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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 179-190

179화 탈출 (6)

파다다닥―!

코를 벌렁거리며 숲속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스멜로우들이 보였다. 통제가 풀렸는지 움직임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길 잃은 잠자리 떼를 보는 것 같았다.

'정신이 없겠지.'

[광기 통제]가 사라졌으니, 광기가 폭발한 기사들이 미쳐 날뛰고 있을 것이다.

그 한 가운데에 카멜이 있다면?

주군을 지키느라 이것들을 신경 쓸 상황이 아닐 것이다.

"탈출할 시간은 확보한 것 같고."

기사의 수가 많은 만큼 상황이 종료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것이고, 종료됐을 땐 우린 이미 광산을 탈출한 뒤일 것이다.

뒤쪽 카멜 무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문제는 와일리 그라임스다.

카멜이 광산으로 보냈을 것이 확실한 5성 기사였다.

소설 속 와일리의 신명 목록을 떠올렸다.

[와일리 그라임스 ― 보좌의 검(바람)]

[전우애]

[맹수의 포효]

[호위 본능]

다른 놈들과 달리, 세뇌당한 와일리의 신명 목록은 그대로 유지될 확률이 높았다.

와일리는 '보좌'에 특화된 기사.

주인인 카멜이 곁에 없으니, 록터와 칼이라면 충분히 막으리라 판단했다.

'근데 와일리를 보낸 놈이 카멜이라서 말이지.'

상처를 입고, 스스로 미끼까지 됐다.

과연 와일리란 패로 만족할까?

학살자의 모략은 이미 치가 떨리도록 경험해봤다.

전달자 시절에 3성 감시자를 곁에 붙이고, 4성 진짜 감시자를 몰래 붙였던 치밀한 놈이었다.

분명 추가로 뭔 짓을 더 했을 것 같은 불안감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가 광역 폭탄 테레모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이고, 다른 변수로는 조력자를 숨겨뒀을 경우다.

'아니, 진짜 최악은 이 둘 다 있는 경우겠지.'

그 외 대응하지 못할 변수로 아케인의 존재를 꼽았지만, 곧 고개를 흔들며 생각을 털어냈다.

'내가 아는 아케인이라면 절대 나서지 않을 거야.'

소설에서 아케인의 실질적 등장 비중은 거의 없다.

하지만 주인공 무리와 메인 조연들의 대사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바로 운명의 아케인이었다.

신명의 주인들과 직간접적으로 꼭 엮이는 인물.

다만, 스토리 안에서 움직이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그러고 보니 신명도 알려지지 않았어.'

소설의 내용으론 파악이 힘든 인물이다.

아케인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오르도르 숲으로 가야 했다. 그를 경계하는 마녀들이 더 정확히 알고 있을 테니까.

파파파팍―!

이를 악물고 속력을 더욱 올렸다.

산길이 아닌 광산으로 향하는 최단 루트로 전력 질주하고 있지만 도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광산 쪽 상황은 지금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격발 마렵네.'

마음속으로 하나만 간절히 빌며 미친 듯이 광산으로 달렸다.

폭탄만 터지지 말아라.

* * *

콰자자자자장―!

광산 입구에서 거센 불꽃이 튀었다. 허공 위에서 번뜩이는 불꽃 파티.

검과 검이 부딪치며 나타난 흔적이었다.

"…큭!"

록터는 망부석처럼 입구를 틀어막은 채 와일리의 검격을 정신없이 받아쳤다.

와일리의 속성은 바람.

그의 검날은 돌풍처럼 거셌고, 때론 강풍처럼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가 더 경계하는 것은 눈앞에서 와일리를 놓치는 경우였다.

바람을 탄 속도가 워낙 빨라 입구를 내주기라도 하면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절대 통과시켜선 안 돼.'

칼의 위기 감각을 공유했기 때문일까.

록터는 본능적으로 입구를 철벽처럼 방어하며 와일리를 붙잡았다.

방어에 치중하니 제대로 된 반격이 될 리 없다.

치고 빠지며 빈틈으로 검을 쑤시는 와일리가 보인다.

송곳처럼 날카롭다.

카장―!

"...!"

매섭게 후려친 순간, 록터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서리검에 꿰뚫렸던 어깨 상처가 터지며 출혈이 시작됐다.

늘어트린 검 끝으로 자신의 핏방울이 뚝뚝 흘러내린다.

잠시간의 전투로 입구 밑바닥이 피로 흥건히 물들었다.

록터는 이를 악물었다.

회피하거나 반격하고 싶지만, 와일리의 손에 든 폭탄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후후후웅―!

거리를 벌린 와일리의 오라 소드가 눈앞에서 번뜩였다.

연격이 펼쳐지며 섬뜩한 바람이 쏟아지더니 바닥이 갈라지며 록터에게 짓쳐 날아갔다.

원거리로 쇄도하는 바람 칼날.

보이지 않는 수십 개의 오라 검격에 록터는 흠칫하며 팔찌를 발동시켰다.

투명한 실드가 생성되며 바람 칼날을 튕겨냈다.

그것도 잠시,

콰직― 콰지직―!

"…이!"

투명한 벽에 실금이 가더니 이내 와장창 부서졌다.

록터는 고함을 내지르며 오라 소드를 미친 듯이 휘둘렀다.

번뜩이는 바람, 부딪치는 불꽃, 그리고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쿨럭!"

밀린다.

록터는 상황을 인정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모를까. 리옹과의 격전으로 피로감이 한계까지 쌓인 상태에선 버티는 게 고작이었다.

'…정말 쉽지 않아.'

록터는 붉은 침을 뱉어내며 검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리옹 때도, 눈앞의 와일리 때도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버티고 버티는 힘겨운 싸움.

부웅―!

휘두르는 검이 너무 무겁다.

헌트에 들어간 뒤로 늘 한계까지 내몰렸다.

늘 상처를 달고 다녔다.

이 모든 것이 아서 탓일까?

록터는 누군가의 원망보단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꼈다.

'약하기 때문이다.'

노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좌절은 없었다.

다음에는 더 강해질 수 있겠단 확신이 들었으니까.

"…왔군."

번뜩이는 오라 소드 사이로 록터의 두 눈이 번뜩였다.

공명으로 느껴지는 영웅 조력자의 기운.

칼이 이 주변에 서성이는 게 느껴졌다.

자신은 당장 약해도 상관없다.

자신에겐 동료가 있었으니까.

"록터!!!"

외침과 동시에 칼이 투척 자세를 잡고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록터는 그 생각을 읽었다.

미친 생각이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다.

"크아아아아!"

록터는 마력검을 한계치까지 터트리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처음으로 입구 바깥으로 발을 뗐다.

전력을 짜낸 공격.

콰앙―!

"...!"

검격이 충돌한 순간 와일리는 휘청이며 물러났다.

기운을 퍼트리며 와일리를 압박했다. 그가 회피를 시도하자 빠져나가지 못하게 재차 검을 휘둘렀다.

카장―!

두 번의 부딪침.

마력검에 금이 가더니 부러졌다.

주춤 물러나는 와일리의 발밑을 본 록터는 이를 악물곤 옆으로 몸을 튕겼다.

"뒈져!"

동시에 밀린 와일리의 발밑으로 단검 한 자루가 정확히 콕 박혔다.

단검이 박힌 틈 사이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아서가 혹시 몰라 작업해놨던 광대 단검.

다섯 자루의 주술 단검이 연쇄적으로 터지며 그 주변을 집어삼켰다.

"…크억!"

미리 피했어도 폭발 여파는 엄청났다.

폭발에 밀리며 록터가 벽에 처박혔다.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는 느낌.

쓰러진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잠시 후, 록터의 머리 위로 칼이 머리를 긁적이며 나타났다.

"괜찮아?"

"미, 미친놈."

"내가 뭐? 개 멋졌잖아."

"테레모어를 들고 있었다."

"...."

잠시 와일리 쪽을 바라본 칼은 록터를 부축하며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아서에겐 비밀이다."

"...."

"안 터졌으면 된 거야."

록터가 헛웃음을 흘리며 섰을 때, 일행이 다가왔다.

일행 중 한 명이 록터를 업었고 두 일행은 록터를 데리고 광산 입구로 움직였다.

"먼저 넘어가 있어."

"아직 움직일 수 있다."

"손가락 빨 힘도 없잖아. 방해만 돼. 여긴 내가 알아서 할게."

"녀석은...."

"올 거야. 내가 데려갈 테니까. 쉬고 있어."

칼이 손짓하자, 록터가 뭐라 외치기 전에 일행들이 광산 안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칼은 숨을 내쉬곤 긴장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짙은 먼지 너머로 쓰러져 있는 와일리가 보였다.

검게 그을린 흔적.

혹시 모르니 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푹―

박힌 단검에 와일리의 몸이 흔들렸다. 등에 깊숙이 박혔는데 반응이 없다.

'죽은 건가?'

아서의 신호대로 미친 듯이 광산으로 복귀했는데, 설마 와일리가 이곳을 공격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칼은 다시 품을 뒤적거렸다.

단검이 다 떨어졌다.

욕설을 내뱉으며 조심스레 와일리에게 접근했다.

록터의 말에 의하면 테레모어를 들고 있었다고 했다.

수거가 가능하면 수거해가려고 했는데,

삑. 삑. 삑.

"…아니지?"

흰 구체가 붉은빛을 반짝반짝거리고 있었다.

저 소름끼치는 소리.

"…이런 씨발."

테리모어가 작동한 건가?

자신은 마력 폭탄에 대해 잘 모른다. 하지만 저 소리가 들린 후로 주변이 가루가 됐다는 것 정도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칼은 다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터지면 광산 입구가 무너진다.

칼은 구체를 낚아채곤 미친 듯이 밑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터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던질 생각이었다.

심장이 두근두근 떨리며 이마에 식은땀이 몽글몽글 맺혔다.

처음으로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순간 칼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의문이 담긴 눈빛.

"…뭐지?"

깜빡깜빡 점멸하는 붉은 빛이 보인다.

구체를 움켜쥐고 살핀 것도 잠시, 칼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왜 아무런 느낌도 없지?"

폭발이 터지기 직전이라면 자신의 위기 감각이 터질 듯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느낌이 없다.

잠시 서서 상황을 파악하는데, 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빠르게 접근해왔다.

"뭐해요!?"

아서였다.

"터질 것 같아서 멀리 던지려고 내려왔는데...."

아서가 테레모어를 낚아채더니 빠르게 살폈다.

다급히 누군가를 부르기도 했다.

"레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익숙한 그림이다.

잠시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던 아서가 '미친!'을 외치더니 쥐고 있던 구체를 바닥에 내던졌다.

"입구는요!?"

"입구?"

"누가 지키고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 록터도 일행도 전부 건너편으로 보냈다. 우리 둘뿐이야."

그 순간 아서가 칼을 밀치곤 광산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가짜에요! 함정입니다!"

"뭐? 대체 왜...?"

"내려온 지 얼마나 지났습니까?"

폭발 범위가 넓었기에 제법 많이 내려왔다.

시간으로 따지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입구에 도착했을 때 그 생각은 싹 사라졌다.

"분명 이곳에...."

눈앞에 와일리가 사라진 상태이었다.

사라진 흔적은 입구 쪽이 아니었다.

숲 한쪽으로 질질 끌려간 흔적.

하지만 아서도 칼도 와일리가 사라진 흔적이 아닌 광산 입구 쪽으로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생긴 생소한 발자국이 광산 안쪽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누군가 와일리를 데려갔고, 또 누군가가 광산으로 진입했다.

* * *

어두운 통로를 질주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리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5성인 와일리를 포기할 리 없지.'

그가 들고 있던 테레모어는 가짜였다.

처음부터 카멜은 와일리를 버릴 생각이 없었다.

카멜이 미끼를 자처해서 와일리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선물 포장 안에 든 선물 박스에 또 다른 박스가 존재하고 있었다.

조력자가 있다.

난 광산으로 들어와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처음 왔을 때 우글우글했던 인파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휑하고 긴 통로가 이어졌고, 벽에 걸린 횃불들도 힘을 다했는지 어스름만 남긴 채 차츰 빛을 잃어갔다.

어둡다.

다행히 '통로'를 통해 데려온 인원이 전부 건너편으로 넘어간 것 같았다.

드넓은 공터를 바로 앞에 뒀을 때였다.

삐―

"...."

미세한 소리가 청각에 잡혔다.

익숙한 소리이면서 절대 들려선 안 되는 소리.

삐삑― 삐삑―

"…시발, 좆됐다."

어둠 너머로 번쩍이는 붉은 빛에 칼이 상황을 파악했고, 난 이를 악물며 거대한 공터로 발을 내디뎠다.

공터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는 호리호리한 인영이 보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보니 여인 같았다.

그녀가 작동된 테레모어를 움켜쥔 채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을 본 순간, 난 신음을 흘리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뇌된 블랙마켓 지부장.

삐비빅! 삐비비빅!

피하긴 이미 늦었다.

180화 탈출 (7)

"포, 폭탄을 뺏어요!"

내 다급한 외침에 칼이 움직였고, 지부장은 그에 반응하며 도망쳤다.

광산 중심부와 연결된 통로는 제법 많다. 그중 한 곳으로 빠르게 움직이자, 난 욕설을 내뱉으며 활을 소환했다.

여기서 놓치면 대참사다.

퍼퍽―!

"...!"

관통이 부여된 화살들이 지부장의 허벅지와 어깨를 꿰뚫었다.

바닥을 뒹구는 지부장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블랙마켓이라는 이름값 때문에 검은 장미 지부장을 떠올리며 실력을 가늠했는데, 실력이 그에 한참 못 미쳤다.

천만다행이었다.

쓰러진 그녀는 비명조차 흘리지 않았다.

세뇌의 흔적.

칼이 다급히 테레모어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손톱이 깨지고 팔이 부러져도 절대 테레모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삐비빅―

섬뜩한 울림.

난 이를 악물었다.

퍽―

지부장의 얼굴을 매섭게 걷어찼다. 벽에 처박힌 지부장 손에서 구체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칼은 목이 꺾인 지부장을 살피곤 날 올려다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무식한 새끼."

"다 죽게 생겼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겁니까?"

여기서 1초는 생명과 직결된다.

난 테레모어를 움켜잡았다.

아직 허공에 떠오르지 않았으니 시간이 있다.

새하얀 구체를 잡고 노려보고 있는데, 칼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거 주고 넌 빠져나가."

"무슨 개소립니까?"

"넌 죽으면 안 돼. 나랑 다르다고."

칼이 구체를 빼앗으려고 하자, 난 뒤로 물러났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진다.

감각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진짜 폭탄이다.

"시발! 터진다고! 진짜야!"

"지랄하지 마세요."

"록터와 약속했다. 널 데려가겠다고!"

"그럼 같이 가야죠. 여기서 못 막으면 어차피 다 죽습니다. 우리도, 통로를 지나고 있는 록터 일행도."

순간, 레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능하다.]

기다리던 소식.

리옹과 전투에서 첫 번째 테레모어의 기운을 파악한 레토는 내게 한 가지 제안을 했었다.

그 제안의 가능성을 레토가 확신하자, 난 테레모어에 성력을 퍼붓기 시작했다.

속성 부여 능력, 인첸트.

황금빛에 새하얀 구체가 눈부시게 물들기 시작했다.

"레토, 진짜 가능해요?"

[각기 다른 성질들이 초 응집된 마력 덩어리다. 네 기운이 강하다면 폭발을 억누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구체에 담긴 응집된 마력이 성력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입술이 으깨질 정도로 기운을 쏟아부었지만 성력이 밀린다.

"겨, 격발을...."

[성력에 잠력이 실리면 인첸트가 네 통제를 벗어난다. 자살 행위다.]

"크윽!"

[부족해. 폭발을 막을 수 없다. 늦추는 방향으로 가라.]

테레모어의 붉은빛 간격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

그 광경에 칼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응축된 마력 덩어리가 불안정해지면 터지는 폭탄입니다. 반대로 마력을 안정시키면 터지지 않아요."

"그게 가능해?"

"될 줄 알았는데, 안 되네요."

"…뭐 이 새끼야?"

무질서함을 바로 잡는 기운, 성력.

내 속성 기운은 불안정한 것들을 안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그건 내 기운이 더 강할 때고.

우우우웅―

"…빌어먹을!"

내 머리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테레모어.

분위기가 안 좋다.

조금씩 성력을 밀어내며 뒤틀리는 마력 덩어리.

지금이라도 테레모어를 가지고 광산 밖으로 나가야 할까?

[건들지 마라. 터진다.]

"…뒤가 없네. 시발."

레토는 테레모어의 마력 정보를 내게 실시간으로 전달했다.

초월체라서 그런지, 레토는 세상의 기운에 무척 민감했다.

[광폭의 기운이다. 바로 잡는 건 불가능해.]

잠시 후,

뚝―

진동하던 새하얀 구체가 멈칫하더니 황금빛을 집어삼키며 서서히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슬로우 화면처럼 눈송이가 떨어지듯 그 추락은 매우 느렸다.

마치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인첸트가 강제로 풀리는 과정.

건드리면 터진다고 했다.

즉, 땅에 닿으면 폭발한다.

"도, 된 거야? 성공한 거지?!"

"뭐가 돼! 튀어!"

목숨이 걸린 순간이 오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첫 번째 선택이 폭탄의 처리 방법이었다.

레토의 조언으로 폭발 시간을 늦추는 덴 성공했지만, 막진 못했다.

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상황.

'생존 확률은 저곳이 확실한데....'

조금 전, 진입한 통로를 잠시 바라봤다.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이 '통로' 건너편보다 훨씬 가까웠다.

하지만,

'내가 없으면 고립될 거야.'

