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폐광산의 저주(2)
터널의 어둠마저 집어삼키는 머릿수였다.
쪽수가 터무니없이 많다.
터널 앞뒤를 꽉꽉 채워서 서서히 좁혀오는데, 그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꾸물꾸물 끝도 없이 몰려왔다.
우리는 일단 발밑에서 튀어나온 것들부터 정리했다.
스가각―!
펜리의 크로우가 허공을 빛내자, 좀비들이 뭉텅이로 썰려 나갔다.
난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좀비들의 머리를 밟아 부순 뒤 뒤로 살짝 물러났다.
그제야 두 쌍의 크로우가 반경을 넓히며 삽시간에 좀비들을 쓸어버렸다.
대인전 최강의 무기라더니, 눈앞에서 보니 확실히 살벌하다.
크로우에 묻은 썩은 살점을 털어내며 그녀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이전보다 수가 더 많아졌다.
꾸역꾸역 땅속에서 계속 튀어나왔다.
"두더지 새끼들인가? 땅을 파고든 흔적은 없었는데?"
"지워졌을 겁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까."
"어쩔 거야?"
"움직여야죠. 시간을 끌수록 불리합니다."
"왜?"
그 물음에 난 펜리의 뒤통수를 가리켰다.
은은한 빛을 흩뿌리는 머리 장신구.
어느 순간부터 다크 로즈의 축복이 발현되고 있었다.
펜리는 뒤늦게 다크 로즈를 만지작거리며 반응을 살폈다.
축복은 방어용이 대부분이다.
무언가로부터 펜리를 지키기 위해 축복이 발동한 것이었다.
펜리를 공격하는 보이지 않는 기운.
"설마...."
"저주입니다."
답을 하며 난 서서히 성력을 끌어올렸다.
저주의 영향인가?
육체에 이상 증상이 나타났다.
팔이 가려워서 살펴보니 피부가 거미줄 형태로 물들며 검게 퍼지고 있었다. 물든 부분을 꾹꾹 눌러보니 감각이 없다. 마치 고통 없는 괴사가 진행되는 느낌이었다.
저주가 육체에 주는 부작용이 분명했다.
펜리에게 다크 로즈가 있다면 내겐 성력이 있었다.
성력을 끌어올리자 변색하던 피부가 천천히 혈색을 되찾았다.
오염됐던 피부도 빠르게 재생되었다. 저주를 밀어내자, 심장이 피부 재생에 들어간 모양새.
폐광산의 저주는 내게 통하지 않았다.
저주가 안 먹히니 임무 성공에 반은 먹고 들어간 셈이고, 내가 임무를 적극적으로 맡은 이유였다.
'저주의 발원지가 근처에 있다는 건데.'
갑자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저주가 발동됐다.
우리의 접근에 뭔가가 반응을 보인 것이다.
"펜리!"
"왜?"
내 부름에 앞에서 날뛰고 있던 펜리가 유령처럼 곁에 붙었다.
구체의 빛에 기울어진 내 그림자를 타고 나타났는데, 난 주변을 둘러보곤 혀를 내둘렀다. 앞쪽에 너부러진 수십 구의 시체들이 보였다.
그 짧은 사이에 양민 학살 수준으로 좀비들을 조져놨다.
'실력은 인정해줘야 한다니까.'
평소에 틱틱거리며 날 괴롭히는 게 취미인 변태 같은 엘프지만, 동료로 두면 안심하고 등을 맡길 수 있는 인물이었다. 물론, 그때그때 고삐를 쥐고 관리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었다.
"일단 달리죠."
"달려? 어디로?"
"어디긴 어디예요. 정면 돌파지."
"이 상황에서? 물러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펜리가 뒤를 가리켰다.
바닥에서 일어난 시체들이 퇴로를 꽉 틀어막고 있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도망칠 구멍은 만들어놓고 움직이자는 말이었다.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물러나면 다시 접근하기 힘들 수도 있어요."
"앞쪽에 뭐가 있을 줄 알고."
"뒤쪽도 마찬가지죠. 수십 년 동안 저주에 희생된 이종족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리고 다크 로즈가 저주를 계속 막아주리라 확신하지 마세요."
"축복이 멈출 수도 있다는 거야?"
"그건 모르죠."
주인의 의지대로 축복이 발동하지 않고, 주변 상황에 맞춰 발동하는 것.
내가 다크 로즈를 양보한 이유가 저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긍정적인 효과라지만, 발동과 해제 조건이 불확실했다.
차라리 확실한 방어 수단인 정신 방벽과 심장에 의지하는 것이 내겐 마음이 더 편했다.
다크 로즈를 만지작거린 펜리는 날 뚫어지게 바라봤다.
뭘 원하는 눈빛인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바라는 건 확실한 정보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
동료지만 부탁하는 처지라 최소한의 설득이 필요했다.
이곳은 위험 지대였으니까.
"발원지가 이 근처에 있어요. 저주가 발동했다는 게 그 증거죠."
"발원지를 찾으면?"
"원흉을 찾아 없애야죠. 저주의 근원이니까."
"원흉? 살아있는 존재라는 거야?"
"물건일 확률이 높아요. 광산 개발 중에 발견한 저주받은 물건을 광부들이 건드린 거죠."
여기까지 말한 나는 펜리를 지나쳐 단검을 휘둘렀다.
다가오던 좀비 머리가 툭 떨어졌다.
펜리가 주변을 정리했다고 해도 틈이 채워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좀비들이 우르르 몰려와 손톱을 들이민다.
잡히는 순간 벌떼처럼 달라붙어 물어뜯을 기세였다.
"움직여요!"
"칫!"
펜리가 전방으로 튀어 나가고, 난 그 뒤를 쫓으며 측면을 맡았다.
우웅―!
단검에 성력을 싣자, 검날이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도르네프에게 부탁해서 받은 드워프제(製) 단검인데, 인챈트를 무난히 버티는 것이 확실히 강도가 남달랐다.
광부 복장을 한 썩은 시체들이 양쪽에서 달려들자, 그들의 가슴에 큰 구멍을 뚫어줬다.
그런데,
"…안 먹히네?"
가슴이 뚫린 채 재차 덤벼드는 좀비들.
성력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모습이었다.
저주를 막아내기에 성력이 통할 줄 알았는데, 예상이 빗나갔다.
자세를 낮춰 바닥을 한 바퀴 구른 후 펜리 곁으로 바짝 붙었다.
"드디어 능력 빨이 다한 거냐?"
"기다려봐요."
잠시 후, 황금빛 물결이 빠르게 퍼져나갔다.
고대 문양을 발동시켰다. 수백의 좀비들이 삽시간에 빛에 휩싸였지만, 빛 사이로 기괴한 음성은 여전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빛이 옅어지니, 되려 더욱 사납게 달려든다.
빛이 안 먹힌다.
"…키메라 때와 반응이 영 다르네요."
"괜히 힘 빼지 마. 효과가 미미하니까."
좀비들의 움직임이 다소 느려진 것을 보니, 문양의 영향을 아예 안 받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소모하는 마나에 비해 효과가 저조해서 고대 문양을 개방할수록 손해였다.
키메라와 좀비.
비슷한 듯 보였는데, 지닌 성질이 다른 것 같았다. 반응을 보니 펜리는 뭔가 알고 있는 듯 보였는데 당장 묻기는 힘들었다.
"질척거리지 말고 뒈져!"
그녀는 눈앞의 좀비 떼를 뚫고 가는 데 온 정신이 팔려있었다.
정면 돌파.
한 번 의견이 결정되자, 그녀는 더는 주저하지 않고 돌파에만 모든 힘을 집중했다.
일단 판단이 서면 행동력 하나는 끝내주는 여자였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한 발을 디딜 때마다 살점이 튀고 악취가 더욱 짙어졌다. 지나온 길목에 잘린 시체 조각들이 즐비하다.
잠시 후, 포지션 스위치가 이뤄졌다.
내가 정면, 펜리가 보조다.
내가 나서도 충분하다는 판단이 섰기에 제안한 것이었다. 혹시 모르니, 펜리의 힘을 아끼는 방법을 선택했다.
심장의 영향으로 내 체력은 이미 인간 수준을 벗어났다. 이 정도 전투에 쉽게 지칠 몸뚱이가 아니었고, 펜리의 무기인 갈퀴나무 손톱 정도는 아니지만, 인챈트를 이용하면 단검으로 좀비들의 팔다리는 어렵지 않게 절단할 수 있었다.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손에 도끼만 쥐여줬으면 게임 속 바바리안이 될 것 같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놈."
"피도 있고 눈물도 있거든요."
날뛰었던 온몸이 쓰리다.
손톱과 이빨에 긁히고 찢기는 상처들.
쪽수가 많다 보니 상처도 삽시간에 늘었다. 하지만 열 걸음 정도 걷다 보면 대부분 아물어 있었다.
누가 좀비고 누가 사람인지 모르겠다.
그만큼 좀비 떼는 내가 무쌍을 찍기 딱 좋은 상대였다. 다만, 쪽수가 징글징글하게 많아서 돌파 속도가 더뎠다.
'전(前)대 가주들이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알겠네.'
저주에 노출되면 육체가 괴사하며 좀비화가 진행된다.
나와 펜리의 경우는 저주에 대항하는 힘이 있지만, 드워프들은 아니었을 것이다.
터널 깊숙이 들어온 상황에서 좀비들에게 포위. 쪽수에 밀려 빠져나가지도, 그렇다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발목이 잡히는 사이, 저주에 잡아먹히며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모두 저들처럼 좀비가 됐겠지.
"…좀비가 됐겠지?"
중얼거린 것도 잠시, 흠칫 놀란 나는 전장을 빠르게 둘러봤다.
죽은 이들의 복장은 걸레짝이나 다름없지만, 태를 보면 살아생전 어떤 일을 했는지 가늠이 됐다.
몰려든 이종족들은 대부분 광부나 일반 병사들이었다.
순간 펜리가 알려준 정보가 떠올랐다.
[전대 가주들이 광산의 저주를 풀려다가 목숨을 잃었어. 그때 함께 사라진 정예 기사단만 3대대, 350명이 넘어가지.]
"…갑자기 불안해지네."
전대 가주들.
그리고 정예 기사단.
일부라도 보여야 할 존재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는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뜬 순간, 난 뒤로 물러나며 손을 내밀었다.
일종의 터치다운.
스위칭 신호인데, 펜리는 눈살을 찌푸리곤 내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 망할 년이?
내가 눈을 부라리며 손을 한 번 더 내밀자,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앞자리로 스위칭했다.
하여튼 청개구리도 아니고 한 번에 간 적이 없다. 언제고 매운맛 좀 보여줘야 하는데.
"시간 좀 끌어줘요."
"이미 끌고 있어!"
아, 그런가?
난 어색하게 웃고는 순백의 팔찌를 움켜잡았다.
흡혈의 고리.
손바닥이 팔찌를 감싸자, 손바닥 사이로 순백의 활대가 빛처럼 늘어났다. 활대를 움켜쥐자, 흡혈의 고리가 기지개를 켜며 모습을 드러냈다.
부드러운 그립감도 잠시,
스스스스스―
'옴팡지게 처먹네.'
흡혈의 고리가 내 피를 게걸스럽게 빨아먹기 시작했다. 순간적으로 어지럼증이 올라왔는데, 심장이 크게 맥동하기 시작하자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 줄 땐 내가 확실하게 준다.
'위력만 만족스럽다면 말이지.'
흡혈이 길어질수록 화살의 위력이 강해진다고 했다.
얼마나 강해질까?
이번이 그 실험대가 될 것 같았다.
한쪽으로 활대를 잡은 채 다른 쪽으론 단검을 역수로 쥐곤 펜리 뒤를 보조했다.
언제부턴가 질척거리던 좀비 떼가 헐거워진 느낌이 든다. 좀비 수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는 뜻이고, 목표 지점이 멀지 않았다는 얘기였다.
"저기예요. 저기!"
터널의 너비가 빠르게 넓어지더니, 저 너머 바깥 출구가 보였다.
지긋지긋한 전투의 끝이 보인다.
저 출구 너머가 발원지일까?
스토리상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펜리가 저 출구 너머까지 도달한 뒤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난 장면까지다.
홀로 좀비 떼를 뚫고 온 그녀가 갑작스레 물러난 이유.
"멈춰요!"
"갑자기 왜?"
터널이 끝나는 순간,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확 트인 느낌에 펜리가 구체를 여러 개 소환해 사방으로 흩뿌렸다.
대낮처럼 밝아진 을씨년스러운 공간.
무너진 틈새로 보이는 공간 구석엔 석관으로 된 작은 제단 하나가 보였고, 제단을 막아선 새로운 좀비 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을 본 순간 난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하, 어떻게 불길한 가정은 틀린 적이 없냐?"
이 정도면 과학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발, '귀찮은 기운'을 뿜어내는 죽은 자들이라며?'
6성의 펜리는 저들을 상대하기 귀찮은 것들이라 표현하곤 공략을 포기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귀찮은 것들이 전대 가주들과 기사단이었다.
귀찮아? 저게?
난 펜리를 노려봤다.
이 엘프 년은 확실히 사기꾼이 맞았다.
91화 염원의 반지
하나 같이 녹슨 도끼를 움켜쥐고, 낡은 방패들로 몸통을 가렸다. 그 틈 사이로 헤진 듯 보였지만, 값비싸 보이는 갑주를 걸친 드워프 무리였다.
아니 정확히 썩은 존재들이다.
피부가 바짝 말라비틀어지고, 지독한 악취를 뿜어내는 좀비들 말이다.
차별점이 있다면 걸친 장비들이 남다르다는 점과 짐승처럼 달려드는 타 좀비들과 달리 무기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모습이었다.
마나 유저는 좀비로 변해도 전투 본능이 남아 있는 건가?
저주의 메커니즘을 모르니 섣부른 판단은 이르지만, 한 가지는 딱 봐도 알겠다.
'정면 승부는 불가능해 보이고.'
우리를 막아선 업그레이드 된 좀비 떼는 대략 300 정도.
순간 '스파르타―!'를 부르짖던 영화 300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만큼 숨이 턱 막히는 비주얼과 분위기였다.
펜리도 나와 비슷한 생각 중인지 얼굴을 서서히 일그러트렸다.
아, 불안해라.
"한 새끼한테 두 번이나 속을 줄이야."
"제가 뭐요? 도르네프님이 눈앞의 장면을 봤더라면 황금패 서너 개쯤은 더 줬을 것 같구만."
"더 줘? 지랄하네. 다 포기하고 영원히 광산을 폐쇄하자고 했을걸? 너 다 알고 있었지? 그래서 날 데려온 거지? 고작 황금패 하나를 미끼로."
"에이, 고작 황금패 하나라뇨."
"네 눈에는 저 썩은 방패들밖에 안 보이지?"
펜리는 방패를 든 좀비 떼 너머를 가리켰다. 왕관 비슷한 투구를 쓴 좀비 드워프들이 뒤쪽에 무게를 잡고 서 있었다.
모두 세 명으로 하나같이 무식한 해머와 할버드를 움켜쥐고 있는데,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무기의 때깔부터가 달랐다.
전(前)대 가주들의 장비니 당연한 건가?
"도르네프 세쌍둥이가 뒈져서 부활하면 딱 저런 모습이겠네."
"...."
살아있을 때보다 훨씬 약할 테지만, 베네타의 군주들은 모두가 베네타를 대표하는 괴물들이었다. 좀비라도 뭔가 다를 것 같았다. 게다가 그들 주변에 포진한 3대대 기사단까지. 도르네프가 따라왔어도 당장 도망가자고 외쳤을 것이다.
"이 사기꾼 새끼야. 이제 어떡할 거야?"
"…사기꾼?"
설마, 펜리년에게 사기꾼 소리를 듣게 될 날이 올지 몰랐다.
나도 저렇게 한마음으로 똘똘 뭉쳐서 기다릴 줄은 몰랐다고.
좀비가 된 군주들과 기사들이 따로따로 놀면 무섭지 않지만, 저렇게 뭉쳐 있는 건 부담스럽다.
우린 고작 두 명이거든.
하지만 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일단 부딪쳐 보죠. 그래야 튀든, 싸우든 할 거 아닙니까?"
"부딪쳐? 딱 봐도 빡세 보이는데 싸우자고?"
"그럼 그냥 물러날 겁니까? 여기까지 왔는데?"
