 헌터들만으로도 1페이즈까지는 버틸 수 있었을 거다.'

웨이브를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만이라면 가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천이령 있다.'

랭킹 3위 올마스터 천이령.

'녀석은 미래를 위해 반드시 데려가야 하는 인물 중 하나다.'

극한까지 내몰린 천이령의 각성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녀 하나가 1차 웨이브를 막아내는데 큰 기여를 했을 터.

사최헌은 고개를 들어 주변을 확인했다.

이 근처에 천이령이 있을 것이었다.

비참할 정도로 너덜너덜해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음에도 자신의 강함을 추구하는 한 명의 소녀가.

사최헌의 예상대로, 천이령은 대피소의 안쪽에서 나타났다.

"뭐야, 사최헌 아저씨잖아. 뭐하다가 이제 와요?"

"······?"

그런데 나타난 천이령의 모습이 너무나 멀쩡했다. 옷이 조금 해져 있기는 하지만 눈빛은 평소 그대로였다.

한계를 뛰어넘었다기엔 너무 평범한 표정.

"뭐?"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지는 그 순간.

"자, 잠깐······."

"뭐야, 바닥에 깔린 거? 설마 이거 전부 마수 잔해?"

"으앗, 마수들의 파편이 땅에 가득해요."

길드원들이 바닥에 흩뿌려진 마수의 잔해들을 보고 호들갑을 떨었다.

도로 전체가 마수의 파편으로 가득했다. 벌레의 껍질, 살조각, 부스러진 날개, 정체 모를 이빨······.

마수들의 축축한 액체가 도로를 완전히 적시고 있었다.

그제서야 사최헌은 죽음 물결의 기여도 현황판을 살펴보았다.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무명(無命) [ 76,354 점 ]

- 2위 : 천이령 [ 825 점 ]

- 3위 : 김석호 [ 564 점 ]

- 4위 : 강지연 [ 496 점 ]

현황판을 확인하는 사최헌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수치였다.

"뭔······."

76,354 점?

지금 시점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점수였다.

인플레이션이 심해진 나중이라면 모를까.

놀라기는 길드원들도 마찬가지였다.

"무, 무명이 와 있었네!"

"미친 76,354 점이라는데? 실화냐. 오류 난 거 아니야?"

"길드장. 우리 올 필요 없었던 거 아니에요?"

천이령이 각성하지 않고,

대피소가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이곳에 무명(無命)이 있어서였다.

"사전 미션과 첫 번째 웨이브 때만 해도 마물들이 조직적으로 움직여서 곤란했는데 이제는 괜찮아졌어요."

그리 말한 천이령은 도시 중심부의 높은 빌딩을 가리켰다.

"무명이 가서 없앴어요. 거기 붙어 있던 마물들까지 싹 다."

"마, 말이 돼? 혼자서?"

길드원 하나가 반문했지만 그도 알고 있었다.

- 1위 : 무명(無命) [ 76,354 점 ]

현황판에 새겨진 점수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었으니까.

"천이령. 무명의 얼굴을 직접 봤나?"

"아뇨. 웬 빵봉투를 쓰고 있던데요."

"······."

사최헌은 잠시 침묵했다.

빵봉투라면 사도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무명도 이곳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죽음의 물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예정대로 간다."

사최헌은 장갑을 고쳐 끼고서 길드원들에게 말했다.

빌런 한종우는 시작일 뿐이었다. 한종우를 처치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곧 마기 방출이 시작된다.'

마인(魔人)들은 끈질기다. 타락한 한종우의 영혼체를 매개로 시작되는 2페이즈부터가 진짜였다.

"운이 좋으면 무명도 보겠네요?"

"기왕 온 거 최선을 다해야겠죠······."

"그래도 사람들이 무사하다니까 다행이야."

길드원들이 사최헌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

그리고 그 뒤에서 머뭇거리던 천이령이 당차게 손을 들며 외쳤다.

"저기요. 저도 데려가요! 무명(無命)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 * *

푸쉬이이—!

짙은 흑색의 연기가 끝없이 하늘로 치솟았다. 검은 장막의 내부에 마기가 들어차고 있었다.

파직, 파지직!

주변의 건물과 땅에서 검은 스파크가 터져나왔다.

루시퍼는 심각한 목소리로 내게 설명했다.