건너편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

내가 모두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오직 나만이 그들을 살 곳으로 이끌 수 있었다.

난 바깥쪽이 아닌 광산 안쪽으로 몸을 날렸다. 칼이 그런 날 다급히 쫓아왔다.

여유 따윈 없었다.

둘 다 미친 듯이 달렸다.

폐쇄된 갱도.

'통로'가 보이자, 난 칼에게 다급히 경고했다.

"제 등만 보고 따라와요. 죽을 것 같으면 제 어깨를 두드리고요."

"…죽어? 두드려? 왜?"

대답 대신 황금빛을 소환했다.

시야를 확보한 뒤 틈새로 몸을 욱여넣었다.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공간.

둘이 나란히 움직이기엔 비좁았다.

자세가 나오지 않으니 속도를 내기가 힘들었다.

나와 칼은 정신없이 팔을 놀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급해지니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온몸이 벽에 긁히며 상처가 늘어갔다.

록터와 일행은 건너편으로 빠져나갔을까?

시간상 다소 부족해 보이는데.

"고, 공간! 넓어진다!"

"달려요!"

비좁은 공간이 서서히 넓어졌다. 달릴 수 있는 각이 나오자, 난 발을 놀리며 고래고래 외쳤다.

"달려!! 전부 달려!!!"

한 방향으로 쭉 뻗은 통로.

그 사이로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내 경고가 앞쪽 사람들에게 닿길 바랄 뿐이었다.

난 달리며 목이 터지라 외쳤다.

목이 쉰다.

내가 쉬자, 칼이 나 대신 고함을 내질렀다.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젠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릴 정도다.

우린 모든 기운을 쥐어짜 두 발에 쏟아부었다.

벼락처럼 나아가는 두 신형.

벽면을 물결처럼 수놓은 황금빛이 더욱 환하게 빛났다.

전에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다.

넬레토리 협곡이 딱 이랬다.

그때도 협곡이 무너져서 죽을 뻔했다.

생매장을 당할 위기가 1년 사이에 두 번이나 찾아오다니, 내 운명이 참으로 기구했다.

달려―!!!!!

열 번째 외침이 통로를 뚫고 시원하게 퍼져나간 순간이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웅―!!!

"...!"

바닥 전체가 휘청이더니 벽면에 잔금이 쩌저적 갈라졌다.

바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테레모어가 터졌다.

그그그그그그―!

통로 전체가 비명을 질러대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 시바알아!!!"

칼의 다급한 욕설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콰콰콰콰쾅―!!!

폭발의 여진으로 뒤쪽부터 통로가 닫히듯 파편을 쏟아냈다. 거기다 지반까지 무너진다.

우린 이를 악물었다.

4성 기운을 모조리 쏟아붓는데, 한 발, 한 발이 답답했다.

더 빨리!

아직 칼이 내 어깨를 붙잡지 않았다.

위기 감별사가 아직은 죽음에 이르지 않았다고 몸짓으로 말하고 있었다.

"저, 저기!!!"

눈앞에 록터 일행이 들어왔다.

일행 두 사람이 록터를 업은 채 미친 듯이 달리는 모습.

부축하며 셋이 움직이니 우리보다 다소 늦는 것 같았다.

그래도 외침이 닿았는지, 그들은 전력을 다해 내달리고 있었다.

난 주변을 살폈다.

앞쪽에 셋, 뒤에 하나.

머릿속에 그림을 그렸고, 시뮬레이션을 수차례 돌렸다.

저들이라면 가능할 것 같았다.

"아아아아악! 야! 야!"

뒤를 돌아본 칼이 새된 비명을 내지르며 내 어깨를 붙잡고 미친 듯이 흔들었다.

뒤쪽에 무슨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지 모른다.

다만, 칼이 시선을 뒤로 둔 채 사시나무 떨듯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죽는다!

"죽는다고, 시발아!"

감별사가 죽음을 선고한 순간, 난 칼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멱살을 움켜쥐고,

"크아아아아아아!!!!"

고함을 내지르며 온몸의 근육을 수축한 뒤 터트렸다.

마지막 격발!

눈동자에 비추던 황금빛 물결이 소나기처럼 휘어졌다.

세상이 빨려 들어온다.

내 몸이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그리고 땅에서 솟아난 듯 일행 곁에서 속도를 잠시 늦췄다.

으드득―

"…크."

휘청이는 감각에 이를 악물었다.

속도를 조금 늦춘 것뿐인데도 전 근육이 비명을 질러댄다.

시간이 없다.

"붙잡아! 당장!"

설명을 안 해도 일행은 실험체 감옥부터 생존에 최적화된 이들이다.

몸을 내밀고, 팔을 뻗자, 두 사람이 공간을 잡고 내 몸에 매미처럼 달라붙었다.

록터를 업고 있던 일행을 남은 팔로 휘감고 자세를 낮췄다.

다른 일행은 칼을 잡고 늘어졌다.

"놓으면 다 죽어! 뭐가 부러져도 잡고 있어!"

"아악! 야, 너 왜 내 머리… 자, 잠...!"

칼의 처절한 외침을 끝으로,

콰아아아아앙―!

"까아안!!!!!!!!"

동료들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묵직한 무게를 이끌며 질주를 시작했다.

이때부터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념무상.

그저 눈앞에 뚫려 있는 공간에 온몸을 밀어 넣으며 발을 박찼다.

귀를 닫고, 고통에 감각을 닫았다.

모든 감각을 걸어 닫는 채 난 달리는 데 의식을 집중했다.

세상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다.

이 느낌, 이 감각, 레토의 훈련에서 경험해 본 적 있다.

빈사 상태였다.

[잠력이 바닥났다. 멈춰.]

레토의 목소리가 의식을 뚫고 웅웅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아직 멈출 수 없었다.

아직 탈출하지 못했다.

꺼져가는 격발의 불씨는 붙잡고 놓지 않았다.

격발이 계속 유지된다.

처음 알았다.

단발로 사용하던 격발을 연속해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잠력이 바닥나니,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눈. 코. 입에서 핏물이 흘러나오고, 전신의 뼈가 삐거덕거렸다.

뇌가 타는 듯한 느낌.

고통이 울부짖는다.

[진물이 되어 죽고 싶나?!]

레토가 두 번째 경고를 날렸다.

목소리에 다급함이 느껴졌다.

그때,

통로 끝, 빛이 보였다.

[...!!!]

붙어 있는 동료들이 뭐라 외치지만 들리지 않았다.

시야를 채우는 짙은 먼지.

지반이 여기까지 무너진 것인가?

다급한 비명들과 함께 목소리 하나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뛰어―!!!!!!"

록터의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콰콰콰콰콰콰콰쾅―!

지반이 바로 뒤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짓눌린다.

그 전에 난,

―!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은 쉰목소리로 고함을 내지르며 바깥으로 몸을 날렸다.

세상이 더욱 느리게 흘러간다.

눈 앞에 펼쳐진 숲?

아니, 숲이 아니다.

만(萬)에 이르는 엄청난 인파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이 하나하나 숨 쉬듯 움직이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건가?

날이 언제 밝았지?

목이 꺾이며 고개가 절로 위로 올라갔다.

푸르른 하늘이 날 반겼다.

미소를 짓는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통로가 무너지며 짙은 흙먼지가 사방을 휩쓸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통로와 연결된 암벽이 무너져 내렸고,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록터님!"

"마, 마스터!"

위험한 순간, 통로 앞에서 대기 중이던 일행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들은 마지막 일행이 통로에서 가까스로 탈출했을 때, 그들을 업고 빠르게 위험 지역에서 벗어났다.

"모두 무사한가!?"

하인즈가 헐레벌떡 뛰어와 쓰러진 이들을 챙겼다.

저들은 이 무리에서 자신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들이었다.

절대 나쁜 일이 생겨선 안 됐다.

하인즈는 긴장한 눈으로 상태를 살피는 일행을 바라봤다. 그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만 보면 자잘한 상처 빼곤 모두 무사한 것 같았다.

의식이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중 한 명.

"...."

칼은 쓰러진 일행 중 하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양손에 가득 움켜쥐고 있는 머리카락.

칼은 머리를 스윽 만져봤다.

빈 공간을 지켰던 최후의 방어선이 모조리 뽑혔다.

맨질맨질한 감촉을 느끼며 칼은 푸르른 하늘을 올려다보곤 눈을 감았다.

"…괜찮아. 살아남았으니까."

탈출에 성공했다.

모두 살아남았다.

기뻐서 그런가?

닭똥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181화 변화의 시발점

카멜은 입을 다문 채 광산 방향을 올려다봤다.

그그그그궁―!!!

밤하늘을 뒤엎는 짙은 먼지가 숲 너머로 솟구치며 거센 여진이 온몸을 두드렸다.

테레모어가 터졌다.

보지 않아도 광산이 무너져 내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결국 터지나?'

광산은 세력 성장에 무척 중요한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터트린 건, '통로'의 존재를 발각당했다는 것 외에 정적을 제거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큰 이득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카멜은 주변을 둘러보며 짧게 혀를 찼다.

하나둘 힘없이 쓰러지는 광전사 무리가 보인다.

알렉스를 잡을 절호의 기회를 허무하게 놓쳐버렸다. 가장 강력한 패라 확신했던 것에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렌구아의 보고를 듣기 전에 카멜은 궁금했던 것을 아케인에게 먼저 물었다.

"놈의 신명을 봤나?"

"...."

아케인은 턱을 만지작거릴 뿐 바로 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서서 고래고래 호통치는 렌구아만 바라볼 뿐이었다.

"내 말 안 들리나?"

"알렉스에 관해 묻는 것이라면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 알렉스가 신명의 주인이 아니라는 건가?"

"그건 모르겠습니다."

"난 말장난을 싫어해."

"...."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광기 전염]

[광기 폭발]

렌구아를 응시하던 아케인의 시선이 카멜에게 향했다. 사납게 노려보고 있는 그가 보인다.

"눈으로 확인한 사실만 본다면 알렉스는 신명의 주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그게 뭔지는 모른다?"

"조금 전 사용한 무기가 특별하더군요. 활에 대해 알아보셨습니까?"

아케인의 시선이 다시 렌구아에 향했다.

귀걸이를 통해 렌구아의 신명 변화가 실시간으로 저장되고 있었다.

흥미로운 광경이다.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광기 통제]

[광기 전염]

[광기 폭발]

'신명이 돌아왔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화살을 맞는 순간, 렌구아의 신명 목록 중 [광기 통제]가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시작된 혼란.

카멜도 렌구아도 이 혼란에 대해 이유를 모르는 듯 보였지만, 아케인은 단 한 발의 화살이 지금의 결과를 만들었다고 확신했다.

'신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능력이라....'

신력 혹은 신기.

그런 능력이 세상에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무척 특별했다.

그래서 꼭 확인이 필요했다.

조금 전 화살이 정확히 알렉스의 능력인지 활의 능력인지를 말이다.

"활? 자세히는 알지 못한다."

"첫 만남 때도 활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니, 첫 만남 때 놈은 비루한 암살자에 불과했다. '그'에게 받은 게 분명해."

"…'그'라."

또 '그'다.

불변의 법칙이라 여겼던 '신명'의 운명을 비틀어버린 존재.

그 비틀린 이유가 신의 변덕인지, 스스로 개척한 능력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토바른의 일에 개입을 시작한 이유도 '그'란 존재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토바른에서 만나긴 힘들 것 같군.'

광산이 무너지고, '그'와 연관 있는 이들을 잡지 못한 이상, 더는 연결 고리가 없었다.

더 머문다고 '그'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

다만, 답은 나왔다.

'핏빛의 활.'

[그 혓바닥 덕에 이 '활'을 얻었으니 감사를 표하마.]

알렉스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활을 직접 만져본다면 '그'와 관련된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단서를 찾은 셈인데, 눈앞의 카멜은 활이란 단서보다 활 주인의 생사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았다.

"죽은 이는?"

"실망하게 해드려서 송구하군요. 없습니다."

"…한 명도 없다고? 단 한 명도?"

"신명의 주인 안에선 그렇습니다."

카멜이 입술을 잘근 씹었다.

핏물이 새어 나오는 것도 잊은 채, 사납게 미소 지으며 웃었다.

광산마저 무너트렸는데 죽은 이가 없다.

"이해가 안 가는군."

테레모어의 폭발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카멜의 손짓에 눈치를 보고 있던 렌구아가 냉큼 앞으로 다가왔다.

"와일리는?"

"데, 데려왔습니다."

가리킨 방향을 보니, 걸레짝이 된 와일리가 구석에 쓰러져 있었다.

폭발에 휘말린 모습.

블랙마켓 지부장을 은밀히 와일리 곁에 보낼 때 주술사 부대를 붙여주며 지시를 내렸는데, 와일리를 수거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았다.

"숨은?"

"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최악은 피한 건가? 입구 쪽은?"

"록터가 먼저 입구로 진입하고, 뒤이어 지부장이 폭탄을 터트리기 위해 따라붙었습니다. 알렉스와 칼은 마지막으로 진입했는데...."

"두 사람이 마지막이라고?"

"그렇습니다. 광산 안에서 테레모어가 터졌으니, 전부 죽었을 겁니다. 하늘이 주군을 돕고 있는 게...."

"시끄럽다."

"...."

"어디서 잘못됐지?"

아케인을 통해 록터와 칼이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칼과 함께 움직였던 알렉스도 죽지 않았다는 말인데.

"그대를 너무 과대평가했군."

"죄, 죄송합니다."

"오늘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가슴에 새겨놔라. 두 번은 용서치 않겠다."

"추, 충!"

주군의 차가운 반응에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는 것을 눈치챘다.

묻고 싶었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서 눈만 내리깔았다.

잃기만 하고 얻는 건 하나도 없다.

최악의 결과라 생각하고 있을 때,

"여기서 헤어지도록 하죠."

아케인이 카멜에게 동행의 마침표를 찍으며 봇짐을 싸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렌구아가 사납게 외치며 발끈했지만. 카멜의 손짓에 입술을 깨물며 물러났다.

아케인은 잡고자 한다고 잡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토바른을 떠날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헬 그라임 내에 떠오른 장소가 있나 보군."

"인연이 이끄는 곳으로 갈 뿐입니다."

헬 그라임의 중심부, '상아탑의 서고'에서 핏빛의 활에 대한 정보를 알아볼 생각이었다.

고대 기록에는 그 능력에 관한 기록과 활에 대한 정보가 있을지 몰랐으니까.

'운명의 흐름이 바뀌었다.'

아케인은 가만히 서서 눈앞의 사내를 바라봤다.

블라이어 성주, 카멜 블레이저.

운명의 시각으로 바라본 카멜은 훗날 토바른의 지배자로 떠오를 '학살자의 별'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오늘 전투로 그 별이 사라졌다.'

토바른의 운명이 카멜에서 다른 이에게로 넘어갔다는 의미였다.

흐름이 바뀐 이상, 도울 이유가 사라졌다. 운명의 수레바퀴에서 탈락할 게 분명했으니까.

물론, 희박한 예외가 보이긴 했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

두 길을 걷는다는 의미가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학살자의 별에서 탈락했다면 또 다른 길이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었으니까.

"부탁이 하나 있다."

렌구아는 주군의 말에 움찔했다.

부탁.

주군이 부탁이란 단어를 누군가에게 하는 것을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마법사 집단과 직접 통하는 연락책을 알고 싶다."

"블랙마켓에 부탁하는 것이 더 빠를 겁니다."

"상황이 전과 달라졌다."

'통로'가 사라지면서 더는 블랙마켓과 우위에 선 교섭이 불가능해졌다.

통로를 통해 헬 그라임으로 매년 노예를 제공해주는 것.

그게 블랙마켓과의 거래였으니까.

게다가 금광도 사라졌다.

돈과 그 어떤 수단으로도 블랙마켓에게 제안할 카드가 많지 않았다.

알렉스를 산 채로 잡았다면 '그'의 정보를 뽑아내서 엄청난 이득을 얻었겠지만, 실패했으니 아케인을 통해 방법을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뎀토어'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오직 뎀토어만이 내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줄 수 있다."

마법의 뎀토어(Demtor).

마법사들의 전통 집단.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마탑 연합의 정식 명칭이었다.

"뎀토어가 원하는 카드가 당신에게 있을지 모르겠군요."

"있다. 절대 거부할 수 없는 카드가."

"제가 먼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할지도 모르는데."

"유령의 숲 파훼법."

"…굉장한 패를 가지고 계시는군요."

평소에 덤덤한 아케인마저 놀란 표정을 지을 정도로 방금 건넨 카멜의 패는 놀라운 것이었다.

유령의 숲이 파훼 되면 마녀사냥을 시작할 수 있다.

마녀의 존재에 집착하는 뎀토어라면 무리한 조건이라도 수락할 것이 분명했다.

"그대 이름으로 날 소개해줄 수 있나?"

"당신 말이 사실이라면 제가 얻는 이득도 상당할 테니 거절할 이유가 없겠지요."

"거짓말 같나?"

뎀토어와 대등한 관계에서 교섭하려면 블랙마켓이 아닌 아케인의 소개로 접근해야 했다.

마력검 베가(Bega)와 실드 팔찌, 테레모어 세 구까지.

정보 제공을 대가로 뎀토어에게 받은 것들은 모두 예상을 웃돌았다.

그 이유는 단 하나.

'아케인의 존재 때문이겠지.'

그가 하는 일에 도움을 주고자 테레모어 같은 광역 폭탄까지 건넸을 것이다. 그만큼 뎀토어는 아케인과 떨어질 수 없는 긴밀한 관계였다.

"...."

아케인은 조용히 카멜의 눈을 응시했다.

