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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3 - 15-20

15화 선금

황금색 5만원권이 가지런히 놓여진 서류 가방.

"일단 선금 10억입니다."

루시퍼는 자랑스레 말했다.

겉보기엔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5만원권이 다발로 있으니 역시 단위가 달라지는구나 싶다.

10억이나 되는 거금.

'이게 진짜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액수다.

그러다 불현듯 루시퍼의 말이 떠올라 되물었다.

"잠깐, 선금이라고?"

"네, 아이템 판매 대금은 총 55억이었는데, 불멸 길드에서 보유하고 있는 진짜 현금이 일단은 10억 정도랍니다."

55억.

그중에서 10억.

하긴, 레전더리급 아이템의 매각 비용이 10억 정도 일 리가 없다.

'진짜로 건물주 할 수 있겠는데.'

꿈에 그리던 목표가 성큼 다가왔다.

참고로 받아 온 현금은 아무 문제가 없는 돈이란다.

따로 추적이 되지도 않는 완전히 깨끗한 돈.

루시퍼는 여기에 설명을 덧붙였다.

"나머지 45억은 현찰로 받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사최헌은 주인님만 괜찮으시다면 불멸 길드에 있는 아이템과 교환하자고 하더군요."

아이템하고 교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사실 현찰로 나머지 45억을 받아도 사용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계좌에 넣으려고 해도,

은행 직원한테 신고 당하거나 국세청에서 연락이 오겠지.

부동산에 현금을 들고 갔다간 미친놈 취급 받을 테고.

그러니 아이템 교환 쪽이 나을 수 있다.

그건 그것대로 흥미롭다.

'심지어 불멸 길드의 창고를 직접 살펴볼 수 있다는 거잖아.'

인터넷 상에 루머처럼 퍼져 있는 소문이 있었다.

불멸 길드의 아이템 창고에는 온갖 재보가 쌓여 있다라고.

'분명 쿨타임 감소 아이템도 있겠지.'

높은 등급의 아이템은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세상이다. 내가 원하는 템을 받을 수 있다면 땡큐다.

정 받을 게 없으면 돈으로 받아도 되고.

"나중에 제가 가서 살펴보고 쓸만한 게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루시퍼는 맡겨달라는 듯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도 부탁할게."

생각보다 수확이 훨씬 컸다.

상당한 거금이 손에 들어왔을뿐더러, 사최헌 헌터와의 연결점도 생겼다.

더욱이 무명(無命)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 위협이 될 뻔한 각성자 연합도 정리되었다.

"그 각성자 연합의 대장이었던 사람은······. 죽은 거지?"

"죽을만한 놈이었으니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딱히 동정심은 들지 않는다. 사최헌 헌터의 말대로 극악무도한 빌런이었으니까.

'좀 충격이긴 한데. 다른 부분에서.'

영화나 만화에나 나올 법한 비밀 조직이 실제로 있었다니.

내 표정을 의식한 루시퍼가 급히 품 안에서 펜던트를 꺼냈다.

"펜던트도 가져왔는데. 착용해보시죠."

"맞다. 그게 있었지."

악마를 잡고 드랍된 레전더리급 펜던트였다.

『 [ 레전더리 ] 칠흑(漆黑) : 데빌 펜던트 』

- 하위 악마종의 공격 무효

- 방어력 + 144

- 스킬의 위력 40% 증가

- 쿨타임 감소 25%

모든 옵션 하나하나가 훌륭하지만, 제일 중요한 옵션은 쿨타임 감소였다.

이건 무려 25%의 쿨타임을 줄여준다.

나는 펜던트를 곧장 목에 둘렀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창.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25%(8.8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35.1일 → 26.3일 』

'이제 한 달보다 적어졌다.'

즉살의 쿨타임이 눈에 띄게 줄었다.

'근데 쿨타임 계산이 좀 치사한 거 아니야?'

감소되는 쿨타임이 합연산이 아니라 곱연산이었다.

흔히 게임에서 사용되는 개념인데, 곱연산이 되면 모아야 하는 장비의 수가 훨씬 증가한다.

'하긴······.'

쿨타임을 없애는 게 그리 쉬웠으면, 돈 많은 헌터들은 죄다 쿨타임 없이 대형 스킬을 난사하고 다녔겠지.

'쿨타임 아이템을 최대한 많이 모아야 하는 건 변함 없다.'

즉살에는 범위 제한도,

배가 좀 고픈 걸 제외하면 소모값도 없다.

오로지 쿨타임만이 걸림돌이다.

즉, 쿨타임 문제만 해결하면 내 전력은 압도적이란 의미.

"루시퍼, 고생했······."

그런데 루시퍼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였다.

땀도 흘리는 데다가 약간 멍한 눈빛.

평소랑은 많이 다르다.

벨리알과의 전투가 힘들었던 걸까?

"너 괜찮아?"

"예? 아, 물론입니다. 아주 쌩쌩하고 말고요."

그렇다면 괜찮다만.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아, 깜빡할 뻔했네. 루시퍼. 고생해둔 널 위해서 준비해둔 게 있거든."

"예······?"

고개를 갸웃하는 루시퍼.

나는 밥상에 놓아둔 족발을 가리켰다.

당연히 루시퍼가 오기 전에 미리 시켜둔 따끈따끈한 족발(특대)였다.

내가 해줄 만한 게 이런 것밖에 없다.

그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는 루시퍼.

"감사합니다. 주인님의 은혜란 하늘과 같군요······."

"아니, 뭘 그 정도까지."

녀석은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하더니 그대로 밥상으로 달려가 걸신들린 듯 족발을 먹기 시작했다.

와구와구, 냠냠.

잘 먹는 걸 보니 뿌듯하다.

"내친김에 피자도 라지 사이즈로 몇 판 시키자! 치킨도 몽땅 시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다 말 해!"

나는 스마트폰으로 배달앱을 켜서 손이 가는대로 주문을 시작했다. 잔고는 없지만 현금으로 결제하면 그만이다.

돈을 이만큼이나 벌었는데 아껴서 뭐 하겠는가.

오늘만큼은 플렉스다.

* * *

다음날.

잘 먹고 푹 자고 일어났다. 상쾌한 아침이었다.

평소랑 별 차이도 없는데, 왜 이리 상쾌할까.

잠시 이불에 앉아 멍 때리다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10억이 있어서다.

양치를 하다 치약을 실수로 과하게 짜버렸지만 괜찮다. 10억이 있으니까.

'전부 예금하긴 어렵겠지만.'

당분간 생활 걱정은 없는 것도 사실.

적절한 범위에서는 사용해도 될 거다.

든든함의 차이가 다르달까.

돈이 있는 걸로 이렇게까지 안심이 되는구나 싶다.

그런데 어째 이상했다.

아침 가장 먼저 일어나 있었어야 할 루시퍼가.

아직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다.

"으으······."

게다가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소리까지.

나는 이불을 걷어내고서 루시퍼의 상태를 살폈다.

"루시퍼?"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나고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손에 화상을 입을 뻔한 수준.

"괜찮아? 설마 저주 같은 거에 걸린 거야?"

솔로몬의 72 악마 벨리알 처치.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어 보이는 적이었다.

너무 쉽게 잡았나 했더니 이런 복병이 있었던 건가?

"아닙니다."

내 물음에 루시퍼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러면 뭐야, 감기?

사도도 감기에 걸리나?

온갖 추측이 떠오르는 가운데.

루시퍼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건 아마······. 주인님의 명령을 거역해서 그런 걸겁니다."

"내 명령을 거역했다고? 언제?"

그리 묻긴 했지만 떠오르는 게 있었다.

-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 아니, 이제 끝낼 수 있다면 끝내.

그 직후 루시퍼가 광선을 다발로 쏘아내긴 했는데,

벨리알은 죽지 않았다.

그런 것까지 명령 거부로 취급되는 거야?

"별거 아닙니다······."

루시퍼는 비틀대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지나면 낫습니다. 주인님께서 신경을 쓰실 필요는······."

풀썩.

그대로 쓰러져 버렸다.

"억지로 일어나지 마."

주인을 위해서 한 행위지만 시스템상으로는 명령에 거역한 셈이 된다니. 뭐, 그딴 시스템이 다 있나.

처억.

우선 수건에 찬물을 묻혀서 루시퍼의 머리 위에 올려줬다.

집에 있던 감기약과 포션을 먹여보긴 했지만 영 효과는 없었다. 나는 팔짱을 낀 채 루시퍼의 앞에 앉았다.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지 뭐."

"면목 없습니다······."

오늘의 일정은 딱히 대단한 게 없었다.

D급 인스턴스 게이트와 F급 미궁을 돌 예정이었다.

보상으로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얻을 수도 있으니까.

참고로 악마 처치 보상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 보상을 정산 중에 있습니다. 』

공략을 그냥 전설도 아닌 전설+급으로 해서 그런가.

아직까지도 정산이 안 되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쉬고 있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인스턴스 게이트나 F급 미궁 정도는 나 혼자도 공략할 수 있다.

"위, 위험하실 수도······."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코웃음을 칩니다. 』

이제 내 레벨은 50이다.

F급 미궁에선 위험해지기도 어려운 수준.

D급 인스턴스 게이트도 마찬가지다.

인스턴스 게이트의 특성상 D등급 하위의 마수들이 나온다. 따라서 등장하는 마수들은 전부 나보다 레벨이 낮을 수밖에 없다. 게이트엔 함정이 없기도 하고.

"!"

그런데 날 바라보던 루시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 주변에 떠 다니는 별빛을 확인하는 듯했다.

녀석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내게 물어왔다.

"주인님. 혹시 새로운 성좌가 나타났습니까?"

"응. 그런데."

"혹시 성좌의 수식언이 백색의 여명······?"

"맞아."

루시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가볍게 미소짓습니다. 』

"이 자식······. 어떻게 알고······. 인정사정 봐주지 말고 뜯어내야······."

루시퍼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열이 더욱 심해져서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나는 허공의 백색 별빛을 향해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에요?"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시치미를 뗍니다. 』

"······."

뭔가 허술한 메시지를 보내왔다.

시치미를 뗀다는 건 아는 사이란 거잖아.

"뭐······."

나중에 루시퍼가 깨어나면 물어보도록 하고.

"쉬고 있어라."

오늘 일정 정도는 나 혼자 해도 문제없다.

그리고 루시퍼가 줬던 흑색의 깃털도 아직 가지고 있다.

정말 위급한 상황이라면 루시퍼를 소환하면 된다.

나는 배낭에 생수병과 어제 먹다 남은 피자를 챙겼다. 그러고선 시스템 창을 열어 인스턴스 게이트를 생성했다.

『 인스턴스 게이트(D)를 활성화합니다. 』

『 소모 비용 : 10,000 Coin 』

『 해당 게이트는 공략 실패 시 자동 소멸합니다. 』

『 해당 게이트는 1인 전용입니다. 』

우우웅—!

"들어가 볼까."

나는 원형의 보랏빛 게이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공략 보상을 기대합니다. 』

* * *

『 D급 게이트 - 오크 부락 』

▶ 클리어 조건

- 오크 처치 0 / 25

- 오크 워리어 처치 0 / 1

게이트 내부는 탁 트인 평원이었다.

