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각자의 계획 (3)
널따란 공간의 텅 빈 진열대들이 날 맞이한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익숙한 전경이다.
'좋아, 일단 진열부터 시작을....'
난 상점의 훌륭한 일꾼들인 용기병을 소환하려다가.
순간 손을 멈칫거렸다.
"흠...."
난 눈앞의 정경을 보며 생각했다.
'분명 평소랑 다를 것 없는 광경인데 말이지, 오늘따라 뭔가 감회가 좀 새로운 것 같네.'
오늘따라 조금 더 감상적인 기분이 들어서 그런 건가.
옛 기억들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다.
'처음 불타는 군주를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정말 죽었구나 싶었는데. 진짜 많이 발전하긴 했네.'
이제 이 편의점은 공략자들에게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장소이자.
누구도 싸움을 해선 안 되는 불문율을 가진 중립지대가 됐으니 말이다.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생각을 이어 갔다.
'탑의 마지막 층까지 공략하면 어떻게 되려나.'
항상 갖고 있던 의문 중 하나.
그건 바로 탑의 공략이 끝난 이후의 상황이었다.
'뭐, 나만 그런 의문을 갖고 있는 건 아니겠다만.'
근데 진짜 마지막 층까지 공략하고 나면 어떻게 되려나?
탑이 사라지게 되는 걸까?
아니면 이대로 탑은 남아 있고 공략자들만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혹시 원주민들까지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된다든가.
'흠, 모르겠다. 어차피 탑 공략을 지속해야 되긴 하니까.'
내 앞에 어떠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도.
탑을 공략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말고 장사 준비나....'
내가 상상의 나래를 접곤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때.
띠링-
[왜곡된 세계가 활성화됩니다.]
돌연 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건....'
[왜곡된 존재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난 메시지를 보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VIP 손님이 오신다는데, 당연히 응해야지!'
왜곡된 존재
솔직히 이 본사의 관리자는 내게 있어 정말 VIP 고객이란 말이지.
층에 대한 정보도 주고, 간접적이었다곤 해도 이번 대전에 대한 정보도 줬으니까.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다니합용작 가계세 된곡왜]
초대에 응한 지 몇 초나 지났을까.
딸랑, 딸랑-
편의점 문에 달린 종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리며.
적막하던 공기를 뒤흔든다.
난 편의점에 들어온 금발의 여인에게 빈 잔을 내밀었다.
"오랜만입니다. 커피 한잔하시겠습니까?"
"커피? 사양할게."
"제법 풍미가 좋은 녀석인데, 아쉽군요."
난 커피 잔을 슬며시 밀어내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정말 빨려 갈 듯 빛나는 푸른색의 눈동자다.
"다른 걸 다 떠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주신 정보가 정말 큰 도움이 됐거든요."
"그래? 그럼 이번에는 네가 나한테 도움을 주는 건 어때?"
음? 잠깐.
지금 본사의 관리자가 나한테 도움을 구한다고?
아쉬울 것 하나 없을 존재가?
혹시 '관리자식' 농담인 건가.
"...재밌는 말씀이시군요."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야. 하아... 나도 어지간하면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상황이 그렇게 됐어."
공략자의 손을 빌려야 할 정도의 상황이라.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일단 이걸 받아."
그녀가 무언가를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이건...."
금색의 자그마한 동전이다.
왜곡된 금화
설명: ???
내용: 특정 조건에 놓일 시, 금화의 색이 변한다.
'특정 조건에 처하면 금화의 색이 변한다라....'
선뜻 그 용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이건 어디에다가 쓰면 됩니까?"
"그걸 갖고 있다 보면 언제고 금화가 작동하는 시점이 올 거야. 그때 만난 공략자를 기억하고 있다가 나한테 알려 주면 돼. 간단한 부탁이지?"
뭐, 간단한 부탁인 건 맞는데, 이해가 안 되네.
본사의 관리자면 공략자 정도는 그냥 찾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왜 구태여 내게 부탁까지 하면서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쓰려는 거지?
'흠, 거기다가 본사 관리자가 직접 찾을 정도의 공략자라....'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저도 받은 게 있으니 협조는 하겠습니다만, 몇 가지만 물어도 되겠습니까?"
"물어봐."
"이런 방식을 쓰기보단 직접 찾으시는 게 빠르지 않을까요?"
나의 물음에 그녀가 치웠던 잔에다가 커피를 따르곤.
한 모금 삼키며 말한다.
"이쪽도 내부 사정이라는 게 있어서 말이야. 최대한 조용히 찾아야 되거든."
"아하...."
내부에서 알력 다툼이라도 있었던 건가?
본사의 관리자, 공략자의 탐색... 으음.
난 잠시 여러 가정들을 떠올리다가 입을 열었다.
"본사의 관리자라고 하더라도 공략자에게 개입해선 안 되는 겁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래서 나도 이런 귀찮은 방법을 쓰고 있는 거고."
"오...."
본사의 관리자도 공략자에게 개입하는 건 불가능한 거였구나.
그녀도 뭔가 특수한 방법을 이용하여 날 찾아오는 거고.
'근데 그런 그녀가 내게 부탁까지 하면서 공략자를 찾으려 한다는 건....'
"혹시 본사의 다른 관리자가 공략자에게 개입한 겁니까?"
본사의 다른 관리자가 그녀의 정적이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존재라면.
그래서 다른 관리자가 개입한 공략자를 없애려 하는 거라면.
그녀의 부탁 또한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긴 한다.
난 흘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
표정에 변화가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읽을 수가 없다.
그녀가 이내 잔을 내려놓으며 피식 웃는다.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네. 얼추 비슷하다고 생각해도 좋아. 아무튼 네 탑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야."
확실히 득이 되는 일인 것 같긴 하네.
어쨌건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상황.
그런 그녀의 정적이 이 탑에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니.
그 헛짓거리를 막거든 결과적으로 내게도, 그녀에게도 득이 된다는 결론이 섰다.
"좋습니다, 협조하죠."
"잘 생각했어."
"근데 말입니다. 시간이 꽤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괜찮습니까?"
금화가 반응하는 공략자를 찾아라?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근데 탑이 좀 넓은 것도 아니고.
이건 뭐 거의 사막에서 바늘 찾는 수준이잖아?
"아! 아니면 이 금화를 변색시키는 공략자한테 엄청난 상품을 준다고 하면 의외로 금방 찾을 것도 같네요."
"아니. 금화는 철저하게 숨겨. 최대한 은밀하게 진행해야 하는 일이야."
"으음. 은밀히라...."
뭐, 확실히 은밀함을 요하는 것 같긴 한데.
그럼 진짜 사막에서 바늘 찾아야 되는 거잖아?
'하루 이틀 만에 끝날 일은 아닌 것 같네.'
"좋습니다. 다만, 꽤나 고생을 할 것 같은데, 저도 부탁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 봐."
난 숨을 크게 들이쉬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탑의 존재 이유, 본사는 뭘 하는 기관인지, 탑의 공략을 끝마쳤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싶습니다."
잠시 후.
딸랑-
난 비어 있는 맞은편의 자리를 보며.
관리자가 남기고 간 말을 떠올렸다.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못 알려 줄 것도 없지. 대신 네가 그 공략자를 찾아낸다면 말이야.]
다른 관리자가 개입한 공략자를 찾으면 뭐든 알려 준다라....
이건 조건이 너무 후해서 오히려 사기 같다는 느낌도 들긴 하네.
'그래도 지금껏 그녀가 내게 보였던 행보를 생각하면 구태여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긴 해.'
난 손에 쥐고 있던 금화를 내려다봤다.
'일단 이 금화에 반응하는 공략자를 찾아볼까. 또 의외로 금방 찾을지도 모르지.'
다른 관리자라는 놈이 개입을 했을 정도면.
필시 평범한 공략자는 아닐 터.
그리고 이름 좀 날리는 공략자들은 대부분 내 편의점의 고객이 아니던가?
'진짜 의외로 금방 찾는 것 아냐?'
* * *
3주 뒤.
45층, 별의 마을.
반짝-
무수히 많은 별들이 걸린 하늘 아래로.
일단의 공략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와! 다들 이것 좀 봐! 우리가 또 매거진에 올라왔어!"
"어디? 나도 좀 보자, 나도!"
한데 모여 슈팅스타 매거진을 살피는 바빌론의 클랜원들.
[빛나던 별은 별길을 따라 별의 마을에 입성했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다. 이 별이 이토록 찬란하게 빛날 줄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별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건 더욱 흥미로운 일이며....]
"크으! 이 정도로 매거진에 올라올 정도면, 이제 우리도 나름 네임드인 것 아냐?"
"네임드는 너무 나갔고, 중견급 정도는 되지 않을까?"
특히 요즘 공략자들이 대거 활동을 재개하거나 시작하는 지금.
45층까지 도달한 그들이라면 나름 네임드라고 봐도 좋을 터!
"그래, 우린 아직 부족해.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네임드지."
한 클랜원이 펼친 매거진의 1페이지에는.
[환상의 상점의 탄생 배경 - 100가지 가설]
가면을 쓴 상점주와 더불어 환상의 상점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환상의 상점주는 논외로 쳐야지. 그건 애초에 공략자도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지. 근데 이 매거진 말이야. 진짜 신기하긴 하다. 우리가 45층에 올라온 건 엊그제잖아? 근데 어떻게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진짜로 예지 능력을 갖고 있는 걸지도 몰라."
클랜원들이 들뜬 음성으로 대화를 이어 나가던 그때.
"다들 잠깐 집중 좀 해 줘."
클랜장, 에드가 그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일단 다른 걸 다 떠나서, 우리는 45층에 도착했어. 하지만 이제 시작이야. 우리는 더 높은 곳, 높은 층, 나아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곳까지 올라갈 거야. 우리가 걷는 길이 최초가 되는 그날까지!"
"오오오오!"
"그래! 까짓것! 최초?! 우리라고 못 할 것도 없지!"
45층에 도달했다는 자신감이 그들을 고취시킨 걸까.
바빌론의 클랜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팔을 번쩍 치켜들어 보인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 너희는 더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어. 솔직히 지금의 너희는 약해."
"음...."
다소 냉정하긴 해도 에드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솔직히 45층까지 도달하기까지.
에드의 힘이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으니 말이다.
"그건 그렇긴 한데, 사실 에드 네가 말도 안 되게 강해진 거야!"
"맞아! 그보다 전의 그 능력은 뭐였던 거야? 나 진짜 깜짝 놀랐다니까?! 거의 벼락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
불과 몇 주 사이, 에드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의 이명이 '섬광'이라고는 하나.
사실 냉정히 그 속도가 빛과 같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의 에드는 빛과도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게 가능했다.
"혹시 엄청나게 강력한 파생 능력을 얻은 거야? 슬슬 말해 줄 때도 됐잖아?"
"그래! 좀 알려 줘! 우리도 좀 강해지게!"
모두가 농담 반 진담 반 섞어 가며 투덜거리자.
에드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그건 어려워. 선택을 받아야 되거든."
"또 또 그놈의 선택!"
"근데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 어떤 파생 능력이 나오느냐에 따라 또 달라지는 건 사실이니까."
"하아, 나도 좀 쩌는 파생 능력 좀 얻었으면 좋겠다."
아쉬움을 토로하는 클랜원들을 보며.
에드는 조용히 생각한다.
'난 그분의 선택을 받았으니까 당연히 너희랑 다를 수밖에.'
그는 다르다.
그는 탑으로부터,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선택받은 특출난 존재.
그렇기에 클랜원들과의 격차는 당연히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다음에는 또 무슨 퀘스트를 내려 주실까.'
솔직히 이제는 기대가 된다.
매번 퀘스트 보상으로 부여되는 능력치, 칭호 등.
모든 것이 탐스러웠으니까.
그러던 그때.
"환상의 상점이다! 환상의 상점이다!"
"오오?! 진짜로? 이거, 오늘은 되는 날인가 본데?!"
그들이 머물던 건물 바깥에서 공략자들의 음성이 울려온다.
'환상의 상점이라.... 마침 잘됐네, 공헌도 정산을 받아야 되는데.'
덤으로 아직 그분께서 내려 주신 퀘스트도 유효한 상황.
'공헌도를 올리면서 상점주랑 슬쩍 친해질 수 있으면 그것도 괜찮겠어.'
이내 에드가 웃으며 클랜원들에게 말한다.
"다들 뭐 하고 있어? 우리도 얼른 가자!"
221화 각자의 계획 (4)
서둘러 환상의 상점이 출현했다는 곳으로 달려가는 에드 일행.
"오, 저기 있다!"
환상의 상점을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크으, 난 운도 좋다니까? 35층에서 상품 산 지 얼마나 됐다고, 또 환상의 상점이라니!"
"진짜 생각도 못 했는데. 으흐흐흐, 이거이거... 오늘 저녁은 맥주에다가 훈제 닭까지 뜯을 수 있겠는데?!"
"난 그게 좋더라! 냉동 순대를 딱 데워 가지고 고추장 튜브를 짜 주면... 키야, 이만한 별미도 없다니까?!"
"야야, 일단 패부터 꺼내."
"아차차...."
척-
이미 상점 주변으로 모여든 공략자들이 패를 힘껏 흔들어 대고 있었으니까.
물론 대부분의 패는 실버와 브론즈-패였고.
드문드문 황금색의 패도 보였다.
"와, 45층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았구나...."
"그러게. 45층 정도까지 오면 조금은 여유롭게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마을이니까 별수 없긴 하지."
마을의 칭호를 달고 있는 층의 경우.
여타의 층보다 더 많은 공략자들이 활동한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
"거기다가 근래에는 공략자들도 엄청나게 유입됐다던데."
"역시 상점주가 했던 발언 때문이겠지?"
"그렇겠지. 공략을 안 하면 망한다는데, 별수 있나."
특히 상점주가 '탑 멸망설'을 발표한 이후.
45층에는 더 많은 공략자들이 유입됐다.
다른 마을의 칭호를 가진 층들이 그러했듯.
55층 드라고니아에 '최전선과 가장 가까운 마을'이라는 타이틀을 빼앗기긴 했어도.
이제는 중간 지점, 휴게소로서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별의 마을'이었다.
"일단 우리도 얼른 줄을 서자."
다른 공략자들처럼 줄을 선 채.
환상의 상점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에드 일행.
얼마나 기다렸을까.
딸랑-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종소리가 바람을 타고 군중 사이로 흘러나가자.
"우오오오오오!"
"돈은 충분히 들고 왔다고, 상점주!"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더 힘껏 패를 흔들어 댄다.
그런 군중을 바라보는 상점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하하하,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살짝 묵례를 하곤 계속 말을 이어 가는 상점주.
"요즘 탑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죠.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탑 공략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고취되는 것 같더군요."
상점주의 말이 끝나자.
에드의 옆에 있던 동료가 속삭이듯 에드에게 말한다.
"한마음 한뜻이 아니라, 그냥 죽기 싫어서 공략하는 놈들도 있지 않을까? 진짜 우리처럼 좋아서 공략에 나선 것들이 몇이나 될...."
"쉿."
죽기 싫어서 공략하건 아니면 상점주의 발언을 불신하고 공략을 하지 않건.
그런 건 지금 그에게 있어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 공헌도 정산을 하면서 슬쩍 우리 클랜을 어필해 볼까?'
그저 심해의 깊은 눈동자가 제시한 특수 퀘스트를 클리어 하기 위해.
상점주의 관심을 살 방법만을 고민하는 에드.
'솔직히 우리 클랜의 공략 속도를 생각하면 관심을 가져 줄 법도 한데....'
클랜, 바빌론.
탑에 현존하는 클랜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45층까지 도달한 초신성 클랜.
그것이 현재 그들이 세간으로부터 받는 평가였다.
'최상위 클랜에 비하면 부족할지 몰라도, 이 정도 명성도면 상점주도 우리한테 조금은 관심을 보일지도 몰라.'
그렇게 상점주와 안면을 트고.
그와 자연스레 관계를 구축하다 보면 퀘스트 달성은 물론이요!
상점주의 적극적인 후원까지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나도 선구자들같이 유명한 공략자가 되겠지?!'
어디 그뿐인가!
그가 그토록 원했던 '최초의 길'에 금방 도달할 수 있을 터.
에드가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밝은 미소를 짓던 그때.
"지금부터 환상의 상점을 오픈하겠습니다!"
상점주의 외침이 들려온다.
"통화 카드 한 장이요!"
"강화권이랑 분해권 1장씩만 주세요!"
자신들이 원하는 상품들을 바삐 구매하는 공략자들과.
