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뒤틀린 황천 (6)
"동맹을... 맺자고?"
상대방이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하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게 일반적이겠지.'
이 전장, '뒤틀린 황천'에서의 동맹은 허울뿐인 관계이며.
언제든 뒤집을 수 있고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는 걸 모두가 충분히 봐 왔지 않았던가?
"물론 잘 이해가 가진 않을 거야."
"당연하다. 이곳에서의 동맹은 무의미하다."
"그치. 근데 왜 지금껏 다른 놈들이 맺었던 동맹이 그렇게 박살 난 줄 알아? 그건 서로의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지지도 않았는데도 억지로 동맹을 맺어서 그런 거야."
난 숨을 짧게 들이쉬며 계속 말했다.
"서로가 서로의 멸망만을 바라고 있는데 제대로 된 동맹이 맺어질 리가 없잖아?"
"...그럼 넌 다르다는 건가?"
이레귤러의 말에 난 픽 웃었다.
"내가 네 탑의 멸망을 원했다면 이런 제안조차 안 하지 않았을까? 어차피 이제 남은 탑은 2개야. 구태여 우리가 멸망해야 할 2개의 탑이 될 필요는 없잖아?"
"...."
"뭐, 아무튼 네가 내 동맹 제의를 거절한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 식량을 필요로 하는 탑은 많으니까."
이레귤러의 이마에 달려 있는 눈동자에는 고뇌하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고민이 사라진 자리에 굳은 결의가 자리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다. 좋다! 동맹을 맺겠다!"
"잘 생각했어."
"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동맹을 맺게 되거든 구체적으로 어떤 걸 도와주면 되는 거지? 네 탑이 위험에 처했을 때, 우리 탑의 공략자들을 파견하면 되는 건가?"
"그것도 좋지만, 지금은 그보단 다른 걸 도와줬으면 해."
난 고개를 저으며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일단 홍보 좀 해 줄래?"
"홍보... 라고?"
* * *
몇 시간 뒤.
"북동부 연합, 종말 연합에서 동맹을 구하고 있다! 관심이 있는 놈들은 종말 연합을 찾아와라!"
내가 건네준 현수막을 창끝에 매달고는.
투구가 들썩거릴 정도로 열정적으로 흔들어 보이는 이레귤러.
그래서일까.
"...."
거의 판에 머리를 처박다시피 한 채.
전투에 몰두 중이던 이레귤러들이 그를 흘끔 쳐다본다.
"...종말 연합이라고?"
"흥, 동맹을 맺은 건가. 어차피 금방 허물어질 관계이건만, 멍청한 짓들을 하는군."
대부분은 비웃음을 던지거나 매몰찬 말을 던졌으나.
그는 꿋꿋하게 창을 흔들며 계속 말한다.
"지금 종말 연합에 들어오는 탑에게는 무료로 식량을 지급하고 있다!"
"무료로... 식량을 주고 있다고?"
잠시 후.
"동맹을 구한다는 말을 들었다."
"식량을 무료로 나눠 준다고 들었는데, 그게 진짜인가요?"
"헛소리일 뿐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
난 내 앞에 득실거리는 이레귤러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많이도 왔네. 뭐, 올 수밖에 없겠지.'
지금 중립지대는 굉장히 불공평하다고 할 정도로.
소수의 일부 탑들이 대부분 차지한 상황이었으니까.
"잘들 오셨습니다. 일단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웰컴 티를 한 잔씩 받으실까요?"
난 반장 선거에 앞서 반에 간식을 돌리듯.
이레귤러들에게 콜라를 한 캔씩 나눠 줬다.
"이건...."
"마시는 법은 간단합니다. 여기 따개가 보이죠? 이걸 이렇게 뒤로 확 넘기면...."
따악-
"쉽죠?"
이야기를 나누기에 앞서.
간단한 간식으로 분위기를 한번 환기시킨다.
'똑같은 말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니까.'
"...전에 준 샌드위치와는 생김새가 많이 다른 것 같은데."
"못 들었나? 콜라라고 했잖아!"
"다른 세계의 특이 음식, 연구하고 관찰한다."
"오오... 이 청량함, 시원함...! 지금껏 마셔 본 그 어떤 술보다 강렬하군!"
다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맛에 취한 덕일까.
"다들 콜라가 마음에 드신 모양입니다. 저도 기쁘군요."
"엣헴, 엣헴... 그, 썩 나쁘진 않군."
처음보다 분위기가 풀어진 게 느껴진다.
"그래서... 식량을 준다고?"
"그렇습니다. 물론 저희 종말 연합에 들어와야겠지만요."
"근데 그렇게 대단위로 많은 탑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가 뭐지?"
그래, 당연히 물어볼 줄 알았지.
난 싱긋 웃었다.
"전 대단위 동맹을 결성하여 이 대전을 끝내 볼까 합니다."
"대단위... 동맹?"
"이제 2개의 탑만 멸망하면 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구태여 저희끼리 싸워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게 제 생각이고요."
그래. 어차피 2개의 탑이 멸망하는 건.
필연적인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빠르게 두 탑을 멸망시키는 것이 좋을 터.
나의 말이 끝나자.
이레귤러들이 작게 수군거린다.
"확실히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는 게 좋긴 하지."
그들이라고 왜 그 사실을 모를까.
다만, 서로를 향한 불신이 그러한 결정을 막고 있었을 뿐.
"그쪽이 뭘 원하는지는 잘 알겠다.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그쪽 탑이 버티기 어려워질 것인데?"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저희 쪽은 식량이 충분하거든요."
대전의 시작 때부터 건설한 배급의 나무가 이제는 수십 그루가 넘으며.
사전에 내가 대량으로 만들었던 버프 음식들도 아직 여유가 있었다.
"중요한 건 여러분의 결정입니다. 저와 함께 이 대전을 끝낼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희 종말 연합은 언제든 여러분을 환영할 겁니다."
"말은 잘하는군.... 하지만 그럼에도 배신을 하려는 놈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당연히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괜찮다.
"그런 일이 발생할 경우, 연합 차원에서 대대적인 응징을 가하면 됩니다."
인원이 늘어나면 배신도 어려워진다.
특히나 이렇게 장소와 인원이 한정적인 장소에선 더더욱 말이다.
"과연.... 한 가지만 더 물어봐도 되나?"
"물으시죠."
"그럼 연합은 어떤 탑을 멸망시키려는 건가?"
"멸망시킬 탑이라...."
난 빙긋 웃었다.
"당연히 정해 뒀지요."
* * *
일주일 뒤.
"...."
블라디미르는 판을 내려다보며 혀를 내둘렀다.
'전쟁의 형태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군.'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곳곳에서 전쟁이 일어나 어떤 탑이 멸망할지 한 치 앞도 모르는 상황이었건만.
지금은 전장의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런 기괴한 것들이랑 같이 싸우다니...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원주민들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잖아? 그보다 싸움에 집중하라고!]
[취르르르... 나도 너희, 마음에 들지 않는다. 냄새 난다.]
[쿠오오오오!]
종말의 탑을 필두로 만들어진 '종말 연합'.
약 20개의 탑들이 연합하며 시작된 게.
지금은 30개가 넘는 탑들이 뭉친 대연합으로 덩치를 키웠다.
'저 정도 규모면 배신자가 나오기도 힘들 테고. 악랄한 놈... 여기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니.'
놈은 사전에 맛있는 음식을 뿌려 이레귤러들에게 호감작을 한 뒤.
찾아올 식량난에 맞추어 그들에게 식량을 뿌리고 견고한 동맹을 맺었다.
'저건 이제 멈출 수 없는 눈덩이나 마찬가지군.'
그리고 이미 덩치를 한껏 부풀린 눈덩이가 향한 곳은.
[크으읏... 이것들은 도대체....]
[수가 너무... 많다.]
[버텨야 한다! 싸워야 한다!]
이 대전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던.
[153 - 모순의 탑]과 [171 - 난제의 탑]이었다.
'나중에 가장 위협이 될 두 탑을 사전에 제거한다라.... 정말이지... 악랄함의 극치로군.'
강력한 경쟁자들을 사전에 제거하여.
추가로 있을지도 모를 대전을 대비하려는 계획일 터.
"쯧쯧...."
블라디미르는 서서히 불타오르는 두 탑을 보며 혀를 찼다.
'그 강함을 이용해서 어느 탑이든 공격했으면 차라리 쉬웠을 것을.'
저 두 탑은 너무 다른 탑들의 눈치를 봤다.
아니, 차라리 눈치를 볼 거면 끝까지 보기라도 하지.
욕심은 또 많아서, 중립지대는 있는 대로 챙긴 게 저들의 패배 요인이리라.
'아니. 대규모 동맹이 결성되는 순간 사실상 대전은 끝났다고 봐야 하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블라디미르.
그는 의자에 앉아 있는 조커 카드를 힐끔 바라봤다.
'난놈이긴 하군.'
당연한 것이지만, 두 탑이 멸망하거든 탑의 잔재는 분명.
조커 카드의 세계에 현현할 것이다.
'그럼에도 계획을 실행하는 강단만큼은.... 악랄한 것. 아니지, 그래도 최소한의 예의는 아는 놈이긴 한데....'
그가 조커 카드를 주시하던 중.
'음?'
블라디미르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느꼈다.
모든 이레귤러의 시선이 모순의 탑과 난제의 탑 주변의 전장에 쏠려 있는 상황이건만.
어째선지 가면 속 조커 카드의 시선은 다른 곳에 쏠려 있는 듯했다.
'저놈... 어딜 보고 있는 거지?'
블라디미르는 자기도 모르게 조커 카드가 응시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긴!'
뒤틀린 황천의 중심에 위치한 중립지대,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었다.
'설마 이 상황에 저기를 점령할 생각인 건가?'
슬쩍 판을 보니.
[다 왔다!]
[주변의 붉은 점들 보이지? 알아서들 피하라고!]
조커 카드의 제일 검이라고 해도 좋을 선구자들이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을 점령하는 중이었다.
* * *
'흠....'
나는 패 위로 떠오른 수많은 화면들을 보며 생각했다.
[탑이 불타오른다!]
[우리의 승리다!]
'저쪽은 거의 끝났네.'
전쟁은 거의 마무리가 되어 가는 상황.
'문제는 이쪽인데....'
[안쪽에 함정은 없는 것 같아.]
[근데 여긴 도대체 뭐 하는 곳일까?]
[뭔가 거대한 관 같은 게 많은 걸 봐선, 무덤 같은 게 아닐까?]
지하의 신전 같은 공간을 탐험 중인 선구자들을 보며.
난 낮게 혀를 찼다.
'선구자들을 좀 더 빨리 투입할 걸 그랬나.'
띠링-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의 점령까지 남은 시간, 10분]
점령까지 10분이 남은 상황이건만.
'만약 점령을 하기 전에 두 탑이 멸망하면... 대전도 그대로 끝나는 것 아냐?'
으음, 그래선 곤란한데.
모순의 탑과 난제의 탑의 선전을 기원해야 하는 걸까.
그러던 그때.
[여기 봐! 여기에 뭐가 있는데?]
[이건... 크리스털이잖아?]
지하 신전에서 붉은 크리스털을 발견한 선구자들이 대화를 나눈다.
[함부로 만지지 마, 저주 걸린 아이템일지도 모르니까.]
[그렇다기엔 별다른 기운은 안 느껴지는데? 내 그루트로 시험해 보면 되지.]
그오오오-
알터가 소환한 그루트들이 크리스털을 어루만진다.
바로 그 순간.
[종말의 탑이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을 점령하였습니다.]
해당 지역의 점령을 알리는 메시지와 더불어.
[모순의 탑이 영원한 안식에 접어들었습니다.]
[난제의 탑이 영원한 안식에 접어들었습니다.]
[3개의 탑이 영원한 안식에 접어들었습니다. 대전이 종료됩니다.]
대전의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나의 눈앞에 떠올랐다.
'일단 점령을 하긴 했는데... 된 건가?'
잘 모르겠다.
애당초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몰랐으니.
'확인을 하고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뭐, 그래도 일단 무사히 대전을 끝냈음에 감사할까.'
딱히 멸망한 탑들에 미안하지 않다.
어차피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으면 이쪽이 죽는다.
그렇다면 최선을 다해 멸망시키는 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흠, 뭔가 나도 마인드가 공략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
내가 가면을 고쳐 쓰던 그때.
"대전이 종료됐다."
블라디미르의 음성이 회장을 울린다.
"이번 대전에서 각 탑이 획득한 점수에 따라 보상이 결정되며, 보상은 돌아가거든 확인할 수 있을 거다."
"오오...."
과연 블라디미르의 말대로.
화아악-
이레귤러들의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어이, 늘꺾이는마음이라고 했던가? 기회가 되거든 다시 보자고! 다음에는 적일지 아군일지 모르겠다만!"
"햄... 보거? 아무튼 잘 먹었다!"
"좋은 경험이었다!"
내게 음식을 얻어먹었던 놈들이 한마디씩 던지며 자리에서 사라졌고.
그저 조용히 빛과 함께 사라진 놈들도 있었다.
'근데....'
잠잠-
'왜 내 몸에선 빛이 안 나는 거지?'
내가 의아함을 느끼던 바로 그때.
"조커... 아니, 종말의 탑의 김인성, 축하한다."
블라디미르가 창백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을 점령한 이에겐 부가적인 보상이 제공된다."
211화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
"오!"
그래! 뭔가 있을 줄 알았다니깐!
조용히 주먹을 쥐어 보이는 내게.
블라디미르가 말을 잇는다.
"악랄한 것."
"예?"
내가 잘못 들었나?
갑자기 순수 비난을 한다고?
"음? 아, 흠흠... 제법이구나."
멋쩍게 헛기침을 하는 블라디미르.
"과감히 중립지대를 선점하는 것도 그렇고, 자칫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을 연맹으로 풀어 가는 판단도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래.
편의점 '종합 선물 세트'도 쥐여 줬는데 비난을 할 이유가 없지.
"따라서 종말의 탑의 대전자 김인성에게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의 탐색을 허락한다."
"...?"
잠깐만....
무덤의 탐색을 허락한다니? 이게 무슨 소리야?
"음, 그러니까, 제가 마지막에 점령했던 중립지대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의 탐색을 해도 된다고 허락한다는 말씀이시죠?"
"이해가 빠르구나."
"...."
'도굴이 보상이라.... 그건 그렇다고 쳐. 근데 도굴할 것도 없잖아!'
이미 난 선구자들을 통해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 내부를 봤었다.
정체불명의 커다란 관들만이 가득한 그곳.
솔직히 더 탐색을 한다고 한들, 딱히 얻을 만한 것도 없어 보였건만.
'혹시 숨겨진 뭔가가 있는 건가?'
"조금... 의외의 보상이군요."
"뭐, 그렇게 날 바라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애초에 이 보상은 내가 정한 게 아니거든."
"...."
주관자가 보상을 정한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누가... 아.
'설마 본사 쪽에서 정한 규칙 같은 건가?'
아마도 탑들을 총괄하는 조직, 본사.
그 기관이 정한 규칙이라.
