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탑토체스 (2)
반짝-
굵은 호박빛 보석이 알알이 박혀 있는 푸른 왕관.
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여명의 왕관을 집었다.
띠링-
[여명의 왕관을 획득하였습니다.]
[해당 아이템의 효과는 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유지됩니다.]
여명의 왕관
등급: 유물
설명: 탑토체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유물 아이템이다.
내용: 해당 아이템을 보유할 시, 매 라운드마다 1번 무료로 '리셋'을 할 수 있다.
'크으! 이거지!'
시작이 너무 좋은데?
어디, 다른 녀석들은 뭘 가져갔는지 볼까.
'어이구, 신록의 저주라.... 저놈은 종말의 잉태를 가져가네? 이야, 가져가도 저걸 가져가냐.'
초밥 판 위의 유물들은 저마다 각각의 효과를 갖고 있다.
생각 이상으로 함정 카드가 많다는 게 문제지만.
"공격 속도가 소폭 상승하는 대신 일정 체력이 감소... 관리자님! 이게 무슨 말이죠?"
"내가 집은 물건에도 이상한 문장이 적혀 있다. 설명이 필요하다."
유물을 집은 이레귤러 몇이 관리자에게 질문을 던졌으나.
"스스로 사고하고 고찰해라. 네놈에게 최소한의 지능이 있다면 대전을 통해 단서를 얻어 낼 수 있겠지."
"...."
돌아오는 답은 매몰차기 짝이 없었다.
'이번 대전도 완전히 백지 상태서부터 시작하는 건가. 으흐흐, 좋은데?'
관리자의 불친절함이 오히려 내게는 득이 되니까.
'아무튼 대충 다들 뭘 집었는지 확인도 했으니 이제....'
띠링-
[모든 대전자가 유물 선택을 완료하였습니다.]
[전장, 탑토체스가 시작됩니다.]
대전에 집중을 해 보실까.
'후우, 과연 무슨 카드가 나오려나.'
지금부터는 정보의 영역이 아닌.
어느 정도의 행운과 불행이 작용하는 운의 영역일 것이다.
과연 내 운은 어떠할지....
화르르륵-
본격적인 대전의 시작을 알리듯.
체크무늬의 판 위로 불길이 치솟아 오른다.
그리고 불길이 잦아드는 바로 그 순간.
[모든 대전자들에게 3코인이 지급됩니다.]
[카드를 선택해 주세요.]
촤르르르르륵-
회색빛을 머금은 다섯 장의 카드가 내 앞에 떠오르자.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카드들을 하나씩 훑었다.
<제임스>
성급: ★
시너지: 전사
소속 클랜: 안단테
최대 공략 층: 9층
가격: 3코인
<김아선>
성급: ★
시너지: 치료사
최대 공략 층: 8층
소속 클랜: 밑바닥
가격: 3코인
<그로드>
성급: ★
시너지: 도적/중립
최대 공략 층: 11층
소속 클랜: 창천
가격: 3코인
그 외에도 각각 마법사, 궁수 시너지를 가진 두 장의 카드를 보며.
난 턱을 쓸어내렸다.
'여기서 선택을 잘해야 하는데.'
우선 같은 시너지를 가진 카드 3장을 모으는 게 좋겠지.
그래야 1성 카드를 2성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게 가능하니까.
'그렇다고 너무 2성에 매몰되면 안 되겠지만.'
무작정 성급만 올리려고 하다간.
이 대결 속에 숨겨진 함정에 금세 빠지고 말리라.
'그런 면에서 이 카드들은 좀 애매한 감이 있긴 하네....'
난 카드 속의 '최대 공략 층' 그리고 '클랜'을 유심히 살폈다.
'가만있자....'
지금껏 너튜브에서 봐 왔던 수많은 클랜들.
개중에는 저들이 소속된 클랜들도 있었다.
'안단테는 그냥 초보자들이 모여서 만든 클랜이라 무난할 거고, 밑바닥은 초심자들을 울궈먹는 질 나쁜 놈들만 모인 곳이었던가. 창천도 약간 사이비 냄새가 나는 곳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흠, 어쩔까.
그래도 무난한 선택지가 존재해서 다행이긴 한데....
난 입맛을 다시며 5장의 카드를 살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리셋."
그 순간.
[리셋에 필요한 비용은 2코인입니다.]
[여명의 왕관의 특수 능력이 발동됩니다.]
[카드들이 리셋됩니다.]
기존의 카드들이 모두 사라지고.
5장의 새로운 카드들이 나의 눈앞에 펼쳐졌다.
'후우, 이번에는 좀 괜찮은 카드가 떠야 할 텐데.'
나는 손바닥을 비비며 카드들을 살폈다.
'첫 번째는... 이렇다 할 특색이 없네. 흠, 이것도 좀 애매하고.'
난 두 번째 카드에 이어 세 번째 카드에 시선을 돌렸다.
'호오?'
<박온수>
성급: ★
시너지: 전사
최대 공략 층: 16층
소속 클랜: 아카데미가 너무 강함
가격: 3코인
'월척이로구나!'
[아카데미가 너무 강함] 클랜.
아니, 정확히는 [아카데미가 너무 강함] 아카데미가 운영하는 직속 클랜이다.
'아카데미가 너무 강함 출신이면 믿을 만하지!'
탑 내에 아카데미 열풍을 일으켰던 탑카데미에는 조금 끗발이 밀리긴 해도.
최고의 아카데미 중 하나로 평가 받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거기다가 최대 공략 층도 16층이면 준수하네. 실력은 확실하겠어.'
4번째, 5번째 카드도 이미 꽝인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고 한다면....
안 뽑을 이유가 없지!
[박온수 카드를 구매하였습니다.]
[3코인이 차감됩니다.]
[박온수가 대기열에 출연합니다.]
그 순간.
화아아악-
체크무늬 판 하단에 있는 대기열 한 칸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철 갑옷과 방패를 착용한 자그마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어? 어어어? 뭐, 뭐야? 여기가 어디야?!]
대기열에서 남자의 당황해하는 음성이 울려온다.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지? 어이! 거기 아무도 없나요!]
난 아무렇지 않게 박온수를 택했다.
그러자 남자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더니.
[어어엇?]
체크무늬 판 위로 이동된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작금의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검과 방패를 쥔 채 주변을 경계하는 박온수.
난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고 자시고, 이제 네 활약이 중요하니까, 잘 좀 해 줘라.'
[1라운드가 시작됩니다.]
뿌우우우우-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거대한 나팔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콰득, 콰드드득-
깨진 균열 사이로 출연한 사이클롭스들이 체스무늬 판 위로 걸어 나온다.
[그오오오오!]
[X발! 이게 대체 뭐냐고!]
박온수의 입에서 속사포처럼 쏟아져 나오는 욕설과 달리.
그의 검은 착실히 적을 베어 나간다.
[어라? 크기만 컸지, 생각보다 할 만한데?]
어느새 사이클롭스 한 놈을 고꾸라뜨린 박온수를 내려다보며.
나는 픽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1라운드니까.'
1라운드는 중립 몬스터가 출현한다.
물론 1라운드라고 해서 난이도가 낮다는 건 아니지만.
'어디....'
난 슬쩍 시선을 돌려.
다른 이레귤러들의 판 위를 살폈다.
[그오오오오오!]
콰작, 으지지직-
사이클롭스의 거대한 몽둥이가 하늘에서 춤출 때마다.
몽둥이에 묻은 살점과 체액 따위가 후두둑 떨어져 나간다.
"...1라운드라며?! 왜 벌써 뚫리는 건데!"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테이블을 쾅쾅 내려치는 이레귤러.
난 속으로 혀를 찼다.
'쯧쯧, 그거야 네가 스펙 달리는 놈을 선택했으니까 그런 거지.'
카드가 갖고 있는 시너지? 성급?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카드가 갖고 있는 고유 스펙도 엄청나게 중요하거든.
'정확히는 카드 형태를 한 공략자의 스펙이지만.'
공략자마다 갖고 있는 힘과 능력은 다르다.
그렇기에 똑같은 시너지와 성급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카드의 스펙에서 크고 작은 차이가 날 수 있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의 결과는....'
띠링-
[1라운드가 종료되었습니다.]
[완벽하게 방어한 대전자들에게 2코인이 추가로 지급됩니다.]
1라운드 정산이 진행되는 가운데.
"관리자! 관리자!"
누군가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관리자를 찾는다.
얼굴 부근에서 벌레 같은 것들이 꾸물거리는 기괴한 형태를 한 이레귤러가.
관리자를 향해 삿대질한다.
"체력이 깎인 거야 그렇다고 쳐도, 내 하수인이 사라졌다고! 이건 문제 있는 것 아냐?!"
과연 그 말대로다.
이레귤러의 체스무늬 판 위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문제?"
메피스토의 몸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정말 역겨울 정도로 멍청하군. 최소한의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건가?"
"뭐라고? 이건 생각이고 자시고, 대전의 규칙에 문제가 있는 거잖아!"
"규칙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메피스토가 말을 끝마친 순간.
대전장에 묘한 정적이 흐른다.
"잠깐... 규칙에 문제가 없다고?"
"그렇다는 건...."
'흠, 이제 다들 얼추 눈치를 챈 모양이네.'
라운드에서 패배하여 소환한 카드, 즉 공략자가 사망했을 경우.
그 카드는 소멸해 버린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카드의 기본 체급이 중요한 거지.'
일단 카드가 남아 있어야 성급을 올릴 수 있지.
카드가 없어지는데 성급은 무슨.
[1라운드가 종료됐습니다.]
[현재 체력 순위가 공개됩니다.]
[김인성 - 100]
[아르놀라 -100]
[에스터 -100]
.
.
.
[노리 - 98]
"체력 순위라...."
이레귤러들이 대전장 중앙에 떠오른 표를 보며 중얼거린다.
"저 체력이 다 소진되면 패배하는 건가."
"과연...."
그러던 그때.
한 이레귤러가 손을 든다.
"관리자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지?"
"4등 안에 들어야 괜찮다고 했는데, 그럼 다른 대전자를 견제할 수단은 없는 겁니까?"
이레귤러의 질문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메피스토의 실타래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온다.
"이제야 조금 질문다운 질문을 들어 보는군. 그에 대한 답을 해 주자면, 금방 알게 될 거다."
"...금방이라고요?"
확실히 금방이긴 하지.
그도 그럴 게, 2라운드부터는 서로를 상대해야 하니까.
'그보다 심연의 가면을 고른 놈은 어떻게 됐지?'
난 온몸이 백색의 빛으로 번쩍이는 이레귤러의 판을 살피곤.
삐져나오려는 웃음을 꾹 눌렀다.
분명 녀석은 유물의 효과로 10코인을 보유한 상태로 시작했을 터.
즉, 놈은 처음부터 카드 3장을 고르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썰렁-
놈의 판 위에 보이는 것은 전무했다.
'카드 2장을 선택한 것까지는 봤는데, 다 죽었나?'
그러고 보니 놈의 필드 위에 엇비슷하게 생긴 핏빛 정령들이 있었던 걸 기억한다.
'시너지 효과를 노렸다가 망한 건가.'
놈의 선택지에 같은 시너지를 가진 카드들이 나왔다면?
그런데 하필 그 카드들의 스펙이 형편없을 정도로 낮았다면?
'거기다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코인도 아꼈을 테고.'
운빨도 없는 데다가, 심지어 카드를 고르는 실력도 없다라....
넌 그냥 져라.
'초반에 달려야 할 유물을 들고 그따위로 운영하면 져야지.'
저건 더 볼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다른 놈들은....
아직까지는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네.
[모든 대전자들에게 4코인이 지급됩니다.]
[카드를 선택해 주세요.]
2라운드 시작 전에 주어지는 4코인.
1라운드 종료 보상으로 얻은 2코인을 더해.
내 수중에는 6코인이 있는 상황.
'이제 무슨 카드들이 나올지가 진짜 중요해지는 시점이다.'
같은 시너지를 가진 카드가 두 장 더 나온다면.
성급을 올릴 수 있다.
'같은 시너지를 가진 카드가 나오지 않더라도, 체급 높은 카드가 나오면 제대로 된 전열과 후열을 구성할 수도 있겠지.'
앞쪽에는 비교적 튼튼한 전사 계열의 공략자를 배치하고.
뒤쪽에는 그를 지원할 법사나 치료 계열 공략자를 배치하여 효과적인 공략을 하는 것도 좋은 선택지이리라.
'뭐가 됐건 일단 무슨 카드가 나올지부터 봐야겠지.'
촤르르르르륵-
다시금 회색빛을 머금은 다섯 장의 카드가 내 앞에 떠오르자.
나는 카드들을 하나씩 훑었다.
'오오?! 이건!'
241화 탑토체스 (3)
<멜러니>
성급: ★
시너지: 전사
소속 클랜: 레비아탄
최대 공략 층: 13층
가격: 3코인
<보리스>
성급: ★
시너지: 전사
소속 클랜: 판도라
최대 공략 층: 10층
가격: 3코인
'전사 카드가 2장이나 더 뜬다고? 이게 확률이 말이 되나?'
일단 존재하는 시너지만 30가지이다.
근데 각각의 시너지마다 100장의 카드가 존재하고.
시너지마다 1성 카드가 50장인 걸 감안하면....
'거의 4% 확률이 두 번 연속으로 터졌다고 봐야 되는 건가....'
난 이내 입꼬리를 올렸다.
'확률이고 자시고, 결국 중요한 건 운이긴 하지. 으흐흐, 일단 다른 카드들을 마저 볼까.'
남은 카드 3장은 각각 치료사, 마법사, 사령술사 시너지를 갖고 있었다.
'이러면 선택의 폭이 꽤 넓어졌는데?'
전사 카드 2장을 구매하여 성급을 올려도 되고.
다른 시너지를 가진 카드들로 필드 위를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도 방법일 터.
'솔직히 마음 같아선 당장 전사 카드들을 구매해서 성급을 올리고 싶긴 한데... 그 부분은 완전히 운의 영역이란 말이지.'
같은 시너지를 가진 1성 카드들을 합성할 경우.
같은 시너지를 가진 2성 카드가 무작위로 출현한다.
'전사 2성 카드가 나오는 건 확정인데, 어떤 게 나올지를 모르니.'
1성 카드도 저마다 갖고 있는 체급이 다를진대.
하물며 2성 카드는 어떻겠는가?
최악의 경우에는 알맹이만 2성이고 내용물은 1성인 게 나올지도 모를 터.
'일단 다른 시너지를 가진 두 개의 카드를 구매하고 한 라운드를 더 지켜봐? 그게 안전하긴 한데....'
난 카드들을 보며 턱을 매만지다가.
이내 결론을 내렸다.
'에이! 그래도 명색이 2성인데 그렇게까지 별로겠어?!'
아무리 썩었다고 해도 1성보다는 나을 터.
'가 보자!'
[멜러니, 보리스 카드를 구매하였습니다.]
[6코인이 차감됩니다.]
[멜러니, 보리스가 대기열에 출연합니다.]
화아아악-
각각 얇은 가죽 갑옷과 레더메일을 걸친 두 남녀가 대기열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여, 여기는....]
[으음....]
누가 봐도 당황해하는 티가 역력한 두 남녀를 보며.
난 마른 숨을 내뱉었다.
[똑같은 시너지를 가진 카드 3장을 확보하였습니다.]
[합성할 수 있습니다. 합성하시겠습니까?]
조건을 충족하여 나타난 메시지를 보며 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합성을 시작합니다.]
그 순간.
[어어엇? 당신들은... 누구세요?]
[지금 그게 중요해욧?! 우리 몸이 뜨고 있잖아요!]
[으음....]
서로의 신상을 파악하던 세 공략자의 몸이 필드 위로 떠오르더니.
화아아아악-
그곳에 빛이 있었다.
이윽고 빛이 사라지자.
철커덕-
"오오...."
난 필드 위에 오롯이 서 있는 하나의 존재를 자세히 관찰했다.
온몸을 덮은 칠흑의 갑주.
한 손에 들려 있는 두터운 바스타드 소드.
튼튼해 보이는, 해골 문양이 박힌 카이트 실드까지.
'장비부터 1성이랑은 느낌이 다르네.'
난 얼른 카드의 정보를 살폈다.
<파이탄>
성급: ★★
시너지: 전사
소속 클랜: 바이킹
최대 공략 층: 30층
가격: 9코인
'오오! 바이킹 클랜?! 월척이로구나!'
바이킹 클랜은 나도 너무 잘 알고 있는 클랜이었다.
주로 28층과 35층 일대에서 물자 운송, 호위를 생업으로 삼으면서 공략도 진행하는 클랜으로서.
종종 엘라시움이나 마왕의 성에서 내 편의점에 들르기도 했으니까.
'으흐흐, 실력은 확실하겠지.'
뭐, 이제 30층과 그 주변 층들도 아래층 취급을 받는다곤 하지만.
적어도 그 부근에서만큼은 이렇다 할 적수가 없다고 평가받는 클랜이 바로 바이킹 클랜이니.
[....]
확실히 아래층의 베테랑이라 그런가.
1성 공략자들과는 달리 차분하게 필드 위를 관찰하는 모습도 마음에 드는걸?
'이제 결과를 지켜볼까.'
[2라운드가 시작됩니다.]
뿌우우우우-
다시금 라운드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필드 위를 울리고.
콰득, 콰드드득-
깨진 균열 사이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펄럭-
'저건....'
2장의 새하얀 날개.
등 뒤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광채.
만약 이곳이 대전장이 아니었다면 영락없는 천사라고 해도 믿었을 정도로 신성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저것도 1성인가? 에이, 설마 2성은 아니겠지? 살짝 볼까.'
상대 카드의 정보를 살펴보는 것도 가능했기에.
난 천사의 정보를 빠르게 살폈다.
<엘>
성급: ★
소속 군단: 제54군단
시너지: 자애
최대 공략 층: 14층
가격: 3코인
'뭐야, 1성 맞네. 근데 1성 주제에 뭐 저렇게 화려해?'
하지만 중요한 건 외관이 아니라 실력이니까.
난 시선을 돌려 파이탄을 관찰했다.
[....]
녀석은 우두커니 서서 천사를 관찰하더니.
주섬주섬-
돌연 검을 바닥에 꽂아 넣곤 허공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든다.
"...."
굉장히 눈에 익은 샌드위치 몇 개를 꺼내 든 그는.
두 손으로 샌드위치를 압착시키더니 그것을 곧장 입에 욱여넣는다.
[맛있군.]
'얀마! 하나씩 먹으라고 만든 걸...!.'
그 외에도 분해의 결정체까지 사용한 파이탄.
[으음!]
도핑의 효과가 제대로 먹혀든 걸까.
키이이이잉-
검고도 불길한 아우라가 파이탄의 몸 주변에서 솟구쳐 오른다.
그리고 기운이 서서히 잦아들 무렵.
탁-
흑색의 전사가 자리에서 사라졌다.
[죽어라, 마물.]
어느새 천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파이탄이 바스타드 소드를 힘껏 휘두른다.
그저 서로의 힘을 탐색하기 위한 일격이었을 뿐이건만.
콰아아아앙-
분명 검으로 방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몸이 날아가듯 뒤로 튕겨져 나간다.
[네놈, 약하군.]
짧은 한마디를 끝으로.
파이탄의 바스타드 소드에서 검은 강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죽어라.]
서걱-
필드 위에 넘실거리는 검은 강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천사의 상체와 하체가 서서히 분리되기 시작한다.
파스스스슥-
삽시간에 먼지로 변해 허공으로 흩어지는 천사의 신형을 보며.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쪽이 우위인 건 알았지만, 아예 반응조차 못 할 줄은 몰랐네.'
저 천사 놈.
자신이 어떻게 당했는지조차 몰랐는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부릅뜬 눈으로 파이탄을 노려보는 게 전부였으니 말이다.
