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2)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아니, 그보다 잠깐만... 벌써 59층을 공략했다고?!"
펄럭이는 현수막을 바라보는 공략자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경악한 기색들이 역력하다.
"58층 공략한 지도 얼마 안 된 것 아니었어?"
선구자들, 58층 공략 성공!
이 소문이 45층까지 흘러 내려온 것도 비교적 근래의 일이었건만.
"노, 농담이겠지?"
"그럼 굳이 상점주가 저렇게 현수막에 걸어 놨겠어? 거기다가 선구자들이잖아?"
"그것도 그렇긴 한데...."
공략자들이 현수막을 올려다보며 웅성거리던 와중.
누군가가 실버-패를 든 손을 번쩍 쳐들며 외친다.
"그래서,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이라는 게 뭡니까?!"
"하하,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상점주가 웃으며 공략자들의 앞에 나서자.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정숙해진다.
"이 탑에서 많은 클랜들이 활동 중에 있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맞는 말이다.
탑을 공략하고자, 소속감을 얻고자 혹은 믿을 만한 동료를 구하기 위해서 등.
다양한 목적들을 바탕으로 수많은 클랜이 창립되었으니까.
"문뜩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공략자들을 위한 이벤트는 여럿 있었지만, 정작 그 공략자들을 아우르는 클랜과 관련된 이벤트는 있었던가? 하고 말이죠. 그래서 저는 클랜들을 대상으로 자그마한 이벤트를 열어 볼까 합니다."
"클랜들을 대상으로 한... 이벤트?"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가운데.
상점주가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방식은 간단합니다! 자, 여러분이 들고 계신 패가 공헌도를 바탕으로 등급이 나뉜다는 건 알고 계시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공략자들.
공헌도와 관련된 사항을 모르는 이는 적어도 이 자리에는 없을 터.
"옙! 잘 알고 있습니다!"
"각 클랜원들이 보유하고 있는 공헌도, 그 공헌도를 합산하여 가장 높은 공헌도를 기록하는 것! 그것이 이번 이벤트의 핵심이 되겠습니다!"
상점주가 말을 끝마치자.
"오...."
"...."
누군가는 뒤통수를 긁적거렸고.
또 다른 누군가는 작게 입을 벌리거나 멍하니 상점주를 바라본다.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이라는 게 그런 의미였나...."
"무슨 말인데? 난 전혀 이해를 못 했어."
"저것도 이해를 못 했다고?! 멍청하긴! 그러니까 클랜별로 클랜원들이 모은 공헌도를 모두 합산해서 등수를...."
여기저기서 상점주의 의중을 파악하고자 했고.
일부에선 이벤트의 룰을 이해하지 못한 이들의 질문 소리가 흘러나온다.
"자자!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게 아니니까 잠시들 진정 좀 하시고요!"
"대충 요지는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이벤트에 참가하면 뭐가 좋은 거죠?!"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가면 아래로 드러나 있던 상점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공헌도 합산 점수에 따라 순위를 산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보상을 드릴 계획입니다."
"순위에 따른... 보상?"
"보상이 뭡니까?!"
곳곳에서 질문이 울려 댄다.
"먼저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만 해도! 저희 상점에서 상품을 두 개 더 추가로 구매하실 수 있는 기회를 드립니다!"
"오오! 상품을 두 개나 더 살 수 있게 해 준다고?! 그냥 참가만 해도?!"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의 숫자에 제한이 걸려 있어서 그런 걸까.
공략자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혜택이 그것뿐이라면 페스티벌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감이 있겠죠! 공헌도 점수 상위 4~10위로 페스티벌을 마무리한 클랜들에게는 각각 특제 우표, 강화권&분해권을 10장씩 지급해 드립니다!"
"오오오!"
특제 우표 그리고 강화권&분해권이나 통화 카드.
환상의 상점에서만 취급하는 이 특수한 상품들은 돈이 있다고 구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일단 '패'의 등급이 충족되어야 하며.
수많은 경쟁을 뚫고서야 겨우 손에 쥘 수 있는 상품이건만!
그런 걸 10장씩이나 지급한다니!
"근데 4등부터 10등까지라는 걸 보니까 1등부터 3등까지는 더 특별한 걸 받을 수 있나 본데?"
"그러게? 보상이 뭘까?"
모두가 상점주의 입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중.
상점주의 입술이 꿈틀거린다.
"3등에게는 클랜 아지트 소짜를! 2등에게는 클랜 아지트 중짜 그리고 1등에게는 무려 클랜 아지트 대짜가 보상으로 지급됩니다!"
"클랜 아지트...?"
기대감으로 반짝이던 눈들에서 빛이 사라져 간다.
"아지트야 뭐... 적당한 곳에 자리 잡으면 그게 아지트잖아?"
"그러니까 말이야."
물론 기존에 클랜들이 사용하던 클랜 하우스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클랜 하우스는 어디까지나 임시로 사용하는 거점이자 쉼터일 뿐.
계속 층을 공략하는 공략자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하하, 다들 별로 관심이 없는 듯하군요. 그렇다면 일단 여기에 있는 모델하우스를 구경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모델하우스?"
"앞에 계신 분들! 잠시 뒤로 물러 나주시겠습니까?"
공략자들을 뒤로 물리곤 갑자기 주머니를 꺼내어 드는 상점주.
그가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손을 끄집어내는 그 순간.
촤라라라라라락-
환상의 상점 앞으로 형형색색의 모래 알갱이 같은 것들이 소용돌이처럼 솟구치더니.
하나의 커다란 건물이 완성되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이건...."
언뜻 커다란 모래성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이다.
층이 나뉘어 있는지 칸칸이 유리창이 달렸으며.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모래성의 모습이 반투명해졌다가 다시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콘셉트 하우스: 샌드 캐슬입니다. 주 소재는 오색 모래이며...."
잠시간 사용한 재료들을 주절주절 읊던 상점주가.
샌드 캐슬 앞으로 다가가 문을 열어 보인다.
"자, 다들 들어오시죠. 여기에 있는 인원들에게 다 보여 드리는 건 어려울 것 같으니, 대표로 클랜장님들만 오시겠습니까?"
"...."
상점주의 안내를 따라 조심스레 샌드 캐슬로 들어서는 클랜장들.
"오오...."
내부를 둘러보는 이들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터져 나온다.
"내부가... 꽤 넓군. 이 정도면 클랜원들 전부를 수용하고도 남겠어."
"그러게 말이야. 거기다 아까 보니 상점주가 주머니에서 이걸 꺼냈잖나? 혹시 이 집... 아공간에 보관이 가능한 게...."
좌중이 회오리 모양으로 굽이치는 계단과 곳곳에 달려 있는 밝은 구체를 보던 그때.
"허어억!"
누군가가 경악에 찬 비명을 내지른다.
"왜, 왜 그러나?"
"이게 대체...."
허공을 보며 입을 뻐끔거리는 남자.
그리고 다른 클랜장들 또한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샌드 캐슬에 입장한 상태입니다. 하우징 시스템이 적용됩니다.]
[버프, '오아시스'가 작용 중입니다.]
[버프, '편안한 휴식'이 작용 중입니다.]
[버프, '모래바람'이 작용 중입니다.]
.
.
.
그들의 앞에 떠오른 수많은 메시지들.
"버프라니, 이게 대체...."
한 클랜장이 황급히 작용 중이라는 버프를 살펴본다.
모래바람(샌드 캐슬 전용)
설명: 샌드 캐슬 주변으로 모래바람이 불고 있다.
내용: 샌드 캐슬의 관계자 이외의 존재들은 샌드 캐슬을 발견할 확률이 떨어지며, 관계자들은 기습받을 확률이 낮아진다.
편안한 휴식(샌드 캐슬 전용)
설명: 샌드 캐슬에서 편안히 휴식을 취해 보자!
내용: 샌드 캐슬에 머무를 시, 휴식/회복의 효율이 10배로 증가한다.
오아시스(샌드 캐슬 전용)
설명: 샌드 캐슬에서 달콤하고 안락한 한때를!
내용: 샌드 캐슬에서 5시간 이상 머물렀다가 나갈 시, 하루 동안 민첩이 15 상승한다.
"이게 도대체 뭔...! 상점주! 이게 대체 뭔가?"
"하하, 샌드 캐슬만이 갖고 있는 버프 효과라고 해 두죠. 다들 어떠십니까? 클랜 아지트는 좀 마음에 드십니까? 아 참, 참고로 이 클랜 아지트는 아공간에 소지하는 게 가능하니 참고들 하시고요."
"...."
상점주의 말에 다들 벙어리가 된 듯 말이 없다.
'맙소사, 아공간에 보관이 가능한 집이라고?! 그런 게 가능한 거였어?'
'아공간에 보관이 가능하다라.... 이건 그야말로 움직이는 전초기지나 다름없군! 활용하기에 따라 엄청난 전력이 되겠어!'
'기습을 당할 확률이 낮아진다니. 이건 물건이에요! 거기다가 휴식의 효과가 10배? 이건 반드시 저희 멜버른 클랜이 차지해야 돼요!'
'아무것도 하지 않고 5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기만 하면 민첩이 15나 상승한다고? 이게 말이 돼? 이건 거의 최상급 칭호랑 맞먹는 능력이잖아?!'
클랜장들이 말없이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던 중.
한 클랜장이 묻는다.
"정말 멋진 클랜 아지트야! 당장이라도 갖고 싶어서 손이 근질근질할 정도로! 근데 상점주! 페스티벌에 참가할 수 있는 조건 같은 게 있어?"
"조건이라.... '패' 소지자라면 누구나 참가가 가능합니다."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상점주.
"그리고 꼭 샌드 캐슬만으로 고정된 게 아닌, 클랜 아지트를 받게 될 분들의 취향에 따라 클랜 아지트의 외관이나 간단한 능력의 변경도 가능하니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능력도... 변경이 가능하다고?"
"하하, 외관이 바뀌면 능력도 조금 달라지니까요."
공략자들이 무언가에 홀린 듯 멍하니 고개만 끄덕거리던 그때.
어디선가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온다.
"페스티벌은 모두가 즐기는 축제잖아! 근데 이게 무슨 페스티벌이야?! 어차피 결과가 뻔히 정해져 있는데! 그냥 집어치워!"
상점주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향한다.
"유성 클랜장님? 불만이 있으신 모양이군요."
모두의 시선이 붉은 레더 아머를 입은 남자에게 향했으나.
그는 아랑곳 않고 목청을 높인다.
"당연히 불만이 있을 수밖에 없지! 이미 선구자들이 1등을 하는 건 확정이잖아! 2, 3등도 망치 클랜이나 지식 클랜 같은 최상위 클랜들이 할 테고! 이미 서로가 쌓아 둔 공헌도 양부터 엄청나게 차이가 나잖아!"
"이, 이봐, 일단 진정 좀 해!"
"아니,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유성 클랜장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이미 선구자들을 비롯한 최상위 클랜들은 독보적인 공헌도 점수를 보유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아닌 건 아니라고 말을 해야 상점주도 개선을 하... 읍읍!"
자리에 있던 공략자들이 황급히 유성 클랜장의 입을 틀어막으면서도.
조심스레 상점주의 눈치를 살피며 속닥인다.
-화난 건 아니겠지?
-표정이 안 보이니 뭘 알 수가 있나?
-근데 솔직히 유성 클랜장의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이미 결과는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냥 들러리들인 것 아냐?
-쉿! 그런 건 속으로만 생각해, 이 얼간아!
그러던 그때, 희미한 반달만을 그리던 상점주의 입이 열린다.
"좋은 지적입니다!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죠. 아니, 누구나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전혀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뒤이어 들려오는 상점주의 한마디.
"공헌도는 페스티벌 기간 동안 누적된 공헌도로만 산정하니까요."
"...오오?! 잠깐! 그렇단 건 우리한테도 기회가 있다는 거잖아?!"
공헌도 점수를 확보하는 것.
그건 공략 중인 층의 층수가 높다거나 몬스터와의 강함과는 상관이 없다.
자신의 상황에 맞추어 적합한 퀘스트나 토벌 등의 행위를 수행하거든.
그에 맞는 공헌도 점수를 확보하는 게 가능했으니까.
"맞습니다! '패'를 소지하신 분들에 한정되긴 하지만, 기회는 모든 분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모두가 즐겨야 하는 페스티벌이니까요!"
오오오오오오오-
레벨, 강함과 별개로 누구나에게 기회가 열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덕일까.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당장 사냥해야 돼! 사냥!"
"퀘스트! 퀘스트부터 클리어 하자! 퀘스트가 은근 공헌도 점수가 짭짤하다고!"
열기로 눈을 번뜩거리는 클랜장들이 황급히 자리를 뜨려고 한다.
"잠깐! 가시기 전에 주의 사항은 듣고 가셔야죠."
"주의 사항?"
"모두가 제 손님들이시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클랜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클랜 아지트가 악용될 수도 있으니까요."
상점주의 말에 모두가 껄껄 웃는다.
"에이, 상점주! 누가 악용을...."
"뭐, 인간의 악의는 끝이 없으니까요."
클랜장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점주가 웃으며 몇 가지 말을 덧붙였다.
"제 판단하에 클랜 아지트를 압수할 수 있고, 경우에 따라 제가 '징계'를 할 수도 있으니 참고하세요."
"징계...."
티끌만큼이라도 아지트를 꿀꺽하는 생각을 했던 것인지, 몇몇의 얼굴이 순간 창백해졌다.
짝!
상점주가 손뼉으로 분위기를 환기했다.
"자, 이번 페스티벌의 진행 기간은 한 달입니다! 시간이 없죠?"
* * *
다음 날.
수많은 클랜들이 대대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181화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3)
42층, 거신의 정원.
이이이이이이잉-
허공을 검게 채운 흡정벌레들을 올려다보며.
갖가지 장비를 든 공략자들이 격한 고성을 내지른다.
"한 마리도 놓치지 말고 싸그리 다 잡아들여! 저게 다 경험치이자 골드이자 공헌도라고! 일타삼피!"
"1등은 우리 파리지옥 클랜이 가져간다!"
"우오오오오오!"
미친 듯이 흡정벌레를 사냥하고 사냥하는 이들.
그리고 비단 이러한 현상은 42층에서만 벌어진 게 아니었다.
52층, 공허 지대.
보랏빛의 불길한 기운이 검은 아우라와 맞물린 하늘 아래로.
무수히 많은 공허충과 온갖 괴이한 생명체들의 사체가 지면에 널려 있다.
퍼어어어억-
[크르르... 카각....]
유일하게 수백 개의 다리를 꿈틀대던 공허충마저.
복부에서 녹색의 체액을 흘리며 움직임을 멎자.
"후, 이제 둥지 하나 처리한 건가?"
"야, 야! 공헌도는 공헌도고, 거기 아이템 챙겨!"
무리 지어 공허충을 사냥하던 공략자들이 분주히 승리의 산물을 챙긴다.
"잠깐 쉬었다가 바로 다른 둥지로 이동할 거니까, 지금 최대한 쉬어 둬라!"
"예? 아니, 대장. 이번 둥지가 마지막 아니었어요?"
"무슨 소리! 우리가 쉬는 동안에도 다른 놈들은 미친 듯이 공헌도를 올리고 있을 거라고! 침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계속 전투다! 알았어?!"
"오...."
패를 소지한 공략자들.
그리고 그러한 공략자들이 모인 클랜에선 끝없이 몬스터들을 토벌하였으며.
퀘스트를 클리어 하는 중이었다.
"그래도 우리 클랜의 실적이 나쁘진 않을 텐데? 꽤 잡은 것 같은데, 지금 우리 클랜은 몇 등이야?!"
클랜장이 공허충의 사체에 앉은 채 질문을 던지자.
옆에 있던 남자가 검을 툭 털어 묻은 체액을 털어 내곤 실버-패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순위 확인."
그러자.
스스슥-
패 위로 네모난 게시판 모양의 허상이 나타난다.
[1위 - 선구자들 2,580]
[2위 - 지식 1,650]
[3위 - 망치 1,580]
[4위 - 저니맨 1,550]
.
.
.
허상에는 수많은 클랜들의 이름과 점수가 적혀 있었으며.
[2위 - 지식 1,680]
점수는 시시각각 바뀌는 중이었다.
"씨드, 씨드.... 대장, 저희는 지금 32위입니다."
남자의 대답에 클랜장의 표정이 싸해진다.
"숨 한번 안 돌리고 계속 사냥만 했는데도... 32위라고?"
"하지만 10위권 클랜들과의 점수 차이가 크지 않아, 언제든 뒤집을 수 있습니다."
"흠...."
허상의 게시판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씨드 클랜장.
"선구자들은 여전하군."
역시나 유일하게 최전선에서 층을 돌파하고 개척해 나가는 클랜다운 점수이다.
"애당초 1위는 힘들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동등한 상황과 조건이 주어진다고 해도, 개인의 능력 차가 있는 건 사실이니까요."
