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ereads / COMOSOBREVIVIRAUNVILLANO / Chapter 14 - 130-140

Chapter 14 - 130-140

130화 개 같은 악당 새끼(3)

'눈빛 한번 뜨겁네.'

뒤통수가 아주 따갑다.

등 뒤에서 록터가 노려보는 게 분명했다.

'아, 괜히 록터 앞에서 통신구를 사용했나?'

호감을 얻기 위해 시원하게 카멜을 씹어대는 모습을 보여줬다.

왜 그런 거 있지 않나?

싫어하는 인간을 같이 씹다 보면 금방 친해지는 거.

회사원 시절, 변태 팀장을 몰래 씹으면서 동료들과 금세 친해진 경험이 있어서 시도해 본 건데 융통성 제로인 록터에겐 먹히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니,

"헌트(Hunt)의 알렉스라고?"

오히려 뒤통수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물어보는데 심장이 쫄깃했다.

어차피 들킬 정보라 타이밍을 재고 밝힌 건데, 역시나 헌트에 대해 바로 물어왔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헌트의 돌격 대장으로 만들어놨으니 당연한 건가?

"네. 지금은 알렉스란 가명을 쓰고 있습니다."

"그 소문, 그대가 낸 건가?"

"헌트의 돌격 대장에 관한 거라면 제가 낸 게 맞습니다."

"왜지? 날 이용한 건가?"

당연하지.

그런데 여기서 솔직하게 답을 하면 어떻게 되려나. 꼴통으로 불리는 꽉 막힌 인간이니 한 번 사이가 틀어지면 돌이킬 수 없겠지?

그래서 록터 펠리스 버전으로 핑곗거리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독자라는 사실이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됐다.

입체적으로 상대를 파악할 수 있거든.

진지한 녀석은 진지하게 상대해야 한다.

"전 당신을 이용한 적이 없습니다. 당신을 구하기 위해서 낸 소문입니다."

고개를 돌린 내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진지했다.

"날 구하기 위해서?"

"조금 전 에토르로 향하던데 맞습니까?"

"맞다. 첫 만남에서 그대가 언급했던 장소였으니까."

"에토르에 도착했다면 당신도 칼도 무사하지 못했을 겁니다. 원인을 제공했던 저는 평생 죄책감에 사로잡혔겠죠. 그래서 간절한 마음을 담아 신호를 보냈습니다. 소문을 듣고 다른 선택을 하길 바라면서."

"신호?"

"헌트. 소문을 흘린 베네타로 오라고 말입니다."

"알렉스가 아니라 아서였다면 베네타로 향했을 거다."

"이름을 밝히지 못한 사정이 있습니다. 그저 소문을 들으면 불의를 참지 못하는 당신이 베네타를 찾으리라 생각했습니다. 헛소문을 바로 잡기 위해서 말이죠."

"…그런 뜻이었나?"

그런 뜻이었냐고?

당연히 아니지.

내가 그런 것까지 생각하고 소문을 냈겠니?

하지만 내 눈동자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이 세상에 떨어진 후 연기 실력만 주연급으로 늘어난 것 같았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괜한 소문으로 록터님의 심기만 불편하게 했군요."

"아니다. 내 머리가 부족해서 그대의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신경 써줘서 고맙군."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말 아주 마음에 들었다."

"네?"

"개 같은 악당 새끼."

꽉 막힌 인간이라 전혀 안 통한 줄 알았더니, 록터도 사람이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냥 싫어하는 인간도 아니고 복수로 칼날을 가는 대상인데 오죽했을까.

쌍욕을 더 박을 걸 그랬나?

시선을 마주 보며 피식 웃고 있는데, 통신구에서 귀를 사로잡는 내용이 들려왔다.

카멜이 아닌 처음 듣는 목소리들이었다.

[형, 놈이 숨은 곳을 찾은 것 같아.]

[록터?]

[아니, 새로운 표적. 쥐새끼처럼 숨어 있는데 어떡할까?]

[놈을 특정했어?]

[아니, 양 떼 속에 있어서 특정이 힘든 상황이야. 그냥 다 죽일까?]

[지켜보고 있어. 주인이 주술사들과 합류한 후에 움직이라고 했으니까.]

[천천히 와도 돼.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아직 살아있거든.]

형이란 단어를 듣는 순간 쌍둥이 형제 중 동생인 하우엘을 떠올렸다.

통신구로 편히 대화를 주고받는 위치라면 그들밖에 없었다.

잭과 하우엘 형제.

방금 형제가 주고받은 대화, 진짜일까?

형인 잭이 주술사들과 합류한다고 했는데, 주술사 부대를 말하는 건가? 그들은 에토르 쪽에 몰려 있을 텐데?

거짓으로 치부하기엔 칼을 대놓고 언급한 게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마지막 말이 너무 디테일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이 아직 살아있다니....'

납치해온 여인들이 분명했다.

이딴 걸 거짓 정보로 흘린다고?

마음이 다급해졌다.

"넬라. 더 빨리요!"

땀을 훔치며 한숨을 내쉰 넬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더욱 속도를 높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최선을 다하려는 모습이었다.

역시 꼼수 쓰는 펜리년과 다르다.

"록터, 위험하면 칼이 신호를 보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호각을 분다고 했다."

"호각…."

호각 소리는 아직 들리지 않았다.

그럼 둘 중 하나다.

놈들의 대화가 나를 기만하려는 거짓이거나, 아니면 하우엘에게 노출된 상황에서 칼이 아직 발각당한 사실을 모르는 것 말이다.

만에 하나 상황이 후자 쪽이라면 형인 잭이 도착하기 전에 칼과 합류해야 했다.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 * *

칼 일행이 록터와 떨어져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사냥꾼 무리에 스며드는 것이었다.

사냥꾼 복장으로 위장했어도 소수인 열 명으로 돌아다니는 건 눈에 띄었다.

표적이 그 유명한 록터이다 보니 최소 백 단위로 사냥꾼들이 뭉쳐 다녔기 때문이다.

'전처럼 사냥꾼 무리와 섞여 움직인다면 괜찮아지겠지.'

여럿의 사냥꾼 무리와 섞여 움직인다면 가슴을 옥죄는 이 불안한 감각도 곧 없어지리라 판단했다.

록터의 이동 경로를 잠시 떠올린 칼은 코룬 강 하류를 따라 여러 숲을 돌아다녔다.

최대한 큰 규모의 무리를 찾아다녔고, 이백 단위가 넘은 무리를 발견하자, 자연스레 스며들며 무리에 합류했다.

가장 먼저 사냥꾼들부터 살폈는데, 역시나 100만 골드란 현상금에 무작정 몰려온 어중이떠중이가 대부분이었다.

실력이 떨어질수록 규모를 키우려는 사냥꾼 특성을 이용한 것이라 칼이 딱 원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정보가 없어서 실시간으로 합류하는 사냥꾼들의 정보를 취합해서 움직였기 때문이다.

일행에게 신호를 보내자, 엘튼과 일행이 무리 속으로 흩어져 은밀히 정보를 흘리기 시작했다.

"헌트의 지원군이 나타난 모양이야."

"조금 전 대규모 전투에서 블라이어가 패배해서 수백이 죽었다더군."

"록터가 함정을 파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정보를 흘리자 동요가 일어났다.

처음에는 의심하던 사냥꾼들이 잠시 후 실제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사냥꾼들이 합류하면서 사실을 확인했고, 그때부턴 겁을 집어먹기 시작했다.

역시나, 록터를 쫓던 사냥꾼 중에 지원군 소식을 듣고 사냥을 포기한 이들이 나타났다.

수가 상당했는데, 이백 중 절반에 달하는 수가 뿔뿔이 흩어졌다.

칼 일행은 사냥을 포기하지 않고 에토르로 향하는 무리에 섞여 조용히 이동했다.

그것도 잠시, 칼이 섞인 사냥꾼 무리는 다른 방향에서 나타난 사냥꾼 무리와 합류하며 금세 세를 불렸다.

칼은 일행에게 다시 신호를 보냈고, 똑같은 작업이 은밀하게 반복됐다.

"록터 펠리스만 해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데, 지원군? 난 돌아갈래."

"나도."

무리를 이탈하는 사냥꾼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엘튼과 일행은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마스터를 따라 해오던 작업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사냥꾼들이 물어온 정보를 취합해 현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반대로 거짓 정보를 흘려 주변에 혼란을 주었다.

거짓 작업으로 사냥을 포기한 사냥꾼들만 오백 이상은 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상당한 성과인데,

"...."

"마스터?"

무슨 이유인지, 칼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모든 상황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

엘튼의 의문에 칼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이상한 거 못 느꼈어?"

"네? 이상한 거라면...."

"사냥꾼들의 수가 줄어들지 않아. 보낸 수만큼 계속 흘러들어온다고."

칼은 넓은 시야를 가지고 주변을 둘러봤다.

이동하는 내내 여러 사냥꾼 무리와 섞였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지원군의 정보를 흘려 사냥꾼들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는데, 흩어진 무리에서 다시 새로운 무리와 합류하면 머릿수가 비슷해졌다.

보낸 만큼 다시 이곳으로 새로운 사냥꾼들이 합류한다는 건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왜 이쪽으로 전부 몰리는 것 같지?

게다가 이젠 사냥을 포기하는 이도 눈에 띄게 줄어서 작업이 더는 무의미했다.

'어디서 온 놈들이지?'

새로 합류한 사냥꾼들을 살펴보니 어중이떠중이 같지 않았다.

합류하는 놈들마다 착용한 장비가 꽤나 좋았다.

표적이 에토르로 집중되면서 실력 있는 놈들까지 모조리 몰려든 건가?

'불안감도 여전하고, 계속 뭔가가 거슬려.'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은 풀리기는커녕 시간이 지날수록 증폭됐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며 입술을 깨물 정도로 불안감이 한계에 치닫자 칼은 다급히 일행을 호출했다.

가슴이 떨려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한곳에 머물다간 당할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들었다.

움직여야 했다.

흩어졌던 일행이 하나둘 모이는 사이, 칼은 사냥꾼들 사이에서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됐다.

"저놈들, 그놈들 아니야?"

"맞아. 쌍둥이 형제 밑으로 들어간 녀석들."

"웬만한 실력으론 못 들어간다더니 장비빨 죽이네."

"두 형제가 현상금 분배를 약속하고 모은 사냥꾼들이잖아. 꽤 많이 모였다고 했는데."

"맞아. 저기도 있는데?"

"뭐야, 다 몰려온 거야? 설마 록터가 이 근처에 있나?"

사냥꾼들의 대화를 듣는 순간 칼은 위기감의 정체를 파악했다.

저들은 록터를 얘기했지만, 칼은 잭과 하우엘 형제를 떠올렸다.

형제가 영입한 사냥꾼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건 쌍둥이 형제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었다.

'갑자기 왜 이곳으로?'

불현듯 느껴지는 불안감에 칼이 수신호를 보내자, 다가오던 일행이 속도를 줄였다.

칼은 일행을 살피며 그 주변을 면밀히 관찰했다.

두 형제에게 영입된 사냥꾼 무리 중 일행에게 눈길을 주는 이는 없었다.

괜한 불안감이었나?

"빠져나간다."

엘튼까지 모두 모이자, 칼은 일행을 이끌고 무리 뒤쪽으로 물러났다. 사냥꾼이 현상금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건 의심스러운 행동이 아니었다.

역시나, 물러나는 칼 일행을 보고 붙잡은 이는 없었다.

일부 사냥꾼들이 칼에게 비웃음을 날리며 꺼지라고 조롱할 뿐이었다.

칼 일행은 빠르게 사냥꾼 대열에서 벗어났고, 코룬 강 하류와 이어진 숲으로 파고들었다.

칼은 속도를 높였다.

무리에 섞여 움직이느라 록터와 거리가 많이 벌어졌다.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이런."

칼 일행이 사냥꾼 대열을 벗어나고 잠시 후, 주술사 한 명이 그 근처 숲으로 다급히 달려와 누군가를 찾았다.

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빽빽이 찬 숲 너머에서 여인의 비명과 신음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으니까.

"하우엘님."

"...."

"급한 일입니다."

잠시 후, 여인들의 비명이 뚝 멈췄다.

그리고 숲 사이에서 발가벗은 사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촘촘한 근육으로 이어진 길쭉한 팔과 다리, 얇은 허리가 눈에 띄는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사내는 늘어진 머리카락을 쓸어올리며 짜증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시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놀 때 방해받는 거 알지? 시답지 않은 일이면 이곳에서 형체도 없이 녹여버릴 거야."

"표, 표적이 도망쳤습니다."

주술사는 둥지에서 콧대가 제법 높았지만, 눈앞의 형제들 앞에선 빌빌 기었다.

주군의 총애도 있지만, 주술사조차 학을 뗄 정도로 강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다.

"도망쳐? 표적이 대열에서 빠져나왔다고?"

"그렇습니다."

"사냥개들은?"

"따라붙었습니다."

"아, 그 개새끼는 좀만 더 있다가 도망칠 것이지."

욕설을 내뱉은 하우엘은 숲으로 다시 들어갔다.

잠시 후, 숲에서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끔찍한 비명과 함께 그 주변 숲이 녹물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주술사는 주춤 물러나며 눈앞의 광경에 마른침을 삼켰다.

하우엘을 중심으로 남은 건 녹다가 굳은 작은 뼛조각들과 진물이 흐르는 휑한 대지뿐이었다.

닿은 즉시 삽시간에 녹아버리는 맹독.

하우엘은 나뭇가지에 걸린 옷을 걸치며 주술사에게 턱짓했다.

그 신호에 주술사는 주술 인형에 올라타곤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하우엘은 조용히 따랐다.

그는 칼 바스타인을 떠올렸다.

사냥꾼들 사이에 숨어 있던 표적이 무슨 이유인지 바깥으로 나왔다.

이젠 표적을 특정할 수 있는 상황.

지시 때문에 줄곧 표적에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자신의 취미를 방해받았기 때문일까.

"놈의 얼굴이 궁금하네."

문득 얼굴을 알고 싶어졌다.

그래야 붙잡은 뒤 얼굴을 천천히 녹이며 구경하는 재미가 있을 테니까.

131화 표적

[표적을 미끼로 쓴다.]

하우엘이 칼 바스타인이 숨어든 장소를 파악했음에도 조용히 물러난 건 두 형제의 주인인 카멜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카멜에게 필요한 건 록터 펠리스의 목이지, 칼 바스타인의 목은 쓸모가 없었다. 죽여봤자 큰 이득이 없으니 중요한 조력자로 파악한 이상, 미끼로 사용해 사라진 록터를 찾거나 사냥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귀찮아졌네."

하우엘은 주술 인형의 뒤를 쫓으며 주인이 내린 지시를 떠올렸다.

대상의 기억을 뽑아내는데 특화된 주술사들이 형인 잭과 함께 오는 중이라고 했다.

형과 그 일행이 도착할 때까지 표적을 감시하고 그들에게 나머지를 맡기면 이곳 임무가 끝이 났는데, 표적이 감시 범위에서 벗어나면서 새로운 지시가 떨어진 상태였다.

[록터 펠리스를 찾아갈 수 있으니, 거리를 두고 흔적만 쫓아라.]

비가 멈춘 대지는 흔적이 남기 쉬워 추적이 용이했다. 앞서 사냥개 부대를 먼저 보낸 하우엘은 주술사를 따르며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잠시 후, 울창한 숲에서 주술 인형이 멈춰 섰다. 인기척이 들리자, 하우엘은 고개를 돌려 그곳을 바라봤다.

나무 뒤에 은신 중이던 암살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개 부대가 남긴 연락책인 것 같았다.

급히 알려야 할 특이 사항이 생긴 모양.

"표적이 혼자가 아닙니다."

"칼 바스타인 외에 더 있어? 몇 명인데?"

"발자국만 보면 아홉 정도로 추정됩니다."

"아홉? 제법 많네. 표적의 인상착의는?"

"거리를 두라고 하셔서 아직은… 당장 파악할까요?"

"록터 펠리스의 흔적은?"

"아직입니다."

"그럼, 안 되지. 꼬리로 붙인 얘들이 몇이야?"

"스물다섯입니다."

"뭐? 왜 그것밖에 안 돼?"

"붐(Boom)을 삼킨 이들이 모조리 죽어버리는 바람에...."

"시발! 그 벌레 새끼는 왜 이딴 부작용을 말 안 한 거야!?"

신경질을 내는 하우엘을 보며 암살자는 욕이 나오려는 것을 삼켰다.

인간이 펑- 터지는 게 재밌다면서 주변 이들에게 붐을 삼키게 한 당사자들이 바로 쌍둥이 형제였기 때문이다.

"스물다섯이면 좀 빡센데."

록터라도 만나면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머릿수가 한참 부족했다. 하우엘은 잠시 고민하더니 암살자에게 지시를 내렸다.

"넌 사냥꾼 무리로 가서 내 말을 전해."

두 형제가 영입한 사냥꾼들은 모두 베테랑인데, 그들은 현재 흩어진 사냥꾼들을 한데 모으는 중이었다.

주인의 지시라 그들을 모두 떼어놓고 왔는데, 지금쯤 어느 정도 임무가 마무리됐을 것이다.

"발 빠른 놈들로 백 정도만 추려서 내 쪽으로 보내.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그리고… 응?"

