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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 100-110

100화 그냥 미친 훈련

몽둥이 훈련의 본질은 육체 구성을 변화시키는 데 있다.

흔히들 강철 근육이라고 하는데.

난 불사자의 근육이라 말하고 싶었다.

레토가 바라는 건 그 1단계 근육 수준으로 물리적인 충격에 탄력 있게 반응하고, 유연하며, 회복 능력에 빠르게 반응하는 근육이라고 했다.

키메라야?

그런 근육을 어떻게 만들어?

당연히 레토도 평범한 방법으론 만들 수 없다고 했다.

[훈련 외에 연금술과 주술, 마법적 치료가 병행되어야 한다.]

"우리에겐 없는 건데요?"

[예외는 늘 존재하는 법이다. 너는 가능하다. 내가 있으니까.]

"그럼 지금 하는 이 미친 훈련이...."

[새로 바꾸려면 기존의 것을 파괴해야 한다.]

기존 근육을 파괴하고 새로운 형질의 근육으로 변환시키는 작업.

그런 이유로 난 오전 내내 훈련장에서 근육을 파괴하는 변태 같은 훈련에 매달려야 했다.

퍼퍼퍼퍽―!

"…끄으으!"

물론, 내가 따로 할 일은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고통을 참고 버티는 것이다. 내 근육인데, 파괴하는 이들은 따로 있었다.

내 주변을 동그랗게 에워싼 드워프 기사는 모두 다섯.

모두 3성급 기사들로, 그들은 오라로 신체를 강화해 내 몸을 쉴 새 없이 두드렸다.

일반인이 휘두르는 강도로는 도움이 되지 않아 3성급 기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물론, 몽둥이는 기운이 실리지 않은 통짜 쇳덩어리였다.

버틸 수 있으니 더 아프다.

몽둥이에 기운이 실렸다면 번뜩이는 순간 골로 갔을 테니 말이다.

"크아아아악!"

레토가 주문한 건 무력하게 맞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시'였다.

버티고 다가가서 공격 루트를 눈동자에 담으라는 것.

4성에 오른 내가 마나를 사용했다면 저들을 충분히 위협할 수 있지만, 마나 사용은 훈련 중에 금지되었다.

순수 육체와 정신력으로 극복해야 하는 지독한 훈련.

짐승 같은 발악이 이어졌고, 난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어 갔다.

마나 사용 없이는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은 게임이었다.

맞고 쓰러지고 맞고 쓰러지고의 반복.

"그, 그만…."

힘없이 중얼거리는 내 신호에 드워프들은 질린 듯한 표정으로 한 걸음씩 물러났고, 난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린 채 근육이 회복되길 기다렸다.

죽을 만큼 아프다.

그런데 할 만했다.

훈련의 한계를 낮췄기 때문일까.

빈사 상태 직전에 훈련은 멈춰졌고, 회복도 빨랐다. 레토는 새로 복구되는 근육의 감각에 신경을 기울이라고 했다.

어제는 빈사 상태에서 움직이면서 새로 복구되는 근육을 감각으로 느끼라고 했다. 심지어 회복 속도도 무척이나 더뎠다.

다시 생각해도 내겐 불가능한 훈련이었다.

[변화가 느껴지나?]

"저, 전혀요."

[한참 부족하다.]

새로 복구된 근육은 이전의 근육보다 성장했지만, 그 변화는 내가 전혀 느끼지 못할 만큼 미세했다.

레토의 도움으로 진행 중인 이 미친 훈련은 종(種)의 진화나 다름없는 작업이었다. 염원의 반지와 레토란 존재가 있기에 가능한 훈련이지만, 하루아침에 근육이 불사자 급으로 바뀌는 건 불가능했다.

조금씩 조금씩 눈곱만큼 진화가 이뤄졌다.

한참 부족하다.

그럼 다시 근육을 파괴해야 했다.

거친 호흡을 내쉬며 비틀비틀 일어났다.

"크아아아악!"

고함과 비명이 섞인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다시 훈련장을 가득 메웠다.

솔직히 길어야 사흘 정도 할 훈련이라 생각했다.

펜리가 의식을 차리면 훈련보단 앞으로의 일에 집중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 고통의 시간이 안 끝났다.

시바, 펜리년이 안 일어났다.

그렇게 열흘이 흘러갔다.

* * *

"저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뭘까요?"

샤르바딘은 훈련장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아서의 훈련을 구경했다.

첫날에는 놀라운 감정이 가시지 않았는데, 지금은 심드렁하게 구경할 정도가 되었다.

그녀의 물음에 나토네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련해 보입니까?"

"미련한 사람이 아니라서 더 궁금하네요."

폐광산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나토네는 조금 전 도르네프의 지시로 손맛이 아주 좋은 기사 한 명을 추가로 데려왔다.

훈련 상대를 더 늘려달라는 부탁을 받았기 때문인데, 어느덧 일곱 명의 기사들이 그를 에워싸고 괴롭히고 있었다.

여섯으로 늘린 지 사흘 만에 일곱으로 늘렸으니 적응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확실히 첫날과 비교하면 대처가 눈에 띄게 달라지긴 했다.

"큭!"

"멍청한…! 붙지 말고, 견제해!"

"돌아! 돌라고!"

매서운 반격에 주춤 물러나는 기사들이 보였다.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하는 게 아닌, 뼈를 내주고 목숨을 물어뜯는 무식한 한 마리의 맹수를 보는 것 같았다.

그 기세가 워낙 사납다 보니, 오늘 합류한 기사는 새하얗게 질린 채 연신 물러나기 바빴다.

일방적으로 맞기만 하던 훈련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막고 피하고 때린다.

물론, 여전히 얻어맞는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드워프 인생에서 저렇게 지독한 훈련은 처음 봅니다."

"엘프도 마찬가지일걸요? 오직 저 사람만 가능할 거예요."

"그를 특별하게 생각하시는군요."

"은인이잖아요."

그를 보며 살포시 웃는 안주인을 보니 어째서 성주가 훈련 상대로 손맛 좋은 드워프들만 골라 보내는 건지 알 것 같았다.

"크아아악!"

짐승을 닮은 외침에 나토네는 사내를 바라봤다.

라웁 숲에서 처음 만난 사내.

그를 볼 때마다 강렬했던 황금빛 물결을 떠올랐다.

하지만 이젠 아니었다.

이제 그를 보면 상식 불가의 회복력과 불굴의 정신력을 떠올린다.

그리고 저 미친 훈련 방법까지.

강렬해도 너무 강렬했다.

그래서일까.

나토네는 훈련 장면을 지켜볼 때마다 묘한 떨림을 느꼈다.

이 세상을 지배하고 뒤흔드는 괴물들은 저렇게 탄생하는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왜 포식자가 되려고 할까요?"

"살아남기 위해서겠죠."

"살아남기 위해서?"

"세상은 포식자와 먹잇감, 이 둘로 나뉘지 않습니까."

포식자와 먹잇감으로 이뤄진 세상이라니.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어제도 훈련장에 머물렀죠?"

"담당자의 보고로는 그렇습니다."

"그럼 지금까지 잠을 자지 않았다는 말이네요."

이틀이 더 지나면 그가 훈련을 시작한 지 보름째다. 그런데, 그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숙소로 돌아간 적이 없었다.

놀랍게도 쉰 적이 없다는 소리였다.

아침부터 오후까진 드워프들과 시간을 보내고, 저녁부턴 처음 보는 신비로운 활과 드잡이를 하며 밤을 보냈다. 이따금 새벽에는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오기도 했는데, 그 통에 성주 전용 훈련장에서 몬스터를 길들이고 있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정말 몬스터라고 해도 믿겠네요. 어떻게 보름 가까이 잠을 안 자고 저런 훈련을 견딜 수가 있는 거죠? 나토네 경은 가능한가요?"

"제가 드워프 중에서 터프함으로 손꼽히는 편인데 절대 불가능합니다."

알면 알수록 신기한 인물이었다.

제단에게 마주쳤던 첫 만남과 비교하면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샤르바딘의 눈에 아서는 이미 무척 강한 사람이었다.

* * *

콰직―!

"...!"

쇠몽둥이를 막았던 팔뚝이 기형적으로 꺾었다. 지독한 통증이 뇌리를 찌르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물러났다.

피부, 근육, 뼈까지 비틀린 감각.

팔목이 완전히 아작났다.

근래에 생긴 부상 중 가장 큰 상처였다.

훈련 사고였다.

"이, 이런 미친놈이!"

"저놈 잡아! 족치라고!"

훈련 15일 차.

나토네가 데려온 신입이 긴장감에 실수를 저질렀다.

살기를 터트리며 눈앞까지 돌진해오자, 본능적으로 쇠몽둥이에 오라를 담아 휘두른 것이다.

팔뚝으로 막아서 이 정도지, 머리를 맞았으면 수박처럼 박살 났을 것이다.

훈련은 바로 멈춰졌고, 실수를 저지른 기사는 '…어?, 어?' 하더니 동료 기사들에게 에워싸여 나 대신 매타작을 맞기 시작했다.

비명이 얼마나 처절한지, 잘못한 사람이 누명 쓴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나저나 정말 찰지게 때리네.

단체로 한 명을 조지는 훈련 경험이 만들어낸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부러진 팔뚝을 흔들었는데 감각이 없다. 부상 정도가 크다. 치유되려면 하루 이상은 걸릴 것 같았다.

난 혀를 차곤 그들을 물렸다.

오늘 훈련은 땡이었다.

"죽을 뻔했네."

[부러운 소리를 하는군.]

"...."

죽음을 축복으로 여기는 녀석에게 무슨 말을 못 할까.

"이런 훈련이 의미가 있습니까? 조금 전처럼 한 방에 훅 갈 것 같은데."

[1단계조차 완성하지 못한 주제에 바라는 게 많군.]

"엥? 나중에는 오라도 방어가 된다는 겁니까?"

['견딘다.'가 정확하겠지. 그건 네 녀석의 노력하기 나름이다. 지금 네 수준으론 까마득해 보이지만.]

더 놔두다간 드워프 하나 잡을 것 같아서 서둘러 기사들을 말렸다.

요즘 저 기사들의 '악명'이 이곳까지 종종 들려왔다.

일명 참회의 몽둥이.

드워프 여섯 명으로 구성된 베네타의 심판자들로 불렸는데, 범죄자나 악인들 사이에서 공포의 존재감을 흘리고 다녔다.

도르네프가 손맛이 뛰어난 이들로만 구성해서 내게 보냈는데, 그런 그들이 보름 동안 날 상대로 아픈 곳만 골라 때리는 연습을 했다면?

나도 제대로 맞으면 눈물이 나오는데, 보통 이들은 맞는 순간 꺽꺽대며 오줌을 지릴 것이다.

그런 녀석들이 무려 여섯이고, 동시에 한 놈만 팬다면?

악인도 눈물을 흘리며 개과천선한다는 소문이 있다.

의도치 않게 베네타의 치안에 큰 공헌을 한 셈인데, 그런 기사들조차 나를 상대할 땐 치를 떨며 훈련이 얼른 끝나길 빌었다.

확실히 훈련에 성과가 생겼다는 의미였다.

"이런, 치료사에게 데려가야겠네요."

오늘 심판자가 일곱 명이 될 뻔했는데, 얻어맞은 상태를 보니 여섯에 그칠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완전 맛탱이가 갔다.

내일은 못 볼지도.

기사들이 동료를 업고 사라지자, 샤르바딘이 멀리나 나를 불렀다.

"식사하세요!"

도르네프의 우려와 달리, 그녀는 훈련이 끝날 때쯤이면 웃는 얼굴로 찾아와 식사를 준비해줬다.

도르네프가 이 광경을 본다면 나토네경을 내 훈련에 다시 집어넣을지도 모르겠다.

나토네가 바로 베네타의 심판자들을 만든 당사자였으니까.

참회의 몽둥이를 든 우두머리란 뜻이었다.

그만큼 손이 가장 매웠다.

* * *

"샌드위치네요?"

"제가 직접 만들어봤어요."

"매번 감사합니다."

"넉넉하게 가져왔으니까. 실컷 드세요."

피투성이 몰골로 돗자리에 주저앉아 그녀가 건네는 샌드위치를 받아먹었다.

맛으로 먹는다기보단 허기를 때우기 위해 억지로 목구멍으로 집어넣었다.

맛과 상관없이 정신적으로 지쳐있다 보니 맛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차라리 먹는 것보다 몸을 씻고 싶었다.

피와 땀이 뒤섞인 썩은 냄새가 풀풀 풍겼는데, 씻고 와도 금세 피투성이가 돼버리니 어느 순간부터 씻는 걸 포기했다.

훈련이 끝나면 씻으려고 했는데, 레토는 지금까지 쉴 틈 자체를 주지 않았다.

냄새가 지독할 텐데, 그녀는 별 상관없다는 반응이었다. 피 웅덩이에서 단련된 엘프답게 금세 적응해버렸다.

"바깥소식은 어떻습니까?"

"요즘은 조용한 편이에요."

샌드위치를 오물오물 씹으며 샤르바딘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의 입에선 많은 정보가 흘러나왔다.

미리 준비한 것처럼 정보의 질이 무척 좋았는데, 넬라가 신경 써서 보낸 티가 났다.

"펜리는 여전히 의식이 없습니까?"

"엘프석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마력 중독 증상이 원래 이렇습니까?"

"아니요. 중독 증상 외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은데, 넬라님이 말해줄 수 없는 이유가 있으신 것 같아요. 이유를 물을 때마다 표정이 곤란해지시거든요."

마력 중독 외에 다른 요인으로 지금껏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펜리.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생긴 게 분명했다. 다만, 무슨 이유로 넬라가 샤르바딘의 질문을 회피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신녀가 말해줄 수 없는 질문은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신명에 관한 정보.

'펜리의 신명에 변화가 생긴 모양인데.'

손도 망가졌겠다.

이쯤 훈련을 종료하고 숙소로 가봐야 할 것 같았다.

101화 개안(凱安)

"이거하고 이거는 도르네프가 좋아하겠어요."

"정말요?"

일어나면서 맛이 괜찮은 샌드위치를 골라줬는데, 그녀가 무척 좋아했다.

별것 아니지만, 저 샌드위치는 내가 알려준 음식 레시피였다.

취미 생활로 캠핑을 즐겼던 터라, 전문가는 아니지만 요리 담당을 맡을 정도로 간단한 요리 정도는 뚝딱 해내는 편이었다.

드워프의 영지라서 그런지, 음식 메뉴가 빵이면 빵, 고기면 고기, 무척 단조로운 편이라 바구니 안에 있는 재료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건넸더니 반응이 무척 뜨거웠다.

그때부터 여러 가지 레시피로 만들어서 이것저것 가져왔는데 손재주가 있어서인지 맛이 괜찮았다.

'샌드위치가 그렇게 신기한가?'

기존에 있던 빵과 고기, 채소를 섞은 것뿐이다.

베네타의 안주인이 샌드위치에 흥미를 보이자 그 밑으로도 알음알음 레시피가 퍼지고 있었다. 확실히 유행은 위에서부터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일상처럼 먹던 패스트푸드가 이 세상에선 큰 변화로 받아들여지자, 현대의 지식을 이용할 방법을 잠시 고민해봤다.

하지만 바로 휴지통행.

지식을 이용해 영지를 발전시켜봤자, 재앙이 나타나면 끝이었다.

손짓 한 번에 모든 게 날아갈 수 있는 세상이다.

그 고민을 할 시간에 레토에게 가르침 하나를 더 받는 것이 훨씬 이득일 것 같았다.

"얼른 도르네프에게 줘봐야겠어요!"

물론, 작은 이득도 있었다.

그녀가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도르네프에게 가져간 이후로 날 노려보는 횟수가 줄어들었다는 거?

혹한의 망치를 휘두르는 군주가 눈앞의 여인에겐 싫은 티도 못 내면서, 그 꿍한 마음을 손맛 좋은 드워프를 내게 보내는 것으로 풀고 있으니 기가 막혔다.