'아아, 이게 2성이지!'
1성따리와는 격이 다른 체급과 무력!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진다.
'내 쪽의 전투는 마무리됐으니, 다른 놈들을 좀 살펴볼까.'
이쪽이 천사를 상대했듯.
누군가는 내 파이탄을 상대해야만 할 터.
'과연 파이탄이 당첨된 불쌍한 놈은... 아, 저기 있네.'
난 맞은편에 위치한 이레귤러의 필드를 관찰했다.
'얼레? 이미 끝났나?'
[우오오오오!]
완벽한 복사본이라고 해도 좋을 흑색의 전사가 상대의 필드에서 홀로 승리의 함성을 외치고 있다.
"잠깐! 이게 뭐야! 아예 상대조차 안 되잖아!"
얼굴에서 벌레가 흘러내리는 이레귤러가 비명을 지르더니.
황급히 관리자에게 소리친다.
"...관리자! 아니지?! 설마 패배했다고 또 카드가 사라지는 건 아니지?! 한번 패배했다고 아예 승리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그건 너무 가혹하잖아!"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야.
패배할 때마다 구매한 카드가 소멸해 버리면.
실질적으로 이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구조니까.
'하지만 그게 규칙인....'
내가 생각을 이어 가려던 찰나.
관리자 메피스토의 몸체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네 눈은 장식인 건가? 아, 눈이 없나 보군."
"...뭐?"
"필드 위를 봐라."
필드 위를 보라고?
난 다시 상대 이레귤러의 필드를 살폈다.
'...음?'
[크르르르르륵....]
분명 파이탄의 손에 소멸했던 자그마한 용 두 마리가 다시 부활하여.
필드 위를 돌아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뭐지?'
분명 공고문에서 봤던 규칙에 의하면.
중립 몬스터나 상대 대전자에게 패배할 경우.
필드 위에 있던 공략자들은 모두 소멸한다고 적혀 있었건만.
'혹시 룰이 바뀐 건가?'
그러고 보니....
[해당 사안은 임시 규칙이며 향후 변동될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던 것 같긴 한데.
'뭐, 상관없나.'
애당초 상식 밖의 규칙이라고 생각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딱히 질 것 같지가 않단 말이지.
[2라운드가 종료됐습니다.]
[완벽하게 방어한 대전자들에게 4코인이 추가로 지급됩니다.]
라운드 종료 메시지를 보며.
난 생각을 이어 갔다.
'카드들이 소멸되지 않는다면 나도 필드를 확실하게 보강해야겠어.'
물론 내 필드에 2성 등급인 전사, '파이탄'이 있긴 하지만.
자그마한 변수가 발생하는 것조차 사양이다.
'다만, 일단 유물 타임에 어떤 유물들이 뜰지가 중요하겠어.'
4라운드가 종료되고 나면.
다시금 유물이 올라간 회전 초밥 판이 등장한다.
거기에 나오는 유물들은 처음 들고 시작한 유물보다 효과가 더 좋은 걸 생각하면 무조건 좋은 걸 집어 와야지.
* * *
[크하하하핳! 이게 전부냐! 날 더 끓어오르게 만들어 봐라! 대지 분쇄!]
콰아아아아앙-
남자가 든 워해머가 대지를 후려치자.
콰작, 콰자자작-
지면 위로 튀어나온 기다란 암석들이 적들의 육체를 꿰뚫고 찢어발긴다.
[무라단 님! 저희도 도울게요!]
[애송이들은 빠져 있어라! 크하하하하!]
쩌어어어어억-
[10라운드가 종료됩니다.]
[현재 체력 순위가 공개됩니다.]
[김인성 - 100]
[레이라 -52]
[안트릴 -43]
.
.
.
[노리 - 21]
10라운드가 종료되고.
대전자들의 현재 체력이 수정구 위로 떠오르자.
"...생각보다 금방 끝나겠는데?"
"그러게. 아니, 10라운드에 4성은 선 넘었지! 저걸 어떻게 이겨?"
수정구를 바라보던 각 탑의 관리자들이 삿대질을 하기 시작한다.
"애초에 10라운드에 4성이 뜨는 게 가능하긴 한 거였어?"
"무슨 유물을 먹냐가 중요하긴 한데... 운도 따라야지."
"아니면 혹시...."
다른 탑 관리자들의 시선이 종말의 탑 관리자들에게로 향한다.
"너희... 혹시 정보 흘린 건 아니지?"
"뭐?"
블라디미르가 싸늘한 눈으로 다른 관리자들을 쏘아본다.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위험을 무릅쓰고 간섭을 할까. 아, 물론 너희 코인 털어먹는 건 맛있긴 하네."
"하지만 말이 안 되잖아! 1번도 아니고 3번이나 제일 좋은 유물을 가져갔으면 의심할 만하지!"
각각 4라운드 그리고 8라운드가 종료된 뒤.
종말의 탑 이레귤러가 챙겨 간 유물들.
[뒤집힌 거울] 그리고 [역동하는 세계]는 가히 사기라도 불러도 손색이 없는 것들이었다.
"라운드마다 [여명의 왕관]을 이용하여 무료로 리셋 해서 6라운드에 필드에 2성 전사 두 명을 소환한 것까지는 그렇다고 치자고. 뒤집힌 거울은 아니지!"
"사실 뒤집힌 거울을 가져간 순간부터 이미 1등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긴 했다."
필드에서 가장 강한 카드의 성급 그리고 시너지를 가진 카드 한 장을 소환하는 유물, 뒤집힌 거울.
그 유물로 인해 종말의 탑의 이레귤러는 6라운드에 3성 등급의 전사를 소환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 데 성공해 버렸으니 말이다.
"사실상 거기서 이미 1위는 결정 났는데, 거기다가 역동하는 세계까지 먹었으니...."
필드 위에 있는 공략자들 중.
무작위로 한 공략자의 성급을 올려 주는 유물, 역동하는 세계.
유물 한 개, 한 개만으로는 닿지 못했을 영역.
그러나 3개의 유물이 한 이레귤러의 손에 들어간 탓에.
끝내 10라운드 전에 4성 등급이 출현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이봐, 블라디미르. 진짜 아무 개입도 안 한 거지?"
"아씨, 우리 목숨은 뭐 여러 개 되는 줄 알아?!"
"그건 그렇지.... 하지만 저건 진짜 말이 안 되는데...."
누군가가 개입하거나 정보를 유출한 게 아니라면.
저 모든 것들이 오직 '운'에 의해 발생한 일일 터.
"저 이레귤러 놈... 도대체 얼마나 운이 좋은 거야?"
"1등은 놔두고, 허접 대전이나 지켜보자고. 어차피 4등까지는 상관없잖아? 중요한 건 5등부터 8등까지지."
"1등은 추가 혜택이 있다고 공고문에 적혀 있었던 것 같다만."
블라디미르가 실소를 흘린다.
"추가 혜택이 중요해? 4등 안에 못 들어가면 싹 다 망하는데."
"그래도 규칙이 바뀐 덕에 보는 맛은 있군."
"그건 나도 동의해. 카드들이 소멸해 버리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잖아?"
관리자들이 살짝 달라진 규칙을 두고 대화를 나누던 그때.
"아!"
무언가 깨달은 건지.
블라디미르가 뒷목을 잡는다.
"만약 조커 카드가 5등을 했다면 이 귀찮은 짓거리도 더 이상 안 해도 되는 거였잖아?! 크으윽!"
"안 하긴? 다른 탑에 배정돼서 또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겠지. 헛소리 말고 그 피자인지 뭔지나 좀 가져와 주면 안 되나? 나름대로 요깃거리 정도는 되더군!"
"...네놈이 알아서 갖다 먹어!"
242화 탑토체스 (4)
[14라운드가 종료됐습니다.]
'끝났네.'
14라운드를 끝으로 길었던 4위 결정전도 끝났다.
난 슬쩍 시선을 돌려 체력 순위표를 살폈다.
[김인성 - 100]
[아르놀라 - 21]
[안트릴 - 16]
[에스터 - 2]
'말이 4위 결정전이었지, 다 간당간당하긴 했네.'
대진 운, 카드를 뽑는 실력 그리고 유물의 뽑기 등.
무엇하나라도 선택지가 달랐더라면.
순위권에 적힌 이름들 또한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뭐, 사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난 나의 옆에 앉아 있던 이레귤러를 흘끔 바라봤다.
"취르르륵... 취르르륵... 사, 살았다...."
겨우 4위라는 막차에 올랐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리자드맨을 빼닮은 이레귤러가 팔을 바르르 떨며 안도의 숨을 내뱉는다.
"4위 축하해."
"축... 하?"
갑자기 놈의 몸이 붉게 변하더니.
전신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취르르륵... 네놈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축하를 한다고?"
놈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이미 승부가 결정 난 마당에 뭐 하러 도발하겠어? 아, 그리고 죽을 뻔한 건 너만이 아니었잖아?"
필드 위에 4성 전사 무라단이 나온 시점에서 난 한 대의 트럭이 되었고.
모두를 공평하게 쳤다.
물론 대진 운이 지지리도 없던 놈은 2번 연속으로 트럭에 치이긴 했지만.
"취르르륵... 내가 원하는 싸움은 영혼을 건, 피의 전투다. 이런 싸움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오."
일기토를 하고 싶다는 건가?
근데 대전 방식을 이레귤러가 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건 좀 어려울 텐데.
그러던 그때.
[대전자, 안트릴 님의 체력이 0이 되었습니다.]
[배덕의 탑이 영원한 안식에 접어들었습니다.]
[대전 종료까지 남은 탑의 개수: 0개]
[대전 '탑토체스'가 종료됩니다.]
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드디어 끝났구나.'
대전의 종료를 위해 4개의 탑이 제물이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다.
이쪽도 멸망하고 싶진 않거든.
'이대로 깔끔하게 마무리가....'
[배덕의 탑의 잔재가 현현할 탑을 선정 중입니다.]
[배덕의 탑의 대전자 선택을 완료하였습니다.]
[해당 대전자의 세계에 이변이 출현합니다.]
쩝, 역시 그럴 리 없겠지.
'그래도 이번에는 이변이 2개뿐이라는 게 나름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멸망한 탑의 원한을 가장 크게 산 탑은 그 원한을 받아 내야 한다.
트럭을 몰았던 걸 감안하면.
4개의 탑 중 2개 탑의 원한만 받아 내는 거니 나름 싸게 먹히는 걸지도?
'밖에는 발리나도 있고 하니 이변에 최소한의 대처도 될 테고.'
물론 저번처럼 초자연적인 이변이라면 대처하기가 어렵긴 하겠다만.
내가 가면을 고쳐 쓰며 쓴웃음을 짓던 중.
"대전이 종료됐다."
메피스토의 고저 없는 음성이 들려온다.
"이번 대전에서 각 탑이 확보한 등수에 따라 보상이 차등 지급 될 거다. 설마 이마저도 못 알아먹진 않겠지?"
오오, 드디어 보상 타임이구나!
물론 보상은 복귀해야만 확인할 수 있겠지.
"보상은 네놈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가거든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설명은 끝이다. 얼른 이곳에서 꺼져라. 네놈들같이 어리석은 놈들과 계속 한곳에 있자니 나까지 멍청해지는 기분이 든단 말이지."
실타래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이 멎는 그 순간.
화아아악-
전과 마찬가지로 이레귤러들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이번에도 어떻게든 버텼군.... 이게 마지막 대전이면 좋을 텐데."
어떤 이레귤러는 안도의 중얼거림을 내뱉으며 빛과 함께 사라졌지만.
대부분은 조용히 공간을 이탈했다.
'나만 자리에 남은 건, 1위 보상을 따로 챙겨 주려는 거겠지.'
이번 대전에서 1등을 달성할 시.
추가적인 보상이 지급된다는 문구를 공고문에서 봤었으니까.
"네놈, 제법이더군. 단 한 번의 패배조차 용납하지 않던 모습이 꽤나 인상 깊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은...."
잠시 말을 끊은 메피스토가 뒷말을 덧붙인다.
"네 판단은 단순히 똑똑하다는 수준을 넘어선 것 같았다. 아니, 마치 문제의 정답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더군."
흠, 유물을 고를 때 말고는 딱히 티 나게 행동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난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그저 운을 필요로 하는 대전에서 남들보다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그저 운이 좋았다라.... 결국 행운도 지혜에서 따라오는 거다. 최선의 판단이 선행되어야 행운도 그것에 깃드는 법이지. 어리석은 판단에 운이 더해져 봐야 꺼져 가는 장작의 불씨를 조금 키우는 정도다."
"그러니까 제 판단이 좋아서 행운도 함께 따라왔다는 말씀인 거군요?!"
실타래 안에서 메피스토의 마른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오만한 놈. 여하튼 네놈의 판단과 선택만큼은 꽤 흥미로웠다."
"감사합니다."
"따라서 종말의 탑의 대전자 김인성에게 한 가지 특전을 허락하겠다."
툭, 데구르르르-
실타래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내 발 앞을 굴러다닌다.
'이건....'
난 붉은색을 띤 주사위를 주워 들었다.
"이게 뭡니까?"
"굴려라."
"...."
에이, 설마.
"주사위를 굴려서 나온 눈금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 뭐 그런 건 아니죠?"
"네가 생각한 게 정확하다."
아니, 관리자 양반.
보상을 딱 정해서 줘야지, 보상까지 운에 맡기라고?
그래도 일단은 굴려 보겠지만.
도르르륵-
내 손을 떠난 주사위가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이윽고 완전히 움직임이 멎는다.
"3이군. 3의 보상은 다음과 같다."
* * *
화아아악-
익숙한 집 안의 풍경이 보이자.
"후우."
난 짧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어떻게 잘 끝마쳤네.'
대전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고는 해도.
대전장에 나서는 건 항상 부담이란 말이지.
'선택 한 번에 운명이 달라지니 원....'
나의 선택 하나하나가 종말의 탑과 바깥세상의 몰락 여부를 결정하는 셈이니.
아무리 경험이 쌓였다고 해도 긴장감이 사라지지 않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뭐, 그래도 당분간은 괜찮겠지.'
이제 대전이 끝났으니.
한동안 대전이 발생하지는 않을 터.
'그사이에 최대한 탑의 체급을 올려놓는 게 중요하겠지.'
이번 대전에서 다시금 실감했다.
공략자들의 기본 체급, 무력이 중요하다는 걸 말이다.
'대전의 승패를 직접적으로 결정하는 건 나지만, 공략자들의 스펙이 높으면 높을수록 대전에서 승리할 확률이 올라가는 것도 사실이니까. 뭐, 그건 그렇고....'
난 아공간 주머니에서.
뒷면은 체크무늬, 앞면은 수레바퀴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한 장 꺼냈다.
'이번 보상은 뭔가 조금 다르단 말이지.'
행운의 수레바퀴(김인성 전용)
설명: 탑토체스에서 당신의 탑이 1등을 달성하였다.
내용: 다음 대전에 한해, 1회의 특전을 부여받을 수 있다.
제한 사항: 해당 아이템은 다음 대전장에서만 사용이 가능하다.
다음 대전장에서 특전을 받을 수 있다라....
근데 도대체 무슨 특전을 주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일단 갖고 있으면 쓸 일이 생기겠지.'
내가 카드를 도로 아공간 주머니에 집어넣던 찰나.
틀어져 있던 TV에서 아나운서의 다급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보시는 바와 같이 현재 뉴델리 지역에는 때아닌 초대형 태풍이 발생한 상황입니다. 나무가 뽑혀 나가고 건물의 벽면이 가볍게 뜯겨 나갈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로 접어드는 시기에 태풍이라....
아마 저것도 균열의 활동으로 인해 생긴 현상일 터.
투두두두둑-
포장된 아스팔트 도로를 박살 낼 듯 쏟아지는 빗줄기.
제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힘겹게 바람에 저항하는 사람들.
뜯겨져 나간 건물의 잔해가 추가로 피해를 발생시킨다.
"...."
멸망하는 것보다는 저게 싸게 먹히는 일이긴 하다만.
보고 있자니 마음이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다.
난 이내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어, 나라야. 바빠? 그, 전에 재난지원금 전달한 곳이 어디라고 했지?"
* * *
며칠 뒤.
탑 관리국의 회의실.
김중후 관리장이 화면 속의 인물들에게 브리핑을 이어 가고 있다.
"이번에 활동한 균열의 개수는 총 2개입니다. 하나는 여러분이 짐작하시듯, 뉴델리에 발생한 초대형 태풍으로 짐작되며, 다른 하나는...."
둥-
김중후가 리모컨으로 화면을 넘기자.
빔 프로젝터가 다른 사진을 비춘다.
[저건....]
사진 속의 균열.
균열 안에는 노란 눈동자들 수백여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균열 속에서 무언가가 출현하려 한 건 확실합니다. 어째서인지 모두 소멸했지만 말입니다."
[혹시 샘플은 확보했나요?]
제시 관리장의 물음에 김중후는 고개를 저었다.
"체액에 갑자기 불이 붙어 샘플의 확보는 어려웠습니다."
[...혹시나 해서 묻겠네만, 샘플을 독점하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 부분은 증거 자료가 있으니 언제든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딱 잘라 말하는 김중후.
[그런가.... 아쉽군. 샘플을 충분히 확보한다면 인류의 진화와 도약도 꿈만 같은 이야기는 아닐 텐데 말이야.]
"...."
김중후는 쓴 미소를 지었다.
'다들 아주 눈이 돌아갔군.'
물론 이해를 못 하는 건 아니다.
균열에서 출현하는 마물의 모습조차 보지 못했다고는 해도.
마물은 바깥세계에 처음 등장한 '탑의 소재'이다.
만약 충분한 확보가 가능하다면.
탑이 갖고 있는 미지의 힘, 그 근원에 접근하는 것도 아주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
'어쩌면 바깥에서 능력자들을 양성하는 것도 가능하겠지.'
물론 그 모든 건 다 꿈만 같은 이야기이긴 하다.
지금 그들에겐 이렇다 할 소재도 연구 결과도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소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게 좋을지 의문이지만.'
만약 탑 안의 공략자들이 대거 바깥에 나오거든.
어떠한 현상이 발생할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변화가 항상 긍정적이지만은 않으니.'
김중후는 이내 상념을 접곤 다시금 회의에 임했다.
* * *
몇 시간 뒤.
"관리장님, 도착했습니다."
"음, 수고했... 으음...."
검은 세단에서 내리던 김중후가 몸을 비틀거리자.
수행원이 황급히 그를 부축한다.
"관리장님!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조금 지친 모양이군."
활동하는 균열, 뉴델리의 초대형 태풍, 마물 등.
각종 안건으로 인해 회의가 길었던 탓일까.
김중후의 얼굴엔 피곤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 남은 일정은 캔슬하시는 것이...."
"여기까지 와 놓고 취소하라고? 자네, 제법 농담이 늘었군."
김중후는 힘없는 미소를 보이곤.
고개를 들어 눈앞의 카페를 바라봤다.
[인성 카페]
"다음 손님! 주문받을게요!"
"죄송해요, 마왕의 붕어빵은 품절됐어요."
초저녁임에도 사람들로 붐비는 초절정 인기 카페.
인성 카페를 두고 발길을 돌리라니?
"하지만...."
"이 카페의 디퓨저, 향이 참 좋더군. 뭐랄까... 삼림욕을 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되나. 묵은 피로가 씻기는 기분, 자네도 아나?"
"...전 잘 모르겠습니다."
김중후가 피식 웃는다.
"나도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네."
전에 관리장들과 단체로 인성 카페를 방문해.
디퓨저 타임을 맛본 뒤로 그 마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그였다.
"아무튼 곧바로 들어갈 수 있겠지?"
"예. 대기 순번 8번이라고 하니 금방 들어가실 수 있을 겁니다."
"수고했네."