순간 하우엘이 나무 위쪽으로 손을 뻗었다.

푸스슥-

풍성한 나뭇잎들이 잠시 흔들리더니 서서히 부식되며 잿가루처럼 흩날렸다.

휑해진 나무 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자, 하우엘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아니. 잘못 본 모양이야. 어서 움직여."

하우엘이 귀찮은 듯 손짓하자 암살자는 눈치를 보다가 반대편으로 사라졌고, 주술사는 주술 인형을 다시 일으켰다.

쿵- 쿵-!

거친 기세로 주술 인형이 나무숲을 밀쳐내며 달리기 시작하자, 하우엘은 여유롭게 그 뒤를 쫓았다.

표적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지만, 그 방향은 알 수 있으니, 추적에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표적이 가고 있는 방향은 주인이 머무는 에토르.

어차피 독 안에 든 쥐였다.

하우엘이 자리를 비우고, 모두가 사라진 인기척 없는 공간.

잠시 후, 나무 위에서 잿가루가 흘러내리더니 검은 인형이 뚝 떨어졌다.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주저앉은 복면인.

"…위험했다."

엘튼이었다.

그는 자리를 잡고 다친 어깨를 움켜잡았다. 쓰라린 통증에 표정을 구기곤 주술 인형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마스터가 나를 남긴 이유가 저들 때문인가?'

열 명이서 함께 이동하던 중 마스터가 혹시 모를 추적자를 살펴보라고 자신을 뒤쪽에 남겨놓고 갔다.

그러던 중 암살자로 보이는 한 녀석을 발견했고, 그 뒤를 미행하다가 이곳까지 오게 됐다.

엘튼은 이곳에서 아주 중요한 대화를 엿들었다.

'표적, 칼 바스타인 그리고 인상착의.'

모두 마스터와 관련 있는 단어였다.

마스터 칼 바스타인이 표적이라고?

심상치 않은 정보라 더 접근해서 정보를 엿들으려고 했는데, 한 존재에게 발각당해 자칫 당할 뻔했다.

'우두머리로 보였어.'

가진 능력이나, 주술사를 수하로 부릴 정도면 보통 놈은 아닐 것이다.

엘튼은 그 날카로운 인상을 떠올리며 살며시 어깨에서 손을 뗐다.

불로 지진 듯한 통증. 상처에선 붉은 진물이 흘러나왔고, 옷 부분은 검게 그을림과 동시에 악취가 났다.

'독인가?'

나뭇잎이 부식되는 것을 보고 바로 피해서 망정이지, 늦었다면 존재가 발각당했을 것이다. 어깨 상처는 최대한 기척을 숨기려다 당한 것이었다.

상처 위에 포션을 바르며 독을 조심스레 살폈다.

현재의 몸 상태를 살피니 중독 증상은 거의 없었다. 다만, 닿은 즉시 부패가 일어나는 즉발성 효과가 지독했는데 거리만 주지 않으면 해볼 만할 것 같았다.

'독이 퍼지는 속도가 느렸으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난 엘튼은 암살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놈을 제거하면 사냥꾼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대화를 엿들으니 상황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심각했다.

표적이 록터 펠리스에서 칼 바스타인으로 바뀐 상황.

서둘러 마스터에게 알려야 했다.

* * *

"…뭐? 표적? 그리고 내 이름을 알고 있다고?"

"네. 붙은 꼬리도 상당합니다."

"얼마나 붙었는데."

"스물다섯인데, 길어지면 사냥꾼 백 정도가 더 붙을 것 같습니다. 그것도 최소로 잡은 겁니다."

칼은 엘튼이 알려온 소식에 헛웃음을 흘렸다.

움직이는 내내 구린 감각이 따라오더라니,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 록터 다음으로 블라이어의 표적이 된데다가, 이름까지 노출된 것 같았다.

어떻게?

'크룩스에서 흘러나온 건가?'

아니, 크룩스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존재를 몰랐다. 사전에 얼굴이 노출됐다면 모를까. 그 전에 크룩스의 입에서 자신의 정보가 나왔을 리 없었다.

그럼 누구의 입에서 정보가 흘러나온 거지?

칼은 일행을 둘러보곤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이들은 절대 아니다.

그렇다고 록터는 더더욱 아니었다.

'빌어먹을, 간만에 대가리가 뜨거워지네.'

칼은 풀리지 않을 고민은 집어치우고 눈앞의 상황부터 파악했다.

이동 루트가 발각당했고, 꼬리가 밟혔다.

그런데도 엘튼이 먼저 도착한 것을 보면, 어디선가 거리를 둔 채 대기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뭘 기다리는 걸까?

자신이 이동함으로써 저들이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지금처럼 움직이면 곤란하다.

"계획 변경, 모두 흩어진다."

"개인전입니까?"

"아니 최악의 경우를 대비해야지. 두 명씩 움직인다."

칼의 지시에 일행은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최악의 상황엔 한 명이 희생하고, 다른 한 명은 도망쳐서 상대의 정보를 알린다. 웬만해선 지시하지 않은 포지션이었다.

하지만 칼은 단호했다.

"서둘러. 시간 없어."

쫓고 쫓기던 록터의 상황을 한 번 경험해봤기 때문일까. 칼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아주 개 같은 가정 한 가지를 떠올렸는데, 그 가정이 진짜라면 함께 있으면 다 죽는다.

칼은 에토르 방향을 제외한 모든 방향 곳곳으로 일행을 퍼뜨렸다. 그리고 마지막 조로 칼과 엘튼이 함께 움직였다.

고요한 숲속에서 둘은 서로 시선을 마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 개 같은 상황, 참 오랜만이지?"

"실험체 감옥 첫날이 떠오르네요. 아니 그때보다 지금이 훨씬 더 험난할 것 같습니다."

"결국, 살아남을 거야. 내 특기잖아."

"전 마스터만 믿을 뿐입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확인해 볼 게 있어. 일단, 뺑뺑이다."

"…지금 상황에서 말입니까?"

도주 루트가 발각당한 이상, 록터에게 갈 순 없다. 지금 상황에선 엘튼이 가져온 정보를 토대로 상황을 파악하고 틈을 찾아야 했다.

'구린 감각은 여전하거든.'

몸을 숨길 장소가 필요했다. 현 상황에서 몸을 숨길 장소는 한군데뿐이었다.

바로 사냥꾼 무리.

칼은 덩치가 큰 사냥꾼 무리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 * *

칼은 이동 중 엘튼을 뒤쪽에 남겨 꼬리를 밟은 이들을 살펴보고 싶었다.

하지만 에토르의 반대 방향인 코룬 강 쪽으로 움직임을 튼 순간, 저들의 움직임이 눈에 띌 정도로 매서워졌다.

"꼬리 밟기가 아닙니다!"

"알아!"

단순한 꼬리 밟기에서 추적으로 갑자기 태세가 바뀌었다.

한계치를 넘어선 경고에 칼은 가슴을 움켜잡으며 신음을 흘렸다.

개 같은 가정이 슬슬 확신으로 다가왔다.

각기 다섯 방향으로 일행을 흩어지게 했다. 그런데, 놈들은 정확히 자신 쪽으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록터 때와 같아!'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대로 도망쳐도 결국 잡힐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마스터!"

그때, 숲 너머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칼은 엘튼이 가리킨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풀숲에 도착하자 다급히 몸을 낮췄고 앞으로 기었다. 우거진 틈 사이를 비집고 뭉친 풀 바깥을 확인해보니, 엄청난 수의 사냥꾼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무슨 일이지?'

무장이 잘된 사냥꾼들이 고래고래 외치며 떠도는 사냥꾼들을 한데 모으는 모습인데, 모인 수가 천 단위는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의문도 잠시, 엘튼을 바라보며 물었다.

"내 인상착의는 아직 안 밝혀졌지?"

"그럴 겁니다."

"들어간다."

"네? 하지만...."

"시간 없어."

칼이 사냥꾼 복장을 갈무리하고 자연스레 몸을 일으키며 앞서 걷자, 엘튼도 다급히 복면을 벗고 사냥꾼들 사이로 파묻혔다.

잠시 후,

"이런 개새끼가...."

풀숲을 거칠게 헤치며 하우엘이 사냥개 부대를 이끌고 드넓은 공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한데 모인 사냥꾼들을 훑어본 뒤 주술사를 노려봤다.

주술사는 방향만 가리킬 뿐 고개를 다급히 저었다.

저 대규모 무리 안에 숨어 있다는 뜻이었다.

하우엘은 조금 전까지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숲 쪽을 바라보며 이를 빠드득 갈았다.

"시발, 뺑뺑이를 쳐 돌다가 결국 제자리라고? 감히 날 똥개 훈련 시켜?"

"어찌할까요?"

"통신구로 상황을 보고해."

떠나려는 사냥꾼들을 붙잡은 건 주인이 시킨 일이라, 자신도 그 이유를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그저 '보험'이라고만 들었다.

다만, 주술사들과 관련된 일이니 절대 좋은 목적으로 모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저, 하우엘님, 직접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주군입니다."

"...!"

주인이란 말에 표정을 굳힌 하우엘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곤 통신구를 조심스레 받아들었다.

"하, 하우엘입니다."

카멜과 직접 대면하는 것도 아닌데, 그의 표정엔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이전과 완전히 다른 꼬리 내린 사냥개의 모습으로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통신을 마친 하우엘은 길게 한숨을 내쉬곤 주술사에게 통신구를 넘겼다.

그때, 통신구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도착했다. 하우엘.]

주인이 말한 대로였다.

형인 잭이 도착했다.

132화 이번 희생은 제 몫입니다.

칼과 엘튼은 빽빽이 모여 있는 사냥꾼들 사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무슨 이유인지 베테랑으로 보이는 사냥꾼들이 이곳저곳에서 사냥꾼 무리를 데려와 드넓은 숲 공터에 몰아넣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몰려드는 게 실시간으로 눈에 보일 정도였다.

특이한 점은 공터 안쪽으로 들어서기 전에 저들에게 금화 열 닢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다시 외침이 들려왔다.

"금화를 받고 싶으면 이곳으로 모여!"

"성주님이 사냥에 성공하시면 남은 금화를 더 배분하실 거다. 늦은 놈들한테는 한 푼도 없어!"

사냥꾼들 사이를 스치며 대화를 엿들어보니, 이곳에 대기하고 있으면 금화를 넉넉히 받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헌트 지원군이란 소문으로 사냥꾼 무리를 해체했다면 저들은 반대로 금화로 흩어진 이들을 다시 모으고 있었다.

'뭔 개수작이지?'

사냥 성공?

한창 표적 사냥에 열을 올리는 중 아니었던가?

자신만 해도 미친 듯이 쫓기지 않았던가.

아무리 봐도 지금 모습은 표적 사냥과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른 목적으로 생긴 장소가 분명했다.

"소문은 진짜다! 블라이어 성주님의 확언이 있으셨다!"

카멜 블레이저.

그 학살자가 아무 이득도 없는 일에 금화를 뿌리고 있었다.

실제로 공터로 들어온 모든 이에게 금화를 열 닢씩 쥐여주자, 긴가민가하던 이들도 환호하며 적극적으로 그들의 말을 믿기 시작했다.

무려 금화 열 닢이다.

이것만 해도 사냥꾼들에게는 큰 액수였다.

곳곳에 옹기종기 모여 시시덕거리며 금화를 세고 있는 사냥꾼들의 모습.

작게나마 도움을 준 대가로 현상금을 나눠준다는 말에 블라이어 성주를 찬양하는 모습이었다.

"...."

칼은 우두커니 서서 그 광경을 쭉 둘러본 뒤 손바닥 위에 올려진 금화들을 응시했다.

눈앞에 황금빛 동전.

이상하게 꺼림칙했다.

"버려."

"…네?"

"받은 금화들을 모두 버리라고."

그는 엘튼에게 귓속말로 금화를 몰래 버리라 말했다.

블라이어 성주 뒤에는 흑주술사들이 있다. 단순한 금화도 그들이 장난질하면 살인 도구가 될 수 있었다.

주변에 핏빛 망토를 걸친 이들이 안 보이니, 단순한 억측일 수도 있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엘튼조차 남몰래 금화를 파묻으며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과연 이 중에 받은 금화를 버리는 자가 있을까?

아니, 버리면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할 것이다.

'타이밍을 봐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오가는 이들을 강제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러니, 공터에 모인 이들도 저리 화기애애하게 기다릴 수 있는 거겠지.

백 단위로 몰리는 사냥꾼 무리 덕에 공터는 빠르게 채워졌다.

다시 한번 100만 골드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피부로 느꼈다.

실력도 안 되는 것들이 진짜 더럽게 많이도 몰려왔다.

칼과 엘튼은 빽빽이 들어찬 공간을 천천히 거닐며 빠져나갈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놈들입니다."

"알아."

조금 전 자신이 나왔던 숲에서 사냥개 부대로 보이는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엘튼이 말한 주술 인형도 하나 보였다.

판단이 조금만 늦었으면 잡혔을 것이다.

그것도 잠시, 그들 뒤로 무장이 잘 된 사냥꾼 백 정도가 추가로 도착했다.

움직일 듯 보이자, 바짝 긴장되었다.

저들이 일시에 이곳으로 들이닥치면 발각당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응?"

그들은 이쪽이 아닌 드넓은 공터를 낀 숲으로 퍼지는 모습을 보였다.

뭐지?

자신의 위치를 알고 있는 거 아니었나?

칼은 일단 사냥개 부대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공터 반대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랄, 완전 외통수에 걸렸네."

지금 나가자니 발각될까 우려스럽고, 여기에 계속 머물고 있자니 잡히는 건 시간문제 같았다.

다만, 지금 상황보다 더 최악인 시나리오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저들만 따돌린다면 된다.

저들만.

그런데 그건 칼의 완벽한 착각이었다.

"...!"

저들과 최대한 떨어진 반대쪽에 도착한 순간, 바로 지척에 우거진 숲이 크게 들썩이더니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칼과 엘튼 코앞에서 나타난 이들은 고작 서른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나타난 순간 공터 분위기가 삽시간에 조용히 가라앉았다.

펄럭이는 핏빛 망토.

그들이 밟고 서 있는 반다이크들이 무려 열 기나 되었다.

칼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소수에 불과했는데, 이백 가까이 모인 반대편보다 더 큰 압박감이 느껴졌다.

흑주술사들이었다.

그것도 대략 스무 명.

핏줄이 바짝 선 느낌이다.

움켜쥔 두 손이 부르르 떨렸다.

사냥개 무리에 둘러싸인 토끼가 된 느낌이랄까.

칼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물러났다.

그 순간,

"...."

칼은 흑주술사들을 이끌고 온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

그 사내의 눈빛에 조소가 깃든 순간, 칼은 입술을 꽉 깨물 뿐 움직이지 못했다.

지독한 압박감.

결국, 여기까진가.

죽음을 떠올렸을 때, 사내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돈을 준다니까. 팔 병신도 찾아오는 건가? 하긴 네깟놈이 어디 가서 금화를 만져보겠나."

"...?"

비웃음을 날린 그는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건 주술사들도 마찬가지.

주술 인형 위에 선 그들은 자신이 있는 방향을 가리키며 대화를 주고받을 뿐 자신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왜?

칼은 멍하니 서 있다가 엘튼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물러났다.

'바로 앞에서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디로 도망쳐도 자신을 추적해온 놈들이었다.

인상착의를 모른다지만, 바로 코앞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그런데 모른다?

'설마 방향만 특정하는 건가?'

노련한 칼조차 처음 경험해 보는 상황이라, 뭐라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엘튼이 무거운 표정으로 작게 속삭였다.

"쌍둥이 형제입니다."

"쌍둥이…?"

"조금 전 마주친 사내 말입니다. 아무래도 쌍둥이 중 한 명 같습니다."

엘튼이 가리킨 방향을 살피자, 앞쪽과 뒤쪽에 똑같이 생긴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들이 서 있다.

얼굴 외형부터 분위기, 착용한 복장까지.

모두 똑같았다.

잭과 하우엘 형제.

소문으로 듣기만 해봤지 직접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칼은 두 형제를 살피며 잠시 고민하더니 주술사 무리 곁에 서 있는 사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놈이 형인 잭일 거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마주친 순간 도망칠 생각을 못 했거든.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뜻이야."

"하지만 형인 잭은 4성이라고…."

"아니. 5성이야. 확실해. 4성이라면 내가 이런 압박감을 느낄 수 없어. 뒤에 동생 놈이랑 느낌이 달라."

"...."

칼은 사냥꾼 틈에서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자신을 추적해온 이들을 면밀히 살피며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모습이었다.

잠시 후 그는 생각한 바를 엘튼에게 늘어놨다.

"날 특정하지 못하고 있어. 대략적인 위치만 파악할 수 있는 거야."

"그럼 당분간은 안전하겠군요."

"글쎄, 과연 그럴까?"

칼의 시선은 흑주술사들에게 향해 있었다. 저들이 없었다면 다소 시간을 벌 수 있겠단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가장 우려했던 존재들이 나타났다.

이곳도 곧 어떤 변화가 찾아올 것 같았다.

그것도 아주 안 좋은 쪽으로.

짧게 탄식을 토한 칼이 엘튼을 바로 세우곤 그 눈을 똑똑히 바라보며 말했다.