'공기가 좋네.'

평원 위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지역이라 그런가.

저 멀리 오크들이 모여 사는 군락이 보였다.

'기습당할 염려는 없겠네.'

이건 큰 이점이었다. 급습만 조심하면 내가 싸움에서 패배할 일은 없으니까.

자세한 건 가까이 다가가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약자멸시의 범위가 100m이기도 하고.

'출발하기 전에 잠깐 준비 운동 좀 할까.'

나는 손에 쥔 망멸검을 가볍게 검을 휘둘러보거나,

양옆으로 제자리 뛰기를 해보기도 했다.

레벨이 20이나 올랐다.

갑작스레 변한 몸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은 필요하다.

아무리 약자멸시가 있다지만,

혹시 모를 상황은 대비해야지.

슥, 스슥!

확실히 이전보다 스탯이 오른 게 느껴졌다.

상당히 격하게 움직여도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됐겠어.'

어설프게 직접 전투를 할 생각은 없다.

내가 가진 스킬은 전투계 스킬이 아니다.

움직임을 보조하거나 힘을 증강시켜주지 않는다.

철저하게 상대를 배제할 뿐.

따라서 내 스타일에 맞는 전투를 할 생각이다.

망멸검을 들고서 오크 군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취익, 취이익—!

원시적인 부락.

망을 보고 있던 오크 한 마리.

뿌우우—!

놈의 손에 들려 있던 뿔나팔의 경고음이 오크 부락 전체로 울려퍼졌다.

준비 동작은 필요치 않다.

입을 열어 한 마디를 내뱉으면 충분하다.

"약자멸시."

푸화악-!

뿔나팔을 불던 오크는 그대로 즉사했다.

흔적도 남지 않은 채로.

일부러 한박자 늦게 잡았다.

부락 내에 있을 오크들을 끌어모으기 위해서.

취익, 취익-!

[ Lv. 39 ]

[ Lv. 41 ]

[ Lv. 37 ]

뿔나팔 소리를 들은 오크들이 순식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녹슨 칼이나 돌도끼를 들고 있었다.

'그럴싸한 무기를 들고 있네.'

조잡한 날붙이를 들고 다니던 고블린에 비하면 대단히 위협적인 무장이다.

본래대로였다면 헌터 개인이 홀로 전투를 펼치며 이만한 수의 오크를 처치해야 했다.

인스턴스 게이트는 혼자밖에 입장할 수 없으니까.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없는 평원에서 25마리의 오크를 처치.

체력적으로도, 기량적으로도 쉽지 않은 싸움이 되어야 했지만.

'나에게는 해당 없지.'

나는 인벤토리에서 검은 가면을 꺼내 얼굴에 썼다.

『 은둔자의 가면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Lv.2의 은신

- B급 이하 탐지 스킬에 면역이 됩니다.

스륵.

나는 오크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이쪽을 바라보던 오크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약자 멸시."

나는 굳이 스킬의 이름을 외쳤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쪽이 낫지 않나 싶다.

푸확, 푸화악-!

일대를 뒤덮는 피바람. 열 마리가량의 오크가 무(無)로 돌아갔다. 동시에 불어오는 바람에 지독한 혈향이 뒤섞였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솜씨에 감탄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

취이익—!

취익?!

뒷열에서 살아남은 오크들이 일제히 소리쳤다. 동시에 사라진 나를 찾기라도 하듯 마구잡이로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이 닿을 리가 없다.

나는 이미 공격이 닿지 않는 먼발치까지 이동했으니까.

"약자 멸시."

푸화악-!

다시 한번 죽음의 파도가 오크들을 휩쓸었다. 그 앞에서 오크들은 무력하게 사라져갔다.

오크 부락에 존재하던 일반 오크들이 전멸했다.

"······."

이상할 정도의 고요함이 부락에 가라앉았다.

그제서야 부락의 중심부에 있던 천막이 들썩였다.

"취이익!"

그 내부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오크 워리어.

[ Lv.49 ]

이번 게이트의 보스 되시겠다.

다른 오크들과는 외관부터가 달랐다.

우락부락한 근육질에 크기도 1.5배 가량은 컸다.

놈은 광분해선 엄청난 기세로 무기를 휘둘러댔다.

부웅! 부웅-! 부우웅!

무기가 만들어낸 바람이 내가 있는 장소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원래대로라면 저런 걸 직접 상대해야 한단 거지?'

엄두가 안 난다. 한 대 맞으면 절명할 것 같은데.

대체 다른 헌터들은 인스턴스 게이트를 어떻게 공략하는 걸까.

"약자······."

부우웅—!

시동어를 외치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오크 워리어가 던진 도끼가 내 근처를 향해 쇄도했다.

콰앙!

도끼는 나와는 다섯 걸음 떨어진 땅에 박혔다.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

그 짧은 순간에, 오크 워리어는 내 말소리를 듣고 무기를 던진 것이었다.

'이만큼 멀리 떨어져 있는데 들렸다고?'

말도 안 되는 청력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내가 안일했다.

'젠장.'

은신 상태라고 해서 안전하지 않다.

즉살 스킬이 있다고 해서 무적이 아니다.

D급인 오크 워리어가 이 정도인데,

상위 마수들은 얼마나 더한 괴수겠는가.

두근두근.

심장 소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반대로 머리는 급속도로 차가워진다.

혹여나 심장 소리가 들릴까 나는 빠르게 시동어를 외웠다.

"죽어."

나는 아까보다 더 작고 간결하게.

푸화악-!

그래도 약자 멸시 앞에선 일반 오크건 오크 워리어건 평등한 법.

오크 워리어는 마정석 하나를 남기고선 폭발했다.

그렇게 D급 게이트 공략은 끝이 났다.

'······.'

승리는 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다.

운이 없었다면 도끼에 직격당했을 거다. 물론 방어력을 올려주는 데빌 펜던트가 있었으니 죽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위험했던 건 사실이다.

'다음부터 이런 실수는 절대로 없어야 한다.'

나는 방금 전의 일을 상기했다.

시동어는 최대한 짧고 작게.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도 절대 방심하지 않을 것. 적의 행동을 항상 주시할 것.

조금이라도 상대가 강해보인다면, 절대로 틈을 주지 않아야 한다.

앞으로 상대할 마수들은 고블린 워리어보다 훨씬 강할 테니.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쉰 뒤, 가방에서 피자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어쨌든 공략은 끝났다. 나는 시스템 창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러면 보상을 받아볼까.'

『 D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이전과 마찬가지로 공략의 수준은 전설급.

문제는 지금부터다.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과연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나와줄 것인가.

16화 성좌의 격

『 D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 유니크 ] 강철 어깨 보호대

- 전설의 증표 x 1

'아까비.'

아쉽게도 스킬 초기화권은 나오지 않았다.

그 대신 방어구를 얻었다.

『 [ 유니크 ] 강철 어깨 보호대 』

- 방어 + 40

- 힘 Lv.3, 방어구 마스터리 Lv.3

강철로 만든 보호대에 가죽을 덧댄 물건이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감탄합니다. 』

'옵션이 장난 아니네.'

아이템 하나에 스킬이 두 개나 붙어 있다.

그것도 전부 Lv.3로.

『 힘 Lv.3 』

- 근력을 상당히 향상 시킵니다.

『 방어구 마스터리 Lv.3 』

- 방어구의 효율을 15% 증가 시킵니다.

아이템에 붙는 스킬의 최대 레벨이 3인 것을 감안하면, 굉장한 옵션이었다.

'방어구가 필요하긴 했는데. 마침 잘 됐다.'

나는 보호대의 가죽 끈을 어깨에 둘렀다.

『 강철 어깨 보호대를 착용합니다. 방어 + 40 』

『 현재 방어력 : 184(+28) 』

- 방어구 마스터리 Lv.3 [ 적용중 ]

어제 벨리알을 처치하고 획득했던 펜던트의 방어력이 144였다.

거기에 어깨 보호대가 더해지니 풀 플레이트 갑옷 부럽지 않은 방어력이 완성 되었다.

모양새도 나름 괜찮다.

'이 정도면 방어구를 풀 세트로 걸쳐야 얻을 수 있는 방어력이니까.'

『 성좌 '백색의 여명'이 한시름 내려 놓습니다. 』

방어력이 높으면 같은 공격을 받아도 피해가 덜하다.

중상에 이르는 치명타가,

가벼운 경상으로 끝날 수 있단 뜻.

'나쁘지 않다.'

헌터의 목숨이 걸려 있는만큼 좋은 방어구는 비싸다.

하도 사기템만 주워서 현실 감각이 사라진 기분이지만,

사실 10억을 들여도 내 수준의 방어력은 못 만든다.

······라고 어제 인터넷에서 봤었다.

뭐, 초기화권이 안 나온 건 아쉽지만.

다음에 나오겠지.

아직 공략할 곳도 많고.

보상을 얻을 곳도 많다.

우우웅—.

인스턴스 게이트 공략이 끝나자,

바깥으로 향하는 게이트가 열렸다.

그곳을 통과하자, 우리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출발했던 그대로였다.

하나만 빼고.

"루시퍼?"

루시퍼가 누워 있던 이불이 깨끗하게 개어져 있었다. 방바닥도 묘하게 반짝거리고.

화장실 불이 켜져 있었다. 내부를 살펴보니, 까마귀로 변한 루시퍼가 세면대에서 첨벙거리고 있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내 시선을 의식한 건지, 루시퍼가 짐짓 근엄한 척 대답했다.

이미 늦었다.

물장구 치는 거 다 봤다.

아닌가.

세면대에 차가운 물을 받아서 몸을 식히고 있었던 걸지도.

"아직 열이 심한 것 같은데.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니야?"

까마귀의 머리를 짚어보니 여전히 불덩이처럼 뜨겁다. 루시퍼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애초에 이건 감기가 아니니까요. 이 다음으로는 F급 미궁에 가시는 거죠?"

"그건 그런데."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습니다. 』

"윽, 이 자식이 누굴 한심하게······."

까마귀가 허공의 별빛을 향해 소리치려다 말고선 나를 바라봤다. 데려가 달라는 의미였다.

"그러면 같이 가자. 잠깐만."

아침보다는 상태가 나아진 것 같다.

저렇게까지 가고 싶어하는데 가지 뭐.

애초에 감기가 아니라면,

쉰다고 나아질 문제도 아니겠지.

나는 매고 있던 배낭에 수건을 깔고 아이스팩도 하나 넣었다.

그리고 까마귀가 된 루시퍼를 그 안에 넣었다.

"몸 상태가 좋아질 때까지 거기에 있어."

"저를 생각해서 이렇게까지······. 매우 안락합니다. 피자 냄새도 나고요."

뭐, 그렇겠지.

방금 전 게이트에 어제 먹다 남은 피자를 챙겨갔었으니까.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사도를 비웃습니다. 』

"비웃지마라. 이건 주인님께서 준비해주신 안락한 은신처. 네 놈이 평생 맛 볼일 없는 극락이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사도를 부러워합니다. 』

"크윽, 이 자식······."

