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도와주겠다
'상황이 많이 변했어.'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난 고민에 빠졌다.
혈맹 이후 넬라와 함께 베네타를 벗어날 때까지만 해도 내 목표는 위기에 빠진 록터 펠리스를 구출한 뒤 빠르게 베네타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카멜이 발톱을 드러내지 않고 웅크리고 있던 시기라, 록터를 내세워 이종족들을 설득한 뒤 학살자와 전쟁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런데,
'카멜이 이번에 발톱을 제대로 드러냈어.'
내가 움직였다는 소식이 카멜에게 변화를 준 것일까.
그는 가진 패를 숨기지 않고, 이번 전투에서 많은 것들을 드러냈다.
잭과 하우엘 외에 아티팩트로 무장된 전력을 드러냈고, 주술 인형들이 전장에 투입됐다. 그리고 죽은 자들의 영토와 금화 인형까지.
'넬라가 이 모든 것을 직접 보고 확인했지.'
록터의 흔적을 쫓기 위해 그녀와 동행한 것도 있지만, 넬라를 통해 학살자의 무서움을 알려주고 싶었다.
넬라도, 전투 도중에 소환된 펜리도.
카멜이 베네타에 얼마나 위협적인 인물인지 피부로 느꼈을 것이다.
굳이 록터가 증명하지 않아도, 그 둘이 이종족들을 설득할 것이다.
문제는 그 설득이 단순한 준비 과정이 아니라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었다.
'전쟁은 이미 시작됐어.'
록터만 구출해서 빠져나갔다면 평화는 당분간 지속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전투로 잭과 하우엘이 죽고, 블라이어의 주력으로 쓰일 사냥개 부대가 전멸했다. 주술사들의 둥지도 큰 피해를 입었다.
학살자가 과연 이를 두고 볼까.
블라이어의 군대까지 베네타 경계에 주둔해 있는 상황이니, 분명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슨 짓을 벌일 것이다.
전면전만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지, 보이지 않은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가만히 있으면 당한다.
먼저 쳐야 했다.
'지금 블라이어를 최대한 흔들어야 해.'
카멜은 주력과 함께 에토르에 머물고 있고, 영토를 지키던 전력은 우리들의 손에 몰살당했다.
군대마저 경계 쪽에 빠진 상황이니, 블라이어 영토는 지금 완벽한 빈집이었다.
문제는 이 사실을 우리만 알고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노예 사냥꾼들.
그들도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 * *
"이랴―!"
록터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실렸다. 몰살당한 마을을 본 뒤로 그의 표정엔 여유가 사라졌다.
우리를 태운 마차는 무너진 마을을 벗어나 사냥꾼들이 남긴 흔적을 쫓았다.
블라이어 남부.
식수가 풍부한 코룬 강 주변에는 작은 마을이 상당수 존재했고, 이동하고 얼마 뒤 두 번째 마을에 도착했다.
뭉게뭉게 피어오른 검은 연기를 본 순간 난 이미 늦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 마을도 이미 사냥꾼들이 헤집고 간 뒤였다.
칼의 주도 아래 우리는 흔적을 쫓아 계속 움직였다.
세 번째, 네 번째.
방문하는 마을이 늘어날수록 록터의 표정은 낮게 가라앉았다.
더는 분노를 표출한 감정이 남아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다섯 번째 마을에선 마차를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기존 마을보다 서너 배는 큰 마을이었는데, 마을 자경단이 존재했는지 저항한 흔적이 보였다.
마을 주변에 노예 사냥꾼들의 시체가 곳곳에 눈에 띄었다.
생존자는 이번에도 없었다.
다만, 눈에 띄는 점은 죽은 영지민의 수가 그전에 방문했던 마을과 비슷하다는 것이었다.
수백 명이 사라졌다.
사냥꾼들의 시체를 살핀 칼은 욕설을 내뱉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는데?"
"무슨 소리입니까?"
"사냥꾼 중에 내가 돌려보낸 놈들도 상당수 있어."
"돌려보내요?"
"한곳으로 뭉치는 걸 견제하려고 소문을 흘려서 분열시켜 놨거든. 그놈들이랑 새로 합류한 놈들이랑 작당해서 이 짓을 벌이고 있어."
칼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중이떠중이가 대부분이야. 제대로 된 놈들은 죽은 자들의 영토에서 전부 뒈졌을 텐데?"
"전부 죽진 않았을 겁니다. 눈치 빠른 놈들은 주술사들을 보자마자 도망쳤을 테니까."
"그래도 무슨 깡으로 이 짓을 벌이는 거지? 블라이어가 두렵지 않나?"
"영지가 텅 비었다는 걸 알고 벌인 짓입니다."
"이놈들이 어떻게 알고?"
"사냥꾼 대부분이 블라이어의 하수인처럼 움직였습니다. 카멜이 보낸 이들 밑에 있었을 테니 정보에 밝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실한 정보도 한데 뭉치면 중요한 단서가 되는 법이다.
게다가 현상금 100만 골드에 눈이 멀어 찾아온 사냥꾼들의 수는 엄청났다.
'머릿수를 믿는 거겠지.'
원래 인간은 뭉치면 없던 용기도 생기는 법이다. 100만 골드를 허탕 쳤으니,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칼은 초토화된 마을을 둘러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사내들은 전부 죽이고 젊은 여인과 아이만 데려갔어. 백 단위를 잡아갈 정도면 수가 그 이상으로 많다는 거야. 문제는 이런 무리가 한 곳이 아니라는 거겠지."
칼은 바닥에 난 흔적 여러 곳을 가리켰다. 바깥과 이어진 큰 흔적만 서너 군데나 됐다.
"여기서 패가 갈렸어. 한데 뭉칠수록 떨어지는 몫이 적어지니 무리를 나눈 것 같아."
"피해가 더 늘겠네요."
"적당히 하다가 물러나지 않을까? 여긴 블라이어와 그리 멀지 않아."
"아뇨. 블라이어로 올라가는 동안 약탈을 계속할 겁니다."
"그게 말이 돼? 블라이어 영지민들을 노예로 잡아다가 블라이어 도시에서 판다는 게. 누가 그들을 산다는 거야?"
"블랙 마켓."
"아…."
칼은 그제야 퍼즐이 맞춰진 듯 허탈하게 웃었다.
"시발, 그러네. 노예 사냥꾼들이 블랙 마켓과 연결이 안 될 리 없지."
블랙 마켓은 노예 수급에 항상 목마른 조직이다.
사냥꾼들이라면 블랙 마켓과 연결된 루트를 알고 있을 테고, 노예를 팔고 주변 영지로 숨어들면 잡을 방법이 없었다.
절대 블라이어는 이 사건을 블랙 마켓에게 묻지 못할 테니까.
"혹시 아는 루트가 있습니까?"
"블랙 마켓?"
"네. 암살자 출신 아닙니까?"
"본진이 있던 에토르라면 모를까. 블라이어 쪽은 아는 바가 없어.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야? 블랙 마켓과 부딪칠 건 아니지?"
"'아직' 부딪칠 생각은 없습니다."
굳이 부딪칠 이유는 없다.
노예로 팔기 전에 잡으면 그만이니까."
"아직이라... 무서운 말을 하네."
칼을 쓰게 웃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예 사냥꾼을 잡아서 물어보는 게 더 빠를 거야."
"흔적부터 쫓죠. 일단 잡아야 뭐든 될 것 같으니까."
난 마차로 이동했고, 칼은 록터를 찾아 움직였다.
칼은 록터를 발견하곤 짧게 혀를 찼다. 죽은 이들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가 보인다.
듬직했던 뒷모습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였다.
록터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많은 경험을 해서일까.
칼은 지금 록터가 느끼는 심정을 알 것 같았다.
'죄책감.'
통곡의 언덕에 올라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들을 봤다. 카멜은 반란의 싹을 자르기 위해 록터와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잡아다 처형했다.
그때 언덕 위에서 시체를 내려다보던 록터의 뒷모습이 딱 저랬다.
'자신 때문에 더는 죽는 이가 나오지 않길 바랐던 것 같은데….'
아서는 그를 영웅이라고 했다.
영웅의 길이 이리 험난한 것일까.
칼은 그 무게를 짐작할 수 없었다.
...살려!
"...!"
록터를 부르기 위해 손을 올린 순간, 어디선가 비명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무척이나 미약했다.
마을이 죽음의 늪처럼 고요하지 않았더라면 듣기 힘든 흐릿하고 간절한 목소리였다.
상당히 먼 거리다.
콰아앙―!!
"큭…!"
칼은 거칠게 튀는 흙더미에 주춤 물러났다. 시선을 돌리니 록터가 사라지고 없었다.
"로, 록터!"
소리가 난 방향으로 빠르게 멀어지는 록터가 보였다.
엄청난 속도였다.
칼이 뒤따랐지만,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록터는 순식간에 마을 뒤편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입니까?"
"목소리가 들렸다."
"목소리?"
칼이 방향을 잡고 달리자, 난 그 뒤를 쫓았다.
무너진 마을 뒤편으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잠시 후, 먼 거리에서 흐릿한 무언가가 잡혔다.
마차다.
한 마차를 중심으로 말을 탄 무리가 그 주변을 뱅뱅 돌고 있었다. 처음에는 마차가 도망치고 그 뒤를 쫓는 무리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제발...!"
"살려줘요! 살려…커억!"
처절한 비명은 도움을 바라는 것이 아닌 말을 탄 이들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을 탄 이들은 낄낄 웃으며 마차 돌며 재미 삼아 화살을 툭툭 날리고 있었다.
마차 바퀴에 묶여 있는 이들이 보인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무력하게 화살을 맞고 천천히 죽어갔다.
사냥꾼들이 영지민을 잡아다 재미 삼아 죽이고 있었다.
"칼."
"…왜?"
내 부름에 칼이 낮게 대답했다.
얼굴을 살피니 입술을 깨문 채 사나운 눈빛으로 한 곳을 노려보고 있었다. 움켜쥔 단검은 당장 눈앞의 사냥꾼들을 절단하려는 듯 보였다.
냉정한 칼답지 못했다.
록터와 신명을 공유하면서 감정적으로 바뀐 건가? 아니면 지금 록터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게 어떻든 저들은 무조건 죽는다.
"크아아아아아아!!!"
울분에 찬 록터의 괴성이 들려왔으니까.
난 한숨을 내쉬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한 놈 쏠게요. 그놈만 살려서 데려오세요."
"시발…."
"블랙 마켓."
"…알았다."
잠시 후,
"저, 저놈 뭐야!?"
"어? 어?! 죽여! 얼른!"
"잠까… 끄아아아아악!"
번뜩이는 오라 소드가 보인다.
잘린 팔다리들이 허공에 떠올랐다.
솟구치는 핏방울 사이로 록터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빛이 번뜩일 때마다 사냥꾼들은 갈가리 찢겨 죽었다.
사냥꾼들은 오라 소드를 보자 기겁하며 말머리를 돌리고 도망쳤지만, 그 뒤로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도망치기엔 너무 늦었다.
베고 베고 또 베었다.
"사, 살려…!"
"닥쳐."
싹싹 비는 두 손을 날려버리고, 비명을 지르자 머리를 쪼갰다.
록터에게 자비 따윈 없었다.
그는 눈에 보이는 사냥꾼들을 족족 죽여갔다.
"끄아아악! 크악!"
그사이 칼이 내가 쏜 사냥꾼 놈을 질질 끌고 왔다.
혈흔이 길게 늘어졌는데, 양 발목 아래 아킬레스건이 날카롭게 잘려있었다.
칼은 놈을 내게 던지곤 잘린 아킬레스건을 지그시 밟았다.
비명을 지르는 놈은 덜덜 떨며 날 올려다봤다.
"네가 대장이냐?"
"그, 그게… 끄아악!"
"살고 싶어? 그럼 묻는 말에 대답해."
"…네, 네! 네! 대장 맞습니다! 제가 대장입니다!"
가장 큰 말을 타고 있길래 목표로 정했는데 제대로 짚었다.
고통에 정신이 나갔는지 묻는 말에 바로바로 답을 했다. 잠깐 머뭇거릴 것 같으면 칼이 단검으로 이곳저곳을 찌르고 밟았는데, 그때마다 비명을 지르며 술술 불었다.
공포에 질린 사냥꾼 앞에 난 시선을 맞췄다.
마지막 질문.
"블랙 마켓에 관한 루트 아는 대로 말해."
질문을 던지고 잠시 후, 칼의 단검이 놈의 뒷덜미를 꿰뚫었다.
* * *
"헉… 헉… 헉…."
주변을 모조리 도륙한 록터는 마차로 터벅터벅 걸었다.
피로 붉게 물든 얼굴, 옷가지, 검까지.
바퀴에 매달린 이들은 벌벌 떨며 두려워했다.
록터가 검을 휘두르자, 바퀴째 잘리며 사람들은 자유를 찾았다.
그들은 일어나지 못하고 머리를 박고 엎드려서 록터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런 이들은 묵묵히 내려다본 록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다."
블라이어 내에 록터를 모르는 이는 없다. 아니, 카멜이 통치를 시작한 뒤로는 그를 그리워하는 영지민도 많았다.
확실히 그의 이름은 파급력이 있었다.
공포에 떨던 이들 중 몇몇이 고개를 살짝 들어 록터와 눈을 마주쳤다.
그들은 록터의 명성만 들어봤을 뿐, 얼굴도 특징도 몰랐다.
피투성이 사내.
허름한 옷가지.
부러진 검까지.
영지민들은 섣불리 뭐라 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도와주겠다."
"...아."
굳건한 눈빛은 믿음직스러웠다.
"…딸이 잡혀갔습니다."
"제 아이를 구해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제발, 제발!"
가족을 잃은 영지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록터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잡혀간 이들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일.
그리고 잔혹하게 죽은 이웃, 가족, 친구에 대한 복수.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다.
문득 떠오르는 한 얼굴.
천천히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을 때,
"꼬리를 잡았습니다. 가시죠."
다가온 사내의 말에 록터는 쓰게 웃었다.
아서 클레이튼.
"개새끼들 잡아서 다 족칠 거야."
칼 바스타인.
그래, 자신에겐 이들이 있었다.
동료.
록터는 그 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과 함께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151화 으악! 시발, 내 눈!
"바로 움직이지."
절절한 호소를 앞에 뒀기 때문일까.
록터는 꼬리를 잡기 위해 바로 움직이려고 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작정 움직인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살려두면 해가 되는 이들이다."
"앞선 장소엔 납치당한 사람이 많습니다. 사냥꾼도 많죠. 인질극을 벌이면 인질까지 베실 수 있겠습니까?"
"…베어야 한다고?"
"우린 고작 셋입니다. 전부 지키는 건 어렵습니다."
여인과 아이가 많다고 들었다.
록터는 절대 못 벤다.
사냥꾼들은 비열함을 하드웨어로 깔고 가는 족속들이라 잠시라도 머뭇거리면 눈치 빠른 사냥꾼들이 인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납치당한 이들을 보호할 이가 필요했다.
"마차를 이곳으로 끌고 오십시오."
"마차?"
"그녀가 탄 마차 말입니다. 분명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았다."
록터는 군말 없이 마을로 움직였다.
난 칼에게 꼬리를 먼저 밟으라고 말했다.
"간을 보라는 거지?"
"네. 놈이 분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이 먼저입니다."
"흔적을 남겨놓을 테니 따라와."
칼까지 떠나자, 이곳에는 나와 살아남은 이들만 남았다.
수는 서른 명 정도.
도와주겠다던 록터가 갑자기 사라지자 갈 길을 잃은 표정들이었다. 난 이를 무시하고 일단 죽은 사냥꾼들의 품을 뒤졌다.
"많이도 해 먹었네."
기를 쓰고 약탈했는지 주머니를 뒤질 때마다 반짝이는 것들이 잡혔다.
부피가 작으면서 값이 나가는 물건들을 빠르게 챙긴 뒤 주인 잃은 말들을 데려왔다.
네 필의 말고삐를 잡고 그들에게 다가서자, 불안함을 느낀 것인지 사람들은 주춤 물러났다.
"돌아갈 곳이 있습니까?"
"...."
"도움을 드릴 테니 말씀해보세요."
고향이 불타고, 소중한 이들을 잃었다. 모든 것이 망가진 상태에서 마을로 돌아가야 할까?
내 물음에 입이 떨어지지 않은 듯 우물쭈물하자, 내가 길을 제시했다.
"블라이어로 가십시오."
"…블라이어?"
"그곳에 자리를 잡고 록터 경에 관한 소문을 내주십시오. 이 자리에서 듣고 보고 느낀 것들을 사실대로 말하면 됩니다."
난 사냥꾼들에게 얻은 말과 전리품을 사람들에게 안겨주었다. 평생 만져보기 힘든 돈일 것이다.
"록터 경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건."
"그 간절한 부탁이 이뤄지길 바라십니까? 그럼 제 얘기대로 하십시오."
"정말… 시키신 대로 하면 복수를 할 수 있습니까?"
"제 딸은...."
"제 가족도 찾을 수 있습니까?"