"나도 알아. 2위, 아니 3위를 노리는 게 현실적이겠지."
어차피 현실적으로 1위는 무리이다.
하지만 3위만 하더라도 클랜 아지트를 받는 것은 기정사실 아닌가!
"저도 클랜 아지트는 좀 탐나더군요, 대장."
"그래, 반드시 우리가 가져야지, 반드시."
야외 노숙, 습격, 불침번, 텐트와 불편한 잠자리.
마을에 체류 중인 이들을 제외하고.
'공략자'라면 누구나 저 단어들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게 작금의 현실.
그러나...!
"클랜 아지트만 있으면 공략의 기간이 길어져도 쾌적한 환경에서 생활할 수 있으니까."
쾌적한 환경에서 휴식을 취함으로써 컨디션을 회복하고.
버프 효과까지 얻을 수 있으니 이보다 완벽한 공간은 없을 터!
"대장, 세면 시설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면 시설만이 아니야. 마법으로 작동하는 것 같긴 했지만 주방 같은 것도 있었다."
"오... 그건 좀 궁금하군요. 도대체 상점주는 어떻게 그런 집을 구한 거고, 또 집이 작동하는 원리...."
"아니!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다!"
어떻게 집이 아공간에 들어가는지.
상점주가 어떻게 그런 집을 갖게 된 건지.
그런 이유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갖는다! 반드시 갖는다!"
"옙!"
"그런데 말이야, 이놈들은 도대체 뭐지?"
의욕을 불태우던 씨드 클랜장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허상의 게시판을 훑는다.
"저니맨 클랜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순위권에 있는 대부분의 클랜들은 들어 본 적이 있거나 클랜원들 간 안면이 있는 클랜들이지만.
단연코 저니맨 클랜은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아, 거기는 이번에 솔로로 활동하던 놈들이 뭉쳐서 만든 곳이라고 합니다."
"그래?"
씨드 클랜장이 픽 웃는다.
"아무래도 클랜 아지트를 노리는 놈들이 한두 명이 아닌 모양이군. 읏차!"
공허충의 사체에서 내려간 그가 클랜원들을 향해 소리친다.
"휴식은 끝이다! 다들 일어나! 다른 놈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의 등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다! 공헌도를 더 번다!"
"오오오오!"
쫓는 자, 추월당한 자 그리고 쫓기는 자 등.
저마다 처한 입장과 상황은 달랐으나.
모든 이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클랜 아지트, 반드시 우리가 먹는다!]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에서 시작된 불꽃이 더 크게 타오른다.
* * *
같은 시각.
"으흐흐...."
난 눈앞의 게시판을 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다들 열심히 사냥 중인가 보네.'
실시간으로 바뀌는 공헌도 점수와 클랜들의 순위.
다들 의욕에 불이 붙었는지 순위권 변동 폭이 주식의 장보다 더한 것 같다.
'다들 클랜 아지트가 마음에 들었나 보네.'
미친 듯이 뒤바뀌는 순위와 점수만 보더라도.
저들이 얼마나 클랜 아지트를 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러면 나도 만능 인테리어를 강화한 보람이 있지.'
전에 고요의 탑과의 대결에서 승리한 보상으로 얻었던 '느긋한 아침'.
내가 원하는 능력 중 하나를 강화해 주는 아이템.
난 그것을 엄청난 고민 끝에 만능 인테리어에 투자하기로 결정했었다.
'다른 능력들에 사용하는 것도 괜찮겠지만, 솔직히 다른 능력들은 지금도 충분히 값어치를 해 주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 결정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김인성
Lv: 60
근력: 75(+14)
체력: 48(+4)
지력: 40(+17)
민첩: 32(+6)
보너스 스탯: 0
고유 능력: 편의점 주인
파생 능력: 즉석식품 제조, 인증 마크, 묶음 무적,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 팝업 스토어, '영원한' 편의점 업그레이드(Lv2), 특제 우표, PB 업그레이드
칭호: [기적의 생존자], [엘프들의 영원한 친우], [펜릴의 주인], [숙달된 요리사], [천공의 지배자를 공략한 자], [최초로 50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1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2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3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4층을 돌파한 자], [단신으로 여왕을 몰락시킨 자]....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패시브)
설명: 편의점 내부와 외부를 자유로이 꾸밀 수 있다
내용: 편의점의 모습을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다. 또한 편의점을 예쁘게 꾸미다 보면 특별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다!
특이 사항: 패시브, '느긋한 아침'의 효과가 적용되었다.
새로이 업그레이드된 능력,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
언뜻 설명은 기존에 사용하던 만능 인테리어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고생을 좀 했지.'
변형된 능력의 효과를 알아내기 위해 거듭 실험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알아낸 결과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이었다.
이제는 편의점 인테리어에만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건물의 인테리어를 바꾸더라도 버프 효과가 적용되었으니까.
'하지만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이거란 말이지.'
능력이 변형됨에 따라 새로이 딸려 온 '인테리어 레시피 북'.
이게 또 아주 요물이었다.
책 안에는 수백 개가 족히 넘는 건물의 도면이 있었으며.
필요한 재료를 구하기만 하면 다양한 옵션이 붙은 건물을 짓는 게 가능했으니까.
'재료 구하는 게 좀 귀찮긴 하지만, 그래도 결과물이 좋으니까. 으흐흐....'
선구자들이 58층, 59층을 공략했다는 명목하에 페스티벌을 개최한 건.
내가 만든 클랜 아지트를 시험하고자 함이 컸다.
그리고 현재까지의 반응은 합격!
'공헌도 오름 폭이 말이 안 되긴 해.'
공헌도가 상승하는 속도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공헌도의 상승.
이를 달리 말하면 공략자들의 스펙이 상승하는 것이었으며.
탑의 체급이 올라가는 일이니.
'그건 그렇고....'
난 잠시 고민에 잠겼다.
'그 관리자도 믿어도 되는 거려나?'
전에 우연히 백룸에서 맞닥뜨렸던 관리자.
그녀는 내게 고요의 탑과의 대결 일정을 시작으로.
58, 59층에 대한 정보와 공략법까지 알려 줬었다.
'그 덕에 58, 59층을 빠르게 클리어 한 것도 있지.'
내가 그 정보를 반쯤 흘리듯 선구자들에게 전달했으며.
선구자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손쉽게 층들을 공략했었으니.
'근데 바르바토스도 그렇고 그 여자 관리자도 그렇고, 그렇게 공략법을 막 알려 주는 이유가 뭘까.'
뭔가 원하는 게 있으니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일 텐데.
도대체 그들이 원하는 게 뭔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는다.
'나야 아무런 대가 없이 정보를 얻는 거니 나쁠 게 없다지만. 흠....'
* * *
한편.
"흠...."
본사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입실론.
그녀는 수정구를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잘나간다 싶더니, 또 뭘 하는 거야?"
최근 종말의 탑의 기세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여타의 탑들과 비교하면 꽤 괜찮은 편에 속했다.
그녀가 건넨 정보 덕인지.
종말의 탑은 무서울 정도로 빠른 속도로 58, 59층 공략에 성공했으니까.
근데....
[이번에야말로 홍염에게 승리하는 거다! 망치를 들어라!]
[2등! 아니! 3등이라도! 고지가 코앞이다! 몇백 점 차이 안 난다고!]
[클랜 아지트!]
수정구 속의 공략자들을 보며 미간을 짚는 입실론.
"왜 60층 공략은 안 하고 또 이상한 짓을 하는 거야? 네가 공략을 서둘러야 내가 단서라도 얻을 수 있을 것 아냐!"
그녀의 부사수를 이용하여 종말의 탑에 개입한 존재.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부사수를 소멸한 존재.
지금껏 그녀는 그 존재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본사에 있는 기록의 수정구를 살피거나 신들의 도박장에서 정보를 모으고자 했었다.
'아무런 소득도 없었던 게 문제지만.'
사실 정보를 얻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란 것 정돈 알고 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상대는 그녀보다 상위의 존재이자 주주들 중 하나일 테니까.
'그래서 저 이레귤러가 얼른 공략을 이어 가야 하는 건데....'
주주의 정체는 모른다.
그러나 그가 종말의 탑의 멸망을 원했던 만큼.
종말의 탑이 거듭 공략에 성공하여 앞 순위로 치고 나가거든 필시 움직임을 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레귤러는 그녀의 기대에 부응했다.
'도대체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이 뭔데?'
그놈의 페스티벌인지 뭔지인지가 열리기 전까지는 말이다.
'저 이상한 짓이 탑의 강함의 근간인 건 알겠는데....'
다른 탑과의 전투 그리고 두 번의 압도적인 승리.
그 이면에는 저렇게 이레귤러가 벌이는 이상한 일들이 배경으로 깔려 있는 것일 터.
'그냥 놔둬도 언제고 60층 공략은 하겠다만, 그럼 내가 답답해서 죽을 것 같고. 후, 개입해야 되나?'
이미 전에 이레귤러를 만났을 때 안배는 해 뒀다.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60층 공략 여부도 베팅에 포함되어 있었지. 그렇다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똑똑-
"대, 대대대, 대리님, 제, 제, 제제제, 제가 도, 도, 도와, 드릴 일은...."
바깥에서 부사수의 음성이 들려온다.
다시금 미간을 짚는 입실론.
'최대한 빨리 개입해야겠어.'
* * *
며칠 뒤.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공식 랭킹 현황판]
난 편의점 앞에 세워 둔 게시판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것까지 놓으니까 뭔가 더 이벤트 하는 느낌이 드네.'
현황판은 '패'를 소지하지 않은 이들도 순위를 확인할 수 있도록 만든 나의 작은 배려다.
"오오! 저것 좀 봐! 망치 클랜이랑 지식 클랜이랑 박빙인데?!"
"그러게. 근데 점수 차이가 진짜 크게 안 나는 걸 봐선 언제든 뒤집히는 것 아냐?"
"그럴 수도 있지. 그럼 저 점수가 클랜의 강함을 측정하는 기준이라고 봐도 되는 건가?"
편의점에 방문한 공략자들은 상품을 구입하기도 하고.
게시판을 보며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다.
'영상까지 틀면 딱이긴 한데.'
그러던 그때.
띠링-
[왜곡된 세계가 활성화됩니다.]
갑자기 나의 눈앞에 웬 메시지가 떠오른다.
'왜곡된... 세계? 그게 뭔... 아.'
기억났다.
분명 전에 백룸에서 만났던 관리자가 건넸던 물건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게 왜 갑자기....'
[왜곡된 존재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왜곡된 존재의 초대?
'이거... 설마 관리자가 날 부르는 건가?'
아니, 그것보다 관리자가 이렇게 공략자를 불러도 되는 거야?
바르바토스는 약간의 누설만으로 피를 막 토했었는데.
이 정도면 거의 무조건 죽는 게 아닌가?
'그보다 어쩔까. 초대라....'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생각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층에 대한 정보도 줬던 관리자잖아? 만나서 나쁠 건 없겠지.'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다니합용작 가계세 된곡왜]
그리고 일순간.
세상이 멈춘 듯 고요해졌다.
182화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4)
'이건... 시간이 멈춘....'
그러던 그때.
공략자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까할지차 가누 은등1 다보그]
[?어겠니아 배정 이들자구선 시역 ,음]
누구 할 것 없이 말투가 이상하다.
'...왜 다들 거꾸로 말을 하고 있는 거지?'
거기다가 이상한 건 공략자들의 말투만이 아니었다.
고오오오오오-
'건물들이 뒤집혀 있어?'
아니.
뒤집힌 건 건물들만이 아닌 것 같다.
엘라시움의 자랑인 푸르른 나무들도, 그 위를 오가던 날짐승들도.
[!다한대초 를희너 에엔리드판 전터 의들트엔 ,랑자 의움시라엘 !움우우호]
그리고 엘라시움을 거닐던 엔트들까지.
모든 것들이 거꾸로 뒤집힌 채 활동을 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뭔....'
사실 뒤집힌 건 세상이 아니라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두리번거리는 건 그쯤 해 둬, 그리 시간이 많지는 않으니까."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뒤집힌 세상에서 유일하게 정상적인 목소리를 내는 존재라면....
난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전에 백룸에서 내게 58, 59층에 대한 정보를 줬던 이름 모를 관리자.
금발의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또 정보를 주려고 왔나?'
전에 그녀가 뜬금없이 던져 준 탑과 탑의 대결 정보.
그리고 58, 59층 정보는 정말이지 유용하게 사용했다.
'그러잖아도 60층에 대한 정보가 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는데.'
"오랜만입니다."
"시간이 많지 않으니 짧게 말할게."
관리자가 옅은 미소를 짓더니.
다소 딱딱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어 간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 페스티벌 같은 건 최대한 빨리 마무리 짓고 60층 공략에 집중하는 게 좋을 거야."
"...예?"
60층 공략에 집중하라고?
갑자기?
너무 뜬금없잖아?
'가만....'
저 관리자랑은 이름이 뭔지도 모르는 사이이긴 하지만.
적어도 그녀가 나 그리고 이 종말의 탑에 도움을 준 존재인 건 확실하다.
그렇다면 60층 공략을 강조하는 데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혹시 멸망 예정 기한이 앞당겨지기라도 한 건가?'
난 그녀를 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하하, 페스티벌과 공략은 별개입니다. 그리고 60층 공략도 이미 진행 중에 있고요."
실제로 60층은 선구자들이 공략을 들어갔다.
물론 이제 막 60층에 발을 디딘 거긴 하지만.
"그래.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겠지. 60층은 네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난이도가 높아."
"음."
확실히 그녀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전에 탑들의 순위표를 봤던 당시.
상당수의 탑들이 60층에 묶여 있던 걸 봤으니까.
"그리고 공략이 늦어지면 너희 탑은 멸망하겠지."
"아하...."
난 관리자의 얼굴을 힐끔 살폈다.
전에 내게 정보를 알려 줬을 때처럼.
피를 토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진짜 본사 쪽 관리자인 건가?'
관리자, 그 이상의 힘을 가진 존재.
당장 떠오르는 건 관리자들에게 공고문을 보냈던 조직, '본사' 외에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근데 본사 쪽 관리자가 이렇게 막무가내로 날 만나러 와도 되는 거야?'
만약 탑이 별개의 집단이며.
모든 탑을 아우르는 게 본사라고 한다면....
이건 공정성에 위배가 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괜찮은가? 물론 내게 득이 되는 거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건 그것만이 아니다.
본사가 더 상위의 조직이라면, 그냥 종말의 탑 관리자를 부리면 되는 것 아닌가?
어째서 그녀가 직접 찾아온 건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왜 나를 도와주는지도 의문이었다.
"공략이 늦어지면 멸망한다라.... 그럼 탑과 탑의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리스크를 주는 것도...."
내가 놀란 척하며 말꼬리를 흐리자.
그녀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그려진다.
"제법 눈치가 빠르네. 맞아. 멸망을 가속화하기 위함이지."
"...."
"그러니 일단 60층에 대한 세부 정보와 공략법, 주요 퀘스트를 알려 줄게. 너도 너희 탑이 멸망하는 건 원치 않잖아?"
오호, 60층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나야 마다할 이유는 없지.
"그럼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조금 정보가 많으니 정신 줄 잘 붙들고 있어."
"예?"
입실론이 손가락을 내 이마를 향해 뻗는 순간.
웅웅웅-
'오오오?!'
60층의 구도와 환경 그리고 원주민들과 퀘스트의 종류 등.
방대한 정보의 물결이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다.
'굉장한데?'
솔직히 단편적인 정보만 줘도 기대 이상이라 생각했건만.
아예 층에 대한 정보를 통째로 줘 버릴 줄이야.
난 힐끔 관리자를 바라봤다.
"후...."
역시나 그녀의 상태는 멀쩡해 보인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지원해 주는 이유가 뭘까.'
"정보가 꽤 많군요."
"그래. 알아서 잘 조합해서 60층 공략을 해 봐, 공략은 너희 몫이니까. 60층 공략이 끝나면, 다음 층에 대한 정보들도 넘겨줄게."
"감사합니다. 근데...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이유가 뭡니까?"
나의 물음에 그녀가 피식 웃는다.
"서로의 목적이 일치해서, 라고 생각해 둬."
역시 말해 줄 생각은 없는 건가?
'뭐, 필요 이상으로 질문할 필요는 없겠지.'
정보가 담긴 황금 알을 주는 닭을 구태여 자극할 필요는 없을 터.
"아 참, 그리고 이것도 받아 두고."
그녀가 내게 무언가를 던지자.
난 그것을 확 낚아챘다.
"이건...."
검은빛의 물결이 찰랑이는 것 같은 실타래다.
기억의 실타래
설명: 임의의 힘이 부여된 실타래다.
내용: 능력을 사용할 시, 어떤 장소에 있건 명계로 귀환할 수 있다.
특이 사항: 해당 능력은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이건 좀 예상 밖인데?
설마하니 고정 이동 아이템을 줄 줄이야.
"고정 이동 아이템이군요."