"시끄러, 판단은 내가 해."
"아뇨. 제가 합니다."
"뭐?"
순간, 펜리의 눈썹이 짜증으로 솟구쳤지만, 난 덤덤한 눈빛으로 이를 받아쳤다.
"폐광산의 저주가 당신의 신명과 관련 있다면요?"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제가 당신을 이곳으로 이끌었으니까요. 절 '길잡이'라고 부른 게 당신 아닙니까?"
"...."
"신명이 절 이끈다면서요. 넬라가 한 말을 잊었습니까?"
길잡이와 신명, 넬라를 들먹이자, 그녀도 잠시 멈칫했다. 막 나가는 그녀도 신녀인 넬라의 경고는 귀담아듣는 모양이었다.
현재 그녀의 상황을 표현하자면 이 문장이 딱이다.
우리 펜리가 달라졌어요.
'세계수의 그림자'란 신명을 부여받고 미래가 바뀐 펜리는 소설 속의 펜리와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베네타는 여전히 건재했고, 토바른에 펜리가 지켜야 할 건 아주 많았다.
그런 그녀에게 '공략 포기'는 어울리지 않는다. 부딪쳐 보는 게 맞다.
"망할, 끝나고 보자."
뭘 봐?
운명은 바뀌었는데, 저 썩을 성격은 똑같았다.
그래도 설득이 먹혔는지, 펜리는 한 번 으르렁거리곤 등을 돌렸다.
두 쌍의 크로우를 소환하는 모습.
'나도 많이 변했네.'
처음과 달리, 이젠 펜리년의 선택에 변화를 줄 만큼 내 태도에 여유가 생겼다.
말빨도 장난 아니게 늘었다.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이 머리를 굴렸더니, 없던 머리도 진화한 모양이었다.
진짜 사기꾼으로 전향해도 성공할 것 같은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가?
'공격수를 밀어 넣었으면 판을 만들어줘야지.'
펜리가 휘젓고 다닐 수 있게끔 틈을 만들어줘야 했다.
흡혈의 고리를 앞으로 겨눴다.
이동하는 내내 흡혈을 시켰더니, 활대의 겉면이 새하얀 순백에서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핏빛으로 변한 뒤부턴 흡혈의 느낌이 없다.
지금이라면 활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끼이이이익―
난 붉은 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
당김과 동시에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는 화살.
아니,
"…이 정도면 투창 아니야?"
붉은빛을 띤 매끈한 화살 형태가 활대를 뚫고 쭉쭉 뻗어 나왔다. 투창이라 착각할 만큼 그 길이가 길쭉하고 촉이 매우 날카로웠다.
대체 피를 얼마나 빨아간 거야?
난 화살에 인첸트를 부여했다.
부여된 효과는 기본 속성인 관통.
퉁―
모든 작업이 끝내고 가볍게 시위를 놓았다.
스스스스스스―
쏘아진 화살은 조용했다.
미약한 바람 소리만 들려올 정도.
하지만 만들어낸 결과물은 달리던 펜리조차 잠시 움찔할 정도였다.
퍼석―!
화살을 막은 방패 하나가 시원하게 뚫렸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의 방패도, 그 뒤의 뒤의 방패도.
화살이 관통하는 곳엔 방패와 무기, 썩은 시체들이 산산조각 찢겨 날아갔다.
관통력이 미쳤다.
종국에는 왕관 투구를 쓴 가주들까지 노리고 들어갔다.
콰아앙―!
망치로 화살을 쳐올린 군주 하나가 휘청거렸다. 충격에 몸을 가누지 못하는 모습.
화살은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소멸했지만, 단 한 발의 화살이 좀비 진형을 무너트리고 빈틈을 만들어냈다.
활 위력이 예상을 웃돌았는지 저들이 약한 건지 모르겠지만, 영화 스파르타 300은 일단 취소다.
할만할 것 같았다.
파팟!
빈틈을 놓칠 펜리가 아니었다.
좀비 떼를 훑던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든 순간, 그녀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림자 주술.
굴곡진 신형이 좀비 그림자들 사이로 빠르게 스며든 것도 잠시,
카카카캉―!
무리 가장 뒤쪽에서 쇳소리가 터져 나왔다. 가주들의 등 뒤로 불꽃이 튀었다.
한 움큼씩 뜯겨나가는 왕관 드워프들의 갑주를 내려다보며 펜리는 허공에서 짧게 혀를 찼다.
"하여간 드워프 제(製) 갑주는 사기라니까."
동시에 그녀의 신형이 먹물처럼 밑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그 위로 거대한 해머와 할버드가 붕― 매섭게 휘둘러졌다.
조무래기보단 좀비가 된 세 가주의 실력을 확인하려는 의도 같았다.
조무래기(?)들의 시선이 펜리 쪽으로 향하자 난 시선을 돌리기 위해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겼다.
콰콰쾅―! 콰쾅―!
퍼부어진 화살이 저들의 방패와 몸에 부딪히며 폭발했다.
기본 마력탄 위력이라더니 확실히 시원시원하게 잘 터진다. 단단한 장비로 무장된 녀석들이라 큰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이지만, 시선을 끌기엔 충분했다.
좀비들이 도끼를 쳐들고 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움직임이 일반 좀비보다 월등히 빨라서 긴장해야 했다. 포위당한 순간 육포처럼 다져질 것이 확실했으니까.
떼로 몰려오는 압박감에 다급히 화살을 수십 차례 날렸는데, 순간 머리가 띵해지더니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활대를 잡은 팔뚝이 미라처럼 바짝 말라 있었다. 무리했더니 회복 속도가 흡혈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내 피통이 마르지 않은 우물인 것은 맞는데, 속도 조절이 필요해 보였다.
좀비들이 코앞까지 달라붙자, 흡혈의 고리를 해제한 뒤 바닥을 굴렀다.
틈을 찾아 미친 듯이 몸을 날렸다.
멈칫한 순간 포위가 시작되니, 멈출 수가 없었다.
"공간이 좁아터졌어!"
길이 막히자 방향을 틀고 두 팔을 교차했다.
눈앞에서 퍼부어지는 도끼 세례.
이를 악물고 그사이를 질주했다.
그어어어어―
"…시끄러."
낡은 도끼가 날카로운 도끼보다 더 아팠다.
등과 팔다리, 온몸의 살점이 뜯기는 느낌이다. 어그로는 제대로 끌었는데, 이러다간 내가 먼저 죽을 판이었다.
사방이 막힌 구조라 출구 쪽으로 몸을 틀었는데 헛바람을 들이켜며 멈춰 섰다.
터널 출구가 좀비들을 꾸역꾸역 토해내기 시작했다. 터널에서 부활했던 좀비들이 모조리 이곳으로 몰려오는 것 같았다.
크아악! 크악!
"징글징글하다. 진짜."
출구도 막혔다.
주변을 둘러봐도 날 반기는 건 시체들뿐이다.
아, 살짝 위험한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팔뚝 위로 소름이 오소소 돋는 순간, 내 것을 포함한 주변 그림자들이 꿀렁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파팍―!
"...!"
바닥에 검은 가시들이 사방으로 솟구쳤다.
그림자 가시들은 내 키보다 컸고 날카로웠으며 셀 수 없이 많았다.
나를 에워싸듯 바깥으로 솟구친 그림자 가시들.
가시에 꿰뚫린 좀비들은 넝쿨처럼 뒤엉켜 허우적거렸다.
가시로 만들어진 시체 벽이 좀비 떼의 접근을 막았다.
내가 위험해 보이자, 펜리가 나선 모양.
서둘러 펜리를 찾으려고 시선을 돌렸는데, 내 눈동자 앞에 작은 존재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이 녀석은 설마…."
주먹만 한 크기의 생명체였다.
검은 우비를 둘러쓴 귀여운 소녀의 모습.
날 보며 눈을 흘기는데 눈매가 묘하게 펜리를 닮았다.
암코양이의 미니 버전을 보는 느낌이랄까.
귀여운데 달콤살벌했다.
"그림자 요정?"
"인간 주제에 그림자 요정을 알아?"
뒤를 돌아보니 펜리가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그림자 요정도 펜리 머리 위에서 팔짱을 낀 채 날 노려봤다.
곰방대를 물고 연신 연기를 뿜어냈는데, 엘프석을 통해 마력을 보충하는 것 같았다.
"전투가 빡빡했습니까?"
"죽을 뻔했어. 무식한 세쌍둥이 새끼들."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드러난 허벅지와 골반 쪽에 베인 상처가 제법 깊어 보였다.
그녀는 도르네프가 준 배낭에서 포션을 꺼내 발랐다. 그리곤 육포를 꺼내 질겅질겅 씹었다.
좀비 떼 사이에서 육포 섭취라니.
아포칼립스 세상에 던져놔도 웃으면서 기어 올라올 년이었다.
"요정을 소환하신 건 처음 보내요."
"그만큼 상황이 최악이니까. 이것도 얼마 못 버텨. 마력 소모가 심하거든."
그림자 가시 더미가 좀비들을 꿰뚫고 벽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몰려드는 수가 너무 많아 조금씩 밀리는 모습이었다.
서둘러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
펜리는 곰방대를 내 얼굴에 뿜으며 말했다.
"길잡이 씨, 안내해야지? 고(go)야, 다이(die)야?"
"고는 뭐고, 다이는 뭡니까?"
"여기서 뒈질 건지, 후퇴할 건지."
"…그게 그렇게 됩니까?"
"바싹 썩었어도 가주들은 다르더라고. 제거는 불가능해."
"매개체는 찾았습니까?"
"찾긴 찾았지."
우리의 목표는 좀비들과 데스 매치를 뜨는 게 아니라, 폐광산의 저주를 없애는 것이었다.
진원지에서 좀비들과 부딪치다 보면 매개체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는데, 그녀가 찾는 모양이었다.
"저 가운데 있는 녀석."
펜리는 시체 벽을 밀고 있는 좀비 떼 중 한 곳을 가리켰다.
거대한 해머를 질질 끌며 다가오는 왕관 투구.
"가주 중 한 명이네요."
"알고 있는 난쟁이야. 이름은 비요른, 저 셋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녀석이지. 저 녀석 왼쪽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펴봐."
반지?
허우적거리는 좀비 떼 뒤로 비척비척 다가오는 비요른을 살폈다.
거리가 제법 멀어서 반지를 어떻게 보나 싶었는데,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네요."
반지에서 검은 아우라가 느껴졌다.
구토감이 느껴지는 거북함.
죽음의 기운이 짙게 풍긴다고 해야 하나.
내 두 눈동자 위로 죽음의 아우라가 선명히 새겨진 순간이었다.
두근―!
"…큭!"
반지에 반응하듯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났다.
심장에서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뻣뻣한 감각. 마치 흥분하는 것 같았다.
심장이 갑자기 왜 이러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가슴을 움켜쥔 채 주저앉았다.
[염원의 반지(ring of desire). 그리움이 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야.]
"...!"
잠잠했던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말을 걸어왔다.
92화 염원의 반지(2)
펜리는 비요른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죽음의 냄새가 풀풀 풍기지? 부딪친 순간 알아챘어. 저 난쟁이가 낀 반지가 저주의 매개체야. 광산에 재앙을 불러온 시발점."
광산 개발 중에 나온 이름 모를 제단.
그 제단 안에 있던 반지를 광부가 건드렸고, 광부를 거쳐 전대 가주들에게 반지가 옮겨간 것 같았다.
"자, 이제 어떡할 거...."
뒤를 돌아본 펜리는 멈칫하곤 헛웃음을 흘렸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녀석이 보였다.
어째 조용하더라니.
"지금까지 나 혼자 헛소리 한 거냐?"
"...."
"하, 미치겠네."
반응이 없다.
뭔가 문제가 생겼다.
녀석에게 다가가려는데 곰방대가 말썽을 부렸다. 마력 공급이 끊긴다. 그녀는 욕설을 내뱉고는 곰방대를 빨았다가 천천히 내뱉었다. 날숨 사이로 초록빛이 섞여 나오자, 곰방대를 흔들었다.
마력이 수명을 다했다.
그녀는 재빨리 곰방대 뚜껑을 열곤 손톱만 한 에메랄드 보석을 밀어 넣었다.
엘프석(Elf stone).
엘프족 중 오직 신녀만 제작이 가능하며 마력의 축복이 깃든 진귀한 보석이었다. 그 가치만큼이나 제조비가 살벌해서 언제나 돈에 쪼들리는 그녀였다.
"빌어먹을, 손해가 막심하네."
체질 변환에 써야 할 엘프석을 쓸데없는 데에 다 써버렸다.
그림자 요정을 소환한 대가인데, 그림자 주술의 상위 기술을 사용하려면 그림자 요정의 도움이 필요했다.
5성의 마력으로는 긴 시간을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찌지지직― 찌직―
"...."
그림자 가시들이 좀비 떼의 우악스러운 움직임에 찢겨 나가고 있었다.
터널에 있던 놈들까지 죄다 몰려왔다. 수백? 수천? 사방이 꼬챙이가 된 좀비 시체 더미로 막혀 있어서 숫자를 가늠하기 힘들었다.
"오래 버티기 힘들 거 같지?"
펜리의 물음에 요정이 아기자기한 두 팔로 큰 동그라미를 그렸다.
5분도 채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비요른을 포함한 가주들이 합세하면 지금보다 더 빨리 그림자 가시가 찢겨 나갈 게 분명했다.
"하여튼 저 녀석이랑 엮이면 피곤하다니까."
돌멩이라도 던져서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뒤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들의 움직임을 잠시 붙잡을 수 있겠습니까?"
"뭔 상황이야? 갑자기?"
"그 존재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
펜리는 입을 다물었다.
그 존재.
그녀의 시선이 녀석의 심장을 향했다.
성에서 도르네프와 함께 밤을 지새울 때 녀석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던 내용이었다.
[혹시 레토니칼스란 존재를 아십니까?]
불사자 레토니칼스.
인간의 수명보다 10배 이상을 살아가는 이종족이지만, 엘프도 드워프도 그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펜리는 그 존재가 실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녀석의 육체를 빌려 오싹한 초근접 격투술을 펼쳤던 미지의 힘과 붙어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 없어. 본론만 말해."
"반지와 접촉해야 합니다. 가주들을 붙잡아 주세요."
"망할 새끼, 어려운 부탁만 골라 하네. 반지와 접촉하면?"
"저주를 풀 겁니다."
"확실해? 내가 이 상처들을 왜 입었다고 생각해? 반지와 접촉했기 때문이야."
반지를 강탈해갈 목적으로 반지를 잡아챈 순간 정신적 공황이 찾아왔다. 그건 전신의 신경이 죽어버리는 공포와 같았다.
"다크로즈의 축복이 아니었으면 반지의 주인이 나로 바뀌었을지도 몰라. 베네타의 군주들도, 나도 통제할 수 없는 반지를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레토… 아니, 그 존재는 가능할 것이라 했습니다."
"대체 뭘 들은 거야?"
"정확한 건 접촉해봐야 합니다. 확신을 준 게 아니라서요."
"뒈질 수도 있다는 거네."
"반지 때문에 죽진 않을 겁니다. 저 좀비 떼에게 물려 죽는 건 몰라도."
"...."
한 마디로 저주를 풀 동안 좀비들로부터 보호해 달라는 얘기였다.
펜리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눈앞에 지옥 풍경이 펼쳐졌지만, 도망치려면 못 도망갈 것도 없었다.
'엘프석만 충분하다면 말이지.'
소지한 엘프석이 단 두 개뿐이었다. 한 개를 녀석을 돕는 데 쓴다면 하나밖에 남지 않는다. 살짝 불안했다. 이 하나는 그녀에게 목숨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좋아."
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석 하나가 있으니, 일단 길잡이의 말을 따른다. 망했다 싶으면 녀석을 업고 튀면 그만이었다.
도주는 그녀의 전문 분야였으니까.
그리고 공짜로 해줄 생각도 없었다. 앞으로 펼칠 주술은 대가를 꼭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네 제안대로 놈들을 모조리 잡아줄게. 대신 조건이 있어."
"뭡니까?"
"광산 지분. 저주를 풀면 분명 네 몫까지 배당될 거야. 네 지분을 검은 장미가 갖겠어."
"가져가세요."
"…결정이 빠르네?"
"시간 없다면서요?"
광산 지분이 큰돈이 될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돈은 내게 힘을 기르는 수단에 불과했다.
