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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MUERTEINSTANTAN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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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nopsis

Chapter 1 - 1-10

1화 즉살(卽殺)

헌터의 시대.

게이트가 열리고,

마수들이 나타났다.

기존의 화기는 무용지물.

모두가 인류의 멸망을 예상하던 그때.

각성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냉병기를 들고 마수를 사냥했으며,

인류의 혼란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헌터(Hunter).

마수를 사냥하는 각성자들은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게이트는 단순한 재앙이 아니었다.

마정석이라는 미지의 에너지원을 품고 있는 보물창고였다.

수많은 각성자들이 게이트를 향해 몰려들었고.

바야흐로 헌터의 시대였다.

"젠장. 또 떨어졌다고?"

그리고 그러한 헌터의 시대에.

나는 평범한 취업준비생이었다.

- 주강혁님, 귀하의 이력서를 면밀히 검토한 결과, 안타깝게도 이번 채용 과정에서는 서류 전형을 통과하지 못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또, 또 떨어졌어."

면접이라도 봤으면 납득이라도 하지.

서류 전형에서 죄다 탈락해버리는데 어쩌란 건지.

스펙을 더 쌓아야 하나.

아니면 자기소개서를 더 고쳐야 하나.

왜 떨어졌는지도 알 수가 없다.

벌컥, 벌컥.

분노에 차서 찬물을 들이켰다.

"에휴."

헌터의 시대라지만, 내 인생은 달라지는 게 없다.

운 좋게 고등급 각성에 성공한 사람들은 마수만 잡아도 평생 벌 돈 다 번다던데.

각성이 로또라는 소리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세상이 바뀌어도 나같이 평범한 사람은 달라질 게 없는 거지.'

각성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취직만 성공해도 지금은 바랄 게 없다.

나는 싱크대에 컵을 내려놓고서 주변을 둘러봤다.

허름한 반지하 단칸방.

가구도 자그마한 테이블이랑 매트리스가 전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도 난다.

면접 떨어졌다고 일일이 슬퍼해선 끝이 없다.

'그래도 힘내자.'

여길 벗어나려면 빨리 취직부터 해야 하니까.

언제까지고 여기에서 살 순 없다.

'아직 이력서 안 넣어본 곳이······.'

그렇게 스마트폰으로 취업 사이트를 둘러보던 사이.

팅!

『 각성하셨습니다. 』

내 눈앞으로 갑작스러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순간 헛것을 봤나 싶을 정도.

'응?'

나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걸로도 모자라 두 눈을 비벼보기도 하고, 손을 휘휘 저어보기도 했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갑자기?'

반투명한 푸른색의 메시지창이 내 눈앞에 떠올라 있었다.

'지, 진짜잖아.'

손으로 슥 만져보니 위치가 바뀌기까지 한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메시지는 사라졌다.

꿈이라도 꾸고 있나 볼을 꼬집어봤다.

"크윽."

아프네.

진짜가 맞다.

아니,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는다.

나한테 이런 행운이?

각성자가 되면 인생 역전.

그런 말을 하도 들어 온 터라 심장이 떨려온다.

하지만 각성했다고 끝이 아니다.

'등급. 등급이 중요해.'

헌터의 등급은 각성과 동시에 정해진다.

이후 노력에 따라 등급을 올릴 수 있다지만,

그럼에도 시작점은 중요하다.

F급은 일반적으로 짐꾼.

다른 헌터들에 비해 능력치도 낮아, 고된 일을 도맡아 할 수밖에 없다.

헌터란 결국 몬스터를 사냥하는 자.

약하면 활약할 수 없고, 활약할 수 없다면 성장할 수 없다.

게다가 듣자하니 경험치를 올리기도 굉장히 어렵다더라.

"······."

사실 각성한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방금까지 어디에 이력서 넣을까 고민하고 있었던 게 나다.

등급을 주는 대로 절하면서 먹어야겠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되나.

'기왕 각성한 거 최초 등급은 무조건 높아야 한다.'

B등급만 되어도 인생 역전. 고소득 전문직 못지않은 벌이다.

A급은 최전선에서 활약하는 딜러.

S급은 대한민국의 명운을 손에 쥔 영웅 취급이다.

등급에 따라 헌터로서의 삶이 달라진다는 뜻.

두근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과연······.'

자신의 등급을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서 일반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태창."

팅!

청아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각성자 정보 』

- 이름 : 주강혁

- 레벨 : 1

- 등급 : F

- 고유 스킬 : 즉살(卽殺)

아.

'······.'

정보창을 살핀 나는 잠시 굳어졌다.

F등급이었다.

그러니까 최하단에 위치한 등급.

밑바닥 중의 밑바닥이었다.

어쩐지 실망감을 감출 수 없다.

'뭘 실망하는 거냐.'

각성한 것만으로도 기뻐할 일이다.

헌터가 되면 적어도 취직 걱정은 안해도 된다. 항상 수요가 있다. 짐꾼이라도 하면 굶어 죽을 일은 없다.

'쩝.'

그렇긴 하다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 F급 각성자 현실

나도 모르게 검색창에 검색을 하고 있었다.

다행히 나와 비슷한 질문을 한 사람이 있었다.

- F급으로 각성했는데 헌터 할만함?

ㄴ ㅋㅋㅋㅋ 짐꾼 개 빡셈.

ㄴ 그거 못 버텨서 걍 노가다 하는 사람도 많음

ㄴ 마수 잡을 기회도 안 줌. 사고 난다고.

ㄴ F급 헌터 할 거면 그냥 취업하는게 나을듯

'······.'

뭔가 암울한데.

글 몇 가지를 더 찾아봤지만 다 비슷한 말뿐이었다.

ㄴ F급이어도 스킬이나 특성 좋으면 됨

ㄴ 태생 F급은 대부분 스킬도 구려서 답 없음 ㅋㅋ

그나마 아래 달린 댓글이 희망이었다.

'그래, 아직 스킬이 남았지.'

등급이 낮아도 스킬이 좋다면 만회할 수 있다.

특히 타인의 능력치를 올려주는 '버퍼(Buffer)' 계열은 등급 무관 모든 길드에서 데려가려고 줄을 선다.

'황족 중의 황족이지.'

하지만 아까 힐끗 보고 말았다.

내 고유 스킬의 이름을.

『 각성자 정보 』

- 이름 : 주강혁

- 레벨 : 1

- 등급 : F

- 고유 스킬 : 즉살(卽殺)

누가 봐도 버프랑은 거리가 먼 이름.

'즉살이라.'

공격 계열 스킬이다.

그래도 이름만 들어보면 꽤 괜찮을 것 같은데······.

자세한 정보를 확인해보자.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고유 스킬을 눌렀다.

팅!

『 고유 스킬 』

이름 : 즉살(卽殺)

등급 : EX

설명 : 지정된 생명체 하나를 살해합니다.

쿨타임 : 44일

설명을 살피는 내 미간이 좁혀졌다.

'잠깐······.'

등급은 EX.

스킬 중에서도 최상급.

Extra(규격 외).

그런데 더 중요한 건 설명이었다.

'지정된 생명체 하나를 살해한다고······?'

심플 이즈 베스트라지만,

너무나 단순한 설명.

'생명체이기만 하면 뭐든 살해할 수 있는 건가?'

레벨, 등급 무관하게?

그게 말이 되나?

너무 사기다.

사기 수준을 넘어서 반칙이다.

대한민국 1위 헌터 사최헌도 그런 능력은 없다.

산과 번개, 공간을 가를 순 있어도 말이다.

원하는 상대를 지정해서 살해?

뭐 그딴 사기 기술이 다 있단 말인가.

'그래, 그 정도는 아니겠지······.'

그래도 내심 사기 기술이었으면 좋겠다.

F급 헌터인 것도 서러운데.

면접 생각 따윈 이미 훨훨 날아간지 오래였다.

어디 스킬 좀 써 볼 장소 없나?

그때였다.

위이잉—!

스마트폰에서 강렬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 [ 긴급 재난 경보 ]

17:34 서울 도심 월드 보스 출현

실제 상황입니다. 서울 전역의 주민들은 즉시 대피소로 피난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연스레 창밖으로 시선이 향한다.

도심에서 불길이 치솟는 장면이······.

보이지 않는다.

반지하라서 안 보인다. 길거리를 뛰어다니는 행인들의 발만 보인다.

'대피까지 해야 할 정도야?'

무슨 일인가 싶어서 TV를 틀었다. 당근 마켓에서 중고로 산 TV의 화면이 켜졌다.

가끔 화면이 깜빡 거리긴 하지만 볼 만하다.

동시에 스마트폰으로는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접속.

TV에선 긴급 뉴스가 보도되고 있었다.

- 현재 서울 OO구 중심지에 Lv.152 월드 보스 출현. 길드 단위로 대항하고 있으나 피해 확산이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뉴스 앵커가 다급하게 보도 한다.

현장 상황도 심상치 않다. 건물이 파괴되고 불길과 폭발이 어지러이 치솟는다.

포털 사이트의 기사들도 하나 같이 그 이야기뿐이었다.

- 서울 OO구, 월드 보스 출현

- 협회, 모든 길드에 긴급 지원 요청

아주 난장판이었다.

아까 검색할 때 포털 사이트에 뭔가 잔뜩 올라와 있던게 이거였나.

- 야, 이거 대한민국 붕괴하는 거 아니야?

- 사최헌은 어디에 갔냐.

- 지금 3대 길드 대부분이 S급 게이트 공략 중임.

- 한국 망하냐? ㄷㄷ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주요 전력이 자리를 비운 상태.

그런 와중 나타난 월드 보스.

거대한 이무기 한 마리가 도심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 막강함은 수십 개의 길드가 연합해야 겨우 토벌 가능하다.

'설마 공략에 실패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TV의 화면을 주시했다.

헬기가 멀리서 찍은 영상.

수 백 명의 헌터들이 마법을 던지고, 활을 쏘고, 스킬을 난사한다.

그러나 흑색의 이무기는 그것들을 모두 무시하고 전진했다.

쿠웅-!

놈의 몸짓 한 번에 헌터들이 개미처럼 우수수 날아갔다.

콰아아—!

이윽고 놈의 입에서 쏘아지는 브레스가 지면을 완전히 녹였다. 현장의 장면이 급하게 전환된다.

'······.'

어째 상황이 심각하다.

뉴스는 직접 언급을 회피하고 있지만, 누가 봐도 위태로운 상황이란 게 느껴진다.

과거 등장했던 월드 보스는 제주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놨다. 덕분에 지금 제주도는 사람이 살지 못하는 지역이 되었다.

저 놈을 놔뒀다간, 서울 도심도 비슷한 꼴이 되는 거 아니야?

사최헌 같은 탑 랭크의 헌터가 도착하지 않으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지도.

전문가들이 실시간으로 대책을 논의하는 방송도 있었다.

- 랭킹 1위인 사최헌은 어디서 뭘하는 중입니까?

- 현재 사최헌 헌터는 S급 게이트 공략 중에 있습니다. S급 게이트의 특성상 한 번 입장하면 퇴장이 불가합니다.

- 미국이나 주변 국가에 지원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어요. 공간계 능력자를 활용하면 충분히······.

국가적 위기.

그런 상황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당장 뭔가 하지 않으면 피해가 커질 건 불 보듯 뻔한 일.

원래대로라면 나도 짐싸서 대피소로 도망갔을 거다.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게 끝이니까. 지시 사항 잘 듣고, 잘 대피하는 게 최선.

'잠깐.'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일반인이 아니잖아.

헌터다.

F급이긴 하지만.

아무튼 스킬을 가진 헌터.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있을지도 모른다.

『 고유 스킬 : [EX] 즉살(卽殺) 』

- 지정된 생명체 하나를 살해합니다.

스킬 설명에도 써있지 않은가.

지정된 생명체 하나.

'이무기는 생명체가 맞잖아.'

조건은 딱 맞다.

하지만 정말로 가능한가?

이무기는 월드 보스다.

일반적인 마수들과는 격을 달리하는 상위종.

심지어 그 레벨은 152.

현장에 있는 S급 헌터들도 애먹고 있으며, 그 이하의 헌터들은 섣불리 다가설 생각조차 못하는 수준.

'반면에 나는 고작 F급 헌터.'

이제 막 각성을 마친 1레벨짜리 헌터다.

스킬이 통하면 통하는 대로 말이 안 된다.

레벨도 무시하고, 등급도 무시한 채로 살해한다는 뜻이니.

'하지만······. 시도 해볼 만하다.'

딱히 실패한다고 해도 손해 보는 건 없으니까.

내가 위치한 장소는 반지하 단칸방,

스킬이 안 통하면 그냥 대피소로 이동하면 그만이다.

혼자서 조금 뻘쭘한 상황이 연출 되겠지만,

그게 내가 감당해야 하는 전부다.

'해보자.'

나는 리모콘을 들어 올렸다.

삑.

현장을 라이브로 보여주는 방송으로 채널을 돌리는 순간.

드드드드······.

반지하 방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기 뿐이 아니다. 아마도 서울 일대가 흔들리고 있을 거다.

그 원인은 영상 속 이무기.

고오오오—!

거대한 흑색 이무기의 입가로 푸른 빛의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 강대한 마력에 서울 전체에 옅은 지진이 발생했다.

"······!"

심상치 않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건 누가봐도 자명했다.

브레스가 뿜어지면 일대가 초토화될 것이다. 헌터고 건물이고 죄다 날아가버리겠지.

돌이킬 수 없는 피해가 서울을 휩쓸기 직전이다.

꿀꺽.

긴장감에 마른침이 넘어간다.

스킬의 발현은 간단하다.

의지를 담은 말 한마디면 충분.

정말로 효과가 있을 것인가?

아니, 지금 상황에선 아무래도 좋았다.

해보자.

나는 화면 속 이무기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죽어."

짧고 간결하게. 딱 한 마디.

그러나 반응이 없었다.

'······.'

어색한 침묵만이 방 안에 감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다. 누가 있었으면 수치스러워서 죽었을 거다.

역시 안되는 건가.

하긴, 아무리 그래도 F급 헌터가 월드보스를 즉살한다는 건 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려는 순간.

한 타이밍 늦게.

푸화아악!

"어?"

화면 상의 이무기가 붉은 핏빛이 되어 터졌다. 사방팔방으로 쏟아진 붉은 피가 비처럼 후두둑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장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

진짜 된건가?

나뿐만이 아니라 현장의 헌터들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리에 멈춰서 있었다.

그럴 수밖에.

흑색 이무기의 강렬한 브레스를 대비하고 있었는데,

돌연 보스가 토벌되어 버렸으니까.

- 마, 말씀드리는 순간 월드 보스가 토벌 되었습니다!

상황을 설명하는 아나운서까지 말을 더듬는다.

스마트폰으로 틀어둔 유튜브의 방송 채팅으로는 물음표가 끝도 없이 올라 왔다.

- ??

- ?

- ????

- 뭐임?

- 갑자기 왜 터짐?

- 어떻게 된 건가요? 누구 보신 분?

대한민국의 모든 헌터의 앞으로 시스템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 (KR)월드 보스가 처치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경이로운 업적! 』

『 타차원의 성좌들이 해당 공략에 경악합니다. 』

『 기여도를 정산 중에 있습니다. 』

그러나 영상 속 현장은 여전히 어수선하다.

갑작스레 이무기가 토벌 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얼떨떨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통한거 맞나?'

그리고 그런 의문을 일소하듯 내 앞으로 떠오른 메시지.

『 '흑(黑):이무기 처치'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닉네임을 입력하고 보상을 수령하십시오. 』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스템이 그리 말하고 있었으니까.

기여도 1위.

그게 나라고.

"······."

내가 즉살(卽殺)의 능력을 얻었다고.

2화 무명(無命)

두근두근.

심장의 뜀박질이 멈추지 않는다. 강한 고양감이 전신을 타고 흐른다.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

"하······."

정말로 내가 이무기를 처치한 것이다.

고작 F급인 내가,

상위 헌터들도 애먹는 월드 보스를 말 한마디로 처치했다.

『 '흑(黑):이무기 처치'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닉네임을 입력하고 보상을 수령하십시오. 』

그걸 증명하듯 시스템 창이 눈앞에 분명하게 떠올라 있다.

닉네임을 입력하란다.

'닉네임, 닉네임······.'

나는 뜨겁게 달아오른 머리를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여기에는 본명을 적어 넣는 게 일반적이다.

당연하다.

자신의 업적과 강함을 자랑할 수 있는 기회.

헌터로서 유명세를 얻으면 최상위 길드에서 영입 제안이 온다. 그렇게만 된다면 압도적인 부와 명성을 누릴 수 있다.

한마디로 인생역전.

순간적으로, 내 이름 주강혁 석자를 박아 넣고 싶은 욕망이 치밀었지만.

'아니, 지금은 아니야.'

상식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쿨타임은 44일.

즉, 나는 44일 동안 아무것도 아니란 의미.

반면에 '즉살' 스킬의 활용도는 상상을 초월한다.

'······지정된 생명체를 처치한다는 효과.'

사용해보지 않아도 뻔하다.

여기에는 인간도 포함되는 거겠지.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위험한 능력이다.

'내 능력을 노리는 사람이 생기지 않을까.'

자의식 과잉?

그럴 리가.

실제로 세계 곳곳에서는 헌터를 대상으로 한 납치와 실험이 빈번하게 이뤄지고 있다.

'그리고······.'

대형 길드나 헌터 협회에 의탁한다고 해도 문제다.

잘 풀리면 최고급 대우를 받겠지만,

자칫 잘못하면 국가 차원에서 격리당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내 선택권이 없다는 거.'

일방적으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나는 힘이 없으니까.

'힘을 키울 때까지는 비밀로 하는 게 낫겠는데.'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본 결과 그런 답이 나왔다.

따라서 닉네임은 이렇게 하자.

"닉네임은 무명(無名)으로."

『 닉네임 '무명(無命)'으로 등록합니다. 』

"그래, 그······. 아니. 잠깐."

한자가 이상한데.

목숨 명(命)이 아니라 이름 명(名)인데.

내 의사가 정확히 반영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의문을 제기할 새도 없이 닉네임이 등록되었다.

