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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7 - 160-170

160화 지배(Control) (2)

카멜은 영주관을 나와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걸어가는 도중 성 내부를 둘러보니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성벽, 바닥, 나무들 곳곳에 흉터처럼 남은 핏자국들이 선명했다.

짙은 피비린내도 가시지 않았다.

성 사람들이 모두 나서서 열심히 흔적을 지우고 있지만, 한동안 피 냄새가 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썩기 전에 서둘러!"

"거기 시체부턴 다음 수레에 담아!"

바깥에서 수레를 끈 병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수레에는 참혹한 몰골의 시체가 한가득 실려 있었다.

피바람이 불어닥친 뒤 이틀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영지 전역에는 아직도 시체들이 범람했다.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추, 충!"

카멜 일행이 모습을 드러내자 병사들은 작업을 멈추고 예를 표했다. 리옹과 렌구아를 바라보며 두려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태도는 마치 은인을 대하듯 공손했다.

"카, 카멜님!"

병사들을 지휘하던 행정관들이 카멜을 발견하곤 허겁지겁 달려왔다.

병사 지휘는 원래 기사들의 몫이지만, 영지에는 현재 기사가 없다시피 했다. 대부분 광인이 되거나, 죽거나,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행정관들도 병사들처럼 카멜에게 예를 표하며 극진한 태도를 보였다.

날뛰는 광인들을 몰아내고, 영지를 구한 에토르의 은인.

눈앞의 사내가 병력을 이끌고 제때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에토르는 광인들의 손에 쑥대밭으로 변했을 것이다.

광인들의 주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에토르의 기사들이었으니까.

다만, 리옹과 렌구아를 바라볼 땐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광인 무리와 뒤섞여 싸우던 아군까지 얼려버리거나, 찢어발겼던 괴물들. 잔혹한 손속이지만, 대부분이 원망보단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만큼 상황은 심각했고, 지옥 그 자체였으니까.

"이 시간에 어딜 가십니까?"

"지하 감옥에 볼일 있다."

"볼일이라시면...."

"자작님의 실종에 도움이 될만한 흔적이 광인들에게 있는지 살펴볼 생각이다."

카멜의 눈짓, 목소리, 분위기.

행정관들의 시야에 카멜의 존재감이 다른 이들보다 선명히 박혔다.

절로 집중이 되며 그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게 된다. 위압감에 숨이 막히다가도, 목소리를 들으면 긴장이 탁 풀리며 안도감이 올라왔다.

"저희가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모시던 주인이 실종되고, 기사 단장도 가신들도 소식이 없었다.

영지를 이끌 대리인의 부재.

땅으로 푹 꺼진 듯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행정관들은 당장 기댈 수 있는 카멜을 주인처럼 따랐다.

그건 병사들도 마찬가지.

"저 수레들이 전부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나?"

"지, 지하 감옥입니다."

"광인의 시체 더미가 쌓인 장소에 평범한 이는 들어올 수 없다. 그대들은 자작님을 기다리며 영지 정리에 힘쓰도록. 광인들의 흔적은 내가 데려온 주술사들이 살필 것이다."

"추. 충!"

"아, 후계자들은 찾았나?"

"그게, 저택으로 광인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바람에...."

"죽었나?"

"그렇습니다."

"쯧, 큰일이군."

붉은 마석을 삼켰던 이들이 한순간에 전부 광인으로 변하면서 하루아침에 영지 절반이 날아갔다. 자작의 혈육들도 그 횡액을 피해가진 못했다.

"자작님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찾아낼 것이다. 블라이어가 에토르를 도울 것이다."

"가, 감사합니다! 에토르 영지민들은 오늘날의 도움에 하나같이 블라이어 성주를 찬양하며 후대에 이 은혜를 전할 겁니다."

행정관들의 외침에 병사들은 블라이어와 카멜의 이름을 번갈아 외치며 도움받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카멜 일행은 수레 행렬을 따라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거리를 두고 천천히 이동하던 카멜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잘 처리했군."

리옹과 렌구아는 살짝 고개를 숙였다.

무차별적인 살인.

그 안에는 자작의 혈육도 포함되어 있었다.

"저 행정관들은 그대로 놔둘 생각입니까?"

"평범한 이들은 매혹으로 충분하다. 종속은 선택적으로 사용해야 해."

종속 지배는 자신이 가진 영혼의 그릇만큼만 가능했다.

그릇의 크기를 결정하는 건 신명 목록인 [통제 위의 카리스마]가 영향을 미쳤다.

용아의 망토로 원래 그릇보다 넓어졌다지만, 종속을 시도하려는 상대의 역량이 뛰어나면 많은 수를 부릴 수 없었다.

그릇이 넘치면 더는 종속 지배를 사용할 수 없었으니까.

감옥 입구는 카멜의 친위대가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입구부턴 병사들의 출입이 금지되고, 친위대가 직접 수레를 끌고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는 수레 행렬.

카멜은 끝없이 늘어진 대기 줄을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광인들의 시체가 넘쳐나는군."

"네. 하늘이 주군을 돕고 있습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주술사 전원에게 반다이크를 배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둥지로 영입된 주술사에게 반다이크를 추가로 지급한다고 소문을 흘려야겠어."

"일반적인 흑주술사라면 소문을 듣고 벌떼처럼 달려올 겁니다."

주술 인형의 핵심 재료인 피로 물든 영혼을 붉은 마석으로 물든 광인의 영혼으로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이 파악되자 카멜은 죽은 광인들의 시체를 지하 감옥으로 모조리 수거했다.

지하 1층으로 내려오자 렌구아가 데려온 주술사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에 달라붙어 영력 도구에 영혼들을 담고 있었다.

카멜은 주변을 둘러보곤 렌구아에게 물었다. 감옥 책임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사로잡은 광인들은?"

"지하 2층이 모아놨습니다."

"앞장서라."

렌구아의 안내에 따라 지하 2층에 내려가니, 드넓은 철창 안에 검은 그림자들이 한가득 차 있었다.

흐린 횃불 아래 흐느적흐느적 몸을 흔들며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는 존재들.

사라진 에토르의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이는 하나도 없었다. 전부 두 눈이 풀린 채 벌린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터벅― 터벅―

인기척이 들리자, 기사들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가며 악귀처럼 표정이 일그러졌다.

철창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기운.

오라 유저들의 기운이 광기와 함께 터져 나왔다.

"케에에엑!"

일촉즉발의 상황.

렌구아가 주문을 외우며 지팡이를 흔들자, 기사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온순해지더니 다시 앞을 바라보며 가만히 흐느적거렸다.

광인들이 통제되는 모습에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톰자엘 자작과 밀 2천 포대로 맞바꾼 렌구아의 고대 아티팩트.

블러드 오크 지팡이(Blood Orc Staff).

톰자엘 자작도, 카멜 자신도 이 지팡이 하나가 에토르의 운명을 결정짓게 될 줄은 몰랐다.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광기 통제]

[광기 전염]

[광기 폭발]

블러드 오크 지팡이를 통해 렌구아는 속성을 '광기(狂氣)'로 각성하며 광기와 관련된 특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렌구아가 에토르에 시도한 제단 작업은 '광기 전염'이었다.

마석 복용자들의 몸에 축적된 광기의 기운을 증폭시켜 강제로 광인으로 만들어버리는 주술.

다만 렌구아 홀로 드넓은 영지 전체를 전염시킬 수 없었기에 그는 한 가지 주술 도구를 구해달라 부탁했다.

"이게 그 '광기의 돌'인가?"

"그렇습니다."

카멜의 지하 2층에 세워진 제단에서 주먹 크기의 돌을 발견했다.

돌은 암석을 깎아 올린 제단 위에 놓여 있었는데, 살아 숨 쉬듯 검은빛이 커졌다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매혹의 문양과 함께 블랙마켓에서 받아온 대가 중 하나였다.

카멜은 광기의 돌을 톡톡 손가락을 두드리며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재밌지 않나? 이리 쉽게 에토르가 무너지다니."

"전부 주군의 뛰어난 복안 덕분입니다."

단 이틀.

에토르가 무너진 시간이다.

톰자엘 자작은 마석을 이용해 기사들을 대폭 늘리며 기사단을 강화했다.

1, 2성의 수습 기사에게도, 3성, 4성 기사에게도, 기사 단장에게도 닥치는 데로 마석을 복용시켰다.

그 결과는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에토르를 순식간에 몰락시켰다.

판을 깔아준 것은 렌구아지만, 에토르를 무너트린 건 광인이 된 에토르의 기사들이었다.

최소 3성 이상으로 이뤄진 광인 집단.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그들은 적에게 공포를 선사하는 광전사나 다름없었다.

카멜은 광인이 된 기사들을 보며 짙게 미소 지었다. 코룬강에서 잃은 전력을 단박에 복구할 귀한 전력을 얻었다.

"3층으로 가지."

이젠 광전사 집단을 이끌 수장을 얻을 차례였다.

"흐으으으―"

지하 3층에 들어서자 악취가 흘러나왔다. 단단한 감옥에는 두 사람이 억류되어 있었는데, 노쇠한 듯 보이는 노인은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오물이 덕지덕지 묻은 몸뚱이.

노인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톰자엘 자작.

한때, 토바른 3강에 포함될 정도로 강인한 세를 구축한 노귀족.

"으히히히… 배고파."

"충. 주군을 뵙습니다."

정신이 나간 톰자엘을 밀어내고 주술사들이 다가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실실 웃고 있는 톰자엘을 잠시 응시한 카멜은 주술사들을 바라봤다.

"세뇌는?"

"끝났습니다."

"그럼 자작은 필요 없겠군."

주술사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옹이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자작의 목이 데구루루 떨어졌다.

세력을 잃은 톰자엘은 그저 늙은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런 그를 지금까지 살려둔 이유는 저 사내 때문이었다.

에토르 가문의 검.

톰자엘에겐 과분한 기사.

5성 개화 특성자, 와일리 그라임스.

방치된 자작과 달리, 와일리는 주술이 담긴 쇠사슬에 사지가 결박된 채 공중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와일리를 산채로 포박하는데 리옹과 렌구아 그리고 다섯의 주술사 부대가 동원됐다.

피해는 없었지만, 반나절이란 시간이 걸릴 정도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기사였다.

'신명의 주인.'

와일리의 신명 목록은 아케인을 통해 전달받았다.

[와일리 그라임스 – 보좌의 검(바람)]

[전우애]

[맹수의 포효]

[호위 본능]

"얼굴이 많이 상했어."

카멜은 허공에 매달린 와일리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와일리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5성의 정신력은 초인에 가깝다.

그런 정신력을 단시간에 무너트리기 위해 카멜은 톰자엘을 와일리 곁에 살려뒀다.

[호위 본능]

와일리의 신명 목록에서 약점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주술사들은 와일리 앞에서 주군인 톰자엘을 처절하게 고문했다.

톰자엘이 미쳐버린 이유였다.

"와일리."

"…맹세하겠습니다. 충성을 맹세하겠습니다. 충성을...."

지속적인 정신 세뇌로 와일리는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내게 충성을 맹세하겠나?"

카멜이 종속의 반지를 와일리의 얼굴 앞에 내밀자, 검은 사파이어 위로 와일리의 얼굴이 투명하게 비췄다.

종속의 반지 앞에 와일리는 충성을 맹세했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껍질뿐인 맹세였지만, 종속의 반지는 와일리의 얼굴을 검게 물들이며 저항하지 않는 와일리의 영혼을 카멜에게 종속시켰다.

와일리는 우뚝 섰다.

마치 표정이 없는 인형 같았다.

"축하주다."

그런 카멜은 와일리에게 와인잔을 건넸다.

렛샤포 블랑.

톰자엘 자작과 첫 만남에서 음미했던 와인이었다.

"감사합니다. 주군."

"마셔라. 블라이어의 기사로 들어온 것을 환영한다."

"네."

무미건조한 대답과 함께 와일리가 잔을 받아마신 순간, 카멜은 짙게 미소 지었다.

신명의 주인 세 명.

이것으로 하나의 신명 목록 조건이 맞춰졌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은 통찰력]

[정신 지배(매혹)]

[종속 지배]

그리고,

[블라이어의 수장(3)]

카멜의 신명 목록에 변화가 생겼다.

161화 지배(Control) (3)

[블라이어의 수장(3)]

새로운 신명 목록의 추가.

카멜은 이를 볼 수 없었지만, 그 변화는 느낄 수 있었다.

종속의 반지, 검은 사파이어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가 더욱 짙어졌다.

그 모습에 카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이 커졌다.'

신명 목록은 단순한 지표가 아니다.

각자 보이지 않는 효과가 존재하며, 이는 신명의 주인에게 능력으로 발현된다.

[수장] 목록을 얻으면 '용아의 망토'처럼 지배력과 존재감이 커지는 효과가 생긴다.

이는 종속 가능한 그릇의 넓이가 커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나가지."

내려갈 땐 셋이었지만, 2층으로 올라올 땐 넷이 되었다.

피투성이 몰골의 기사, 와일리.

감정 없는 표정의 와일리는 카멜 곁에 착 달라붙어 따라왔다. 그를 주인으로 모시면서 [호위 본능]이 발동한 것 같았다.

카멜은 2층 감옥에 갇힌 광전사들을 둘러봤다.

"정체를 가릴 갑주가 필요하겠어."

얼굴마담으로 내세울 와일리와 달리 기사들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노출 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정체를 숨겨야 했다.

렌구아는 자신 있는 표정으로 답했다.

"이미 제작 중입니다."

"다른 주술사는 광전사들을 통제할 수 없나?"

"광기를 다룰 수 있는 이가 저뿐인지라...."

"광기의 돌이 있어도?"

"광기의 돌은 증폭 효과만 두드러질 뿐, 통제는 제 지팡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럼 이 돌의 쓰임은 다한 건가?"

"대규모 [광기 폭발]을 사용하려면 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럼 광기의 돌도 그대가 가지고 있어야겠군."

"그렇습니다."

혼탁한 빛을 불규칙하게 흩뿌리는 작은 돌.

이 돌을 처음 운반한 시종들은 모두 광기에 잡아먹혀 미쳐버렸다.

곁에 두면 안 되는 귀물(鬼物)로 광기로 사무친 원한 어린 원념이 담겨 있다고 알려져 있다. 카멜이 광기로부터 보호받는 이유는 착용 중인 목걸이 때문이었다.

축복을 내려주는 푸른 돌의 신비한 목걸이.

'본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능력을 더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신명을 판 대가로 받은 아티팩트 중 하나인데, 블랙마켓의 신명 거래는 철저한 익명으로 거래됐기에 물건의 주인에 대해 파악하는 건 불가능했다.

"렌구아 밑으로 광전사 부대를 편입시킨다."

"근시일 안에 최고의 부대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렌구아는 찢어지려는 웃음을 꾹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벌써부터 완성된 갑주에 어떤 주술을 새겨넣을지 행복한 고민이 들었다.

힐끗 리옹 쪽을 살피니, 역시나 표정이 잔뜩 굳어져 있었다. 안 그래도 신명 각성으로 밀리던 알력이 더욱 벌어진 순간이었다.

"바로 다음 계획으로 넘어갈 것이다. 최대한 빠르게 이곳 일을 마무리 짓도록."

"알겠습니다."

"와일리는 그대 곁에 두겠다. 그가 나타날 장소는 에토르가 아니니까."

와일리에게 당부를 내린 뒤 카멜은 렌구아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 감옥을 벗어났다. 시체들이 실린 수레 행렬은 전보다 더 늘어 있었다. 이곳이 정리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듯 보였다.

영주관으로 향하는 길.

잠시 말없이 뒤따르던 리옹이 조심스레 말을 걸어왔다.

"저… 렌구아 쪽으로 너무 힘을 실어주시는 건 아닌지."

"무슨 걱정이지? 너도 렌구아도 이미 종속의 충성을 맹세했을 텐데."

종속의 반지를 얻고 카멜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최측근들의 충성 맹세를 받는 일이었다.

카멜은 그 누구도 믿지 않았다.

그가 신뢰하는 건 탐욕을 바라보는 인간의 솔직한 감정뿐이다. 나머지는 탐욕을 이루기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카멜은 한눈에 리옹의 마음을 꿰뚫어 봤다.

신명의 주인, 렌구아 그리고 와일리.

그는 지금 초조해져 있었다.

"신명의 주인이 되고 싶나?"

"…송구합니다."

"네 염원은 곧 이뤄질 것이다."

"...?"

"날 못 믿나?"

"그, 그런 불경한! 절대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이 있다."

"어떤 명이든 내려주십시오!"

잠시 후, 리옹은 카멜의 지시를 받들어 친위대 일부를 선별해 블라이어 군대가 주둔 중인 베네타 경계로 보냈다.

'기마병 전부를 물리라니....'

포위망의 큰 축을 담당하던 기마병 전부를 블라이어 영지로 복귀시키란 지시가 떨어졌다.

주군의 명에 의문이 들었지만, 그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말이다.

* * *

카멜은 영주관으로 돌아와 자작의 가신들과 행정관을 모두 불러 모았다.

에토르 참사에 살아남아 도시 복구에 힘쓰던 사람들은 카멜의 부름에 모든 작업을 중단하고 자작의 방에 몰려들었다.