"근데, 오만한 카페이긴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관리장님의 예약조차 받아 주질 않는다는 게...."
불만을 표하는 수행원.
그러나 김중후는 중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기다림 끝에 맛보는 행복이 더 달콤한 법이네. 조금 시간이 있는 듯하니, 잠시 갤러리를 둘러보는 것도 좋겠군."
인성 갤러리는 특별하다.
특히 요즘 업계에서 큰 이슈가 되고 있는 낫-휴먼의 신작을 유일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으니까.
"갤러리로 가지."
"예, 관리장님."
김중후는 잠시 발길을 돌려 갤러리로 이동하려다가.
카페의 창문에 붙은 패를 보곤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 사장, 꽤나 젊던데 꽤 이타적이군."
"예?"
"저길 좀 보게."
김중후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희망을 나눠요 캠페인 - 인성 카페 직원 일동 재난지원금 후원 100억]이라는 팻말과 사진이 자리하고 있었다.
243화 편의점은 처음이지? (1)
며칠 뒤.
[...즉, 회장님의 말씀은 이번 태풍 또한 결국 자연이 인류에게 내리는 심판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그렇습니다. 파괴되고 오염된 자연이 비수가 되어 인류에게 되돌아온 것이죠. 균열 현상이요? 그것은 본질을 왜곡하는 의견의 일부에 불과합니다.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라도 자연을 지키고 상생해야....]
블루피스의 회장이 패널로 나온 프로그램을 보며.
발리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는다.
"정말 인간들은 알다가도 모르겠군."
옆에서 츄르를 핥던 루나가 힐끔 그녀를 바라본다.
"그게 무슨 말이냥?"
"이제 그 어디에서도 자연재해가 균열의 활동으로 인해 생긴 거라는 말이 안 나오고 있잖아? 일부러 정보를 은폐한 건지, 아니면 정말 자연적인 현상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건지."
"오오, 꽤 유식해 보였다냥. 근데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냥?
루나의 물음에 발리나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당연히 상관이 있지! 균열이 활동할 때마다 난 추가 노동을 해야 한다! 이번에도 인간들 몰래 균열에서 나온 잡것들을 처리하는 데 내 귀한 휴식 시간을 썼어!"
"흐음, 흐음이다냥."
루나가 그녀의 이야기를 듣기보다 츄르를 핥는 데 더 집중했지만.
그녀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이 정도 도와줬으면 충분히 도와줬다. 이제는 인간들이 스스로 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슬며시 말꼬리를 흐리며.
나의 눈치를 살피는 발리나.
어쭈? 저 녀석 봐라?
"그래서, 막기 싫다는 거지? 잘됐네, 그러잖아도 볶아야 할 콩들이 많았는데, 이참에...."
"시, 싫다는 게 아니다! 다만 포상 휴가를 늘려 달라!"
포상 휴가? 아.
균열을 잘 막거든 특별히 주던 포상 휴가의 기간을 늘려 달라는 건가?
"그래서 저번에도 무려 2일이나 줬잖아!"
"너, 너무 짧다! 적어도 4일은 줘야 한다!"
"4일이나 달라고?"
평소였으면 2일짜리 포상 휴가에도 만족했을 녀석이건만.
아아, 설마 그것 때문인가?
"너, 룰드컵 때문에 그러는 거지? 직관 가려고?"
"...!"
어떻게 알았냐는 듯.
눈동자를 잘게 떠는 발리나를 보며 난 피식 웃었다.
"굿즈 숍이나 경기장 직관 가는 거야 2일이면 충분할 테고, 남은 거야 뻔하지."
내가 네 머리 위에 있다, 이 녀석아.
"흠, 그래도 4일은 좀 길긴 한데."
"어, 어떻게 안 되는 건가...."
난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직 일정까지 기간이 조금 남았잖아? 그때까지 너 일하는 것 보고 결정하는 걸로...."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어느새 주방에 서 있는 발리나가 보란 듯 팬을 흔들어 젖히기 시작한다.
촤르르륵-
손목 스냅을 따라 흩날리는 커피콩들.
"너, 보여 주기가 많이 늘었다?"
"무슨 말인가? 원래 볶는 게 내 천직이었다."
"그래? 그럼 쉬는 날에도 계속하면 되겠네. 그치?!"
"...!"
난 픽 실소를 흘렸다.
오늘은 가야 할 곳도 있고 하니.
발리나를 놀리는 건 이쯤 할까.
"분신아, 적당히 상황 보고 괜찮다 싶으면 네가 알아서 일정 조정해서 애들 휴가 주고 그래."
"그거야 어렵지 않지. 근데 이번에는 며칠이나 탑에 있으려고?"
"글쎄. 이번 층은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엥? 아무런 정보가 없... 아! 설마 또 지하층으로 가려는 거야?"
분신은 영 찝찝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거기, 탑 관리자들의 공간 같았다며. 괜찮겠어?"
분신의 우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공략자가 관리자의 공간에 들어갔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
"그렇긴 한데, 층 목록에 지하층이 생긴 게 궁금하잖아?"
B1층은 얼추 휴게실 같은 공간이라는 걸 파악했다.
그러나 아직 B2층, B3층은 가 보지 않았다.
'탑 대전'이라는 큰 불도 껐겠다, 지하층의 탐색을 이어 가는 게 당연하잖은가?
"B1층도 별 무리 없이 탐색하기도 했고, 괜찮아.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지."
"음...."
"나름 믿는 구석도 있고. 아무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사전에 이동 준비를 모두 끝마쳐 뒀었기에.
난 곧바로 문고리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B2층을 선택하셨습니다.]
[이동 시, 해당 층으로 고정 이동 됩니다.]
화아아악-
"아무튼 다녀올 테니까, 애들 관리 좀 잘하고 있어!"
"어, 음... 그래, 조심히 다녀와!"
* * *
검은색의 관들이 즐비한 공간.
바닥에는 핏빛을 머금은 빵 쪼가리가 너저분하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공간의 한편에선.
"음...."
블라디미르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수정구들을 바라보며 침음을 흘리고 있다.
[이이이이잉-]
하늘에 펼쳐진 거대한 그물망 안에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흡정벌레들이 가득했고.
[몰았다! 빨리 포획해!]
[좋았어! 잡았다!]
[크으, 이게 다 몇 마리야?]
공략자들은 그런 흡정벌레들을 보며 기뻐하는 중이었다.
"...."
게슴츠레한 눈으로 다른 수정구를 바라보는 블라디미르.
또 다른 수정구에선.
화르르르륵-
[크하하핳! 이 열기! 시원하군!]
[흡정벌레 뜸은 매일 받아도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한창 흡정벌레 뜸을 즐기고 있는 거신들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으으...."
수정구를 지켜보던 블라디미르의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새어 나온다.
"흡정벌레 둥지를 그렇게 늘려 놨는데도 감당이 안 된다니... 환장하겠네."
층의 관리.
그것은 관리자의 기본 소양이다.
물론 최근 탑 대전을 준비한다거나 사적인 취미에 조금 몰두하긴 했으나....
화르르르륵-
잠깐 층에서 눈을 뗐다고.
그렇게 많이 만들어 뒀던 흡정벌레 둥지들이 죄다 박살이 났을 줄이야.
"망할 것들, 적당히를 모르냐, 적당히를."
솔직히 층을 관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층의 원주민과 마물 간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건 기본 중의 기본.
거기다가 공략자들을 위한 각종 신규 퀘스트의 안배.
새로운 지역 & 신종 마물의 출현지를 만든다든가, 그 외 여러 특수한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등.
본래 관지자로서 해야 할 일도 더럽게 많건만.
"공략자 놈들도 그렇고 본사 놈들도 그렇고... 죄다 일만 늘려 놓고 있네. 끄으으으으...."
이미 반쯤 퀭한 블라디미르의 눈이 뒤집히려던 그때.
"바쁜가?"
어느새 그의 관리실로 들어온 유그드라실의 몸체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울려온다.
"...바쁘냐고?"
"...."
광기에 젖은 블라디미르의 눈을 본 탓일까.
유그드라실이 슬며시 몸을 돌린다.
"흠흠, 다음에 다시 찾아오...."
"그럼 당연히 바쁘지! 그냥 바쁜 게 아니라 더럽게 바쁘다고! 공략자 놈들 돈벌이야 그렇다고 쳐도, 본사 망할 놈들이 벌인 이벤트 때문에 왜 내가 피해를 봐야 되냐고! 그런 일들은 지들이 직접 와서 해도 되는 거잖아!"
끝내 관리실 안의 온갖 집기들과 수정구 따위가 허공을 날아다닌다.
잠시 후.
조금은 차분해진 블라디미르에게.
유그드라실이 나지막이 말한다.
"그렇게 열심히 하는 이유가 있는 건가?"
"뭐?"
"딱히 본사로 가고 싶은 것도 아니라고 했으면서, 그렇게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말이다."
"...."
맞는 말이다.
그들이 아무리 열심히 탑을 관리한다고 한들, 그것은 당연한 것.
어느 누구도 그들의 노고를 알아주지 않는다.
"...이것 말곤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좋아서 하는 게 아니었나?"
유그드라실의 물음에 블라디미르가 입을 떡 벌린다.
"미쳤어?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좋다고 일을 하겠어?!"
"그래서 난 네가 완전히 미쳐 버린 줄 알았다."
"...."
멍하니 유그드라실을 바라보던 블라디미르가 이내 실소를 흘린다.
"미쳐도 이 일을 좋아하긴 어렵겠지. 애초에 우리 의지로 이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니잖아?"
"...."
잠시간 말이 없는 두 관리자.
이내 유그드라실이 침묵을 깬다.
"잠시 휴게실에서 기분을 전환하는 건 어떤가? 마침 내가 새로운 걸 개발해 자네가 평가해 줬으면 하는데."
"...새로운 것? 또 피자의 아류작인 것 아냐?"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전에는 피자가 갖고 있는 자극적인 맛을 모방하는 데 중점을 뒀다면 지금은 나만의 레시피를 만드는 데 중점을 두고 있지."
"모방을 해서 나온 결과가 그 녹색 피자잖아."
잠시 말이 없던 블라디미르가 한숨을 내쉰다.
"후우, 그래. 잠시 숨을 돌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블라디미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바로 그때.
화아아아악-
갑자기 관리실 한쪽에서 찬란한 빛이 번쩍인다.
"뭐야? 깜짝 선물이야?"
빛 속에서 블라디미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내가 선물을 줄 리가 없잖나?"
당황한 유그드라실의 목소리가 뒤이어 울린다.
이내 빛이 사라지자.
"...."
2층 높이의 큰 건물, 통유리로 된 외벽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건물의 입구에 걸린 간판에는....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
어딘가 굉장히 익숙하면서도.
이 자리에 존재하면 안 될 것이 보인다.
"...?"
"이봐, 유그드라실."
블라디미르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묻는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이건 장난이...."
"아니면, 오! 혹시 새로 보여 준다던 게 이거였어?!"
"아니, 내 말을...."
유그드라실의 말을 묵살하곤.
편의점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외관을 훑는 블라디미르.
"이야, 외관은 꽤나 그럴싸하게 만들었는데? 누가 보면 진짜 조커 카드의 상점인 줄 알겠어."
"그건 진짜...."
"어디, 내부도 한번 볼까?"
덜컹-
"음? 이봐, 유그드라실. 잠겨 있는데? 뭐, 됐다. 내가 열지."
블라디미르가 돌렸던 고개를 다시 문 쪽으로 돌리던 그 순간.
"...."
블라디미르는 목도했다.
여우 가면 밑으로 드러난 입가에 그려진 어색한 미소를.
"오, 조커 카드까지 구현한 건가? 꽤나 공을 많이 들였는...."
"하하... 안녕하세요?"
"...?"
조커 카드를 한 번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유그드라실을 보기를 한 번.
그렇게 같은 행위를 몇 차례나 반복한 뒤.
아까보다 더 창백해진 블라디미르가 조커 카드에게 조용히 묻는다.
"너... 진짜냐?"
"네."
그 순간.
"흐어어어바나루고!"
블라디미르가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르며 황급히 편의점에서 떨어진다.
"유그드라실! 저게 어떻게 된 거야?!"
"...나도 모른다."
"뭐? 네가 모르면 누가 알아!"
진짜 조커 카드라니...! 진짜 조커 카드라니!
아니, 조커 카드의 출현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이곳이 관리자들의 영역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
"조커 카드의 능력이 무작위로 층에 떨어지는 건지는 알고 있었는데, 그게 우리 쪽도 포함이 되는 거였어?!"
"나도 모른다. 조커 카드한테 직접 물어보는 건 어떤가?"
"미쳤어?! 직접 물어보긴 뭘 물어봐! 자칫 잘못했다가 개입한 꼴이 되면 골치 아파진다고!"
관리자는 공략자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다.
개입하거든 그에 따른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그럼 쫓아내면 되지 않나?"
"그것도 개입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어째서 조커 카드가 이곳에 왔는지는 몰라도.
지금 그들이 조커 카드를 쫓아낼 수 있는 수단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끄으으으으! 젠장, 왜 하필 나한테 이런 일이...! 어떻게 해야 되지...!"
블라디미르가 두 손으로 머리를 싸매던 중.
딸랑-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조커 카드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하하, 환상의 상점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음?"
244화 편의점은 처음이지? (2)
벙찐 표정으로 조커 카드를 바라보는 블라디미르.
"그러니까 지금... 우리를 상대로 장사를 하겠다고? 얼빠진 것도 정도가 있지...."
피식피식 웃음을 흘리던 블라디미르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가던 그때.
유그드라실이 가지로 블라디미르의 옆구리를 툭툭 친다.
"조금 진정하지. 그리고 이 상황이 곤란한 건 사실이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우리에게도 좋은 일 아닌가?"
"...뭐라고?"
좋은 일이라니?
지금 공략자가 관리자의 영역을 침범한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는데.
그게 어떻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봐, 유그드라실. 지금 사태는 농담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고. 어떻게 조커 카드가 우리 구역으로 넘어왔는지, 이런 현상이 발생한 원인은 뭔지, 또 이 일을 본사에 보고할 경우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것 말고도 또...."
"블라디미르."
평소와 달리 사뭇 진중한 유그드라실의 음성에 블라디미르가 대답한다.
"왜?"
"그것들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조커 카드'와 관련된 일은 본사가 해결할 문제이지, 우리가 나설 영역이 아니잖은가?"
"...그래서?"
"보고는 차후에 하는 걸로 하고, 일단 상점을 이용해 보는 건 어떤가?"
블라디미르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린다.
"상점을 이용하자고? 하지만 그건 개입...."
흘끔-
블라디미르의 시선이 통짜 유리 너머의 진열대로 향한다.
[부자가 되는 100가지 방법]
[개인의 마블 - 8세 이상부터]
[푸케푸케몬 - 레드 스타 버전]
'저것들은....'
전에는 못 봤던 책들, 낯선 카드 팩.
그 외에도 여러 다양한 이름이 적힌 박스들이 있다.
'신상품들인가. 취급하는 상품의 폭이 전보다 훨씬 더 넓어졌군.'
저것들의 정확한 용도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의 휴식 시간을 더 알차게 만들어 줄 물건들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저건....'
거기다가 냉동고 한 칸에 가득 쌓인 박스들.
분명 냉동 피자들이었다.
심지어 갖가지 맛들이 적혀 있는 게, 종류도 다양하다.
"하아...."
블라디미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이용은 어렵겠지만, 구경하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것도 같네."
"좋은 생각이다."
상점주의 앞으로 다가가는 블라디미르.
"이봐, 조커 카... 아니, 공략자. 상점을 둘러보고 싶은데 가능한가?"
"하하, 원칙적으로는 패를 소지한 사람만 이용이 가능하긴 합니다. 다만 오늘은 특별한 경우이니 예외를 적용하죠. 들어오시죠. 아차, 옆의 분은 사이즈를 좀 줄여야 하실 것 같군요. 입구가 좁아서요."
상점주의 지목을 받은 유그드라실의 몸체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
유그드라실의 거대한 몸체가 잠시 흔들리는가 싶더니.
투두두두둑-
이내 거대한 나무는 오간 데 없고.
자그마한 소년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너, 그 모습 별로 안 좋아하는 것 아니었어?"
"그렇긴 하다만, 상점에 들어가려거든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 그보다 상점주, 이 정도까지 크기를 줄였으면 괜찮겠지?"
"물론입니다. 들어오시죠."
딸랑-
마침내 편의점의 문이 열리자.
"오오!"
두 관리자는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하며 편의점 내부를 구경한다.
"과연... 실물로 보는 건 확실히 느낌이 다르군."
"동의한다."
수정구로 볼 때와 달리.
편의점 안은 그들의 생각보다 쾌적했으며 또 넓었다.
"이게 음료수를 보관하는 수납장이로군. 호오, 일부러 차갑게 유지를 하는 건가?"
"어이, 유그드라실! 여기 좀 보라고! 신기한 것들이 꽤 있는데?"
진열대 곳곳을 돌아다니며.
상품들을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는 두 관리자.
"하하, 천천히들 구경하세요."
조커 카드가 어느새 의자에 앉은 채 차를 홀짝이고 있었지만.
"오오, 슈프림? 핫 내슈빌? 피자의 종류가 이렇게 많았다니, 놀랍군."
"여기에 있는 이 잡지들이랑 보드게임도 나쁘지 않아 보여. 이런 게 있으면 한동안 휴게실에서 시간 때우기엔 최고일 것 같은데?"
"면... 봉? 이건 어디다 쓰는 물건이지?"
그들은 오직 진열된 상품에만 관심을 보이는 중이었다.
잠시간 진열대 곳곳을 돌아다니던 중.
블라디미르가 혀를 차며 말한다.
"이 물건들을 살 수 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이야."
"음...."
공략자의 상점을 이용하는 것.
그것은 자칫 '개입'하는 꼴이 될 수도 있었기에.
그들은 선뜻 상품을 집지 못했다.
그러던 그때, 유그드라실이 의미심장한 말투로 말한다.
"아니, 그건 모른다."
"뭐가?"
"잘 생각해 봐라. 이곳은 탑 안이 아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유그드라실이 설명을 덧붙인다.
"애당초 개입에 대한 반향은 탑 안에서 공략자에게 간섭했을 때 작용되는 제재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지? 우리가 탑 안에 있나?"
"아...."
그들이 위치한 곳은 탑을 관리하는 관리 시설.
물론 이 또한 탑의 일부라고 볼 수는 있겠으나.
엄밀히 말해 공략자들이 활동하는 공간은 아니잖은가?
"탑 안에서 공략자들에게 간섭하는 건 명백한 개입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라면 어떨지, 궁금하지 않나?"
"...전례가 없는 일이긴 하지."
애당초 공략자가 관리자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부터 전례가 없던 일이긴 하지만.
그렇기에 유그드라실의 의견에 묘하게 설득되는 블라디미르였다.
"그래서 시험 삼아 상품을 사 보자고?"
"그래."
"음... 후우, 그래.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되겠지."
블라디미르는 냉동고에서 냉장 피자 한 판을 꺼낸 뒤.
계산대로 걸어갔다.
"이봐, 공략자. 이건 얼마지?"
"오, 근본 있는 치즈 피자라, 드실 줄 아시는군요. 면식도 있으신 분들이니 특별히 2골드만 받겠습니다."
"2골드라...."
조커 카드에게 골드를 주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다.
다만....
잠시간 금화 두 닢을 만지작거리던 블라디미르가 깊게 숨을 들이쉰다.
"후우!"
그리고.
짤랑-
2개의 금화가 상점주의 손에 놓이는 그 순간!
편의점 안에 묘한 정적이 흐른다.
"이봐, 블라디미르. 괜찮...."
"쿨럭...."
블라디미르가 돌연 기침을 하자.
유그드라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이 또한 개입이라는 건가."