깊고 무거운 시선.

마치 진실 여부를 파악하려는 의도 같았다.

잠시 후, 아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가는...."

"'그'에 대한 정보 그리고 알렉스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

"거래 성립이군."

카멜은 고민 없이 수락했고, 아케인은 품에서 통신구로 보이는 작은 구체를 내밀었다.

자신의 이름으로 뎀토어와 직접 거래할 수 있는 통신구였다.

"설명을 잘해야 할 겁니다. 쉽게 믿지 않을 테니까."

"마녀들의 천적은 마법사가 아니야. 흑주술사들이지."

카멜의 답에 아케인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어느 정도 수긍한 표정이었다.

"그럼, 신명의 부름이 당신 곁에 함께 하길."

아케인은 공손히 예를 표한 뒤, 카멜을 뒤로한 채 멀어져 갔다.

카멜은 떠나는 그를 더는 잡지 않았다.

아케인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 순간, 카멜은 통신구를 움켜쥐곤 이를 악물었다.

"영지로 돌아간다."

뎀토어.

솔직히 지금 자신으론 교섭하기 버거운 상대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 없이 상황을 뒤집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통로 너머엔 오르도르 숲이 있다.'

토바른 출신의 인간이 헬 그라임 영역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노예' 밖에 없다. 그럼 그들이 향할 장소는 오르도르 숲밖에 없다.

헌트에는 마녀 릴리가 존재했으니까.

'놈이 오르도르 숲을 움직이기 전에 손을 써야 해.'

지금부터 시간 싸움이다.

뎀토어와 손을 잡기 위해, 또 손을 잡은 후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대비하려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헌트…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단 한 번.

뎀토어를 앞세운다면 아직 뒤집을 기회가 한 번 남았다.

카멜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타버린 성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큰 숲을 천천히 가로지르던 아케인은 빛바랜 숲 앞에서 멈춰 섰다.

주변에 도착한 순간, 지독한 정적이 주변을 감쌌다.

벌레 우는 소리도, 새소리도 일절 들리지 않았다.

산 자들을 증오하는 숲.

토바른에서 헬 그라임으로 넘어가기 위해선 '유령의 숲'을 무조건 지나야 했다.

숲의 경계에 발을 디디기 전에 아케인은 앞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카멜의 피가 묻은 손수건.

아케인은 그 피를 조용히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특성이 '시간'이라, 그자가 관심을 가질 수도 있겠어."

특별한 피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존재가 떠올렸다.

피를 마시는 잔.

조용히 입가에 미소를 그린 아케인은 유령의 숲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182화 배고파

새 삶을 위해 탈출했던 통로 바깥은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땅이었다.

어두운 데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지만, 1만에 달하는 대규모 인원을 훤히 노출된 장소에 계속해서 놔둘 수 없었다.

달조차 구름에 가려진 암흑 사이로 칼은 대규모 무리가 쉴만한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이곳이 좋을 것 같습니다."

"당장 사람들을 옮기겠습니다."

다행히 날이 밝기 전에 칼 일행 중 한 명이 근처에 괜찮은 장소를 발견했다.

주변을 둘러본 하인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의 지시에 대규모 무리가 자리 잡은 장소는 갈대가 수북이 쌓인 들판이었다.

바람도 막아주고, 대규모 인원을 전부 수용할 수 있는 크기여서 잠시간 은신처로 사용하기 좋은 장소였다.

"날이 밝으면 수색에 나설 겁니다. 그전까지 사람들을 통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하인즈는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토바른이 아니다.

2지역과 오르도르 숲의 경계 사이.

위쪽은 헬 그라임의 영역이 아래쪽은 오르도르 숲의 영역이라 어느 곳으로 향하든 안전하지 않았다.

불안함이 드는 장소라서 그럴까.

하인즈는 숨 쉬는 공기마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분들은 언제쯤 의식을 차릴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제 말에 따라주십시오."

"그런데, 괜찮으신 겁니까?"

"저요? 전 팔팔합니다."

하인즈는 뭔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지만, 입을 다물곤 병사들을 챙기기 위해 떠나갔다.

칼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구석 자리를 바라봤다.

아서부터 시작해서 릴리, 록터까지.

주요 인물들이 전부 의식이 없는 상태라 당장 갈 길을 잃은 상태였다.

'마녀라도 깨우면 숲으로 가는 길이 열릴 것 같은데....'

딱 봐도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은데, 일어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깨우려고 시도했지만, 저 발발이 같은 강아지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다가갔다가 된통 물려서 왔는데, 또 보내는 건 포기했다.

저 강아지의 정체를 아서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일단 이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다려볼 생각이었다.

'모두 지쳤으니까.'

블라이어 영지에서 광산으로 또 통로로, 모두가 목숨을 건 이동을 한 탓에 자리를 잡자마자 취한 듯 잠들었다.

그렇게 조용히 하루가 지나갔다.

"이리 모여."

화창한 햇살이 내리쬐는 아침.

날이 밝자 칼은 일행을 한군데로 모았다.

모두 여덟.

칼은 이 주변 수색을 명했다. 각자 다른 방향으로 일행을 보내면서 두 가지를 주지시켰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올 것.

그리고 인간과 최대한 접촉을 피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시와 별개로 대원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아니, 정확히 눈빛이 묘했다.

"왜 떠나가는 놈들마다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아, 아닙니다."

"불만 있어? 뭔데?"

하나둘 흩어지기 전에 칼을 힐끗 바라봤는데, 누구도 칼의 질문에는 답을 회피하는 모습이었다.

칼은 그런 반응을 보며 싱겁다며 피식 웃었다.

멀어지는 일행을 보며 칼은 엘튼을 떠올렸다.

'블라이어 기마병을 잘 속이고 탈출했겠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쯤 엘레토르 성곽으로 향하고 있거나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 자리가 내 자리였어야 했는데....

자신을 대신해 꿀 빨고 있을 엘튼을 생각하니 갑자기 배가 아파 왔다.

시야에 일행들이 전부 사라졌다.

"별일 없겠지?"

칼이 일행을 보낸 방향은 전부 헬 그라임의 영역이었다.

수색을 보낸 건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대신 아서의 경고가 있었기에 숲으로는 접근조차 시키지 않았다.

칼은 고개를 돌려 드넓게 펼쳐진 색바랜 숲을 응시했다.

산 자들은 들어갈 수 없는 장소.

유령의 숲.

잠시 고민하던 칼은 앞으로 일을 상의하기 위해 하인즈를 찾아갔다.

"눈부시네."

빛나는 풍경 앞엔 하인즈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있었다.

그런데,

"헉!"

"응?"

"으아아아앙!"

"엄마!"

어두운 새벽녘과 달리, 칼을 바라보는 인파들의 반응이 이상했다.

칼이 앞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하인즈는 움찔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고, 주변에 있던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더니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

칼은 주변 반응을 살피며 서서히 미간을 좁혔다.

왜 아이들 눈을 가리는 건데?

내 모습이 어때서?

칼은 그제야 수하들의 눈빛을 떠올렸다.

녀석들은 자신을 보며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말 괜찮으십니까?"

"제가 이상합니까?"

"머리에 피딱지가...."

"시발."

녀석들이 입을 꾹 다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머리 가운데가 홀라당 벗어진 상태였다.

핏물도 흘러나왔는지 피부가 붉게 물들었다.

아서와 함께 움직이면서 몰골이 엉망이 됐기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상태가 심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건 칼의 착각이었다.

'…무슨 인상이.'

병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더럽다는 말을 넘어 살벌했다.

안 그래도 칼자국이 얼굴에 새겨진 인상인데, 피투성이 머리 때문에 더욱 험악하게 보였다.

게다가 건장한 덩치에 외팔.

투견 같은 외모에 사람들은 절로 시선을 마주하자 눈을 내리깔았다.

잠시 후, 칼은 중대한 결심을 한 듯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피하고 싶었지만,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끔찍한 고통을 두 번이나 겪었다.

세 번은 피하고 싶었다.

아니, 잡을 머리털이나 있으려나?

"부탁 좀 합시다."

"...?"

칼은 하인즈에게 자신의 단검을 건넸다.

여유가 생긴 지금, 정리가 한 번 필요할 것 같았다.

해가 서서히 지고 있다.

수색을 마친 일행이 하나둘 복귀했다. 하지만 일행들 모두 보고하기 전에 칼의 머리를 바라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런 대원들의 반응에 칼은 사납게 웃으며 단검을 겨눴다.

"뒤가 없는 사람 알지? 내가 지금 딱 그래. 이빨만 보여봐. 전부 똑같이 만들어줄 테니까."

"...."

대원들은 고개를 강하게 끄덕이며 입을 꾹 다물었다.

매끈한 민머리.

대머리가 되고 싶진 않았다.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대원들이 모두 무사히 복귀하자, 칼은 하인즈를 불렀다.

하인즈가 도착하자, 대원들은 수색 결과를 보고하기 시작했다.

대부분 아무것도 없는 확 트인 풍경만 보고 왔는데, 단 한 명만 달랐다.

"마을이 있어?"

"제법 큰 마을입니다."

"도시 규모라는 건데."

경계에 세워진 최전선 도시인 것 같았다. 그럼 평범한 마을과 다를 것이다.

"안쪽은?"

"잠시 들어갔다 왔는데...."

마을 사람보단 사냥꾼들로 보이는 무장 인원이 다수 섞여 있는 모습이라고 했다.

시장이 발달했고, 경비도 방어 수준도 높은 것 같았다.

"노예들을 다룬다고?"

"네. 수많은 마차에 이종과 인간들이 갇혀 있는 것을 봤습니다."

지역 경계인 만큼 타 지역 사람들을 노예로 납치한 뒤 거래를 하는 장소인 것 같았다.

헬 그라임은 노예 제도가 활성화된 지역이었으니까. 그럼 노예를 사냥하는 이들부터, 노예를 사려는 이들까지 온다는 건데.

"마법사로 보이는 무리도 보였습니다."

"우리 존재가 들키면 귀찮아지겠네."

역시 가장 좋은 방법은 엮이지 않은 것이다.

하루가 더 지났을 때, 록터의 의식이 돌아왔다.

리옹과 와일리.

두 명의 5성급 기사들을 상대로 버텼던 후유증이 한꺼번에 오면서 정신을 잃었는데, 다행히 큰 이상은 없는 듯 보였다.

"어깨는?"

"괜찮다."

"그래서 꿰뚫린 상처니 부목이라도 대. 움직이면 상처가 터질 수도 있으니까."

무리 중 노역장이 치료에 일가견이 있었다. 과거 치료사라고 들었는데, 실력이 제법 뛰어나 보였다.

노역장이 발 벗고 나서서 록터를 치료하자 록터는 반나절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록터가 모습을 보이자, 다소 불안했던 분위기가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록터 펠리스의 존재감은 확실히 무리의 안정감에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날 저녁.

주변을 둘러본 칼이 심각한 표정으로 일행들을 불러 모았다.

"식량이 없어."

"…그렇군."

"녀석은 아직이지?"

"이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쉽게 일어나지 못할 거야."

모든 힘을 긁어 쓴 아서는 이전에도 며칠간 의식이 없었다.

바닥난 잠력을 채우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결국 한동안은 이곳에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록터의 설명에 칼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탈출하는 데만 급급했던 터라, 식량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아직은 버틸 만한 것 같지만, 시간이 더 지나면서 굶주림에 대한 부작용이 분명 나올 것이다. 벌써 일부에선 배고프다며 칭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이 잡혔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건 하책이야. 방법을 찾고 바로 움직여야 해."

"하지만 당장 1만이 먹을 만한 식량을 이곳에서 구하는 게...."

하인즈는 말끝을 흐렸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을을 방문해야 할 것 같은데."

"거긴 위험하지 않을까요?"

"무역이 활발한 도시이니 위장을 잘하면 괜찮을 겁니다. 문제는 돈인데...."

칼의 물음에 모두의 시선이 하인즈에게 쏠렸다.

여기서 돈이 있을 만한 이는 귀족인 하인즈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인즈는 쓰게 웃고는 품에서 작은 보석 주머니를 꺼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양은 아니었다. 식량 하루치도 힘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낙심하는 그때, 록터가 한 곳을 응시하며 말했다.

"돈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또 있다. 이것보다 훨씬 많을 거다."

"뭐? 누구… 아!"

뭔가를 떠올린 칼은 릴리가 잠든 방향을 바라봤다. 그녀 곁을 지키는 사나운 강아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서에게 이번 작전에 관해 전달받으면서 저 강아지의 정체도 알게 됐다.

숲의 파수꾼, 케로베로스.

'유령의 숲 문지기.'

그리고 입속에 거대한 아공간이 존재하는 마수라는 것을 말이다.

통곡의 언덕에서 거대한 주술 인형을 작은 입으로 꿀꺽 삼켰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릴리가 자랑스럽게 외쳤던 말도.

[내 황금은 모두 케로스의 배 속에 있어! 저 산만큼 빵을 사 먹을 수 있다고 아서가 그랬다고.]

저 강아지를 털어야 한다.

이 일을 해결할 수 있는 인물은 모두 의식이 없는 상태.

잠시 고민하던 칼이 앞으로 나섰다.

"나한테 맡겨라."

"방법이 있나?"

칼은 대답 대신 머리를 쓸어내렸다.

"뒤가 없는 사내의 모습을 보여주지."

뭐가 결심한 듯 칼은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푹신한 갈대 풀이 쌓인 공간에 두 사람이 잠에 든 모습으로 누워있었다.

아서와 릴리.

릴리 다리 밑엔 작은 강아지가 앞발을 내민 채 혀를 할짝이고 있었다.

칼이 다가오자, 케로스는 두 귀를 쫑긋 세우며 얼굴을 들었다.

"야. 혹시 인간 말 알아듣냐?"

"...."

"저 숲으로 가고 싶어. 너는 가능하다며? 지금 갈 수 있냐?"

역시나 반응이 없다.

역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건가?

순간, 아서가 준 고기에 환장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고기 먹고 싶지 않냐? 지금 사러 갈 건데."

고기란 단어에 케로스가 혀를 길게 내밀곤 꼬리를 살랑 흔들기 시작했다.

이 강아지 새끼.

사람 말 알아듣잖아?

"황금이 필요해. 황금 무게만큼 고기를 가져다줄게."

"...."

"두 배, 그 이상은 안 돼. 내가 손해다."

누구라도 이 대화를 엿들었다면 미친 사기꾼 새끼라며 멱살을 움켜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마수 케로스.

그는 황금과 고기 사이를 잠시 저울질하더니 입속에서 묵직한 황금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두 배.

이 정도면 완벽한 거래다.

케로스의 경제 관념에 고기는 황금보다 위였다.

"가즈아!"

"으아아아!"

황금 보따리를 맨 칼은 영웅 대접을 받으며 도시 쪽으로 사라졌다.

도시로 직접 들어가 거래를 하는 일이라, 위기 감별사인 칼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일행 중 반수인 넷이 보조했고, 헬 그라임의 문화에 지식이 있는 하인즈가 함께했다.

다섯이 도시로 향하는 길.

칼은 일행들을 잠시 떨어트리곤 하인즈에게 은밀히 붙었다.

"마법사들의 도시니까. 굉장한 물건들도 있겠군요."

"물론이네. 마법 물품점도 분명 존재할 거네."

"꼭 들려야겠군요."

"우린 식량을...."

하지만 칼의 머릿속에 이미 식량 다음이 계획에 잡혀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헬 그라임의 도시에 방문할지 모르는 상황.

민머리를 슥슥 매만지며 마법사들에 대한 신뢰를 성처럼 쌓아갔다.

분명 그것이 존재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마법사도 대머리가 존재할 테니까.

칼이 일행을 데리고 식량을 구하러 가는 사이, 시간은 흘러 하루가 지나갔다.

"…음."

인기척에 록터는 곧장 둘에게 다가갔다.

아서와 릴리.

그중....

"배고파."

배고픈 릴리가 의식을 차렸다.

183화 편안해

릴리는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긁적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눈꺼풀이 무거운 것이 아직 잠이 덜 깬 듯 보였다.

"응?"

손등을 스치는 따뜻한 감촉.

시선을 돌리니 아서가 잠을 자듯 누워 있었다. 그 얼굴을 내려다본 것도 잠시 우렁찬 꼬르륵― 소리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그를 흔들었다.

"배고파. 배고… 아앗!"

"멍!"

케로스가 힘차게 릴리를 덮친 후 꼬리를 흔들며 얼굴을 핥았다.

얼굴을 휙휙 피하던 그녀는 케로스의 턱을 밀어내곤 물었다.

"밥은?"

"멍!"

"어, 없어? 거짓말이지?"

계속 멍멍거리는 케로스.

짖는 소리에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다양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잠든 이후 상황을 듣는 것 같았다.

"헬 그라임?"

눈썹을 찡그린 그녀는 눈을 감고 허공에 손을 흔들었다.

손끝에 걸리는 이질적인 기운.

토바른에선 느껴지지 않던 풍부한 마력 때문인지 이질감이 느껴졌다. 오르타들이 경고하는 금지(禁地), 헬 그라임이 맞았다.

마법사 집단, 뎀토어의 영향력이 깃든 장소 말이다.

"여긴 위험한데...."

마법사와 마주쳐서 피를 안 본 적이 없기에 릴리는 인상을 찡그렸다. 위기에 둔감한 그녀조차 헬 그라임에 대해선 거부감이 있었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시야가 어두워지자 릴리는 고개를 빼꼼 들었다.

록터였다.

"길을 열 수 있나?"

"길?"

"그대라면 엘레토르 성곽과 이어진 숲길을 열 수 있다고 하더군."

"누가 그래?"

"녀석이."