『 기여도 정산이 완료되었습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위 : 민하은

- 3위 : 천이령

···

내가 닉네임을 설정한 것으로 기여도의 정산이 끝났다. 익숙한 유명 헌터들의 이름이 나열되었다.

그 맨 위에 내가 설정한 닉네임이 있다.

다시 바꿀 수는 없는 것 같다.

'뭐, 상관없나.'

무명(無命)이나 무명(無名)이나.

같은 가명이니.

『 막대한 양의 경험치를 습득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Lv.1 -> Lv.10 』

『 일일 성장치가 최대에 달했습니다. 』

이무기를 잡고 순식간에 10레벨.

······하루에 올릴 수 있는 레벨이 정해져 있을 줄이야.

그래도 여기서 끝이 아니다.

『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토벌 보상이 남아 있었다.

샤아아—.

새하얀 빛무리가 내 앞에 내려앉았다.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 전설의 증표 x 1 』

『 이무기의 혼(SR) x 1 』

『 전설급 단검 - 망멸검(蟒滅劍) 』

『 1,000,000 Coin 』

"오······."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티켓 한 장.

금으로 이뤄진 메달.

그리고 분홍빛의 영혼.

전설급 단검은 검은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지막 코인은 내 시스템 계좌로 들어왔다.

'······보상이 장난이 아니네.'

말 한마디 한 거치고는 과할 정도의 보상이다.

'멍하니 있을 게 아니지.'

타닥, 타닥.

나는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아이템을 검색했다.

'전설급 단검 시세가······.'

등급부터가 전설이다.

집 한 채 가격은 너끈히 나간다고 들었다.

시세를 확인한 내 눈이 커졌다.

최소 30억에서 잘하면 60억.

······갑자기 손이 떨려 온다.

엄마, 나 진짜로 인생역전 했어.

취업 평생 안해도 될 것 같다.

단검 하나만 팔아도 평생 놀고 먹겠다.

'물론 팔 수 있다면 말이지만.'

『 망멸검(蟒滅劍) 』

- 등급 : 전설

- 설명 : 흑(黑) 이무기의 뼈와 가죽으로 만든 흑색의 단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의 한이 서려 있다. 용족 대상 데미지 + 100%

대놓고 흑(黑) 이무기로 만들어 놨다고 적혀 있다.

이런 걸 팔았다간, 내가 누군지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격.

가명을 쓴 이유가 사라진다.

당분간 정체를 숨기기로 결정했으니, 판매 시기는 뒤로 미뤄질 수밖에 없다.

다음 아이템.

『 전설의 증표 』

- 설명 : 전설급 업적을 달성한 증표입니다.

- 성좌와의 특별한 거래에 사용됩니다.

'성좌(星座)라······.'

성좌는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다. 보통 헌터들을 보조하거나, 아이템을 후원해준다고 알고 있다.

'이런 아이템도 있네.'

이것과 이무기의 혼은 당장 사용할 순 없어보인다. 그래도 일단 가지고 있으면 나중에 도움이 되겠지.

마음 같아서는 전부 팔고 편안한 여생을 즐기고 싶다.

사실상 인생 졸업이다.

꿈에 그리던 경제적 자유가 여기에 있다.

건물 하나 사서 월세 받으면서 살면 되는 거 아닌가.

불과 몇 십 분 전까지만 해도 취업 준비생이었건만,

건물주의 꿈이 한발자국 앞까지 성큼 다가왔다.

그러면 이제 남은 아이템은······.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이거인데.

스킬을 얻는 티켓이다.

현재 내 스킬은 즉살(卽殺)이 유일하다.

앞서 말했듯 쿨타임 44일짜리니 없는거나 마찬가지.

'쓸까.'

최소한 사냥에 쓸만한 스킬이 있어야 F급 헌터를 벗어날 수 있다.

'응?'

습득권을 사용하려던 찰나, 틀어놨던 TV의 뉴스에서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 그러니까, 지금 무명(無命)이라는 미확인 헌터가 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 월드 보스를 일격에 쓰러뜨릴 만큼의 강자가 대한민국에 있었다는 뜻입니다.

- 전문가들의 추측에 따르면 최소 S급 혹은 그 이상의 능력자로 추정······.

무명(無命)에 대한 이야기였다.

도시의 피해는 컸지만, 시민들의 빠른 대피로 사망자는 없었다고 한다. 다친 사람은 상당히 많았지만.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헌터들도 무사했다.

큰일이 나기 전에 무명이 보스를 처치한 덕이란다.

'······나서길 잘했네.'

세간의 관심은 돌연 나타난 미확인 헌터 '무명'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 미확인 헌터 '무명(無命)' 그의 정체는?

-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최상위 헌터 존재 가능성 있어

- 월드 보스를 일격에 처리한 무명 헌터에 관해······.

스마트폰에서 확인한 포털 사이트의 기사들도 죄다 그 이야기뿐이다.

괜히 호기심이 생겨서 검색창에 '무명' 두 글자를 검색해 봤다.

커뮤니티에서도 난리가 났다.

- [ 잡담 ] 무명 뭐냐. 월드 보스를 어떻게 한 방에 잡냐.

ㄴ 내 사촌이 관계자인데 지금 난리남. 아무도 누군지 모른다더라.

ㄴ 현장에 있던 헌터들 신원 대조하면 알 수 있는 거 아님?

ㄴ 그게 쉽냐. 애초에 그냥 말도 안되게 쎈 것 같은데.

ㄴ 해외 뉴스에도 기사 떴다.

ㄴ 지금 사람들이 영상 일일히 확인하면서 무명 찾는 중임

영상을 하나하나 뒤지고 있다고?

당연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내가 나올 리가 없다.

나는 집에 있었으니까.

TV 앞에 서서 월드 보스를 잡았다.

찾으면 그게 이상한 거다.

'인터넷에 글 올라오는 속도가 장난이 아니긴 하네.'

커뮤니티고 뭐고 싹다 무명(無命)에 관한 내용으로 도배되고 있었다.

난리가 나는 게 당연했다. 월드보스는 개인이 처치하라고 존재하는게 아니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고.

그런데 그 불문율이 오늘 깨졌다.

개인의 무력이 단체의 무력을 압도한 것이다.

만약 내가 한 일이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게시판에 글이나 적고 있었겠지.

- 무명 개쩐다. 대한민국에서 세계 최초로 SS급 헌터 생긴 거 아니냐?

뭐 이런 식으로.

아, 그러고보니 각성자들이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접속 방법은 이거였나.

"커뮤니티 접속."

『 각성자 커뮤니티에 접속합니다. 』

『 해당 커뮤니티는 각성자만이 이용할 수 있습니다. 』

- 무명이 대체 누구죠?

- 현장에 있었는데 특이한 사람 없었습니다.

- 무명님 댓글 달아주세요. 영입하고 싶습니다.

- 흑색 이무기가 갑자기 눈 앞에서 터져서 죽었습니다. 전조 없이요.

- 저주 형태의 스킬?

일반 커뮤니티보다는 조금 정제된 느낌이다. 사용하는 말투도 더 공손하다.

하지만 내용은 비슷했다.

다들 무명(無命)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에고서칭.

연예인들이 한다는 자기 이름 검색.

나도 모르게 중독 될 것 같다.

댓글을 달진 않았다.

즉살의 쿨타임은 44일이니까.

앞으로 44일 동안은 무방비 상태.

평범한 헌터다.

괜히 나댈게 아니라,

일단 강해져야 한다.

나는 아까 쓰려고 했던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을 집어 들었다.

'스킬부터 얻고 생각하자.'

전설급 스킬 습득권이니까 뭐라도 나오겠지. 여기서 좋은 스킬이 나오면 폭발적인 레벨업이 가능할 거다.

'가능하면 제대로 된 공격 스킬로.'

보통 스킬은 헌터의 적성과 일치하는 게 나온다.

내가 힐러라면, 치유나 능력치 상승 버프 같은 스킬이 나온다.

내가 검사라면 검과 관련된 스킬이 나오고.

문제는 내 적성이 뭔지 모르겠다는 거다.

'사신? 그건 오반가.'

내가 생각하고도 어이가 없다.

하여튼 공격계 스킬이 나와주면 땡큐다.

아니면 짐꾼부터 시작해야 한다.

레벨 10도 여전히 F급이기에.

'어디 한 번 보자.'

나는 티켓을 쫘악하고 찢었다.

샤아아아—!

강렬한 금빛과 함께 메시지가 떠올랐다.

『 [ 전설 ] '즉살(卽殺) - 약자멸시'를 습득합니다. 』

전설급 스킬.

그런데 이번에도 즉살이다.

'미친.'

이미 한 번 즉살의 맛을 본 뒤다.

심장이 떨려 온다. 설마 이것도 사기 스킬?

나는 손가락으로 메시지 창을 눌렀다.

『 스킬 : [전설] '즉살(卽殺) - 약자멸시' 』

- 자기 레벨보다 낮은 레벨의 생명체를 즉시 살해합니다.

- 효과 반경 50m

'와.'

이번에도 사기 스킬이었다.

다만 고유 스킬인 즉살과 달리 약자멸시에는 조건이 붙는다.

'나보다 레벨이 낮은 대상만 없앨 수 있는건가.'

지금의 내 레벨은 10.

이무기를 잡아서 단번에 올랐다.

1레벨부터 9레벨까지의 대상을 즉시 처치할 수 있다는 뜻.

'반경도 50m로 제한된다.'

고유 스킬만큼의 위력은 아니다.

그래도 충분히 사기적이다.

왜냐면······.

'소모값이 없어.'

이 스킬은 마력도 체력도 소모하지 않는다.

반경에 들어 온 적이라면 즉시 처치할 수 있다.

완전 치트나 다름 없다.

그때였다.

사사사삭!

벽면으로 소름끼치는 무언가가 나타났다. 갈색을 띄는 흉물스런 존재가 빠르게 벽을 타고 기어가고 있었다.

"주, 죽어!"

고민할 것도 없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그리고 그 즉시.

파삭-!

벽을 타고 오르던 바퀴벌레가 터졌다. 산산조각이 난 바퀴벌레의 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성능은 확실했다.

"깜짝 놀랐네."

휴지로 벽과 바닥을 슥슥 닦으며 생각했다.

'······근데 진짜 돌았네.'

바퀴 벌레가 내 능력에 죽었다.

단순히 벌레를 잡은 것 뿐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퀴 벌레의 레벨은 0으로 취급되는 것 같다.

마수가 아닌 다른 동물들도 능력의 대상이 된다는 거겠지.

심지어는 인간까지도······.

두려운 힘이다.

나 같은 개인이 소유해도 괜찮나?

깊게 생각하지 말자.

'뭐, 능력은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예를 들자면 식칼.

식칼은 훌륭한 도구다. 재료를 손질하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

가끔 타인을 다치게 하거나 범죄 행위에 사용되지만, 그렇다고 식칼이 나쁜 건 아니지.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문제일 뿐이다.

'잘만 사용하면 유용한 힘이 될 거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킬을 얻었으니 사용해봐야겠지.'

게이트에선 어떤 효과를 낼지.

직접 사용해보면서 스킬을 익혀야 한다.

내 능력에 대해 상세히 파악해 둬야,

여차할 때 제대로 쓸 수 있을테니.

'헌터 등록부터 하고.'

취업 고민은 싹 날아간지 오래다.

지금부터 장밋빛 미래가 펼쳐질텐데 취업은 무슨,

어디 기업에 취직하는 걸로는 성에 안 찬다.

최대한 강해져서 아이템 싹 다 팔아치우고 건물주부터 되자.

사기 능력도 얻었는데, 겨우 건물주?

겨우 건물주가 아니다.

헌터가 인생 역전급 로또라지만,

자칫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허다하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최대한 벌어서 빨리 은퇴하는 게 현명한 길이다.

오케이, 이걸로 인생 계획은 다 짰다.

그럼 황금빛 미래를 위한 이제 첫발자국을 뗄 때다.

새로 얻은 스킬을 시험해 볼 차례.

각오를 다지며 자리에서 일어선 그때였다.

팅!

"······?"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을 발견했습니다 』

『 당신의 주시성(注視星)이 되고자 합니다. 』

눈 앞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검은 별의 주인······?'

이 세계에 시스템이 도래하고 나서,

마수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또다른 존재.

성좌(星座).

각성자들이 닿지 않는 초월적 영역에서,

이 세계에 영향력을 흩뿌리는 신과 같은 자들.

그들 중 하나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에게 후원하고자 합니다. 』

『 주시성(注視星) 등록을 하여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심지어 뭔가 후원하고 싶단다.

3화 인스턴스 게이트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에게 후원하고자 합니다. 』

『 주시성(注視星) 등록을 하여 후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주시성이 뭐더라······.'

헌터와 관련된 정보는 인기가 많다. 요즘 시대에 연예인보다 유명한 게 헌터이니.

따라서 성좌라는 존재도 대중에 알려져 있다.

이 세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못하는 초월자들.

그래도 의외다.

'먼저 메시지를 보내는 경우는 드물다던데.'

성좌들은 시스템 메시지를 보내서 감정을 표시한다.

간혹 마음에 드는 각성자에게 후원을 하기도 하고.

이 드넓은 지구가 하나의 인터넷 방송이라면,

성좌들은 그러한 인터넷 방송의 시청자인 셈.

'그런데 주시성이란 건 처음 듣는데.'

타닥, 타닥.

고민할 것 없이 스마트폰으로 검색.

- 주시성(注視性) :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조형적, 시각적 효과

'이건 아닌데.'

인터넷에는 나오지 않는다.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정보가 아니란 의미다.

그래도 알아낼 방법은 있다.

'여기에 접속하면 되지.'

『 헌터 커뮤니티에 접속합니다. 』

『 단어 '주시성(注視星)'을 검색합니다. 』

'오, 나온다.'

여기에는 바로 결과가 나왔다.

답이 있을 만한 질문글을 터치.

- 주시성이 뭡니까? 성좌가 자꾸 등록해 달라는데.

ㄴ 굉장히 부럽네요. 성좌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입니다.

ㄴ 성좌가 님한테 관심 있다는 뜻임

ㄴ 그거 즐겨찾기나 구독이라고 생각하면 편함.

'아하.'

한마디로 정리가 된다.

너튜브 구독.

혹은 방송 즐겨찾기.

대신 일반적인 구독이나 즐겨찾기와는 다르다.

헌터 본인이 수락을 해줘야 하는 모양.

- 유명 S급 헌터들은 주시성을 열 개 넘게 데리고 다니기도 함.

- 주시성이 많을수록 보상이 늘어난다는 거 진짜임?

ㄴ 유료 코멘트 [ 100,000 Coin ]

ㄴ 치사하게 코인을 걸어 놓냐. 거, 같이 좀 봅시다.

미친. 십만 코인이나 걸어놨네.

굳이 유료 댓글을 구매할 필요도 없었다.

딱보니까 주시성이 많으면 좋은 것 같다.

S급 헌터들이 이유 없이 주시성을 주렁주렁 달고 다닐리도 없으니까.

아까 얻었던 전설의 증표에도 써 있었다.

성좌와의 거래에 사용할 수 있다고.

성좌는 여러모로 유용한 존재인듯.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당신에게 후원하고자 합니다. 』

'맞다. 후원을 하고 싶댔지.'

일단 주시성으로 등록을 해줘야 후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굳이 고민할 거 없었다.

"성좌 검은별의 주인을 주시성으로 등록."

『 해당 성좌가 주시성(注視星) 등록에 성공했습니다. 』

『 검은 별의 주인이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

"그러면 이제······."

스킬을 시험해 보러갈 시간이다.

헌터 등록을 먼저 해야 하나.

잠깐.

"그래서 후원은······?"

그냥 넘어갈 뻔했네.

딱히 떼먹으려는 건 아니었는지,

말이 끝나자마자 내 주변으로 검은빛이 반짝였다.

『 검은 별의 주인이 첫번째 선물을 후원합니다. 』

『 [ 희귀 ] 은밀 망토를 습득합니다. 』

펄럭~.

허공에서 검은색 망토 하나가 떨어졌다.

후원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는건가. 신기하다.

망토를 주워드니 아이템 정보가 보인다.

『 [희귀] 은밀 망토 』

- 영상 및 추적 장치에 탐지 되지 않습니다.

- 이동속도 + 3%

간단한 효과가 달린 망토였다.

살짝 감탄했다.

"오······."

이 아이템을 건네준 의도를 알겠다.

들키지 말고 던전을 공략 하란 의미.

'센스 좋네.'

사용할 일이 있을테니, 일단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다.

『 은밀 망토를 인벤토리에 수납합니다. 』

『 현재 사용 가능한 인벤토리는 3칸입니다. (잔여:2) 』

인벤토리는 코인을 사용하면 늘릴 수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코인은 헌터의 여러 능력을 강화하는데 사용된다.

현재 소유한 코인은 백만.

사용처는 여러가지겠지만,

당장 급한 건 아니니 놔두고.

당장은 새로 배운 스킬 약자 멸시의 테스트를 하고 싶다.

'그러려면 헌터 등록부터 해야 할 텐데······.'

협회 본사로 가려다가 말았다.

"······도로가 꽉 막혔네."

스마트폰으로 확인한 도로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협회로 가는 길이 월드 보스 때문에 매우 혼잡했다. 대중교통도 못 움직이는 모양.

'어쩐다.'

그냥 몰래 아무 게이트나 던전에 들어가기도 어렵다. 게이트 위치는 헌터 등록을 한 사람에게만 제공된다.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인스턴스 게이트를 추천합니다. 』

'인스턴스 게이트······?'

다시 헌터 커뮤니티를 열어 검색해봤다.

살펴보니, 코인을 지불하면 개인화된 게이트를 열 수 있단다.

역시 성좌인가.

시스템에 대해선 꿰고 있는 듯하다.

"오, 감사합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상당히 뿌듯해합니다. 』

도움이 되는 조언을 받았다.

이래서 주시성이 많으면 좋다고 한건가?

그러면 바로 해보자.

"인스턴스 게이트 오픈."

『 인스턴스 게이트(F)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 소모 비용 : 1,000 Coin 』

『 해당 게이트는 공략 실패시 자동 소멸합니다. 』

『 해당 게이트는 1인 전용입니다. 』

들어갔다가 안되면 바로 나오자.

