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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3 - 120-130

120화 각성 신호탄(5)

할짝할짝―

고개를 요리조리 돌리며 간지러운 감촉을 피하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케로스의 집요한 공격에 릴리는 투정을 부리며 눈을 떴다.

"응? 여긴 어디야?"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눈을 비비며 주변을 둘러봤다. 빗소리만 들리는 마차 안에는 둘 뿐이었다. 마부는 사라진 뒤였고, 마차만 울창한 숲 가운데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녀는 소나기를 퍼붓는 밤하늘을 가리키며 케로스를 바라봤다.

"나 오래 잤어?"

"멍."

"반나절? 얼마 안 잤잖아. 아침까지 자게 놔두지."

하품을 하며 진지하게 더 잘까 고민하는데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비바람이 불어오는 뻥 뚫린 마차 공간.

귀찮은 것 다음으로 싫은 건 추위였다.

따뜻한 여관에서 쉬는 게 더 낫다는 결론이 나오자, 릴리는 로브를 둘러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세찬 비가 로브를 두들겼다.

그녀가 나오자 케로스가 마차에서 뛰어내린 뒤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근처 마을을 찾는 건 언제나 케로스의 몫이었다.

핏―

케로스가 사라진 순간 릴리의 모습도 땅으로 푹 꺼졌다.

* * *

"와, 장난 아니다."

숲을 나오자 잘 닦인 도로가 시야에 들어왔다.

넓은 도로 위로 수많은 인파가 오고 가는 풍경이 펼쳐졌다. 상인, 용병 등 한눈에 직업을 알 수 있는 익숙한 복장도 많이 보였다.

마차와 수레도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볼거리 천지였다.

숲을 나온 이래 가장 많은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길을 따라 시선을 쭉 옮기니 저 멀리 큼지막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 몇 개를 붙여놔도 저 성벽보단 작을 것 같았다.

대도시 블라이어.

릴리는 아주 큰 성벽을 본 순간 저곳이 목적지라는 것을 깨닫곤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작은 한숨 소리와 함께 목덜미로 폭신한 감각이 느껴졌다.

인형 놀이를 시작한 케로스의 머리를 쓰다듬곤 숲을 나와 길 쪽으로 이동했다.

인파 속에 파묻혀 인간들을 구경하고 싶었다.

"...?"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길 위에 서기 무섭게 길게 늘어진 행렬에 구멍이 생겼다.

마치 보이지 않은 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이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그전에 방문했던 마을과 비슷한 반응이지만, 묘하게 달랐다.

머릿수가 엄청 많아서일까.

시선을 무작정 피했던 그들과 달리, 이곳에선 감정을 담은 눈동자 일부가 자신을 똑바로 바라봤다.

두려움 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짙은 원망.

늘 사랑만 받고 자랐던 그녀에겐 어색하고 외로운 감정이었다.

설마 이전 마을도 저런 눈빛이었을까?

관심이 없었으니 알 도리가 없었다.

이유를 물어볼까 고민하고 있을 때, 성벽 쪽에서 큰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그르르르륵!

"...!"

톱니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웅성거리던 소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빼꼼 내밀며 저 너머를 바라보는데 몰려 있던 인파가 빠르게 반으로 갈라지더니, 그 사이에서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붉은 물결.

망토를 두른 무리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그들이 오기도 전에 허겁지겁 도망치기 바빴다.

더럽고 추악한 영력들이 사방을 가득 채웠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기운.

'흑주술사.'

릴리가 그들의 정체를 정의했을 때, 붉은 물결이 그녀 앞에 멈춰 섰다.

가만히 있다 보니 홀로 그들과 마주한 상황에 펼쳐졌다.

그들은 릴리를 조용히 주시했다.

잠시 후, 선두에 있던 주술사가 릴리에게 손을 뻗었다.

우우웅―

"...."

릴리는 걸친 망토를 살폈다.

망토가 나직하게 떨리며 울기 시작했다.

저 주술사가 영력을 일으키자 망토가 반응을 보였다.

붉은 망토.

민무늬 붉은 망토야 상점 어딜 가든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신호에 맞춰 특유의 영력을 뿜어내는 망토는 어디에서도 판매하지 않았다.

평범한 망토라 생각했는데, 영력에 공명하며 음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영력 동화 현상.'

릴리는 망토의 현상을 한눈에 알아봤다.

마녀들도 신분 확인을 위해 자주 사용하는 주술이었다. 마녀로 위장하여 숲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해마다 수백 명은 되기 때문이다.

이 망토는 신분증 같은 것이었다.

릴리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멀찍이 거리를 둔 채 굳어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수백 수천의 인파들.

걸친 옷들을 살펴보니 붉은 망토를 걸친 이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인간들이 자신에게 보인 반응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녀들의 긴 챙처럼, 붉은 망토는 이곳 흑주술사들의 상징 같았다.

조금만 신경 쓰면 알 수 있는 반응이지만, 그녀는 흥미를 느끼지 않은 것엔 철저히 무관심을 보였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너무 귀찮거든.

영력을 거둔 주술사는 곁의 주술사들과 대화를 나눴다.

'방금 망토의 신분을 확인했어.'

릴리의 눈동자가 순간 샛노랗게 번뜩였다.

만월의 재능인 만월의 눈을 펼친 순간 망토에서 흘러나오는 영력 배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배열을 삽시간에 파악하곤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저주.

이 망토의 주인은 저주 계열의 흑주술사 같았다.

"저주 학파 아그레일드."

"...."

"왜 늦었지? 복귀 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을 텐데?"

선두에 선 이가 대장인 모양이었다.

쇠 긁는 듯한 탁한 소리, 성별 구분이 힘든 중성음.

주술로 변조된 목소리다.

뒤가 구린 흑주술사답게 앞선 이들 중에 얼굴을 드러낸 주술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자신을 부른 아그레일드란 이름도 진짜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영력 동화를 통해 서로의 신분을 확인하는 모양인데, 릴리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주술로 이야기하면 오히려 편했다.

세상 물정은 하나도 몰라도, 주술에 관해선 장로 할머니보다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흑주술이라면 그녀가 그나마 관심 있어 하는 분야였다.

복귀 신호?

듣는 순간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잃어버렸다."

"통신구를 잃어버려? 다른 동료들은 어디 있지? 셋은 항시 같이 다닌다는 둥지의 원칙도 잃어버렸나?"

"...."

"어디서 오는 길이지?"

"위쪽 마을."

"…위쪽 마을?"

주술사의 반응이 이상한 듯 보이자, 릴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기억하는 게 귀찮아서 그렇지, 일단 집중하면 한 번 들었던 건 모두 기억하는 그녀였다.

붉은 망토가 주술사의 것이라면 주술사를 만났던 마을일 것이다.

"반디 마을이다."

"임무가 뭐였지?"

"제물 수급."

"흠…."

릴리는 대답을 하며 주술사 무리를 살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총 머릿수는 스물다섯.

많다.

그중에는 주술사가 아닌 존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붉은 갑주로 완전히 무장된 큰 덩치들이 보였다.

생기(生氣)가 전혀 느껴지지 않아 만월의 눈으로 살펴보니 속 안이 텅 비어 있었다. 수많은 영혼을 붙이고 조립해서 만든 혼탁하고 이질적인 기운만 보였다.

'주술 인형이네.'

흑주술사들의 대표 인형인 반다이크 같았다.

무게를 두면 효율이 엄청나게 떨어질 텐데, 왜 반다이크의 포맷을 저렇게 해놨지?

보통 주술 붕대로 단단히 둘러 형체를 유지했는데, 이것들은 단단한 갑주로 도배해놨다.

집요할 만큼 방어에 신경 쓴 형태였다.

잡생각도 잠시 흠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선두에 선 주술사 곁에 머물던 다른 주술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영력이 뭉치는 것이 보였다.

'주술? 들킨 건가? 어디서 걸린 거지?'

판단은 빨랐다.

흑주술사 열다섯, 주술 인형 열 개체.

케로스 없이는 부담스럽다.

문제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여기서 케로스가 본모습을 보이면 숲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몰랐다.

그건 싫었다.

인간들의 세상을 더 구경하고 싶었다.

케로스에게 도주 신호를 보내려고 하는데, 주술사의 손에서 익숙한 영력 배열이 만월의 눈에 담겼다.

착용한 망토에서 흘러나왔던 영력 배열과 유사한 기운이었다.

저주다.

게다가 기운이 미약했다.

릴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주술사가 펼치는 저주의 배열을 흉내 내서 영력을 조합했다.

어렵지 않은 기본 조합이라 가능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주술사가 저주를 쏟아내자, 릴리도 똑같은 저주를 퍼부었다.

"…큭!"

주술사의 몸이 검게 물들더니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보곤 릴리도 똑같이 비틀거리곤 천천히 저주를 풀어냈다.

저주를 풀어내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배열을 역으로 돌리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저들이 이 해주 과정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었다면 경악할 테지만, 그녀에겐 그리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주술사가 몇 차례 저주 주술을 펼치자, 릴리는 빠르게 반응하며 저주를 똑같이 흉내 냈다.

처음 보는 저주의 형태지만, 기본에 맞춰져 있어서 어렵지 않았다.

잠시 후, 선두에 선 이가 가로막았다.

"그 정도면 충분해. 의심할 필요는 없겠어."

최근에 둥지에서 개발한 저주 계열을 모조리 펼쳤다.

신분은 확실했다.

굳이 한 번 더 확인 작업을 한 이유는 최근 라웁 숲으로 파견된 주술사들이 살해당한 사건 때문이었다.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졌다.

셋을 이루지 않은 주술사는 신분을 반드시 확인하라고.

흑주술사들은 대부분 범죄자 출신이라 신분을 밝히는 조건이면 영입이 힘든 경우가 많았다.

각인된 망토로 1차 신분을 확인하고, 둥지에서 개발한 최신 주술로 2차 확인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받아라."

"...?"

주술사가 품에서 던진 건 머리통만 한 수정구였다.

처음에는 통신구인 줄 알았는데 통신구의 반경을 늘려주는 보조 도구 같았다.

'이런 것도 있었어?'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수정구를 받아든 릴리는 눈앞의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의심은 피한 것 같은데, 어째 상황이 꼬인 것 같았다.

"마스터의 지시가 떨어졌다. 너도 지금부터 합류해라."

"…어?"

"이동한다."

주술사들은 인파를 헤집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가는 주술사 무리를 얼떨결에 따라갔다.

뒤를 돌아보니 대도시 블라이어가 점점 멀어졌다.

따스한 욕조와 포근한 침대, 최고로 기대되는 대도시의 음식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다.

'…어쩌지?'

대도시에서 시간을 보내며 아서 클레이튼을 찾으려고 했는데 계획이 틀어졌다.

분위기를 살폈는데 이탈은 당분간 힘들 것 같았다.

'상황을 봐서 튀면 되겠지.'

신체 강화를 했는지 주술사들의 몸놀림이 상당히 빨라서 릴리도 일단 이동하는 데 집중했다.

마차로 가기 힘든 가파른 숲 사이를 빠르게 주파했는데, 쏟아지는 비에도 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근데 어디로 가는 거지?

의문은 그녀가 쥐고 있는 수정구를 통해 풀 수 있었다.

통신구의 보조 도구.

메인 통신으로 사용하는 빛나는 수정구는 무리를 이끄는 주술사가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목소리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듯 실시간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것처럼 보였다.

[블라이어 쪽은 어찌 됐지?]

"가용 전력 전부가 출동했다."

[반다이크 모두 중갑으로 무장시켰나?]

"무장 완료했다."

[황금빛의 존재를 발견했다. 되도록 그 존재를 만나면 물리적인 피해는 피해라.]

"정체 파악은 끝났나?"

주술사의 물음에 일순간 시끄러웠던 통신구가 침묵했다. 잠시 후, 나른한 사내의 목소리가 수정구에서 흘러나오자 주술사들의 기운에 긴장감이 서렸다.

무리가 멈춰 섰다.

누구기에 달리는 것도 멈춘 거지?

[블라이어 성주다.]

"…충!"

['알렉스 마르샤'로 판명. 베네타의 신성(新星)으로 헌트(Hunt)의 일원으로 떠오른 인물이다.]

121화 각성 신호탄(6)

릴리는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블라이어 영토 안에서 심각한 사건이 터진 것 같은데, 그 내용이 무척 흥미롭다.

마치, 불난 집을 구경하는 재미랄까.

흑주술사 무리를 학살하고 도주한 범인을 찾고 있는데, 블라이어 성주가 그 정체를 언급한 이후로 통신구에서 알렉스 마르샤란 이름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알렉스? 알렉스가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이다.

물론, 누구의 이름을 듣던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이지만.

블라이어 성주의 이름은 알았다.

카멜.

몇 달 전 숲에서 처음 마주했던 노예 사냥꾼들이 지나가듯 이야기한 것을 들었다.

그 뒤로는,

"응? 없네?"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블라이어 성주를 입에 담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붉은 망토를 바라보는 시선을 떠올려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흑주술사를 품에 안으려면 제물은 필수다.

공포를 통한 지배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혹여 제물로 끌려갈까 봐 그 이름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저 악질들조차도 목소리에 긴장감이 맴도는 것을 보니 아주아주 무서운 인간일 것 같았다.

우지끈-!

주술사 무리가 빽빽한 나무숲을 뚫고 너른 들판을 질주하기 시작했다.

매섭게 달리니 거센 빗방울이 온몸을 따갑게 때렸다.

인상을 구기며 로브를 꽉 조이고 있는데, 젖은 인형으로 펄떡대던 케로스가 불만을 표했다.

"꾸릉… 꾸륵!"

"참아. 걸리면 이 날씨에 한바탕 굴러야 한다고. 알았니… 아얏!"

쓰다듬으려고 했더니 손가락을 꽉 깨문다.

볼때기를 쭉쭉 잡아당겨 케로스를 진압(?)한 후, 손에 쥐어진 통신 보조 수정구에 관심을 보였다.

빗속에서도 통신구에선 주술사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흘러나왔다.

말하는 지역을 들어보니 블라이어 영토 이곳저곳에 주술사들이 배치된 것 같았다.

각 지역의 정보를 빠르게 공유하며 주어진 정답으로 나아갔는데, 그 집단 지성을 지켜보며 릴리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범위한 통신 범위가 이를 가능케 한 것 같았다.

'통신망을 어떻게 구축한 거지?'

오르도르 숲에도 이를 구축하면 편할 것 같았다.

밥을 먹을 때나 간식이 필요할 때, 통신구로 부탁하면 얼마나 편하겠는가.

모든 능력을 자신의 편안함과 직결시키는 그녀가 잡생각을 하는 사이,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통곡의 언덕에서 수상한 흔적 발견. 지시에 없던 주술사들이 다녀갔다. 머릿수는 두 명이고 떠난 흔적은 남쪽. 빠르게 추적하겠다.]

잠시 후,

[남쪽 마을에서 마차를 타고 간 흔적 발견했다. 흔적은 계속 남쪽으로 이어져 있다. 코룬 강과 마주한 방향이다.]

코룬 강을 언급한 순간, 한동안 침묵하고 있던 블라이어 성주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통신을 듣는 모든 이는 임무를 중단하고 코룬 강에 대기 중인 사냥개 부대와 합류하라. 긴급이다. 서둘러라.]

"충!"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이동하던 주술사 무리의 방향이 남쪽으로 변경됐다.

"모두 반다이크 위로 올라타라."

끝 모를 평지가 펼쳐지자 주술사들은 반다이크를 이동 수단으로 이용했다.

열 개체의 반다이크 양어깨 위로 주술사들이 올라탔고, 릴리는 가장 뒤편에 있는 반다이크의 어깨에 홀로 걸터앉았다.

쿵. 쿵. 쿵. 쿵.

진동이 상당했다.

철갑으로 무장된 주술 인형들이지만 속도는 무척이나 빨랐다. 말보단 느리지만, 일반 마차보다는 빠른 것 같았다.

게다가,

콰앙! 쾅! 쾅!!

바위든, 나무든, 막아서는 방해물들을 모조리 때려 부수며 나아갔다.

그녀의 눈에는 무식한 멧돼지들처럼 보였다.

이동이 고착화되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앞을 살피던 릴리는 고민을 시작했다.

눈치채지 못하게 일단 무리의 뒤를 잡았다. 이대로 기척을 죽이고 사라지면 한동안 눈치채지 못할 것 같았다.

'떠날까? 아니면 따라갈까?'

조금 전까진 블라이어 영지가 눈앞에 아른거려서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선택지가 생겼다.

'화끈한 싸움이 될 것 같은데.'

릴리는 먹는 것만큼 싸움 구경도 좋아했다.

특히 승패를 정하는 것을 즐겼다.