[ 장막 곳곳으로 퍼져나간 마기가 마물들을 광폭화 시킬 겁니다. 죽음의 물결이 극도로 심화되겠죠. 지금까지 하곤 비교도 안 될 정도로요. ]

나는 방구석에 앉아 루시퍼의 보고를 들었다. TV에선 불멸 길드가 장막으로 들어갔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의 소식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바깥에선 내부의 상황을 아예 모른다.

"지금처럼 약자멸시로 마수들을 처치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악마의 눈의 유지 시간이 남아 있다. 현재 내 스킬 범위는 '전국(全國)'. 마물들이 강해져도 나보다 레벨이 낮다면 문제없다.

[ 그게······. ]

루시퍼가 설명을 이어가려는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도시에 생성된 게이트 속에서 마물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두 번째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

『 마기(魔氣)의 영향으로 죽음의 물결이 극도로 심화됩니다. 』

그어어-!

케에엑!

크에에!

마물들의 근육은 비대해져 있었고, 놈들의 눈은 시뻘겋게 빛나고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박감이 느껴질 지경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파직, 파지직-!

[ Lv.78 ]

[ Lv.75 ]

[ Lv.77 ]

···

[ Lv.81 ]

마기에 감화된 마수들의 레벨은 증폭되어 있었다.

'······이건 너무 억지잖아.'

원래 죽음의 물결은 이런가?

그럴 리가.

죽음의 물결은 분기마다 한 번 으레 있는 일이었다.

헌터들에겐 레벨업의 장소이자, 마수의 재료를 모을 수 있는 기회의 장이었다.

[ 배후에 있던 마인(魔人)들이 슬슬 움직이기 시작하는 걸 겁니다. 놈들은 언젠가 축출해야 할 악입니다. ]

"마인이란 말이지."

[ ······정보 제한이 일부 풀렸네요. 주인님께 자세히 설명해 드릴 수 있어서 마음은 편하지만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닙니다. ]

죽음 물결의 공략률은 거의 100%였다.

과거에 있었던 한 번의 실패를 제외하면 말이다.

'설마.'

과거 제주도에서 벌어졌던 일과 비슷한 형국이었다.

월드 보스의 출현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고, 잇따른 죽음의 물결에 의해 제주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이 돼버렸다.

그때 죽음 물결에 참전했던 헌터들도 그리 말했었다.

- 갑작스레 마물들이 강해졌습니다.

- 동레벨의 일반 마수들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 죄송합니다······. 면목 없습니다.

뉴스에서 인터뷰를 하던 헌터들의 눈에 보이던 절망감이 아직도 떠오른다.

제주도는 결국 마수의 땅이 되었다.

'그때도 마인의 짓이었던 걸까?'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막아야 한다.'

이성을 잃은 마물들이 천천히 도시를 향해 퍼져나가고 있었다.

이번에는 제주도가 아닌 내륙이다.

그 피해가 얼마나 클지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그때였다.

"무명, 상상 이상이군. 솔직히 놀랐다."

루시퍼의 시야에 사최헌 헌터가 나타났다.

쿠웅.

옥상의 빌딩에 착지한 사최헌은 루시퍼를 바라보고 있었다. 반대편에선 불멸의 길드원들이 인질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천이령 헌터도 눈치를 보며 인질 구조를 돕고 있었다.

홀로 옥상에 선 사최헌은 루시퍼를 향해 말했다.

"사도. 지금부터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고 있겠지."

"더럽게 늦게 와놓고서 폼 잡긴."

사최헌은 루시퍼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조용히 품 안에서 푸른 결정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결정을 확인한 루시퍼의 목소리가 커졌다.

"뭐야, 너 그거 어디에서 났어?"

"무명. 너도 이게 뭔진 알고 있겠지."

『 성좌 '백색의 여명'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왜 다 아는 눈치야.

난 모른다.

생전 처음 봤다.

저게 뭔데.

내 의문에 루시퍼가 바로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 빙결계 정령왕의 심장입니다. 현시점에서 얻을만한 아이템이 아닌데 어디서 구했을지 궁금한 부분입니다. ]

하여튼 대단한 아이템인가본데.

"죽음의 물결 저지에 실패한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이 심장을 사용할 것이다."

[ 저 심장은 주변 일대를 영구동토(永久凍土)로 만드는 아이템입니다. 한마디로 사최헌은 이 근처를 아예 꽁꽁 얼려버리겠다는 거죠. ]

그리 말한 사최헌은 다시금 루시퍼를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어딘가에 있을 나를 향해서.

