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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2 - 110-120

110화 혈맹이란 이름으로(5)

특별하다.

다만, 아직은 그 특별함이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아케인 앞에서 정체를 들킬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정도?

그 정도면 특별한 건가?

당장은 넬라에게 괜한 의심을 받는 중이라 억울한 마음부터 들었다.

"길드 이름은 정했나요? 어제부터 머리를 쥐어뜯고 하시던데."

"제가 그랬습니까?"

"네. 머리가 없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직입니다."

"길게 고민하면 오히려 더 결정이 어려울 수 있어요. 딱 떠오른 것으로 하세요."

"딱 떠오르는 것이라…."

"중요한 순간들을 떠올려보세요. 그 안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앞으로 나아갈 무언가를 찾다 보면 답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신녀는 달라도 뭔가 달랐다.

레토의 조언과 비교해보니, 레토는 나이를 헛먹는 것이 분명했다.

뭔가 속이 뻥 뚫린 듯한 느낌.

이래서 사람들이 점을 보고 타로점을 보러 다니는 건가.

괜히 푸른 장미 마담뚜이자 뭇 남성들의 간택 No.1으로 불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마음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다.

"조언 감사합니다."

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곤 바닥에 편히 주저앉았다.

팔짱을 끼곤 두 눈을 감았다.

이곳에서 떨어진 첫날, 그리고 악착같이 살아남았던 과정을 떠올려봤다.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나 첫 살인의 기억이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왔던 현대의 인간에게 첫 살인만큼 임펙트있고 충격적인 사건이 또 있을까.

칼바람의 협곡, 그리고 고대 문양의 경험을 떠올린 순간부터 의식의 흐름이 무아지경으로 흘렸다.

도네콜린트를 죽이고 그 힘을 빼앗았다. 그 힘을 이용해 아레나를 제거하고 그녀의 심장을 취했다. 그리고 그 심장을 이용해 폐광산에서 또 다른 힘을 얻었다.

고대 문양, 심장, 그리고 염원의 반지.

움켜쥔 힘을 통해 또 다른 힘을 얻어가는 과정.

조각처럼 퍼져 있던 기억들을 하나의 퍼즐로 완성한 순간, 한 단어가 벼락처럼 떠올랐다.

"아...."

나직이 탄성을 흘리며 두 눈을 번쩍 떴다.

고개를 드니 넬라는 자리를 비웠고, 주변 하늘에 어스름이 꼈다. 벌써 밤이 된 건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지붕 위로 붉은 태양이 서서히 떠올랐다. 황당하게도 하루가 지나고 날이 밝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지났다고?

[제법이다.]

"…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상태. 관조는 그렇게 하는 것이다. 가르친 보람이 있군.]

물아일체 뭐 어쩌고 어째?

그런 게 가르친다고 되니?

레토 녀석도 점점 뻔뻔해지는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은 버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얼떨결에 아침을 맞이했다.

혈맹 의식이 열리는 날이었는데, '이름'을 찾았기 때문인지, 더는 한숨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설렌다.

그때 뒤에서 넬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일어나셨네요. 안 일어나면 어쩌나 했는데."

"제가 오래 앉아 있었죠?"

"집중하시는 것 같아서 건들지 않고 나왔어요. 이름은 찾았나요?"

"덕분에."

그녀의 물음에 난 크게 미소 짓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준비할 시간이네요."

"네? 뭐를…."

"들어오세요!"

넬라가 손짓하자 여러 사람이 우르르 훈련장으로 들이닥쳤다.

그중에는 늑인 할아범과 그 시종들도 있었다.

"…누, 누굽니까?"

"혈맹의 주인공이 그 몰골로 단상에 서려고요? 자! 시간 없어요. 서둘러요!"

"네!"

넬라가 손뼉을 치자,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는 미용 도구부터 화려한 옷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 * *

파팡팡! 팡! 팡! 팡!

하늘 위로 화려한 폭죽이 터졌다.

도르네프는 오늘을 베네타의 특별 기념일로 지정하고 축제를 선포했다.

주민들은 오랜만에 바깥으로 나와 축제를 즐겼다.

출입을 봉쇄한 대광장 중심부를 제외하곤 특수를 노린 상인들이 성 곳곳에 좌판을 깔고 대규모 장사진을 이뤘다.

볼거리, 다양한 음식과 물건, 흥겨운 놀거리까지 아이들의 얼굴에 오랜만에 미소가 깃들었다.

"보기 좋네요."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넬라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바깥을 구경했다. 그러다 날 보곤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부터 표정이 왜 그러세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아닙니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 기대고 있던 나는 고개를 털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좀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수십 명의 사람에게 둘러싸여 정신없이 변신하는 과정은 혼이 빠져나가는 작업 같았다.

귀족들은 어떻게 매일 같이 이렇게 꾸미고 사는 거지?

새삼 그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을 토하며 창가를 바라보니 확실히 바깥 열기가 남달랐다. 들뜬 분위기가 마차 안까지 느껴졌다.

"평소에는 축제가 없었습니까?"

"근래에 무척 뒤숭숭했잖아요. 축제는커녕 성주님 눈치 보기도 바빴어요."

"아, 그렇죠."

도미닉의 손에 많은 이들이 납치당하고 사라졌다.

그중에는 성주가 사랑하는 샤르바딘도 있었고.

생각해보니, 베네타의 축제는 나도 처음 경험해보는 것이었다.

몰락의 운명을 지녔던 이종들의 영지.

창가 너머로 비추는 주민들은 표정은 모두 밝았다.

스토리 상 죽거나 노예로 끌려갈 운명이었지만, 지금의 베네타는 폐광산의 저주까지 해결되면서 그 화려한 꽃을 피우려고 하고 있었다.

감회가 새롭다.

내 손에 의해 이뤄진 것 같아서.

"근데, 다른 마차는 안 보이네요?"

"오늘 내성에는 마차 운행이 금지됐어요. 마차를 몰 수 있는 이들은 혈맹의 주인들뿐이에요."

"…네? 그럼 이 마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알겠네요?"

"당연하죠."

다시 바깥을 바라봤다.

마차가 지나가면 인파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하기 바빴다.

호기심 짙은 시선으로 마차를 구경하곤 다시 돌아갔는데, 성주가 안에 타고 있어도 저렇게 반응을 보일까 싶었다.

인간들의 영지에선 넙죽 엎드리며 예를 표했기 때문이다.

"복종, 차별, 권위는 인간만 하는 짓이에요. 여긴 베네타에요. 성주를 향한 존중과 존경만 있을 뿐이죠."

"만약 성주가 존경을 받지 못한다면 어찌 됩니까?"

"물러나야죠."

"그럼 물러납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지지율이 바닥이라고 물러나라 한다면 정말 '네.'하고 물러난다고?

자유 민주주의 세상에도 보기 힘든 일인데?

혈통과 권력에 집착하는 인간들과 비교하면 이종족의 마인드는 엄청 파격적이었다.

아메리칸 스타일보다 더 매운맛이다.

그에 놀란 것도 잠시, 걸리적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봐서 모를 수가 없었다.

이종족과 거리가 먼 이들.

인간들의 무리였다.

"인간 상인들이 많이 보이네요."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들이에요. 드워프가 운영하는 광산은 인간들에게 황금알을 낳은 거위나 다름없거든요. 아서님께 줄을 대려고 하겠죠."

"저한테요?"

"저주를 푼 장본인이니 광산 개발에 큰 영향력을 끼칠 존재라 파악했겠죠. 게다가 같은 인간, 몰락 귀족, 말이 통하는 상대라 생각할 거예요."

"저 쥐뿔도 없는데요?"

"상인들이 그 말을 믿을까요?"

"개지랄을 해도 안 믿겠죠."

염원의 반지와 광산 지분을 엿 바꿔 먹어서 내겐 아무것도 없었다.

파리가 무진장 꼬일 것 같은데, 상관없었다.

혈맹 의식이 끝나는 즉시, 넬라와 함께 베네타를 뜰 생각이거든.

"혈맹 의식이 끝나시면 바로 벗어나실 거죠?"

"네. 록터가 있을 법한 장소로 가야 합니다."

"생각해둔 데가 있나요?"

"염두에 둔 장소가 있습니다."

"저도 함께 따라나서야 하고요."

"그렇죠."

그녀가 곁에 있어야 록터가 신명의 주인으로 각성했을 때 그 위치를 바로 파악할 수 있다.

"음, 혹시 모르니 마스터께 말해놔야겠네요.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보호자가 필요할 겁니다. 펜리님에게 가장 센 녀석으로 보내 달라고 강력히 어필하세요."

넬라를 최우선으로 보호하겠지만, 나 혼자서는 힘들 수도 있다. 강한 적이라도 만나면 지키면서 싸워야 하는데, 내 미천한 전투 경험으로 그녀를 보호하다간 실수가 있을 것이다. 전투 스타일이 워낙 무식해야지.

그런 부담감으로 하루에 20시간 이상 훈련에 매진하고 있지만, 넬라를 지킬 호위가 따로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검은 장미 내에 그녀의 위치를 생각하면 펜리가 알아서 호위를 붙여줄 것이다.

"잠시 멈추십시오."

대광장 중심부로 통하는 입구에 들어서자, 기사들이 마차를 막아섰다.

그것도 잠시, 내가 로브자락을 들추며 얼굴을 드러내자 드워프들은 허리를 착 세우며 경례를 표했다.

"여, 영광입니다!"

"영광입니다!"

"...."

사이비종교도 아니고.

무슨 영광.

요즘 기사들이 날 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 몽둥이 녀석들의 영향 같은데, 도대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떠들고 다니는 거야?

나중에 난쟁이들을 불러서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드르르르―

대광장에 천천히 들어섰다.

우리가 탄 마차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등장하자, 시끌벅적했던 소란이 잦아들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수천수만의 인파로 둘러싼 외곽과 달리, 대광장 중심은 텅 비어있었다.

한눈에 올려다볼 크고 높은 단상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인데, 오늘 혈맹의 주인들이 오를 무대였다.

"그런데 펜리님은 어디 있습니까? 도르네프님도 안 보이고."

"하…."

두 녀석의 이름에 넬라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흔들었다.

이 녀석들 또 싸우고 있는 모양인데?

"서로 눈치를 보고 있어요."

"눈치? 무슨 눈치요?"

"보다시피, 대광장에 가장 나중에 등장하려고요."

"…나중에?"

설마,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그 논리가 이곳에서도 먹히는 건가.

이러다가 두 녀석 다 영영 안 오는 거 아니야?

난 다른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마차 안에서 잠시 대기했다. 지금 바깥으로 나갔다간 시선 테러에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난 반장 선거도 떨려서 못 나갔던 사람이라고.

"이전 혈맹도 이렇게 공개적으로 했습니까?"

"아니요. 그땐 핵심 인물들만 따로 모여서 조용히 의식을 진행했어요. 공개해서 얻을 이득이 전혀 없었거든요."

"그럼 지금은 이득이 있다는 겁니까?"

"네. 아주 많죠. 아서님은 혈맹 회의에 참여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많은 대화가 오갔고 안건들이 정해졌어요."

혈맹 회의에 초대받긴 했는데, 시간이 아까워서 무시했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

그들의 이득과 관련된 안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인 혈맹 의식 선언.

도르네프도 펜리도 내 경우처럼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야 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말이었다.

혈맹의 이름으로 선언하는 건 듣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강한 힘이 실린다.

그것이 한 세력의 수장들이 지닌 힘이었으니까.

두 사람이 어떤 선언을 할지는 두고 보면 알 것이다.

뎅―!!!!!!!!!!

베네타를 가득 채우는 종소리.

정오가 됐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종이 울리자 주변에 어수선해졌다.

대광장으로 통하는 양쪽 갈래에서 길이 크게 열리더니 화려한 마차 두 대가 양방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은 엘프, 다른 쪽은 드워프 무리였다.

시간을 딱 맞춰서 동시에 등장하다니, 서로 어지간히 지기 싫었던 모양이었다.

저것도 말을 맞췄겠지?

두 대의 마차가 우리 마차 근처에 멈춰서고 신호에 맞춰 도르네프, 펜리 그리고 내가 마차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드워프, 엘프 그리고 인간.

무려 백 년 만에 이종족의 혈맹에 인간 하나가 끼어들었다.

혈맹 의식이 시작됐다.

111화 우리들의 이름, XX

찌릿찌릿한 환호 소리에 발을 삐끗할 뻔했다. 그런 나를 넬라가 팔짱을 끼며 부축했다.

"정신 차려요. 여기서 실수하면 평생 어리숙하다는 꼬리표가 따라다닐 거에요."

"아, 죄송합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라서…."

"저도 처음이거든요?"

새침한 시선으로 날 한 번 바라본 그녀가 앞을 바라보곤 허리를 꼿꼿이 폈다.

내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는데, 안내를 바라는 귀족 영애의 모습이라 눈치껏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단상으로 통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넬라는 신녀의 신분으로 이번 혈맹의 주관을 맡았기에 이 자리에 함께했다.

"괜찮겠습니까? 이제 푸른 장미에서 일을 못 할 수도 있는데."

"애초에 하고 싶어서 한 일이 아니에요.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죠."

푸른 장미 손님 중 그녀를 알아본 이가 있다면 놀라자빠지지 않을까.

오늘은 그녀에게도 무척 중요한 날이었다.

그건 넬라뿐만이 아니었다.

"...."

"...."

뒤쪽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도르네프와 펜리가 보인다.

둘 다 멋들어지게 차려입었는데, 자리가 자리인지가 투덕거리는 모습은 없었다.

수만 인파의 시선이 우리를 올려다보는 사이, 우리는 단상 꼭대기로 올랐다.

나토네의 지휘 아래 기사단이 올라오고 그들은 무기 대신 깃발을 들어 올렸다.

망치 문양의 깃발들이 하늘을 수놓는다.

단상 높이는 모든 이들을 아우를 정도로 높았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개미 떼처럼 우글우글 움직이는 사람들이 시야에 잡혔다.

영지 전체를 꽉 채운 압도적인 광경.

수만 관객들이 가득 찬 올림픽 콘서트 한가운데에 오르면 이런 기분이려나?

미치도록 떨렸다.

펄럭―

"알렉…아!"

바람이 분다.

내 얼굴을 가린 순백의 로브 자락이 펄럭이며 얼굴이 드러났다.

바람에 나부끼는 브론즈 머리카락.

1단계 육체 훈련을 통해 레토와 동화율이 올라가서인지, 내 머리카락엔 핏빛의 기운이 은은하게 돌았다. 그건 매서운 눈매 속에 담긴 백금색 눈동자도 마찬가지.

거친 맹수의 기세가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난 다시 로브 자락으로 얼굴을 가렸다.

화려한 가죽옷 위로 얼굴이 살짝 비춰 보이는 순백의 실크 로브는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감을 불러왔다.

이 순백(純白)의 컨셉트는 '구원의 성자'란 느낌으로 푸른 장미의 마담뚜인 넬라가 작정하고 꾸며준 스타일이었다.

특히 순백의 로브 뒤로 핏빛의 활 문양이 마법처리가 됐는데, 멀리서도 한눈에 띌 정도로 임팩트가 강했다.

실용성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저 돈 지랄인 복장.

존재를 어필하는 데뷔 무대로는 최고의 복장이긴 한데.

무슨 교주가 된 기분이었다.

[혈맹 의식을 시작합니다.]

넬라가 그녀의 보구인 마른 나뭇가지를 꺼내자, 엘프들이 조용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지금은 말라비틀어진 볼품없는 나뭇가지지만, 세계수는 엘프들에게 존재 이유나 다름없는 상징물이었다.

엘프족의 신녀 넬라.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넬라는 세계수가 그려진 황금빛 망토를 걸친 채 조용히 의식을 진행했다.

잠시 후, 도르네프와 펜리, 그리고 내가 단상 중심에 서고 넬라는 마법 영창을 이용해 혈맹 선언문을 크게 읽어 내려갔다.

그녀의 청량한 목소리가 베네타 곳곳에 울려 퍼진다.

높이 쳐든 나뭇가지에 신성한 빛이 흘러나오자 모두가 조용히 그 광경을 지켜봤다.

임팩트 지리네.

신녀가 혈맹을 주관하니 혈맹 의식이 무척 성스럽게 진행되었다.

물론, 그 사이에서 남몰래 벌어지는 난쟁이와 암고양이의 대화는 여전히 유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상에 오를 순서, 그거 가지고 으르렁거리더니 이내 펜리가 내게 슬쩍 다가와 속삭였다.

"네놈 순서가 마지막이다."

"…제가요?"

단상에 서는 마지막 순서가 주인공이라며?

인지도나 세력으로 당연히 내가 처음인 줄 알았다. 그런데 둘 다 나한테 양보한다고?