록터의 시선을 따라 아서를 잠시 바라본 그녀는 입맛을 다셨다. 아서가 말한 의미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야. 케로스지."

"케로스? 저 작은 짐승을 말하는 건가?"

"응. 케로스는 숲의 파수꾼이거든."

숲의 파수꾼 케로스.

유령의 숲 문지기이기도 한 케로스는 유일하게 숲 전역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존재였다.

"숲이 얼마나 넓은데, 오르타들도 숲에선 헤맬걸?"

"그럼 작은 짐승에게 부탁할 수 있나? 길을 열어달라고."

"내 부탁이라면 케로스가 길은 열어 줄 거야. 근데 어차피 다 죽어."

"…뭐?"

예상치 못한 답변에 록터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 죽는다고?

"유령의 존재 때문인가?"

"유령? 그들을 회피하는 방법은 내가 알고 있어. 하지만 마녀들은 아니야."

"마녀?"

"마녀들이 당신들을 다 죽일 거야. 숲의 규칙이거든."

"그대가 있어도 말인가?"

"내가 인정한 몇몇은 괜찮겠지."

숲을 통과하려면 자격이 필요한 것 같았다.

"전부를 인정할 순 없다는 건가?"

"저 많은 이를 다 인정하라고? 내가 왜?"

"살기 위해 나를 따라온 이들이다."

"숲과 상관없는 일이야. 마녀들도 인정하지 않을 거야. 인간은 마녀 편이 아니거든."

록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신음을 삼켰다.

깜빡이는 두 눈에 악의가 전혀 없다.

사실 그대로를 말해주는 것이다. 이들 전부를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면 마녀들의 공격을 받을 거라고.

그녀 자신도 숲의 파수꾼도 숲의 규칙으로부터 막아줄 수 없다고 말이다.

록터의 시선이 의식이 없는 아서에게 향했다.

녀석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으로 우리를 이곳으로 이끈 거지?

"다른 방법이 있나 보지."

"…뭐?"

릴리는 턱을 괸 채 아서의 볼을 쭈욱 잡아당겼다.

"그가 헛소리한 적은 없잖아."

"방법이 없다고 말한 건, 마녀인 그대 아닌가?"

"난 저들을 살릴 방법을 몰라. 하지만 그는 다를지 모르지. 지금껏 그가 말해서 실패한 적이 있었어?"

"...."

"없지? 그러니 사흘간 요리해주겠단 약속도 잘 지킬 거야. 그렇지 케로스?"

"멍!"

록터는 아서를 괴롭히는 릴리는 말없이 바라봤다.

순간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마녀조차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데, 동료인 자신은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록터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생각할수록 부끄럽다.

그는 릴리 앞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

"고맙다."

"응? 뭐가?"

"잠시 잊고 있던 것을 확실히 알게 됐다."

"그럼, 밥은?"

릴리의 반응에 록터는 피식 웃었다.

쉬울 것 같으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여인이었다. 이런 여인을 아이처럼 다루는 아서가 대단해 보였다.

"오늘 중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거다."

"난 샌드위치로."

"멍!"

"뭐? 못생긴 칼이 고기를 그렇게 많이 가져다준다고 했어? 갑자기 왜?"

"...."

"응? 왜 말을 안 해?"

케로스의 목덜미를 잡고 흔드는 릴리를 놔둔 채 록터는 등을 돌렸다.

그녀의 말이 옳다.

애초에 아서 하나만 보고 여기까지 왔다.

1만이 넘어가는 대규모 인파가 자신만 바라보는 상황이라 부담감에 마음이 급해졌던 모양이었다.

자신은 혼자가 아니다.

헌트.

소속감을 떠올리자,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과거 블라이어에서 단장으로 살았던 때와 전혀 다른 편안하고 기댈 수 있는 감정이었다.

늘 책임감만 앞섰던 자신이 한 사내에게 기대는 감정이라니.

생소하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결국 아서가 깨어날 때까진 이곳에서 버텨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 * *

"록터! 거짓말쟁이!"

"...."

날이 밝자 기다린 듯 릴리가 씩씩거리며 록터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하루가 지났지만, 식량을 구하러 갔던 칼 일행은 돌아오지 않았다.

굶주림으로 하루 이틀이 지나자, 사람들의 표정에도 불안감이 깃들었다.

다만, 불만을 가진 이들은 없었다.

광산 노역, 노예, 연구 제물.

이곳에 모인 이들은 대부분 삶이 나락으로 빠졌다가 록터의 손에 구함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굶주림은 별일 아니었고, 그 이상으로 록터를 향한 신뢰가 대단했다.

그가 기다리라고 했으니,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다만, 한 여인과 한 마리의 개만이 록터를 향해 반기를 들었다.

"밥! 샌드위치!"

"멍!"

"기다려라."

나름 사납게 표정을 짓고 있는데, 록터의 눈엔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다.

릴리는 재차 머리로 록터의 가슴을 밀어내며 노려봤다.

많이 배고프면 신경이 날카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처음 알게 됐다.

"배고픈데 검은 왜 자꾸 휘두르는 거야! 더 배고프잖아!"

그녀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 행동. 바로 지루하고 반복적인 록터의 검술 훈련이었다.

"강해지기 위한 훈련이다."

"쓸데없어. 훈련은 한 번이면 되거든?"

"한 번으로 완벽해지는 훈련은 없다."

"가능해."

"완벽함에도 단단함이 다르다."

노력형 기사와 천재의 대화가 서로 이해될 리 없다.

특히, 어린 릴리에겐 더더욱.

"홀로 죽음 앞에 서 본 적이 없군."

"나도 죽을 뻔한 적 있거든?"

"그대 곁에는 늘 보호자들이 있지 않나."

"그래서?"

"홀로 서는 것에 익숙해진다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됐고. 밥은?"

"기다려라."

"자꾸 그러면 케로스 데리고 숲으로 가버린다?"

"그럼 녀석을 다신 볼 수 없겠지."

"...."

지금껏 자신이 화내면 모두가 눈치를 보곤 했는데, 록터는 겁박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확실히 단단함이 달랐다.

"두, 두고 봐!"

패배자의 뒷모습.

릴리와 케로스는 터덜터덜 아서 곁에 주저앉았다. 순간 아서가 괘씸해서 허벅지를 세게 꼬집었다.

"힝."

반응이 없자, 그녀는 아서 곁에 누워서 웅크렸다. 록터가 마지막에 했던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서를 다시 볼 수 없다라....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였다.

아서의 신명에 호기심을 느끼고 숲을 나왔다. 반년 정도 세상을 구경했고, 그를 만나 여행을 시작했다.

위기와 전투.

도주와 전투.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무척 강렬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아서에게 특별함을 느꼈다.

"편안해."

숲의 마녀들은 자신에게 늘 친절하지만, 눈빛에 '기대'란 감정을 품고 있다.

마법사들은 '악의'란 감정을, 인간들은 '공포'란 감정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특별한 존재.

모두가 자신을 특별하게 바라봤다.

하지만,

"편안해."

아서는 달랐다.

그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릴리는 그것이 너무 좋았다.

마치 자신에 대해 잘 아는 듯한 느낌?

오래된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기분이었다.

곁에 있으면 늘 즐겁고 편안했다.

아서의 팔에 머리를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쿠울―

저도 모르게 잠들었다.

그와 헤어지는 건 싫으니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목적을 위해 참는 것을 배우는 건 그녀에게 어색한 것이었다.

결국 잠을 자는 것으로 그녀는 배고픔을 회피했다.

* * *

해가 서서히 저물고 있다.

붉은 석양 사이로 바람에 나부끼는 드넓은 갈대숲이 펼쳐졌다.

나름 멋들어진 장관이었다.

록터는 흩날리는 갈대숲 사이에서 칼이 사라진 방향을 살폈다.

하루하고 반나절이 지났는데, 여전히 칼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지금 시간이라면 적어도 소식을 전할 사람을 보내와야 했다.

문제가 생긴 것일까?

칼 일행 중 한 명이 록터에게 다가와 의견을 구했다.

"내일도 오지 않으면 어찌할까요?"

잠시 고민하던 록터는 남은 일행을 불렀다. 일행 넷 중 한 명은 척후로 나갔고 셋이 록터 곁에 모였다.

"나와 같이 갈 한 명을 골라라."

"록터님이 직접 가실 겁니까?"

"칼이 오지 못했어. 그가 못 올 정도면 내가 직접 가봐야 한다."

"하지만 이곳은...."

"상황 파악만 하고 돌아오겠다. 문제 생기면 한 명을 보낼 테니, 아서가 깨어나면 그의 지시를 따르도록 해."

이전 경험을 보면 슬슬 아서의 의식이 돌아올 때가 됐다. 식량이 없으니 언제고 죽치고 있을 순 없었다.

움직이든가, 식량을 찾든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신이 없으면 이곳을 지킬 이는 릴리밖에 없었다. 다만, 그녀는 아서와 달리 인간에게 우호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그녀의 도움은 아서가 있기에 나오는 것.

아서를 핑계로 잠시 도움을 구하려고 하는데, 멀찍이서 척후로 나가 있던 일행이 다급히 이곳으로 달려와 소식을 알렸다.

"여러 대의 마차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적인가?"

"아닙니다. 일행이 타 있습니다. 문제는 뒤에 추적자들이 붙은 것 같습니다."

"전투조를 소환해."

갈대숲 한쪽에는 1천이 넘는 전투조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서 대기 중이었다.

하인즈의 병사들과 싸울 수 있는 남자들을 한데 모은 전력이었다.

전투조들을 불러 모으고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스름으로 물든 하늘이 순간 번쩍이더니 눈부시게 빛났다.

번쩍―

"...!"

푸른 벼락.

그리고,

쿠우우우웅―!!!

뒤이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마른하늘에 벼락이 떨어졌다.

벼락이 떨어진 장소는 마차가 달리는 방향이었다.

"마법...."

록터는 이를 깨물곤 일행에게 이곳을 지키게 한 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사의 등장.

그는 마법사와 싸운 경험이 없지만, 적어도 다수의 병력에게 엄청난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곳엔 1천의 전력 외에 1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마법사가 이곳에 접근하게 해선 안 된다.

* * *

"멍!"

"…알아. 케로스."

릴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대기의 기운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의 잔향이다.

기분 나쁜 마법사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저, 저기...!"

그때 일행 하나가 다급히 그녀에게 달려왔다. 도움을 청하기 위해 온 것인데, 릴리는 입을 꾹 다물 뿐 제대로 된 답을 주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면 단순한 싸움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숲에 분명 큰 영향을 줄 것이다.

"마, 마법사입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

거절하기도 수락하기도 힘든 상황이라 우물쭈물하는데,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황이… 어떻게 됩니까?"

"…아!"

익숙한 목소리에 릴리는 두 눈을 크게 뜨곤 황급히 뒤를 돌아봤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한 사내.

눈매를 찡그리며 목을 주물럭거리는 그 모습에 릴리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서 클레이튼.

그가 정신을 차렸다.

184화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악, 시발 내 눈!"

칼은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대기가 번쩍이더니 눈이 멀 것 같은 빛이 벼락처럼 터졌다.

바늘로 찌르는 듯한 고통이 눈을 찔렀다.

뒤이어 귀청이 떨어지는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콰아아아앙―!

"아악!"

"마, 마스터!"

땅이 뒤집히는 것 같다.

그 여파로 가장 후미에 있던 칼이 마차에서 튕겨 나왔다.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땅에 처박힌 후 그는 쉴 새 없이 굴렀다.

"…시발, 진짜 무시무시하네."

온몸이 망치로 두드린 듯 아팠다.

칼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다급히 뒤를 살폈다.

안개가 걷히듯 시력이 돌아오고, 자신이 탔던 마차가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게 보였다.

멈추면 어쩌나 했는데 상황 파악을 잘해서 다행이었다.

식량 마차도, 일행도 무사했다.

다행이었다.

칼은 마차를 따라가는 대신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다음 것은 진짜 못 피할 거 같거든."

마법사들의 마법은 한 방, 한 방이 살 떨릴 정도로 강력했다.

조금 전 벼락 마법도 위기를 감지하고 다급히 우회하지 않았더라면 직격으로 처맞았을 것이다.

마법사한테 거리를 주면 안 된다.

앞서 세 대의 마차를 잃고서야 칼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짙은 먼지 사이로 놈들이 나타났다.

손에 들린 단검이 벼락같이 움직이자, 앞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개 같은 새끼들. 텃세도 정도껏 부려야지."

먼지 사이로 우르르 나타난 사냥꾼 무리.

그중 십수 명이 칼의 투척술에 명을 달리했다. 칼의 실력에 긴장한 듯 사냥꾼들은 말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칼은 단검을 움켜쥐고 무리 너머를 응시했다.

잠시 후,

"크에에에엑!"

짙은 먼지를 뚫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괴성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도마뱀 괴물들.

덩치는 말 다섯 마리를 합친 것보다 거대했다.

모두 두 마리로, 등에 큰 안장이 착용되어 있었는데 칼은 안장을 차지한 로브의 존재들을 올려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펄럭이는 로브 자락엔 이니셜 'D'가 새겨져 있었다.

"팔자 좋네. 뎀토어 출신들은 타는 것부터가 달라."

뎀토어(Demtor).

마차를 겨냥한 지팡이에서 빛이 흘러나오자, 칼은 전력을 담아 마법사들에게 단검을 투척했다. 죽일 수 있을 거라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캉! 카아아앙―!

"...!"

거친 쇳소리가 터지며 단검들이 투명한 실드에 튕겨 나갔다.

4성의 기운이 실린 단검.

쩌적! 금이 가는 실드에 마법사들은 멈칫하곤 지팡이를 칼에게 겨누었다.

"네놈이 우두머리군."

"포기한 건가?"

마법사들의 시선을 끄는 데는 성공했다.

칼을 내려다본 푸른 로브의 마법사가 사냥꾼들에게 지시를 내리자, 사냥꾼 무리는 말 머리를 돌려 마차들을 뒤쫓았다.

칼은 그들을 잡지 않았다. 발목은 잡히겠지만 사냥꾼들에게 당할 일행이 아니었다.

눈앞의 두 녀석만 견제하면 된다.

솔직히 지금 상황에선 한 명도 부담스러웠다. 실력 차이라기보단 적을 모르는 부담감이 더 컸다. 마법사와의 전투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돈 많은 마법사 나리께서 왜 우리를 노리는 거지? 뭐 먹을 게 있다고?"

"우리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 생각했나?"

"뭐라는 거야?"

"심부름꾼이라니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온 놈이로군."

"…심부름꾼?"

"몰라서 묻는 건가?"

"시발, 다짜고짜 마법부터 날리는데 물어볼 시간이 어딨어?"

마법사 하나가 품에서 반짝이는 물건을 꺼냈다.

아는 물건이었다.

케로스가 뱉어냈던 황금 장신구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마녀의 악취가 맡아진다. 마녀들이 너에게 뭘 시켰지?"

"…멍청한 강아지 새끼, 이런 건 미리 알려줬어야지."

아니, 말해줬어도 못 알아들었으려나?

"마법 상점에 마녀의 물건을 건넨 이유가 뭐지? 무슨 꿍꿍이냐?"

"그냥 물건 하나를 샀을 뿐인데…."

"물건? 마탑 물건에 또 사악한 짓을 하려는군."

"아, 시발, 진짜 미치겠네."

머리를 움켜잡고 싶은데 허전했다.

저들이 오해하는 물건을 떠올리니 갑자기 서러워졌다.

도시로 몰래 잠입한 뒤 상인으로 위장해 식량을 구할 때까지만 해도 문제가 전혀 없었다.

수많은 외지인이 드나드는 경계 도시라 외지인에 대한 경계가 느슨했기 때문이다.

계획대로 식량을 실을 큰 마차들을 여러 대 구매했고, 식량도 꽉꽉 채워 넣었다.

어디서나 황금은 귀했기에 거래도 쉽사리 성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방문한 마법 상점.

신세계를 떠올리게 하는 신비한 마법 물건들을 살피며 칼은 결국 염원했던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마력의 발모제!

"그 물건을 내놔라."

"이 시발놈들아! 그런 게 아니라고!"

"닥쳐라! 마녀는 어디 있지?!"

"마녀랑 상관없어!"

"헬 그라임에서 마녀의 심부름꾼은 화형, 그 혈연관계도 화형, 인연이 있는 자들도 전부 화형이다."

"...."

"마녀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말해준다면 고통 없이 보내주지."

"와, 시발, 세상 록터 같은 꼴통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네. 너흰 티키타카도 모르냐?"

"시간 낭비했군."

그 순간, 뒤쪽에서 소란이 터져 나왔다.

멈춰진 마차 대형을 위협하는 사냥꾼 무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붙잡힌 것 같았다.

'막을 수 있겠지?'

일행을 믿었지만,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식량을 구하고 도시를 나왔을 땐 모두 열 명이었다. 하인즈가 마차를 몰 인원이 더 필요하다고 해서 휘하 기사 넷을 더 데려갔기 때문이다.

원래는 큰 위협이 안 될 상대인데, 추격 중 쏟아지는 마법에 기사 셋이 마차와 함께 잿가루로 변했고, 다른 이들도 마법에 온전한 상태가 아니었다.

"빌어먹을!"

카장―!

칼은 뎀토어의 마법사들과 부딪쳤다.

멈춰진 마차들 위로 큰 마법이라도 떨어지면 전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냥꾼들의 목숨 따윈 벌레처럼 여기며 마법을 퍼붓는 것을 봤기에 무작정 시선을 끌며 덤벼들었다.

파지지지지직―!

퉁!

두 마법사의 지팡이에서 마법이 쏟아졌다.

