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왜 후광이....
후비적―
어떤 놈이 날 씹고 있는 모양이었다.
귀를 후빈 새끼손가락을 후― 불곤 빵빵해진 배를 툭툭 두드렸다.
첫 시식 기념으로 펜케이크 가게 영업을 조기 종료시켰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고 난 후 큰 변화가 찾아왔는데, 그게 바로 식탐이었다.
먹는 양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늘었고, 먹어도 먹어도 배 터져 죽을 것 같은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굶주린 아귀가 된 것 같달까.
다행이라면 첫날 빼곤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이게 행복이지."
소화나 시킬 겸 개인 훈련장 바닥에 뒹굴뒹굴하며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정오쯤 시작한 독서인데, 내용에 몰입하다 보니 주변이 어둑해지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연구 일지가 있어서 다행이네."
탁―
난 일지를 덮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도미닉의 일지를 살핀 이유는 심장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도미닉이 신(新)동력 원천이라 칭했던 레토니칼스의 심장.
그는 긴 시간 동안 크리스탈 미믹을 연구하면서 동력 원천의 정보를 유추해서 적어놨는데 무척 흥미로웠다.
'마석 생산, 불멸에 가까운 생명력, 체력 회복, 상처 재생.'
그리고 그 에너지원을 '식탐'을 통해 얻는다고 적혀 있었다. 식탐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에 빼놓을 수 핵심 요인이란 의미였다.
'석 달 동안 고갈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내 이성을 잠시 잠식할 정도로 말이지.'
미믹도 다르지 않았다.
일부로 먹이를 고갈시키니, 바로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적혀 있었다.
잠식의 부작용인데, 도미닉은 이 부작용을 제거하기 위해 아레나에게 '영혼 박탈'을 시술했다.
잠식할 영혼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
아레나를 인형으로 만들어 심장을 동력 원천으로만 써먹으려는 의도였는데, 이 방식은 완벽히 빗나갔다.
심장은 키메라 군단을 통제하려고 했고, 아레나를 조종해 스스로를 삼키게 했다.
난 아레나의 신명을 떠올렸다.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分身體).'
분신체란 한 주체에서 갈라져 나온 존재를 말한다.
만약 레토니칼스의 분신체가 완성됐다면 아레나는 어떤 존재로 재탄생됐을까?
심장엔 분명 자의식이 존재했다.
"…괜시리 쫄리네."
가슴을 만지작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심장에 자의식이라니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이 알게 된 정보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베르센 클라크란 인물이었다.
'어지간히 죽이고 싶었나 보네.'
일지 절반가량이 클라크 대공에 대한 저주로 채워져 있었다.
나도 베르센 대공에 대해 알고 있지만, 지금은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챕터 II, 오르도르의 숲과 관련된 두 번째 악당 주인공으로 등장하니 말이다. 릴리 베이스가 숲을 지키는 한, 토바른 지역에서 베르센 대공과 엮일 일은 없을 것이다.
가방 안에 일지를 넣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당장 조심해야 할 건 한 가지 정도인가?"
배불리 먹는 것.
굶주리면 심장이 잠식을 시도할 수 있다.
다만, 이 정도 리스크는 거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굶주릴 일이 있으려나?
차라리 다른 부작용을 찾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어둡다.
식탁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등잔에 불을 붙였다.
흐릿한 공간 사이.
난 잠시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온몸을 이완시키고 두 팔을 늘어트렸다.
잠시 후, 눈을 뜬 난 바닥에 돌멩이를 줍고는 천장 세 곳을 향해 돌을 던졌다.
탕― 탕― 탕―
천장 군데군데 돌들이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돌이 부딪친 지붕 위에서 부산스러운 소리가 들리자, 씨익 웃었다.
정확히 세 명.
은신해 있던 검은 장미의 위치를 잡아낸 것이었다.
"자, 잡히신 분 1골드씩 내놔요."
"...."
대답은 없었지만, 천장에서 반짝이는 금화가 툭툭툭 떨어졌다.
모두 3골드.
넬라 때문인지 의외로 쉽게 친해져서, 이틀 전부터 술래잡기 내기를 시작했는데,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았다.
계약서란 블랙 카드가 생긴 이상, 더는 금화에 목맬 필요가 없어졌고,
'이젠 다 보이거든.'
미약하게 잡혔던 기척들이 어젯밤부턴 선명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석 달 동안 멈춰있던 육체가 갈무리되어 활력을 되찾는 순간 마나의 흐름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어젯밤, 난 4성에 올랐다.
조금 허탈하기도 했다.
알다시피, 이 몸뚱이의 마나 감응력은 쓰레기 수준이다. 적어도 반년 안에 4성은 무리라 판단했는데,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쓰레기 같은 감응력을 무시하고 각성의 벽을 뚫어버렸다.
이 세계에 발 들인 지 1년도 되지 않았는데 벌써 5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괴물 같은 성장력은 분명한데....'
카멜 블레이저, 도미닉 후아튼 같이 챕터Ⅰ에 등장하는 주요 악당들을 다 거치면서 살아남았다. 다시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할 것 같았다.
제발 이제 꽃길만 걷고 싶었다.
스스스―
지붕 위 미끄러지는 소리.
다시 포지션을 바꾼 모양인데, 난 바뀐 장소에 시선을 두곤 피식 웃었다.
날 감시하기보단 이 주변을 감시하는 검은 장미들인데, 술래잡기가 무료했던 저들의 승부욕을 불태웠나보다.
검은 장미들이 귀엽게 느껴질 날이 오다니.
[10분이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처음 만났을 땐 절대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졌는데, 살아남으면서 나도 성장한 것 같았다.
주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찾았다.
그래도 돈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좋았다. 꽁돈을 마다할 내가 아니었다.
한 번 져주고, 두 번 이기는 짤짤이 패턴.
야금야금 장미들의 금화를 갈취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찾아와 소식을 전했다.
"둘이 또 무슨 작당을 하려고 그러는 거야?"
토바른의 정보에 밝은 넬라에게 바깥 정보를 얻기 위해 만남을 요청했는데, 펜리와의 자리가 길어지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 중이길래 늦은 저녁까지 끝나지 않은 거지?
"내 욕하는 거 아니야?"
다시 귀를 후비곤 종업원에게 1골드를 팁으로 던져줬다. 줄곧 뻣뻣하게 굴던 종업원의 허리가 직각으로 굽었다.
이게 돈의 위대함인가.
짤짤이를 더 하고 싶은데, 욕심부리다간 호구들이 눈치챌 수 있었다.
펜리와 헤어지면 곧장 이리로 온다고 했으니, 넬라가 오기 전까지 기운 적응 훈련이나 할 생각이었다.
스르릉―
훈련장에 비치된 검을 꺼내 들었다.
팔 길이 정도의 두꺼운 검날을 지녔는데 나무에 철을 씌운 것이라 무게는 가벼운 편에 속했다.
참고로 난 검술을 모른다.
검술을 훈련하려고 잡은 게 아니라는 뜻.
몇 차례 검을 휘두르곤 지붕을 올려다봤다.
"이번에 잡히면 다음 교대자가 올 동안 자리를 비우는 것으로 하죠."
"...."
"쫄리면 말고요."
"네 녀석이 진다면?"
"한 명당 2골드."
"좋다."
승부욕을 살살 건드리자, 바로 미끼를 물었다.
장미들은 내 실력을 어떻게 생각할까.
절대 4성으로 생각지 않을 것이다.
넬리토리 협곡에서 알려진 내 실력은 고작 1성에 불과했으니까.
잠시 후 벌어진 내기는 당연히 내 승리.
이쯤 되면 눈치챌 법도 한데 눈치가 없는 건지, 인정하기 싫은 건지 승부욕만 불타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주변 기척을 살핀 난 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장미들을 멀찍이 보내버린 이유는 기운 적응 훈련이 인첸트였기 때문이다.
이곳은 검은 장미의 본진이다. 즉, 그들의 눈만 피하면 다른 이들의 시선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우우웅―!
두터운 검날 위로 새하얀 빛이 씌워지기 시작했다.
이전보다 거칠고 컨트롤이 힘들다.
관통의 기운을 서서히 늘려갔는데, 그것도 잠시,
쩌저저적―!
"...!"
검날이 기운을 버티지 못했다.
겉면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콰작―! 터지며 부러져 나갔다. 짧게 혀를 차며 다른 검을 집어 들었다.
"쉽지 않네."
4성에 오르면서 마나의 질이 짙어졌는데, 평범한 쇠붙이는 그 기운을 버티지 못했다.
참고로 지금 내 수중엔 무기가 하나도 없었다.
자주 애용하던 크룩스 단검들도 기운 적응 훈련 도중 부러져 나갔기 때문이다.
"아티팩트급 장비를 생각할 때가 오긴 했는데."
펜리의 전용 무기, 먹빛을 띤 두 쌍의 크로우가 떠올랐다.
미친 절삭력을 지닌 고대 아티팩트 장비.
그 정도 최상급 장비를 바란 것은 아니지만, 인첸트를 버틸 정도의 무기가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조만간 도르네프를 만나러 가야겠어."
대장장이의 정원에는 드로네프 가문이 예부터 수집해온 여러 가지 장비들이 잠들어 있다고 들었다. 드워프가 수집한 장비인 만큼 기대가 되는 건 사실이었다.
카장―!
"윽!"
또 파괴됐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러진 무구 조각이 너부러져 있었다.
넬라가 보면 또 잔소리를 퍼부으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지만, 이젠 무섭지 않았다.
내겐 블랙 카드가 있었으니까.
"돈 걱정 없이 사는 게 이런 맛이구나."
"무슨 맛인데? 매운맛 좀 보여줄까?"
"…헉!"
갑작스런 목소리에 허둥지둥 뒤를 돌아봤다.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불쾌한 감촉.
고개를 돌리니 허공을 주물럭거리는 손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이 어두워 얼굴이 흐릿했는데, 단박에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이 변태 엘프 년의 손버릇은 여전했다.
"뭐, 뭡니까!?"
내 외침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엉덩이 탄력이 왜 이래?"
"제 엉덩이가 어때서요?"
"전보다 강해진 느낌인데?"
"…그런 것도 알 수 있습니까?"
"많이 만져보면 알아."
어지럽다.
설마 엉덩이 탄력으로 실력을 가늠하는 거냐? 장미들이 갑자기 불쌍해졌다.
더 무서운 건 정확하다는 거다.
내가 부정을 하지 않자, 펜리는 씨익 웃고는 손가락 하나를 폈다.
"큰 빚에 빚이 하나 더 늘었네?"
"...."
무서운 년이 상황 파악도 빨랐다.
심장 덕에 강해진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녀의 얼굴 그림자가 너부러진 장비 잔해들을 살핀 후 창고 주변을 둘러봤다.
"애들 다 어디 갔어?"
"...."
"아니, 상관없으려나? 어차피 다 보내려고 했으니까."
펜리가 어둠을 뚫고 다가왔다.
어째 느낌이 싸했다.
넬라가 오기로 했는데, 그녀가 대신 왔다.
펜리가 블랙마켓에서 어떤 정보를 얻어왔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그녀에게 직접 듣고 싶진 않았다. 먼 길 다녀왔으면 쉴 일이지 왜 이리 부지런해?
투덜거림도 잠시, 그녀가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난 두 눈을 깜빡여야 했다.
"...응?"
"왜? 내 얼굴에 뭐 묻었냐?"
"아니, 그게...."
볼륨감 넘치는 몸매.
그 위로 흘러내린 부드러운 금발.
성깔 있어 보이는 눈매까진 전과 똑같았다.
근데, 내 눈에 이상한 것이 보였다.
조금 전 만났을 땐 별천지로 꾸며진 5층 VIP실이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이곳은 달랐다.
'…왜 후광이?'
그녀의 머리 위로 보이는 은은한 후광.
눈앞의 경험은 전에 한 번 해봤다.
아레나 후아튼이 신명을 각성했을 때.
저 후광이 뜻하는 바는 하나다.
펜리가 신명의 주인이 됐다.
81화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스토리에서 펜리 체이서의 신명 각성은 제법 시간이 흐른 뒤에 이뤄진다.
기반을 모두 잃고 토바른을 떠나 새로운 지역에서 기틀을 다지는 시기.
이방인, 이종족.
견제와 배척이 당연시되는 모진 세계관에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세우는 것이 순탄할 리 없다.
그 고난 속에서 피어난 한 줄기의 빛이 바로 6성 각성이다.
그때 펜리에게 부여된 신명이 '엘프족의 큰 나무'였다.
'기존 스토리보다 훨씬 앞당겨졌다.'
나의 개입으로 펜리의 운명에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설마 나와 깊게 엮인 건 아니겠지?
부여받은 신명을 볼 수 있다면 감이 잡힐 것 같은데, 지금 내 눈에는 후광만 보일 뿐, 전에 봤던 룬 문자들은 없었다.
룬 문자는 '사냥'을 시작해야 보이는 것 같았다.
멈춰 선 펜리의 손에는 여러 장의 서류가 들려 있었다.
"넬라가 이게 필요할 것이라 하던데."
"아, 직접 오실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고맙...."
"누가 너 준대?"
내가 넬라에게 부탁했던 정보였는데, 역시나 저 엘프 년이 쉽게 줄 리 없었다.
"내게 할 말 없어?"
"큰 빚은 샤르바딘 님을 만나보고 알려드릴게요."
"제법 눈치는 있네."
월급쟁이 생활에 눈칫밥 없으면 시체지.
그녀가 가져간 다크 로즈(Dark rose)로 딜을 해볼까 생각했지만, 목숨 빚을 갚은 것으로 퉁치기로 했다.
펜리에게 잘 어울리는 물건이기도 했고,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으면서 다크 로즈의 축복 효과도 크게 기대하기 힘들었다.
이럴 땐 시원하게 주고 더 큰 것을 노리는 게 맞다. 혈맹을 맺으면 앞으로 신세 질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았으니까.
눈앞의 정보도 그중 하나였다.
달라진 미래를 대비하려면 검은 장미의 정보력이 꼭 필요했다.
내가 방긋 웃고는 손을 내밀자, 펜리가 서류를 건넸다.
그런데,
"그 한 장은 왜 안 줍니까?"
"이건 내가 알아 온 정보니까."
"혈맹 관계에 네 것 내 것이 어딨습니까? 건넨 김에 시원하게 주시죠."
"여기에 적힌 몇 줄이 고대 아티팩트 하나에 90만 골드의 가치를 지녔어."
"...."
내가 좀 뻔뻔하긴 한데, 저건 양심상 그냥 달라고 하기가 그랬다. 정보의 가치를 들어보니 무슨 정보인지도 알 것 같았다.
블랙마켓 정보.
최근에 각성한 신명 주인들의 리스트가 분명했다.
각성한 펜리를 보자 남은 이들의 정체도 궁금해졌다.
넬라가 셋은 알려줄 수 있을 거라 했는데, 펜리를 제외하면 남은 두 명이 저 종이에 적혀 있을 것이다.
"혈맹을 수락하면 신명 정보도 공유한다고 넬라가 약속했습니다."
"넬라가 마스터야? 내가 마스터인데 누가 결정해."
"뭐 그렇다고요."
계급이 깡패이니 넬라에게 따지기도 뭐했다.
딱 보니, 저 배배 꼬인 성깔로는 그냥 줄 것 같지 않았다.
달라고 조르면 때릴 것 같아서 침묵하고 있는데, 펜리가 종이를 살짝 흔들며 다가왔다.
웃고 있는 얼굴인데 살짝 미묘했다.
꿍꿍이가 있는 미소.
"최근에 각성한 주인이 몇 명인지 알지?"
"다섯 아닙니까?"
"그래, 죽은 아레나를 제외하면 네 명이지."
"그 넷이 적혀 있는 겁니까?"
"그래."
"...그, 그래?"
넷이 다 적혀 있다고?
그럼 베일에 가려진 주인마저 알고 있다는 말이잖아.
블랙마켓이 알아낸 것일까.
더 궁금해졌다.
"그냥 원하는 걸 말하세요. 돌려 말하는 거 싫어하시면서."
"네놈의 정체."
"정체? 라웁 숲에서 밑천까지 싹싹 긁어서 보여드렸는데요?"
"그래, 보여줬지.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
"곰곰이 생각해보면 말이야. 전부 네가 말한 대로 이뤄졌어. 이상하지 않아?"
"운이 좋았습니다."
