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헌트(Hunt) (3)
엘튼은 록터와 칼이 나타난 순간부터 대(大)자로 뻗어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그 얼굴 위로 칼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살아 계실 줄 알았습니다."
"난 네가 죽을 줄 알았어."
"섭섭합니다."
"무모한 짓은 다시 하지 말란 얘기야."
서로 마주 본 둘은 피식 웃었고, 칼이 손을 내밀자 엘튼이 손을 맞잡고 일어났다.
칼은 엘튼을 부축한 채 넬라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절뚝절뚝 움직이던 엘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장을 바라봤다.
록터와 펜리, 5성급 둘에게 합공당하는 잭이 보인다. 조금 전 두 형제가 힘을 합쳐 펜리를 몰아붙이던 때와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아티팩트의 힘을 빌려 버티곤 있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상황이 이렇게 뒤바뀔 줄 몰랐습니다."
"타이밍을 완벽히 노린 거지. 대처할 틈을 안 줬거든."
"잭도 곧 마무리가 되겠죠?"
"글쎄, 그건 지켜봐야겠지. 아서는 반반 확률이라고 말했으니까."
"네? 저 둘이 공격하는데, 놓칠 수도 있단 말입니까?"
"상대가 5성에 바람을 사용하는 놈이니까. 숨겨둔 한 수가 있을 수 있겠지. 그것보단 우리 상태가 썩 좋지 못해."
"아…."
"네 녀석만큼은 아니더라도 휴식이 필요한 상태라는 거지. 록터도 저 다크 엘프도 마찬가지일걸? 잭을 매섭게 몰아붙이고 있지만, 저 둘도 지금 죽을 맛일 거야."
"그럼, 여기 있을 게 아니라, 가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했잖아. 저 둘이면 반반 확률이라고. 셋이면 다르겠지."
칼이 엘튼을 데리고 오자, 나무 위에 있던 넬라가 손을 흔들었다.
어서 이쪽으로 오라는 신호였다.
아서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잭은 무조건 죽어. 그 작은 생존 가능성마저 없애버리려고 녀석이 움직였거든."
"대단하네요."
"대단하지."
자신마저 잭에게 향했다면 더 확실하게 죽일 수 있을 텐데, 아서는 자신에게 부상 당한 이들을 수습하게 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알리라 전했다.
게다가 다음 지시까지 휴식을 명했다.
잭과 하우엘을 제거한 이후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첫 만남에선 그저 목숨줄이 질긴 운 좋은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녀석은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고 있었다.
아서 클레이튼.
녀석과 어울릴수록, 녀석의 생각을 읽을수록 강한 확신이 생겼다.
녀석에겐 자신들이 갖지 못한 아주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게 뭘까?
"크아아아아아! 죽어!"
그때 잭의 발악 섞인 기합이 터져 나왔다. 그를 중심으로 사나운 바람이 뭉치더니, 일시에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바람 칼날 뭉치!
엄청난 수의 바람 칼날이 공간을 뒤덮었다. 록터와 펜리는 미친 듯이 무기를 휘두르며 물러나야 했다.
둘은 그 지독한 여파에 휩쓸려 온몸에 칼날이 베인 것처럼 작은 상처가 가득했다.
아서가 말했던 숨겨둔 능력 같았다.
거친 숨을 내쉬며 서로 노려보는 대치 상황.
거리를 벌린 잭은 뒤로 몸을 튕기며 둘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비겁한 새끼들! 복수는 꼭 한다. 기다려...."
퍼석―!
단말마의 외침은 한줄기의 푸른 빗살에 단절됐다.
푸른 빛의 화살에 머리가 부서졌음에도.
뒤늦게 날아온 다섯 발의 화살이, 재차 날아온 화살 세례가 잭의 몸을 무참히 꿰뚫었다.
잭은 찢어진 종이처럼 최후를 맞이했다.
"무서운 새끼."
칼은 멀찍이서 모습을 드러낸 아서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상대가 가장 큰 기술을 펼치고 가장 지쳤을 때, 상대가 다급히 도망치려고 시선이 분산됐을 때를 노렸다.
그때까지 록터와 펜리를 내몰고 기다린 것이다.
완벽한 암습.
'사냥꾼.'
순백의 활을 든 그를 보자 떠오른 단어였다.
펜리는 갈가리 찢긴 잭을 내려다보곤 인상을 찡그렸다. 대인전이 주특기인 자신을 이토록 고생시키다니 그녀의 엘프 인생에 손꼽히는 강자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근데 비겁을 여기서 왜 찾아. 양심에 털 난 새끼도 아니고. 다구리는 네놈이 먼저 했다고."
"맞는 말이다."
"당신도 경험이 있나 봐?"
"암살자와 사냥꾼을 합쳐서 삼백 이상에게 쫓겼다."
"이거 완전히 쓰레기 새끼네."
펜리는 잭의 시신을 잘근잘근 밟았다. 하지만 그건 목적을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망가진 시신에서 원하는 물건이 나오자, 그녀는 눈을 빛내곤 반지와 크로우를 챙겼다.
난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실망시키질 않네.
누가 돈을 좇는 돈리 체이서 아니랄까 봐.
"홀라당 다 가지시려고요?"
"내가 다 했잖아."
"죽인 건 전데요."
"에이, 막타는 선 넘었지."
록터를 바라봤지만, 그는 두 눈을 끔뻑일 뿐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꼴통 기사로 살아온 티가 팍팍 났다.
이럴 땐 지분을 주장하는 거라고요.
"넬라 말로는 모든 아티팩트에 저주가 걸려 있어서 당사자 외에는 사용할 수 없다고 하던데요?"
카멜은 수집한 모든 아트팩트에 저주를 걸어놨다. 흑주술사가 많으니 할 수 있는 짓인데, 저주를 풀려면 막대한 재료가 필요해서 대부분 그대로 놔두었다. 가진 능력에 비해 너무 수지타산이 맞지 않았거든.
하지만 두 형제의 물건은 달랐다.
"나도 알아. 하지만 이 녀석들 것은 딱 봐도 특별해 보이잖아. 저주를 풀 비용을 생각해도 수지타산이 맞을 거야."
"아시는 흑주술사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일단 챙기는 거지."
하우엘 쪽에 관심을 보이는 펜리를 보며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칼이 전리품을 챙기는 것을 봤다.
록터의 성격은 대충 알 것 같고, 칼은 수완이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치료부터 하죠."
짧은 여유는 끝이 났다.
난 넬라가 있는 나무 밑으로 일행을 데려갔다. 넬라의 손이 바빠진 것은 당연한 일.
난 치료를 받은 일행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겼다.
여기까진 계획대로 됐다.
잭과 하우엘을 제거했다.
이건 아주 큰 성과다.
문제는 다음이다.
이곳을 빠져나가야 하는데, 기발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금화 인형들이 곧 몰려올 거야.'
잭과 하우엘을 사냥하기 전 록터와 함께 금화 인형들의 시선을 최대한 멀리 떨어트려 놨다.
표적을 쫓는 그들의 습성을 이용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금화 인형의 표적이 나와 록터임을 확신했다.
조금 전 금화 인형 한 기가 나타난 것을 보니, 슬슬 다른 녀석들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그놈들은 죽을 때까지 표적을 쫓아 움직인다. 블라이어 군대로 모든 퇴로가 막힌 상황이라 결국 승부를 봐야 하는데, 문제는 일행의 몸 상태가 최악이라는 것이었다.
록터도 펜리도 칼도 엘튼도.
모두 지쳤다.
금화 인형들은 고통을 모르고 방어력이 뛰어나다. 록터조차 단번에 부수기 힘들 정도니, 난전이 벌어지면 분명 죽는 이가 나올 것이다.
'광(光)속성만 있으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데.'
내리쬐는 달빛을 올려다보며 아쉬운 마음이 들였다.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금화 인형이요? 조금 전 절 공격한 인간을 말한 건가요?"
"넬라님이 인형을 공격해서 목표가 바뀐 거지. 원래는 절 노리고 온 놈들입니다."
"…네?"
죽음을 대가로 죽음을 바란다.
금화 인형이 노린 건 그녀가 아니라 나무 위에 있던 나였다.
그들의 목표는 오직 하나, 표적의 죽음이다.
나와 록터 말이다.
"여기서 흩어지죠."
그래서 난 일단 일행을 나누기로 했다.
한데 뭉치면 두려울 게 없는 조합이지만, 지금 상태에선 분명 죽는 이가 나온다. 특히 넬라와 엘튼이 가장 위험했다. 넬라의 무력은 지금 상황에 방해만 될 뿐이고, 엘튼의 경우엔 상처가 위중했다.
그는 지금 부축 없이 뛸 수 없는 처지.
약한 자가 있으면 보호하는 자가 나온다.
그럼 둘의 보호자인 펜리와 칼의 시선이 분산된다.
이것대로 최악이니, 팀을 나누는 게 답이었다.
'이 이상 넬라의 희생을 강요하면 검은 장미의 반감을 살수도 있고.'
그녀는 검은 장미의 정신적 지주를 맡은 신녀였으니 위험한 곳에 계속 내몰면 알게 모르게 반감을 살 게 분명했다. 당장 펜리부터 불만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
아쉽지만, 여기서 둘을 털어내야 했다.
"펜리, 그녀를 데리고 돌아가시면 됩니다."
"베네타로?"
"네. 가능하죠?"
"넬라와 단둘이라면 가능하지."
표적도 아니고, 카멜도 록터와 나를 놔두고 둘은 잡을 생각이 없었다. 경계를 가로막고 있는 블라이어 군대는 그림자 주술을 이용해 뚫고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엘튼이었다.
근데, 우리를 배웅한 건 엘튼이 아니라 칼이었다.
칼은 입술을 앙다문 채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나와 록터를 진지하게 배웅했다.
"꼭 살아남아라."
"...."
"근데 우리는 어디로 움직여야 하지? 생각해둔 장소가 있나? 동료들과 그곳에서 기다리겠다."
금화 인형의 표적은 나와 록터뿐이니,
당연히 나와 록터만 따로 움직이리라 판단한 것 같았다.
원래는 그게 맞는데,
칼의 경우는 좀 특별했다.
"넬라. 떠나기 전에 한 가지만 알려주세요."
"칼은 아직도 추격받을 수 있어요."
"참으로 안타깝네요."
"...?"
칼은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난 조용히 엘튼을 물리고, 칼의 어깨를 탁탁 다독였다.
"칼은 우리와 함께 갑니다."
"…시발. 뭔 개소리야?"
험상궂은 얼굴이 더 살벌해졌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칼 곁에 엘튼을 붙여놓으면 엘튼이 위험해진다. 칼의 위치가 노출되는 순간까지 카멜이 추격자를 계속 붙일 게 분명하거든.
신명의 주인이 원래 좀 그렇다.
잘못 걸리면 아주 고달파진다.
"근래에 뒷골이 싸해지는 경험을 하지 않았습니까? 계속 누군가 쫓아온다거나."
"...."
그 이유를 내가 간단히 설명해주자, 칼의 입이 붕어처럼 서서히 벌어졌다.
충격을 받은 칼을 놔둔 채 엘튼에게 다가가자, 그가 물었다.
"그럼 전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일행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약속된 장소가 있는데, 먼 거리는 아닙니다."
"엘튼이 가야 할 곳은...."
그때,
으어어어― 으어어―
"...."
어둠 사이에서 기괴음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가까워진다.
멍때리던 칼이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하자, 난 다급히 펜리를 돌아봤다.
"펜리!"
"서로 걱정은 접어두고, 돌아오면 정산부터 해."
"팬케이크 먹으러 꼭 와야 해요!"
펜리가 손짓하자, 반리가 잠시 날 바라보더니 앙증맞은 손을 흔들었다.
같이 흔들어주자, 반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펜리와 넬라를 휘감고 바닥 밑으로 스며들었다.
둘이 떠났다.
이제 남은 이는 엘튼뿐.
우리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숲이 들썩이는 것이 언제라도 놈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난 달리면서 엘튼에게 목적지를 말했다.
"일행들을 데리고 블라이어로 가십시오."
"…네?"
"뭐?"
"음...."
내 말에 모두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블라이어라니?
그곳에서 죽기 살기도 도망친 게 얼마 전이다. 그런데 그 안으로 다시 기어들어 가라고?
칼이 헛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제정신이야?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
"당장 갈 곳은 블라이어 뿐입니다."
"베네타로 가면 되잖아."
"그럼 전쟁입니다."
"…뭐?"
"경계에 블라이어 군대가 주둔 중입니다. 저희가 그곳을 뚫고 가면 카멜이 군대를 움직일 겁니다. 록터란 존재는 카멜에게 가시 같은 존재거든요."
"베네타 영토로 군대가 쳐들어온다고?"
"전쟁을 선포하고 록터를 조건으로 내걸 수도 있습니다. 그럼 또 외통수죠."
"...음. 그래서 블라이어로 도망치는 건가?"
록터의 물음에 난 고개를 절레 저었다.
도망쳐?
내가 왜?
"누가 도망친다고 했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처맞기만 할 겁니까? 맞았으면 때려줘야죠."
"때려줘?"
난 칼과 록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지금 블라이어는 빈집입니다."
계획이 있다.
하지만 그 계획 전에 이곳에서 카멜의 눈을 피해 살아남아야 한다.
신명으로 추적이 되는 칼이 당장 블라이어에 가면 안 되는 이유였고, 우리와 함께 남아야 하는 이유였다.
설명할 시간이 없다.
"엘튼, 절 믿습니까?"
"…믿는다."
라웁 숲에서 한 차례 목숨을 빚졌다. 그런 그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을까.
엘튼은 아서를 신뢰했다.
"그럼 절 믿고 당장 움직이세요!"
"알았다."
"서둘러요! 꼬리가 붙었습니다!"
엘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곤 어두운 숲속으로 빠르게 몸을 묻었다.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모든 어그로를 우리가 끌고 있으니,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 것이다.
사라지는 엘튼을 보며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엘튼이 부러울 날이 올지 몰랐네."
"정신 바짝 차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진짜니까."
칼은 날 돌아보며 말없이 눈을 응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뭘 하면 되지?"
"지금까지 쭉 했던 거요."
"도망치는 거?"
"아뇨. 살아남는 거요."
그 말에 칼과 록터는 피식 웃고는 나를 앞지르기 시작했다.
빠르게 달리는 둘의 등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툭 던지듯 물었다.
"앞에 둘, 헌트에 들어올 생각 없습니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지금 상황에?"
"죽으면 제안을 못 하지 않습니까?"
"무슨 개 같은 논리야?"
"싫으면 말고요."
"누가 싫데?"
칼의 대답에 난 짙게 미소 지었다. 록터는 말없이 달렸지만, 분위기를 보니 다 넘어온 것 같았다.
헌트(Hunt)의 멤버.
칼 바스타인.
그리고 록터 펠리스.
일단 셋으로 시작이다.
141화 첫 번째 친구
릴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때 케로스? 저 사람 참 신기하지 않아?"
"멍!"
"별것 아니라고? 넌 저렇게 할 수 있어?"
"…멍!"
"인간이 아니라서 모르겠다고?"
그녀의 시선에는 숲으로 사라지는 아서가 잡혔다.
눈동자엔 흥미가 가득했다.
그것도 잠시, 거칠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에 미간을 구기며 머리를 흔들었다.
거친 밤바람.
빠르게 지나가는 숲 위의 풍경이 보인다.
그녀는 현재 빗자루를 타고 허공 높이 부유한 상태였다.
"밝아서 좋아."
고개를 들어 머리맡의 달빛을 올려다봤다.
찬란한 보름달.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그리고 가장 마음이 편해지는 날이었다.
세찬 바람 사이로 가녀린 손을 뻗자, 달빛이 반짝이며 그 손을 타고 춤을 추듯 보였다.
달의 마녀.
달의 축복을 타고난 그녀는 '신명'대로 달이 사랑하는 마녀였다.
샛노란 달빛이 그녀의 눈동자에 투영되어 은은하게 반짝였다.
"배경이 너무 예뻐!"
이건 못 참는다.
그녀는 손거울을 꺼내 달빛을 배경 삼아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은은한 빛과 어우러지는 투명한 피부가 오늘따라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음!'하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케로스가 정신 차리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앙 깨물었다.
"아앗! 알았다고!"
머리를 털어낸 그녀는 빗자루를 타고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숲과 붙어서 날면 더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만, 주변을 뒤덮은 검은 막 때문에 접근이 꺼려졌다. 검은 막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그녀가 지닌 속성과 상극이었기 때문이다.
"어라? 어디로 갔지? 벌써 사라졌네."
잠시 딴생각하는 사이에 아서의 흔적이 사라져버리자, 릴리는 눈을 감은 채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잠시 후,
"저기다!"
두 눈을 번쩍 뜬 그녀가 빗자루를 움켜잡고 방향을 홱 틀었다.