"시간이 없으니 솔직히 말하지. 무명. 여기서부터는 네 힘이 필요하다. "

한없이 단호한 눈빛.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 도시를 마수와 통째로 얼리겠다."

사최헌의 품 안에서 냉기 서린 결정이 빛나고 있었다.

* * *

'잠깐, 도시를 통째로 얼려버리겠다고?'

그리 말하는 사최헌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그만큼 심각하다는 것이었다.

마기가 들어찬 죽음의 물결은 사최헌도 막아내기 힘들 정도.

"······스케일이 너무 커졌는데."

죽음의 물결에서 레벨업이나 하고 보상이나 챙기려던 게 여기까지왔다.

[ 주인님의 힘을 시험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습니다. ]

"우선 기다리라고 해봐."

어차피 지금 내 능력으론 마물들을 제거할 수 없다.

레벨이 너무 높아져 버렸다.

'이걸 사용할 차례다.'

나는 인벤토리에서 스킬 습득권을 꺼내 들었다.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찬란하게 빛나는 금색의 티켓 한 장.

사용하면 전설+급의 스킬을 얻을 수 있다.

어차피 판매하기도 애매한 아이템이다.

전설+급의 스킬 습득권은 악마를 처치한 사최헌이나 나밖에 가질 수 없는 아이템이니.

현금으로 받아도 처치 곤란이다.

판매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냥 내가 쓰는 게 낫겠다는 판단.

"사용해보자."

내 쪽에서 손해 볼 일은 없다.

뭐가 되었든 전설+급의 스킬을 얻게 되는 거니까.

'당장 도움이 안 되는 스킬이 나온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으니.

사최헌의 계획에 동의하는 수밖에.

"쓸게."

『 성좌 '백색의 여명'이 기대감을 품습니다. 』

찌이익-!

나는 금색의 티켓을 시원하게 찢었다. 찢어진 티켓의 틈에서 새어 나온 황금빛이 내 전신을 휘감은 순간.

『 [ 전설+ ] '백(白) : 사도 소환'을 습득합니다. 』

새로운 스킬이 떠올랐다.

메시지창을 읽는 내 눈동자가 커졌다.

'······사도 소환이다.'

루시퍼와 마찬가지인 사도 소환.

그 성능은 이미 실컷 체감해왔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환호의 박수를 칩니다. 』

'스킬은 잘 나왔어.'

전설+급이다.

어쩌면 루시퍼보다 강한 사도가 소환될지도.

[ 주인님, 설마 사도 소환······? ]

"응, 그런데."

[ 혹시 색깔이 백색인가요? ]

"맞아. 어떻게 알았어?"

[ 큭, 이렇게 될 거란 건 알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전설+라니······. ]

약간 충격받은 듯 중얼거리는 루시퍼.

자기보다 강한 사도여서 그런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 주인님의 소환할 사도는 높은 확률로 그 놈일 겁니다. ]

그놈?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미소짓습니다. 』

하나 밖에 없었다.

그제서야 이해가 됐다.

루시퍼가 왜 저런 반응이었는지.

루시퍼의 전(前) 직장 동료 '백색의 여명'.

이 성좌가 내 사도로 소환된다는 거였다.

스킬이 나오자마자 성좌가 환호성을 지른 이유가 그거였다.

[ 백색의 여명. 뜸 들이지 말고 주인님께 후원해라. 그러고서 소환 되어라. 주인님의 충실한 종으로서 살아가라. ]

어차피 소환될 거라면, 성좌일 때 할 수 있는 후원을 전부 다 털고 가란 의미.

백색의 여명은 루시퍼의 말에 곧장 반응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마지막 선물을 후원합니다. 』

『 해당 성좌의 격이 인과를 뒤흔듭니다! 』

거리낌 없이 후원을 투척했다.

전재산을 베팅하는 세 번째 후원.

쩌저적—!

주변의 공간이 깨어지며 새하얀 빛을 두른 아이템 하나가 나타났다.

『 [ 성유물 ] 모조품 : 광창 브류나크 』

- 해당 정보의 열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 사도의 전용 무기(전설+)

투욱.

창은 바닥에 떨어졌다. 들어 올리려고 시도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엄청난 무게였다.

"······."

이것으로 세 번째 후원이 끝났다.