"활성화."

우우웅—!

앞쪽의 공간이 일렁이더니 원형의 보랏빛 게이트가 생성되었다.

'천천히 해보자.'

레벨이 1이었다면 고민했겠지만, 이무기를 잡아서 10 레벨이 되었으니 괜찮을 거다. 사기 스킬도 있고.

『 [ 전설 ] 즉살(卽殺) - 약자멸시 』

뭐가 튀어나와도 대처할 수 있도록,

한 손에는 흑색의 망멸검을 들고 천천히 게이트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 * *

한편, 헌터 협회 본사.

"무명(無命) 헌터 소재 파악이 아직도 안돼?"

"사최헌 헌터가 공략 복귀 했습니다!"

"당장 회의실로 모셔와!"

"길드 보고서 취합 끝났어? 빨리······."

협회 직원들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외부 기관의 질타,

분노한 시민들의 항의 전화.

파괴된 도시의 복구 대책까지.

거기에 더해 무명(無命) 헌터의 정체를 묻는 사람들까지.

협회의 직원 누구 하나 쉴 틈이 없었다.

협회로선 이번 사태 자체가 뼈아픈 실책이었다.

서울에 돌연 등장한 월드보스.

협회는 등장 시기 예측에 실패했다.

더욱이 월드 보스는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여기에 탑 랭커들의 부재까지 겹쳐졌다.

도시 하나가 통째로 날아갈 뻔한 것이다.

'······무명(無命)이 없었으면. 정말로 위험했다.'

협회 각성관리본부.

본부장 유진철.

그의 표정은 시종일관 굳어 있었다. 조금만 시간이 늦어졌어도 타국가에서 개입했을 것이었으므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그만한 대가도 치뤄야 했을 것이고.

'길드들의 자체적인 피해도 심각했겠지.'

이 정도 선에서 끝난게 천만 다행이었다.

돌연 나타난 무명(無命)이라는 헌터가 여럿의 목숨을 살렸다.

'하지만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그는 회의실에 앉아 영상을 몇 번이고 돌려보았다.

멀쩡하던 이무기가 갑자기 터져 죽었다.

그럴듯한 전조도 조짐도 없다.

기이하다는 걸 넘어 섬뜩할 지경.

그때였다.

끼익.

"본부장님, 사최헌 헌터님 도착하셨습니다."

부하 직원이 열어준 회의실의 문 앞으로 훤칠한 남성 하나가 들어왔다.

유진철 본부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아, 사최헌 헌터. 오셨습니까. S급 게이트 공략 성공 축하드립니다. 피곤하실텐데 불러서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

대한민국 1위 헌터 사최헌.

S급 게이트 공략을 막 마치고 협회 본사에 도착한 그였다.

사최헌의 차가운 눈빛이 영상이 나오는 스크린을 향했다.

"······저걸 무명(無命)이 했다는 거군요."

사최헌도 대강 이야기는 들었다.

월드보스를 한 번에 처리한 강자가 나타났다고.

그가 공략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달려 온 이유였다.

이따금씩 나타나긴 한다.

상식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인재가.

하지만 이번 일은 규모가 달랐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상을 보는 사최헌의 미간이 좁혀졌다.

"어떻게 보십니까?"

본부장이 조심스레 그의 의견을 물었다. 최전선에 있던 길드가 직접 찍어온 영상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것들과는 퀄리티가 다르다.

사최헌을 여기로 부른 이유가 영상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영상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사최헌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런 일은 한 번도······."

"예?"

본부장의 물음에 사최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최헌은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영상만으로는 판단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영상에 잡히지 않는 마력이나 의념일 수도 있기에. 아니면 은신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

"차원이 다른 강자인 것만큼은 확실합니다. 월드 보스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건 저도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하, 그렇군요······."

본부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사최헌조차 쉽게 할 수 없는 일이라니.

무명(無命).

도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사최헌은 말을 덧붙였다.

"S등급 이상을 달성한 확인되지 않은 강자일 겁니다. 초심자는 아니겠죠. 지금까지 힘을 비축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째서 정체를 숨기고 있었던 걸까요."

본부장의 질문에 사최헌은 영상에서 눈을 떼지 않고서 답했다.

"글쎄요. 거기까진 모르겠지만."

출신은 수상하다.

나타난 타이밍도 이상하다.

왜 이제서야?

하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무명(無命)은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줬다.

따라서 사최헌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 번 직접 만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 * *

나는 인스턴스 게이트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F급 게이트 - 고블린 숲 』

▶ 클리어 조건

- 고블린 처치 0 / 30

- 고블린 킹 처치 0 / 1

싱그러운 수풀과 나무가 가득한 숲.

게이트에 들어 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물론 너튜브 영상으론 많이 봤다. 헌터들이 자진해서 사냥 영상을 올리곤 하니까.

스윽.

나는 주변을 살피며 검을 들어 올렸다.

팅!

『 성좌 '검은별의 주인'이 역사적인 순간에 감격합니다. 』

깜짝이야.

갑자기 메시지가 튀어나와서 놀랐다.

역사적인 순간?

설마, 내 첫사냥을 말하는건가?

호들갑이 심하네.

"그러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마수를 찾아 시선을 옮기는 그때였다.

키륵, 키르륵!

숲의 어둠 속에서 고블린이 풀 숲에서 튀어나왔다.

총 두 마리.

더러운 가죽을 걸친 녹색 난쟁이들.

손에는 조잡한 날붙이를 들고 있다.

[ Lv.3 ]

[ Lv.4 ]

조금 집중해서 쳐다보니 놈들의 레벨이 떠올랐다. 각성자라면 누구나 머리 위에 떠오른 레벨을 확인할 수 있다.

'레벨은 3 정도인가······.'

흔히 최약체로 평가받는 마수지만, 여러 마리가 모이면 위험한 놈들이다.

자칫 방심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실제로 매년 나오는 사고이기도 하고.

크르르······.

키륵······.

막상 마수를 눈앞에 두니 압박감이 장난 아니네.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언제든 내게로 달려들 기세다. 자그마한 틈만 보여도 바로 덤벼들겠지.

괜히 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방심은 곧 죽음이니까.

'침착하자.'

솔로 플레이에서 부상은 치명적이다.

더군다나 여기엔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간다.

스윽.

흑색 단검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약자 멸시."

그리고 그 순간.

푸화악!

『 스킬 '즉살(卽殺):약자멸시'가 발휘됩니다. 』

『 대상의 레벨이 자신의 레벨보다 낮습니다. 』

『 지정된 생명체를 살해합니다. 』

내가 지정한 고블린이 그 자리에서 터졌다. 풍선이 터지듯 퍼엉하고.

'와우······.'

너무 깔끔하게 사라져서 잔인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후두둑.

붉은 피가 바닥과 주변을 적셨다.

그렇게 고블린 한마리가 순삭 되었다.

키, 키륵······?

옆에 서 있던 고블린이 얼어붙듯 멈춰섰다.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

그러나 고블린의 지능은 그리 높지 않다.

키륵, 키르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제대로 파악하는 건 불가능.

놈은 날붙이를 꽉 쥐더니 나를 향해 달려 들었다.

"키에엑!"

접근을 허용할 생각은 없다.

나는 곧바로 검을 겨눈 채 말했다.

"죽어."

『 스킬 '즉살(卽殺):약자멸시'가 발휘됩니다. 』

『 지정된 생명체를 살해합니다. 』

푸화악.

마찬가지로 허무하게 삭제.

놈은 내 근처에 오지도 못했다.

'······.'

순식간에 고블린 두 마리를 처치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하게.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건가?

남들은 무기 들고 땀 흘려가며 싸워야 한다던데.

나는 그냥 한마디하면 끝이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만.

약자멸시도 사용법은 고유 스킬인 즉살과 똑같다. 대상을 정하고 시동어를 말하면 된다.

"죽어."

푸확!

"죽어라."

푸확!

우선 스킬의 시동어.

유감스럽게도 이건 필수다.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말하지 않으면 스킬이 발동 되지 않는다.

자세히는 몰라도 마법 계열 헌터가 주문을 외우는 것과 동일하다.

'마법 영창이랑 동일 취급인가.'

무영창으로 사용하려면 조건이 필요하거나,

무영창 스킬을 습득해야 할 것 같다.

'쩝.'

다른 사람들 앞에서 사용하긴 좀 어렵겠는데.

순수하게 쪽팔려서.

그리고 한 가지 더.

내가 인지하지 못한 적은 처치할 수 없다.

"죽어. 죽어. 죽어······."

숲 내부를 향해서 적당히 죽어를 연발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미소를 짓습니다. 』

"······."

저거 비웃은 거 아니야?

외치고 나서 현타가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영창을 안하면 스킬이 안써지는데 어떻게 해.

어쨌든 작동 원리를 대충 파악했다.

내가 모르는 적은 죽일 수 없다.

경험치도 오르지 않고 고블린이 죽지도 않는다.

'최소한 적을 인지한 상태여야 하는 건가.'

당연하다면 당연한 조건이었다.

참고로 풀숲에 엄폐한 고블린도 내가 파악만 하고 있으면 없앨 수 있었다. 무언가가 있다는 것만 알면 스킬은 발동된다.

'기습이나, 내가 모르는 공격은 위험하겠어.'

이 능력은 무적이 아니다.

사기적인 건 맞지만······.

나는 공격력이 9999인 유리 전차.

본체인 내가 당해버리면 끝이다.

능력이 사기라고 안심하고 있을 순 없단 뜻이다.

특히 미궁 던전 같은 장소에선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하니까.

'레벨을 올리면 어느 정도 해결되겠지.'

레벨이 오르면 능력치도 함께 오른다.

게이트를 공략해 아이템도 맞추면, 왠만한 상황에는 대처할 수 있을 거다.

"죽어."

푸화악!

별다른 이변 없이 20마리의 고블린을 순식간에 클리어.

숲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나아가니 새로운 장소가 나타났다.

고블린 부락.

처음에는 조금 긴장됐지만, 능력 사용해 익숙해지니 산책하는 기분과 다르지 않다.

그래도 방심하진 말자.

"여기가 보스가 있는 곳인가."

『 고블린 킹이 당신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

쿠에에엑!

열 마리의 고블린들을 부하로 거느린 고블린 킹.

살이 뒤룩뒤룩 찐 고블린 킹은 의자에 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키르륵, 키르륵!

키륵, 키륵!

고블린 킹이 손에 쥔 막대를 앞으로 뻗자, 지시에 맞춰 고블린들이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타다다다.

대략 열 마리가 한 번에 달려 온다.

물량으로 밀어 붙이면 쉽지 않다.

입을 열 번이나 움직여야 하니까.

적이 셀 수 없이 늘어난다면 그때는 정말로 턱이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 '즉살(卽殺):약자멸시'에는 숨겨진 기능이 있다.

나는 숨을 살짝 들이 마쉰 뒤,

의념을 담아 입을 열었다.

"죽어."

푸화아악—!

죽음의 파도가 놈들을 휩쓸었다.

달려오던 10마리의 고블린이 일제히 터져나갔다.

영화 속에서나 볼법한 광경이 눈 앞에 펼쳐졌다.

요점은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도 한 마디면 충분하다는 것.

"쿠, 쿠에엑······."

부하들을 잃은 고블린 킹의 울음소리는 처연했다.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듯 했다.

나는 놈의 머리 위에 떠오른 레벨을 확인했다.

[ Lv.9 ]

보스라 혹시나 했는데 다행히 레벨이 10보다 낮았다. 이 F급 게이트 자체의 수준이 낮은 모양.

그러면 간단하다.

나는 가볍게 외쳤다.

"약자멸시."

푸화악-!

어이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처치.

토옥.

놈이 가지고 있던 마정석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즉살 스킬의 숨겨진 장점이다.

별도의 해체 작업 없이 마정석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본래대로라면 마정석을 제대로 얻으려면 해체 기술이 필요했을텐데.'

이건 편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약자멸시의 사기적인 성능에 감탄하며 떨어진 마정석을 주워 드는 순간이었다.

띠링!

『 F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생각치도 못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인스턴스 게이트도 공략 보상이 따로 있는 거였어?'

4화 월드 보스

『 F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놀랍게도 인스턴스 게이트에는 공략 보상이 따로 있었다.

일반 게이트엔 이런 보상이 없는 걸로 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고작 F급 게이트였지만,

전설급 공략으로 인정되었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그냥 들어가서 고블린을 손대지도 않고 말 몇 마디로 죄다 쓸어버렸을 뿐이다.

······요약하고 나니까 그럴듯하네.

개사기 능력 맞다.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F급 인스턴스 게이트 공략 보상'은 1회로 한정됩니다. 』

'보상은 등급당 한 번씩만 지급된다는 건가 본데.'

F급은 이제 더 공략해도 보상을 못 받는 모양.

샤아아—.

옅은 빛과 함께 두 가지 아이템이 나타났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 룬 : 반경 증가 』

F급 게이트 하나 공략했을 뿐인데,

그럴듯해 보이는 보상.

'오······.'

가벼운 빛과 함께 허공에서 나타난 백색의 티켓과 돌조각.

『 고유 스킬 초기화권 』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을 1회 초기화합니다.

티켓은 이름 그대로의 효과였다.

내용을 확인한 내 눈이 커졌다.

'잠깐, 이러면 즉살 스킬을 한 번 더 쓸 수 있다는 거잖아.'

본래의 쿨타임은 44일이다.

약 1달 반에 달하는 대기 시간을 없애준다는 뜻.

'미쳤네.'

약자 멸시와 달리 즉살에는 아무런 제한 조건이 없다.

거리도 상대의 강함도 무시.

단번에 적을 처치할 수 있다.

대놓고 사기 기술.

'스킬 테스트 하는 김에 공략한 게이트치고는 보상이 짭짤한데.'

물론 당장 사용할 생각은 없다.

대한민국의 월드 보스가 공략된 것이 오늘이다.

'설마 월드 보스가 또 나오겠어?'

역사상 이틀 연속 월드 보스가 나온 적은 없다.

굳이 찾자면 해외의 월드 보스를 잡는 것도 가능하지만,

닉네임이 남는다는 게 문제다.

국제 문제로 비화되면 나중에 곤란해질 수 있다.

그런 골치 아픈 일은 사절이다.

평생 정체를 숨길 것도 아니니까. 우선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게 좋겠지.

나는 티켓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응?'

아니 넣으려고 했다.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의 인벤토리 수납에 실패했습니다. 』

『 인벤토리에 보관할 장소가 없습니다. ( 3 / 3 ) 』

그런데 튕겨져 나왔다.

이유는 인벤토리가 꽉 차서.

『 인벤토리 목록 ( 3 / 3 )』

- 은밀 망토

- 최하급 마정석(小) x 13

- 최하급 마정석(中) x 1

'마정석을 정리해놨었지.'

고블린을 잡고 얻은 마정석들이 내부를 꽉 채우고 있었다.

최하급 마정석은 소짜 하나당 5만원.

중짜는 15만원이다.

다 합치면 80만원어치.

망멸검이랑 다르게 이 정도는 내다 팔아도 아무 문제 없을 거다. 당장의 생활비로 쓰기엔 충분하다.

'인벤토리는 미리 늘려둬야겠네.'

한 20칸쯤 늘려두면 앞으로 걱정없겠지.

이무기를 잡아서 백만 코인을 벌었으니 이 정도는 괜찮다.

『 34,000 Coin을 사용해 인벤토리를 20칸까지 늘렸습니다. 』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인벤토리에 수납합니다. 』

티켓은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내친김에 인벤토리 칸이 모자라 방구석에 놓아놨던 전설의 증표와 이무기의 혼도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그러고선 또다른 보상을 주워들었다.

'다음 보상은······.'

검은 돌 위에 녹색 문양이 새겨진 형태였다.

'룬이라고 했었지.'

『 룬 : 반경 증가 』

- 모든 스킬의 적용 반경을 증가시킵니다.

이것도 상당히 고가의 물건처럼 보인다.

찾아보니, 한 번 사용하면 영구히 적용되는 아이템이란다.

'약자 멸시의 반경은 50m.'

이 룬을 사용하면 그 반경을 늘릴 수 있다는 건가.

팔면 상당한 돈이 되겠지만······.

고민이 된다.

쓸까? 팔까?

망멸검은 솔직히 내가 쓸 일이 없다.

팔아도 그만이다.

하지만 이 룬은 사용하면 내가 강해지는 거잖아.

'으음······. 그냥 쓰자.'

유효 거리가 늘어나면 여러모로 이점이 많다.

적이 다가오기 전에 빠르게 처리할 수 있기도 하고, 남들 모르게 마수를 없앨 수도 있으니까.

"룬 사용."

나는 룬을 손바닥에 올리고서 시동어를 말했다.

샤아아.

빛으로 변한 룬이 내 몸으로 흡수되었다.

『 '즉살(卽殺) : 약자멸시'의 유효 반경이 증가합니다. 』

『 50m → 100m 』

50m였던 약자멸시의 거리가 두 배로 늘어났다.

'오오, 앞으로 얻는 스킬도 전부 포함된다 이거지.'

이걸로 보상은 전부 정리했다. 상당히 만족스럽다.

'다 좋은데······.'

꼬르륵.

아까부터 느꼈지만, 배가 무지하게 고프다. 밥을 먹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허기가 지다 못해 배가 등가죽에 달라붙을 것 같은 느낌.

'약자멸시의 대가인가?'

무지막지한 능력에 치고는 아주 사소한 디메리트다.

'······배고파 죽겠네.'

나는 찬장을 열어 라면 세 봉지를 꺼냈다.

보글보글.

빠르게 끓인 라면이 어느 때보다 맛있게 보인다.

그 자리에서 세 봉지를 먹어 치우고, 추가로 배달로 치킨을 시켜 먹었다.

그래도 전혀 아깝지 않다.

"꿀맛."

식비가 나오는 게 단점이라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능력이 보통 사기여야지.

* * *

다음날.

헌터 협회 서울 본사.

"본부장님, 월드보스 등장까지 1시간 3분 남았습니다."

"재해 규모는 재난급. 레벨 160대로 추정됩니다."

"근처의 시민들은 이미 대피소로 이동했습니다."

