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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60-70

60화 소리 없는 찬가

"괴, 괴물! 오지 마!"

"아아아아악―!"

피로 물든 숲 너머로 비명 섞인 바람만 불어닥쳤다.

대지에 너부러진 시신들은 모두 찢기고 갈라져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그중 살아남은 이들은 괴물들에게 잡혀 사지가 뜯기는 중이었다.

"먹이들이 도망쳤군요."

메마른 표정의 중년인이 큰 책을 들고 앞에 섰다. 얼굴에 묻은 핏방울을 닦아내며 중년인, 아니 도미닉은 눈앞의 용병에게 물었다.

"불사자의 심장이라고 했습니까?"

"사, 살려주시… 아악!!!"

"전 죽음을 싫어합니다."

눈앞의 용병을 심문하는 건 용병이 이 행렬의 책임자로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흥미로운 소식이 그 용병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불사자의 심장.

왜일까.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도미닉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

"다, 다 말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물음에 답하신다면."

"부, 분명 들었습니다! 제단에서 붉은 괴물이 튀어나와 드워프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고!"

"제단? 방금 제단이라고 했습니까?"

용병은 조금 전까지 천여 명의 행렬을 이끌고 라웁 숲을 벗어나는 중이었다.

키메라 무리가 나타났을 때, 제물로 던져줄 이들이 수백이 넘어갔다.

시선을 돌리고 도망치기 충분해서 용병들은 탈출을 자신했다.

하지만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드, 드워프들의 말이 맞았어.'

제물을 던지고 던져도 키메라들은 끝도 없이 몰려왔다.

제물마저 부족해지자 키메라들은 용병들로 만찬을 시작했고, 목줄이 풀린 키메라들은 먹잇감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천여 명이 몰살당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제 이곳의 유일한 생존자다.

'이곳에서 죽을 수 없어....'

그리고 아직 삶의 희망을 놓지 못했다. 살기 위해 그는 떠오른 모든 정보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연구실에 나타난 드워프들과 연구실에 남은 자들.

지금 연구실의 상황.

소식을 전달한 C급 용병 알이란 이름까지.

두서없이 그는 입을 쉬지 않고 조잘거렸다. 눈물범벅이 되고, 표정에 절망이 서렸다.

간절히 삶을 원하는 용병을 도미닉은 감정 없이 바라봤다.

인간은 식용돼지를 보며 가여움을 느끼던가?

"사, 살려주시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인 도미닉은 아레나를 바라보며 손짓했다.

"영원한 삶을 약속하겠습니다. 대신 머리는 필요 없으니 몸통만 가지고 가지요."

"그 무슨 개소… 끄아아악!"

아레나의 손에 용병의 머리가 뽑혔다.

그녀는 잘린 머리를 한쪽에 던졌다. 그곳에는 그녀에게 살육당한 용병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었다.

도미닉은 피로 물든 그녀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

그 사이 그녀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연구실 방향을 응시하는 소녀.

작은 변화였지만 도미닉은 그녀의 반응에 눈을 반짝였다.

인형처럼 움직이던 그녀가 연구실에 가까워질수록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끌림을 느끼는 듯한 반응.

저 공허한 눈으로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불사자의 심장."

그 단어를 중얼거리자, 딸의 시선이 자신을 향했다.

그 반응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도망친 먹이들이 전해온 한 가지 정보.

딸의 반응은 불사자의 심장과 분명 관련이 있었다.

'미믹이 죽고 붉은 괴물이 나타났다라.'

미믹과 교감이 끊긴 순간, 미믹의 죽음을 눈치챘다.

드워프들의 짓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로 미믹을 잡기란 불가능했다.

강력한 실력자가 존재한다.

"도르네프. 베네타의 군주가 직접 움직인 건가?"

도르네프가 어떻게 자신의 연구실을 찾은 것인지, 왜 급습했는지 이유는 모른다.

아니, 더는 알 필요 없다.

도미닉의 신경은 오직 하나, 붉은 괴물에 집중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미믹에 대한 정보를 캐내며 마석의 비밀을 파악했다.

'마석은 부산물에 불과해.'

마석을 생산해내는 고대의 힘.

그 힘이 크리스탈 미믹의 진정된 가치였다.

미믹은 마석이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거위의 배를 가르지 않은 건 아레나의 육체가 완성되기까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힘이 배를 가르고 나왔다면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아레나의 신(新)동력 원천.'

그 붉은 괴물은 자신의 것이다. 누구도 욕심내선 안 됐다.

동력 원천을 손에 넣고, 아레나가 진정한 힘을 각성한다면 도미닉은 딸과 함께 그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베르센 클라크! 기다려라.'

클라크 대공을 떠올린 순간, 감정 없던 도미닉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언제고 대공을 키메라로 만들어 복수의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도착하는 대로 일지부터 챙겨야겠어.'

손을 내밀자, 아레나가 그 손을 잡고 따라왔다.

"오늘이 너의 생일이구나. 탄생을 기념하는 파티를 시작해야겠다."

도미닉이 책을 활짝 펼쳐 들자, 숲에 흩어져 있던 키메라들이 멈칫하더니 동시에 절벽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키에에엑!

쿠웩!

잠시 후, 키메라들이 신호를 받은 것처럼 절벽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구름이 숲을 가득 채웠다.

잠시 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숲을 뚫고 드넓은 들판을 밟았다.

그 순간,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눈앞의 절벽에서 섬뜩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키메라 떼가 일순간 멈춰 설 정도로 울부짖음이 담고 있는 기운은 거칠고 폭력적이었다.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기운.

도미닉은 그 기운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본체다.

본체가 나타났다!

이곳 키메라들은 저 본체의 부산물로 만들어진 실험체들이라, 기운이 터진 순간 움츠러들었다.

오직 아레나만 그 기운에 대항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두렵다.

그런데 미칠 듯이 기뻤다.

'드디어!'

도미닉의 눈동자가 희열로 가득 찼다.

그는 빠르게 책 페이지를 넘겼다. 이 책에는 미믹에게서 얻은 많은 고대 지식이 담겨 있다. 잠시 후, 책이 떨리더니 보랏빛 운무가 키메라들을 둘러쌌다.

운무 속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가라."

키에에에에엑!

멈칫하던 키메라들이 입을 벌린 채 울부짖는 방향으로 사납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울부짖음에도 더는 주춤하지 않는 모습.

쿠쿠궁―!

울부짖음에 절벽이 흔들리며 비명을 토했다. 절벽 안쪽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일어나는 움직임.

"...."

도미닉은 저 멀리 절벽 입구에 고립된 먹이들을 발견했다.

숫자가 많지만, 그에겐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다.

작은 손짓 하나.

처형 명령이 떨어졌다.

* * *

"이봐."

"네."

"내 눈에는 네가 말한 골든타임이 끝난 것 같은데?"

"무슨 뜻입니까?"

"ㅈ된 거 같다고."

펜리는 바깥을 나와 절벽을 등졌다. 팔짱을 낀 그녀는 숲 너머 기운을 살폈다.

좌우 그리고 정면, 세 방향에서 광폭한 키메라들의 기운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미 한바탕했는지, 바람 사이로 피 냄새가 물씬 풍겼다.

드넓은 숲이 괴물들을 토해내는 끔찍한 광경이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일반인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오줌을 지릴 것이다.

"저 안쪽도 난리가 난 것 같고."

펜리는 곰방대를 물곤 입구 쪽을 바라봤다. 난리인 건 뒤쪽도 마찬가지였다.

후드득―! 두둑!

"까아아악!"

"저, 절벽이!!!"

수천 인파가 한데 모인 공터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벽 전체가 쩌적 갈라지며 돌조각을 토해냈는데, 흔들림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해졌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은 분위기.

사람들은 삽시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무, 무너지기 전에 나가야 해!"

"멈춰라, 신호를 기다려!"

"하, 하지만…!"

"통제를 따른다고 약조했을 텐데?"

나가려는 이들을 드워프들이 무기로 가로막았다.

드워프들도 이곳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장 벗어나고픈 마음도 있었지만, 도르네프가 도끼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터라 표정을 숨긴 채 통제에 들어갔다.

입구 쪽에 홀로 서 있는 존재.

저 인간이 신호를 보낼 때까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한참 전부터 뭘 살피고 있는 거지?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레 입구에 서 있는 한 사람에게 집중됐다.

붉게 저무는 하늘을 감상하듯 우두커니 서 있는 모습.

처음에는 그 뒷모습을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이젠 두려움으로, 나중에는 원망으로 바뀌었다.

그 분위기를 읽은 것일까.

"기다려 주세요. 우리는 모두 살아서 나갈 거예요."

샤르바딘이 나섰다.

"그를 믿을 수 없다면 베네타를 믿어 주세요. 당신들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온 그대들의 군주입니다."

토바른 지역의 3강이자, 이종들의 정신적 지주.

그녀의 입에서 도르네프가 언급되자, 혼란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다행히 설득이 먹힌 모습.

모인 이들의 시선이 샤르바딘 쪽을 향했다.

정확히 큰 키의 샤르바딘을 어부바하고 있는 도르네프를 바라본 것이었다.

군주의 위엄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는 모습.

도르네프도 어색했는지 허허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녀를 업은 건 이유가 있었다.

자신뿐 아니라 대다수 드워프들이 곁에 여인과 아이를 끼고 있었다.

신호가 떨어지면 바로 업고 달리기 위해서였다.

'전투보단 전력 질주가 될 것이라 했지.'

샤르바딘의 불안정한 숨결이 느껴졌다.

내색은 안 했지만, 그녀도 이곳이 무너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었다.

피앙세를 불안하게 만든 괘씸한 존재.

도르네프는 입구 쪽에 선 사내를 바라봤다.

아서 클레이튼.

샤르바딘의 은인이라지만, 펜리 체이서의 보증이 아니었다면 절대 이런 미친 짓은 안 했을 것이다.

돈만큼이나 자신의 목숨에 민감한 다크 엘프.

도르네프는 아서보단 펜리의 감을 믿었다.

그녀는 아서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모든 이의 생존 확률을 높이는 일이라 확신했다.

무엇을 보고 그런 판단을 내린 것일까.

도르네프는 아서란 인물에 호기심을 느꼈다.

그때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직 움직일 때가 아닙니다."

"이 미친놈아, 너만 살려고 하는 거면 미리 말해. 나라도 살아야지."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타이밍은 찰나일 거라고."

"그 찰나가 어느 정도인데? 네놈 짝짓기 시간보다 짧아?"

"당연히 짧죠."

"조루는 아니지? 1분도 안 되면 곤란하잖아."

"절 못 믿으십니까?"

"내가 어떻게 믿어. 너랑 짝짓기도 안 해봤는데."

"...."

이 상황에 저런 헛소리나 하고 있다니.

도르네프는 갑자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에 한마디 하려고 움직이려는데,

그오오오오오오오오―!!!!

"...!!!"

거친 바람과 함께 안쪽 통로에서 매서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찌릿찌릿―!

그 울부짖음에 도르네프는 살짝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평범한 소리가 아니다.

온몸을 짓누르는 듯한 기운이 담겨 있다.

절대적 존재인 드래곤 피어와 비교할 순 없지만, 비슷한 압박을 느꼈다.

"…이런."

역시나 안 좋은 예감은 맞았다.

샤르바딘의 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나 유저를 제외한 다른 이들도 하나같이 돌처럼 굳어버렸다.

표정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도르네프는 마나를 퍼트려 샤르바딘의 몸을 풀어줬다.

굳은 몸은 마나로 풀어줘야 한다.

도르네프가 서둘러 기사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순간이었다.

크에에엑―!

"고, 괴물입니다!"

"도미닉이 공격해 오고 있습니다!"

바깥에 키메라들이 나타났다.

"빌어먹을! 하필 이 타이밍에!"

도르네프는 순간 당황했다.

울부짖음에 굳어버린 이들만 수천에 달했다. 기사들이 움직여도 현 상황을 해결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터, 이대로라면 신호가 떨어져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다급한 마음에 입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그런데 그 녀석은 이미 안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수천이 모인 공터 중앙에 선 녀석이 갑자기 소매를 걷었다. 주먹을 움켜쥐고 잠시 두 눈을 감던 녀석이 두 눈을 부릅뜬 순간,

번쩍―!!

"...!"

황금빛이 공터를 가득 채웠다.

화려한 빛의 물결이 허공을 따라 빠르게 퍼져나갔다.

빛에 뒤덮인 순간, 등에 업혀 있던 샤르바딘이 막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내쉬기 시작했다. 그녀를 시작으로 빛의 물결이 한데 모인 이들을 살포시 훑고 지나갔다.

순간 사방에서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모두 죽다 살아난 표정이었다.

두려움도 잠시, 사람들의 표정에 안정감이 깃들었다.

사람들은 본능처럼 두 눈을 감고 빛을 받아들였다. 마치 빛에 귀를 기울이는 듯한 모습.

"…이건."

도르네프는 그 광경에 알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 빛은 마치,

소리 없는 찬가 같았다.

61화 골든타임

공터를 채우던 빛이 사그라들고 어둠이 찾아왔다.

주변을 둘러본 나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거친 호흡에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문양이 살짝 그을릴 정도로 무리하게 힘을 쏟아부었다.

'아, 진짜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네.'

단말마의 울부짖음.

내가 기다리던 신호였다.

근데, 울부짖음에 담긴 기운까진 예상치 못했다.

미믹의 것과 비슷하지만, 더욱 짙고 끈적한 기운.

뱀과 마주한 쥐가 공포에 몸이 굳듯, 울부짖음에는 포식자의 기운이 담겨 있었다.

그 기운에 삼켜져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다행히 효과가 있다.'

미믹과 같은 기운이라 주저 없이 움직였고, 예상한 대로 고대 문양의 힘이 기운을 소멸시켰다.

사람들은 하나둘 머리를 흔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정신을 차린 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까지 내비치던 원망 섞인 감정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의 다음 행동이나 말을 기다리는 모습인데, 방금 전 능력으로 확고한 신뢰를 얻은 것 같았다.

"괜찮나?"

"…혹시 포션 있습니까?"

"포션?"

"네. 꼭 필요합니다. 이럴 때 쓰려고 한 힘이 아니라서."

도르네프가 다가오자, 난 바로 포션을 떠올렸다.

수천에 이르는 이들을 빛 안에 담기 위해 문양의 힘을 한계치까지 터트렸더니, 몸에 부담이 커졌다.

키메라 군단을 가로지르려면 문양의 힘은 필수였다. 컨디션 회복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내 말에 도르네프는 잠시 갈등하더니, 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건넸다. 오렌지 색감을 띤 맑은 액체가 든 병이었다.

"샤르바딘이 잘못됐을 때를 대비해서 가져온 것인데, 쓰게."

"뭡니까?"

"요정의 눈물."

"...!"

병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난 눈을 번쩍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병을 잡았는데, 도르네프가 쉽게 놓지 않았다. 내가 힘을 주자, 탄식을 내뱉으며 병을 놨는데 굉장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난 물약을 마시지 않고 품 안에 넣었다. 그 모습에 도르네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뭐 하는 건가?"

"이런 물건을 지금 쓰면 욕먹습니다."

"그럼 언제…."

"어련히 잘 쓰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요정의 눈물까지 준비한 것을 보면 샤르바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자꾸 피앙세, 피앙세 하며 소름 돋게 했는데, 이젠 인정해준다.

'목숨 코인이 하나 더 늘었네.'

요정의 눈물은 최상급 포션보다 효과가 좋은 진귀한 물건이었다.

도르네프 정도의 이종 군주쯤 돼야 일 년에 한두 병 얻을 수 있는 치료제.

몸에 부담이 가는 정도로 복용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손끝에 힘조차 안 들어갈 때 마셔도 늦지 않았다.

뭔가 당했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도르네프.

쿵! 쿵! 쿵!

하지만 그 표정도 곧 동굴 안쪽을 돌아보며 딱딱하게 굳었다.

울부짖음이 멈추더니 이내 바닥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오고 있다.

"뭐가 나타난 거지?"

"그겁니다."

"그것? 설마…."

굳이 뭐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쿵쿵 소리의 간격이 점점 빨라지더니 더욱 가까이 들려왔다.

거대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빠르게 오고 있다. 아니, 정확히 나오려고 하고 있다.