"당장 이곳을 벗어나라."

"…네?"

"곧 폐쇄될 느낌이야. 지금 아니면 빠져나가기 힘들 거다."

"그럼 같이 나가야죠."

"난 위치를 파악당하고 있어서 못 움직여. 팀을 둘로 정할 때 이미 정해진 사안이야. 둘 중 한 명이 희생할 때다."

"...."

"주변 전력을 둘러봐. 여긴 록터가 곁에 있어도 방법이 없어. 네가 돕는다고 달라질 게 아니란 소리야."

칼은 엘튼의 양쪽 어깨를 꽉 움켜잡았다. 고집불통인 녀석이라 쉽사리 말을 알아들을 게 아니라서 강하게 나가야 했다.

"명령이다. 엘튼."

침묵하던 그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내밀었다.

칼이 한숨을 내쉬며 악수를 하려고 하자, 엘튼이 그 손을 탁 치곤 말했다.

"호각, 호각을 주십시오."

"…뭐? 내 말 못 들었어?!"

"실험체 감옥."

"...."

"저 대신 거대 슬라임에게 먹히던 그 날, 제가 말했죠?"

[다음번 희생은 제 몫입니다.]

엘튼의 단단한 눈빛을 본 순간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시발, 여기 록터 펠리스가 한 명 더 있었네."

"그분이 꼴통이긴 하죠."

"너도 꼴통이야 빌어먹을 새끼야. 꼴통처럼 그 실력도 같았으면 좋았을 텐데."

"호각이나 주시죠."

이젠 뭐라 말해도 먹힐 녀석이 아니라 품에서 호각을 꺼내 던졌다. 뭐라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엘튼은 호각은 품에 갈무리하곤 칼을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숲으로 사라졌다.

엘튼이 어떤 생각으로 호각을 가져갔는지 안다.

그래서 칼의 표정은 그 어느 때 보다 쓸쓸했다.

"개죽음이라고 멍청아."

칼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비라도 시원하게 쏟아져서 모든 흔적을 말끔히 지워준다면 바랄 게 없을 텐데.

내릴 듯 말 듯 보이는 저 흐린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하늘을 잠시 바라본 칼은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어디론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금화를 버린 장소로 갔고, 땅을 파고 금화를 한 손에 아슬아슬하게 한 움큼 움켜쥐었다.

"이래서 팔 하나는 불편하다니까."

나직이 중얼거린 칼은 금화를 움켜쥔 채 흑주술사 무리가 대기 중인 곳으로 다가갔다.

그 앞에선 짧게 해후를 즐기는 쌍둥이 형제, 잭과 하우엘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형제에게 다가가는 칼은 한 손에 삐쭉 튀어나온 금화를 유지한 채 걸어갔다.

걸리기 전에 놈들에게서 뭐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가만히 있다가 뒈지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말이지.'

위기 감별사.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두 형제에게 다가가던 그때 두 형제의 대화가 멈춘 순간 칼은 손에 쥔 금화 한 닢을 떨구고는 허둥지둥 그 한 닢을 줍다가 결국 손에 있던 금화를 모두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중 몇 개가 두 형제의 발밑까지 굴러갔다.

"소, 송구합니다. 보다시피 손이...."

칼은 한쪽 팔로 천천히 기어 다니며 금화를 주웠다.

하우엘이 바닥에 놓인 금화를 밟고는 칼을 내려다보며 비웃었다.

"너 운이 좋네. 주인만 아니었으면 남은 팔도 잘렸을 거야."

"놔둬. 그리고 금화는 건들지 마. 주인이 말하는 말 못 들었어?"

"나도 안다고. 그런데 저런 병신부터 어중이떠중이들을 왜 모으는 거야?"

"헌트 지원군이 올지 모른다는 정보가 있어서 주인이 대비를 하는 거라더군."

"헌트 지원군? 그 소문이 진짜였어?"

"모르지. 데려온 주술사들이 여긴 알아서 할 테니, 우린 이제 록터에게만 신경 쓰면 돼."

"여기 숨어 있는 쥐새끼는?"

"곧 걸러질 거야. 주인 말대로 주변을 폐쇄하고 소수로 무리 지어서 분산해 놓으면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하긴 주술사가 스물이 넘어가니까. 금방 찾겠지?"

"서른 명 안쪽부터 기억을 뽑아낸다고 했으니 그중 하나가 걸리겠지."

"그럼 록터의 정보도 곧 풀리겠네. 그럼 이곳 볼일은 다 끝난 것 아니야?"

"그러긴 하는데. 아직 내 볼일은 안 끝났어."

"저 주술사?"

조금 전 잭에게 들었던 내용 때문에 하우엘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주술사 무리 끝에 서 있는 작은 체구의 주술사를 응시했다.

로브로 얼굴이 가려져 성별 구별이 힘들었는데 잭이 여자라고 했다.

그것도 아주 기가 막힌.

"어떻게 알아?"

"목소리를 들었거든. 그래서 장난삼아 조금 전에 이걸 해봤는데."

잭은 비릿하게 미소를 짓고는 다섯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순간, 가리킨 주술사 주변으로 바람이 불더니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하지만 벗겨지진 않았다.

"앙큼한 년이 눈치챘네. 아까는 성공했는데."

"그 정도로 이뻤어?"

"역대급이야. 한 번 보면 딴 년은 눈에 안 들어올걸?"

"형이 그리 말할 정도면 대단하다는 건데. 상대가 좀 맵네? 가능하겠어?"

"여기선 힘들겠지만, 기회가 있을 거야. 우리 둘이 작업해서 실패한 적 있었어?"

"흐흐흐."

희번덕거리며 끈적하게 노려보는 두 형제의 눈빛을 뒤로한 채 주술사는 조용히 흐트러진 로브 자락을 갈무리했다.

어깨에 달린 강아지 인형이 부르르 떨자, 주술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다 엎어버릴까? 케로스?"

"그릉―"

"그치? 너무 많지? 너 때문에 참는 거야. 알겠어?"

영롱한 여인의 목소리였다.

133화 찾았다.

위기의 경중을 심적 압박으로 감별하는 능력.

위기 감별사.

3성 개화 특성으로 위기 감별사를 얻은 칼은 빈번히 목숨을 내던지는 무모한 행동을 하곤 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죽고 싶어 안달이 난 인간으로 비쳤지만, 사실 칼은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죽음을 비켜 가는 중이었다.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날 선 감각이랄까.

4성에 오른 지금은 그 감각이 더욱 날카로워졌는데, 두 형제 앞에서 쇼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죽을 것 같지 않았다.

'여기까진가.'

다만, 살짝만 잘못돼도 골로 가는 짓이라 절대 욕심부리면 안 됐다.

두 형제의 대화를 더 엿듣고 싶었지만, 칼은 날 선 감각을 느끼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빠르게 물러났다.

"야."

그런 그를 하우엘이 불러 세웠다.

"…네? 저, 저 말입니까?!"

"여기에 너밖에 더 있어? 금화 가져가."

하우엘이 발을 치우자 금화 두 닢이 그 앞에 덩그러니 굴렀다.

"고, 괜찮습니다."

"씨발,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가지고 꺼져. 진짜 죽여버린다?"

"아, 알겠습니다!"

최대한 몸을 낮춘 채 떨어진 금화를 수거하곤 칼은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소란으로 수많은 시선이 집중되는 것을 느껴졌지만, 칼은 이를 무시하고 조금 전 상황을 떠올렸다.

'금화를 서둘러 버려야 해.'

잭과 하우엘은 여자만큼이나 돈에도 욕심이 많은 놈들이었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서 금화를 강탈해갈 놈들이 오히려 금화를 가져가라고 불러세웠다.

예측은 곧 확신으로 바뀌었다.

금화를 가지고 있으면 죽는다.

움켜쥔 금화를 남들 눈에 안 들키고 최대한 조용히 버리려고 하는데,

"어이, 형씨, 들고 있기 불편하면 날 주라고."

"팔도 하나뿐이니, 금화도 절반만 있으면 되지 않아? 키키키킥."

시선을 많이 끌었다.

보는 눈들이 많았다.

조금 전 광경을 지켜본 주변 사냥꾼 일행이 칼을 바라보며 비아냥대자, 칼은 생각을 바꿔 비아냥대는 사냥꾼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냥꾼 앞에 금화를 내밀었다.

"뭐야?"

"포션 있나?"

"포션? 그건 왜?"

"금화를 전부 줄 테니 너희들이 가진 포션과 전부 교환하자."

"뭐?"

"싫어? 싫음 말고."

"자, 잠깐!"

상급 포션도 아니고 사냥꾼들이 쓰는 하급 포션은 금화 한 닢으로도 여러 병 구할 수 있었다. 칼은 사냥꾼들이 내미는 포션 중 질 좋은 것들만 챙기고 금화를 모두 넘겼다.

등을 돌리고 가는데 뒤쪽에서 '멍청한 새끼.'란 소리와 함께 비웃음이 들려왔다.

칼은 그 비웃음보단 주변을 살폈다.

자신의 행동에 큰 반응이 없는 모습이었다.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칼은 다시 움직였다.

비웃음?

현재 놓인 처지를 떠올렸을 때 그런 감정 따위에 반응하는 건 사치였다.

'어떡하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잡아낼지 정확히 들었다.

공터 주변을 둘러보니, 베테랑 사냥꾼들이 사방을 포위한 상태였다. 다행이라면 엘튼이 빠져나간 뒤 포위가 이뤄졌다는 점이었다.

'난 틀렸고.'

쌍둥이 형제와 주술사들이 표적을 주시하고 있다. 지금 도주하는 건 그저 일찍 잡히는 것일 뿐이었다.

마흔 평생 수많은 위기에 빠졌고, 최악의 상황에서도 능력을 이용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극복해왔다.

몸 위에 새겨진 수많은 상처가 이를 증명했다.

그런데,

'…없나? 진짜 없어?'

이번만큼은 도무지 방법이 안 보였다.

"잠시 집중!"

그때 주술사들의 지시를 받았는지, 사냥꾼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서서히 공터 주위를 포위해왔다.

"이 안에 록터의 조력자가 있다는 제보다! 수상한 행동을 보이면 그자로 간주할 테니, 모두 천천히 일어나!"

칼은 마른침을 삼키며 욕설을 내뱉었다.

공터로 들어온 이들이 모든 사냥꾼을 구석 한곳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이건 무조건 잡힌다.

잡혔을 때 언변으로 위기를 극복할 상황도 아니었다. 바로 주술사들의 손에 기억이 뽑힐 테니까.

죽음을 떠올린 순간, 칼은 문득 한 사내를 떠올렸다.

자신을 블라이어로 보낸 녀석.

아서 클레이튼.

"빌어먹을 녀석. 어디 가서 발 뻗고 쿨쿨 쳐 자고 있겠지?"

이유 없이 그놈이 원망스러웠다.

* * *

공터에 모인 사냥꾼들의 수는 천을 넘어 천오백에 다다랐다.

통제하는 이들보다 월등히 많은 수였지만, 사냥꾼들은 갑작스러운 통제에도 제대로 된 반항을 하지 못했다.

핏빛 망토 무리.

주술사들의 둥지가 반다이크를 대동하고 움직였기 때문이다.

인간 백정으로 불리는 암살자조차 학을 떼며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저들이었다.

절대 척지면 안 되는 존재들.

사냥꾼들은 불만과 초조함을 드러내며 공터 구석 쪽으로 모조리 내몰렸다.

잠시 후, 주술사 한 명이 반대편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에서부터 백 명씩 저쪽에 서라."

어물쩍거릴 뿐 누구도 먼저 움직이려고 하지 않자, 주술사를 따라온 사냥꾼들이 앞쪽부터 거칠게 잡아끌어 반대편으로 밀어버렸다.

백 명이 채워지고 잠시 후, 통신구를 든 주술사가 고개를 가로젓자, 백 명의 사냥꾼들은 곧장 편한 자리로 안내되었다.

우려했던 것보다 색출 작업이 별것 없어 보이자, 그때부터 남은 이들은 앞다투어 주술사가 가리킨 장소에 서기 시작했다.

백 명.

또 백 명.

다시 백 명.

그렇게 록터의 조력자를 색출하는 작업이 시작됐고, 구석에 뭉쳐 있던 인파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순번에 걸리겠네."

반다이크 어깨 위에서 색출 작업을 지켜보던 릴리는 구석 끝자락에 웅크리고 있는 중년 사내를 바라봤다.

[칼 바스타인 – 영웅 조력자(감각)]

[본능적 위기 직감]

[암살자의 상황 판단]

[공명(共鳴) – 대상: 록터 펠리스]

릴리의 눈동자에 비치는 신명 목록.

통신구를 통해 표적의 방향을 살피는 주술사들과 달리, 릴리는 정확히 칼을 응시하고 있었다.

신명의 주인을 본 첫 소감은,

"인상 참 더럽네."

"크릉!"

"그치? 이쁘고 귀여운 나랑은 안 어울리지? 근데 신명의 주인이 연달아 각성한 장소라니, 이곳이 터가 좋나 봐."

"...."

"뭐? 우린 재수 없는 것 같다고?"

댕댕의 귀를 잡고 이유를 물어보려다 끈적한 시선을 느끼곤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쌍둥이 형제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까부터 바람으로 장난을 치더니, 재수 없는 눈을 하고 계속 히죽거리는데, 저 입을 붙잡고 시원하게 찢어버리고 싶었다.

"완전 재수 없어."

"뭐라고 했지?"

"아, 너한테 한 말이 아니다."

"계속 여기 있을 건가? 토템 작업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을 텐데? 그대가 표적의 기억을 축출할 건가?"

"아니."

대상의 기억을 축출하는 건 부작용이 심각해서 마녀 사회에서 금지된 주술이었다.

릴리는 고개를 가로젓곤 바닥에 착지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주술사 열댓 명이 공터 주변을 돌아다니며 토템을 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토템들을 바라보곤 미간을 좁혔다.

"흑주술사들과 사이좋게 토템을 심는 날이 올 줄이야. 이 모습을 오르타들이 보게 되면 거품 물고 쫓아오겠지?"

"크릉!"

"댕댕아,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라고."

"...."

"알았어. 살코기 특상으로 줄게."

강아지 인형이 신난 듯 퍼덕대자, 릴리는 투덜거리며 토템을 심는 척했다.

낡은 토템에는 죽은 자들의 왕, 제스 밀러(Jess Milo)의 낙인이 찍혀 있었다.

통신구에서 흘러나온 내용을 들었기에 잠시 후 이곳에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죽음을 대가로 힘을 빌려주는 영력 증폭기.

그 대가의 대상이 되는 죽음의 코인들은 저쪽에 우르르 몰려 있는 사냥꾼들이 지니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면 다 죽는다.

하지만 그녀는 이곳에서 그 누구도 도울 생각이 없었다.

흑주술사든, 사냥꾼이든, 모두 그녀가 싫어하는 대상이었으니까.

토템 작업이 마무리되고, 눈치껏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허리를 툭툭 치며 일어났다.

"허리 아파. 너무 열심히 일했어."

"...."

릴리는 색출 작업을 지켜봤다.

공터 구석에 몰아넣은 이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 백? 이백?

표적 색출이 거의 다 끝난 듯 보였다.

하지만 잡힐 대상은 칼 바스타인이란 자로 그녀가 바라던 이가 아니었다.

"주술사들을 따라다니면 그 인간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상금 100만 골드짜리 록터 펠리스를 만나 보고 싶었다.

록터 주변에 있으면 엄청 흥미로운 구경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주술사들은 잡을 듯하면서 결국 록터를 찾아내지 못했다.

"여기… 이놈! 커억!"

색출하던 장소에서 비명이 터졌다.

릴리는 기지개를 쭉 켜곤 소란이 들리는 장소로 걸어갔다.

"저놈이다!"

"잡아!"

버티고 버티던 표적이 결국 정체를 드러냈다. 허리춤에서 단검을 벼락같이 내던지자 사냥꾼들이 줄줄이 고꾸라졌다.

대단한 투척술이었다.

하지만 주술사와 반다이크가 나서자 상황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결박 주술에 잡히고, 반다이크 두 기가 돌진하자,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싱거운 싸움.

릴리는 그리 생각하며 칼 바스타인 근처에 섰다.

잠시 후, 주술사들의 우두머리가 붉은 수정을 움켜쥔 채 칼 앞에 섰다.

요사스러운 빛무리.

기억을 축출하는 기억 저장구였다.

"네놈이 칼 바스타인이냐?"

"...."

험상궂게 생긴 외팔이 중년인.

그는 매서운 눈으로 노려볼 뿐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눈깔 잘 알지. 물어보는 것보다 이게 더 빠르겠어. 잡아."

우두머리의 지시에 사냥꾼들이 칼을 붙잡은 채 일으켜 세웠다.

붉은 수정구가 칼의 눈앞에 놓이자, 칼 바스타인이 울부짖듯 매섭게 외쳤다.

"실컷 비웃어라! 곧 다 죽을 테니!"

"뭐라고?"

"헌트! 헌트의 지원군이 곧 도착한다! 너희는 포위됐어!"

"...!"

칼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이들이 주춤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공터를 에워싼 숲은 고요했고,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헛소리. 기억을 뽑고 네놈 혀부터 뽑아주마."