방안은 작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카멜은 그 시선들 속에서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꿀꺽―

그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때문인지, 뒤에 시립한 리옹의 사나운 시선 때문인지, 그 누구도 카멜이 잔을 내려놓기까지 입을 떼지 않았다.

조용한 침묵.

잠시 후,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톰자엘 자작님의 흔적을 발견했다."

"저, 정말입니까!?"

"오, 신이시여!"

에토르 성주의 흔적이 발견됐다!

들뜬 외침과 웅성거림도 잠시, 모두가 카멜의 입만 바라봤다. 이들이 현재 가장 궁금해하는 건 성주의 생사였기 때문이다.

"생사는 불확실하다. 수색을 위해 군대를 동원해야 할 것 같은데...."

"암요! 무조건 해야지요! 어딥니까? 자작님의 흔적이 발견된 장소가?"

"이곳이다."

자리에 선 카멜이 책상에 펼쳐진 지도 위에서 한 장소를 가리켰다.

"…이곳은?"

"라웁 숲 아닙니까?"

카멜이 가리킨 라웁 숲은 블라이어 방향과 최단 거리로 이어져 있었다. 일부는 그 위치에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에토르보단 블라이어에 가까운 상당히 먼 거리였기 때문이다.

"어찌 자작님이 저곳까지...."

"단장 와일리의 흔적도 함께 발견된 상태다. 곁에 단장이 있다면 모두가 생존해 있을 확률도 있겠지. 기사단의 생사도 알 수 있을지 모른다."

"기, 기사단까지!?"

"바로 군대를 움직여야 합니다!"

"당장 동원령을 내리겠습니다!"

에토르의 은인, 카멜이 확신하는 정보.

톰자엘 자작과 단장 와일리, 기사단의 생사를 파악할 수 있다면 위치가 어디든 수색대를 먼저 보내는 게 맞았다.

사람들은 카멜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차를 마시는 손짓.

"믿어줘서 고맙군."

나른한 목소리에 시선이 끌렸다.

매혹의 문양.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카멜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 * *

이틀 뒤, 에토르 전역에 소집령이 떨어졌다. 도시 복구 작업에 투입된 정예들이 하나둘 북쪽 성문 앞에 집결했다.

들불처럼 번진 광인들의 공격으로 일반 병사들의 피해가 극심했지만, 눈앞에 집결한 정예들은 큰 피해가 없었다.

값비싼 장비.

철갑을 두른 전투마.

카멜의 부탁대로 전원 정예 기마병으로 구성된 수색대였다.

톰자엘 자작이 훗날 블라이어를 삼키기 위해 철저히 훈련시킨 최정예 전력.

3천 기의 강력한 기마 군대가,

"나를 따르라."

블라이어 성주, 카멜의 지휘 아래 질서정연하게 라웁 숲 방향으로 빠르게 이동을 시작했다.

따닥― 따닥― 따닥―

리옹은 친위대와 함께 카멜이 탄 마차를 곁에서 호위했다.

그 뒤로는 통신 역할을 위해 따라온 주술사 부대가. 더 뒤로는 에토르의 기병 수천이 따라붙었다.

전부 말을 타고 이동했기에 숲을 가로지르는 속도는 거침이 없었다.

마차 안에는 카멜 외에 새로운 인물이 탑승해 있었는데, 바로 아케인이었다.

열린 창가 사이로 보드란 바람이 불어닥쳤다.

하늘거리는 백발.

햇살에 반짝이는 푸른 사파이어 귀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케인은 산책을 나온 듯 휙휙 스치는 풍경을 조용히 감상했다.

카멜은 그런 아케인을 말없이 응시했다.

에토르에 머무는 동안 카멜은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조사했다.

[아케인은 '피를 마시는 잔'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의 농락일 수 있지만, 자신을 죽인 존재가 언급된 만큼 무시하기도 힘들었다.

은밀히 감시자들도 붙였고, 시간을 내서 따로 식사나 만남의 시간도 가졌다.

아케인을 철저히 파악하기 위해서였는데,

'도통 모르겠군.'

세력도 없어 보였고, 그에게 접근하는 인물도 없었다.

성격 또한 마찬가지.

뛰어난 통찰력으로 타인의 생각을 단박에 파악하는 자신조차 아케인이 어떤 인물인지 정확히 정의 내리지 못했다.

아케인은 에토르의 몰락 과정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다.

수천, 수만 명이 자신의 명령 한 마디에 학살당하는 장면을 봤음에도 그는 자신을 향해 어떠한 말을 남기지도, 그렇다고 곁을 떠나지도 않았다.

그저 숙소를 부탁한 뒤 조용히 지냈을 뿐이었다.

카멜이 그에 대해 파악한 건 딱 한 가지뿐이다.

그는 마법사 집단과 친분이 깊다.

"불편한 것은 없었나?"

"아주 편하게 지냈습니다."

"온종일 기도를 드렸다고 하던데."

"점성술사의 신기는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것. 주기적으로 하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목소리를 들었나?"

그 물음에 아케인의 가느다란 눈매가 카멜을 향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카멜의 얼굴에 드물게 파동이 일었다.

묘한 흥분감.

"그래서 어떤 목소리를 들었지?"

"그 전에 당신께 변화가 생겼군요. 당신의 신명을 보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얼마든지."

마차 안에서 신비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귀걸이에서 손을 뗀 아케인은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카멜의 신명에서 새로운 목록을 봤기 때문이다.

"수장으로 선택받으셨군요."

"얼마 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케인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적힌 내용을 살핀 카멜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졌다.

'그'의 신명 목록에 변화가 생겼다.

[XX XXXX― 신명 사냥꾼(xx)]

[X X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심장]

[XXXX 길잡이]

[염원의 반지(XX)]

[헌트(hunt)의 수장[?]]

베일에 가려진 정보는 이전과 거의 동일했다.

달라진 것은 두 가지.

그중 조금 전 아케인의 말뜻을 알아채곤 한 가지 목록에 집중했다.

"…헌트의 수장."

"새로 노출된 신명입니다."

"놈이 수장이 됐다는 건 주변에 신명의 주인이 셋 이상 존재한다는 건데. '그' 곁에 록터 펠리스와 칼 바스타인이 붙은 거겠지?"

"더 있을지도 모르죠. 최소 셋이라는 뜻이니까."

"...."

아케인의 묘한 뉘앙스가 거슬렸다.

릴리 베이스의 존재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니, 그녀를 소속으로 영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대(大)마녀의 고향은 오르도르의 숲이었으니까.

아직 천년 나무는 멀쩡했다.

그나마 추가로 가능성 있는 인물이,

"알렉스 마르샤는 신명의 주인인가?"

"직접 만나보기 전까진 알 수 없습니다."

"그를 직접 보면 답이 나오나?"

"답은 신이 주시는 겁니다."

언제나 그렇듯 아케인은 확답을 피했다.

카멜은 미간을 좁힌 채 다른 신명 목록에 집중했다. 아케인이 말했던 '페널티'일까. 베일에 가려졌던 '그'의 신명 목록 일부가 드러났다.

"염원의 반지라...."

그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신명 목록에 나올 정도라면 종속의 반지처럼 유명한 아티팩트가 분명한데, 회귀 이전에 들어본 적 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런 카멜을 잠시 살피던 아케인이 물었다.

"염원의 반지에 대해 아는 바가 있습니까?"

"아니. 모른다."

"어렵군요. 이 자의 신명은...."

"새로운 정보가 또 노출된다면 언제고 정체가 밝혀지겠지."

"그 전에 당신이 먼저 이 자를 찾아야 할 겁니다. 그게 제가 당신을 돕는 이유니까."

"헌트 소속의 일원만 잡으면 바로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기대하겠습니다."

아케인은 다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신명에 대해 고민하는 것일까.

'그'의 신명과 '그'의 이름에 대해 유독 집착을 보이는 아케인이었다.

"리옹."

카멜이 마차에서 창문을 열고 신호를 보내자, 리옹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후, 주술사가 통신구에 대고 주문을 읊조렸다.

렌구아에게 보내는 신호였다.

그렇게 하루가 흘렀다.

"...."

덜컹거리는 마차에서 잠시 눈을 붙인 카멜이 정신이 들었을 때, 날이 밝아 있었다.

카멜이 이끄는 군대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이동했다. 아케인을 살피니 그는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자는 것인지, 기도를 올리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습.

창문을 열고 리옹을 호출하려고 하는데, 뒤편에서 소란이 일더니 따라오던 기마 부대가 하나둘 멈추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오, 와일리님다!"

"앞쪽에 소식을 알려!"

단장 와일리가 터덜터덜 숲에서 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누군가의 습격을 받은 듯 여전히 피투성이였다.

"…록터 펠리스."

와일리의 입에서 록터의 이름이 나직하게 흘러나왔다.

톰자엘 자작을 죽인 범인으로 지목한 것이다.

162화 주도권 싸움

와일리 그라임스.

실종됐던 기사 단장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가 멈춰 섰다.

에토르의 기마병들은 자연스레 와일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기사 단장은 성주의 부재 시, 그 자리를 대리할 수 있는 신분이기에 지금부터 와일리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려고 했다.

"성주님이 록터의 검에 암살당했다."

"...!"

와일리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모두에게 충격을 주기 충분했다.

록터 펠리스.

한때 와일리와 함께 토바른 내 가장 강한 기사로 손꼽혔던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

그가 성주를 암살했다니.

믿기 힘든 소식이지만, 전달자가 와일리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블라이어로 도망쳤다. 당장 추적해야...."

말끝을 흐린 채 와일리는 피투성이로 쓰러졌고, 병사들이 다급히 그를 부축했다.

조용히 지켜보던 카멜이 나섰다.

"그를 마차에 태워라."

와일리를 마치 안에 태우고 카멜은 치료를 위해 주술사를 불렀다. 카멜은 치료를 이유로 병사들을 물리고 리옹을 불렀다.

하지만 그의 입에선 치료와 전혀 상관없는 내용들이 흘러나왔다.

"와일리가 도착했으니, 그대는 시킨 대로 움직여라."

"맡겨주십시오."

"놈들의 흔적을 찾되, 발견한다면 렌구아와 합류하기 전까지 충돌은 무조건 피해라. 명심해."

"충."

리옹은 기마병의 선임병들을 소집한 뒤 병력을 블라이어로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와일리가 아닌 리옹의 지시였지만, 에토르의 기마병들은 군말 없이 리옹의 뒤에 붙어 블라이어로 떠날 준비를 했다.

록터 펠리스 사냥.

성주를 죽인 범인을 추적하겠다는데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와일리 단장도 기절하기 전까지 도망간 범인을 당장 추적해야 한다고 외치지 않았던가.

기마 백 기 정도만 마차 호위로 남겨둔 채 수천의 기마병과 리옹의 부대는 빠르게 숲에서 사라졌다.

다소 휑해진 마차 무리.

카멜이 탄 마차는 그 뒤로 천천히 이동을 시작했다.

[렌구아, 어디쯤이지?]

[블라이어에서 사흘 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리옹과 엇비슷하게 도착하겠군.]

마차 안의 광경은 병사들이 상상한 것과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치료를 위해 들어간 주술사는 통신구를 렌구아와 연결했고, 와일리는 반대편 자리에 멀쩡히 자리하고 있었다.

[광전사 부대는?]

[주술 각인까지 마무리하지 못했지만, 전원 갑주를 착용한 채 이동하고 있습니다.]

[둥지 내에 머무는 주술사들은?]

[비밀 거점으로 대피령을 내렸습니다. 제가 블라이어에 도착하면, 그 즉시 전부 합류할 겁니다.]

[내일 중으로 주술사 부대 열 개 대대가 그대를 찾아갈 것이다. 그들과 합류하는 즉시 리옹을 찾아가라.]

[바로 사냥을 시작합니까?]

[산 채 잡을 수 있다면 잡아라. 힘들면 죽여도 좋다.]

[뿔뿔이 도망친다면....]

[알렉스 마르샤. 놈을 최우선으로 잡아라.]

카멜은 주저 없이 알렉스를 지목했다.

록터도 중요했지만, 한 번의 뼈아픈 패배 이후 그동안의 흐름을 되짚어봤을 때, 놈을 정리해야 앞으로 전투가 손쉽게 이뤄질 것 같았다.

게다가 알렉스는 '그'의 전달자 노릇을 하던 놈이었다. 머릿속엔 모두가 궁금해하는 '그'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다.

놈을 잡아 아케인 앞에 꿇린다면 지금껏 가진 의문과 의심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도착했을 때 원하는 얼굴이 내 앞에 있었으면 좋겠군.]

[주군의 염원은 이뤄질 것입니다.]

렌구아와 통신을 끝낸 카멜은 곧장 블라이어에 머무는 주술사에게 연락을 취했다.

록터 펠리스, 톰자엘 자작을 죽인 살인자.

그로 인해 블라이어와 에토르가 전쟁을 일으킬 것이란 소식.

카멜은 이 소문을 정보 길드를 통해 블라이어 전역에 퍼트리라 명했다.

현재 흘러나오는 록터의 영웅담을 더 자극적인 소문으로 덮으려는 의도였다.

[현상금 100만 골드 외에 록터의 위치를 알려준 자에게 1만 골드를 주겠다고 알려라.]

돈을 뿌렸으니, 록터의 위치도 곧 파악될 것이다.

필요한 작업을 모두 마치자, 주술사는 예를 표하며 마차 바깥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아케인은 와일리에 관심을 보였다. 사로잡히기 전에 사자 같은 위용을 보였던 기사였다.

눈앞에 손을 흔들며 관심을 끌었는데, 와일리는 눈길을 한 번 줬을 뿐, 인형 같은 반응을 보였다.

"정신이 잡혀 있군요. [종속 지배]입니까?"

"눈치가 빠르군."

"종속은 정신을 가두기 때문에 신명의 성장을 막습니다. 이대로 흐른다면 이자의 성장은 여기서 끝날 겁니다."

"상관없다. 부족한 힘은 다른 것으로 채우면 그만이니까."

자신은 미래를 알고 있는 회귀자다.

잘 닦인 길로 탐욕을 쫓다 보면 굳이 성장을 통해 강해질 필요가 없었다. 전부 빼앗아서 취하면 그만이었으니까.

아케인은 그런 카멜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조금 전 내용들 제가 전부 들어도 되는 것입니까? 중요한 내용 같던데."

"들어서 좋을 건 없지."

"절 죽일 생각입니까?"

"죽일 수 있었다면 진즉 죽였겠지."

"...."

강해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누구보다 건드리기 껄끄럽다.

그게 카멜이 판단한 아케인의 존재였다.

'그리고 정말 피를 마시는 잔과 관련되어 있다면....'

카멜은 아케인과 손을 잡으며 그를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양날의 검이 될지 모르지만, 회귀 전과 지금의 자신은 달랐다.

피를 마시는 잔을 확실하게 인지한 상태였으니까.

중요한 작전을 아케인 앞에서 언급한 건, 신뢰적인 면이나 훗날 더 노골적인 부탁을 의도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마법사 집단과 손을 잡아야 할 수도 있으니까.'

카멜은 마녀 집단과 부딪칠 최악의 상황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놈들이 베네타로 도망쳤다면 일이 훨씬 수월했을 텐데 아쉬워."

"전쟁이라도 할 생각이었습니까?"

"이종족들의 안전 욕구를 모르나? 그들이라면 록터를 보내서라도 전쟁을 막으려고 했을 거야."

지금 자신이라면 블라이어와 에토르 군대를 모두 이끌고 갈 수 있다. 베네타의 혈맹 관계에 분열을 유도할 좋은 기회였는데, 놈들이 블라이어를 정면으로 파고들지 예상치 못했다.

"그들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미 독 안에 든 쥐다. 그들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어."

블라이어 안쪽으로는 리옹과 렌구아가 광전사 부대와 친위대, 주술사 부대를 이끌고 추적에 나설 것이고, 그들을 피해 영지 바깥으로 도망친다면 블라이어와 에토르의 기마병, 도합 6천의 기동력과 와일리를 운용해 발목을 잡을 계획이었다.

놈들이 아무리 강해도 이 많은 수를 상대로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이번에야말로 놈들을 사로잡아 머릿속 기억을 모조리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박멸의 기회였다.

* * *

"우와!"

릴리는 블라이어의 성문을 코앞에서 올려다보며 감탄을 흘렀다.

토바른 지역을 여행하면서 본 가장 큰 성문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곧 목이 아픈지 칭얼거리며 뒷목을 탁탁 두드렸다.

"블라이어에 가본 적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응. 입구까지만."

저 멀리 바닥을 가리켰는데, 저 자리에서 주술사 무리를 만나 코룬 강까지 끌려갔다고 했다.

주술사 무리가 가져다준 소중한 인연.

릴리의 설명을 들으면서 주술사들에게 처음으로 고마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치? 댕댕아."

"...."

케로스는 작은 강아지 인형이 되어 릴리 왼쪽 어깨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외형이 눈에 띄기에 인형화를 시킨 건데, 나름 귀여웠다.

"들어가죠."

"약속 지켜!"

"물론입니다."

예쁜 옷을 선물해준다고 했는데, 과연 마음에 들려나 모르겠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 하루 남았다.

그 전에 나도 할 일이 있었기에 록터와 칼처럼 블라이어에 발을 들여놨다.

노예로 잡힌 마을 사람들을 풀어주고, 드라카가 이끄는 사냥꾼 무리를 박멸한 지 이틀 정도 지날 때였다.