전격이 쏟아지고, 불덩이가 떨어졌다.

"…끄!"

자신은 토바른 내에도 적수가 얼마 없는 4성 암살자였다.

실력은 자신이 더 우위인 것 같은데, 전투가 너무 까다로웠다.

원거리 마법.

그리고 접근하려고 하면 두 도마뱀이 사납게 이빨을 들이밀며 물어뜯으려고 했다.

근접 공격이 힘들고, 원거리 회피는 더더욱 힘들었다.

특히 전격.

눈부시게 빠르다.

오라를 터트리며 마법을 튕겨냈지만, 후유증이 누적되기 시작했다.

몸이 서서히 말을 듣지 않는다.

제대로 붙지도 않았는데 지독한 위기감이 올라왔다.

이건 못 이긴다.

도주를 떠올렸을 때, 거대한 꼬리가 칼의 몸을 후려쳤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이었다.

"크억!"

칼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철저한 계산 아래 이성적으로 싸우는 원거리 상대.

마법사란 족속에 대해 듣긴 했는데, 직접 부딪쳐보니 이건 뭐 철옹성과 싸우는 기분이다.

우우우우웅―!

"자, 잠깐!!!!"

자신이 쓰러진 사이, 한 마법사가 거대한 불꽃을 소환했다.

긴 영창 끝에 허공에 큰 불덩이가 피어올랐다.

지팡이를 겨눈 방향은 칼이 아닌 한창 전투가 벌어지는 마차 방향이었다.

사냥꾼들이 멀쩡한데도 마법을 날리려는 모습에 칼이 다급히 외쳤지만, 마법사는 비틀린 미소를 보일 뿐이었다.

"마녀를 돕는 자는 모조리 화형이다."

"아, 안 돼!"

거대한 불꽃이 허공을 꿰뚫었다.

하늘이 붉어진 순간, 전투는 멈춰졌고 사냥꾼들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마차 속에 웅크리고 있던 하인즈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불꽃이 짓쳐온다.

죽음을 떠올린 순간, 하인즈의 눈동자에 하늘로 솟구치는 검은 짐승이 잡혔다.

검은 털의 케르베로스.

그 등에 탄 여인이 천천히 손을 뻗자, 매섭게 짓쳐오던 거대한 불꽃이 불씨를 뱉어내며 사그라들었다.

마법 무효화.

불덩이를 소환했던 마법사는 갑자기 사라진 마력에 두 눈을 부릅떴다.

뭉쳐 있던 마력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빈손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른 마법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크아아아아앙―!!!

거대한 검은 짐승이 엄청난 속도로 짓쳐왔다.

그 짐승을 탄 여인을 본 순간, 마법사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뎀토어에 가입하면 가장 먼저 익혀야 하는 매혹적인 얼굴.

검은 긴 머리.

검은빛의 눈동자.

그리고, 손거울.

"리, 릴리 베이스!!!!"

"당장 알려!"

공포의 마녀가 경계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사는 황급히 로브에 손을 대었다.

로브에 새겨진 이니셜 D가 빛을 터트리더니 하늘 위로 솟구쳤다.

하늘에 백색 D가 마크처럼 새겨지며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우린 시간을 벌어야...!"

퍼억!

신호를 보낸 마법사가 동료를 바라본 순간, 동료의 상체가 푸른 빛과 함께 찌그러지더니 사라졌다.

거대한 화살이 동료와 그가 탄 호타루의 머리를 꿰뚫었다.

핏물이 솟구치며 허공을 수놓았다.

"…이익!"

남은 마법사는 다급히 실드를 소환했다.

카앙! 카아앙!

투명한 막에 불꽃이 튀었다.

심부름꾼이 자신을 향해 단검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아, 안 돼!"

다가온 릴리의 눈빛이 검게 물든 순간 실드가 스르륵 녹아내렸다.

무효화된 마법 사이로 칼의 투척 단검이 마법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그가 죽자, 도마뱀 괴물, 호타루가 통제를 잃고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위협적으로 꼬리를 흔들며 칼을 공격하는 모습.

그 위로 아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으적―

호타루의 머리에 단검이 박히고, 검 자루에 주먹을 매섭게 내리쳤다.

단검이 호타루의 뇌를 파고들자, 거대한 괴물이 지푸라기처럼 축 늘어졌다.

"칼!"

"제길, 쉴 틈을 안 주네!"

내가 한 곳을 가리키자, 칼이 마차 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칼이 뒤에서 지원을 시작하자, 사냥꾼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마법사들이 죽은 순간부터 이미 끝난 싸움이었다.

사냥꾼들은 말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케로스의 이빨에 모두 목숨을 잃었다.

그사이, 난 죽은 마법사들을 살폈다.

"운이 좋네."

단 두 명.

게다가 마법사들이 탄 이동 수단이 호타루였다.

거대 도마뱀은 겉으로 보면 무척 강해 보이는 비주얼이지만, 호타루는 뎀토어 출신 마법사 중 등급이 가장 낮은 이들에게 주는 이동 수단이었다.

"그런데도 못 막았네. 빌어먹을."

뎀토어 출신이라 그런지 판단력이 더럽게 빨랐다.

난 하늘을 올려다보며 짧게 혀를 찼다.

하늘에 새겨진 거대한 이니셜 D.

그중 백색은 오직 릴리를 발견했을 때 보내는 뎀토어의 긴급 신호였다.

시간이 없었다.

릴리가 노출됐다면 근처에 뎀토어 마법사들이 들이닥칠 거다.

만에 하나 근처에 '벨루가'를 탄 마법사라도 나타나면 전부 목숨을 걸어야 했다.

'지금은 헬 그라임과 엮일 때가 아니야.'

학살자 카멜도 정리 못 한 상태에서 헬 그라임 쪽으로는 오줌도 누면 안 된다.

실력을 더욱 성장시키고, 템빨도 최고로 맞춰야 그나마 접근 가능한 지역.

난 황급히 일행을 모았고, 곧장 갈대숲으로 움직였다.

한 차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기 때문일까.

덜컹거리는 마차 안은 침묵이 흘렀다.

난 사태 파악에 나섰다.

대체 뎀토어의 마법사들이 왜 경계까지 쫓아온 걸까?

이유를 알아야 했다.

"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제가 뭘요?"

칼은 대답 대신 머리를 쓸어 넘겼다. 매끈하니 더 기분이 더러웠다.

그때 마차에 웅크리고 있던 케로스가 코를 벌렁거리더니 칼에게 다가왔다.

"멍!"

"품에 뭘 넣은 겁니까? 케로스가 마탑 물건 같다고 하는데, 설마 그것 때문에?"

"시발, 아니야! 아니라고!"

칼이 억울한 얼굴로 품에서 병을 꺼낸 순간,

"...."

모두가 침묵했다.

병 밑에 금이 가 있었다. 안에 든 액체가 모조리 흘러내린 것 같았다.

칼은 두 눈을 끔뻑이곤 옷깃을 열었다.

축축하게 젖은 가슴.

아니다.

절대 아니리라 생각했다.

185화 쉬자

밀 포대가 한가득 실린 마차들이 갈대숲으로 줄지어 들어왔다.

익숙한 밀 냄새에 모두가 기대감을 드러냈지만, 당장 음식을 해먹을 상황이 아니었다.

뎀토어를 의미하는 이니셜 D를 잠시 올려다본 난 서둘러 하인즈를 불렀다.

"바로 사람들을 이동시키면 됩니다. 록터 경이 준비를 해놨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하인즈는 곧장 병사들을 불러 모은 뒤 인파가 있는 장소로 달려갔다.

갈대숲이 순간 부산스러워졌다.

차례로 줄지어 갈대를 헤치며 나오는 사람들.

길게 늘어진 행렬 사이로 록터가 마차 쪽으로 다가왔다.

그를 태운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마차 뒤로 하인즈가 사람들을 이끌고 따라붙었다.

무슨 이유인지, 사람들의 표정이 밝고 발걸음이 가볍다.

식사가 곧 배불리 이뤄질 것이란 말을 잘 전달한 것 같았다.

당장 위급함을 알리기보단 굶주림의 욕구를 이용하는 것이 혼란 없이 무리를 이끌기 좋았다.

실제로 숲 안에서 식사를 할 생각이기도 했고.

'소화가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문 너머로 지평선을 채운 잿빛의 숲이 펼쳐졌다.

유령의 숲을 마주했다.

뒤쪽을 살폈는데 우려와 달리 마법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신호탄이 터졌지만, 헬 그라임의 끝자락이라 시간이 걸리는 것 같았다.

'벨루가라면 바로 올지도 모르지.'

긴장한 채 하늘을 살폈는데, 숲 코앞까지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무사히 숲으로 들어설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로 들어가죠."

"쉴 틈이 없네. 쉴 틈이…."

칼이 상처를 치료하며 투덜거렸다.

일행들은 부상자를 치료하고 있었고, 릴리도 다소 무리했는지 포대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케로스만 고기 주머니에 코를 박고 군침을 흘릴 뿐이었다.

"숲은 위험하지 않나?"

"여기보단 덜 위험할 겁니다."

"유령의 숲이다. 저 많은 이들이 모두 안전할 수 있을까?"

록터의 물음에 마차에 탄 일행이 나를 바라봤다.

간절함이 엿보이는 눈빛이다.

딱 봐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쉬고 싶죠?"

"말이라고 하냐? 하루라도 좋으니까. 편하게 눈 좀 붙이고 싶다. 이건 뭐, 실험체 감옥이 더 그리울 정도라고."

"그 정도입니까?"

"그 정도라니? 감옥에선 그래도 잠은 재워줬다고!?"

칼은 질린 듯 고개를 흔들었다.

록터를 만난 직후부터 추격에 시달렸다.

블라이어를 탈출하고, 전투하고, 다시 블라이어로 돌아오고, 전투하고를 반복했다.

언제 편히 쉬었는지 가물가물했다.

카멜의 손아귀에서 겨우 탈출했더니, 이젠 또 마법사가 달려든다.

긴장감의 연속.

쉬고 싶었다.

그건 록터도 일행들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한계까지 다다른 상태다.

휴식이 필요했다.

'나도 마찬가지고.'

의식이 돌아오긴 했는데 레토의 배려로 가능했던 거였다. 나와 달리 레토는 심장을 매개체로 주변 상황을 살필 수 있었으니까.

상황이 다급했기에 회복 전에 나를 깨운 것이었다. 의식은 회복할 수 있었지만, 조금 전 전투에서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란 것을 파악했다.

지금 전투는 무리다.

[휴식이 필요하다.]

"레토가 휴식을 입에 담을 줄 몰랐네요."

[단련에도 두드림과 쉼이 필요하다. 네 육체는 격발로 지나치게 과열되어 있어. 충격을 더 줬다간 부서질 거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해.]

레토조차 휴식을 언급할 정도니 정말 지독하게 달려온 것 같았다.

베네타를 벗어난 이후로 생존을 위해 달려왔으니 당연한 건가?

휴식.

그 단어를 떠올리자, 한 장소가 불현듯 떠올랐다.

조금 전까진 다소 무리하더라도 곧장 숲을 가로질러 엘레토르 성곽으로 향하려고 했다.

'하루 이틀 갈 거리는 아닐 거야.'

나도 동료들도 잠시 몸을 추스를 장소가 필요했다.

오르도르 숲엔 그런 장소가 존재한다.

나는 손을 뻗어 케로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고기 주머니에 코를 박고 있던 녀석이 앙앙거리며 날 물으려고 한다.

입가에 묻은 피.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생고기에 성력을 담아 입에 욱여넣으니 두 눈을 부릅뜬다.

찹찹찹찹.

"'마녀의 정원'으로 길을 열어줘."

마녀의 정원(witch's garden).

내가 장소를 언급하자, 바삐 움직이던 케로스의 입이 뚝 멈췄다.

릴리를 보며 눈치를 보는 것 같은데.

그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거기가 어딘지 알고 말하는 거야?"

"마녀들이 산책하는 곳이잖아."

"정원이 망가지면 마녀들이 화낼 거야."

"안 망가트려. 장소만 잠시 빌릴 거다."

나를 빤히 바라보던 릴리는 어깨를 으쓱이곤 다시 밀 포대에 머리를 기댔다.

자신은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신호였다.

애초에 숲으로 진입하는 것 자체를 자살행위로 여기던 그녀였다.

아서가 방법이 있다고 하니 그를 믿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멍!"

"어쭈, 너는 허락한 적 없다고? 이래도?"

내가 생고기를 다시 욱여넣자, 케로스는 켁켁거리며 고기를 뱉어냈다.

더럽게 맛없다.

원래 고기맛이다.

성력으로 간을 해서 고기를 다시 욱여넣자, 케로스는 눈을 번쩍 뜨며 찹찹찹 입을 움직였다.

너무 맛있다.

난 맛없는 덩어리와 맛있는 덩어리를 양손에 흔들곤 선택을 종용했다.

"어쩔래?"

덥썩―!

내 손까지 삼킨 케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땐 참 단순해서 좋네.

내가 마수를 홀리는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이 은근슬쩍 다가왔다.

"그 힘, 네 능력이지?"

"성력입니다."

"신의 힘이라 굉장한데?"

확실히 위대하긴 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을 가능케 했으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칼이 민머리를 들이밀었다.

"머리카락은 안 되냐? 머리에 한 번 써봐."

"...."

물론, 절대 불가능한 것도 있었다.

* * *

숲에 들어서기 전에 하인즈에게 주지시킨 규칙이 있다.

앞사람 다리만 보고 따라올 것.

주변의 사물을 절대 건드리지 말 것.

침묵할 것.

주지시킨 내용은 하인즈의 입을 통해 병사들에게 전해졌고, 병사들은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통제에 들어갔다.

숲 안에서 길을 잃으면 죽음뿐이다.

머릿수가 많아 혹여나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마차에 내려서 일행과 함께 숲에 들어선 순간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풍경이 변했다.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실험체 감옥의 결계를 보는 것 같았다. 단 한 걸음 차이로 다른 세상에 떨어진 착각마저 들었다.

"분위기 죽이네."

"예쁘지?"

"예쁘다고? 마녀의 심미안은 우리랑 다른 건가?"

"칼은 못생겼어."

"다르네. 확실히 달라."

진회색 빛깔 세상.

숲도, 바위도, 대지도 모두 잿빛이었다.

하늘마저 막힌 세상은 무척 탁했다.

활짝 핀 나뭇잎마저 생기가 전혀 없다.

유령의 숲.

숲 풍경이 이름과 아주 찰떡이었다.

생명체조차 없는지, 너무 조용해서 사람들의 발자국과 침 넘기는 소리만 들리는 것 같았다.

'실제로 보니 더 살벌하네.'

숲에 들어선 순간 풍경에 압도되었다.

자신이 이 정도니 일반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모두 겁을 집어먹은 채 앞사람 다리만 보고 걸었다. 하인즈조차 입을 뻥끗할 생각을 못 했기 때문에, 이동 내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마치 시간이 멈춘 세상에 우리만 움직이는 것 같았다.

난 도도도 앞서 걷는 작은 뒤통수를 바라봤다.

귀를 쫑긋 세운 채 길을 여는 케로스가 보였다.

길을 안내하는 작은 시바견의 뒤통수는 아주 작고 귀여웠는데, 저 녀석의 발걸음에 1만 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니, 차마 건드릴 수가 없었다.

"문제는 없는 건가?"

"주변에 유령들이 없는 걸 보니 큰 걱정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저 마수 덕분이군."

"숲의 파수꾼입니다. 이곳의 관리자죠."

릴리에게 유령을 피하는 법을 물어보니 케로스가 알아서 할 것이라고 했다.

유령들이 지나가지 않는 길이 존재한다나?

록터는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으로 듣던 생기를 빨아먹는 유령들이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더 움직여야 하지?"

"글쎄요. 저 녀석만 알겠죠."

코를 킁킁거리며 수차례 방향을 틀었다. 현재까지 길이 비좁거나, 길이 험해서 지체된 적이 없으니, 기특하게도 머릿수를 고려하면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얼마나 이동했을까.

으흐흐흐흐―

갑자기 숲 사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부에 소름이 쫙 돌았다.

모두 표정을 굳힌 채 몸을 웅크렸는데, 칼은 역시 다른 사람과 달랐다.

"으아아아아악!"

흐느낌과 함께 칼이 비명을 지르더니, 릴리 등 뒤로 사라졌다. 그녀 머리 위로 솟구친 동그란 대가리 하나가 보인다.

"뭐 해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너도 암살자라서 잘 알잖아!"

암살자?

그게 뭐?

"암살당한 이가 원한을 품으면 유령이 돼서 들러붙는다고!"

그 소문을 믿는지 크룩스 출신인 일행들도 흐느낌에 움찔하며 주춤거렸다.

아니, 당신들이 이런 거에 겁먹으면 안 되지!

"괜찮습니다."

"난 안 괜찮아. 훠이. 훠이."

"유령도 오다가 칼 면상을 보면 도망갈걸요?"

"뭐, 인마?"

발끈한 것도 잠시, 유령의 흐느낌이 더욱 커지자 칼은 릴리의 어깨를 붙잡곤 흔들었다.

종이 인형처럼 흐느적거리던 마녀는 결국 쌍심지를 켠 채 칼을 숲 안으로 집어 던졌다.

"아악! 아아악! 시발놈들아!"

"...."

원래 저런 캐릭터가 아닌데.

나와 함께 하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원래 어둠을 지배하는 악당 조력자.

피도 눈물도 없는 악당 새끼였는데.

흐느낌 속에 이동 속도가 지체됐다.

울음을 터트리거나, 다리가 풀려 쓰러진 이들이 생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부축하고 서로 온기를 나누며 힘겹게 걸음을 이어나갔다.