확신이 깃든 태도로 길을 제시해주고 빼앗은 금품을 아낌없이 베풀자, 이들의 표정에 혹시? 라는 희망이 물들기 시작했다.
"물론입니다. 록터 펠리스를 믿으십시오."
내가 록터를 마을로 먼저 보낸 이유는 릴리를 데려오기 위함도 있지만, 록터의 이름을 빌려 블라이어를 흔들기 위함도 있었다.
꽉 막힌 록터의 성격상 눈앞의 사람들을 이용하는 것에 반감을 드러낼 게 분명했다.
물론, 나도 이용보단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다. 그사이에 생기는 이득은 도움을 준 대가라고 여기며.
"록터 경은 약탈한 이들을 추격해서 섬멸할 겁니다. 복수는 이뤄질 겁니다."
"…아."
그들도 사내의 실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홀로 말을 탄 이들을 순식간에 도륙 냈다.
"구출한 이들은 블라이어로 보내질 겁니다. 록터 경의 소문이 들리는 장소로 보낼 계획입니다. 그럼 딸도 가족도 그 자리에서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하, 하겠습니다! 꼭 하겠습니다!"
소문이 퍼진 장소에 잃어버린 가족들이 찾아온다. 이들은 최선을 다해 소문을 퍼트릴 것이다.
물론, 이들이 낸 소문이 블라이어 모든 이의 귀를 사로잡을 순 없다.
하지만 잡혀간 이들을 구해서 모조리 블라이어로 보낸다면?
입이 많아지고, 그 소문의 진원지가 그 사건의 당사자들이라면 그 파급력은 엄청날 것이다.
영웅 록터.
'한 번에 판을 뒤집을 수 있어.'
현재 록터는 100만 골드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다. 카멜이 만든 범죄자 프레임을 단박에 엎어버리려면 이 기회를 무조건 살려야 했다.
"…근데 저분이 정말 그분이 맞습니까?"
그들이 가리킨 곳에 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마부석에 앉은 우직한 사내.
땀과 피로 얼룩진 볼품없은 모습이지만, 그에게 풍기는 기운은 곧으면서 단단했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의 이름은 록터 펠리스.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입니다."
순간 머리를 스쳐 가는 생각에 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헌트의 행동 대장이기도 하죠."
* * *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록터가 마차를 끌고 도착했을 때, 사람들은 남겨진 말과 마차를 타고 떠나는 중이었다.
"블라이어로 보냈습니다."
"블라이어?"
"갈 곳 없는 이들이라 이곳 전리품을 챙겨서 보냈습니다. 자리 잡기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저들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다."
"저들이 찾고 있는 소중한 인연들도 블라이어로 보낼 겁니다. 그러려면 부지런히 사냥꾼들을 찾아 죽여야겠죠? 대신 복수도 해줄 수 있겠군요."
"...."
록터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막연히 부탁을 들어준다고 그들 앞에서 맹세했는데, 눈앞의 사내는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고맙다."
"고마우면 마차 좀 몰아주십시오.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요."
"볼일?"
"혹시 깼습니까?"
내가 마차 안을 가리키자 록터는 고개를 흔들고는 마부석에 올라탔다.
칼이 남긴 표식을 알려주자, 록터가 마차를 몰고 이동을 시작했다. 그사이 난 마차 안으로 들어와 머리를 긁적였다.
만세 자세로 소파 위에 늘어져 있는 릴리가 보였다. 그 난리가 났는데 깨지도 않고 잘도 잔다.
"설마, 죽은 거 아니지?"
코끝에 손을 대보니 그건 아니었다.
색색거리면서 잠들었는데, 볼을 툭툭 두드려도 무반응이었다.
내가 암살자면 어쩌려고?
밑바닥에선 케로스가 솜뭉치처럼 웅크린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애는 또 왜 이래?"
짧게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때깔 좋은 육포 조각을 꺼냈다. 릴리의 코앞에 육포를 살살 흔들자 잠시 후 긴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간식 먹을 시간입니다."
"…간식."
육포 조각을 내밀자, 릴리는 눈을 비비며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육포를 하나씩 집어 입에 넣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사냥꾼들이 지니고 있던 간식인데 졸린 눈으로 잘도 먹는다. 다만 먹는 모습은 살짝 불편해 보였다.
팔 길이에 비해 소맷자락이 무척이나 컸다.
"맞는 옷이 없었습니까?"
"딱 맞는 건 불편해서 못 입어."
"항상 옷을 크게 입고 다닙니까?"
"아니. 잘 때는 벗고 자는데?"
"...."
"아, 깨끗한 장소에서만이야. 이곳은 더럽잖아."
뭐랄까.
대화를 나눌수록 틀에 갇혀있지 않은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틀이 없다고 해야 하나?
옷을 선물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녀도 좋아했지만, 내가 고른 옷들을 그녀가 입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구두든 드레스든 틀에 맞춰진 아름다움에는 불편함이 공존하는데,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근데, 케로스는 못 일어나는군요."
육포 조각을 케로스의 작은 머리 위에 하나하나 올리고 있는데, 영 반응이 없었다. 이럴 녀석이 아닌데 이상했다.
케로스의 계약자는 릴리 베이스다. 그녀를 보호하는 것이 녀석의 임무일 텐데?
"당분간은 정신없이 잠들 거야. 본신(本身)을 드러내면 피곤해하거든."
"설마 이대로 자면 못 일어납니까?"
"응."
"그럼 당신이 잠들 땐 주변 경계는 어떡합니까?"
"한 적 없는데?"
"...."
진짜 아무 생각이 없구나.
숲을 나오고 사고가 없었던 것이 신기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었다.
그럼 당장은 케로스에게 도움을 바랄 수 없으니, 릴리에게 직접 부탁을 해야 했다.
역시나,
"내가 으왜?"
바깥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육포를 질겅질겅 씹은 채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인간들을 보호해 달라니.
귀찮은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난 그녀에 대해 아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도와줘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도와줘야 하는데?"
"배고프지 않습니까?"
"…배고파. 육포 더 없어?"
아주 많지.
그런데 더는 줄 생각이 없었다.
"저 너머 마을에 기가 막힌 맛집이 존재합니다."
"맛집?"
"음식이 정말 맛있어서 인기가 많은 음식점을 말합니다."
"오! 맛집! 지금 갈 거야?"
"당장 가고 싶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문제?"
"앞선 사냥꾼들이 방문하는 마을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있습니다."
"설마, 그 맛집도...."
"네. 곧 사라질 위기에 처했죠."
"그럼 없어지기 전에 얼른 가서 먹어야겠네."
"자, 잠깐!"
빗자루를 소환해 바로 날아가려는 릴리의 뒷덜미를 겨우 붙잡았다.
아니, 이 여자가.
이걸 이딴 식으로 받아들인다고?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가는 겁니까?"
"아! 어디지?"
"돈은 있습니까?"
"돈? 돈은 케로스 배 속에 있는데...."
릴리는 케로스를 뒤집곤 배를 꾹꾹 눌렀다. 작은 반응조차 없자, 그녀는 울상을 짓고는 날 올려다보며 귀여운 척 두 눈을 깜빡였다.
어림도 없다. 이 여자야.
"큰 마차를 보호할 광역 주술이 필요합니다."
내 단호함에 릴리는 시무룩한 태도로 소파에 걸터앉았다.
"휴, 떠올려 볼게."
"배우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배웠지. 그동안 공부를 안 해서 안 까먹었을 거야. 기다려봐."
공부를 안 해서 안 까먹었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잠시 후, 주먹을 탁―! 친 릴리가 손거울을 꺼내더니 나직이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거울에 붉은빛이 흘러나왔다.
어떤 주술이냐고 묻자, 릴리가 거울을 내게 내밀었다.
거울에서 흘러나온 빛을 본 순간 내 두 눈동자에 메마른 눈빛을 한 녀석이 나타났다.
검은 눈동자, 무표정한 얼굴.
카멜 블라이저.
놈이 코앞에 나타나자,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게 무슨!"
"신기하지? 대상의 약한 부분을 건드려서 환각을 보이게 만드는 주술이야. 어때?"
"약한 부분이라...."
알게 모르게 카멜에 대한 두려움이 깔렸던 모양이었다. 난 쓰게 웃으며 릴리에게 대단하다고 말해줬다.
"주술은 범위를 넓힐수록 위력이 약해져. 버티는 사람도 나올 거야."
"그 정도는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확실히 실력 빵빵한 마녀가 곁에 있으니 전투가 수월했다.
이걸로 필요한 것은 다 갖춘 것 같았다.
워―
"응?"
갑자기 록터가 마차가 멈춰 섰다.
소리를 들어보니 칼의 목소리가 멀찍이서 들려왔다. 앞서 척후 역할을 맡아 주변을 둘러보고 돌아온 모양.
록터에게 인사를 건넨 그가 마차 문을 벌컥 연 순간, 그 눈앞에 거울이 내밀어졌다.
번쩍―
"으악! 시발, 내 눈!"
칼이 두 눈을 가리고 쓰러졌다.
무엇을 본 것인지 웅크린 채 바닥을 데구루루 굴러다녔다.
내가 어이없는 눈빛으로 릴리를 바라보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군이 걸리지 않도록 한 번씩 내성을 준 거야. 두 번은 안 걸리거든."
"그런 건 미리 말씀해주시죠."
"미리 말하면 재미없잖아."
잠시 후 비틀거리던 칼이 힘없이 일어났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바깥에서 뭘 보고 왔는지 바로 물어보지 못했다.
릴리가 거울을 들고 록터에게 살금살금 다가가는 사이, 난 뒤에서 칼을 부축했다.
"괜찮습니까?"
"방금 그건… 뭐지?"
"대체 뭘 본 겁니까?"
"내 얼굴."
"...."
난 조용히 칼의 옷을 털어주곤 릴리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굳이 주술에 관해선 칼에게 말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152화 영웅 록터 펠리스
릴리는 김샌다는 표정으로 내 옆에 붙었다.
"쳇. 재미없어."
"왜요?"
"주술에 걸렸는데 반응이 없잖아."
마부석에 앉은 록터를 가리켰는데, 그는 주술에 걸렸음에도 칼처럼 큰 리액션이 없었다.
[불굴의 의지] 때문인가?
환각이 걸려도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역시 저 아저씨가 재밌어."
"하하하...."
그녀의 표정을 보니 앞으로 칼이 꽤나 시달릴 것 같은데.
각자 다른 시선으로 나와 릴리가 칼을 바라봤고, 우리의 눈빛을 오해한 칼은 드디어 자신의 차례가 됐다는 듯 척후에서 본 것들을 자랑하듯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난 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보는 전부 사실이었어."
"머릿수가 얼마나 되는 것 같습니까?"
"직접 보는 게 더 빠를 거야."
그는 손짓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도착한 장소는 그리 멀지 않았다. 경사가 다소 높은 언덕에 올랐는데, 너머 밑을 슬쩍 내려다보니 거대한 무리가 한 눈에 들어왔다.
코룬 강 주변에 자리한 무리.
2~3백은 되어 보였다. 그중 대부분이 큰 나무를 중심으로 여유롭게 늘어진 채 노닥거리고 있었는데, 식사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사냥꾼 무리였다.
음식을 준비하는 이들은 여인들로, 하나같이 표정이 어둡고 눈치를 보는 것이 강제로 식사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다.
"거대한 마차 세 대에 잡혀 온 이들이 갇혀 있어. 두 대는 여인과 아이들이고 남은 한 대는 대장장이나 세공사 같은 기술자들 같아."
"기술자는 비싸게 팔 수 있으니 살렸나 보네요."
"본보기로 끌려온 마을 사람도 있어."
칼이 한쪽을 가리키자 록터가 미간을 살짝 일그러뜨렸다.
큰 마차들 주변을 둥글게 에워싼 마차 행렬.
그 일부 바퀴에 사람들이 묶인 채 처참한 몰골로 죽어 있었다. 온몸 곳곳에 화살이 박힌 흔적이 가득했다.
제 세상인 듯 살인을 밥 먹듯이 해댄다.
"공포를 심어주기 위해 눈앞에서 처형 장면을 보여준 거야. 보면 도망칠 생각을 못 하거든."
"고삐가 제대로 풀렸네요. 카멜이 영지에만 있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텐데."
"블라이어 성주?"
"녀석도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토템의 미끼로 데려온 사냥꾼들이 영지를 엉망으로 헤집고 다닐 줄 예상이나 했을까?
"토벌대를 보낼 수도 있잖아."
"우리 존재 때문에 어설프게는 못 보낼 겁니다."
통신구에 대고 거칠게 선전 포고를 날렸으니 추격대의 주축 전력이 몰살당했다는 것을 인지했을 것이다.
잭과 하우엘, 사냥개 부대, 주술사들의 둥지, 싹다 죽었다.
내 도발에 학살자는 어떤 포지션을 선택했을까?
공격? 방어?
주춤하거나 방어를 선택했다면 내 의도가 먹힌 것인데, 이미 한 차례 당한 것이 있던 터라 방심은 금물이었다.
'하지만 놈도 예측이 힘든 건 마찬가지야.'
일단 우리에 대한 정보가 없다.
우리 위치를 파악하기 전까진 절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할 거다.
우리를 상대하려면 적어도 리옹이나 렌구아가 주력과 함께 움직여야 할 테니까.
'딱 일주일 정도만 에토르에 처박혀 있어라.'
그 기간만 블라이어를 비워준다면 블라이어를 분열시킬 기반을 만들 수 있다. 록터가 있기에 가능한 일.
그 전에 미쳐 날뛰는 사냥꾼들부터 조속히 마무리 지어야 했다.
어찌 보면 카멜을 도와주는 꼴이지만, 더 큰 것을 얻기 위한 것이니 상관없었다.
"언제 칠 거야?"
"잠시만요."
내 손에는 흡혈의 고리가 쥐어져 있었다. 서서히 붉게 물드는 활대. 시간이 흐르면서 시위에 걸린 화살은 그 크기를 부풀려 나갔다.
그 변화가 신기한지 릴리는 두 눈을 반짝이며 활을 살폈다.
일단 분위기부터.
강가 쪽 여인들은 빵과 수프를 나르며 사냥꾼들 주변을 서성거렸다.
서른 명 정도로 여인들의 수가 상당했다. 옷 상단부가 찢긴 채 두려움에 떨며 돌아다녔는데, 그동안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었다.
배급이 끝났다.
조롱과 희롱을 당하며 잡혀 있는 여인들을 빼곤 남은 여인들은 큰 마차 쪽으로 이동했다. 잡혀 온 이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움직이는 모습.
난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칼은 바깥에 있는 여인들을 챙기세요."
"마차로 옮기면 돼?"
"네. 릴리는 저 큰 마차들이 모인 곳에 주술을 써주시면 됩니다."
"응."
"그리고 록터."
"말해라."
내 부름에 록터는 검을 들어 올렸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목을 한 번 쓰윽 그었다.
"그냥 보이는 족족 다 죽이세요. 숨 쉬는 공기도 아까운 놈들입니다."
"마음에 드는 말이군."
"오라 소드는 최대한 숨기세요. 보고 도망치면 골치 아파지니까."
"알겠다."
신호와 함께 동시에 움직이기로 했다.
난 큰 나무 쪽으로 화살을 겨누었다.
흡혈의 고리 최대 출력.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것이 상도덕이긴 한데, 개새끼만도 못한 놈들은 예외다.
투쾅―!
거대한 화살이 허공을 꿰뚫은 순간, 셋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그 뒤를 따르며 난 시위를 잡아당겼다.
사냥 시작이다.
* * *
콰아아아아아아앙―!
"...!"
거대한 핏빛 화살이 아름드리나무 중앙에 내리꽂혔다.
최대 출력이 실린 마력탄 위력.
엄청난 폭발로 나무 파편이 산산조각 부서지며 그 주변을 매섭게 휩쓸었다. 근처에 누워서 노닥거리던 사냥꾼들은 튀는 파편에 꿰뚫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무… 끄아아악!"
"피, 피해!"
거대한 나무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한쪽으로 천천히 기울어졌다.
쿠쿠쿵―!
묵직한 나무 기둥에 벌레처럼 짓눌린 사냥꾼들은 비명횡사했고, 먼지가 피어오르며 주변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삽시간에 평화는 지옥으로 바뀌었다.
"스, 습격이다!!!"
여인을 희롱하던 사냥꾼이 벌떡 일어나 외친 순간, 그는 목을 부여잡고 픽 쓰러졌다. 목에는 단검에 박혀 있었다.
"그러게. 장소 따지면서 손을 놀려야지."
목에서 단검을 뽑아낸 칼은 기절해 있는 여인을 끙 둘러업었다. 이미 칼의 등에는 또 다른 여인이 업혀 있었다. 순간, 얼굴에 난색이 깃들었다.
"팔 하나로 여러 사람을 옮기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왜 날 시키는...."
불평도 잠시,
"마, 막아! 한 놈이다!"
"죽여! 전부 달려들어!"
"으아아아아아!"
"...."