본부 통신실에 놓인 계기 장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틀림없는 월드보스 등장의 전조였다.

직원들은 거의 반 패닉 상태였다.

하루만에 또다시 월드보스가 나타나다니.

분명 어제 월드보스가 등장하지 않았던가.

전대미문의 일이었다.

"빌어먹을. 한국 땅에 마가 끼었나."

본부장 유진철이 얼굴을 구겼다.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하기야, 언제는 시스템이 인간의 사정을 봐준 적이 있었나. 최소한 규칙적으로 나오면 대처하기엔 좀 편했으려만.

그래도 어제와 달리 상황은 한결 낫다.

"사최헌 헌터와 채아린 헌터 모두 공략 참여 가능한 상태입니다."

부하 직원 하나가 본부장의 옆으로 다가와 보고했다.

랭킹 1위 사최헌.

랭킹 2위 채아린.

이 두 사람이 사실상 대한민국의 최대전력이다.

어제는 S급 게이트 공략 탓에 합류하지 못했던 두 헌터가 오늘은 대기 중이다.

협회 내에서도 어제처럼 고전하는 일은 없을 거란 예상이다.

"모니터링 잘하고, 이 둘이 요청하는 일은 보고 없이 즉시 실행해."

"알겠습니다. 다른 길드들에도 지속적으로 제공하겠습니다."

협회 지휘통제실에 있는 수많은 모니터 위로 현장이 보인다.

공중 위로 떠오른 드론들이 현장의 상황을 보내고 있는 것. 전부 마정석이 탑재된 최신 기종이었다.

현장에 대기하고 있는 수많은 헌터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한 현장의 최전선.

대한민국 랭킹 1위.

사최헌 헌터가 있었다.

사최헌은 무표정한 얼굴로 보스가 나타날 도로 위를 주시했다.

'시작되는가······.'

사최헌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연이은 월드 보스의 등장.

그것은 의심할 수 없는 증거였다.

세계는 바뀔 것이다.

머지 않아 튜토리얼이 종료된다.

시스템은 갖은 수를 써서 인류를 멸망하려 들고,

숨죽이고 있던 온갖 존재들이 수면 위로 드러날 것이다.

불 타오르는 도시, 붕괴된 빌딩, 마수들로 점철된 땅······.

그렇게 될 것이다.

막고 싶다고 막을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까득.

사최헌이 분한듯 이를 악물었다. 절망적인 미래를 바꾸기 위해 몇 번이고 도전해 왔지만 결과는 늘 같았다.

그렇지만 이번에야말로 바꿔야 했다.

그는 결연한 다짐과 함께 검을 뽑아 들었다.

사최헌.

그는 회귀자였다.

고유 스킬 '회귀(回歸)'.

이미 이 세계를 몇 번 경험한 존재였다.

그만큼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시작이라는 것을.

"월드 보스가 이틀 연속으로 나오다니······. 운이 없네요. 안 그래요?"

랭킹 2위 채아린이 사최헌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사최헌은 관심 없다는 듯 답했다.

"그래, 운이 없는 일이지."

"그보다······. 이번에도 그 사람이 나타날까요?"

채아린은 짓궃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

답하지 않는 사최헌을 향해 그녀는 어깨를 으쓱였다.

"너무 딱딱한 거 아니에요? 우리 서로 안지 꽤 됐는데······. 이제 슬슬 친하게 지내죠?"

"무명(無命)은 분명 나타날 거다."

"저기요······. 우리 같이 대화하는 거 맞죠?"

사최헌은 채아린의 말을 무시한 채 도로의 한지점을 바라봤다.

이번 월드 보스.

사최헌은 공략 이외에도 다른 이유로 참가했다.

드드드드······.

도로와 지반이 함께 무너지며 지면에 숨어 있던 마수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KR)월드보스가 등장합니다. 』

『 보스를 토벌하고 보상을 획득하십시오. 』

쿠구구구!

뜨거운 불길과 함께 거대한 들개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 초대형 헬하운드 Lv.162 』

입가에선 용암을 뚝뚝 흘리고, 목 주변으로 청색의 불꽃을 피워올리는 흑색의 지옥견.

대기하고 있던 수십의 길드가 일제히 움직였다.

파아아-!

피슈슈슛!

보스의 등장과 함께 무수한 마법들이 하늘을 갈랐다.

콰과과과—!

헬 하운드를 폭격하는 수많은 공격들.

그러나 헬 하운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촤아아!

대부분의 마법과 화살은 몸에서 피어오른 지옥 불길에 증발했으니까.

"미, 미친!"

"다들 후퇴해!"

"진로에서 벗어나!"

헌터들은 경악했다. 공격이 아예 통하지 않는 적이라니.

반면 초대형 헬 하운드는 여유롭게 전진하고 있었다.

"뭐, 뭐예요?! 길드원들 공격이 아예 안통하는데요?"

정면에 서 있던 랭킹 2위 채아린도 살짝 당황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동요의 기색은 잠시 뿐이었다.

"채아린, 빛의 검을 꺼내라."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거든요?"

사최헌의 독촉에 채아린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채아린의 능력은 빛의 검.

이른바 성검(聖劍).

번쩍—!

채아린의 손에 쥔 빛의 검이 끝없이 늘어났다. 그녀의 날카로운 검날이 헬 하운드를 향해 떨어졌다.

콰아아아—!

그러나 통하지 않았다.

헬 하운드로부터 방출된 지옥의 불길이 빛의 검을 막아서고 있었다.

"으으윽! 내 공격도 안 통해······?"

완전히 처음 겪는 일이었다.

"저기요! 뭐라도 좀 해봐요!"

채아린은 뒤쪽에 있을 사최헌을 향해 소리쳤다.

"······."

그러나 사최헌은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지, 진짜 위기거든요?!"

팔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채아린이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물러서라."

사최헌이 중얼거렸다.

"할 수 있는 거죠?!"

그 말을 들은 채아린이 빛의 검을 거두고 곧장 뒤쪽으로 뛰어올랐다.

꽈악.

사최헌은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었다.

'무명(無命). 끝까지 나타나지 않는 건가.'

월드 보스의 보상을 생각하면,

굳이 공략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무명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주변에도 수상한 기척은 없었다.

헬 하운드의 위험성을 생각하면 여기서 더 전진 시킬 수는 없었다.

우우웅—!

검을 쥔 사최헌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의 특기인 공간검이 발휘되는 신호였다.

아우우우—!

헬 하운드의 소름끼치는 울음 소리가 도시 전역에 울려 퍼졌다. 동시에 헬 하운드의 화염이 강해졌다.

놈의 화염은 방어막의 역할을 겸한다.

모든 마법적 공격을 태우는 지옥의 업화.

지금의 사최헌조차 두 번의 검격에 나눠 잡아야 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다.'

회귀를 통해 온갖 히든 피스와 아이템을 독식한 사최헌이었다.

월드 보스 하나 정도는 단신으로 상대해도 상관 없었다.

웅혼한 기운이 그의 검집 위로 깃들고.

패도적인 기세가 주변을 잠식하는 바로 그 순간.

푸화아악—!

갑작스레 헬 하운드가 폭발했다. 놈의 핏물이 일대의 도로를 뒤덮었다.

사최헌이 아직 검을 휘두르기도 전의 일이었다.

"뭐······?"

사최헌의 눈동자에 경악이 깃들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었다.

어떠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강자의 낌새조차 없었다.

사최헌은 지금 벌어진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 없었다.

"무, 무명? 진짜 왔나봐요!"

뒤로 물러나 있던 채아린이 반색했다. 전투에 참여하고 있던 길드원들도 안도의 환호성을 질렀다.

"다, 다행이다!"

"와, 미친······!"

"무명!"

오직 사최헌만이 굳어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 (KR)월드 보스가 처치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경이로운 업적! 』

『 각차원의 성좌들이 해당 공략에 환호합니다. 』

『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2위 : 채아린

- 3위 : 천이령

기여도 정산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

사최헌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릴 뿐이었다.

"무명, 네 놈은 대체······."

* * *

『 고유 스킬 초기화권을 사용하셨습니다. 』

내 앞에는 반으로 쪼개진 티켓 놓여 있었다.

TV에선 공략 성공을 알리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 초대형 월드보스가 또다시 무명 헌터에 의해 공략 되었습니다.

- 현 시점에서 사최헌을 뛰어넘는 새로운 헌터의 등장에······.

'······솔직히 사최헌까지 있어서 쓸지 말지 고민했는데.'

결국 스킬 초기화권을 사용했다.

꽤 고민했다.

쓸까말까.

결론은 그냥 쓰기로 했다.

딱히 아껴봤자 좋을 게 없다는 판단.

최대한 아이템과 보상을 땡겨 받는 게 좋다.

'월드 보스를 잡아서 나오는 보상은 차원이 다르니까.'

이무기를 잡고 받은 보상이 스킬 '약자멸시'였다.

뭐가 되었든 쓸만한 스킬을 받고 빨리 성장하는 게 낫다.

레벨만 높아지면 약자멸시로 대부분의 몬스터가 한 방일테니까.

그리고 혹시 아는가.

새로운 스킬을 얻게 될지.

『 성좌 '검은별의 주인'이 당신의 화끈함에 만족합니다. 』

"자, 그러면······. 또 보상을 받아볼까."

『 '초대형 헬하운드 처치'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내 앞으로 황금색 빛무리가 모여들기 시작헀다.

5화 사도

『 최고 기여자로 선정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샤아아—!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 전설의 증표 x 1 』

『 헬 하운드의 혼(SR) x 1 』

『 1,000,000 Coin 』

구성 자체는 지난번과 거의 동일하다.

새로운 성좌의 유입은 없었다. 이유는 모른다. 무슨 규칙 같은 게 있는 걸지도.

『 레벨이 10 상승합니다. Lv.10 → Lv.20 』

『 일일 성장치가 최대에 달했습니다. 』

어쨌든 경험치는 달콤하다.

『 20 레벨을 달성하여 등급이 상승합니다. 』

『 E등급 헌터가 되셨습니다. 』

이틀 만에 E등급 헌터라니.

남들은 F급에서 벗어나려고 몇 년을 썩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쉽게 달성할 줄이야.

'······이제 짐꾼 할 걱정은 덜어놔도 되겠네.'

아쉽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망멸검 같은 아이템이 없단 것 정도.

'어쩔 수 없지.'

쓸만한 장비가 나오길 내심 기대했는데.

당장 팔기는 어려워도 사용은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입맛을 다시며 바닥에 떨어진 황금빛 티켓을 주워들었다.

'물론 이것도 나쁘진 않지만.'

『 신규 스킬 습득권(전설) 』

스킬 습득권은 얻기 어렵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전설급의 습득권은 천문학적인 가치다.

탑 랭커들도 기를 쓰고 가지고 싶어 하는 물건.

하지만 이것도 그냥 쓰기로 결정.

어차피 필요하면 44일 있다가 월드 보스 한 마리 더 잡으면 나오겠지.

게다가 궁금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무슨 스킬일까.'

약자멸시 다음으로 나올 스킬이 뭘지.

즉살.

즉살:약자멸시.

이 두 가지가 현재 내가 소유한 스킬이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효과의 스킬이 나올 확률이 크다.

쫘아악!

나는 고민하지 않고 티켓을 찢었다.

전설급이니 뭐가 나와도 괜찮을 거다.

샤아아-!

『 [ 전설 ] '흑(黑) : 사도소환'을 습득합니다. 』

밝은 빛과 함께 떠오른 메시지.

나는 미간을 좁힌 채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 스킬 : [전설] '흑(黑) - 사도소환' 』

- 흑색의 사도를 소환합니다.

'사도 소환······?'

아주 생소한 단어였다. 마찬가지로 설명은 간결했고.

즉살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입을 다물지 못합니다. 』

"이게 뭐길래······."

하나 있는 성좌가 상당히 놀라신 모양.

괜히 오버해서 리액션하는 걸 수도 있고.

'왜 그러냐고 물어 봐도 정확한 답변을 받을 순 없겠지.'

성좌의 메시지는 표현이 제한되어 있는 듯했으니까.

시스템에서 지정된 단어를 사용하거나,

감정을 표현하는 정도가 그들의 의사표현 방식.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안달복달합니다. 』

'설명하고 싶어서 그런 건가?'

인스턴스 게이트는 잘만 알려줬다만.

그건 기본적인 시스템에 관한 질문이어서 그런거 같고.

아마 지금은 상황이 다른 거겠지.

그러면 답은 정해져 있다.

타닥, 타닥.

즉시 스마트폰 검색.

'으음······.'

아쉽게도 잘 안 나온다. 역시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한계가 있다.

'무턱대고 소환하기는 조금 걸리는데.'

조금만 더 정보를 모아보자.

『 각성자 커뮤니티에 접속합니다. 』

- 흑(黑)이라는 수식어는 색깔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야 색깔이겠지.

- 최상급 아이템이나, 격이 높은 마수가 색을 소유합니다.

지난번 흑(黑) 이무기가 그 예시였다. 흑색이 입혀진 마수. 강하고 흉포했다.

- 그리고 간혹 가다 스킬에 색이 입혀지는 경우가 있는데······.

띠링!

『 유료 분량입니다. 』

『 10,000 코인을 소모해 확인하시겠습니까? 』

'미친.'

여기서 끊겼다.

제일 중요한 대목이었는데.

작성자도 이걸 노린 건가?

"······."

헌터 커뮤니티의 장점이자 단점.

유용한 정보에 코인을 걸어 놓을 수 있다.

1만 코인이면 꽤 비싼 거다.

코인은 한화와 비교해 약 100배의 가치를 가진다.

1만 코인이면 백 만원.

지금 가지고 있는 코인은 196만 5천 코인. 한화로 1억 9천 정도.

'······궁금한데 그냥 쓰자.'

앞으로 코인이야 더 벌겠지.

월드 보스 한 마리당 100만 코인인데.

『 유료 분량을 확인합니다. 』

『 글 작성자에게 1만 코인이 지급됩니다. 』

- 대박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흑색(黑色)의 상징은 강함, 무패, 패왕, 죽음, 밤 등등.

- 기존 스킬 대비 2배 이상의 출력이 보장됩니다. 부가 효과도 파괴적인 수준으로 붙고요.

한마디로 파워 2배.

굉장한 수식어가 붙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성좌의 2차 검증까지 거쳤으니 틀림 없겠지.

'젠장, 내 백 만원.'

근데 아무리 생각해도 비싸다.

헌터들은 돈이 많아서 신경 안쓰나?

쩝.

그러면 다음으로 사도가 뭐냐인데.

『 '사도'와 관련된 게시물을 찾지 못했습니다. 』

이건 각성자 커뮤니티에도 정보가 없었다.

사도라면 신을 따르는 사람?

거룩한 일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

뭐, 그런 거라는데.

'이 정도면 조사는 할만큼 했다. 직접 써보자.'

밑져야 본전.

별 일이야 일어나겠는가.

기껏해야 소환수를 불러내는 정도겠지.

나는 방에서 일어났다.

반지하 단칸방.

그래도 충분히 거리를 벌리고서.

외쳐본다.

"사도 소환."

『 스킬 '흑(黑):사도 소환'이 발휘됩니다. 』

스킬의 발동을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그리고 그게 끝이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단칸방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

그냥 안쓰러운 인간이 되었을 뿐이다.

스킬들이 왜 다 이 모양인지.

"불발 된건가······?"

스킬 불발이라니 그게 가능한가?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강하게 부정합니다. 』

그리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꽈과광! 쿠르릉!

바깥에서 거대한 소음이 들려왔다.

"까, 깜짝이야."

나는 자연스레 창문으로 다가섰다. 하늘은 보이지 않는다. 반지하니까.

투둑, 투두둑······.

하지만 길 위로 빗줄기가 지는 게 보인다. 미약하던 빗줄기는 점차 강해지더니 장대비처럼 쏟아진다.

쏴아아—!

미친듯이 퍼붓기 시작한 비.

콰르릉! 쿠구궁!

동시에 천둥과 번개가 번갈아 터진다. 넋놓고 바라보고 있을 게 아니었다.

"아이고."

나는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비 올 때 창문을 열어들면 진짜 물난리가 난다.

투두두두—!

닫힌 창문을 빗줄기가 미친듯이 두드린다.

다급히 오늘 기상 일보를 찾아보는데.

강우 확률은 0%.

맑디 맑은 하늘이다.

나는 얼떨떨해져서 창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한 건가······?"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강하게 긍정합니다. 』

진짜냐.

* * *

월드 보스 '헬 하운드'가 처치된 거리의 한복판.

"이번에도 무명(無命)이라고?"

"월드 보스가 한 방이었다니까."

"이 근처에 무명이 아직 있는 거 아니야?"

수많은 길드들은 아직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헬 하운드가 죽고, 기여도를 나타내는 메시지가 떠올랐음에도 말이다.

모든 헌터들이 두 눈으로 확인했다.

『 기여도를 정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1위에 새겨진 두 글자.

무명(無命).

어제의 흑(黑) 이무기와 마찬가지였다.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월드 보스인 지옥견 헬 하운드가 그 자리에서 증발했으므로.

정확히는 형체도 없이 산산조각이 났다고 봐야 했다.

"당장 주변부터 수색해! 무명을 찾기만 해도 대박이니까."

"우리 길드에 영입만 할 수 있으면······."

"월드 보스가 증발했다니까요?!"

각자의 목적으로 소란스러운 가운데.

"저기요, 슬슬 저희도 돌아가죠? 상황은 정리된 것 같은데."

랭킹 2위 채아린이 사최헌에게 말을 걸었다.

"······."

사최헌은 답하지 않았다.

"에휴, 무슨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네."

채아린은 한숨을 내쉬고선 돌아섰다.

"그보다 다음 월드보스가 문제네. 벌써부터 이 정도로 강하면 다음에는 얼마나 더 세다는 거야? 무명이 있으니까 괜찮으려나."

채아린은 혼잣말인듯 아닌듯 그런 말을 하며 멀어져갔다.

회귀자 사최헌은 홀린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채아린은 안중에도 없었다.

'믿을 수가 없군.'

사최헌은 무명이 나타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만이라도 확인해두고자 했다.

그게 안되더라도 능력을 가늠할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림도 없었다.

