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주도권 싸움 (9)
변수는 없었다.
3천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온 친위대는 엘튼을 연락책으로 착각하고 그와 함께 베네타 경계로 황급히 돌아갔다.
속았다는 것을 눈치챘을 쯤이면 우린 이미 블라이어를 뜬 상태일 테니, 저쪽은 엘튼에게 맡기면 될 것 같았다.
연락책의 부재.
이 사실을 통해 난 주술사 부대 전원이 카멜 곁에 머문다는 것을 파악했다. 전에 거짓 으름장을 놓으며 당장 가서 죽일 것처럼 속인 적이 있는데, 그때 주술사 부대를 전부 곁에 둔 모양이었다.
그간 했던 행동 하나하나가 나비 효과가 되어 이득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2타는 어떻게 될까?
"…뭐, 이 새끼야?"
그걸 고민하기 전에 우선 눈앞의 험상궂은 아저씨부터 안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멱살을 움켜잡고 흔드는 데 슬슬 어지러워서 말이지.
"거짓말이지?"
"칼에게 얻어먹을 게 뭐가 있다고 제가 거짓말하겠어요."
"리옹 마트레인이 곧 나타날 것 같다고? 친위대와 주술사 부대, 또 뭐라고?"
"정예 3천 기마병이요."
"그, 그건 조금 전에 보내버렸잖아!"
"이번에는 '에토르'의 기마병입니다."
에토르 지부 검은 장미를 통해 학살자가 에토르 기병 3천을 지원받아 라웁 숲으로 향했다는 정보를 듣게 됐다.
실종된 톰자엘 자작을 수색할 목적으로 데려온 병력이지만, 기사 단장 와일리의 증언에 에토르의 병력이 2타 전력에 포함된 것이 확인됐다.
거짓 증언.
와일리가 록터를 저격했다.
'학살자에게 포섭됐어.'
5성 기사를 포섭하는 시간이 너무 빨랐다.
스스로 굴복한 것이 아닌 주술사들을 동원해 종속 계약을 유도했을 것이다. 지금쯤 카멜의 손에 종속의 반지가 있을 테니 말이다.
"그걸 왜 이제야 말하는 건데?! 처음 봤을 때 말했으면 내가 엘튼 대신 저들을 따라갔을 거 아니야?!"
"그 무슨 개소리입니까? 칼은 록터와 끝까지 함께 해야죠."
"내가 왜?!"
록터와 칼은 한 세트다.
당장 칼의 신명 효과 '영웅 조력자'의 버프를 받을 수 있는 이는 록터뿐이거든.
"영웅 조력자로서 실격입니다. 언제는 록터를 위해...."
"시끄러!"
"바늘 가는 데 실 가는 겁니다."
"하, 저놈의 주둥이… 구라는 내가 아니라 네놈이 쳐야 해. 세상을 속여 먹을 놈!"
살짝 찔끔했다.
아직 세상을 속이진 못했지만, 왠지 비슷하게 흘러가는 모양새거든.
칼은 탄식을 내뱉고는 서서히 밝아지는 지평선을 응시했다.
동이 트고 있다.
저 너머는 아직 고요했다.
곧 지축이 울리고 말발굽 소리가 울리겠지?
시발, 엘튼! 돌아와!
칼은 고개를 털어내곤 내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되고 있는 거야?"
"네. 지금까지는요. 가장 걱정했던 것이 적들이 뭉쳐서 오는 건데 다행히 따로 움직일 것 같습니다."
"성이 불탔기 때문이겠지?"
"네. 성이 불타고 영지 상황을 알 수 없으니 카멜도 다급할 겁니다. 가까운 병력부터 보내고 보겠죠. 상황을 파악하려면 정보가 필요하니까."
아무리 똑똑한 카멜이라도 자신의 성이 불타고 영지가 뒤집힐지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놈은 상황에 가려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각개격파의 가능성을 말이다.
"2타는 기만책이 안 통하겠지?"
"안 통합니다. 리옹이 주술사 부대를 통해 카멜의 지시를 받고 있을 테니 오히려 역으로 당할 겁니다."
"성에서 버티는 건? 시간을 끌면 우리에게 좋은 거 아니야?"
"버티다가 죽을 뿐이죠. 우린 몰라도 들고 일어난 영지민들은 다 죽을 겁니다."
비밀 거점의 정보, 그리고 검은 장미의 정보를 조합하고 나니 블라이어로 짓쳐오는 카멜의 병력 운용을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만약 1타 병력인 블라이어 기마병이 비밀 거점의 주술사들과 합류했다면, 그들은 곧 2타로 도착할 리옹 부대와 함께 우리 발목을 붙잡고 늘어졌을 것이다.
기마병만 6천이 되니, 우린 성에 틀어박혀 있을 수밖에 없을 테고, 광산에 동원된 하인즈의 병력도 소환해서 성벽을 막아야 했을 것이다.
그럼 도주 계획이 실패하게 된다.
'그리고 3타인 렌구아 부대가 도착하면 총공격이 시작됐겠지.'
그럼 끝이다.
도르네프와 펜리가 와도 승부를 점치기 힘든 상대 전력인데, 이곳 병력으로 학살자의 병력과 싸우는 건 계란으로 바위 치기였다.
'이 사실은 1타 병력을 기만책으로 속였다 해도 변하지 않아.'
6천에서 3천이 됐을 뿐이다.
여전히 완벽한 열세.
2타 병력만 해도 무척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카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따로 병력을 운용하는 것이겠지.
확실히 틈이 없다.
하지만 난 그 틈을 찾았다.
그것도 아주 치명적인.
'리옹 마트레인.'
토바른의 주도권이 걸린 중요한 싸움.
그 주도권 싸움의 승부는 이번 2타 전투에서 갈릴 것이라 확신했다. 솔직히 3타인 렌구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리옹. 리옹만 잡으면 됩니다."
"계획은?"
"있습니다."
그를 잡으면 우리의 탈출 계획이 훨씬 수월해진다.
내 계획을 앞서 듣게 된 칼은 턱을 벅벅 긁으며 고민에 잠겼다.
'계획대로 된다면 녀석의 말처럼 될 가능성도 있어.'
녀석의 말대로 이뤄진다면 실로 기가 막힌 계획이긴 했다.
하지만 그 계획의 성공 조건에는 두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 번째, 리옹을 잡아야 한다는 것.
두 번째, 연락책인 주술사 부대를 제거해야 했다.
주술사 부대야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문제는 리옹 마트레인.
그 괴물이 문제였다.
"잡을 수 있겠어?"
"저희로는 힘들죠. 록터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음, 확실히 록터라면."
록터와 리옹은 과거 블라이어 단장과 부단장 사이다.
지금은 앙숙이 되어버린 존재.
아마 록터도 카멜만큼이나 리옹에게 복수의 칼을 벼르고 있을 것이다.
"리옹 혼자만 오는 게 아니잖아."
"정확한 정보는 곧 도착할 겁니다."
"뭐? 그게 언제...?"
"아, 딱 맞춰 오네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두 사람 사이로 뿌연 돌개바람이 불어닥쳤다.
두 사람의 얼굴을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곧 주먹 크기의 희끄무레한 존재가 내게 아주 작은 쪽지를 건넸다.
"…정령?"
"검은 장미 지부장의 정령입니다. 미리 부탁했는데 다행히 안 늦었네요."
쪽지를 받고 '고맙다.' 말을 전하자, 정령은 희미한 미소를 남기곤 허공에서 사라졌다.
쪽지에 적힌 깨알 같은 글자.
리옹 마트레인.
4성 기사 다섯.
주술사 부대 하나.
기마병 3천.
"예상은 했지만, 역시 카멜은 없네요."
2타에 카멜이 없다면 녀석은 렌구아와 같이 있거나, 더 후방에서 움직이고 있을 것이다.
카멜은 그 누구보다 자신의 안전에 집착하는 인간이다.
곁에 두던 리옹과 떨어졌다는 건 리옹 정도로 강력한 호위가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와일리 그라임스.
기사 와일리가 카멜을 지키고 있다.
그럼 눈앞의 전력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뜻.
하지만 쪽지를 살핀 칼의 표정은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힘들 것이라 예상했지만, 병력 구성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이건 안 돼. 너무 많아."
"가능합니다."
"리옹은 록터가 상대한다고 쳐. 4성 기사 다섯은 누가 막아?"
"제가 막을 겁니다."
"…뭐?"
"칼은 일행과 함께 주술사 부대를 암습하고 절 도우러 오시면 됩니다."
"미친놈. 4성 주제에 4성 다섯을 막겠다고? 이놈들은 그냥 4성이 아니야. 아티팩트로 무장된 정예 기사다. 그리고 기마병 3천이 우습냐? 그놈들이 병풍이야?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내가 고개를 돌린 순간 칼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샌드위치네~ 도시락이네~"
숨바꼭질을 끝내고 돌아온 그녀는 작은 바위에 걸터앉아 10층 도시락을 하나하나 까먹고 있었다.
릴리 베이스.
확실히 그녀는 강하다.
하지만 칼의 판단으로 2타 전력을 상대하기엔 부족하다 생각했다.
릴리의 힘은 그녀 개인의 것보다 오르도르 숲이란 단체에서 나오는 것이었으니까.
"힘들 거야."
"칼, 우리 목표는 적들을 쓰러트리는 게 아닙니다. 레옹 마트레인 한 명이지."
"리옹이 작정하고 버티면 우린 결국 다 죽어."
"그러니 5분을 넘기면 안 됩니다. 5분이 지나면 뒤도 안 보고 후퇴할 겁니다."
"5분, 음, 그 정도라면...."
"릴리라면 그 시간은 벌어다 줄 겁니다."
* * *
"꺼억―!"
"...."
릴리는 볼록 튀어나온 배를 툭툭 두드리며 바위에 머리를 댔다.
머리가 바닥에 닿으면 잠이 와야 하는데,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았다.
그녀는 이것이 수면을 방해하려는 아서의 계략임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결국 잠이 들지 못한 채 바위 위를 굴러다녔다. 그런 릴리를 케로스는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정확히 릴리가 아닌 그녀 주변에 나뒹구는 텅 빈 도시락들을 보는 것이었다.
무려 열 개의 도시락.
케로스는 자신 앞에 달랑 하나 놓여 있는 도시락에 시무룩한 반응을 보였다.
케로스는 혀를 날름거렸다.
불만스러울 때 나오는 그의 버릇.
아서가 다가오자 케로스의 혀는 끝없이 날름거렸다.
"멍!"
['건방진 인간, 가만두지 않겠다.'라고 하는군.]
그런 말을 이렇게 귀엽게 한다고?
"해석에 재미 들이셨네요. 잠력 회복은 끝난 겁니까?"
[방금 끝마쳤다.]
"타이밍 죽이네요."
소비된 잠력을 회복하느라 그동안 조용했는데, 그 작업도 이제 끝난 것 같았다. 격발 횟수가 리셋된 셈이니, 전투를 보다 유리하게 펼칠 수 있을 것 같았다.
난 케로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불꽃이 튄다.
"레토, 제 말 좀 전해주십시오."
[그냥 말하면 된다.]
아, 그런가?
귀여운 모습으로 앉아 있다 보니 잠시 착각했다.
눈앞의 동물은 마수라는 것을.
난 릴리의 도시락을 가리키곤 두 팔을 활짝 폈다. 그리곤 케로스의 도시락을 바라보며 작게 압축했다.
난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고의 고기만 골라 만들었습니다."
"...."
"먹어보세요. 생각이 달라질 테니."
"멍!"
['내 혀를 속일 순 없다'라고 하는군.]
"...."
내 진지한 눈빛에 케로스는 으르렁대며 도시락을 까먹기 시작했다. 그리곤 흠칫하더니 게걸스럽게 도시락을 파먹기 시작했다.
'성력이 사기네.'
남은 음식에서 고기만 발라서 넣어둔 도시락인데, 성력이 다한 것 같았다.
릴리의 것도 그렇고, 이 녀석은 더 그렇고, 성력이 물질에 어떤 효과를 주는 것 같았다.
이참에 암살자에서 요리사로 전직해야 하나?
이 녀석은 된 것 같고.
난 뒹굴거리는 릴리에게 다가가 한 가지를 물었다.
"저주?"
"정확히 광역 저주입니다. 범위 안으로 들어오면 강력한 저주를 내리는 주술 같은 거 알고 있습니까?"
"알고 있긴 하지. 근데 연습해 본 적이 없어."
"쓸 수는 있습니까?"
애초에 릴리에게 연습은 무의미하다.
만월의 재능.
그녀의 재능은 하늘이 내려준 것이었으니까.
곰곰이 생각하던 릴리가 미간을 좁히곤 고개를 저었다.
"귀찮아. 또 나한테 부탁하려는 거지? 숨바꼭질 약속부터 지켜."
"전 마녀들의 복수를 위해 당신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응?"
난 가방을 뒤적거렸다.
사실 오르도르 숲을 지날 때 써먹으려고 오래전부터 줄곧 챙겨왔던 물건이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거, 뭐야?"
멈칫하던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날 바라봤다.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흑주술사 도네콜린트의 목걸이.
넬리토리 협곡에서 그를 죽이고 빼앗은 주술 목걸이로, 이 목걸이의 재료는 마녀들의 이빨이었다.
릴리는 그 이빨들을 단박에 알아봤다.
"한 주술사의 물건입니다. 그자가 속해있는 세력이 지금 오고 있습니다."
"...."
"복수할 기회입니다."
릴리는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마녀의 직감으로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아보려고 하는 것 같은데.
진실이다.
죽긴 했어도 도네콜린트는 훗날 카멜의 가신으로 활동하던 놈이었으니까.
"그거 이리 내놔."
릴리는 목걸이를 거칠게 낚아챘다.
목걸이를 살핀 그녀의 눈망울이 흔들린다. 잠시 후, 그녀가 이를 악물곤 날 바라봤다.
"여기서부터 저기."
릴리는 바닥의 위치를 천천히 가리켰다.
대략 20미터 정도의 큰 원이다.
그리곤 도네콜린트이 목걸이를 내게 보이곤 말했다.
"…마녀들의 한(恨) 맺힌 절규가 들려? 이 목걸이로 펼칠 수 있는 저주의 범위야."
잠시 후,
펑―!!!!
신호탄이 터졌다.
성안에 있는 록터 펠리스를 부르는 신호였다.
171화 주도권 싸움 (10)
신호탄이 터지기 무섭게 록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늘어트리고 다가오는 표정이 무거워 보였다.
마음이 복잡할 것이다.
한때 지키고자 했던, 이젠 무너트려야 하는 애증의 장소.
피를 묻힌 장소가 다른 곳도 아닌 블라이어였으니까.
"상황은 어떻습니까?"
"성공했다. 나머지 이들은 사람들을 이끌고 광산으로 가고 있다."
실패할 확률이 없는 계획이라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표정이 안 좋네요?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예상했던 것보다 움직이는 이들이 적다."
영지 곳곳을 뛰어다니며 록터가 목이 터지라 구원을 외쳤지만, 이에 동조하는 영지민은 많지 않았다.
전(前)대 가주를 따르거나, 카멜에게 소중한 이를 잃은 사람들만 적극적으로 움직일 뿐, 그 외 대부분은 눈치를 보며 문을 걸어 잠갔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지라 난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카멜의 공포 통치에 적응한 이들일 겁니다. 이곳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니까요."