그러던 그때.
블라디미르가 손을 흔든다.
"쿨럭, 쿨럭... 아냐...."
"뭐?"
"숨을 너무 깊게 들이마신 모양이야. 그래서... 커헉!"
"...."
숨이 넘어갈 것처럼 기침을 해 대는 블라디미르를.
무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그드라실.
"그래서 괜찮다는 건가?"
"쿨럭, 음음... 일단 괜찮은 것 같은데? 아무런 반동이 오지 않았어."
보통 개입을 하거든 관리자의 존재에 타격을 주는 반동이 와야 하건만.
어째서인지 블라디미르의 상태는 너무도 멀쩡했다.
"이상한 일이군.... 내가 한번 해 보도록 하지."
유그드라실은 마찬가지로 피자 한 판을 선택하곤.
2골드를 상점주에게 지불했다.
잠잠-
"...정말이군. 아무런 제재가 가해지지 않았다."
"하나만 사서 그런 것 아냐?"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러 개를...."
피자 외에 온갖 상품들을 계산대로 가져와 결제를 시도해 봐도.
두 관리자에게 어떠한 반동도 오지 않았다.
"오오, 이것도 괜찮다는 건가?! 그렇다면 이 정도 양은 어떠냐!"
"괜찮은 모양이군. 그렇다면 다음은 양을 3배로 늘려서...."
잠시 후.
텅텅-
진열대에 놓인 상품 중.
절반가량이 사라지고서야 두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괜찮은 모양이군."
"그러니까. 왜 이만큼이나 상품을 샀는데도 아무런 반동이 없는 거지. 물론 우리한텐 좋은 일이긴 하지만."
"여하튼 이걸로 확실해졌군."
"그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상품을 사도 반동이 없다!
그 말인즉슨....
"상점 안의 상품들을 모두 사도 괜찮다는 거다!"
"크흐흐흐...."
두 관리자의 면면에 흐뭇해하는 미소가 걸리던 중.
유그드라실이 아차 싶었는지 황급히 블라디미르에게 묻는다.
"근데 자네... 혹시 남은 골드가 좀 있나?"
"난 애당초 그런 잡동사니를 안 들고 다녀서."
"이런...."
유그드라실이 곤란해하는 표정을 짓자.
블라디미르가 상점주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봐, 공략자. 지금 우리가 소지한 골드가 없어서 그런데, 혹시 정보도 거래가 되나?"
"정보요? 뭐, 저야 정보도 환영하긴 합니다만, 괜찮으시겠어요?"
"반동만 없다면 상관없다! 좋다, 그렇다면 네게 쓸 만한 정보를 하나 주도록 하지! 잘 들어라! 특별히 거신의 정원에 숨겨진 비밀 지역으로 가는...."
순간, 블라디미르가 말을 멈추자.
유그드라실이 그를 의아하다는 듯 바라본다.
"왜 그러지?"
"이게 뭐랄까... 감이 좋지 않아."
"흠, 그런가?"
"갑자기 더 말을 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단 말이지."
"네 감은 꽤 정확한 편이긴 하지."
"흐음, 기다려 봐라."
갸웃거린 블라디미르가 다시금 입을 열어 본다.
"이번에는 마왕성의...."
순식간에 해쓱해져 고개를 젓는 블라디미르.
"아, 아니야. 느낌이 너무 안 좋아."
"네 감이 이 정도로 반응하는 거라면, 아무래도 정보로 거래하는 건 자중하는 게 낫겠군."
유그드라실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블라디미르가 상점주에게 말한다.
"공략자, 미안하게 됐다. 아무래도 정보로 거래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군."
"하하, 괜찮습니다. 애당초 정보를 받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거든요."
"호오...."
무언가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
상점주가 뭘 알고 있는지 궁금하긴 했으나.
지금 중요한 안건은 그깟 호기심이 아니다.
"그보다 오늘 이곳에 흘러들어 온 건, 우연인 건가?"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군요."
'흠, 조커 카드가 이곳에 오게 된 건 능력의 여파가 아닌 건가?'
뭐, 상관없나.
엄밀히 오늘 일이 사고라곤 해도.
이렇게 피자를 잔뜩 살 수 있는 사고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니까.
'조커 카드가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겠지.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라. 금방 골드를 갖고 오겠다."
"하하, 그러죠."
* * *
약 1시간 뒤.
관리자들의 공용 휴게실.
콰작-
게한나가 메마른 빵을 씹으며 멍하니 수정구를 바라보자.
한쪽에서 카드를 돌리고 있던 동료가 그녀에게 묻는다.
"게한나, 뭐 그런 맛대가리 없는 걸 먹고 있어? 어차피 그딴 걸 안 먹어도 활동하는 데 아무 지장 없잖아?"
맞는 말이다.
구태여 먹지 않아도, 수면을 취하지 않아도 그들에겐 아무런 영향이 없으니까.
"후우, 생전의 습관 같은 거야."
"그렇긴 한데, 굳이 그것 말고도 다른 맛있는 것도 있잖아?"
"질렸어."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재미있는 놀이라도.
반복을 거듭하다 보면 지루해진다.
이 맛없는 빵을 곱씹는 일이 나름 신선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하아...."
게한나가 한숨을 내쉬며 마른 빵을 툭 던진다.
"유그드라실이랑 블라디미르가 부럽네."
"뭐? 갑자기 또 그게 무슨 헛소리야?"
"그 바보들은 한동안 몰두할 취미거리가 있으니까, 그게 부럽다고, 얼간아."
조커 카드가 팔던 피자를 넘어선 궁극의 피자를 만들겠다며.
하루 종일 피자를 닮은 쓰레기를 만들던 두 관리자.
무언가에 몰두하는 그 모습이 오늘따라 괜히 부러워진다.
"그럼 너도 같이 껴서 만들면 되는 거잖아."
"이미 꽤 발전한 것 같아서. 다 만든 판에 끼어드는 건 재미없잖아?"
"거참, 취미 특이해. 그럼 너도 와서 카드나 돌리든가."
그러던 그때.
쾅-
갑자기 휴게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으흐흐흐흐...."
어딘가 음흉한 미소를 흘리는 블라디미르와 유그드라실이 휴게실 안으로 들어온다.
"저놈들은 또 왜 저래?"
"이번에는 진짜 성공작을 만들었나 보지, 물론 그것도 실패작이겠지만."
이제는 이 상황이 익숙했던 걸까.
대부분의 관리자들이 대수롭지 않아 하던 그때.
텅-
블라디미르가 카드판 위에 발을 탁 올리며 소리친다.
"모두 집중! 집중해라!"
"뭐, 뭐 하는 거야?! 다 이기고 있었는데! 미쳤어?!"
붉은 기운으로 번들거리는 블라디미르의 눈동자가 관리자를 쓱 훑더니.
이내 무언가를 툭 던진다.
우수수-
"저, 저건...."
관리자들은 목도했다.
고오오오오-
[찰떡 빵], [고기만두], [점심 햇살]....
블라디미르가 테이블 위로 던진 음식들.
"오오오! 이 자식들...! 드디어 성공한 건가! 믿고 있었다고!"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치는 누군가의 등짝을, 옆의 누군가가 철썩 때렸다.
"이 멍청아! 저걸 쟤들이 만들었겠냐? 저건...!"
그것들은 분명....
"조커 카드가 파는 음식들이잖아?!"
"브, 블라디미르! 유그드라실! 네놈들 어떻게 살아 있는 거냐...?"
245화 편의점은 처음이지? (3)
휴게실 안에 있던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번에 있었던 대전의 주관은 메피스토가 맡았었으니까 선물로 받은 것도 아닐 테고...."
"한 개, 두 개, 세 개.... 도대체 너희, 몇 번이나 선을 넘은 거야?!"
예상된 반응들이 쏟아져 나오자.
블라디미르가 가볍게 코웃음 친다.
"이 정도쯤이야 가벼운 일이지."
"가벼운... 일이라고?"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게한나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들을 쏘아본다.
"아무리 너희가 제멋대로인 놈들이라고는 해도 이런 것에 목숨을 걸 놈들은 아닐 테고. 무슨 수를 썼어?"
"수라니?"
"이 물건들, 개입해서 얻은 건 아닐 것 아냐?"
게한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떻게 반동을 피한 거야? 규칙의 허점이라도 발견한 거야?"
"그런 거면 우리도 좀 알려 주라고! 나도 자유롭게 상점 좀 이용해 보게!"
"알려 줘!"
관리자들의 질문 세례가 쏟아진다.
유그드라실의 몸체에서 껄껄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본사에서 정한 규칙은 절대적인데 그런 방법이 있을 리가 있나?"
"그럼 그 상품들은 어떻게 구한 건데?!"
"자, 자, 일단 진정들 하지."
터억-
유그드라실이 더 많은 상품들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두자.
관리자들의 눈이 하나같이 휘둥그레진다.
"이게 대체...."
"자세한 이야기는 이따가 해 줄 터이니, 먼저 지금을 즐기는 게 어떤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가 아니잖나?"
"...."
몇 시간 뒤.
탕, 탕, 데구르르-
빈 맥주병이 바닥을 나뒹굴고.
테이블 위에 가득 놓여 있던 음식들도 어느새 동이 났다.
"으하하하핳! 좋군, 좋아!"
"역시 조커 카드가 취급하는 상품들은 격이 다르다니까?"
"자, 자! 한 잔 더!"
새로운 술을 접해서일까.
대부분은 반쯤 취해 있거나 골아떨어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다.
"그보다 유그드라실, 자네한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녹색 피자는 쓰레기였다는 게 새삼 실감이 나는군! 크허헣!"
한 관리자가 반쯤 취하여 게한나의 어깨에 팔을 올리자.
게한나는 무심히 팔을 쳐 내며 말한다.
"기껏 취했는데 깨고 싶지 않다면 눈 똑바로 떠."
"...음? 아, 유그드라실이 아니었군. 크허허헣! 실례했네!"
"...."
게한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유그드라실을 바라봤다.
"이제 슬슬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어? 어떻게 구한 거야?"
"어떻게 구했냐라...."
유그드라실이 컵에 넣어 둔 자신의 얇은 뿌리를 빼내며 계속 말한다.
"조커 카드가 왔었다."
"왔었다고? 어디에?"
"블라디미르의 관리실."
"...."
한동안 묘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니까 조커 카드가 상점이랑 같이 블라디미르의 관리실에 왔다는 거지? 그래서 너희한테 상품을 팔았고?"
"그렇지!"
"...취했냐?"
유그드라실이 싸한 게한나의 눈빛을 받으며 몸을 들썩인다.
"뭐, 헛소리처럼 들리긴 하겠군."
"헛소리처럼이 아니라 그냥 헛소리지. 공략자가 어떻게 관리실로 넘어와?"
"유그드라실 말이 농담 같지만 진짜야, 진짜!"
블라디미르가 유그드라실의 의견에 힘을 실어 주었지만.
게한나는 좀처럼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으으, 답답해 죽겠네! 믿기 어려운 건 알겠는데 진짜라니까?"
"취기나 없애고 말해!"
"그건 좀 아까운데.... 아무튼 진짜라고!"
둘의 말싸움 소리가 커다래지자.
파티를 즐기던 관리자들도 그 소리를 듣곤 토론을 시작한다.
"조커 카드의 상점이 관리실에 떴었다고?"
"당연히 헛소리지. 내가 보기엔 저 녀석들 개입해 놓고 모른 척하는 게 분명하다니까?"
"이야, 음식에 목숨을 태워? 저 녀석들도 이제 반쯤 정신을 놨나 보구만?!"
"아! 아니면 그런 것 아냐? 개입이 아닌 우회 루트를 찾아냈다든가!"
"그건 오히려 더 위험하지! 본사에서 알아채면 어쩌려고?!"
술기운으로 몽롱하던 파티 현장이 다시금 활기를 띠던 중.
"그래, 그런 거라고 치자."
한참의 말다툼 끝에 결국 게한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런 걸로 치는 게 아니라, 진짜라니까 그러네?"
"알아서들 해. 내가 개입한 것도 아니고, 소멸해도 너희가 하지 내가 하냐?"
"그러니까 개입한 게 아니라...."
휙-
게한나가 자리를 뜨자.
블라디미르가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린다.
"하여간 저놈의 성격은...."
"선뜻 믿기 어려운 부분이 많긴 했다."
"하긴, 솔직히 나 같아도 갑자기 조커 카드가 관리실에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헛소리하지 말라는 말부터 나갈 것 같긴 해."
블라디미르가 킥킥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다가.
유그드라실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말한다.
"그보다 그 자식... 괜찮겠지? 본사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조커 카드한테 개입을 할 것 같은데...."
"아마 하겠지. 다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어쨌건 조커 카드는 탑을 대표하는 이레귤러. 거기다가 계속 승리하기도 했지. 그러니 이번 일을 본사에서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를 없애기보단 능력을 일부 조정하는 방식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흠, 그런가...."
"신경 쓰이나?"
유그드라실의 질문에 블라디미르가 픽 웃는다.
"좋은 걸 받았잖아? 뭐... 사실 그보다도, 계속 지켜보다 보니 조금 감정이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정이라도 든 모양이군."
"정은 개뿔! 그놈이랑 나는 시작부터 악연이었다고!"
블라디미르가 잊고 있었던 T-9999 이야기를 끄집어내어 열변을 토하자.
유그드라실이 껄껄 웃는다.
"그건 그렇고...."
테이블 위의 빈 박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블라디미르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조커 카드가 또 방문하는 일은 없겠지?"
"음? 푸하하하, 당연히 그럴 리 없지. 전례가 없던 특수한 상황이 몇 번이고 반복될 리가 없잖나?"
"하긴."
환상의 상점이 등장한 건 어디까지나 시스템적인 문제로 인한 것일 터.
그리고 그 문제는 곧 해결될 터.
"심란한 표정은 그만 짓고, 오늘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어떤가?"
"그래야지. 아 참, 근데 냉동 피자들 남았지?"
블라디미르의 질문에 유그드라실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다. 그것들은 내 연구의 방향을 잡아 줄 기준점이니까."
"휴, 난 또 홀라당 다 먹어 버린 줄 알았네."
"이번에야말로 조커 카드를 넘어선 궁극의 피자를 만들어 보지."
두 관리자는 결의를 표명하듯.
챙-
각자가 들고 있던 잔을 맞부딪쳤다.
* * *
며칠 뒤.
"흐아아암!"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블라디미르.
그의 시선이 테이블로 향한다.
두툼-
테이블에는 예전보다 훨씬 모양새가 잡힌 그럴싸한 피자가 놓여 있었다.
"이제 확실히 근접한 것 같긴 한데... 뭔가가 빠진 것 같단 말이지."
피자 위에 올라간 각종 토핑들과 엇비슷한 맛을 내는 재료들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으나.
무언가 맛의 중심이 빠져 있는 느낌이다.
"이 산미, 아무리 봐도 이 붉은 소스에서 느껴지는 것 같은데... 왜 내가 만든 소스와 다른 거지? 피로 만드는 게 아닌 건가?"
깊게 맛을 고찰하는 블라디미르.
시작은 유그드라실의 녹색 피자가 못마땅해서였으나.
지금은 누구보다도 피자 만들기에 열심인 그였다.
'으음, 도저히 모르겠군. 다시 먹어 보고 연구를....'
피자 박스에 손을 뻗던 블라디미르가 손을 움찔거린다.
"음?"
슬쩍 박스를 살펴보니 안에 내용물이 없다.
'벌써 다 먹었다고? 그럴 리... 아.'
블라디미르는 미간을 짚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 며칠간.
[흠, 맛의 깊이를 느끼려면 일단 먹어 봐야지.]
[이건 오직 탐구를 위해서지! 결코 먹고 싶어서 먹는 게 아니야!]
[...한 조각만 더?]
한 조각, 한 조각 슬쩍슬쩍 피자를 먹었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간다.
"크으읏...."
이 무슨 실수인가!
분명 아껴 먹고 아껴 먹을 것이라 스스로 다짐까지 했건만.
'그, 그래도 아직 다른 것들이 남은... 아.'
생각해 보니 그건 파티를 하는 데 다 썼던가.
"...."
블라디미르가 공허해 보이는 표정으로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던 그때.
덜컹-
누군가가 그의 관리실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더니.
"오, 블라디미르, 있었나?"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유그드라실인가. 무슨 일이야...."
"목소리가 다 죽어 가는군."
"...급격하게 죽고 싶어졌다."
블라디미르의 울적해 보이는 표정을 내려다보던 유그드라실의 몸체에서 환한 음성이 들려온다.
"오오! 그러하면 그 목숨, 상점의 상품을 사는 데 써 주는 건 어떤가? 기왕 소멸하는 김에... 농담이네, 농담이야."
"...그래서 왜 온 건데?"
유그드라실이 블라디미르의 앞으로 가지를 뻗는다.
"피자 좀 빌려주게."
"...맡겨 놨어? 아니, 그보다 네 건 다 어쩌고?!"
분명 상점에서 산 상품들 중.
파티에서 사용한 양을 제외하고 남은 것을 공평하게 반으로 나눠 가졌건만.
"다 먹었다."
"뭐?!"
그 수량이 결코 적은 것이 아닌데 벌써 다 처먹었다는 말인가?!
"연구용으로 쓴다고 하지 않았어?!"
"원본을 맛보고 탐구하는 건 연구자의 기본적인 덕목이 아니던가!"
"아아, 그건 동의해."
유그드라실이 그것 보라는 듯 가지를 위아래로 흔들어 댄다.
"역시 자네는 잘 아는군! 그러니...."
"그래서 나도 다 먹었다."
"과연 자네를 믿고... 뭣? 전부 다 먹었다고?"
"애당초 그런 맛있는 걸 가만히 놔두는 게 이상하잖아?"
"...."
두 관리자가 잠시간 서로만 쳐다보던 그때.
"어이, 블라디미르! 문 좀 열어 줘!"
"나도 좀 들어가자!"
"나도!"
어째서인지 관리실 바깥에서 요란한 음성들이 들려온다.
"또 뭔데?!"
블라디미르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문을 열기 무섭게.
우르르르르-
"어우, 업, 욱, 커윽!"
냅다 블라디미르의 관리실로 들어오는 관리자들.
단체 행동이라곤 휴게실에서 모임을 가질 때가 전부인 그들이건만.
어째서 갑자기 그의 관리실로 찾아온 걸까.
"블라디미르, 혹시 말이야."
"없어."
"뭔 줄 알고?"
"조커 카드의 상품 말하려는 것 아냐?"
"...천잰데?"
아아, 이럴 줄 알았다.
그야 상점주의 상품을 접한 적이 있었다지만.
다른 관리자들은 파티에서 접한 것이 처음이었으니까.
"에이, 우리 사이에 그러지 말고, 진짜 남는 것 없어?"
"파티에서 시원하게 뿌렸으면 됐지! 아, 진짜 없다니까 그러네?"
"그러냐.... 그럼 혹시 유그드라실은...."
모두의 시선이 유그드라실에게로 쏠리자.
유그드라실이 장난기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 몫은 전부 블라디미르가 보관하고 있다만?"
"...?"
그 순간.
관리자들의 눈빛이 전사의 그것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블라디미르, 그렇다는데?"
"잠깐! 진짜 아무것도 없다고! 다 먹었다니까?!"
"좋아, 그럼 우회해서 개입하는 법이라도 알려 줘. 우리도 조커 카드의 상점 좀 이용해 보자!"
"그래! 우리도 좀 알려 줘라!"
블라디미르가 반쯤 눈이 뒤집힌 채 소리친다.
"내가 말했잖냐! 갑자기 조커 카드의 상점이 내 관리실 안에 생겨났다고!"
"얀마! 말도 좀 그럴싸하게 지어내야지! 그게 말이 되냐?!"
"진짜라니까! 유그드라실! 너도 뭐라고 말 좀... 이 새끼 어디 갔어?!"