"아, 오늘은 깡 조수가 쉬는 날이라 해당 상품의 사용은 어려우신데, 그래도 구매하시겠습니까?"
그런 공략자들을 바삐 상대하는 상점주.
덜그럭-
상점주의 소환물인 용아병들 또한 그를 도와 바삐 손님들을 상대한다.
그러한 그들의 노력 덕분일까.
"자, 다음 손님?"
어느새 상점의 입장 순서는 에드의 차례가 되었다.
"반갑습니다, 늘꺾이는마음 님! 바빌론 클랜의 클랜장, 에드입니다!"
상점을 이용할 때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정중히 인사하는 에드.
"네, 반갑습니다, 손님. 안으로 들어오실까요?"
그러나 상점주는 여타의 공략자들을 상대했던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칫....'
별다른 반응이 없다는 것.
그것은 상점주가 그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일 터.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오늘은 진짜로 상점주한테 나의 이름을 각인시키는 거야!'
나름의 업적도 세웠으니.
상점주의 관심을 끄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
"저, 혹시 저희 클랜을 아시나요?"
"예?"
"저희 바빌론 클랜이요."
상점주의 입가에 웃음도, 그렇다고 무표정한 것도 아닌 오묘한 미소가 걸린다.
"음... 미안합니다. 잘 모르겠군요. 워낙 많은 손님이 저희 상점을 이용하는 터라, 모두를 기억하긴 어렵거든요."
"아."
에드의 표정이 차가워진다.
'바빌론 클랜을... 아니, 나를... 모른다고?'
그래도 이제는 나름대로 유명 인사가 됐다고 생각했건만.
상점주의 시야에 드는 건 어려웠던 걸까?
빠득-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지만 자존심이 상한다.
'확 상점에 불을 놓으면 나를 좀 알아보려나? 그럼 확실히 날 기억하긴 하겠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것 정돈 에드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에드가 속으로만 분을 삭이던 그때.
"아무튼 안으로 들어오실까요? 기다리시는 손님들이 많...."
그를 응대하던 상점주가 돌연 움직임을 멈춘다.
"호오...."
의미 모를 탄성을 흘리는 상점주.
"이건... 생각 이상으로 빠른데?"
"예?"
"아. 하하, 아닙니다. 이제 좀 기억이 났네요. 바빌론 클랜, 역대 가장 빠른 시간 내로 45층을 주파한 초신성 클랜. 맞죠?"
상점주의 물음에 에드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네, 맞습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매거진에서 본 기억이 있네요. 한 달도 안 돼서 40층에서 45층까지 도달했다라.... 이것 참, 전도유망한 후배의 미래가 기대되는군요."
"하하하핳!"
"자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뒤에 손님들이 많아서 말이죠."
에드를 상점으로 들여보낸 뒤.
슬며시 손바닥을 펴 보이는 상점주.
파스스슥-
이미 절반가량이 녹슨 것처럼 붉은 빛을 띠던 금화가 이내 완전히 붉게 변해 버린다.
"...."
붉게 녹슨 금화를 내려다보며.
상점주가 조용히 중얼거린다.
"흠, 진짜로 이렇게 빨리 발견할 줄은 몰랐는데. 어떻게 하는 게 좋으려나...."
* * *
"냉동으로 하는 게 어때? 45층까지 올라왔는데 작게 파티라도 열어야지?!"
"우리가 언제 또 환상의 상점에 올 줄 알고? 오래 먹을 수 있는 걸로 챙겨 둬야 한다니까?"
난 바삐 진열대 앞을 두리번거리는 에드와 그의 동료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 반응이 없었는데, 확실히 저놈한테 반응했지.'
에드와 대면한 순간.
금화의 변색이 시작됐으니 말이다.
'솔직히 반신반의하긴 했었는데....'
이러면 정말 본사 관리자의 말이 사실이라고 봐야 하지 않겠는가?
난 유심히 에드를 관찰했다.
이미 바빌론 클랜에 대한 정보는 바깥에서 자세히 찾아봤다.
'아래층에서 나름대로 이름이 있는 클랜이긴 하지만, 최근 사이에 공략 속도가 말도 안 되게 빨라졌지.'
마치 거의 다른 클랜이 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중심이자 변화의 핵인 에드.
클랜의 성장 배경에 그의 활약이 상당하다는 건 덤이었다.
'마치 내가 탑에 등장했던 것처럼.'
이건 뭐, 더 볼 것도 없겠지.
본사의 관리자 혹은 무언가가 에드의 등 뒤에 있다는 건.
거의 확실한 상황.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솔직히 말하면 조용히 에드를 처리하는 편이 가장 깔끔하긴 하다.
다만.
[혹시나 금화가 반응한 공략자를 찾거든 일단 그냥 놔둬 줄래? 증거를 수집해야 해서.]
부탁을 받은 게 있어서 일단 놔두긴 하겠지만....
근데 증거 수집을 언제까지 한다는 건데?
'흠, 그래. 뭐 그건 그거고, 일단 내 시선이 닿는 곳에 놔둘까.'
그럴 가능성은 낮겠으나.
혹시나 놈이 편의점을 이용하러 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을 터.
그러면 나도 곤란해진단 말이지.
'그러려면....'
난 싱긋 웃으며 에드 일행에게 다가갔다.
"혹시 매핑 서비스에 대해 아시나요?"
"다, 당연히 알죠! 저희도 이용하고 싶었는데, 돈이 모자라서...."
돈이 부족하다고?
매핑 서비스가 그렇게 비싼 서비스는 아닌데?
아무튼 알고 있다면야 이야기가 빠르지.
"저희 주요 손님들은 전부 이용하고 있는 시스템입니다. 특히 매핑 서비스를 사용한 이래로 손님들이 입는 피해 또는 기습이 크게 줄어들었죠."
"오오...."
"그야말로 저희 상점이 자랑하는 '특급 서비스'라고 봐도 좋습니다."
홀린 듯 내 말을 듣던 에드 일행이 입맛을 다신다.
"저희도 잘 알죠. 이용하고 싶기도 하고요.... 하지만 최근 장비를 사는 데 돈을 다 써서...."
"그럼 이렇게 하죠. 세 달 정도, 무료 서비스 기간을 드리겠습니다."
"...네? 무료요?"
그래.
어차피 매핑 서비스로 받는 골드가 얼마 되는 것도 아니니까.
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탑의 미래에 작게나마 투자하는 거라 생각하세요."
* * *
잠시 후.
"에드! 에드!"
호들갑을 떨며 에드에게 다가가는 바빌론의 클랜원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아니, 환상의 상점주 말이야! 그 사람이 왜 우리한테 호의를 베푼 거야?! 혹시 상점주랑 무슨 이야기라도 나눴어?!"
"아니면 혹시... 우리도 선구자들처럼 상점주가 밀어주는 클랜이 된 거야?!"
에드가 씨익 웃는다.
"그래. 상점주가 우리를 꽤 좋게 봤나 봐."
"와씨, 미쳤다! 그럼 우리도 이제 선구자들 같은 클랜이 되는 거네?!"
"그건 아니지. 선구자들은 너무 급이 다르잖아?"
"그래도 지금의 우리면 60층, 61층도 금방 아니겠어? 그러니까 상점주도 그런 우리의 잠재력을 보고 에드한테 투자하려고 하는 거고!"
모두가 해맑은 미소를 짓는 와중.
에드만이 다른 생각을 한다.
'상점주의 투자도 받고, 거기다가 심해의 깊은 눈동자 님의 조력까지 받는다면... 어쩌면 난 선구자들도 뛰어넘어 유일무이한 공략자가 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도전, 모험심으로 가득했던 눈동자에 깊은 욕망의 불길이 피어오른다.
* * *
같은 시각.
[...지금의 방식은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든 현실에서 잘살게 할 생각을 해야지, 탑으로 보내면 그게 해결이 됩니까? 그건 눈앞의 현실에서 도피하는 행동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박사님께서는 관리국의 정책에 대해 반대를 하는 입장이신지요?]
한참 TV에서 100분 토론 프로그램이 나오는 가운데.
"흐아아암!"
분신이 늘어져라 하품을 한다.
"토론 말고 다른 건 없나."
하루 일과를 끝마친 분신이 여유로이 리모컨을 조작하던 그때.
딩동-
돌연 벨 소리가 울린다.
'...음? 집에 올 사람이 없는데?'
분신이 싸늘한 표정을 한 채 바깥으로 나간다.
'요즘 빈집인 걸 확인하고 털어먹는 도둑놈들이 있다던데. 혹시 그런 건 아니... 음?'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문가를 확인한 분신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저게 뭐야?'
집 앞이 온 동네 개들의 정모 장소라도 된 것인지.
수십 마리는 족히 넘는 개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그 선두에 서 있는 백구까지.
"백구야! 이게 무슨 상황이야?!"
"왈왈왈!"
"...뭐?"
백구의 대답에 분신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다 네 아내들이라고?"
222화 동물병원 가고 싶어?!
이게 무슨 개 뜬금없는 상황인 건지.
"이게 다 몇 마리야? 하나, 둘...."
"왈왈!"
"뭐? 심지어 이게 끝이 아니라고?!"
백구의 말에 의하면.
아직 오지 못한 아내와 새끼들만 수십 마리가 더 된다고 한다.
"아니, 도대체 얼마나 씨를 뿌리고 다닌...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래서, 대가족을 데리고 온 이유가 뭐야?"
"왈왈왈! 왈왈왈왈!"
"음, 그러니까... 바깥 세계에 생긴 이변들에 불안감을 느낀 네 가족들이 안전하게 생활할 터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게 이 집이었다?"
분신이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한 걸까.
백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회전한다.
"뭐, 사정을 알겠는데... 얀마! 아무리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아니지!"
"헥?"
"집 안을 개판으로 만들 일 있어?!"
적어도 수십, 아니.
어쩌면 백 단위가 넘을지도 모르는 개들을 집에서 키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아르르르르...."
"그렇게 말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저 많은 개들 관리는 누가 해? 밥이랑 물 주는 것부터, 화장실도 그렇고, 무엇보다 집이 좁다니까? 그리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좀 적어?"
인성 카페에 납품할 상품들 제작부터.
그룹 낫-휴먼으로서 완성해야 할 작품 제작까지!
해야 할 것들이 얼마나 많던가?!
"왈왈왈왈왈!"
"아니, 그러니까 주인 말대로 관리를 좀 잘했어야지. 좀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중성화 수술을 받는 게...."
"아르르르...."
백구의 격한 반발에 분신이 끝내 뒷목을 잡는다.
"일을 벌인 건 넌데 왜 그 책임을 우리한테 떠넘기려는 건데! 그리고 네 가족만 가족이야?! 우리는 가족 아니냐고!"
"끙...."
분신이 마당에서 거듭 열변을 토하던 그때.
그들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완전 개판이잖아?!"
"주인, 마침 잘 왔어!"
주인이 언제 집에 복귀한 것인지는 몰라도.
정말 좋은 타이밍이다.
"백구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좀 보라고!"
"무슨 짓? 아."
수십 마리가 넘는 개들을 바라보던 주인의 입가에 썩은 미소가 그려진다.
"백구야, 설마 다 네 처자식들인 건 아니지?"
"왈왈왈!"
"잠깐... 진짜야?"
조금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주인을 보며.
분신이 묻는다.
"솔직히 어느 정도 예상된 상황 아니었어? 왜 그렇게 놀라?"
"아니... 반쯤 농담이긴 했는데, 이미 백구는 자체 중성화를 당한 상황이잖아?"
"엥? 그게 무슨... 아!"
확실히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다.
지금껏 탑의 원주민과 공략자 사이에서 어떠한 사랑의 결실이 맺어진 적이 없지 않던가?!
그런데 어떻게 백구는 저렇게 대가족을 이룬 것이란 말인가!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어떻게 저게 된 거지? 동물은 논외라든가...?"
"그것도 전례가 없어."
그 외에도.
'이곳이 탑이 아니라 바깥 세계라서 가능했다'든가.
'백구가 특수한 사례'라든가.
'주인이 특별한 이레귤러이기에 그 영향을 받은 것이다' 등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으나 이렇다 할 결론은 내지 못했다.
"뭐,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어?"
씨익 미소 짓는 주인.
"그래서, 가족들은 왜 데려온 거야? 나한테 인사시키려고?"
"음, 그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그가 간단한 상황 설명을 해 주자.
주인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찬다.
"아무리 집이 넓어도 그건 안 돼. 정확히는 불가능하지."
"낑낑...."
애처로운 눈빛을 발사하는 백구.
"집이 넓은 건 맞는데, 네 대가족을 다 수용하는 건 어려워."
"끙끙...."
그래도 평소에 주방에서 가장 묵묵히 일하던 백구가 약한 모습을 보인 탓일까.
분신이 슬며시 주인에게 말한다.
"주인, 어떻게, 다 수용할 방법은 없으려나?"
"반대하는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한데... 백구 닮은 꼴들을 보고 있자니 조금 마음 약해지네."
백구를 빼닮은 새하얀 강아지나 얼룩덜룩한 강아지들.
녀석들은 연신 어미들의 다리에 들러붙어 떨어질 생각을 않는다.
"흠...."
잠시 턱을 쓸어내리는 주인.
"그래, 백구가 문제인 거지, 백구 가족이 잘못한 건 아니니까. 솔직히 나도 중성화를 안 시키고 방치한 잘못이 있기도 하고."
"헥?"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고."
* * *
며칠 뒤.
부스럭-
난 테이블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박스를 조심스럽게 개봉했다.
박스 안에서 여러 장의 사진들이 쏟아져 나오자.
"오, 잘 나왔네."
난 사진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널따란 마당, 설치형 수영장, 배식대 등등.
사진 속의 장소 곳곳마다 강아지들이 한가득하다.
'그보다 이건 어떻게 찍으셨는지 모르겠네.'
한 장의 사진 속에는, [백구의 가족 농장]이라는 커다란 간판 밑으로.
수십 마리가 넘는 강아지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이걸 찍는다고 꽤 고생하셨겠네.'
이 사진을 보내 준 건.
내가 임시로 고용한 농장의 직원이었다.
'그보다 휴가용으로 샀던 시골 땅을 이렇게 써먹게 될 줄은 몰랐네.'
[오도이촌]
'5일은 도시에서, 2일은 시골에서 보내는 힐링 라이프를!'이라는 문구에 끌려.
경기도 여주 부근에 넓은 부지를 매입했었다.
물론 막상 사 뒀으나 갈 일이 드물어 땅을 관리할 관리자를 고용하는 선에서 그치긴 했지만.
"백구야! 가족사진 왔다!"
"헥?"
내 부름에 샌드위치를 만들다 말고 헐레벌떡 달려오는 백구.
난 녀석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보여 줬다.
"어때? 그래도 저 정도면 꽤 즐거워 보이지? 진짜 이만큼 가족 복지 신경 써 주는 사람도 없다. 인정?"
"왈왈왈왈왈!"
백구도 만족한 듯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아 보이자.
난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근데 이번에는 좋게 끝나서 다행이지만, 다음에도 또 대가족을 만들어 오면 그땐... 알지?"
내가 테이블에 놓인 통에서 핑킹가위를 꺼내 들기 무섭게.
후다다닥-
백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주방으로 도망친다.
난 그 모습을 보곤 픽 웃었다.
'하여간 중성화 이야기만 나오면 거의 발작을 하네.'
그래도 종종 농장에 백구를 데려가긴 해야겠지.
가족이니까.
'그건 그렇고....'
난 너튜브에 올라온 뉴스들을 차분히 살펴봤다.
[중국에 발생한 기상이변은 정말 탑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전례 없던 기상이변의 상처를 서서히 딛고 일어나는 중국.]
[탑은 현실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 이구민 박사]
'호오, 분위기가 좀 바뀌었네.'
탑 관리국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균열이 활동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까?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탑과 기상이변의 관계성을 의심하던 언론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게 느껴진다.
그 외에도.
[관리국의 적극 지원 정책, 상당히 효과를 보여.]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고자 하는 인원의 증가세가....]
[다른 탑의 존재, 과연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다양한 뉴스들이 나의 시선을 자극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가고 있네, 아직까지는.'
탑에 유입되는 공략자들이 늘어났고, 공략에 진심으로 임하는 공략자들의 숫자 또한 전에 비해 크게 늘어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신경 써야 할 부분들이 많단 말이지.
스윽-
내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스스스스스슥-
여러 개의 화면들이 나의 눈앞에 떠오른다.
그 안에는.
[우와아아악! 또 쏟아진다!]