"언제고 도구로 희생될 뿐이다."
"자신은 아닐 것이라 생각할 겁니다. 부담감도 작용했겠죠."
이곳을 벗어나 다른 곳에서 새로 시작한다?
카멜의 공포보다 새로운 변화가 더 두려운 이들도 있을 것이다. 변화보단 카멜의 눈치를 보며 폭풍이 지나가길 바라겠지.
"일일이 설득할 시간 없습니다. 포기합니다."
"...."
록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이를 받아들인 자신의 변화에 스스로 놀라는 중이었다.
그도 이젠 블라이어에서 떠나 헌트란 새로운 둥지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록터는 주변을 둘러봤다.
칼은 일행 다섯과 함께 시체들을 바삐 옮기고 있었다. 멀찍이서 시체 더미를 싣고 와 주변에 버리고 있는데, 록터의 눈에는 범위가 있는 일정 표식처럼 보였다.
릴리는 그 주변 바위에 기대어 목걸이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제법 진지한 표정이다. 그 옆 작은 강아지는 고개를 박은 채 끙끙대고 있었는데 고민이 있는 듯 보였다.
"성에서 마녀를 봤다."
"그녀에게 중요한 부탁을 했는데 잘 처리해준 것 같습니다."
카멜의 눈과 귀를 막기 위한 세작 제거.
그 와중에 카멜과 연락이 닿는 블랙마켓 쪽 연락책도 제거한 모양이었다. 릴리의 활약으로 성 내부의 연락책이 모두 끊겼다면 지금쯤 카멜은 조바심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판단이 급해지면 빈틈이 생길 수 있다.
난 그 빈틈을 노릴 생각이고 말이다.
"주변에 적은 없어 보이는데. 신호탄을 미리 터트린 이유가 있나?"
"덫을 깔 겁니다."
"덫?"
"네. 록터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해라."
"리옹 마트레인."
리옹의 이름을 언급하자, 록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카멜이 혈육을 제거하고 가문을 삼키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단장 리옹 마트레인.
그와는 지독한 악연으로 엮인 관계였다.
"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
내 물음에 록터는 헛웃음을 흘렸다.
기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다. 하지만 록터 자신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1년 가까이 도망자 신세로 전전하는 동안, 리옹은 회귀자 카멜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눈부신 성장을 반복했다.
얼마나 강해졌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과거의 그라면 이길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지만...."
"냉기를 다루는 5성 개화 특성자, 고대 아티팩트로 기사 장비로만 최소 2개 이상은 될 겁니다."
스토리상 이 시기 정도에 리옹이 지닌 장비는 '네메시스의 얼음 방패'와 '서리검'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 카멜의 거침 없는 성장 속도를 봤을 때 이 정도가 최소 장비일 것이다.
분명 더 가지고 있다.
렌구아가 신명의 주인이 됐다.
카멜 입장에선 둘 사이의 벨런스를 맞추기 위해 그에 상응하는 아티팩트를 리옹에게 더 건넸을 것이다.
'그 물건이 뭔지 알면 좋을 텐데….'
아마 앞으로 벌어질 전투에서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이 모르는 고대 아티팩트.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에 그 변수를 최대한 줄이려면 결국 록터의 역할이 중요했다.
"...."
록터는 자신의 장비를 바라봤다.
네 자루의 검.
평범한 강철로 만들어진 무기다. 리옹의 무기와 부딪쳐서 몇 번이나 버틸 수 있을까.
고대 아티팩트로 무장한 리옹.
지금껏 아티팩트를 성장을 막는 걸림돌로 여기며 기피했는데, 아서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최소한의 무구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무구에 대한 절실함이 느껴졌다.
[그를 이길 수 있겠습니까?]
록터는 쓴웃음을 흘리며 날 바라봤다.
그제야 내 질문의 속뜻을 깨달은 것 같았다.
맞다.
난 록터에게 승리를 바라지 않는다. 그게 욕심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거든.
"난 버티기만 해도 성공이겠군. 진짜는… 그대인가?"
그 물음에 내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록터는 흠칫하며 검을 다급히 뽑아 들었다.
지독한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이 반응한 것이다.
잠시 당혹스러운 눈빛을 보내던 록터는 이내 검은 내려놓고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이전에 봤던 익숙한 변화가 눈앞에서 벌어졌다.
우우우우웅―!!!
내 몸이 황금빛으로 은은하게 물들기 시작했다.
신명 사냥꾼(표적 – 록터 펠리스)
내 선택에 레토가 우려를 표했다.
[어리석은 선택이 될 수 있다. 오늘의 선택이 훗날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네 목을 옥죌 거다.]
"됐고. 격발 사용 횟수나 알려주세요."
[여덟 발이다. 횟수가 늘어난 만큼 받게 될 과부하는 배가 될 것이다. 사용에 신중을 기해라.]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변화에 집중했다.
격발 사용 횟수, 여덟 발.
그릇이 커진 효과로 이전의 다섯 발보다 사용 횟수가 늘었다.
기운 증폭.
개안(開眼) 발동.
신명 목록 효과 상승.
각성으로 전체적인 능력 강화가 일어났다.
리옹이 신명의 주인이라면 표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리옹은 신명 각성을 이루지 못한 상태였다.
록터를 주체로 힘을 각성했기에 훗날 내 신명 목록 일부가 공개되겠지만, 리옹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 리스크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리옹은 카멜의 검이야.'
시간이 갈수록 강해지는 건 카멜이 아니라 그의 검인 리옹이란 뜻이다.
여기서 학살자 최고의 패를 제거할 수 있다면 주도권을 넘어 승기마저 가져올 수 있었다.
큰 도박에 내가 가진 걸 베팅한 셈이었다.
"…왔나?"
록터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와 함께 일행들의 시선도 같이 움직였다.
시야는 짙은 잿가루로 흐릿했지만, 저 멀리 대지가 거친 말발굽 소리에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두두두두두두―!
리옹 마트레인.
놈이 도착했다.
내가 신호를 보내자 일행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덫은 완성됐고, 이젠 사냥감을 덫으로 유인할 차례였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며 록터를 바라봤다.
"제한 시간 5분입니다. 그 안에 상황을 끝낼 겁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미끼가 되어 주십시오."
사냥을 위한 작전이 시작됐다.
* * *
"…빌어먹을."
블라이어를 지척에 뒀을 때, 리옹은 눈앞의 풍경에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양쪽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연기.
영주성과 통곡의 언덕, 양쪽 모두가 불타버린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졌다.
빈집이 털릴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이건 그 예상을 훨씬 웃도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밀 거점 쪽과 연락은?"
리옹의 물음에 따라오던 주술사가 통신구를 치우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블라이어 기마병과 합류했다는 교신이 지금쯤 비밀 거점 쪽에서 들려와야 하는데 연락이 두절 된 상태였다.
잿가루만 흩날리는 불타버린 언덕을 응시하며 리옹은 확신이 들었다.
거점에 문제가 생겼다.
더불어, 블라이어 기마병에게도.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에토르 기마병을 이끄는 지휘관이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기병 3천을 이끄는 지휘관은 자작의 가신으로 귀족 출신이었다. 에토르에 제대로 된 기사가 없었기에 영향력이 강한 그가 지휘를 맡게 됐는데, 실상 리옹에게 기대어 움직이는 상황이었다.
"록터 짓입니다."
"네? 그가 어찌 블라이어를…."
"에토르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광인들을 이용한 겁니다."
이미 에토르가 크게 당한 상황이라, 귀족은 리옹의 거짓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귀족의 뇌리에 록터는 이제 무조건 징벌해야 할 적으로 자리 잡았다.
블라이어와 에토르의 주적이 된 록터.
"놈의 흔적을 찾아야 합니다."
리옹은 기마병들을 움직여 주변 흔적을 실시간으로 보고를 받았다. 보고 받은 내용은 곧장 통신구를 통해 카멜에게 전해졌다.
[성벽에 베네타의 깃발이?]
"네. 베네타에서 기습을 해 온 것이 아닌지…."
[아니. 거짓일 확률이 높다. 베네타 내부에서도, 경계 쪽에서도, 병력이 움직인 흔적은 없었어.]
"영지 안쪽을 확인해보겠습니다."
[안쪽 연락책들과 연락이 끊겼다. 함정일 수 있으니 에토르 병력 일부를 척후로 먼저 보내고, 정예 전력은 그대로 유지해라.]
"알겠습니다."
[비밀 거점 주술사들과 우리 쪽 기마병의 흔적부터 찾아라. 놈들의 전력으로 그들 전부를 없애는 건 불가능해. 생존을 확인하고 생존했다면 함께 움직여라.]
블라이어 기마병에게 수하들을 보내 비밀 거점과 합류하라 지시한 것이 리옹 자신이었다.
흔적이 남아 있다면 비밀 거점이 자리했던 통곡의 언덕에 있을 것이다. 리옹은 성 쪽으로 기병 백 기를 추려 척후로 보내고, 언덕 쪽으로 움직였다.
안개처럼 짙은 시야 너머로 새까맣게 탄 거대한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밤새도록 타오른 짙은 연기로 인해 대낮임에도 주변이 뿌옇게 흐렸다.
리옹은 짧게 혀를 차곤 기마병들을 오십 기씩 나눠 언덕 주변을 정찰하게 했다. 열 개 소대, 기병 오백이 탁한 시야 사이로 뿔뿔이 흩어졌다.
잠시 후,
"뭐? 사라져?"
"한 개의 소대가 복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이 사라진 방향이 어디지?"
귀족이 언덕 한쪽을 가리키자, 리옹은 그곳으로 이백의 기병을 더 밀어 넣었다.
이번엔 반응이 있었다.
흐린 시야를 뚫고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저, 적이다!"
"…오라 소드!"
그리고 들린 하나의 이름.
"로, 록터 펠리스!!!!!"
"…록터."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리옹은 말을 박찼다. 시야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매섭게 질주했다. 그 뒤로 부장들이, 주술사 부대가, 수천 기병이 따라붙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말과 함께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토르 기병들이다.
자신이 언제 당한 지도 모른 채, 시신들은 하나같이 깔끔하게 목이 잘려있었다. 그 외 다른 시체도 보였다.
언덕에서 죽은 병사들의 것인가?
둘러보니, 살아남은 기병들이 한 사내를 둘러싼 채 부딪치고 있었다.
번뜩이는 검광.
실루엣조차 익숙한 사내.
록터 펠리스였다.
일격에 기병들이 한 명씩 쓰러지고 있는 그림이다.
당연한 그림이지만, 그 홀로 오십 명의 기병을 비명도 없이 제거하는 건 불가능했다.
'죽은 기병들의 수도 마찬가지.'
비명이 터지고 곧장 달려왔다.
그런데 이백 기 중 벌써 절반가량이 전투 불능 상태이거나 죽어 있었다.
록터 혼자선 불가능하다.
지원군이 있으리라 확신했을 때, 흐린 시야를 꿰뚫고 다섯 빗줄기가 주술사를 노리고 쇄도했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담긴 화살.
섬뜩한 황금빛이다.
"아, 알렉스입니다!"
그 기운을 읽은 주술사들이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외쳤다.
부장들이 검을 뽑고 화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화살이 잘리며 먼지처럼 흩어졌다.
동시에 지독한 살기가 리옹에게 쏟아졌다.
"리오오오옹!!!!!!"
"...큭!"
찌릿찌릿한 기세에 부장들이 주춤하며 물러난 사이, 말에서 내린 리옹은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앞으로 돌진했다.
마주 달려오는 한 사내.
그리고 일평생 자신에게 열등감을 심어준 빌어먹을 인간.
"록터 펠리스!!!"
리옹의 검이 벼락처럼 뽑혀 나왔다.
스스스슷―
리옹의 검이 허공을 벤 순간 주변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고대 아티팩트 서리검.
동시에 리옹의 팔뚝에 착용된 팔찌가 눈 부신 빛을 발한 순간, 투명한 사각 방패가 소환됐다.
네메시스 얼음 방패.
주인의 숨결조차 얼리는 지독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 방패 위로,
"크아아아아아!"
록터의 오라 소드가 내리꽂혔다.
172화 주도권 싸움 (11)
카카카카카캉―!
검광과 함께 눈 부신 빛이 번뜩였다.
두 기사의 오라 소드가 벼락처럼 번뜩이며 주변을 무섭게 베고 지나갔다.
록터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모든 공격은 투명한 방패에 막혔고, 서리검은 부딪칠수록 지닌 기운이 얼어붙었다.
그건 검도 마찬가지.
"...."
록터는 부러진 검을 버렸다.
펼친 검술에서 처음으로 벽을 느꼈다. 낭패가 어렸지만, 아서에게 언질을 받은지라 그는 리옹을 묵묵히 바라봤다.
자신감에 차오른 리옹이 보인다.
"상대를 내리까는 그 눈빛, 방심으로 이어진다고 항상 말했을 텐데?"
"여전히 망상에 사로잡혀있군. 네놈 눈엔 나 리옹이 아직도 부단장으로 보이나?"
"한 번도 날 이기지 못한 패배자인 건 알고 있지."
"닥쳐!"
후― 하고 흘러나오는 새하얀 입김.
얼어붙은 대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바람.
록터의 붉은 오라에 땅에 갈라지고, 리옹의 푸른 오라에 주변이 얼어붙는다.
괴물들의 치열한 전투 여파에 그 주변 병력이 주춤 물러났다.
오직 부관들만 자리를 지키며 전투를 지켜봤다. 기회를 엿보며 록터의 등에 검을 박아넣을 생각인 듯싶었다.
지켜보는 태도가 여유롭다.
리옹의 실력에 확신이 있는 표정들이었다.
크아아앙!!!
"...!"
그때 뒤쪽에서 야수의 포효가 터져 나왔다. 뒤를 돌아보니 기마병 후미 쪽에서 거대한 짐승이 바위처럼 파고들며 진형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검은 털의 짐승, 아니 마수다.
마수의 사나운 포효에 말들이 두려움에 떨며 발광을 시작했다.
"오르도르의 파수꾼입니다!"
주술사는 그 짐승을 한눈에 알아봤다. 유령의 숲 마지막 문을 지키는 숲의 파수꾼. 마수 케르베로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통신구에서 카멜의 지시가 떨어졌다.
[셋은 파수꾼을 사냥하고, 나머지는 릴리 베이스를 견제하라.]
시간만 끌어도 이기는 싸움이다.
록터는 절대 리옹을 이길 수 없을 테니까.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부관 중 셋이 케로스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이 꺼낸 검에선 미약한 빛이 흘러나왔다.
마력검 베가(Bega).
착용자의 기운을 일시적으로 증폭시켜주는 마탑 연합의 대표 아티팩트 중 하나였다. 마력이 실리기에 마수에게도 상성이 좋았다.
4성 기사 셋이 케로스 주변을 맴돌며 검을 휘두르자, 거대한 몸체에 피가 튀었다.
카아아아아―!
케로스는 입을 쩍 벌린 채 검은 불을 사방에 쏟아냈다.
광역기. 검은 불꽃.
끄아아아악!
기마병들 일부가 불에 휩쓸리며 불타올랐고, 그 앞을 막아선 부관 하나가 팔찌에 대고 주문을 외웠다.
파지지지직―
투명한 실드가 소환되며 검은 불꽃을 밀어냈다. 그건 다른 둘도 마찬가지.