"뭐, 그렇다면야.... 알겠습니다."
"좋다. 그렇다면 널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으로 이동시켜 주마."
"근데 이거랑 별개로 복귀하거든 보상은 따로 들어오는 거죠?"
"...."
* * *
잠시 후.
스스슥-
'흠....'
난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고대의 신전처럼 거대한 기둥들이 규칙적으로 박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커다란 관들이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다.
'이런 곳을 탐색하라고 해 봐야, 탐색할 만한 게....'
관 말고 없지 않은가?
'남의 관짝을 열어 보는 취미는 없지만, 어쩔 수 없지.'
나는 슬쩍 관 하나를 조심스레 열어 봤다.
덜컹, 그그그그긍-
'오, 열리네?'
분명 선구자들이 관을 열려고 했을 땐 열리지 않았건만.
나의 우려와 달리 관은 너무도 쉽사리 열렸다.
'근데... 이건 뭐야?'
당연히 관 안에는 사체나 백골 따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봉처럼 생겼네.'
붉은색과 금색이 적절히 잘 어우러진 기다란 봉이다.
제법 멋들어지게 생기긴 했다만....
난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봉을 살펴봤다.
공
설명: ???
내용: 해당 아이템 사용 시, 칭호 [제천대성] 획득 가능.
특이 사항: ??
'무기인 줄 알았더니 소모품이었나.'
내가 봉의 정보를 주의 깊게 살펴보던 그때.
띠링-
[정말로 아이템, '공'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해당 아이템을 선택할 시, 본래의 자리로 귀환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흠, 선택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라는 거네.'
그렇다면 일단 좀 더 둘러보는 게 맞지.
난 기다란 봉을 도로 관 안에 놔두곤.
옆에 있던 관을 열었다.
화르르륵-
그리고 그 안에는 불길에 휩싸인 망치가 자리하고 있었다.
헤파
설명: ???
내용: 해당 아이템 사용 시, 능력 [불타오르는 장인의 혼] 획득 가능.
특이 사항: ??
'불타오르는 장인의 혼이라.... 이건 뭔가 제작 계열 능력 같은데?'
그 외에도 난 여러 관들을 개봉했고.
여러 물품을 살펴봤다.
'호오!'
벼락의 형상을 한 무기, '우스'라든가.
죽음의 아우라를 한껏 내뿜는 낫, '데스'라든가.
'오오!'
달빛 같은 시린 느낌의 빛을 한껏 내뿜는 비늘갑옷, '요르문'이라든가.
관 안에는 정말 많은 장비들이 자리했다.
'뭔가 엄청난 것들이 많아서 결정하기가 쉽지 않네.'
워낙 선택지가 다양했기에.
도리어 고민의 늪에 잠긴다.
'으음, 뭘 선택해야....'
내가 고민을 거듭하던 바로 그때.
[오! 이건 또 뭐야! 공략자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거지? 신기하네! 너, 뭐냐?]
허공의 어딘가에서 조금은 경박한 음성이 울려온다.
"...."
난 천천히 주먹을 쥐곤 주변을 살폈다.
[어딜 보는 거야?! 여기라고, 여기!]
음성이 울려오는 방향을 올려다보자.
웬 정갈한 도복을 입은 원숭이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오! 내가 보이나 보네!]
"...넌 누구지? 이 무덤의 수호령?"
[수호령? 수호령?! 수호령 같은 소리 하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천상의 왕, 하늘의 폭군! 공... 공... 공! 에라이! 아무튼 공이다!]
'오, 아까 본 그 봉의 주인인 건가.'
그렇다면 이 무덤이나 장비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알 수 없는 욕설을 퍼붓는 원숭이를 향해.
나름의 예의를 갖추곤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무슨 일로 제 앞에 나오신 겁니까? 성불을 원하신다거나 아니면...."
[성불? 네까짓 게 날 성불시킨다고?]
배를 잡고 폭소를 터뜨리는 공.
한참을 웃던 그가 돌연 웃음을 그치곤 정색하며 말한다.
[아서라, 애송아. 아무리 내가 이름을 잃었다고 한들, 너 같은 애송이에게 패배할 일은 없으니까.]
'이름을 잃어? 그건 또 무슨 말이지?'
그러고 보니 이 무덤의 이름도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이지 않은가?
'원래 이름이 공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있는....'
난 더 이상 생각을 이을 수 없었다.
빠각, 우르르르릉-
"음...."
돌연 엄청난 압력이 전신을 짓누른다.
'이게 뭔....'
분명 난 묶음 무적의 효과를 받고 있건만.
어째서일까.
압력으로 인해 조금씩 무릎이 굽혀진다.
"크읏...."
이윽고 한쪽 무릎이 바닥에 닿자.
[그래, 이제야 좀 예의가 느껴지네.]
몸을 짓누르던 압력이 씻은 듯 사라졌다.
난 잠시 말을 잃었다.
'무적 상태인 내게 이렇게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존재라면... 관리자, 아니.'
어쩌면 관리자보다 더 높은 위치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한다면....
"혹시 본사의 직원이셨습니까?"
[호오, 본사를 아는 걸 보아하니 아주 애송이는 아니었나 보구나. 하지만 난 그 어중이떠중이들보다 더 대단한 존재지!]
본사 직원보다 더 윗급의 존재라고?
그렇다는 건, 본사보다 더 윗급의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가?
[근데 왜 그놈들이 네놈 같은 애송이를 이곳에 보낸 건지 모르겠네. 게임에 변화를 주려고 그러는 건가?]
"...."
침묵하는 날 보며, 공이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다.
[키키킥!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로구나! 뭐, 좋아. 이것도 연이라면 연이겠지. 물어봐라!]
이건 기회다.
본사 직원보다 더 높은 존재였다면 당연히 아는 것도 많을 터.
"탑의 공략이 끝나면 어떻게 됩니까?"
[어떻게 되긴? 그야 당연히... 어라? 음? 엥?]
갑자기 뒤통수를 벅벅 긁적이는 공.
[이거... 이름을 압수당하면서 기억도 좀 날아갔나 본데? 기억이 안 난다.]
"오...."
이 도움 안 되는 원숭이 놈을 봤나.
[다른 걸 물어보라고, 다른 걸!]
"그럼 당신은 왜 이곳에 있는 겁니까?"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그야 주머니까지 탈탈 털렸으니까! 난 역배를 좋아하거든! 그게 도박의 묘미 아니겠어?!]
도박이라고?
난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했다.
'설마 지금껏 벌어진 게임들에 베팅을 했다는 건가?'
이제껏 탑에서 이레귤러들과 펼쳤던 여러 게임들.
그게 누군가에겐 도박적 요소였다는 건가.
'그렇다는 건....'
잠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
난 이내 정리를 끝마치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도박을 했다가 재산을 탕진했고, 그 대가로 이름을 빼앗겼다는 말입니까?"
[기억이 조각나서 좀 애매하긴 한데, 그랬을걸?]
기억에 영향을 미칠 정도인 걸 보면.
이름이 가지는 의미가 꽤 중요한 것 같긴 한데.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이름을 걸면서까지 할 정도로 도박에 가치가 있었던 건가요?"
[뭔 헛소리야? 도박은 그 자체로 훌륭한 유희라고! 그리고 그 정도는 걸어야 희열이 느껴지지. 나 같은 존재도 생과 사를 오가게 하는 궁극의 유희!]
무슨 소리인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이 원숭이 놈... 어지간히도 도박에 중독됐네.'
그리고 끝내 파국을 맞이하여.
이 무덤에 있는 것이리라.
[네가 아직 도박의 묘미를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내가 온갖 종류의 유희를 즐겼지만, 그만한 유희거리가 또 없... 음?]
돌연 자신의 손을 살피는 공.
[이런....]
그의 손이 반투명해져 있다.
아니, 손만이 아니다.
스스슥-
손을 시작으로 그의 몸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끙... 좀 더 나로 있고 싶었는데, 아쉽군.]
씁쓸히 웃는 공.
설마 저대로 완전히 사라지는 건가?
"잠깐만요!"
[애송아, 아쉬운 건 알겠지만 이건 정해진 운명이다, 뒤집을 수도, 엎을 수도 없는....]
"아니, 가기 전에 추천 좀 해 주고 가시라고요. 이 무덤에서 제일 쓸 만한 물건으로요!"
공이 멍하니 날 바라보다가 크게 웃는다.
[이야, 너도 어지간히 맛이 간 놈이었구나. 좋아, 마음에 들었다! 네게 제일 쓸 만한 거라. 그거라면....]
* * *
화아악-
"크으...."
문에서 나간 난 눈앞의 광경을 보며 낮은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얼마 만의 집이야?'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장기간 출장을 갔다가 집으로 돌아온 기분이다.
'이렇게 자리를 오래 비운 적은 거의 없던 것 같긴 한데.... 그건 그렇고, 이 녀석들은 다 어디 간 거야?'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근데 또 TV는 틀어져 있고. 잠깐 어디 나갔... 음?'
난 고개를 돌리려다가 다시금 TV 속 화면을 바라봤다.
[...현재 저장성의 항저우시에 9.0 규모의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지역이 한국에 인접한 만큼, 많은 분들께서도 흔들림을 느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 마침 현장의 이우림 기자와 연결이 되었군요. 이우림 기자, 이우림 기자?]
[예, 현재 여긴 항저우의 상공입니다! 현재 지상은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아비규환의 상황입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 때문일까.
기자가 목에 핏대를 세운 채 악을 내지르듯 소리친다.
[지진의 여파를 이기지 못한 수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으며, 수많은 사상자와 난민들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시 주석은....]
과연 기자의 말대로 화면에 비친 광경은 재앙 그 자체였다.
푹 꺼진 건물들, 치솟고 번지는 불길을 따라 엄청난 연기가 피어오른다.
'아이고, 저게 뭔 일이래.'
엄청난 재난 현장을 보니.
절로 연민과 안타까운 감정이 든다.
그러던 그때.
우르르릉-
화장실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가 울려오더니.
분신이 안에서 손을 털며 밖으로 나온다.
"아이고, 배야. 오, 주인, 왔어?"
"있었어? 그보다 다른 녀석들은 다 어디 갔어?"
"다 휴가를 즐기고 있지. 아, 발리나만 빼고."
난 의아함을 느끼곤 물었다.
"발리나는 왜?"
"또 균열이 활동해서 나갔어."
"아."
그러고 보니 두 개의 탑이 멸망하면서.
두 탑의 이레귤러 모두가 종말의 탑을 지목했었다.
"근데 이미 균열이 한번 활동하지 않았어?"
"그래서 저번에는 중국에 엄청난 한파가 발생했었어."
예전 기사를 보여 주는 분신.
난 녀석이 내민 핸드폰 속의 기사를 살피며 말했다.
"과연.... 그럼 저 지진도 균열이 활동해서 생긴 건가."
"저번 폭설도 그랬던 걸 생각하면 그러지 않을까 싶어. 근데 좀 이상하긴 해. 왜 자꾸 중국에서만 저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냥 우연인 건가 싶기도 하고."
중국에서만 2번이나 균열로 인한 현상이 발생했다라....
"아마 인구수가 엄청 많아서 그런 걸 수도?"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설명하자면 좀 복잡한데... 저게 일종의 원한 덩어리거든? 근데 원한이 가장 큰 피해를 입히도록 발현된다고 관리자가 그랬단 말이야? 그래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지역에 발생하는 걸 수도 있어."
나의 설명에 분신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아아, 그러니까 가장 피해 입히기 좋은 지역이 타깃으로 잡혔다는 거네."
"그런 셈인 거지. 근데 그건 그렇고... 발리나 그 녀석은 뭘 한 거야? 농땡이 부린 것 아냐?"
무려 '태초의 혼돈'씩이나 되는 녀석이 뭘 했기에 저리 사태가 벌어진 것이란 말인가.
"그게, 녀석도 막아 보려 했는데, 즉발형이라서 좀 곤란하다 했어."
"아, 확실히 즉발형이면 막기 어렵긴 하겠지. 일단 녀석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좀 들어 봐야겠...."
그러던 그때.
덜컹-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발리나가 집으로 들어온다.
"오, 마침 잘 왔...."
난 발리나를 보며 말을 하려다가.
그녀의 행색을 보곤 입을 멈췄다.
"...."
온몸에 푸른 체액을 덕지덕지 묻힌 발리나가 천천히 입을 뗀다.
"휴가!"
212화 이건... 너무 괜찮잖아?!
"음?"
"휴가! 휴가! 휴가!"
저거... 눈동자가 번들거리는 게.
휴가를 주지 않으면 완전히 정신을 놓을 기세인데?
"휴가? 당연히 줘야지! 다른 녀석들이 쉰 만큼 확실하게 쉬어! 근데 쉬기 전에 보고는 해야지."
나의 퇴마 의식이 성공적으로 먹힌 걸까.
"음? 아, 내가 무슨...."
몸을 지배하던 휴가 악령이 빠져나간 건지.
발리나가 고개를 홱홱 젓더니 말한다.
"주인이 부재중이던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래 보이긴 해. 근데 몸에 묻은 건... 치울 수 있으면서 일부러 달고 온 거지?"
흠칫-
발리나가 몸을 움찔거린다.
"그, 그게 무슨...."
"나 이만큼 고생했다, 보여 주기용으로다가 달고 온 것 아냐?"
발리나 정도 되는 녀석이 저 정도 체액 따위를 못 털고 왔을 리도 없으니 말이다.
"고생한 건 알았으니까 일단 닦지? 바닥 더러워지면 휴가는 압수야."
그 순간.
발리나가 냉큼 손을 휘두른다.
반짝-
그와 동시에 반짝이는 그녀의 몸.
"하여간 잔머리가 엄청 늘었다니까."
"흠흠... 그게 다 주인을 보고 배운...."
"그보다 보고부터 해 봐. 무슨 일이 있었어?"
"그게...."
머뭇거리던 발리나가 말한다.
"총 3개의 균열이 활동했다. 1개는 막았지만, 다른 2개는 즉발형이라 내가 손을 쓰기가 어려웠다."
"그래?"
난 연신 속보가 흘러나오는 TV를 보며 계속 말했다.
"아마도 즉발형은 저거랑 한파였을 테고, 다른 한 개는 뭐였어?"
"대량의 몬스터들이 출몰했었다."
'즉발형 재앙에 이어 대량의 몬스터라....'
균열에서 나오는 게 생각보다 다양할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몬스터들은 처리했지?"
"물론이다!"
씨익 웃는 발리나.
"인간들이 미처 놈들의 존재를 인지하기도 전에 으깨 버렸다."
"그건 잘했네. 근데 혹시 뭔가가 나오거나 하진 않았지?"
"등반자들이 쓰는 아이템 같은 걸 말하는 거라면, 그런 건 일절 없었다."
'하긴, 아이템이 나오는 게 이상한 거겠지.'
이번 균열의 활동은 '이레귤러의 원한'에서 비롯된 것.
그러니 이로운 아이템 같은 걸 줄 리가 없잖은가?
"그래? 아무튼 잘했어, 너희가 있어 준 덕에 나도 편하게 탑에 들어갈 수 있는 거니까."