"석 달은 너란 인간을 알아보기 충분한 시간이야. 너 처음부터 심장을 노린 거지? 날 만나기 전부터 말이야."
"흘러가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아니, 그 흐름을 잡은 건 네놈이야. 생명의 징표도 그중 하나겠지."
"아니, 그건…."
"아레나 후아튼을 저격하기 위한 도구, 흰나비 소환 스크롤. 구입 시기를 내가 모를 줄 알아?"
이건 예상 못 했다.
설마 환상 스크롤을 짚고 넘어갈 줄이야.
내 과거를 조사했다면 한참 전에 구입했다는 것을 알아냈을 것이다. 환상 스크롤을 구입한 곳이 다른 곳도 아닌 베네타였으니까.
펜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하면서 너무 많은 정보를 드러낸 것 같았다.
내가 펜리의 밑천을 알고 있듯이, 그녀도 내 밑천에서 수상함을 눈치챈 것이다.
다만, 내 적은 학살자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혈맹이 될 사이니, 아군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오해를 풀어야 한다.
방법을 찾고 있는데, 침묵이 그녀를 자극했다.
"난 이래서 인간이 싫어. 머리를 굴리거든."
"...자, 잠깐!"
순간 그녀의 신형이 사라졌다.
시야에 잡히진 않지만 4성에 오르면서 느낄 수 있었다. 방어 자세를 잡고 이를 악물었다.
온다!
퍼억―!
"커억!"
교차한 팔 아래로 묵직한 발차기가 솟구쳤다.
막았지만 충격을 흘리기엔 무력 차이가 너무 컸다.
신형이 하늘로 솟구쳤고,
콰자자작―!
천장을 뚫고 지붕 위로 굴러떨어졌다.
시발, 더럽게 아프다.
피를 게워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두근―!
신체의 자극에 심장의 맥동이 요동친다.
고통은 사라지고 육체엔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사흘 전과 달리 밤하늘엔 커다란 달이 떠올랐다.
짙은 그림자.
난 전력으로 내 그림자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내 육체 능력은 심장을 얻으면서 이미 인간의 수준을 벗어났다.
질기고 단단하다.
그리고 강했다.
콰앙―!
묵직한 감각이 느껴졌다.
맞았다.
동시에 지붕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지붕이 무너지더니 천장이 내려앉았다. 다시 훈련장 아래로 발을 디뎠을 때, 달빛이 공간 전체를 비췄다.
환해진 공간.
"4성?"
"알고 있던 거 아니었습니까? 엉덩이를 보면 안다면서요."
"4성은 선 넘은 거지. 석 달 전에 3성에 오른 놈이 할 말은 아니잖아? 날 속였지?"
"어젯밤에 벽을 넘었습니다."
"그걸 나보고 믿으라고?"
"엘프면서 진실, 거짓도 파악 못 합니까?"
"기분 나쁠 정도로 엘프에 대해서 잘 알아. 또 뭘 알고 있지?"
"절 못 믿는 겁니까?"
"너 같으면 믿겠냐?"
주변에 드리운 그림자들을 둘러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오해를 풀기엔 상대가 안 좋았다.
빌어먹을 암고양이.
그래도 진실을 말해줄 순 없다.
내가 알고 있는 진실은 파급력이 너무 크거든.
"절 죽일 겁니까?"
"넬라는 네놈이 꼭 필요하다고 하더군. 혈맹을 맺어야 한다고. 그런데 난 네놈을 못 믿겠어. 그러니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증명해."
"...증명?"
악당들이 판치는 세상에 증명할 거라면 하나밖에 없다.
바로 실력.
이 엘프 년이 지금 나랑 싸우고 싶어 하는 거 맞지? 아니, 패고 싶은 건가?
내가 상대될 리 없잖아.
5성과 4성 차이는 고작 한 단계지만 전투의 결이 다르다고 보면 된다.
4성이 다구리를 쳐도 5성 하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소리다.
"그냥 패고 싶다고 말하세요. 뺨 대드려요?"
"웃기지 마. 네 밑천을 본 나야. 방법이 있잖아? 날 보면서 느껴지는 게 없어? 이래 봬도 '신명의 주인'인데."
"...."
빌어먹을, 내 고유 능력을 눈치챈 건가?
전투를 함께 했다지만, 능력을 알려준 적은 없는데 어떻게 알았지?
"신명 사냥꾼."
펜리의 쐐기에 내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바닥에 뒹구는 단검을 움켜쥐고 전투 자세를 잡았다.
시치미 떼긴 글렀다.
내 비밀을 알고 있다.
다만, 분위기를 보니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것 같았다.
'정말 증명을 바라는 거라면….'
성력이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펜리를 본 순간 성력이 조금 전부터 반응을 보였다.
사냥하겠냐고.
한 번 발동하면 원하는 때 멈출 수 있을까?
갈등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신명의 주인이 전부 적이란 보장이 없었다. 아군도 있을 터.
언제고 한 번쯤 경험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사냥하겠다."
그 물음에 답한 순간,
번쩍―!
내 몸 주변으로 새하얀 아지랑이들이 뻗어 나왔다.
달빛조차 삼키며 퍼지는 눈부신 빛무리.
순간 세상이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감각이 날카로워지며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넘쳐흐르는 마나량.
사냥꾼 전투 모드로 주변을 둘러보자, 그녀가 은신해 있는 장소에 검은 오오라가 피어올랐다.
신명 목록을 읽어내는 사냥꾼의 눈.
개안(開眼).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다크 엘프족의 축복받은 몸놀림]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그림자 일족의 주술]
'세계수의 그림자?'
펜리의 신명이 변했다.
신명 목록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모조리 털어버리고 지금은 단 하나만 생각했다.
사냥.
일단 증명이 먼저다.
"이제 저도 모릅니다. 알아서 감당하세요."
"꼴값 떨고 있네. 네놈 목숨 걱정이나 해."
내가 정확히 그녀를 노려보고 있자, 그늘진 곳 사이에서 펜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두 손에는 크로우가 들려 있었다.
[진(眞) 다크 엘프의 갈퀴나무 손톱]
크로우의 이름이 갈퀴나무인 모양이었다.
그녀의 고대 아티팩트가 신명 목록에 적혀 있었다. 고대 문양처럼 소환을 통해 실체화하는 무구란 뜻이었다.
후―
길게 호흡하며 활 쏘는 자세를 잡자, 그녀가 땅을 박차고 돌진해왔다.
주저하면 끝나는 전투.
다급히 뒤쪽으로 몸을 튕기며 두 눈을 부릅떴다.
오오라 주변에 떠도는 룬 문자의 향연.
그중 하나를 노려보곤 벼락처럼 시위를 놨다.
스아아아아―
빛바랜 화살이 그녀에게 빗살처럼 쏟아졌다.
화살을 본 그녀가 지그재그로 신형을 튕기며 회피 기동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 표적은 그녀가 아닌 그녀의 신명.
신명의 화살을 피하는 건 불가능하다.
번쩍―!
"...!"
화살이 허공에서 사라지더니, 펜리의 후광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멈칫한 그녀의 표정이 일순간 당혹으로 물들었다. 그것도 잠시, 옆쪽에서 드리운 그림자에 그녀는 다급히 몸을 비틀었다.
이전과 다른 무거운 움직임.
그녀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큭! 너 이 새끼! 뭔 짓을 한 거야!?"
대답 대신 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둘렀다.
3성 때는 봉인을 유지하는 것도 벅찼는데, 4성이 되면서 공격도 가능해졌다.
[다크 엘프족의 축복받은 몸놀림(봉인)]
신명의 화살로 목록 하나를 잠재웠다.
그녀를 상대로 그나마 내가 비벼볼 수 있는 것이 육체 능력이었다.
다크 엘프 특유의 민첩함을 봉인하고 힘으로 밀어붙이자 그녀가 밀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서걱―
"…시부랄. 템빨 지리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단검이 두부처럼 잘려나갔다. 바닥에 떨어진 무기들을 낚아채서 찌르고 베고 던졌는데, 연습용 무기론 일격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쫄려서 나중엔 붙질 못했다. 시발, 스쳐도 팔이 잘릴 것 같은데 어떻게 비벼.
미친 절삭력이었다.
"내 더럽고 치사해서...!"
피투성이가 된 채 물러났다.
아무리 펜리가 느려졌어도 공격이 날카롭기 그지없었다. 육체 재생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숨을 고른 후 다른 방법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여유를 주자 뒤쪽에서 검은 손들이 튀어나와 나를 옭아맸다.
그림자 주술이었다.
엄청난 수의 손들이 내 그림자에서 끊임없이 뻗어 나와 날 압박했다.
삽시간에 내 육신은 검게 물들었고, 검은 꼬치가 되어 옴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지독한 압박감.
숨 쉬기가 힘들었다.
"으아아아악!"
답답함에 비명을 지르며 고대 문양을 소환했지만, 그림자 속성에겐 별다른 타격을 주지 못했다.
황금빛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고작 그게 다야?"
"...!"
치사하고 더러운 년이라 욕하고 싶었지만, 입이 틀어막혀 외칠 수 없었다.
"악착같이 심장을 얻으려고 하길래, 뭔가 대단한 게 있는 줄 알았는데, 진짜 별거 없네. 고작 그것 따위에 목숨을 건 거냐? 날 개고생 시키면서?"
고작 그것 따위.
펜리의 빈정거림에 내 얼굴은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레토니칼스의 심장은 고작 그것 따위가 아니다.
소설 주인공조차 포기한 메인 스토리의 힘이란 말이다.
외치고 싶었다.
심장을 느낀 지 고작 사흘밖에 안 됐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달라질 거라고 말이다.
너 따윈 곧 씹어 먹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다.
'당장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짙은 무력감에 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쯧,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
[씹어 먹는 거야 어렵지 않지. 넌 오래 걸리겠지만.]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보여주마.]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82화 레토니칼스식(式) 전투
'일단 여기까지인가?'
펜리는 팔짱을 낀 채 검은 고치처럼 제압된 녀석을 올려다봤다.
실력을 가늠했을 때 풀어주지 않는 이상, 빠져나오는 것은 힘들어 보였다.
팔짱을 풀고 몸 상태를 살폈다.
아직도 팔다리가 무겁고 감각이 둔했다.
펜리는 빛바랜 화살을 떠올렸다.
맞은 순간 온몸을 짓누르는 탈력감이 찾아왔다. 게다가 무슨 마법을 부렸는지 화살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레나와 싸울 땐 공격하는 쪽이라 몰랐는데, 당해보니 알겠다.
'치명적인 능력이야.'
찰나지만 4성인 녀석에게 밀렸다.
팔다리가 묶인 상태로 싸우는 기분이었다.
반대로 녀석은 점점 더 강해졌다.
만에 하나 녀석이 5성에 오른다면?
'신명의 주인들이 제법 위협을 느끼겠어.'
신명 사냥꾼.
직접 경험해보니 확실히 대단한 능력이다.
'대단한 능력이긴 한데….'
아쉬움이 느껴졌다.
녀석의 잠재적인 적들은 신명의 주인들이 될 확률이 높았다.
사냥의 대상 자체가 특별한 존재들이란 뜻이다.
지닌 무기는 특별하지만, 무기에 걸맞은 사냥꾼의 실력이 한참 모자랐다.
넬라는 이 녀석에 대해 확신이 있었지만, 자신은 한 세력을 책임지는 수장.
녀석과 혈맹을 맺으면 맹약처럼 돌이킬 수 없기에 확신을 얻고 싶었다.
녀석이 뭔가를 보여주길 바라는 마음이 컸는데,
'기대가 너무 컸나?'
라웁 숲에서 보인 녀석의 활약은 그만큼 비상식적이었고 놀라웠다.
블랙마켓에서도 이 녀석의 신명을 무척 중요히 여기는 듯 보였고.
"성장 가능성만 본다면 놀랍기는 하지."
첫 만남에서 고작 1성에 불과했던 놈이, 4성의 벽을 뚫는 데 반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녀석의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도와준다면 그 시간마저 더 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으로 봤을 때, 자신이 생각한 혈맹의 마지노선을 겨우 넘긴 찝찝한 합격이었다.
펜리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움켜쥔 주먹을 천천히 풀었다.
더 놔두다간 호흡 곤란이 올 것 같아서 녀석의 압박을 풀려고 했다. 주먹에 힘을 빼자, 그림자 주술의 압박도 약해졌다.
그런데,
"...응?"
꿀렁―!
검은 고치가 그녀의 눈앞에서 출렁대더니, 앞쪽으로 쭉― 늘어났다.
코앞까지 늘어난 검은 그림자.
당장에라도 뚫고 나오려는 움직임이다.
'아직도 여력이 있나?'
펜리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펴던 주먹을 반대로 움켜쥐었다.
압박 수위를 재차 높이려는 의도였다.
얼마나 버티나....
"큭...!"
압박이 강제로 풀린다.
움켜쥐던 주먹이 마비된 듯 경직되더니 서서히 펴지기 시작했다.
자의가 아닌 녀석에 의해 벌어지는 현상.
주술을 밀어내는 엄청난 반탄력이었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마치 그림자들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펜리는 이를 악문 채 몸을 튕겼다.
그 자리 위로,
콰자자작―!
고치를 찢고 주먹이 사납게 튀어나왔다.
콰아앙―!
주먹질에 바닥이 움푹 꺼지고 지반이 갈라지며 무너져 내렸다.
마치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그 흩어지는 돌조각 사이로,
"끄아아아악!"
주술을 찢고 나온 녀석이 웅크린 채 비명을 터트렸다. 내지른 어깨를 움켜잡고 있었는데, 얼굴이 고통으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부러졌다.'
어깨뼈가 뒤틀린 모습.
조금 전 주먹질이 얼마나 거셌는지, 어깨가 버티지 못한 것 같았다. 그것도 잠시, 펜리는 헛웃음을 흘리며 전투 자세를 잡았다.
"인간이 아니라 트롤 새끼였네."
뒤틀린 어깨를 바로잡고 팔을 크게 돌리는 녀석. 재생력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났다.
녀석과 눈을 마주쳤다.
붉게 충혈된 눈.
혼잣말로 뭐라 중얼거리는데 다행히 초점엔 생기가 있었다. 제정신인 듯 보이는데, 분위기가 달라졌다.
녀석이 발을 굴렀다.
쿵―
"...!"
신형이 사라졌다.
아니, 미친 듯한 속도로 돌진해왔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등 뒤로 녀석이 솟구치듯 나타났다.
빠르다.
둔해진 감각에 반응이 늦었지만, 그래도 펜리가 더 빨랐다.
날카로운 크로우로 녀석의 허벅지를 꿰뚫고 아킬레스건을 무참히 베어냈다.
발을 디딘 순간 꼬꾸라지는 치명적인 상처.
그런데,
콰아아앙!
"…큭!"
거센 발길질에 펜리의 신형이 쭉 날아갔다. 주저앉은 그녀의 두 팔이 마비된 듯 덜덜 떨렸다. 막았는데도 이 정도라고?
앞을 바라보니, 녀석이 절뚝거리며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발목이 뒤틀렸고 정강이뼈가 피부를 뚫고 튀어나왔다. 구멍 난 허벅지에선 핏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그런데도 걸어온다.
아니, 서서히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
"…이 미친 변태 새끼가."
욕설과 달리 펜리는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방 한 방이 위협적이다.
방어 따윈 없었다.
뼈를 내주는 일격 필살의 전투 스타일.
다가오는 녀석에게 처음으로 압박감이란 감정을 느꼈다.
가볍게 상대할 수 없는 상대.
더 하다간 녀석을 정말 죽일 것 같았다.
어찌 제압할지 고민하는 그때,
쿵―
"...."
성큼 걸어오던 녀석이 돌연 바닥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트롤 같은 재생력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펜리는 무기를 거두고 녀석의 머리에 돌멩이를 던졌다.
퍽―
좀 세게 던졌는지 뒤통수가 깨지며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미동이 없다.
의식을 잃은 건가?
펜리는 그림자 주술을 사용해 녀석을 자신 앞으로 조심스레 옮겼다.
기절한 녀석이 보인다.
그를 내려다보는 펜리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달랐다.
묘한 흥분을 띤 미소.
'조금 전 그 힘은 뭐였지?'
눈앞의 아서에게 뭔가를 발견한 눈빛이었다.
* * *
"…커억!"
거친 호흡과 함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푸른 장미 VIP룸이었다.
하, 또냐.