사라진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신명의 주인인 영웅 조력자와 함께 사라지는 것을 봤으니, 칼 바스타인의 흔적만 쫓으면 됐다.
눈을 가늘게 떠보니, 저 멀리 큰 강이 눈에 들어왔다.
저곳으로 향하는 건가?
속도를 높이니, 기나긴 흑발이 사정없이 흩날렸다. 매달려 있던 케로스가 머리카락을 피해 고개를 훽훽 돌리다가 결국 그녀의 뒷머리를 다시 물었다.
둘은 또 투덕대곤 빨간 리본을 꺼내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녀가 리본으로 머리를 고정하는 사이, 케로스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뭐?"
"멍!"
"아, 그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흠...."
리본에서 손을 뗀 그녀는 한 사내를 떠올렸다.
신명 사냥꾼, 아서 클레이튼.
황금빛의 흔적 아래 그를 처음 만났다. 그 뒤로 쭉 그를 지켜봤는데, 결론은 '특별하다'였다.
"일단 엘프와 인연이 있는 것 같으니, 호감 1점."
마녀들과 가장 우호적인 이종족이 바로 엘프다.
"장로 할머니가 엘프가 인간을 위해 싸우는 경우는 큰 인연을 맺은 경우밖에 없다고 했어. 엘프는 인간과 달리 절대 돈으로 움직이는 종족이 아니라고 했거든."
"멍!"
"그렇지? 댕댕도 그렇게 생각하지?"
릴리와 케로스는 그 재수 없는 변태와 치열하게 싸우던 다크엘프를 떠올리며 턱을 동시에 주억거렸다.
멋진 여전사 같았다.
돈에 구애받지 않은 착한 엘프가 분명하리라.
"그리고 그 재수 없는 인간도 결국 죽였잖아. 그래서 또 호감 1점이야."
"멍!"
"두 명이니 2점이라고? 얼굴이 똑같았잖아. 한 명으로 묶어도 돼."
"...?"
그 외에 몸을 사리지 않고 동료를 구하는 것도, 손등에서 흘러나온 황금빛이 흑주술사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마녀의 친구.
장로 할머니가 강조했던 기준 중에 타인을 위한 희생과 흑주술사를 적대하는 태도가 전부 포함된 이였다.
다만 전투를 지켜보니 좀비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있지만, 그건 확인해보면 될 일이고, 결론은 '좀비만 아니면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다.'였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릴리는 기분 좋게 웃었다.
신명을 통해 알게 된 존재.
그 신명에 호기심을 생겨 숲을 나왔고 눈앞의 존재를 만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떠올려보는 친구였다.
첫 번째 친구.
가슴이 설렌 것도 잠시, 쌩쌩하게 날던 빗자루가 뚝 멈춰 섰다.
"근데 이렇게 막 접근해도 될까? 날 처음 보는 인간들의 반응은 정해져 있잖아."
너무 이뻐서 달려들거나, 너무 이뻐서(?) 도망가거나.
뭐든 이뻐서 피곤했는데, 두 가지 상황은 그녀가 아서에게 바란 것이 아니었다.
"멍!"
"뼈다귀면 다 된다고? 최고급?"
진지하게 뼈다귀를 떠올린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인간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라도 뼈다귀는 아닌 것 같았다.
"너무 맛없어."
"...!"
케로스가 강력히 뼈다귀를 주장하며 컹컹거리고 있을 때 숲에 큰 변화가 찾아왔다.
콰앙―!
"...?"
숲 멀찍이서 큰 폭발이 터지더니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조금 전 폭발은 시작에 불과했다.
콰콰쾅! 콰쾅―!!
"와...."
숲이 울릴 정도로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파괴력이 무척 거세고 사납다.
저 방향, 아서가 사라진 방향과 일치했다.
"또 뭔가가 터졌나 봐."
"멍!"
"전투라고? 왜 그를 못 잡아먹어서 난리지? 누가 그를 괴롭히는 걸까?"
의문도 잠시, 폭발이 터진 장소로 이동하던 릴리가 멈칫하곤 밑을 말없이 내려다봤다.
거슬리는 기운이 꿈틀거렸다.
잠시 후, 그녀가 그 변화를 눈치채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움직여."
"...?"
"막을 이루는 검은 연기 말이야.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숲을 덮고 있던 거대한 막이 그녀 밑을 스쳐 가며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연기가 부풀어 오르며 올라오자, 그녀는 더욱 높이 날아올랐다.
높은 장소에서 검은 연기가 움직이는 방향을 살펴보니, 폭발이 터진 방향이었다.
아서가 사라진 방향.
그 이동 속도가 바람을 타고 이동하는 구름 같아서 순식간에 아서가 있는 장소를 덮칠 것으로 보였다.
"저거 위험해 보이지?"
광(光)과 반대되는 어둠을 가득 품고 있는 기운이었다.
특히 그 기운의 주인이 죽은 자들의 왕, 제스밀로와 관련 있다면 죽음을 코앞에 뒀다고 볼 수 있었다.
"그가 죽으면 숲을 나온 이유가 사라지잖아. 그치?"
"멍!"
"맞아. 나도 숲으로 돌아가긴 싫어. 세상을 더 돌아다니고 싶거든. 맛난 것도 실컷 먹고 싶고. 새로운 것도 경험하고… 응? 우리 도와주는 척하고 슬쩍 곁에 붙을까?"
릴리는 볼을 긁적이곤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고민은 짧았다.
릴리의 빗자루가 쌩쌩쌩 검은 막을 따라 날기 시작했다.
"멍!"
"접근은 절대 안 해. 연기가 피부에 닿는 건 싫거든? 트러블 일어난다고."
찬란한 달빛.
자신의 미모가 돋보이는 날이다.
손거울 위로 달빛을 담으며 그녀는 걱정 어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구해줬다고 나한테 반하면 어쩌지?"
"...."
"아, 곤란한데. 너무 이뻐도 문제라니까. 그렇지? 댕댕아?"
케로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이래저래 참으로 피곤한 밤이다.
* * *
"으아아아! 시발!"
칼이 투척한 단검 따윈 무시하고 멧돼지처럼 돌진해오는 금화 인형들이 그를 사납게 위협했다.
인형 다섯 마리.
공격이 막혀 주춤하는 칼을 보며 다급히 소리쳤다.
"우측으로 굴러요!"
외침과 동시에 흡혈의 고리에서 핏빛 화살을 쏟아냈다.
칼이 우측으로 몸을 날리고, 그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던 금화 인형들에게 매서운 화살 세례가 퍼부어졌다.
콰콰콰쾅―!
"...!"
마력탄이 터진 것처럼 허공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큰 폭음과 함께 금화 인형들이 충격에 휩쓸리며 뒤로 훨훨 날아갔다. 바닥에 처박히고 내동댕이쳐진 것도 잠시, 인형들은 곧 꿈틀대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다시 달려들었다.
핏빛 화살은 한발 한발 마력탄의 위력을 지녔지만, 인형을 부수기엔 부족했다.
달빛 아래에선 가능할 줄 알았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욕설을 내뱉으며 물러나는데, 칼이 다가와 빽 소리 질렀다.
"야, 임마! 죽을 뻔했잖아!"
"공격당할 수 있으니, 섣불리 인형을 공격하지 말라고 경고했잖습니까?"
"록터가 위험했다고!"
록터의 뒤를 노리던 인형들을 칼이 견제한 것인데, 칼이 먼저 움직일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했다.
아니, 갈수록 더 안 좋아졌다.
달려오는 다섯 마리 뒤로 풀숲이 들썩이더니 새로운 금화 인형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열다섯 마리다.
"…시발, 못 뚫어. 얼른 튀자."
"동감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포위망을 뚫지 못하면 이렇게 포위당하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나중에는 더 많은 수가 몰려올 것이다.
"록터―!"
내 신호에 금화 인형 다수와 고군분투 중이던 록터가 오라 소드를 이용해 빈틈을 만들곤 내 쪽으로 가까스로 몸을 뺐다.
가슴이 헐떡이는 거친 호흡.
다가온 록터의 표정은 무척 지쳐 보였다.
움켜쥔 검이 사시나무 떨리듯 움직였다.
"둘 다 달릴 수 있겠습니까?"
한눈에 봐도 록터의 체력이 한계까지 몰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칼도 마찬가지.
칼과 록터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난 코룬 강 방향을 가리켰다.
"뒤돌아서 앞만 보고 달려요."
"넌?"
"팔팔한 사람이 고생해야죠. 자리 잡고 쉬고 계세요. 시선 좀 돌리고 올 테니까."
내 지시에 둘은 주저 없이 등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난 그 길목을 가로막고, 흡혈의 고리를 힘껏 움켜잡았다. 꿀렁꿀렁 피를 빨아대는 흡혈의 고리가 다시금 붉어진다.
사나운 눈매로 앞을 노려봤다.
코앞까지 온 다섯 마리
록터를 에워싸던 열 마리.
방금 나타난 열다섯 마리까지.
모두 뭉쳐서 내 쪽으로 모조리 돌진해오고 있었다.
"망할...."
짧게 호흡을 내뱉곤 두 눈을 번뜩이며 활시위를 신들린 듯 당기며 화살을 미친 듯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다섯. 다섯. 다섯. 다섯. 다섯.
소환한 핏빛 화살이 연달아 번뜩이며 사라졌다.
콰콰콰콰콰콰콰콰쾅―――!
인형들이 엄청난 폭발에 휩쓸리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대규모 폭발이지만 그것뿐이다.
엎어진 인형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그것도 모자라 폭발 사이로 더 많은 수의 인형들을 우르르 몰려들었다. 초토화된 외곽 숲 사이사이로 새로운 인형들이 계속 튀어나와 내 목을 노렸다.
난 최대한 많은 인형의 시선을 끈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인.
우리가 체력을 깎아 먹으면서 금화 인형들과 싸운 이유는 하나다.
인형들을 떼어내려면 코룬 강 하류로 가야 하는데, 그 길목 전체를 놈들이 막고 있었다.
힘으로 단숨에 뚫고 가려고 했는데, 돌파력이 부족해서 막혔다. 예상했던 것보다 일행의 체력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다 덤벼! 다 오라고 새끼들아!"
그래서 선택한 것이 차선책.
돌파 아니라 유인으로 포위망을 흔든다.
사방팔방에 화살을 쏘아대며 난 인형들을 내 쪽으로 유인했다.
타타닥! 타타타타타닥!
섬뜩한 발자국 소리가 숲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모조리 내 쪽으로 몰려온다.
작은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분위기.
시발, 너무 많이 유인했나?
호러물이 따로 없다.
정신없이 화살을 날리며 일행 반대쪽으로 저들을 유인하고 있는데, 순간 거친 바람과 함께 시야가 어두워졌다.
"...어?"
처음에는 내 시야에 문제가 생긴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두 눈을 비벼도 상황은 똑같았다.
달빛이 내리쬐는 숲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암흑이 찾아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대 문양을 펼치자, 빛무리가 깜빡깜빡 흘러나오더니 푹― 꺼져버렸다.
검은 막.
인지한 순간 등골이 쭈뼛 섰다.
"…시발, 뭐야?!"
그어어억―! 그억!
어둠 사방으로 들려오는 금화 인형들의 괴성.
전보다 더욱 거칠고 사나워진 기세다.
죽은 자들의 영토가 눈앞에 펼쳐졌다.
142화 월광(月光)의 빛
처음엔 이해가 안 갔다.
죽은 자들의 영토는 이곳과 한참 떨어진 장소에 있었다.
분명 영토를 벗어났는데, 코앞에 다시 영토가 생겼다.
하지만 고민도 잠시,
"...이거, 설마 그겁니까?"
[맞다. 영토 상징물이 근처로 옮겨졌다. 누군가 상징물을 지니고 움직이나 보군.]
영토 상징물.
제스밀로와 거래할 때 쓰인 핵심 물건을 말했다.
상징물을 누군가 지니고 움직였다면 그들밖에 없었다.
주술사들의 둥지.
'무슨 꿍꿍이지?'
제자리에 머물던 그들이 갑자기 상징물을 들고 움직였다.
잭과 하우엘의 죽음과 관련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엘튼이 그들과 연락하던 주술사를 제거하고 통신구를 부쉈다고 했으니까.
'느낌이 쎄한데....'
일행과 서둘러 합류해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풍경이 짙어져서 시야가 어두웠다.
그 속에서 개안을 펼쳐 록터와 칼의 신명 오오라를 찾았다.
오오라가 보이진 않지만, 방향이 감지됐다.
다행히 코룬 강 쪽으로 잡혔다.
'유인이 먹혔나?'
포위망이 풀린 모양이었다.
이제 이곳을 무사히 벗어나기만 하면 된다.
방향을 잡은 나는 습격에 대비해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고 시위를 잡아당겼다.
순백의 활대가 피를 탐닉하며 붉게 물든 순간이었다.
"…큭!"
시야가 어질어질하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비틀거리던 중심을 나무 기둥을 잡고 가까스로 버텼다.
묘한 불쾌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갑자기 왜?
"레, 레토!"
[반지의 효력이 줄어들고 있다.]
"…설마 염원의 반지도 한계가 있는 겁니까?"
[헛소리. 네 정신력이 한계를 보이는 거다. 반지의 염원이 마르지 않은 샘물이라 착각하지 마라. 대가 없는 힘은 없다.]
"대가가 뭡니까?"
[생존에 대한 갈망.]
"...."
갈망?
마나 없이 사용 가능해서 개꿀이라고 생각했는데, 무시무시한 대가를 가져가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갈망?
그 갈망이 말라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살아남으려는 갈망이 사라지려나?'
반지의 능력 자체가 갈망이나 욕구로 탄생한 것이니, 그걸 대가로 가져가는 모양인데, 마나처럼 딱 떨어지는 성질이 아니라서 감이 안 잡혔다.
"그럼 반지를 사용할수록 위험한 거 아닙니까?"
[인간이 지닌 갈망을 우습게 보는군. 인간의 갈망은 변화 앞에서 쉼 없이 채워지고 바뀌고 지워진다.]
"무슨 소립니까? 그게...."
[그만큼 채우기 쉽다는 뜻이다. 무분별한 남용만 피해라. 네 그릇은 반지를 담기엔 너무나도 하찮다.]
"그놈의 하찮다...."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세웠다.
머리를 몇 차례 털고는 정신을 차리고 숲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숲이 흔들리며 인기척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인형들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시간을 너무 끌었다.
"빌어먹을...!"
욕설을 내뱉으며 당기던 활시위를 내려놨다.
수백이 덤벼도 마력탄 위력의 화살만 있다면 다 떨굴 수 있다고 확신했는데, 제약이 걸렸다.
레토의 경고처럼 더는 무분별하게 화살을 휘갈기는 건 힘들 것 같았다.
지금처럼 가슴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불쾌감이 찾아올 때는 더더욱.
처한 상황이 한계까지 내몰리니, 가진 능력의 한계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약점을 알게 된 것은 좋은 일이지만 당장은 쓸모없는 지식이었다.
'마나는 바닥이 났고.'
관통이 부여된 푸른빛 화살.
성력이 부여된 황금빛 화살.
마나 부족으로 진즉 봉인돼서 핏빛 화살만 쏘아대고 있었다.
핏빛 화살마저 봉인 당하면 남은 건 튼튼한 몸뚱이뿐이다.
마력탄 위력도 버티는 금화 인형들이 고작 내 주먹질에 쓰러질까?
'한계다. 서둘러야 해.'
이를 악물고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런데,
"…진짜 개떼처럼 몰려왔네."
어둠 사이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금화 인형들.
가던 길목이 순식간에 막혔다.
주춤 물러나며 등을 돌린 순간, 뒤쪽에서도 인기척이 들려왔다.
스물. 서른. 마흔. 쉰 마리.
인형들이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드러내며 주변을 포위했다.
보이는 건 어둠 속 번뜩이는 새하얀 안광뿐이다. 섬뜩한 눈동자들이 숲을 이루는 나무보다 더 많다는 것을 알려줬다.
시발, 존나 섬뜩하네.
[격발을 써라.]
"안 됩니다."
[네 능력으론 벗어나기 힘들다.]
"그건 지켜보면 될 일이죠."
빠르게 좁혀지는 압박감을 느끼며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안에 한가득 잡히는 금화 뭉치.
난 금화를 한 움큼 잡고는 허공에 비처럼 뿌렸다.
촤르르르―
76골드.
펜리가 잊고 간 금화 뭉치였다.
골드 뭉치가 어둠 속에 반짝이곤 바닥에 우르르 쏟아지자, 날 노려보던 백색 안광의 움직임이 바닥에 쏠렸다.
동시에 내 쪽으로 몸을 던지는 금화 인형들.
내가 몸을 웅크리고 정면으로 몸을 날린 순간, 다가오던 금화 인형들이 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떨어진 금화 뭉치에 닿아 있었다.