착 달라붙는 검은 가죽옷으로 몸매를 드러낸 펜리가 으르렁거리며 도르네프를 노려봤다.

둘의 시선에 불꽃이 튀었다.

서로 마지막 순서는 절대 양보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내게 양보한 느낌인데, 애새끼들도 아니고 진짜 유치하게 논다.

"그럼 누가 첫 번째입니까?"

"나."

"네? 이유가 뭡니까?"

"혈맹 의식에 관한 비용을 저 난쟁이가 전부 대겠다고 했거든. 난 저 난쟁이가 마지막만 아니면 돼."

그렇다고 돈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역시 돈 귀신이 붙은 엘프다웠다.

[혈맹의 인연 고리에 축복이 깃들길!]

넬라의 짧고 굵었던 혈맹 선언문이 끝이 났다. 맹약 의식은 작은 잔에 피를 나눠마시는 것으로 끝이 났고, 혈맹의 주인들이 나와서 한마디씩 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펜리가 첫 번째로 단상 앞에 섰다.

대중 앞에 섰음에도 그녀는 덤덤한 표정이었다. 원체 뻔뻔한 년이라 아무렇지 않은 건가?

[검은 장미 마스터, 펜리 체이서다.]

첫 마디에 난 깜짝 놀랐다.

설마 검은 장미를 대중 앞에 공개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토바른 내에 엘프들의 대표에서 검은 장미의 마스터가 됐다. 이 뜻은 검은 장미를 음지가 아닌 양지로 드러내겠다는 건데, 이는 대륙에 퍼져 있는 엘프들에게 무척 큰 파급력을 불러올 것이다.

[우린 엘프족을 수호하며 세계수를 찾고 있다.]

기댈 나무가 생긴 셈이니까.

이에 대해선 펜리와 자세히 대화를 나눠봐야 할 것 같았다.

도르네프는 폐광산의 저주에 대해 말을 이었다.

[내 대(代)에 폐광산의 저주가 막을 내렸다. 우리의 신 아톨레스님의 가호가 내 대에 내려졌음이 분명하다!]

혹한의 망치와 갑주를 뽐내며 자기 자랑.

그리고 샤르바딘을 '사랑한다!' 세 번 외치는 것까지.

정말 뭐에 한 번 꽂히면 뒤가 없는 드워프 같았다. 절대 적이 되면 안 되는 부류랄까.

드디어 내 차례.

둘 다 제법 오래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금방 내 차례가 됐다.

후―

길게 숨을 내쉬며 단상 중심에 섰다.

웅성거리던 소리가 천천히 가라앉는다.

날 바라보는 엄청난 시선들.

펜리도 그렇고 도르네프도 그렇고 공개적인 자리인 만큼 말이 길었다.

근데, 내 경우엔 다르다.

진실 속에 구라를 살짝 섞을 거라 말이 길면 손해다.

살짝 오글스럽게, 그리고 강렬하게 선언을 끝내야 한다.

"알렉스다."

귀족이 존댓말 하는 거 봤냐?

나도 저들처럼 반말로 일관했다.

"이종족의 혈맹원이 된 최초의 인간으로서 목숨보다 가치 있는 이 신뢰를 지키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이 또한 내 소중한 이들을 걸고 맹세하겠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광장 아래를 천천히 내려다봤다.

모두가 나를 올려다본다.

그 모든 시선에 하나하나 맞추려는 둣 난 행동으로 저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다.

화려한 임팩트.

고대 문양을 최대로 소환했다.

번쩍―!!!!!!!

"...!"

단상 전체가 황금빛으로 물든다.

신녀 넬라가 소환했던 빛보다 성스럽지 않지만, 그보다 강렬하고 화려하며 눈부시다.

그 황금빛을 높게 쳐들며 크게 외친 나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내 소중한 이들.

내가 언급한 맹세의 주체.

"빛 아래 모여든 우리들의 이름, '헌트(Hunt)'의 이름을 걸겠다. 그들도 나와 함께 할 것이다."

고민 끝에 지은 길드 이름, '헌트(Hunt)'가 세상에 공개가 됐다.

사람들의 뇌리에, 그리고 세상에 헌트가 처음으로 알려진 순간이었다.

* * *

이랴―!

대광장에 도착할 때는 각자 다른 마차를 타고 왔지만, 혈맹 의식이 성공 리에 끝난 후에는 다 같이 한 마차를 타고 복귀했다.

마차에는 혈맹 의식에 참여했던 네 명이 모두 함께했다.

상의할 것이 있어서 내가 먼저 부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시 넌 사기꾼이 맞았어."

"뭐가요?"

"대중을 후리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는 뜻이네."

정면에는 펜리가, 옆자리에는 도르네프가 날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화려한 황금빛으로 대중 좀 홀리고, 멋진 척 오글거리는 대사 몇 마디 뱉었을 뿐이다.

근데 이게 또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다.

앞선 두 녀석과 달리 말이 끝내자 엄청난 환호가 터져 나왔거든.

이 세계도 그렇고 현실에서도 그렇고.

윗사람 연설은 짧을수록 인기가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 외 화려한 장치가 한몫했지만 말이다.

퍼퍼퍼퍼펑―!

바깥에 폭죽 소리가 요란하게 터졌다.

혈맹 의식이 끝나자 대광장 전체가 개방되었고 본격적인 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는 3일 동안 열린다고 넬라가 알려줬다.

"헌트(Hunt), 앞으로 사용할 길드 이름인 거야?"

"네."

"흠, 헌트… 사냥이라 나쁘지 않네. 너랑도 어울리고."

펜리는 신명 사냥꾼을 염두에 두며 하는 말 같았다. 하지만 난 그저 지금껏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떠올린 것뿐이었다.

그 핵심은 '사냥'이었다.

도네콜린트, 아레나 후아튼 그리고 폐광산의 비요른까지.

누군가를 사냥하고 얻는 힘이 내겐 생존과 직결됐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헌트의 첫 번째 영입 인물은 역시나 록터 펠리스겠지?"

"네. 모두를 위해선 그가 꼭 필요합니다."

"블라이어와의 전쟁을 염두에 둔 건가?"

도르네프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 펠리스는 학살자가 100만 골드 현상금을 내건 특급 범죄자다. 내가 그를 영입하면 당연히 블라이어와 적이 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물론, 그 외에 내 가짜 신분 때문이라도 블라이어와 친분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 신분은 알렉스 마르샤.

마르샤 가(家)는 '용아의 망토'를 가진 죄로 카멜의 친위대인 리옹에게 몰살당한 가문이었다.

공개적으로 카멜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정보를 좀 다룬 이들이라면 몰락 귀족인 내 과거를 곧 알게 될 것이다.

도르네프의 표정이 내키지 않은 듯 보이자 슬쩍 물었다.

"아직도 카멜이 베네타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나도 원로들도 의심은 하고 있네. 하지만 확신은 일러. 블라이어와 엮인 게 제법 있거든."

지하 감옥에 베네타의 정보를 빼돌리던 세작들이 대거 잡혔다.

정확히 이틀도 안 돼서 세작들은 눈물 콧물을 질질 짜며 의뢰주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불었는데, 몽둥이를 든 드워프들 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다며 간절히 매달렸다고 한다.

심판자의 몽둥이들.

이들의 명성이 갈수록 드높아지는데, 왜 머리가 점점 지끈거리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더 깊게 엮이는 건 아니겠지?

"보고 받으셨죠?"

"받았네."

"의뢰주들은 대부분 이름 없는 주술사들과 관련 있습니다. 그들의 뒤를 캐면 에토르 영지에 머무는 신명의 주인, 렌구아 필드와 연결되죠. 렌구아는 카멜의 최측근 주술사이자, 주술사들의 둥지를 책임지는 인물입니다. 즉, 카멜이 세작을 보낸 진짜 의뢰주입니다."

"원로들은 폐광산의 일로 카멜이 베네타에 관심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네."

"전(前)대 블라이어 성주와 맺은 광물 거래 건 때문에 말입니까?"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타는 블라이어와 오랜 세월 광물 거래로 사이가 우호적인 편에 속했다.

저주로 광산을 폐쇄한 후 대용량의 광물을 주기적으로 공급해줄 영지로는 대규모의 광산을 가진 블라이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벌써 수십 년째 이뤄지고 있는 거래.

원로들은 당장 블라이어에서 광물 공급이 끊기는 걸을 우려하고 있었다.

"폐광산을 개발하면 해결되는 거 아닙니까?"

"그건 폐광산 규모를 몰라서 하는 말이야. 폐광산을 정상화하려면 빨라도 6개월이 소요돼. 채굴까지 생각한다면 더 오래 걸리겠지. 문제는 그사이에 쓸 광물이 곧 바닥난다는 데 있어."

"여유 분량이 전혀 없습니까?"

"없어. 키메라와의 전쟁으로 한동안 공급이 끊겼거든. 원로들이 블라이어에게 공급을 요청한 상황이네. 어린 성주가 어떻게 나올지 반응을 보고 판단해야겠지."

베네타는 드워프들의 제조업으로 경제가 유지되는 자유 도시다. 하루라도 광물이 끊기면 베네타의 경제에 큰 타격이 올 게 분명했다.

개인과 달리 확실히 세력은 염두에 둘 게 많은 것 같았다.

똑똑한 카멜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테니, 분명 광물과 관련된 패도 준비하고 있을 거다.

"록터의 영입이 베네타한테 불리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자넨 계획을 강행하겠지?"

"네. 계획을 미루면 공개적으로 혈맹 의식을 한 이유가 사라지니까요."

당사자에겐 허락조차 받지 않았지만 은밀하게 소문을 흘릴 것이다.

헌트(Hunt)의 행동 대장, 록터 펠리스.

영웅 록터를 헌트의 두 번째 인물로 말이다.

112화 위하여

"잠깐, 소문을 퍼트린다고 쳐. 근데, 록터는 꼴통 기사잖아."

펜리가 말한 꼴통이란 꽉 막힌 사람을 뜻했다.

카멜조차 기사 단장임에도 영입을 포기하고, 버리는 패로 사용할 만큼 록터는 정통 꼴통 기사였다.

그 우직하고 단단한 성정 때문에 그는 주변에 인망과 신임을 얻었지만, 반대로 그 덕에 일찍 죽게 됐다.

배신자의 존재.

믿음을 중요시하는 록터의 성격을 파악하고 카멜이 미리 그 곁에 배신자들을 심어뒀기 때문이다.

첫 배신에 한쪽 팔을 잃고 두 번째 배신에 독살로 명을 달리한 인물.

"그 꼴통은 분명 소문을 듣고 헛소리라 외치고 다닐 거야."

"상관없습니다."

"당사자의 말인데?"

"카멜의 귀에만 소문이 들어가면 됩니다. 소문으로 노리는 건 카멜에게 혼란을 주기 위함이지, 록터가 뭐라 하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현상범 신분이라 믿지도 않을 거다.

"나중에 문제가 될걸? 그 꼴통이 널 뭐로 보겠어. 설득할 자신 있어? 헌트로 영입한다며?"

"네. 설득할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을 텐데."

"의외로 쉬울 겁니다. 설득 상대가 저라면."

펜리는 미덥지 못한 표정인데, 난 자신 있었다.

'바라보는 적이 같다면 없던 동지애도 생기는 법이거든.'

라웁 숲에서 마주쳤던 칼도 같은 이유로 내게 큰 호감을 보였다. 크룩스 조직과 악연으로 동지애가 생긴 탓이다.

그런 면에서 록터도 조만간 나와 같은 적이 바라보게 될 것이다.

학살자 카멜.

록터에게 '배덕의 기사'란 신명을 각성시킨 주적 말이다.

"아, 그리고 베네타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문제? 광물 수급 말인가?"

"네. 정확히 철광석이죠?"

"맞아."

도르네프가 큰 관심을 드러내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창가를 응시했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

많은 이가 우리가 지나가는 길목에 서서 마차를 구경했는데, 내 눈에 인간 상인들이 딱 들어왔다.

옹기종기 모여 마차로 접근하려는 것을 병사들에게 막혀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우리 아니, 나와 접촉하기 위해 안달이 난 표정인데, 손만 내밀면 냉큼 다가와 꼬리를 흔들 것 같았다.

"난 인간이 싫어. 특히 상인은 더더욱."

펜리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홱 돌리자 난 어색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하네?

요즘 날 아주 귀찮게 구는 녀석들.

저들을 보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 * *

별장에 도착한 뒤 작은 파티를 열었다.

내 원래 계획은 혈맹 의식을 마무리한 뒤 오늘 밤 은밀히 영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도르네프의 고민을 들은 뒤 계획을 잠시 미뤘다.

새로운 일정이 생겼기 때문인데 그 일정이 뭐냐면,

"굉장한 연설이었습니다! 알렉스님!"

"토바른에 새로운 영웅이 탄생한 것이 분명합니다. 하하하!"

"게다가 이 빼어나신 외모까지! 베네타의 여인들이 알렉스님을 보고 밤잠을 설칠 듯 보입니다. 큰일이군요."

접대실을 가득 채운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아부 오브 아부.

난 인간 상단주들을 별장에 초대해서 아부의 킹을 가리는 중이었다.

아부인 걸 알면서도 입가가 실룩이는 것을 보니, 역시 상인들의 세 치 혀는 무서웠다.

내 신분은 몰락 귀족이지만 내 등 뒤엔 혈맹으로 맺어진 베네타가 있었다. 저들이 내 비위를 맞추며 눈치를 보는 이유였다.

넬라에게 부탁해서 굵직굵직한 상단만 초대해 달라고 했는데, 그 머릿수만 열에 이르렀다.

토바른 내에 방귀 좀 뀐다는 상단주들이 대부분 모인 셈인데, 이번 베네타의 광산이 주는 파급력이 상인들에게 상상 이상으로 굉장했던 모양이었다.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는데, 이왕에 플렉스(Flex)한 기분을 맛보려고 선물 보따리를 풀었더니 하나 같이 팬케이크뿐이었다.

"...이게 뭡니까?"

"팬케이크를 무척 좋아하신다는 말을 들어서 종류별 최고급으로 전부 준비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시발, 너 같으면 마음에 들겠냐?

정보 길드에 쫙 퍼진 확실한 정보라는데, 어떤 쌍놈이 이상한 소문을 퍼트린 모양이었다.

정색하며 식탁을 엎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누르며 이를 꽉 깨물고 웃었다.

내 목적은 이런 떡고물조차 안되는 팬케이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 대신 늑인 할아범과 시종들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었는데, 상인들이 나 몰래 주는 팁이 상당했던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내 정보를 묻는 값이겠지만, 별 걱정하지 않았다.

도르네프가 고르고 고른 사람들인데 괜한 말이 나올까 싶었다.

"자, 한잔들 하십시오."

내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상단주들이 미소를 띠며 잔을 들어 올렸다.

내 말 한마디에 빠릿빠릿 잔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니 옛 직장 생각이 났다.

회식 때 회장님이 뜨면 딱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시발, 오늘 나도 해보자.

"위하여."

"위하여!!!"

나도, 상단주들도 뭘 위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분위기나 띄울 겸 술자리를 즐겼다.

언제 본론으로 들어갈지에 대한 일종의 눈치 싸움이었다.

"오! 이건 뭡니까? 처음 보는 음식이군요."

"맛이 다채롭습니다. 식감도 좋고요."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군요."

상단주들은 시종들이 가져온 샌드위치를 발견하곤 이리저리 살피며 눈을 빛냈다.

하여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잘 맡는다니까.

조만간 토바른 전역에 샌드위치 바람이 불 것 같았다.

써브웨이 하나 차리면 돈을 갈퀴로 쓸어 담을 것 같은데 말이지. 레시피를 팔아볼까 했지만, 내용물이 단순한데다 카피가 쉬워서 입맛만 다시곤 넘어갔다.

"저, 알렉스님."

"아, 이름이?"

"그레노스라고 불러주십시오."

"네. 그레노스님 물어보고 싶은 게 뭡니까?"

"먼저 이름을 불러주셔서 영광입니다. 알렉스님."

그레노스.

우아한 이름과 달리, 턱살이 두둑한 뚱뚱보 녀석이었다. 첫 만남부터 내 곁에 착 붙어서 아부를 시작했는데 그 실력이 우리 회사 아부로 탑티어를 찍은 팀장 새끼를 능가할 만큼 놀라웠다. 아니, 이 녀석이 오늘의 아부킹이다.

다만, 다른 이들이 이 뚱뚱보의 눈치를 보는 걸 봐선, 상인으로 끗발 좀 날리는 녀석 같았다.

역시나 뚱뚱보가 입을 열려고 하자, 주변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살짝 긴장감이 도는 흐름.

