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신명의 빛
아케인의 물음에 카멜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신명의 주인일까?
"신명의 주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상한 답이군요."
"'그'라 의심 가는 녀석의 신명 목록을 알고 있다."
"...."
이어진 카멜의 답에 아케인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가느다란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당신에게 신명의 내용을 발설한 어리석은 이가 누굽니까?"
"광의의 예언자."
아케인은 안타까운 듯 짧게 혀를 찼다.
신명의 빛을 본 자가 신명의 내용을 함부로 발설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
광의의 예언자도 신명의 빛에 무척 밝은 인물로 꼽히는 자였다.
클라크 대공에게 끌려다니며 능력을 팔고 다니더니, 결국 이렇게 망가지는가 싶었다.
"신명 목록이 뭡니까?"
"맨입으로 말하긴 그런데, 거래하지."
"주인장, 잘 마셨습니다."
아케인은 테이블 위에 동전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에 카멜은 미간을 좁히곤 그를 막아섰다.
"거래 내용조차 듣지 않을 건가?"
"우리 사이에 거래는 이것뿐일 텐데요."
아케인은 금화 주머니를 흔들고는 품에 넣었다. 얼굴을 보여주는 것으로 당신과 거래가 끝났음을 알려주는 행동이었다.
"'그'에게 관심이 있었던 거 아닌가?"
"당신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방법이 제겐 없습니다."
"없는 신명 목록을 만들 순 없지."
"원하는 게 그 신명 목록을 지닌 주인의 정보 아닙니까?"
"그렇다."
"전 광의의 예언자와 달리 저주를 두려워해서 말이죠. '그'가 확실치 않은 단계에서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작은 힌트라도 상관없다."
"듣고도 제가 알려드리지 못한다면요?"
"그게 무슨 뜻이지?"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제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지 마십시오."
등을 돌린 아케인이 발걸음을 옮기자, 그 앞을 리옹이 막아섰다.
검을 뽑으려는 행동에 렌구아가 황급히 리옹을 저지했다.
아케인의 무력은 신비로 가려져 있다. 제압에 실패한다면 그 뒷일을 감당키 어려웠다.
아케인은 회유하거나, 억압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카멜도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리옹에게 물러나라 신호를 보냈다.
자신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그 말대로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인물의 힌트를 얻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아케인이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신명을 발설하고도 저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니까.'
어떤 방법으로 저주를 상쇄시키는지 알 수 없지만, 아케인은 신명의 내용을 타인에게 발설해도 저주를 회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죽일 수 없다면 되도록 적이 되어선 안 된다. 그는 신명의 주인들에 대해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지니고 있고, 발설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원하는 게 있나?"
"거래를 원한다면 정보가 먼저입니다."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그리고 가장 최근에 신명을 각성한 존재라는 것."
카멜은 고민 없이 광의의 예언자에게 얻은 정보를 풀었다.
어차피 이 단서로는 '그'를 찾을 한계가 명확했기에 한발 물러난 것이다.
신명 목록을 들은 아케인은 세이렌의 찬가를 나직이 중얼거리며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감은 모습인데, 감정을 읽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아케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장 최근에 각성한 존재는 아닌 것 같군요."
"혹시 근래에 또 다른 이가 각성했나?"
"당신이 찾아오기 직전 새로운 주인이 탄생했습니다."
새로운 신명의 주인.
카멜은 그 주인을 짐작한 듯 다시 물었다.
"위치를 알 수 있나? 그대라면 대략적인 위치를 알 수 있을 텐데."
각성 장소가 가까운 탓에 아케인도 대략적인 장소를 특정할 수 있었다. 그만큼 특정 범위가 넓은 장소였기 때문이다. 받은 정보가 있었기에 아케인은 굳이 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라웁 숲."
"…라웁 숲."
광범위한 장소지만, 카멜에게 그 단서 하나면 충분했다.
도미닉 후아튼이 자리한 곳.
지금쯤 각성할 시기이기도 했다.
라웁 숲을 중얼거리며 렌구아를 바라보자, 렌구아가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연구 일지를 회수하는 임무에 실패한 데다가 라웁 숲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주술 인형마저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곧 복구될 주술 인형의 기억에 중요한 단서가 있길 바랄 뿐이었다.
아케인의 눈에는 무엇이 보이는 것일까. 잠시 허공을 응시하던 그가 불현듯 말을 이었다.
"이자군요.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신명의 주인이."
그 말에 카멜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에게 다가갈 가장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하지만 아케인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예상과 달랐다.
[XX XXXX ―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이름은 모릅니다.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건 '신명'뿐입니다."
"…이름을 모른다고?"
"모릅니다. 읽을 수 없습니다."
"...."
읽지 못한다.
광의의 예언자에게 들었던 말을 아케인에게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아케인조차 전부 알지 못하는 신명이라니, 도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토록 베일에 싸인 것일까.
다만, 아케인의 표정이 생각보다 평온했다. 이런 일이 익숙한 것일까?
"혹시 자주 일어나는 일인가?"
"희귀한 경우입니다. 다만, 읽지 못한 내용에 크게 얽매이는 편이 아닙니다. 시기의 차이일 뿐 언제고 전부 밝혀지니까요"
"그자의 신명이 뭐지?"
"그 전에 당신의 신명 목록을 열람하고 싶군요."
카멜은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내 신명 목록? 내가 각성할 때 신명의 빛으로 봤을 텐데?"
"지금 상황처럼 당신 또한 각성 시 읽지 못하는 목록이 존재했습니다. 전 그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그걸 알 수 있다고?"
"당신이 허락해준다면."
처음 듣는 얘기다.
문득 카멜도 자신의 신명이 궁금해졌다. 회귀 전과 회귀 후의 자신의 인생은 확실히 달라졌기 때문이다.
"내 신명 정보를 이 자리에서 공유하고 싶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열람을 허락하시겠습니까?"
"허락한다."
순간, 아케인의 귀걸이에서 푸른빛이 흘러나오더니 카멜에게 쏟아졌다.
그 강렬한 빛에 시선을 돌린 것도 잠시, 카멜의 머리에 붉은 후광이 생기더니 글자가 적히듯 몇 가지 잔상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카멜 블레이저 – 두 길을 걷는 탐욕 군주(시간(時))]
[통제 위의 카리스마]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신명 정보가 아케인의 시야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케인이 읽지 못했던 카멜의 신명 정보는 고유 속성이었다.
바로 '시간(時)'.
속성이 시간이라니, 무척 희귀한 속성을 지닌 이였다.
시간 속성은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
서로가 만날 운명이 아닌데도 지금 만난 것처럼 운명을 거스르는 것과 관련 있을까.
아케인은 '그'보다 먼저 눈앞의 사내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관심을 두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자였다.
확인한 신명 정보를 카멜에게 쪽지로 전달해준 뒤 아케인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광의의 예언자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혼자 보는 걸 추천드립니다."
내용을 읽은 카멜은 그대로 쪽지를 목구멍으로 삼킨 뒤 아케인을 바라봤다.
"이제 거래 성립인가?"
"그자의 신명을 알고 싶으십니까?"
카멜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케인은 허공에 시선을 두었다.
그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자의 신명은 '균열 속의 은둔....'"
아케인의 말이 막 끝맺음을 하려는 때였다.
번쩍―!!!
"...!"
1층 식당이 눈 부신 빛으로 밝아졌다. 빛의 진원지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아케인의 귀걸이.
귀걸이에 달린 사파이어가 엄청난 빛을 토해냈다.
그 빛과 공명하듯 반응하는 또 다른 빛.
그 빛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렌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구슬을 앞으로 내밀었다.
"주, 주군!"
구슬에서 눈 부신 빛이 번뜩이고 있었다. 렌구아는 이미 이 빛의 정체를 한 차례 목격한 바가 있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인 록터 펠리스가 주군께 충성 맹세를 했던 그날, 자신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한 줄기의 빛 말이다.
"시, 신명의 빛입니다!!!!"
구슬에 신명의 문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렌구아는 자신에게 찾아온 두 번째 신명에 흥분하며 구슬을 노려봤다.
저번에는 아무것도 읽지 못했다.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 확신했고, 인형 소멸로 추락한 자신의 가치를 다시 주군께 증명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빌어먹을…!"
[XX XXXX – XX XX XXX]
[X XX XX]
[XXXX XX]
이번에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렌구아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문자를 읽을 순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 신명의 주인.
전에 자신이 받은 신명의 주인과 동일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또다시 신명이 나타난 거지?
그때였다.
"...헉!"
[XX XXXX – XX XXX(X)]
[X XX XX]
[XXXX XX]
[XXXXXX XX]
갑자기 문자가 늘어나더니, 신명의 내용이 바뀌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변화가 나타났길래,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날 정도일까.
이 의문을 해소해줄 존재가 떠올랐다.
렌구아의 시선이 아케인에게 향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터진 신명의 빛.
아마 자신과 같은 것을 보고 있으리라.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이는 이 신명의 빛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전부 읽었을까?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주군과 마주할 때도 여유롭게 반응하던 아케인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굳어있었으니까.
[XX XXXX― 균열 속의 은둔자]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분명 조금 전까지 봤던 신명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신명의 빛이 재차 나타난 것일까.
게다가 이 빛무리.
너무나도 눈 부시다.
처음 벌어진 상황에 의문이 든 것도 잠시,
"...!!"
아케인의 눈동자가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문자가 늘어나며 신명이 실시간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XX XXXX ― 신명 사냥꾼(X)]
[X XX XX]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XXXXXX 심장]
"…이게 무슨!"
신명의 신비에 가장 밀접해 있는 인물, 운명의 아케인.
그조차도 처음 경험해보는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계시를 통해 운명처럼 정해지는 신명은 절대 변할 수가 없다. 아니, 그렇게 확신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란 신명이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리고 완성된 새로운 신명은,
'신명 사냥꾼...?'
새로운 신명을 마주 본 순간 아케인은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신명 사냥꾼이라니, 신명의 주인들이라면 무척 위협적으로 느낄만한 신명이었다.
순간 카멜이 했던 말이 떠오른 건 왜일까?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71화 신명의 빛(2)
아케인의 시선이 카멜에게 향했다.
조금 전 드러난 신명의 주인공을 확인하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인물.
그가 자신을 찾아와 '그'를 언급한 순간 이 같은 사건이 벌어진 게 과연 우연일까.
"얘기를 끝까지 듣지 못했다. 그자의 신명이 뭐지?"
"...."
조금 전 렌구아와 빠르게 귓속말을 주고받은 카멜은 아케인의 침묵에 눈을 반짝였다.
렌구아는 신명을 읽지 못했다. 하지만 신명의 내용이 변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명 목록이 바뀌었으니, 다시 이야기해야겠지. 안 그런가?"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되려 '그'에 대해 묻고 있는 아케인의 반응에 카멜은 확신했다.
조금 전, 렌구아가 본 신명의 빛은 세이렌의 찬가를 지닌 주인의 것이 분명했다.
불변의 법칙이라 불리는 신명마저 변화시키는 존재다.
'놈이야. 놈밖에 없어.'
신명의 주인이 더욱 '그'일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내가 아는 '그'에 대해 알려주지. 이번에도 거래를 거절할 텐가?"
"...."
카멜의 물음에 아케인은 전과 달리 의자에 천천히 앉았다.
아케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에 대한 관심이 흥미를 넘어 눈빛에 짙은 경계를 담고 있었다.
[영혼을 꿰뚫는 통찰력]
카멜의 뇌리에 자신의 신명 목록이 스쳐 지나갔다.
불현듯 떠오른 생각이 이 신명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멜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했던 인물을 곁에 둘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그래서 가장 큰 미끼를 던졌다.
"'그'를 잡을 수 있는 계획이 내게 있다. 함께할 텐가?"
"'그'를 잡으면 어찌할 생각입니까?"
카멜은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었다.
굳이 물어볼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전 '그'와 만나고 싶을 뿐입니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아케인은 잠시 고민했지만, 제안을 거절하려고 했다.
자신은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
계시 없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
아케인의 귀걸이가 일순간 부르르 떨리더니, 그의 눈동자가 푸른 벼락처럼 번뜩였다. 찰나의 변화였기에 카멜 일행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잠시 후, 아케인은 표정을 고치곤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한시적인 동행이라면 허락하겠습니다."
한시적인 동행.
언제든 곁을 떠날 수 있다는 말이었지만, 상대가 운명의 아케인이라면 잠시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환영이었다.
아케인이 지닌 신명의 정보와 자신의 회귀 경험이 합쳐진다면?
세상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존재들이 뭉쳤다. 그 파급력을 떠올리자,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카멜은 손을 내밀었고, 두 사람은 손을 마주 잡았다.
운명의 아케인과 학살자 카멜.
'그'란 존재를 사이에 둔 임시적 동맹이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 *
쿠쿠쿠쿠쿠쿵―!
라웁 숲 전체가 흔들렸다.
한때 도미닉의 연구소로 불리던 절벽이 붉은 괴물의 난동으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다가 결국, 폭발의 여진에 무너져 내렸다.
수많은 돌무더기가 한바탕 숲을 휩쓸었다.
숲 한가운데서 흡사 산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보였다.
붉은 대지에 즐비하게 널린 수천 마리의 키메라의 시신도, 거대한 붉은 괴물도, 도미닉의 시신도 흙더미 아래로 파묻혔다.
피어나는 짙은 먼지가 주변 시야를 뿌옇게 가렸다. 잠시 후, 그 연기 사이를 뚫고 한 인영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콜록! 콜록! 이런 시부랄!"
흙먼지를 뒤집어쓴 펜리가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그녀의 몰골은 진흙을 뒤집어쓴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는데, 멀리서 보면 다크 엘프인지 모를 정도였다.
잔해들을 거칠게 헤치고 평평한 바닥에 선 그녀는 안고 있던 존재들을 내려놨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펜리는 사내를 내려놓으며 사납게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1만 골드 새끼가 다크 엘프 잡네. 시발, 이제부터 검은 장미 의뢰금에 1만 골드짜리는 없어. 무조건 2만 골드부터 시작이다."
아서 클레이튼.
베네타에서 1만 골드 의뢰로 엮인 인연 때문에 녀석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가 여기까지 왔다.
태어나서 이토록 자신을 개고생시킨 존재가 있었던가. 눈앞의 사내를 살리기 위해 정말이지 먼지 나도록 구른 것 같았다.
맹약만 아니라면 진즉 버리고 왔을 것이다. 아니 눈앞에서 죽도록 패버렸을지도.
하지만 사나운 눈빛과 달리 아서를 만지는 두 손은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그래서 더 억울하고 분했다.
징표자의 문양이 살아있는 한, 절대 죽어선 안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뒈지면 반칙인 거 알지? 무조건 버텨라."
아서의 몸 상태는 솔직히 죽었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할 만큼 처참했다.
도미닉에게 당한 아랫배 관통만 해도 무시무시한 치명상인데, 날아간 왼팔부터 시작해 왼쪽 옆구리와 양쪽 허벅지는 뼈가 드러날 정도로 파여 있었다.
전투에 쐐기를 박은 대폭발의 참극이었는데, 그 폭발의 원인은 그녀도 잘 알지 못했다.
다행이라면 망가진 육체가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출혈은 진즉 멈췄고, 살이 돋아나는 게 보인다고 해야 하나?
혀를 내두를 정도의 빠른 재생력이었다.
조금 전 자신이 녀석의 입에 욱여넣은 심장과 눈앞의 현상이 관련 있을 것이다.
[저, 절 살리고 싶지 않습니까?]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끔찍한 몰골로 생명이 꺼져가던 녀석이 움켜잡고 있는 작은 소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아이가 삼킨 심장이 필요합니다.]
