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성장
어둡고 축축한 벽돌로 이뤄진 미궁의 통로.
콰과과과—!
그곳을 시원하게 질주하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있었다.
걸리적 거리는 마물과 함정을 단번에 돌파하는 압도적인 파괴력.
사도 루시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인님, 이 정도 속도면 괜찮을까요?"
루시퍼는 뒤를 돌아보며 자신의 주인인 주강혁에게 물었다. 주강혁은 잠시 뒤를 살피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제 없는데, 조금만 느리게 가자. 저 사람들이 따라올 수 있도록."
현재 주강혁의 레벨은 28.
하루만에 8이나 올렸다.
E급 미궁에서 3, D급 미궁에 5를 올렸다. 마수를 독식했기에 가능한 성장 속도였다.
'레벨업을 한만큼 능력치도 확실히 상승했어.'
처음에는 따라가기 벅찼던 루시퍼의 속도였지만, 지금은 충분히 따라가고도 남았다.
'체감이 될 정도로 체력이 좋아졌다.'
꽤 오랜 시간을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숨이 차지 않는다.
'28레벨이면 E급 중간인건데······. 벌써 이 정도라면 상위 등급의 헌터들은 얼마나 괴물인거야?'
주강혁은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다섯명의 헌터들이 죽어라 자신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정확히는 루시퍼의 뒤를 쫓아오는 거겠지만.
많이 지쳐보이긴 해도 얼추 따라오고 있었다.
D급 미궁에 들어올 정도니 레벨도 주강혁 자신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공격 당했던 한 명도 회복했나 보네.'
주강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수에게 당해 걱정했었는데.
혹시 몰라 미궁에 들어오기 전에 사뒀던 포션이 도움이 되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미궁에서 곤란한 상황에 빠졌던거겠지.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
루시퍼의 말을 듣고 이쪽으로 와보길 잘했다.
- 저 쪽에 인간들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어떻게 할까요? 그 앞에는 강한 마수의 기운도 느껴집니다.
- 네가 보기엔 누가 이길 것 같은데?
- 인간들이 무조건 죽겠는데요.
- ······당장 가자.
도와줄 수 있다면 돕는 게 맞다.
딱히 뭐 힘든 일도 아니었으니까. 모습은 감추고 있으니 정체를 들킬 염려도 없고.
구해주길 백 번 잘했다.
'사람들 도와주는 것도 나쁘지 않네.'
주강혁은 괜스레 뿌듯함을 느끼며 미궁을 나아갔다.
"주인님, 이제 이 코너만 지나면 보스가 있는 방입니다."
루시퍼는 미궁 내부에 존재하는 기운을 느낄 수 있다. 인간 뿐만 아니라 내부에 존재하는 마수들도 파악이 가능한 모양.
따라서 미궁의 출구인 보스방을 찾는 건 간단했다.
가장 강한 기운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향하면 되므로.
"여기입니다. 바로 돌파하겠습니다!"
콰앙-!
까마귀 루시퍼는 몸통을 부딪혀 보스의 방으로 이어진 나무 문을 부쉈다.
『 보스의 방에 입장하셨습니다. 』
그르르······.
넓은 방 안에는 커다란 늑대 한 마리가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눈에 새겨진 커다란 상처가 인상적인 늑대였다.
[ Lv.35 ]
번뜩.
외부자의 인기척에 눈을 뜬 맹수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것만으로 주강혁의 팔에는 소름이 돋아났다.
보스 늑대는 눈빛만으로 상당한 수준의 위압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허억, 허억······!"
"보, 보스 방이다!"
"진짜 도착했어!"
뒤쪽에서 열심히 쫓아오던 아성 길드의 사람들이 보스방 입구로 모여들었다.
"헉, 크다."
"엄청 큰 늑대마수······."
"큭, 까마귀님 부탁드리겠습니다."
길드원들은 뒤쪽으로 한발자국 물러나며 고개를 숙였다. 이미 체력을 전부 소진한 그들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부탁할게."
나는 루시퍼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까악.
까마귀는 낮게 한 번 울더니 부리를 열었다.
우우웅.
그 내부로 흑색 마력이 모여들며,
주변의 공기가 낮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변을 눈치챈 늑대 보스가 육중한 몸을 일으켰지만 이미 늦었다.
루시퍼의 입에서 쏘아진 흑색의 마력 레이저가 허공을 갈랐다.
콰아앙—!
일순의 번쩍임. 귓전을 때리는 굉음. 전신을 뒤흔드는 충격에 이어 자욱한 먼지가 보스방 내부를 가득 채웠다.
"뭔······."
"엄청난 위력······."
그 광경을 입을 벌린 채 바라보는 아성 길드원들. 기절해 있었던 길드장 이정훈은 아예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들이 목숨을 걸고 도전했던 미궁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공략되었다.
『 D급 미궁 던전이 공략 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뛰어난 업적! 』
『 소수의 성좌들이 해당 공략을 눈여겨 봅니다. 』
『 2등과의 압도적인 격차! 』
『 랭킹 점수를 계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1,926 점 ]
- 2위 : 사최헌 [ 561 점 ]
- 3위 : 채아린 [ 447 점 ]
보스가 처치되는 순간, 근처에 있던 헌터들에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존의 1위였던 사최헌을 제치고 무명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무명?"
"사, 사최헌 헌터를 제쳤어."
"까마귀님이 헌터였던 거야······?"
"아니, 아까 주인이 있다고 했잖아."
랭킹을 확인한 아성 길드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아성 길드는 무명의 이름을 처음봤다.
무명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불과 며칠 전.
미궁에 갇혀 있던 그들이 무명의 이름을 알 리가 만무.
미궁에선 헌터 커뮤니티를 사용할 수 없을 뿐더러 통화도 불가능했기에.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변함 없었다.
무명(無命)이 랭킹 1위 사최헌의 점수를 압도적으로 뛰어넘었으므로.
"무, 무명 헌터님?"
침을 꿀꺽 삼킨 이정훈이 까마귀를 향해 물었다. 아이템 때문에 주강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기에.
루시퍼는 낮게 깐 목소리로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인간. 그 분의 이름을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가라. 그 분께 은혜를 입었다는 것만으로도 일생의······. 크흠."
주강혁의 날카로운 눈빛을 의식한 루시퍼가 목을 가다듬었다. 쓸데 없이 폼 잡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때문이었다.
"아무튼 여기에서 본 것을 말하지 말아라. 너희는 아무것도 못 본 거다. 내 주인께서 그리 원하신다."
이번에는 진심이었다.
옅은 마력이 담긴 루시퍼의 목소리.
그 덕에 까마귀의 모습은 한층 위엄 서린 존재처럼 보이게 되었다.
아성 길드원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애초에 떠벌리고 다닐 생각은 없었다.
무명은 생명의 은인이었다.
미궁에서 죽을 뻔한 그들을 구해줬다.
엘리트 마수까지 잡아주고 친절하게 미궁의 보스까지 처치해줬다.
그런 그가 침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걸 은혜도 모르고 떠벌리고 다니겠는가.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습니다."
길드장 이정훈과 길드원들 모두 하나 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무명을 열렬히 따르게 될 추종자(?)들이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 * *
나는 미궁을 빠져나오며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일일 달성 가능한 최대 레벨을 달성했습니다. 』
보스를 처치하고 레벨을 두 단계 더 올렸다.
이로써 내 레벨은 30.
여기서 10레벨만 더 올리면 E급을 벗어나, D급 헌터가 되는 거다.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레벨업이었다.
"고생했어. 루시퍼."
"별 거 아닙니다. 이 정도는 준비 운동도 못 되죠. 앞으로 주인님께서 빠르게 성장하실 수 있도록 제 한 몸 불사르겠습니다!"
녀석은 까마귀인 상태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 D급 미궁 던전 랭킹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경험치 비약(유니크)
- 전설의 증표 x1
새로 얻은 보상은 간단했다.
경험치 비약은 마시면 대량의 경험치를 단번에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 경험치 비약 (유니크) 』
- 다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 경험치 제한을 무시합니다.
경험치 제한도 무시할 수 있단다.
이런 건 최고 효율을 계산해서 쓰는 게 좋은데.
'알아보고 나중에 필요할 때 마시면 되겠지.'
어쨌든 미궁 두 개를 공략하며 일일 최대 레벨을 달성한 것으로 오늘의 목표치는 달성 되었다.
하루에 10업.
인터넷과 헌터 커뮤니티를 다 뒤져봐도 유례 없는 속도다.
"이런 식이면 한 달도 안되서 S급 헌터가 되는 거 아니야?"
내 말에 루시퍼가 위 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하고 말고요. 다만 운도 좀 따라야 할 겁니다. 등급이 높아지면 공략에 걸리는 시간이 자연스레 길어지거든요. 그래도 1달 반 정도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S급이 되면 굳이 정체를 숨길 필욘 없을 거다. 충분한 강자이기도 하고 내 몸 하나 정도는 알아서 지킬 수 있을테니.
한 달 정도면 금방이겠네.
즉살 스킬의 쿨타임이 끝나기도 전이다.
그때였다.
꼬르륵.
"?"
이 소리의 주인은 내가 아니었다.
"이거 힘을 좀 써서 그런지 배가 고프네요."
루시퍼가 멋쩍은 듯한 목소리로 변명했다.
"준비 운동 수준이라고하지 않았나?"
"준비 운동도 하루 종일 하면 배가 고픈 법이죠."
넉살스레 대답하는 루시퍼를 향해 씩 웃었다.
딱히 눈치를 준 건 아니다.
별 거 안 한 나도 배가 굉장히 고팠으니까.
조금 수준이 아니다.
당장 뭘 먹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
그야말로 등가죽이 배에 달라 붙은 것 같다.
'······내 능력의 유일한 단점인가.'
단점이라고 말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지만.
배가 너무 고프다.
"안되겠다. 오늘은 식당에 가서 배에 기름칠이나 하자."
"그 말씀은······?"
"내가 쏜다는 거지. 어제도 먹은 삼겹살이긴 하지만. 식당에서 먹는 건 또 다르니까."
"주인님께서 사주시는 거라면 뭐든 좋습니다. 그런데 식당에 까마귀도 출입이 될까요?"
당연히 인간 모습으로 돌아와야지.
까마귀랑 고깃집 가는 사람이 어디 있냐.
"인간폼으로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시켜."
당장 돈 걱정은 없다.
미궁에서 얻은 마정석도 꽤 된다.
한꺼번에 팔면 엄청난 돈이 되겠지만,
너무 많은 양을 팔면 의심스럽겠지. 신참 헌터니까.
그래서 돼지고기다.
소고기는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먹자.
* * *
치이익—!
불판 위에서 돼지고기가 알맞게 구워졌다. 집게를 든 루시퍼는 현란한 솜씨로 순식간에 고기를 구워냈다.
그것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자,
노릇노릇하게 익은 삼겹살 여러점이 불판에 줄세워졌다.
"이제 드셔도 됩니다."
만족스럽다는 듯이 미소짓는 루시퍼.
한 점을 집어 상추 위에 올리고, 파채와 마늘 한 알 쌈장 조금을 얹어 입에 넣으면······.
완벽하다.
알맞게 익은 삼겹살엔 육즙이 가득해 신선한 쌈채소의 궁합이 일품이다. 그야말로 입 안에서 펼쳐지는 쌈채소와의 오케스트라.
"훌륭해."
"후, 이 날을 위해 지옥불 앞에서 특훈한 보람이 있네요."