쇠몽둥이는 또 어떻고.

작정하고 만들었는지 더럽게 아팠다.

"혹시 매운맛이 강한 재료가 있습니까? 아주 매운 거면 좋습니다."

"아팔의 씨앗이 무척 맵기는 한데…."

"그겁니다. 그거 왕창 넣어서 도르네프에게 줘보세요. 새로운 맛일 테니."

"정말요?"

그녀의 샌드위치가 맵다고 뱉을 녀석이 아니지.

어디 당해 봐라 난쟁이 녀석아.

이런 소심한 복수 말고 크게 손을 봐줘야 하는데, 기회가 올지는 모르겠다.

일단 나보다 세기도 했고, 그 전에 펜리년을 먼저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펜리년이 무조건 먼저다.

아, 드디어 간식 뺏어 먹을 시간인가.

"설마, 훈련이 끝난 건가요?"

훈련장을 벗어나던 샤르바딘이 내가 계속 뒤따라 나오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통은 활을 잡고 훈련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보다시피 팔이 이래서요. 숙소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팔이… 치료사를 불러드릴까요? 심각해 보이는데."

"이 정도는 침만 발라도 낫습니다."

"...."

뒤틀린 팔목을 잡고 배웅하듯 손을 흔들고 있으니 샤르바딘은 어색하게 웃고는 도르네프를 찾아서 휑 가버렸다. 함께 가던 나토네와 눈을 마주쳤는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반응들이 왜 저래?"

어깨를 으쓱이며 발걸음을 돌렸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에 몸부터 씻었다.

물에 닿으면 팔목이 더럽게 아팠는데, 몸이 찝찝한 게 더 싫었다.

시종들의 도움을 받을까 잠시 고민했지만, 역시 혼자 씻는 게 마음이 편했다.

여인들이 내 몸을 닦아주는 모습은 아직 상상이 안 가거든.

상처도 보게 되면 기겁할 테고.

"아, 살 것 같다."

피로 얼룩진 흔적이 찬물에 씻겨가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더러운 흔적이 사라지니 단련된 육체가 드러났다.

몸짱에서 체지방이 싹 빠진 느낌인데, 오밀조밀 각 잡힌 근육이 드러나자 절로 눈길이 갔다.

보름 전만 해도 아기처럼 뽀송뽀송한 피부를 자랑했는데, 셀 수 없이 뜯기고 찢기길 반복하면서 피부결도 거칠게 변했다.

질기고 탄력적이다.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네.'

물기를 닦으며 거울을 바라보니, 달라진 내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매섭게 휘어진 눈썹.

전에는 느낌이 강해 나와 안 어울렸는데, 이젠 눈썹의 매서움이 딱 맞는 옷처럼 느껴졌다.

심장의 영향 때문일까.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거칠어졌다.

기존에 날 알던 사람도 자세히 보지 못하면 못 알아보고 지나칠 정도다.

[변화가 느껴졌나?]

"이런 신체적 변화를 말하는 겁니까?"

[웃기는 소리.]

"그럼, 무슨 변화를 말하는 겁니까?"

[내가 알려주는 것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면 진즉 말했겠지.]

"...."

이따금 똑같은 질문을 던지는 레토.

그가 묻는 변화란 1단계 근육 단련의 완성을 뜻하는 것 같은데, 어떤 변화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물어도 부족하다는 말뿐이다.

숙소로 돌아왔다.

방안을 둘러보니 전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눈에 띄는 건, 펜리 곁 작은 식탁에 놓인 꽃병 정도?

싱그러운 향기가 난다고 생각했는데, 저 푸른 안개꽃에서 흘러나오는 향기 같았다.

[마력향이 진하게 풍긴다.]

"저 안개꽃에서 말입니까?"

[자연적인 꽃이 아니다. 신녀의 기도로 피운 꽃이다. 마력 회복에 도움을 주지.]

신녀.

며칠 전 엘프 넬라가 다녀갔다고 하더니, 그녀의 작품인 것 같았다.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상태는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잠든 것처럼 보였는데, 샤르바딘의 말에 따르면 넬라가 엘프석 하나를 펜리에게 사용하곤 낭패를 지으며 다시 돌아갔다고 들었다.

마스터의 몸에 큰 변화가 생겨서 엘프석 한 개로는 부족하다나.

그 변화는 분명 신명 목록과 관련 있을 것이다.

"어떤 신명 목록이 변한 거지? 궁금하네."

[궁금하면 보면 되지 않나?]

"전 '신을 받드는 자'가 아니라서요."

[멍청한 말을 하는군. 그 두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건가?]

"제 눈이 어때서… 아!"

레토가 날 죽일 듯이 굴리고, 가진 능력 중 연구할 것들이 많다 보니, 신명 사냥꾼의 능력을 잠시 잊고 지냈다.

사냥감의 후광을 통해 신명을 읽어내는 개안(凱安) 능력 말이다.

누워있는 펜리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은한 후광이 그 증거였다.

다만, 개안을 펼치려면 신명 사냥꾼으로 먼저 각성해야 했다.

[대상과 대치하든, 대상이 죽어가든, 대상이 자고 있든, 네가 사냥할 의지만 있다면 그저 사냥감일 뿐이다.]

사냥꾼 각성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사냥에 실패했을 때의 페널티를 걱정했는데 우려에 불과했다.

저번 펜리의 경우처럼 사냥에 실패해도 그렇다 할 페널티를 느끼지 못했다.

"사냥할 의지라…."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아레나 후아튼 앞에 섰을 때, 최근 펜리 앞에 섰을 때 어떤 마음으로 신명 사냥꾼을 각성했는지 떠올려봤다.

사냥하고자 하는 마음.

'…살기(殺氣)?'

그래, 살기다.

사냥감을 죽이고자 했던 마음 말이다.

그 마음을 담아 펜리를 노려봤는데, 반응이 없었다.

뭐가 부족한 거지?

[그딴 게 살기라고? 사냥꾼으로서 수치다.]

"...."

역시 약했나?

저번처럼 펜리가 날 때려주면 쉬울 것 같은데 말이지.

이렇게 빌빌거리고 누워있으면 죽이기가 미안해지잖아.

짧게 호흡을 내쉬고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에 죽이고자 하는 대상을 떠올렸다.

역시나, 한 사내의 얼굴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흩날리는 거친 흑발, 그 사이로 보이는 메마른 눈빛.

학살자 카멜 블레이저.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자신의 대적자.

살아남기 위해 반드시 죽여야 하는 존재.

번쩍―

사납게 두 눈을 뜬 순간,

움찔―!

의식이 없던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 살기에 반응을 보였다.

동시에 후광에서 신비한 룬 문자가 신비롭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다크 엘프족의 축복 받은 몸놀림]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그림자 일족의 주술]

[그림자 왕의 가호]

'그림자 왕의 가호?'

넬라가 본 신명 목록이 이거였던 모양이었다.

설마 폐광산에서 그녀가 사용했던 왕의 소환술이 그림자 왕의 호기심을 불러온 것일까.

6성에 오르고 그림자 왕의 관심을 받았을 때와 완전히 다른 상황이었다.

5성에 그림자 왕의 관심이라….

"이건 너무 빠른데."

지금 마력으로 그림자 왕의 힘을 사용하기엔 너무 일렀다.

마력 한계가 분명할 텐데 어떻게 자격을 얻는 거지?

순간 펜리가 보물처럼 안고 자는 벨트에 시선이 닿았다.

'아, 마력의 루비 벨트!'

설마, 저 아티팩트가 그림자 왕의 선택을 앞당겼나?

여러 가지 변수가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이게 그녀에게 좋은 선택일까?'

확신하기 어렵다.

그림자 왕의 힘은 강력하지만 내가 불사자의 심장을 얻은 것처럼 양날검으로 작용할 확률이 높았다.

당장만 해도 마력 중독에 빠져 빌빌거리고 있지 않나.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힘.

절대자들의 힘은 강력한 만큼 큰 대가를 지불했다.

[검은 녀석이 엘프에게 호기심을 드러냈군. 마력에 항상 굶주리겠어.]

특히, 그림자 왕은 마력을 잡아먹는 포식자였다.

마력 중독은 앞으로 펜리에게 인생 과제나 다름없었다.

"그림자 왕을 알고 있습니까?"

[그는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림자니까.]

"레토, 당신도 절대자였습니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럼 당신은 힘을 빌려주는 대가로 무엇을 가져갔습니까?"

[살고자 하는 의지.]

"…살고자 하는 의지?"

[절대자들이 대상으로부터 원하는 대가는 대부분 결핍과 관련되어 있다. 검은 녀석은 마력을 통해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길 원하지. 그림자는 홀로 실체를 드러낼 수 없으니까.]

"그럼, 당신은...."

[내 결핍은 '죽음'이다. 내 힘을 빌릴수록 숙주는 죽음을 품게 된다. 영혼이 죽고, 이성이 죽고, 종국에는 육신마저 죽는다.]

"불사자의 힘을 얻는 대가가 죽음이라니 황당하네요."

[네 녀석은 예외다. 네 녀석에겐 영혼과 이성을 지킬 수 있는 가호와 육신을 살리는 염원의 반지가 있으니 말이다.]

레토의 말대로 모든 것에는 예외가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마 펜리도 그 예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어쨌든 마력 벨트부터 그림자 왕까지, 그녀의 스펙이 수년을 앞서갔다.

이 결과를 보니, 문득 불안감이 올라왔다.

스토리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내 개입으로 펜리가 이렇게 바뀌었다면 소설의 주인공에게는 더 큰 변화가 있지 않을까?

내가 학살자 카멜 사이에 끼어들면서 주인공에게 포섭되어야 할 인물들, 주인공에게 주어진 기연, 성장할 힘까지 뺏어왔다.

소설 속 주인공이라면….

"부족한 힘을 대체할 다른 방법도 알고 있겠지."

펜리보다 더 크게 변하면 변했지. 멈춰있을 자가 아니었다.

큰 변수가 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나 혼자 학살자를 상대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니까.'

학살자는 강력한 세력을 이루고 있고, 이를 상대하려면 나도 세력이 필요했다.

혈맹.

혈맹을 맺고, 베네타와 검은 장미의 힘을 빌려야 했다. 그러려면 일단 펜리가 의식을 차려야 일이 진행된다.

넬라가 엘프석을 제작하고 있지만, 아무리 빨리 잡아도 일주일은 더 걸릴 터였다.

그전까지 내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다.

레토에게 1단계 육체 진화를 인정받는 것.

그리고 하나가 더 늘었다.

'내 신명 목록을 알아내야 해.'

102화 변화 그리고 완성

신명 목록은 세상이 그 존재를 바라보는 운명 바코드와 같다.

과거, 현재,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는 이정표.

물론, 나에게만 해당하는 얘기다.

난 신명이 뜻하는 바를 예측할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개안(開眼)을 통해 타 주인들의 신명 목록을 볼 수 있게 됐지만, 정작 내 신명 정보에 대해 무지했다.

알게 된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텐데.

이 세계가 날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는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될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나를 비추는 거울을 향해 살기를 드러냈다.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거울에 비친 내 머리 위엔 후광이 없었고, 사냥꾼이 사냥꾼 자신을 사냥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됐기 때문이다.

'역시 실패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사냥의 대상이 자신이 될 순 없는 모양.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 신명을 볼 수 있는 인물을 찾아가야 한다는 건데.'

당장 떠오른 인물은 두 명이다.

운명의 아케인, 그리고 마녀 릴리.

이중 아케인은 대상에서 지웠다.

내 신명을 가지고 블랙마켓에서 카멜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내 존재에 대해 경계 혹은 적개심을 가진 것 같았다

찾아간다고 해도 내 물음에 답해줄 것 같지 않고, 오히려 카멜에게 목숨을 위협받을 확률이 높았다.

그럼 남은 인물은 오르도르 숲의 마녀인데,

'이쪽이 확률이 훨씬 높겠어.'

악명 높은 마녀로 알려졌지만 그건 마녀사냥을 이끌었던 집단이 만들어낸 선입견이 컸고, 그녀의 천성은 '악(惡)'과는 다소 거리가 멀었다.

날이 선 고슴도치 같다고 해야 하나?

마녀 대학살로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지만, 만날 기회만 있다면 친해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단순하고 꾸미는 것을 즐기며 먹는 것을 좋아하는 어느 소녀와 같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건, 그녀가 움직이는 곳에는 늘 상급 마녀 오르타들이 지켰기 때문이다.

오르타들은 마녀 대학살 당시 강과 들판, 산맥을 피로 물들였던 공포의 마녀들이다.

그 마녀들 사이에 고고히 피어난 검은 꽃, 릴리 베이스.

그녀는 선입견이 만들어낸 공포의 상징이자, 사람들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유다.

'챕터Ⅱ에 등장하는 인물이라, 당장 만나긴 어려울 거야.'

그래도 가능성을 놓지는 않았다.

운명의 아케인 또한 챕터Ⅱ부터 등장하는 인물인데, 카멜 곁에 붙었다.

펜리가 마력 벨트를 얻고 그림자의 왕의 관심을 얻는 것처럼, 카멜도 아케인의 도움을 통해 나에게 빼앗긴 힘과 기연을 다른 방면으로 회복하고 있었다.

이 변화가 오르도르의 숲에도 없으리란 법이 없었다.

밤공기나 쐴 겸 창문을 열었는데, 구름에 걷힌 달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더럽게 크네.

달이 둥글게 만개했다.

창 너머로 펼쳐진 베네타에 환한 달빛이 내리쬔다.

횃불이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잠시 달을 멍하니 올려다봤다.

조금 전 마녀 릴리에 대해 자세히 떠올렸기 때문일까.

"달의 마녀(Moon witch)...."

만월을 보자, 나도 모르게 그녀의 신명을 중얼거렸다.

'만월의 재능'을 가진 그녀는 모든 주술에 능통한 만능케에 가까웠다.

지금 그녀에게 주어진 유일한 페널티는 '시간'이다.

그릇이 클 시간 말이다.

갑자기 그녀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소설에선 그 미모 때문에 뭇 사내들의 마음을 울리고, 피바람을 몰고 다녔다고 했다.

지금은 어리니, 그 정도까진 아니려나?

내 신명 목록을 알아내려면 한 번쯤 꼭 만나봐야 하는 인물이니, 그 외모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창문을 닫았는데, 밤바람 때문에 펜리의 얼굴 주변에 꽃잎들이 떨어져 있었다. 꽃병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건드리지 마라.]

이마에 떨어진 꽃잎을 치워주려고 하는데, 레토가 경고를 해왔다.

[그림자 왕의 가호를 잊었나?]

"위험합니까?"

[그림자 주인의 의식이 없을 땐 피하는 게 좋다. 그림자가 있다면 더더욱.]

등불에 비춘 펜리의 그림자가 침대 위에 머물러 있다.

의식이 없을 때 섣불리 건들면 안 되는 모양이었다. 그림자가 튀어나와 공격하려나? 호기심에 목숨을 거는 성격이 아니라서 뒤로 물러났다.

"당신은 저런 거 없습니까? 숙주를 지켜야죠."

[죽기 전에 깨워주지 않나?]

"…아, 네. 고맙네요."

레토에게 많은 것을 바라면 안 된다. 레토가 지시하는 행동에는 무조건 고통이 따랐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 또 다른 고통을 선물해줄지 모르니 입조심 해야 했다.

뭘 할까 하다가 침대에 드러누웠다.

손목이 제자리를 잡긴 했는데 손가락에 힘이 안 들어간다.

근육과 신경이 회복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현실에서 이 정도 상처라면 불구를 걱정해야 하는데 하룻밤 정도의 상처로 치부하고 있으니, 나도 이곳 사람이 다 된 것 같았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내가 얼마 만에 자는 거지?

보름 만에 드디어 숙면을,

드르르....

[일어나라.]

…컹, 시발.

[인첸트 숙달에 걸음마도 못 뗀 주제에 휴식이라니, 게을러터졌군.]