실드의 보호를 받으며 부관들이 불꽃을 뚫고 검을 쏟아내자, 케로스는 괴성을 지르며 물러났다. 마력검에 베인 상처들이 늘어나고, 주변 기마병들도 대열을 잡고 창을 찌르기 시작하자, 검은 털의 마수는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마수 케르베로스의 피가 대지를 적셨다.
그와 부딪치는 인간들의 피도 마찬가지.
대지는 삽시간에 붉게 물들었다.
잠시 후, 핏물이 마르며 대지 위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흐릿 시야 덕에 그 누구도 대지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저기다!"
주술사들이 바위 위쪽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여인이 우뚝 서 있었다.
릴리 베이스.
목걸이를 두 손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그녀는 나직이 주문을 읊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주술사들은 공격 주술을 준비했다.
주술사 넷을 지키던 호위는 부관 둘과 중갑의 실더 하나.
부관들은 실더를 남기고 릴리를 견제하기 위해 벼락처럼 움직였다.
마력검 베가를 뽑고, 실드를 유지한 채 바위를 타고 올랐다.
스스스스스―
오싹한 흑주술이 릴리 머리 위로 쏟아지고,
"죽어!"
기사의 매서운 공세가 아래쪽에서 릴리를 향해 퍼부어지려는 순간이었다.
번쩍―
"...!"
갑자기 허공에서 황금빛이 터졌다.
세이렌의 찬가.
찬가에 흑주술이 소멸하자, 주술사들은 반발력에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동시에 마녀를 막아선 존재에 부관들은 이를 악물었다.
알렉스 마르샤.
최우선 제거 대상이 눈앞에 나타났다.
후―
단검을 움켜쥔 난 길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곤 두 눈을 부릅뜨며, 탕―!
첫 번째 격발을 터트렸다.
단검이 총알처럼 쏟아져 나갔다.
불사자의 심장과 동화된 육체가 삐거덕거렸다.
격발이 실린 미친 강격.
살벌한 스매시가 휘둘러졌다.
쾅! 콰앙!
"크억!"
"…컥!"
두 번의 휘두름.
단검과 마력검들이 부딪친 순간, 부관들은 마력검을 놓치고 바위 밑으로 처박혔다.
쩌적―
도르네프가 준 단검인데도 강격을 버티지 못하고 금이 가더니 이내 부러져 나갔다.
손가락도 세 개나 부러졌다.
다행히 시위를 당기는 엄지와 검지는 무사했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곧장 두 번째 격발을 사용했다.
삽시간에 커진 화살.
목표는 주술사 부대다.
"…큭!"
온몸을 짓누르는 반발력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이를 악물며 시위를 쭉 당겼다.
이정도는 참을만하다.
투쾅―!
관통을 실린 거대한 화살이 주술사 무리에게 짓쳐 날아갔다.
화살을 막기 위해 실더가 거대한 방패를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퍼억―!
화살은 방패를 꿰뚫고 실더의 머리를 관통했다.
화살이 막혔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실더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졌을 때, 주술사 주변에 널브러졌던 시체 일부가 들썩거렸다.
"…쿠룩!"
주술사 하나가 목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목에 정확히 박힌 투척 단검.
"쳐!!!!!"
칼이 시체에서 나와 일행들에게 신호를 보내자, 시체 밑에 은신해 있던 다섯이 주술사를 향해 매섭게 질주했다.
이미 세이렌의 찬가로 반발력을 느낀 터라, 주술사들은 제대로 된 주술을 사용하지 못했다.
호위가 사라진 상태에서 암습까지 이어지자, 주술사들은 단검에 심장이 꿰뚫리며 무너져 내렸다.
뚫린 가슴에서 핏물이 울컥울컥 솟구친다.
주술사의 피가 바닥을 적시자,
우우웅―!
미약하게 변화하던 대지가 눈에 띄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서서히 검게 물드는 대지.
그제야 주변 이들은 변화를 감지했다. 가장 먼저 눈치챈 이는 릴리를 견제하려다 바닥에 처박힌 부관들이었다.
"…이게 무슨?!"
그들은 비틀거리며 검게 물든 바닥을 살피곤 놓친 마법검을 찾았다.
그것도 잠시,
콰아아앙―!
거센 충격파 소리가 위쪽에서 울렸다. 섬뜩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위험하다!
"...!"
살기를 감지하고 부관 한 명이 다급히 몸을 틀었지만 늦었다. 부릅뜬 눈동자에 실린 거대한 주먹.
알렉스의 주먹이다.
그저 두 눈을 한 번 끔뻑할 시간.
반응조차 할 시간도 없었다.
너무 빨랐다.
세 번째 격발.
벼락처럼 몸을 튕긴 내 신형이 하나의 주먹처럼 폭발했다.
콰앙!
폭탄처럼 부관의 머리가 주먹에 터져나갔다.
완벽한 기습.
하지만 동시에 배 쪽에 지독한 고통이 느껴졌다.
확실히 4성은 달랐다.
한 명이 당한 사이, 다른 녀석이 보조 검으로 내 배를 찔렀다.
"크아아아아!"
"…크윽! 이 미친 새끼가!"
난 그대로 놈을 부둥켜안았다.
박힌 검이 깊숙이 들어와도 무시했다. 그저 놈을 꽉 껴안고는 온몸의 근육을 팽창시켰다.
난 이를 부서지라 깨물었다.
그리고 사용한 네 번째 격발.
죽. 인. 다.
"크아아악!"
"끄아아아아악!"
비명의 하울링.
그 사이로,
으드드득―!
뼈 뒤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리가 부러지고, 척추가 부러졌다.
잠시 후, 두 팔이 축 늘어지고 고개를 떨군 녀석을 바닥에 버리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압박으로 놈의 몸을 짓뭉갰다. 물론, 내 어깨뼈도 무사하지 못했다. 난 배에 박힌 검은 뽑고는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시에 격발의 후유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연속적인 격발 사용.
난 결국 피를 토했다.
세상이 빙빙 돈다.
"쿠, 쿨럭! 레토...."
[열 호흡. 움직이지 마라.]
염원의 반지가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원한 감각과 함께 몸이 치유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사시나무 떨듯 근육이 비명을 질러댄다.
"시발, 강해져도 좀비 신세는 변하질 않네."
움직이는 건 불가능.
난 이를 악물며 다음을 떠올렸다.
다섯 부관 중 둘을 제거했다.
사용한 격발 횟수는 네 번.
이젠 최대한 아껴야 한다.
그 순간,
[까아아아아아아아아아―!!!!]
마녀의 비명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세상이 찰나 동안 멈췄다.
검게 물든 대지 위에서 움직이던 이들이 멈칫하곤 비틀거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도네콜린트의 목걸이를 매개체로 릴리가 펼친 광역 저주.
'공포의 늪(Swamp of Horrors)'이 발동됐다.
검은 기운이 둘러싸인 이들의 몸이 무척 무거워 보인다.
기운 둔화, 육체 둔화가 섞인 디버프 저주.
우우웅―!
동시에 저주로 물든 공간에 새하얀 빛들이 터져 나왔다.
나, 록터, 칼 일행, 그리고 케로스.
신체 부위에서 흘러나오는 신비한 문자.
마녀의 축복이 담긴 문자가 저주의 효과를 밀어내며 저주로부터 보호를 해주고 있었다.
"됐다."
[됐다.]
저주 타이밍과 레토의 신호가 동시에 떨어졌다.
두 눈을 번쩍 뜨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걸어갔다.
크아아앙!
"막아!"
"다 잡았어! 서둘러!"
저주 범위 안에서 케로스가 부관 셋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기마병들이 아군을 돕기 위해 다가왔지만, 검은 땅을 밟은 순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말도, 병사들도,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 움직이는 건 쉽지 않았다.
범위 안에서 거동이 가능한 이들은 마나를 사용하는 유저들뿐이었다.
"잡아!"
커어어엉―!
부관 셋이 마력검을 휘두르며 피투성인 케로스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였다.
저주 효과에 몸놀림이 느려졌어도, 아직 그들에겐 힘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유리한 상황도 잠시,
"큭!"
"뒤를 조심해!"
주술사를 정리한 칼 일행이 케로스를 받치며 보조를 이루자, 전투가 팽팽하게 흘러갔다.
케로스와 3성 암살자 다섯이 정예 기사 셋을 정신없이 몰아붙였다.
저주의 여파인지, 기사들은 방어만 신경 쓰며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
"내가 없어도 괜찮겠지?"
"네. 충분합니다."
"너 괜찮아? 몰골이 죽기 직전인데?"
"조금 전까지 그랬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내가 손을 내밀자, 칼은 품에서 단검을 건넸다. 평범한 단검이 아니었다.
릴리의 주술이 들어간 주술 단검.
나와 칼은 단검을 들고 한 방향으로 움직였다.
남은 시간 2분 남짓.
릴리를 바라보니, 입술을 꽉 깨문 채 힘겨워하는 모습이 보였다.
5성, 4성급 실력자들의 기운을 억누르는 저주 주술이다. 매개체가 있어도 오래 유지하기 힘들 것이다.
'여기까지 계획대로 흘러갔다.'
이제 남은 건 목표 사냥이다.
나와 칼은 주술 단검을 움켜쥔 채 은밀히 리옹 마트레인에게 향했다.
콰아앙―!!
거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리옹이 숨겨운 힘을 꺼내기 시작했다.
* * *
"…크억!"
얼어붙은 검날이 깨지며 얼음 결정으로 화했다.
록터는 충격에 새하얗게 변한 대지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 앞으로는 부러진 검 자루들이 뒹굴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검은 한 자루뿐.
록터는 마지막 남은 검에 기대어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쿨럭!"
피를 한 사발 토하니 속이 편해졌다.
손끝에 감각이 없다.
팔다리, 얼굴, 몸통에 베인 수많은 상처. 피부가 얼어붙어 핏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기운으로 냉기를 밀어내고 있지만, 점차 몸이 굳어 둔해졌고, 모든 감각이 얼어붙었다.
움직일 때마다 얼어붙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다.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록터는 리옹에게 달렸다.
지금 리옹도 다급한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카앙―!
"빌어먹을 놈!"
"크아아아!"
록터는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며 리옹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주 범위에서 벗어나려는 리옹은 록터의 끈질긴 추격에 발이 묶였다.
사실 리옹은 이날을 줄곧 기다렸다.
자신이 와일리와 록터를 넘어 토바른 최고의 기사로 불리길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곳을 벗어날 생각뿐이었다.
광역 저주가 펼쳐진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변에 아군이 보이지 않았다.
카장!
"...!"
투명한 방패에 부딪힌 록터의 검이 결국 부러졌다.
마지막 남은 검.
리옹은 벼락처럼 록터의 가슴에 서리검을 찔러넣었다.
어깨에 박힌 서리검.
록터는 서리검을 양손으로 붙잡고 버텼다. 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얼어붙었다.
록터를 죽일 수 있는 기회.
리옹은 다급한 상황은 잊고 피식 웃었다.
"멍청한 놈."
"…그 눈빛, 방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순간,
바닥에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리옹은 몸을 틀고 방패로 뒤를 막았다.
카앙―!
불꽃이 튀며 단검이 튀어 올랐다.
투척 단검.
앞으로 암살자 놈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그에게 시선을 준 찰나의 순간,
푹―
"...?"
옆구리를 비집고 들어온 단검 한 자루가 눈에 들어왔다.
언제?
고개를 돌린 순간, 익숙한 얼굴, 알렉스 마르샤가 일그러진 얼굴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끄, 시발, 잡았다."
다섯 번째 격발!
순간 리옹의 몸에 박힌 단검이 울음을 터트리더니 바닥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저주가 단검에 몰려든다.
저주 중첩 현상.
리옹은 몸을 비틀거렸다.
갑자기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호흡조차 힘들어 검조차 쥘 힘이 없다.
리옹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서리검을 놓쳤다.
록터가 뒤에서 서리검을 잡고 자신을 겨눴다. 알렉스가 자신을 끌어안고, 눈앞의 암살자는 목을 노리며 몸을 날렸다.
최악의 상황.
순간 주군의 지시가 떠올랐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리옹은 품에서 하나의 물건을 움켜잡았다.
마탑 연합이 건넨 마력 광역 폭탄 테레모어.
딸칵―
그중 하나가 모두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73화 주도권 싸움 (12)
푹―
캉―!
내 귀로 두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목을 노리던 칼의 단검은 투명한 방패에 막혔고, 록터가 찌른 서리검은 리옹의 등을 관통했다.
잔뜩 일그러진 리옹의 얼굴.
치명상이다.
리옹을 끝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판단했다.
그런데,
투웅―!
"...!"
눈앞에 떠오른 새하얀 구체를 본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아니, 설마 했다.
마탑 연합이 저 물건을 카멜에게 건넸다는 것이 이해가 안 갔거든.
하지만,
삑. 삑. 삑. 삑.
"…시발!!!"
구체 겉면에서 붉은 점이 타이머처럼 깜빡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거점이나 성문 파괴가 주목적인 마력 광역 폭탄.
죽음의 섬광이라 부리는 '테레모어'가 맞았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리옹이 날 내려다봤다.
고통스런 표정과 달리 놈의 눈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죽는 것은 너희뿐이다."
리옹이 주먹을 움켜쥔 순간, 투명한 방패가 종잇장처럼 깨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쩌저저저적―!
"…큭!"
"무, 뭐야!?"
리옹의 육체에 변화가 생겼다. 푸른 아지랑이가 훅 퍼지더니 지독한 한기가 휘몰아쳤다.
박힌 서리검과 함께 리옹의 육체가 얼음 조각처럼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록터는 신음을 흘리며 검자루에서 손을 뗐고, 나도 얼어붙는 감각에 다급히 리옹의 허리에서 팔을 떼고 물러났다. 물론,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퍽―
"쿠, 쿨럭!"
리옹의 심장에 정확히 주먹을 박아넣었다. 피를 토하는 리옹의 머리를 재차 노렸는데,
콰작―
"…큭!"
주먹을 움켜쥐며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4성 기사의 머리통을 날린 주먹인데, 이번엔 내 주먹이 부서진 것 같았다.
그 옆에서 칼이 단검을 수 차례 찌르고 있는데, 강철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말도 안 되는 강도.
어느새 푸른 피부로 변한 리옹은 두 눈을 감은 채 동상처럼 굳어버렸다.
피조차 흘러나오지 않는 모습.
난 욕설을 내뱉었다.
"일체화…."
네메시스 얼음 방패의 희생 능력.
방패 일체화가 분명했다.
주인의 육체에 절대 방어를 부여하는 사기적인 기술. 대가로 아티팩트가 소멸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설마 이것까지 생각하고 테레모어를 사용한 건가? 학살자가 언질을 준 것이 분명했다.
삐삑― 삐삑―
깜빡임과 소리가 점점 더 빨라진다.
마음이 다급해졌다.
남은 격발 횟수는 세 번.
만약을 대비해 아껴놔야 했지만, 한 번 더 울리는 삑― 소리에 난 주저 없이 양 손을 뻗으며 격발을 터트렸다.
콰아아앙―!!
"...!"
"아아아악!"
바깥으로 벼락처럼 쏟아지는 내 신형과 함께 록터와 칼도 딸려 날아왔다.
칼은 머리털이 잡혀 내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딴 거 살필 상황이 아니다. 난 둘을 큰 바위 뒤로 내던졌다.
