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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 230-240

230화 죄와 벌 (5)

[?데는다준 나이002 를도헌공 !봐 좀 트스퀘 저, 오]

[?아않 지같 것 짠 금조 이상보 데근]

어느 순간부터 거꾸로 들려오는 공략자들의 목소리.

고오오오-

그리고 하늘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뒤집혀 있는 건물들까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세상이 뒤집히는 데 무슨 힘이 작용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래도 나름 보는 맛이 있긴 하지만.

내가 뒤집힌 세상을 느긋이 바라보던 그때.

저벅, 저벅-

이 뒤집힌 세상에서 나 이외에 유일하게 지면에 발을 딛고 있는 존재가.

금발의 여자가 나의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한다.

"오랜...."

난 그녀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려다.

순간 멈칫거렸다.

'...뭐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분명 느꼈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무형의 기운.

그건... 이제껏 봐 왔던 관리자들의 기운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전보다 더 강해진 건가?'

"오랜만이야."

그녀가 인사를 건네 오자.

난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좀 더 일찍 찾아오려 했는데 일이 많아서 좀 늦어졌어."

"그렇군요."

많은 일들이라....

역시 본사 관리자들 간에 세력 다툼이 있었던 건가?

"일단, 고마워."

"예?"

"네 덕분에 결정적인 증거를 빠르게 얻을 수 있었거든."

그녀의 말에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만."

"편하게 물어봐. 어지간한 건 대답해 줄게."

어랍쇼?

평소였으면 답할 수 있는 거면 답해 주겠다고 했을 텐데.

"돌아오셨다는 건, '에드'에게 개입했던 다른 관리자와의 다툼에서 승리하셨다고 봐도 좋은 겁니까?"

"다른 관리자? 아."

그녀가 피식 웃는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하지만 다른 관리자는 아니었어. 주주와 문제가 있었던 거지."

"주주입니까...."

조금 이상한데?

예전에 백룸의 게시판에서 봤던 공지 글을 기억한다.

'분명 거기에 적혀 있던 내용들은... 주주들을 즐겁게 만들어 줘야 한다고 했었어.'

그래서 당연히 본사라는 조직은.

주주들의 유희를 책임지는 하위 기구라고 생각했었건만.

"본사는 주주들을 위한 기관이 아니었던 건가요?"

"기본적으로는 주주들을 위하지. 근데 이쪽도 이쪽 나름의 룰이 있어서 그런...."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설명을 하다가.

순간 날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근데 그 사실을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난 말해 준 적이 없는데."

"...."

이런... 너무 나갔나.

"뭐, 상관없겠지. 아무튼 본사가 주주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은 맞지만, 주주들도 본사의 규칙을 일정 부분 따라 줘야 하거든. 내가 상대했던 주주는 그 규칙을 어겼지만."

* * *

며칠 전.

"포세이돈 님을 위하여!"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처리해라!"

포세이돈의 세력이 이끄는 군세와 본사의 직원들이 얽힌 지상의 공간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그 자체였다.

"오오! 이봐, 토르! 누가 이길 것 같나?"

"저 물고기 놈이 이길 턱이 있나. 본사 쪽에 걸지."

"그럼 내기가 성립되질 않잖아?! 끙... 좋다! 그럼 내가 포세이돈 쪽에 거는 걸로 할까. 아니면 우리도 참전하는 게 어때?"

"물고기 놈은 규칙을 어겼다. 그런 놈을 돕는 순간 도박장의 존재도 의미가 사라진다."

"알지, 아는데, 워낙 재밌어 보여서. 끙... 아쉽군."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다른 주주들이 전투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것.

만약 다른 주주들까지 전투에 끼어들었다면.

또다시 라그나로크가 발생했으리라.

번쩍-

그 와중에 빛이 번쩍일 때마다 빅뱅 같은 폭발이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귀를 찢어 놓을 것 같은 굉음이 일대를 뒤덮는다.

"포세이돈!"

"네까짓 게 멋대로 불러도 좋을 이름이 아니다! 경의를 담아 주주님이라고 불러야지!"

"...."

빛과 빛이 격돌하는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는 입실론.

감히 눈으로 따라가지도 못할 속도다.

'주주는 정말... 차원이 다르구나.'

벌써 며칠째 임원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포세이돈이건만.

"크하하하하!"

간혹 보이는 그의 얼굴에선 조금도 지친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되레 합공을 펼치는 임원들이 밀리는 것 같기도 하다.

"포세이돈, 규칙을 준수해라."

"규칙? 감히 피조물들 따위가 규칙을 거론하다니. 네놈들을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삼지창을 휘휘 돌리던 포세이돈이 창날이 바닥을 보도록 들어 올렸다가 힘껏 내려찍는다.

그 순간.

쩌저저저적-

지면 곳곳에 균열이 퍼져 나가더니.

거대한 물줄기들이 지면을 찢고 나와 하늘로 치솟아 오른다.

"흐으읍!"

포세이돈이 핏줄이 솟아오른 팔뚝을 힘껏 휘두르자.

물줄기는 생명이라도 얻은 듯 그의 팔놀림을 따라 공중에 모여들었고.

곧 하나의 형태를 만들어 낸다.

고오오오오-

마치 포세이돈의 무기를 빼닮은 듯한.

그러나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삼지창이 지면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순간.

"오오!"

넥타르와 주전부리를 씹으며 전쟁을 구경하던 신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트라이던트인가! 저걸 보는 게 얼마 만이지?"

"크으, 저 물고기 놈, 완전히 작정을 한 모양이구만!"

"어차피 뒤가 없다는 거지! 도박에는 영 소질이 없는 놈이 저런 건 잘한다니까?!"

트라이던트.

본래 포세이돈의 애병기의 이름이긴 했으나.

그 안에는 다른 한 가지 의미도 담겨 있었다.

[완전한 정화]

"어디...."

포세이돈이 임원들과 직원들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보인다.

"이것도 막아 봐라."

그의 팔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그 순간.

쇄애애애액-

하늘에 떠 있던 거대한 삼지창이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한다.

"결계! 결계를 펼쳐라!"

이름 없는 직원들은 물론이요.

직급을 가진 직원, 나아가 임원들까지 모두 저마다 그 힘을 하늘로 뻗어 낸다.

스스스슥-

각각의 기운을 머금은 오색의 결계가 겹겹이 쌓여 두꺼운 결계가 되었으나.

창날의 끝이 결계와 맞닿자.

파작, 콰자자자작-

결계가 물로 변하기 시작한다.

"무, 무슨...."

"쓸데없는 짓을 하는군."

포세이돈이 다시금 팔을 위에서 아래로 힘껏 잡아당기자.

파창-

결계를 부순 트라이던트가 그대로 지상을 직격한다.

그 순간.

"아아...."

"어어...."

해당 영역에 있던.

수천은 족히 넘는 직원들의 몸이 커다란 물방울로 뒤바뀐다.

그저 허공을 맴도는 미세한 신음 소리만이 그들이 그 자리에 있었음을 알릴 뿐.

"보기 좋군. 존재의 의미조차 갖지 못한 것들에게 적합한 최후가 아닌가?"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포세이돈이 힐끔 고개를 돌린다.

"포세이돈...! 포세이돈!"

챙-

맞물린 삼지창과 지팡이 너머로.

분노에 물든 데우스의 얼굴을 본 포세이돈이 조소를 흘린다.

"그래도 임원이다 이건가. 그래, 날 더 즐겁게 만들어 봐라. 그게 너희의 임무가 아니던가?"

"포세이돈!"

하늘 위로 빛무리가 번진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리고 그 모습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입실론.

'설마 지는 건 아니겠....'

그 순간.

콰아아아앙-

하늘에서 빛무리가 갈래로 나뉘었고.

개중 한 빛줄기가 그녀의 앞으로 떨어져 내렸다.

"쿨럭...."

"데... 우스 님?"

임원, 데우스가 삼지창에 복부를 꿰뚫린 채 신음을 흘리던 중.

"쯧쯧."

어느새 그들의 앞으로 다가온 포세이돈이 삼지창의 손잡이를 잡는다.

"말했잖느냐? 네놈들과 나는 존재의 격이 다르다고 말이야. 만들어진 것들이 알 리가 있나?"

푸확-

"크헉...."

삼지창을 뽑아 든 포세이돈이 번들거리는 눈으로 입실론을 응시한다.

"오히려 이런 잔챙이들보단 네년이 궁금하더군. 어떻게 내 계획을 알아낸 거지?"

"...."

답하지 않는 입실론을 보며.

포세이돈이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린다.

"제법 괜찮은 유희였다."

이번에는 합장하듯 두 손을 포개는 포세이돈.

그 순간.

두둥-

가느다란 물의 줄기로 얽히고설킨 거대한 물의 감옥이 일대에 있는 모든 것을 가둔다.

"상으로 고통 없는 소멸을 허락하마. 너희 모두에게 말이다."

"얀마! 물고기! 우리까지 가두면 어쩌자고!"

구경하던 주주들의 항변에 포세이돈이 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인다.

"알아서 빠져나가라."

그 순간.

스스스스슥-

물의 감옥이 순식간에 범위를 좁히기 시작한다.

서걱-

창살에 닿은 모든 것이 잘 벼려진 검에 잘린 듯.

얇은 오이채처럼 썰려 나간다.

바로 그때.

파르르르륵-

돌연 포세이돈의 앞에 웬 책 한 권이 나타난다.

"이건...."

미간을 찌푸린 채.

책을 바라보는 포세이돈.

새하얀 백지 위로 하나의 문장이 적혀 있다.

[거듭된 규칙 위반을 확인. 개입 확정.]

"개입... 확정? 시답잖은 잔재주를...."

포세이돈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코웃음을 치다가.

돌연 몸을 흠칫거린다.

고오오오오오-

책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기운.

그것은 지금껏 그가 느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섬뜩하면서도 압도적인 기운이었다.

"네놈...."

재빨리 삼지창을 고쳐 잡는 포세이돈.

그는 잔뜩 긴장한 채로 책을 노려본다.

"정체가 뭐냐...."

[존재의 분리를 개시.]

"정체가 뭐냐고 묻고 있지 않느냐!

포세이돈이 책을 향해 삼지창을 내지르던 바로 그 순간.

서걱-

포세이돈의 몸에 가느다란 실선이 그려진다.

"무슨...."

4개의 실선이 좌우로 어긋남과 더불어.

갈라진 몸뚱이들이 힘없이 바닥에 쓰러져 내린다.

"...뭐, 뭣?"

"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그 모습을 본 직원들은 당황하여 입을 뻐끔거렸고.

"저건... 정체가 뭐냐?"

행실, 성격을 떠나 포세이돈은 엄연한 주주였다.

한데 그런 주주를 벌레 잡듯이 잡아 버리다니.

"...나도 처음 보는데. 본사에 저런 게 있었다고? 우리가 저런 걸 만들었던가?"

"...무기들 들어."

그저 구경꾼으로서 전쟁을 즐기던 주주들까지도.

심각해져 저마다 무기들을 잡기 시작한다.

그러던 그때.

스스스슥-

백지 위로 한 줄의 문구가 떠오른다.

[개입 완료. 인지 부조화를 확인. 인식의 개변을 실시함.]

* * *

난 상념에 잠겨 있는 입실론을 보며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하는 거지?'

주주가 규칙을 어겼다는 말 이후로 계속 저 상태다.

난 슬며시 입을 열었다.

"그럼 주주와의 다툼에서 승리한 당신과 본사가 더 강하다는 거군요?"

"아...."

그제야 생각의 흐름에서 깨어난 건지.

입실론이 날 바라보다가 웃는다.

"뭐? 호호, 그럴 리가. 당연히 주주가 더 강하지, 원래의 나였으면 상대도 안 될 정도로. 하지만 본사에서 내건 규칙만큼은 주주들도 지켜 줘야 하거든. 그래서...."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니까 본사가 주주들의 유희를 위한 조직인 건 맞는데, 주주들이 그 유희를 즐기기 위해선 본사에서 내세운 규칙을 따라야 한다?'

주주는 절대적인 존재인 줄 알았더니.

본사의 규칙을 또 준수해야 한다고?

'상하 관계인 건 맞는데 어느 정도의 수평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라....

'그게 도대체 무슨 관계야?'

"대충 이해했습니다."

"아무튼 이번 일은 네 도움이 컸어. 네 협조가 없었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팠을 거야. 거기다가 새로운 이름도 얻었고."

새로운 이름?

잠깐 의문이 들긴 했으나.

난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제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으니까요."

관리자이건 주주이건.

어쨌건 다른 놈이 불순한 의도를 갖고 공략자에게 개입하고자 했던 일을 방지한 거니까.

"그래서 네게 작은 선물이라도 줄까 하는데. 뭐가 좋으려나.... 아, 일단 네 상태를 좀 확인을 해 보고 네게 필요한 걸 줄게."

다짜고짜 내 손을 붙잡는 입실론.

"어디 보자... 네게 필요할 만한 게...."

그러던 그때.

"엇?!"

그녀가 놀라며 황급히 내 손을 놓는다.

'엥?'

뭐야, 갑자기 왜 저래?

정전기라도 올랐나?

"왜 그러십니까?"

"방금 그건 대체...."

231화 죄와 벌 (6)

입실론은 굳은 표정으로 이레귤러를 바라봤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오늘은 이레귤러에게 약간의 보상을 주고.

그와의 관계를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다.

당연한 일이다.

[입실론 대리! 축하하네! 자네처럼 초고속 승진을 한 직원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아차, 이제 입실론 임원이라고 불러야 하나?]

포세이돈의 존재력을 이어받은 그녀는 이제 일개 대리 따위가 아닌.

본사의 핵심 중 하나인 임원이 되었으니까.

'시간이 너무 끌리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물론 왜곡 능력으로 지금의 만남을 은폐했다고는 하나.

꼬리가 길어서 좋을 게 없다.

예전과 달리, 이제 그녀는 잃을 게 많아졌으니까.

'그래. 빨리 적당한 보상만 주고 마무리를.... 아, 신경 쓰여 죽겠네.'

입실론은 방금 봤던 이레귤러의 상태창을 다시금 떠올렸다.

김인성

LV: @#!

근력: %@

체력: $#

지력: !@

민첩: %^

고유 능력: @#%%$&

파생 능력: !@#~~@

[접근이 불가능한 정보입니다.]

'임원급인 나조차도 접근이 불가능한 정보라고? 겨우 이레귤러의 정보 따위가?'

적당한 보상을 던져 주고 이 관계를 마무리 짓는 게 현명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눈앞의 비상식적인 상황이 자꾸 그녀의 발목을 잡는다.

'...내가 잘못 본 걸 수도 있는 거니까.'

다시금 이레귤러의 정보를 확인해 보는 입실론.

"...."

그러나 역시나 상태창은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그에게서 주주나 다른 본사 관리자가 개입한 흔적은 못 느꼈는데.... 하, 이것 봐라?'

그렇다는 건 탑의 관리자가 어떠한 의도를 가지고 그의 정보를 은폐했다는 것일 터!

왜 이레귤러의 정보를 은폐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겨우 시설 관리자들 따위가 내 힘을 막을 수는....'

그녀가 새로이 얻은 힘을 개방하려던 바로 그때.

파르르르륵-

"...어?"

돌연 그녀의 앞에 책 한 권이 나타난다.

"회, 회, 회장님이 여기는 어떻게...."

당황하여 헛소리를 연발하는 입실론.

흔들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가 백지 위로 떠오르는 문구를 훑는다.

[잠시 그 몸을 쓰겠다.]

* * *

'흠.'

난 눈앞의 입실론을 보며 생각했다.

'보상을 주겠다더니, 갑자기 왜 저래?'

내 손을 만지고 나서 혼자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나타난 책을 보며 '회장님?'이라는 헛소리를 날리면서 눈을 까뒤집는 건 무슨 일이람?

'설마 저 책이 진짜로... 에이, 그럴 리는 없겠지.'

"괜찮으세요?"

"음? 아."

그녀는 고개를 좌우로 툭툭 털더니.

날 보며 씨익 웃어 보인다.

"괜찮아."

"...."

뭔가 살짝 분위기가 바뀐 것 같은데.

"그보다 저 책은 뭐죠?"

"이것? 별것 아냐. 그보다 드디어 네게 줄 물건을 정했어."

그녀가 손을 살짝 흔들자.

스스슥-

나의 앞으로 검은 큐브 형태의 물체가 떠오르듯 나타났다.

"자, 받아."

"이건...."

큐브에서 흘러나오는 묘한 아우라.

아무래도 보통의 아이템은 아닌 모양이다.

존재의 일부

설명: 이이이, 입실론 님! 죄, 죄죄죄송합....

내용: 무언가로부터 끄집어낸 기운을 일부 응집한 물체이다. 사용 시, 큰 힘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음...."

난 손에 쥔 큐브를 내려다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용하면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그건 너무 좋은 일이긴 한데....

"혹시 저주받은 아이템이거나 그런 건 아니죠?"

"뭐?"

그녀가 깔깔 웃는다.

"저주받은 건 아냐. 그저 내 부사수였던 놈이 갖고 있던 힘을 조금 분리한 거지."

"오.... 그래서, 그 부사수분은...."