내 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소환을 대기합니다. 』

이쯤 되면 아예 짐 싸놓고 기다리는 수준.

"죽음의 물결을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나는 백색의 여명에게 물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

본인이 그렇다고 하니, 내가 망설일 이유는 없다.

"후우."

나는 가볍게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믿어보자.

"사도 소환."

『 스킬 '백(白):사도 소환'이 발휘됩니다. 』

이전과 마찬가지로.

무언가 변화했단 느낌은 없었다.

* * *

사최헌은 고뇌하고 있었다.

'마기로 점철된 죽음의 물결은, 현재 인류의 수준으론 클리어할 수 없다.'

막으려는 시도는 여러번 해왔다.

그러나 성공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끝없이 쏟아지는 적을 상대로 24시간을 버텨야 했다.

이전 악마 강림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사최헌이라면 버틸 수 있다.

흑색의 사도 또한 버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헌터는?

바깥에선 내부의 상황을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외부에 있던 헌터들이 들어올 것이다. 죽음의 물결을 방치할 순 없으니까.

'그들을 전부 지키며 싸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도시는 넓고 인력은 한정되어 있다.

마기를 뒤집어쓴 마물들은 변칙적이고 파괴적이다.

'결과는 뻔하다.'

수많은 시민들과 헌터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24시간이 지나고 죽음 물결이 끝났을 때, 마물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른 도시로 퍼져나가 피해를 키운다.

'그게 마인(魔人)인 협회장이 원하는 미래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 협회의 권한은 비대해진다. 길드를 통제하고, 각성자들을 입맛에 맞춰 병사처럼 운용한다.

그 결과는······.

한국의 멸망이다.

『 [ 아티팩트 ] 빙결(氷結) : 정령왕 글라시아의 심장 』

따라서 사최헌은 도시를 통째로 동결시키는 방법을 써왔다. 도시의 기능은 일부 정지하지만 혼란은 방지할 수 있기에.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수도 있다.'

사최헌은 얼음 결정을 움켜쥐었다.

만약 무명이 협력한다면 방향은 달라진다.

죽음 물결의 완전 공략.

이번에는 무명(無命)과 불멸이 그 명성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봐 온 무명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그리 말하는 사최헌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무명의 힘은 진짜다.

1차 웨이브를 혼자서 정리할 만큼 능력이다.

그의 힘은 단순히 개별적인 적을 상대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수에게도 통용된단 의미.

'협력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사최헌은 조용히 답을 기다렸다.

곳곳에서 나타난 마수들이 도시로 퍼져나간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였다.

차악.

루시퍼가 사최헌의 옆으로 내려앉았다.

"기대해도 좋다. 사최헌."

나란히 옆에 선 루시퍼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입을 열었다.

"주인님께서 힘을 빌려주시겠다고 하신다."

"······!"

"다만, 주인님은 허락해도 내가 맨입으로는 못 끝내겠거든."

"뭘 원하지?"

루시퍼는 별거 아니라는 듯 답했다.

"네가 가진 정보를 내놔라."

"그러지."

"응?"

사최헌의 빠른 승낙에, 루시퍼는 살짝 당황했다. 언제는 불멸에 들어오지 않으면 국물도 없다고 해놓고선.

"이번 죽음의 물결의 공략 여부에 따라 그렇게 하지."

조건을 덧대긴 했지만 사최헌은 진심이었다.

죽음 물결에 들어와 기여도를 확인하고서 다시금 깨달았다.

무명(無命)은 틀림없는 강자다.

미래를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 이레귤러.

그런 그를 밑에 두려고 했단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협력의 관계.

당장은 그 정도면 충분했다.

사최헌의 말에 루시퍼는 씩 미소지었다.

"건방지긴. 그렇다면 똑똑히 봐둬라. 주인님의 힘을."

루시퍼의 고개가 건너편이 빌딩 상층부로 향했다. 인질들이 있었던 가장 높은 장소.

인질들이 모두 구출되어 텅텅 빈 옥상의 정원.

고오오오—!

그 위로 심상치 않은 기류가 소용돌이 치기 시작했다. 하늘 위로 모여들었던 마기가 걷어지고 도시를 덮었던 흑암의 장막이 열리기 시작했다.

장막에 뚫린 거대한 구멍 위로 찬란한 백광(白光)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눈부신 빛이 옥상에 쏟아졌다. 새하얀 깃털들이 빛과 함께 내려온다.