"최대한 좁고 깊게 땅을 파! 폭탄이 터질 거야! 어서!"
두서없는 외침.
둘은 그제야 정체 모를 구체를 떠올렸고, 내 다급한 표정을 보곤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이대로 둘을 데리고 도망치면 테레모어의 폭발 범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내겐 이들 말고 지켜야 할 동료들이 더 있었다.
난 바위 꼭대기에 선 릴리에게 몸을 날렸다. 동시에 케로스와 일행에게도 신호를 보냈다.
"모여!! 당장!!!!"
카아아아아―!
검은 불을 토해낸 케로스가 적과 거리를 벌린 뒤 일행과 함께 내 쪽으로 질주해왔다.
물러났던 적들도 힘겹게 뒤따라왔다.
그들의 목적은 우리를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리옹이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리옹을 옮기려고 시도했는데, 저주의 영향 때문인지 4성 셋이 힘을 끙끙 써도 리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력도 다했는지, 움직임도 굼뜨다.
삐삐삑― 삐삐삑―
저 셋은 죽음 확정이었다.
난 릴리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순간 릴리의 두 손에 걸려 있던 도네콜린트의 목걸이가 먼지처럼 흩어지며 사라졌다.
강력한 주술이 강제로 풀린 탓에 릴리는 신음을 흘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입에선 핏물이 울컥 흘러나왔다.
나중에 한 소리 듣겠는데?
난 그녀를 품에 안고는 그대로 바위 뒤편으로 몸을 날렸다.
바닥에 착지하자 도착한 케로스가 작은 시바견이 되어 내게 이빨을 들이밀었다. 릴리를 해코지한 것 때문에 그러는 것 같았다.
"멍―!"
"시끄러!"
난 녀석의 뒷덜미를 잡고 구멍으로 집어 던졌다. 볼링공처럼 잘도 날아간다.
짧은 시간이지만, 록터와 칼이 판 구덩이는 제법 깊었다. 케로스를 시작으로 다급한 분위기를 읽은 일행들이 하나둘 구덩이로 몸을 날렸다.
"…위험해."
품에 안긴 릴리의 입에서 나직이 경고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며 난 쓰게 웃었다. 마녀의 직감이란 참으로 무섭다. 이래서는 남편 될 사람이 바람도 못 피우겠는데?
"괜찮아요."
내가 릴리를 안고 구덩이 밑으로 몸을 날린 순간이었다.
[―――――――――――――――――――――!]
거대한 바위 뒤편에서 새하얀 섬광이 터져 나왔다.
섬광이 모든 것을 빨아들였다.
그리고 진공처럼 찰나의 순간 고요해졌다.
드드드드드드―
뒤이어 대지가 흔들리며 비명을 토해냈다. 그리고 섬광이 빨아들인 모든 것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쿠우우우우우웅―!
파괴의 기운이 담긴 빛이 주변을 덮치며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큭!"
구멍 전체가 드드드― 흔들린다.
후폭풍이 불어닥치며 밝았던 세상이 순간 컴컴해졌다.
은폐물로 삼았던 거대한 바위가 파편 덩어리가 되어 산산조각 날아가고,
"...큭!"
구덩이 밑으로 지독한 열기가 거세게 불어닥쳤다.
뜨겁다.
난 구덩이 가장 위쪽에 몸을 펴고 열기를 최대한 틀어막았다.
전부 다 막을 순 없지만, 치명적인 기운은 받아낼 수 있었다.
후폭풍의 잔재가 내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살이 익어가는 고통.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졌다.
일행들이 날 올려다보며 뭐라 다급히 외치고 있지만, 세상이 흔들리며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결국,
"끄아아아아악!"
난 비명을 내지르며 고통을 버텨 냈다.
세상이 나와 함께 비명을 질러대는 것 같다.
얼마나 흘렀을까.
"아, 아서!"
입 모양만 뻐끔거리던 일행의 외침이 내 귀로 시끄럽게 들려온 순간, 시야가 흐려졌다.
"…시발."
의식이 날아갔다.
* * *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올 만큼 큰 폭발입니다.]
"...."
[테레모어입니다.]
덜컹거리는 마차.
카멜이 창가를 열고 손을 흔들자 이동이 잠시 멈췄다. 그는 마차에서 나와 바깥 공기를 잠시 쐬었다.
렌구아가 테레모어 폭발 소식을 알려왔다. 블라이어 방향을 바라봤지만, 이곳에선 폭발의 잔재가 보이지 않았다.
테레모어 폭발.
리옹이 마력 폭탄을 사용한 것이 분명했다. 순간 죽음까지 몰렸다는 건데, 대체 놓친 부분이 뭘까?
릴리 베이스?
아니, 달빛이 아닌 대낮에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주술은 한정적이다.
록터는 리옹의 상대가 아니고 파수꾼은 마탑 아티팩트로 무장한 친위대로 가볍게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마병 3천이나 있는 상황.
주력의 전력이 훨씬 압도한다.
근데, 왜 진 거지?
"알렉스 마르샤."
자신이 자세히 모르는 이는 그놈뿐이다.
회귀 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놈.
'그'의 대리자.
하지만 반년 전 1성에 불과했던 비루한 암살자 놈이 강해지면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에토르 일 외에는 제대로 풀리는 게 없군.'
이유를 알기 위해선 리옹이 필요하다.
고민하던 카멜은 주술사를 부른 뒤 통신구에 대고 지시를 내렸다.
"테레모어가 폭발한 장소로 당장 출발해라. 리옹을 찾아 보호해."
[…네? 아, 네.]
리옹을 보호하라.
주군은 마치 리옹이 살아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리옹을 확보한 후부턴 내가 도착할 때까지 대기해. 섣불리 움직이지 마라."
이미 두 개의 주력 병력이 놈들에게 당한 상태다. 렌구아까지 당한다면 주도권이 아니라 자신의 목까지 내놓아야 할지도 몰랐다.
지시를 끝낸 카멜은 다시 마차에 탔다.
헌트.
그놈들을 향해 끓어오르던 분노가 바람을 쐬니 다소 가라앉았다. 감정을 다스리고 표출하지 않은 이유는 마차에 동승한 인물 때문이었다.
마주 보는 사내가 자신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 눈깔, 마음에 안 든다.
보통이라면 눈깔을 파버렸겠지만, 운명의 아케인은 섣불리 건드릴 수 없었다. 카멜이 유일하게 신경 쓰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리옹 경이 살아있습니까?"
"그럴 겁니다."
"테레모어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니 흥미롭군요. 어찌 그럴 수 있습니까?"
궁금한 것이 있으면 눈치 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짜증 났지만,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조건이었기에 카멜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메시스의 얼음 방패.
회귀 전, 테레모어 앞에 놓인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리옹이 썼던 능력이었다.
'다만 살아있는 것과 써먹을 수 있는 건 또 다르지.'
아무리 절대 방어라도 테레모어에 직격으로 노출됐다면 정상적인 상태는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다신 검을 들지 못하는 신세로 전락했으니 말이다.
그땐 쓸모가 다해 가차 없이 버렸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리옹이 없으면 자신의 안위는 바람 앞의 촛불이란 것을 죽음 통해 알게 됐으니까.
리옹을 살리려면 결국 '마법사 집단'과 손을 잡아야 했다.
'되도록 힘을 갖춘 뒤 인연을 맺으려고 했는데.'
피할 수 없는 인연이기에 최대한 만남을 늦추려고 했지만,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더는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 * *
마차가 블라이어를 지척에 두고 멈춰 섰다. 카멜은 불타버린 성과 통곡의 언덕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보고를 듣던 것과 직접 보는 건 확실히 달랐다.
기분이 더러웠다.
막사가 세워지고 렌구아가 찾아와 예를 표했다.
"리옹은?"
"…그게."
"데려와라."
잠시 후, 전신이 새하얀 천으로 덮인 사내가 들것에 실려 왔다.
천을 들친 카멜은 눈을 감고는 다시 천을 덮었다.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상태.
리옹 마트레인이 딱 그랬다.
"상태는?"
"전신 화상은 테레모어에 휩쓸린 흔적인데, 치명상은 등에 박혀 있던 서리검과 심장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검을 다시 들긴 힘들 것 같습니다.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상태입니다."
"서리검은?"
"따로 챙겨놨습니다."
"됐다. 숨만 붙여놔라. 해결책은 내가 찾아보지."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해결책이란 말에 큰 기대를 표하지 않았다. 이건 성자가 와도 살리기 힘든 상처였기 때문이다.
카멜은 리옹의 치료는 잠시 미뤄뒀다.
당장 눈앞의 일부터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합류한 병력이 있나?"
"에토르 기병 3천은 무사합니다. 그리고 그중 일부가 성안을 살피러 갔다가 의외의 인물을 데려왔습니다."
"누구지?"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자신을 블랙마켓 지부장이라 소개했습니다."
호리호리한 신형.
가면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카멜은 한눈에 지부장이 여인이란 것을 눈치챘다. 서로 필요에 의해 연락을 주고받던 사이였지만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카멜에겐 지부장이 누구이건 상관이 없었다.
중요한 건 지부장이 가진 정보.
"연락 두절은 어찌 된 거지?"
"릴리 베이스, 그녀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가 노린 건 정확히 누구였지?"
이에 지부장은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목표가 블랙마켓인지, 주술사인지에 따라 오르도르 숲의 태도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무척 민감한 질문이지만, 지부장은 카멜이 바라는 답을 알고 있었다.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중요한 건 릴리의 공격에 지부가 사라졌다는 겁니다. 블랙마켓은 피해를 받은 것에 대해선 책임을 꼭 묻습니다."
"만족스런 대답이군."
잘하면 블랙마켓도 이번 일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멜은 메마른 미소로 지부장과 눈을 마주쳤다.
지부장의 눈에는 카멜의 얼굴이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매혹의 문양.
어느 순간부터 지부장의 눈이 풀리더니 카멜의 질문에 술술 답을 하기 시작했다.
블랙마켓 지부장은 현재 이곳 소식에 가장 정보가 밝은 인물이다.
성안 소식.
블라이어 주변 소식.
흘러가는 상황을 모두 들은 카멜은 턱을 매만지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렌구아."
"네."
"테레모어 한 구를 챙기고 광산으로 갈 준비를 해라."
헌트 놈들이 수많은 이들을 끌고 광산으로 향한 이유.
분명 '통로'와 관련 있다.
잘하면 눈엣가시 같던 놈들을 모조리 제거할 기회가 올 것 같았다.
174화 탈출
꿈을 꾸었다.
처음으로 소설 속 풍경이 아닌 현실 세상이었다.
학교, 회사, 그리고 집.
인생을 준비하고, 실전에 뛰어들고, 일생을 보내던 그때 말이다.
뭘 하든 안 풀리는 시기였다.
시험을 봐도, 면접을 봐도 불합격.
푼돈 좀 벌려고 투자하면 잃기 일쑤였고, 궁핍하니 친구와 연인 관계도 엉망이었다.
알바, 막노동, 불합리한 대우.
뭐든 약자로서 참아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그래서 소설을 보며 나름 현실을 잊으려고 했는지 모른다.
특히, 악당에게서 살아가는 법이 그랬다.
죽음이 일상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상상하다 보면 현재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에 위로받곤 했으니까.
물론, 그 감정도 번듯한 회사원이 되고, 삶이 평탄해지면서 변했다.
가끔 소설 속 세상에서 살아가도 나쁘지 않겠단 망상이 들었다.
과거 쓰라림의 경험이 추억으로 무뎌질 때쯤, 평온히 흘러가던 인생이 너무 지루했거든.
근데 지금은 그 쓰라림조차 미치도록 그리웠다.
시발, 이 빌어먹을 세계에서 벗어나 현실로 돌아가고 싶다.
'꿈 맞네.'
상상 속의 그림일까?
학살자가 내 심장을 짓누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죽여버리겠다.]
입을 쩍 벌리며 다가온다.
"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허우적거렸다.
오싹한 현실, 꿈에서 깨어났다.
거친 숨을 몰아쉰 것도 잠시, 가슴이 무거워 고개를 드니 날 아니꼽게 내려다보는 케로스가 있었다.
나를 깨물 듯이 입을 벌리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곤 멈칫한 상태.
아니, 왜 내 가슴을 깔고 앉아 있어?
이 녀석 때문에 그 악몽을 꾼 게 틀림이 없다.
"날 죽이겠다고 한 게 너냐?"
"그릉!"
표정을 보니 진짜인 것 같은데?
나 때문에 그 개고생을 했으니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녀석이 본모습으로 상대 진영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았더라면 리옹에게 집중할 수 없었을 테니까.
목덜미를 움켜잡고 녀석의 몸을 살폈는데 상처투성이다.
새끼에 불과한데, 너무 빡세게 굴렸나? 아니, 마수니까 강하게 키우는 게 맞을지도.
"약속한 대로 고기 파티를 열어줄게."
어느새 내가 준 고기에 중독된 케로스였다.
이러다가 개 한 마리 분양받는 거 아니야?
혀를 날름거리는 케로스를 보며 잡생각을 하는 사이,
"괜찮나?"
록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가 어딥니까?"
"광산과 가까운 숲 근처다."
날 잠시 살핀 그가 먹을 것을 건넸다.
작은 공터, 화톳불이 중앙에 피어올랐고, 일행들은 각자 자리를 잡고 쉬고 있었다.
먹을 것을 보니 허기졌다.
난 받아든 육포를 입에 넣었다.
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배를 채우는 데 집중했다.
록터도 일행도 식사하는 날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서의 끔찍한 뒤태.
처음에 그 상처를 봤을 땐 죽은 줄 알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새살이 돋고 상처가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괴물 같은 재생력.
다만, 모두가 재생력에 놀라기보단 아서가 의식을 차려서 살았다는 표정이었다.
'다행이다.'
아서 클레이튼.
그가 없으니 항해 도중 나침판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알게 모르게 모두 그의 판단에 의지하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항해를 진두지휘하는 확실한 선장이었다.
"칼은요?"
"불안하다며 정찰을 나갔다."
"정찰이라… 위기 감별사의 감이니 좋은 일은 아니겠네요."
아마 칼이 나타난다면 뭔가 일이 터진 상태일 게 분명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대가 의식을 잃은 상태라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리옹은요?"
"애매하다."
"애매? 무슨 의미입니까?"
"주변에 제 모습을 갖춘 건 놈뿐이었다."
폭발의 여진이 멈춘 순간, 일행은 아서를 업고 바깥으로 나왔다.
가장 먼저 확인한 것은 리옹 마트레인의 생사.
함께 있던 부관들도 잿가루처럼 사라졌는데, 리옹은 살아있는 것처럼 그을린 것 빼곤 멀쩡했다.
마무리하려고 했지만, 록터의 오라 소드에도 생채기 하나 낼 수 없었고, 뒤늦게 기병들이 몰려오면서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우린 광산으로 가는 중이었다. 그 상황에 칼이 위기감을 느끼고 블라이어 쪽을 살피기 위해 자리를 잠시 비웠다. 우린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정찰 나간 지 얼마나 됐습니까?"
"오래되지 않았다."
깜깜한 밤을 보니, 반나절 정도 지난 것 같았다.
이 시기면 학살자가 도착했을 것이다.
놈의 다음 선택은 뭘까?
고민도 잠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릴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안 보이나?"