록터에게 개떼처럼 달려드는 사냥꾼 무리가 뿌연 시야 속으로 휙휙 지나갔다. 엄청난 칼부림, 주변에 피와 살점이 튀며 사나운 전장이 펼쳐졌다.
안 그래도 붉었던 록터의 몰골이 혈인으로 변해갔다.
"고생하네...."
칼은 헛기침하곤 조용히 여인들을 둘러업었다.
"아서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그는 곧 뿌연 연기 너머 커다란 마차로 몸을 날렸다.
* * *
"…컥!"
"누, 누구… 끄악!"
노예들을 감시하던 사냥꾼들은 뿌연 먼지 사이로 픽픽 날아오는 화살에 대응조차 못 하고 죽어 나갔다.
방패로 막아도, 칼로 쳐내도 소용없었다.
관통이 부여된 화살은 사냥꾼들의 장비 따윈 우습게 뚫고 그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주변을 순식간에 정리하고 날렵하게 넓은 마차 지붕 한 곳에 올라서자, 마차 밑에서 쿵. 쿵. 쿵. 소리와 함께 살려달라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마차에 갇힌 여인들 같았다.
록터라면 저 소리에 반응을 보였겠지만, 난 일단 무시했다.
저들을 구출하는 건 상황이 마무리된 후에 이뤄져야 했다.
지금 꺼냈다간 오히려 혼란이 올 수 있다.
릴리가 빗자루를 타고 내 쪽으로 내려오더니 다른 마차 지붕 위에 폴짝 뛰어내렸다.
"여기야?"
"네. 여기요."
"좋아."
잡혀 온 이들이 탄 마차들 중 릴리는 가운데 마차 지붕 위에 서서 주술을 펼쳤다.
작은 거울이 붉은빛을 흘리며 마차들 주변을 은은하게 둘러쌌다.
환각 주술이 펼쳐진 흔적 같았다.
"아아악!"
"으흑!"
그 증거로 배식을 위해 마차 쪽에 붙었던 여인들이 환각에 빠진 듯 허우적거렸다. 그녀들은 칼이 바쁘게 움직이며 챙기고 있었다.
난 시선을 돌려 상황을 파악했다.
사냥꾼들 반수는 록터에게 몰려들었다. 단 한 놈이니 별생각 없이 달려든 모양인데, 곧 그곳이 사지(死地)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머지는?
역시나 우리가 올라탄 마차 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돈줄이니 당연하려나?
"노예들을 꺼내!"
앞뒤 좌우 사방에서 사냥꾼들이 수십 명씩 몰려들었다. 수가 역시나 많다.
잡혀 온 이들을 지키면서 싸우려고 했다면 무척 고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난 활시위를 당기며 사납게 웃었다.
"개미굴에 온 걸 환영한다."
이미 방어선이 구축된 상태다.
릴리의 환각 주술이 사방에 펼쳐진 상태에서 사냥꾼들이 그 범위에 발을 들이자, 대부분이 방향을 잃고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여줬다.
분노, 오열, 두려움 등에 빠져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리는 모습.
무력화된 그들을 향해 나와 칼이 죽음의 손길을 내밀었다.
푹―
퍽―!
화살에 단검에 사냥꾼들은 고통조차 잊고 생을 마감했다.
썩은 짚단처럼 사냥꾼들이 우수수 쓰러지며 환각에 걸려 죽어가는 가운데, 일부가 주술을 뚫고 마차로 접근했다.
주술 범위가 넓다 보니 저항하는 이들이 나타난 모양.
몸놀림을 보니 오라를 쓰는 유저였다.
1성 2성, 열다섯 정도 되려나?
수가 꽤 많았다.
그중엔 3성도 있었다.
"저년을 죽여!"
인상 더러운 녀석이 날카로운 도끼로 릴리를 가리켰다.
주술을 펼친 범인이 릴리라는 것을 파악하곤 돌격대를 꾸려 사납게 돌진해왔다.
"어딜."
투투투퉁―!
나를 중심으로 그물처럼 쏘아지는 화살 세례. 릴리가 탄 마차로 올라타던 이들이 매서운 화살 견제에 굴러떨어지자, 도끼를 든 이가 눈앞의 마차를 도끼로 부수기 시작했다.
3성이 실린 도끼에 마차가 종잇장처럼 부서졌다.
"다 죽여! 전부 죽여버려!"
"까아아악!"
설마 여기서 인질극을?
다급히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달려가는 데 도끼를 미친 듯이 휘두르던 녀석이 뚝 멈추더니 천천히 뒤로 넘어갔다.
잠시 후 마차 뒤로 칼이 단검을 돌리며 나타났다.
"이 못생긴 새끼가 감히 어딜."
칼이 나를 보며 찡끗 눈짓했다.
난 어색하게 웃으며 록터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곳은 릴리와 칼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남은 일은 이제 뒤처리다.
"괴물 새끼...!"
"모, 못 이겨! 못 이긴다고! 다 죽을 거야!"
"으아아악!"
방어구 하나 없이 낡은 검 하나만 휘두르는 사내. 그 허름한 몰골에 사냥꾼들은 비웃으면서 달려들었다.
금세 죽을 것 같던 사내는 질겼다.
피하고 베고 피하고 베고.
부딪칠 때마다 동료 서너 명이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전투가 길어졌을 때 그들은 죽은 동료들이 하나같이 목울대가 잘려 죽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시무시한 정확도.
오십, 백 명이 넘어가자 눈치 빠른 놈들은 밀고 오는 동료들을 밀치며 도망가기 시작했고 두려움은 무리에 전염이 되어 상황을 끝냈다.
도, 도망쳐!!!!!!
비명 같은 외침이 록터 귀에 들려왔을 때,
우우웅―!
더는 숨길 게 없다는 듯, 록터의 검에서 오라 소드가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그 섬뜩한 빛은 더는 목울대를 베지 않았다.
팔다리.
목.
몸통 전체가 분쇄되듯 사냥꾼들은 갈가리 찢겨 사라지기 시작했다.
끄아아악!
살려...!
이곳이 가장 무서운 사지(死地)였음을 그들은 뒤늦게 깨달았다.
살아남은 사냥꾼들은 뿔뿔이 도망치며 흩어졌다.
강을 건너는 이들도, 말을 타고 언덕으로 도망치는 이도 있었다.
머릿수가 많다 보니 록터도 전부 잡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푹―
"끄어억!"
푹. 푹. 푹. 푹.
하지만 난 다르다.
내 주무기는 원거리 화살이거든.
난 도망치는 이들을 집중적으로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강으로 몸을 던진 이들은 머리통이 꿰뚫렸고, 말을 탄 이들은 말에서 고꾸라졌다.
그 뒤를 난 집요히 쫓았다.
단 한 놈도 놓칠 수 없다.
내 목표는 사냥꾼들의 전멸이다.
사냥꾼들의 습성은 무리를 이루는 것이고, 그들은 무리로 합류하기 전 서로 정보를 교환한다.
우리의 정보가 다른 사냥꾼 무리에게 전달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고작 넷.
우리의 머릿수가 적었기 때문에 저들의 후퇴는 늦었고, 그 선택이 저들의 운명을 갈랐다.
"하...."
잠시 후, 칼이 주변을 둘러보곤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았다.
서 있는 이들은 단 세 명뿐.
릴리, 록터. 아서 뿐이다.
사냥꾼들이 전멸했다.
"작업을 시작하죠."
"…언제 왔냐?"
칼은 허리를 두드리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록터를 블라이어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할 때였다.
깊게 고심이 필요한 작업.
"맛집은?"
"...."
물론, 가볍게 고민이 필요한 작업도 있었다.
153화 영웅 록터 펠리스 (2)
"록터, 괜찮습니까?"
"보다시피."
"거의 죽기 직전의 몰골인데요?"
"...."
내 말에 록터는 얼굴을 스윽 문질렀다.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발걸음을 옮기니 옷깃 사이에서도 핏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것이 아니다."
"그게 더 문제죠."
이대로 사람들과 대면한다면?
'영웅이 아니라 살인귀로 불리겠네.'
보이는 족족 죽이라고 했더니, 아주 작정하고 검을 휘두른 것 같다.
난 고개를 흔들곤 록터를 잡았다.
"강가에서 씻고 오세요."
"괜찮다."
"제가 안 괜찮습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음… 알겠다."
"그리고 전리품 수거도 부탁드립니다."
"전리품?"
사냥꾼들의 품을 뒤져서 돈이 될만한 것을 가져오라는 말에 록터는 미간을 좁혔다. 일평생 기사로서 품위를 지켜온 그에겐 어색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꼰대력도 오늘까지다.
"나눠줄 겁니다. 저들에게."
내가 뒤편을 가리키자, 록터는 말없이 내 등 너머를 바라봤다.
거대한 마차가 밀집한 장소.
칼이 마차 주변을 돌며 철장을 부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너저분한 몰골, 어두운 낯빛.
사냥꾼들의 손에 노예로 잡혀 온 이들이었다. 그 수가 무척이나 많다.
"사냥꾼보다 많은 숫자입니다. 모두 마을과 가족을 잃은 자들이죠."
"...."
"돈이 필요할 겁니다."
록터는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큰 수레가 필요하겠어."
그는 등을 돌리곤 강가 쪽으로 걸어갔다. 씻기 위해서가 아니다. 기사인 그는 자신의 검을 버렸다. 검 대신 그는 낡은 수레를 잡았다. 그리곤 수레를 끌며 죽은 사냥꾼들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씻는 것보단 전리품 수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달라지고 있네."
록터를 바라보며 난 그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기사라는 이름 아래 굳건하게 지켜왔던 신념들이 하나둘 부서지고 있다.
꼴통 기사가 영웅으로 변모하는 과정.
과연 그 자신도 지금의 변화를 인지하고 있을까?
아니,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현듯 깨닫게 될 것이다.
달라졌다고.
"이걸로 록터의 시선은 돌려놨고."
죽은 사냥꾼만 수백이니 품만 뒤져도 한참은 걸릴 것이다.
묵묵히 움직이는 록터를 놔두고 난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걸어갔다.
카앙―! 캉―!
"시발, 존나 단단하게 막아놨네."
칼이 욕설을 내뱉으며 마차를 덧댄 철창을 부수고 있었다.
세 대 중 두 대가 그의 손에 부서져 있었는데, 탈출한 이들이 칼 주변에 서성거리며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피비린내가 가득하고 사방 곳곳에 시체들이 널려있다.
불안하겠지.
"이제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
내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성인 남녀 비율 3:7 정도로 여인이 많이 섞인 무리였다. 남자들은 대부분 나이가 지긋한 중년인으로 기술자들로 보였다. 합쳐보니 머릿수가 삼사백 명으로 상당했다.
칼이 작업 중인 마차까지 합친다면 도합 오백여 명 정도 되려나? 나머지는 아이들일 것이다.
나와 칼, 록터가 전부 책임지기엔 부담스러운 숫자다. 사람들의 자발적 도움이 필요했다.
난 그들 앞에 서서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저희는 한 사내의 부탁을 받고 당신들을 구하기 위해 왔습니다. 아, 그 사내가 저기 있군요."
내가 한 곳을 가리키자, 사람들의 시선이 묵묵히 낡은 수레를 끄는 록터에게 향했다.
피땀으로 얼룩진 몰골로 시체를 뒤적거리며 금품을 수레에 싣고 있는 사내.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
"저 사내의 이름입니다."
이전에 서른 명을 블라이어에 보낸 것처럼, 난 록터를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사냥꾼들에게 잡혀 온 이들은 모두 비슷한 처지였다.
가족과 마을을 잃은 자들.
끌려가는 도중 구함을 받은 데다, 록터 펠리스의 이름까지 내걸며 대화를 이어가자, 대부분이 내 말을 믿고 따르기 시작했다.
물론, 그가 진짜 록터인지 의심하는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마, 맞네. 그분이 맞아."
"…정말입니까?"
"확실해. 과거 영주성에 세공품을 진상할 때 멀리서 얼굴을 뵌 적이 있네."
기술자 중 나이가 지긋한 장인이 록터 펠리스의 얼굴을 알아봤다.
록터가 기사단장으로 활동한 시기가 블라이어에서 10년이 넘는다. 성을 들락거린 장인이라면 록터의 얼굴을 볼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신분 확인까지 완벽히 끝나자, 사람들의 표정이 안도로 물들기 시작했다.
의외로 쉽게 설득 과정이 끝났다.
이젠 도움을 요청할 차례.
난 남자들만 따로 추려 사냥꾼 무리가 타고 온 마차들을 한데 모으게 했다. 일부는 사냥꾼들이 죽고 남긴 쓸만한 장비들을 챙기게 했는데 대장장이가 상당수 있다 보니 장비를 챙기는 건 순조롭게 이뤄졌다.
여인들에겐 음식 조달과 아이들을 맡겼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니 상황이 빠르게 정리되는 모습이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보던 나는 릴리가 탄 마차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그녀가 두 손을 모은 채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반겼다.
"가져왔어?"
"여기 있습니다."
"…우와!"
릴리는 내가 건넨 장신구 세트를 살피며 입을 헤― 벌렸다.
근처에 죽은 오라 유저들의 물건만 따로 챙겼는데, 다른 사냥꾼들보다 고가의 물건을 지니고 있었다. 그중 장신구만 따로 추려서 그녀에게 건넸더니 아이 같은 표정으로 장신구 세트에 푹 빠졌다.
'당분간 맛집 얘기는 안 하겠지.'
시선을 돌리니 검은 시바견을 닮은 케로스가 다소곳이 앉아 릴리의 눈치를 보며 혀를 내밀고 있었다.
릴리를 보호해야 할 녀석이 줄곧 잠들어 있었으니 찔렸겠지.
잠시 케로스를 본 나는 릴리에게 물었다.
"이 녀석 좀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왜? 태워 죽일 사람이라도 있어? 말해, 다 태워줄게!"
장신구 세트가 좀 과하게 먹힌 것 같았다.
"…그냥, 녀석에게 가만히 있으라고만 하십시오."
"멈춰?"
"네."
케로스의 몸통을 붙잡고 들어 올리니 혀를 날름거리며 날 노려본다.
기분 나쁜 건 알겠는데, 우리 친해지자고.
"댕댕, 멈춰."
릴리가 툭 쏘며 한마디 하자, 케로스는 고개를 떨구며 내게 항복했다.
짜식, 넌 내 상대가 아니야.
케로스를 옆구리에 낀 채 난 마차 바깥으로 나갔다.
"으아아앙!"
나오니 울음바다다.
숨조차 죽인 채 두려움에 떨던 아이들이 바깥으로 나오자 긴장이 풀린 듯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잡혀 온 아이들은 특징이 있었다.
눈동자나 머리 색이 보기 드물게 희귀했다. 돈이 될법한 아이들만 잡아 온 것 같았다.
우는 아이들 앞에 선 칼이 난색을 보이더니 최대한 밝게 미소를 짓고 얼굴을 들이밀자, 아이들은 '엄마―!'하며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칼, 록터를 도와주세요. 여기 있으면 민폐입니다."
"뭐, 임마?"
투덜거리는 칼을 록터에게 보내고 난 아이들 앞에 케로스를 내려놨다.
차아!
"…응?"
땅에 내려놨는데 다시 폴짝 뛰어 내 품에 안긴다. 다시 던져도 품으로 멍! 날아왔다.
설마 내 의도를 눈치챈 건가?
하지만 이미 늦었다.
어린아이답게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눈앞에 나타나자, 아이들은 울음을 뚝 멈추고 케로스 앞에 몰려들었다.
"강아지다!"
"귀여워!"
"머, 멍!"
왜 내 귀엔 케로스가 '저리 꺼져!'라고 외치는 것 같지?
케로스는 아이들의 손길에 돌처럼 굳었다.
분위기를 풀기 위해 케로스를 제물로 바쳤는데 반응이 괜찮았다.
아이들이 밝아지니 아이들을 챙기던 여인들의 표정도 밝아졌다. 피로 물든 전장의 중심부이지만 아이들로 인해 사람들의 표정엔 여유가 생겼다.
'어른들 사이에 아이가 보물이란 뜻이 이런 거겠지.'
난 나이 지긋한 장인들을 불러 모았다.
대략 열다섯 정도.
수십 년 동안 대장장이 혹은 가죽 공예를 해온 장인들이었다.
살던 마을들을 물어보니 모두 제각각이었다.
"혹시 마을 책임자가 있습니까?"
"저들 손에 책임자가 가장 먼저 죽었습니다. 책임자는 아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 마을에서 중책을 맡던 사람들입니다."
작은 마을의 기술자라면 마을 대소사를 책임지는 만큼 중책 한 자리씩은 맡고 있었을 것이다.
난 그들에게 자초지종을 들었다.
사냥꾼들이 어디서 왔으며, 수는 얼마나 됐는지, 그들이 한 말 중에 특이점이 있었는지.
난 사냥꾼의 시야가 아닌 잡혀 온 이들의 시야로 얘기를 들었다.