입구에 병사들의 감시가 있었지만, 출입이 다른 때와 달리 자유로운 편이었다.

특히 사냥꾼 복장으로 들어서니, 검문조차 대충 이뤄졌다.

그만큼 많은 수의 사냥꾼이 이번에 블라이어를 많이 찾았다는 뜻이었다.

물론, 살아서 돌아간 사냥꾼은 반의반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블라이어로 오는 길은 평탄치 않았다.

피로 얼룩진 길.

"식당이 너무 많아!"

"좌판입니다. 식당이 아니라."

하지만 그 불편함도 대로(大路) 사이로 길게 펼쳐진 좌판들을 보자 잠시 녹아들었다.

카멜의 공포 정치 속에서도 블라이어는 나름 사람 사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거! 이거!"

그녀가 멈춰선 좌판은 고기 꼬치집이었다. 노릇하게 형체를 알 수 없게 구워진 꼬치구이.

무슨 고기일까.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먹고 싶은 만큼 드세요."

난 안 먹을 거거든.

릴리는 신난 표정으로 여러 종류의 꼬치를 입에 욱여넣었다. 표정을 보니 맛이 괜찮은 듯 보였다.

난 꼬치 하나를 집어서 멍한 케로스의 코앞에 흔들곤 릴리에게 냉큼 건넸다.

크르릉―

나만 들리는 작은 울음소리.

좋은 뜻은 아닌 거 같은데.

[나중에 머리를 씹어준다고 하는군.]

"…그런 살벌한 해석은 굳이 안 해줘도 됩니다."

오늘 아침 레토의 의식이 돌아왔다.

그 이후, 케로스의 으르렁거림을 해석해주며 존재를 과시했는데 릴리야 계약자이니 당연하지만, 레토의 경우는 어떻게 케로스의 말을 알아듣는 거지?

"다 잤습니까?"

[죽었다가 깨어났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 저주의 여파로 무수히 죽고 깨어나길 반복했다.]

"…죽어요?"

이러면 장난도 못 치겠네.

앞으로 신명을 자주 확인할 텐데 괜찮냐고 물으니 아주 좋다고 했다.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나.

이 녀석도 확실히 변태가 맞았다.

"이것도!"

"이건요?"

"이건 모양이 징그러워서 싫어."

"네모랑 세모인데...."

"세모는 징그러워."

뭐가 다른 건데?

사탕 모양을 가지고 잠시 투덕거린 것도 잠시, 릴리를 풀어놓으며 그녀 뒤를 쫓았다. 신기한 지 좌판 곳곳을 다니며 돈을 펑펑 써댔는데, 그녀를 보고 있자니 팽팽히 당겨졌던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눈앞에 놓인 상황은 급박하기만 한데, 그녀와 있으니 묘하게 긴장이 안 됐다.

분위기가 너무 밝은 것도 문제였다.

"아앗! 자, 잠깐! 잠까안――!"

"시간 없습니다. 옷 구경해야죠."

"맞아, 옷!"

이미 봐두었던 옷 가게에 들어갔다. 1층과 2층으로 이뤄진 고급스럽고 세련된 옷 가게였다.

나와 릴리가 들어서자, 1층 소파에서 쉬고 있던 여인들의 표정 변화가 눈에 담겼다.

릴리의 얼굴을 보곤 화들짝 놀라더니 이내 우리 복장을 살피곤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기서 비웃음이라니.

사냥꾼 복장 처음 보나.

릴리보다 못생긴 것들이.

꾸며놓은 자태를 보니 이 주변에서 제법 콧방귀 뀌고 다니는 집안 여식들 같았다.

여인들은 지배인을 불러 우리를 가리키곤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화를 요약하면 더러운 종자들을 치우라는 말인데, 이년들 봐라?

잠시 후, 지배인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죄송하지만 이곳은...."

"죄송할 필요 없고, 이거요."

난 지배인에게 한 장의 편지를 건넸다.

편지 위에 새겨진 검은 장미.

펜리가 떠나기 전, 블라이어 내의 검은 장미 지부를 알려주며 건네준 편지였다. 그냥 보이면 된다고 했는데, 역시나 편지를 보자 지배인의 반응이 180도 달라졌다.

"신분이 어떻게 되십니까?"

"혈맹의 주인."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혈맹의 주인은 모두 셋.

베네타의 주인 도르네프와 검은 장미 마스터 펜리, 그리고 헌트의 알렉스였다.

편지를 확인한 지배인은 나에게 다가온 속도보다 두 배는 빠른 속도로 여인들에게 달려가더니,

"오늘 영업 끝났습니다. 전부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뭐?! 싫다면?"

"쫓아내!"

여인들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버티려고 했지만, 사내들이 나타나 여인들을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지나치는 그녀들의 얼굴을 보며 난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고, 곧 미소로 답해줬다.

"아, 죄송. 너무 못 생겨서."

"…이!"

어떠냐, 이것이 바로 인싸의 인맥이라는 거다.

163화 주도권 싸움 (2)

옷 가게 입구에 [영업 종료]란 팻말이 걸렸다.

지배인은 나와 릴리를 2층 접대실로 안내했다.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인이 차와 간식을 내왔는데, 여인도 지부의 사람 같았다.

잠시 후, 연락을 취하고 돌아온 지배인이 말을 전했다.

"기다리시면 전령이 올 겁니다. 그럼."

"아, 잠시만."

"제게 시키실 일이라도...?"

"이 여인에게 어울릴 만한 옷을 골라주시겠습니까? 전령과 만나는 건 저 하나입니다."

잠시 릴리를 바라본 지배인은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영광입니다."

지배인을 따라가라는 내 말에 릴리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간식과 지배인을 번갈아 보는 모습.

난 헛웃음을 흘리며 간식을 한 움큼 집어 손에 쥐여줬다.

"됐죠? 어서 가요."

"응!"

이제 그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 것 같았다.

릴리가 1층으로 내려가고 뒤따라 사라지는 지배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전령이라...."

정보를 전달하는 인물이 따로 있는 걸 보니 지배인은 지부로 사용하는 장소를 관리만 하는 사람 같았다.

블라이어에선 이종족이 자리 잡을 수 없으니 대리인이 필요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종족의 보호는 오직 베네타에서만 이뤄졌으니까.

잠시 후, 들려오는 작은 인기척.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검은 복면을 한 호리호리한 이가 서 있었다.

검은 피부, 뾰족한 귀.

다크 엘프, 검은 장미의 일원 같았다.

"혈맹의 주인을 뵙습니다. 블라이어의 지부장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소개한 다크 엘프는 테이블 건너편에 자리를 잡았다. 다소 뻣뻣한 모습인데, 처음부터 친절은 바라지도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정보지, 그의 친절이 아니었으니까.

"마스터는 무사히 복귀했습니까?"

"사흘 전에 연락받았습니다. 마스터도 넬라님도 모두 무사합니다."

"다행이군요. 사흘 전이면 설득하기 충분한 시간이었을 텐데, 베네타에서도 답이 나왔겠군요."

"넬라님이 적극적으로 나섰지만, 답은 거절입니다."

"역시, 거절이군요."

예상은 했지만 직접 답을 듣게 되니 쓴웃음이 나왔다.

코룬강 전투를 경험한 넬라는 카멜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인지한 인물이다. 신녀의 영향력을 통해 베네타에게 지원 요청을 부탁했는데 역시나 답은 거절이었다.

"일이 잘못되면 베네타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해합니다."

군주 도르네프와 단장 나토네, 드워프 기사단.

마스터 펜리와 간부급 이상으로 구성된 검은 장미.

내가 지원으로 요청한 전력은 베네타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나마 혈맹의 주인 신분으로 강력히 요청하고 신녀 넬라가 피력했기에 논의라도 된 것이다.

즉, 이번 요청은 도르네프도 펜리도 거절했다는 의미였다.

'아직 전면전은 무리인 건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준비가 덜 됐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도 확신을 주지 못했고, 베네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카멜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최정예는 아니지만 다른 이들이라도...."

"아닙니다. 그들이 아니면 도움이 안 됩니다. 지원 요청은 철회하겠습니다."

"그리 전하겠습니다."

"베네타의 상황을 알고 싶군요."

"경계를 포위한 블라이어 군대 때문에 축제는 조기에 종료됐습니다. 지금은 혹시 모를 침략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블라이어 군대는 여전히 경계 쪽에 주둔 중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특이점이라도 있습니까?"

"기마병이 보이지 않습니다."

"기마병?"

"검은 장미들이 블라이어 군대를 살피는 중인데, 경계를 포위하고 감시하던 기마병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사라진 기마병의 숫자를 아십니까?"

"대략 3천 정도로 파악됩니다."

"3천...."

묘한 불안감.

기동력이 빠른 기마병을 어디로 뺀 거지?

경계에 없다면 두 곳 중 한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블라이어 혹은 에토르.

무척 중요한 정보로 판단하고 고민을 시작했는데, 전령이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뭡니까?"

"에토르 지부장이 보내온 긴급 서신입니다. 직접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가져왔습니다."

"에토르?"

학살자 카멜이 현재 머무는 장소.

무척 궁금했던 소식이라 다급히 서신을 펼쳤는데, 서신을 읽은 순간 이전에 한 고민은 말끔히 사라졌다.

서신에 적힌 첫 줄.

[톰자엘 자작이 실종됐습니다.]

"빌어먹을...."

내가 예상했던 최악의 시나리오.

서신에 적힌 에토르의 상황을 쭉 읽어 내려갈수록 그 예상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광인들의 습격을 막아낸 블라이어 성주가 에토르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구원자? 지랄 염병하네."

광인을 이용해 피해 없이 에토르를 도모한 것 같았다.

무혈입성.

예상했던 시나리오보다 더 최악이었다.

학살자의 손에 에토르가 넘어간 상황. 서신을 내려놓으며 전령에게 물었다.

"블라이어 쪽 기마병이 사라진 시기가 언제입니까?"

"이틀에서 사흘 안쪽입니다."

광인들이 에토르를 습격한 시기와 기마병이 사라진 시가가 크게 차이 났다.

카멜이 에토르를 장악하고 며칠 뒤에 기마병이 군대에서 빠져나갔다.

에토르와 상관없는 움직임이란 뜻.

그렇다는 건,

'블라이어다.'

수천의 기마병이 블라이어로 오고 있다.

우리를 가두기 위해 적극적이던 포위망을 포기하고 기마병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카멜에게 우리 위치가 발각당한 것 같았다.

시간이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어디서 우리 위치를 파악한 거지?

"그리고 블랙마켓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습니다."

'아, 블랙마켓.'

빌어먹을, 그놈들을 생각지 못했다.

아니, 생각할 여유가 없다.

블랙마켓의 눈을 피해 일을 도모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어떤 움직임입니까?"

"비밀리에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찾거나, 조사하는 모양새인데...."

뭔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다급히 알아봐야 할 것이 생겼다.

"도움이 필요한데 몇 가지 부탁을 해도 되겠습니까?"

"마스터의 각별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어떤 부탁이든 적극적으로 돕겠습니다."

펜리, 이 녀석.

드디어 철들었구나?

"대신 알렉스님이 가지고 계신 다마스커스 금속에 대한 교섭권을...."

"하. 이 돈리 새끼."

"...?"

잭에게 강탈해간 크로우가 다마스커스 금속이란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긴 베네타는 드워프들의 도시였으니까.

"제가 죽으면 아무것도 없다고 전해주세요."

"...."

"제 부탁은 이겁니다."

난 교섭권 따윈 무시하곤 필요한 것들을 전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도와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으아아악!"

1층으로 내려오니 비명이 들렸다. 다급히 달려가니 지배인이 손을 붙잡고 쓰러져 있었다.

소파에 홀로 배를 깔고 멍하니 엎어져 있는 케로스. 딱 봐도 인형인 줄 알고 만지다가 물린 모양이었다.

살짝 문 것 같은데 피가 철철 나온다.

아, 그나마 다행인 건가?

"이, 인형이...!"

"이거 치료비로 쓰세요."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 인형."

"여인은 어디 갔습니까?"

내가 주제를 돌리며 묻자, 눈치 빠른 그는 한쪽을 가리켰다.

"탈의실에 계십니다."

지옥견을 홀로 두고 가다니, 옷 가게가 홀랑 타버리면 어쩌려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옷가지가 보였다.

옷들이 모두 예쁘고 화려하긴 한데, 역시나 선택받지 못했다.

당황한 지배인을 2층으로 올려보내고, 케로스의 뒷덜미를 잡아 올렸다. 축 늘어진 게 영락없는 인형이다.

"물어뜯을 거면 인형인 척은 왜 하는 거야?"

"...."

"너 때문에 릴리가 곤란해지면 어쩌려고."

콧잔등을 툭툭 때리며 도발했는데, 역시나 릴리의 이름을 들먹이자 대들지 못하고 수염만 부르르 떨 뿐이었다.

잠시 후, 종업원의 안내를 받으며 릴리가 탈의실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왔네?"

"...."

불편하다며 빽― 외치며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외의 모습이었다.

새하얀 블라우스에 짧은 스커트.

다만 블라우스의 양쪽 소매가 불편했는지 민소매처럼 뜯어버렸다.

기다란 흑발을 가지런히 묵고, 온몸이 옅게 비치는 실크 망토를 걸쳤는데, 무척 잘 어울렸다.

그런데,

"…진짜입니까?"

"뭐가?"

"그, 그거."

"뭐? 가슴? 불편하긴 해. 맞는 게 없더라고."

"...."

소설에는 이런 설정이 없었는데.

펑퍼짐한 로브를 벗고, 드러난 그녀의 몸매는,

"뭐가 어리다는 거야? 망할 작가 새끼."

반전이었다.

* * *

"으아아앙! 안돼!"

"됩니다."

"안 된다고!"

"돼요."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옷을 포장해달라고 했더니, 벗기 싫다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고른 옷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

하지만 입고 나가기엔 너무 눈에 띄었다. 카멜이 쫓는 상황이라고.

하지만 설명해 준다고 알아들었으면 그건 릴리가 아니었다.

"마음에 듭니까?"

"응. 마음에 들어."

"전투가 벌어지면 바로 찢어질 겁니다. 맞죠?"

"그렇지. 그건 안되지."

"복구 기능이 설정된 아티팩트로 제작을 의뢰할 생각입니다. 평생 입고 다니는 거죠."

"어?!"

"하지만 찢어지면...."

"포장해죠!"

상황은 금세 일단락됐다.

사냥꾼에게 강탈한 금화가 제법 있어서 넉넉하게 비용을 지불하고 릴리와 바깥으로 나왔다.

우리는 길목 곳곳을 돌아다니며 광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정신없이 주변을 구경하는 릴리와 달리 난 귀를 기울이며 움직였다. 슬슬 퍼질 때가 됐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듣고 싶었던 소식이 들려왔다.

록터의 영웅담.

성주 카멜도 방관하고 있는 약탈자들과 맞서 블라이어를 지켜내는 록터의 소문은 실시간으로 불같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선 록터의 이름이 자주 언급됐다.

'이 정도면 충분해.'

확인을 끝내고 드넓은 중앙 광장에 도착했다.

살아남아 블라이어에 온다면 꼭 한번 방문하고 싶었던 장소였다.

광장 주변은 꽃과 나무로 정원처럼 꾸며져 있었다.

카멜에게 잡혀 블라이어를 빠져나갈 때만 해도 중앙 광장은 피가 마르지 않은 죽음의 장소였다.

신입으로 자신을 끌고 왔던 암살자들조차 썩어서 문드러진 곳.

꽃 대신 단두대가, 나무 대신 시체들이 쌓여 있던 곳인데, 지금은 그 흔적을 말끔히 지우고 모든 과거를 부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 대신 탄생한 장소가 통곡의 언덕이지.'

영지 바깥에 자리한 거대한 둔덕.

카멜에게 반하는 자, 카멜에게 이용당한 자, 카멜을 원망하는 자들이 죽고 죽어 버려지는 장소였다.

끌려가면 끔찍한 죽음에 이르는 장소라 영지민들에겐 공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가 광산에 끌려가도, 이웃이 주술사에게 핍박받고 납치를 당해도 사람들이 쥐 죽은 듯 살아가는 데는 통곡의 언덕이 큰 몫을 차지했다.

공포 통치.

카멜은 통곡의 언덕을 이용해 사람들의 반발심을 짓밟았다.

내가 통곡의 언덕으로 동료들을 모으는 이유였다.

'사람들의 심리를 흔들려면 그 심리를 붙잡는 원인부터 제거해야 하니까.'

통곡의 언덕을 불태울 계획이었다.

광장을 쭉 둘러본 나는 잠시간의 감회를 느끼며 등을 돌렸다.

살아남아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그냥 안 돌아간다."

카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계획도 분명 변수가 발생할 것이다.

하지만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다.

내 시선은 잠시 릴리에게 머물렀다. 예쁘게 핀 꽃망울 앞에 쭈그린 그녀가 보인다.

"가죠."

"응? 어디로?"

"저 너머 언덕이요."

성벽 너머를 잠시 바라본 나는 릴리와 함께 움직였다.

릴리가 주섬주섬 품에서 사탕을 꺼내 건넸다.

네모난 사탕.

난 피식 웃으며 사탕을 입에 넣었다.