바닥을 기어 다니며 금화를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펜리 덕에 위기를 넘겼네.'
탐욕으로 제작된 탐욕스런 존재들은 새로운 금화에 탐욕을 드러냈다.
[흥미로운 광경이군. 저들이 금화에 관심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안 거지?]
이름 보면 딱 감이 안 오니?
금화 인형이잖아.
소설에서 본 내용을 사용한 것뿐이다.
다만, 잠시뿐이었다.
금화를 전부 삼키면 내게 눈을 돌릴 테니, 서둘러 움직여야 했다.
인형들의 시선이 금화로 쏠린 사이 둘의 오오라를 쫓아 숲을 통과했다.
잠시 후, 스르릉 검 뽑는 소리가 들리자 황급히 외쳤다.
"접니다!"
"아서?"
검은 연기가 공간을 가득 채운 탓에 시야가 어두웠다.
다섯 걸음 바깥으론 시야 확보가 어려울 정도다.
조심스레 다가가니, 둘은 나무 기둥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조금 전 검을 뽑은 이가 록터였던 모양.
내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자, 칼이 헛웃음을 흘렸다.
"몰골이 그게 뭐냐? 거지꼴이 따로 없네."
"금화 뿌리고 온 사람한테 거지라니요."
"뭔 개소리야?"
"개소리 맞습니다. 여기서 저를 기다린 겁니까?"
"갑자기 어두워져서 대기하고 있었다. 너라면 우리를 찾아올 것이라고 록터가 그러더군."
"일단 움직이죠. 곧 인형들이 쫓아올 겁니다."
"…시발, 이제 인형 소리만 들어도 자다가 경기가 날 것 같아."
"제 뒤만 따라오십시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정말 끔찍하니까."
일행이 코룬 강 쪽으로 움직였기에 지금까진 대략 방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일행과 합류한 상황.
여기서 방향을 잃으면 최악의 경우 이곳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 긴장하고 방향을 정확히 잡아야 했다.
내가 움직이자, 칼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강으로 가면 안전한 거야?"
"네. 적어도 인형들은 떨굴 수 있습니다."
"그놈들이 물을 싫어하나?"
"비슷합니다."
금화 인형은 피부가 단단한 만큼 무척 무거워서, 물 위로 뜨지 못했다. 소나기로 강물이 불어난 상황이라 하류에 몸을 맡긴 채 강을 타고 움직이면 인형들을 손쉽게 따돌릴 수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며 속도를 조금씩 올렸다.
잠시 후, 우거진 나뭇잎을 헤치며 바깥으로 나왔을 때, 기다리던 소리가 들려왔다.
쏴아아아아아아―!
거친 물살 소리.
코룬 강이다.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방향을 잘못 잡았을까 걱정했는데 제대로 온 것 같았다.
물소리가 들리자, 뒤쪽에서 침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말라. 물이나 실컷 마시고 싶네."
"곧 원 없이 마시게 될 겁니다. 배 터져 죽을지도 몰라요."
"지랄, 근데 이 검은 연기는 어디까지 퍼진 거야?"
"하류만 벗어나면 괜찮을 겁니다."
숲을 벗어나자 작은 돌이 잔뜩 깔린 대지가 펼쳐졌다. 시야가 어두워 눈앞의 강이 보이지 않았지만, 흐르는 물살 소리를 따라가면 강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왔다고 느끼며 입수를 떠올렸을 때였다.
"피, 피해!!!!"
칼의 다급한 외침이 터졌다.
위기 감별사의 경고다. 우리는 주저 없이 땅을 박차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콰콰콰쾅―!!!
"…큭!"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핏빛 마법진이 번뜩이며 소환되더니 폭발이 터졌다.
거대한 폭발에 휩쓸려 우리는 바닥을 수차례 굴렀다.
"시발,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해! 위험해!"
"이게 무슨...!"
칼의 경고가 들리자, 난 당혹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암흑.
상황 파악이 힘들다.
뭐가 잘못된 거지?
그때 우리의 귓가로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군의 예상대로군."
"...!"
"셋뿐이지만, 목표했던 둘이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잠시 후,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을 파고들었다. 꿈에서도 듣고 싶지 않은 그놈의 목소리.
[카스펠로, 놈들의 목을 가져와라.]
"시발...."
학살자 카멜이었다.
통신구가 끊기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기척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기분 나쁘게 울리는 주술사들의 웅얼거림.
그리고,
쿵. 쿵. 쿵. 쿵.
묵직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들의 기척이었다.
[녀석에게 읽혔다.]
"…미친 새끼. 이걸 예상했다고?"
금화 인형들을 피해 코룬 강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주술사들을 배치해놨다.
영토를 움직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설마, 이런 식으로 생각을 파악당할 줄 몰랐다.
[영혼을 꿰뚫은 통찰력.]
"무서운 새끼."
소설 속 주인공 중 한 명, 카멜 블레이저의 심계가 피부로 와닿았다.
"적이...."
"어서 빠져나가...!"
다급히 외치는 록터와 칼의 목소리가 빠르게 작아지더니 이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둘에게 문제가 생긴 게 아니었다.
"모두 이리로 모여!"
크게 외쳤는데,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
칼의 목소리도, 록터의 목소리도, 물소리도 전부 음소거 처리가 됐다.
범위 내 소리를 제거하는 흑주술이다.
"비, 빌어먹을...!"
어둠을 뚫고 짓쳐 오는 거대한 그림자들.
반다이크들의 사나운 돌진에 난 이를 악물곤 발을 박찼다.
거대한 주먹세례가 대지를 부수고 지나갔다.
부서진 파편이 사방에 튀며 반다이크들이 주변을 파괴하고 있는데, 아무런 소리가 안 들렸다.
무음 속의 진공 사이에 있는 듯한 느낌.
소리가 안 들리니, 치명적이다.
"칼! 록터!"
목놓아 외쳐도 대답이 없다.
게다가 반다이크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코룬 강이 어느 방향인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시각과 청각이 봉인된 고립 상황.
지금 상황에 금화 인형들까지 몰려오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
위기다.
"레토!"
[우측에 강이 흐르고 있다. 격발을 사용해 빠져나가라.]
"빌어먹을!"
혼자는 절대 못 간다.
다행이라면 일행의 기척이 개안으로 감지된다는 것이었다.
둘 다 다급하게 움직이는 것이 반다이크들의 합공을 받는 것 같았다.
[뒤, 조심해라.]
"...뭐?"
레토의 경고에 주먹을 피하고 고개를 돌렸는데, 암흑 속에 새하얀 안광들이 안개가 퍼지듯 삽시간에 늘어났다.
금화 인형들이다.
인형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뒤쪽에서 질주해왔다. 흩어지며 움직이는 것이 록터도 노리는 것 같았다.
"시발! 생각해, 어서!"
누구에게 외친 것이 아니다.
록터 뒤를 노리는 인형들을 쫓으며 이를 타개할 방법을 스스로에게 간절히 외쳤다.
일행 모두가 살 방법이 없는 것일까?
내가 가진 카드는 두 발의 격발뿐.
불현듯 한 가지 방법이 떠올렸다.
주먹을 내밀며 인챈트를 떠올렸다.
거기에 격발이 합쳐진다면....
[죽으려고 환장했군.]
"…하지만!"
그 순간,
크에에에에에엑! 크에엑!
"...!"
금화 인형들의 섬뜩한 괴성이,
쿵. 쿵. 쿵. 쿵!
쾅! 콰앙―!
반다이크들의 거친 움직임 소리가,
"꺼져, 이 시발 새끼들아!"
"크아아아아!"
칼의 욕설과 록터의 기합이 귓속을 파고들었다.
귀가 뻥― 뚫리며 세상의 소리가 뇌리를 관통했다.
그리고 세상이 토해내는 그 소리의 풍경이 내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확 트인 대지 그리고 전장.
거짓말처럼 암흑이 삽시간에 걷혔다.
"다, 달빛!"
칼의 외침에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아."
저도 모르게 감탄이 흘러나왔다.
어둠에 먹혀 사라졌던 보름달이 밤하늘 위로 선명히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막을 밀어내고 내리쬐는 시리도록 푸르른 달빛.
그래서 시야에 똑똑히 보였다.
밤하늘,
허공 사이로 춤을 추는 붉은 리본이.
"월광(月光)의 빛...."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143화 이렇게 이쁜데!
블라이어에 온 순간부터 록터와 합류하고 탈출하는 과정까지.
주마등처럼 스쳐 가는 기억에 편안함은 없었다.
위기 그리고 또 위기.
피로 얼룩진 길만 우리를 반겼다.
그만큼 학살자는 집요했고, 적들은 강했다.
힘을 합쳐 한 걸음 한 걸음 위기를 헤쳐 나갔지만, 결국 막바지에 계획이 간파당하면서 큰 고비가 찾아왔다.
암울한 상황.
도박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절망했을 때,
크아아아앙―!!!
"...!"
상황이 급반전됐다.
우렁찬 울음이 대기를 찢으며 터져 나왔다.
쏟아지는 달빛 사이로 검은 털의 큰 짐승이 허공에서 내려와 금화 인형들을 헤집고 다녔다.
큰불을 입에서 뿜고, 물어뜯고, 발톱을 휘두를 때마다 인형들이 찢어지고 부서지며 금화들을 토해냈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부서지는 모습이 보인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인형들이 약해졌다.
월광의 빛, 어둠을 얼어붙게 하는 시린 빛무리.
광(光)속성 가호.
그리고,
"붉은 리본."
그 상징적인 장신구와 눈앞의 검은 짐승을 본 순간 확신이 들었다.
달의 마녀 릴리 베이스.
오르도르 숲에 머물고 있어야 할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스토리 자체가 완전히 어그러진 전개.
하지만 그녀가 이곳에 왜 나타났는지, 우리를 왜 돕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칼! 록터!"
지금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내 부름에 두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목소리가 닿는다.
주술에 소멸당했던 소리의 흔적은 달빛이 쏟아지자 거짓말처럼 회복됐다.
시야를 가렸던 암흑도 마찬가지.
월광의 빛에 검은 연기가 흩어지기 시작하자, 전장이 한눈에 담겼다.
강 쪽에서 우왕좌왕하는 주술사 무리, 우리를 포위한 채 위협하는 주술 인형들, 그리고 검은 짐승과 뒹구는 금화 인형들까지.
기회다.
'격발!'
쾅―!
후― 호흡을 내뱉은 순간 시야가 쑥 빨려 들어왔다.
두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주저 없이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목표는 주술사 무리.
최악의 순간 떠올렸던 계획을 그대로 실행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전과 180도 달라졌다.
도박에 가까운 신체 인첸트를 할 필요가 사라졌고, 일행과 신호가 닿으면서 합공이 가능해졌다.
"하, 진짜 개빡시네."
"움직여. 뒤처진다."
"미친, 저걸 어떻게 따라가."
록터의 도움으로 주술 인형을 따돌린 칼은 다 무시하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곁에 록터가 서둘러 붙고, 둘은 바람을 꿰뚫고 질주하는 내 꼬리를 잡고 따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속도가 워낙 빨라 거리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노, 놈이다!"
"정신 차리고 진형을 짜!"
갑작스러운 상황에 혼란을 느낀 주술사들이 날 발견하고 다급히 대응에 나섰다.
해골 지팡이를 든 주술사를 중심으로 진형이 짜였다.
저놈이 우두머리다.
주문과 함께 저들 진형에서 핏빛이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물컹―
"...!"
바닥이 흐물거리며 솟구치더니 질퍽한 진흙 파도가 날 덮쳐왔다. 범위가 넓어서 피할 수 없다.
'어차피 피할 생각도 없어.'
격발에 정지나 방향 전환 따윈 없다.
오로지 돌격.
부스스 소리와 함께 질퍽한 진흙더미가 내 몸을 산사태처럼 뒤덮으며 압박했다. 몸이 무거워지고 바닥이 날 잡아끄는 것 같다.
휩쓸리면 생매장당하기 딱 좋은 주술이다.
하지만 저들은 격발을 우습게 봤다.
[뚫어라.]
"크아아아아!"
기합을 터트리며 쿵― 발을 구르자, 붙어 있던 진흙더미가 갈가리 뜯겨나갔다.
송곳 같은 질주.
거리는 이제 열 걸음.
두 주먹을 까득 움켜쥐며 주술사 무리를 겨누었을 때, 해골 지팡이가 다급히 움직였다.
우웅―!
코앞에 소환된 핏빛 마법진.
동시에 내 몸이 부웅― 떠오르며 허공에 붙잡혔다. 뒤늦게 주술사들이 손을 뻗자 붉은 줄기들이 튀어나와 삽시간에 내 몸을 옭아맸다.
얼굴만 드러난 채 온몸이 결박당했다.
주술 트랩이다.
미리 와서 대비한 건가?
상관없다.
다섯 걸음, 이미 범위 안에 모두가 들어왔으니까.
남은 얼굴마저 서서히 줄기로 덮이고 있는 사이, 붉은 줄기 다발에서 또 다른 줄기들이 튀어나와 도움을 주려는 칼과 록터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줄기 다발에 발목이 잡혀 접근하지 못하는 모습.
우두머리 주술사가 끌끌끌 낮은 웃음을 터트리며 내게 다가왔다.
"어리석은 놈, 빨리 죽고 싶었나 보지?"
"...."
"네놈 하나가 우리 모두를 이길 수 있을 리라 생각하나? 이 자리에서 머릿속을 헤집어주마."
"...없었어."
"뭐?"
한쪽 눈만 드러난 내가 우두머리 주술사, 카스펠로를 응시하며 비웃었다.
"처음부터 이길 생각 따윈 없었다고. 다 죽여버릴 생각이었지."
"건방진 놈, 그 눈깔부터 파주마."
"그 눈깔로는 이게 안 보이나 봐?"
우우우우웅―!
옥죄던 붉은 줄기가 부르르 떨리기 시작하자, 내게 지팡이를 겨누던 카스펠로가 흠칫하곤 물러났다.
줄기들 사이로 황금빛이 하나둘 흘러나온 순간, 주술사들은 아차했다.
죽은 자들의 영토가 걷힌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달빛 죽이지?"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잡는 기운, 성력.
번쩍―!!!!
"...!"
격발의 효과까지 쏟아부어 고대 문양을 최대출력으로 터트리자, 옥죄던 줄기 다발이 허공에 먼지처럼 사라졌다.
황금빛 물결이 눈 부신 빛을 터트리며 그 주변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부족한 마나를 잠력으로 채웠다.
그래서일까.
문양이 새겨진 손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덜 떨렸다. 팔이 터져나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이를 악문 채 손목을 잡고 버텼다.
끄아아아아아아―!
흑주술을 퍼붓던 주술사들이 카운터를 맞고 비명을 터트렸다.
내 얼굴도 이내 고통으로 사납게 일그러졌다.
격발의 시간이 끝났다.
피를 울컥 뱉어내며 비틀거리듯 물러났다.
"어서!!!"
내 울부짖음에 황금빛을 뚫고 두 인형이 나를 가로지르며 나타났다.
이를 까득 문 칼의 손에는 단검 자루가, 사납게 두 눈을 번뜩이는 록터의 무구에는 오라 소드가 흘러나왔다.
"뒈져!"
"크아아아아!"
두 사람이 주술사 무리 사이로 파고든 순간, 학살이 시작됐다.
그 광경에 안도한 것도 잠시, 한곳을 살핀 난 이를 악물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쿨럭!"
[연달아 사용하면 버틸 수 있으리라 보나?]
"이, 일단 하고 보는 겁니다."
[흥미롭군.]
미친 변태 새끼.
시발, 근데 진짜 몸이 버틸 수 있으려나?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펼친 격발(擊發).
후―
거친 호흡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총알이었다.
* * *
"커억!"
"아, 안...! 끄아아악!"
주술을 쓰지 못하는 주술사는 일반인이나 다름없다. 뭉쳐 있던 주술사들 절반이 단 한 번의 부딪침에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손속에 자비 따윈 없었다.
오히려 몸이 안 따라줘서 두 사람의 얼굴엔 다급함이 떠올랐다.
진즉 체력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불꽃을 토해내며 주술사들을 모조리 베어 넘기던 두 사람은 이내 카스펠로를 동시에 노렸다.
제발 죽어!
칼의 염원이 닿길 바랐지만,
콰앙―! 콰콰콰쾅―!
"…크윽!"
"컥!"
주술사들의 시신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두 사람을 바깥으로 튕겨냈다.
쓰러진 칼은 일어나지 못했고, 록터는 비틀거리며 겨우 중심을 잡았다. 충혈된 눈으로 살아남은 주술사를 노려본 록터가 무거운 걸음을 옮기자, 붉은 줄기 다발이 주변에서 튀어나와 그의 팔다리를 움켜잡았다.