사이가 좋은건지 나쁜건지.

어쨌든 둘이 아는 사이인게 분명하다.

그것도 꽤 대등한 수준.

검은 별의 주인을 대할 때랑은 확실히 태도가 다르다.

이전에는 하인 대하듯 했다면,

이번에는 동네 친구 대하듯 한다고 해야 하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백색의 여명이랑 아는 사이야?"

"······."

"루시퍼?"

답을 듣고 싶었지만,

열이 올라서 잠시 기절한 모양이었다.

······조금 있으면 깨어나겠지.

나는 배낭을 다시 잘 매고서 현관문을 나섰다.

"그러면 출발 하겠습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초고속으로 F급 미궁을 돌파하고 보상을 챙겨보자.

* * *

현재 대한민국은 한 헌터에 대한 이야기로 뜨거웠다.

혜성처럼 등장한 압도적 고수 '무명(無命)'.

그는 월드 보스를 단 한 방에 처치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나.

[ KR ] 무명, 월드 보스 처치 영상 (흑이무기)

- 조회수 1,042만회 #인기급상승 1위

[ 레전드 ] 무명 두번째 월드 보스 사냥 (헬하운드)

- 조회수 754만회 #인기급상승 2위

ㄴ 대한민국의 헌터계의 미래가 밝다.

ㄴ 그냥 시원하네. 미쳤다.

ㄴ 채아린 그냥 멍때리는데?

ㄴ 한국은 월드 보스 안전지대임ㅋㅋㅋ

ㄴ ㅇㅈ 무명 없었으면 피해 상당했을 듯?

너튜브 영상의 조회수는 폭발적이었다.

각종 커뮤니티에서도 무명의 언급이 끊이질 않았다.

- 근데 무명 정체 대체 뭐임?

ㄴ 유명 헌터가 닉네임 변경한 거란 썰도 있음

ㄴ 그게 가능함? 안 될걸.

ㄴ 최소 S급은 그냥 넘는 것 같은데.

ㄴ 아, 진짜 궁금하다.

가장 이슈가 되는 것은 무명의 정체.

도대체 무명은 누구인가?

무명과 연관된 검색어만 해도 그 관심도를 알 수 있었다.

연관검색어 : 무명 정체, 무명 누구. 무명 얼굴, 무명 신상······.

대중들만 궁금한 게 아니었다.

정보가 없는 건 다른 길드나 헌터들도 마찬가지.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이 무명(無命)의 정보에 목말라 있었다.

그리고 바로 어젯밤.

『 (KR)솔로몬의 72 악마 중 하나가 처치 되었습니다. 』

『 기여도 정산이 완료 되었습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위 : 사최헌

한국 전역에 시스템 메시지가 울려퍼졌다.

월드보스와 마찬가지로,

각성자 모두가 이 메시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불멸 길드 본사의 입구에서 기다리던 기자들은 사최헌의 인터뷰를 따내는 것까지 성공했다.

"무명 헌터를 직접 마주했나요?"

"무명 헌터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명 헌터의 능력에 대해서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수도 없이 들이밀어지는 마이크.

연신 터지는 플래시 세례 앞에서 사최헌은 딱 한마디를 했다.

"악마를 처치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무명의 덕입니다."

기사화가 되기엔 충분한 문장이었다.

- 전세계 최초 악마처치 달성!

- 사최헌 헌터, 무명과의 협력 인정.

- 사최헌 '전적으로 무명의 덕'

- 불멸 길드 무명에 대한 영입 의지 활활

기사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무명(無命)이 여태껏 정체를 숨기고 있던만큼, 대중의 관심도 클 수 밖에 없었다.

- 사최헌은 무명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거 아니야.

- 대한민국에서 국가권력급 헌터 나오나?

- 사최헌이 인정할 정도면······. 진짜 세단 건데. S급 상위일 듯.

- 해외에서 귀화한 S급 헌터일 수도.

- 다들 명심해라. 진짜 무명은 빵봉투를 쓰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관심 속에서.

사최헌 헌터는 다음을 준비하고 있었다.

* * *

대한민국 헌터 협회.

본사 빌딩 상층부.

"사최헌 헌터. 정말 이럴텐가? 우리가 하루이틀 보는 사이도 아니지 않은가."

고급스런 의자에 몸을 기댄 풍채 좋은 노인.

협회장 구성철.

그는 미간을 좁힌 채,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명(無命)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면 좋잖나. 국가적으로도, 인류적으로도 말이야. 윗분들도 그걸 원하셔."

고풍스런 테이블의 앞쪽.

손님용 소파에 걸터 앉은 사최헌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따로 말씀 드릴 건 없습니다. 월드 보스때와 동일했습니다."

"어허, 거 참. 알만한 사람이."

사최헌은 무명에 관한 정보 일체를 비밀로 했다.

루시퍼에 관한 것도, 무명이 가져간 아이템에 대해서도.

심지어 불멸의 길드원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허어."

짙은 한숨을 내 쉰 협회장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상황이 달라지고 있네. 얼마 전만 해도 월드 보스가 2회 연속으로 출연하지 않았던가."

협회도 예측하지 못한 월드 보스 출현.

명백한 이상 신호였다.

"비단 국내 뿐이 아니네, 해외에서도 이상 현상이 계속해서 보고 되고 있어. 계속해서 시스템이 우리의 예측을 벗어나고 있단 말일세."

알다마다.

회귀자인 사최헌이 모를 리가 없었다.

난이도의 상승.

불규칙한 마수 출현.

협회장은 말하지 않았지만, 각성자들의 수도 점차 증가하고 있을 것이었다.

모두 다 시스템의 튜토리얼이 끝나간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최헌은 입을 다문채 묵묵히 협회장의 말을 들었다.

"미궁에서는 엘리트 개체의 출현이 늘었고, 게이트의 브레이크 발생률은 늘었지. 곧 있을 죽음의 물결이 어떤 재난이 될진······. 자네도 알 거 아닌가."

끼익.

의자를 돌려 앉은 구성철.

그의 탁한 눈동자가 사최헌을 향했다.

"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건 무명(無命). 그와 같이 뛰어난 헌터일세."

돌려 말하곤 있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명확했다.

무명에 대한 정보를 넘겨라.

"······."

사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 본 뒤, 차가운 목소리로 말할 뿐이었다.

"시간이 되었으니. 가보겠습니다."

"사최헌 헌터."

자리에서 일어난 사최헌은 협회실의 문고리에 다가섰다. 뒤쪽에서 성난 음성이 들려 왔다.

"더 이상 협회에선 불멸 길드의 독주를 두고 보진 않을 걸세. 그걸 분명히 알아야 할 거야. 자네의 세상이 언제까지 이어질 것 같나?!"

"상관 없습니다."

끼이익. 쿵.

사최헌은 쏟아지는 노성을 무시하고서 협회장실 바깥으로 나왔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사최헌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마인 주제에 말은 잘하는군.'

협회장의 정체는 마인(魔人)이었다. 시스템의 출현과 비슷한 시기에 타차원에서 넘어 온 이방인.

'아직은 때가 아니다.'

마인들은 아직 인류의 수준에서 상대하기 힘든 거악(巨惡).

지금 사최헌의 힘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였다.

인간의 껍질을 쓰고 있지만, 그 남자의 목표는 인류 멸망.

대한민국의 안위를 위해 무명의 정보를 넘기라니.

개소리도 그딴 개소리가 없었다.

하지만 협회장의 말 전부가 거짓은 아니었다.

세계는 점차 혼란스러워 질 것이었다.

이미 이상한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여러번의 회귀를 경험한 사최헌은 이후 벌어질 일을 상세히 알고 있었다.

'진짜는 지금부터다.'

벨리알은 처치되었고,

각성자 연합이 붕괴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새로운 결과를 불러 일으킨다.

시스템은 통제 불능이 되고,

각지에서 숨죽이고 있던 자들은 슬슬 고개를 들기 시작할 것이다.

'무명, 너는 다가올 미래를 넘어설 수 있는가.'

사최헌은 그리 묻고자 했다.

* * *

"물론이죠. 케첩도 넣어주세요."

미궁으로 향하기 전에 패스트푸드점에 들러 햄버거를 구입했다.

버거왕 햄버거 세트 메뉴.

각종 튀김도 잔뜩 추가.

평소에는 비싸서 잘 안먹었지만, 돈도 벌었으니 맛있는 거 먹어야지.

"······저는 치즈 버거에 제로 콜라로 먹겠습니다. 올 엑스트라로요."

가방 속에 있는 까마귀가 속삭였다.

묘하게 자세한 주문이네.

어쨌든 녀석의 요청도 받아서 주문 완료.

아무리 F급 미궁이라지만 식량은 중요 문제니까.

포장한 햄버거를 가방에 넣고서 택시에 올랐다.

부웅.

약 40분쯤 갔을까.

도로의 정체가 극심한 구간이 나타났다.

'엄청 막히네.'

곳곳에 배치된 경찰들이 교통정리를 돕고 있었다. 택시 기사 아저씨가 곤란한 듯 혀를 찼다.

"앞에서 게이트 브레이크가 터진 모양인데. 거 참. 오도가도 못하겠네."

게이트 브레이크.

게이트 공략에 실패하게 되면 내부의 마수들이 바깥으로 쏟아져 나온다. 이때 마수들은 본래보다 훨씬 강화되어 있다.

게이트를 제대로 공략하지 못했을 때 생기는 재난이었다.

헌터 어플에도 뜬다.

"여기서 내릴게요."

"괜찮겠어요? 학생, 저쪽으로는 갈 생각도 하지마요."

"괜찮아요. 저도 헌터거든요."

현금으로 택시를 결제하고서 바깥으로 나왔다. 벗어 두고 있던 어깨 보호구도 다시 장착했다.

'미궁은 바로 이 앞이긴 한데.'

지도상으로는 현재 F급 미궁까지 가는 길목 자체가 막혀 있었다.

"거기 접근 금지입니다!"

"정지, 정지!"

"여기서부터 통제 구역입니다. 위험하다니까요!"

조금 걸어서 나아가자, 군인들과 길드 관계자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든 구경꾼들도 뒤섞여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은신으로 넘어가긴 좀 그렇겠네.'

주변에 상위 랭크의 헌터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은신 Lv.2는 충분히 간파될 법하다.

'도울 수 있으려나.'

나는 우선 근처의 건물 옥상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대피해 있어 쉽게 올라갈 수 있었다.

'마수들의 레벨부터 확인하자.'

나보다 레벨이 낮아야 약자멸시를 발휘할 수 있다.

건물의 옥상에서 내려다보자, 현재 붕괴된 게이트의 상황이 한 눈에 보였다.

검은색으로 변한 5m 크기의 게이트.

그곳에서 다양한 종류의 마수들이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15명 가량의 헌터들은 그 앞을 치열하게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의 소리는 여기까지 닿지 않는다.

소리를 차단하는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는 모양.

나는 마수들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집중했다.

[ Lv.43 ]

[ Lv.37 ]

[ Lv.45 ]

'레벨은 나보다 낮다.'