난 길게 숨을 내쉬곤 주먹을 움켜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긴장한 것 같았다.

붉은 혹, 아니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시작됐다.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시험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머물고 있으면 휘말린다.

"골든타임입니다."

어서 튀어야 했다.

"빌어먹을, 빨리도 말하는군."

"시간이 없습니다. 어서!"

"움직인다!!!"

도르네프의 외침.

그 외침을 뒤로한 채 나는 다급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분명 울부짖음이 터졌을 때 키메라들의 움직임이 일시에 멈췄다. 지금은 어떻게 됐을까?

바깥을 나와 펜리에게 물으니, 그녀는 짧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혹시나 했는데, 다시 움직인다."

숲 주변을 둘러본 나는 나직이 신음을 내뱉었다.

조금 전까지 군데군데 채우던 키메라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검은 그림자 떼가 순식간에 숲 전체를 채우며 절벽을 에워쌌다.

완벽히 포위한 채 빠르게 좁혀오는 모습.

"시발, 진짜 너무하네."

"망한 거야? 얼른 말해."

"왜요? 혼자 튀려고요?"

"혼자 튀긴 그렇고, 서넛 정도는 가능해."

나와 도르네프 그리고 샤르바딘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생명의 징표가 있으니 그나마 나까지 신경 써주는 거겠지.

"어쩔 거야?"

"움직여야죠. 골든타임입니다."

"뭐? 도망칠 공간이 어디 있다고?"

키메라 떼가 사나운 기세로 다가오고 있었다.

난 키메라 떼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보랏빛 운무에 집중했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정면 돌파 할 거라고."

"미친놈. 저걸 보고도?"

"저쪽입니다."

난 다가오는 키메라 떼 좌측을 가리켰다. 다가오는 키메라 떼 중 좌측에서 흘러나오는 운무가 가장 옅었다.

운무가 가장 짙은 우측에 도미닉이 자리하고 있다는 의미고, 좌측을 뚫고 가야 도미닉과 마주치지 않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앞장서라고 말 안 할 테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그 힘으로 뚫고 가려고?"

"알면서 물었습니까?"

"머릿수가 달라.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다."

"저도 그게 고민이었는데, 방금 해결됐습니다."

내가 품을 두드리며 자신 있게 말하자, 펜리는 미간을 좁혔다.

동굴에서 백 단위 키메라를 단숨에 무력화시킨 능력이 떠올랐다.

다만 지금은 그때보다 수도 많았고, 지키는 이들도 있었다.

과연 녀석이 버티면서 돌파할 수 있을까?

"확실해?"

"제가 헛소리하는 거 봤습니까?"

단 한 번도 실망하게 한 적 없는 녀석의 확신.

곰방대를 집어넣은 펜리가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내가 도와줄 일은?"

"웬일입니까? 돈도 안 받고 움직이다니."

"의뢰금을 줄 저 난쟁이 새끼가 빠져나가야 돈을 받지. 추가 수당까지 합쳐서 청구할 거니까, 넌 신경 꺼."

"더럽게 고맙네요."

문양을 유지하는 데 집중해야 했기에 펜리에겐 호위를 부탁했다.

입구 쪽을 돌아보니 도르네프가 샤르바딘을 업고 달려오고 있었다. 그 뒤쪽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외침.

"여자들과 아이들은 모두 업혀!"

"이제부터 앞만 보고 달린다!"

"서둘러!"

도르네프를 선두로 드워프들이 여인과 아이들을 업고 빠르게 따라붙었다. 그 뒤로 건장한 이들이 자리했다.

이제 길잡이인 나만 바라보는 상황.

난 고개를 끄덕이곤 키메라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떼거리로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의 좌측.

방향을 잡은 후 숨을 길게 들이켠 난 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길을 이끌자, 내 뒤로 기다란 행렬이 만들어졌다.

이젠 멈춰도 죽고, 잘못돼도 죽는다.

"날 실망시키지 마라."

도르네프의 한마디에는 묵직함이 담겨 있었다.

아마 이번 탈출의 결과에 따라 베네타와 내 관계가 정해질 것이다.

솔직히 요정의 눈물을 끝까지 아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쓰지 않고 버티다, 계획에 실패하면 베네타를 등에 업을 기회를 영원히 잃게 된다.

"분명히 말하지만, 낙오자는 버리고 갑니다."

"이미 다 전달했다."

기호지세(騎虎之勢).

호랑이 등에 탄 상황으로 멈춘 순간 죽는다.

난 사람들에게 경고의 쐐기를 박은 뒤 속도를 점차 올리기 시작했다.

바깥 상황을 모르던 사람들은 시야에 드러난 광경에 기겁했다.

성벽처럼 똘똘 뭉쳐 있는 키메라 군단.

그 아가리 속으로 내가 주저 없이 질주를 시작하자, 뒤쪽에서 당황스런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뭐야!?"

"아아아악…! 괴물!"

"앞사람 뒤통수만 봐! 멈춘 순간 버리고 갈 것이다!"

도르네프의 매서운 외침.

미리 언질을 줬음에도 막상 키메라 군단과 마주하자 사람들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공포는 빠르게 전염이 된다.

삼삼오오 분열되기 전에 내가 나서야 했다.

나는 병따개를 따곤 병을 입에 물었다.

요정의 눈물.

아껴 마셔야 하는데, 남을지 모르겠다.

"시발! 오늘 한번 죽어보자!"

번쩍―!

노을이 지고, 어둠이 찾아온 숲.

그 숲을 가로막은 키메라 떼 사이에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황금빛 물결.

그 빛에 닿자 키메라들의 육체가 검게 그을리기 시작했다. 뭉쳐 있던 키메라들이 비명을 지르며 퍼드득 발광하며 물러났다.

좌측 대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빛을 따라가라!"

내가 요정의 눈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오른손을 번쩍 들자, 사람들의 시선이 빛에 머물렀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괴물들의 비명과 거친 숨소리.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지만, 사람들은 홀린 듯 빛을 따라 발을 미친 듯이 굴렀다.

번쩍―!

전보다 더 눈 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연달아 터지는 빛은 마치 폭죽을 연상케 했다.

포위망이 홍해가 갈라지듯 빠르게 갈라졌다.

도르네프의 등에 업혀 움직이던 샤르바딘은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는 빛이 만들어낸 광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건 마치,

기적(奇蹟) 같다고.

* * *

"...."

도미닉은 굳은 표정으로 한 곳을 응시했다.

어둠을 밀어내는 황금빛 물결.

그 물결 사이로 키메라들이 튕겨 나오고 있었다. 공격을 지시했지만, 키메라들은 마치 막힌 벽을 둔 것처럼 빛 가까이 가지 못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수백 수천의 샘플 연구.

도미닉은 수많은 연구를 행하고 수집하며 키메라의 모든 것을 파악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눈앞에서 펼쳐진 키메라들의 반응은 그조차 처음 보는 것이었다.

빛을 거부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멀리서 보는 것만으로도 강렬한 거부감이 드는 빛이다. 저 황금빛은 확실히 자신에게 위협적이었다.

빛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아레나를 그쪽으로 보내려는 순간이었다.

그어어어어어어어어어―!!!

"...."

코앞에서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도미닉은 빛에서 시선을 떼곤 정면을 응시했다.

좌측에서 키메라의 비명이 시끄럽게 들려왔지만, 반응하는 대신 책을 들어 올리곤 눈앞의 전투에 들어갔다.

쿵―!!!!!!!!

절벽 틈새를 비집고 붉은 무언가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이 부리는 거대 키메라보다 두 배 가까이 큰 엄청난 덩치.

물컹거리는 육체를 지닌 이족 보행의 괴물이었다.

인간의 형태 같은데, 얼굴 부분이 붉은 혹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블러드 골렘?'

고대 시절에 개발된 액체 골렘을 닮은 형태.

하지만,

그어어어어어어어―!

괴물의 넓은 가슴이 쩍 벌어지며 그 안에서 사나운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가슴에 기괴하고 큰 입이 달렸다.

게다가 벌어진 입 속에서 눈에 띄는 것을 발견했다.

거대한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심장.

불타는 심장을 본 순간 도미닉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신동력 원천!'

도미닉은 책을 펼치고 지시를 내렸다.

그 순간, 좌측, 우측에 넓게 퍼져 있는 키메라들이 도미닉을 중심으로 뭉치기 시작했다.

인간들을 포위하던 진형이 삽시간에 무너지며 먹이들이 숲 안으로 도망치는 것을 봤지만 진짜 목표가 눈앞에 있는 상황이라 신경 쓰지 않았다.

작은 개체들이 뭉치고 뭉쳐 거대한 무리를 이뤘다. 붉은 괴물의 덩치보다 수배는 커다란 진형이 완성됐다.

"아레나."

도미닉의 딱딱한 한마디에, 본능적으로 앞서 나가던 작은 소녀가 멈칫하더니 도미닉 곁으로 다가왔다.

아레나가 점점 멀어지자 붉은 괴물이 분노한 듯 괴성을 질러댔다.

붉은 괴물도 아레나를 의식하고 있었다.

익숙하면서 닮은 기운.

먹음직스럽다.

아니, 먹고 싶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뒤로 천천히 물러나며 입술을 혀로 핥았다.

잡아먹은 자가 '진짜'가 되는 전투.

도미닉은 이 순간을 기다렸다.

"먹어 치워라."

명령이 떨어진 순간, 엄청난 키메라 떼가 침을 흘리며 득달같이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아아아아아아아아―!

키에엑!

크아앙!

붉은 괴물이 사납게 포효하며 이빨을 들이밀었다.

붉은 괴물과 키메라들이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은 같았다.

먹이다.

포식 시간이었다.

62화 헤어질 시간이다

"어서! 서둘러요!"

난 다급히 손을 흔들었다. 내가 가리킨 숲 방향으로 사람들이 정신없이 뛰어갔다.

돌파 시에는 가장 선두였지만, 이젠 포지션 변경이 필요한 상황.

도르네프에게 앞서 신호를 보내곤 난 후방으로 뛰었다. 워낙 사람들의 수가 많다 보니 후방까지 도달하는 데만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추적이 온다면 뒤쪽부터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

마음을 졸이고 있는데, 후미에 다다른 순간 키메라 진형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감지했다.

숲을 따라 들어오는 키메라들이 없다.

'됐다!'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은 것을 보니, 키메라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제자리에서 헐떡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닉이 추적을 포기했다는 건, 그의 신경이 온통 붉은 괴물에 집중됐다는 뜻이다.

가장 큰 위기를 넘긴 셈.

행렬 꼬리 끝에 붙어 난 사람들을 독려했다.

안전거리 확보가 우선이었다.

콰앙―! 콰아아앙!

"…이크!"

어느 순간부터 피떡이 된 키메라들이 하늘에서 날아와 처박혔다.

끔찍하게 뭉개진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쏟아지자, 사람들은 기겁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끔찍한 몰골에 구역질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 거리까지 시체가 날아온다고?

아직도 살벌한 전투 현장 안에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무식하게 싸우네.'

붉은 괴물이 얼마나 무식하게 강한지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그어오오오오오―!!

멀찍이 터져 나온 성난 울부짖음에 사람들은 겁을 집어먹고 정신없이 달렸다.

숲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고 긴 행렬.

얼마나 달렸을까.

"커, 커억!"

"헉, 헉...."

일부 사람들이 헐떡이며 쓰러지더니 일어나지 못했다. 그 수가 빠르게 늘어나자, 난 정지 신호를 보내곤 쓰러진 이들을 추스르게 했다.

주저앉아 쉬는 이들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려 있다.

대부분 며칠간 음식은커녕 물도 입에 대지 못한 이들이었다. 여기까지도 드워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젠 안전거리라 판단했기에 난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움직였다.

"주변에 물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펜리에게 묻자, 그녀는 고민 없이 한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전과 달리 나는 여유를 가지고 일행들을 이동시켰다.

잠시 후, 큰 냇가와 마주하자 지쳐 쓰러져 갔던 사람들의 표정에 활기가 돌았다.

"...물!"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사람들은 허겁지겁 냇가로 다가가 얼굴을 처박았다. 그건 드워프들도 마찬가지.

갈증이 해결되자, 일행의 표정에 생기가 차올랐다.

"용케 이런 데를 찾았네요?"

"천 골드 값은 해야지."

그녀에게 수색을 맡긴 건 확실히 잘한 선택이었다.

모두가 냇가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는 사이, 도르네프가 다가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또 신세를 졌어."

샤르바딘을 구해주고, 불가능할 것 같았던 탈출도 성공시켰다.

탈출에 실패했다면 도르네프의 군대는 도미닉과 부딪쳤을 것이고, 많은 피를 흘렸을 것이다. 덕분에 큰 피해를 막았으니, 도르네프 입장에선 내게 큰 빚을 진 셈이었다.

"난쟁이, 상도덕도 없냐? 말 한마디로 퉁치려고?"

"내가 너 같은 줄 아나?"

펜리의 핀잔에 도르네프는 미간을 구기더니 품에서 작은 패를 내게 던졌다. 망치가 음각된 황금패. 그 패를 본 펜리가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장장이의 정원을 열려고?"

"자격이 충분하니까."

"그럼 나는?"

"돈으로 달라며?"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말이 다르지!"

"하나만 해. 이 암코양이년아!"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난 손바닥보다 작은 황금패를 만지작거렸다.

'대장장이의 정원.'

인물들의 대화 속에 익숙히 언급됐던 장소였다.

학살자의 손에 베네타가 무너지면서, 대장장이의 정원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도르네프가 정원을 스스로 불태워 버렸다는 소문도 있었는데, 난 정원이 숨겨진 위치를 알고 있었다.

물론, 안다고 들어갈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도르네프 가(家)의 조상들이 대대로 모아 놓은 장비들이 수집된 장소, 드워프의 허락 없이는 절대 발을 디딜 수 없었다.

내 손에 들어온 황금패는 그 대장장이의 정원에 수집된 장비 하나를 소유할 수 있는 일회용 교환권 같은 것이었다.

나에 대한 베네타의 평판이 신뢰 이상으로 올라갔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건 대박인데.'

탈출 확률을 높이기 위해 도르네프와 함께 한 것인데, 예상치 못했던 선물을 받았다.

안 그래도 쓸만한 장비를 장만하려던 참이었다.

'좋은 장비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올라가니까.'

그 시작이 대장장이의 정원이라면 분에 넘치는 수준이었다.

어떤 장비가 좋으려나?

'행복한 고민이긴 한데, 지금 고민할 때는 아니지.'

난 도르네프에게 감사를 표하곤 황금패를 품에 넣었다. 지금 이렇게 한가히 다리를 뻗고 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진짜 목적은 이곳에 없었으니까.

얼른 계획의 피날레를 찍으러 가야 했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제 일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쯤에서 헤어지자는 소리입니다."

투덜거리던 두 사람은 멈칫하곤 나를 바라봤다. 내 의도가 궁금하다는 표정이다. 하긴 막 위기를 벗어났는데 헤어지자고 하니 궁금하겠지.

"베네타로 움직일 거 아니었어?"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중요한 일? 설마 돌아갈 생각은 아니지?"

펜리가 절벽 쪽을 가리켰다.

멀찍이 숲 한가운데 솟구친 가파른 절벽.

레토니칼스의 시험이 진행 중인 도미닉이 자리한 장소로, 한창 끔찍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는 공간이었다.

펜리와 눈을 마주치자 난 짧게 혀를 차곤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파악하려는 저 엘프의 눈, 완벽히 속일 수가 없으니 확실히 거슬렸다.

"눈치 한번 빠르시네요."

"혼자서는 위험할… 아니지. 네놈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으니 괜찮으려나? 이유가 뭐야?"

"저곳에 모인 존재들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저리가 난 줄 알았는데?"

"제 능력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존재들 아닙니까?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지켜본다면 단서를 얻을 수도 있겠죠."

"단서라… 멀리서 지켜만 보는 거지?"

자신의 일이 아니면 무관심인 그녀가 집요하게 내 행보를 캐물었다. 생명의 징표를 의식하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미친 척 도미닉 앞에서 개지랄 떨면 보호를 해야 하는 입장이니 당연했다.

이런 리스크가 있으니 되도록 징표를 주지 않으려고 한 것이겠지.

"지켜만 볼 겁니다."

"정말이지?"