"크아아아!"
발악에 가까운 힘겨루기.
해골 지팡이를 내민 카스펠로는 신음을 흘리며 어깨에 박힌 단검을 부여잡았다. 칼이 의식을 놓기 전 투척한 단검이었다.
"버러지 같은 놈들…."
해골의 안광에서 흘러나오는 핏빛이 황금빛을 밀어내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했지만, 주변에 살아있는 주술사는 없었다.
카스펠로는 비틀비틀 강가 쪽으로 물러났다.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 준비해둔 탈출 방법이 이곳에 있었다.
여유가 생기자, 그는 통신구를 켰다.
[보고해라.]
"저...."
그리곤 현 상황을 빠르게 전달했다.
새로운 지원군, 주술사들의 몰살과 불리함을 어필하자, 잠시간 통신구에 침묵이 감돌았다.
줄기를 끊으며 서서히 다가오는 록터의 모습에 카스펠로는 질린 표정으로 통신구에서 어서 후퇴 명령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 잠시 후, 통신구에서 지시가 내려왔다.
['죽은 자들의 왕'을 불러라.]
"…네?"
[상징물인 토템을 대가로 주면 가능하다. 서둘러라.]
"아, 알겠습니다."
죽은 자들의 왕을 영토에 소환하는 건 그의 상식으로 미친 짓이나 다름없지만, 주군의 명이었다.
다른 뭔가가 있으리라 판단하고 그는 품에서 토템을 꺼냈다.
음습한 빛깔의 토템.
주문과 함께 토템이 허공으로 부유하자, 검은 짐승이 다급하게 울부짖으며 토템 쪽으로 맹렬하게 돌진해왔다.
토템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을 읽어낸 것 같았다.
카스펠로는 반다이크들을 움직여 검은 짐승을 막게 했다.
"죽은 자들의 왕, 제스...."
상황이 급박하다.
그가 서둘러 그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이었다. 눈앞에 황금빛이 번뜩였다.
정면을 본 순간 눈 부신 빛이 그를 맞이했다. 아찔할 정도로 환한 황금 빛무리. 그게 카스펠로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퍼석―!
"...!"
거대한 황금빛 화살이 그를 꿰뚫고 지나갔다. 머리와 가슴이 사라진 그의 시신이 천천히 강물로 넘어갔다.
붉은 핏물이 강물에 번진다.
첨벙― 첨벙―
끊어지려는 정신줄을 다잡고 카스펠로의 시체 앞으로 다가갔다.
"헉, 헉, 헉…."
의식이 점차 흐려진다.
모든 근육이 딱딱하게 굳는 듯한 느낌. 다리에 쥐가 날 때처럼 곧 온몸에 지독한 고통이 동반될 것이니 마음 단단히 먹고 준비를 하라는 것 같았다.
격발의 후유증이 곧 배가 되어 찾아올 것이다.
기절하고 싶은데, 시체 앞에 붉은빛을 발견한 순간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조금만 더…."
결국, 시체 코앞에서 자빠지며 피를 토했다. 강물이 차갑다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런데 몸이 안 움직인다.
"그 새끼한테 전해야 하는데…."
반짝반짝 신호를 보내며 강물 위에서 구르는 통신구에 손을 뻗고 있을 때였다.
첨벙―
누군가 강물 위에 발을 딛더니, 내 손에 통신구를 쥐여줬다.
머리맡을 간질이는 긴 머리카락.
코끝에 향긋한 향기도 맡아졌다.
향수 같기도 하고, 화장품 같기도 했다.
"필요한 것 같아서."
"...."
여인의 속삭임이 귀를 파고들었다.
어리고 맑은 느낌이다.
누군지 단박에 알 것 같아서, 입이 안 떨어졌다.
내 목숨줄, 아니 일행의 목숨줄을 움켜쥔 존재.
"어? 요게 아닌가? 그럼 이거?"
그러더니 다른 손에 나무 토템을 올려줬다.
상징물, 죽은 자들의 영토를 부르는 물건이 분명했다.
음습한 기운이 내 몸을 타고 흘렀다.
동시에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당장 놔!]
"...쿨럭!"
처음으로 레토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난 토템을 집어 던지고, 통신구를 움켜잡았다.
일단 이것부터.
거친 숨을 내쉰 것도 잠시, 난 붉게 번뜩이는 통신구에 입을 댔다.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줄 알고 좋아했지? 죽여줄게. 거기 딱 서 있어."
콰작―!
통신구를 부순 순간, 온몸에 기력이 바람처럼 빠져나가더니 강물에 얼굴을 처박았다.
시발, 이젠 나도 모르겠다.
세상이 깜깜하게 변했다.
* * *
"...."
릴리는 심각한 표정으로 기절한 아서를 내려다봤다.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케로스를 바라봤는데, 변신의 여파인지 어깨에 매달려 죽은 듯이 자고 있었다.
결국, 그녀 혼자 지금 상황을 해석해야 했다.
필요한 것 같아서 물건들을 쥐여줬더니 하나는 집어던지고, 하나는 부숴 버렸다.
그리고 퍼부어진 욕설.
[개 같은 악당 새끼야.]
"음, 그건 인간들에게 자주 들어본 소리이긴 한데, 수년 전에 들었던 걸 어떻게 안 거지? 분명 다 죽였는데."
아서의 머리맡을 내려다보며 릴리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머리 위에 서 있긴 했는데 뭐가 좋았다는 것일까. 하나도 안 좋았다.
"날 죽이려나?"
릴리는 진지하게 고민하더니 품에서 거울을 꺼냈다. 은은한 달빛 아래서 얼굴을 살핀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이쁜데 어떻게 죽일 생각을 할 수 있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내.
하지만,
"저게 무슨…."
그녀의 행동을 주저앉은 채 바라보고 있던 록터도 그녀를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한 여자였다.
144화 아저씨는 못생겼잖아
강물에서 아서를 건져낸 묘령의 여인.
바닥에 쓰러진 아서 옆에 쭈그리고 앉아 나뭇가지 끝으로 그 머리를 콕콕 찌르고 있는데, 여인보다는 아이 같은 모습을 보였다.
'...'
록터는 여인을 그냥 두었다.
이유를 설명할 순 없지만, 록터는 현재 신비한 감각을 한 존재와 공유하고 있었다.
칼 바스타인.
칼의 정확한 능력은 모른다.
다만, 그가 압박감을 느끼며 표정을 구길 때, 여유를 느끼며 안도할 때, 최악의 상황에 경악할 때처럼 록터는 수시로 반응하는 칼의 감각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감각이 '공명(共鳴)'하듯 울린다고 해야 하나?
전투 상황에서도 그 울림을 실시간으로 느꼈는데, 그 때문에 전투 스타일에도 변화가 생겼다.
고지식한 전투 대응이 영리하게 변했는데, 정확한 이유는 알지 못했다.
록터도 자신의 전투 스타일이 고지식하다는 것을 울림을 통해 처음 알게 됐으니까.
이 신비한 감각에 대해선 나중에 칼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다만, 그 감각 공유를 통해 눈앞의 여인이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위협적이라도 지금 상황에선 할 수 있는 게 없다.'
죽은 이가 없다는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로 치열한 전투였다.
동료 중 자신만 의식이 있었다.
자신조차 부러진 검에 기대어 겨우 버티는 정도.
저 여인이 우리를 노린다?
굳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잠시간의 휴식도 달콤했다. 숨돌릴 틈이 생기자, 허리를 펴고 주변을 살폈다.
주술사, 주술 인형, 금화 인형.
위협적인 적들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검은 짐승의 활약 때문이었다.
'그 짐승은 뭐였지?'
마차 크기의 덩치, 검은 털의 거대한 짐승이었다.
늑대 계열의 몬스터를 닮았는데, 존재감은 일반 몬스터 따위가 아니었다.
이빨과 발톱으로 금화 인형들을 모조리 찢어발겼고, 주술 인형들은 갑주째 덥석 물어 강가로 던져버렸다.
일대일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하기 힘든 강력한 존재였다.
록터는 강가 쪽을 잠시 살폈다.
불어난 물살은 거셌다.
혹여나 주술 인형들이 돌아올 것을 염려했는데, 주술사들이 몰살하면서 기능을 잃은 듯 보였다.
안전하다.
감각이 그리 말하기 시작했을 때,
"저 아저씨 위험해 보이는데."
"…뭐?"
"저쪽."
여인이 두 눈을 깜빡이곤 칼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피투성이로 쓰러진 칼이 있었다.
고르게 움직이는 가슴을 보니, 그녀가 언급한 위험은 칼의 상태를 말하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순간 감각이 쭈뼛 섰다.
데구르르-
"…저건."
록터는 다급한 표정으로 무거운 몸을 움직였다.
큰 전투가 벌어졌던 숲 주변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금화 더미들.
수천 골드에 달하는 금화들이 칼을 향해 빠르게 굴러오고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였는데, 그 모습에서 섬뜩한 기분마저 들었다.
록터는 이를 악물고 칼을 둘러업고는 여인이 있는 장소로 내달렸다.
그녀 곁에 있어야 할 것 같은 강한 확신이 들었다.
록터가 방향을 틀자, 굴러오던 금화들도 방향을 틀고 록터를 쫓기 시작했다.
일부 금화들이 통통 튀며 록터를 노렸는데, 뇌리에 경고가 울렸다.
닿으면 위험하다.
이를 악물고 남은 체력마저 끌어모아 내달렸다.
몸이 너무 무겁다.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아, 이거였네."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손에는 음습한 느낌의 나무 토템이 들려 있었다. 잠시 토템을 살피며 고민하던 여인은 토템을 바닥에 내려놓고 발로 팍팍 밟아 부서트리기 시작했다.
토템이 콰작! 부서지자 갑자기 주변이 조용해졌다.
뒤를 돌아본 록터는 서서히 멈춰 섰다.
움직이던 금화들이 거짓말처럼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움직임이 멈췄다.
"고맙다."
"..."
록터가 다가와 고마움을 표했는데, 그녀는 부서진 토템 파편을 응시한 채 말없이 서 있었다.
잠시 후, 그녀가 신기한 듯 아서를 바라봤다.
"이래서 아까 집어 던진 건가? 어떻게 알았지? 나도 못 느꼈는데."
뜻 모를 말을 내뱉은 그녀가 손짓하자, 둥둥 떠 있던 빗자루가 아서를 태우곤 그녀 곁에 머물렀다.
그사이 여인은 해골 지팡이에서 해골을 떼오곤 부서진 토템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다시 밟았다.
손을 탁탁 턴 여인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곤 빗자루에 엉덩이를 걸쳤다.
"죽고 싶지 않으면 따라와."
"..."
할 말만 하고 숲으로 날아가버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록터는 잠시 고민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따라오라니.
그건 협박이었을까, 조언이었을까.
해골을 왜 밟아서 부순 거지?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여인이라 생각을 읽기 힘들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록터는 한숨을 내쉬곤 칼을 업고 달리기 시작했다.
눈꺼풀이 무겁다.
바닥 어디든 머리만 닿으면 기절할 것 같은데, 바닥 곳곳에 나뒹구는 금화들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금화에 욕심을 보일 법도 한데, 조금 전 겪은 것이 있다 보니 금화 근처에 있는 것도 꺼림칙했다.
그도 이곳을 서둘러 벗어나고 싶었다.
록터는 악착같이 여인 뒤를 따라붙었다.
잠시 후,
...…차릉
치열한 전장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됐을 때, 대지에 뿌려진 금화들이 미약하게 들썩이더니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금화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듯 이동하더니, 부서진 토템이 있는 곳에 한데 뭉치기 시작했다.
금화와 금화가 뭉치며 황금 액체로 변화했고, 그 액체 사이로 금화들이 스며들었다. 수천 골드가 하나로 합쳐졌을 때 황금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퐁-
웅덩이 위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잠시 후, 웅덩이 위로 무언가가 솟구치며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 형태의 조각상 모습. 선명한 이목구비는 없었다.
황금 조각상은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군요. 분명 느꼈는데…]
직접 움직일 정도로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운이었다.
아주 기분 나쁘고, 아주 더러운, 그런데 보고 싶은.
그런 미묘한 기운이었는데,
[그게 뭐였을까요?]
죽음과 닿아있는 수십, 수백, 수천만의 기운 중 유독 호기심을 끄는 기운이었는데, 찰나처럼 스쳐 간 것이라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기운을 느낀 순간, '죽이고 싶다.'란 생각이 들었다.
흐릿한 이목구비에서 입이 가늘게 찢어지더니 선명한 미소가 드러났다.
그 기운을 떠올리자, 쾌락에 뒤덮인 살심(殺心)이 올라왔다.
죽음 선고는 그에게 숨을 쉬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두근두근 뛰었다.
왜 이런 기분이 들지?
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인데, 이유를 모르니 짜증이 났다.
[더러운 기운이 섞여서 다 망쳐놨군요.]
부서진 해골의 잔재를 내려다본 것도 잠시, 황금 인형은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허공을 매만지곤 아쉬운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대기에 느껴지는 마력이 메마른 수준이다.
지맥(地脈)이 막힌 지역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런 환경에서 실체를 오래 유지하는 건 어려웠다.
[중앙 지역이었다면 호기심을 풀 수 있을 텐데, 아쉽군요.]
나직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황금 인형은 촛농처럼 녹아내렸고, 잠시 후 황금 웅덩이는 땅속으로 스며들며 그 흔적마저 지워졌다.
남은 건 부서진 파편에 새겨진 제스밀로의 표식뿐이었다.
* * *
"우에에에에엑!!!"
칼을 벌떡 일어나 구토를 시작했다.
인생에 고비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 뇌리에 비상종이 땡땡땡 울렸다. 당장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지 않으면 인생이 종 친다는 신호였다.
바위를 부여잡고 하얀 신물을 토해내는 칼이 보인다. 조금 전까지 의식을 잃고 죽을 것처럼 빌빌대던 인간 같지 않았다.
"..."
록터는 칼의 모습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리곤 손에 쥐어진 갈색 병을 살짝 내려놨다. 마실지 말지 갈등하고 있는데, 등 뒤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마실래?"
"…아니, 괜찮다."
"아프다며? 얼른 마셔."
"..."
"내가 만든 특제 묘약이야. 우리 숲에선 큰 벌을 받는 이들이 억지로 마시곤 하는데, 효과는 진짜야. 먹으면 바로 벌떡 일어난다고."
"그런 것 같군. 그대도 마셔봤나?"
"아니?"
"..."
"왜?"
"아니다."
잠시 후, 늘어진 침을 질질 흘리며 칼이 힘없이 다가왔다.
록터 곁에 주저앉곤 헛웃음을 흘리고 있는데 정신이 나간 사람 같았다.
"괜찮나?"
"시발, 방금 죽을 뻔했어…."
"효과는 확실한가?"
"왜? 마시려고?"
"아직 블라이어 영토다. 언제 적이 나타날지 몰라."
"말리고 싶은데…. 말릴 수가 없네."
칼이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힘없이 끄덕였다. 탈진까지 갔던 체력이 서서히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상처 회복은 더디지만, 확실히 기력에는 도움이 됐다.
칼의 말이 길어질수록 록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내 입술을 꽉 물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시 다녀오겠다."
"..."
숲으로 사라지고 잠시 후 록터가 비틀거리며 칼 옆에 주저앉았다.
이마를 부여잡고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는데, 조금 전 칼의 모습을 빼 박은 모습이었다.
"한 병 더 있어. 마실래?"
여인이 다가와 갈색 병을 내밀자, 둘은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곤 아서를 챙겼다. 그의 입을 쩍 벌리곤 갈색 병뚜껑을 시원하게 따는데, 둘의 표정이 절로 일그러졌다.
말려야 하나?
하지만 결국 말리지 못했다.
일행 중 가장 상태가 심각한 이가 아서였기 때문이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신음이 쉼 없이 흘러나왔는데, 마치 지독한 고통을 느끼는 듯 보였다.
다행인 건 상처가 없어서 그저 악몽을 꾸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고 있었다.
아기 젖병 물리듯 갈색 병을 아서 입에 물리는 흑발의 여인.
실로 무시무시한 광경인데, 여인이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그런 생각이 안 들었다.
칼이 록터의 옆구리를 툭툭 치며 물었다.
"누구야?"
"모른다. 우리를 구해준 여인이라는 것밖에는."
"적은 아니라는 거네. 이름은 알아?"
"얘기를 안 해주더군. 그저 숲에서 왔다는 말만 들었다."
"숲? 엘프 혼혈인가? 그냥 이쁜 수준이 아닌데?"
"음…."
록터도 그건 부인하지 않았다.
묘령의 여인은 신묘한 매력을 지닌 미인이었다.
그리고 뛰어난 주술사로 보였다.
"주술사?"