"이건······."

사최헌이 표정이 굳어졌다.

시스템이 형성한 장막을 걷어낸 인과조정.

거기에 지금 떨어져 내리는 성광(聖光)은.

의심할 나위 없는 천사의 강림이었다.

콰아아앙—!

눈이 멀듯 강렬한 순백의 번개가 옥상 위로 떨어졌다.

천지가 요동치는 듯한 굉음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기를 몰아내는 순백의 광풍이 빌딩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크윽, 요란하긴."

루시퍼조차 팔을 들어 그 여파를 막아내야 할 정도.

파스스—!

천사가 강림한 자리.

눈부신 빛이 걷어지며 빌딩 상층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쑥대밭이 된 옥상의 정원과 구조물들.

그 중심에 순백의 날개를 펼친 천사가 있었다.

금발을 허리까지 기른 아름다운 여성.

가브리엘(Gabriel).

그녀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윽.

가브리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이 몸 강림."

두 번째 사도가 지상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24화 종료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가브리엘의 모습은 영락없는 천사였다. 머리에 링은 없었지만.

"천사······?"

천이령은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그 외관에 압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형태의 기운이 천사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사최헌도 굳어진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사의 외관이 너무 아름다워서?

현시점에는 아무도 다루지 못하는 성력(聖力) 때문에?

둘 다 아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게 무슨······.'

사최헌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도가 둘이라니?

빵 봉투를 뒤집어쓴 것은 루시퍼.

그리고 저 천사는 분명 가브리엘이다.

'허······.'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도가 무려 두 명이나 강림했다. 이들은 튜토리얼이 종료되고 한참 뒤에나 나와야 상위 존재들이다.

그러한 사도 둘이 무명(無命)의 소환수.

사최헌은 무명의 협력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나 사도를 하나 더 소환할 줄은······.

"······."

충격을 받아 정지한 사최헌의 옆.

"저놈이 나보다 등급이 높다는 게 말이 안 돼. 주인님, 오해하지 마셔야 합니다. 본래의 힘은 제가 훨씬 강할 테니까요."

미간을 좁힌 루시퍼가 불평했다.

현재 현세(現世)는 시스템에 의해 여러 가지가 제한되어 있었다.

대표적으로 정보 제한.

그다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전투력 제한.

초월적 존재였던 사도 루시퍼가, 현세에 강림하며 낼 수 있는 출력은 제한되어 있다.

현재는 전설급만큼.

반면 가브리엘은 전설+급으로 한 단계가 더 높았다.

스윽.

옥상에 강림한 채 주변을 둘러보는 가브리엘. 그런 그녀를 향해 루시퍼가 소리쳤다.

"멍청아, 얼굴부터 가려라!"

얼굴이 알려지면 앞으로의 활동에 제약이 생긴다. 주인의 방침에 따라 얼굴은 숨기는 게 기본.

"······."

가브리엘은 고운 미간을 좁힌 채 루시퍼를 바라봤다.

언짢은 표정의 루시퍼를 향해 가브리엘은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난 나보다 약한 자의 말은 듣지 않는다."

가브리엘은 자신과 루시퍼를 번갈아 가리켰다.

"나는 전설+. 너는 전설."

"아오, 저 자식을 패버릴 수도 없고."

루시퍼가 열을 내는 사이,

주인 주강혁의 명령이 떨어졌다.

- 얼굴을 가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게.

신상을 숨길 수 있으면 좋다는 이야기였다.

"주인이 그렇게 말한다면야."

가브리엘은 군말 없이 손을 펼쳤다.

화아악.

새하얀 빛이 그녀의 얼굴을 완벽히 가렸다.

가브리엘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한 건 기껏해야 천이령과 사최헌 정도였다.

불멸의 길드원들은 거리가 너무 멀었으니.

그때, 충격에서 벗어난 사최헌이 루시퍼의 옆으로 다가섰다.

"사도가 둘이 되었단 건 알겠다. 하지만 이걸론 죽음의 물결을 막아낸다는 보장이 없다."

사최헌도, 루시퍼도 이미 압도적인 강자였다. 거기에 가브리엘이 하나 더 추가되었을 뿐.

피해 없이 죽음 물결을 공략하는 것은 완전 다른 일이었다.

"걷잡을 수 없는 피해가 될 거다."