"조각났지. 그중의 하나는 내가 가져온 거고."

도대체 부사수라는 양반이 무슨 중죄를 저질러서 이런 처벌을 받은 건지.

'그런데 가만... 부사수라고 해도 관리자잖아?'

즉, 이 검은 큐브는 관리자가 갖고 있던 힘의 일부인 게 아닌가?

그런데 그걸 공략자인 내게 줘도 되는 건가?

"받아도 괜찮은 거겠죠? 먹어서 뒤탈 날 물건이라면 사양하겠습니다."

"괜찮아. 아무 문제 없는 물건이야."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하는데....

정말 이걸 받아도 되는 건가?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돼."

"...."

흠, 아이템 자체에 하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가 굳이 내게 수작을 부릴 이유도 없긴 해.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내가 조심스럽게 큐브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거려 보인다.

"잘 사용해, 탑에선 못 구하는 거니까."

"오.... 아, 그리고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다른 관리자가 개입한 공략자의 처우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관리자가 개입한 공략자?"

관리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그건 네가 알아서 처리하든가 해, 더 이상 다른 관리자가 그에게 개입할 일은 없으니까. 아무튼 나중에 또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아, 그리고 조만간 다른 탑들과 또 전쟁이 있을 테니까 대비해 둬."

자리를 뜨려는 건지 그녀의 몸이 반투명해지기 시작한다.

어어, 잠깐!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머릿속을 맴돌던 수많은 질문 중.

하나의 질문이 툭, 나의 입 밖으로 튀어 나간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도 될까요? 성함이 정확히 어떻게 되시는...."

그러자 그녀가 미세한 미소를 지으며 답한다.

"아르실라."

* * *

몇 시간 뒤.

화아아악-

금일의 장사까지 모두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난.

소파에 앉은 채 생각에 잠겼다.

'아르실라라... 아르실라.'

돌이켜 보면 내게 있어 참 도움이 되는 관리자였다.

공략하려는 층에 대한 정보를 준다든가, 다른 탑들과의 대결도 미리 언급해 준다든가.

정말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다음에도 그렇게 도움을 줄까?'

그녀와의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그녀의 정적인 '다른 관리자'는 제거된 게 분명해 보였다.

그렇단 건 그녀가 날 도울 이유가 사라진 셈이 아닌가?

'흠, 도움이 없으면 좀 아쉬울 것 같긴 한데.'

난 입맛을 다시다가 두 팔을 천장으로 쭉 뻗었다.

'에라이, 언제는 도움받으면서 공략했었나.'

도움을 받으면 좋은 거고, 아니면 마는 거지.

'그보다 아까 받은 거나 한번 사용을 해 볼까.'

난 아르실라에게 받은 검은 큐브를 꺼냈다.

이것도 다른 아이템들처럼 사용하면 되는 건가?

철커덕, 철컥-

몇 번 큐브를 좌우로 비틀자.

띠링-

[존재의 일부를 사용하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 선물인지 한번 보자고!'

"그래."

[존재의 일부를 사용합니다.]

그 순간.

철커덕, 철컥-

제멋대로 돌아가는 큐브 사이에서 미세한 빛이 흘러나오더니.

이내 나의 몸을 이불 덮듯 덮는다.

'오오!'

근데 딱히 강해지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

띠링-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금제가 해금됩니다.]

[이후 81~85층의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이후 86~90층의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레벨이 1 상승하였습니다.]

[이후 91층의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엥?"

잠깐만!

큰 힘을 준다는 게 레벨 업을 말하는 거였어?!

'근데 이게 가능한가?'

지금의 내가 레벨을 올리기 위해선.

레벨 상승에 필요한 수만큼의 업적을 달성해야 하건만.

난 얼른 상태창을 살폈다.

김인성

Lv: 90

근력: 75(+14)

체력: 59(+5)

지력: 51(+17)

민첩: 62(+36)

보너스 스탯: 9

고유 능력: 편의점 주인

파생 능력: 즉석식품 제조, 인증 마크, 묶음 무적(2단계),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 팝업 스토어, '영원한' 편의점 업그레이드(Lv2), 특제 우표, PB 업그레이드(2단계), 개발 매니저, 무인 점포

칭호: [기적의 생존자], [엘프들의 영원한 친우], [펜릴의 주인], [숙달된 요리사], [천공의 지배자를 공략한 자], [최초로 50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1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2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3층을 돌파한 자], [단신으로 여왕을 몰락시킨 자], [섭리를 지키는 자], [뇌조 학살자], [광기를 잠식시킨 자], [수수께끼를 괴멸시킨 자], [유령선의 진실을 파헤친 자], [프리즌 브레이커]....

특이 사항: 시스템, 업적 적립이 적용 중입니다.

'워... 단숨에 7레벨이 올라갔네.'

업적 적립으로 7레벨을 올리려 했다면.

도대체 업적을 몇 개나 쌓아야 했던 건지.

'크으, 좋구나!'

이거, 아르실라가 정말 좋은 선물을 줬는데?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짓던 그때.

다시금 메시지가 떠오른다.

[레벨 90을 달성하였습니다.]

[새로운 능력이 개방됩니다.]

'오오, 새로운 능력?!'

이건 좀 기대가 되는데?

무려 90레벨을 달성하여 얻은 능력이다.

더욱이 금화 적립이 업적 적립으로 바뀐 이후.

처음 얻는 능력이 아니던가?

'으흐흐, 어디 보자. 과연 어떤 능력인... 엥?'

* * *

며칠 뒤.

45층, 별의 마을.

"아르만디의 이빨로 만든 목걸이 장식입니다! 민첩을 크게 높여 줘서 사냥에 아주 탁월한 아이템입니다! 한번 보고 가세요!"

"이 부츠로 말할 것 같으면, 제가 드레이크 공방에서 구매한 이후 지금까지 신었던 부츠입니다. 골드가 부족해 500골드에 급처를...."

아이템을 사고팔려는 이들.

"물자 다 확보했지?"

"그래, 얼른 가자고!"

그리고 위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 등.

유입된 인원들 덕에 도시는 크게 활기를 띠고 있었다.

"어휴, 이제 여기도 거의 시장판이 다 됐네."

도시 안쪽 거리를 걷던 두 남녀가 대화를 나눈다.

"그러니까. 조용히 별을 감상하는 맛이 있었는데, 이제 그것도 글렀네."

물론 모두가 이 북적거림을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별의 마을 말고 좀 조용한 층은 없으려나?"

"찾아보면 있을지도 모르지. 근데 애초에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곳이 세상 어디에 있겠어?"

맞는 말이다.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야말로 이상적인 낙원이라고 해도 좋을 터.

"그보다 우리... 붙을 수 있을까?"

"우리가 뭐 어때서?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그렇긴 한데...."

들고 있던 양피지를 내려다보는 남자.

[뜨거운 전투와 끓어오르는 투지를 느끼고 싶다면 바로 지금 이곳으로!]

[클랜원 절찬리 모집 중 - 망치 클랜]

"망치 클랜은 워낙 유명한 클랜이니까 그렇지. 그리고 솔직히 난 아직도 좀 의심스러워. 이 퀘스트... 진짜 망치 클랜이 건 게 맞겠지?"

"어휴, 맞다니까? 환상의 상점의 게시판에 걸려 있던 걸 그대로 받아 온 거라고!"

"그건 아는데...."

그러던 그때.

"떴다! 환상의 상점 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함 소리.

그 순간.

"뭐?!"

"뭐라고?!"

"그래?!"

거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달려!"

"내가 먼저다!"

누구 할 것 없이 질주를 시작한다.

"우, 우리도 서두르자!"

두 남녀 또한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린다.

"헉, 헉...."

"후우. 오오!"

환상의 상점 주변을 바라보던 여자가 기쁨의 탄성을 지른다.

"나쁘지 않은데? 아직 사람들이 많지 않아! 이러면 우리 차례까지 오겠어!"

그들은 실버-패의 소지자.

같은 패를 소지했을 경우에는 더 빨리 온 순서대로 손님을 받는 만큼.

먼저 줄을 서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다.

"와, 저기 봐. 사람들이 엄청 몰려오고 있어."

여자의 말에 남자가 뒤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비켜, 비키라고!"

"X 까!"

"키에에에엑!"

좀비 떼를 방불케 하는 군중이 저마다 패를 흔들어 대며.

환상의 상점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그러게."

두 남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도.

환상의 상점 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언제 오픈하려나."

"물건 진열하는 걸 봐선, 30분이면 열 것 같기도 하고?"

과연 남자의 말대로였다.

30분 뒤.

딸랑-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손님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침내 상점주가 환상의 상점에서 나오자.

"오오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갈비만두!"

공략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패를 흔들며 열렬한 환호성을 보낸다.

"다만, 영업을 개시하기에 앞서 오늘 한 가지 사항을 공지해 드릴까 합니다."

"오오, 또 뭐가 있는 건가?"

"음? 에이, 게시판 생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뭐가 생겼겠어? 신상품이 입고된 걸 말하려는 거겠지."

두 남녀가 군중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

상점주의 목소리가 뚜렷이 들려온다.

"오늘부로 저희 상점에서 새로운 서비스를 개시하게 됐습니다."

"새로운 서비스?!"

"그것은 바로... 종말특급입니다!"

232화 종말특급 (1)

"종말... 특급?"

도저히 그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단어 때문일까.

모든 군중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특급 서비스... 같은 거려나?"

"설마 이름 그대로 죽음으로 직행하는 서비스인 건 아니겠지?"

"푸하하핫! 설마?"

"그래서 상점주! 대체 종말특급이라는 게 뭐요?!"

쏟아지는 질문들, 기대 어린 눈빛들이 상점주에게로 향하자.

가면 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설명을 듣기보단 눈으로 보는 편이 빠르겠죠?"

따악-

상점주가 손가락을 튕기는 바로 그 순간.

스스스슥-

편의점 건물 뒤로 기다란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음?"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네모난 통들이 줄줄이 엮여 있는 그것은 분명....

바깥에서만 볼 수 있던 열차가 틀림없었다.

"기차잖아?!"

"선보인다는 서비스가...? 맙소사... 설마 진짜로 움직이는 건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며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걸.

머리로 느끼면서도 좀처럼 열차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군중들.

"아무리 관리자라고 해도 그렇지... 저게 가능해? 그보다 저거, 움직이긴 하는 거야? 철도도 없는데?"

"60층에 물 위를 달리는 수상 열차라는 게 있다고 들었는데, 그걸 그대로 카피해서 가지고 온 걸지도 모르지."

갖가지 의문과 혼란이 가중되어 소란스러움이 커지던 중.

상점주가 팔을 들어 보이자 모두가 입을 다문다.

"하하, 궁금하신 점들이 많을 겁니다. 일단 가장 중요한 사안 한 가지만 말씀드리자면, 열차는 정상적으로 가동됩니다."

"오오오!"

"뭔가 끝내주는데?! 저 테두리 좀 보라고! 금으로 덮은 것 아냐?"

"그렇긴 한데... 흠."

그러나 모두가 열차에 대해 긍정적인 건 아니었다.

"저 열차 말이야. 솔직히 이용 가치가 있으려나?"

"다른 지역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거나, 음... 잘 모르겠네."

열차가 얼마나 빠른지,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는지 무엇 하나 알려진 바가 없었던 만큼.

그들의 의문은 지극히 정당했으며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들의 의문에 답하듯.

상점주가 말한다.

"종말특급의 장점을 한 가지만 꼽자면, 현재까지 공략된 층까지 운행이 가능하다는 점이겠죠."

"오오, 그럼 각 층이 일종의 역 같은... 음? 잠깐만... 상점주가 방금 뭐라고 했지?"

"공략된 층까지... 운행이 가능하다고?"

그 말인즉슨.

종말특급은 1개의 층을 순회하는 열차가 아니라, 전 층을 오갈 수 있는 열차라는 것 아닌가?!

"에이, 상점주! 아무리 그래도 농담이 좀 지나친 것 아니요?!"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탑을 오르거나 내려가기 위해선 층과 층 사이를 연결하는 계단을 이용해야만 한다.

그것은 최초로 탑이 등장한 이래로.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던 규칙이자 기초적인 상식이건만.

상점주의 발언은 지금까지의 상식을 뒤집어 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약간의 예외 사항은 있습니다. 열차는 자신이 공략한 최대의 층까지 이용하지 못하니까요."

"...."

"그것만 해도 엄청난 것 같은데...."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의구심 가득한 표정들을 보며.

상점주가 씨익 웃는다.

"이렇게 듣는 것보단 역시 직접 이용해 보는 편이 빠르겠죠. 지금 환상의 상점에서 종말-머니를 충전해 보세요! 아, 참고로 골드-패 소지자부터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 참고해 주시고요."

"종말... 머니?"

* * *

'흠.'

자신의 키보다 커다란 지팡이를 쥔 노인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웃는다.

'또 상식을 아득히 초월한 게 튀어나왔군.'

이 환상의 상점은 참으로 재밌는 곳이다.

올 때마다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하나씩 턱턱 꺼내 놓으니 말이다.

'종말특급이라....'

그가 기다란 열차를 지그시 바라보던 중.

뒤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이, 노땅! 클랜원들은 다 어디 두고 혼자 여기에 있는 거야?"

"음? 아, 자네였나."

노인은 실비아 무리를 보며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잠시 재료를 구하러 거신의 정원에 내려갔다가 돌아가던 길이었지."

"또 무슨 이상한 잡동사니를 만들려고?"

"잡동사니가 아니라, 탑에 이로운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연구의 일환이네."

노인의 대답에 실비아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댁들 실력이면 그냥 탑 공략에 올인하는 게 낫지 않아?"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만, 이게 우리 클랜이 존재하는 이유일세."

탑의 모든 것들을 탐구하고 파헤쳐 새로운 변화를 일궈 낸다.

그것이 바로 지식 클랜이 창설된 근간이었으니까.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 그리고 그들의 환경! 신비롭고 새로운 것들로 가득한데, 어떻게 그것들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노인을 보며.

실비아가 혀를 내두른다.

"하여간 노땅도 그렇고, 그쪽 클랜장도 그렇고, 어째 지식 클랜은 그렇게 괴짜들만 모인 건지 모르겠네. 근데 또 실력이 떨어지는 건 아니고."

"괴짜라... 최고의 칭찬이군."

"딱히 칭찬을 한 건 아닌데. 아무튼 그렇게 혼자 다녀도 괜찮은 거야?"

실비아의 질문에 노인이 피식 웃는다.

"아직 어디서 객사할 정도로 실력이 녹슬진 않았네."

"뭐, 그건 그렇지."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클랜 중 하나인 지식 클랜.

거기서도 부클랜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노인을 죽일 수 있는 존재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그래도 신경은 쓰라고.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할 나이잖아?"

"푸허헛!"

다소 거칠긴 해도 그녀 나름대로 걱정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실비아의 무례한 언행에도 노인은 도리어 껄껄 웃는다.

"고맙네."

"올라가는 길이면 이따가 우리랑 같이 가든가."

"정말 고마운 제의네만, 지금은 저 종말특급이라는 것에 관심이 가는군."

노인은 눈을 반짝이며 기다란 열차를 바라본다.

"만약 상점주의 말이 사실이라면 구태여 걸어 올라갈 필요가 없지 않겠나?"

"그렇기는 한데... 솔직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다른 것들이야 다 그렇다고 쳐도, 이번 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단 말이야."

"그러니 직접 피부로 경험하고 느껴 봐야지."

노인이 껄껄 웃으며 골드-패를 번쩍 쳐들어 보인다.

잠시 후.

덜그럭-

용아병의 절제된 통제를 따라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는 노인과 실비아.

"자, 다음 손님! 어서 오세요!"

상점주의 익숙한 환영이 그들을 반긴다.

"오랜만일세."

"지식 클랜과 선구자들의 파티라.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조합이군요."

"우연히 맞닥뜨린 것뿐이네."

간단한 담소를 나누며 그간의 안부를 묻는 이들.

잠시간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노인이 눈을 번뜩인다.

"그보다 바깥의 종말특급이라는 걸 이용해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나?!"

"하하, 물론이죠! 다만, 저희 종말특급을 이용하시기 위해선 먼저 종말-머니를 충전해 주셔야 합니다."

"그 종말-머니라는 건 어떻게 충전을 하는 건가?!"

"간단합니다. 골드를 지불하시면 되죠. 일단 골드-패를 소지하고 계시니, 최대 500골드까지 충전이 가능하신데...."

곧바로 두툼한 주머니를 꺼내어 카운터에 올리는 노인.

"500골드네."

"좋습니다, 그럼 바로 충전을 해 드리죠. 패를 주시겠습니까?"

노인이 금색의 패를 내밀자.

패를 네모난 박스 위에 올리는 상점주.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띠로링-

[충전을 시작합니다.]

[500종말-머니가 충전되었습니다.]

박스에서 충전이 끝났다는 음성이 울려오자.

상점주는 다시 패를 집어 도로 노인에게 내민다.

"자, 충전 완료됐습니다."

"...이걸로 끝인 건가?"

"네. 이제 그걸 가지고 종말특급을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 참, 운행 시간이 있으니 저쪽에 붙은 시간표를 참고해 주시고요."