블라이어에서 주술사는 카멜의 사람뿐이라, 칼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반응에 록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심할 필요는 없다. 우릴 죽이려고 했으면 진즉 죽였을 거야."
"하긴."
"말을 섞어봤는데 토바른 지역을 전혀 모르더군. 이곳 지역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그래? 다른 지역으로 가는 루트는 다 막혔을 텐데, 어떻게 넘어왔지? 주술사만의 방법이 있는 건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자리부터 깔지. 쉬고 싶다."
"의지의 록터가 약한 소리라니, 의외네."
칼은 피식 웃고는 나무를 모아 불을 피웠다. 새벽 공기가 흐르는 어두운 숲 공터에 작은 화톳불이 자리 잡았다.
칼이 불을 쑤시며 물었다.
"이곳은 어디쯤이야?"
"코룬 강 하류에서 2시 방향, 반나절을 이동했다."
"그렇게 멀리 왔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이유가 있는 듯 보였다."
상당한 거리를 이동했음에도 여인은 멈추지 않았다.
지칠대로 지친 상태라 쉬어가자고 했지만, 그녀는 거리를 더 벌려야 한다는 말만 내뱉으며 반나절을 이동했고, 그가 탈진 직전까지 가서야 '이 정도면 안전하다.'라는 말을 남기며 자리를 잡았다.
"…얼른 쉬어라."
그 먼 거리를 자신을 업고 왔으니, 록터의 고생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칼은 자리를 깔아줬고, 록터는 땅에 머리가 닿자마자 코를 골며 자기 시작했다.
자는 게 아니라 의식을 잃은 듯 보였다.
"엄청 피곤했나 보네."
칼은 그 모습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도 동료라도 자신을 믿고 자는 모습에 왠지 기분이 좋아졌다.
칼은 슬쩍 눈치를 보곤 여인 곁으로 다가갔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사람 사이로 녹아들어 정보를 얻는 건 실험체 감옥에서부터 해온 그의 특기나 다름없었다.
여인 주변을 둘러보던 칼은 그녀 곁에 웅크리고 자는 강아지를 발견했다.
탐스러운 털에 두 귀를 쫑긋하는 게 무척 귀여웠다.
두 눈을 반짝인 칼이 강아지 곁으로 다가갔다.
"귀여운 강아지네요."
"갠 케르베로스 혈통이라 건들면 죽어."
"하하하. 무슨 농담도. 키우는 겁니까?"
"집 지키라고 부르긴 했는데, 잠만 자."
"어려서 그럴 겁니다."
"음, 새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런 귀여운 것으로 집을 지키게 하려면 힘들겠군요."
"잘 지켜. 많이 잡아먹기도 했고."
"벌레가 많았나 봅니다."
"음, 몇몇은 벌레나 날파리가 많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
"그런데 혹시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왜 내가 반말하는 게 싫어?"
"그건 아닙니다만…."
"우리 할머니가 이쁘면 반말해도 된다고 했어."
"저도 말을 놓을까요?"
"안 돼. 아저씨는 못생겼잖아."
"...."
아저씨.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는 호칭이었다.
그리고 대놓고 못생겼다니.
연속으로 두 번이나 상처받았다.
칼은 긴장한 표정으로 여인을 바라봤다.
마흔 평생에 처음 만나본 강적이었다.
145화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나?
록터가 눈을 떴을 때, 나무숲 위로 동이 트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자 가장 먼저 고기 익은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시선을 돌리니 화톳불 위에 큼지막한 고깃덩어리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가고 있었다.
"…큭!"
몸을 일으키려는데,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물먹은 솜처럼 몸이 엄청나게 무겁다.
휴식을 취했는데 몸 상태가 이전보다 더욱 안 좋아진 상황이다.
몸을 살피며 살짝 당황하고 있는 사이,
"어? 진짜 깼네."
"…몸이 안 움직인다."
"영 신뢰가 안 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녀의 말이 맞았어."
칼이 고개를 흔들며 록터를 부축했다.
마치 록터가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저주 흔적이 짙어서 깊게 자지 못할 거라고 했거든."
"저주...?"
"'쇠약'이란 저주에 걸렸다고 하던데. 혹시 기억나?"
록터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쇠약'은 모르지만, 암살자들이 쓰던 저주받은 볼트를 여러 발 맞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 저주가 뒤늦게 나타나는 모양인데, 걱정은 하지 마. 치료 방법을 알고 있거든."
"저주에 대해 잘 아나?"
"아니, 저쪽."
칼이 가리킨 곳에는 여인이 있었다.
소맷자락을 바짝 걷고 익은 고기 일부를 뜯어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마치 며칠은 굶은 사람처럼 보였다.
이쪽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모습.
칼이 미묘하게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먹는 것에 아주 약해."
"...."
"치료할 것을 받아왔어."
"…설마, 갈색 병은 아니겠지?"
"그 물약 얘기는 꺼내지도 마. 끔찍하니까."
칼은 록터의 웃옷을 벗기곤 등을 살폈다.
등을 살핀 칼은 멈칫하곤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어이없네. 이런 상처들을 입고 지금까지 아무렇지 않게 싸운 거냐?"
"익숙하다."
"너도 미친놈이었네."
볼트에 꿰뚫린 상처부터, 베인 상처, 찔린 상처, 부딪쳐 찢어지고 멍든 상처까지.
등 전체를 봐도 깨끗한 부위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쓰릴 거다. 참아."
"...."
칼은 혀를 내두르며 상처 곳곳에 약초들을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진액이 흘러나왔는데, 상처에 닿자 록터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릴리가 손가락을 쪽쪽 빨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약초를 왜 이상한데 붙여?"
"여기가 아니야?"
"저주가 뭉친 부위에 붙여야지. 저쪽, 아니, 저쪽. 아니, 더 아래라고."
"그냥 네가 해주면 안 되냐? 보다시피 팔이 하나라."
"응. 안 돼. 저 아저씨는 내 스타일이 아니거든."
"아니. 이게 스타일이랑 무슨 상관인데?"
"상관있어."
칼의 능청스러움과 친화력은 릴리에게도 통했다.
밤새 잡담을 나눈 효과일까?
둘은 어느덧 편히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처음에는 이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는데, 칼이 사슴을 사냥해온 뒤 먹음직스럽게 구워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했다.
"다 됐다."
"신세를 졌군."
"신세는 무슨, 너나 나나 저 녀석이나 한동안 회복에 신경 써야 해. 하루 이틀은 이곳에서 쉴 거야."
"너무 위험해. 카멜이 추격자를 보낼 거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 이젠 추적을 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뭐?"
"우리가 신명의 주인인 건 알고 있지?"
칼은 그녀에게 밤새 들었던 내용을 록터에게 자세히 알려줬다.
숨고 도망치고 따돌려도 곧장 추격해오는 추적대의 비밀.
그 내용이 이어질수록 록터의 표정은 허탈하게 변했다.
"신을 받는 자들이 우리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헛고생하면서 도망 다닌 거지. 완전히 독 안에 든 쥐였어."
"지금은 괜찮다고 어떻게 확신하지?"
"'신을 받드는 자'가 저기 있거든."
칼이 릴리를 가리켰는데, 그녀는 잠든 강아지 코앞에 고기 조각을 살랑살랑 흔들며 장난치고 있었다.
칼과 록터는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정말 믿어도 되나…?"
"아마도?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잖아. 거짓말하는 타입은 아니야. 오히려 너무 솔직해서 문제지. 근데, 나 정말 못생겼냐?"
"...."
록터는 그녀를 믿어보기로 했다.
"우리 신명 목록도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신명 목록?"
"세상의 시각으로 바라본 우리의 운명이 궁금하지 않아?"
신명의 주인이 됐으니 당연히 궁금했다.
자신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지표이기도 했으니까.
어떤 운명, 어떤 재능, 어떤 능력을 타고났을까.
재능 아닌 지독한 노력으로 이 자리까지 오른 록터에겐 큰 유혹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칼은 록터의 표정을 보곤 쓰게 웃었다.
눈빛만 봐도 록터의 답을 알 것 같았다.
"수명을 대가로 받더라. 발설에 대한 페널티를 없애는 방법이라나? 근데 우리 나이가 벌써 40줄 아니냐. 단명은 사절이다."
"난 알고 싶다."
"10년이야."
"상관없다."
"돈으로 알아낼 방법이 있는데? 단명할래?"
"얼마가 필요하지?"
"네 현상금 정도?"
"음...."
록터는 말없이 여인을 바라봤다. 그리곤 아서에게 눈길을 준 뒤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칼이 움직이면 안 된다고 말렸지만, 요지부동이었다.
"확인해볼 게 생겼다. 네 말을 듣고 떠오른 게 있어."
"뭐가 떠올랐는데?"
"그녀의 신분."
수명을 대가로 신명을 알려 준다.
기사 단장 시절에 권력자들 사이에서 익숙하게 들었던 대화 내용이었다.
그 내용 끝에는 언제나 한 존재가 등장했다.
비틀거리며 화톳불 앞에 자리한 그는 여인을 조용히 직시했다.
강아지에게 장난치던 여인은 다시 고기를 집어 먹고 있었다. 손으로 쭉쭉 찢어먹는데, 여린 외모에 비해 털털한 면이 있었다. 그동안 지켜본바, 그녀의 성향은 단순하고 솔직했다. 악의는 없지만 절대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그녀 앞에 있으면 검을 뽑기가 잠시 주저됐으니까.
찰나의 망설임.
처음에는 여린 여인이라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 이름은 록터, 록터 펠리스다."
록터는 자신을 정식으로 여인에게 소개했다.
"이미 알고 있어."
"당신의 이름이 궁금하다."
록터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여인은 그를 바라보며 고기를 오물오물 씹었다. 잠시 후, 고기를 꿀떡 삼킨 그녀는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은 말 못 해."
"왜지?"
"저 인간한테 확인해볼 게 있거든."
릴리는 곁에 누워 있는 아서를 응시했다.
"내가 숲을 나온 이유는 저 인간을 만나기 위해서야. 그런데 왜 만나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몰라. 그래서 확인해보려고. 그때까지 내 이름을 말해줄 수 없어."
"그럼 한 가지만 물어보지."
"하나만 물어봐."
"오르도르 숲에서 나왔나?"
"응."
너무나도 쉽게 인정하자, 록터는 헛웃음을 흘렸다. 오히려 놀란 건 칼이었다.
오르도르 숲.
방금 여인은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인정했다.
"…야!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안 물어봤잖아."
"마녀는 숲에서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맞아. 오르도르 숲은 살기 좋거든."
"...."
마녀라 인정한 순간,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릴리는 그 분위기에 입맛이 떨어졌는지 이마를 찡그리곤 식사를 마쳤다.
인간 세상에서 마녀를 바라보는 인식은 굉장히 부정적이다.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강했기 때문인데, 저 둘도 이를 피해갈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우릴 왜 도운 거지?"
"저 인간이 너흴 살리려고 했으니까."
"...."
입술을 삐죽거린 릴리는 화톳불 근처에 망토를 깔고 누웠다.
인간들이 마녀를 어떻게 보든, 그녀는 별 상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남의 시선 따윈 전혀 개의치 않은 성격이었으니까.
배부르고 등 따시고.
잠잘 시간이다.
"저 녀석의 이름을 알고 있나?"
"하나만 물어본다며. 귀찮게 하지 마."
그래도 기분 나쁜 건 사실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자, 록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은인인데, 마녀라 듣는 순간 경계심을 보였다.
기분을 어떻게 풀어주지?
이런 쪽에는 서툴러서 칼을 바라봤는데,
"당신은 알고 있어?"
그녀가 먼저 질문을 해왔다.
"그의 이름 말인가?"
"그래. 진짜 이름 말이야."
"알고 있다."
록터의 대답에 릴리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그 눈동자를 조용히 응시했다.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에는 아이 같았는데, 지금은 노인 같았다. 역시나 종잡을 수 없는 여자였다.
"내가 그 이름을 알면? 뭐가 달라지는데?"
"이름을 알고 있다면...."
록터가 이에 잠시 고민하는 사이, 분위기를 보던 칼이 불쑥 다가와 대신 답했다.
"친구가 될 수 있지."
"…친구?"
"저 녀석은 친구 아니면 진짜 이름을 말해주지 않거든."
"아저씨도 알고 있어?"
"아저씨라 부르지 마!"
릴리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친구를 반복적으로 중얼거렸다. 칼의 눈에는 그 모습이 무척 귀여웠는데, 이내 고개를 털며 경각심을 가졌다. 마녀는 인간을 홀린다는데 정말인 것 같았다.
"알고 있어. 저 인간의 진짜 이름."
"이름이 뭐지?"
그녀가 마녀이건 범죄자건 살인자이건 아무런 상관없었다.
단 하나.
아서 클레이튼.
그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면 록터는 그녀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은 모두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곤란한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신명을 통해 알게 된 거라 누군가에게 듣기 전까지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해."
"내 수명을 대신 주지."
"저 인간의 신명은 특별해서 바로 죽을걸?"
"...."
잠시 후, 칼이 앞으로 나와 제안을 했다.
"우리가 그 이름을 밝히면 너도 말할 수 있다는 거야?"
"응."
"그럼 이렇게 하지. 바닥에 이름 수십 개를 적을 거야. 그중 하나를 골라."
릴리는 두 눈을 반짝이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신을 받드는 자가 대가를 받고 신명을 먼저 알려주는 건 봤어도, 그 반대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자, 골라봐. 익숙한 이름이 있을 거야."
칼이 나뭇가지를 털어내며 물러나자, 바닥엔 글자들이 어지러이 적혀 있었다.
모두 칼이 알고 있는 일행의 이름들이었다.
릴리는 바닥을 쭉 살피곤 두 눈을 끔벅였다.
"없는데?"
"확실해? 잘 보라니까?"
"나랑 장난해?"
"진짜 알고 있나 보네. 알렉스 마르샤. 그 이름이 맞지?"
"무슨 헛소리야? 재수 없어."
"...."
릴리의 말에 칼이 상처받은 표정을 짓자, 록터는 피식 웃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반응을 보니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진짜 이름을 알고 있다.
"헌트(Hunt)."
"...?"
"그대가 알고 싶어 하는 이가 몸담은 조직이다."
"헌트...."
"이름은 그에게 직접 들어라. 그럼 친구가 될 수 있겠지."
록터는 자러 간다는 말을 남기곤 화톳불 반대편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칼은 진짜 이름을 알려주려다가 멈칫하곤 진지하게 물었다.
"잘생겼다고 말해봐. 그럼 알려주지."
"못생겼어."
"…두고 보자."
록터가 말한 데로 칼은 힘없이 물러났다.
화톳불이 주저앉아 불침번을 선다고 모두 자라고 말했지만, 금세 고개를 꾸벅이며 졸기 시작했다.
"...."
릴리는 다시 망토 위에 몸을 뉘었다. 그녀의 시선은 근처에 죽은 듯이 자는 인간에게 닿아있었다.
특제 묘약은 오르타들도 한 모금 마시면 불같은 반응을 보이는데, 그는 묘약을 마시고도 의식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악몽이라도 꾸는 건지 줄곧 일그러진 얼굴로 자는 모습이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인간.
얼굴도, 목소리도, 신분도 모른다.
[아서 클레이튼―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25%)]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하지만 전부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넌 날 얼마나 알고 있니?"
그게 무엇이든 자신의 이름뿐이라면 실망할 것 같았다.
소개 없는 통성명.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아마 그 이후가 될 것 같았다.
146화 릴리 베이스
'여긴....'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서 있었다.
시야엔 처음 보는 숲이 펼쳐졌고, 압도적인 거목(巨木)이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확히 새빨갛게 타오르는 거대한 나무였다.
타닥타닥―
수천, 수만의 나뭇잎이 타오르며 비명을 질러댄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시뻘건 화마(火魔).
숲 전체가 거센 불에 삼켜졌다.
그런데 느껴져야 할 지독한 열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 홀로 다른 공간에 떨어져 있는 느낌.
'…또 그건가.'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오감도 사라졌다.
격발 후유증으로 몸조차 가누기 힘든 상태여야 하는데,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꿈.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스토리 내용 중 일부분.
학살자 카멜이 도르네프의 목을 베고 베네타를 몰락시킨 장면이 떠올랐다.
설마 꿈을 통해 새로운 장면이 또 펼쳐지는 것일까.
'여긴 어디지?'
하지만 이곳은 숲이라 정확한 장소를 특정하기 힘들었다.
시야에 또렷하게 박히는 건 압도적인 크기의 거목뿐.
한때 압도적인 존재감을 흘렸을 거목 전체가 불꽃에 휩싸여 쓸쓸히 타오르고 있었다. 그 시뻘건 장면을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는데,
크아아아앙―!
거친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시선을 돌리니, 거대한 짐승이 수많은 인간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검은 털.
쫑긋한 두 귀와 검붉은 눈동자.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거대한 늑대였다.