루시퍼는 진심으로 뿌듯하다는 듯 집게를 들어올렸다.
근데 진짜로 왜 이렇게 잘 굽는거야.
이것 뿐만이 아니다. 집안 일을 너무 완벽하게 한다.
사도는 원래 이렇게 다재다능한가?
"너도 좀 먹어. 제일 고생했는데."
"그러면 사양않고 먹겠습니다."
루시퍼도 신이 나서 젓가락을 들었다.
둘이서 정신 없이 먹다보니 불판 위의 고기가 순식간에 사라졌지만 몇 인분이고 더 추가해도 괜찮다.
앞으로 돈에 쪼들릴 걱정은 없으니까.
크게 사치하지 않는 이상,
생활비는 충분히 감당 가능하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고기를 먹을 수 있다니.
불과 며칠 전까지만해도 취업 걱정에 불안감 한가득이었는데.
'진짜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구나.'
그러고보니 엄마랑 동생한테도 슬슬 알려줘야 할텐데.
헌터로 각성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고기를 먹고 있을 때였다.
'응?'
고깃집의 벽면에 걸린 TV에 무명에 관한 내용이 흘러가고 있었다.
- 내일, 무명(無命) 헌터에 관한 협회의 입장 발표가 있을 예정
오늘 아침에 1위 길드인 불멸에서 무명에게 영입 제안 의사를 비쳐왔었다.
'······이건 좀 관심이 생기는데.'
거기에더해 내일은 협회의 입장 발표까지.
성장을 우선시한다는 기조는 바꿀 생각 없지만, 무슨 입장일지는 궁금하기는 하다.
'미궁 공략에 대한 이야기는 없네.'
무명이 미궁을 공략했다며 난리가 날 법도 했는데.
아성 길드 사람들이 약속을 지켜준 모양이다.
'게다가······.'
미궁 랭킹을 확인하려면 미궁의 출구에 도달해야 하니. 소문이 퍼지고 증명되는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거다.
그래도 내일 즈음에는 다른 헌터들에 의해 소문이 퍼져나갈 거다.
'어쩔 수 없다. 최대한 빨리 공략해나가는 수밖에.'
그리 생각하며 고기를 입에 넣을 때였다.
드르륵.
루시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언짢은 듯한 표정이었다.
"벌써 다 먹었어?"
"아뇨, 아닙니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뭔가 더러운 게 달라 붙은 것 같아서요."
그리 말한 루시퍼는 화장실 열쇠를 들고서 고깃집을 빠져나갔다.
"······여기 물티슈도 있는데."
순식간에 나가버렸다. 나는 들어 올렸던 물티슈를 다시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결벽증이 틀림 없다니까.'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집 바닥이 무진장 깨끗한 이유가 있었다. 설거지한 그릇들도 광이나서 얼굴이 비쳐보일 정도였으니.
'고기나 미리 구워둬야겠다.'
치이익.
나는 새로운 고기를 불판에 얹으며 뉴스에 다시 집중했다.
* * *
덜컥.
루시퍼는 고깃집의 문을 열고서 밖으로 나왔다.
타앗.
그는 주변을 잠시 살핀 뒤, 곧장 건물의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수상한 놈들이 있다.'
그는 사도로서 자신의 주인을 보좌할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만약 주인에게 사고라도 생긴다면,
소환수인 루시퍼는 자연스레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성좌로서의 삶은 이제 지긋지긋하거니와 루시퍼는 무엇보다 자신의 주인을 끝까지 보좌하고 싶었으므로.
'분명 여기였지.'
루시퍼는 옥상 아래의 골목길을 내려다봤다.
고기를 먹으면서도 근방의 마력을 확실하게 체크 하고 있었다. 이 능력만큼은 상시 유지였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나도 대응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 결과 루시퍼는 근방에서 보기 힘든 수준의 기운 두 개를 감지해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된다는 거 아닙니까."
"틀림 없다. 이 위치가 맞다."
험상 궂은 인상의 남성 두 명이 골목 어귀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골목 바깥을 눈짓하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을 확인한 루시퍼는 눈쌀을 찌푸렸다.
'······지독한 기운이구나. 살인자나 범죄자들이 풍기고 다닐 법한 기운인데. 갱생도 안되는 놈들이야.'
그런 이들이 여기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단 말인가?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루시퍼는 기척을 죽이고서 두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남자 하나가 혀를 차더니 불평하듯 말했다.
"그런데 정말로 여기서 나타나는 겁니까?"
"틀림 없어. 그 분의 이야기는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무엇이 나타난다는 걸까.
그에 대한 답은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거야 알지만. 무명(無命) 정도 되는 거물이 이런 평범한 고깃집에 나타난다는 게······."
"의심하지 말고 믿어라. 그 분께서 하신 말씀이다."
"예. 물론입죠."
무명(無命).
그 두 글자가 남자의 입에서 튀어나온 순간.
루시퍼의 두 눈동자에 이채가 깃들었다.
정체를 들켰다?
그건 아니었다.
무명 본인인 주강혁 뿐만 아니라 루시퍼 또한 정체를 숨기는 데에 각별히 신경 썼으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아성 길드.
그건 불가능했다. 아성 길드는 자기네 길드로 바로 돌아갔다. 미행을 했다면 진작 알았을 거다.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닌 듯했다.
'분명 뭔가가 더 있다.'
게다가 두 각성자에게는 지독히 악독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가 되었든 그냥 놔둘 순 없었다.
두 남자의 대화가 끝나는 순간이었다.
스륵.
두 남자의 뒤편으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둘은 자신의 뒤쪽에 무언가가 다가왔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분명 무명쯤 되면 평범하게 생기지는 않았을텐데."
"잘 봐라, 언제 나올지 모른다. 그 분께서 특별히 내린 지령이다. 반드시 완수해야 해."
열성적으로 골목 바깥을 살피는 두 남자의 어깨에 루시퍼가 손을 얹었다.
"큭?"
"?!"
순식간이었다.
루시퍼의 손에서 뻗아나간 흑색 마력이 두 헌터의 몸을 속박했다.
"이 새끼 뭐야?"
"뭐, 뭐냐 넌?!"
흑색 마력에 의해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된 두 남자.
그 둘을 향해 루시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 나누던 이야기 좀 자세히 듣고 싶은데 말이야."
11화 각성자 연합
고깃집 뒤편의 골목길에 있던 수상한 각성자 둘.
두 사람 전부 B급 헌터 수준의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퍼의 상대는 아니었다.
콰악!
"끄으윽······!"
"큭, 이거 안 풀어? 우리가 누군지 알고······."
손에서 뻗어나간 흑색 마력으로 두 사람을 제압한 루시퍼가 미간을 좁혔다.
'이놈들한테서 무명(無命)이란 두 글자가 나왔다.'
대화로 유추하건데 이 둘은 여기서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도 꽤 정확하게.'
고깃집 근처라는 위치까지 알고 있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루시퍼는 발버둥치는 두 각성자를 향해 낮게 읊조렸다. 짙은 마력이 담긴 음성이었다.
"뒤돌아보지 마라. 내 얼굴을 보면 죽일 거다."
"허, 허억······."
"크윽."
루시퍼의 흑색 마력은 사정없이 두 사람의 목을 움켜잡았다. 창백해진 두 각성자의 이마 위로 식은땀이 미친듯이 흘러내렸다.
안간힘을 써봤지만 빠져나오기는 커녕 압박이 심해질 뿐이었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선생님."
결국 행동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먼저 비굴하게 물어왔다. 루시퍼는 차갑게 대답했다.
"길게 말하지 않겠다. 무명에 대해서 어떻게 아는 거지?"
"그, 그건 말할 수······."
콰드득-!
"끄억!"
섬뜩한 소리와 함께 행동대장의 옆에 있던 부하가 그대로 늘어졌다.
"저, 전부 말하겠습니다! 제발 목숨만은······."
그제서야 행동대장이 목숨을 구걸했다.
루시퍼는 무감한 얼굴로 늘어진 남자를 확인했다.
'쯧, 인간들이란.'
인간이란 언젠가 반드시 죽음을 경험하는 필멸자.
죽음의 공포 앞에서 의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마음 같아선, 당장 없애고 싶지만······.'
다른 하나도 아직 죽이지 않았다. 기절만 시켰을 뿐이다.
우선은 자세한 이야기부터 들어봐야 했으니.
"저, 저희는 각성자 연합입니다. 이 정도의 강자시면 저희 단체의 이름을 들어보셨을 수도······."
겁에 질린 행동대장이 소속을 밝혔다.
루시퍼의 눈썹이 미묘하게 올라갔다.
'각성자 연합? 처음 듣는데.'
사도는 현세에 강림할 때 보편적인 지식을 얻고 시작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문화, 역사, 사회 전반에 걸치는 지식들이 자연스럽게 습득된단 의미.
그런데 각성자 연합이란 단어는 아예 처음 들었다.
'알려지지 않은 단체인가.'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졌다.
"연합이고 나발이고 관심 없다. 무명에 대해서 어떻게 알았는지 말해라."
"지, 지부장께서 알려주셨습니다. 그 분의 능력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루시퍼가 인상을 찌푸렸다.
'······설마 예언 능력인가?'
예언자는 시대불문, 세계불문 귀찮은 존재였다.
미래를 예지하고 원하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기에.
무명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입장에선 여러모로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행동대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저, 저희는 여기서 무명(無命)헌터를 뵙고 각성자 연합에 초대하기 위해서 있었던 겁니다. 절대 나쁜 뜻은 없었습니다."
"나쁜 뜻은 없었다라."
루시퍼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거야 모르는 일이다.
아까만해도 살기를 풀풀 흘리고 있었으니까.
행동대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호,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선생님께서 무명 헌터이신 겁니까?"
그 말에 루시퍼는 싸늘하게 웃으며 답했다.
"글쎄."
이 이상 대화를 이어갈 필요는 없어보였다. 루시퍼의 흑색 마력이 한층 진해진 순간.
콰득!
행동대장이 그대로 축 늘어졌다.
마찬가지로 아직 죽이지 않았다. 루시퍼는 확실하게 기절 시킨 두 사람을 골목 구석에 밀어 넣었다.
당장 주인님께 보고할만한 사안은 아니었다.
허나, 화근이 될만한 것은 미리 뿌리 뽑아야 했다.
주인님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루시퍼는 고깃집으로 걸어들어왔다. 자리에 앉아 고기를 먹고 있던 주강혁이 루시퍼에게 손짓했다.
"왔어? 더 먹어. 모자라면 더 시키고."
그런 주인을 바라보며 루시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주인님,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습니다."
"뭘?"
"마트 세일할 시간이었습니다."
"엥? 그런 것까지 파악해 뒀어?"
"물론이죠. 기왕이면 절약하는 게 좋으니까요. 고기는······."
와구와구.
루시퍼는 자리에 일어선 채로 젓가락을 들더니 불판의 고기를 흡입했다.
입을 쓱 닦은 루시퍼가 몸을 돌리려다 멈칫했다.
스윽.
녀석은 품 안에서 흑색 깃털 하나를 꺼내 주강혁에게 건네었다.
"혹시라도 제가 장을 보는 동안 무슨 일이 생기면 이걸 사용해주시면 됩니다."
"이게 뭔데?"
"저를 즉시 소환할 수 있는 깃털입니다. 깃털을 쥐고 제 이름을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런 편리한 게 있었다니.
루시퍼는 감탄하는 주강혁에게 깃털을 쥐여줬다.