떠오른 마수들의 레벨은 전부 나보다 낮았다.

전부 약자 멸시로 처리할 수 있다.

"루시퍼, 주변에 상위 랭크의 헌터의 기운은 없어?"

쏙.

가방 속에서 얼굴을 내민 까마귀가 좌우를 쓱쓱 살폈다.

"은신을 간파할만큼 강한 헌터는 안 보입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입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동의합니다. 』

그렇다면 됐다.

거리낄게 없어졌다.

나는 은밀망토와 은둔자의 가면을 착용했다.

Lv.2의 은신이 적용되며 내 모습이 투명해졌다.

"그러면 이제 가볼까."

"······경험치도 못 얻고, 마석도 못 줍는 무료 봉사라니. 저 놈들은 복 받은 줄 알아야 할 겁니다."

가방에서 루시퍼의 아쉬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루시퍼의 인성에 경악합니다. 』

오늘 경험치 제한은 이미 가득 채우긴 했다.

근데 그게 중요해?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판인데.

빠르게 계단을 내려가던 그때였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선행에 대한 보상을 준비합니다. 』

팅!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에게 후원하고자 합니다. 』

『 주시성(注視星) 등록을 하여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눈 앞으로 떠오르는 메시지.

백색의 여명의 후원이었다.

"선(善) 계열의 성좌인 척하기는."

뒤쪽에서 궁시렁대는 루시퍼.

"그게 뭔데?"

"아, 성좌들의 성향을 나타낸 척도입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선계열의 성좌는 선행을 좋아합니다. 참고로 저는 혼돈 중립입니다."

대충 들어 본 거였다.

루시퍼는 악(惡)계열일 줄 알았는데.

하여튼 좋은 일에 대한 보상을 미리 준다는 거잖아.

"보상은 꽤 쓸모 있는 물건일겁니다."

루시퍼의 목소리는 은근히 들 떠 있었다. 아는 친구한테 후원 받는다고 기분이 좋은걸까.

어쨌든 이 상황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라면 환영이다.

한시가 바쁜 상황.

『 성좌 '백색의 여명'을 주시성으로 등록합니다. 』

나는 바로 주시성 등록을 했다.

백색의 여명은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메시지를 띄웠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첫번째 선물을 후원합니다. 』

『 해당 성좌의 격이 인과를 뒤흔듭니다! 』

그런데 어째 검은 별의 주인 때와는 뭔가가 달랐다. 나오는 메시지부터가 다르다.

성좌의 격이 인과를 뒤흔들어······?

메시지에 의문을 가지는 찰나.

쩌적, 쩌저적—!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 위로 새하얀 실금이 새겨졌다.

17화 게이트 브레이크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첫 번째 선물을 후원합니다. 』

『 해당 성좌의 격이 인과를 뒤흔듭니다! 』

쨍그랑!

허공의 공간이 깨어졌다.

갑작스런 이변에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깨어진 공간의 내부에선 빛과 바람이 쏟아져 나왔다.

툭-!

『 [ 성유물 ] 백(白):금이 간 영혼등 』

새하얀 빛과 함께 튀어나온 아이템. 나는 그것을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랜턴······?'

외관은 새하얗게 칠해진 랜턴이었다. 완전한 순백은 아니었다. 사용감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유리 부분은 조금 깨어져 있고, 색깔이 빛바래져 있었다.

그런데 아이템의 등급이 심상치 않다.

'성유물이라고······?'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

일반적인 아이템의 등급은 이러하다.

일반 - 레어(희귀) - 유니크 - 레전더리(전설).

성유물은 이러한 등급 체계에 속하지 않는 특별한 아이템.

'나도 인터넷에서 구경만 해봤다.'

검은 별의 성좌가 첫 번째 후원으로 줬던 아이템이 희귀 등급이었던 걸 생각하면 엄청난 차이다.

"백색의 여명 녀석의 격(格)은, 일반 성좌들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현세의 인과쯤은 가볍게 비틀 수 있죠."

배낭에 들어 있던 까마귀 루시퍼가 자랑스레 설명을 늘어놨다.

"격? 그게 뭔데?"

"헌터들을 등급으로 분류하듯, 성좌들은 격으로 분류되는데······. 으, 현재로서는 여기까지만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제한이 있거든요."

루시퍼도 소환되기 전에는 성좌라고 했었지.

이쯤 되니 다시 떠오르는 의문.

"근데, 백색의 여명과는 무슨 사이인 거야? 설마 이것도 제한?"

"전(前) 직장 동료라고 할까요. 별로 안 친합니다."

그런 것치고는 되게 아는 척하는데.

사실 대강 짐작은 간다.

일단 루시퍼(Lucifer).

각종 영화나 매체에서 접할 수 있듯 그 이름은 유명하다. 너무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본래 신의 사자였던 루시퍼는 모종의 이유로 타락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타락 천사.

'그런 루시퍼의 전 직장동료라고 한다면······.'

백색의 여명의 정체는 천사겠지.

그리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천사쯤 되면 인과를 비트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었다.

루시퍼 본인에게 과거에 대해 물어봐도

"제한입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으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루시퍼의 과거를 캐물을 때가 아니었다.

'게이트 브레이크 도와줘야지.'

건물 밑에선 한창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고 있을 것이다.

빠르게 아이템을 확인하고 도와주러 가야 했다.

나는 백색 랜턴의 시스템 정보를 살폈다.

『 [ 성유물 ] 백(白):금이 간 영혼등 』

- 마물의 영혼을 수집합니다. [ 0 / 500pt ]

- 영혼을 최대치로 채우면 소규모 기적을 행사합니다.

- 소규모 기적 : 고유 스킬 초기화 티켓 x1

* 내구도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미쳤네."

아이템 설명을 확인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마수를 많이 잡아서 포인트를 모으면, 고유 스킬 초기화 티켓을 얻을 수 있단다.

전설급의 공략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아이템이란 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소규모 기적이 맞다.

내구도가 얼마 안 남았다는 게 흠이지만, 성능이 좋으니 어쩔 수 없지.

"나쁘지 않네요. 이러면 무료 봉사는 안 될 테니까요. 경험치는 못 얻어도 티켓은 챙길 수 있겠죠. 이럴 게 아니라 어서 게이트 브레이크를 막으러 가시죠."

배낭에서 랜턴을 살펴보던 루시퍼가 나를 재촉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사도의 태세 전환에 코웃음을 칩니다. 』

"아이템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그 녀석한테 존댓말 안 쓰셔도 됩니다. 당연한 후원인데요."

"내 맘인데."

"아, 그러면 쓰셔도 됩니다."

"······."

하여튼 게이트 브레이크를 해결하러 가자.

나는 빠르게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건물 바깥에는 길드 관계자들과 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나는 가면을 고쳐 쓴 뒤 통제선을 향해 다가갔다.

『 은둔자의 가면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은신 Lv.2

- B급 이하 탐지 스킬에 면역이 됩니다.

"아무래도 상황이 심각해지는데."

"젠장, 지원은 언제 온다는 거야?"

"이쪽도 슬슬 대피를 생각해야······."

길드 관계자들의 목소리에는 짜증과 긴장이 섞여 있었다.

힐끗힐끗 뒤를 바라보는 경찰들도 불안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황이 별로 좋지는 않아 보인다.'

나는 빠르게 통제선을 넘었다. 통제선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내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애초에 은신을 들킬 염려가 없었다.

그만한 실력자가 없다는 건 이미 루시퍼를 통해 확인해뒀으니.

그렇게 통제선 내부를 지나 깊숙이 들어가자, 침묵에 휩싸여 있던 재난의 현장이 드러났다.

콰앙-! 촤아악! 촤악!

"그 개새끼 죽여! 절대 바깥으로 못 나가게 해!"

"힐러, 힐러 어디있어요! 젠장!"

"크아아악! 내 팔이!"

5m 가량의 검은색 게이트에선 마물들이 끝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파이어볼 던져, 던지라고 이 새끼야!"

"방패 똑바로 들어! 젠장, 지원은 언제 오는거야?!"

"조금만 더 버텨요!"

'······.'

상황은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 * *

13명의 헌터들은 필사적으로 게이트를 틀어막고 있었다.

"진형 끝까지 유지해! 절대 밀리지마!"

성현 길드의 길드장, 김성현이 악에 받친 듯 소리쳤다. 필사적인 그의 목소리는 완전히 갈라져 있었다.

'빌어먹을!'

본래대로라면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D등급 게이트 공략이었는데······.

공략은 정식적인 절차를 밟아 진행되었다.

길드원들도 경험이 많은 실력자들이었다.

장비와 도구에 대한 점검도 완벽했다.

그런데도 실패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마수들이 게이트에 숨어 있었던 탓이다.

최근 들어 발생한 이상 현상.

상위 길드나 협회에서도 공지가 내려온 상황이었다.

'큭, 더 조심했어야 했는데. 아니 조심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어.'

그러나 그 피해자가 자신이 될 줄은 몰랐다.

게이트에 있던 마수들은 길드원들로는 도저히 처치 불가능한 수였다.

성현 길드는 매뉴얼에 따라 게이트 바깥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지옥이었다.

별안간 게이트가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 어, 어째서?!

- 생각할 때가 아니야. 일단 막아!

- 크윽, 이놈들 왜 이렇게 질겨······!

게이트 속에서 빠져나온 마물은 훨씬 강해진다.

D등급 하위의 마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젠장! 조금만 더 버텨! 지원이 올 테니까!"

"그러니까, 그 지원이 대체 언제 오냐고!"

콰드득.

"크으윽!"

징그럽게 생긴 마수 한 마리가 김성현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김성현은 이를 악물고서 놈의 머리에 검을 박아 넣었다.

"무조건 막아! 여기서 뚫리면 끝장이야!"

축 늘어진 마수를 떼어낸 김성현이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촤악-! 촤아악!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곳은 도심의 한복판.

만약 한 마리라도 놓친다면,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생길 것이다.

뭐 대단한 영웅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브레이크를 저지하지 못하면 헌터로서의 커리어는 끝. 오랜 기간 키워 온 성현 길드는 해체 될 것이다.

길드장인 자신은 법적인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었다.

촤아악!

이유야 어찌 되었든 김성현은 온 힘을 다했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

여기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정신없이 검을 내지르던 그때였다.

"길드장, 위험해!"

"길드장!"

몇 길드원들의 다급한 외침에 김성현은 정신을 차렸다.

"!"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게이트에 너무 가까워져 있었던 것이다.

쩌어억-!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마수 한 마리가 김성현을 삼킬 듯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었다.

"아."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검을 휘두르기엔 너무 늦었다.

몸을 던져 피하기엔 너무 깊었다.

김성현은 자신의 최후를 직감했다.

그리고 그 순간.

푸화악—!

자신을 삼킬 듯 달려오던 마수가 폭발했다. 마치 폭죽이 터지듯 순식간에. 김성현은 마수의 피를 전신에 뒤집어썼다.

"······?"

마수가 일시에 사라졌다.

이만한 화력을 가진 사람이 우리 길드에 있던가?

어안이 벙벙해진 김성현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푸화악-! 푸확, 푸화악!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이게 무슨······."