우두머리가 수정구를 칼 눈앞에 내밀고 주술을 발동시키려는 찰나,

삐이이이이이이이―!

"...!"

날카로운 호각이 울려 퍼졌다.

그 신호에 칼이 망가지는 걸 흥미롭게 구경하던 잭과 하우엘이 벼락같이 움직였다.

이 호각 소리.

벌레 새끼인 크룩스의 것이었다.

크룩스를 제거한 이는 다름 아닌 록터 펠리스.

마치 기다린 듯 그들의 반응에는 주저가 없었다.

"따라와!"

둘은 엄청난 속도로 호각이 울린 숲 방향으로 사라졌고, 그 뒤를 사냥개 부대가 따랐다.

잠시 공터에는 침묵이 흘렀다.

호각 소리에 칼의 기억 추출 작업은 잠시 중단됐다.

목숨이 잠시간 연장된 상태.

하지만 칼은 적들의 반응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설마 잭과 하우엘이 동시에 움직일 줄은 몰랐다.

엘튼이 버틸 수 있을까?

그가 헌트 지원군을 내세우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한 건 적들이 호각 소리에 경계하고 움직이지 않길 바라서였다.

엘튼을 지키기 위해 한 행동인데,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다.

잠시 후,

"이거 웃긴 새끼들이네. 감히 우릴 속여?"

비웃음과 함께 하우엘이 숲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더니 주술사에게 신호를 보냈다.

거짓 신호이니 계속하라는 신호였다.

우두머리는 칼의 머리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지원군이라더니 피라미가 왔나 보구만."

칼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잭이 돌아오지 않았고, 하우엘의 표정에 여유가 있다.

엘튼이 당했다.

설마 잭의 장난감이 된 것은 아니겠지?

"헌트의 지원군은 아직인가? 얼마든지 기다려주지."

헌트의 지원군?

자신이 낸 소문에 불과한 허상인데, 그딴 게 올 리가 있나.

주술사들의 조롱에 주변 이들이 키득거리며 비웃기 시작했다.

"그냥 죽여! 이 씹새끼들아!!"

모든 걸 내려놓고, 칼이 울분을 담아 외친 순간이었다.

번쩍―!!!!!!!!!!!!!!

"...!"

그들의 등 뒤로 황금빛 기둥이 솟구쳤다.

모두의 시선이 숲 너머 황금빛 기둥에 쏠렸다.

호각이 들렸던 방향이었다.

하우엘이 그 빛에 당황하더니 다시 숲으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어엇! 어디 가는 거야!"

주술사 하나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릴리.

무슨 이유인지, 그녀의 두 볼은 보드란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잔뜩 흥분했을 때 나타나는 표정이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이 세상 그 누구도 볼 수 없는 단 하나의 목록이 새겨져 있었다.

황금빛 기둥의 주인.

[아서 클레이튼 ― 신명 사냥꾼(사냥 대상:록터 펠리스)]

"찾았다!"

134화 불러요! 당장!

릴리는 나무 기둥을 붙잡고 섰다.

그녀가 서 있는 위치는 조금 전 황금빛 기둥이 솟구친 나무숲 근처였다. 빛이 사라지자 릴리는 요리조리 고개를 돌리며 흔적을 찾았다.

"멍!"

"따라오라고?"

작은 시바견이 짧은 다리를 뻗으며 앞서 달리기 시작했다. 앙증맞은 코를 킁킁대는 것이 죽음과 관련된 냄새를 맡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바람을 타고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왔다.

저 나무숲 건너편이다.

릴리는 근처에 보이는 가장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편안해 보이는 나뭇가지에 걸터앉은 그녀는 한 곳을 내려다보며 눈을 반짝였다.

비릿한 냄새.

"포위해!"

"저놈만 집중적으로 노려!"

피가 튀는 치열한 전투가 한창이었다.

시야에 들어온 전투는 두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두 장소를 번갈아 보더니 흥분한 듯 손뼉을 탁― 치며 케로스를 찾았다.

"100만 골드! 저 인간, 록터 펠리스 맞지?"

"멍!"

"찾고 있던 이들이 여기 다 있었네. 역시 이곳은 터가 좋은가 봐."

바로 밑엔 아서 클레이튼.

그리고 건너편 숲에는 록터 펠리스가 주술사의 편으로 보이는 사내와 매섭게 공방을 주고받고 있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아서와 록터가 한 편으로 보였다.

록터 펠리스의 상대는 그녀도 알고 있는 재수 없는 인간이었는데, 조금 전 바람으로 자신의 로브 자락을 벗기려고 했던 놈이었다.

"저렇게 강했어?"

그녀는 재수 없는 인간의 무력을 보곤 깜짝 놀랐다. 바람을 칼날처럼 다루는 특성 개화자 같았는데, 그 위력이 자신을 위협할 정도였다. 100만 골드의 검술도 대단했는데, 치고받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두 눈이 어지러울 정도라 릴리는 고개를 휙휙 흔들곤 아서 클레이튼에 집중했다.

자신을 오르도르 숲에서 나오게 한 존재.

신명의 법칙을 벗어난 유일한 존재라 무척이나 그 정체가 궁금했었다.

"인간이었네."

"멍."

"알아. 우리 둘 다 틀렸으니까. 비긴 거네. 가위바위보 할까?"

"...."

"아, 댕댕은 주먹밖에 못 내지?"

그동안 '아서 클레이튼'이란 이름을 떠올리며 어떤 존재인지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사냥꾼, 세이렌, 심장, 이종족.

신명 목록에 나온 단어만 나열해보면 인간보다는 전투와 사냥에 능한 이종족으로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날렵한 신체에 사나운 눈매를 지녔지만, 그 외엔 순딩순딩한 외모였다.

"이제 어쩌지? 다음은 생각을 안 해봤는데."

목표했던 이와 드디어 조우했다.

근데, 찾아볼 생각만 했지 만나서 그와 어떤 관계를 이어갈지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친구인지, 원수인지.

그 어떠한 관계도 정립이 안 된 상태.

릴리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고민했는데, 의외로 답은 쉽게 나왔다.

"어떤 인간인지 파악하고 생각하자."

일단 지켜보는 것.

"우리 댕댕은 어떻게 생각해?"

"멍!"

"엥? 냄새가 그렇게 구려? 정말이야?"

"...."

"그 정도야? 좀 의외네."

케로스는 지옥견 케르베로스의 피를 이어받은 존재였다. 종족 특성상 죽음과 관련된 냄새를 좋아했는데, 반대로 죽음과 반대되는 냄새를 무척이나 싫어했다.

냄새가 구리다는 것은 대체로 죽음과 거리가 먼 존재. 케로스의 종족을 위협하는 강자를 의미하기도 했다.

하지만 풍기는 기운,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지켜보니 전혀 강해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리부터 노려!"

"다 잡았다! 총공격해!"

아서는 현재 한 사람을 지키면서 고전하고 있었는데, 다수의 암살자 무리가 둘을 포위한 채 맹공을 퍼붓자, 그 모든 공격을 홀로 받아내고 있었다.

단검에 배가 찔리고, 등도 찔리고, 어깨도 찔리고, 틈만 생기면 어디든 푹푹 찔리고 있었다.

"…저거, 죽는 거 아니야? 냄새 구리다며?"

"...."

누가 누구를 지키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그는 피투성이였다.

여기서 죽으면 곤란해지는 건 자신이라 잠시 도울까 고민하는데, 곧 멋쩍은 얼굴로 볼을 긁적였다.

"와, 왜 댕댕이 냄새가 구리다고 했는지 알겠다. 좀비였네."

아서의 반격이 시작됐다.

* * *

퍼석―!

벼락같이 내지른 주먹에 암살자가 얼굴을 맞고 허공을 한 바퀴 돌았다.

뭔가 터지는 소리였는데, 공중에서 무너진 암살자의 얼굴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흉측하게 뭉개져 있었다.

즉사(卽死).

섬뜩한 파괴력이었다.

후―

숨을 내뱉으며 손바닥을 옆으로 쭉 뻗었다.

엘튼의 목을 노리고 오는 단검.

단검은 곧 내 손바닥을 꿰뚫었고, 뚫린 손으로 놈의 손목을 낚아채 잡아당긴 후 사납게 주먹을 내질렀다.

퍽―! 소리와 함께 심장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암살자는 피를 울컥 게워내며 스르륵 무너졌다.

"…아씨, 더럽게 아프네."

손바닥에 박힌 단검을 뽑아낸 뒤 상처를 살피니, 조금씩 아무는 게 보였다.

이 정도 모습이면 보통 기가 질릴 만도 한데, 사방에서 암살자들이 사나운 표정으로 달려들었다.

사냥개 부대.

듣긴 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더 지독했다.

어중이떠중이도 아니었다.

최소 2성 이상이었다.

그런 놈들이 무려 스물다섯이다.

작정한 듯 목숨을 도외시하고 엘튼만 집요히 노리는데, 보호하는 입장에선 죽을 맛이었다.

엘튼을 보호하려는 내 모습을 악착같이 이용하려는 것인데, 제대로 먹혔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번에도 위협적인 단검이 엘튼의 뒤를 노렸다.

푹―!

"…끄으! 이 망할 새끼들이!"

단검을 팔뚝으로 막고 그대로 발차기를 날렸다. 내 공격을 막은 암살자는 팔이 뒤틀린 채 돌멩이처럼 나가떨어졌다.

단검이 주무기인 놈들이라 주로 접근전을 펼쳤는데, 엘튼 주변에 가까이 붙어서 집요히 검 끝을 들이밀었다.

여유를 안 준다.

하지만,

"너흰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 스승이 다른 누구도 아닌 레토니칼스다. 초근접으로 붙어서 싸우는 미친놈이란 뜻이다.

접근전이라면 나도 어디 가서 절대 안 졌다. 하지만 막상 붙어보니 불협화음처럼 전투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엉망진창이다. 이런 개싸움이라니.]

"처맞는 것만 가르쳤잖아요!"

[상대는 몽둥이가 아니라 쇠붙이다. 멍청하게 몸으로 받으려 하지 말고 피해라.]

"그건 나도 알아!"

쇠붙이를 못 피하는 게 아니라, 안 피하는 것이었다.

내가 감싸고 있는 엘튼은 현재 의식은 있지만 움직일 상태가 아니었다.

조금 전 잭에게 장난감처럼 짓밟히고 있는 모습으로 발견됐는데, 날카로운 검에 베인 것처럼 온몸이 끔찍한 상처로 도배되어 있었다.

잭의 바람 칼날이 지나간 흔적이었다.

조금만 움직여도 핏물이 울컥울컥 흘러나와서, 포션으로 지혈하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여선 안 됐다.

내가 무식하게 몸으로 공격을 받아내는 이유였다.

"지, 지금 마스터가 위험하다."

"기다려. 여기도 빡세다고."

"…날 버리고 당장 마스터에게 가라. 정말 위급하...쿨럭!"

손에 쥐어진 호각이 벌벌 떨렸다.

지독한 고통에도 엘튼은 칼 걱정뿐이었다. 공터 쪽 적들의 전력이 엘튼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반쯤 흘려들었다.

'이 새끼들, 세뇌라도 당했나? 마약 빤 것처럼 달려드네.'

마치 죽기 위해 덤비는 모습이었다.

[죽음으로 안식을 찾으려는 모습이다. 부럽군. 죽을 수 있어서.]

여기에 레토 같은 변태들이 또 있을 줄 몰랐다.

온몸을 내던지며 단검을 찔러대니, 나도 몸을 던져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주술사들의 손에서 살아남은 암살자들이니, 저주의 낙인을 받은 놈들일 거다. 그것 말고는 저 무모한 행동을 설명할 수 없었다.

"…시발, 많이도 처먹었네."

저들의 맹공에 야무지게 당했다.

열 명 죽이는데, 여섯 군데나 찔렸다.

염원의 반지와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아니었으면 엘튼보다 내가 먼저 출혈로 죽었을 것이다.

엘튼만 없었다면 저들과 거리를 벌린 후 흡혈의 고리로 유린했을 것이다. 설마 이렇게 질척거리며 싸울 줄은 몰랐다.

'심각하네. 이거.'

상대를 지키는 기술과 나를 지키는 기술이 부족했다.

내 전투 방식에 단점이 뚜렷이 보인다고 해야 할까.

지금이야 신명 사냥꾼으로 각성해서 약한 적들을 힘으로 누르고 있지만, 비슷한 적과 싸운다면 분명 크게 당했을 것이다.

"컥!"

스물다섯이 반수로 줄어들었을 때, 나무 사이에서 화살이 날카롭게 날아와 암살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한 발, 한 발 치명적으로 암살자들을 노렸다.

"넬라!"

호각을 듣고 록터와 먼저 달려왔는데, 넬라가 뒤늦게 도착해 지원에 나선 모양이었다.

그녀가 궁술로 지원하고, 암살자들 그림자 밑에서 반리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튀어나오자 상황은 빠르게 정리가 되었다.

피 웅덩이가 그려진 대지.

그 위에 엘튼과 함께 주저앉은 난 거친 숨을 내쉬었다.

예상치 못하게 고전했다.

잠시 후, 숲에서 넬라가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또 다른 전투가 벌어지는 나무숲 쪽을 잠시 응시한 뒤 내게 다가왔다.

"괜찮나요?"

"저는 괜찮은데, 이 녀석이 문제입니다."

"아는 사람인가요? 상처가 심각한데."

"엘튼이란 녀석인데, 동료입니다. 혹시 포션 있습니까?"

"잠시만요."

잠시 후, 힘겹게 숨을 고르던 엘튼이 '아서'의 이름을 힘겹게 부르며 내 어깨를 꽉 움켜쥐자, 넬라는 살짝 놀란 얼굴로 멈칫했다.

내 진짜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놀란 모양이었다.

엘튼의 계속되는 경고에 넌지시 칼의 생사를 묻자, 그녀가 고개를 흔들었다.

"칼 바스타인은 아직 살아있어요."

"이 녀석의 치료를 대신 부탁해도 될까요?"

"제가요?"

"급히 움직여야 할 것 같아서요."

"알겠어요."

넬라가 엘튼을 치료하는 사이, 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록터를 살폈다.

칼을 구하려면 록터의 힘이 필요했다.

숲 너머 칼이 잡혀 있는 장소는 전력이 막강해서 나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

시선을 끌어줄 동료가 필요한데, 문제는 록터도 지금 무척이나 고전 중이라 몸을 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파파팡―! 파팡―!

묵직하게 터지는 바람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렸다. 록터가 정신없이 허공에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바람 칼날 공격.

잭과 하우엘, 이 두 형제의 숨겨진 특성을 이미 록터에게 귀띔해줬는데, 알고도 막기 힘든 모습이었다.

"잭이 저렇게 셌던가?"

오랜 전투로 록터가 많이 지친 것도 있지만, 무기의 부재가 컸다.

검과 검집이 하나둘 잭의 크로우에 부딪쳐 산산조각 부러지는데 아티팩트까지 사용하는지, 기본기로 단단하게 다져진 록터에게도 힘으로 밀리지 않았다.

내가 준 드워프제 단검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모습인데, 주무기가 아니라서 부딪칠 때마다 작은 상처들이 새로 생겼다.

내가 도와도 쉽사리 승부가 날 것 같지 않은 분위기.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넬라, 그녀를 불러야겠습니다."

아티팩트로 도배된 잭을 막으려면 똑같이 아티팩트로 도배된 5성밖에 없다.

잭의 발목을 붙잡고, 당장 록터를 빼낼 방법.

펜리 소환!

"…진심이에요?"

넬라는 한 번 더 짙은 눈빛으로 물었다.

감당할 수 있냐는 물음.

넬라가 위험한 것도 아닌데 소환했으니, 당연히 날 잡아먹으려고 하겠지.

하지만 확실한 도움만 받을 수 있다면 그런 고생 따윈 나중에 얼마든지 해줄 자신이 있었다.

"불러요! 당장!"

넬라의 손등에 생명의 징표인 푸른빛이 터져 나온 순간, 난 흡혈의 고리를 꺼내 잭을 공격했다.

투투투퉁―!

다섯 발의 화살이 잭을 노리고 들어가자, 잭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허공에서 터지는 다섯 발의 화살.

잭의 시선을 끈 사이, 록터가 내 곁에 붙었고 난 짧게 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봤다.

"...."

시간이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느낌이다.

펜리 체이서.

넬라가 갑작스레 소환했는데, 그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것이었다.

"오늘은 또 누구를 등쳐먹었습니까?"

"...."

미소를 띠며 금화를 세고 있다가 돌처럼 굳은 모습인데, 펜리는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상황을 살피곤 나를 바라봤다.

"아니지?"

"맞을 겁니다."

"이런 시발 놈이…."

넬라와 묘하게 닮았지만, 앙칼진, 다크 엘프 펜리가 벌떡 일어나 흑빛 크로우를 소환했다.

135화 헌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자, 잠깐! 이미 많이 먹었다고!"

멀쩡히 서 있는 것 같지만, 엘튼 대신 칼빵을 여러 군데 먹은 상태였다. 딱 봐도 피투성이 몰골인데, 펜리년의 눈에 이런 내 몰골은 익숙했던 모양이었다.