만월의 눈을 지닌 이후 생긴 버릇 같은 것인데, 상대가 흑주술사 무리라 더욱 관심이 갔다.

게다가 통신을 들어보니 엄청 많은 인원이 알렉스란 인간을 잡기 위해 동원된 것 같았다.

그는 강할까?

강하다면 얼마나 강할까?

또한, 부딪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두 손을 모은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릴리의 모습에 케로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또 망상이 시작된 모양. 한동안 선택이 미뤄질 것 같았다.

그때,

[새로운 소식이 들어왔다. 잠시 대기.]

블라이어 성주의 목소리에 주술사들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무슨 정보이기에 모든 이의 움직임을 멈춘 것일까.

들어보니 무슨 편지를 받았다고 한 것 같은데 정확히 잘 모르겠다.

퍼붓는 소나기 한가운데에 주술사들은 침묵한 채 대기했다.

잠시 후, 성주의 지시가 떨어졌다.

[지시를 변경한다. 사냥개 부대를 제외한 모든 부대는 코룬 강을 수색하라. 수색 대상은 록터 펠리스. 알렉스의 수색은 전면 중단한다.]

주술사 부대는 다시 움직였다.

지시는 변경됐지만, 목적지는 같았다. 똑같은 방향으로 움직이며 주술사들은 지시에 대한 추측을 하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야."

"소문?"

"헌트의 행동 대장 록터 팰리스."

"아, 헌트. 그럼 알렉스가 헌트 일원인 록터를 돕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거야?"

"그러니 록터 수색을 명하셨겠지. 알렉스가 록터와 합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둔 거야."

릴리는 깜짝 놀랐다.

흑주술사들의 머리가 이렇게 좋았나? 대화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놀람도 잠시 록터 펠리스를 중얼거리던 그녀는 손뼉을 치곤 바로 결정을 내렸다.

'100만 골드! 가자!'

록터 펠리스는 그녀도 알고 있는 유명한 이름이었다. 아니, 이름보단 100만 골드 현상금에 더 꽂혔다고 해야 하나?

어딜 가든 록터의 이야기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100만 골드는 마을 수십 채를 살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100골드 현상범까지 엮인 사건이다. 이 구경을 놓치면 억울해서 고기도 못 먹을 것 같았다.

기회를 봐서 100만 골드도 챙길 수 있는 기회.

가만히 있으면 저들이 100만 골드 앞으로 자신을 데려다줄 것이다.

"그런데 코룬 강은 블라이어 남쪽 지역을 관통하는 거대한 물줄기인데, 그 광범위한 지역에서 언제 록터를 찾지?"

"받은 것이 있으니 구르라면 굴러야지. 당분간 비에 홀딱 젖은 채 고생하겠어."

"오래 안 걸릴 거야. 다수가 동원된 것 같으니까."

주술사들의 대화에 쉽지 않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그녀는 찌릿한 느낌과 함께 등골에 소름이 돋아나는 감각을 느꼈다.

두 눈에 불꽃이 튀는 듯한 현상.

그녀는 다급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거."

먹구름 사이로 푸른 스파크가 번쩍이며 튄다.

릴리는 주술사들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중요한 현상이 일어났는데 반응들이 없다.

저들 사이에서 저 현상을 보는 이는 없는 건가?

마법사들처럼 추악한 탐욕을 마음에 담고 있으니, 세계의 눈도 저들을 외면한 모양이었다.

신을 받드는 자 중에 뛰어난 일부는 지금쯤 저 현상을 올려다보고 있을 것이다.

"댕댕아, 새로운 신명의 주인이 곧 탄생하려나 봐. 이번엔 어느 지역일까? 댕댕아, 댕댕아? 자니?"

신명 각성의 전조 현상.

'하늘의 부름'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록터!"

칼의 다급한 외침에 록터는 등을 천천히 돌렸다.

그를 향해 매섭게 쇄도하는 암살자들이 보였다. 다양한 무기를 움켜쥔 채 록터를 향해 휘둘렀다.

록터는 들고 있던 나무 상자를 조심스레 내려놓고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핏물로 녹슨 검날이 뽑혀 나오고, 록터는 상자를 지키려는 듯 움직이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돌처럼 단단한 자세다.

그리고 가볍게 휘둘렀다.

베기로 이뤄진 단순한 움직임.

하지만 결과는 놀라웠다.

카카카카캉-!

"...!"

쏟아지던 무기들이 허공 위로 튕겨 올라갔다. 당혹스러운 암살자들의 부릅뜬 눈동자.

하지만 그 눈동자는 잠시 후 감지 못한 채 두둥실 떠올랐다.

접근했던 암살자들의 머리가 동시에 굴러떨어졌다.

"...."

록터는 검을 착검하곤 상자를 부드럽게 집어 들었다. 그리곤 다시 강 쪽으로 등을 돌렸다.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눈앞의 광경을 바라봤다.

척후조 따위의 암살자들에게 당하리라 생각지 않았지만, 암살자를 제거하는 모습을 보니 같은 암살자로서 섬뜩할 정도다.

칼은 고개를 돌려 엘튼을 바라봤다.

엘튼은 라웁 숲의 경험을 통해 현재 4성에 오른 상태다. 게다가 불꽃을 사용하는 특성 암살자였다. 그런 그가 신음을 흘리고 있다.

"어때?"

"…절대 못 죽입니다."

"5성이라서?"

"아뇨. 4성이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치고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틈?"

"검을 휘둘러도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기본기가… 미쳤습니다."

엘튼의 입에서 기본기가 '미쳤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면 소문대로 꼴통 기사가 맞는 모양이었다.

'몇 번을 봐도 믿기 힘들단 말이지.'

칼은 고개를 흔들며 빗줄기 중심에 우뚝 선 록터의 거대한 등을 바라봤다.

저 등을 만들기 위해 저 기사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기초 체력 5년.

기초 검술 10년.

베기를 위한 기초 훈련만 합이 15년.

모두가 그런 록터를 비웃었을 때 그는 단 하나의 검술로 5성을 각성한 '무(無)특성' 실력자였다.

그리고, 그런 무특성을 두고 특성 개화자들이 대놓고 비웃음을 날렸을 때, 록터는 검을 들었다.

'무특성 개화자들의 희망.'

록터는 5성 특성 개화자와 여러 차례 부딪쳐 모두 승리한 유일무이(唯一無二)의 무특성 각성자였다.

꼴통 기사.

사람들이 록터를 보며 말하는 꼴통을 다른 단어로 표현하자면 무식한 노력을 뜻했다.

피우지 못한 재능을 노력으로 채운 미련함.

록터는 무식할 정도로 '노력에 미친 자'였다.

"마스터, 모두 처리했습니다."

보고가 들리자 칼은 시선을 돌렸다.

매복해 있던 수하들이 도착해 있었다.

코룬 강에 접근하자, 척후조에 발각당한 것인데 다행히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조금 전 록터를 노린 암살자들은 퇴로가 막혀 최후의 발악을 하던 이들이었다.

신호탄을 가장 우려를 했는데 날씨가 도왔다.

"머릿수는?"

"서른이 조금 넘습니다."

"빌어먹을 많이도 보냈네. 사냥개 새끼들이 냄새를 맡겠어."

"가짜 흔적을 만들어놓을까요?"

"아니. 지금은 굳이 만들 필요 없겠어."

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을 뜨기 힘들 정도로 쏟아지는 빗줄기.

흔적은 순식간에 지워질 것이다.

날씨가 우리를 돕는 상황이었다.

문제는 록터다.

똥고집도 저런 똥고집이 없었다.

"저 꼴통 녀석이 당최 말을 안 들어 처먹어서 우리만 개고생 중이잖아."

"가족 일이지 않습니까?"

"나도 알아. 그러니까. 도와준 거라고."

본보기로 세워놓은 시체들을 훔쳐 록터에게 건넸다.

그때 처음으로 우직한 기사의 눈물을 봤다.

칼 일행은 가만히 록터를 지켜봤다.

나무 상자에서 새하얀 뼛가루를 강물로 흘려보내는 그가 보인다.

이 시간만큼은 방해해선 안 된다.

록터는 지금 죽은 가족들을 가슴 속에서 보내는 중이었으니까.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코룬 강 하류로 온 이유도 그 때문이다.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장소.

그가 서 있는 장소는 기사가 되기 전의 록터 펠리스가 아내와 딸을 데리고 처음 자리 잡았던 고향이었다.

"...."

아내와 딸을 태운 잿가루를 강 아래 흘려보냈다.

이곳에서 만나 결혼했고, 딸을 낳았다. 전(前)대 블라이어 가주의 영입 제안을 받아들이고 20년 동안 블라이어를 위해 살았다.

남은 건 전대 가주의 혈육이 본보기로 내건 썩은 시체뿐이었다.

아내와 딸을 보내고, 친우들을 보냈다.

보통 무덤을 만들지만, 록터는 사랑하는 이들이 이 혼탁한 세상에 남길 바라지 않았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롭게 태어나 행복하게 살거라."

모든 것을 잃었다.

자신도 따라가고 싶지만, 그에겐 뒷일이 남았다.

모두를 강물에 떠나보내고, 록터는 품에서 깃발을 꺼냈다.

깃발을 보자 씁쓸한 미소가 그려졌다.

기사 단장이 됐을 때, 전대 가주가 수여한 블라이어의 명예 깃발이다.

록터는 깃발을 펼쳤다.

비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나직이 블라이어의 충성 구절을 읊조렸다.

"일평생을 지켰던 가문이여, 동고동락했던 내 사랑스러운 영지여. 그 찬란했던 나의 고향, 블라이어여."

록터는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이젠 감정이 메말라서 그에겐 단 하나의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다 죽인다."

록터는 덤덤한 시선으로 펄럭이는 깃발을 사선으로 잘라냈다.

카멜 블레이저의 대항마인 배덕의 기사.

먹구름이 푸른 스파크를 띠며 울부짖기 시작했다.

신을 받드는 자들만 들을 수 있는 소리.

누군가는 신명을 느끼고, 누군가는 보고, 누군가는 그 '위치'를 알 수 있는.

하늘의 부름, 신명이 터졌다.

모두가 아는 각성 신호탄이었다.

122화 제발 닥치고 있어라

"고맙다."

강에서 돌아온 록터가 가슴 위로 주먹을 올리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칼은 록터의 인사에 어색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적들에게 포위되어 도움을 줬을 때도, 가족들의 시신을 되찾아왔을 때도 감정을 표하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고개를 숙였다.

칼은 누군가의 인사가 이토록 묵직할 수 있구나, 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네 부탁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이미 조건은 말했을 텐데."

"복수를 도와달라는 것 말인가?"

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록터는 희미하게 웃었다. 복수의 대상은 달랐지만, 복수라는 것에서 묘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복수?

도와준다.

그 마음을 이젠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으니까.

록터가 조용히 손을 내밀자, 칼은 미소를 띤 채 손을 맞잡았다.

"헛고생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최선을 다해 도와주겠다. 대신… 나를 도와다오."

"설마 블라이어에게 복수하려고?"

록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난감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중견 조직인 크룩스조차 타인의 힘을 빌려 복수를 이루려고 하는 처지에 블라이어?

블라이어 성주 한 마디면 크룩스도 전멸을 피하지 못한다. 자신들 따위는 목에 손 긋는 시늉 한 번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너무 큰 산이야."

"대신 싸워달라는 억지스러운 부탁은 하지 않겠다. 지금처럼 조력만 해줘도 충분하다."

"생각한 계획이라도 있나?"

"이제 막 탈출했는데, 있을 리가… 전혀 없다. 하지만 맞서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

안 되면 혼자라도 싸울 인간이라 뭐라 말도 못 하겠다.

'록터 펠리스를 도울만한 세력이 남아 있으려나?'

칼 일행은 그동안 블라이어에 둥지를 틀고 록터의 소식이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서 블라이어의 정세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조사했는데, 현재 록터를 도울 세력은 와해되어 그 명맥조차 불투명한 상태였다. 블라이어 성주의 손속이 그만큼 잔혹하고 빨랐다는 의미였다.

정적 제거에 거침이 없다.

한 마디로 현재 록터 주변엔 자신이 전부였다.

록터의 단단한 눈빛에 칼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의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칼은 아서를 떠올렸다.

녀석의 조언대로 록터를 영입하는 건 성공했다.

엘튼이 확신했던 것처럼, 그는 크룩스를 무너뜨릴 무력을 지녔다.

복수를 도와줄 날카로운 검은 얻었는데 양날검이었다. 록터에게 달라붙은 악재가 너무나도 많았다.

블라이어와 적이 됐고, 100만 골드란 현상금이 붙으면서 실력 있는 노예 사냥꾼들의 표적이 됐다.

더 큰 문제는,

'당장 갈 곳이 없어.'

어딜 가든 사냥꾼들의 눈이 존재했다. 크룩스의 눈을 피해 수년간 도주 생활을 해왔지만, 그때와 비교해서 지금이 열 배는 더 빡신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어디로 가지?

"우선 이곳을 벗어나서 생각하자고."

아서를 믿고 록터에게 배팅을 했고 이미 물리기엔 늦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단점이 확실한 만큼, 장점도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실력이나 신뢰에 대해선 의심할 필요가 없는 사람.'

얼굴과 행동, 눈빛이 말한다.

한눈에 봐도 그는 믿을 수 있는 기사였다.

자신만 이렇게 생각할까?

아니, 대부분 록터를 보는 순간 '신뢰'를 떠올릴 것이다. 이는 아서의 조언처럼 사람을 끌어당길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될 수 있었다.

'이 위기만 벗어나면 분명 기회가 있을 텐데.'

당장 벗어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만큼 카멜의 포위망은 지독했고, 그 압박감은 움직이면서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지금.

칼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마스터?"

"무슨 일이지?"

칼을 뒤따르던 록터는 칼이 갑자기 멈춰서자 이유를 물었다.

그건 엘튼도 마찬가지였다.

마스터의 특성은 위기 감별사.

마스터는 본능적으로 안전한 방향으로 루트를 정해 움직이기에 그 뒤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블라이어에서도, 다른 곳에서도, 줄곧 안전하게 이동한 이유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뭐지?"

칼은 주변을 서성이며 움직였는데 방향을 전혀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 뒷골이 찌르르 울리고 가슴이 분탕질을 친다.

이 감각,

크룩스의 마스터가 자신에게 붐(Boom)을 먹었을 때의 그 감각이다. 어느 방향으로 이동하든 목숨이 위태롭다. 제자리에 선 채 칼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X된 거 같은데, 이유가 뭐지? 어디서 잘못된 거야?"

하늘을 바라봤지만, 신호탄이나 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럴 때 내리는 소나기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환경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척후조를 쓰러뜨릴 때까지만 해도 안전했던 루트가, 지금은 사지(死地)로 변해 있었다.

칼은 고민에 빠졌다.

수많은 경험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결국, 판단을 내렸고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적들이 우리의 이동 루트를 모조리 꿰고 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이것 말고는 지금 같은 감각을 설명할 수 없었다.

칼은 자신의 경험을 믿었다.

적들은 우리의 이동 루트를 파악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두고 움직여야 한다.

판단을 내린 칼은 근처 숲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록터가 그 뒤를 따르며 물었다.

"위치가 발각당했나?"

"몰라. 그런데 느낌이 너무 싸해. 적들이 어디서든 나타날 것 같다."

칼은 말을 내뱉으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그 모습에 뒤를 따르던 일행도 무기를 꺼내 들었고, 칼도 검자루를 잡았다.

전투를 피할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적들이 나타나면?"

"나타난 적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그 방향으로 질주한다."

"적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도주한다고?"

"그래."

"이유가 뭐지?"

"그게 포위망을 흔들기 좋거든."

칼의 말에 록터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생전 처음 듣는 황당한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경험상으로 이 방식대로 움직이는 게 생존 확률이 가장 높았어. 믿어도 돼."

"다른 방법은?"

"있었으면 진즉 내 주둥이부터 때렸을 거야."

록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칼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적들을 빠르게 제거하려면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

록터는 심호흡을 하며 전투를 준비했다.

* * *

"자, 잠깐만요."

질퍽한 땅을 밟고 가고 있는데, 넬라가 내 옷자락을 확 잡아끌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그녀의 젖은 몸에 팔뚝이 닿자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가, 가슴은 아니었지?

지금 상황에 내가 무슨 생각을.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있는데, 넬라가 다급히 내 어깨를 툭툭 치며 귓가에 대고 작게 소곤거렸다.

"떴어요."

"네? 떠요? 아, 설마...?"

넬라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리곤 품에서 신명 도구인 나뭇가지를 꺼냈는데 영롱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빛이 분명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서님이 말한 신명의 주인이 맞아요."

정말 내 말대로 이뤄지니 그녀는 무척 흥분한 모습이었다. 느낌이 싸해서 방금 뭔가 뜰 것 같다고 말했는데 정말 떴다.