죽을힘을 다해 싸우던 동료들도 얼떨떨해진 표정으로 자리에 멈춰섰다.

푸화악-!

멋모르고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마물 한 마리.

그 놈 또한 가차 없이 폭발했다.

"이거 어디선가······."

김성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어디에선가 봤던 광경이었다.

데자뷰처럼 새겨져 있는 장면.

이렇게나 인상 깊은 장면은 분명······.

"무명, 무명 헌터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그제야 길드원들 모두가 깨달았다.

"무, 무명이라고?"

"진짜 무명이다!"

영상 속에서 보았던 월드 보스의 최후와 마찬가지였다.

푸확! 푸화악!

마수들이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족족 증발하고 있었다.

강화된 마수건 뭐건 아무 소용 없었다. 그 수가 얼마가 되든 무명의 앞에서는 상대가 아니었다.

"······미쳤네."

헌터들은 넋을 놓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무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마수들만이 차례차례 목숨을 잃어갈 뿐이다.

폭죽놀이하듯 연달아 폭발하는 마수들.

이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라도 무명에게 방해가 될까.

그어어어······.

게이트 속에서 3m 크기의 보스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악어의 형상을 한 마수는 위협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전진했다.

아무도 무기를 들거나, 자세를 바로 잡지 않았다.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제자리에 굳어져 그저 보스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 자리의 모두가 알고 있었다.

푸화악—!

보스가 무명의 상대가 될 리가 없다는 것을.

보스의 붉은 피가 도심의 바닥을 적셨다. 마수들의 피로 가득한 도로 위에 또 하나의 웅덩이가 고인 것이다.

5m였던 흑색의 게이트는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3m, 1m, 1cm······.

비대해졌던 게이트는 그대로 점이 되어 소멸했다.

『 게이트 브레이크를 저지했습니다. 』

그제서야 길드원들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하, 하아······."

"끄, 끝났다."

"막아냈어. 무명이······."

"무명이 뭐냐, 오늘부턴 무명님이다."

"살았어. 우린 살았다고."

긴장이 풀린 길드원들이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에 그들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딘가에 있을 무명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었으나.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진짜 신출귀몰하다는 게 이럴 때 쓰는 말인가······."

"진심으로 무명 팬클럽 가입해야겠다."

"괜찮으십니까?!"

경찰들과 길드 관계자들이 몰려오며 상황이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

투두두두······.

검정색 헬기 한 대가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왔다. 헬기의 등장에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려는 찰나, 헬기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렸다.

쿠웅!

"모두 괜찮아요?!"

땅에 착지한 것은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었다.

헌터 랭킹 3위 천이령.

그녀의 별명은 올 마스터(All Master).

유일한 S급 고교생으로 더 알려진 부분이었다.

천이령은 단검을 쥐고서 주변을 살폈다.

"게이트 브레이크가 일어났다고 해서 급하게 들렸는데······."

원래 오기로 했던 지원은 아니었다. D등급 브레이크에 랭킹 3위의 헌터가 파견될 리가 없었으니까.

자신의 임무 장소로 향하던 천이령이 순수한 선의로 헬기에서 내린 것이었다.

"혹시 다 끝난 거예요?"

그런데 뭔가 예상했던 거랑 상황이 달랐다.

"천이령 헌터다!"

"지원으로 온다던 사람이 천이령 헌터였어?"

"설마. 협회 놈들이 무슨 수로."

"헌터님, 팬이에요. 싸인 해주세요!"

기다리고 있던 시민들이 오히려 천이령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어라. 여러분. 진정, 진정해요!"

게이트 브레이크는?

벌써 정리가 끝났다고?

물론 다행이었다.

아무 사고 없이 브레이크가 해결된 거니까.

'이크, 여기서 이럴 시간 없는데.'

천이령이 눈동자를 굴렸다.

해결이 됐으면 바로 출발해야 했다. 당장 헬기에 올라타야 했다.

"죄, 죄송해요. 다시 가봐야 해서 싸인은 좀······."

천이령이 시민들을 헤치고 나아가려는 찰나.

"천이령 헌터님!"

현성 길드의 관계자가 급하게 인파를 뚫고 다가왔다.

관계자는 천이령에게 있었던 일을 전했다.

무명이 와서 브레이크를 순식간에 해결했다고.

"지, 진짜로 무명이 왔었어요?"

자리에 멈춰선 천이령은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 * *

나는 브레이크를 정리하고서 곧장 F급 미궁으로 향했다.

"이야, 완벽하셨습니다. 거기 있던 인간 놈들은 평생 잊지 못하겠죠. 주인님의 추종자가 늘 겁니다. 구원의 순간은 언제나 황홀한 법이니까요."

"아니, 뭐 그 정도까지야······."

나는 루시퍼의 과한 찬사를 건성으로 들으며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냠냠.

미리 햄버거 세트를 사두길 잘했다.

영양보충은 제때제때 해줘야 하는 법.

햄버거를 다 해치운 뒤, 콜라를 쭉 들이켜며 백색 랜턴을 확인했다.

'이 정도 속도면 나쁘지 않네.'

『 백(白) : 금이 간 영혼등 』

- [ 176 pt / 500 pt ]

백색의 랜턴 내부에는 새하얀 기운이 몽글몽글 모여 있었다. 이게 내부를 가득 채우면 목표치 달성이다.

D급 게이트의 브레이크를 정리하니 1/3 가량이 채워졌다.

"단순히 마수를 많이 처치하는 게 전부는 아닌가 본데."

"높은 수준의 마수를 처치하면 더 높은 포인트를 획득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금방 채우겠는데?"

몇 번 쓰면 부서진다는 게 흠이지만.

어쨌든 다 채우면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준단 거 아니야.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다다익선이다.

'필살기를 저장하는 느낌이니.'

많이 얻어서 쟁여둘 수 있다면 최고다.

나는 랜턴을 인벤토리에 넣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햄버거 포장지도 대충 정리해서 가방에 넣었다.

그러면 이제 정말로 F급 미궁 공략이다.

"루시퍼, 상태는 어때?"

"거의 호전되었습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67% 정도입니다."

뭐 그런 애매한 수치가.

조금 더 쉬게 하자.

F급 미궁 정도는 나 혼자도 공략할 수 있으니까.

"나오지 마. 장비도 맞춰져 있어서 괜찮거든."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동의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예, 배낭에서 주인님의 활약을 지켜보겠습니다."

나는 미궁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닥이 살짝 내려가는 것과 동시에 앞쪽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쉬익-!

나는 굳이 화살을 피하지 않았다.

사실 반응하지 못했다고 보는 게 맞지만.

툭.

화살은 나를 뚫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오오,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화살조차 주인님의 앞에선 고개를 숙이는군요!"

"아부는 이제 됐다니까."

전적으로 방어력 덕분이다.

『 현재 방어력 : 184(+28) 』

- 방어구 마스터리 Lv.3 [ 적용 중 ]

펜던트랑 어깨 보호대.

이 두 개가 합쳐지니 웬만한 F급 함정에는 면역이다.

이게 바로 템빨이지 뭐겠어.

상위 헌터들이 비싼 돈 들여가며 아이템을 장만하려는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였다.

"말 안 해도 되니까 그냥 있어."

"넵."

루시퍼가 나설 것까지도 없다.

F급 미궁은 나 혼자도 충분하다.

내가 미궁의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그 순간이었다.

팅!

『 솔로몬의 72악마 '벨리알' 처치 보상이 정산되었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악마 처치 보상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에 대한 감상은 이러했다.

······이게 지금?

18화 늦은 정산

투두두두—!

천이령은 다시 헬기에 올라탔다. 헬기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서울의 상공을 가로질렀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천이령의 표정은 굳어져 있었다.

'······무명이 왔었다고?'

천이령이 자신의 입술을 깨물었다.

D등급 던전 브레이크는 깔끔하게 해결되어 있었다.

무명에 의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월드 보스를 즉사시키는 사람에게 D등급 브레이크의 뒤처리 정도는 간단했을 테니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으으······."

천이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조금만 일찍 왔으면 무명을 직접 볼 수도 있었단 거잖아!'

대한민국 랭킹 3위 천이령.

아직 고등학생인 그녀는 무명의 팬이었다.

월드 보스 토벌 당시, 천이령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집 안.

길드원들을 응원하며 월드 보스 토벌을 시청하던 그때였다.

푸화악-!

TV 속 월드 보스가 즉사했다.

그 순간, 천이령은 화면에서 눈을 뗄 수조차 없었다.

'어떻게······?'

천이령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강함이 그곳에 있었으므로.

무리를 해서라도 토벌 현장에 나갔어야 했는데. 후회 섞인 눈물을 삼키며 너튜브의 영상을 몇 번 돌려봤는지 모른다.

천이령은 아쉬운 듯 아래쪽을 내려다봤다.

저 멀리 산처럼 솟아오른 F급 미궁이 보였다. 그런 천이령에게 불현듯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까······.'

천이령의 소속은 길드 청명(淸明).

대한민국에선 불멸 길드 다음가는 2위 길드였다.

천이령은 희미한 기억을 끌어 올렸다.

분명 아침 회의에서 무명에 관한 정보가 오갔었다.

- 현재 악마 처치 이슈에 가려져 있지만, SNS에서 무명의 행적으로 추정되는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여기 자료입니다.

- E급 미궁 공략자 랭킹에 무명이 나타났다는 거지.

- 사최헌 헌터 점수의 3배가량? 말이 안 되잖아.

반쯤 졸면서 듣긴 했지만, 무명이 미궁을 공략하고 있단 루머가 SNS에서 확산되고 있다고 그랬다.

그럴듯했다.

기존 미궁의 랭킹 어디에도 무명의 이름은 없었으니까.

천이령은 반쯤 확신했다.

'그래! 무명이 게이트 브레이크 하나를 저지하려고 왔을 리가 없어.'

집 앞이라면 모를까. 굳이?

'만약 무명의 목적이 F급 미궁을 공략하는 거였다면······?'

그렇다면 브레이크를 정리한 것도 말이 된다.

가는 길에 방해가 되니까.

천이령은 그런 결론을 내놓았다.

'으, 당장이라도 확인하러 가고 싶어.'

그녀의 감이 맞다면 무명은 지금 F급 미궁에 있을 거다.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을지도.

꼭 물어보고 싶었다.

그 강함의 비밀을.

어떻게 하면 그토록 압도적인 무(武)를 손에 넣을 수 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만했다.

'하지만······.'

천이령은 당장이라도 헬기에서 뛰어내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정신 차리자, 천이령.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야.'

현재 전국 각지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하고 있었다.

방금 전의 D등급 브레이크는 귀여운 수준일지도 모른다.

천이령이 향하는 장소에는 재해에 가까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으니까.

투두두두—!

어느새 서울을 지나간 헬기가 경기도 외곽 지역에 들어섰다.

헬기는 한 대가 아니었다. 여러 대의 헬기가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방송국의 헬기와 길드 소유의 헬기들.

그중 길드 소속의 헬기에는 S 랭크의 헌터가 하나씩 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걸로도 부족할지 모른다.