펜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생명의 징표.
그 징표가 살아있는 한, 펜리의 최우선 목적은 눈앞의 녀석을 살리는 것이었다.
펜리는 갈가리 찢긴 아레나의 육체에서 심장을 찾아 뜯어냈고, 아서에게 주저 없이 먹였다.
그 결과가 바로 눈앞의 상황이었다. 아서의 혈색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었다.
펜리는 바위에 걸터앉은 채 곰방대를 물었다.
길게 빨았다가 후― 뱉어내니 긴장이 풀리는 게 느껴졌다.
하늘을 바라보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길고 고되고 엿 같은 하루란 생각이 들었다.
곰방대를 털며 아서 곁에 축 늘어진 아레나 후아튼의 시신을 응시했다.
온몸 곳곳이 찢기고, 심장마저 뜯긴 참혹한 몰골이다.
굳이 함께 데려온 이유는 저 작은 괴물이 죽어서도 녀석을 부둥켜안고 끝까지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끝까지 자신을 개고생시키는 망할 녀석.
펜리는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손해지. 아주 손해야.'
큰 도움을 받았기에 생명의 징표를 녀석에게 줬다지만, 이 녀석의 경우는 선을 좀 많이 넘었다. 한 번이 아니라 최소 열 번은 살려준 것 같았다. 그때마다 자신은 눈물 쏙 빠지게 굴러다녔다.
이건 무조건 추가 요금을 받아야 한다.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저 물건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선불 겸해서 지금 가져올까?"
펜리의 반짝이는 시선이 흑요석이 박힌 다크 로즈(dark rose)에 닿아있었다. 아서의 가슴팍에 달려 있었는데, 몰래 떼어내려다가 빛을 머금는 것을 보고 일단 놔뒀다.
축복 효과가 유지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펜리는 다크 로즈에서 시선을 떼며 입맛을 다셨다. 검은 장미로 세공된 탓에 유독 더 탐이 났다. 원래 자신의 것 같은데, 왠지 빼앗긴 기분이랄까?
"어설프게 입 닦으려고 하면 각오해야 할 거야."
그땐 골수까지 쭉쭉 짜서 값을 받아낼 생각이었다.
다만 우려가 되는 건, 녀석이 깨어난 후의 정신 상태였다.
과연 눈을 떴을 때 그는 아서일까, 아니면 또 다른 존재일까.
심장에게 먹힌 존재들을 봐왔기에 대비를 해야 했다.
자신의 손으로 징표자를 죽여야 하는 상황이 펼쳐질지도 몰랐으니까.
펜리가 생각하는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다.
'생각해보니, 징표자가 날 죽이려고 하면 손을 쓸 수가 없잖아? 맹약을 손 좀 봐야겠어. 아니, 이참에 없애버릴까?'
시달린 것을 생각하니, 없애는 것도 한 방법일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상황에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펜리 주변으로 호리호리한 그림자들이 벼락처럼 내려앉았다.
스물에 달하는 복면인들이 그녀를 둘러싼 상황. 펜리는 그들을 둘러보곤 한심한 듯 혀를 찼다.
검은 장미들이었다.
"내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이제 얼굴을 들이미는 거야? 내 몰골 안 보여?"
"…죄송합니다."
"기껏 키워놨더니 돈값을 못 하네. 돈값을!"
장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펜리는 그들의 얼굴에 연기를 길게 뿜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갑작스럽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검은 장미들이라도 쉽게 자신을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니, 찾아온 것 자체를 칭찬해야 하나?
저 녀석을 업고 가기 귀찮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런데 순간 펜리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렸다. 수하들을 보자 중요한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돈은? 돈은 챙겼지? 그렇지?"
"침대 위에 뿌려놓으신 금화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전부 수거해서 푸른 장미로 옮기는 중입니다."
"침대 밑도 찾아봤고?"
"네."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것마저 잘못됐다면 저 녀석을 정말 잘근잘근 씹었을지도 모른다.
"저 녀석을 옮겨."
"함께 있는 시신은 어찌할까요?"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잠시 작은 괴물을 바라봤다.
"태워버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전장의 흔적이 무너진 흙더미에 모조리 파묻혀 버렸다.
이젠 누구도 이곳에서 어떤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고, 어떤 기적이 벌어졌는지 모를 것이다.
산 자는 산 자대로 살아나가고, 죽은 자는 이곳에 묻히는 게 맞았다.
"알겠습니다."
잠시 후, 검은 연기가 타올랐다.
검은 장미들은 타오르는 작은 시신을 뒤로했고, 아서를 업은 채 빠르게 사라졌다.
아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펜리는 가죽 가방을 가볍게 둘러멨다.
녀석의 가방을 혹시나 해서 챙겼다. 이것도 물론 추가 요금이 붙을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남아 펼쳐진 잔해들을 둘러봤다.
홀로 서 있는 장소엔 공허한 바람만 불어닥쳤다. 타다 남은 소녀의 재 가루만 허공을 떠다닌다. 검게 그을린, 이젠 흔적조차 사라진 바닥을 응시하며 펜리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서 녀석이 기절하기 직전 작은 괴물에게 속삭였던 말.
"다음 생엔 인간 말고 꽃으로 태어나라."
도미닉 후아튼의 역작이라 불리던 백(百) 개의 심장, 아레나 후아튼의 최후였다.
* * *
오르도르 숲.
마녀들의 마지막 안식처라 불리며, 인간들의 발길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장소. 그렇다고 인간 냄새가 전혀 없는 삭막한 숲은 아니었다.
인간의 발길이 끊어졌기에 오히려 평화롭고 조용한 공간이었다.
그 고즈넉한 숲에 작은 소란이 일어났다.
"리, 릴리!"
"아악! 밀지 마!"
문이 부서지듯 펑퍼짐한 로브를 걸친 여인들이 우르르 그녀의 방으로 몰려들었다. 우당탕! 구르고 넘어지는 마녀들의 손에는 지팡이, 구슬, 장신구 등등 눈 부신 빛을 머금은 오브제(objet)들이 쥐어져 있었다.
신명의 빛.
상급 마녀 '도르타'들의 설레발에 릴리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전의 광경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역시나,
"우, 우리 중에 내용을 해석한 이가 한 명도 없어!"
"단 한 글자도!"
"릴리라면…!"
똑같은 상황이 펼쳐졌다.
어떻게 대사까지 똑같을 수가 있지? 릴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신의 큰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빛.
[아서 클레이튼 ― 신명 사냥꾼(성(Divine))]
[제3의 정신 방벽]
[세이렌의 찬가(Siren's Hymn)]
[레토니칼스의 심장(R.H)]
거울 위로 막 변화를 끝낸 신명의 내용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72화 오르도르의 숲
"시끄럽다고!"
전과 달라진 상황이 있다면 릴리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전처럼 거울을 보고 놀라는 모습 대신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마녀들 앞에 섰다.
최대한 화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빵빵해진 양 볼은 귀여움만 불러왔다.
"...귀여워."
안 먹힌다....
되려 마녀들이 릴리의 표정에 헤죽거리며 놀리는 듯 손가락을 까닥거리자, 릴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나, 나가!"
"아이고, 고막이야. 릴리, 너 저번에 분명…."
"모른다고! 몰라!"
"…자, 잠깐만!"
어디서 나타났는지 빗자루들이 마녀들을 포위하곤 투닥투닥 매타작을 시작했다.
처음에 버티던 마녀들은 이내 두둥실 날아오는 큰 솥단지를 보곤 질겁하며 도망갔다.
마녀들을 내쫓은 릴리는 손을 탁탁 털어내곤 큰 거울 앞에 다시 섰다. 그러곤 몰래 했던 것처럼 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도 이해가 안 된다고."
마녀들 앞에선 평상시처럼 행동했지만, 사실 그녀는 저번 때보다 더욱 놀란 상태였다.
신명을 보는 자들 사이에선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했다.
신명의 목록은 변할 수 있어도, 한 번 점지된 '신명'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균열 속의 은둔자'가 눈앞에서 새로운 신명으로 탈피했다.
탈피가 맞을 것이다.
그토록 눈 부신 빛은 처음이었으니까.
오래도록 이어진 규칙이 깨진 것이다.
신명의 빛을 보는 자라면 지금쯤 난리가 났을 것이다.
'아케인이 똥줄 좀 타겠는데?'
아케인은 그 누구보다 신명의 규칙을 신봉하던 자였다. 신명을 계시로부터 나오는 신의 말씀이라 여기던 자였으니 혼란스러울 것이다.
신이 말을 번복한 것이었으니까.
"헹, 쌤통이다."
자신과 아케인은 신명을 정의하는 방향이 완전히 달랐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자신의 정의가 더 옳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거울 속에 비친 신명의 주인에게 무척 큰 호기심을 느꼈다.
세상에 커다란 파문을 가져온 존재.
누굴까?
그리고 왜 마녀 중 유독 자신의 눈에만 저 신명의 내용이 보이는 것일까.
"아서 클레이튼, 인간일까? 아, 누군지 진짜 궁금하네."
그녀는 거울 위 점지가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거울을 응시했다.
턱을 괴며 고민하는 표정인데, 거울에 비친 자신의 표정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생각해보니 살면서 고민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큰 고민은 도르타들이, 자잘한 고민은 그 제자들이 모두 해주었으니 고민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그런 만큼 지금 고민은 릴리에게 아주 큰 결심이었다.
"그래, 한번 해보는 거야!"
궁금한 것을 절대 못 참는 성격이었다.
지금까지 궁금한 것들은 도르타들이 해결해줬지만, 이번만큼은 힘들어 보였다.
그럼, 이 궁금증을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직접 만나보면 알겠지!"
고민은 짧았다.
결심이 선 순간 그녀는 화장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일단 귀여운 강아지가 박힌 토트백을 꺼내 그 안에 화장품과 향수를 쓸어 넣었다.
미용에 관심이 많은 자신을 위해 마녀들이 선물해 준 것인데, 바깥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 1순위로 챙겨야 했다.
빗과 머리띠, 장신구들을 종류별로 챙긴 그녀는 거울 앞에 앉아 꽃단장을 시작했다.
허리까지 내려온 찰랑거리는 흑발.
큰 빗으로 머리를 가지런히 빗던 그녀가 홀린 듯 거울 앞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투명하고 새하얗다.
그리고 작고 귀엽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뻐!"
거울을 보고 자화자찬하는 건 그녀의 중요한 취미 중 하나였다.
이쁜 리본으로 단장을 마친 그녀는 거울 위에 손을 대었다. 펑―! 소리와 함께 큰 거울이 손거울 크기로 변했다.
토트백에 손거울을 챙긴 그녀는 오두막을 씩씩하게 걸어 나왔다.
마을 숲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릴리는 마을 숲 중심에 수백 년 먹은 거대한 나무로 향했다.
나무 밑동 그늘진 공간에 흔들의자를 놓고 낮잠을 즐기는 마녀가 있었는데, 릴리는 그 뒤로 몰래 다가가 의자를 장난스레 흔들었다.
잠을 방해받은 마녀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쭈글쭈글한 손등과 얼굴, 이 숲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는 장로 마녀였다. 장로는 릴리가 왜 자신을 귀찮게 구는지 잘 알고 있었다.
"…요것아, 또 뭐가 궁금한 것이냐?"
"장로 할머니! 숲 바깥으로 나가면 가장 필요한 게 뭐야?"
"숲 바깥? 돈이 필요하겠지."
"돈? 얼마나 필요한데?"
"많을수록 좋지."
"난 돈이 없는데?"
"릴리는 필요 없어. 어딜 가든 도르타들이 붙을 테니까."
장로는 대충 대답하곤 다시 눈을 감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그 옆에 선 릴리는 메모장을 꺼내 방금 한 대화를 꾹꾹 눌러 적었다.
돈이다.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돈은 많을수록 좋았다.
금붙이를 자랑하던 마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중에는 장로 할머니 것도 있었다. 아무래도 큼지막한 보따리를 챙겨야 할 것 같았다.
릴리가 사라지고 잠시 후, 잠이 든 장로가 흠칫 떨며 몸을 웅크렸다.
앞날을 예견한 것일까.
마치 악몽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꾸루― 꾸루―
오르도르 숲은 밤이 일찍 찾아왔다.
마녀들이 모두 잠든 야심한 밤, 숲과 어우러진 오두막 마을에는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그 어둠 사이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한 오두막에서 몰래 총총 걸어 나오는 가녀린 인영. 모자에 달린 긴 챙이 흔들리며 시야를 방해하자, 릴리는 챙을 위로 접어 올렸다.
"끙, 무겁네."
몸뚱이보다 두 배나 큰 봇짐이었다.
주술로 마녀들을 재우고 금붙이와 보석들을 닥치는 대로 긁어모았다. 만만한 마녀들 위주로 마을을 한 바퀴 쭉 돌았는데, 금붙이를 챙기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난 거지였어!'
돈 한 푼 없고 받기만 하는 이들을 거지라고 했던 걸 들었다.
릴리는 말없이 토트백 안을 들여다봤다. 금붙이는 없고, 전부 받은 것들뿐이다. 거지가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젠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마녀가 됐으니까.
뭔가 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을을 벗어났다.
마을 숲 중심부는 여느 숲과 똑같았다.
하지만 중심부와 멀어질수록 숲 분위기가 달라졌다. 뿌연 안개가 시야를 가렸고, 나부끼는 바람은 을씨년스러웠다.
우우우우―
이상한 소리도 들려왔다.
큰 나무들로 빽빽이 찬 풍경에 들어섰는데, 나무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존재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숲의 망령으로 망령들은 오르도르 숲 바깥 지역을 배회하며 침입자들을 공격했다.
일명 유령의 숲(haunted forest).
오르도르 숲의 결계 중 하나로 마녀들은 1년에 한 번씩 큰 의식을 통해 유령의 숲을 유지하고 있었다.
끝 모를 망령들이 인간 냄새를 맡고 릴리에게 모여들었다.
오싹한 광경.
하지만 릴리가 하품을 하며 손을 휘휘 내젓자 망령들은 괴성을 흘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그녀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숲 끝자락에 다다르자 확 트인 너른 들판이 펼쳐졌다. 다만, 들판 풍경이 살짝 일그러져 보였는데, 숲을 보호하는 대결계 때문이었다.
마녀들만 드나드는 결계 출구에 도착하자, 릴리를 반기는 작은 존재가 있었다.
작은 체구의 귀여운 강아지.
릴리의 토트백에 그려진 검은 털의 강아지와 똑 닮았다. 시바견을 닮은 쫑긋한 두 귀와 탐스러운 꼬리, 날렵해 보이는 몸을 지닌 강아지였다.
강아지는 출구 앞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릴리는 그 강아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 풀때기로 코를 간질였다. 코를 움찔하던 강아지가 눈을 사납게 뜨며 으르렁거리자, 릴리는 강아지 얼굴에 손을 내밀며 활짝 웃었다.
"댕댕! 잘 있었어?!"
댕댕은 손 냄새를 킁킁 맡고는 그녀를 왕! 덮쳤다. 볼을 할짝거리며 꼬리를 휙휙 흔들어대는 것이, 릴리를 알아보고 격한 반가움을 표하는 것 같았다.
놀아달라는 댕댕의 애교에 릴리는 목적을 잊고 댕댕과 숲 주변을 뛰어놀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댕댕을 안고 둥근 달을 향해 높이 던지기도 했는데, 댕댕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마녀들이 봤다면 놀라 자빠졌을 것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더니, 밤이 지나갔다. 어둠이 서서히 걷히자, 릴리는 손뼉을 탁― 치곤 현실을 자각했다.
"장로 할멈이 깨기 전에 도망쳐야 해!"