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지켜만 볼 것이다. 그 후에 대해선 교묘히 말을 돌렸다.

머릿속에 있는 내 계획을 이 여자가 알게 된다면 날 기절시킨 뒤 베네타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

어디로 통통 튈지 모르는 여자라 일단 안심시킨 후 보내야 했다.

'그녀는 소환하면 그만이니까.'

징표의 효력은 일방적이다.

내가 갑이란 소리였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도르네프를 중심으로 베네타로 갈 행렬이 만들어졌다.

그 행렬에서 제외된 건 나뿐이었다.

헤어질 시간이다.

샤르바딘이 떠나기 전, 날 찾아왔다.

"이걸 왜 제게…."

"제 옆에는 이제 도네프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내민 것은 검은 장미로 세공된 흑요석 장신구였다.

다크 로즈(dark rose).

본래라면 펜리 체이서의 상징물이 될 보석이지만, 샤르바딘의 생존으로 그 가치가 바뀌어 버린 물건.

다크 로즈에겐 뛰어난 축복이 걸려 있었다.

이 귀한 것을 왜 내게?

"위험한 곳에 가신다고 들었어요. 도움이 될 거예요."

"이 물건은 도르네프님이 주신 선물 아닙니까?"

"허락받았어요. 도네프가 더 좋은 것으로 만들어준다고 했어요. 그러니 받으세요."

다크 로즈를 거부하면 미친놈이지.

다만, 보는 눈들이 워낙 많아서 냉큼 가져오진 못하고 몇 번 생색낸 후에 가슴에 브로치처럼 달았다.

황금패에 이어 다크 로즈까지 얻었다.

불운 덩어리에게 이런 날도 오나?

갑자기 불안한데?

"꼭 베네타에 방문해 주세요."

"조만간 방문하겠습니다."

"꼭이에요! 꼭!"

그녀는 몇 번이고 신신당부한 뒤 돌아갔다.

제단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던 것이 그녀에게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이었다.

아낌없이 퍼주는 미모의 엘프라니.

좋은 호ㄱ… 아니 좋은 인연을 얻었다.

"집으로 돌아간다!"

도르네프의 힘찬 외침.

그 외침에 드워프들이 힘찬 함성으로 답을 했다. 그 뒤를 따르던 이들도 도르네프의 외침에 많은 감정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집으로 돌아간다.

그제야 살아남았다는 것을 피부로 느낀 것 같았다.

비탄의 감정은 안도감으로.

일그러진 얼굴에는 옅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 동질감에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위로를 보내던 사람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한 사내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떠나는 샤르바딘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앳된 청년.

길에서 마주한다면 그냥 지나칠 평범한 분위기를 풍겼지만, 사람들의 눈동자에 담긴 청년은 가슴 속에 큰 존재로 다가왔다.

이름은 알지 못했다.

아니, 물어봤지만 그는 미소로 답할 뿐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름은 모른다.

하지만, 사내가 이뤄낸 기적만큼은 뇌리에 영원토록 각인되었다.

황금빛의 기적.

그리고 구원.

'기적을 부르는 사내.'

'구원의 성자.'

베네타로 돌아가는 길.

생존자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사내의 존재감이 퍼지고 있었다.

* * *

"많이도 살아남았네."

숲으로 사라지는 6천의 인파를 배웅하며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본래 스토리 상 악당 도미닉에게 죽음이 예정됐던 이들이었다. 저들 하나하나가 살아남아 세상에 영향을 끼친다면 기존 스토리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당장 샤르바딘의 생존만 해도 많은 것들이 바뀌었으니까.'

미래 사건을 아는 건 내게 엄청난 힘이 된다.

그 미래가 내 선택으로 인해 실시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래서 후회가 되냐고?

"아니, 전혀."

난 등을 돌려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암살자 신분으로 카멜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세상은 더는 내가 알던 세상이 아니었다.

스토리는 이미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고, 난 그 사이에서 이용할 것을 추슬러 내 힘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 힘을 이용해 세상을 손에 넣거나, 군림하거나 그런 헛된 망상 따윈 애초에 없었다.

'살아남는 것.'

그게 내 목표이자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백 개의 심장'도 마찬가지.

이 메인 이벤트도 학살자를 위한 이벤트로 놔둘 생각 없었다.

'날 위한 이벤트로 만들어주마.'

강해질수록 선택의 폭도 넓어질 것이다.

그렇다 보면 차차 다음 목표도 생각나겠지.

가방을 챙긴 후 장비를 정비했다.

단검 세 자루와 석궁 하나.

도미닉을 상대하기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손에 닿을 수 있을 만큼 도미닉 숨통까지 다가갔지.'

호흡을 길게 들이쉰 뒤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움직일 시간이다.

* * *

그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은 압도적인 덩치를 자랑했다.

힘 또한 마찬가지.

팔다리를 붕붕붕 휘둘러 키메라들을 벌레처럼 짓뭉갰고, 여러 마리를 한 번에 움켜쥐고 허공에 매섭게 내던지기도 했다.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질 때면 허공에 피가 튀고 수많은 키메라가 잡아먹혔다.

일방적인 살육.

인간이라면 그 압도적인 위용에 움츠리며 도망갔을 것이다.

하지만 키메라들은 달랐다.

이지를 상실한 부정한 존재들.

그들은 지시만 따르는 인형에 불과했다.

키에에엑!

쿠어억!

한 마리가 죽으면 두 마리가.

두 마리가 죽으면 네 마리가.

네 마리가 죽으면 그보다 더 압도적인 머릿수가 붉은 괴물에게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마치 벌레 떼 같다.

콰작―! 콰자자작!

그리고 키메라들은 그 작은 벌레 떼처럼 찢기고 터져나갔다. 수많은 혈흔에 주변에 피바람이 불어닥쳤다. 그 악취에 코를 틀어막으며 난 나직이 중얼거렸다.

"시발, 미쳤네."

눈앞의 전투를 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비위가 상할 정도로 끔찍한 전투.

광기가 깃든 사투였다.

63화 주술 인형, 반다이크

우지끈―!

"...."

키메라 한 마리가 날아와 딛고 서 있는 나무 기둥에 처박혔다.

나무가 부스스 내려앉자, 주변 나무 쪽으로 발을 박찼다. 높은 나뭇가지에 안착한 뒤 다시 전투를 내려다봤다.

"하, 징글징글하네."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풀 한 포기 없는 마른 대지는 키메라들로 득실득실 차 있었다.

연구실 입구인 절벽 틈새와 다소 떨어진 드넓은 공터.

붉은 괴물은 그 중심에서 포위당한 채 광기에 찬 육탄전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죽이고 또 죽여도 키메라는 줄어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많아졌다.

"도대체 몇 마리나 데려온 거야?"

얼추 7~8천 정도로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전투 중에도 새로운 키메라 떼가 끝도 없이 나타났다.

라웁 숲 전역에 퍼트린 키메라들이 뒤늦게 도착해 합류한 것인데, 그 수가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거대 키메라도 스무 마리 이상 눈에 띄었다.

'견제했는데도 이 정도라고?'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미닉의 전력을 살펴보니, 세운 계획이 이 자리까지 도달한 건 엄청난 행운이 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만약 도미닉의 군단이 하루만 더 일찍 도착해 연구실 전력과 합류했더라면?

'도르네프도 나도 위험했다.'

아니 도르네프는 몰라도, 난 무조건 죽었다. 지금쯤 키메라 배 속에서 소화되고 있을지도.

단 하루 차이로 목숨을 부지했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전투를 지켜봤다.

"단시간에 끝날 것 같지 않네."

전투의 흐름은 붉은 괴물의 일방적인 학살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건 전초전에 불과했다.

달려드는 키메라는 소형뿐이었고, 거대 키메라는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다.

딱 봐도 괴물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키메라들을 제물로 던지는 모습인데, 도미닉과 아레나가 움직여야 진짜 승부가 결정될 것이다.

'이 근처에 숨어서 간을 보고 있겠지.'

두 사람의 위치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주변에 두 사람이 자리하고 있을 걸 생각하면 심장이 쫄리긴 한데, 관심사가 붉은 괴물에 집중되고 있는 이상, 내게 큰 위협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다.

도미닉이 반응하기 전까진 괜찮다는 뜻.

그렇다는 건,

"쥐새끼부터 찾아야겠지?"

펜리가 헤어지기 전에 내게 귀띔해준 내용이 있었다.

[인간들의 군대는 없었지만, 악취 나는 쥐새끼 한 마리가 숨어 있더라고.]

[악취 나는 쥐새끼?]

[쓸데없이 나 부르지 말라고 알려주는 거야.]

[그걸 왜 이제야 알려주는 겁니까?]

[쥐새끼가 우리 쪽엔 관심이 없는 것 같았거든.]

연구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고, 우리에게 관심이 없는 존재.

'그리고 부정한 기운을 품은 자.'

엘프에게 '악취'란 부정한 기운을 의미했다.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다는 건데, 그 힌트까지 주어지자 그 악취 나는 쥐새끼가 누구의 지시로 움직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학살자가 보낸 놈이겠지.'

학살자는 회귀자인 만큼 도미닉의 정보에 빠삭했다. 도미닉의 연구 일지를 확보하기 위해 쥐새끼를 보낸 것이 분명했다.

연구 일지는 내 손에 있으니 이미 실패한 임무지만, 난 쥐새끼를 먼저 사냥해야 했다.

'눈앞의 상황이 카멜의 귀에 들어가면 곤란하거든.'

난 웅크린 채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콰앙―! 쾅― 콰아앙―!

야구공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와 바위, 바닥에 매섭게 처박히며 뭉개지는 키메라들.

마치 포탄 같아서 나도 여러 번 회피하며 움직인 상황이었다.

과연 나만 그럴까?

나뭇잎 사이에서 한동안 죽은 듯이 주변을 눈여겨봤다.

잠시 후, 쿠쿵―! 소리가 터지며 키메라들이 건너편 넝쿨 더미를 휩쓸자, 난 두 눈을 반짝였다.

검은 그림자가 순간 솟구쳤다 사라졌다.

'찾았다.'

단검을 슬며시 움켜쥔 뒤 크룩스의 걸음걸이를 이용해 나무 위를 타고 걸었다.

나뭇가지 사이 밑으로 꿈틀대는 로브 자락이 시야에 잡혔다.

다시 넝쿨로 조용히 숨어든 녀석.

짙은 녹색 로브로 숲을 보호색 삼아 주변을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절벽 틈새 쪽으로 향하는 듯 보였다.

기회를 봐서 연구실 쪽으로 진입하려는 모습.

'움직이기 전에 정리해야겠네.'

난 쥐새끼의 바로 머리 위 나뭇가지에 기대어 잠시 대기했다. 은밀히 접근을 시도했는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상대는 흑주술사일 확률이 높았다.

암습에 취약하단 뜻이었고, 난 먹잇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이빨을 숨긴 채 기회를 기다렸다.

잠시 후,

그어어어어어어―!

"...!"

붉은 괴물이 키메라들을 움켜잡고 몽둥이처럼 휘두르더니 이리저리 던지기 시작했다. 키메라로 키메라를 공격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수백의 키메라들이 일시에 튕겨 나와 숲으로 떨어졌다.

재차 포탄처럼 날아오는 키메라들.

키메라들이 넝쿨 쪽으로 굴러떨어지자, 쥐새끼가 움직였다.

솟구친 검은 그림자.

'지금!'

난 단검을 잡고 밑으로 몸을 던졌다.

"잡았다."

내 목소리에 쥐새끼가 반응을 보였다.

허공에 뜬 놈이 고개를 쳐든 순간,

푹―!

인챈트를 덧댄 날카로운 단검이 놈의 이마를 깊숙이 찔렀다. 정확히 뇌를 관통한 공격이었다.

완벽한 암습.

"됐...!"

성공을 확신하며 쾌재를 외쳤는데, 불현듯 등골이 서늘해졌다.

단검이 안 뽑힌다?

난 주저 없이 단검을 놓고 몸을 비틀었다.

놈의 로브가 거칠게 펄럭였다. 지독한 바람과 함께 느껴지는 섬뜩한 살기.

난 본능적으로 왼팔을 들어 머리를 보호했다.

콰아아앙―!

"…커억!"

머릿속이 진탕되는 충격이다.

해머로 처맞은 것 같았다.

그대로 바닥에 처박혀 몇 바퀴를 굴렀다.

뇌진탕이 이런 느낌인가.

귀에서 삐― 소리가 울리며 어질어질했다. 다급히 고개를 털고 일어나려는데, 휘청이며 다시 쓰러졌다.

'미친, 부러졌다….'

왼쪽 손목을 들어 올렸는데 축 늘어진 채 힘이 안 들어갔다.

손목에는 칼이 준 팔찌가 있었다.

폭탄 벌레 붐을 봉인시키는 마법 아이템 겸 가드로도 사용할 수 있는 방어구였다.

검도 튕겨내는 팔찌였는데, 손목이 충격으로 부러진 것이다.

'시발, 인간 맞아?'

늘어진 왼팔을 놔두고 오른손으로 다급히 석궁을 집어 들었다.

머리가 뚫리고도 움직인다.

카멜, 이 새끼가 연구 일지의 가치가 가치인 만큼 진짜 괴물 새끼를 보냈다.

다급히 거리를 벌리고 석궁을 겨누었는데, 쥐새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놈이 일어나자 내 고개도 따라 올라갔다.

"쥐새끼치곤... 더럽게 크네?"

크다.

웅크리고 있을 땐 몰랐는데, 서서 보니 덩치가 보통 사람보다 머리 서너 개 정도 더 컸다.

2미터는 가볍게 넘을 것 같은데?

저 덩치가 주술사라고?

육체 하드웨어가 딱 봐도 무식한 기사잖아.

짧게 혀를 차며 욕설을 내뱉고 있는데, 놈이 두 팔을 벌린 채 매섭게 돌격해왔다.

저 손에 잡힌 순간 뒈진다.

민첩하게 뒤로 스텝을 밟으며 방아쇠를 당겼다. 이 석궁은 크룩스 단장의 것으로 한 번 장전하면 세 발의 볼트를 속사할 수 있었다.

투투퉁―!

세 발의 볼트에는 관통을 극대화한 인챈트가 실려 있었다. 당연히 놈의 하체를 깔끔하게 관통했는데, 짓쳐 오는 속도가 전혀 줄지 않았다.

노리고 쏜 것인데, 안 먹힌다.

"빌어먹을! 대체 뭐 하는 새끼...!"

다급히 몸을 비틀어 주먹을 피했다.

콰아아앙―!

천으로 감긴 거대한 주먹이 바닥을 내리꽂자, 대지가 푹 파이며 흙먼지가 튀어 올랐다.

맞았으면 찰흙처럼 짓뭉개졌을 거다.

쿵쾅쿵쾅하는 심장을 부여잡고 놈의 시야 앞에 문양을 터트렸다.

번쩍―!

기습적인 눈 부심을 이용한 것인데, 예상치 못한 현상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빛에 노출된 놈의 천이 삽시간에 검게 물들더니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잠시 멈칫했을 뿐 주먹이 재차 날아오자 냉큼 머리를 숙이고 데굴데굴 굴렀다. 주먹에 맞은 나무가 뿌리째 뽑혀 나갔다.

시발, 주먹 한 방 한 방이 무슨 필살기도 아니고.

'이 새끼 정체가 뭐야?!'

이를 악다문 나는 바닥을 밟고 튀어 오르며 단검을 투척했다. 이번엔 몸을 노리지 않았다.

내가 노린 건 펄럭이는 로브 자락.

단검이 로브를 휘감고 통과한 순간, 로브 자락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리고 드러난 눈앞의 상대.

어둠 속에 비친 쥐새끼의 모습에 난 헛웃음을 흘렸다.

"...주술 인형, 반다이크?"

처음 맞닥뜨린 상대였지만, 특징이 확실해서 마주한 순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전신을 두른 새하얀 천.

온몸 여기저기 새겨진 붉은 인주 자국.

그리고 날 노려보는 시뻘건 눈동자까지.

주술사 렌구아가 부리는 주술 인형이 분명했다. 즉, 렌구아 그 늙은이가 저 썩은 눈깔로 지금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뜻도 됐다.

렌구아는 날 고문한 늙은이라 내 얼굴을 알고 있었다.