"그래. 네 능력이 무작위 층에 떨어진다는 건 알고 있어. 그러니 그게 도움이 되겠지."
"감사하기는 한데... 이거 장물은 아니죠?"
본래 고정 이동 아이템은 해당 층에서 얻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아이템이 이 자리에 있다는 건.
그녀가 해당 아이템을 훔쳐 왔다는 것 아니겠는가?
"장물?"
픽 실소를 흘리는 관리자.
"그건 내가 직접 제작한 거다."
"호오...."
그래도 되는 건가?
그런 건 종말의 탑 관리자가 해야 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없는 아이템이겠죠?"
"탑 안에서 대놓고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이보쇼.
하자가 있는 물건 맞잖아!
"하지만 크게 걱정할 건 없어. 정보를 왜곡해 뒀으니 다른 존재들에겐 평범한 실타래처럼 보이겠지. 아무튼 60층의 정보를 봤으면 알겠지만, 그곳은 공략자들만으론 클리어 하기 어려운 곳이야."
"그렇긴 하죠."
확실히 정보 속의 '명계'는 공략자들만으로 클리어 하기엔 좀 난감한 부분들이 있었다.
"그러니 네가 60층에서 활동하면 공략에 큰 도움이 되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일단 이 고정 이동 아이템은 사용할 수가 없어요."
"뭐?"
"변형이 안 된 고정 이동 아이템은 못 쓰거든요."
지금껏 고정 이동 아이템을 얻거든.
'종말의 유희'가 아이템에 개입하여 아이템의 효과를 변형시켜 줬다.
그러나 지금 이 아이템은 변형이 되어 있지 않다.
"편의점 출현 층이 60층으로 고정되지 않으면, 고정 아이템은 제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아. 다시 줘 봐."
도로 실타래를 가져간 그녀의 손에서 정체불명의 기운이 흘러나온다.
끼릭, 끼리릭-
그녀의 손 주변의 공기가 일그러졌다가 펴지고 흔들거리길 몇 차례.
"후우... 받아."
지친 기색이 역력한 관리자가 다시금 실타래를 내민다.
왜곡된 기억의 실타래
설명: 임의의 힘이 부여되고 왜곡된 실타래다.
내용: 편의점 주인이 능력을 사용할 시, 편의점 출현 층을 60층으로 고정할 수 있다.
특이 사항: 해당 능력은 한 달에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제한 사항: 불안정한 기운이 가미되어 그 형태가 변질되고 불완전해졌다. (남은 사용 횟수: 3)
'음... 3번 사용을 하면 더 이상 이건 사용할 수 없게 되는 건가?'
그럼 종말의 유희라는 놈은 눈앞의 본사 인물보다 더 높은 직급의 존재라는 건가?
종말의 유희는 아무렇지 않게 아이템의 능력을 변형시켰으니 말이다.
"지금 내 힘으로는 그게 한계야."
"3번이면 충분하죠."
"...그래."
지친 미소를 짓던 관리자가 돌연 눈에 힘을 주며 말한다.
"다른 것보다 60층 공략을 우선시해, 꼭."
"그러죠."
"다음에 여건이 되거든 다시 찾아올게."
관리자가 허공으로 손을 뻗으려던 그때.
난 황급히 그녀에게 물었다.
"잠깐만요. 근데 혹시 성함이...."
"...."
그러나 그녀는 말없이 미소만 지어 보이곤.
홀연히 자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그 순간.
"와! 저니맨 클랜이 3위로 올라섰어!"
"잠깐만! 근데 다시 4위로 내려갔는데?"
"엥?"
뒤집어졌던 세계가 다시금 원래대로 돌아왔으며.
공략자들의 목소리도 정상적으로 들려온다.
'꿈이라도 꾼 기분이네.'
그러나 손안에서 느껴지는 실타래의 감촉이 방금 일이 현실이었음을 인지시켜 준다.
'60층 공략이라....'
* * *
같은 시각.
신들의 도박장.
"...."
한 손으로는 푸른빛의 수염을 쓸어내리고.
다른 손으로는 코인을 만지작거리는 포세이돈.
"흐음...."
얼마나 집중을 한 건지, 두 눈동자는 수정구에 고정되어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그리고 잠시 후.
콰아아아아앙-
포세이돈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려치자.
수정구가 공중으로 높이 떠오른다.
떠오른 수정구에는.
[나태의 탑과 무지의 탑의 '미로의 제단'의 돌파가 종료됐음을 알립니다.]
[결과: 무지의 탑이 '2시간 40분 20초' 더 빨리 미로를 돌파하고 제단을 확보하였습니다.]
[승자는 무지의 탑이며, 해당 탑의 배당률은 1.1입니다. 금액을 정산합니다.]
승자와 패자를 양분하는 결과가 기록되어 있었다.
촤르르르륵-
어디선가 돈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와중.
"이건 사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무지의 탑이 이길 리가 없다!"
포세이돈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쯧쯧, 사기는 무슨? 그러게 적당히 역배에 걸었어야지."
"그렇게 판단력이 흐려서야 원."
그러나 다른 주주들은 그런 그에게 비웃음을 던지며.
포세이돈이 수정구 옆에 쌓아 둔 코인을 살핀다.
"슬슬 자리 접고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어? 그 코인으로 뭘 하겠다고?"
"코인을 다 쓰면... 알지?"
"크윽...."
삼지창에 손을 뻗으려다가 이내 주먹을 꽉 쥐는 포세이돈.
그는 테이블에서 물러나.
바삐 도박장을 돌아다니는 직원에게 고함을 내지른다.
"이봐! 넥타르!"
"예, 예예.... 여여여, 기 있스스습, 니다!"
"...."
벌벌 떠는 두 손으로 황금빛으로 찰랑이는 잔을 내미는 직원.
"입실론은 어디로 갔지?"
"대대대, 대리는... 보보, 본사의 업무를...."
"됐다!"
더 듣고 있다간 답답해서 속이 뒤집어질 것만 같다.
포세이돈은 애써 분노를 억눌렀다.
'남은 코인이....'
"이봐, 내가 지금 게임에 베팅한 코인이 총 얼마야?"
"초, 초, 총 5개의 게, 게, 게임에 베, 베, 베팅을 하셨고, 총 코코, 코인은 1,500코, 코, 코인입니다."
"...."
게임에 들어가 있는 코인이 1,500.
그리고 현재 소지하고 있는 코인이 500.
'이건 좀... 위험하군.'
게임에 들어간 코인이 코인을 벌어 온다면 모를까.
만약 코인을 모두 소진한다면....
더 이상 그는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
지금껏 느껴 보지 못했던 위기감이 온몸을 엄습해 온다.
"이봐, 지금 내가 가장 코인을 많이 건 게임은?"
"1,000코, 코, 코인을 거신, 조조조, 종말의 탑 60층 고고고, 공략 시간 게, 게임입니다!"
"흠."
이 도박장에는 코인을 날로 먹을 수 있는 몇 가지 게임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바로 60층 공략과 관련된 게임이었다.
60층은 모든 탑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층.
그렇기에 언제나 정배가 들어맞았고.
역배 위주로 베팅을 했던 그 또한 이번만큼은 정배에 베팅을 했다.
'3달 안에 클리어가 가능해? 우스운 소리지.'
이번만큼은 반드시 딸 수 있을 거다!
포세이돈은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183화 60층으로!
'음....'
난 집으로 돌아와.
이름 모를 관리자와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어 봤다.
'60층 공략이라, 60층....'
관리자가 내게 주었던 60층과 관련된 정보들.
이건 말이 정보이지, 60층의 모든 것을 망라하는 정보의 집결체였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밀어주는 걸까.'
이미 수차례 생각하고 생각해 봤지만 도저히 관리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다.
"흠...."
"주인, 또 무슨 고민을 그렇게 해?"
고민에 잠겨 있던 나의 앞으로 분신과 깡통이 다가온다.
<새로운 일거리를 구상하는 눈빛임. 주의가 필요함.>
"뭐? 얀마, 그런 것 아냐!"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에 문제라도 생겼어?"
"아니, 페스티벌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지, 참여율도 좋고."
다들 클랜 아지트에 눈이 뒤집힌 건지.
페스티벌은 내 생각 이상으로 경쟁에 불이 붙었으니 말이다.
"그럼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두 녀석에게 탑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줬다.
"그러니까 주인의 말대로라면, 탑들을 총괄하는 본사 쪽 인물이 주인한테 정보를 줬다는 거네?"
"그렇지. 잘 이해했네."
"그럼 좋은 것 아냐? 어쨌건 본사 쪽 존재가 주인을 좋게 보고 있으니까 여러모로 밀어주는 것 아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 많은 탑들 중에서 굳이 우리 탑만 밀어주는 데는 이유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것도 그렇긴 해."
"뭐, 사실 관리자의 의도야 어떻건 나한테도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까 상관은 없어. 내가 고민하는 건...."
<....>
말없이 나를 바라보던 깡통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자그마한 병을 내게 권한다.
<마셔라. 고민이 날아갈 거다.>
"얀마, 그건 참기름이잖아! 흠흠... 아무튼 관리자는 차치하고, 60층 공략에 대해 고민 중이었어."
60층, 통칭 명계.
본사의 인물에게 받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은 지금껏 공략된 층들보다 귀찮은 구석이 있었다.
"무슨 고민?"
"귀찮은 제한들이 좀 있는 것 같거든. 명계에선 감각이 떨어진다거나 아이템 사용에도 제한이 있는 것 같고."
"오... 그건 좀 골치 아플 것 같은데."
"개중 가장 큰 건 일부 능력들에 제한이 걸린다는 거야."
영혼 상태가 아닌 존재들은 능력의 사용에 강력한 제한이 걸리는 제약.
이건 좀 문제란 말이지.
묶음 무적의 효과를 받고 있는 나도 피해 가기 어려운 제약이라니.
"주인의 능력은 무적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능력에서 기반한 힘이잖아? 능력 자체에 제약이 걸리면 골치가 아파지는 거지."
"음... 그럼 그 제약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난 고개를 저었다.
"혼령 상태가 되면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것 같긴 해."
"혼령 상태? 죽어야 된다는 거야?"
"아니. 죽으면 끝이야."
"엥?"
공략자들은 목숨을 잃는다고 혼령이 되는 게 아니다.
그걸로 끝.
그렇기에 저 제약이 골치 아픈 거다.
"그럼 제약을 벗어날 수가 없는 거잖아? 다른 방법은 없어?"
"없어."
"와... 그럼 능력에 제한이 걸린 상태로 단서의 파편 퀘스트를 찾고 또 도전해야 한다고?"
혀를 내두르는 분신.
"그래서 일단 레벨을 올리려고."
"레벨을?"
"제약되는 능력은 랜덤인 것 같거든. 그러니 가짓수를 늘리면 괜찮지 않을까 해서."
묶음 무적, 팝업 스토어 같은 전투 능력이 제약되지 않는다면.
활동하는 데 지장은 없을 터이니.
"어차피 슬슬 레벨도 올릴 생각이었으니까, 이참에 한번 쭉 올리려고."
"...돈 엄청 깨지는 것 아냐?"
난 분신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아마 그러겠지? 하지만 지금껏 벌어들인 게 얼만데?!"
갤러리와 카페 그리고 편의점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돈은 막대했다.
단위가 10만 골드를 넘어선 이후론 세는 걸 포기할 정도였으니.
"엄청 쌓이긴 했지. 근데 주인, 지금껏 돈을 아낀 이유라도 있는 거야?"
"오늘 같은 날이 생길까 봐."
"아아...! 근데 보험금치곤 좀 많은 것 같은...."
난 분신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두 손을 비볐다.
'슬슬 레벨을 올려 볼까!'
"금화 적립."
띠링-
[금화 적립을 사용합니다. 50골드를 사용하여 레벨을 올리시겠습니까?]
"당연하지!"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레벨이....]
.
.
.
금빛 물결이 내 주변에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길 몇 차례.
[65레벨 이후로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선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40,000골드입니다.]
'4만 골드?'
난 실소를 흘렸다.
어디, 오늘 어디까지 레벨을 올릴 수 있는지 보자고.
[40,000골드가 차감됩니다.]
[능력, '개발 매니저'를 획득하셨습니다.]
'오오오! 개발 매니저?'
새로운 능력의 효능이 너무 궁금하긴 하지만.
일단 레벨을 마저 올리고 확인해야겠다.
[레벨이 1 올랐습니다.]
[레벨이....]
.
.
.
[70레벨 이후로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선 추가 비용이 발생합니다.]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 필요한 금액은 80,000골드입니다.]
'8만 골드? 우습지!'
[80,000골드가 차감됩니다.]
[묶음 무적 → 묶음 무적(2단계)으로 강화됩니다.]
'오오! 묶음 무적이 강화된 건 좋은데?!'
내 주력 능력의 강화는 언제든 환영하는 바였으니까.
하지만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계속 간다!'
[160,000골드가 차감됩니다.]
[PB 업그레이드 → PB 업그레이드(2단계)로 강화됩니다.]
.
.
.
[320,000골드가 차감됩니다.]
[능력, '무인 점포'를 획득하셨습니다.]
'후우... 일단은 여기까지 할까.'
레벨이 80에 이르러서야 난 금화 적립의 사용을 멈췄다.
'엄청 썼네.'
약 60만 골드.
엄청난 거금을 사용하여 금화가 거의 남지 않은 탓도 있었으나.
내가 레벨을 올리는 걸 멈춘 건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띠링-
[레벨이 80을 돌파하였습니다. 더 이상 금화를 사용하여 레벨을 올릴 수 없습니다. 시스템 금화 적립이 소멸합니다.]
[새로운 시스템, 업적 적립이 개방됩니다.]
'금화 적립이 소멸한다고?'
20레벨 이후로 지금껏 나의 레벨 상승을 책임져 왔던 금화 적립이 소멸한다니.
'근데 업적 적립은 뭐지?'
아마도 새롭게 레벨을 올리는 시스템인 것 같긴 한데....
'일단 바뀐 능력들이랑 새로 생긴 능력 그리고 업적 적립부터 확인해 보자.'
김인성
Lv: 80
근력: 75(+14)
체력: 48(+4)
지력: 40(+17)
민첩: 32(+6)
보너스 스탯: 20
고유 능력: 편의점 주인
파생 능력: 즉석식품 제조, 인증 마크, 묶음 무적(2단계),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 팝업 스토어, '영원한' 편의점 업그레이드(Lv2), 특제 우표, PB 업그레이드(2단계), 개발 매니저, 무인 점포
칭호: [기적의 생존자], [엘프들의 영원한 친우], [펜릴의 주인], [숙달된 요리사], [천공의 지배자를 공략한 자], [최초로 50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1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2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3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4층을 돌파한 자], [단신으로 여왕을 몰락시킨 자]....
특이 사항: 시스템, 업적 적립이 적용 중입니다.
'먼저 능력들을 좀 살펴볼까.'
시스템, 업적 적립도 궁금하긴 했지만.
우선 새로 생긴 능력들과 바뀐 능력을 확인하고 싶다.
묶음 무적(2단계)
설명: 할인과 묶음 판매는 물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내용: 편의점 안에서만 적용되던 '무적 효과'를 바깥에서도 적용받을 수 있다. 사용자가 공격을 할 경우, 묶음 무적의 효과가 1회 차감된다.
특이 사항: 묶음 무적의 사용 횟수는 1+(2×α)이다. 근력을 올려 묶음 무적의 사용 횟수를 올릴 수 있다. 사용 횟수는 근력의 10 단위로 증가한다.
현재 사용 가능한 횟수: 1+14회
제한 사항: 묶음 무적을 모두 사용할 시, 24시간 뒤 재적용된다.
'오오? 잠깐만!'
설명이나 능력 자체는 기존의 묶음 무적과 차이가 없었지만.
사용 가능한 횟수가... 15회?!
'2단계가 되면서 횟수를 올리는 게 2배가 됐잖아?!'
본래 지금의 근력으로 늘어나는 묶음 무적의 횟수는 7회.
그러나 지금은 2의 배수가 적용되어 무려 14회까지 늘어난 모습이었다.
'좋은데?!'
능력의 단계가 오르면서 이 정도로 능력이 상향될 줄이야.
'다른 능력도 얼른 봐야겠어!'
PB 업그레이드(2단계)
설명: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만의 독자적인 상품을 만들어 보자!
내용: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물품에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의 스티커를 부착할 수 있다.
'PB 업그레이드는 당장 눈에 보이는 변화는 없네.'
설명이 기존의 능력과 똑같았으니.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니까.'
PB 스티커를 붙여도 변화가 없던 상품들에 변화가 생긴다든지.
다룰 수 있는 상품의 가짓수가 늘어난 걸지도 모른다.
'그건 나중에 실험을 해 보는 걸로 하고....'
난 미소를 지은 채 다음 능력들을 살폈다.
개발 매니저
설명: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만의 독자적인 상품 개발을 위하여!