"…네?"
록터의 시선을 따라가니, 바로 옆에 덮인 망토가 보였다. 망토를 치우니 잠결에 꼼지락거리는 릴리가 있었다.
볼을 톡톡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
머리가 땅에 닿았으니 끝난 건가?
깨우기 힘들겠지?
"그녀는 괜찮습니까?"
"배고프다며 이것저것 먹고 방금 잠들었다."
"큰 부상은 없는 것 같군요."
"큰 부상은 그대뿐이다. 괜찮나?"
"주먹 빼곤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오른쪽 주먹 뼈가 아작나서 아직도 뻐근했다.
리옹의 머리를 부수려다가 실패한 것인데, 절대 방어로 보호받던 리옹이라면 테레모어의 여파에도 살아남았으리라 판단했다.
"리옹은 살아있을 겁니다."
"우리에겐 위기가 되겠군."
"아뇨. 당장은 괜찮습니다. 목숨만 겨우 붙었을 테니까."
비슷한 상황에서 살아남았기에 이번에도 숨은 붙어 있을 것이다.
대신 불구가 되겠지.
하지만 회귀한 카멜이라면 불구가 된 리옹을 포기하지 않고 더 강력하게 만들 것이다. 놈은 그 방법을 이미 알고 있을 테니까.
"그와 싸워보니 어떻습니까?"
"...."
록터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정만 봐도 허탈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노력이 부정당한 느낌이겠지.
노력도 중요하지만, 나아갈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에 깨달았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나머지 길은 내가 제시해줄 수 있으니까.
"광산으로 이동합니다."
"칼이 오지 않았다."
"칼이 도착한 뒤엔 대비가 늦습니다. 광산 쪽 상황을 살피고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카멜을 상대할 땐 보고 대응하면 늦는다.
대응 방식으론 절대 상대할 수 없는 놈이니, 무조건 먼저 움직여야 했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휴식을 취하던 칼 일행도 따라 일어났다.
치열한 전투였을 텐데, 다섯 모두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았다.
난 다섯 모두를 이곳에 두고 칼을 기다리게 했다.
"칼이 돌아오면 렌구아 쪽 병력 상황을 파악해 달라고 전해주세요. 만약 칼이 그럴 여유 따윈 없다고 말한다면...."
난 잠시 고민하곤 입을 열었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광산 쪽으로 달리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슬슬 몸을 푸는 일행을 뒤로한 채 난 릴리를 둘러업고 광산으로 향했다.
내 뒤로 록터와 케로스가 따랐다.
* * *
블라이어 영지에서 광산까지 거리는 수레를 끌고 하루 정도 걸린다.
수레 없이 이동하면 더욱 빠르게 오를 수 있고, 그만큼 산길이 잘 닦였다는 뜻이기도 했다.
"엄청 죽어 나갔겠네."
오르는 산길이 내 눈엔 시체 밭으로 보였다.
땅을 뒤엎고, 숲을 없애고, 바위 더미를 퍼 나르는 노역이 반년 가까이 강제로 이뤄졌다. 끌려 온 이들 중 몇이나 살아남았을까.
악착같이 생존했다고 해도 남은 건 광산 노역에 끌려갈 뿐이니, 남겨진 이들에겐 짙은 절망감뿐이었을 것이다.
죽기 전까진 끝나지 않은 악의 구렁텅이.
그 상황에서 구원이 이뤄졌다.
광산 분위기는 어찌 흘러가고 있을까.
곧 있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코오― 코오―
횃불 하나에 기대어 오르는 어두컴컴한 신길이다.
등 위에선 릴리의 코 고는 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
"곧 도착할 거다."
록터는 앞장서서 날 안내했다. 이곳에서 수 개월간 노역을 한 덕에 그는 이곳 지리에 익숙했다.
난 록터의 등을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록터 펠리스를 표적으로 신명 사냥꾼을 각성했다.
의식을 잃었다.
시간도 반나절 이상 흘렀다.
신명 사냥꾼(표적 – 록터 펠리스)
그런데도 각성 상태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
'단시간에 실패로 이어지진 않나 보네.'
실패 조건이나 제한 시간이 분명 존재할 텐데, 물어볼 상대가 없다는 게 아쉬웠다.
오르도르 숲에 가면 알아볼 방법이 있으려나?
장로 메데이아를 만나보고 싶은데,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몸 상태를 살피며 남은 격발 수를 떠올렸다.
"세 발인가?"
격발을 다 소진하면 잠력이 바닥난다.
그때부턴 육체가 급격히 무너지기 때문에 레토가 강제 회복에 들어갔다.
즉 또 의식이 날아갈 수 있다.
되도록 사용을 자제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 한 발이다.]
"…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내 임의대로 잠력을 끌어다 썼다. 지금 네가 정신을 차린 것도, 고통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것도, 회복에 잠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아…一."
[내 자의적 판단이 신경 쓰인다면 말해라.]
"아닙니다. 잘하셨습니다."
어쩐지 상처 회복이 빠르다고 했다.
딱 한 발이라니, 사용하지 말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레토의 판단은 정확했다.
현 상황에 내가 의식을 잃고 있었다면 기껏 유리하게 가져간 주도권 싸움이 단박에 뒤집힐 수 있었다.
카멜을 상대할 자는 현재 헌트에서 자신뿐이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으니 방심하면 안 된다.
"저기다."
산길을 뒤덮은 무성한 숲이 끝나고 탁 트인 공터가 펼쳐졌다.
그 끝자락에 세워진 가파른 절벽, 그 아래 깊숙이 파여 있는 거대한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학살자 카멜에게 막대한 부를 선물한 금광이다. 반대로 영지민에게 절망과 고통을 안겨준 장소.
블라이어 광산이었다.
우리가 광산으로 다가가니, 횃불들이 빠르게 접근했다.
"누구… 로, 록터님!"
날카로운 외침.
하지만 이내 록터의 얼굴을 알아보곤 횃불을 든 이들이 무기를 집어넣고 우르르 다가왔다.
늙은 귀족, 하인즈의 병사들로 보였다.
광산 입구에 경계를 서고 있던 모양.
예상대로 광산을 뒤엎는 데 성공하고, 노역하던 이들을 구한 것 같았다.
우리는 병사의 안내를 받아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
주변에 널브러진 시체들이 보인다.
블라이어 병사 정복.
대부분 광산을 감시하던 카멜의 병사들이었다.
잠시 후, 긴 터널 끝에 드넓은 공간이 펼쳐졌다.
"그래도 공간이 부족하군."
록터는 나직이 신음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엄청난 인파가 우글우글 모여 병사들의 인도를 받고 있었다. 광산에 뚫린 여럿의 통로 중 한 군데에 잔뜩 몰려 더는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
뭐지?
설마 '통로'를 찾지 못한 건가?
그 모습을 심각하게 바라보고 있는데, 하인즈가 다급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 오셨습니까?"
"어찌 된 겁니까? 통로는 찾았습니다."
"예, 통로는 찾았습니다. …일단 따라오시죠."
하인즈가 바삐 움직이며 인파가 몰린 장소로 다가갔다.
하인즈가 등장하자, 몰린 인파가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우리는 하인즈의 안내를 받으며 빠르게 이동했다.
통로는 무척 길었고, 그 통로에서 대기 중인 사람들도 끝없이 눈에 띄었다.
마치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하인즈의 보고가 들려왔다.
"통로에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지만, 일행분의 도움으로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통로 반대편을 확인했습니까?"
"네. 황량한 대지, 그리고 주변에 끝없이 늘어진 숲이 자리하고 있더군요."
반대편 통로에 펼쳐진 풍경.
소설 속 내용 그대로였다.
펼쳐진 숲은 오르도르 숲 북쪽 외곽이었다.
그리고 황량한 대지는,
'2지역의 경계.'
1지역 토바른 지역 너머의 장소.
챕터 2의 메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장소.
마법사들의 땅, '헬 그라임(Hell grime)'과 이어진 갈림길이었다.
175화 탈출(2)
1지역 토바른과 2지역 헬 그라임의 경계가 무너진 시기는 마녀들의 정착지, 오르도르 숲이 불타 없어지면서부터였다.
대(大)결계 '유령의 숲'이 두 지역의 교류를 완벽히 차단했기 때문인데, 블라이어의 경우엔 금광 개발 중 '통로'가 발견됐기에 상황이 달랐다.
회귀자 카멜은 '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고, 그는 통로를 이용해 블랙마켓과 마법사 집단의 힘을 빌려 엄청난 속도로 힘을 축적해 나갔다.
"근데, 그 시기가 아직 초반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네."
폐쇄된 갱도.
그 안쪽까지 대기 중인 인파를 가로질러 도착했을 때, 난 '통로'를 발견하곤 헛웃음을 흘렀다.
암벽 한쪽이 매몰된 작은 틈새가 보였다.
그 공간 속으로 몸을 잔뜩 웅크린 사람들이 한 명씩 통과하고 있었다.
비좁다.
나중엔 큰 마차까지 통과할 정도로 확장이 이뤄지는 곳인데, 초반에 발견된 통로는 사람 한 명이 겨우 통과할 정도였다.
이건 생각지 못했는데?
하인즈가 다급한 표정으로 우릴 이곳에 데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통로를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이다.
"하인즈님, 함께한 이들이 얼마나 됩니까?"
"1만이 조금 넘습니다."
"…1만? 그렇게나 많습니까?"
"광산에 노역 중인 이가 예상보다 많았습니다. 그들 전부 이번 동행에 합류하다 보니...."
그 외에 동행한 이들을 들어보니, 1만은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단순히 노역과 제물로 잡혀갔던 이들만 수천은 될 것이다.
그 가족들과 하인즈를 따르는 세력.
노예로 잡혀 록터에게 구원받은 코룬강 사람들까지 합쳐진다면 오히려 적은 편에 속했다.
분위기에 휩쓸릴 법도 한데, 대부분 영지에 남은 것을 선택한 것이다. 아직은 록터의 존재감이 카멜의 공포를 이기지 못한 듯 보였다.
"남은 이는 얼마나 됩니까?"
현재까지 절반 정도가 통로로 빠져나간 상태라고 했는데, 그래도 통로 바깥으로 전부를 내보내려면 밤새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통로 자체 길이도 상당했으니까.
결국, 문제는 시간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정도 남았을까.
"불행 중 다행인가?"
"그러게요. 다 죽을 뻔했습니다."
록터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쓰게 웃었다.
지금껏 동조하는 영지민이 적다며 아쉬움을 표했는데, 록터가 카멜 이상의 카리스마로 영지민들을 모조리 광산으로 이끌었다면 다 같이 발목이 잡혀서 오도가도 못 할 뻔했다.
오히려 눈앞의 머릿수가 적어서 안도감이 들었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간사했다.
"하인즈님."
움직이는 속도를 더 높여야 했다.
내가 조곤조곤 귓속말로 지시를 내리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돌아다녔다.
잠시 후, 병사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소리쳤다.
"통로만 통과하면 자유가 기다리고 있다! 더는 핍박을 받지도,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
"으아아아아아!"
"록터님이 우리에게 살길을 제시해 줄 것이다. 누구도 우릴 건드릴 수 없다!"
"록터! 록터!"
"서둘러라! 어서!"
광산 안이라서 그런지 함성이 더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광산 전체가 록터의 이름으로 가득 찼다.
록터가 눈앞에 나타나고, 확신을 던져주자 불안했던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움직임에 힘이 넘친다.
당연히 통로의 이동 속도도 빨라졌다.
"고개 들어요. 영웅이 얼굴값을 해야지 뭐하는 짓입니까?"
"건들지 마라."
"부끄럽습니까?"
"네 녀석이 부끄럽다."
미소 짓고 손을 흔들어주는 게 어때서?
나와 달리 함성 한가운데에 선 록터는 고개를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추앙받는 것에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
차차 익숙해져야 할 것이다.
나와 칼은 태생이 암살자다.
우리 진형 쪽에 기사 영웅 하나쯤은 있어도 되잖아?
"릴리를 통로 건너편으로 보내야겠습니다."
"잠든 것 아니었나?"
"티는 안내도 큰 주술을 강제로 끊어버렸으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닐 겁니다. 더는 부탁하기 힘듭니다."
내 의견이라기보단 날 쫄래쫄래 따라오는 케로스의 부탁이었다.
녀석이 릴리의 상태를 알려왔다.
레토가 있어 케로스와 대화가 통해서 좋았는데, 귀여운 맛이 떨어져서 살짝 아쉽단 말이지.
인파에 섞인 아이들을 본 순간부터 몸이 잔뜩 굳은 채 내 곁에 착 달라붙어 따라오는데, 더 놔뒀다간 내 종아리를 꽉 물 것 같았다.
난 릴리를 하인즈가 소개한 사람에게 조심스레 건넸다.
다부진 체격.
병사들을 지휘하던 윗사람 중 하나로 기억한다.
"실력 있는 기사입니다. 아내분은 제 기사가 목숨을 걸고 지킬 테니 안심하십시오."
…아내?
이 노망난 귀족 노친네를 봤나.
이리 눈치가 없으니 카멜의 눈 밖에 나지.
내가 직접 업고 챙기다 보니 릴리에 대한 오해가 생겼다.
그런데 바로 오해를 풀 순 없었다.
"하. 하. 하."
저 여인이 공포의 마녀 릴리 베이스고 곁에서 꼬리를 살랑 흔드는 강아지가 지옥 파수꾼 케르베로스라고 기사에게 알려줄 수가 없었거든.
그저 사라지는 기사 등에 대고 웃으면서 손을 흔들어 줄 수밖에 없었다.
바깥세상에 헌트 일행이 출구를 지키고 있다고 했으니 릴리를 보면 알아서 잘 챙길 것이다.
난 하인즈를 데리고 입구 방향으로 이동했다.
"광산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 있습니까?"
"노역장이라고 노역한 이들을 대표해서 챙기는 이가 있습니다."
"살아있습니까?"
"나쁜 이는 아니고 주로 선의를 베풀고 다친 이들을 챙기던 인물입니다. 노역한 이들 사이에서 평이 좋습니다. 지금도 우리 일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당장 불러주십시오."
하인즈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와 록터는 인파가 붐비는 드넓은 장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한쪽이 소란스러웠다.
그곳으로 다가가니, 칼이 도착해 있었다. 다급히 우릴 찾던 칼이 날 발견하곤 소리 질렀다.
"야! 큰일...!"
후다닥 달려와 앞에서 입을 열려는 것을 내가 틀어막았다. 난 칼의 주둥이를 콱 잡곤 구석으로 끌고 갔다.
"상황이 얼마나 심각합니까?"
"응?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알았어?"
"남겨둔 일행과 함께 왔으니까요. 렌구아 쪽 정보를 알아볼 여유도 없던 겁니까?"
"아니, 그쪽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똘똘 뭉쳐서 움직이고 있으니까."
광산으로 향하는 영지 북쪽 성문에서 일련의 병력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했다.
화려한 마차 한 대.
마차를 지키는 이들은 다수의 주술사 부대였다.
마차 앞엔 핏빛 갑주로 전신이 무장된 2~3백 사이의 병력이 선두를 이끌었다.
전부 얼굴을 가렸다고 했는데, 그들을 본 순간 칼이 지독한 위기감을 느꼈다고 했으니 보통 놈들은 아닐 것이다.
"혹시 그들과 붙어봤습니까?"