릴리는 봇짐을 짊어지곤 댕댕의 머리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댕댕, 숲 잘 지키고 있어. 나갔다 올게!"
"멍!"
"그치? 댕댕이 봐도 짐이 너무 많지? 뭐? 도와준다고? 이렇게?"
릴리는 봇짐을 풀어 댕댕 앞에 내놓았다. 시선 교환으로 댕댕과 의사소통을 하는 모습이었다.
휘황찬란한 금붙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댕댕은 살짝 눈치를 보더니, 금붙이들을 흡― 빨아들였다.
댕댕의 덩치가 봇짐보다 한참 작았는데도, 봇짐에 든 모든 내용물을 삼키곤 릴리 앞에 앉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같이 데려가 달라는 몸짓 같았다.
"아, 댕댕한테는 아공간이 있었지. 흠, 어쩐다. 널 데려가면 장로 할멈이 화낼 텐데."
하지만 릴리는 걸어 다니는 가방을 포기할 수 없었다. 같이 다니면 편할 것 같았다. 혼자 다니는 것보다 심심할 것 같지도 않고.
"멍!"
"그치? 큰 문제 없겠지? 결계 의식도 마무리됐잖아. 1년은 안전하겠지?"
"멍!"
"2년도 우습다고?"
강아지(?)에게 설득당한 그녀는 결국 댕댕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저 멀리 산책이나 하러 갈까?"
"멍!"
"뭐? 뼈다귀를 챙겨야 한다고? 묻어둔 데가 어딘데?"
사이좋게 룰루랄라 주변 땅을 파헤치며 돌아다닌 것도 잠시, 여인과 강아지는 동이 트는 오르도르의 숲을 뒤로한 채 숲에서 사라졌다.
* * *
"내, 내 금반지가!"
"우아앙! 보석함이 없어졌어."
"감히, 누가 내 금니를…!"
"스, 습격이다!"
날이 밝고 여느 때처럼 평화로워야 할 오르도르 숲이 발칵 뒤집혔다.
1년에 한 번 모일까 말까 한 대표 도르타들이 오두막에 모여들었다.
각 계파의 수장을 맡은 이들로, 그들은 마녀 사회에서 원로라 부를 수 있는 핵심 전력이었다.
마녀들이 이리 긴급하게 모인 이유는 하나였다.
릴리가 사라졌다!
장로, 메데이아는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녀의 오두막으로 도르타들이 모인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그녀가 오르도르 숲을 관장하는 장로 신분이었고, 다른 하나는 릴리를 본 마지막 마녀였기 때문이다.
"돈 되는 건 다 털어갔다고?"
"…네. 누굴까요? 릴리에게 그런 몹쓸 짓을 알려준 마녀가."
"그 마녀를 찾아서 중징계를 내려야 합니다!"
"당장 가서 잡아 오...!"
"지, 지금 그런 것을 따질 때인가?! 릴리가 사라졌어!"
장로 메데이아는 황급히 식탁을 쾅쾅거리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릴리의 행동에 원인을 제공한 마녀가 바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어째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메데이아는 또 말이 나오기 전에 릴리와 함께 사라진 숲의 파수꾼, 케로스를 언급했다.
얼핏 보면 귀여운 강아지로 보이지만, 파수꾼 케로스는 절대 일반적인 존재가 아닌 만큼 도르타들의 관심을 돌리기 충분했다.
금붙이를 가지고 간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릴리와 파수꾼, 이 두 존재가 바깥세상으로 나갔다는 게 중요했다. 겉모습과 달리 두 존재는 움직이는 폭탄 덩어리나 마찬가지였다.
도르타들이 릴리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던 이유였는데, 지금은 그 보호자조차 없는 상황이다.
심각성을 인지하자 마녀들은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을 삼켰다.
"이제 좀 악명이 잊히나 싶었는데…."
"큰일이군요. 마녀사냥이 또다시 재현되는 건 아닐는지…."
10년간 잠잠했던 마녀의 악명이 또다시 불거질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73화 마녀와 강아지
도르타들은 곧장 대책에 들어갔다.
"북쪽 숲으로 심부름꾼들을 더 보내야 합니다."
한 도르타의 의견에 장로 메데이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부름꾼은 마녀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실력자를 뜻했다.
릴리와 케로스.
숲을 지키는 핵심 전력이 자리를 비웠으니, 북쪽의 감시 인원을 더 늘려야 했다.
오르도르 숲 북쪽은 대공 베르센 클라크의 영토와 닿아 있었다.
마녀사냥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마법사 집단.
숲 전력이 약화된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수작을 부릴 게 분명했다.
결계가 유지되는 1년 정도는 안전하겠지만, 릴리가 자리를 얼마나 비울지 모르니, 사전에 대비해야 했다.
"근데, 릴리는 왜 숲을 떠난 걸까요? 혼자 움직이는 걸 무척 싫어하는 아이인데."
"마녀의 진리에 이유가 필요할까."
마녀의 진리.
마녀의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엉뚱하고 고집스럽지만, 우리를 부모로 여기던 아이야. 말 잘 듣던 아이가 불현듯 떠난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마녀들을 붙여야 할까요?"
"줄곧 숲을 지키던 파수꾼이 그녀를 따라갔어. 그녀를 중심으로 어떤 운명이 점지(點指)된 거야. 지켜만 보고 모른 척하는 게 맞아."
메데이아는 마녀 중 가장 오래 산 만큼 지혜롭고 경륜이 깊었다. 도르타들은 그녀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럼 실력 좋은 심부름꾼을 보내 멀리서 지켜보게만 하겠습니다."
마법사들이 움직일 수 있으니, 도르타들은 숲을 떠날 수 없었다. 이곳은 마녀들의 최후의 안식처. 절대 잃어선 안 됐다.
다시 금붙이 얘기가 나오려고 하자, 메데이아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도르타들을 내쫓았다.
홀로 남은 자리, 그녀는 텅 비어버린 보석함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많을수록 좋다고 했더니, 아끼던 금가락지며 보석이며 돈이 될 만한 건 모조리 긁어갔다. 안 그래도 많은 주름이 하루 새 더 늘어난 것 같았다.
괘씸했지만, 한편으로 걱정이 되었다.
"큰일이 없어야 할 텐데…."
어린 시절 '마녀 대학살(witch slaughter)'을 경험한 릴리는 도르타의 손길 없이는 잠을 잘 자지 못했다.
해맑은 심성 안에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있는 아이.
보호자 없이 릴리가 바깥으로 나간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부신 미모와 금붙이는 인간들의 탐욕을 부르기 충분했고, 그 탐욕이 많은 피를 부를까 우려되었다.
오르도르 숲의 마녀, 릴리 베이스.
숲에는 수많은 마녀가 존재하지만, 사람들은 오르도르 숲 하면 릴리 베이스를 떠올렸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잠재력을 지닌 마녀. 한창 성장 중임에도 도르타와 비견되는 실력을 지녔다.
모든 도르타가 릴리의 부모를 자처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전 마녀들의 계파를 잇는 전무후무한 대(大)마녀란 뜻이었다.
세상이 그녀를 두려워하는 이유였다.
텅 빈 보석함에 미련을 버린 메데이아는 창가로 걸어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번뜩이던 예지가 이번만큼은 안개에 낀 듯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앞날을 몰라도 어떻게 흘러갈지는 예측할 수 있었다.
"두 맹수 새끼들이 숲 밖으로 풀려났으니, 한바탕 시끄러워지겠구나."
특히, 파수꾼 케로스.
그 괴물이 본모습을 드러낸다면 그 지역이 큰 충격으로 출렁댈 것이다.
지하세계를 지키는 지옥의 파수견, 세 개의 머리를 지닌 케르베로스(Kerberos).
케로스는 그 케르베로스의 새끼였으니 말이다.
* * *
"댕댕, 맛있어?"
"멍!"
"흠…."
릴리는 뼈다귀를 물고 씹는 댕댕을 잠시 응시했다. 딱 봐도 너무 맛나게 먹는 모습이다.
꼬르륵―
배 속이 요동치자 릴리는 일단 뼈다귀를 잡고 댕댕처럼 물고 씹었다. 그러곤 울상을 지었다.
"…맛없어."
"멍!"
"귀한 건 알겠는데, 맛없다고."
숲속으로 뼈다귀를 휙 던지자, 댕댕은 배신당한 표정으로 릴리를 올려다보곤 후다닥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쭈그리고 앉아 땅에 좋아하는 음식들을 그렸다.
숲에서 나온 지 반나절밖에 안 됐는데 벌써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배고픔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때가 되면 마녀들이 식사를 가져왔으니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장로 할머니가 마녀가 아니라 공주처럼 산다고 타박을 하곤 했는데, 정말 그렇게 살았나 싶었다.
"힝, 배고파."
홀로 나와보니 자신이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알 것 같았다.
다시 숲으로 돌아갈까.
잠시 갈등하고 있는데, 눈앞에 툭― 하고 무언가가 떨어졌다. 핏물 묻은 고깃덩어리였다. 그 짧은 순간 댕댕이가 사냥을 해온 모양이었다.
혀를 헥헥거리며 칭찬을 바라는 모습인데, 그녀는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댕댕아, 날것을 먹으면 배탈 난다고."
"멍!"
"넌 괜찮아도, 난 아니야."
그것도 잠시, 댕댕이 입을 벌리자 입에서 검은 불이 훅― 뿜어져 나왔다. 고기와 함께 바닥이 새까맣게 타며 연기가 타올랐다.
"...."
릴리가 익은 고기를 살짝 집어 들었는데, 겉은 바싹, 속은 촉촉이 아닌 겉은 바짝 타고 속은 핏물이 배어 나오자 다시 울상을 지었다.
장로가 거짓말을 했다. 돈이 많으면 뭐든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곳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일단 인적이 없어서 돈을 쓸 곳이 없었다.
토바른 지역과 맞닿은 경계 같은데, 나무 꼭대기에서 주변을 둘러봐도 성곽은커녕 그림자도 안 보였다.
주술을 쓸까 고민했지만, 주술을 감지하고 도르타들이 찾아올 수 있는 거리라 꾹 참고 있었다.
엘레토르 성곽까지 걸어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는 상황.
턱을 괸 채 엉망으로 구워진 고기를 잠시 바라보던 그녀는 결심한 듯 탄 고기를 집어 들었다.
배고픈 건 익숙지 않아서 힘들었다.
한숨을 내쉬며 검게 탄 껍질을 벗기려는데, 댕댕이 귀를 쫑긋하더니 고개를 휙 돌렸다.
"댕댕, 뭐야?"
"멍."
"사람?"
잠시 후, 댕댕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중저음의 사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개도 한 마리 있고."
"내가 뭐라고 했어.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했잖아."
"월척이었으면 좋겠는데."
사냥꾼 복장을 한 사내들이 우거진 넝쿨 사이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머릿수가 열 명으로 상당했다.
그들의 무장은 활을 포함해 다양한 장비들로 구색을 갖췄는데, 기세를 보니 상당한 실력자들로 보였다.
릴리는 악취에 인상을 찡그리곤 코를 틀어막았다. 피 냄새가 지독한 인간들이었다.
다짜고짜 릴리에게 성큼 다가온 사내들은 그녀의 챙을 거칠게 들췄다.
"...!"
흘러내리는 흑발, 그 사이로 드러난 백옥 같은 미모에 사냥꾼들은 멈칫했다. 잠시간의 침묵, 곧 그들의 얼굴 위로 흥분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신이 도우신 날인가?"
"월척이 아니라 고래가 잡혔어. 크크크."
노예 사냥꾼으로 활동하면서, 아니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엄청난 미녀였다.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며 남은 사냥꾼들이 한마디씩 했다.
"...잘 팔면 인생 끝나겠는데?"
"노예 상인에게 팔면 골드로 천 단위, 아니 만 단위는 받겠어."
"근데 복장이… 마녀 아니야?"
"마녀 복장을 한 년이겠지. 숲으로 도망치려면 마녀 행세라도 해야 생존 확률이 올라가니까."
"용케 마녀 복장을 구했네."
"도망치는 귀족이 뭘 못 구하겠어."
노예 사냥꾼들은 현재 오르도르 숲으로 도망치려는 귀족들을 추적하고 있었다.
전부 블라이어의 귀족들로, 카멜 성주를 적대하는 핵심 귀족들이었다. 전(前)대 기사 단장이었던 록터 펠리스의 세력을 숙청 중이었는데, 구석까지 내몰린 귀족들이 도망칠 곳이 마땅치 않자, 엘레토르 성곽을 넘은 것이었다.
카멜은 군대를 보내는 대신, 노예 사냥꾼들을 고용해 척살을 지시했다.
"딱 봐도 귀족이지? 블라이어 출신 영애인가? 이 정도 미모면 소문이 났을 텐데?"
"뭔 상관이야. 척살령이 떨어졌는데, 목만 가져가면 되는 거 아니야?"
"그 카멜이란 성주도 멍청한 놈이네. 이 정도 미인이면 취할 것이지, 왜 모조리 죽이는 거야?"
"그 덕에 우리에게 기회가 왔잖아."
사냥꾼들은 눈빛을 주고받곤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릴리를 본 사냥꾼들의 눈동자엔 끈적한 욕정이 담겨 있었다.
사내라면 참을 수 없는 매혹적인 아름다움.
이미 잡은 먹잇감을 어떻게 요리하든 그건 사냥꾼 마음이었다.
"아, 첫 만남부터 더럽네."
릴리는 저 시선들에 익숙했다.
10년 전 마녀 대학살 당시에도 수없이 느껴본 역겨움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기 시작했다.
잠시 후, 사냥꾼들이 그녀를 에워싸자, 릴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 먹을 거 있나요?"
"굶주렸나 보지? 먹을 게 필요해?"
"네. 많이 필요해요."
"먹을 거야 원 없이 줄 수 있지. 우리가 시키는 대로만 한다면?"
"내가 뭘 하면 되죠?"
"그 펑퍼짐한 로브부터 벗어. 몸매를 볼 수가 없잖아?"
사냥꾼들이 조롱을 날리며 낄낄 웃자, 릴리는 모자를 꾹 눌러쓰곤 나직이 입을 열었다. 더는 말을 섞는 게 무의미했다.
"케로스."
"멍!"
"태우진 말아. 음식이 타면 곤란하니까."
그녀의 말이 끝나자, 작은 강아지가 폴짝 뛰더니 사냥꾼 무리를 향해 달려왔다.
사냥꾼들은 달려오는 강아지를 보며 배를 잡고 웃었다. 일부는 활을 꺼내 시위를 당겼고, 사냥꾼의 리더는 히죽 웃으며 바지춤을 풀었다.
"미친년에겐 약이 최고지."
바지를 훌렁 벗어 던지며 여인에게 다가갔다. 자신들밖에 없으니 알몸이든 뭐든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낄낄거리며 남은 속옷마저 벗으려고 하는데, 주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웃음이 갑자기 뚝 멈췄다.
이상함에 동료들을 돌아보니, 사냥꾼들이 새파랗게 질린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뭐야?"
시선을 다시 돌리자,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삽시간에 집어삼켰다. 그의 시선이 서서히 위를 향했다. 동시에 경악으로 물드는 눈동자.
"무, 뭐!?"
검은 털 괴물?
거기까지 생각이 떠올랐을 때,
콰직―!
거대한 발이 그를 짓밟으며 지나갔다. 그에게 남은 건 짓이겨진 핏덩어리뿐이었다. 학살이 시작됐다.
"…괴물! 아아악!!!"
"사, 살려줘!"
인적 없는 숲에 비명이 메아리처럼 터져 나왔다.
릴리는 비명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첫 번째로 죽은 사냥꾼의 시신은 무시하고 그 주변에 떨어진 배낭만 챙겼다.