조심스레 입가를 매만지며 얼굴을 두른 천을 살짝 추켜올렸다.

기습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 천으로 얼굴을 가렸는데 안 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몸을 더 사려야 했다.

주술 인형이 미친 멧돼지처럼 돌진해오자, 거리를 후다닥 벌리며 문양을 터트렸다.

역시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움찔―

천이 검게 물들 때는 잠시 멈칫하던 인형이 색이 복구되자 재차 돌격해왔다. 문양에 분명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몸에 두른 천 조각이 문양의 힘을 상쇄시키는 것 같았다.

'렌구아 정도의 짬밥이면 능력을 막아내는 수단도 있겠지.'

반다이크는 흑주술로 움직이는 주술 인형이다.

형체가 없으니 물리력도 안 먹힌다.

처음부터 공략 방법이 틀려먹었다.

'팔이 완전히 맛이 갔네.'

한 손으로 장전은 무리라 석궁을 버리고 마지막 남은 단검을 움켜쥐었다. 고민한 것도 잠시, 단검에 새하얀 백광이 물들기 시작했다.

내가 인챈트 할 수 있는 속성은 두 가지다.

인챈트의 기본 속성인 관통.

그리고 최근에 얻게 된 고유 속성, 성력(聖力).

무질서를 바로잡는 힘.

성력은 정화(淨化)의 성격을 띤 고대 문양의 성질과 닮았다. 아니, 경험해 볼수록 결이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인의 고유 속성에 따라 각인된 문양의 능력이 달라진다면 세이렌의 비명이 다른 능력으로 변한 것도 설명이 되지.'

성력은 흑주술에게도 상성이 좋았다.

저 빌어먹을 천이 간접적으로 빛을 상쇄한다면 강제로 쑤셔 넣으면 된다.

반다이크가 자세를 낮추고 돌격해온 순간, 난 냅다 단검을 투척했다.

애초에 물리력을 보고 던진 것이 아니었다.

단검이 반다이크의 어깨에 푹― 박혀 들었다. 단검에 담긴 백광이 반다이크의 몸에 스르륵 스며들었다.

그리고,

크웨웨웨웨웩―!

반다이크에게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천이 검게 그을리더니 놈이 한쪽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먹힌다!

난 이를 악물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세 걸음을 앞뒀을 때, 놈이 고개를 퍼뜩 쳐들곤 손을 빠르게 뻗어왔다.

그 손을 피해 허공으로 날아오른 나는 냅다 놈의 이마에 박힌 단검을 움켜쥐었다.

"뒈져―!!"

번쩍―!

성력을 단검에 쏟아부었다.

괴성이 터지며 반다이크의 이마가 눈 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반다이크를 두른 천이 검게 그을리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반다이크의 얼굴이 드러났는데, 소름 끼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천이 재 가루처럼 흩어지자, 대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흙먼지만 휑하니 나뒹굴었다.

주술 인형을 소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크오오오오―!

"…진짜 어질어질하다."

바닥에 대(大)자로 뻗어 쉬고 싶었는데, 주변 상황이 워낙 개 같아서 편히 쉴 수도 없었다.

비틀거리듯 일어나 장비들을 챙기고 가장 큰 나무 뒤로 피신했다. 가방에서 포션을 꺼내 응급처치에 들어갔다.

포션에 닿은 손목이 시큰거렸다.

통증이 찐하게 올라오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렌구아, 이 망할 늙은이는 멀쩡하겠지?"

반다이크로 인해 내 존재가 렌구아에게 알려졌다. 그 말은 즉, 학살자도 곧 내 존재를 알게 된다는 뜻이고, 이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얼굴은 못 봤을 테지만, 성력이 알려졌다.

성력은 혼돈과 파괴, 무질서에 천적인 능력.

그 삼박자를 모두 갖춘 주술사들의 둥지에겐 무척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될 것이다.

설마, 더미로 뿌린 '그'까지 생각이 닿진 않겠지?

'고유 능력을 하루빨리 확인해야 해.'

펜리가 그림자 속성을 갖고 그림자 주술을 부리듯, 나 또한 성력으로 고유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발동 조건이 워낙 까다로워서 확인이 힘들었다.

도미닉이라면 그 조건에 부합할 테니, 이참에 고유 능력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제대로 된 전투가 벌어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에 몸을 추스르며 시간을 보냈다.

주변이 완연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광기는 여전했고, 숲이 뱉어내는 피비린내는 점점 짙어졌다.

이윽고, 그 광기가 절정으로 치달았을 때,

크어어어어어어어어어―!

붉은 괴물의 또 다른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소리가 전과 달랐다.

당황과 분노가 담겨 있다.

콰아앙―!

"...!"

큰 폭발음에 고개를 돌리니, 붉은 괴물이 바닥에 처박힌 채 쭉 밀려나는 광경이 펼쳐졌다.

처음으로 괴물이 당한 모습이 눈에 담겼다.

난 자리를 털고 빠르게 움직였다.

도미닉이 움직였다.

64화 생명의 징표

샛노란 달빛 아래, 전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달빛이 강한 날이라 시야 확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콰아앙!

크어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붉은 괴물의 머리가 쾅! 쾅! 터지더니 연신 휘청이며 밀려났다.

사체로 쌓아 올린 무덤 위로 가볍게 착지한 작은 존재.

아니, 작은 괴물.

아레나 후아튼이 공격을 시작했다.

주먹을 움켜쥔 아레나의 육신은 보랏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 주변에 도미닉이 책을 허공에 띄운 채 그녀에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는데, 일종의 강화 버프처럼 보였다.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거대 키메라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거대 키메라들은 붉은 괴물의 팔다리를 붙들고 늘어졌다. 십수 마리가 집요하게 들러붙으니 붉은 괴물의 덩치가 압도적이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봉쇄된 틈을 이용해 아레나가 괴물의 머리 위로 올라가 깍지를 끼고 매섭게 내리찍었다.

쾅! 쾅! 쾅―!

"...!"

폭탄이 터진 것 같았다.

붉은 괴물은 움찔움찔 몸을 떨며 울부짖었다.

머리를 이루던 붉은 혹은 움푹 파였고, 일부가 터지며 시뻘건 피를 쏟아냈다.

'공격이 먹힌다?'

난 눈가를 가늘게 뜬 채 붉은 괴물을 자세히 살폈다.

불사자의 심장 때문인지 붉은 괴물의 상처는 빠르게 아물었지만, 상처투성이가 된 흔적은 남아 있었다. 키메라 떼와 사투를 빚으며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

'나와 펜리, 도르네프의 공격에는 작은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어.'

그런데 키메라들의 공격, 특히 아레나의 공격에는 큰 대미지를 받은 모습이었다. 이유를 고민해보니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저들이 지닌 한 가지 공통점.

'마석?'

마석을 동력 원천으로 움직이는 존재들.

마석의 기운만이 괴물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라면?

전투를 지켜보면서 가설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오직 키메라만이 저 붉은 괴물을 사냥할 수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깨닫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만약 괴물이 숲을 벗어나 바깥으로 나간다면 누가 막지?'

펜리나 도르네프 같은 강자도 괴물을 막아낼 수 없으니, 토바른 지역은 쑥대밭이 될 것이다.

눈앞의 재앙 덩어리를 몰라봤다니,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번만큼은 스토리대로 흘러가야 해.'

설마 도미닉을 응원할 날이 올지 몰랐다.

물론,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 전투는 무조건 도미닉이 이긴다.

긴장할 시기는 그 이후였다.

붉은 괴물이 쓰러진 직후 말이다.

카아아악―!!

도미닉의 손짓 한 번에 키메라들이 반응을 보였다.

지휘를 받는 키메라들은 마치 잘 훈련된 병사들 같았다.

거대 키메라를 중심으로 키메라 무리가 연계를 이루며 붉은 괴물을 강하게 압박해 나갔다. 그 틈으로 아레나가 치명타를 입혔는데, 그때마다 붉은 괴물은 휘청이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만, 승부는 쉽사리 결착 나지 않았다.

미믹의 맷집을 보면 알듯이 불사자의 심장을 지닌 존재는 상처 회복이 빠르고 지치지 않았다.

붉은 괴물은 피투성이가 된 채 발광하며 도미닉에게 달려들었다. 키메라 떼를 부리는 존재를 눈치챈 듯 보였다.

키메라들은 온몸을 내던지며 도미닉을 보호했고, 아레나는 괴물을 죽이기 위해 움직였다.

오직 살의만 담긴 지독한 전투.

대지가 묽은 피로 샘물을 이루고, 숲은 저주받은 땅처럼 파괴되었다.

"후―"

그 광경에 잠시 압도되어 멍을 때리고 있던 나는 호흡을 고르곤 움직일 준비를 했다.

밤새 이어진 처절하고 기나긴 사투.

끝이 보이지 않던 전투에 변화가 생겼다.

붉은 괴물의 움직임이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띄게 둔해졌다.

늘어나는 상처에 비해 회복이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역시 다굴에는 장사 없는 건가?

조심스레 숲을 끼고 전장 주변을 돌았다.

넝쿨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미니 붉은 괴물을 한눈에 담을 정도까지 다다랐다.

도미닉의 옆모습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

잠시 거리를 재던 나는 고개를 가로젓고는 엎드렸다. 엉망이 된 넝쿨을 헤집고 전장 중심으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도미닉과의 거리는 대략 300미터 정도.

머릿속에 그린 계획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내가 노리는 건 완벽한 기습이다.

이 거리에선 힘들다.

더 접근해야 했다.

난 엄폐물을 찾아 피로 흥건한 바닥을 기기 시작했다.

"우욱!"

지독한 피비린내만 참는다면 엄폐물들은 차고 넘쳤다.

대지를 가득 메운 키메라들의 사체.

크고 작은 언덕처럼 너부러진 처참한 사체들 사이를 엉금엉금 기어갔다.

철퍽― 철퍽―

'…미치겠네.'

온몸이 삽시간에 붉게 물들고, 닿은 곳마다 누구 것인지 모르는 살점이 짓이겨졌다.

미끌미끌하고 질척거리는 감촉.

지옥의 풍경을 떠올리라면 눈앞의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 같았다.

250미터.

200미터.

그리고 150미터.

이때부턴 더는 나아가지 않고 몸을 웅크린 채 상황을 살폈다.

크아아앙―!

크오오오!

"귀 떨어지겠네."

귀를 틀어막고 사체 사이로 몸을 파묻었다.

이 이상 접근하면 전투에 휩쓸릴 위험이 있었다.

반다이크에게 당한 왼쪽 손목을 천천히 돌려봤다. 아려오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보니 부러진 상처는 치료된 듯 보였다.

'벌레가 살짝 걱정되긴 한데.'

충격에 혹여나 터져버릴까 봐 걱정이 됐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몸속에 넣고 다니는 불안감이 이런 건가?

이 벌레 새끼도 얼른 치워버려야 하는데.

투덜거리며 가방을 뒤졌는데 포션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 전투로 다 써버린 것이다.

병이 있었는데 꺼내 보니 텅 비어 있었다.

빈 병을 보며 요정의 눈물을 떠올렸다.

좀 남겨뒀으면 진짜 든든했을 텐데, 수천 명의 생사가 걸린 일이라 아낄 상황이 아니었다.

'이따가 포션 셔틀(?)을 부르면 되니까.'

가방에서 단검과 석궁을 꺼내 정비한 후 도미닉에게 집중했다.

안경을 고쳐 쓰는 옆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점잖아 보이는 학자풍의 외관, 영락없이 학교 선생님의 이미지인데 이따금 미소 짓는 표정을 볼 때마다 섬뜩함이 올라왔다.

붉은 괴물을 향한 눈동자에 짙은 광기가 느껴졌다.

그 앞에 둥둥 떠오른 큼지막한 책.

그 책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난 단검을 양손에 움켜쥐고 타이밍을 쟀다.

하늘을 바라보니 달빛이 옅어지고 숲이 만든 지평선으로 붉은 색감이 서서히 올라왔다.

밤샘 전투의 끝을 알리듯 동이 트기 시작한다.

시뻘건 태양이 피로 물든 전장을 비췄다.

그 눈 부심 때문일까.

"...!"

쿵―!

주변을 매섭게 휩쓸던 붉은 괴물이 발을 헛디디며 나자빠졌다.

곧장 일어나려고 했지만 허우적거릴 뿐 계속 손발을 헛디디며 엎어졌다. 바닥에 쌓인 사체들과 흥건한 핏물이 이를 방해하는 것 같았다.

도미닉은 눈앞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키에에엑!

카아아악!!!!

키메라들이 개미 떼처럼 괴물의 몸에 올라타기 시작했다.

키메라들이 노리는 건 오직 하나.

불타오르는 심장이었다.

거대, 소형 가릴 것 없이 모든 키메라가 가슴 쪽을 향해 이빨을 들이밀자, 붉은 괴물의 가슴에 달린 거대한 입이 쩍 벌어지며 방어에 나섰다.

콰작― 콰자작―!

거대한 입이 아작아작 씹힐 때마다 키메라들이 허공에서 찢겨나갔다.

도미닉은 멈추지 않았다.

키메라들을 계속해서 입으로 쏟아부었다.

삼키고 뱉고, 삼키고 뱉고.

벌어진 입으로 백 마리, 천 마리가 미친 듯이 파고들었다.

그우우우우―!

가슴에 달린 입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안에 든 키메라가 너무 많아 뱉어내지도, 씹지도 못했다. 입마저 무력화됐을 때, 아레나가 움직였다.

푹―!

"...!"

입 안에 뭉쳐진 키메라들 속으로 아레나가 비집고 들어갔다.

잠시 후, 붉은 괴물이 고통으로 몸부림쳤다.

거대한 입이 어느 순간 벌어지기 시작했고, 속에 든 키메라들이 바닥으로 우수수 쏟아졌다. 그럼에도 입은 더욱 크게 벌어졌다. 아니 찢어졌다.

결국,

크아아악―!

입이 걸레짝처럼 찢어져 버렸다.

그 안에서 피를 뒤집어쓴 작은 소녀가 심장을 움켜쥔 채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보석을 닮은 아름다운 심장.

그 심장과 연결된 핏줄을 툭툭 뜯어내자,

쿠웅―

붉은 괴물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심장을 빼앗기자, 붉은 괴물의 피부가 빠르게 부패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몸체는 순식간에 진물이 되어 녹아서 없어졌다.

아레나는 높다란 시체 언덕 꼭대기에서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에 떠오른 태양 아래, 심장을 움켜쥐고 있는 어린 소녀.

기괴하면서 섬뜩한 장면이었다.

그 모습에 도미닉의 입가가 쭉 찢어졌다.

드디어 손에 넣었다!

도미닉이 책을 덮고 언덕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우우우웅―!

"...!"

대기가 짙게 떨리기 시작했다.

도미닉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저 높이 심장이 울고 있다.

동시에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핏빛.

그 빛이 아레나를 붉게 물들이자, 그녀가 심장을 삼키기 위해 천천히 입을 벌렸다.

도미닉은 다급히 책을 펼쳐 들었다.

"아, 안 돼!"

처음으로 도미닉의 목소리에 당황이 깃들었다.

도미닉이 주문을 외우자, 아레나의 몸이 핏빛과 보랏빛으로 물들며 물감처럼 섞이다가 흩어지길 반복했다. 두 빛이 서로를 공격하며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

심장을 입으로 가져간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잠시 후, 책과 씨름하던 도미닉이 입술을 깨물곤 외쳤다.

"버려!"

아레나는 움찔하며 심장을 놓쳤다.

심장은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 두둥 떠올랐다. 그 모습을 뒤로한 채 아레나는 황급히 도미닉 곁으로 돌아왔다.

도미닉은 당혹스런 표정으로 허공에 뜬 심장을 살폈다.

조금 전 아레나를 조종하려고 했던 것처럼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주변에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빛은 자신이 사용한 보랏빛과 비슷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아니, 애초에 책의 능력은 미믹에게 얻은 것이니, 그 본질의 힘은 저 심장의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설마."

움찔움찔―

핏빛에 노출된 키메라들이 멈칫멈칫하며 도미닉의 지시를 거부했다. 잠시 후 하나둘 도미닉을 향해 몸을 돌리곤 이빨을 들이밀기 시작했다.

통제권 일부를 심장에게 빼앗겼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책을 움켜쥔 도미닉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악!