잠시 후,
"블라이어로 가십시오. 도시에서 록터 펠리스의 이름을 쫓다 보면 보고 싶은 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난 이들에게 똑같은 제안을 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중 일부는 이번 여정에 우리와 잠시 동행하기로 했다.
내 제안에 그들은 만장일치로 제안을 받아들였다.
"어서 마차를 가져와!"
사냥꾼들이 타고 움직이던 마차는 무척이나 많았다.
그중 가장 깨끗하고 쓸만한 것들을 추려 사람들 앞에 가져왔다.
장인들은 같은 마을 사람들끼리 무리를 이루도록 했다. 스물에서 서른 명으로 이뤄진 작은 무리는 마차에 하나둘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블라이어.
남자들은 사냥꾼들이 쓰던 장비를 받아 무장했고, 여인들은 아이를 돌봤다.
그들은 떠나기 전 멀끔해진 록터의 방문을 받았다.
마차에 탄 록터는 그들에게 보석과 금화를 쥐여주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록터님,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사람들은 록터를 보며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표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록터는 마차에서 내려와 낡은 수레를 다시 끌었다.
수레 안에는 반짝이는 보석과 금화가 쌓여 있었다.
열, 스물, 서른 대의 마차들이 시간을 두고 하나둘 떠나갔다. 그때마다 낡은 수레에 실렸던 금은보화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달그락― 달그락―
이제 마지막 마차.
록터는 그 마차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그곳을 응시했다.
낡은 수레는 텅텅 비어 있었다.
"마음이 어떠십니까?"
"조금 후련해졌다."
"싹싹 다 긁어서 다 주셨네요."
"애초에 저들 것이었으니까."
마차가 사라지자 록터는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등을 돌렸다. 아침부터 시작됐던 긴 추격과 전투 그리고 구원까지 이 모든 것이 마무리됐을 땐 석양이 붉게 지고 있었다.
석양을 등지고 록터와 나란히 걸었다.
붉어진 대지 사이로 길게 늘어진 두 개의 그림자가 보인다.
그림자를 보니 펜리가 떠올랐다.
펜리는 넬라와 함께 무사히 베네타에 도착했을까?
내 생각을 떠올리니, 록터의 얼굴에 비춘 씁쓸한 미소가 무얼 뜻했는지 알 것 같았다.
"떠난 이들이 걱정되십니까?"
"호위 하나 없는 일반인들이니까."
"우리는 고작 셋입니다. 저들 전부를 책임질 수 없죠. 이동 수단도 돈도 무기도 제공했습니다. 블라이어로 가는 건 이제 저들의 몫입니다."
"알고 있다."
"무기는 마음에 드십니까?"
내 물음에 록터는 걸음을 멈추곤 허리춤에 달린 네 자루의 검을 살폈다.
록터의 검이 모조리 부러진 것을 알게 된 대장장이들이 쓸만한 검들을 그 자리에서 수선해서 록터에게 바쳤다.
정성껏 갈무리된 칼날을 가져오자, 여인들은 검집과 검 자루를 깨끗하게 닦아서 새로 가져왔다.
완성된 검에는 아이들이 풀로 만든 장신구를 검 자루에 예쁘게 달았다.
네 자루 모두 좋은 검들이 아니다.
오히려 낡고 허름한 검들이다.
하지만,
"마음에 든다. 그 어떠한 검들보다."
검 자루를 만지작거리는 록터의 입가엔 작은 미소가 깃들었다.
처음 제대로 본 것 같았다.
영웅의 미소를.
154화 영웅 록터 펠리스 (3)
노을이 빠르게 지고 밤이 찾아왔다. 온종일 생존자를 찾아 마을들을 뒤지고 흔적을 쫓아 사냥꾼 무리를 추적했다. 그리고 치열한 전투까지.
하루가 이렇게 고됐던가.
칼도 록터도 피로한 기색이 완연했지만, 우린 쉬지 않고 다시 이동했다.
다사다난(多事多難)했던 코룬강의 경험.
하지만 이 경험으로 칼은 크룩스에게 복수를 이뤘고 4성에 올랐다. 록터 또한 도망자 신세에서 영웅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됐다.
'마녀 릴리와도 인연이 닿았지.'
그녀를 통해 신명을 알게 됐고, 신명 사용에 대한 페널티도 깨닫게 됐다.
고통보다 얻는 것이 훨씬 많았던 장소.
우린 그런 코룬강을 뒤로한 채 블라이어가 위치한 북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두두두두―
어두운 숲길 사이로 두 대의 마차가 거침없이 질주했다.
덜컹덜컹― 선두에서 달리는 거대한 마차는 칼이 마부석을 맡고 있었다. 안에는 동행을 부탁했던 장인들이 타고 있었다.
열 명으로 모두 경륜이 깊고 노회한 이들이었다.
장인들은 못 볼 것을 본 듯, 날 보며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그렇게 불편한가? 눈빛들이 왜 이래?
칼이 고삐를 내리치며 날 바라봤다.
"넌 왜 여기에 탄 거야? 마녀랑 간다며?"
"절 아주 싫어하는 개새끼가 있어서요."
"뭐? 개새끼?"
난 조용히 팔뚝을 들어 올렸다.
"뭐? 어쩌라고? 피부 좋다고 자랑하냐?"
"...."
빠른 회복력이 이럴 땐 참 안 좋았다. 뜯긴 살점이 직전까지 아물고 있었는데, 지금은 뽀얀 피부뿐이었다.
아, 장인들이 보고 기겁한 것이 이것 때문이었나?
팔뚝에는 처참하게 물린 자국이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 자국.
아이들에게 시달려 축 늘어진 케로스를 들어 올렸는데, 놈이 왁―! 내 팔목을 물어뜯었다.
"통뼈라서 버텼지, 일반인이었으면 팔목째 뜯겨 나갔을 겁니다."
"농담도 정도껏 쳐. 고 작은 것이 물어봤자 얼마나 아프다고."
고 작은 것한테 물려보면 생각이 바뀔 텐데.
지옥견 케르베로스에 대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일단은 넘어갔다. 장인들에게 교육할 것이 많아서 말이지.
난 이들을 앞세워 앞으로 구출할 사람들을 설득할 계획이었다. 마을에서 신뢰받던 사람들이 움직인다면 직접 록터 펠리스의 존재를 알리고 설득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파악한 사냥꾼 무리만 셋.'
정보를 취합한 결과 뭉쳐서는 사냥꾼 무리를 반도 잡을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지금은 병력이 텅텅 비었다지만, 이곳은 학살자의 영토였다. 언제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학살자가 판단을 내리기 전에 치고 빠져야 해.'
시간이 많지 않으니 답은 하나였다.
팀을 나눠야 한다.
"일행이 머문다는 마을은 언제 도착합니까?"
"급해?"
"급한 건 아니지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요."
칼은 어둠 너머 한 방향을 가리켰다.
"저 숲만 돌아가면 약속했던 마을이 나올 거야. 거의 다 왔어."
"숲? 어두워서 하나도 안 보이는데, 밤눈이 얼마나 밝은 겁니까?"
"응? 대충 둘러보면 답이 나오지 않아? 쉽잖아?"
쉬워? 전혀 모르겠다.
칼의 고유 속성인 '감각'의 능력을 활용한 것으로 보였다. 보통 사람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엘튼은 무사히 도착했겠죠?"
"엘튼도, 다른 녀석들도 전부 모여 있을 거야. 다들 도망치는 덴 도가 텄다고."
하긴 그 무시무시한 실험체 감옥에서 살아남은 이들인데 고작 사냥꾼 무리 사이에서 도망치지 못했을까.
'팀을 나누려면 그들이 필요해.'
칼 일행은 칼과 엘튼을 포함해 모두 열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원 3성 이상에, 악전고투 절체절명을 겪으며 최종까지 살아남은 암살자들.
어딜 내놔도 최고의 결과를 가져올 정예 중 정예였다.
그들이 합류하면 내가 판을 짜기가 훨씬 쉬워진다.
내가 칼을 앞세워 엘튼 일행이 머무는 마을로 먼저 향하는 이유였다.
"뒤에 마차는 잘 따라오지?"
"그런 것 같네요."
시선을 돌리니 마부석에 앉은 록터가 거리를 두고 잘 따라오고 있었다.
"이제 조용하네?"
"잠든 것 같습니다."
"잠? 잠은 아까도 잤잖아."
"그건 아까 잔 거고요."
"허...."
조금 전까지 우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릴리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렸다.
뭐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록터도 칼도 그리고 나도 배가 무지 고팠다.
온종일 한 끼도 못 먹었다고.
그런데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맞다.
어이없게도 우린 간단한 음식조차 안 챙겼다.
떠나는 이들에게 몽땅 줘버린 것이다.
설마, 하고 마차를 뒤지며 일행을 붙잡고 물었더니,
'전부 다 줬다.'
"팔이 두 개인 네놈이 챙겨야지."
'먹을 거! 먹을꺼어!'
여기저기 퍼주는 녀석.
남한테 미루는 녀녁.
아무 생각도 없는 녀석까지.
그 누구도 우리 것을 챙길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째 사냥꾼 무리와 싸우면 싸울수록 궁핍해지는 느낌인데, 이거 맞는 건가?
앞으로 돈이나 물자 관리는 내 몫이 될 것 같았다.
'난 돈이라도 챙겼으니까.'
곧 도착할 마을에 음식 잘하는 식당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저기다!"
칼의 말대로 숲 외곽을 크게 돌자 저 멀리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을을 밝히는 횃불 같았다.
주변을 밝힌 횃불의 수를 세어보니 작은 마을 같았다.
하지만 멀리서도 불빛이 보일 정도라....
"사냥꾼들의 표적이 되기 쉬운 곳인데, 무사한 것 같네요."
"이유가 있겠지."
의문도 잠시, 입구에 도착하자 우린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늦은 밤 시끄럽게 울리는 마차 소리에 잠시 마을에서 소란이 일더니, 닫힌 입구 앞으로 익숙한 복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개 부대가 입고 다니던 암살자 복장. 그중 선두에 선 이가 단검을 꺼내 들며 말했다.
"사냥꾼 나부랭이들이면 썩 꺼져라. 이곳은 사냥개들의 쉼터이니."
사냥개들의 쉼터.
잭과 하우엘이 부리던 사냥개 부대의 은어였다.
아, 이거였나?
블라이어 성주의 전력이 이 마을에 머물고 있으니 사냥꾼들도 섣불리 약탈을 시도하지 못한 것 같았다.
가로막은 머릿수가 적어 의심을 할 수도 있지만,
화르르륵―
단검에서 피어오른 불꽃을 보면 순순히 물러갔을 확률이 높았다.
불꽃검.
우리에겐 익숙한 능력이었다.
"딱 아홉 명이네요."
"정확하지? 내가 말했잖아. 다 무사할 거라고."
가로막은 이들을 훑어본 칼은 피식 웃고는 마부석에서 뛰어내렸다.
어둠을 지나쳐 칼이 천천히 횃불 아래로 모습을 드러내자, 단검을 겨누던 이들의 입에서 '어?'란 의문사가 튀어나왔다.
잠시 후, 막아서던 이들이 복면을 벗어 던지며 달려 나왔다.
"마스터!"
우리를 가로막은 이들은 엘튼 일행이었다.
* * *
엘튼이 입구 앞에서 손을 흔들자, 두터운 문이 드르륵 열렸다.
엘튼의 안내에 따라 우리는 마차들을 끌고 마을 안으로 입성했다.
"네가 왜 마을을 보호하고 있어? 돈이라도 받은 거야."
"작게나마 도움을 받았습니다."
"도움?"
"상처가 위중해 치료할 약초가 필요했는데, 마을에서 제공해줬습니다. 덕분에 몸을 빠르게 추스를 수 있었죠."
"다친 허벅지는 괜찮아?"
"가끔 욱신거리는 것 빼곤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휘두른 크로우에 깊게 찔린 상처가 있었는데 다행히 회복한 것 같았다.
칼은 다른 이들의 안부를 전부 묻고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다친 이가 하나도 없었다.
덜컹― 덜컹―
난 칼 대신 마차를 몰며 주변을 둘러봤다.
앞선 엘튼이 모습을 보이면 마을 사람들이 나와 인사를 건넸다.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사람들이 그에게 보내는 호감은 무척 커 보였다.
내가 엘튼 옆으로 마차를 바짝 몰아 그 이유를 묻자,
"사냥꾼들이 두 차례나 쳐들어왔다."
"두 차례요?"
"그래. 조금 전 방식대로 상대하니 모두 물러갔다. 무리하게 칠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
"꾀를 잘 냈네요."
"마스터에게 배운 임기응변일 뿐이다."
엘튼 일행 덕에 큰 횡액을 두 번이나 면했으니 호감을 표하는 건 당연한 건가.
마을이 작은 탓에 건물들이 모여 있는 광장에 금세 도착했다.
엘튼이 직접 안내하는 마차에 마을 사람들은 큰 호기심을 보였다. 하지만 마을 책임자들은 도리어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무얼 걱정하는지 난 알 것 같았다.
마차에서 내린 뒤, 모여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일행끼리 정한 것은 아니지만, 코룬강에서 난 암묵적으로 일행의 리더를 맡고 있었다. 내가 앞서자 엘튼 일행이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에 마을 책임자로 보이는 노인이 날 보며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마을 촌장직을 맡고 있습니다."
"이곳 일행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동안 도움을 주셨다고."
"아닙니다. 도움은 오히려 저희가 더 크게 받았습니다."
"그럼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내가 말끝을 흐리자, 촌장은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네 입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난 고개를 주억거리며 진지하게 물었다.
"괜찮은 식당 좀 추천해주십시오."
"…네?"
"일행들이 굶은 상태라 일단 먹고 얘기하시죠."
"…아, 네! 모, 모시겠습니다."
노인은 황급히 표정을 고치곤 곁에 있던 사람들을 시켜 우리를 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작은 마을이라 그런지 큰 식당은 두 개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촌장이 안내해준 식당은 예상보다 음식 맛이 괜찮았다.
"배고파! 배고파! 냠!"
릴리가 배고프다 연신 외치며 음식을 입에 넣고 있었다.
아니, 먹으면서 왜 배고프다고 하는 건데?
도통 저 여자의 생각을 모르겠다.
그녀의 의자 곁에서 케로스가 먹을 것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난 맛없는 뼈다귀 세트를 저 녀석에게 줄 것을 식당 주인에게 돈까지 쥐여주며 요청했다.
당해봐라, 요 녀석아!
그렇게 나와 릴리, 칼 일행과 동행한 장인들까지.
스무 명이 넘은 일행이 식당 하나를 통째로 빌려서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가졌다.
잠시 후, 내 옆에서 눈치를 보며 함께 요기하던 촌장이 내가 식사를 마친 듯 보이자 조심스레 물었다.
"식사 후에 혹시 계획이 있으신지...."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이곳을 떠날 생각입니다. 엘튼 일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역시나 엘튼 일행이 떠날까 봐 불안했던 모양인데, 그 우려를 내가 현실화 시켜주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대로 놔두면 촌장이 내 앞에 넙죽 엎드려서 울고불고할 분위기라 먼저 선수를 쳤다.
"사냥꾼들은 더는 오지 않을 겁니다. 저흰 토벌대니까요."
"…토벌대?"
"저희는 록터 펠리스 경의 부탁을 받고 약탈하는 이들을 토벌하는 중입니다. 저들도 록터 경의 사람들이죠."
"...?"
엘튼이 식사를 하다가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난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미 여러 마을이 록터 경의 검에 구조된 상태입니다. 약탈자들도 곧 일망타진 될 계획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아니라 록터 경에게 감사하십시오. 그분만큼 블라이어를 사랑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꼭 알리겠습니다."
난 의자를 슬쩍 밀며 품에 손을 넣었다.
"식사가 끝난 듯 보이는데, 음식값이...."
"아, 아닙니다! 그냥 드십시오. 약소한 성의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하루 묵었으면 하는데...."
"암요!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돈이...."
"괜찮습니다!"
식사와 잠자리 값이 굳었다.
공짜로 마을에서 제일 큰 여관에 묵게 되었는데, 같은 방을 쓰게 된 칼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떻게 얼굴 하나 안 변하고 그런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거지?"
"제가 뭘요?"
"록터가 그 자리에 있었으면 얼굴이 벌게져서 검을 뽑았을 거다. 기름칠도 정도껏 해야지."
"록터가 자리에 없었으니 한 거 아닙니까?"
마을에서 밤을 보낸다고 하자, 록터는 내게 양해를 구하고 검을 휘두르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
정말 지독한 수련광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우리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거야? 사냥꾼들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쳐야 하잖아."
"지금 시간이면 사냥꾼들도 자리 잡고 쉴 테니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그곳'으로 향하지 않을 겁니다. 그 주변에서 최대한 많은 이를 납치해서 가려고 하겠죠."
"그래서 이젠 어쩔 거야?"
"팀을 셋으로 나눌 겁니다."
"그다음에는?"
"임무를 마치고 '그곳'에서 만나 피날레를 찍어야죠."
"통곡의 언덕 말이지?"
"네."
통곡의 언덕.