"그러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루시퍼는 그제서야 고깃집 바깥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주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녀석 가사에 진심이구나. 본받을만한데."
자취한답시고 얼마나 대충 살았던가.
루시퍼가 오고나서부터 생활이 바뀌는 게 느껴진다.
전투도 전투지만, 집안일까지 해주는 건 솔직히 고맙다.
주강혁이 그리 감탄하는 사이.
바깥으로 나온 루시퍼는 빌딩 위에서 주변을 샅샅이 살펴봤다.
'주변에 위협이 될만한 기운은 없다. 이 녀석들 말고는.'
그대로 골목으로 내려온 루시퍼는 기절한 남자 둘을 마력의 끈으로 묶었다.
"그럼 출발해볼까."
콰앙—!
이어서 루시퍼는 땅을 박차고 하늘 위로 뛰어올랐다.
"아, 아?! 으아악!"
"사, 사람 살려!"
정신을 차린 두 각성자가 소리쳤지만, 이미 하늘 높이 올라온 상태. 두 사람의 비명은 어디에도 닿지 못했다.
루시퍼는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안내해라. 네 놈들의 우두머리가 있는 장소로."
* * *
"드, 들어보십쇼. 선생님! 그쪽도 각성자이신 것 같은데, 이참에 저희 각성자 연합에 합류하시는 건······."
"지부장님께서 분명 좋은 지위를 주실겁니다!"
두 각성자는 끌려가면서도 재잘댔다.
그 덕에 루시퍼는 각성자 연합이 어떤 단체인지 알 수 있었다.
각성자 연합.
그들은 인류의 지배자는 각성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상 세계 지배를 꿈꾸는 허무맹랑한 단체였다.
'각성자들에 의한 인류 지배라.'
딱히 신선하진 않았다.
'이런 놈들은 어느 세계를 가도 있구나.'
루시퍼가 들여다본 다른 차원에도 많았다.
시스템의 능력을 얻은 각성자들은 언제나 세계의 주축이 되고자 했다.
그러한 혁명 혹은 반란은 이따금 성공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지금의 세계는 그저 튜토리얼에 지나지 않으니까.
'주인님께서 세계를 지배한다면 모를까.'
지금 루시퍼에게 중요한 것은 주인의 안위뿐.
경우에 따라 각성자 연합을 완전히 해체 시킬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콰아아—!
검은 날개를 펼치고 활공해 온 루시퍼의 시야에 폐건물 하나가 보였다.
숲 속에 덩그러니 놓여진 폐건물.
허름한 외관탓에 누가봐도 버려진 건물처럼 보이지만.
"저, 저 건물의 지하가 각성자 연합의 본부입니다."
지하에 비밀 시설이 있다는 모양.
루시퍼는 그 방향을 향해 천천히 내려갔다.
마력 밧줄에 묶여 있는 두 각성자도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하고 있는 생각은 서로 비슷했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누가봐도 이 녀석이 무명이야.'
'본부에는 A급 각성자들이 즐비하다고. 떼거지로 덤벼들면 상황 끝.'
애시당초 두 사람의 목적은 무명(無命)의 회유였다.
그런데 무명(?)이 직접 본부까지 와줬으니 할 일은 다한 셈이었다.
만약 설득이 가능하다면 좋은 동료를 얻게 되는 것이고,
각성자 연합과 뜻을 달리한다면 단순히 제거하면 된다.
그리 생각하며 두 사람이 비릿한 미소를 흘리고 있을 때였다.
우우웅! 번쩍!
루시퍼의 오른손으로 검은 빛이 모이기 시작했다. 공중에서 압축된 빛은 레이저가 되어 건물로 쏘아졌다.
콰아앙-! 쿠구구구!
흙먼지와 함께 폐건물이 그대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어, 어라?"
"어······."
허공에 묶인 채 두 눈을 깜빡이는 행동대장과 부하.
방금 뭘 본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호의적이지 않을거란 건 알고 있었지만,
공중에서 건물을 포격해서 부순다니?
콰앙-! 콰아앙!
루시퍼는 레이저 두 방을 폐건물에 먹여주고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러고선 품 안에서 갈색 빵 봉지를 꺼내들었다.
골목 옆이 빵집이었던가.
툭툭. 스윽.
대충 눈이 있어야 할 부분에 구멍을 뚫고서 빵 봉지를 머리에 썼다. 날개도 숨기니 평범한 인간이 되었다.
'훌륭하네.'
완벽한 변장에 루시퍼가 만족했다.
"인간. 입구는 어디지?"
"저, 저쪽이었습니다만······."
행동대장이 무너진 잔해의 아래를 가리켰다. 대장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건 아예 각성자 연합에 대한 선전 포고 수준이었다.
아무리 그 무명이라지만,
각성자 연합을 전체로 싸울만한 자신감이 있다는건가?
그때였다.
콰앙!
잔해가 들썩이더니 굉음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파편이 튀어 올랐다. 그곳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헌터들이 있었다.
"콜록, 콜록."
"케헥. 아오, 먼지."
"뭐냐. 저 새끼가 무명이야?"
"뭔 거지 같은 봉투를 뒤집어 쓰고선······."
잔뜩 열이 받은 헌터들이 사나운 얼굴로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 수는 대략 20명.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기세였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게 상대는 무명(추정).
월드 보스를 단번에 처리한 압도적 강자.
뿐만 아니라 폐건물 전체를 일순간에 붕괴시킨 괴물이다.
침묵을 깨고 먼저 움직인 것은 각성자 연합 쪽이었다.
저벅 저벅.
각성자들 사이에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오는 누군가.
"무명 헌터. 저희를 적대하는 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있는 헌터들만해도 전부 A급. 감당하실 수 있으신가요?"
"······너는 누구지?"
"각성자 연합, 통칭 각연의 부책임자 오성연이라고 합니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루시퍼를 마주했다.
"무명(無命)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 손에 넣었지?"
"각성자 연합에 합류한다고 결정하시면 알려드리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뒤쪽에 있는 헌터들이 각자 무기를 들어 올렸다. 마력이 둘러진 냉병기들이 각자 빛을 내기 시작했다.
"살려 드리진 못할 겁니다. 당신 같은 강자가 적이라면 우리의 계획에 큰 방해가 되거든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동료가 되던가,
이 자리에서 죽던가.
둘 중 하나였다.
루시퍼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내 질문에 답할 생각이 없다면 이렇게 하지."
타앗.
가볍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루시퍼. 헌터들이 공격을 인지하기 도 전. 그의 발차기가 부책임자인 오성연의 복부에 강하게 꽂혔다.
"끄허억?!"
콰아아앙-!
걷어차인 오성연이 그대로 허공을 날아 뒤쪽의 헌터들에게 내다 꽂혔다.
"다음."
당연하게도 이어지는 건 루시퍼의 일방적인 파괴였다.
* * *
콰앙! 콰아앙!
무명(無命)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쪽수 앞에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실제로 A급 헌터 20명이 모이면 S급 헌터도 제압이 가능했다. 게다가 부책임자인 오성연은 S급 하위에 속하는 강자.
그러니 아무리 상대가 무명이더라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끄아악!"
"크악!"
"괴, 괴물이다······!"
콰아앙—!
각성자 연합 소속의 헌터들이 죄다 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콰앙! 콰앙!
주먹질 한 방에 서너명이 나가떨어졌다. 일방적인 구타. 그러나 헌터들은 제대로 반격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끄으윽······."
충격파에 튕겨나온 부책임자 오성연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이, 이 놈. 우리를 가지고 놀고 있잖아.'
영상 속에서 보았던 무명의 모습은 이것보다 훨씬 잔혹했다.
월드 보스가 그 자리에서 터져 죽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무명은 주먹질로만 헌터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제대로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거냐······.'
놈은 굳이 주먹만 써서 각성자 연합의 헌터들을 두들겨 패고 있었다. 그 악랄함(?)에 오성연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콰악-!
루시퍼는 바깥에 나온 20명의 A급 헌터를 전부 때려눕힌 뒤, 오성연의 멱살을 쥐었다.
"지하가 본부라고 했지."
루시퍼는 그대로 거침없이 내부를 헤집고 다녔다.
"크윽, 날 왜 끌고 가는 겁니까?!"
부책임자인 오성연이 간절히 소리쳤지만 루시퍼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
루시퍼는 직접 지하 시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자료를 확인했다.
각성자 연합의 목표는 예상했던 대로 세계 지배였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이 놈들은 약하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인류 지배를 꿈꾸는 놈들치고 나사가 빠진 것처럼 약해.'
각성자에겐 인류의 화기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지만 겨우 이 정도 규모로 인류 전체를 통솔한다는 건 말이 안된다.
'그렇다고 단순한 미치광이 놈들은 아닌 것 같고. 조직이 꽤 정교해.'
루시퍼는 시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이곳저곳을 뒤졌다.
'쯧······.'
어느 방에는 인간의 시체처럼 보이는 것들이 잔뜩 쌓여 있기도 했다.
"이, 이건······."
"설명해봐."
유성연은 루시퍼의 눈빛에 덜덜 떨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듣자하니, 각성자 연합은 비각성자들을 물건보다 못하게 취급하고 있던 모양.
다가올 각성자의 세계에 일반인은 노예나 다름없다나.
참고로 생존자는 없었다.
"비밀 창고 같은 거 있으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거다."
"아, 안내하겠습니다."
루시퍼는 오성연의 안내를 받아 내부를 더욱 샅샅히 돌아다녔다.
서류, 금고, 냉장고 등 보이는 건 전부 부수고 털었다.
그러다가 눈에 띄는 서류 뭉치 하나를 발견했다.
'흐음?'
가장 깊은 방에 존재하는 금고에 숨겨진 서류였다. 기밀이라고 적힌 서류의 앞장을 넘기자 그 내용이 드러났다.
- 솔로몬의 72 악마 '벨리알' 강림 계획
'호오, 이 놈들 봐라?'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루시퍼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인류 지배가 목표라면 이런 야망 정도는 있어야지.'
기밀 서류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악마 강림으로 세계 정복.
이 세계에 잠든 악마의 봉인을 풀어 대한민국에 큰 혼란을 야기. 동시에 악마의 제어권을 통해 권력을 손에 넣는다는 내용이었다.
'확실히. 72 악마 중 하나 정도면 그럴 수도 있겠지.'
지구 어딘가에 악마가 봉인 되어 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였지만, 루시퍼는 그 점을 의심하진 않았다.
시스템이 이 세계에 도래하며 바뀐 것은 각성자들 뿐이 아니었다.
지구라는 행성 자체가 마력이 흐르고 전설과 환상이 살아 숨쉬는 세계가 되었다.
마신뿐만 아니라 온갖 전설적 존재들이 지구 어딘가에 잠들어 있으리라.
'실행 날짜는······.'
바로 오늘이었다.
'리더가 본부에 없는 이유가 있었군.'
무명(無命)에 대한 정보도,
봉인된 악마에 대한 정보도 전부 이 리더로부터 나온 모양이다.
"흐음."
루시퍼는 서류를 전부 살핀 뒤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빵 봉투 속의 차가운 눈빛이 부책임자 오성연을 향했다.
"악마라. 그런 것의 봉인이 풀린다면 정말 큰일이겠구나. 대한민국이 붕괴하는 것도 금방이겠어."
"이, 이미······."
숨죽이고 있던 오성연이 악에 받친듯 소리쳤다.