번뜩이는 크로우에 이년이 드디어 미쳤구나 싶었는데,

팡―! 파파팡!

"...!"

나를 지나친 크로우가 허공을 찢고 바람을 연쇄적으로 베어냈다.

아, 기습?

뒤를 돌아보니, 잭이 일그러진 얼굴로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흩날리는 금발이 내 시야를 가렸다. 머리카락을 쓱 넘긴 펜리가 내게 등을 보이곤 탄식을 내뱉었다.

"하, 내가 어쩌다 저놈이랑 엮여서...."

그녀가 허공에 손짓하자, 밑 그림자가 먹물처럼 솟구치더니 반리가 그녀 머리맡에 올라탔다.

그녀와 반리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날 노려봤다. 쌍으로 노려보니 어째 그림이 이상한데....

"저놈 때문에 날 부른 거지?"

"이젠 눈빛만 봐도...."

"시끄러. 이걸로 네놈에게 진 빚은 없는 거야. 알겠어?"

그림자 왕의 가호로 반리가 폭주했을 때 신세를 진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어?

격발(擊發)을 완성한 덕에, 훈련이라 말하고 고문이라 칭했던 레토의 가르침에서 해방된 날이라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이럴 땐 저 계산적인 성격이 좋다니까.

"콜."

"콜은 무슨, 쫄면 뒈지는 주제에."

"그땐 패가 안 좋았다니까요?"

펜리가 잭을 바라보며 크로우를 양쪽으로 펼치자, 압박감을 느낀 잭이 반대편 숲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네?"

"잡아주세요. 죽이면 더 좋고요."

내가 펜리를 불러 잭을 견제하려는 이유다.

바람을 다루는 녀석이라 작정하고 치고 빠지면 나도 록터도 잡기 힘들었다. 그림자를 다루는 펜리가 놈의 상대로 딱이었다.

"죽이면 수당 나오나?"

"죽일 수 있으면 죽여보십시오."

"도발하는 거냐?"

"쉽지 않을 겁니다."

"흥, 거기 바닥에 떨어진 금화나 주워놔. 나중에 가져갈 거니까."

"그런 게 지금 눈에 들어옵니까?"

"56골드다."

굴러떨어진 금화의 금액을 알려준 순간, 난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해야만 했다.

이 녀석의 이름은 펜리가 아니라, 오늘부터 돈리다.

돈리 체이서.

새로운 별명을 듣지 못한 채 펜리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잠시 후, '캉―!' 쇳소리가 들리며 저 멀리서 불꽃이 튀었다.

잭과 펜리의 크로우가 매섭게 부딪쳤다.

그녀의 갑작스런 등장에 당황한 듯 움직이는 잭이 보였다.

"저놈도 목숨 걸어야겠네."

펜리가 그림자 능력을 보였으니, 죽이겠다고 선언한 것과 같았다. 하지만 쉽지 않을 거다.

그냥 잭도 아니고 학살자 버프를 받은 잭이었으니까.

"합공해서 뒤를 잡으면 죽일 수 있다."

"잭이랑 칼의 목숨 중 누구를 선택할 겁니까?"

"…칼은 지금 어디 있지?"

"일단 벗어나죠."

펜리가 전투에 집중할 수 있도록, 넬라를 데리고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엘튼을 내려놓고 우리는 바로 움직일 준비를 했다.

"상처는 심하지만, 치명상은 없어요.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거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엘튼의 상처에 덕지덕지 발라진 푸른 반죽이 보였는데, 넬라표 치료제인 모양이었다. 푸른 반죽의 정체가 궁금했지만, 펜리가 벌어준 시간을 허투루 쓸 수 없었다.

"가요!"

넬라를 놔둔 채 우리는 숲을 뚫고 질주를 시작했다.

풍경이 휙휙 빠르게 지나가는 전력 질주.

두 눈에 힘을 주며 난 방향을 잡았다.

빽빽한 숲으로 시야가 가려져 있지만, 난 개안을 통해 보이지 않는 기운, 칼의 아우라를 볼 수 있었다.

아니, 지금은 희미하게나 느낄 수 있었다.

칼 바스타인의 오오라.

저기다.

"아까 그건 뭐지?"

"뭐 말입니까?"

"살기(殺氣). 날 죽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럴 리가요. 능력 발현에 필요한 조건이라 록터님의 신명을 이용한 겁니다."

"…신명?"

개안이 록터를 향했다.

[록터 펠리스 – 배덕의 기사(무(無))]

[검술의 대가]

[기본기 마스터]

[불굴의 의지]

"록터님은 신명의 주인입니다."

"...!"

돌 같은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역시나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이에 대해 더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지만, 상황이 그리 놔두지 않았다.

부스럭― 부스럭― 풀숲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익숙한 인영이 거칠게 튀어나왔다.

잭과 똑 닮은 사내.

우리를 발견하자, 그는 다급히 크로우 한 짝을 들어 올렸다.

잭과 같은 붉은 색 크로우였다.

"동생 하우엘입니다! 절대 뒤로 보내선 안 돼요!"

쌍둥이 형제의 무력은 홀로 있을 때보다 함께 있을 때 무섭게 빛을 발했다. 둘을 붙여놓으면 아무리 펜리라도 밀릴 게 분명했다.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주저 없이 넬라만 데리고 후퇴할 여자라 그 여지를 줘선 안 됐다.

"로, 록터!"

록터를 발견하자, 하우엘은 전투를 포기하고 잭이 있는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앞으로 내달린 것도 잠시, 그는 흠칫하곤 뒤로 물러났다.

그 앞으로 번뜩이며 지나가는 푸른 화살 다발.

내가 흡혈의 고리로 하우엘의 발을 잡고, 록터가 양을 몰 듯 앞쪽으로 돌진하자 하우엘이 공터 쪽으로 등을 돌리고 도망갔다.

우리와 붙을 생각조차 없는 모습.

저래서 두 형제는 잡기가 까다로웠다. 불리하다 싶으면 일단 도망쳤다가 힘을 합쳐서 다시 오거나, 암습을 해대거든.

"아깝네."

작은 배낭에서 꺼낸 물주머니를 집어넣으며 입맛을 다셨다.

하우엘의 특성은 산화독(酸化毒).

그 독의 약점을 불시에 공략하고 '격발'을 사용해 제거할 기회를 잡으려고 했는데, 상대가 록터이다 보니 그 거리조차 주지 않았다.

전력으로 쫓고 있지만, 거리가 더는 좁혀지지 않았다.

"잭과 싸우면서 눈에 띄는 점 없었습니까? 무기나 장신구 같은 거요."

"반지. 놈의 반지에서 빛이 짙게 흘러나왔다. 그 뒤로 힘이 강해지더군."

그럼 쌍둥이 동생인 하우엘에게도 그와 비슷한 물건이 있을 것이다.

"혹시 모르니 이거 챙기세요."

코룬 강에서 떠온 작은 물주머니 두 개를 록터에게 건넸다. 기습적으로 산화독을 써올 것을 대비한 것이었다.

록터도 산화독의 약점을 들었던 터라 허리춤에 물주머니를 달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스스스스스―

우거진 풀들이 우리 몸을 무수히 때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땅에 갈라지고 푹푹 파였다.

전력을 다한 질주.

우리는 순식간에 인기척으로 가득 찬 나무숲과 마주했다. 수많은 발자국과 흔적이 나무숲 너머와 이어져 있었다.

하우엘이 나무숲 쪽으로 사라진 순간,

"록터 펠리스다! 놈이 이곳에 나타났어!"

하우엘이 고래고래 록터의 존재를 알리며 모두에게 경고를 날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숲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인기척들이 우리 쪽으로 쏠렸다.

그 거센 파도가 우리를 휩쓴다.

[사냥꾼들이 수천은 될 거야. 주술사도 수십 명이 넘고… 제발 도와줘. 마스터를 구해죠.]

우리를 잡기 위해 몰려드는 존재들.

많다.

소름이 돋는다.

저 안에서 칼을 구해서 나올 수 있을까?

그건 전적으로 록터의 의지에 달렸다.

"버틸 수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인 록터는 내가 준 단검과 빛바랜 검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칼과 약속했다. 그게 죽음이라도 빚을 갚겠다고."

[멋진 말이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군.]

"...."

왠지 이 꼰대와 록터가 잘 어울릴 것 같단 말이지.

난 말 없이 록터에게 호각을 건넸다. 엘튼의 피로 얼룩진 호각.

록터에게 바톤이 넘어갔다.

호각을 입에 문 록터의 표정은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피투성이, 엉망이 된 몰골, 그의 손에 부러진 검들이 지금까지 몇 자루나 될까?

코룬 강에 들어선 이후 잠을 자봤을까?

몰골은 당장 쓰러질 것처럼 지쳐 보였지만,

"여긴 내게 맡겨라."

그는 덤덤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마 이번 일이 끝나면 몇 날은 쓰러져서 지낼 것 같았다.

"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록터가 고개를 끄덕이자, 난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반대 숲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록터는 두 눈을 지그시 감고 호흡을 몇 차례 고르더니 눈을 부릅뜨며 볼을 힘을 줬다.

삐이이이이이이익―!

날카로운 호각이 숲 전체를 깨웠다.

잠시 후, 찌릿찌릿한 살기가 쏟아졌다.

록터는 짓쳐 오는 인기척의 파도에 몸을 던졌다.

헤치고 나온 나무숲.

드넓은 공터가 시야에 밟혔고, 눈앞으로 무장을 갖춘 수백의 사냥꾼이 돌격해오고 있었다.

베테랑 사냥꾼들.

"록터 펠리스다!"

"100만 골드가 눈앞에 있다!"

"죽여―!!!!!!"

뒤로 빠진 하우엘이 록터를 가리키며 죽이라 외치자, 다른 사냥꾼 무리도 눈치를 보며 록터를 크게 포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스윽―

록터는 시야를 꽉 채운 머릿수를 보며 양팔을 천천히 늘어트렸다.

오늘따라 검이 무겁다.

하지만 괜찮다.

복수만큼 의미 있는 전투였으니까.

"와라."

앞을 노려보며 두 개의 검을 들어 올렸다.

모든 시선이 록터 펠리스에게 쏠린 순간이었다.

* * *

"록터 펠리스가 나타났습니다."

[알렉스는?]

카멜의 물음에 주술사가 하우엘을 바라보자, 하우엘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와 함께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황금빛의 주인도 나타난 것 같습니다."

[잭을 불러.]

"신호를 보내도 응답이 없습니다."

"혀, 형은 살아있어! 이걸 보라고!"

하우엘은 착용한 붉은 색감의 크로우를 내밀었다. 형제에게 한 짝씩 주어진 크로우는 원래 두 쌍이 한 세트였는데, 카멜이 하나씩 나눠준 고대 아티팩트였다.

다마스커스 크로우.

하우엘의 산화독에 닿아도 손상되지 않는 단단한 무구로, 두 쌍은 서로 공명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잠시 통신구에 침묵이 감돌았다.

잠시 후,

[헌트의 지원군이 왔다면 잭이 위험하다. 하우엘, 당장 잭과 합류해라.]

"다, 당장 가겠습니다!"

[주술사 한 명과 반다이크를 붙여라. 헌트의 지원군이 어떤 이들인지 파악하고 보고해. 그리고 제거할 수 있다면 전부 제거해라.]

"충!"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하우엘은 주술사와 주술 인형을 대동하고 잭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토템 작업은?]

"지시만 내려주시면 됩니다."

[카스펠로.]

"마, 말씀하십시오!"

주술사를 이끄는 우두머리, 카스펠로는 주군의 부름에 허리를 숙였다.

로브 자락 사이로 드러난 주름진 얼굴은 흥분으로 물들었는데, 주인이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는데 오는 희열감이었다.

[토템 사용을 허락한다. 그 자리에서 록터와 알렉스의 목을 가지고 와라.]

"충!"

[일을 성공시킨다면 원로의 자리를 약속하겠다. 렌구아의 운이 다한다면… 네가 마스터에 오를 수도 있겠지.]

"바, 반드시 성공시키겠습니다!"

허리를 펴자 주술사들이 앞다퉈서 카스펠로에게 다가와 축하 메시지를 건넸다.

권력의 중심이 될지 모르니, 지금부터라도 환심을 사려는 모습이었다. 서로에게 배타적인 흑주술사들이 먼저 다가올 만큼 주군이 제시한 약속은 파격적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토템을 발동시켜라."

카스펠로는 노회한 만큼 재빨리 감정을 추스르고 지시를 내렸다.

대가를 생각했을 때 이 임무가 절대 쉽지 않을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우엘이 사라진 숲을 잠시 바라보곤 주변 상황을 살폈다.

록터 펠리스의 등장으로 모든 사냥꾼의 관심이 100만 골드인 그에게 쏠린 상태였다.

통제를 하던 이도, 통제를 받던 이도 모두 록터 쪽으로 몰려간 상태.

이곳에는 주술사들과 반다이크 그리고 피투성이로 꿈틀대고 있는 칼 바스티인이 전부였다.

"칼 바스타인의 기억을 뽑을까요?"

[그자보단 록터와 알렉스의 기억이 더 필요하다.]

"알겠습니다."

카스펠로가 손짓하자, 반다이크 한기가 느릿느릿 쓰러진 칼 앞으로 다가왔다.

강철로 덧씌워진 거대한 주먹을 내세우며 그대로 칼의 머리를 내리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끝인가.'

가슴을 옥죄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위기 상황에 느껴보는 어색한 평온함.

칼은 이 감각이 위기를 넘어 죽음에 도달했을 때 찾아오는 감각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다가오는 주먹을 보며 힘없이 두 눈을 감았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

세찬 바람이 그 앞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칼, 오랜만이네요?"

"…아."

천천히 뜬 두 시야에 눈부신 황금빛이 비쳐 보이자, 나직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온 세상이 황금빛 물결이다.

그 흐릿해진 시야로 천천히 익숙한 얼굴이 다가왔다.

다소 변했지만, 저 매서운 눈매.

장난이 깃든 미소.

"…아서?"

"함께 가시죠."

그가 내민 손을 힘겹게 잡고 그 등에 업혔다. 아서의 목을 한 팔로 꽉 움켜잡으며 칼은 사라진 압박감의 이유를 알게 됐다.

아서 클레이튼.

녀석이 곁에 온 순간 위기가 사라졌다.

"…날 구하기 위해 온 거냐?"

"우린 한 팀이잖아요."

"그랬던가...."

"헌트(Hunt)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136화 격발(擊發)

칼의 구출 작전은 간단했다.

현상금 100만 골드인 록터를 미끼로 던져서 모든 이의 이목을 끌게 한 뒤 주술사들을 기습해서 칼을 빼내 올 계획이었다.

'반만 성공했네.'

칼을 둘러업은 나는 짧게 혀를 차곤 황금빛으로 가려진 주변을 둘러봤다.

눈부시게 빛나는 빛무리.

최대출력으로 시야를 가리고, 칼을 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았다.

'주술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성력은 흑주술사들의 천적인 능력이라 기습만 완벽했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하지만 타격은커녕 다급히 '격발(擊發)'을 사용해 주술사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켰다.

죽기 전전에 놓인 칼을 봤기 때문이다.

상당한 거리였음에도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서 반다이크를 날려버리는 데 두 호흡이면 충분했다.

엄청난 폭발력과 가속도.

잠력을 터트려 육체적 한계에서 벗어나는 격발(擊發)은 확실히 대단했다.

다만, 그 폭발의 반동을 받아내는 육체는 터무니없이 약했다.

[잠력이 담긴 그릇도 하찮지만, 몸뚱이는 더 하찮다.]

"잘 알거든요."

칼 앞에선 티를 내지 않았지만, 반동의 대가로 난 지금 한쪽 발목이 틀어져서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문양의 힘을 최대로 터트린 건 레토의 조언대로 회복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칼을 업고 도망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칼도 마찬가지.

상처가 위중해서 그도 버틸 힘이 필요했다.

등 뒤에서 꿀떡꿀떡 액체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넬라에게 얻어온 특제 포션을 칼이 복용하는 소리였다.

'조금만 더.'

뒤틀린 발목이 빠르게 잡히고 있는데, 레토가 육체 정보를 알려왔다.

[격발 사용은 5번 이하, 복잡한 움직임은 삼가해라. 의식을 잃거나, 온몸이 뒤틀릴 수 있다.]

"5번이라 애매하네요."

[신명 각성 중이라 이 정도다. 평소였다면 발목 하나로 안 끝났다.]

신명 각성이라....

록터 펠리스를 사냥감으로 지정하고 부여받은 힘을 말하는 것 같았다.

'격발을 총알로 비유하면 앞으로 4발인가.'

탄창에 넣은 다섯 발의 총알 중 한 발을 사용했다.

앞으로 남은 총알은 네 발.

아직은 여유가 있다.

발목을 까닥거리니 시큰거리는 고통이 사라졌다.

주술사들이 빛으로부터 다급히 물러난 것을 봤으니 좀 더 여유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피, 피해! 당장!"

칼의 다급한 경고가 날아왔다.

위기 감별사의 경고다.

주저 없이 몸을 날렸다.

빛을 뚫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불쑥 튀어나와 주먹을 내질렀다.

쾅! 콰아앙!

"...!"

칼이 있던 자리로 거대한 주먹이 연달아 내리꽂혔다.