오래 걸었다.

모두가 서서히 지쳐갈 때쯤,

"응?"

난 두 눈을 깜빡였다.

뒤를 돌아보니 그들은 아직 못 본 것 같았다.

"여기가 거기냐?"

내 물음에 케로스가 헥헥거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착했다는 신호.

난 미소를 지으며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

"…뭐, 뭐야?"

모두가 나처럼 주변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한 걸음을 다시 내딛는 순간,

"우아아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오색찬란한 빛무리가 내리쬐며 눈동자에 스며들었다.

향긋한 풀 냄새.

기분 좋은 산뜻한 바람.

주변엔 처음 보는 크고 작은 꽃들이, 수북이 쌓인 안개꽃 위론 나비와 벌레들이 날아다녔다.

푸른 잎사귀 사이로 새 지저귐도 들려오고, 떨어지는 낙엽 사이론 사슴을 닮은 동물들이 뛰어다녔다.

오르도르의 숲.

그리고,

"일단 짐부터 풀죠?"

마녀의 정원에 도착했다.

내 말에 마차 안에서 칼이 거대한 솥단지를 꺼내왔다.

일행이 움직이고, 록터가 다독이니 사람들이 뚝딱뚝딱 숲에 임시 거처를 잡고 자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정원이 서서히 망가지는 광경에 케로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마녀들이 이 광경을 본다면 뒷목을 잡고 쓰러질지 모른다.

사달이 날 게 분명했다.

이 사실을 릴리도 모르지 않을 텐데.

"어서! 어서!! 어서!!!!"

뿌연 김이 솔솔 나는 솥단지 주변을 뛰어다니며 소리치는 그녀가 보였다.

그 모습에 케로스는 짧게 혀를 찼다.

한심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케로스는 벌떡 일어나더니 허공에 점프했다.

덥썩―

날아온 고기를 날렵하게 낚아챘다.

아서를 바라보니, 그의 손에 들린 또 다른 고기에 황금빛 소스가 뿌려졌다.

저 소스가 뭔지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뛰어!"

"크아앙!"

이성을 잃을 정도로 맛있다는 것이었다.

식사 시간이다.

손을 탁탁 털어낸 난 주변을 둘러봤다.

자칫 뎀토어와 엮이며 위험할 뻔했지만, 무사히 이곳까지 왔다.

여기서부턴 내 역량이 중요했다.

하지만 그 전에,

"쉬자."

마녀의 모든 걸을 알고 있는 나는 마녀가 두렵진 않다.

그저 내 단잠을 깨울까 귀찮을 뿐이었다.

186화 운명의 큰 흐름

하늘을 빛내던 뎀토어의 상징.

백색의 이니셜 D가 구름 속에서 서서히 옅어졌다.

늦은 오후, 흐려진 신호탄 아래에선 때아닌 파티가 열렸다.

까악! 까아아악―!

까마귀 무리가 피 냄새를 맡고 하나둘 몰려들었다.

거대한 호타루의 시체부터 인간들의 시체 더미까지, 까마귀 떼들은 모처럼 방해 없이 피의 만찬을 즐겼다.

잠시 후,

후웅―!

돌풍이 불어닥쳤다.

시꺼먼 그림자가 시체 더미 전체를 뒤덮자 까마귀 떼는 놀란 듯 울부짖으며 이리저리 날아올랐다.

끼에에에에에엑―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괴성.

하늘을 뒤덮은 포효와 함께 두 날개를 활짝 펼친 거대한 괴물이 지상에 내려앉았다.

은빛 비늘을 두른 와이번이 모습을 드러냈다.

뎀토어의 마법사 중에서 선택받은 존재만 다룬다는 공중 마수 벨루가였다.

"수고했다."

끼익―

거대한 마수가 주인의 손길을 느끼며 그루룩― 기분 좋은 소리를 냈다.

안장에서 뛰어내린 마법사.

주변을 살핀 그는 한 손을 뻗더니 영창과 함께 주먹을 살며시 움켜쥐었다.

주먹에서 터져 나온 빛의 고리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생명력을 감지하는 마력 파동 마법, 라이프 스캔.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흔적을 살피던 마법사는 눈썹을 찡그리곤 시야를 방해하는 로브를 들췄다.

진회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날카로운 인상을 지닌 젊은 마법사는 대규모의 흔적을 쫓으며 드넓은 숲을 살폈다.

갈대숲 그리고 유령의 숲.

엄청난 무리가 이곳에 머물렀고, 모두 숲으로 사라졌다.

"쯧, 늦었나?"

하늘을 올려다보니 표식은 어둠에 가려 사라졌다.

서서히 저무는 석양 아래 크고 작은 실루엣 두 개만이 덩그러니 갈대숲을 비췄다.

"그녀를 보지 못하다니, 아쉬워."

벨루가를 타고 전력으로 날아왔건만, 신호탄이 터진 장소는 헬 그라임 가장 끝자락에 자리한 유령의 숲 경계였다.

상대가 떠나고도 남을 시간.

다만, 최소한의 누군가가 발목이라도 잡아줬더라면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마법사는 도시 쪽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한심해. 아주."

도시 쪽에 자리한 마법사들이 신호탄을 보고 뭉쳤더라면 그녀의 발목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호탄이 사라진 지금도 이곳에 도착한 이는 자신뿐이었다.

상대가 '공포의 마녀'이다 보니 뎀토어의 주력이 움직이기 전까지 눈치껏 웅크린 것이다.

릴리를 지키는 오르타들을 의식했겠지.

이렇듯 이성적인 존재들은 치밀하지만, 겁쟁이이기도 했다.

"숲의 파수꾼도 왔었나?"

눈앞에 어지러이 찍힌 거대한 발자국을 보자, 더욱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릴리 베이스와 마수 케르베로스.

모두 마주치기 힘든 존재들이었다.

마법사는 유령의 숲을 잠시 응시했다.

저 숲 가까이에 그녀가 있다.

숲으로 들어가 잠시 소란을 피울까 고민했지만, 금세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유령의 숲은 그조차 접근하기 부담스러운 장소였다. 마력이 메마른 공간에선 마법사가 힘을 쓰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시간 낭비만 했어."

화아아악―!

한 번의 날갯짓과 함께 은빛의 와이번이 무겁게 날아올랐다.

광활한 하늘 위에서 마법사는 지상을 끝 모르게 뒤덮은 숲 너머를 응시했다.

토바른.

그 저주받은 땅에 모습을 드러냈던 릴리 베이스가 돌연 헬 그라임의 경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쥐 죽은 듯이 살아가던 마녀가 어느 순간부터 흔적을 드러내며 적극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뭘 노리는 거지?'

복귀하는 대로 '별'들을 소환해 상의해봐야 할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을 등졌다.

허공을 뚫고 돌아가려는 순간,

"응?"

마법사는 멈칫하곤 고삐를 당겼다.

라이프 스캔에 무언가가 감지됐다.

생명력이었다.

타깃은 흔적이 끊긴 방향이 아닌 다른 방향에서 나타났다.

숲을 나와 이곳으로 빠르게 접근해온다.

마법사의 판단은 빨랐다.

양손을 교차했고, 두 손목에 착용한 투박한 팔찌들이 빛을 뿜어냈다.

깨알 같은 룬어들이 겉에 모습을 드러내더니,

번쩍―

교차된 팔찌에서 눈부신 섬광이 발출됐다.

하늘 위에서 대지로 내리꽂는 십(十)자 광선.

마른 대지가 번뜩이더니 그 위로 큰 폭발이 터졌다. 터지는 빛에 삼켜지는 것들은 모조리 얼음처럼 녹아내렸다.

호타루의 시체도, 인간들의 시체도 빛에 닿은 순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마법사가 고삐를 치자, 와이번이 폭발이 터진 장소로 날아갔다.

마법사는 마력을 끌어올렸다.

생명체가 유령의 숲에서 나왔다.

그럼 상대는 둘 중 하나였다.

마녀 혹은 마녀와 관련된 강자.

그럼 힘에 자비를 둘 필요가 없었다.

폭발 중심부에 십자로 깊게 파인 메마른 대지가 보였다.

마법사는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조우했다.

벨루가에서 내린 마법사는 신음을 흘리며 자신을 난감하게 바라보는 사내 앞에 섰다.

"…아케인."

"렌님 오랜만이군요."

마법사 렌에겐 썩 달갑지 않은 상대.

운명의 아케인이 숲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광폭에 휩쓸렸을 텐데, 그는 멀쩡해 보였다. 애초에 평범한 인물이 아님을 잘 알기에 렌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숲에서 나오다니 무슨 짓을 하고 온 거지?"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숲을 나왔을 뿐이죠. 그러다 표식을 보고 호기심에 달려온 것뿐입니다."

신호탄을 보고 이곳으로 온 모양이었다.

"유령의 숲에서 나온 것을 봤다. 숲을 통과할 재주가 있었나?"

"영업 비밀입니다."

"우리 몰래 마녀들과 교류하는 건 아니겠지?"

"마녀들이 절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으실 텐데요? 제가 방문한 곳은 숲이 아니라 토바른입니다."

"토바른? 그 저주받은 땅에는 무슨 일로...?"

"운명에 따라 흘러갔을 뿐입니다."

"운명이라, 또 마법사가 싫어하는 말을 지껄이는군."

렌의 타박에도 아케인은 어깨를 으쓱이곤 주변을 둘러봤다. 대규모 흔적이 저 너머 유령의 숲으로 향한 것을 발견한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통로'에서 나온 이들이 이곳을 벗어나 무사히 숲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오르도르의 숲은 마녀들의 최후 안식처였다. 그 장소에 인간들이 땅을 밟은 것을 과연 그녀들이 허락할까.

'그럴 리가.'

궁금했다.

무슨 생각으로 숲을 가로지른 것일까.

릴리 베이스는 대체 뭘 보고 이를 허락한 거지?

"이곳에 나타난 무리에 대해 알고 있나?"

"자세히는 모릅니다."

"알고 있다는 거군."

"저보단 토바른 쪽에 물어보는 게 빠를 겁니다. 연락이 갔을 텐데요?"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뎀토어가 시끄럽다. 무슨 생각으로 그자에게 통신구를 건넨 거지?"

"숲의 파훼법. 제안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우리도 해내지 못한 일은 고작 변방의 성주 따위가?"

"지켜보면 될 일입니다. 그는 '특별'하거든요."

"...."

렌은 미간을 좁혔다.

다른 인물도 아닌 운명의 아케인이 내뱉은 말이니, 정말 파훼법이 존재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아케인의 예언은 실제로 현실이 된 경우가 무척 많았으니 말이다.

그렇다 보니 뎀토어 일원 대부분은 아케인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보였지만 렌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경계했다.

그의 혀는 암시처럼 마법사의 마음마저 흔들었기 때문이다.

"대공을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겠지만, 뎀토어 안에선 조심해라. 난 널 좋아하지 않아."

"'뎀토어의 별'이라면 저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텐데, 아쉽군요."

뎀토어의 별.

오르도르의 숲에 '오르타'가 있듯이, 뎀토어에도 '별'들이 존재했다.

신명의 주인들.

광휘의 렌.

그는 뎀토어의 별 중 한 명이었다.

"별 중에 그대를 반기는 이는 그람뿐이다. 착각하지 말도록."

"그람님처럼 다른 별들도 저와의 대화가 유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겁니다."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상아탑까지 태워다주시겠습니까? 대신 흥미로운 정보를 들려드리죠."

"내 벨루가는 그대를 싫어해."

"토바른에 대한 것입니다."

"이미 카멜 블레이저, 그자를 통해 많은 것을 들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카멜 블레이저에 대한 정보가 없죠. 그와 거래하려면 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필요할 겁니다. 쉬운 사내가 아니거든요."

"블랙마켓에게 이미 의뢰를 한 상태다."

"저보단 자세히 알지 못할 겁니다. 그는 신명의 주인이거든요."

"...."

"어쩌실 겁니까? 큰 대가를 주고 얻는 블랙마켓의 것보다 정보의 질은 더욱 좋을 겁니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방긋 웃는 아케인.

순간 렌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귀걸이에서 손 치워라."

"민감하시긴."

"한 번 더 내 앞에서 귀걸이를 만졌다가 손목을 잘라버릴 거야."

"그래서 태워줄 겁니까? 말 겁니까?"

매서운 기세도 넉살 좋게 넘기는 그를 보며 렌은 욕설을 내뱉었다.

곁에 두기 꺼림칙한 자이지만, 뎀토어는 아케인을 거부할 수 없다. 신의 배척을 받는 마법사들은 신명 정보에 까막눈만큼 어두웠다.

마녀나 다른 이들처럼 노예로 붙잡아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눈앞의 사내는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아케인이 뎀토어에 강한 발언권을 가진 이유였다.

"키렌."

끼익― 끼익―

렌이 나직이 벨루가의 이름을 부르자, 은빛 와이번이 싫은 티를 내며 기다란 목을 아케인 앞으로 뻗었다.

아케인을 태운 벨루가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거센 바람 사이로 렌의 물음이 흘러나왔다.

"카멜이란 자를 돕고 있는 것 아니었나?"

"전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신이 점지한 대로 운명이 흘러가길 바랄 뿐이고, 카멜보단 뎀토어에서 더 큰 흐름을 봤을 뿐입니다."

"큰 흐름?"

"뎀토어의 태도에 따라 토바른에 큰 변화가 찾아올 것 같군요."

아케인은 순백의 머리를 쓸어올렸다.

천천히 시선을 돌리는 가느다란 눈매.

그는 토바른의 세력 구도를 머릿속으로 담았다.

카멜 곁에 장시간 머물렀기에 아케인은 토바른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예상할 수 있었다.

''그' 혹은 카멜 블레이저.'

겉보기엔 두 사내가 일군 세력 싸움처럼 보이지만, 토바른의 판도는 오르도르 숲과 뎀토어의 역량에 따라 언제든 뒤바뀔 수 있었다.

"근시일 내에 토바른의 주인이 정해질 겁니다."

"저주받은 땅에 주인이 누가 되든 뎀토어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과연 그럴까요?"

아케인은 토바른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헬 그라임의 운명이 뒤바뀔 것이라 확신했다.

'블라이어 성주가 주인이 되는 것이 운명의 흐름이었지만.'

주도권을 빼앗긴 지금은 그 흐름이 불투명해진 상황이었다.

흐름을 방해한 '그'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다.

특히 이름.

'그'의 이름만 파악하면 많은 것을 알아낼 수 있었다.

'단서는 역시 그 암살자뿐인가?'

알렉스 마르샤.

진즉 죽었어야 할 존재가 생존해 눈앞에 나타났지만, 그에게선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가호라고 했다.'

정말 가호 때문일까?

다만, 그가 사용한 능력은 특별했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상아탑 서고에 절대자들의 시대가 적힌 고대의 서적들이 존재한다.

알렉스가 들고 있던 활.

그리고 신명을 봉인하는 신비한 능력.

정말 고대 아티팩트일까?

다시 그자와 마주하기 전에 알아볼 것이 생겼다.

앞날에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확신했으니까.

187화 이러다 우리 다 죽어

도미노 게임.

연이어 세워 놓은 도미노 패의 한쪽 끝을 쓰러트리면 그 영향으로 줄줄이 파도처럼 패들이 무너지는 놀이었다.

당연히 그 피날레를 보기 위해선 모든 패를 완벽한 간격으로 세워야 하는데, 그 전에 잘못 건드리기라도 하면 완성 도중 모조리 무너지기도 했다.

"스토리 수정이라고 했단 말이지."

난 이곳에 떨어지기 전을 떠올렸다.

회사 화장실에서 기절하기 직전 분명 화면을 통해 수정 공지를 읽었다.

소설, 악당에게서 살아남는 법.

악당들의 손에 멸망으로 치닫는 세상.

그게 내가 알고 있던 소설의 피날레였다.

1화로 시작된 소설의 내용은 도미노 패처럼 편수를 늘려갔고, 곧 '멸망'이란 피날레를 볼 수 있는 상황까지 왔다.

그런데 신의 변덕일까,

아니면 그저 도미노를 다르게 쌓고 싶었던 것일까?

'누가 분탕을 쳤을 수도.'

피날레 직전까지 작업해 놓은 도미노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새로운 첫 패가 세워졌다.

'그게 나겠지.'

첫 번째 주인공, 카멜 블레이저의 퍼스트 킬로 낙점된 암살자.

그 암살자가 생존하면서 스토리에 변화를 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미약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한 지역의 운명마저 바꿀 정도로 커진 것이다.

'헬 그라임의 운명도 달라질 테고.'

스토리의 흐름은 각 지역과 긴밀히 연결된다. 즉, 내가 알고 있던 기존의 스토리와 앞으로의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그게 내가 살아남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내 피날레도 언젠가 찾아올 테지.'

누군가 날 첫 패로 세워놨고, 그것을 밀어 도미노를 무너트릴 것이다.

물론, 그 전에 내가 죽는다면 피날레는 없다.

'아니, 그게 피날레일지도 모르지.'

이대로 끌려다닐 생각도 없었다.

'언제고 더 큰 힘을 쥐게 된다면....'

도미노를 움직이는 손끝의 주인이 내가 되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피날레가 어찌 끝날지, 과연 그 피날레를 볼 수 있을지, 아니면 내가 피날레를 만드는 손끝의 존재가 될지는 지금 알 수 없었다.

지금은 눈앞의 생존에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더 먹을래요?"

"아니."

릴리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죽그릇을 내려놨다. 허기는 달랬지만, 정작 맛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다.

"맛없어서 못 먹겠어."

"...."

난 어색하게 웃으며 턱을 긁적였다.