"이미 늦었습니다. 우리들의 리더께서 봉인 장소로 향하셨으니까요!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악마의 강림은 이제 못 막습니다!"
"안 막아."
"예?"
루시퍼의 말에 오성연이 고장난 것처럼 되물었다. 루시퍼는 짧게 답했다.
"안 막는다고."
그리 말하는 루시퍼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상위 악마종 벨리알.
놈은 마신(魔神)급 마수다.
현시점에서는 그 정도는 아니려나.
어쨌든.
그런 좋은 먹잇감을 뭐하러 땅속에 묵혀두겠는가.
"막을 게 아니라 잡아야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주인님의 힘 아래 강자는 없으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인님을 반드시 최강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악마조차 주인님의 양분이 되도록.
루시퍼는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12화 악마 강림
반지하 단칸방으로 돌아온 나는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다.
각성하고 며칠간 정신이 없어서 연락도 못 했었기에.
"진짜로 각성했어. 이제 나도 헌터라니까."
스마트폰에서 어머니의 기뻐하시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
요즘 세상에 아무리 헌터가 인생 로또라지만 위험한 일이 있는 건 사실이니까.
나는 그런 엄마를 안심시켰다.
"위험한 거 없어. 진짜 하나도 없다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다.
진짜로 위험한 게 없다.
미궁은 루시퍼가 다 뚫어주고,
월드 보스는 집에서 TV로 잡는데 위험은 무슨 위험.
오히려 이 정도로 편해도 되나 싶을 정도다.
"그래, 시윤이한테도 전해줘. 나중에 또 전화할게."
전화를 마친 뒤 스마트폰을 내려두었다.
'이제는 좀 쉴까.'
반지하의 창문을 내다보니 완전히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미궁 자체가 워낙 넓고 복잡하다 보니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하루에 두 개를 공략한 건 대단한 일이긴 하다.
나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 TV를 틀었다.
'뉴스는 아까 고깃집에서 실컷 봤고······.'
적당한 예능 프로를 틀고서 시스템 창을 불러왔다. 시간을 보니 루시퍼가 도착하려면 좀 걸릴 것 같았다.
'아이템이나 확인해 둘까.'
미궁 2개 분량을 혼자 독식했으니 마정석이 꽤 쌓였을 거다.
"인벤토리 오픈."
『 인벤토리 목록 ( 12 / 20 )』
[ 장비 ]
- 은밀 망토 x1
- 은둔자의 가면 x1
- 망멸검 x1
[ 마정석 ]
- 최하급 마정석(小) x 95
- 최하급 마정석(中) x 57
- 최하급 마정석(大) x 22
- 하급 마정석 (小) x 8
- 독특한 마정석(★) x 1
[ 특수 ]
- 흑(黑) 이무기의 혼(SR) x 1
- 헬하운드의 혼(SR) x 1
[ 중요 ]
- 전설의 증표 x 5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경험치의 비약 x 1
'뭐가 많네.'
벌써 이만큼이나 쌓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다시 가져와 계산기를 두드렸다. 검색도 중간중간하고.
그 결과는······.
일반 마정석만 전부 팔아도 회사원의 연봉 수준.
'장난 아니네.'
원래는 이것보다 더 벌 수도 있었을 거다.
'공략을 전부 때려 부수면서 해서 그런지 재료나 소재가 남아나질 않네.'
이건 내가 직접 즉살 스킬을 써서 잡아도 발생하는 문제다.
마정석은 회수해도 재료는 가져올 수 없으니까.
능력의 메리트를 생각하면 이 정도는 감수해도 괜찮다.
'그래도 여기 독특한 마정석까지 합치면······.'
엘리트 마수를 잡고 나온 독특한 마정석(★).
개당 2,000만원은 받는 보물이었다.
즉 이틀간 5,230 만원을 벌어들였다.
'······최고다.'
더군다나 이만큼이 E등급, D등급 미궁을 공략하고 번 돈이다.
그보다 상위인 C등급, B등급 미궁을 공략한다면?
거기서 나아가 A급 이상의 상위 던전이라면?
돈을 자루로 쓸어 담을 수 있을 거다.
'이대로만 가면 농담이 아니라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겠는데.'
나중에 엄마랑 동생한테 자랑할 생각을 하니 절로 웃음이 나온다.
'아버지 없이 엄마 혼자 고생 많이 했지.'
그 고생도 곧 있으면 끝이다 이말이야.
물론, 아직 마정석들은 전부 가져다 팔 수 없다.
길드도 소속도 없는 초보 헌터가 이만한 양의 마정석을?
누가봐도 의심스러운 상황이니 당분간은 적당량만 팔아야 한다.
'어차피 이 정도 속도로만 가면 S급 헌터도 꿈은 아니니까.'
약 한 달.
그 정도는 충분히 참고도 남는다.
'앞으로 공략할 던전들도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고.'
나는 인벤토리 창의 중요 카테고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중요 ]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경험치의 비약 x 1
- 전설의 증표 x 5
무엇보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 있다.
현재 즉살의 남은 쿨타임은 35일.
이전과 달리 지금은 루시퍼가 있으니 무리해서 사용할 필요가 없다.
'어지간히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은······.'
그리 되뇌고 나니 어쩐지 찜찜하다.
지난번엔 월드 보스가 연속으로 두 번이나 출현했었지. 헌터들도 막기 힘들 정도로 강했고.
누가 봐도 좋은 조짐은 아니다.
근데 뭐 언제는 좋았나.
'뭐, 별일 있겠어.'
사실 별일이 있다고 해도 내가 미리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굳이 고민할 것도 없고.
그리 생각하며 습관적으로 TV의 채널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팅-!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 해당 성좌가 이 발견을 매우 기뻐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조금 아쉬워합니다. 』
새로운 성좌의 출현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응?"
백색의 여명이라.
솔직히 성좌들에 대해선 아는 게 없다.
다만, 검은 별의 주인처럼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많이 데리고 있을수록 좋은 거겠지.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에게 인사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모두에게 인사합니다. 』
"······안녕하세요."
갑작스러운 인사에 어색하게 답했다. 그에 화답하듯 허공에 생겨난 자그마한 빛이 반짝였다.
내 주변을 부유하는 빛 하나가 늘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환하게 웃습니다. 』
지켜보고 있는 건가.
딱히 부담이 되거나 하진 않는다.
성좌라는 존재 자체가 실감이 안 난다고 해야 하나.
"으음."
혹시나 백색의 여명도 무언가 하나 던져 주지 않을까 싶어 괜히 시스템 창을 노려보고 있던 그때였다.
『 흑색의 사도가 시야를 공유합니다. 』
파앗-!
별안간 눈앞이 번쩍하더니 시야가 바뀌었다.
이미 몇 번 경험해 본 시야 공유라 당황스럽진 않았다.
'루시퍼?'
단칸방 한구석에서,
어두컴컴한 밤하늘로.
시야가 일변했다.
콰아아—!
루시퍼는 밤하늘을 활공하고 있었다. 도시의 빛 공해에서 멀어진 장소인걸까.
밤하늘에 새겨진 별빛과 달빛이 유난히 밝게 보였다.
[ 주인님. 급히 전달 드려야 할 일이 있어 허락 없이 시야 공유를 활성화했습니다. ]
루시퍼의 아래에는 달빛에 비친 바다가 일렁이고 있었다.
"······마트 장보러 간다고 하지 않았었나?"
[ 아, 그건 내일 배달로 올 겁니다. 저 루시퍼, 일평생 세일 시간은 단 한 번도 놓친 적이 없거든요. ]
그게 문제가 아니다.
어디로 가고 있는거야?
[ 본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인님을 노리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각성자 연합이라고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
"아니. 들어 본 적 없는데."
게다가 내가 노려지고 있었다고?
[ 이해하기 쉽도록 현세의 상황에 맞게 설명해 드리자면 각성자 연합은 세계 지배를 목표로 하는 빌런 조직입니다. ]
빌런 조직.
그런 곳에서 나를 노렸단다.
"······."
있었잖아. 위험한 거.
엄마한테 전화로 절대로 위험한 거 없다고 말하고 온 참인데.
무슨 이상한 조직에게 노려지고 있었다니.
충격이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분개합니다. 』
[ 놈들은 무명(無命)의 위치를 비교적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경우에 따라 무력을 쓰려고 했던 것 같고요. ]
"걔네가 내 위치는 어떻게 알아낸 거야?"
협회와 1위 길드 불멸에서도 무명(無命)을 못 찾아서 난리였다. 아성 길드도 내가 어디로 갔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을 텐데.
그런데 내 위치를 알고 있었단다.
[ 그걸 지금부터 알아내러 갈 겁니다. 주인님께선 집에서 편안히 계셔도 됩니다. 놈들이 저를 무명이라고 착각하고 있으니까요. ]
그렇다면 안심이긴 한데.
'세계 지배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레벨인데.
각성자 중에 범죄자가 된 사람을 빌런이라고 부르긴 한다. 종종 뉴스에 나와 화젯거리가 되기도 하고.
'각성자 연합은 처음 듣는데.'
혹시나 해서 각성자 연합을 검색해 봤지만,
인터넷에도 컴퓨터에도 나오는 정보가 없다.
[ 아, 참고로 각성자 연합의 목적은 지상에 악마를 강림시키는 겁니다. 마침 오늘이 그날이고요. 리더를 찾아가 추궁하는 겸해서 그 계획도 저지할까요? ]
"응?"
악마를 강림시킨다고?
마물이 나오고, 시스템이 존재하는 이 세상.
충분히 있을 법한 시나리오였다.
루시퍼가 나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고.
"잠깐만. 악마가 강림하면 어떻게 되는데?"
[ 각성자 연합의 리더가 대한민국을 쑥대밭으로 만들겠죠. 하지만 주인님은 무사하실 겁니다. 제가 있으니까요. ]
"······."
들어 버린 이상 모른 척할 순 없다.
"막아. 전력으로 막아."
내가 뭐 대단히 정의감이 투철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걸 모른 척하기엔 양심이 너무 없다. 보아하니 루시퍼가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것 같고.
게다가 각성자 연합의 리더가 나에 대한 정보를 어떻게 얻었는지도 알아내야 했다.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시퍼.
[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도착하면 시야 공유 해드리겠습니다. 너튜브라도 보면서 기다리셔도 됩니다. ]
이 상황에 너튜브를 잘도 보겠다.
세계 지배 같은 소리를 들었는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루시퍼가 다시 시야 공유를 연결한 것은 어느 섬에 도착하고 나서였다.
[ 도착했습니다! ]
처억.
루시퍼는 그대로 섬의 한가운데에 착지했다. 관리되지 않은 울창한 숲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어슴푸레한 달빛 속에서 수풀을 헤치고서 전진.
숲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기이하게 생긴 철문이었다.
[ 저 안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악마의 봉인을 해제하는 주술이 한창일 겁니다. ]
루시퍼는 품 안에서 빵봉투를 꺼내더니 머리에 썼다.
"······그건 뭐야?"
[ 신분을 숨기려고요. 아까 각성자 연합의 본부를 습격할 때도 이걸 썼었습니다. 그러면 출발하겠습니다. ]
뭐, 없는 거 보다야 낫겠지.
나름 철두철미하다고 해야 하나.
루시퍼가 철문 가까이로 손을 가져다 대려던 순간이었다.
스릉.
돌연 시퍼런 칼날이 루시퍼의 목덜미에 들이밀어졌다. 칼날에 둘러진 강기(罡氣)에 주변의 공간이 떨려올 정도였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 온 목소리는 익숙했다.