크웨웨웨!

키메라 군단이 절반으로 쪼개졌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들이밀며 공격을 시작했다.

거대 키메라들도 마찬가지.

통제권을 사이에 둔 도미닉과 심장 사이에 혼돈의 전투가 시작됐다.

"왔다."

그 모습에 난 고개를 끄덕이곤 주변을 살폈다.

키메라 군단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혼란이 극에 달했던 시기.

'그리고 도미닉을 제거할 유일한 타이밍.'

타이밍이 만들어지자, 난 눈을 살며시 감고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시원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마에 주술 문양이 떠오르더니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펜리 체이서가 남긴 맹약의 낙인.

생명의 징표.

난 주저 없이 징표의 힘을 발현시키고 펜리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자신을 떠올리며 이름을 부르라고 했지?

어떤 이미지가 나으려나?

이 여자의 이미지라면... 이거밖에 없지.

"펜리 체이서."

이름을 읊조린 순간, 새벽 햇살에 비춘 내 그림자가 꿀렁이더니 검은 신형을 토해냈다.

나타난 검은 신형을 내려다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기가 막히게 딱 맞네."

내가 떠올렸던 그녀의 이미지.

시시덕거리며 황금을 세고 있는 펜리가 보였다.

65화 도미닉 후아튼

"…응?"

황금에 취해 있던 펜리.

그런 그녀가 두 눈을 끔뻑이곤 주변을 둘러봤다. 눈앞에 수북이 쌓여 있던 금화가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곁에 있던 도르네프는 어디 가고, 핏덩어리가 된 사체들만 눈에 밟혔다.

닳고 닳은 그녀조차 거부감이 드는 지옥 같은 풍경.

그러다 나를 발견하곤 미간을 좁혔는데, 온통 피로 물든 나를 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확인차 물었다.

"아니지?"

"맞을 겁니다."

"실수로 날 부른 거라면…."

"그럴 리가요."

"전혀 죽을 것처럼 안 보이는데?"

"죽은 다음에는 부를 수가 없잖아요. 자, 받아요."

난 그녀에게 스크롤 하나를 던졌다.

흰나비 떼가 소환되는 환상 스크롤.

베네타의 마법 상점에서 구매한 것으로 아레나와 마주쳤을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이 스크롤을 펜리에게 건넨 이유는 하나였다. 그녀의 상대가 아레나일 확률이 99.9%였으니까.

아레나는 흰나비에 지독한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었다. 괴물이 된 상태에서도 경직된 반응을 보일 정도로.

펜리라면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설명을 들은 그녀의 눈썹이 와락 구겨졌다. 왜 이딴 걸 주냐는 무언의 눈빛.

"위험하면 사용하시라고요."

"뭔 개소리야?"

"곧 알게 될 겁니다."

"...흠."

나를 잠시 올려다본 펜리가 천천히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자, 난 그녀와 거리를 빠르게 벌렸다.

저 포즈가 누군가를 패려고 할 때의 동작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눈가를 가늘게 뜨며 물었다.

"어디 가?"

"그 스크롤 진짜 최악의 순간에만 쓰세요."

"헛소리 그만하고 이리 오지?"

"아, 포션 있으면 빨리 던져주세요."

"뭐?"

"저 죽기 전에요. 그럼!"

내가 후다닥 앞으로 달려 나가자, 그녀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 머리채를 확 잡으려고 했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앞! 앞! 앞이요!"

"이게 진짜 죽으려고...."

살짝 비켜선 내 몸뚱이 너머의 장면이 그녀의 눈동자에 담겼다.

땡그랑―

순간 손에 한가득 쥐어진 금화들이 우수수 굴러떨어졌다. 소중한 금화를 잠시 잊을 정도로 그녀에겐 당혹스런 장면이었다.

키에에에에엑―!

쿠아아악!

펜리는 두 눈을 몇 차례 깜빡이곤 현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다.

"전부 미쳐 날뛰고 있네…?"

이 표현이 딱 맞았다.

전방의 한가운데,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서로를 향해 물어뜯고, 던지고, 뒤엉켜 굴러다니고 있었다.

혼돈 속의 전장.

휘말린 순간 갈가리 찢겨 죽을 것 같은 지옥의 구렁텅이 같았다.

문제는 그 구렁텅이 속으로 저 빌어먹을 녀석이 몸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펜리는 다급히 손바닥을 살폈다.

"이...."

손바닥에 징표의 문양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맹약이 발동됐다는 신호.

"이 미친 새끼가…."

펜리는 정신을 퍼뜩 차리곤 아서 뒤를 쫓기 시작했다.

생명의 징표를 사용한 녀석의 표정이 너무 평온하기도 했고, 솔직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일생일대 가장 많은 황금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꿈에 부푼 것이 조금 전이었다.

그 타이밍에 자신을 소환하고 이렇게 엿을 먹인다고?

징표가 발동된 이상, 징표자가 눈앞에서 죽으면 엄청난 페널티를 받게 된다.

이젠 저 뒤통수가 원수처럼 보였다. 하지만 펜리는 살심보단 실리를 따졌다.

"빌어먹을 새끼, 받아!"

펜리는 품에서 병을 꺼내 힘껏 던졌다. 오직 그녀만 사용하는 특제 포션. 단검을 던져 등에 꽂고 싶었지만, 저놈은 이 자리에서 무조건 살아남아야 했다.

"감사!"

"뭔 감사야? 이 새끼가…."

포션 셔틀… 뭐시기를 외치며 다시 내달리는 녀석.

주술로 놈을 옭아맬까 고민했지만, 녀석은 이미 난장판 중심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메라들의 시선이 녀석에게 쏠렸다. 이질적인 존재를 감지하곤 앞다투어 아가리를 쩍 벌린 채 아서를 노리기 시작했다.

번쩍―!

황금빛이 시야를 집어삼켰다.

눈 부신 빛을 마주 보며 펜리는 양손에 크로우를 소환했다.

욕설을 내뱉으며 빛 사이에서 아서의 흔적을 쫓았다.

멈추지 않고 더욱 속도를 붙여 전장의 중심부로 내달리는 녀석이 보인다. 그 끝에 도미닉이 있었다.

모든 과정을 살핀 펜리가 헛웃음을 흘리곤 크로우를 빠르게 교차했다.

"뒤통수 제대로 맞았네."

목숨이 경각에 달려서 징표를 사용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징표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설마,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징표를 요구한 것이었나?

'말도 안 되지.'

첫 만남부터 지금 상황까지 예측하고 움직였다는 건데,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할아비가 와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목적이 뭔지 모르겠지만, 이번 한 번만 당해준다.'

눈앞의 목적을 위해 하나뿐인 징표를 사용한 녀석이다.

방해했다간 무슨 헛짓거리를 할지 모르니, 당장은 도와주는 척 달래다가 살려서 데려가는 게 맞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검게 물들었다.

그림자 주술의 발동 신호.

펜리의 몸이 그녀의 그림자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서를 향해 짓쳐오는 섬뜩한 살기가 느껴진다. 엄청난 속도로 주먹을 내지르는 작은 괴물.

도르네프가 몇 차례 긴장하며 경고했던 아레나 후아튼이 분명했다.

저대로 두면 무조건 죽는다.

펜리는 그대로 그림자를 타고 징표자, 아서 클레이튼의 뒤를 순식간에 잡았다.

교차한 크로우를 때리는 매서운 주먹.

쾅―!

거친 폭발이 아서를 중심으로 터져 나왔다.

* * *

"…헉!"

눈앞이 번쩍이며 큰 폭음이 터졌다. 거친 바람에 머리카락이 볼썽사납게 흔들렸다.

멈춰 선 작은 주먹.

세 뼘 거리에서 교차한 크로우에 막혔다.

'미, 미친, 언제?!'

머리가 부서질 뻔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키메라들은 접근하다가도 빛에 노출된 순간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는데, 저 작은 괴물은 퍼트린 빛에 반응도 없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 왔다.

아니,

치이이익―

빛에 피부가 그을리고 있음에도 별 상관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녀의 무표정이 저렇게 무서워도 돼?

'골로 갈 뻔했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계획의 마지막 퍼즐.

시선을 돌리니, 펜리가 굳은 얼굴로 아레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먹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넌 오늘 내가 무조건 살린다. 대신 나중에 내 손으로 죽여버릴 거야."

"…하하하."

미운털이 제대로 박힌 것 같지?

의도한 대로 펜리 앞에서 일단 질렀는데 다행히 먹혀들었다.

후환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욕심쟁이 엘프의 화를 풀어줄 방법이야 이미 생각해 둔 바가 있거든.'

눈빛만 교환한 채 난 펜리와 거리를 벌렸다.

등을 돌리고 전력으로 언덕을 오르려는데, 섬뜩한 살기가 느껴졌다.

아레나가 내 뒤를 잡기 위해 재차 움직이려는 모습이다. 날 제거하라 지시받은 모양인데, 난 무시하고 달렸다.

펜리가 무조건 살려준다고 했으니 어떻게든 살려줄 거다.

"어딜!"

바닥이 어둡게 물들더니 수십 개의 그림자 손들이 아레나를 옭아맸다. 움직임을 봉쇄한 후 펜리가 크로우를 겨누며 달려들었다.

"네가 그렇게 세다며? 난쟁이 말이 사실인지 어디 볼까?"

"...."

콰앙―! 쾅!

귀가 터질 것 같은 폭음이 연달아 귀를 때렸다.

두 사람이 제대로 붙은 모양인데,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난 도미닉이 있는 방향을 올려다보며 내달렸다.

피와 살점으로 올려진 거대한 언덕 위에는 도미닉 외에 짙은 존재감을 흘리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도미닉은 그 심장에 접근하기 위해 언덕을 오르는 중이었다.

그 앞길을 방해하기 위해 뒤엉켜 싸우는 키메라들이 보인다.

천천히 심장과 거리를 좁히는 도미닉.

그 광경을 끝으로 난 언덕 초입 앞에 멈춰 섰다.

후―

길게 호흡을 내뱉으며 거친 숨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고 언덕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도미닉의 뒷모습이 보인다.

손만 뻗으면 놈에게 닿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저 너머의 심장까지도.

'드디어 여기까지 왔다.'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처음 라웁 숲에 떨어져 감옥에 갇혔을 때만 해도 생존만 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학살자도 포기한 힘, 레토니칼스의 심장.

백 개의 심장 이벤트는 애초에 도전이 불가능한 챕터라 생각했다.

하지만 칼 일행을 만나고, 문양의 힘을 각성하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피어올랐고, 펜리와 인연이 닿으면서 해볼 만한 도박으로 바뀌었다.

운도 무척 따랐다고 생각했다.

'여기까진 내 예상대로 흘러갔어.'

붉은 괴물은 예상대로 도미닉에게 제거당했고, 심장은 마지막까지 큰 혼란을 불러왔다.

키메라 떼는 고대 문양으로, 아레나 후아튼은 펜리를 소환해 견제했다.

이제 마지막.

팔다리가 떨어진 도미닉이 남았다.

'도미닉은 내가 맡는다.'

도미닉이 심장에 닿기 전에 그를 제거해야 했다.

다른 이들은 절대 도미닉을 죽일 수 없었다.

도미닉을 제거할 방법을 아는 이는 오직 자신뿐. 학살자조차 알지 못하는 도미닉의 약점을 파고들어야 했다.

소설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의 메인 악당 중 하나, 도미닉 후아튼.

이길 수 있으려나.

솔직히 두렵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냐."

소설 속 엑스트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소설의 끝은 파멸로 정해져 있고, 그 세상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대가를 지불하고 강해져야 했다.

고유 능력을 잠시 떠올린 나는 도미닉을 올려다봤다.

끔찍한 몰골로 겹겹이 쌓인 사체들이 보인다. 도미닉까지 이어진 사체 언덕, 그 위를 잠시 올려다본 나는 사체들을 짓밟고 질주하기 시작했다.

내가 접근하자, 키메라들이 달려들었다.

번쩍―

문양을 소환하며 몸 상태를 빠르게 체크했다. 부러진 손목이 살짝 불편한 것 빼곤 움직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키메라들이 주춤 물러나자, 그 사이를 거침없이 뚫고 올라갔다.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지자 도미닉의 시선이 느껴졌다.

키메라로 막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오르는 것을 멈추고 내 쪽으로 몸을 틀었다.

도미닉의 반응에 난 접근을 멈추고 거리를 살짝 벌렸다. 그러곤 도미닉을 응시하며 능력 발현을 기다렸다.

"...."

"...."

잠시간의 침묵.

나는 눈썹을 찡그리곤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수차례 깜빡이고, 비벼봐도 내가 기대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한 번쯤은 쉽게 가면 안 되냐?'

내 고유 능력.

예상대로라면 도미닉과 마주한 순간 능력이 발현되어야 하는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분명 신명(神名)의 주인이 됐을 텐데?'

신명(神名)의 주인.

악이든 선이든 세상에 변화를 불러올 운명을 타고난 자들.

내 고유 능력은 그런 신명의 주인들과 마주쳤을 때 조건부로 발현된다.

내 능력이 잘못됐을 리 없으니, 결론은 하나였다.

'도미닉이 신명을 얻지 못했다?'

붉은 괴물을 쓰러트리는 과정에서 도미닉은 신명을 받게 되는데, 그 신명이 바로 '백(百) 개의 심장'이었다.

근데 얻지 못했다는 건, 내 개입으로 운명이 틀어졌다는 뜻이었다. 이러면 고유 능력 없이 내가 가진 힘으로 도미닉을 제거해야 하는데,

'충분히 가능해.'

판단이 선 순간 단검을 겨누고 질주를 시작했다.

3성의 마나를 모조리 태우며 전력을 뽑아냈다.

도미닉과의 거리, 30미터.

키에에엑!

거대 키메라 두 마리가 사납게 다가왔다. 다른 키메라들과 달리 몸에서 보랏빛이 흘러나왔는데, 황금빛을 뚫고 날 공격해 왔다.

저 보랏빛으로 문양의 빛을 상쇄시킨 건가?

거대 키메라 두 마리라면 무척 버거운 상대였지만, 전면전이 아니라 회피가 목적이라면 할 만했다.

콰앙―! 쾅! 쾅!

울퉁불퉁한 언덕 사이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그들의 공격을 피해냈다. 굳이 내가 싸울 필요 없이 시간만 끌면 되었다.

군단의 분열로 저들을 견제할 이들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역시나, 주변 키메라들이 몰려와 얽혀들면서 두 키메라를 맹렬히 물어뜯기 시작했다.

나를 공격하고 싶어도, 붙들려서 다가오지 못하는 상황.

난 그들 사이를 잽싸게 뚫고 나왔다.

10미터.

도미닉의 표정이 선명히 보일 정도까지 접근했다.

도미닉과 1:1 상황이 만들어졌다.

"미치광이!"

내 외침에 도미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난 도미닉을 향해 단검을 투척했다.

66화 도미닉 후아튼(2)

캉―!

허공에 불꽃이 튀며 단검이 튕겨 나왔다. 미간을 정확히 노렸는데, 허공에 생성된 보랏빛 배리어에 막힌 것이다.

잠시간의 대치, 도미닉은 안경을 고쳐 올리곤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누구십니까?"

"네 안식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

"전 당신을 모릅니다만, 이유가 궁금하군요."

"넌 몰라서 사람들을 잡아다가 실험체로 썼냐? 이유 따윈 없어. 그냥 죽어."

도미닉은 허공에 책을 펼쳤다.

내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빛을 잠시 응시하던 그가 나지막이 경고를 날렸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붙잡지 않겠습니다."

"미치광이가 몸을 사리다니, 저 심장이 어지간히 신경 쓰이나 봐?"

"...."

"그건 곤란해. 내 목적은 애초에 네 목숨이 아니거든."

내가 심장을 바라보자, 도미닉의 뺨이 씰룩거렸다. 눈길을 주는 것만으로도 감정을 드러낼 만큼 심장에 대한 집착이 대단해 보였다.

"주인이 정해진 심장입니다."

"그게 바로 나야."

역린을 건드린 것인지, 도미닉의 표정이 곧장 사납게 변했다.

"하찮은 피조물 따위가…."

"가식 덩어리 새끼. 이제야 본모습이 나오네."