"사실을 고할 때까지 네놈은 유그드라실이 만든 특제 피자를 먹어 줘야겠다. 갖고 와!"
두둥-
정체불명의 초록색 건더기가 드글거리는 녹색 피자가 줄줄이 들어오자.
블라디미르가 고함을 내지른다.
"이 개새끼들아!"
그러던 그때.
화아아아악-
갑자기 관리실 한쪽에서 찬란한 빛이 번쩍인다.
그리고 이내 빛이 사그라지자.
"...어?"
"지, 진짜네?"
관리자들이 멍하니 한쪽 방향을 바라본다.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
246화 편의점은 처음이지? (4)
조커 카드의 상점이 나타나리라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걸까.
다들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편의점을 바라본다.
"어, 음... 이거... 괜찮은 건가?"
"어이, 블라디미르. 본사에 보고는 했지?"
"그렇게 말할 때는 듣는 척도 않더니! 진작 했다, 이것들아! 괜히 불똥이 나한테 튀는 일은 사양이니까!"
블라디미르의 항변이 끝나기 무섭게.
관리자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해 간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러면 본사에서 공문이 오기 전까지는 시간이 있다는 거네?"
"음?"
블라디미르의 짧은 반문이 채 끝나기도 전에.
관리자들이 우르르 편의점 앞으로 내달린다.
쾅, 쾅-
"어이! 조커 카드! 문 열어라, 문!"
"그 금밥인지 뭔지! 그거 맛있더라! 한 줄, 아니! 있는 걸 다 사야겠다! 아니면 그냥 내놓든가! 선택해라!"
"흑곰 맥주! 그놈 참 별미더구나!"
각자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이름을 외치며 조커 카드를 찾는 관리자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블라디미르는 속으로 혀를 찼다.
'다들 완전히 눈이 돌아갔군.... 당연한 건가.'
조커 카드에게서 받았던 선물 덕에 비교적 바깥 세계의 상품에 익숙했던 그와 달리.
대부분의 관리자들은 전에 열었던 파티에서 처음 바깥 세계의 상품을 접했으니.
'기존에 알고 있던 "맛있다"라는 개념을 넘어선 새로운 음식과 음료가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으니 다들 환장할 수밖에.'
낯선 경험, 감각.
그것들은 무료함에 익숙해진 관리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터.
쾅, 쾅-
"얼른 열어!"
"아니면 조커 카드 네놈! 설마 우리도 패를 발급 받아야 된다는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뒤진닭볶음면! 고라니 우동!"
"키에에에에엑!"
이미 반쯤 좀비화가 되어 바깥 세계의 음식의 이름을 외쳐 대는 관리자들.
'그보다 저 문... 용케도 버티네.'
조커 카드의 상점이 무적 효과를 받는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관리자들의 무수한 노크에도 흠집조차 나지 않을 줄이야.
'설마 전력으로 때려도 멀쩡한 건 아니겠지?'
블라디미르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유리문을 바라보던 바로 그때.
띵-
그의 앞으로 커다란 편지봉투 하나가 떠올랐다.
"어! 왔다! 본사에서 공문이 왔어!"
블라디미르의 외침이 울리자.
"버, 벌써 왔다고?!"
"으으, 오기 전에 하나라도 샀어야 했는데...."
전투적으로 문을 두들기던 관리자들의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열어 봤어? 뭐라고 적혀 있어?"
"보나 마나 능력의 특수성 때문에 생긴 문제라서 조치했다고 적혀 있겠지."
"제에에엔장!"
모두가 아쉬워하는 눈으로 편의점 안에 진열된 상품을 바라보던 그때.
"엥?"
편지봉투 위로 떠오른 편지지를 훑던 블라디미르의 입에서 당황해하는 한 마디가 터져 나온다.
"왜? 뭐라 적혀 있는데 그래?"
"설마 우리한테 책임을 묻겠다든가, 그런 건 아니지? 솔직히 이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
"에이, 아무리 본사 놈들이 막무가내라고 해도 그렇지, 설마 우리한테 책임을 떠넘기겠어?"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이던 블라디미르가 얼빠진 얼굴로 말한다.
"아무 문제 없다는데?"
"그래, 당연히 그렇게 조치를... 뭐라고?!"
"농담이지?!"
"직접 와서 보든가!"
황급히 블라디미르의 앞으로 몰려드는 관리자들.
모두의 눈동자가 편지지 쪽으로 쏠린다.
[해당 사항을 면밀히 검토한 결과,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을 확인함.]
[귀 관리자들은 업무에 집중할 것을 요망.]
편지지 안에는 짤막한 문구들이 적혀 있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고?"
이레귤러가 관리자들의 영역으로 넘어왔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블라디미르, 이게 진짜 본사에 온 공문인 것 맞아?"
"그럼 진짜지, 가짜겠어?"
"하지만 이건 도저히 말이 안 되잖아?"
모두가 당혹감을 금치 못하던 중.
스윽-
게한나가 슬며시 편의점 앞에 줄을 선다.
"게한나, 너... 뭐 하는 거냐?"
"본사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잖아. 그럼 이용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오히려 이용 안 하는 게 머저리인 것 아냐?"
"...."
짧은 정적이 흐른다.
수 초간 서로가 서로의 눈치만 보던 중.
"내, 내가 먼저!"
블라디미르가 냅다 몸을 날린다.
그것이 신호탄이 됐을까.
"얀마! 넌 전에도 샀잖아! 이번에는 양보해!"
"웃기는 소리! 내가 먼저다!"
누구 할 것 없이 편의점을 향해 몸을 던졌고.
"내가 못 가면 너도 못 간다!"
"크아아아악!"
삽시간에 블라디미르의 관리실은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 * *
화아아악-
"후우!"
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을 훑어 냈다.
'엄청 쫄렸네.'
특히나 이번에는 무슨 관리자들이 그리도 많았던 건지.
'관리자들이 이 정도로 바깥 물건에 관심이 많을 줄은 몰랐네.'
하나같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려고 난리를 벌이던 그 모습은 정말....
공략자와 무슨 차이가 있나 싶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무사히 돌아와서 다행이다.'
관리자가 갖고 있는 힘은 이미 여러 번 목도했기에.
그들이 얼마나 강한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다들 젠틀 했지. 한, 두 놈 정돈 무데뽀로 나올 줄 알았는데.'
관리자임에도 불구하고.
'거래'라는 행위를 통해 상품을 가져가고자 했으니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오늘 이후로 지하층에 가는 건 삼가도록 할까, B1층부터 B3층도 얼추 파악을 끝냈으니.'
알아내고자 했던 지하층들의 정체는 대략적으로 확인을 끝냈다.
B1층은 아마도 관리자들의 휴게실.
B2층은 관리자, 블라디미르의 관리실.
B3층도 관리자, 유그드라실의 관리실이었다.
'알고 싶었던 건 다 알아냈으니까, 실험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는 편이 낫겠지.'
어차피 내 주요 고객은 공략자들이다.
구태여 위험을 감수하며 관리자들을 상대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보다....'
난 주방 쪽을 한번 훑곤, 흘끔 손목의 시계를 살폈다.
'분신이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서 카페도 한번 들러야겠네.'
난 두 팔을 쭉 뻗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2달 뒤.
웅웅웅-
가지각색의 모양을 가진 음표들이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그리고 물결치는 음표들의 아래.
"정말 아름다운 음율이야...."
정교한 실력으로 공예된 것 같은 유리 형태의 여신상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마치 살아 있기라도 한 것인지.
황홀해하는 표정으로 허공의 음표들을 바라보는 여신상.
"...."
손에 기다란 현악기를 든 남자가 흘끔 여신상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시금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퐁, 퐁-
소리 대신 음표들이 공중으로 떠오르던 그때.
"그만하면 됐다."
여신상에서 음성이 흘러나온다.
"참으로 아름다운 곡조였다. 마음이 평안함과 기쁨으로 요동친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구나."
그녀의 말이 끝나자.
이지수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럼 이걸로 된 걸까?"
"약속은 지켜야겠지."
"고마워."
"다만 잊지 말거라. 음악은 끝없는 고뇌와 아픔을 동반하는 고통의 길. 그럼에도 그 고통을 회피하고자 한다면 그 실력은 금세 녹슬고 금이 가 부서져 버릴 거다. 노력하고 또 노력해라, 이 꽃망울들이 완전히 꽃을 피우게 되는 그날까지."
꽃을 어루만지듯, 음표를 쓰다듬던 여신상이 움직임을 멎는다.
그 순간.
띠링-
[선율의 여신상이 당신들의 연주에 크게 만족했습니다.]
[퀘스트, '영원히 반복되는 선율'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최초로 65층, 천상의 울림을 클리어 하였습니다.]
[보상으로 100,000골드가 지급됩니다.]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천상의 악보가 지급됩니다.]
.
.
.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수많은 메시지들.
"끝났나...."
이지수는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뱉곤.
현악기를 든 남자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그쪽이 없었다면 65층 공략은 어려웠을 거야."
"흥, 딱히 네 녀석들을 도와줄 생각은 없었어. 그저 내 실력이 어디까지 먹히나 시험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던 거지."
남자의 차가운 말투 때문일까.
"거참, 떽떽거리네."
옆에 있던 실비아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뭐라고? 하! 이제 쓰임새가 다했다고 막 나가자는 건가?"
"말을 똑바로 하라는 거지. 딱히 우리가 차별을 한 게 아니잖아? 어중간한 능력을 가진 공략자가 뒤처지는 건 당연한 탑의 생리야. 목적을 갖고 생산 계열 능력을 가진 공략자들을 차별하려는 게 아니었다고. 그냥 약하네? 하고 보니까 생산 계열 능력자였던 거지."
"그게 차별이라는 거다!"
두 남녀가 격렬한 토론을 벌이는 중.
이지수의 눈앞에 추가 메시지가 떠오른다.
[65층, 천상의 울림의 공략으로 다음과 같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칭호, '고요한 멜로디', '최초로 65층을 돌파한 자'가 주어집니다.]
[최초로 65층을 돌파한 용감한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며, 보상은 활약 여부에 따라 차등 지급 됩니다.]
[보상으로....]
최초로 65층을 공략함에 따른 보상 메시지.
당장 확인하고 싶긴 하지만.
지금은 다른 것이 우선이다.
[66층으로 이동할 수 있는 계단이 열립니다.]
[계단의 생성 위치는 천상의 홀입니다.]
메시지를 본 이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규모가 작은 층이니까. 잘됐어.'
크기가 작은 층은 이런 게 편하다.
공간 자체가 한정적인 덕에.
계단이 생성되는 위치도 제한적이었으니까.
철컥, 그그그그긍-
홀의 우측 끝.
반투명한 벽이 자리하고 있던 공간 쪽에서 계단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음...."
익숙하게 계단 옆의 공략석부터 살펴보는 이지수.
[65층-공략자: 선구자들 클랜, 마에스트로]
'이걸로 65층 공략도 완전히 끝났구나....'
아이러니하게도 62층에서 길게 시간이 끌렸던 덕분에.
도리어 65층까지 수월히 공략을 끝마쳤다.
'그때 연을 맺었던 대장장이 덕에 마에스트로랑도 연결이 된....'
"그러니까 그건 그쪽의 피해망상이라니까?! 우리는 제작 계열 공략자들을 핍박한 적이 없다고!"
"흥, 말로는 뭔들 못 할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댁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우습지 않아? 결국 너도 다른 평범한 제작 계열 공략자들과 차별화된 능력을 갖고 있으니까,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거잖아?"
실비아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음률을 실체화해 적을 공격한다거나.
음악을 통해 아군을 지원하는 능력은 평범한 공략자라는 단어와 거리가 있었으니까.
"개소리 마라!"
마에스트로가 낮게 으르렁거린다.
"네가 뭘 안다고! 겨우 악기나 연주하는 능력 하나만 받았을 때 내 심정이 어땠는지 알아?! 그렇다고 받아 주는 클랜도 하나 없고, 악기 말고 다른 무기는 사용하지 못하는 능력 때문에 이 등신 같은 바이올린으로 슬라임을 때려잡아야 했던, 그때의 내 심정을 아냐고!"
"오. 그건 굉장하네. 근데 그걸로 공격이 돼?"
"끄, 끝까지 조롱을!"
'하아....'
끝없이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실비아와 마에스트로.
저대로 뒀다간 밤새도록 싸움을 벌일지도 모르겠다.
"그만들 해."
"난 싸울 생각 없는데 저쪽이 계속 입을 털잖아?"
"마에스트로, 그쪽도 그쯤 해."
이지수의 중재 덕분인지.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마에스트로가 이지수를 힐끔 쳐다본다.
"흠흠, 추태를 보였군. 어쨌건 홍염! 이쪽은 약속을 지켰다. 이제 네 차례다."
"그래, 알고 있어."
마에스트로가 65층 공략에 협조했고 또 공략에 성공했으니.
이제 이쪽이 약속을 지킬 차례다.
"나름 네임드 클랜들에겐 전부 공문을 보냈어. 어지간하면 다들 참석할 거야."
"그것 고맙군. 내 말에는 힘이 없어서 말이야. 하지만 홍염의 공문이라면 다들 모이겠지."
"근데 슬슬 말해 줘도 괜찮지 않아? 왜 클랜들을 다 소집하려는 건데?"
마에스트로가 입을 꾹 다물자.
실비아가 나지막이 말한다.
"대답할 생각 없는 것 같은데, 그냥 내려가자. 열차 운행 시간에 맞추려면 조금 빠듯하다고."
"그래야지."
마에스트로의 부탁은 차치하고.
어차피 정비를 하기 위해 55층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64층으로 내려가서 종말특급을 탑승해야 한다.
"그보다 아직 65층에는 종말특급이 없나 보네."
"상점주가 그랬잖아, 공략된 층까지만 운행한다고."
"아 참,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실비아를 뒤로하고.
"다들 정비 끝났으면 내려...."
이지수가 선구자들에게 소리치던 그때.
화아아악-
천상의 홀에 커다란 빛무리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뭐, 뭐야. 새로운 이벤트인 건가?"
"하지만 65층 공략은 끝난...."
이윽고 빛이 가시자.
선구자들 전원이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본다.
둥-
기다란 폭, 널따란 넓이를 가진 역.
역에 정거한 새하얀 열차를 바라보던 이지수가 조용히 웃으며 말한다.
"이러면 굳이 64층에 내려갈 필요는 없겠네."
247화 검은 물결 (1)
몇 시간 뒤.
[우리 열차는 '드라고니아'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약 30분간 해당 역에 정차할 예정이오니, 이용객 여러분께서는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치이이이익-
열차가 완전히 멈춰 서자.
탑승했던 승객들이 한 명, 한 명 내리기 시작한다.
"우와! 뭐야?! 진짜 55층이잖아?!"
"이러면 앞으로 굳이 계단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겠는데?"
처음 종말특급을 이용해 본 것일까.
몇몇 공략자들이 탄성을 지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선구자들이 뒤이어 열차에서 내린다.
"새삼 이런 말 하기 뭐하지만, 진짜 무지하게 빠르긴 하네."
"빠르지."
동료의 말에 먼저 내렸던 알터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난 무엇보다 왔던 길을 되돌아갈 필요도, 습격당할 일도 없다는 게 가장 마음에 들어."
"아, 그것도 인정!"
아무런 위협이나 걱정 없이 층을 오갈 수 있다는 것.
이것만 하더라도 종말특급의 가치는 숫자로 매길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으니.
"거기다가...."
"다들 내렸으면 이동하자."
어느새 열차에서 내린 이지수가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던 알터에게 눈짓을 주곤.
고개를 돌려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오오오-
여전히 음울할 정도로 어둡고 검은 하늘이다.
보고 있으면 저 짙은 어둠 속에 빨려 들어갈 정도로....
"어이, 대장! 이동하자며? 뭐 하고 있어?!"
"아."
멋쩍어하는 미소를 짓는 이지수.
"잡생각이 길었네. 이동하자."
그녀의 말이 끝나자.
"빨리 가자고! 간만에 뜨거운 물에 몸을 불릴 생각을 하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지!"
"55층에라도 마을이 있어서 다행이야, 진짜로."
"그건 조금 아쉽더라. 65층이 마을 후보지가 될 가능성이라도 보였으면 좋았을 텐데."
선구자들 사이로 떠들썩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와중.
"쉬는 것까지는 말리지 않겠지만, 약속이 우선이야!"
마에스트로의 재촉하는 음성이 들려온다.
"걱정 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니까."
이지수는 고개를 끄덕이곤.
전방을 향해 손짓했다.
"일단 5구역으로 가자."
역을 나가 5구역으로 나아가는 선구자들과 마에스트로.
어느덧 거대한 벽이 모습을 드러내자.
이지수와 그 일행은 곧장 벽 내부로 들어선다.
"자자, 1박에 3골드! 장기 투숙 하시거든 10% 깎아 드립니다!"
"사념체들의 힘을 때려 박은 사념의 갑옷 한번 보고 가세요!"
다양한 용인들 그리고 공략자들이 섞여 활발함을 자아내는 거리.
예전 판자촌 같았던 5구역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여긴 올 때마다 모습이 달라지는 것 같네."
"드라고니아에서도 가장 낙후된 지역이었잖아? 그러니 변화의 폭도 가장 클 수밖에."
"변화는 좋은 거지. 특히 그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욱, 잡종 냄새...."
코를 잡고 그들의 옆을 스쳐 가는 용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알터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인다.
"아직 모든 게 바뀐 건 아니지만."
아직 위계에 따른 차별도 남아 있었으며.
여전히 드라고니아 이외의 상당 지역은 죽음의 기운만이 넘실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하하하-
크르르릉-
그럼에도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다들 웃으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 아니겠는가?
"여하튼 살기 좋아진 건 맞잖아? 이래서 리더가 중요한 거라니까? 머리가 바뀌니까 분위기도 확 달라지잖아!"
"동의해."
드라고니아의 실질적 주인.
골드 드래곤, 모그.
그의 등장 이래로 드라고니아는 하루하루 달라져 나가고 있으니까.
"뭐, 그것도 상점주가 간섭해서 그런 거긴 하겠지만."
알터가 눈앞에 서 있는 동상을 올려다본다.
여우 가면에 익숙하게 올라가 있는 입꼬리를 가진 황금색의 동상.
봐도 봐도 적응이 되질 않는다.
"흐음, 나도 원주민이나 키워 볼까?"
"갑자기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니, 그러면 나도 동상 같은 걸 하나 만들어 주나 해서,"
알터의 농담에 선구자들 모두가 피식 웃던 중.
이지수가 일행에게 소리친다.
"잡담은 그만하고 이동하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잠시 후.
4구역의 중심가이자.
대다수의 공략자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는 상업 거리.
"...."
선구자들이 멍하니 한 카페를 바라본다.
[카페 럭키 스위티 드래곤]
"약속 장소가... 여기 맞지?"
"맞아."
"어, 음... 하필 많고 많은 카페들 중에서 왜 굳이 여기를...."
알터가 탄식하듯 침음하던 그때.
"크르릉, 주인들! 어서 와라! 맛있는 음료와 음식이 있다!"
메이드복 차림의 용인들이 그들에게 들어오라는 듯 손짓을 해 온다.
"으으, 누구 머리에서 나온 건지 몰라도 취향 참 고약하네...."
"그래도 적긴 해도 수요가 있다던데?
"엥? 설마... 그 엘프 좋아하던 놈들이 여기까지 진출한 건 아니지?"
"그냥 그놈들 사업 모델만 따라 한 거겠지. 메이드복 차림의 엘프들은 엄청 인기가 많았었으니까."
선구자들이 수군거리는 와중.
이지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에스트로에게 묻는다.
"그보다 왜 약속 장소를 여기로 잡은 거야?"