"...."

보름 동안 잠도 안 자고 훈련 중인데 게을러터졌단다.

절대자들은 잠도 안 자나?

이 녀석이 내게 온 것도 어찌 보면 불행이 아닌가 싶다.

아니, 불행의 시작인가?

손목 부상이 아니라도 내겐 주어진 훈련이 많다.

난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맛있냐?

흡혈의 고리가 내 피를 쭉쭉 빨아먹기 시작했다.

어째 하나같이 날 괴롭히는 것들뿐이다.

인첸트 숙달을 위한 훈련이 밤새 이어졌다.

* * *

5일이 더 지났다.

예상은 했지만, 내 손목을 아작냈던 신입 드워프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추가 도우미 없이 여섯 명으로 훈련을 진행했는데 훈련 20일 차가 되는 날부터 얻어맞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기 시작했다.

공격 루트가 눈에 익었다고 해야 하나?

레토가 말한 '주시'가 드디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섯 명이 휘두르는 몽둥이 궤적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퍼퍼퍽―!

"...크!"

물론 포위당했으니 다 피할 순 없다. 하지만 급소를 피하고, 빗겨 치는 횟수가 늘면서 내 반격이 매서워졌다.

퍽―!

"크억!"

결국, 한 놈의 면상에 이마를 박아넣는 데 성공했다. 코를 부여잡고 한 녀석이 바닥을 구르자, 놀란 나머지가 나와 거리를 벌리곤 경계에 들어갔다. 이젠 거리를 주면 당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봤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하지만 움켜쥔 주먹엔 힘이 넘쳤다. 고통도 익숙해졌고, 맞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 상태다.

한 발을 쿵! 내딛자, 정면에 있던 드워프가 한 걸음 물러났다.

줄곧 방어만 해왔던 내게 처음으로 공격권이 주어졌다.

간다!

[그만.]

"…억! 뭐요?!"

[훈련의 본질을 잊었나? 맞지 않으면 의미 없어.]

시발, 정말 변태 같은 훈련이다.

그래도 불만을 표하지 못하는 게, 단시일 내에 눈에 보일 정도로 강해지고 있는 게 느껴졌다.

20일 동안 쉴 새 없이 퍼부어졌던 공격 궤도는 앞으로 내가 어떻게 피하고 막고 반격해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알게 해줬다.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줄어들었단 소리였다.

맞을수록 강해지는 몸이라니, 슬프다.

"한 명 더 늘립니까…?"

[여섯이 가장 이상적이다. 일곱부턴 공격이 되려 무뎌지더군. 드워프들에겐 합공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 같다.]

"…그럼?"

[변화는?]

또 변화에 관해 묻는다.

레토가 하루에 한 번은 내게 꼭 묻는 질문이다.

레토가 내게 바라는 변화는 무엇을 뜻하는 걸까?

"수수께끼 그만하고 힌트라도 주시죠?"

[네놈이 요즘 고민하는 고민거리 하나가 줄어들겠지.]

"내 고민거리?"

[흡혈의 고리.]

그 말을 듣는 순간 레토의 뜻을 알아챌 수 있었다.

레토가 바라는 변화가 이뤄지면 그게 가능하다고?

난 순백의 팔찌를 바라봤다.

요즘 내 고민거리는 최대 출력에 관한 것이었다.

단시간에 흡혈의 고리를 최대 출력으로 올리는 방법 말이다. 그러기 위해선 흡혈이 순식간에 이뤄져야 하는데, 레토는 1단계 육체 완성이 그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내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흡혈의 고리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레토가 훈련 종료를 선언했다.

[이 이상 훈련은 무의미하다. 훈련으로 변화를 잡아낼 수 없다면 '계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른 훈련에 집중해라.]

"계기? 어떤 계기를 말하는 겁니까?"

[인간의 언어로 '깨달음'이라고 표현해야겠군. 나도 모른다. 깨달음은 네 몫이지.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석양이 질 때쯤 마무리되는 몽둥이 훈련이 점심쯤 일찍 마무리됐다.

"…훈련이 끝난 겁니까?"

"일단은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훈련 종료를 알리자 기사들의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홀가분함, 기쁨, 안도감… 응?

아쉬워 죽겠다는 저 표정은 뭔데?

날 때리는 게 설마 즐거웠던 거니?

저 드워프 녀석의 얼굴은 꼭 기억해놔야겠다.

"군말 없이 훈련에 동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흰 기사입니다. 주군이 시키면 해야죠."

물론 말과 달리 기대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돈이냐?

그럴 리가.

난 피식 웃고는 그늘 밑에 쟁여놨던 큼지막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평상시엔 훈련이 끝나면 바구니를 오픈하는데 오늘은 훈련이 일찍 종료되어 점심을 내가 준비한 음식으로 하게 됐다.

"오!!!!!!"

바구니를 열자, 드워프들이 감탄을 흘리며 바구니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바구니 안에는 이 세계에서 볼 수 없는 색다른 음식들이 펼쳐졌다.

성내 사람들이 샌드위치에 큰 관심을 보이면서 기사들에게 줄 음식을 떠올려봤다.

군주의 명이라지만 하루의 절반을 날 위해 땀 흘리는 도우미들이다.

직접 챙기고 싶었다.

샤르바딘에게 부탁해 성내 주방을 사용할 수 있게 됐는데, 며칠 전부터 생각해둔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서 반응을 살폈다.

"크하하하하!"

"내가 이 맛에 여길 온다고!"

"오늘도 먹고 죽자!"

'부담스러울 정도로 폭발적인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돗자리를 깔고 그 위에 음식을 죽 깔아놓자 흥분한 표정들로 맥주를 들어 올렸다.

캠핑에서 주로 먹던 맥주용 안줏거린데 맥주가 빠지면 섭하지.

바비큐, 김치 짜글이, 골뱅이무침, 감자튀김 겉바속촉의 위대함을 느껴봐라.

물론, 레시피만 비슷할 뿐 재료들은 이 세상 것들이라 현대의 맛과는 달랐다.

그래도 맛있다고 정신없이 집어먹는다.

홀짝―

나도 맥주로 목을 축였다.

미지근한 맥주.

맥주는 시원한 것이 생명인데, 마법을 사용할 줄 모르니 아쉬운 대로 만족하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가벼운 대화도 오갔다.

"성주님의 개화 특성인 '냉기'를 본 적 있지. 상대가 누구든 일격에 얼어붙는 공격이라니 대단하지 않나? 자네도 특성을 개화했겠지? 육체 쪽으로 말이야."

드워프들의 눈빛에 부러움이 스쳐 지나갔다.

이들과 대화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내 예상보다 개화 특성자가 훨씬 적다는 것이다.

눈앞의 여섯만 해도 3성인데도 전원 무특성인 것을 보면 개화 특성자가 얼마나 희귀한 경우인지 알 수 있었다.

기사 단장 나토네도 마찬가지다.

그는 무특성 5성의 실력자였다.

"운이 좋은 편이라서요."

구라다.

내 운은 쓰레기나 다름없다.

하지만 특성을 개화했으니, 일단 웃으면서라도 개화 특성에 관해 인정해야 했다. 우는소리 했다간 진짜 몽둥이질을 당할 것 같거든.

다만, 드워프들은 나의 개화 특성이 육체와 관련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아니다.

이름 알렉스,

마르샤 가(家)의 몰락 귀족.

단검과 석궁을 잘 다루며 특별한 빛을 다루는 특성 개화자.

검은 장미들이 베네타 바깥으로 흘리고 있는 내 거짓 스펙이었다.

학살자에게 혼란을 주기 위한 밑밥 깔기인데 머리가 좋은 놈이라 솔직히 통할지는 모르겠다.

103화 변화 그리고 완성(2)

"오늘도 대단했어."

"아쉬워. 이젠 이 빵을 집으로 가져갈 수 없다는 게. 마누라한테는 뭐라고 하지?"

"그건 그래. 요리사 것보단 이쪽이 백 배는 더 맛있다고."

드워프들의 품에는 길쭉한 빵들이 안겨 있었다. 하나같이 빵을 보며 아쉬워하는 표정들이다.

출시는 사흘도 안 됐는데, 어느덧 베네타의 시그니쳐가 된 맥주빵이다.

혹시나 하고 밀가루에 맥주를 섞어서 만든 맥주빵인데 버터에 찍어 한입 먹어본 드워프들 사이엔 신이 내린 빵으로 불리고 있었다.

맥주에 죽고 못 사는 드워프들에게 맥주향이 나는 빵이란 중독과도 같았다.

성 요리사가 하도 울고 불며 달라붙어서 레시피를 건네줬더니, 도르네프도 아침엔 저 빵부터 찾는다고 한다.

취미로 배웠던 캠핑 지식이 이리 요긴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다.

나중에 생존에도 도움이 되려나?

드워프들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훈련장을 벗어났다.

그들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게. 몽둥이를 들고 벼락같이 달려올 테니."

"…하하하."

내 몸을 훑어보며 눈빛들을 번뜩이는데, 난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훠이, 저리 꺼져. 다신 안 부를 테니까.

베네타의 심판자들이 졸업했다.

저 참회의 몽둥이는 이제 베네타의 악인들에게 쓰일 것이다.

드워프들이 훈련장에서 사라지자, 뒷정리를 간단히 하고 여분의 음식은 바구니에 담아 다시 그늘 밑에 놔뒀다.

샤르바딘과 나토네의 것이었다.

요즘은 날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음식을 맛보러 방문하는 느낌이 강했다.

특히, 나토네.

폐광산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텐데, 저녁마다 이곳엔 빠짐없이 들렸다.

맥주빵의 위력인가?

하여튼, 그들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후―

작게 숨을 내쉬며 빈 훈련장에 홀로 주저앉았다.

훈련에서 생긴 상처들이 식사하면서 호전되긴 했는데, 아직 회복이 완벽히 된 것은 아니었다.

이전이라면 끙끙 앓을 고통인데 이젠 드워프들과 맥주 한잔하며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조용하다.

적막이 흐르는 훈련장 안에서 난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레토."

내 부름이 신호가 된 듯 회복 속도가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듯 진행됐다.

팔다리 허리 가슴 등 근육 하나하나가 회복되는 감각에 집중했다.

활력의 움직임, 호흡도 놓치지 않았다.

스스로 자신의 몸과 대화하는 시간, 관조(觀照).

레토가 기감 발달에 도움이 된다며 시킨 훈련인데, 확실히 이 훈련을 하고 나서부터 기운을 통제하는 스킬이 많이 늘었다.

특히, 인첸트 숙련에 무척 도움이 됐다.

[관조 훈련을 극대화하려면 빈사 상태에서 이뤄져야 한다.]

죽기 직전 정신적 각성이 이뤄지며 시간마저 정지된 듯 흘러가는 상태.

숨이 넘어가기 직전 인생이 파노라마처럼 비친다고 하는 얘기가 괜히 들리는 게 아니었다.

그때 무의식으로 이뤄지는 관조 훈련은 그 어떤 기감 수련보다 뛰어나다고 했다.

첫 경험 때 미친 매운맛으로 경험했던 터라 아직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지만, 언제고 해야 할 훈련이라나?

1단계 훈련을 완료해도 내 고통의 시간은 여전히 끝나지 않을 것이란 말이었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온 순간 두 눈을 번쩍 뜨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모든 사물이 또렷이 시야에 잡힌다. 이 상태에서 활을 쏘면 백발백중일 것 같았다.

우웅―!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고 순백의 활대를 움켜쥐자 흡혈이 시작되며 활대가 붉게 물들었다.

흡혈의 고리는 색이 가지는 특징이 존재했는데, 짙게 붉어질수록 화살의 위력이 강력해진다는 것이었다.

내 피를 닮은 완벽한 핏빛.

이때가 최대 출력의 신호인데 시간을 재보니 대략 15분 정도 흡혈을 해야 완성되는 것 같았다.

15분.

첫 기습 때 빼곤 전투 중에는 사용하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활대를 힘껏 쥐어보기도 하고, 기운도 사용해보는 등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최대 출력의 시간을 단축하지 못했다.

내 고민은 이 시간을 줄이는 건데, 레토는 1단계 훈련이 마무리되면 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뭐가 달라지는 걸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스윽―

붉게 그려진 시위를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내가 하는 훈련은 인첸트 숙련을 위한 과정이었다.

흡혈의 고리에 집중하자 화살이 소환되기 시작했다.

한 발이 아니었다.

하나, 둘, 셋….

그 수가 빠르게 늘더니 무려 다섯 발의 화살이 활대에 장전되었다.

'위력을 줄이면 멀티샷도 가능하단 말이지.'

시위에 다섯 발의 화살을 고정하고 한 곳을 겨눈 뒤 가볍게 놓았다.

콰콰콰쾅―!

거친 폭발이 터져 나왔다.

단발의 화살을 다섯 개로 나눈 거라 위력이 약했지만, 사방이 그을리는 광범위한 피해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일종의 광역기.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방면으로 위력을 발휘할 것 같았다.

다시 흡혈, 그리고 다섯 발의 화살 소환.

처음에는 두 발로 나누는 것도 어색했지만, 이젠 다섯 발까진 손쉽게 나눌 수 있다.

최소 파괴력인 마력탄 수준으로 나눌 수 있는 한계치이기도 했다.

더 늘릴 수 없을까 고민했지만, 마력탄 수준은 일반인들에게나 먹힐 뿐 강한 녀석들에게 큰 피해를 주기에는 어렵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화살 강화다.

난 화살 위로 각각 인첸트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위력이 약해지면 강하게 만들면 된다.

"...음!"

인첸트 기운이 분산되자 감각이 어지러웠다. 눈이 절로 감기고, 얼굴이 찡그려졌다.

집중력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인첸트 부여가 실패했다.

기운이 흩어지면서 불안정한 현상을 보이는 것인데 인첸트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이때 처음 알았다.

실패의 대가는 바로,

파삭―!

다섯 발의 화살 중 세 발이 먼지처럼 흩어지며 소멸했다.

인첸트 일부가 실패하면서 충격을 받아 사라진 것인데, 이것 나름대로 내겐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왜냐고?

[네 몸뚱이라고 생각했으면 실패하지 않았을 거다.]

"...."

시발, 이런 걸 보고도 내 몸에 인첸트를 부여하라니.

시험 삼아 살짝 해보긴 했는데 그 고통에 입이 쩍 벌어졌다.

생살과 근육이 찢어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더럽게 아팠다.

[인첸트 숙련을 더욱 빠르게 올리고 싶다면 네 몸에도 시도해라. 생존했을 때의 고통은 성장의 밑거름이 되니까.]

"…몸이 부서질 텐데요?"

[손가락부터 시작하지.]

손가락 정도는 터져도 복구할 수 있다는 레토의 덤덤한 발언.

레토는 미친놈이 분명했고, 난 이 녀석이 점점 무서워졌다.

육체에 인첸트를 부여하는 건 한참 후의 일이 될 것 같았다.

벌써부터 내 몸이 아작나는 건 보고 싶지 않거든.

[다시.]

"…큭!"

[집중력이 부족했다. 다시.]

"제길."

[하나가 아니라 전체에 집중해라. 다시]

훈련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뤄졌다.

다섯 개 모두 성공하는 경우는 손에 꼽았다. 평균 성공 확률이 두 발 정도 됐는데 인첸트 없이 다섯 발을 날린 것보다 위력이 훨씬 강했다.

숙달된다면 큰 힘이 될 게 분명했기에 레토의 도움 아래 그동안 잠도 안 자고 인첸트 숙달에 집요하게 매달렸다.

끼이이익―

마찰음 소리에 훈련을 멈추고 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눈을 깜빡이니, 눈이 따가웠다.

이마를 훔치니 땀으로 범벅이다.

언제 이렇게 땀을 흘렸지? 주변을 둘러보니 밝았던 훈련장이 어느새 횃불을 켜야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훈련에 매달렸던 모양이었다.

샤르바딘이 올 시간이 된 건가?

아니다.