빌어먹을.

맞췄는데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혹시 방향을 알 수 있습니까?"

"코룬 강 하류, 정확한 방향은 이쪽이에요."

넬라가 팔을 들어 방향을 가리켰다.

"얼마 동안 방향을 잡아낼 수 있습니까?"

"각성의 여운을 생각하면 반나절 정도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반나절. 그럼 아케인도 가능하겠죠?"

"저보다 훨씬 뛰어난 인물이니 당연하겠죠?"

짙은 한숨부터 나왔다.

"하, 염병, 미치겠네."

록터, 이 꼴통 기사는 하루만 더 늦게 각성할 것이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각성해서 날 심란하게 만드는 것일까.

"반리."

내 부름에 넬라 머리 위에서 부지런히 정찰하던 반리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없어? 진짜?"

"반리가 두 번은 묻지 말래요."

"…아, 네."

반리에게 부탁한 건, 이 주변에 서성거리던 주술사들의 기척을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마차의 흔적을 쫓아온 놈들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많아져서 마차를 버리고 움직이던 차였다.

근데 방금 그 기척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조금 전, 통신구에서 들린 학살자의 지시 때문이었다.

"모조리 코룬 강 쪽으로 움직인 건가?"

"우리에겐 다행 아닌가요?"

"글쎄요. 이게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요."

내 손에는 작은 수정구가 쥐어져 있었는데 수정구에선 여러 가지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주술사들이 쓰던 광역 통신구를 손에 넣은 것이다.

이 통신구는 반리가 마차에서 가지고 놀던 것을 빼앗은 것이었다.

반리가 넬라 몰래 빼돌렸는데, 멱살(?)을 흔들며 물어보니 반짝이는 구슬이 이뻐 보였다나?

도망치던 사냥조 주술사에게 빼앗은 것이라고 했는데, 난 구슬이 반짝였다는 부분에 집중했다.

'구슬이 반짝였다. 통신구가 작동했다. 누군가에게 우리의 정보가 흘러갔다.'

이 광범위 통신구는 마탑의 전유물이다. 마탑은 폐쇄적인 집단이라 함부로 전유물이 된 물건들을 교환하지 않는다.

'빌어먹을, 내 신명 정보가 이렇게 비싼 거였어?'

카멜이 내 신명 정보를 가지고 제대로 해 먹었다.

우리가 비에 쫄딱 젖으며 진흙 바닥을 걷고 있는 이유였다.

정체가 탄로 난 것이다.

'그 주인에 그 정령 아니랄까 봐.'

하여튼 반짝이는 물건엔 사족을 못 썼다.

미리 알았다면 다른 방법을 세웠을 텐데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블라이어 영역에 깔린 전력들이 학살자의 원격 지시에 바로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다행인 건 반리가 수정구를 챙겨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적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어쩌실 거죠?"

"아무래도 카멜의 유인책 같습니다."

"네? 유인책이요? 누구를...."

"저요."

"아서님을요?"

"록터를 미끼로 저까지 사냥할 목적인 것 같습니다."

알렉스 마르샤.

수정구를 통해 카멜이 내 존재를 파악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하나둘 밝혀지는 흔적을 통해 내 목적을 예측하고 모든 전력을 록터에게 집중시키고 있었다.

록터를 구하려는 의도가 파악 당한 것이다.

"그럼 위험한 거 아닌가요?"

"네. 위험하죠."

"이제 어쩌죠? 다른 방법을 찾아볼까요?"

"아뇨. 그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카멜에게 시간을 주면 안 된다.

게다가 록터를 잃으면 모든 계획이 어그러진다.

카멜과 정면 대결은 내 입장에선 공멸과 같았다. 아레나와 베네타가 공멸하는 사이 학살자가 베네타를 무너뜨렸던 것처럼, 카멜과 베네타가 공멸하면 또 다른 세력이 토바른을 넘볼 것이다.

"달리면서 생각하죠."

그건 안 된다.

토바른을 기반으로 나아가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려면 록터가 필요했다.

거친 빗속을 뚫으며 난 통신구에 집중했다.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주술사들의 목소리.

[사냥개 부대의 척후조가 하류 쪽을 맡고 있다.]

[코룬 강 도착. 우리는 상류부터 흔적을 찾아보겠다.]

[그럼 우리는 중간 지점을 맡지.]

[빗속이라 흔적을 직접 찾기 힘들다. 척후로 반다이크들을 나눠서 보내겠다.]

아직 록터에 관한 정보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아케인이 카멜 곁에 없는 건가?

이유야 어떻든 학살자 곁에 아케인이 머문다면 곧 알려질 정보였다.

'사냥개 부대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을까?'

통신구를 통해 대략적인 전력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주술사들의 둥지.

노예 사냥꾼.

그리고 사냥개 부대.

주술사들의 부대나 노예 사냥꾼은 얼마가 오던 무섭지 않다.

하지만 사냥개 부대는 부담스럽다.

그들은 물고 늘어지는 것에 특화된 녀석들이었다. 게다가 코룬 강 하류 쪽에 대기 중인 상태인 것 같았다.

녀석들에게 걸리면 분명 지능적으로 시간을 끌려고 할 테고, 그 사이 주술사들과 노예 사냥꾼 무리가 도착하면 무조건 죽는 게임이었다.

시간 싸움.

유인책이 펼쳐지기 전에 빠져나와야 한다.

"어디죠?"

"이쪽!"

넬라가 한쪽을 가리키자, 우거진 숲을 뚫고 미친 듯이 달렸다.

잠시 후,

콰아아아아아아-

빗소리를 뚫고 멀찍이서 흐릿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코룬 강의 물줄기가 들려온다. 처음부터 하류를 목적지로 잡고 움직였다.

반리가 신호를 보내왔다.

주술사들이 주변에 있는 모양.

노출되는 건 사양이다.

목표가 우리로 바뀌면 곤란하거든.

우리는 숲 쪽을 길게 우회해서 코룬 강 하류 주변을 돌아다녔다.

'록터라면 쉽게 당하진 않을 거야.'

누구에게 잡히든 록터 펠리스라면 수세 속에서도 능히 버틸 실력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빗줄기가 쏟아지면 잭과 하우엘의 특성이 무력화된다.

소나기가 퍼붓는 지금이 탈출할 기회였다.

다만, 가장 우려되는 한 가지.

난 긴장하면서 수정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나오지 마라.

나오지 마라.

'빌어먹을! 제발 닥치고 있어라!!'

학살자 카멜.

녀석이 한 마디 내뱉을 때마다 상황이 급격하게 변했다.

범상치 않은 놈이라 어떤 짓을 할지 예측이 안 됐다.

123화 쥐새끼 사냥을 시작해볼까

"...."

푹신한 의자에 기댄 카멜은 턱을 괸 채 나른한 표정으로 영상구를 감상했다.

영상구에선 황금빛 광채가 번뜩였다.

영상이 찍힌 장소는 라웁 숲으로 복면인이 빛을 이용해 반다이크를 몰아붙이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었다.

복면인과 반다이크의 전투 장면.

반다이크는 곧 복면인의 단검에 찔려 무력화되는 것으로 장면은 마무리되었다.

렌구아가 가져온 기억 영상구인데, 카멜은 최근에 알렉스란 인물이 유명세를 치르면서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다.

홀로 시간이 날 때마다 반복적으로 영상을 살피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혼자가 아닌 여러 이들을 막사로 불러 모았다.

불러 모은 이들은 모두 셋.

렌구아, 리옹 그리고 아케인이었다.

카멜은 영상구를 렌구아에게 건네며 말했다.

"렌구아 이해해줘서 고맙다."

"…아, 아닙니다."

반다이크 무력화 영상은 렌구아 입장에서 알려지기 껄끄러운 약점이었지만, 카멜은 영상을 이곳에서 공개했다.

황금빛 주인의 존재는 더는 렌구아만 아는 정보가 아니었기에.

"리옹."

"높게 평가해도 3성, 그 이상은 무리입니다."

"그래? 하지만 렌구아가 직접 제작한 반다이크를 이겼지. 너도 렌구아의 주술 인형을 상대해봐서 알 텐데?"

"네. 4성이 아니면 상대할 수 없을 겁니다."

"실력을 숨겼을 가능성은?"

"반응 속도와 움직임을 봤을 때 여유를 둔 것 같지 않습니다."

"3성에 무게를 둔다는 뜻인가?"

"저 영상구에 비친 실력만 본다면 3성이 확실합니다. 능력이 특출날 뿐이죠."

"능력이라...."

리옹의 확언에 카멜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렌구아를 바라봤다.

"복면인이 영상구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나?"

"복면인의 반응을 초 단위로 살핀 결과 첫 교전 시에는 반다이크의 존재를 알지 못했습니다."

"후에는 눈치챘다?"

"네. 주술 붕대를 알아보곤 그 뒤로는 빛을 이용해 반다이크를 무력화시켰습니다. 초반에는 영상구의 존재를 몰랐을 겁니다."

"그럼 능력만 빼면 별것 없다는 뜻인데."

"저 빛이 확실히 문제입니다."

황금빛.

저 빛은 현재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최우선 조사 대상에 놓여 있었다. 그 덕에 일부 퍼즐이 맞춰지긴 했다.

바로 황금빛의 주인.

카멜이 가볍게 손짓하자 리옹에 초상화 한 장을 식탁에 올려놨다.

한 인물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였다.

리옹과 렌구아는 그 인물을 직접 만나봤기에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각자 입에서 나온 이름은 달랐다.

리옹은 인상을 구기며 '암살자 놈'이라고 했고, 렌구아는 '가호를 받은 빌어먹을 놈'이라고 했다.

카멜에겐 과거 '그'의 전달자로 자신을 찾아왔던 놈이었다.

이름 없이 '놈'으로 불리던 초상화의 인물은 얼마 전 스스로 이름을 부르짖으며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스 마르샤. 수정구에서 나온 복면인의 인물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초상화.

구원의 성자와 라웁 숲을 함께 탈출했던 이종족들의 기억을 뽑아 그린 것이기 때문이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신분을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구원의 성자가 넬리토리 협곡에서 도망친 전달자라는 것을 알아냈고, 최근 혈맹을 맺은 인간이라는 것도 파악했다.

다만, 단 한 명.

"...."

초상화를 처음 본 아케인의 반응이 이상했다.

말없이 초상화만 뚫어지게 보며 푸른 빛의 귀걸이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지? 이상한 점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이 자의 정체가 암살자라고 했는데, 혹시 어느 조직에 몸담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왜 궁금하지?"

"알려주시면 답해드리겠습니다."

"크룩스."

"아, 그렇군요. 역시 살아있었군요."

"살아있다?"

"원래 죽었어야 할 인물인데, 살아있군요. 그래서 물어본 겁니다."

"...."

카멜의 눈에는 아케인이 뭔가 더 숨기는 듯한 표정인데 더는 물어보지 못했다.

아케인은 수하가 아닌 이득을 위해 잠시 함께하는 동반자다.

그런 아케인이 이 자리에 있는 건, '그'와 관련된 정보 공유를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조사는?"

"둥지의 정보엔 없는 인물입니다. 마르샤 가엔 자식이 없습니다. 그 돼지 상인이 싸지른 자식이라면 가능한데. 그것까진…."

"가주패의 진위는?"

"진품입니다. 하지만 둥지에선 알렉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신분이라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이유는?"

"돼지 상인의 혈육이라고 하기엔 너무 뛰어납니다. 게다가 마르샤 지역 주변에 그를 아는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습니다."

처음 황금빛의 주인을 파악했을 때, 카멜은 저 암살자 놈을 '그'로 의심했었다.

영상구에 나온 지리적 위치는 도미닉의 각성 장소와 근접한 연구소 숲이었기 때문이다.

반다이크를 연구소에 보낸 건 도미닉의 연구일지를 강탈하기 위함인데, 암살자에게 잡혀 임무에 실패했다.

그런데 도미닉 후아튼의 각성마저 어긋난 상황이 벌어졌다.

그 자리에 저 녀석이 있었다.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런데 알렉스란 인물의 정보를 수집할수록 의심보단 의문이 들었다.

'…3성.'

고작 3성의 실력으로 도미닉 후아튼을 죽이고, 신명의 주인이 된 아레나를 제거할 수 있을까?

블라이어를 손에 쥔 자신조차 부담스러워서 포기한 존재를?

'퍼즐이 안 맞아.'

분명 그놈 뒤에 강력한 조력자가 있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기존의 흐름을 뒤틀어버릴 정도로 강력한 조직 세력 말이다. 그런데 며칠 전 그 세력으로 의심되는 조직이 이름을 드러냈다.

'헌트(Hunt).'

최근에 카멜의 심기를 거슬리게 하는 이름이었다.

회귀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조직이 나타났고, 베네타는 혈맹으로 강하게 묶였다.

토바른의 세력 구도가 완전히 변한 것이다.

헌트 뒤에 '그'가 있다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그때 아케인이 초상화를 집어 들었다. 그는 초상화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이 자가 '그'란 존재입니까?"

"며칠 전까지 '그'로 의심했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게 지금 판단이다."

알렉스란 이름으로 자신에게 직접 쪽지까지 보낸 놈이다.

'그'라고 하기엔 스스로를 너무 노출시킨다.

결정적으로,

"이 초상화의 인물이 그 신명의 주인이 아닌 모양이군요."

"신명 목록에서 그자와 겹치는 정보가 없다. 다른 인물이 존재해."

베일에 찬 신명의 주인.

카멜은 그 신명의 주인이 '그'일 것으로 확신했다. 그는 며칠 전 아케인이 준 신명 목록을 떠올렸다.

[XX XXXX― 신명 사냥꾼(xx)]

[X X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심장]

[XXXX 길잡이]

[XXX 반지(XX)]

이전보다 두 가지 단서가 더 생겼다.

'길잡이' 그리고 '반지'.

하지만 이것으로 무언가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주어진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다.

카멜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최근 '그'의 신명 목록에서 노출된 정보는 없었나?"

"없습니다."

"저번에는 어떻게 알아냈지? 분명 모른다고 했을 텐데."

"제 능력이 아닙니다. 그건 신명의 주인이 받은 페널티입니다."

"페널티?"

아케인은 '그'의 신명 목록이 추가됐다는 것을 알려왔지만, 그땐 그 목록이 무엇인지 읽어내지 못했다. 하지만 얼마 전 '길잡이'와 '반지'란 단서를 가지고 왔다.

그 이유가 페널티라고?

신명 목록에 페널티가 있다는 건 카멜도 처음 듣는 정보였다.

"신명과 관련된 맹약을 지키지 못했을 경우 여러 형태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그 페널티가 '그'에겐 신명 목록의 노출이다?"

"확신하긴 어렵지만, 가능성은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노출됐으니까요."

"'그'가 맺은 맹약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나?"

"글쎄요. 대부분 주어진 신명과 관련 있으니 '사냥'과 관련 있지 않을까요? 가령 사냥에 실패를 했다거나."

"사냥이라…."

새로운 단서를 얻었지만, 이번에도 시원하게 결론이 안 나왔다.

위안이 되는 건 '그'에게 점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일까.

다른 방법 또한 눈앞에 놓인 상황이었다.

'그'의 단서가 될 녀석들이 자신의 영토 안으로 기어들어 왔다.

"록터를 다시 잡아들인다."

헌트의 행동 대장 록터 펠리스.

록터의 외골수 성정을 알고 있기에 그동안 믿지 않았던 소문이지만, 알렉스가 라웁 숲에서 꼬리를 드러내면서 의심이 생겼다.

록터를 구하기 위해 스스로 블라이어 영토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맴버가 아니라면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알렉스와 록터, 두 녀석의 머리를 가져오면 '그'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록터에 관한 소문을 더 빨리 알았으면 좋을 뻔했어. 하필 탈출한 뒤에 듣다니…."

"…송구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리옹이 고개를 숙이며 죄를 청했다.

자신에게 록터를 감시하라 명했는데,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록터 곁에 확실한 첩자를 심어뒀는데 너무나도 쉽게 노출되면서 감시망이 뚫려버렸다.

리옹이 검자루를 움켜잡으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명만 내려주시면 제 손으로 직접 잡아 오겠습니다."

"리옹 마트레인. 내가 에토르에 직접 온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건가? 대계(大計)가 코앞이다. 그대는 날 지켜라."

"…충."

펄럭―

순간 거친 비바람이 불어닥치며 막사 덮개가 뒤집혔다.

덮개 사이로 비추는 흐릿한 성곽의 형태. 폭우 너머 가까운 거리에 거대한 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에토르 성벽.

카멜은 지금 에토르를 코앞에 둔 상태였다.

"자, 의견 교환은 이쯤 하지."