끔찍한 시신의 모습에도,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사냥꾼의 몰골에도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약하면 죽는다.
죽으면 빼앗긴다.
빼앗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려면 죽이고 빼앗아야 한다.
릴리가 마녀 대학살 때 얻은 배움이고, 마녀가 이 세계에서 살아남은 법이었다.
착한 마녀, 멍청한 마녀는 용서할 수 있지만, 약한 마녀는 용서할 수 없었다. 10년 전에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강해지려면 죽음과 친해져야 했다.
지금처럼.
비명이 뚝 멈추자 물건을 챙기던 릴리가 허리를 꼿꼿이 폈다.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시신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거대한 족적과 함께 밟혀 죽은 흔적.
생존자는 없었다.
"댕댕."
릴리의 부름에 저 멀리 숲에서 작은 강아지가 튀어나왔다. 댕댕이 다리 사이로 다가와 얼굴을 비비자, 릴리는 그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얼른 튀자, 할머니가 우리를 잡으러 올지도 몰라."
"멍!"
"그치? 할머니는 너도 무섭지? 자, 입 벌려."
릴리는 댕댕의 입 속으로 주운 배낭들을 욱여넣고는 사냥꾼들이 나타난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입엔 달콤한 쿠키가 물려 있었는데, 사냥꾼의 배낭에서 막 꺼낸 것으로 보였다. 단것이 들어가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멍!"
"안 돼. 넌 뼈다귀가 있잖아. 쿠키는 내 거라고. …뭐? 삐지겠다고? 음, 그럼 도시에 도착하면 먹고 싶은 거 사줄게. 어디로 가냐고?"
댕댕을 응시하며 혼잣말을 중얼거린 것도 잠시, 릴리는 저 너머 지평선 위로 흐릿하게 비춘 드넓은 성곽을 응시했다.
엘레토르 성곽이다.
그녀는 성곽을 가리키며 외쳤다.
"블라이어! 블라이어로 갈 거야!"
블라이어를 떠올린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가 아는 도시는 조금 전 사냥꾼들에게 들은 블라이어가 전부였으니까.
그렇게 한 마녀와 강아지가 토바른 지역에 발을 들였다.
74화 꿈이었다
'…뭐야.'
난 눈앞의 상황을 멍하니 응시했다.
눈을 뜨니 상황 파악이 안 된다고 해야 하나? 이거 무슨 상황인 거지?
'설마... 꿈?'
맞다. 꿈이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자, 현실이 아님을 바로 눈치챘다.
어둑한 막사 안, 학살자 카멜이 코앞에서도 날 인지하지 못했고,
[도네콜린트, 적군에게 공포가 뭔지 보여줘라.]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내 손에 죽은 흑주술사 도네콜린트가 카멜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등에 새겨진 도네콜린트의 고대 문양, 세이렌의 비명을 보자 더욱 확신이 들었다.
저 문양의 주인은 나다.
이건 꿈이 맞았다.
그런데 꿈이 너무 생생했다.
설마 죽은 건가?
가능성이 있었다. 아레나를 고기 방패로 삼아 붐(Boom)을 터트렸는데, 그녀의 육신이 작다 보니, 폭발에 휩쓸리면서 팔다리가 완전히 아작 났다.
펜리가 내게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였다면 살 확률이 있겠지만, 이곳에선 확인이 불가능했다.
일단 내 육신이 안 보였거든.
학살자에게 예를 표한 도네콜린트가 등을 돌리곤 나를 그대로 통과했는데, 마치 존재감 없는 유령이 된 것 같았다.
난 홀린 듯 도네콜린트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나갔다.
둥― 둥― 둥―
새벽안개가 자욱한 병영에 묵직한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눈부신 보름달 아래임에도 짙은 안개 덕에 병영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근데, 병사들은 어디 간 거지?
병영치곤 너무 조용했다.
그때, 안개 너머로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끄아아아악!"
"모조리 죽여라!"
동시에 긴박한 외침과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알고 보니, 전쟁터 한복판이었다.
도네콜린트는 십여 명의 복면인을 대동한 채 비명이 터진 안개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비명이 전장을 뒤덮을 겁니다.]
막사에서 도네콜린트가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대사를 곱씹으며, 난 안개를 허겁지겁 헤치고 도네콜린트를 쫓았다.
'지금 이 상황....'
눈앞의 상황, 대사, 분위기에서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학살자에게 영입된 도네콜린트의 첫 전투 장면.
한때 소설에 푹 빠져 이따금 상상해보던 주요 장면이기도 했다.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하이라이트 내용이자, 카멜이 날개를 펴고 비상을 시작했던 사건.
'베네타의 몰락.'
걷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이내 난 전력 질주를 하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거친 뜀박질 사이로 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뿌연 시야가 사라졌고, 선명해진 눈앞에 처절하고 잔혹한 전쟁터가 펼쳐졌다.
제자리에 선 채 타오르는 붉은 화마(火魔)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드워프들의 오랜 손길로 쌓아 올린 아름다운 성벽. 이종들의 도시, 베네타.
성벽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불을 끄기 위해 다양한 이종들이 성벽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하지만 이내 쏟아지는 불비에 비명과 함께 불타오르며 사라졌다.
주술사들의 둥지.
그들이 펼친 지옥불에 베네타가 무너지고 있었다.
뜨겁다.
그리고 역겹다.
…이게 꿈이라고?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생생했다.
고개를 돌리니, 말을 탄 카멜이 친위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메마른 표정으로 전장을 천천히 둘러보던 학살자 카멜.
카멜의 등장에 도네콜린트가 뒤엉킨 전장 안에서 오른손을 천천히 추켜들었다.
번쩍―!
고대 문양이 섬뜩한 빛을 토해냈다.
불결하고 끈적한 빛무리.
동시에 두 귀로 흘러오는 주술적 비명이 전장을 집어삼켰다.
끼아아아아아아악―
세이렌의 비명이 전장을 강타했다.
성문을 지키던 용병들과 이종 군대가 환각에 걸려 아군에게 창칼을 겨누기 시작했다. 성벽 방어선이 삽시간에 무너졌고, 블라이어 기사단을 막아내며 악착같이 버티던 드워프 기사단이 퇴로가 막히면서 포위당해 섬멸당했다.
베네타의 기사 단장, 나토네의 머리가 리옹의 검에 떨어졌다.
[주, 주술사를 죽여!]
베네타의 남은 기사들이 도네콜린트를 죽이기 위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들도 곧 도네콜린트 주변에 은신해 있던 암살자들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도네콜린트 곁을 호위하는 암살자 부대. 그 앞에선 외팔이 사내가 지휘하는 장면이 시야에 잡혔다.
칼 바스타인.
스토리상 흘러갔던 악당 조력자 칼의 모습에 난 신음을 삼켰다.
내가 만들어낸 새로운 스토리가 아닌, 본래 소설의 내용대로 흘러가는 장면.
베네타의 성문은 결국 무너졌고, 블라이어의 전 병력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볼 필요도 없었다.
안쪽 병력은 이미 몰살 직전일 테니까.
베네타의 성안은 이미 폐허나 다름없었다. 모든 건물이 무너져 내렸고, 성주인 도르네프도 상처투성이에 기력을 다했다.
혹한의 망치는 부러졌고, 갑주는 찢겨 나간 채 주저앉아 있었다.
그를 돕던 조직, 검은 장미도 마찬가지.
검은 장미들의 시체가 성 한가운데 잔뜩 널브러져 있었다. 그 중심에 멍하니 서 있는 펜리.
블라이어가 도착하기 전에 대부분의 전력이 몰살당한 흔적이었다.
그 엄청난 피해를 안고 얻은 건, 단 한 구의 시체였다.
절뚝거리며 선 펜리는 한 손에 든 아레나 후아튼의 머리를 움켜잡곤 이를 바드득 갈았다.
백(百) 개의 심장.
이 끔찍한 괴물이 베네타의 대부분을 집어삼키는 동안, 블라이어가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
아레나 후아튼을 죽이는 데 성공했지만, 모든 것을 잃었다.
막을 수 없다.
반파된 갑주를 벗어 던진 도르네프는 암담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죽은 샤르바딘의 복수는 성공했지만, 그 끝은 파멸이었다.
[베네타의 군주를 내 앞에 꿇려라.]
담담히 명하는 카멜의 지시에 리옹이, 렌구아가, 칼이, 각자 세력을 이끌고 돌격해왔다.
"도망쳐! 멍청이들아! 못 이긴다고!"
난 도르네프와 펜리 곁에서 도망치라고 외쳤다. 하지만 이건 내 바람일 뿐이다. 상황은 스토리대로 흘러갈 뿐이었다.
[도망쳐라. 암고양이. 넌 혼자가 아니잖아?]
[닥쳐, 이 난쟁이 새끼야. 이젠 거시기마저 쪼그라든 거냐?]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그때 네가 잘하는 걸 하면 돼. 도망치는 것.]
주인 잃은 할버드를 움켜쥔 도르네프가 남은 이들을 데리고 적들을 막아섰다.
콰아아아아앙―!!!!
큰 폭발이 터지며 도르네프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주술사들의 둥지.
렌구아가 중심이 되어 발악하는 상대를 향해 엄청난 화력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도르네프의 잔여 병력이 갈려 나갔다.
검게 탄 시신들이 즐비한 가운데, 리옹과 칼이 도르네프를 압박하며 그 육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쿠쿠쿵―
큰 지진이 일어나고, 베네타의 성이 땅속으로 푹 꺼지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도르네프는 손수 베네타의 모든 역사를 무너트렸다. 이제 베네타의 영광을 기억하는 건 살아남은 자들뿐이다.
[펜리 체이서!]
도르네프의 울부짖는 외침에 펜리의 신형이 그림자 아래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피가 날 정도로 움켜쥔 두 손,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슬픈 눈동자.
고개를 푹 숙이며 사라진 펜리의 도주를 끝으로 베네타의 저항이 마무리되었다.
[수고했다.]
첫 전투를 성공리에 끝내고 데뷔한 도네콜린트는 학살자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처참한 몰골로 포박되어 끌려온 도르네프가 카멜 앞에 꿇려졌다.
[비, 비겁한...!]
스걱―
한 번의 손짓.
리옹의 검에 목이 날아가는 도르네프가 보였다.
베네타의 몰락.
1년에 걸쳐 벌어진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마지막 장면이었다.
난 처형 광경 앞에 서서 가슴을 움켜잡았다.
이것도 작은 인연이라고.
시리도록 아프다.
도르네프의 죽음, 베네타의 사람들이 몰살당한 것에 슬픔을 느끼는 것일까.
끓어오르는 분노에 카멜을 사납게 노려봤다.
그런데,
"...!"
카멜이 말 위에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검을 꺼내 든 그가 날 겨누며 사납게 웃었다.
이를 드러낸 명백한 살의(殺意).
[다음은 너다. 아서 클레이튼.]
* * *
"커헉!"
막혔던 숨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났다.
거친 숨을 내쉬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뚝뚝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조금 전 악몽을 다시금 상기시켜줬다.
다음은 나라고?
스토리대로 잘 흘러가다가 마지막에 왜 지랄인 건데.
"...."
문득 든 생각에 조심스레 왼팔을 들어 올렸다.
왼팔이 붙어 있다.
그러자 더 욕심이 생겼다.
제발... 다음은 나라고 했다고.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눈을 살며시 뜨며 오른손을 살폈다.
"아...."
손등에 선명히 새겨진 고대 문양을 난 멍하니 바라봤다.
잠시 후 씁쓸히 웃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괜한 기대였나.
혹여나 그동안의 일이 진짜 꿈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 내가 살았던 곳으로 돌아간 것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난 새로운 세상에서 여행 중이었고, 날 데려온 존재는 아직 날 돌려보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딜까?
방 내부가 무척 화려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만 해도 킹사이즈 세 배 크기에, 이불 감촉 또한 남달랐다.
돈지랄이 상당했을 거 같은데.
일단 침대를 나와 몸을 살폈다. 기절하기 직전 내 몸 상태를 떠올려봤다. 왼팔은 당연히 날아가고, 다른 부위도 뼈가 드러날 정도로 찢겨 나갔다.
'좀비 그 자체였는데.'
내가 살아날 방법은 그 당시 한 가지뿐이었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
"펜리가 성공한 건가?"
성공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가 멀쩡히 이곳에 서 있는 것이겠지.
생명 보험 하나는 확실히 들었다고 생각했다.
심장에 손을 얹어봤는데, 특별한 변화는 느껴지지 않았다. 별다른 것이 없는 느낌인데, 이건 펜리를 만나보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좀 많이 변한 것 같기도 하고."
일어나니 나신이었다.
눈앞에 비친 거대한 거울이 나를 반겼다. 알몸 자태에 난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봤다.
거울 속의 내가 손을 흔든다.
확실히 내가 맞단 말이지.
옅은 브론즈 머리카락.
눈매는 매섭게 휘어졌지만, 백금색의 밝은 눈동자가 매서운 느낌을 부드럽게 희석해줬다.
심장의 영향인지 피부가 아이 피부처럼 투명했는데, 탄탄한 몸과는 잘 안 어울렸다.
꼭 자이언트 베이비 같잖아?
그 덕에 여자 여럿 울릴 것 같은 외모가 됐다.
변화한 외모가 신기해서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포즈를 잡아봤다.
이렇게 말끔한 모습으로 내 외모를 살펴본 적이 있었던가?
살아남느라, 그딴 거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쨍그랑―
잠시 후, 무언가 깨지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열린 문 사이로 수수한 복장을 한 엘프가 무척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음식을 가져오다가 내 알몸 쇼를 보곤 쟁반을 떨어트린 모양인데, 어째 익숙한 얼굴이었다.
푸른 눈동자에 금발의 미녀 엘프.
난 이불로 몸을 가리며 멋쩍게 그녀를 반겼다.
"엘프 넬라. 오랜만이네요."
"…이제야 의식이 돌아왔군요."
"제가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오래됐죠."
한숨을 내쉬며 넬라는 종업원을 불러 주변을 치우게 하곤 음식을 새로 내오게 했다.
그녀는 곧장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어냈다.
쨍쨍한 햇살이 통창을 통해 스며들고, 바깥 풍경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조금 전 꿈에서 봤던 불타는 성을 보고 와서일까.
저 멀리, 도르네프가 머무는 영주성이 눈에 담기자, 감흥이 새로웠다.
[베네타의 역사가 곧 파묻혀 사라질 거다.]
눈앞의 베네타는 여전히 건재했다.
그것도 아주 찬란하게.
75화 시발, 탄 맞았다.
"3개월?"
"네. 3개월이요."
허겁지겁 빵을 집어 먹던 난 멈칫하곤 넬라를 바라봤다.
무려 3개월 동안 의식이 없었다고?
접시 위에 빵을 슬며시 내려놓고 이불을 들어 몸을 살폈다.
헛기침 소리가 들렸지만,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인가?
적재적소에 자리 잡은 단단한 근육, 영양 크림을 듬뿍 바른 것 같은 탄력 있는 피부까지.
이게 3개월 굶은 몸이라고?
"정말 아무것도 안 먹었습니까? 몸이 이런데?"
"네."
"입으로 음식을 넣어줬다든가…."
"그런 일은 결단코 없었습니다."
넬라가 미간을 찡그리곤 단호히 고개를 젓자, 난 어색한 미소를 짓고는 빵을 입에 물었다.
아니면 아닌 거지. 왜 그렇게 질색하는 건데?
'오랫동안 굶어도 멀쩡한 몸이라….'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지만, 이곳 자체가 원래 상식 밖의 세상이니 깊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원인만 파악하면 되는데, 아무래도 심장의 영향이 아닐까 싶었다.