분위기를 보니 이 뚱뚱보가 총대를 멘 것 같았다.

이제야 본론으로 넘어가나.

상인 녀석들은 왜 이리 탐색전이 긴지 모르겠다. 귀족들은 더 하다는데 큰일이었다. 주먹이 먼저 날아갈까 봐.

"초대를 거부하시다가 생각을 바꾸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제가 생각을 바꿨다고요?"

"그게… 초대장을 여러 차례 보냈는데 답장이 없으셔서."

"아, 답장."

러브레터도 아니고 쉰내 나는 사내새끼들이 보낸 초대장에 답장을 왜 줘?

물론, 생각과 달리 내 표정엔 예의가 가득 담겼다.

"의도치 않게 오해를 불러왔군요. 폐광산에서 돌아온 후 밖과 단절한 채 지냈습니다. 운신을 한지도 얼마 되지 않았죠."

"다, 다치셨습니까?"

표정을 보니, 내가 아니라 뚱뚱보가 더 다친 것 같았다.

무서운 새끼.

"저주를 푸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지라…."

"이런! 지금은 괜찮으십니까?"

"환청이 가끔 들리는데 심한 편은 아닙니다. 저주의 후유증이죠."

[날 말하는 건가?]

꼰대 새끼야 그 얘기가 아니잖아. 진지하게 듣지 말라고.

"저희는 그것도 모르고… 같은 '인간'끼리 너무 소원한 것 아닌가 싶어서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전부 오해였군요. 알렉스님이 그럴 리 없지요."

영혼까지 팔아 동족에게 사기 치는 건 인간밖에 없을 텐데 '인간'을 운운하다니 진짜 뻔뻔한 새끼였다.

"답장이 없었다면 섭섭해할 수도 있지요. 그래서 이리 늦게라도 자리를 만들지 않았습니까?"

"역시 영웅다운 면모이십니다. 저 그레노스, 가는 곳마다 알렉스님에 대한 찬양을 입에 담고 살겠습니다."

역시 이 새끼는 아부킹이 맞았다. 무슨 조기 아부 교육이라도 받았나?

살짝 아쉽지만, 이제 이 달콤했던 아부 타임도 슬슬 끝낼 때가 온 것 같았다.

"찬양은 무슨, 저도 대가를 받고 움직였을 뿐입니다."

"…대가? 대가라면?"

"광산 지분입니다. 성주께서 감사하게도 제게 지분을 주셨지요."

순간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뚝 가라앉았다.

지분이란 단어가 나온 순간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네타의 광산에 죽을 때까지 빨대를 꽂을 수 있는 권리. 그게 바로 지분이다.

상인들은 머리를 팽팽 돌렸다.

눈앞의 이 어린놈.

어떻게 구슬릴 수 있을까.

그건 뚱뚱이 그레노스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지분의 뜻을 아십니까?"

"전 상업 쪽은 문외한이라."

"영웅에게 광산 지분 같은 건 귀찮은 번뇌 같은 거지요. 혹시 그 귀찮음을 누군가에게 팔 의향도 있으신지...."

"명예 지분인지라 팔 수 없습니다. 그저 광산에 나오는 광물 일부를 양도받는 수준이지요."

내 말에 곳곳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무척 아쉬운 표정인데, 어떤 꿍꿍인지 안 봐도 훤히 보였다.

지분을 어떻게든 확보하고 싶었겠지.

상인들의 열기가 확 식는 것이 느껴졌다.

광물이야 블라이어 영지에서도 수급이 가능했다. 굳이 베네타가 아니더라도 대체 가능한 사업.

양도권을 받아도 큰 이득은 되겠지만, 기대한 것만큼의 대박은 아니었다.

차라리 드워프의 연결고리로 저 어린 녀석을 써먹는 것이 장기적으로 유리했다. 상인들이 그에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마나석입니다."

"...네?"

"아, 양도 받은 광석 말입니다. 미미한 양이지만 해마다 지분 만큼 양도 받을 권리를 얻었죠."

"…마나!, 쿨럭! 쿨럭!"

"마나석!"

"진짜 마나석입니까!?"

갑자기 상인들의 반응이 격렬해졌다.

마나석은 매우 희귀한 광석이기 때문이다.

샤르바딘을 통해 베네타의 광산에는 다양한 광물과 함께 마나석이 채굴된다고 들었다.

대장장이 정원에 채워진 다수의 아티팩트가 나올 수 있었던 이유도 마나석 때문이었다.

물론, 소량만 나왔는데 그 작은 양만 해도 인간들에겐 엄청난 가치를 지녔다.

마탑 연합.

마나석은 마법사들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재원이었다.

상인들에겐 마탑과 연줄을 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제, 제게 파십시오!"

"그 무슨 무례인가...!"

"아, 알렉스님! 제 얘기를 일단 들어보십시오!"

너도나도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오려고 했다.

파티가 엉망진창으로 변했다.

이들의 말을 듣고 있으면 끝이 없을 테니, 난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저들을 모은 이유는 하나다.

대규모의 철광석 수급.

"보름 후까지 영주성으로 가장 많은 계약금을 들고 오신 분에게 1년 치 마나석에 관한 양도권을 드리겠습니다."

"...1년 치라면? 그 양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 겁니까?"

"저 상자 안을 채울 정도는 되겠군요."

내가 팬케이크 포장 상자를 발로 툭툭 건드리자, 상인들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이다. 하지만 마법사 앞에 가져가도 교섭 우위를 얻을 수 있는 양이다.

이건 절대 놓쳐선 안 될 대박 거래였다.

"다만, 계약금은 철광석으로 받을 겁니다."

"…철광석? 굳이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부피가 상당할 텐데, 무게도 많이 나갈 테고."

"드워프 종족과 거래에 진심인 상인분을 찾으려면 광물을 가장 많이 취급하는 분께 기회를 드리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성으로 가장 많은 철광석을 가져오신 한 분께 도르네프님이 직접 마나석 양도권을 드릴 겁니다."

마나석에 이어 드워프 성주와 안면을 틀 기회.

이 정도 미끼를 안 물면 상인 때려치워야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모두 내로라하는 상단주들.

순식간에 계산이 끝났고 확신이 서자, 그때부터 엉덩이를 들썩이며 몸을 배배 꼬았다.

당장 자리를 파하고 나가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지금부터 눈앞의 모든 이들이 경쟁자다. 철광석을 독점하려면 이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하는데 내가 못 나가게 눈치를 주자, 서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나가면 섭섭하지.

난 천천히 잔을 들어 올렸다.

우리 회사에서도 이랬어.

시발, 집에 가고 싶은데 안 보내줬다고.

113화 펜리 반리

"위하여!"

"우, 위하여!!"

어째 전과 달리 구호에 힘이 없다.

이 자리보단 모두 바깥에 신경이 쏠린 탓이다.

난 무시하고 다시 술잔을 들어 올렸다.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는데? 회장들도 이 맛에 건배하는 건가?

뚱뚱보 녀석이 은근히 먼저 자리를 파하려고 눈치를 보냈는데, 난 이런저런 핑곗거리를 대며 뚱뚱보를 잡았다.

넌 마지막이다. 이 새끼야.

"이제부터 시작인데 섭섭합니다. 설마 제가 아닌 마나석을 보고...."

"아, 아닙니다! 저도 이 자리가 너무 즐겁습니다. 하하하…!"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 같군요. 노래 한 곡 어떻습니까? 제가 부를까요?"

"...."

갑질이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었어?

인생 자체가 철저한 을이었던지라, 이런 기분을 알 기회가 있어야지.

"위하여!"

그렇게 슬슬 건배사가 귀찮아질 때쯤이었다. 시간이 제법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이 열리며 지배인이 들어왔다.

"알렉스님, 새로 와인을 내왔습니다."

늑인 할아범이 와인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적포도주가 아닌 백포도주가 잔에 담기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이마를 슬쩍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작업이 끝났다는 신호가 떨어졌다.

"살짝 취기가 돌아. 자리를 파할까 싶은데. 원하신다면 더...."

"아닙니다! 오늘 얼마나 피곤하시겠습니까!? 저희는 물러가겠습니다."

"그러시겠습니까? 아, 그레노스님?"

"…네?"

"노래는 마저 끝내시고 가셔야죠. 멈추기엔 아까운 실력입니다."

딱 뚱뚱보 순서가 됐을 때 난 자리를 파하고 상인들을 내보냈다.

처음엔 나와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려고 했던 자들인데 내가 허락하기 무섭게 배꼽 인사를 하곤 후다닥 사라져버렸다.

힘없이 노래를 끝마친 뚱뚱보를 마지막으로 파티가 끝이 났다.

뚱뚱한 녀석이 더럽게 빠르네.

모두가 떠난 접대실.

폭풍이 한차례 휩쓸고 간 풍경이었다.

"이것 좀 드시고 치우세요."

"감사합니다!"

"넉넉하게 가져가셔도 됩니다. 가족들이랑 같이 드세요."

산처럼 쌓인 펜케이크 상자를 가리키자, 할아범과 시종들의 표정이 밝아졌다.

주머니 빵빵해, 값비싼 간식도 챙겨.

나 같아도 행복하겠다.

포도주를 홀짝이며 상인들이 가져온 팬케이크를 하나씩 까먹고 있는데, 넬라가 조용히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맛있어요?"

"넬라표를 따라가려면 멀었죠. 볼 일은 다 끝났습니까?"

"네."

"근데 호위가 없네요? 펜리님이 확실한 녀석으로 붙여준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아, 여기요."

넬라가 배시시 웃으며 손등을 보여줬는데 익숙한 문양이 보였다.

설마 생명의 징표를 그녀에게 쓸 줄이야.

펜리 녀석, 넬라를 보내고 엄청 불안했나 보다.

하지만 생명의 징표는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다.

일회용이라는 거.

게다가 그림자가 존재해야 한다는 조건도 붙었다.

어떤 위기가 어떤 타이밍에 올지 모르는데, 펜리를 막 부를 수 없는 노릇이었다. 왜 호위를 붙이지 않고 그녀 혼자 보낸 거지?

"이거 일회용 아닙니까?"

"아닌데요?"

"...네?"

넬라가 손바닥을 펴고 내밀자, 그 위로 거무튀튀한 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비를 둘러쓴 펜리의 미니미니 버전.

전보다 살짝 커진 그림자 요정이었다.

정령이 날 힐끗 보곤 넬라의 품에 폭 안겼다.

뭐야? 이 온도 차이는?

아니, 그것보다 정령이 왜 넬라 곁에 있지?

"생명의 징표를 받으면 명령은 내릴 수 없지만, 그림자 정령을 곁에 둘 수 있어요."

"이번에 정령이 성장하면서 가능해진 겁니까?"

"아니요? 처음부터 가능했는데요?"

"…처음부터?"

이 망할 펜리 년을 봤나.

나한테 생명의 징표를 쓸 땐 일언반구도 없던 내용이었다.

"아, 오해하지 마세요. 마력을 지녀야 정령이 머물 수 있으니까요. 전 강하지는 않지만, 마력 생성에 관한 능력을 지니고 있거든요."

"그렇습니까?"

"정령과 친화력도 있어야 해요. 전 반리와 상성이 좋거든요."

"반리…?"

"정령 이름이에요. 제가 지어줬거든요."

펜리? 반리?

리자 돌림으로 지은 건가?

이름이 언급되자 정령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정령에게 이름을 지어줬다는 건 무척 큰 의미가 있는데, 계약자인 펜리가 그녀에게 허락한 걸 보니 그림자 정령과 계약할 때 넬라의 도움을 받았던 모양이었다.

어쨌든 오해는 풀었고.

바깥일이 궁금했다.

"작업은 다 끝났어요."

"너무 해 먹으면 안 됩니다. 의심을 살 수 있어요."

"그 정도로 눈치 없는 분은 아니에요."

글쎄, 돈 귀신이 붙은 펜리가 직접 하는 일이라 살짝 불안했다.

방금 나간 상인들이 철광석을 구하기 위해 어디로 가장 먼저 달려가겠는가?

바로 베네타 내에 자리한 광물 거래소일 것이다.

하지만 이미 펜리가 유통된 철광석을 모조리 쓸어간 상태였다. 내가 상인들을 붙잡고 늘어진 이유와 관련 있다.

펜리가 움직일 시간을 벌어다 준 것이었다.

상인들이 철광석을 구할 곳은 베네타 외의 지역, 블라이어나 에토르 지역뿐이었다.

보름 안에 토바른 내 유통 중인 철광석을 최대한 확보하려면 똥줄 타게 뛰어다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최종 캐스팅 보드를 쥔 펜리가 수집한 철광석을 한 명에게 밀어주는 조건으로 거액을 요구하겠지.

과연 얼마나 뜯어 먹을지.

"근데 광산에서 정말 마나석이 나옵니까?"

"네. 소량이지만 꾸준히 채굴됐다고 문헌에 적혀 있어요."

"도르네프님이 여유분을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네요."

"남은 것들은 제작에 사용할 수 없는 하(下)품이에요. 그러니 지금껏 남아 있었죠."

"상인들은 그것에도 만족할 겁니다. 마나석은 마법사들이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니까요. 유통 중인 철광석들을 악착같이 모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넬라는 팬케이크를 하나씩 까먹는 아서를 말없이 바라봤다.

드워프들이 우려했던 광물 부족을 인간 상인들을 이용해 해결할 줄은 몰랐다.

신기한 사람.

"같은 인간이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인가요?"

그 물음에 난 피식 웃었다.

"인간을 털어먹는 건 인간뿐이거든요. 비슷하다고 봐야겠죠?"

"인간을 이해 못 하겠어요. 그리고 당신도요."

"사람 속은 자기 자신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세요."

"그럼, 그다음은요?"

"다음 뭐 말입니까?"

"상인들이 성으로 철광석을 싸 들고 오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성주님이 알아서 하겠죠."

난 남은 조각을 입에 털고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났다.

그다음?

'내 알 바 아니지.'

필요한 광물을 바리바리 성으로 배달해줬는데 나머지 일까지 일일이 내가 말해줄 필요가 있을까?

성주인 도르네프가 마나석을 제공하든, 제값을 주고 전량을 구매하든, 무력으로 빼앗던 알아서 할 것이다.

난 미끼만 대신 던져줬을 뿐, 그물을 건지는 건 도르네프의 몫이었다.

그것도 못 챙기면 성주 그만둬야지.

펜리의 경우엔 그냥 어부 곁에 어슬렁거리는 고양이 포지션이었다.

어부가 고기를 노획하다 보면 몰려든 고양이 무리에게 먹으라고 던져주는 생선 같은 거 있지 않나?

앞으로 돈이 많이 필요할 것 같아서 살짝 발을 담그게 해줬다.

검은 장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올 엘프들을 먹여 살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할 것처럼 보였으니까.

나중에 이 일로 상인들이 나를 찾아와 하소연해도 소용없다.

"슬슬 갈까요?"

난 지금 떠날 거거든.

그레노스란 그 뚱뚱보의 아부가 살짝 그리워질 것 같긴 한데, 다시 볼 일이 있을지 모르겠다.

"당분간 영주성에 머물 것 같으니, 잘 지내고 계세요."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닙니다. 축제 구경도 하면서 천천히 갈 생각입니다."

"…알렉스님."

"네 말씀하세요."

넬라와 함께 입구에 선 나는 늑인 할아범의 배웅을 받았다.

눈빛에 진한 아쉬움이 한가득 깃들길래, 그동안 정이 들었나 싶었다.

그런데,

"상인분들은 또 안 오십니까?"

"빗질이나 열심히 하세요."

돈맛을 너무 늦게 알아버린 늑대 할아범이었다.

* * *

별장은 내성 구석에 자리한 탓에 조용했다. 하지만 외각을 조금만 벗어나면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우리를 반겼다.

어느새 대광장 중심까지 밀고 들어온 좌판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썰물과 밀물처럼 인파가 내 어깨를 쉴 새 없이 치고 가는데, 방심했다간 길을 잃을 것 같았다.

혈맹 의식 때보다 인파가 더 늘어난 느낌이었다.

우린 로브를 걸친 채 성 바깥으로 향했다.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건 덤이었다.

넬라의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표정들이 행복해 보여요."

"축제가 주는 힘이죠. 좋은 기억을 심어주거든요."

"베네타가 늘 이랬으면 좋겠어요."

"자주 보게 될 겁니다. 이제 베네타는 혈맹이 지켜야 할 심장부가 됐으니까."

"지킬 수 있겠죠?"

"노력해야죠. 펜리님도 베네타를 지키려고 검은 장미를 세상에 공개한 거 아닙니까?"

"맞아요."

마스터 펜리는 엘프족의 수호를 슬러건으로 내걸었다. 게다가 세계수의 존재까지.