블라이어 영지 바깥 거리에 자리한 죽은 자들의 무덤.
록터의 사람들이 묻힌 곳.
영지민들의 통한과 눈물이 물든 곳.
그리고 블랙 마켓의 지부가 자리한 곳이기도 했다.
155화 영웅 록터 펠리스 (4)
똑똑똑―
앞날의 행보에 관해 칼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엘튼이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가 줄곧 기다렸던 인물이기도 했다. 나는 대화를 멈추고 그에게 집중했다.
"지도는 구했습니까?"
"촌장에게 구했다."
"촌장에게 또 신세를 졌네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라더군."
엘튼이 마을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은 것 같았다.
어지러운 식탁을 쭉 밀어버리고 지도를 펼쳐 위에 올려놓았다.
블라이어 영토가 자세히 표시된 지도.
작은 마을이라 지도를 구할 수 있을까 내심 걱정했는데, 시작부터 느낌이 좋았다.
난 기대 어린 시선으로 엘튼을 바라봤다.
식사 자리가 끝난 후 엘튼이 나를 찾아와 알려줄 정보가 있다고 했다.
블라이어와 관련된 주요 정보.
사실 내가 기다린 건 지도보다 엘튼이 가진 정보였다.
"그런데 정보는 어디서 얻었습니까?"
"마을로 접근했던 사냥꾼 무리에 잠입해서 정보를 모았다."
"두 군데 모두 말입니까?"
엘튼이 고개를 끄덕이자, 난 엄지를 추켜올렸다.
스토리에선 악당 조력자로 칼의 휘하 아래 학살자의 그림자로 활동했던 이들이다. 어딜 내놔도 결과를 만들어내는 뛰어난 사람들.
아군이 되니 이렇게 듬직할 수 없었다.
"사냥꾼 무리가 마을에 나타난 시기가 어떻게 됩니까?"
"사흘 전과 하루 전이다. 첫 번째 습격은 내가 마을에 온 첫날에 벌어진 일이었다."
"…사흘 전?"
"그래. 너무 갑작스레 들이닥쳐서 자칫 전투로 이어질 뻔했지."
"사흘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막 사냥꾼들이 흩어질 시기잖아."
칼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흘 전이면 내가 격발 후유증으로 휴식을 취할 때였다.
죽은 자들의 영토가 생기고 전투가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인데, 그 당시 사냥꾼끼리 무리를 이루고 마을을 습격하며 이곳까지 올라오기 시작했다?
블라이어의 정보가 사냥꾼들에 의해 퍼진 시기라고 해도 행동이 너무 빨랐다.
간땡이가 부었다고 해도 불가능한 움직임인데, 뭔가 퍼즐이 어긋난 느낌이었다.
그 퍼즐을 엘튼이 맞춰졌다.
"블랙 마켓이 사냥꾼들에게 정보를 제공하고 움직이게 했다면?"
"블랙 마켓?"
예상하지 못했던 세력이 엘튼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잠입한 두 곳에서 한 사냥꾼의 이름을 듣게 되었다. 블랙 마켓의 사주를 받은 놈 같았어."
"그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드라카."
"…드라카."
"드라카란 자가 엄청난 돈을 벌게 해준다며 사냥꾼들을 선동한 것 같았다. 모두 그 녀석 말대로 움직이는 모양새였어."
"음...."
머리를 굴려보길 잠시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드라카는 처음 듣는 이름이다.
내가 이름을 모르는 인물이라면 소설 내에서 큰 비중이 없는 인물이란 뜻이다.
잭과 하우엘 급도 안되는 엑스트라는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즉, 드라카란 사냥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블랙 마켓의 개입에 날카롭게 반응을 보여야 했다.
'블랙 마켓의 개입은 챕터 Ⅱ부터 시작되는데.'
더욱이 학살자의 영토에서 블랙 마켓이 꿍꿍이를 벌이다니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현재 두 세력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만, 훗날 학살자와 블랙 마켓 사이엔 비밀 협약이 맺어진다.
그것은 그들이 꽤 우호적인 관계란 뜻.
'상황이 갈수록 복잡해지네.'
마녀 릴리도 그렇고, 운명의 아케인도 그렇고, 블랙 마켓까지.
챕터Ⅰ과 챕터 Ⅱ의 스토리가 뒤섞이고 있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소설의 흐름이 빨라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다만, 정보만 놓고 보면 굉장히 좋은 정보였다.
"그래도 나쁜 상황은 아니네요."
"뭐? 블랙 마켓이 개입했다면 빡센 거 아냐? 그놈들이랑은 엮이지 않는 게 좋아."
"엮일 일은 없을 겁니다. 개입하기 전에 끝낼 거니까. 엘튼, 드라카란 인물이 무리 안에 있었습니까?"
"아니. 두 곳 다 없었다."
"그럼 나머지 한곳에 머물고 있겠군요."
잡혀 온 이들과 사냥꾼들을 통해 사냥꾼 무리가 크게 세 무리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중 두 무리를 제외하면 남은 한 무리에 이 일을 주도한 이가 존재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최소 블랙 마켓과 깊게 연결된 인물.
'아니, 블랙 마켓의 일원일지도 모르지.'
놈이 블랙 마켓과 접선하기 전에 일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엘튼은 지도를 통해 두 무리의 이동 경로를 예측했다.
사냥꾼 무리의 최종 목적지가 통곡의 언덕이니, 두 무리의 이동 경로만 파악하면 남은 한 무리의 경로를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드라카가 포함된 무리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했을 때,
"엘튼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어."
칼의 안도 섞인 말에 난 크게 동의했다.
맞다.
엘튼이 가져온 정보가 아니었다면 이리 쉽게 대응책이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정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기도 했다.
난 파악한 이동 경로를 붉은 줄로 쭉쭉 그었다.
모두 세 줄.
"공격 루트가 정해졌네요."
다만 공격 계획을 결정하기 전, 꼭 파악해야 할 정보가 있다.
바로 카멜 블레이저의 움직임.
난 지도에서 베네타의 경계를 가리키며 엘튼에게 물었다.
"혹시 블라이어 군대에 관해 들은 바가 있습니까?"
"군대는 경계에 계속 주둔 중이라 들었다. 특별한 움직임은 없었어."
"블라이어 성주에 관한 소식은요?"
"성주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사냥꾼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지만, 성주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자는 없었어."
"...."
학살자는 지금 에토르 근처에 머물고 있다. 펜리가 목걸이로 추적하지 않았더라면 방향조차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은밀하게 움직였다는 뜻.
학살자는 어떤 의도로 주력을 이끌고 에토르로 간 것일까. 블라이어가 엉망이 되는 데도 놈은 아직도 복귀하지 않고 있었다.
'군대는 움직이지 않았어.'
경계에 주둔 중인 군대가 뒤늦게 에토르 쪽으로 움직였다면 난 에토르의 몰락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장 떠오른 가능성은 두 가지다.
첫 번째는 비밀 협약.
톰자엘 자작과 베네타의 침공을 두고 비밀 군사 동맹을 맺으러 간 경우.
'두 번째가 최악의 경우인데....'
소수로 에토르 영지를 집어삼킬 힘이 생긴 경우.
톰자엘 자작도 토바른 3강에 들어가는 군벌이다. 그런데도 두 번째 가능성이 현실화 된다면 내겐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갈 확률은 얼마나 될까?
'무시하기엔 그자가 카멜 곁에 있어.'
운명의 아케인.
카멜의 파격적인 행보에 힘을 실어준 존재. 그로 인해 카멜의 움직임이 내 예측을 벗어났다.
'두 번째 가능성을 염두에 둔다면....'
난 길게 고민을 시작했다.
한동안 반응이 없자, 엘튼이 손을 뻗어 부르려는 것을 칼이 고개를 흔들며 막았다.
생각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잠시 후, 내가 입을 열었다.
머리가 정리되니 앞으로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감이 왔다.
일단, 사냥꾼 정리부터.
"세 루트로 움직일 팀을 정하겠습니다."
난 지도에 맴버를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각 루트에 적힌 이름을 보며 칼은 미간을 좁혔다.
"나와 록터? 단둘이 움직이라고?"
"충분할 겁니다. 머릿수만 많을 뿐 오합지졸이니까."
"하지만 인질을 잡으면...."
"전부 지킬 순 없습니다. 이건 제가 따로 록터에게 주지시키겠습니다."
"그럼 이곳은 저랑 대원들만 움직입니까?"
엘튼이 두 번째 루트를 바라보며 묻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홉으로 이뤄진 엘튼 일행이라면 루트 하나를 괴멸시키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가장 조심해야 할 루트는 마지막 루트였다.
주범 드라카가 머무는 사냥꾼 무리.
그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일을 꾸밀 정도라면 최소 4성, 최악의 경우 5성도 염두에 둬야 했다.
난 드라카가 포함된 루트를 콕 집으며 둘을 바라봤다.
"이곳은 제가 가겠습니다."
"괜찮겠어?"
"괜찮을 겁니다. 혼자가 아니니까."
"아니. 그래서 더 걱정하는 거야."
"...."
나와 함께 움직일 맴버는 둘이었다.
릴리 베이스와 케로스.
칼의 말에 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공격 루트와 멤버가 정해지니 나머지 것들은 빠르게 정리가 됐다.
난 사냥꾼 무리를 정리한 뒤 처우에 대해서 엘튼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엘튼은 록터의 영웅화 계획에 대해 몰랐기 때문이다.
"잠깐, 그럼 나는?"
"칼이 왜요?"
"난 록터와 함께 움직이잖아. 엘튼이 하려는 작업을 했다간 록터가 날 죽이려고 할걸?"
"칼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됩니다. 구출한 뒤에 남은 이들을 블라이어로 보내십시오."
"뭐?"
"작업은 엘튼과 제 쪽만 신경 써도 충분합니다. 이미 수백 명이 블라이어로 흘러 들어간 상태니까요."
며칠 뒤면 록터에 관한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기 시작할 것이다.
불씨는 집힌 상태고, 불씨를 키울 사람들은 나머지 사람들로 충분했다.
굳이 록터가 구한 이들까지 작업할 필요는 없었다.
작전은 새벽에 시작해 다음 새벽에 끝낼 계획이었다.
계획의 그림이 대략 그려지자, 피곤이 몰려왔다.
한숨 자고 출발하면 딱인데, 여태껏 얼굴을 보지 못한, 한 인물이 떠올랐다.
"록터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숲에 있겠지?"
"지금까지 훈련하고 있다고요?"
소설을 읽었기에 난 록터의 훈련이 얼마나 지독한지 알고 있다.
하지만 글과 실제는 너무나 달랐다.
온종일 돌아다니고 전투까지 한 상태에서 굶기까지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식사도 하지 않고 훈련 중이라고?
밥은 언제 먹는 건데?
레토가 잠들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레토가 록터의 훈련에 감명받고 영감을 얻으면 내가 무척 괴로울 것 같거든.
"신명을 알게 돼서 훈련에 더욱 집착하는 게 아닐까?"
"…신명 말입니까?"
"녀석의 신명은… 조금 '특별'하잖아. 사실 좀 걱정된다."
칼은 조심스레 록터의 상황을 우려했다. 자신과 달리 록터의 신명은 다른 각성자와 달랐기 때문이다.
[록터 펠리스 – 배덕의 기사(무(無))]
[검술의 대가]
[기본기 마스터]
[불굴의 의지]
무특성.
무재능.
록터의 신명 목록에는 그 사실이 잔혹하게 적혀 있었다. 목록 또한 재능은 하나도 없고 그가 수십 년간 피땀 흘려 이룬 목록뿐이었다.
"그건 아닐 겁니다."
"무특성이란 것을 알았잖아."
처음 자신에게 신명을 들었을 때 록터의 표정엔 큰 변화가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덤덤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그는 오히려 안도한 듯 보였습니다."
자신의 길이 틀리지 않았음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런 사내였으니까.
* * *
칼은 엘튼과 함께 대원들이 머무는 방으로 갔다.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동료들과 공유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쪽 작전 설명은 걱정 말고, 넌 록터에게 가봐."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칼이 가볍게 손을 흔들곤 엘튼을 데리고 사라졌다.
홀로 남은 방에서 잠시 고민하던 나는 촌장을 찾아가 주방을 잠시 빌렸다.
잠시 후, 내 손에는 큰 바구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곳 세상에 떨어져 나름 증명된 레시피가 있는데 바로 샌드위치였다.
조미료가 없어서 조금 아쉽긴 한데, 이곳에서 쓰던 것을 섞어서 맛을 내다보니 비슷한 맛을 흉내 낼 수 있었다.
난 록터가 사라졌던 숲으로 들어갔다.
달이 밝게 떠서 그런지, 숲속 전경이 시야에 잘 들어왔다.
후웅― 후웅―
고요한 숲속에 울리는 바람 소리.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가니 작은 공터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록터가 보였다.
온몸에 땀이 가득하다.
그는 얼마 동안 저 자세로 검을 휘둘렀을까.
마치 기계 같았다.
수련을 방해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슬슬 마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를 부르려고 하는데,
"응?"
발밑에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여인의 실루엣이다.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보니 나뭇가지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달을 구경하는 릴리가 있었다.
이곳에 그녀가 웬일로?
뭐가 어떻든 나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거든.
"어이."
내 부름에 달을 구경하던 릴리가 날 내려다봤다.
난 피식 웃으며 그녀에게 바구니를 보였다.
"맛집에서 가져온 음식 좀 먹을래요?"
이건 자신 있었다.
156화 헌트(Hunt)의 수장
"맛집?"
역시나 이 단어에 릴리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파다다 발장구치던 두 발이 뚝 멈췄고, 그녀가 내 앞으로 폴짝 뛰어내렸다.
흑발이 코끝을 간질이며 좋은 향기가 스쳤다. 향수를 쓰는 것도 아닐 텐데, 그녀에겐 늘 상큼하고 기분 좋은, 그런 향기가 흘러나왔다.
"거짓말 아니지? 맛집은 없던데?"
"그걸 어찌 아십니까?"
"다 먹어봤거든."
"...네? 전부요?"
"응."
숙소에서 자고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사이 주변 음식점들을 다 돌아본 모양이었다.
마을이 작아서 그런 건가?
아니면 잠보다 먹는 걸 더 좋아해서?
"나 잘 먹어. 할머니는 살찐다고 늘 타박하지만, 날 막을 순 없지. 헹!"
콧대 높은 척을 왜 하는 건데.
먹부심을 부리곤 바구니를 요리조리 살피며 덮개를 잡고 낑낑대기 시작하는데, 그 모습에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곳 음식 다 먹어봤다면서요."
"그게 왜?"
"배부르지 않습니까?"
"댕댕이랑 지칠 때까지 놀아주고 왔거든. 배고파."
지옥견이 지치려면 도대체 어떻게 놀아줘야 하는 거야?
살이 안 찌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개새… 아니 케로스는 어디 있습니까?"
"잠자."
답을 하며 흐르는 머리카락을 올리는데, 아담한 귀밑으로 시선을 사로잡은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준 장신구 세트를 하고 있었다.
반지, 목걸이도 마찬가지.
옷도 큰 것을 좋아하더니, 액세서리도 하나 같이 크고 화려한 것들이었다.
"아씨! 안 열려!"
"미는 겁니다. 당기는 게 아니라."
내가 고개를 흔들며 덮개를 스윽 밀자, 샌드위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이건 못 보던 음식이네."
샌드위치를 집어 든 그녀는 냄새를 맡고는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하길 잠시, 그녀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그 반응에 난 '그럼 그렇지!'를 속으로 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의 미간.
기가 막힌 음식을 먹을 때 나타나는 그녀 특유의 표정.
그녀의 두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 이럴 수가!"
릴리는 아구아구 신들린 듯 샌드위치를 베어 물기 시작했다. 입가 주변이 소스 범벅으로 되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모습.
난 바구니를 스윽 뒤로 잡아 뺐다.
"더 줘!"
"제 질문에 답해주시면 하나 더 드리죠."
"질문 하나에 한 개."
"먹기 싫습니까?"
"해! 어서 질문하라고!"
많은 질문을 던지고 싶지만, 지금은 록터에게 더 중요한 볼일이 있어서 말이지.
난 그녀에게 당장 확인이 필요한 질문부터 던졌다.
"천년 나무는 무사합니까?"
"응? 천년 나무를 알아?"
"이거 제가 먹어도 됩니까?"
"아, 안 돼!"
고민도 없이 답을 하는 그녀.
질문과 답은 순식간에 끝났다.
오르도르 숲에 관해 몇 가지를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에게 샌드위치를 건넸다.
"아침에 절 찾아오면 더 드리겠습니다. 특제로 준비해드릴게요."
"음음!"
샌드위치를 한가득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놔둔 채 난 록터가 있는 공터로 등을 들렸다.
먼저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천년 나무는 무사하네.'
꿈으로 경험했던 숲의 참극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혹여 큰 변화가 생겼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려했던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천년 나무가 무사하고, 숲에도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릴리를 따라 나온 오르타가 없다는 것이 의외였지만, 당분간 학살자에 집중하면 될 것 같았다.