"희한한 질문을 하는군. 드라고니아에서 가장 매력적인 장소를 회담 장소로 정한 것뿐인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건가?"
잠시 침묵하던 이지수가 무심한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취향은 존중해."
"오오, 혹시 그쪽도 용인들의 매력을 알아보겠어? 바위보다 단단하지만 세밀하게 몸을 덮고 있는 비늘, 기다란 꼬리 그리고 경멸 어린 눈동자.... 보면 볼수록 빠져든단 말이지."
"...."
마에스트로가 용인의 아름다움에 대해 설파를 이어 가려던 찰나.
이지수가 딱 잘라 말한다.
"일단 들어가자, 다들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음? 아. 흠흠, 그러지."
* * *
"크르르릉, 럭키 스위트 드래곤에 어서 와라!"
메이드복 차림의 용인들이 바삐 카페를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있다.
모두가 즐거워하며 카페의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고 있었지만.
"...."
한쪽 테이블에선 무겁다 못해 음울한 분위기가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이보게, 홍염. 아무리 임시 회담이라지만, 장소가 좀 좋지 못한 것 아닌가?"
무라단이 자신의 앞에 놓인 곰돌이 모양의 컵을 슬쩍 밀어내며 말하자.
옆에 있던 지식 클랜의 부클랜장도, 레전드 클랜의 클랜장도 한마디를 덧붙인다.
"장소가 좀 불만이긴 한데, 그보단 난 바로 본론을 듣고 싶군."
"홍염, 슬슬 말해 줄 때도 됐잖아? 이렇게 다 모은 이유가 뭐야?"
이지수가 테이블에 앉은 이들의 면면을 훑는다.
지식, 레전드 클랜 등.
그 모두가 탑에서 그 위명이 자자한 명실상부 최상위 클랜들.
그리고 그들을 구태여 소집한 이유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뭐?"
"이쪽이 우리 모두를 한자리에 모이게 해 달라고 했거든, 그게 65층 공략에 협조하는 조건이기도 했고."
이지수의 대답에 대다수가 표정을 찌푸린다.
"내 참, 그러니까 너희의 사적인 이유 때문에 우리를 불렀다고?"
"사례는 할게."
"당연히 그래야지! 우리가 한가한 사람들도 아니고!"
"흠, 그보다 마에스트로라고 했던가? 그래서, 우리를 모은 이유가 뭐지?"
무라단의 질문이 끝나자.
좌중의 시선이 마에스트로에게 쏠린다.
"인권 개선을 위해서다."
"인권... 개선?"
마에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난 제작 계열 공략자들의 현실과 처우를 개선하고 싶다. 지금껏 제작 계열 공략자들이 당했던 핍박, 억울함! 나열하자면 끝도 없겠지. 난 그것들을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그쪽들이 협조를 해 줬으면 해."
"제작 계열 공략자들의 인권 개선이라...."
대부분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내 참, 무슨 이야기를 하나 했더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데?"
"...뭐?"
"솔직히 그렇잖아? 딱히 우리가 소외시키려고 한 것도 아니고, 그냥 능력이 별 볼 일 없어서 도태된 건데, 그걸 뭐 어떻게 도우라고?"
틀린 말은 아니다.
약한 자는 먹히거나 도태된다.
그것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원초적인 탑의 생리이기도 했으니까.
"그런 놈들을 돕는다고 해도 우리한테 무슨 이득이 있는데?"
"딱히 공략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잖아?"
몇몇 클랜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마에스트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진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정말 그럴까? 대장장이를 필요로 하던 62층은 어땠지? 그리고 이번의 65층은? 내가 없었다면 과연 클리어가 가능했을까?"
"...."
모두가 입을 다물자.
이지수가 천천히 입을 연다.
"최근 들어 그런 층들이 늘어나긴 했어. 소외받던 능력들을 필요로 하는 층들이 말이야."
"그렇지! 역시 홍염은 생각하는 게 다르군!"
마에스트로가 눈을 찡긋거리던 중.
무라단이 그에게 묻는다.
"그러니까 그쪽 말을 정리하자면, 이후의 공략에 협력해 주는 대가로 제작 계열 능력자들의 처우 개선을 원한다, 이런 말인 건가?"
"그래! 잘 이해했네!"
"하지만 말이 개선이지,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네. 누가 힘도 없는 동료를 옆에 두고 싶어 하겠나. 무능한 아군은 적보다 위험하다는 걸 모르나?"
마에스트로가 얼굴을 찌푸린다.
"그러니까 그걸 좀 어떻게 하자는 것 아냐! 그러니까 이렇게 하자고. 아래층에 탑카데미 같은 기관을 만들어 줘. 오직 제작 계열 공략자들을 위한 학업 시설을 말이야."
"...?"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그런 거라면 그냥 탑카데미들 중 하나를 택해서 들어가는 게...."
"그게 안 되니까 그렇지! 능력들이 변변찮아서 탑카데미의 기초적인 커리큘럼조차 따라가기 벅찬 게 현실이니까."
그 말을 들은 실비아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그 정도로 쓸모가 없으면 그냥 아래층에 처박혀 있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어허! 실비아!"
"왜? 맞는 말이잖아?"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려고 하자.
이지수가 마에스트로를 보며 말한다.
"그쪽의 의도는 이해했어. 그래서, 그쪽의 조건을 전부 수용했을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건 뭐지?"
"우리 장인 클랜은 이후, 탑 공략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
"호오, 그건 조금 관심이 가는군."
장인 클랜.
쓰레기라 취급되는 제작 계열 능력자들만이 모였음에도.
어떻게든 탑 등반을 하고 있는 다소 신비한 클랜이었다.
"홍염, 알고 있던 이야기인가?"
무라단의 물음에 이지수가 고개를 젓는다.
"처음 듣는 이야기야.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안 하겠다고 했거든."
"그런가.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지?"
"나쁘지 않은 조건인 것 같아. 장인 클랜이 돕는다면 공략에 더 탄력이 붙을 테니까."
장인 클랜에는 갖가지 제작 계열 혹은 이상한 능력을 보유한 공략자들이 대거 포진되어 있다고 들었다.
"다만, 당장 결정을 내릴 수는 없겠네."
"왜지? 딱히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을 제시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아니면...."
마에스트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다.
"그만한 투자를 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제작 능력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런 뜻이 아니야. 일단 탑카데미를 지은 건 우리 선구자들이 맞지만, 의견 자체는 우리 머리에서 나온 게 아냐. 상점주지."
"그 말은...."
이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점주와 상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아서."
"흠, 관리자와 상의를 한다고 한들.... 뭐, 좋아. 그렇게 하자고. 그래서, 상점주는 언제 오는 거지?"
"몰라. 그래도 조만간 55층에 모습을 보일 거야. 우리가 새로운 층을 공략하고 오면 항상 그쯤에 모습을 보이더라고."
마에스트로도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결국 상점주가 열쇠인 건가."
그러던 그때.
카페 바깥에서 웅성거림이 울려온다.
"떴다! 환상의 상점 떴다!"
"뭣들 하고 있어! 달려!"
도대체 몇 명이 환상의 상점을 향해 달리고 있는 건지.
카페 안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였다.
이지수가 미소를 머금은 채 마에스트로를 바라본다.
"운이 좋네. 바로 가 볼까?"
248화 검은 물결 (2)
'흠....'
난 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65층 공략 성공 메시지를 보고 온 건데, 이건 또 예상 밖이네.'
본래 오늘은 장사도 하고 선구자들과 대화도 나눌 겸 온 것이건만.
난 여타의 다른 공략자들과 달리 자그마한 케이스를 어깨에 걸치고 있는 남자를 힐끔 살폈다.
'희한한 인간이네.'
대부분의 공략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우선적으로 추구한다.
당연한 거다.
그렇게 쌓인 이익들이 곧 자신의 무력으로 연결되니 말이다.
'그런데 소외된 공략자들을 챙기겠다?'
그 의도가 조금 궁금하긴 한데... 뭐, 상관없으려나.
딱히 의중 자체가 나쁜 것도 아니거니와 무엇보다 공략에 도움이 되는 것 같으니.
"흠, 좋습니다. 제작 계열 공략자들만을 위한 커리큘럼을 따로 만들어 보죠."
"시원시원하군!"
"기존의 커리큘럼을 조금만 손보면 되는 거니까요. 그것만으로 장인 클랜의 협조를 얻을 수 있다면 큰 득이죠. 그렇다면 이후에는 선구자들과 함께 움직이신다고 생각하면 될까요?"
나의 물음에 마에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 이행되는 동안에는 우리도 적극적으로 공략에 협조한다고 약속하지."
"좋습니다."
난 웃으며 그의 손을 맞잡으면서도.
바삐 머리를 굴렸다.
'장인 클랜이 합류하면 66, 67층은 조만간 클리어되겠지.'
뛰어난 제작 계열 능력자들이 모인 장인 클랜이 합류한다면.
66, 67층의 클리어는 어렵지 않을 거다.
뛰어난 장신구를 만드는 것도, 세상 어디에도 없는 아름다운 옷을 지어 내는 것도.
그들에게 있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테니까.
'가만있자... 68층은 잠시 쉬어 가는 느낌의 층이었고, 69층도 지금 선구자들의 스펙이라면 분명 공략에 성공할 거야.'
이렇다 할 함정이나 수행해야 할 퀘스트가 없었던 68층은 물론이거니와.
10인이 하나의 파티로 구성되어 층의 보스를 잡아야 하는 69층도 선구자들이라면 분명 공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문제는 70층이려나.'
난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을 이어 갔다.
'으음, 거기는 공략법이 안 떠올라서 놔두기는 했는데.'
장인 클랜의 합류로 66~69층의 공략이 그리 머지않은 상황.
선구자들이 70층을 수월히 공략하게 하기 위해선.
70층에 대한 추가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는 것이 좋을 터.
'그래, 일단 다시 70층으로 가 보자.'
* * *
다음 날, 오전.
"흐음...."
난 커피를 홀짝이며 편의점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을 응시했다.
빵, 빠앙-
널따란 차도 위를 오가는 수많은 차들.
"여보세요? 아, 예예! 지금 가는 중입니다. 예, 금방 가겠습니다!"
"어, 자기야. 나 이제 출근 중!"
높다란 건물들과 도심지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
난 그 모습들을 보며 픽 실소를 흘렸다.
'진짜 리얼하게도 만들어 놨네.'
모르는 이가 봤다면 정말 바깥 세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말이다.
'퀘스트 메시지도 여전하고.'
퀘스트: 잠시간의 여흥
설명: 눈앞에 주어진 세계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내용: ?
보상: ?
하지만.
딸랑-
편의점 바깥으로 발을 내딛기 무섭게.
띠링-
[닿을 수 없는 세계에 진입하였습니다.]
[정신 오염이 시작됩니다.]
[서서히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서서히 정신이 침식됩니다.]
.
.
.
[묶음 무적이 적용 중입니다.]
이 세계가 갖고 있는 이면의 일부가 메시지로 드러난다.
'내 참. 그냥 층에 있는 것만으로 정신이 침식된다니.'
70층은 퀘스트 층이다.
나야 괜찮다지만 공략자들은 한번 들어오면 클리어 전까지는 나갈 수가 없다는 거다.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느냐, 아니면 그 전에 클리어 하느냐의 싸움이라.... 의미는 없지만.'
정신착란은 이미 해결책을 마련해 뒀다.
정신착란 면역 효과가 있는 PB 상품, 특제 땅콩버터를 만들어 뒀으니까.
'다만, 진짜 문제는....'
내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던 그때.
누군가가 나의 옷소매를 잡아당긴다.
"아저씨, 아저씨!"
내 무릎 언저리 정도 크기의 꼬마 소녀가 날 올려다보며 묻는다.
"그 가면 어디서 샀어? 나도 사고 싶어! 얼마야?"
"하하, 이건 받은 거라서 나도 잘 모르겠네."
"우움! 그게 뭐야!"
볼을 부풀린 채 심통 부리던 소녀가 이번에는 내 팔을 가리킨다.
"그럼 이건 얼마야?"
질문은 계속됐다.
"아저씨 다리는 얼마야? 손가락은 얼마야? 심장은 얼마야?"
"...얼마냐고?"
난 조용히 검지를 둥글게 말아 엄지손가락 위에 올렸다.
그러곤.
"그딴 걸 알겠냐?"
"...어?"
주저 없이 소녀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퍼어어어억-
소녀의 몸이 쏘아진 화살처럼 튕겨 날아간다.
'하여간 이놈의 기분 나쁜 질문 패턴은 바뀌지를 않았네.'
"그건 그렇고...."
난 슬쩍 도보 위의 사람들을 바라봤다.
홱-
분명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저마다의 삶의 터전을 향해 이동하던 사람들이 90도로 고개를 꺾은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예, 지금 가는 중입니다. 지금 가는 중입니다. 지금 가는 중... 가는 중. 가는 중. 가는...."
"자기, 자기, 자기, 자기."
저벅, 저벅, 저벅저벅저벅, 휘이익-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던 것들이 어느새 검은 무언가로 탈바꿈하더니.
내 쪽으로 날아오기 시작한다.
'어이구, 또 시작이네.'
난 슬쩍 주먹을 치켜들었다가.
이내 고개를 젓곤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철퍽, 철퍼덕-
검은 슬라임 같은 것이 창에 들러붙어 떨어지질 않던 중.
그것의 위로 드러난 자그마한 입에서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네놈... 왜 멀쩡한 거지.... 아아... 아무래도 좋아.... 먹는다.... 흡수한다...."
"먹는다고?"
난 입구에 선 채.
검은 물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퍼어어억-
검은 슬라임 같은 것이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떨어져 내리자.
가려졌던 시야가 잠시나마 드러난다.
고오오오-
건물들이, 차도는 오간 데 없고.
검고도 거대한 실루엣이 파도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다시 봐도 좀 그러네.'
물론 저걸 없애는 것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다.
다만 지금 내가 원하는 건, 보스의 소멸이 아니라 층에 대한 정보이다.
'공략에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 있어야 70층도 수월히 클리어 할 텐데. 으음.'
내가 뒤통수를 긁적이는 사이.
검은 슬라임 같은 것이 천천히 편의점에서 떨어진다.
"너... 반드시... 먹는다.... 반드시...."
꿀렁꿀렁-
검은 세계가 다시금 바깥 세계의 모습으로 일변한다.
방금 있었던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것처럼 말이다.
"예, 사장님! 금방 가겠습니다!"
"자기야, 조금 바빴어. 응!"
난 내 쪽을 주시하며 이동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며 픽 웃었다.
'참 골치 아픈 층이야.'
그래도 뭐 어쩌겠는가.
일단 최대한 70층에 대한 정보를, 퀘스트와 관련된 단서들을 모아야지.
'뭐, 대충 어떤 층인지 감은 오지만. 굳이 이곳의 모습이 바깥 세계의 모습과 닮은 건, 아마도....'
내 가정이 맞다면.
이곳은 분명 개미지옥이다.
공략자들이 가장 원할 법한 환상을 보여 주고, 그 대가로 목숨을 갈취하는 개미지옥 말이다.
'일단 정보를 더 수집할까.'
먼저 퀘스트를 진행하기 위한 정보를 모으는 게.
현실적으로 가장 좋을 터.
난 목을 좌우로 꺾곤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같은 시각.
"흐음."
이제는 정말 피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흡사한 빵을 우물거리는 블라디미르.
그는 바라보던 수정구에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돌렸다.
"내 차례로군. 군주의 무덤을 필드에 안착, 수비로 전환한 뒤 마법 카드를 설치하고 차례를 종료하겠다."
"수가 너무 뻔히 보이는 것 아닌가?"
"깍까악, 궁금하면 공격해 보지 그래?"
거무튀튀한 까마귀 형태의 조인이 웃으며 듀얼을 하고 있다.
블라디미르가 그런 그에게 소리쳤다.
"이봐, 셰이드! 조커 카드가 70층에 간 것 같은데, 괜찮겠어?"
"조커... 카드?"
셰이드의 날개가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의 부리 사이에서 까악까악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괜찮다, 괜찮다! 이미 충분히 대비해 뒀다!"
"오, 꽤나 자신만만한데?"
"당연하다! 너희야 뭣도 몰라서 조커 카드에게 당했다지만, 난 다르다!"
까마귀 조인이 우쭐거리며 말을 이어 간다.
"너희가 당한 일들을 고찰하고 학습해서, 층을 더 업그레이드해 뒀다!"
"업그레이드라.... 하는 건 좋은데, 당연히 본사에 보고는 한 거지?"
"깍까악! 물론이다! 보고는 기본이다!"
그러한 셰이드의 모습 때문일까.
호기심이 동한 블라디미르가 계속 묻는다.
"근데 무슨 업그레이드를 했는데 그렇게 자신만만한 거야?"
"조커 카드가 원하는 건 내 층의 정보다. 정보를 얻어 공략자들에게 공유하려는 게 분명하다! 까아악!"
"그래서?"
"그걸 전력으로 방해할 요소들을 추가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블라디미르.
"조커 카드의 정보 수집을 방해하는 요소? 그게 가능해?"
무적 상태인 조커 카드에게 어지간한 함정은 없는 것만도 못할 것인데.
도대체 무슨 함정을 팠다는 걸까?
"까악까악! 우선 정보를 수집 못 하게 시야를 원천 차단 했다."
"원천... 차단?"
블라디미르가 흘끔 수정구를 살핀다.
꾸물꾸물-
검은 슬라임 같은 덩어리들이 거대한 막 같은 형태를 이뤄.
조커 카드의 주변을 완전히 덮어 버린 상태였다.
"설마 원천 차단이라는 게... 저걸 말하는 건 아니지? 조커 카드한테 저런 게 통할 리가 없잖아?"
블라디미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퍼어어억-
수정구에서 굉음이 울렸다.
어느새 부서진 검은 막 사이로 걸어 나온 조커 카드가 다시금 걸음을 이어 가고 있었다.
"저것 보라고. 저건 그냥 걸어 다니는 함정 분쇄기라니까?"
"까아악! 난 그간 조커 카드에 대해 많은 조사를 했다. 그리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그건 바로! 조커 카드의 무적이 무한하지 않다는 거다! 참고로 70층의 보스 드림 이터는 엄청난 재생 능력을 갖고 있다!"
"뭐? 그건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안이... 아."
블라디미르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셰이드가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뛰어난 재생 능력을 바탕으로 계속 조커 카드의 시야를 가릴 거다! 그럼 조커 카드도 제풀에 지쳐 포기하겠지? 깍깍깍!"
어차피 조커 카드가 층을 헤집고 다니는 걸 막는 건 무리다.
그러니 전력으로 조커 카드의 정보 수집을 방해한다?
"과연... 확실히 나쁘지 않은 계획인데?"
"깍깍! 그렇지? 조커 카드의 조력이 없다면 결국 공략자들은 70층을 통과하지 못할 거다! 바깥 세계의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 뒀다. 놈들은 다들 층에 안주하려 할 테고, 결국 아무것도 모르고 드림 이터에게 먹히겠지!"
깍깍깍-
만족스럽게 웃는 셰이드.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그래도 계속 대비는 해 두는 게 좋을걸? 조커 카드 저놈 여간 미친 놈이 아니라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니까?"
"걱정 마라! 경험을 축적한 난 다르다!"
"흠...."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구는 꼴을 보니, 그냥 조커 카드가 시원하게 뚫어 줬으면 싶기도 하고.... 기분 묘하네.'
블라디미르는 이내 고개를 젓곤 다시금 수정구를 바라본다.
* * *
다음 날.
여느 때처럼 휴게실에서 수정구를 관음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블라디미르.
그런 그의 눈에 조커 카드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온다.
'호오, 또 뭔가를 하고 있군.'
어제도 70층에서 정보를 탐색하더니.
오늘도 70층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하고 있는 듯하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자세히 보니 손에 '강력반짝 클린 세제'라는 희한한 문구가 붙은 통을 든 채.