"빌어먹을… 붙기 전에 튀었다."
칼은 욕설을 흘리곤 한곳을 바라봤다. 내가 일행을 발견한 곳이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셋밖에 없었다. 아니, 두 명이 일행 둘을 업고 있었다.
난 표정을 굳히곤 일행에게 다가갔다.
"어찌 된 겁니까?"
"이동 속도가 너무 빨랐어. 발을 묶으려고 두 번 정도 치고 빠졌다."
"주술에 당했습니까?"
"솔직히 뭐에 당한 지 모르겠다. 갑자기 머리를 붙잡고 쓰러졌거든."
흑주술이 맞을 거다.
3성에 이른 일행 둘을 동시에 무력화시킬 정도라면 렌구아의 작품이었다.
둘을 내 앞에 눕히곤 그들의 손목을 동시에 잡았다. 그리곤 성력을 천천히 불어넣었다. 새하얗게 질린 표정이 서서히 혈색을 되찾자 칼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력을 확인해보진 못했지만, 내 직감이 제대로 된 기사라 말하고 있어.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야."
"렌구아가 그들을 이끌고 있습니까?"
"지팡이를 든 늙은 주술사. 렌구아 필드가 맞을 거야. 주술사 부대도 그 앞에선 허리를 숙였으니까."
"마차에 카멜이 타 있습니까?"
"확인하지 못했다."
"...."
"일단 나가자. 여기 상황을 보니 딱 봐도 시간이 필요한 것 같은데 맞지?"
"네."
"그럼 방법을 찾아야 해. 놈들의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다."
칼이 가져온 정보는 도움은 됐지만 완벽하지 않았다.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해.'
상대의 전력을 한 번 떠올리며 고민하는 사이, 하인즈가 같은 연배로 보이는 노인을 데려왔다.
광산 노역을 하던 이들의 정신적 지주를 하던 노역장이었다. 노인은 날 보곤 허리를 넙죽 숙였다.
눈치 없는 하인즈와 달리 눈치가 빠른 노인 같았다.
"혹시 폭탄 같은 거 있습니까?"
"…폭탄이라면?"
"광산 내부의 단단한 암벽을 파괴할 때 쓰던 주술 도구 같은 겁니다. 주술사들이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카멜이라면 주술사들의 둥지를 이용해 폭발 도구를 제작했을 것이다.
금광을 빠르게 개발하려면 폭발물은 필수였으니까.
역시나,
"아, 있습니다! 주술사들이 보따리로 가져온 물건이 있는데...."
"가져오십시오. 당장."
노역장이 사람 몇을 데리고 사라진 사이, 난 하인즈에게 기절한 일행을 통로 반대쪽으로 옮겨달라 부탁했다.
잠시 후, 노역장이 무거운 자루를 들고 나타났다.
자루 안을 확인했는데, 붉은 단검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략 스무 자루 정도?
검자루 중앙에 손톱만 한 보석이 모두 박혀 있었는데, 흘러나오는 기운이 끈적하고 불결했다.
'광대 단검(Clown Dagger)?'
상대에게 자폭 공격으로 사용하던 주술 무기 같은데, 설마 광산 개발용이 초기 버전이었나?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땅에 박은 다음에 여기 보석을 누르면 터지는데… 사용 방법에 문제가 있습니다."
"설마 격발 장치로 사람을 썼습니까?"
"…네."
아, 진짜 흑주술사 새끼들은 굴비 엮듯 엮어서 분쇄기에 갈아버려야 한다.
망할 새끼들.
"충격을 줘도 터지긴 합니다만."
"그 정도면 됐습니다. 폭발 범위는요?"
난 보따리에 든 물건을 챙기며 몇 가지를 묻고는 일행을 데리고 광산을 나왔다.
잠시 후, 난 광산 입구에서 멈춰 섰다. 턱을 매만지며 말없이 서 있으니 칼이 물었다.
"뭔데?"
"아무래도 한 명은 여기서 지켜야 할 것 같습니다."
"입구를?"
"네. 상대의 목적이 정확히 뭔지 알 수 없거든요."
사실 가장 우려한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다.
죽음의 섬광, 테레모어.
카멜 손에 그 빌어먹을 광역 폭탄이 또 있다면 떼죽음을 면치 못할 테니까. 특히 광산 내부에서 터지면 통로도 사라진다.
퇴로가 막히면 남은 건 죽음뿐.
접근 자체를 사전에 막아야 했다.
좁은 입구를 지키는 데 특화된 인물.
수백 명이 돌진해와도 버티는 배짱. 그라면 입구를 쉽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록터가 지키세요."
"알겠다."
"무기는...."
"칼이 리옹과 붙었던 장소에서 쓸만한 물건들을 주워 왔다. 이건 얼마나 쓸지 모르겠군."
록터가 꺼내든 검을 보며 난 이채를 띠었다.
마력검 베가(Bega).
5성인 록터의 그릇을 담기엔 부족하지만, 이번 전투에선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검 외에 실드 반지도 하나 챙긴 것 같았다.
"둘 다 사용할 수 있습니까?"
"가능하다. 테스트 해봤으니까."
시간이 없었던 것일까. 마탑 물건이라 조심스러웠던 것일까.
저주가 걸려 있지 않았다.
'내 손에 죽은 부관은 두 명인데....'
내가 말없이 시선을 보내니, 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멋들어지게 돌렸다.
자신이 한 일이 자랑스러운 모양인데, 반응을 보니 하나밖에 챙기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구도 들여보내선 안 됩니다."
"걱정하지 마라."
떠나기 전 광대 단검 다섯 자루 정도를 입구 주변에 박아놨다.
칼과 일행 셋.
난 이들을 데리고 산길을 타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잡이는 나한테 맡겨라."
칼이 진지한 눈빛으로 앞장섰다.
자신과 수천의 목숨이 걸린 임무라서 그런지 나름 비장한 분위기를 풍겼다.
근데,
"...."
코앞에서 힘차게 내달리는 칼.
광산 안에선 어두운 횃불 시야라 발견하지 못했는데, 밤하늘 환한 달빛 아래에 있으니 칼의 뒤통수가 훤히 드러났다.
허전한 가운데 머리.
정수리가 다 뽑혔다.
[머리털을 잡고 격발을 사용하면 저렇게 되는군. 처음 알았다.]
일행을 바라보니 시선을 돌리는 게 느껴졌다.
웃으면 안 된다.
지금은 아주 급박한 상황이었으니까.
'시발, 시험받는 건가?'
난 이를 지그시 깨물었다.
"위가 밝아서 다행이야."
칼이 턱을 들곤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결국 난 눈을 내리깔았다.
176화 탈출 (3)
숲을 달리며 생각했다.
챕터 I의 영웅, 록터 팰리스.
광산에 갇힌 그가 탈출하기 전까지 토바른 지역은 키메라 떼에게 받은 피해를 재정비하는 휴식기였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갔네.'
록터의 탈출을 시발점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록터를 중심으로 펼쳐진 코룬강 전투부터 반격이 시작된 사냥꾼 토벌, 그 결과 카멜의 영주성과 통곡의 언덕이 불타면서 상황이 지금까지 쭉 이어졌다.
'학살자와 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부딪쳤지.'
죽을 뻔한 위기와 도박 같은 판단도 있었다.
'그리고 모두 승리했다.'
운이 따랐다고 생각했다.
결국엔 주도권마저 뺏어오면서 반(反) 카멜 연합군의 기반이 될 세력도 흡수하는 분위기였으니까.
이젠 이 긴 여정의 마침표만 남았다.
무사히 광산을 탈출하는 일 말이다.
'이번 위기만 무사히 넘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는데 말이지.'
이종의 도시 베네타가 건재한 상황이니, 반(反) 카멜 연합군을 일으켜 힘을 합치면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에토르의 몰락을 막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미 학살자의 핵심 요충지를 파괴했다.
그중 하나가 통곡의 언덕으로, 이 장소는 흑주술의 제물과 재료가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밭이었다.
언덕을 모조리 태우고, 비밀 거점마저 무너트렸으니 주술사들의 둥지는 한동안 힘을 쓰지 못할 게 분명했다.
'남은 건 광산인데....'
광산은 카멜의 돈줄을 책임지는 금광이자, 타지역의 세력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광산마저 무너트린다면 카멜의 팔다리가 잘려 나가는 치명타인 셈.
이 피해는 회귀자라도 쉽사리 복구하지 못할 것이다.
'당장 무너트리고 튀는 그림이어야 하는데... 역시 쉽게 흘러가질 않네.'
난 묵직한 가방을 들치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노역장이 건넨 광대 단검.
계획대로 대피가 성공리에 끝났다면 난 광대 단검을 모두 사용해 광산을 무너트렸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로 광산에 대피가 늦어지면서 상황이 꼬였다.
지금은 추격대를 상대로 시간을 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시야가 좁은 야밤, 엄폐물이 많은 산속이라....'
광산은 산중 깊은 장소에 자리한 만큼, 공사로 다듬어진 길 빼곤 사방이 암벽과 거친 숲으로 이뤄져 있었다.
마차가 포함되어 있다면 다른 길로는 이동할 수 없으니, 결국 이쪽 길로 루트를 잡을 것이다.
칼 또한 광산 입구부터 숲이 아닌 잘 닦인 길을 따라 움직였고, 이대로 가면 적과 마주칠 상황이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난 주변을 살피며 인기척을 살폈다.
제법 오랜 시간 내려온 느낌이라, 칼에게 상황을 물었다.
"놈들이 어디쯤 있습니까?"
"위치상 중간쯤에 있을 거야."
"중간이라, 생각보다 빠르네요."
"우리가 암습해서 그 정도야. 우리 쪽 전력을 경계하는 눈치였거든."
"경계요?"
난 잠시 고민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카멜이 우리 쪽 피해가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 같네요."
"놈들이 어찌 알고? 큰 폭발에 모든 흔적이 다 지워졌을 텐데? 설마 리옹이 정신 차린 건가?"
"리옹보단 아케인일 확률이 높습니다. 능력 좋은 점쟁이거든요."
아케인을 통해 죽은 신명의 주인을 파악했다면 우리 쪽 신명의 주인들이 모두 무사하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이다.
피해가 없는 우리 쪽과 달리 상대 쪽은 리옹이라는 큰 전력을 잃었다. 우리 상태를 파악할 수 없으니 조심스레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 우리도 리옹의 생사를 작은 마녀한테 물어보면 됐잖아. 걔도 능력 좋다며?"
"물어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내가 깨어난 이후로 릴리는 줄곧 잠들어 있었거든.
나중에 물어볼 생각이었다.
"마스터, 적입니다."
그때 함께 움직이던 일행이 한 곳을 가리켰다.
중턱에 멈춰서서 아래쪽을 살폈다.
멀리 떨어진 거리.
내리막과 이어진 나무숲 사이로 빛들이 움직이는 게 잡혔다.
횃불이다.
대규모로 보이는 횃불 무리가 길을 따라 오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근데 이상하지 않냐?"
"뭐가 말입니까?"
"전력과 위치를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움직이잖아."
"가장 변수가 없는 방법이기도 하죠. 저렇게 뭉쳐 있으면 우리 쪽에선 쉽사리 덤비질 못하니까요."
"속도가 빨라. 저리 놔두면 대피 전에 광산에 도착할 거야."
확실히 가장 까다로운 방법으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여기서 시작하죠."
경사가 없는 평탄한 길목을 작업 장소로 결정하고 난 큰 나무들이 솟구친 방향을 가리켰다.
"나무들을 쓰러트리자고? 어느 세월에?"
"단검으로요."
"이걸로?"
칼이 자신의 단검을 들며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묻자, 난 고개를 흔들며 가방에서 핏빛 단검을 꺼내 들었다.
"비슷한데 다른 거요."
광대 단검이었다.
콰아아앙-!!!
어두운 숲에 큰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우지끈- 소리와 함께 거대한 나무가 하나둘 쓰러지며 잘 닦인 산길을 가로막았다.
고요 속에 폭발이라, 횃불을 든 무리도 멀리서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칼은 피어오르는 짙은 먼지에 손사래를 치며 아래쪽을 살폈다.
불안감이 엿보였다.
"너무 대놓고 움직이는 거 아니야?"
"반응을 보려고 하는 겁니다."
"모조리 달려들면 어쩌려고?"
"그건 힘들 겁니다."
나무 기둥이 겹겹이 쓰러져 길을 막은 현장.
이 정도면 보통 지나갈 엄두도 못 내지만, 상대가 카멜이라 솔직히 귀찮은 방해물 정도에 불과했다.
"여길 돌파하는 건 일도 아니야."
"하지만 마차를 잠시 세울 순 있죠. 직감에 걸리는 게 있습니까?"
"아직은."
큰 폭발이 앞에 터졌는데도 이렇다 할 움직임이 없었다.
헌트는 소수지만 리옹도 쓰러트린 최정예였다.
그 표적이 카멜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신중한 녀석이 병력을 분산할 리 없다. 확실히 놈의 입장에선 똘똘 뭉쳐서 빠르게 치고 올라가는 게 최선이긴 한데....
'너무 예상대로야.'
카멜 블레이저가 내 예상대로 움직인다?
그게 이상했다.
확인이 필요했다.
칼에게 남은 광대 단검들이 담긴 가방을 건넸다.
"상대가 돌파할 경우를 대비해서 뒤쪽에 단검들을 전부 심어두세요. 신호를 보내면 바로 터트리시고요."
"전부 다?"
"네."
칼은 고개를 끄덕이곤 일행 둘과 함께 쓰러진 나뭇더미 뒤로 넘어갔다.
그사이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산길을 피해 거친 숲으로 몸을 날렸다.
산길을 우회해서 적들에게 은밀히 접근했다. 거리를 두고 무성한 나뭇가지 위에 몸을 숨긴 채 상대를 살폈다.
잠시 후, 멈춰 섰던 적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00미터 거리, 옅은 횃불 사이로 비추는 전력이 보인다.
칼의 보고대로다.
핏빛 갑주로 전신 무장한 수백의 기사들.
그 뒤로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따랐다.
마차를 호위하는 전력은 다수의 주술사 부대였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다.
저리 뭉쳐서 움직이면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내 눈동자는 이질적인 기운을 쫓았다.
신명 사냥꾼의 능력, 개안(開眼).
잠시 후 내 시선은 수백의 갑주들 중심에서 멈췄다.
검붉은 오오라가 핏빛 갑주 사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지팡이를 든 익숙한 얼굴의 노인.
둥지의 마스터, 렌구아가 그들과 함께 섞여서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거리가 부족해.'
오오라 주변을 떠다니는 신명 문자를 확인하려면 더 접근해야 했다.
천천히 그리고 최대한 기척을 죽이며 나무를 타고 앞으로 접근했다.
80미터.
70미터.
순간, 렌구아의 고개가 돌아갔다.
난 나무 위에 웅크린 채 숨죽였다.
잠시 후, 고개를 갸웃거린 렌구아가 고개를 돌리고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한숨을 내쉬며 놈을 바라봤다.
더 이상 접근이 어려울 것 같았다.
대신 거리는 확보했다.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광기 통제]
[광기 전염]
[광기 폭발]
렌구아의 신명 목록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광기라....'
소설에서 본 적 없는 신명 목록이다.
다만, 한가지.
렌구아가 든 지팡이의 정체는 파악할 수 있었다.