"너······. 여기엔 무슨 목적으로 온 거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바로 그 목소리.
'사최헌 헌터잖아.'
이 사람이 왜 여기에?
* * *
사최헌.
대한민국 랭킹 1위.
불멸 길드의 리더.
그는 회귀자였다.
그러나 회귀자의 삶이란 기구하다.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하기에 끝없는 쳇바퀴를 달려 나가야만 했으니까.
미래를 알고 있기에,
반드시 막아야만 하는 일들이 존재했다.
'오늘이 각성자 연합이 악마의 봉인을 푸는 날이다.'
각성자 연합은 실로 위험한 단체였다.
사최헌이 경험한 과거 중 하나에서 각성자 연합이 악마 강림에 성공한 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악마의 등장은 위험하다.'
악마의 힘은 막강했다.
탑 랭크의 헌터들이 죄다 달라붙었지만, 악마를 등에 업은 각성자 연합의 진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대한민국 전체가 혼돈에 빠진다. 도시가 불타고 수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는다.
적지 않은 영웅들을 잃고 나서야 대한민국은 다른 국가에 지원을 요청.
어렵사리 악마를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각성자 연합은 악마 강림으로 엄청난 이득을 취한 상태. 추종자들이 따라붙으며 그 규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커지고 만다.
'반드시 손을 써둬야 하는 지점이다.'
최적의 타이밍은 바로 악마 소환이 시작되는 시점.
너무 이르면 조직이 재결성 되고,
너무 늦으면 악마가 강림한다.
그리하여 사최헌은 소환이 예정된 무인도로 시간에 맞춰 달려왔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사도가 있었다.
"······대답해라."
길드의 샤워실에서 마주친 지 이틀만이었다.
웬 빵봉투를 쓰고 있었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똑같았다.
일반적인 헌터라면 모를까 사최헌에겐 어림없는 변장이었다.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악마 소환을 저지하려고 왔는데. 인간, 네 놈이야말로 왜 여기에?"
루시퍼는 목에 칼이 들이밀어진 상태에서도 능청스럽게 답했다. 사최헌은 칼을 거두지 않고서 말했다.
"······각성자 연합에 대해 아는건가?"
"뭐야, 너도 알고 있는 거였나.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사최헌의 검이 살짝 떨렸다.
그 주인이란 사도를 다루는 막강한 헌터를 의미했으므로.
잠깐의 침묵 후.
루시퍼가 사최헌에게 물었다.
"우리 주인님께서 너랑 협력하라고 하시는데. 어떻게 할래?"
"네가 각성자 연합의 편이 아니라는 증거가 필요하다."
루시퍼는 어깨를 으쓱이며 목에 들이밀어진 칼을 치웠다.
"여기서 평화롭게 대화나 나눌 시간이 있나 모르겠네. 언제 악마가 부활할지 모르는데 말이야."
"······."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 악마의 소환 저지였다.
한 번 부활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나는 들어갈 테니까, 거기서 실컷 생각이나 하고 있던가."
콰드득!
루시퍼는 철문을 종잇장처럼 뜯어내고 내부로 들어갔다.
"······."
잠시 멈춰 있던 사최헌도 이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이유는 있었다.
사도 루시퍼가 각성자 연합이었다면 진작에 자신을 막아섰을 것이다. 굳이 번거로운 방법을 쓸 이유는 없었을테니까.
저벅 저벅.
내부는 돌로 구성된 유적이었다.
드문드문 횃불이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너흰 뭐냐?!"
"사, 사최헌?!"
"저 새끼는 뭐야? 빵봉투?"
그리고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각성자 연합이 있었다.
"의식 장소로 향하는 걸 막아라!"
어둠 속에서 달려드는 최정예였지만.
서걱-!
사최헌의 자비 없는 칼날이 각성자 하나를 베어냈다. 옆에 서 있던 루시퍼가 짐짓 혀를 차며 말했다.
"어후, 같은 인간끼리 너무 자비 없는 거 아니야?"
콰아앙-!
루시퍼의 주먹이 각성자 하나를 그대로 날려버렸다. 사최헌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설명했다.
"각성자 연합은 수도 없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들이다. 이들은 비각성자들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다. 도구나 물건처럼 여기지."
서걱-! 서걱-!
사최헌의 검술에 뒤따라 달려들던 적들이 연거푸 쓰러졌다. 공간 자체를 절단하는 신묘한 검술 앞에 방어는 무의미했다.
"그런 것 같긴 한데."
사최헌과 루시퍼는 그대로 유적의 통로를 전진했다.
콰앙-! 쾅!
방해하는 자들은 전부 처리했다.
좌측에서 튀어나오는 각성자들을 사최헌이.
우측을 루시퍼가 맡으며 전진.
"뭐야, 이거 생각보다 복잡한데. 미궁도 아니고."
"아무것도 모르고 온 건가? 이쪽이다."
유적은 지하로 길게 이어져 있었다. 내부로 들어갈수록 골렘 같은 마수들도 튀어나왔지만······.
콰앙! 쾅!
둘의 상대는 아니었다.
사최헌은 앞으로 나아가며 루시퍼에게 말했다. 아니, 정확히는 이 모든 광경을 보고 있을 주강혁에게.
"사도의 주인이여. 불멸 길드에 합류해라. 원하는 조건은 전부 맞춰주지. 무명(無命)과 마찬가지다.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그 힘이 필요하다."
현재 사최헌은 무명(無命)과 사도의 주인이 다른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 말에 루시퍼는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글쎄, 이쪽도 이쪽의 사정이 있어서 말이야."
"······그건 네 주인의 뜻인가? 멋대로 지어낸 것처럼 들리는데."
"뉘앙스는 비슷해."
"······."
사최헌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캐묻기 위해선 자신도 패를 공개해야 했기 때문이다.
사최헌의 회귀(回歸)는 성좌들도 모르는 극비.
이어지는 대화는 없었다.
사최헌과 루시퍼는 묵묵히 눈앞의 골렘들을 쳐부수며 전진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유적의 최중심부.
쿠우우우-!
"큭, 앞이 안 보일 지경이네."
"지금부터 절대 방심하지 마라."
"하, 살다살다 인간한테 걱정을 다 받아보네."
사악한 마기가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폭풍의 눈 속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 악마의 강림이 임박했습니다. 』
『 솔로몬의 72악마 : 벨리알 』
각성자 연합의 리더 한종윤.
"아아······."
그가 쇳소리를 토해냈다.
"사최헌인가. 어떻게 알고 온거지? 내 부하들은 전부 쓰러진 건가?"
두 눈은 새카맣게 물들었고, 전신에 새겨진 복잡한 문신은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었다.
"옆의 빵봉투는 부하인가? 괴상한 취미군. 흐흐."
"······이 새끼가 누구보고 부하래."
한종윤은 사최헌을 앞에 두고도 여유로웠다. 악마의 강림을 눈앞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때보다 충만한 마기가 그의 몸에 스며들고 있었다.
콰앙-!
사최헌이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이윽고 그의 검이 마기의 폭풍을 베어내기 위해 휘둘러졌다.
카앙!
"큭."
그러나 허무하게 튕겨져 나왔다. 그만큼 어마어마한 마기가 휘몰아치고 있단 뜻이었다.
당장이라도 악마가 강림할 것 같은 상황.
"크하하하! 무슨 짓을 해도 소용없어! 마신은 강림하게 되어 있다! 그게 정해진 미래다!"
각성자 연합의 한종윤이 광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을 듣고도 사최헌은 포기하지 않았다.
"반드시 막는다."
그리 중얼거린 사최헌이 검 위로 대량의 마력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어이, 인간. 기다려."
처억.
루시퍼가 단호한 목소리로 사최헌의 어깨를 잡았다. 루시퍼는 입가의 미소를 숨기지 않은채 말했다.
"악마를 처치하면 막대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단 거. 알고 있나?"
"······?"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최헌은 회귀자니까.
72악마는 마수들 중에서도 최상위종에 속하는 고위험개체.
그 보상이란 전설급을 뛰어넘는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악마의 강림은 재앙이나 다름없다. 고작 한 마리 풀려난 것으로 대한민국이 멸망할 뻔했으니까.
한마디로 미친 개소리였다.
"뭔 소리를 하는 거냐? 지금 악마를 강림시키자는 건가?"
처억.
사최헌의 칼끝이 루시퍼를 향했다.
루시퍼는 시종일관 태연한 표정이었다.
"그래."
악마를 처치하고 나오는 막대한 보상을,
루시퍼는 자신의 주인에게 바칠 예정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사최헌을 향해 루시퍼는 쐐기를 박았다.
"쫄리면 빠지시던가."
13화 승리자
"······제정신인가?"
루시퍼의 제안을 들은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악마를 강림시킨 다음에 처치하자니.
무모하기 그지없는 발상이었다.
악마의 강함은 월드 보스를 능가한다.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이 불지옥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잡을 수 있다면 대박이잖아? 왜. 자신이 없나?"
루시퍼는 도발하듯 사최헌에게 말했다.
막대한 경험치와 현시점에선 얻을 수 없는 보상까지.
대박은 대박이다.
잡을 수만 있다는 전제하에.
칭호인 데몬 슬레이어는 이후 등장할 악마 사냥을 수월하게 해줄 키카드다. 이로 인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정말로 이길 수 있는가?
"······."
잠깐이지만 사최헌은 머뭇거렸다. 루시퍼는 그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인간, 네 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사도다. 한낱 인간······. 물론 주인님은 제외입니다. 하여튼 한낱 인간과는 궤를 달리하는 존재."
루시퍼는 날개 없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어서 사최헌을 내려다보듯 쳐다보며 마기의 폭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아앙—!
루시퍼의 손아귀에서 뻗어나간 마도광선이 마기의 폭풍을 강타했다.
일순 마기의 폭풍이 깔끔하게 걷어졌다.
"뭐, 뭔······?!"
악마 빙의를 진행 중이던 한종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러나 한종윤은 지금 루시퍼의 관심 밖이었다.
"그런 내가 너에게 협력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다."
루시퍼가 사최헌에게 쐐기를 박았다.
콰아아-!
사라졌던 마기의 폭풍이 다시 솟아오르며 유적 내부에 강풍을 일으켰다.
"하. 그렇다고 해도······."
사최헌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붙잡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지만,
사최헌은 사도의 강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회귀자였으므로.
'······내가 아는 미래가 달라졌다.'
사최헌이 알고 있는 미래에서 현시점에 사도의 출현은 없었다. 무명(無命)의 출현 또한 명백한 이상현상이었다.
'어쩌면 둘도 없을 기회일 수도 있다.'
사도가 직접 손을 내미는 기묘한 상황.
악마를 처치하기엔 둘도 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사최헌 자신의 장비와 스킬, 성장력은 수차례의 회귀 중에서도 역대급.
거기에 사도가 협력한다면······.
악마를 잡아내는 게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지금 이대로라면······.'
사최헌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간다면 나는 인류의 멸망을 막아낼 수 있는가?'
최고의 효율로 온갖 기연을 마주하며 성장해 왔다.
장비, 스킬 그리고 미래를 위한 포석까지.
그렇다면 언젠가 다가올 최후의 순간을 넘어설 수 있는가?
······그건 장담할 수 없었다.
'부족하다.'
인류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많은 힘이 필요하다.
지금 따윈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강함을 손에 넣어야 했다.