혀로 사탕을 굴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날이 저무는 도시는 여전히 시끌벅적했고 사람들의 표정엔 미소가 감돌았다.

묘한 위화감이 든다.

공포 정치를 받아들이고 타인의 죽음을 외면하면서 얻게 된 작은 행복이라는 걸까.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있기에 원한은 없지만, 블라이어 어딘가엔 카멜의 도구로 죽어가는 이들이 존재할 것이다.

"좋은 시간은 이제 다 끝났네."

그래.

이젠 다 끝났다.

눈앞의 저들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그렇게 우리는 성문을 빠져나갔다.

계획 시작을 하루 앞둔 밤이었다.

164화 주도권 싸움 (3)

통곡의 언덕은 블라이어 성문 밖으로 나서면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까마득한 거리에 있음에도 눈에 띄는 드넓은 언덕.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오싹한 분위기를 풍긴다.

성문을 드나드는 영지민들은 아침마다 언덕을 눈에 담으며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깜깜해."

"저쪽입니다."

우리가 성문을 나섰을 땐 밤이었다.

확 트인 평야.

어둠으로 물든 탓에 언덕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방향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허공 속에 활활 타오르는 횃불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횃불들은 거리를 둔 채 한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횃불 중 한 곳으로 다가가자, 고요한 어둠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수레를 끌고 힘겹게 나아가는 당나귀 한 마리.

노인 한 명이 횃불을 든 채 당나귀 곁에서 수레를 끌고 있었다. 힘없이 걷던 노인은 내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풍파가 휩쓸고 간 피로한 몰골이었다.

"…누구요."

"밤 길이 어두워서 그러는데,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노인은 말없이 나를 바라봤다. 나를 보는 노인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없었다.

닳고 닳은 메마른 눈동자.

이미 삶을 포기한 사람 같았다.

"이 수레가 어디로 가는지 알고 하는 소리요?"

노인은 수레를 가리켰다. 수레는 덮개로 덮여 있었다. 핏자국도 군데군데 보인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언덕이겠죠."

"혹시 성에서 나온...."

"아닙니다."

잠시 두려운 감정을 내보이던 노인은 내 답에 한숨을 내쉬곤 수레를 끌고 움직였다.

"맘대로 하시오."

조용한 동행이 시작됐다.

저 너머, 노인과 같은 횃불들이 계속 눈에 띄었다. 모두 언덕으로 향하는 수레 같았다.

시간은 늦은 밤을 지나고 있지만, 횃불을 든 이들은 빠르게 늘어났다. 이젠 뒤쪽에서도 횃불들이 따라붙는 게 보였다. 어느덧 나도 횃불 행렬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기분이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릴리는 내 곁에 서서 횃불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횃불에 비치는 감정이 느껴져. 절망 그런데 희망도 보여."

"놓치기 싫은 간절함 같은 겁니까?"

"응? 너도 보여?"

"그럴 리가요."

난 쓸쓸히 웃고는 노인에게 물었다.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곤란한 질문이오."

"광산이겠죠."

"...."

"저쪽 횃불은 성에서 나온 이들이겠군요. 지하 감옥 근처 구덩이엔 여전히 시체들이 가득합니까?"

"난… 모르는 일이오."

"가족들은 당신이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시체로 언덕을 쌓는 일 말입니다."

"시, 시끄러!"

가슴을 후벼파듯 내가 역린을 건드리자, 노인의 표정이 살아났다.

"…말조심하게. 우리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저 횃불들은 전부 사연이 있는 겁니까?"

"내겐 두 아들이 있어. 두 아들 모두 광산으로 끌려갔지. 내가 수레를 끄는 이유는 아들들의 시체를 거두기 위해서야. 저 썩은 언덕이 아니라 햇볕이 잘 드는 땅에 묻어야 하니까."

"광산에 끌려가면 전부 죽는 겁니까?"

"얼마나 버티느냐의 차이지. 대부분 죽어서 나온다고...."

말끝을 흐린 노인은 다시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다만 억눌렀던 감정이 터졌는지 노인은 내게 하소연하듯 말을 시작했다.

"그래도 광산은 나은 편이야. 주술사에게 끌려가면 시체조차 찾기 힘들어. 수레를 끄는 일을 가족들이 아냐고? 아니, 모르지. 죽었는데 어떻게 알겠어. 우리가 수레를 끄는 이유는 죽은 가족들의 시체를 찾기 위해서야. 다 똑같다고. 다 똑같아...."

"...."

난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늦은 밤, 횃불들은 그새 더 늘었다. 횃불의 숫자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진다. 하지만 릴리는 저 횃불에도 희망이 보인다고 했다.

"아직 수레를 끈다는 건 두 아들이 살아있다는 뜻이겠군요."

"…결과는 늘 같아. 횃불은 언제고 꺼지겠지. 죽은 가족을 묻는다면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그래도 희망은 품고 사나 봅니다. 이곳이나, 저 도시나."

불빛으로 반짝이는 블라이어를 잠시 응시한 나는 횃불들을 살폈다.

저 횃불들은 절망 속에 감춰진 미약한 희망과 같다. 횃불이 꺼졌다는 건 보고 싶은 가족이 죽었다는 뜻일 테니까.

"두 아들과 만나고 싶으십니까?"

"쓸데없는 말 그만하고 돌아가게. 이곳에 더 있다간 위험해져."

노인이 끌던 수레는 어느덧 언덕 초입에 다다랐다.

움직이던 횃불들은 모두 언덕 앞에 멈춰 있었다.

검문소.

기사와 병사들이 수레 덮개를 열어보곤 방향을 지시하고 있었다.

묻는 장소를 알려주는 것 같았다.

난 조용히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순백의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지는 활대에 노인은 흠칫했다.

난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두 아들과 만나고 싶으십니까?"

"…자네."

"잠시 후, 이곳이 불타오를 겁니다. 그럼 횃불을 든 모두에게 전하십시오. 들고 있는 횃불들을 언덕 시체 구덩이에 던지라고."

난 노인 곁에서 활시위를 쭉 당겼다.

서서히 커지는 핏빛 화살.

핏빛은 이내 노인이 든 횃불을 뒤덮고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서서히 커졌다.

난 검문소로 화살을 겨누며 말을 이었다.

"광산에 잡혀간 아들과 만나고 싶다면 조금 전 제가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노인에게 머물던 내 시선이 곧 검문소로 향했다.

활대를 까득 움켜쥔 순간,

번쩍―

어둠을 밝히는 황금빛 기운.

세이렌의 찬가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갑작스레 터진 빛무리에 검문소에서 소란이 일더니 일련의 병력이 내 쪽으로 쏟아져 나왔다.

말을 탄 기사와 병사들.

그들을 향해 난 활시위를 놓았다.

콰아아앙―!!!

크, 크아아악!

엄청난 폭발이 그들을 휩쓸었다.

바닥에 처박히는 기사와 병사들. 한순간에 언덕의 감시자들이 걸레짝이 되어 쓰러졌다.

"아...."

황금빛에 노인은 정신을 차렸다.

두 팔을 살피고 몸을 살폈다. 온몸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물결.

혼란스러운 감정이 빠르게 가라앉았다.

들리지 않지만, 나직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찬가.

죽은 병사들을 한 차례 둘러본 노인은 재차 활시위를 당기는 사내에게 다급히 물었다.

"누, 누구십니까!?"

시위를 당기던 나는 노인을 바라보며 나직이 답했다.

"헌트(Hunt)."

콰아아아앙―!

두 번째 폭발이 터져나갔다.

* * *

"치, 칩입자다!"

"저쪽이다! 막...크아악!"

통곡의 언덕은 드넓은 너비만큼 설치된 검문소가 무척이나 많았다.

들어가는 입구가 많다는 뜻이고, 이를 지키는 병력도 수백에 이르렀다.

콰아앙! 콰앙!

시위를 놓을 때마다 검문소들이 불타올랐다. 언덕을 천천히 오르며 난 주변 검문소의 위치를 떠올렸다.

언덕의 방비는 이미 칼 일행의 조사로 정확하게 파악한 상태였다. 저 너머 새로운 검문소가 눈에 들어오자, 난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이번엔 반격이 있었다.

화살 세례가 쏟아지자 난 뒤로 잠시 물러났다.

기사와 병사들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숫자는 오십 정도.

"한 놈이다! 포위해!"

"기다리면 다른 검문소에서 병력을 보내올 것이다!"

기사들이 독려하며 병사들을 움직였다. 일부는 활을 당기고, 나머지는 창끝을 겨눈 채 내게 다가왔다.

그 순간,

끄아아아악―!

"...!"

"…무, 뭐야!?"

기사들의 시선이 여러 방향으로 돌아갔다.

내가 아닌 다른 방향에서 새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지원을 기다리던 주변 검문소들이 검은 연기와 함께 동시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대기 중인 동료들이 황금빛을 보고 움직인 모양이었다.

저쪽은 록터인가? 엘튼 일행도 움직인 것 같았다.

동시다발적인 기습 공격.

예상 밖의 상황에 눈앞의 병력이 당혹스러워하며 우왕좌왕하자 난 활을 겨누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나 혼자 왔을 리가 없잖아."

"자, 잠깐!"

콰아아앙―!

"크아아악!"

폭발과 함께 병사들이 피를 토하며 바닥에 처박혔다. 기사들이 폭발을 뚫고 돌진해왔지만, 내지른 주먹에 심장이 파열되거나 얼굴이 곤죽이 되어 즉사했다.

활잡이라고 무시하면 안 되지. 게다가 내 진짜 실력은 격투술이라고.

[2성도 안 되는 쓰레기들을 상대로 그런 헛소리라니.]

"레토,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 관계가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 같은데요."

잠시 후, 주변을 정리한 나는 얼굴에 묻는 핏자국을 닦았다.

언덕을 지키는 놈들은 인성이 망가진 악질들이라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단순히 시체를 버리는 장소가 아니거 든.

수천수만의 시체가 구덩이 곳곳에 쌓인 장소다.

주술사들이 죽은 자들을 연구하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있을까. 역시나 언덕을 오르고부터 릴리의 반응이 달라졌다. 주술사들이 남긴 흔적들을 느낀 게 분명했다.

"기분 나빠."

"도와줄 겁니까? 그냥 족족 다 죽이면 됩니다."

"생각해볼게."

"사탕 다 먹으면 도와주는 겁니다?"

록터, 칼, 엘튼 일행이 언덕 주변을 돌아다니며 남은 검문소들을 정리를 시작했다.

늦은 밤, 통곡의 언덕은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잠시 후,

뿌우우우우―!

날카로운 뿔피리 소리가 허공을 꿰뚫었다.

언덕 가장 꼭대기, 거대한 봉화가 매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블라이어에게 보내는 구조 신호.

신호를 봤으니, 블라이어에서도 병력을 보내올 것이다.

"와봤자지."

지금 블라이어는 빈집이다.

토바른 지역에서 4~5성은 최상위 포식자나 다름없다.

우리를 위협할 만한 전력이 오는 건 불가능했다.

검문소들을 하나하나 파괴하고, 감시 병력을 쫓아 제거하다 보니 나와 일행들은 하나둘 합류하기 시작했다.

기사 하나를 투척 단검으로 제거한 칼이 손을 털며 내게 다가왔다.

"얼른 마무리하자. 할 말이 많아."

"변수입니까?"

"들리는 정보가 심상치 않다. 이상한 소문도 퍼지고 있고."

"서둘러 정리하죠."

잠시 후 블라이어에서 지원군이 도착할 테니, 이곳을 정리하고 미리 자리를 잡고 있어야 했다.

인원이 소수 정예라 집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칼이 신호를 보내자 엘튼과 일행들이 기름 주머니를 들고 언덕 곳곳을 바쁘게 뛰어다녔다.

시체 언덕에, 시체 구덩이에 기름 주머니들이 투척됐다.

그사이 살아남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허겁지겁 언덕 밑으로 도망쳤다.

그 뒤를 쫓는 건 록터였다.

록터는 미친 사람처럼 검을 휘두르며 언덕 곳곳을 피로 물들였다.

배덕의 기사.

그는 소중한 이들을 죽인 저들에게 복수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난 일행이 뿌리고 간 기름 장소에 활시위를 겨누었다.

콰쾅―! 콰콰콰쾅―!

마력탄처럼 터져나가는 폭발은 곧 기름을 좀 먹고 불씨를 키우기 시작했다.

통곡의 언덕이 서서히 붉어지며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던 신호.

과연 노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난 언덕 위에서 똘똘 뭉쳐 있는 횃불 무리를 내려다봤다.

압도적인 살육 장면에 수레를 버리고 주춤주춤 물러나 있던 사람들이 보인다.

잠시 후, 알 수 없는 고성이 터지고, 횃불로 이뤄진 거대한 불씨가 언덕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으아아아아아―!

비통한 고함과 함께 거대한 불씨는 작은 불씨로 흩어지며 언덕 사방으로 뿌려지기 시작했다.

수많은 횃불이 언덕 쪽으로 던져지고 있었다.

화르르르르르!

염원과 분노가 담긴 불은 곧 거대한 화마가 되어 언덕 전체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165화 주도권 싸움 (4)

노인의 수레 뒤로 줄줄이 따라오던 횃불들이 언덕에 도착하기 무섭게 시체 구덩이로 던져졌다.

끌고 온 수레에 불을 붙여 구덩이에 밀어 넣은 이들도 보였다.

울분에 찬 자들, 눈물을 흘리는 자들, 각자 사연이 담긴 염원의 횃불들은 칼 일행이 뿌려놓은 기름과 만나 들불처럼 번지며 언덕을 집어삼켰다.

"아뜨뜨, 불이 제대로 붙었네."

이젠 끄려고 해도 끌 수 없다.

작은 불꽃으로 시작한 불길은 어느덧 드넓은 언덕을 검게 태우며 덩치를 빠르게 불려가고 있었다.

이젠 블라이어 어디에서도 한눈에 볼 수 있을 태산(泰山) 같은 불길로 변했다.

공포의 상징물이 불타 없어지는 광경을 블라이어 전역에 보이게 하는 것.

이것으로 1차 목적을 달성했다.

"전부 모여요!"

주변 풍경이 새빨갛다.

불길을 피해 언덕을 내려가며 난 일행을 불러 모았다.

곧 봉화를 보고 반응할 블라이어 병력을 정리하려면 뭉쳐야 했다.

일명 불나방 작전.

사전에 막을 수 있음에도 봉화가 켜지도록 놔둔 이유가 있었다.

이제부터 성에서 나온 병력을 모조리 섬멸해서 안 그래도 적은 병력을 밑바닥까지 줄이는 게 다음 목표였다.

앞서 걷는데 곁이 허전했다. 뒤를 돌아보니 릴리가 수많은 구덩이 중 한 곳에 서서 뚫어지게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음."

릴리는 미간을 좁힌 채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내가 준 사탕을 빨면서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상황이다. 그렇기에 난 릴리를 설득했다.

"자랑하던 그 머리카락을 홀라당 태우고 싶어요? 얼른 가요."

"사탕 다 먹었어."

"그런데요?"

"다 먹으면 도와달라며. 여기 그리고 저기."

릴리는 구덩이 두 곳을 번갈아 가리켰다.

처음에는 뭔가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 이 주변 구덩이엔 불길이 붙지 않지?

"주술사들이 싫어하는 냄새가 뭔지 알아? 마녀의 숨결이야."

"입 냄새요?"

"죽을래?"

새침하게 노려본 릴리는 조심스레 입 냄새를 확인하곤 자신 있게 내게 입김을 불었다.

싱그런 사과 향.

사탕 향기다.

"전 주술사가 아닌데요?"

"…그냥 지켜봐."

그녀는 입을 오므리곤 입김을 후- 불었다.

걸치고 있던 로브가 순간 펄럭이더니 그녀 중심으로 바람이 모였다. 불길에서 흘러나온 잿가루들이 그녀의 손짓에 따라 움직인다.

잿가루들은 그녀가 가리킨 구덩이 쪽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뭘 한 겁니까?"

"숨어든 쥐새끼들을 불렀어."

"쥐새끼? 설마 주술사들이...!"

그 순간,

그그그그그-

시체 구덩이에서 거센 진동이 울리더니 시체들이 들썩들썩 움직이기 시작했다.

시발, 이건 또 무슨 일이야.

하지만 들은 바가 있어서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록터! 칼!"

난 다급히 동료들을 불렀다.

콰아앙-!

주술사들이 언덕에 숨어 있었다.

크에에엑-!

그어어어어-!

시체 더미를 뚫고 일시에 튀어 오른 거대한 존재들. 한눈에 그 존재들이 주술 인형 반다이크라는 것을 알아챘다.

'열 마리?!'

예상보다 수가 훨씬 많았다.

저 정도면 둥지에 남겨진 숫자 아니야?

반다이크 무리가 시체들을 짓뭉개며 바닥에 쿵- 착지하더니 우리 쪽으로 미친 듯이 돌격해왔다.

또한, 반다이크들의 등장으로 무너진 구멍 속에서 주술사로 짐작되는 이들이 빠르게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스무 명 정도로 전원 핏빛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주술사들의 둥지다.

난 다급히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시발! 주술사 새끼들이 왜 여기에 있어!?"

쿠쿠쿠쿠쿠쿵-!