그 짐승을 본 순간 내용 묘사가 떠오르며 짐승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케로스.'
릴리 베이스와 함께 등장하는 반려 마수가 분명했다.
마수 케로스, 그리고 거목(巨木).
두 가지 특징을 떠올리자, 내가 서 있는 장소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마녀들의 안식처, 오르도르의 숲.
그럼 저 불타오르는 나무는 마녀들이 신성시하는 '천년 나무(Millennial Tree)'가 분명했다.
천년 나무가 불타오르고 있다?
'…설마.'
천년 나무의 전소(全燒)는 챕터 Ⅱ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마녀사냥에 기회를 엿보던 마탑 연합이 오르도르의 숲에 이빨을 드러내는 시기.
마녀 최후의 날.
결계(結界) 유령의 숲이 학살자 카멜의 모략으로 파훼 당하고, 마탑 연합이 총공세를 퍼부으면서 마녀들의 안식처가 불타오른 사건. 이 사건으로 살아남은 마녀는 단 '한 명' 뿐이다.
크아아앙―!!
매서운 기세가 터지며 케로스의 입에 검은 불꽃이 사납게 뿜어져 나왔다.
지옥견 케르베로스의 능력 중 하나인 불지옥이다.
검은 불꽃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인간들을 삼켰지만, 인간들은 오히려 투명한 반구를 소환하며 앞으로 돌진해왔다.
실드!
실드!
실드!
마법사들의 전유 마법인 실드(Shield).
마법사들의 하모니 같은 영창에 투명한 반구가 빠르게 커졌다.
동시에 파훼 된 유령의 숲 틈새로 마법사들이 꾸역꾸역 흘러들어왔다.
색색의 로브들이 물결을 이룰 정도로 수많은 마법사가 동원됐다.
수가 많으니, 이젠 방어를 넘어 불지옥을 향해 마법들을 매섭게 퍼붓기 시작했다.
얼음과 물.
불과 상극인 마법들이 셀 수 없이 퍼부어지며 불지옥을 소멸시키고, 케로스의 몸을 때렸다.
케로스의 비명.
거대한 육신이 얼어붙으며 비틀거리자, 마법사 무리 앞으로 검은 로브를 걸친 이들이 빠르게 질주해왔다.
가슴에 새겨진 나비 문양.
그들이 손을 뻗자, 섬뜩한 마법창이 손에 잡혔다.
'검은 나비(Black Butterfly).'
일부 학파에서 초엘리트들을 모아 만든 전투 집단.
마법사의 고질적인 단점인 약한 육체를 보완한 그들은 뛰어난 마법 실력과 함께 근접 전투에도 능한 올라운더 정예들이다.
소수의 그들이 육체에 보조 마법을 걸고 케로스를 유린하기 시작했다.
근접에선 검은 나비들이.
뒤쪽에선 마법사 다수가 마법 폭격을 가했다.
케로스는 결국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 육신 위로 마법창들이 잔혹하게 박혀 들었다.
들썩이는 검은 육신.
마수의 최후였다.
[마녀들의 흔적을 지워라.]
마법사들은 멈추지 않았다.
숲 사방으로 불 마법을 퍼부으며 숲을 모조리 태웠다.
숲과 공존하던 오두막도, 아기자기한 나무 집기도, 투박한 생활 도구들도 모조리 잿가루가 되어 타올랐다.
오두막을 나온 검은 나비들의 손에는 죽은 마녀들의 머리가 들려 있었다.
일방적인 학살.
주변을 모조리 정리한 그들은 천년 나무를 향해 질주했다.
[달의 마녀다.]
그들은 내 몸을 그대로 통과하고 천년 나무 주변을 빽빽이 포위했다.
그들의 목표는 이제 하나.
'아....'
그제야 난 천년 나무 아래 자리한 실루엣을 발견할 수 있었다.
타오르는 잿가루와 함께 흩날리는 기나긴 흑발. 머릿결 사이로 드러난 매끈한 귀 그리고 아름다운 이목구비까지.
처음 보지만 한 눈에 그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베이스.
그녀는 멍하니 타오르는 천년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그녀의 시야가 머문 곳을 보니 욕설이 절로 흘러나왔다.
천년 나무 나뭇가지 사이에 수많은 시신이 꿰뚫려 있었다.
내용상 장로와 오르타들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타오르는 천년 나무 위로 내리쬐는 달빛이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다.
마법사들이 정의 구현의 날이라 천명했던, 그 밤이다.
그 밤 아래 수많은 마법사가 릴리 베이스를 포위했다.
[....]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무표정이었다.
감정은 잃었지만, 두 눈에선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시선은 피투성이가 된 케로스에 닿아 있었다.
[이유가 뭐지? 우리는 그저 살아갔을 뿐이야.]
[인간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세상에 혼란을 가져오는 불온의 씨앗들. 세상의 평화를 위해선 마녀들은 사라져야 한다.]
[아이들도 있었어.]
[마녀일 뿐이다.]
[....]
[고통 없이 보내줄 테니, 얌전히 포박을 받아들여라.]
[피를 뽑히고, 실컷 연구 재료로 농락당하다가 사라지겠지.]
[마법 발전에 이바지하는데 작은 희생은 묵인될 수 있다.]
불씨 속에서 릴리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름 끼치도록 슬픈 웃음이었다.
웃음을 뚝 멈춘 그녀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직하게 읇조렸다. 그녀의 시선은 검은 나비들의 뒤편, 마법을 준비하는 마법사들이었다.
[위선적인 종자들아. 이미 노예로 전락했음을 너흰 모르는구나.]
릴리는 타오르는 천년 나무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진짜라곤 하나도 없는 거짓된 존재. 그리고 그 존재에게 속고 있는 멍청한 인간들아.]
검은 나비들이 마법창을 소환하고 릴리에게 돌진했다. 마법사들은 그들을 보조하며 마법을 퍼부었다.
섬뜩하지만 지독히도 아름다운 마법이 허공을 수놓았다.
그때 타오르는 천년 고목에서 샛노란 빛이 터져 나오며 마법을 일시에 소멸시켰다.
그 광경에 마법사들은 경악했고, 검은 나비들은 릴리의 몸을 꿰뚫기 위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복수의 율법에 따라, 아이든 여인이든 마법사와 관련 있다면 다 죽일 것이다.]
릴리의 신형이 천년 거목 안으로 파고들었다.
마법창들이 거목을 매섭게 찔렀지만, 거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불씨가 흩날리는 공허 속에 그녀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오늘부로 인간들은 내 적이다.]
챕터 Ⅱ 두 명의 메인 주인공 중 한 명.
'대(大) 마녀, 릴리 베이스의 탄생'이었다.
* * *
"...."
두 눈을 끔뻑이며 눈을 떴다.
이번에는 바닥이었다.
전과 달리 지금은 꿈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챘다.
고기 굽는 냄새.
본능대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고, 입가엔 침이 고였다.
누운 바닥은 차가웠는데, 주변 공기는 화톳불 덕에 따뜻했다.
타닥타닥, 조금 전과 달리 조용하고 편안한 불씨 소리였다.
'몸은?'
무력감이 느껴졌는데, 다행히 고통은 없었다.
격발 후유증이 대단했을 텐데, 기절하면서 무사히 넘어간 건가?
혹여 기절해서 고통을 느끼지 못한 것이라면 정신을 잃은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닌....
"…응?"
그것도 잠시, 이상한 느낌에 몸을 돌려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날 내려다보는 이들이 있었다.
모두 세 명.
"정신을 차렸는데?"
"괜찮은 건가? 아까 그건 도대체 뭐였지?"
"아 그거? 난 알고 있지."
"역시 마녀는 달라. 그게 뭔데?"
"못생긴 얼굴 치워. 기분 나쁘니까."
"시발...."
나를 내려다보며 머리를 맞댄 채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다.
익숙한 얼굴들이다.
록터, 칼, 그리고....
"으아아아아악!"
흑발을 늘어트린 여인과 눈을 마주친 순간 난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조금 전 샛노랗게 번뜩이며 마법사들을 살벌하게 노려봤던 그 얼굴이었다.
[복수의 율법에 따라, 아이든 여인이든 인간이라면 다 죽일 것이다.]
마법사들의 천적이자, 마탑 전체가 악착같이 죽이고자 했던 대(大) 마녀, 릴리 베이스.
그녀가 두 눈을 끔벅이며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발, 얘가 왜 여기 있어!?
꿈에서 봤던 공포의 존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얼굴을 들이밀자, 난 또다시 기겁했다.
칼이 히죽거리며 릴리의 어깨를 툭 쳤다.
"네 얼굴도 만만찮나 봐? 이 녀석이 기겁하는데?"
"나 때문이 아니야."
"널 보면서 기겁하잖아."
"흥!"
릴리는 코웃음을 치곤 손거울을 꺼냈다. 얼굴을 슥슥 살피고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음!' 거울 속에 비춘 얼굴에 스스로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거울을 품에 넣고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악수하면 개구리로 만들어버리는 건 아닐까?
꿈속에서 워낙 살벌한 모습을 봐서인지, 웃고 있는 얼굴도 무시무시하게 보였다.
막 정신을 차린 터라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그녀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케로스가 고기 냄새에 반응을 보이며 킁킁 코를 벌렁벌렁하곤 두 눈을 번쩍 떴다.
본능적으로 고기에 반응하며 붉게 물든 눈동자.
마법사 수백 명과 싸웠던 그 무시무시한 마수, 지옥견 케로스다.
순간 지옥불이 떠올랐다.
"멍!"
"으아아아악!"
다시 비명을 질렀을 때, 칼이 릴리에게 손가락질하며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두고 보자.'라고 했던 복수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입꼬리를 비틀어 뭐라 말하려고 하는데, 릴리가 앞서 칼의 엉덩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물어."
반사적으로 케로스가 그녀의 어깨에서 튕겨 나갔다.
"으아악! 이 개새끼가!"
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케로스가 칼의 엉덩이를 물고, 록터는 고개를 흔들며 케로스의 엉덩이를 붙잡았다.
셋이 물고 잡으며 힘겨루기를 하는 동안, 릴리는 나를 노려보곤 심각한 눈빛으로 물었다.
"날 보면서 비명을 지른 이유가 뭐지?"
네가 릴리 베이스라서.
그런데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대충 둘러댔다.
"아는 사람이랑 너무 닮아서...."
"거짓말."
"...!"
릴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날 노려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이 여자도 엘프처럼 진실을 보는 눈을 지닌 건....
"나처럼 이쁜 여자가 세상에 또 있을 리가 없어."
"...."
거울을 다시 살피는 그녀를 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꿈에서 본 그녀의 눈동자엔 처절한 슬픔과 악의 그리고 인간을 향한 지독한 살의로 가득했다.
외모도 거울에 비춘 얼굴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지금 거울을 붙들고 있는 릴리는 다소 앳된 모습을 띠고 있었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엔 그 어떤 악의도 없다.
맑고 투명하고 순수하다.
꿈의 릴리와 지금 릴리는 괴리감이 너무 컸다.
'대마녀는 무슨....'
생각해보니 지금 시절, 그녀는 마녀들의 사랑과 보살핌을 한창 받던 시기였다.
어릴 적 경험한 전쟁의 잔재가 있지만, 인간에게 살의를 느끼기보단 호기심이 더 강한 시절이었다.
생생한 꿈 때문에 잠시 혼란스러웠을 뿐, 원래 이런 이상한(?) 여자가 맞았다.
긴장이 풀린 그 순간,
'…어? 잠깐?'
아주 중요한 것이 떠올랐다.
그녀가 왜 우리 곁에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난 그녀를 한 번쯤 꼭 봐야 할 이유가 있었다.
신명(神名).
그녀라면 내 신명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으니까.
147화 신명, 달의 마녀
작은 소란은 고기가 다 익으면서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약속이라도 한 듯,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화톳불 사이에 옹기종기 앉아 다 익은 고기를 뜯어 먹기 시작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
꼬르르륵―
위장이 배고프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심장을 얻고 식욕이 강해졌기에 모든 생각을 뒤로 미루고 정신없이 고기를 뜯었다.
먹고 먹고 또 먹었다.
사슴 한 마리가 사라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벌써 바닥을 드러낸 모양새.
그런데도 배가 고팠다.
얼마나 굶은 거지?
[의식을 잃고 이틀하고 13시간 지났다.]
"…그런 것은 또 어떻게 계산하는 겁니까?"
[심장 박동 주기로 알 수 있다.]
"후유증이 생각보다 심하지 않았는데, 이유가 있습니까?"
[저 마녀가 도움을 줬다. 미각을 잠시 잃었는 데 큰 문제는 아니다.]
"…미각?"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은 고기를 맛봤다.
미각에는 큰 이상이 없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릴리가 이곳에 있는 이유.
전장에 나타난 것도 신기한 일인데, 어째서 우리 곁에 머무는 것일까?
"의식이 없어도 주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까?"
[지금껏 심장이 멈춘 적이 있던가. 난 너와 동화되어 있다. 당연한 것을 묻는군.]
"이곳에서 벌어진 내용, 간략히 알려주십시오. 제가 기절했을 때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내가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칼이 이상한 눈초리로 날 바라봤다.
"어디 아파? 이상한 행동을 하니까. 갑자기 무섭네."
"별것 아닙니다. 먹을 것은 더 없습니까?"
"예전에는 소식하지 않았냐? 깨작깨작 먹었던 것 같은데."
"실험체 감옥에선 먹을 것이 별로 없었잖아요."
"그렇긴 한데...."
칼은 내 앞에 수북이 쌓인 뼛조각을 보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전까진 고기가 늘 남았는데, 저 녀석이 끼자 양이 부족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잠깐 기다려 봐. 강가 근처라 금방 잡힐 거야."
단검을 집어 든 칼이 숲속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칼이 작은 멧돼지를 어깨에 걸치고 나타났다.
야영에 익숙한 암살자 출신답게 그는 멧돼지를 먹기 좋게 손질한 뒤 화톳불 위에 올렸다.
침을 꼴깍 삼키며 고기가 노릇노릇 익기를 기다리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고개를 돌리니, 검은 강아지가 털을 바짝 세운 채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 옆에 조용히 오물거리고 있던 릴리가 내 앞에 쌓인 뼛조각을 응시하곤 고개를 흔들었다.
"욕심쟁이."
"...."
아, 너무 많이 먹었나?
양을 생각지 않고 허겁지겁 먹었더니 케로스의 원망을 산 모양이었다.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고 있는데, 칼이 뒷다리를 뜯어 케로스 앞에 내밀었다.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 앞에 케로스가 꼬리를 살랑 흔들며 다가왔다.
"어쭈, 조금 전 내 엉덩이를 콱 문 그 강아지 맞냐?"
"멍!"
"다음에는 국물도 없어. 귀여우니 한 번은 봐준다."
"멍!"
뒷다리 하나로 둘은 극적인 화해에 들어갔다.
릴리가 나직하게 케로스의 뜻을 중얼거렸는데, '닥치고 내놔라. 인간', '성의를 봐서 살려주도록 하지.' 이렇게 말한 것 같았다.
록터나 칼은 그때 전장을 휩쓴 거대한 짐승이 눈앞의 강아지라곤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긴, 같은 선상에 두기엔 비주얼 차이가 크긴 했다.
어느새 다 익은 고기를 천천히 먹고 있는데, 록터가 질문을 던졌다.
"몸은 괜찮나?"
"네.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이군. 조금 전에 네 몸에서 잿빛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 줄 알고 깨운 거다."
"...잿빛?"
록터에게 자세히 들어보니, 갑자기 허공에서 잿빛이 번뜩이더니 내 몸에 스며들었다고 했다.
황금빛도 아니고, 잿빛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의식이 없던 상태라 그 변화가 무엇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는데, 식사를 마친 릴리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충격적인 사실을 알려줬다.
"신벌의 빛이야."
"…신벌?"
신벌(神罰).
신명의 주인에게 내려지는 페널티 같은 것이었다. 내게 신벌이 내려질 일이 있던가. 내가 무슨 잘못을....
"아!"
신명 사냥꾼의 계약.
록터 펠리스를 사냥하겠다고 선언하고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각성을 위한 거짓 선언이니 지켜질 리 없었다.
사냥 실패.
그런데 실패에 대한 페널티가 존재한다고?
지금까지 어떠한 부작용도 경험한 적이 없는데?
"혹시 그 신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까?"
"음, 정확하진 않는데...."
"괜찮습니다."
"그럼 소원 하나를 들어줘."
"소원...?"
"할머니가 인간의 부탁을 들어줄 땐 소원을 말하라고 했거든."
할머니.
장로 메데이아가 분명했다.
빌어먹을 할망구.
아니, 지금 릴리 곁에 메데이아가 없는 것에 감사해야 했다. 그 할망구가 이곳에 있었다면 릴리가 이런 장소에 머물고 있을 리 없을 테니까.