내용: 신규 상품 개발에 특화된 매니저를 소환할 수 있다.
무인 점포
설명: 이제는 바야흐르 대무인의 시대! 시대의 발걸음에 맞춰 점포를 관리해 보자!
내용: 무인 점포를 운영 및 관리 할 수 있다.
'호오... 이 능력들은 예상한 거랑 비슷한 모양이네.'
개발 매니저와 무인 점포.
둘 다 당장 테스트를 해 보고 싶을 정도로 그 능력들의 효능이 궁금하다.
'무인 점포는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거고, 매니저는 소환하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러나 난 호기심을 겨우 억누르곤.
마지막으로 업적 적립을 확인했다.
업적 적립
설명: 위대해지기 위해선 위대한 업적들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내용: 능력, 편의점 주인의 보유자는 80레벨 이후부터 업적 적립을 이용하여 레벨을 올릴 수 있다.
특이 사항: 다음 레벨인 81레벨 달성에 필요한 업적의 개수, 1.
'...필요한 업적의 개수?'
레벨을 올리는 데 업적이 필요하다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어떻게 해야 업적을 올릴 수 있다는 건데?
"흠...."
아무래도 테스트 기간이 조금 길어지겠는걸.
* * *
며칠 뒤.
'슬슬 출발을 해 볼까.'
지난 며칠간 새로이 얻은 능력들과 변화한 능력의 테스트는 얼추 끝냈다.
이제 60층으로 원정을 떠날 차례다.
'가 볼까.'
모든 출발 준비를 끝마친 난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힘껏 돌렸다.
철커덕-
[왜곡된 기억의 실타래의 능력이 작용합니다.]
[편의점의 출현 층이 60층으로 고정됩니다.]
[왜곡된 기억의 실타래의 남은 횟수는 2회입니다.]
* * *
화아악-
익숙한 편의점의 내부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난 곧장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장사를 하러 온 게 아니니까.'
왜곡된 기억의 실타래의 효능이 작동한 걸 봐선.
분명 60층에 도착하긴 했을 텐데.
'일단 명계의 어디로 떨어졌는지부터 확인을 할까.'
정보에 의하면.
명계도 각각의 구역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일단 내가 명계의 어떤 곳에 도착했는지부터 확인을 해야 할 터.
딸랑-
난 문을 열곤 천천히 바깥으로 나갔다.
'오오, 여긴....'
그리고 내가 바깥을 채 구경하기도 전에.
띠링-
[명계에 진입하였습니다.]
[일정 능력과 아이템들의 효과가 봉인됩니다.]
'오....'
명계에 왔음을 알리는 격한 환영 메시지가 나를 반겨 온다.
그래, 이런 능력 제약형 층이 언젠가 나올 거란 건 이미 각오했던 바다.
당연히 대책도 세운 상태.
그건 바로....
'무적이 막히면 튄다...!'
심플 이즈 더 베스트.
너무 당연한 이야기다.
나는 무적이 없으면 그저 현대인 1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다음은....
'선구자들과 내가 키워 온 수많은 공략자들을 믿어 보는 수밖에.'
다시금 안내 메시지가 출력된다.
[봉인된 능력과 아이템들은 명계를 벗어나기 전까지 해제되지 않습....]
'음?'
칙... 치지지직....
뭔가 타다가 마는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다시금 메시지가 이어진다.
[...니다만, 그런 사소한 제약을 묶음 무적이 처참히 박살 내었습니다.]
'음?'
184화 60층, 명계 (1)
무적과 제약.
그것은 완벽한 모순(矛盾).
제약이라는 창과 무적이라는 방패 중 어느 쪽이 더 강한가라는 질문에.
시스템은 친절하게 답을 주었다.
'음, 그러니까... 방패가 창을 때려 부쉈다는 거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내가 했던 고민이 이토록 수월하게 해결됐으니.
더 이상의 생각은 시간 낭비다.
'그보다 여기가....'
난 고개를 들어 편의점 앞으로 펼쳐진 전경을 바라봤다.
'오?'
전방으로 드넓게 펼쳐진 강이 보인다.
강의 가장자리에는 수많은 원주민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서 있는데.
마치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만 같다.
'어디에 왔나 했더니, 브로드강이었구나.'
브로드강.
명계와 이승을 가르는 경계선이자.
명계로 가는 수상 열차를 탈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곧바로 1계로 떨어졌다면 좀 더 편했을 것 같긴 한데.'
단서의 파편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선.
1계로 가야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차피 가야 할 길이라면 즐겨야지.'
기왕 브로드강에 떨어지게 됐으니.
명계의 수상 열차를 타 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터!
'내가 언제 또 물 위를 달리는 열차를 타 보겠어?'
난 고개를 들어 편의점을 흘낏 올려다봤다.
'음, 외출이 좀 길어지겠는데.'
철컥-
'후, 가 볼까! 살짝 설레네.'
공략자가 되어 본격적인 공략에 나서는 게 얼마 만인지.
난 문을 단단히 잠그곤 몸을 돌렸다.
* * *
수상 열차를 타기 위해서는, 일단 표를 사야 한다.
난 기차 옆에 자리하고 있는 둥근 지붕의 건물을 올려다봤다.
<모비딕 수상 열차 매표소>
[일반 표로 하나 주세요!]
[저도 일반 티켓으로 하나만....]
이미 매표소를 가득 에워싸고 있는 원주민들.
대부분은 일반 표를 구매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가격이....'
<특급 표 - 200카르마 / 10,000골드>
<우등 표 - 100카르마 / 5,000골드>
<일반 표 - 50카르마 / 2,500골드>
'호오... 진짜 이곳은 화폐 단위가 다르네.'
지금껏 모든 층들이 골드만을 사용했던 반면.
이곳에선 카르마를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골드로 대체가 되니까 다행이긴 한데... 특급 표가 1만 골드라고? 선 넘네.'
저 금액은 최상위 공략자들조차 쉽게 구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그렇다고 일반 표를 구매하는 건 미친 짓이고.'
표의 등급이 나뉜 건.
단순히 좌석의 질이 좋다든가 좋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든가의 이유 때문이 아니다.
수상 열차가 명계에 도달하기까지.
총 5개의 역을 지나치게 된다.
[방랑자들의 숲]
[인고의 저울]
[고통의 수레]
[피의 축제]
[만월의 밤]
이름만 들어도 뭔가 있어 보이는 역들.
참고로 이 역들에는 모두 매표소가 있다.
왜냐고?
만약 특급 표를 사지 않으면 중간에 이 역들에 강제로 내렸다가 다시 표를 사야 하거든.
더 정확히 말하면, 표마다 갈 수 있는 거리가 정해져 있다.
일반 표는 1정거장.
우등 표는 2정거장.
즉, 일반 표를 사면 매 정거장마다 내려서, 퀘스트를 깨서 카르마를 벌고 그 카르마로 다시 표를 사야 하는 식이다.
'와... 동선 진짜 거지같이 짜 놨네'
예상되는 공략자들의 고난에 혀를 내두르는 중.
주위에서 원주민들의 수군거림이 들린다.
[요즘 표 가격이 아주 환장혀....]
[그러게 말여. 옛날 카룬 님이 계실 때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디 말이여.]
[쉿! 카룬 얘기는 하지도 말어! 괜히 들키면....]
아하.
무슨 말인지 눈치챈 나는 피식 웃었다.
설정상으로, 수상 열차의 기관사 겸 관리자는 원래 '카룬'이라는 자였고, 그에게는 부기관사가 있었다.
그리고 부기관사가 기관사를 몰아냈다는 전형적인 이야기.
'하지만 여기에 더 깊은 이야기가....'
[다음!]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내 차례가 되었다.
[네놈은... 육체가 있군.]
놀랍게도 기관사이자 관리자인 모글리는 매표원까지 겸하고 있었다.
거대한 몸뚱어리의 거대한 눈알이 나를 주시한다.
"예, 뭐."
[흐음.]
모글리가 묘한 웃음을 짓더니.
손가락을 딱! 하고 튕기자.
가격표의 숫자가 후루룩 뒤집혔다.
<특급 표 - 2,000카르마 / 100,000골드>
<우등 표 - 1,000카르마 / 50,000골드>
<일반 표 - 500카르마 / 25,000골드>
[미안하지만, 육체는 무겁거든. 가격도 당연히 오를 수밖에.]
"그런가요?"
[그래. 꼽나? 꼬우면 영혼 상태로 오든가. 그러면 영혼 가격으로 해 주지.]
"아뇨, 별로 그렇지는 않은데...."
꼬울 리가 있나.
설정이 그렇다는데 뭐 어쩌겠어?
하지만 말야. 나도 좀 궁금한 게 있거든.
나는 씨익 웃으며.
입실론에게서 받은 정보 중 '금기어'를 내뱉는다.
"...예전 카룬 님 계실 적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말이죠."
우뚝.
순간 모글리와 주위 원주민들이 정지한 느낌이 들더니.
원주민들이 우수수수 빠져나간다.
어느새 매표소에는 모글리와 나만이 남았다.
[아, 그래? 예전엔 어땠기에 그러나?]
모글리가 목을 한번 꺾더니, 매표소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며 묻는다.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쨌긴요. 이름조차 없었던 쓰레기 하급 망령이, 카룬 님에게 일을 열심히 배웠죠."
[그런가? 그런 망령이 있었나?]
"그럼요. 카룬 님은 그 망령을 어여삐 여겨 중히 썼는데, 그만 그 망령이 수상 열차의 심장을 욕심냈지 뭐예요?"
[....]
"욕심만 많지 능력은 없던 망령이, 수상 열차의 엔진 문을 열고 심장을 덥석 집어삼켰어요."
[....]
여기서 '추가 금기어'까지 가게 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걸 말하기로 했다.
"그리고, 망령은 오히려 거꾸로 잡아먹혔습니다. 수상 열차의 심장 '모글리'에게요. '모글리'는 카룬까지 잡아먹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카룬을 어딘가에 봉인해 두었죠."
[...재밌는 이야기군.]
"어떻게, 푯값으로는 충분한가요? '모글리' 님?"
[아주 재미있어. 이 정도면 특급 표보다 더 좋은 걸 줘야겠는데.]
모글리가 나에게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지옥행 열차표라는 흔해 빠진 설정은 아니겠지?"
[티가 많이 났나?]
"그렇게 힘을 주고 다가오는데 모를 수가 있나."
모글리의 몸이 마치 열차 엔진처럼 달아오르고 있었다.
붉은색, 푸른색에 이어.
백염을 넘어, 투명한 불꽃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모글리.
내 앞까지 다가온 그가 눈을 희번덕거렸다.
[소멸시키기 전에, 이건 들어야겠군. 단언하는데, 나는 너에게 표를 판 적이 없어. 우리는 초면이다.]
"...."
[그런데 넌 이런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알았지?]
어떻게 알긴.
다 인맥이지.
나는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모글리에게 설명하는 대신.
웃으며 말했다.
"명계까지 태워 주면, 명계에서 말해 주지."
그 이야기를 들은 모글리도 씨익 웃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그냥 그 이야기를 잘 싸 들고 가서 지옥에서 풀어놓도록 해.]
일순간 모글리의 몸을 뒤덮고 있던 투명한 불꽃이 사그라진다.
그리고 내가 직면한 건.
시야를 뒤덮는 거대한 주먹이었다.
쇄애애애애애액-
폭주한 기관차처럼 엄청난 속도로 날아드는 주먹을 보며.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려 댔다.
콰아앙!
[하하! 찰지구나!]
손맛을 본 놈이 씨익 웃고는.
다시 힘을 끌어 올린다.
삐익! 삐이이익!
몸에서 울려 퍼지는 기차 소리와 함께, 놈이 난타를 시작했다.
[우자우자우자!]
쏟아지는 주먹 세례에.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려 댄다.
쾅쾅쾅쾅!
[우자우자우자우자우자우자우자우자!]
쾅쾅쾅쾅쾅쾅쾅쾅쾅쾅!
쾅쾅쾅....
[우자우자우자... 헉, 헉 헉....]
"끝이야? 여긴 마사지사 실력이 영 별로네. 팁은 없는 걸로."
[너, 너, 대체 뭐냐. 뭐 하는 놈이야.]
헉헉대던 놈이 한 발 물러서서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뭐긴 뭐야, 손님이지."
[...물은 내가 멍청했군. 하앗!]
놈은 그새 기운을 좀 보충했는지.
이번에는 숨을 모으고는, 그것을 드래곤 브레스처럼 뿜어냈다.
펑-
백열 광선이 내 얼굴을 덮친다.
[하하하, 어리석은 놈. 수만, 수십만이 넘는 망령들을 태우고 태워서 만들어진 '염화'다. 한번 불이 붙으면 절대로 꺼지지 않지. 염화를 광선으로, 그것도 직격으로 맞았으니 머리가 녹아 버렸겠....]
아쉽게도 아직 머리가 멀쩡하던 나는.
놈의 말을 무시하곤 머리를 한번 털고 나서.
몸에 붙은 불을 툭툭 털어 냈다.
티디딕-
'염화'라는 말이 무색하게.
투명한 불은 옷에 달라붙은 벌레처럼 쉽사리 떨어져 나갔다.
"더 센 건 없나? 이제 내 차례로 봐도 돼?"
얼마나 당황한 건지.
거대한 눈동자가 파르르 떨린다.
[네놈... 도대체 뭔....]
난 발뒤꿈치에 힘을 줬다.
그러곤 삽시간에 모글리의 앞에 당도하여 빙긋 미소를 지었다.
"명계의 수상 열차 엔진도 별것 아니네. 차라리 우리 집 안마기 모터가 더 세겠어."
[이 건방진....]
"아, 얘기는 여기까지. 시간 낭비잖아."
난 이미 옆구리까지 당겨 둔 팔을 힘껏 내질렀다.
쩌어어어어어어어억-
[끄으으으으... 오오오오오오!]
박살 난 모글리의 사체에서 빛이 터져 나온다.
터져 나온 빛이 수상 열차 쪽으로 빨려 들어가자.
열차가 환하게 명멸했다.
잠시 후 열차를 감싼 빛이 사그라지고, 열차 문이 열렸다.
열차에서 내린 것은 등이 살짝 굽고 꼬장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몇백 년간 봉인된 것치곤 꽤나 멀쩡해 보이네.'
[네 녀석이냐?]
"예?"
[네 녀석이 모글리를 해치웠냐, 이 말이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큼큼, 일단은 고맙다고 해 두마.]
간단히 감사를 표하곤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가는 카룬.
[먼저, 제일 중요한 것부터 말하마.]
"뭔가요?"
[내가 방심해서 진 거지, 제대로 싸웠으면 이겼어.]
"아."
아무래도 이 할아버지도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수상 열차 쪽으로 주먹을 내질러 보이는 카룬을 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카룬이 헛기침을 한다.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어쨌건 도움을 입었으니 나도 무언가 답례를 하긴 해야겠는데, 내가 딱히 보답할 만한 건 없고... 아, 그래! 그게 좋겠군!]
카룬이 손뼉을 탁 친다.
[자네랑 비슷한 존재들에겐 푯값을 3분의 1만 받도록 하지.]
"저랑 비슷한 존재요?"
[그래. 순수한 생명도, 그렇다고 순수한 영혼도 아닌 존재 말이다.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띠링-
[카룬이 푯값 할인 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공략자들은 표를 3분의 1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됩니다.]
[할인 행사의 기간은 무기한입니다.]
'오오! 됐구나!'
3분의 1의 할인 행사.
그렇단 건 특급 표도 할인을 받으면 얼추 3,300골드 정도일 테니.
공략자들도 큰 부담 없이 특급 표를 구매할 수 있으리라.
"하하, 고맙습니다!"
[됐다. 그보다 곧 열차가 출발할 거니 얼른 타기나 해라.]
난 틱틱대먼서도 다 설명을 해 주는 카룬을 뒤로하고.
질서를 지키며 수상 열차에 올랐다.
'오호.'
열차의 내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깔끔했고 또 단출했다.
'진짜 열차의 내부 같네.'
[와아아아아! 특급!]
자신들이 받은 특급 표의 정체가 뭔지도 모르면서.
정신없이 복도를 뛰어다니는 아이들.
[....]
[괘,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아이들과 달리 대부분 일반과 우등 표를 구매한 어른들은 저마다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표를 내려다보고 있다.
치이이이익-
[관제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지금부터 저희는 총 5개의 역을 지나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길 보내시길.]
카룬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자.
뿌우우우우우, 철커덕, 철커덕-
기다란 신호음과 함께 수상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오오....'
이 열차가 철도도 없는 강 위를 달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뭔가 더 설레는걸?
난 슬쩍 창밖을 바라봤다.
짙은 어둠만이 홱홱 지나가는 와중.
[사, 살려....]
[우루루루루룹....]
강 위로 사람의 손 같은 것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자.
'...운치는 없네.'
난 슬며시 커튼을 쳤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치이이이이익-
[관제실에서 알려 드립니다.]