'블러드 오크 지팡이.'
아무래도 저 고대 지팡이를 통해 렌구아가 신명의 주인으로 각성한 것 같았다.
에토르가 광인들로 인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렌구아의 작품인 것 같았다.
'확실히 파워 인플레이션이 사기야.'
첫 만남에서 자신을 고문했을 때만 해도 렌구아는 약간 특출난 주술사에 불과했다.
하지만 현재 렌구아는 영지 하나를 뒤집는 능력을 지녔다.
록터를 밀어붙이던 리옹만 봐도 알 수 있듯 그것이 바로 회귀자 카멜의 무서운 점이었다.
놈의 회귀 정보는 최측근의 말도 안 되는 성장 속도를 만들어낸다.
"...."
핏빛 갑주의 기사들을 바라본 것도 잠시, 내 시선은 후미를 따라오는 화려한 마차에 닿았다.
신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짙고 강렬하다.
'한 명이 아니야.'
정확한 머릿수를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뭉친 기운을 봤을 때 최소 2명 이상이 마차에 타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카멜과 와일리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뭐지?"
마차가 가까이 지나가는 순간, 난 눈을 한 차례 비비곤 다시 살폈다.
개안을 통해 마차에서 흘러나오는 오오라를 살폈는데, 신명 문자들이 뿌연 빛에 가려져 읽기가 어려웠다.
마치 모자이크를 한 것처럼 인식되는 느낌.
뭔가가 내 능력을 방해하고 있었다.
"...."
더 가까이 접근해야 할까?
아니면....
끼이이익-
난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최대 출력이 실린 관통의 화살이 마차를 겨누었다.
70미터.
카멜을 죽일 수 있을까?
가능성을 점치곤 고개를 흔들며 활을 내려놨다.
주술사 부대에 섞여 있는 다수의 실더가 보였다. 기회는 한 번뿐이다. 확실하지 않으면 시도하면 안 된다.
저긴 벌집이다.
어설프게 건들면 오히려 악수가 될 수 있었다. 내 1차 목표는 일단 시간을 버는 것이었으니까.
카멜의 마차가 지나가고, 텅 빈 장소에 난 잠시 대기했다.
뒤에 따라오는 전력이 더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후속 병력이 없다라….'
난 빠르게 칼이 있는 장소로 복귀했다.
내가 도착하자 숨어 있던 칼이 화들짝 놀라더니 날 다그쳤다.
"갑자기 없어져서 깜짝 놀랐잖아!"
"놈들이 오기 전에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었습니다."
"확인할 거?"
"후속 병력이 없더군요. 에토르 기마병 3천이 보이지 않습니다."
"영지에 남긴 거 아니야? 지금 영지 치안이 엉망진창이잖아."
"타 영지의 병력을 성안에 두는 성주가 있습니까? 3천이나 되는 대규모 병력을요?"
"말하고 싶은 게 뭔데?"
"기마병이 올 수 있는 길은 이곳뿐입니다. 이 중요한 전투에 그들을 데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확신이 들더군요."
난 숲 한쪽을 바라봤다.
무너진 나뭇더미 너머로 핏빛 갑주를 걸친 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렌구아가 이끄는 기사단.
"에토르 기사단 같습니다."
정확히는 렌구아의 통제당하는 광인 부대가 정확했다.
"저들이?"
"네. 저들의 정체를 들킬 수 있으니 에토르 기마병들을 다른 장소로 뺀 겁니다. 카멜 자신이 에토르를 무너트린 범인이란 사실을 들킬 수 있으니까요."
카멜이 아직 에토르를 완벽히 자신의 것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저들만 막으면 된다는 거잖아."
"쉬워 보입니까?"
"지랄하네. 어떡할 거야?"
난 뒤이어 모습을 드러내는 마차를 응시하며 활을 들어 올렸다.
카멜이 타 있는 것이 확실한데, 이상하게 찝찝함이 느껴졌다.
마차 안을 확인해봐야 한다.
"일단 찔러보죠."
카멜은 몰라도 마차는 부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177화 탈출 (4)
"이런 하찮은...."
쓰러진 나뭇더미가 길을 막고 있자, 렌구아는 지팡이를 흔들었다.
잠시 후, 핏빛 갑주를 걸친 이들이 앞으로 나서며 등에 걸린 무기들을 꺼내 들었다.
거대한 도끼, 망치, 할버드 같은 둔기류였다.
콰작! 콰자작-!
기사들은 가로막은 나무들을 가차 없이 베어 넘겼다. 휘두르는 동작이 맞지 않은 옷처럼 다소 어색해 보였지만 무식한 힘으로 단점을 보완하는 모습이었다.
막힌 길을 뚫는 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사들은 열린 길로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서진 나무 잔해가 깔린 너저분한 길.
그들 일부가 무너진 방해물을 지나쳐 그 앞으로 발을 내디뎠을 때, 나무 위에서 단검 한 자루가 투척 됐다.
콰작-
단검이 잔재 속 한 장소에 박힌 순간,
검붉은 빛이 터져 나왔다.
콰콰콰콰콰콰쾅-!!!
"...!"
연쇄적인 폭발.
광대 단검들이 폭발하며 주변 땅이 푹 꺼졌다.
일부 기사들은 폭발에 휩쓸려 날아가고, 길목은 새까만 먼지로 뒤덮였다.
어둠과 먼지, 시야가 좁은 틈을 노리고 칼이 두 번째 행동에 나섰다.
"으아아아아!!!"
칼은 고함을 내지르며 일행과 함께 마차 우측으로 달려갔다.
수는 고작 셋.
하지만 4성과 3성으로 이뤄진 실력자들이다. 칼 일행이 매섭게 기운을 터트리며 기세를 드러내자, 주술사 부대가 발 빠르게 반응하며 자리를 잡고 방어 자세를 잡았다.
모든 시선이 칼에게 쏠린 그 순간,
후미에 있던 주술사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뒤, 뒤!!!!!"
"막아!!!"
정반대인, 좌측 숲에서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거대한 화살이 마차를 노렸다.
실더들이 뒤늦게 방패를 잡고 몸을 날렸지만, 화살을 막은 건 한 명뿐이었다.
콰작-
"끄아아아악!"
막은 실더의 팔이 방패와 함께 날아가고, 화살은 그대로 마차를 비스듬히 직격했다.
우지끈-
마차에 큰 구멍이 뚫리며 마차가 밑으로 내려앉았다. 마차 바퀴 아래가 깔끔하게 꿰뚫렸다.
투투투퉁-!
흡혈의 고리에서 다섯 발의 붉은 화살이 부서진 마차로 재차 날아갔다.
콰쾅! 콰콰콰쾅-!
마차 주변에서 폭발하는 화살 세례.
난 앞으로 내달리며 시위를 연속해서 당겼고, 작은 폭발이 주변을 무수히 때리며 마차를 휩쓸었다.
마차는 완전히 파괴되어 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잠시 후, 짙은 먼지 사이로 붉은 막이 은은하게 빛나자 난 짧게 혀를 차며 한 걸음 물러났다.
렌구아가 어느새 카멜을 보호한 채 지팡이를 내밀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당혹감이 물들었는데,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그 뒤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음습한 방어막 사이로 메마른 눈동자가 날 노려보고 있었다.
카멜 블레이저.
놈의 얼굴에 피가 묻어 있었다.
카멜은 찢긴 볼을 스윽 닦고는 피식 웃었다. 그리곤 날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내 앞에서 무릎 꿇고 빌던 암살자 따위에게 상처를 입다니 재미있어."
"난 재미없어. 빌어먹을 새끼야."
카멜이 상처를 입었다는 것에 나도 놀랐다.
마차를 부수는 정도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눈은 빠르게 카멜 주변을 훑었다.
카멜의 신명 목록은 기회가 왔을 때 필히 확인해야 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정체까지 드러내며 접근했는데, 여전히 신명 문자들을 읽을 수 없었다.
왜지?
마차에 타고 있던 인물들을 확인했다.
앞쪽에 카멜.
그리고 뒤쪽엔,
'아케인?'
새하얀 백발의 호감형 인간이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운명의 아케인.
의외의 인물이 마차에 타고 있었다.
전투가 벌어지는 장소에 카멜과 왜 동행한 거지?
아케인이 내 능력을 방해하고 있는 듯 보였다. 신명에 관해선 그 누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리고 아케인 뒤쪽으로 투구를 둘러쓴 기사가 호위를 하듯 서 있었다.
처음부터 마차에는 두 명이 아니라 셋이 타고 있었다.
와일리로 생각했던 기사를 살핀 순간 멈칫했다.
오오라도 신명의 문자도 없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신명의 주인이 아니다.
저 기사는 와일리가 아니었다.
설마 카멜이 다친 것이....
혼란도 잠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된다.]
레토의 경고에 난 아케인의 귀걸이를 떠올리곤 황급히 의식을 닫았다.
넬라에게 배우고, 릴리에게 확인한 신명 정보를 차단하기 위한 방어 행동에 들어간 것이다.
날 바라보던 아케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 신명 목록을 확인했을까?
릴리 말로는 내 정보는 허락 없이 절대 볼 수 없다고 했다.
'꿍꿍이가 뭐지?'
신명 정보를 차단하고 빠르게 머리를 두 번 쓰다듬었다.
칼에게 보내는 것으로 이유 불문 광산으로 복귀하라는 신호였다.
카멜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와일리가 자리에 없었다.
5성 기사가 위치 파악이 안 된다.
칼 일행을 광산으로 보낸 이유였다.
대기 중이던 칼 일행이 다급히 모습을 감춘 것도 잠시, 홀로 남게 되자 압박감이 심해졌다.
이거… 빡쎈데?
촤르르륵-!
"...!"
붉은 줄기가 사방으로 튀어나와 나를 옥좼다. 주술사들이 기습적으로 선수를 친 것인데, 황금빛 문양을 터트리자 줄기는 시들고 주술사들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다만, 황금빛은 렌구아의 지팡이 앞에 막혀 더는 나아가지 못했다.
역시나 마스터는 다른 건가?
"네놈의 뇌를 그때 파버렸어야 했는데."
"늙어서 까먹었냐? 쫄아서 시도도 못 한 주제에."
"…이놈. 갈가리 찢어주마."
렌구아가 이를 갈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저 지팡이 상당히 거슬린다.
주변을 둘러보니, 핏빛 기사들이 빠르게 날 포위하는 움직임이었다.
번쩍-
황금빛을 터트리자, 기사들이 움찔하며 물러났다.
본능적인 움직임.
하지만 거짓말처럼 황금빛이 쪼그라들었다.
렌구아를 바라봤다.
놈이 내 문양을 억누르는 게 느껴졌다.
힘겹게 힘 싸움을 벌이며 뒤로 물러났다.
포위당하면 끝이다.
다행인 건 작정하고 튀었을 때 날 잡을 이가 렌구아 뿐인데, 난 그와 상성이 괜찮다는 것이었다.
지금처럼 압박을 버티는 것도 상성 탓이 컸다.
렌구아의 기운은 나와 상극이었으니까.
숲 쪽으로 방향을 틀고 물러나는데 순간, 거짓말처럼 짓누르던 힘이 사라지고 기사들의 포위망도 풀렸다.
뭐지?
상대의 의도에 잠시 의문을 가졌을 때,
"알렉스 마르샤."
"...?"
"내가 제안 하나 하지."
카멜이 날 불러 세웠다.
그가 나와 대화하길 원한다? 이 상황에서?
동시에 허공으로 떠오르는 괴상한 생명체들.
파다다닥- 파다닥-
코 형태를 지닌 주먹 크기의 날개 달린 괴물들을 주술사들이 사방에 날리고 있었다.
'스멜로우(Smellow).'
특정 냄새를 쫓는 추적 몬스터로, 주로 마녀의 흔적을 찾을 때 사용하곤 했다.
저 스멜로우들은 이 주변에 릴리가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킁킁이들을 뿌리다니, 의심이 많네?"
"릴리 베이스를 무시하는 발언이군. 그녀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
"그녀도 헌트의 일원인가?"
그 뻣뻣한 카멜이 질문으로 시간을 끄는 모습에 난 쓰게 웃었다.
'…빌어먹을, 뒤치기 당했네.'
카멜은 신명과 관련된 내 능력을 전혀 모른다.
내가 와일리의 존재를 파악한 것도, 이곳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모를 것이다.
소설 내용을 알고 있기에 오직 나만 유추할 수 있는 내용.
한 마디로 와일리는 카멜의 숨겨둔 패였다.
'와일리가 진짜다.'
숨겨둔 패를 지금 꺼내 들었다.
자신을 미끼로 시선을 끌고 숨겨둔 패로 적의 심장을 찌른다.
내가 아니었다면 그 누구도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짜 소름 끼치는 새끼네.'
이번에 확실히 알았다.
서로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놈과 싸우면 무조건 내가 진다는 사실을.
당장 광산으로 움직여야 하나?
고민도 잠시 난 자리에 멈춰 서곤 카멜을 바로 보고 섰다.
'록터를 믿을 수밖에.'
와일리를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존재.
상대가 카멜이라 록터를 입구에 놔둔 것이 신의 한 수가 됐다.
그라면 와일리를 막아설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버티느냐였다.
록터는 리옹과의 전투로 몸 상태가 망가진 상태였다.
와일리의 상태가 최상이라면 오래 버티기 힘들다. 수중에 마력검 베가와 실드 반지가 있으니 칼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길 기도할 수밖에.
'가장 중요한 건 결국 시간이니까.'
지금은 움직이면 안 된다.
난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달이 기우는 것을 보며 대략적인 시간을 계산했다.
아직 약속된 시간이 안 됐다.
내가 섣불리 움직이면 카멜도 즉각 판단을 내리고 반응을 보일 것이다.
지금 광산으로 놈들을 끌고 가면 최악의 타이밍이다.
"제안? 흥미로운데? 어디 말해봐."
때아닌 학살자 놈과 잡담할 시간이 생길 줄 몰랐다.
카멜과 마찬가지로 나도 시간이 필요했다.
내 반응에 카멜도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네 뜻대로 된 것 같지?'
동상이몽(同床異夢)인 상황이었다.
* * *
"얼마나 남았지?"
"이제 3백 명 정도 남았습니다."
록터의 물음에 입구에 나온 하인즈가 흘러가는 상황을 보고 했다.
좁디좁은 통로였지만 질서 있게 한 명씩 보내다 보니 어느덧 남은 수가 얼마 되지 않았다.
슬슬 중요 인물들이 통로로 모여야 할 시기라 하인즈는 입구로 나왔다.
통로 너머 새로운 장소에서 무리를 이끌 수 있는 이는 무려 록터라는 사내가 대장이라 부르는 젊은 청년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나운 눈매가 인상적인 인물.
그가 없으면 지금까지 한 일들은 모두 물거품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름은 모르기에 하인즈는 그 사내를 그분이라 표현했다.
"그분은...."
"곧 올 것이다. 건너편에 모인 사람들이 불안해할 테니, 그대도 얼른 넘어가라."
"전 록터님과 함께 넘어가겠습니...."
그 순간, 록터가 하인즈의 어깨를 움켜잡고는 거칠게 뒤로 뺐다.
마력검 베가를 뽑아 든 록터는 칼을 겨누고 굳은 표정으로 하인즈에게 소리쳤다.
"남은 이들을 얼른 통과시켜! 그대도 당장 넘어가라!"