날 찾아온 건 시종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시종이 날 발견하곤 곧장 내게 뛰어나왔다.

"넬라님이 찾으십니다."

엘프 넬라가 도착했다?

엘프석이 완성된 모양이었다.

성주 전용 훈련장에 시종이 찾아왔다는 건, 도르네프가 보낸 사람이란 뜻이었다.

시종의 안내를 받으며 훈련장을 나왔다. 가는 위치를 물어보니 숙소였다.

그 전에 샤르바딘과 나토네를 찾아 음식 바구니를 건네주려고 했는데, 그들의 소식을 시종이 전해왔다.

"성을 비웠다고요?"

"네. 성주님의 지시를 받고 두 분 다 오전 일찍 바깥으로 나가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전 일개 시종이라…."

도르네프를 만나면 절로 알게 될 일이라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시종 뒤를 따랐다.

어느새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르고 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 달은 유난히 맑다.

앞서 걷는 시종의 그림자가 선명히 보일 만큼.

* * *

천천히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숙소는 영주성 꼭대기 층에 자리했다.

시종은 성 입구까지만 날 안내했는데, 감사의 의미로 음식 바구니를 건넸더니 무척이나 좋아하며 돌아갔다.

"응?"

꼭대기 층에 발을 디딘 순간 통로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도르네프와 넬라.

이 성의 군주와 검은 장미의 신녀가 날 발견하자 내게 곧장 다가왔다.

근데 도르네프의 복장이 심상치 않았다.

제단에서 미믹과 한판 붙을 때 입었던 전투 무장을 하고 있었다. 손에 쥔 혹한의 망치도 보인다.

뭐지?

그의 성에서 그를 위협할 무언가가 있나?

내가 의문을 담아 그를 바라보자, 도르네프가 날 사납게 노려봤다.

망치를 쥔 손이 부르르 떨리는 데 무섭다.

갑자기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다고?

"아펠의 씨앗, 아주 맛있게 먹었네. 근래에 가장 화끈한 맛이었어."

"...."

당해 보라고 넌지시 샤르바딘에게 말했는데, 그녀가 샌드위치에 그 매운 고추씨를 듬뿍 넣어서 도르네프에게 준 모양이었다.

화끈하긴 했겠네.

궁금해서 살짝 아펠의 씨를 맛봤는데, 혀를 후려치는 캡사이신 맛과 비슷했거든.

이 악당의 세계에는 '적당히'가 없는 것 같았다. 왜 이리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게 많은 것인지.

그만큼 아펠의 씨앗은 매웠다.

"괜찮았죠? 건강에 아주 좋습니다."

"오래 살고 싶으면 그녀에게 다시 말하게. 그건 실패작이라고."

"직접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녀가 우는 건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매일 그것을 먹었니?

이 무식한 드워프 같으니라고.

하지만 표현은 못 하고 어색하게 미소만 지었다.

코앞으로 망치를 들이미는데, 그 망치 위로 푸른 서리가 끼기 시작했다.

한 대 맞으면 골로 가겠지?

"설마, 절 협박하려고 풀 무장을 한 건 아니죠?"

"...."

진짜야?

이 미친 난쟁이가 제정신인가?

아니, 그 정도로 맵다는 뜻이겠지.

설마 이 성의 군주를 위협한 것이 샤르바딘이 만든 샌드위치가 될 줄은 몰랐다.

"아니에요. 절 보호하기 위해서 무장을 갖추신 거예요."

금발의 미녀 엘프가 날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엘프석을 제작하느라 고생했는지 얼굴에 힘이 없어 보였다.

이쁜 얼굴에 초췌함까지 묻어나니 날 향한 미소가 유혹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난 저 미소에 속지 않는다.

당한 게 너무 많거든.

"넬라님, 오랜만입니다."

"샤르바딘에게 듣긴 했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분위기가 더 많이 변했네요."

"좀 험하게 지냈습니다."

넬라는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아서의 외모는 외모의 끝판왕이라는 푸른 장미의 눈으로 봐도 뛰어난 편이었다.

다만, 사내치고 유한 느낌이 강했는데, 며칠 새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단단하고 거친 사내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그런데 도르네프님의 도움이라니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마스터께 엘프석을 먹일 거예요."

"그게 문제가 되는 겁니까?"

"흠, 문제는 아닌데 상황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거든요."

"위험?"

"일단 마스터께 가요. 당신까지 합류했으니 얼추 안전이 보장된 셈이니까."

안전 보장이라니.

저번 엘프석을 펜리에게 먹였을 때 문제가 생겼던 게 분명했다.

104화 변화 그리고 완성(3)

통로는 어둡고 조용했다.

도르네프가 비상시를 대비해 주변을 모두 물린 것 같았다.

"그림자?"

"네. 마스터 앞에 엘프석을 꺼낸 순간 그림자가 엘프석을 낚아채곤 사라졌어요. 그리고 마스터의 신명에 변화가 생겼죠."

그림자 왕과 관련된 신명이 분명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샤르바딘에겐 전달받지 못했는데?

내 의문 섞인 표정에 그녀가 쓴웃음을 지었다. 샤르바딘에 대한 미안함이었다.

"신명과 관련된 내용이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어요. 신명 얘기도 이곳에 혈맹의 핵심들만 있기에 꺼낸 거예요."

"...."

"...."

신명이 언급되자 침묵이 흘렀다.

나도 넬라도.

그 신명이 '그림자 왕의 가호'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함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블랙마켓이나 다른 이가 액받이로 신명을 발설하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 발설된 신명이 입을 통해 전해지지 않은 이상 신명의 저주라는 제약에 걸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앞으로 이 제약으로 답답한 상황이 자주 벌어질 것 같았다.

개안(開眼) 능력으로 타 주인의 신명을 확인해도 나 혼자 끙끙대며 숨겨야 한다는 소리였으니까.

진짜 답답해 뒈질지도 모르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도 들었다.

'입 밖으로 신명을 내뱉어도 회피할 방법이 있지 않을까?'

세상이 정한 규칙대로라면 저주를 피할 순 없다. 신을 받드는 자들이라면 이 규칙을 인정하고 살아간다.

신녀인 넬라도 마찬가지.

하지만 난 예외를 알고 있다.

운명의 아케인.

그는 신명의 저주를 회피하는 '신을 받드는 자'다.

그래서 특별했다.

그런데 특별함으로 따지면 나보다 더 특별한 존재가 있을까?

레토는 세상 어디에나 예외가 존재한다고 했다. 나중에 저주에 관해 레토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불사자는 억겁의 세월을 살아온 만큼 세계의 비밀에 근접한 존재였으니 말이다.

"…아! 이걸 깜박했네요. 가방 받으세요."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받을 줄은 몰랐네요."

예상보다 성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검은 장미에 놓고 온 가방이 마음에 걸렸다.

그 안에 든 물건들이 보통 물건들이어야지.

샤르바딘에게 부탁했는데, 넬라가 이번에 가져온 모양이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마녀의 목걸이.

마르샤 가(家)의 직인.

특히 이 직인이 필요했다.

내 가짜 신분을 증명해줄 중요한 물건이었으니까.

그리고, 보랏빛 마석 더미가 가방 밑에서 뒹굴고 있었다.

제단에서 굴러다니는 걸 주워왔는데, 아직 그 쓰임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용물을 일일이 확인하고 있으니, 넬라가 새침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요? 누가 훔쳐 갔을까 봐요?"

"네."

"...."

아, 나도 모르게 본심이 나와버렸다.

통로는 전보다 더 무거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넬라의 눈치를 보며 걷고 있는데 어느새 숙소 앞에 도착했다.

서둘러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뭘 하면 됩니까?"

"변수가 발생하게 되면 절 보호해주세요."

"맡겨주시죠. 몸을 날려서라도 막아줄 테니까."

"말 안 해도 믿어요. 누구처럼 남을 불신하는 마음이 없거든요."

"하하하…."

네가 나한테 한 짓을 떠올려보라고, 불신 안 하게 생겼나.

어색하게 웃으며 도르네프를 바라봤는데, 고개를 스윽 돌려버린다.

난쟁이 녀석이 안 도와주네.

아, 민망해라.

그녀의 손에는 엘프석이 쥐어져 있었다. 무려 두 개나 됐다.

저 수량을 단시간에 채우려고 검은 장미 전체가 뭐 빠지게 굴렀을 것이다.

부디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끼이이익―

닫혀 있던 문이 천천히 열렸다.

늘 편히 들렸던 방인데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큼지막한 통창을 통해 선명한 달빛이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를 비췄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

주변 커튼들이 을씨년스럽게 하늘거렸다.

이 공간이 이렇게 무서웠어?

무슨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준비해요!"

넬라가 긴장한 표정으로 엘프석 두 개를 펜리 근처로 던진 순간이었다.

허공 위로 엘프석이 반짝이며 떠오르자, 펜리의 그림자가 반응을 보였다.

꿀렁―

끈적한 액체처럼 그림자가 솟구치더니 엘프석을 집어삼키곤 사라졌다.

마치 간식을 낚아채는 돌고래의 점프샷을 보는 것 같았다.

엘프석을 흡수하는 것인지, 검은 먹물처럼 그림자에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르르륵―

그림자가 밀물처럼 범위를 넓히기 시작했다.

펜리를 뒤덮더니, 이내 침대, 잠시 후엔 방 내부의 절반을 그림자로 뒤덮었다.

일행은 조금씩 뒤로 물러나며 상황을 지켜봤다.

커지는 그림자의 존재감이 강력하다.

설마 그림자 왕이 직접 움직인 건가?

세상에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은 곳은 없다.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고, 반대로 어디에도 없을 수 있다.

그림자 왕도 마찬가지.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에게 가호를 내리기도 하고 거두기도 한다.

변덕이 심한 절대자로 유명했다.

펜리는 그중 가호를 받은 한 명인 것이고.

"무슨 상황인지 아시는 분?"

내 물음에 넬라도 도르네프도 입을 다물었다. 펜리 당사자도 아니고, 그들이 그림자 주술에 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다.

그저 반응만 살필 뿐이었다.

내 질문은 저 둘에게 한 게 아니었다.

[그림자 왕은 아니다. 저 엘프와 계약한 그림자 정령의 진화 과정이다.]

바로 레토.

그는 한눈에 그림자가 방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을 알아챘다.

정령의 진화 과정?

암고양이의 미니 버전인 그 우비 쓴 귀요미를 말하는 건가?

[그림자 왕의 가호를 받는다는 건 그림자 정령들에겐 기연과 같다. 급성장을 이루게 되지. 다만, 저 정령의 경우에는 불안해 보인다.]

"불안해 보여? 뭐가 말입니까?"

툭 내뱉은 내 물음에 두 사람이 날 바라봤지만, 짐짓 모른 척했다. 레토와 속마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만, 세상일이 그렇게 쉽지 않더라고.

아니, 내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내 진짜 정체부터, 현대의 지식까지 읽어냈을 테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

내 밑바닥까지 털리는 건 사양이라고.

[가호 효과로 인한 정령의 서투른 진화다. 주인의 그릇이 정령의 진화 과정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눈앞의 현상은 그 부족한 그릇을 대신 채울 무언가를 찾는 일종의 탐색이다.]

엘프석으로는 부족한 그릇을 채우기 부족했던 모양이었다.

하긴 6성의 그릇이 고작 엘프석으로 채워질까?

원래대로라면 6성에 이뤄져야 할 정령 진화가 '그림자 왕의 가호'로 5성에 이뤄지고 있으니 그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탐색?

이 근처에 뭐가 있다고 탐색을 하는 거지?

"넬라, 처음에도 이랬습니까?"

"아뇨. 처음 보는 현상이에요!"

"엘프석으로는 안 됩니다. 그릇을 채울 다른 것이 필요...."

둘을 설득하고 방법을 찾으려고 했는데 순간 내 머릿속에 보랏빛 마석이 떠올랐다.

날 3성으로 올려준 생명의 결정체.

그런 마석이 내 가방 안에는 무더기로 있었다.

설마 저 탐색의 움직임이….

스밧!

"…이런, 제길!"

눈앞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림자가 그물처럼 퍼지며 날 집어삼키려고 했다.

딱 봐도 가방을 노리는 움직임.

허리를 다급히 틀었지만 늦었다.

퍼진 그림자 위로 그림자 손들이 튀어나와 가방을 낚아챘다.

넬라에게도 다가가는 듯 보이자, 그녀는 다급히 품을 가렸다.

귀중한 물건을 품고 있는 모습.

그 앞을 푸른 망치가 막아섰다.

스스스스―

푸른 안개가 일행 앞으로 퍼지자, 그림자 손들이 더는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 물러났다.

도르네프의 냉기 특성인 서리 안개다.

갑자기 온도가 확 내려갔다.

새하얀 입김이 후― 하고 나온다.

"물러나!"

도르네프의 외침에 우리는 뒤로 물러났다. 내 시선은 가방에 머물러 있었다.

"아씨."

허공에서 탈탈 털리고 있는 가방이 보였다.

정령 새끼가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강탈에 익숙했다.

가방 문이 결국 열리고 소중한 물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중 보랏빛 마석들이 바닥을 구르더니 그림자 속으로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 순간,

...!

뒤덮인 그림자 전체가 움찔움찔하며 거친 기운을 토해내더니 발광하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손들이 무질서하게 튀어나와 잡히는 모든 것을 파괴했다.

창문이 부서지고, 바닥에 금이 가고, 천장이 뚫리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범위가 눈에 띄게 커진다.

이러다 성이 무너질 판이었다.

마석들을 모조리 삼키더니 정령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콰자자장―!

"까아아악!"

바깥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너진 창가를 내려다보니 성안에 머물던 이들이 우르르 탈출하고 있었다.

거리를 둔 채 우리를 올려다봤는데, 얼굴이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환한 달빛 아래 첨탑 위로 피어오르는 거대한 그림자.

그들의 눈에는 괴물같이 보였을 것이다.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를 제외하곤 주변이 모조리 그림자로 채워졌다.

저게 그 귀여운 정령의 실체야?

귀엽다는 말 취소다.

[혼돈이 담긴 마석을 대량으로 삼켰다. 폭주한다. 막아라.]

"방, 방법은요!?"

[두 가지다. 주인의 의식을 깨우는 것. 정령을 무력화시키는 것.]

그오오오오오―!

펜리를 중심으로 방 전체가 검은 물감을 칠한 듯 끈적이더니, 오싹한 소리와 함께 전에 봤던 거대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거대한 손을 보자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그림자 왕의 신체 일부를 불러오는 그림자 소환술.

저게 튀어나오면 성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두 사람을 돌아보며 외쳤다.

레토는 두 가지 방안을 제시했고, 난 그중 가능성이 큰 한 가지를 선택했다.

"성이 무너지기 전에 정령을 무력화시켜야 합니다!"

"저것을? 어떻게...!"

"달빛이 없는 장소로 펜리를 데려가야 합니다! 더 커지기 전에 그림자를 공격해요!"

무력화.

간단했다.

그림자를 지우면 된다.

흡혈의 고리를 소환하곤 앞으로 내달렸다.

정령의 뿌리는 펜리다.

펜리를 빛이 없는 어두운 장소로 옮겨야 했다.

정령이 난동을 부리면서 창가부터 천장, 외벽이 전부 뚫렸다.

사방이 달빛으로 뿌려지는 이곳에서 정령을 무력화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펜리를 업고 다른 장소로 튀어야 한다.

안쪽으로 발을 디디니, 마치 검은 공간 안에 들어온 느낌이다.

검은 손들이 사방에서 뻗어 나왔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짓쳐오는 검은 손들을 응시했다.

몽둥이들의 궤적과 겹쳐 보인다.

검은 손들은 변칙적이고 그 수도 많지만, 3성 여섯이 에워싼 다구리보단 덜 위협적이었다.

궤적을 읽으며 스텝을 밟고 허리를 틀고 고개를 젖혔다.

잡힐 것 같으면 주먹으로 그림자들을 흘리며 쳐냈다.

훈련은 실전에서도 바로 통했다.