그리고 비요른이 지닌 저 반지는 그 힘의 정점에 있는 아이템 같았다.
['염원의 반지'다. 내 육체를 소멸시켰던 도구 중 하나지.]
불사자의 육체를 소멸시켰던 반지.
왜 스스로 육체를 소멸시켰는지, 어떤 원리로 그 힘을 발휘했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존재인 레토니칼스가 고대 시절 최후까지 사용했던 반지라고 했다.
최상급 아티팩트를 넘어선 나도 처음 보는 신화급 아이템.
폐광산이란 히든 던전과 소설에서도 언급되지 않던 반지.
광산 지분이 아니라 광산 전체를 달라고 해도 줬을 것이다.
"거래 성립입니까?"
"나중에 딴말했다간...."
"절 죽이세요."
펜리는 만족스런 표정으로 곰방대를 물곤 두 손을 내밀었다.
두 손바닥을 붙이고 펴자, 그 위로 그림자 요정이 폴짝 내려앉았다.
앙증맞은 손으로 우비를 동여매곤 결연한 눈빛을 내게 보내는데, 마냥 귀엽기만 했다. 새끼손톱으로 툭 치면 울 것 같은데.
"당신이랑 안 어울리게 귀엽네요."
"만져볼래? 한 호흡이면 널 고깃덩어리로 만들어 버릴 텐데."
"…제가 어떡하면 될까요?"
"가주들이 공격하는 순간을 노릴 거야. 준비해."
고개를 끄덕인 나는 흡혈의 고리를 움켜잡았다. 순백의 활대가 흡혈을 시작하자 불그스름한 색감으로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다.
급속 충전처럼 급속 흡혈 같은 거 없나?
단시간 내에 최대 출력에 이른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여유가 될 때 흡혈의 고리를 세세히 연구해봐야 할 것 같았다.
시체 벽과 좀비 떼의 지지부진한 대치도 잠시였다.
쿵― 쿵― 쿵―
다른 좀비 떼와 달리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들이다.
핏빛 활시위를 천천히 잡아당기며 난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는 그림자 요정을 두 손으로 포갠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콰직! 콰지직!
그림자 가시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큰 충격에 그림자들이 거칠게 흔들렸고, 그 사이로 거대한 해머가 가시들을 짓뭉개며 나타났다. 찢긴 그림자들은 바닥으로 스며들었고, 잡혀 있던 시체 더미들은 빠르게 허물어졌다.
그어어어어어어―!!
"...."
시체 벽을 밀어낸 비요른이 틈 사이로 얼굴을 들이밀며 괴성을 질러댔다.
뿌연 눈동자, 썩어 빠진 얼굴.
코앞에서 보니 꿈에 나올까 무서운 비주얼이다.
그 뒤로 비슷한 비주얼의 가주들이 무기를 쳐올리며 좀비 기사단과 함께 남은 시체 벽을 무너트리기 시작했다.
쿠쿠쿵―!
계속되는 둔기 공격에 그림자 가시들이 모조리 소멸했다.
시체 벽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방어선이 뚫리자, 시꺼먼 좀비 떼가 불개미처럼 달려들었다.
아니, 광경이 딱 썩은 물로 이뤄진 해일 같았다.
휩쓸리면 같이 썩어버릴 것 같은 느낌 말이다.
펜리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우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오래 못 버틴다. 최대한 빨리 해결해."
그 말을 끝으로 펜리가 두 손을 펼치자 그림자 요정이 그녀의 몸속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양손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이뤄진 검은 장갑의 형태.
그림자 장갑을 추켜올린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검은 연기가 줄줄 흘러나오는 섬뜩한 광경.
그녀가 지금 펼칠 능력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모조리 견제해주겠다고 자신하더니 숨겨진 필살기를 선보일 줄 몰랐다.
검은 왕의 신체 일부를 불러오는 그림자 소환술.
"그림자의 왕(King of shadows)."
펜리의 주문이 펼쳐진 순간, 좀비들이 만들어낸 그림자 전체가 꿀렁이며 하나로 뭉치더니 거대한 손이 튀어나왔다.
그림자 장갑과 비슷한 형태의 두 개의 손그림자.
펜리가 그림자 장갑을 서서히 움켜쥐자, 거대한 손들도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허공에 주먹을 매섭게 휘둘렀다.
부우웅―!
거대한 그림자 주먹도 매섭게 공간을 갈랐다.
콰자자자자자자자자작!
검은 주먹들이 바닥을 무참히 쓸어 버린다.
좀비 떼들은 짓눌리거나 허공으로 튀며 산산조각 부서졌다.
"…무시무시하네."
"서, 서둘러!"
힘겨워하는 펜리의 목소리에 정신을 바짝 차린 나는 비요른을 향해 돌진했다.
얼굴을 보니 벌써부터 죽상이다.
한계 이상의 힘을 펼치고 있다는 뜻이고, 그녀의 말처럼 그림자의 왕은 5성도 유지 자체가 힘겨운 능력이었다.
콱―
내가 비요른 코앞까지 다다르자, 거대한 그림자 손 하나가 비요른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괴성을 지르며 발버둥을 치는 비요른.
퉁―
화살을 날리자, 쾅―! 소리와 함께 비요른의 머리가 뒤로 확 젖혀졌다.
하지만 재차 괴성을 지르며 내게 손을 뻗는 모습이 충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난 헛웃음을 흘리곤 단검을 뽑아 비요른의 오른쪽 손목을 찔렀다.
콱! 콱! 콱―!
"…질기네 진짜!"
발악하는 통에 손가락을 노리기 힘들어서 손목을 노렸는데, 한 번에 잘리지 않았다. 그림자에 잡혀 움직이지 못하는 놈이라 집중적으로 손목만 노렸는데, 남은 가주들이 내 뒤를 노리고 둔기를 사납게 휘둘렀다.
콰앙―!
"...!"
그들의 공격은 또 다른 그림자 손에 틀어막혔다. 거대한 손이 둘을 낚아채더니 좀비 떼 위로 내던지자, 투석기에 처맞은 것처럼 좀비 떼들이 뭉그러졌다.
그림자 손들이 움직일 때마다 좀비들이 뭉텅뭉텅 사라졌다.
이대로 섬멸시키는 편이 좋았을 텐데, 터널에서 몰려오는 좀비 떼가 끝도 없었다.
펜리는 그림자의 왕을 이용해 좀비 떼를 쳐내고 막고 밀쳐냈다.
흡―!
곰방대를 빨아대는 펜리의 표정이 고통으로 얼룩졌다.
엘프석을 통해 마력을 채우고 채워도 마력 고갈 현상이 몸을 괴롭힌다.
이 능력은 5성으로 펼치기엔 확실히 무리였다.
"됐다!"
아서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펜리는 기합을 터트리며 팔을 크게 휘둘렀다.
반경 수십 미터의 좀비 떼를 멀리 치워버린 후 헛바람을 토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식은땀이 줄줄 흘러나오고, 그림자 장갑이 해제된 두 손은 약에 취한 듯 바들바들 떨렸다.
떨리는 손으로 다 써버린 곰방대의 엘프석을 갈아 끼우곤 재차 흡입에 들어갔다.
연기를 후― 뱉어내며 힘겨운 시선으로 녀석을 찾았다.
잘린 비요른의 손목에서 반지를 살피는 녀석이 보인다.
녀석이 반지를 조심스레 뽑아냈다.
반지와 접촉했다.
다행히 자신과 같은 패닉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가락에 반지를 낀 순간 녀석이 뚝 멈춰버렸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것처럼.
그어― 그어―
"...."
죽은 자들의 괴성이 다시 들려오기 시작한다.
펜리는 멈춰버린 녀석을 말없이 바라보곤 키득키득 웃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녀는 비틀비틀 걸어 녀석의 곁에 섰다.
부릅뜬 눈에는 초점이 없다.
반지에 잡아먹힌 것인지, 저주를 푸는 중인지 알 도리가 없는 상황. 그제야 반지가 아닌 좀비 떼에게 죽을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도대체 언제까지 부려 먹을래. 응?"
녀석은 언제까지 저주를 풀 것이라 알려주지 않았다.
잠깐이 될 수도 하루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이대로 머물 수 없는 일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죽은 자들이 주변을 에워싼 채 좁혀오고 있었다.
팔목이 잘린 비요른도, 다른 가주들과 기사들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압박해 들어왔다.
펜리는 조용히 아서를 어깨에 둘러업은 뒤 곰방대를 쭉 빨았다.
후―
뿌연 연기를 내뱉으며 그녀는 출구 쪽을 바라봤다.
"엘프석이 오래 버텨야 할 텐데."
도르네프가 건네준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
그때까지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흩어지는 연기와 함께 그녀의 신형도 사라졌다.
93화 염원의 반지(3)
"으...."
정신이 든 순간 지독한 갈증이 찾아왔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반지와 접촉을 했고, 레토니칼스의 말에 반지를 착용한 순간 의식이 날아갔다.
지금 상황은?
의문도 잠시, 메마른 입술이 가뭄의 단비처럼 촉촉이 젖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시원한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금붕어처럼 입을 뻐금뻐금하며 목을 축이고 있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지랄을 해라."
"…응?"
"어떻게 물 마시는 모습까지 이리 밉상일 수 있지?"
물을 받아마시며 힐끔 시선을 돌리니 펜리가 쭈그린 채 앉아 있었다.
세상에 짜증이란 짜증은 얼굴에 다 담은 표정인데, 행동은 물을 잘 마실 수 있게 물병과 내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설마, 이런 게 츤데레…?
펜리가 츤데레의 성격이었나?
하지만 그런 기대도 펜리가 물병을 내 코 위에 쏟아부으면서 사라졌다.
"커억!"
코로 물 들어갔다. 망할 년.
"정신 차렸으면 일어나. 한가롭게 누워 있을 시간 없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어떻게 돼. 아직도 ㅈ된 상황이지."
펜리는 내 앞에 모래시계를 던졌다. 자리에 앉아 시계를 살펴보니 바닥 부분이 모래로 거의 다 차 있었다.
사흘 후에 모래가 다 찬다고 했으니 도르네프와 약속했던 사흘이 다 된 셈이다.
"오늘이 사흘째다."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사흘 가까이 의식을 잃고 있었다고?'
입술이 말랐을 때 제법 시간이 흘렀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난 염원의 반지를 살폈다.
색감은 먹물에 담근 것처럼 여전히 칙칙했다. 다만, 풀풀 풍기던 죽음의 아우라가 눈에 띄게 옅어졌다.
반지의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건데, 레토니칼스의 말이 사실이었다.
[반지에 담긴 염원은 찌꺼기뿐이라 금방 사라질 거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내가 담았으니까.]
반지의 주인이 그라는 것이 놀란 것도 잠시, 반지에 담긴 염원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레토니칼스는 잠시 침묵하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죽음(Death)'이다.]
무의식 속에서 레토니칼스와 제법 긴 시간 대화를 주고받았는데, 찰나에 불과했던 그 시간이 현실에서 사흘이나 흐른 뒤였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주에 대한 힌트를 얻었으니까.
'반지의 염원이 사라지면 죽은 자들은 흙으로 돌아간다고 했지.'
일단 확인이 필요했다.
"죽은 자들은 어찌 됐습니까?"
분위기를 살폈는데 조용한 것을 보니, 주변에 좀비 떼는 없는 것 같았다.
대신 펜리의 얼굴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로 시야가 어두컴컴했다.
마법 구체를 왜 소환하지 않은 거지?
그 의문은 펜리가 가방에서 횃불을 켜면서 깨닫게 됐다.
난 펜리를 보며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몰골이."
"전쟁터에서 구른 병사 같지? 내가 이렇게 된 데에는 네놈 지분이 100%야. 전부 네놈 탓이라고 빌어먹을 새끼야."
"...."
뭐라 맞장구쳐주고 싶은데, 피투성이가 된 그녀를 보니 말문이 턱 막혔다.
거친 말투는 똑같지만 두 귀가 축 늘어진 것처럼 말하는 모습에 힘이 하나도 없다.
시무룩한 고양이를 보는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그녀의 피가 아니라는 거다.
검게 변색한 썩은 피.
그리고 악취.
죽은 자들의 피였다.
그놈들이랑 얼마나 뒹군 거야?
"죽은 자들에게 변화는 없었습니까?"
"변화? 하루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나도 몰라."
"네? 뭔 소립니까?"
펜리는 횃불로 한 곳을 가리켰다.
흐릿한 시선 속에 크게 무너진 바위 더미가 보였다. 사람 크기의 바위들이 한가득 쌓여있다. 위쪽을 살펴보니 암벽을 무너트려 바위 더미로 입구를 막은 것 같았다.
"여긴...."
"우리가 처음 발을 디뎠던 장소."
"광물 저장소 말입니까?"
"그래."
"그럼 저곳은 터널이겠네요?"
"맞아. 놈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무너트렸지."
하루 전에 암벽을 무너트려 입구를 틀어막은 뒤 줄곧 버텼다고 했다.
펜리는 내게 횃불을 쥐여줬다.
뭐지?
횃불을 건넨 그녀의 표정에서 후련함을 읽었다. 어깨에 짊어진 짐을 모조리 내려놓은 표정이랄까.
어째 느낌이 쎄한데?
"이틀 동안 널 업고 다니면서 별짓을 다 했어. 난쟁이 새끼는 문을 열 생각을 안 하지. 죽은 자들은 꾸역꾸역 쫓아오지. 넌 더럽게 무겁지."
"...."
"숨어도 보고, 도망도 치고, 싸우기도 했는데 도저히 놈들을 떼놓을 수가 없더라고. 왜인 줄 알아?"
펜리의 눈빛이 사납게 돌변했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착용한 염원의 반지에 닿아 있었다.
"저 망할 반지 때문이야. 반지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놈들을 계속 불러오더라고. 광산에 묻힌 시체가 얼마나 많던지, 난 이곳이 광산이 아니라 암매장 무덤인 줄 알았다고."
"…그래서요?"
"뭘 그래서야, 이전보다 머릿수가 훨씬 더 많아졌지. 터널에 뚫린 작은 틈새나 구멍에서 놈들이 꾸역꾸역 기어 나오는데, 네가 그 소름 돋는 장면을 봤어야 해. 그래야 널 버리려고 했던 내 마음을 이해하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날 버리려고 했다니, 무슨 말을 그렇게 살벌하게 해?
"구,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야. 네 단단한 몸뚱이와 재생력이 아니었으면 나도 위험했어. 긴 터널을 뚫고 오려면 단단한 방패가 필요했거든."
…방패?
이 엘프년이 설마, 날 고기 방패로 써먹은 거야?
횃불로 몸을 살펴보니 웃옷은 사라지고 바지는 걸레짝이 되어 있었다.
상처는 없는데, 기분이 왜 이리 찜찜하지?
"지금이라도 깨어나서 다행이야. 진짜 위험했거든."
"지금이 위험한 상황입니까?"
"곧 위험해질 거야."
펜리는 곰방대를 꺼내더니 깊게 빨아들였다. 뿌연 연기 위로 초록빛이 섞여 나왔다.
그녀는 짧게 혀를 차곤 곰방대에서 엘프석을 툭툭 털어냈다.
"엘프석이 수명을 다했어. 내 마력은 곧 바닥날 거야. 보다시피 주변을 밝힐 구체조차 소환할 마력도 없거든."
"바위 더미로는 부족합니까?"
"마력이 바닥난다는 건 어딘가에 쓰고 있다는 뜻이겠지? 어디에 마력을 쓰고 있는 것 같아?"
"바위 더미?"
"아니, 너."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몸 위로 푸른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 몸에 걸어놨던 마법이 풀리는 현상 같았다.
쿵―!
그어어어어어―!
"...."
갑자기 바위 더미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람을 맞추고 일어난 것처럼 터널 안쪽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미친 듯한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난 신음을 흘리며 몸에서 빠져나오는 기운을 살폈다.
이 푸른 기운, 전에 펜리에게 부여받은 적이 있었다.
"…위장(Camouflage)?"
"이성이 없는 존재에겐 효과가 확실한 마법이지."
"그 효과가 끝났다는 겁니까?"
"말했잖아. 엘프석이 없다고. 반지의 기운을 가리려면 얼마나 많은 마력이 필요한지 모르지? 난 할 만큼 했어."
"그럼 저 바위들은…."
"고작 바윗덩어리로 놈들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해? 어림도 없지."
펜리가 내 그림자 위에 섰다.