시체들을 밟고 위로 솟구친 반다이크들이 코앞까지 다다르자, 난 릴리를 옆구리에 끼고 물러났다.

일행이 도착하지 않았다. 아직은 부딪칠 때가 아니었다.

그사이 주술사들이 한데 모여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무리 중심으로 검게 퍼지는 아우라.

흑주술의 흔적이다.

뭔가 온다!

"뭔 짓을 한 겁니까?!"

"도와달라며?"

"도와 달랬지. 누가 적들을 몽땅 부르라고 했습니까!?"

"저쪽은 적이 아닌데?"

"…뭐요?"

그녀가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린 순간, 의외의 장면이 펼쳐졌다.

반다이크들의 목표는 우리가 맞는 것 같은데, 흑주술을 쏟아낸 표적은 우리가 아니었다.

콰콰콰쾅-!

구덩이 반대쪽에 시체들이 뭉텅이로 터지며 누군가를 공격했다.

시체 위를 빠르게 밟으며 연쇄적인 폭발을 회피하는 존재.

순간이동처럼 허공 위로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하며 폭발을 피하는데 그 움직임이 무척 깔끔했다.

이곳에 주술사들 말고 다른 이가 또 있었어?

"입 냄새가 지독했나 보네."

"뭐!?"

릴리의 입김 한 번으로 통곡의 언덕에 숨어 있던 존재들이 모조리 튀어나온 것 같았다.

도망치는 존재를 발견한 순간 마음이 다급해졌다.

개안으로 비추는 은은한 후광.

시발, 신명의 주인이다.

"빌어먹을!"

통곡의 언덕에 예상치 못한 이들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저들을 하나하나 상대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일시에 처리해야 한다.

다행이라면 내겐 그럴 힘이 있었다.

"이것들은 뭐야!?"

"타앗!"

칼과 록터가 도착했다.

짓쳐오는 반다이크들을 향해 록터가 검을 휘두르고, 칼이 단검을 투척했지만, 주술 인형은 물리력이 통하지 않는 존재였다.

역시나 몇 번 부딪치더니 다급히 물러나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엘튼 일행까지 합류했다.

도합 열셋.

"멍!"

아니, 열넷.

릴리를 내려놓고 흡혈의 고리를 앞으로 겨눴다. 그리고 달렸다.

"전부 날 따라와요!"

"어쩌려고?!"

"설명할 시간 없습니다!"

"시발, 이 상황에서 설명 안 해주면 어쩌라고!"

칼의 다급한 외침이 이해가 갔다.

내가 지금 질주하는 방향은 다른 곳도 아닌 반다이크 무리 정면이었거든.

난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활시위를 당기고 최대 출력까지 이른 화살을 그대로 갈겼다.

폭발성 효과.

핏빛 화살이다.

콰아아아앙-!

"...."

거대한 폭발이 터지며 길을 막고 있던 반다이크들이 바닥에 처박히며 굴렀다.

벌어진 틈새를 빠르게 통과하니, 뒤늦게 반다이크들이 방향을 꺾어 우리 뒤를 쫓기 시작했다.

"뛰어요!"

난 구덩이 아래로 몸을 날렸다. 밑에 자리한 주술사들을 향해 그대로 질주하는 모습.

[...!]

빠르게 접근하는 내 모습에 주술사들은 다급히 뭐라 소리치며 주문의 방향을 틀었다.

반대편에서 매섭게 터지던 시체 폭발이 뚝 멈추고, 우리 쪽 방향에서 시체들이 폭발하더니 파도처럼 빠르게 짓쳐오기 시작했다.

폭발 웨이브.

휩쓸리며 위험하다!

"릴리!"

내 부름에 릴리는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순간 번뜩이는 그녀의 눈동자.

만월의 재능이 펼쳐진 순간, 거울 위에서 보라색 빛무리가 터져 나왔다.

짓쳐오던 시체 폭발의 파도가 신기루처럼 옅어지더니 사라져버렸다.

그 광경에 주술사들은 경악했다.

'만월의 재능, 진짜 사기 능력이긴 하네.'

상대의 기운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파훼하는 '무효화(無效化)' 능력.

마법사 집단이 마녀 릴리의 능력을 경계하는 이유였다.

다수가 펼친 주술을 무효화한 탓인지 릴리는 인상을 구기곤 비틀거렸다.

그사이 난 앞뒤를 살피며 주술사와 반다이크의 거리를 쟀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난 주술사들에게 달려가며 빠르게 레토에게 물었다.

"레토, 격발 사용 횟수가 어떻게 됩니까?"

[다섯 회.]

"…네? 신명 사냥꾼으로 미각성 상태인데 다섯 회라고요?"

[그릇이 넓어졌다. 이유는 새로운 신명 목록에 있겠지.]

언제 신명 목록에 변화가 생겼지?

나중에 릴리를 통해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았다.

'다섯 발.'

격발의 횟수를 떠올린 나는 주술사 무리를 향해 주먹을 까득 움켜쥐었다.

내가 다가오자, 주술사 무리 앞으로 붉은 막이 생겼다.

황금빛을 막는 경계의 막이다.

역시나 내 능력을 파악하고 있었다.

난 막 앞에 선 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부르르-

손등에 새겨진 세이렌의 문양이 거칠게 요동치며 깜빡깜빡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내재 된 잠력을 폭발시켜, 지닌 능력의 한계를 일시적으로 뛰어넘은 기술.

"크아아아아!"

이를 악물고 격발을 터트린 순간, 세이렌의 찬가가 요동치며 눈부신 황금빛 물결을 터트렸다.

[아아아- 아아-]

환청일까.

순간 스치고 가는 미약한 노랫소리가 들린다. 노랫소리와 함께 붉은 막이 쩌적 금이 가더니 이내 산산조각 부수면서 주술사 무리를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끔찍한 비명과 함께 주술사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꼬리를 무는 반다이크 또한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움찔거리며 움직이지 못했다.

비틀비틀 선 채 난 버럭 소리쳤다.

"모두 쳐!"

내 신호에 일행들이 앞뒤로 흩어졌다.

일방적인 전투.

학살이다.

"몇 놈 살려둬요!"

록터의 검에 무참히 목이 날아가는 주술사들이 보이자, 난 다급히 록터를 말렸다.

뒤쪽을 돌아보니 반다이크들의 하체가 엘튼 일행의 검에 잘려 나가고 있었다.

한둘 무력화되는 모습.

정리가 끝날 듯 보이자, 난 빠르게 발을 놀리며 시체를 타고 구덩이 바깥으로 나왔다.

콰앙-!

두 번째 격발!

내 신형이 일순간 흐릿하게 사라지더니 앞쪽으로 튀어 나갔다.

저 멀리 빠르게 멀어지는 신형이 보인다.

눈에 띄는 후광.

그 후광을 향해 흡혈의 고리를 겨눴다.

빠르게 늘어나는 화살.

관통의 효과.

투광-!

격발이 담긴 푸른 화살이 신형의 등을 무참히 꿰뚫었다. 아니, 꿰뚫린 순간 흐릿하게 사라지며 땅을 푹 꺼졌다.

"쳇!"

정체 모를 신명의 주인.

놔두면 무슨 변수가 될지 몰랐다.

격발을 사용해 기습했는데, 눈치챘다.

순간 훅- 올라오는 격발 후유증.

욱신거리는 육체를 붙잡고 사라진 장소에 도착하니, 찢어진 로브가 덩그러니 뒹굴고 있었다. 핏자국이 남은 걸 보며 피해는 준 것 같은데 큰 상처는 아닌 것 같았다.

핏자국을 따라가길 잠시, 난 다시 흡혈의 고리를 집어 들었다.

시체 사이로 흘러나오는 후광.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순간, 시체들이 들썩거리더니 숨어 있던 신명의 주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커험, 이 모습을 들키다니 참으로 쪽팔린 일이야."

"...."

신사용 검은 모자를 둘러쓴 중년인.

피를 털어내는 복장은 영국 신사를 떠올리게 하는 귀족 정장 차림이었다.

검은 우산을 들고 있었는데, 눈앞의 모습만 보면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명언을 남긴 킹스맨의 주인공이 떠올랐다. 눈에 띄는 건 중년인이 지닌 콧수염이었다.

그래, 콧수염.

'배달부 사무엘 바버.'

한눈에 중년의 정체를 알아챘다.

사무엘은 나를 신기한 눈으로 살피곤 허허롭게 웃었다.

성격 좋아 보이는 웃음이다.

"이번 의뢰는 영 꽝이로군. 이보게 청년. 방금 전 일은 잊어주겠나? 웃음거리는 사양이거든."

"누구십니까?"

"음, 난 배달부네. 이곳에서 물건을 받기로 했지."

그는 자신을 속이지 않았다.

물건이란 단어를 듣자, 사무엘이 왜 이곳에 있는지 눈치챘다.

그는 블랙마켓이 보낸 인물이었다.

"물건이 혹시 노예입니까?"

"응? 자네가 접선자였나? 좀 일찍 오지 그랬나? 괜히 주술사들에게 다가갔다가 죽을 뻔했네."

그는 사냥꾼들이 끌고 올 노예를 블랙마켓 지부에 배달하기 위해 온 배달부였다.

하긴, 수천에 이르는 사람들을 한꺼번에 데려가려면 사무엘만큼 확실한 배달부는 없겠지.

그는 공간을 다루는 능력자였으니까.

그때 뒤에서 릴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어? 콧수염?!"

"응? …악동 꼬맹이가 왜 이곳에 있지?"

"언제 또 자랐어?"

"크음!"

릴리를 발견한 사무엘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콧수염을 가리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는 마녀들의 배달도 책임지는 심부름꾼으로 유명했다.

"할머니한테 내 얘기를 하면 또 뽑아버릴 거야."

"난 저치들과 상관없는 사람이네. 볼일 보게. 의뢰는 물 건너간 것 같으니."

두 눈을 깜빡한 순간 사무엘의 신형이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릴리 때문일까.

다급히 도망치는 모습이다.

더는 쫓지 않았다.

신명의 주인이 사무엘이란 것을 확인한 순간 긴장을 풀었다.

'적이 아니니까.'

사무엘은 상황에 따라 적이 될 수도, 아군이 될 수도 있는 중립 인물이었다. 아니 꼭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의 능력은 이 세계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으니까.

"여긴 어쩐 일입니까?"

"따라가 보라고 해서."

"다른 이들은요?"

"정리가 끝났다고 전해달래."

"가죠."

난 릴리와 함께 구덩이로 다시 돌아왔다. 주변을 정리하고 있는 일행이 보였다.

상황은 모두 끝나 있었다.

우선 칼을 불렀다.

"블라이어 방향 좀 살펴주십시오."

"지원 병력을 말하는 거지? 뭔가 오면 바로 알려줄게."

칼이 구덩이 위로 사라지고, 난 록터가 살려둔 주술사들에게 다가갔다.

[효과가 더 좋은 고문법을....]

"아뇨. 지금도 충분합니다."

전에 레토가 알려준 흑주술사 전용 고문법, 성력으로 주술사들을 괴롭히니 질문에 술술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

난 어이없는 표정으로 다시 물었다.

"…비밀 거점? 여기가 비밀 거점이라고?"

"그, 그렇습니다! 마스터가 습격이 올 수 있다며 비밀 거점으로 옮기라고…."

"...."

이건 뭐, 그냥 얻어걸렸다고 해야 하나.

안 그래도 다음 목표가 영주성에 자리한 주술사들의 둥지를 치는 일이었는데, 일이 훨씬 수월해졌다.

아니, 이건 기회다.

"바깥 상황에 대해 아는 바를 모조리 불어."

내가 둥지를 치려는 가장 큰 이유.

바로 카멜의 꿍꿍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166화 주도권 싸움 (5)

스걱―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빌던 주술사들의 목을 록터가 가차 없이 날려 버렸다.

둥지에서 인간들을 제물 삼아 흑주술을 익히던 놈들이다.

설령, 모든 것을 실토해도 살려줄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다.

"엘튼!"

내 부름에 주술 인형들을 불꽃검으로 괴롭히던 그가 일행과 함께 다가왔다. 난 불에 타거나, 목표를 잃고 버둥대는 주술 인형들을 살폈다. 그로테스크한 장면이지만, 통제하던 주술사들이 죽은 이상 반다이크들은 크게 신경 쓸 필요 없는 상대였다.

난 엘튼 일행에게 거점 수색을 부탁했다.

습격에 대비해 둥지를 버리고 비밀 거점으로 옮긴 이들이다. 과연 빈손으로 움직였을까?

엘튼 일행이 거점으로 보이는 구덩이 밑으로 사라지자 난 죽은 주술사들의 망토를 벗겨내고 몸을 뒤졌다.

'아무것도 없네.'

특별한 물건이 있을까 싶었지만, 눈에 띄는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릴리의 주술에 물건을 챙길 새도 없이 거점에서 튀어나온 모양이었다. 마녀의 숨결이라니, 도대체 어떤 원리로 상대를 자극하는 거지?

"멍!"

"안돼, 케로스!"

케로스의 짖음에 릴리 쪽을 살폈는데 마녀와 강아지는 주술 인형 한 마리를 가지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인형을 콱 물려고 하는 케로스와 목덜미를 콱 잡고 버티는 릴리.

둘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다가가니, 릴리가 먼저 인형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인형들, 묘하게 익숙해."

"가디언과 비슷한 느낌입니까?"

"비슷한데 달라. 조잡해. …응? 근데 유령의 숲을 알아?"

"정확히는 모르지만, 가디언들의 존재가 영혼으로 이뤄진 유령이란 건 알고 있죠."

난 단검을 꺼내 눈앞의 반다이크를 푹 찔렀다.

황금빛 성력이 터지며 천으로 이뤄진 반다이크가 괴성과 함께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내 눈에는 안 보이지만, 마녀인 릴리의 눈에는 다른 뭔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특정한 영혼들을 붙여 만든 타락한 존재야. 하지만 냄새가 숲을 지키는 가디언들과 비슷해. 주술사들 작품이야?"

"반다이크입니다."

"반다이크?"

주술 인형 반다이크.

유령의 숲을 파훼하는 카멜의 중요한 카드 중 하나.

반대로 마녀들을 설득할 중요한 카드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 덩치들을 어떻게 챙겨가냐인데.

"혹시 저들을 삼킬 수 있습니까?"

"응? 잠깐만...."

릴리가 움켜쥔 주먹을 입으로 넣으려다 내게 주먹을 보여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 너 말고.

"아뇨. 이 녀석 말입니다."

"케로스? 아마 가능할걸?"

난 마수 케르베로스의 능력 중 하나인 아공간 주머니를 알고 있었다. 저 작은 주둥이 안에 거대한 공간이 있단 말이지.

마녀와 강아지는 서로 귓속말로 속닥속닥하더니 내게 거래를 해왔다.

"절반은 간식으로 달라는데?"

"반다이크를 간식으로요?"

"댕댕이는 잡식이거든 이런 종류도 잘 먹어."

"...."

반다이크를 물려고 한 게 아니라 먹으려고 한 것이었구나.

영혼 섭식이 케르베로스의 진화 과정 중 하나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난 고민 없이 거래를 수락했다.

필요한 주술 인형은 사실 한 기면 충분했기 때문이다.

앙―!

케로스의 작은 주둥이가 반다이크의 머리를 콱― 물었다.

고개를 탈탈 털며 인형을 거칠게 흔들자 인형의 몸 위로 엘튼이 질러놓은 불꽃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꿀꺽―

잠시 후, 작은 강아지 입속으로 거대한 인형들이 삼켜지는 기괴한 장면이 펼쳐졌다.

정글의 아나콘다가 집채만 한 멧돼지를 한입에 삼켜 소화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평범한 동물이 아니었나?"

록터의 신음이 들리는 것을 보니, 그도 케로스의 정체를 눈치채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칼이 이 장면을 봤다면 자지러졌을 텐데.

반다이크들은 눈 깜짝할 새에 케로스 입안으로 사라졌다.

꺼억―

작은 강아지 입에 우렁찬 트림이 흘러나왔다.

"많이 먹고 무럭무럭 자라야 해!"

"멍!"

그 모습에 릴리가 대견해하며 케로스 머리를 쓰다듬는 사이, 엘튼 일행이 구덩이 바깥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깨춤에 커다란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비밀 거점 안에서 눈에 띄는 물건들을 모조리 챙겨서 나온 것 같았다. 엘튼이 가방 안에 손을 넣더니 큰 수정구를 내밀었다.

"이걸 찾았다."

"통신구네요."

"그 앞에 휘갈겨 놓은 쪽지들이 있었는데...."

"지금 보죠."

쪽지들을 빠르게 훑어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용은 이미 고문을 통해 파악한 것과 같았다.

비밀 거점에 온 주술사들의 다음 행보가 적힌 내용들.

전부 마스터인 렌구아가 내린 지시들이었다.

비교 대조를 통해 정보의 신뢰성이 올라갔다고 해야 하나.

'카멜의 움직임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단 말이지.'

이 통신구는 렌구아와 직통으로 연결된 통신구인 것 같았다.

그 외 가방 안에는 용도를 파악하기 힘든 각종 주술 도구와 주술 언어가 적힌 종이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 자료들은 릴리가 있으니 천천히 알아보면 된다. 그전에 난 멀쩡한 핏빛 망토들을 챙겼다.