이제 곧 수많은 길드와 헌터들이 이곳으로 진입할 것이다. 그들 모두를 지키며 전투를 지속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

사최헌은 품 안의 얼음 결정을 꺼내 들었다.

"무명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면······."

마수들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어느덧 핏빛의 살덩이가 곳곳에서 꿀렁이고 있었다. 마수들을 뱉어내는 둥지였다.

그곳에서 마기에 오염된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성질도 급하군. 잠자코 보기나 해라. 말했잖냐. 주인님께선 이미 협력하기로 결정하셨다고."

루시퍼는 팔짱을 낀 채, 가브리엘이 있는 옥상을 바라보았다.

가브리엘은 오른손을 하늘을 향해 뻗었다.

샤아아—!

새하얀 빛이 그녀의 손끝에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눈부실 정도의 빛은 이내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

보석과 순금으로 장식되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창 한 자루.

『 [ 성유물 ] 모조품 : 성창 브류나크 』

가브리엘이 마지막 후원으로 건네준 아이템이자, 성좌 백색의 여명이 스스로 안배한 무기였다.

사도에게는 레벨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사도가 강해지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전용 무기의 습득.

우우웅—!

강대한 성력(聖力)이 가브리엘에게로 모여들고 있었다. 새하얀 빛의 기운이 폭풍처럼 가브리엘에게 스며든다.

루시퍼는 그에 맞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장소를 향해 나아갔다. 모든 마수가 한눈에 보이는 공간을 찾아 움직였다.

"길드장! 어떻게 된 거예요? 저 천사는 뭐고, 무명은 왜 하늘로······."

"무명 헌터가 도와준대요?"

흩어져 있던 길드원들이 사최헌에게로 다가왔다. 사최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무명의 의도를 파악할 순 없었다.

그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도.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었다.

"우선은 지켜봐야겠지."

사최헌은 품 안의 얼음 결정을 꺼내 들었다.

멀지 않은 곳, 천이령 헌터도 잠자코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무명 헌터가 하늘 위로 갔어.'

하지만 곧 무언가가 일어날 거란 건 알 수 있었다.

화아악-!

하늘 위로 날아오른 루시퍼.

그는 도시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도달했다.

아직 일반 헌터들은 진입하지 않았다.

콰앙-! 쿵! 콰앙!

S급 헌터들이 마수들과 치열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피소를 습격하려는 조직적인 움직임은 없어졌다.

헌터들의 발은 풀렸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마수들은 도시 곳곳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었으므로.

그어어!

크르르!

마기에 감염된 마수들은 더욱 강하고 흉포했다. S급에게도 버거울 정도.

루시퍼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참으로 약하구나. S급의 수준도 참으로 형편없으니. 곧 찾아올 멸망을 견딜 수나 있을련지.'

바깥에서 대기하던 헌터들이 이곳으로 진입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이다.

아니면 사최헌이 도시를 통째로 얼리던가.

둘 다 인간들에게 있어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할 뿐인 결과.

그 전에 상황을 종료시켜야 했다.

"가브리엘. 멀었나."

루시퍼의 사념이 먼 장소에 있는 가브리엘에게 닿았다. 가브리엘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이제 끝."

가브리엘의 창끝으로 막대한 빛이 모여들었다. 극도로 압축된 빛의 구체는 빠르게 진동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주변의 대기가 일제히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브리엘이 발을 디딘 옥상의 바닥 위로 미세한 금이 새겨졌다.

준비는 끝났다.

남은 것은 성력(聖力)의 해방.

숨을 가볍게 들이마신 가브리엘은 창을 앞으로 뻗었다. 느릿하지만 강한 힘이 실린 찌르기가 압축된 빛의 구체를 꿰뚫었다.

쩌적, 쩌저적—!

모조품이었던 광창 브류나크의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금이 새겨졌다.

무기 전체가 파괴되며 발하는 성광(聖光).

그것이 현시점에는 존재할 수 없는 궁극의 기술을 불러왔다.

『 위광(僞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콰아아아—!

가브리엘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백색의 폭발이 도시 전체로 퍼져나갔다.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헌터들을 휩쓸었다. 도시로 뻗어나가는 마물들도, 도시의 건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대폭발.

콰아아—!

"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미친 듯이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천이령이 중얼거렸다.

폭발의 내부로 들어왔으나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오히려 따스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는 듯한 기분.