검은 손들이 내 사이로 휙휙 지나갔다.

순식간에 펜리 근처로 접근했다.

당연히 그림자들의 공격은 더욱 매서워졌다.

"진짜 더럽게 공격하네."

쇄도해오는 그림자 떼에 이를 악물었다. 수가 너무 많다. 피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성질을 넘었다.

다급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콰과과광―!

다섯 발의 화살이 동시에 터지자, 쇄도해오던 그림자들이 주춤 물러났다.

틈을 찾아 바닥을 구르고 침대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

뭐지?

의문도 잠시 고개를 쳐든 순간 욕설을 내뱉었다.

"씨...!"

시야를 꽉 채운 거대한 그림자 주먹이 짓쳐오고 있었다.

105화 변화 그리고 완성(4)

거대한 벽이 쇄도하는 듯한 지독한 위압감.

머리가 새하얘졌다.

피하기엔 주먹이 너무 컸다.

흡혈의 고리 최대 출력이라면 방향을 틀 수 있을 것 같은데, 15분은커녕 1초도 기다려 줄 것 같지 않았다.

순간 폐광산에서 저 주먹을 맞고 날파리처럼 날아가던 좀비 떼가 떠올랐다.

한 방이 죽진 않겠지?

두 손으로 머리를 보호하고,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콰아아앙―!!!!!

"...!"

머리카락이 매섭게 흔들렸다.

내 머리 위로 터진 거대한 폭음.

충격은 없었다.

눈을 살며시 뜨니 푸른 빛의 망치가 그림자를 막고 있었다.

혹한의 망치.

도르네프가 움직였다.

고개를 돌리니, 도르네프와 넬라가 함께 서 있었다.

둘에게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는데, 그 주변으로 그림자들이 다가오지 못하고 있었다.

넬라가 소중히 품에 안고 있는 마른 나뭇가지의 효과 같았다.

대치도 잠시,

그그그그극―!

거대한 주먹에 푸른 망치가 서서히 밀린다. 지독한 냉기가 그림자를 밀어내지만 폭주한 그림자를 막기에는 힘겨워 보였다. 도르네프가 이를 악문 채 날 바라봤다.

"뭐, 뭐하나!? 암고양이를 챙겨!"

"아!"

바로 침대를 향해 몸을 날렸다.

펜리의 손목을 움켜잡고 거칠게 잡아당겨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 녀석이 이렇게 가벼웠나?

상태를 살폈는데 혈색이 안 좋다. 얼굴을 일그러트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었는데, 마치 마력 중독 초기에 빠졌을 때를 보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왜 이래?

[그림자의 주인이 누군지 잊었나? 정령이 엘프의 마력을 뽑아 쓰고 있다. 벨트를 채워.]

마력의 루비 벨트를 낚아챈 후 펜리의 허리를 휘감았다.

그녀를 안고 벨트를 꽉 잡아당긴 순간 루비에서 붉은빛이 퍼지면서 얕은 숨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해 보였다.

'전투 네비게이션이 따로 없네.'

레토를 떠올리며 그림자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주변 상황을 삽시간에 파악한 후 필요한 지시를 내려주는 불사자 레토.

그 조언은 하나 같이 찰떡처럼 맞아떨어져서 어느새 신뢰까지 하게 됐다.

훗날 누군가와 찰나의 승부를 가를 때 그의 조언이 승리의 단초가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얼굴을 간질이는 황금빛 머릿결.

시원한 밤바람이 나와 펜리의 머리를 휩쓸었다.

여긴 꼭대기 층이다.

부서진 잔해 너머에 추락 포인트가 있었지만, 난 주저 없이 그 위로 몸을 날렸다.

줄 없는 번지 점프를 고민 없이 하는 나도 참 미친놈이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작 추락사 따위로 뒈질 내가 아니었다.

"아, 안돼!"

"까아악!"

달빛 아래로 추락하는 남녀를 보며 밑에 있던 이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쓸데없는 비명 따윈 무시하고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빛 한 점 없는 장소.

추락한 뒤 그곳을 찾아서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아아아아아악!"

"도, 도르네프님!"

위쪽에서 도르네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응?"

시선을 돌리기 전에 내 머리 위로 검은 물체가 휙―하고 지나갔다.

고개를 드니, 두 눈을 부릅뜬 도르네프가 날 보며 입을 뻐금거리고 있었다.

어째서 허공 위에 난쟁이 녀석이....

생각도 잠시, 도르네프는 밤하늘 저 멀리 어딘가로 빠르게 사라져 버렸다.

"...."

뭐지 이 황당한 상황은?

난쟁이가 하늘을 나는 마법을 익힐 리 없으니, 범인은 그림자였다.

위를 살피자 상황 파악이 바로 됐다.

거대한 손이 도르네프를 잡고 야구공처럼 집어던졌다.

날 맞추려다가 실패한 모양.

넬라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나뭇가지를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는데, 다행히 그림자는 그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왜냐면 저 그림자의 뿌리를 내가 안고 도망치고 있거든.

순간,

"...!"

위에 머물던 그림자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신기루처럼 없어진 정령의 존재에 당황하고 있는데 넬라가 위쪽에서 다급히 외쳤다.

"미, 밑이에요! 밑!"

…밑?

순간 풍경이 사라지고 시야가 어둠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고통이 찾아왔다.

"…컥!"

그림자 정령이 성의 그림자를 타고 내려와 내가 추락하기 전에 밑에서 나와 펜리를 움켜잡았다.

이래서 그림자 주술과는 싸우기 싫었다.

까다롭거든.

주인을 훔쳐 간 대가일까.

날 잡아챈 그림자 손의 기세가 무척이나 매섭다.

날 완벽히 포위한 손이 압박을 시작했다.

끄드득―!

"…크윽!"

이 노빠구 정령 새끼가!

주인을 인질로 잡고 있는데도 난 압살할 생각인듯싶었다.

이를 빠드득 물곤 팔을 뻗어 그림자를 밀어냈다. 한 손으로 펜리를 안고 보호하는 터라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압박이 더욱 거세졌다.

하체가 먼저 비틀렸고 압출기에 눌리듯 공간에 비좁아졌다.

서서히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도 잠시,

우득! 우드득!

"끄아아아악!"

결국, 하체가 부서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내 몸이 쿠션 역할을 하면서 펜리에게는 충격이 가지 않았지만, 내가 마른 육포처럼 압착 돼버리면 그녀도 위험했다.

폭주한 정령은 지금 주인도 눈에 안 뵈는 듯 보였으니까.

[그녀를 죽여라.]

"…뭐?"

[지금 네 능력으로는 빠져나올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그녀를 죽이면 동력을 잃은 정령도 소멸한다. 죽여라.]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넌 불사자가 아니고, 난 너를 잃고 싶지 않다.]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 전투 네비게이션이 그녀를 죽이라고 종용했다.

펜리를 죽이라고?

[시야가 다 가려진 상태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지랄하지마!"

대가로 이뤄진 거래라지만 그녀에게 받은 것이 많다. 목숨도, 능력도, 그리고 이 심장도.

나 살자고 그녀를 죽인다면 내가 학살자와 뭐가 다르지?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트리며 그녀를 안고 아이처럼 웅크렸다.

온몸을 짓누르는 압박감.

이젠 숨까지 턱 막힌다.

그때,

우웅―!

위기를 느낀 것인지 염원의 반지가 붉은빛을 반짝이며 빛을 발했다.

고통이 잠시나마 사라지며 숨이 트인다.

그리고,

들썩―

펜리의 고개가 힘겹게 움직였다.

후―

짧게 토해지는 숨.

뭐라 작게 중얼거린다.

내가 그녀의 입으로 귀를 가져가자, 힘없는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고작 그게 다냐?"

"뭐?"

"날 개고생 시키면서 얻는 힘이 고작 이거냐고."

지금 상황을 알고 있다?

기절해 있는 상태에서도 의식이 있었던 건가.

대체 언제부터?

하지만 의문도 펜리년의 도발에 잊혔다.

[악착같이 심장을 얻으려고 하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별거 없네. 고작 그것 따위에 목숨을 건 거냐? 날 개고생 시키면서?]

지난날 녀석이 날 조롱하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때도 이 빌어먹을 그림자에 잡아먹혀서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었지.

하지만 그때와 달리 지금 나에겐 뚫린 입이 있었다.

염원의 반지를 얻고, 심장에 적응했으며, 육체를 훈련하고 강해지면서 기회가 온다면 녀석에게 꼭 말해주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아니, 이제 너 따윈 씹어먹을 수 있어."

두 번 쪽팔림 당했으면 됐다.

세 번은 없다.

온몸이 부서지는 감각.

지독한 고통.

근육이 짓눌리며 비명을 질러댄다.

난 두 눈을 감고 주먹을 으스러지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이딴 고통은 오히려 시원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레토."

[미친놈이군.]

내가 뭘 하려는 지 그는 바로 알아챘다. 그래서 날 미친놈이라 말한 것이겠지.

[하지만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생존한다면 고통은 성장에 도움이 되니까.]

레토의 기꺼워하는 목소리가 마침표를 찍은 순간,

번쩍!

내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두 주먹에서 황금빛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인첸트 부여.

속성은, 관통이다.

"끄아아아아아아!"

지독한 고통에 모든 근육이 몸부림친다. 인첸트 부여를 버티기 위해 전 근육들이 수축하며 힘을 모았다.

주르륵―

실핏줄이 터지며 축축한 액체가 두 눈에서 흘러나왔다.

코피도 흘러나왔다.

"쿨럭!"

피를 토하면서 두 주먹을 양쪽으로 사납게 내질렀다.

퍼석―!

"...!"

한 손이 부여 실패로 먼지처럼 부서져 나가고, 다른 손이 압박하던 그림자를 꿰뚫었다.

그림자를 뚫고 나온 손이 그림자를 움켜잡곤 찢었다.

틈이 생긴 공간, 그 틈 바깥으로 펜리의 뒷덜미를 입으로 물어 틈 사이로 내던졌다.

허공에 뜬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한쪽 손이 날아간 끔찍한 고통 때문인지 내 미소는 이를 드러낸 사나운 야수 같았다.

"너 나한테 목숨 빚 하나 진 거다."

"...."

그녀가 사라진 사이, 틈은 삽시간에 그림자로 아물었고 다시 어둠이 찾아왔다.

고통에 분노한 정령이 재차 날 압살하기 위해 짓쳐 들어왔다.

난 멀쩡한 주먹을 허리춤에 고정하곤 주먹 지르기 자세를 잡았다.

인첸트 부여에 내 근육들이 난리를 친다.

새로운 힘에 대한 저항이다.

그리고 그 저항이 만들어낸 한 가지 깨달음이 있다.

"그 변화가 이겁니까?"

[변화를 깨우쳤군. 나쁘지 않아.]

"…뭡니까? 이게."

물음을 던지며 전 근육을 돌처럼 수축시켰다.

그리고 이완.

수축 다시 이완.

마치 심장이 뛰는 것처럼 근육들이 숨을 쉰다.

온몸이 불타는 것처럼 뜨겁다.

마치 폭주 기관차가 된 느낌이었다.

주먹에 담긴 인첸트가 눈 부신 빛을 발하고, 난 그저 주먹을 찌르겠다는 생각만 했다.

[레토니칼스의 전투, 잠력 폭발 기본식, '격발(擊發)'이다.]

격발을 펼친 순간,

으직―

세상이 찢어졌다.

* * *

의식을 차리니 어두컴컴했다.

암흑 공간.

주변에 느껴지는 인기척이나 감각은 잡히지 않았다.

설마 아직도 그림자 안에 갇혀 있는 건가.

두 눈을 끔벅인 순간 익숙한 녀석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 속에 녀석만 보였다.

암고양이의 미니 버전, 그림자 정령인 우비 녀석이었다.

진화를 통해 성장했는지 꼬마보단 어엿한 소녀처럼 보였다.

여전히 귀여웠는데, 실체를 봐서인지 이젠 귀엽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웠다.

두근―

심장이 뛴다.

그녀의 것이 아니다.

내가 가슴을 매만지자, 그림자 정령은 나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아한 자세로 인사를 건넨 정령은 곧 어둠 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동시에 세상이 열렸다.

끔뻑―

무거운 눈꺼풀 사이로 선명한 달빛이 눈에 담겼다.

윙윙거리던 귓가가 잡히더니 어지러운 소란이 들려왔다.

아직 현장인 것 같았다.

난 지금 누워있는 건가?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다.

[격발은 잠력을 터트리는 기술이다. 생명을 태우는 기술이지.]

"…생명? 그러면 죽는 거 아닙니까?"

[예외가 있다고 말했을 텐데.]

시야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염원의 반지가 몸을 회복시키는 것이 느껴졌다. 써버린 잠력을 염원의 반지가 채워주는 것 같았다.

"...크."

반대쪽 손목이 날아간 것을 잊었다.

그때 누군가 내 옆으로 다가와 손목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붕대를 묶고 있는 건가? 조심스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온몸에 힘이 없어서 고개조차 돌리지 못했다.

잠시 후 시야가 어두워지고, 누군가 달을 가리고 날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금발.

펜리다.

그녀는 말없이 날 내려다봤다. 한쪽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는데, 다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까?"

내 물음에,

"…."

그녀는 입을 우물우물하더니 이내 꾹 다물었다. 눈썹을 찡그린 그녀가 등을 돌리곤 휙 가버렸다.

뭐야? 저 녀석?

[고맙다.]

"네…?"

[저 다크엘프가 조금 전 네게 했던 말이다.]

'고맙다.'라.

저 녀석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목숨 빚을 탕감해줄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동감이다.]

그 말로 빚을 퉁치려고?

어림도 없다.

다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106화 혈맹이란 이름으로

가진 잠력을 일순간 터트려 한계를 뒤집는 폭발성 육체 강화술, 격발(擊發).

그 후유증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누운 채로 어디론가 실려 와 사흘 동안 병자처럼 누워서 지냈는데, 염원의 반지라도 바닥난 잠력을 회복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일 자체가 경이로운 능력이니 불만을 가지면 욕심이겠지?

누워서 시간을 보냈지만, 멍하니 시간을 낭비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특히, 주둥이.

사흘 내내 내 주둥이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주둥이로 두 가지 임무를 피땀 흘려 진행했는데, 그중 하나는 쉴 새 없이 음식을 씹고 삼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바로 폭풍 질문이었다.

상대는 이심동체(?)인 레토였다.

"레토, 잠력의 크기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레토, 신명의 저주를 피할 방법이 있을까요?"

"레토, 마석은 한때 당신의 숙주였던 미믹의 신체에서 나온 것인데, 혹시 저도 나중에 마석을 뱉어내는 겁니까? 예를 들어 똥을 쌀 때라던가."

"레토. 레토?"

떠오르는 의문이 생기면 레토에게 즉각 묻고 답을 구했다.

레토는 꼰대답게 모든 질문에 진지하게 답을 해줬다. 싫거나 귀찮은 내색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잘 프로그램된 AI와 대화하는 기분이었는데, 거짓 없이 알고 있는 사실을 자세히 설명해줬다.

레토의 답은 때론 무척 지루하기도 했고, 무척 흥미로웠으며, 대단히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흥미롭다.

그리고 대화의 행위 속에서 난 레토의 또 다른 가능성을 발견했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백과사전이나 간이 공략집을 얻는 기분이랄까.

[모른다.]

[처음 들어보는 단어군.]

물론, 절대자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건 아니었다.

다음 날.

드디어 침대를 털고 일어나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다.

사지(四肢) 멀쩡히 돌아다니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것인지 오늘에서야 알았다.

특히 식사하거나 볼일을 볼 때 시종들의 도움을 받아야 했는데 기분이 아주 고약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지만… 그건 힘들겠지?

홀가분했던 그 기쁨도 잠시,

손목을 고정하던 붕대를 풀자 기쁨 대신 놀라움이 자리 잡았다.

"...와. 진짜 쩔긴 쩌네."