통 안의 내용물을 뿌려 대고 있다.
[흐음, 이건 아닌가?]
그다음 날.
[좋아, 이번에는 이걸로!]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물 뿌리듯 초코 과자를 흩뿌리는 조커 카드.
'저딴 게... 정보 탐색?'
조커 카드의 기행은 며칠째 반복되었고.
관심 있게 지켜보던 블라디미르의 표정도 어느덧 심드렁해질 무렵.
[으으, 끄아아아아아악!]
돌연 수정구에서 끔찍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다.
'음? 이 목소리는 조커 카드의 목소리가 아닌데?'
반쯤 졸고 있던 블라디미르가 황급히 수정구에 얼굴을 들이민다.
"오?"
그런데 수정구 안, 바깥 세계를 빼닮은 공간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출렁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249화 70층, 환상향 (1)
"호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흔들림은 그저 멸망의 전조에 불과했던 것인지.
쩌억-
뒤이어 하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정교하게 칠했던 페인트가 굳어 껍질이 뜯겨 나오듯.
하늘이었던 파편들이 후두둑 지면으로 떨어져 내린다.
쩌적, 쩌저저적-
뿐만 아니라 높다란 건물들도, 잘 꾸며진 가로수들까지.
엎어진 퍼즐 조각들이 허물어지듯 조각조각 갈라져 나간다.
'세계가 무너지고 있군. 그렇다는 건....'
잠시 상황을 파악하던 블라디미르는 수정구의 시점을 조커 카드 쪽으로 돌렸다.
[흠....]
태평하게 손을 탁탁 털고 있는 조커 카드.
놈의 앞에는 가지가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거대하고도 검은 나무가 서있었다.
다만 몸체에 구멍이 뻥 뚫려 있는 걸 보아하니.
그 상태가 썩 좋지만은 않아 보였다.
[이해할... 수가... 없다....]
[뭐야, 몸체 안의 핵을 부쉈는데도 아직 살아 있어? 생명력 하나는 더럽게 질기네.]
조커 카드가 혀를 내둘렀지만.
검은 나무에선 계속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째서 네놈은... 나의 세계를... 거부할 수 있었던 거지?]
[뭐?]
[이곳은... 네놈들의 고향.... 그리움으로 한이 맺힌 땅이... 아니었던 건가?]
조커 카드의 입술이 원 모양을 그린다.
[오? 그렇기는 하지. 근데 네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내 기억을 엿봤을 리는 없을 테고....]
[꿈속의 수많은 파편들 중... 몇 개를 엿봤을 뿐이다.... 그보다... 대답해라! 왜 이 이상향을 거부한... 거냐.]
[이상향? 이상향이라.]
조커 카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어 간다.
[그 이상향이 나한테는 현실 중의 하나일 뿐이라서.]
[...뭐? 그게 무....]
드림 이터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투둑, 투두두두둑-
몸 중심에 뚫린 거대한 구멍 주변으로 번져 있던 실선들이 순식간에 벌어지다가.
파창-
끝내 그 몸이 유리 조각처럼 깨져 나가 버렸다.
[흠.]
조커 카드가 우수수 떨어지는 조각들을 올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는데. 힘 조절을 더 했어야 했나?]
잠시 후.
화아악-
보스가 사라져 백색의 공간으로 변한 70층에서 빛이 퍼져 나온다.
"갔군."
조커 카드가 빛과 함께 사라진 걸 확인한 뒤.
블라디미르는 슬쩍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까악...."
어딘가 침울해 보이는 셰이드.
"충분히 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말했잖아. 대비고 자시고 저놈은 그냥 걸어 다니는 재앙의 화신이라니까?"
"...."
셰이드가 침묵하자.
블라디미르는 위로 차원에서 적당히 덕담을 던져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그래도 좋은 의미로다가 더 이상 조커 카드를 신경 쓸 필요는 없어졌잖아?"
"까악... 그건 그렇지."
덕담 때문일까.
이내 기운을 차린 셰이드의 입에서 새소리가 흘러 나온다.
"조커 카드의 정보 수집을 막진 못했지만 그래도 공략자 놈들이 내 층을 클리어 하는 건 어려울 거다! 깍까악!"
"오, 자신만만하네?"
"조커 카드야 바깥에 익숙하다지만 다른 공략자들은 그게 아니니까!"
"확실히 그건 그래."
"다만 몇 가지를 추가로 보강을 해야 할 것 같다. 조커 카드의 기억을 읽지 못했는데도 바깥 세계의 모습을 구현한 건 조금 문제가 있기도 하고, 또...."
셰이드가 아쉬웠던 점들을 스스로 고찰하자.
블라디미르가 슬며시 몇 마디를 얹는다.
"그럼 기왕 보강하는 김에 드림 이터의 외관을 좀 바꿔 보는 건 어때? 설마 그거, 유그드라실을 본떠서 만든 건 아니지? 너무 느낌이 없잖아."
"까악?"
"크기는 나쁘지 않았지만, 그래도 명색이 보스라면 가슴에서 빔 정도는 나와 줘야지!"
블라디미르는 손가락을 좌우로 까딱이더니.
쾅-
셰이드의 앞에 큼지막한 도면을 꺼내어 놓는다.
"까악... 이, 이건...."
"그래, 나의 야심작 T-9999의 설계도다. 비록 제대로 빛은 못 봤지만, 네 녀석이 사용해 보는 건 어때?"
"까아악... 빛도 못 본 거면 나한테 쓰레기를 주려는 거...."
"뭐?!"
* * *
몇 시간 뒤.
화아악-
집으로 돌아간 난 곧장 소파로 직행했다.
"후우...."
이제 1차적인 건 얼추 끝난 건가.
70층, 환상향.
이곳의 환경, 공략 방법, 퀘스트 진행 방식의 파악을 끝냈으니.
'하지만 조금 걱정이 되긴 하네.'
내가 답안지를 완성했다고 하더라도.
학생이 답을 적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물론 선구자들이 모범생인 건 맞지만....'
70층은 정말 바깥 세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바깥 세계의 모습을 충실히 재현한 공간이었다.
'혹시나 마음이 흔들리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을지 모르겠네.'
난 잠시간 고민하다가 이내 두 팔을 하늘 위로 쭉 뻗었다.
'에라이! 그래도 경험이 있는데 알아서 잘해 주겠....'
첨벙, 촤악, 촤아악-
"...."
옆에서 들려오는 물소리에 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정화한다.>
여느 때처럼 참기름 대야에서 깡통이 놀고 있는 건가 했건만.
<불순물을 정화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그컵에 참기름을 담아 그것을 제 몸에 끼얹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닌가?
"뭐 해? 참기름의 새로운 활용법 같은 거야?"
<누군가가 본 좌를 저주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음. 참기름을 활용한 정화 의식을 진행 중임.>
"...?"
정화 의식이라....
종교랑 관련된 프로그램이라도 봤나 보네.
"그보다...."
난 소파에서 일어나 마루에 놓인 캔버스 앞으로 다가갔다.
[발리나 전용 자리]
[깡통 전용 자리]
.
.
.
깡통 전용 자리 앞에 놓인 캔버스.
그 안은 다른 녀석들의 캔버스와 달리.
새하얗고 깨끗했다.
"깡통아, 노는 건 상관없는데 일은 하고 노는 거지?"
<이미 여러 그림을 완성함.>
"근데 이건 어째 백지인데?"
<그건 이미 완.성.된. 그림임.>
이미 완성이 됐다고?
어딜 봐도 그냥 백지인... 오.
자세히 보니 캔버스 중앙에 점 같은 게 몇 개 찍혀 있긴 하네.
"제대로 그린 게... 맞지?"
<전뇌를 총동원하여 그린 그림임.>
"음, 그래."
이런 그림이라도 일단 전시장에 놓기만 하면.
곧장 프라이빗 경매로 넘어가 삽시간에 팔려 버렸으니.
'거참, 진짜 예술의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 * *
약 2달 뒤.
백색의 공간.
고오오오-
[69층-공략자: 이지수 외 9인]
글자가 적힌 공략석 앞으로 선구자들이 집결해 있다.
"30분 뒤 진입한다! 그 전에 다들 마지막으로 정비해!"
이지수의 고함 소리가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가운데.
모두가 다음 층 진입에 앞서 최종 점검을 진행 중이다.
"1조, 이상 무!"
"2조도 이상 없수다!"
"3조도 확인 완료."
.
.
.
한차례 조직을 개편한 이래로.
선정된 각 조의 조장들이 보고를 이어 간다.
이윽고 보고가 끝나자.
이지수가 클랜원들을 보며 소리친다.
"다들 공략법은 확실하게 외워 뒀겠지?!"
"그건 당연히 외워 뒀지. 근데 그 상점주가 그렇게 신신당부할 정도면 얼마나 위험한 층인 거야?"
바로 며칠 전.
[일단 층의 모습에 현혹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명심하세요. 여러분이 보는 건 진실이 아닙니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이상향은 없어요.]
[그리고....]
그들이 70층 공략을 하기에 앞서 상점주가 물자를 판매하며 70층에 대한 공략법을 알려 줬었다.
"상점주가 그렇게 공략법을 자세히 알려 준 적은 처음이지 않아?"
"뭐, 그만큼 위험한 층이라는 거겠지."
"근데 지금껏 안 위험한 층이 있었나?"
"푸하하하! 그것도 그렇지. 그리고 우리는 지금껏 잘 공략해 왔어! 이번에도 그럴 거고!"
지난 두 달간, 69층까지 순식간에 돌파한 덕일까.
선구자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잡담은 그쯤 하고, 도핑 시작해! 끝나는 대로 올라갈 거다!"
"옙!"
이지수의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식사를 시작한다.
[끝내주는 김밥을 섭취하였습니다.]
[8시간 동안 근력이 4증가합니다.]
.
.
.
[PB 커피땅콩을 섭취하였습니다.]
[3시간 동안 정신력이 강력해집니다.]
잠시간의 도핑 타임이 끝났다.
"출발한다!"
선두에 선 이지수가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우오오오오!
선구자들 또한 전의를 다지며 그 뒤를 쫓는다.
이윽고 계단의 끝자락에 도착하자.
화아악-
익숙한 불빛이 넘실거리고 있다.
"70층, 진입한다!"
검을 빼어 든 이지수가 불빛 속으로 걸음을 내딛자.
띠링-
[70층에 진입합니다.]
[70층은 동시 진행 가능 인원의 제한 숫자가 없습니다.]
익숙한 메시지가 그녀의 눈앞에 떠올랐다.
'인원의... 제한 숫자가 없다고? 지금껏 인원의 제한 숫자가 없던 퀘스트 층이 존재했었나?'
여타의 퀘스트 층은 진입할 수 있는 인원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진입하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층의 난이도가 높다는 게 보편적으로 알려진 정설이건만.
'그렇다면 이번 층의 난이도는 도대체....'
그 생각을 끝으로.
그녀의 시야가 빛으로 번쩍거렸다.
* * *
"...."
모두가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멍하니 정면을 바라본다.
빵, 빵-
이제는 기억의 한 조각이 되었던 차의 클랙슨 소리.
은연중 코를 간질이는 매캐한 매연 냄새.
"아이고, 늦었네, 늦었어...."
익숙한 평상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분명....
"노, 농담이지? 이럴 리가 없잖아...!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잖아?!"
"진짜, 진짜 바깥이라고? 우리, 바깥으로 나온 거야?"
클랜원들이 크게 동요하자.
이지수가 나지막이 말한다.
"진정들 해. 상점주의 말을 잊었어? 저건 어디까지나 허구, 가상의 모습일 뿐이라고."
"알아, 아는데... 만약 70층이 끝인 거라면, 그래서 우리가 정말 바깥으로 돌아온 거라면...."
"정신 차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잖아?"
"하지만...."
그러던 그때.
띠링-
퀘스트: 잠시간의 여흥
설명: 눈앞에 주어진 세계를 마음껏 즐겨 주세요.
내용: ?
보상: ?
퀘스트 메시지가 떠오르자 모두의 표정이 숙연해진다.
"젠장...."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게 이 층의 노림수야."
이지수가 주변을 경계하며 말을 잇는다.
"정신들 차려. 이제부터 안쪽으로 들어갈 거야. 다시 말하겠는데, 여기는 탑 안이야, 바깥이 아니라."
그 말을 끝으로 이지수가 앞으로 움직이자.
모두가 그 뒤를 따른다.
잠시 후.
한 번화가 거리에 접어든 선구자들.
"와...."
거리를 거닐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거기다가.
[중년 피자]
[드랍십 에그]
[버거퀸]
.
.
.
거리를 가득 채운 각종 상점들에서 흘러나오는 매력적인 향기.
그것들은 분명, 그들이 한때나마 누렸던 문명의 이기임이 틀림없었다.
"저것들도 전부 가짜겠지?"
"하지만 가짜인 것치곤 너무 진짜 같아...."
뿅뿅-
인형 뽑기 기계를 조작하고 있는 커플.
줄을 선 채 음식점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 모든 것들이 생동감 있고 현실감 넘쳤다.
그러던 그때.
"어이구, 어디 촬영이라도 오신 겁니까?"
피자집에서 중년의 남자가 나와 그들에게 말을 건다.
"다들 옷차림이 꽤 특이하시네요, 하하! 그보다 괜찮으시면 저희 가게에서 식사를 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이래 봬도 이 근방에서 저희 피자가 맛있기로 소문이 자자하거든요!"
"...진짜 사람이랑 대화하는 것 같네."
"예? 푸하핳! 그야 진짜 사람이죠. 자자, 혹시 맛이 마음에 걸리십니까? 그렇다면 여기 시식용을 하나씩 드셔 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어느새 피자를 갖고 나온 남자가 선구자들에게 피자를 권유한다.
"피자라...."
"한 입만 드셔 보세요! 정말 끝내준다니까요?"
어째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재차 피자를 권유하는 남자를 보며.
'만약 아무런 정보도 예방 접종도 없었다면 홀린 듯 받았을지도 모르겠네.'
이지수가 피식 웃어 보인다.
"괜찮아. 피자라면 우리도 있거든."
"...예?"
이지수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냉동 피자를 꺼내어 흔들어 보인다.
"이거, 제법 맛있거든."
"그건.... 아뇨! 저희 집 피자가 더 맛있습니다! 꼭 드셔 봐야 됩니다! 꼭이요! 꼭!"
번들거리던 남자의 눈이 붉게 물들던 그때.
서걱-
이지수의 검이 허공에 반원을 그렸다.
250화 70층, 환상향 (2)
"...어?"
누가 채 말리기도 전에 일어나 버린 상황.
모두가 멍하니 바닥을 구르는 목을 바라본다.
"뭐야, 저거.... 진짜 피 아니야?"
"그, 그러게...."
진하면서도 진득한 쇠 냄새.
그것은 지금껏 그들이 수백 번도 넘게 맡아 온 익숙한 냄새였다.
"설마 대장이 죽인 게 진짜 사람인 건... 아니겠지?"
"하지만 분명 상점주가 이곳은...."
그래, 알고 있다.
저건 어디까지나 희망의 탈을 쓴 마물일 뿐이며.
그들을 둘러싼 모든 것이 허상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상점주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이 세상... 너무도 진짜 같아.'
'만약 이곳이 바깥 세계의 일부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만에 하나라는 가정 그리고 맹목적이지 못한 믿음과 당연한 의심이 마음 한구석에 스며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대, 대장...."
등 뒤에서 들려오는 알터의 음성에도.
이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는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군중을 노려볼 뿐이었다.
'자, 이제 어떻게 나올 거지?'
상점주는 층의 원주민을 죽였을 때.
보이는 패턴은 크게 2가지라고 했었다.
'곧장 모습을 바꿔 공격을 해 오거나, 아니면....'
"와아! 방금 검 휘두르는 것 봤어?! 난 검을 뽑은 줄도 몰랐네."
"저게 공략자구나.... 근데 피자 가게 주인은 왜 죽인 걸까?"
"글쎄? 뭔가 잘못한 게 있으니까 죽인 것 아니겠어?"
"비밀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게 아닐까?"
비명을 내질러도 시원찮을 상황이건만.
어째서인지 군중들은 두려움이 아닌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쯧...."
이지수가 나지막이 혀를 차며.
상점주가 했던 조언을 떠올렸다.
[주변의 모든 것들이 바뀐다면 차라리 편해요. 금방 퀘스트 보스를 대면할 수 있겠죠. 다만 상식 밖의 일을 저질렀는데도 원주민들이 그것을 당연한 걸로 인식한다면... 조금 귀찮아질 겁니다.]
그리고 그 귀찮은 일이라는 건 분명....
그녀가 생각을 이어 가려던 그때.
짝짝짝-
"과연 선구자들. 대단하십니다!"
어느새 한 남자가 박수를 치며 그들에게 다가온다.
"그러잖아도 저 마약 밀거래자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했는데, 이렇게 강경한 대처를 해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마약... 밀거래?"
알터가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옆에 있던 실비아가 속삭이듯 말한다.
"그냥 그런 설정인 거겠지. 잊었어? 우리의 행동에 따라 알아서 이유가 부여될 수도 있다는 거?"
"아차차, 그랬었지."
상황에 따라 형편 좋은 이유가 따라붙는다.
그것도 이 세계가 갖고 있는 특성 중 하나라고 상점주가 그러지 않았던가?
머쓱하게 웃던 알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근데 궁금하긴 하다. 만약 다른 원주민을 죽이면 이번엔 어떤 이유가 붙을까? 알고 보니 테러 조직의 수장이었다든가 강도였다든가 하는 이유가 붙는 것 아냐?"
"얼빠진 소리 하지 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잖아?"
"네 호기심을 충족하려고 막무가내로 원주민을 죽였다가, 보스를 클리어 못 하면 어쩌려고?"
보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층의 원주민은 되도록 죽이지 마라.
그 또한 상점주가 신신당부했던 사항이 아니던가?
"그냥 궁금하다는 거였지. 누구를 바보로 알아? 막무가내로 죽이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부터 바보 인증을...."
두 남녀가 속삭이는 와중.
이지수가 말을 걸어온 남자와 말을 주고받는다.
"그쪽은 누구시죠?"
"아, 소개가 늦었군요. 실례했습니다. 전 공략자 관리부 소속 요원, 이정구입니다."
"공략자 관리부요?"
이정구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 오해는 마셨으면 합니다. 저라고 숨어서 선구자분들의 꽁무니를 쫓고 싶진 않거든요. 다만... 아시죠? 공략자라는 존재가 워낙 특수하다 보니, 하하."
"...."
"그래도 여러분께는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탑 공략에 성공하신 덕에 지금과 같은 평화도 있는 거니까요!"
이정구가 말을 끝마치기 무섭게.
선구자들 중 한 명이 목소리를 낸다.
"저거, 허술한 구석이 있네. 구라를 치려면 좀 사실을 바탕으로 그럴듯하게 쳐야지. 그래서야 우리가 속겠냐?"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우린 아직 공략 중이라고, 이 자식아!"
이정구가 당황해한 표정을 짓는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금 여러분이 계신 곳은 탑 안이 아니라, 바깥입니다. 탑은 여러분이 70층에 올라간 것을 끝으로 소멸하지 않았습니까?"
"...뭐?"
선구자들 대다수가 침묵을 유지하는 가운데.
"저놈 표정 봐 봐. 자기가 하는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눈치인데?"
"상점주가 계속 주의를 줬던 이유가 있군. 거짓말을 저렇게 진솔하게 말하면 안 속아 넘어갈 수가 있겠어?"
"근데... 진짜 70층이 끝인 거고 사실 여기가 진짜 바깥 세계면 어떡하지?"
"이것 보라고! 벌써 속는 놈이 나왔잖아?"
일부가 작은 목소리로 숙덕거린다.