사최헌은 그의 강함을 측정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시기에 존재할 수 없는 압도적 강함이다.'

벌써 몇 번이고 반복된 세계.

사최헌은 수많은 전투를 치렀고, 숱한 강자들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그러나 이번에 나타난 무명(無命)은 차원이 달랐다.

존재는 커녕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경이로운 것을 넘어 기적처럼 느껴지는 무위.

'아무리 내가 본래의 컨디션이 아니라곤 하지만······.'

사최헌은 그 앞에서 경악했다.

만약 무명이 사최헌 자신을 노렸다면?

꼼짝 없이 죽었을 거다. 반항이고 나발이고 없었다.

'하지만 왜 이제서야 나타난거지?'

무엇보다 이해할 수 없는게 그거였다.

몇 번의 회귀를 반복하는 동안,

사최헌은 무명(無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이토록 말도 안 되는 힘은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고민하던 사최헌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또다른 회귀자?'

잠시 그런 생각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다.'

회귀(回歸)는 사최헌 자신의 고유 스킬이다.

다른 자는 소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힘.

그렇다면 무명은 어째서 이다지도 강한가.

잠시 고민하던 사최헌이 결정을 내렸다.

'직접 만나봐야 한다.'

대대적으로 광고를 내든, 정보 길드에 의뢰를 하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무명(無命).

그는 인류의 적인가?

아니면 미래를 함께 할 수 있는 존재인가.

알아내야만 했다.

그리 생각을 마친 사최헌이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쿠르르릉—!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다.

맑게 개어 있던 하늘이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

사최헌은 하늘을 바라봤다.

막대한 마(魔)의 기류가 서울 상공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막대한 양의 마기가 소용돌이처럼 모여든다.

쏴아아아—!

거세게 쏟아지는 빗속.

하늘을 가득 채운 먹구름 사이로 사최헌은 분명히 보았다.

"뭔······."

꽈르릉!

이름 모를 산 위로 흑색(黑色)의 번개가 내리치는 것을.

* * *

나는 우산을 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비가 거세고 하늘이 어두컴컴하다. 한낮인데도 밤인 것처럼.

그래도 꼭 나와야 했다.

'오늘은 헌터 등록을 꼭 해야 한다.'

오늘부로 통장 잔고가 똑 떨어졌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모아두었던 돈이 0원이 되었다.

'마정석 팔아서 돈 벌어야 돼.'

수중에 가지고 있는 마정석은 총 80만원어치.

F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공략하고 모은 거였다.

이 정도는 그냥 팔아도 괜찮겠지만,

헌터 등록을 하면 절세 혜택도 있다.

당장 생활비가 없으니 최대한 아껴야지.

'내가 무명이라는 걸 들킬 일은 없겠지.'

헌터 등록 절차를 미리 검색해 봤다.

닉네임은 확인하지 않는다.

등급을 확인하는 정도가 끝이다.

가지고 있는 스킬은 직접 말하지 않는한 확인할 방법이 없다.

'현시점에서 E급 헌터인 나를 무명이라고 단정 지을 증거는 없다.'

점쟁이나 예언자라도 되면 모를까.

협회의 헌터 등록 정도로는 알아낼 도리가 없다.

따라서 협회에 가서 헌터 등록을 하기로 했다.

앱으로 확인하니 대중 교통도 원활하게 운행되고 있다.

월드 보스가 연달아 두 번 등장하긴 했지만,

두번째 보스는 금방 처치되었기에.

마음먹었을 때 시작하는 게 제일 좋다.

비가 언제 그칠지도 모르고.

'사도 소환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성좌의 반응을 보아하니 성공한 것 같은데.

소환했으면 상식적으로 나한테 왔어야 하는 거 아닌가?

'설마, 사도가 엄청 거대한 괴수 같은 건 아니겠지?'

그랬으면 벌써 뉴스에 나왔을 거다.

날씨를 바꿔버리는 힘은 상당히 대단하지만.

밖에 나가야 하는데 폭우는 좀······.

'뭐, 괜찮겠지.'

불안해서 검색해 봤는데,

소환수는 소환사에게 충성하게 되어 있단다.

큰 문제는 없을 거다.

버스를 타고 협회로 이동했다.

협회의 건물은 총 두 개.

하나가 헌터 등록소, 다른 하나는 협회 본사다.

본사쪽에 어쩐지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빗속에서 우비를 걸친 채, 연신 플래시 세례를 터트리는 사람들.

기자들이었다.

"무명 헌터의 소재 파악은 끝났습니까?"

"이틀 연속 월드 보스 출현에 대한 협회의 입장을······."

"사최헌 헌터를 뛰어넘었다는 평가에 대해선 어떻게······."

협회의 유명한 사람이 나와서 무어라 답변하는 듯했다.

다행히 내가 가려는 건물은 반대편에 있다.

나는 기자들을 피해서 걸어갔다.

괜히 찔리네.

무명이 누군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벌떼처럼 달려드는 기자들을 보니 더더욱 밝히고 싶지 않아진다.

보기만해도 피곤해지는 기분.

유명하다고 다가 아니다.

어딜가도 사람들이 날 알아보고,

싸인해달라 하고, 사진 찍어달라하고······.

인사 안해주면 예의 없다고 사진 찍혀서 박제되고.

그런 걸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아니다.

남들이 날 아무도 모르고,

돈은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

그게 최고지.

무명(無命)이라는 닉네임이 밝혀지는 정도는 괜찮다만.

그리 생각하며 반대편의 건물로 들어갔다.

헌터 등록 관리소.

다른 건물과 달리 여긴 비교적 한가하다.

직원이 친절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 주었다.

"어서오세요, 헌터 등록 하러 오셨나요?"

"네, 등록하고 싶은데요. 신분증 여기에 있습니다."

"이쪽 측정기에 손을 대주시겠어요?"

직원이 시키는대로 기계 위에 손을 대니 순간적으로 빛이 번쩍였다.

무슨 기계라던데.

간혹 숨겨진 힘이 발견되는 경우도 있단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기대의 눈빛을 보냅니다. 』

소문으로 들었는데,

등록소 뒤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길드 관계자랬다.

쓸만한 싹이 보이면 유명 길드에서 즉시 채간다나 뭐라나.

'······딱히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띠―.

모니터 위에 결과가 떠올랐는지,

직원의 눈빛이 바뀌었다.

"결과는······."

괜히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즉살 스킬이 들킬 염려는 없다.

말했다시피 검색까지 다 해보고 왔다.

설마 나도 모르는 숨겨진 힘이 더 있겠어?

그건 진짜로 말이 안 된다.

"음, 등급은······."

직원의 말에 집중하려던 그때였다.

파앗!

별안간 눈 앞이 번쩍하더니,

시야가 바뀌었다.

"?!"

헌터 등록소 건물 내부에서,

어떤 산의 풍경으로.

후두두두—!

지독한 비가 쏟아지는 어떤 산의 정상. 거센 비바람에 나무가 흔들리고, 산의 흙들이 거칠게 쓸려나간다.

거기에는 흉흉한 기세를 내뿜는 인간이 있었다.

'뭐, 뭐야······.'

『 흑색의 사도가 시야를 공유합니다. 』

시야를 공유한다니.

사도의 시야를 보고 있는 건가?

그때 위압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

"······정체를 밝혀라."

그리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아주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저 사람은······.

대한민국 랭킹 1위.

사최헌 헌터다.

저런 유명인이 왜 여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죽이겠다."

결연한 표정으로 검을 손에 쥔 사최헌은 그리 말했다. 그의 몸에서는 파괴적인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검을 휘둘러 눈앞의 적을 소멸시킬 태세.

'자, 잠깐.'

그 경고의 대상은······.

다름 아닌 내가 소환한 사도였다.

6화 루시퍼

사도와 공유된 시야에서 미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진명(眞名)을 말해라. 마지막 경고다."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고 있는 사최헌.

그의 눈동자에선 살기가 넘쳐흐르고 있다.

뭔 상황인지 대강 알 것 같다.

내가 소환한 사도가 마수인 줄 안 건가?

뭘 어째야 하나 싶은 그때.

[ 주인님. 어떻게 할까요? 죽일까요? ]

머릿속에 직접적으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미친. 죽이긴 뭘 죽여······."

대한민국 랭킹 1위를?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두근두근해 합니다. 』

심지어 성좌까지 거든다.

죽인다고? 미쳤냐.

절대로 안 된다.

그냥 조용히 레벨업이나 하는 게 당장의 내 목표다. 괜한 소란을 피울 생각은 없다.

그리고 사최헌은 대한민국을 지켜주는 영웅.

괜히 다치게 하면 국가적 손실이다. 나는 그날로 대역죄인 되는 거고.

"······너는 내가 소환한 소환수가 맞는거지?"

[ 물론이죠. 명령만 내려주십쇼. 세계 정복이라도 할까요? ]

농담은 잘하네.

"일단 복귀. 집으로 돌아와."

[ 음, 이 녀석 엄청난 아이템을 소유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냥 갑니까? ]

그야 그렇겠지.

랭킹 1위니까.

각종 히든피스랑 최고급 아이템을 둘렀겠지.

근데 어쩌려고.

때려서 뺏기라도 하려고······?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무조건 복귀."

[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 주인님께서 계신 장소로 복귀하면 되죠? 이야, 하인들도 꽤 많네요.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

하인?

건물에 있는 직원들보고 하는 소리인가 본데.

뭔 개소리야.

"아니, 아니. 집일 리가 없잖아."

네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진 몰라도,

여기에 왔다 간 대소동이다.

[ 음, 그러면 주소 불러주시겠습니까? ]

"주소가 뭔지는 아는 거야?"

그걸 아는 놈이 하인이니 뭐니 한 게 더 웃기다.

[ 물론이죠. 현세에 강림할 때, 기본적인 지식은 머리에 넣어두니까요. 어이쿠. ]

대화가 이어지던 찰나.

사최헌이 공격해 왔다.

공유된 시야로 무언가 빛이 번뜩이는 게 보였다.

콰과광-! 쿠구궁!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지는데, 내 눈으론 뭐가 뭔지 보고서도 알 수가 없다.

[ 이 녀석 공격하는데요? 쯧, 건방지게. 그래도 무시하고서 돌아가겠습니다. ]

사도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은 모양.

오히려 사최헌에게서 뿜어지는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아니면 소환 취소를 했다가······."

[ 아, 저는 일반 소환수가 아니라 취소가 불가능한 형태인데요. ]

"······."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나는 재빨리 집 주소를 불러줬다.

[ 넵, 파악했습니다. 바로 가 있겠습니다! 아, 이 남자한테 남길 말씀은 없으십니까? ]

남기긴 뭘 남겨.

사최헌 헌터랑은 일면식도 없다.

TV로 보던 게 전부다.

괜한 사고치지 말고 빨리 돌아와라.

[ 알겠습니다. 크허어억! ]

『 시야 공유가 해제됩니다. 』

뭐, 뭐야. 마지막에 좀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는데? 괜찮으려나?

꽈르르릉—!

건물 밖에서 강한 파공음과 천둥치는 소리가 번갈아 들렸다. 건물에 있던 사람들도 바깥을 내다볼 정도.

헌터 등록을 하던 직원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괘, 괜찮으세요?"

"예?"

"갑자기 한동안 가만히 계셔서······."

"······괜찮습니다."

가만히 있었다고?

'휴.'

불행 중 다행이었다.

허공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미친놈처럼 보이진 않아서.

괜히 머리가 아파진다.

사도 소환 괜히 했나?

아니다. 지금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여기 온 목적을 잊으면 안 된다.

"등록은 됐나요?"

"아, 네. 끝났습니다."

직원은 미소와 함께 헌터 등록증을 내게 내밀었다.

"E급입니다. 각성초기부터 E급이면 꽤 운이 좋으신 거예요."

"감사합니다."

나는 멋쩍은 미소와 함께 등록증을 받아 들었다.

레벨이 올라 있어서 E급인 모양.

숨겨진 힘 같은 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 * *

마정석을 팔아치우고 82만원을 벌었다.

세금 다 떼고 그 정도.

F급 게이트 한 번에 이만큼이라니.

이것도 솔로 플레이라서 가능한 수익이긴 하다. 원래대로라면 인원수대로 분배하니, 내 몫은 더 줄어들게 된다.

그래도 노력 대비 쏠쏠하다.

헌터가 좋기는 하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아, 오셨습니까?"

집에 돌아오니 물에 흠뻑 젖은 남자 한 명이 있었다. 비를 다 맞고 왔는지 몸에서 빗물이 뚝뚝 흘러내린다.

쓱싹쓱싹.

녀석은 자기가 흘린 물을 걸레로 열심히 닦고 있었다. 걸레질을 상당히 야무지게 잘한다.

외양은 20대 초반.

검은 머리에 적색의 눈동자.

검은 가죽 옷을 걸치고 있다.

눈에 띄는 특징은 등에 달린 검은 날개.

『 [전설] 흑(黑) 사도 : 루시퍼 』

떠오르는 정보는 이게 전부다.

"사최헌 헌터한테 당한 거 아니었어?"

마지막 비명이 귓가에 선명한데.

"아, 그거 말인가요? 모기에 물린 정도입니다. 자꾸 쫓아와서 귀찮긴 했지만 떨쳐 냈습니다. 그보다······."

어깨를 쓱쓱 움직이는 루시퍼.

방 안을 살핀 루시퍼는 천연덕스런 얼굴로 내게 말했다.

"여긴 참 좁네요. 여기는 주인님의 애완견이 생활하는 장소인가요?"

"아니, 우리 집인데."

"······죄송합니다."

이래 봬도 우리 집이다.

나름 오래 살아서 정도 들었다고.

돈이 생기면 곧장 나가겠지만.

루시퍼는 갑자기 두 주먹을 불끈 주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인님을 고작 이런 단칸방에 머물게 하다니. 이 세계의 인간들······. 도저히 안 되겠네요. 멸망시키죠."

뭐라는거야.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한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물었다.

"어쨌든 네가 내 소환수라는거지?"

"아, 그런데 일반적인 소환수하고는 다릅니다. 저는 사도거든요."

"그 사도라는 게 뭔데."

"굉장히 강한 소환수죠. 음, 지금은 그렇게밖에 설명드릴 길이 없네요."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

"벌써 성좌까지 거느리고 계신 겁니까? 역시 주인님이십니다."

"······."

시스템 메시지가 녀석에게도 보이는 모양. 루시퍼의 시선이 자연스레 부엌에 있는 라면 봉지로 향했다.

"이거 먹어도 됩니까? 신기한 형태군요."

그건 어제 먹고 남은 쓰레기인데······.

기본적인 지식은 머리에 넣고 왔다고 하지 않았냐. 사최헌한테 머리라도 얻어맞아서 고장 났나?

'음.'

어쨌든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숙식 제공을 해줘야 한다니.

소환수까지 먹여 살려야 할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의 단점은 역시 식비가 많이 드는 걸까.

"먹을 걸 사와야겠네."

"아, 심부름은 제게 맡겨 주시죠. 마트에서 식재료 사오면 되는거 아닙니까?"

"왠지 못 미더운데······. 그리고 그 꼴로 나가면 난리 날 걸."

게다가 등 뒤에 자라난 검은 날개.

그런 꼴로 나갔다간 마물인 줄 알고 토벌 당할 거다.

"외양의 변화 정도야 간단합니다."

검은 빛이 일렁이더니, 등 뒤의 날개가 모습을 감췄다. 몸에서 내뿜던 검은 빛도 잠재우니 겉보기에는 사람처럼 보인다.

"마트 도착하면 즉시 시야를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럼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장을 봐준다고?

의외로 편한데?

루시퍼가 장을 보는 동안 나는 편안히 방 안에 누워 TV를 시청했다. 무명(無命)의 정체에 대해 떠들썩 하다.

각종 분석 방송들이 주를 이룬다.

물론, 죄다 헛다리만 짚고 있었다.

유명 헌터 A군이 무명이라든지,

사실은 대한민국의 전략 병기라든지······.

루시퍼에게는 라면과 삼겹살도 구매하도록 시켰다.

"돌아왔습니다! 영수증도 가져왔습니다."

"벌써?"

"이 정도야 간단하죠."

약간 걱정했는데 훌륭하게 심부름을 완수해냈다.

치이익—.

루시퍼가 사온 삼겹살을 프라이팬에 굽고, 라면까지 끓여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오, 맛있습니다."

"그래, 많이 먹어."

간만에 하는 포식이었다. 땀 흘려(?) 번 돈이라 그런가. 뿌듯하네.

식사를 마친 루시퍼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야, 잘 먹었습니다. 현세의 음식은 역시 맛있네요."

"현세?"

"예, 이 세계를 일컫는 말입니다. 저는 다른 차원에서 왔으니까요."

누가 봐도 그래 보인다.

"정리는 제가 하겠습니다."

루시퍼는 마트에서 멋대로 사 온 앞치마를 허리에 둘렀다. 그러고선 고무장갑까지 양손에 끼더니.

샤샤샥.

빠르게 먹은 것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설거지까지 완벽하다.

돼지고기의 기름은 휴지로 닦아 일반쓰레기에 버리고, 퐁퐁도 적당량 사용해 깔끔하게 정리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닦아낸 그릇은 반짝반짝해서 빛이 날 정도.

'펴, 편하다.'

집안일을 해주는 하인 하나가 생긴 기분이다. 반지하 단칸방에 하인이라니 과한 느낌도 들지만.

압도적으로 편한 것은 사실이었다.

쓱쓱.

루시퍼는 자연스럽게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와서 방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대충 놓여 있던 이불도 깔끔하게 개고.

"뭐라도 도와줄······."

"아뇨, 괜찮습니다. 꼭 제가 하고 싶습니다."

걸레에 물을 묻혀 정성스럽게 바닥을 닦기까지.

반짝반짝.

너저분했던 단칸방이 청결한 장소로 변화했다.

'와, 장난 아니네.'

모든 일을 끝마친 루시퍼는 앞치마를 놓아두고선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면 배도 채우고 청소도 했겠다. 제 능력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아."

나는 녀석의 화려한 청소 실력에 혼미해졌던 정신을 가다듬었다.

"괜찮고말고."

솔직히 궁금하기는 했다.