물론, 한 가지를 꼭 확인해야 했다.
바로 심장의 유무.
내가 그 소유자인지 말이다.
"펜리 님을 만나고 싶은데요."
"마스터는 지금 베네타에 없어요."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사건이 있긴 한데... 아직은 말씀드릴 수 없군요."
"그럼, 그녀가 떠나기 전에 내게 남긴 말 같은 거 없습니까? 분명 있을 텐데."
"잠시만요. 쪽지가 있어요."
넬라는 품에서 작은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건네받으며 난 넬라의 복장을 유심히 살폈다.
첫 만남 때는 노출이 심한 원피스를 입었는데, 지금은 수수하고 편한 차림이었다. 마치 잠옷 같달까.
부스스한 금발을 큰 리본으로 마무리했는데, 붉은 리본을 보자 문득 의문이 들었다.
"빨간 리본이네요."
"그런데요?"
"혹시 릴리 베이스를 좋아해요?"
"...."
릴리 베이스.
오르도르 숲의 마녀가 언급되자, 넬라는 잠시 멈칫했을 뿐, 침묵한 채 날 가만히 응시했다.
싫다고 하지 않은 걸 보니 마녀 릴리에게 호감이 있는 것 같았다.
"그 리본 유명하잖아요."
인간과 달리 이종족은 릴리 베이스를 동경 혹은 좋아해서 릴리의 상징인 붉은 리본을 자주 달고 다닌다고 알고 있었다.
"근데, 푸른 장미 콘셉트에 변화가 생긴 겁니까? 섹시에서 친근한 여동생 콘셉트로 바뀐 거 같은데."
"이건 영업 전 복장이에요. 오해 마시길."
이젠 눈초리까지 싸늘해졌다.
살짝 경계하는 눈초리인데 정확한 이유를 모르겠다.
입맛을 다시며 펜리가 남기고 간 쪽지를 읽어봤다.
[네 말대로 먹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망할."
심장의 유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펜리가 내 부탁대로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먹인 것 같았다. 그럼 장기간 굶어도 멀쩡했던 이유가 설명된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불사자의 심장으로 그 소유자는 생존에 관해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했다.
굶주림에 대한 저항도 그 능력 중 하나일 것이다. 다른 능력은 차차 알아가면 될 일이고, 문제는 쪽지에 적힌 다음 문구였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라니.
성격 더러운 여자의 말이라 더 살벌했다.
"그녀가 혹시 제게 많이 화났습니까?"
"글쎄요. 가끔 아서 님이 코를 골면 무기를 꺼내시곤 했습니다."
"...."
번뜩이는 크로우가 떠오르자 마른침이 넘어갔다.
이거 눈치 봐서 튀어야겠는데?
펜리의 살기가 여기까지 느껴졌다.
하지만 그런 걱정도 곧 잊혔다.
간소한 애피타이저가 끝나고 종업원들이 음식이 든 접시를 한가득 가져오자, 뭐에 홀린 듯 손이 움직였다.
조금 전까진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 고기가 배 속으로 들어가자, 두 눈동자에 핏기가 서리며 짙은 고양감이 올라왔다.
두근―
심장이 뛴다.
머리가 더 많은 음식을 원하고, 갈구했다. 식욕이 터진 느낌이랄까.
이성의 끈마저 끊어진 기분이었다.
"...응?"
정신을 차렸을 땐 넬라는 자리에 없고, 미모의 엘프 종업원 셋이 곁에서 바삐 시중을 들고 있었다.
"무, 뭐야?"
식탁 옆에 산더미처럼 쌓인 빈 접시를 보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양손에 쥐어진 큼지막한 고깃덩어리.
설마 내가 다 먹은 건 아니겠지?
기억의 필름이 살짝 끊어졌다가 돌아온 것 같았다. 기억이 전혀 나질 않았다.
정말 이성의 끈을 놓고 먹었다.
이게 정상일까?
그럴 리가. 그럼 원인은 하나였다.
일단 고깃덩어리를 마저 다 먹고 심장을 만지작거렸다.
'골칫덩어리가 하나 더 늘어난 것 같은데.'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으면서 몸에 큰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인간의 몸이되, 인간과 거리가 있는 육체. 그리고 정신까지.
얻는 게 뭔지, 대가가 뭔지, 잃은 게 뭔지 우선적으로 파악이 필요해 보였다.
"다 드셨습니까?"
"아, 네."
"그럼 여기...."
"이게 뭡니까?"
"계산서입니다."
이쁜 엘프 종업원이 생글 웃으며 종이를 내밀었는데, 종이엔 금액이 적혀 있었다.
258골드.
음식값이었다.
두 눈을 끔뻑이곤 종업원을 올려다보니 더 밝게 미소로 답하는 그녀가 보였다.
"…전부 제가 시킨 겁니까?"
"물어봐도 대답이 없으셔서 넬라 님이 대신 주문하고 나가셨습니다."
'…이년이!'
입꼬리를 올리며 떠나는 넬라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잠시 깜빡하고 있었다.
이곳은 푸른 장미, 방심하면 영혼까지 털리는 악마의 소굴이란 것을 말이다.
"오, 외상 됩니까?"
"그건 넬라 님께 여쭤봐야 합니다. 그럼 나머지 추가 요금도 외상으로 처리할까요?"
"...나머지 추가 요금?"
"VIP룸에서 숙박하신 요금이 밀려있습니다. 모두 3달 치입니다."
"...."
"소지품 보관료도 있는데, 찾으시려면 추가로 요금을 더 지불하셔야 합니다."
'타짜2' 하이라이트 영상을 보면 탄 맞는 주인공이 나온다.
그때 주인공이 상대 타짜에게 고스톱으로 탄 맞아서 신장이 털렸었지?
탄 맞아서 골로 갔다고.
그래, 맞다.
시발, 탄 맞았다.
* * *
"시부랄 놈들, 도둑놈들, 사채업자도 울고 갈 놈들!"
11800골드.
쌓인 계산서를 내밀며 푸른 장미가 내게 청구한 금액이었다. 무슨 VIP숙소가 하룻밤에 100골드나 하냐고.
세 달 치 숙박료를 계산하니 무려 9천 골드가 나왔다.
더 억울한 건 VIP숙소에서 머문 기억이 반나절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난 오늘 아침에서야 VIP숙소에 머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방 안에 돈지랄이 남다르더라니.
이 정도면 펜리 년에게 사기당한 거나 다름없었다.
강력히 따지려고 넬라를 찾아갔는데 불편한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넬라의 접견실에 함께 있던 검은 장미들.
펜리에게 무슨 언질을 들었는지 내가 돈 얘기를 꺼내자 무기를 꺼내며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무효를 외치면 바로 칼이 날아올 것 같은 분위기.
설마, 이것까지 계산한 건가.
펜리 이 무서운 년….
"…그래, 이 정도면 싸게 먹힌 거지."
펜리에게 구함을 받은 목숨값치곤 저렴한 편이라며 스스로 위안 삼았다.
11800골드.
역시나 가슴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접견실을 도망치듯 나온 후 계단을 내려왔다.
당장 돈을 벌 궁리부터 해야 할 것 같았다. 다행인 건 가진 능력이 있어서 못 갚을 금액은 아니라는 거다.
별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건물 안은 영업 전인지 한산했다.
5층부터 1층까지 내려오며 눈이 돌아갈 만한 예쁜 엘프들과 마주쳤다. 여긴 눈이 즐거워서 좋긴 하네.
"개인 훈련장이 마련되어 있다고 했지?"
혹시 이것도 돈 받는 거 아니야?
우려와 달리 VIP숙소 손님에겐 무료로 제공하고 있었다.
당장 확인하고픈 게 있었기에 프런트에 서 있는 남자 엘프에게 개인 훈련장을 요청했다.
푸른 장미 건물 주변에는 수많은 창고가 즐비했는데, 그 창고 일부를 개인 훈련장으로 쓰는 것 같았다.
엘프가 한 창고로 날 안내하곤 공손히 물었다.
"VIP고객에겐 시중을 들어줄 아리따운 종업원들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수련에 필요한 편의 물품도 제공하고 있는데 불러올까요?"
"아뇨. 됐습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연히 괜찮죠."
푸른 장미는 겉으로는 술과 웃음을 파는 살롱 업소의 형태를 띠지만, 본질은 검은 장미의 정보 조직이나 다름없었다.
훈련실에 시중을 붙인다는 건, 그 사람의 능력이나 실력을 파악하려는 목적이 더 클 것이다.
내 실력이야 이곳 마스터가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숨길 필요는 없지만, 불필요한 노출은 피하고 싶었다.
안내자가 물러가고, 텅 빈 훈련소에 나만 남았다.
작은 놀이터 넓이에 장비들이 좌판처럼 장식된 간소한 훈련장이었다. 각종 무기에 강철 갑옷까지 구색은 다 맞춰진 장소라 혼자 수련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후―
짧게 호흡을 내뱉은 나는 일단 달리기 시작했다.
그것도 전력 질주로.
* * *
아침 햇살로 가득 찼던 훈련장에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해가 진다.
수련장 안이 어두컴컴해서 시야가 보이지 않았을 때, 그제야 난 비로소 달리는 걸 멈췄다.
"헉, 헉, 헉…."
거친 호흡을 뱉어내며 램프를 찾았다. 철그럭 철그럭 움직일 때마다 귀에 걸리는 쇠 긁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램프에 빛이 들어오자, 내 모습이 램프 유리에 비쳐 보였다.
두꺼운 갑주를 걸친 모습.
"…와, 이 미친 체력 보소."
설마 했는데, 진짜 해냈다.
강철 갑옷을 걸치고 순수 체력으로 점심부터 저녁까지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력 질주는 무리였지만, 속도 조절을 하면 밤새 달리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스스로의 체력에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무거운 갑주를 낑낑거리며 벗어 던졌다.
살 것 같다.
난 대(大)자로 누워 호흡을 골랐다.
금세 안정되어가는 호흡.
난 체력보단 이 회복력에 놀라는 중이었다.
"체력전에선 지려고 해도 질 수가 없겠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갑주가 헐거운 탓에 뛸 때마다 이음매에 피부가 찢기고 멍이 들었다.
근데 몸은 피투성인데 상처가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생존에 특화된 재생과 회복 능력.
살아남는 것이 목표인 내겐 최고의 힘이나 다름없었다.
주인공인 카멜조차 기피했던 메인이벤트, 백(百) 개의 심장.
불가능에 가까운 미션인 만큼, 보상은 확실했다.
대박이다.
목숨을 걸었던 것이 안 아까울 만큼.
'하지만 부작용도 분명 있겠지?'
직접 두 눈으로 지켜봤기에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크리스탈 미믹, 붉은 괴물, 그리고 아레나 후아튼까지.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머문 숙주의 말로는 죽음이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심장의 통제를 받았다.
이런 부작용을 경계했기에 붐(Boom)을 터트릴 때 의식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는데, 폭발 강도가 예상치를 벗어나서 의식이 날아갔다.
"다행히 잠식을 당하는 건 피한 거 같은데."
정신 방벽을 계산에 깔고 벌인 도박이기도 했다.
도박에 성공했을 때의 이득이 이렇듯 엄청났으니까.
하지만 조금 전 식사를 할 때 잠시나마 이성을 잃은 것을 보면 완벽히 부작용을 피했다고 볼 순 없었다. 다음에도 이와 똑같은 반응이 나타난다면 심각하게 고민해볼 일이었다.
'가진 능력 안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은데.'
머릿속으로 내가 지닌 능력들을 나열해봤다.
정신 방벽.
인챈트.
고대 문양.
성력과 신명 사냥꾼.
그리고 레토니칼스의 심장까지.
모처럼 여유가 생겼을 때 한 가지씩 테스트해보며 몸 상태를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3개월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으니까.
창밖을 바라보니, 구름이 잔뜩 낀 밤이라 달빛이 보이지 않았다.
램프에 핀 작은 불꽃에 의지해야 하는 어두운 밤.
출렁이는 불꽃을 잠시 감상하고 있는데,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분 나쁜 밤이네요."
푸른 장미의 주인, 넬라가 날 찾아왔다.
76화 혈맹을 제안해요
넬라가 들어온 입구 사이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밤이 됐지?
푸른 장미의 영업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오늘도 아리따운 꽃을 꺾어보려는 남정네들이 문전성시를 이룬 것 같았다.
물론, 내 눈에는 피를 빨리러 온 호구들로 보였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왜 찾아온 걸까? 접견실에서 쫓아낸 지 반나절도 안 지난 거 같은데.
"개인 훈련 중입니다만? 매너 모르십니까?"
"바람이나 쐴 겸 찾아왔어요."
"바람을 쐬면 막 찾아올 수 있는 그런 곳입니까? 이곳이?"
"돈 갚기 싫으세요?"
"갚아야죠. 이리 들어오시죠."
난 램프가 올려진 식탁 옆 의자를 손수 털어주곤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돈이 권력이고 깡패인 더러운 세상.
"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오신 겁니까?"
"당연히 아니죠."
"손님도 많을 시간에 무슨 용건입니까?"
"막 의식을 차린 분이 훈련장에서 상식 밖의 행동을 보여서요. 살펴보러 왔어요."
"상식 밖의 행동?"
"갑주를 입고 온종일 뜀박질만 한다고."
"...그게 수상한 겁니까?"
"정상인이 할 행동은 아니니까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확인차 방문했어요."
"무슨 확인 말입니까?"
은은한 불빛 아래 넬라가 날 빤히 바라봤다. 아침과 달리 꽃처럼 치장한 그녀가 날 쳐다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하긴 했는데, 저 눈빛,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잠식으로 괴물이 됐는지 안 됐는지."
"...."
"안타깝게도 정상이네요. 제법 준비를 많이 했는데."
넬라가 살짝 손짓하자, 지붕 전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사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시발, 몇이나 있었던 거야?
더 무서운 건 내 기감에 안 걸렸다는 거다.
뛰어난 검은 장미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내가 오기 전부터 이미 지붕에 은신 중이었다는 소리였다.
"…무, 뭡니까?"
"심장에 잠식된 괴물로 판단되면 조직 전체를 동원해 제거하라는 마스터의 지시예요."
"저를 감시한 겁니까?"
"당신이 장미들의 눈 아래 있는 거죠. 여기가 어디라고 생각하세요?"
어디긴 어디야.
검은 장미 본진이지.
"하하하...."
어째 아침부터 날 예민하게 살피더니, 그런 무시무시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물론, 펜리의 판단은 이해했다. 심장의 주인은 하나같이 이지를 상실한 괴물들이었으니까. 어찌 보면 내가 예외적이라 볼 수 있었다.
이상하리만큼 확신이 있었거든.
"보다시피 정상입니다."
"알아요."
"저 살았습니까?"
"아쉽지만 그렇게 됐네요."
"아쉽다라, 뼈가 있네요?"
"아까 말하지 않았나요? 기분 나쁜 밤이라고."
"그게 저랑 무슨 상관 있습니까?"
내 물음에 넬라는 살포시 웃고는 다리를 살짝 꼬았다. 갈라진 원피스 사이로 아찔한 각선미가 드러났다.
원피스가 퇴색되어 보이는 우윳빛 피부. 게다가 하필 은은한 불빛 아래다.
이러니 남정네들이 정신을 못 차리지.
아침에 본 수수한 엘프와 같은 엘프인지 헷갈릴 정도로 도발적인 행동이었다. 이래서 여자는 변신의 동물이라 하는 건가.
"상관있죠. 오늘은 구름이 많이 낀 '그림자가 없는 밤'이잖아요."
넬라의 답에 난 뺨을 긁적였다.