"인간 따위가 저 힘을 감당할 수 있으리라 보나?"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난 달라!"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광기에 찬 확신을 드러내는 모습.

염원하던 순간을 내가 부정하고 있으니 열받은 모양인데, 너도 똑같거든?

도미닉이 심장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었다면 챕터1의 주인공은 학살자가 아니라 도미닉이 됐을 것이다. 토바른 지역을 집어삼키고, 엘레토르 성곽 너머에 자리한 대공에게 복수를 시도할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도미닉은 아레나를 각성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녀를 완벽히 통제하는 데는 실패했다.

'폭주한 아레나의 광역기에 갈가리 찢겨나갔지.'

딸이란 존재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한 비참한 최후.

수천수만의 목숨을 유린한 악당에게 어울리는 죽음인데, 내가 나선 이상 그 일은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 전에 죽을 테니까.'

쿠우웅―!

"이크!"

주변에서 벌어지는 격렬한 전투로 바닥이 거칠게 출렁이자, 난 서둘러 공격에 들어갔다.

키메라 대 키메라.

아레나 대 펜리.

지금은 팽팽하게 전투가 대치 중이지만, 도미닉이 심장에게 빼앗긴 통제권을 찾아오면 상황은 순식간에 뒤집힌다.

그 전에 승부를 보든지, 견제하든지 해야 했다.

"어리석은!"

도미닉이 책에 손을 대자, 허공에 뜬 책이 붉은빛을 토해냈다. 그 빛에 노출된 주변 키메라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광기의 빛.

마석에 담긴 광기의 부작용을 증폭시킨 빛이었는데, 그 광기를 먹어 치우고 3성에 오른 내게 통할 리가 있나?

번쩍―

고대 문양이 붉은빛을 서서히 밀어내기 시작했다.

남은 단검은 두 개.

그중 하나를 다시 투척했다.

아무 기운도 실리지 않은 평범한 단검.

이번에도 배리어에 무력하게 튕겨 나가자 도미닉은 단검에 신경 쓰지 않고, 내게 붉은빛을 집중적으로 퍼부었다.

잠시 후, 도미닉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스치기만 해도 미쳐버리는 저주의 빛이 놈에겐 안 먹혔다. 키메라조차 지시를 내려도 물러나 버린다.

능력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대.

그의 뇌리에 '천적'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어디서 나타난 놈이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듯 나타났는데, 하필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일을 망치려 들었다.

위기감을 느낀 도미닉이 하늘 위로 손을 뻗었다.

퍼엉―!

"...?"

허공에서 폭발음이 터지더니 주변에 검은 비가 쏟아졌다.

피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었다.

검은 비가 몸에 닿자 내 표정은 빠르게 굳어졌다.

'키메라 체액?'

키메라 배 속을 경험해 봤기에 체액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미믹을 사냥하기 위해 준비한 것을 나한테 써먹은 건가?

'이건 골치 아픈데.'

체액은 성력으로 상쇄할 수 없었다. 마비 증상이 찾아오기 전에 상황을 끝낼 수 있을까?

검은 비를 뚫고 도미닉 앞에서 투척 자세를 잡았다.

마지막 단검.

그 모습에 도미닉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배리어를 생성했다. 체액에 노출됐으니, 버티기만 해도 상황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이를 지그시 깨물곤 단검을 던졌다.

도미닉은 마법사이지만, 마탑의 마법사처럼 대인 전투에 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연구에만 목적을 둔 마법이 대부분이라, 앞서 보인 능력처럼 고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공격이 전부였다. 그랬기에 그는 항시 강력한 키메라들을 곁에 달고 다녔다.

하지만 지금 도미닉 주변에는 아레나도 키메라도 없었다.

그 말은 즉,

콰작―!

"...!"

눈앞의 배리어만 파괴하면 충분히 제거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두 번의 투척 페이크로 방심을 부르고, 세 번째에 진짜 이빨을 드러냈다.

번쩍―!

인챈트가 실린 단검이 배리어에 박혀 들었다.

부여된 속성은 성력.

예상대로 보랏빛 배리어는 성력에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박힌 단검이 백광을 뿌리자, 배리어가 거칠게 꿀렁이며 단검을 뱉어내려고 했다.

빠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단검 끝을 겨누었다. 주먹이 새하얗게 물들고,

콰아앙―!

전력으로 단검 끝을 후려치자, 배리어가 흔들리더니, 이내 종잇장처럼 깨졌다.

당황한 듯 두 눈을 부릅뜬 도미닉. 무방비가 된 그를 향해 석궁을 겨누었다.

"잡았다."

"...."

코앞에서 석궁을 겨누었는데, 도미닉의 반응이 미적지근했다.

처음으로 위험에 노출됐을 텐데, 위협받은 표정이 아니다.

난 그 이유를 잘 안다.

그를 겨냥하던 석궁은 내 시선을 따라 이동하더니 허공에 뜬 책을 겨누었다.

그 모습에 도미닉의 얼굴에 균열이 생겼다.

"아, 안 돼!"

"돼."

투투퉁―!

성력이 깃든 세 발의 볼트가 두꺼운 책 표면을 꿰뚫었다. 꿰뚫린 책이 부르르 떨리더니 바닥에 툭 떨어졌다. 뚫린 구멍들 사이에서 핏물이 울컥 흘러나오더니, 바람 빠진 풍선처럼 책이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악―!!!!

도미닉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쭈글쭈글해진 책을 앞에 둔 채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도미닉이 보인다.

난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낚아채곤 그를 향해 벼락처럼 질주했다.

시체 바닥 위를 구르는 도미닉.

단검이 울음을 토해내며 백광으로 물들었고, 곧 비틀비틀 일어나는 도미닉의 턱으로 쇄도했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았다.

푹―!

"...컥!"

턱 밑으로 단검을 끝까지 밀어 넣고, 도미닉을 거칠게 자빠트렸다. 그러곤 한 손으로 박힌 검 자루를 붙잡고 다른 손으로 도미닉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핏줄이 선 도미닉의 눈동자.

놈이 날 노려보며 손을 허우적거리자, 내 양손이 무참히 교차하며 도미닉의 목을 기괴한 각도로 꺾어버렸다.

우두둑―

목이 반쯤 뜯겨나갔다.

그것도 모자라 턱에서 단검을 뽑은 뒤 심장에 다시 박아 넣었다. 그 위로 성력을 퍼붓자 경련을 일으키던 도미닉이 이내 축 늘어졌다.

세 호흡 정도 안에 일어난 일.

눈 깜짝할 새에 도미닉을 처리했다.

후―

그제야 막힌 숨을 토해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보랏빛 재 가루가 허공에 흩날리자, 책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책이 있던 자리엔 그을음만 남아 있었다. 재 가루가 되어 사라진 모양.

도미닉의 숨겨진 약점이 바로 책이었다.

'책은 도미닉의 심장으로 만들어진 것이니까.'

쓰러트린 도미닉이 키메라란 뜻이고, 본체는 따로 있다는 의미였다. 책이 멀쩡히 존재하는 한, 그는 죽지 않았다.

한마디로 책만 없애면 되는 일인데, 이게 쉬운 일이냐.

'불가능에 가깝지.'

수만에 이르는 키메라 떼를 뚫고, 호위로 있는 아레나를 물리친 후, 도미닉의 능력까지 파훼해야 했다.

"그래도 결국 해냈네."

도미닉이 죽어서일까.

주변 분위기가 갑자기 어수선해졌다. 키메라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통제권이 풀려서 벌어진 일인데, 더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심장을 손에 넣어야 했다.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응?"

순간, 불길한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갑자기 왜 이러지?

본능적으로 심장이 자리한 언덕을 올려다봤다.

막 동이 튼 하늘.

그런데 하늘을 비추는 햇살이 다른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더 짙고 붉은 핏빛.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강렬하게 퍼지며 키메라 떼를 빠르게 집어삼켰다.

키아아아아악―!

키메라들의 움직임이 이상해졌다.

무차별적으로 움직이던 키메라들이 어느 순간부터 군집을 이루듯 뭉치기 시작했다. 분열하던 키메라들이 통일된 움직임을 보인다.

"이, 이런 빌어먹을!"

상황을 깨닫자 다급함이 올라왔다.

도미닉이 죽자, 심장이 그 빈자리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바로 견제자의 부재.

도미닉의 제거만 생각했지, 도미닉의 부재 시 심장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뻗칠지는 생각한 바가 없었다.

스토리에 전혀 없던 내용이니 당연했다.

'그럼 아레나는?!'

아레나의 통제권이 심장에게 넘어갔다. 다급히 고개를 돌려 아레나 쪽 상황을 살폈다.

멀찍이서 펜리가 움직이는 게 보인다. 상황이 변하자 다급하게 내 쪽으로 오는 모습인데, 표정이 이상했다.

왜 저렇게 다급하게 날 바라보고 있는 거지?

"위험해!"

펜리의 외침이 터진 그 순간,

푹―

"…커억!"

아랫배에서 지진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밑을 내려다보니 피 묻은 손이 배를 뚫고 나와 있었다.

이 손은... 아레나의 것이 아니다.

더 크고 투박했다.

"도, 도미닉?"

비틀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목이 기괴하게 꺾인 도미닉이 초점 없는 눈으로 멍하니 서 있었다.

동시에 바닥의 사체들이 하나둘 움직이며 내게 기어왔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 돋는 광경.

"…미친."

설마 죽은 키메라들까지 조종할 수 있는 건가?

심장의 영향력이 내 예측을 완전히 벗어났다.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

근데, 몸이 어느 순간 움직여지지 않았다.

'…체액.'

엎친 데 덮친 것처럼 마비 증상이 찾아왔다.

굳어 버린 몸 위로 도미닉의 손이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심장에 박힌 단검을 뽑아내고 내 목을 노렸다.

"시, 시발… 쿨럭!"

죽는다.

이를 악물고 도미닉을 노려본 순간, 내 그림자가 꿀렁이며 펜리를 토해냈다.

"제길!"

스가가가각―!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렸다.

흩날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렸고, 머리카락이 천천히 내려앉았을 때 수십 조각으로 잘린 도미닉의 사체가 눈에 들어왔다.

기어오던 사체들마저 모조리 찢어버린 그녀가 다급히 날 바닥에 눕혔다.

상처를 살핀 펜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하, 약해빠진 새끼."

배에 주먹만 한 구멍이 생겼다.

핏물이 쉴 새 없이 솟구치는데 치사량을 넘어간 것 같았다.

"쓰지도 못할 포션을 왜 달라고 한 거야?"

그녀는 내 품을 뒤져 자신이 준 포션을 찾은 뒤 상처에 들이부었다. 상처가 빠르게 아물며 나아진 듯 보였지만, 출혈이 멈추지 않았다.

"너, 독까지 당한 거냐? 마비독 때문에 피가 안 멈춰."

손가락에 힘이 빠진다.

호흡은 가빠지고, 얼굴도 새파랗게 질렸다.

당장 죽을 듯 상태가 나빠지자, 펜리의 표정이 처음으로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 순간,

우우웅―!

"...!"

내 가슴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펜리는 가슴에 달린 검은 브로치에 집중했다. 욕심났던 보석이라 한눈에 그 물건이 뭔지 알 수 있었다.

베네타의 보물로 불리는 다크 로즈(Dark Rose).

도르네프가 몇 달간 공을 들여 제작한 축복받은 장신구였다. 그 축복이 상처를 감싸며 내 목숨을 잠시나마 붙잡고 있었다.

67화 신명 사냥꾼

흐릿한 의식 속으로 펜리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목숨 줄이 간당간당해. 네가 뒈지는 건 나도 피하고 싶거든?"

"…쿨럭!"

"자살 구경시켜주려고 날 부르진 않았을 거고. 살 방법을 말해봐."

"시, 심장을 손에 넣어야…."

"심장?"

펜리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사체들로 쌓아 올린 언덕 꼭대기.

그 위에 둥둥 떠 있는 심장이 이질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후, 심장 곁으로 작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전까지 펜리를 고생시켰던 괴물 같은 년.

아레나 후아튼.

그녀의 손에 심장이 들려졌다.

"빌어먹을, 저 괴물과 또 싸우라고?"

펜리는 미간을 와락 구겼다.

아레나를 향한 도르네프의 경고는 거짓이 아니었다.

무시무시한 반사신경과 괴력.

더 위협적인 건 목숨을 도외시하는 반격이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저돌적으로 달려드니 대인전에 강한 펜리조차 긴장하기 일쑤였다.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부담스러운 상대란 뜻.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펜리는 주변을 둘러보며 이를 살짝 깨물었다.

상대는 이제 저 작은 괴물만이 아니었다.

크르르르르―

"간만에 살 떨리네."

군집을 이룬 엄청난 수의 키메라들이 자신과 아레나 주변으로 빠르게 몰리고 있었다.

완벽한 고립.

펜리는 헛웃음을 삼키곤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키메라들까지 하나로 뭉친 상황에서 아레나까지 상대하는 건 개죽음이나 다름없었다.

'녀석을 데리고 튀어야 하나?'

녀석의 상태를 보니, 높은 확률로 도시에 도착하기 전에 죽을 것 같았다.

그럼 징표의 페널티를 받게 되는데, 그 손해는 솔직히 어떤 것으로도 메꿀 수가 없었다.

"하지만 싸워도 죽어."

자신이 빠지면 이 녀석 혼자 남게 되는데, 결국 키메라들에게 죽을 거다.

뭘 선택해도 녀석의 죽음을 막을 수 없다면 살 확률이 높은 것을 선택해야 했다.

베네타에 도착할 때까지만 숨이 붙어 있으면 어떻게든 살릴 수 있다.

"목숨 줄이 질기길 빈다."

판단을 내리고, 아서를 부축한 채 그림자 주술을 발동하려고 했다.

그런데,

"...?"

펜리의 표정이 당혹스럽게 변했다. 밑을 둘러보니 조금 전까지 보이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그녀는 주변 환경이 미묘하게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닥에 깔린 사체들 사이에서 음울한 빛들이 흘러나왔는데, 그 빛무리가 서서히 짙어지며 그림자 생성을 막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펜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레나를 응시했다.

아니, 그녀가 한 짓이 아니다.

어느 정도 눈치만 있어도 그녀는 지시를 받은 인형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럼 어떤 존재가 그녀를 움직이고, 지금의 상황을 만드는 것일까.

아마 저 심장일 것이다.

"도미닉은 죽었으니까."

직접 도미닉의 시체를 조각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럼 심장에게 의지가 존재한다는 말인데,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순간, 아레나가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손에 쥔 심장을 천천히 입으로 가져간다.

"…아니지?"

펜리의 부정도 잠시, 아레나가 작은 입으로 심장을 꿀꺽 삼켰다.

두근―!

잠시 후, 그녀의 몸에서 붉은 파동과 함께 심장 박동 소리가 흘러나왔다.

메아리처럼 퍼지는 심장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주변을 채우던 음울한 빛들이 하늘로 솟구치며 아레나에게 스며들었다.

아레나를 중심으로 붉게 물드는 빛무리.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꺼림칙한 느낌에 펜리는 아서를 둘러업고 고립의 빈틈을 찾았다. 키메라들이 미동 없이 아레나 쪽을 올려다보는 상황이라, 지금이 탈출의 적기라 판단했다.

"자, 잠시만…."

"뭐가 잠시만이야. 진짜 뒈지고 싶냐? 입 열 힘이 있으면 능력이나 펼쳐."

"...."

그 뒤로 말이 없어진 녀석은 아레나가 서 있는 방향으로 힘겹게 손을 뻗었다.

손바닥 위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백광.

정말 능력을 사용하려고?

녀석이 뭔가를 본 듯 작게 읊조리더니, 이내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냥하겠다."

"뭐?"

죽어가던 녀석이 갑자기 사냥 타령이라니, 무슨 헛소리인가 했는데,

우우우우우우웅―!!!!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펜리 주변으로 새하얀 아지랑이가 흘러나왔다.

아니, 아지랑이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눈가를 좁히며 업혀 있는 아서를 바라봤다.

아서의 몸 위로 수백 개의 아지랑이가 뻗어 나오고 있었다. 아지랑이들은 더욱 짙어졌고, 이내 겹겹이 뭉치며 큰 물결을 이루기 시작했다.

"이게 뭐야?"

혼잣말처럼 던진 그 질문에,

"일단 내려주시죠."