[빨리 저쪽으로 숨어!]
여러 개의 물감을 섞은 듯 굽이치는 회오리 모양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잡동사니들을 보며.
황급히 몸을 피하는 바빌론 클랜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켜!]
소리친 에드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거대한 막이 생성되고.
터더더더덩-
막을 뚫지 못한 잡동사니들이 우산에 맺힌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꽤나 강력한 보호막이네.'
그리고 저 힘은 아마도... 다른 관리자가 부여한 힘에서 파생된 것일 터.
난 계속 영상을 주시했다.
'흠, 뭔가 그 관리자라는 놈과 커넥션이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까지는 여타의 공략자와 별반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지 않은가?
'일단 좀 더 지켜봐야 되나.'
계속 관찰하다 보면.
언제고 단서를 발견할지도 모른다.
'만약 정말 다른 관리자가 개입했다고 한다면....'
변색된 금화보다 명확한 증거가 있다면.
곧바로 바빌론 클랜을 배제할 생각도 갖고 있다.
다만.
'일단 그 관리자랑 연락이 닿아야 말이지.'
내게 금화를 줬던 본사의 관리자 녀석.
금화가 변색됐는데도 왜 모습을 안 보이는 건지.
'일이 많이 바쁜가?'
뭐, 조만간 연락을 주겠지.
만약 계속 연락이 없다고 한다면 내가 직접 움직여도 되는 거니까.
'그보다... 끙. 고민이네.'
최근 내게는 무엇보다 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수요가 너무 늘었어.'
'탑 멸망'을 발언한 이후 탑을 공략하고자 하는 공략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더불어 '패 소지자'들 또한 덩달아 그 숫자가 불어났다.
'예상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감당이 안 된단 말이지.'
편의점에 들일 수 있는 상품의 숫자는 한정적인 반면.
지금도 상품을 원하는 손님의 수는 늘어나고 있으니.
'솔직히 이대로 운영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전부 소화하는 게 좋겠지.'
탑의 멸망이라는 새로운 추진체가 공략자들의 공략 의욕을 부추겼다고는 하나.
편의점의 상품이 의욕을 더욱 끌어올린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실제로.
[젠장, 이게 뭐냐고! 아무리 열심히 공략하면 뭐 해! 환상의 상점을 이용 못 하는데!]
[그래, 잘난 놈들끼리 공략해라. 난 관두련다. 바깥의 물건도 못 사는데 뭣 하러 공략해?]
거듭 편의점을 이용하지 못하고 흑화해 버린 공략자들도 제법 등장하고 있지 않은가?
'그걸 감안하면 공급을 늘려야 할 것 같긴 한데....'
공급량을 늘리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바깥에서 상품들을 더 많이 사들이면 되는 거니까.
'근데 그러면 내가 하루 종일 상점에 붙어 있어야 한단 말이지.'
많은 인원을 소화하는 건 단연코 쉬운 일이 아닐 터.
'흠, 그 능력을 사용해 볼까. 그러면 어느 정도 수요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 * *
다음 날.
41층, 포탑의 나라.
포탑의 나라는 환상의 상점주가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층.
그렇기에 해당 시간에 맞춰 상점을 이용하려는 공략자들로 인해.
이미 일대는 포화 상태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와, 사람들 봐라...."
"그러게. 오늘은 살 수 있을까? 우리 차례까지 왔으면 좋겠는데...."
내심 불안해하는 브론즈-패 소지자들.
"이제 슬슬 긴장하긴 해야 돼. 우리도 더 이상 안정권이라고 보기는 어려우니까."
"그러니까 빠르게 골드-패까지 올려야 한다니까?"
"말이 쉽지, 골드까지 등급 올리기가 좀 쉬운 줄 알아?"
실버-패 소지자들 또한 조금 상황이 나았을 뿐.
걱정을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10분 정도는 통화해야지."
"난 강화 좀 하려고. 이번에 새로 무기를 바꿨는데 +2강 정도는 해 줘야지."
오직 소수의 골드-패 소지자들만이 작금의 상황에서도 여유로울 뿐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상황이 교차하던 그때.
스스스슥-
일대의 공간에 환한 빛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오오오! 온다!"
"젠장, 상점주! 엄청 기다렸다고!"
저마다 처한 상황은 달라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패를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인다.
몇 분 뒤.
딸랑-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방문해 주신 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상점주가 상점 바깥으로 나오자.
"우오오오오오오!"
"매일 이 순간만을 기다린다고!"
"오늘은, 오늘은 살 수 있는 거죠?! 상품을 많이 가져온다고 하셨잖아요!"
그 어느 때보다 열렬히 상점주를 맞이하는 공략자들.
"하하하, 오늘은 평소보다 더 반응이 좋군요. 다만, 일단 상점을 열기에 앞서 한 가지 사안을 공지할까 합니다."
"공지? 또 무슨 이벤트를 열려는 건가?"
"아니면 저번처럼 폭탄 발언을 하려는 걸지도 모르지."
모두가 기대 어린 눈으로 상점주를 바라보던 중.
상점주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오늘부터는 환상의 상점 외에도, 무인점포를 같이 운영해 볼까 합니다. 어떻게 보면... 2호점이 되겠네요."
223화 아무튼 무인점포는 맞잖아?
"무인... 점포라고?"
"점원 없는 상점을 말하는 거지? 근데 그게 가당키는 한 건가?"
상점주의 발언에 대다수의 공략자들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법보다 힘의 논리가 더 크게 작용하는 탑 안!
하물며 이 환상의 상점 또한 상점주가 힘을 바탕으로 내세운 규칙하에 운영되고 있는 공간이 아니던가?
근데 무인점포라니?!
"상점에 상품만 덜렁 있으면... 그게 제대로 돌아가려나?"
"내 말이. 오히려 작은 무법 지대가 되지 않을까?"
주인 없는 상점.
그곳에서 벌어질 일은 너무도 극명했다.
"도난이야 귀여운 수준일 거고, 상점에 불을 지르거나 때려 부수려는 놈들도 있을걸?"
"에이, 방화는 귀여운 수준이지! 나였으면 무인점포 입구를 틀어막고 통행세를 받는 법도 생각을... 워워, 진정해. 내가 한다는 게 아니라, 만약 내가 나쁜 놈이었으면, 이라는 가정인 거지!"
공략자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며 무인점포의 성공 여부를 논하던 그때.
"하하하, 무인점포의 안전성과 활용성에 의문을 품고 있는 분들이 있군요. 하지만 너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여러분이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오! 상점주! 무인점포에 뭔가 해 놓은 건가? 그렇다면야 안심이지!"
그저 '무인점포는 안전하다'라는 말뿐이었으나.
자리에 있던 공략자들은 일말의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상점주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무인점포라고는 했지만, 역시 직원을 둔 모양이야."
"아니면 관리자니까, 뭔가 시스템 같은 걸 설치했을지도?"
"그런데 상점주! 그 무인점포라는 건 언제부터 운영을 시작하는 겁니까?!"
한 공략자의 질문에 상점주가 씨익 웃는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현재 무인점포는 운영 중에 있습니다."
"음? 이미 운영 중이라고요?"
"네, 현재 무인점포는 엔드미엘에 오픈해 뒀습니다."
* * *
같은 시각.
35층,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길고 길었던 마족과 수인족의 대립과 용사와 마왕의 싸움의 끝을 기념하고자 만든 평화의 도시.
"저희 달콤두툼 베이커리의 특제빵! 달콤계란빵을 드셔 보세요! 코카트리스의 알로 만들어서 맛이 아주 진해요!"
"달콤두툼 베이커리보다 맛있는 우리 쌍둥이의 눈사람 빵을 먹어 보라고!"
이제는 검과 마법, 피와 대를 넘어 내려오던 원한 대신.
마을 곳곳에선 빵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중이었다.
"오오, 저건 맛있어 보이는데?"
베이커리 앞을 지나가던 몇몇 공략자들이 잠시 발길을 멈추곤.
진열된 빵들을 구경한다.
"그러게. 이제 여기는 완전 베이커리 마을이 됐네."
"근데 수왕도 어지간히 빵을 좋아하나 봐? 얼마나 빵을 좋아하면 이런 마을까지 만들었을까?"
"수인들이 빵 좋아하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난 오히려 마족들이 빵 굽고 있는 게 놀랍다, 놀라워."
남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참에 우리도 여기서 자리 잡는 건 어때? 제빵 기술을 배우면 잘살진 못하더라도 안락하게 사는 것 정돈 가능할 것 같은데?"
"취직은 개뿔.... 소문 못 들었어? 탑 공략을 안 하면 탑이 멸망한다는 것?"
"그건 뭐... 우리보다 잘난 능력을 가진 놈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지 않을까?"
멸망.
당연히 막을 수 있다면 막는 것이 좋다는 것 정돈 안다.
그러나 멸망을 막는 것도 결국 그것을 막을 힘이 있는 놈에게나 주어지는 선택지이다.
"아직 우리도 안 늦었어! 지금처럼 천천히 한 층, 한 층 올라가다 보면...."
"그러다가 죽었다고 치자. 근데 탑이 멸망하지 않으면? 그건 좀 억울하잖아. 그럴 바엔 차라리 내 눈으로 멸망을 지켜보는 게 낫지."
"그래서 공략을 안 하시겠다?"
"안 하겠다는 건 아니고...."
남자가 뒷말을 이으려던 찰나.
동료가 짐 보따리에서 주섬주섬 초코바를 꺼낸다.
"공략을 안 하면 환상의 상점도 이용 못 한다고."
"그래. 그래서 계속 공략하고 있는 거잖아?"
공헌도를 벌지 않거든 환상의 상점에서 발급 받은 패가 소멸해 버리니 말이다.
"이곳에서 좀 쉬다가 황혼의 사막으로 넘어가자고."
황혼의 사막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사막의 망령.
그놈이 가끔 떨어뜨리는 보석은 마족들에게 꽤나 수요가 있는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도시를 돌아다니던 그때.
"음?"
한 남자가 발걸음을 멈춘다.
"...저건 또 뭐야? 빵집인 줄 알았더니."
"왜? 뭔데 그래?"
모두가 남자가 바라보는 건물을 쳐다본다.
"편의점24 종말의 탑... 무인점?"
"뭐야. 화, 환상의 상점인 것 아냐?"
"아니. 잘 봐, 환상의 상점보다 크기가 작잖아."
과연 남자의 말대로다.
2층 규모에다가 널따란 사이즈를 갖고 있는 환상의 상점과 달리.
그들의 앞에 자리한 무인점은 그보다 규모가 작은 편이었다.
"근데 이거, 누가 장난질 한 것 아냐? 이름만 환상의 상점이랑 똑같이 했다든가...."
쿵-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붙인 남자가 눈알을 좌우로 굴리더니.
동료들을 보며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아무래도 우리는 꽤 운이 좋은 모양인데?"
"왜, 왜? 뭔데?"
"네가 직접 와서 안을 보라고."
남자의 말을 따라 조심히 유리창을 통해 내부를 살피는 이들.
"오? 오오오오?! 잠깐... 저건 빅밤 아냐?!"
"라, 라면...! 거기다가 저기 봐! 음료수도 있다고!"
환상의 상점에 비해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 내부는 환상의 상점에 꿀리지 않을 정도로 알차게 구성되어 있었다.
"미친! 저것 봐! 아이스크림이랑 냉동도 있어!"
심지어 패 소지자만이 구매할 수 있는 귀한 상품들은 물론이요.
"어? 어어어? 저건 통화 부스잖아?"
"맙소사...."
그 개수가 1호점에 비해 적긴 해도.
통화 부스까지 갖춰져 있었다.
"통화 부스까지 있는 걸 보면 진짜 상점주가 운영하는 곳 같긴 하네."
"일단... 들어가 볼까?"
슬며시 좌우를 살피던 남자들은 이내 무인점으로 들어선다.
"크으, 진짜 끝내주는데?!"
진열대에 놓인 상품들을 보며 함박웃음을 짓는 남자들.
"그러니까 이걸 다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거잖아?!"
평소에는 거의 텅 비어 있는 진열대를 보기 일쑤였건만.
지금은 진열대마다 상품들이 꽉꽉 들어찬 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풍족게 한다.
"좋아! 일단 쫙 담아 보자고!"
남자들이 냅다 가죽 가방을 바닥에 내팽개치곤.
진열대의 상품들을 한 아름 끌어안는 그 순간.
띠링-
[경고합니다.]
[귀하가 소지하고 계신 패의 등급은 실버입니다.]
[구매하실 수 있는 상품의 개수는 6개입니다.]
그들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건 또 뭐야. 6개?"
"아무래도 우리의 패 등급 때문에 그런 것 같은데? 어쩔래?"
상식적으로는 알고 있다.
이곳은 엄연한 환상의 상점주의 영역이며.
그의 눈에 거슬리는 짓을 해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도 말이다.
그러나.
"...."
스멀스멀-
이곳에 보는 눈이 없어서일까.
"상관없지 않나?"
검은 욕망이 이성을 누르고 끝내 날개를 펼치고야 만다.
"솔직히 지키는 사람도 없고, 상품만 떡하니 놓여 있으면 털어 달라고 놔둔 거나 마찬가지 아냐?"
"그, 그렇긴 하지만 여기는 상점주의 영역인데...."
"이 정도면 오히려 상점주도 우리가 털어 가길 바라는 걸지도 모르지! 됐고! 전부 쓸어 담아 버리자고!"
남자가 막무가내로 진열대의 상품을 자루에 담기 시작하자.
"어, 어... 으음... 이게 맞나?"
"에이씨, 모르겠다. 일단 털어!"
긴가민가하던 동료들도 이내 남자를 따른다.
띠링-
[경고합니다.]
[귀하가 소지하고 계신 패의 등급은 실버입니다.]
[구매하실 수 있는 상품의 개수는 6개입니다.]
계속하여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지만.
이미 눈이 뒤집어진 남자들을 제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자, 다 담았으면 얼른 빠져나가자고!"
두툼한 자루를 챙겨 밖으로 나가려는 남자들.
쿵-
"음?"
"왜 그래?"
"문이... 안 열리는데?"
그러나 어째선지 무인점의 문이 열리질 않는다.
"뭐야! 왜 안 열리는데?!"
쾅, 쾅-
손발로도 모자라 저마다 들고 있던 무기로 문을 내려찍어도.
문에는 자그마한 흠 하나 생기질 않았다.
"시발! 왜 안 열리는 거냐고!"
띠링-
[경고 횟수가 누적되었습니다.]
[형벌을 집행합니다.]
"...형벌? 아무도 없는데 형벌을 어떻게 내려!"
이미 반쯤 넋이 나간 남자가 소리를 지르던 그때.
덜그럭-
카운터 부근에서 무언가 기묘한 소리가 울려온다.
"우,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어?"
덜그럭, 덜그럭-
이내 카운터에서 소리를 자아내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흉흉한 노란 안광을 내뿜는 것들.
저것들은 분명 상점주를 돕던 용아병들이었다.
"...무인점이라고 하지 않았어?"
"저것들이 사람은 아니니까 무인점이 맞지 않을까?"
"지금 농담할 분위기야?!"
남자가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쳐들며 소리친다.
"까짓것 해보자고! 상점주도 아니고 겨우 해골 나부랭이들이잖아?!"
사실 이미 그들에게 싸우는 것 외의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다 박살 내고 튀자고!"
"우오오오오오오!"
몇 분 뒤.
"비, 빌어먹을...."
"스켈레톤 따위가 왜 이렇게 강한 거야...."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얼굴이 퉁퉁 부은 남자들이 줄줄이 포박된 채.
용아병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끌려간다.
"우, 우리를 어디로 데리고 가는 거야?!"
"무인점이라며! 무인점이라며! 훔치라고 만든 곳이잖아!"
남자들의 외마디 비명을 끝으로.
그들은 곧 자취를 감춘다.
* * *
[자, 잘못했어! 다시는 안 그럴게!]
[진짜 잠깐 눈이 돌아가서 그런 거라니까?!]
포박된 남자들의 모습이 편의점의 벽면에 비치기를 몇 분.
이내 그들의 모습이 벽면에서 사라지자.
"저걸 무인점이라고 봐야 하나?"
"확실히 사람이 없으니 무인점이긴 한 것 같기도 하고."
환상의 상점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공략자들이 수군거린다.
"근데 확실히 걱정할 일은 없겠어."
"용아병이 지키고 있다면야 뭐...."
상점주만큼의 무력은 아니겠으나.