방랑 중인 엘프들을 베네타로 끌어들이겠다는 포부를 밝힌 것이다.

엘프의 힘을 하나로 결속시키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당연히 힘을 키우기 위함이었다.

'쉽진 않을 거야.'

엘프들이 모이고, 드워프들이 힘을 합쳐도 위기는 계속될 것이다.

넬라와 달리 내 머릿속은 이미 이 행복 뒤로 펼쳐질 새로운 전쟁을 떠올리고 있었으니까.

그건 학살자,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베네타의 광산은 탐욕스러운 세력의 표적이 될 확률이 높았다.

마나석의 존재는 비밀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차라리 광산이 저주로 폐쇄됐을 때가 베네타의 안전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잠자코 멸망을 기다리는 일.

이제 베네타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벽을 부수고 부순 뒤, 토바른 지역 너머를 바라봐야 했다.

그래야 이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에겐 힘을 기를 시간이 있다는 거다.

오르도르의 숲.

마녀들의 숲이 보호막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 전에 우리는 첫 번째 벽, 학살자 카멜을 무너트리고 토바른을 손에 넣어야 했다.

퍼퍼펑―! 펑! 펑! 펑!

화려한 폭죽을 뒤로한 채 우리는 성문을 나왔다.

바깥에 나오니 병사들이 대기한 곳에 엄청난 마차들이 정차되어 있었다. 성안으로 마차를 몰고 갈 수 없으니, 외성 벽에 줄지어 마차들을 댄 모양인데, 무슨 군대 병력이 도착한 줄 알았다.

더럽게 많다.

잠시 후, 넬라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도착했다.

마부가 다크 엘프인걸 보니, 검은 장미의 일원을 안내자로 보낸 것 같았다.

마차는 곧 우리를 태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가 지시한 방향은 블라이어 방향이었다.

난 록터가 아닌 칼을 염두에 두고 록터의 위치를 생각해봤다.

내가 칼 바스타인이라면?

'추적자들이 절대 생각지 못한 곳에 숨어 있겠지.'

칼은 유독 등잔 밑이 어두운 곳을 좋아했다.

칼이라면 도망치는 대신 반대로 블라이어 중심부로 더욱 들어갔을 확률이 컸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뒤 넬라에게 물었다.

"편지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미 블라이어로 출발했어요. 그곳에 없더라도 사흘 안으로 블라이어 성주의 손에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근데, 편지 내용은 언제 말해줄 거예요?"

"나중에요."

"록터 펠리스와 관련 있겠죠?"

난 고개를 끄덕였다.

록터 펠리스를 찾기 전에 사전 작업이 필요했다.

바로 알렉스의 이름으로 학살자에게 당당히 편지를 보내는 것.

난 이미 학살자가 내 정체를 '그'의 전달자로 파악한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다.

카멜의 조직인 주술사들의 둥지라면 정보를 모으기 충분할 것 같거든.

그래서 먼저 선수를 쳐서 알릴 생각이다.

내가 '그'의 사람이고.

록터 펠리스도 '그'의 사람이라고.

상대가 미래를 알고 있는 회귀자라면 혼란을 주기에 편지만 한 것이 없었다.

114화 사냥개 부대

"정지! 여기서 내리겠습니다."

워―

내 목소리에 마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넬라와 함께 바깥으로 나오니 날이 밝아 있었다. 마차를 타고 밤새 이동했는데 여기서부턴 베네타의 영토가 아니라서 마차에서 내려서 움직이는 게 안전했다. 마차로 가는 길목은 눈에 띄기 쉽고, 라웁 숲을 가로지를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숨을 깊게 들이쉬니 풀 내음이 짙게 났다. 숲 한가운데, 새 지저귐에 유독 시끄러운 저 너머가 라웁 숲이었다.

"넬라, 준비됐나요?"

"잠시만요."

돌아보니 넬라가 늘어트린 머리를 가지런히 묶고 있었다. 복장은 움직이기 편하도록 딱 붙은 갈색 가죽옷으로 갈아입었는데 우윳빛 피부와 잘 어울렸다. 틀어 올린 묶음 머리 아래로 가녀린 목선이 유독 눈에 들어온다.

준비를 마친 넬라가 마부석을 가볍게 두드리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스터께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인 검은 장미가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이거 받으십시오."

"이게 뭔가요?"

"이번 주 정기 정보입니다. 미리 드렸어야 했는데 상황이…."

검은 장미는 서신을 건네곤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조용히 떠났다.

바퀴 자국만 남은 자리, 그녀는 조용히 서신을 펴곤 읽어 내려갔다. 내용이 궁금해서 슬쩍 다가가니, 그녀가 피식 웃으며 서신을 읽어보라고 권했다.

"무슨 서신입니까?"

"당신과 관련된 내용이 담겨 있네요. 검은 장미에서 최근에 모은 정보가 담겨 있어요."

"정보요? 마차에 있을 때 미리 주지. 왜 지금 주는 겁니까?"

"자고 있었잖아요."

"전 안 잤거든요?"

"아서님껜 주기 싫었나 보죠."

"...."

혈맹 의식에 많은 기력을 소모했는지, 그녀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나는?

팔팔했다.

두 눈을 멀뚱히 뜨며 밤새 바깥 구경이나 하고 있었는데, 미리 정보를 줬으면 잡생각이라도 했을 거 아니야?

입맛을 다시며 서신을 건네받았다.

이렇게라도 질 좋은 정보를 받아볼 수 있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다.

정보의 접근성.

혈맹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랄까.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읽은 순간 내 미간이 확 좁아졌다.

다크 엘프 새끼, 이런 내용이었으면 내게 진즉 줬어야지!

하여튼 펜리년을 닮은 녀석들은 하나같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근데, 이 내용... 진짜야?

"크룩스가 먹혔네요…?"

"네. 아서님이 과거 암살자로 몸담던 곳이라 신경 썼던 곳이거든요. 근데 크룩스뿐만이 아니에요. 에토르 내에 자리 잡고 있던 암살 조직 대부분이 사라졌어요."

크룩스가 사라졌다.

칼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지 궁금했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스토리를 보면 카멜이 에토르 영지를 점령하고 칼을 밑에 두기 전까지 크룩스는 잘 먹고 잘살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사라진 것이다.

누가 이런 짓을 벌였을까.

의심 가는 놈이 있긴 했다.

'렌구아 필드, 그 흑주술사가 손을 뻗었을 가능성도 있어.'

블라이어 영지에는 암살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 주술사들의 둥지가 들어서면서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이유는 재료 수급.

암살자처럼 피로 물든 영혼은 주술 인형 반다이크들의 핵심 재료로 쓰인다.

에토르 영지에는 렌구아가 오래도록 자리 잡고 있었다.

게다가 신명을 각성한 것까지.

이것 또한 기존 스토리를 비켜 갔다.

렌구아가 이번 일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컸다.

그럼, 카멜의 지시를 받았다는 건데, 이 정도로 에토르를 들쑤시면 주인인 톰자엘 자작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에토르와 직접 부딪치기엔 아직 시기가 이를 텐데, 뭘 노리는 거지?

"잠깐만요."

"다른 정보가 또 있습니까?"

"암살자 하니까 생각난 게 있어요."

넬라는 턱을 잠시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기더니 새로운 내용을 언급했다.

"보름 전쯤인가? 블라이어 성주가 임시 부대를 창설했어요. 암살자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들었는데. 그것과 관련 있을까요?"

"임시 부대요?"

"네. 정확히 파악되면 알려드리려고 했는데, 지금과 맞물린 것 같아서요."

학살자의 새로운 부대.

처음 듣는 내용이다.

게다가 암살자 출신?

"그 부대의 수장이 누굽니까?"

리옹은 친위대, 렌구아는 주술사들의 둥지를 맡고 있다.

칼 바스타인이 빠진 지금, 임시 부대를 맡을 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설마 크룩스의 마스터…?

"잭과 하우엘. 카멜이 최근에 직접 영입한 쌍둥이 형제들이에요."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그 개새끼들이 학살자 밑으로 들어갔다고?

어떻게?

"정말 잭과 하우엘이 맞습니까? 카멜 밑에 있다고요?"

"네. 카멜이 직접 챙길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 다만 실력이 의심스러워요. 성주의 신임을 받기엔 모자라 보이거든요."

"혹시 두 형제 근처에 검은 장미들이 머물고 있습니까?"

"정보를 얻기 위해 근처에 자리를 잡긴 했는데…."

"물리는 게 좋을 겁니다. 피해만 커질 테니까."

"네? 하지만 저희가 판단하기로 형인 잭은 4성, 동생 하우엘은 3성 정도로…."

"아뇨. 형인 잭은 5성, 동생 하우엘은 4성입니다. 그리고 둘 다 특성 개화자들입니다."

"...!"

넬라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두 형제가 감쪽같이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에 놀란 표정이었다.

"돈과 여자에 환장한 망나니들이라 들었어요. 그것조차 실력을 숨기기 위한 장치였던 건가요? 그 정도로 무서운 이들...."

"아닙니다. 그들은 발정 난 개새… 아니 망나니들 맞습니다. 다만, 실력을 숨기는 데만 진심인 인간들이죠."

"왜죠?"

"생존에 유리하니까요. 게다가 특성과 관련 있습니다. 둘 다 암살과 관련된 특성을 지녔거든요."

암살 특성은 들키면 그 위력이 반감된다. 그래서 두 형제는 특성을 되도록 드러내지 않았다.

발정한 개새끼들.

그놈들은 여인에 미친 놈들이다.

신분 안 따지고 이쁘면 덮치고 보는 변태들이라 귀족들의 여인도 많이 건드렸다.

당연히 그들을 죽이려는 귀족가 역시 한 트럭인 상황.

그래서 실력을 숨겼다.

만만한 암살자들만 보내왔으니까.

하지만 쪽수에는 답이 없어서 두 형제는 지금쯤 학살자 밑이 아닌 암살자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어야 했다.

바로 에토르의 모든 암살 조직에 의해 말이다.

그런데 에토르의 암살 조직은 씨가 말랐고, 쌍둥이 형제는 카멜을 뒷배로 두고 안전을 확보했다.

그것도 모자라 두 형제를 수장으로 둔 임시 부대?

'학살자 전력에 변화가 생겼다.'

잭과 하우엘을 얻음으로써 카멜은 쓸만한 사냥개들을 얻었지만, 지독한 불명예를 떠안았다.

잭과 하우엘에게 이를 가는 귀족 가문들과 척을 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럼 에토르의 힘만 더 강해진다.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굳이…?

'뭔가 확실한 패가 있어. 귀족 가문들 따윈 더는 눈치 볼 필요 없는.'

아, 아티팩트!

맞다. 카멜에겐 내 신명 정보를 팔아 획득한 다량의 아티팩트가 있었다. 그게 분명 큰 변수가 됐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이 사실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두 형제가 이끄는 암살자 부대는 완벽한 사냥개 부대다.

물리면 골로 간다.

위치 파악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 녀석들 지금 위치 파악됩니까?"

"블라이어 영지에서 하루 떨어진 마을에 자리 잡고 있어요. 록터를 추적한 듯 보이다가 사흘 전부터 마을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 정확한 이유는 몰라요."

하루거리.

살짝 위험한데?

두 형제의 전력이면 록터가 제 실력을 발휘해도 목숨을 장담하기 힘들다.

"카멜의 위치는 아직이죠?"

"네."

넬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카멜을 감시하던 검은 장미들의 소식이 끊겼기 때문이다. 카멜이 영지를 벗어난 직후 벌어진 일인데, 그 후로 카멜의 정확한 위치가 파악이 안 되고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이곤 숲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위치부터 빨리 알아봐야겠네요."

"마스터가 곧 위치를 알려올 텐데요?"

"더 빨리 알아야 할 이유가 생겼습니다. 따라오세요."

내가 베네타에서 기어 나온 이유는 어느 정도 안전에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주각만 잡고 본다면 리옹과 렌구아 정도만 조심하면 되는데, 리옹은 학살자 곁에 머물렀고, 렌구아는 에토르에 있다.

학살자의 위치만 파악하면 되는데, 그건 펜리가 넌지시 언급해줬다.

그녀가 블랙마켓에서 신명 정보료로 건네줬던 세계수의 목걸이, 그 목걸이의 위치가 블라이어가 아닌 에토르 방향에서 잡혔기 때문이다.

펜리가 직접 나섰으니, 사흘 안으로는 위치가 파악될 것이다.

다만, 신경 써야 할 전력이 늘어서 계획보다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사냥개 부대.

듣기만 해도 살벌하다.

난 라웁 숲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블라이어 영지는 라웁 숲 서쪽 끝에 자리한 영지다.

우리는 라웁 숲에 들어서기 무섭게 달리기 시작했다.

나무가 휙휙 지나갈 정도로 빠른 속도. 곁눈질로 넬라를 바라보니 걱정과 달리 가볍게 따라오고 있었다.

엘프가 지닌 특유의 민첩함 때문인지, 그녀는 인간보다 몸이 날랬고 숲에선 더욱 가벼워 보였다.

다만, 체력적 한계가 있어서 이따금 쉬고 움직이길 반복했다.

"쉬지도 않고 달렸는데,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죠?"

"개처럼 구르면 가능합니다."

그렇게 반나절 정도 움직였을 때, 처음으로 짐승 소리가 아닌 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키에에에엑―!

크아아앙!

넬라가 긴장한 듯 내 소맷자락을 당기자, 난 나무 위를 가리키곤 그녀와 함께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높은 나뭇가지를 밟고 몇 차례 이동한 것도 잠시, 건너편 나무 아래서 익숙한 녀석들이 서로 물어뜯고 뒹굴며 싸우는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넬라는 그 괴물들을 바라보곤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생명체와 거리가 먼 기괴한 외모.

"키메라들이네요."

"아레나가 죽고 도망친 키메라들이 상당히 많았거든요. 숲을 돌다 보면 자주 마주치게 될 겁니다."

"서로 왜 싸우는 거죠?"

"통제하는 자가 없으니 그저 본능대로 움직이는 겁니다."

"광인들처럼 말이죠?"

"네."

광인들의 존재는 현재 많이 알려진 상태였다.

특히 에토르.

에토르 영지에선 서서히 늘어나는 광인들 때문에 톰자엘 자작이 골치를 썩이고 있다고 들었다.

기사단을 움직여도 그 피해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마석의 부작용을 경고하고 복용하는 행위를 금지해도 강해지려는 욕구 때문인지 소용이 없었다.

톰자엘 자작 자신도 은밀히 마석을 모아 기사들에게 먹이는 상황이니 통제가 될 리 없다.

지금까진 큰 소란 없이 마무리되는 모습인데, 영지 내부가 얼마나 썩었을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렌구아가 은밀히 작업하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요즘 마석 값이 많이 올랐죠?"

"부르는 게 값이에요."

시간이 갈수록 마석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올라갔다.

키메라 생산이 멈춘 지금, 희귀성이 올라갔기 때문이다.

돈이 되면 당연히 용병들은 움직인다.

눈앞의 상황이 그렇다.

키아아아아악!

"포위해!"

괴성이 들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일련의 사내들이 무기를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에토르의 용병들이었다.

서른 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키메라 두 마리를 포위하고 집중 공격을 퍼붓자 전투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저들을 기다린 거예요?"

"아니요. 저들은 아닌데, 곧 제가 기다리던 놈들이 나타날 겁니다."

"놈들? 누구를 말하는 거죠?"

"먹이사슬 상위 단계겠죠?"

키메라를 사냥하는 용병들.

그리고 그 용병들을 사냥하는 또 다른 존재들.

지금 시기에 한창 활동할 때였다.

잠시 후,

우웅―!!

"뭐, 뭐야!? 무슨 일...!"

키메라 시체에서 채취한 마석들을 가지고 시시덕거리고 있던 용병들이 흠칫하더니 바닥을 바라봤다.

핏빛 마법진이 생기더니, 용병들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력 좋은 용병들은 한발 빨리 움직여 마법진을 벗어났지만, 그들은 곧 숲에서 튀어나온 로브의 존재들과 맞닥뜨렸다.

용병들은 다급히 그 상대들에게 무기를 찌르거나 휘둘렀다.

푹―

"…어?"

"이, 이것들 뭐야?!"

재빨리 상대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은 용병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건 상대를 베어낸 또 다른 용병도 마찬가지.

허공을 찌른 듯한 느낌.

손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문도 잠시 용병들은 곧 로브 자락 사이로 뻗어 나온 번뜩이는 주먹을 맞고 기절했다.

용병들이 순식간에 제압당하자 우거진 숲에서 네 명의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명은 기사 복장, 다른 셋은 핏빛으로 이뤄진 가죽 망토를 걸치고 있었다.