"그것들은 왜 챙기는 거지?"

"쓸모가 있을 것 같아서요."

록터의 물음에 간단히 답을 하며 우리는 구덩이 바깥 쪽으로 빠져나왔다.

구덩이 위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변했다.

온통 살벌한 불길뿐이다.

보통 사람은 화상을 입어도 이상할 게 없는 열기가 온몸을 뒤덮었지만, 이 중 평범한 이는 없었다.

시체 더미가 타오르는 고약한 악취를 밀어내며 움직이는데, 함께 움직이는 록터 표정이 무겁게 내려앉은 게 보였다.

내 시선을 사로잡는 미소.

씁쓸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미소였다.

"…잘가라."

그리고 나직한 중얼거림.

그의 시선은 검게 타오르는 시체 더미에 닿아 있었다.

잿가루로 화하는 시체 더미를 보며 이곳에 묻힌 동료, 친구, 그와 인연이 닿아 있는 이들을 떠나보내는 것 같았다.

잿빛으로 타오르는 풍경을 살피던 록터의 시선이 이내 내게 고정됐다.

얼굴부터 가슴 그리고 팔다리, 온몸이 핏자국이다.

아주 작정하고 검을 휘두른 모양이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영지에 퍼지고 있는 소문, 네가 한 짓이라고 칼이 그러던데."

"들었습니까?"

"왜 그랬지?"

쭉쭉 소문이 날개를 달고 퍼지더니 자신의 영웅담을 듣게 된 모양이었다. 보통은 영웅이 된 유명세에 기꺼워할 텐데, 그는 아닌 것 같았다.

"전부 사실 아닙니까?"

"사실?"

"사냥꾼 무리를 소탕하고 노예로 잡힌 이들을 구하고 재물을 나눠준 것. 여기에 거짓이 있습니까?"

"내가 코룬강으로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노예로 잡혀갈 일도 없었을 것이다."

"원인 제공자는 100만 골드로 사냥꾼들을 불러들인 카멜이지. 당신이 아닙니다."

"나 혼자 한 일이 아니다."

"헌트가 한 일이죠. 그리고 당신은 헌터의 행동 대장입니다. 당신의 이름을 이용한 건 대장인 저의 판단이었죠."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

눈빛에 책망이나 불만은 보이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눈빛이었다.

그만큼 날 믿는다는 뜻이겠지?

"각을 재는 중입니다."

"각?"

난 아직 누구에게도 내 생각을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현재 진행 중인 상황에 대해 아직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릴리의 활약으로 비밀 거점을 발견한 것과 그로 인해 얻게 된 정보를 통해 내 확신은 점점 한 방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영지를 흔들고 빠지는 게 아니었나?"

"맞습니다. 통곡의 언덕을 태우고, 영주성을 유린한 후 당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빠지는 게 이번 목표였죠."

"생각이 바뀌었나?"

"네."

"이유가 뭐지?"

"카멜의 손에 에토르가 떨어졌습니다."

"...!"

내 답에 불길 사이를 내달리던 록터가 뚝 멈췄다.

뒤따르던 일행이 록터의 행동에 멈춰서자, 그는 실수를 깨닫고 다시 움직이며 내 곁에 붙었다.

그의 눈빛엔 불신이 담겨 있었다.

"에토르가 무너졌다고? 톰자엘은 무능하지만, 그 곁에는 기사 와일리가 있어 그리 쉽게...."

"검은 장미가 보내온 소식입니다. 거짓은 없습니다. 에토르 전체가 카멜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

록터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난 주변을 둘러봤다.

엘튼 일행도 뒤따르며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역시나 에토르의 몰락이 충격적인 모양.

난 톰자엘 자작과 기사단의 실종, 영지를 구한 영웅 카멜 등, 검은 장미에게 전달받은 에토르의 상황을 간략히 설명했다. 결국 록터가 신음을 흘리며 빠르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블라이어와 에토르의 병력이 합쳐지면 모든 면에서 베네타가 밀릴 테니, 카멜이 토바른의 주도권을 가져가겠죠."

"내가 어떻게 해야 하지?"

바로 방법을 묻는다.

칼과 함께 있더니 상황 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늘어난 것일까.

이전처럼 꽉 막힌 록터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뒤집어엎어야 합니다."

"…블라이어를 말인가?"

"최소 하루, 길면 이틀 정도 시간이 있습니다. 그 시간 안에 블라이어를 쪼개야 합니다."

"그럼 각을 잰다는 게...."

난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블라이어를 쪼갤 수 있을지...."

"답은 나왔나?"

"'그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찾았습니까?"

내가 록터에게 부탁한 건, 훗날 록터 펠리스를 중심으로 반(反) 카멜 블레이저 연합의 기반이 될 '몰락 귀족'들을 찾는 일이었다.

전대(前代) 가주와 일공자를 지지하던 블라이어의 구 가신들.

성주에 오른 카멜이 최우선으로 숙청한 이들이지만 그 칼날을 피한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스토리 상 블라이어 주변에 잔뜩 웅크리다가 록터 펠리스의 등장에 빠르게 세를 불리는데, 당장 블라이어를 뒤집으려면 그들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찾았다. 아니, 먼저 알아보고 찾아오더군."

"찾아와요?"

"내 소문이 퍼지는 걸 듣고 날 찾고 있었다. 그래서 쉽게 만날 수 있었지."

릴리의 활약으로 비밀 거점을 우연히 찾는 것부터, 찾고 있던 이들이 소문을 따라 록터를 찾아온 것까지.

마치 하늘이 록터를 돕는 것처럼 일이 술술 풀린다.

블라이어를 뒤집으라는 하늘의 계시인 걸까.

"그들은 어디 있습니까?"

"통곡의 언덕."

"…네?"

"수레를 끄는 이들 중 상당수가 우리와 함께한 이들이다. 그들도 통곡의 언덕이 주는 상징성을 알고 이번 일에 도움을 주고자 따라 나왔다."

언덕 밑에서 불을 지르던 이들이 떠올랐다.

횃불을 던지라고 노인에게 일러주긴 했는데, 그런 것치곤 너무 발 빠르게 움직인다고 생각하긴 했다.

순간 노인이 떠올랐다.

첫 만남부터 성에서 나온 인물인지 경계하며 묻던 게 생각났다.

그 노인도 구 가신 중 하나였을까.

"수가 얼마나 됩니까?"

"점조직이라 정확한 수는 오늘 저녁에나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최소 오백 이상은 모이리라 확신한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요?"

"대략 백정도 된다. 지금껏 블라이어 내에서 살아남은 강단 있는 이들이라 보통 이들보다 훨씬 강할 거다."

"빙고."

난 록터를 보며 씨익 웃었다.

빙고를 외치기 위한 모든 숫자가 맞춰진 것이다.

블라이어를 뒤집기 위해선 세 가지가 필요했다.

중심이 될 록터의 존재.

그런 록터를 도와 보조를 맞춰줄 다수의 세력.

그리고,

'탈출구.'

첫 번째 록터와 세 번째 탈출구는 마련이 됐지만, 두 번째인 세력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였다. 아무리 강해도 소수 인원으로 할 수 없는 것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방금 답이 나왔습니다."

"답은 뭐지?"

록터와 엘튼 일행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답에 따라 움직이는 포지션이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한번 뒤집어보죠."

이번 계획이 성공하면 주도권을 굳힐 수 있다.

내 계획은 간단하다.

반(反) 카멜 블레이저 연합을 블라이어 영지에서 만든 후 알맹이를 들고 쏙 빠져나갈 계획이었다.

말도 안 되는 계획이지만,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내겐 가능한 방법이 있다.

핵심은 학살자의 병력이 언제 도착하느냐였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를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 순간,

삐이이이이이―

동태를 살피러 갔던 칼에게 신호가 떨어졌다.

봉화 신호를 발견한 블라이어 성에서 병력이 나온 것 같았다.

흡혈의 고리를 소환한 나는 일행을 둘러보며 말했다.

"뒤집기 전에 몸이나 풀까요?"

"이미 푼 것 아니었나?"

"저들은 몸풀기도 안 될 겁니다. 하지만 그 이후엔… 꽤 힘들 겁니다."

검은 장미와 비밀 거점의 정보를 취합해서 곧 몰려온 카멜의 병력을 대략적으로 파악한 상태였다.

그중 첫 번째 놈들이 곧 나타날 거다.

내 말에 록터와 엘튼 일행이 피식 웃으며 무구를 꺼내 들었다.

"이번에도 잘 부탁하지...."

검을 뽑아 든 록터가 언덕 밑으로 내달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대장."

날 완벽한 대장으로 인정한 모습이었다.

167화 주도권 싸움 (6)

블라이어 정규 군대는 베네타 경계에, 핵심 전력은 카멜과 함께 에토르에 있는 상황이다.

성을 지키는 병력은 최소로 구성된 잔여 병력이 전부.

엘튼 일행을 사전에 보내 병력 구성마저 완벽히 파악한 상태라 모습을 드러낼 병력의 규모는 삼백 전후일 것으로 확신했다.

역시나 블라이어 성에서 나온 병력은 내 예상과 일치했다.

말을 탄 기사들과 창을 든 병사로 이뤄진 일련의 병력.

먼 거리가 아니기에 그들은 금세 통곡의 언덕 앞에 도착했다.

"…이런!"

봉화 신호를 받고 지원을 나오긴 했는데, 온 세상이 타오르는 것처럼 거대한 언덕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그때 기사들의 눈에 비루한 행색을 한 무리가 눈에 띄었다.

수레에 시체를 담아 옮기던 영지민들이 옹기종기 불을 피해 한쪽 구석 장소에 뭉쳐 있었다.

"저들을 잡아!"

상황을 물어볼 자들이 주변에 보이자, 기사들은 병력을 이끌고 영지민들에게 다가갔다.

수레들이 한가득 몰려 있는 장소 코앞까지 말을 탄 기사들이 도착했을 때였다.

"쳐!"

"으아아아아!"

다가오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던 영지민들이 갑자기 돌변하더니, 수레 밑에서 무기를 뽑아 들곤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기사들은 당황하기보단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흘렸다.

"비루한 잡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앞서 달려오는 사내의 목을 베려고 선두에 선 기사가 검을 힘껏 내리쳤다.

스각―

"...!"

기사의 검과 함께 목이 허공으로 둥― 떠올랐다.

툭툭 바닥에 구르는 기사의 목.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이었는지, 한순간에 병력의 움직임이 멈칫했다.

순간 흘러나오는 정적.

바닥에 착지한 사내는 기사들 사이에서 조용히 검을 털어냈다. 들고 있는 검날에선 유형화된 빛이 흘러나왔다.

오라 소드.

기사들은 그제야 사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로, 록터 펠리스!"

"크아아아아!"

록터가 사납게 고함을 내지르며 사방에 살기를 터트리자, 기사들이 탄 말들이 공포에 질려 날뛰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말을 진정시키는 기사들.

록터가 기사들의 발목을 잡는 사이, 무기를 움켜쥔 백여 명이 사나운 표정으로 병사들을 덮쳤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개새끼들! 이날만 기다렸다!"

병사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는 자들의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구 가신들의 사람들.

머릿수는 블라이어보다 적었지만, 상황은 압도적으로 흘러갔다.

지휘관이 죽고, 록터 펠리스가 나타났다.

상황이 뒤집히자, 기사들은 말머리를 돌리고 성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건 병사들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미 퇴로를 막고 기다리던 자들이 있었다.

우리 쪽으로 도망쳐 오는 병력이 보인다.

"칼."

"맡겨둬."

칼이 엘튼 일행을 이끌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고작 열 명으로 이뤄진 파티지만 5성인 록터조차 쉽게 상대하기 힘든 실력자들이었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해 말을 탄 기사들을 노리기 시작했다.

앞뒤로 포위된 일방적인 학살이 펼쳐졌다.

퇴로가 막힌 병력은 순식간에 궤멸하며 바닥에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 * *

"알렉스님을 몰라뵀습니다."

"우리 구면이네요."

"하인즈 벨입니다."

난 신기한 듯 노인을 바라봤다.

하인즈 벨 남작.

록터와 함께 긴 시간 동안 카멜과 대항하던 반(反)연합군의 핵심 인물. 록터의 보좌역을 맡아 라웁 숲에 둥지를 틀고 연합군의 기틀을 만들었지만, 너무 일찍 목숨을 잃은 탓에 소설 내에서도 비중이 큰 인물은 아니었다.

나와 함께 수레를 끌던 노인.

설마, 나와 함께 했던 노인이 구 가신을 이끄는 중심인물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이것도 인연이라는 건가?

"하인즈님."

"뭐든 물어보십시오."

"조금 전 제게 했던 말들, 전부 거짓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제 두 아들은 광산에 잡혀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들 또한 모두 저와 비슷한 처지입니다. 숙청의 대상이 된 가문들은 대부분 광산에 끌려가거나 주술사들의 제물로 사라졌습니다."

"그럼 수레를 끄는 것도...."

"매일같이 했던 일입니다. 모두 꺼리는 일이고, 영지 바깥에서 움직이는 일이라 추적자들의 감시도 피하기 좋았습니다."

하인즈는 허름한 옷을 바로 잡고 내게 다시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록터에게 들었는지 내가 이 무리의 책임자인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부디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전 도움을 줄 뿐입니다. 남은 이들을 이끄는 건 하인즈님의 몫이죠."

전부 책임지며 갈 순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베네타처럼 도움을 주며 함께 공생하는 것.

내 뜻을 거절의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하인즈는 두 무릎을 꿇고 날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다른 이들도 무릎을 꿇고 내게 빌기 시작했다.

"저흴 버리지 마십시오! 뭐든 하겠습니다!"

"목숨을 걸겠습니다!"

하인즈는 '귀족'의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록터 경이 말했다.

저 사내가 카멜 블레이저를 상대할 유일한 사내라고.

무조건 잡아야 했다.

"…이것 참."

난 머리를 긁적이며 록터를 바라봤다.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봤다.

딱 봐도 저 노인을 버렸다간 나를 해코지할 표정이다.

내가 대장이라며?

날 믿는다며?

난 한숨을 내쉬며 하인즈에게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를 수레에 담으라고 지시했다.

"그럼...?"

"카멜을 상대하려면 당신들의 힘이 필요합니다. 같이 가죠."

"가, 감사합니다!"

"록터 경의 밑으로 들어가십시오. 전 당신들을 품을 그릇이 아닙니다."

하인즈는 내 뜻을 바로 알아채고 내게 했던 것처럼 록터에게 예를 표했다.

역시나, 록터는 말도 안 된다며 표정을 굳히며 물러났다.

좀 나아졌나 싶었는데, 역시나 아직은 꽉 막힌 꼴통 기사가 맞았다.

내가 왜 소문을 흘려가며 너를 영웅으로 만들었겠니?

난 그를 붙잡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잘못 맺은 매듭을 바로 잡을 기회입니다."

"…잘못 맺은 매듭?"

"지하 감옥에서 가졌던 카멜과의 만찬."

"...."

"그 자리에서 당신이 카멜의 제안을 수락하지 않았더라면, 또 모두 앞에서 카멜에게 거짓된 충성 맹세를 하지 않았더라면, 저들이 이리 쉽게 몰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게 모두를 구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잘못된 매듭을 풀고 바로 잡아야죠. 저들을 받아들이십시오. 또다시 모두를 잃고 싶지 않다면."

"나보다는 그대가...."

"마지막 기회입니다. 당신은 또 도망칠 겁니까?"

록터는 허탈하게 웃고는 내 눈을 잠시 바라봤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그는 구 가신들의 세력을 받아들였다.

카멜의 성장을 유일하게 견제했던 세력, 반(反) 카멜 블레이저 연합이 무려 수년 앞서 탄생한 순간이었다.

됐다.

이걸로 기반이 만들어졌다.

이제부턴 모조리 흡수하면 된다.

"이젠 어쩔 생각이지?"

"성을 점령할 겁니다. 그리고 광산도 무너트릴 겁니다."

"…가능하리라 보나?"

고작 이 인원으로 가능할까? 하는 표정들이지만 난 확신이 있다.

성도 광산도 피해 없이 수중에 넣을 수 있다.

난 오히려 그 이후를 걱정하고 있었다.

'시간이 더럽게 빠듯해.'

이번 싸움의 핵심은 반(反)연합군을 따르는 이들을 얼마나 데리고 탈출하느냐였다.

광산 안쪽까지 사람들을 전부 이끌고 가야 한다.

그곳에는 일명 '통로'라 불리는 '탈출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십시오."

난 엘튼 일행 중 셋을 따로 불러 록터 곁에 붙였다.

상대를 속이는 데는 엘튼 일행이 뛰어나고 눈치도 빨랐다.

난 셋에게 핏빛 망토를 걸치게 하고 앞으로 할 일을 알려줬다.

록터도 그 곁에서 눈도 깜빡하지 않고 내 말을 경청했다.

그 사이, 죽은 블라이어의 기사와 병사들이 수레에 모두 실렸다. 그 밑부분에는 수백 자루의 무기가 숨겨져 있었다.

"수레를 전부 끌고 블라이어 성으로 들어가십시오."

"성문을 열어주지 않을 텐데...."

하인즈의 걱정에 난 고개를 흔들며 핏빛 망토를 둘러싼 이들을 가리켰다.

주술사들의 둥지로 위장한 엘튼 일행이었다.