무려 열다섯 그릇을 비운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바닥까지 싹싹 긁어 먹은 릴리가 입맛을 다시더니 내게 물었다.

"맛있는 건 언제 해줄 거야?"

"재료만 있으면 배 터지게 해줄 수 있는데, 지금은 밀뿐이라...."

식자재를 잔뜩 실은 마차가 파괴되어 재료가 없다. 그래서 지금은 밀을 죽으로 만들어 모두가 허기를 채우는 중이었다.

거대한 솥에 줄지어 선 사람들이 보였다.

구수한 냄새에 모두가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아쉬움이 들었다.

'소금만 있었어도.'

그럼 더욱 맛있는 식사를 했을 텐데.

하지만 저들은 그저 배불리 먹는 것에 감사하고 있었다.

짠한 광경이지만, 릴리에겐 전혀 공감이 안 됐던 모양이었다.

열다섯 그릇에도 채워지지 않은 허전함.

아서의 요리가 먹고 싶었다.

"기다려봐. 재료를 구해올게."

"멀리 가면 안 됩니다. 당신이 사라지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죽어요."

"금방 다녀올 거야."

뭔가가 떠오른 듯, 그녀는 파릇파릇한 정원을 쭉 둘러보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케로스를 찾았다.

그 녀석이라도 곁에 있어야 안심이 됐기 때문이다.

케로스는 작은 바위 위에서 멍멍멍 시끄럽게 짖고 있었다.

"뭐라고 짖는 거야?"

레토가 있었다면 알려줬을 텐데.

그는 현재 신명의 저주를 받고 잠에 빠져든 상태다.

어젯밤 릴리에게 신명 목록 변화에 대해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작은 시바견이 목청 높여 뭐라고 짖고 있는데, 생각해 둔 바가 있으니 근처에만 있으면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읏차!"

난 나무 기둥에 걸터앉아 몸 상태를 살폈다.

마녀의 정원에 들어오고 만 하루를 쉬었다. 평온한 분위기 속에 휴식을 취했더니 회복이 무척이나 빨랐다.

이대로 사흘 정도만 더 쉬면 될 것 같은데.

난 죽그릇을 비우곤 주변을 둘러봤다.

모처럼의 평화.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인즈에게 편히 쉬라고 전달했더니, 모두가 눈치 보지 않고 정원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 아래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의 풍경.

보드란 바람 사이로 향긋한 꽃내음이 정신을 맑게 해줬다.

소풍하기 딱 좋은 날씨와 장소였다.

"멍! 멍!"

"이 개놈 시키야! 그만 좀 짖어!"

"멍!"

"시끄러!"

록터와 어울리던 칼이 케로스에게 단검을 집어던졌다.

폴짝 뛰어 단검을 회피한 케로스는 다시금 짖었다.

칼은 포기했는지 고개를 흔들곤 다시 록터와 어울렸다.

록터의 부탁으로 영웅 조력자의 능력인 공명(共鳴)을 살펴보는 것 같았다.

함께 대화를 주고받으며 어울리는 둘의 모습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비 효과가 죽이긴 하네."

스토리 대로 흘러갔다면 지금쯤 록터는 배신자에게 한쪽 팔을 잃고 도피하는 중일 것이다.

칼은 에토르에서 카멜을 만나 악당 조력자의 길을 걷고 있겠지.

모두 자신과 만나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록터는 반란의 수괴가 아닌 토바른의 영웅이 됐고, 칼은 영웅 조력자가 되어 록터를 보조하고 있었다.

그건 엘튼도 칼 일행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헌트'란 이름 아래 모여들었다.

"헌트에도 이제 기반이 생긴 건가?"

베네타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헌트는 이름뿐인 조직에 불과했다.

그저 혈맹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조직.

하지만 지금은 록터와 칼을 휘하에 두고, 반(反) 블라이어 연합군의 모태를 세력으로 둔 상태였다.

성장하고 있다.

난 내 신명 목록을 떠올렸다.

[아서 클레이튼 ―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30%)]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헌트(Hunt)의 수장(3)]

내가 눈여겨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심장의 동화율.

동화율이 25%에서 30%로 증가했다.

심장 동화율이 육체적 성장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레토와의 동화율은 신명과 관련이 있어.'

내 필살기나 다름없는 격발(擊發) 횟수가 다섯에서 여덟 발로 늘어났을 때, 레토는 내 그릇이 커졌다고 말했다.

내 육체적 성장은 4성에서 멈춰있는 상태.

그럼 그릇을 키운 건 한 가지뿐이다.

바로 신명 목록.

난 새로 생긴 신명인 [헌트(hunt)의 수장(3)]을 떠올렸다.

'신명 목록이 성장하면 그릇이 커진다.'

불사자의 심장은 신명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신명 사냥꾼으로 각성하면 격발의 횟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말이다.

즉, 강해지고 악당에게서 살아남으려면 신명 목록을 늘려가야 했다.

신명을 어떻게 늘렸을까?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얻은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아레나 후아튼을 죽이고 얻은 [레토니칼스의 심장].

베네타의 몰락을 막고 얻은 [이종족의 길잡이]와 [염원의 반지(생존)].

그리고,

이번 주도권을 승리로 가져가는 과정에서 얻는 [헌트(Hunt)의 수장(3)]까지.

내 신명 목록은 모두 스토리의 수정 과정에서 얻게 된 결과물들이었다.

스토리 안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 속에서 신명을 강탈해야 한다는 뜻.

메인 악당들을 더 죽이고, 희생될 영웅들을 살려야 한다.

그게 내가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저...."

"응?"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혼자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는데 하인즈가 죽그릇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릴리가 곁에 있을 땐 불러도 금세 가버리더니 그녀가 없으니 기다린 듯 다가왔다.

일행을 제외하고 릴리의 정체를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

그녀의 정체를 듣고 나서부터 확실히 그녀에 대한 하인즈의 태도가 달라졌다.

두려움과 어려움.

인간이 릴리를 바라보는 시선이었다.

"앉으세요."

내가 턱짓으로 가리키자, 그는 내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사람들 사이에 문제는 없습니까?"

"네. 모두 편안히 쉬고 있습니다."

"다행이네요. 언제 떠날지 모르니, 여유가 있을 때 푹 쉬라고 전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죽그릇을 바닥에 내려놓은 하인즈가 날 바라봤다.

노회한 얼굴엔 걱정이 가득 담겼는데, 차마 입을 열지 못하는 모습이다. 귀족답게 그는 이 숲이 가지는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대규모 무리를 이끄는 사람이니 걱정이 당연한 건가. 생각해보니 너무 무심했단 생각이 들었다.

"절 믿고 계십니까?"

"믿습니다."

"그럼 걱정하지 말고 쉬는 데 집중하십시오. 목적지에 도착하면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할 테니까."

"한 가지만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저희의 최종 목적지가 어딥니까?"

아, 내가 말을 안 했던가?

정확하게 말하자면 말을 못 했다.

기절했었거든.

난 입맛을 다시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엘레토르 성곽입니다."

"…네? 거긴 인간들이 머물 수 없는 장소가 아닙니까?"

"왜 머물 수가 없습니까?"

"그건 마녀들이 허락을...."

"우리가 지금 쉬고 있는 장소가 어딥니까?"

"...."

여긴 오르도르 숲이다.

마녀가 허락하지 않으면 살아나갈 수 없는 죽음의 숲 말이다.

"숲을 무사히 나가게 된다면 엘레토르 성곽을 거점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겁니다."

거점이 있어야 반(反) 카멜 연합군 창설을 전역에 선언하고 세력을 모을 수 있다.

난 그 거점을 엘레토르 성곽으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르도르 숲의 영향으로 텅 비어버린 거대한 성.

성곽을 얻기 위해선 결국 마녀들의 허락이 필요했다.

하인즈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걱정한 것은 마녀들이 과연 자신들을 살려둘 것이냐였다.

당장 주변만 봐도 마녀들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정말 괜찮을까요? 시키신 대로 편히 쉬고 있긴 한데...."

"괜찮습니다."

"하지만...."

하인즈는 마녀들이 이곳을 보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다.

마녀의 정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정원이 빠르게 망가지고 있었다.

아이들은 땅을 파고 놀이를 즐기고 있었고, 어제부터 잘 가꿔진 나무와 풀 등을 베어와 요리에 쓸 불씨로 쓰고 있었다.

수천 명이 정원을 밟고 다니니 정원이 멀쩡할 리 없다.

"멍! 멍!"

"...."

정원이 망가질수록 저 작은 강아지가 짖는 횟수가 늘기 시작했다.

딱 봐도 경고하는 듯 보였다.

하인즈는 저 짖는 소리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게요. 정원을 망가트리면 바로 찾아올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인내심이 대단하네요."

"…네?"

"식량은 얼마나 남았습니까?"

"이틀 정도...."

"그 안에는 찾아오겠죠? 그렇지 않으면 정원이 더 망가질 테니까."

잠시 후, 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당당하게 다가오는 그녀 뒤엔 일행도 함께 움직였는데, 그들을 데리고 어딘가 다녀온 모양이었다.

"…이거."

난 일행이 들쳐멘 동물들을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정원 깊숙한 곳에서 함께 살아가는 푸른 뿔의 사슴이었다.

설마, 사슴을 사냥해서 온 거냐?

장로 메데이아가 아끼는 동물일 텐데.

릴리, 저 마녀도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 모습에 케로스가 다급히 짖기 시작했다.

"이 개놈 시키야! 사슴 고기 줄 테니까. 제발 좀 닥쳐!"

칼의 외침에도 케로스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 이젠 울부짖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거리더니 레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럽군.]

"정신이 돌아온 겁니까?"

[이번 건 조금 아팠다.]

아퍼?

신이 주는 저주를 조금 아팠다고 표현하다니, 확실히 불사자는 달랐다.

"케로스가 뭐라고 하는 겁니까?"

[음… 들려주지.]

"네?"

그때 케로스의 울부짖음이 머리로 하나하나 각인되기 시작했다.

[제,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 우리 다 죽어! 다 죽는단 말이야. 나 너무 무서워.]

"…미치겠네."

망가지는 정원을 보니, 케로스도 장로 메데이아가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근데 이 할멈은 왜 안 나타나는 거야?

간을 보나?

그때 칼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으, 으악! 사, 사슴 대가리가!"

이 할멈도 양반은 아닌 모양이었다.

188화 어디 읽어봐

"야, 정말 괜찮은 거지?"

"응. 괜찮아."

릴리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자, 칼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단검을 움켜쥐었다.

눈앞에는 특이한 뿔이 달린 사슴들이 축 늘어져 있었다.

모두 일곱 마리였고,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푸른 뿔 사슴(blue horned deer)'으로 불리며 숲에 이따금 손님이 찾아올 때 할머니가 대접하는 귀한 고기라고 들었다.

그녀가 이미 손을 썼는지, 사슴들은 생채기 하나 없이 죽어 있었다.

먹기 좋게 도축을 할 사람이 필요했는데, 그 일을 칼이 맡게 됐다. 숲에서 오랫동안 생존했던 경험이 있어서 도축은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만,

'영 찝찝한데.'

도축을 위해 단검을 움켜쥔 순간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위기의 경종은 아니었다.

묘한 불안감.

칼은 잠시 아서를 바라봤다.

위기감이 느껴지면 곧장 신호를 보내라고 했는데, 이건 알리기도 안 알리기도 애매한 느낌이었다.

목을 따? 말어?

"진짜 괜찮은 거지?"

"날 못 믿어?"

널 어떻게 믿니?

목구멍 끝까지 이 말이 나오려고 했지만, 칼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믿는다는 신호를 보냈다.

여긴 오르도르 숲이다.

그의 생존 본능이 이 숲에선 그녀의 눈 밖에 나면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릴리가 곁에 있으니 이 정도 느낌은 괜찮지 않을까?

칼은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자, 귀여운 숙녀님. 눈앞에서 시원하게 잘라드리겠습니다!"

"우와!"

"으랏챠!"

릴리 앞에서 자신 있게 사슴 목을 뎅겅 날려버렸다. 보통 여인은 피가 튀는 모습에 기절할 텐데, 그녀는 두 주먹을 말아쥐곤 신난 표정을 보였다.

역시 마녀는 다른 건가?

"여기, 여기 부분 잘라줘. 맛있는 부위야."

"여기?"

"아니, 여기!"

"...."

거긴 심장이잖아. 이 여자야.

헛웃음을 흘리며 단검을 다시 움켜쥔 순간이었다. 앞을 보던 릴리의 표정이 순간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도 마찬가지.

도축을 구경하던 사람들이 멈칫하더니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왜 그래?"

"아, 앞…!"

"앞?"

고개를 돌린 순간 칼은 단검을 툭 떨어트렸다.

잘린 사슴 대가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더니 자신 쪽을 올려다봤다.

죽은 눈깔이 번쩍 떠지더니,

[건방진 인간이로군.]

"으아아아악!"

죽은 사슴이 말을 걸어왔다.

으드득― 으득―

"...!"

목 잘린 사슴을 시작으로, 함께 죽어 있던 사슴 사체들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죽어 있는 사슴들이 사방을 둘러보며 눈동자를 빛냈다.

서슬 퍼런 푸른 눈동자.

그로테스크한 광경에 시끌벅적했던 정원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 겁에 질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머, 먹는 거라며?!"

"...."

"야! 뭐라고 말 좀...."

칼은 주춤 물러나며 릴리를 돌아봤다.

그런데,

"…이 녀석, 어디 갔어?"

조금 전까지 곁에 붙어 있던 릴리가 보이지 않았다. 땅으로 꺼진 듯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동시에 해맑던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아름답던 정원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아아악!"

"사, 살려줘!"

"...!"

비명이 터져 나왔다.

푸릇푸릇했던 꽃밭도, 생기 넘치던 숲도 잿빛으로 물들며 그 생기를 잃었다.

모인 사람들이 잿빛으로 물든 대지로 모조리 빨려 들어갔다.

악을 쓰며 허우적거리지만 소용없었다.

모래사막에 삼켜지듯 만 명에 이르던 사람들이 눈 깜짝할 새에 땅속으로 묻혀 버렸다.

"…이거."

칼은 신음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유령의 숲.

맞다.

아름다운 정원이 유령의 숲으로 바뀌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칼은 다급히 동료들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아서도, 록터도, 수하들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흐으으― 흐으―

"…아니지?"

사람들을 삼킨 잿빛 대지 위로 유령들이 하나둘 기어 나왔다.

하나같이 끔찍한 몰골들이다.

수백 수천의 유령들이 칼을 감싸기 시작했다.

손에 쥔 단검이 덜덜 떨린다.

산전수전 다 겪어본 자신이지만, 이런 경험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무섭다.

공포로 직감마저 고장 났는지 죽음 앞에서도 위기의 경종은 울리지 않았다.

'이럴 리가 없는데….'

위기 감별이 전혀 되지 않았다.

이를 빠드득 깨문 칼은 문제의 사슴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자른 사슴 대가리가 허공에 둥둥 뜬 채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빛의 눈동자와 마주한 순간,

"이 미친 대가리 새끼야! 내게 원하는 게 뭐야!?"

칼이 겁을 떨치려는 듯 바락바락 외쳤지만, 그 외침에 사슴은 입을 달싹거리며 답했다.

[죽어라.]

"으아아아악!"

유령들이 우르르 달려들더니, 칼의 몸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 * *

[광역 최면이다.]

"…빌어먹을, 이건 예상치 못했는데."

칼의 다급한 외침이 터진 것도 잠시였다.

곁에서 대화를 나누던 하인즈가 돌연 표정을 잃더니 풀썩 쓰러졌다.

다급히 상태를 살폈는데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만, 두 눈을 부릅뜬 채 기절했는데 눈동자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를 본 레토는 최면에 걸린 상태라고 말했다.

빌어먹을 할멈, 역시나 대화로 상황을 바로 풀 수는 없는 건가?

풀썩―

"...."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뛰어놀던 아이들도, 배식을 기다리던 기다란 줄도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렸다.

수천 명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지푸라기처럼 쓰러졌고, 그다음이 병사들과 기사들이었다.

기사들은 그나마 검을 빼 들고 경계 자세를 잡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휘청거리더니 의식을 잃었다.

일행들도 칼에게 달려가다가 힘없이 쓰러졌고,

"…칼."

칼마저 부들부들 떨더니 뒤로 넘어갔다.

그 옆자리엔 릴리가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에 난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릴리 베이스조차 버티지 못하는 광역 최면이라, 장로 메데이아만 온 것이 아니었다. 오르도르 숲 전체가 움직였다.

"모두 정신 차려!"

그때 자신을 제외하고 움직이는 존재가 있었다.

록터 펠리스.

그는 검을 빼 들고 허공에 뜬 사슴 머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서거걱―!

허공에 뜬 사슴 머리가 반으로 쪼개지고, 근처에 움직이던 사슴 사체들도 삽시간이 고깃덩어리로 변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검을 겨눈 록터가 주변을 둘러보자,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신명의 주인, 록터 펠리스.]

"누구냐! 모습을 보여라!"

여인. 아니, 여인들이라고 해야 하나?

숲 전체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진 탓에 그 방향을 정확히 잡기가 어려웠다.

['배덕'이라, 불결한 신명을 가진 자로군.]

"마녀인가?"

[우리 영역을 알고 들어오다니 어리석어.]

"그대들과 싸우려고 온 게 아니다."

[인간들은 늘 그리 말하지. 싸우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지만....]

푸른 정원을 둘러싼 숲 한 곳에서 잿빛이 쏟아졌다. 록터가 기운을 터트리며 잿빛에 대항했지만, 사방에서 여럿의 잿빛이 쏟아지며 록터의 육신을 잿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팔다리, 몸통, 서서히 잿빛으로 물드는 록터.