지독한 악몽을 꾸었다.
태산(泰山)처럼 큰 벌레 새끼한테 짓눌려 숨이 막혀 죽는 꿈.
저번 악몽에는 학살자가 나오더니, 이젠 붐(Boom)을 닮은 끔찍한 벌레 새끼가 등장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채 몸을 살폈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육신.
어깨뼈가 뒤틀리고, 다리가 반병신 됐던 결투가 꿈처럼 느껴졌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커튼을 치우고 창문을 열자, 내리쬐는 햇살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눈에 고통이 느껴질 정도다.
얼마나 기절해 있었던 거지?
설마 이번에도 석 달은 아니겠지.
펜리 년이 설마 나를 크로우로 담글지는 몰랐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죽었다고.
펜리를 향해 욕설을 쏟아내곤 눈에 힘을 팍 줬다.
실눈을 뜬 채 수많은 창고에서 내가 쓰던 개인 훈련장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훈련장 바닥은 뭔가 터진 것처럼 내려앉아 있었고, 그 위로 인부들이 무너진 지붕을 수리하는 모습이 눈에 담겼다.
펜리와 사투를 벌인 전투 흔적이 고스란히 보이자,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꿈일 리가 없지."
전투 흔적이 지금껏 남아 있는 것을 보니 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듯 보였다.
"끔찍한 고통이었어. 꿈이었으면 바로 깼을 거야."
무의식적으로 펼친 새로운 전투법.
몸 근육과 신경 다발이 갈가리 찢기고 뜯기는 지독한 고통이었다.
다시 경험해보고 싶지 않은 통증.
그 통증이 떠오르자, 통증을 준 존재를 상기시켰다.
[숙주가 이리 약해서야.]
목소리의 강렬했던 여운이 지금도 머릿속에 맴돌았다.
누군가가 내게 보낸 마법 메시지 따위가 아니었다.
[레토니칼스식(式) 전투를 보여주마.]
레토니칼스.
이벤트의 당사자인 도미닉 후아튼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심장의 이름을 알고 있고, 그 이름을 입에 담을 수 있는 존재.
그리고 날 '숙주'라고 불렀다.
내 손은 조심스레 가슴에 닿았다.
범인은 심장밖에 없었다.
설마, 대화도 가능했던 거야?
잠시 고민하던 내 입술이 달싹거렸다.
"...심장아?"
시발, 첫 만남에 내뱉은 인사말치고 진짜 없어 보였다. 소개팅을 처음 접해본 어수룩한 소개팅남이 된 기분이랄까.
목소리의 존재는 소설 속에서 다룬 적이 없던 만큼 크게 긴장한 탓도 있었다.
잠식이 아닌 목소리로 반응했다.
이건 큰 변수다.
하지만 그 의문은 바로 풀 수 없었다. 수차례 말을 걸어봐도 묵묵부답.
반응이 없었다.
졸지에 허공에 혼잣말하는 미친놈이 된 기분이다.
"미, 미쳤어요?"
실제로 넬라가 내 모습을 지켜보곤 날 미친놈 취급했다.
창가에서 알몸을 드러낸 채 허공에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으니, 그리 보일 만했다.
그나저나 언제 또 문을 열고 들어온 거야?
그리고,
"왜 자꾸 제 옷을 벗겨놓는 겁니까? 알몸 페티시라도 있으세요?"
"피투성이 상태로 오면 어디가 상처인지 알 수가 없잖아요. 상처를 살피려고 그런 거예요."
"보다시피 깨끗한데요?"
"사흘 전에는 아니었어요."
"사흘? 그렇게 오래 잠들어 있었습니까?"
"잠들어요? 당신 죽을 뻔했어요."
"…죽어요? 제가?"
"네."
죽을 뻔했다니 이해하기 힘들었다.
펜리에게 펼쳤던 레토니칼스식 전투법.
이 전투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다. 타오르는 파괴 본능에 몸을 맡기긴 했지만, 강제적이진 않았다.
내 허락이 무의식적으로 깔린 움직임이었는데, 더럽게 아프긴 해도 상처 재생이 바로바로 진행되는 것을 느꼈다.
즉, 상처가 심해서 죽을 일은 없었다는 거다.
"마나 고갈?"
"고갈 수준이 아니에요. 짜낼 것도 없는 말라비틀어진 장작처럼 보였으니까."
심한 고뿔을 앓는 것처럼 보였다는데, 펜리도 처음 보는 현상이라 무척 당황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에 기억이 절단된 것처럼 끊겼다.
마나 고갈로 의식이 날아간 건가?
"그럼, 전 어떻게 살아난 겁니까?"
"시간이요."
"시간?"
"하루 정도 지나니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어요. 마스터가 남긴 말을 지금 전달할게요. 그 힘, 함부로 쓰지 마세요. 폐인으로 전락하고 싶지 않다면."
펜리가 경고한 힘이 무엇인지 안다.
뼈를 내주고 목숨을 취하는 일격 필살의 공격 방식.
유지하는 데만 마나 고갈과 근육이 녹아내리는 고통을 받는다.
이 전투법은 확실히 위험하다.
나도 이를 인식했는데, 목소리가 마지막에 남긴 메시지가 있었다.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를 넘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리지.]
'본능이 저항하는 한계…?'
무슨 뜻인지 감이 안 왔다.
죽을 날짜를 받아놓은 노인들만 한다는 선문답이다.
심장을 빙자한 꼰대 새끼면 어떡하지?
다만, 나를 해코지할 존재는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투를 펼치며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일시적 동화(同和)를 경험했는데, 목소리의 말투나 분위기에는 살기(殺氣)가 없었다.
잠식의 의지 대신 나른함과 무료함을 느꼈다.
권태에 찌든 듯한 감정.
수백 수천의 세월 동안 닳고 닳은 메마른 절벽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권태의 감정 틈새에는 나를 향한 작은 관심도 있었다.
초탈한 것 같은 존재가 그토록 살벌하고 무식한 전투를 고집하는 이유가 뭘까.
궁금했고,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문을 두드려도 상대는 반응이 없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좀 드세요."
"오, 팬케이크! 역시 센스가 남다르시네."
"좋아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젠 못 먹겠지만."
"…네? 왜요?"
"출입 금지가 떨어졌거든요."
"…넬라 님이요?"
"아니, 그쪽이요."
마스터가 내게 출입 금지령을 내렸단다.
가게 입구만 다가가도 이제 검은 장미들이 저지한다나?
줬다 뺏는 게 더 잔인한 짓임을 펜리 년은 모르는 건가?
불만이 있으면 직접 찾아오라고 하는데, 어떤 해코지를 당하려고 거길 찾아가.
결국, 돈 주고 먹으라는 얘기였다.
불쌍한 표정으로 넬라에게 푸념해봤지만, 돌아온 건 알몸을 가릴 옷가지 폭탄이었다.
화려한 옷들이 머리 위로 후드득 떨어졌다.
귀족들이 입을 법한 귀공자 코스프레 옷 같았다.
멍하니 옷가지에 파묻혀 두 눈을 끔뻑이는데 종업원들이 후다닥 다가와 옷을 강제로 입히기 시작했다.
…뭐야? 갑자기.
83화 그자에게 황금패를 선물했다
"아니, 그 옷 말고 저 옷으로 하죠."
"...."
"너무 튀어요. 좀 더 심플한 걸로. 아, 그게 좋겠네요."
넬라의 말 한마디에 종업원들의 손이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삽시간에 옷이 바뀌고, 머리 스타일이 변했다. 전문 살롱이라서 그런가, 종업원들의 손놀림이 범상치 않았다.
졸지에 넬라의 인형 놀이 상대로 전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성주인 도르네프 님이 당신을 호출했어요. 바깥에 마차를 준비했으니 서두르세요."
"…저 방금 깨어난 사람인데요?"
"마스터가 당신이 깨어나면 바로 보내라고 했거든요."
"펜리 녀… 아니 펜리 님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영주성이요."
펜리가 영주성에는 무슨 일이지?
눈빛으로 물음을 던졌는데, 넬라는 내 옷매무새를 살피느라 눈빛 따윈 무시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녀는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빠졌다.
특히 살짝 화난 것 같은 저 휘어진 눈매와 백금색 눈동자. 귀공자처럼 꾸미니 묘하게 매력적이었다.
피부도 웬만한 엘프보다 좋았는데, 3층 바텐더 자리에 세워놓으면 매출에 크게 이바지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욱 아쉬웠다.
13000골드.
외상을 없애는 게 아니었는데 말이다.
'무서워. 이 여자야.'
넬라의 눈빛이 심상치 않아 앞섶을 꽉 여미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종업원들이 물러나자, 그녀가 입맛을 다시곤 뒤늦게 이유를 말해줬다.
"혈맹에는 특별한 의식이 필요해요. 당신도 예외가 될 순 없죠."
"혈맹 의식을 영주성에서 한단 말입니까?"
"참고로 베네타는 검은 장미와 이미 혈맹 관계예요. 당신을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르네프 님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뜻이죠. 동의가 떨어지면 영주성에서 함께 의식을 치를 거예요."
"그 동의라는 거… 될까요?"
"마스터가 갔으니까. 지켜봐야죠."
펜리는 도르네프를 설득하러 간 것 같았다.
웬 인간 하나를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데, 베네타가 과연 허락할지 모르겠다.
내가 도르네프의 반려인 샤르바딘의 은인이긴 하지만 이종족의 혈맹은 세력 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행사다.
베네타와 검은 장미 그리고 나.
세력 가치를 봤을 땐 굴지의 대기업 총수들이 동네 슈퍼 주인에게 협력하자고 손을 내미는 것과 같았다.
인간들의 혈맹이라면 백이면 백, 동네 슈퍼가 잡아먹히겠지만 이종족의 경우엔 특별했다.
하나의 세력으로 인정받는다.
다수결 시에 결정적인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혈맹의 투표수는 셋.
그중 내 표가 캐스팅보트가 될 확률이 높았다.
전에 말한 대로 내겐 더럽게 유리한, 이종족들에겐 더없이 불공평한 거래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겁니까?"
"마스터가 설명 안 했나요?"
설명은 무슨.
압박 취조 후에 두들겨 맞은 기억밖에 없구만.
"곧 알게 될 거예요. 하나만 기억해요. 저흰 검은 장미예요."
검은 장미.
돈에 환장하는 마스터 펜리가 수장으로 있는 집단.
절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한다는 의미였다.
'베네타의 가신들이 날 죽이려 들면 어떡하지?'
도르네프는 군주다.
군주 밑에는 가신들이 존재하고, 그들은 영지의 수많은 이권에 개입한다.
가신들에게 내 존재는 굴러온 돌일 것이다.
게다가 인간.
불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검은 장미의 경우엔 펜리가 꽉 잡고 있어서 분란이 없었지만, 베네타의 경우엔 다를 것이다.
진짜 날 죽이려 들면 답이 없다.
난 세력 하나 없는 외톨이였으니까.
"왜 눈만 뜨면 고난이 시작되는 것일까."
얼마 전엔 펜리 년에게 죽을 뻔했는데, 오늘은 또 난쟁이 새끼들의 망치질에 대가리가 깨질 것 같았다.
정말 눈을 감아야 마음의 안식이 찾아오려나?
뒈져야 편해지는 세상이라니.
마차에 올라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창가에 기대었다.
하늘이 참으로 맑다.
하지만 오늘도 꽃길보단 가시밭인 것 같았다.
쿵딱― 쿵딱― 쿵딱―
창고를 수리하는 요란한 소리가 내 마음을 더 심란하게 만들었다.
심란함을 잊고자 품에서 두 장의 봉투를 꺼냈다.
하나는 흰색, 다른 하나는 붉은색이었다.
넬라가 마차에 타기 전에 배웅하며 건네준 것이었다.
[원하는 정보는 여기에 다 있어요.]
흰 봉투에는 석 달 동안 벌어진 토바른의 주요 사건이, 붉은 봉투에는 나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다고 했다.
[붉은 서신은 마차 안에서 읽고 바로 처리하세요. 절대 타인의 손에 들어가면 안 돼요.]
이유를 물으니, 넬라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붉은 봉투는 마스터의 비밀 서신.
넬라도 허락 없이 읽을 수 없다고 했다. 두어 차례 신신당부를 한 것을 보니, 펜리 년이 단단히 경고하고 간 모양이었다.
"음, 뭐부터 읽을까."
두 서신 모두 궁금했기에 작은 갈등이 생겼다.
고민도 잠시, 난 붉은 봉투부터 뜯었다.
이 붉은 색감을 보라.
느낌부터가 위험해 보였다.
얼른 읽고 처리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덜컹―
마차는 어느새 시내를 벗어나 중앙대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난 붉은 봉투 안에 든 서신을 활짝 폈다.
내용은 한눈에 담겼다.
단 네 줄.
그런데 그 내용이 가히 충격적이다.
[펜리 체이서 – 세계수의 그림자(암(Shadow))]
[도르네프 가더 – 토바른의 방패(냉기(冷氣))]
[렌구아 필드 – 블러드 오크 샤먼의 후인(광기(狂氣))]
신명의 주인들이 적혀 있었다.
최근에 각성한 주인들.
전부 알고 있는 익숙한 이름들이었다.
그리고,
[이름 미상(未詳) ― 신명 사냥꾼]
"…이런 시발."
마지막 줄에선 마음속에서 우러난 욕설이 흘러나왔다.
마차가 흔들려서 잘못 본 건가.
잠시 맑은 하늘을 조용히 올려다보곤 서신을 다시 응시했다.
아니, 노려봤다.
내 눈은 틀리지 않았다.
신명 사냥꾼.
내겐 너무나도 익숙한 신명이었다.
베일에 감춰진 마지막 신명의 주인이 나라고?
사흘 전 펜리가 내 앞에서 신명 사냥꾼을 언급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미상(未詳)이라 적고 이름을 적지 않은 건 펜리의 뜻일까. 아님, 정보의 부재일까.
이건 중요한 문제였다.
만약 신명과 함께 이름까지 밝혀진 상태라면,
'최악의 시나리오인데.'
C용병 알로 활동한 기간이 대부분이라 내 진짜 이름을 아는 이는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하지만 신명이 밝혀졌으니 신명의 주인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정보의 부재이길 기도해야 하나?
'꽃길은 얼어 죽을….'
가시밭길이 삼만 리나 펼쳐질 악몽 퍼레이드가 그려졌다.
욕설을 내뱉으며 서신을 갈가리 찢었다. 빈 부분은 창밖에 버리고, 신명이 적힌 부분은 입 안으로 삼켰다.
종이 때문인지 걱정 때문인지 입맛이 썼다.
순간 궁금증이 올라왔다.
'이름이 밝혀졌다면 아서 클레이튼일까? 아니면 내 진짜 이름일까?'
이름을 알 수 있다면 세계가 날 바라보는 시선을 알 수 있으리라.
뭐가 됐든 무서운 일이다.
이 세계가 나를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
머리가 복잡했지만, 지금은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변한 미래의 분위기를 읽으려면 정보가 필요했다. 다행히 내겐 정보가 있었다.
짧게 심호흡을 하며 흰 봉투에서 서신을 꺼냈다. 두툼했는데, 석 달의 정보를 모아놔서인 것 같았다.
서신을 다급히 넘기며 이름 하나를 찾았다.
[블라이어 성주, 카멜 블레이저의 동태.]
"...."
난 가장 필요한 정보부터 읽어 내려갔다.
드르륵― 드르륵―
조용히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 들린다.
성안으로 들어온 모양.
마차가 멈출 때까지 난 죽은 듯이 서신을 읽는 것에 집중했다. 종이 넘어가는 소리만 조용히 들려오고, 사락거리는 종잇장 소리가 길어질수록 난 확신했다.
'살길은 꼭 열어주네. 이 빌어먹을 세계는.'
검은 장미와 베네타를 주축으로 한 이종의 혈맹.
살아남으려면 이 혈맹에 무조건 들어가야 했다. 날 보호해줄 둥지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 * *
영주성 1층에 자리한 대광장.
거대한 원형 돔이 떠오르는 웅장한 공간에는 수많은 이종족들이 한데 모여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었다.
고성과 성토가 오가는 무척 소란스러운 장면이었다.
"혈맹은 절대 불가합니다!"
"인간 놈들은 뒤통수치는 게 본능인 것들입니다. 믿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릅니다. 베네타에선 구원의 성자로 불리고 있습니다. 라웁 숲에서 구함을 받은 이종족들이 상당합니다."