"그렇다는 건...."
아무렴!
제대로 수고한 자에게는 그에 걸맞은 보상이 따라야지.
"아마 당분간 균열이 활동할 일은 없을 테니, 발리나에게는 추가 휴가를 지급한다! 따로 말하기 전까지는 푹 쉬라고!"
"오오! 드디어!"
발리나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일단 바로 2시간 뒤에 있을 피어리스와 G8의 경기부터 직관을 하러 가야겠다!"
냉큼 밖으로 사라진다.
난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픽 웃었다.
'휴가가 그렇게도 좋나.'
"근데 주인, 이번 대전은 정확히 뭐였어?"
"아, 그거?"
내가 전장, '뒤틀린 황천'에서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자.
분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니까 이제는 완전 다른 탑들이랑 대대적으로 전쟁을 치른다는 거네."
"그런 셈이지."
"그럼 높은 층까지 공략한 탑이 무조건 유리한 것 아냐?"
맞는 말이다.
높은 층까지 공략한 공략자들이 갖는 힘은.
여타의 공략자들과는 그 궤를 달리했으니까.
그러나....
"그게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꼭 그것만 중요한 건 아니더라."
"엥? 그게 무슨 말이야?"
"소수의 강자들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고."
실제로 난 봤다.
등수가 높은 탑이었음에도 등수가 낮은 탑과의 싸움에서 힘없이 밀리는 모습을 말이다.
"절대 강자급의 공략자들 간의 실력 차도 우열을 가리는 데 중요하긴 했지만, 각 탑의 중간층이 얼마나 탄탄하냐에 따라 또 전장의 구도가 달라지더라고."
"오오, 그러니까 탑의 체급이 중요하다는 거네? 주인이 그렇게 탑의 체급을 강조한 이유가 있었구나?!"
"뭐, 그런 셈이지."
사실 이번 전장이 이런 개판 전쟁터일 줄은 몰랐지만.
종말의 탑이 굳건했던 데는 40~50층 부근을 공략 중인 '허리층'이 많은 덕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계속 안주하려는 공략자들을 공략에 나서게 하는 게 중요한 거야. 결국 지구력은 허리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그래.
이번 전쟁에서 더 확실히 느꼈다.
'더 많은 공략자들이 공략에 나서게 해야 돼.'
탑의 공략이 1순위라는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탑의 체급을 키우는 것 또한 굉장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편의점을 더욱 원활히 운영해야만 할 터!
"그렇긴 하지! 그래서 바로 탑에 장사하러 가려고?"
"아니, 일단은...."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좀 쉬려고."
이래저래 나도 탑들 간의 정세라든가 분위기를 계속 읽었어야 해서.
피로가 좀 쌓였으니 말이다.
"쉴 때는 또 쉬어 줘야지!"
"그리고 이것도 좀 확인을 해야 해서."
내가 아공간 주머니 안에서 물건을 꺼내어 들자.
분신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건 뭐야? 뭔가 장난감 수레바퀴처럼 생겼네."
"생긴 건 그렇긴 하지."
난 손바닥 크기의 수레바퀴를 내려다봤다.
쿨드
설명: 운명의 실타래가 풀린다. 그 누구도 미래를 알지 못한다.
내용: 해당 아이템을 사용할 시, 특별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
특이 사항: 이 아이템은 한 번만 사용할 수 있다.
'그 원숭이 놈이 적극 추천 해서 가져오긴 했다만... 설명이 너무 애매하잖아?'
도대체 특별한 일이라는 게 뭔지.
사용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이거, 귀물이야. 쉽게 구할 수 없는 아이템이라고."
"...그래?"
"일단 사용해 보면 알겠지."
띠링-
[아이템, 쿨드를 사용합니다.]
그 순간.
촤르르르륵-
수레바퀴가 살아 있는 것처럼 스스로 회전을 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철커덕, 철컥-
수레바퀴가 회전을 거듭할수록 붉은 실이 뿜어져 나왔고.
실들이 내 주변을 빙글빙글 맴돌며 기이한 빛을 발산한다.
"주, 주인, 이것 괜찮은 거지? 혹시 저주받은 물건이라든가...."
"괜찮아."
불쾌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뭔가 힘이 샘솟는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화아아아악-
이윽고 빛을 발산하던 실들이 발광을 멈추자.
미친 듯이 회전하던 수레바퀴의 움직임도 멎는다.
바로 그 순간.
[운명의 실타래가 사용자에게 작용합니다.]
[사용자의 운명의 흐름이 변화합니다.]
[불변의 금제가 해금됩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름과 더불어.
스스슥-
수레바퀴가 먼지로 변하여 사라진다.
'불변의... 금제? 그건 또 뭔데?'
기존에는 업적 적립을 이용하여.
적합한 업적의 수를 달성하거든 레벨이 오르고 금제가 해금됐었건만.
'업적 적립으로 해금되는 금제랑은 뭔가 다른 건가?'
내가 의문을 느끼던 찰나.
[고유 능력, '편의점 주인'의 효과가 일부 변경됩니다.]
다시금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난 혀를 내둘렀다.
'고유 능력이 일부 변경된다고?! 이게 가능해?!'
고유 능력이 아닌 그 하위 능력, 파생 능력은 그 능력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다.
레벨이 오름에 따라 능력이 강화된다거나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에 정해진 '고유 능력'만큼은 절대로 그 능력이 변하지 않는다.
'잠깐만, 그렇단 건....'
나의 고유 능력인 '편의점 주인'에 무언가 변화가 생겼다는 것일 터!
난 황급히 고유 능력을 살폈다.
편의점 주인
설명: 탑 안에서 편의점을 운영할 수 있다.
내용: 편의점 주인이다. 출퇴근이 자유롭다.
특이 사항: 편의점은 무적이며, 편의점에 머무르는 경우에 한하여 편의점 주인 또한 무적 효과를 받는다.
'...어?'
바뀌었다.
확실히 능력이 바뀌었다!
'문구가 없어졌어!'
본래 내용란에 있던 '다만, 너무 오래 닫아 두면 안 될 것 같다.'라는 문구.
그리고 특이 사항란에 있던 '편의점의 출몰 지역은 무작위이다.'라는 문구가 사라져 있다.
"...."
난 잠깐 멍하니 능력을 바라보다가.
황급히 문을 향해 뛰어갔다.
"어? 주인, 어디 가? 쉰다며?!"
나는 분신의 질문을 무시하곤.
냉큼 열쇠를 문고리에 넣고 힘껏 돌렸다.
철커덕-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문에서 빛이 흘러나온다.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방문하실 층을 선택하여 주십시오. 방문하실 층을 선택하지 않을 경우, 무작위의 층으로 이동합니다.]
[1F]
[2F]
.
.
.
[67F]
[69F]
.
.
.
[74F]
"하, 하하... 하하하하하!"
난 떠오른 문구를 보며 한껏 웃음을 터뜨렸다.
'돌았다...! 미쳤다! 미쳤어!'
지금껏 편의점의 출현 위치는 무작위였다.
그렇기에 고정 이동 아이템의 의존도가 극도로 높았건만.
'이제 내가 원하는 층으로 이동할 수가 있다는 거잖아?!'
"푸하하하하하!"
"...주인, 왜 그래?"
분신의 걱정에도 난 아랑곳 않고 웃었다.
이건 진짜 너무 기쁜데?
'이름이 공이었나...? 진짜 그 원숭이가 좋은 아이템을 추천해 줬구나!'
혹여나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있거든.
바나나 향이 잔뜩 첨가된 우유라도 선물로 줘야겠는걸?
"후우...."
일단 조금 진정하자.
아직 확인해야 할 게 많아.
층의 목록 중 일부 비어 있는 층도 있고.
아직 내가 모르는 어떤 기준 같은 게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천천히 하나씩 시험을 해 볼....'
내가 28층 엘라시움을 선택하곤 빛으로 들어가려던 그때.
"주인, 주인!"
분명 밖으로 나갔던 발리나가 돌아와 나를 찾는다.
"뭐야. 왜 돌아왔어? 뭐 빠뜨리고 갔어?"
"그게 아니다. 잠깐 밖으로 나와 봐라! 주인이 봐야 할 것 같다!"
바깥을 보라고?
하늘에 변화라도 생긴 건가?
하긴, 대전도 끝났으니 하늘의 환영 또한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덜컹-
난 발리나, 분신과 더불어 바깥으로 나갔다.
"오?"
확실히 발리나의 말대로 하늘의 형태가 조금 뒤바뀌어 있다.
본래 탑들의 환영이 가득했던 하늘에는 커다란 문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종말의 탑이 뒤틀린 황천에서 생존하여 다음과 같은 보상이 지급됩니다.]
[보상으로 모든 공략자들에게 칭호, '뒤틀린 의지'가 지급됩니다.]
'오오, 뒤틀린 의지라....'
내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중.
담장 너머로 동네 주민들의 음성이 울려온다.
"저것 봐! 하늘에 글자가 생겼어!"
"뒤틀린 황천에서... 생존? 보상?"
"뭔지 몰라도 우리 탑이 이긴 것 아냐?! 너튜브 보니까 다른 이상한 탑들이 엄청 많았잖아?"
"그런가? 최신 영상이 업로드됐는지 한번 볼까? 음, 아직 최신 영상은 안 올라온 듯?"
난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업로드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
지금 공략자들은 다들 승리와 생존의 기쁨을 만끽하며 축배를 들고 있을 테니까.
'오늘만큼은 나도 축배를 들어야지.'
오늘은 묵혀 둔 좋은 술이라도 한 병 꺼내야겠다.
* * *
다음 날, 아침.
딸랑-
난 간만에 카페에 출근하여 내부를 살폈다.
'음, 카페는 여전하네.'
내가 부재하는 동안 분신이 확실하게 관리를 한 모습이다.
"사장님, 좋은 아침이에요!"
"어, 수정아! 좋은 아침! 조금 일찍 출근했네?"
"호호호, 오늘은 엄청 기쁜 날이거든요!"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오늘따라 수정이의 표정이 유독 해맑아 보인다.
"오늘 새벽에 R.B의 신곡이 나왔거든요! 한번 들어 보실래요?! 진짜 엄청, 엄청, 엄청 좋거든요!"
"그, 그래. 아직 오픈 전이니까 괜찮아."
희번덕거리는 수정이의 눈동자.
진심인 그 눈빛이 좀 무서운걸?
이윽고 카페의 음향 기기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우린 하늘 위로 올라가. 바닥에서 정상을 찍어. 사사-오정, 사사-오정.]
강렬하면서도 신이 나는 게, 제법 괜찮은 노래 같다.
"근데 가사에... 왜 사오정이 나오는 거야?"
"사오정이 서유기의 주인공이잖아요? 사오정처럼 쓰러지지 않고 일어나서 하늘로 나아가겠다, 이런 느낌인 거죠!"
213화 대책 회의 (1)
"아하...."
흠, 요즘 음악 트렌드는 이해하기 어렵네.
근데 계속 듣다 보니 또 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가사가 좀 난해하면 어때?'
난 슬며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여기서 밥을 먹고 위층에 전시관에 들르면 된다는 거지?"
"그렇지! 그것만으로 일단 데이트 코스로 반은 먹고 들어간다니까? 형, 첼 정글인 것 알지? 내가 짠 동선만 따라가면 솔로 탈출은 확정이라니까?"
"오오오! 내가 진짜 잘되면 한턱 쏨!"
여전히 엄청난 인파로 바글거리고 있는 인성 카페 앞.
나는 그런 사람들을 보며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난해한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사람들로 붐비는 현장을 본다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지.'
노래도, 이 커피도 그리고 사람들이 저렇게 군집할 수 있는 것도.
모두 평화라는 견고한 지반이 있기에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결국 문화 생활이라는 건, 평화라는 견고한 지반에 뿌리를 내리는 식물 같은 거니까.
'역시 평화로운 게 최고긴 한데... 진짜 즉발형 재앙은 어떻게 좀 막을 수단을 강구하든가 해야겠네.'
이번에야 재앙이 중국 영토에 집중적으로 떨어졌다지만.
만약 그게 내 카페 위에 펼쳐졌다고 생각하면....
'카페야 무사하겠다만, 장사에 영향이 있겠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이 평화의 시기 동안.
즉발형 재앙에 대처할 방법 같은 게 있나 좀 찾아봐야겠는걸.
'탑에 그런 아이템은 없으려나? 광범위한 방어 아이템이라든가....'
내가 입맛을 다시며 '탑 지식 백과'나 '탑무위키' 같은 탑 아이템을 전문적으로 리뷰하는 너튜버들의 영상을 뒤적거리던 중.
"사장님, 안녕하세요!"
"안녕, 인성아!"
카페로 출근한 선아.
그리고 갤러리에 올라가기에 앞서 카페에 들른 나라가 내게 반갑게 인사한다.
난 그런 그녀들을 보며 생각했다.
'탑의 생활도 나쁘진 않지만, 평화로운 일상도 좋구나.'
"얘들아, 안녕! 오늘도 파이팅 해 보자!"
"네, 사장님!"
난 카페의 문을 활짝 열며 군중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오세요! 지금부터 인성 카페 영업을 시작합니다!"
* * *
몇 시간 뒤.
"여기 주문하신 특제 둥글둥글 빵이랑 구름 빵, 갈색 빵 그리고...."
정장 차림의 남자가 카페 직원이 내미는 두툼한 종이봉투를 받는다.
슬며시 종이봉투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는 남자.
'이만하면 부족하진 않겠지.'
대기 알바까지 동원하여 겨우 구매한 상품들을 보며.
남자가 작게 한숨을 내쉰다.
'어휴. 그냥 다른 사람들처럼 떡이나 돌렸어야 했는데, 내가 미쳤지, 미쳤어....'
관리국에 입사한 기념으로 큰맘 먹고 돌렸던 빵이건만.
하필 그게 또 관리장의 입맛에 맞았던 건지.
이후 인성 카페에 들러 간식을 사는 일은 그의 일과 중 하나가 돼 버렸다.
'그래도 목적을 달성했으니 다행이라 해야 하는 건지.'
남자는 고개를 젓곤.
카페 안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젊은 사장을 바라봤다.
'진짜 여기 사장은 그냥 돈을 갈퀴로다가 긁어 담겠네.'
나이도 젊은 것 같은데, 참으로 부럽기 그지없는 일이다.
'쩝, 부러워해서 뭐 하나. 내 할 일이나 하러 가자.'
남자가 주차해 놓은 차로 이동하기 위해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중.
사람들 사이에서 여러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인성 카페의 빵 말이야, 뭔가 엄청 더 맛있어진 것 같지 않아?"
"너도 그렇게 느꼈어? 뭔가 빵이 더 폭신해진 것 같으면서도 달달한데, 또 자극적이지 않고, 거기다가...."
한층 맛이 업그레이드된 인성 카페의 빵을 극찬 하는 여자들.
"그 정도면 따로 카페 말고 베이커리나 제과점을 만들어도 될 것 같은데. 그럼 조금은 줄이 줄어들지 않을까?"
"내 말이, 내 말이! 아니면 아예 프랜차이즈로 나가서 2호점, 3호점 같은 걸 만들어도 좋고!"