'강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회귀자인 자신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사최헌이 짊어진 숙명.
"해보겠다."
사최헌의 입에서 어렵사리 결론이 나왔다.
"응? 뭐라고? 잘 안 들리는데?"
"······."
루시퍼가 사최헌을 놀리듯 물었다.
사최헌은 재차 말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검을 들어 올린 뒤, 심신을 가다듬으며 악마의 강림을 기다릴 뿐.
"뭐, 동의한다는 거지?"
사최헌의 승낙을 받아낸 루시퍼는 확신의 미소를 지었다.
"주인님, 사최헌이 동의했습니다."
지상에 악마를 강림시키겠다는 희대의 미친 짓.
상식적으로 주강혁이 동의할 리가 없었다.
반면 루시퍼는 주인을 설득시키고자 했다.
거기에 루시퍼의 주인, 주강혁이 내건 조건은 딱 하나였다.
- 사최헌 헌터가 허락한다면 할게.
랭킹 1위 사최헌의 동의.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루시퍼는 그 조건을 완벽하게 만족시켰다.
"이제 시작될 겁니다."
악마의 강림이 완성되고 있었다.
콰아아아!
사악한 마기가 안개처럼 모여들었다. 소용돌이치는 흑빛 안개 속에서 잿빛의 악마가 손을 내밀었다.
쿠구구구—!
악마 벨리알은 그대로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유적 중심부를 절반가량 채우는 그 몸집만 해도 엄청난 위압감을 주기엔 충분했다.
『 솔로몬의 72 악마 '벨리알'의 봉인이 해제 되었습니다. 』
『 세계 최초로 악마가 강림합니다. 』
온몸에 돋은 뿔과 근육으로 이뤄진 벨리알은 악마의 형상 그 자체였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악마 출현에 기겁합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느긋하게 바라봅니다. 』
벨리알이 움직일 때마다 유적 전체가 흔들릴 지경. 동시에 지독한 악기가 유적 중심부를 빠르게 채워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두 놈 다 제정신이 아니구나, 너희들은 전부 죽게 될 거다!"
봉인을 해제한 장본인인 한종윤이 광소를 터트렸다.
그런 혼돈스런 상황에서.
"절대 걸리적거리지 마라."
"어이, 인간아. 내가 할 소리라니까?"
사최헌의 검 위로는 푸른 검강이,
루시퍼의 양손 위로는 흑색의 마력이 준비되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전에 볼 수 없던 강렬한 기운이 두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이제 물러설 자리는 없었다.
그리고 유적이 있는 무인도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서울의 한 단칸방.
"이기겠지······?"
주강혁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 * *
'악마와 랭킹 1위의 싸움을 방구석에서 직관이라······.'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됐다.
너무 큰 일을 벌인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물론 가능성은 있어보였다.
'사최헌 헌터가 승낙했어. 영 승산이 없는 싸움은 아니란 거야.'
악마 소환을 저지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소환해서 보상을 획득하는 방향.
대비는 철저하다.
방금 전 나눴던 대화로 확실하게 확인했으니까.
- 저랑 이 사최헌이라는 인간이 힘을 합치면 악마 한 마리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겁니다.
- 하나만 물어보자.
- 예,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 악마는 생명체야?
만약 악마 처치에 실패했을 경우.
나는 고유 스킬인 즉살(卽殺)을 사용할 생각이었다.
『 고유 스킬 』
이름 : 즉살(卽殺)
등급 : EX
설명 : 지정된 생명체 하나를 살해합니다.
쿨타임 : 35.1일
그러나 즉살이 살해 가능한 대상은 '생명체'에 한정된다.
악마는 생명체인가?
그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혹시나 사최헌과 루시퍼가 실패하더라도, 최후의 보루는 남겨두어야 했으니까.
루시퍼의 대답은······.
- 의심할 나위 없이 생명체입니다. 지상에 강림한 악마는 모두 생명을 소유하게 되니까요.
악마는 심장과 살덩이로 이뤄진 명백한 생명체.
'그렇다면 안심이다.'
악마가 풀려나 대한민국이 쑥대밭이 되고, 각성자 연합이 세계를 지배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내 선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으니까.
『 고유 스킬 초기화권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을 1회 초기화합니다.
나는 손에 티켓을 든 채로 대기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쿨타임을 초기화하고 즉살을 발동시키기 위해서.
루시퍼의 시야로 보는 대상은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
'제일 좋은 건 스킬 초기화권을 아끼고 악마를 처치하는 거다.'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상황을 지켜봐야 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느긋하게 지켜볼 여유는 없었다.
혹시라도 루시퍼가 쓰러져 시야 공유가 끊기면 대참사.
이쪽에서 해줄 수 있는 게 없다.
'나도 긴장을 늦출 순 없다.'
적절한 타이밍에 즉살을 사용하기 위해서 집중해야 한다.
콰아앙—! 콰아앙—!
현장의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루시퍼가 양 손에서 쏘아낸 마도 광선이 벨리알의 거체를 꿰뚫었다.
촤좌좌좍!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뛰어든 사최헌이 휘두른 검격이 공간에 수도 없이 새겨졌다.
뒷걸음치는 벨리알의 몸에 수많은 상처가 새겨졌다. 언뜻 벨리알이 수세에 몰린 것 같기도 한 상황.
그러나 몸을 웅크리고 있던 벨리알이 땅을 내리치는 순간.
파아앙—!
강렬한 마기가 시야를 뒤덮었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루시퍼와 사최헌이 벽면에 처박혔다.
벨리알의 뒤쪽에선 광기 어린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하하하! 악마를 상대로 정말로 이길 거라고 생각한 거냐?"
각성자 연합의 리더 한종윤.
그의 지시에 따라 벨리알이 땅을 부수며 전진했다.
벽에 박혀 있던 사최헌이 빠져나왔다.
그대로 벨리알을 향해 고속 전진.
콰과과각—!
벨리알의 주먹이 사최헌의 검과 맞부딪혔다. 그 순간 강대한 마력 충돌이 일어났다.
콰아앙!
쩌적! 쩌저적!
유적 중심부의 벽면과 천장 위로 거대한 금이 쭉쭉 그어졌다.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덜컥 거리는 유적.
이번에는 벨리알 쪽이 우세였다.
"크윽."
벨리알의 주먹을 받아내는 사최헌의 팔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으니까.
"랭킹 1위의 힘이란 게 고작 그거냐? 벨리알은 아직 본래 힘의 절반도 내지 않고 있다!"
자신만만해진 한종윤이 소리쳤다.
"사최헌, 지금이라도 각성자 연합에 붙어라. 너에겐 2인자의 자리를 주겠다. 나와 함께 새로운 세계의 지배자가 되는거다."
"······."
사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벨리알과 맞댄 검을 붙잡고 있었다.
번쩍!
빛이 번쩍였다.
동시에 벨리알의 전신에 푸른 선이 새겨졌다.
지금의 내 수준으론 그것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파악하기도 힘들었으니.
푸콰아-!
벨리알의 양 팔이 날아갔다. 단면에서는 붉은 피가 미친듯이 쏟아져나왔다.
"뭣?"
의외의 저력에 한종윤의 입이 벌려진 사이.
한종윤을 향해 검은 빛줄기가 쏘아졌다.
콰아앙-!
루시퍼가 쏘아낸 마도광선이 한종윤에게 적중했다. 검은 연기가 크게 피어올랐지만, 아쉽게도 한종윤은 멀쩡했다.
"큭, 마(魔)의 가호가 있는 한 나는 죽지 않는다."
"벨리알을 죽이지 않는 이상 답이 없나."
루시퍼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벨리알을 조종하느라 한종윤도 별다른 훼방은 놓지 못한다.
콰앙-! 콰아앙!
날아오른 루시퍼가 벨리알을 향해 쉴새없이 마도 광선을 퍼부었다. 사최헌 또한 공격을 이어가며 벨리알을 압박했다.
양팔이 없는 벨리알은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일견 순조롭게 전투를 이어나가는 듯했으나.
■■□■!
돌연 벨리알이 괴성을 내질렀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공간 전체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큭, 귀찮은 짓을······."
루시퍼가 이를 악물었다.
슬로우모션처럼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 속.
벨리알만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잘려 나갔던 팔도 어느새 원상 복구된 상태, 악기(惡氣)를 두른 주먹이 사최헌을 강타했다.
콰아앙-!
유적의 벽에 깊숙이 처박힌 사최헌이 느릿하게 피를 토해냈다. 루시퍼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땅을 차고 뛰어오른 벨리알의 양손이 루시퍼를 내리쳤다.
"크허억!"
콰앙-!
루시퍼가 충돌하며 부서진 땅에서 파편이 솟구쳤다. 벨리알은 루시퍼에게 곧장 올라타 주먹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뻐억, 뻐억!
누가봐도 절체절명의 상황.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눈을 질끈 감습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미간을 좁힙니다. 』
'······지금이다.'
초기화 티켓을 찢기 위해 손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 주인님! 아직, 아직입니다! ]
루시퍼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뇌 속에 직접 내리꽂는 텔레파시.
'뭐?'
콰아앙—!
루시퍼는 마도광선을 쏘아 벨리알을 튕겨냈다. 그리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할 수 있습니다."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는 루시퍼.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수세에 몰린 두 사람을 바라보던 한종윤이 놀리듯 입을 열었다.
"겨우 그 정도로 되겠나? 옆의 빵봉투도 대단하긴 하다만. 악마를 이길만큼은 안되는구만."
한종윤은 앞으로 가볍게 손짓했다.
고오오—.
그에 맞춰 벨리알의 주변으로 수십 개의 마력 구체가 떠올랐다.
"랭킹 1위 사최헌의 죽음은 신호탄에 불과하지. 차례차례 각성자 연합에 합류하지 않은 유명 헌터들이 죽어 나갈 거야."
음악을 지휘하듯 움직이는 손끝.
"처음에는 대한민국, 그리고 일본, 중국······. 각성자 연합은 차례차례 세계를 지배해 나갈 거다."
그 신호에 맞춰 벨리알이 준비해둔 마력 구체가 대포알처럼 쏘아졌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였다.
눈빛을 주고 받은 사최헌과 루시퍼의 몸에서 강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사도여, 지금이다!"
"명령하지 말라니까!"
콰아아아-!
주변의 공간마저 일그러뜨리는 강렬한 기세.
사최헌과 루시퍼가 각자 만들어낸 불길이,
벨리알이 만들어낸 공간의 제약을 무시해내고 있었다.
콰앙!
사최헌의 신형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루시퍼 또한 그 뒤를 따라 쏘아져 나갔다.
무수한 마력 구체를 회피하며 달려 나가는 두 사람.
내 수준으로는 그 움직임을 쫓을 수 없었다.
루시퍼의 시야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연이은 굉음, 번쩍이는 시야.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었다.
초인(超人)의 경지를 뛰어넘은 S급의 전투.
콰아아앙-!
그야말로 내 인지의 한계를 뛰어넘은 전투였다.
시야 전체가 카메라를 마구 흔든 것처럼 어지러이 휙휙 움직이는 상황.
"크허어억!"
그 속에서 핏물 섞인 외침이 들려왔고.
"웃기지마라! 악마가, 악마가 질 리가 없잖냐?!"
악에 받친 한종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리알, 벨리알! 이 멍청한 새끼야! 크아악!"
뭔가 처참하게 무너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는 바닥에 쓰러진 한종윤과, 검째로 벽면에 박혀 있는 벨리알이 눈에 들어왔다.