기분 나쁘게 왜 남의 그림자를 밟느냐고 투덜거리고 싶지만, 난 설마 하는 표정으로 펜리를 바라봤다.
위기에 몰린 엘프년의 패턴이야 뻔하지 않은가.
곰방대를 잠시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내게 물었다.
"너, 그 반지 포기할 생각은 없지?"
"네."
"단호하네."
"이유가 생겼거든요."
"그럼 난 여기까지야. 난쟁이 녀석이 신호를 보낼 때까지 알아서 살아남아. 이젠 내 몸 살필 여력도 부족하니까."
"...."
펜리가 내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매끈한 다리, 호리호리한 허리, 새침한 얼굴이 사라지고, 쭉 뻗은 한쪽 팔만 남은 상황에서 그녀의 손이 엄지로 변하더니 날 추켜세웠다.
이 상황에서 영화 터미네이터가 떠오른 건 왜일까? 그 영화에서 터미네이터는 'I will be back(나는 돌아올 것이다)'를 외쳤지만, 저 엘프년은,
"바톤 터치다. 난 돈값 했어."
절대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광산 지분 얘기만 하고 홀라당 사라져 버렸다.
"진짜 가버렸네."
한두 번 경험한 일이 아니다 보니 이젠 놀랍지도 않았다. 함께 지지고 볶고 구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서운한 감정은 없었다.
'정말 할 만큼 한 것 같았으니까.'
몰골만 봐도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다. 날 업고 이틀 내내 죽은 자들 사이를 뛰어다녔을 것이다.
과정이야 어떻든 의식을 차리기 전까지 날 살렸으니, 돈값은 확실히 한 셈이다.
'도와줄 여력도 없는 것 같고.'
덤덤한 표정과 달리 한계에 다다른 상태란 것을 알고 있다.
내 눈은 못 속이지.
저것 또한 나약함을 가리기 위한 '위장'이었다.
마력 중독 현상.
그림자의 왕을 소환했을 때부터 부족한 마력을 엘프석을 통해 쉴 새 없이 공급받았다. 사흘, 체력이 버텨내기엔 긴 시간이다. 그 부작용이 슬슬 나타날 시간이었다.
어딘가에서 빌빌대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내게 살 방법까지 말해준 거겠지.
'반지를 포기한다라....'
죽은 자들이 반지만 노린다면 반지는 지금 상황에선 내 목숨을 위협하는 물건이다.
욕심을 버리면 위험을 회피할 수 있지만, 반지를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레토니칼스가 반응을 보였거든.'
불사자의 심장은 내 생존에 무척 이롭지만, 심장에 깃든 레토니칼스란 존재는 내게 우호적이지도,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내가 느낀 레토니칼스는 일부 관심거리 빼곤 모든 것에 무관심했다.
지독히 오랜 세월을 살아온, 짙은 매너리즘에 빠진 절대 존재.
[반지의 주인이 되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지.]
그 권태에 찌든 존재가 처음으로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첫 등장 이후 무시로 일관했던 레토니칼스가 스스로 손길을 내민 것이다.
반지의 주인이 된다면 레토니칼스란 존재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생길 것 같았다.
심장은 이제 내 몸의 일부다. 심장에 대해 많은 걸을 알수록 생존 확률이 올라갈 테니, 반지를 포기할 순 없었다.
'저주는 곧 풀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폐광산의 저주는 레토니칼스의 염원인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
반지의 힘이 곧 다할 것이라 했으니, 저주도 사라질 것이다. 게다가 도르네프와 약속했던 시간이 거의 다 되간다.
모래시계를 품어 넣고 바위 더미를 응시했다.
시간만 끌면 된다.
쿠웅―! 쿵! 쿠우우!
크고 작은 굉음이 쉴 새 없이 울렸다.
바위 더미가 들썩들썩했다.
좀비 떼가 바위 더미를 밀치는 모양.
"안에서 아주 지랄발광을 하고 있네."
공간 전체에서 바위 긁어대는 소리가 이곳까지 들려왔다.
잠시 후,
그그극―
바위 한쪽이 퍼석―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더니 사람 하나 빠져나올 틈새가 만들어졌다.
끄에엑! 끄에!
벌어진 틈새 사이로 썩어 빠진 팔들이 한가득 튀어나왔다.
지옥문 사이로 서로 튀어나오려는 악귀들이 따로 없었다.
난 이를 악물곤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리곤 틈 앞에서 미친 듯이 곡괭이로 좀비 떼를 찍고 찍고 또 찍었다.
악취와 함께 피와 살점이 온몸에 튀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뚫리면 오래 못 버틴다.'
이곳은 드넓지만, 출구가 막혀 있다.
고립된 장소란 뜻이고, 포위당하면 답도 없었다.
터널 입구를 틀어막고 최대한 버텨야 했다.
이제부터 생존은 오롯이 내 몫이었다.
94화 염원의 반지(4)
나란 존재를 소설 속 세상으로 불러온 신이란 새끼는 날 더럽게 싫어하는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 반년 정도 살아남는 동안 깨어 있는 시간보다 기절했던 시간이 더 길었던 것을 보면 답이 나왔다.
지금까지 몇 번을 기절했었지?
넬리토리 협곡에서 강물로 추락했을 때.
칼이 준 걸레 빤 물맛이 나는 독극물을 먹고 붐을 치료했을 때.
아레나 후아튼 앞에서 붐을 터트렸을 때.
눈앞에서 염원의 반지를 얻었을 때.
더 있나?
아, 생각해보니 화장실에서 휴지를 찾던 때도 있다.
시발.
더 최악인 건 기절한 횟수보다 죽을 뻔했던 적이 훨씬 많다는 거다. 그리고 꼭 기절했다가 깨어나면 근시일 내에 죽을 위기가 뭉텅이로 찾아왔다.
지금도 그렇다.
일어났더니 좀비 나라의 헬게이트가 열렸다.
난 그 헬게이트를 홀로 막아내는 중이고.
이 정도면 기절&위기가 절대 공식이 될 거 같아서, 기절하는 것도 무서워서 뜬 눈으로 버틸 것 같았다.
콰작― 콰자작―
"빌어먹을! 네놈들은 쉬는 시간도 없냐?"
힘찬 곡괭이질 한 번에 좀비 두세 마리가 산산조각 부서졌다.
이백? 삼백? 아니 그 이후로는 곡괭이를 휘두른 횟수를 잊었다.
숨이 차올랐지만, 버틸만했다.
심장의 주인이 되면서 육체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덕에 눈앞의 좀비들은 내 상대가 아니었다.
좀비가 된 대부분이 키가 작고 머리가 큰 드워프란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콱―!
곡괭이로 내리꽂아도 헤드샷이고, 발로 차도 헤드샷이었다.
머리가 부서지면 다행히 녀석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징글징글하다. 진짜."
문제는 틈새로 기어 나오는 수가 끝도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틈새를 막고 버티니 거품을 물고 달려들었다.
반지를 향한 집착들이 집요함을 넘어 미저리 저리가라였다.
그 엄청난 어그로 때문에 바위 더미들이 버텨주고 있지만, 관심이 집중된 나는 죽을 맛이었다.
눈 한 번 깜빡할 시간도, 숨을 돌릴 찰나의 여유도 없었다.
"으윽!"
중심을 잡던 발이 미끄럽다.
정강이까지 차오른 토막 난 시체들이 움직임을 방해했다. 풀풀 풍기는 썩은 냄새도 두통이 지끈거릴 정도로 고약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우지끈―
"...!"
단단한 곡괭이 자루가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결국 부러졌다. 부러진 자루를 잡고 틈새로 돌격했다.
푸욱―
서너 마리의 좀비를 날카로운 자루로 꿰뚫고 발로 차 넘어트렸다.
찰나의 쉴 틈.
길게 숨을 내뱉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또 기어 나온다.
난 욕설을 내뱉으며 기계적으로 단검을 휘둘렀다.
곡괭이와 달리 단검을 무기로 사용하자, 휘두른 팔에 긁힌 상처들이 하나둘 늘기 시작했다.
접근 거리가 짧으니, 이빨과 손톱에 박혀 피부가 찢겨나갔다.
하지만 괜찮다.
몇 번 휘두르다 보면 말끔하게 아물었으니까.
좀비 떼의 공격이 단조롭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방어가 수월했다.
보통은 지쳐서 나가떨어질 물량 공세지만, 체력에 자신 있는 내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게다가,
'점점 약해지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좀비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반지의 힘이 약해진 여파 같았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게 유리한 상황인 것은 맞는데, 나도 반대급부로 대가를 지불하고 있었다.
바로 '마나'였다.
혹시나 하고 성력을 끌어올렸지만, 역시나 반응이 없다.
몸속에서 느껴지는 텅 빈 공허함.
[기운을 가져가겠다.]
몸속에 흐르는 기운들을 심장이 모조리 빨아들이고 있었다.
반지의 저주를 푸는 데에 내 특성 기운인 성력이 필요하다나?
그래서 지금껏 순수 육체 능력으로 버티는 중이었다.
'이대로만 흘러간다면 버틸 만한데….'
지치지 않는 체력과 완력이 그걸 가능케 했다.
반지의 힘이 약해질수록 좀비 떼의 힘도 무력화되니 이깟 마나가 봉인돼도 손해는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유리한 상황이 계속 유지가 될까?
"빌어먹을, 그럴 리가 없지!"
그아아아―!
염려했던 우려가 눈앞의 틈새로 모습을 드러냈다.
카앙―!
"큭! 빌어먹을 드워프 장비!"
휘두른 단검이 처음으로 튕겨 나갔다. 드워프 제(製) 단검을 튕겨낼 것은 같은 드워프 제(製) 방어구뿐이다.
기사단 출신 놈들이 뒤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약해졌어도 저 무식한 장비들은 여전히 단단했다.
둔기까지 사납게 휘두르며 기어 나오자 나도 주춤주춤 밀리기 시작했다.
전투 후 처음으로 틈새 자리를 내줬다.
공간을 내주자, 좀비들이 물 흐르듯 틈에서 새어 나왔다.
두 마리, 세 마리, 다섯 마리.
눈을 끔뻑일 때마다 상대할 머릿수가 실시간으로 많아졌다.
"…미치겠네."
모래시계를 살피니 여전히 모래가 떨어졌다. 악착같이 버텼다고 생각했는데, 도르네프의 도움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휘적휘적 비틀거리는 좀비 떼가 보인다. 어느덧 무릎까지 차오른 시체 더미가 진로를 방해하고 있다.
의도한 건 아닌데, 수북이 쌓인 시체 더미가 좀비 떼를 저지하고 있었다.
저곳이라면 좀 더 버틸 수도.
잠시 갈등하던 나는 곡괭이를 움켜쥐곤 시체 더미 중앙으로 뛰어들었다.
"크아아아아! 시발!"
목청에서 짐승 같은 기합이 터져 나왔다.
한 손엔 곡괭이, 다른 손엔 단검.
움켜쥔 무기들로 노린 것은 오로지 머리다. 좀비 떼 사이로 뛰어들자, 사방에서 손톱과 이빨, 그리고 둔기가 날아왔다.
"아악!"
아프다.
하지만 난 방어 따윈 무시하고 오직 좀비 새끼들의 머리만 노렸다.
서둘러 머릿수를 줄여야 한다.
까앙―!
곡괭이로 기사의 투구를 날리고, 단검으로 놈들의 턱을 꿰뚫었다.
뇌까지 휘저은 단검을 뽑을 때면 온몸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졌다.
피부가 찢어지고 뼈에 금이 갔다.
대신 빠르게 상처가 아문다.
좀비 떼와 싸우니 나도 좀비가 돼버린 것 같았다.
"시발! 시발! 시발!"
어느새 난 부러진 곡괭이 자루와 단검을 쳐들고 시체 더미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머리를 꿰뚫고, 부수고, 으스러트렸다.
무릎까지 차오른 시체 더미가 허벅지까지 차올라, 내 앞에는 작은 둔덕이 되었다.
"…커억, 헉. 헉."
드디어 심장에 과부하가 왔다.
호흡 부족으로 심장이 날뛰며 발작을 해댔다.
그럼 마나를 쓰게 해주던가.
여섯 마리, 여덟 마리, 열 마리.
계산 미스다.
죽이고 또 죽여도 덤벼드는 좀비들이 줄지 않았다.
틈새가 뚫렸다.
좀비 떼의 움직임이 더욱 느려지지 않았더라면 진즉 끌려가서 다진 고기가 됐을 것이다.
전신이, 얼굴이 저들의 썩은 피와 살점으로 버무려졌다. 이 정도면 동족으로 착각해도 되는데 왜 자꾸 덤비는 거야?
아, 반지.
반지 때문이다.
체력이 부치니 내 움직임 또한 둔해졌다. 상처가 아무는 속도보다 늘어나는 상처가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대론 죽어.'
전투를 포기하고 무기들을 버렸다. 그리고 바닥을 굴러 좀비 떼 사이를 벗어났다.
그러던 중,
콰아아아앙―!
바위 더미에서 폭음이 들려왔다.
터널을 틀어막았던 바위들이 와르르 무너졌다. 시커먼 터널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르륵― 그르륵―
안쪽에서 오싹한 바닥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소리다.
거대한 해머.
놈이 드디어 나타났다.
"시발, 끝판왕이냐?"
반지의 전(前)주인이었던 비요른이다.
끝판왕도 부담스러운데, 그 뒤로 남은 가주들과 기사들도 하나둘 터널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홀로 싸우다간 자칫 골로 갈 수 있었다.
결국, 난 최후의 방어선까지 포기하고 더욱 뒤로 물러났다.
'버틸 수 있으려나.'
다행이라면 저들도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졌다는 것이다.
드넓은 공터를 이용해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이기는 싸움이 될 수 있다.
반지를 살펴보니, 이젠 검은 아우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반지의 저주가 거의 다 해제되어 가는 신호였고, 그 신호의 힘인지 눈앞에 갑작스런 변화가 찾아왔다.
크아아악, 크아악!
좀비 떼 일부가 괴성을 지르며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다.
일반 좀비들이다.
기괴하게 몸을 비틀던 그들의 몸짓이 뚝 멈추더니, 이내 마른 껍데기처럼 부서지기 시작했다.
근처에 다가오던 좀비 떼를 시작으로 도미노처럼 잿가루가 돼서 흙으로 돌아갔다.
뿌연 잿가루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드디어 저주가 풀린 것인가 기대했는데, 가라앉은 잿가루 사이로 가주들과 기사들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도 잠시,
"…뭐!?"
그들의 모습이 어둠 속으로 푹 사라졌다. 잿가루의 여파로 주변에 설치해놓은 횃불들이 꺼진 것이다.
암흑이 찾아왔다.
"…쿨럭, 시불!"
텁텁한 느낌에 기침을 뱉어내며 횃불 쪽으로 달렸다.
횃불 주변엔 펜리가 놓고 간 가방이 있다. 암벽에 손끝에 닿자 주변을 더듬더듬거리며 가방을 찾았다.
손끝에 걸리는 가죽 감촉.
가방이다.
다급히 가방에서 기름을 꺼내 던지다시피 주변에 뿌린 후 불을 질렀다.
기름 위로 바닥이 활활 타오르며 주변 시야를 환하게 밝혔다.
다시 터널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난 멈칫했다.
"...."
죽은 자들 대부분이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지만, 눈앞의 비요른과 그 병력은 최후까지 버티며 내 목숨을 위협하고 있었다.
"…또 반지냐?"
암흑 속에서도 반지가 저들을 불러왔고, 가방을 찾는 사이 완벽한 포위망이 만들어졌다.
도망칠 틈이 없다.
입술을 다문 채 두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의 상대를 노려봤다.
첫 대면 때와 달리 비요른도 무척 약해진 상태였다.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나만 돌아온다면 말이지.'
속으로 그를 불렀지만, 레토니칼스는 조용했다. 심장은 마나를 뱉어낼 생각을 안 했고, 결국 난 순수 육체 능력으로 저들과 싸워 버터야 했다.
"이건 많이 빡센데."
내 신음 섞인 중얼거림에,
"뭘 빡세, 할만하구만."
타오르는 불꽃이 만든 그림자에서 힘 빠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누군가 내 등을 맞대고 섰다.
펜리다.
시선을 돌리니 그녀가 숨을 거칠게 고르고 있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린 채 두 눈이 살짝살짝 풀려있다.