핏빛 망토를 본 순간 나는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주술사들의 둥지.

핏빛 망토는 그들의 시그니처 로브였다.

기다리던 사냥감이 나타났다.

먹이사슬 최상위 단계인 내가 나설 차례였다.

5분 후에 사냥 시작이다.

115화 전투 AI가 있거든요

"사, 살려주십시오!"

핏빛 마법진에 묶인 용병들은 주술사를 발견하고는 살려달라 빌었다.

주술사는 말없이 품에서 주먹 크기의 수정을 꺼내더니 용병들 앞으로 내밀었다.

번쩍―!

"...!"

수정에서 터진 빛을 본 순간 용병들의 눈이 뒤집히더니 시체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수정을 갈무리한 주술사는 익숙한 듯 로브의 존재를 바라보며 지시를 내렸다.

"제물들을 정리해."

"...."

존재는 흐느적흐느적 움직이며 기절한 용병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다른 존재까지 합쳐서 로브의 존재는 모두 셋.

주술사 한 명당 하나의 존재를 조종하는 듯 보였다.

"사, 살려...."

주먹을 맞고 기절했던 용병 하나가 흐릿한 의식을 붙잡고 손을 뻗었다.

로브 자락을 잡아당겼는데, 벗겨진 로브 사이로 인간인 줄 알았던 존재가 핏빛 눈동자로 용병을 내려다봤다.

전신을 두른 새하얀 천.

온몸 여기저기 새겨진 붉은 인주 자국.

주술 인형 반다이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퍼억―!

용병의 얼굴을 함몰시킨 반다이크는 용병의 발목 한쪽을 움켜잡고 한 곳으로 질질 끌고 갔다.

주술 인형들이 제물들을 쌓아 올리는 장면.

"쳇."

기사는 그런 반다이크들을 바라보며 짧게 혀를 찼다. 불만이 가득 담긴 표정이었다.

저 잡스러운 것들이 최근에 머릿수를 늘리면서 주술사들이 친위대의 영역을 침범하기 시작했다.

하는 짓도 음침하고 잔인해서 눈도 마주치기 싫은 족속들인데, 최근에는 주술사들의 호위 임무까지 맡게 됐다.

짜증이 났지만, 방패를 보며 기사는 불만을 가라앉혔다.

'뭐, 덕분에 좋은 장비를 얻었으니까.'

아티팩트라 불리는 마법 무구.

리옹 단장이 가져온 선물 보따리가 아니었다면 이리 군말 없이 호위를 맡진 않았을 것이다.

친위대에게 골고루 아티팩트가 분배될 정도로 개수가 많았는데, 주술사들의 공으로 가능했다고 들었으니 말이다.

정리는 빠르게 이뤄졌다.

용병들을 한곳에 쌓아놓고 주술사들이 그 주변에 주술 도구를 설치하자, 기사는 슬슬 움직일 준비를 했다.

저렇게 해두면 뒤에 수거조가 찾아와 용병들을 거둬 갈 것이다.

저 주술사들은 사냥조였다.

마석이 귀해지면서 라웁 숲으로 마석을 구하려는 용병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는데, 주술사들의 둥지에서는 등급 높은 제물을 얻기 위해 용병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마석 수거는 덤이었다.

기사는 혹시 모를 위협에서 주술사들을 지키는 호위였다.

주술사들이 신호를 보내자, 기사는 그들 곁에 섰다.

다음 제물을 찾기 위해 움직이려는 것인데, 발을 뗀 순간 기사는 멈칫했다.

눈가를 가늘게 뜨곤 숲 한곳을 바라봤다.

저 멀리 붉은 빛이 번뜩이고 있다.

"왜 그러지?"

"저 너머에 뭔가가 있다."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기다려봐라."

의문이 든 것도 잠시, 핏빛이 푸르게 변하더니 삽시간에 가까워졌다.

빠르다. 그리고 날카롭다.

화살?

두 눈을 부릅뜬 기사가 방패를 올리며 외쳤다.

"기습이다!"

"...!"

주술사들은 전투 자세를 잡았고, 기사는 앞을 보호하며 자세를 낮췄다.

순간, 찌릿찌릿한 감각이 소용돌이쳤다.

지쳐오는 살기.

대기의 거친 기운이 이곳으로 빨려오며 쏟아지고 있었다.

뭐지?

코앞까지 짓쳐온 화살의 크기가 유독 크다고 느껴졌다. 아니, 화살이 아니다.

투창?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자, 기사는 다급히 방패의 능력을 발동했다. 투명한 보호막이 방패를 감싸고 아티팩트의 가호가 일행들을 보호한 순간,

콰아아아아앙―!!!

엄청난 폭발이 기사를 휩쓸었다.

"끄아아아악!"

방패를 움켜쥔 손과 함께 방패가 휘리릭 허공으로 날아갔다.

공성 무기인 바리스타를 정통으로 맞은 느낌이었다.

기사는 허공을 뱅그르르 돌았다.

바닥 위를 구르고 굴러 하늘을 바라보며 누웠을 때, 기사는 자신의 한쪽 팔이 뜯겨 나갔음을 느꼈다.

"끄…쿨럭!"

정예 기사인 만큼 그는 바로 상황을 파악했다. 방금 전 방패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한쪽 팔이 아니라 전신이 찢겨서 사라졌을 것이다.

일어나야 한다!

기사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고 했다.

투웅―

"…!"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섬뜩한 파열음.

설마, 그 끔찍한 화살이 또 날아온다고?

그 무서움을 피부로 느낀 기사의 몸이 돌처럼 굳어졌을 때,

"위다!"

하늘에서 검은 무언가가 떨어졌다.

네 발의 화살.

그런데 전과 달리 크기도 작고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술사들이 하늘을 가리키자, 반다이크들이 허공에 몸을 띄운 채 화살을 받아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에에에에에엑―!

그에에엑!

처음 들어보는 주술 인형들의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화살을 몸으로 받아낸 순간, 주술 인형들의 몸이 황금빛으로 번지더니 펑―! 터져나갔다.

기사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떠졌다.

"마, 말도 안 돼!"

믿기 힘든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겉으로 잡스러운 존재라 표현했지만, 기사는 반다이크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무기로도 죽일 수 없었던 불사의 인형들이 거짓말처럼 소멸했다.

그것도 동시에 셋이 전부!

"화, 황금빛! 놈이다!"

"…마법진, 마법진을 발동시켜!"

놈?

주술사들을 뭔가 아는 눈치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사냥하는 포지션에서 언제나 여유로웠던 주술사들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다급해 보였다.

잿가루가 허공에 내려앉고, 그 뿌연 공간을 뚫고 누군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기사는 현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 누군가를 올려다봤다.

눈앞이 검게 물든다.

콰직―!

"...."

기사의 머리를 짓밟아 터트린 존재.

고고히 빛을 발하는 순백의 활을 해체하고, 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반다이크들과 기사를 제거한 순간 게임은 끝났다.

완벽한 기습 성공.

난 잿가루 사이를 뚫고 주술사들을 향해 돌진했다.

"내가 막을 테니, 너희들을 이 사실을 알려!"

주술사 하나가 나를 붙잡았다.

바닥에 발을 디딘 순간 붉은 마법진이 내 몸을 휘감았는데, 마비되는 감각이 느껴졌다.

주술 트랩이다.

용병들이야 당황하며 허우적거렸지만, 난 피식 웃으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 있는데, 흑주술사는 내게 쥐약이라는 사실이었다.

번쩍―

"크아아아악!"

고대 문양을 터트린 순간 날 막아서던 주술사가 휘청이며 쓰러졌다.

피를 게워냈는데, 주술의 반발력이 주술사의 온몸을 괴롭히고 있었다.

녀석의 뒤통수를 검 자루로 찍고, 난 도망치는 주술사들을 쫓았다.

단검을 투척해 한 녀석을 넘어트린 후, 그대로 턱을 향해 싸커킥을 날렸다.

레토에게 주술사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을 물어봤는데,

[혀를 뽑아라.]

"그러면 듣고 싶은 걸 못 듣지 않습니까?"

[턱을 부수고, 두 팔을 뽑아라.]

뭐만 하면 일단 뽑으라는 레토의 살벌한 조언을 살짝 수정해서 두 팔을 부러트리는 선에서 주술사를 무력화했다.

손을 털고 뒤를 돌아보니 남은 한 녀석이 숲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잠시 후, 주술사가 사라진 숲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넬라가 그 방향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녀의 그림자가 기절한 주술사를 질질 끌고 있었다.

모르고 보면 공포 호러물인데, 알고 보니 든든하기 그지없다.

그림자 정령, 반리.

'펜리년처럼 까탈스럽지 않아서 다행이네.'

전투 전에 혹시나 하고 정령에게 부탁했는데, 의외로 그림자 정령은 내게 우호적이었다.

넬라의 마력이 받쳐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지만, 확실한 전력 하나가 생긴 것 같았다.

펜리년이 이 사실을 알면 분명 정령 사용료를 지불 하라고 할 텐데 무시하기로 했다.

넬라는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잘 싸웠죠?"

"제가요?"

"이렇게 쉽게 제압할지 몰랐거든요."

주술사 셋, 그리고 기사 하나.

쉽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마치 짜인 연기처럼 완벽하게 제압에 성공했다.

"알려준 데로 싸웠죠. 전투 AI가 있거든요."

"네? AI?"

[내 이름은 레토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난 내 머릿속의 정보를 레토에게 집어넣고 움직임을 수정했다.

반다이크, 흑주술사.

모두 한 번 이상 전투 경험이 있는 존재들이었기 때문이다.

기사가 변수였는데, 설마 흡혈의 활 최대 출력을 버텨낼 줄은 몰랐다.

기사가 제 실력을 발휘했다면 힘든 싸움이 됐을 것이다.

[아티팩트의 힘이 느껴졌다.]

아티팩트라….

조각난 방패 쪽으로 가보니, 뜯긴 팔과 함께 뒹굴고 있다.

기습 공격으로 무력화시킨 것이라 기사의 실력을 볼 기회가 없었지만, 아티팩트가 남아돌 리 없을 테니 정예 기사였을 것이다.

"제 신명 정보를 팔아서 기사들에게 투자한 모양이네요."

"얼마나 무장됐는지 파악할 필요성은 있어 보여요. 그리고 주술사들은 알렉스님의 능력을 알고 있는 눈치였어요."

고개를 끄덕였다.

황금빛을 보자, 싸우기보단 후퇴를 선택했다.

연구실 숲에서 만난 반다이크의 기억이 정보로 풀린 모양인데 카멜이 그 정보를 봤을지 모르겠다.

"물어보죠."

난 제압한 주술사들을 한곳에 던져 놓은 뒤 손목 발목을 풀었다.

주술사들의 둥지는 블라이어의 귀를 담당하는 정보 조직도 겸하고 있다.

반다이크를 다룰 정도라면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뜻이니, 쓸만한 정보 몇 개는 알고 있을 것이다.

물어볼 게 많으니, 입부터 바로 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앞서 걸으며 나직이 작게 중얼거렸다.

"레토."

[하찮은 주술사 따위의 입을 열게 할 고문법은 158가지가 있다. 그중 네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건 20가지다.]

"…뭘 그렇게 많이 알고 있습니까?"

[죽음과 가까운 행위니까.]

"...."

이 미친 변태 새끼를 봤나.

설마 죽으려고 고문법을 자신한테 다 적용해본 것은 아니겠지?

[네가 하는 그 생각 아마 맞을 것이다. 난 고대 시절부터 행해온 모든 고문법을 꿰고 있다.]

시발.

기록에 없어서 그렇지. 불사자 레토니칼스란 존재, 알고 보니 고대 시절 엄청난 악당이 아니었을까?

지금 난 이 녀석에게 속고 있는 게 아닐까?

"…가장 빠르고 쉬운 거요."

[성력 주입을 추천한다.]

그건 일단 눈앞의 궁금증부터 해결하고 고민해볼 생각이었다.

"끄아아악! 제, 제발!"

"다, 다 말해겠습니다!"

고문은 성공 리에 끝났다.

성력을 몸속에 주입하자 흑주술의 반발력으로 주술사들은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게다가 내 성력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보니 주술사들의 영력이 녹아내렸는데 힘을 잃는다는 공포가 주술사들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술술 물어보면 술술 분다.

거짓말?

내겐 심장박동으로 진실 유무를 파악할 수 있는 판타지판 거짓말 탐지기가 있었다.

너무 쉽게 가니 넬라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는데, 신녀가 그래도 되나?

"더 짜면 다른 정보도 나올 것 같은데…."

"...."

이곳 엘프들을 확실히 평화와 거리가 멀었다. 순한 맛은 없고, 매운맛투성이란 말이지.

우드득―

더는 뱉어낼 게 없자 고통 없이 보내줬다. 내 위치가 카멜에게 알려져선 안 되기 때문이다.

주저 없이 사람 목을 돌리는 내 모습에 순간적인 괴리감을 느꼈는데 잠깐이었다.

확실히 이곳 세상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았다.

"얻는 정보를 정리할 필요가 있는데, 이따 한꺼번에 하죠.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그래요."

주술사들이 알려준 정보에는 사냥조라 불리는 이들이 세 팀이나 더 있다고 했다.

전력도 똑같았다.

주술사 셋, 기사 하나.

시계 반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사냥감을 찾아다녔는데, 난 시계 방향으로 돌면서 그들을 사냥할 계획이었다.

전부 사냥하고 정보를 취합한다.

뒤치기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곳엔 사냥개 부대도, 렌구아도,

'학살자도 없었으니까.'

대략적으로 위치 파악이 다 끝났다는 의미였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달리기 시작했다.

116화 각성 신호탄

콰아아아앙!

내가 사냥조를 노리는 급습 패턴은 처음과 같았다.

관통 인첸트가 부여된 최대 출력의 흡혈의 고리로 기사를 원큐에 보내버린 뒤 반다이크들은 성력이 깃든 화살 세례로 소멸시켰다.

이 둘만 제거하면 주술사들은 식후 운동 거리도 안 됐다.

"끄아아아아악!"

눈부신 황금빛에 자지러지는 흑주술사들이 보였다. 흑주술을 펼칠 때 카운터로 빛을 터트리면 피를 토하며 경련을 일으켰는데 영력에 엄청난 타격이 가는 듯 보였다.

전투는 순식간에 마무리됐고, 숲으로 도망간 주술사 하나를 넬라가 쫓아갔다.

정확히 반리를 보낸 것이었다.

잭과 하우엘 이야기를 듣고 난 뒤부터 적극적으로 반리를 전투에 참여시켰다.

펜리가 아닌 넬라 곁에 머무는 반리의 전력을 파악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

의외의 소득도 있었는데, 그건 넬라의 활 솜씨였다.

엘프족의 특성이니 당연한 건가.

보조 전력으로 두면 한 사람 몫은 충분히 할 것 같았다.

가장 베스트는 펜리년을 소환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이번이 마지막인가?"

첫 사냥조를 포함해서 네 팀을 사냥했다.

정보대로라면 라웁 숲 사냥에 뛰어든 주술사들을 모두 정리한 셈이었다.

그래, 이런 날도 있어야지.

허구한 날 도망치는 건 나 자신에게 너무 미안한 일이잖아.

"읏차!"

반리가 마지막 녀석을 잡아 오는 동안 난 쓰러진 주술사들을 한 장소에 모았다.

기다리는 동안 주술사와의 전투를 복기하며 과거 레토와 대화하던 때를 떠올렸다.

격발로 인한 후유증 시기에는 남은 게 시간이었거든.

'차이가 뭘까.'

키메라와 흑주술사.

유독 성력에 약한 모습을 보이는 공통점이 무엇인지 고민해본 적 있다. 아니, 고민은 잠시뿐이고 그냥 족집게 답선생인 레토에게 물었다.

[담고 있는 기운의 차이다.]

"기운의 차이?"

[네 성력은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 잡는다. 담긴 기운이 불완전할수록 충격이 심할 수밖에 없지.]

키메라는 여러 신체를 붙여 제작했기에 모든 것이 불안했고, 흑주술사들은 대부분 타인의 영혼을 갈취하여 힘을 얻으니, 그 기운이 불안정했다.

둘의 공통점은 '혼돈'이다.

즉, 혼돈의 기운은 내게 쥐약이었다.

다만, 의문 한 가지.

"폐광산의 좀비들은 왜 아무렇지 않은 거죠?"

[죽은 자들을 말하는 거라면 당연하다. 죽은 자들을 농락한 힘은 '완벽한' 어둠이니까.]

"…완벽한 어둠?"

[균열이 전혀 없는 순수 어둠이란 뜻이다.]

"성력과 어둠은 반대되는 속성 아닙니까?"