다시금 스피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감았던 눈을 떴다.
'자리가 많이 비었네.'
분명 처음 출발할 때는 만석의 열차였건만.
아마도 일반, 우등 표 소지자들은 표 검수원들에 의해 각각의 역에 내렸으리라.
[저희는 '만월의 밤'역에 이어, 목적지인 명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무쪼록 즐거운 여행길 보내시길.]
185화 60층, 명계 (2)
끼이이이익-
수상 열차가 멈추자.
난 다른 원주민들과 더불어 열차에서 하차했다.
[우와아아아!]
[같이 가!]
그저 신이 나 뛰어가는 아이들.
목적지가 어디인지는 아는 걸까.
[가는 거냐?]
그래도 열차에 있는 동안 나름 대화를 나눈 덕일까.
어느새 열차에서 나온 카룬이 입에 곰방대를 문 채.
내게 인사를 건네 온다.
"가야죠. 건강하세요, 어르신."
[어르신은 얼어 죽을.... 아직 청춘이다, 이놈아!]
투덜거리며 다시금 열차에 오르는 카룬.
[뭣 하러 산 놈이 죽은 놈들 사이에서 부대끼려는 건진 모르겠다만, 즐거운 여행 해라.]
"다음에 기회가 되거든 또 뵙겠습니다, 어르신."
[또 보자고?]
카룬이 픽 웃는다.
[뭐, 네가 날 기억한다면 말이다.]
치이이이익-
그 말을 끝으로 카룬은 하얀 연기를 내뿜는 수상 열차와 함께.
삽시간에 강 너머 어둠으로 사라졌다.
'나도 가 볼까.'
'명계역'이라는 글자가 적힌 낡은 나무 간판을 지나 역 밖으로 나가자.
'오오...!'
꽃들이 화사하게 만발한 널따란 정원이 보인다.
짹-
꽃들 사이를 누비는 이름 모를 자그마한 새들.
먼저 정원에 들어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꽃 내음을 타고 흩날리는 듯하다.
'예쁘긴 하네.'
하지만 이 정원에 발을 디미는 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은 아닐지도 모른다.
[꽃이 참 아름답군. 누가 심은 걸까?]
[이봐! 이... 어? 이봐, 자네 이름이 뭐였더라?]
[그게 무슨 소리야? 열차 안에서 알려 줬잖아! 내 이름은... 뭐였지?]
정원에 들어선 원주민들의 당혹해한 음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레테의 정원>
저곳에 들어선 영혼들은 생전의 기억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된다.
자신이 누구였는지, 어떠한 존재였고 뭘 했었는지도 말이다.
물론, 공략자에게는 효과가 좀 바뀌어 적용된다.
'육체를 가졌기에, 망각이 절반만 작용한다.'는 콘셉트랄까.
[저주, 망각의 향이 당신의 몸을 뒤덮습니다. 능력치를 일정 비율 봉인당합니다.]
[묶음 무적이 적용 중입니다. 저주를 파훼합니다.]
능력 봉인에 이은 스탯 봉인.
명계를 '통곡의 벽'으로 만들어 주겠노라고 관리자가 자신했다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상관없다.
나한테는 묶음 무적이 있거든.
난 턱을 쓸어내리며 레테의 정원을 바라봤다.
'기회를 보아 없애 버려야겠는데. 아냐. 이걸 없애면 영혼들의 기억을 없애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다른 문제가 일어날 수도 있으니....'
'나비효과를 고려하면, 일단은 다른 길을 만드는 쪽이 낫겠군. 길을 만들고, 저주가 그 길을 피해 가는지를 확인해야겠어.'
그러던 그때.
정갈하고도 새하얀 예복을 입은 일단의 존재들이 정원으로 걸어온다.
[새로운 시작의 장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자, 이쪽으로 오실까요?]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저들은....'
명계에서 환생을 담당하고 있는 사신들.
통칭 '환신'이라고도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저희를 어디로 데리고 가려는 겁니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절대로 위험한 곳은 아니니까요.]
그렇겠지.
이후 환신들이 모든 기억을 망각한 영혼들을 데리고 갈 곳은.
잠시간 영혼들이 머무르며 쉬는 안식처 같은 공간일 터이니.
[그런데 당신은....]
내 몸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환신들.
[살아 있군요.]
[어떻게 산 자가 5개의 시련을 통과한 거죠?!]
"아, 특급 표를 이용했습니다."
환신들의 두 눈이 다시금 휘둥그레진다.
[생전에 굉장히 많은 선행을 베푸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이곳은 산 자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인데 어떻게....]
"으읏...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나의 혼신의 콘셉트 플레이에.
환신들 중 하나가 질문을 던진 환신을 째려본다.
[그만 물어봐. 이제 막 망각해서 혼란스러울 거라고!]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산 자가 이곳까지 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만약 명왕님의 결계가 약해진 거라면....]
[쉿! 조용히 해.]
동료를 제지한 환신 하나가 내게 웃으며 말한다.
[많이 당황스러우실 거예요. 하지만 이곳에 머물다 보면 그 당혹스러움도 금방 잊히겠죠. 일단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후에야 환신이 발을 멈추었다.
[여러분, 이곳은 앞으로 여러분이 머무르게 될 여로의 광장입니다.]
'오오오! 멋진데?'
난 두리번거리며 광장의 정경을 살폈다.
기초적인 양식이나 계획과는 거리가 먼.
울룩불룩하거나 그 끝이 삐뚤빼뚤한 기묘한 집들이 도보를 따라 세워져 있다.
[악령을 깨끗하게 정제하여 만든 식칼이 겨우 5카르마!]
[포르치치의 가죽으로 만든 옷 좀 보고 가세요!]
도보 주변에 노점을 열고 장사 중인 수많은 원주민들.
그리고 그러한 노점을 이용하는 이들.
영혼들이 오는 명계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현실과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저... 혹시 저희는 이곳에서 뭘 하면 되는 건가요?]
[여러분은 5개의 시련을 통과한 깨끗한 영혼들입니다. 그러니 이곳에서 좋을 대로 시간을 보내시면 됩니다. 저들처럼 물건을 만들어 장사를 하셔도 좋고, 아무 생각 없이 쉬셔도 좋습니다. 그저 일상의 행복이 지겨워질 때까지 이 시간을 만끽하세요.]
[혹시라도 바로 새로운 시작을 원하시는 분들은 저희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거의 자유여행 수준으로 영혼들에게 자유를 허락하는 환신들.
그러나 구경은 나중이다.
우선적으로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난 도보 뒤편의 골목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약 두 시간 뒤.
'쓰으읍....'
난 골목에서 나서 고개를 저었다.
'이게 안 되네.'
단서의 파편 퀘스트는 수행이 불가했다.
[퀘스트 수행 불가 대상입니다.]
[단서의 파편 퀘스트 '손녀를 죽인 악령에게 복수를!'의 수행이 불가합니다.]
공략석에 이름을 새길 수 없다는 걸 알았을 때.
이런 일도 벌어질 수 있을 거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건만.
'일단 레테의 정원의 우회로 작업을 좀 해 볼까....'
몸을 돌리려는데.
마침 내 앞을 지나치는 환신들의 대화가 들려 왔다.
[대마령? 그런 게 진짜 있어?]
[대장이 그랬다니까? 대장은 현장에도 있었다고 하니까 진짜 아니겠어?]
내 앞을 지나치는 환신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대마령?'
이거, 뭔가 귀가 솔깃한데.
* * *
같은 시각.
백색의 벽과 기둥이 균일하게 세워진 공간.
각각 검고 새하얀 의복을 입은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요즘 0계는 좀 어떤가?]
명왕의 물음에 암왕이 한숨을 내쉰다.
[영혼들이 가득 들어차서 감당이 안 되는 수준이야. 이러다가 곧 만석이 되겠어.]
0계는 카르마가 역행한 자들만이 오는 징벌의 계.
시련을 통해 다시금 환생의 기회를 얻는 영혼들과 달리.
0계에 오는 이들에겐 그러한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오직 영겁의 고통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
[그만큼 세상이 악으로 물들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렇다고 해도 그렇지, 정도가 심해.]
암왕이 이렇게 앓는 소리 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명왕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진다.
[이러다가 또 대마령 같은 놈이라도 탄생한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
대마령.
한때 명계를 쑥대밭으로 만든 악령으로서.
지금 명계를 두르고 있는 결계는 오직 그놈을 봉인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건 우리가 방심해서 생긴 일일 뿐이야. 그런 일은 다시는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게!]
암왕이 술잔을 탁 내려놓으며 단호히 말한다.
[그래, 그렇지. 하지만 놈이 남긴 저주가 지금도 명계 전역에 퍼져 있잖나?]
역행의 저주.
대상이 갖고 있는 힘을 거의 토막 내는 수준의 저주로서.
저주에 노출되면 명계의 통치자인 그들마저도 힘이 깎여 나갈 정도로 강력했다.
[그래서 결계를 만든 거잖나? 영혼들은 안전하고, 순리가 역행하는 일은 없을 거네.]
다행히 결계의 힘으로 명계의 영혼들은 저주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영혼 외의 존재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렇기는 하지.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모양이야.]
[자네가 그렇게 반응해서야, 앓는 소리도 못 하겠군.]
[그만큼 충격이 컸던 일이었잖나?]
[잔이나 들게.]
* * *
55층.
선구자들의 임시 클랜 아지트.
"...."
모두의 표정이 무겁다.
침묵만이 맴돌던 중.
실비아가 침묵을 찢고 입을 뗀다.
"60층 공략은... 포기하는 게 어때?"
"뭐?"
쌍심지를 세운 이지수의 눈동자가 실비아에게 향한다.
"나라고 좋아서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닌 것 알잖아. 당연히 넌 어떻게든 공략할 방도를 찾자고 할 테니까, 난 그에 반대되는 의견을 내는 것뿐이야. 의견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계속해 봐."
이지수의 눈빛이 한결 차가워지자.
실비아가 계속 말을 잇는다.
"알다시피 척후, 전열의 중요성은 다들 알고 있을 거야."
"...중요하지."
정찰은 모든 일의 기본 중 기본이요.
전열에서 적들을 상대하는 탱커의 중요성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근데 우린 중요하면서도 기본적인 두 가지를 모두 잃었어. 아니, 전력의 반이 날아갔다고 봐야겠지."
"그건...."
"이 상태로 계속 공략을 강행했다간, 다른 놈들은 몰라도 전열을 맡은 놈들 목숨은 장담 못 해. 얼굴에 아가리만 달린 유령이 베이프의 방패를 한입에 부수는 것 봤지?"
"으음...."
실비아의 말이 맞다.
선구자들이 60층에 진입한 순간.
[명계에 진입하였습니다.]
[일정 능력과 아이템들의 효과가 봉인됩니다.]
갑자기 메시지가 뜨며 선구자들의 능력들 중 일부가 봉인되었으니까.
특히 실비아의 경우.
그녀의 주 능력 중 하나인 '대천사의 축복'이 봉인되었으니.
"난 대천사의 축복, 성스러운 성가, 완벽한 해주, 이 능력들 말고도 여러 개가 봉인됐어."
"난 다른 것보다도 천리안을 봉인당한 게 너무 뼈아프긴 해. 그게 없으면 정찰이 어려워져."
"나도 오감각이...."
"나는...."
심지어 그녀뿐만이 아니라.
저마다 여러 능력들을 봉인당한 터라 60층에서의 활동은 더욱 쉽지 않았다.
"거기다가 이번 원정으로 확실하게 확인했잖아? 60층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간다고 해도, 봉인된 능력만 다시 재봉인된다는 걸 말이야."
이지수를 보며 말을 이어 가는 실비아.
"냉정하게 판단해. 이번 공략은 자칫 몇 놈 죽고 끝나는 정도가 아니라, 전멸할 수도 있어."
"적어도 그 황야라도 벗어난다면 뭔가 단서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 전에 다 죽는다니까? 시작부터 반병신이 되는데 뭘 할 수 있는데?"
"...."
불편하지만 맞는 말이다.
냉정하게 지금의 그들로선 60층 공략이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지수가 고민에 잠긴 와중.
알터가 번쩍 손을 든다.
"다른 클랜이랑 협력해서 60층 공략을 하는 건 어때?"
"아직 58층도 공략 못 한 놈들이랑? 그리고 지금은 클랜 페스티벌까지 있어서 다들 정신도 없어."
실비아의 반박에 알터가 머쓱해하며 손을 내린다.
"거기다가 유령들이 드글거리는 것도 봤잖아? 그놈들을 뚫고 나아가려면 무조건 온전한 전력으로 출발해야 된다고."
선구자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누군가가 그것을 보면서 깔깔 웃고 있었다.
[히히히, 내 60층은 본사 측에서 난이도를 특별 검수 한 층이라구. 이 무지렁이들, 멍청이들, 촌뜨기들, 한심이들, 버러지들, 쓰레기들! 쉽게 넘어갈 생각 말라구!]
186화 60층, 명계 (3)
프릴이 가득 달린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수정구를 보며 빙글빙글 웃자.
불길로 온몸이 뒤덮인 기사가 나지막이 말한다.
"여러 능력들을 봉인하는 제약이라.... 제약의 무게가 과한 것 같은데, 괜찮은 건가?"
"당연하지! 본사에서도 허락한 안건이었다고!"
"그런가. 본사에서 허락했다면 상관없다."
이그나이트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손을 들어 앞에 있는 수정구를 가리켜 보인다.
"근데 헤르, 저건 뭐지?"
수정구 안에선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입만 달려 있는 거대한 악령이 황야를 떠돌고 있었다.
"아아, 저거? 역시 보는 눈이 있구나! 저건 내 자신작이야! 폭식하는 악령, 글러트니야!"
"글러트니?"
"영혼까지 먹어 치우는 악령인데, 한번 글러트니의 입에 삼켜지면 회복 능력으로도 회생이 불가능하지! 히히히! 그리고 저것 말고도 나태의 악령, 슬럿이 있는데...."
관리자 헤르가 신이 나서 황천의 황야를 양분하여 지배하는 두 악령에 대해 설명을 이어 간다.
"아, 그리고 또 브로드강도 내가 직접 설계한 거야! 여긴 엄청난 돈이 있어야 통과할 수 있고, 또...."
떠벌거리는 그녀의 입에서 레테의 정원에 대한 설명이 흘러나올 무렵.
묵묵히 그녀의 설명을 듣던 이그나이트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하지만 정말로 악질적인 건, 역시 층에 걸린 '제약' 같군. 제약으로 인해 공략자들의 활동력 자체가 축소됐으니 말이다."
"히히히! 그게 이 층의 매력이지."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건가?"
헤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간다.
"당연히 없지. 제약을 푸는 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불가능?"
"그래, 그건 공략하라고 만든 게 아니니까. 그건 명계에 제약을 걸기 위해 만든 거야. 덤으로 세계 리셋 버튼이기도 하고."
자신만만하게 설명을 이어 가는 헤르.
"대마령을 공략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 제약을 푸는 것도 불가능하지!"
"흠... 그 정도인가."
"잠깐만, 지금 그 반응은 뭐야?"
헤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이그나이트를 째려보자.
불의 기사의 얼굴 부근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설마 조커 카드의 힘을 잊은 건 아니겠지? 53층의 공략이 불가능한 히든 보스도 놈의 손에 토벌당했다."
"...."
'공략 불가', '극악의 난이도' 같은 말이 조커 카드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건.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잦아들었다고는 하지만.
[저, 저 자식이 내 종말의 병기를...!]
[비밀 통로는 또 어떻게... 하아아....]
[내 역작 발리나가... 끄어어어어....]
한때는 휴게실이 다른 관리자들의 울부짖음으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무, 물론 잘 알고 있지! 내가 설마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
"수를 써 둔 건가?"
"당연하지!"
헤르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넘실거린다.
"대마령이 봉인된 장소를 옮겼거든! 제아무리 조커 카드라고 해도 결코 갈 수 없는 장소에 말이야, 히히히!"
"과연...."
대마령의 봉인지를 비추는 수정구.
대마령이 있어야 할 제단 위는 텅 비어 있었고.
커다란 사슬들만이 외로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저 사슬들은 뭐지?"
"아, 저거? 대마령을 봉인하는 데 쓰던 거."
"...음? 그럼 사슬들도 같이 옮겼어야 되는 게 아닌가? 사슬이 파괴되면 어떡하려고?"
잠시 망설이던 헤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맞긴 해."
"정말 이해를 할 수 없군. 대체 왜 같이 안 옮긴 거야?"
"젠장,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어? 존나 급했으니까 그러지!"
버럭 소리친 헤르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대마령은 본사 인물들이 크게 관여한 거라 그런지, 사슬이 안 옮겨지더라고."
"아니, 잠깐. 그렇단 건 본사에 보고하지 않고 대마령을 옮겼다는 건가?"
싸늘한 이그나이트의 말투에도.
헤르는 도리어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당연한 것 아냐?! 보고한들 언제 연락이 올 줄 알고?! 일단 선조치! 그리고 후보고! 그런 것도 몰라?!"