카멜은 식탁 옆에 놓인 지도를 바라봤다. 지도에는 여러 말이 놓여 있었다.

특히, 코룬 강 주변에 검은 말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는데, 그중 색이 다른 말은 단 한 개뿐이었다.

새하얀 말.

표적인 록터였다.

카멜은 아케인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아케인은 고개를 끄덕이곤 록터의 말을 집어 들었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그는 방향을 잡곤 록터의 말을 천천히 동쪽으로 이동시켰다.

"이쪽이군요."

"정확도는?"

"거리가 있으니 오차가 있겠지만 백 걸음 안쪽일 겁니다."

"완벽하군. 그대란 동반자를 곁에 둔 건 내게 엄청난 행운이었던 모양이야."

"약속만 지키시면 됩니다."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케인의 힘을 빌리면서 자신의 계획이 엄청난 속도로 앞당겨졌다.

특히 '그'의 신명 정보를 팔아 아티팩트를 긁어모은 건 신의 한 수였다.

그로 인해 에토르를 손쉽게 집어삼킬 기회가 생겼다.

조금 전 아케인이 알려왔던 신명 각성 정보도 마찬가지였다.

'배덕의 기사라, 록터 펠리스다운 신명이로군.'

회귀 전, 록터는 그렇다 할 신명 각성이 없었다. 친형의 뒷배로 자신의 세력 형성에 지독한 방해꾼 역할을 했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으니까. 그로 인해 블라이어를 손에 넣는 데만 수년을 소비했다.

그래서 성주가 된 후 가장 먼저 록터부터 정리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의외의 결과였지만, 록터의 신명 각성은 지금 자신에게 기회로 다가왔다.

아케인은 신명 각성자의 위치를 파악할 능력이 있었다.

록터를 잘만 이용하면 알렉스까지 엮어서 낚을 기회.

카멜이 손을 들자, 렌구아가 통신구를 들고 다가왔다.

에토르의 계획은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 그 전에 눈앞의 문제부터 치워버릴 생각이었다.

"쥐새끼 사냥을 시작해볼까?"

아케인이 록터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시간은 반나절 정도.

시간은 충분했다.

그 안에 사냥을 끝낸다.

지도에 수많은 말들을 둘러보던 카멜은 자신의 패를 살폈다.

사냥개 부대.

주술사들의 둥지.

대규모 노예 사냥꾼 무리.

그리고,

"블라이어의 군대를 베네타 국경과 길목에 모조리 배치해라."

에토르 점령에 군대가 필요 없어지면서 움직일 수 있는 가장 큰 패가 생겼다.

베네타로 빠져나갈 모든 구멍을 대규모 포위망으로 틀어막은 후 천천히 사냥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카멜은 검은 말 하나를 집어 든 후 조금 전 아케인이 놓은 록터의 말 앞쪽에 세웠다.

수정구가 빛나자 카멜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잭 그리고 하우엘. 사냥 시작이다."

첫 번째 입질은 사냥개 부대였다.

124화 크룩스

통신구에서 비웃음과 함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이, 벌레. 폐기(廢棄)되고 싶지 않으면 잘해. 지켜볼 거야.]

"...."

[말이 없네? 벌레 새끼라 인간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밟아야 꿈틀댈래?]

"…아, 알겠습니다."

[비가 멈출 때까지야. 그 전에 사냥감이 빠져나갔다는 소식이 들리면 알지? 네 꼬봉처럼 녹지 않으려면 열심히 뛰라고. 그러라고 살려준 거잖아.]

"네."

[이제 중요한 볼일이 있으니까. 연락하지 마.]

수정구가 뚝 끊기며 빛을 잃자, 중년인은 주먹을 움켜쥐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짧은 머리, 40년의 풍파를 겪은 노회한 인상의 사내.

얼마 전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암살 조직을 운영했던 마스터 신분이었지만, 이젠 일개 암살자로 목숨을 연명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크룩스 마스터.

중년인, 크룩스는 자신의 옛 신분을 떠올리곤 울분을 조용히 삼켰다. 쌍욕이라도 처박고 싶지만, 쌍둥이 형제에게 매수당한 놈들이 지켜보고 있을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그는 수정구를 주술사에게 건넸다.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당장...."

"닥치고 애들이나 불러. 다 들었으니까."

무시가 잔뜩 들어간 어조.

주술사에게 암살자들은 인간이 아니었다.

쓰다 버릴 패 아니면 제물.

주술사가 손짓으로 신호를 보내자, 크룩스 뒤로 거대한 존재가 우뚝 섰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

기척도 없이 다가온 주술 인형과 마주한 크룩스는 숨이 턱 막혔다.

자신을 이 꼴로 추락시킨 괴물 병기. 저 괴물들의 손에 수십 년 일궈온 조직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뭘 봐? 내 말 안 들려? 애들 불러오라고."

"아, 알겠습니다."

당장에라도 복수심에 분노가 차올라야 하는데, 머릿속엔 공포심만 자리했다.

간부들이 주술 인형의 제조과정 안에서 찢겨 사라지는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봤다.

그 지옥을 보고도 복수?

그런 건 상대가 인간이었을 때나 하는 것이다.

저들은 인간이 아니다.

절대 넘봐선 알 될 악마 같은 자들.

그는 복수를 포기했고, 공포에 굴복한 이에게 남은 건 생존에 대한 미련뿐이었다.

그는 더는 크룩스 마스터가 아니었다.

"전부 모였습니다."

주술 인형 어깨에 올라탄 주술사는 집결한 암살자들을 훑어봤다.

머릿수는 대략 백(百) 정도로 제법 많았다.

주술사들에게 몰락한 암살자들로 구성된 사냥개 부대인데, 주술 인형의 제물로 적합하지 않아 폐기를 모면한 생존자들이었다.

"낙인을 보여라."

주술사의 지시에 암살자들은 왼쪽 손등을 동시에 들어 올렸다.

그건 크룩스도 마찬가지.

"둥지의 낙인은 죽어야 없어지는 천형이다. 벗어나고 싶다면 우리를 위해 죽어라."

둥지에 끌려온 모든 이에게 새겨지는 둥지의 낙인. 한 번 찍히면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저주이기도 했다.

"임무를 시작한다."

주술사는 크룩스를 한 번 바라본 뒤 주술 인형을 돌렸다.

자신은 안내자 역할만 할 뿐, 실질적인 임무는 저 암살자 놈의 몫이었다. 통신구에 집중하며 대기하길 잠시,

[표적의 위치를 전달하겠다.]

주술 인형이 숲길을 헤치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주술사가 이끄는 데로 크룩스는 암살자들을 데리고 그 뒤를 빠르게 쫓았다.

크룩스는 자신에게 내려온 임무를 떠올렸다.

임무는 간단했다.

표적인 록터가 모습을 보이면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이다.

목숨을 노리는 사냥이 아니라, 상대의 움직임을 묶기 위한 시간 끌기 작전.

최상부에서 내려온 임무인데, 쌍둥이 형제는 비가 멈추기 전까진 움직일 생각이 없다며 자신을 앞서 보냈다.

'날 보내놓고 놈들은 어젯밤 납치해온 여인들을 유린하고 있겠지.'

안 봐도 뭔 짓을 할지 뻔했다.

임무 중에도 이쁘다는 소문이 들리면 귀족의 여식이든, 기사의 여식이든, 심지어 여기사까지 물불을 안 가리고 납치해왔다.

그들의 뒷배로 블라이어 성주가 서 있지 않았다면 암살자들의 칼끝은 록터가 아니라 두 형제에게 향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두 형제의 중독적인 여성 편력은 악명이 높았고, 두 형제의 주인인 성주에게도 악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블라이어 성주는 묵인으로 두 형제를 비호했다.

뛰어난 실력을 우대했기 때문이다.

'두 형제가... 무섭기는 하지.'

잭과 하우엘 형제가 나타나기 전까지 임시로 이곳을 맡던 이는 크룩스였다. 두 형제가 나타나면서 모든 지휘권을 박탈당했는데, 쌍둥이 형제의 실력이 보잘것없어 보였기에 부마스터를 움직여봤다.

그때 동생인 하우엘의 실력을 처음 보게 됐다.

'핏물이 되어 사라졌지.'

자신과 엇비슷한 역량을 지닌 부마스터의 허무한 죽음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무서운 점은 지금도 하우엘의 정확한 능력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다만 한 가지.

부마스터는 4성이라는 것이고, 부마스터를 가볍게 죽인 하우엘보다 형인 잭이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이었다.

숲을 달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낮이지만 먹구름이 끼어 날씨가 무척 흐렸다.

줄기차게 쏟아지던 빗줄기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는데, 두 형제의 말처럼 비가 곧 그칠 것 같았다.

잠시만 잡아두면 된다.

잠시만.

"시체다."

앞서 달리던 주술 인형이 멈춰 섰다. 주술사가 풀밭에 뒹구는 시체를 가리키자, 크룩스는 신호를 내렸다.

암살자들이 시체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눈앞의 주술사는 표적의 대략적인 위치만 전달받을 뿐, 정확한 위치는 주변의 흔적을 쫓아 움직여야 했다.

주술사는 구경할 뿐이고, 암살자들은 크룩스의 지휘 아래 흔적을 추적했다.

크룩스에게 지휘권이 있는 건, 그의 특성과 관련 있었다.

특수 벌레 생성.

자폭 벌레 붐(Boom).

암살자들의 심장엔 폭탄 벌레가 모두 자리하고 있었다.

크룩스의 짓이 아닌 록터의 발목을 붙잡기 위해 두 형제가 벌인 짓이었다.

붐(Boom)은 원격으로 폭발할 수 없다고 알려졌지만, 크룩스의 경우엔 달랐다.

그를 중심으로 반경 10미터.

그 범위 안에 붐이 있다면 신호를 통해 벌레를 터뜨릴 수 있었다.

원거리에 해당하는 전투 거리였지만 실력자에겐 코앞으로 치부되는 위험천만한 반경이라, 그동안 배신자를 처단할 용도로만 썼던 능력이었다. 하지만 이젠 살아남기 위해 능력을 사용해야 했다.

능력으로 쓸모를 증명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기에.

"시체 열다섯 구, 전부 노예 사냥꾼 같습니다."

"돈독 오른 놈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군. 상흔은?"

"한 명에게 모두 당했습니다."

"록터다. 흔적을 쫓아."

암살자들은 록터가 남긴 흔적을 쫓아 움직였고, 주술사가 그 뒤를 따랐다.

숲길을 가로지를 때마다 널브러진 시체가 보였다. 일격에 당한 노예 사냥꾼들이 수두룩했다.

"멍청한 놈들, 상대가 록터 펠리스라는 것을 모르는 건가?"

무려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이었던 인물이다.

지금 블라이어에서도 그를 이길 기사가 과연 존재할까?

현상금 100만 골드에 눈이 뒤집힌 결과였다. 알면서도 경쟁자들 때문에 서두르다 당한 것이다.

"꼬리가 붙었습니다."

"꼬리?"

자신들을 움직임을 발견하고 뒤쫓는 이들이 감지됐다.

거리를 둔 채 적게는 열 명, 많게는 수십 명이 뭉쳐서 따라왔는데, 무장을 보니 노예 사냥꾼들로 보였다.

그 수가 시간이 흐를수록 많아졌다.

"어떡할까요?"

"무시해."

현재 코룬 강 주변엔 토바른 내에서 활동하는 노예 사냥꾼이 모두 몰렸다고 해도 무방했다.

머릿수가 늘면 그에게 유리한 일이니 따라오도록 놔두는 게 나았다.

잠시 후, 흔적을 쫓아 빛이 미약한 컴컴한 숲길로 들어섰을 때 암살자들이 멈춰 섰다.

"무슨 일이지?"

"흔적이 끊겼습니다."

"뭐?"

크룩스가 직접 나와 살폈다.

록터의 흔적이 숲길 한가운데에서 푹 꺼진 것처럼 끊겼다.

위쪽을 살피니 하늘 전체를 가린 무성한 나무숲이었다. 설마 나무를 타고 이동한 건가?

암살자들을 풀어 나무 위를 샅샅이 살폈지만,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흔적을 놓쳤다.

하지만 그에겐 다른 방법이 있었다.

크룩스는 주술사를 바라봤다.

"안내 부탁드립니다."

"쓸모없는 새끼들."

주술사는 짧게 혀를 차곤 수정구에 집중했다. 표적의 위치는 일정한 텀을 두고 전달됐다.

잠시 후,

[표적의 위치를 전달한다.]

"...응?"

위치를 주술로 해석한 주술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향이 안 보인다.

정보가 잘못된 것일까.

아니다. 수정구에선 록터의 위치를 두고 대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북동쪽이다. 표적이 위쪽으로 방향을 틀었어.]

[지도를 보니 나무숲 쪽을 통과할 것 같다. 우린 건너편에서 대기하겠다.]

자신이 실수한 것일까.

다시 한번 주술을 써봤지만, 방향은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이해가 안 되는 상황에 의문을 표하며 일단 숲을 거닐었다.

방향이 나올 때까지 움직이려는 생각이었는데,

팍―!

"...!"

땅이 아래로 푹 꺼지더니 반다이크 발아래서 검은 인영이 솟구쳤다.

흙더미가 흩날리고, 그 사이로 매서운 눈빛을 한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주술사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익숙한 실루엣과 얼굴이다.

"로, 록...터!"

스각!

반다이크가 사타구니부터 반으로 잘리더니, 번뜩이는 칼날은 주술사마저 반으로 찢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 아래서 록터는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우우웅―

검날을 타고 흐르는 푸른 마나의 향연.

5성의 상징, 오라 소드였다.

앞서 걷는 그때,

덥썩―

"...."

발목을 움켜쥔 거대한 손아귀가 보였다.

반으로 잘린 반다이크가 록터를 붙잡고 늘어졌다. 주술사가 있었다면 위협적인 인형이지만, 주인이 죽은 이상 그저 움직이는 인형에 불과했다.

손아귀를 베어낸 록터는 앞으로 매섭게 질주했다. 그리고 눈앞에 걸리는 모든 존재를 베어내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로, 록터다!"

"막아…!"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던 노예 사냥꾼 열 명이 삽시간에 검에 쓸려나갔고, 흔적을 쫓던 암살자들의 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다섯 중 셋을 순식간에 베어내고, 남은 둘을 처리하려고 할 때였다.

주춤 물러나던 암살자들이 돌연 딱딱하게 굳더니 비명을 지르며 기운을 터뜨렸다.

기운.

섬뜩한 신호를 감지한 록터는 다급히 검과 검집을 교차했다.

콰아아아앙―!

"...!"

폭발이 터졌다.

록터는 신음을 흘리며 뒤로 튕겨 나왔다.

예상보다 충격이 컸다.

팔뚝과 어깨, 허벅지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뼛조각이 스치고 간 상처였다.

자폭이라니, 다급히 거리를 벌리는 크룩스를 보며 록터는 눈빛을 가라앉혔다.

삐이이이이익―!

록터 펠리스.

표적을 찾았다.

크룩스는 호각부터 불었다.

주변에서 서성거리는 사냥꾼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였다.

"멍청한 주술사 새끼!"

앞에서 견제해줘야 할 반다이크가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력화돼버렸다.

노린 것일까.

노린 거라면 제대로 약점을 찔렸다.

암살자들을 앞쪽에 배치해 안전망을 둔 크룩스는 시간을 벌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소수는 록터를 에워싸고, 다수는 거리를 벌린 채 석궁을 꺼내 들었다.

대치는 눈꺼풀 몇 번 끔벅일 정도로 짧았다.

"온다!"

"이익―!"

빠르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크룩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자신 주변에 벽으로 세웠던 일부 암살자들.

그중 일부는 정확히 10미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콰아아앙―!

록터가 오는 방향에 서 있던 암살자의 몸이 터졌다.

붐(Boom)이 터진 순간, 크룩스가 신호를 보내자 암살자들이 석궁을 미친 듯이 쏘아대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볼트는 핏빛이 흐르고 있었다. 주술사의 저주가 담긴 것으로 스치기만 해도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매서운 반격에 록터가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났다.

자잘한 상처가 순식간에 늘었다.

중앙에 있는 놈을 잡아야 하는데, 잡으려면 자폭 부대와 석궁 세례를 뚫고 가야 했다.

홀로는 힘들다.

물러나는 게 맞지만, 록터는 물러나지 않고 앞에서 계속 대치하며 시선을 끌었다.

콰콰쾅! 쾅!

암살자들의 자폭이 몇 차례 더 이어졌을 때, 뒤쪽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록터 펠리스! 100만 골드다!"

"자, 잡아!!!!!!"

"으아아아아아!"

무장한 노예 사냥꾼들이 사방에서 우르르 몰려오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사냥꾼 무리를 보며 록터는 눈을 빛냈다.