"타앗!"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붕붕 울렸다.
록터는 여전히 훈련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육체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이십 년 가까이 행해졌던 베기 동작.
평범한 이는 지루해 미칠 정도로 반복적인 훈련이 이뤄졌을 것이다.
5성에 오른 그에게 지금 훈련이 과연 큰 의미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난 주변에 뒹구는 돌멩이들을 한 움큼 움켜쥐었다. 그리곤 록터를 향해 매섭게 집어 던졌다.
사사삭―
허공이 번뜩이더니 돌멩이들이 하나 같이 반으로 쪼개졌다.
어떤 자세, 어떤 상황에서도 펼쳐지는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베기.
확실히 대단했다.
"무슨 일이지?"
"새벽에 마을을 떠날 겁니다."
"새벽? 상황을 보고 움직인다고 하지 않았나?"
"엘튼이 중요한 정보를 가져왔거든요. 계획이 잡혔습니다. 이리 앉으세요. 얘기가 제법 깁니다."
바구니를 놓고 내가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자, 록터는 고개를 끄덕이곤 검을 갈무리했다.
그가 날 마주 보며 앉자, 그에게 음식을 권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식사를 이어 나갔다.
인기척과 함께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도시락 옆에 쭈그린 채 날 빤히 바라보는 릴리가 있었다.
"뭡니까?"
"더 줘."
"아침에 찾아오라는 말 못 들었습니까?"
"응."
"…드세요."
무슨 설득이 필요할까.
그냥 내 몫을 주는 게 마음이 편했다. 조용해진 릴리를 놔둔 채 난 록터에게 이번 계획을 천천히 털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계획보다 더 중요하게 전달하고픈 것이 있었다.
이미 소중한 이들을 잃었기에 더는 누군가를 잃고 싶지 않은 그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
"모든 이를 지키며 싸울 순 없습니다. 현실을 인지하세요. 당신은 신이 아닙니다."
"...."
역시나, 내 단호한 말에 그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모든 계획을 전달하자 묵묵히 듣고 있던 록터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게 자네가 생각하는 최선인가?"
"당장은 그렇습니다."
"그럼 그 최선을 위해 난, 나로 인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봐야겠군."
"강해진다면 달라지겠죠."
"난 일평생 강해지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당신은 강하지 않습니다."
"...."
내 말에 록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무 팩트 폭행했나?
하지만 사실이다. 록터가 정말 강자였다면 무고한 이들이 희생당하기 전에 상황은 끝났을 것이다.
"정확히 우리가 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작전이 필요하고, 그 안에서 포기해야 할 것들이 생기는 거겠죠."
"난 강해지고 싶다."
"강해진다는 의미가 뭔지 아십니까?"
"…강해진다는 의미?"
록터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복수를 이룰 힘이다."
누가 배덕의 기사 아니랄까 봐.
하지만 난 록터의 답에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복수는 약자가 부여하는 단어입니다. 약했기에 당했고, 당했기에 복수를 하는 것이죠. 다시 묻겠습니다. 복수를 이룰 힘이 강한 겁니까?"
"...."
"진짜 강자에겐 적이 없습니다. 강해진다는 것은 처음부터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겁니다."
무적(無敵).
겨룰만한 적이 없음.
"당신이 진짜 강자였다면 사냥꾼들은 당신을 본 순간 인질을 잡을 게 아니라 도망쳤을 겁니다. 그게 진짜 강함입니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내가 정의하는 진짜 강함이었다.
록터에게 이 정의를 알려준 이유는 복수 이후를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였다.
'배덕의 기사'란 신명을 얻을 정도로 그는 한 번 목표를 정하면 집요히 달려든다.
복수 이후엔?
분명 스스로 한계를 느끼며 크게 헤맬 것이 분명했다.
내 말에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다.
잠시 후, 입을 앙다문 그가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진짜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헌트(Hunt)에 들어오십시오. 길을 제시해 주죠. 언제나처럼."
록터가 무적(無敵)의 기사로 불릴 날이 올까.
굉장히 힘들 것이라 본다.
앞으로 우리가 직면할 악당 중에 우리보다 약한 자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 마지막 전장에 끝까지 살아남아 서 있는 자가 록터라면?
그는 진짜 강자로 불릴 것이다.
실력이나 명성 모든 면에서.
내가 내민 손을 록터는 말없이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그가 내 이름을 조용히 불렀다.
처음이다. 그가 나를 바라보며 내 진짜 이름을 언급하는 것은.
"헌트의 최종 목표가 뭐지?"
"살아남는 것."
"살아… 남은 것?"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우리는 악당들을 끝없이 사냥해야 했다.
그 첫 번째 대상이 바로 챕터I의 주인공,
"카멜 블레이저. 우리가 살아남고자 꼭 죽여야 하는 첫 번째 대상입니다."
록터에게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길의 첫 번째엔 그의 복수 대상인 카멜이 있었다.
록터의 고민은 짧았다.
아니, 코룬 강의 전투를 아서와 함께 경험하며 이미 결정을 마음속으로 굳혔는지도 몰랐다.
자신은 불가능한, 하지만 저 녀석은 가능할 것 같은 목표.
카멜 사냥.
록터는 내가 내민 손을 꽉 움켜잡았다.
"네 뒤를 묵묵히 쫓다 보며 진짜 강함이 뭔지 알 수 있겠지."
"알려드리죠."
"잘 부탁한다. 대장."
대장.
썩 나쁘지 않은 단어다.
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 펠리스, 헌트의 멤버가 되신 걸 환영합니다."
영웅 록터를 정식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록터란 사내는 한 번 정하면 번복이 없다.
가장 든든한 아군을 얻는 것이다.
이것으로 블라이어를 분열시키기 위한 기반이 완성됐다.
록터가 헌트의 정식 멤버가 됐으니, 이젠 모든 이의 앞에서 헌트의 존재 아래 록터의 이름을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헌트의 행동 대장, 록터 펠리스.
소문은 곧 현실이 되어,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 될 것이다.
"...."
기분 좋게 록터와 시선을 뜨겁게 교환하며 악수를 하고 있는데, 밑에서 재차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난 한숨을 내쉬며 릴리를 바라봤다.
"이제 샌드위치 다 떨어...."
"나도 들어갈래!"
"…?"
"헌트!"
쪼그려 앉은 채 올라보는 릴리의 눈빛이 무척 부담스럽다.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헌트 가입을 희망했다. 이 여자는 헌트가 어떤 조직인지 알고 이런 말을 하는 건가?
"헌트를 아십니까?"
"당연히 모르지."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왜…."
"재밌을 것 같아서."
잠시 상상의 나래를 펼쳐봤다.
대(大)마녀 릴리 베이스가 헌트에 들어온다면?
일단 장로 메데이아의 방문 협박을 받게 될 것이고, 그 뒤로 오르타들이 굴비처럼 줄줄이 엮어서 날 찾아올 것이다.
얼굴만 보고 갈까?
아니, 각종 협박과 으름장을 놓으며 주술과 저주를 퍼부을 게 분명했다.
헌트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결론에 온몸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절대 안 됩니다."
"왜?"
"록터 경처럼 듬직하고 남자다운 면이 있어야 합니다."
"아름답고 여리여리하면 안 돼?"
대체 누가 여리여리하다는 건지.
"...그냥 할머니 허락이나 받아오세요. 저 오래 살고 싶습니다."
"칫."
릴리는 입술을 삐쭉이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할머니 허락은 좀 부담스럽기 때문이다.
릴리의 칭얼거림을 뒤로한 채 우리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숙소 입구에서 예상치 못했던 이들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입구에서 서성거리는 칼 일행.
그들은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미소를 띤 채 우리에게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
"록터와 할 말이 있어서 좀 늦었습니다. 바깥에는 왜 나와 있습니까? 대원들과 해후를 나눈다며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해후를 나누고 있었지. 그러다 대화를 나누면서 한 가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됐다. 그 전에...."
칼은 입술에 혀를 축이곤 록터를 바라봤다.
"어때? 수락했어?"
칼의 물음에 록터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칼은 '역시!'라 외치더니 들뜬 표정으로 내 앞에 엘튼과 대원들을 일렬로 쭉 세웠다.
뭐야 이 분위기는?
"나를 포함 일행 전원이 헌트에 가입하고 싶다."
"…네? 갑자기요?"
"모두와 의견을 주고받고 숙고해서 결정한 거야. 나름 깊이 생각해서 결정한 거니까. 받아줘."
악당 조력자, 칼 바스타인.
학살자의 그림자들.
당연히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
고민도 없이 웃는 얼굴로 그들의 부탁을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이를 지켜보던 릴리가 손을 들더니 반론을 제기했다.
"잠깐! 자격이 안 되잖아?"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칼이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릴리를 내려다보자, 릴리는 칼을 가리키며 나를 돌아봤다.
"듬직하고 남자다워야 한다며? 딱 봐도 부실하고 못생겼잖아."
"뭐 임마? 한 번 봐줄 테니 당장 사과해라. 여자라고 안 봐준다."
"너도 할머니 허락 맡고 와."
"태어날 때부터 할머니 얼굴도 모르고 자랐는데, 무슨 할머니?"
"아… 미안."
"그런 불쌍한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난 이마를 붙잡고는 릴리를 건물 구석으로 데려갔다. 일단 이 여자부터 치우고 대화를 해야 할 것 같았다.
"우리 아침에 소풍이나 갈까요?"
"소풍?"
"네. 이 안에다가 맛난 음식 잔뜩 넣어서요."
내가 바구니를 들어 올리자, 릴리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아까 먹은 그거!"
"많이 준비하겠습니다."
"좋아!"
조금 전 상황은 잊어버린 듯 릴리는 '잘자!'라는 말을 남기곤 싱글벙글 자신의 방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그녀를 보내고 등을 돌리자, 칼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뒤쪽에 엘튼과 대원들의 반응이 안절부절못한 모습이다.
뭐가 그렇게 심각한 건데?
"정말 난 안되는 거냐? 그래도 저들보단 잘생겼…."
"그럴 리가요. 오히려 감사하죠."
난 단칼에 칼의 말을 자르며 악수를 청했다.
가까스로 또 다른 불화(?)를 막았다. 난 칼에 이어 엘튼 그리고 대원 한 명 한 명과 이름을 주고받으며 영입을 확정시켰다.
배덕의 가사 록터 펠리스.
영웅 조력자 칼 바스카인.
그리고 엘튼 일행.
도합 11명.
이종 혈맹의 최소한의 자격 조건을 맞추기 위해 신설한 길드 헌트(Hunt).
이름 모를 작은 마을에서 신명의 주인 두 명과 더불어 강력한 그림자들을 정식으로 영입했다.
[아서 클레이튼―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25%)]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그리고,
[헌트(hunt)의 수장[3]]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157화 해방
가입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조촐한 술 파티라도 열까 고민했지만, 계획이 시작되는 탓에 술 파티는 이번 일이 마무리된 후로 미루게 됐다.
새벽이 되자 우리는 건물 앞에 다시 모였다.
아니, 전부는 아니다
릴리와 케로스가 못 나왔다.
아마 꿈나라 중이겠지.
너무 당연하게 생각해서 놀랍지도 않았다.
그런 날 보며 칼이 짧게 혀를 찼다.
"고생길이 훤해 보인다. 수고해라."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계획대로 해주세요."
"우리를 못 믿어? 통곡의 언덕에서 보자고."
칼이 록터의 옆구리를 치며 신호를 보내자, 두 사람은 지도 위에 첫 번째 루트가 그려진 11시 방향으로 마차를 몰고 사라졌다.
일행 모두 각 루트마다 마차를 운행했는데, 마차 안에는 일행 이외에 서너 명의 장인들도 함께 동행했다.
장인들은 구출한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서 블라이어로 보내는 역할을 맡게 될 것이다.
"엘튼."
"이쪽도 준비 끝났다."
엘튼이 손짓하자 대원들이 커다란 마차를 끌고 나타났다.
대원들은 떠나기 전에 나를 보며 고개를 숙였는데 나름 수장에 대한 예를 표한 것이었다.
'이건 부담스럽네.'
칼 일행은 조직 생활에 익숙한 탓인지, 영입된 지 하루도 채 안 돼서 질서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물론, 표면적으로 내 위에는 '그'가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더미(Dummy) 말이다.
어색하게 손을 흔들며 엘튼 일행을 배웅했다. 그들의 마차가 두 번째 루트로 이어진 마을 뒤편으로 사라졌을 때, 난 숙소 앞에 세워진 마차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남은 장인 셋이 마차에 탑승한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잠꾸러기들이 있어서."
장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곤 숙소 2층으로 올라왔다.
방문 앞에 선 나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문을 벌컥― 열었다.
코오오오오―
역시나 만세 자세로 코를 신나게 고는 그녀가 보였다. 케로스는 그녀의 왼쪽 발목에 머리를 대고 대(大)자로 자고 있었다.
개야, 사람이야?
문에 서서 벽을 탕탕 두드렸는데, 일어날 생각을 안 한다.
'영입은 절대 사절이다.'
영입한 순간 믿고 등을 맡기는 동료가 아니라 등에 업고 다닐 애 하나를 키우는 느낌일 것 같다.
재차 결심을 단단히 굳히며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들고 있던 바구니 덮개를 열자,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겼다.
그 냄새에 릴리와 케로스가 킁킁거리더니 바구니 쪽으로 데구르르 몸을 굴렀다.
덮개를 탁― 닫자, 마녀와 강아지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날 올려다봤다.
난 둘을 내려다보며 미소로 답했다.
"소풍 갈 시간입니다."
잠시 후, 마차가 마지막 루트를 향해 출발했다.
사냥꾼 사냥이 시작됐다.
* * *
인간 사냥꾼 드라카는 말을 탄 채 주변을 둘러봤다.
조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마을이 거센 불길로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도망치는 사람들, 그 뒤를 낄낄거리며 쫓는 사냥꾼들.
검은 연기 사이로 처절한 비명과 비웃음이, 간절한 호소와 조롱의 감정이 교차했고, 핏물로 물든 지옥도가 펼쳐졌다.
무차별적 약탈.
사냥꾼들의 약탈 행위가 드라카의 지휘 아래 한창 진행 중이었다.
잠시 후, 잿더미로 변한 마을에서 사냥꾼들이 노예로 팔기 위해 사람들을 마차로 끌고 왔다. 그 수를 확인한 드라카는 미간을 좁혔다.
"왜 저것밖에 안 돼?"
대략 서른 명.
마을 크기를 봤을 때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그게, 소문을 듣고 대부분 도망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돈이 될만한 것들은 죽이지 말라고 했잖아."
"대부분 나이가 찬 것들이라."
"빌어먹을."
드라카는 침을 뱉으며 말머리를 거칠게 돌렸다.
사흘 전까진 가는 마을마다 사람들이 넘쳐나 납치하는 맛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약탈 소문이 퍼졌는지 사람들이 블라이어로 피신하면서 큰 재미를 못 보고 있었다.
온종일 주변 마을을 약탈하고 뒤졌는데도 이젠 오십을 채우기 힘들었다.
'슬슬 거래 장소로 가야겠어.'
솔직히 욕심을 더 부리고 싶었다.
오늘 노예로 잡은 여인과 아이들만 해도 금화로 환산하면 무척 큰돈이었다.
하지만 블랙마켓에서 어젯밤 사람을 보내, 사흘 안에 거래 장소로 물건들을 보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블라이어가 곧 움직일 것이란 소식이었는데, 토벌대라도 동원되면 지금까지 한 짓이 모두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치고 빠질 때였다.
"이동한다!"
드라카의 외침에 그 앞으로 수십 대의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는 노예를 가둔 마차 무리를 둘러보며 히죽 웃었다.
커다란 마차로 열다섯 대 분량이나 됐다.
이곳 말고 추가로 두 무리가 가진 마차들까지 합하면 마흔 대 이상은 될 것이다.
한 대당 노예 오십 명씩 잡으면 2천 명 이상이 넘은 숫자였다.
'밑에 놈들에게 수백 골드씩 돌려도 내 몫으로 최소 5만 골드 이상 떨어질 거야. 흐흐흐.'
평생 벌어도 만지기 힘든 금액이었다. 함께 온 녀석 중에 그런 푼 돈 말고 현상금 100만 골드를 노려야 한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놈들도 있었다.
'병신들, 이미 다 뒈졌겠지.'
드라카는 경험 많은 4성이기에 5성의 무서움을 그 누구보다 잘 안다.
마나 유저가 떼거리로 덤벼도 잡기 어려운 존재가 5성이다. 사냥꾼 따위로 사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드라카는 코룬 강으로 찾아온 블랙마켓의 손님을 상대했을 때, 그가 건넨 제안을 고민 없이 수락했다.
통곡의 언덕으로 최대한 많은 여인과 아이들을 확보해서 끌고 오는 것.
록터 펠리스를 사냥하고 100만 골드를 나눠 먹는 것보단 블랙마켓이 준 정보로 빈집을 털고 노예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현실적이고 실패 확률이 없었다.