상점주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종말특급 운행 시간표>

[1회차 - 12:00]

[2회차 - 13:00]

[3회차 - 14:00]

.

.

.

"1시간 단위로 운영을 하는 모양이군."

"뭔가 그럴듯한 사기를 당하고 있는 기분이야."

실비아가 툭 던진 말에 노인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직 얼떨떨하네. 그래도 일단 타 봐야 하지 않겠나?"

"...일단 가 보자고."

상점주에게 간단히 종말특급의 이용법을 들은 뒤.

그들은 곧장 편의점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종말특급 대기열]

은색과 백색을 섞은 듯 깔끔한 열차의 앞으로.

앞서 상점을 이용했던 공략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노인과 실비아 일행 또한 그들의 뒤에 줄을 선 뒤.

"오오오...."

열차를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뜨린다.

"푸허헛! 이건 정말 굉장하군! 눈앞에서 보니 또 느낌이 색달라! 그렇지 않은가?"

"정말 열차처럼 생기긴 했네."

"어떻게 이런 아이템을 구현할 수 있는 거지? 아이템이라고 보는 것이 맞는 건가? 아니면 관리자의 능력이라고 봐야 하는...."

잔뜩 신이 나 떠벌거리는 노인과 달리.

여전히 실비아는 미심쩍어하는 표정으로 열차를 바라봤다.

"이게 정말 제대로 작동하긴 할까?"

"그건 타 보면 알게 되겠지! 그보다 이 기체의 굴곡을 좀 보게. 정말 바깥에서 보던 열차를 완전히 빼닮았어!"

"...."

잠시 후.

덜그럭-

대기열의 앞에 있던 용아병들이 옆으로 길을 터 주자.

열차의 문이 스르륵 열리기 시작한다.

"오오오! 이제 탑승이 가능한 모양이네!"

"나도 눈이 있어, 이 노인네야."

그들이 소곤거리는 와중에도 사람들은 한 명씩, 한 명씩 열차에 올랐고.

이윽고 그들의 차례가 도래했다.

덜그럭-

열차를 가리키며 손짓하는 용아병들.

아마도 열차에 탑승하라는 몸짓인 모양이다.

"후우... 떨리는군."

어린아이처럼 긴장한 노인을 필두로 열차에 오르는 실비아 일행.

그 순간.

띠링-

[오늘도 저희 종말특급을 이용해 주시는 고객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동하실 목적지를 정해 주세요. 목적지에 따라 이용 요금이 달라지며, 이동하실 수 있는 층은 고객님께서 마지막으로 클리어 하신 층까지만 가능합니다.]

저마다 소지하고 있던 패 위로 안내 문구가 떠오른다.

[현재 고객님께서 이동하실 수 있는 층은 60층까지입니다.]

[이동하실 층을 선택해 주세요.]

"오오, 과연... 이런 거였나."

잔뜩 흥분한 노인이 콧김을 뿜으며 이동할 층을 택한다.

[45층 → 60층 이동 루트를 선택하셨습니다.]

[150종말-머니 지불 시, 좌석표가 발급됩니다. 지불하시겠습니까?]

"물론이네!"

[좌석표가 발급됩니다. 귀하의 좌석은 C-5입니다. 즐거운 여행길에 오르시길.]

촤르르륵-

패 위로 자그마한 티켓 같은 것이 떠오르자.

노인은 얼른 그것을 잡아챈다.

[고객명: 반스웰 / 좌석: C-5]

티켓에 적힌 문구를 보며.

노인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정말 신기하군.... 도대체 어떤 원리가 작용하고 있는 건지, 아예 가늠조차 못 하겠어."

"알았으니까, 얼른 저 해골한테 티켓부터 주라고."

"음?"

덜그럭-

과연 실비아의 말대로 용아병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이런, 미안하네."

얼른 티켓을 주자.

쫘아아악-

용아병이 실선이 그려진 부분을 찢은 뒤.

남은 절반의 티켓을 그에게 돌려준다.

"이제 다 된 건가?"

"들어가면 되는 것 같은데."

용아병을 지나 열차의 내부로 들어가는 실비아 일행.

"오오!"

내부는 정말이지 정갈하고 깔끔했다.

완벽하게 오와 열을 맞춘 좌석들에 다시금 감탄을 터뜨리는 이들.

"우리 자리는 여기네."

"그렇군. 오오! 그보다 이 자리, 바깥을 보는 맛이 있군!"

창밖으로 보이는 편의점과 공략자들.

으레 보던 광경이었으나.

열차 안에서 보는 광경은 그 느낌이 또 색달랐다.

"그보다 실비아, 자네는 몇 층으로 정했나?"

"나도 60층으로 하긴 했는데... 진짜 거기까지 갈까?"

실비아가 여전히 미심쩍단 표정으로 티켓을 내려다보던 중.

딩동-

열차 안에서 음성이 울려온다.

[저희 종말특급을 이용해 주시는 고객님들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우리 열차는 약 5분 후 출발합니다.]

그 순간.

"...."

열차에 타고 있던 이들의 표정이 제각각 변해 간다.

"이제 곧 출발하려나 보네."

"근데 설마 진짜로 다른 층으로 이동하겠어? 그냥 이 분위기를 즐기자고!"

"하긴. 언제 또 우리가 이런 열차를 타 보겠어?"

열차에 탄 대부분은 애당초 열차가 다른 층으로 간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는지.

그저 지금의 경험을 즐기려는 눈치였다.

그러나 5분 뒤.

[종말특급, 출발합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뿌우우우우-

경쾌한 경적 소리를 시작으로.

삽시간에 창밖이 어두워졌다가 이내 밝아지자.

다시금 열차 안에서 음성이 울려온다.

[이번 역은 '세상의 끝', '세상의 끝'역입니다.]

"이야, 잘 만들었네."

"만약 창밖에 46층이 보이잖아? 그럼 난 바로 뛰어내린... 어?"

창밖을 바라보던 공략자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탄성이 터져 나온다.

"...미친?"

"농담이지? 환상인 것 아냐?!"

"맙소사...."

마찬가지로 창밖을 바라보던 실비아 또한.

멍하니 밖을 보며 중얼거린다.

"진짜 46층이라고?"

233화 종말특급 (2)

창밖으로 보이는 회오리 모양의 잿빛 하늘.

그리고 하늘의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수많은 잡동사니들.

저 광경은 필시 46층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허헣... 상식을 넘어선 일들을 여럿 겪었다고 생각했건만."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반스웰.

비단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았던 건 실비아 일행만이 아니었던 건지.

"...농담이지?"

"혹시 단체로 환상 능력에 걸린 것 아냐? 사실 이 모든 건 상점주가 보여 주고 있는 환상인 거고, 우리는 그걸 보고 있는 거라든가...."

좌석 곳곳에서 공략자들의 당황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허허헣! 환상이라...."

반스웰이 창밖을 보며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짓자.

실비아가 그에게 나지막이 묻는다.

"노땅, 어떻게 생각해?"

"질문의 의미를 잘 모르겠네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저 모든 게 진짜인 것 같아? 그쪽은 이런 걸 전문적으로 탐구하잖아."

지식 클랜은 탑의 특이점이나 상식을 벗어난 이치와 경험을 전문적으로 탐구하는 클랜이다.

하물며 그러한 클랜의 부클랜장인 노인이라면.

전문적인 의견을 제시해 줄 수 있을 터.

"으허허허헣!"

실비아의 물음에 반스웰이 껄껄 웃으며 말한다.

"현실을 초월한 일 앞에서 경험이 무슨 소용이겠나? 다만 정말 이 모든 게 환상이라고 한다면 상점주한테 환불을 해 달라고 해야겠군, 꿈값으로 500골드는 조금 과한 감이 있으니."

"농담하지 말고."

실비아가 싸늘한 시선을 보냈으나.

반스웰은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이 경험 앞에선 모두가 초심자일 터인데 내 의견이 뭐 그리 중요하겠나, 우리가 두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바를 경험으로 승화시키면 될 뿐인 것을."

"...."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중.

[우리 열차는 '세상의 끝'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약 30분간 해당 역에 정차 할 예정이오니 이용객 여러분들께서는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끼이익, 철컥-

차장의 안내 음성과 더불어 열차가 완전히 멈춰 선다.

"30분이면 충분하겠군."

자리에서 일어나는 반스웰.

"내리려고?"

"경험은 관찰에서부터 시작되는 거라네."

반스엘은 그대로 용아병에게 다가가 몇 마디를 던지더니.

고개를 돌려 실비아 일행에게 말한다.

"열차가 떠나기 전에만 다시 돌아오면 밖으로 나가도 괜찮다는군."

"그렇다면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실비아 일행.

"오, 그럼 우리도 슬쩍 나갔다 와 볼까?"

"그, 그럴까?"

그런 실비아 일행을 따라 공략자들 또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여기가 진짜 46층인지 솔직히 다들 궁금하긴 하잖아?"

"난 그것보다 그게 더 궁금한데? 만약 정말 층 간 이동에 성공한 거라면 계단 이외에 탑을 오갈 수 있는 새로운 이동 수단이 생긴 최초의 사건일 테니까."

"에이, 최초는 아니지! 16층에서 60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비밀 통로가 열린 것 몰라?"

"음?"

"거참, 이 친구... 귀는 장식인 게 분명하구만...."

뒤에서 들려오는 공략자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열차를 나서는 실비아 일행.

턱, 턱-

실비아는 짧은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곧 계단이 보이지 않자.

계단만 보고 걷던 그녀는 바깥으로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탁-

마침내 두 발이 땅을 밟자.

천천히 고개를 쳐드는 실비아.

"이건...."

길고도 널따란 회색빛의 터널형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균일한 간격으로 세워진 기둥들에는.

[세상의 끝역]이라는 띠가 둘러져 있다.

"허허헣...."

뒤따라 내린 반스웰이 두리번거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그린다.

"...정말 대단하군! 설마 이만한 규모의 승강장이 또 존재했을 줄이야."

"그러니까."

지금껏 그들이 봐 온 승강장은 환상의 상점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던 것이 전부였다.

물론 당시에도.

-대체 언제 이런 규모의 승강장을 만든 거지?

-환상의 상점이 사라지면 이 승강장도 함께 사라지는 건가?

여러 의문들이 있긴 했지만, '환상의 상점이니까.'라는 생각으로 넘어갔었다.

하나 그러한 승강장이 또 존재할 줄이야.

"몇천 명은 충분히 수용하겠는데? 대체 상점주는 언제 이런 걸 지었을까?"

"관리자에게 이 정도 일은 우스운 일이겠지. 그보다... 정말 신비롭군! 이 공간은 안전지대인 것일까? 아니면 파괴가 가능한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며 승강장 곳곳을 누비는 반스웰.

"저 노땅 또 눈 돌아갔네."

새로운 탐구거리를 봤으니.

반스웰은 한동안 저 상태일 터.

'승강장은 저 양반한테 맡기고, 난 밖을 좀 살펴볼까.'

정말 이곳이 46층인지 확인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원주민을 대면하는 것일 터.

'나와 원주민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환상으로 보여 주긴 어렵겠지.'

잽싸게 승강장을 나서는 실비아.

[―→출구는 이쪽입니다]라는 친절한 문구가 통로 중간마다 붙어 있어.

바깥으로 나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

찬찬히 주변을 살펴보는 실비아.

'어디에 내린 건가 했더니....'

승강장 너머로 보이는 계단.

45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인 걸 보아하니.

46층의 초입부인 게 분명했다.

'거기다가....'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코 끝에 번져 오는 녹슨 쇠의 내음.

저 멀리 보이는 '잡동사니 마을'까지.

냄새도, 환경도, 모든 것들이 이곳이 46층임을 알려 오고 있었다.

실비아는 홀린 듯 잡동사니 마을로 걸어갔다.

끼긱, 끼긱, 끼긱-

기괴한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거대한 시계 태엽을 시작으로.

잡동사니로 쌓아 올린 집들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다.

'여긴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네. 당연한 건가.'

공략자들이 장기 체류 하기 적합한 환경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잡동사니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독한 썩은 내는 엘프들이 풍기는 비료 냄새에 견줄 정도였으니까.

물론 마을에 공략자들이 없는 건 아니었다.

"어후, 냄새...."

"그래도 좀 괜찮지 않냐? 엘프들 똥내 덕에 좀 면역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활동하기가 불편하다 뿐이지.

레벨을 올리고 아이템을 파밍 하는 데는 꽤 장점을 가진 층이었으니까.

'그보다....'

잡동사니 마을을 거닐던 실비아가 누군가를 발견하곤.

그 앞으로 다가간다.

깡, 깡-

무언가의 일부였던 것 같은 쇠붙이를 바삐 두들기는 에반겔족에게 말을 건네는 실비아.

"어이, 몰트."

"음?"

목 아래의 모든 것들이 기계로 이루어진 남자가.

쇠를 두드리다 말고 고개를 든다.

"오, 누군가 했더니, 너였나. 폐품을 주우러 온 거라면 얼마든지 환영...."

"폐품 때문에 온 건 아니고, 물어볼 게 있어서."

"물어볼 것?"

실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기억나? 내가 잡았던 그 몬스터?"

"...몬스터? 네가 잡아 온 게 한두 마리였어야지."

"그 왜, 있잖아, 우리 파티만 잡았던 몬스터."

"아, 혹시 고철 왕자를 말하는 건가? 그거라면 이미 감사의 표시를 했었잖아? 이제 와 보상을 더 달라고 해도 못 준... 어이! 어디 가?!"

몰트가 갑자기 내달리는 실비아의 등에 대고 소리치자.

실비아의 목소리가 울린다.

"10분 남았어!"

"10... 분?"

도대체 뭐가 10분이 남았다는 건지.

그로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잠시 후.

"후우...."

승강장으로 돌아온 실비아.

그녀는 승강장에 정차 중인 열차를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늦진 않았나.'

아무리 선구자들이 '최초'를 지향한다고는 하나.

열차를 놓치는 것까지 최초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근데....'

실비아는 숨을 돌리다가 흘끔 공략자 무리를 쳐다봤다.

"이런 기둥 같은 곳을 잘 살펴보라니까? 숨겨진 공간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알고 보니 이런 곳에 역내 매점이 있다든가?!"

"어쩌면 개 쩌는 퀘스트가 있을지도 모르지!"

승강장의 기둥이나 바닥 따위를 자세히 관찰 중인 이들.

'저 얼간이들은 뭘 하고 있는 거지?'

"모든 위대한 업적들은 관찰에서부터 시작되지! 자네들은 지금 업적의 중심에 다가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인 거네!"

"오오오!"

그 중심에는 공략자들의 허파에 열심히 바람을 넣고 있는 반스웰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봐, 노땅! 슬슬 다시 타야 될 시간이야! 5분도 안 남았다고!"

"음? 오."

그녀를 본 반스웰이 미소를 머금은 채 묻는다.

"화장실이라도 다녀온 건가?"

"화장실은 개뿔. 잡동사니 마을에 갔다 왔어."

"오오, 그랬던 건가! 뭔가 소득은 있었나?!"

실비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여기, 환상 같은 게 아니라 진짜 46층인 모양이야. 원주민이 옛날에 선발대원들이랑 클리어 했던 네임드 몬스터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어."

"과연...."

"그래서 더 납득이 안 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심각한 표정을 짓는 실비아를 보며.

반스웰이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상점주 말이야. 대체 관리자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는 거지. 애초에 관리자라는 게 뭐야? 탑을 관리하는 존재들이잖아? 근데 왜 이렇게 공략자들한테 편의를 제공하는 건지 모르겠어."

"...?"

반스웰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선구자들은 가장 큰 혜택을 입지 않았던가?"

"이 노땅이 노망이 들었나.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먹어?! 혜택을 받은 거랑은 별개로 궁금하다고!"

"그건... 상점주에게도 무언가 목적이 있을지도 모르네. 탑이 멸망하지 않기를 바란다든가."

반스웰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다른 탑들이 존재하는 것도, 탑이 멸망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상점주가 알려 준 정보들이네. 그런 그가 우리에게 위해를 끼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그건 아닌데, 혜택들이 과하다 보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드네."

"자네는 걱정이 과할 때가 많은 것 같군. 때로는 단순히 접근해야 할 일도 있는 법일세."

"...."

실비아가 입을 꾹 다물자.

반스웰이 너그럽게 웃는다.

"논쟁은 안에서 더 하는 게 어떻겠나?"

"...그래야지."

실비아 일행을 비롯하여 공략자들이 종말특급에 오르는 와중.

"어이! 거기! 이보쇼들!"

승강장 바깥에 몰려 있던 공략자들이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혹시 이 건물, 퀘스트 때문에 생긴 겁니까?"

"오오, 저 열차 좀 보라고! 보통 퀘스트가 아닌 것 같은데?!"

대부분은 승강장을 비롯한 그 모든 것들이 퀘스트 요소라 생각했는지.

큰 관심을 내비친다.

"그렇게 궁금하면 안에 들어와 보면 되잖아?"

"우리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진입 불가 지역이라고 떠서요!"

누군가의 외침에 반스웰이 다시금 감탄사를 터뜨린다.

"설마 종말-머니를 충전하지 않으면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방식인 건가! 과연...."