"열어 줄 겁니다. 성벽에 제대로 된 이가 없을 테니까."

블라이어 안에는 하인즈를 따르는 이들이 다수 머물고 있었다.

록터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반(反)연합군의 존재를 선포하고 연합군 사람들과 함께 움직인다면 성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대부분 영지민들은 공포에 억눌려 지냈을 뿐, 눈앞의 '계기'를 지금껏 기다렸을 테니 말이다.

앞장서는 이가 영웅 록터라면?

'분명 들고 일어날 거야.'

한 번 민심이 터지면 광산까지 무너트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엘튼 일행이 알아 온 광산 감시 병력은 고작 삼백이었으니까.

진짜 문제는 블라이어가 아니라 앞으로 짓쳐올 카멜의 군대를 상대하는 일이다.

"신호탄 있습니까?"

내 물음에 하인즈가 여기저기 바삐 돌아다니더니 신호탄으로 쓰던 폭죽을 가져왔다.

신호탄을 확인한 난 록터에게 물었다.

"신호탄이 터지고 이곳까지 전력 질주하면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성 어디서라도 1분 안으로 올 수 있다."

"신호탄이 터지면 오줌을 누더라도 신호탄이 터진 장소로 달리세요. 늦으면 저 죽습니다."

우리 일행 중 가장 큰 전력은 록터였다. 그럼에도 그를 성 쪽으로 보내는 건 블라이어 내에서 록터의 존재가 주는 영향력 때문이다.

록터가 눈에 보여야 블라이어 사람들이 움직일 것이다.

"여기서 적을 상대할 건가?"

"네. 제가 말한 내용 절대 잊지 마세요. 모든 이를 책임 질 수 없습니다. 포기할 땐 포기하세요. 안 그럼 동료들이 위험해집니다."

"명심하지."

무겁게 고개를 끄덕인 록터는 시체가 실린 수레 하나에 몸을 뉘었다.

덮개가 덮이고 잠시 후 수십 대의 수레가 핏빛 망토를 두른 일행 뒤를 따라 성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안 좋은 소문이 몇 가지 있었는데, 괜한 걱정이었네."

"안 좋은 소문?"

"록터의 위치에 대한 현상금이 1만 골드나 붙어서 걱정을 했거든. 그런데 성 자체를 엎을 거면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다른 소문은 또 뭡니까?"

"톰자엘 자작의 시해범으로 지목된 것 같아."

"시해범? 록터가 말입니까?"

"기사 단장 와일리의 증언이라 록터가 살인범이란 소문에 무게가 실리고 있었거든."

"록터 홀로 움직였다면 낭패를 봤을 수도 있었겠네요."

"맞아. 구 가신들의 세력이 지원군으로 붙었으니 이 소문도 별 영양가 없이 끝나겠지."

"두 개 다 어제까지 듣지 못했던 소문인데...."

"정보 길드에 의해 반나절 만에 퍼진 소문들이다. 작정하고 퍼트린 것 같아. 이곳 주인이."

"의뢰한 자가 성안에 숨어 있다는 뜻이네요. 잡을 수 있습니까?"

"시도해 봤는데, 주술사라서 쉽지 않아. 솔직히 우리로는 힘들다."

카멜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세작이 성에 숨어 있다.

통신구는 귀한 아티팩트라 가지고 있는 이가 적다.

'한 놈일 확률이 높은데.'

되도록 늦게 카멜이 블라이어 소식을 몰라야 내가 유리하다.

되든 안 되든 세작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해봐야 했다.

난 릴리를 불렀다.

엘튼을 불러 통신구를 가져오게 한 후 이를 케로스 코앞에 두었다.

"혹시 아티팩트 냄새도 쫓을 수 있습니까?"

"냄새?"

"네. 통신구에 영력을 실으면 잔향이 남는다고 들었거든요."

릴리는 통신구를 들어 냄새를 맡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케로스는 달랐다. 냄새를 맡고는 코를 찡긋거렸다.

"이와 비슷한 냄새를 지닌 이가 성안에 있습니다. 이 물건과 똑같은 것을 품에 지니고 있죠."

"잡아달라고?"

"숨바꼭질 같은 거죠. 그자를 제거하면 하루 동안 샌드위치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것으로 되겠어?"

"이틀."

"어림도 없어."

"사흘."

"가자 케로스!"

"멍!"

"응? 술래가 잡으면 상대를 먹어도 되냐는데?"

난 마른침을 삼키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세작이 누군지 모르지만, 속으로 축복을 빌어줬다.

릴리까지 보내자, 주변에 남은 이는 칼과 엘튼, 일행 다섯이 전부였다.

밤새 타오르던 불길은 여전히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칼은 언덕을 잠시 바라보곤 나를 돌아보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땅에 뭔가를 끄적끄적 적고 있자, 궁금한 듯 다가와 바닥을 살폈다.

"1타, 2타, 3타? 뭘 적는 거야?"

"앞으로 우리가 막아야 할 상대를 적고 있습니다."

"3타나 온다고?"

"최소로 잡으면요. 이 중 1타와 2타는 통곡의 언덕에서 막아야 합니다."

"어째서?"

"가장 먼저 이곳으로 올 테니까요."

통곡의 언덕은 블라이어의 상징물이다. 카멜의 사람이라면 불타고 있는 언덕을 보면 가장 먼저 달려올 것이다.

그리고 1타인 블라이어 기마병의 목적지는 처음부터 통곡의 언덕이었다.

"까짓거 다 막으면 되지. 1타는 누구야?"

"블라이어의 3천 정예 기마병이요."

"이 양심도 없는 새끼야! 기마 3천을 우리가 어떻게 막아!"

"막을 수 있습니다."

"장난이지? 정보처가 누구야?"

"비밀 거점의 주술사들이요."

"시발! 시발!!! 그럼 진짜라는 거잖아!? 못 막아! 못 막는다고! 성으로 튀자."

"누가 막는다고 했습니까?"

2타 3타를 들으면 놀라 자빠지겠네.

난 핏빛 로브를 꺼내 들었다.

이걸 누구한테 준담.

난 칼과 엘튼을 바라보곤 이내 핏빛 로브를 엘튼에게 내밀었다.

1타는 '기만(欺瞞)책'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168화 주도권 싸움 (7)

덜컹―!

거대한 톱니바퀴가 '그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바른 지역에서 가장 크고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블라이어 성문.

두텁고 높은 성벽을 단단히 막고 있던 성문이 눈앞에서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이게 맞는 거겠지?'

성문 책임자를 맡고 있던 기사는 불안한 눈동자로 벌어지는 성문을 응시했다.

봉화 신호에 언덕으로 지원 나간 병력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수레에 실려 왔다.

겁에 질린 기사는 처음에는 문을 굳게 닫고 버텼지만, 앞서 나온 주술사들이 불같이 성을 내며 섬뜩한 협박을 해대자 성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신분을 확인할 주술사도 없고.'

전부 비밀 거점으로 이동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오히려 눈앞의 주술사들이 비밀 거점에서 나와 적들을 섬멸하고 아군의 시신을 수습해왔다고 하니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게다가 대부분 익숙한 놈들이니, 큰 문제 없겠지.'

수레들을 끌고 온 이들은 오랫동안 시체를 실어 나르던 영지민들이었다. 주술사들의 눈치를 보며 벌벌 떠는 모습을 보니 오히려 비웃음이 흘러나왔다.

성문이 활짝 열리자, 대기 중이던 수레들이 줄지어 성안으로 들어왔다.

입구에서 기사는 주술사들을 맞이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래. 수고했지. 문을 빨리 열던가, 그냥 열지 말던가. 열 듯 말 듯 눈치 더럽게 보내."

"…하하하."

기사는 어색하게 웃었다.

단순히 성격 더러운 주술사라 생각했다.

그런데 앞에 선 주술사들의 행동이 이상했다. 두른 핏빛 망토를 벗어 던지더니 단검을 꺼내 무장하기 시작했다.

수레를 끌고 온 영지민들도 마찬가지.

두려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수레 밑바닥에서 무기를 꺼내 무장하곤 자신을 노려봤다.

"…어? 어??"

바로 앞 수레에선 시체로 생각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털며 일어났다.

그는 허리춤에 달린 네 자루의 검 중 두 자루를 양손으로 뽑아 들곤 무심한 시선으로 기사를 내려다봤다.

기사는 멍하니 사내를 올려다봤다.

횃불에 비친 익숙한 실루엣.

"로, 록터 펠리스?"

록터는 수레 위에서 천천히 검을 추켜 올렸다.

자신의 검은 노예로 끌려갔던 장인들이 염원을 담아 수리한 무기다.

그들의 염원은 하나다.

바로 구원.

록터는 기사의 목을 가차 없이 날려 버리곤 앞을 겨누며 모두가 들으라는 듯 목이 터지라 소리 질렀다.

"구하라―!"

그리고 벼락처럼 내달렸다.

그 뒤를 받치는 헌트 일행의 기척을 느끼며 록터는 검을 크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영지민을 구하라!!!!!"

구원.

록터의 목소리에 답하듯,

으아아아아아아아―!!!!!

사방에서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장인들의 염원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자, 잠까… 크아악!"

"안돼…! 커억!"

록터와 일행 셋은 기사들을 가장 먼저 노렸다.

5성 기사와 3성 암살자들의 맹공은 능력 부족으로 후방에 남겨진 기사들이 막기엔 터무니없이 강했다.

십여 명의 기사가 삽시간에 쓰러지자, 병사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했다.

성벽이 점령당하고, 활짝 열린 성문이 빠르게 닫혔다.

쿵―!

바깥출입을 차단한 하인즈는 성 곳곳에 웅크리고 있던 세력을 빠르게 규합했다. 이미 록터와 대화를 끝내고 하루 전에 소식을 전했기에 신호를 보내자 규합은 눈 깜짝할 새에 이뤄졌다.

삼백. 사백. 오백....

과거 구 가신들이 부렸던 이들까지 우르르 성문 앞으로 몰려들자, 대기 중인 이들이 수레 밑에서 무기를 꺼내 그들에게 건넸다.

무기는 죽은 병사들의 것을 가져왔기에 차고 넘쳤다.

짧은 시간에 세력을 전부 규합하니 천 단위가 넘어갔다.

무기를 움켜쥔 이들의 복장은 통일되지 않았지만, 하인즈를 올려다보는 눈빛은 한 사람처럼 빛났다.

의지로 똘똘 뭉친 눈빛.

통곡의 언덕이 불탔고, 성벽이 점령당했다. 오늘이 결전의 날이란 것을 그들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인즈는 그 눈빛에 답하듯 성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나이가 들었지만, 교양으로 긴 시간 검술을 익힌 그였다.

"성으로 간다!"

부르짖는 하인즈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떨렸다.

일부를 포로 감시 인원으로 남겨놓고 하인즈는 성을 향해 내달렸다.

그 뒤를 따르는 구 가신의 사람들.

철옹성처럼 느껴지던 성이 오늘따라 텅텅 비어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막아서는 이가 없었다.

아니, 기사나 병사들이 있었지만 모두 주검이 되어 죽어 있었다.

길 위에 널브러진 시체들.

록터와 헌트에서 온 이들이 떠올랐다.

그 압도적인 무력은 이미 성을 유린하고 있었다.

* * *

화르르르륵―!

"…부, 불이야!"

"서, 성이...!"

공포의 대상인 카멜 블라이저가 머물던 영주성이 검은 연기와 함께 타오르기 시작했다.

영지의 중심인 거대한 성이 활활 타오르자, 영지민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카멜의 보복이 두려워 문을 걸어 닫고 꼭꼭 숨은 영지민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걸어 잠근 문을 열고 나온 영지민도 있었다.

바깥에서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외침이 큰 영향을 끼쳤다.

"광산으로 가자!"

"광산으로 잡혀간 이들을 구하러 가자!"

"모여라! 모두 모여라!!"

가족과 지인을 구하자며 목이 터지라 외치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은 무기를 든 채 광장으로 우르르 이동했다.

영지민들은 다시 불타오르는 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통곡의 언덕이 타오를 땐 두려움이 앞섰는데, 영주성이 타오르자 두려움보단 뭔가 꿈틀대는 감정이 앞섰다.

분노.

그리고 희망.

"…가족."

광산으로 소중한 이가 끌려갔던 영지민들이 가장 먼저 움직였다.

그들은 터져 나오는 목소리를 허겁지겁 쫓았다.

그리고 보았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채 광장 한가운데를 천천히 가로지르는 한 기사를.

"로, 록터!"

"록터 팰리스다!!!!!"

"으아아아아!"

록터를 보자 꿈틀거리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이유는 모른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낫과 곡괭이를 들었다. 그리곤 록터 뒤를 쫓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

록터는 입을 열지 않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시야에 들어오는 블라이어 병력을 죽이고 광산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아서가 말했다.

앞서 보여주면 따라올 이는 따라올 거라고.

고민하는 이, 갈등하는 이, 두려워하는 이까지 설득해서 챙기고 갈 시간 따윈 없다고 했다.

록터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북쪽 성문과 이어진 대로(大路)가 인파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얼마나 많은 이가 자신을 따라나선 것일까.

'아서의 말대로 이건 소수가 할 수 없는 일이야.'

록터의 시선이 주변에 있던 하인즈에게 머물렀다.

사람들을 부리고, 그 사람들로 또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모습이 보였다.

성을 불태우는 과정에서 제물로 잡혀갔던 이들이 합세했고, 록터가 사냥꾼 무리에게 구한 이들까지 소식을 듣고 따라나섰다.

하인즈 밑으로 수천의 무리가 따르기 시작했다.

덩치는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부풀었고, 이젠 그 누구도 이 무리를 막을 수 없었다.

"영웅 록터 펠리스를 따라라!"

하인즈는 록터의 존재감을 앞세워 사람들을 광산으로 이끌었다.

외성 북쪽 바깥, 성을 나온 모두가 드넓은 산과 마주했다. 산 안쪽으로 길게 포장된 잘 닦인 도로가 보였다. 광산과 바로 이어졌으며 수개월 간 끔찍한 노역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눈앞의 길은, 수레를 이용하면 하루 안에 광산에 도달하게끔 만들어졌다.

새벽녘, 횃불로 이뤄진 기다란 행렬이 시작됐다.

일행 셋은 록터 곁을 떠나 하인즈를 돕기 위해 곁에 붙었다. 광산을 정리하고 '통로'를 찾는 건 이제부터 하인즈의 몫이었다.

록터는 일행과 하인즈를 떠나보내고 기척을 죽인 채 숲을 빠져나와 다시 성으로 돌아왔다.

자신은 아직 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신호탄이 언제 터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까아아아악―!

"아, 안돼! 제발…!"

그리고 아직 성안에서 정리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아 있었다.

성이 불타고 병사들이 죽어 나자빠졌다.

치안을 유지할 병력이 없으니 성안에 머물던 사냥꾼들이 약탈을 시작했다.

록터는 내성을 누비며 약탈자를 향해 가차 없이 검을 베고 베고 또 베었다.

성에 남은 하인즈의 사람들까지 검을 들고 합세하자, 성 사방에서 고성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혼란의 도가니.

도망치던 사냥꾼들을 모조리 벤 록터는 핏물로 가려진 시야를 손등으로 닦았다. 약탈하는 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베어버렸다.

다만, 예외가 있었다.

식량 창고.

록터는 식량 창고를 터는 이들은 가만히 놔두었다.

아서와 이미 이야기된 세력.

식량을 털고 있는 세력은 검은 장미로, 그들은 수십 대의 수레에 식량을 한가득 싣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가 나타나길 반복하고 있었다.

텅 빈 창고들은 불타오르며 그들이 다녀간 흔적을 지웠다.

록터는 등을 돌린 채 광장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멈칫하곤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만이 느낄 수 있는 미세한 기척.

검게 물든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검은 그림자가 눈에 담겼다.

길쭉한 그림자.

빗자루다.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록터는 미간을 좁혔다.

"마녀가 무슨 일로...."

빗자루에 탄 마녀와 강아지 한 마리가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록터가 물었다면 그녀는 이리 답했을 것이다.

숨바꼭질 중이라고.

* * *

"하나 잡았네~ 하나 남았네~"

릴리는 한 손으로 빗자루를 잡고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허공을 노닐었다.

다른 손에는 금이 간 통신구가 쥐어져 있었는데, 조금 전 불타는 성에서 누군가와 다급히 교신하던 주술사를 잡고 빼앗은 것이었다.

꺼억―

릴리 품에 안긴 케로스가 트림을 시원하게 하자, 릴리가 방긋 미소 지었다.

"댕댕이 오늘 포식하네?"

"꺼억!"

케로스가 잡아먹을 수 있는 존재는 정해져 있다. 아서가 알려준 익숙한 냄새의 주인은 흑주술사였다.

마녀들을 사냥하는 악질 중의 악질.

케로스에게 허락된 주식량 중 하나였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오히려 흥이 났다.

"하나 잡았네~ 하나 남았네~"

아서는 표적이 한 명이라고 했지만, 그가 알려준 냄새를 지닌 이가 또 있었다.

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광장 근처 건물.

케로스가 코를 벌렁거리며 옷깃을 잡아당기자, 릴리는 한 건물 지붕 위로 폴짝 뛰어내렸다.