125화 영웅 조력자

'왜 도망가지 않지?'

크룩스는 록터의 대응에 의구심이 들었다.

호각 소리에 노예 사냥꾼들이 기다렸다는 듯 몰려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수십 명이 몰려들 정도로 코룬 강 주변엔 사냥꾼이 많았다.

이 순간에도 나무숲 사이사이에서 계속 모습을 드러내며 포위망을 두텁게 만들고 있는데, 록터는 숲 안쪽으로 물러날 뿐 대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깥 상황을 모르는 건가?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저쪽일 텐데.

'지금 상황에선 노리는 게 있을 리가 없는데.'

도망치기 바쁜 상황에서 뭘 할 수 있을까. 언제라도 포위망을 뚫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지켜보면 알겠지."

주어진 임무는 표적을 사냥하는 것이 아닌 잡아두는 것이었다.

크룩스는 암살자들을 물리곤 일부만 일정 범위 내에 세워두었다.

10미터.

혹시 모를 록터의 기습을 막기 위한 희생양이었다. 역시나 암살자들의 눈빛에는 짙은 원망이 깃들었다.

그 원망에 답하듯 크룩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원망스럽나? 이건 그저 순서의 차이일 뿐이야. 먼저 가느냐 늦게 가느냐. 죽기 위해 온 것 아닌가?"

둥지의 낙인을 보자, 암살자들은 허탈한 눈빛으로 앞을 바라봤다.

저자의 말처럼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죽음보다 두려운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난 너희와 달라.'

물론, 크룩스는 희생할 생각도 죽을 생각도 없었다. 이번 기회를 살려 가치를 증명하고 살아남을 생각이었다.

잭과 하우엘 형제를 우대하는 블라이어 성주를 봤기 때문이다.

충분히 자신 있었고, 그 기반을 다지려면 록터란 희생양이 필요했다.

크룩스는 눈앞의 대치를 지켜봤다.

대치가 오래 유지되길 바랐는데, 사냥꾼의 수가 급격히 늘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어느새 백을 넘어 이백에 다다른 사냥꾼의 숫자.

사냥꾼들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히며 록터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록터가 강해도 그는 인간이었다.

오랜 도주 생활로 지쳐 보이는 물골에 상처도 꽤나 심각해 보였다.

100만 골드.

록터에게 걸린 엄청낸 금액에 사냥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하지만 섣불리 덤비지 않았다.

록터는 늑대가 아니다.

사자다.

사전에 합의가 된 듯, 사냥꾼들은 눈치를 살피며 협공을 준비했다.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사냥이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바보들은 아니군."

100만 골드에 미쳐서 왔다지만, 표적에 대해 알고 찾아온 이들이었다. 어중이떠중이도 있겠지만 사냥 가능성을 점치고 온 사냥꾼 무리도 제법 많았다.

그 이유는 록터가 '무특성'이라는 데 있었다.

"놈은 무특성이다. 검술만 조심해."

"몰골을 봐, 많이 지쳤어. 몰아치면 놈도 더는 버티지 못할 거야."

"마법 스크롤을 꺼내. 움직임을 봉쇄한다."

광역기도, 필살기도 없었다.

게다가 록터는 실력 향상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순수 육체파, 오직 검술 하나만 익힌 기사였다.

크룩스도 그 약점에 동의했기에 줄곧 록터의 접근만 조심하며 대응했다.

'사냥꾼들이 록터를 잡을 수 있을까?'

머릿수는 많지만, 쉽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상대는 순수 검술뿐인 무특성 5성이지만, 꼴통 기사로 불리는 자였다.

독하고 집요한 인간이란 뜻이었다.

"스크롤을 찢어!"

"으아아아아!"

"둔해졌다! 죽여!"

사냥꾼이 더 몰려오자 일부 사냥꾼이 참지 못하고 록터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100만 골드를 나누기로 한 이상, 모인 수가 많아지면 떨어지는 몫이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스크롤에서 마법이 터지고, 검과 검들이 부딪친다.

카카캉―! 캉!

"뒤를 노려!"

쾅!

쇳소리와 불꽃이 튀는 전장으로 사냥꾼들이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주 마법으로 움직임을 묶고, 포위한 채 사방에서 무기를 휘둘렀다. 빈틈을 노려 사이사이로 투척 무기와 화살을 날리는 것까지.

인간을 사냥해온 자들답게 사냥이 무척이나 체계적이었다.

저주 마법에 움찔하던 록터가 보인다. 그것도 잠시,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그가 울부짖었다.

"크아아아아!"

붉은빛을 띠던 저주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쏟아지는 무기 사이로 록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큭!"

"미친…!"

검, 도끼, 해머가 튀어 오르고, 투척 단검과 화살이 튕겨 나왔다.

그 뒤로 튀어 오르는 수많은 핏방울.

록터 앞을 막아선 사냥꾼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후―

거친 호흡 사이로 흘러내리는 땀방울.

낮은 자세로 내달리는 록터는 한 손에는 검, 다른 손에는 검집을 잡고 있었다.

공격이 쏟아지면 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미친 듯이 양손을 휘둘렀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

완벽한 양손잡이를 구축하기 위해 그가 들인 피땀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검과 검집이 교차하며 완벽한 방어가 펼쳐지고, 그 뒤로 검이 번뜩이면 우수수 사냥꾼들이 쓰러졌다.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쉴 새 없이 공격이 퍼부어졌고, 록터의 상처는 눈에 띄게 늘어났다.

"괴물 같은 새끼...."

크룩스는 질린 표정으로 록터의 전투를 지켜봤다.

상처가 늘면서 온몸이 피로 물들었지만, 치명상은 없고, 지친 듯 보이지만 움직임에는 틈이 없었다.

절대 무너지지 않은 거대한 벽을 만난 것 같았다.

죽일 수가 없다.

상부에서 왜 사냥하지 말고 발목만 붙잡으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완벽한 공방을 갖춘 기사.

놈을 잡으려면 물리력으로는 불가능했다.

압도적인 주술과 마법이 필요했다.

"쏘, 쏴! 쏘라고!"

"막아!… 빌어… 크아아악!"

비명과 함께 포위망이 뚫렸다.

핏물을 둘러쓴 록터가 앞으로 돌진해왔다.

목표는... 자신이었다.

"…빌어먹을!"

크룩스는 붐(Boom)을 준비했다.

록터가 다가오길 기다렸는데, 갑자기 그가 달리는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 뒤를 바짝 따르는 사냥꾼들.

록터와 눈빛을 마주친 순간, 크룩스는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접근하지 마!"

다급히 외쳤지만, 록터가 사냥꾼들과 함께 크룩스의 범위 안으로 들어온 것이 더 빨랐다.

고작 10미터.

벌써부터 록터의 섬뜩한 검날이 피부로 느껴졌다. 누구를 생각하며 판단할 거리가 아니었다.

크룩스는 주변에 있는 붐(Boom)을 모조리 터뜨리며 뒤로 몸을 굴렀다.

콰콰콰쾅!!!!

"끄아아아아악!"

붐들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사냥꾼들도 폭발에 휩쓸렸다.

푹 꺼진 바닥 사이로 사냥꾼들이 피를 토한 채 죽어 있었다.

잠시 소강상태.

크룩스는 뒤따라온 암살자들의 머릿수를 세어보곤 욕설을 내뱉었다.

벌써 반수 이상이 죽었다.

더 잃었다간 임무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기에 그는 사냥꾼 무리가 뭉친 곳으로 이동했다.

삐익! 삑―!!!!

자리를 잡고 호각을 두세 차례 더 불었다.

사냥꾼들을 더 모으기 위해서였다. 그 모습에 반발을 보일 사냥꾼들이 있을 법한데, 그들의 정신은 온통 구덩이 한곳에 쏠려 있었다.

분노를 표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얼굴에 환의가 깃든다.

"놈이다! 어서!"

"다 잡았어!"

폭발로 생긴 구덩이 속에서 록터가 비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검도 부러지고, 검집만 움켜쥔 채였다.

피를 토하는 모습까지.

딱 봐도 한계에 다다른 모습이었다.

사냥꾼들 역시 열광하며 그를 잡기 위해 앞으로 우르르 달려 나갔다.

빠르게 스쳐 가는 사냥꾼들을 크룩스는 바라보기만 했다.

저들로는 못 잡는다.

하지만 추가로 사냥꾼 무리가 더 온다면 그들을 미끼로 록터의 발목을 더 오래 붙잡을 순 있을 것 같았다.

크룩스가 신호를 보내자, 암살자들도 석궁을 들고 록터에게 향했다.

상황이 유리해 보이니, 견제만 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암살자 부대가 앞서 사라지고, 사냥꾼 무리가 크룩스를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때였다.

가장 방심할 그 순간,

푹―

"...컥!"

기습이 이뤄졌다.

크룩스의 척추를 부수며 단검이 박혔다. 동시에 등 뒤로 지독한 열기가 온몸을 태우듯 감각을 망가트렸다.

지독한 고통.

다급히 몸을 틀자, 또 다른 단검이 그의 목울대를 베었다.

목소리가 안 나온다.

붐을 떠올렸다.

주변에 암살자를 남겨놨기에 손가락을 튕기려고 했다. 하지만 옆에 있던 단검이 더 빨랐다.

스각―

"크, 크룩!"

손가락이 잘려 나갔다.

지독한 고통도 잠시, 시야에 들어온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크룩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자신의 손가락을 벤 인물.

"오랜만입니다. 마스터."

"너, 너...크럭!"

"인사드리겠습니다. 칼 바스타인입니다."

인사와 함께 스쳐 가던 사냥꾼 일부가 몸을 틀더니 크룩스에게 안기듯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푹. 푹. 푹. 푹. 푹. 푹.

"...!"

가슴, 배, 허벅지, 어깨, 그리고 옆구리까지. 단검들이 온몸을 헤집고 지나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독을 섞었는지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니, 고통도 없었다.

그래서 온몸의 피가 빠르게 빠져나가고 있음에도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붐(Boom)이라… 여전하군요. 수하들을 희생시켜 목숨을 부지하는 것 말입니다."

"…살려."

"그게 당신의 유언입니까?"

칼은 단검을 들어 올렸다.

복수를 앞에 둔 상태에서도 그의 눈빛은 덤덤했다.

뭐랄까.

허무했다.

이젠 복수보단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고 움직였던 인물이 떠올랐다.

록터 펠리스.

칼은 단검을 쳐들며 록터에게 외쳤다.

"도망쳐!"

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록터가 몸을 빼기 시작했다. 그 뒤를 사냥꾼들이 쫓으려고 했고, 앞서 있던 암살자들은 칼의 존재를 눈치채고 이쪽으로 몸을 틀었다.

지금!

"붐과 함께 사라지십시오."

칼은 크룩스의 이마에 단검을 박아넣었다.

단검을 박고 강하게 비튼 순간 크룩스의 목숨이 끊어졌다.

그리고, 칼 등 뒤로 엄청난 폭발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쾅!!!!!!

"무...!"

"끄아아악!"

폭발과 비명.

붐을 지닌 암살자들이 모조리 터져나가며 숲 주변이 초토화됐다.

사냥꾼 절반 이상이 폭발에 휩쓸려 명을 다했다. 칼은 크룩스의 이마에서 단검을 뽑고는 바로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록터 아니... 주군을 구해라."

엘튼을 제외한 수하들이 록터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다.

망가진 숲에 칼과 엘튼이 섰다.

칼은 말없이 크룩스의 시체를 바라봤다.

"설마 여기서 이자를 만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복수 따윈 잊고 다른 뜻을 품고 살라는 뜻이겠지."

무너진 크룩스 마스터는 너무나도 하찮았다. 고작 이런 사내를 위해 모든 걸 걸었던 자신마저 같이 하찮게 보일 정도였다.

그냥 복수를 이루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크룩스 앞에서 등을 돌린 칼은 줄곧 담아왔던 복수의 감정을 내려놨다.

감정이 사라지니 얼굴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 순간,

"...?"

칼의 몸에 변화가 생겼다.

한쪽 팔을 잃고 오랜 세월 동안 4성에 오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었다. 그런데, 온몸에 기운이 넘치며 새로운 기운이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추, 축하드립니다. 마스터!"

"이게 이렇게 쉬운 거였나…?"

닫힌 마음이 줄곧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다.

4성에 올랐다.

칼과 엘튼은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록터 펠리스.

복수를 돕기 위해 자신의 안위를 내던진 어리석은 인간.

"설마 했는데, 진짜로 버틸 줄은 몰랐습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그 이상의 잠재력을 지녔다는 뜻이겠지."

"정말 그를 주인으로 모실 생각입니까?"

"이미 약속한 일이다. 지금부터 록터를 주인으로 모신다."

"그렇군요."

"불만이 있으면 지금 말해."

"불만 없습니다."

원래 암살자보다 기사가 더 어울린다고 칼에게 놀림을 받았던 엘튼이었다.

록터를 주인으로 모신다.

음지가 아닌 양지로 올라가는 새로운 운명이 펼쳐졌다.

엘튼은 기분이 좋은 듯 자신의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록터 펠리스를 도와 블라이어를 무너뜨릴 것이다."

"그 전에 주군의 목숨이 붙어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가자. 어서!"

칼과 엘튼은 록터가 사라진 숲으로 빠르게 뛰어들었다.

폭발로 엉망진창이 된 나무숲.

부러진 나무들로 가려졌던 하늘이 드러나자,

쿠쿠쿵!

그들은 보지 못한 하늘의 부름이 터져 나왔다.

[칼 바스타인 – 영웅 조력자(감각)]

푸른 불꽃 아래 새로운 신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126화 복수는 이뤘나

칼은 빠르게 록터의 흔적을 쫓아 움직였다.

숲 곳곳을 물들인 붉은 핏자국.

그것은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었다. 그중 록터의 흔적이 더욱 두드러졌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상처가 위중한 듯 보였다.

문제는 그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칼은 신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빌어먹을, 비가 멈췄어."

"사냥꾼들도 록터님의 흔적을 쫓아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남은 사냥꾼들이 아직 추적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다.

붐(Boom)을 삼켰던 암살자들이 크룩스의 죽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사냥꾼들이 반절 이상 죽어 나갔다.

그 충격에 주춤할 만도 한데, 살아남은 사냥꾼들은 여전히 눈에 불을 켜고 도주 중인 록터를 뒤쫓고 있었다.

"100만 골드의 힘이 대단하긴 하네요."

"당연하지. 나도 록터와 엮이지 않았으면 현상금 사냥을 생각해봤을 거라고."

"어쩌실 겁니까?"

"폭발 때문에 더 몰려올 거야. 서둘러야 해."

엘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숲이 울릴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으니, 흔적을 쫓아서 더 많은 이가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이거."

"뭡니까?"

"시선을 분산시켜야지. 고생 좀 해라."

칼이 엘튼에게 건넨 건 호각이었다.

크룩스가 이 호각으로 사냥꾼들을 불러 모으는 것을 확인했다.

잠시 시선을 돌리기엔 충분할 것이다.

호각을 받아든 엘튼은 고개를 끄덕이곤 반대쪽 숲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삐이이이이이이―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엘튼이 새로 몰려들 사냥꾼들의 시선을 끄는 사이, 칼은 서둘러 록터의 흔적을 쫓았다.

속도에 박차를 가했는데, 몸이 가볍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붙은 가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4성이 되고 나서 느끼는 강한 고양감.

'다행이야.'

그리고 짙은 안도감이 올라왔다.

지옥 같았던 실험체 감옥의 경험이 일행들을 빠른 각성으로 이끌었다.

반년 사이에 엘튼은 4성, 일행들은 3성에 올랐는데, 자신만 수년째 제자리인 상황이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껏 한쪽 팔의 부재를 성장의 방해 요인으로 꼽았었는데, 육체의 미흡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결국 마음가짐의 문제였다.

마음을 다잡자, 또 하나의 가능성이 떠올랐다.

'포기했던 기술도 다시 익힐 수 있겠어.'

칼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기존 단검보다 작고 가벼운, 비수에 가까웠다.

팔을 잃는 순간 그는 성장에 한계를 깨닫고 기술 개발에 모든 신경을 쏟았다.

근접 전투는 불리했기에 원거리 기술을 선택했다.

팔 하나로 쓸 수 있는 기술.

칼이 선택한 건 단검 투척이었다.

일시적으로 팔에 기운을 담아 던지는 투척 기술을 전문적으로 익혔는데, 4성에 오르면서 부족했던 힘을 채울 수 있게 됐다.

허리춤에 차곡차곡 쌓인 단검들을 확인하며 기술을 하나하나 떠올리는데, 한 방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록터다!"

"뭐, 뭐야? 저것들은?! 어서 정리해"

"밀어붙여! 우리가 훨씬 많다고!"

사냥꾼들의 외침이었다.