"아, 그건 좀 생각해 봐야 돼. 프랜차이즈 냈다가 오히려 맛이 떨어졌다고 욕먹는 곳도 많잖아?"
자신의 가게도 아니건만.
카페의 영업 확장을 논의하는 남자들.
'오지랖도 가지가지구만.'
남자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인파를 거의 뚫고 나가려던 중.
그의 귓가에 하나의 음성이 뚜렷이 들려온다.
"근데 말이야. 이번 그 대결은 뭐였을까?"
"무슨 대결?"
"아니, 너튜브에 올라온 영상 안 봤어? 종말의 탑의 공략자들이 다른 탑이랑 싸우는 영상 말이야!"
"아, 그건 당연히 이지수가 올린 걸로 봤지! 정확한 룰은 몰라도, 서로 막 땅 먹으려고 정신없이 싸우는 게 엄청 재밌더라!"
"재밌긴 했지. 근데 난 그걸 보면서 과연 저게 그저 단순한 이벤트일까? 하는 생각도 들더라.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번 이벤트의 적들이 다른 탑들이랑 거기에 소속된 괴물들이었잖아! 그게 단순한 적이 아니라, 다른 탑의 공략자들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하늘에 뜬 환영도 그렇고... 뭔가 그럴듯하지 않아?"
"그러니까 네 말은... 종말의 탑 말고도 다른 탑들이랑 공략자들이 존재한다는 거야?"
"아니, 확신은 아니고. 내 뇌피셜이긴 해."
뇌피셜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오기 무섭게.
"에라이, 어디 뇌피셜을 가져와?! 가져올 거면 오피셜을 가져와야지!"
"뇌피셜도 적당히 써야지! 다른 탑들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냥 이벤트용으로 잠깐 등장한 거겠지!"
친우를 질타하는 남자들.
그러나.
"...."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남자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일반인들도 저렇게 생각하고 있는 건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애당초 당장 관리국 내에서도 해당 안건으로 다양한 이견이 있지 않은가?
'일단... 출근할까.'
* * *
같은 시각.
관리국의 회의실.
탑 관리국의 관리장, 김중후가 수많은 화면에 담긴 인물들을 향해 말한다.
"...먼저 중국에서 발생한 참사에 깊은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유감?]
중국의 관리장 장 쓰쉔이 비웃음을 던진다.
[유감이 아니라 기쁨이겠지. 재앙이 우리나라에 떨어졌으니 말이야. 안 그래?]
[장 관리장, 말이 조금 지나친....]
[지나치다고? 전례가 없던 대지진이었다. 근데 뭐? 겨우 하는 말이 유감?!]
이미 눈이 반쯤 광기로 잠식된 장 쓰쉔이 핏발 선 눈으로 김중후를 노려본다.
"쓰쉔 관리장님, 저는 진심으로...."
[아직도 이게 단순한 기후 문제로 보여?! 이건 단순한 기후변화도 뭣도 아니야. 균열이 활동해서 생긴 여파인 거지.]
"...."
[벌써 공식적으로 집계된 사망자만 10만이야, 10만!]
김중후는 낮게 침음했다.
사실 말이 10만이지, 집계되지 않은 피해자들까지 합한다면.
숫자는 그 이상일 테니까.
[너희 모두 방관자들일 뿐이야. 알아?!]
[쓰쉔 관리장, 안타까운 건 알겠으나 조금만 진정하게.]
[각국에서 의료인과 보급품을 보냈으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다른 관리장들의 만류에도 흥분한 장 쓰쉔의 고성은 멈출 줄 몰랐다.
[잘들 들어! 한 번만 더 우리 국내에 이런 사태가 발생하거든, 주석께서 그땐 직접 탑을 날려 버리겠다고 하셨다.]
"...."
탑을 날린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단순명료했다.
[쓰쉔 관리장, 지금 중국에서 핵을 사용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그럼 너희한테 물어볼까. 이게 과연 중국에만 국한된 일이라고 생각하나?]
[....]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는 관리장들.
오직 미국의 Jacy 관리장만이 한 소리를 한다.
[헛소리하지 마세요. 만약 그랬다간 저희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요.]
[오, 그래. 한번 보자고. 너희 핵 발전소가 지진으로 작살이 나도 그 말이 나오는지 말이야.]
[그래서 중국의 핵 발전소가 작살났나요? 무사하잖아요?]
[그건 우리가 잘 대처를 해서....]
대화가 길어질 듯하자.
김중후가 대화에 끼어든다.
"중국에서 발생한 일은 국제적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우리는 다음 단계를 대비해야 합니다. 다들 보고를 받아 아시겠지만, 어제 2번의 균열 활동이 있었습니다."
그가 리모컨을 조작하여 화면을 전환하자.
커다란 사진이 들어찬다.
사진 속 바닥에는 푸른 체액 같은 것이 곳곳에 어지러이 흩뿌려져 있었다.
[김 관리장, 저건 무슨 사진인가요?]
"저희도 아직 조사 중입니다만, 균열이 활동함과 동시에 갑자기 바닥에 저러한 현상이 발생했습니다."
[꼭... 벌레의 진액처럼 생겼네요.]
한 관리장의 음성에 김중후가 고개를 끄덕인다.
"예, 저희는 아마도 이것이 몬스터의 피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몬스터의 피라고요? 몬스터가 나왔나요?]
"몬스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본래 균열의 활동으로 몬스터가 나왔어야 했으나, 모종의 이유로 몬스터들이 저러한 형태로 나오지 않았을까 추측 중입니다."
김중후가 화면을 넘기며 사진들을 더 보여 주고자 했으나.
[균열 활동의 첫 실패 사례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체액을 회수했으면 그 샘플을 저희에게도 보내 주시겠어요?]
[그 외의 다른 형태는 없었나요?!]
다른 관리장들의 질문이 쏟아진다.
"일단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샘플을 보내 드릴 수는 없습니다."
[뭐라고요?]
[설마 한국이 샘플을 독점하려는 건 아니겠죠?]
김중후는 대답 대신 사진을 한 장 띄웠다.
"해당 사진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갑작스레 체액 위로 검은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그 탓에 샘플의 회수는 어려웠습니다."
[아....]
다들 아쉬움에 입맛만 다시던 중.
잠자코 있던 장 쓰쉔이 다시금 입을 연다.
[샘플이고 나발이고, 그래서 어쩔 거야?]
"어쩌다니요?"
[탑 말이야. 그대로 놔둘 거야?]
장 쓰쉔의 발언에 다른 관리장들이 말한다.
[놔둬야죠. 쓰쉔 관리장님은 오늘 업로드된 영상을 못 보셨나요? 영상 속의 수많은 탑들... 이곳에 있는 분들이라면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아실 거라 생각합니다.]
[영상?]
장 쓰쉔의 물음에 화두를 던진 관리장이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아무튼! 중요한 건 어쩌면 우리 세상에 있는 탑 외에 다른 탑들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오, 그것참 뜬구름 잡는 말이네. 아주 멋져! 과학자들이 좋아하겠어!]
[그렇게 단순히 비꼬고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중대 사안일 수도 있다.]
[....]
장 쓰쉔은 한마디를 더 토해 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와 중국이 처한 상황이 열받는 건 맞지만.
저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Adam 관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다른 탑들이 존재하는 것, 이건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뭐가 위협이라는 건데? 자연재해보다 더 위협적인 게 있어?]
"정말 다른 탑들이 존재한다는 가정하에 말씀을 드리자면, 탑들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3개의 탑이 멸망했습니다."
[그랬었지.... 근데?]
"탑만 멸망하면 상관이 없겠으나, 만약 멸망하는 것이 탑만이 아니라면 어떻겠습니까?"
김중후의 묵직한 질문에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장 쓰쉔만이 비꼬듯 묻는다.
[김 관리장이 그런 얼빠진 소리를 할 줄이야. 탑과 바깥은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세상이라는 걸 잊었어?]
"물론 그랬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겠습니까? 균열 현상이 발생하고 하늘에 환상이 나타난 지금, 탑과 바깥이 별개의 독립된 세상이라 단언하실 수 있습니까?"
[....]
맞는 말이다.
과거에야 엄연히 별개의 세상이라 봐도 됐겠지만.
지금은 확실히 탑의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쓰쉔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묻자.
김중후가 천천히 입을 연다.
"지금까지는 탑에 들어갈 사람이 기존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삶을 선택하는 자율적인 방식을 채택했었다면... 이제는 각국의 인원을 차출하여 탑에 들여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214화 대책 회의 (2)
[인원을... 차출하자고요?]
[그게 무슨....]
김중후의 발언에 일부는 당혹감을.
[흠, 그런 건가.]
[솔직히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긴 하지.]
일부는 김정후의 의도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장 쓰쉔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김중후를 바라본다.
[탑 공략에 박차를 가하자, 이 뜻인 거겠지?]
"그렇습니다."
[알아서 자원하는 인원만으로는 부족한가?]
김중후와 장 쓰쉔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화면 속의 한 관리장이 손을 든다.
[잠깐만요! 그게 무슨 말이죠?]
[....]
장 쓰쉔의 가느다란 눈매가 질문을 던진 관리장을 향했다가.
이내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온다.
[탑을 없애지 않고 탑에 인원을 대거 투입해 빠르게 탑 공략을 하겠다는 말이잖아.]
[김 관리장, 저 말이 사실인가요?]
"예, 그렇습니다."
김중후 관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게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보나요? 엄청난 반발이 있을 텐데요?]
[설사 반발을 어떻게 무마하고 차출한 사람들을 탑에 투입한다고 한들, 들어간 사람들이 뜻대로 움직여 줄지도 미지수다.]
[그것도 그렇고, 이미 탑에 자리를 잡은 사람들을 비집고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가 성장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 텐데요? 자칫 탑에 무의미한 희생자들만 집어넣는 꼴이 될지도 몰라요!]
화면에서 여러 목소리들이 쏟아지듯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그러자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김중후.
"그럼 달리 좋은 의견이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좋은 의견이 있으시다면 경청하겠습니다."
[음....]
[그건....]
선뜻 답하지 못하는 관리장들.
[선택지가 핵으로 탑을 무너뜨리거나 전 세계 인원의 차출이라.... 너무 극단적인 것 같군.]
"현상 유지를 하는 선택지도 있습니다. 다만 그걸 원치 않으시는 분들도 계시겠죠."
모두의 시선이 장 쓰쉔 쪽으로 쏠리자.
그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핵 발언은... 조금 과한 감이 있긴 했지. 하지만 달리 좋은 방법이 없다면, 여전히 선택해 볼 만한 카드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래서 탑이 무너지고 더한 일이 발생하거든 어쩌려고?!]
[그럼 김 관리장의 말처럼 인원을 차출하든가.]
[그보다는 차라리....]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가 들어가길 반복하고.
의견은 서서히 하나의 길로 좁혀져 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인원을 차출하는 게 제일 나을 것도 같군.]
[차출이라고는 해도, 다양한 혜택을 준다고 하면 사람들이 몰릴지도 몰라요. 탑 공략에 성공하거든 엄청난 돈을 준다거나 한다든가요.]
서서히 인원을 차출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리는 와중.
각국의 관리장들은 생각한다.
'어차피 인원을 차출한다면,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인원을 대량으로 투입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탑에서 우리나라의 영향력이 높아진다면 발언권도 높아지겠지.'
'어차피 통신이야 관리자가 운영하는 편의점이 있으니 괜찮을 테고. 그렇다면....'
잠시 후.
[그럼 일단 인원을 차출하는 것으로 하죠. 물론 윗선에서 허가가 떨어져야겠지만 말이죠.]
[먼저 세부적인 조항이나 틀을 다듬는 데 주력합시다.]
[그럼 다음 회의에서 다시 뵙죠.]
둥-
화면이 하나둘 꺼져 간다.
이윽고 모든 화면이 검게 변하자.
"후우...."
김중후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담뱃갑을 만지작거린다.
'내가 발의한 안건이긴 하지만, 잘한 건지 모르겠군.'
탑에 들어갈 인원을 강제로 차출한다는 것.
어찌 보면 인륜을 저버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리 좋은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니....'
차라리 미사일 따위로 탑에 금이라도 갔다면.
기꺼이 미사일을 이용해 탑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미사일 따위론 탑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핵을 쓰면 뭔가 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절대로 안 될 일이지.'
그렇기에 나온 것이 각국에서 탑에 들여보낼 인원을 차출하여.
탑 공략에 투입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질 않는군.'
끝내 담뱃갑 주변에서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이 담배를 빼어 든다.
'뭐, 일단 신경을 끄자. 각국의 수장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지켜봐야 하고....'
철커덕-
그가 라이터의 부싯돌을 당기려던 그때.
똑똑-
회의실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온다.
"관리장님, 요청하셨던 간식입니다."
그 순간.
화아악-
씁쓸함이 묻어 나오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바다의 향기도 있겠지?"
"네, 거기다가 새로운 빵 몇 가지가 추가됐습니다."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김중후는 담뱃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곤.
미소를 지은 채 회의실을 나선다.
* * *
다음 날.
"자, 자! 서둘러!"
덜그럭-
나의 명령을 따라 분주히 움직이는 용아병들.
녀석들이 창고에 가득 쌓인 상품들을 바삐 아공간 주머니에 옮겨 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분신이 슬며시 내게 묻는다.
"어째 평소보다 가져가려는 양이 배는 되는 것 같은데.... 어디 피난이라도 가?"
"이겼잖아. 그럼 뭘 해야겠어?"
"엥? 무슨 말을 하는... 아!"
나의 의도를 이해한 걸까.
분신이 박수를 친다.
"저번 대전에서 승리한 기념으로다가 크게 한탕 하려는 거지?!"
"뭐? 하하, 한탕은 아니고. 마침 유통기한이 얼마 안 남은 것들이 좀 있거든. 그래서 겸사겸사 승리 기념 이벤트를 해 보려고."
저번 대전장 '뒤틀린 황천'에서 제법 시간을 보내는 동안.
유통기한이 한계까지 임박한 상품들이 제법 존재했다.
'이벤트도 열고 재고도 처리하고. 크, 좋다!'
"오! 재고 처리 이벤트... 아니, 좋은 이벤트네. 근데 저 물량을 다 들고 갈 수 있겠어?"
"괜찮아. 몇 번 왕복하면 되지."
이제 더 이상 고정 이동 아이템에 의존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원하는 층으로 이동이 가능한 만큼.
탑과 바깥 세계를 몇 번이나 왕복한다 한들 전혀 부담이 없었으니까.
"아하, 근데 균열은 저대로 놔둬도 돼?"
"균열?"
난 피식 웃었다.
"대전이 끝났으니까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네. 알았어, 잘 다녀와!"
나는 열쇠를 힘껏 문고리에 넣었다.
'자, 가 볼까!'
* * *
35층, 마왕의 성.
지팡이로 길을 트던 남자가 번잡한 거리를 보며 혀를 내두른다.
"어휴, 무슨 놈의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정신없어 죽겠네."
붐비는 마족들, 소수이지만 화합의 도시를 거쳐 마왕령을 방문한 수인들.