"이종족들을 구한 것은 도르네프 님과 기사단입니다. 고작 한 명의 인간이 뭘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부풀려진 이야기입니다!"
"그자의 가치는 검은 장미의 수장 펜리 체이서가 보증했습니다. 지금껏 그녀가 먼저 나선 적이 있었습니까?"
"그녀의 영향력은 무시할 순 없지만, 베네타의 운명을 그녀의 한마디에 맡길 순 없습니다. 베네타는 검은 장미와 다릅니다."
중앙 홀을 중심으로 수백의 이종족들이 한데 모여 설전을 벌였다.
베네타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이었다.
크게 기사단, 대장장이 연합, 상인들로 구성됐는데, 세 파벌의 중심에는 원로 드워프들이 대표로 나와 있었다.
그중 인간을 옹호하는 드워프는 다름 아닌 기사 단장 나토네.
그는 기사단의 대표로 혈맹 찬성에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토네는 도미닉 연구소에서 그 인간을 직접 보고 경험한 드워프였다. 누구라도 그 황금빛 기적을 눈앞에서 본다면 생각이 바뀔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인간들에게 잦은 피해를 본 상인이나 대장장이들은 달랐다.
인간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린 탓에 반대부터 하고 나섰다.
혈맹이 주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원로 드워프 중 하나가 도르네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주군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원로의 물음에 대광장의 시선이 상석에 앉은 도르네프에게 쏠렸다.
도르네프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부러움과 경외가 담겨 있었다.
펜리가 가져온 소식 때문이었다.
베네타에 신명의 주인이 탄생했다.
토바른의 방패란 신명을 얻은 도르네프는 이전보다 더욱 큰 기대를 받으며 이종족들의 신뢰를 받게 되었다.
도르네프는 원로의 질문에 눈썹을 찡그렸다.
원로들은 자신의 생각을 이미 알고 있다.
검은 장미의 제안으로 이 회의가 열렸지만, 이를 수락한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원로들의 생각은 뻔했다.
직접 언급하고 책임을 지든가. 회의를 파하라는 것이었다.
'드워프면 단순한 맛도 있어야지. 하여튼 나이를 먹으면 전부 너구리가 된다니까.'
도르네프는 입맛을 다시곤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는 대광장 가장 앞쪽에서 다리를 꼰 채 발목을 까딱거리고 있었는데, 시선을 마주치자 눈을 돌렸다.
모르쇠로 일관하는 뻔뻔함에 도르네프의 수염이 부르르 떨렸다.
'빌어먹을 암고양이, 귀찮은 걸 알아 와서.'
샤르바딘과 단꿈에 취한 것처럼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불현듯 찾아와 재 가루를 팍팍 뿌렸다.
다만, 귀찮아도 펜리가 전한 이야기는 무시하기엔 사안이 무척 중했다.
혈맹으로 이어진 두 개의 신명.
'세계수의 그림자'와 '토바른의 방패'가 만에 하나 넬라의 예언처럼 흘러간다면 이는 곧 토바른 내에 큰 전쟁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도르네프는 이 사달을 만든 한 인간을 떠올렸다.
'아서 클레이튼'
도르네프는 아서에 대해 완벽히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잘 알고 있다.
단 한 명의 인간이 미래를 어떻게 바꾸는지 말이다.
모두 라웁 숲의 일로 자신을 칭송하지만, 도르네프와 나토네, 그곳에 있던 기사들은 잘 안다.
그 인간이 아니었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말이다.
펜리는 그를 '길잡이'로 표현했다.
길잡이.
표현이 정확했다.
그는 라웁 숲에서도 완벽한 길잡이였다.
그래서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그자에게 황금패를 선물했다."
그를 혈맹으로 받아들인다.
도르네프는 이 한마디로 자신의 의견을 함축했다. 황금패는 베네타의 귀한 손님을 의미했으니까.
84화 새로운 이름이 필요하다
위엄 어린 도르네프의 당찬 선언.
베네타의 군주가 혈맹 찬성에 손을 들었다.
보통 군주가 뜻을 내비치면 그 휘하 가신들은 그 뜻을 받들거나, 승복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이종족의 도시 베네타였다.
이종족들의 권위는 수직보단 수평적인 성향이 강했다.
수평, 즉 만만하단 소리였다.
"…황금패까지?!"
"들었지? 신명의 주인이 되더니 머리가 이상해진 게 틀림없어."
"토바른의 방패? 이 정도면 그 인간의 방패 아니야?"
쑥덕대는 원로들의 대화에 도르네프의 수염이 부르르 떨었다. 다른 이라면 모를까, 오래 산 드워프인 원로들에겐 군주의 위엄이 통하지 않았다.
한 다리 한 다리 건너면 모두 혈족이고, 가족이니 당연했다.
게다가, 무려 혈맹이다.
원로들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군주, 그자는 베네타를 아우를 정도로 강합니까?"
"아니오."
"검은 장미처럼 세력이 있습니까?"
"아니…."
"돈은 많습니까?"
"...."
"솔직히 말해주십시오. 그자에게 약점 잡혔습니까?"
혈맹도 어느 정도 급이 맞아야 수긍이 가는데 달랑 인간 한 명이라니, 아무리 군주의 뜻이라도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특별합니다!"
보다 못한 단장 나토네가 앞으로 나섰다.
"자꾸 그, 그, 하는데, 이름도 모르면서 왜 옹호하는 거요? 군주에게 뒷돈이라도 받은 거요?"
"뒤, 뒷돈!? 기사를 모욕하지 마십시오!"
"그럼, 그 잘난 이름이나 한번 들어봅시다! 그자의 이름이 뭐요!?"
"그, 그건!"
다시 도르네프가 나섰다.
"그자의 이름은 혈맹을 맺으면 알려주겠다!"
"이름에 무슨 황금이라도 발라놓은 겁니까? 절대 안 됩니다!"
다시 논쟁에 불이 붙었다.
한 인간을 두고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섰다. 드워프들의 목청이 좀 크던가, 도르네프까지 가세하니 가히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펜리는 이마를 잡곤 한숨을 내쉬었다.
"예상은 했지만, 정말 엉망진창이네."
"…으, 그러게요."
펜리 곁에 자리 잡은 샤르바딘은 쩌렁쩌렁 울리는 소음에 귀를 바짝 접었다. 오래 있었더니 머리까지 울렸다.
그러다 가끔 도르네프와 눈이 마주치면 손가락 하트를 날렸는데, 하트를 받은 도르네프는 헤벌쭉하곤 기세를 올려 혈맹을 밀어붙였다.
확실히 샤르바딘을 데려온 건 잘한 선택이었다.
"이 분위기면 혈맹이 무산되는 거 아닌가요?"
"혈맹은 이뤄질 거야."
"어떻게 확신하죠?"
"넬라가 확신했거든. 운명이 녀석을 이리로 이끈다나?"
"뜬구름 잡는 소리네요. 차라리 혈맹에 그분을 넣으려는 진짜 이유를 알려주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아직은 안돼."
"그럼 어쩔 수 없죠. 근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안돼. 물어보지 마."
"은인께 건넨 다크로즈가 왜 펜리님께 있는 거죠?"
무시하고 물어보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펜리는 입맛을 다시곤 금발을 쓸어내렸다. 흑요석 머리 장신구가 그녀의 금발을 더욱 화려하게 빛냈다.
"강탈이라면...."
"아직은 아니거든? 녀석에게 물어봐."
"언제쯤 오시는데요?"
"깨어나면 넬라가 성으로 보낼 거야."
"빨리 뵙고 싶긴 한데, 오늘은 안 왔으면 좋겠네요."
"그렇지?"
"네. 분위기가 살벌해요."
군주 도르네프마저 성토하며 인간의 편을 들기 시작하자, 이 논쟁의 시발점인 인간에게 반대파 드워프들의 분노가 쏟아졌다.
대장장이들이 망치를 휘두르며 저주를 퍼붓는데, 눈앞에 인간이 나타나면 용암 화로로 끌고 가 담금질을 할 기세였다.
상단을 맡던 드워프들도 노예로 팔아버릴 거라고 외치고 있을 때였다.
"이, 인간이 도착했습니다!!!!"
바깥을 지키던 경비병이 다급히 들어와 인간의 방문을 알렸다.
"...."
광장이 순간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수백의 눈동자가 번뜩이며 경비병에게 쏠리자, 그는 딸꾹질하며 다급히 뒤를 가리켰다.
시선이 스윽 넘어가더니 드워프들의 눈빛에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의 주인공.
멀끔하게 차려입은 인간 하나가 두 눈을 멀뚱히 뜬 채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서 클레이튼.
녀석이다.
펜리는 녀석의 등장에 헛웃음을 흘렸다.
"타이밍 한 번 죽이네."
녀석이 자신을 발견하곤 손을 반갑게 흔들자, 펜리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그건 샤르바딘도 마찬가지였다.
* * *
마차가 영주성 입구에 도착했을 때, 마부가 날 '베네타의 귀한 손님'이라 소개했다. 그때부터 경비들이 호위처럼 곁에 붙었고, 검문 하나 없이 이곳까지 안내되었다.
날 안내하던 경비병들의 태도는 예상외로 호의적이었다.
날 보며 기적을 부르는 사내라든가, 구원의 성자라고 수군댔는데, 이유를 물어보니 라웁 숲 사건으로 제법 유명세를 탄 것 같았다.
TV는커녕 미디어나 흔한 댓글에도 언급된 적 없던 나다.
기분이 좋아야 정상인데, 오히려 난 유명세에 식겁했다. 설마 이름이 알려진 건가 걱정했는데, 이름을 묻는 경비병들이 많아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를 보며 인사를 건네는 시종들이 보인다.
나를 맞이하는 성 분위기가 괜찮았다.
그래서 혈맹에 관한 얘기가 의외로 잘 풀렸다고 생각했는데,
"분위기가 왜 이래?"
광장에 들어선 순간 분위기가 급변했다.
날 노려보는 눈빛들이 살벌했는데, 세렝게티 임팔라가 사자 우리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들이 따로 없다. 입 한 번 잘못 놀렸다간 단체로 잡아먹을 분위기.
펜리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했지만, 무시당했다.
망할 년.
'불렀으면 책임을 지라고!'
멱살을 움켜쥐고 떽떽 소리치고 싶은데 주변 분위기가 워낙 살벌해서 눈치가 보였다.
어색하게 걷다 보니 도르네프 앞이었다.
갑주가 아닌 평상복을 입은 도르네프는 수염이 긴 인상 좋은 땅딸보 아저씨였다. 근육만 본다면 쇠질 3대 500은 우습게 칠 것 같았지만 말이다.
막상 앞에 서니 할 말이 없었다.
귀띔도 없이 이곳으로 끌려왔다.
뭘 어쩌라는 거야?
"베네타의 귀한 손님이 도착했구만. 소식은 들었네. 몸은 좀 괜찮나?"
"네. 신경 써주신 덕분에 다 나았습니다."
"몸조리가 필요할 텐데, 이리 불러서 미안하네. 중요한 사안이니 이해해주게."
"당연한 말씀입니다."
눈치껏 빈말이 오갔다.
도르네프는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단장 나토네도 안부를 물으며 호감을 드러냈다.
문제는 저 반대편 난쟁이들이었다.
쌍심지를 켜며 날 사납게 노려보는데, 작은 고추가 맵다고. 드워프 중에서도 유난히 매워 보이는 놈들이었다.
"자네가 혈맹을 제안한 인간인가?"
"제안? 제가요?"
"이름이 뭐지? 혈맹을 제안했으면 대외적으로 소개가 필요한 법인데, 이름을 아는 이가 없어. 인간들은 원래 이리 무례한 건가?"
"아니, 그게...."
"핑계라도 대보게."
"오늘 의식을 차렸습니다."
"핑곗거리가 그것뿐인가?"
아니, 진짜라니까?
이 난쟁이 새끼들이 심보가 처음부터 틀려먹었다. 애초에 적개심을 깔고 가는 분위기인데.
원로 중 한 명이 이름을 걸고 넘어지자, 주변에서 신분을 밝히라는 성토가 쏟아졌다.
첫 질문부터 골치가 아파 왔다.
평소라면 고민 없이 이름을 외쳤겠지만, 서신을 읽은 뒤로 조심스러웠다.
난 펜리를 바라봤다.
펜리가 고개를 살짝 젓고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서신]
두 글자를 끝으로 그녀는 입을 닫았다. 보는 눈이 워낙 많아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펜리를 먼저 만나 말을 맞추고 이 자리에 섰어야 했다.
타이밍이 구렸다고 해야 하나? 하필 모두가 모인 회의장에 끌려왔다.
'서신이라….'
그래도 펜리와 함께 구른 짬밥이 있다 보니 그녀가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서신 어디에도 내 이름은 없었다.
도르네프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날 안내했던 경비들도, 광장에 모인 이들도 내 이름을 모른다.
그 뜻은 하나로 귀결됐다.
'이름을 알려주면 안 된다.'
판단은 빨랐고,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난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내 이름은...!"
내 이름이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쥐죽은 듯이 조용했다.
수백의 눈동자가 재촉하듯 날 노려봤지만, 난 슬쩍 미소를 지으며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긴장이 전혀 안 된다.
라웁 숲의 전투가 날 성장시킨 것 같았다. 살기(殺氣)로 가득 찬 키메라 수천 마리에게 둘러싸여 봐라. 웬만한 정신력으로는 절대 못 버틴다.
당연히 저들의 눈빛 따윈 간지럽게 느껴졌다.
"제 이름은 알렉스입니다."
"…뭐? 알렉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인데?"
구원의 성자로 작게나마 명성을 얻고 있으며 군주인 도르네프가 혈맹으로 밀고 있는 인물.
기대한 것과 달리 별것 없자, 광장에 모인 이들은 김빠진 표정을 지었다.
"귀족인가?"
혹시나 하는 원로의 물음에 난 품에서 패 하나를 꺼냈다.
반짝이는 금패.
돈이 될 것 같아서 라웁 숲에서 쭉 가방에 넣어뒀던 건데. 이런 용도로 쓰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당분간 내 새로운 신분을 증명해줄 금패는 바로,
"전 마르샤 가(家)의 후계자입니다."
용아의 망토를 노린 학살자에게 몰락당한 대(大)상인 마르샤 가문의 인장이었다.
학살자의 근황을 알게 된 직후 새로운 신분이 필요함을 느꼈다.
알이란 가명으로 활동했던 C급 용병패가 있었지만 더는 쓸 수 없었다.
'블라이어 수배자 명단에 올랐거든.'
한 달 전에 카멜이 토바른 전역에 거액의 수배를 때렸는데, 그 수배 명단에 C급 용병 알이 포함되어 있었다.
C급 용병패는 카멜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가 내 흔적을 쫓고 있다.
언제고 발각되겠지만 시간을 벌려면 알이란 신분은 당장 버려야 했다.
마르샤 가문이란 말에 여러 반응이 나왔다.
좋은 반응은 아니었다.
악덕 대상인이란 이미지가 강했으니까. 다행인 건 이곳 드워프들과 악연으로 엮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니,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게 더 정확했다. 베네타는 마르샤가 건들기엔 부담스럽거든.
"마르샤는 몇 달 전 몰락했을 텐데?"
"네. 지금은 잿더미만 남은 몰락한 가문입니다."
"결국, 빈털터리란 소리군."
혹시나 기대했지만, 역시나 몸뚱이밖에 없는, 혈맹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었다.
원로들이 실망한 표정으로 도르네프를 바라보자, 움찔하던 도르네프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는 영지민을 구한 영웅이다."
"그걸로는 자격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군주의 위업을 축소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영지민을 구한 건 군주입니다."
"제, 제 은인이에요!"
샤르바딘이 용기 내어 목소리를 높였지만, 원로들은 고개를 절레 가로저었다.
"그 빚은 이미 갚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도르네프의 황금패.
샤르바딘이 준 다크로즈면 은인의 대우는 충분히 해준 셈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더는 날 옹호하며 혈맹을 우기기가 힘들어 보였다.
도저히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자, 난 짧게 한숨을 내쉬곤 반대파 쪽으로 걸어갔다. 판은 대충 깔린 것 같으니, 부족한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할 것 같았다.
자격.
내게 필요한 건 자격이다.
베네타에서 저들의 반대를 짓누를만한 자격이 뭐가 있을까?