'이긴건가······?'
사최헌의 검이 거대해져 있었다. 아마 사최헌이 가지고 있던 능력 중 하나인 모양이었다.
"후우······."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사최헌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그는 땀과 피범벅이 된 얼굴을 닦아내며 말했다.
"아직 끝이 아니다. 긴장을 늦추지마라, 사도."
"내가 너보다 몇 배는 악마에 대해서 잘 알 거다. 인간아."
루시퍼도 심호흡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두번째 페이즈?'
게임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힘겹게 체력을 깎아놓은 보스가, 다시 부활하며 두번째 싸움을 시작하는 기믹.
아직 끝이 아니란 이야기였다.
드드드드드······.
무인도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이어졌다. 벨리알의 심장에 박혀 있던 대검이 튕겨져 나왔다.
인간의 속박에서 풀려난 악마가 본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전신에 흐르는 악기(惡氣)가 벨리알의 육체를 수복하고 강화시켜주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압박감.
짙은 흑색의 안개가 땅을 완전히 뒤덮었다.
■□□■□!
인간의 언어가 아닌 무언가가 토해져 나왔다.
사최헌의 귓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사최헌은 아무런 내색 없이 말했다.
"여기서부터는 정신력 싸움이다."
사최헌은 다시 한번 기운을 끌어 올렸다.
루시퍼도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어지는 것은 광투(狂鬪).
상대를 죽이기 위해 펼쳐지는 끝없는 전투였다.
싸움은 1시간도 넘게 이어졌다.
사최헌은 계속해서 벨리알을 잘라냈고, 벨리알은 계속해서 회복을 이어갔다.
루시퍼는 벨리알의 마력 구체를 죄다 격추시켰다. 사최헌이 편히 공격할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주고 예상치 못한 공격을 전부 쳐냈다.
독선적인 전투가 아니라 사최헌과 제대로 협력하고 있었다.
꽤나 의외인 부분.
'문제는······.'
바삭.
나는 치킨의 닭다리를 뜯었다.
'허기가 끝이 없다.'
치킨 두 마리와 족발 특대를 시켜 놓았다. 목이 막히지 않도록 콜라를 간간히 먹어가며 열심히 에너지를 보충했다.
두 사람이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뭔 개짓거리인가 싶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루시퍼는 내가 소환한 사도.
그가 사용하는 마력의 원천은 나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루시퍼가 힘을 쓸수록 허기는 짙어진다.
내가 에너지를 보충하지 않는다면 루시퍼의 마력도 바닥이 나고 말 거다.
그러니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사도. 대답해라."
길어지는 전투 속에서 먼저 입을 연것은 사최헌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큭, 왜 부르고 난리야. 이쪽도 필사적인데."
"숨기고 있는 힘이 있다면 지금 전부 방출해라. 이제 곧 마지막이다."
루시퍼 또한 지친 듯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안 되겠는데. 여기서 내가 전력을 내게 되면 주인님께 해가 되거든."
"그렇다면 사도의 주인이여. 듣고 있다면 답해라! 사도에게 전력을 내도록 지시해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콰앙-!
벨리알의 주먹질에 길게 밀려난 사최헌이 소리쳤다. 그의 절절한 목소리는 충분히 내게 닿고 있었다.
이쪽도 초조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써야 한다.'
초기화권을 아끼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다.
[ 아뇨, 아직. 아직입니다. 조금만요. ]
"무슨 소리야, 빨리 끝내야······!"
[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루시퍼의 간절한 외침.
그러나 여기까지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이제 끝낼 수 있다면 끝내."
내 명령은 효과가 있었다.
콰과과광!
루시퍼 손아귀에서 마도광선이 연달아 발사되었다.
"그거다, 사도."
콰과과과—!
그에 맞춰 사최헌도 자신의 주력기인 공간검을 난사했다.
산산조각난 유적의 바닥이 솟구쳐오르고 짙은 흙먼지가 연막처럼 피어올랐다. 공간 자체가 어지러이 일렁이고 있었다.
"허억, 허억······."
"후우······."
그야말로 최후의 일격.
스으으.
흙먼지가 천천히 걷히고 있었다. 벨리알이 쓰러졌다는 메시지는 아직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긴장되는 순간.
"인간. 지금이 몇시냐?"
루시퍼가 사최헌에게 물었다. 사최헌은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이 상황에 그게 중요한가?"
그리 말하면서도 사최헌은 자신의 손목에 있는 시계를 봐주었다.
"이제 막 12시가 되었다."
"그런가."
스스스.
흙먼지가 완벽하게 걷어진 자리.
솔로몬의 72악마 벨리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유감스럽게도······.
벨리알은 건재했다.
■□□■□!
그 모든 공격을 받고서도 멀쩡히 포효하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
"크윽······."
사최헌이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표정에 절망으로 물들었다.
처억.
루시퍼는 땅으로 내려왔다. 더 이상 부유할 힘도 없는 듯했다. 그러나 루시퍼는 어느 때보다 후련한 표정이었다.
"뭐야, 인간. 왜 다 포기한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
사최헌을 향해 놀리듯 미소지은 루시퍼.
녀석은 내게 말했다.
"주인님. 지금입니다."
지금. 어째서 지금인가.
뭐하러 지금까지 기다렸던 거야?
벨리알에게 두들겨 맞아가면서까지.
'설마.'
그제서야 루시퍼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경험치 획득 제한.'
나는 오늘 하루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를 전부 획득했다.
1일 동안 올릴 수 있는 레벨은 최대 10까지.
그 이후로는 아무리 많은 경험치를 얻어도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
그리고 그 1일 제한이 풀리는 시간은······.
밤 12시가 기준이었다.
'루시퍼, 이 미친놈아.'
쫘아악—!
나는 망설이지 않고서 티켓을 찢었다.
'하지만 잘했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사용하셨습니다. 』
목표는 루시퍼의 시야를 통해 보이는 악마 벨리알.
더 이상 생각해야 할 건 아무것도 없다.
"죽어라."
나는 벨리알을 향해 즉살(卽殺)을 발동했다.
사최헌과 루시퍼가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치열했던 전투.
그 끝은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허무했다.
푸화아악—!
솔로몬의 72 악마 중 하나인 벨리알.
놈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뭐······?"
사최헌의 짧은 탄성과 동시에.
내 눈앞으로 알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상위 악마종을 처치해 추가 레벨업 보너스를 받습니다. 』
『 10 레벨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
최후의 승리자는 사최헌도 루시퍼도 아닌.
바로 나였다.
『 솔로몬의 72악마 벨리알을 처치하셨습니다! 』
14화 보상
푸화아악—!
지상에 강림했던 악마 벨리알이 거짓말처럼 폭발했다.
촤아악······.
놈에게서 터져 나온 핏물이 홍수처럼 쏟아져 유적의 바닥을 적셨다.
그 광경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최헌은 굳어져 있었다.
"무명······?"
그 두 글자를 중얼거렸다.
혼신의 힘을 다해도 쓰러뜨릴 수 없던 악마가 즉사했다.
어떠한 전조도 없이.
월드 보스와 마주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상황이었다.
주변을 이루는 마력의 흐름도, 이 공간에 존재하는 의념조차 사최헌은 읽어내지 못했다.
그러나 무명이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최헌은 사도의 주인과 무명이 다른 인물이라고 여기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설마······."
바닥에 꽂은 대검에 쓰러지듯 기댄 사최헌의 눈동자가 커졌다.
『 (KR)솔로몬의 72 악마 중 하나가 처치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최초의 악마 처치.
메시지는 대한민국 전역에 울려 퍼졌다.
『 경이로운 수준의 업적! 』
『 소수의 성좌들이 크게 열광합니다. 』
당연히 유적의 중심부에 있는 사최헌에게도 메시지가 떠올랐다.
『 기여도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위 : 사최헌
정산이 완료된 시스템 창.
'무명이 맞다. 그런데······.'
그곳에 새겨진 이름을 읽어 내려가는 사최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랭킹판에는 무명의 이름뿐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있어야 할 다른 이름이 없었다.
'사도의 주인의 이름이 없다.'
루시퍼는 분명히 벨리알에게 데미지를 가했다. 루시퍼의 주인 또한 어떤 식으로든 기여도를 올렸어야 정상.
그러나 눈 씻고 찾아봐도 기여도 창에는 무명의 이름뿐이었다.
'정말이란 말인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무명과 사도의 주인은 동일인물이라는 것.
"······네 주인이 무명이었던거냐."
사최헌의 시선이 루시퍼에게 고정되었다.
"음, 내가 말을 안 했던가?"
루시퍼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충분한 답이 되었다.
"하."
사최헌은 경악했다.
당연히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
상위 존재인 사도를 다루는 능력과,
최상위 마수인 악마를 단번에 처리하는 무력.
그 두 개를 동시에 소유하는 각성자라니.
'그런 인간이 정말로 존재한단 말인가.'
회귀를 거듭하며 온갖 각성자를 마주한 사최헌조차 온몸에 소름이 돋을만한 스펙이었다.
사최헌은 애써 동요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무명. 너는 정말로 인류의 편인가?"
주변에서 무명의 기운이라고 할만한 것은 느껴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단순히 초장거리의 스킬인지,
무명이 기척을 완전히 감추고 있는 것인지,
사최헌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 무명은 듣고 있으리라.
루시퍼를 통해서든, 자신의 귀를 통해서든.
"뭘 당연한 걸 물어? 말했잖아. 주인님께서는 인간들의 편이시라고. 그러니 너무 두려워하지 말거라 인간아."
무명(無命)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능글맞은 루시퍼의 빈정거림만이 돌아올 뿐.
"······너에게 물은 게 아니다."
잠시 숨을 고른 사최헌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불멸에 합류해라, 무명. 모든 지원을 해주겠다."
무명의 행적은 다소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별안간 뚝 떨어진 것 같은 헌터였으니까.
그럼에도 사최헌은 무명을 자신의 팀에 넣고자 했다.
월드보스의 처치.
각성자 연합의 악마 강림 저지.
우연치곤 기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
사최헌은 루시퍼를 지긋이 바라봤다.
무명은 과연 이 세계에 다가올 운명을 알고 있는가.
그렇다면 힘을 합쳐야 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더욱더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과 힘을 합쳐야만 한다는 것이 사최헌의 생각이었다.
물론 루시퍼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간들이 만든 길드로는 주인님의 그릇을 담지 못한다. 게다가 말했잖아.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루시퍼는 사최헌을 지나치며 비웃음을 흘렸다.
주인님을 길드로? 어딜 날로 먹으려고.
어림도 없는 시도다.
불멸은 주인님을 지킬 만큼 강한가?
루시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앞으로 다가올 시련을 생각하면, 인간의 길드는 오히려 주인님에겐 속박이 될 뿐.
물론 최종 결정은 주인님께 달려 있었다.
저벅, 저벅.
루시퍼는 바닥에 쓰러진 한종윤을 향해 다가갔다. 악마의 봉인을 푸는데 생명력을 소진해버린 한심한 인간.
"악(惡)의 화신이, 고작해야 인간에게······. 고작, 고작······."
한종윤은 계속해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반쯤 미쳐 버린 듯한 모양새.
콰악.
루시퍼는 무릎을 굽히고선 한종윤의 머리채를 잡았다.
"이봐, 물어볼 게 있다."
"각성자 연합은 세계의 정점에 오른다. 분명 그런 미래를 봤는데. 분명히 봤는데······."