[네 성력은 어둠과 부딪치는 광신도들의 속성과 다르다. 모든 속성과도 불화가 없고, 조화를 추구할 뿐이지. 네 성력과 부딪치는 건 그 조화를 깨는 존재들이다.]

키메라와 흑주술사는 조화를 깨는 존재들이라 성력에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꼰대의 설명은 어려웠지만, 이해한 것도 있었다.

무질서한 기운을 바로 잡는 힘.

그 조화의 힘 덕분에 내가 심장의 잠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이 비껴갔지 뭐야.

"순수 어둠, 당신의 염원에 힘을 준 그 존재는 누굽니까?"

궁금했다.

레토의 염원은 '죽음(Death)'.

잔재라 말했던 찌꺼기만으로 드워프들의 광산을 백 년 가까이 폐쇄시킨 힘.

불사자의 육체마저 소멸시킨 그 어둠은 죽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불사자인 레토가 직접 염원의 그릇을 채워줬다.

레토의 경우에는 누굴까?

[죽은 자들의 왕, 제스 밀로(Jess Milo)의 권능을 담았다. 살아있는 이들을 죽음으로 인도하거나 농락하는 녀석이지. 네 녀석이 계속 살아남는다면 언제고 만나게 될 것이다.]

"…왜요?"

제스 밀로(Jess Milo)는 나도 알고 있는 절대자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걸 유흥으로 삼은 악마 같은 존재.

생존이 목표인 내겐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귀를 씻어내야 하는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런데 만나? 내가 왜?

이때만큼은 레토가 끌끌끌 웃고 있다고 느껴졌다.

웃어?

설마 제스 밀로와 친한 사이야?

그런 거라면 진즉 말을....

[나와 앙숙적인 관계거든. 불사자인 나를 유일한 결핍으로 여기는 놈이다.]

* * *

"아, 시발."

갑자기 팔뚝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몸을 떨며 레토와의 대화를 머릿속으로 지웠다.

불사자 레토니칼스.

죽은 자들의 왕, 제스 밀로(Jess Milo).

죽지 않는 변태와 죽이는 걸 업으로 삼는 변태.

두 변태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건 사양이었다.

"이름조차 떠올리기 싫은 존재는 그냥 잊는 게 답이지."

[제스 밀로를 말하는 건가?]

"좀 닥쳐!"

왕재수를 털어내려고 양쪽 귀를 후비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문득 시간이 상당히 지났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늦네?"

보통 지금쯤 반리가 도망친 녀석을 질질 끌고 나타나야 하는데 소식이 없었다.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넬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펜리 손에 난도질당할 텐데.

문득 불안감이 들 때, 숲에서 넬라가 모습을 보였다.

근데 형색이 먼지투성이다. 바닥을 구른 흔적인데, 내가 다가가니 난색을 드러냈다.

"저 녀석은 또 왜 저래요?"

"아, 그게...."

어색하게 웃는 넬라 머리 위로 우비 소녀 반리가 OTL 모양으로 엎어져 있었다. 몹시 좌절한 동작인데, 이 녀석 조금 전까지 가슴을 쭉 내밀며 자신만만하더니 왜 우울해져 있어?

혹시 주술사를 놓친 건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양쪽 팔이 부러진 채 끌려온 주술사가 뒤쪽에 보였거든.

"제가 다칠 뻔해서 그런 것 같아요. 좀 심하게 굴렀거든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저 주술사, 다른 주술사와 달랐어요. 반리의 공격을 받아치고 반격까지 했거든요."

받아치고 반격까지 했다고?

그 정도면 주술사들의 둥지에서도 두각을 나타낼 정도일 텐데?

"다친 곳은 없습니까?"

"네. 살짝 긁힌 것 말고는 없어요."

넬라는 상처를 치료하고 반리를 위로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고, 난 잡아 온 녀석을 주술사들이 있는 곳으로 끌고 갔다.

정보 취합 시간이다.

다만, 이번에는 살짝 더 기대가 컸다.

크아아아악―!

성력에 의식을 깬 주술사들은 비명을 질러댔다. 다른 세 팀과 비슷한 질문을 했고, 듣는 답은 엇비슷했다. 다만,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마지막에 잡혀 온 녀석이 사냥조들의 관리자란 정보를 얻었다.

어쩐지 실력이 남다르다 했더니 사냥조 우두머리였냐?

이 녀석의 입에서 나올 정보는 다른 주술사에게 얻지 못한 특별한 정보일 확률이 높았다.

성력을 주입하며 기대를 했는데,

"쿠, 쿨럭! 죽여라!!"

독했다.

핏줄이 터진 눈동자로 날 노려보더니 혀를 깨물려고 하는데, 입에 주먹을 욱여넣어 막았다.

통증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빨이 주먹을 파고들어 왔다. 날 죽일 기세로 물어뜯는다.

성력으로 입을 열게 하긴 힘들 것 같았다.

난 쓰게 웃으며 레토에 물었다.

"스무 가지 고문 중 녀석의 입을 열게 할 게 있습니까?"

[입이 제법 무거운 녀석이다.]

레토 입에서 '제법'이란 단어가 나왔다. 쉽지 않다는 뜻이다.

잠시 후, 레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인첸트를 부여해라.]

"…인첸트요?"

[성력이 적당하겠군.]

정말 괜찮은 건가?

고통 내성에 익숙해진 나조차 인첸트를 버티지 못하는데.

고통에 돌아버린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인첸트 실패 시 반작용은 끔찍했다.

그 고통을 직접 경험해 봤기에 쓰기가 잠시 망설여졌다. 왠지 지독한 악당이 된 기분인데, 흑주술사를 보자 헛웃음이 나왔다.

제물로 힘을 탐닉하는 잔혹한 녀석 앞에서 악당 타령이나 하고 있다니.

놈의 머리에 손을 올려놨다.

"그런 눈으로 노려보지 마. 눈깔 파버리기 전에."

다른 놈들은 몰라도, 녀석들에겐 악당 소리 들어도 된다.

주먹을 계속 물고 있네?

죽어봐라.

잠시 후, 주술사의 몸에 황금빛이 터져 나왔다.

"...!!!!!!!!!!!!"

턱이 쩍 벌어지며 물어뜯던 주먹이 훌렁 나왔다. 찢어진 두 눈동자, 얼굴 살 전체가 부들부들 떨렸다.

컥컥거리며 숨을 삼키는데 비명조차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성공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실패(?)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눈을 두 번 깜빡이며 항복 신호를 보내자, 기운을 서서히 줄이며 물었다.

들었던 정보 중에 가장 궁금했던 정보.

학살자가 비밀리에 에토르 영지로 움직이는 이유를 말이다.

"카멜이 에토르 영지에 가는 이유가 뭐지?"

"레, 렌구아님을 만나기 위해서...."

"렌구아 필드를 만나서? 그리고?"

"계획... 실행…."

"그 계획이 뭔지 말해봐."

힘을 완전히 줄였다.

지옥 같았던 고통이 사라지자 일그러진 주술사의 표정에 일순간 평온함이 돌았다. 그것도 잠시,

"광인을 우...크아아악!"

광인을 입에 담은 순간 주술사가 울부짖으며 몸을 배배 꼬았다.

콰앙―!

"...!"

얼굴에 살점이 튀었다.

멍한 표정으로 피투성이가 된 주술사를 내려다봤다.

뭘 시도하기 전에 머리가 터져 죽어버렸다. 광경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이런 경험은 여전히 좆같았다.

[언어 제약이다. 고약한 것을 걸어놨군.]

"...."

조용히 피를 털어냈다.

상대가 주술사들의 둥지라는 것을 잠시 잊었다.

방심했다.

짧게 한숨을 내쉬곤 남은 주술사들을 고통 없이 보내줬다.

잠시 후, 넬라가 다가와 걱정이 담긴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아요? 무슨 일이죠?"

"별일 아닙니다. 흑주술사들은 역시 방심할 수가 없네요."

"악독한 자들이라 약한 마음가짐으로는 상대하기 어려워요."

엘프가 저런 말을 할 정도라니.

더 독해져야 한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원하던 정보는 얻었나요?"

"이것으로 확실해졌습니다. 록터 펠리스가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아요."

"어디죠?"

"블라이어."

주술사들의 입에서 록터에 관한 정보는 전혀 얻을 수 없었다.

전부 찾고 있다는 말뿐.

록터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는 정보를 들을 때마다 확신이 섰다.

록터는 칼과 함께 있다.

칼 바스타인.

칼에겐 '위기 감별사'란 특성이 있다. 도주하는 데는 최적의 능력이라 작정하고 몸을 숨기면 쉽게 찾을 수 없었다.

땅굴 파는 스킬이 또 기가 막히거든.

[한 번쯤 믿어보시죠.]

헤어질 때 크룩스에게 복수할 방법을 지나가듯 말해주며 록터를 언급했다. 한 번 믿고 블라이어에서 기다려보라고.

'내 말을 정말 믿었네.'

생긴 건 산적도 형님이라 굽신거릴 살벌한 면상이지만, 칼은 여우 중 여우였다.

내게 무엇을 보고 미래를 바꾼 것일까.

그게 뭐든 칼이 록터를 이끌고 있다면 익숙한 지리를 이용해 블라이어에 몸을 숨겼을 것이다.

'헌트 맴버가 두 명으로 늘 수도 있겠어.'

칼 바스타인이라면 땡큐지.

문제는 둘을 살려서 베네타로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잭과 하우엘이 이끄는 사냥개 부대.

주술사들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사냥개 부대는 지금 이빨을 숨긴 채 웅크리고 있다고 들었다.

록터의 흔적이 드러나면 바로 움직일 태세인데, 최정예들은 대기 중이고 추적자들을 사방에 풀었다는 소식이었다.

'문제는 크룩스도 사냥개 부대에 흡수됐다는 거지.'

크룩스의 마스터.

칼에게 붐(Boom)을 먹인 존재였다.

이번 일에는 칼의 악연도 엮여 있었다.

불길한 소식이기도 했다.

칼의 흔적을 잡을 수 있는 조직이 사냥개 부대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통곡의 언덕으로 갈 겁니다."

"그곳은 이미 검은 장미들이 가 있잖아요."

"살펴볼 게 있습니다."

통곡의 언덕.

이름처럼 통곡이 매일 들린다는 블라이어 외곽에 자리한 묘지 언덕이었다.

카멜이 블라이어의 성주가 된 이후 생긴 절망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만큼 많은 이들이 카멜의 지배 아래 죽어 나갔다.

그리고,

영웅 록터의 소중한 인연들이 묻힌 장소이기도 했다.

117화 각성 신호탄(2)

풀 한 포기 없는 메마른 언덕을 넬라와 함께 천천히 올랐다.

흙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언덕 위에서 그리고 아래에서 낡은 수레들이 자주 오가며 무언가를 옮기고 있었다.

수레를 옮긴 이들은 손등이 쪼글쪼글하고 등이 굽은 노인들이 대부분인데, 얼굴에는 고단함이 묻어나 있었다.

툭―

조용히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휘청거리던 수레 한 대가 내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수레를 덮은 천이 그 충격으로 흘러내리자 난 멈춰서서 잠시 수레를 내려다봤다.

"...."

죽은 시신들이 가득했다.

하나같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 그들의 마지막이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통곡의 언덕.

우리는 지금 통곡의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제 잘못입니다! 저만 벌해주십시오!"

내 손을 친 사람들은 새파랗게 질린 채 넙죽 엎드렸다.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벌벌 떨고 있다.

내 앞에서 바짝 엎드린 채 빌고 있는 노인. 그 등이 유독 왜소해 보였다.

자기만 죽여달라 외치며 내 망토를 붙잡고 늘어졌다.

주변에선 동정의 시선들이 몰렸지만,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붉은 망토.

블라이어에선 공포의 상징이었다.

"...."

잠시 노인을 내려다보던 나는 노인을 발로 차곤 등을 돌린 채 언덕을 다시 올랐다.

명백한 무시, 그게 노인을 살리는 길이었다.

"병사들이에요."

뒤에서 넬라가 작게 소곤거렸다. 우리는 로브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수상한 복장임에도 병사들은 오히려 우리를 발견하곤 주춤 물러나며 길을 열었다.

우리는 로브를 둘러쓰고 붉은 망토를 걸쳤다.

주술사들을 죽이고 그 복장으로 똑같이 위장한 것인데, 성문부터 시작해서 누구도 우리를 건드리지 못했다.

주술사들의 둥지.

성 지하에서 은밀히 힘을 키우던 주술사들은 카멜이 성주에 즉위하자 양지에 모습을 드러내며 힘을 과시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지나쳐 우리는 수레들을 따라 올라갔다.

인파가 상당했는데, 입을 여는 자들이 없다.

참으로 을씨년스러웠다.

잠시 후, 언덕 중턱에 오르자 광활한 대지 위로 무덤들이 즐비했다.

무덤 크기가 제각각이었는데, 그날 수레에 실린 시체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무덤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크게 파인 구덩이 한곳으로 수레들이 몰리자 넬라가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쪽이 아닙니다."

"네? 그럼 어디...."

"저곳입니다."

수레가 몰린 구덩이보다 훨씬 깊고 드넓은 구덩이가 바로 앞쪽에 존재했다. 초창기에 판 것으로 보였는데, 구덩이가 지금껏 메워지지 않은 상태라 역한 냄새가 이곳까지 흘러나왔다.

다른 곳과 달리 기사들도 많이 보였다.

우리가 다가가자, 기사 하나가 검을 올리며 우리를 막아섰다.

"주술사들이 여긴 무슨 일이지?"

어깨에 달린 푸른 견장.

블라이어의 정예 기사였다.

[주변에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진다. 제법 많다.]

구덩이에서 서성이는 푸른 견장의 기사들이 열 명이 넘어갔다. 아티팩트를 수여 받았다면 카멜의 친위대일 확률이 높았다. 정예 중에서도 선택받은 기사들이란 뜻.

부딪치기엔 부담스러운 숫자였다.

물론, 부딪칠 생각도 없었다.

"위에서 보내서 왔다."

"위? 누구 말이지?"

"알아서 어쩔 거지? 우린 임무를 받고 왔을 뿐이다. 시체 도둑들의 흔적을 찾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뭐라고?"

기사들과 주술사들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알력 싸움인데, 역시나 내 대답에 기사들의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칼만 안 뽑았지, 눈빛만 본다면 당장 죽일 것처럼 보였다.

"시체 도둑을 찾는 건, 성주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하달한 임무다. 주술사 따위가 낄 자리가 아니야."

"못 미더웠나 보지."

"그 주둥이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주술사로 살아가고 싶다면."

"불만이 있으면 성주님께 직접 아뢰라. 우린 지시를 받고 움직이는 것뿐이니까."

블라이어에는 지금 카멜도 리옹도 렌구아도 없었다.

막 나가도 당장 알아볼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게다가 누가 블라이어에서 주술사 흉내를 내고 다닌다고 생각하겠어. 혹여 신분을 의심할 수도 있어서, 우린 비밀 병기를 꺼냈다.

후읍―!

넬라의 어깨에 서서 얼굴을 찐빵처럼 부풀린 반디가 기사들을 노려봤다.

무서운 표정이라는 데 전혀 안 무섭다.

다만 존재 자체가 딱 보면 불길해 보이는 검은 정령이라 이곳 분위기와 딱이었다.

미지의 존재는 주술사들의 영역이라 치부되는 시대, 게다가 신분패까지 꺼내서 기사에게 보였다.

내가 강탈해 온 건 사냥조의 관리자 신분이었다.

급이 제법 높더란 말이지.

신분패를 확인한 기사는 멈칫하곤 반디에게 눈길을 한 번 준 뒤 말했다.

"얼굴을 보여라."

"너희들이 얼굴을 본다고 뭐가 달라지지?"

"...."

"우린 누군가에게 얼굴을 보이는 걸 싫어해. 적이 많거든. 그래서 얼굴을 보인 이들에게 저주를 내리곤 하지. 내 얼굴을 볼 텐가?"

기사는 한발 물러났고, 주변 흔적을 살피던 기사들도 욕설을 뱉어내며 구덩이 바깥으로 나왔다.

기사가 으르렁거리며 말했다.

"10분이다. 그 안에 끝내고 돌아가."

10분.

넬리토리 협곡의 경험 때문에 10분이란 시간에 노이로제가 걸린 상태라, 난 기사를 무시하곤 넬라와 함께 구덩이 밑으로 몸을 던졌다.

10분.

넘기면 어쩔 건데?

우린 수백 구가 넘어가는 널브러진 시체 더미 앞에 섰다.

넬라가 코를 막으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까진 무난히 왔네요."

"피곤하죠?"

"안 피곤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블라이어로 향하는 최단 거리로 라웁 숲을 주파했다.