'이 정도로 거대한 건······. 처음 봐.'

바깥을 내려다보는 천이령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지역의 일부가 통째로 검은 장막에 휩싸여 있었다. 내부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시 하나를 뒤덮는 크기의 반구.

내부에 있는 사람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 대규모 재난.

팅!

일정 범위 안으로 들어서자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곧 죽음의 물결이 현세를 덮칠 것입니다. 』

『 남은 시간 - 23:45:29 』

『 해당 지역에 재난이 강림합니다. 』

『 해당 지역에 대규모 마수가 출현합니다. 』

『 사전 진입으로 죽음 물결의 규모를 축소 시킬 수 있습니다. 』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해.'

죽음의 물결.

정해진 구역에서 엄청난 수의 마수가 출현하는 사냥 이벤트.

시스템상으로나 이벤트지 인류의 입장에선 재난이었다.

월드 보스가 거대한 개체 하나를 상대하는 토벌이라면, 죽음의 물결은 막대한 수의 마물들을 막아내는 디펜스 형식이었다.

단검을 쥔 천이령의 손에 자연스레 힘이 들어갔다.

그럴 수밖에.

지금의 제주도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하는 땅이 되었다.

월드 보스에 연이은 죽음의 물결을 막아내지 못한 결과였다.

지금 이 도시도 마찬가지였다.

실패한다면 전례 없는 규모의 사상자가 나올 것이다.

천이령은 손에 쥔 통신 장치를 입 근처로 가져왔다.

"청명 길드, 천이령. 출발합니다."

천이령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검은 장막을 향해 뛰어내렸다.

* *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보상 목록 』

- 악마의 눈 [ 레전더리 ] [소모품]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악마 : 벨리알의 혼(SSR)

- 전설의 증표 x 2

+ 칭호 '악마 살해자'

악마를 처치한 보상이 지금에서야 정산되었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대단히 만족합니다. 』

늦은 정산인만큼 구성품은 알찼다. 월드보스 공략 때와 비교하면 엄청난 수준의 보상.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시스템이 주인님의 활약을 예상치 못한 게 확실합니다."

배낭에서 머리만 내민 까마귀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였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동의합니다. 』

"어쨌든 보상이 나왔으니 다행이네."

나는 보상 목록을 살폈다.

레전더리급 소모품이랑,

신규 스킬 습득권.

'사실상 이 두 개가 메인이다.'

매번 모이는 영혼과 전설의 증표는 아직 사용처가 없으니까.

잠깐, 영혼?

나는 급히 배낭에서 '백:금이 간 영혼등'을 꺼내들었다.

"설마 들어가지는 건가?"

벨리알의 영혼은 왠지 아까우니, 예전에 잡았던 흑 이무기의 영혼을 인벤토리에서 꺼내 손에 들었다.

보스의 혼을 넣어서 초기화권을 얻을 수 있다면 이득이잖아.

어차피 당장은 남아서 쓸 곳도 없는데.

팅-!

『 해당 영혼의 농도가 너무 짙습니다. 』

『 '백 : 금이 간 영혼등'이 해당 영혼을 거부합니다. 』

"······."

아쉽게도 튕겨져 나왔다.

"굳이 문제를 찾자면 백색의 여명 녀석이 준 랜턴이 허접했던 거겠죠."

루시퍼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백색의 여명은 더 높은 수준의 영혼등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꼭 뜯어내죠."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딴청을 피우며 휘파람을 붑니다. 』

나중에라도 쓸 데가 있다는 걸 확인했으면 됐다.

"뭐가 됐든 가면서 확인해야겠다."

아이템 정보를 보는 건 미궁을 공략하면서 해도 늦지 않는다.

나는 미궁을 빠르게 나아갔다.

"죽어."

푸화악-!

중간중간 마주치는 고블린들은 약자멸시에 의해 즉사.

푸화악—!

이따금씩 떼거지로 달려들어 왔지만 녀석들은 내 상대가 되지 못했다.

나혼자 처치한 고블린만 50마리가 넘어갔다.

쉬익, 팅!

카가각!

어디선가 날아오는 함정들도 내 방어력을 뚫지 못했다.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아이템과 스킬이 갖춰지니 미궁 탐사가 진짜 산책 수준이 되었다.

나는 걸어가며 보상으로 받은 아이템을 확인했다.

『 악마의 눈 [ 레전더리 ] 』

분류 : 소모품

설명 : 벨리알의 눈

효과 : 일시적으로 스킬의 적용 범위를 '국가' 단위로 확장합니다.

'국가 단위로 확장?'

레전더리급이라는 수식어가 알맞은 효과였다.

만약 힐러가 이걸 사용한다면 전국 어디에든지 힐을 줄 수 있단 거였다. 집에 앉아서 버프를 주는 것도 가능할 거고.

내가 사용한다면.

'약자멸시가 엄청난 범위를 가지게 된다는 거잖아.'

현재 약자멸시 스킬의 범위는 100m.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고유 스킬 즉살과 마찬가지로 집구석에 앉아서 마수들을 몰살시킬 수 있단 거다.

'사기템이네.'

다음으로 획득한 아이템은.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황금빛으로 이뤄진 티켓 한 장이었다.

'루시퍼를 소환했을 때보다 한 등급 높다.'

티켓은 찬연한 황금빛을 발하고 있었다. 자체발광에 눈이 부실 지경.

솔직히 악마의 눈보다 이게 더 신경 쓰인다.

'스킬 습득권이라.'

심지어 '전설+' 등급이다.

어쩌면 전 세계를 뒤져도 이게 유일할지 모른다.

"내가 사용하면 무슨 스킬이 나오려나."

가방 속에 있던 루시퍼가 빠지지 않고 한마디 했다.

"운이 좋다면, 저와 관련된 스킬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현재 제 능력은 본래의 실력에 비하면 백사장 위의 모래 한 줌에 불과······."

"널 강화하는 스킬이 나올 수도 있단 거지?"

"넵."

루시퍼의 능력 강화라.

그런 종류의 스킬도 나쁘지 않다.

굳이 말로 하진 않았지만, 내가 본 루시퍼의 전투력은 사최헌 헌터와 동급이거나 더 높은 정도 같았다.

여기서 더 강해진다니.

그것대로 괜찮다.

『 성좌 '백색의 여명'이 일말의 기대를 품습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티켓을 사용하길 원합니다. 』

"이건 돌아가서 생각하자."

당장 스킬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까.

나는 황금빛 티켓을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보상을 얻는 김에 코인벤토리 칸도 50칸까지 대폭 늘렸다.

칸이 늘어날수록 비용도 기하급수적으로 올랐지만, 남아있던 코인만 180만 가량이라 괜찮았다.

나머지는 벨리알의 혼과 전설의 증표 두 개.

"전설의 증표는 언제 어느 성좌랑 교환 가능한 거야?"

"자세한 시기는 제한입니다. 그래도 모아두시면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정도로 이득을 보실 겁니다. 성좌들이 좋아서 미쳐 날뛰는 물건이거든요."

이것도 제한이란다.

뭐, 방송용 금지어 같은 건가.

『 전설의 증표 x 8 』

이로써 모인 전설의 증표는 8개.

일단 차곡 차곡 모아두자.

루시퍼의 말대로 쓸 데가 있다니까.

마지막으로 칭호가 있었다.

『 칭호 : 악마 살해자 』

- 악마종 대상 데미지 1.5배 증가

- 악마종으로부터 받는 데미지 30% 감소

무지막지하게 좋아 보이는 칭호였지만, 즉살을 사용하는 마당에 데미지 증가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칭호는 저도 효과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에 악마종이 나타나기만 하면 필승이란 거죠."

오, 그렇다면 진짜 괜찮다.

이걸로 보상 확인은 끝났다.

다 좋기는 한데.

매우 좋은 보상이긴 한데.

'······고유 스킬 초기화권은 안 나왔네.'

그래도 조바심 낼 필욘 없었다.

F급 미궁 공략도 거의 끝에 다다랐으니.

이번 공략 보상에서 초기화권을 노려보자.

"이제 저 골목만 넘어가면 보스의 방입니다."

"그래?"

미궁 공략은 전체적으로 순조로웠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도 없이 보스방에 도착.

끼이익—!

나는 보스방으로 이어진 녹슨 쇠문을 열어젖혔다.

* * *

키륵, 키르륵!

보스방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우두머리 고블린이었다.

놈은 일반적인 고블린과 달리 양손에 단검을 들고 있었다.

[ Lv.19 ]

F급 미궁답게 레벨은 한참 낮았다.

약자멸시로 한 번에 처치해도 되지만······.

스윽.

나는 인벤토리에서 망멸검을 꺼내 들었다.

흑 이무기를 잡고 나온 무기였다.

"직접 싸우시는 겁니까? 이거 진귀한 광경이네요. 배낭 속에서 응원하겠습니다."

딱히 루시퍼가 나를 말리진 않았다.

그만큼의 레벨 차이가 나니까.

내 레벨은 50.

고블린의 레벨은 19.

지는 게 이상할 정도.

이기는 게 뻔한 싸움이지만 나는 진지하게 망멸검을 들어 올렸다.

'오늘 아침 E급 인스턴스 게이트에서 확실히 느꼈지.'

내게는 경험이 부족했다.

그 탓에 아침에도 오크 워리어의 공격을 허용할 뻔했다.

'되도록이면 약자멸시와 즉살을 활용하겠지만······.'

만에 하나라는 일이 있지 않던가.

최소한 전투가 어떤 느낌으로 진행 되는지 정도는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키륵······.

나는 고블린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망멸검을 쥔 두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타앗.

고블린 우두머리가 땅을 박차고 달려왔다. 놈의 양손에 들린 날카로운 쌍단검이 망멸검에 부딪혔다.

카앙!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 미약한 흑색의 기운이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 』

검 끝으로 흑색의 기운이 모여들었다.

키에엑?!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검을 맞댄 고블린이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엥?"

내 의문에 루시퍼가 빠르게 대답했다.

"주인님의 엄청난 재능······! 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아이템의 효과입니다."

"그럴 것 같더라."

『 현재 소유한 흑(黑)의 갯수는 2개입니다. 』

- 칠흑 : 데몬 펜던트 [아이템]

- 흑 : 사도 소환 [스킬]

흑색과 관련된 걸 두 개 가지고 있어서 생기는 특수 능력.

키르륵······!

수세에 몰린 고블린은 발악하며 단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카앙! 카앙!

검과 단검이 부딪히며 새빨간 불똥이 튀어 올랐다. 고블린의 단검술은 생각보다 빠르고 파괴적이었다.

단검은 몇 번이고 내 근처를 찔러 들어왔다.

팅! 팅!

그때마다 흑의 기운이 자동으로 공격을 방어해냈다. 가벼운 방어막이 생긴 느낌이다.

테스트 해보길 잘했다.

기본적으로도 레벨 차이가 있다 보니 위협은 되지 않는다.

심장이 두근거리기는커녕 피가 차갑게 식는 듯한 느낌.

그래서일까.

의식이 또렷해지고 주변의 상황이 명료하게 파악되기 시작했다.

휙, 휙, 휙!