내가 대답했다.

* * *

악당들이 강해지면 벌어지는 일.

이 소설의 스토리를 대부분 알고 있지만, 늘 변수를 염두에 뒀다.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그런데 이번 건은 변수를 아득히 넘어버린 최악의 상황이 돼버렸다.

도미닉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는데, 보상이라 생각했던 심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상황이라니.

'여기까진가?'

죽음을 인지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옅어진 의식 사이로 꿈틀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듯했다.

익숙한 기운, 성력이었다.

성력이 말을 걸어왔다.

물론, 성력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린 건 아니었다.

감각을 두들겨 전한다고 해야 하나?

성력이 한 존재를 의식하며 묻고 있었다.

'저 존재'를 사냥할 거냐고.

사냥?

사냥이란 단어에 고유 능력이 떠올랐다.

저 존재, 아레나 후아튼이 사냥감이라고?

생각지 못한 대상이었지만, 죽음을 앞에 둔 상황에서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몸에 신비한 변화가 찾아왔다.

"…신명 사냥꾼."

각성한 고유 능력을 나직이 중얼거리며 몸의 변화를 살폈다.

정신이 또렷해지며, 축 늘어졌던 근육들이 새로운 자극에 꿈틀거렸다.

가쁜 호흡이 삽시간에 안정되었고, 온몸에 감각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힘겹게 눈꺼풀을 뜨니, 펜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비가 풀렸네? 상처도 빠르게 아무는 중이고."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펜리가 아니었다면 이미 몇 차례 죽고도 남았을 것이다.

천천히 몸을 일으켰는데, 상태가 나쁘지 않았다. 배에 난 상처는 지금도 심각했지만, 출혈이 멈췄다. 혈색도 빠르게 회복되고 있었다. 마비독이 풀리면서 특제 포션 효과가 돌고 있는 덕도 있지만, 포션 때문만이 아니었다.

'모든 능력이 눈에 띄게 올라갔다.'

신체 능력, 마나량, 전투 감각, 회복 속도 등.

전투와 관련된 모든 능력이 뻥튀기된 듯 올라갔다.

지금이라면 한 단계 위인 4성과도 비벼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월적인 능력 강화.

사냥꾼으로 각성했을 때의 능력 중 하나였다.

"몸 상태는?"

"움직일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했지? 그럼 이제부터 내 말대로 해."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내가 뭐라고 할 줄 알고?"

"길을 뚫으라 하시겠죠."

"그래서 안 가겠다고?"

"못 가는 겁니다."

포위 사이에서 틈을 찾던 펜리는 이내 멈칫하더니 사나운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너, 지금 말도 안 되는 환경에서 날 부른 거 알고 있지? 여긴 네 급으로 올 곳이 아니었어."

"당신이 없었으면 애초에 도전도 안 했을 겁니다."

"미친놈. 이미 많이 봐줬어. 그러니 심장은 포기해."

"눈치채셨습니까?"

"숨이 꼴깍 넘어가는데도 심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으니까."

"이젠 포기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일이 너무 커졌거든요."

"뭐?"

"여기서 저걸 못 막으면 토바른 전체가 피로 물들 겁니다."

난 아레나 후아튼을 올려다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레나의 머리 뒤에 후광처럼 검은 오오라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오오라는 오직 내 눈에만 보이는 현상이었다.

오오라 주변으로 몇 안 되는 문장들이 떠다녔는데, 고대 룬어로 보였다. 다만, 처음 보는 문자임에도 난 그 의미를 해석할 수 있었다.

신명 사냥꾼의 능력 중 하나.

신명을 볼 수 있는 사냥꾼의 개안(開眼).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0%)]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백(百) 개의 심장]

신명의 목록이 눈동자에 담겼다.

도미닉 대신 아레나가 신명의 주인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 심장이 신명을 받았다는 게 정확했다.

지금 아레나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건 레토니칼스의 심장이었으니까.

도미닉은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통제할 고대 지식을 연구하고 익힌 악당이었다. 계승자의 조건을 갖춘 유일한 존재.

그 유일한 계승자가 죽어버렸으니, 심장이 폭주하며 스스로 존재를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걸 잡을 수 있으려나?

순간, 룬어가 바뀌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55%)]

'55%?'

분신체의 완성도가 50%에서 55%로 순식간에 올라갔다.

아레나의 몸으로 빠르게 흡수되고 있는 음울한 빛무리가 보인다.

사체들의 빛무리인데, 죽은 키메라들 속에 남아 있는 마석의 힘을 뽑아 흡수하는 것 같았다.

분신체의 완성도가 100%가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절대 좋은 꼴 못 보겠지.'

분신체라지만, 그 대상이 무려 불사자 레토니칼스다. 악이든 선이든 계승자의 신기는 하나같이 절대자들과 인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중 불사자는 악(惡) 그 자체로 알려진 존재.

전에 변이됐던 붉은 괴물과는 비교도 안 될 엄청난 재앙이 탄생할 수도 있었다.

무조건 막아야 했다.

퍽―

"...!"

내 투지를 읽은 것인지, 펜리가 내 뒷덜미를 기습적으로 후려쳤다.

기절한 뒤 끌고 갈 생각이었나 본데, 육체 능력이 올라가면서 충격을 버텨내자, 그녀가 살짝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맷집이 갑자기 세졌네?"

"도와준 김에 확실히 도와주시죠."

"뭘 도와줘. 이미 살려준 횟수만 따져도 넌 몸 팔아서 나한테 돈 갚아야 해."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힌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60%)]

벌써 60%다.

올라가는 속도를 보니, 뻗대는 그녀를 설득하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눈앞의 존재를 제거하려면 미완성 단계인 지금밖에 없었다.

역시 어쩔 수 없나?

"신세는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안 갚아도... 어디 가!"

그대로 키메라 떼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욕설을 퍼부으며 쫓아오는 펜리가 보였다.

페널티를 받지 않으려면 날 살려서 데려가야 하니 죽을 맛일 거다.

오늘 사건을 계기로 학을 떼며 생명의 징표를 없앨지도 모르지.

"악당도 울고 갈 새끼! 나중에 죽여버릴 거야!"

"...."

저 분노를 나중에 감당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는 건 사치지.'

당장은 눈앞의 일에 집중해야 했다.

사방을 둘러봤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새까맣게 모여든 키메라 떼뿐이다.

어느새 공터를 꽉 채워서 라웁 숲 너머까지 넘어갈 정도라, 검은 바다 위에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빛무리의 아지랑이 때문일까.

허공에 떠오르자, 수천수만의 눈깔들이 날 올려다봤다.

키에에엑!

카아아아악!

내 존재를 의식한 키메라들이 이빨을 드리우며 살기를 드러냈다.

그건 아레나도 마찬가지.

입술을 혀로 핥으며 노려보는데 날 먹잇감으로 인지한 것 같았다.

난 언덕 위에 우뚝 선 아레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고대 문양이 번뜩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문양에 응축된 기운이 전과 달랐다.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운이 넘쳐흘렀다.

우우웅―!!

한계치까지 문양에 마나를 쏟아부으며 아레나를 향해 미소를 날렸다.

이를 드러낸 사나운 미소.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사냥을 시작해야 한다.

신명 사냥꾼.

"사냥감은 내가 아니라 네놈들이야."

번쩍―!

나를 중심으로 황금빛 파동이 허공을 찢으며 퍼져나갔다.

68화 신명 사냥꾼(2)

키메라 떼 중심에서 터진 눈 부신 빛의 파동.

각성한 능력 때문인지 문양의 범위는 평상시 빛 범위를 훨씬 웃돌았다. 그렇다고 빛이 키메라 떼를 전부 삼켰다는 건 아니었다.

전체의 절반의 절반도 안 되는 범위.

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캬아아아아악!

끄에에!

이빨을 내밀던 키메라들이 고통에 고개를 돌리곤 비명을 질러댔다.

빛에 노출되자 하나같이 발광하며 몸부림쳤는데, 중심에서 터진 빛이라 노출된 수가 셀 수 없이 많았다.

빛과 멀어지기 위해 몸을 돌린 키메라들은 주변 키메라들을 거칠게 밀어냈다.

사방에서 넘어지고, 뒹구는 키메라들.

주변은 난장판이 되었고, 혼돈에 빠진 그 자리를 다른 키메라들이 짓밟고 지나갔다.

온몸이 으스러지고 피가 튀는 장면들이 줄줄이 연출됐다.

문양이 만들어낸 패닉 효과는 곧 연쇄 반응을 일으켰다.

쿠쿠쿠쿵―!

밀려나는 키메라 떼에 사체 언덕들이 함께 쓸려나갔다.

키메라 떼가 사체들과 뒤섞여 바닥을 뒹굴었다.

그물로 노획한 수천 마리의 고기 떼를 한 번에 쏟아내는 장면 같았다.

예상을 뛰어넘은 결과에 난 혀를 내두르며 문양을 갈무리했다.

"이 정도면 거의 사기 수준인데."

고대 문양이 인간에게도 먹혔다면 만능 치트키나 다름없는 힘인데, 키메라에게 한정인 게 아쉬웠다.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충만했던 마나가 한순간에 허해졌다. 가진 문양의 힘을 한계치까지 뽑아내니, 마나 소모가 극심했다.

바닥에 착지한 후 마나를 회복시키며 주변을 둘러봤다.

엉망진창이 된 주변.

키메라 대부분을 문양의 힘으로 무력화시켰다.

움직이는 상대는 거대 키메라 무리와 아레나 후아튼뿐.

역시 강력한 존재들은 문양에 대한 면역이 다른 이들보다 강했다.

주변을 살핀 나는 주저 없이 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저 너머 무너진 언덕 사이에 검은 오오라가 넘실거리는 게 보인다.

오오라를 이정표 삼아 정확히 그녀를 찾아냈다.

'타격이 없는 건 아닌데….'

아레나의 피부가 빛으로 새빨갛게 그을렸다. 문제는 회복 속도였다. 마치 물감을 바르듯 피부가 순식간에 복구되고 있었다.

"재생 속도가 미쳤네."

신명 목록에 뜬 '백(百) 개의 심장' 효과일 것이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70%)]

완성도가 금세 70%를 돌파했다.

지금도 아레나 육신으로 음울한 빛무리가 쉴 새 없이 흡수되고 있었다.

끝도 없이 펼쳐진 사체들을 보니, 분신체의 완성을 물리적으로 막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제거 말곤 답이 없는 상황.

그녀 앞으로 한 발 더 내디뎠을 때 당황으로 흠칫했다. 두 눈을 깜빡인 순간 아레나가 사라졌다.

"큭!"

살기에 본능적으로 몸을 틀었다. 확장된 전투 감각이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할 엄청난 속도였다.

부웅―!

핏빛을 띤 작은 주먹이 옆구리를 스쳐 허공을 꿰뚫었다.

바람이 터지는 충격파가 주변을 휩쓴다. 저 괴력은 인간의 육신이 버틸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내 몸빵으론 한 방만 허용해도 게임 오버. 재차 붙으려고 하자, 다급히 문양을 터트렸다.

다행이라면 심장이 차지한 아레나의 육신이 키메라란 것이었다. 문양은 키메라에게 천적인 능력.

황금빛이 주변 공간을 채우자 그녀가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것도 잠시, 타오르는 피부만큼 회복 속도도 빠르자, 그대로 빛을 뚫고 돌격해왔다.

이를 악물고 다음 회피를 준비하려는데, 내 뒷덜미를 펜리가 낚아채더니 뒤로 냅다 던졌다.

"미친 새끼, 죽을 거면 내 손에 죽어."

동시에 아레나의 주먹이 번뜩이자, 펜리가 크로우를 뻗었다.

카카카카카캉―!

눈부신 공방이 오갔다.

주변을 휘돌고 있는 두 인영은 벼락같이 움직이며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그 속도가 너무 빨라 눈이 아닌 감각으로 잡아내야 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가슴이 서늘하게 식었다.

펜리와 싸우는 아레나를 코앞에서 지켜보니, 실력 차이가 피부로 와닿았다.

각성을 통해 나름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기기는커녕 잠깐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불사자의 심장을 품은 아레나는 그만큼 강했다.

"...큭!"

쇳소리와 함께 펜리가 신음을 흘리며 내 곁으로 돌아왔다. 자세를 잡은 그녀의 표정엔 낭패가 서려 있었다. 어깨와 허벅지에 진득한 핏물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에 잡아 뜯긴 흔적.

"저 괴물이랑은 부딪칠수록 손해야."

아레나도 가슴에 큰 상처를 입었는데 순식간에 아물었다.

회복력에서 차이가 너무 크다.

아레나가 움직이자, 거대 키메라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난 다급히 문양을 소환해 거대 키메라를 물렸다.

하지만 아레나는 한 걸음 한 걸음 빛 사이로 빠르게 좁혀오고 있었다.

펜리의 말이 옳다.

이 싸움을 길게 끌고 가는 건 죽음을 의미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튀자."

그녀의 표정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림자 주술을 쓸 수 없어도 포위망이 뚫린 이상 몸을 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기라는 게 있다. 지금이 아니면 절대 수습할 수 없는 타이밍 말이다.

"여기서 제거해야 합니다."

"못 이겨. 너도 봤잖아?"

"다를 겁니다. 제가 도와주면."

"네깟 놈이 어떻게?"

"주변부터 막으세요."

"뭐, 인마?"

대답 대신 나는 허공에 손을 뻗고는 모든 마나를 한곳에 쏟아부었다. 몸 위로 흘러나오던 빛무리가 활 형태를 띠며 뭉치기 시작했다.

마치 새하얀 눈덩이를 뭉쳐 만든 장궁 같았다. 허공에 뜬 장궁을 움켜잡고 천천히 시위를 잡아당겼다.

문양이 빛을 잃자, 그 틈을 노리고 거대 키메라들이 매섭게 달려들었다.

집중 공격을 받게 되자, 펜리는 욕설을 내뱉으며 크로우로 주변을 지켰다.

다행이라면 아레나가 발걸음을 멈췄다는 거?

무엇을 느낀 것인지, 그녀의 시선이 날 응시했다.

마주 보는 대신 난 그녀의 후광에 집중했다.

검은색 오오라, 그 위를 떠도는 룬의 향연.

'신명.'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80%)]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백(百) 개의 심장]

신명 목록이 눈동자에 박혔다.

분신체 완성도 80%.

완성을 무조건 막아야 한다.

어느새 내 손가락 끝에는 신비로운 화살이 잡혀 있었다.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신명 목록 중 하나를 나직이 중얼거린 뒤 활시위를 가볍게 놓았다.

퉁―!

빗살처럼 사라진 화살.

그 화살을 쫓으며 펜리에게 외쳤다.

"쳐요!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빌어먹을, 진짜 마지막이야. 수틀리면 이제 버리고 갈 거라고!"

경고를 날린 펜리가 키메라들을 밀어내고 앞으로 질주를 시작하자, 나도 그녀 뒤를 빠르게 쫓았다.

허공을 가르고 사라지는 화살이 보인다.

한 줄기의 빛처럼 화살은 그녀의 후광을 벼락처럼 꿰뚫었다.

[극한까지 개조된 키메라 육체]

후광이 관통당한 순간 목록 하나가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어진 눈앞의 변화.

마주 달려오던 아레나가 크게 휘청이더니 바닥에 쿵― 쓰러졌다.

바로 일어났지만, 몸에 이상이 생겼는지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그 틈을 놓칠 펜리가 아니었다.

"죽어!"

벼락처럼 파고든 뒤 아레나를 향해 검은 발톱을 휘둘렀다.

평상시라면 주먹으로 반격을 해왔을 텐데, 아레나는 양팔을 교차해 크로우를 막았다.

갑작스러운 방어 태세 전환.

부딪친 순간 펜리의 눈이 반짝였다.

놈이 갑자기 약해졌다.

그 뒤로 전투 양상은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작은 육신 위로 끔찍한 자상들이 삽시간에 새겨지더니, 이어지는 공격에도 무력하게 밀리는 모습이 연출됐다.

둔해진 몸짓, 약화된 힘.

아레나는 아슬아슬하게 펜리의 공격을 버텨냈다. 방어와 회피를 하며 버티기에 들어간 모습.

크로우가 움직일 때마다 진득한 핏물이 대지를 붉게 적셨지만, 그녀는 쉽사리 쓰러지지 않았다.