하나, 둘, 셋, 넷.

삽시간에 반다이크 네 기가 주변을 감싸더니 사정없이 돌격해왔다.

황금빛을 쏟아냈지만, 철갑으로 무장된 주술 인형들에겐 고대 문양의 힘이 먹히지 않았다.

"뒤다! 조심해!"

칼의 신호에 시선을 돌리니, 남은 다섯 기가 퇴로를 막아선 채 달려오고 있었다.

눈 깜짝할 새에 아홉 기의 반다이크가 포위망을 좁혀왔다.

"이 새끼들, 반응이 왜 이렇게 빨라!?"

예상과 다른 움직임이다.

통제가 없으면 빈 깡통이나 다름없는 주술 인형들이라, 주술사들 머리 위로 황금빛을 집중해서 쏟아냈는데, 인형의 움직임을 보니 빛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모습이었다.

성력에 노출됐다면 주술사들도 섣불리 힘을 쓸 수 없을 텐데?

주술사 쪽을 확인해보고 싶었는데,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

사방이 철갑쟁이들이다.

훅 올라온 먼지 위로 매서운 주먹들이 허공을 뒤덮었다.

당한다.

"빠, 빠져나가!"

두 손이 묶인 상태라 잡히면 위험해질 것 같아서, 결국 판단을 내려야 했다.

"꽉 잡아요!"

"...?"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다.

호흡, 날숨에 따라 근육 전체가 수축하며 단단하게 응축했다.

호흡과 근육을 동화시키는 작업.

잠력 폭발 기본식, 격발(擊發).

후-

호흡을 내뱉으며, 그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으… 으아아악!"

몸이 움직인 순간 칼에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질주하는 풍경이 눈동자로 빨려 들어올 듯 다가왔다.

엄청난 돌파력!

그 앞에는 반다이크 두 기가 가로막고 있었다.

"…큭!"

[복잡한 움직임은 네게 아직 무리다.]

방향을 틀면 발목이 부러진다.

오직 무식한 돌파뿐이다.

이를 까득 깨물고 몸을 살짝 비틀었다.

빌어먹을, 인형 새끼들.

"으아아아! 다 뒈져! 이 새끼들아!"

"이, 이, 이 미친놈아!"

숄더 차징!

내 어깨와 철갑을 두른 거대 인형 반다이크가 그대로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우, 우웩!"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 핏덩이가 울컥 흘러나왔다.

온몸이 박살 나는 것 같았다.

한 발을 더 내디디니, 반다이크가 바닥에 처박혀 데굴데굴 굴러갔다.

휘청이는 중심을 바로 잡고 다시 몸을 앞으로 튕겼다.

흐느적거리는 왼팔이 보인다.

부러졌다. 시발.

"칼? 괜찮아요?"

"...."

뒤에서 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충격이 상당했는데, 설마 이 정도로 죽진 않겠지?

그를 살필 여유가 없었다.

다른 한 기가 사납게 달려와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으니까. 자세를 낮추고 벼락처럼 주먹 안쪽을 파고들었다.

주먹이 살벌하게 얼굴을 살짝 스쳤는데, 다시 칼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살아있네.

품을 파고든 순간, 반다이크의 머리를 밟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쾅-! 거센 충격파가 터지며 짓밟힌 반다이크가 바닥에 처박혔다.

나와 칼은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카롭게 치고 올라갔다.

멀찍이서 내려다보니 숲 쪽으로 떨어질 듯 보였다.

추락은 두렵지 않다.

레토가 치료해줄 테니까.

다만, 칼의 생각은 달랐다.

"으아아악! 이 무식한 새끼야!!"

"그게 은인한테 할 말입니까?"

칼의 비명을 뒤로한 채 부러진 어깨를 붙잡고 염원의 반지를 발동시켰다.

염원의 그릇은 생존.

생존의 기운이 레토니칼스의 심장과 함께 육체를 무서운 속도로 복구하기 시작했다.

새빨간 빛과 함께 부러진 뼈가 맞춰지고, 파괴된 조직이 새로 돋아났다.

'진짜 괴물이 따로 없네.'

평소보다 몇 배는 더 빠른 회복 속도였다.

레토 말로는 신명 각성으로 부여된 육체 강화 효과 외에 신명 목록의 증폭 효과가 추가로 있으리라 언급했는데, 내 신명 목록 안에 회복과 관련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예측이었다.

아직 정확한 신명 목록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이라, 일단은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고 있었다.

레토는 신명에 관한 계약인 만큼 페널티가 있을 수 있으니 함부로 쓰지 말라고 했지만, 아쉬운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지금껏 페널티에 관한 것을 느껴본 적도 없었고 말이다.

순간,

"…윽!"

머리가 핑-돌며 의식이 흐려졌다가 돌아왔다. 두통과 함께 짙은 무력감이 찾아왔다.

격발 효과가 끝난 것이다.

[앞으로 3번이다.]

의식을 잃을 수 있다더니 이런 식으로 맛이 가는 건가?

고개를 털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발아래 쪽에서 붉은 뭔가가 휘리릭 다가와 발목을 휘감았다.

검붉은 나무줄기.

고대 문양을 터트리자, 줄기는 '케엑!'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잿가루로 화했다.

흑주술이다.

밑을 내려다보니 엄청난 수의 검붉은 나무줄기가 우리를 옭아매기 위해 솟구쳐 올라왔다.

끔찍하게 많다.

"더, 더 위로 올라가!"

"그게 제 마음대로 됩니까?"

짓쳐 오는 나무줄기 일부를 밟고 다시 허공을 올랐다.

고대 문양을 터트리자, 줄기들은 다행히 다가오지 못하고 괴성과 함께 녹아내렸다.

위협이 사라지고, 뒤늦게 밑을 내려다보니 드넓은 공터를 반죽처럼 덮은 거대한 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어스름 낀 검은 막(膜)이다.

언제 생긴 거지?

엄청난 속도로 부풀어 오르며 주변을 뒤덮었는데, 우리가 추락한 지점까지 검게 물든 상황이었다.

'이거....'

허공을 채우고 올라오는 막을 향해 고대 문양을 터트렸다.

그런데,

'안 통해?'

쏟아지는 황금빛이 막에 밀려서 튕겨 나왔다. 황금빛 자체를 차단하는 것 같았다.

"으아아악! 자, 잠깐!"

"꽉 잡아요."

추락한다.

떨어지는 위치에는 이미 숲을 뒤덮은 검은 막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대로 들어가도 괜찮나?

"별 거지 같은 걸 들고나왔네."

추락 직전 한곳을 노려봤다.

검은 막 중심부에 해골 지팡이를 든 핏빛 망토의 주술사가 보였다.

저자를 중심으로 주술을 외우고 있는 십 수명의 주술사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니, 공터 군데군데 검은 빛이 흘러나와 막을 키우고 있었다.

"3발밖에 안 남았는데...."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고 시위를 쭈욱- 잡아당겼다.

잠력을 터트리며 격발(擊發)의 방아쇠를 당긴 순간, 소환된 푸른빛 화살의 크기가 무럭무럭 자라나더니 투창 크기로 변했다.

최대출력에 이른 시간은 단 1초.

투쾅-!

인챈트, 관통을 부여한 거대한 화살을 주술사 무리에게 날리고, 성력을 부여한 최대출력의 한 발을 다시 준비하려는 순간, 지독한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의 신경 다발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네 그릇으론 한 발이 한계다.]

"…큭! 빌어먹을!"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고, 추락에 대비했다.

번쩍-

화살이 검은 막을 때리는 순간, 우리는 숲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추락하는 동안 황급히 보이는 나뭇가지에 손을 뻗어 붙잡았다.

부러지고, 부러지고 또 부러지고.

손바닥이 찢어지고 터지며 피로 온몸이 흥건해질 때쯤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결국, 충격을 완화하고 가까스로 나뭇가지를 움켜잡고 멈추는 데 성공했다.

온몸이 부서진 듯 아팠지만, 나보단 칼이 걱정됐다.

들리던 비명이 어느 순간 뚝 끊겼기 때문이다.

"칼."

"…시발, 내가 네 등에 또 타면 인간이 아니라 개새끼다."

"괜찮은 것 같네요."

피식 웃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하늘을 감싸고 있던 검은 막이 출렁대기 시작했다.

케에에에엑-!

기괴한 비명이 흘러나오며 서서히 옅어지기 시작한다.

저 너머 자신이 쏜 관통의 화살이 막을 찢고 주술사 무리에게 쇄도하고 있었다.

푸른 빛이 번뜩이며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마, 막… 끄아아악-!"

저 멀리서 주술사의 것으로 보이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처리한 거냐?"

"그랬으면 바랄 게 없는데, 마지막 한 발이 너무 아쉽네요."

비명도 잠시, 옅어졌던 검은 막이 다시 짙어지기 시작했다.

하늘이 가려지고 시야가 점점 어두워진다. 난 바닥에 내려와 칼을 잠시 내려놓고 컨디션 회복에 집중했다.

으득!

꽉 씹은 이빨 사이로 핏물이 흘러나왔다.

격발이 끝난 후 찾아오는 후유증은 머릿속이 새하얘질 만큼 고통스러웠다. 레토의 수련으로 고통 내성이 강해진 나조차 견디기 힘들 정도였다.

앞으로 남은 총알은 2발.

격발의 사용 횟수가 누적될수록 돌아오는 반동은 더욱 강력해졌다.

더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는데.

"물어보고 싶은 게 산더미 같은데, 당장은 이곳을 벗어날 생각부터 하자고. 시꺼먼 게 아주 불길해."

"좋은 생각입니다."

"괜찮나?"

"솔직히 뒈질 것 같습니다. 움직일 수 있겠습니까? 다시 업힐래요?"

"미친 소리 그만해. 다시 업힐 바엔 차라리 날 죽여."

"팔팔해 보여서 좋네요."

넬라에게 위급 시 쓰라고 펜리가 준 특제 포션이니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웃음을 흘리곤 허리를 펴고 천천히 일어났다.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가만히 서서 몸이 회복되길 기다렸는데, 칼은 보채지 않고 내가 움직이길 기다렸다.

밤도 아닌데 어둠이 서서히 찾아온다.

검은 막 안에 들어온 순간 고대 문양이 빛을 잃고 무반응을 보였다.

말없이 주술사들이 있는 방향을 바라봤다.

주술 인형까지 다수 보유한 전력이다.

이곳에서 주술사와 싸우면 필패다.

서둘러 벗어나야 했다.

'록터는...?'

개안을 이용해 록터가 있는 장소를 찾았다.

록터 펠리스의 오오라.

어둠으로 물드는 숲속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백색 오오라가 보인다.

"가죠."

"방향은 알고 가는 거야?"

"네. 아주 정확히 가고 있습니다."

방향을 잡고 오오라를 쫓아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칼을 무사히 구했으니, 이젠 록터를 데리고 벗어날 타이밍이었다.

137화 금화 인형

"넷은 즉사했습니다."

"쯧. 무능력한 놈들. 나머지는?"

"숨은 붙어 있는데...."

갈가리 찢긴 핏빛 천 조각들이 바닥에 흩날리고 있었다.

둥지의 상징, 핏빛 망토가 무더기로 찢겨 널브러진 흔적이었다.

결계를 뚫고 덮친 푸른 빛의 화살.

의식 중에 휩쓸린 탓에 넷이 죽고, 다섯이 큰 상처를 입어 목숨이 위태로웠다.

보고에 인상을 찡그린 카스펠로는 중앙에 심은 핵심 토템부터 살폈다.

검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투박한 나무 토템.

공터에 심어놓은 모든 토템이 발동 중이란 신호였다. 그 신호에 그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주술사들의 죽음 따위는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토템의 발동 여부.

다행히 의식은 성공한 것 같았다.

딸그락- 딸그락-

그는 지팡이를 흔들며 신음을 흘리는 주술사들에게 다가갔다.

화살의 여파는 끔찍했다.

팔다리가 사라진 이들이 양호해 보일 정도였다.

저주에 특화된 주술사들만 데려온 탓에 치료술을 펼칠 수 있는 이가 없었다.

살려달라고 고통스럽게 외치는 주술사들을 말없이 내려다본 카스펠로가 품에서 금화를 한 움큼 꺼내 주술사들의 몸 위로 뿌렸다.

갑작스러운 금화 세례.

살아남은 주술사들은 뒤로 물러났고, 세례를 당하는 주술사들의 표정은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했다.

"카, 카스펠로님! 왜 이러십니까!?"

"그동안 수고했네. 마지막까지 주군을 위해 모든 것을 태우게."

"살려주십시오!"

카스펠로가 지팡이를 흔들며 주문을 외우자, 금화들이 들썩들썩 움직이더니 다친 주술사들의 육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얼굴과 몸통 그리고 팔다리가 기괴하게 꺾이더니, 이내 새하얀 눈동자를 번뜩이며 무표정한 그들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사라진 팔다리는 어느새 돋아났고, 출혈 역시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대신, 몸에서 탁한 쇳가루 냄새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선 그들의 놔둔 채 카스펠로는 주문을 읊조리며 나무 토템 앞에 편지와 작은 금패를 내려놨다.

편지는 알렉스 마르샤의 체취가, 금패는 록터 펠리스가 일평생 품고 있던 단장패였다.

그는 지팡이를 토템 앞에 내리꽂으며 주문을 마무리했다.

"죽음을 대가로 죽음을 원한다."

검은 막으로 어두워진 공간.

이 공간은 한 명의 절대자와 거래하기 위한 결계의 틈새였다.

순간 허공에 새하얀 눈매가 비추더니 반달처럼 크게 휘었다.

허공 속에서 나타난 존재감.

그 모습에 주술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죽은 자들의 왕, 제스밀로.

죽음이란 단어로 유희를 즐기는 절대자.

"대상은 알렉스 마르샤와 록터 펠리스. 금화 인형들은 내 부름에 답하라."

토템 앞에 놓인 편지와 금패가 잿가루로 화해 사라진 순간, 멍하니 서 있던 주술사들이 괴성을 지르며 어디론가 달려가기 시작했다.

주술사라 생각하기 힘든 엄청난 속도.

그리고,

콰직- 콰지직-

나무와 바위가 그대로 뜯겨 나갈 정도로 단단한 육체였다.

남겨진 금화들이 굴러다니자, 주술사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하며 물러났다.

죽은 자들의 왕, 제스밀로가 탐욕으로 타락시킨 영혼들로 빚어낸 금화 인형.

제스밀로의 영토 안에 뿌려진 타락한 금화들이 하나둘 깨어나며 매개체 사냥을 시작했다.

* * *

"놈이 지쳤다!"

"100만 골드가 코앞이다. 더 몰아쳐!"

록터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닦아냈다. 검자루를 쥔 양손이 덜덜 떨렸다. 손가락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커억… 헉… 헉."

거친 숨도 진정될 기미가 안 보였다.

훈련 시에 그는 언제나 한계에 도전해왔다. 팔을 들어 올릴 수 없을 때까지, 검을 쥘 수 없을 때까지, 그리고 의식을 잃을 때까지.

늘 한계에 도전하는 지독한 훈련을 해왔고, 그 훈련들은 땀방울처럼 모여 오늘의 전투를 지금껏 버티게 했다.

지독하다.

그리고 강했다.

겁먹은 개들이 크게 짓는 것처럼 사냥꾼들이 악악 외쳐대며 막상 덤벼들지 못하는 이유다.

록터는 검에 기댄 채 중심을 잡았다.

쿡쿡 찌르는 통증에 몸을 살피니, 화살 서너 발이 어깨와 허벅지에 박혀 있었다. 검을 휘둘러 화살대를 잘라낸 뒤 천천히 허리를 폈다.

'피곤하군.'

죽음이 코앞까지 들이미는데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지치고 힘든 날이었다. 아니, 가장 힘들었다.

눈앞에 쌓인 시체 더미가 보인다.

하지만 저 너머로 자신을 포위한 이들이 더 많았다.

그렇게 죽였는데도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시련을 준 사내를 떠올렸다.

[칼을 데려올 때까지만 버텨요.]

아서 클레이튼.

자신에게 희망이란 감정을 선물해준 사내. 그래서 단단한 바위처럼 버티며 기다렸다.

산사태처럼 휘몰아치는 사냥꾼들의 공세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피로 점철된 대지를 구르고, 기고, 날뛰며 자리를 지켰다.

칼은 천천히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렸다.

"쳐!"

"으아아아아!"

어두워진 주변.

갑작스러운 변화였는데, 이를 제대로 인지한 이는 없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100만 골드가 있으니 당연했다.

죽인다. 그리고 빼앗는다.

사냥꾼들의 눈은 탐욕으로 이글거렸다.

그리고 그 탐욕에는 록터의 죽음이 아닌 다른 것이 반응을 보였다.

끄아아아악-!!!!

"...!"

눈앞에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비명이 들렸다.

그 소리가 너무도 끔찍하고 소름 돋아서 록터는 휘두르는 검을 멈춘 채 뒤로 물러났다.

"...?"

짓쳐오는 파도처럼 사냥꾼들이 뒤에서부터 집단처럼 쓰러지기 시작했다.

쓰러진 이들 사이로 수없이 튀어 오르는 황금빛 물체의 향연.

수백 수천 골드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 금화다!"

"비켜!"