"이보쇼, 영감! 종말-머니가 뭐요?!"

"좋은 정보가 있으면 교류도 하고 그럽시다!"

승강장 바깥의 공략자들이 연신 질문을 던져 대자.

실비아는 까칠한 목소리로 툭 한마디를 던진다.

"환상의 상점의 서비스니까, 궁금하면 지랄들 말고 환상의 상점에 가!"

"새로운... 서비스?"

그 말을 끝으로 열차에 오르는 실비아.

"잠깐! 잠깐만요!"

"미안, 이제 진짜 타야 되거든. 댁들도 다음에 기회가 되거든 타 봐요. 이거, 아주 물건입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 열차가 도대체 뭔...."

치익, 철커덕-

탑승객들을 태운 열차의 문이 천천히 닫히자.

"...출발하려는가 본데?"

질문을 던지던 공략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열차를 주시한다.

뿌우우우우우-

"오오, 움직인다! 진짜 움직이네?!"

"근데 철로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승강장과 승강장을 잇는 철로는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건만.

경적 소리를 따라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다가 뒤집어지는 것 아냐?"

"그건 그것대로 장관일 것 같긴 한...."

그러던 그때.

승강장을 나선 열차가 하늘에 철로가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허공을 향해 질주하더니.

"어엇?!"

사사사삭, 둥-

누군가의 단말마가 채 울리기도 전에 자취를 감춰 버린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 * *

며칠 뒤.

"흐음...."

난 입맛을 다시며 핸드폰의 화면을 바라봤다.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종말특급 출현!]

[종말특급의 토막 상식을 알아보자! 특등석과 1등석의 차이점은?]

[목적지 전 역에 떨어져 봤다. 환불 안 되나?]

[역내 매점의 등장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이미 너튜브에는 종말특급과 관련된 영상들이 빼곡하다 못해.

도배에 가까울 정도로 가득했다.

234화 종말특급 (3)

난 픽 웃음을 흘렸다.

'어느 정도 예견된 일이라지만 반응이 뜨겁긴 하네.'

그도 그럴 게, '종말특급'이라는 단어가 제목으로 쓰인 영상들의 경우.

모두 백만 단위가 넘는 조회 수를 기록하고 있었으니까.

'댓글들도 엄청나게 달렸네.'

기본적으로 수천 개, 많이 달린 곳은 이미 만 단위가 넘어간 상태였다.

난 슬며시 한 영상을 누르곤 댓글을 살폈다.

[합리적추론: ㅋㅋㅋ 와, 할 말이 없네. 내가 살면서 탑에서 열차가 운행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너튜브공무원: 왜 이렇게 호들갑임? 열차 처음 봄? 아! 못 배운 티가 났던 게, 촌놈이라 그런 거였누?]

[└└답글A.I.: (먹이 제공 금지)

[버스기사: 그런데 열차 배차 시간도 있답니까?]

[└답글A.I.: 승강장마다 시간표가 있대요.]

[└└버스기사: 잠시만요. 승강장... 마다요? 다른 곳에도 승강장들이 있다는 겁니까?]

[└└└답글A.I.: 다른 영상들도 봐 보세요. 아니면 렉카들이 정리 영상 올리는 것 기다리셈.]

[환승노인: 혹시 환승은 안 된답니까?]

[└유튜브 공무원: 틀딱아, 되겠냐?]

[호기심천국: 근데 승강장이나 열차는 그렇다고 쳐도, 종말특급은 환상의 상점이 열렸을 때만 운영되는 건가요?]

[└합리적추론: ㄴㄴㄴ 환상의 상점이 없어도 운영한다던데요? 상점주가 그랬음.]

.

.

.

'어이구, 정신이 없네.'

다양한 의견들은 기본이요.

온갖 질문들과 관심 종자들이 몰려든 댓글란은 그야말로 혼돈의 장이었다.

'뭐, 능력이 좀 특이하긴 했지,'

솔직히 나도 새로이 얻은 능력이 이러한 것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으니까.

난 상태창을 열어 전에 얻었던 능력을 살펴봤다.

종말특급(패시브)

설명: 시대를 앞서 나가는 편의점이 되기 위해선 원활한 교통 체계가 있어야 한다.

내용: 층마다 종말특급을 위한 승강장이 설치되며, 종말특급의 이용시간 및 운행 방식을 정할 수 있다.

제한 사항: 단, 종말특급은 마지막으로 공략 중인 층까지만 운행할 수 있으며, 특수한 퀘스트 층에는 승강장이 개설되지 않습니다. (현재 운행이 가능한 층: 1~62층)

처음 이 능력을 얻었을 때만 하더라도.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건만.

'다시 와서 보니 진짜 말도 안 되는 능력이긴 하네.'

평균적으로 층과 층을 오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4~5일.

물론 최정상급 클랜은 공간 능력이나 이동 능력을 활용하여 그 기간을 비약적으로 단축시킨다지만.

모두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대부분은 평균 언저리에 있다고 봐야겠지. 그렇다면... 흠, 역시 이용 등급을 조금 낮춰야 하나?'

지금 종말특급을 이용할 수 있는 등급은 '골드'부터다.

물론 전에 비해 골드-패를 소지한 공략자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숫자에 비하면.

실버, 브론즈, 우드-패를 소지한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맞다.

'열차의 특수성을 생각해서 등급 조정을 그렇게 하긴 했다만. 음, 열차의 범용성을 생각하면 더 많은 인원들이 이용할 수 있게 하면 좋을 것 같긴 한데....'

높은 등급의 패를 소지한 이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어.

공략 의욕을 상승시키는 게 맞긴 한데....

또 한편으론 더 많은 공략자들이 열차를 이용하면 좋겠다 싶단 말이지.

'하지만 그러면 또 열차가 만석이 돼서 골드-패 소지자가 열차를 이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을 테고.'

고민이 길어지려던 찰나.

번뜩-

불현듯 한 가지 생각이 나의 머릿속을 스쳐 가자.

난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만! 그래! 그 방법을 쓰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 * *

약 3주 뒤.

탑 관리자들의 휴게실.

"흐음...."

블라디미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눈앞에 놓인 둥근 빵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뭔가 다 따라잡은 것 같으면서도... 뭔가가 부족한 것 같단 말이지.... 뭔가가...."

드디어 조커 카드가 팔던 피자와 흡사한 맛을 내는 피자를 만든 것 같긴 한데.

뭔가가 다르다.

2%가 부족하다고 해야 할까.

"으음... 역시 재료를 더 구해야 되는 건가."

그러던 그때.

"뭘 그리 끙끙대고 있나?"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유그드라실이 그에게 말을 걸어온다.

"아아, 뭘 하나 했더니, 아직도 연구 중이었나? 그냥 내가 만든 걸 먹으면 될 것을. 쯧쯧...."

유그드라실이 테이블에 놓인 붉은 피자를 보며 혀를 차자.

블라디미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그를 바라본다.

"네가 만든 건 썩은 피 맛이 난다고! 최소한 먹을 만한 걸 만들어야...."

"그보다 이걸 좀 봐라."

기다란 나뭇가지를 내미는 유그드라실.

블라디미르는 나뭇가지 끝에 자리한 서류를 보곤 의아함을 드러낸다.

"뭔데?"

"공고문이 내려왔다. 다음 대결 일자에 맞춰 준비를 해 두라는군. 한 달 뒤라고 하니, 지금부터 느긋하게 움직이면 되겠지."

"그게 끝이야?"

"끝이냐고?"

유그드라실의 몸통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질문의 답신도 같이 왔다."

"오오! 드디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피자 옆의 수정구를 바라보는 블라디미르.

그 안에서는.

[이런 건 미리 선점해 둬야 하는 걸 몰라? 역세권이라고, 역세권! 여기다가 작은 매점 같은 것 하나만 만들어도 떼돈 벌어들이는 건 일도 아닐걸?!]

[지금부터 이곳은 우리 보물섬 길드가 통제한다.]

[헛소리하네. 전세 냈어?]

[꼬우면 덤비시든가!]

승강장 일대를 둘러싼 공략자들이 격렬한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대체 저놈들은 왜 저기서 싸우는 건지 모르겠군. 싸워서 이긴다고 승강장의 소유권을 차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유그드라실의 의문에 블라디미르가 픽 웃으며 답한다.

"뭐긴 뭐겠어, 돈 때문이지. 공략자들이 붐비는 곳이잖아? 저기에다가 잡화점 하나만 설치해도 큰돈 만질걸?"

"...."

유그드라실의 몸통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

"딱히 간섭할 생각은 없었다만, 멋대로 다른 이의 힘에 편승하려는 게 꼴사납긴 하군."

"그러잖아도 다른 녀석들한테 승강장 주변 좀 통제하라고 전달했어."

각 층의 원주민들을 이용하여 적절히 현장에 개입하거든.

상황은 금세 마무리가 될 것이다.

"아니면 중립지대를 확장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모든 승강장들은 계단의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계단 인근은 싸움이 불가능한 중립지대이다.

그러니 중립지대를 확장하거든 저 꼴사나운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될 터.

"뭐, 근데 사실 그건 최후의 대책인 거고. 그보다 본사에선 뭐래? 분명 문제가 있다고 하지 않아?"

"그건...."

유그드라실이 무어라 말을 하려던 중.

블라디미르가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 간다.

"이번 일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 각 층에 승강장을 설치하는 게 애당초 말이나 되는 일이야?"

"...상식을 벗어난 일이긴 하지."

지금껏 조커 카드가 벌인 일들이 예상 밖의 것이라곤 하나.

'이레귤러'라는 이름이 갖는 영역의 안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은 '이레귤러'의 범주를 넘어섰다.

"상식을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우리 권한에 근접한 일이라고!"

층을 오르내리는 계단.

그것은 엄연히 탑의 관리자들이 만든 규칙이었건만.

"저 열차는 우리가 만든 규칙을 완전히 뛰어넘었어! 저건 문제가 있다니까?!"

"...확실히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이 있는 건 동의한다."

"그냥 납득이 안 가는 게 아니라, 말이 안 된다고! 아무리 조커 카드라고 해도, 우리의 영역에 근접한 능력을 사용하는 게 말이나 돼? 막말로 얼굴만 가리면 관리자라고 해도 믿을걸?!"

블라디미르의 말이 맞다.

이번에 조커 카드가 발현한 능력은 능히 관리자의 권한에 근접한 힘이라고 봐도 좋았으니까.

"아무튼 본사에선 뭐래?"

그들이 공략자에게 간섭하는 건 어려우니.

결국 본사의 뜻이 어떠한지가 중요할 터.

"...아무 이상 없다는군."

"그래! 이번 일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니까! 당연히... 음?"

잘못 들었다는 듯 다시금 되묻는 블라디미르.

"뭐라고?"

"아무 문제 없으니 업무에 충실하라는 답이 왔다."

"그게 무슨 소리야?!"

블라디미르가 유그드라실이 들고 있던 서류를 냅다 낚아채더니.

황급히 내용을 훑는다.

[1. 귀 관리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보내 주신 애로 사항 건을 확인한 결과, 아무런 문제 사항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3. 이후로도 의문점&건의 사항이 있거든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이게 뭔...."

아무 문제가 없다니?

탑의 규칙을 넘어서려는 현상이 발생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

"드디어 본사 놈들이 정신 줄을 놨나? 누가 봐도 문제가 있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게 말이 돼?!"

"아니면 새로운 시도인 걸지도 모른다. 탑들 간의 대전처럼 말이지."

"아."

확실히 그거라면 말이 되긴 한다.

애당초 탑들 간의 대전 또한 이번에 새로이 도입된 시스템이 아니던가?

조커 카드가 저러한 능력을 발현하는 것 또한.

본사가 구상한 계획의 일부라면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긴 하다.

"그렇다면 할 말이 없긴 한데, 적어도 사전에 공지 정도는 해 주면 안 되나? 탑 대전도 진행되기 얼마 전에 알려 주고, 하여간 일 처리들 하곤...."

푹신한 의자에 편하게 몸을 기울이는 블라디미르.

그는 수정구를 보며 어깨를 으쓱인다.

"아무튼 보고도 했고, 이상이 없다는 답도 받았으니 그걸로 됐어."

더 이상 그들이 조커 카드의 열차에 신경 써야 할 이유는 없다.

"그보다, 내가 새로 만든 신작이 있는데 한번 맛을...."

* * *

며칠 뒤.

"후우...."

일단의 무리가 반복적으로 숨을 내쉬며 새하얀 계단을 오른다.

"조금... 떨리네."

하얀 로브를 입은 여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옆에 있던 남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 우리도 35층에 가는 거구나."

마왕의 성.

다소 사악한 이름과 달리 엄연한 마을로 불리는 층.

그곳에 도착하거든 길었던 여행의 노곤함을 잠시나마 씻을 수 있을 터다.

"난 35층에 가면 엔드미엘부터 가 보고 싶어. 거기가 진짜 천국이라고 했잖아?"

"빵 좋아하는 너한테 딱이긴 하겠네. 근데 일단 자리를 좀 잡고 퀘스트부터 받자. 마족들이 쓰는 장비들은 45층에 가서도 쓸 만하다고 선생님들이 그러셨잖아?"

탑카데미에서 받았던 교육들.

그것들은 지금도 뼈와 살이 되어 그들의 여행길에 보탬이 되고 있었다.

"오, 끝이 보이는데?"

이윽고 계단의 끝이 보이자.

일행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가자!"

찬란한 빛이 몸을 덮는다.

그리고 이내 빛이 사라지자 천천히 눈을 뜨는 일행들.

"여기가 마왕의... 음?"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두 눈을 비빈다.

"...저게 뭐지?"

길고도 널따란 건물.

그 안에는 탑에서는 결코 볼 수 없던 열차가 자리하고 있었다.

"열차잖아? 근데 저게 왜 저기에 있는 거지?"

"그, 글쎄. 선생님들도 마왕의 성에 열차가 있다고 말하신 적은 없는데...."

"어? 얘들아! 저기 좀 봐!"

남자의 외침에 일행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다.

"어어? 환상의 상점이잖아?"

"어쩐지 사람들이 많더라니...."

승강장 옆에 자리하고 있는 2층 크기의 건물.

그것은 분명 환상의 상점이었다.

"비빔면 들어왔습니까?!"

"뒤진닭소스! 그게 없으면 이제 살아갈 수가 없어!"

이미 현장은 몰려든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운이 좋았는데?! 우리도 줄 서 볼래?"

"하지만... 우리가 상점의 물건을 살 수 있을까?"

실버-패를 소지했다고는 하나.

이미 대기 중인 공략자들이 많은 상황.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상점의 상품을 산다는 건.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닐 터.

"종말-머니 좀 충전해 주세요! 저도 종말특급 좀 타 봅시다!"

"통화 카드!"

저마다 원하는 상품들을 소리치며 패를 흔들어 대는 공략자들.

번쩍번쩍-

대개는 은빛 패를 소지하고 있는 듯했다.

"실버-패 소지자들이 많네. 아무래도 상점을 이용하는 건 어렵겠다."

"근데 방금 들었어? 종말-머니? 그게 뭘까?"

"상점의 신상품 같은 것 아냐?"

일행이 속닥거리던 그때.

딸랑-

편의점의 문이 열리고 여우 가면을 두른 남자가 천천히 안에서 걸어 나온다.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손님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오오!"

척-

다시금 허공을 수놓는 수많은 패들.

"오늘은 상점을 오픈하기에 앞서 한 가지 사안을 전달할까 합니다."

"음? 혹시 또 신상품?!"

"하하, 오늘부로 저희 종말특급의 임시 운행이 종료됩니다."

상점주의 말에 공략자들의 표정이 숙연해진다.

"그, 그럼 더 이상 종말특급을 이용할 수 없다는 건가...."

"아뇨! 오늘부로 종말특급의 정식 운행이 시작됩니다!"

235화 종말특급 (4)

기존까지 임시 운행이었다고 한다면.

정식 운행이 된 지금은 무언가 달라진 게 있는 걸까?

"정식 운행이 시작된 오늘부로! 실버-패 오너분들도 종말 특급의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그 순간.

"오오오!"

"우, 우리도 이용이 가능하다고?!"

실버-패 오너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의 미소가 걸리기 시작한다.

그도 그럴 게, 요즘 탑의 큰 이슈 중 하나가 바로.

'종말특급에 타 본 경험이 있느냐'였으니까.

[어흠, 어흠! 거, 종말특급 타 봤어? 안 타 봤으면 말을 말라고. 그냥 체감이 달라, 체감이.]

[열차 밖의 풍경을 바라본 적이 있나? 처음에는 그저 칠흑 같은 암흑뿐이지만, 그 뒤로 장관이 펼쳐지지. 무리 지어 헤엄치는 별들, 작은 은하계 같은 것들을 보고 있으면 내가 소우주의 중심에 선 듯한 느낌이 든다고. 뭐? 떼잉! 어디 별의 마을이랑 비교를 하고 있어?!]

[이제 구태여 공간 이동 능력에 목맬 필요 없다니까? 차라리 공간 이동 능력자를 찾을 시간에 패 등급을 올리라고! 그 편이 더 빠를걸?]