영상 속의 공략자들이 용아병들의 손에 처참히 깨진 것만 봐도 그 힘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
무인점의 '무법 지대화'는 걱정할 일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확실히 무인점이 있다면 조금은 편해지겠는데?!"
"그러니까! 솔직히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고!"
"상점주! 무인점은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 겁니까?!"
공략자들의 물음에 상점주가 웃으며 말한다.
"기본적인 방식은 환상의 상점과 동일합니다. 다만 본점과 차이점이 있다면, 강화나 분해 같은 몇 가지 기능을 이용하지 못한다는 점이 있지요."
"무인점도 규칙적으로 출몰하는 장소가 있나요?!"
"혹시 무인점을 더 늘릴 계획도 있는 건가?!"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 속에서.
상점주는 대답 대신 슬며시 손을 들어 보인다.
"당분간 무인점은 몇 군데에 한해 고정적으로 등장시킬 예정입니다."
"오오오오오!"
"그리고 무인점의 확장은 여러분의 공략 정도에 따라 달려 있죠."
"우리의... 공략 정도?"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가는 상점주.
"무인점은 여러분이 성실히 공략에 임했기에 제공한 혜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더 적극적으로 공략에 나선다면 더 많은 혜택들이 제공되겠죠?"
* * *
몇 시간 뒤.
'전량 매진인가.'
1호점의 모든 물량이 매진된 것은 당연했고.
무인점의 상품들 또한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팔려 나갔다.
'이러면 조금은 수요를 해결할 수 있겠지.'
물론 상품을 원하는 공략자들의 숫자에 반해.
아직 공급량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그래도 일단 계획한 대로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네.'
근데 진짜 레벨을 올려서 '무인점포'의 능력이 상향되면.
무인점을 더 만들어 낼 수 있으려나?
'그럼 진짜 말도 안 될 것 같긴 한데.'
난 픽 웃으며 열쇠를 집었다.
'일단 집으로 돌아갈까.'
* * *
며칠 뒤.
"쓰쉔 관리장님, 이쪽입니다."
"흠...."
정장을 차려입은 일단의 무리가 엄중히 경계 중인 군인들을 지나 어딘가로 이동한다.
"아담 관리장님도 오셨군요."
"하하, 영상으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직접 보는 것보다 좋은 게 없죠."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그 외에도 각국의 관리장들이 안내를 받으며 통로를 따라 걷는다.
"혹시나 무슨 일이 생기진 않겠죠?"
"균열이 활동을 멈춘 지 꽤 된 듯하니, 괜찮을 겁니다. 유사시의 경우 여기에 있는 최고의 요원들이 여러분을 보호할 겁니다."
김중후 관리장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이동하는 각국의 관리장들.
이윽고 그들의 눈앞에 거대한 철문이 모습을 드러내고.
"문을 개방하겠습니다."
끼이이이익-
육중한 철문이 서서히 열린다.
"오오...."
"탑을 실물로 보는 건 오랜만이군. 여전히 굉장한 박력이야...."
거대한 탑을 바라보는 관리장들의 입에서 연신 감탄사가 흘러나오던 중.
김중후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것이 바로 '균열'입니다."
224화 인성 카페 보유국 (1)
"오오... 저것이 균열...."
균열을 바라보는 좌중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꼭 금이 간 거대한 창문처럼 생겼군요. 영상으로 보던 것과 똑같네요."
"그러게요. 확실히 상식을 벗어난 종류의 물체네요. 물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고 싶군."
안전하다고 생각한 걸까.
몇몇 관리장들이 홀린 듯 균열에 다가가려 하자.
김중후는 얼른 그들을 제지했다.
"과한 접근은 자제해 주시기 바랍니다. 언제 긴급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까요."
"그날 이후 아직까지 이렇다 할 활동은 없다고 하지 않았나? 조금 더 가까이서 본다고 한들...."
"혹시나 이변이 생길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저희에게 있습니다. 그러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김중후가 딱 잘라 거절하자.
몇몇 관리장들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아쉬운 일이군. 아 참, 그보다 김 관리장, 그건 어떻게 됐나?"
"그것이라니요?"
"수색대를 편성해서 균열 안으로 들여보낼 거라 하지 않았나?"
"아...."
김중후가 씁쓸해하는 미소를 짓는다.
"결과적으로 탐색은 실패했습니다. 정확히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군요."
"시도조차... 못 했다고?"
"균열에 진입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습니다. 이미 결과를 전달드렸을 텐데요?"
"미안하네만, 난 따로 전달받은 것이 없네."
"그럼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르겠군요."
김중후가 옆에 있던 병사에게 손을 까딱이자.
대기 중이던 드론이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위이이잉-
천천히 균열을 향해 접근하는 드론.
이윽고 드론이 균열 언저리에 다다랐을 무렵.
까가가가각, 펑-
돌연 드론이 있던 자리에서 작은 폭발이 일어난다.
"뭣?"
"...."
떨어져 내리는 드론의 잔해를 바라보는 관리장들을 보며.
김중후가 무심히 말한다.
"드론, 로봇 개, 무인 장갑차 등, 투입할 수 있는 건 다 투입해 봤습니다만, 결과가 저렇더군요."
"탐지기들이 파괴된 이유는 나온 건가요?"
"아직 과학적으로 어떠한 근거도 나오진 않았습니다. 그저 '정체불명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파괴됐다는 것 외에는 말이죠."
천천히 허리를 숙여 드론의 잔해를 챙기던 아담 관리장이 쓴웃음을 짓는다.
"아쉬운 일이군. 만약 이쪽에서 균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면 새로운 가능성을 확보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새로운 가능성이라.... 역시 그건 탑에 들어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인 겁니까?"
김중후의 물음에 아담 관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균열이 탑의 영향으로 발생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균열의 끝자락이 '탑 안'일 수도 있다."
"...."
확실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균열의 출구가 바깥 세계라면, 그 입구는 어디일까?
그건 바로 '탑 안'이 아닐까?
"만약 균열이 정말 통로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면 대규모의 병력을 파병하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아쉽군."
다른 탑의 존재 그리고 멸망.
어쩌면 바깥 세계의 힘으로 막아 낼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했건만.
현실의 벽은 만만찮은 듯했다.
"어쨌건 이렇게 균열을 직접 본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어요."
"일단 돌아갈까요? 어차피 오늘만 보고 말 것도 아니잖아요?"
관리장들이 균열을 뒤로하고 천천히 발길을 돌리자.
김중후는 그런 그들에게 웃으며 말한다.
"오늘은 귀하신 분들이 모인 만큼, 귀한 곳에서 만찬을 대접할까 합니다."
"...귀한 곳이요?"
"일단 이동하시죠."
* * *
당일 저녁.
"와...."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는 수정이.
"언니, 저 혹시 꿈꾸고 있는 걸까요?"
수정이의 질문에 선아는 제 뺨을 꼬집어 본다.
"음,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꿈이 아니라면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본래 마감 시간까지도 손님들로 붐비는 핫 플레이스가 바로 '인성 카페'이건만.
휑-
어째서인지 오늘은 바깥에 손님들이 보이질 않는다.
그것도 피크 타임인 초저녁인데 말이다!
"언니, 혹시 누가 너스타에 근거 없는 소문이라도 흘린 게 아닐까요?!"
전투적으로 너스타에서 '인성 카페'와 관련된 게시물을 훑는 수정이.
그러나 그 어디에서도 이렇다 할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으음...."
"으음...."
다른 직원들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자.
결국 선아가 매니저로서의 직분을 다하고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장님."
"음?"
난 핸드폰을 뒤적이다 말고 선아를 올려다봤다.
"오늘... 괜찮은 걸까요?"
"괜찮냐고? 그게 무슨... 아."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얘들한테 그걸 말 안 해 줬네.
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은 평소보다 좀 한가하지?"
"한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람이 없어요."
"오늘따라 갤러리도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하네."
방문객이 없어서일까.
어느새 카페로 내려온 나라도 커피를 홀짝이며 우려를 표한다.
'다들 표정이 꽤 심각하네. 하긴....'
다른 카페들이야 어떨지 몰라도.
항상 사람들로 미어터지던 인성 카페에 손님이 없다는 건 정말 전례가 없던 일이었으니까.
다만.
"푸하하하하!"
난 그 이유를 알고 있었기에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인성아?"
"사, 사장님...?"
"미안. 조금 상황이 재밌어서 웃었네. 아무튼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오늘은 단체 손님이 카페를 전세 내기로 했거든."
내 대답에 여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전세요?"
"하, 하지만 사장님! 단체 예약... 아니, 예약은 안 받으시는 게 아니었어요?"
"그치."
한 명이라도 더 다양한 손님을 받는다는 취지에서.
개인, 단체 손님의 예약을 비롯하여 카페를 통째로 빌려주는 경우는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했었으니 말이다.
"근데 이번에는 조금 상황이 그렇게 됐네. 거절해도 되긴 했는데, 나도 좀 관심 있는 사람들이 온다고 해서 이번만 수락했어."
오늘 아침,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었다.
저녁에 인성 카페를 통째로 대여해도 되냐고 해서 거절하려 했건만.
'근데 보통 그런 양반들은 파인 다이닝 같은 곳에서 식사를 하지 않나?'
"사장님이 관심 있는 사람이요? 누, 누가 오는데요?"
"나도 궁금해, 인성아. 누가 오는 거야?"
여자들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던 중.
수정이가 눈을 반짝거린다.
"호, 혹시 R.B는 아니죠? 그쵸? 잠깐만요! 저 화장도 대충 하고 왔는데 마, 마렌이 오기라도 하면...."
"아쉽게도 그건 아니야. 몇 번 제의가 오긴 했었는데 거절했거든."
"아아, 역시... 네에?! 제의가 왔었다고요?!! 근데 거, 거절을...."
R.B의 단체 예약을 거절했다는 말에 현기증이라도 온 걸까.
수정이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바로 그때.
덜컹-
갑자기 카페의 문이 열린다.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남자들이 연이어 들어와서 그런지.
"어, 어서 오세요...."
수정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낯선 방문객들을 응대한다.
"...."
남자들은 수정이의 응대에 살짝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신하곤.
곧장 내게 다가온다.
"혹시 인성 씨 되십니까?"
"네, 제가 김인성입니다."
"경호 팀장 전수학입니다."
아하.
이 양반이 아침에 전화를 했던 사람이구나?
"사전에 연락을 드리긴 했습니다만, 음식의 준비는...."
"이미 다 준비됐습니다. 손님들만 오시면 되죠."
"예, 그럼 잠시 실례를...."
갑자기 주방으로 향하는 경호원들.
'음?'
개인 접시에 음식들을 조금씩 덜어 담더니.
맛을 보는 경호원들을 보며 난 헛웃음을 흘렸다.
'뭐야. 기미 상궁들이야?'
물론 사전에 언급을 받았기에 상관은 없다지만.
'근데 국가원수도 아니고, 탑 관리국의 관리장이 방문하는데 이 정도로 경호를 하나?'
내가 작은 의문을 느끼고 생각에 잠기려던 그때.
"크으음?!"
"어, 어떻게 이런 맛이...."
"팀장님... 저 이런 건 처음 먹어 봅니다."
음식을 맛보던 경호원들 사이에서 숨죽인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그냥 너스타빨로 뜬 카페인 줄 알았는데...."
"조용. 우리의 일은 어디까지나 음식의 이상 유무를 확인하는 거다."
이보쇼, 경호 팀장 양반.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선글라스가 흔들리는 것 같은데.
"으음...."
그러나 과연 경호 팀장은 다르긴 다른 건지, 이내 선글라스의 떨림이 멎는다.
음식 검사 후 카페의 건물 곳곳을 살핀 뒤.
무전기를 잡는 경호 팀장.
"검사 끝났습니다. 입장하셔도 됩니다."
[확인 완료.]
잠시 후.
덜컹-
'오....'
다양한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연이어 카페 안으로 들어오자.
난 생각을 조금 바꿀 수밖에 없었다.
'외부의 손님들 때문에 보안에 더 신경을 썼던 거였나.'
근데 이거....
손님들의 면면이 꽤 화려한데?
설마하니 김중후 관리장 말고도 각국의 관리장들이 내 카페에 올 줄이야.
그러던 그때.
"반갑습니다, 김 사장님."
김중후가 내게 정중히 인사를 해 온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 영광입니다. 인성 카페의 음식들은 항상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사담입니다만, 이 카페의 팬입니다."
"예?"
엥?
설마 이 양반, 우리 카페의 단골손님이었나?
아니면 그냥 예의상 하는 소리인 건가?
"하하, 감사드립니다."
"다른 것보다도 바다의 향기는 정말 따로 개별 판매를 요청드리고 싶을 정도로 훌륭하더군요. 차에서 그토록 신선하고도 깊은 풍미를 느껴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호오, 말하는 걸 보니 제대로 먹어 본 것 같네.
그렇다면 인성 카페의 팬이라는 말이 진실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저희 카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저녁 만찬 또한 매우 기대하는 중입니다."
만찬이라....
떡볶이나 붕어빵, 샌드위치가 만찬과 적합한 단어인가 싶긴 하지만.
어쨌건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이 도리 아니겠는가!
"하하, 걱정 마세요. 최고의 음식을 대접해 드리죠."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김중후와의 대화를 끝마친 뒤.
난 다른 관리장들을 향해 소리쳤다.
"오늘 이렇게 인성 카페를 찾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우선 다들 빈자리에 앉아 주시겠습니까?"
"호오...."
머리가 벗겨진 흑인 남자가 이채로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우리나라 말을 꽤 유창하게 하시는군. 혹시 유학 생활을 하신 적이 있습니까?"
토종 한국인이올시다.
다만 탑 통역기가 부착이 돼서 그렇지.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외국 손님들도 많이 방문을 하시는지라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독학이요?! 믿을 수가 없군요! 발음도 그렇고, 정말 미국인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입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훈훈한 분위기 속에 대화가 오가던 중.
눈매가 째진 남자가 투덜거리듯 중얼거린다.
"아무래도 구르메 가이드도 한물간 모양이군. 이런 조잡하게 생긴 음식점에 별을 주다니...."
호오, 이 녀석....
중국어로 말하면 내가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난 웃으며 남자에게 말했다.
"저도 구르메 가이드의 후한 평가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
남자의 가느다란 눈매 사이로 눈동자가 크게 트인다.
"혹시 화교 출신인가?"
화교라 함은 외국에 사는 중국인을 말하는 것일 터.
근데 토종 한국인이라니까 그러네.
"한국인입니다."
"우리나라 말이 꽤나 유창하군...."
"중국 요리에도 관심이 많아 독학으로 배웠습니다."
"그런가."
내가 중국어를 구사한 덕일까.
심술 가득하던 남자의 표정이 한결 풀어졌다.
'그보다 슬슬 준비를 할까.'
"자, 그럼 모두 착석하신 것 같으니 지금부터 음식을 내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내가 주방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사장님, 사장님! 중국어는 또 언제 배우신 거예요?!"
수정이가 토끼같이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날 올려다본다.
"그러니까요. 저 사장님이 영어 말고 다른 나라 말도 배우신 줄 몰랐어요."
선아도 덩달아 질문 대열에 합류하자.
난 머쓱하게 웃었다.
"아, 그거? 요즘 중국인 단체 손님도 많잖아? 그래서 좀 배웠지."
"와아... 그럼 이제 3개 국어를 마스터하신 거예요?"
"마스터까진 아니고, 그냥 간단히 대화하는 정도인 거지, 뭐. 흠흠, 아무튼 잡담은 이쯤 하고 이제 슬슬 준비하자!"
* * *
"...."
손깍지를 낀 채, 테이블에 앉아 있는 김중후.
장 쓰쉔은 그런 김중후를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만찬을 즐기는 자리까지는 좋았다.
과연 구르메 가이드의 별을 3개나 받은 레스토랑이라 그런지.
음식도, 디저트도 모든 게 깔끔하고 만족스러웠으니까.
근데....
[이대로 자리를 파하면 아쉽겠죠. 한국을 대표하는 음료를 맛보여 드리겠습니다.]
엄청난 음료를 맛보여 주겠다며 국빈들을 데리고 온 곳이....
고작 동네의 카페라니?!
'혹시 균열이 사람의 머리에도 영향을 미치는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김중후 관리장이 국빈들을 끌고.
이 동네 카페까지 올 이유가 없잖은가?
'아무리 음료가 대단하다고 한들 얼마나 대단하다고.'
그나마 카페 사장이 중국어를 구사하는 건 마음에 들었지만.
그저 그뿐이었다.
'대충 이야기나 좀 나누다가 숙소로 돌아가야겠....'
그러던 그때.