"쯧."
어떻게 무명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추궁하려고 했건만.
"일곱 번째 달에 하늘에서 공포의 대왕이 내려오리라······!"
"뭐란 거야."
"커허억!"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던 한종윤은 몸을 가늘게 떨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보잘것없는 최후였다.
"젠장."
정작 들어야 할 대답을 듣지 못했다. 예언 능력이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놈의 입으로 직접 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루시퍼의 미간이 좁혀지는 순간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다. 세기말에나 유행하던 철 지난 농담이지."
뒤쪽에 있던 사최헌이 담담하게 설명했다. 그 말에 루시퍼는 얼굴을 찡그렸다.
"뭐?"
"한종윤에겐 예언의 능력이 있었다. 무명(無命)의 소재를 알아낸 것도 그래서일 거다."
"어째 자세히 아는데."
"성실하게 조사했을 뿐이다."
사최헌의 말에 흔들림은 없었다.
루시퍼는 손을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차피 대강은 알고 있었다. 이 녀석이 마지막인지 그 배후가 있는지가 궁금했던 것뿐.
한종윤이 예언자였단 사실을 알아냈으니 본래의 목적은 달성했다. 루시퍼는 슬쩍 고개를 꺾고선 물었다.
"혹시 다른 예언자들 명단 같은 거 없냐?"
"없다. 있다고 해도 내가 알려줘야 할 이유라도 있나? 불멸과 아무 관련도 없는 타인에게."
"쯧, 치사하긴."
루시퍼의 시선이 자연스레 죽은 악마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악마가 있었던 자리.
무언가 터진 듯한 핏자국만 남은 장소의 중심.
거기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아이템들이 있었다.
- 열화 네크로노미콘 [ 레전더리 ]
- 악의 기운이 서린 마정석 [ ★ ]
- 칠흑(漆黑) : 데빌 펜던트 [ 레전더리 ]
루시퍼는 아이템 쪽을 향해 다가섰다.
"꽤 잘 나왔는데."
놓여진 아이템들을 확인한 루시퍼는 숨을 잠시 고른 뒤 땀을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본 사최헌이 의아한 듯이 물어왔다.
"지친 건가?"
"뭐? 내가? 그럴 리가."
"그렇다면 됐다."
사최헌 또한 아이템 앞으로 다가왔다.
"아이템은 어떻게 할 거지?"
"뭘 봐. 네 놈 건 없어. 주인님이 없었으면 거기서 끝이었구만."
"······."
루시퍼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보상은 여기에 떨어진 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최헌 또한 기여도에 따른 보상을 정산받을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사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다만, 사용하지 않는 아이템은 불멸 길드에서 매입하고 싶다."
"잠깐만 기다려봐. 주인님과 상의 해야 하니까."
잠시 팔짱을 낀 채 아이템을 노려보던 루시퍼.
루시퍼는 아이템 중 하나를 들어 올렸다.
『 [ 레전더리 ] 칠흑(漆黑) : 데빌 펜던트 』
- 하위 악마종의 공격 무효
- 방어력 + 144
- 스킬의 위력 40% 증가
- 쿨타임 감소 25%
색깔에도 등급이 존재한다.
흑(黑)의 상위에 존재하는 것이 바로 칠흑(漆黑).
'이 아이템에 주인님께서 찾으시는 쿨타임 감소가 있다.'
같은 색의 아이템을 여럿 착용하면 세트 효과를 받을 수 있기에 최고의 선택이었다.
루시퍼는 데빌 펜던트를 주머니에 넣었다.
잠시 침묵하던 루시퍼가 입을 열었다.
"나머지는 팔겠다고 하신다."
다른 아이템들은 주강혁에겐 필요가 없었다.
가져온다고 해도 처치가 곤란하다. 현재 주강혁의 상황으론 팔기도 어렵고 제대로 값을 쳐줄 곳도 없다.
불멸에게 넘기는 게 베스트였다.
사최헌도 썩 만족스러운 듯 했다. 이 정도의 아이템이 있으면 확실하게 불멸과 자신의 스펙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었으니.
"대금은 어떻게 주면 되는거지?"
그게 마지막 걸림돌이었다.
여기에 대한 루시퍼의 답은 정해져 있었다. 루시퍼는 검은 날개를 펼치며 말했다.
"현금. 무조건 현금으로."
* * *
『 (KR)솔로몬의 72 악마 중 하나가 처치 되었습니다. 』
『 기여도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위 : 사최헌
한밤중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는 대한민국 전역에 전달 되었다. 각성자들 모두가 새로운 알림에 들썩였다.
- 미친. 무명하고 사최헌이 같이 보스를 잡았나 본데?
- 와, 무명 폼 미쳤네. 불멸에 합류하는 거임?
- 악마는 새로 나온 필드 보스인건가.
- 심지어 기여도 1위는 무명임 ㅋㅋㅋㅋㅋ
- 랭킹 1위 사최헌 컷ㅋㅋㅋ
ㄴ 사최헌이 양보한 거겠지.
인터넷 뿐만 아니라 헌터 커뮤니티도 난리였다.
- 시스템에 표시될 정도면 상당히 강한 보스일텐데······.
- 무명(無命)의 정체가 점점 더 궁금해지네요.
ㄴ 은둔고수였던 걸까요?
- 이게 진짜면 불멸은 영원히 1위 길드겠는데요.
- 불멸 길드 독식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그러나 정작 불멸 길드원들은 어리둥절했다.
"야야, 방금 시스템 메시지 봤어?"
"······길드장 산책나간다고 했잖아."
"와, 우리 속이고 무명이랑 만난거야? 젠장, 부럽네."
"무명. 그 사람이 진짜 불멸에 가입하는 걸까."
조금 잠잠해지려던 대한민국이 다시 무명에 관한 이야기로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벨리알은 완벽하게 처치 되었다.
그것도 '전설+' 등급으로.
'잘 끝나서 다행이네.'
사최헌은 아이템 분배에 승낙했다. 오히려 편의를 봐준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사최헌이 직접 말했지.'
불멸에 가입하지 않겠냐고.
그리 말하는 사최헌의 눈은 진지했다.
'불멸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을까.'
사최헌 헌터는 명망 높은 헌터다. 불멸 길드도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것은 맞다. 그의 제안은 사뭇 매력적으로 들리지만······.
문제는 주도권이다.
'사최헌이 생각하는 무명(無命)과 실제 나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다는거지.'
사최헌 헌터는 나를 무슨 괴물처럼 보고 있지만, 실제 나는 그만한 강자가 아니다.
신상이 밝혀진 '주강혁'이 불멸에서 얼마만큼의 발언권을 가질 수 있을까.
무명은 자유롭게 활동할 수 없게 될 거다.
최악의 상황은 불멸의 도구로 전락하는 거고.
'뭐,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쁜 짓은 안 하겠지만······.'
어쨌든 주강혁으로서 불멸에 들어가는 순간, 어떤 식으로든 그들에게 끌려다닐 수밖에 없을 거다.
그러나 내가 무명으로 있는 한, 무명(無命)의 주도권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단한 이득을 취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가 나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겠단 거다.
그 최저선이 S급 헌터인거고.
'사최헌 헌터와는 지금 같은 협력의 관계면 되겠지.'
서로서로 좋은 관계가 진짜 좋은 거 아니겠어?
'그런데······.'
나는 현관문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얘는 왜 안오냐.'
아직 루시퍼가 집에 도착하지 않았다.
루시퍼도 배고플게 분명하니 족발 특대짜리를 시켜 놓았다. 마지막 통잔 잔고를 긁어모아 시켰다.
악마와의 전투에서 에너지를 보충하느라 돈을 다 썼으니 어쩔 수 없다.
물론 이제 돈은 상관없다.
사최헌한테 아이템을 팔았으니까.
이런 배달 음식은 실컷 먹을 정도로 받아오겠지.
기다리다 지친 나는 밥상에 앉아서 족발을 하나 집어 먹었다.
오지 않는 건 루시퍼 뿐이 아니었다.
'······보상은 언제 준다는 거야.'
시스템이 보상을 지급해준다길래 기다리고 있는데.
한참이 지나도 반응이 없다.
『 보상을 정산 중에 있습니다. 』
파직, 파직—!
이전과 달리 제때 지급이 이뤄지지 않고 있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시스템에게 항의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
급기야 성좌들이 화를 내기까지.
효과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딱히 뭔가가 진행된다는 느낌은 없다.
루시퍼가 말하길.
-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시스템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주인님께서 엄청난 활약을 하셨다는 증거니까요.
진짜로 하는 말인지 그냥 아부하는 건지.
그래, 시스템을 상대로 화를 내면 뭐하겠어.
그냥 기다려야지 별수 있나.
시스템이 보상 떼어먹었단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기도 하고.
치익.
나는 콜라캔을 따며 시스템의 메시지 창을 불러왔다.
'아까 제대로 못 봤던 메시지나 확인해 둘까.'
나는 시스템의 로그(log)를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을 움직였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를 살필 수 있는 기능이었다.
슥슥.
지나갔던 레벨업 알림이 보였다.
『 상위 악마종을 처치해 추가 레벨업 보너스를 받습니다. 』
『 10 레벨이 추가로 상승합니다! 』
『 현재 레벨 : Lv.30 → Lv.50 』
『 축하드립니다. D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40 레벨을 지나 D등급 헌터가 되었다. 거기에서 10 레벨을 더 추가해 50 레벨.
루시퍼 덕에 한 번에 20레벨을 올렸다.
이제는 결코 약하다고 할 수 없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철인(鐵人)이라고 불리는 등급.'
초심자 취급인 E급과 F급을 벗어나,
어엿한 헌터라고 인정 받는 등급이 바로 D등급이다.
'내일부터 인스턴스 게이트도 공략하고, 미궁도 계속해서 공략하면 되겠네.'
한 장 남아 있던 고유 스킬 쿨타임 초기화권을 벨리알에게 사용했다.
'후회는 안 하지만······.'
스킬 쿨타임 초기화권을 다시 얻어놔야 안심이 될 것 같다.
만일을 대비해서 여러장 모아둘 수 있으면 더 좋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레벨도 오르겠지.'
어디부터 공략하는 게 좋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대충 적어보고 있던 그때였다.
띠디디디. 철컥-!
빠르게 도어락을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열렸다. 루시퍼는 환한 미소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주인님, 돌아왔습니다!"
"오, 고생했다. 그건······."
"받아왔습니다."
루시퍼는 양손에 든 검은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렸다.
영화에서나 보던 바로 그 검은 가방.
"될 수 있는 대로 받아 왔습니다. 물론 펜던트도 제대로 가져왔습니다."
『 칠흑(漆黑) : 데빌 펜던트 [ 레전더리 ] 』
펜던트는 루시퍼의 팔목에 잘 둘러져 있었다.
아이템의 능력치는 아까 확인했다.
지금은 가방에 더 관심이 간다.
꿀꺽.
"열어보자."
내 말에 루시퍼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더니, 직접 잠금을 해제하기 시작했다.
"뜸 들이지 않고 바로 열겠습니다."
철컥.
이윽고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두 개의 서류 가방이 열렸다.
샤아아—.
물론 그런 효과음은 없었지만,
느낌은 그러했다.
다발로 된 5만원권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광경.
마치 보이지 않는 빛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와."
생전 볼 일 없을 줄만 알았던 양의 현금이 눈앞에 놓이니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 이게 다 얼마야?
15화 선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