그리고....
우글우글-
"아이고, 좀 지나갑시다!"
"이러다가 늦으면 나가리야, 나가리!"
그 어느 때보다 몰려든 공략자들로 인해.
성안은 그야말로 시장통을 방불케 했다.
"다들 엔드미엘로 가려고 온 건가?"
"그렇다고 해도 저건 너무 많은데?"
신규 지역,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을 방문하려는 공략자들이 늘었다고는 해도.
지금 모여든 공략자들의 숫자는 상식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아니면 다들 환상의 상점을 이용하려고 온 것 아냐?"
"그렇다고 해도 평소보다 많은 것 같은데.... 아무튼 우리도 서두르자고!"
남자가 지팡이를 흔들며 인파를 헤집고 달려 나가자.
그의 동료들도 그 뒤를 급히 쫓는다.
이윽고 환상의 상점의 출현 예정 지역에 도착한 그들.
"오, 이 정도면 양호한데?"
이미 환상의 상점 출현 예정 지역 주변을 공략자들이 점거하고 있었으나.
저 정도 숫자면 그래도 그들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올 것이다.
그도 그럴 게, 그들의 클랜은 전원 실버-패를 소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보다 저기 좀 봐! 선구자들이야!"
"워, 망치 클랜도 왔네. 잠깐만, 저기 지식 클랜 아니야?!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이야...."
비교적 최근 35층에 입성한 그들이 네임드 클랜 그리고 네임드 공략자들을 보는 일은 굉장히 귀한 일이었다.
특히나 이제는 중간층이 되어 버린 35층에선 더더욱 말이다.
"이벤트 대전에서도 못 봐서 아쉬웠었는데, 뭔가 지리긴 하네. 장비들 좀 보라고."
"저기에 찍히면 시체도 안 남겠어."
그들이 무라단의 거대한 워해머를 보며 수군거리던 중.
옆에서 다른 이들의 음성이 들려온다.
"근데 듣자 하니 위층에서도 환상의 상점을 이용할 수 있다던데. 욕심이 좀 과한 것 아냐?"
"그러게. 내려오는 것도 일이겠다."
"이벤트 대전이 끝나서 그런 걸지도?"
그러던 그때.
화아아아악-
허공에서 찬란한 빛이 번뜩인다.
그리고 빛이 사라진 공간에.
[편의점24 종말의 탑 1호점] 간판을 단 커다란 2층 건물이 들어선다.
"오오오! 왔다! 왔어!"
"이 시간만 기다렸다고!"
이벤트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환상의 상점을 이용하지 못한 탓일까.
척-
저마다 자신이 소지한 패를 자랑스럽게 들어 보이는 공략자들.
동색, 은색, 금색 등, 갖가지 색의 패들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러한 열성에 화답하듯.
딸랑-
상점의 문이 열리고 가면을 쓴 남자가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도 어김없이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손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으레 있는 상점주의 환영 멘트가 끝나기 무섭게.
"크으! 휴지! 휴지! 이제 휴지가 없으면 못 사는 몸이 돼 버렸다고!"
"내가 이 시간만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전에 샀던 건 진작 다 먹었다고!"
공략자들이 패를 좌우로 흔들며 함성을 지른다.
"탄산...! 탄산...! 우오오오오! 탄산!"
일부는 금단 증상이 나타나기라도 한 건지.
반쯤 눈이 돌아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상점주가 손을 들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조용해진다.
"일단 상점을 열기에 앞서, 이 부분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겠더군요. 흠흠...."
목을 가다듬은 상점주가 뒷말을 잇는다.
"이번 대전에서의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 이뤄 낸 승리이기에 더욱 그 의미가 깊었습니다. 기쁜 날에는 기쁜 일이 따라야겠죠?"
상점주가 손을 까딱이자.
펄럭-
용아병들이 커다란 현수막을 상점 위에 걸기 시작한다.
[블랙데이]
"오오! 블랙... 데이?"
"색깔이 검은 물건만 파는 날 같은 건가?"
모두가 의아해하던 찰나.
상점주가 공략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오늘 저희 환상의 상점에서 취급하는 모든 상품의 가격을 50% 세일합니다!"
"오오오오오?!"
"가격을 절반이나 깎아 준다고?! 아니, 진짜 저렇게 팔아서 뭐가 남는 거야?!"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공략자들이 환한 웃음을 짓던 그때.
"그런데 상점주! 질문 하나만 해도 되나?!"
무라단이 워해머를 들어 보이자.
상점주가 그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물어보시죠."
"이번 이벤트 전장에 우리 탑 말고도 수많은 다른 탑들이 존재하던데, 그건 그저 이벤트의 일부인 건가? 아니면 정말로 다른 탑이 존재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른 탑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지도 듣고 싶네!"
"오, 무라단! 잘 물어봤다! 그거, 나도 진짜 궁금했는데!"
다른 탑의 존재 유무.
그것은 공략자들 사이에서도 큰 화젯거리였다.
"진짜 우리가 상대했던 게 다른 탑의 공략자들이었나요?"
"그저 이벤트 대전의 환경적인 요소였던 겁니까?"
이미 상점주가 관리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대다수인 탓일까.
과연 그가 명쾌한 답을 줄지, 아니면 침묵할지.
모두의 시선이 상점주에게 향한다.
"...."
입가에 걸린 미소와 달리 상점주가 말이 없자.
"대답 안 해 주려나 보네."
"관리자도 말할 수 없는 사안이가 봐."
"사실 우리한테 말해 줄 이유도 없긴 하잖아?"
공략자들이 작게 수군거린다.
그러던 그때.
침묵하던 상점주가 입을 뗀다.
"다른 탑은 실존합니다."
215화 힘... 열심히 키워야겠지?
"...."
상점주의 갑작스러운 대답 때문일까.
아니면 그의 입에서 나온 답이 대부분의 예상을 벗어나기라도 한 걸까.
좌중 사이로 묘한 술렁임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니겠지? 당연히 농담이겠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관리자 피셜이라 그냥 넘길 수도 없고."
지금껏 세상에 존재하는 탑은 오직 '종말의 탑'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던 탓인지.
일부는 혼란스러워하거나 선뜻 상점주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러나.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그랬던 건가."
"하긴, 뭔가 이상하긴 했다고. 다른 탑들이 있는 것도 그렇고 갖가지 능력을 쓰는 이종족 놈들도 그렇고, 어딘가 거울을 보는 느낌이 들었다니까?"
"이제야 퍼즐이 들어맞는 기분이군."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정이 맞았음을 확인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다만 '다른 탑이 실존한다'는 답은.
공략자들이 갖고 있던 수많은 의문들 중 하나일 뿐.
"근데... 탑들이 여러 개나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설마 이번 대전처럼 앞으로도 계속 다른 탑들이랑 싸워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엉?! 탑만 공략하면 되는 게 아니었어?"
여전히 현장에는 해결되지 않은 수많은 물음표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때문일까.
"상점주! 질문 좀 해도 되겠습니까?!"
"저도요! 저도!"
"다른 탑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뭔가?! 탑을 공략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던 건가?"
"설마 탑을 공략하는 목적이, 다른 탑들을 상대하고자 함이었던 겁니까?!"
질문이 비처럼 쏟아져 내리자.
상점주가 웃으며 군중들을 제지한다.
"자자, 일단 진정들 하시고요."
"...."
삽시간에 소란스럽던 현장이 잦아든다.
"궁금한 점들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모두의 질문을 받기도 어려운 노릇이니, 대표자의 질문에 몇 가지 답을 하는 걸로 하죠."
상점주가 이지수를 향해 손을 까딱이자.
이지수가 굳은 표정으로 상점주의 앞으로 나아간다.
"자, 뭐든 물어보시죠!"
"뭐든 물어보면, 뭐든 답해 주는 건가?"
이지수의 질문에 상점주의 입가가 희미하게 올라간다.
"그건 질문에 따라 다르겠죠?"
* * *
테이블에 반듯이 놓인 수정구.
그 안에선.
[...그럼 우리는 뒤틀린 황천에서 다른 탑들과 경쟁을 한 셈이잖아. 그렇다면 이후에도 다른 탑들과 싸우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야?]
[단언할 수는 없으나, 현재로서는 그럴 가능성이 높겠죠?]
문답을 주고받는 두 사람과 배경처럼 깔린 수많은 공략자들을 비추고 있었다.
[그래. 사실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 왜 종말의 탑 말고도 다른 탑들이 존재하는지, 그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이유 따위는 상관없어.]
[오....]
[다만 내가 정말로 궁금한 건, 우리가 대전에서 패배했을 때야. 만약 우리가 질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
[패배했을 때라....]
수정구 속, 조커 카드가 턱을 쓸어내리다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이미 다들 그 결과를 알고 있잖습니까?]
[이미 결과를... 알고 있다고? 아, 잠깐....]
수정구 속 여자의 표정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 가자.
조커 카드가 정답이라는 듯 그녀에게, 아니.
모든 공략자들에게 들으라는 듯 소리친다.
[패배는 곧 탑의 몰락을 의미합니다. 탑은 멸망할 것이며, 현실도 그 영향을... 쿨럭, 쿨럭....]
돌연 조커 카드의 입 사이로 붉은 액체가 새어 나오자.
"크으... 정말 훌륭한 연기력이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그드라실이 나뭇가지를 모아 박수를 친다.
"정말 모르는 녀석들이 보면 놈이 우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러나?"
"흠... 그 정돈가?"
데면데면한 표정으로 수정구를 지켜보는 게한나와 달리.
유그드라실은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어 간다.
"연기도 연기지만, 무엇보다 조커 카드가 큰 결단을 내린 게 흥미롭단 말이지! 설마하니 정보를 풀어 버릴 줄이야!"
"큰 결단이라기보단, 이제 숨기는 데 한계가 있어서 그런 것 아냐?"
게한나가 다시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유그드라실이 나뭇가지를 강하게 흔들어 보인다.
"모르는 소리! 다른 탑들의 존재를 숨기고 싶었다면 다른 탑들은 구조물의 일부였다고 얼버무렸으면 됐을 거다."
실제로 상당수의 공략자들이 조커 카드를 관리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그가 정보를 은닉하고자 했으면 어렵지 않게 숨길 수 있었을 터!
"흠, 더 이해가 안 되는데? 정보를 오픈할 이유가 있나? 오히려 혼란만 더할 것 같은데?"
"쯧쯧, 그렇게 보는 눈이 없어서야. 그건...."
유그드라실이 대화를 이어 가려던 찰나.
탁-
"그 악랄한 놈이 설마 아무 생각도 없이 그랬을 것 같아?"
어느새 다가온 블라디미르가 수정구 옆에 무언가를 내려놓으며 대화에 끼어든다.
"그러니까 조커 카드의 생각이 궁금하다는 거지. 사실 다른 탑에 대한 정보는 진작 풀 수 있었잖아. 근데 지금껏 숨겨 왔던 거고."
게한나의 말이 맞다.
이미 조커 카드는 첫 대전인 '영원의 전장'을 통해 다른 탑의 존재를 마주했었으니까.
"그래서 당연히 난 조커 카드가 혼란을 피하려고 정보를 숨겼고, 끝까지 숨길 거라 생각했는데, 그걸 풀어 버렸으니 의문이라는 거지."
"이유는 간단하다. 이제 더 이상 정보를 숨길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지."
"정보를 숨길 이유가 없어졌다고? 아. 설마 균열 때문인가?"
블라디미르가 정답이라는 듯 손가락으로 게한나를 가리킨다.
"바로 그거다! 이미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으니, 조커 카드도 더 이상 정보를 숨길 이유가 없는 거지!"
"그래서 정보를 공개하고 이득을 챙기겠다는 건가. 나쁘지 않은 선택 같네."
일단 다른 탑에 대한 정보와 '멸망'에 대한 정보가 조커 카드의 입을 통해 공개된 이상.
종말의 탑은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제 엄청나게들 공략하려고 하겠네."
삶을 이어 나가고자 하는 의지는 생명체가 갖고 있는 가장 원초적인 본성이다.
그런데 '다른 탑과의 전투에서 패배할 시 멸망'이라는 현실을 직시하게 됐으니.
당연히 공략자들 또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을 칠 터.
"근데 탑 내에는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다고 치더라도, 바깥도 그럴까?"
"바깥도 바깥 나름대로 재밌는 변화가 생기겠지. 우리는 그저 즐겁게 지켜보면 될 뿐이다. 그런데...."
유그드라실이 블라디미르가 테이블에 내려놓은 물품에 흥미를 보인다.
"뭘 갖고 온 거지?"
"아, 이거?"
블라디미르가 씨익 웃더니 자랑스럽게 말한다.
"전에 조커 카드한테 받은 뇌물... 아니, 선물을 연구하고 분석해서 내 식대로 재해석을 해 봤다!"
"이건... 피자잖아?"
"그래. 유그드라실이 만든 건 영 먹을 게 못 되는 것 같아서 말이야."
기존에 유그드라실이 만들었던 녹색 피자와 달리.
블라디미르가 가져온 피자는 그 모양새가 제법 진짜 피자와 흡사해 보였다.
"...확실히 조커 카드가 팔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군."
"그렇지? 네가 만들던 그 풀떼기 빵이랑은 확실하게 다를걸? 이거야말로 진정한 완성품! 완성작! 먹어들 보라고!"
블라디미르의 권유에 관리자들이 피자를 한 조각씩 가져간다.
그리고.
"음...."
"어때? 괜찮지?"
"...."
어째 입을 놀리는 관리자들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갔으나.
블라디미르는 어깨를 쭉 펴곤 자신만만하게 묻는다.
"어때? 원주민들이랑 공략자들이 환장해서 달려드는, 그런 맛이 느껴지지?!"
"음... 어째 여기에서 피의 향기가 나는 것 같은데...."
"아, 그거? 아주 제대로 봤어! 내 취향을 좀 담아서 진한 녀석을 섞어다가 한번 만들어 봤지! 어때?! 끝내주지?!"
게한나가 한숨을 내쉬며 툭 피자를 그릇에 던진다.
"너나 유그드라실이나 다를 게 뭐지?"
"...어?"
"조커 카드한테서 받아 온 물건이 남았다면 지금이라도 내게 넘겨라. 내가 개발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아니, 잠깐, 잠깐! 이게 맛없다고?! 진짜로? 혹시 맛있는데 맛없는 척을...."
"맛없다니까?!"
삽시간에 휴게실이 관리자들의 말다툼으로 시끌벅적해진다.
* * *
2주 뒤.
[...다음 소식입니다. 재앙은 지나갔습니다만, 재앙이 훑고 간 자리에 생긴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고 있죠. 각국에서 도움의 손길이 이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현장의 상황은 막막해 보이기만 합니다. 자세한 상황....]
"오...."
간단한 군것질 거리를 입에 욱여넣으며.
TV를 주시하는 분신.
"와, 진짜 처참하긴 하네. 회복하려면 꽤 시간이 걸리겠어."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탑에 들어가고자 하는 지원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통계가 늘고 있는 가운데, 탑 관리국의 정책 발표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와.... 주인, 주인!"