그런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기라도 한 걸까.
"아, 이해합니다. 참으로 가혹한 일정이었죠. 너튜브를 보던 저조차도 심하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 스트레스가 많이 심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슴에 손을 탁 올린 채 계속 말하는 이정구.
"하지만 괜찮습니다! 그런 부분들까지 모두 케어하기 위해, 저희 공략자 관리부가 존재하는 거니까요!"
"케어라...."
"여러분이 괜찮으시다면 센터에서 간단히 대접이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어떻습니까? 현장 정리는 저희가 할 테니 걱정 마시고요."
'공략자 관리부에 센터라.... 환상치곤 꽤 현실적이네.'
이지수가 쓴 미소를 짓던 중.
띠링-
그녀의 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퀘스트 '잠시간의 여흥'이 '준비된 미래'로 변경됩니다.]
퀘스트: 준비된 미래
설명: 도망치고 안주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다. 하물며 안주할 그곳이 이미 준비된 미래라면 말이다.
내용: 1주일 동안 이정구를 따라 바깥 세계 곳곳을 확인하고 이용해 보자.
보상: ?
'드디어 퀘스트가 바뀌었네.'
다시금 상점주의 말을 떠올리는 이지수.
[시작 퀘스트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진짜 중요한 건 그다음 퀘스트부터니까요. 보였던 행동에 따라 퀘스트 양식이 조금씩 달라지기는 하지만, 결국 종점은 하나입니다.]
[잊지 마세요. 종점까지 가는 동안 그곳이 환상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것만 망각하지 않는다면 무리 없이 클리어 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부터 진짜 시작이라는 거겠지.'
일단은 상점주의 조언을 따라.
정석대로 퀘스트를 이어 나가는 것이 좋을 터.
이지수가 웃으며 이정구에게 말한다.
"좋아요. 그 센터라는 곳, 가 보도록 하죠."
* * *
며칠 뒤.
"바다의 향기 두 잔 주문 들어왔어요!"
"애플티랑 애플민트티도 바로 만들어 주셔야 돼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방불케 하는 카페의 주방.
"오전 타임 라스트 오더입니다! 거신의 떡볶이, 마왕의 와플, 갈색 빵 그리고...."
브레이크 타임 전의 마지막 오더를 해치울 무렵.
또롱-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자.
난 핸드폰을 꺼내어 들었다.
[신규 영상이 올라왔습니다.]
[70층, 환상향 공략! 시작합니다!]
'호오.'
그러잖아도 70층 공략 진행 상황이 궁금했는데 이렇게 영상이 올라오다니.
난 얼른 해당 동영상을 눌렀다.
스스슥-
수십 명은 족히 들어갈 널따란 공간.
천장을 환히 빛내는 샹들리에의 빛 아래로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융단이 깔려 있었고.
빵, 빠아앙-
통짜 유리 너머로 보이는 전철이 경적을 내며 한강 위를 지나가고 있다.
'흠, 어디 호텔 같은 곳에서 묵고 있나 보네.'
[홍염, 우리 왔어!]
[여기 진짜 너무 좋더라! 쇼핑몰 좀 구경하고 싶다니까 아예 통째로 전세를 내 주는 것 있지?]
저마다 한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는 동료들을 보며.
이지수가 나지막이 묻는다.
[그거, 의미 있는 거야?]
[의미?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층을 클리어 하면 사라질 물건들이잖아. 그런데 그런 걸 사는 게 의미가 있나 해서.]
아무리 좋은 물건도 이곳에선 환상일 뿐인데.
구태여 사라질 환상을 손에 움켜쥔 동료들이 그녀로선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그건....]
[그냥 기분 전환 같은 거지! 어차피 앞으로 며칠은 더 대기해야 한다며? 그럼 잠깐 숨 돌리는 것 정도는 괜찮잖아?]
[맞아. 거기다가 환상의 상점에서 이렇게 많은 의상을 취급하는 것도 아니고.]
동료들의 말이 계속 이어진다.
[공략자들 대우하는 게 장난 없더라. 무슨 면책권? 우리가 어떤 죄를 저질러도 괜찮다던데?]
[환상이라는 걸 알지만... 나, 가족을 만났어. 당연히 도플갱어 같은 건 줄 알았는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진짜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리고 대화가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이지수의 눈도 점차 차갑게 내려앉는다.
'흐음.'
난 영상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 2페이즈인가 보네.'
쇼핑 따위를 즐기는 걸 보아하니.
아직은 층이 본격적으로 송곳니를 드러내기 전의 상태일 터.
'곧바로 보스가 등장했으면 편했을 텐데. 그보다 원주민들을 마구잡이로 죽인 건 아니겠지?'
원주민이 사망한 숫자에 따라 추후 등장할 보스의 강력함도 달라진다.
'그렇게 설명해 줬는데, 그러지는 않았을 테고. 뭐, 일단 3페이즈 전까지는 괜찮겠지.'
2페이즈는 유혹의 단계다.
세계의 모든 것을 누리고 즐길 수 있게 해 주며.
동료들 간에 합치했던 의견에 균열을 내고자 하는 층의 함정이다.
'2페이즈에서 별 소득이 없다 싶으면 3페이즈로 넘어갔던가.'
세 번째 퀘스트부턴 그 양상이 많이 달라진다.
세계가 전력을 다해 공략자를 죽이려 드니까.
'그걸 상대하는 건 조금 새롭긴 했었지만.'
내가 고개를 젓던 그때.
동영상에 무언가가 잡힌다.
콰르르르릉-
기다란 포신이 달려 있는 전차들이 호텔에서 멀지 않은 차도 부근에 일렬로 정렬하고 있다.
[이야, 저것 좀 봐! 전차야, 전차!]
[지하철 갖고 뭐 그렇게 호들갑이야?]
[아니, 그 전차 말고! 탱크, 탱크!]
영상에서 신이 난 것 같은 알터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와씨, 죽이네. 나도 저런 것 타고 탑 공략 하면 좋겠다!]
전차의 등장에 다들 감탄사를 흘리면서도.
하나둘 저마다 무기를 잡기 시작한다.
[저런 것도 부숴야 한다니, 아쉽네.]
[기념으로 한 대 맞아 보는 건 어때?]
[농담은 거기까지, 다들 준비해!]
이지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앙-
늘어선 전차들이 포신에서 불을 뿜는다.
그 순간.
콰과과과과광-
거대한 굉음이 연쇄적으로 울리며.
화면이 뱅글뱅글 돌더니 이내 검게 변하며 영상은 끝을 맺었다.
'이제 3페이즈까지 진입했구나. 나쁘지 않은데?'
물론 3페이즈는 쉽지 않긴 하겠지만.
'마물이라지만 사람의 탈을 쓴 놈들을 계속 때려잡는 게 쉽진 않지.'
갖가지 현대 무기들은 물론이요.
소총과 기관총 따위로 무장한 수많은 군인들에.
나아가 미사일까지 떨어지니까.
'그래도 알려 준 대로 진행하면 미사일이 떨어지기 전에 최종 페이즈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선구자들은 잘해 낼 것이다.
아니, 솔직히 못 해내면 그것도 문제가 좀 있어.
내가 거듭 실험하면서 얻은 정보들을 다 넘겨줬는데 말이지.
'그건 그렇고....'
난 흘끔 댓글란을 살폈다.
251화 응징, 당해야겠지?
[밀덕: 아아, 본 좌가 탑 안에서 K-9 자주포를 보게 될 줄은 몰랐군.]
[└폐지와 성실한 청년: 그게 뭔데, 십덕아.]
[└└밀덕: 님, 미필임?]
[전투공익: 근데 진짜 신기하긴 하네요. 진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같아요.]
[└답글A.I.: 진짜는 아니에요. 공략자들을 신처럼 대접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포탄을 갈기는 세상이잖아요.]
[└└전투공익: 어쩌라고, X발아!]
[└└└밀덕: ㅋㅋㅋㅋㅋ 급발진 뭐임. 공익인 이유가 있었누.]
[└└└└전투공익: 미필은 아가리 여물어라!]
[└└└└└밀덕: 응, 형은 기갑부대 출신이야.]
바깥을 완전히 빼닮은 세계가 출현한 탓일까.
이미 댓글창은 또 하나의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좋아요'를 받기 위해 개소리와 헛소리가 난무하고 있었지만.
[근데 진짜로 공략자들이 탑 밖으로 나온다고 생각해 보셈. 저게 현실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님?]
[이제 70층까지 왔음. 탑 공략도 머지않았다는 거임. 슬슬 이쪽도 미래에 대해 고민해야 할 시점인 듯. 솔직히 공략자들이 탑에서 나오면 군 병력 갖고 막을 수 있겠음?]
[진짜 공략자 관리부 만들어서 미리 준비해 두는 것도 괜찮긴 할 것 같네요.]
[ㅋㅋㅋㅋ 출산율도 해결 안 하는데 미래를 고민하겠누? 응, 다 같이 나락 가면 그만이야~]
개중에는 다시금 생각을 해 보게 만드는 논제도 보였다.
'확실히 공략자들이 바깥으로 나오게 된다면 여러 문제들이 생기겠지.'
지금껏 사람과 사람 간의 등급을 결정하던.
능력과 돈의 가치가 뒤바뀌진 않을 거다.
다만 권력의 양상이 크게 달라질 터.
'뭐, 솔직히 누가 권력을 잡건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만.'
그나마 신경 쓰이는 점이라면 공략자들이 밖으로 나옴으로써.
나의 정체가 들통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이긴 한데.
'지금껏 가면을 잘 쓰고 다니기도 했고, 능력도 있으니까.'
솔직히 무적 상태인 나를 누가 건드리는 게 가능하긴....
'아, 근데 가만.'
이거 탑 공략이 끝나도 능력이 유지되는 건가?
난 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만큼 고생을 했으니 당연히 능력이 남아 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미리 좀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은데. 그래야 나도 미리 대비를 하든가 대책을 세울 수 있으니.'
당연히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건 '탑 공략'이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도 방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공략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 될지 알 길이 없으니....'
난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을 이어 갔다.
'다시 가고 싶지는 않았지만, 역시 정보를 얻으려면 거기밖에 없겠지?'
물론 원하는 대답을 들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시도할 가치는 있을 터.
'좋아, 거기로 가 보자.'
난 자리에서 일어나 창고로 이동했다.
* * *
며칠 뒤.
관리자들의 휴게실.
"키에에에에에엑!"
"끄오오오오오오!"
몇몇 관리자들이 입에 거품을 문 채.
발광하며 휴게실 안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다.
"가져와! 해물볶음면 가져오라고!"
"점심햇살!"
"이런, 시끄러워서 집중이 안 되는군."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유그드라실이 그들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그들의 입에 쑤셔 넣는다.
"일단 이거라도 먹고 진정들 하라고."
우물우물-
"이건... 피, 자...."
"그래! 나와 블라디미르가 사력을 다해 만든 진짜 피...."
"맛있...."
잠시나마 눈동자가 돌아오는 듯싶더니.
"그래도 해물볶음면!"
"키아아아악!"
이내 다시금 광기에 잠식되는 관리자들.
"하아, 중증이로군."
"그러게 말이야."
어느새 옆에 앉은 블라디미르가 혀를 내두른다.
"설마 저렇게까지 중독돼 금단증상을 보일 줄은 몰랐다니까."
그들은 이치를 초월한 존재들.
그 어떠한 공격도 함정도 그들에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마음에서부터 비롯된 감정은 어쩔 수 없었지만.
"뭐, 기대감 때문이 아니겠나?"
"기대감? 무슨 기대감?"
"다시 조커 카드가 이곳에 올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몇 달째 코빼기도 보이질 않으니 말이지. 그만큼 실망이 큰 거겠지."
유그드라실의 대답에 블라디미르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가?"
"뭐, 그렇다고 해도...."
유그드라실은 광기에 잠식된 관리자들을 흘끔 바라봤다.
"이건 해물볶음면입니다.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을 위해 면은 말린 데드웜을 사용했고, 매콤한 맛을 내기 위해 해상 왕국의 향신료를 곁들여 봤습니다."
"음, 으음...! 이븐 하게 익었... 아냐, 이 맛이 아냐!"
저마다 자신들이 맛있게 먹었던 음식의 아류작들을 선보이며.
연구 결과를 보이는 관리자들.
"저 모습은 조금... 추하긴 하군."
"너도 처음 피자 만들 때 저랬어."
"...."
유그드라실의 몸통에서 머쓱해하는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런데 말이네. 조커 카드 녀석이 언제 올지는 나도 궁금하긴 하군."
"글쎄, 막말로 다시는 안 올 수도 있는 것 아냐?"
"...!"
유그드라실이 충격을 받은 듯 가지를 움찔거린다.
"내가 그놈 입장에서 생각을 좀 해 봤거든? 근데 이곳에서 상품을 팔아 봐야 아무런 이점이 없겠더라고."
"...이점이 없다고? 나와 친밀해질 수 있는 이점이 있다만?"
"너랑 친해져서 뭐 할 건데? 정보를 줄 수 있어? 아니면 공략에 도움을 줄 수 있어? 돈이야 공략자들한테 장사해서 벌면 그만인 거고."
"...."
확실히 블라디미르의 말은 꽤나 일리가 있었다.
"조커 카드의 구미가 당길 만한 걸 이쪽에서 준비해야 한다는 말이로군...."
"뭐, 그런 셈이지. 근데 겨우 공략자가 파는 상품 따위에 휘둘리는 거, 솔직히 자존심 상하잖아?"
그들은 관리자들이다.
탑의 층을 설계하고 기획하며 탑의 모든 것을 주무르는 절대자들이었다.
그런데 겨우 음식 몇 개에 줏대 없이 휘둘린다면.
그 얼마나 꼴불견일까.
"과연.... 우리는 관리자! 중립을 지키며 결과를 관찰하는 냉정한 관찰자! 그게 바로 우리지."
"그래! 그러니까 본질을 잊지 말자고! 아무리 조커 카드가 파는 음식들이 맛있다고는 해도, 우리 자존심까지는 팔지 말자고!"
"과연!"
두 관리자가 의기투합하여 서로를 바라보던 그때.
화아아악-
휴게실 한쪽에서 찬란한 빛이 번뜩인다.
이윽고 빛이 잦아들고.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
그 사이로 익숙한 간판이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내가 1번이다!"
"...?"
퍼드드득-
"네놈! 빨리 문을 열고 상품을 팔아라!"
박쥐로 변한 블라디미르가 세차게 편의점을 향해 날아가 버린다.
"저, 저 박쥐 같은 놈이!"
한발 늦게 자리에서 일어난 유그드라실이 편의점으로 가고자 했으나.
"키에에에엑!"
이미 반쯤 눈이 돌아가 있던 관리자들이 앞다투어 편의점 앞에 몰려든다.
"크읏... 늦었군."
블라디미르의 배신으로 한발 늦게 출발했던 유그드라실이 탄식을 흘리던 그때.
딸랑-
편의점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조커 카드가 모습을 드러낸다.
"하하,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이곳에는 오랜만에 찾아오는...."
"해물볶음면!"
"새우탕! 튀김우동!"
광기에 젖어 상품의 이름을 연발하는 관리자들.
그런 그들을 바라보는 조커 카드의 입가에.
씨익-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이렇게까지 저의 재방문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 서비스! 그야말로 출혈을 감수한 특수 이벤트를 열어 볼까 합니다."
"...특수 이벤트?"
"네. 단 한 가지, 제 질문에 대답해 주시는 분께! 오늘 제가 갖고 온 상품을 전량 판매하도록 하겠습니다."
"...!"
한순간 광기에 잠식되어 있던 관리자들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정보를... 달라고?"
"오만한 놈,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점차 관리자들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조커 카드가 나지막이 말한다.
"저는 공략자이기 전에 상인이기도 합니다. 즉, 이득을 추구한다는 거죠. 하지만 거래할 상대가 더 이상 제게 이득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된다면 더 이상 이곳에 올 이유도 없겠죠."
어느새 본모습으로 돌아온 블라디미르가 낮은 탄성을 내지른다.
"저, 저 악랄한 놈 같으니...."
"하지만 딱히 틀린 말도 아니긴 하군."
불완전한 존재가 완전해지기 위해 이득을 추구하는 건.
지극히 원초적인 이치였으니까.
"흐음...."
하지만 문제는 그들이 그 대가를 지불하기 어렵다는 거다.
정보의 제공은 곧 개입.
개입했을 때 닥쳐오는 파동은 관리자들에게 있어 감당하기 쉽지 않은 것이었으니.
"대답하기 어려우시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들어만 보시죠."
조커 카드가 빙긋 웃으며 묻는다.
"탑 공략이 끝나거든 공략자들이 갖고 있는 능력은 계속 존재하는 건지 궁금하더군요. 아, 여러분이 대답해 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제 질문을 본사에 보내 주실 수 있을까요?"
"본사에... 보내 달라고?"
"그보다 네 녀석... 어떻게 본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거지?"
관리자들의 질문에 상점주는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 번 대전을 치르다 보니 대충 느낌이 오더군요."
"그런 거였나.... 하여간 눈치 하나는 더럽게 빠른 놈이야."
"근데 확실히 본사에 문의를 하는 형식이라면 딱히 우리가 개입하는 것도 아니잖아?!"
"오, 그러네?"
관리자들이 수군거리는 사이.
블라디미르가 손을 번쩍 쳐들며 소리친다.
"그러니까, 네 질문을 문의 사항 형식으로 보내면 된다 이거지?"
"정확합니다!"
그 순간.
퍼드드득-
박쥐로 변한 블라디미르가 황급히 자리에서 사라진다.
"음? 아... 아앗!"
"저, 저 박쥐 새끼가!"
"젠장!"
그리고 그 의도를 이해한 관리자들 또한 황급히 자리를 이탈하기 시작한다.
몇 분 뒤.
"허억, 허억... 보내고 왔다!"
가장 먼저 되돌아온 블라디미르가 힘겹게 대답을 하던 중.
스슥, 스슥-
"나도 보내고 왔다!"
"나도!"
한발 늦게 도착한 관리자들이 뒤늦게 목청을 높여 본다.
"아아, 이것 참 아쉽게 됐습니다. 아쉽게도 선착순이었던지라."
블라디미르가 의기양양해하는 표정으로 후발대를 바라보며 승자의 미소를 짓는다.
"내가 제일 빨랐네?"
"저, 저 박쥐 새끼가!"
"크으윽!"
이놈의 자식, 저놈의 자식, 내가 너보다 100년은 더 오래 일했느니 등등.
순식간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던 조커 카드가 소리친다.
"그럼 약속한 대로, 상점에 있는 모든 상품은 이쪽에 계신 관리자님께 인도하도록 하죠!"
잠시 후.
화아악-
조커 카드가 떠난 뒤.
"읏차!"
블라디미르는 한가득 쌓여 있는 물자 위로 올라가 털썩 주저앉는다.
그러곤.
"으으...."
"젠장, 조금만 빨랐어도...."
자신의 둔함을 탄식하는 관리자들을 내려다보며 송곳니를 드러내 보인다.
"다들 갖고 싶지? 자, 한 달간 내 업무를 대신 처리해 주는 녀석에게 라면 종합 세트 준다!"
"크으윽!"
모두가 침음하던 중.
유그드라실이 나지막이 말한다.
"근데 그것 아나? 우리가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을."
"...음? 자, 잠깐만! 잠깐만!"
어느새 몸집을 키운 유그드라실의 몸통에서 스산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내 뒤통수를 쳤으니 그 대가를 치러야 되지 않겠나?"
"그건 그냥 내가 빨랐던 거잖아!"
"어허! 말이 많군!"
억울한 듯 항변하는 블라디미르에게 유그드라실의 가지가 뻗어 나갔고.
"네가 둔해 터진 게 왜 내 탓이야!"
블라디미르의 비명 소리가 휴게실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