엄지를 추켜올리며 당당히 사라졌던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엘프석의 마력을 과다하게 받아들인 대가로 그녀는 마력 중독에 빠져 있었다. 그 후유증이 뒤늦게 발작하며 나타난 것 같았다.
"어디 숨어 있다가 나온 겁니까?"
"네놈 그림자."
"전 허락한 적 없는데요?"
"닥치고 앞이나 봐."
"괜찮습니까?"
"내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빌빌대는 게 다 보여서요. 그냥 쉬세요. 제가 해결합니다."
"네깟놈이?"
"믿어 보세요. 우린 친구 사이 아닙니까?"
그때가 갑자기 떠올랐다.
연구소를 탈출할 때 펜리가 즉흥적으로 친구를 제안했고, 냉큼 받아들인 기억 말이다.
"친구 사이? 지랄하고 자빠졌네."
물론, 이 망할 엘프는 자기가 한 말조차 기억 못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하는 짓을 보면 구해줄 가치가 전혀 없는 엘프년인데, 그동안 받은 것이 있으니 돌려줄 생각이다.
거래로 이뤄진 관계라지만 그녀로 인해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게다가 나와 그녀 사이엔 신명으로도 엮여 있었다.
이 정도면 운명이라고 봐도 된다.
앞으로 펼쳐질 내 고단한 여정 뒤엔 늘 검은 장미는 곁에 있을 것이고, 내 선택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미칠 것이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악당 새끼들이 판을 치는 더럽고 추악함이 일상적인 세상.
이 비열한 세상 속에 서로 등을 맡길 수 있으니, 우린 친구가 맞았다.
"친구 사이 맞습니다. 악수까지 했는데요?"
"나랑 자꾸 엮지 마. 사기꾼 새끼야."
"...."
지금은 비즈니스 친구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았다.
95화 염원의 반지(5)
나를 에워싼 거센 불길이 적들의 접근을 막아주고 있었다. 조금만 늦게 불을 피웠으면 어둠 속에서 고깃덩어리가 될 뻔했다.
다급한 마음에 기름을 뿌린 행동이 나를 살린 셈이다.
"불을 무서워하네요?"
"여유 부릴 때가 아니야. 곧 꺼진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 너머에서 비요른이 날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
도르네프가 챙겨준 기름 주머니를 몽땅 퍼부어 한순간 강하게 타오르게 했을 뿐, 불길은 빠르게 사그라들고 있었다.
횃불로 주변을 밝힌 후 흡혈의 고리를 소환했다.
둘러보며 뒤로 물러나니 암벽이다.
암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직각으로 매끈하게 깎여 있어 등반 자체가 힘겨워 보였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게 분명했다.
"드워프들 짓이야."
"출구로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겠죠? 오르면 또 오를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뒈지기 싫으면 그딴 생각 버려. 내가 터널 입구를 어떻게 무너트렸을 것 같아?"
"네?"
"트랩이 깔려 있다."
"...."
"밧줄을 내려주지 않으면 꼼짝없이 굶어 죽는다는 뜻이지."
"우선 살아남아야겠네요."
"그건 반지에 미련을 못 버리는 네놈이 걱정해야 할 문제고. 나랑은 상관없어."
생각해보니 그렇네.
죽은 자들은 반지의 주인인 나만 집요히 노릴 것이다. 내 곁에서 그녀가 슥 빠진다고 눈길이나 주겠는가.
그 사실을 알면서 날 도와주겠다는 이유가 뭐지?
그녀는 지금 마력 중독에 빠져 있다.
나처럼 마나를 사용할 수 없는 상태란 뜻이다. 조용히 숨어 있으면 도르네프가 밧줄을 내려줄 텐데,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날 돕겠다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설마 겉으로는 싫어해도 날 진짜 친구로….
"네놈이 죽으면 광산 지분이 날아가잖아. 숨은 붙여놔야지."
"…아 네."
망할 엘프년.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생각 없이 나선 건 또 아닌 것 같았다.
"네가 한 짓이지? 죽은 자들이 사라지고, 저것들이 점점 둔해지고 있는 게."
"그렇다고 볼 수 있죠."
"저것들은 못 없애는 거야?"
"시간이 필요합니다."
"얼마나?"
"긴 시간은 아닐 겁니다. 반지의 힘이 거의 사라진 듯 보이니까요."
이젠 평범해 보이기까지 한 반지를 보여주자, 펜리는 '좋아.'를 짧게 외친 후 두 쌍의 크로우를 소환했다.
"가주들만 조심해. 내가 견제해 줄 테니 잘 버텨보라고."
"…버티라고요?"
"넌 가능하잖아."
…이런 미친.
결국, 또 고기 방패냐?
그런데 또 정확히 판단한 것이라 반박하기 힘들었다. 이번 전투로 몸뚱이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거든.
더럽게 아픈 것만 빼면, 마나 없이 힘으로 휘두르는 둔기 공격 정도는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다만, 일격에 나를 짓뭉갤 수 있는 비요른과 가주들의 경우는 달랐다.
크아아아아악!
"온다! 시선을 끌어!"
불길이 푹 꺼져버렸다.
흐릿해진 시야, 펜리가 그 시야 속으로 사라졌다.
최악의 몸 상태로 정면 승부는 무리니, 나를 미끼 삼아 뒤를 견제할 생각인 듯 보였다.
그럼 나는,
'일단 미끼가 되어줘야겠지.'
활대를 잡고 시위를 쭉 당겼다.
피를 대가로 마나 없이 마력탄 위력의 화살을 무한정 소환할 수 있다는 건 상당한 메리트였다.
콰콰콰콰콰쾅―!
놈들이 코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사방으로 화살을 갈겼다. 무리는 안 했다. 머리라도 핑 돌면 그대로 저승행이었으니까.
반지의 기운에 화살로 도발까지 하니, 사방이 날 죽이려는 놈들뿐이다. 거리를 잰 후부턴 공격하지 않고 기다렸다.
쿵―
비요른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더 버티다간 포위 당한다.
난 비요른을 향해 돌진했다.
섬뜩한 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흔들자 그대로 슬라이딩을 했다.
콰아아앙―!
거대한 해머가 내 머리를 스쳐 바닥에 내리꽂혔다. 비요른의 턱이 드러나자, 그대로 시위를 위로 튕겼다.
콰아앙―!
"...!"
폭발이 터지며 비요른의 투구가 하늘로 치솟았다. 충격에 비틀거리며 물러난다. 전에 머리를 맞췄을 때 곧장 손을 뻗어오던 터프함이 사라졌다.
확실히 약해졌다.
"야, 굴러!"
"…헉!"
붕! 부우웅―!
날 선 할버드가 양쪽에서 날 스치고 지나갔다. 시발, 조금만 늦었으면 목이랑 허리가 뎅겅 잘릴 뻔했다.
비요른 곁을 지키던 가주들이다.
빠르게 자세를 잡고 다음 공격을 대비했는데 조용했다.
뒤를 돌아보니, 펜리가 가주들을 견제하며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적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기 때문인지, 다크 엘프 특유의 민첩함이 빛을 발했다.
최악의 컨디션에도 저런 움직임이라니.
확실히 5성은 달랐다.
내가 어그로를 끈 탓에 그녀의 움직임이 자유로운 점도 한몫했다.
반대로 얘기하면 저들 빼곤 전부 나만 노린다는 뜻이었다.
내게 둔기 세례가 퍼부어졌다.
퍽! 퍼억! 퍽!
"…끄!"
머리를 보호하며 내달렸다.
맞은 부위에 피멍이 들고 살점이 뜯겨나갔다.
멍석말이를 당하면 이런 고통이려나.
속이 뒤집힐 듯 아프고, 뼈란 뼈가 비명을 질러댔다.
아프다. 시발.
근데 버틸만했다.
이번 폐광산 전투로 확실히 느낀 것이 있는데,
"…제길, 인생이 더 고달파지겠네."
내 맷집이 인간 수준을 한참 벗어났다는 거다.
둔기의 위력이 반감된 탓도 있지만, 둔기를 얻어맞고 버틴다는 것 자체가 일반 상식으론 불가능했다.
보통 인간이었으면 뼈가 부러지고, 머리통이 부서졌을 것이다.
펜리도 내 맷집을 인지했기에 날 이곳으로 밀어 넣었겠지.
틈새를 악착같이 막고 버텼던 그 미친 전투를 다 지켜본 게 틀림없었다.
가주들만 조심하면 된다.
그리고 가주들을 펜리가 붙잡고 있는 지금이,
스각―
반격의 기회란 뜻도 됐다.
한 대 맞으면 그대로 돌려준다.
열 배로 돌려주고 싶은데, 쪽수가 너무 많았다.
난 미친놈처럼 단검을 휘둘렀다. 멈추면 포위당하기에 불도저처럼 좀비 떼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바닥을 쉴 새 없이 굴렸고, 적들의 장비를 빼앗아 휘두르고 던졌다. 다급할 때면 한 놈을 잡아끌어 고기 방패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신이 없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건 사치였다.
눈앞의 적을 죽이면 또 다른 적이 자리를 채웠고, 쉴 새 없이 싸우면서 근접이 유리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근접.
붙고 붙고 또 붙었다.
그리고 한 뼘 거리의 초근접 전투가 시작됐을 때 내게 변화가 찾아왔다.
두근―!
심장이 힘차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신호지?
레토니칼스가 반지의 저주를 푼 것일까?
아니다.
이건 하나의 준비를 위한 레토니칼스의 신호였다.
이성이 사라지고 본능이 머릿속을 채웠다. 손에 쥔 단검이 걸리적거리기 시작했다. 단검을 투척해 한 놈의 머리통을 날려버리고 두 주먹을 말아쥐었다.
"크아아아악!"
퍼석―!
휘두른 주먹에 두 마리의 좀비가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파편이 허공에 튀고, 난 그사이를 짐승처럼 질주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얼굴을 손바닥으로 우그러트리고, 팔을 휘둘러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팔꿈치는 이제 드워프의 투구를 우그러트리고 머리까지 터트렸다.
연달아 주먹을 날렸고, 지나간 자리엔 뭉개진 고깃덩어리만 남았다.
주변에 적이 줄어들수록 내 얼굴은 서서히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지독한 통증이 온몸을 채운다.
근육 가닥가닥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위험 신호.
본능이 멈추라 했다.
안 그러면 몸이 망가진다고.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여전히 내 한 뼘 거리엔 반지를 노리는 적들이 득실거렸으니까.
순간 레토니칼스의 선문답이 떠올랐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새로운 세상.
맞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난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펼치고 있었다.
두근―!
심장, 레토니칼스가 거친 맥동을 통해 말했다. 본능이 정한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멈추지 말라고.
그어어어어―!
"크아아악!"
어느새 다가온 비요른.
서로 악을 질러대며 부딪쳤다.
놈의 해머가 내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레토니칼스 식 전투법에 회피는 없다.
이빨을 사납게 드러낸 채 왼팔을 크게 휘둘렀다.
퍼석―
해머를 비껴친 손이 뭉개졌다.
그 충격에 해머는 날 비스듬히 스쳐 지나갔다. 난 멈추지 않고 비요른의 품을 파고들었다.
퍼억―!
어깨 차징.
본능대로 움직였다.
비요른을 넘어트린 후 몸 위로 올라타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날 노려보며 괴성을 지르는 괴물이 보인다.
고개를 뒤로 젖힌 나는,
콰작―! 콱! 콱!
놈의 얼굴에 박치기를 시전했다.
미친 듯이 머리를 움직였다.
이마가 찢어지고 실핏줄이 터지며 붉은 세상이 펼쳐졌다. 하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그 순간,
퍼석―
비요른이 부서졌다.
아니, 정확히 내가 부순 게 아니라 껍데기가 돼서 잿가루로 화했다.
드넓은 공터에 검은 재가 비산했다.
비요른 뿐만 아니라 죽은 자들 전부가 허공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피투성이가 된 끔찍한 몰골로 전장 한가운데에 우뚝 섰다.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펜리와 눈을 마주쳤지만, 그녀는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볼 뿐 다가오지 않았다.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끄으으으."
고통에 삼켜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다.
지금 누군가 날 노린다면 난 죽을 거다.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는 지독한 양날의 검이었다.
마치 죽고자 하는 전투법 같았다.
숨마저 턱 막히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난 죽고 싶지 않다.
[염원이 풀렸다.]
레토니칼스가 말을 걸어왔다.
염원의 반지가 힘을 잃자, 모든 것이 말끔하게 해결됐다.
저주가 풀렸다.
이제 남은 건 한 가지.
[나의 염원이었던 '죽음'이 사라졌으니, 빈 반지에 새로운 염원을 담아야겠지.]
스스로 반지의 주인이 되겠다고 했다.
레토니칼스가 내게 물었다.
[네 염원은 무엇이지?]
"염원을 말하면 들어줍니까?"
[염원은 반지의 그릇을 정하는 과정일 뿐, 그 힘을 담지 못한다면 빈 그릇에 불과하다.]
"그 힘은 어떻게 담습니까?"
[하늘에 맡겨야 한다. 바로 얻을 수도 영원히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말이 어렵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꼰대 티가 풀풀 풍겼다.
그릇, 일단 내 염원의 기준을 정하라는 말 같은데.
'기준이라….'
순간 칼 바스타인이 떠올랐다.
라웁 숲에서 칼은 내게 살아가는 '기준'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복수. 난 복수를 위해선 적과도 손을 잡을 수도, 죽이는 대상도 가리지 않아.]
그때 칼의 염원이자 기준은 복수였다.
그 자리에서 내 기준도 정했던 것 같다.
이 세계에 떨어진 순간부터 줄곧 유지해온 나만의 기준.
"생존."
망해가는 세상에서, 이 빌어먹을 악당들에게서 악착같이 살아남는 것.
그것이 나의 염원이자 기준이다.
[부질없는, 이해하기 힘든 염원이군.]
레토니칼스의 목소리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건 착각일까.
[하지만 너로서는 최고의 선택이었다.]
"…?"
최고의 선택?
무슨 뜻일까.
의문이 들었지만,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저릿한 감각에 반지를 살폈다.
반지가 붉게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활력이 돌고, 선명했으며, 생동감 있는 색감이었다.
두근―!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크게 뛰기 시작했다.
[염원은 '생존'으로 정해졌다. 그 빈 그릇은… '불사자'인 내가 채워주지.]
반짝 반짝.
두근 두근.
심장과 반지가 공명을 시작했다.
96화 최고의 스승
먹물처럼 칙칙했던 반지가 단풍처럼 물들며 선명한 색감을 띠기 시작했다.
새빨간 반지로 물드는 과정에 생동감이 넘쳤다.
반지에서 풍겨 나오는 새로운 아우라(Aura).
죽음과 완전히 반대되는 기운, 역동적인 활력이 느껴졌다.
"…어?"
그 변화를 멍하니 지켜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뇌를 쿡쿡 찔렀던 지독한 통증이 빠르게 가라앉더니 시원한 감각이 찾아왔다.
몸을 살피니, 좀비와 다를 바 없었던 끔찍했던 몰골이 시간이 역으로 흐르듯 복구되고 있었다.
찢기고 베인 수십 곳의 상처, 금이 간 뼈마디들이 삽시간에 아물고, 뒤틀린 뼈와 뭉개진 팔처럼 심각한 부상도 눈에 띄게 회복되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빠른 회복력이다.
이건 마치,
'심장을 두 개 가진 기분이네.'
두 개의 심장.
그중 하나로 보이는 붉은 반지를 살피니, 루비 보석 같은 광택이 흘러나왔다.
염원의 반지(Ring of Desire).
내 염원이 '생존'인 것처럼 내가 선택한 그릇에 맞게 생존과 관련된 힘이 채워진 것 같았다.
[최고의 선택이었다.]
최고의 선택.
레토니칼스가 남긴 말뜻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불사자의 심장을 지닌 상태로 '생존'을 염원의 그릇으로 정했으니, 생존에 최강자로 꼽히는 불사자의 힘이 그릇에 채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의도한 건 아닌데, 반지를 확보함으로써 불사자의 심장을 하나 더 얻게 된 효과를 얻었다.
'일격에 목이 잘리거나, 피떡이 되지 않으면 죽을 일은 없겠네.'
여분의 심장이 주어진 셈이다.
이는 앞으로의 선택과 행보에 많은 변화를 줄 것 같았다. 뭐든 유리한 방향일 테니 고민은 접어두었다. 고민은 나중에 여유가 있을 때 천천히 하면 된다.