연신 탄성을 터트리던 분신이 나의 어깨를 툭툭 친다.
"왜?"
난 핸드폰에서 시선을 거두곤 녀석을 바라봤다.
"저것 좀 봐 봐! 탑에 들어가려는 희망자들에게는 엄청난 혜택을 준다는데?"
"...."
슬쩍 TV를 보니 과연 분신의 말대로다.
[...생존에 필요한 훈련 그리고 그 훈련 비용을 전적으로 지원한다고 하며, 그 외에도 탑에 들어가기 전까지 여러 편의 사항과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 공표했습니다. 심지어 그뿐이 아닙니다. 탑 공략에 성공하고 복귀할 시, 많은 보상과 혜택을 제공할 것이라....]
"오, 차출까지도 생각했는데, 나름 유순한 방법으로 가네."
"엥? 차출? 그게 무슨 말이야?"
난 대답 대신 핸드폰을 녀석에게 보여 줬다.
[상점주의 폭탄 발언! 종말의 탑 말고도 다른 탑들이 존재한다!]
[다른 탑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더 이상 그 누구도 안전하지 않다.]
.
.
.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분신이 말한다.
"이건 주인이 정보를 오픈한 이후의 영상들이잖아?"
"그치."
내가 정보를 공개한 이후.
공략자들의 움직임은 크게 달라졌다.
외부의 적이 있다는 걸 알게 된 뒤, 다들 자신의 스펙을 올리고자 미친 듯이 공략에 매진 중이었으니 말이다.
'진작 저렇게 알아서 움직였으면 좀 좋아?'
"근데 이 영상들이랑 차출이랑 무슨 상관인데?"
"다른 탑들이 존재하고, 탑이 멸망하면 바깥 세계에도 영향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무슨 생각이 들 것 같아?"
"그야... 조졌구나?"
분신의 말에 난 픽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 하지만 일단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하지 않을까?"
"그게 차출이라는 거야?"
"뭐, 그런 셈이지."
탑에 대량의 인원을 투입해 조금이라도 탑 공략 속도와 공략 확률을 높이는 것.
그것이 현재 바깥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차출까지는 하지 않은 건, 과도한 혼란을 걱정해서 그런 건가.'
뭐, 상관없다.
어쨌건 공략자들도 바깥 사람들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여 주고 있으니까.
"흠. 근데 주인, 하나 물어봐도 돼?"
"뭔데?"
"왜 정보를 오픈한 거야?"
분신의 질문에 난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는 숨기는 것보다 공개하는 게 더 메리트가 크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지금까지는 괜찮게 가고 있기도 하고."
"오...."
이미 다른 탑들과의 전투가 발발한 지금.
다음에도 다른 탑들과의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높을 터.
'미리미리 대비를 해 둬야 조금이라도 승기를 잡을 확률이 높아지지.'
운과 기회는 언제나 준비된 자의 것이니까.
"그건 그렇고, 발리나랑 백구가 돌아오면 슬슬 일 시작해야 하는 건 알지? 재고가 거의 다 떨어졌어."
"으으, 이제 휴가도 끝인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는 분신.
"난 잠깐 탑에 다녀올 테니까, 집 잘 보고 있어."
"또 장사하러 가는 거야?"
"가야지."
공략에 나서는 공략자들이 엄청나게 는 만큼.
우드-패를 발급받기를 원하는 공략자들 또한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그리고 오늘은 선구자들이랑도 만나야 되고."
"선구자들은 왜?"
"이후 탑 공략에 대해 논의해야지. 아무튼 다녀올게."
"어, 잘 다녀와!"
난 문고리에 열쇠를 넣곤 힘껏 돌렸다.
철컥-
216화 역배는 못 참지
같은 시각.
"오오오오!"
"이제 끝났네요."
토르, 아테네 등.
도박장의 죽돌이, 죽순이들이 수정구 속 영상을 보며 탄성을 터뜨린다.
우르르르르르릉-
수정구 안에선 거대한 탑 하나가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이번 대전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혈전을 벌여서 보는 맛이 있었다."
"그러게요. 저렇게 좀 시원하게 치고받고 싸워야지, 어중간한 협상들만 하고 있으니."
"어허! 그게 무슨 말인가! 전투도 좋지만, 서로 동맹을 맺었다가도 뒤통수 치는 걸 지켜보는 게 또 묘미이건만! 뭘 모르는 소리들을 하는군!"
테이블에 모여 있던 이들이 서로의 취향을 질타하던 중.
수정구 위로 일련의 문구가 떠오른다.
[제8 대전장의 대전이 종료되었습니다.]
[순위 정산을 시작합니다. 정산의 기준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립지대의 보유량, 적 처치 수, 생존율, 그리고....]
[순위 정산표를 공개합니다.]
촤르르르륵-
[1위 - 침묵의 탑]
[2위 - 여로의 탑]
.
.
.
순차적으로 떠오른 47개의 탑들의 이름을 보며.
도박꾼들은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역시나 이변은 없었군."
"당연한 것 아닌가?!"
토르가 호쾌하게 넥타르를 들이켜더니.
다른 신들을 보며 씨익 웃는다.
"가장 정상에 근접한 탑들이 가장 높은 등수에 오르는 게 맞는 거지! 아니면... 혹시 멍청하게 역배에 베팅한 놈이 있는 건 아니겠지?"
"...."
해당 발언에 몇몇 이들은 얼굴을 찌푸리거나.
"무슨 낭만 없는 소리를 하는 거야? 걸 거면 당연히 역배에 걸어야지! 그게 도박의 참묘미인 걸 몰라?!"
"으하핳! 아무렴! 도박의 '도' 자도 모르니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껄껄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봐, 포세이돈! 저 낭만 없는 놈에게 한마디 해 주라고!"
"...."
그러나 포세이돈은 조금도 웃지 못했다.
아니, 웃을 수 없었다.
"...."
슬며시 자신의 자산 현황을 살펴보는 포세이돈.
잘그랑-
몇 차례 진행한 도박에서 본전도 못 건진 탓일까.
그의 손에 들린 코인은 이제 겨우 200코인 남짓.
정말 파산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간당간당한 상황이었다.
'크으윽....'
어쩜 이렇게 도박에 소질이 없는 것인지.
심지어 정말 정배 중의 정배인 탑들에만 베팅을 했는데도.
이 모양 이 꼴인 건 문제가 있어 보였다.
오죽했으면.
'...설마 본사에서 주작을 한 건 아니겠지?'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의심까지 피어오르는 지경이었다.
"어이! 넥타르!"
포세이돈은 괜히 직원을 향해 고함을 지르곤.
턱에 손을 괸 채 생각한다.
'젠장... 전의 계획들이 성공을 했었어야 했는데.'
200코인이 남을 때까지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본사의 직원을 은밀히 매수하고자 했으며.
다른 탑의 공략자에게 슬쩍 간섭하여 힘을 부여하기도 했으니까.
'직원을 매수하는 거야 어려울 걸 예상했지만, 간섭한 공략자가 죽을 줄이야....'
나름 싹수가 보이던 놈이었다.
그래서 힘을 줬고, 당연히 그 힘을 이용하여 층 공략에 성공할 줄 알았건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지금껏 겪었던 실패들이 더욱 뼈아프게 느껴진다.
'이대로는 안 된다....'
이제 수중의 200코인마저 잃게 되거든 정말 돌이킬 수 없게 된다.
드르륵-
포세이돈이 천천히 일어서자.
주변에 앉아 있던 신들이 모두 그를 쳐다본다.
"뭐야, 벌써 가려고?"
"...조금 지루해서 말이다."
"지루한 게 아니라 수중의 코인이 얼마 안 남은 게 아니고?"
맞은편에 앉아 있던 토르가 비웃음을 던지며 계속 말한다.
"이참에 은퇴 절차를 밟는 건 어떤가?! 어떤 이름으로 바뀔지 기대가 되는군. 이돈? 포이? 푸하하하!"
"이놈이...!"
끝내 얼굴이 새빨개진 포세이돈이 삼지창을 잡자.
토르 또한 옆에 두었던 거대한 망치를 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워워, 진정들 하라고."
"싸울 거면 나가서들 싸우라니까? 왜 자꾸 애꿎은 놀이터를 망가뜨리려 하는 건데?"
황급히 그들을 제지하는 주변의 신들.
"도발은 저놈이 먼저 했다."
"도발이 아니라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한 건데, 네놈이 발끈한 거지."
"그만들 해. 즐겁자고 만든 장소에서 뭣들 하는 거야?"
결국 두 신이 잡았던 무기를 내리자.
주변의 신들이 포세이돈에게 한마디씩 덕담을 건넨다.
"코인이 많으면 어떻고 적으면 또 어때?"
"난 개인적으로 적은 편이 더 재미있긴 하던데. 더 희열감 같은 게 느껴진다고 해야 되나? 승부 하나에 내 존재감이 오가는 그 상황이란... 진짜 짜릿하긴 하지. 너도 그 짜릿함을 느끼고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편이 재밌긴 하지만, 그러다가 훅 가는 거야. 그 원숭이 놈도 미친 듯이 역배에만 걸다가 그 꼴 난 것 아냐?"
맞는 말이다.
도박의 희열감에 몸을 맡겼다가 이름을 잃고 밑바닥으로 추락한 이들이 한둘이던가?
"그놈이 진짜 내가 본 역배충 중에서도 최고이긴 했지. 유일하게 남은 100코인까지 역배에 걸곤 웃더라니까? 그때 느꼈지. 아, 이놈은 진짜다, 하고."
"그러고 보니 그 원숭이 놈은 어떻게 됐대? 근황이 궁금하군."
"이름을 잃고 본사의 관리하에 들어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뭐, 본사의 직원 중 누군가가 이름을 이어받았겠지."
그 의미와 존재감을 잃은 이름은 변형되고 뒤바뀌어.
불완전한 직원의 존재력을 완전케 하거나 수많은 직원들을 양산하는 양분이 된다.
"뭐, 근황 따위 알 게 뭔가? 이름을 잃은 놈은 신도 뭣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반쪽짜리의 필멸자일 뿐이지."
"그것도 그렇군."
"음? 근데 포세이돈은 어디로 간 거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자리에서 사라진 포세이돈.
"혼자 술이라도 마시러 간 모양이지."
그러나 신들은 이내 빈자리에서 관심을 거둔다.
"그보다... 어이! 8대전장의 대결도 끝났잖아? 다음 대결은 뭐야?"
"대, 대, 대대전 뒤뒤, 뒤틀린 화, 황천은 그, 그, 그것으로 종료가 돼, 됐습니다. 이이, 이후 새로이 여, 열릴 대대전을 기, 기기대해 주시길...."
직원의 말을 들은 신들이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그래도 이번 대전은 꽤 괜찮았어. 다음 건 좀 더 베팅하는 맛이 있는 걸로 준비하라고!"
"며며, 명심하겠습니다! 해, 해해당 안건은 보보, 본사에 거거건의를...."
"어우, 답답해 죽겠네. 가서 넥타르나 가져와!"
* * *
'망할....'
도박장에서 나온 포세이돈이 이를 악문다.
'기분이 더럽군.'
코인이 얼마 남지 않은 탓일까.
오늘따라 유독 더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벼락 맞은 쥐새끼가 자신을 욕하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200코인을 확실하게 불릴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
결국 이 모든 건 코인이 부족해서 일어난 일.
그렇다면 다시금 코인을 늘리면 된다!
'방법, 방법이라....'
물론 더 이상 도박장에 출입하지 않는다는 선택지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도박장에 출입하지 않거든.
필시 다른 신들이 그를 안줏거리 삼아 비웃을 게 너무도 뻔했으니까.
'하지만 너무 변수가 많은 게 문제란 말이지....'
그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계획들도 결국 예상치 못한 변수들에 무너졌으니 말이다.
'변수 없이 확실하게 코인을 대량으로 먹을 방법....'
고뇌를 거듭하는 포세이돈.
잠시 후.
"오늘은 어디에다가 베팅을 하면 좋을까?"
"당연히 무조건 정배지. 역배가 베팅하는 맛이 있긴 해도, 지면 씁쓸하다고."
"역배에는 조금만 베팅하면 되지!"
몇몇 신들이 대화를 나누며 도박장에 들어서려다가.
망부석처럼 서 있는 포세이돈을 발견한다.
"오, 뭐야. 포세이돈이잖아? 근데 도박장 앞에서 뭐 하는 거지?"
"놔둬. 또 잃었나 보지."
"그 정도면 도박이랑은 연이 없는 것 같은데. 차라리 다른 유희를 찾는 게 낫지 않으려나?"
수군거리는 신들.
"다른 유흿거리가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이 근방에는 도박장 외에도 그들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갖가지 시설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그래도 도박보다 재미가 떨어지잖아?"
"그것도 그렇긴 해."
요리의 신이 공들여 만든 음식도, 음악의 신들이 만들어 내는 합주도 계속 경험하다 보면 질리기 마련.
이미 온갖 것을 경험하고 즐긴 그들이다.
기대감의 역치가 이미 정점에 달한 그들이 그런 것에 만족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
"확실히 존재력을 걸고 베팅하는 것만 못하긴 하지."
"계속 실수해서 코인을 까먹으면 점점 나락에 떨어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이 끝내준다니까?"
그들이 하하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그때.
철커덕, 철컹-
도박장 입구 옆에 자리하고 있던 [금일의 신규 도박] 게시판이 변하기 시작한다.
[NEW - 회개의 탑의 65층의 공략 시간: 1~3개월]
[NEW - 개몽의 탑의 62층의 공략 성공 여부]
.
.
.
갖가지 종류의 도박들이 떠오르자.
그것들을 구경하던 신들이 혀를 찬다.
"뭔가 새로운 게 나오나 했더니, 늘 하던 것들이군."
"그러게, 조금 아쉬운데.... 그래도 요즘 새로운 것들을 많이 시도하는 것 같긴 하잖아? 뒤틀린 황천은 나름 재밌었다고."
"그래, 내 말이 그 말이야! 그런 걸 좀 더 만들어야...."
그러던 그때.
철커덕, 철컹-
[NEW - 풍파의 탑의 네임드 공략자 에르미스의 생존 여부]
[NEW - 무한의 탑의 이레귤러의 사망 여부]
.
.
.
추가로 등장한 금일의 신규 도박 목록들.
"오오!"
"저건 못 본 종류인 것 같은데?!"
신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린다.
"이러면 다음 대규모 대전이 생기기 전까지 또 재밌게 즐길 수 있겠어!"
"그래, 이제야 본사의 잡것들이 좀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네. 우리를 좀 더 즐겁게 만들...."
그들이 활짝 웃으며 도박 목록들을 바라보던 그때.
"음!"
망부석처럼 서 있던 포세이돈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오, 포세이돈!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우린 이제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같이 들어가겠...."
콩, 콩-
가볍게 그들의 말을 무시하곤.
하체의 물고기 지느러미를 움직여 게시판 앞으로 다가가는 포세이돈.
그가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거라면 꽤나 해 볼 만할지도 모르겠군...."
그의 두 눈동자가 하나의 게임을 똑바로 응시한다.