새로 생긴 손가락을 조심스레 오므렸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살짝 뻑뻑한 느낌 빼곤 큰 이상은 없어 보였다.

인첸트 부여 실패 여파로 날아간 손목이 자리 잡았다.

이례적인 회복 속도.

['격발' 상태에선 모든 육체 능력이 한계의 벽을 넘게 된다. 회복력 또한 마찬가지지.]

손목이 회복되는 과정을 실시간으로 바라봤다. 붐(Boom)을 터트렸을 때 이미 경험했지만, 직접 보고 감각으로 느끼는 건 나름 신선한 충격이었다.

점점 인간과 멀어지는 것 같았는데,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순정 인간으로 버티기엔 이 세상은 터무니없이 살벌했으니까.

훼손된 육체, 그 복구 과정에 대해 질문을 던지니,

[네 육체 구성에 필요한 생체 정보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다.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떤 부위든 회복시킬 수 있다. 다만, 숨이 붙어 있어야겠지.]

머리나 심장이 터지거나, 목이 잘리거나,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었을 때.

이것이 내 죽음의 조건이었다.

다른 것은 한 번에 이해됐는데, 마지막 조건이 아리송했다.

"회복 불가능한 상처…?"

[속성 중엔 회복을 방해하는 것들도 존재한다. 그 힘이 네 회복력보다 월등히 강력하다면 넌 죽는다.]

"어떤 것들입니까?"

[사용자의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니 특정하기 어렵다. 굳이 답을 원한다면 '독'이 대표적이다.]

소설에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됐다.

한 달 정도 늘어지게 쉬면서 레토에게 배움을 청하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산더미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찌뿌둥한 몸을 풀고 나갈 준비를 마치니,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창가 너머 어두워지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곤 방을 나왔다.

영주성 일부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숙소로 옮겼는데, 위치는 내성 외곽 쪽에 붙어 있는 개인 별장이었다.

펜리는 의식을 차린 뒤 푸른 장미로 가버려서 별장에선 혼자 지냈다.

펜리의 소식은 이따금 샤르바딘이 찾아와 알려줬는데, 진화한 그림자 정령에 적응하고 그동안 밀린 업무를 몰아서 처리하느라 정신이 없다고 들었다.

"알렉스님, 일어나셨습니까?"

"아, 네. 안녕하세요."

"말씀 낮추십시오. 전 별관 지배인일 뿐입니다."

"전 이게 편해서요. 편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건물을 나오자 바닥을 쓸던 거구의 지배인이 날 반겼다.

나이 지긋한 할아범인데, 그냥 할아범은 아니고 늑대 수인이었다.

늑대가 늙으면 딱 저런 모습이겠구나 하는 비주얼.

베네타에는 드워프들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지만, 엘프나 수인들도 자리 잡은 영토였다.

특히, 수인 중에는 늑대의 피를 가진 이들의 비중이 가장 높았다.

그러고 보니, 푸른 장미의 집사도 늑대 수인이었지?

눈앞의 할아범도 샤르바딘이 고용한 별장 지배인이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앞으로 식사를 훈련장으로 가져다주세요."

"오늘 저녁부터 준비해 드릴까요?"

"부탁드립니다."

별장 뒤편에는 작은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지배인이 한 번 쓸고 갔는지 훈련장이 무척이나 깔끔했다.

주변을 둘러보며 새로운 감회를 느꼈다.

"…나 출세 한 건가?"

훈련장이 붙어 있는 개인 별장에 지배인과 시종도 셋이나 머무는 공간이었다.

비용은 당연히 공짜.

현실에선 꿈도 꾸지 못 할 일이었다.

평범한 삶도 지키기 힘들었던 인생.

대출 끼고 아파트 한 채를 사면 일평생 일했을 경우 노후에 남은 건 대출이 끝난 집 한 채가 아닐까 싶다.

내가 살던 곳에선 그것도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했으니까.

[출세? 뭐가 출세라는 거지?]

"그런 게 있습니다."

레토에게 설명해봤자 입만 아프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순백의 활이 반가움을 표하며 내 피를 쭉쭉 빨아먹는다.

형태나 분위기는 여신인데, 하는 짓은 악녀나 다름없었다.

피식 웃으며 활대를 잡은 손에서 붉은 반지를 응시했다.

염원의 반지.

격발(擊發)도 그렇고 흡혈의 고리도 그렇고 '생존'의 염원이 담긴 이 반지가 아니었다면 내 능력은 전부 반쪽짜리였을 것이다.

힘의 완성에 마침표를 찍어준 물건.

지금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기도 했다.

잠시 후, 핏빛으로 물든 활을 바라봤다.

1단계 훈련이 완료되면 레토는 최대 출력 시간이 단축될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한참 부족하네."

그 말처럼 최대 출력에 이르는 시간이 눈에 띄게 짧아지긴 했다.

5분 정도?

15분에서 5분으로 줄어든 것이니 확연한 변화는 맞는데, 5분도 실전에선 사용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더 줄일 순 없습니까?"

[언젠간 가능하겠지. 네 피의 가치가 올라간다면.]

"피의 가치? 피에도 등급 같은 게 있습니까?"

[단순히 피의 양으로 활의 능력이 발현된다고 보나? 질적 가치가 더 중요하다. 이번 깨달음으로 네 그릇이 커졌기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럼 격발 시에는 어떻습니까?"

잠재력을 태우면 육체를 구성하는 그릇의 한계가 사라진다. 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훨씬 더 단축되겠지. 하지만 지금 네 육체 그릇으로 격발을 사용한다면 활을 잡을 정신이나 있을지 모르겠군.]

"...."

레토가 쥐꼬리만 한 잠력을 비꼬아 말했다.

펜리가 만약 내 격발의 유지 시간을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조루보다 못한 새끼라고.

결국, 더욱 성장해서 잠력을 담을 그릇을 키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고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이고, 또 높이고, 계속 높였다.

깔끔했던 훈련장 바닥이 내 발자국으로 잔뜩 더럽혀지고서야 난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후욱― 후욱―

이마에 땀방울이 가득했다.

전력을 다해 정신없이 몸을 풀었더니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레토에 지시하에 시작됐던 1단계 육체 훈련법.

이 정신 나간 훈련은 욕이 절로 나오고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효과는 하나는 기가 막혔다.

[싸움꾼의 눈이다. 그 토대는 맞는 것부터 시작하지.]

공격 궤적을 읽어내는 눈이 생겼고,

[목을 물어뜯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상대의 이빨 바로 밑까지 치고 가야 하니까.]

어떤 공격이든 담담히 받아내는 강심장이 됐다.

육체도 질기고 단단해졌다.

흡혈의 고리와 인첸트 숙련도도 실전에서 충분히 펼칠 정도로 성장했다.

이젠 어디 가서 한 사람 몫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한가지.

'육체에 인첸트를 부여하는 건 미친 짓이다.'

인첸트에 훨씬 익숙해질 때까지 육체에 인첸트를 부여하는 개또라이 짓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 또 결심했다.

천운이 따라서 손목 하나로 끝났지, 재수가 없었더라면 몸 전체가 박살 났을 것이다.

참고로 난 그리 운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번 일로 모든 운을 다 써버렸을지도.

다사다난했던 베네타에서의 훈련.

최후 미션인 '격발(擊發)'까지 각성하면서 성공리에 마무리가 된 것 같았다.

"레토, 이제 좀 쉬엄쉬엄해도 되겠죠?"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갓난아기가 걷는 것에 만족한다면 인간이라 부를 수 없다. 짐승과 다를 바 없지.]

"…무슨 소립니까?"

[인간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다.]

…꼰대 새끼, 융통성은 밥 말아 먹었나.

길게 한숨을 내쉬곤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팔목이 없었을 때가 편했으려나?

오늘도 밤샘 훈련이 될 것 같았다.

* * *

"피곤해 보이십니다."

"그렇죠? 바로 나가봐야겠습니다."

"성으로 곧장 가실 겁니까?"

"네. 성주님의 호출이 있었거든요."

"다녀오십시오."

터덜터덜 힘없이 별장을 나서자 늑대 할아범이 빗자루를 흔들며 날 배웅했다.

새벽부터 바닥 쓸기라니, 늑대 수인은 다 저렇게 부지런한 건가?

"정말로 훈련장에서 아침을 맞이할 줄은 몰랐네."

유도리라곤 개미 똥구멍만큼도 없는 레토 새끼.

피곤해서 바닥에 누워 휴식 좀 취하려고 하면 [일어나라.] 이딴 소리를 내뱉으며 쉬지 못하게 했다.

무시하려고 해도, 심장을 옥죄거나 찌르는 자극을 주니 버티기가 힘들었다.

인간 해부학에 정점을 찍던 현대에서도 이딴 고문은 없었다고!

벌써부터 '일어나라'라는 말에 노이로제가 걸릴 것 같았다.

저 멀리 영주성이 보이자, 잘 닦인 돌길을 타고 여유롭게 걷기 시작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고즈넉한 성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어젯밤 도르네프가 시종을 보내 영주성에 들려달라는 말을 남겼다.

펜리도 의식을 차렸으니, 슬슬 혈맹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됐다.

지금쯤 폐광산에 관련된 일도 준비가 끝났을 것이다.

드워프, 엘프, 인간.

세 종족을 중심으로 한 혈맹이 맺어지면 토바른 내에 큰바람이 불 것이다.

이종족이 인간과 혈맹을 맺은 사건은 거짓 백 년 만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펼쳐질까?'

나름대로 예측해 보려고 머리를 굴려봤는데, 일단 도르네프를 만나 얘기를 들어봐야 할 것 같았다.

성 중심부에 진입하자 큰 길이 드러나며 사람들이 눈에 띄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응?"

잡생각을 하며 길을 걷고 있는데 묘한 감각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니 성 사람들이 날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인간이니 이곳에선 눈에 띄는 것은 맞지만, 바라보는 서신이 노골적으로 뜨거웠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뭐야? 갑자기…."

일단 내가 나타나면 하던 일을 멈추곤 날 바라보며 자기들끼리 수군수군했다.

대놓고 돌려 까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표정을 보니 악의나 적대보단 호감이 잔뜩 보여서 내가 더 당황스러웠으니까.

107화 혈맹이란 이름으로(2)

"아,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

기사단의 훈련장을 지나치는데 근처에서 기초 훈련을 받던 드워프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와 예를 표했다.

형색을 보아하니 수습 기사들로 보였다.

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드워프들이 그것도 기사 출신들이 내게 먼저 다가와 예를 표하다니 갈수록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쯤.

기사 하나가 붉게 흥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심판자분들을 탄생시킨 분이라 들었습니다!"

"…심판자?"

"악인 척결! 그분들은 베네타의 희망입니다!"

설마 날 패는 것을 낙으로 여겼을 것이 확실한 몽둥이 녀석들을 말하는 건가.

"부디 제게도 심판자가 될 기회를 주십시오!"

뭐 이 새끼야?

한 녀석이 용기 있게 외치자, 여기저기서 드워프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다.

설마... 이거였냐?

몽둥이를 든 드워프 녀석들이 바깥에서 어떤 짓을 하고 돌아다닌 지 모르겠지만 훈련 과정이 고된 건 나 자신이지 녀석들이 아니다.

뭔가 단단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상황이 아주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자, 잠깐!"

"알렉스님!"

"으아아악!"

인기 연예인으로 살아가는 기분이 이런 건가?

뜨거운 눈빛, 호감 어린 태도, 날 향해 흔드는 손짓까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난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내겐 아주 ㅈ같은 일이었다.

일단 내 눈앞에 여자는커녕 전부 땀내 나는 수염쟁이 드워프 새끼들이었다.

"기회를 주십시오!"

"기회를...!"

"저리 꺼져!"

욕설로 응대하니 환호를 내지르며 더 격하게 달려온다.

이런 미친 새끼들이!

[배움을 청하다니 좋은 태도다.]

"닥쳐!"

이른 아침 영주성 입구에서 때아닌 난리가 벌어졌다.

적도 아니니 쥐어팰 수도 없고, 드워프들에게 완벽히 둘러싸여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진이 다 빠지네.

"모두 멈춰요!"

다행히 샤르바딘이 제때 등장하면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인파를 뚫고 입구로 후다닥 들어왔다.

"…고맙습니다."

"안 그래도 마차를 보내려고 했는데 일찍 나오셨네요?"

"잠이 없어서요."

"이젠 회복이 끝나신 건가요?"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뭘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은 한 건데요. 도네프는 5층 집무실에 있어요. 마침 마스터도 와 계시니까 안내해드릴게요."

"펜리님이요?"

"네."

고개를 끄덕인 샤르바딘이 드레스 자락을 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사뿐사뿐 잘도 오른다.

그 뒷모습을 보며 따라간 것도 잠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녀에게 물었다.

"아까 그 상황 어떻게 된 겁니까?"

"드워프들이요?"

"드워프뿐만 아니라 성 주민들이 절 보는 눈초리가 평소와 달랐습니다."

"음, 상황이 조금 복잡해요. 여러 가지 소문이 겹치고 상상이 더해져서 만들어진 환상이랄까?"

"환상?"

샤르바딘은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들러봤다.

우리밖에 없으니까. 그냥 얘기해!

내 속마음을 눈치챈 것인지 샤르바딘은 어색하고 웃고는 내게 작게 속삭였다.

"지금 베네타에 아서님의 소문이 불같이 퍼지고 있어요."

"…그 웃기지도 않는 심판자 때문에 말입니까?"

"그것도 있고, 최근에 벌어진 영주성 괴물을 처리한 일로 유명세를 타고 있죠."

"괴물? 그림자 정령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요. 곧 알게 되실 텐데, 괴물의 짓으로 결론을 지었어요."

샤르바딘이 눈에 힘을 주며 괴물을 강조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이야 어떻든 도르네프가 그리 결정했다면 그렇게 알고 있으면 된다.

나와는 큰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고.

"근데, 아서님이 괴물을 쓰러트리기 전에 도네프가 크게 당했잖아요."

"…운이 없었죠."

당했다기보단 잡혀서 날아갔다. 그것도 아주 멀리.

그 장면이 성 주민들에겐 당한 것으로 비친 모양이었다.

성주도 당했던 괴물을 쓰러트린 인간.

"그 때문에 과거 라웁 숲에서 활약했던 소문이 베네타에서 재조명되고 있어요. 구원의 성자란 칭호 말이에요. 사실 헛소문이란 말이 지배적이었거든요. 그리고 또 있어요."

"…또 말입니까?"

"폐광산의 저주."

"아…."

"아서님이 폐광산의 저주를 풀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미 베네타 내에서 큰 화자가 됐어요. 대신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죠. 지금은 비밀로 숨기고 있지만, 현재 베네타 내에 야금야금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문이 퍼지고 있어요. 나토네 경이 며칠 전 드워프들을 데리고 광산 내부에 설치된 트랩들을 제거하러 방문했거든요."

"…만약 그 소문이 진짜라고 판명이 난다면? 전 어떻게 될까요?"

"뭘 어떻게 돼요. 베네타를 넘어 토바른 지역으로 알렉스란 이름이 혈맹의 이름 아래 퍼져나가겠죠."

샤르바딘은 무척 재미있다는 표정을 하곤 날 바라봤다. 당사자인 나와 달리, 그녀는 앞날을 지켜보는 것이 무척 흥미로운 듯 보였다.

"이종족과 인간, 이들이 혈맹을 맺고 이어가던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아나요?"

"...."

"백 년이에요."

물론 알고 있는 내용이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혈맹이 주는 파급력이 더 클 것 같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조용히 크긴 그른 것 같았다.

끼이이익―

5층 집무실에 도착한 샤르바딘이 문을 열자 인기척이 들려왔다.

"이 암코양이가!"

"시끄러! 난쟁이 새끼야!"

익숙한 목소리들이다.

익숙한 광경이기도 했고.

테이블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도르네프와 펜리가 보였다.

내 인기척에 동시에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는데 둘 다 사나운 얼굴들이다. 내가 오기 전에 한바탕 한 것이 분명했다.