"그래도 그렇지...."
"히히히,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 마.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놈이라면 기존 봉인지를 찾아내더라도 텅 비었으니 다른 곳으로 가고 말지, 설마 이 빈 곳에서 사슬만 뽀개는 그런 미친 짓을 하진 않을 테니까."
"...."
헤르의 말이 마냥 틀린 건 아니다.
조치조차 하지 않아 주먹만 바르르 떨던 관리자가 한둘이 아니었으니.
사실 조치한다고 해도 조치할 수 없는 '재앙'에 가깝긴 했지만.
아무튼 헤르의 판단이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자라면, 봉인지가 비어 있다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판단인 것도 맞으니까 말이다.
"네 판단이 옳길 바란다. 아무리 관리자라고 해도,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에 간섭했다가 문제가 생기거든 시말서 정도로는 안 끝날 테니 말이다."
"흥, 그건 쓸데없는 참견이야!"
"쓸데없는 참견이라.... 그렇다기엔 얼마 전에 네가 자신만만해했던 게 기억이 나는군. 그때 분명, 조커 카드가 무조건 중간에서 내릴 수밖에 없을 거라 하지 않았던가?"
장난기 가득하던 헤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간다.
"그건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니까?! 수상 열차에 대한 아무런 단서도 못 얻었는데, 모글리의 심장 퀘스트를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조커 카드가 시작부터 브로드강에 온 건 납득한다.
그건 조커 카드의 능력이니까.
근데 브로드강에 떨어진 놈이 다짜고짜 숨겨진 퀘스트를 수행하는 건.
누가 봐도 의심이 가지 않는가?!
"흠, 다른 관리자에게 해당 사안을 누설한 적이 있었나? 그렇다면 누가 조커 카드에게 말을 해 준 걸지도 모른다."
"뭐, 다른 관리자가 말했을 수도 있겠지? 엄청난 대가를 감수하고 말야!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놈은 단서의 파편 퀘스트를 수행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거기다가 대마령에 접근하는 건 더더욱 불가능하니까!"
"조커 카드가 다른 공략자들과 협력하여 층을 클리어 하는 방법도 있다."
헤르가 수정구를 바라보며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어 간다.
"그럼 뭐 해? 그 공략자들이 입구부터 막혀서 빌빌거리고 있잖아?"
"것도 그렇군."
"이제 조커 카드도 내가 만든 설계도 위에서 규칙대로 공략할 수밖에 없을 거야. 히히히!"
* * *
2일 뒤.
거대한 공동.
고오오오오오-
붉고도 기다란 길을 따라 늘어선 촛대들의 불꽃이 일렁거린다.
그리고 불꽃의 일렁임 그 끝에 자리한 거대한 제단.
"흠...."
난 제단을 올려다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상하네. 분명 여기가 대마령의 봉인지가 맞을 텐데.'
분명 이 제단 위에 봉인된 대마령의 혼체가 있어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제단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잘못 찾아온 것 같진 않은데....'
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공동 안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거대한 사슬들.
저건 대마령을 봉인하기 위해 명계의 두 지배자가 만든 결계다.
'결계가 멀쩡한 걸 보니 봉인이 풀렸다고 보기에도 어렵고.'
'쯧, 영문을 모르겠군. 이러면 아예 대마령에 대한 단서가 사라져 버린 건가.'
대마령을 처리해야 명계 전역에 걸린 제약도 풀릴 터인데.
'음, 설마 본사 직원이 잘못된 정보를 준 건가?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내가 고민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저기다! 저기 침입자가 있다!]
동공의 입구 쪽에서 시끌시끌한 고함 소리가 울려온다.
슬쩍 시선을 돌리니.
척-
새하얀 광채를 발하는 전사들이 일렬로 도열하여 내게 무기를 겨누고 있다.
'천신들인가. 오, 명왕과 암왕도 왔구나.'
1계의 질서를 수호하며 영혼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천신.
그리고 그런 그들을 아우르는 명계의 지배자 명왕과 암왕까지.
난 저들을 보며 생각했다.
'올 줄은 알았는데, 생각보다 더 빠르네.'
애당초 이 봉인 지대는 명왕과 암왕이 만든 곳.
이런 곳에 무단으로 침입하거든.
당연히 두 지배자도 그 사실을 알 수밖에 없을 터.
그래서 얼른 대마령만 처리하고 자리를 뜨려 했던 것이건만.
'어쩔 수 없나.'
난 명왕과 암왕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세상 곳곳을 돌아다니는...."
[네놈, 네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기는 하는 것이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수염을 파들거리던 명왕의 고함이 공동을 쩌렁하게 울린다.
"무슨 짓이라뇨?"
[대마령의 혼체를 건들다니....]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이곳엔 처음부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뭐, 내가 사실을 말한들 과연 저 원주민들이 믿어 줄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헛소리를....]
명왕이 순간 몸을 움찔거린다.
조금은 냉정을 되찾은 그의 눈동자가 공동 안에 가득한 사슬들을 훑는다.
[구마의 사슬들이 멀쩡하다니, 이게 뭔....]
"보시다시피 봉인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
명왕의 얼굴 위로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구마의 사슬은 멀쩡한데, 대마령의 혼체는 사라졌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오, 그건 나도 굉장히 동의해.
사실 좀 이상하단 말이지.
구마의 사슬은 대마령의 활동을 억제하는 봉인 아이템이다.
'그럼 대마령이랑 같이 없어져야지, 왜 굳이 사슬만 자리에 남은 건지.'
명왕과 암왕이 황급히 다가와 나를 지나치더니, 사슬을 만져 본다.
[이건 정말 이상하군. 봉인에는 이상이 없는데.]
[하지만 대마령의 혼체의 위치를 도저히 파악할 수가 없어.]
[사슬 때문이겠지. 봉인의 효력 아닌가.]
나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고민하던 그들이 앓는 소리를 낸다.
[이를 어쩌지. 영문을 모르겠군. 정말 모르겠다.]
[일단 저놈을 심문해 보는 게 맞겠지.]
명왕이 나를 가리켰다.
[날 따라와라. 전후 사정을 듣겠다.]
"오."
작금의 사태를 감안하면.
명왕이 굉장히 관대한 처사를 내린 건 사실이다.
'하지만 따라가도 말이지, 나도 왜 대마령이 없어졌는지 모르거든?'
대화로 좋게 푸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
그렇다고 따라가지 않는다면 명왕과 휘하의 천신들과 전투를 벌여야 할 터.
'싸우는 거야 상관없긴 한데....'
이후 명왕이 단서의 파편 퀘스트와 연관이 되어 있는 원주민인 만큼.
그를 날려 버리는 건 그리 좋은 방법이 아니리라.
'으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래,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대마령을 찾지 못해서잖아?'
대마령만 찾아내서 해결하면.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된다.
나는 명왕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암왕에게 물었다.
"사슬 때문에 대마령의 위치를 찾지 못했다고요? 원래는 찾을 수 있는데 말이죠?"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암왕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그래.]
좋아, 적어 두자.
첫째, 봉인이 풀리면 이들은 대마령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이번에는 명왕에게 묻는다.
"명계에서 제법 잘나가는 분들인 것 같은데, 이곳으로 빠르게 온 것도 그렇고, 원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능력이 있는 거죠? 부하들도 있는 걸 보니 함께 이동한 것 같고요."
명왕도 귀찮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그래. 영혼 이동 능력이지. 그것도 모르는 놈이 여기는 어찌 들어온 게야? 됐고, 따라와라. 물어볼 것이 많다.]
둘째, 암왕과 명왕은 단체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모이면.
답이 나온다.
나는 웃으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즉, 대마령의 위치가 확보되면, 그 위치로 나와 함께 이동이 가능하다는 거네요?"
[그렇지... 음?]
저벅저벅, 그들을 향해 걸어가자 명왕이 팔을 뻗어 나에게 경고한다.
[멈춰라, 지금 당장 소멸당하기 싫으면.]
저벅저벅저벅.
[갈! 바보 같은!]
암왕이 호통치며 강한 기운을 내쏘자.
나를 둘러싸고 있던 천신들이 우루루 날아가지만.
정작 내 털끝은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
저벅저벅저벅저벅.
[이 무슨! 보통 놈이 아니었구나!]
대경실색한 암왕과 명왕이 흑색, 백색 옥패를 꺼내어 휘두르자.
거대한 태극 문양이 나를 칭칭 사로잡았으나.
나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내밀었다.
[네 이놈! 당장 손을 떼라!]
[진정하게. 명계 최고의 강도를 자랑하는 소재일세. 손 좀 댄다고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일단 전략적으로 접근하자고.]
암왕이 내 손을 바라보며 노호성을 지르고.
명왕이 나를 노려보자.
나는 그들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소리 지를 시간에 준비하세요."
[뭘 준비하란 말인가?]
뭐긴.
뻔하잖아.
나는 팔에 힘을 주었다.
콰작.
사슬에 균열이 생기자.
동굴 내 모두가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돼!"
콰자자자자자작!
187화 60층, 명계 (4)
균열이 난 사슬이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났고.
허공에 흩뿌려졌던 파편 가루가 바닥에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맙소사, 봉인이... 봉인이....]
얼빠진 표정으로 지면을 내려다보는 명왕과 암왕.
난 그런 그들에게 소리쳤다.
"자, 이제 대마령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죠?"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겠냐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검은 옥패를 쳐들려던 암왕을 명왕이 제지한다.
[진정하게.]
[진정?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도 진정하라는 말이 나오는가?!]
[자네, 혼자 힘으로 구마의 사슬을 부술 수 있나?]
[뭐? 그건... 아.]
악령이 몸에서 나가기라도 한 걸까.
분노로 뒤집혔던 암왕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차분해진다.
[일단 대마령을 저지하러 가지. 막 봉인이 풀린 만큼, 아직 대마령도 본신의 힘을 다 회복하진 못했겠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르네.]
[자네 말이 맞군. 내가 너무 흥분했어. 그나저나....]
명계의 두 지배자가 나를 쳐다보았다.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 봉인을 풀고 대마령을 만나서 어쩌려는 거냐.]
나는 웃으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아니아니, 지금 뭔가 잘못 생각하는 것 같은데."
[뭐? 무얼 말이냐?]
"내가 마음만 먹었다면 당신들은 진작에 소멸했을 겁니다. 당신들을 없애는 데 대마령 따위까지도 필요 없어요."
[이런, 건방진!]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부서진 사슬 쪽을 자기도 모르게 한번 눈짓한 명왕과 암왕이, 흠칫하며 한발 물러선다.
"내 목적이 당신들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 거니까, 당신들은 나를 그냥 대마령 앞에 데려다 놓기만 하세요."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암왕이 명왕을 쳐다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시간이 없네.]
[....]
눈을 질끈 감은 명왕이, 이를 한번 악물고는 허공에 한숨을 흘린 뒤 암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 기운의 느낌 자체는 중립적이야. 어느 한쪽으로 치우지지 않았네. 한번 믿어 보지.]
[...자네의 감이 틀린 적은 없지.]
명왕에게 고개를 마주 끄덕여 보인 암왕이 나에게 손짓한다.
[좋다. 다만, 행여나 수상한 낌새를 보인다면 그땐....]
"전 대마령이 있는 곳으로 가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좋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이동하지.]
암왕과 명왕이 나를 한 번씩 흘깃 노려보고는.
저마다 들고 있던 흑색과 백색의 옥패를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꽂는다.
그 순간.
화아아아악-
거대한 태극의 문양이 바닥에 그려지고.
난 몸이 어딘가로 이동되는 느낌을 받았다.
* * *
발이 지면에서 떠 있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자.
난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고오오오-
저 멀리 거대한 두개골들이 산등성이처럼 늘어서 있었고.
발치에는 이름 모를 이들의 뼈들이 어지러이 굴러다닌다.
함께 이동해 온 명왕, 암왕 일행을 제외하고.
움직이는 것은 보이질 않는다.
'...여긴 어디야?'
분명 본사 직원에게 60층에 대한 정보를 모두 받았다고 생각했건만.
정보에 포함되지 않은 지역이 있을 줄이야.
그러던 그때.
띠링-
[미$&@^%역, $&%@&$]
[!$&!@]
갑자기 의미 불명의 메시지가 나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글자들이 상당 부분 깨져 있어서 그 의미를 이해하기가 어렵다.
'뭔가 감춰져 있던 지역이라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감춰져 있던 지역이라고 해도.
이렇게 메시지가 깨져서 나온 적은 없었는데 말이지.
'흠, 그보다도 대마령은 어디에 있는 거지?'
설마 이상한 데로 온 건 아니겠지?
난 고개를 돌려 명왕을 바라봤다.
"제대로 온 게 맞습...."
[으으음....]
명왕이 떨리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나도 그를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오....'
모랫빛 하늘 위로.
두근, 두근-
태양도 가릴 정도로 거대한 눈동자가 심장처럼 고동치고 있다.
[모두 전투태세를 갖춰라! 역행자가 곧 깨어날....]
그러던 그때.
두근두근두근두근-
일정한 박자로 요동치던 박동 소리가 갑자기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런...! 천신들이여!]
명왕이 함께 데려온 천신들에게 황급히 소리치자.
척-
일렬로 정렬한 천신들이 등에 메고 있던 깃발을 하늘 위로 높이 쳐든다.
새하얀 깃발들이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에 나부끼자.
그그그그그그그긍-
새하얗고도 거대한 문이 지면을 뚫고 솟구쳐 오른다.
'천생의 문인가.'
천생의 문.
천신들의 연합 능력으로서.
저 문 주변에 있기만 하더라도 엄청난 속도로 부상이 회복되며.
피해도 천생의 문이 대신 입는다고 한다.
'보통 명계에 큰 위기가 닥쳤을 때 쓴다고 본 것 같은데....'
난 허공의 거대한 눈을 보며 생각했다.
'흠, 그 정도인가?'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명왕과 암왕이 각각 들고 있던 흑색과 백색의 옥패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현란하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영혼과 육신, 삶과 죽음....]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를지니....]
[생사일로!]
두 지배자가 술식의 완성을 끝내자.
스스스스슥-
두 옥패에서 새하얗고도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하나의 거대한 태극 방벽을 완성한다.
'오, 뭔가 좀 멋진데?'
생사일로.
삶과 죽음이 각각 입구와 출구가 되어.
피해를 입거든 그 피해를 모두 외부로 되돌려 방출하는.
이론상 무적에 가까운 방어 능력이었다.
'바짝 긴장한 모양이네.'
시작부터 최고의 방어 능력을 사용하다니.
도대체 대마령의 힘이 어느 정도기에.
두 지배자가 처음부터 전심으로 임하는 걸까.
내가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눈을 바라보던 그때.
두근, 뚝-
반복하여 울리던 고동 소리가 멈췄다.
띠링-
[대악령, 역행자가 봉인을 깨고 일어납니다.]
[세계의 역행이 시작됩니다. 저주, '역행의 저주'가 '역행하는 순리'로 강화됩니다.]
[저주, '역행하는 순리'가 명계 전역을 뒤덮기 시작합니다.]
[저주, '세계를 향한 증오'가 명계 전역을 뒤덮기 시작합니다.]
[저주, '황천의 시간'이....]
.
.
.
끝도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
어휴, 무슨 저주가 이렇게도 많아?
[묶음 무적이 적용 중입니다. 저주를 파훼합니다.]
[저주를 파훼합니다.]
[저주를....]
그러나 묶음 무적에 속절없이 막히는 저주 종합 세트를 보며.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긴장한 티가 역력한 명왕의 짧은 한 마디가 울린다.
[온다.]
거대한 눈에 고여 있던 피 웅덩이에서.
하나의 핏방울이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똑-
그 순간.
호수에 돌을 던지기라도 한 것처럼.
지면 위로 붉은 파문이 일어난다.
사사사사사삭-
삽시간에 퍼져 오는 붉은 파문이 천생의 문과 맞닿자.
쿠과과과과과과과과과-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일대를 뒤흔든다.
[크으으으읏....]
[으오오오옷!]
굉음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천신들이 들고 있던 깃발들이 갈갈이 찢겨 나간다.
나아가 그들이 입고 있던 갑옷마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뜯겨 나갈 무렵.
퍼어어어억-
[크어어어억...!]
[커허억!]
천신들의 몸이 뒤로 홱 밀려나더니.
하나같이 바닥을 나뒹굴며 고통에 찬 신음을 토해 낸다.
그와 동시에.
붉은 파문이 무너져 내린 천생의 문을 넘어.
명왕과 암왕이 만든 방벽에까지 다가온다.
우르르르릉-
[크으음!]
[으음!]
명왕과 암왕의 이마가 점점 구겨져 가던 찰나.
사사삭-
힘이 다한 것인지 붉은 파문이 점점 잦아든다.
[....]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명왕과 암왕.
일순간 백색과 흑색의 선이 된 이들이.