난잡하게만 보이던 쌍단검의 궤적이 한없이 단조로워지는 그 순간.

'찌를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양손으로 움켜쥔 검을 무게중심과 함께 앞으로 내밀었다.

푸욱-!

고블린의 검격 사이를 망멸검이 파고 들었다. 뼈를 가르는 감각과 함께 고블린의 심장이 꿰뚫렸다.

"키에엑!"

단말마와 함께 축 늘어지는 고블린 우두머리.

검술 실력은 이 놈이 나보다 우위다.

레벨 차이와 템빨이 없었더라면 졌겠지.

"죽어."

굳이 검을 뽑기보단 확실하게 마무리를 지었다.

푸화악-!

고블린은 그대로 즉살.

데굴.

동시에 놈이 체내에 품고 있던 마정석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오, 나이스······."

굴러온 마정석을 주워 들려는 찰나.

마정석의 정보가 떠올랐다.

『 독특한 마정석 (★) 』

"이 녀석 엘리트 마수였잖아."

어느샌가 배낭에서 빠져나온 까마귀가 내 어깨에 툭 앉았다.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나를 바라봤다.

"어······. 진짜로 재능 있으신 거 아닙니까?"

"그래봤자 F급 미궁에 있는 고블린인데 뭐."

"아뇨, 엘리트 마수들은 다릅니다. 레벨과 등급을 무시할 만큼 강하거든요."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부분 동의합니다. 』

"그런가"

입에 발린 말이긴 해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만.

이번에 내 수준을 확실히 알았다.

'애매해.'

검술에 기가 막힌 재능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앞으로 칼 들고 싸워 보겠다고 나설 생각은 절대로 없다.

'직접 싸워 보는 건 이번이 마지막.'

일방적으로 이길 수 있다면 그렇게 해야 한다.

인생은 실전이니까.

내 능력이 그런 능력이기도 하고.

『 백(白) : 금이 간 영혼등 』

- [ 231 pt / 500 pt ]

나는 영혼등을 확인했다.

'괜찮네.'

엘리트 마수를 잡아서일까.

F급 미궁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꽤 쌓였다.

남은 포인트는 절반가량.

'이건 이거고······.'

나는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미궁의 보상 메시지가 나올 장소를 향해서.

작은 염원을 담아 말했다.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 나와야 해."

"시스템, 슬슬 내놓을 때가 됐잖냐. 주인님께서 원하신다. 내놔라."

"그렇게 따지는 게 효과가 있어?"

내가 진지하게 묻자, 루시퍼가 멋쩍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습니까."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보상을 기대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보상을 기대합니다. 』

그래.

목표는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다.

『 F급 미궁 던전이 공략 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랭킹 점수를 계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932 점 ]

- 2위 : 사최헌 [ 452 점 ]

- 3위 : 채아린 [ 395 점 ]

보스를 직접 잡아서 그런가.

이전보다는 다소 낮은 점수.

그래도 상관없다.

1등은 1등이고,

전설급 공략인 건 마찬가지니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나는 이어서 떠오르는 메시지에 집중했다.

『 굉장한 업적!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그렇게 떠오른 보상엔······.

『 보상 목록 』

- 고유 스킬 초기화권(전설) x 1

- 전설의 증표 x 1

고유 스킬 초기화권이 있었다.

"나왔다!"

19화 죽음의 물결

F급 미궁 공략도 끝났겠다.

나는 루시퍼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절 데리고 다니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주인님은 편하게 쉬고 계시죠. 저녁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배낭에서 뛰어 내린 까마귀가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

"거의 완벽합니다. 격렬한 전투는 어렵지만요.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 없습니다."

앞치마를 걸친 루시퍼는 냉장고 앞으로 다가갔다. 내부에는 식재료가 한가득이었다.

"혹시 드시고 싶은 게 있으신가요?"

"김치찌개?"

"그러면 마계식 김치찌개로 가겠습니다."

"멀쩡한 거 맞지?"

나가서 먹는 것도 좋지만,

집에서 먹는 것도 괜찮다.

루시퍼가 장을 한가득 봐뒀기도 하고,

녀석의 요리 솜씨가 보통 예사롭지 않으므로.

나는 벽에 기대고 앉아 습관처럼 TV를 켰다.

'오늘 하루 얻은 게 많네.'

백색의 여명에게 후원도 받고,

악마 처치 보상도 정산되었다.

'거기에 더해 스킬 초기화권까지.'

현재 즉살의 쿨타임은 26.3일.

하루가 지났지만 여전히 기다리기엔 멀다.

초기화권이 나와서 다행이다.

여차할 때 즉살을 쓸 수 있으니 심적으로 안심이 된달까.

나는 리모콘으로 TV 채널을 돌리다가 멈칫했다.

- 한국 헌터 협회에서 무명에 대한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그러고보니 어제 뉴스에서 입장 발표를 할 거랬다.

이어서 자료 화면이 나왔다.

기자회견장에 협회장이 직접 나와 발언하고 있었다.

- 무명(無命) 헌터가 협력할 의지를 직접 내비친다면 협회 측에서는 무명의 요구를 적극 수용할 것입니다. 물론 국가 차원에서의 특혜를 부과하는 대신 그만한 정보의 제공과······.

내용을 들어보니, 무명이 먼저 신상을 밝히고 도움을 준다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는 것 같다.

'뭐, 좋기는 한데.'

협력은 가능하다만,

당장 신상을 밝히는 건 무리다.

'이쪽도 좋아서 정체를 숨기는 게 아니란 말이지.'

어제 각성자 연합을 보고 확실히 깨달았다.

이 세계에는 내가 모르는 위협이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루시퍼가 없었다면?

각성자 연합에 끌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었을 거다. 아니면 각성자 연합이 되어서 인류 지배에 강제 동원됐겠지.

고작 C등급 헌터가 나 무명(無命)이요. 하고 나섰다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아, 그러고 보니. 아파서 말씀 못 드렸던 게 있습니다"

밥솥에서 밥을 푸던 루시퍼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사최헌 헌터가 협회를 믿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어제 아이템 받으러 갔을 때?"

"예. 의미심장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물론, 저는 사최헌 그 인간도 믿지 않습니다. 오직 주인님만 믿죠."

흠. 이유가 궁금하긴 하다.

어쨌든 방침은 똑같다.

"······거듭 말하지만 S급부터 찍어야지."

『 성좌 '백색의 여명'이 당신의 선택에 적극 동의합니다. 』

레벨이 오르면 약자멸시의 폭도 넓어지고, 어지간한 위험은 혼자 극복할 수 있게 될 테니.

"마계식 김치찌개 완성되었습니다."

루시퍼가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들고 왔다.

겉보기엔 평범한 김치찌개다.

냄새가 무진장 좋긴 하다.

후릅.

한 입 먹자마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와, 뭐야. 엄청 맛있는데?"

"별거 아닙니다."

"비법이라도 있어?

"마계에선 조미료를 아끼지 않거든요."

"아하······."

마계는 뭐하는 곳이길래.

하여간 밥이 술술 넘어간다. 루시퍼도 수저를 가져와서 함께 앉았다.

식사하며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편성이 심상치 않았다.

"······뭔가 일이 생겼나 본데."

TV 채널들에선 하나 같이 긴급 방송을 하고 있었다.

- 현재 경기도 E시에서 죽음의 물결이 활성화되었습니다. 인근 지역의 주민분들은 대피소로 피난해주시고······.

어느 채널에서도 죽음의 물결에 대한 보도가 나오고 있었다.

이번 죽음 물결은 특히 큰 규모란다.

- 출현 마수의 레벨은 최소 50으로 예측되며, 다수의 S급 헌터들이 사전 파견되어 있습니다. 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내일 중으로 공략이 완료될 예정입니다.

이어서 상공에서 죽음 물결을 찍은 장면이 나타났다.

도시 하나가 검은 장막에 휩싸여 있는 모습.

"괜찮으려나."

최근 들어 흉흉한 느낌이긴 하다.

월드 보스도 두 번이나 나오고.

이번에는 거대한 죽음 물결이라니.

"신경 쓰이시면 바로 출발할까요?"

루시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쉬고 내일 가자."

현재는 S급 헌터들만 사전 입장한 상태.

거기에 가면 괜히 오해만 일으킬 게 뻔하다.

루시퍼의 컨디션도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물결에 참가하는 건 내일도 늦지 않는다.

어느새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

나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수저를 내려놓았다.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이야, 잘 먹었어. 설거지는 가위 바위 보로 정할까?"

"아뇨, 절대 안 됩니다."

그리 말하는 루시퍼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러면 청소라도······."

절레절레.

"그냥 너튜브 볼게."

끄덕끄덕.

루시퍼의 간곡한 부탁(?)에 따라, 나는 너튜브와 헌터 커뮤니티를 순회했다.

여차할 때 쓸 수 있도록 관련된 정보를 최대한 머릿속에 넣어둬야지.

* * *

다음날.

"원래 예정은 C급 미궁을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죽음의 물결이 나타났죠."

그렇다.

3시가 되면 죽음의 물결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된다.

월드 보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의 물결에는 기여도가 존재한다. 거기에서 1위를 달성하면 상당한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어제 남는 시간에 너튜브를 열심히 봐두길 잘했다.

"죽음의 물결부터 참여하자."

협회에서도 헌터들에게 단체 메시지가 전해졌다. 레벨 50 이상의 헌터들의 지원을 적극 기다린다는 메시지였다.

"C급 미궁은 언제든 공략해도 되지만, 죽음의 물결은 항상 오는 게 아니니까."

"경험치적인 측면에서도 굉장히 도움 되실 겁니다. 그리고—."

루시퍼는 뚜두둑하고 손을 풀었다.

"어제 쓰러져 있었던 만큼 전력을 다해 마수를 사냥하겠습니다."

나는 일단 집에서 대기할 거다.

죽음 물결에 등장하는 마수의 레벨은 최소 50.

나는 레벨이 딱 50이니 가도 할 게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1. 루시퍼가 먼저 가서 내 레벨을 올린다.

2. 이후 내가 직접 가서 약자멸시로 마수를 처치한다.

이 두 가지로 압도적인 기여도를 달성할 수 있을 터.

"하지만 이 작전에는 한 가지 조건이 붙어."

"그렇죠. 무지 중요한 조건이죠."

나와 루시퍼는 내 주변을 떠다니는 검은 별빛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식은땀을 흘립니다. 』

"아, 정체를 가릴만한 아이템 하나만 더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게 말입니다. 잘만하면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질 것 같기도 한데······."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시선을 피합니다. 』

은밀 망토나 은둔자의 가면 모두 검은 별의 주인에게서 나왔다.

비슷한 느낌의 아이템을 더 가지고 있을 법하다.

"근데 성좌는 후원을 하면 무슨 이득이 있기는 해?"

"주식 투자 같은 겁니다. 주인님의 활약이 커질수록 성좌도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죠. 다만, 인간은 쉽게 죽거든요. 그러면 상장폐지 된 겁니다."

뭔가 묘하게 현실적인 비유네.

루시퍼는 설명을 이어갔다.