진짜 뼈가 있는 대답이었다.
'그림자가 없는 밤'은 그림자 주술이 봉인되는 펜리의 약점을 우회해서 표현한 것이었으니까.
눈빛을 보니 떠보는 게 아니었다.
내가 그림자 주술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마스터의 약점을 알고 있는 존재로 인지했다는 건데… 그녀의 분위기가 VIP룸과 접견실에서 봤던 것과 다른 느낌인 이유를 알겠다.
단순한 마담뚜가 아닌 검은 장미의 일원으로 날 바라보는 것이다.
"그녀에게 들었습니까?"
"마스터가 누굴 구해서 아지트로 데려온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래서 집요하게 물었죠."
"어디까지 들었습니까?"
"생명의 징표, 전투 그리고 구출까지."
라웁 숲 사건에 대해 빠짐없이 다 들었다는 말이었다.
펜리가 숨김없이 다 말했다는 건, 넬라의 지위가 조직 내에서 상당하다는 것을 뜻했다.
확실히 몇 차례 부딪쳐 보니 보통 여인은 아닌 것 같았다.
아름다운 미모, 그 안에 무서운 비수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하나?
가시 돋친 장미란 표현이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눈만 뜨면 긴장의 연속이네.'
죽을 고비 끝에 좀 살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은 아니겠지?
"알려진 약점 아니었습니까?"
"마스터가 그 말을 들었다면 당신 목을 두 바퀴 정도 돌렸겠네요. 마스터는 지금껏 모든 의뢰를 홀로 수행했어요. 능력을 최대한 숨기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고 보니 샤르바딘 의뢰 때도 혼자 움직였었다.
나와 함께 움직인 게 이례적이란 뜻인데, 상황이 그만큼 급박하긴 했나 보다.
지금까진 그림자 능력을 잘 숨긴 모양인데, 제단에서 크리스탈 미믹을 상대할 때 많은 드워프들 앞에 능력을 노출시켰다.
그 미친 미믹 새끼가 좀 버텨야지.
"저 때문에 약점이 노출됐다는 겁니까?"
"당신이 계획의 주동자라고 들었거든요."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래서 절 원망하시는 겁니까?"
"원망은 안 해요. 반대급부로 조직의 5년 치 예산을 도르네프에게 받게 됐거든요. 한마디로 돈방석에 앉았죠."
"뽀찌 같은 거 없습니까?"
"살려드렸잖아요."
독한 년.
있는 것들이 더했다.
그런데, 뽀찌란 단어를 어떻게 알지?
"그럼, 왜 제게 그 말을 꺼낸 겁니까? 그림자 없는 밤 말입니다."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요."
"제안?"
"마스터의 능력에 대해 함구해 줄 것."
"이미 노출이 됐다고…."
"드워프들이라면 괜찮아요. 봐도 모를 것이라고 했으니까. 문제는 당신이죠. 마스터와 등을 맞대고 마스터의 전력을 지켜본 존재."
아레나 후아튼과 싸웠을 때를 말한 것 같았다.
하긴 그때 펜리가 똥줄 타면서 밑천을 전부 드러내긴 했지. 아레나가 좀 세야지.
근데, 등을 맞대기보단 내가 거의 업혀 다녔다.
날 구하느라 발에 땀 나도록 뛰어다녔는데, 말하기 쪽팔렸는지 넬라에겐 돌려 말한 것 같았다.
"저도 염치라는 게 있어서요. 제 생명의 은인인데 발목을 잡고 싶진 않습니다. 마스터의 능력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겠습니다."
"전 인간을 신뢰하지 않아요. 아니, 모든 엘프가 그렇게 생각하죠."
"원하는 게 뭡니까?"
"당신께 혈맹을 제안해요."
"…혈맹? 진심입니까?"
"네."
혈맹.
피로 맺은 연합체란 뜻인데.
엘프가 말하는 혈맹은 인간이 생각하는 혈맹과 달랐다.
인간이야 혈맹이든, 혈족이든 제 살길 힘들면 배신을 밥 먹듯이 하지만 엘프는 아니었다.
목숨을 걸어야 한다.
괜히 펜리가 날 살리려고 그 개고생을 자처한 게 아니었다.
엘프가 내뱉은 맹약은 그만큼 구속력이 강력했다.
언령에 특화된 종족의 비애랄까.
"전 인간입니다만, 당신들이 신뢰하지 못하는."
"알아요. 인간은 우리와 다르게 배신을 잘하죠."
"그런데 혈맹 제안? 저랑 말장난하자는 겁니까?"
"전 거짓말을 못 해요."
"이유가 뭡니까? 이미 여러 차례 배신당한 경험이 있으실 텐데?"
"...."
엘프들이 좋아서 술을 팔고, 웃음을 팔고 다니겠는가?
전부 생존을 위해서였다.
숲을 잃었고, 터전을 잃었기에 엘프들은 돈이 필요했다.
그 터전을 망가트린 주범이 누구였을까.
인간이다.
정확히 세상의 큰 주축을 담당하는 마법사 집단 말이다.
"설마 그녀도 허락한 겁니까?"
"제 개인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마스터도 결국 허락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곧 진실과 마주하게 될 테니까."
"진실?"
내 의문에 넬라는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내게서 뭘 봤길래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거지?
도통 그녀의 생각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리란 쪽지를 보지 못한 건가?
제법 오랜 시간의 침묵.
먼저 침묵을 깬 건 넬라였다.
그녀는 기지개를 쭉 켜곤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베네타에서 가장 귀가 밝은 사람이 누군지 아나요?"
"넬라 당신이겠죠."
푸른 장미에는 수많은 정보가 모여든다. 그 주인이 바로 넬라고.
"맞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토바른 지역 전체를 봐도 손꼽을 정도로 귀가 밝은 편이죠. 당신이 의식이 없었던 3개월 동안 많은 일이 일어났어요."
3개월.
나도 그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무척 궁금했다.
특히, 카멜 블레이저.
그 녀석의 행보가 가장 궁금했다.
"그중 가장 큰 관심사는 근래에 각성한 신명의 주인들이죠."
"신명의 주인들?"
미간이 확 좁혀졌다.
주인들?
왜 여러 명이지?
스토리 흐름대로라면 백 개의 심장 각성 이후로 한동안은 신명의 각성이 없었을 텐데?
"…혹시 몇 명인지 압니까?"
넬라는 내 앞에 멈춰 선 후 다섯 손가락을 폈다.
다, 다섯? 아니지?
"각성한 신명의 주인은 모두 다섯 명이에요."
하지만 넬라의 쐐기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이건 말이 안 되는데?
"그중 한 명은 죽었고, 다른 한 명은 온통 베일에 감춰졌어요. 정체가 드러난 이들은 남은 셋인데 토바른 내에선 유명 인사들이죠."
"...."
난 말없이 넬라를 바라봤다.
나머지 셋의 정보를 알고 있다?
신명은 정보를 통해 함부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무려 '신명'이다. 발설하면 저주를 받는.
"혹시 정보를 샀습니까?"
"아직이에요."
"당신, 설마 신을 받드는 자입니까?"
"놀란 표정이네요. 신을 받드는 자는 그리 희귀한 직업이 아니잖아요. 물론, 나름 신명을 잘 보는 편이라 다른 자들보단 차별점이 있지만."
그녀는 신명을 받는 자가 맞았다.
엘프라면 뛰어난 정령사 혹은 신녀, 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마법사는 신명으로부터 배척되는 게 이 바닥의 규칙이었으니까.
엘프 넬라.
비중이 있는 인물 같은데,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다.
'부각되기 전에 죽었다는 건데.'
백 개의 심장이 베네타를 휩쓸었을 때 희생당했던 모양이었다.
넬라란 인물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 물론, 호감과 아주 거리가 먼 관심이었다.
"죽은 신명의 주인은 아레나 후아튼이에요."
"…말해도 됩니까?"
"신명의 생사는 신을 받드는 자라면 누구나 확인할 수 있고, 죽은 신명의 주인은 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어요. 괜찮아요."
한 명은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알던 신명의 주인이기도 했다.
도미닉 후아튼 대신 각성하게 된 아레나 후아튼.
나머지 네 명이 누군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내가 미래를 바꿈으로써 무려 넷이나 각성했다는 거다.
"혈맹을 맺는다면 신명의 주인 중 세 명에 대해서는 알려줄 수 있어요."
"그게 가능합니까?"
"마스터가 돌아오면 알려 줄 거예요. 그 정보를 얻기 위해 자리를 비운 거니까."
혈맹이면 가능하다라.
잠만, 그러고 보니 이 혈맹….
'내가 거부할 이유가 없잖아?'
엘프와의 혈맹은 인간인 내겐 너무나도 유리한 맹약이었다.
저쪽이 내게 발목 잡힐 확률이 훨씬 높았다.
수틀리면 배신할 가능성이 있는 나와 달리, 저들은 아니었으니까.
검은 장미는 계산이 아주 철저한 조직이다.
왜 이렇게까지 손해를 보며 날 잡으려는 거지?
그 답은 넬라가 알고 있고, 펜리가 돌아와야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신명과 정보.
난 펜리가 향한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블랙마켓(black market).
힘과 권력을 지닌 자들이 수단을 위해 암묵적으로 인정한 암거래 시장.
신명의 주인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싶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기도 했다.
블랙마켓에는 돈을 받고 신명을 알려주는 일종의 액받이, '저주받은 노예'들이 있었으니까.
"제안에 대한 답은 결심이 서는 대로 알려주세요."
넬라는 꾸벅 고개를 숙인 후 훈련장을 벗어났다.
그녀가 나간 문 사이로 새까만 암흑이 펼쳐졌다.
진짜 그림자 하나 없는 구름 낀 밤이다.
펜리가 가장 싫어하는 밤 말이다.
77화 우린 블랙마켓이다
펜리는 두 눈을 끔벅였다.
암흑 공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주술로 연결된 암흑 공간은 정보 제공자와 고객의 신분을 완벽히 감출 수 있었다.
서로 정체를 모르며, 목소리 또한 가짜인 마법적인 공간.
블랙마켓 VIP만 입장할 수 있는 거래 공간으로, 이곳에선 오직 신명에 관한 정보만 취급했다.
펜리는 고객 신분으로 이 공간의 정보 제공자와 신명의 정보를 두고 거래 중이었다.
"한 명당 30만 골드?"
"왜? 비싼가?"
"아니, 생각했던 것보다 싸서."
"셋의 신명 목록을 알아내는 건 단가가 싼 편이라 다른 곳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거든."
"단가가 싸다고?"
거래자의 마지막 말에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액받이로 쓰던 노예들의 희생이 적었다는 뜻이다.
마녀사냥 시절에 블랙마켓에서 수많은 마녀를 노예로 사들였다고 들었다.
높은 확률로 희생당한 노예들은 '마녀'였을 것이다.
마녀 대학살 이후 마녀들을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는데, 음지에선 여전히 마녀들에게 가혹한 짓을 벌이는 모양이었다.
펜리 또한 인간의 탐욕에 희생된 종족이라 눈앞의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모른 척 무시했다.
블랙마켓은 세상을 주무르는 권력자들의 수단 통구다.
지금 펜리가 상대하기엔 너무 큰 산이었다.
"거래할 텐가?"
"최신 정보겠지?"
"물론이다."
신명 목록은 그 주인의 성장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업데이트된 목록들의 가치는 세상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주인일수록 비싸졌다.
아니, 나중에는 돈으로 구할 수 없는 정보가 되기도 했다.
그만큼 알아내는 것에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돈을 지불했다.
그녀가 구입한 신명 목록은 모두 세 명.
모두 합쳐서 90만 골드였다.
조직의 1년 예산에 버금가는 엄청난 금액이었지만, 도르네프의 의뢰를 완료한 덕에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물론, 돈을 건네는 펜리의 입장에선 욕이 절로 나왔다.
[어떤 대가를 줘서라도 제가 말한 정보들을 구해 오세요!]
넬라의 강력한 경고가 아니었다면 이런 정보 따위에 절대 거금의 골드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넬라는 엘프족 안에서 얼마 남지 않은 신녀 중 한 명. 평소에 조용하고 얌전한 그녀가 강력히 주장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네."
90만 골드가 허공에서 사라졌다.
고작 이 종이 쪼가리에 적힌 정보 때문에 그 큰 투자를 하다니, 탄식을 내뱉으며 정보를 읽었다.
잠시 후, 펜리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
입을 앙다물고 마른침을 삼켰다.
표정 관리가 전혀 안 된다.
늘 그림자가 가려진 이 블라인드 공간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오늘에서야 이 공간의 유용함을 알 것 같았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도르네프 가더 – 토바른의 방패(냉기(冷氣))]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신명 목록에 적힌 세 명의 이름.
셋 모두 익숙히 알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바로 자신이었다.
목록을 받아 든 펜리는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넬라가 다급히 블랙마켓을 이용해 신명 정보를 받아 오란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신명의 주인이 됐다.
'도대체 언제…?'
언제고 신명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했다.
6성에 오른다면 대부분 받게 되는 게 신명이었으니까.
신명을 받는 순간부터 인생에 큰 변화가 찾아온다.
당장 어딜 가든 대우를 받으며, 이곳 블랙마켓만 해도 수십만 골드 차용증을 우습게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펜리는 전혀 기뻐할 수 없었다.
'내 무력과 조직의 전력은 변한 게 없어.'
그런데 신명을 받았다?
자신의 능력이 아닌 외부적인 요인이 그녀의 운명을 변화시켰다는 뜻이었다.
그녀의 시선은 또 다른 신명의 주인, 도르네프에게 닿았다.
베네타의 군주도 자신과 똑같은 시기에 신명을 받았다.
쪽지에는 신명 각성 순서와 날짜가 적혀 있었는데, 가장 최근에 신명을 받은 이는 일주일 전으로 블라이어의 흑주술사로 알려진 렌구아란 인물이었다.
그다음이 도르네프인데, 그 각성 시기가 자신과 완벽히 똑같았다.
그럼, 각성 이유도 똑같지 않을까?
자신과 도르네프가 최근에 공통으로 엮인 사건은 하나뿐이었다.
'라웁 숲, 도미닉 후아튼.'
그리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그 녀석이 있었다.
이름만 떠올려도 이가 갈리는 녀석.
하지만 자신의 신명이 그 녀석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단순한 감이 아니었다.
녀석의 전투를 바로 곁에서 지켜봤기에 확신할 수 있는 감이었다.
빛의 물결로 수천의 키메라 떼를 물리는 압도적인 광경.
각성한 아레나의 기운을 짓누르는 권능.
마지막엔 그녀를 죽이고 심장까지 삼켰다.
이젠 묻혀버린 그 흔적 위로 그 처절한 전투를 기억하는 이는 오직 자신뿐이었다.
아니, 이젠 넬라까지 두 명이었다.
아서 클레이튼.
그 존재를 말이다.
'그 녀석은 지금도 의식이 없으려나? 잠식으로 괴물이 되면 예상이 빗나가는 건데.'
녀석에 관한 모든 정보를 넬라에게 전달했으니, 그녀가 슬기롭게 대책을 세웠을 것이다.
신명 정보를 확인한 펜리는 쪽지를 태워버렸다.
신명 구매자는 웬만해선 타인과 정보를 공유하지 않았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정보를 흘린 주체가 신명의 주인들에게 흘러간다면 적대감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보는 자신과 그 주변 인물의 정보였지만, 그래도 조심스럽게 다뤄야 했다.
"최근 각성한 주인들은 모두 다섯이라 들었는데?"
"몰라서 묻는 건가?"
"아니, 죽은 한 명은 빼고, 남은 한 명의 정보가 필요해."