[왜 싸우기 싫어하는 인간들은 굴복한 상대를 보며 하나같이 복종을 입에 담는 거지?]

"크윽! 난...."

[대화를 하고 싶다면 자격을 증명해라. 배덕의 기사여.]

"끄아아아악!"

얼굴마저 잿빛으로 물든 록터가 머리를 감싸며 쓰러졌다. 잠시 후, 멍한 표정의 록터가 잿빛 눈동자로 허공을 바라보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레, 레이나… 벨린."

죽은 아내와 딸의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록터는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

록터마저 쓰러졌다.

난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이제 서 있는 이는 정원에 아무도 없었다.

나무에 기대고 있던 난 하인즈를 편안히 눕히곤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로 걷기 시작했다.

주변을 둘러봤다.

마녀의 정원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푸르른 풀밭 위로 들리는 새 지저귐.

바람도 따스했다.

달라진 건, 화창한 정원을 뒤덮은 만여 명의 사람들이었다.

따스함 속에 감춰진 오르도르 숲의 진짜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신명, [불굴의 의지]를 지닌 록터조차 버티지 못하고 최면에 빠져들었다.

'뎀토어의 별들'조차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지옥의 숲.

난 그 숲의 진짜 모습을 경험하기 전에 바위에 쓰러져 있는 케로스를 품에 안았다.

"그토록 짖던 이유가 이거였냐?"

부르르 떠는 것이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난 케로스의 배를 만지작거렸다.

부드럽고 따뜻했다.

호흡하며 부풀고 쪼그라드는 움직임이 규칙적이었다.

하인즈의 상태와 똑같았다.

동료들이 무력하게 쓰러지는 모습에도 내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였다.

[죽은 이는 아직 없다.]

"그러게요."

마녀들은 아직 우릴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 이유는 하나.

'릴리 베이스가 데려온 인간들이니까.'

물론, 목숨을 보장받는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건 오로지 내 몫이었으니까.

"장로 메데이아, 대화를 원합니다."

[그대는 누구지?]

내게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마녀들의 시선이다.

난 제자리에 서서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모조리 몰려왔네.'

절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한 바퀴를 도는 동안, 숲 사이로 비춘 후광들이 군데군데 잡혔다.

각 계파의 수장, 오르타들이 분명했다.

릴리 베이스와 관련된 일이라, 모조리 몰려온 게 분명했다.

이러니 록터도 버티지 못했겠지.

"전, 마녀의 친구입니다."

[…믿을 수 없다.]

"증명이 필요합니까?"

릴리와 친구가 될 때부터 난 오르도르 숲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다.

숲에 도착해서 장로 메데이아나, 오르타들을 만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눈치를 봐야 할까?

호감을 보여야 할까?

헌트의 수장이 되고 카멜과 부딪치면서 그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난 피식 웃고는 손가락을 까닥까닥했다.

"다 덤벼보십시오."

[건방진…!]

절대 만만하게 보이면 안 된다.

난 대마녀, 릴리 베이스에게 선택받은 인간이었으니까.

사람들을 숲에서 빼내고, 엘레토르 성곽의 주인으로 인정받고, 추후 뎀토어를 상대로 마녀들을 주도적으로 움직이게 하려면 첫인상이 무척 중요했다.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줘야 한다.

[난 특별한 마녀래.]

릴리가 내게 말했다.

특별해서 모두가 자신을 다르게 바라본다고.

[아서, 너도 특별해.]

마녀들을 다루려면 릴리처럼 특별함을 보여야 했다.

[꿇려!]

번쩍―

잿빛이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팔다리가 잿빛으로 뒤덮인다.

동시에 감정을 뒤흔드는 환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과거, 자신을 괴롭혔던 기억들.

진짜 그 앞에 있던 것처럼 현실이 앞에 펼쳐졌다.

대학에 한 번, 두 번, 세 번 떨어지며 울면서 길을 걷던 기억.

회사 면접에서 떨어져서 여자 친구에게 차였던 기억.

돈, 돈, 그 빌어먹을 돈 때문에 자존심을 굽히며 살아갔던 기억.

조금 전 록터처럼 최면을 걸기 위해 의식의 틈을 만들려는 것 같은데 내겐 안 통했다.

[제3의 정신 방벽]

그리고,

번쩍―

"...!"

손목에서 터진 황금빛이 둘러싼 잿빛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세이렌의 찬가.

상대가 아닌 나 자신에게 사용한 찬가의 빛이었다.

정신이 맑아지며 혼탁한 생각들이 사라졌다.

"시발, 더럽네."

마녀들의 주술에 떠오른 과거 기억 때문에 기분이 아주 더러웠다.

아주 좆같은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숨어서 하는 짓이 고작 이런 겁니까? 마녀들이 왜 뎀토어의 손에 몰락했는지 알 것 같네요."

[여기 있는 이들을 다 죽이고 싶나 보군. 어설프게 도발하지 마라.]

"어설프게?"

난 피식 웃었다.

순간, 난 봉인해 놓은 신명 의식을 활짝 열었다.

아케인의 눈을 피하려고 봉인해 놓은 신명 정보.

꼭꼭 숨겨둔 봉인이 풀린 순간,

[...뭐!?]

내 신명이 짙은 존재감을 드러내며 숲 전체를 채우기 시작했다.

록터를 한눈에 알아봤던 것처럼 마녀들은 내가 신명의 주인이란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하지만, 숲에선 침묵이 감돌았다.

"그 잘난 눈깔로 읽을 수 있으면 읽어봐."

[....]

안 읽혔다.

아무것도.

189화 마녀의 선물

오르도르 숲은 오랜 세월 대(大)결계[유령의 숲]의 보호를 받으며 평화로운 분위기로 흘러갔다.

마녀들은 큰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것에 안도하고 만족했는데, '마녀 대학살'의 끔찍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폐쇄적인 사회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

그랬기에 숲으로 들어온 불청객을 살려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숲으로 들어온 일만 이상의 대규모 인간을 미리 파악하고 그냥 무시했던 것도, 사흘 안에 유령의 숲에서 말라죽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결계를 뚫고 오르도르 숲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아끼던 정원에 자리를 잡고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녀 사회에 대(大)회의가 열렸고, 숲의 규칙에 따라 모두 죽이는 방향으로 의견이 기울었다.

하지만.

멍―!

"파수꾼?"

"그럼 릴리도…?"

틈만 나면 짖는 케로스의 존재로, 가출했던 릴리의 존재가 드러나면서 의견이 반반으로 갈렸다.

숲으로 인간들을 안전하게 이끈 이가 릴리였기 때문이다.

모두 죽여야 한다.

일단 지켜보자.

강경파는 릴리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릴리의 판단과 선택에 불신을 보냈다.

온건파는 마녀의 운명을 믿었다. 릴리가 인간들을 데려온 데에 큰 운명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만 하루 동안의 회의에도 판단이 안 서자, 결국 최종 결정은 장로 메데이아의 선택으로 넘어갔다.

[제압하고 심판한다.]

결론은 일단 제압하는 것으로 결정이 됐고, 눈앞의 상황처럼 광역 최면을 통해 인간들을 별 어려움 없이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단 한 명.

황금빛으로 물든 한 인간을 제외하고 말이다.

"읽을 수 있으면 읽어봐."

[....]

사내의 도발에 오르타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모두 고개를 가로젓자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록터 펠리스의 신명을 가볍게 읽어낸 오르타들조차 눈앞의 신명은 단 한 줄도 읽어내지 못했다.

이런 경험은 전에도 한 차례 있었다.

근래에 각성한 신명의 주인.

베일에 가려진 존재 말이다.

그 일로 모든 마녀가 상심하고 있을 때, 장로 메데이아가 위로를 보낸 적이 있었다.

딱 한 명.

마녀 중에 그 신명을 읽을 수 있는 이가 있다고 말이다.

그 말에 마녀들이 후보로 떠올린 인물은 두 명이다.

릴리 베이스.

그리고 장로 메데이아 본인.

'장로님이라면?'

그녀라면 눈앞의 신명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메데이아가 사내의 도발을 무참히 짓밟아주길 기대하며 오르타들의 시선이 장로에게 향했다.

그 순간, 황금빛의 사내도 오르타와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닥 안 차갑습니까? 얼굴 돌아가겠네."

"...."

"연기 그만하시죠. 다 알고 있으니까."

사내의 말에 릴리 주변에 쓰러져 있던 왜소한 노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집어 든 노파는 허리를 두드리곤 사내를 올려다봤다.

"내가 마녀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

"릴리가 그러더군요. 마녀에겐 향기가 난다고."

"표정 하나 안 변하고 거짓말을 잘도 하는군. 주술과 인연이 없는 자에게는 해당이 안 돼."

"영업 비밀이라고 말할까요?"

"쯧, 여우 같은 놈이 릴리 곁에 붙었구먼."

메데이아는 잠시 릴리를 내려다보곤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팡이로 툭툭 바닥을 짚으며 사내와 가까워진다.

그 모습에 모든 마녀가 주술 도구를 들곤 영력을 끌어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눈앞에서 멈춰 선 메데이아가 옅게 미소 지으며 사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 한 번 해봐도 되나?"

"안 하면 죽일 분위기네요. 악수 한 번 하고 싸우자는 겁니까?"

"우린 의심이 많을 뿐이지, 천성은 그리 악하지 않아. 세상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지."

"...."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네."

사내는 장로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 * *

[신명을 한 줄도 읽을 수 없어요.]

엘프 신녀 넬라가 내게 말했던 내용이다. 그래서 물어봤다. 신명을 보는 능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냐고.

그때 넬라가 한 말은,

[엘프 중에선 저보다 신명을 잘 보는 이는 없을 거예요.]

신을 받는 자 중 넬라의 능력은 상급에 속했다.

그리고 릴리와 인연이 닿고 그녀와 신명에 관해서 많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나름 확신한 것이 있었다.

[마녀 중에 아서의 신명을 보는 건 나밖에 없었어.]

내 신명을 볼 수 있는 자는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

물론, 예외가 존재했다.

바로 신명 페널티.

이미 한 번의 페널티를 받은 상황에선 내 신명을 알아볼 자가 생길 수도 있었다.

''접촉'이라면 일부분은 들킬 수도 있겠네.'

분위기를 보니 내 신명을 본 마녀는 없었다.

하지만 접촉이라면 달랐다.

장로 메데이아가 내게 허락을 구하고 악수를 청한 이유.

접근 방식에 따라 신명을 볼 수 있는 벽이 낮아지기 때문이다.

신명의 주인을 그저 떠올리는 것.

신명의 주인과 직접 마주 보는 것.

그리고, 신명의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만지는 것.

이 중 세 번째 방식은 상대의 신명을 가장 정확하게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신명의 주인이라면 약점이 될 수 있기에 당연히 접촉을 허락하지 않는다.

내 경우엔 필요한 일이라 허락했다.

소설의 비주류인 마녀.

내 생존에 꼭 필요한 세력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XX XXXX ― 신명 사냥꾼(X)]

[X X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xx]

[이종족의 길잡이]

[xxx xx(XX)]

[헌트(hunt)의 수장(X)]​

'죽을 때가 됐나 보군.'

그녀는 헛웃음을 흘렸다.

허락을 구하고 직접 접촉했음에도 눈에 보이는 신명이 한정적이었다.

아니,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땐 한 줄도 읽지 못했으니, 이것도 나름 정보를 얻었다고 할 수 있었다.

상대의 신명을 보면 그자의 발자취가 보인다.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어떤 목표와 신념을 지녔는지 말이다.

'이종족의 길잡이.'

다행히 눈앞의 사내에겐 우호적인 신명 목록이 존재했다.

'이종족의 길잡이'란 이종족들의 굳건한 신뢰를 얻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헌트(hunt).

이미 베네타에서 열린 이종족 혈맹에 인간 조직인 헌트가 포함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헌트의 수장.

릴리가 직접 데려왔고, 마녀와 우호 관계인 토바른의 이종족과 혈맹을 맺고 있는 존재.

폐쇄적인 마녀 집단이지만, 이자는 믿을 수 있겠단 판단이 들었다.

"파수꾼은 왜 안고 있는 거지?"

"인질입니다. 죽자고 달려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한 발 떨어진 장로는 품에 안겨 축 늘어진 케로스를 응시하곤 홀홀 웃었다.

"케로스 녀석이 의외로군. 릴리만 따르는 줄 알았더니."

"무슨 소리입니까?"

"안고 있지 않나? 그게 이유네."

안고 있다.

즉, 잡혀 있는 게 아니란 뜻이었다.

그 의미를 이해하자 난 작게 탄성을 흘렸다.

녀석을 내가 잡은 것이 아니라 케로스가 스스로 잡혀준 것이었다.

파수꾼이 자신의 숲에서 최면에 걸렸다는 것 자체가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됐다.

장로의 말을 듣고 보니, 짖고, 또 짖던 행위가 나름 우릴 살리기 위한 시도라는 것도 깨달았다.

"잘 자는군."

"...."

개나 개 주인이나 때와 장소를 안 가리고 처자는 건 똑같은 것 같았다.

그래도 예쁜 짓을 했으니 간식은 두둑이 줄 생각이었다.

마음이 고마웠으니까.

"무엇으로 마수를 꼬신 거지? 쉽지 않았을 텐데."

"영업 비밀입니다."

"비밀이 많은 인간이로군. 하지만…."

장로 메데이아는 정원을 쭉 둘러봤다.

곳곳에서 들리는 신음 소리.

의식을 잃었지만 모두 악몽을 꾸고 있는 탓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인간들을 살려야 할 이유에 대해선 비밀이 없어야 할 거야"

"비밀은 없습니다. 저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두 가지니까요."

"두 가지?"

"살기 위해서, 그리고 싸우기 위해서."

내 말에 메데이아는 미간을 좁혔다.

"숲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마녀 전체를 설득할 순 없을 거다."

"마녀의 생존을 위해 싸운다면 그 이유가 될까요?"

"…우리의 생존?"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당연히 믿기 힘들겠지.

하지만 미래의 흐름을 대략적으로 알고 있는 난 확신을 갖고 얘기할 수 있다.

"반년, 그 안에 유령의 숲은 파훼될 겁니다."

"하! 그 말을 우리보고 믿으라고?"

"증거를 가져왔습니다. 보시게 되면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보시겠습니까?"

난 케로스의 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이 녀석을 먼저 챙긴 이유는 인질이라기보단 이 안에 마녀들을 설득할 물건, 주술 인형 반다이크가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로 메데이아는 마녀의 운명을 믿는 쪽에 속했다.

릴리 베이스.

대마녀의 운명을 타고난 그녀가 데려온 인물의 말을 허투루 흘릴 수 없었다.

메데이아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오르도르 숲이지만, 이곳은 유령의 숲 경계다. 게다가 마녀들도 지시를 기다리며 긴장하고 있는 상태.

중요한 대화를 나눌 자리가 아니란 판단이 들자, 메데이아는 손짓으로 아서를 불렀다.

그 모습에 아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대화의 장을 만들었다.

이젠 설득만 하면 된다.

한고비를 넘긴 것이다.

"따라와라."

"그 전에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최면을 풀어주십시오."

"판단이 내려지기 전까진 안 돼."

"그럼 저들에게 꿈을 선물해 주십시오. 단 하루면 충분할 겁니다."

"…꿈이라, 마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어. 그대 주변에 마녀와 친분이 있는 인물이 있나?"

있긴 있다.

인물이 아니라 소설책이라서 그렇지.

저주에 가까운 최면이 있듯이, 최면에는 그 반대의 성질도 존재했다.

달콤한 행복.

그리고 이곳이 '마녀의 정원'인 이유.

마녀들이 꿈을 꿀 때 찾아오는 장소였다. 즉, 최면에 최적화된 장소란 뜻이었다.

"부탁드립니다."

"피곤한 녀석을 만났어."

장로가 지팡이를 흔들자. 거대한 나무줄기가 릴리를 포근하게 안고, 장로를 따라왔다.

메데이아가 멀어졌지만, 아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후, 그녀가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자리를 비우면 마녀들이 움직일 거야."

"감사합니다."

"행복한 꿈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괜찮겠지."

"포근한 인상이신데 말 한번 살벌하시네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장로 메데이아와 내가 정원을 벗어나 숲으로 사라지자, 숲에 자리하고 있던 마녀들이 정원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백에 이르는 마녀들은 장로의 지시대로 주변 숲에 주술을 걸기 시작했다.

파르르륵―

잠시 후, 나무숲에서 소나기처럼 나뭇잎이 허공에서 쏟아지더니, 모든 인간의 이마 위로 나뭇잎이 한 닢씩 안착했다.

따스한 빛과 함께 나뭇잎이 빛나며 정원을 아름답게 채웠다.

―!

신음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일그러진 인간들의 얼굴이 서서히 펴지더니 이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해맑은 미소를, 어른들은 잔잔히 미소로 행복에 빠져들었다.

칼은 머리를 만지며 '머리가…'를 중얼거렸고, 일행들도 각자 단꿈에 빠져 입을 헤― 벌렸다.

"...."

마녀들은 주술 도구에 영력을 쏟아부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마녀가 인간에게 행복한 꿈을 선물하는 것.

도대체 언제인지 모를 오래된 이야기였다.

마녀의 선물.

한 오르타는 말없이 록터를 내려다봤다.

"레이나… 벨린…."

언제 이런 미소를 지어봤을까.

굳어 있던 얼굴이 어색하게 보일 정도다.

록터는 행복한 미소를 지고 있었다.

"밥 먹자…."

아내와 딸이 가장 예뻤던 그 시절.

두 사람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190화 천년 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