거대한 눈동자를 향해 쏘아져 간다.
* * *
까득, 까드득-
자신의 손을 연신 물어뜯는 헤르를 보며.
이그나이트가 무심히 말한다.
"조커 카드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장소가 어디인가 했더니, 아직 개발이 덜 끝난 세계였나."
"...."
개발이 덜 끝난 세계.
아직 퀘스트도, 원주민도, 공간도 뚜렷이 구현되지 않은 불안정한 공간.
그렇기에 대마령을 숨기기에 최적의 공간이라고 생각했건만.
"분명 조커 카드가 설계도 위에서 놀아날 수밖에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만만했던 것에 비해 결과가 아쉽...."
"시끄러워, 시끄러워, 시끄러워!"
헤르의 거대 가위의 양날이 이그나이트의 목을 단숨에 벨 듯이 조여든다.
"관리자들 간의 전투는 엄연히 금지된 행위이다. 모르지 않을 텐데? 실수를 더 큰 실수로 덮으려는 거라면,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군."
"...."
층의 관리 미흡과 동료 폭행.
후자가 압도적으로 그 죄질이 무거웠던 탓일까.
헤르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거대 가위를 내린다.
"난 잘했어."
"...."
"난 잘했다고. 저 머저리, 얼간이, 모지리, 또라이, 어처구니없는, 천둥벌거숭이, 찌질이 새끼가 사슬을 건든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거지, 난 잘했다니까?!"
이그나이트의 불꽃이 좌우로 살짝 흔들거린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누가 뭐라고 했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
"옆에서 훈수 처하지 말고, 그냥 지켜만 보라고. 알겠어?!"
"뭐, 그러지."
헤르가 겨우 진정하자.
두 관리자는 다시금 수정구를 응시한다.
백색과 흑색 그리고 붉은색의 선이 하늘에서 현란하게 움직이며 부딪칠 때마다.
투콰아아아앙-
굉음이 수정구 너머로까지 터져 나온다.
하늘에서 굉음이 울리고 또 울리기를 몇 분.
쇄애애액, 쾅쾅-
두 줄기의 선이 하늘에서 떨어져 지면에 처박히자.
헤르의 눈동자에 희미한 희망이 아른거린다.
"좋아! 일단 떨거지들은 처리했고! 조커 카드까지 죽여 버리라고! 이렇게 된 거, 리셋이 답이야! 리셋이 답이야!"
리셋이 답이다, 라는 말을 반복하여 중얼거리는 헤르를 보며.
이그나이트는 속으로 생각한다.
'아직도 대마령이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하긴, 대마령이 이기거든 이번 일은 그저 가벼운 사건이 될 터이니.
그녀가 저리 응원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었다.
그의 입가에 옅은 실소가 그려진다.
'당해 보면 깨닫는 게 있겠지.'
어째서 조커 카드가 관리자들 사이에서 그리도 악명이 높은지.
어째서 관리자들이 저마다 품속에 시말서를 한 장씩 들고 다니게 됐는지.
모두 겪어 보면 알게 될 터.
이그나이트가 다시금 수정구를 바라본다.
[천 년을 넘게 봉인되었어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날 함정에 빠뜨린 네놈들의 영혼을 분쇄할 날만을 기다리고 기다렸지. 그런데 고맙게도 알아서 봉인을 풀어 주다니. 크하하하하하하!]
[크윽....]
역행자의 창끝이 얼굴 언저리에서 흔들리고 있었지만.
명왕과 암왕은 쓰러진 채 제대로 반박조차 하지 못한다.
[특별히 네놈들의 머리만은 남겨 두마. 그 두 눈으로 명계가 멸망하는 모습을 오롯이 담을 수 있....]
[잠깐만. 감사 인사는 나한테 하라고.]
[음?]
역행자의 얼굴이 반시계 방향으로 투둑 돌더니.
조커 카드를 바라본다.
[넌 뭐지?]
[뭐긴 뭐야, 네 봉인을 푼 사람이지.]
조커 카드를 위아래로 훑어본 역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육체를 가진 제물은 오랜만인데, 첫 봉헌물로 준비를 잘했구나. 좋다. 내 기쁘게 받도록 하지.]
역행자의 손에 들려 있던 붉은 창이 삽시간에 조커 카드의 면전으로 날아들자.
"죽어-----!"
앉아 있던 헤르가 벌떡 일어나 고성을 지른다.
그리고.
깡-
맨 목으로 창을 받아 내는 조커 카드.
"---어어어어?!"
헤르의 목소리가 당혹감으로 높아지던 중.
손바닥으로 창을 잡은 조커 카드의 입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아이템은 아니네. 아쉽게 됐군.]
[이놈...!]
붉은 아우라를 뿜어내던 역행자가 창을 뽑아내려 힘을 주지만.
창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네놈... 뭐 하는 놈이냐.]
대답은커녕.
뽀각-
명계의 두 지배자도 어찌하지 못했던 창을 수수깡처럼 분지르는 조커 카드.
[....]
붉은 아우라를 뿜어내던 역행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묻어 나온다.
[알아서 뭐 하게.]
[뭣?]
[내가 뭐 하는 놈인지, 네가 알아서 뭐 어쩔 건데.]
조커 카드가 역행자를 보며 빙긋 웃는다.
[아무튼 널 소멸해야 제약이 풀리거든? 곱게 성불해라.]
[나를... 소멸한다고?]
역행자의 입에서 광소가 터져 나온다.
[내가 오래 봉인되어 있긴 했나 보군. 너 같은 놈들도 덤비고 말야.]
그의 등 뒤의 불길한 아우라가 점점 짙어진다.
[제물을 거두는 창날을 한 번 막았다고, 나를 소멸하네 마네.... 저기 명왕과 암왕도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못했는데.]
아우라가 점점 짙어지다가.
역행자의 계속 형태가 변하는 손에 뭉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
암왕과 명왕이 신음했다.
[대마령... 더 강해졌구나.]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다....]
역행자가 조커 카드를 보며 음울하게 미소 지었다.
[네놈의 혼을 뽑아낸 다음, 내 무기의 숫돌로 삼아 주마.]
스슥-
역행자가 조커 카드의 눈앞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모든 역행의 기운을 몰아넣은, 칼날 모양의 손이 조커 카드의 복부로 날아들었다.
[끝인가....]
명왕과 암왕이 눈을 질끈 감고.
"좋아좋아!"
헤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는 와중.
채애애앵!
생각지 못한 효과음이 울린다.
[으음?]
"어?"
188화 60층, 명계 (5)
수정구 안팎으로 당혹에 찬 음성이 터져 나오던 와중.
조커 카드의 목소리가 수정구를 타고 선명히 울린다.
[축하한다. 네가 새로운 1등이야.]
[...1등?]
[지금껏 맞아 본 공격 중에서 제일 타격감이 있었어! 제법 묵직하네!]
[타격감... 이라고?]
한때 세상의 모든 것을, 영혼의 섭리와 순환마저 일그러뜨리고 모든 것을 무로 돌리려 했던 대마령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진다.
[확실히 60층 정도 되니까 느낌이 다르긴 하네! 이 정도면 발리나보다 더 위... 아니, 엇비슷하려나?]
[나와 엇비슷한 존재라면 제법 강력한 놈이었던....]
[그래, 설거지가 특기인 녀석이지.]
[....]
하하, 하하하하하-
조커 카드와 역행자, 둘 다 뭔가에 홀린 것처럼 웃는다.
먼저 웃음을 그친 건 역행자 쪽이었다.
[쓸데없는 농담은 됐다. 이제 죽어라.]
역행자가 두 손으로 인을 그리기 시작한다.
[운명을 거슬러 올라 태초로 돌아가라.]
그리고.
팡-
역행자의 두 손이 모여 합장하는 자세를 이루는 그 순간.
두둥-
붉은 핏줄 같은 실선으로 덮인 거대한 모래시계가 그의 옆에 나타난다.
"좋아! 그거야! 그거라고!"
그 모습을 보던 헤르가 점프하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저게 무슨 능력인데 그러는 거지?"
"태초의 시발점이라고, 역행자가 진짜 빡치거나 궁지에 몰렸을 때 쓰는 능력인데...."
[역행해라.]
"오오, 시작한다! 그냥 직접 봐!"
"흠...."
잔뜩 기대한 헤르와 달리.
이그나이트는 무심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바라본다.
사라락-
모래시계 안에 고여 있던 모래가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자.
후우우우우웅-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일대를 덮는다.
"자신만만하게 말한 것치곤 별것 없는 것 같군."
"저걸 보고도 그 소리가 나와?"
"호오...."
시작은 천신들의 외마디 외침이었다.
[어? 어어어어?]
[내, 내 몸이....]
점점 몸이 투명해져 가는 천신들.
이윽고 몇몇 천신들의 몸이 완전히 투명해져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사라졌군."
"맞아! 저게 역행자의 능력이야, 히히히! 산 자는 육체를 구성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려 버리고, 영혼은 무(無)로 되돌려 버려."
"존재 자체를 지우는 능력인 건가?"
"멍청하긴!"
헤르가 답답한 듯 소리친다.
"영혼이 형태를 갖추기 이전의 상태로까지 되돌려 버린다고!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상태인 거지!"
"그런가. 근데 그건 네 층에 국한된 이야기다. 내가 관리하는 층은 다르다."
"대답해 줘도 지랄이네."
헤르의 구시렁거림을 가볍게 묵살한 이그나이트가 계속 묻는다.
"근데 저 두 원주민의 힘으로 벗어날 수는 없는 건가?"
이그나이트가 명왕과 암왕의 영혼 이동 능력을 언급하자.
헤르가 깔깔 웃는다.
"당연히 안 되지! 역행자가 저 능력을 발동한 순간, 모두 저주의 영역에 갇힌 셈이나 마찬가지거든!"
"갇혔다라.... 갇힌 게 누구인 건지 모르겠군."
"뭐?"
"조커 카드가 움직이는군."
두 관리자가 다시금 수정구를 주시한다.
[시계 좋아 보이네. 브랜드야?]
[아직 형체를 유지하고 있다니, 제법 한가락 하는 놈이었나 보군.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다. 네놈의 몸은 곧....]
순간 역행자의 눈이 기괴할 정도로 커다래진다.
슥-
어느새 모래시계 앞에 선 조커 카드가 모래시계를 이리저리 살핀다.
[어디 보자. 뭐가 있진 않네. 하긴, 몰렉스에서 모래시계를 내진 않겠지.]
[이게 무슨....]
[근데, 이건 뒤집으면 어떻게 돼?]
[뭣?]
지금까지 받아 본 적도 없는 질문이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주제.
조커 카드의 뜻밖의 의문에 역행자의 몸이 움찔거린다.
[궁금하잖아, 이걸 뒤집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번 해 볼까?]
[자, 잠깐...! 이, 이놈!]
역행자가 모래시계를 꽉 붙들고는 다리를 땅에 깊게 박아 넣는다.
꽈드득... 콰드드득!
다리가 나무뿌리처럼 땅 속으로 깊게 파고들어 고정되고.
몸이 모래시계를 나뭇가지처럼 감싼다.
엎드려서 자신의 존재를 지키는 데 사력을 다하던 명왕과 암왕이.
힘겹게 고개를 들어 조커 카드와 역행자를 쳐다보았다.
[읏차!]
투두두둑....
조커 카드가 살짝 힘을 주자.
모래시계를 감싸고 있던 가지들이 너무나 쉽게 뜯겨 나간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안 돼...! 안 돼....!]
명왕과 암왕은 구마의 사슬의 광경을 떠올렸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조커 카드와 함께 중얼거렸다.
[돼!]
[크아아아악!]
쿵-
거대한 크기가 무색할 정도로 모래시계가 쉽사리 뒤집히는 그 순간.
[우오오오오오오오오!]
사라진 천신들의 육체가 다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에 반해서....
투둑, 투두두두둑-
역행자의 몸이 뜯겨 나가기 시작한다.
옷부터 시작하여 몸, 얼굴, 모든 것이 파편처럼 뜯겨 나가 허공에 휘날린다.
[노오오오옴!]
상체가 뜯겨 덜렁거리는 상태에서.
몸이 분해되는 와중.
조커 카드를 향해 달려드는 역행자를 보며.
이그나이트가 나지막이 한마디를 한다.
"마지막 발악이라지만, 악수로군."
그 말대로였다.
퍼어어어어어어엉-
[이 내가....]
"역행자가 저렇게 쉽게... 주먹 한 방에...."
헤르가 멍하니 수정구를 바라본다.
역행자였던 모래는 바람과 뒤섞여 모래바람이 되어.
조용히 자리를 떠나간다.
"...그럴 리가 없어. 이건 말이 안 되잖아. 말이 안 되는데... 이래도 되는 거야?"
수정구를 번쩍 쳐들었던 헤르가 조용히 수정구를 내려놓는다.
그러곤 어딘가 넋이 나간 것처럼 흐느적대며 의자에 앉는다.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녀를 보며.
이그나이트가 나지막이 말한다.
"이제 알겠나? 층을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했건, 조커 카드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걸 말이다."
"...."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이다."
운이 좋다는 말에 발끈한 듯.
매서운 눈으로 이그나이트를 노려보는 헤르.
"자꾸 긁는 것 같다? 방금 그 꼴을 보고도 그딴 소리를 해?!"
"적어도 60층은 59층의 공략이 달성된 이후에 공략이 진행됐다."
"뭐? 갑자기 당연한 소리를 왜 하는 건데?"
이그나이트의 몸에 붙어 있던 불이 옅은 파란색을 띠는 걸 보아.
무척이나 씁쓸해하는 것 같았다.
"내가 관리하던 55층은 정식으로 개방되기 전부터, 조커 카드의 개입이 있었다."
"뭐, 얼마나 개입했는데?"
"...하잘것없는 원주민 하나가 세계를 아우르는 드래곤이 되었다. 55층의 '공간 제약'을 정화할 정도로 변해 버렸지."
"오... 그건 몰랐네, 다른 층에는 관심이 없어서."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는 이그나이트.
"아무튼... 이제 60층 공략도 곧이겠군."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단서의 파편 퀘스트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
조커 카드가 무너뜨린 건 어디까지나 '제약'일 뿐.
아직 60층이 공략이 된 건 아니었다.
화르르르륵-
이번에는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른다.
아주 재밌다는 감정이리라.
"뭐가 그렇게 웃긴 건데?!"
"왜 조커 카드가 굳이 난장판을 피웠는지 아직도 모르는 건가?"
"...."
"조만간 알게 될 거다. 아, 그리고 하나만 더 묻지. 혹시 대마령의 토벌 보상을 설정해 뒀나?"
"아...."
대마령은 절대 잡히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마구잡이로 설정해 놓았던 토벌 보상.
그걸 떠올리자마자 헤르는 그만 신음을 토하고 말았다.
* * *
띠링-
[히든 보스: 명계의 뿌리 깊은 죄악의 잔재, 대마령 '역행자'를 성공적으로 소멸하셨습니다.]
[모든 업적들을 총합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특수 보상으로 '역행자의 혼령주', 칭호, '섭리를 지키는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오오, 뭔가 보상이 좀 많네?'
난 그저 제약을 없애려고 했을 뿐인데.
보너스가 줄줄이 딸려 오다니!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히든 보스: 명계의 뿌리 깊은 죄악의 잔재, 대마령 '역행자'를 성공적으로 소멸하셨습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새로운 업적을 달성하여, 레벨이 1 상승합니다.]
[금제가 해금됩니다.]
전에 얻은 새로운 시스템 '업적 적립'이 적용됐는지.
레벨 1이 곧바로 오른 모습이다.
'81레벨인가. 금화를 안 쓰고 레벨을 올리니 뭔가 느낌이 이상하네.'
뭐, 돈 안 쓰고 레벨이 오르면 좋은 거니까.
근데... 금제가 해금됐다는 게 무슨 말이지?
'끙, 아이템이랑 업적 적립은 나중에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야겠다.'
일단 아직 미처 못 본 메시지를 마저 봐야겠다.
[저주의 매개체 역행자가 소멸하였습니다.]
[대상자가 건 모든 저주가 사라집니다.]
난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후우, 이걸로 됐겠지.'
모든 제약, 저주의 근원이 소멸했으니.
이로써 명계에 걸려 있던 '제약'은 모두 사라졌다고 봐도 좋을 터.
[결계가... 가벼워졌군. 저주가 사라져 가는 모양이야. 자네도 느껴지나?]
[나도 느끼고 있네.]
명왕과 암왕의 대화는 내게 더욱 확신을 주었다.
'이걸로 정상적인 공략도 가능해지겠지.'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관문들은 대부분 정리했으니.
남은 것들은 공략자들에게 맡기면 되리라.
'솔직히 이 정도까지 해 줬으면 나머지는 자기들이 알아서 해야지. 아무렴!'
이것으로 일단 60층에서 해야 할 일들은 얼추 끝났다고 봐도 좋을 터.
'슬슬 돌아가 볼까. 좀 피곤하네.'