난 이 혈맹에 꼭 포함되어야 한다.
서신의 내용을 잠시 떠올렸다.
학살자 카멜.
그의 행보는 지금 내 목줄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다.
행보에 맞서 대항하려면 세력을 등에 업어야 하는데, 그 대항마로는 현재 베네타밖에 없었다. 학살자를 홀로 상대하는 건 달걀로 바위를 치는 것보다 더 바보 같은 짓이었으니까.
잠시 베네타에 대해 떠올려봤다.
베네타의 스토리 중에 혈맹 자격을 논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을까?
그러던 중 대장장이의 정원처럼 대화 속에서만 등장했던 장소 한 곳이 떠올랐다.
'거기라면....'
내가 성큼 다가오자, 원로들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시선이 같잖다는 표정인데 반응을 한 번 봐야겠다.
"저주받은 폐광산."
"...!"
"그, 그걸 어찌 인간이…!"
원로들의 격한 반응에 확신했다.
이 정도면 먹힐 것 같았다.
일단 지르고 본다.
"제가 그 폐광산의 저주를 풀어드리죠. 그럼 자격이 되겠습니까?"
85화 꽃길 따윈 없다
질 좋은 광맥이 흐르는 풍요의 땅.
드워프들이 그 땅 근처에 도시를 짓고 문명을 이룬 도시가 베네타였다.
광맥의 존재가 베네타의 시작이라 할 만큼 내가 언급한 폐광산은 한때 드워프들에게 무척 중요한 장소였다.
"거길 어떻게 안 거야?"
"폐광산이요?"
"그래."
진열된 술병들을 구경하고 있던 나는 펜리의 물음에 자리로 돌아왔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고 주변을 둘러봤다.
도르네프가 머무는 영주실.
드워프 아니랄까 봐. 내부는 멋들어진 은빛 갑주와 무구들로 장식이 되어 있었고, 벽 쪽에는 술병들이 잔뜩 진열되어 있었다.
"유명한 사건 아니었습니까?"
"광산 폐쇄는 유명한 사건이긴 하지. 하지만 폐쇄 이유가 '저주'라는 건 도르네프나 원로들 정도만 아는 정보야. 아까 반응 보면 몰라?"
하긴 좀 뜨거웠었지.
도르네프가 직접 내 입을 틀어막고, 원로들은 다급히 회의를 파해버렸으니까.
그게 저주란 단어 때문이었어?
"저주는 누구한테 들은 거지? 나도 혈맹을 맺고서야 듣게 된 정보인데."
누구긴 누구야 바로 당신이지.
토바른을 떠나 가혹한 세계에 던져진 펜리는 늘 폐광산의 존재를 아쉬워했다. 그 폐광산을 드워프들이 이용할 수 있었다면 학살자의 손에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거라고 말이다.
"무슨 저주인지 알고 말하는 거야?"
아주 잘 알고 있다.
그것도 당신이 얘기해 줬거든.
하지만 이 정도로 쉬쉬할 줄은 몰랐다. 게다가 폐광산의 저주가 알려진 시기는 펜리가 6성에 오르고 스폐셜에 등극했을 때였다. 그녀가 가장 강력했던 시기에 방문한 장소란 뜻이었다.
그럼에도 내가 도전할 수 있는 이유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었으니까.'
심장의 능력이 있으니 비벼볼 수 있는 거였다.
펜리의 질문에 더 언급하면 안 될 것 같아 난 침묵을 택했다.
진실의 눈은 확실히 피곤하다.
내 반응에 펜리는 피식 웃고는 술이 든 잔을 집어 들었다.
"혈맹을 맺고도 속마음을 감추려 든다면 언제고 넌 내 손에 죽을 거야. 난 너한테 많은 걸 걸었어. 알지?"
"...."
하여간 눈치는 더럽게 빨랐다.
그래도 미래의 당신이 알려준 내용이라고 어떻게 말을 해?
조용히 있으니, 술을 홀짝이던 그녀는 소파에 몸을 묻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르네프가 오기 전까진 여유가 있으니, 녀석이 정보를 알든 모르든 도움 될만한 정보를 알려줄 생각이었다.
넬라가 말했다.
운명이 녀석을 이끌 거라고.
자신은 녀석의 뒤를 받치며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녀석은 길잡이였으니까.
"도르네프 이전의 전대 가주들이 광산의 저주를 풀려다가 목숨을 잃었어. 50년간 베네타의 성주가 네 번이나 바뀐 사실은 너도 잘 알겠지. 그때 함께 사라진 정예 기사단만 3대대, 350명이 넘어가지. 병사들은 당연히 셀 수 없이 많고."
"저주에 대해 알려진 바가 있습니까?"
"들어가면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어. 그럼에도 드워프들은 눈물을 머금고 기다림보단 폐쇄를 선택했지. 광산은 그들에게 보금자리 이상의 장소야. 그만큼 저주가 지독했다는 뜻이겠지. 그리고 넌 지금 그곳을 제 발로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거고."
"...."
도르네프 앞에 있을 땐 혈맹의 자격을 증명하기 위해 지른 감이 있었는데, 펜리의 말을 듣고 보니 사지(死地)에 못 들어가서 안달 난 변태 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생각해보니 서둘러 들어갈 필요가 없잖아?'
처맞고 기절한 후 어제 막 눈을 떴다.
혈맹 자격에 유통 기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치 좀 보다가 천천히 움직여도 되는 거였다.
출발 날짜를 좀 뒤로 물릴 수 있나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벌컥 열리며 도르네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표정이 좋아 보인다.
근데 왜 난 불안하지?
"얘기가 잘 끝났다! 이젠 해결만 하면 돼!"
"아, 저 그게 출발 시기를...."
"내일 출발한다! 이미 도장 찍듯 선언까지 했으니 원로들도 결정을 뒤집진 못할 거야. 크하하하하!"
"…아. 시발."
따로 원로들만 모여 회의를 진행했는데, 내 제안이 먹힌 것 같았다.
인간이 폐광산의 저주를 해결한다면 혈맹으로 받아들이는 건 물론 종족의 은인으로 대우하기로 말이다.
근데 왜 하필 내일이야?
창가를 응시하니, 밤하늘에 뜬 달이 기울고 있다.
곧 동이 틀 것 같다고.
'어째 인생에 꽃길은 보이지도 않냐.'
내 선택이긴 한데, 어째 살려고 발악할수록 더 생존과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도르네프 뒤로 시종들이 우르르 따라 들어왔다. 그들의 손에는 서류 더미가 잔뜩 들려 있었는데, 내 앞 테이블 위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 시야에는 난쟁이 도르네프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
"…이게 뭡니까?"
"폐광산에 대한 자료."
"이렇게나 많습니까?"
"그만큼 절실했으니까."
일부 서류를 훑어보니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내용은 없어 보였다.
광산에서 나온 생존자가 없는데 쓸만한 정보가 있을 리가 없다.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는 도르네프의 배려. 그만큼 나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대체 뭘 믿고?'
눈앞의 드워프도, 저 옆의 엘프도, 내게 불안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난 서류 더미를 한쪽으로 쭉 밀어내곤 두 사람 앞에 섰다. 눈앞의 서류보다 저들의 심중을 확인하는 게 더욱 중요했다.
"이제 얘기해 주시죠?"
"뭘?"
"이 혈맹에 제가 필요한 이유."
나도 혈맹이 필요하지만, 저들이 왜 날 필요로 하는지 꼭 알아야 했다.
둘은 잠시 시선을 교환하더니, 펜리가 곰방대를 물며 입을 열었다.
"길잡이."
"…길잡이?"
"이번 신명으로 우리 운명이 바뀌었거든. 넬라는 엘프족 사이에서 몇 안 남은 신녀야. 그녀가 그러더군. 네 녀석이 우리 운명을 이끌 길잡이라고."
"…무슨 뜻입니까?"
"네 녀석 때문에 우리가 신명을 받았다는 뜻이다."
나 때문에 신명을 받아?
'틀린 말은 아닌데….'
내 개입으로 스토리가 많이 바뀌었다. 그중 저 둘의 변화가 가장 컸다.
하지만, 나를 중심으로 저들의 신명이 부여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지금 상황이 내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는 지켜봐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당장은 득이 되겠지.'
저들이 내민 손은 진심이었다.
난 그 손을 움켜잡고 살아남아야 했다.
"이유를 말해줬으니, 넌 해야 할 일에 집중해. 실패하면 다 끝인 거 알지?"
"네네."
서류가 도움은 안 될 것 같지만, 목숨이 달린 일이라 살펴는 봐야 했다.
난 서류를 뒤적거리며 둘에게 폐광산 외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블랙마켓에 관한 이야기.
흑주술사 렌구아의 신명.
그리고 카멜 블레이저까지.
넬라가 준 토바른 정보도 많은 도움이 됐지만, 눈앞의 둘은 토바른의 주요 수장들이다.
비교할 수 있는 정보의 질이 달랐다.
격랑처럼 변화하는 토바른의 새로운 바람과 분위기.
그 중요한 정보들이 내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업데이트되고 있었다.
미래가 바뀐 만큼 나도 변화해야 했다.
* * *
"처음에는 서운했는데, 은인의 목숨값이라면 이해해야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샤르바딘 님."
하루가 지나고 아침 일찍 샤르바딘을 찾았다. 어제는 정신이 너무 없었던 탓에 시간을 내어 방문하지 못했다.
그녀는 다크 로즈를 펜리에게 준 것을 서운해했는데, 사정을 설명하자 이해해주는 모습이었다.
역시 이쁜 사람은 마음씨도 이쁘다니까.
내가 혀를 끌끌 차며 펜리를 바라보자, 뻐금뻐금 곰방대를 펴던 그녀가 뭐냐는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은인에서 은인에게라, 뭔가 나쁘지 않아요."
샤르바딘은 살포시 웃으며 펜리의 머리맡에 장식된 다크 로즈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뭔가 다크 로즈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모습인데, 검은 장미의 꽃말이 '당신은 영원히 나의 것'이란 것을 알게 된다면 기겁할 거다.
아니, 그 전에 도르네프가 먼저 망치를 들고 날 죽이려 들지도.
몸을 부르르 떨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샤르바딘이 아쉬운 듯 따라 나왔다.
"도네프에게 들었어요. 오늘 바로 폐광산으로 출발하신다고."
"그렇게 됐습니다."
"위험한 장소라고 들었는데,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닌가요? 준비를 확실히 하시는 게."
그러니까.
그 땅딸보 아저씨가 성격이 좀 급해야지.
그녀의 부군이라 앞에선 욕도 하기 힘들었다.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제 생존력 아시지 않습니까?"
내 능청스러움에 샤르바딘은 마주 보고 웃었다.
눈앞의 사내는 미믹의 제단에서 피 웅덩이 위를 함께 구른 사이다.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도 사내가 나서면 해결이 됐다. 누구보다 잘 해낼 것이라 믿었다.
"안 갑니까?"
"내가 왜?"
내가 손짓하자, 소파에서 쿠키를 집어 먹던 펜리가 표정을 와락 구겼다.
"싫으면 말고요."
"죽고 싶어서 환장한 놈 같네."
"함께하면 제가 살 확률이 올라가겠죠?"
"하, 내가 어쩌다 너 같은 인간이랑 엮여서."
"거절해도 됩니다. 거래 물릴까요?"
"그럼 '그거'는?"
"누구 좋으라고요. 품에 안고 죽을 겁니다."
"이 미친 돌아이 새끼가."
어제 머리를 굴려봤다.
폐광산의 저주에 대해선 안다.
그런데 알아도 혼자 들어가면 생존할 거란 확신이 없다. 그럼 방법은 하나뿐이다.
'확실한 보험을 데려가야지.'
이번 일만 마무리되면 난 드워프들의 은인이 된다. 그럼 황금패 하나쯤은 더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슬쩍 떠보니 도르네프가 확신을 줬다.
황금패 1+1이 가능한 상황.
전대 가주들이 공들여 만든 드워프 장비 교환권이면 탐욕에 찌든 엘프 하나 정도는 꼬실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다크 로즈로 그 성능을 확인한 펜리라면 더더욱 이 미끼를 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다크 로즈가 물고기 떡밥이 돼버렸다.
"황금패가 두 개나 생길 것 같은데, 어쩐다."
"...."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하나 정도는...."
"닥쳐!"
아직 미끼를 콱 물진 않았지만, 대장장이 정원까지만 데려가면 안 물고는 못 배길 거다.
황금패 떡밥은 못 참지.
내일만 살 것처럼 그녀 눈앞에서 황금패를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데, 도르네프가 멋들어진 갑주를 걸치고 나타났다.
"도네프! 조심해요!"
"내 사랑 샤딘, 꼭 살아오겠소."
"꼭이에요!"
"약속하리다."
둘이 포옹하고 뽀뽀하고 애틋한 눈빛을 교환하며 사랑을 나누는데, 저 아저씨는 폐광산 입구까지만 안내할 거면서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
갑주는 대체 왜 입고 온 거야?
"가지."
도르네프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니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농장에서 흔히 쓰는 평범한 마차였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성을 벗어났다.
마차에 탄 일행은 도르네프와 펜리 그리고 나 셋뿐이었다.
이번 폐광산 임무는 나 혼자 맡기로 한 상태였다.
베네타에서 도움을 주려는 손길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했다.
드워프 전대 가주들이 정예 기사단을 끌고 가도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다.
'거긴 머릿수로 해결이 안 되는 곳이거든.'
눈앞의 도르네프나 펜리 정도가 아니면 오히려 방해만 될 뿐이었다.
86화 밑밥은 깔아 놔야지
마차는 성문을 통과해 광활한 대지로 나아갔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서서히 멀어지는 베네타의 성을 구경하고 있는데, 창가를 몇 차례 둘러보던 펜리가 묘한 표정을 짓고는 도르네프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는 거지?"
"알면서 왜 물어?"
"폐광산에 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잖아."
"대장장이의 정원 말인가?"
"당연하지. 가서 뒈지면 쓰지도 못할 황금패인데 임무 전에 쓰는 게 맞잖아."
뭐, 뒈져?
이 엘프 년이 못 하는 소리가 없네.
하지만 난 발끈하지 않고 기다렸다. 펜리의 말에 코를 후비는 도르네프의 저 행동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다.
"지금 가는 중이잖아."
"뭐? 지금 영지 바깥으로 나가는 중인데?"
"대장장이 정원은 영주성에 없어."
도르네프의 말에 펜리는 멈칫하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 정원은 영주성 어딘가에 꼭꼭 숨겨진 비밀 공간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검은 장미인 자신조차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보물 창고를 영지 바깥에 모셔놨다고?
"속임수였어?"
"해마다 보물을 노리고 성으로 잠입하는 날파리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알아?"
"보물 창고가 떡하니 있는데 날파리가 꼬이는 건 당연한 거라고."
"그래서 대비했잖아. 너도 눈치 못 채게."
"눈치 못 챈 게 아니라 관심이 없었던 거지. 깡그리 다 훔쳐줘?"
"암고양이… 자꾸 그러면 대가리 깨진다?"
둘이 또 투덕대며 으르렁하는 것을 내가 막았다. 마차 뒤로 의심스러운 움직임을 포착했기 때문이다.
"꼬리가 붙었네요?"
"꼬리?"
"네. 그것도 상당히 많이요."
영지에선 잘 숨어서 따라왔는데, 밖은 확 트인 평지라 숨을 장소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둘은 내가 가리킨 방향을 살펴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나타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났다. 서로 눈치를 보다가 몇몇이 숨기를 포기하자 결국 모두가 모습을 드러내며 따라 나온 모양새였다.
"뭐야, 저것들은?"
"전부 인간이네. 실력은 형편없고."
"정보 길드 같아요. 복장을 보니 한두 군데가 아니네요."
"베네타 쪽은 아니야. 전부 타지에서 온 녀석들이란 건데. 표적이 누구야? 난 아닐 테고, 너도 아닐 테니."
나와 펜리가 도르네프를 바라보자, 그는 멀뚱히 두 눈을 깜빡이곤 자신을 가리켰다.
"나라고?"
"너밖에 더 있어? 저 녀석은 좆밥이고, 난 건들면 다 죽을 텐데."
좆밥이라니.
근데, 반박하기 애매해서 그냥 다물고 있었다.
"제가 봐도 도르네프 님 같습니다."
"뭘 노리고?"
"베네타에 꿍꿍이가 있는 이들이겠죠?"
"꿍꿍이?"