저것들은 왜 마주보기만 하면 으르렁거리는지.

"마침 잘 왔어."

"좋다. 저 녀석에게 의견을 물어보지."

뭘 물어봐.

물어볼 건 내가 훨씬 더 많은데.

하지만 표정들이 워낙 살벌해서 테이블 사이에 조용히 앉아 저들이 다툰 이유를 들어봤다.

무엇 때문에 싸울지 예상은 됐다.

역시나,

"광산에 대한 지분 협상이 안 돼. 저 탐욕스런 난쟁이 때문에."

"타, 탐욕이라니! 이 욕심쟁이 엘프년이!"

엘프년이라 욕을 했다가 그는 샤르바딘의 헛기침 소리에 움찔하곤 어색하게 허허거렸다.

"그대는 예외요! 나의 피앙새."

아주 지랄을 해라.

혹한의 군주가 어쩌다 이리됐는지. 공처가가 따로 없었다.

베네타, 검은 장미 그리고 나.

도르네프가 제안한 광산 지분 비율을 7 : 1.5 : 1.5였다.

염원의 반지를 얻기 위해 내가 펜리에게 광산 지분을 줬으니, 베네타와 검은 장미가 7:3으로 지분을 나눈 것인데, 펜리는 6:4를 강하게 원하고 있었다.

10프로를 올려달라는 주장이었다.

펜리가 탁자를 탁! 치며 외쳤다.

"내가 아니었으면 폐광산의 저주 따윈 풀지도 못했어! 난쟁이 놈들은 한 게 아무것도 없잖아! 내가 다 했다고! 내가!"

마치 자기 혼자 다 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진짜 뻔뻔한 년이었다. 역시 아플 때가 그나마 엘프 같았어.

"그러니 파격적으로 지분을 챙겨준 거다. 수십 년이 넘도록 폐쇄된 광산을 채굴까지 손보려면 천문학적인 금액과 노동력이 요구돼. 그 이후 지속적인 채굴을 하려면 유지 비용이 필요한데, 60%로는 원로들을 설득할 수 없어. 70%가 마지노선이다."

"혹한의 망치가 들이밀면 돼. 협박 몰라?"

"여기가 무슨 시정잡배들의 놀이턴 줄 아나!"

또다시 티격태격하며 둘끼리 말싸움을 시작했다.

이러다 날밤 새우겠는데?

아, 난 상관없으려나?

중재 역할로 제격인 샤르바딘을 바라봤는데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두 사람이 알아서 하란 신호를 보내왔다.

이미 중재를 포기한 듯 보였다.

근데 나한테 묻는다고 하지 않았니? 저들 눈에는 이미 내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저 펜리년은 왜 이리 기를 쓰고 지분을 늘리려는 거지? 내 몫까지 가져갔으면 차고 넘칠 텐데.

그 이유를 샤르바딘이 말해줬다.

"광산 채굴이 시작된 이후를 생각하시는 거예요. 광산을 노리는 자들이 생길 테니 보호비 명목이죠. 큰 출혈이 예상되거든요."

"출혈? 베네타의 광산에 누가 손을 댄단 말입니까?"

"베네타의 광산은 조금 특별하거든요. 드워프들이 이유 없이 저 광산 근처에 뿌리를 뒀을까요? 분명 노리는 자들이 나타날 거예요."

소설에선 폐광산에 대해 자세히 다루지 않아서 정확한 정보를 알지 못했다.

어쨌든 이 상황부터 해결해야 했다.

귀가 아파지기 시작했거든.

"논쟁이 되는 광산 지분 10프로를 혈맹 비자금으로 쓰는 건 어떻습니까?"

불쑥 꺼낸 내 제안 카드에 두 사람의 말싸움이 뚝 멈췄다.

날 바라보는 눈빛에는 더 해보라는 신호가 담겨 있었다.

"혈맹을 맺으면 어차피 혈맹 유지 비용이 필요할 거 아닙니까? 광산 지분으로 따로 빼놨다가 혈맹에 필요한 작업에 쓰면 될듯싶은데...."

"괜찮군."

"그 정도라면… 좋아."

내 의견에 잠시 고민하던 둘은 의외로 쉽게 내 의견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혈맹에 쓰는 비용은 베네타와 검은 장미, 두 곳 모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테니, 둘에게 모두 이득이 되는 일이었다.

"결국, 넌 한 푼도 안 내겠다는 거잖아? 너도 혈맹의 주체 아니야?"

예리한 년.

내 숨은 의도가 단박에 들켰다. 하여튼 돈 냄새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달랑 혼자인 저한테 무슨 돈입니까? 그리고 저 개털인가 잘 아시면서."

"그래서 말인데, 이에 관해 이야기할 것이 있네."

"네? 무엇을 말입니까?"

설마 돈을 토해내라고 하는 건 아니겠지?

긴장한 눈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봤는데, 다행히 돈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신,

"자네를 중심으로 길드를 만들 생각 없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제안을 해왔다.

길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길드요? 제가요?"

내 물음에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꼭 필요한 일이네. 자네가 혈맹으로 들어오면 베네타는 몰라도 다른 지역에선 이상하게 볼 테니까."

"혼자이기 때문입니까?"

도르네프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나와 암고양이의 혈맹은 정확히 드워프와 엘프의 종족 연합과 다름없어. 베네타 외에 토바른 지역의 동족에게도 모두 해당하는 이야기지."

도르네프가 펜리를 바라보자, 그녀가 말을 받았다.

"알다시피, 검은 장미는 아직 세상에 드러난 조직이 아니야. 나 또한 검은 장미 마스터라기보단 엘프들의 대표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해."

"인간 대표가 되라는 말입니까?"

"맞아. 영토를 가진 성주는 아니더라도 인간을 대표하는 조직의 수장 정도는 되어야 해. 그래야 동족들도 인정할 거야."

세력을 만들라니.

무척 어려운 과제가 내게 주어졌다.

내가 길드를 만들고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다행히 자격은 충분해."

"제가요?"

"소문 못 들었어? 네 녀석의 이름은 베네타에서 무척 유명한 편이야. 그리고 나와 난쟁이가 네 이름값을 더 높여줄 거야. 혈맹을 위해선 필요한 일이니까."

"인지도를 높인다는 말입니까?"

"큰 세력의 수장이라고 믿게 하려면 그래야지. 조금만 손보면 다들 믿을 분위기거든."

"거짓말을 하라는 겁니까?"

"거짓말은 무슨, 선 길드 후 모집이라고 생각해. 세력을 이룰 네 사람은 길드를 만든 후 천천히 채우라는 얘기야."

"...."

자리에 앉은 채 난 고민에 들어갔다.

제법 길게 고심하며 자리를 지켰는데, 도르네프와 펜리는 조용히 나를 기다려줬다.

잠시 후, 고개를 끄덕인 내가 입을 열었다.

"세력을 공표하되 비밀 조직으로 가시죠."

방금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108화 혈맹이란 이름으로(3)

"비밀 조직? 암고양이가 만든 검은 장미처럼 말인가?"

"그보다 더 은밀하게 갈 겁니다. 그리고 제가 조직의 얼굴마담이 되어볼 생각입니다."

"얼굴마담? 무슨 뜻이지?"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수장임을 밝히지 않으려고요."

도르네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수장이면 수장이지 뭐가 그리 복잡하냐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펜리는 단박에 내 의도를 알아챘다.

"사람들이 네가 수장인지 아닌지 알아서 판단하라는 거네."

"맞습니다."

"네가 얻는 것은?"

"시간이요."

시간이란 말에 펜리는 피식 웃었다.

"네 뒤에 더 큰 세력이 있음을 착각하게 하려는 거야?"

확실히 눈치가 귀신 같다.

도르네프와 달리 음지에서 활동했던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혈맹이 맺어지는 그림 상 충분히 가능합니다. 일반인들에겐 제가 수장으로 비치겠지만, 저흴 견제하려는 이들에겐 이름 모를 조직의 얼굴마담으로 의심하게 만드는 거죠."

"네 뒤를 집요하게 파고들 텐데?"

"못 찾을 겁니다. 애초에 제 뒤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음."

"발각되더라도 제법 시간이 흐른 뒤일 겁니다. 그전까지 상대는 섣불리 저흴 공격하지 못합니다. 제 뒤에 누가 있는지 모를 테니까."

"괜찮은 생각이에요."

내 의견을 잠자코 듣던 샤르바딘이 고개를 끄덕이며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적이 가장 무서운 법이죠. 방법도 그리 어렵지 않아요. 세상에 혈맹을 천명하고 아서님 뒤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은밀히 흘리기만 하면 되거든요."

"누구에게 흘린다는 말이오? 샤딘?"

"며칠 전에 저와 나토네 경이 잡아 온 이들이 많잖아요. 세작들이요."

"아! 역시 그대는 천재가 분명하오! 내 피앙새답소. 허허허허!"

"...."

때와 장소 구분 없이 마누라 사랑이다.

그래도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샤르바딘의 의견이 정말 괜찮았기 때문이다.

넬라가 엘프석을 가지고 숙소를 방문했던 그 날밤, 샤르바딘은 나토네와 함께 세작 소탕 작전에 나섰다.

혈맹 전에 베네타에 깔린 눈과 귀를 제거하려고 한 일인데, 그때 잡아들인 세작들이 백(百)여 명에 달했다.

현재 성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의뢰주 파악에 나서고 있는데, 그 의뢰주가 누군지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카멜 블레이저.

대부분 블라이어와 연결된 세작일 확률이 높았다.

그런 세작들에게 정보를 흘리겠다는 건 학살자에게 거짓 정보를 풀겠다는 의미와 같았다.

진실과 거짓으로 교묘히 살을 붙여서 퍼트린다면 학살자 진영에 혼란을 줄 수도 있는 카드였다.

"광산에 쏠리는 시선이 분산될 테니, 광산이 자리 잡는 데도 도움이 될 거예요."

"대신 저 녀석에게 시선이 집중될 텐데 괜찮겠어?"

셋의 시선이 내게 쏠리자 난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당장은 시선이 쏠리겠지만, 잘만 신분을 포장시키면 더 안전할 수 있습니다."

"안전하다고?"

"제 존재가 확고해질수록 진짜 이름을 숨길 수 있잖아요."

셋은 내 이름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명 사냥꾼, 아서 클레이튼.

내 신명과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면 다른 신명 주인들의 관심을 불러올 수 있다.

지금 가진 혈맹의 무력으로 그들까지 상대하는 건 무리니, 힘을 기를 시간이 필요했다.

적어도 토바른 전체를 손에 넣어야 안전했다.

"실패한다면 더 빨리 네 진짜 신분이 들킬 수도 있어."

"가만히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벌써 들켰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먼저 선수 쳐야 합니다. 제가 아서가 아님을."

"들켜? 누구에게?"

"운명의 아케인."

"아, 맞아. 그 녀석이 있었어!"

펜리는 주먹을 탁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내 신명을 읽고 블랙마켓에 정보를 넘긴 인물. 다만, 어디까지 내 신명을 알고 있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내가 얼굴마담을 자처하며 공개적인 자리에 먼저 나서려는 이유는 하나다.

학살자에게 살아남기 위해 내가 더미로 만든 '그'란 존재.

내 뒤에 '그'가 있을 것이란 확신을 학살자에게 심어줘야 했다.

'그'가 아서 클레이튼이 되어야 한다.

'내 정보는 이미 너무 많이 풀렸어.'

얼굴도 팔렸고, 능력도 일부 팔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에게 노출까지 됐으니, 뛰어난 통찰력을 가진 학살자라면 내가 알렉스란 가명을 써도 곧 '그'의 전달자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그'의 전달자가 '그'라는 결론까지 도달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그러니, 학살자가 확신할 수 없도록 작업을 해놔야 했다.

그 첫걸음이 더는 숨는 것이 아닌 당당하게 앞으로 나서는 것이고, 두 번째로 확신을 주는 카드를 학살자에게 던져주는 것이다.

내 뒤에 진짜 '그'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게 하는 확실한 카드 말이다.

'결국, 새로운 맴버가 필요하다는 말인데.'

얼굴마담인 나 다음으로 내세울 행동 대장급 맴버가 필요했다.

'그'의 사람이란 소문을 퍼트려도 학살자가 납득할 수 있어야 하고, 토바른 내에 인지도도 확실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해야 해.'

이 까다로운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할 인물.

한 사람의 이름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블라이어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소설에서 정해준 학살자의 대항마이자, 영웅으로 분류된 인물.

영웅 록터라면 내 기준에 완벽히 부합한다.

최고의 시나리오는 혈맹 전에 록터를 영입하고 앞에 내세우는 건데, 위치조차 파악이 안 되는 지금 그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혹시 록터의 위치가 파악됐습니까?"

"아니, 귀신이 붙었는지 움직임이 신출귀몰해. 블라이어 영지에서 흔적이 끊겼다."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겁니까?"

"기사 녀석이 암살자같이 움직이고 있어. 검은 장미들도 쉽지 않은 모양이야."

암살자같이 움직인다.

기사 록터는 정통 기사다.

암살자처럼 움직이고 싶어도 움직일 수 없다.

'칼이 붙었다면?'

칼 바스타인이라면 검은 장미의 눈도 피할 수 있다.

그는 무려 수년 동안 크룩스 정예들의 눈을 피해 살아남은 노련한 암살자였으니까.

칼이 내 조언을 듣고 블라이어로 갔다면 록터와 함께 할 확률도 배제해선 안 된다.

"검은 장미들을 에토르 영지로 물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 그 녀석이 필요하다고 한 건 너잖아. 금광의 존재를 증명해줄 존재."

"지금까지 흔적을 잡지 못했으면 앞으로도 힘들 겁니다. 그리고 블라이어 내에서 추적이 길어질수록 검은 장미들이 위험합니다."

"위험해?"

"록터를 쫓고 있는 세력은 다른 누구도 아닌 블라이어입니다."

록터 펠리스는 5성급 기사.

그를 제거하기 위해 무시무시한 녀석들을 보낼 확률이 높았다.

카멜의 최측근이 나설 거다.

펜리라면 모를까. 검은 장미로는 어림도 없다.

내 말에 펜리도 심각성을 느꼈는지 고개를 조용히 끄덕였다.

"근데 왜 하필 에토르 영지지?"

"그에게 신호를 남겼거든요. 혹시 올지도 모릅니다."

"신호?"

에토르 영지를 추천한 건 피의 만찬에서 내가 록터에게 에토르에 관한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록터가 과연 에토르로 올 수 있을까?

학살자의 표적이 됐으니 운신조차 힘들지 몰랐다.

'학살자보다 우리가 먼저 록터의 위치를 파악해야 하는데.'

나로 인해 록터의 운명이 변했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만 믿고 움직이기엔 너무 위험했다.

아무래도 혈맹 의식이 끝난 후 내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소식이 내일 중으로 베네타에 알려질 거네."

"내일입니까?"

"자네의 혈맹 자격을 증명하려면 필요한 과정이니까. 혈맹에 관한 것은 이미 원로들의 승인이 떨어졌어. 모든 준비가 끝났네. 조만간 혈맹 의식도 열리게 될 거야."

말을 잇는 도르네프의 표정에 후련함이 깃들었다.

그동안 폐광산과 혈맹에 관해 뛰어다니느라 무척 고생한 모양.

내일 베네타가 한바탕 시끄러워질 것 같았다.

알렉스란 이름이 좌판, 대로, 상점, 술집 곳곳에 퍼져나가겠지.

폐광산의 저주를 푼 존재라고.

"제가 따로 준비할 것이 있습니까?"

"길드 이름이나 생각해둬. 혈맹 의식이 거행되는 자리에서 밝혀야 할 수도 있으니."

"…이름이라."

뒤에 도르네프가 불라불라 앞에서 뭐라 떠들었는데 전혀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 이름을 짓자니 여러 생각이 스쳐 갔기 때문이다.

레토가 말했었다.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된다고.