펜리는 아레나 후아튼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직접 그 시신을 태운 당사자였으니, 가장 먼저 알았다는 게 정확했다.
남은 이는 넬라가 베일에 감춰진 주인이라 말한 한 명.
블랙마켓은 그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까?
"그자는 완벽하지 않다."
"완벽하지 않다? 그게 무슨 뜻이지?"
"일부 내용만 알고 있다는 뜻이다."
"액받이들이 이젠 없나 보지?"
"그 입,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VIP라도 선이란 게 있으니까."
목소리만 들리는 공간.
제공자의 목소리엔 섬뜩한 살기가 담겼다. 아니 분노하는 것 같았다. 다만, 분노의 대상은 펜리가 아닌 정보를 알아내지 못한 것에 대한 수치심 같았다.
"이 정보는 중개만 하고 있다."
"중개?"
"정보 위탁이다. 정보를 제공한 위탁자가 원하는 물건이 아니라면 정보를 알려줄 수 없다는 의미지."
"어떤 정보를 알 수 있지?"
"신명."
신명.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정보이기도 했다. 넬라는 어떤 대가를 지불해서라도 그자의 정보를 구해 오라고 했다.
"가격은?"
"번외."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건가?"
"정보 위탁자가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물건이니까."
"물건?"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
"…미친 새끼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우리에게 교섭권은 없어. 정보 위탁자의 조건이니까."
펜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라니, 무슨 생각으로 이딴 조건을 내건 거지.
'아니, 가능할 수도 있겠네.'
지금 알고자 하는 신명은 무척이나 특별했다.
무려 신명의 규칙을 깬 존재의 신명이었으니까.
방금 제시한 엿 같은 조건에도 분명 거래를 원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정보 위탁자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고대 아티팩트를 쓸어 담겠어.'
펜리는 잠시 고민했다.
상급 이상의 고대 아티팩트.
그 조건을 충족하는 물건이 그녀에겐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한 가지를 떠올린 펜리는 우선 교섭에 들어갔다.
"중개 조건으로 그 정보를 넘겨받았겠지?"
"...."
"원하는 금액을 얼마든지 맞춰 줄 수도 있어. 나한테만 몰래 팔아."
"중개 계약에 아주 곤란한 주술이 걸려서 말이지. 곤란하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다.
실력 좋은 주술사들을 밑에 두고 있는 자였나?
이러면 결국 조건대로 움직여야 하는데, 펜리는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틈을 찾았다.
"정보 정확도는?"
"백 퍼센트."
"출처를 알 수 있나?"
"운명의 아케인."
더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틈이 없다.
그리고 왜 블랙마켓이 욕심을 접고 중개만 맡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아케인은 신명을 취급하는 이들에게 절대 척을 져선 안 되는 존재였다. 아케인이 정보 위탁자로 나섰다는 건, 이 거래가 독점이란 뜻이다. 다른 곳에선 절대 얻을 수 없을 거란 확고한 자신감 말이다.
'넬라도 그자의 신명을 전혀 읽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펜리는 또 고민에 들어갔지만, 고민의 결론은 같았다.
어떠한 대가로든 그자의 신명을 알아내야 했다.
'엘프족의 운명이 걸렸을 수도 있다고 했으니.'
펜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신명을 떠올렸다.
세계수의 그림자.
세계수는 태초 시절부터 내려오는 엘프들의 안식처이자 터전이다.
자신이 그 터전의 그림자로 지목됐다. 그것도 이번 라웁 숲 사건에 휘말리면서 말이다.
펜리는 넬라의 감을 믿었다.
그녀는 차고 있는 목걸이를 벗어 허공에 내려놨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목걸이.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고대 시절에 존재했던 세계수의 축복을 받은 목걸이였다.
상급을 넘어 엘프족에겐 최상급에 준하는 고대 아티팩트다.
'미끼로 이만한 게 없지.'
나름 머리를 굴린 선택이었다.
고대 아티팩트 수집.
아케인을 내세웠지만, 분명 그 뒤에 흑막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펜리는 목걸이를 통해 그 흑막을 밝혀낼 생각이었다.
'선택받은 엘프족이 아니라면 목걸이의 숨겨진 능력을 파악하지 못할 테니까.'
위치 추적이 그 능력 중 하나였고, 위치 파악을 통해 펜리는 두 가지를 얻을 생각이었다.
하나는 흑막의 주인.
그리고 다른 하나는,
'수집된 고대 아티팩트들.'
찾기만 하면 훔칠 수 있다.
그건 자신의 특기였으니까.
목걸이의 감정 시간은 제법 길었다.
감정을 해봤자, 상급 정도의 가치로만 나올 것이다.
펜리는 목걸이의 가치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블랙마켓이라면 목걸이의 가치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잠시 후,
"거래 성립이다."
거래 수락과 함께 한 장의 쪽지가 손에 쥐어졌다.
펜리는 그 작은 쪽지를 받곤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쪽지를 펴고 읽었다.
단 한 줄의 신명 정보.
[신명 사냥꾼]
"...."
신명 사냥꾼.
해석에 따라서 엄청난 파급 효과를 불러올 신명이었다.
펜리는 조용히 쪽지를 태웠다.
무슨 이유인지, 손을 내려놓은 그녀의 손이 덜덜 떨린다.
"흥미롭지 않나?"
"뭐가 말이지?"
정보를 구매했기 때문일까.
정보 제공자는 펜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줬다.
"신명의 '앞 글자'가 단순히 이름을 뜻하는지, 사냥하는 자의 먹잇감 이름인지 말이야."
'신명' 사냥꾼.
해석에 따라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만약 앞 글자 '신명'이 그 주인들을 사냥하는 존재라면 이자는 신명을 지닌 자들의 적으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블랙마켓은 이자를 어떻게 판단하고 있지?"
"우린 블랙마켓이다."
펜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등을 돌렸다.
그 답이면 충분했다.
블랙마켓은 이득이 기운 쪽으로 움직인다. 단일 세력이 아닌 철저한 이득 집단으로 이뤄진 연합체이기 때문이다.
펜리 자신도 이 신명을 알기 전까진 블랙마켓과 똑같은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신명 사냥꾼.'
펜리는 나직이 신명을 중얼거리며 공간을 벗어났다.
자신의 엘프 인생에서 뭐랄까.
무언가에 더럽게 엮인 느낌이었다.
78화 이곳이 바로 악의 소굴
푸른 장미 5층은 베네타의 명물로, 하루 이용료만 300골드가 넘어갔다.
한껏 치장한 아찔한 외모의 엘프들과 일대일로 은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프라이빗한 장소.
오늘 밤도 수많은 손님이 엘프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돈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손님들 사이엔 나도 떡하니 한 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내 지명 상대는 다름 아닌 이곳의 마담뚜 넬라였다.
"…뭐라고요?"
"이해 못 했습니까? 두 번 말하기 입 아픈데."
"지금 그딴 제안을 하려고 절 여기로 부른 건가요?"
은하수를 떠올릴 법한 몽환적인 공간. 보석으로 치장된 은폐된 방 안에 들어온 넬라는 고운 이마를 찡그리곤 푹신한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영업시간이라 그런지 마담뚜 포스가 물씬 풍겼다.
"그딴 제안이라고 하면 섭섭하죠. 무려 '혈맹'에 관한 대화 아닙니까?"
"그러니까. 접견실에서 해도 되는 이야기를 왜 이곳에서 하냐는 거죠. 돈도 없는 사람이 방은 또 어떻게 잡았죠?"
"얘기하니까 다 들어주던데요?"
난 위스키를 흔들곤 쭉 들이켰다.
푸른 장미에서 가장 비싼 술을 달라고 했는데, 종업원들이 군말 없이 제공해주었다.
날 외상으로 독박 씌우려는 펜리의 지시가 분명했다.
VIP룸에 재웠을 때부터 알아봤다고.
"유명한 곳인데, 저번에 저만 구경을 못 했거든요. 방 분위기가 참 좋네요. 어둡기도 하고."
남정네들 마음에 불을 지피기 딱 좋다는 뜻이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 같거든.
"영업의 기본이니까요."
"영업도 잘하시는 분이 유독 저한테 까탈스러운 이유가 뭡니까?"
"제안이 형편없으니까요."
"혈맹을 먼저 제안했으면 그 정도는 해줘야죠."
날 바라보며 잠시 헛웃음을 짓던 넬라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내 행동이 기가 막혔나 보다.
"그래서 장부에 달린 외상값을 전부 없애 달라? 앞으로 달릴 것도 쭉?"
"쪼잔하게 혈맹끼리 무슨 돈을 받으려고 그래요. 혈맹 프리패스 모르십니까?"
"…혈맹 프리패스?"
"혈맹끼리는 돈돈거리면 안 된다는 뜻이죠."
바뀐 육체를 살피고 적응하는 데 사흘 정도가 걸렸다. 목숨이 걸린 일이라, 잠시 깜빡 잊고 있던 게 있는데, 이곳이 바로 악의 소굴, 푸른 장미란 것이었다.
사흘이 지난 지금, 11800골드가 13000골드가 됐을 때, 난 결심해야 했다.
막 나가기로.
'나도 살아야지.'
펜리 년이 작정하고 날 염전 노예로 만들려는 게 분명했다.
생명의 징표 일로 앙심을 품고 날 담그려는 것 같은데, 어림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숙소로 옮겨 가느냐??
'이 좋은 데를 놔두고 굳이 왜?'
개인 수련장도 있지, 음식 잘 나오지, 침대도 죽이지.
거기다 이쁜 엘프들도 있어서 눈도 즐거웠다.
현대로 따지면 5성급 스위트 프리미엄 VIP 호텔보다 좋은 곳인데 떠나는 게 바보였다.
더군다나 거래 우위에 있는 지금이라면 더더욱.
"혈맹 제안으로 무척 싼 대가 아닌가요?"
저들이 왜 날 혈맹으로 붙잡으려는지 모른다. 다만, 손해를 보고라도 날 잡아야 하는 이유가 있다는 거다.
펜리 년이 오기 전에 이 거래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년은 솔직히 무섭다고.
"아, 정보 공유도 추가로 넣겠습니다. 혈맹끼리 서로 알 건 알아야죠."
학살자의 소식을 알고 싶은데, 터무니없는 요금을 요구해서 아직도 궁금증을 풀지 못했다. 이것도 지금 짚고 넘어가야 나중에 딴말이 안 나온다.
"당신, 생명의 징표가 사라진 건 알고 있나요?"
"알죠. 정신 차리자마자 바로 확인했는데."
"그럼 지금 제안이 마스터의 귀에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겠네요?"
"넬라 님이 막아주실 거라 믿습니다."
"무리예요."
"무리라는 게 못 막는다는 겁니까? 안 막겠다는 겁니까? 엘프로서 솔직해지시죠?"
"...."
넬라는 고운 이마를 찡그렸다.
엘프와 인연이 없어 보이는데, 눈앞의 사내는 엘프의 언령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았다. 교묘히 말을 돌려도 바로 짚어내곤 집요히 물어온다.
'알면 알수록 모르겠어.'
중요 인물이 될 수 있기에 아서 클레이튼이란 인물의 과거를 탈탈 털어봤다.
과거 크룩스 출신의 암살자란 것과, 블라이어와 사이가 안 좋다는 것, 그리고 최근에 아서 클레이튼이란 이름을 쓰고 다녔다는 것 정도였다.
그 전의 과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름 없는 존재라니.'
고아 출신.
노예 출신.
암살자 출신.
출신만 알 뿐 이름이 없었다.
뭘 알아내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다만, 조사를 하면서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을 자랑한다는 거.
죽을 것 같으면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았고, 약한 것 같으면서도 벌어진 전투는 늘 승리했다.
신기한 사내.
오랜만에 넬라의 관심을 잡아끈 인물이었다.
"그 제안은 마스터가 오면 물어보세요."
"누구 허리 접히는 꼴 보려고 하십니까? 어쩔 수 없네요. 지금 떠나겠습니다."
"…떠나요?"
"여기 있으면 빚만 늘어날 텐데, 어쩌겠습니까? 돈 갚으려면 떠나야지."
"일거리를 중개해 줄 수 있어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맡기지. 뭘 믿고요? 됐습니다."
"담보 없인 보내드릴 수 없어요."
"이걸 담보로 맡기죠."
"...."
내가 가슴에 달린 검은 브로치를 툭툭 건드리자, 넬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다크 로즈(dark rose).
베네타의 보물을 맡기고 간다는데 잡는다는 건 억지나 다름없었다.
"저 갑니다?"
식탁 위에 다크 로즈를 올려놓고, 엉덩이를 살짝 들썩였다.
겉으론 뻗댔는데, 속으로는 살짝 쫄렸다.
안 잡으면 나가린데.
그래도 확신을 두고 움직이는 거였다.
사흘 동안 훈련장에 콕 박혀 지냈다. 그 사이 넬라는 하루에 한 번은 꼭 시간을 내서 날 찾아왔다.
많은 주제로 내게 말을 걸었는데, 내 눈치가 또 백 단이라 그녀의 의도를 단박에 파악했다.
나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 큰 관심이 없다면 보일 수 없는 모습.
"하, 좋아요. 일단 앉아요."
문고리를 소리 나게 잡자 넬라가 항복을 선언했다. 몰래 웃음 짓던 난 표정을 바로 고치곤 등을 돌렸다.
품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낸 후 그녀 앞에 내밀었는데, 서류를 살핀 넬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날 올려다봤다.
"...검은 장미 계약서, 우리 의뢰에 쓰는 계약서를 당신이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거죠?"
"지붕에 있는 녀석들에게 부탁하니 들어주던데요?"
"...하."
마스터가 구해 온 생존자, 그리고 자신이 혈맹을 제안하며 직접 챙기는 모습까지.
따로 언질을 주지 않았던 것이 오해를 불러온 것 같았다.
아니, 귀한 손님이 맞긴 한데, 인정하기 싫다고 해야 하나.
마스터의 말대로 밉상이었다.
"바쁘신 것 같아서 제가 미리 준비했습니다. 지장 찍으세요."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약으셨네요?"
"마스터에게 제 얘기 못 들었습니까?"
"육포처럼 떠버릴 테니, 잡아두라고만 하셨어요. 근데 저도 동참할까 생각 중이에요."
"…못 들은 거로 하겠습니다."
넬라는 피식 웃고는 계약서에 사인을 했다. 조금 전까지 내 제안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던 엘프 맞나 싶었다.
진짜 육포를 뜨려고 마음먹은 거 아니야?
"태세 전환 빠르네요?"
"한번 결정하면 미련을 안 두는 편이라."
"계약도 맺었으니, 하나만 물어봅시다."
방금 계약을 통해 혈맹에 한 발 담갔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그동안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저 같은 자에게 혈맹을 제안한 이유가 뭡니까? 이제는 말해줄 수 있지 않습니까?"
"생명의 징표요."
"생명의 징표? 징표는 이미 써버려서 이젠 끗발이 없을 텐데?"
"그 징표가 사라진 날, 검은 장미의 미래가 바뀌었거든요."
"무, 뭐가 바뀌어요?"
"미래요."
아서 클레이튼.
이 사내와 마스터 간의 징표 맹약이 끝나는 그날, 마스터와 도르네프가 신명을 동시에 각성했다.
'세계수의 그림자.'
그리고 토바른의 방패.
신명을 내다본 순간 감이 왔다.
이 사내를 절대 놓쳐선 안 된다는 것을.
"그게 무슨 말...."
뜻 모를 말이라, 자세히 답을 구하려는데,
"요놈 깨어났네?"
"...헉!"
절대 들려선 안 되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넬라가 내 뒤를 바라보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예를 표하는 존재는 이곳에서 한 명뿐이다.
이곳의 마스터.