느껴지는 감각에 이상 신호가 없자, 그는 주저 없이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우거진 숲을 뚫고 나온 순간, 에워싸듯 뭉쳐 있는 사냥꾼 무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릿수는 오십을 조금 넘는 정도.

자신이 보낸 일행 중 셋이 사냥꾼들의 공세를 막으면서 록터를 보호하고 있었다.

칼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투척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궤적대로 움직이는 비도술.

"…커억!"

"무, 뭐야!? 어디서…끄룩!"

한 호흡에 다섯 자루를 던졌고, 다섯 명이 차례로 목을 잡고 쓰러졌다.

날카롭고 빠르고 은밀했다.

또 다른 단검을 뽑으며 칼은 크게 외쳤다.

"헌트(Hunt)의 지원군이 도착했다!"

갑작스러운 기습.

그리고 '지원군'이란 외침에 사냥꾼들의 진형에 혼란이 생겼다.

그 혼란을 틈타 록터를 보호하던 일행도 사냥꾼들을 거세게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모두 3성급의 실력자들.

사냥꾼 일부가 힘을 합쳐 그들을 저지했지만, 곧 뒤쪽에서 날아오는 단검에 목숨을 잃었다.

진형은 삽시간이 무너졌고, 사냥꾼들은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행이 그 뒤를 쫓으려고 하자 칼이 만류했다.

"쫓지 말고 다른 이들을 호출해. 최대한 빨리!"

현재 칼 일행은 총 열 명이었다.

셋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져 동료들을 호출하러 간 사이, 칼은 록터에게 다가갔다.

나무 기둥에 기댄 채 버티고 있는 그가 보인다. 예상보다 상태가 훨씬 심각했다.

오랜 도주로 지친 상태에서 자살 부대나 다름없는 사냥개 부대와 사냥꾼 수백을 홀로 감당했다. 아무리 5성이라도 물량 공세엔 답이 없다.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였는데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게 대단할 정도였다.

"…왔나?"

"입 열 시간 있으면 이리 누워."

"치료는 서서 받겠다."

록터가 다가와 등을 보이자 칼은 신음을 흘렸다.

등에 볼트가 여럿 박혀 있었다.

볼트를 잡아뺀 순간 음습한 기운에 볼트를 놓았다. 평범한 볼트가 아닌 것 같았다. 포션을 써도 출혈이 쉽게 멈추지 않았다.

"썩을... 주술사들의 저주야."

"어쩐지 피가 멈추질 않더군."

"어지러울 텐데, 괜찮나?"

"괜찮다."

등 쪽 상처 외에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다. 붐(Boom)에 당한 상처부터 사냥꾼들에게 당한 상처까지.

치명상은 없지만, 상처가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고통이 엄청났을 텐데, 움직이는 록터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혹시 고통을 못 느끼나?"

"그저 익숙할 뿐이다."

독한 성격인 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느끼니 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칼은 지닌 포션을 모조리 쏟아부으며 록터의 치료에 전념했다.

둘 사이에 흐르는 짧은 침묵.

그 침묵을 깬 건 록터였다.

"복수는… 이뤘나?"

"덕분에."

"어떤 기분이지?"

"글쎄...."

칼은 굳이 자신의 허무했던 감정을 록터에게 말하지 않았다.

복수를 직접 해보기 전까진 절대 느낄 수 없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있었다.

"표현하기 힘든 감정이야. 다만, 존재했던 것들을 돌아보게 되는 여유가 생기는 것 같다."

"존재했던 것들? 여유?"

"최근에 하늘을 본 적 있나? 그런 것과 비슷해. 곁에 항상 존재했지만 잊고 사는 것들. 그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거든."

록터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먹구름이 흩어진 하늘은 이제 푸르렀다.

포션 효과 때문인지 록터의 표정은 전보다 가벼워 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복수를 이룬다면 알게 될지도."

"그런가? 그럼 이젠 그대 차례다. 약속을 지키리라 믿는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코룬 강 하류부터 시작된 힘겨운 도주 생활.

흔적을 아무리 지우고 조작해도 일행의 위치가 계속 발각당했고, 수상함을 감지한 칼은 사냥꾼으로 위장한 채 주변 조사에 들어갔다.

그때 록터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파악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칼 일행은 그때부터 작전을 바꿔 록터와 따로 움직이며 그의 도주를 간접적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호각 소리를 듣게 됐는데, 그 소리 끝에서 복수의 대상인 크룩스를 발견하게 됐다.

[시선을 끌어주지. 복수를 이룬다면 날 도와주겠다고 약속해라.]

록터가 칼에게 제안했던 약속이었다. 미련하게도 그는 그 약속을 끝까지 지켜냈다.

"복수를 도와준 이를 주인으로 모시겠다고 다짐했다. 일행들도 모두 동의한 내용이야. 널 주인으로...."

"아니. 필요 없다."

록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미 말했을 텐데. 주인이나 충성 같은 건 필요 없어. 충성에 묶여 피눈물을 흘리는 건 나 하나면 충분하거든."

"...."

"조력이면 충분하다."

록터의 단단한 눈빛에 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꼴통 같은 고집을 누가 꺾을까 싶었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자, 록터는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 중 쓸만한 무기들을 찾기 시작했다.

오라 소드를 사용하면 평범한 검은 오래 버티질 못했다.

그 반복되는 행동에 칼은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그 좋은 검을 왜 부러뜨린 거야?"

"복수하려는 가문의 검을 쓸 수 없지 않나?"

"그 덕에 지금처럼 개고생하고 있잖아."

"상관없다. 그리고 헌트란 이름을 왜 사용한 거지? 난 헌트와 전혀 상관없다고 했을 텐데."

"지원군 소식을 들으면 적들의 움직임이 신중해지거든. 도주에 유리하다. 소문이든 뭐든 지금 상황에선 이용할 건 다 이용해야 해."

"그것도 싫다."

"록터."

"...?"

"주인이 되는 걸 거부해줘서 정말 고맙다. 안 그랬으면 내가 답답해서 먼저 죽었을 거야."

"무슨 뜻이지?"

"그냥 닥치고 따라오라는 소리야."

실질적인 이득보다 신념으로 움직이는 사내.

아마, 가장 빨리 죽는 타입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록터 같은 스타일이 끝까지 살아남는다면 큰 영향력을 끼칠 인물이 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칼은 그것에 배팅하는 것이었다.

'그 녀석은 다르겠지.'

자신을 블라이어로 움직이게 한 인물.

아서 클레이튼.

능글능글한 녀석인데, 그 녀석은 록터와 달리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서 뭔가 크게 될 녀석 같았다. 무조건 잡아야 하는 녀석인데, 소식이 궁금했다.

약속한 대로 방문하는 장소마다 특정 표식을 남겨두고 있으니 언제고 연락이 닿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디 가서 뒈질 녀석으로는 안 보였으니까.

"바로 움직일 수 있지?"

"언제든지."

"따라와."

칼은 우거진 숲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엘튼이 호각으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다.

서서히 가슴을 옥죄는 감각.

4성에 오르고 나서, 위기 감별사의 감각이 더욱 또렷해졌다.

좀 더 세분화된 느낌이랄까.

압박감이 더 심해지기 전에 일행과 약속해둔 장소로 움직였다.

뒤를 돌아보니 록터가 잘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움직임이 전보다 훨씬 둔해진 느낌이었다.

피로도가 한계치 이상으로 쌓였다는 뜻인데, 고민이었다.

포위망도, 위협적인 감각도 여전했으니까.

큰 바위 쪽에 도착하니, 일행이 모여 있었다.

아직 엘튼이 오지 않았는데, 곧 도착할 것이란 소식을 받았다.

그 사이, 칼은 고민에 들어갔다.

'어디로 가야 하지?'

감각에 따라, 생존 본능에 따라 이곳까지 흘러왔다.

하지만 이젠 목적지를 정해야 했다. 록터의 위치가 계속 노출되는 상황이라면, 블라이어 영토 안에서 버티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저들이 섣불리 들어올 수 없는 장소로 가야 했다.

'베테나 혹은 에토르.'

블라이어를 견제할 세력은 토바른 내에 이 두 곳뿐이다.

다만, 아직 선택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자신들보단 블라이어에 호의를 베풀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소문의 헌트를 듣고 베네타를 염두에 두었다.

[록터 펠리스, 헌트의 행동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우리의 검이다.]

하지만, 록터가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분명 꿍꿍이가 있을 것이라 베네타를 불신하는 상태였다.

그렇다고 에토르로 가자니,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사지(死地)로 들어가는 기분이랄까.

칼의 감각으로 가장 꺼려지는 장소였다.

결국 록터를 도와줄 조력자가 있을 만한 곳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응? 잠깐."

불현듯 록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그자와 연락이 되나? 아니면 머무는 장소라던가."

"그자? 누구를 말하는 거지?"

"광산에서 널 죽이려고 했던 배신자를 알려준 존재 말이야."

"전(前)대 성주가 키운 손가락 중 하나로 알고 있다."

"손가락?"

"블라이어의 그림자로 불리던 이들이다. 카멜에게 모조리 숙청당했지."

"그 녀석은 살아있잖아?"

"나도 정확하게 모른다. 모르는 인물이었거든."

기사 에펠로아.

록터의 최측근으로 심어둔 카멜의 세작인데, 모른 상태로 배신을 당했다면 크게 당할 뻔했다. 그래서 록터도 그 손가락의 존재에 대해선 우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을 들었다며?"

"들었다."

"이름이 뭐지?"

"...."

"뭘 고민하는 거야?"

"은인의 이름을 함부로 말하는 게…."

"시끄러! 지금 그딴 거 생각할 때야!?"

"내겐 중요한 일이다."

"도움을 줄 세력이 필요해. 손가락이라며? 내가 아는 이름일 수도 있으니 어서 불어. 움직이는 데 분명 도움이 될 거라고."

"모를 거다. 나도 처음 듣는…."

"저기 엘튼 안 보여? 얼른 말해!"

수풀을 헤치고 엘튼이 모습을 드러냈다. 피투성이였는데, 시선을 잡아끄느라 부상을 당한 것 같았다.

신음을 흘리며 상처를 치료하는 모습에 칼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록터를 노려보자, 그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을 보니, 더는 고집을 부리기 어려웠다.

"아서 클레이튼."

"...뭐?"

"아서 클레이튼. 내게 배신자 에펠로아의 이름을 알려준 손가락의 이름이다."

127화 합류

아서 클레이튼.

그 이름이 록터의 입에서 흘러나온 뒤로 칼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칼이 물었다.

"그 녀석이 마지막에 뭐라고 했지?"

"에토르로 오라고 했다."

"…에토르? 에토르 영지가 확실해?"

"그렇게 들었다."

칼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느낌이 안 좋았던 장소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그 녀석의 조언이라 한 번 더 에토르를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마스터의 제자라며? 그런데 블라이어의 손가락? 그 녀석은 여기저기에서 뭘 하고 다녔던 거야?'

녀석의 스토리를 들었다.

카멜의 암살을 시도했다가 탈출한 뒤, 실험체 감옥까지 흘러들어왔다고 했다.

그럼 잡혔을 때 록터를 만나 배신자의 정체와 탈출 후 갈 곳까지 전해줬다는 얘기인데, 포로 입장에서 그게 가능하다고?

언제 죽을 줄 알고?

그리고 그 정보들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의문투성이네. 의문투성이야.'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녀석의 조언대로 움직여서 지금껏 손해를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조언대로 록터는 탈출 직후 배신자를 처단했고, 자신은 록터와 합류하게 되면서 복수까지 이루게 됐다.

녀석의 조언대로 다 이뤄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고민하는 건 당연했다.

'진짜 에토르로 가야 하나?'

그런데 느낌이 진짜 싸했다.

4성이 된 이후로 그 감각이 더욱 또렷해져서 더 갈등 되었다.

칼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자, 록터가 물었다.

"알고 있는 인물인가?"

"알고 있지. 널 만난 게 다 그 녀석 덕분이니까."

"그자가 날 돕기 위해 널 보낸 건가?"

"아니. 그거랑은 상관없어. 아니, 이젠 그것조차 의심해 봐야 하나?"

숲에서 녀석과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닌 것 같았다.

예언자처럼 정보를 흘리고 다니는 녀석.

실험체 감옥에 대해서도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대체 뭐 하는 녀석일까?

모르겠다.

칼은 곧 잡생각을 털어냈다.

이딴 고민에 지금 시간 낭비할 때가 아니었다.

서서히 조여오는 압박감.

또 다른 포위망이 몰려오고 있었다.

"에토르로 일단 가자고."

"거긴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내 감은 지금도 에토르로 가지 말라고 하고 있어. 더 최악인 건 지금 내 직감은 더듬이처럼 바짝 서서 상태가 최고라는 거지."

"그런데도 간다고?"

"녀석이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겠지."

"이미 수개월 전의 이야기다. 상황이 달려졌을 수도 있어."

"솔직히 말해줘?"

"뭘 말이지?"

"에토르가 유독 심할 뿐이지 어디를 향하든 뒈질 것 같은 느낌은 똑같다는 거야. 아직도 네 몸에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겠지만, 위치가 계속 노출되고 있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야. 계속 움직이는 것. 그 사이에서 빈틈을 찾는 것."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내 직감이 전부 다 맞는 건 아니야. 상황을 보면서 움직여야 해."

고개를 끄덕인 록터는 바로 움직일 채비를 했다.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칼 일행도 거리를 두며 보조를 맞출 수 있었다.

에토르는 5시 방향에 자리 잡고 있으니 코룬 강 하류를 따라 쭉 이동하면 될 것 같았다.

록터는 장비를 살폈다.

상태가 양호한 두 자루의 검.

단단해 보이는 세 개의 검집.

모두 허리춤에 매달고 몸 상태를 확인했다. 주먹을 움켜쥐며 미간을 살짝 좁힌 록터는 채비를 마무리하고 칼 일행에게 다가갔다.

록터의 얼굴을 살핀 칼이 넌지시 물었다.

"컨디션은 어때?"

"나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말고. 확실하게 어느 정도야?"

잠시 고민하던 록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체력 회복과 근육의 반응 속도가 점점 더뎌지고 있다."

"몸이 점점 무거워진다는 거지?"

"맞아."

"볼트의 저주 때문일 거야. 포션으로는 치료할 수 없었거든."

록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술사의 저주가 깃든 볼트를 여러 대 맞았다.

저주가 분명하지만, 일행들은 주술이나 마법 쪽으로는 취약했다. 저주를 풀 방법이 당장은 없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전처럼 미친 짓을 더 했다간 골로 간다는 뜻이었다.

록터의 상태를 파악한 칼은 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지금처럼 움직여서는 안 된다.

"너무 급하게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움직여도 안 돼. 일정한 속도로 쉬지 말고 움직여. 그래야 내가 네 위치를 가늠하면서 움직일 수 있어."

"알겠다."

"강 쪽은 되도록 피해. 그리고 혹여 내가 신호를 보내면 바로 내 쪽으로 튀어와.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누가 위험하다는 거지?"

"내가."

"네가 위험하다고?"

"사냥꾼들이 다시 뭉치면 골치 아파져. 흔들어야 해. 헌트에서 지원군이 왔다는 정보를 퍼뜨렸으니까. 그걸 이용할 거야. 조금 빡셀 수 있어."

"난 헌트와 상관없다."

"알고 있으니까. 그만 닥치고 달리기나 해."

칼이 귀찮은 듯 손짓하자, 록터는 옅게 미소를 짓곤 등을 돌렸다.

블라이어에서 처음 만나 생사를 오가는 동행을 함께 했던 두 사람의 관계는 크룩스의 죽음 이후 완벽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서로 등을 맡길 수 있는 관계를 넘어, 서로 목숨을 맡길 수 있는 관계.

"위험하면 언제든 불러라."

"내가 널 부른 순간이 우리한테는 가장 위기가 될 거야."

"넌 내가 살린다."

그 말을 남기고 록터는 빠르게 숲 안쪽으로 사라졌다.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콧등을 긁적인 칼은 일행을 이끌고 사냥꾼 무리를 찾아 움직였다.

늘 그렇듯 포위망은 도주하는 록터를 중심으로 형성이 될 것이다.

그 주변으로 거리를 두고 움직이다 보면 사냥꾼 무리가 마주치게 된다.

이동 중 칼은 엘튼의 상태를 확인했다.

"상처는 어때?"

"버틸 만합니다."

"사냥꾼들한테 당한 거야?"

"네. 머릿수가 많기도 했지만, 실력도 이전 놈들보다 뛰어났습니다."

"빌어먹을, 슬슬 진짜들이 나타나는 것 같은데."

실력 있는 놈들은 절대 먼저 나서지 않는다. 최대한 사냥감의 상태를 확인하고 움직였다.