베이고 잘린 흔적들이 삽시간에 아무는 모습에 펜리는 헛웃음을 흘렸다.

"트롤 저리 가라 할 년이네."

[백(百) 개의 심장].

트롤도 울고 갈 엄청난 재생력 때문에 그녀를 단시간에 죽일 수가 없었다.

"…심장을, 심장을 노려요!"

"보고도 몰라? 심장 위치나 알려주고 말해."

심장이 있을 법한 위치를 수차례 찔러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완벽히 제압한 후 심장을 노려야 할 것 같은데, 거대 키메라들 때문에 제압이 쉽지가 않았다.

중요한 순간마다 몸을 던지며 아레나를 보호하는 키메라들.

크로우에 갈가리 찢겨 나가고 있지만, 덩치도 크고 수가 많아 쉽사리 뚫기가 힘들었다.

"귀찮은 것들! 어떻게 좀 해봐!"

"…무리예요."

난 이를 악물곤 거친 숨을 내쉬었다.

펜리를 돕고 싶지만, 화살이 사라진 후부터 쉽게 움직일 수 없었다. 성력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기 때문이다.

신명 목록의 일부를 봉인시키는 능력.

'신명의 화살'을 유지하기 위한 성력 소모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 능력이 모자란 탓이었다.

'빌어먹을, 서둘러야 하는데….'

펜리의 실력이라면 거대 키메라들을 충분히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전부 처리하기엔 수가 많다는 거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90%)]

분신체의 완성도가 지척에 다다랐다. 시간이 없었다. 아레나가 분신체라는 새로운 존재로 변이된다면 단둘이선 절대 죽일 수 없었다.

[...95%]

시간을 재보니, 이대로는 실패할 것 같았다.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아레나와 심장을 당장 분리해야 하는데, 심장의 위치를 모른다.

환상 스크롤을 터트리고 집중 공격을 한다면?

아니, 이미 집중 공격 중인데도 질긴 육체와 재생력 때문에 제압이 안 되는 상황이다.

지금 공격을 능가하는 한 방이 필요했다.

'일격에 막대한 충격을 줘서 아레나 육신 자체를 갈가리 찢어버려야 해.'

내가 가진 능력 중에 그 정도로 강력한 것이 있나?

있긴 있다.

그래서 절로 인상이 구겨졌다.

이건 진짜 못 하겠는데....

[...97%]

그런데, 절대로 피하고 싶은 그 방법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였다.

"시발, 이건 너무 가혹하지 않냐?!"

누구한테 하소연하는지 모르겠다. 봉인 효과를 거둬들인 나는 아레나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냥꾼의 능력 대신 고대 문양을 발동시켰다.

빛무리가 반원을 그리며 아레나와 그 주변 모두를 집어삼켰다. 키메라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반대로 봉인이 풀리면서 힘을 되찾은 아레나가 펜리에게 매섭게 달려들었다.

"…큭! 야, 뭐 하는 짓이야!"

"터트려요, 그거!"

"뭘 터트…."

"스크롤!"

잠시 말을 흐리던 펜리가 품에서 스크롤을 꺼내더니 아레나 쪽을 겨눴다.

환상 스크롤.

매서운 기세로 달려드는 주먹이 보이자, 펜리는 그대로 스크롤을 쭉 찢었다.

69화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찢어진 스크롤 사이로 공간을 삼키는 날갯짓 소리가 흘러나왔다.

파파파파파파파파팟―!

허공에 새하얀 장관이 펼쳐졌다.

흰빛으로 이뤄진 나비들이 주변 풍경을 빛내며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가파른 절벽을 에워쌀 정도로 엄청난 수의 나비 떼가 소환됐다.

축제에서나 보던 아름답고 몽환적인 장면.

모든 것이 나비 떼에 삼켜졌다.

멈칫―

펜리를 몰아치던 아레나의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무표정한 아레나의 동공이 빠르게 확장됐다.

눈동자에 가득 비친 흰나비 떼.

온몸이 흰나비에 둘러싸이자 그녀의 움직임이 돌처럼 굳었다.

죽음으로도 잊지 못한 트라우마가 불러온 찰나의 경직.

난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지러운 나비 떼를 뚫고 아레나의 등 뒤로 왼팔을 뻗었다. 거칠게 그녀를 휘감고 품으로 잡아당겼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 생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피부다.

"꼬맹아, 이만 끝내자."

내 목소리에 아레나가 반응을 보였다.

감정이 말라비틀어진 눈동자로 날 응시한다.

클라크 대공에 의해, 부모에 의해 죽어서도 유린당한 작은 괴물.

불운한 그녀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한 가지뿐이다.

딸칵―

"고통은 없을 거야. 나만 더럽게 아프겠지."

벗어 던진 팔찌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람을 숙주로 신호에 맞춰 폭발하는 변태 같은 벌레, 붐(boom).

붐을 봉인한 팔찌를 여기서 풀게 될 줄이야.

'이젠 못 먹어도 고다.'

도망치고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생명 보험이 존재한다는 거다.

휘몰아치는 나비 떼 사이에서 펜리와 눈을 마주쳤다.

표정을 보니 내 돌발 행동에 아주 당황한 눈치였다.

네가 걜 왜 안고 지랄이야?

이런 눈빛인데, 그냥 어색한 미소로 답을 해줬다.

이번에도 잘 부탁해.

헛생각도 잠시, 지독한 고통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으드득―!

경직이 서서히 풀리며 아레나가 휘감은 내 왼팔을 잡아 뜯으려고 했다.

뼈가 으스러지고 팔이 뽑힐 것 같은 고통을 참으며 난 붐을 깨우기 시작했다.

"…망할 년, 불쌍한 거 취소다."

[팔은 날아가겠지만, 위력은 보증하지. 웬만한 녀석들은 다 죽을걸?]

붐(boom)으로부터 살아남은 칼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붐을 터트려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물론, 조건이 필요했다.

'정신 줄 놓치면 골로 간다.'

내 목표는 레토니칼스의 심장을 얻는 것이지, 아레나를 죽이는 게 아니었다.

부서진 그녀의 육체가 회복되기 전에 심장을 뽑아내야 한다.

그 후에는….

다음을 떠올리려는 순간, 손목에 잠들어 있던 붐이 꿈틀대기 시작했다.

[아레나 후아튼 – 불사자 레토니칼스의 분신체(97%)]

'어, 어서!'

신경 다발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 같다. 팔이 터져나갈 것 같은 두려움.

난 이를 까득 물곤 정신을 바짝 차렸다.

영문도 모른 채 떨어진 이 개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가지 능력을 얻었다.

그리고 그중 내가 가장 신뢰하고 의지하는 능력은 고대 문양도 성력도 신명 사냥꾼도 아니었다.

'정신 방벽.'

소설 속 인물이 아닌 '진짜' 나란 존재에게 부여된 특수 능력.

내 능력을 믿을 뿐이다.

[...98%]

[...99%]

"시, 시발."

콰아아아아아아앙―!!!

온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 * *

인적이 드문 으슥한 뒷골목.

카멜은 굳은 얼굴로 어두컴컴한 골목 사이를 거닐고 있었다. 곁을 지키는 이들은 기사 단장 리옹과 주술사 렌구아가 전부였다.

조용한 발자국 사이로 카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렌구아, 아직 멀었나?"

"곧 도착합니다. 그런데 어찌 그런 누추한 장소로...."

"묻지 말고 안내해라."

"알겠습니다."

렌구아는 고개를 숙이곤 앞장을 섰다. 길잡이 역할을 맡았지만, 렌구아는 지금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소멸로 인해 망가진 주술 인형의 기억을 복구하는 작업 중에 갑자기 끌려왔기 때문이다.

'블라이어로 돌아가신다고 했는데, 어찌 다시 돌아오신 거지?'

자신의 주인은 잭과 하우엘 형제를 포섭하고 반강제로 끌려온 상단주들과 곡물 계약을 마무리한 후 곧장 에토르 영지를 떠났다.

자신은 에토르의 마석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남았는데, 돌연 주군이 다시 돌아와 자신을 호출하더니 크룩스의 아지트로 안내하라는 것이 아닌가.

주인은 절대 즉흥적으로 움직이는 인물이 아니었기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었길래….'

사건의 발단은 한 장의 보고서였다.

'주술사들의 둥지'에서 보내온 것이니, 암살 조직 크룩스와 관련된 내용일 터였다.

평상시에는 자신에게 먼저 도착했을 보고서가 떠나는 주군께 긴급으로 전달됐다.

내용이 '특급'이란 의미.

주군이 극도로 경계하는 '그'의 흔적이 발견됐다면 오늘 길들인 잭과 하우엘 형제도 동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냥개들은 블라이어로 먼저 보내진 상태. 그럼 '그'와는 상관없는 내용이란 예측이 나왔다.

질문을 통해 궁금증을 해결하고 싶었지만, 주군의 표정이 무겁다 보니 눈치가 보였다.

렌구아는 일단 크룩스의 아지트로 주군을 안내하는 데 집중했다.

자신과 리옹만 대동하고 움직인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곳입니다."

카멜 일행은 골목 구석에 있는 낡은 건물 앞에 섰다.

간판에는 정보 길드를 뜻하는 표식과 이름이 적혀 있었는데, 크룩스의 마스터가 머무는 비밀 아지트였다.

"마스터를 끌고 나올까요?"

렌구아는 큰 고민 없이 마스터를 언급했다.

주술사들의 둥지를 통해 이미 크룩스의 전력에 대해 알 만큼 알고 있었다.

자신이나 리옹, 둘 중 한 명만 움직여도 충분하다 판단했다.

하지만 그 물음에 카멜은 피식 웃더니 방향을 틀었다.

"내가 마스터 따위를 보려고 직접 나선 줄 아나?"

"…그럼?"

"근처에 볼일이 있다."

카멜은 크룩스의 비밀 거점을 지나쳐 주변에 자리한 허름한 여관 앞에 멈춰 섰다.

카멜은 여관을 잠시 응시했다.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한달음에 이곳으로 달려온 이유.

특급으로 보내온 보고서에 적혀 있는 단 한 줄의 내용 때문이었다.

[크룩스를 찾아온 손님이 확인됐는데, 그 손님 이름이....]

'아케인이라니.'

크룩스에서 '그'의 흔적을 찾던 중 전혀 예상치 못했던 아케인이란 이름이 튀어나왔다.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사람일지도 모르지만, 이름을 알게 된 이상 무조건 확인이 필요했다.

1층에서 흘러나오는 흐릿한 불빛.

카멜은 불빛을 따라 여관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갔다.

1층 식당에선 손님들이 식사와 술을 즐기고 있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그 작은 소란 사이로 젊은 귀공자가 검은 망토를 두른 채 입구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사람들은 하나둘 침묵하기 시작했다.

바라보는 것만 해도 가슴을 옥죄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시선조차 마주 보기 힘들었다.

뒤이어 리옹마저 나타나자 사람들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날카로운 인상의 푸른 갑주의 기사.

뒷골목에서 기사와 엮이면 죽는다는 격언대로 움직인 것인데, 사실 기사보단 저 귀공자의 존재감 탓이 더 컸다.

더 있다간 질식해 죽을 것만 같았다.

새파랗게 질린 여관 주인만 자리를 지키는 가운데, 카멜의 시선이 식당 한 곳에 머물렀다.

모두가 떠난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이, 허름한 로브를 걸친 그는 등을 보인 채 테이블에 올려진 술잔을 조용히 기울이고 있었다.

카멜 일행의 등장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저자에 대해 알고 있나?"

카멜의 물음에 주인은 화들짝 놀라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푸, 푼돈을 받고 점을 봐주는 점성술사입니다."

"이름을 알고 있나?"

"그게... 모, 모릅니다! 자신을 그저 점성술사라고만 소개해서…."

"얼마나 머물렀지?"

"석 달 정도…?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건너편 건물에도 자주 오갔던 터라…."

카멜은 주인에게 점성술사에 대한 여러 가지 것들을 자세히 물었다. 주군의 태도에 리옹과 렌구아는 의문이 들었다.

점성술사를 직접 잡아다가 물어보면 될 것을 굳이 주인에게 묻는 이유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카멜은 점성술사에게 다가간 뒤 테이블 위에 금화 한 닢을 올려놨다.

"점괘를 보고 싶은데."

"보다시피 영업을 끝내고 한잔 마시는 중입니다."

"금화가 부족한가?"

"술에 취하면 점괘가 잘 안 맞아서 말이죠. 낼 아침에 다시 찾아오십시오."

사내의 태도에 카멜은 눈을 반짝였다. 용아의 망토를 걸쳤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반응이다. 되려 사내의 무시에 리옹이 발끈하며 앞으로 나서려고 하자 카멜이 이를 저지했다.

카멜은 테이블 반대편에 앉은 뒤 황금 주머니를 그 앞에 올려놨다. 보기만 해도 엄청난 양의 금화가 담긴 주머니였다.

"그럼 점괘 대신 얼굴 구경이나 하고 가지. 구경값이다."

"남자를 좋아하는 관상은 아닌 듯한데…."

"어떡할 거지?"

"단순한 흥밋거리치곤 대가가 지나치군요. 당신이 찾는 사람이 아니면 절 죽일 생각입니까?"

남은 잔을 비운 사내가 리옹을 바라보며 묻자, 카멜은 그 빈 잔에 술을 채우며 피식 웃었다.

"죽여? '계시(啓示)'를 받드는 존재를 적으로 삼을 만큼 내가 멍청해 보이나?"

"...."

카멜의 말에 아케인은 술잔을 받아 조용히 들이켰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모습이다. 오히려 경악한 사람은 곁에 있던 렌구아였다.

아케인? 그 아케인이라고?

계시를 통해 신명(神名)의 신비에 가장 밀접하게 다가간 인물.

오르도르 숲의 마녀와 함께 절대 적으로 두면 안 되는 인물로 꼽히는 이였다.

'아케인이 왜 크룩스 같은 하찮은 조직의 손님으로….'

그것도 진짜 이름을 드러내고 말이다.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굳이 고민하지 않았다.

아케인은 계시를 받고 움직이는 인물이다. 계시의 뜻을 한낱 인간 따위가 어찌 이해할 수 있을까.

"이상하군요. 이름을 드러내도 저를 찾아올 귀한 인연은 점괘에 없었는데."

"내가 별것 아니라는 건가?"

"흠, 그럴 리가요. 그래서 이상하다는 겁니다."

아케인은 둘러쓴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긴 백발이 허공에 흩날렸다.

새하얀 피부를 지닌 젊은 미남자였다. 왼쪽 귀에 푸른 사파이어가 박힌 귀걸이를 착용하고 있었는데, 백발과 어우러져 무척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아케인은 가느다란 눈매로 카멜을 잠시 응시한 뒤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신명의 주인'이시면 귀한 분이 맞으니까요."

"...!"

아케인의 말에 카멜 뒤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움찔했다.

주군이 앞에 있어 티를 내지 못했지만, 반응을 보니 주군이 신명의 주인인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내가 신명의 주인인가?"

"모르셨습니까?"

"확인을 받은 건 처음이니까."

카멜의 표정을 보니, 모르는 눈치는 아니었다. 아케인은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저와 당신은 인연의 연결고리가 무척 약합니다. 아직은 저를 만날 운명이 아니라는 뜻이지요."

"나도 알아. 내가 당신을 찾아오게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가 날 이곳으로 이끌었지."

"'그'?"

"그대가 맹신하는 운명이란 것을 가볍게 비틀어버린 놈이지. 지금처럼."

'그'가 아니었다면 크룩스를 조사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고, 크룩스 손님으로 와 있는 아케인의 존재도 몰랐을 것이다.

귀걸이를 만지작거리던 아케인의 손짓이 멈칫했다.

카멜의 이야기를 듣고 생각이 많아진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계시가 애매하게 어긋나서 크룩스에 계속 머물고 있던 참이었다.

'계시'대로 죽었어야 할 인물의 생사가 불투명해지더니, 그 인물과 관련된 점괘가 뿌연 벽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인연의 연결고리에 없던 신명의 주인이 찾아와 '그'란 존재를 언급하며 경고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아케인이 카멜에게 물었다.

"'그'란 사람도 신명의 주인입니까?"

70화 신명의 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