일부 사냥꾼들은 등을 돌리곤 떨어진 금화를 줍기 위해 달려들었다. 그 모습에 다른 사냥꾼들도 허겁지겁 바닥에 떨어진 금화를 줍기 시작했다.

그것도 잠시,

"…컥!"

금화를 밟은 사냥꾼이 피를 토하며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주변에 서 있던 사냥꾼들이 픽픽 힘없이 허물어졌다.

"뭐지...?"

웬만한 일에 흔들리지 않은 록터도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자신을 위협했던 사냥꾼 중에 서 있는 이가 없었다.

포위를 주도했던 베테랑 사냥꾼부터 뒤에서 눈치를 보던 사냥꾼들까지 삽시간에 당했다.

전멸.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데구르르-

순간, 그의 앞으로 금화들이 굴러왔다. 그 접근을 지켜보는 순간, 금화들이 튕겨 오르며 록터를 공격했다.

카카카캉-!

수십 개의 금화를 튕겨내며 그는 천천히 물러났다.

베어지지 않았다.

단단했다.

끄으으....

끄아아악!

뒤늦게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금화들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이리저리 튀어 오르며 사냥꾼들의 몸을 파고들었다.

사냥꾼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처절한 비명.

뒤틀린 경련.

그리고 침묵.

고개를 처박은 그들은 죽은 듯이 침묵했다. 격렬한 전장이 공허한 무덤으로 변해버렸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단검을 휘둘렀다.

"록터! 접니다!"

움직이던 검이 멈칫했다.

시선을 옮긴 곳에 아서가 서 있었다. 검은 내려놓은 록터의 표정에 처음으로 안도가 깃들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이가 왔다.

록터의 시선은 아서의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린 칼에 닿아있었다.

"칼을 구했군."

"대화할 시간 없습니다! 어서요!"

"상황이 이상하다."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다급히 움직이며 손짓하자, 따라오던 록터가 신음을 흘리며 주저앉았다.

긴장이 풀리자, 근육마저 풀린 모양이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 록터를 다급히 부축하고 있는데, 숲이 들썩들썩하더니 검은 인영들이 튀어나왔다.

새하얀 눈동자를 본 순간, 난 다급히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빌어먹을, 깡통 새끼들!"

푸른 화살이 번뜩이며 쏘아졌다.

관통이 실린 세 발의 화살이 앞서 돌격해오던 이들의 가슴을 때렸다.

타앙-!

둔탁한 쇳소리.

화살이 가슴에서 터지고, 인영들은 바닥에 자빠지며 뒹굴었다.

그것도 잠시, 엎어졌던 이들이 꿈틀대더니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가슴은 멀쩡했다.

관통이 실린 화살을 날렸지만 버틴다.

쇳덩이보다 단단한 것 같았다.

"하, 어째 상황이 점점 더 빡세지냐?"

쓰러진 사냥꾼들을 둘러본 나는 황급히 록터를 둘러업으려고 했다.

시간이 없었다.

록터가 미간을 구기며 거부 반응을 보였다. 기사로서 수치스러운 자세였기 때문이다.

"혼자 갈 수 있다."

"칼처럼 기절할래요?"

"설마...."

"절대 업히지 않겠다고 반항해서요."

"...."

난 거칠게 록터를 어깨에 매달았다.

왼쪽에는 칼은 오른쪽에는 록터를 들쳐멘 상황.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하지만,

[제스밀로의 기운이 점점 짙어진다. 도망가라.]

레토가 아까부터 도망가라고 강력히 경고를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잡히면 죽는다고 확정하듯 말했다.

아마 저것들 때문이겠지.

"저놈들은 뭐지?"

"금화 인형입니다. 설명은 나중에 드릴게요."

내가 뒤쪽을 가리키자, 시선을 돌린 록터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그어어어어어-!

쓰러졌던 사냥꾼들이 하나둘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킨다.

수십, 수백.

갈대숲처럼 빽빽이 선 그들의 새하얀 눈동자 번뜩이며 록터를 노려봤다.

록터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달려라."

"…네?"

"달려!"

"이제야 말이 통하네."

난 짧게 혀를 차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쿠쿠쿠쿠쿠쿵-!

단단한 발이 대지를 부딪치는 소리가 뒤쪽에서 천둥처럼 들려왔다.

수가 징그럽게 많다 보니,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소리가 울렸다.

시발, 완전 망했다.

아무리 생존이 컨셉인 세계관이라지만, 이딴 식으로 일을 벌이면 어떻게 살아남으라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시발놈아!"

"...?"

누군지 모를 신에게 욕설을 한바탕 퍼부었다.

그것도 잠시, 숲을 내리쬐던 빛이 사라지며 색감이 짙어지자,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

어둡다.

이젠 시야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

게다가 이 공간에선 방향 감각이 흔들렸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떨어진 느낌.

시야마저 흐릿하니 잘못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었다.

방향을 잃으면 개떼처럼 일어난 금화 인형에게 포위될 테니, 결론은 개죽음이다.

'주술사가 너무 많더라니.'

엘튼이 이곳 전력을 말해줬을 때 이상함을 눈치챘어야 했다.

설마, 카멜이 이곳에 죽은 자들의 영토를 소환할 줄은 몰랐다.

죽음을 대가로 죽음을 원하는 제스밀로의 거래 공간.

그중 금화 인형이 나왔다.

금화 인형들은 한번 표적을 정하면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금화 인형이 날 노렸으니, 그 표적 대상이 나인 것 같고.'

아마 록터도 그 대상에 들어갈 확률이 높았다. 카멜이 진정 제거하고 싶은 이가 록터였으니 말이다.

금화 인형.

소설 속에서 그놈들을 상대할 방법을 떠올려봤다.

금화처럼 단단한 내구력을 지닌 좀비 괴물이라고 보면 된다.

'붙으면 절대 못 이긴다.'

일단, 머릿수가 더럽게 많았다.

물리력만 갖춘 지금 멤버로는 최악의 상성이나 다름없었다.

저 많은 수를 상대하려면 어둠과 상반되는 힘, 빛(光)의 힘이 무조건 필요했다.

내 속성인 성력은 빛(光)속성과 다르다.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 잡을 뿐, 완벽한 어둠에겐 효과가 없었다.

게다가 금화 인형은 관통 화살도 버티는 괴물들이다.

"레토!"

[놈의 영토를 벗어나는 데 집중해라. 이곳에선 절대 이길 수 없다.]

"나가면요?"

[빛을 찾아라. 보름달이길 바라야겠군.]

금화 인형은 어둠으로 똘똘 뭉친 매개체라 빛에 약했다.

태양 빛이 가장 확실한 카운터이지만, 달빛도 그 힘을 약화시킬 수 있었다.

이곳을 벗어날 때쯤이면 밤일 것이다.

'정말 레토 말대로 보름달이 뜨길 바래야겠네.'

그 전에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난 두 눈을 지그시 감고는 부릅떴다.

자신에게 방향을 알려줄 존재가 한 명 있다.

펜리 체이서.

개안으로 그녀의 신명 오오라를 찾았다.

보인다.

방향을 틀고 미친 듯이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울리던 기괴한 울음이 잠시 후 사방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포위하려는 건가?

격발을 사용할까?

아니, 이제 두 번밖에 안 남았다. 격발은 최후의 보루였다.

난 이를 악물고 전력으로 몸을 앞으로 튕겼다.

잠시 후,

"으아악! 나왔다!"

어두웠던 공간이 환하게 밝아지며 어스름이 낀 숲이 시야에 잡혔다.

밤이 찾아왔다.

"날 내려줘라."

"으으으...!"

둘의 소리를 무시한 채 난 밤하늘부터 살폈다.

내리쬐는 은은한 빛이 보인다.

차가운 기운이 담긴 빛(光).

"진짜 최악은 아니네."

나를 반긴 건 푸르도록 시린 '보름달'이었다.

138화 헌트(Hunt)

검은 막에서 벗어나 완연한 숲에 들어섰을 때, 잠시 멈춰서서 뒤쪽을 살폈다.

달빛 아래 옅게 비친 나무숲이 보였다. 그중 나무숲 일부가 검은 막에 뒤덮여서 보이지 않아 바닥을 살피니, 막(膜)이 더는 퍼지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죽은 자들의 영토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한데, 금화 인형들이 바깥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어둠이 깔린 장소에선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을 거다.]

"달빛 아래서는요?"

[효과가 있다. 다만 본능적으로 빛을 피해 표적을 쫓을 테니, 언제 어디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른다. 포위되기 전에 움직여라.]

"상대하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습니까?"

[의식에 쓴 주요 물품을 파괴하는 방법이 있지만, 별로 추천해주고 싶지 않다.]

그건 나도 알고 있는 방법이다.

의식에 쓴 물건이 뭔지도 모르고, 파괴하려면 저 어두운 공간으로 다시 들어가야 하니 불가능에 가까웠다.

또 다른 방법을 물었지만, '네 능력으로는 없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괴한 괴성이 숲 전체에서 흘러나왔다. 벌써 바깥 어딘가로 나와 움직이는 건가?

결국 표적을 쫓아 움직일 테니 이곳도 곧 위험해질 터였다.

등을 돌리고 달렸다.

체력을 아끼지 않았기에 그 속도는 무시무시했다.

최대한 금화 인형들과 거리를 벌리려고 하는데, 양쪽 어깨에 매달린 이들이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특히, 막 정신을 차린 칼의 반응이 무척 거셌다.

"제정신이야? 날 기절시키다니...!"

"아직 달릴 상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다른 방법도 있었잖아!"

"업히기 싫어하셔서 이렇게 둘러멨습니다. 이건 괜찮죠?"

"원래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어쩌다가...."

"난 괜찮지 않나?"

"록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어깨가 어지간히 불편한 모양이다.

덩치 둘을 둘러메고 달리는 내 생각은 안 하니?

하지만 불편하더라도 당장은 휴식을 취하는 게 맞았다.

상처만 치유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둘의 체력은 오랜 도주 생활로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게다가 연달아 적과 부딪치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지금 상태로 더 무리했다가 자칫 빈사 상태에 빠지면 곤란했다.

빈사 상태에 빠져서 하는 그 지랄 같은 훈련을 해봐서 안다.

그 상태에 빠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체력은 포션으로 채울 수 없는 부분이라, 이렇게라도 쉬게 해야 했다.

둘을 위해서라기보단, 나를 위해서였다.

격발(擊發).

터트리면 놀라운 성과를 만들어내지만,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페널티가 존재했다. 사용 후 후유증도 만만찮으니 안전을 책임져 줄 보험이 필요했다.

"상황이 더 빡세질 겁니다. 잠시라도 쉬세요."

"저들을 상대할 방도가 있나?"

"금화 인형을 말하는 거라면 당장은 없습니다."

"솔직해서 좋긴 한데, 불안하군."

그어어어어―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기괴한 인기척.

칼도 뒤늦게 심각한 상황을 인지했는지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위기 감별사가 있으니 기습은 안 당하려나?

"이대로 도망치는 건가?"

"아뇨. 처리해야 할 놈들이 있습니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거든요."

"이곳에서? 누구지?"

"블라이어 쌍둥이 형제."

잭과 하우엘 형제를 언급하자, 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블라이어 영지부터 도주하는 내내 쌍둥이 형제에게 집요히 추적당하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들이 이 근처에 있다고?"

"정확히 제 동료와 전투 중입니다. 그쪽으로 서둘러 가는 중입니다. 오래 못 버틸 것 같거든요."

펜리를 걱정할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하우엘이 주술사와 함께 숲으로 빠지는 것을 봤다.

칼을 구하느라 놈을 막지 못했는데, 하우엘이 잭과 합류했다면 아무리 그림자 왕의 가호를 받는 펜리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두 형제가 호흡을 맞추면 1+1이 아니라 1+4 정도의 무력을 발휘하거든.

동료 얘기가 나오자, 칼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에, 엘튼?! 엘튼은 어찌 됐지?"

"무사합니다."

"고, 고맙다."

"아직 고맙긴 이릅니다. 구하긴 했는데, 거기 상황이 지금은 어찌 변했는지 모르겠거든요."

"알아듣게 설명해!"

달리면서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넬라의 존재.

엘튼을 구하고, 펜리를 불러 잭을 견제한 일. 그리고 하우엘이 곧 잭과 합류할 것이란 것까지.

"우린 뭘 해야 하지?"

조용히 듣고 있던 록터가 진지하게 묻자, 칼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쪽 어깨에서 아저씨들이 그렇게 뜨겁게 쳐다보면 부담스럽다고.

다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두 신명의 주인이 내게 지휘를 바라는 상황이었으니까.

"제게 물어보는 겁니까?"

"우릴 구한 건 너다. 네 지시에 따를 수밖에."

"정확한 전력부터 알아야겠습니다."

"…전력이라."

내 말에 록터와 칼이 자신들이 가진 것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나는 펜리의 오오라 방향으로 빠르게 내달리며 현재 흘러가는 그림 전체를 머릿속으로 빠르게 그렸다.

꼬리를 밟고 오는 금화 인형들.

잭과 하우엘 형제.

그리고 뒤에 남은 주술사 무리와 반다이크까지.

'금화 인형도 학살자의 말 중 하나겠지?'

우리를 잡기 위해 쓴 패이니, 분명 놈도 금화 인형을 염두에 두고 움직일 것이다.

통신구를 통해 학살자가 간접적으로 지휘를 하고 있으니 대치가 길어질수록 상황은 불리했다.

속전속결이 유리하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타이밍?"

"네."

이미 수세에 몰린 상태다.

하지만 내가 가진 패도 만만치 않았다.

5성인 펜리 체이서와 록터 펠리스.

4성 엘튼과 칼 바스타인까지.

대부분 상태가 엉망진창이고 당장 쓰러질 듯 지쳐 있지만, 소설 내에선 모두 한 끗발 날리던 이들이었다.

벼랑 끝에 내몰아도 쉽게 죽을 이들이 아니었다.

나는 더더욱 아니고 말이다.

숨은 전력인 넬라가 치료에 능한 것 같으니 다소 무리하더라도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문제는 정보에 없는 변수인데,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 일이다.

변수가 괜히 변수겠는가.

'당장 할 수 있는 것부터.'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쌍둥이 형제를 사냥할 겁니다."

"사냥?"

그리고 둘에게 머릿속의 그림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헌트로서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건가?'

아직 당사자들의 동의도 받지 않았지만, 뭐 그건 결국 이뤄질 일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거든.

* * *

[헌트의 지원군은?]

"검은 장미 수장으로 알려진 펜리 체이서입니다."

[혈맹 의식에 나온 그 다크 엘프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술 인형을 타고 있던 주술사가 상황을 살피며 통신구에 대고 보고를 하고 있었다.

하우엘을 따라왔던 주술사였다.

잠시 후, 통신구가 붉어지더니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원은 다크 엘프년 혼자뿐인가?]

"당장 보이는 건 그렇습니다."

어깨를 깊게 베인 금발의 다크 엘프가 비틀거리며 물러나는 게 보였다.

쌍둥이 형제의 합공에 위태위태하게 그림자를 소환하며 맞서고 있는데, 그녀를 돕는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가면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림.

하지만 카멜의 생각은 달랐다.

[혼자라면 도망갈 확률이 높다. 그녀가 도망가거든 둘에게 추적하지 말고 바로 나를 찾으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그때 새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희는 어찌할까요?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주군.]

[칼 바스타인은 아직인가?]

[방향을 쫓고 있는데 흔적을 보아, 영토를 빠져나간 것 같습니다.]

[핵심 토템은?]

[제가 품에 지니고 있습니다.]

주술사 카스펠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식을 성공 리에 끝마친 주술사들은 핵심 토템을 지키며 신명의 주인인 칼을 쫓고 있었다.

주군이 알려준 방향대로 칼을 쫓고 있는데, 이미 떠난 듯 흔적에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많던 금화 인형도 하나도 보이지 않은 걸 보니, 영토 안에 표적이 없다는 확신도 강하게 들었다.

[보름달이 떴다. 놈들이 죽은 자들의 영토를 벗어나면 변수가 생길 수 있으니, 쌍둥이 형제와 합류… 잠깐.]

침묵이 잠시 이어지고, 살짝 빨라진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잭과 하우엘에게 당장 그곳을 벗어나라고 전해. 칼 바스타인의 방향이 그쪽과 일치한다.]

"…네?"

[빨리!]

"추, 충!"

주군의 호통에 주술사는 깜짝 놀라 다급히 통신구를 품어 넣곤 주술 인형을 빠르게 움직였다.

은신하고 있던 우거진 숲에서 모습을 드러낸 주술사는 멀찍이서 주술을 사용해 쌍둥이 형제에게 메시지를 날리려고 했다.

나직이 주문을 외우고 있는데,

스스스―

"...?"

위쪽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인기척에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주술사의 눈동자에 시뻘건 불꽃이 투영되었다.

호리호리한 사내의 손에 들린 단검에서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불꽃검 엘튼.

콰작―!

"...!"

주술사 얼굴 위로 단검이 박혀 들었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단검이 박힌 순간, 주술사의 얼굴이 타들어 가더니, 시커먼 시체로 바닥에 굴러떨어졌다.

단검을 갈무리한 엘튼은 날렵하게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부우웅―!

그 위로 스치는 거대한 주먹.