시야 전체가 백광의 아래에 놓였다.

회색으로 물들어 있던 도시가 순식간에 제빛을 되찾고 있었다.

새하얀 별빛이 세상을 뒤덮은 듯하다.

"와······."

천이령조차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수많은 S급 헌터들을 마주했던 그녀였지만, 이런 기술은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마법인가? 무력인가?

이토록 거대한 규모의 스킬이라니. 보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안에 담긴 원리도 방법도 무엇하나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필시 무명이 만들어낸 기적.

무명은 도대체.

도대체 무명이란 사람은 무엇이기에.

이토록 강하단 말인가.

* * *

도시 외곽의 각 대피소.

S급 헌터들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대체 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집중이나 해! 말할 시간 있으면 한 마리라도 더 죽여!"

검은 장막이 갈라지고 새하얀 번개가 내리친 기이한 현상.

그러나 그런 일에 신경을 쓸 틈은 없었다.

눈앞의 마수들이 죽일 듯 달려오고 있었다.

"젠장, 세상이 망하려고 그러나."

"조금 정리되는가 싶더니······. 어째 더 질겨졌냐!"

대피소를 지키던 S급 헌터들의 필사적인 몸부림.

마물의 사령탑은 사라졌으나,

죽음의 물결은 현재 진행 중이었다.

따라서 조금도 쉬지 못한 헌터들이 태반이었다. 무명의 시야가 닿지 않는 장소도 있었으니까.

그들은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콰득, 콰드득-!

마기를 두른 마물들은 한층 더 강력했다.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던 불멸 길드는 중심부로 향해버렸다.

결국 S급 헌터들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야 하는 상황.

13번 대피소.

이곳의 S급 헌터 두 명도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크윽, 마물들이 정리가 안 되잖아! 뭐가 이리 세?!"

촤아악! 촤악!

S급 헌터 강지연이 이를 악물며 창을 휘둘렀다. 악다문 이에서 피가 흘러나올 정도였다.

"누님, 조금만 버티면 됩니다! 불멸하고 무명 헌터가 어떻게든 할 겁니다!"

그렇게 소리치는 동료 헌터의 목소리에도 자신감은 없었다.

"걔네가 이거 다 잡아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거야 그렇죠. 그래도 아까 한숨 돌렸잖습니까."

뭔가 하려거든 제발 빨리해주길.

그때였다.

"어, 누님······? 저기 뭔가가······."

도시의 중심부터 시작된 새하얀 폭발. 그것은 순식간에 도시 전체를 뒤덮었다.

두 헌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폭발에 휩쓸렸다.

화아아악—!

미처 피할 새도 없이 헌터과 마물을 덮치는 백광(白光).

"큭, 뭐야? 너는 괜찮아?"

폭발에 휘말릴까봐 자세를 잡았는데, 바람을 제외하면 거의 영향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예, 누님. 그보다 조심하십쇼!"

동료 헌터의 경고에 강지연 헌터가 앞으로 뛰어든 마물을 검으로 베어냈다.

그런데 무언가가 이상했다.

서걱—!

너무나도 간단하게 마수가 베어졌다.

푸확! 촤악! 촤아악!

"마물들이 약해졌다······?"

엄청난 위화감에 강지연 헌터의 미간이 좁혀졌다.

"뭡니까, 누님 혹시 새로운 재능에 눈 뜨신 겁니까?!"

"아니, 너도 잡아봐. 이놈들 완전 비실비실해졌는데?"

"어, 진짜 그렇네요?!"

미친 듯이 들이닥치던 마수가 눈에 띄게 약화 되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리에서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

촤아아악!

이제는 마수들을 쭉쭉 밀고 나가고 있었다.

강지연 헌터가 호쾌하게 창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뭐가 뭔지는 몰라도 지금이 기회야!"

"예쓰, 이놈들 전부 쓸어버리죠!"

마수가 약해졌다.

그것도 형편없이.

새하얀 빛이 도시를 삼키고 나서 발생한 이상현상.

무엇이 달라졌는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 Lv.46 ]

[ Lv.43 ]

···

[ Lv.44 ]

70 레벨을 상회하던 마수들의 급격히 레벨이 낮아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수들의 몸을 감싸고 있던 기분 나쁜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 탓일까.

단단했던 마수들의 껍질과 가죽이 연해졌고, 흉포하게 돌진해 오던 놈들의 기세도 눈에 띄게 약해졌다.