목과 허리를 돌리니 잘 돌아간다.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이 되자, 펜리를 찾았다.
그녀는 횃불 아래 암벽에 기대어 쉬고 있었다.
다가가니, 그녀는 두 쌍의 크로우를 착용한 채 날 응시하고 있었다.
몸을 살짝 웅크린 채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는데, 마력 중독으로 힘겨워하는 티가 역력해 보였다.
마력 중독은 어떤 느낌일까.
갑자기 변태가 된 것 같아서 서둘러 잡생각을 털어버렸다.
"괜찮습니까?"
"그건 내가 할 말인데? 서서 기절한 줄 알았더니 아니네."
"기절은 더는 사양입니다."
기절은 곧 위기란 공식이 만들어진 만큼, 앞으로 기절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미신이라고 해도 확률이 높았거든.
"...."
그녀는 날 빤히 올려다봤다. 내가 뭐냐는 듯 제스처를 취하자, 그제야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웬 한숨입니까? 제가 한심해 보입니까?"
"누구라도 네놈의 전투를 지켜봤다면 나처럼 반응했을 거야."
"이상했습니까?"
"이상했냐고? 이상했지. 소름 돋을 만큼."
펜리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방금 전 내뱉은 한숨은 녀석의 정신이 정상이라는 사실에 안도한 한숨이었다.
이와 비슷한 기세를 훈련장에서 경험해 본 적이 있지만, 이번과는 달랐다.
조금 전 전장에서 녀석은 마치,
'피에 미친 악귀 같았지.'
본능뿐인 녀석의 초근접 전투는 상대로 하여금 원초적 공포를 자극했다.
오직 파괴 본능만 따르는 기괴한 전투 스타일. 파괴의 범주 안에는 스스로도 포함되어 있어서 전투 패턴을 읽을 수가 없었다.
'몰아붙일수록, 죽음에 이를수록, 상대하기 두려워지는 타입.'
적으로 두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아군인지 알면서도 한 번 더 상태를 확인해보게 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을 정도였으니까.
'그 존재의 영향이겠지?'
레토니칼스.
펜리는 그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크로우를 해제했다.
"진짜 괴물 새끼가 다 됐네."
"능력입니다. 괴물 새끼가 아니라."
"능력 좋아하네. 화톳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이 딱 네놈일 거다. 살면서 내게 세 번의 위기가 있었는데, 그중 두 번이 네 녀석과 엮인 사건이었어."
"도미닉 연구소와 폐광산, 하나는 뭡니까?"
"알아서 뭐하게?"
"다 좋게 끝나지 않았습니까?"
"좋게? 내 꼴이 지금 좋아 보여? 내가 너랑 또 엮이면 엘프가 아니라 난쟁이 새끼다."
"챙길 건 다 챙기면서 우는 소리는."
"죽을래?"
"이미 죽을 뻔했습니다."
지랄 같은 펜리년의 성격이면 지금쯤 주먹이 날아와야 하는데, 그녀는 벽에 기댄 채 씩씩거리고 있었다.
중독 상태로 그리 날뛰었으니 탈진 직전일 것이다.
난 염원의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통하려나?'
하나의 심장이 된 반지를 건넨다면 마력 중독을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될까?
[저 엘프 수준으로는 회복되기 전에 미쳐버릴 거다.]
"…응?"
갑작스러운 레토니칼스의 대답.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을 한다?
설마, 내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건가?
[행동을 느끼고 파악한 것뿐이다. 내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절로 미간이 좁혀졌다.
다행히 내 진짜 정체는 숨길 수 있을 것 같은데, 사소한 행동에도 생각을 읽히는 것을 보니 앞으로가 피곤해질 것 같았다.
당장 레토니칼스를 붙잡고 할 말이 많았지만, 일단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그르르륵―!
톱니바퀴 맞물리는 마찰음이 들려왔다.
시간이 된 것 같았다.
우린 자연스럽게 위를 올려다봤다.
철컥―! 소리와 함께 도르네프가 약속했던 두꺼운 밧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타이밍 참으로 뭐 같네.'
아니, 오히려 잘 된 건가?
다시 생각해보니, 밑에 좀비 떼가 득실거렸다면 도로네프는 밧줄을 내리기보단 문을 다시 닫았을지도 모르겠다. 사흘 후 다시 기약된 시간이 있었으니까.
우린 밧줄이 내려오길 기다렸다.
슬슬 손을 뻗으려고 하는데, 돌연 밧줄이 중간 높이에서 뚝 멈췄다.
잠시 후, 저 높은 암벽 구멍에서 도르네프의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위대하신 도르네프님이라고 외쳐봐!"
"닥쳐! 이 난쟁이 새끼야!"
"암고양이가 확실하군."
이상한(?) 확인 작업을 끝으로 밧줄이 머리맡에 멈춰 섰다.
"먼저 올라가."
"저 먼저요?"
"왜? 내 엉덩이 보고 싶어?"
그 반대도 싫다고 엘프년에게 강하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내 엉덩이까지 주물럭거린 여자와 괜한 심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거 가져가고."
"...이건."
"전대 가주들의 투구다."
가방 안에는 왕관을 닮은 투구들이 담겨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저주를 푼 증거들을 챙긴 모양이었다.
꼼꼼한 건 인정해줘야겠네.
밧줄을 잡고 잠시 주변을 둘러봤다.
시체는 사라졌지만 죽은 자들의 흔적은 남아 있었다.
폐광산의 망령이 사라졌으니, 역사로만 남았던 베네타의 광산은 다시 활기를 띨 것이다. 이는 또 소설과 전혀 다른 미래로 이어지겠지.
앞으로 어떤 변화가 찾아올까?
여러 고민 속에서 난 밧줄을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꼬르르륵―
"...."
배가 고팠다.
고민 전에 일단 배부터 채워야 할 것 같았다.
나의 생존에 굶주림은 치명적이었으니까.
* * *
베네타의 영주성.
"...."
무거운 눈꺼풀을 뜨자 실크 레이스가 달린 투명한 커튼이 내 코를 간질였다.
한동안 멍하니 바람이 살랑거리는 커튼을 올려다봤다.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잤었나?
침대와 붙어 있는 큼지막한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날 반겼다.
아, 아침에 잠깐 깼다가 다시 잠들었던 것이 떠올랐다.
얼마나 더 잔 거지?
도르네프의 성에 복귀한 지 이틀 동안, 난 먹고 자며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 평생 이렇게 살고 싶어라.
드넓은 침대 위에서 푹신한 이불을 부둥켜안고 빈둥대고 있는데, 누군가 문을 열고 다가왔다.
"오찬 시간이 한참 지났어요. 일어나요."
감미로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늘씬한 여인이 침대 옆 작은 테이블에 음식이 든 접시를 내려놓곤 날 내려다봤다.
바람에 살랑거리는 브라운 계열의 머리카락. 슈퍼 모델 뺨치는 미모의 엘프가 식사를 가져왔다.
영주성의 안주인, 샤르바딘이었다.
성의 안주인이 직접 챙겨주는 식사 자리.
'호강은 호강인데….'
더럽게 눈치가 보였다.
호탕한 면모의 도르네프이지만, 유독 샤르바딘과 관련해선 소심함의 극치를 보였기 때문이다.
내 식사를 직접 챙겨줬다고 하면 또 은근슬쩍 찾아와 날 사납게 노려볼 것이다.
"다른 사람을 보내도 되는데…."
"알다시피, 두 사람의 복귀는 비밀에 부쳐진 상태라서요. 한동안은 제가 직접 움직일 거에요."
"검은 장미가 시중을 붙여준다고…."
"아니요! 제게 은인인 분인데 소홀히 대하면 안 되죠! 식사와 잠자리는 제가 직접 챙길 거예요."
아니, 괜찮아. 괜찮다고!
특히, 잠자리 얘기는 도르네프에게 제발 하지 마.
샤르바딘의 과한 관심만 빼면 지내기 최고의 장소인데, 저 엘프도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계속 안 볼 수도 없는 것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는 성주가 묵고 있는 꼭대기 층이었다.
아무나 오를 수 없는 층이라, 우리 존재를 숨기기 위해 잠시 묵게 된 숙소인데, 샤르바딘 바로 옆 방인 게 문제였다. 심심하면 찾아와서 귀찮게 군다.
'저 엘프년이 얼른 깨어나야 하는데.'
달콤한 수프에 빵을 찍어 먹으며 옆 침대를 응시했다.
베개에 금발을 늘어트린 구릿빛의 늘씬한 엘프가 보인다.
암고양이 펜리였다.
약한 모습을 절대 보이지 않더니, 대장장이 정원을 벗어난 후 마차를 타자마자 기절해버렸다. 그 이후로 지금껏 의식을 차리지 못했는데, 치료사 말로는 신녀인 넬라가 오기 전까진 치료가 오래 걸릴 것이라 했다.
단시간에 회복시키려면 엘프석이 필요하다나?
"엘프석은 아직입니까?"
"넬라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제작 중인데, 알다시피 엘프석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생각했던 것보다 엘프석의 가치가 더 귀한 것 같았다. 그걸 이번 의뢰에 몽땅 사용한 셈이니, 그녀의 속이 무척 쓰렸을 것이다.
'그래도 저걸 얻었으니까. 오히려 이득이려나.'
오물오물 씹던 빵을 꿀꺽 삼킨 후 침대에서 일어나 펜리에게 다가갔다.
평소에 앙칼진 모습과 달리 이리 죽은 듯이 자고 있으니 순해 보였다.
저 잠자는 모습이 내겐 가장 호감 가는 모습이 아닐까?
조용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전생에 벨트와 사랑하는 사이였나? 독하다 독해."
"저 벨트가 뭐길래 그렇죠?"
"대장장이 정원에서 가져나온 아티팩트입니다."
마력의 루비 벨트.
주인의 마력을 한 단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는데, 마력에 목마른 펜리에겐 보물 같은 물건이었다.
가주들의 투구를 증거로 제시하고 곧장 저 벨트를 도르네프에게 요구했는데, 내가 벨트를 먼저 채갈까 봐 어지간히 신경 쓰였나 보다.
정신줄을 놓을 때부터 지금까지 저 벨트를 보물처럼 부둥켜안고 있었다.
"...으으."
내가 벨트에 손을 대자 평온했던 암고양이의 인상이 앙칼지게 변했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는데, 이게 가능해?
"…의식이 없는 거 맞죠?"
"그, 그럴걸요?"
눈이라도 부릅뜨며 노려볼까, 조심스레 벨트에서 손을 뗀 후 식탁에 앉았다.
짧은 식사 시간 동안 샤르바딘은 반대편에 앉아 바깥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중요한 이야기도 있고, 쓸데없는 이야기도 있었다.
정보 반, 수다 반이다.
나긋나긋한 조잘거림 사이로 보드란 바람이 불어와 내 얼굴을 간지럽혔다.
대충 맞장구를 쳐주며 창밖을 바라봤다. 티타임 중인데, 카페에 앉아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겼던 여유가 떠올랐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네.
한참 조잘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집사의 호출을 받고 자리를 비웠다.
"또 올게요!"
"…네."
도르네프도 폐광산 건으로 긴 시간 자리를 비우다 보니,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창밖으로 걸어가니, 어느새 태양이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평온한 햇살이 베네타를 비춘다. 그 광경을 조용히 바라보던 나는,
턱―
창문을 닫으며 생각에 잠겼다.
샤르바딘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바깥소문을 알 수 있고, 토바른 내 심상치 않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블라이어.
카멜 녀석이 슬슬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고 있다.
'아직은 괜찮아.'
바깥일보단 내겐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난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이 자세를 유지하는 데에 큰 이유는 없었다. 그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기 편한 자세라고 해야 하나?
두 눈을 감으니, 심장 박동이 고요한 파동처럼 들려온다.
"레토."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불사자 레토니칼스.
이 녀석을 어떻게 구슬려야 할까?
97화 최고의 스승(2)
누가 보면 온종일 침대에서 뒹구는 동네 백수처럼 보였겠지만, 내 머리는 일개미처럼 쉴 새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 반년이 지난 지금, 내겐 많은 능력이 생겼다.
인첸트와 정신 방벽.
넬리토리에서 획득한 고대 문양.
특성 개화 능력인 성력과 신명 사냥꾼.
메인 스토리의 보상인 레토니칼스의 심장. 그리고 이번 폐광산에서 획득한 흡혈의 고리와 염원의 반지까지.
악착같이 살아남으며 다양한 힘을 얻었지만, 정작 완벽하게 익혔다고 확신하는 건 단 한 개도 없었다.
스킬만 익혀놓고 숙련도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 숙련 방법을 몰랐다는 것이 정확했다.
획득 정보야 소설을 통해 알고 있지만, 수련 방법은 몸으로 직접 익혀야 하는 만큼 단순히 알고 있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지금껏 실전을 통해 그 능력들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지만, 그 한계가 명확했다.
'이곳은 현실이고, 난 천재가 아니니까.'
게임처럼 단축키 한 번에 스킬이 나가고, 사용횟수마다 스킬 레벨이 오르는 간단한 구조가 아니었다.
직접 부딪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공부하듯 발전시켜나가야 했다.
난 그 발전 시간을 단축해줄 존재로 레토니칼스를 떠올렸다.
이 녀석이라면 날 단시일 내에 강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말이다.
지금은 바깥에 신경 쓸 데가 아니라 내실을 다져야 할 시기다.
내가 획득한 능력을 다듬을 시간.
그러기 위해선 심장에 깃든 이 녀석의 도움이 절실했다.
'일단 대화는 가능해졌는데….'
레토니칼스와 대화의 물꼬를 튼 시기는 이틀 전, 베네타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을 때였다.
펜리는 벨트를 얻자 바로 기절했고, 도르네프는 폐광산의 저주가 풀리면서 준비해야 할 미래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 조용한 공간에서 난 레토니칼스를 불렀다.
무시로 일관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는 내 부름에 쉽사리 응답했다.
그래서 물었다.
[당신의 진짜 정체가 뭡니까?]
내가 그에게 건넨 첫 번째 질문이자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다. 심장에게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겪어보기 전까진 알지 못했으니까.
그 질문에 레토니칼스는 '초월성(超越性)'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표현했다.
절대자의 강력한 의지가 뭉쳐서 만들어진 독립적인 에너지 덩어리 말이다.
간단히 말하면 영혼에서 떨어져 나온 영혼 파편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대화를 통해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는데, 불사자란 실체가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육체를 없앴고, 영혼마저 소멸시켰다.
[하지만 완벽한 안식에는 실패했다.]
레토니칼스는 영원한 안식을 계획했지만 실패했다.
스스로의 존재가 그 실패의 증거라나?
녀석과 대화하면 이따금 이런 생각이 든다.
'뭔 개소리야?!'
솔직히 반은 알아듣고, 반은 못 알아먹겠다.
상식 밖의 녀석과 대화하려니 가슴이 답답하고 덥다.
창문을 괜히 닫았나?
"이름 레토가 어때서요?"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있다. 가볍게 여긴다는 건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럼 당신이 불사자 레토니칼스입니까?"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네가 레토니칼스냐, 아니냐.
이틀 동안 이 주제를 가지고 이 녀석과 논쟁을 펼쳤다.
중요한 내용은 아니었다.
그저 녀석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한 밑밥 깔기였다.
그런데 질문을 던질 때마다 모호한 답변을 내놓거나, 궤변을 늘어놨다.
특히,
[실체는 소멸했지만, 난 여전히 세상에 존재한다.]
죽었는데, 살아있다.
'술은 먹고 운전은 했지만 음주 운전은 아니었다'와 뭐가 다른 소린지 모르겠다.
뭐든 철학이 담긴 선문답으로 돌려 말하는 꼰대 스타일.
머리가 지끈거렸다.
"실체는 소멸했다면서요? 그럼 당신은 다른 존재 아닙니까?"
[난 그 실체에서 뻗어 나온 분신체다.]
"분신체?"
[세계수의 나뭇가지를 꺾어 심는다고 그 나뭇가지가 세계수가 아닌 것은 아니지. 분신체는 그런 존재다.]
분신체.
실체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
신명 사냥꾼으로 각성했을 때 아레나 후아튼의 후광에서 본 신명이었다.
'레토니칼스의 분신체.'