종말특급의 편리성에 거듭 감탄한 골드-패 오너들이 자발적으로 영업을 뛴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많은 이들이 종말특급을 이용하기를 원하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뭣들 하냐! 골드 안 꺼내고!"

누군가의 외침에 실버-패 소지자들은 흔들던 패를 내리곤.

저마다 두툼한 가죽 자루를 들어 보인다.

"내 골드를 전부 가져가라고!"

"종말-머니!"

"자, 충전 드가자!"

삽시간에 축제 분위기로 변해 가는 현장.

모두가 높았던 문턱이 낮아졌음을 기뻐한다.

"흐음...."

그러나 모두가 그러한 결정을 반기는 것 같진 않았다.

"조금 아쉬운 결정이군."

"그러니까. 자리가 널널해서 좋았는데, 이러면 종말특급 이용하는 건 쉽지 않겠네...."

"앞으로 꽤나 경쟁이 치열해지겠어."

기존에 혜택을 받았던 골드-패 소지자들은 아쉬워하며 입맛을 다신다.

그런 분위기를 읽기라도 한 걸까.

상점주가 좌중에 소리친다.

"다만 몇 가지 새로운 규칙들이 적용됐습니다. 첫째로 새로이 생긴 특등석의 경우, 골드-패를 소지한 분들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특등... 석?"

"특등석을 이용하시는 분들께는 열차 내에서 여러 부가적인 혜택들이 제공되니, 마음껏 즐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상점주의 발언에 눈을 번뜩이는 공략자들.

"특등석은 뭔가 다른 모양인데? 우리도 어떻게 안 되나?"

"못 들었어? 골드-패 소지자만 이용이 가능하다잖아."

"그렇긴 한데...."

군중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리는 와중.

상점주의 목소리가 연이어 들려온다.

"그 외에도 종말특급의 노선에 하행선을 추가하여 편의성을 도모하고자 하니, 많은 이용 부탁드립니다."

* * *

종말특급이 정식 운행을 시작한 지 며칠 후.

15층, 드레이크 공방.

[붉은 고리의 대장간]

[푸른 비늘 날개의 대장간]

.

.

.

용인들이 저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대장간들 사이로.

일단의 공략자들이 바삐 돌아다니고 있다.

보통은 대장간에서 판매하는 장비들의 품질을 살펴보기 마련이건만.

"흠...."

어째선지 그들의 시선은 진열대에 전시된 장비들이 아닌.

"크륵, 똑바로 망치를 들어라. 네 피와 땀의 양이 장비의 질을 결정한다."

"알겠습니다, 스승님!"

용인들과 함께 작업 중인 사람들에게 쏠려 있었다.

"저 녀석은 어때?"

대장간을 살피던 남자의 물음에 그의 동료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인다.

"음, 어떻고 자시고... 이게 의미가 있는 거야? 솔직히 난 잘 모르겠는데."

"뭘 모르는 소리 하네. 이런 건 미리미리 준비를 해 놔야 한다고!"

"그건 그런데...."

"됐고, 넌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남자는 동료를 뒤로 밀어내곤.

구슬땀을 흘리며 망치를 내려치는 공략자에게 다가간다.

"저기요."

"싫습니다."

"...예?"

아직 별다른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싫다니?

"하하, 일단 조금 대화를 나눠 보시는 건...."

"클랜 가입 권유라면 사양하겠습니다."

"...."

그의 목적을 읽기라도 한 걸까.

딱 잘라 말하며 망치질을 이어 가는 대장장이.

"한번 들어만 보세요. 그쪽에게도 결코 나쁜 조건은 아닐 겁니다."

"나쁜 조건이고 좋은 조건이고, 전 지금의 삶이 좋습니다. 괜히 나섰다가 죽고 싶지도 않고요."

"아하...."

이걸로 도대체 몇 번째 퇴짜를 맞는 건지.

남자가 쓴 미소를 짓는다.

"쓰읍, 아무래도 쉽지가 않네."

"그냥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어때? 솔직히 저놈들, 외모만 우리랑 같을 뿐이지 그냥 원주민들이랑 다를 게 없다니까?"

동료의 말이 맞다.

저들은 진작 공략을 포기하고 지금의 현실에 완벽히 순응한 이들이었으니까.

"나도 알지, 아는데, 이후에 있을 공략 때문에 이러는 것 아냐!"

선구자들이 62층에서 가로막힌 이유가 뛰어난 대장장이가 없어서 그렇다는 건.

탑 안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선구자들이야 그렇다 쳐도, 우리는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기간이 있잖아? 이런 건 미리 선점을 해 둬야 한다고."

제작 계열의 능력자가 거의 사장되다시피 한 지금.

미리 포석을 깔아 둬야만 향후 공략이 편해질 터.

"그건 알겠는데, 아무 전투 능력도 없는 놈을 어떻게 키우려고? 국가 층이야 우리가 도와준다고 쳐도, 퀘스트 층은?"

애당초 제작 계열 능력자들이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보유한 능력들이 생존과 전투에 적합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그 능력이 특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 아니던가!

"우리가 백날 도와줘 봐야 결국 퀘스트 층에서 막힐 수밖에 없는 구조라니까? 이럴 시간에 그냥 어느 정도 완성된 대장장이를 찾는 게 빠를걸?"

"그러면 좋지! 너무 좋지! 근데 그런 놈이 있어?! 선구자들도 환상의 상점의 퀘스트 보드를 이용해서 겨우 한 명 구한 게 전부라잖아?!"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잇는다.

"레벨도 준수하고 괜찮은 전투 실력이랑 제작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면 최고겠지. 근데 그런 놈이 있을 리도 없고,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이미 어딘가에 소속돼 있겠지."

"그건 그렇지만...."

"그러니까 미리 투자를 하자는 거야. 일단 투자를 해 두고 나중에 우리 클랜에 받아들이자는 거지. 이해했어? 투자는 물건값이 0일 때 투자해야 의미가 있는 거야. 그래야...."

한창 자신의 투자론을 설명하는 남자를 보며.

동료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아직 62층까지는 열 걸음이나 남았구만...."

"뭐?"

"아무것도 아냐."

"그럼 서두르자고, 우리가 늦장 부릴수록 가능성도 줄어들 테니까."

그들은 계속 대장간을 돌아다니며 그들이 원하는 인재를 찾아 나선다.

* * *

몇 시간 뒤.

"쩝...."

"역시 쉽지 않네...."

처음의 포부와 달리.

이렇다 할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드레이크 공방을 나가는 남자들.

-이미 계약한 클랜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그쪽 클랜이랑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저랑 엇비슷한 레벨의 공략자들이랑 함께하다가 클랜을 옮기라는 거죠? 음, 굳이 그래야 하나 싶네요.

여러 제작 능략자에게 거듭 퇴짜를 맞은 탓일까.

그들은 반쯤 해탈한 표정으로 용의 머리 모양의 드레이크 공방을 올려다본다.

"내가 말했지? 진작 왔어야 한다니까? 이미 다 낚아채 갔잖아?!"

"미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남자의 눈치를 보던 동료가 조심스레 운을 뗀다.

"아니면 우리도 환상의 상점의 퀘스트 보드에 의뢰해 보는 건 어때?"

"진작 걸어 놨지. 근데 아직도 무소식이야."

"...."

며칠 동안 고생은 고생대로 했건만.

"하아... 체류가 길긴 했다. 일단 복귀하자."

천천히 드레이크 공방 거리를 벗어나는 이들.

이윽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15층의 승강장이었다.

두 남자는 승강장을 보며 말한다.

"그래도 이게 생긴 이후로 참 편해지긴 했어."

"그건 인정."

본래 며칠, 몇 주가 걸릴 여행길을 하루로 단축시켜 버렸으니.

"일단 들어가자고."

그들이 승강장의 입구 부근으로 향하자.

띠링-

[소지하신 패의 등급을 확인합니다.]

입구에서 무미건조한 여자의 음성이 울려온다.

[소지하신 패의 등급이 '골드'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종말특급 15층 승강장에 방문하신 걸 환영합니다.]

스슥-

승강장의 문이 열리자.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남자들.

고급 호텔의 홀처럼 생긴 공간이 그들을 반긴다.

작은 낙서 하나 없는 백색의 벽면을 시작으로.

천장에선 밝은 빛이 그들의 머리 위로 흘러내린다.

푸슛-

그들은 물을 뿜어 대는 자그마한 분수대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가방에서 빈 통들을 꺼내어 물을 담으며 말한다.

"다른 건 몰라도 식수를 확보할 수 있는 건 진짜 좋긴 하네."

"이것도 다 요금에 포함되어 있는 거겠지."

애당초 이곳은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잠시간 쉴 수 있는 휴식 공간이었으니까.

그렇다고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을 해도 좋은 건 아니다.

치익-

그들과 마찬가지로 휴게 공간에 있던 한 남자가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려던 찰나.

화아아악-

"어엇?!"

돌연 그의 몸이 빛에 휘감기더니.

승강장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나 요금 냈어, 이 새끼들아! 들여보내 줘!"

승강장의 입구를 쾅쾅 두들기는 남자를 보며.

곳곳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려온다.

"쯧쯧... 저 양반 승강장의 규칙을 몰랐나?"

승강장에는 몇 가지 규칙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방금처럼 규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승강장에서 추방된다.

"기본적인 것만 지키면 되는데 그걸 못 지키냐."

"그래도 패 소지자인데, 몰랐던 거겠지. 그건 그렇고...."

남자가 슬며시 휴게 시설을 훑는다.

"이 층에선 이용하는 사람이 적을 줄 알았는데, 은근 사람들이 있네."

"우리랑 비슷한 생각을 갖고 왔던 거겠지, 뭐."

동료의 말은 꽤 일리가 있었다.

실제로 층에 어울리는 냄새를 풍기는 뉴비들보단.

그들과 엇비슷한 경험자의 기운을 흘리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하긴. 이제 16층 공략에 나서려는 녀석들한테 종말특급은 필요 없겠지."

"흠, 그래도 아래층에서 장사하는 놈들은 자주 이용할 것 같은데?"

"그러잖아도 그것 때문에 요즘 물품 교류가 엄청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때.

띠링, 띠링, 띠링-

[지금 승강장에 상행선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휴게 시설 안에 안내 음성이 울린다.

"갈까?"

휴게 시설을 나가 승강장 내로 들어서자.

이미 정차를 끝마친 백색의 열차가 그들을 맞이한다.

덜그럭-

공략자들이 한 명씩, 한 명씩 용아병의 안내를 받으며 열차에 오른다.

"와아, 이게 종말특급...."

"미쳤다...."

대부분이 탄성을 지르며 열차 안을 구경하는 와중.

동료가 남자를 보며 묻는다.

"우리 자리는 어디야?"

"저기로 가면 된다던데?"

대부분의 공략자들이 오른쪽의 문 안으로 들어갔건만.

남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열차의 머리 부분으로 향하는 좌측 문을 가리켜 보였다.

"음? 저건 뭐야?"

"종말특급에 새로운 게 생겼다더라고? 특등석이라던가?"

"오오... 특등석?!"

"나도 정확히는 몰라. 용아병이 우린 특등석으로 가라던데? 아무튼 들어가 보면 알겠지."

두 남자가 조심스레 문을 젖히자.

"오...."

특등석의 내부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와, 씨... 의자가 아니라 거의 침대 같은데?"

일반석의 자그마한 의자와 달리.

구비된 커다란 의자는 딱 봐도 푹신하며 안락해 보였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기, 맥주 한 잔 줘!"

덜그럭-

정장을 입은 용아병의 서비스와 그에 따라오는 음식과 음료는 기본이오.

"오오, 이것 봐. 잡지들이잖아?"

칸 한쪽에는 다양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다.

"와, 씨... 이게 다 뭐래? 우리 종말특급 탄 것 맞지? 일반석이랑은 너무 다르잖아?!"

"그보다 일단 좀 앉자."

두 남자가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 짐을 풀려던 중.

"...."

먼저 열차에 타 있던 건지 그들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들을 올려다본다.

얼굴의 상당 부분을 가리고 있는 여우 가면을 쓴 남자를 보며.

두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숙덕거린다.

"이제 좀 줄어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상점주를 따라 하는 사람이 있네."

상점주가 등장한 이래로.

그를 따라 여우 가면을 쓰고 그를 사칭하는 놈들이 오죽 많았던가?

물론 그런 놈들은 대부분 '상점주'라는 이름을 감당할 정도의 힘이 없어 조용히 어둠 속에 묻혔지만.

"냅둬, 상점주의 골수팬인가 보지. 골드-패 오너잖아?"

그래.

특등석에 있다는 건 최소 골드-패 오너라는 것!

적어도 그 신분에 문제가 있는 이는 아니리라.

"그리고 이런 곳이 인맥을 넓히기 좋은 곳이라고. 잘 봐."

"흠흠...."

남자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곤.

가면을 쓴 남자에게 슬쩍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어디까지 가십니까? 저희는 55층까지 가는데,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닐까요? 이건 간식인데 괜찮으시다면 하나 받으시죠."

남자가 말린 건포를 내밀자.

가면 밑으로 보이는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괜찮습니다."

그는 정중히 거절의 의사를 표한 뒤.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리고 딱히 정해진 목적지는 없습니다."

"...?"

순간, 남자들의 표정에 물음표가 걸린다.

"잠깐만... 어째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은데?"

어디선가 들어 본 듯한 이 목소리는 분명....

두 남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설마... 상점주?"

236화 종말특급 (5)

으레 환상의 상점을 이용할 때마다 들었던 그 목소리.

분명 상점주의 것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두 남자가 자기들끼리 속닥거린다.

"진짜 상점주인 것 아냐?"

"에이, 설마? 상점주가 뭐 하러 열차에 타고 있겠어?"

"하지만 목소리가 닮았잖아?"

"목소리 엇비슷한 놈들이 한둘이야? 그렇게 사기를 당해 놓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저건 정교한 짝퉁이라고, 짝퉁!"

"...그런가?"

두 남자는 이내 속닥거림을 멈추곤.

웃으며 눈앞의 가짜 상점주에게 말을 건다.

"정처 없는 여행을 하시는 중이었군요!"

"낭만 있으십니다."

"여행이라...."

가면 밑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여행은 아닙니다. 오늘은 어디까지나 서비스, 시설 점검 차원에서 온 거니까요."

"...예? 시설 점검이요?"

"네. 특등석이 주는 만족감이라든가, 용아병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는 어떠한지, 불편함은 없는지... 그런 요소들을 확인하려는 겁니다."

"...."

잠시 멍하니 가면남을 바라보던 두 남자가 다시 속닥인다.

"사, 상점주가 맞는 것 같은데?"

"상점주는 무슨, 그냥 극한의 콘셉트충이겠지. 아니면 리뷰어든가."

다양한 층을 오가며.

층의 특수한 시설이나 장소를 전문적으로 리뷰하는 리뷰어.

그런 자들이 '종말특급'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잖은가?

"아, 그런 건가?"

"그래! 상점주가 왜 여기에 있겠냐고! 생각을 좀 해, 생각을."

두 남자는 눈앞의 존재를 극한의 콘셉트 리뷰어일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뒤.

웃으며 말을 이어 간다.

"아아, 그러셨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떤 평가를 내리셨는지 들어 봐도 될까요?"

"아직 평가 중입니다. 주관적인 생각을 최대한 배제하려다 보니, 시간이 좀 걸리는군요."

"그럼 저희가 좀 도와드릴까요?"

남자가 갑작스레 제안하자.

옆의 동료가 화들짝 놀라 소곤거린다.

"야, 야, 미쳤어?"

그러나 아랑곳 않고 가면을 쓴 남자에게 제의를 이어 가는 남자.

"저희가 종말특급에서 경험하고 느낀 바를 참고하신다면, 리뷰를 작성하시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

잠시 고민에 잠긴 듯한 리뷰어.

그가 이내 제의를 한 남자에게 말한다.

"확실히 의견이 많은 편이 도움이 될 것 같긴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그럼요! 그냥 종말특급을 이용하면서 느낀 점을 말해 드리면 되는 거잖아요? 그게 뭐 어려운 거라고, 하하하!"

남자는 호탕하게 웃으며 리뷰어에게 손을 내민다.

"아르테일 클랜의 클랜장 파이스입니다. 저쪽은 제 동료 페논이고요."

"늘꺾이는마음입니다."

"...콘셉트는 확실하시군요."

파이스가 주변을 힐끔 살펴본다.

다들 종말특급이 주는 분위기를 만끽하기 바쁜 탓일까.

사람들은 그들에게 별 관심이 없는 눈치다.

"저희야 그런 취미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다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선 자제하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예?"

"상점주를 사칭했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 사람들이 제법 되거든요."

"아아."

가면을 쓴 남자가 쓴 미소를 짓는다.

"이것 참, 가끔 제 취미가 선을 넘는 경우가 있었는데, 조언 감사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아무튼,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될까요?"

파이스의 물음에 리뷰어가 씨익 웃는다.

"특등석은 얼추 다 살폈으니, 이제 열차의 부대시설을 이용해 볼까 합니다."

"부대... 시설이요?"

잠시 후.

리뷰어의 뒤를 따라 열차의 머리 칸으로 이동하는 파이스와 페논.