"근래에 저런 이들이 늘지 않았습니까?"
내 물음에 도르네프도 뭔가를 느낀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날파리들이 근래에 엄청나게 들어오긴 했지. 암고양이에게도 의뢰를 넣었는데?"
"아, 저들의 의뢰주가 누군지?"
"혹시 누군지 아십니까?"
"역추적 중이라 곧 정체가 밝혀질 거야. 누군지 몰라도 돈지랄을 못 해서 안달 난 놈 같거든."
도르네프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폐광산으로 움직인 건 어떻게 안 거지? 최대한 은밀히 움직였는데. 설마, 내부에 세작이...."
"지랄하네. 그 번쩍번쩍한 갑주를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나 도르네프예요!'라고 광고하고 다니는데 어떤 머저리가 못 알아봐."
"시끄럽다!"
잠시 투덕거린 둘은 더는 뒤쫓는 이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마차에 몸을 묻었다.
위협적인 이들도 아니었고, 도르네프 말로는 폐광산에 진입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갈 것이라 했기 때문이다.
다만, 내 경우에는 달랐다.
난 저들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누가 보낸 건지 알 것 같거든.'
도르네프 한 명에게 붙은 눈들이 저 정도면 베네타 내의 인원은 훨씬 더 많을 것이다.
이 시기에 베네타의 정보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부을 존재는 한 명뿐이다.
학살자 카멜.
그 녀석밖에 없었다.
'무슨 꿍꿍이일까.'
이미 카멜은 신명을 통해 모든 계획이 물거품으로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아레나 후아튼이 죽었으니까.'
백(百) 개의 심장, 베네타와 공멸할 아레나 후아튼이 죽었다. 그러니, 저 움직임은 다른 꿍꿍이를 위한 정보 수집이 분명했다.
계획이 틀어졌다고 베네타를 포기할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아직 카멜은 철저히 웅크린 채 존재감을 숨기고 있는 상태. 하지만 슬슬 학살자의 존재를 두 사람에게 언급할 때가 된 것 같았다.
"의뢰주는 블라이어 성주일 겁니다."
"블라이어 성주? 이번에 성주에 오른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 아닌가?"
"그 꼬맹이는 아닐 거야."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내가 묻자 펜리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석 달 전 에토르 행에서 키메라 토벌에 정예 수천을 잃었거든. 복구도 빠듯한 예산에서 천문학적인 돈을 베네타에 쓸 여유도 이유도 없어."
아, 들은 적이 있다.
도르네프와 기사단이 도미닉 연구소로 빠르게 도착했던 이유 중 하나.
에토르와 블라이어 연합군이 키메라 군단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그 전투에서 학살자가 정예 수천을 잃었다고?
'카멜, 이 새끼. 어디서 뻥카를 치려고.'
다른 이는 몰라도, 내겐 안 먹힌다.
주변 세력의 방심을 불러오려는 밑장 빼기가 분명했다.
펜리까지 속을 정도면 진짜 수천 명을 미끼로 던졌다는 건데, 피도 눈물도 없지만 무섭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저들이 아직 카멜의 위험성을 알 때는 아니니까.'
카멜이 움직이기 전이고, 직접 부딪쳐 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카멜의 무서움을 지금 설득할 생각 따윈 없었다. 혈맹이 되고 난 후에 경고해도 늦지 않다.
다만,
'밑밥은 깔아놔야지.'
내가 말한 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추후 계획에서 내 말에 힘이 실린다. 이는 내게 꼭 필요한 일이었다.
저 둘은 한 세력의 수장인 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라면 움직이려 하지 않을 테니까.
"의뢰주야 곧 밝혀질 테니 그때 제 말이 틀렸는지 맞았는지 알 수 있겠죠. 그리고 블랙마켓에서 운명의 아케인이 움직였다고 말씀하셨죠. 그 뒤에 누군가 있을 것 같다고."
"그 녀석도 곧 밝혀질 거야. 미끼를 뿌렸거든."
"그 미끼가 아까우실 겁니다. 그 범인도 블라이어 성주일 확률이 높으니까."
"...."
펜리는 날 조용히 노려봤다.
잠시 생각하는 표정인데, 곧 고개를 털곤 생각을 포기한 듯 물었다.
"확신하는 이유가 뭐야?"
"세이렌."
"세이렌? 그거 블라이어 수배 명단 리스트에 있는 거잖아. 10만 골드짜리."
하여튼 저 엘프 년은 돈과 관련된 건 귀신같이 알아챘다.
"그리고 넌 5만 골드짜리고. C급 용병 알 씨."
"제 이름은 알렉스입니다."
"지랄하네. 푼돈이라 그냥 넘어간 거야. 고맙게 생각해라."
"…정말 고맙네요."
"헛소리 그만하고 세이렌과 아케인이 뭔 상관인데?"
카멜의 성명으로 배포된 수배자 명단 리스트는 총 세 명이었다.
그중 한 명이 5만 골드 현상금의 C급 용병 알이고, 또 다른 하나가 '세이렌'과 관련된 인물 정보였다.
이와 관련된 작은 정보만 알려줘도 10만 골드를 주겠다는 엄청난 정보 제공료가 현상금으로 걸린 것이다.
"직접 수배하지 않고 정보만 원하는 이유가 뭘까요?"
"나도 그게 이상하긴 했어."
"세이렌은 신명 목록과 관련 있습니다. 아케인 정도만 알 수 있는 정보죠."
내 답에 펜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이렌이 신명 목록이라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저 침묵했을 뿐인데, 펜리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잠시 후엔 '너, 너…'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주변을 둘러봤다.
내게 바짝 다가온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너, 알고 있었어? 네 신명 목록."
"모릅니다. 저도 알고 싶네요."
"자꾸 헛소리하면 혀를 뽑아버린다."
"이것만 알고 있습니다. 세이렌이란 단어, 이거 제 신명 목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도 넬라가 준 정보 서신을 읽고 얼마나 기겁했는지 모른다.
세이렌 하면 바로 떠오르는 도네콜린트의 신명.
'세이렌의 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카멜이 쫓는 건 신명의 주인이 된 나였다.
"아케인 정도만 알고 있는 '신명 사냥꾼'의 신명 목록 일부를 카멜이 뿌린 것을 보면 대충 감이 오지 않습니까?"
"…백 프로 확실해?"
"확실한 건 아닙니다. 이 목록을 본 또 다른 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케인이 왜 카멜 곁에 붙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근데 블라이어 성주는 어째서 '세이렌'이 신명 목록임을 숨기는 거지?"
"여러 가지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겁니다. '세이렌'은 신명 목록의 일부 단어에 불과합니다. 전부 노출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절 압박해서 끌어내려는 수작이거나, 반대로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할 의도 같습니다."
카멜은 곧 움직일 거다.
에토르 점령.
블라이어든 베네타든 에토르를 손에 넣은 세력이 토바른의 영토 70%를 손에 넣게 된다.
그 대계(大計)를 펼치기 전,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허튼짓하지 말라고.
"만약 아케인이라면 그가 제 신명, 특히 '이름'을 알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야 의도가 협박인지, 견제인지 알 수 있거든요."
"간만에 머리 아프네."
펜리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도르네프는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그는 머리 쓰는 건 질색인 타입 같았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이 떠올라 지나가듯 물었다.
"블라이어 성주가 돈이 그리 많았나? 토바른 내의 수많은 정보 길드를 움직일 만큼?"
"금광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건 또 처음 듣는 정보인데, 확실한 거야? 너무 터무니없는데."
펜리에게 말한 것도, 도르네프에게 말한 것도 전부 증거는 없고 내 말뿐인 근거였다.
나였기에 귀라도 기울인 것이지,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미친 소리 그만하고 꺼지라고 외쳤을 것이다. 내 말만 믿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을 거란 소리다.
"증인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를 베네타로 데려와야 합니다."
"증인? 블라이어에 금광이 존재한다는 걸 증명할 증인이 있다고?"
"네. 더불어 운이 좋다면 그를 통해 블라이어와 아케인의 관계도 증명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게 누구지?"
그 물음에 난 현상금 수배 리스트 마지막 줄에 적힌 인물을 떠올렸다.
현상금 100만 골드의 사나이.
블라이어의 전(前)대 기사 단장.
"록터 펠리스. 그자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피의 만찬을 함께 즐겼던 록터가 금광을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학살자의 대적자로 불렸던 영웅 포지션.
그를 우군으로 얻어야 한다.
* * *
베네타에서 북쪽으로 얼마간 올라갔을 때, 마차는 우거진 숲으로 진입했다.
숲에 들어와서인지, 뒤따라오는 말발굽 소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폐광산은 멀었습니까?"
"다 왔어. 저기다."
도르네프가 창가를 가리켰을 때, 숲이 중간에 툭 끊긴 듯 푸르른 녹음(綠陰)은 사라지고 드넓은 암벽 지대가 펼쳐졌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동굴.
멀리서도 그 동굴 크기가 압도적이라 느껴졌는데, 너비가 마차 십여 대 정도는 일렬로 들어가도 될 것 같았다.
저기가 폐광산이라고?
단순히 '폐(閉)'했다기엔 동굴이 뻥 뚫려 있다.
"동굴로 들어가야 합니까?"
"당연하지. 토바른 내에 가장 큰 광맥이 흐르는 곳이야. 그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드워프인 나조차 확실히 알지 못하지."
마차는 주저 없이 동굴 속을 파고들었다. 마차 겉의 횃불 네 개가 켜지고 내부가 밝아지자, 도르네프가 바깥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따라오는 이들 중 익숙한 얼굴이 있었나?"
"없습니다. 왜 묻는 겁니까?"
"죽으면 아쉬운 소리 할까 봐."
"네?"
"대장장이 정원을 왜 폐광산 안쪽으로 옮긴 줄 아나?"
"정원이 이곳에 있어?"
펜리의 물음에 도르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동굴 바깥에서 주저하던 인간들이 마차를 쫓아 들어오자, 도르네프는 짧게 혀를 차곤 마차에 몸을 다시 묻었다.
"여긴 성과 달리 시체를 처리할 필요가 없거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끄아아아아악―!
뒤쪽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르륵― 그르륵―
쇠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 트랩이 작동한 것 같았다.
87화 대장장이의 정원
"하, 함정이다!"
"호, 화살? 조심… 크아악!"
비명의 울림이 끝없이 터져 나왔다.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은 죽을힘을 다해 마차를 뒤쫓았다. 멈춰도, 후퇴해도 죽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처절한 비명을 내지르며 따라오는데, 도르네프는 귀를 후비며 무시로 일관했다.
일단 적으로 인식하면 가차 없다.
괜히 군주가 아닌 건가.
쿠쿵―
"...!"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잠시 후, 바닥 사이로 짙은 안개가 빠르게 피어올랐다.
안 그래도 어두웠던 동굴 내부가 더욱 어두워졌다. 아니, 짙은 안개에 횃불마저 꺼져버리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암흑이 찾아왔다.
두두두두두―
"...."
근데 마차는 마치 앞이 보이는 것처럼 전과 똑같이 움직였다. 두 눈을 한동안 끔뻑여도 어둠 그 자체다.
변한 건 주변 소리였다.
그르륵― 그르륵―
뒤쪽에서 들려오는 톱니바퀴 굴러가는 소리.
뒤쫓던 이들은 암흑 세상에 패닉 상태라 그 죽음의 속삭임을 듣지 못했다.
피융―!
"아, 앞이 안…!"
"끄아악!"
다시 울리는 비명.
그 비명은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내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이젠 마차 굴러가는 소리밖에 안 들린다. 난 조심스레 입을 뗐다.
"뭐가 어떻게 된 겁니까?"
"트랩이 반응한 거지."
"다 죽은 겁니까?"
"아마도?"
목소리가 덤덤한 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들어보니 드워프들이 작정하고 만든 강철 트랩이었다. 능숙한 마나 유저조차도 방심하면 꼬챙이가 되거나 톱니에 갈려 죽을 거라나.
함정 하나 살벌하게 만들어놨다.
게다가,
"지금 마차가 움직이는 거 맞죠?"
"잘 가고 있네만."
"도르네프 님은 앞이 보입니까?"
"인간들의 시야로 본다면 암흑 그 자체이지만, 드워프들의 시야로는 앞이 보인다고 말할 수 있지."
"대체 뭐가 보인다는 겁니까?"
"땅의 결이 보이네만."
숨 쉬는 방법을 왜 묻냐는 듯 말하는데, 땅만 줄기차게 파고 사는 종족답게 어둠 속 동굴에서도 주변을 느끼는 타고난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에 감탄도 잠시,
덜컹―!
"나, 나토네! 방금 전복될 뻔했잖아!"
"…죄송합니다! 주군!"
"내가 말을 몰아야겠나? 집중 안 해?!"
"아,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
"...."
마부가 기사 단장이었어?
긴장한 듯 숨소리가 거칠었는데, 손꼽히는 실력자도 이리 긴장할 정도면 땅의 결을 느끼는 능력도 모든 드워프에게 해당하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숨 쉬듯 하는 거라면서요."
도르네프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이 난쟁이 양반도 허풍이 심한 타입 같았다.
그나저나 어두워진 이후로 펜리 년이 조용했다.
이리 입 다물고 있을 여자가 아닌데?
"펜리 님?"
"시끄러워."
목소리가 날카롭다. 발톱을 바짝 세운 고양이 같아서 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그림자가 없는 암흑에 민감하다고 하더니, 그 탓인 것 같았다.
긴 어둠 사이로 마차는 쉬지 않고 움직였다.
수차례 지그재그로 마차가 기우는 움직임.
동굴이 한 방향으로 뚫린 것 같지 않았다.
미로?
그것도 무척 복잡한 미로 같았다.
이젠 내 위치가 어디쯤인지 감도 못 잡겠다.
'이러니 학살자도 정원을 못 찾았지.'
아티팩트 수집에 집착하는 카멜이 대장장이 정원을 놔둘 리 없었다.
점령한 순간부터 정원을 찾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엄청난 인원을 동원해 수년에 걸쳐 영지 잔해를 치우고 주변 땅을 파고 이 잡듯이 뒤졌다.
당연히 폐광산도 의심하고 조사를 했는데, 이렇게 변태같이 숨겨놓으면 위치를 알았다고 한들, 찾기 불가능했을 것 같았다.
'드워프의 허락 없이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는 장소라더니.'
대장장이 정원을 표현한 소설 문구가 완벽히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긴 암흑도 오랫동안 노출되니 적응이 되었다.
두 사람의 꿈틀대는 실루엣이 시야에 비칠 정도로 눈이 익숙해졌을 때였다.
"워―!"
마차가 드디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마부석에서 내려온 나토네가 주섬주섬 무언가를 챙기더니 마차 문을 활짝 열었다.
"으! 눈 부셔."
나토네가 등불을 들고 나타나자, 눈 부심에 고개를 돌렸다. 불빛에 흐릿했던 시야가 돌아왔을 땐 막다른 벽이 나를 반겼다.
우리는 마차에서 내린 후 암벽으로 꽉 틀어막힌 장소 앞에 섰다.
툭툭―
벽을 두들겨 보니 속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건너편에 공간이 따로 있는 것 같지 않은데,
"다 온 겁니까?"
"이 암벽 너머부터 폐광산이다."
"건너편에 공간이 있다고요?"
입구에 얼마나 많은 암벽을 때려 박은 거야? 여길 치우고 광산으로 진입하는 건 평생 곡괭이질을 해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폭파도 힘드니,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비밀 통로.'
내가 도르네프를 돌아보자,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딱 봐도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아서 품에서 황금패를 꺼내 건넸다.
황금패를 움켜쥔 도르네프가 암벽에서 스무 걸음 정도 물러나더니 한 자리에 섰다.
잠시 후 그 주변을 살피던 그가 바닥을 쓸고는 황금패를 내려놨다.
그 순간, 바닥이 쿠쿵! 울리더니 황금패와 함께 푹 꺼졌다.
갈라진 바닥 밑으로 끝 모를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까지 이어진 거지?
너비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비좁고 어두웠는데 밑 분위기가 공포 특집을 떠올릴 정도로 을씨년스러웠다.
"이봐."
"…헉!"
이 난쟁이가 왜 등불을 얼굴 밑에 들이밀고 지랄이야!
"왜 그래?"
"아, 아닙니다. 혹시 밑에 가디언이나 트랩은 없습니까?"
"없으면 섭섭하지."