펜리 체이서가 내 그림자를 밟고 띠꺼운 표정으로 곰방대를 물고 있었다.
"하하하… 여기서 뵙네요."
"여기서 뵙네요? 웃기고 자빠졌네."
넬라와 잠시 눈빛을 교환한 그녀가 내 손에 쥐어진 계약서를 낚아챘다.
계약서를 읽어 내려가는 그녀의 표정이 보인다. 일그러지면서 딱딱하게 굳어지는데 무슨 호러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그게...."
"열한 번이야."
"…네?"
"네놈이 징표를 발동하고 내가 네 목숨을 구해준 횟수가 자잘한 거 빼고 무려 열한 번이라고. 생명의 징표라도 이대로 퉁치기엔 솔직히 수지 타산이 안 맞잖아. 명색이 검은 장미 마스터인데."
독한 년.
그걸 일일이 다 계산하고 있었냐?
순간 육포를 떠버리겠다는 넬라의 말이 떠올랐다.
목을 깨끗이 씻고 기다리란 쪽지도 있었지.
난 펜리가 계약서를 쫙쫙 찢고, 내 몸도 쫙쫙 찢을 줄 알았다.
그런데, 펜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계약서를 다시 내게 돌려줬다.
"그래서 이번이 마지막이야. 내가 손해 보는 짓은. 계약서대로 해주지."
"…뭡니까? 더 불안하게."
돈을 안 받겠다고?
저 구두쇠 펜리가?
갑자기 왜?!
펜리가 눈짓하자, 넬라가 고개를 숙이곤 방을 총총 벗어났다.
은하수가 쏟아질 것 같은 몽환적인 공간에 그녀와 단둘이 남았다.
푸른 장미 5층이 이렇게 무서운 데였어?
펜리가 내게 다가오더니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한 가지만 기억해."
"...."
"넌 내게 큰 빚이 있어. 알지?"
"…큰 빚?"
"깊이 새겨두라고. 여기에."
그녀가 내 심장을 툭툭 두드리자, 난 신음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토니칼스의 심장.
확실히 난 그녀에게 큰 빚이 있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심장을 얻지도, 그 자리에서 살아남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 빚 지금 받아갈게."
"…뭐요?"
"싫어?"
"아, 아닙니다."
"잘 생각했어. 잘 처리할 거라 믿는다."
"...?"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펜리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휙 벗어났다.
뭘 처리하라는 거야?
처음엔 저 엘프 년이 뭔 소리인가 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본 순간 난 어이없는 눈빛으로 펜리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다크 로즈는 또 언제 가져갔대."
흑요석 브로치가 사라지고 없었다.
두 엘프가 눈빛을 교환하더니, 넬라가 냉큼 가져간 모양이었다.
이토록 쿵짝이 잘 맞는 것을 보니, 피부 다른 자매가 분명했다.
설마 그 목숨 빚을 다크 로즈로 대신하겠다는 건 아니겠지?
예나 지금이나, 틈만 주면 코 베어 가려는 건 똑같았다.
역시, 이곳은 악의 소굴이었다.
79화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
군주 도르네프의 장인의 혼으로 제작된 다크 로즈(Dark rose).
흑요석에 깃든 힘은 주인의 생존에 필요한 축복 효과를 부여했다.
미믹 제단에선 샤르바딘의 목숨을, 도미닉과의 전투에선 내 목숨을 구해준 고마운 물건.
그 물건을 펜리가 허락 없이 홀라당 가져가 버린 것이다.
'다크 로즈가 원래 6성에 오른 펜리의 상징 각인물이긴 한데.'
스토리대로라면 펜리의 손에 들어가도 이상할 건 없었다. 확실히 다크 로즈는 그녀와 무척 잘 어울렸으니까. 다만, 샤르바딘이 생존하면서 그 소유권이 내게 넘어왔다는 거다.
조금 전 펜리의 태도를 보니, 다크 로즈에 큰 욕심이 있어 보였다.
하긴, 검은 장미를 닮은 보석인 데다, 축복 효과까지 있으니 펜리 입장에선 욕심낼만한 물건이었다.
'생명의 징표를 한 번 더 요구해 봐?'
아니, 이건 생존을 우선시하는 내 원칙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징표의 '징' 자만 꺼내도 죽을 거다.
다크 로즈 건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내 소유이긴 해도 은인으로서 받은 물건. 샤르바딘의 동의를 구해야 물건 양도가 가능했다.
펜리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기에, 큰 빚을 언급하며 간접적으로 협박한 것이었다.
가서 샤르바딘의 동의를 구해 오라고.
다크 로즈와 별개로 어차피 도르네프를 만나러 가야 했다.
'꿀단지가 코앞에 있는데, 안 가면 내가 벌이 아니고 파리 새끼지.'
도르네프에게 선물 받은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가 떠올랐다.
베네타 가문에 대대로 내려온 대장장이의 정원 1회 교환권.
그 안에 어떤 보물이 숨겨져 있을까.
기대감이 벅차오르기 시작하자, 5층을 나온 내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1층으로 후다닥 내려온 후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남자 엘프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소지품을 찾으러 왔습니다."
그가 날 보며 기계적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보관료는 가져오셨습니까?"
"이거 보고 다시 얘기하시죠."
"이게 뭡니까?"
"제가 오늘 경제적 자유를 얻었다는 계약서입니다."
펜리가 1층 보관함에 내 가방을 넣어놨는데, 하루 보관료가 무려 20골드에 달했다.
석 달 하고도 사흘.
1860골드가 없어서 지금껏 내 가방을 내 가방이라 외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펜리를 욕할 수도 없었다.
"내 가방!"
"...."
가방을 홱― 낚아채곤 안을 다급히 확인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
도네콜린트의 마녀 목걸이.
마르샤가(家)의 직인.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
붐(Boom)을 봉인한 팔찌와 보랏빛 마석 더미까지 야무지게 잘 챙겼다.
물건들을 확인하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물건들의 가치를 생각했을 때, 보관료 따윈 공짜나 다름없었다.
펜리가 물건을 꿀꺽하고 모르쇠로 일관해도 알 수 없는 일. 오히려 챙겨준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이제 부의 자유를 만끽할 차례다.
훈련장을 갈 때마다 1층에서 내 발길을 잡았던 그 향긋한 간식. 돈 없어서 바라보기만 했던 그것을 원 없이 먹어볼 차례였다.
"여기 팬케이크 종류별로 부탁해요."
"가격이...."
"여기 계약서요."
이 정도면 블랙 카드인데?
식탁에 쫙 깔린 팬케이크들을 보며 실실 웃었다.
이 세상을 경험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엘프들의 팬케이크 굽는 솜씨가 대륙 최고라는 것이다.
푸른 장미 1층에 팬케이크 가게가 따로 있을 정도고, 이 케이크를 먹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도 생각보다 많았다.
"으음!"
살살 녹는다.
요리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현대로 데려가면 케이크 시장을 씹어 먹고도 남을 것 같았다. SNS 메인에 있는 케이크 맛집과 비교해도 압도적이었다.
누가 케이크 요리사를 데려갈지 모르겠지만, 음식 복 하나는 타고난 놈일 거다.
사흘간 규칙적으로 행해졌던 훈련 루틴이 조금 변할 것 같았다.
훈련 전 팬케이크, 훈련 후 팬케이크 말이다.
오늘부터 이 팬케이크는 내 거다.
* * *
푸른 장미 건물 내의 비밀 공간, 펜리 체이서의 사무실.
펜리는 오물거리면서 빈 접시를 내려놨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며칠 전부터 단게 엄청 땡겼거든."
"밖에서 사드시지 그랬어요?"
"입맛 버릴 일 있어? 여기 넬라표 팬케이크가 있는데."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렸나 보네요?"
"잘 풀렸지. 출혈이 예상보다 커졌다는 것만 빼면."
"얼마나 들었나요?"
"90만 골드, 그리고 내 목걸이까지."
"…목걸이요? 그걸 건넸단 말이에요?!"
"두 번째 신명의 주인, 그 녀석의 정보가 번외더라고."
번외.
돈으로 구할 수 없는 정보란 뜻이었다.
접시를 치우던 넬라는 펜리 앞으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굳이 목걸이를 건넨 이유를 묻는 표정이었다.
"큰 기회를 놓치긴 아까웠어."
"무슨 기회요?"
"잘만 풀리면 단시간에 큰 힘을 얻을 기회."
미끼를 통해 수집된 고대 아티팩트 세트를 강탈.
하지만 이 계획에는 중요한 정보가 빠져 있었다.
"흑막이 건드릴 수 없는 상대라면 어쩌려고요?"
"그 수준이라면 상급 수준의 아티팩트가 아니라, 최고를 원했을 거야. 충분히 할 만한 도박이야."
"그래도 검은 장미로는 안 될 거예요."
"내가 직접 움직여."
"알았어요."
넬라는 더는 묻지 않고 물러났다.
마스터가 성공을 자신했으면 할 만한 것이었다. 적어도 침투와 은신에서 마스터를 따를 자는 없었으니까.
"그래서 내가 말한 건 얻어 왔나요?"
"기대한 만큼은."
"지금도 돈 버리는 짓이라 생각해요?"
"전혀."
펜리가 허공에 대고 손짓하자, 주변에 있던 인기척들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자신의 직속 호위들을 멀찍이 물린 후 그녀는 블랙마켓에서 얻어온 신명 정보를 넬라 앞에서 천천히 풀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적막한 공간 안에서 흘러나왔다.
잠시 후, 넬라가 속이 시원하다는 듯 말했다.
"잠금 해제! 이제야 대화가 되겠네요."
"내가 말한 것 중에 모르는 게 있어?"
"아직까진 없어요."
신명을 받드는 자가 신명의 발설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눈앞의 과정이 필요했다.
다른 곳을 통해 신명 정보를 알게 된 경우, 마스터가 알고 있는 인지 범위 안에선 신명의 정보 공유가 가능했다.
넬라가 모든 정보를 사전에 알고 있음에도 펜리에게 정보를 알아 오라 시킨 이유였다.
"알다시피 마스터의 신명은 '세계수의 그림자'예요."
"어떻게 해석했지?"
"엘프족의 터전 완성."
넬라의 답에 펜리는 나직이 신음을 흘렸다. 엘프족의 터전 완성이라니, 대담한 펜리조차 어깨가 무거워지는 말이었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는 혈맹 관계예요. 이종 간의 혈맹은 인간들처럼 가볍지 않죠."
"베네타의 난쟁이와 내가 동시에 신명을 각성한 게 혈맹과 관련 있다는 거야?"
"도르네프 님의 신명은 '토바른의 방패', 베네타가 토바른 내에 지켜야 할 것이 생긴다고 해석할 수 있어요."
"지켜야 할 것? 그게 세계수다?"
"제가 생각하는 해석은 그래요."
"토바른에 세계수는 없어."
"대륙 어디에도 세계수는 없죠. 세계수가 단순히 엘프족의 터전을 뜻한 것일 수도 있고, 진짜 신화 속의 세계수를 지칭하는 단어일 수도 있어요."
"그걸 어떻게 알아내고 찾지?"
"길잡이가 찾아주겠죠. 그자가 세계수로 저흴 이끌어줄 테니까."
길잡이.
그 단어를 듣는 순간, 펜리는 그 녀석을 떠올렸다.
아서 클레이튼.
어째서 넬라가 단 한 명의 인간과 혈맹을 맺으려고 하는지 이해가 됐다.
"그 녀석이 길잡이란 근거는?"
"마스터와 도르네프 님의 각성 날이, 마스터가 그자를 구해온 날이니까요."
"…빌어먹을."
"마스터의 신명과 분명 깊은 관련이 있어요. 곁에 둬야 해요."
넬라의 근거에 펜리는 짧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렇게 되면 녀석과 완벽히 엮이게 되는데 블랙마켓에서 느꼈듯이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무슨 문제 있나요?"
"잘못되면 적들이 굉장히 많이 생길 것 같아서."
"…네?"
"도착 전까지 난 그 녀석을 버릴지, 이용할지를 두고 고민했어. 함께 갈 사이로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는 길잡이가 맞아요."
"그럼, 절대 죽어선 안 되는 거잖아."
"왜 그의 죽음에 신경 쓰죠?"
"가시밭길이 보이니까."
펜리는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절대 죽어선 안 된다라.
[절 살리고 싶으십니까?]
순간 그 녀석의 재수 없는 면상이 떠올랐다. 끔찍했던 그때의 과거, 징표 소환의 날이 다시금 도래하려고 했다.
'그냥 거기서 죽였어야 했나?'
기껏 개고생해서 살려 데려왔더니, 생명의 징표보다 더 빡센 상황이 만들어졌다.
아레나 후아튼?
그 정도 괴물은 앞으로 벌어질 후폭풍에 비하면 동네 양아치 수준이었다.
"아, 두 번째 신명의 주인, 그 정보를 듣지 못했어요."
"내가 알아 온 건 신명뿐이야. 그래서 미치도록 심란한 상태지."
펜리는 잠시 주저하더니 그녀에게 새로운 신명 정보를 전했다.
신녀 넬라도 보지 못했던 신명 정보.
"신명... 사냥꾼?"
넬라는 그 신명을 여러 번 중얼거렸다.
그동안 보아왔던 신명 중 가장 강렬한 존재감이었다. 해석에 따라 신명의 주인을 사냥하는 존재로 비칠 수도 있었으니까.
"그 정보가 전부인가요?"
"모르지. 하지만 하나는 확실해. 누구도 그 주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는 거."
"정말 궁금하네요. 이 정도로 베일에 감춰진 주인이라니."
"그렇지? 그 주인의 정보를 선점해 판다면 황금산을 쌓을 수 있겠지?"
"황금산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도 바라보겠죠."
"나도 조금 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어. 안 먹어도 배가 불렀지. 하지만 이젠 아니야. 시발!"
안 먹어도 체할 것 같은 답답함.
도미닉 후아튼과의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었을 때, 빈사 상태에 빠진 녀석의 중얼거림을 들었다.
[…신명 사냥꾼.]
그래서 쪽지를 읽은 순간 신명의 주인이 누군지 떠올릴 수 있었다.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두 번째 주인의 이름.
신명 사냥꾼, 아서 클레이튼.
'그리고 신명의 주인을 사냥하는 존재.'
근래에 제거된 신명의 주인, 아레나 후아튼의 전투를 녀석과 함께 했다.
빛바랜 신묘한 화살.
그는 신명의 주인, 아레나 후아튼을 사냥했다.
녀석의 신명은 진짜다.
'이 정보를 팔면 뭘 받을 수 있을까?'
신명의 주인이라면 모두가 바라는 특급 정보.
그 가치가 가늠도 안 된다.
펜리는 넬라의 표정을 살폈다.
그 녀석에 대해 많은 정보를 알려준 상태라 눈치챌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신명 사냥꾼을 은밀히 조사해봐야겠어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하긴 가진 무력도 애매한 데다 얼빵한 이미지가 있다 보니, 길잡이의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신명의 주인까진 연결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다행인 건가?
"뭐가 다행이냐. 그 새끼는 전생에 나랑 원수를 졌나."
"…?"
운명이 참으로 얄궂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단것이 또 당겼다.
"팬케이크 하나만 더 부탁해."
"다 떨어졌어요."
"…뭐?"
"조금 전에 계약자님께서 싹 다 담아가셨거든요."
"…계약자님?"
"기억 안 나세요?"
넬라가 어깨를 으쓱이며 위를 가리키자, 펜리의 입이 잠시 벌어지더니, 서서히 일그러졌다.
"이런 찢어 죽일...."
아서 클레이튼.
죽이고 싶다.
진심으로.
80화 왜 후광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