열차 칸을 3칸이나 이동했을 무렵.

"흠, 죄다 특등석뿐인데, 정말 열차 안에 그런 시설이 있긴 한 건가? 저 리뷰어, 뭔가 착각한 것 아냐?"

페논이 작게 속삭이자.

파이스가 어깨를 으쓱인다.

"없으면 없는 대로 즐기면 그만이지. 그냥 즐겨, 열차를 벗어나면 이렇게 편하게 여행하는 것도 끝이니까."

"그건 그렇지."

두 남자가 작게 숙덕이던 그때.

"여깁니다."

선두에 있던 리뷰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황급히 대화를 멈추곤 시선을 돌리는 두 남자.

"오오?"

열차의 칸과 칸을 나누는 기존의 평범한 문들과 달리.

눈앞의 문에는 다소 특이한 문구가 걸려 있다.

[종말특급 종합 이용 시설]

"종합 이용 시설?"

"이게 그쪽이 말한 부대시설인가요?"

"네, 제대로 찾아온 모양입니다."

리뷰어가 웃으며 문고리에 손을 올린다.

"일단 들어가 볼까요?"

리뷰어가 문고리를 옆으로 힘껏 당기자.

드르르르륵-

황금색의 문양이 각인된 문 너머의 광경이 그들의 두 눈에 한가득 들어찬다.

"저건...."

분명 그들이 위치한 곳은 열차의 안이건만.

"열차 안에... 마을이 있다고?"

눈에 보이는 저 많은 구조물들은 대체 무엇이고.

그 구조물을 수용할 정도로 널따란 이 공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환각에 걸렸나?"

파이스가 손을 들어 제 뺨을 후려치려던 와중.

리뷰어가 웃으며 그를 제지한다.

"골드-패를 소지하고 계시다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시설입니다."

"그, 그래요?"

"와...."

갓 상경한 시골 청년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남자들.

"흐읍!"

"하압!"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역시 기합 소리가 울려 대는 연무장이었다.

"허억, 허억...."

저마다 체력을 단련하거나 대련 중인 공략자들을 보며.

파이스와 페논이 나지막이 말한다.

"열차 안에 이런 시설이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군."

"그러니까. 어떻게 이런 게 가능... 음? 야야, 저기 좀 봐."

페논이 가리킨 방향, 그곳에선....

"허허허, 이런 곳에서 환상의 상점의 향취를 느낄 수 있다니, 정말 만족스럽군."

"호호호, 너무 좋은 공간이네요."

일단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저긴 레스토랑 같은 곳인가?"

"그런가 본데? 음? 페논, 여기 와서 이것 좀 봐."

레스토랑 입구에 놓인 나무 팻말을 바라보는 이들.

[금일 셰프의 추천 메뉴 - 환상카세]

식전주 - 숙성 요구르트

애피타이저 - 감동이 있는 계란 / 풍미 가득 잼과 식빵

해물 요리 - 잘게 다진 생선을 특제 소스와 섞은 특제 요리

메인 디시 - 3가지 맛을 한 번에 느낄 수 있는 3대장 닭

.

.

.

"매일 메뉴가 바뀌나 봐."

"오오, 뭔가 먹음직스러운 이름들인데?"

"그러게. 우리도 가서 먹어 볼래? 거기 리뷰어 씨 생각은 어때요?"

파이스가 리뷰어의 의견을 구하던 그때.

덜그럭-

파이스의 시선이 서빙 중인 용아병들의 손에 들린 그릇에 향한다.

"음? 근데 뭔가 요리들이 눈에 익은 것 같은데."

"파이스, 저 식전주 말이야. 환상의 상점에서 파는 요구르트 아냐?"

"...어라?"

투명한 잔 안에서 찰랑이는 살구색의 액체를 시작으로.

뒤이어 서빙되는 계란과 빵.

그리고 친숙한 참치크래커에 이어.

수넬, 야마, 캬라 등 3대장 치킨까지.

"다 환상의 상점에서 취급하는 것들이잖아?"

보통 코스 요리라 함은, 셰프가 정성껏 만든 음식들이 순서대로 나오는 게 아니던가?

그런데 상점에서 파는 상품들을 그대로 내놓다니!

"...오히려 좋을지도?"

"엥? 그게 무슨 말이야? 파는 상품을 그대로 내놓는 건데, 그게 좋다고?"

"생각해 봐. 굳이 줄을 서지 않고 냉동이나 다른 상품들을 맛볼 수 있는 거잖아?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그 외에도 그들은.

"크큭... 오크 부락을 제물로 바쳐 오크 로드를 소환, 뒤이어 특수 카드를 발동! 오크 로드의 전용 무기 길로크를 장착시키겠다."

"으음...."

카드 배틀만을 전문적으로 즐길 수 있는 듀얼 센터라든가.

덜그럭-

저마다 악기를 든 용아병들이 선보이는 작은 음악회 따위를 구경하며.

곳곳을 돌아다녔다.

몇십 분 뒤.

"허 참... 진짜 넋 놓고 있다간 시간 가는 줄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그들은 빈 의자에 앉아.

그들이 보고 느꼈던 바를 대화로 나눈다.

"정차할 역에 도착하면 용아병들이 알려 주는 시스템도 괜찮았어."

"흠, 알려 준다기보단 끌고 가는 듯한...."

때마침.

덜그럭-

"키에에에에엑! 더 있고 싶어! 내리기 싫어!"

용아병들의 손에 질질 끌려가는 공략자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 들어온다.

"...."

"뭐, 저 심정도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네."

"그러니까."

파이스와 페논이 멀어져 가는 공략자를 바라보던 중.

옆에 있던 리뷰어가 나지막이 입을 뗀다.

"이제 돌아다닐 곳은 얼추 다 돈 것 같은데, 당신들의 소감을 듣고 싶군요."

"소감?"

파이스와 페논이 피식 웃는다.

"소감이고 자시고 할 게 어딨어? 여긴 그냥 미쳤어."

"타 본 적은 없지만 초대형 크루즈선에 탄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끝없이 쏟아지는 찬사와 호평.

그러나 리뷰어는 무언가 불만족스러웠는지.

계속 질문을 이어 간다.

"좋습니다. 그럼 개선됐으면 하는 시설이라든가 추가됐으면 하는 게 있을까요?"

"개선됐으면 하는 거라.... 이용료가 비싼 것도 아니고 즐길 거리도 넘쳐 났는데 여기서 더 개선할 게 있나요?"

"어차피 영원히 열차에 있을 것도 아닌데, 나도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리뷰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잘 알겠습니다. 그래도 추후 시설에 불만족스러운 부분이 생긴다거나 개선점이 보이거든 시설의 직원에게 문의해 주세요."

"음? 어, 뭐... 그러죠."

"두 분 덕에 비교적 원활히 평가를 끝마쳤네요. 보답이라고 하기에는 뭐하지만, 이건 작은 성의입니다."

리뷰어가 내민 것은 두 장의 통화 카드였다.

"음? 하하하, 이것 참... 성의에는 감사드리지만, 이건 받을 수가 없겠네요. 환상의 상점의 상품들은 거래가 안 돼요. 깜빡하신 모양입니다."

"받으시죠."

"...."

분명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줬건만.

재차 통화 카드를 권하는 리뷰어를 보며.

두 남자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곤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린다.

"지금은 콘셉트에 완전히 잡아먹힌 것 같은데?"

"그냥 맞춰 주자."

"하하, 그렇다면야 감사히 받겠습니다."

통화 카드에 손을 뻗는 두 남자.

텁-

"...?"

"어라? 이게 왜...."

분명 통화 카드는 리뷰어의 소유물이고.

환상의 상점의 상품은 거래, 양도가 불가한 물건이건만.

"잠깐만, 이게 가능하려면...."

두 남자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거린다.

"짜, 짝퉁이 아니라 진짜라고?"

"아니, 상점주가 왜...."

* * *

같은 시각.

[...교통의 발달 이후 현대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종말특급 또한 그러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거대한 변화의 시작을 말이죠.]

[그렇군요. 그럼 다음으로 이다미 교수님의 의견을....]

거실에 옹기종기 모여 TV를 시청 중인 주방 멤버들.

"저 열차 말이다. 조금 재밌어 보이는군."

"헥?"

"그냥 움직이는 쇳덩이 아니냥? 저게 뭐가 재밌다는 거냥?"

루나의 물음에 발리나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알아서 목적지까지 운반해 준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예를 들자면... 내가 협곡에서 팀원들을 버스 태워 준다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지."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냥?"

"왈왈왈!"

의문을 표하는 루나와 백구를 보며.

발리나가 코웃음을 친다.

"협곡의 '협' 자도 모르는 것들. 피와 전투, 비명과 욕설이 난무하는 그 치열한 전투 현장을 너희가 알 리 없지."

"주인한테 들었다냥. 만년 실딱이라고 하지 않았냥?"

움찔-

발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건 내 버스에 승차하기를 거부하는 팀원들의 문제이지, 내 잘못이 아니다! 팀 운이 좋았다면 난 진작 다이아! 아니! 그 이상도 올라갔을 거다!"

"그러냥? 난 잘 모른다냥."

"네게 최소한의 지식이 있었다면 내가 듀오를 해 줄 용의도 있긴 하다만, 아무래도 그건 어렵겠군."

그러자 루나가 고개를 쳐든 채 묻는다.

"그럼 내가 시작하면 알려 줄 거냥?"

"그, 그건...."

협곡의 대표적인 버스 챔피언인 책에 올라탄 고양이와 루나가 오버랩되어 보이는 이유는 어째서일까.

발리나가 식은땀을 흘리던 그때.

"얘들아, 다들 주목해 봐."

소파 뒤로 분신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발리나, 백구, 루나는 물론이요.

참기름이 가득 담긴 대야에 둥둥 떠다니던 깡통도 상반신을 일으킨다.

"무슨 일이냥?"

"오늘의 일은 모두 끝마쳤다."

혹시나 잔업이 있는 건가 싶어 불안함을 내비치는 주방 멤버들.

"일단 다들 여기 있는 통에서 용지를 뽑아 볼래?"

분신이 빈 휴지통을 흔들자.

안에 무언가가 들어 있는지 작게 소리가 울린다.

"이, 이상한 게 들어있는 것 아니냥?"

"하하, 그런 건 아니니까 일단 뽑아 봐."

"...."

다들 의아해하면서도 휴지통에 손을 넣는 주방 멤버들.

"이게 뭐냥? 엑스(X)가 그려져 있다냥."

"헥?"

<참기름이 묻혀 있는 표식이 분명함. 당장 찾아야 함.>

모두가 엑스(X) 자가 그려진 용지를 뽑은 가운데.

"오(O)가 적혀 있다."

발리나가 용지를 보이며 의문을 표한다.

"그래서, 이게 뭐지?"

"오, 발리나 당첨! 자, 그럼 오늘의 단합 대회의 주제는 발리나의 취미로 할까?"

"...?!"

순간, 발리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딱딱해진다.

"그게 무슨...."

"친목을 다지는 시간으로 서로의 취미를 공유하는 단합 대회를 준비했는데, 어때?"

"잠깐... 그 말은 지금, 지금 나보고 이 녀석들에게 게임을 가르치라는 건가?"

그에 분신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 단합 대회라니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려면 취미도 공유해 봐야지. 오늘은 다 같이 네가 좋아하는 협곡인지 뭔지를 해 보자고."

지옥을 넘어선 심연의 5인 큐가 협곡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237화 지옥과 단합 대회는 취향 차이

협곡에 지옥이 도래하기 30분 전.

"자, 세팅은 다 됐다. 다들 자리에 앉아."

일렬로 진열된 다섯 대의 컴퓨터 앞으로.

일시불란하게 착석하는 주방 멤버들.

"이제 뭘 하면 되냥?"

"헥헥!"

<단합 대회의 주제를 변경할 것을 권함. 참기름 수영장을 개설해 줄 것을 요구.>

모두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발리나를 쳐다보자.

그녀는 눈앞이 노래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지럽군....'

애당초 게임의 목적이 무엇이던가?

피지컬로 적을 압도하고, 성장하며, 나아가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무려 초보를 넷이나 데리고 게임을 하라고?

"크으읏...."

끝내 머리를 부여잡는 발리나.

그녀는 떨리는 눈으로 빈 의자를 바라봤다.

고오오오오-

저 의자는 지옥으로 통하는 입구이다.

저기에 앉는 순간부터 끝없는 고통과 심마가 계속 그녀의 가슴을 노크해 올 터.

'앉는 순간 끝이다.... 앉는 순간....'

"안 앉고 뭐 해? 안 할 거야?"

"...."

"어어? 어째 표정이 썩어 있다?"

분신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묻는다.

"너, 설마 단합 대회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아, 아니다.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서로가 서로를 더 이해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중요한 자리'인데, 싫어하면 안 되지."

분신이 씨익 미소를 짓더니.

고갯짓으로 모니터를 가리켜 보인다.

"아무튼, 그래서 뭐부터 해야 돼? 너, 이 방면에선 완전 전문가잖아?"

"...."

잠시 후.

분신이 모두를 보며 말한다.

"그래도 기왕 다 같이 하는 거, 간단히 5번만 이겨 보자. 금방 끝나면 단합 대회라고 하기에도 그렇잖아?"

"다, 다섯 번이라고?"

"왜? 간단한 것 아냐?"

아아, 이 얼마나 무지한 소리인가! 이 얼마나 무식한 소리인가!

하여간 초심자들은 이게 문제다.

한 번의 승리를 위해 어떠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얼마나 키보드를 담금질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니 말이다.

그런데 1, 2승도 아니고 무려 5승?!

"냉정하게 말하겠다. 이 전력으로 5승은 무리다. 가볍게 1, 2승 정도로 조정하는 게 좋아 보인다."

"그래? 그럼 이길 때까지 하면 되지."

흠칫-

발리나의 몸이 크게 흔들거린다.

"그게 무슨...."

"어차피 내일은 카페도 쉬는 날이잖아?"

"...?!"

'피 같은 휴일을... 지옥 속에서 보내라는 건가?!'

안 된다.

그것만은 안 된다.

휴일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오롯한 그녀만의 시간이다.

휴일만큼은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

'지옥은... 하루로 족하다!'

"5승만 하면 되는 건가?"

"그래. 그 이상은 좀 과할 것 같긴 한데, 너희가 괜찮다고 하면 좀 더 늘려도 상관은 없...."

"5승! 확인했다!"

발리나는 황급히 분신의 말을 자르곤.

의자에 앉아 있는 주방 멤버의 면면을 훑는다.

"헥?"

"그래서 뭐부터 하면 되는 거냥?"

아아, 그래도 믿음직했던 주방의 동료들이 지금은 개폐급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휴일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발리나가 천천히 입을 뗀다.

"먼저 간단히 게임 방식을 설명하겠다. 게임은 간단하다. 영웅을 선택하고 적을 죽여라. 병사들을 몰살하고 상대의 진영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면 끝이다."

게임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한 뒤.

발리나는 의자에 앉으며 좌우로 고개를 돌린다.

"어차피 모든 게 처음인 너희에게 많은 기대를 하지 않는다. 일단 이 게임이 어떠한 게임인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는 데 주력하도록."

"오오, 알겠다냥!"

"설명은 좋았는데, 어째 목소리에 힘이 좀 들어간 것 같아?"

분신의 장난스러운 농담에 발리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이 전장에서만큼은 내가 압도적으로 경험이 많다. 즉, 이곳에서만큼은 내가 더 위라는 거다. 그러니 게임을 진행하는 동안에는 존중과 존경심을 담아 발리나 님이라고 부르는 걸 추천하는 바다."

"왈왈!"

"백구가 개소리 말라는데?"

"...아무튼 일단 경험해 봐라. 마침 게임도 잡혔군."

먼저 이 한 판으로 동료들의 전투력, 가능성을 판별한다.

[소환사의 협곡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내가 캐리 한다!'

잠시 후.

[패배]

"패배는 당연한 거다! 다시!"

[패배]

"이 모든 건 승리를 위해 적응하는 과도기일 뿐이다!"

[패배]

[패배]

.

.

.

"...."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는 발리나.

'크으읏... 예상을 벗어나는 가혹함이군.'

다들 실력이 형편없을 거라는 건 당연히 예상했던 바였으나.

설마 마우스와 키보드 다루는 것조차 제대로 못할 줄이야.

홱-

고개를 돌려 루나를 째려보는 발리나.

"왜, 왜 그렇게 무섭게 쳐다보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도 끝없는 패배 속에서 아예 소득이 없던 건 아니다.

'분신이야 어느 정도 해 줄 거라 예상했다지만, 설마 백구와 깡통에게서 가능성을 느낄 줄이야....'

물론 둘 다 15데스를 넘게 기록하긴 했으나.

스킬의 배분, 움직임은 초보인 것치고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10판 정도 하면서 감을 잡게 하면.... 문제는 루나인가....'

게임에 대해 아예 감조차 잡지 못한 저 한심한 고양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고민하던 발리나가 이내 입을 뗀다.

"이걸로 너희의 수준은 대충 알았다."

"어떠냥? 이만하면 충분히 잘하고 있지 않냥?"

"답답해서 죽고 싶어졌다. 차라리 고급 봇들과 파티를 맺는 게 나을 정도다."