카페의 사장이 활짝 웃으며 말한다.
"자! 음료와 음식을 기다리시는 동안 먼저 저희 카페의 명물 디퓨저 타임을 즐겨 보실까요?"
'...디퓨저 타임? 그건 또 뭔....'
그러나 이내 향긋한 향기가 카페 안을 가득 채우자.
장 쓰쉔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한다.
225화 인성 카페 보유국 (2)
'이건....'
부드러우면서도 상큼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복숭아 냄새인가? 다른 과일들도 섞인 모양이군.'
어렴풋이 느껴지는 달콤한 냄새. 이건 망고인 같고.
살짝 시원한 것도 같은 게, 민트 계열의 허브도 첨가한 건가.
'...나쁘지는 않군.'
솔직히 나쁜 정도가 아니라 훌륭한 수준이었다.
일국의 관리장으로서 수많은 자리에 참석했었지만.
단언컨대 이런 향은 어디에서도 맡아 본 적이 없었으니까.
"정말 매력적인 향이군."
"그러니까요! 이런 디퓨저가 있다면 저희 집에도 놔두고 싶네요."
다른 관리장 놈들도 이미 향에 취한 듯.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한껏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 쓰쉔이 썩은 미소를 짓는다.
'향기가 좋은 건 인정하겠다만 이렇게 향이 강해서야.'
아무리 향기가 좋다고 한들.
계속 맡다 보면 향기에 익숙해지고 또 질리기 마련이다.
특히나 향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정도는 더할 터.
'쯧, 차를 즐기기에는 글렀군.'
강렬한 향을 맡은 뒤에 차의 향을 맡는다고 한들.
차의 향이 제대로 느껴질 리가 없잖은가?
'구르메 가이드도 한물갔나. 이렇게 세심함이 떨어지는 카페에 별을 주다니.'
역시 타인이 매긴 점수 따위는 신뢰할 수가 없다.
오직 믿을 건 자신의 감각뿐!
킁킁-
그러나 속으로 신랄하게 카페를 비평하면서도.
자꾸 코를 벌름거리는 장 쓰쉔.
"이렇게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정말, 좋군."
각 관리장들이 디퓨저 타임을 즐기고 있던 중.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주문하신 음식과 음료 나왔습니다!"
그들의 앞으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진다.
커피, 차, 에이드 등의 각종 음료부터.
거신 떡볶이, 특제 샌드위치, 컵빙수, 갓 구운 것 같은 빵들까지.
테이블이 꽉꽉 들어찰 정도로 많은 음식의 가짓수 때문일까.
"음, 김 관리장, 호의에는 감사하지만 음식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이미 식사도 하고 왔는데, 주문을 과하게 한 것 아닌가요?"
대부분이 이 자리를 그저 가벼운 대화의 장 정도로 생각했던 만큼.
과할 정도로 많은 음식의 양에 난색을 표한다.
"이봐, 김 관리장."
장 쓰쉔이 김중후를 부른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여기 사장, 김 관리장의 친인척이나 그런 건 아니지?"
"예?"
"아니, 그렇잖아? 밥 잘 먹고 구태여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 것 아냐. 가족 사업 밀어주기야?"
김중후의 얼굴에 커다란 물음표가 걸린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입니다."
"아하! 아니야? 난 또 성이 같아서 그런 건 줄 알았네."
김중후가 사무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국가의 일에 사적인 이익을 끼워 넣을 수는 없죠. 아직 그 정도로 망가지진 않았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장 관리장님과 갔던 레스토랑이 사촌분이 운영하시던 곳이었던가요?"
"...."
장 쓰쉔의 가느다란 눈이 그를 날카롭게 째려봤으나.
김중후는 시선을 무시하곤 다른 관리장들에게 설명한다.
"혹시나 아까의 식사가 부족했을까 걱정하여 넉넉히 주문을 했습니다만,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음료만 드셔도 됩니다."
"그렇긴 한데, 괜히 여기 사장님한테 미안해서 그런 거죠."
"돈 받고 파는 건데 미안할 게 뭐 있나. 오히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지."
퉁명스럽게 대꾸한 장 쓰쉔이 자신의 앞에 놓인 컵을 잡더니.
힐끔 카페의 사장을 올려다본다.
"이게 이 카페의 시그니처 음료라는 건가?"
"네, 그건 저희 카페의 주력 메뉴 중 하나인 포탑에이드입니다."
"시그니처들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물음에 젊은 사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카페에서 판매하는 모든 메뉴들이 저희 카페를 대표하는 메뉴들이거든요."
"...그렇군."
쉽사리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달리.
장 쓰쉔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오만한 놈.'
저명한 레스토랑의 대표 음식들도 그 가짓수가 열 손가락을 넘는 경우가 거의 없건만.
모든 메뉴가 대표 음식?
'에이드가 결국 에이드지, 음료수 맛으로 먹는 게 대표 메뉴?'
어이가 없긴 했지만 그래도 탄산이 들어갔으니.
소화를 시키기엔 제격일 터.
한 손으로는 잔을, 다른 한 손으로는 빨대를 쥐곤.
힘껏 내용물을 빨아들이는 장 쓰쉔.
쭈와아아압-
반투명한 액체가 빨대를 타고 올라가.
입안으로 흘러 들어가는 그 순간.
'...음?'
장 쓰쉔은 자신도 모르게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야 말았다.
'이게 뭔... 다시 마셔 봐야겠....'
쭈와아아압-
"크읍! 허억, 허억...."
도대체 이게 뭐냐.
이게 뭐란 말이냐!
밀도 있는 탄산, 인위적이지 않으나 그 어떤 음료보다 달콤한 과일 맛의 극치가 입안을 태풍처럼 몰아친다.
'이게... 내가 알던 에이드라고?'
충격과 전율로 피부의 솜털이 곤두서는 듯하다.
'이게 에이드라면 내가 지금껏 마셔 왔던 것들은 도대체 뭐였던 거지? 무엇보다... 이미 강한 향을 맡았는데도 그에 꿀리지 않는 풍미와 존재감이라니.'
혼란스럽다.
이러한 기품과 품격을 갖고 있는 에이드가 존재한다는 것도.
그리고 겨우 음료 하나에 충격을 받은 스스로에게도 말이다.
"...."
힐끔 다른 관리장들을 살피는 장 쓰쉔.
"맙소사...! 이 커피는 도대체 뭐죠?! 이 강렬한 불 맛, 강렬한 보디는 정말...."
"바다의, 향기. 과연 그렇군요.... 느껴집니다. 드넓은 대서양이... 눈부시게 헤엄치는 참치들이...! 오오오!"
각기 마신 음료가 다르다 뿐이지.
모두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건 극찬 또 극찬뿐이었다.
"이 정도 수준의 음료라니.... 음식은 어떨지 궁금하네요."
"제이시 관리장, 배부르다고 하지 않았나요?"
"...조금 정도는 괜찮을 것 같네요."
모든 관리장의 시선이 테이블에 놓인 음식들에 쏠린다.
"흠흠, 너무 남기는 건 가게에 대한 예의도 아니니 조금만 맛을 보도록 할까요?"
"그, 그럴까요? 호호호호!"
망설임은 잠시뿐.
어느덧 하나둘 음식에 손을 뻗는 이들.
"이게, 샌드위치라고?"
"마왕의 와플이라고 했나? 이 달콤함은, 허어, 장담하는데, 지금껏 내가 먹은 그 어떤 디저트보다 압도적이로군!"
"이상하네요. 분명 배가 부른데도 왜 자꾸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네요.... 이 중독성 있는 매콤한 맛 때문에 그런 걸까요."
몇십 분 뒤.
깨끗-
한 상 가득 테이블에 놓여 있던 음식들은 오간 데 없고.
반질반질한 그릇들만이 빛에 반사되어 윤기를 뽐낸다.
"하아, 다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게 말이야. 본의 아니게 과식을 해 버렸군."
"하지만 정말 훌륭한 시간이었어요. 이 분위기도, 음료도, 음식도. 모든 게 만족스러웠네요."
빵빵한 배와는 별개로.
모든 관리장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워하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다들 맛있게 드신 모양이군요."
김 관리장이 웃으며 좌중에게 말하자.
관리장들도 머쓱하게 따라 웃는다.
"다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기대 이상이었어요! 정말 이 카페만 이용하기 위해 한국에 재방문할 의사가 있을 정도로요!"
"김 관리장, 차라리 만찬을 이곳에서 하지 그랬나? 솔직히 그 레스토랑보다 훨씬 더 만족감을 느꼈네."
"처음부터 그랬다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불쾌감을 느끼셨을 겁니다."
김중후의 대답에 아담 관리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말도 맞군, 아무래도 여긴 로컬 식당에 가까운 듯하니. 아, 음식과 음료만큼은 글로벌했어. 근데...."
[인성 카페 - ★★]
창가에 놓인 판을 보며 말을 잇는 아담 관리장.
"구르메 가이드의 기준은 이해할 수가 없군. 이 정도 퀄리티의 카페가 겨우 별 두 개라니."
"그러니까요! 세 개, 아니! 네 개를 줘도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그보다 사장님, 잘 먹었어요! 정말 이제껏 먹었던 그 어떤 음식들보다 맛있었어요!"
젊은 사장에게 다가가 거듭 인사를 하는 관리장들.
"하하하, 감사합니다. 즐겨 주셨다니 저도 기쁘군요."
"다음에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이 카페를 즐기러 올게요."
"그것참 감사한 말씀입니다. 아, 근데 다음에 카페를 이용하시려거든 줄을 서셔야 합니다."
"...?"
* * *
잠시 후.
"오, 사장님이 운영하시는 갤러리라니, 흥미가 동하는군요. 한번 구경을 해 봐도 되겠습니까?"
"호호, 물론이죠.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관리장들이 나라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이동하자.
"후우!"
"하아, 진짜 긴장돼서 죽는 줄 알았어요!"
선아와 수정이를 비롯하여 모든 직원들이 쌓아 둔 숨을 토해 낸다.
"다들 고생했어."
"근데 사장님, 그 사람들... 누구였어요? 막 영어로만 대화해서 하나도 못 알아들었어요."
"아, 각국의 탑 관리장들."
"...네?"
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난 웃으며 계속 말했다.
"아까 음식에 독 들었는지 검사했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세상에...."
"그, 그럼 이제 마, 막 그런 사람들만 카페에 찾아오고 그러는 거예요?"
"당연히 그건 아니지. 이번만 특수한 경우였고, 예외는 없어."
이번에야 관리장들이 모여서 무슨 말을 나눌지 궁금해서 카페를 통째로 대여하는 걸 수락한 것뿐.
나이, 국적, 신분을 막론하고 내 카페를 이용하려거든.
줄을 서야 한다는 것엔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나름 괜찮은 시간이었어.'
오히려 사적인 대화의 장이었기에 알게 모르게 흘러나오는 정보들이 있었고.
몇몇 정보들은 제법 흥미롭기도 했다.
'균열을 연구해서 탑과 바깥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겠다라....'
근데 그게 가능하려나?
탑의 관리자들이 그렇게 허술하진 않을 텐데.
그 외에도.
[특수부대의 탑 파병.]
[인원을 추가로 차출하여 탑에 투입하는 방안.]
[균열의 추가 활동 여부.]
여러 정보들을 엿들을 수 있었다.
'나름 조용히 말한다고 말하는 것 같았지만 다 들리니.'
근데 그건 그렇고....
난 힐끔 위층을 올려다봤다.
'올라간 지 좀 된 것 같은데.'
슬슬 내려올 법한 시간이건만.
아직도 구경 중인 건가?
"얘들아, 난 잠깐 올라갔다 올 테니까 쉬고 있어."
"네, 사장님!"
난 엘리베이터를 타고 곧장 갤러리로 올라갔다.
갤러리의 입구에 들어서자.
하나의 그림 앞에 질서 정연하게 앉아 있는 관리장들이 보인다.
그리고.
"10만 달러 나왔습니다! 더 없으신가요?!
그런 관리장들을 향해 소리치는 나라.
"11만!"
"네, 11만!"
'...뭐 하고 있는 거야?'
이건 뭐 영락없는 경매장이 아닌가?
근데 끼어들자니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워.
일단 관망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13만!"
"네, 13만! 더 없으신가요?! 13만? 13만?! 13만! 네, 축하드립니다! C.A.T 작가님의 작품, '도전 그리고 눈물'은 제이시 님께 돌아갑니다!"
"예스!"
금발 여자가 주먹을 불끈 쥐는 중.
나라가 나를 발견하곤 좌중을 향해 빙긋 웃는다.
"다음 작품의 경매를 진행하기에 앞서, 10분 정도 쉬었다 가겠습니다."
"후우... 정말이지 더 이상 놀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오늘 여러 번 놀라는군."
"그러게 말이에요. 설마 이런 곳에서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을 보게 될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요."
각국의 관리장들이 손에 쥔 팸플릿을 보며 거듭 감탄하던 중.
"음?!"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아담이 내게 다가와.
두 손을 덥썩 잡는 게 아닌가?
'이 양반 이거 왜 이래?'
"킴! 듣자 하니 자네가 이 그림을 그린 작가들과 유일하게 커넥션이 있다고 들었네!"
"아, 네, 뭐, 그렇죠."
"혹시 내게 작가들을 소개해 줄 생각은 없나?! 사례는 후하게 하겠네!"
226화 죄와 벌 (1)
작가들을 소개해 달라고?
'이번 걸로 몇 번째더라?'
그룹 낫휴먼과 이어 달라든가, 꼭 한번 작가님들을 뵙고 싶다든가.
하다못해 그들의 친필 사인을 구할 수는 없냐는 둥.
이런 부탁도 벌써 몇백 번을 넘게 받아 이제는 횟수를 세는 것도 잊었으나.
내 대답만큼은 언제나 같았다.
"죄송합니다. 워낙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들이거든요."
"으음. 그건 저기에 있는 큐레이터에게 듣긴 했네만. 그래도 어떻게...."
"굉장히 섬세한 분들입니다. 혹여나 자신들이 외부에 노출이 되거든 업계에서 은퇴하시겠다고 압박 아닌 압박까지 받는 중이라, 저도 여러모로 곤란합니다."
"끄응... 아쉽군."
아담을 비롯한 여러 관리장들은 아쉬움을 내비치면서도.
좀처럼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이렇게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그림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장담하는데, 5년, 아니 3년 내로 낫휴먼의 그림은 세계적인 반열에 오를 거다. 내 감정은 틀린 적이 없어."
"3년이라...."
그러던 그때.
"다들 편히 휴식을 취하셨나요. 그렇다면 이어서 임시 프라이빗 경매를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다시금 나라가 그들의 앞에 서자.
관리장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피기에 여념이 없다.
"자네는 아까 C.L.O.N.E 작가님 걸 구매했으니 이번에는 좀 빠지는 게 어떠나?"
"그래, 제이시. 이번 건 양보하는 게 어때?"
서로 구면인 점을 이용하여 적절한 합의(?)도 오갔으나.
"양보는 무슨 양보? 경매에선 이기는 사람이 가져가는 거지. 그게 경매의 좋은 점 아냐?"
"그렇기는 한데... 끙."
경매의 장에서만큼은 개개인의 관계는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은 이토록 많은 반면.
그림의 숫자는 한정적이었으니 말이다.
"자, 다음 그림은 R.O.B.O.T 작가님의 '행복 그리고 참기름'입니다!"
오오오오오!
* * *
임시 프라이빗 경매는 약 2시간에 걸쳐 마무리됐다.
"하하하하, 킴! 다음에 또 오겠네!"
"정말 만족스러운 시간이었어요. 다음에는 일 때문이 아니라 정말 편안하게 인성 카페를 즐기러 올게요!"
모든 관리장들이 덕담을 남긴 것은 물론이요.
상당수가 재방문 의사를 내비치며 카페를 떠난 건 덤이었다.
"다소 당황스러운 요청이었을 텐데 이렇게 훌륭히 응대를 해 준 점, 감사드립니다."
거기다가 관리장들을 데리고 온 김중후는 내게 정중히 인사까지 했다.
"별말씀을요. 다음에도 저희 인성 카페&갤러리를 이용해 주세요. 아, 그땐 줄을 서셔야 합니다."
"하하, 물론입니다. 그럼...."
관리장들이 카페를 뜨자.
"사장님, 끝난 거죠? 다 가신 것 맞죠?"
여전히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수정이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래, 다 끝났어. 고생들 많았다! 얼른 정리만 하고 퇴근들 해."
"네!"
선아, 수정이를 비롯한 직원들이 바삐 내부를 정리하는 사이.