반다이크가 적을 인식하고 주먹을 매섭게 휘둘렀지만, 통제가 사라진 주술 인형은 그저 단단한 인형에 불과했다.

엘튼이 바닥을 스치듯 내려와 인형의 발목을 베어내고, 인형이 자빠진 순간, 그 위에서 사정없이 단검을 찌르기 시작했다.

파파파팍―!

사방에 불꽃이 튀어 올랐다.

로브가 타오르고, 주술 인형의 몸체를 이루는 인주가 새겨진 천도 그을리며 타올랐다.

잿가루만 남은 주변을 둘러보며, 엘튼은 주술사 시체로 걸어가 통신구를 짓밟았다.

"나오셔도 됩니다."

엘튼의 말에 나무 뒤에서 넬라가 조심스레 모습을 드러냈다.

주변을 잠시 둘러본 그녀는 펜리를 바라보더니 다급히 엘튼에게 작은 가방을 건넸다.

가방 안에는 코룬 강에서 떠온 물주머니가 들어있었다.

"힘드시겠지만, 마스터를 도와주세요."

넬라의 부탁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엘튼이 전장으로 질주했다.

사실 부탁은 필요 없다.

자신도 정말 죽이고 싶은 놈들이었으니까.

마스터인 칼을 구하기 위해 호각을 분 순간, 쌍둥이 형제에게 포위당해 놀잇감으로 전락했다.

지독한 상처와 치욕을 당했지만, 넬라의 도움으로 의식을 회복했고, 복수할 기회를 잡았다.

으득―

4성의 오라가 온몸에 실리자, 엘튼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이 찢어지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바람 칼날이 온몸을 베고 지나갔다. 자잘한 상처는 치료됐지만, 여전히 깊은 상처에선 핏물이 배어 나왔다.

피투성이가 될수록, 고통이 가중될수록 놈들에 대한 분노가 커졌다.

단검을 겨눈 엘튼의 눈빛에 살기가 감돌았다.

개새끼들! 다 죽인다!

"…넌!"

"하우엘!"

"칫!"

카카카카캉―!

불꽃검이 하우엘을 노리고 들어가자, 붉은 크로우가 번뜩이며 불꽃검을 쳐냈다.

매서운 합공이 깨지자, 펜리가 사나운 얼굴로 잭에게 크로우를 벼락같이 휘둘렀다. 동시에 그녀의 루비 벨트가 빛나며 마력을 쏟아내자, 반리가 그림자에서 검은 가시를 뽑아 두 형제를 공격했다.

"어딜!"

잭의 바람 칼날이 그림자 가시를 모조리 베어내고, 크로우와 크로우가 벼락처럼 부딪치며 사라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엄청난 공방 사이로 잭이 하우엘에게 신호를 보냈다.

"버러지들, 뒈져!!!"

불꽃검을 쳐낸 하우엘이 잭에게 붙으며 거칠게 기합을 터트리자, 그 중심으로 바람이 퍼져나갔다.

치이이익―!

옷깃이 부식되자, 펜리는 다급히 물러나며 외쳤다.

"독이다! 피해!"

산화독(酸化毒).

아서가 경고했음에도 몇 차례 당한 지독한 독이었다.

바람의 도움을 받고 움직이는 독이다 보니 회피하는 방향이 정해졌는데, 그때마다 잭과 하우엘의 합공을 받고 상처를 입었다.

자신조차 피할 수 없는 공격을 저 인간이 피할 수 있을까?

걱정도 잠시, 엘튼이 물주머니를 허공에 던지더니 단검으로 찢기 시작했다.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자, 허공에 녹색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허무하리만큼 산화독이 거품처럼 녹아내렸다.

"어, 어떻게!?"

하우엘의 당혹스러운 외침도 잠시, 재차 물주머니를 터트리는 엘튼을 보며 표정을 굳힌 쌍둥이 형제는 시선을 주고받곤 각자 착용한 반지의 기운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산화독의 약점을 알고 있다.

적어도 저놈과 저 다크엘프년은 확실히 제거해야 했다.

잭은 붉은빛, 하우엘은 푸른 빛이 반지에서 흘러나왔다.

주인에게 수여 받은 고대 아트팩트.

붉은 완력과 푸른 민첩의 반지.

합공 자세를 잡았다.

왼쪽 크로우, 오른쪽 크로우.

하나가 된 듯한 자세를 잡고 쌍둥이 형제는 벼락처럼 질주해왔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속도.

펜리의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건 아서에게 들은 바 없던 힘이었다.

"조심...!"

말이 끝나기 전에 두 쌍의 크로우가 번뜩이며 사라졌다.

139화 헌트(Hunt) (2)

카앙―!

"…큭!"

펜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왼쪽 크로우를 막는 순간 몸이 밀렸고, 오른쪽 크로우가 옆구리를 깊게 베고 지나갔다.

지독히 강하고, 지독히 빨랐다.

엘튼이 돕기 위해 다급히 달려왔지만, 오히려 노림수가 되어 표적이 됐다. 두 쌍의 크로우가 교차하며 그를 잡아먹었다.

손바닥이 찢어지며 단검이 튕겨 나갔고, 남은 크로우가 엘튼의 허벅지를 깊게 파고들어 갔다.

다시 돌진하는 두 형제.

하우엘이 엘튼의 목으로 노리며 마무리하려는 순간,

챙―!

"어떤 빌어먹을 놈이…!"

날카로운 화살이 기습적으로 날아와 엘튼을 구했다.

펜리까지 가세하면서 엘튼을 놓치자, 잭과 하우엘은 일그러진 눈으로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노려봤다.

그것도 잠시,

"응?"

그들의 눈이 서서히 풀리더니 이내 반짝였다.

자신들을 향해 활시위를 겨누고 있는 미모의 엘프. 눈앞의 다크 엘프도 무척 매력적이지만, 건들기엔 너무 매운 상대라 제거를 택했는데, 저 우윳빛 엘프는 달랐다.

연약해 보였고, 사내를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무척 화난 표정인데, 두 형제의 눈에는 진귀한 장난감을 발견한 표정이었다.

똑같은 얼굴과 눈동자.

쌍둥이 형제의 눈에 욕정이 타올랐다.

베네타에서 워낙 유명한 엘프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쌍둥이 형제에겐 납치리스트 가장 위쪽에 있는 엘프였다.

"푸른 장미 마담이 분명해. 이름이 넬라였던가?"

"보고 싶은 얼굴이었는데, 여기서 보네."

"기회야. 서둘러 정리하고 저 엘프년을 전리품으로 데려가자고. 회포 제대로 풀어야겠어."

"데려갈 년이 하나 더 있지. 그 주술사 년. 크크크."

다마스커스 크로우.

완력과 민첩의 반지.

고대 아티팩트로 무장된 그들의 머릿속에 패배는 없었다.

두 형제의 대화에 펜리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자신을 앞에 두고 넬라에게 음담패설을 날리는 것들을 보곤 꼭지가 돌았다.

나 펜리 체이서를 감히 무시해?

곰방대를 소환해 입으로 쭉 빨았다.

후―

길게 내뱉은 연기 사이로 형제를 노려보던 눈동자가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런 개잡놈 새끼들이."

"...!"

그녀의 양손이 검게 물들자, 주변 그림자들이 꿀렁대며 빠르게 뭉치더니 거대한 손이 바닥에서 솟구쳤다.

검은 왕의 신체 일부를 불러오는 그림자 소환술.

그림자의 왕(King of Shadows)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 * *

쾅! 콰콰쾅! 콰쾅!

검고 거대한 주먹이 숲 주변을 돌풍처럼 휩쓸었다. 그림자가 지나간 자리는 부서진 잔재만 남았다.

산산조각 파괴된 나무와 바위 파편.

주변은 삽시간에 폐허로 변했다.

"이, 미친년이!"

"물러나!"

압도적인 파괴력.

곰방대를 문 펜리가 사나운 눈을 치켜세우며 두 주먹을 빠르게 휘두르자, 형제는 압박감을 느끼며 회피에 집중했다.

겉으로 보면 그림자 주먹에 짓눌려 곧 죽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대치가 길어질수록 전투를 지켜보는 넬라의 표정은 서서히 어두워졌다.

'상대가 안 좋아.'

그림자 왕의 기술은 한 방, 한 방이 강력한 마력 덩어리다.

일격에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기술.

하지만 맞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다수를 상대할 땐 그 어떤 능력보다 뛰어난 파괴력을 보이지만, 잭과 하우엘 같은 실력자 앞에선 그 위력을 전부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특히, 발이 가벼운 이들에겐 더더욱.

마스터가 이 사실을 몰랐을까?

'아니.'

마스터가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엘튼이 조금 전 전투로 큰 부상을 당했다.

멀찍이서 주저앉은 채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

마력 낭비가 심한 그림자 왕을 두 형제 앞에서 사용했다는 건, 그만큼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두 형제의 무력은 강했다.

"잇!"

팅― 팅― 팅―

매섭게 화살을 날렸지만, 두 형제는 오히려 손가락을 흔들며 그녀를 조롱했다.

거대한 그림자 주먹이 등장했을 때 바짝 긴장했던 형제가 이젠 다소 여유를 찾고 펜리를 상대하고 있었다.

고대 아티팩트 사용 중에는 큰 위협이 안 된다는 것을 파악한 것 같았다.

"어쩌지?"

자신이 노출된 이후로 마스터의 표정에 다급함이 서렸다.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는 경우를 우려하는 것 같았다.

엘튼을 구할 수 있었으니, 자신의 선택에는 후회가 없다.

다만, 걱정되는 건 그 이후였다.

"오래 유지하기 힘들 텐데."

그녀는 마스터를 잘 안다.

그림자 왕을 사용할 동안 형제를 제거하지 못하면 분명 도주를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엘튼은?

마스터가 그림자로 데리고 갈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그래서 이를 악물고 화살을 날렸다.

"제발!"

그렇게 간절함을 담아 한발, 한발 화살을 날리고 있는데, 뒤쪽에서 갑작스레 괴성이 들려왔다.

그어어어어어―!

"...!"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니 우거진 숲이 들썩였다. 잠시 후, 숲을 헤치고 새하얀 눈자위를 지닌 인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리쬐는 달빛에 잠시 주춤한 것도 잠시, 갑자기 넬라가 있는 방향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돌진해왔다.

캉―!

"...아!"

시위를 돌려 정확히 인간의 미간 부분을 맞췄지만, 거짓말처럼 화살이 튕겨 나갔다.

뒤로 젖혀진 고개를 다시 세우고 날카로운 손톱을 들이밀며 다가오자, 넬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카아앙―!

짓쳐오던 인간 뒤에서 검이 휘둘러졌다.

목을 때린 순간 쇳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처박힌 인간의 목이 기괴하게 꺾였다. 그 앞으로 사내가 달려오더니 똑같은 위치에 검을 내려치자, 목이 뜯겨 나가며 축 늘어졌다.

등을 보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

양손에 각기 다른 검을 움켜쥔 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떠졌다.

"록터!!!"

"안 늦어서 다행이다."

록터를 보자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는? 그는 지금 어디에 있죠?!"

록터가 눈짓으로 위를 가리키자, 넬라가 고개를 쳐들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늦었어요. 아서."

아서 클레이튼이 높은 나뭇가지 위에 꼿꼿이 선 채 활시위를 잡아당기고 있었다.

시위에 걸린 화살은 투창을 떠올릴 정도로 거대했다.

두 형제를 노려보는 매서운 눈매.

잠시 후, 넬라를 힐끗 내려다보며 미소로 답한 그가 표정을 굳히곤 신호를 보냈다.

"시작해요!"

아서의 신호가 떨어지자, 록터가 전장으로 질주하면서 넬라에게 외쳤다.

"혹시 모르니 나무 위로 올라가라!"

이유는 모르지만, 빈말할 인물이 아니라 주저 없이 아서가 자리한 나무를 타고 올랐다.

아서에게 묻고 싶은 건 많지만, 분위기를 보니 건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조용히 높은 위치에 자리한 그녀는 더 넓은 시야로 전장을 살필 수 있었다.

쌍둥이 형제와 펜리가 맞붙고 있는 전장으로 매섭게 질주하는 두 인물을 볼 수 있었다.

한 명은 그녀도 알고 있는 록터 펠리스.

다른 방향으로 질주해오는 인물은 처음 보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칼 바스타인.

험상궂은 외팔의 사내는 돌격하는 록터와 달리 전장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주변을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그의 손에는 비수처럼 얇은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그 둘이 전장에 완벽히 스며들고, 뒤늦게 두 형제가 그들의 존재를 눈치챈 순간,

타아앙―!!

파공음과 함께 넬라의 긴 머리카락이 거친 바람에 흩날렸다.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니, 아서의 활시위가 놓아졌다.

푸른 빛의 거대한 화살이 두 형제를 꿰뚫기 위해 쏘아졌다.

사냥을 위한 암습의 신호탄이었다.

* * *

무시무시한 파공성.

뒤를 돌아본 잭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일그러졌다.

"피, 피해!"

잭의 신호에 두 형제는 양쪽으로 찢어졌다. 아티팩트 발동 시에 훈련한 가장 강력한 포메이션을 포기하고 물러날 만큼 뒤에서 짓쳐오는 화살의 기세는 매서웠다.

늦었다.

잭은 이를 악물고 거대한 화살을 크로우로 베어냈다.

카카카카카캉―!

부딪친 순간 지독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크아아아악!"

잭이 기합을 토해내자 반지에서 짙은 빛이 터져 나왔다. 반지의 힘을 빌려 가까스로 크로우를 틀어 화살을 흘리는 데 성공했다.

숲 한쪽을 매끄럽게 뚫고 간 화살의 흔적

이건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다마스커스 크로우와 완력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화살에 관통당해 죽었으리라 잭은 확신했다.

그렇게 화살을 흘리고 뒤로 물러나는데,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

화살로 인해 포매이션의 균형이 깨지자, 그 틈을 누군가 노리고 들어왔다.

또 다른 기습.

"혀, 형엉!"

"빌어먹을!"

하우엘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속도로 동생에게 불시에 기습하는 상대를 본 잭의 표정에 다급함이 서렸다.

사냥감으로 여겼던 록터 펠리스가 날카로운 이빨이 들이밀며 하우엘을 물어뜯으려고 했다.

자신이 아닌 정확히 약자인 동생을 노리고 들어왔다. 꼴통이라 불리는 우직한 놈이 이딴 암습을 한다고?

지독한 위기감에 하우엘이 산화독을 터트렸지만, 록터의 손에 물주머니가 터져 나온 순간 기겁하며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동생이 위험하다!

잭은 열 손가락을 다급히 움직여 바람 칼날을 록터의 등에 소나기처럼 퍼부었다.

하지만,

퍼퍼퍼퍼퍼퍽―!

"...!"

록터를 노리던 바람 칼날들이 눈앞에 쿵 떨어진 거대한 손에 가로막혔다.

그림자 손이 물컹거리며 찢어진 부위를 수복했다. 그 앞으로 펜리가 사납게 웃으며 잭에게 다가왔다.

피로 물든 얼굴. 거친 호흡.

거의 다 잡았는데, 록터의 등장으로 기세가 살아났다.

"넌 나랑 놀아야지?"

"...이!"

잭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 * *

퍼억―

"끄아아악!"

도망치는 하우엘의 허벅지에 얇은 단검이 박혔다.

어, 어디서?!

단검은 은밀하고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두 번째부터는 크로우로 황급히 튕겨냈지만, 록터가 등 뒤에서 매섭게 검을 휘두르는 상황이라 제대로 막기란 쉽지 않았다.

민첩의 반지를 한계치까지 사용해, 록터의 공격을 회피하고 단검을 쳐냈다.

굉장히 잘 버틴다고 생각하며 형인 잭을 기다렸다.

하지만,

한 발.

또 한 발.

다시 한 발.

"끄아아아아악!"

기다려도 형은 오지 않았다.

하우엘은 결국 박힌 단검들을 움켜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산화독도, 민첩의 반지도, 크로우도 안 통한다.

절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단검을 쥔 이가 앞으로 다가왔다.

칼 바스타인.

알고 있는 인물이다.

"자, 잠까...!"

서걱―!

그의 머리가 허공에 붕 날아올랐다.

검을 휘두른 록터가 핏물을 털어내곤 곧장 잭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그 모습에 칼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서가 말할 틈도 주지 말고 제거하라고 했는데, 정말 단칼에 죽여버릴 줄은 몰랐다.

"저 인간한테는 어디 가서 장난도 못 치겠네."

툭―

굴러온 머리가 칼 발아래에 멈춰 섰다.

칼은 두 눈을 부릅뜬 하우엘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도 붙잡혔을 때 잠깐이라고 외쳤는데, 너희가 쥐어팼잖아. 이것으로 퉁치자고."

칼은 발로 머리를 짓밟았다.

죽은 녀석을 조롱할 생각은 없었다.

아서가 죽인 녀석의 머리를 되도록 없애라고 했기에 실행한 것뿐이다.

이곳 기억을 읽힐 수 있다나?

하우엘의 시체에서 반지와 크로우를 챙겼다.

"이건 내 전리품. 난 성욕이 없어서."

칼은 부서진 머리 앞에서 붉은 크로우 한 짝을 흔들고는 엘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140화 헌트(Hunt)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