그런 놈들은 자신의 목숨도 중히 여기는 놈들이라 신중했다. 상대가 록터 펠리스라면 개인전은 절대 안 할 테니, 분명 똘똘 뭉쳤을 것이다.

"복장 다시 확인해."

칼 일행은 사냥꾼 복장을 다시 확인했다. 엘튼도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칼도 눈에 띄는 허리띠나 단검들은 옷 사이로 가렸다.

조무래기들과 달리 노련한 놈들 사이로 스며들려면 하나하나 조심해야 했다.

특히, 사냥꾼들을 움직이는 놈들을 잘 파악해야 했다.

우두머리가 누구려나?

그 의문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존재들이 엘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쌍둥이 형제의 지휘를 받는 듯 보였습니다."

"…뭐? 잭과 하우엘?"

"네. 절 쫓는 사냥꾼들 사이에서 분명 두 형제의 이름을 들었습니다. 사냥꾼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 같았습니다."

"...."

앞서 달리던 칼은 표정을 굳히고는 자리에 뚝 멈춰 섰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칼이 보인다.

엘튼은 그 모습이 뭔가 일이 틀어질 때 마스터가 하는 행동임을 알아챘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잭과 하우엘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가슴이 꽉 조이는 느낌을 받았다.

답답하다. 그리고 불안했다.

칼은 록터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보통 그 녀석과 멀어지면 모든 압박감에서 해방됐다.

록터와 거리를 둘수록 안전하다는 뜻인데, 무슨 이유인지 거리를 벌리고 있음에도 압박감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위기 감별사의 직감은 완벽하지 않지만 대체로 맞아떨어졌다.

지금 자신은 무척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뭘까?

아니면 4성에 오른 감각이 너무 예민해서 그런 것일까?

목 아래까지 칼날이 파고드는 섬뜩한 감각이 느껴진다.

이 정도로 생생한 감각.

붐(Boom)이 왼팔을 터뜨리고, 죽기 직전까지 위기에 몰렸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뭔가가,

잘못됐다.

* * *

콰아아앙―!

거대한 주먹이 바위를 부수고 짓쳐 왔다.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바위를 부수고, 나무를 부수고, 눈앞의 사내마저 부수려고 했다.

고개를 젖혀 주먹을 회피하고 반격을 하려는 순간, 뒤쪽에서 다급히 사내를 불렀다.

"알렉스 뒤요! 위험해요!"

"빌어먹을!"

넬라의 외침에 다급히 바닥을 굴렀다.

검은 그림자가 등 뒤를 덮더니 내가 있던 자리에 큰 구멍을 만들었다.

콰쾅―! 쾅!

주먹이 모든 것을 짓뭉개듯 덤벼들었다.

폭주 기관차가 따로 없었다.

난 재차 붉은 눈빛을 번뜩이며 질주해오는 주술 인형들을 노려보며 시위를 당겼다.

황금빛으로 물든 화살.

퉁―!

쏘아진 화살들이 성력을 담고 반다이크들을 압박했지만, 화살은 곧 반다이크의 몸에 맞고 무력하게 튕겨 나갔다.

성력 공격이 안 통한다.

아니, 정확히 화살이 주술 인형의 몸에 박히지 않았다.

"약삭빠른 새끼들. 벌써 대응책을 세웠네."

화살을 쏴도, 단검을 찔러도.

통짜 쇠로 떡칠한 무식한 방어를 뚫고 반다이크를 공격하는 게 쉽지 않았다.

약점을 무식한 방어력으로 보완한 것인데, 손쉽게 소멸시켰던 때보다 훨씬 힘들어졌다.

한 마리라면 시간을 들여 충분히 공략할 수 있지만 세 마리, 네 마리가 동시에 압박하며 내 몸을 찢어버릴 듯 돌격해오니, 피하는 데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몸을 빠르게 튕기며 거리를 벌린 것도 잠시,

번쩍―!

"...!"

반대편 멀찍이서 섬뜩한 핏빛이 쏟아지자, 난 다급히 시위를 당기며 빛이 터진 곳으로 몸을 틀었다.

흑주술이다.

반디이크들로 내 발을 묶으면서 내게 원거리 주술을 날려댔는데, 쏟아지는 기운이 위협적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성력이 실린 화살이 빛을 관통하자, 오싹한 주술적 기운이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저 멀리서 비틀거리는 일부 주술사들이 시야에 잡혔다.

저놈들이 내게 주술을 걸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주술사만 죽이면 끝나는 게임인데.'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인데, 방패를 든 기사들과 부딪친 이후로 엄두가 안 났다.

푸른 견장.

카멜의 친위대가 주술사들을 앞에서 보호하고 있었다.

'주술사와 반다이크 다섯, 그리고 친위대 둘.'

한눈에 블라이어 군대의 핵심 전력인 주술사 부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술사 부대가 이 자리에 나타난 이유는 반나절 전에 카멜의 지시로 움직인 블라이어 군대가 베네타 경계에 주둔하고부터다.

베네타 방향에서 주술사 부대들이 코룬 강 쪽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식이 들린 뒤 난 계획을 바꿔 눈에 보이는 주술사 부대를 족족 에토르 방향으로 유인하는 중이었다.

다행이라면 날 발견한 뒤로 주술사 부대들의 표적이 나로 변했다는 것이었다.

콰아앙―!

나무가 부서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반다이크들이 반리와 대치 중이었다. 반리가 남은 주술 인형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그저 시간을 벌어다 줄 뿐이었다.

기습이 실패하고 성력마저 통하지 않은 상황에서 저들과 긴 시간 대치하는 건 위험했다.

주술사 부대는 저들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후퇴.

판단이 서자, 주술사들을 향해 푸른 빛의 화살 세례를 쏘아 올렸다.

관통이 실린 화살을 보자, 기사들이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모든 시선이 화살에 쏠리는 사이, 난 등을 돌리고 숲 쪽으로 몸을 날렸다.

"넬라!"

내 부름에 숲 안쪽에서 웅크려 있던 그녀가 내 곁에 바짝 붙어 따라왔다.

반리도 어느새 그녀의 그림자를 타고 올라와 그녀의 머리맡에 안착했다.

숨을 헥헥 쉬고 있는데 전투가 쉽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됐습니까?"

넬라는 다급한 얼굴로 수정구를 내게 내밀었다.

현재 상황을 알 수 있는 블라이어의 통신구였다.

"표적이 둘로 나뉘었어요!"

"설마, 새로 각성한 주인이 표적으로 추가된 겁니까?"

"네!"

"어딥니까? 그자가 있는 방향이."

잠시 미간을 좁힌 넬라가 한 방향을 가리키자, 난 그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그를 구하러 갈 건가요?"

"그는 록터와 다릅니다. 우리가 안 가면 그는 무조건 죽습니다."

"록터는 어쩌실 거죠?"

"그는 칼보다는 안전합니다. 더는 록터의 위치를 알 수 없지 않습니까?"

"네. 이젠 위치를 읽을 수가 없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넬라는 이제 록터 펠리스의 위치를 잡아낼 수 없게 됐다.

즉, 신명 각성을 통한 록터의 위치 노출은 더는 탐색이 불가능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변수가 터졌다.

새로운 신명의 주인.

[칼 바스타인이다. 찾아라.]

칼이 하필 지금 상황에 각성해버린 것이다.

표적의 대상이 록터 펠리스에서 칼 바스타인으로 바뀌어버린 상황이었다.

"응? 반리 왜 그래?""

그때 반리가 기척을 발견하곤 넬라에게 신호를 보냈다.

또 다른 주술사 부대인가?

흡혈의 고리를 잡고, 전투를 준비하려는 그때였다.

시위를 당기고 있는데, 단 하나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 손에는 투박한 검은 다른 한 손에는 낡은 검자루를 움켜쥔 사내였다.

128화 개 같은 악당 새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다가오는 실루엣.

잠시 후, 숲 사이로 너저분한 몰골의 사내가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있었지만, 난 그를 본 순간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내 눈에만 보이는 신명 사냥꾼의 능력.

후광(後光).

사내의 머리맡에서 은은한 후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신명의 주인.

그리고 저 고집스러운 얼굴까지.

"록터 펠리스!"

이름을 외치는 내 감정엔 반가움이 깃들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오히려 반대였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도망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외침이 바로 자신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선 그는 우리 복장을 살폈고, 판단을 마친 듯 그대로 검을 움켜쥔 채 잔상처럼 사라졌다.

오싹한 감각이 경고를 보내왔다.

아, 붉은 망토!

위장에 익숙해진 탓에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 복장이 지금 흑주술사라는 것을 말이다.

"자, 잠깐!"

망토를 벗어 던지고 얼굴을 드러냈지만, 록터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번뜩이는 검이 짓쳐 온다.

상대는 5성이었다.

이를 악물곤 넬라를 풀숲으로 거칠게 밀어냈다.

"반리, 붙잡아!"

넬라 머리 위에서 뛰어내린 반리가 땅속으로 사라지더니 눈앞에 그림자 손들이 담쟁이넝쿨처럼 솟구쳤다.

록터의 그림자 밑에서 튀어나온 것인데, 찰나의 순간 두 다리가 묶인 록터가 나타난 곳은 내 코앞이었다.

시발, 더럽게 빠르네.

뒤로 한 발 물러난 순간 앞 머리카락 일부가 싹둑 잘려 나갔다.

아니, 검은 더 빨랐다.

방금 죽을 뻔한 거 맞지?

"시발! 내 얘기 좀… 이, 이 꼴통 새끼가!"

검이 빛으로 번뜩였다.

오라 소드로 그림자 손들을 단칼에 잘라버리고 날 노려보며 옆으로 검집을 휘둘러 쏘아진 화살을 튕겨냈다.

카장―!

넬라가 쏜 화살이었다.

그리고,

쾅―!

"...!"

두 번째 화살을 검집으로 때린 순간 폭발에 휩쓸리며 록터가 뒤로 주춤 물러났다.

순백의 활이 보였다.

그 시위 사이로 하나둘 핏빛 화살이 생성되더니, 자신에게 우수수 쏟아졌다.

록터의 양손이 어지러이 움직였다.

콰콰콰쾅―!

폭발이 터지고, 뿌연 연기가 솟구쳤다.

[물러나라. 두 번은 안 통한다.]

"압니다."

[자세를 잡고 전투를 준비해. 보고 움직일 상대가 아니다.]

레토의 조언대로 난 거리를 벌리곤 흡혈의 고리를 해제했다. 두 주먹을 움켜쥐고 긴장한 눈으로 록터가 있는 방향을 노려봤다.

록터를 상대로 내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총 세 가지다.

신명 사냥꾼.

펜리 소환.

그리고 격발(擊發).

다만, 이중 내 계획에 록터에게 쓸 카드는 없었다.

한 마디면 충분하거든.

이런 상황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한 대사가 있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제때 써먹지 못했다.

물론, 100프로 확신은 없으니 대비는 해야 했다.

연기 뚫고 록터의 신형이 튀어나온 순간 난 빠르게 한 단어를 언급했다.

"말린 사과, 기억 안 납니까?"

"...!"

블라이어 전(前)대 영주인 리암슨 자작의 암구호를 언급한 순간, 흙먼지를 뒤집어쓴 록터가 뚝 멈춰 섰다.

대략 열다섯 걸음 거리.

[아슬아슬하군. 긴장 놓지 마라.]

"...."

록터가 암구호를 알아볼 것이라 확신하지만 혹시 모른다.

세 가지 카드 중 당장 쓸 수 있는 격발 자세를 잡고 작게 중얼거렸다.

"오지마. 제발."

"...."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록터의 눈동자가 꿈틀하더니 살벌했던 기운이 서서히 수그러들었다.

말린 사과.

이 암구호를 알고 있는 이는 이제 단 두 명뿐이다.

자신, 그리고 자신에게 이름을 알려준 한 인물.

"…아서?"

"오랜만이네요."

"그대가 왜 이곳에 있지?"

"구하러 왔습니다."

록터가 검을 내려놓자,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자세를 풀었다.

갑작스런 만남에 자칫 골로 갈 뻔했다.

"그 복장은 뭐지?"

"잠입하려고 위장을 하긴 했는데...."

"위치는? 내 위치를 어떻게 알았지?"

날 알아봤지만, 록터는 아직 의구심을 버리지 않았다.

험한 도주 생활.

사방이 적이니 확신이 필요한 것 같았다. 과거 내게 도움을 받았다지만, 칼 일행과 달리 그는 피의 만찬에서 나를 잠깐 본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넬라."

설명하는 것보다 흑주술사가 아니란 증거를 보여주는 게 더 빨랐다. 내가 손짓하자, 넬라가 곁으로 다가와 로브를 벗었다.

금발의 엘프가 얼굴을 드러내자, 록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중에 흑주술사가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칼은 어디 있습니까?"

"모른다. 내가 움직이면 그가 늘 날 찾아왔으니까."

"칼이 위험합니다."

"…뭐?"

지금껏 덤덤한 표정을 유지하던 록터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칼의 신변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급한 상황이라 일단 록터를 데리고 움직이려고 했는데, 넬라가 귓속말로 록터의 상태를 전했다.

"저 사람, 저주에 걸렸어요."

"저주요?"

"네. 중첩된 저주가 온몸을 압박하고 있어요.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

"치료할 수 있겠습니까?"

"단시간에는 안 돼요. 하지만 저주를 약화시킬 순 있어요."

"부탁드립니다."

"아, 전 안되고, 당신이라면 가능해요."

흑주술이란 뜻이었다.

우리 대화를 들었는지 내가 다가오자 살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봤다.

"그대가…?"

"잠시."

록터의 등에 손을 얹고 고대 문양을 소환했다. 황금빛이 은은하게 흘러나와 록터와 나를 부드럽게 감쌌다.

하―

록터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고통보단 답답했던 무언가가 빠르게 사라지는 쾌감에 가까웠다.

주먹을 몇 번 움켜쥐며 감각을 살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옥죄던 압박에 약해지니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고맙다."

"임시방편입니다. 제대로 된 치료는 나중에 꼭 받으세요."

"그러지. 이 빚은 꼭 갚겠다."

대화는 잠시 멈춰졌다.

동시에 모두의 고개가 숲을 향했다.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 때문이다.

황금빛이 시선을 끈 것일까.

쿵. 쿵. 쿵. 쿵.

육중한 것들이 숲을 짓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순식간에 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눈앞의 숲이 무너지며 반다이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을 지체한 사이에 발각당했다.

엉망이 된 숲 너머로 주술사 부대가 모습을 드러내자, 난 미간을 좁혔다. 저들을 정리하고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다른 전력과 합류하면 귀찮아질 테니까.

나와 넬라만 있었다면 할 수 없는 판단이지만, 지금 내 곁에는 미래의 돌격 대장이 있었다.

"돌격… 아니 록터."

"...?"

"그 빚 지금 갚으시죠?"

"복수를 원하나?"

"그 정도까진 아니네요."

록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뽑아 들었다.

* * *

숲 위로 태양이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붉게 물든 대지 위로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졌다.

주술사 복장으로 얼굴을 가린 이가 숲 사이를 뚫고 주술사들이 뭉친 방향으로 매섭게 짓쳐 왔다.

그를 발견한 주술사들이 반다이크들에게 복귀를 명령했지만, 저 멀리 검은 정령에게 발이 묶인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이미 한 차례 겪어본 전투 패턴이었다.

"놈이다!"

"접근하기 전에 막아!"

놈이 사용하는 황금빛은 자신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주술사들은 빠르게 물러났고, 그 앞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알렉스 마르샤, 아까 혼이 덜 났나 보군."

"이번에는 꼭 머리를 가져가겠다."

푸른 견장으로 무장한 두 명의 기사.

과거에도 푸른 견장은 블라이어의 정예 기사로 실력이 증명된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근래에 푸른 견장은 명예를 넘어 토바른 내 기사들의 부러움과 공포의 상징이 되어 있었다.

아티팩트로 무장된 최정예 기사단.

푸른 견장은 곧 아티팩트의 주인을 뜻했다.

기사들은 각자 자신들의 아티팩트를 꺼냈다.

놈은 활을 잘 쓰지만, 근접 격투도 상당한 편이었다. 황금빛에 취약한 주술사들을 지키면서 싸우려면 아티팩트 사용이 필수였다.

민첩을 올려주는 팔찌가 빛나고, 강도와 절삭 증폭 효과가 있는 검이 눈부시게 빛났다.

두 기사는 자리를 지킨 채 곧 다가올 녀석을 기다렸다.

잠시 후, 눈앞에서 서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아티팩트에 집착할수록 기사와 멀어진다고 내가 그리 말했거늘."

"...?"

로브가 벗겨지더니, 단단한 눈빛의 사내가 두 자루의 검을 펼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 사내를 본 순간, 기사들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록터 펠리스.