"하루 뒤에 우리 모두 엉덩이에 금화를 한가득 깔게 될 것이다!"
"으아아아!"
"서둘러라! 황금산이 코앞이다!"
드라카의 외침에 사냥꾼들은 환호와 함께 드라카의 이름을 목놓아 외쳤다.
4성 무특성이지만, 그의 특기는 실력이 아닌 사람들을 선동하는 특유의 입담에 있었다.
"두 곳에도 사람을 보내."
"뭐라고 전할까요?"
"이틀 안으로 약속 장소에 도착해야 한다고 전해. 늦으면 한 푼도 못 받을 거라고 강조하고."
"알겠습니다."
두 필의 말이 각기 다른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이곳과 반나절 거리에서 약탈 중인 또 다른 무리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그가 할 일은 끝났다.
드라카는 서서히 저무는 태양을 응시하며 기분 좋게 웃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붉은 하늘을 보니, 내일도 날씨가 좋을 것 같았다.
거래하기 좋은 날씨다.
"하늘도 내 성공을 축하해주는 모양이야."
그렇게 장밋빛 미래를 상상하며 통곡의 언덕을 하루 앞에 둔 숲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새벽,
"드, 드라카님!"
"...."
"드라카님!"
"아씨, 짜증나게."
막사로 불청객이 찾아왔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단잠을 자던 드라카는 신경질을 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양옆에는 납치해온 반반한 여인들이 지친 얼굴로 쓰러져 있었는데, 차가운 검집으로 툭툭 때리며 꺼지라 외치자, 겁에 질린 채 옷가지를 들고 막사 바깥으로 쫓겨나갔다.
"무슨 일이냐!?"
"당장 나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옷을 걸치고 바깥으로 나가자, 피투성이가 된 사내들이 멍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모두 얼굴이 익숙한 사냥꾼들로, 다른 무리에서 힘깨나 쓰던 이들이다.
지금쯤 전달을 받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고 있어야 할 사람들인데?
슬슬 불안감이 올라왔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꼴은 그게 뭐고?"
"스, 습격 받았다."
"뭐? 설마 토벌대가 움직인 건가?"
"아니. 다, 단 두 명이었다."
"...뭐?"
"로, 록터, 펠리스. 그가 움직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블라이어에서 살기 위해 도망친 현상금 수배범이 다시 블라이어로 기어들어 왔다고?
믿을 수 없었다.
문제는 다른 사내에게서도 또 다른 습격 소식을 보고 받았다는 것이었다.
그쪽은 무려 아홉 명이 덤벼들었다고 했는데, 새벽에 쥐도 새도 모르게 암습을 받아 절반이 암살로 죽고 나서야 그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도망쳤다는 소식이었다.
도망쳐?
"…그럼 노예들은."
"모두 공포에 질려서…."
"이런 머저리 같은 새끼들! 그게 얼마짜리인데!"
드라카는 제자리에 펄펄 뛰며 성을 내고는 모두를 깨웠다.
이대로 있다간 자신들도 당할 수 있다. 대비를 하든 이동을 하든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상황.
그때,
"저, 저기 뭔가 옵니다!!"
"…뭐?"
새벽 어두운 숲 사이로 드라카가 머무는 숙소를 향해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드라카는 앞으로 걸음을 옮긴 뒤 손을 들었다.
"잠시 멈춰라!"
그의 특기는 뛰어난 입담이다.
단 몇 마디만 나누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귀를 기울이게 할 수 있는 입담.
일단 대화를 시도하면 어떤 상황이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그래서 먼저 상대를 멈춰 세우려고 했는데....
"멍―!"
"…시, 시발! 막아!!!"
상대는 인간이 아니라 엄청난 덩치를 자랑하는 개새끼였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검은 털의 짐승이 드라카를 보고 입을 쩍 벌린 순간,
화르르륵―
"으아아악!"
시꺼먼 불이 막사 주변을 휩쓸고 그 주변 숲을 태우기 시작했다.
동시에 날카로운 이빨이 도망치는 사냥꾼들의 목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처절한 비명이 터지고, 붉게 타오르는 숲 사이로 거침없는 학살이 시작됐다.
"우웨웨웩!"
"사, 살려...."
"아니야! 아니라고!"
노예들을 가둔 마차 주변에 사냥꾼들이 각자 다양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릴리의 환각 마법에 걸린 증상인데,
퍽―!
그들은 곧 뒤이어 날아온 화살에 머리가 꿰뚫리며 생을 마감했다.
난 마차 위에 선 채 다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사냥꾼들의 수가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케로스가 시선을 끌고 있어서 대부분 무방비한 모습이었다.
투투투퉁―!
난 그중 급이 높아 보이는 사냥꾼들만 골라서 죽이기 시작했고, 피해가 누적되고 죽은 이들이 많아지자 사냥꾼들은 통제를 잃고 숲 사방으로 뿔뿔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머릿수만 많지 잡졸들이라 위협이 될만한 상대는 없었다.
그나마 조심해야 할 인물이 드라카인데,
"이놈은 어디에 숨어 있는 거야? 설마 도망갔나?"
케로스의 지옥불에 허무하리만큼 불타 죽어버린 드라카의 존재를 모른 채 눈앞의 상황은 너무나도 쉽게 마무리가 되었다.
"어? 도망간다?"
"그냥 놔두세요."
"왜? 저번엔 미친개처럼 쫓아가서 다 죽였잖아."
"…미친개라뇨."
"내가 다 봤거든?"
그땐 우리 정보가 사냥꾼들에게 새어나가면 안 되는 상황이라 악착같이 쫓았던 거고.
이번에는 세 군데를 동시 타격 중이라 어디로 향하든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도망친 사냥꾼들이 갈 곳은 그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주변을 둘러보니 상황은 얼추 끝난 것 같았다. 케로스가 나머지 잔당을 잡고 씹고 던지고 있었다.
'특제' 고기를 맛보게 해줬더니, 아주 환장해서 마수(魔獸) 변신을 명했더니 냉큼 변해서 주변을 쓸어버리고 있다.
'혹시나 하고 시도해본 건데, 음식에도 인첸트가 적용될지 몰랐네.'
간식을 보고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마냥 격한 반응을 보니, 앞으로 케로스를 써먹을 일이 많아질 것 같은 느낌인데, 저 녀석이 문제였다.
주술은 뒷전이고 거울을 보며 피부를 살피는 릴리를 보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저 여자를 혹하게 할 또 다른 무기가 필요했다.
"웃차!"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곤 마차 위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바닥에 사냥꾼들이 버리고 간 무구가 많았는데, 그중 도끼를 집어 들곤 거대한 마차 무리로 걸어갔다.
한 마차 앞에 서자, 수백 개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저들도 눈으로 보고 있으니 알 것이다. 지금 상황이 단순한 전투가 아니라 일방적인 사냥꾼들의 학살이란 것을.
그래서인지, 도움을 청하는 이는 없고 전부 두려움에 물든 표정이었다.
하긴 케로스의 마수화가 섬뜩하게 보일 법도 하지.
난 거대한 자물쇠들을 하나하나 파괴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들을 구출하기 위해 왔습니다."
"누, 누구십니까?"
"저희는 록터 경의 부탁을 받고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든 자물쇠를 풀었지만, 사람들은 열린 문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다.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자 이를 멀리서 지켜보던 장인들이 마차를 끌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다시 마차 쪽을 바라본 나는 도끼를 바닥에 버린 후 사람들을 둘러보며 미소 지었다.
"가족의 품에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 말에 사람들이 반응을 보였다.
마차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158화 나랑 친구하자
"예상대로 잘해주고 있네."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나이 지긋한 노인들은 장인 직업을 가지고, 마을에서 큰 어른으로 불리던 이들이었다.
"대, 대장장이 어르신!"
"할아버지! 흐에엥!"
"…오! 신이시여!"
역시나, 장인들이 격정 어린 얼굴로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그들을 알아본 사람들이 있었다.
같은 마을 사람, 혹은 이웃 사람.
익숙한 웃어른들이 나서서 잡혀 온 이들을 안심시키자 눈에 띄게 사람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긴장이 풀리자 사람들은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쏟아냈다.
살았다는 안도감.
죽은 이에 대한 뒤늦은 슬픔.
잃어버린 가족과 만날 수 있다는 희망.
여러 감정이 뒤섞이며 잠시간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흐에에엥."
"…왜 이러는 겁니까? 무섭게."
"그냥, 슬퍼서."
잠시 훌쩍거리던 릴리는 다시 거울을 들곤 주름을 조심해야 한다며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
며칠을 함께했지만, 여전히 성격 파악이 힘든 여인이었다.
소중한 이들을 눈앞에서 잃고 재앙의 씨앗으로 각성한 대(大)마녀와 지금의 릴리는 엄청난 괴리감이 있었다.
하지만,
'보기는 좋네.'
어리숙하면서도 때묻지 않은, 그녀의 지금 모습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소설 속 비탄과 저주, 좌절과 분노로 삐뚤어진 그녀를 지켜보며 안타깝다는 생각을 많이 했거든.
지금의 릴리를 바라보며 묘한 안도감을 느끼는 사이, 장인들은 교육받은 대로 사람들을 모아 설득에 들어갔다.
그들이 나서니, 굳이 록터의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손쉽게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잠시 후, 장인 중 한 명이 내게 조심스레 다가왔다.
"설득이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돈이 필요할 테니, 사람들을 풀어서 금품 수거에 나서십시오."
"알겠습니다. 저 근데...."
"무슨 일 있습니까?"
"괜찮은 건지...."
노인이 불안한 눈빛으로 전장 쪽을 응시했는데, 시선을 돌리니 검은 털의 거대한 짐승이 피 묻은 앞발을 할짝거리며 앉아 있었다.
하긴, 케로스 주변에 갈가리 찢긴 시체를 본다면 기겁할 만도 하겠지.
'이곳이 내 영역이다!'를 뿜뿜 흘리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나한테 시위하는 듯 보였다.
'고기.'
내 손짓에 녀석이 벌떡 일어나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후다닥 물러났다.
난 그대로 주머니에서 물컹한 것을 꺼내곤 숲 반대편으로 던졌다.
날아간다 살코기.
"커엉!"
괴성(?)과 함께 케로스가 후다닥 사라지자, 난 웃으면서 노인에게 말했다.
"제가 키우는 강아지입니다. 괜찮으니까. 작업을 시작하세요."
"네, 네...."
잠시 후, 사람들은 장인들의 지시에 따라 사냥꾼들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돈이 될만한 것들을 한데 모으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자리를 비우고, 아이들만 마차 쪽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힘없이 웅크리고 있던 한 아이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곤 한쪽을 가리켰다.
"가, 강아지!"
"어? 진짜다!"
"귀여워!"
작은 시바견 형태로 돌아온 케로스가 릴리에게 달려오다가 몰려드는 아이들에 급정거하곤 다시 숲으로 차아― 도망쳤다.
어딜?
녀석의 뒷덜미를 낚아채곤 아이들에게 걸어갔다. 지랄견처럼 파닥파닥하는데, 릴리를 데려오자 체념한 듯 아이들 앞에 넙죽 엎드렸다.
확실히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단 말이지.
모습에 따라 사람들의 반응이 이리 다르니, 선입견이 참 무서웠다.
아이들에게 케로스의 간식(?)을 쥐여주곤 주변을 살폈다.
수거 작업이 얼추 마무리된 듯 보였다.
한자리에 한가득 쌓인 재화가 보인다. 사람들은 노인들의 분배에 따라 재화를 알맞게 나눠 가졌다.
도망친 사냥꾼이 많아서 넉넉하게 돌아가진 않았지만, 영지에 자리 잡기엔 충분한 양이었다.
"저, 약소하지만 이것을...."
"아닙니다. 여분의 금화는 지니고 있다가 꼭 필요할 때 쓰세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비록 늙은 몸뚱이지만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소문이나 확실하게 내주세요."
장인들은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사람들은 말과 마차, 사냥꾼들의 이동 수단에 각자 나눠 탄 뒤 블라이어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한데 몰려가면 눈에 띌 수 있으니, 시간을 두고 한두 대씩 나눠서 숲으로 보냈다.
어지럽게 널렸던 마차들은 새벽이 지나고 동이 텄을 땐 대부분 떠난 뒤였다.
이제 움직이는 마차는 한 대뿐.
가장 후미에 남은 마지막 마차는 떠나기 전 내 옆에 마차를 세우곤 공손히 물었다.
장인 중 한 명으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으로 알고 있었다.
"…이름을 알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대표로 내 이름을 물었다.
의외네. 내 이름을 묻다니.
하지만 이번 계획에 내 존재감이 드러나면 안 된다.
이번 계획의 핵심은 록터 펠리스의 영웅화였으니까.
노인의 물음에 난 미소로 답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인은 아쉬운 듯 한숨을 내쉬곤 고삐를 잡았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고삐를 놓고 내게 말을 건넸다.
"어젯밤에 제게 보여줬던 그 붉은 크로우 말입니다."
노인은 잡혀 온 대장장이 중 가장 실력이 뛰어난 인물로 손꼽혔다. 그래서 쌍둥이 동생인 하우엘이 사용하던 붉은 크로우가 어떤 금속으로 제작되었는지 어렴풋이 알아봤다.
다마스커스 금속.
다른 형태로 제련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답은 '불가능하다'였다. 그런데 이에 해주고 싶은 말이 달리 있는 건가?
기대하며 바라보자, 노인이 말을 이었다.
"다마스커스 금속은 한 번 형체를 결정하면 변형이 어렵습니다. 하지만 드워프 종족이 지닌 아티팩트 제련법이라면 방법이 있을 거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티팩트 제련법?"
"네. 혹시 아십니까?"
순간 도르네프 가문의 아티팩트들이 떠올랐지만, 확실한 것이 아니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까?"
"제 윗대 스승께 오래전에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갑자기 떠올라서 도움이라도 될까… 아, 혹시 다마스커스의 뜻을 아십니까?"
"다마스커스의 뜻? 금속 이름에 뜻도 있습니까?"
"다마스커스는 고대어입니다. '불굴의 의지'란 의미를 담고 있죠. 그만큼 단단하고 고집이 센 금속입니다."
"…불굴의 의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가는 신명 목록.
[록터 펠리스 – 배덕의 기사(무(無))]
[검술의 대가]
[기본기 마스터]
[불굴의 의지]
록터의 신명 목록 중 하나가 떠오른 건 왜일까.
이것도 설마 운명이려나?
"정보 감사합니다."
힌트를 얻었으니 제련에 관한 건 베네타에 간 후에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았다.
도르네프에게 다마스커스 제련법을 묻기 전에 펜리가 낚아채 간 나머지 한 짝을 찾아와야 했으니까.
노인이 탄 마차가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췄다.
모든 사람이 블라이어로 떠났다.
나와 릴리만 덩그러니 남은 상황.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내 옷깃을 잡아당겼다.
"아이들과 놀아줬으니까. 안 늙는 거지?"
"네. 오늘 하루는 나이를 안 먹었네요."
"기분 좋아."
아이들과 놀아주면 나이를 먹지 않는다고 알려줬더니, 케로스를 제물로 아이들과 신나게 놀아주는 그녀였다.
근데, 얘는 내 말에 의심도 안 하나?
"돗자리는 어디에 깔 거야? 식후 운동 후에 바구니를 오픈할 거라며? 운동 끝난 거 아니야?"
그래. 식후 운동으로 사냥꾼들을 학살하다시피 하긴 했지.
참으로 살벌한 소풍이었다.
"배고프죠?"
"많이."
"움직였으면 먹어야죠."
"어디가?"
"여기서 먹기엔 풍경이 살벌하지 않습니까?"
"난 괜찮은데."
뭐가 괜찮아.
잘린 팔다리가 나뒹구는 시체 더미 한가운데에 돗자리를 펴고 식사를 하자니, 이런 거 보면 대(大)마녀가 맞긴 맞는 거 같은데....
"햇살이 뜨겁지 않습니까? 얼굴이 탈 것 같은데."
"그건 안 되지!"
"저쪽으로 가시죠."
따스한 아침 햇살을 뒤로한 채 우거진 숲으로 들어서자, 케로스가 터덜터덜 세상 잃은 표정으로 뒤따라왔다.
아, 저 녀석이 있었지?
잠시 잊고 있었다.
* * *
그르르릉―!
"…물겠다?"
내가 건넨 살코기를 공격적으로 씹고 있던 케로스가 날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먹는 모습이 귀여워서 머리 좀 쓰다듬으려고 했더니, 아예 손목째 물어뜯을 기세였다.
"하나 더."
"머, 멍!"
바닥에 고기 한 점 내려놓자 냉큼 머리를 들이민다. 난 다시 슥슥슥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살코기가 사라지자 녀석은 다시 으르렁거리며 날 노려봤다.
이 정도면 고기 받아먹으려고 으르렁거리는 거 맞지?
이유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릴리와 달리 녀석은 성력이 인첸트 된 고기에 환장했다.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잡는 특질이 고기에 어떤 작용을 준 모양인데, 내겐 녀석을 꾈 미끼가 생겨서 아주 좋은 상황이었다.