이 자리는 내게 큰 기회였다.
"소원이 뭡니까?"
"아직 생각 안 했어. 생각나면 말할게."
"저와 관련된 이들과 제게 피해가 가지 않은 선이라면 능력껏 소원을 들어주겠습니다."
"좋아."
릴리는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곤 내게 손거울을 내밀었다.
내 얼굴이 거울에 비춰 보인다.
몰골이 진짜 말이 아니네.
"자, 거울에 대고 약속해."
"...."
순진한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꼼꼼한 면이 있었다. 설마 마녀의 거울을 들이밀 줄은 빼박으로 소원 하나 들어주게 생겼다.
내가 거울에 대고 약속하자,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짓고는 입을 열었다.
"잿빛으로 신명의 문자 일부가 전보다 진해졌어."
"…무슨 소리입니까?"
"거울에 비친 글자가 처음에는 전부 투명했는데, 진해지고 있다고. 이거하고 이거."
그녀가 거울 여기저기를 손가락으로 툭툭 가리켰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울 안에 그녀만 보이는 글자가 있는 것 같은데, 말을 들어보니 내 신명 목록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일단 하나는 확실하게 확인했다.
그녀는 내 신명 목록을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시발...."
페널티도 뭔지 알 것 같았다.
베일에 싸인 신명의 주인.
신녀인 넬라가 내 신명 목록은 온통 베일에 싸여 있다고 했다. 자신조차 해석이 하나도 안 되는 것들이라, 뛰어난 이들도 전부를 알 순 없을 거라고 했다.
"혹시 마녀 중에 제 신명 목록을 읽은 이가 있습니까?"
"아니. 나밖에 없어."
"...."
신명의 문자가 진해졌다는 뜻.
정확히 확인해봐야겠지만, 신벌의 페널티는 내 신명 목록의 노출을 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방금 페널티를 받았으니 내 신명 목록 일부가 다른 이들에게 노출됐을 것이다.
'운명의 아케인....'
난 먹던 고기를 내려놨다.
갑자기 식욕이 뚝 떨어졌다.
학살자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는 건, 내가 만든 '그'란 존재 때문이었다.
확인한바, 학살자는 내가 '그'와 동일인임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이를 통해 아케인이 내 신명 목록을 전부 해석하지 못한다고 확신했는데, 방금 전 페널티로 상황이 어찌 변했을지 모르겠다.
내 신명 목록이 전부 밝혀지면 유추를 통해 내가 '그'란 것을 알아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신명 목록이 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건데.'
결론은 하나였다.
내 신명 목록을 알아야 했다.
난 조심스레 릴리에게 물었다. 그녀의 태도를 보건대, 우리에게 호감을 보내고 있다. 잘하면 일이 쉽게 풀릴지도.
"혹시 제 신명을 알 수 있겠습니까?"
"보통 수명을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네 것은 무리야."
"…이유가 뭡니까?"
"웬만한 수명으론 택도 없을 것 같거든."
"얼마나 필요합니까?"
"글쎄? 한 100년? 그 이상이 될지도."
예상대로 그녀는 대가로 수명을 요구했다. 신명을 발설 시에 받게 될 저주를 액받이 할 수명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알기론 마녀 중 오직 릴리 베이스만 가능한 저주 회피법이었다.
'100년이라....'
인간의 수명으론 한계에 다다른 숫자다.
보통 인간이었다면 대가를 준 순간 수명을 다해 죽었겠지.
하지만 내 경우엔 조금 특별했다.
난 100년이란 말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100년 드리죠. 200년도 상관없습니다.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십시오."
"…뭐?"
"얼마건 상관없다는 얘기입니다."
"난 상관있거든?"
"도중에 제가 죽어서 당신께 피해를 줄 일은 없을 겁니다."
"진짜?"
수명 100년이든 200년이든 1000년이든 난 겁날 것이 없었다.
왜냐고?
그 대가를 줄 존재는 내가 아니거든.
"레토. 가능합니까?"
[상관없다.]
불사자 레토니칼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불멸의 존재.
레토의 수명은 무한에 가까웠다.
수명을 대가로 지불해도 그 양은 모래사막에 모래 한 톨 정도 될 뿐이었다.
'여기서 신명에 관한 대화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
전에 레토와 신명의 저주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개안으로 본 신명을 타인에게 누설했을 때 과연 난 신명의 저주를 받을까.
답은 '아니오'였다.
난 신을 받드는 자가 아니다. 신기를 통해 신명을 보는 것이 아닌, 내 개화 능력인 개안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라 신명의 저주를 피해갈 수 있다.
고민했던 건 릴리를 만났을 때,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었는데 레토가 간단히 해결해줬다.
그냥 수명을 지불하면 된다.
역시나, 손거울로 나를 비추고 나직하게 주문을 외우던 그녀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바라봤다.
수명을 확인하곤 놀란 모양이었다.
"…너, 설마 좀비?"
"좀비는 아니고 제 능력 중 하나입니다."
"음, 이 능력 때문인가 보네."
거울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궁금해 미칠 것 같았다.
무슨 능력을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그럼 알려주는 겁니까?"
"공짜는 안 돼."
"또 소원입니까?"
"응. 하나당 하나씩."
"...."
이러다가 소원 몇 개가 될지 모르겠네.
내게 뭘 바라고 저러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할머니 말을 따라 그냥 주긴 뭐해서 조건을 내거는 것일까.
다만, 이번에는 굳이 소원을 들어줄 필요가 없었다.
"거래를 하죠."
"거래? 난 너한테 필요한 게 없는데?"
"당신의 신명."
"...."
내 말에 웃고 있던 릴리의 표정이 빠르게 굳었다. 고기를 먹고 있던 케로스도 마찬가지.
검은 강아지는 느릿느릿 그녀 앞으로 걸어와 날 올려다봤다.
작은 주제에 눈빛은 왜 이리 무서운지.
"내가 누군지 알아?"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베이스."
난 검은 강아지를 가리켰다.
"마수 케로스."
"...."
침묵이 감돌았다.
뒤편에서 케로스에게 뒷다릿살을 뜯어주던 칼도 마찬가지. 그는 돌처럼 바짝 굳었고, 록터는 흘러가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검집에 손을 올렸다.
"날 어떻게 알아?"
"당신과 비슷합니다. 볼 수 있죠."
"…설마, 너도? 내 신명 목록을 알아? 내 신명이 뭐야? 응?!"
굳었던 릴리의 표정이 서서히 풀리더니 묘한 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사탕을 잔뜩 기대하는 아이의 표정 같았다. 그 반응에 난 안도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신명 목록을 제대로 해석한 마녀가 아직 없나 보네.'
신명이 베일에 싸이는 경우는 내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마녀, 릴리 베이스도 마찬가지.
지금은 신명 사냥꾼 상태가 아니라서 그녀의 신명을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월광(月光)의 빛이 쏟아지는 그날.
난 이미 그녀를 알아봤고, 개안을 통해 그녀의 신명을 한눈에 담았다.
"아, 너도 저주 때문에 말할 수 없는 상태인 건가? 수명을 주면 얼굴에 주름이 생길 텐데, 그건 곤란해. 어쩌지? 케로스!"
"...."
케로스의 양 볼때기를 붙잡고 의견을 묻고 있는 그녀가 보인다.
아직은 세상의 때가 덜 묻는 모습.
그녀를 보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난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신명, 달의 마녀."
"아...!"
신명을 대놓고 발설하자, 릴리도 케로스도 두 눈이 큼지막하게 떠졌다.
아직은 마녀들도 일부밖에 모르는 신명.
어떻게 안 것일까.
난 그녀에게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디디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월의 재능, 저주 나태(懶怠), 케르베로스의 친구."
"...."
마지막엔 그녀 코앞에서 그녀의 마지막 신명 목록을 내뱉었다.
"재앙의 씨앗."
[릴리 베이스 – 달의 마녀[월광(月光)]]
[만월의 재능]
[만월의 저주 – 나태.]
[케르베로스는 내 친구]
[대(大)마녀의 씨앗(재앙).]
그녀가 날 찾아온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하지만 오르도르의 숲이 안전한 지금, 난 그녀의 미래가 꿈처럼 흘러가지 않게 바꿀 수 있었다.
148화 너무 시끄러웠다
우우웅―!
작은 손거울이 찬란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달빛을 머금고 이내 나를 비추더니 내 몸에서 붉은 기운을 쭉 뽑아갔다.
[시원하군.]
엄청난 수명을 뽑아가는 것 같은데, 레토에겐 가려운 등을 긁어주는 정도인 모양이었다.
그녀 말로는 수명을 희생해도 당사자가 신명을 해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최악이라고 했는데, 그건 우려에 불과했다.
[아서 클레이튼―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25%)]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드디어."
거울 겉면에 신명 목록이 선명히 보인다.
그것도 아주 명확하게.
두 눈에 힘을 팍 준 채 난 신명 목록을 눈에 담았다.
잠시 후, 나와 릴리는 신명 정보 교환을 마쳤다.
서로의 정보에 만족한 상황.
그녀와의 첫 만남은 비명으로 시작했지만, 마무리는 미소로 끝을 맺었다.
앞으로 변화할 신명 목록을 계속 확인하려면 그녀의 도움은 필수다.
좋은 인연을 맺어둬야 하는 건 당연한 일.
그러려면 일단 그녀의 상황을 알아야 했다.
그런데,
"오늘 너무 무리했어."
"물어볼 게 있습니다."
"급한 일이야?"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낼 물어봐. 제때 못 자면 피부가 푸석해진다고."
거울을 보며 피부를 걱정하던 릴리는 화톳불 주변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망토를 둥글게 말아 베개를 만들곤 그 위에 머리가 닿자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자리 준비부터 잠들기까지 눈 깜짝할 새에 이뤄졌다. 익숙한지 케로스는 그녀의 곁에 배를 깔고 앉은 후 발바닥을 할짝댔다.
"...."
그 모습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신명 정보를 처음으로 알게 된 날인데, 고민도 없이 저렇게 빨리 잠든다고?
고민 자체를 안 하는 부류인 건가?
숲을 나온 이유를 묻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고개를 흔들곤 시선을 돌려 칼과 록터를 바라봤다.
화톳불 주변에 앉아 내 눈치를 보는 두 사람이 보였다.
'덩치는 곰 같은 사내들이....'
표정이 마치 어미 새를 기다리는 아기새 같달까.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한숨을 내쉬며 발걸음을 옮겼다.
일단 저쪽부터인가?
"당분간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내 육체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손가락 끝에 힘이 안 들어간다고 해야 하나.
굶주린 식욕이 채워지면서 전보다 빠른 회복이 진행되고 있지만, 격발로 고갈된 잠력을 회복하는 데는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내 신명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게 좋겠어. 네게 묻고 싶은 게 많거든."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화톳불 한쪽에 자리를 잡자 침묵이 흘렀다.
첫 만남부터 워낙 긴박했던 터라, 전투 이외에는 특별한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셋이 여유를 두고 대화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칼과는 라웁 숲 때부터 인연을 맺은 탓에 가볍게 안부를 주고받았지만, 록터와는 아직 어색했다.
좀 더 알아갈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다.
'아직 헌트로 영입하기 전이니까.'
지나가듯 영입 제안을 해봤지만, 확실한 대답은 듣지 못했다.
다만, 오늘은 대답을 듣기 좋은 날은 아닌 것 같았다. 서로에게 미뤄둔 대화가 너무 많았다. 제안은 충분히 대화를 나누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선 저 두 사람이 내 눈치를 보는 이유부터 해결해야 했다.
"신명 내용이 궁금하십니까?"
"…혹시 내 목록을 알고 있나?"
록터가 먼저 물어왔다.
신명 목록이 무척 궁금한 표정이었다. 내가 릴리와 정보를 손쉽게 건네받은 모습을 봤으니 기대하는 것이겠지.
[록터 펠리스 – 배덕의 기사(무(無))]
[검술의 대가]
[기본기 마스터]
[불굴의 의지]
록터의 신명 목록은 이미 확인했기에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가 궁금한 건 단순히 신명을 아는 것이 아니야. 그 내용을 알려줄 수 있냐는 거지."
"알려줄 수 있습니다."
"뭐? 진짜?"
칼이 두 눈을 반짝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칼 바스타인 – 영웅 조력자(감각)]
[본능적 위기 직감]
[암살자의 상황 판단]
[공명(共鳴) – 대상: 록터 펠리스]
그건 칼의 것도 마찬가지.
난 미소를 짓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알고 싶다. 대가라면 지급하지."
"돈도 없지 않습니까?"
"음...."
록터는 미간을 좁히곤 턱을 매만졌다. 돈을 구할 방법을 궁리하는 표정인데, 저 우직한 기사가 떠올린 방법은 기껏해야 호위나 용병이 전부일 거다.
블랙마켓에서 최소 30만 골드로 시작하는 신명 정보를 얻기엔 평생 일해도 듣지 못할 거다.
"돈은...."
"돈은 됐습니다. 그냥 알려드리죠."
"대가 없이 말인가...?"
"네."
"왜지?"
"이유가 필요합니까? 우린 서로 등을 맞대고 목숨을 건 동료 아닙니까? …아닙니까?"
"그건...."
신명을 알려주는 조건으로 영입을 제안할 수 있지만, 이들에게 조건을 내걸긴 싫었다.
냉혹하고 메마른 세상 속에서 조건 없이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
미래에는 목숨마저 내걸 수 있는 동료.
그 첫 단추에 이득이나 거래 따윈 들어가선 안 된다.
'신뢰부터.'
마음을 얻으려면 먼저 다가가야 한다. 사내끼리 친해지는 방법은 단순했다.
"배고픈데 먹으면서 얘기할까요?"
"그렇게 먹고도?"
"사흘 굶었습니다. 칼."
"징그러운 놈."
말과 달리 칼은 피식 웃고는 숲에서 사냥을 해왔다.
추적술에 능한 암살자.
뛰어난 투척 단검술까지 지녔으니, 그에게 사냥은 가벼운 산책과 같았다.
타닥― 타닥―
불을 크게 피우니, 부드러운 불씨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고요함 속에 코 고는 소리만 고롱고롱 들려왔다.
칼은 고기를 손질하며 릴리를 바라봤다. 사람을 잘 보는 그인데, 유독 릴리에 대해선 가늠이 잘 안됐다.
예측 불가능한 성격.
"사흘을 봤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어. 마녀들은 다 저런 성격인가?"
"다 그렇진 않을 겁니다. 저 여인만 특별할 뿐이죠."
"특별하다라… 뭐, 이 상황에 깨지도 않고 자는 것을 보면 특별하긴 하네. 암살자 앞에서 코를 골고 자다니."
손질하던 도구를 스윽 올리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봤는데, 난 헛웃음을 흘리며 릴리 주변을 바라봤다.
두 귀를 쫑긋거리는 저 작은 강아지 앞에서 뭔 짓을 하려는 건지.
작은 뒤통수를 흔들며 다시 턱을 괴는데 방금 칼이 죽다 살아났다는 것을 아는지 모르겠다.
"그녀를 알고 있는 눈치던데, 어떻게 알게 됐어?"
"오늘 처음 봅니다."
"…뭐?"
"다 익었습니다. 먹죠."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락한 분위기다.
회사 시절엔 주말마다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당연하게 느꼈던 안락함인데, 이 세계에선 이런 여유는 손꼽힐 정도였다.
처음에는 소소한 이야기로 대화를 시작했다.
밤은 길었고, 시간은 충분했다.
화톳불을 앞에 둔 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영웅 조력자]
[배덕의 기사]
그리고 새벽, 두 사람이 자신의 신명 목록을 알게 된 날이기도 했다.
* * *
차가운 바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끄응!"
뒤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탄 냄새가 났는데 시선을 돌리니 화톳불이 꺼져 있었다.
새까만 잿가루와 널브러진 뼛조각이 어젯밤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기지개를 켜곤 팔다리를 움직였다.
"이제 좀 살만하네."
주먹이 힘이 들어갔다.
온몸에 활력이 도는 개운한 감각.
천천히 호흡하며 마나를 살피니, 들숨과 날숨에 따라 부드럽게 기운이 움직였다.
격발(擊發) 사용으로 바닥난 잠력이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았다.
좀비로 오해할 만큼 괴물 같은 회복 능력을 지녔는데도 잠력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지.'
격발에 소모되는 잠력은 인간의 생명력을 이루는 불씨였다.
탄생 순간 지니고 태어나는 선천적인 기운. 그 귀한 불씨를 모조리 소모해서 꺼트렸는데, 사흘 만에 다시 불씨를 피운 것이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미라처럼 말라진 채 죽었을 것이다.
[레토니칼스의 심장]
[염원의 반지(생존)]
다만, 내 경우에는 신명 목록에 있는 이 두 가지 효과가 회복을 가능케 했다.