얼마나 강하길래, 소환하는 것만으로 맑았던 날씨를 바꿔 버릴 정도란 말인가.

"E급 인스턴스 게이트를 열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 인스턴스 게이트(E)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 소모 비용 : 5,000 Coin 』

어려울 거 없는 부탁이었다.

'루시퍼가 강하면 앞으로 편하긴 할 거야.'

내가 가진 스킬 약자멸시의 단점은 내 레벨보다 낮은 상대만 처치할 수 있다는 것.

'내 레벨은 20. 이제 막 E급이 되었다.'

E급 게이트에 등장하는 마수들은 죄다 레벨 20이 넘는다. 나보다 레벨이 높은 마수를 상대할 방법은······.

'딱히 없다.'

망멸검이라도 휘두르면 나쁘지 않겠지만.

검도조차도 배워본 적 없는데, 제대로 먹히기나 하겠는가?

그러나 이제는 소환수가 생겼다.

나 대신 싸워줄 사람이 생긴 거다.

"인스턴스 게이트 오픈."

『 해당 게이트는 공략 실패 시 자동 소멸합니다. 』

『 해당 게이트는 1인 전용입니다. 』

"설마, 1인 전용이라 못 들어가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저는 인간 취급이 아니라 괜찮습니다."

루시퍼는 당당하게 게이트 안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나도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둘 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내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 E급 게이트 - 놀의 땅 』

▶ 클리어 조건

- 놀 처치 0 / 30

- 놀 우두머리 처치 0 / 1

게이트에 들어가자마자 짐승의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에에—.

놀은 하이에나의 머리를 한 소인종이다. 고블린보다는 덩치가 더 크고 흉포하다.

크에엑!

수풀 사이에서 튀어나온 놀 한마리.

[ Lv.24 ]

레벨은 24였다. 나보다 4나 높다. 이런 경우에는 약자 멸시가 통하지 않는다.

뚜둑.

루시퍼가 손을 꺾으며 앞으로 나섰다.

"주인님께선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화아악!

루시퍼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른 루시퍼는 허공에서 유유히 날개를 펼쳤다.

곧이어 한쪽 손아귀에서 검은 마력을 쏘아냈다.

투두두두—!

폭격하듯 쏟아지는 검은 마력.

크엑! 크에엑!

풀숲에 숨어 있던 놀들은 혼비백산하며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대항하고 싶어도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콰과과!

몇몇 놀들이 돌멩이나 무기를 던져대긴 했지만 무의미했다.

놀들이 가진 무기로는 무슨 짓을 해도 공중에 있는 루시퍼에게 닿지 못한다.

크에에엑!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루시퍼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놀들을 처치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센 거야?'

E급 마수들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힘.

콰광, 콰과과과-!

보통 E급 게이트를 공략하려면 E급 헌터 다섯명이 있어야 한다는데. 그런 기준이 우스울 정도다.

하품을 하면서 잡는 수준이다. 실제로 하품을 하고 있다.

정말로 사최헌하고 붙어도 이길 정도인건가?

'설마. 그게 되면 밸런스 붕괴지.'

E급 헌터가 소환한 소환수가 설마 S급이랑 비비겠어?

물론 지금 루시퍼가 보여주는 힘은 장난이 아니긴 했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엄지를 치켜듭니다. 』

콰아아아—!

루시퍼의 손에서 쏘아진 마기가 레이저처럼 땅을 갈랐다. 공유된 시야를 통해서 전장의 상황이 명확하게 보인다.

놀 우두머리는 그대로 사망.

'사기네.'

게다가 루시퍼는 단순 강하기만 한 게 아니다.

시야 공유가 가능하다.

잘만하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면 즉살의 대상을 정한다거나.

공중에서 적을 정찰하게 한 다음 스킬을 발휘할 수도 있겠지.

『 E급 인스턴스(개인화) 게이트가 공략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그렇게 공략은 완료되었다.

지난번 F급과 마찬가지로 전설급 공략이었다.

"어떻습니까? 제 실력. 쓸만하지 않습니까?"

"너무 굉장한데."

진심이었다.

본 실력의 반의반도 안 보여준 거 같은데.

E급 게이트를 아주 초토화를 시켜놨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더 강한 상대도 맡겨만 주시죠. 전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 고유 스킬 초기화권 x 1 』

『 룬 : 쿨타임 감소 』

보상은 뭘까.

"오."

이전과 마찬가지로 대기시간 초기화권이 하나.

'나이스.'

즉살(卽殺)의 활용도는 무궁무진.

초기화권은 다다익선이다.

다른 보상 하나는 룬이었다.

황금색으로 룬어가 새겨진 검은색 돌멩이.

이걸 사용하면 지정된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쿨타임 감소 룬인가"

이것 또한 이득이었다.

즉살(卽殺)의 대기 시간이 줄어든다는 의미니.

얼마나 줄어들지는 사용해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기존 쿨타임인 44일은 너무 길었다.

물론 여기서 조금 줄어든다고 크게 달라질 것도 없지만.

'룬을 중복해서 모은다거나 하면······.'

나중에는 즉살의 쿨타임을 엄청나게 줄일 수 있을 거다.

일주일에 한 번만 쓴다고 해도 미친 필살기니까.

"상당히 좋은 아이템입니다. 바로 사용하십니까?"

"물론이지."

나는 곧장 룬을 손에 들고 사용했다.

『 '즉살(卽殺)'의 쿨타임이 줄어듭니다. 』

7화 후원

『 모든 스킬의 쿨타임이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44일 → 39일 』

5일이 줄었다.

"오······."

뭐랄까.

"······엄청 줄지는 않네."

더 자주 쓸 수 있게 된 건 맞지만,

44일이나 39일이나 체감상의 차이는 크지 않다.

실제로도 10% 밖에 안줄었다.

"아마 주인님께서 가지고 계신 즉살이 고유 스킬이라 그럴 겁니다."

루시퍼가 위로하듯 말했다.

고유 스킬은 일반 스킬과 달리 1개만 소유할 수 있다. 대신 성능이 훨씬 뛰어난 경우가 대부분.

"내가 가진 스킬도 보이는 거야?"

"물론입니다. 주인님의 충성스런 사도니까요. 주인님에 대한 건 뭐든지 알고 있습니다."

"······."

뭐든지?

약간 징그러운데.

하지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성좌와 달리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되는 존재니까.

"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보셔도 좋습니다. 지금은 전부 말씀드릴 수 없지만, 저 아는 게 꽤 많거든요."

루시퍼는 검은 날개를 쫙 펴며 자랑스러운 듯 말했다.

그렇다면 우선은 정확한 전력 파악이다.

앞으로 공략할 장소가 산더미다.

게이트, 미궁 던전, 죽음의 물결까지.

방금 E급 게이트를 공략하긴 했지만, 워낙 일방적인 학살극이어서 전투력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얼마나 센거야?"

"으음······. 그건 어려운 질문이네요."

내 질문에 루시퍼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

"우주 늑대만큼 강하다고 하면······. 대답이 될까요?"

우주 늑대 같은 소리하고 있네.

생전 처음 듣는 마수다.

"레벨로 말하면 되잖아."

"사도는 레벨이 없거든요. 으으음. 뭐라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지구에 현존하는 헌터들보다는 제가 강할 겁니다."

그 정도라고······?

물론 본인이 하는 말이다.

어느 정도 과장은 있겠지.

"그러니 심부름도 마수 사냥도 행성 정복도 저한테 믿고 맡겨 주시면 됩니다."

"······."

하여간, 굉장히 강하다는 것 같다.

그 다음으로는 활동 방침 전달이었다.

"지금까진 내 능력을 숨긴채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까지라곤 해도 고작 이틀이다.

나는 그간 있었던 일을 루시퍼에게 설명했다.

월드 보스를 잡고 무명이라는 닉네임을 입력한 것까지.

내 말에 루시퍼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아주 잘하셨습니다. 현명하시네요. 주인님께서 가지고 계신 능력이 워낙 출중하시니까요. 당분간은 숨기는 게 맞다고 봅니다."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루시퍼는 손가락까지 펼쳐가며 말했다.

"소환 되었을 때, 저는 주인님을 둘러싼 세계 3차 대전의 발발까지도 염두에 뒀었습니다. 진지하게 인류의 멸망까지 이어졌던······."

"이어졌던?"

"말실수입니다. 하여간 주인님의 잠재력이 인류의 멸망까지 초래할 수 있다는 거죠."

개소리를 굉장히 진지하게 말하는 루시퍼.

"······."

한 가지 확실해졌다.

다른 건 모르겠고 이건 분명하다.

이 녀석이 은은하게 돌아 있다는 거.

사도라는 건 원래 이런 족속인 건가?

그보다 아까하던 말을 이어서 하자면.

"근데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단 말이지."

사도 소환이라는 강력한 카드를 뽑았다.

루시퍼는 보다시피 말도 안되게 강하다.

이제 내 신변의 안전은 보장된 셈.

"굳이 더 숨길 필요가 있을까?"

"네, 있습니다."

루시퍼는 세상 단호하게 말했다. 웃음기를 싹 빼고.

"적어도 주인님께서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때까지는요."

"그래?"

"제 특기가 보호와는 거리가 좀 있거든요. 게다가 명확히 말씀드리진 못하지만 이 세계에도 제가 인지 못하는 위협이 있을 수도 있고요. "

루시퍼의 비호에도 한계가 있을 거다.

24시간 붙어 있는다고 해도, 불운한 사고까진 막지 못할 가능성도 있고.

"그러니 눈에 보이는 통치자가 되기보단, 이면에 숨겨진 흑막이 되시길 추천드립니다."

뭐, 통치자까지야······.

그래도 루시퍼의 말대로다.

'그래.'

이름을 알리는 건 그만큼 트러블에 휘말리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니.

결정했다.

"당분간은 이대로 유지하자."

정 필요한 일이 있으면, 루시퍼를 보내서 해결하면 되겠지.

적어도 내가 강해질 때까지는 말이다.

활동방침이 대강 정리 되었다 싶은 순간이었다.

"잠깐."

불현듯 떠오른 생각.

"그러고보니까······. 사최헌 헌터는 그냥 놔두고 온거야?"

"예? 네. 아무 말도 남기지 말라고 하셔서."

그랬기는 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일단 복귀하라고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까, 사최헌 헌터는 무슨 큰일 난 줄 아는 거 아니야?

분명 사최헌은 루시퍼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보통 살기가 아니었다.

괜히 오해할라.

"너······. 사최헌한테 다시 가라."

* * *

불멸(不滅).

대한민국 3대 길드 중 하나의 이름이었다.

그중에서도 불멸은 독보적인 1위 길드였다.

대한민국 랭킹 1위인 사최헌이 길드장으로 역임하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터벅, 터벅.

비를 쫄딱 맞은 사최헌은 최신식 길드 건물 내부로 걸어들어왔다.

마침 로비에 나와 있던 그의 동료가 사최헌을 반겼다.

"헉. 길드장님. 홀딱 젖었네요. 갑자기 웬 폭우가 오더라니까요. 수건 드릴까요?"

"괜찮다."

"······무명(無命)은 어떻게 됐어요? 다들 궁금해서 죽으려 그래요."

"자세한 이야기는 조금 있다하지."

그의 말에 유지훈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라면 이대로 물러났겠지만.

유지훈은 볼을 긁적이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길드장님. 뭔가 고민되는 일이 있으면 저희한테도 말해주세요. 저희는 언제나 길드장님 편이니까요."

그 말을 남긴 유지훈은 괜히 쑥쓰러운지 순간이동으로 사라졌다.

"······."

사최헌은 유지훈이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엘리베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불멸 길드에 소속된 동료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잠재력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회귀자인 사최헌이 한 명 한 명 엄선해서 선정한 사람들.

그러나 이 중에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이들은 내가 회귀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니 무명(無命)에 관한 것도,

갑작스레 나타난 상위 존재에 관한 것도.

아직은 이야기할 수 없었다.

쏴아아—.

사최헌은 곧장 샤워실로 향해 샤워기를 틀었다.

머리가 복잡했기에 정리를 할 시간이 필요했다.

'무언가가 바뀌었다. 미래가 완전히 비틀렸다.'

월드 보스가 눈앞에서 즉사했다.

사최헌 자신이 손을 대기도 전이었다.

무명이 혼자서 해낸 일이었다.

시스템상의 기여도 1위는 무명.

최소한 무명이 누군진 밝혀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장에는 희미한 마력조차 남지 않았다.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아직 인류 멸망을 가리키는 '페이즈'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젠장.'

쿵.

사최헌은 샤워실의 타일을 주먹으로 쳤다.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

무명 하나만으로도 골치 아픈 변수인데,

사최헌은 마주하고야 말았다.

산 정상에 나타난 상위 존재를.

'그놈은 분명······. 사도였다.'

사도는 멸망 2페이즈가 넘어서야 나타나는 상위 존재. 현 시점에는 성좌(星座)의 형태로만 존재해야 정상이다.

그런 미친 놈이 왜 지금 현세에 강림한건지.

이름을 물었지만 놈은 대답하지 않았다. 검격을 날리긴 했지만, 통했는지도 모르겠다.

검격을 맞고 비명을 지르긴 했지만 도망치려고 일부러 낸 소리 같았다. 베었다는 감각은 없었다.

흑색 계열의 사도 중에 그런 놈이 있었던가?

어쩌면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이 세계의 인과가 망가져 있는 걸까.

사최헌은 절망했다.

'이 세계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단 말인가.'

고뇌가 깊어진다.

어떤 방식을 써야 이 세계에 대항할 수 있을지.

아니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하아······."

사최헌이 깊은 한숨을 내쉬는 그때였다.

"뭘 세상 다 산 사람처럼 한숨을 쉬고 그러나."

"?!"

샤워실의 수증기 사이로 다른 존재의 그림자가 비쳤다. 사최헌은 즉시 인벤토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화아악-!

사최헌의 기운이 주변으로 펼쳐지며 단번에 수증기를 걷어냈다. 수증기 속에서 나타난 것은 검은 날개를 가진 사도.

루시퍼였다.

사최헌의 동공이 지진이 난듯 흔들렸다. 아무리 무방비한 상태였다지만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

대체 어느 틈에?

"······날 없애러 온 건가?"

날선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 사최헌.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다.

상위 존재들 대부분이 오만함의 극치를 달린다.

산 정상에서 사최헌은 사도를 공격했었다.

그에 대한 보복을 하러 온 걸지도 몰랐다.

그러나 루시퍼는 민망한 듯 시선을 돌리며 기침을 했다.

"큼. 아니, 수증기는 왜 없애고 그러냐. 에이씨, 눈 버렸네."

"대답해라."

"그러니까. 오해다."

"오해?"

루시퍼는 혀를 차면서 말을 이어갔다.

"나는 딱히 인간들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이 없다고. 주인님의 뜻에 반대 되거든."

"주인님······?"

사최헌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뇌었다.

그 격조 높은 상위 존재에게 주인이라니.

"내 주인은 인간이시다. 따라서 나는 너희 편이다. 오케이?"

"······?"

"하여튼 나는 오해 풀었으니까, 간다?"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잠깐······!"

루시퍼가 검은 날개를 한 번 펄럭이자 단번에 까마귀로 변했다. 그러고선 사최헌이 붙잡기도 전에 창틈으로 날아갔다.

일방적인 대화였다.

사최헌은 그 자리에 멈춰섰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상황을 인지하기 힘들었다.

쏴아아—.

그의 손에 들린 검 위로 샤워기의 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얼마나 멈춰 서 있었을까.

어처구니가 없어 서 있던 그때.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남자 길드원들이 샤워실로 쳐들어왔다.

"뭐, 뭡니까?!"

"길드장, 무슨 일이에요?! 무기는 왜······?"

"······."

사최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체 불명의 힘을 다루는 무명(無命)도 모자라,

이제는 사도를 다루는 인간이라니.

변수가 둘이나 생겼다.

'하지만 아직 절망하기엔 이르다.'

어찌보면 이건 기회였다.

사도의 강림이 인간에 의한 소환이라면, 아직 설득의 여지가 있다.

무명과 사도의 주인.

두 사람(?)이 인류의 편이라면······.

아니, 그 둘 중 하나만 인류의 편이라도.

이번 세계의 운명은 크게 바뀔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한 사최헌이 길드원들을 향해 말했다.

"······반드시 찾아낸다."

"예?"

"우선 무명(無命)부터 찾는다. 비용이 얼마가 되든 상관 없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찾아내겠다."

그의 목소리는 결연했으나,

길드원들은 어쩐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왜 그러지?"

미간을 좁힌 채 고개를 갸웃하는 사최헌을 향해 길드원 중 하나가 조심스레 말했다.

"길드장, 일단 옷부터 입으시죠."

* * *

루시퍼는 사최헌과의 오해를 풀고 돌아왔다.

나는 그 모습을 시야 공유로 확인했다.

"······."

본의 아니게 민망한 모습을 본 데다가,

오해를 푼다는 것도 얼렁뚱땅 이었지만,

루시퍼를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충분하다.

"뭐, 이 정도면 됐겠지."

그렇게 그 날은 일단락되었다.

다음날 아침.

보글보글, 치지익—.

나는 이른 아침부터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보다 이른 기상 시간이었는데, 싱크대쪽이 소란스러워서였다.

"아, 주인님 일어나셨습니까?"

앞치마를 두른 루시퍼가 아침을 만들고 있었다. 프라이팬에서 익어가는 계란 프라이, 베이컨. 그리고 된장찌개.

양식과 한식이 섞여 있다.

"식사 준비 끝났습니다."

루시퍼는 작은 상까지 펴서 내 앞으로 가져왔다.

이 자식 엄청 부지런하네.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서 먹어보니 맛도 훌륭하다. 베이컨과 계란도 딱 알맞게 구워졌고.

'감동스러울 정돈데······.'

나는 아침 식사를 하며 입을 열었다.

"어제 자면서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성좌 있잖아."

"네, 있죠. 지금 주인님의 주변에도 한 놈 있네요."

내 머리 근처를 맴도는 검은 별빛 하나.

나는 떠오른 의문을 루시퍼에게 물었다.

"다른 성좌들도 분명 많을텐데, 이러면 내 정체가 간단하게 들키는 거 아니야?"