그래서 레토는 이름을 버렸다. 존재를 지우고 싶었으니까.

난 '이름'이 갖는 힘을 알고 있다.

아서 클레이튼이란 이름을 짓는 순간, 세상이 날 바라봤기 때문이다.

앞으로 사용할 길드의 이름.

뭐가 좋을까?

* * *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

베네타의 주민들은 아침 인사 대신 이 소식을 가지고 대화를 나눴다.

이른 아침부터 베네타 소속 용병들이 영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소식을 알렸기 때문에 소식은 삽시간에 영지 전체로 퍼져나갔다.

인간 알렉스.

그에 대한 무성한 소문이 주민들의 입을 타고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그 인간이 구원의 성자라며?"

"성주님을 내던진 검은 괴물을 찢어 죽였다는 말도 있어."

"꾸며낸 말 아니야? 성주님이 얼마나 강하신데."

"영주성에서 직접 본 이들이 얼마나 많다고. 진짜라니까?"

"하긴, 그 정도니 누구도 풀지 못했던 폐광산의 저주를 풀었겠지."

"심판자들을 탄생시킨 존재란 말도 있어."

"…뭐? 시, 심판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주민 일부가 심판자라는 말에 긴장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죄를 지은 이들에게 심판자는 재앙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몽둥이에 걸리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라서 범죄자들은 언제나 심판자들을 두려워했다.

요즘은 잠잠했는데, 며칠 전 잡혀간 세작들을 심문하는 데 투입됐다는 소문이 있었다.

"뭐 하는 인간일까?"

여러 가지 정보와 소문이 합쳐지면서 주민들의 머릿속에 '알렉스'란 이름이 강렬히 각인되었다.

당연히 그에 대한 정보가 바깥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근래에 가장 노난 곳은 다름 아닌 푸른 장미가 운영하는 정보 길드였다.

인간 상인들이 정보의 주고객이었다.

베네타에 인맥을 만들어보려는 상인들은 알렉스란 존재에 큰 관심을 보였다. 배타적인 이종과 거래를 틀 수 있는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존재.

"기본 정보는 천 골드입니다."

"…비싼데."

이름 알렉스.

마르샤 가(家)의 몰락 귀족.

단검과 석궁을 잘 다루며 특별한 빛을 다루는 특성 개화자.

쓸만한 정보이긴 하다.

하지만 호감을 사려는 상인들에겐 부족한 정보였다.

"다른 것은 없나? 여자를 좋아한다거나, 돈을 좋아한다거나 취미 같은 거 말이네."

"아, 이번에 들어온 특급 정보가 있긴 한데…."

"특급 정보...?"

엘프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 다섯 개를 들어 올렸다.

5천 골드.

"…장난치는 건가?"

"마스터의 지시라 네고 불가능합니다. 싫으시면 안 사시면 됩니다."

"사, 사겠네."

누군지 모를 마스터에게 심한 욕설을 날리며 상인들은 정보를 구매했다.

[팬케이크를 광적으로 좋아함.]

"…이게 뭔가?"

"아, 그건 서비스고 진짜는 뒷면에 적혀 있습니다."

"뒷면?"

뒷면을 돌려본 순간 상인들은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누구도 이 정보의 값에 불만을 표하지 못할 정보가 적혀 있었다.

[두 종족의 대표가 혈맹으로 알렉스를 묶으려는 이유에는 그 뒤에 강력한 세력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

"더 특급 정보가 있는데…."

"…특급 정보가 대체 몇 개나 있는 건가?!"

엘프가 손가락 열 개를 펴자, 상인들은 이곳 마스터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돌아갔다.

더 끌려가다간 파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종족의 도시인 베네타.

그 도시 안에 이종이 아닌 단 한 명의 인간에 의해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109화 혈맹이란 이름으로(4)

2타 소식이 베네타를 강타했다.

[이틀 후, 나 도르네프 가더의 이름으로 혈맹 의식을 공개적으로 개최한다.]

혈맹(血盟)!

안 그래도 불타고 있던 관심에 기름이 뿌려졌다.

소문으로 돌고 있던 내용이 성주의 이름 아래 현실로 이뤄지자, 알렉스란 이름이 더욱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혈맹 의식이 도시 대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대광장이라니! 드디어 그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있겠어. 잘생겼을까?"

"인간이 잘생겨봤자지. 수염도 없잖아?"

"푸른 장미 출신 엘프들 사이에서 알렉스에 관한 관심이 뜨겁다는 말이 있어. 엘프들이 반할 정도라면 다르지 않을까?"

"거기 엘프들 몰라? 돈이지. 다 돈 보고 하는 거라고."

"신분도 귀족이라던데…."

"몰락 귀족이야. 별것 아니라고."

"너 여자 친구 없지?"

"...."

남녀의 관점대로, 종족의 관점대로 끊임없이 알렉스란 이름이 화자 되며 식을 줄 몰랐다.

이종의 도시에 인간의 이름이 이토록 많이 언급된 적은 없었다.

베네타를 잠시 방문한 외지인조차 알렉스란 이름을 기억했고, 그들의 입을 통해 그 파급은 베네타 바깥으로도 알음알음 퍼지고 있었다.

* * *

소문의 진원지인 도르네프 영주성.

태풍이 뜨겁게 불어닥치는 바깥 분위기와 달리, 아서가 머무는 별장은 태풍의 눈처럼 맑게 갠 무풍지대였다.

도르네프의 허락 없이는 접근할 수 없는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바깥 상황에 신경을 끊은 채 난 남은 시간 동안 훈련에 매진했다.

팡―!

"...!"

인첸트를 부여하던 화살 하나가 터지며 시위에서 사라졌다.

실패다.

미간을 좁힌 채 남은 네 발에 기운을 집중했다.

잠시 후, 네 발의 화살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인첸트 성공.

위력을 살펴보고 싶은데, 이곳에선 마력탄 위력의 화살을 퍼붓기가 마땅치 않았다.

흡혈의 고리를 해제하니, 화살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화살을 리셋시킨 나는 다시 흡혈의 고리를 소환한 후 활대를 움켜잡고 기다렸다.

잠시 후,

투쾅―!!!!!

대기가 거칠게 터지며 푸른 하늘로 한 줄기의 핏빛이 쏟아져 올라갔다.

최대 출력까지 5분.

전투 중에 최대 출력에 도달하는 시간 감각을 익히기 위한 훈련이었다.

다시 흡혈의 고리에 집중했을 때 어느새 시위에는 다섯 발의 화살이 걸려 있었다. 이번에는 달리기 시작했다.

1단계 육체 훈련을 마무리한 뒤로 난 인첸트 컨트롤에 대부분 시간을 쏟아붓고 있었다.

거칠게 움직이며 인첸트 부여를 시도했다.

눈앞에서 하나둘 빠르게 소멸하는 화살들.

제자리 때와 움직일 때의 집중력은 천지 차이다.

이번에는 두 발만 살아남았다.

다시 해제 후 최대 출력을 반복하며 훈련했다.

그때마다 염원의 반지가 빛을 발하며 내게 피를 공급해줬다.

무한의 화살을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후―"

[집중하면 네 발, 움직이는 동안에는 두 발이 안정권이다.]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는 흡혈의 고리 한계치를 레토가 족집게 선생처럼 콕 집어줬다.

"생각보다 늘지 않네요."

[훈련 부족이다.]

"하루에 20시간 훈련하는 사람에게 할 말입니까?"

[24시간도 부족하다.]

시바, 무슨 소리 없는 아우성도 아니고 뭘 말이 통해야 불만을 토로하지.

수건으로 땀을 닦곤 흙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체력에 자신 있는 육체지만, 인첸트 훈련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구하는 터라 정신적 피로가 빨리 찾아왔다.

오랜 시간 훈련하면 시야가 핑핑 돌았다.

대(大)자로 누워 멍하니 둥둥 떠다니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모습에 여유가 느껴진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평온함.

하지만 이 평온함도 내일이면 끝이다.

혈맹 의식.

태풍으로 들어갈 시간이 곧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유독 오늘은 한숨이 계속 흘러나왔다.

[웬 한숨이지?]

"마땅한 이름을 짓지 못해서요."

[길드 이름을 말하는 건가?]

"네."

[내가 지어준 이름들이 있는데 무슨 고민이지?]

"하하하...."

레토가 내 고민을 느끼고 몇 가지 이름을 후보로 알려주긴 했다.

[까미레토, 다리가 132개 달린 고대 벌레 이름이다. 생존력이 질긴 품종이었지. 네 목표가 생존이라면 아주 적합한 후보 이름이다.]

"...."

[타마라, 거북 품종으로 터틀 드래곤이다. 수명이 내가 알기론 생명체 중 드래곤 다음으로 길다. 대머리를 상징하지.]

"…대머리는 좀."

그 외 드래곤, 신(神), 악마를 알려줬는데 이건 모조리 패스다.

드래곤은 마법사들이 신성시하는 존재, 드래곤의 이름을 썼다간 마법사들이 거품을 물고 달려들 거다.

신이나 악마도 마찬가지.

이곳 세상의 종교는 우리나라 사이비 종교가 귀여워 보일 정도로 믿음이 빡센 곳이다.

심지어 힘도 더럽게 셌다.

그들 앞에 신과 악마의 이름을 거론하라고?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세상.

더 빡세게 살고 싶지 않았다.

'레토니칼스가 딱이긴 한데.'

불사자의 이름.

그리고 나를 표현하기에 이보다 완벽한 단어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레토'로 바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지? 그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스스로 존재를 부정하고픈 마음.

그런데 내가 그 이름을 쓴다? 레토에게 장난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시 머리를 끙끙 싸매며 이름을 고민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지?

오후가 되자, 입구에서 호리호리하고 길쭉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큰 접시를 양손에 들고 조심조심 발을 움직이며 나타났는데, 그녀가 푸른 잔디 위에 음식을 가지런히 세팅하기 시작하자 바람을 타고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먹는 건 못 참지.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길게 늘어진 금발, 가녀린 뒷모습이 정리를 끝낸 후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돌아봤다.

"와서 먹어요."

신녀 넬라였다.

"제 식사를 직접 챙길 필요 없다니까요? 늑인 할아범도 먹고살아야죠."

"심심해서요. 전 뭔가를 해야 마음이 편하거든요."

"휴가 나왔다고 생각하세요."

"놀아주지도 않을 거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난 머리를 긁적이곤 음식 앞에 앉았다.

푸른 장미 운영에 정보 취합까지, 늘 바쁘게 살아온 그녀에게 이곳은 심심한 공간이긴 했다.

이틀 전부터 그녀는 나와 함께 별관에 머물렀다.

내 부탁이 있었기 때문인데, 앞으로 발생할 신명을 느끼고 그 신호를 긴급으로 알려줄 인물이 필요했다.

오직 넬라만 할 수 있는 일.

다만, 그녀는 검은 장미의 핵심 인물이자, 엘프족의 하나뿐인 신녀였다.

그런 그녀를 기한 없이 내 곁에 둔다?

보호자도 없이?

당연히 펜리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두 눈 딱 감고 펜리에게 귀띔을 하니, 당연하게도 주먹부터 날아왔다.

[이유나 듣고 때려요!]

[시끄러!]

내가 넬라를 곁에 두려는 이유는 영웅 록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숙소로 돌아와 영웅 록터의 문제를 곰곰이 생각해봤다.

록터는 학살자의 심장에 비수를 찌르는 카운터 카드다.

그의 신병을 확보하는 건, 베네타의 미래와도 관련 있는 중요한 일이고, 그건 학살자 세력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학살자보다 록터를 먼저 찾을 수 있을까.

그 고민을 하던 중 문득 한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바로 신명.

신명 각성을 이용해 위치를 파악하는 방법.

'근시일 안에 록터가 신명의 주인으로 각성할 거야.'

신을 받드는 자 중에 뛰어난 이는 그 각성한 위치를 어렴풋이 파악할 수 있었다.

기가 막힌 방법이라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순간 가슴이 턱 막혔다.

'시발, 아케인!'

학살자 곁에는 운명의 아케인이 머물고 있었다.

그라면 록터가 각성할 시, 그 위치를 완벽히 파악할 수 있을 터.

이대로 가만히 있다간 록터를 잃을 수 있다.

다급한 마음에 아주 긴 시간, 아주 격렬하게 내가 정리한 생각을 펜리에게 전하니,

[누가 신명을 각성해? 꿈꿨냐?!]

[시발, 믿으라…억!]

당연하게도 두 번째 주먹이 연달아 날아왔다.

망할 년.

진짜 언제고 꼭 널 멍석에 앉혀서 살풀이를 거하게 할 테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목숨 코인이었다.

정령의 갑작스런 진화 과정에서 생긴 불협화음.

저번 영주성에서 펜리는 내게 목숨 빚 하나를 졌다.

그걸로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니, 넬라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절충안까지 나왔다.

그 결과가 바로 푸른 잔디 위에서 아리따운 엘프와의 식사였다.

펜리의 제안에 넬라는 고민 없이 내 손을 잡아줬다. 하여튼 펜리와 달리 이쁜 짓만 한다니까.

"이건 또 어디서 배웠습니까?"

"아, 샌드위치요? 요즘 유행하는 레시피거든요. 귀족들한테 인기가 좋아서 메인메뉴에도 추가한 메뉴에요. 괜찮죠?"

"진짜 맛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 맛있다.

샤르바딘에게 미안하지만, 그녀의 것이 그냥 샌드위치면 넬라의 것은 T.O.P였다.

넬라가 요리를 이렇게 잘했나?

아, 그러고 보니 펜케이크 장인이라고 했지.

"그쵸? 마스터가 이 레시피의 개발자를 납치해오라고 했는데, 샤르바딘이 말을 안 하네요."

"하하하…."

펜리, 이 돈에 미친 엘프년은 사사건건 내 목줄을 조여온다.

샤르바딘이 날 보호해주다니, 역시 은인의 위력은 강했다.

즐겁게 식사를 하고 가벼운 담소를 나눴다.

당연히 대화 주제는 '신명'이었다.

난 질문을 통해 이 세상의 신명에 대한 규칙을 넬라에게 배워가고 있었다.

내가 신녀인 그녀를 곁에 두는 두 번째 이유다.

고유 능력이 '신명 사냥꾼'인 만큼 신명에 대한 생생한 정보는 내가 꼭 알고 있어야 할 내용이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음… 안 보여요."

"이래도?"

날 잠시 직시하던 그녀가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녀의 손에는 마른 나뭇가지가 들려 있었는데, 저 나뭇가지가 신녀가 신명을 부르는 도구였다.

빛바랜 세계수의 나뭇가지.

신화 속의 세계수를 직접 보고 만져보니 무척 신기했는데, 그 나뭇가지를 바라보는 넬라의 눈이 너무 슬퍼서 굳이 나뭇가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보통은 주인이 허락하면 신명이 보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하지만 아서님의 경우엔 보이기는커녕 기운조차 읽을 수 없어요. 정말 신명의 주인이 맞아요?"

"…맞는데."

"진짜요?"

며칠 전 고민 끝에 그녀에게 내 신명에 대해 털어놨다.

펜리도 알고 있는 정보를 그녀도 언젠간 알게 될 거란 판단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꼭 확인할 것이 있었다.

신을 받드는 자들은 보는 순간 그 사람이 신명의 주인임을 알아볼 수 있을까?

답은 '조건부로 볼 수 없다.'였다.

신명의 주인들이 의식을 가지고 마음을 완전히 닫는다면 곁에 신명의 주인이 지나가도 알아보기 힘들다고 했다.

대신 반대로 신명의 주인이 마음을 열면 볼 수 없는 신명도 읽을 수 있다고 했다.

주인에게 허락을 구하는 행위가 신명을 바라보는 대표적 절차 중 하나라나?

그래서 실험을 해봤는데 내 마음을 활짝 열어도 그녀는 내 신명이 전혀 안 보인다는 말뿐이었다.

기운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넬라는 그런 날 보고 특별한 존재라고 했다.

110화 혈맹이란 이름으로(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