생존에 특화된 신명 목록.
그리고 흡혈의 고리나, 레토니칼스 전투법을 펼치려면 없어선 안 될 핵심 코어 같은 목록이었다.
팔을 움직이다가 손등을 보곤 멈칫했다.
가볍게 성력을 흘리자 황금빛을 반짝이며 그 존재감을 알렸다.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고대 문양의 이름도 알게 됐다.
문양 효과가 달라져서 예상은 했는데, '세이렌의 비명'이 '세이렌의 찬가'로 바뀌었다.
그 외에 [제3의 정신 방벽]도, [이종족의 길잡이]도 대략적으로 내 지식 범위 안에 있는 것들이었다.
신명 목록을 알게 되니, 내가 가진 힘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건 무척 큰 장점인데,
'이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지.'
[동화율 25%]
레토니칼스의 심장에 붙은 이 옵션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레토에게 물어보면 답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가 생겼다.
'잠들 줄은 몰랐단 말이지.'
나 대신 신명의 저주를 받아내며 자신만만하더니 돌연 졸립단 말을 남기곤 잠들어버렸다.
'불사자라며? 시원하다며?'
꼰대처럼 자존심만 세서 말이지.
나중에 깨어나면 잔소리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동화율은 차차 알아보기로 하고, 주변을 살폈다.
"잠 안 와서 미치겠다고 하더니. 아주 곯아떨어졌네."
코를 고는 릴리 반대편에 더 크게 코를 고는 칼이 있었다.
암살자가 코를 골면 오래 못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정작 자신은 코를 고는지 모르는 듯 보였다.
"못 잤습니까?"
"…음."
칼과 달리 록터는 내가 일어나자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얼굴이 무척 수척해 보였는데, 알게 된 신명 때문에 잠을 못 잔 건지, 저 둘의 코골이 때문에 못 잔 건지 잘 모르겠다.
"너무 시끄러웠다."
역시 코골이였다.
하지만 록터의 시선은 둘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나를 바라보는 거야?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 * *
"아웅!"
릴리가 일어났다.
화톳불 앞에서 잠들었는데, 그녀가 일어난 곳은 저 멀리 숲과 닿아있는 장소였다.
20미터가량 굴러서 일어난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풀어진 머리를 정돈하곤 케로스에게 굿모닝 뽀뽀를 한 뒤 화톳불 앞에 앉았다.
릴리 앞으로 칼이 식사를 건넸다.
고기가 들어간 스튜였다.
"태양이 되바라진 정오야."
"응."
"어제도 그제도 가장 먼저 잔 녀석이 가장 늦게 일어나다니. 마녀들은 잠이 모두 많아?"
"이쁠수록 잠꾸러기라고 했어. 난 잠꾸러기야."
"그딴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할머니. 그런데 할머니는 잠이 없어. 주름이 많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라고."
"그건 나이를 먹어서...."
"어? 이거 맛있네. 뭘 넣은 거야?"
"사슴 대가리."
칼과 잠시 노닥거린 릴리는 입을 오물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땀을 흘리며 검을 휘두르고 있는 록터가 보였다. 지금껏 세 번 눈을 떴는데, 모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럼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해가 질 때까지 저렇게 똑같이 검을 휘두를 것이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행위, 록터의 일과는 그녀에게 너무나도 지루한 것이었다.
그에게 눈을 뗀 릴리가 아서를 찾았다.
"그는 어디 있어?"
"주변을 둘러보러 나갔다."
"돌아오는 거야?"
"당연한 걸 왜 물어?"
"음… 알았어."
식사를 마친 릴리는 케로스와 뒹굴며 놀았다.
오늘은 불을 뿜고 노는 날이었다.
칼은 주변을 정리하고 어제 들었던 내용을 하나하나 정리해 갔다.
그렇게 각자 자신만의 시간을 보내며 아서를 기다리는데, 록터의 검 소리가 뚝 멈췄다.
검을 갈무리한 록터가 땀을 닦고 뒤를 돌아보자, 숲 사이에서 마차가 불쑥 나타났다.
히히히힝―!
말 두 마리가 이끄는 낡은 마차였다.
마부석에서 고삐를 잡아당긴 나는 셋을 둘러보곤 턱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타세요. 슬슬 움직여야 하니까."
149화 피에는 피로
"옷은 어디서 났어?"
칼이 말끔해진 내 모습을 훑어보며 묻자, 난 턱짓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상태가 괜찮은 것들을 주워 왔습니다. 갈아입으세요."
"주워? 상단이라도 턴 거야?"
"제가 한 짓은 아니고,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갔더라고요."
코룬 강 주변을 수색하던 중 냇가에서 주인 없는 마차를 발견했다.
말들이 목을 축이기 위해 움직인 모양인데, 사람은 없고 혈흔만 가득했다.
"시체도 없었어?"
"글쎄요. 기다려도 소식이 없길래. 그냥 가져왔습니다."
사실 주인 없는 마차는 한두 대가 아니었다. 시체도 많았다.
옷가지를 어디서 가져왔는지, 시체들이 누구였는지, 왜 당했는지, 난 이를 굳이 일행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모두 알게 될 일이었으니까.
다닥 다닥 다닥―
마차는 평탄한 길목을 따라 천천히 나아갔다.
칼은 상인 옷으로 갈아입고 마부석 옆에 자리를 잡았다.
록터는 농부의 것으로 보이는 평범한 옷을 걸쳤는데, 문제는 릴리였다.
그녀는 안에서 옷가지들을 살피곤 마차 벽을 두드렸다.
마부석과 연결된 작은 문이 열리자, 릴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옷가지를 내밀었다.
"전부 마음에 안 들어."
"그래도 갈아입어야 합니다."
"왜? 이 복장으로 잘 다녔는데."
"그 복장은 이제 곤란합니다."
릴리가 입고 있는 복장은 주술사들의 둥지 복장이었다. 전에 블라이어 내에서 움직일 때는 거의 치트키 수준으로 쓸 수 있는 권력의 상징이었지만, 카멜이 우리의 위장 상태를 파악한 이상 위치를 알려줄 족쇄만 될 뿐이었다. 주술사 복장을 한 이들부터 찾으라고 지시를 할 게 분명했다.
"그게 뭐? 나랑 상관없잖아."
상관있다고 이 여자야.
역시 이딴 걸 설명한다고 이 여자가 '그렇네.' 하면서 옷을 갈아입을 것 같지 않았다.
릴리를 설득하려면 생각의 전환이 필요했다.
"귀족 영애를 아십니까?"
"당연하지."
"그녀들의 옷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응? 으, 응!"
"도시에 도착하면 그중 가장 이쁜 것으로 사드리겠습니다."
"정말?"
"옷과 어울리는 장신구도 사 드리죠. 그러려면 사이즈를 알아야 하는데...."
릴리가 쥐고 있는 옷들을 내가 바라보자, 릴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딱 맞는 것으로 입을게!"
"입고 있는 사이즈로 딱 맞춰드리겠습니다."
"약속했어!"
릴리는 히히 웃으며 마차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 보던 칼이 날 보며 엄지를 추켜올렸다.
"대단한 녀석."
"뭐가 말입니까?"
"저 여자가 보통 여자냐? 마녀 릴리 베이스잖아. 떼쓰면 우리가 무슨 방법으로 강제해."
"편하게 말도 놓으면서 뭔 소리입니까?"
"아직은 편한 상대가 아니라는 거지. 고작 사흘 됐거든?"
칼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조차 마법사들이 흘린 마녀 릴리에 대한 선입견에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다.
'하긴 작정하고 소문을 흘렸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녀를 모르니 하는 말이다.
그녀에 대해 잘 알면 그녀만큼 다루기 쉬운 인물도 없다.
먹을 거 좋아하고, 예쁜 것 좋아하고, 귀찮은 것 싫어하고.
당장 이것들만 염두에 두면 다루기 쉽다.
내가 마차를 가져온 이유이기도 했다.
'이동 중에 잠들면 곤란하거든.'
잠시 후, 분명 또 코 고는 소리가 들릴 거다.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일단 자고 보는 게 그녀의 '나태' 기질이었으니까.
마차 없이 움직이다가 잠이라도 들면?
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케로스의 감시 때문에 그녀를 건드릴 수가 없거든.
아직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그녀와 동행을 염두에 둔 상태라 미리미리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마차 안쪽에서 소란이 들려왔다.
"…아니! 지금 뭐 하는 거지!?"
"응? 왜? 옷 갈아입잖아."
"그러니까… 으앗!"
록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칼빵 수십 군데를 맞고, 볼트 다발에 등이 꿰뚫려도 신음조차 없던 록터가 비명을 지르다니.
이동 중 록터가 마부석으로 다급히 튀어나왔다. 당혹스러운 표정이 가관이었다. 아니, 과연 저 표정을 또 볼 수 있을까?
역시 릴리는 대단했다.
잠시 후, 걸친 옷을 갈무리한 그녀가 안에서 록터에게 불평을 쏘아댔다.
"벗는데 문을 열면 어떻게? 춥잖아."
"…그대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모르는 건가?"
"배려? 옷 갈아입는 데 무슨 배려가 필요해. 당신이 내 옷 갈아입혀 줄 거야?"
"아니… 그 무슨!"
오르도르 숲에 마녀만 살다 보니 남녀 간에 에티켓을 배웠을 리 없겠지.
남자가 없으니까.
릴리에겐 자연스러운 행동이지만, 꽉 막힌 꼰대력을 가진 록터에겐 충격으로 다가왔던 모양.
"다, 다음부턴 조심해라."
"내가 왜? 문이나 닫아."
"...."
대화도 힘도 안 통하는 상대.
도저히 릴리를 이길 수 없는지, 록터는 안에 들어가는 대신 문을 닫고 마부석에 자리 잡았다.
'아니, 이건 또 뭔 상황이야.'
고삐를 잡은 나를 사이에 두고 칼과 록터가 양옆에 자리 잡았다.
덩치 큰 남자 셋이서 좁아터진 마부석에 껴 있으니 숨 막혀 죽을 것 같았다.
이게 더 눈에 띌 것 같았다.
눈치를 보며 이동한 것도 잠시, 록터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마차를 몰겠다."
"음… 제가 몰겠습니다."
"아니. 고삐를 넘겨. 칼과 신명을 두고 나눌 말이 있다."
"...."
난 록터를 바라보곤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삐를 넘겼다. 되도록 안쪽에 있길 바랐는데, 뭐 어쩔 수 없나?
칼은 길을 안내해야 했기에 자리에 남았다.
다음 목적지가 칼 일행이 머무는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이다.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마차 안에 들어섰다. 릴리와 단둘이 있을 기회니, 이참에 생각해놨던 것들을 물어볼 생각이었다.
물론,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내리쬐는 햇볕이 따스했는지, 릴리는 창가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옆엔 케로스가 배를 드러낸 채 누워 있었는데, 뼈다귀를 물고 놀다가 나와 눈을 마주치곤 멈칫했다. 뼈다귀를 물고 눈치를 보는 모습이 꽤 귀엽다.
"혹시 인간의 말을 알아듣습니까?"
"...."
케로스는 다시 뼈다귀를 물고 놀기 시작했다.
명백한 무시.
몇 차례 대화를 시도했지만, 모두 무시당했다. 정말 못 알아듣는 건지, 척하는 건지 모르겠다.
유독 날 싫어하는 것 같단 말이지.
그나저나,
"이쁘긴 진짜 이쁘네."
평범한 아낙의 옷을 걸쳤는데도 귀티가 났다. 변장이라지만 워낙 눈에 띄어 변장 같지 않았다.
이렇게 편히 얼굴을 살피는 건 처음이었다.
흐트러진 흑발 사이로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도드라졌다.
햇빛에 비친 우윳빛 피부.
투명하고 맑다.
푸른 장미에 머물면서 나름 심미안에 높아진 상태였는데도 압도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엘프와 비교할 수 없는 다른 매력이 있는 여인.
옷이건 뭐건 얼굴을 무조건 가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드르륵―
마차는 천천히 나아갔다.
그 사이, 마부석에서 록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칼과 신명을 두고 할 말이 있다고 하더니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주제는 예상대로 공명(共鳴)에 대한 것이었다.
[공명(共鳴) – 대상: 록터 펠리스]
영웅 조력자인 칼 바스타인의 능력.
나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다만, 소설을 통해 그 능력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악당 조력자.'
칼이 학살자 밑에 있을 시 얻은 신명이 악당 조력자였으니까.
그때도 공명(共鳴)과 비슷한 능력이 있었다.
일명 '신명 버프'.
칼이 지닌 신명 목록의 효과를 조력하는 이와 공유하는 것인데, 처음에는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뒤로 갈수록 사기라는 생각이 드는 능력이었다.
'신명 목록은 계속 늘어나니까.'
학살자가 죽기 전까지 칼을 곁에 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번엔 학살자가 아닌 영웅 록터에게 그 힘이 넘어간 상태.
앞으로 칼의 신명 효과가 록터에게 영향을 준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한 번쯤 상상해본 적 있다.
'주인공인 학살자보다 궁합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았지.'
시너지가 굉장할 것으로 생각했다.
신명은 그 주인의 성질을 따라는 경우가 많다.
록터는 단단하지만 한번 결정하면 변화가 없기에 부러지기 쉽고, 칼은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화하기 때문에 중심이 없다.
서로의 장단점을 채워줄 수 있는 궁합.
이에 대해선 두 사람이 어느 정도 신명에 대해 파악했을 때 자세히 다룰 생각이었다.
지금은 나도 저들도 부여된 신명을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다.
유유자적한 이동은 계속됐다.
릴리는 코를 골고 잤고, 케로스도 잠들었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신명 정보를 공유하며 공백 없이 떠들던 두 사람.
"...."
"...."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들의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침묵 사이로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려온다.
난 감고 있던 두 눈을 살며시 떴다.
"본 것 같네."
난 짧게 혀를 차곤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역시나 마을이다.
그리고 그 마을은 죽음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 * *
백 가구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다.
공터로 보이는 작은 광장.
그 중심에는 시체들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무기를 든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을 사람.
이들은 그저 하루하루 평화롭게 삶을 연명하던 일반 영지민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나같이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내 탓이다."
록터는 시체 더미 앞에 서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마을 바닥은 끌려다닌 혈흔으로 어지러이 이어져 있었다.
상인, 농부, 아녀자, 아이까지 닥치는 데로 끌고 와 강탈하고 죽이고 몹쓸 짓을 한 흔적이 가득했다.
시선을 옮길수록 록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글거리는 눈동자엔 부둥켜안고 죽은 여인과 아이가 담겨 있었다.
록터는 고개를 힘없이 떨궜다.
"…내가 이곳에 오지 않았더라면."
"록터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명분을 제공한 것은 나다."
내가 이래서 마차 안에 태우려고 한 것인데.
엄청난 수의 사냥꾼이 록터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이 주변 모든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
말이 사냥꾼이지 그중에는 노예 사냥꾼도 상당했다. 강도나 살인자의 경계선에 있는 자들.
처음에는 눈치를 봤겠지만, 쌍둥이 형제가 하는 짓을 보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똑같은 부류.
게다가 병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사냥꾼들은 마을을 마음껏 약탈하기 시작했다.
"약탈에 대한 명분은 당신이 아니라 쌍둥이 형제입니다. 그들이 가장 먼저 약탈을 시작했을 테니까요."
추적대의 수장들이 마을을 짓밟고 여인들을 납치하고 다니는데, 밑의 사냥꾼들이 가만히 있을까.
명분에 힘까지 실린 상황이니,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
하지만 이 꼴통 기사가 남 탓을 할 위인이던가.
그저 말없이 선 채 마을을 둘러볼 뿐이었다.
"묻어주고 싶다."
"시간 없습니다."
"내겐 중요한 일이다."
"앞으로 거쳐 갈 마을이 수두룩한데 그때마다 모든 시신을 묻어줄 겁니까?"
"...."
"카멜이 좋아하겠군요. 우리 위치를 찾기 위해 지금쯤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뒷모습 뿐이지만, 아마 록터의 표정은 악귀처럼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노예 사냥꾼들 짓입니다."
"...."
"죽은 이들보다 잡혀간 이가 더 많겠죠. 그리고 이곳에서 노예를 팔 곳은 블라이어 도시밖에 없습니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록터는 천천히 등을 돌려 날 바라봤다.
핏발이 선 눈동자.
기사로서 모든 죗값을 어깨에 짊어지고 가려는 표정이다.
"당연히 구해야죠."
"...."
"블라이어의 영웅이 되십시오."
난 시체 더미에서 낡은 검을 집어 들었다. 마을 사람들을 베어내고 이가 나가 버린 검이다.
피에는 피로.
난 그 검을 록터에게 내밀었다.
"그게 카멜에게 복수하는 길입니다."
150화 도와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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