성좌들과 직접적인 메시지는 주고 받을 수 없다.

하지만 간접적이어도 정보를 수집할 순 있지 않은가.

무명(無命)이라는 닉네임도 무용지물이 아닌지?

루시퍼는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건 불가능합니다. 성좌들의 의사표현에는 제한이 걸려 있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감정 표현 밖에 못 보내잖아.

해봤자, 시스템과 관련된 메시지고.

"특히 세계에 크게 간섭하는 정보 제공은 현 시점에선 절대로 불가능하니 걱정 안하셔도 될 겁니다."

"그런가."

루시퍼는 손가락으로 내 머리 근처의 별빛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 놈은 딱봐도 운이 좋아서 주인님을 찾아낸 거고요."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뿌듯해합니다. 』

루시퍼는 설명을 덧붙였다.

"참고로 다른 성좌들도 주인님의 주시성이 되고 싶어서 눈에 불을 켜고 있을 겁니다. 다만, 주인님의 능력이 특수해서 정확한 위치를 못 찾고 있는 거겠죠."

······그런거였나.

어쨌든 성좌 문제는 괜찮다는 거다.

그래도 문제가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오늘부터 던전을 공략하려고 하는데······."

현재 내가 열 수 있는 인스턴스 게이트는 E급까지다.

내 등급이 E급이므로.

인스턴스 게이트만 반복 공략해서 레벨업을 하면 좋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알아본 결과 인스턴스 게이트는 경험치를 지급하지 않는다.

'헌터들이 바깥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이유가 있었던 거지.'

경험치 뿐만 아니라 공략 보상도 미리 쌓아두고 싶다.

그런데 일반 게이트는 보상이 없다.

따라서 공략 보상과 경험치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미궁을 공략하고자 했다.

문제는 이거다.

"조용히 공략만 다니고 싶은데 말이야."

성좌로부터 받은 은밀 망토를 착용해도 마찬가지다.

은밀 망토를 착용하면 CCTV에는 남지 않지만,

랭킹과 닉네임이 남는다.

그걸 역추적하면 날 찾아낼지도 모른다.

"뭐, 좋은 능력 없어?"

내 질문에 루시퍼가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 시점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까마귀로 변신하기, 전투하기, 시야 공유하기, 심부름하기 정도입니다만······."

따악!

그때, 무언가 번뜩였다는 듯 루시퍼가 손가락을 튕겼다.

"성좌에게서 후원 받죠. 그 성좌한테 이미 은밀 망토를 받으신 거죠?"

"그거야 그런데."

"한 성좌당 총 세 번의 후원을 받을 수 있거든요. 아마, 더 좋은 아이템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루시퍼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 주변을 돌고 있는 자그마한 검정 별빛을 노려보았다.

"거기 너."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시선을 회피합니다. 』

"모르는 척하지 말고. 후원 하나만 더 내놔 봐. 확실하게 신원을 감출 수 있는 걸로."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곤란해합니다. 』

슬금슬금, 검은 별빛이 루시퍼를 피해 뒤로 물러난다. 루시퍼는 그런 성좌를 집요하게 쫓으며 협박했다.

"야, 씨. 콱. 너 뭐 돼? 빨리 내놔."

"······그래도 되는 거야?"

"물론이죠. 성좌들도 격의 차이가 있는데, 이 놈은 그리 대단한 녀석이 아닙니다. 별빛의 크기를 보면 짐작이 가능하거든요."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울상을 짓습니다. 』

"뜯어낼 만큼 뜯어내도 된다는 겁니다."

루시퍼의 차갑게 가라앉은 눈이 별빛을 향했다.

"주인님의 능력을 보고도 울상을 지어? 결과적으론 너한테도 좋은 일일텐데. 너 나중에 나 감당 되냐? 어차피 줄 거 빨리 내놔."

그렇게 협박한다고 줄 리가.

괜히 성좌가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 헌터들을 지켜보는 고고하신 존재인데,

양아치처럼 협박한다고 템을 던져주겠냐고.

루시퍼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으려던 그때였다.

띠링!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울먹이며 후원을 선언합니다. 』

응?

『 검은 별의 주인이 두번째 선물을 후원합니다. 』

『 [ 유니크 ] '은둔자의 가면'을 습득합니다. 』

후원 메시지가 떠올랐다.

······진짜 줬다.

그것도 유니크 아이템으로.

아이템의 등급은 일반, 레어, 유니크, 레전더리.

그러니까 유니크면 거의 준종결 아이템인데.

이걸 이렇게 간단히?

"역시 대화로 해결되는 안 되는 게 없다니까요."

루시퍼가 흡족스런 미소와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8화 공략

『 [ 유니크 ] 은둔자의 가면 』

- 은신 Lv.2

- 또한 B급 이하의 탐지 스킬에 발각되지 않습니다.

"와······."

검은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반가면.

무려 스킬이 달려 있다.

완벽한 은신 아이템.

내게 딱 필요했던 물건이다.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눈물을 흘립니다. 』

눈물을 흘릴 정도의 지출이었던 걸까?

"얼마나 쓰셨는진 몰라도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말 뿐이긴 하지만 감사인사라도 해놓자.

성좌도 공짜로 후원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아이템을 확인한 루시퍼도 감탄사를 뱉었다.

"오······. 이 녀석. 돈 좀 썼나 봅니다. 저희에게 넘어오는 건 아이템 뿐이지만, 성좌는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거든요."

그걸 알면서 성좌를 협박한 네가 더 대단하다. 나는 은둔자의 가면을 착용해보았다.

"그래도 이제 신분을 숨긴 채 바깥에 나갈 수 있겠네."

착용과 동시에 내 몸이 반투명해진다. 화장실의 거울을 확인해보니 내 모습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오오.'

이게 은신 Lv.2의 효과.

B급 이하의 탐지 스킬에도 걸리지 않는단다.

"그러면 이제 네 차례인데."

"저 말씀이십니까? 날개는 숨길 수 있습니다. 일반인인 척하죠."

"아니, 너 같은 일반인이 어딨어."

나는 루시퍼를 빤히 바라보았다. 검은 날개는 가린다고 쳐도, 외견이 기본적으로 너무 눈에 띈다.

칠흑 같은 머리색에, 적색의 눈동자, 훤칠한 키와 체격.

'이 자식. 쓸데없이 너무 잘 생겼는데.'

외모가 해외의 모델 수준이다.

한 번이라도 봤으면 인상에 무조건 남는다.

"주인님께 칭찬을 받다니. 잘 생기게 태어나길 잘했네요."

"칭찬이 아닌데······."

'동네 심부름이라면 모를까. 공략 때마다 눈에 띄면 곤란해.'

해결책은 간단했다.

"까마귀로 변해."

"그리 말씀 하실 줄 알았습니다."

사최헌한테서 도망칠 때처럼 까마귀가 되면 된다. 그 성능은 사최헌조차 추적하지 못할 정도인 듯 하니.

그리고 여차하면 평범한 까마귀인 척해도 되잖아.

"바로 변신하겠습니다."

펑!

검은 빛이 번쩍이자, 루시퍼는 까마귀가 되어 있었다. 그대로 내 어깨 위에 올라타는 루시퍼.

까악, 까악!

『 대상 루시퍼(까마귀 폼)가 은신 Lv.2의 적용을 받습니다. 』

아이템의 효과는 내 어깨에 앉은 루시퍼에게도 적용 되었다.

'성능 좋은데.'

이 정도면 상위 헌터들에게 모습을 보여도 딱히 이상할 건 없다. 동물을 소환수로 부리는 헌터는 의외로 꽤 있으니까.

이제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한 셈.

"그러면 출발하실까요? 원하시면 주인님을 잡고 날아오를 수도 있습니다."

"아니, 그건 하지 말자."

실수로 떨어지면 즉사잖냐. 게다가 까마귀에 들려서 날아가는 헌터라니. 모양새도 이상하고.

걸어가면 충분하다.

나는 현관을 나서며 스마트폰의 어플을 확인했다. 헌터 등록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헌터 전용 앱이었다.

여기엔 각종 게이트와 미궁 던전의 위치가 적혀 있다.

"E급 미궁 던전까지는 걸어갈만 해."

바깥으로 나와 도보를 걸으며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정보 수집의 일환······같은 거창한 건 아니고.

단순히 무명(無命)에 관한 내용이 궁금해서였다. 두번째 월드 보스를 처치한 게 바로 어제였으니까.

- 무명, 흑이무기에 이은 두번째 월드 보스 토벌

- 헌터 협회, 무명(無命) 헌터의 소재는 현재 불명

- 랭킹 1위 사최헌 '무명, 불멸 길드 영입 제안 가능'

- 대한민국 최초 SS급 헌터의 출현?

포털 사이트가 온통 무명에 대한 이야기로 도배 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건, 단연 영입 제안.

'불멸 길드에서 영입 제안······?'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1위 길드 '불멸(不滅)'.

연봉이 억 단위로 세 자리가 넘어가며,

최신 훈련 설비와 최고급 장비가 지원되는 최고의 길드다.

그곳에 들어가는게 모든 대한민국 헌터들의 꿈일 정도니.

'좀 끌리긴 하지만······.'

다만, 길드의 혜택은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다. 입단하는 순간 의무가 생기게 된다.

대한민국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S급 게이트를 공략해야한다는 의무가. 불멸은 그런 길드다.

'그건 좀······.'

건물주가 되어 은퇴한다는 내 계획과는 완전히 반대.

마음대로 은퇴도 못할 거다. 한다고 해도 막대한 위약금을 배상해야 할지도 모르고.

"이야, 현세가 주인님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이네요. 사최헌 그 놈도 주인님을 찾고 있나본데요?"

어깨에서 스마트폰을 훔쳐보던 루시퍼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당장은 강해지는데 주력해야지."

내 능력을 사용하면 레벨업은 금방이다.

S급 헌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테고.

신중하게 움직여서 나쁠 건 없다.

"매우 현명하신 선택이십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요. 그럼 출발하실까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문 앞으로 날아가는 까마귀 루시퍼.

들뜬 녀석을 향해,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잠깐만, 그 전에 시험해 볼게 있어."

처음부터 떠올렸던 사실이 하나 있다.

루시퍼의 시야 공유.

그리고 내 즉살 스킬이 합쳐진다면······.

나는 집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될 수 있다.

* * *

까악—!

먹구름 낀 하늘 위로 높이 날아오른 까마귀 루시퍼. 녀석은 하늘을 고속으로 활강해 근방의 게이트로 향했다.

『 사도 루시퍼가 F급 게이트에 입장합니다. 』

루시퍼의 시야는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있다.

[ 주인님, 고블린 놈들이 보입니다. ]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야.

나에게도 숲을 헤치고 돌아다니는 고블린이 똑똑히 보인다.

[ Lv.11 ]

키륵, 키르륵······.

지난번 인스턴스 게이트에서 처치했던 놈들보다 훨씬 레벨이 높다. 들고 있는 무기도 좀 더 정교하고 날카롭다.

나는 지금 게이트의 바깥에 있다.

이곳에서 '즉살:약자멸시'는 닿지 않는다.

단순히 스킬의 범위가 100m이기 때문이다.

반면 거리 제한이 없는 '즉살(卽殺)'은 닿겠지만.

"루시퍼 하나 잡아볼래?"

나는 루시퍼에게 부탁했다.

[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까악. ]

우웅, 콰과과과—!

까마귀의 입가에서 쏘아진 검은 빛줄기가 고블린을 순삭했다. 덤으로 근처의 나무도 죄다 박살냈고. 요란한 공격이다.

'음.'

나는 상태창을 확인했다.

'······경험치가 안 오른다.'

루시퍼가 고블린을 죽였지만, 당연히 올라야 할 경험치가 그대로였다.

사도가 내 소환수라면 당연히 경험치가 올라야 했다.

원인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내가 게이트 바깥에 있어서 그런 건가.'

어제는 월드 보스를 잡으며 레벨이 최대치까지 상승했기에 경험치가 더 이상 오르지 않았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제한이 없다.

마수를 잡으면 경험치가 올라야 한다.

"이번에는 같이 들어가보자."

『 [ 유니크 ] 은둔자의 가면을 착용합니다. 』

『 [ 희귀 ] 은밀 망토를 착용합니다. 』

나는 후원 받은 아이템을 전부 몸에 착용하고서 F급 게이트가 있는 장소로 향했다.

두 개의 은신 아이템의 효과는 상당히 뛰어났다. 행인들의 바로 옆을 지나가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

'걸릴 걱정은 없겠네.'

나는 어렵지 않게 F급 게이트로 들어갈 수 있었다.

"주인님, 오셨습니까. 고블린들의 서식지는 미리 파악해뒀습니다."

나는 루시퍼의 안내를 따라 이동한 장소에서 고블린 두 마리를 지정했다.

키륵, 키르륵!

키르륵······.

나는 루시퍼의 시야에 보이는 고블린 두 마리를 향해 말했다.

"죽어."

타인의 앞에서 외치는 두 글자.

막상 현실이 되면 창피할 줄 알았는데,

그 타인이 루시퍼여서 그런지 의외로 괜찮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적 친밀감이라도 쌓였나.

『 스킬 '즉살(卽殺) - 약자멸시'를 발휘합니다. 』

퍼억! 푸악!

두 마리의 고블린이 폭발하며 즉사했다.

[ 와우, 깔끔하십니다. 직접보니 감탄밖에는 안나오네요. ]

루시퍼는 호들갑을 떨었지만 정작 나는 무던하다.

그냥 스킬 쓴 건데, 뭐.

'이번에는······.'

나는 경험치 정보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

'올랐다.'

소량이기는 하지만 경험치가 올랐다. 시야 공유를 통한 약자멸시도 마찬가지였다. 경험치가 상승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 안에 직접 들어와야 경험치가 오른단거네.'

월드보스가 특이한 경우였다. 그건 다른 차원의 마수가 이쪽으로 넘어오는 거니까.

"아하, 처치하는 마수와 같은 차원에 있어야 경험치가 획득 되는군요. 하나 배웠습니다."

루시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이어진 길을 따라 전진하며 말했다.

"빠르게 정리하고 돌아가자."

"옙, 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게이트에도 공략 보상이 있는지 확인했다.

고블린 한 마리까지 남김없이 처리했으나, 아쉽게도 별 다른 알림은 뜨지 않았다.

'하긴, 일반 게이트에 공략 보상이 있단 건 들어본 적도 없다.'

인스턴스 게이트가 특이한 거였다.

'일반 게이트는 굳이 공략할 필요 없겠고······.'

다음은 미궁 던전으로 향할 차례였다.

여기에는 확실히 랭킹과 공략 보상이 존재한다.

* * *

미궁 던전.

어느날 불쑥 솟아오른 땅 위로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문이 등장했다.

『 미궁 던전 ( E ) 』

게이트만 공략해 오던 사람들에겐 생소한 형태였다.

그러나 몇몇 용감한 헌터들이 선발대를 자처했고, 현재에 이르러 미궁 던전은 자연스런 공략 장소가 되었다.

'사라지지 않는 게이트인 셈이지.'

주기적으로 내부가 바뀌고, 마수들의 배치가 바뀐다는 사소한 특징을 제외하면 게이트와 동일하다.

'······하지만 미궁 던전에는 랭킹 시스템이 존재한다.'

그게 게이트와는 다른 점이었다.

많은 헌터들이 랭킹을 공략하고 더 많은 보상을 얻고자 미궁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야, 여기는 인간들이 정말 우글우글하네요."

까마귀 모습을 한 루시퍼가 내 어깨에서 말했다. 녀석의 말대로 주변에는 미궁을 공략하려는 헌터들로 북적였다.

미궁 던전 근처에는 큰 상권이 형성 되어 있어, 공략 물자를 보급하기에도 좋고 아이템을 거래하기도 쉽다.

나는 다른 곳에 시선을 두지 않고 미궁 던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본래대로라면 공략 신고 절차를 밟아야 하지만······.'

이후의 일이 귀찮아질 게 뻔하다.

자칫하면 내가 무명(無命)이라는 게 까발려질테니.

그러니 그냥 가자.

문양이 잔뜩 새겨진 철문을 통과하자, 미궁 던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가 미궁인가.'

지하 특유의 쾌쾌한 냄새가 코끝을 찌르는 듯했다.

『 E등급 - 미궁 던전 1F 』

깔끔한 돌바닥이 복도처럼 쭉 이어져 있다. 일견 무해해보이는 장소지만, 숨겨진 함정이 있을 확률이 100%다.

마찬가지로 미궁의 솔로 플레이는 권장되지 않는다.

다치기라도 하면 대처가 안되니까.

"주인님, 멀리서 다른 인간들의 기척도 느껴집니다. 최대한 우회해서 가면 될까요?"

"그래. 그게 낫겠다. 별 일이 있는 게 아니라면."

미궁은 불특정 다수가 동시에 공략하도록 되어 있다. 시작 지점은 다르지만 목표는 같다.

보스를 처치하고 미궁을 탈출하는 것.

"그러면 루시퍼, 앞으로 가서 함정을 해체해."

"음, 제가 함정을 해체 할 수 있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던가요······?"

없다.

하지만 함정을 부수는 건 할 수 있을테지.

"눈에 보이는 거 전부 부숴버려."

"그거라면 맡겨만 주십쇼!"

까마귀 루시퍼의 주위로 검은 마력이 감돌기 시작했다. 흑암의 기운을 두른 루시퍼가 그대로 전진.

콰과과과—!

미궁의 함정을 박살내며 돌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진짜 말도 안되게 세네.'

내가 시키긴 했지만 어처구니가 없다. 모든 함정을 무시하는 수준으로 돌파하고 있다.

"여기서 왼쪽으로 갈까요, 오른쪽으로 갈까요?"

"최대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방향으로."

"알겠습니다!"

콰과과과—!

압도적인 속도로 미궁이 공략되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 고블린과 거미 마수들은 그대로 쓸려나갔다.

『 레벨이 상승합니다. 』

『 레벨이 상승합니다. 』

순식간에 레벨이 2개 상승했다.

그러고도 경험치가 70%까지 차올랐다.

독식임을 감안해도 빠른 속도였다.

콰아아앙—!