과거 블라이어의 전대 기사 단장.

"다, 단장!?"

"너희에게 원한은 없다."

"자, 잠깐…."

눈앞에 오라 소드가 번쩍이는 순간, 기사들은 이를 악물곤 검을 휘둘렀다.

카앙―!

마법검이 오라 소드와 부딪치며 버티자, 다른 기사가 록터의 목을 벼락같이 베어냈다. 팔찌의 힘을 빌린 엄청난 속도. 하지만 곧 검집에 흘리며 기사의 검은 위로 솟구쳤다.

카카카카카캉―!

한 호흡에 이뤄진 수십 공방.

공격을 모조리 튕겨낸 록터가 자세를 낮추자, 기사들은 다급히 소리 질렀다.

"빌어먹을! 모두 공격해!"

단장의 검은 리옹 부단장의 변칙과 달리 단순했다.

하지만 같이 훈련하는 기사들 백이면 백, 단장과 대결하는 것을 가장 꺼렸다.

극한에 이른 기본 검술.

빈틈이 없는 검.

이런 아티팩트 같은 편법으론 절대 못 이긴다.

기사들이 록터를 붙잡고 늘어지는 사이, 주술사들은 다급히 주술을 준비했다. 그중 한 명은 통신구를 꺼내, 이 사실을 카멜에게 알리려고 했다.

"…어?"

통신구 겉면으로 빛이 반사되자, 주술사는 무심코 뒤를 돌아봤다. 그리곤 툭― 통신구를 떨어트렸다.

투창 크기의 황금빛 화살이 등 뒤로 짓쳐 오고 있었다.

뒤늦게 이를 눈치채고, 다른 주술사들이 화살을 보며 입을 쩍 벌렸을 때,

번쩍―

한줄기의 황금빛이 한데 뭉친 주술사들을 무참히 휩쓸고 지나갔다.

서 있는 주술사는 없었다.

찢긴 망토, 피로 흥건한 바닥.

신체 일부만 드러난 흔적 아래로 잠시 후, 두 개의 머리가 툭 굴러떨어졌다.

고통으로 한껏 일그러진 얼굴.

두 기사의 머리였다.

"...."

록터는 한때 동료였던 기사들의 머리를 한 번 내려다본 후 등을 들리곤 반다이크를 향해 달려나갔다.

오라 소드가 반다이크의 투구 덮개를 무참히 반으로 쪼갰다.

* * *

"존나 깔끔하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곤 전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성력에 당한 반다이크들은 모두 소멸한 상태였다.

록터가 놈들의 두꺼운 철갑을 갈라버리면, 그 틈으로 화살만 날리면 되는 전투였다.

반다이크들의 갑주를 뚫기 위해 별 개지랄을 떨었던 과거가 허무할 정도로 쉬운 전투였다.

그건 주술사들을 제거할 때도 마찬가지.

강력한 기사 한 명을 동료로 얻자, 전투 난이도가 말도 안 되게 쉬워졌다.

'역시 동료가 필요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

헌트를 통해 한 명, 한 명 모아갈 생각이었다.

[2소대, 신호를 보냈으면 보고하라.]

서둘러 칼을 찾기 위해 록터에게 손짓을 했는데, 바닥 어딘가에서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찢긴 망토를 들치니 통신구가 있었다.

통신구가 붉게 변해 있었는데, 주술사가 카멜에게 통신을 연결하고 죽은 모양이었다.

난 통신구를 집어 들곤 잠시 고민했다.

이 타이밍이라면 한 번 흔들 수 있지 않을까?

짧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 아."

목을 한 차례 가다듬고.

"오랜만이다. 카멜."

[...?]

"알렉스 마르샤다. 내 부친을 죽인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오늘 한 번 질러본다.

강하게.

129화 개 같은 악당 새끼(2)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욕설에 막사 안은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보통 먼저 화를 내는 리옹조차 눈치를 보며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무표정.

주군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정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카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의 전달자인가?"

[알렉스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전달자 임무가 끝난 지 언젠데 아직도 전달자 타령이야.]

"겁대가리가 없군."

[부친을 죽인 원수에게 무슨 말을 못 해? 아, 부친을 죽인 패륜아 새끼는 이 울분이 찬 떨림의 감정을 모르려나? 존나 미안하다.]

까득―

수정구를 움켜쥔 손아귀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모두의 앞에서 자신에게 이런 모욕을 준 이가 지금껏 있었던가.

회귀 전에도 이런 경험은 해보지 못했다.

"아주 재미있어."

[재밌어? 넌 이게 재밌냐? 변태 새끼.]

벌레 따위로 취급했던 놈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서려고 하는 꼴이라니.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그 표정에 리옹과 렌구아는 마른침을 삼켰다.

수천 단위의 학살을 명할 때 보이는 표정.

저 표정 뒤엔 늘 수많은 피가 따랐다.

그렇다고 주군이 흥분한다거나 이성을 잃은 모습은 보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냉정하고 날카롭게 판단을 내렸다.

깊은 심계(心界).

그것이 주군의 장점이자 무서운 면모였다.

통신구를 들고 잠시 턱을 매만지던 카멜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네 편지를 받았다. 거기 적힌 내용, '그'가 알려준 건가?"

['마스터'는 아직 너와 잘해볼 생각인 것 같은데, 난 아니야. 그것만 알아두라고.]

"내 위치를 어떻게 알고 편지를 보낸 거지?"

[네 곁에 첩자라도 있나 보지.]

"웃기는 소리."

[둥지의 주술사들을 통해 베네타로 첩자들을 보낸 거 다 알아. 우리라고 둥지로 첩자를 못 보냈을 거 같아? 아, 주술사들의 기억을 뽑긴 좀 그렇지?]

곁을 지키던 렌구아도 당황하게 만드는 대답이었는데, 카멜은 무표정으로 일관했다.

"내게 연락한 이유는?"

[마스터의 최후통첩이다. 당장 병력을 물려.]

"거절한다. 나와 적이 돼서 좋을 게 없을 텐데?"

[그건 마스터 사정이고. 나야 협상이 결렬되면 고맙지. 네 멱을 따러 가도 마스터가 별말 안 할 테니까.]

"내 앞에서 무릎 꿇고 살려달라 빌던 네깟놈이?"

[누가 나 혼자 간데? 헌트가 움직이면 다를 거야. 에토르 성의 바깥 공기가 무척 차던데. 네 무덤으로 쓰기엔 장소가 너무 춥지 않아?]

카멜이 리옹을 바라보자, 리옹이 다급히 예를 표하곤 바깥으로 나갔다.

"날 치러 오겠다?"

[군대는 베네타의 경계에, 정예 전력은 록터를 잡는데 보낸 것 같은데, 호위 좀 데려가지 그랬어. 급한 볼일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재미있군. 와라. 그 머리통을 요긴하게 써줄 테니."

[지금 가는 중인데?]

아케인은 묘한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봤다. 그는 계시(啓示)대로 움직이며 그 뜻에 순응하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저 대화의 주인공들은 계시를 비껴간 존재들이었다.

크룩스의 암살자인 알렉스는 계시대로 진즉 죽었어야 할 인물이었는데 지금껏 살아서 카멜을 도발하고 있었다.

운명을 거부하고 자신을 찾아온 카멜 블레이저도 마찬가지.

즉, 저 둘의 대화는 계시를 벗어난 것이며, 아케인의 세상에선 절대 벌어져선 안 되는 장면이란 뜻이다.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계시(啓示)가 만들어낸 세상을 비튼 변곡점이 저 둘 중 누군가에게 존재했다. 변곡점을 없애려면? 간단했다. 그 존재를 없애면 된다.

아직 계시의 흐름을 바꿀 정도의 힘은 없는 것 같았으니까.

[기다려. 이 학살자 새끼야.]

그 목소리를 끝으로 지직― 연결이 끊겼다. 렌구아는 송구하다는 듯 카멜이 내민 수정구를 받아 들었다.

"렌구아."

"마, 말씀하십시오."

"2소대가 당했다. 다른 소대 위치를 파악한 뒤 우리 쪽으로 모두 보내."

"베네타 경계에 주둔 중인 군대는 어찌할까요?"

"전원 대기한 채 경계 수위를 더 올려. 그곳 포위망은 절대 내주면 안 돼. 록터가 베네타로 가면 곤란하다."

록터는 반란의 중심이 될 수 있는 자다. '그'의 손에 넘어가게 두면 절대 안 된다.

"그래도 주술사 부대 외에 호위 병력을 더 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금 그 헌트라는 놈들이…."

"안 오면?"

"네?"

"놈들이 안 오면 우린 닭 쫓던 개 신세가 된다. 최소한의 대비만 해두고 상황에 따라 움직인다."

수정구를 통해 놈은 자신을 도발하며 당장 쳐들어올 것처럼 행동했지만, 카멜은 상대가 기만책일 경우도 생각했다.

놈의 말만 믿고 병력을 자신 쪽으로 물리는 순간 록터는 물론 놈도 놓치기 때문이다.

일단 잡아두고 상황을 보면 된다.

기만책일 경우엔 포위망을 좁히면 되고, 정말 쳐들어오면 에토르 내에 준비해둔 장소로 몸을 피하면 된다.

주술사 부대라면 그 정도 시간은 벌어다 줄 것이다.

"그 녀석 말인데."

"네? 누구를…."

"알렉스. 그 암살자 놈의 기억을 뽑을 당시에 실패하더라도 그 머릿속 뇌 구경을 해야 했어."

"모두 제 불찰입니다."

"이번 작전이 꼭 성공해야 할 거야. 렌구아."

"무, 물론입니다. 오늘 밤 안에 마법진이 완성될 겁니다. 에토르를 곧 주군의 손에 바치겠습니다."

"나가봐."

고개를 숙인 채 렌구아가 막사를 나가고 안에는 아케인만 자리했다.

카멜은 다리를 꼰 채 아케인을 말없이 바라봤다.

식탁 위 지도를 내려다보는 그가 보인다.

부드럽게 흘러내린 백발.

그 백발에 물든 듯한 새하얀 피부.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로 용모를 꾸민 수려한 외모가 눈에 띄었지만, 카멜의 눈에는 저 생각을 알 수 없는 가느다란 눈매가 가장 눈에 띄었다.

얼핏 보면 신비로운 점성술사 느낌이 물씬 풍겼지만, 카멜의 통찰적 감각으론 점성술사보단 마법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다.

회귀 전에도 소문으로만 듣던 인물.

그조차 잘 알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조금 전 놈이 보낸 편지 내용을 떠올렸다.

[우리 헌트(Hunt)에게 원한이라도 있으신가. 현상금에 나를 포함해서 헌트 멤버가 다 있던데, 록터 펠리스는 우리 헌트의 멤버야. 영입 조건으로 목숨을 한 번 살려줬지. 마스터가 당신이 심어둔 세작 에펠로아의 존재를 록터에게 알려주는 것으로.]

거슬리는 내용이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자신의 위치를 알고 편지를 보낸 것도. 세작의 존재가 들킨 것도 작은 변수일 뿐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으니까.

문제는,

[헌트의 맴버는 건드리지 마. 병력을 물리면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지. 손해 보는 걸 싫어하니까. 마스터의 전언 중 앞부분을 전달할게.]

마스터가 보냈다는 전언 부분이 문제였다.

[['피를 마시는 잔'은 아케인과 관련 있는데 곁에 두고 계시더군요. 이전보다 더 빨리 죽고 싶으신가 봅니다.] 난 전했다?]

이 문구를 본 순간 아케인이 다르게 보였다.

경각심.

'그'의 노림수라도 제대로 짚었다.

피를 마시는 잔.

자신을 파멸로 이끈 뒤 산 채로 피를 뽑아간 악마 같은 놈. 기억나는 건 흰나비 가면 사이로 비친 메마른 눈동자뿐이었다.

"제게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대의 도움에 늘 고마워하는 마음뿐이다."

"별말씀을."

"록터의 위치는 이제 알 수 없나?"

"네. 하늘의 부름이 끝났습니다."

아케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다른 말을 움직였다.

조금 전 각성한 새로운 신명의 주인. 영웅 조력자, 칼 바스타인의 말이었다.

그 모습에 카멜은 아케인에 대한 시선을 거두었다.

생각 같아서는 피를 마시는 잔을 언급하며 반응을 살피고 싶었지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아케인은 헌트와 관계가 없어.'

오히려 적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아케인 덕에 '그'의 신명을 알아냈고, 블랙 마켓을 통해 '그'의 정체를 노출시키는 것 외에 엄청난 이득을 챙겼다.

지금도 록터와 그 동료를 죽이기 위해 도움을 주고 있었다.

아직은 이용 가치가 있다.

괜한 부스럼을 만들 필요 없었다.

카멜은 식탁에 서서 칼 바스타인의 말을 한동안 응시했다.

잠시 후 그는 주술사들을 불러 통신구를 여러 대를 놓게 했다. 그중 하나를 작동한 카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블라이어 성주다."

아직 사냥은 끝나지 않았다.

* * *

"이쪽이에요!"

앞쪽에서 빠르게 내달리던 넬라가 메마른 나뭇가지를 흔들더니 방향을 틀었다.

그녀의 신명 도구가 칼 바스타인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나와 록터는 그녀의 안내에 따라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달리면서 난 통신구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카멜에게 직접 도발을 날린 이후로 카멜의 목소리가 빠르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위치를 보낼 테니, 주술사 부대는 칼 바스타인를 찾는 즉시 척살하라.]

[베네타 경계에 주둔 중인 군대를 숲으로 모두 투입시킨다. 록터 펠리스를 찾는 즉시 알리도록.]

[잭과 하우엘은 임무를 중단하고 당장 에토로 이동해라. 호위 임무로 변경한다.]

"...."

난 잠자코 그 내용을 듣다가 더 들을 필요 없다는 듯 통신구를 품속에 넣었다.

그런 내 행동에 곁에서 붙어 따라오던 록터가 의문을 표했다.

"왜 더 듣지 않지? 중요한 내용 아닌가?"

"더 들을 필요 없습니다. 전부 거짓이니까."

"거짓?"

"통신구로 거짓 지시를 내리면서 다른 쪽에선 따로 지시를 내리고 있을 겁니다. 절 방심하게 하려는 개수작이에요."

"그대가 의도한 방향으로 놈이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거짓이라는 건가?"

"네. 베네타의 경계는 여전히 군대가 있을 거고, 잭과 하우엘도 칼을 추적하고 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지?"

"상대가 카멜이거든요. 제가 노린 건 주술사 부대입니다. 블라이어 군대 최정예들과 전투에서 엮이면 상황이 엄청 불리해집니다."

"그래서 도발한 건가?"

"네. 주술사 부대 대부분을 에토르 근처로 유인해놨거든요. 가까우니까 호위로 곁에 둘 확률이 높습니다. 최악을 염두에 두는 놈이라 최소한의 호위 정도는 두려고 할 테니까."

"…설마 그걸 노리고 주술사 부대를 유인한 건가?"

"아뇨. 다른 의도로 한 일인데, 어쩌다 보니… 뭐, 운이 좋았죠."

록터는 앞서가는 아서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신음을 삼켰다.

주술사 부대.

최소 열 부대가 넘는 위협적인 상대라고 했다.

아서의 말대로 된다면 도발 한 번으로 주술사 부대들을 전투에서 배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그렇게 된 것 같고.'

이따금 주술사 부대로 보이는 흔적이 잡혔는데, 움직이는 동안 그들과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들이 카멜의 호위를 위해 에토르로 향했다면 지금 상황이 모두 설명이 된다.

자신은 카멜과의 수 싸움에서 무참히 패해서 모든 것을 잃었다.

아니. 수 싸움이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당했다.

지금 흘러나오는 통신구의 지시에도 속지 않았던가.

하지만 아서는 아니었다.

그는 단번에 카멜의 수를 파악했다.

수를 놓고 카멜과 싸우는 모습을 보며 록터는 전율이 일었다.

지나가듯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있지만, 이 짧은 시간 안에 계획을 떠올리고 카멜 같은 이에게 써먹을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절대.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꼴통 기사.

록터는 그동안 모두에게 꼴통으로 불리며 기사로서 우직하게 신념에 따라 모든 고난을 홀로 헤쳐왔다.

하지만 처음으로 카멜을 보며 한계를 느꼈다.

카멜은 자신의 성정으로 절대 무너트릴 수 없는 성과 같았다.

칼도 말하지 않았던가.

불가능한 목표라고.

그런데,

'아서 클레이튼.'

문득 이런 기분이 들었다.

저 사내의 도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정말 복수를 이룰 것 같은 그런 확신 말이다.

'이번 전투가 무사히 끝난다면....'

아서의 등을 바라보는 록터의 눈에는 열망이 담겨 있었다.

130화 개 같은 악당 새끼(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