난 갤러리에서 내려온 나라에게 말했다.
"나라야, 고생했어."
"고생이랄 것도 없지. 이게 내 일이잖아?"
나라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치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돌연 손뼉을 친다.
"근데 인성아, 탑 관리국이랑은 언제부터 연을 튼 거야? 심지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관리장들이었잖아?"
"아, 그거?"
난 피식 웃었다.
"손님들 중에 관리국 직원인 분도 있었던 모양이야. 그래서 이렇게 또 연이 닿은 것 같아."
"이러다 정계 진출까지 하는 것 아냐? 만약 그렇게 되면 낫휴먼 작가님들 그림은 진짜 불티나게 팔리겠다. 소장 가치야 말할 것도 없고, 선물로 보내기에도...."
"워워, 그런 끔찍한 농담 마. 난 지금이 좋아."
그래.
애당초 내가 권력욕이 강했더라면 지금처럼 생활하진 않았지.
'지금의 힘을 이용해서 국가... 아니, 세계를 조종하는 배후가 되는 것도 가능했을지도?'
물론 난 세계를 좌지우지하는 권력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역시 최고의 직업은 돈 많은 한량이랑 취미로 일하는 자영업자지.'
두 직업의 공통점이라면 역시나 모두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한 자유가 있다는 것일 터.
'뭐, 돈 많은 한량이 제일 좋아 보이긴 하지만 카페도 갤러리도 내가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거니까.'
그래.
세상의 명예? 그딴 건 관심 없다고.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탑의 상황이 더 중요하니까.
'아, 그렇게 보니까 나... 생각보다 부지런한 놈일지도?'
이제는 취미가 됐다고는 허나.
카페, 갤러리를 운영하는 것도 모자라 탑에서 편의점까지 운영하고 있으니.
"호호, 당연히 농담이지. 무슨 생각을 그렇게 심각하게 해? 그리고 오늘 우리 회식하는 거지?"
"회식? 너희가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근데 괜찮겠어? 안 피곤해?"
"전 완전 멀쩡해요, 사장님!"
"저도요! 저도!"
선아와 수정이가 번쩍 손을 쳐들자.
다른 직원들도 덩달아 손을 든다.
"그래?"
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러자. 오늘은 다들 고생 많았으니까 소고기로 할까?"
* * *
같은 시각.
톡, 톡-
새하얀 손가락이 테이블을 반복적으로 두드린다.
"흐음...."
멍하니 허공을 보며 손가락을 놀리는 입실론.
테이블에 놓인 수정구를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중했으며 심각했다.
수정구 안에는.
[우와아아악! 또 쏟아진다!]
[빨리 저쪽으로 숨어!]
여러 개의 물감을 섞은 듯 굽이치는 회오리 모양의 하늘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잡동사니들을 보며.
황급히 몸을 피하는 바빌론 클랜이 자리하고 있었다.
[비켜!]
소리 친 에드의 주변으로 반투명한 거대한 막이 생성되고.
터더더더덩-
막을 뚫지 못한 잡동사니들이 우산에 맺힌 빗물처럼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본 입실론이 기가 막혔는지 헛웃음을 흘린다.
"도대체 얼마나 개입한 거야?"
분명 그녀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에드라는 공략자는 '칭호 수집가'라는 고유 능력을 갖고 있었다.
'보유한 칭호의 숫자와 능력에 따라 힘이 상승하는 능력이었나.'
여타의 공략자들에 비해 조금 특이한 고유 능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에드가 크게 특출난 건 아니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증거 자료는 충분히 모았어.'
그가 '개입'하기 전의 활동 자료들.
그리고 '개입'한 이후의 활동 자료들을 세밀히 비교 분석까지 해 뒀다.
'이 정도면 증거로는 충분하겠지.'
그녀는 모아 둔 서류를 내려다보다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래도 이레귤러가 단서를 빠르게 찾아 줘서 다행이었어.'
그 덕에 누군가가 '에드'에게 개입했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포세이돈이라고 확신하기는 어려웠으나.
포세이돈 외에는 이런 일을 꾸밀 이가 없을 터.
'근데 그 생선 대가리는 왜 굳이 옛 이름을 쓴 거지? 정체를 숨길 생각이었던 건가? 꼬락서니를 보면 또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포세이돈의 의중이 어떻건 간에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수정구에 저장된 과거의 영상을 확보한 만큼.
해당 영상을 본사에 제출하거든 포세이돈의 파멸은 예정된 수순이니까.
"후우...."
입실론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지금껏 그녀가 수집한 자료들과 수정구를 바라봤다.
'이제 이걸 본사에 제출하면....'
어떠한 형태로든 커다란 변화가 그녀를 맞이할 터.
"...가 볼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테이블에 놓인 서류들과 수정구를 챙겨 일어나려던 그때.
똑똑-
그녀의 집무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누가....'
황급히 서류와 수정구를 아공간에 넣은 입실론.
"...누구시죠?"
"이이이입실론 님, 저저저, 접니다. 마마맡기셨던 자작업을 다다 끄끄끝마치고 도돌아왔습니다."
노크를 한 건 그녀의 부사수인 모양이었다.
"후우, 마침 잘됐네. 들어와."
"예, 예예!"
부사수가 안으로 들어오자.
입실론이 그에게 의자를 가리켜 보인다.
"잠깐 나갔다 올 거니까, 자리 좀 지키고 있어."
"아아알겠습니다! 그, 그그런데 어디를 가가시는 건지...."
"감사과."
쾅-
그 말을 끝으로 입실론이 집무실을 나서자.
"...."
어딘가 부족해 보이고 어수룩해 보이던 부사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해 간다.
"흠, 감사과라.... 감사과에 갈 이유가 있나?"
아까까지와는 달리 멀쩡한 말투로 중얼거리는 부사수.
그는 테이블에 놓인 서류들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는 것 같은데."
감사과.
부적절한 행위를 하거나 본사의 규칙을 위반했을 때.
신고를 하는 기관이건만.
왜 그의 사수는 갑자기 감사과로 향한 것일까?
"아."
불현듯 입실론 사수가 했던 미묘한 말들이 떠오른다.
[포세이돈 주주가 묘하게 신경 쓰인단 말이지. 아, 신경 쓰지 마. 이 일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주주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으니까.]
[왜 자꾸 종말의 탑을 조사하냐고? 그냥, 좀 관심이 가서.]
'종말의 탑, 포세이돈 주주, 감사....'
몇 가지 키워드들이 모이자.
이내 한 가지 가설이 완성된다.
"...설마 포세이돈 주주가 탑에 개입을 한 건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박장을 관리하는 직원이라면 그의 보유 코인이 바닥났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고.
궁지에 몰린 그가 탑에 개입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근데 사수가 감사과에 간다는 건...!"
부사수의 눈이 부릅뜨인다.
찾았구나.
그래! 찾은 거야!
포세이돈이 탑에 개입한 정황 증거를 찾은 게 분명해!
"그런 거였나."
입실론의 부사수가 실실 웃는다.
"이거이거... 선택지가 두 가지라.... 어느 쪽을 고르는 게 좋으려나."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잠시 입맛을 다시던 부사수가 이내 집무실을 나가 자취를 감춘다.
* * *
툭, 툭-
"흠."
커다란 손가락이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린다.
"즉, 네 사수라는 놈은 내가 규칙을 위반했다고 생각했다는 거군."
"그그그렇습니다. 아아마도 감사과로 가가간 걸 봐선, 뭐뭔가 다, 다다단서를 얻은 것 가같습니다."
입실론의 부사수의 말이 끝나자.
포세이돈이 손으로 수염을 쓸어내린다.
"잘 알았다. 돌아가서 나의 명령을 기다려라."
"예예옙! 저저는 이이입실론의 부부사수입니다. 저저저를 기억해 주시길...."
연신 말을 더듬던 직원이 황급히 그의 거처를 빠져나가자.
포세이돈이 허공을 향해 나지막이 읊조린다.
"케인."
"예, 포세이돈 님."
허공에서 울려오는 목소리에는 어떠한 고저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군세를 불러 모아라."
"알겠습니다. 얼마나 소집할까요."
"전원 불러들여라."
"...라그나로크입니까?"
처음으로 목소리가 감정을 드러내자.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이다."
포세이돈이 픽 웃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다.
"일단 쥐새끼부터 잡는다."
척-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잡아 든 그 순간.
부글부글-
그의 발밑에 웅덩이가 생겨나더니.
삽시간에 그가 웅덩이 속으로 자취를 감춰 버린다.
* * *
같은 시각, 본사 내부.
"...그래도 이제 관할하는 탑들이 줄어서 한결 편해졌지."
"꼭 그렇지만도 않아. 새로운 경쟁 시스템을 만들어 내야 돼서 죽을 맛이라니까."
바삐 복도를 오가는 직원들 사이로 커다란 웅덩이가 생겨나더니.
풍덩-
삼지창을 든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낸다.
"허어억...."
"포, 포세이돈 주주님?"
갑작스러운 포세이돈의 등장에 직원들은 아연실색했으나.
포세이돈은 대수롭지 않게 눈앞의 문을 바라본다.
[감사과]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거기다가 입실론도 보이지 않는다.
'아직 늦지는 않은....'
그러던 그때.
끼익-
감사과의 문이 열리고.
금발의 여인이, 입실론이 모습을 드러낸다.
"...포세이돈 주주님?"
"...."
그리고 그녀의 빈손을 바라보는 포세이돈의 얼굴이 딱딱하게 일그러져 간다.
227화 죄와 벌 (2)
당황한 건 입실론도 마찬가지였다.
'...포세이돈이 여긴 왜 온 거지?'
입실론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본사 방문이 예정되어 있으셨나요?"
"...뭐?"
"포세이돈 주주님께서 본사에 방문하신다는 어떠한 보고나 전달 사항을 전해 들은 게 없어서요."
그러나 포세이돈이 대답하지 않자.
입실론은 복도에 있던 익숙한 동료의 얼굴을 바라봤다.
도리도리-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연신 고개를 젓는 동료 직원.
'방문 약속 없이 무단으로 온 건가.'
아무리 주주라고 할지라도 약속 없이 본사에 방문하는 건.
명백히 규정에 위배된 행동이건만.
"방문 일정?"
올라간 포세이돈의 입꼬리.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네, 약속 없이 본사에 방문하시는 건 규칙에 위배되는...."
"그 규칙은 누가 만들었지?"
"...네? 그야 본사에서 규정한...."
"그렇다면 이 본사는 누가 만들었지?"
입실론이 힘겹게 입을 뗀다.
"그건 주주들께서...."
"그래. 바로 우리가 만들었다. 그런데 고작 우리의 힘에서 파생되어 탄생한 조무래기 따위가 감히 나의 결정에 의문을 표하다니."
포세이돈의 삼지창이 허공에 들린다.
"나의 규칙을 위반한 네년에게는 벌을 줘야겠군."
삼지창 끝에 푸른 기운이 모여들자.
입실론은 그제야 확신했다.
'이 새끼... 그냥 날 소멸하려고 온 거였어.'
분명 완벽히 정보를 은폐하고 포세이돈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건만.
놈은 어떻게 알아챘는지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자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태양에 다가가고자 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지."
"잠깐...."
"사라져라."
삼지창 끝에 맺혀 있던 기운이 날카로운 비수의 형태가 되어.
그녀의 이마로 쇄도해 온다.
'피할 수가 없....'
단순한 형태의 공격이었음에도 입실론은 발을 움직이지 못했다.
아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디든 도망가려고 해도 모든 장소가 죽음의 종착지라고 여겨질 만큼.
피할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그때.
휘리리리릭-
돌연 그들 사이로 거대한 낫이 날아오더니.
포세이돈의 손에 들린 삼지창과 충돌한다.
콰아아아아앙-
두 무기 사이에서 퍼져 나온 힘의 파동을 따라.
복도가 무너지려던 그때.
툭, 떼구르르르-
갑자기 난장판 사이로 굴러들어 온 하나의 큐브가 제멋대로 맞물린다.
그 순간.
"...."
방금까지 복도를 비롯해 건물을 날려 버리려던 힘의 파동은 사라졌으며.
찢겨 나갔던 복도도 처음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포세이돈이 얼굴을 구긴 채로 정면을 바라본다.
"포세이돈, 그쯤 하지."
거대한 낫을 든 소년, 수시로 그 몸을 회전시키는 큐브.
그리고 뒤틀린 떡갈나무 지팡이를 들고 있는 노인 등.
이형의 존재들이 입실론의 앞에 서 있다.
"임원들인가...."
본사의 핵심 전력인 임원진.
보통 그들이 모이는 경우는 드물건만.
어째서 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던 걸까.
* * *
30분 전.
스슥-
검은 가루로 몸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나.
촤륵, 촤르르륵-
수시로 몸을 회전시키는 큐브 등.
이형의 존재들이 커다란 원형 테이블 주변에 착석해 있다.
이들은 모두 본사의 임원들로서.
본사의 핵심적인 존재들이기도 했다.
"이건 확정이군. 증거가 이렇게 명확해서야, 반론할 여지조차 없겠어."
뱅글뱅글 회전하던 큐브의 몸체에서 나지막한 음성이 울린다.
"이게 얼마 만의 개입이더라?"
"잘 기억도 안 나는군. 다만 확실한 건 포세이돈 주주는 본사의 규칙을 어겼다는 거다."
주주들은 진행되는 게임, 즉 탑에 개입해선 안 되건만.
"쯧쯧, 개입을 할 거면 걸리지나 말 것을."
"유희를 즐기다가 유희에 잡아먹힌 놈들이 한둘이던가."
그 말에 테이블 가장자리에 앉아 있던 노인이 껄껄 웃는다.
"어쨌건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 본사의 힘이 강해지는 것이니 말이야."
노인의 말에 모두가 동의하듯.
반박하는 이가 없다.
"그보다 데우스, 이 자료를 가져온 게 일개 대리라는 말이 있던데, 진짜야?"
"허허, 그럼 내가 거짓말을 하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 잘 납득이 안 가니까 그렇지. 대리가 뭔 수로 주주의 개입 여부를 알아낸 건지 궁금하잖아?"
큐브의 몸체에서 질문이 흘러나오자.
데우스라 불린 노인이 껄껄 웃는다.
"직감이었다더군."
"...직감?"
"나름 오랜 시간 주주들의 수발을 들어서 그런 것인지, 무언가 느낌이 왔다더군. 포세이돈 주주가 규칙을 어길 거라는 걸 말이네."
데우스의 말에 테이블 주변으로 마른 웃음이 흘러나온다.
"직감이라.... 아무래도 다시금 직원들을 정신교육 할 필요가 있겠어. 우리를 만만하게 생각하니 그런 변명이나 하는 것 아니겠어?"
대리, 입실론이 자료를 모으기 위해 탑에 개입했다는 건.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주주... 아니, 그 죄인이야 원칙대로 처리한다고 쳐도, 입실론 대리의 처우가 문제군."
"문제 될 게 있나? 그 또한 원칙대로 하면 될 것을. 본사의 직원이 탑에 개입한 것 또한 명백히 규칙에 위반되는 행위다."
"소멸하는 게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본다."
그러나 의견을 내놓던 일부 임원들과 달리.
데우스는 고개를 젓는다.
"그녀가 탑에 간섭한 건 사실이나, 개입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네."
"...뭐?"
"입실론 대리가 탑에 영향력을 행사한 이력은 찾아볼 수 없더군. 그저 보고 없이 몇 번 종말의 탑에 방문했던 게 전부야."
데우스의 말도 틀린 건 아니었다.
입실론이 보고 없이 종말의 탑을 방문한 적은 있었어도.
그녀가 공략자에게 개입한 흔적은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녀가 죄인의 개입 이력을 찾아낸 건 사실이니, 규칙대로 죄인이 보유한 존재력을 그녀에게 부여하는 것이 맞다고 보네."
"으음...."
"겨우 대리에게 신이 가진 존재력을 모두 부여한다라...."
몇몇 임원들이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그도 그럴 게, 주주의 이름을 그들이 받게 되거든.
지금보다 더 강력한 힘과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봐 데우스, 조금 융통성 있게 가는 건 어떠나? 솔직히 대리에게 그 힘은... 조금 아깝지 않나?"
"허허허, 욕심이 과하거든 먹었던 것마저 토해 내기 마련인 것을."
"하지만 포세이돈의 존재력이라면 조금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이야기가 다르다고 결과까지 달라서야 쓰나."
임원들이 서로 의견을 피력하며 논쟁을 벌이던 그때.