정말로 레벨 40 수준의 마수들 그 자체.

S급 헌터들에게 있어 그런 마수를 처치하는 건 너무나 간단했다.

"전부 몰아내자!"

"알겠습니다!"

강지연 헌터와 동료의 공격이 파죽지세로 마물들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뭐가 되었든,

한 가지는 확실했다.

죽음의 물결의 난이도가 정상으로 돌아왔다는 것.

* * *

『 사도 '가브리엘'이 궁극기를 발휘합니다. 』

『 위광(僞光) : 주야장천(晝夜長川) 』

사도 가브리엘이 펼친 궁극의 기술.

그 효과는 상상 이상이었다.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레벨을 30 낮춥니다. 』

『 범위 내의 모든 마물의 상태를 정상화합니다. 』

빛이 닿은 범위에 있는 모든 적들의 레벨을 낮추는 사기적인 기술. 심지어 마물을 오염 시켰던 마기까지 완전히 거둬냈다.

루시퍼의 시야를 통해 S급 헌터들이 마물들을 몰아내는 게 보였다.

"미쳤네."

감탄이 절로 나오는 성능이었다.

『 현재 악마의 눈이 적용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

『 스킬의 범위가 '국가' 단위로 확장됩니다. 』

가브리엘의 기술에는 악마의 눈이 적용 되었다. 덕분에 도시 전체로 빛을 퍼뜨릴 수 있었던 모양.

효과는 뛰어났다.

[ ······전용 무기가 있으면 저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

내가 감탄하고 있자,

루시퍼가 슬쩍 텔레파시를 보내왔다.

"그걸 어디서 얻는데?"

[ 전설의 증표를 많이 모아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

루시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지만 대충 이해했다.

전설의 증표를 사용해 성좌들과 교환하면 된다는 거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문제는 그때가 언제냐는 것 뿐.

[ 그러면 주인님. 마지막을 장식해주시죠. ]

[ 이제 주인의 차례야. ]

루시퍼와 가브리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준비는 끝났습니다. ]

루시퍼의 시야는 도시 전체를 한 눈에 담고 있었다.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공유된 시야에 집중했다.

마기에 의해 70대로 치솟았던 마물들의 레벨이 30 낮아졌다.

내 레벨은 66.

따라서 죽음 물결에 존재하는 모든 마물의 레벨은 나보다 낮다.

'약자멸시는 대상을 분류할 수 있다.'

목표는 인간을 제외한 모든 마물.

나는 의념을 담아 외쳤다.

"전부 사라져라."

그것으로 끝이었다.

푸화아악—!

진정한 죽음의 물결이 장막 내부를 휩쓸었다.

15개에 달하는 모든 대피소.

편의점, 호텔, 영화관, 백화점······.

무수한 마물들이 이유도 모른 채 최후를 맞이했고, 그들의 잔해와 피는 도시를 붉게 물들였다.

마치 해일이 일어난 것처럼.

더 이상 싸울 상대가 없어진 S급 헌터들은 자리에 멈추어 섰다.

마수의 피가 강처럼 흐르는 도로의 한복판에서, 그들은 도시의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빛이 뻗어나가기 시작한 바로 그 장소.

백색의 낙뢰가 도달한 빌딩.

헌터들은 그곳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들의 표정은 보이지 않는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기뻐하는 걸까, 아니면 허탈한 상황에 헛웃음을 짓는 걸까.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들 모두가 무명(無命)의 이름 두 글자를 떠올렸으리라.

* * *

마수 하나 남지 않은 도시.

모든 헌터의 위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팅-!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무명(無命) [ 99,999 점 ]

- 2위 : 천이령 [ 825 점 ]

- 3위 : 김석호 [ 742 점 ]

- 4위 : 강지연 [ 707 점 ]

한계까지 치솟은 무명이 점수가 최대치에 도달했다.

다른 헌터들과의 비교가 무의미한 수치.

그에 따른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 플레이어 '무명(無命)'이 99,999 점에 도달했습니다. 』

『 히든 조건을 달성하셨습니다. 』

『 죽음의 물결이 즉시 종료됩니다. 』

24시간 동안 예정되어 있었던 죽음 물결의 종료.

『 보상을 정산합니다. 』

파직, 파지직—!

이어지는 것은 보상 정산의 시간이었다.

25화 빠른 정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