[NEW - 종말의 탑의 네임드 공략자 이지수의 사망 여부]
-배당률 생존 1.1 / 사망 1.9
역배가 무려 1.9!
다른 게임들의 배당률이 꽤나 맛이 없는 걸 감안하면.
이 배당률은 꽤나 출중했다.
'코인을 불리기 좋은 배당률이군. 이건 반드시 참여를... 흠.'
포세이돈이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탑의 이름을 응시한다.
'...하필 그 탑인가.'
그가 개입했었음에도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던, 아니.
오히려 막심한 손해를 봤던 탑이다.
그 뒤에도 몇 번 종말의 탑과 관련된 도박에 코인을 베팅했으나.
베팅한 족족 쓴맛을 보지 않았던가?
'저 탑에는 마가 낀 것 같아서 더 이상 건들지 않으려 했건만.'
그래도 배당률 1.9를 그냥 보낼 수는 없는 노릇!
'미리 손을 써 둬야겠군.'
철저한 준비는 승리를 보장하고.
보장된 승리의 끝에 따라오는 코인은 응당 그의 것이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준비를 하고 움직인다.'
포세이돈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217화 심해의 깊은 눈동자
'이지수의 사망 여부라.... 이지수가 누구지?'
그에게 있어 공략자들이란 그를 즐겁게 만들어 주는 도구, 벌레와도 같은 것.
하물며 벌레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잖은가?
'흐음, 상관없나.'
어차피 조금만 신경 쓰면 금방 알게 될 정보이다.
'일단 미리 베팅을 해 둬야겠군.'
계획은 그 뒤에 세워도 늦지 않으니까.
콩, 콩-
다시금 도박장 안으로 지느러미를 돌리는 포세이돈.
'저기에 있군.'
수많은 베팅 테이블들이 곳곳에 자리한 도박장 안에서.
포세이돈은 그가 원하던 게임을 쉽사리 찾아낸다.
[종말의 탑의 네임드 공략자 이지수의 사망 여부]
-배당률 생존 1.1 / 사망 1.9
다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한 놈들이 많기라도 했던 건지.
테이블 주변은 이미 선객들로 가득했다.
"오, 이것들 보라고! 간만에 제법 재밌을 것 같은 판이 나왔는데?"
"흐으음... 재미는 있을 것 같은데, 시작부터 배당률이 저래선 걸어도 얼마 못 따겠군."
"역배에 걸면 되지!"
맞는 말이다.
저런 게임에서는 정배에 걸어 봤자 손에 쥘 수 있는 코인은 얼마 되지 않는다.
"어차피 코인도 넉넉할 터이니, 한번 걸어 보지 그러나?"
"그러려고."
"나도 한번 해 볼까?"
신들이 신규 게임에 연이어 베팅을 할 때마다.
촤르르르륵-
-배당률 생존 1.1 / 사망 2.1
-배당률 생존 1.1 / 사망 2.2
-배당률 생존 1.1 / 사망 2.1
.
.
.
배당률 또한 시시각각 변해 간다.
다만 그 변화율이 크지 않았기에.
포세이돈은 코인을 만지작거리며 생각한다.
'역시 200코인을 다 거는 게... 흠.'
200코인을 다 잃으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가 없다.
한 번의 기회라도 남겨 놓는 편이 현실적으로 가장 좋은 방안일 터.
'그래. 만약이라는 게 있으니 100코인만 거는 편이 낫겠군.'
마침내 결정한 포세이돈이 해당 게임에 100코인을 베팅하려던 그때.
촤르르르르륵-
갑자기 배당률 판이 엄청난 속도로 회전하더니.
-배당률 생존 1.04 / 사망 10.1
예상 밖의 배당 현황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10배?'
포세이돈이 멍하니 배당률 판을 바라보던 중.
다른 주주들이 토르를 보며 소리친다.
"어이, 토르! 또 장난질이냐!"
"장난질이 아니라 갖고 있던 코인을 조금 걸었을 뿐이다만?"
"조금 같은 소리 하네! 저게 어딜 봐서 조금이라는 거야?"
껄껄 웃음을 터뜨리는 토르.
"코인을 딸 가능성이 높은 쪽에 크게 베팅하는 게 당연하지. 그게 불만이라면 너희도 나를 따라 걸면 그만 아닌가?"
틀린 말은 아니다.
역배가 터지는 것에 반해.
정배에 걸었을 때 코인을 획득할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10배... 10배라.... 10배!'
하지만 먹기만 하면 소지한 코인을 크게 늘릴 수 있다.
더욱이!
역배가 터지기만 한다면 평소부터 고깝게 여기던 놈의 코인까지 날리게 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이점이 많은 판이었다.
'흔치 않은 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100코인을 더 베팅.... 하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포세이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거린다.
순간, 온갖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잠식한다.
도로록, 퐁-
이마에 매달린 땀방울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넥타르가 담긴 잔에 떨어져도 그의 몸은 움직일 생각을 않았다.
"...."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가 사라지길 몇 차례.
천장에 걸린 화려한 샹들리에의 빛이 반사되기라도 한 걸까.
그의 눈동자가 유독 더 번들거린다.
[종말의 탑의 네임드 공략자 이지수의 사망 여부에 200코인을 베팅하였습니다.]
광기로 반쯤 붉어진 눈으로 문구를 바라보는 포세이돈.
'이제... 돌이킬 수 없다.'
홱-
포세이돈이 무서운 속도로 도박장을 빠져나가자.
"어? 어이! 포세이돈! 어디 가는 건가?"
주변에 있던 주주들이 그를 불러 세웠으나.
포세이돈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곤 밖으로 나갔다.
"...."
천천히 허공을 올려다보는 포세이돈.
그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정말이지... 엄청난 고양감이야.'
이게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위기인가.
목숨, 존재력을 잃을 극한의 상황이 되자.
아이러니하게도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듯했다.
'라그나로크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이 없건만. 조금은... 그 원숭이 놈의 마음도 이해가 가는군.'
억겁의 세월 동안 그의 몸을 눌러 왔던 무료한 기분이 씻은 듯 날아가 버린 느낌이다.
그러나 뜨거운 고양감과는 별개로 그의 머릿속은 차분하고 냉정했다.
'손을 써야.... 하지만 걸리면 소멸을 면치 못할 텐데.... 잠깐.'
개입에 대해 고민하던 포세이돈이.
순간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난 이제 더 잃을 것이 없잖아?'
패배를 해도 끝.
본사에 개입 여부를 걸려도 끝.
어차피 벼랑 끝에서 한 발자국만이 남은 상태.
어어 하면서 천천히 밀려나서 떨어지느니.
제대로 된 단판 승부로 끝내는 것이 남자의 도리인 것이다.
심지어 걸리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은가?
'오오! 그래! 그렇다면 그 방법을 쓰는 것도 재밌겠어!'
무료함에 젖어 있던 그였다면 결코 떠올리지도, 실행하지도 않았을 방법이 뇌리를 강타한다.
"크흐흐, 푸하하하하하하하!"
'아주 재미있겠어.'
돌연 삼지창으로 바닥을 툭 내려치는 포세이돈.
그 순간.
첨벙-
그의 지느러미 밑으로 자그마한 물웅덩이가 생겨났고.
웅덩이가 그의 몸을 삼킴과 동시에 처음부터 그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 사라졌다.
* * *
며칠 뒤.
40층, 물의 도시 일라노어.
퐁-
"와, 저것 봐. 진짜 예쁘다...."
일단의 무리가 도시를 유유히 헤엄치는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을 보며 탄성을 내지른다.
물방울 모양의 집들, 어딘가 아홀로틀(우파루파)을 닮은 것 같은 원주민들도 도시의 아름다움에 멋을 보탠다.
"영상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예쁜 것 같아! 에드!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연신 감탄하는 동료의 물음에 에드라 불린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멋진 도시네."
"피... 무슨 반응이 그래?"
"난 이미 남들이 다 거쳐 간 도시에는 별로 관심 없어. 내가 최초여야 의미가 있는 거지."
에드의 발언에 동료들이 고개를 젓는다.
"또 시작이네. 최초인 게 그렇게 중요해?"
"당연히 엄청나게 중요하지! 최초라는 건 그만큼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거야. 최초 발견! 최초의 보상! 최초의 업적! 이게 얼마나 가슴을 끓게 하는지 너희가 잘 몰라서 그러는 거지."
"음, 그래, 그래. 그러니까 얼른 최전선까지 가자고. 그래야 최초든 뭐든 달성할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에드와 그의 동료들이 대화를 나누던 중.
도시를 지나가던 공략자들이 그들의 어깨에 붙어 있는 클랜 로고를 보곤 숙덕거린다.
"오, 바빌론 클랜이네? 분명 38층에 머무르고 있다는 기사를 봤던 것 같은데, 언제 40층까지 올라온 거야?"
"바빌론... 클랜? 난 처음 들어 보는데? 유명한 클랜이야?"
"진짜 몰라? '섬광의 에드'가 이끄는 바빌론 클랜! '슈팅스타 매거진'에 나왔던 클랜이잖아! 5개의 샛별 클랜 중 하나인 초신성 클랜!"
"어, 음...."
동료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하자.
남자가 한숨을 내쉬며 계속 말한다.
"다른 건 몰라도 매거진은 좀 구독해라. 몇 골드나 한다고. 다른 건 몰라도 탑 돌아가는 꼴은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
"거기 믿을 만한 거긴 한 거야? 정보는 정확한 건지, 누가 운영하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은 조직이잖아?"
최근 탑을 강타한 조직 '슈팅스타'의 매거진.
주기적으로 탑의 여러 이슈들을 종합한 잡지를 출간하는데.
누가 출간하는 것인지, 유통망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
무엇하나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래도 안에 담긴 정보들은 확실하다는 게 정설이야. 거기다가 별로 비싸지도 않잖아? 몇 골드로 가십거리를 본다고 생각하면 나쁘진 않지."
"거참. 알겠어, 알겠고. 그래서 저놈들이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초신성인지 뭔지 하는 건데?"
"30층까지 공략하는 데 걸린 시간이 반년도 안 된다던데. 엄청나지 않아?!"
"...."
호들갑을 떠는 남자와 달리 동료는 조금 떨떠름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뭐?"
"솔직히 그렇잖아. 모르긴 해도 이미 바깥에는 꽤 많은 공략 영상이 풀렸을걸? 당연히 저놈들도 그 영상을 숙지하고 들어왔을 테고. 모르니까 어려운 거지, 다 알고 공략하면 누가 클리어를 못 해?!"
동료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저들이 앞서갔던 이들의 발자취를 뒤쫓아 온 후발대인 것도 사실이었으니.
"...듣고 보니 그것도 그러네."
"초신성이니 뭐니 잔뜩 포장은 해 주지만, 결국 그냥 애송이들일 뿐이라고!"
남자들의 대화 소리가 조금 컸던 탓일까.
"...."
에드 일행이 남자들이 있는 방향을 노려보며 말한다.
"조용히들 좀 말하지. 다 들리네, 다 들려."
"어쩔까, 에드. 가서 입 다물라고 할까?"
그러나 고개를 젓는 에드.
"됐어, 아주 틀린 말도 아니고. 실제로 우리는 지금껏 앞서 나갔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어왔잖아?"
"그래도...."
"그래서 최초가 좋은 거야. 아무리 우리가 활약하고 유명세를 떨쳐도, 결국 과거와 비교될 수밖에 없거든. 그러니까 우리도 빨리 최전선으로 가야 되는 거야. 최초의 업적은 그 누구도 비웃을 수 없을 테니까."
에드가 클랜원들에게 소리친다.
"선구자들도 넘어서는 최고의 클랜으로 거듭나 보자고!"
현재 단연코 '최초'라는 단어에 가장 밀접해 있는 클랜은 선구자들이었다.
그들이 걷는 길이 곧 탑의 역사였으니까.
그렇기에 선구자들은 그들이 추구할 동경의 대상이었으면서도.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기도 했다.
"그래! 우리라고 못 할 게 뭐 있어?!"
"60층? 까짓것 금방 올라가 보자고!"
의지를 불태우는 에드를 보며.
바빌론의 클랜원들 또한 주먹을 불끈 쥔다.
그러던 그때.
띠링-
돌연 에드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심해의 깊은 눈동자가 당신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어?"
메시지를 보곤 당황한 에드가 동료들에게 묻는다.
"지금... 너희도 떴어?"
"뜨다니?"
"메시지 말이야!"
동료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아무것도 뜬 게 없는데? 왜? 메시지가 떴어?"
"아, 아니... 잘못 본 모양이야."
그러나 그의 대답과 달리.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퀘스트 '물의 도시 일라노어의 필드 보스, 섬멸의 자보스 토벌'이 발생했습니다.]
연이어 나타난 메시지는 에드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만들고 있었다.
섬멸의 자보스 토벌
설명: 한때는 그 어느 지역보다 아름다웠던 수중 정원. 그러나 지금은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거듭난 자보스에 의해 그 아름다움을 잃었고, 수중 정원은 황폐해졌다.
내용: 섬멸의 자보스를 토벌하자.
보상: 심해의 깊은 눈동자의 푸른 상자.
제한 사항: 실패 시, 다시는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퀘스트를 부여받을 수 없다.
'이게 무슨....'
에드는 혼란스러웠다.
'왜 갑자기 이런 퀘스트가 나타난 거지? 심해의 깊은 눈동자?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어....'
숨겨진 장소를 발견한 것도, 특수한 업적을 달성한 것도 아니건만.
도대체 왜 그에게 이런 상황이 벌어진 걸까?
심지어 심해의 깊은 눈동자라는 단어는 그 어떤 너튜브 영상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움찔-
이내 에드의 입가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그렇다면, 이 퀘스트는 내가 최초라는 거잖아?!'
지금껏 아무도 수행하지 못했던 퀘스트!
그것이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일 터!
"에드, 왜 그래?"
"어? 아냐, 아냐. 그냥 조금 즐거워졌어."
"음?"
띠링-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218화 각자의 계획 (1)
한 달 뒤.
35층, 마왕성.
"강화권! 강화권이요!"
"아직 통화 카드 남아 있죠?!"
오늘도 여전히 공략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편의점 앞.
"아, 다른 건 몰라도 건빵만큼은 사야 한다니까 그러네?! 그게 얼마나 요긴한 줄 알아?! 그것 하나만으로도 며칠은 거뜬히 버틸 수 있다고! 거기다가 그 안에 들어 있는 별사탕이 또...!"
누군가는 아직 편의점에 남아 있는 상품들을 보며 전의를 불태우는 반면.
"어, 잘 지냈지? 여기? 엄마, 여기도 그래도 나름 사람 사는 곳이야. 살다 보면 또 살아져. 불편한 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나름대로 살 만하다니까?"
"바깥은 좀 어때? 별일은 없는 거지? 기상이변? 아이고... 그냥 누나도 이참에 탑에 들어오는 건 어때?"
또 누군가는 이미 구입한 통화 카드를 이용하여.
당당히 통화 부스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 외에도.
<강화권 확인 완료. 강화할 장비를 내놓아라.>
강화권&분해권을 깡통에게 건네는 등.