킁! 킁! 냄새를 맡던 케로스가 한 곳을 코로 문질렀다.

"여기야?"

"멍!"

"부순다?"

"멍!"

릴리는 빗자루의 크기를 거대하게 키운 뒤 그대로 지붕을 내리쳤다.

콰아아앙―!

"...!"

지붕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구멍으로 폴짝 뛰어 넓은 방 안으로 들어서자, 바삐 움직이던 이들이 돌처럼 굳었다.

릴리는 주변을 둘러보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왜 이리 많아?"

복면을 쓴 이들, 그중엔 얼굴을 드러낸 이들도 있었다.

그녀가 싫어하는 글자가 빼곡히 적힌 종이들도 수북이 쌓여 있었다. 서류들 밑단에 적힌 통일된 글자가 보였다.

[블랙마켓]

그녀의 시선은 서류 뭉치가 끝나는, 커다란 책상에 고정됐다. 책상에 앉아 통신구에 뭐라 다급히 외치는 이가 있었다. 하지만 릴리가 가리킨 건 그자 곁에서 통신구를 운용하던 주술사였다.

"찾았다!"

"누, 누구냐!?"

"저년을 잡아!"

지목당한 주술사가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굳어 있던 사람들이 무기를 꺼내 들곤 릴리에게 사납게 쇄도했다.

수가 많다.

"케로스!"

"크아아아앙!"

드드득―! 뼈 뒤틀리는 소리가 퍼지더니 작은 강아지의 몸이 그림자처럼 삽시간에 커지기 시작했다.

방안을 꽉 채운 검은 털의 짐승.

붉은 눈을 번뜩이며 이를 사납게 드러낸 케로스가 짓쳐오는 인간들을 향해 발톱을 매섭게 휘둘렀다.

콰자자작―!

건물이 통째로 찢어지며 핏물이 터져 나왔다. 건물은 종잇장처럼 무너져 내렸고 추락하는 이들 사이로 케로스는 입을 쩍 벌리며 벼락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무너진 지반을 붙잡고 버티던 주술사.

그의 눈동자에 거대한 입이 짓쳐왔다.

"아, 안돼! 아아아아악!"

주술사가 케로스 입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무너진 잔재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지? 어서 보고 있는 걸 말해!]

카멜 블레이저의 목소리.

무슨 이유인지, 그의 목소리는 무척 격양되어 있었다.

릴리는 반짝이는 통신구를 집어 들었다.

조금 전 성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아서의 조언이 떠올랐다.

[다 개소리니까. 통신구는 다 부숴요.]

콰작―!

릴리는 아까처럼 통신구를 금이 가도록 부수곤 품에 주섬주섬 넣었다.

이걸로 두 개.

"다 잡았다!"

만세를 부른 그녀는 바닥에 꿀렁대는 작은 물체를 집어 들었다.

먼지를 뒤집어쓴 케로스가 켁켁 흙은 뱉어내며 침을 뱉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빗자루를 타고 날아올랐다.

릴리가 허공 위로 사라지고 잠시 후 돌이 들썩이며 블랙마켓 지부장이 잔해 속에서 기어 나왔다.

"둘 다 잡았네~. 샌드위치네~"

"…미친년."

섬뜩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지부장은 주변을 둘러봤다. 통신구는 사라지고 주변에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그저 헛웃음을 흘리며 불타는 성을 바라봤다.

블라이어.

마치 몰락의 징조를 보는 것 같았다.

169화 주도권 싸움 (8)

"지부장이 사라졌습니다."

"지부장은 당신 아닙니까?"

"…블랙마켓 지부장을 말하는 겁니다."

일을 보던 나는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위를 올려다봤다.

검은 장미 지부장, 뾰족귀 다크 엘프가 미간을 좁힌 채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내가 하는 일이 어때서?

"앉으면 안 됩니까? 고개 아픈데."

"...."

다크 엘프는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의 남자 말곤 아무도 없었다. 그는 한숨을 내쉬곤 남자 앞에 쪼그려 앉았다. 마스터와 동격인 혈맹의 주인이라 무시할 수 없었다.

"블랙마켓을 감시해달라고 했지. 없애달란 부탁은 안 했는데요."

"우리가 한 짓이 아닙니다."

"누구 짓입니까?"

"생존자가 없어서 파악이 힘듭니다. 찾은 흔적이라곤 거대한 발톱 정도인데...."

"…발톱."

세작을 잡으라고 보냈더니 왜 거기에 간 거야?

단박에 범인이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어물쩍 주제를 바꿨다.

"블랙마켓이 영지를 뒤지고 다닌 이유는 알아냈습니까?"

"코룬강에서 살아남은 사냥꾼들을 만나러 다녔습니다. 노예들을 풀어준 범인을 파악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알아냈겠네요."

"네."

록터를 몰라봤을 리 없으니, 헌트의 존재를 눈치챘을 것이다.

선동 주체인 사냥꾼 드라카를 제거하고 배달부 사무엘과 조우했을 때 마찰을 염두에 둔 일이긴 했다. 근데 하필 지금 타이밍에 지부장 빼고 몰살이라....

재수 없으면 블랙마켓에게 미운털 박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식량은 어디로 옮겼습니까?"

"성 밖 임시 창고로 옮기고 있습니다. 물량이 많아서 지금도 작업 중입니다."

전쟁을 염두에 둔 만큼 블라이어 창고에는 엄청난 물량의 식량이 쌓여 있었다.

지부에 투입된 검은 장미들이 사람들을 부려가며 작업하고 있지만, 식량을 모조리 옮기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시간이 없거든.'

욕심을 부리다간 옮긴 식량마저 빼앗길 수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동이 트면 바로 작업을 중단하고, 임시 창고에 있는 식량부터 블라이어에서 최대한 멀리 빼세요."

"그래도 성에 남은 식량이...."

"전부 태우세요. 다 못 가져갑니다."

검은 장미에게 부탁해서 최대한 많은 식량을 확보하려는 이유는 이번에 궐기한 반(反) 카멜 연합군에게 식량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머릿수가 늘어난 만큼 식구의 입을 걱정하는 건 수장의 몫, 록터에게 바랄 수 없으니 이건 대장인 내가 챙겨야 했다.

"그럼 '그곳'으로 식량을 옮깁니까?"

"네. '그곳'으로 부탁드립니다."

"...."

지부장은 잠시 입을 다문 채 남자를 응시했다.

알렉스 마르샤.

혜성처럼 나타나 모두가 두려워하는 블라이어를 엉망진창으로 뒤엎고 있는 사내.

그럼에도 그가 식량을 옮기라고 부탁한 장소를 떠올릴 때면 불신부터 생겼다.

'엘레토르 성곽이라니....'

말도 안 된다.

엘레토르 성곽은 토바른 지역 최북단과 오르도르 숲 남단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성곽이었다.

지금은 마녀들의 경고로 주인이 없는 장소. 이종족인 자신들조차 쉬이 머물 수 없는 곳이었다.

도대체 어쩌려는 거지?

헌트 정도의 소수 정예는 몰라도, 일반인이 대다수인 수천 명을 데리고 가는 건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니, 당장 블라이어 성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이곳을 빠져나갈 수나 있을까?

"정말 그곳으로 데려올 수 있습니까?"

"못 믿겠으면 그냥 지켜보시면 됩니다. 말로는 설명 못 합니다."

지부장은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곤 고개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처음에는 그저 운이 좋은 사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가 만들어가고 있는 흐름은 토바른 전제를 뒤흔들고 있었다. 그 깐깐한 마스터가 이 사내에게 배팅한 이유를 알 것 같다가도, 남자가 다시 손을 바삐 움직이기 모습에 또 헷갈렸다.

"...."

부탁으로 가져다준 음식들로 무언가를 만드는 모습. 잘 구워진 빵 안에 처음 보는 조합으로 토핑을 얹고 있다.

지부장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긴 시간 동안 지부장 자리를 지키며 통찰력이 뛰어나다 자부했는데, 이 남자는 도저히 모르겠다.

굳이 이 장소에서, 이 타이밍에, 왜 이딴 짓을 하는 것일까?

"배고프십니까?"

"아니요."

"그런데 왜...."

궁금하겠지.

내가 왜 이런 한심한 짓을 하는 건지.

여유가 있어 넉넉하게 도시락이 완성됐다.

과거 여자 친구한테도 해준 적 없는 10단 도시락. 케로스 것은 1단이다.

난 두 도시락을 한쪽으로 밀어내곤 다크 엘프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을 한 겁니다."

난 방금 수천 명을 구할 가장 값비싼 도시락을 만들었다.

물론, 다크 엘프는 날 미친놈처럼 바라봤지만 말이다.

"...!"

미약한 흔들림.

다크 엘프도 뭔가를 느낀 듯 시선을 돌렸다.

엉덩이를 댄 바닥 사이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먼 거리에서 수천의 말발굽이 대지를 때린다면 이런 느낌이겠지?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베네타에 전하세요. 광물 수급을 최대한 서두르라고. 곧 모든 루트가 막힐 겁니다."

"연락책을 남겨둘까요?"

"아뇨. 검은 장미도 블라이어에서 몸을 빼는 게 좋을 겁니다."

지부장은 고개를 끄덕이곤 밑으로 몸을 날렸다.

경사가 높은 장소인데, 엘프 특유의 날렵함인지 지부장은 순식간에 바닥에 착지한 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곳은 통곡의 언덕을 마주 보는 큰 바위 꼭대기였다. 일행을 두고 나 홀로 경사 높은 장소에 자리한 이유는 혹시 모를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만에 하나 연락책이 있다면 기만책을 쓸 수 없으니까.'

비밀 거점을 통해 파악한 정보.

블라이어의 기마 부대가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한다고 했다.

렌구아의 지령에는 3천의 기마대가 통곡의 언덕을 지날 테니 비밀 거점에서 나와 기마대의 명령 전달에 도움을 주라는 내용이었다.

'베네타 경계에서 복귀한 기마 부대일 거야.'

검은 장미를 통해 이미 3천에 달하는 기마 부대가 베네타 경계에서 사라진 소식을 전달받은 상태였다.

다만, 그 부대엔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했다.

'머리가 없어.'

렌구아의 지령을 통해 렌구아는 물론 카멜과 리옹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기마대를 이끄는 이는 친위대일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주술사들에게 합류 후 명령 전달에 도움을 주라는 건, 기마병 쪽에 주술사 부대가 없다는 뜻이었다.

즉, 기마병 부대엔 연락책이 없고, 지금은 카멜의 지시 밖에 벗어난 상태였다.

비밀 거점을 통해 연락책을 수급할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우리가 제대로 허점을 찌른 셈이다.

그럼에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 암습을 준비했다.

기만책은 정보 차단이 핵심이었으니까.

끼이이이이―

활시위를 팽팽히 당겼다.

거대한 화살엔 주술사들에게 천적인 황금빛 기류가 담겼다.

내가 겨누는 언덕 방향엔 핏빛 망토를 둘러쓴 칼과 엘튼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 * *

"엘튼, 얼마나 지났지?"

"곧 동이 틀 것 같습니다."

"그럼, 단둘이 이곳에서 밤을 새운 거네? 어? 시발?"

"적이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해서...."

칼은 혀를 차며 주변을 천천히 둘러봤다.

아직도 언덕은 불씨가 마르지 않았다. 뜨거운 바람이 불어닥치는 언덕 초입에 서 있으니 새벽녘에도 등에 땀이 흘러나왔다.

"따뜻해서 좋긴 한데. 서서히 가슴을 옥죄는 이 느낌은 뭘까?"

"설마...."

"맞아. 느낌상 녀석이 1타라고 말했던 병력이 올 것 같은데, 이 녀석은 어디 있는 거야?"

"이 주변에서 지켜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마, 튄 건 아니겠지?"

"…네?"

"3천 기마병 앞에 우릴 던지고 도망갈 수도 있잖아."

"...."

"장난이야. 네가 농담도 심각하게 받아들이니까. 녀석이 날 이곳에 남긴 거잖아."

"죄송합니다."

"구라는 내 전문이니 잘 보고 배우라고. 나중에 상황이 어떻게 흐를지 모르니까."

대화도 잠시,

두두두두―!!!!!

두 사람은 지평선 너머에 피어오르는 먼지를 보며 신음을 흘렸다.

지축이 흔들리는 말발굽 소리.

녀석이 말했던 블라이어 기마병이었다.

칼은 핏빛 망토를 갈무리하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두 눈을 번쩍 뜨며 기마병 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크, 큰일 났네!"

그 뒤를 엘튼이 다급히 따랐다.

그의 손에는 비밀 거점에서 가져온 통신구가 쥐어져 있었다.

매섭게 질주해오던 3천 기마병이 칼의 등장에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고삐를 동시에 움켜쥐자, 말 울부짖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잠시 후, 멈춰선 기마병 앞으로 갑주를 걸친 기사들이 나타나자 칼이 다급히 외쳤다.

"베, 베네타가 쳐들어왔네!"

"그게 무슨 소리요?"

친위대와 주술사의 사이는 우호적인 편이 아니었다.

서로의 권력을 탐하고 견제하는 관계.

하지만 불바다가 된 통곡의 언덕과 영지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에 친위대 모두가 주술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보를 줄 이가 그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베네타가 군대를 이끌고 기습을 해왔어. 언덕을 지키던 병력은 전멸했고, 성도 허무하게 넘어갔네."

"…성이? 정말이요?!"

"성벽으로 가보게. 깃발이 바뀌어 있을 테니까."

기사가 다급히 기마 병사들을 보내 확인해보니, 정말로 성벽 깃발이 베네타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기사들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그들이 받은 명령은 통곡의 언덕에서 주술사들과 합류한 뒤 지시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성이 넘어갔다고?

"주, 주군은 뭐라 하시오!"

기사 중 하나가 엘튼이 지닌 통신구를 발견하곤 다급히 물었다.

"당장 베네타 경계로 합류하라고 하셨네. 지금 베네타의 돌격대가 경계에 주둔 중인 우리 군대의 뒤를 치기 위해 움직였어! 서둘러야 하네!"

"돌격대?"

"수천은 될 거야. 혹시 보지 못했나?"

"못 봤는데...."

"이… 이런 설마 늦은 건가?!"

"통신구엔 아무 소식이 없소?"

"없네. 어서 움직여야 하네. 주군이 당하면 끝장이야!"

영지가 점령당한 것이 기사들에겐 평정심을 잃게 했다.

기사들은 다급히 주변에 있는 기마 병사들을 불러 말에서 내리게 했다. 다급히 움직이느라 여분의 말을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지시받은 대로 눈앞의 주술사들과 합류해서 함께 움직일 생각인 듯 보였다.

"난 이곳에 남아 또 다른 병력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하네. 이자가 연락책을 맡을 거야. 어서 데려가게!"

엘튼이 자리가 빈 말을 타고 다가오자, 친위대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곤 황급히 기마병들을 이끈 채 돌아온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엘튼이 고개를 돌려 칼을 바라보자, 칼은 손을 흔들어줬다.

귀한 전력인 엘튼은 저들 곁에 붙인 이유는 하나다.

기만책이 발각당할 시, 저 무리 안에서 살아서 탈출할 실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상황이 다급했던지, 3천 기마 부대는 다가온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반대편으로 모습을 감췄다.

엘튼을 태우기 위해 이곳에 버려진 기마 병사.

그는 칼에게 다가와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주술사님 저는 이제 어찌해야 합니까?"

"뭘 어째, 하늘을 원망해야지. 3천 중에 걸리다니, 너도 어지간히 재수 없다."

"네? 그게 무슨… 커억!"

그때 기마 병사 주변으로 칼 일행이 나타나 병사를 제압했다.

병사는 언덕 구석으로 질질 끌려갔다. 고문을 통해 필요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서였다.

터져 나온 비명 사이로, 칼은 엘튼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적들 사이에서 바짝 긴장할 엘튼이 떠올랐다.

"고생해라. 나이 많은 내가 갈 순 없잖아? 나도 이제 쉬엄쉬엄 살아야지."

중요한 임무가 성공리에 끝나자, 칼은 자리를 잡고 꿀 같은 휴식을 취했다.

자리를 지키며 다음에 나타날 2타나 맞이할 생각이었다.

지금처럼 똑같이 하면 되겠지?

칼은 아직 2타가 어떤 이들인지 듣지 못했다.

* * *

두두두두두두―!

엄청난 기세로 돌진하는 기마 부대.

그 선두에 선 푸른 갑주의 기사는 얼굴을 굳힌 채 곁에 따라오는 주술사를 바라봤다.

잠시 후, 주술사가 쥔 통신구에서 주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렌구아와 합류하면 늦어. 리옹.]

"말씀하십시오."

[성과 연락이 모두 끊겼다. 성으로 전력을 다해 달려라. 가서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상황을 보고해.]

"충."

리옹은 전력 질주를 명했다.

그가 바람을 뚫고 매섭게 달리기 시작하자, 그 주변으로 친위 기사들이 붙었다.

양쪽 어깨에 푸른 견장이 달린 기사들.

4성으로 구성된 친위대의 부장들이었다.

그 뒤로 한 개 소대의 주술사 부대가, 가장 후미에는 에토르 출신의 정예 3천 기마병이 따라붙었다.

리옹이 방향을 잡은 곳.

칼이 쉬고 있는 통곡의 언덕이었다.

170화 주도권 싸움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