"헥?"

"고급 봇이 뭐냥?"

발리나는 가벼운 소란을 묵살하곤 계속 말을 이어 나간다.

"하지만 그것도 다 예상했다. 일단 너희에게 어울리는 전략을 제시하겠다."

딱-

발리나가 손가락을 튕기자.

작은 미니 맵의 형상이 그녀의 손가락 위로 떠오른다.

"우선 포지션을 확정하고 가겠다. 먼저 분신은 미드, 팀의 허리를 맡아라. 그리고 백구, 넌 정글. 깡통은 탑으로 간다."

"왈왈왈!"

"그럼 난 어디로 가냥?"

루나가 번쩍 손을 쳐들며 묻자.

발리나는 무심한 눈으로 루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는 내 도구가 된다."

"냐아아앙?!"

"마침 네게 적합한 영웅이 있다."

잠시 후.

[새 친구를 찾아볼까?]

루나는 책에 올라탄 고양이 캐릭터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린다.

타다다다다닥-

맹렬한 속도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발리나.

"하필 포킹 조합이라니... 크으으읏!"

적이 쏘아 대는 투사체들을 정신없이 회피하며.

적들의 병사를 잡아 낸다.

"도와줄 건 없냥?"

"...."

"흐으음, 흐으으음이다냥! 이 영웅, 재미가 없다냥!"

그저 발리나의 영웅 옆에 기생충처럼 붙어 있는 게 전부였던 탓일까.

루나가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하품을 하던 중.

"Q!"

돌연 발리나가 고함을 내지른다.

"Q! Q 버튼이 어디 있... 아, 여깄다냥!"

달칵-

"늦어! E! 힐! 힐! 빨...."

[아군의 영웅이 적에게 처치당하였습니다.]

"크아아아아악!"

[아군의 영웅이 적에게 처치당하였습니다.]

[적군 더블 킬!]

순식간에 발리나와 루나의 모니터가 검은 배경으로 변한다.

"크으읏...."

"흐으으음, 흐으으음이다냥. 잘한다고 하지 않았냥? 근데 왜 자꾸 죽냥?"

"...?"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실실 웃음을 흘리는 발리나.

외부의 적보다 배신한 아군이 무섭다는 격언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된 말이 틀림없다.

배신자보다 더 무서운 건 무능한 아군이라는 걸 오늘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

"그럼에도 내가 캐리 하겠다!"

[아군이 처치당하였습니다!]

[적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퍼어어어엉-

[패배]

"...."

발리나는 붉은 문구를 보며 생각했다.

'이론은 완벽했다.'

탑, 정글, 미드, 세 개의 라인에 모두 탱커를 배치하여 단단히 버티게 하고.

원거리 딜러인 그녀는 바텀 라인을 찍어 눌러 성장을 가속화하여 캐리 한다.

심플하지만 이것이야말로 가장 승리에 근접한 방식이라 생각했다.

헌데 이 방법마저 실패하다니.

'아니! 한 번 더....'

<거듭된 패배, 모두 지휘관의 역량 부족 때문임. 더 이상 살덩이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

파칭-

탑: 불리츠크랭그

"아, 안 돼...."

"왈왈왈!"

정글: 가서스

거듭된 패배 때문일까.

주방 멤버들이 그녀의 지휘를 벗어나 제멋대로 영웅들을 선택하기 시작한다.

"안 돼!"

* * *

다음 날, 오전.

화아아악-

탑에서의 일정을 끝마치고 집으로 복귀한 난.

곧장 거실로 나갔다.

"읏차!"

소파에 몸을 던지자.

푹신한 촉감이 온몸을 감싸듯 어루만져 준다.

'크으, 이거지! 아무리 열차 안이 편하다고 해도 역시 집이 최고라니까!'

요 며칠간 종말특급의 현장 상황, 반응 등을 확인하기 위해.

열차에서 지내서 그런 걸까.

오늘따라 집이 주는 편안함이 더 반가운 느낌이다.

'근데 왜 이렇게 조용하지?'

보통은 분신이나 백구가 복귀를 반겼건만.

어째 오늘따라 집이 꽤 조용한걸?

'마당에라도 나가 있는 건가?'

내가 몸을 일으켜 집을 나서려던 그때.

"으으으...."

발리나의 방 안에서 기괴한 신음 소리가 들려오자.

난 슬며시 문 앞으로 다가가 발리나의 방문을 젖혔다.

"엥?"

"오, 주인...."

이게 다 뭐야?

데구르르-

책상에는 갖가지 과자, 빵 봉투, 빈 캔 따위가 어지러이 돌아다니고 있다.

아니, 그것보다 저 녀석들 눈 밑이 왜 저렇게 퀭해?

'다른 녀석들이야 그러려니 해도, 발리나도 다크서클이 심하네.'

특히 발리나의 꼴은 더욱 가관이었는데.

"이 지옥의 끝은 어디인가.... 난 누구인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거의 무언가에 통달하거나 해탈한 도인처럼 보였다.

'도대체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뭘 한... 아.'

다섯 대의 모니터, 켜져 있는 게임.

대충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사이즈가 나온다.

"너희 설마 5인 큐 돌린 건 아니지?"

나의 물음에 분신이 머쓱하게 웃는다.

"서로 친목도 다지고 서로의 취미를 이해하는 취지에서 단합 대회를 열었는데, 이게... 꽤 어렵네."

"해 본 적 없으면 당연히 어렵지. 그래서, 단합 대회는 다 끝난 거야?"

"아니, 아직 1승 남았어."

"오, 그럼 나도 간만에 한번 해 볼까."

내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넌 방출이다! 방출!"

"냐아아아앙?!"

발리나가 냅다 루나의 뒷목을 잡곤 의자에서 툭 던진다.

"이게 무슨 짓이냥!"

"걸어 다니는 300골드가 말을 해?"

"난 잘했다냥! 네 실력이 부족한 걸 왜 내 탓을 하냥!"

오....

이건 단합 대회가 아니라 누구 인성이 먼저 파탄 나는지 테스트하는 시험 현장 같은데.

"일단 다들 진정들 하고. 1승만 하면 되는 거지?"

"그, 그렇다!"

"좋아, 그럼 바로 가 보자고. 내가 서포터를 할게."

게임이 시작되고 몇 분 뒤.

"그래! 이거다! 이게 내가 원하던 도구다! 우오오오오!"

쌓여 있던 게 많았던 건지.

나는 모니터에 대고 포효하는 발리나를 보다가.

픽 실소를 흘렸다.

'뭐, 이런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어쨌건 이 또한 평온한 일상의 일부이니.

"오, 서렌 나왔다!"

"드, 드디어...! 드디어! 승리! 크오오오!"

발리나가 거의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것처럼 기쁨의 포효를 터뜨리던 그때.

우르르르르르릉-

갑자기 지면에서 몸을 뒤흔드는 것 같은 강렬한 진동이 인다.

'이건....'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기에.

난 곧장 집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오오오오오오-

하늘 위로 자리한 무수히 많은 탑의 환영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의 순간까지 239:59]

핏빛의 문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238화 있었는데요, 없었습니다

'흐음, 전이랑 문구가 좀 달라졌네.'

분명 전에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건만.

'뭐, 그렇다고 저 현상이 갖고 있는 본질이 달라진 건 아니겠지.'

저 예고 시간이 모두 흐르거든.

저번처럼 다른 탑들과 대전을 벌여야 할 가능성이 높을 터.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흠....'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등 뒤로 주방 멤버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동안 편하다 했더니.... 귀찮아지겠군."

"왈왈!"

"투덜거리지 말고 일단 차 시동부터 걸어 놔. 백구랑 루나는 창고에 가서 가방들 싹 다 가져오고."

주방 멤버들이 투덜거리면서도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러 산개하자.

분신이 내게 묻는다.

"주인, 어디 안 나갈 거지?"

"왜?"

"사재기 좀 하러 다녀오게. 이런 건 잽싸게 움직여야 하거든."

'아, 뭘 하려는 건가 했더니.'

탑들 간 첫 대전이 벌어졌던 당시.

바깥 세계에선 생필품 사재기 대란이 벌어졌었다.

'당시엔 재고가 넉넉해서 상관은 없었지만, 확실히 조금 불편하긴 했었지.'

기본적인 생필품은 물론이요.

모든 생활 물자들이 품귀 현상을 보였었으니.

"그래, 다녀... 아니다. 내가 갔다 올게."

"주인이?"

"어차피 카페랑 갤러리도 들러야 돼서 겸사겸사?"

난 발리나가 시동을 건 탑차 운전석에 탑승했다.

"카페에서 쓸 건 충분하고, 우리 쓸 것만 사 오면 되지?"

"그래도 일단 살 수 있는 건 다 사 봐, 물건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 아무튼 다녀올게."

* * *

곧바로 동네에서 가장 큰 물류 코너를 운영하고 있는 BC 백화점에 도착한 뒤.

난 식품 매장에 들어서며 혀를 내둘렀다.

'허....'

하늘에 문구가 출현한 지 겨우 30분이 지났을 뿐이건만.

드르르르르륵-

수십 명이 넘는 아주머니들이 전투적으로 카트를 끌며.

휙, 휙-

눈에 보이는 생필품을 죄다 카드에 던져 넣고 있었다.

"아니, 내가 먼저 집었다니까요?!"

"먼저 집었고 자시고, 내놔!"

물건을 두고 줄다리기를 하는 건 차라리 평온해 보였다.

드르르르륵, 콰아아앙-

'어이구... 거, 조심들 좀 하시지.'

도대체 여기가 식품 코너인지 범버카 센터인지.

과격한 난폭 운전 끝에 벌어지는 충돌 사고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위이이잉-

등 뒤에서 스크린 도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난 힐끔 시선을 돌렸다.

'오....'

고오오오오-

부릅뜬 두 눈, 얼굴 가득히 엿보이는 결의.

카트의 손잡이를 꽉 잡고 있는 주름진 두 손.

"물, 쌀, 버너, 통조림! 그냥 눈에 보이는 건 싹 다 챙기세욧!"

"예!"

철혈의 여장부들이 콧김을 뿜으며 카트를 몰기 시작한다.

쿠르르르르르-

"자, 잠깐...."

이날, 난 다시금 실감했다.

지켜야 할 가정이 있는 자는 두려운 게 없다는 걸 말이다.

* * *

'후우, 그래도 어찌저찌 잘 샀네.'

워낙 경쟁이 치열하긴 했지만.

그래도 탑차의 뒤칸을 꽉 채울 정도의 생필품을 구매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잠시 카페와 갤러리에 들러 운영 상태까지 체크한 뒤.

집에 돌아온 난 핸드폰을 들어 구팡 어플에 들어갔다.

[쌀 40kg - 품절]

[웅라면 - 품절]

[건빵 - 품절]

.

.

.

'어지간한 건 죄다 품절이네.'

뭐, 당연한 거겠지.

미지에서 오는 공포만큼 사람을 공황에 빠뜨리기 좋은 것도 없으니까.

'그건 그렇고....'

"놀지만 말고 좀 도와라냥!"

"버스 기사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군. 내가 캐리 하지 않았다면 너흰 아직도 협곡 속에 갇혀 지옥을 맛보고 있었을...."

"아르르르...."

난 탑차에서 바삐 물건들을 내리는 주방 멤버들을 보며.

생각을 이어 갔다.

'얼추 10일 정도 남은 셈인데,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이번 대전이 어떠한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알면 좋으련만.

'그 본사의 관리자가 저번처럼 정보를 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렵겠지.'

스스로를 아르실라라고 지칭한 본사의 관리자.

지금껏 그녀가 제공해 준 정보들은 정말이지 유용했었으나.

막연히 도움을 기다리는 것도 우스운 노릇일 터.

'도움은 어디까지나 도움일 뿐인 거니까.'

도와주면 고마운 거지만 도와주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해야지 뭐.

"으차!"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들어갔다.

'일단 기본적인 것들부터 준비를 할까.'

모든 일의 뼈대가 되는 버프 음식을 대량으로 만드는 게 우선이다.

물론 그 준비는 내가 아닌 주방 멤버들이 하겠지만.

"얘들아, 알지?"

"...."

단 두 마디.

내 의사를 주방 멤버들에게 전달하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번에도 저번처럼 준비하면 되는 거지?"

분신의 물음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좋긴 한데, 이번 대전은 저번보다 준비 기간이 더 짧잖아. 가능하겠어?"

"일단 하는 데까진 해 봐야지."

"고맙다. 필요한 게 있으면 이야기하고."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휴가, 휴가가 필요하다."

발리나가 한마디를 던져 왔지만 가볍게 무시해 줬다.

"그럼 얘들아, 고생하고!"

주방 멤버들은 누구보다 이 일에 능숙한 베테랑들.

내가 없어도 알아서 잘 준비들을 해 줄 거다.

'나는 탑으로 갈까.'

먼저 60층에 들러야겠어.

선구자들이랑 다른 최상위 클랜들에 필요한 것들을 사전에 팔아 두고.

그다음으로....

[방문하실 층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방문하실 층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의 층으로 이동합니다.]

.

.

.

[58F]

[59F]

[60F]

.

.

.

현재 이동이 가능한 층들이 나열된 기다란 줄.

난 개중에서 60층을 선택하려다가.

'엥?'

순간 손가락을 멈칫거렸다.

'...잘못 봤나?'

난 두 눈을 슥 비비곤 다시금 나열된 층을 살폈다.

[B3]

[B2]

[B1]

[1F]

[2F]

.

.

.

B1층, B2층이라니?

이건 분명 지하층을 의미하는 거잖아?

'...내가 지하층에 간 적이 있던가?'

아니, 그것보다 지하층이 존재했다고?

'잠깐, 잠깐.'

난 슬며시 미간을 짚었다가.

다시금 층 목록을 바라봤다.

'그래, 지하층이 존재했다고 치자.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이게 왜 갑자기 층 목록에 뜬 거냐고!'

근래에 이렇다 할 일도, 어떠한 변화도 내게 일어나지 않았건만.

'흠, 근데... 좀 궁금하긴 하네.'

지금껏 몰랐던 지하층이라니.

으흐흐, 이거 혹시 보물 같은 거라도 숨겨져 있는 것 아냐?

'한번 가 볼까? 여차하면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고.'

결국 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의 층을 선택했다.

[B1층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동 시 해당 층으로 고정 이동 됩니다.]

'후우, 좋았으. 지하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가 볼까?!'

스스스슥-

난 빛이 흘러나오는 문으로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 * *

같은 시각.

"끄으으으, 죽겠군...."

냅다 소파에 몸을 내던지는 블라디미르.

그러잖아도 마른 얼굴이건만.

지금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온 것이, 거의 환자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 기간에 일이 늘어나는 건 어쩔 수 없지."

옆에 있던 유그드라실이 나지막이 위로를 건네자.

누워 있던 블라디미르가 뱀눈을 한 채 그를 올려다본다.

"바쁜 걸 알면 휴게실에서 빈둥거리지 말고 좀 도와주지?"

"내 일은 다 끝냈다만?"

"네 일 말고, 내 일을 도와주라고."

대답 대신 책상 위에 놓인 수정구를 살피는 유그드라실.

고오오오-

수정구 안으로 체스판 모양의 널따란 전장이 보이자.

유그드라실이 몸통을 돌리며 말한다.

"엄살이 심하군. 거의 다 완성하지 않았나?"

"원래 완성하기 직전이 제일 고비인 걸 몰라?! 으으, 망할 본사 놈들! 그냥 예전처럼 운영하면 될 걸, 왜 자꾸 이상한 짓거리를 해서 일감을 늘리는 거냐고! 도대체 로또체스가 뭐냐고!"

"...오토체스라고 하지 않았어?"

"오토체스고 로또체스고, 그게 그거지!"

끝내 제 감정을 이기지 못한 걸까.

돌연 블라디미르가 쥐고 있던 서류 더미를 허공에 집어 던지더니.

푸드드득-

"끄오오오오!"

박쥐로 모습을 탈바꿈하여 쏟아지는 종이들 사이를 미친 듯이 날아다닌다.

"...또 시작이군."

유그드라실의 중얼거림을 들은 건지.

맞은편에 있던 게한나가 짤막하게 한마디를 던진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냅둬, 저러다가 알아서 정신 차리겠지."

"아무래도 여기서 쉬기엔 글렀군. 먼저 일어나지."

"아, 나도."

"나도."

블라디미르의 난동을 피해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관리자들.

이윽고 마지막 관리자마저 자리를 뜨려는 찰나.

"내 일 좀 가져가라!"

"아오, 좀 가라, 가!"

박쥐로 변한 블라디미르가 냅다 그의 뒤를 쫓아 휴게실을 빠져나가자.

조용-

활기 넘치던 휴게실은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그러던 그때.

화아아아악-

돌연 휴게실의 한쪽 공간에서 빛이 번뜩이더니.

2층 높이의 건물이 자리에 들어선다.

딸랑-

반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내는 남자.

"오오!"

얼굴의 절반가량을 덮고 있는 여우 가면 밑으로 보이는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여긴 또 처음 보는 곳이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본격적인 탐색을 시작하듯.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수정구 따위를 천천히 살펴본다.