잠도 줄이면서 빠르게 이동했는데 통곡의 언덕까지 이틀 정도 소요된 것 같았다.

"이젠 뭘 해야 하죠?"

"흔적을 찾아야죠. 전 시체를 뒤질 테니, 넬라 님은 잠깐 대기했다가 구덩이 위에서 귀를 열고 계시면 됩니다."

"기사들의 대화를 엿들으라는 말인가요?"

척하면 척이라 편했다.

엘프의 청력은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서 기사들의 대화를 엿듣기 충분했다.

흔적을 찾는 건 나만 가능한 일이라, 넬라는 위쪽에서 정보를 모으는 게 더 도움 되는 일이었다.

잠시 후, 넬라는 눈치껏 위로 올라갔고 난 허리를 굽히며 시체들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체는 봐도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게다가 썩어 문드러진 시체 더미는 더더욱 끔찍했다.

이곳에 버리진 시체들은 카멜의 세력에 반하여 처형된 자들이었다.

귀족 가문부터 기사단, 상인 연합까지.

카멜은 반란의 불씨가 될 것 같은 세력은 잔혹하게 전부 숙청했다.

그 숙청 대상에는 록터의 사람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에는 록터의 가족도 있었다.

아내, 딸, 그리고 동료들까지.

록터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었다.

구덩이를 메우지 않고 그들의 시체를 공개한 건 일종의 본보기였다.

그리고 그중 본보기로 세운 시체 일부가 사라졌다.

'넬라가 건네준 정보에는 잭과 하우엘에 관한 정보 외에 시체 도둑을 쫓고 있다는 정보도 담겨 있었지.'

내가 통곡의 언덕에 온 이유고, 헛구역질을 참으며 시체들을 살피는 이유였다.

그 시체 도둑.

록터의 가족을 포함해 시체 다섯 구를 가지고 사라졌다.

시체 다섯 구를 은밀히 옮기는 건 록터 혼자 할 수 없는 일, 조력자가 있다.

'칼 일행이 한 일이겠지.'

칼이 도왔다면 분명 지나간 곳에 내가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을 남겼을 것이다.

라웁 숲에서 헤어지기 전에 다시 만날 것을 대비해 약속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꼼꼼한 칼이 날 떠올렸다면 지나간 곳마다 특정 표식을 남겼을 것이다.

라웁 숲 생활을 하며 칼에게 배운 것이 많다. 특히 상황에 따른 비밀 표식의 경우에는,

[주변에 시체가 있다면 내 결핍을 떠올려봐. 필요한 정보가 있을 거야.]

칼의 결핍.

붐(Boom)으로 잃어버린 왼쪽 팔이다. 그리고 칼은 여성의 시체를 건드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남성, 그리고 왼팔.

"찾았다."

왼팔을 중점적으로 살폈는데 깨알만 한 글자가 새끼손톱에 흐릿하게 적혀 있었다.

코룬 강(Korun River) 하류.

한두 구의 시체에서 나온 것이 아닌 다섯 구 이상에서 똑같은 흔적이 발견됐다.

칼 일행이 코룬 강에 숨어 있다.

코룬 강은 블라이어 영지의 남쪽에 자리한 강인데, 하류에는 크고 작은 마을들이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마을 숫자가 제법 된다고 들었는데, 그 마을 한 곳에 록터와 은신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코룬 강을 본 순간 난 헛웃음을 흘렸다.

"칼, 이 아저씨도 운빨이 나랑 비슷하네."

재수가 더럽게 없는 양반이 분명했다.

은신처를 골라도 하필 코룬 강 하류를 골랐다.

잭과 하우엘 형제가 이를 갈며 웅크리고 있는 장소가 분명 코룬 강 주변이라고 했는데.

등잔 밑을 좋아하는 양반이라고 듣긴 했는데, 너무 발밑으로 골라잡았다.

구덩이를 나오자, 기사들과 거리를 두고 있던 넬라가 내게 다가왔다.

"흔적을 찾았나요?"

"찾긴 했는데 썩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숨은 장소가 위험한 곳인가 보네요."

"서두르죠. 흔적이 드러나기 전에 찾아야 하니까."

"흔적? 신명 각성 말인가요?"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넬라는 눈을 가늘게 뜨곤 날 바라봤다.

눈빛을 보니, 또 그 질문을 하려는 것 같았다.

"록터가 신명을 각성할 것이라 어떻게 확신하죠?"

"말씀드렸잖아요. 길잡이의 감이라고."

"거짓말이 다 티 나는 거 아시죠?"

"믿고 따라온 거 아니었습니까?"

"순진한 엘프도 안 믿을 말을 누가 믿어요? 저도 신녀의 감으로 따라 나온 거예요."

"그 감 믿어도 될 겁니다."

내 능글스러운 답에 넬라는 고개를 흔들며 따라왔다.

"카멜도 각성 사실을 알고 있나요?"

학살자는 1회차 회귀자다. 록터의 탈출조차 예상 못 했을 텐데, 신명 각성은 무슨.

"모릅니다. 하지만 아케인이 곁에 있다면 바로 알 수 있겠죠. 록터의 이름이 드러날 테니까."

"각성을 안 한다면요?"

"그것대로 좋습니다. 은밀히 록터와 접선한 후 빼 오면 되니까."

통곡의 언덕을 빠르게 내려오는 길. 그때 다수의 수레가 보이더니 발길을 붙잡는 소리가 들려왔다.

울부짖는 통곡이다.

노인, 아낙네, 아이들이 움직이는 수레를 붙잡고 서럽게 운다. 병사들은 창대로 그들을 뿌리쳤고, 주저앉은 이들은 멀어지는 수레 행렬을 바라본 채 눈물을 흘렸다.

넬라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떻게 같은 동족을 이리 가축처럼 다룰 수 있죠?"

"인간을 엘프족과 같이 생각하면 안 됩니다."

카멜은 주변 영지와 마을을 복속하고 곡괭이를 잡을 힘만 있으면 나이 성별 불문하고 금광에 처넣었다.

블라이어의 살을 찌우는 재물은 저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난 저렇게 보이는 단면보다 보이지 않은 단면이 더 잔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술사들의 둥지.

'재물'이 아닌 인간 자체를 취급하는 '제물'의 희생.

이에 대해선 굳이 넬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같은 인간으로서 쪽팔렸거든.

"모든 인간이 다 이런가요?"

"그럴 리가요. 하지만 당하는 이들은 똑같죠. 힘이 없는 존재들."

"블라이어 성주는 강한가요?"

"주변에 강한 이들을 거느리고 있죠. 그게 카멜의 힘입니다."

"카멜 블레이저. 알면 알수록 무서운 인물이란 생각이 들어요."

무섭다라….

맞는 말이다.

카멜은 무서운 인간이다.

하지만 내겐 그저,

"카멜은 그저 악당 새끼일 뿐입니다. 죽어도 싼."

카멜과 처음 만났던 블라이어 첨탑을 힐끗 올려다본 나는 영지를 벗어나 남쪽으로 경로를 잡았다.

"비가 올 것 같아요."

"비?"

제법 떨어진 거리에서 뒤쪽을 바라보니 영지를 뒤덮는 먹구름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하늘이 흐려지더니,

쿠쿠궁―!

천둥소리가 울리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일까.

하늘이 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도로 내가 느낀 블라이어의 풍경은 암울했다. 카멜의 부친이 어째서 혈육인 그를 암살하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 사람의 통치로 이렇게 영지 분위기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빗물로 젖어버린 로브를 가볍게 털어내며 넬라에서 엿들은 정보가 없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기사들에게 들었던 대화를 간략히 말해줬는데, 난 순간 한 단어에서 멈칫했다.

"마녀?"

118화 각성 신호탄(3)

"인근에 마녀가 나타났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어디쯤입니까?"

"블라이어 주변 마을 같아요. 그런데 말하는 투가 가벼운 잡담처럼 느껴졌어요. 소문으로 끝날 것 같아서 아쉽네요."

넬라의 표정에 실망감이 깃들었다.

마녀를 만나보고 싶은 건가?

아, 그러고 보니 빨강 리본을 달고 다닌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빨강 리본은 마녀 릴리의 시그니처 아이템.

그녀를 동경하는 이들이라면 하나씩 가지고 있는 액세서리였다.

릴리를 좋아하다 보니, 시답지 않은 잡담 속에서 마녀에 관한 소문만큼은 놓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래도 마녀다.

난 다시 물었다.

"자세한 얘기 같은 건 없었습니까?"

"황당하긴 한데,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홀리고 다녔다고 해요. 미모라는 말도 있고, 엄청난 황금 때문이라는 말도 있어요. 애완동물도 한 마리 데리고 다니고요."

"…네?"

공포 대상으로 찍힌 마녀가 엄청난 황금에 애완동물을 달고 다녀?

죽여달라는 말과 같았다.

이건 마녀로서 선을 많이 넘었다.

"그냥 돈 많은 귀족 중 하나가 아닐까요?"

"기사들은 마녀로 위장한 귀족들로 무게를 두고 있어요."

"그들 말입니까?"

들어보긴 했다.

학살자의 표적이 된 몰락 가문 중 살아남기 위해 마녀 복장을 하고 오르도르 숲에 발을 디딘 도망자들 말이다.

숲이 위치한 엘레토르 성곽 너머부터는 카멜도 병력을 보내기 부담스러운 곳이라 도망자들이 최후의 선택지로 피한 것인데, 그건 늑대를 피하려고 범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짓이었다.

'고립당하기 딱 좋은 장소인데.'

오르도르 숲에는 유령의 숲이란 결계가 존재한다.

마법사들도 뚫지 못하는 결계를 일반 귀족들이 뚫고 간다?

결계에 발을 들인 순간 유령들에게 둘러싸여 영혼을 뜯어먹힐 것이다.

뒤늦게 깨달아도 이미 늦었다.

카멜이라면 그곳에 노예 사냥꾼을 풀어 양몰이를 지시했을 것이다.

공포심을 줘서 유령의 숲으로 스스로 들어가게 하거나, 바깥으로 나오면 잡아 오게끔 말이다.

실제로 그렇게 했을 가능성이 컸다.

"쫓기는 신분일 텐데, 그럴 여유가 있었을까요?"

"마녀도 도망자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죠. 그래서 말했잖아요. 소문으로 끝날 확률이 높다고."

"다른 주제는 없었습니까?"

"우리를 죽여서 구덩이에 파묻고 싶다는 것 정도?"

"…됐습니다."

빗방울이 심해지더니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먹구름으로 물든 하늘을 보니 비가 쉽사리 멈출 것 같지 않았다.

코룬 강 하류까지 거리가 제법 됐기에 우린 인근 마을에서 마차를 빌리기로 했다.

"사람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보여요."

"우리가 입은 옷 때문일 겁니다. 마차만 구하고 얼른 나가죠."

주술사의 복장으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니 사람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눈치를 보며 빠르게 사라지는 모습인데, 혹여 눈에 띌까 긴장한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에 나와 넬라만 덩그러니 남았다.

"왜 저러는 거죠?"

"주술사들이 사람들을 많이 잡아간 모양입니다."

"…저 아이는."

"눈빛에 원망이 담겼네요."

창문에 얼굴을 내민 일곱 살배기 꼬마와 시선을 마주쳤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급히 사라졌지만, 아이를 통해 카멜의 평판을 예측할 수 있었다.

"아이는 감정을 숨길 줄 모르죠. 저 감정은 어른들에게 배웠을 겁니다."

"성주에 대한 원망일까요?"

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은 공포에 짓눌려 감정을 숨기고 있을 뿐, 마음 한켠에는 카멜에 대한 원망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런 마을이 이곳 한 군데뿐일까?

통곡의 언덕에서도 이런 분위기를 느꼈다.

주술사들의 힘이 강해질수록 반대로 원망의 감정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주술사의 강함은 제물의 양과 비례했으니까.

게다가 잭과 하우엘 같은 망나니들이 카멜을 등에 업고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귀족들도 고통을 피해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다 원망과 분노가 쌓이고 쌓여 누군가 터트릴 계기를 만들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곪았던 감정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겠지.'

록터 펠리스.

내가 그를 헌트로 영입하려는 이유였다.

록터는 카멜이 공들여 밟아놓은 반란의 불씨를 단번에 살릴 카드였으니까.

* * *

"어, 얼마든지 가져가십시오!"

"전부 해서 얼마지?"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말을 취급하는 상점을 방문해 말 두 필과 작은 마차를 골랐는데, 주인은 두 손을 흔들며 돈을 받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그를 조용히 바라보자, 상인은 마른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이마에 땀도 연신 흘렸는데 무척 긴장한 반응이었다.

뭐지? 생각보다 반응이 거센데?

아니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주술사를 생각하는 두려움이 큰 건가?

마을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통곡의 언덕에서 본 반응보다 좀 더 조심스러웠다고 해야 하나?

순간 상인의 눈길이 한곳에 머물렀는데, 그쪽을 바라보니 문고리를 잡고 서 있는 작은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아이는 내 복장을 빤히 바라보더니 날 손가락을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댕댕아, 물어."

"...?"

뭘 물어?

어이없는 상황에 두 눈을 끔뻑이며 아이를 바라보고 있자, 상인이 딱딱한 웃음을 흘리며 몸으로 아이를 가렸다.

"방금 깬 아이라 헛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더 좋은 말이 있는데 그걸로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제 성의인데...."

말과 마차를 받은 것도 모자라, 돈주머니까지 받았다.

흑주술사들의 기본 태생이 탐욕 덩어리였다. 거절하는 그림도 이상해서, 돈주머니를 받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마차를 끌고 나왔다.

넬라가 피곤해하길래 마차에 태웠고, 내가 마부석에 앉았다.

마차를 조용히 끌고 가는데, 그녀가 하품하며 말했다.

"거짓말이에요."

"뭐가 말입니까?"

"아이가 헛소리했다는 말이요. 아이가 방금 깬 것은 맞지만, 헛소리한 것은 아니란 뜻에요."

"그래서요? 가서 주인이랑 아이를 놓고 삼자대면이라도 할까요?"

"그냥 제 눈에 걸려서 이야기해준 것뿐이에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그녀는 창가에 기대어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색색 얕은 호흡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이 상황에서 잘도 자네.

'피곤하겠지.'

사흘 정도 잠도 줄이면서 라웁 숲을 이동했다. 나야 잠을 안 자도 버티는 몸이니 상관없지만, 넬라는 아니었을 것이다.

용케 참았다고 해야 하나.

코룬 강까지는 푹 자게 둘 생각이었다.

조용히 덜컹거리는 마차.

빗길을 뚫고 가니, 잠시 미뤄뒀던 고민이 떠올렸다.

학살자의 갑작스러운 에토르 행(行).

전쟁 준비에 한창이어야 할 놈이 갑자기 에토르로 왜 가는 거지?

'렌구아, 그리고 광인.'

에토르의 광인 작업은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학살자가 직접 움직일 정도는 아니었다.

렌구아의 신명 각성이 마음에 걸렸다. 렌구아의 각성은 소설에선 없었던 이벤트였으니까.

직접 가서 확인해보는 게 가장 확실하긴 한데,

'록터와 칼이 먼저야.'

무엇이 되었든 이 둘의 확보가 먼저였다.

쏴아아아아아아―

"...징하게 내리네."

폭우에 젖는 질퍽한 땅 때문에 마차 속도가 더 느려졌다.

그래도 마차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걸어서 움직였으면 넬라가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투레질하는 말들을 다독이며 쏟아지는 빗줄기를 올려다봤다.

"록터의 신명 각성은 과연 이뤄질까?"

폭우를 보니 록터가 떠올랐다.

이처럼 소나기가 퍼붓는 날에 각성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로 인해 많은 것이 변했다.

그건 록터의 운명도 마찬가지.

첫 영웅의 탄생 구절이 떠올랐다.

[…다 죽인다.]

가족의 묘비 앞에서 서럽게 울던 올곧은 기사. 빗방울과 함께 더 많은 물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기사는 많은 감정이 교차하는 눈동자로 블라이어의 깃발을 올려다봤다.

[일평생을 지켰던 가문이여, 동고동락했던 내 사랑스러운 영지여. 그 찬란했던 나의 고향, 영지 블라이어여.]

기사는 검자루를 꽉 움켜잡았다.

기사의 눈에 어느새 붉은 눈물이 흐른다.

배덕의 기사, 록터 펠리스.

[그 모든 것을 내 손으로 베어내리.]

비 오는 그날, 영웅으로 탄생했던 한 기사의 마지막 구절이었다.

* * *

후―

상인은 가슴을 부여잡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를 타고 사라지는 주술사들이 보인다.