"폐광산에 무슨 보물이라도 숨겨놨습니까?"
"숨겨놨지. 폐광산으로 진입하기 전에 보물 구경이나 하고 가라고."
"네?"
등불을 쥔 도르네프가 나토네에게 손짓하자, 나토네는 예를 표하곤 마차로 돌아갔다.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마차에서 기다릴 계획인 것 같았다.
계단에 한 발을 걸친 도르네프가 우릴 돌아보곤 턱수염을 쓸어내렸다.
"죽고 싶지 않으면 한 걸음 이내로 따라와라."
"내 긴 다리로는 반걸음이겠네?"
"고양아, 그 무릎부터 접어줄까?"
노려보던 도르네프가 곧장 계단 밑으로 사라지자 펜리는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곤 그 뒤를 총총 따랐다.
대장장이 정원.
'어떤 모습이려나.'
소설에서도 다룬 적 없는 장소라 가슴이 살짝 떨렸다.
설렘과 긴장이 공존하는 감정.
그것도 잠시, 두 사람이 밑으로 푹 꺼지듯 사라지자, 서둘러 계단을 타고 펜리 뒤를 바짝 쫓았다.
잠시 후, 세 사람이 사라진 바닥이 천천히 닫히더니 공간이 사라졌다.
* * *
철컥― 철컥―
앞서가는 도르네프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비좁은 벽 이곳저곳을 조심스럽게 누르며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철컥철컥 마찰음이 들려왔다.
트랩이 해제되는 소리 같았다.
계단은 그리 길지 않았다.
계단이 끝나고 비좁은 통로가 눈앞에 펼쳐지자, 도르네프는 등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빈손으로 움직였다.
더는 주변이 어둡지 않았다.
통로 벽 사이사이로 촘촘히 박혀 있는 발광석들이 보인다. 반짝이는 발광석의 빛무리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마치 별들이 반짝이는 장면 같아서 어두운 우주를 산책하는 느낌마저 들었다.
언제 통로 끝에 다다랐는지도 모른 채 나는 눈앞에 펼쳐진 몽환적인 광경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장장이 정원에 도착했다.
"엄청나네요."
공간은 그리 넓지 않았다.
휙 훑어보면 한눈에 들어올 정도였는데, 그래서 공간을 꽉 채운 유리 세공품들이 더 화려하게 눈을 어지럽혔다.
다양한 꽃 형태로 세공된 백여 점의 유리 장식품들이 공간을 아름답게 채웠다.
생기라곤 없었지만 발광석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장인들의 정성 어린 손길이 한 땀 한 땀 엿보이자, 어째서 이곳이 대장장이의 정원이라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펜리가 유리 세공품들을 툭툭 건드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하나만 가져가도 수만 골드는 받을 것 같은데."
이 펜리 년은 뭐든 돈으로밖에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곧 정원 중심에 우뚝 선 거대한 유리 세공품에 집중했다.
그 세공품 곁에 서 있는 도르네프를 본떠 실사판으로 만든 것처럼 섬세하게 세공된 드워프 형태의 유리 세공품이었다.
"초대 가주시네."
도르네프는 세공품 앞에 서서 가볍게 예를 표한 후 세공품을 장식한 물건들을 하나하나 가리켰다.
"이 물건들이 정원의 보물들이지."
화려하다 못해, 기가 질릴 정도로 꾸며진 모습이었다.
투명한 드워프 세공품 위로 장비와 장신구들이 가득 차 있었다.
양손에 들린 할버드부터, 등과 허리춤에 매달린 다양한 장비들, 그리고 손가락 하나하나에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반지들과 팔찌도 눈에 들어왔다.
대장장이 정원에 보물 같은 장비들이 숨겨져 있다고 하더니 정말이었다. 난 눈앞의 장비들을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지린다.
펜리조차 홀린 듯 보물들을 살피곤 나직이 중얼거렸다.
"경매로 팔리면 영지 몇 개는 거뜬히 사겠어."
"...."
이년은 포기를 모른다.
그녀의 손이 홀린 듯 올라가는데, 도르네프가 거칠게 손목을 낚아채곤 어림없다는 듯 콧바람을 불었다.
"암고양이, 네 몫은 없어."
"키만큼 쪼잔하게 구네. 가볍게 만져 볼 순 있잖아?"
"저 녀석의 부탁이 아니었으면 넌 이곳에 들어오지도 못했어. 자격이 없으면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라고."
"...."
도르네프를 노려본 것도 잠시, 그녀의 눈은 다시 보물로 멍하니 향했다. 그런 펜리를 놔둔 채 도르네프는 날 바라보며 짧게 턱짓을 했다.
"골라."
"...네? 지금요?"
"물건의 가치를 살피는 심미안도 황금패의 자격 중 하나다. 능력은 알려줄 수 없어.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
무슨 시장 좌판에 깔린 물건처럼 골라 가라 말하는데, 눈앞의 장비들은 무려 몇 대에 걸친 전대 가주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보물들이었다.
'능력을 알려줄 수 없다라….'
다행인 건 시간제한이 없다는 거다.
난 드워프 세공품 주변을 천천히 돌며 장비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신기하게도 이 중 눈에 익숙한 장비들도 보였다.
'꿈에서 봤던 도르네프의 장비도 있어.'
특히 저 황금 갑주와 검게 물든 카이트 실드가 눈에 익었다.
꿈에선 망가진 형태였지만, 장비가 워낙 화려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학살자에게 붙잡혀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존재감을 드러냈던 장비들.
단순한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꿈에서 봤던 장비들이 이리 실존해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레나가 더럽게 세긴 했나 보네.'
이런 장비들을 들고, 검은 장미까지 합세했는데 공멸이라니.
완성된 키메라 육체와 심장의 조합이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 장비를 보니 피부로 느껴졌다.
"이 아까운 장비들을 어째서 보관만 하십니까? 잘만 사용하면 엄청난 힘이 될 터인데."
"제대로 된 주인을 만나기가 어렵거든."
"네?"
"이 장비 하나하나가 역대 가주들이 공들여 만든 것들이야. 문제는 사용자에 대한 배려가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저 지들 잘난 맛에 제작된 물건들이란 거지. 전부 다루기가 까탈스럽고 위험하기 그지없어. 나조차 저 중에 한두 개만 다뤄도 과부하가 올 정도야."
아, 그래서 갑옷과 방패만 사용했던 건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건을 다시 보는데, 펜리의 표정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다. 눈빛에 진득한 탐욕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뭘 보는 거지?
시선을 쫓아가니, 벨트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루비가 박힌 벨트였다.
루비의 크기만 보면 이 중 가장 비싸 보이긴 했다.
표정을 보니, 불꽃처럼 팍! 꽂힌 것 같은데, 이러면 내 선택지에서 벨트는 일단 보류다.
곧 던질 미끼를 콱 물 것 같거든.
그리고 내 눈에는 벨트보다 더 시선을 사로잡는 무기가 있었다.
드워프 세공품 위에 장식된 장비 중 세공품과 가장 언밸런스한 무기라 더 눈에 확 띄었다.
딱 보는 순간 '이거다!'라는 확신이 들었다.
"전 이걸로 하겠습니다."
고민 없이 한 장비를 움켜쥐자, 도르네프는 나와 장비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자네 활은 쏠 줄 아나?"
내가 선택한 건 멋들어진 바디를 자랑하는 거대한 활이었다.
88화 흡혈의 고리
활을 쏠 줄 아냐고?
당연히 현실에선 활을 실제로 구경해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었다. 내가 제대로 다뤄본 장거리 무기라곤 어릴 적에 가지고 놀던 새총이나, 군대에서 쓰던 총기류 정도?
하지만 난 도르네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곤 활 쏘는 자세를 잡았다.
난 아니어도 암살자인 이 몸은 기억하거든.
착 감기는 매끄러운 그립감.
활대의 부드러운 곡선 바디는 순백의 눈이 내린 듯 매끄럽고 은은한 광택이 흘러나왔다.
한눈에 봐도 성스러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응? 근데 활시위가 없네?'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한 순간, 활대에서 강력한 흡착이 느껴지더니 손바닥에 진득한 통증이 올라왔다.
뭐지…?
마치 빨판에 흡착되어 피가 빨리는 듯한 이 불길한 느낌은?
"...시발."
근데 진짜였다.
활대를 움켜쥔 팔이 서서히 검붉게 변색되더니 미라처럼 말라 갔다. 동시에 활대 위로 가느다란 활시위가 소환되었다.
붉은 실선.
마치 내 피로 만들어진 시위 같았다.
성스러움은 개뿔, 순박함을 가장한 사기꾼 새끼에게 당한 기분이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고 서 있자, 펜리가 키득키득 비웃고는 낄낄대기 시작했다.
"딱 너 같은 거 골랐네."
"...뭐요?"
"너 여기저기에 빨대 꽂는 거 잘하잖아. 그 주인에 그 무기를 고른 거지."
뭐, 이년아?
무기의 위력을 알아볼 첫 대상이 정해진 것 같았다. 난 그대로 붉은 실선을 쭉 잡아당겼다.
우웅―!
활시위 사이로 생성되는 핏빛 화살.
일단 화살이 불필요하다는 건 확인했고.
이대로 펜리 년의 머리를 날려버리려고 했는데, 화살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잠시 멈칫했다.
잠깐 이거….
'인챈트가 실리네?'
성력의 기운을 화살에 천천히 밀어 넣자, 화살에 변화가 생겼다.
핏빛이 황금빛으로 물든다.
어느덧 완성된 시위에 걸린 황금빛 화살.
화살의 변화에 도르네프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속성 변화? 이런 능력도 있었나?"
"저 활의 능력이 뭔데?"
"속성 흡혈."
주인의 피를 흡혈하여, 주인이 가진 속성을 화살로 소환하는 변태 같은 활이라고 했다.
피를 뽑아?
확실히 착용자에 대한 배려는 개나 줘버린 물건이었다.
이딴 걸 왜 만든 거야?
전대 드워프 중에 괴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위력은 흡혈의 양에 따라 달라져. 다만, 최소로 요구되는 양이 존재하지. 그 위력은 마력탄 정도?"
"최소 위력이 마력탄? 괜찮은데?"
"계속 사용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
인간 기준으로 서너 발이면 빈혈이 올 정도라고 했다. 빈혈이 오면 제대로 된 전투가 불가능하다. 어지러운데 무슨 칼질을 하겠어.
서너 발 쏜 후에 튀어야 한다는 뜻인데, 마력탄 서너 발로는 2성도 죽이기 힘들었다.
가성비가 무슨 레전드급 민폐 된장녀 수준이었다.
"가성비가 쓰레기네."
"아니, 그냥 쓰레기야. 꽝도 이런 꽝이 없거든."
"비주얼은 괜찮은데?"
"함정이야. 겉만 화려한 보물 상자를 열었는데, 속이 텅텅 빈, 상자 자체가 가장 비싼 경우지."
"망한 거지?"
"좆망한 거지."
"...."
내 양옆에 착 달라붙어서 놀리듯 두 이종 연놈들이 대화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뽑기 실패로 인한 정신적 멘붕?
이 세계에 떨어진 후 내가 겪은 불운 스토리를 떠올리면 해맑게 웃으면서 넘어갈 수 있다.
난 지금 움켜쥔 활의 잠재력을 계산하고 있었다. 오직 나만이 한계 이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활의 능력 말이다.
'이거 잘 쓰면 대박일 것 같은데.'
활대를 잡았던 팔이 어느새 혈색을 되찾고 있었다. 피가 뭉텅이로 빠지자 심장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활의 흡혈보다 심장의 회복 속도가 월등히 높은 모습이었다.
분명 피를 흡혈한 만큼 그 위력이 강해진다고 했다.
'퍼스트 어택에서 활의 최대 출력을 낼 수 있다는 말이잖아.'
피를 흡혈해도 내겐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있었다.
좀비 같은 회복력으로 난 온종일 헌혈을 해도 큰 타격이 없었다. 첫 공격에서 활이 낼 수 있는 최대 파워로 화살을 생성할 수 있다는 뜻.
게다가 이 활은 인챈터인 나와 궁합이 아주 좋았다. 당장 화살에 관통만 인챈트해도 기본 위력의 두세 배를 더 뽑아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활을 선택한 진짜 이유는 다른 것에 있었다.
'신명의 화살을 숨길 수 있겠어.'
내 고유 능력인 신명 사냥꾼.
그중 대표 능력인 '신명의 화살'을 이 활과 섞어 사용한다면 상대가 내 고유 능력을 알아차리기 힘들 것 같았다.
이 활의 능력이라 착각하게 할 수도?
남이 보기엔 꽝인 선택 같지만, 내겐 최고의 궁합을 지닌 무기나 다름없었다.
"이 활, 이름이 뭡니까?"
"흡혈의 고리."
"흡혈의 고리? 무슨 활 이름에 고리란 이름이...."
"활대에서 손을 떼봐."
도르네프의 말대로 활대를 놓자, 활이 잠시 허공에 부유하더니 고리 형태의 팔찌로 줄어들었다.
순백의 색을 지닌, 민무늬 팔찌였다.
그것을 낚아채 왼쪽 팔목에 착용하자 부드럽게 착 감기며 딱 맞게 줄어들었다.
"어때, 지금 심정이?"
"하나만 물어봐도 됩니까?"
"교환은 안 돼."
"보기와 달리 눈치가 빠르시네요."
"저 암고양이와 엮이다 보면 없던 눈치도 생기게 돼. 뒤통수를 수차례 처맞거든."
"뜻이 확고하시니, 어쩔 수 없죠."
"아쉬운 눈치가 아닌데?"
아쉬움?
아니, 난 이 흡혈의 고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펜리 년이 보고 있어서 티를 내지 않고 연기에 들어갔다. 입맛을 다시곤 포기한 듯 드워프 세공품 앞에 주저앉았다.
"뭐 기회가 한 번 더 있으니까요. 그걸로 만회해야죠."
"그 기회가 마치 공짜인 것처럼 말하는군. 목숨을 걸어야 할 거야."
"각오는 됐습니다."
"폐광산의 저주, 풀 수 있겠나?"
"네. 자신 있습니다."
자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소설과 현실은 괴리가 너무 크다는 걸 알아버렸거든.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래서 보험이 필요하다.
펜리 체이서란 우량주 보험 말이다.
내가 자신 있게 외친 건, 당연히 펜리를 의식한 것이었다.
자, 미끼 투척이다.
난 펜리 앞에서 결심한 표정을 짓고는 벨트를 콕 집었다.
큼지막한 루비가 중앙에 박힌 멋들어진 벨트. 조금 전 펜리의 시선을 사로잡은 장비였다.
"황금패를 얻으면 저 루비 벨트는 제 것입니다."
그 말에 펜리의 표정이 확 구겨졌다.
자기 것도 아니면서 벌써 사탕을 빼앗긴 아이의 표정이었다.
하여간 욕심은.
"네놈이 저 벨트가 뭔지 알고?"
"안 들립니까? 벨트가 지금 절 부르고 있습니다. 영혼의 동반자처럼."
"…이 또라이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은 전보다 더 구겨졌다.
당연했다.
영혼의 동반자.
이딴 헛소리는 훗날 저 벨트의 주인이 된 펜리가 했던 말이었으니까.
다크 로즈를 빼앗겼을 때의 감정을 또 느끼고 있을 거다. 생각해보니, 내가 펜리를 더 괴롭히는 느낌인데?
근데, 쟤는 그래도 된다.
'어차피 한참 후에나 갖게 되는 물건이니까. 지금 벨트를 얻게 된다면 앞으로 활동에 큰 도움이 되겠지.'
6성이 된 펜리는 폐광산에 대장장이의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죽기 전의 도르네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다만, 도르네프는 조건 한 가지를 덧붙였다.
더는 강해지기 어렵다고 생각이 들 때 대장장이 정원을 찾아갈 것.
그 기준이 펜리에겐 6성의 끝자락이었고, 한 달의 수색 끝에 대장장이 정원을 찾게 된다.
베네타의 몰락 이후 숨겨진 정원의 보물들이 모두 펜리의 소유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중 펜리가 사용한 장비는 저 벨트 하나가 유일했다.
마력의 루비 벨트.
주인의 마력을 한 단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었다. 마력이 없는 내겐 하등 쓸모없는 장비.
그럼에도 내가 탐욕의 액션을 취하는 척한 건 그녀를 홀라당 낚기 위함이었다.