"이건 그냥 잡템인가?"

수정구를 이리저리 만져 봐도 작동을 하지 않자.

그는 수정구에서 관심을 거두곤 테이블에 놓인 녹색의 수상쩍은 물체를 살펴본다.

"음식같이 생기긴 했는데...."

녹색의 수상쩍은 물체를 들어 냄새를 맡아 보는 남자.

"우웁...."

그는 황급히 녹색의 물체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몇 번 헛구역질을 한 그는 다시금 휴게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흠, B1층인 것치곤 뭔가 평범하네. 어라? 이건 또 뭐야."

한 테이블 위에 어지러이 흩어져 있는 카드들.

어딘가 조잡한 면이 있었지만.

카드들은 그에게 있어 꽤 익숙한 물건이었다.

"종말의 탑 카드랑 비슷한 것 같은데... 가만...."

그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서서히 지워지던 찰나.

바스락-

"음?"

발밑에서 무언가 소리가 들려오자 남자는 고개를 숙였다.

서류들이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

남자는 허리를 숙여 서류를 집어 든 뒤.

천천히 안에 담긴 내용을 살펴봤다.

[신규 전장, 선택의 갈림길과 관련한 공고 사항.]

서류 안에는 딱딱한 서체의 글자들이 인쇄되어 있다.

'선택의... 갈림길?'

[1. 귀 관리자들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2. 본사의 사업 관련으로 기발송한 공문 BN-731호 관련입니다.]

[3. 신규 전장 선택의 갈림길은 한 번의 선택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과 운명을 파생시키는 형식의 전장입니다.]

[4. 해당 전장에는 총 8개의 탑이 참전합니다. 전장의 관리를 맡은 탑의 경우, 전장의 제작 및 관리에 최선을 다해 주시기 바랍니다.]

.

.

.

서류를 꼼꼼히 읽어 내리던 남자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간다.

'쓰레기장인 줄 알았더니, 이건 완전... 빙고잖아?!'

어째서 이 장소에 이런 서류가 떨어져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그에게는 있어 가장 필요한 내용이 담긴 서류이기도 했다.

"으흐흐...."

그는 누구보다 해맑은 미소를 짓다가.

냅다 건물을 향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기가 어디인지는 몰라도 이런 공문이 있다는 건....'

이곳은 필시 관리자들이 사용하는 공간일 터.

서류만 챙겨 냅다 내달리는 남자.

그는 얼른 황금색 열쇠를 꺼내어.

유리문에 붙어 있는 구멍에 힘껏 열쇠를 꽂아 넣었다.

그 순간.

화아아아악-

빛과 함께 건물이 홀연히 사라지기 무섭게.

덜컹-

"알았어, 알았다고! 도와줄 테니까 좀 떨어져!"

반투명한 유령 형태를 한 남자가 어깨에 붙은 박쥐를 털어 내며.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다.

"정말이지?"

"아, 진짜라니까?!"

"좋아, 그렇다면야...."

다시금 본모습으로 돌아온 블라디미르가 만족스러워하는 미소를 짓는다.

"그럼 일단 나랑 같이 전장으로 이동을...."

바닥을 살피던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공고문이 어디로 갔지?"

"무슨 공고문?"

"아까 내가 집어 던진 것."

블라디미르가 뒤통수를 긁적이자.

혼백 형태의 남자가 어깨를 으쓱인다.

"누가 너 대신 똥 치웠나 보네."

"...그런가? 아무튼 따라와, 진짜 마무리 작업만 하면 다 끝나니까."

239화 탑토체스 (1)

하늘에 문구가 떠오른 지 어느덧 6일이 지났다.

55층, 드라고니아의 4위계 내부.

"...."

이지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틱-

[07:48]

시간은 그저 흐르는 강물처럼 유유히 흐르고 있다.

'7시간이라....'

아마도 저 시간이 다 흐르거든.

다른 탑과의 전투가 있을 것이다.

'대전마다 전투 방식이 달라진다고 했었지.'

분명 상점주가 그리 말했었던 만큼.

이번 전투는 전의 전투와 다른 양상을 보일 터.

"이번에는 또 뭘까?"

옆에 있던 알터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들려오자.

이지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대전 방식만 바뀌고 저번과 같은 대규모 전투가 벌어질지도 모르지."

"또? 으으, 그건 좀 질리는데...."

알터의 푸념이 들리기 무섭게.

앞에 있던 실비아가 힐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본다.

"그때도 엄청 죽여 놓고 그런 소리를 한다고?"

"그건 불가피한 상황이었잖아? 막말로 죽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알터의 항변에 실비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오오, 웬일로 반박을 안 한대?"

"알터, 난 말이야, 아주 얼 빠진 소리를 들은 게 아니면 그다지 반박하지 않아."

"...잠깐. 그럼 내가 매번 얼 빠진 소리를 하고 있다는 거야?!"

"이것 봐. 이해 못 하고 되묻는 것부터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는 증거지."

두 남녀가 가볍게 서로의 멱살을 잡아채자.

이지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너희는 간만에 만나도 그대로구나."

"대장, 얘가 그렇게 쉽게 바뀌겠어?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놔라, 놔! 옷 찢어져!"

"그보다 실비아."

이지수의 부름에 실비아가 쥐고 있던 알터의 멱살을 놓는다.

"왜?"

"그 사람은 좀 어때? 일정은 잘 쫓아오고 있어?"

"...그럭저럭. 대장장이치고는 나쁘지는 않아."

편의점의 게시판으로 모집한 대장장이.

실비아와 선구자들 중 몇몇 인원을 아래층으로 보낸 이유는 단 하나.

그 대장장이를 62층까지 올려 보내기 위함이었다.

"근데 제작 계열 능력자인 것치고 나쁘지 않다는 거지, 실력 자체는 형편없어."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조금만 더 힘내 줘."

"아니, 사실 문제는 지금부터지. 55층까지야 어떻게 커버를 해 줬다고 해도, 56층부터 59층까지는 전부 퀘스트 층이잖아. 그건 이쪽에서 어떻게 도와줄 수가 없다고."

실비아가 한숨을 내쉬자.

이지수는 의아함을 내비쳤다.

"그래서 실력 좋은 클랜을 붙여 둔 거잖아. 거기다가 아이템들이랑 정보까지 지원해 주고 있고."

"그렇긴 한데, 고작 대장장이 따위에 목을 매야 하는 상황이 참...."

"어쩔 수 없지. 그만큼 62층이 특수한 층인 거니까."

"근데 만약에 말이야. 기껏 데려왔는데 공략에 실패하면 어쩔 거야?"

정말 힘들고 어렵게 대장장이를 데려왔는데.

정작 클리어의 열쇠가 될 장비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다른 방법들도 계속 모색 중이야. 네가 아래층에 내려갔다 오는 동안 우리도 손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니까."

선구자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던 그때.

"환상의 상점 떴다!"

"우오오오오오!"

4구역 한쪽에서 탄성이 울려온다.

이지수가 웃으며 동료들에게 말한다.

"일단 우리도 이동할까?"

* * *

환상의 상점 앞으로 이동한 선구자들.

"강화권 사러 왔수다!"

"됐고, 아이스크림! 시원한 소다 맛으로다가!"

"고기산적! 떡갈비구이!"

이제 남은 시간이 7시간에 불과하건만.

그럼에도 이미 몰려든 공략자들이 저마다 먹고픈 메뉴를 외치고.

이제는 환상의 상점의 관례 중 하나가 된 '패 흔들기'가 곳곳에서 물결치는 와중.

이지수는 지그시 상점을 바라본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환상의 상점도 처음에 비해 진짜 많이 바뀌긴 했구나.'

외벽 부분과 문이 유리라는 걸 제외하면.

여타의 상점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상점이었건만.

확연한 차이가 느껴질 정도로 넓어진 상점의 크기.

2층으로 증축된 규모!

한쪽에 길게 늘어선 통화 부스는 또 어떠한가?!

'하지만 무엇보다 압권은....'

편의점 뒤편에 들어서 있는 기다란 정거장이라고 할 수 있을 터.

정거장에 대기 중인 새하얀 열차를 보며.

이지수는 조용히 웃었다.

'다시 되짚어 보니까 재밌네.'

지금까지야 계속 방문을 거듭하여 익숙해졌다곤 하나.

새삼 저렇게 상식을 넘어선 공간이 있나 싶을 정도다.

그리고.

딸랑-

"오늘도 저희 환상의 상점을 방문해 주신 손님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상식을 넘어선 공간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내자.

"오오, 상점주!"

누구 할 것 없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환성을 지른다.

"하하! 이제 7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다들 여유가 넘치시는군요."

"아무렴! 아무것도 모르는 게 무서운 거지, 누구랑 싸우는 건지 아는데 무서워할 필요가 있나?! 다른 탑이고 뭐건 간에 다 오라고 그래!"

"진짜로 두려운 건 상점의 물건이 동나는 거라고!"

공략자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상점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정말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지금과 같은 기세라면 무슨 상황이 벌어진다고 한들 두려울 게 없겠죠. 오늘은 특히 더 상품을 넉넉히 챙겨 왔으니 걱정들 마시길."

덜그럭-

상점 내부에 공간이 부족했던 건지.

상점주의 용아병들이 진열대를 갖고 밖으로 나온다.

턱, 턱, 터억-

그리고 진열대 위에 쌓여 가는 수많은 음식들.

잘 포장된 샌드위치와 김밥, 햄버거 따위들을 본 공략자들의 면면에 자연스레 미소가 그려진다.

"오오오!"

"거참, 나도 모르게 침이 나오는군...."

"왜 맛있는 것들은 먹어도 먹어도 질리지가 않는지 모르겠어."

그런 공략자들을 보며.

상점주가 미소 짓는다.

"그럼 지금부터 환상의 상점을 오픈하겠습니다!"

* * *

텅텅-

나는 삽시간에 비어 버린 진열대를 흘끔 바라봤다.

'이번에는 애들이 꽤 분전해서 음식을 만들었는데도 다 팔렸네.'

55층에 유입된 공략자의 숫자가 늘어나서 그런 건가?

뭐, 그래도 이만하면 얼추 최소한의 준비는 됐네.

스탯을 올려 주는 버프 음식.

각종 상태 이상에서 몸을 보호해 줄 PB 상품.

그 외에도 사기를 올려 줄 맛있는 음료와 음식 등, 팔 것들은 전부 팔았다.

'이번 대전은 많은 인원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많은 인원이 차출되는 건 아니더라도.

어떤 공략자가 차출될지는 미지수의 영역이니.

난 하늘을 올려다봤다.

틱-

[00:03]

[00:02]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다.

'하지만 그렇게 걱정이 되지는 않네.'

몇 번이고 공고문을 숙지한 덕일까.

오히려 가슴의 고양감 때문인지 조금은 흥분이 되기까지 한다.

'멸망전에서 살아남는 건... 이번에도 우리 탑이야.'

틱-

[00:00]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시작된다.]

하늘에 떠 있던 문구가 바뀌자.

"이벤트 오픈한다! 다들 준비 끝마쳤지?"

"아무렴!"

기존의 대전에서 적응력을 충분히 확보했는지.

공략자들은 여유가 넘치는 모습을 보인다.

'후우, 좋아. 가 보자고!'

이제 곧 빛이 공략자들의 몸을 덮으며 전송이 시작되리라.

화아아악-

* * *

눈꺼풀을 누르던 빛이 서서히 잦아들자.

난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여긴....'

황금빛의 바닥이 보인다.

오오, 반질반질해 보이는데, 진짜 황금인가?

심지어 바닥만이 아니다.

천창도, 천장을 지탱하는 기둥도, 모든 것들이 황금이다.

'기존의 공간들보단 세련된 느낌이 나네.'

뭐, 사실 공간이 어떻게 생겼건 상관은 없지만.

어차피 중요한 건 이 공간이 아니라 저놈들이니까.

빠직, 빠지지직-

몸에서 연신 스파크가 흐르거나.

안개가 넘실거리는 등.

테이블 너머에 자리하고 있는 이형의 존재들이 보인다.

'흐음.'

난 이레귤러들의 면면을 빠르게 훑었다.

'하나, 둘.... 여덟이라.'

이번에 대전에 참여한 이레귤러의 숫자는 나를 포함하여 총 8명이다.

'근데 전에 봐서 그런가, 다들 낯이 익네. 분명 저놈은 모순의 탑 출신이었고, 저놈은 어디 보자... 아집의 탑 출신이었던가?'

바로 직전의 대전에서 이레귤러들의 면면을 봐 둔 터라.

저들의 모습이 그리 낯설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때 말을 텄던 놈은 없나 보네.'

차라리 잘됐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말을 붙인 놈을 상대하는 것보단.

생판 남을 상대하는 게 마음이 편하거든.

빠직, 빠지지직-

그 와중, 몸에서 전류를 뿜어 대는 백색의 존재가 나의 앞으로 다가온다.

"네놈... 희한한 음식을 팔던 놈이군."

"오, 알아보겠어?"

"네 운도 여기까지인 모양이군. 전에는 수작질로 위기를 모면했을지 몰라도 오늘은 그렇게는 못 할 거다."

수작질이라니?

가만, 그러고 보니 너도 빵 하나 받아 가지 않았냐?

"먹튀범이 여기에 있었네."

"먹... 튀? 무슨 말을 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여기서 미리 숫자를 줄여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파직-

백색으로 번뜩이던 놈의 몸이 점점 샛노랗게 변해 가던 찰나.

휘리리릭-

반투명한 실 같은 것들이 놈을 향해 쏘아지더니.

순식간에 놈의 몸을 옭아맨다.

"이게 무슨...."

포박되어 몸을 바르르 떠는 이레귤러의 앞으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오....'

언뜻 새하얀 고치처럼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실을 실타래에 둘둘 만 것 같은 기이한 것의 몸체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직도 대전장의 규칙을 깨닫지 못했을 정도로 얼빠진 놈은 아닐 테고."

"이것 놔라!"

"아닌가? 그냥 얼빠진 놈이 맞는 걸지도 모르겠어. 미리 말해 두겠다만, 난 멍청한 놈을 제일 싫어한다."

실타래에서 비꼬는 듯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이레귤러가 더 격하게 몸부림을 친다.

"일단 대전을 시작하기에 앞서 간단히 소개를 하마. 이번 대전의 관리 감독을 맡은 관리자, 메피스토다. 지금까지 살아남았으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겠지? 아무튼...."

실타래의 몸체에서 계속 음성이 흘러나온다.

"소규모 다차원 전장, 탑토체스에 온 걸 환영한다. 먼저 테이블에 착석해라. 설명은 그다음이다."

나를 비롯한 이레귤러들이 모두 테이블에 앉자.

다시금 실타래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이번 대전으로 무너질 탑은 총 4개이며, 대전의 진행 방식은 다음과 같다. 직접 알아내도록, 이상."

그 순간.

그그그긍-

아무것도 없던 테이블 위의 형태가 변모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윽고.

8개의 칸으로 나뉜 체스 모양의 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오....'

여기까지는 공고문에 적힌 대로네.

그렇다면 그다음은....

스스슥-

테이블의 중앙 부근.

그곳에서 회전 초밥집의 그릇들처럼 무언가가 돌아가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최소한의 설명은 필요한 것 같은데."

"모두에게 공평한 상황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나? 모르는 게 있으면 스스로 알아내도록."

아무런 정보가 없던 탓일까.

몇몇 이레귤러들이 불만을 표하는 중.

난 속으로 생각했다.

'이건 운이 좀 필요한데.'

도르르륵-

머리 위로 주사위가 돌아가는 소리가 울린다.

난 슬쩍 고개를 쳐들었다.

'흠, 4번째라.... 모호한데.'

난 회전 초밥 판 위를 흘끔 바라봤다.

'제일 좋은 건 여명의 왕관, 아니 못해도 광전사의 군화라도 챙겨 오는 게 베스트인데.'

나는 초밥 판을 바라보다가.

흘끔 다른 이레귤러들의 동태를 살폈다.

"내가 1번이라고? 도대체 무슨 순서인... 아!"

"설마 저것들을 집는 순서인 건가!"

확실히 오래 살아남은 놈들이라 그런지.

대전이 진행되는 방식을 금세 눈치챈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게 우선권이 있다는 건가!"

백색의 광채와 스파크를 튀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레귤러.

놈은 돌아가는 회전 초밥을 유의 깊게 지켜보더니.

"이걸로 하겠다!"

입가가 귀까지 찢어진 붉고 기괴한 가면을 선택한다.

난 그 모습을 보며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골라도 저걸 고르네.'

놈이 고른 건 심연의 가면.

초밥 판 위에서도 가장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모두가 3코인을 들고 시작하는 대신.

10코인을 들고 시작할 수 있는 효과를 부가하는 아이템.

그러나....

'매 라운드마다 체력이 1씩 빠져나가는 아이템이라서 초반에 큰 이득을 못 보면 답도 없는 템인데.'

멀리 안 나가마.

잘 가라.

"이제 내 차롄가?"

"다음은 나군."

이윽고 두 이레귤러가 각각 아이템을 하나씩 가져가고.

내 차례가 돌아오자.

'으흐흐....'

난 초밥 판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게 남아 있네.'

240화 탑토체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