내 방해로 분신체로 각성하는 데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면 아레나는 레토니칼스의 분신체로 세상을 활보했을 것이다.
분신체는 어떤 존재일까?
분신체로서 그녀는 불사자의 길을 걷는 것일까?
"분신체는 불사자입니까?"
[멍청한 질문이로군. 다른 절대자조차 담지 못하는 불사의 권능을 한낱 숙주 따위가 담을 수 있을까?]
"...."
크리스탈 미믹도, 아레나도 녀석의 숙주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
이건 좀 깊게 파볼 필요가 있었다.
"그럼 숙주를 통해 얻으려는 게 뭡니까?"
민감한 질문이지만, 고민 없이 질문을 던졌다.
그동안 살핀 녀석은 답을 회피하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상 답변은 '숙주를 통해 불사자의 실체를 부활시킨다'였다.
그런데,
[난 완벽한 죽음을 원한다.]
"완벽한 죽음? 실체는 소멸했다고...."
[실체는 소멸했다. 하지만 이 세계는 내 죽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억겁의 계획은 실패했고, 난 그 염원을 이어가야 한다.]
아, 모르겠다.
다만, 세계가 녀석의 죽음을 인정하고 있지 않다는 말은 이해했다.
아레나의 신명 각성으로 '레토니칼스'란 이름이 신명으로 떴다는 건, 이 세계가 불사자의 존재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 세계에서 완벽히 지워지는 게 당신이 바라는 것입니까?"
[처음으로 말이 통했군.]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흥분하는 건가?
[난 죽어야 한다. 그것도 완벽하게.]
"...."
돌겠네.
트롤 저리 가라 할 불사의 심장을 얻어 기껏 살만해졌더니, 심장이 죽고 싶단다.
그것도 완벽하게.
트롤도 이런 트롤이 없었다.
아, 트롤이 맞는 건가?
재생력 하나는 진짜였으니까.
근데 죽어?
네가 죽으면 나는?
넌 내 심장인데?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을 읽다 보면 스토리 내에서 수많은 개또라이들을 접하게 된다.
근데 내 안에 깃든 이 녀석은 그 개똘아이들도 한 수 접어주는 미친 상똘아이였다.
어느새 난 침대 위에 벌떡 일어나 있었다.
이 빌어먹을 소설은 정신적으로도 쉴 시간을 안 준다.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그, 그래서 계획이 뭡니까?"
설마, 이것도 말해줄까 싶었다.
[없다.]
"…네?"
[억겁의 세월 동안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다. 그리고 실패했지. 실체는 세상에서 지웠지만, 초월성은 지울 수 없었다.]
"당신이란 존재 말입니까?"
[그렇다. 내 존재가 실체의 영원한 안식을 방해하고 있다. 불사자는 죽지 않은 굴레를 타고 난 존재. 세계는 그 굴레에 맞게 실체를 언제고 부활시킬 것이다. 그럼 짧은 안식도 끝이 나겠지.]
심장 박동이 약해진다.
침울해하는 건가.
녀석의 감정 변화를 알 수 있으니, 좋긴 한데. 이게 내 심장이라 마냥 좋아할 수가 없었다.
"지금껏 스쳐 갔던 숙주들이 많습니까?"
[셀 수 없다. 생명체라 부를 수 있는 모든 종(種)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그들은 모두 어떻게 됐습니까?"
크리스탈 미믹, 아레나 후아튼.
전(前)주인들의 말로를 알고 있기에 답이 예상은 됐지만, 확실히 할 필요가 있었다.
[모두 죽었다.]
"당신이 원한 겁니까?"
[그랬다면 불사의 권능 일부를 심장에 넣지 않았겠지. 숙주가 죽으면 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내겐 번거로운 일이지.]
"하지만 그들은 모두 죽었습니다."
[피조물이란 것을 간과했다. 초월성을 몸 안에 담고 제정신을 유지하는 숙주는 손에 꼽히더군. 분신체로 각성을 완벽히 맞춰도 동화률 10프로가 최고치였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도 몇 해가 지나면 미치거나 육체가 버티지 못했다.]
"그럼 저도...."
[넌 특별하다.]
순간, 심장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의식이 없는 펜리가 몸을 뒤척일 정도로 그 열기는 뜨겁고 강렬했다.
[염원의 반지는 나의 실체가 사용하던 물건이다. '초월적 존재'가 아니면 접촉만으로도 정신이 붕괴되지.]
"…네?"
난 놀란 표정으로 반지를 살폈다.
생동감이 넘치는 붉은 색감의 반지.
내 오른손 중지에서 반지의 아우라가 풍겨나오고 있었다.
접촉하면 정신이 붕괴된다고?
이리 멀쩡한데?
[게다가 반지의 염원이 '생존'으로 정해지면서 내 초월성도 일부 흡수해간 상태다. 정확한 동화율은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다. 넌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내 숙주로 완벽한 존재다.]
"...."
숙주로서 인정을 받았다.
이걸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다행인 건 그가 내게 무척 호의적이라는 사실이었다. 염원의 반지를 얻으면서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폐광산의 저주를 해결하려고 했던 일이 레토니칼스의 인정을 받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았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대체 불가능한 숙주.
레토니칼스에게 난 그런 존재다.
어떻게 이용하면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녀석을 끌고 갈 수 있을까.
고민의 원점은 다시 '이름'으로 돌아왔다.
"그럼 레토니칼스란 이름부터 지우는 게 어떻습니까?"
[이름을?]
"이름에는 존재를 증명하는 힘이 있다면서요. '완벽한 죽음'을 바라는 게 아닙니까?"
[…아.]
이 세상에서 완벽한 생존을 바라는 내게 완벽한 죽음을 바라는 변태 같은 심장이 들어왔다.
기가 막혔지만, 심장을 축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같이 가야 했다.
[이 단순한 이치도 생각지 못하다니 헛살았군. 아주 좋은 생각이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토."
[레토, 레토라….]
새로운 이름에 감회를 느끼는 것일까.
이번만큼은 녀석도 레토란 이름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크게 뛰는 심장 박동이 기분이 무척 좋다는 것을 말해줬다.
내 심장을 느끼면서 저 녀석의 감정을 알아야 하는 거야?
나중에는 헷갈리면 어떡하지?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이 녀석의 것인지, 내 것인지 말이다.
그리고 한 가지 깨달았다.
나와 레토는 심장으로 연결된 사이라는 것.
즉, 서로에게 거짓말이 안 통한다.
애초부터 녀석을 의심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레토."
[말하라.]
절대자로 살아왔던 기억 때문인지, 말투가 영 재수가 없다.
그래도 이름을 바꾼 것을 보면 꽉 막힌 꼰대는 아닌 것 같으니 잘 구슬리면 앞으로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니, 도움에 따라 내 운명이 바뀔지도.
지금도 그렇다.
"절 강하게 만들어주십시오.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만큼."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만큼이라….]
죽음을 간절히 상대에게 죽지 않은 방법을 알려달라는 참으로 아이러니(irony)한 부탁이다.
하지만 어쩌겠어.
이 세계관의 컨셉은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이다.
강한 악당들을 꾸준히 등장할 것이다. 그 재앙으로부터 살아남으려면 무력이 필요했다.
녀석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일단 내가 살아야 했다.
[좋다.]
그걸 레토도 모르지는 않는지,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했다.
후―
길게 숨을 내뱉으며 침대에 주저앉았다.
일단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상황은 만들어졌다.
절대적 아군 하나가 늘었다.
절대자의 파편으로 모든 종(種)을 숙주로 삼으며 억겁의 세상을 바라봤던 존재.
심지어 그는 나 자신보다 내 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
이보다 완벽한 스승을 어디 가서 찾을 수 있을까.
최고의 스승을 얻었다.
98화 포식자가 되는 방법
절대자의 가르침!
벌써부터 몸이 달아올랐지만, 도르네프의 부탁을 받은 터라, 섣불리 성안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아침이 되는 데로 훈련할 장소부터 알아봐야겠네.'
도르네프에게 부탁하면 괜찮은 장소로 구해줄 것이다.
잠시 눈을 붙일까 하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레토와 대화할 때 긴장해서인지 배가 고팠다. 이대로는 잠이 안 올 것 같아서 살금살금 펜리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의 침대 옆에 놓인 과일 접시가 보였다.
깨어날 펜리를 위해 준비해 둔 간식거리인데, 지금껏 내 간식거리로 전락한 상태였다.
오늘은 싱그러운 사과.
그녀 앞에서 사과 하나를 시원하게 베어 물었다.
"뺏어 먹으니까 더 맛있네."
이 펜리년아 어떠냐.
대놓고 대들진 못하니, 이렇게라도 복수하고픈 마음이었다.
접시를 깨끗이 비우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나아가 혈맹까지 맺는다면 홀로 분투하던 생존 서바이벌은 더는 안 해도 된다.
안전한 둥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제야 좀 살만해졌네.'
고생 끝 행복 시작이란 말을 떠올리며 푹신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내일은 더 멋진 하루가 되리라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꿀 같은 숙면도, 꿈꿨던 행복도,
[일어나라.]
레토의 부름에 산산조각 부서졌다.
"무, 뭡니까? 갑자기."
[쇠몽둥이를 준비해라. 훈련 시작이다.]
다음 날부터 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 * *
"어디 가셨지?"
오늘도 어김없이 숙소를 찾아온 샤르바딘은 음식이 가득 든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방 안에는 마스터인 펜리만 덩그러니 누워있었다.
아서의 하루는 단순했다.
늦은 오후까지 침대에서 뒹굴거리다 자신이 찾아오면 식사를 함께하곤 했는데 침대가 오늘은 휑하니 비어 있었다.
함부로 돌아다닐 수 없는 신분이니, 곧 돌아오리라 판단하고 침대에 앉아 기다렸다.
"오늘은 중요한 소식을 알려 주려고 일찍 왔는데."
엘프석 제작이 완료되어 넬라가 곧 방문할 것이라 소식을 전해왔다.
넬라의 부탁으로 바깥 정보를 아서에게 자연스럽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는데, 오늘은 단순히 얼굴만 보고 가면 될 것 같았다.
넬라가 직접 그를 만나보겠다고 했으니까.
'또 심심해지겠네.'
수다 떨 대상이 사라지니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아서의 빈자리를 손바닥으로 쓸었다.
특별한 기운을 지닌 인간.
피 웅덩이에서도 느꼈지만, 그의 기운은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마스터는 아직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말이다.
"늦네."
수프가 차갑게 식자, 그녀는 울상을 지었다. 시종을 부를까 고민하던 그녀는 고개를 흔들곤 성주의 집무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주님은 원로들과 회의 중이십니다."
"기다릴게요."
도르네프는 폐광산 건으로 무척이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신의 대(代)에서 뿌리나 다름없던 광맥을 되찾은 상황이라 준비할 것이 한둘이 아니라고 들었다.
조용히 창가 의자에 앉아 티타임을 즐기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며 도르네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 내 피앙새 샤딘!"
애써 밝은 표정을 짓는 도르네프였지만, 그녀는 그의 피곤한 분위기를 바로 읽어냈다.
얼굴 밑이 퀭한 것이 원로들에게 꽤나 시달린 것 같았다.
"바쁜데 방해해서 미안해요. 도네프."
"무슨 말을! 한동안 얼굴을 못 봐, 너무너무 보고 싶었소!"
둘은 잠시간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잠시 후, 샤르바딘은 그에게 방문 이유를 말했다.
"아서… 아니 알렉스님은 어디 계신가요?"
알렉스.
지금은 아서 클레이튼의 가명이었다. 자리와 상관없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건 펜리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
그 물음에 도르네프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왜 찾는 것이오?"
"온종일 자리를 비운 것 같아서요. 눈에 띄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는 지금 다른 곳에 있소."
"어디요? 말해주세요."
도르네프는 사흘 만에 찾아온 자신의 피앙새가 아서놈을 찾자 눈가를 실룩거렸다.
그녀를 매일 보진 못하더라도, 시종들을 통해 일과를 빼놓지 않고 보고 받았다.
대화 상대로 아서와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들었다.
직접 식사도 챙겨주고, 잠자리도 봐준다고 했을 땐 질투심마저 들었는데, 이젠 자리에 없다고 자신을 찾아와 그를 찾았다.
'부러운 놈!'
그래서 녀석이 오늘 새벽 자신을 찾아와 훈련에 관한 것을 부탁했을 때 흔쾌히 부탁을 들어줬다.
"그는 지금 성주 전용 훈련장에 있을 거요."
"훈련장이요? 갑자기 그곳은 왜…."
"오래 쉬어서 몸을 풀고 싶다고 하더군. 앞으로 그곳에서 지낼 시간이 더 많을 거요."
"그럼 식사를 훈련장으로 가져다줘야겠네요."
샤르바딘의 마지막 말에 도르네프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자신조차 이런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거늘.
감히 피앙새의 관심을…!
그때 기사 단장 나토네가 도르네프를 찾아왔다.
"무슨 일이냐?!"
"…아, 저 그게."
사나워진 성주의 눈빛에 나토네는 잠시 움찔하곤 부러진 쇠몽둥이를 어색하게 들어 올렸다.
핏자국이 묻어 있었지만, 나토네는 굳이 그런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강도를 더 늘려야 할 것 같습니다."
"맷집이 그 정도라고?"
"여기 흔적을 보면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 곧 베네타의 은인이 될 신분인데, 도와줄 땐 확실하게 도와줘야지. 대장간에 일러놓을 테니, 통짜 강철로 가져가게. 그럼 절대 부러질 일은 없겠지."
"…통짜 강철 말입니까?"
"기사들도 부족하다고 했지? 손맛이 매운 녀석들로 보내주지. 이참에 반쯤 죽여… 아니 잘 도와주게."
"...."
샤르바딘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무슨 훈련이길래, 도네프는 실실거리고 나토네 경은 한숨을 내쉬는 것일까.
"궁금하오?"
"나토네경을 따라가도 될까요?"
"출입증을 따로 내줄 생각이었으니, 이참에 경을 따라 구경이나 하러 가시오."
성주 전용 훈련장이라 성주의 허락이 있는 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다만, 도르네프는 출입증을 그녀에게 써주며 확신했다. 이번 방문을 끝으로 두 번 다시 훈련장을 찾지 않을 것이라 말이다.
도르네프는 오전에 찾아온 아서를 떠올렸다. 훈련을 도와줄 기사들을 원했는데, 훈련 내용을 듣곤 바로 녀석에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미친놈.
'정신 나간 녀석이 분명해. 아니면 폐광산의 저주가 녀석에게 옮겨진 건가?'
그만큼 녀석의 훈련은 도와주는 기사들도 질색할 만큼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무실을 나온 샤르바딘은 나토네에게 양해를 구하곤 음식이 담긴 바구니를 들고 왔다.
훈련이 끝난 후 식사를 챙겨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토네는 음식 바구니를 보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못 먹을 겁니다."
"네?"
"아닙니다. 따라오시죠."
설명이 굳이 필요할까.
한 번만 봐도 그 뜻을 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다 그자의 훈련에 엮어서 이런 고생을 하게 됐는지, 나토네를 한숨을 내쉬곤 대장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통짜 쇠몽둥이 묶음을 어깨에 짊어진 나토네가 성주 전용 훈련장으로 향했다. 조용히 뒤를 따르던 샤르바딘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나토네경이 직접 이런 일을 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그럼 기사들을 시키면 되잖아요."
"거동이 가능한 드워프가 저밖에 없어서 그렇습니다."
"훈련이 정말 고된가 보네요."
훈련이 고되다.
그녀의 말에 나토네는 헛웃음을 흘리곤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문 앞에 섰다.
성주 전용 훈련장은 기사단의 훈련장과 붙어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벽돌로 높은 벽을 쌓아서 함부로 안쪽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끼이익―
나토네가 철문을 열자, 문틈 사이로 거친 바람이 훅 불어닥쳤다.
샤르바딘의 보드란 머리카락이 거칠게 흩날렸다. 짙은 열기를 담은 것처럼 바람이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욱!"
그녀는 뒷걸음질 치며 코를 틀어막았다.
짙은 피비린내가 맡아졌다.
열린 문틈으로 훈련장 바닥이 비췄는데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토네가 문을 활짝 연 순간, 그녀는 바구니를 툭 떨어트렸다.
충격적인 광경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게 훈련이라고요?"
"뭐,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토네는 통짜 쇠몽둥이를 움켜쥐며 훈련장 바닥을 응시했다.