파르르르르륵-
돌연 테이블의 끝자락에 놓여 있던 두꺼운 책이 제멋대로 펼쳐지자.
"회, 회장님...."
"오셨습니까."
임원들은 황급히 책을 향해 허리를 숙여 보인다.
"흠흠...."
"으음."
자칫 말 한 마디라도 실수할까 싶어 모두가 침묵하던 중.
스스슥-
새하얀 백지였던 책 위로 문구가 떠오른다.
[포세이돈 주주의 힘을 압수한다.]
[또한 그 성과를 인정하여 압수한 존재력은 입실론 대리에게 부여한다.]
문구를 본 모든 임원이 약속이라도 한 듯 소리친다.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그 무엇보다 회장의 명령은 절대적이었으니까.
툭-
이윽고 그 힘을 잃은 책이 테이블에 떨어지자.
"...가셨군."
임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갑자기 오실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니까."
"근데 회장님은 언제쯤 직접 오실...."
"입조심해."
"미, 미안."
회장님의 정체를 거론하는 것은 엄연한 금기.
값싼 호기심에 선을 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우리는 그냥 회장님 말씀대로 따르면 되는 거야. 회장님의 결정이 틀린 적 있어?"
"그렇긴 하지. 근데...."
바로 그때.
쿠구구구궁-
회의실 바깥에서 거대한 힘의 압력이 느껴지자.
임원들의 표정이 싸늘해진다.
"예정에 없던 손님이 온 모양이군."
"대리를 없애러 온 걸지도 모르지."
"아직 형벌의 날이 정해지진 않았으니 정중히 대하는 걸 잊지 말고."
* * *
여전히 임원들과 포세이돈이 대치하던 중.
낫을 든 소년이 포세이돈에게 훈계를 날린다.
"규칙을 잊은 건 아니지? 여기에서 난동 부려 봐야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잖아. 지금이라면 그냥 묻고 넘어갈 수 있어."
소년의 말에 포세이돈이 껄껄 웃더니.
돌연 정색하며 분노를 드러낸다.
"일개 직원 나부랭이었던 것들이 감히...."
"그런 시절도 있었지. 근데 지금은 아냐."
틀린 말은 아니다.
신들의 존재력을 주워 먹고 그 힘을 덧입은 놈들이니.
'쯧....'
한 놈이나 두 놈 정도라면 상대할 의향도 있겠으나.
저만한 수의 임원들을 상대하는 건 그로서도 부담이었다.
'되는 일이 없군.'
이미 자료가 임원들의 손에 넘어간 것으로 보이는 이상.
이 자리에 더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을 터.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모양이군."
"그래, 그럴 거라 생각했네."
"다음에 기회가 되거든 다시 보든가 하지."
첨벙-
포세이돈이 물웅덩이 속으로 사라지자.
"후우우...."
넘어져 있던 입실론은 비로소 참았던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어이, 입실론 대리."
"예, 옙!"
한 임원의 부름에 벌떡 몸을 일으키는 입실론.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너무 안도하진 마."
"...예?"
끝난 게 아니라니?
지금껏 모아 둔 증거자료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아, 자료가 부족하다거나 그런 게 아냐. 자료는 충분했어."
"그럼...."
낫을 어깨에 걸친 소년이 작게 한숨을 내쉰다.
"너도 대리쯤 달았으면 알 것 아냐? 유희의 끝자락에 선 것들이 지금껏 무슨 일을 벌여 왔는지."
"...."
알고 있다.
순순히 규칙을 따르는 주주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다는 걸.
특히 강력한 힘을 가진 주주일수록.
규칙 따윈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말이다.
"설마... 또 라그나로크가 발생한다는 건가요?"
"뭐, 그럴 가능성이 높지 않겠어? 익숙하잖아?"
실제로 지금껏 몇 차례 신들의 전쟁이 발발했었다.
물론 말다툼 혹은 사적인 이유가 계기가 된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는 규칙을 거부한 신들이 전쟁을 일으킨 게 대부분이었다.
"그럼 지금 바로 포세이돈 주주를 잡아야 하는...."
"아, 그건 안 돼."
"네?"
소년이 씨익 웃으며 대답한다.
"아직 회장님의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거든."
"아...."
* * *
몇십 분 뒤.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입실론.
그녀는 조금 전 임원에게서 들었던 말을 떠올린다.
[일단 돌아가도 좋아. 걱정 마, 별일은 없을 테니까.]
'별일은 없다라.... 그래,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이제 남은 건.
결과와 함께 따라올 결실을 만끽하는 것뿐.
다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대체 어떻게 포세이돈이 내가 자료를 수집했다는 걸 눈치챈 거지?'
아무리 과거의 행적을 곱씹고 곱씹어 봐도 걸릴 만한 증거가 없건만.
그러던 그때.
"이이입실로 님, 이이이 서류는 어어떻게 할까요?"
왜일까.
멍청한 부사수가 눈에 들어온다.
일을 하는 요령이라곤 1도 없는 데다가.
말까지 더듬어 답답함을 2배로 만드는 부사수.
'...설마.'
오늘따라 부사수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왜일까.
'슬쩍 떠볼까. 아니다. 일이 마무리되면 알게 되겠지.'
그래.
우선 이번 일이 무사히 마무리되는 게 우선이다.
그러면 부사수가 정말 정보를 넘겼는지도 알 수 있을 테니.
* * *
몇 주 뒤.
[포세이돈 주주가 규칙을 어겼음이 확인됐다.]
[따라서 본사의 규칙대로 포세이돈 주주에게 제재를 가한다.]
본사의 모든 인원에게 하나의 지령이 전달됐고.
본사의 전력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향한 곳은....
고오오오오오-
소라의 고동처럼 생긴 거대한 구조물 주변으로.
"...."
정장 차림을 한 존재들이 에워싸고 있다.
"포세이돈! 네 죄가 정식으로 인정되었다! 나와서 합당한 대가를 받아라! 거부할 시 무력으로...."
본사의 직원이 소라 고동을 향해 거듭 소리치던 그때.
콰아아아아앙-
순식간에 직원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떨어져 내린다.
으직-
"으으... 아으으으...."
본사의 직원이 삼지창에 꿰여 몸을 파르르 떠는 중.
소라 고동의 주둥이가 천천히 열리고.
포세이돈이 지느러미로 바닥을 콩콩 찍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시끄러워 죽겠군."
포세이돈이 한쪽 팔을 번쩍 쳐들자.
직원을 꿰뚫은 삼지창이 그의 손에 딸려 온다.
"으으...."
포세이돈이 삼지창에 꿰인 직원을 보며 턱을 쓸어내리다가.
천천히 미소를 짓는다.
"함부로 주주의 이름을 그 입에 올린 죄, 그게 네가 소멸하는 이유다."
"자, 잠깐...."
콰작-
주먹으로 그 몸을 가볍게 으깬 뒤.
포세이돈이 활짝 웃으며 직원들에게 소리친다.
"난 누구보다 본사의 규칙을 잘 준수한 것 같은데. 그래서, 내 죄가 뭐라고 했지?"
228화 죄와 벌 (3)
"...."
분명 수많은 직원들이 포세이돈의 거처를 에워싸고 있음에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열지 못한다.
움찔-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그대로 존재 자체가 소멸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때.
"공정해야 할 게임에 무단으로 개입한 것, 본사에 무단출입한 것, 중립을 지켜야 할 직원들을 현혹시킨 것, 그 외에도 포세이돈 주주님의 죄는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직원들 사이로 임원, 데우스가 그의 죄목을 하나하나 읊으며 모습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자잘한 것들을 말하자면 하루로는 부족할 듯한데, 괜찮겠습니까?"
"흥, 잘도 헛소리를 하는군."
"허허, 헛소리가 아니라 사실을 기반으로 말을 한 것입니다만. 여하튼 이제 충분히 납득을 하셨는지요?"
데우스가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를 살며시 흔들자.
삽시간에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빠직, 빠지지직-
그와 대비되듯 새하얀 빛을 발산하는 데우스의 몸을 보며.
포세이돈이 픽 웃는다.
"네까짓 게 그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허허, 과거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지금 이 힘과 권능의 주인은 저인 것을."
"...."
빙긋 웃는 데우스와 그런 그를 노려보는 포세이돈.
데우스가 먼저 입을 뗀다.
"허허헣, 혹시나 해서 묻겠습니다만, 순순히 잡혀 주실 생각은 없으시겠지요?"
"별 시답잖은 농담을 하는군."
"그리 말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데우스가 웃으며 손을 까딱이자.
웅웅웅웅웅-
허공의 곳곳마다 거대한 포탈이 열린다.
포탈 안에는 포세이돈의 거처를 포위한 직원들보다도.
몇 배는 더 많은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벌레들의 숫자가 제법 많군."
"다시 여쭈어보겠습니다. 순순히 잡히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푸하하하하하!"
광기에 젖은 웃음소리가 일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자.
"으윽...."
일부 직원들은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피를 토한다.
"벌레들 상대는 아랫놈들에게 시켜야겠지."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들고 힘껏 바닥을 내려찍는 그 순간.
스스스슥-
바닥에 거대한 파도 문양이 떠오른다.
그리고....
쿠구구구구구구구궁-
빛을 발하던 문양에서 무언가의 끝머리가 튀어나오자.
본사의 직원들이 웅성거린다.
"저, 저건 뭐지?"
"뭔가 건물처럼 생긴 것 같...."
그러나.
콰작, 콰자자작-
문양을 찢어 버리듯 튀어나온 그것이 용오름 치듯 하늘로 날아오르자.
웅성거림은 급속도로 잦아들었다.
"저게 뭔...."
"...."
도대체 그 폭이 어디까지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 거대한 배가 허공에 유유히 떠 있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데우스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아마겟돈이라.... 귀한 걸 보게 됐군요."
아마겟돈.
포세이돈이 세계의 종말을 고하고자 만들어 낸 방주로서.
포세이돈의 모든 병력의 탑승이 가능하며.
방주에 탑재된 신기, 오벨리스크는 능히 신마저 소멸할 수 있다고 한다.
과거 벌어졌던 라그나로크에서도 맹위를 떨쳤었다.
"허허...."
배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무수히 많은 점들.
데우스는 그 모습을 올려다보다가 포세이돈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아무래도 회유는 어렵겠군요."
"계집처럼 입을 놀리는 건 그쯤 하고, 슬슬 오지 그러나?"
포세이돈이 비꼬듯 툭 말을 던진 그 순간.
통-
어느새 포세이돈의 앞으로 도약한 데우스가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허허, 그러잖아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나무 지팡이가 포세이돈의 옆구리를 정확히 가격한다.
뻐어어어억-
기억자로 꺾인 포세이돈의 몸이 직원들이 도열한 방향으로 날아가더니.
쿠구구구구구궁-
포세이돈이 처박힌 공간에서 거대한 굉음이 울린다.
그 여파에 휩쓸린 직원들이 신음조차 남기지 못하고 넝마가 됐으나.
데우스는 포세이돈이 날아간 방향을 보며 온화한 미소를 짓는다.
"허허, 움직임이 예년 같지 않으신 것 같...."
쇄애애애액-
"더 즐겨 보자, 애송이 놈!"
삼지창과 함께 날아온 포세이돈이 그의 얼굴에 창을 내지르자.
황급히 몸을 옆으로 비트는 데우스.
창날의 끝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 앞으로 내질러지자.
콰과과과과광-
창끝이 가리킨 일대에 거대한 물의 폭발이 일어난다.
투둑, 투두두둑-
누구 것인지도 모르는 살점과 핏물이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리는 와중.
"존재에도 엄연한 격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주마!"
포세이돈이 다시금 창을 내지르자.
황급히 지팡이를 가로로 드는 데우스.
그 순간.
콰과과과과광-
삼지창과 지팡이가 맞닿은 틈 사이로 생성된 힘의 파동이 삽시간에 일대를 뒤덮어 버린다.
* * *
회식 후 며칠 뒤.
팅-
손가락으로 튕긴 변색된 금화가 편의점 천장까지 치솟았다가.
다시금 나의 손바닥에 떨어진다.
'도대체 이놈의 관리자는 언제 찾아오려는 거야?'
다른 관리자가 개입한 공략자 '에드'를 찾아냈으니.
금방이고 모습을 보일 줄 알았건만.
몇 주가 지나도록 그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혹시 당했나?'
본사라는 곳이 어떤 방식으로 굴러가는지는 몰라도.
그곳에도 알력 다툼이 있을 터.
그렇다면 그녀가 정적에게 제거를 당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처리를 해야겠지.'
일단 관리자가 알아서 처리하겠거니 놔두고 있긴 했지만.
끝까지 나타나지 않으면 내가 손을 써야지, 별수 있나.
'일단 한 달만 기다려 볼까.'
한 달을 기다려도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땐....
'그건 그렇고....'
'에드'에 대한 생각의 정리를 끝마친 뒤.
난 여느 때처럼 편의점 진열대를 훑으며 고민에 잠겼다.
'흠, 이게 그렇게 맛이 없나?'
전에 신상품으로 들였던 전투식량.
나름 맛도 있는 데다가, 무엇보다 장기 보존이 가능하여 잘 나갈 것이라 생각했건만.
반응은 생각보다 기대 이하였다.
[상점주, 솔직히 통조림이 더 맛있다고!]
[먹어 봤는데... 음, 파운드케이크는 먹을 만했는데 그 소시지볶음이 뭐랄까, 좀 역하던데요.]
여러 피드백을 받은 뒤로 전투식량은 판매 목록에서 빼긴 했지만.
'신상품으로 뭘 들여와야 할지도 고민이네.'
뭐, 사실 지금 판매하고 있는 상품들이 부족한 건 아니다.
스탯을 올려 주는 버프 음식을 시작으로.
각종 부가 효과를 제공하는 PB 상품들.
그 외에도 특제 우표, 강화권&분해권, 통화 카드 등 있으니까.
'하지만 여전히 공급량이 부족한 상황이니까.'
다만, 그저 내 개인적인 욕심일 뿐이다.
'다른 상점들은 몰라도 편의점에서 파는 상품들은 모두 인기 품목이었으면 좋겠단 말이지.'
그렇기에 현장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비교적 인기나 관심도가 떨어지는 상품은 진열대에서 빼 왔었다.
'신상품은 선정할 때마다 항상 고민이 되네. 으으으....'
다음 신상품은 뭘 들여올까.
뭘 들여와야 공략자들이 눈을 까뒤집고 공략에 매진할 수 있을까.
'음, 클랜 하우스 이벤트나 또 개최할까?'
[혹시 다음 이벤트는 언제인가요?]
[그때도 부상으로 클랜 하우스가 걸리나요?]
클랜 하우스에 대한 문의는 이벤트가 끝났음에도 계속 받고 있었으니.
'아! 아니면 이참에 그걸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 * *
당일 오후.
55층, 드라고니아.
"으음, 언제 열리려나...."
"그러게, 벌써 1시간은 기다린 것 같은데."
선구자들, 망치 클랜 등.
탑에서 모르는 이가 드물 정도로 유명한 공략자들임에도.
그들은 오직 반투명한 유리문을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 열리는 거긴 하겠지?"
"요즘 아래층으로 내려가지도 못해서 통조림도 다 떨어졌다고. 무조건 오늘 사야 된다!"
"기다리다 보면 열리겠지. 그건 그렇고 무라단, 요즘 근황은 좀 어때?"
이지수의 물음에 옆에 서 있던 무라단이 껄껄 웃는다.
"근황이랄 게 있나! 적들은 짓뭉개고, 퀘스트는 클리어 하고! 그뿐이지! 그보다 너희...."
게슴츠레한 눈으로 선구자들을 훑는 무라단.
"...더 강해진 모양이군."
달라진 장비,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 얼굴에서 보이는 여유.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62층까지 진입했다고 들었는데, 거기서 기연이라도 얻은 건가?"
무라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옆에 있던 실비아가 까칠하게 말한다.
"정보를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어 죽겠는데, 기연은 무슨 얼어죽을 기연이야."
"그보다 62층의 환경은 좀 어떠나?"
실비아의 투덜거림을 가볍게 무시한 무라단이 이지수를 보며 묻는다.
"60층대라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로 되게 단순해."
"오오! 그럼 금방 통과를 하겠군!"
"아니, 오히려 단순해서 통과를 못 하겠어. 혹시 제작 계열 능력 중 대장장이 계통의 능력을 갖고 있는 공략자를 알고 있어? 대신 압도적으로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어야 돼."
무라단이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대장장이 계열의 제작 능력을 가진 데다가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놈이라.... 그런 놈이 있을 턱이 있나?"