"검은 별의 주인 같은 약소 성좌에겐 기회가 많이 없습니다. 재산이 부족한 거죠. 세 번째까지 후원하는 건 전 재산을 베팅하는 겁니다."

전 재산 베팅이라고?

왜 망설이는지 이해가 되네.

"우리 쪽에서 무지막지한 부탁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

"아니죠. 주인님. 앞으로 수십, 수백, 수천 배의 이익을 낼 기적의 헌터가 바로 주인님이신데요."

루시퍼는 한층 강하게 성좌를 몰아붙였다.

"이 정도 봤으면 너도 알 텐데. 지금이 유일한 기회다. 주인님께서 충분한 성장을 이루시면 네 후원의 가치는 쓰레기가 될 거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민에 빠집니다. 』

『 성좌 '백색의 여명'이 흥미진진하게 지켜봅니다. 』

기다림은 그리 길지 않았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결정을 끝냈습니다. 』

『 검은 별의 주인이 마지막 선물을 후원합니다. 』

올인.

성좌가 전 재산을 걸었다.

펄럭.

짙은 빛무리와 함께 아이템이 나타났다.

검은 바탕에 금색 자수가 놓여져 있는 고급스러운 로브였다.

『 [ 레전더리 ] 이름 없는 자의 로브 』

- 착용자의 모든 정보를 감춥니다.

- 하루 한 번, 전설급 이하의 간파계 스킬을 방어합니다.

"와······."

억지로 뜯어낸 것치고는 엄청난 물건이 왔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의 활약을 기대합니다. 』

무언의 압박감이 느껴지는 메시지 도배였다.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나는 가볍게 인사하고서 로브를 몸에 둘렀다. 사이즈도 딱이다. 이거라면 내 정체를 들키는 일은 없겠지.

"이야, 생각보다 쓸만한 물건인데요? 제 생각보다 힘 좀 쓰는 성좌였나 봅니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루시퍼가 돌연 내 어깨를 잡았다.

"이제 검은 별의 주인의 주시성 등록을 해제하죠."

"아니, 그건 너무 하잖아."

악마도 그렇게는 안 하겠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오들오들 떨기 시작합니다. 』

주시성 해제가 그렇게 쉽게 되는 건가?

루시퍼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날개를 꺼냈다.

"물론 농담이었습니다. 그러면 일단 저부터 출발하겠습니다."

"오케이."

현관문을 열어젖힌 루시퍼가 바깥으로 나가려는 그때였다.

『 [ KR ] 사전 진입 미션에 실패했습니다. 』

『 죽음의 물결이 심화됩니다. 』

S급 헌터들의 사전 진입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메시지가 대한민국 전역에 있는 헌터들에게 전해졌다.

'뭐······?'

나는 곧장 시스템의 헌터 커뮤니티에 접속했다.

- 말이 안 되는데.

- 사전 미션 실패 실화임?

- S급 헌터들 어떻게 된 거예요?

- 길드와 연락이 끊겼습니다. 검은 장막 내부는 통신두절 상태에요.

- 곧 협회에서 헌터들 긴급 지원 요청할 것 같은데······.

헌터들이 쓴 글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었다.

'뭔가 상황이 심각해지는데.'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루시퍼, 출발해."

"예, 맡겨만 주시죠."

그 말과 동시에 루시퍼는 시야에서 사라졌다. 열어 둔 현관문을 통해 거센 바람만이 흘러 들어왔다.

『 곧 죽음의 물결이 시작됩니다. 』

'별일 없겠지······?'

* * *

헌터 랭킹 3위 천이령.

그녀는 마물의 군세에 쫓기고 있었다.

쿠구구구······.

세 자리 수에 달하는 마물들이 진동을 일으키며 천이령을 쫓고 있었다. 놈들이 만들어내는 먼지가 도시의 건물을 휘감을 정도.

그어어—!

그르르르!

타의는 아니고 자의였다.

'이 정도면 상당히 멀어진 것 같은데······.'

어제 사전진입에 성공한 S급 헌터들은 시스템으로부터 미션을 받았다.

『 죽음의 물결 - 사전 진입 미션 』

- 목표 : 엘리트 마수 15 마리를 토벌하십시오. ( 0 / 15 )

- 제한 시간 : 24h

- 성공시 : 죽음의 물결 약화

- 실패시 : 죽음의 물결 심화

15마리의 엘리트 마수를 잡으면 죽음의 물결은 약화된다.

S급 헌터들의 수는 약 30명.

전투만 치렀다면 헌터들은 빠르게 승리를 거머쥐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죽음의 물결은 무언가 달랐다.

- 통신 두절? 장막 바깥하고 연락이 안된다고?

- 안에서 바깥으로 나가는 것도 안 돼.

- 뭐, 이러냐······.

검은 장막은 헌터들의 통신과 출입을 제한했다.

- 사, 살려주세요!

- 으아앙! 엄마! 어딨어?!

- 헌터님들이다!

설상가상으로 많은 시민이 대피하지 못한 상태였다.

- 시민들부터 대피소로 이동시켜!

- 마수들을 몰아내! 엘리트 마수보다 대피가 먼저다!

- 대피소부터 확보해!

S급 헌터들은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피소가 여러 군데 있다는 것 정도.

그렇게 시민들의 피난이 끝났을 즈음,

급격하게 마수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 이놈들 다 어디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거야?

- 자리 이탈하지 말고 대피소부터 지켜!

문제는 대피소를 지키기 시작한 그때부터였다.

'마수들이 대피소를 집요하게 노리고 덤벼들었어. 마치 거기가 우리 약점인 걸 아는 것처럼.'

본래 죽음의 물결에 나오는 마수들에겐 이성이 결여 되어 있다. 심지어 다양한 종의 마수가 난잡하게 뒤섞여 있기까지 하다.

규합이 될 리가 없다.

조직적인 움직임은 절대로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놈들은 마치 사령탑이 있는 것처럼 대피소를 노리고 쏟아졌다.

- 이 마수들······. 레벨보다 훨씬 강해.

- 아오, 짜증 나게 몰려오네.

30명 남짓한 S급 헌터들로 대피소를 지키는 게 고작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뭔가 달라. 단순히 규모만 늘어난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뭔가가 달라졌어.'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천이령은 느낄 수 있었다.

마수들은 무언가에 의해 강화된 상태였다.

'그것만이었다면 어떻게든 됐겠지만······.'

미션의 대상인 엘리트 마수들은 철저하게 숨어다녔다. 마치 헌터들의 미션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 안 돼.'

S급 헌터들이 처치한 엘리트 마수의 수는 고작 3마리.

결국 미션은 실패했다.

천이령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쿠구구구구······.

그녀의 뒤를 쫓는 마물의 행렬은 끝이 없었다.

'으아, 더럽게 많아졌네.'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이제는 다 글렀지만.'

천이령은 12번 대피소에 모여든 마수들을 도발로 끌어모았다. 내친김에 13번, 14번에 있던 마수들도.

올 마스터인 천이령은 대부분의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수를 끌어들이는 '도발'은 그중 하나였고.

'······이제 슬슬 처치해도 되겠지.'

대피소와는 충분히 멀리 떨어졌다.

지금이라면 아무런 방해 없이 마수들을 없앨 수 있었다.

끼이익-!

순간적으로 방향을 바꾼 천이령은 단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다 덤벼!"

천이령의 단검에서 뻗어나간 보랏빛 마력이 벼락처럼 마수들을 덮쳤다. 굉음과 함께 마수들의 파편이 솟구쳤다.

콰앙-! 콰앙!

천이령이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자색의 섬광이 번뜩이며 대지를 강타했다.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대한민국 랭킹 3위란 이름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 사전 진입 미션에 실패했습니다. 』

『 이제 죽음의 물결이 시작됩니다. 』

『 죽음의 물결이 심화됩니다. 』

천이령은 메시지가 떠오르는 것도 모르고, 무아지경으로 마수들을 베어넘겼다.

죽음의 물결이 시작되며 마수가 늘어났지만 괜찮았다.

얼마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전부 없애면 그만이니까.

"허억, 허억······."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정말로 끝이 없었다.

몇 마리나 없앴지?

천 마리? 2천 마리?

S급 헌터라고 체력이 무한한 게 아니었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력에는 당연히 한계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C급 수준의 마수들을 상대로 지친다고······?'

아, 심화된 죽음의 물결이라고 했었지.

레벨에 비해 적들은 질기고 단단했다.

체감상 B급 마수에 맞먹는 수준.

천 마리나 베어내면 S급이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큭.'

어느덧 천일령은 마수들의 한가운데에 고립되고 말았다.

콰앙-! 콰아앙!

'일단 여길 벗어나야 해.'

천이령은 숨을 몰아쉬면서도 활로를 찾았다. 여기서 계속 마수들을 사냥하는 건 무모한 짓이었다.

5분, 아니 1분만이라도 휴식을 취해야 했다.

'으, 온 사방이 마수 천지야!'

그때였다.

주변을 살피는 천이령의 시야에 누군가가 들어온 것은.

빵 봉투를 쓴 남자가 허공에 떠 있었다.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뭐야? 아이템?'

무슨 쓰레기 같은 걸 주워 쓰고 있었다.

도와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천이령은 차마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죽음의 물결에 입장한 S급 중에 저런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렇다면 바깥에서 온 존재라는 건데.

'······사람이 아니야.'

온갖 스킬로 점철된 그녀의 직감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무언가였다.

'큭, 알 게 뭐야.'

그러나 이젠 진짜 한계였다.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천이령이 무어라 다시 소리치려는 바로 그 순간.

콰아아앙—!

남자의 손에서 거센 마력 광선이 쏘아졌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고도로 압축된 마력의 흐름이 주변을 잠식했다.

가공할 위력의 광선은 마물들을 그대로 소멸 시켰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강렬한 열기가 바닥을 시뻘겋게 달궜다.

콰아아—! 콰앙!

빵봉투를 쓴 의문의 남자는 그러한 흑색의 광선을 연달아 쏘아냈다.

광선에 닿은 마물들은 그대로 분해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

천이령은 검을 휘두르는 것도 있고 멍하니 자리에 서 있었다.

"뭐, 뭐야······."

광선은 천이령만을 빗겨나갔다. 그녀 주변의 마물들이 순식간에 사라졌고, 천이령은 도로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날 구해준 거예요?"

"······."

그리고 그런 천이령의 시야 한쪽으로.

누군가의 점수가 빠르게 올라가는 게 보였다.

'어.'

『 죽음의 물결 기여도 현황 』

- 1위 : 천이령 [ 524 점 ]

- 2위 : 무명(無命) [ 314 점 ] (New!)

- 3위 : 김석호 [ 302 점 ]

- 4위 : 강지연 [ 250 점 ]

···

죽음의 물결이 시작되고 나타난 현황판.

그 순위를 확인하는 천이령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자, 잠깐만. 설마 이 사람이······.'

천이령은 허공에 떠 있는 남자와 현황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남자가 마물을 처치할 때마다 점수가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그 뜻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

빠른 속도로 점수를 올리고 있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무명(無命)이었다.

'진짜 무명 헌터?'

20화 소규모 기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