내 액션이 먹힌 것일까.
펜리 년이 내 표정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녀는 위험과 보상을 두고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펜리는 짧게 혀를 찼다.
'저 표정, 재수 없단 말이지.'
폐광산은 베네타의 전대 가주들과 정예 기사단이 묻힌 장소였다.
위험천만한 사지(死地)다.
근데, 그 사지로 들어가는 놈치곤 표정이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정말 자신 있는 건가?
생명의 징표로 녀석에게 크게 덴 경험이 있어서 의심의 씨앗을 버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쓸데없는 곳에 목숨을 내던지는 멍청이도 아니었다.
생존을 무엇보다 첫 번째로 생각하는 빈댕이 같은 놈.
그런 놈이, 폐광산에 스스로 들어간다?
'뭔가 있다는 건데.'
그게 뭔지 물어보고 싶지만, 약은 놈이라 제대로 말해줄 리 없었다.
포기하자니, 저 황홀한 빛을 머금은 루비 벨트가 눈에 아른거린다.
다크 로즈처럼 자신의 것이란 느낌이 팍팍 왔다. 그런데 저놈에게 또 빼앗길 위기다.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저 녀석은 죽을 것 같으면 별 지랄을 다 해서라도 폐광산에 안 들어갈 놈이었다. 자진해서 간다는 건 위험을 회피할 수단이 있거나, 뭔가를 알고 있다는 뜻.
난 펜리의 표정 변화에 속으로 끌끌 웃었다.
'곧 낚이겠네.'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녀의 경우는 판단이 어려운 정보들을 잔뜩 던지면서 낚아야 했다. 머리를 잘 굴리는 타입은 판단이 어려우면 자신이 바라는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역시나,
"전에 말한 그 거래 아직 유효하지?"
던진 미끼를 그녀가 콱 문 순간이었다.
* * *
흡혈의 고리를 선택하면서 대장장이 정원에서 볼일은 끝이 났다.
이제 폐광산의 중심부로 향할 시간.
그 위치를 묻는 내 질문에 도르네프는 밑바닥을 가리켰다.
"이 밑이요?"
설마, 폐광산 위에 대장장이 정원을 올린 거야?
"입구는 없습니까?"
"막힌 벽 못 봤어? 광산 입구로 더는 출입이 불가능해."
"입구를 완전히 무너트린 겁니까?"
"저주가 새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저주가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게 뭐든 밖으로 나오면 베네타에 재앙이 시작되겠지."
군주가 직접 이끈 최정예 전력이 세 차례나 들어가서 몰살당한 장소였다.
최후의 수단은 무조건 틀어막는 것뿐이었다.
도르네프는 정원 한쪽에 은은히 발광하는 꽃밭으로 걸어갔다.
유리로 세공된 아름다운 꽃 세공품들의 향연.
도르네프는 그중 검은색을 띤 꽃 세공품을 조심스레 집곤 천천히 뽑아 들었다.
그게 신호가 된 것인지, 조금 전 도르네프가 가리킨 바닥이 천천히 꺼지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극―!
계단은 없었다.
시커먼 구멍뿐이었다.
한 사람이 몸을 구겨서 겨우 들어갈 정도로 구멍은 비좁았다.
도르네프는 어디선가 두꺼운 밧줄을 가져와 구멍 밑으로 밀어 넣었다.
밧줄이 끝없이 들어가는 것이 밑이 무척 깊은 모양이었다. 반대쪽 밧줄을 스스로 허리에 묶은 도르네프가 말뚝을 박은 것처럼 서더니 우리 쪽을 바라봤다.
"내려간 즉시 밧줄은 회수될 거야. 꺼진 바닥도 막힐 거고."
"출구는 이곳뿐입니까?"
"이곳뿐이다."
"어떻게 신호를 보냅니까?"
"시간을 맞춰야지."
도르네프는 내게 작은 배낭을 건넸다.
89화 폐광산의 저주
"배낭이… 묵직하네요?"
"식량과 필요한 것들을 챙겼어. 특히, 이 모래시계."
"모래시계?"
"배낭 안에서 꺼내 봐."
내가 꺼낸 모래시계는 도르네프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모래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데는 대략 사흘 정도가 소요된다고 했다. 신기한 건 시계를 뒤집고 흔들어도 모래가 한 방향으로 변함없이 흘러간다는 것이었다.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한쪽 공간으로 모래가 전부 떨어졌을 때, 출구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했다.
"낌새가 이상하면 출구는 바로 닫힐 거야. 그러니 미리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어."
"우리가 나타나지 않으면 어찌 됩니까?"
"떨어진 모래가 반대편 바닥으로 다시 옮겨질 때까지 기다려야지. 그때 한 번 더 출구를 열 거야. 그때도 나타나지 않으면 난 돌아갈 거다."
"그 뜻은…."
"출구는 폐쇄될 거야."
사흘 뒤에 한 번. 그리고 다시 사흘 뒤에 마지막.
배낭에 식량이 넉넉히 든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철저하네요."
"전에도, 그 이전에도, 이렇게 해왔으니까."
광산을 폐쇄하기 직전까지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만들어진 규칙이라고 했다.
지나칠 정도로 저주를 경계하는 모습인데, 희생자의 규모를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모습이었다.
물론, 펜리에겐 그 이해를 바라면 안 된다.
"폐쇄는 얼어 죽을, 안 열어주면 출구를 부숴버릴 거야."
"괜히 힘 빼지 마."
"그 정도야?"
"네년이 부술 것 같았으면 내가 같이 오지도 않았겠지."
"야. 들었지? 네놈의 무덤이 될 수도 있어."
내 무덤? 네 무덤은 생각 안 해봤니?
펜리의 시선이 날 향했다.
자신 있냐고 묻는 표정인데,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럴 거면 정보라도 알게 6성 시절에 폐광산을 살짝이라도 공략해보지 그랬어.
대장장이 정원을 발견한 펜리는 보물들을 싹쓸이한 뒤 폐광산 진입까지 시도했는데, 저주와 마주하자 그녀는 '돌파'가 아닌 '공략 포기'를 선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동기가 없었으니까.'
학살자의 영토가 된 토바른 지역에 더는 펜리가 지켜야 할 것이 없었다. 그 탓에 난 저주의 정체는 알고 있지만, 공략법은 모른다.
그러니, 그리 쌍심지를 켜고 보지 말라고.
"쫄리세요? 그럼 포기하시든가."
"…햇병아리가 많이 컸네.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뒈지기 전에 얼른 내려가지?"
"루비 벨트가 탐나긴 하나 봅니다?"
"지랄."
찰진 욕설과 함께 발길질이 날아왔다.
엉덩이를 처맞았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암흑 세상에 빨려간 뒤였다.
추락한다?
이 전개, 제단 구덩이에서도 한 번 경험했던 건데.
또 당한 건가?
위쪽에서 펜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밧줄 안 잡으면 뒈진다는데?"
"…헉!"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양손을 뻗어 벽을 받치고 섰다. 공간이 좁아서 가능한 묘기다.
그 뒤로 밧줄을 잡고 위를 노려보니, 펜리 년이 천천히 밧줄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망할 년아, 죽을 뻔했잖아!
그 말을 내뱉기도 전에, 펜리 년이 위에서 내 머리를 꾹꾹 밟아대기 시작했다.
"…뭐 하는 짓입니까?"
"나무늘보냐? 얼른 안 내려가?"
"자꾸 이러면 가만히 안 있습니다?"
"지금 뒈질래, 내려갈래."
"네네. 갑니다."
훗날 눈물 콧물 질질 싸게 해줄 것이라 다짐하며 밧줄을 타고 주르륵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빛 하나 없는 작은 공간에 불과했다.
굳이 밧줄이 없어도 두 팔을 뻗고 버티며 내려갈 수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것도 더 내려가니 불가능해졌다.
디딜 곳도 없고, 뻗은 벽도 사라졌다.
그네처럼 휘청휘청하는 뻥 뚫린 공간에 던져졌는데, 주변은 암흑천지라 아무것도 안 보였다.
"바닥이 어디쯤이야?"
마치 어둠 속 바다 위에 던져진 느낌이다.
작은 목소리도 메아리처럼 울렸는데, 느낌이 오싹했다.
밧줄 하나에 기대어 내려가는 속도를 서서히 높이는데, 갑자기 주변이 확 밝아졌다.
위쪽을 올려다보니, 펜리가 눈부신 마법구를 소환했다. 마법구를 밑으로 던지자, 빛의 구체가 천천히 허공을 부유하며 주변 시야를 비추기 시작했다.
"…더럽게 넓네."
거대한 홀에 갇혀 둥둥 떠다니는 느낌이었다.
주변은 세월이 엿보이는 가파른 암벽으로 둘러싸였고, 밑으론 뻥 뚫린 공간이 이어졌다.
난 구체를 따라 한참을 내려와야 했다.
예상보다 더 늦게 바닥에 도착했다.
밧줄을 놓고 위를 올려다보니, 밧줄은 까마득한 천장의 작은 구멍과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나온 구멍으로, 도르네프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구멍이 폐광산을 벗어날 유일한 탈출구였다.
'밧줄을 내려주지 않으면 확실히 복귀가 쉽지 않겠어.'
잠시 후, 뒤따라 착지한 펜리가 밧줄을 툭툭 잡아당기자, 밧줄이 스르륵 위로 올라가더니 잠시 후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설마, 했는데 정말 안 내려오네.
도대체 갑옷은 왜 입은 거야?
밧줄을 회수한 도르네프는 이제 사흘간 정원에 머물며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이젠 우리 차례다.
베스트 시나리오는 사흘 안에 임무를 끝내고 이곳에 머무는 것이었다.
"지도 가져왔지?"
"네."
한참 전에 폐쇄된 광산이지만, 내부 구조가 변한 적이 없으니 가져온 지도는 유용했다.
구체의 빛에 기대어 지도를 살폈다.
우리가 서 있는 장소는 채굴한 광물을 보관하는 장소였는데, 지금은 텅 비어서 거대한 공터로 남아 있었다.
우리가 향할 장소는 저주가 시작됐다는 광산 중심부.
위치 파악이 끝나자 지도를 품에 넣었다. 가는 길이 단순해서 더는 살펴볼 필요가 없었다.
"한 길로 쭉 이어진 구조라 헤맬 일은 없을 것 같네요."
"무슨 일이 터질 줄 알고."
"무슨 뜻입니까?"
"배낭 내놓으라고."
"왜요?"
"내가 한두 번 당해?"
이 펜리 년이 라웁 숲에서 일주일 정도 굶겼더니, 트라우마가 생겼나.
식량을 사수하려는 모습인데, 어쩌겠나. 약한 게 죄지.
옜다. 배낭 셔틀이나 해라.
스스로 정신 승리를 쟁취한 뒤 광산의 내부 구조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방향부터 잡죠."
"터널만 찾으면 되지?"
"네. 밝기를 더 키울 수 없습니까? 주변을 살피기엔 빛이 너무 약한데."
"마력 낭비는 사절이야."
펜리는 범위를 늘리는 대신 구체를 벽 끝으로 붙인 후 벽을 따라 빠르게 이동시켰다. 큰 원을 그리며 움직이던 구체가 잠시 후 거대한 터널 앞에 멈춰 섰다.
3미터 높이의 터널이었는데, 터널을 발견하자 우리는 고민 없이 터널로 발걸음을 옮겼다.
중심부와 이어진 길은 저 길 하나뿐이었다.
'미로가 아니니 시간을 낭비할 일은 없겠어.'
만약 도미닉 연구소의 제단 구조처럼 미로로 복잡했다면 임무를 해결하기에 사흘은 빠듯했을 것이다.
터널 안으로 진입하자, 펜리의 머리 위로 구체가 둥둥 떠다니며 앞을 밝혔다. 주변을 살피니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버려진 곡괭이들이 많네요."
터널 곳곳에는 광물 채굴에 필요한 집기들이 너부러져 있었다. 뭔가 사건이 터졌고, 집기들을 버리고 도망친 흔적이었다.
터널을 따라 쭉 걷던 우리는 잠시 멈춰 섰다.
버려진 낡은 방패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광산 채굴 장비와 거리가 먼 물건.
펜리가 방패를 살피곤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단 장비다."
흙을 털어내니 방패 위로 베네타의 문양이 나타났다.
전(前)대 가주들이 이끌고 온 병력의 흔적을 발견하자, 우린 속도를 줄이고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흔적은 앞쪽으로 계속 이어졌다.
부러진 검과 도끼, 뜯긴 방어구들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펜리는 흔적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앞장섰다. 흔적을 살피는 실력이 나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다.
우린 조용히 그리고 최대한 천천히 터널의 더 깊숙한 곳으로 발을 들였다.
제법 지루한 시간이 이어지고, 흔적을 둘러보던 그녀가 미간을 살짝 좁히곤 조용히 입을 뗐다.
"이상해."
"뭐가 말입니까?"
"버려진 장비들은 무더기인데, 그 주인들의 흔적이 없어."
"시체를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펜리는 마른 흙을 집곤 슥슥 비볐다.
붉다.
핏자국이었다.
"근처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어. 누구랑 싸운 거지?"
"눈에 띄는 흔적이 있습니까? 덩치 큰 괴물들이라든가, 특별한 것 말입니다."
"아니, 그런 흔적은 없어."
"모두 똑같은 흔적입니까?"
"전부 드워프의 발자국들밖에 없어."
그 답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변수 없이 내용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그럼, 드워프들끼리 싸운 거네요."
"동족이랑? 미치지 않고서야...."
펜리는 말을 흐리곤 잠시 멈칫했다. 아군끼리 싸운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전투 흔적을 손으로 천천히 쓸어 보던 그녀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너, 뭔가 알고 있지?"
"드워프들의 흔적밖에 없다면서요? 그럼 드워프들 짓이겠죠."
"설마 저주? 드워프들이 뭐에 홀렸거나 미쳤다는 뜻이야?"
"비슷한데, 좀 다릅니다."
그때,
스르렁― 스르렁―
뭔가 바닥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터널 앞뒤로 동시에 흘러나왔는데 오싹한 감각이 올라왔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워낙 어두워서 소리의 진원지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펜리와 나는 자연스레 등을 맞대고 섰다.
"지금껏 단 한 구의 시체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럼 둘 중 하나겠죠."
"말해봐."
"싸워서 이긴 쪽이 죽은 이들을 묻어줬다거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진짜를 말해."
난 조용히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병력 전체가 몰살당하고 시체들이 스스로 움직인 거죠."
펜리는 내가 가리킨 방향을 보지 않았다. 이미 그녀의 앞쪽에서도 비척거리는 인영들이 잡혔기 때문이다.
어둠을 뚫고 천천히 다가오는 무언가.
펜리가 짧게 혀를 차곤 응축된 구체를 터트린 순간 터널 전체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우리는 신음을 흘리곤 전투 자세를 잡았다.
그어어어어어―!
캬아아아아아!
터널을 꽉 채운 무리들이 썩은 몸뚱이를 질질 끌며 모습을 드러냈다.
대부분 드워프였고, 이종족인 수인도 일부 눈에 들어왔다.
하나같이 비주얼은 끔찍했다. 눈동자는 전부 새하얗게 뒤집혔고, 온몸의 살점이 썩거나 떨어져 뼈 마디마디가 드러났다. 벌어진 상처에선 핏물 대신 진물이 흘러나왔다.
죽은 이종족들의 행렬.
"난쟁이 녀석이 눈앞의 광경을 봤어야 했는데."
"왜요?"
"이 정도로 개판이면 황금패를 추가로 더 받을 수 있을 거 같거든."
"…이 상황에서도 그 얘깁니까?"
전부 이성이 사라진 괴물의 모습이었다. 소설에선 저들을 저주받은 존재들이라 표현했지만, 난 저들을 간단히 한 단어로 표현했다.
좀비(zombie).
이보다 어울리는 표현이 더 있을까?
카아아아아―!
"뭐야?"
"으앗! 바, 바닥이요! 바닥!"
앞뒤로 나타난 좀비 무리가 끝이 아니었다.
저들의 등장이 신호가 된 듯, 바닥 곳곳에서 썩은 손들이 우수수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던 곳부터 지나온 곳까지, 그리고 앞으로 지나갈 곳까지.
터널 흙바닥 전체가 비명을 질러대며 좀비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좀비들의 등장은 예상했다.
그런데,
"…뭐가 이렇게 많아?"
90화 폐광산의 저주(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