애당초 이 탑에서 '제작 계열'의 능력은 쓰레기와도 같은 취급을 받는다.
장비를 만든다고 해도 탑에서 얻는 장비보다도 질이 떨어지며.
그렇다고 특수한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제작 계열 능력자가 레벨을 올리고 스펙을 올린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역시 그렇지?"
씁쓸히 웃는 이지수.
"왜 그런 공략자를 찾는...."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는 걸까.
무라단이 몸을 흠칫거린다.
"62층의 클리어 조건이 설마... 물건을 제작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정답이야. 대장장이 원주민이 만든 검보다 더 뛰어난 검을 만들어야 돼."
"허, 그건 정말 최악이군....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제작 계열 능력자를 수소문하고 있었던 거라 생각은 했건만, 그런 이유였을 줄이야...."
최근 선구자들이 뛰어난 대장장이를 찾는다는 정보는.
최상층에서 활동하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정보였다.
"그래. 혹시 다른 돌파법이 없는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자리걸음이야."
"얼핏 간단해 보이지만 참 난해한 층이로군. 아! 혹시 강화권을 쓴다면!"
"안 돼. 자리에서 즉석으로 만들어야 하는 거라. 그리고 강화권을 쓰려면 깡 조수가 있어야 되잖아."
"아...."
무라단이 혀를 차자.
실비아가 대화에 끼어들어 핀잔을 준다.
"남 이야기가 아니야. 댁들도 못 찾으면 62층에서 멈춰야 할걸?"
"틀린 말이 아니군.... 나도 수소문을 해 보도록 하지."
그들이 한창 62층의 공략법을 두고 대화를 나누던 그때.
딸랑-
그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벨소리가 울리고.
"오늘도 이렇게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상점주가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오오!"
무라단은 습관적으로 금색의 패를 흔들어 대다가.
돌연 떠오른 게 있는지 이지수에게 묻는다.
"혹시 상점주한테 도움은 구해 봤나?"
"아니."
"음?! 상점주만큼 많은 공략자들을 만나는 이도 없을 텐데, 왜 물어보지 않은 거지?"
"이미 엄청나게 도움받고 있는데, 사람까지 찾아 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는 것 같아서."
이지수의 대답에 무라단이 코웃음을 친다.
"염치가 공략하는 데 도움이 되나?! 좋다! 내가 물어보지!"
무라단이 가슴팍을 두들겨 보이던 그때.
상점주가 상점 앞에 무언가를 내건다.
"저건... 게시판 아냐?"
"혹시 새로운 이벤트인 건가!?"
"오오! 그렇다면 혹시 클랜 하우스가 보상으로... 음?"
현수막을 보는 공략자들의 얼굴에 하나둘 물음표가 걸리기 시작한다.
경★ 편의점24 서로도와요 게시판 오픈 ★축
229화 죄와 벌 (4)
"서로도와요... 게시판?"
"저게 뭐지?"
"설마 안 쓰는 아이템을 나눔이라도 하라는 건 아니겠지?"
모두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와중.
상점주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다들 게시판의 용도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용도는 지극히 간단합니다. 의뢰 사항을 적은 뒤, 이 게시판에 부착하기만 하면 됩니다."
"의뢰 사항이라고 한다면... 설마 퀘스트 보드 같은 건가."
저마다의 국가 층에는 '편의성'을 위하여.
창설된 모험가 클랜들이 존재한다.
[퀘스트 받으러 가기 귀찮으시죠? 저희가 대신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그들은 주로 원주민들과 공략자들을 잇는 중간 다리이자 중개인을 자처했는데.
'퀘스트 보드'는 그러한 사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퀘스트 보드라.... 뭐, 있으면 편하긴 한데 상점주가 운영하는 게 가능한 건가?"
"그러게?"
퀘스트 중개라는 일의 특성상.
그 층의 터줏대감 혹은 층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클랜이 해당 일을 맡는 경우가 보편적이건만.
"혹시 상점주도 이제 한 층에 정착하려는 것 아냐?"
누군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리자.
일순간 공기가 술렁거린다.
"에이... 설마 상점주가 그러겠어?"
"애초에 다른 탑이 존재하는 것도, 멸망에 대한 것도, 모두 상점주가 알려 준 거잖아? 그런데 설마 상점주가 정착하려 하겠어?"
층에 정착한다는 건.
곧 그 층의 일부로서 살아간다는 걸 의미한다.
즉, 탑 공략을 포기하겠다고 간접적으로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아니겠지. 상점주가 한 층에 정착할 이유가 없어."
"그건 뭐... 또 모르는 거지. 마음이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
일순간 공략자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맴돌기 시작한다.
한때는 탑의 정점, 탑의 마지막 층에 도착할 유일한 클랜이라고 평가받았던 '선발대'.
[X팔! 도대체 언제까지 우리만 선두에서 공략해야 하는 건데!]
[하아, 도저히 못 해 먹겠네.]
그러한 그들을 무너뜨렸던 건, 외부의 적이나 힘든 환경이 아니라 마음에 생겨난 균열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공략자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공략자들은 불안해하는 눈으로 상점주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숙덕거린다.
"혹시 진짜 지치기라도 한 것 아냐?"
"그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점주는 관리자잖아?"
관리자급 존재가 지친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 걸까.
"그래서 더 그런 걸지도 몰라. 이제 상점을 운영하는 게 귀찮아졌다거나."
"아니면 내부 지침 같은 걸지도 모르지."
"으으, 만약 정말 환상의 상점이 한곳에만 있다고 한다면... 꽤나 골치 아파지겠는데."
일단 아래층이나 위층으로 이동해야 하는 수고는 차치하더라도.
여러 문제가 발생할 게 뻔했다.
"분명 상점을 독점하려는 놈들도 나오겠지?"
"상점주가 가만히 있을 리는 없겠지만, 뇌 빠진 놈들은 어디에나 있으니까."
"거기다가 한 층에 공략자들이 엄청나게 쏠리겠지. 그건 좀... 끔찍한데."
모두가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상점주를 바라보던 중.
상점주가 빙긋 웃는다.
"하하, 그렇게들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게시판은 새로 선보이는 서비스의 일종일 뿐, 저희 환상의 상점은 지금과 같은 운영 기조를 유지할 거니까요."
"오오...."
"후우. 정말로, 정말로 다행이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공략자들.
불안이 종식되자 그들은 비로소 게시판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보다 상점주! 의뢰 사항을 적어서 저 게시판에 부착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네. 다만, 의뢰를 맡기려면 비용이 발생하죠? 기본적인 비용으론 골드가 아닌 공헌도가 소모됩니다."
"공헌도가 소모된다고?"
상점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설명해 드리기보단 직접 보시는 편이 빠르실 겁니다."
상점주가 손에 든 종이를 게시판에 내걸자.
모두의 시선이 게시판으로 쏠린다.
<편의점24 서로도와요 게시판>
등록된 신규 퀘스트: 1
소원을 말해 봐
설명: 고객들의 목소리, 들어만 보겠습니다.
내용: 가장 갖고 싶거나 원하는 바깥 세계의 물품들을 적어 제출해 보자.
의뢰자: 환상의 상점주
보상: 50공헌도, 소정의 음식
특이 사항: 편의점에서 발급한 패 소지자라면, 누구나 해당 퀘스트를 받을 수 있다.
"이건...."
* * *
2주 뒤.
28층, 엘라시움.
"냉동! 냉동! 수넬 치킨!"
"비빔라면이 남아야 할 텐데...."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안 보여?! 빨리 끊고 나와!"
편의점 주변에 몰려든 엄청난 인파를 바라보던 남자가 혀를 내두른다.
"이야, 오늘도 어마무시하네...."
"그러게 말이야."
이 널따란 광장과 거리가 붐비는 건.
이제 익숙하디익숙한 광경이었다.
"오늘은 우리 차례까지 돌아오려나?"
동료는 브론즈-패를 만지작거리다가 입맛을 다시며 질문을 이어 간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무인점에 가는 건 어때?"
"아까 슬쩍 옆에 있던 놈이 말하는 걸 들었는데, 거기도 이미 꽉 찼다더라."
남자의 대답에 동료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벌써?!"
"그러니까 빨리 패 등급을 올려야 한다니까? 요즘은 개나 소나 다 브론즈-패를 들고 다니잖아. 이러니까 우리 경쟁력이 떨어지는 거라고."
"끙... 적어도 실버까진 올려야 가능성이 있긴 하지."
넘치는 경쟁자들을 이겨 내고 환상의 상점의 상품을 사기 위해선.
적어도 실버-패 정도는 소지하고 있어야 할 터.
"요즘 브론즈-패 소지자들이 엄청 늘긴 했지."
"솔직히 가만히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단, 뭐라도 해 보는 게 낫잖아? 다들 비슷한 마음가짐인 거겠지."
그들이 군중 사이에 섞여 대화를 나누던 중.
남자가 편의점 주변을 훑다가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켜 보인다.
"어이, 저것 좀 봐."
"뭘 보라고?"
"저기 상점 앞에 세워진 게시판 같은 거! 어라? 저 천막은 또 뭐야?"
거리가 있었을 때는 잘 보이지 않았던 게.
대기열이 조금 줄어들고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저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파라솔 밑을 예의 주시 하는 남자들.
덜그럭, 덜그럭-
용아병 하나가 주전자를 철판 위로 기울이자.
주전자 입구에서 백색의 묽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덜그럭-
그와 동시에 판에다가 검붉은 덩어리를 툭툭 떼어 넣는 용아병부터.
화르르륵-
판 밑에서 불을 내뿜으며 화력을 조절하는 용아병까지.
모든 것들이 질서 정연하게 돌아가고 있다.
"...뭘 만들고 있는 모양인데?"
"그러게. 뭘 만들고 있는...."
그러던 그때.
비료를 뒤집어쓴 일단의 엘프 무리가 그들의 옆을 스쳐 간다.
"이제 저 냄새에도 완전히 적응됐네."
"뭐, 적응하지 못하면 엘라시움에선 활동 못 하... 어이, 어이! 저것 봐!"
"...이미 보고 있어."
엘프들이 손에 들고 있는 황금색의 그것.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저건 분명....
"호떡이잖아?"
"붕어빵도 들고 있는데? 잠깐만. 그럼 저 녀석들이 굽고 있던 게...."
잠시 후.
"오오...."
파라솔과 좀 더 근접해진 남자들은 용아병들의 행동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덜그럭-
거의 숙달된 장인처럼 익숙하게 틀에다가 기름칠을 하거나.
반죽을 틀에 붓는 용아병들.
그 솜씨들이 참으로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이제 붕어빵 장사도 시작한 건가? 아니, 그보다 저 틀은 어디서 난 거야?!"
"상점주의 능력이겠지. 그보다 뭐랄까... 장관이긴 하네. 내가 살다 살다 해골이 붕어빵 굽는 걸 보게 될 줄이야."
"그래도 제법 맛있어 보이긴 하는데? 기다리는 동안 입가심하기에도 좋을 것 같고."
그들은 붕어빵과 호떡 따위를 구매한 공략자들을 힐끔 바라봤다.
"오오! 이건 확실히 느낌이 다르군! 냉동도 맛있긴 하지만 전자레인지로 데운 거랑은 확실히 느낌이 다른 것 같은데?!"
"맛 자체는 냉동이 더 맛있는 것 같긴 한데, 뭐랄까... 직접 만드는 걸 봐서 그런지 손맛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반응은 호평 일색.
모두의 입가에 은은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미소가 걸려 있다.
"근데 갑자기 웬 붕어빵 장사래?"
"기다려 봐. 슬쩍 물어보고 올게."
잠시 다른 공략자들에게 말을 걸던 남자가 이내 동료에게 돌아온다.
"물어봤어?"
"어, 퀘스트에서 최종적으로 채택된 아이디어라던데?"
"엥? 무슨 퀘스트?"
남자가 편의점 앞에 박힌 커다란 게시판을 가리킨다.
"상점주가 내걸었던 퀘스트라던데, 잘 모르겠으면 게시판을 보라더라."
"흠, 서로도와요... 게시판? 이게 뭐야?"
게시판을 응시하는 두 남자.
게시판에는 웬 수많은 종이 같은 것들이 박혀 있다.
<편의점24 서로도와요 게시판>
등록된 신규 퀘스트: 392
제작 계열 능력자를 찾는다
설명: 뛰어난 제작 계열, 대장장이 능력을 가진 공략자를 찾는다. 혹은 해당 공략자의 거처나 상세한 정보도 환영한다.
내용: 해당 공략자를 데려오거나 정보를 제공할 시 사례하겠다.
의뢰자: 클랜, 선구자들(이지수)
보상: 500공헌도, 마그마 글러브
신규 클랜원 모집
설명: 능력 있고 모험심 강하며 강인한 의지를 가진 클랜원을 모집한다.
내용; 탑을 올라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언제든 환영하는 바다!
의뢰자: 클랜, 망치(무라단)
보상: 클랜에 정식으로 가입할 시, 50공헌도, 소정의 골드와 아이템 제공
그 외에도.
[재료, 지평선의 일몰 구합니다], [잊힌 옛 영혼을 토벌할 클랜 모집 - 클랜 합동 의뢰] 등등.
다양한 의뢰들이 게시판에 가득했다.
"이게 다 뭐야...."
"그보다 보상 좀 보라고. 의뢰를 수행하면 공헌도도 얻을 수 있나 본데?"
"500공헌도면... 굉장한데?!"
브론즈에서 실버-패로 등급을 올리기 위해서 필요한 공헌도가 1,500이다.
그런데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공헌도를 준다니?!
"저 정도면 굳이 탑 공략을 하지 않고 의뢰만 수행해도 공헌도를 모을 수 있는 것 아냐?!"
"음, 그건 어려울 것 같은데. 선구자들이 건 퀘스트가 조금 특수한 듯해. 다른 것들은 공헌도를 그렇게 많이 주지 않는 것 같아."
"흠, 근데 그걸 감안해도 보상이... 꽤나 탐나는군."
"일단 퀘스트들을 한번 쓱 훑어보자고."
* * *
며칠 뒤.
55층, 드라고니아의 1위계 구역의 건물.
이지수가 정비 중인 클랜원들을 향해 골드-패를 들어 보인다.
"퀘스트 수행인한테서 연락이 왔어."
"오, 못해도 몇 달은 걸릴 줄 알았는데, 엄청 빠르네? 진짜 게시판에 퀘스트를 걸어 둔 게 효과를 본 모양인데?"
신이 난 알터가 활짝 웃어 보이자.
이지수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몇백, 몇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니까."
"그래서, 그 제작 계열 능력자는 어디에 있대?"
"일단 40층에서 만나기로 했어. 레벨은 55라는 걸 보면 나름의 실력은 있는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알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제작 계열 능력자가 55레벨이라고? 그게 가능한 거야?"
이 탑에서 제작 계열 능력은 사실상.
버려진 능력이나 마찬가지의 취급을 받았건만.
"여타의 제작 능력과 다른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긴, 아무튼 꼭 공략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설마 62층이 그런 층일지 누가 알았겠어?"
"일단 일라노어로 내려가자."
* * *
며칠 뒤.
"으음...."
난 '서로도와요' 게시판을 지그시 바라봤다.
'이 정도로 퀘스트들을 많이 의뢰할 줄은 몰랐는데. 게시판 사이즈를 좀 키워야 되나?'
솔직히 게시판을 만들 때만 하더라도.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다들 제멋대로 활동하는 걸 선호해서 인기가 없을 줄 알았는데, 확실히 보상이 걸리니 다르긴 하네.'
그래.
이렇게 서로 협조를 하면서 공략하면 얼마나 좋아?
클랜들이 제각각 움직이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다만 협력했을 때의 이점 또한 분명하니.
그저 게시판을 통해 그 이점을 살리고 싶었을 뿐.
'이것도 원하는 층으로 이동이 가능해져서 해 볼 수 있는 방법이었지. 크으, 진짜 원하는 층으로 갈 수 있다는 게 참 좋긴 하구나.'
원하는 층에 원하는 대로 갈 수 있다.
이 얼마나 행복한 일이란 말인가!
'흐흐흐, 이제 다음으론....'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게시판을 정리하던 그때.
띠링-
[왜곡된 세계가 활성화됩니다.]
돌연 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난 픽 웃었다.
'하도 연락이 없어서 정적한테 제거된 줄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 보네.'
[왜곡된 존재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그래."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다니합용작 가계세 된곡왜]
일순간 세상에 정적이 찾아온다.
230화 죄와 벌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