까마귀 루시퍼의 입에서 나온 마력 탄환이 보스방의 문을 산산조각냈다.

"키, 키에엑······?!"

보스의 방에 있던 것은 고블린 라이더.

녀석은 거대한 거미 위에 올라타 있었다.

[ Lv.28 ]

레벨은 무려 28.

현재 내 레벨은 22다.

약자멸시는 쓸 수 없겠고.

"루시퍼, 처리해."

"이 정도야 누워서 떡 먹기죠."

루시퍼는 까마귀의 모습 그대로,

검은 마력 탄환을 쏘아냈다.

슈우우—! 콰아앙!

직선을 그리며 쏘아진 마력 탄환은 그대로 보스에게 명중.

강력한 폭발을 일으키며 방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촤르륵!

『 E급 미궁 던전이 공략 되었습니다. 』

『 해당 공략의 수준 : 전설(傳說) 』

『 뛰어난 업적! 』

『 몇몇 성좌들이 해당 공략을 눈여겨 봅니다. 』

『 랭킹 점수를 계산합니다. 』

- 1위 : 무명(無命) [ 1,504 점 ]

- 2위 : 사최헌 [ 420 점 ]

- 3위 : 천이령 [ 397 점 ]

『 E급 미궁 던전 랭킹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2위와의 압도적인 격차! [ 1,084 점 ] 』

『 공략 성과에 걸맞는 보상이 지급됩니다. 』

9화 까마귀

『 E급 미궁 던전 랭킹 1위를 달성하셨습니다! 』

『 공략 수준 '전설(傳說)'급에 대응하는 보상을 지급합니다. 』

미궁 던전의 공략이 끝났다.

루시퍼를 앞세우니 간단했다.

본래 미궁은 길드 단위로 들어와 며칠은 탐사를 이어나가야 하는 장소.

그러한 던전이 몇 시간도 안 돼서 공략 되었다.

이어지는 보상 타임.

『 보상 목록 』

- [ 유니크 ] 흐름의 별반지

- 전설의 증표 x 1

미궁의 마지막 방.

허공에서 솟아난 빛이 각각의 형체를 이뤘다.

"전설의 증표는 성좌와의 교환 재료랬지."

"예, 맞습니다. 그게 있으면 주시성 등록을 하지 않고도 아이템 교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

루시퍼는 설명을 덧붙였다.

"게다가 후원보다 훨씬 좋은 물건으로 교환 가능합니다. 스킬 같은 것도 되고요. 그때가 되면 교섭은 제게 맡겨주시죠. 최대한 싸게 후려쳐보겠습니다."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까마귀 루시퍼.

『 성좌 '검은 별의 주인'이 주먹을 부들거립니다. 』

아이템 뿐만 아니라 스킬 같은 종류도 교환이 가능한 모양.

'기대가 되네.'

월드보스를 잡고 2개.

이번에 미궁을 공략하고 1개.

벌써 3개다.

이것들은 잘 가지고 있다가 교환하면 되겠지.

나는 전설의 증표를 인벤토리에 넣고서, 나머지 하나의 보상인 반지를 들어 올렸다.

'스킬 초기화권이 하나 더 나왔으면 했지만.'

이미 한 장 있으니 괜찮다.

앞으로 공략을 하면서 또 나올 거고.

'아이템도 나쁘지 않아.'

『 [ 유니크 ] 흐름의 별반지 』

- 쿨타임 감소 10%

- 마력 Lv.3

'잠깐.'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정보창을 확인한 나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마력 스킬이 붙어 있잖아."

아이템 중에서도 가장 비싼 아이템은 뭘까?

바로 누가 써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아이템이다.

특히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 각성자는 없다.

'실력 있는 헌터들은 마력을 사용해서 신체를 강화할 수 있다고 했지.'

마력은 그만큼 필수적인 스킬인데,

이 아이템에는 그게 3레벨이나 붙어 있다.

Lv.3는 아이템에 붙는 최대치.

일반에 공개된 정보는 그러했다.

"이야, 축하드립니다. 이거 스킬 쿨타임까지 줄여주네요. 주인님을 위한 아이템 그 자체라고 할까. 운까지 타고 나셨군요."

"······."

현실감각이 너무 없어지는 기분이다.

반지의 가격은 집 한 채 가격을 가뿐히 상회할 테니까.

'뭐, 나한테 마력은 당장 필요 없는 능력치긴 해.'

일반적인 헌터라면 스킬을 쓸 때 마력을 소모하겠지만,

내가 가진 어떤 스킬도 마력을 사용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반지는 마력이 전부가 아니었다.

- 쿨타임 감소 10%

또 다른 옵션이야말로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일단 한 번 껴볼까······.'

꿀꺽.

나는 침을 한 번 삼키고서 반지를 손가락에 넣었다.

아름다운 물결이 음각으로 파여 있는 은반지. 옅은 빛이 반짝이는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 고유 스킬의 쿨타임이 10%(3.9일) 감소합니다. 』

『 고유 스킬 즉살(卽殺)의 대기시간 39일 → 35.1일 』

39일이었던 쿨타임이 35.1일로 감소.

'괜찮네.'

동시에 머릿속에 가닥이 잡힌다.

"······이런 식으로 쿨타임 감소 아이템을 모으면 되겠는데."

이런 식으로 룬과 아이템을 활용해 쿨타임을 점차 줄여 간다면, 나중에는 대기 시간 없이 스킬을 쓸 수 있을 거다.

정했다.

쿨타임 감소템을 최대한 모으기로.

게임으로 따지자면 쿨감 세팅이 되시겠다.

그리 생각하고 있는데, 내 어깨에 앉아 있던 루시퍼가 먼저 운을 떼었다.

"원하신다면 현세에 있는 쿨타임 감소 아이템을 전부 가져오겠습니다."

"응? 어떻게?"

그러면 좋기야 하겠다만.

"잠시 빌리는 겁니다. 현세의 인간들 중에 쿨타임 감소 아이템을 들고 있는 놈들이 꽤 있을 테니까요."

"그 사람들이 싫다고 하면······?"

"좀 두들겨 패면 되겠죠."

"그건 좀······."

순간 혹할 뻔했네.

어디 던전에 파묻혀 있는 거 가져오는 건 찬성이지만, 빼앗는 건 그냥 대놓고 빌런 아닌가.

겨우 아이템 좀 먹겠다고 지명수배당하고 싶진 않다.

"그러면 슬슬 나갈까."

"옙."

전설급 공략 보상도 얻었으니,

더 이상 미궁에 볼일은 없다.

'귀찮아지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겠다.'

미궁에서 신기록을 세웠으니 조만간 무명에 대한 기사가 올라올 거다.

가뜩이나 여러 사람들이 '무명(無命)'을 찾아 헤매고 있다.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대부분의 미궁을 공략해 둘 생각이다.

"다음 미궁으로 가자."

보스방의 한 켠에 있는 빛무리를 향해 걸음을 옮기자, 곧장 바깥 풍경이 펼쳐졌다.

많은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미궁의 입구.

『 '은둔자의 가면'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Lv.2의 은신

- B급 이하 탐지 스킬에 면역이 됩니다.

『 '은밀 망토'의 효과가 발휘됩니다. 』

- 영상 및 추적 장치에 탐지 되지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 하나 나에게 관심 가지지 않는다. 시선조차 내게 닿지 않는다.

성좌로부터 받은 은신 아이템의 효과는 훌륭했다.

'가볼까.'

나는 그들의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빠져나오며 스마트폰을 들어 올렸다.

액정 위에 미궁의 위치가 찍혀 있다.

'다음으로 향할 미궁은 D급.'

여기서 F급 미궁은 거리가 있으니 나중에 공략할 생각이었다.

우선은 가까운 장소부터 빠르게 공략해야지.

* * *

헌터들이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공략은 무엇일까.

거대하고 흉포한 마물을 처치해야 하는 월드 보스?

일정 수의 마수를 토벌해야 하는 게이트?

끝없이 쏟아지는 마물들을 막아내야 하는 죽음의 물결?

뭐 하나 먼저랄 것 없이 까다로운 존재였지만,

단연 까다로운 것은 바로 미궁이었다.

- 미궁 공략 원래 이렇게 힘든가요?

ㄴ제일 어려운 거 맞습니다.

ㄴ 자기 등급보다 1단계 낮춰서 가야 함. D -> E 이런식으로.

ㄴ 대신 보상이 좋잖아요.

마수를 상대하는 걸로 끝이 아니다.

미궁에 도사린 온갖 함정과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힌 통로를 돌파해야 비로소 공략이 가능했다.

미궁은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었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헌터들을 나락으로 끌고 가기에.

"정훈이 형, 식량이 다 떨어졌어요."

"이, 이제는 나가야 하는데."

"미안해요. 오빠. 제가 다치는 바람에······."

C랭크 길드 아성.

그들도 그러한 나락을 한발자국 앞에 두고 있었다.

"우선은 쉬자. 다들 너무 지쳤어."

아성 길드의 리더인 이정훈이 길드원들을 다독였다.

그는 길드원들과 함께 미궁의 비좁은 통로에 몸을 기대었다.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초조하기 그지없었다.

'젠장, 미궁을 너무 얕봤어.'

현재 공략 중인 미궁의 등급은 D랭크.

아성 길드는 그보다 한단계 높은 C랭크다. 미궁을 공략하기엔 적절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연이은 불운에 당할 재간은 없었다.

'젠장, D급 미궁에 왜 엘리트 마수가 있는 거냐고.'

엘리트 마수란,

일반 마수와 비교해 압도적인 능력치와 지능을 지닌 존재였다.

이따금 나타나는 특수 개체인 셈.

그 놈을 마주친 순간 모든 것이 꼬여버렸다.

'당황해서 도망치다보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4명의 길드원 중 2명이 칼날 함정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포션으로 응급처치는 했지만 이어지는 싸움에서 전투력이 급감.

미궁의 마수들은 영악했다.

헌터들이 약해진 틈을 노려 계속해서 몰려왔다.

'살아남는게 고작이었다.'

힘겨운 싸움을 이어온 지 약 일주일.

가지고 있던 식량은 마수들을 상대하면서 대부분 잃어버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은 진작에 다 먹었다.

'이제 다 끝이야.'

이정훈은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구조대는 안 온다. 시간이 너무 일러. 유일한 희망은 누군가 여기를 지나가주길 바라는 건데.'

그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길드장으로서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속은 바싹바싹 타들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크르르······.

으르르······.

미궁의 벽 너머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둠 너머에서 맹수의 눈빛이 번뜩였다.

"기, 길드장······."

"크윽."

길드원들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컨디션은 최악. 전투를 치를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끝까지 해보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도 이정훈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악의 상황이지만 자신만은 평정심을 지켜야 했으니까.

"절대 포기하지마. 끝까지 버티면······. 살아나갈 수 있을 거야."

효과는 있었다.

길드장의 지시에 팀원들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그들의 눈에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 있었다.

"길드장 말이 맞아. 발버둥은 쳐봐야지."

"해보자. 해보자고."

"······마지막 마법 준비할게."

그런 팀원들을 바라보며 이정훈 또한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포기하기엔 이르다. 어디 한 번 해보자.'

죽기 살기로 싸워서 이기고, 마수의 고기라도 씹어먹으며 살아남아야했다.

서걱-! 콰앙! 촤아악!

아성 길드의 모두의 마음이 하나로 모였다. 그들은 있는 힘을 쥐어짜서 눈앞의 늑대 마수 몇 마리를 베어 넘겼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 고비를 다시 한 번 넘길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희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올리려는 찰나.

"자, 잠깐. 길드장. 저 마수······."

길드원 중 하나가 손가락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은 미친듯이 떨리고 있었다.

어둠을 뚫고 나온 회색 늑대 한 마리.

그르르르.

놈의 머리 위에는 하얀 뿔이 자라나 있었다.

"호, 혼 울프······."

길드장 이정훈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아니, 이정훈뿐만 아니라 모든 길드원이 마찬가지였다.

엘리트 마수 '혼 울프'.

녀석이 아성 길드를 지옥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었다. 이정훈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저 놈은 못 이겨."

"도, 도망가야······."

길드원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이었다.

콰아앙—!

별안간 어둠 속에서 뛰어오른 혼 울프.

놈의 앞발이 이정훈의 가죽 갑옷을 강타했다.

뻐억! 쿠웅!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이정훈이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꺄아악-!"

"길드장!"

패닉에 빠진 길드원들의 비명.

길드원 중 그 누구도 혼울프의 움직임에 반응하지 못했다.

그만한 속도 차이였다.

도망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그르르르······.

혼울프는 눈 앞에 놓인 먹이들을 바라보며 만족스럽게 그르렁거렸다.

"끝인가."

"아······."

아성 길드는 여기서 끝이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구나.

길드원 중 하나가 두 눈을 질끈 감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

별안간 미궁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바닥이 심하게 떨려 제대로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할 지경.

"지진?!"

"뭐, 뭐야?!"

갑작스런 진동에 혼울프와 부하 늑대들이 움직임을 멈췄다.

"지금이야! 멍하니 서 있지 말고 도망쳐!"

아성 길드원들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때마침 일어난 지진이 도망갈 시간을 벌어줬으니까.

하지만 혼울프가 자리에 멈춰선 이유는 지진 때문이 아니었다.

그르르······?

압도적인 기운이.

숨조차 쉴 수 없는 강대한 기운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 *

털이 곤두서고, 등줄기가 훅 차가워지는 감각.

혼울프의 본능이 시시각각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그건 줄곧 미궁의 포식자로서 군림하던 혼울프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었다.

콰과과과!

어느덧 가깝게 다가온 굉음에,

맹수의 눈동자가 어둠 속을 주시했다.

혼울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날아오는 것은 까마귀 한 마리였다.

그러나 평범한 까마귀가 아니었다.

까마귀는 막대한 마력의 기류를 형성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하며 돌진해 오고 있었다.

콰과과과—!

미궁에 배치해놨던 늑대 마수들을 갈갈이 찢어버리며,

보이지 않는 장소에 숨겨져 있던 함정들을 죄다 파괴해버리며.

그것은 미친 듯한 기세로 돌진해오고 있었다.

"아우우!"

혼울프는 하울링과 함께 몸을 부풀렸다. 뿔 위로 모여든 붉은 마력에 의해 전신의 털이 삐죽하게 솟아올랐다.

전에 없던 전력(全力).

엘리트 마수 특유의 마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는 바로 그 순간.

푸화악-!

까마귀와 혼울프의 마력이 충돌했다. 그러나 마력 폭발은 없었다.

혼울프와 그 부하들이 통째로 갈려 나갔을 뿐이었다.

평범한 마수나 함정과 다를 바 없이. 미궁을 호령하던 엘리트 마수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꺄아악—!"

"미, 미친—!"

그 광경을 바라보던 아성 길드의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누군가는 눈을 질끈 감고, 누군가는 양 손을 앞으로 들어 올렸다.

엘리트 마수인 혼 울프가 증발했다.

초자연적인 현상?

엘리트 마수를 뛰어넘는 마수의 출현?

그게 무엇이든 중요치 않았다.

저 까마귀가 지나가는 순간,

자신들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으니까.

콰과과과—!

기세 좋게 미궁을 박살내며 전진하는 까마귀 한 마리.

"으아악!"

"제발!"

"희정아 사랑했다!"

길드원 모두가 죽을 직감하는 바로 그 순간.

뚝.

마력의 폭풍이 멎었다.

미궁을 빠르게 날아오던 까마귀가 기적적으로 멈춰섰다.

까마귀는 허공에 멈춰선 채 조용히 길드원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허억."

"머, 멈췄다? 안움직이는 건가?"

"오빠. 아까 뭐라고······?"

"자, 잠깐. 길드장! 괜찮아요?!"

길드원 하나가 반사적으로 길드장에게로 뛰어갔다.

혼울프에게 당한 길드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외상은 없지만 내상이 심각할지도 몰랐다.

"젠장, 포션 남은 거 없어?"

"······없어. 하나도."

곤란해하던 그때였다.

허공에서 포션 한 병이 떨어졌다.

"어?"

얼떨결에 포션을 받아든 길드원이 눈을 끔뻑였다. 자연스레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까마귀를 향해 시선이 고정되었다.

"설마 까마귀님이 주신 겁니까?"

"에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길드원들이 쭈뼛대던 찰나.

"네 놈들은 미궁에서 길을 잃은 건가?"

까마귀가 입을 열었다.

"마, 말했어."

"까마귀가 말했다."

놀란 길드원들에게 아랑곳하지 않고 까마귀 루시퍼가 말을 이었다.

"살고 싶으면 따라와라. 내 주인께서 네 놈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예?"

무어라 물을 새도 없이 까마귀는 길드원들을 지나쳐갔다.

"길드장 정신이 좀 들어?"

"끄으으······."

"오빠, 근데 아까 뭐라고 하지 않았어?"

"일단 쫓아가자!"

아성 길드의 모두가 까마귀의 뒤를 따라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탈출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서.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맨 앞.

까마귀의 바로 뒤쪽.

은신의 가면을 쓰고 있던 주강혁이 있었다.

'루시퍼 녀석, 폼 오지게 잡네.'

누가 보면 까마귀가 아니라 영물인 줄 알겠다.

뭐, 저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틀린 말도 아닌가.

주강혁은 뒤쪽에서 따라오는 길드 사람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위험했던 거겠지.'

루시퍼가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려줬었다.

혹시나 해서 이쪽 길로 왔던 건데.

도움이 되었다면 다행이다.

주강혁은 방금 루시퍼가 갈아버린 혼울프에게서 떨어진 마정석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일반 마정석과는 다른 영롱한 노란빛을 띈 마정석.

『 독특한 마정석(★) 』

- 엘리트 마수에게서만 나오는 마정석

엘리트 마수에게서만 나오는 특수 마정석이었다.

나도 말로만 들어봤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가격은 약 2000만원.

"······엘리트 마수를 한 번에 찢은거야?"

"네? 아하. 아까 그놈이 엘리트 마수였군요. 너무 약해서 그냥 늑대인 줄 알았습니다."

루시퍼는 별 거 아니라는 듯 날개를 퍼덕이며 전진했다.

······이 녀석은 도대체 얼마나 센 걸까.

10화 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