성력을 이딴 데 쓰게 될 줄이야.
난 다시 한 점을 휙 던졌다.
내가 케로스와 교감(?)을 쌓으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
"아우, 배불러. 더는 못 먹겠다."
릴리는 텅 빈 바구니를 탈탈 털고는 배를 툭툭 두드렸다.
짧고 짧은 피크닉이 끝이 났다.
그녀가 돗자리에 누우려고 하자, 난 냉큼 돗자리를 홱 잡아당겼다.
머리가 땅에 닿으면 곤란하지.
데굴데굴 구르던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뜨며 날 노려봤다.
"뭐야?"
"먹었으면 움직여야죠."
"먹었으면 자야지."
"여기서요? 차가운 바닥이라 피부에 안 좋을 텐데."
"…뭐?"
"조금만 더 가면 마을이 있습니다. 푹신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죠."
그 말을 남기고 앞장서서 걷자 뒤에서 그녀가 쫄래쫄래 따라왔다.
누가 릴리 베이스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고 했나.
내가 느끼기엔 그 누구보다 다루기 쉬운 사람이었다.
우리는 숲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단둘이 있는 시간. 그리고 내가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이 끝난 상황이었다.
슬슬 물어봐야겠네.
"숲으로는 언제 돌아갈 겁니까?"
"숲?"
"홀로 나왔다면 마녀들이 당신을 찾지 않겠습니까?"
"음, 당분간 네 곁에 있을 거야."
"왜요?"
"음식을 잘해서?"
난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칼에게 들었습니다. 저 때문에 숲에서 나왔다고."
"...."
릴리는 미간을 구겼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입을 작게 웅얼거렸는데, '못생기고 부실한 할머니 없는....'으로 시작해서 칼을 욕하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칼이 귀를 후비고 있을 것 같은데.
"정확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이유?"
"절 찾아온 이유요."
이 질문은 한동안 심사숙고하며 할 정도로 무척 중요했다.
그녀의 선택은 소설에 없던 내용이었으니까.
스토리를 완벽히 비틀어버린 행동 변화.
그녀는 왜 날 찾아온 것일까.
"마음이 그리 시켰어."
"...."
모르고 들으면 어린 칭얼거림으로 들릴 수 있지만, 난 그녀의 말을 허투루 듣지 않았다.
마음이 시킨 대로 움직였다라....
'마녀의 진리.'
마녀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으로 돌아보면 필요에 의한 행동이란 뜻이었다. 릴리가 날 찾아온 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천년 나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자랑 같지만, 이건 사실이었다.
난 마녀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런 나를 릴리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찾아온 것이다.
'마법사들이 왜 그토록 마녀들을 멸족시키려고 발악하는지 알겠네.'
선택받은 존재라 스스로 격을 높이는, 세상의 중심이 마탑이라 외치는 자들.
마법사 집단.
하지만 마녀들은 그런 마법사들이 결코 갖지 못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신기에 가까운 직감.'
늘 변수를 부르는 이 능력은 이성으로 결론을 도출하는 마법사들에게 치명적인 비수 같은 것이었다.
릴리는 잠시 날 빤히 바라봤다.
투명한 검은 눈동자엔 그 어떠한 사심도 없다.
별을 보듯 계속 바라보고 싶게 만드는 신비한 두 눈동자.
잠시 후, 그녀의 눈동자가 끔뻑이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친구 하자."
"…이것도 마음이 시킨 겁니까?"
"응. 방금. 지금이야."
"천년 나무를 구경하고 싶군요."
"구경할 수 있어. 나와 친구가 되면."
"마녀와 친구라...."
저 손을 잡는 순간, 난 마법사 집단과 완벽히 척지게 된다.
소설 속 메인 집단과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선택의 기로.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친구가 되면 절 부르듯 신명도 알려주는 겁니까?"
"수명만 희생한다면?"
"반갑다 친구야."
그녀는 내 신명 정보를 알려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마법사 집단과는 애초에 함께 할 수 없다. 그들과 손을 잡는 건 내가 아니라 학살자 카멜일 테니까.
녀석에겐 마법사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카드가 있었다.
'대결계(結界), 유령의 숲 파훼법.'
오르도르 숲을 지키려면 학살자부터 무너트려야 했다.
그만큼 블라이어 흔들기는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작업이었다.
'지금쯤 전부 블라이어로 향하고 있겠지.'
록터와 칼, 엘튼 일행.
영지를 뒤엎기 전에 사전 작업이 필요한데, 이미 각자 임무를 알려준 상태였다.
록터의 소문이 퍼지려면 시간이 필요한 만큼 그 전에 필요한 것들을 챙길 생각이었다.
우리가 통곡의 언덕에서 만나기로 한 날짜는 앞으로 사흘 뒤였다.
'제발, 그때까지만 에토르에 처박혀 있어라.'
보이지 않아도, 직접 부딪치는 중이 아닌데 늘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상대.
난 카멜 블레이저를 떠올렸다.
159화 지배(Control)
침묵이 감도는 어두운 복도.
철컥― 철컥―
복도 한가운데로 푸른 갑주의 기사가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사를 발견한 시종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에토르 성의 시종들.
기사를 보내는 시종들의 표정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기사가 사라지자 시종들은 입을 꾹 다문 채 걸레질을 시작했다.
물통에 걸레를 짜자,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복도는 여전히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이틀 전부터 걸레질을 시작했지만, 작업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성 전체가 피로 물든 것 같았다.
"...."
리옹은 화려한 문 앞에 섰다.
에토르의 주인인 톰자엘 자작의 집무실이었다. 주변을 지키는 기사는 아무도 없었다.
리옹은 허락도 구하지 않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고풍스럽고 화려하게 꾸며진 서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서재 중심에는 톰자엘 자작이 아닌 젊은 사내가 창가를 등지고 서 있었다.
어두운 밤.
흐릿한 촛불만이 그의 실루엣을 옅게 비췄다.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
무슨 이유인지, 에토르 주인의 자리를 그가 차지하고 있었다.
"주군."
리옹의 부름에도 카멜은 미동이 없었다. 조용히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모습.
재차 부름이 이어져서야 그는 천천히 등을 돌려 리옹을 마주 봤다. 메마른 얼굴에는 작은 피로감이 엿보였다.
"부른 기억이 없는데."
"이틀이 지났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리 흘렀나?"
창밖으로 시선을 둔 그는 짧게 혀를 차곤 푹신한 소파에 자리했다.
마주 보는 원형 테이블에는 지도가 놓여 있었는데, 빽빽이 채워진 낙서에는 고민의 흔적이 드러났다.
"놈들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나타나지 않았다라...."
그는 늘어진 흑발을 쓸어올리며 지도를 응시했다. 시선은 코룬 강 지형에 닿아있다.
[이 개 같은 악당 새끼야. 지금 내 머리 위에 있는 줄 알고 좋아했지? 죽여줄게. 거기 딱 서 있어.]
알렉스가 경고를 날리고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전투가 벌어진 장소에서 에토르까지 거리는 사흘 남짓.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또 속임수였나?"
첫 대화와 두 번째 대화에서 모두 자신을 노릴 듯하더니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그'의 지시로 움직이는 인형일까.'
알렉스 마르샤.
놈의 도발에 최소한의 대비를 한 것이 이번 전투에선 크게 작용했다. 주술사 정예 부대를 로쿤강 전투에서 배제한 것이 컸기 때문이다.
"도주한 것이라면...."
"도주는 아니야. '그녀'가 합류하는 모양새였으니까."
"릴리 베이스 말입니까?"
카스펠로가 죽기 전에 보낸 메시지에 릴리란 이름은 없었지만, 새로 등장한 적에 대한 설명은 있었다.
막(膜)을 밀어내는 달빛.
거대한 검은 털의 짐승.
그 두 가지 특징을 모두 갖춘 이는 카멜의 기억에 마녀 릴리 뿐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전황이 180도 뒤집혔다.
'왜 그녀가 헌트와 함께 있지?'
에토르를 손에 넣고도, 놈의 경고에도 섣불리 에토르를 나서지 못한 것에는 릴리의 존재감이 컸다.
리옹과 렌구아.
이 둘마저 잃으면 상황을 돌이킬 수 없었다.
상대가 마녀 릴리다.
만약 오르도르의 숲이 헌트와 관련되어 있다면 블라이어 입장에선 지독히 위협적인 적과 마주하게 된다.
게다가 혈맹으로 묶인 베네타의 전력까지.
그 중심엔 '그'가 있었다.
이때부터 카멜은 지도를 살피며 밤낮으로 고민을 거듭했다.
"손실이 뼈 아파."
잭과 하우엘이 죽고, 사냥개 부대가 전멸했으며, 주술사들의 둥지 3할 전력이 사라졌다.
근래에 가장 뼈 아픈 손실.
회귀 후 처음으로 뼈아픈 패배를 했다. 그래서 곱씹고 또 곱씹었다.
카멜은 상대를 인정했다.
지금 토바른의 주도권은 '그'에게 있다.
"놈들은 어디로 향했을까?"
"베네타의 경계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없습니다. 에토르도 마찬가지입니다."
"...."
잠시 지도를 살핀 카멜은 엘레토르 성곽을 집고는 그 위 숲을 가리켰다. 토바른 북쪽 전체를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숲.
"오르도르의 숲은 확인해봤나?"
릴리와 함께 있으니 이 숲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카멜이 알고 싶은 건 놈들의 위치가 아니라 천년 나무에 대한 것이었다.
리옹은 고개를 끄덕인 후 서신을 건넸다.
주군의 명으로 블랙마켓에 의뢰한 천년 나무에 대한 정보였다.
[유령의 숲 이상 무(無).]
[천년 나무 이상 무(無).]
[마녀들의 특별한 움직임 잡히지 않음.]
서신을 접은 카멜이 물었다.
"정보료는?"
"10만 골드입니다."
"그럼 사실이겠군. 릴리에 대한 정보를 팔고 뭘 받아왔지?"
"테라모어 세 구를 받았습니다."
테라모어(Theramore).
마법사 집단의 비전 폭탄이었다.
마력을 응축시켜 단번에 터트리는 광역 폭탄.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인스턴트 아티팩트인데, 세 구나 얻었다는 건 마법사 집단이 엄청난 대가를 주고 릴리에 대한 정보를 구매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릴리의 부재를 모르고 있었어.'
대가를 통해 카멜은 이 사실을 파악했다.
릴리가 숲을 나왔다.
이 사실은 마법사들에게 무척 민감한 문제였다. 그녀가 움직이면 그 뒤로 마녀 전체가 움직였으니 말이다.
'지금 마법사 집단과 엮이는 건 피하고 싶었는데.'
자신에겐 마법사들을 움직이게 할 카드가 하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이 그 카드를 쓸 최적의 타이밍이었다.
이걸 어떤 식으로 써야 토바른에서 다시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을까.
잠시 고민하는 그때, 바깥에서 렌구아가 다급히 방문을 알렸다.
큰 지팡이를 든 렌구아가 방 안으로 들어오자, 카멜은 일어나서 그를 맞이했다.
신명의 주인.
그리고 에토르를 손에 넣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
렌구아는 확신대로 능력을 모두에게 증명했고, 카멜은 그런 그를 대우해주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리옹은 조용히 물러나며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렌구아와 달리 그는 고대 아티팩트 두 개를 하사받았음에도 신명 각성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렌구아가 예를 표하자, 카멜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바쁠 텐데, 직접 찾아올 정도의 소식인가?"
"방금 통신을 받았는데, 블라이어 남부 전역이 사냥꾼 무리의 손에 떨어진 것 같습니다."
"자세히."
"불타서 없어진 마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보고가 들어올수록 피해가 심각합니다."
"영지민은?"
"납치해간 흔적이 가득한데...."
렌구아의 보고가 빠르게 이뤄졌다.
'약탈....'을 작게 중얼거리던 카멜은 잠시 후 코웃음을 치며 지도를 살폈다.
"전부 사냥꾼들이 한 짓인가? 다른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산 위에 왕이 사라지니, 여우 새끼들이 날뛰는군."
사냥꾼들을 통제하던 전력이 모두 죽었다. 그 부작용이 남부 전역으로 퍼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카멜은 여우가 아니라 여우 새끼들이라고 했다.
"누군가 바람을 넣었어."
"'그'일까요?"
"아니. '그'는 겉으로 구원자를 표방하는 놈이야. 약탈과는 어울리지 않아."
"그럼 누가...."
"블랙마켓 연결해."
"…네? 알, 알겠습니다."
카멜의 메마른 눈빛에 렌구아는 고개를 숙이며 통신구를 꺼냈다.
신명의 주인이 되고 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얻었지만, 이상하게 주군의 앞에 서면 기세가 죽었다.
톰자엘 자작의 보물 창고를 다녀온 후부터인 것 같은데, 용아의 망토 이후로 다른 아티팩트를 얻은 게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잠시 후, 통신구가 붉게 빛나더니 성별을 알 수 없는 괴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블라이어 성주다.]
[서로 약속된 날이 아닐 텐데, 무슨 일로 직접 먼저 연락하신 겁니까?]
[감히 내 물건에 손댈 생각을 하다니, 내가 우습나?]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남부, 사냥꾼, 노예.]
[블랙마켓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통로'에 대한 거래는 없던 일로 하지.]
잠시 조용해진 통신구.
곧 다른 빛이 번쩍이며 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괴한 목소리는 여전했지만, 카멜은 억양이나 분위기가 여자라 확신했다.
[지부장입니다. 남부에 머물던 사냥꾼들은 전멸했습니다. 노예도 존재하지 않죠. 우리와 상관없는 일입니다.]
꼬리가 잘렸다.
[전멸? 누가 한 짓이지?]
[록터 펠리스.]
[…록터?]
[록터의 영웅담을 퍼뜨리는 이들이 군데군데 포착되고 있습니다. 영지를 오래 비우시면 안 될 것 같던데, 에토르에 오래 머무시는 것 같군요.]
[무슨 소리지? 에토르라니?]
[블랙마켓의 눈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피로 물든 성, 톰자엘 자작과 기사 단장, 기사단 실종. 더 필요하십니까?]
[그 소식을 누가 더 알고 있지?]
[글쎄요. 하지만 주변 귀족에게 퍼지는 건 제 마음먹기에 달렸겠죠.]
카멜은 잠시 침묵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필요한 정보를 얻었으니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겠다. 하지만 또 거슬린 짓을 하면 '광산 통로'에 대한 권리는 사라지게 될 거야. 그 통로로 물건들을 빼돌리려고 한 거 모를 줄 아나?]
[....]
[내 물건에 손대지 마라.]
카멜은 통신을 끊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헌트(Hunt)가 노린 건 내가 아니었어. 블라이어다."
"…그게 무슨?"
"헌트 전원이 블라이어에 있다."
허(虛)를 제대로 찔렸다.
설마 탈출했던 곳으로 다시 기어서 들어갈 줄이야.
'록터의 영웅담이 퍼진다라....'
록터 펠리스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블라이어는 쪼개진다.
분열을 노리고 있다.
록터가 블라이어를 작정하고 흔들면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다.
하지만 지금 블라이어는 빈집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서둘러 진화해야 했다.
"렌구아, 세뇌 작업은?"
"마무리 단계입니다."
"종속 각인을 지금 한다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감옥으로 간다."
카멜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물건들을 챙겼다.
은은한 빛깔이 타고 흐르는 검은 망토. 용아의 망토를 착용하자, 주변 분위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검은 사파이어 반지.
에토르에서 얻는 종속의 반지는 오직 카멜만 사용할 수 있는 권능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우우웅―
반지를 착용하자 손목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양이 영롱한 빛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눈앞에서 터진 빛무리에 렌구아와 리옹은 감탄을 터트리며 멍하니 그 빛을 바라봤다.
카멜은 반지와 함께 손목에 새겨진 문양을 살폈다.
매혹의 문양.
눈빛, 목소리, 행동으로 상대의 정신을 압박하거나 흔드는 정신 계열의 고대 문양이었다.
카멜은 시험을 통해 고대 문양의 주인으로 인정받았다.
블랙마켓과 광산 통로를 거래로 받은 물건이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매혹의 문양이었다.
'아직 빼먹을 게 많으니, 적대하는 건 이르지.'
문양을 볼 때마다 카멜은 최대한 블랙마켓과 척을 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떠나기 전 카멜은 지도를 살폈다.
오랫동안 고민을 통해 주도권을 가져올 방도를 떠올렸다.
우선 자신의 신명 목록.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은 통찰력]
[정신 지배(매혹)]
[종속 지배]
이를 반영한 첫 번째 단계.
"전력을 수급하러 간다."
카멜이 앞서 걷자 그 뒤로 리옹과 렌구아가 예를 갖추며 따랐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건 헌트를 압박할 강력한 전력을 얻는 것이다.
카멜은 에토르의 핵심 전력부터 손에 넣을 생각이었다. 그다음부터 하나씩 하나씩 처리해가며 지배를 통해 세를 빠르게 불려갈 계획이었다.
160화 지배(Control)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