"로, 록터님!"
"서둘러!"
록터의 다급한 호통에 하인즈는 불길함을 느끼곤 광산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입구 주변을 둘러싼 우거진 숲 그림자.
록터는 싸늘한 바람을 느꼈다.
잠시 후, 어둠으로 물든 공간에서 한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익숙한 얼굴이다.
록터는 신음을 흘렸다.
이곳에서 절대 싸우고 싶지 않은 상대.
"…와일리 그라임스."
친하진 않았지만, 한때 서로 의식했던 라이벌 사이였다.
그의 이름을 나직이 불렀지만, 와일리의 표정은 인형처럼 변화가 없었다.
그저 검을 뽑아 들고 오라 소드를 소환했다. 살의도 감정이 담긴 기세도 없이 눈앞의 적을 죽이기 위해 달려오는 모습.
그런 와일리의 모습에 록터의 눈가엔 슬픔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그대는 이미 죽었구나."
마력검 베가의 검날이 번뜩이는 순간, 록터의 기운이 일시적으로 타오르며 기운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오라 소드를 겨눈 채 록터는 와일리를 살폈다.
한 손엔 검을, 다른 한 손엔 작은 구체를 들고 있다.
새하얀 구체.
아서가 알려준 이름이 떠올랐다.
죽음의 섬광, 테레모어.
록터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저게 광산 안쪽에서 터졌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질 수 없다.
록터는 와일리의 심장에 검 끝을 겨누었다.
"편안한 안식을."
이를 악문 록터는 검을 그대로 휘둘렀다.
178화 탈출 (5)
"…저, 주군 피가."
재차 볼을 닦은 카멜은 짙은 핏자국을 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턱을 타고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파편에 볼이 깊게 베인 모양이었다.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신경 쓰이는군."
"…송구합니다."
렌구아가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카멜의 상처에 당황하던 렌구아의 반응을 보니, 마차에 탄 기사는 그가 통제하던 기사였던 것 같았다.
'아깝네.'
와일리가 없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이곳에서 승부를 봤을 것이다.
카멜만 죽이면....
놈만 죽으면 토바른 지역의 모든 갈등이 깔끔히 해결된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기회가 올까?'
눈치를 보고 있는데, 잠자코 있던 아케인이 손수건으로 카멜의 볼을 지혈했다. 새하얀 손수건이 카멜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카멜은 코웃음을 치며 손수건을 쳐냈다.
"필요 없다."
그는 주술사를 불러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치료받는 사이, 카멜이 날 응시하며 입을 뗐다.
"네놈에게 두 가지 제안을 하지."
"일단 들어보고."
"록터를 넘겨라."
"처음부터 제안이 형편없네."
"록터를 넘기면 내 영지를 망가트린 죄를 묻지 않고 이대로 물러나겠다. 현상금 100만 골드에 추가로 100만 골드를 더 지급하도록 하지."
"네 말을 어떻게 믿고?"
"공증을 세울 수 있다. 여기 아케인이라면 믿겠나?"
운명의 아케인이라.
신을 받드는 자 중 명성이 가장 뛰어난 자를 공증으로 세운 걸 보니, 저 제안은 진심일 확률이 높았다.
단순히 시간을 끌려고 날 붙잡은 것이 아니었나?
'면죄부에 200만 골드라....'
조건만 보면 눈이 뒤집힐 만한 대가이긴 한데.
"대가가 너무 싼데?"
"뭐라고?"
"톰자엘 자작을 죽인 범인으로 록터가 지목된 상황이잖아. 록터를 제물로 삼으면 블라이어는 물론 에토르까지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데 고작 200만 골드? 2,000만 골드는 줘야지. 내 앞에 2,000만 골드 금괴를 가져오면 생각해보지."
"보기와 달리 까다로운 놈이군."
"내가 '그'의 전달자라는 걸 잊었어?"
"진짜 원하는 게 뭐지?"
"저 늙은이."
내가 렌구아를 가리키자, 렌구아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당장 날 찢어 죽이고 싶은 모양인데, 흑주술사라서 좀 무섭긴 하다.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거든.
"렌구아는 충성스러운 나의 가신이다. 그런 가신을 버리는 군주는 없다."
"그 말 그대로 돌려주지."
"...."
"우린 동료를 버리는 조직이 아니라서."
"첫 번째 제안은 결렬인가? 그럼 두 번째 제안이다."
"두 번째든 세 번째든 록터는 안돼."
"난 네놈을 원한다."
순간 멈칫했다.
이 새끼가 방금 뭐라고 시부렁거린 거냐?
날 원한다고?
그런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니 더 무서웠다.
"…진심이냐?"
"'그'가 네게 뭘 제안했지? 무엇을 제안하든 그 이상으로 대접해주마."
"내 부친이 네놈 손에 죽었어. 원수가 내미는 손을 잡은 이를 패륜아라고 말하지."
"멍청한 소리를 하는군."
"뭐?"
"부친의 죽음? 애초에 부친에게 어떤 감정도 없지 않나?"
"...."
시발, 들켰나?
하여튼 저 통찰력은 대화만으로도 정신적 피로를 유발했다.
주술사를 밀어낸 카멜은 용아의 망토를 흩날리며 앞으로 당당히 나섰다.
무력이 없는 놈인데도 흘러나오는 기세가 주변을 압도한다.
이게 놈이 가진 재능이겠지.
"난 모든 혈육을 죽이고 이 자리에 올랐다."
"...!"
숨겨둔 비밀을 밝힌다.
이 새끼가 지금 무슨 꿍꿍이지.
당혹감으로 마음이 흔들린 순간,
[멍청한 놈, 정신 차려!]
"…큭!"
[의식을 잡아라. 들킨다.]
레토의 경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카멜 몸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온 것을 눈치챘다.
몽환적이고, 달콤한 빛이다.
잠시 놈의 목소리에 빠져들고, 기세에 짓눌렸다.
내겐 [제3의 정신 방벽]이 존재한다.
유혹은 버텨냈겠지만, 레토가 경계한 것은 카멜이 아니라 아케인이었다.
의식으로 가둬둔 신명 목록이 풀릴 뻔했기 때문이다.
카멜과 아케인.
두 놈을 사이에 두니 기가 다 빨리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난 카멜의 장단에 맞춰줬다. 놈의 생각을 읽으려면 지금 대화가 무척 중요할 것 같거든.
"시작은 에토르 성주, 그 이후 세력이 더욱 커진다면 네게 토바른의 왕 자리를 약속하겠다."
"왕...."
"이 제안도 공증을 서 줄 것이다. 난 진심이다."
"수락한다 해도 날 믿고 블라이어 병력을 맡길 수 있겠나? 뒤통수가 가려울 텐데?"
"믿는다."
"날 믿는다고?"
"그 전에 내게 충성의 증표를 바쳐라."
"증표?"
"도미닉의 연구일지."
역시 목적이 있었나?
생체 연구학자 도미닉 후아튼의 연구 일지.
흑주술의 성장을 두 단계나 진보시켰던 광대한 정보가 담긴 인체 지식을 카멜은 원하고 있었다.
근데, 난 그 일지를 베개로 쓰다가 이번 여행 때 배네타에 두고 왔다.
종이책이라 찢어질 것 같아서 푸른 장미 여관에 맡겨놨는데, 잘 있겠지?
"네가 소유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카멜은 나를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내게 다오."
순간 내민 손등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흘러나오던 빛이 더욱 강력해졌다.
정신을 매료시키는 빛.
난 이 빛의 정체를 알고 있다.
'매혹의 문양을 얻었나 보네.'
빛에 오래 노출되면 빛의 주인에게 매료당하며 정신을 빼앗기게 된다.
다만 정신의 벽이 두터운 내겐 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난 빛을 응시하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일지는."
품에 손을 넣자, 얼굴에 진한 미소를 띠며 한 걸음씩 다가오는 카멜.
아케인과 거리를 두자 보이지 않던 놈의 신명 문자가 읽히기 시작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접근한 대가는 달콤했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은 통찰력]
[정신 지배(매혹)]
[종속 지배]
[블라이어의 수장(3)]
개안의 눈동자에 놈의 목록이 박혀 든다.
난 더욱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세 걸음만 더 와라.'
아직도 놈과 거리가 제법 됐다.
하지만 '격발'이라면 놈의 머리를 부수고 도망칠 각이 나온다.
마지막 격발이라 자칫 의식을 잃을 수 있지만, 그 대가가 카멜의 머리라면 시도해볼 만했다.
도망칠 방법도 이미 생각해둔 상태.
속으로 '더더!'를 외치며 완벽한 기회를 노리려는데,
"세뇌가 먹힐 인물이 아니군요."
아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경고에 뭔가를 눈치챈 듯 카멜은 날 노려보며 뒤로 물러났다.
아, 시발. 미끼 다 물었는데.
학살자의 신명 문자가 다시 흐릿해졌다.
역시나 개안을 방해하는 것이 저 뿌연 빛이었나?
아케인의 몸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저 빛은 뭘까?
그가 지닌 오오라와 다른 또 다른 기운이었다.
"꼭두각시 주제에 재주를 부리는군."
"속은 주제에 무슨."
내가 품에서 빈손을 드러내자, 카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빌어먹을 '가호'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나?"
"가호?"
카멜의 '가호'란 단어에 아케인이 반응을 보였다. 그리곤 날 살피곤 대뜸 내게 물었다.
"'그'는 절대자입니까?"
"...."
무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꾹 다물었는데, 속으로는 헛웃음이 나왔다.
절대자라니, 아케인도 헛다리 짚을 때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호'는 절대자만이 내릴 수 있는 권능입니다."
"'그'가 절대자라고?"
"이해하지 못할 사건이 자주 벌어졌다면 의심해볼 만합니다."
"...."
카멜은 '그'와 엮인 사건들을 떠올리며 생각에 빠졌다. 마치, 자신의 앞날을 모두 알고 움직이는 듯한 행동들.
가장 이해가 안 가는 건 알렉스의 성장 속도다.
회귀자인 자신보다 빠르다.
정말 '그'는 절대자일까.
다만, 그러기엔 빈틈도 상당수 존재했다.
"절대자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지?"
"저자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겠죠. 가호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겁니다."
"거짓말?"
카멜과 아케인이 동시에 날 바라봤다.
이거 위기 맞지?
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마, 마스터가 절대자라고?!"
"...."
이미 엎질러진 일이다.
난 그냥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역시, 그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신 것이었어."
"당신의 신명이 보이지 않는군요. '가호' 때문이 아닙니까?"
난 아케인을 바라봤다.
카멜도 상대하기 어려운데, 저놈도 만만찮았다.
신명이 보이지 않는다라.
놈은 내가 신명의 주인인지 아닌지 답하지 않았다.
신명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찔러보는 거다.
"당신, 사기꾼 아니야?"
"...?"
"신을 받드는 자가 내가 신명의 주인인지 아닌지도 파악 못 하나? 당신 날 알아?"
"정확히 안다고는 할 수 없지요."
"난 당신을 알아. 날 죽이려고 크룩스 마스터에게 혀를 놀린 점쟁이잖아."
"...."
생각해보니, 난 처음부터 아케인과 잘 지낼 수 없는 사이였다.
이 몸으로 빙의된 이후 그 모진 고초의 시발점이 바로 저 혓바닥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폭탄 벌레를 삼킨 경험을 떠올리니 이건 뭐 원수나 다름없는 새끼였다.
어차피 적이 될 거 난 막 나가기로 했다.
신명 정보를 알려줄 존재?
내겐 릴리가 있었다.
"시발놈!"
"...."
"그 혓바닥 덕에 이 '활'을 얻었으니 감사를 표하마."
목표했던 시간이 끝났다.
슬슬 물러나서 합류해야 할 시기.
활시위를 쭉 당기자, 방패로 몸을 가린 실더들이 앞을 막고, 렌구아가 뒤쪽에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일촉즉발의 상황.
난 카멜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목표는 토바른의 왕 따위가 아니야. 세계다."
"미친놈이군."
"그러니...."
난 시위를 놓았다.
"더는 내 꿈에 나타나지 마! 미저리 새끼야!"
투광―!
황금빛 투사체가 카멜을 노리고 날아갔다. 성력이 가득 실린 최대 출력의 화살이다.
아케인이 아닌 카멜을 노린 건 실패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스토리 최후까지 살아남은 아케인의 실력은 진짜다. 대신 공개적으로 힘을 드러내지 않은 인물이니 지켜보리라 생각했다.
카지지직―!
화살이 실더의 방패들을 밀어냈다.
고대 방패들이 우그러지며 파괴됐지만, 막히는 분위기였다.
주변을 살핀 렌구아는 눈을 빛내며 외쳤다.
"주변에 아무도 없습니다! 저놈 한 명뿐입니다!"
"놈을 잡아!"
스멜로우를 활용해 이 주변 전체를 살펴본 모양이었다.
카멜의 지시가 떨어진 순간, 머리털이 쭈뼛 섰다.
뭐지?
대기가 붉어지는 듯한 느낌.
렌구아의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기운이 주변 기사들을 자극했다.
동시에 렌구아가 꺼내든 물건은 돌이었다.
섬뜩한 기운이 감도는 돌.
돌이 울음을 터트리듯 흔들리자, 두 눈이 붉어지고 터져 나오는 기사들의 기세가 살 떨릴 지경이었다.
순간,
"광기 폭발!"
"크아아아아악!"
렌구아의 주문을 시작으로 기사들이 잔상을 일며 순식간에 주변을 포위했다.
너무 빠르다.
사방으로 짓쳐들어오는 모습.
위기감이 들었지만, 난 이를 악물곤 침착함을 유지했다.
'어느 정도 예상했거든.'
렌구아의 신명을 확인했을 때 떠오른 방법.
다시 활을 들어 올렸을 때, 카멜은 비웃었고 실더들은 다시 방패를 들어 올렸다.
순간 번뜩이는 황금빛 눈동자.
난 몸을 틀고 붉은 화살로 렌구아를 쐈다. 기사들이 몸을 날리며 화살을 막았지만, 화살은 거짓말처럼 그들을 뚫고 렌구아에 적중했다.
신명 사냥꾼 능력 중 하나.
신명의 화살.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광기 통제]
[광기 전염]
[광기 폭발]
렌구아의 신명에서 하나의 목록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광기 통제]가 목록에서 힘을 잃은 순간,
"무, 뭐야!!?"
"끄아아아악!"
"마, 막아! 주군을 보호해!!!!"
광기에 미친 기사들이 사방으로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주술사 부대와 실더가 삽시간에 밀리며 피를 뿌렸다.
처음으로 카멜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고, 렌구아가 '안돼!'를 피를 토하듯 외치며 지팡이를 흔들었다.
일부 기사들이 통제를 받고 다른 기사들과 뒤엉키기 시작했다.
혼돈의 장소.
통제가 풀린 기사들로 인해 누구도 날 신경 쓰지 못하고 있지만, 오직 한 명.
아케인만이 날 조용히 직시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저 눈빛 마음에 안 든다.
"시발...."
카멜을 노리기 위해 마지막 기회를 잡던 나는 결국 활을 접었다.
격발 횟수가 많았더라면....
아케인의 눈빛도 마음에 걸렸고, 내 목숨이 걸린 일이라 쉽사리 사용할 수 없었다.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이 떠올랐다.
난 숲으로 몸을 날렸다.
179화 탈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