진짜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순순히 마차를 받고 떠난 걸 보니, 며칠 전에 사라진 주술사들의 일로 자신을 찾아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아빠!"

딸이 문을 열고 후다닥 달려오자 상인은 딸을 안아 올렸다.

딸의 온기가 느껴지자 줄곧 딱딱했던 표정이 부드럽게 풀렸다. 그리고 딸이 자신의 곁에 있음에 다시금 안도했다.

며칠 전 주술사들이 찾아와 마을의 어린아이들을 노렸다.

재산을 내놓고, 빌어봐도 소용없었다. 반항하면 주술에 당해 장난감처럼 죽을 뿐이었다.

빌어도, 부탁해도 소용없자 저주를 퍼부었다.

나도 데려가라고.

서로 낄낄거리던 주술사들이 재밌다는 듯 손을 뻗는 순간, 모든 이들의 뇌리에 여인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댕댕아, 물어]

그 광경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흐릿한 형체이지만 거대했다.

새하얀 이빨만 보인 것 같았다.

날카롭지만 걸리는 순간 주술사들은 고깃덩어리처럼 뜯겨 나갔다.

바닥에 남은 건 흥건한 핏자국뿐, 주술사들은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목소리 주인의 손짓 한 번에 모든 흔적이 지워졌다.

그때 그녀를 보았다.

[튀자.]

상인은 두 눈을 감았다.

긴 챙을 둘러쓴 마녀의 존재가 뇌리에 박혀 잊히지 않았다.

그 압도적인 살육 앞에 기억나는 건 하나뿐이었다.

상인은 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머리에 달린 작은 리본.

상인은 그 붉은 리본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 * *

"머엉!"

"쉿! 조용해. 케로스."

릴리는 손가락을 튕겨 검은 강아지의 이마를 가볍게 때렸다.

딱밤을 맞은 강아지는 부르르 떨더니 입을 앙 다물었다.

두 귀를 쫑긋 세운 검은 시바견은 인형처럼 행동했다.

릴리는 어깨에 매달린 작은 강아지 인형(?)을 쓰다듬고는 다가오는 주인장을 바라봤다.

얼굴을 가린 로브를 갈무리하고 고개를 돌리자, 식당 주인은 쭈뼛쭈뼛 다가와 식탁에 음식을 내려놨다.

릴리는 음식을 보며 눈을 반짝였지만, 이내 헛기침을 하며 말없이 기다렸다.

"피, 필요한 게 더 있으십니까?"

"생고기."

"…새, 생고기?!"

"신선한 피가 많은 것으로."

"네, 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새파랗게 질린 식당 주인은 도망치듯 홀을 나갔다가 벼락처럼 접시에 생고기를 담아왔다.

생고기 냄새에 개처럼 생긴 인형이 들썩들썩 움직이자 식당 주인은 기겁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본능적인 방어 행동인데, 릴리는 다른 뜻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가져온 황금을 사용하는 건가!

품에서 주섬주섬 황금 덩어리를 꺼내 건넸는데, 주인장은 오히려 살려달라고 빌며 무릎을 꿇었다.

블라이어에 들어선 후 몇 차례 본 반응이라 릴리는 입술을 삐쭉 내밀곤 황금을 도로 넣었다.

오늘도 황금을 사용하지 못했다.

주인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부리나케 홀을 벗어났다.

"할머니 말로는 인간은 돈을 좋아한다고 했는데 왜 아무도 돈을 안 받지?"

"멍!"

"그치? 일단 먹고 생각하자."

음식을 앞에 두고 생각하는 건 그녀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릴리는 편히 먹기 위해 망토를 벗어 의자에 걸었다.

붉은 망토.

며칠 전 주술사들을 죽이고 빼앗은 것이었다.

119화 각성 신호탄(4)

달그락. 달그락.

침묵이 흐르는 공간.

식기 부딪치는 소리만 조용히 들렸다.

그런 탓일까, 릴리는 오물오물 음식을 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식당인데도 내부가 휑했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들어오자 하나둘 빠져나가더니 다신 들어오지 않았다.

인형인 척 연기하던 케로스만 눈치 안 보고 생고기를 씹고 있으니 괜스레 신나 보였다.

"이건 또 색다른 반응이네. 역시 인간들은 모르겠어."

위쪽 지역의 반응은 이곳과 정반대였다.

식당을 가도, 길을 물어도, 숲이나 언덕에서 쉬고 있어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전부 남자들이었고, 눈빛에는 끈적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죽이진 않았다. 하나둘 죽이다 보면 끝도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때부턴 로브를 벗지 않았다.

경험을 통해 안 것이다. 로브를 벗으면 귀찮은 일이 생긴다는 것을.

"황금에도 반응이 없고."

식탁에 놓인 황금 덩어리를 툭툭 치며 회상에 잠겼다.

얼굴을 가린 뒤에도 황금 때문에 여러 가지 말썽이 일어났다.

큰 황금 덩어리를 본 인간들은 처음에는 웃으며 대화를 걸어왔지만, 눈빛과 목소리, 행동에서 거짓된 감정이 느껴졌다.

상점을 가거나, 무엇을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거래하지 않았다.

세상 물정은 모르지만, 오르타들을 통해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거짓된 감정을 가진 자들과 거래하면 손해 본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퉁명스럽게 무시하니, 그 끝은 대부분 같았다.

우악스러운 손길 아니면 날카로운 쇠붙이를 들이밀었다.

죽이진 않았다.

대신 돈을 빼앗았다.

그때 황금이 아닌 다른 것으로도 거래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마녀들과 여행을 다닐 때 모두 배울 수 있는 것들이지만, 릴리는 배우는 것을 극도로 귀찮아하는 성격이라 모든 것을 부딪치며 새로 배워야 했다.

작은 마을들을 거쳐 처음으로 큰 마을이라 생각했던 곳에 방문했을 때, 그녀는 영지 병사들과 마주쳤다.

[마녀?]

그 당시엔 복장이 문제였다.

그래서 한동안 병사들이 없는 장소만 찾아다녔다.

마을 한곳, 또 다른 곳을 방문할 때마다 그녀는 사건과 사고를 몰고 다녔다.

케로스가 마구간에서 말들을 잡아먹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검은 강아지는 흔했지만, 인간들의 경악 어린 반응을 보니 케로스는 이상한(?) 강아지가 맞았다.

언제부턴가는 손거울을 항상 들고 다녔는데,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으면 손거울로 최면을 걸어 사람들의 기억을 지웠다. 다만, 최면에 걸리지 않는 인간들이 더러 존재해서 사람을 홀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외모.

손거울.

검은 강아지.

그리고 마녀.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자 무기를 든 자들이 찾아왔다.

노예 사냥꾼, 용병이 대부분이었는데 모두 돈을 노리고 움직이는 인간들이었다.

몇 놈 잡아서 물어보니, 블랙마켓이라는 곳에선 마녀가 큰돈이 된다나?

그렇게 블랙마켓을 알게 됐다.

이 복장으로 다니면 더 귀찮은 일이 발생할 것 같아서 휴식과 변장을 할 마을을 찾고 있을 때, 한 마을에서 더럽고 추악한 영력의 잔재들을 만났다.

흑주술사들.

마녀들을 사냥해 그 신체로 주술력을 높이는 악질 중의 악질들이었다.

인간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노는 흑주술사들을 보는 순간, 마녀들이 사냥당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그녀는 처음으로 살심(殺心)을 드러냈다.

피바람이 불어닥친 자리에 인간들에게 빼앗은 재물을 놓고 왔다.

빨래 막대에 널린 옷값이었다.

"숲을 나오고 얼마나 지났지?"

"크릉."

"그렇게나 오래됐어? 시간 참 빠르네."

수개월이 지났다.

목적을 가지고 바깥세상에 나왔지만, 그녀는 어느새 목적을 잊고 돌아다니는 데만 집중했다.

인간들의 세상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정적인 마녀의 숲과 달리 인간들이 모인 곳은 언제나 자극적이고 동적인 분위기로 가득 찼다.

하루하루가 살아있는 느낌이랄까.

마음에 들었다.

"응?"

손등이 간지러웠다.

시선을 돌리니 케로스가 할짝대고 있었다.

배부르면 잡생각에 빠지곤 했는데, 케로스가 늘 이렇게 신호를 보내줬다.

"다 먹었어?"

"멍!"

"부족해? 그럼 다른 식당으로 가자. 이 식당에 있는 메뉴는 다 먹어봤거든."

숲을 나오고서 한 가지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숲에서 먹던 마녀들의 음식은 음식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풀과 약초, 짐승의 알과 나무 열매로 이뤄진 간소한 식단.

릴리는 바깥세상에서 맛의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고기.

그래, 고기다.

인간들은 육류로 다양한 요리를 조리했는데, 그 맛이 중독적이라 이젠 숲에선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오르타들은 왜 이런 음식들을 알려주지 않았지? 나중에 마녀들에게 자신이 먹어본 새로운 음식들을 전도할 생각이었다.

그러려면 일단 많이 먹어봐야 했다.

"댕댕아, 가자!"

릴리가 오른쪽 어깨 위를 툭툭 치자, 케로스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인형 놀이를 하기 싫다는 표현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동안 변장을 여러 번 하고 돌아다녔는데 몇 차례 마녀로 의심받았던 적이 있었다.

검은 강아지.

케로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넌 너무 눈에 띈다고. 빨리 와."

"멍!"

"뭐? 왜 나한테 그러냐고? 마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릴리는 인정하지 않았다. 케로스의 목덜미를 붙잡곤 어깨에 올려놨다. 축 늘어진 케로스는 단념한 듯 보였다.

"아, 망토."

릴리는 의자에 걸린 붉은 망토를 챙겼다. 야영할 때 춥다고 투정을 부렸더니 케로스가 덮고 자라고 입 속에서 뱉어낸 망토였다.

어디서 났냐고 물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돌아다니는 동안 이것저것 삼키고 다니다 보니 어디서 생긴 물건인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릴리도 케로스도 주술사를 잡아먹고 나온 전리품임을 알지 못했다.

식당을 벗어나 거리 한가운데로 나오니 분위기가 또 이상했다.

인간들이 자신을 힐끔거리며 피해 갔다.

릴리는 자기 몸을 요리 조리를 살폈다.

얼굴도 가렸고, 영력도 숨겼다.

손거울도 품에 넣었다.

케로스도 인형으로 변장시켜 어깨에 달고 다녔다.

이게 이상한 건가?

"케로스 너 때문일까?"

"크릉."

"아니면 말고."

식당이 보이자 릴리는 발걸음을 멈췄다. 메뉴판을 쭉 훑어본 그녀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식당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음식의 이름 보였다.

그녀의 여행 계획은 단순했다.

마을을 떠나기 전에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마을이 어딘지 물어본다.

그 마을로 간 뒤 식당들을 쭉 둘러본다.

식도락을 마친 뒤엔 다음 마을로 간다.

아서 클레이튼이란 존재는 이미 머릿속에 지워진 지 오래였다.

"케로스, 우리 당분간 이곳에 머물까?"

여섯 군데의 식당을 방문한 뒤 배를 툭툭 두드리며 밖을 나왔다.

이 마을, 먼가 굉장히 멋졌다.

음식값을 안 받았다.

게다가 먹기 편하게 주변 자리까지 모두 비워줬다. 가는 길에는 또 어찌나 공손히 인사를 하는지 그동안 마녀로서 고된 경험을 떠올려보면 이곳은 천국이 맞았다.

"근데 음식들이 별로야. 작은 마을이라서 그런가?"

"크릉."

"맛있었다고? 내 입맛이 까다롭다는 거야?"

케로스의 이마를 가볍게 튕기곤 그럴 수 있겠단 생각을 들었다.

아쉽지만, 이 마을에서 더는 먹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떠나기로 마음먹고 다가오는 사람 중 아무나 붙잡았다.

가까운 마을을 물어보려고 한 것뿐인데,

"…힉! 사, 살려주십시오!"

무릎을 꿇고 이마를 코에 박았다.

상태가 이상해서 다른 인간을 물색해봤더니, 주변이 텅 비었다.

다 어디 갔지?

"부끄럼을 타나?"

확실히 이곳은 이상한 마을이었다.

* * *

덜컹―!

릴리는 마차 뒤편에 걸터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면서 걸어가려고 했던 계획이 마차 여행으로 바뀌었다.

마차를 구하는 건 쉬웠다.

다음 마을로 가는 마차를 붙잡아 태워달라고 부탁했는데 너무 쉽게 허락받았다.

마부 빼곤 타고 있던 인간들도 모두 내렸는데 덕분에 편한 자리를 얻어 타게 됐다.

인간 중에는 친절한 이들도 많다는 것을 그때 느꼈다.

"블라이어라…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어디지?"

다음 마을 행선지가 정해졌다.

대도시 블라이어.

수십 곳의 마을을 전전하고 돌아다니며 수많은 마을 이름을 들어봤지만, 이처럼 익숙한 지명은 처음이었다.

릴리는 미간을 좁힌 채 고민했다.

"멍!"

고개를 돌리니 마차 자리에 꼬리를 흔들며 살 것 같다는 케로스가 있었다.

사람이 없는 곳이 지금 녀석이 가장 편할 때였다.

"댕댕아, 블라이어가 어딘지 알아?"

"멍!"

"아, 맞아. 거기였어!"

케로스가 알려줬다.

우리의 처음 목적지.

토바른 지역 마을들을 돌고 돌아 수개월 만에 처음 정했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었다.

블라이어를 듣자, 그녀는 그제야 잊고 있었던 목적을 상기시켰다.

오르도르 숲은 나온 진짜 목적 말이다.

'아서 클레이튼!'

한 사람의 신명이 불현듯 떠오르자, 그녀는 품에서 손거울을 꺼내 들었다.

오랜만에 살펴볼까?

그것도 잠시, 손거울에 자기 얼굴이 비치자 얼굴을 요리조리 돌리며 자기 얼굴을 감상했다.

"멍!"

"아! 맞아!"

또 목적을 잊을 뻔했다.

릴리는 손거울을 잡고 두 눈을 감았다.

주문을 외우자 손거울에서 영롱한 빛이 흘러나왔다. 거울 표면에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눈을 뜬 그녀는 거울에 새겨진 신명 목록을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동화율 25%)]

[이종족의 길잡이]

[염원의 반지(생존)]

"변화가 생겼네."

신명 목록에 많은 변화가 추가됐다.

이종족의 길잡이는 이종족과 관련된 목록일 테고, 염원의 반지? 이건 무슨 아이템이지?

신명 목록에 추가될 정도라면 세계의 눈이 인정한 물건이란 뜻이었다.

심장의 동화율이란 숫자도 표시됐는데, 이것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모두 궁금증을 불러오는 신명 목록뿐이다.

"맞아. 이런 궁금증 때문에 그를 찾고 있던 거였어."

오직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신명.

그동안 왜 잊고 살았던 것일까.

뭔가 떠오르자, 릴리는 입술을 내밀곤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댕댕아, 이것도 만월의 저주 때문일까?"

"멍."

"그렇지? 저주 맞지? 하, 그래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자꾸 이상한 데 정신이 팔리거든."

릴리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월의 재능'은 축복이자 저주란다.]

장로 할머니의 말을 떠올랐다.

뭐든 한 번 보면 마나 흐름부터 발현까지 꿰뚫어 볼 수 있는 악마 같은 재능.

하지만 이 재능의 지독한 저주는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없는 게으른 태생에 있다.

무엇을 보던 빨리 질리고 쉽게 포기했다. 뭐든 이해하지만 익히려 들지 않았다.

오르타 전원이 그녀의 스승으로 자리한 이유이기도 했다.

한 명으로는 그 천성적 게으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릴리는 드러누운 채 쏟아지는 비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손거울에 비친 신명 목록이 스르륵 사라지더니 하나의 이름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서 클레이튼.

"어딨니? 너."

갑자기 거울의 존재가 보고 싶었다.

그런 감성적인 분위기도 잠시였다.

"드르렁―!"

"멍…."

케로스는 릴리의 망토를 쭉쭉 당기며 그녀를 깨우려고 했지만, 그녀를 코를 골며 잠에 빠져들었다.

이미 늦었다.

한 번 잠들면 소나기가 퍼붓던 불이 나든 산사태가 쏟아져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

마차가 멈춰 섰다.

잠든 그녀를 보고 마부가 마차를 세운 것인데, 검은 강아지를 본 순간 마부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심장이 오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붉게 물든 눈동자.

움직이면 죽을 것 같은 공포가 옥죄여 왔다.

"가, 갈 겁니다. 가요."

마차는 다시 조용히 출발했다.

케로스는 한숨을 푹 쉬곤 릴리의 머리맡 위에 웅크렸다.

마차는 조용히 블라이어로 향했다.

120화 각성 신호탄(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