그러던 그때.
[저, 송구스럽습니다....]
[아까는 귀하신 이를 몰라뵙고 제가 실례를....]
명왕과 암왕이 거듭 고개를 숙이며 내게 사죄를 해 온다.
"서로에게 득이 되는 일이었으니, 좋게 좋게 넘어갑시다."
[하지만....]
"아, 조만간 다시 올 겁니다. 참고로 전 고정 이동 아이템을 굉장히 좋아하니까, 미리 준비를 좀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예? 아, 예!]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두 지배자를 뒤로하고.
난 정면을 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무인 점포."
그 순간.
스스스스슥-
나의 앞에 건물의 형체를 한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편의점24 종말의 탑 무인점]
1층짜리에다가 기존의 1호점에 비하면 다소 귀엽기까지 한.
전화 부스만 한 크기의 건물이 내 앞에 나타났다.
[저게 대체....]
[편의점... 24?]
천신들은 물론이요, 명왕과 암왕조차 당황하여 무인점을 바라보던 와중.
난 열쇠를 들어 무인점의 열쇠 구멍에 꽂아 넣었다.
그 순간.
띠링-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으로 이동합니다.]
화아아아악-
내 몸이 빛에 휘감기기 시작하자.
[저, 저게 대체....]
명왕과 암왕을 비롯한 이들의 당혹해하는 음성이 들렸다가.
멀어지듯 작아지더니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
* * *
철커덕-
'워우!'
거실에 놓인 안락한 소파, TV와 에어컨을 보니.
이제야 집에 돌아온 기분이다.
'이번에는 집을 비운 시간이 좀 길었으니....'
내가 이렇게 장기 외출을 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난 소파에 누워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건 그렇고, 아무리 생각해도 무인 점포는 진짜 말이 안 되네.'
처음 전화 부스 크기의 점포를 보곤.
실망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건만.
'이런 부가 옵션이 붙어 있었을 줄이야.'
본래 내가 탑에서 현실로 복귀를 하려거든.
반드시 1호점에 열쇠를 꽂아 넣었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되도록 1호점에서 멀리 벗어나는 일은 삼가려 했다.
그러나 무인 점포 능력을 얻은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무인 점포를 통해서 1호점으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건 진짜 히트였지.'
물론 제한 사항이 없는 건 아니다.
무인 점포는 내 주변 장소에다만 설치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으흐흐, 그래도 이제 1호점에서 멀리 나가도 아무런 부담이 없으니!'
난 소파에 누운 채로 히죽 웃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차차, 깜빡할 뻔했네. 아까 얻은 것들을 좀 살펴볼까.'
189화 명계 공략 (1)
난 대마령, 역행자를 소멸시키고 얻은 보상들을 차례로 확인했다.
섭리를 지키는 자
설명: 낡은 옛 질서는 타락했으며 그가 수호하던 섭리는 끝내 무너졌다. 이제 새로운 질서가 섭리를 지킬 것이니.
내용: 해당 칭호를 보유할 시, 능력 '수호자'를 사용할 수 있다.
수호자라.
이건 약간 방어형 능력인 것 같은데.
실험을 해 봐야 확실하겠는걸?
역행자의 혼령주
설명: 역행의 기운이 담긴 혼령주이다.
내용: 강력한 역행의 힘이 담겨 있어 사용에 주의를 해야 할 듯하다.
'이건 어디다가 쓰는 건지 모르겠네.'
'가만있자, 본사 관리자가 준 정보에 이 아이템에 대한 정보도 들어 있던가?'
난 정보를 다시금 상기하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보단 일단 이게 우선이야.'
보상들도 보상들이지만.
사실 이게 가장 궁금했다.
'분명 금제가 해금됐다고 했었지.'
업적 적립을 통하여 레벨이 올라감과 더불어.
금제가 해금됐다는 메시지가 떠오른 것을 기억한다.
'그게 도대체 뭘 의미하는지는... 보면 알겠지.'
난 상태창을 열었다.
그러곤 천천히 상태창을 살피던 와중.
"...어? 잠깐만."
난 무언가에 홀린 듯 하나의 문구를 멍하니 바라봤다.
* * *
며칠 뒤.
59층, '피의 제단' 내부.
다소 꺼림칙한 층의 이름과 달리.
이미 선구자들이 공략을 완료한 퀘스트 층이라는 걸 반증하듯, 공간은 새하얀 백색을 띠고 있다.
"진입하기 전에 다들 다시 물자랑 장비들 점검해!"
이지수의 외침이 백색의 공간을 울리자.
"다들 홍염 말 들었지? 빠뜨린 것 없나 다들 다시 확인해 봐!"
"어디 보자. 담배, 보드카 그리고...."
"이 얼간아, 그런 것 말고 장비랑 필수품들을 확인하라고!"
선구자들이 다음 층으로 올라가기 전에 앞서 마지막 점검을 시작한다.
그 와중 슬며시 이지수의 옆으로 다가가는 실비아.
"근데 그 정보, 정말 확실한 걸까?"
지난 며칠간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들었던 탓일까.
이지수가 조금 까칠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하아... 그냥 눈으로 확인해. 어차피 보기 전까진 안 믿을 거잖아?"
"안 믿는 건 아니야. 상점주가 말해 준 거잖아?"
"잘 알면서 왜 자꾸 물어보는 건데."
"납득은 하겠는데 잘 믿기진 않으니까 그런 거지."
옆에서 두 여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알터가 슬며시 한마디를 얹는다.
"정말 봉인이 없어졌다면 본격적으로 60층 공략을 시작하는 거고 아니면 퇴각, 맞지?"
"그래. 다들 준비가 다 끝났으면 이동한다!"
"가 보자고!"
마침내 이지수를 필두로 선구자들이 계단을 오른다.
저벅-
계단의 끝.
그 너머에 이르자.
후우우우웅-
적막에 잠긴 메마른 황야가 그들을 맞이한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여기만큼 기분이 찝찝해지는 곳도 드문 것 같아."
"저 하늘 때문이겠지."
실비아의 손끝이 검은 하늘을 가리켜 보인다.
모두가 작은 별 하나, 빛 한 점 드리우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이지수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간다.
슥-
그녀의 몸이 계단 주변의 안전지대를 통과하는 바로 그 순간.
"아!"
이지수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나옴과 더불어 밝은 미소가 그려진다.
"다들 나와 봐! 빨리!"
"에이, 설마.... 진짜야?"
"난 진짜 상점주를 믿거든? 근데 이번에는 진짜 말이 안 되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슬며시 안전지대에서 나가는 선구자들.
"오! 정말 메시지가 안 뜨는데?! 상점주의 말이 진짜였잖아?!"
"이것 보라니까! 그냥 좀 믿어! 우리를 그렇게 밀어주는 양반이 왜 거짓말을 하겠어?!"
선구자들도 환한 미소를 짓던 중.
실비아가 동료들에게 말한다.
"그래도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서 1시간 정도 대기하는 게 어때? 갑자기 능력이 봉인되면 난감하다고."
"크으, 실비아 너도 참 대단하다. 상점주가 이만큼이나 증명을 했는데도 안 믿어?"
"나도 상점주를 신뢰해. 하지만 맹신하는 건 별개야. 약간의 의심을 갖고 있어서 나쁠 건 없잖아?"
실비아의 물음에 이지수는 살짝 미간을 짚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안전하게 접근해서 나쁠 건 없지. 1시간 정도 대기한다!"
1시간 뒤.
잠잠-
"...괜찮은 것 같네."
이지수가 그것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의심하는 건 좋지만 적어도 상점주만큼은 신뢰해도 괜찮지 않겠어?"
"...."
대답하지 않는 실비아.
이지수는 그런 그녀에게 희미한 미소를 던지곤.
선구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다음 목적지인 브로드강까지 이동한다!"
* * *
약 5일 뒤.
"오, 드디어 새로운 곳이네!"
알터가 드넓은 강을 보며 활짝 웃자.
옆에서 실비아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울려온다.
"유령들만 득실거리던 황야를 겨우 벗어났더니, 이제는 유령들이 득실거리는 강이야?"
사실 실비아의 투덜거림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네임드 보스 두 마리는 좀 힘들긴 했어."
[황천의 황야의 네임드 보스, 폭식하는 악령, 글러트니가 출현합니다.]
[황천의 황야의 네임드 보스, 나태의 악령, 슬럿이 출현합니다.]
수많은 악령과 더불어 출현한 두 마리의 네임드 보스는 정말이지.
정보를 알고 있었음에도 상대하기 까다로웠으니까.
"그래도 상대법을 알고 있었으니 다행이었지, 다짜고짜 머리부터 들이받았으면 몇은 죽었을지도...."
알터의 중얼거림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 슬 뭐시긴지 뭔지 하던 놈은 진짜 엄청 거슬리긴 하더라."
기억의 왜곡, 환상 등 정신을 건드는 나태의 악령은 생각 이상으로 대처가 어려웠다.
"겨우 환각을 깨부쉈나 했더니, 그것마저도 환각이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내가 살면서 이중삼중 환각은 또 처음 봤다니까?"
"상점주가 도와줘서 망정이지, 쉽지 않긴 했어."
상점주가 특제 우표로 전달해 준 한 가지 아이템.
그것은 나태의 악령을 처리하는 데 굉장히 효과적이었었다.
영혼의 구슬
설명: 나태의 악령, 슬럿의 행복했던 기억이 담긴 영혼의 파편이 봉인되어 있는 구슬이다.
능력: 사용 시, 슬럿에게 특수한 작용을 일으킬 수 있을 듯하다.
손마디만 한 크기에 보랏빛을 띠는 구슬.
처음에는 설명, 내용란에 물음표만 자리했었기에 사용법조차 몰랐으나.
상점주의 조언대로 영혼의 샘에 구슬을 담그니 사용이 가능해졌었다.
"근데 상점주는 그런 아이템을 어디서 얻은 걸까? 사용법도 아는 것 같았는데, 혹시 60층에 온 적이 있나?"
알터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옆에 있던 실비아가 툭 말을 던진다.
"관리자니까 그런 거겠지."
"오, 이제 믿는 거야?"
"그건 신뢰가 아니라 납득의 영역이니까."
"오... 그래. 아무튼 황야에서 고생한 덕에 페스티벌 포인트는 제법 벌었잖아?"
알터가 게시판 모양의 허상이 떠 있는, 골드-패를 내밀어 보인다.
"이것 봐! 아직도 우리가 압도적인 1등이야!"
[1위 - 선구자들 8,280]
[2위 - 망치 5,650]
[3위 - 지식 5,280]
[4위 - 저니맨 3,740]
"1등이 뭐가 중요해? 어차피 클랜 아지트는 3위까지 준다며?"
실비아의 물음에 알터가 입을 떡 벌린다.
"엄청 중요하지! 크기가 다르잖아, 크기가!"
"알맹이만 같으면 됐지, 뭔 크기야?"
"하, 진짜 뭘 모르네. 집이 작으면 한 방을 여러 명이 써야 되는데?"
"그렇게 쓰면 되지."
두 사람이 한창 실랑이를 벌이던 그때.
이지수가 손을 들어 전방을 가리킨다.
"저기 봐. 매표소야."
과연 그녀의 말대로 강가에 정박해 있는 열차 옆으로.
<모비딕 수상 열차 매표소>
고래 간판이 달린 매표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저기서 표를 사서 열차를 타면 될 거야."
"근데...."
매표소 주변을 비롯하여 곳곳에 혼령들이 가득한 탓일까.
몇몇 클랜원이 슬며시 무기를 쳐든다.
"혹시 원주민들이 공격하진 않겠지?"
한 클랜원의 물음에 이지수가 고개를 젓는다.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원주민들은 신경 쓰지 말고 표부터 사자."
이지수의 말을 따라 매표소로 이동하는 선구자들.
"상점주가 무조건 특급 표를 사라고 했었지?"
"그랬지. 근데 가격이...."
가격표를 본 이지수가 얼굴을 찌푸리자.
"뭔데? 왜 그래?"
"푯값이 비싸 봐야 얼마나 비싸겠어? 특급이 아니라 특특급이라고 해도... 허어어어억!"
"...가격이 왜 저래?!"
<특급 표 - 200카르마 / 10,000골드>
<우등 표 - 100카르마 / 5,000골드>
<일반 표 - 50카르마 / 2,500골드>
"1만 골드? 농담이지?"
"잠깐만... 그럼 150만 골드가 넘는다는 거잖아?!"
"젠장... 이런 이야기는 없었잖아."
약 150명이 넘는 인원.
그 인원들의 푯값을 지불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다.
"홍염, 지불할 수 있어?"
"지금 갖고 온 클랜 공용 자금을 다 털어도 40만 골드 언저리야."
모두가 특급 표를 구매하는 건 불가능한 상황.
"그룹을 나누는 건 어때? 한 그룹은 특급, 다른 그룹은 우등이랑 일반을...."
"상점주 이야기 못 들었어? 우등이나 일반 표를 사면 1정거장밖에 못 간다고 했잖아? 거기서 다음 역으로 가는 푯값을 구할 때까지 있어야 한다고 했던 걸 잊었어?"
"아니면 다 같이 일반 표를 사든가! 역 하나씩 통과를...."
다급히 다양한 대책과 논의가 오간다.
그러던 그때.
"어?!"
매표소를 이곳저곳 기웃거리던 알터가 동료들을 향해 손짓한다.
"다들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봐! 빨리!"
알터를 따라 매표소 뒤쪽으로 이동한 선구자들.
"이건...."
그곳에는 매표소 앞의 가격표와 전혀 다른 게 붙어 있었다.
<초특급 할인 행사 진행 중!>
<대상자: 육신을 가진 자>
<특급 표 - 66카르마 / 3,333골드>
<우등 표 - 33카르마 / 1,666골드>
<일반 표 - 16카르마 / 833골드>
"초특급... 할인 행사?"
"이게 대체...."
다들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새로운 가격표를 바라보던 중.
덜컹-
매표소 뒷문이 벌컥 열리더니.
입에 곰방대를 문 꼬장한 노인이 안에서 걸어 나온다.
'저 노인이 열차장 카룬이구나.'
[요즘 들어 산 자들이 자주 보이는군.]
"...."
[아무튼 그 가격표를 발견하다니, 너희는 특별히 할인가에 표를 팔도록 하마.]
순간 선구자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그냥 뒤쪽에 숨겨 놓곤 뭐 대단한 걸 발견한 것처럼....
-3,333골드도 딱히 저렴한 것 같진 않은데?
-다른 가격표가 또 있는 것 아냐? 그건 1,111골드라든가.
-쉿! 조용히 좀 해!
그런 선구자들의 속내를 읽기라도 한 걸까.
카룬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미리 말해 두겠다만, 할인은 이게 끝이다.]
"혹시 더 깎아 주실 수는 없나요?"
[뭐? 여기서 더 깎아 달라고?!]
카룬이 코웃음을 치며 곰방대에 하얀 불을 붙인다.
[헛소리를 하는구나. 애당초 푯값 할인도 그 가면을 쓴 이상한 녀석에게 도움을 받아서 특별히....]
"잠깐만요! 가면을 쓴 이상한 녀석이요?"
[그래. 뭔 희한한 동물의 가면을 쓴 녀석인데, 그래도 힘 하나만은 소싯적의 날 보는 것 같더구나.]
카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상점주네."
"100프로 상점주야."
"근데 그 양반은 언제 또 이곳에 왔다 간 거야?"
선구자들이 숙덕거린다.
[웃어른의 말을 두 번이나 끊다니, 고얀 것들. 쯧쯧.... 아무튼 그래서, 살 거냐 말 거냐?]
"당연히 사야죠."
이미 머릿속으로 셈을 끝낸 이지수.
1인당 3,333골드의 푯값.
충분히 지불할 수 있는 액수다.
"근데 만약 골드가 없으면 어떻게 되나요?"
곰방대를 문 카룬의 입 사이로 김빠진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떻게 되긴? 당연히 표를 못 사겠지. 아니면....]
카룬의 눈이 붉게 물든다.
[날 대신할 열차장이 되거든 무료로 탈 수도 있다만? 대신 영원히 수상 열차를 몰아야 하지만 말이다. 어떠냐?]
"...."
순간적으로 카룬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을 느낀 이지수.
그녀는 반걸음 뒤로 물러나며 생각한다.
'그냥 평범한 열차장인 줄 알았는데....'
단언컨대 노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55층에서 만났던 골드 드래곤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다.
"골드로 특급 표를 구매할게요."
[잘 생각했다.]
잠시 후.
소지하고 있던 60만 골드를 거의 다 사용하여 특급 표를 구매한 선구자들.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돈지랄하면서 공략을 해야 하는 경우는 또 처음 겪네."
투덜거리는 실비아가 열차에 오르고.
철커덕, 철컥, 뿌우우우우우-
수상 열차 모비딕이 경쾌한 경적 소리를 울리며 강 위를 달리기 시작한다.
190화 명계 공략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