"포식자가 되는 방법이라고."
거기엔 피투성이가 된 아서가 쓰러져 있었다.
* * *
[의식을 놓지 마라. 포기한 순간 훈련은 물거품이 된다.]
"...시…바ㄹ"
흙바닥 한가운데에 주저앉아 있었다.
바닥을 짚고 있는 두 무릎, 두 손에 감각이 없다. 부들부들 떨고 있는지, 부러진 건지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감각이 없으니 살 것 같았다.
하도 얻어맞아서 솔직히 너무 아팠거든.
주르륵―
갑자기 시야가 붉어졌다.
이마에서 핏물이 흘러나와 두 눈동자를 적셨다.
눈을 깜빡거리고 싶지만 참았다.
눈을 감은 순간, 의식을 잃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핏물은 두 눈을 타고 흐르더니 바닥으로 뚝뚝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가 깨진 건지, 이마가 깊게 찢어진 것 같았다.
[부족해. 한참 부족하다.]
두근―!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몸의 피가 혈류를 타고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염원의 반지가 붉은빛을 토해냈다. 하지만 시원한 감각 대신 미칠 듯한 답답함이 올라왔다. 치유 속도가 터무니없이 느렸다.
레토의 짓이다.
[상처가 아무는 감각, 뼈가 붙는 느낌, 심장을 따라 흐르는 혈맥의 소리를 들어라. 살아있는 감각을 뇌리에 천천히 각인시켜라.]
"…커억, 헉, 헉."
육체가 느릿느릿 회복되는 과정.
그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죽음 직전에서 허우적거리는 고통.
그 고통에 정신이 각성 상태로 흘러갔다.
감각이 곤두서며 시간이 느리게 흘러간다.
모든 소리가 웅웅 일그러져 들렸다.
손가락 끝의 작은 감각마저 크게 느껴지는 상태.
당연히 고통은 배가 되었다.
아파서 말조차 안 나온다.
"끄어억!"
레토는 이 상태는 빈사 상태라고 표현했다.
마라톤을 완주한 이후로 다시 백 미터를 전력 질주하는 고통이다.
펄떡펄떡 뛰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느껴졌다.
[기절하거나 주저앉아 있는 건 먹잇감들이나 하는 짓이다. 포식자가 되려면 일어나라. 그리고 움직여라. 상대를 물어뜯어라.]
"...미친, 커억!"
끊어지려는 의식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데 여기서 일어나라고? 움직이라고? 싸우라고?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다.
까드득 주먹을 움켜쥐었다.
바닥에 긁힌 손톱들이 우수수 부러졌지만, 폐부가 찌그러지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움직여라!]
이를 빠드득 갈며 고개를 들었다.
붉은 시야.
흙바닥에 대(大)자로 퍼질러 누워있는 드워프들이 보인다.
일부는 주저앉은 채 날 괴물 바라보듯 보고 있었다.
가슴을 헐떡이는 것이 그들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지쳐있었다.
망할 난쟁이들.
몽둥이를 휘두른 놈들이 나보다 먼저 나가떨어졌다.
저래 봬도 3성 이상의 기사들이었다. 난 마나 없이 순수 육체 능력으로 저들을 상대했다.
아니, 상대가 아니라 일방적인 구타였다. 마나를 사용하는 기사들과 맨몸으로 싸우라니, 미친 소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했다.
레토가 요구했으니까.
절대자이니, 뭔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쥐뿔도 없었다.
이 빌어먹을 절대자는 호흡조차 죽을 듯이 괴로운 빈사 상태가 돼서야 훈련을 시작한다고 말했다.
시발, 여기서 뭘 하라고.
인간이라면 절대 무리해선 안 되는 기력이 말라비틀어진 상태.
본능이 더 움직이면 죽는다고 내게 겁을 준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어가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
[레토니칼스의 육체에 한계 따윈 없다. 스스로 한계에 선을 긋는 행위는 나약한 종(種)들이나 하는 짓거리다. 벽을 부숴라. 그게 내 훈련법의 첫걸음이다.]
극한의 고통만 연구하는 변태 같은 스승을 만난 것 같았다.
상또라이가 분명했다.
"...."
흔들 인형마냥 고개만 까닥까닥하는 정도.
그것이 빈사 상태에 빠진 나의 한계이자 움직임이었다.
움직이라고?
미친 소리다.
난 본능에 잡아먹혔고, 결국 의식의 끈을 놓았다.
바닥에 코를 박고 쓰러졌다.
[이 정도로 나약하다니….]
흐릿한 의식 너머로 레토의 탄식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난 옅게 미소를 지었다.
기절하는 것이 이렇게나 행복한 경험이었나?
전율이 이는 카타르시스마저 느껴졌다.
기절하면 마(魔)가 끼는데 큰일이었다.
그렇게 내 첫날의 훈련이 끝이 났다.
99화 존재의 격(格)
[일어나라.]
"...헉!"
레토의 부름에 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녀석이 심장을 자극하며 깨우니, 무조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잘만 이용하면 완벽한 경계용 알람인데,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꽤나 귀찮아질 것 같았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둡다.
뿌연 구름에 걸린 달이 현재 늦은 밤임을 알려줬다.
훈련이 뒤늦게 떠오르자 팔다리를 살폈다.
분명 온몸이 망가진 채 기절했는데, 컨디션이 훈련 전과 똑같았다.
찌그러질 듯이 괴로웠던 호흡도 평온했다.
조금 전 그 정신 나간 훈련이 단순한 악몽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이해?"
[네놈이 이상하다는 뜻이다.]
"전 당신이 훨씬 더 이상한데요? 이딴 훈련을 어떤 인간이 버팁니까?"
정예 드워프들에게 둘러싸여 복날에 붙잡힌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처음 훈련 내용을 들었을 땐 나도 드워프들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지만, 레토의 말이니 강력히 훈련을 밀어붙였다.
그런데 지금은?
솔직히 또 하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았다. 이건 인간이 버틸 수 있는 수련이 아니었다.
레토니칼스의 심장과 염원의 반지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너라면 버틸 줄 알았다. 나와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니까.]
"그게 이상한 겁니까?"
[종(種)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하는 정신력으로 나와 대화를 나눈다는 게 가능하다고 보나? 염원의 반지도 마찬가지다. 존재의 '격(格)'이 맞지 않으면 주인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상하다고 할 수밖에.]
"존재의 격(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레토의 말에서 한 가지 능력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레토의 격에 맞게 내 정신을 보호해주는 능력.
어찌 보면 진짜 나란 존재에게 선물로 주어진 특별한 힘이었다. 위기로부터 수없이 나를 구해준 능력이었으니까.
'정신 방벽.'
정신 방벽을 떠올린 순간 레토의 말이 흘러나왔다.
[누군가의 보호를 받고 있군.]
"…누군가의 보호?"
[인간치곤 격이 터무니없이 높아서 의문이 들었는데 이제야 이해가 돼. 보호를 받았던 거지 격이 높았던 것이 아니야. 누구지? 나조차 인지하지 못할 가호라면 나의 격보다 높을 수 있다는 건데, 마땅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누구긴 누구야, 날 이 세계로 떨어트린 놈이겠지. 물론, 난 그놈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연출한 신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드물게 레토가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 정도로 충격적인 일인가?
나야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알게 된 능력이라 그 특별함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하지만 레토는 아닌 것 같았다.
레토는 정신 방벽을 가호라 해석했다
누군가가 나를 보호하는 특별한 힘 말이다.
[그 가호는 나에게도 특별하다.]
"레토, 당신에게도 말입니까?"
[가호가 없었다면 네 존재는 내가 거쳐 갔던 수많은 숙주와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염원의 반지도 마찬가지다.]
"폐광산의 죽은 자들처럼 됐을 거라는 말이군요."
[그렇다. 가호가 너와 나의 안전판 역할을 하는 셈이지.]
"만약 가호가 풀린다면...."
[나의 격에 잡아먹히거나, 극복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아직 네겐 성장할 시간이 있으니까.]
"...."
이렇게 직접 들으니 새삼 정신 방벽이 얼마나 특별한 능력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얻은 능력 중 정신 방벽이 가장 강력한 능력이 아닐까?
게다가 레토가 내게 강력한 위기의식을 심어줬다. 성장하지 않으면 정신 방벽이 사라진 그날 흔한 숙주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진짜 능력이 사라지면 어떡하지?
일종의 시간제한이 있는 초심자 패키지 같은 거 말이다.
강해져야 하는 강력한 동기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그럼 훈련에 더 목마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 훈련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
레토는 침묵했다. 내 스펙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보였다.
그 짧은 침묵은 내게 억겁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레토가 날 포기하면 곤란하다.
단 하루지만 지옥을 맛봤다.
다만, 끔찍한 훈련임에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나도, 암살자였던 전(前)주인의 기억에도 오라나 마력 같은 특별한 능력을 성장시키는 전문 지식이 없었다.
능력이나 아티팩트는 스토리를 토대로 얻을 수 있지만, 얻는 능력들을 성장시키려면 레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계승자의 길을 걷는 것과 같네.'
절대자 레토니칼스의 뒤를 잇는 계승 의식 말이다. 다만 어제 그 미친 훈련처럼 절대자의 상식 속에 날 집어넣는 거는 사절이다. 내가 버티지 못할 테니까.
[훈련의 강도를 한계 아래로 낮추면 된다. 하지만 내가 바라본 강함에는 이르지 못할 것이다.]
"당신이 바라본 강함은 무엇입니까?"
[죽지 않는 것.]
레토의 마지막 말이 내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이 세계는 대체 얼마나 강해져야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일까.
레토가 바라보는 적들은 어떤 존재들일까.
갈 길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아쉽나? 맥박이 가라앉는군.]
"뭐, 노력해봐야죠. 당신이 포기하지 않은 것에 만족합니다."
[아쉬워할 필요 없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니까.]
"무슨 뜻입니까?"
[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다. 그 능력을 성장시킨다면 부족한 부분을 충분히 채우고도 남는다. 아니 더 강해질지도.]
"무슨 능력 말입니까?"
[속성을 부여하는 힘.]
속성을 부여하는 힘.
내 선천적 신력인 인첸트를 말하는 것 같았다.
레토는 내 육체의 일부인 만큼, 내 능력을 나보다 잘 아는 존재였다.
그는 인첸트의 능력에서 어떤 가능성을 찾은 것일까.
[속성을 꼭 장비에만 담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무, 뭐라고요?"
[육체의 부족한 부분을 속성 부여로 채울 생각이다. 네 육체라면... 아마 버틸 수 있겠지.]
"아마…?"
인첸트의 과부하를 버티지 못하고 산산조각 부서졌던 단검들이 떠올랐다. 드워프 제(製) 무구 정도는 되어야 인첸트의 과부하를 버틸 수 있었다.
'내 몸뚱이가 드워프 제보다 단단할 리가 없잖아?'
몸이 부서질 것이다.
또 누굴 죽이려고.
이 사실을 레토에게 알리자, 그는 오히려 한심한 듯 말했다.
[그건 속성을 부여하는 통제력 부재다. 속성 과부하 문제는 최근에 생겼을 것이다. 안 그러나?]
"그, 그러네요?"
4성에 오른 직후 속성을 부여하는 힘이 강해지면서 과부하 현상이 생겼다.
이 능력도 통제할 수 있는 거였나?
[손볼 곳이 더 많아졌다. 잠자는 건 포기해야겠군.]
"아니,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립니까? 인간은 잠을 자야죠!"
수면욕은 인간의 욕구 중 가장 강한 욕구로 꼽힌다. 단 하루만 못 자도 정신이 몽롱해지고, 사흘이 넘어가면 제정신으로 버티는 게 불가능했다.
식욕은 참고 스스로 굶어 죽을 수도 있지만, 수면욕은 인간이 절대로 참을 수 없는 욕구였다.
레토는 빈말과 거리가 먼 꼰대 중의 꼰대.
시발, 진짜 안 재울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준다면 수면 없이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다. 죽음 없는 고통은 성장의 동력이 된다. 잠재력 성장에도 도움이 되겠지.]
"...미친, 한 달이 말이 됩니까?"
[네놈이 부탁했다.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만큼 강해지게 해달라고. 이 세계에 인간만 있는 줄 아나? 인외(人外)의 존재로부터 살아남으려면 인간의 상식부터 버려라.]
팩트 폭행 오지네.
내가 먼저 부탁한 일이라, 뒤로 물리긴 늦었다. 레토의 성격상 어물쩍한 태도를 보이면 때려치우라고 할 게 분명했다.
[동이 트는군.]
레토의 말에 창가를 바라보니, 저 멀리 영지를 에워싼 드넓은 성벽이 태양 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아침이 찾아오고 있었다.
[준비해라. 훈련 내용은 어제와 같다.]
"그 짓을 또 하라고요?"
[당연하다. 토대가 받쳐주지 않으면 씨앗을 심어도 쓰레기만 나올 뿐이다. 이 종잇장 같은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종잇장 같은 몸이라니.
지금 몸이면 근육질 오크랑 주먹 다이를 떠도 이길 것 같구만.
하지만 레토의 기준에선 한참 못 미치는 모양이었다.
"오늘도 기절시킬 생각이면 미리 말씀해주시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니까."
[걸어서 숙소로 올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나보다 믿으라고?
어째 편안한 둥지가 생겼어도 고생길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아니, 스스로 고생길을 만드는 건가?
이것도 불운 덩어리로 낙인찍힌 운명인 것 같았다.
한숨을 내쉬며 몸을 슬쩍 풀었다.
짜증 날만큼 컨디션이 좋다.
수면 없는 훈련.
상식 밖의 육체 회복 능력.
최고의 스승.
이건 버티면 무조건 강해질 수밖에 없는 성장 테크다.
그것도 무척 빠른 기간 안에.
한숨을 내쉬며 펜리를 바라보니, 고로롱거리며 세상 편하게 침대에 누워있다.
며칠 전의 내 모습이 딱 저랬다.
정말 편했었는데.
이때만큼은 그녀가 부러웠다. 그리고 이유 없이 괘씸했다.
난 그녀의 간식에 손을 뻗었다.
* * *
도르네프의 집무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다.
도르네프는 이른 아침에도 집무실 붙박이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도 폐광산 업무로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두 눈덩이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퀭하니 내려앉았는데, 저 짠한 모습을 보니 기회가 와도 절대 성주는 되지 말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 짓거리를 또 하겠다고?"
"왜요? 하루만 할 줄 알았습니까?"
"죽으려면 혼자 나가서 죽어. 우리 피앙세가 네 몰골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나?!"
샤르바딘이 충격받은 게 그렇게 큰일인가? 아주 날 잡아먹으려고 든다.
죽을 뻔한 건 난데, 왜 저래?
그리고, 피를 보고 샤르바딘이 충격을 받아?
'피 웅덩이에서 함께 구른 짬밥이 얼만데 충격은 무슨.'
살짝 놀란 정도에 그쳤을 것이다.
"저를 도와준 드워프들을 다시 부를 수 있겠습니까?"
"기사들은 불러줄 수 있지만, 나토네는 임무를 받고 이른 새벽녘에 자리를 비웠네."
"임무? 중요한 임무입니까?"
"폐광산과 관련된 임무이네. 그에 관해서 자세히 듣고 싶나? 폐광산에 대한 앞으로의 일정이 얼추 잡혔는데."
"어차피 펜리님이 의식을 차리면 다시 조율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럼 나중에 그녀와 함께 듣겠습니다."
폐광산의 저주가 풀렸다는 사실은 토바른 내 파급력이 무척 큰 사건이라, 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비밀에 부친 상태니, 펜리가 의식을 차리고 이야기해도 늦지 않았다.
당장은 훈련에 집중할 시기였다.
혈맹을 맺고, 학살자와 부딪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토바른의 주인을 놓고 벌이는 또 다른 사투가 벌어질 거다.
학살자 주변에 포진된 수하들만 떠올려봐도 전부 나보다 강한 놈들이었다.
언제고 그놈들과 부딪칠 날이 온다면 지금 훈련이 내 운명을 가를지도 모른다. 지금부터 죽기 살기로 훈련에 매진해야 했다.
"그리고 더 필요한 건?"
도르네프의 물음에,
[더 단단한 쇠몽둥이로 준비해라. 어제건 너무 약했어.]
"...."
그렇다고 죽겠다는 건 아니었다.
과연 레토의 말대로 걸어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100화 그냥 미친 훈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