편의점 앞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인 풍경으로 돌아왔다.
'이제야 뭔가 원래대로 돌아온 기분이네.'
물론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아직 안 늦다니까? 지금부터라도 계속 공략하면 되는 거야!"
"그렇긴 하지만... 내가 잘할 수 있을까?"
"공백기가 좀 길긴 했지.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레벨을 올리고 실력을 끌어올리면 되는 거라고! 일단 환상의 상점에서 우드-패부터 발급 받자. 그게 있냐 없냐에 따라 삶의 질이 확 달라지거든."
다시금 탑을 오르고자 하려는 공략자들.
우드-패를 발급 받으려는 중고 신인들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났다는 거다.
'다들 위기의식을 느끼긴 했나 보네.'
다른 탑들과의 경쟁 그리고 멸망.
그 정도까지 정보를 풀었는데 위기의식을 느껴 주지 않으면 그건 그것대로 곤란하다고.
'그래도 지금까지는 효과가 좋네.'
탑에 유입되는 인원이 늘어난 건 차치하더라도.
활동을 재개한 공략자들의 숫자가 늘어난 것만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고 봐도 좋을 터.
'그래, 공략도 중요하지만 탑의 체급도 중요하니까.'
이번 대전을 통해 느꼈다.
압도적으로 강한 소수의 공략자들? 물론 엄청나게 귀한 인적 자원이다.
하지만 탑의 모든 구성원이 참전하는 전투가 벌어질 경우.
결국 가장 중요한 건 탄탄한 허리층이다.
'자고로 허리가 튼튼해야 뭘 해도 잘되는 법이지.'
내가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으며 상점을 이용하고자 하는 공략자들을 바라보던 그때.
"와, 진짜 오늘은 평소보다 더 엄청나네."
"그러게.... 우리 차례까지 돌아오려나?"
"그래서 우리도 얼른 50층 너머까지 가야 되는 거야. 거기서부턴 공략자들 숫자가 줄어서 확실히 여유롭다더라."
군중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일단의 무리가 나의 시야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다른 공략자들이 조금 거리를 둔 탓에 시선이 간 걸지도 모르겠다.
'흠, 바빌론 클랜인가.'
난 저들을 잘 알고 있었다.
최근 너튜브에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초신성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클랜들 중 하나이자.
현재 43층까지 돌파한, 꽤나 전도유망한 클랜이었으니까.
'초신성이라.... 확실히 공략 속도가 남다르긴 하지.'
비록 층에 대한 정보가 풀려 있다곤 하더라도.
한 달 사이에 40층에서 43층까지 돌파한 건 인정할 만한 일이었다.
'근데 조금 의아하긴 하네. 한 달 만에 41, 42층을 돌파하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41층, 포탑의 나라.
42층, 거신의 정원.
여타의 층에 비해 많은 공략자들이 활동 중인 층이긴 하다만.
그래도 돌파가 쉽지 않은 층들이다.
'보통 레벨을 올리는 데 꽤나 애를 먹는데 말이지.'
다음 층으로 나아가기 전에 레벨을 올리고 스펙을 키우는 건 기본 중의 기본인 요소!
그렇기에 공략자들은 포탑의 나라에서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물들을 퇴치한다거나.
거신의 정원에선 흡정벌레를 비롯하여 온갖 벌레들을 퇴치하며 레벨을 올리곤 했다.
물론 그 토벌 과정이 쉬운 건 아니다만.
'아무튼 한 달 사이에 43층까지 올라갈 스펙을 갖췄다는 건데. 레벨이 오르면서 특수한 파생 능력이라도 얻은 건가?'
바빌론 클랜에 대한 흥미가 조금 동하긴 했으나.
난 이내 관심을 거두었다.
'정말 빛나는 별이 될지 아니면 별똥별로 끝날지는 지켜봐야 아는 거겠지.'
솔직히 내 입장에선 바빌론 클랜 말고도.
빛을 발하는 클랜들은 너무도 많았다.
'55층까지 올라오면 그때 다시 기억하든가 하고....'
"상점주! 여기에 있는 이건 뭡니까? 처음 보는 건데요?"
"정말 잘 물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루 음료수입니다. 이렇게 평범한 물에 가루를 타기만 하면...."
난 다시금 바삐 공략자들을 상대했다.
* * *
몇 시간 뒤.
환상의 상점 안에 진열되어 있던 상품들이 전부 동이 난 탓일까.
"어우, 진짜 겨우 소시지 하나 샀네."
"확실히 날이 갈수록 경쟁이 심해지는 것 같아. 이제 우드-패로는 어림도 없고, 못해도 브론즈-패는 갖고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상품을 구매한 이는 안도의 숨을 내쉬는 반면.
구매하지 못한 이들은 아쉬움의 발걸음을 돌린다.
그렇게 공략자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으나.
"...."
에드는 조용히 자리에 서서 환상의 상점을 바라본다.
"에드, 아쉬운 건 알겠는데, 다음에 다시 오자고."
"맞아.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동료들이 그런 그를 나지막이 위로했으나.
에드의 생각은 조금 많이 달랐다.
'어떻게 상점주한테 접근하지?'
근 한 달 동안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여러 퀘스트들을 받아 왔고.
그 퀘스트들을 클리어 했다.
그리고 그 보상은... 정말이지 그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들이었다.
'올 스탯 5를 올려 주는 칭호도 그렇고, 이런 장비를 보상으로 주는 것도 그렇고.'
물끄러미 팔에 달려 있는 푸른 팔찌를 내려다보는 에드.
'도대체 심해의 깊은 눈동자는 뭘까? 왜 나한테 이런 퀘스트를 주고 보상을 주는 걸까.'
이미 수십 차례 스스로에게 던졌던 질문이었고 개의치 않겠다고 결심까지 했으나.
자꾸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냐.'
그래.
지금은 심해의 깊은 눈동자가 준 특수 퀘스트를 달성하는 게 우선이다.
바로 며칠 전.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특수한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도착한 특수 퀘스트 하나.
그것은 이제껏 몬스터를 토벌하거나 층을 공략하던 것과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환상의 상점주와 접촉하라
설명: 모든 것이 베일에 감춰져 있는 환상의 상점주와의 관계를 개선해 보자.
내용: 상점주와의 친밀도를 올려 보자.
보상: ???
제한 사항: 제한 시간은 3개월이며, 해당 퀘스트를 실패해도 별다른 여파는 없을 듯하다.
현재 친밀도: 무관심
'상점주의 친밀도를 올리라니, 도대체 이게 무슨 퀘스튼지....'
심해의 깊은 눈동자가 이런 퀘스트를 준 이유가 뭘까?
모든 게 의문투성이지만 그래도 지금껏 주어졌던 퀘스트들과 달리.
[실패 시, 다시는 심해의 깊은 눈동자로부터 퀘스트를 부여받을 수 없다.]는 문구가 없다는 건 다행이다.
'거기다가 상점주와 친해져서 나쁠 것도 없고.'
실제로 상점주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는 여러 클랜들이 상점주로부터 알게 모르게 여러 혜택들을 받고 있다는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상점주랑 어떻게 친목을 다져야 할지 모르겠네.'
수많은 공략자들이 상점주와 가까워지길 원했으나.
성공한 사례는 전무했다.
'역시 공략 말고는 그의 관심을 끌 방법은 없는 걸까.'
상점주가 탑의 공략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모르는 이가 없을 터.
'그러려면 적어도 골드-패 정돈 갖고 있어야 될 것 같은데....'
골드-패 소지자가 전에 비해 늘긴 했어도.
여전히 그 희소성은 유요했다.
그리고 상점주가 골드-패 소지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했던 걸 생각하면....
'이제 뭘 해야 할지 조금 감이 잡히네.'
이 특수 퀘스트를 깨기 위해선.
먼저 심해의 깊은 눈동자가 준 일반 퀘스트들을 깨야 할 것 같다.
생각을 정리한 에드가 동료들을 보며 말한다.
"일단 돌아가자."
"그래,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 다음에 상점이 열리는 날에 맞춰서...."
"돌아가면 우리는 전력으로 사냥에 나설 거야. 빠르게 레벨부터 올리자고. 적어도 두 달 안에는 55층까지 도전해 보자."
에드의 발언에 모두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두 달 내로... 55층?"
"에드, 최근 우리 기세가 좋은 건 알지만 그건 불가능해."
"맞아. 솔직히 41층도, 42층도 모두 네 덕분에 돌파한 거잖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근래에 에드가 다소 비정상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급격히 강력해졌다곤 하나.
에드의 활약 덕에 그들이 해당 층을 빠르게 돌파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하는 말인데, 다들 전력으로 따라오는 게 좋을 거야."
"...뭐?"
"난 최상급 공략자들이랑 같은 위치까지 올라갈 거야. 그 와중에 뒤처지는 사람도 나오겠지. 미안한 말이지만 난 그런 녀석들까지 데리고 갈 수는 없어."
"...."
모두가 숙연해지는 가운데.
에드가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게. 날 따라오면 우리가 선구자들을 뛰어넘는 최강의 클랜이 될 수 있다고. 어쩔래?"
"...까, 까짓것 한번 해 보든가! 못 할 건 또 뭔데?!"
"그래! 우리도 한번 그놈의 '최초'인지 뭔지 좀 해 보자고!"
동료들을 보며 에드가 씨익 웃는다.
"좋아, 되든 안 되든 한번 전력으로 박아 보자고! 우리야말로 최초랑 가장 어울리는 클랜이니까!"
* * *
같은 시각.
찰랑-
포세이돈이 손에 쥔 잔을 휘휘 흔들며 수정구를 바라본다.
"그래. 아무 의심도, 의문도 가지지 마라. 네 힘에 만족하고 나아가라. 그게 도구의 본분이다."
지금까지 도구의 움직임은 만족스러웠다.
그가 원하는 대로 단기간 내에 급속한 성장을 이뤄 냈으니까.
'저대로 힘을 키워 이지수를 죽일 힘을 얻게 하는 것도 좋지만, 일단 여러 가능성을 만들어 내야지.'
그렇기에 도구에게 특수한 퀘스트를 부여했다.
이지수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 중인 상점주.
그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 데 성공한다면 이지수와의 접촉 또한 원활해질 터.
'이런 밑 작업은 미리미리 해 두는 편이 좋지.'
설사 이 작업이 실패해도 상관없다.
그가 선택한 도구는 탑 안에서 그 누구보다 강력해질 테니까.
"흐흐... 이번 베팅은 무조건 승리할 수밖에 없겠군."
역배에서 10배에 달하는 코인을 확보하거든.
그는 다시 재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이번 베팅이 반드시 성공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한 투자니까.'
포세이돈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잔을 입가에 기울이던 그때.
"포세이돈 님! 포세이돈 님!"
거처의 바깥에서 수하의 음성이 울려온다.
"무슨 일이지?"
얼굴을 찌푸린 채 자신의 애병기 삼지창을 쥐는 포세이돈.
"그게, 본사의 직원이 찾아왔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숫자는?"
"둘입니다."
둘이라는 말에 포세이돈이 피식 웃는다.
'걸린 건 아닌가 보군.'
만약 그가 탑에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다면.
겨우 직원 둘을 보낼 리가 없었으니까.
"들어오라고 해라."
"예!"
잠시 후.
포세이돈의 거처로 들어온 두 남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본사의 대리 입실론입니다."
"보보보보본사에서 파파파파견 나온... 이이입실론의 부부부사수입니다. 아아직... 이이이름은 어어, 없습니다."
219화 각자의 계획 (2)
고개를 까딱이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는 포세이돈.
"알고 있다. 그래서, 무슨 용무로 내 거처에 찾아온 거지? 특수한 경우라면 그 무례함을 용인하겠다만, 만약 아니라면...."
삼지창의 끝머리가 그들을 겨누자.
입실론의 부사수가 황급히 팔을 흔들어 보인다.
"그그그, 그게, 저저저저희는...."
"저희는 오늘 본사 차원에서 조사를 겸해 안부를 묻고자 찾아왔습니다."
"조사 겸 안부라.... 특수한 상황은 아니로군."
화아아악-
포세이돈의 삼지창 주변으로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중.
입실론이 잔잔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뇨, 굉장히 특수한 상황이죠. 현재 주주님께선 베팅한 코인을 제외하고 소지한 코인이 아예 없으신 상황이니까요."
"...."
포세이돈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불쾌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고작 피조물 따위가 감히 나를 능멸하려는 거냐?"
"그럴 리가요. 저희는 엄연히 본사의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에요."
"제제, 제가 아알기로 보보본사의 규규규칙은 주, 주주님들이 마마만드신 걸로 아아알고 있습니다!"
포세이돈의 강한 압박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말을 이어 나가는 입실론과 부사수.
"주주님들께서 5차 라그나로크 사태 이후로 새로 도입하신 규칙이죠."
5차로 발발했던 신들의 전쟁.
그러나 전쟁이 발발한 이유는 참으로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코인을 모두 소모한 주주가 본사의 '집행'을 거부하고.
몇몇 신들과 합세하여 난동을 부렸으니 말이다.
"본래는 저희가 조금 더 빨리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다소 빠듯한 본사의 일정으로 조금 늦은 점은 양해 부탁드려요."
포세이돈의 입가에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진다.
"재미있군. 감히 내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잡것들이 지금은 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니."
"저희는 그저 본사의 지침에 따라 움직인다는 점을 알아주시면 감사하겠어요."
"그래서... 이걸 받아 가려고 온 건가?"
포세이돈이 자신이 들고 있던 삼지창을 흘끔 바라보자.
입실론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다만, 영원히 회수하는 것은 아니에요. 주주님께서 다시금 최소한의 코인을 소지하시게 되거든, 주주님의 일부를 되돌려드릴 겁니다."
무기의 압수.
그 뜻은 곧 그의 존재력 일부를 압수하겠다는 소리나 매한가지였다.
무기는 곧 그 신을 대변하는 일부이기도 했으니까.
"...."
천천히 턱을 쓸어내리는 포세이돈.
'다행히 아직 나의 개입을 눈치채진 못한 모양이군.'
아무래도 저놈들은 그저 본사의 규칙을 따라.
그의 무기를 압수하러 온 게 목적의 전부인 듯했다.
'예상은 했지만... 꽤 기분이 불쾌하군.'
하잘것없는 이름, 툭 치거든 소멸할 존재력을 가진 것들이.
그의 무기를 요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냥 이대로 놈들을 소멸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나름의 재미는 있겠어.'
다만,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것은 선명한 파멸이었기에.
포세이돈은 이내 생각을 접는다.
'아직 본사에서 눈치를 챈 것 같진 않으니, 일단 무기를 건네줘도... 상관은 없겠지.'
별 탈 없이 그의 계획이 성공하여 역배가 터지기만 한다면.
무기도 돌려받을 수 있을 터이니.
마침내 고민을 끝마친 걸까.
턱-
"받아라."
삼지창을 직원들에게 던지는 포세이돈.
"협조에 감사를...."
화아아아아악-
순간 삼지창에서 강렬한 힘의 파동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자.
날아가듯 뒤로 주르륵 미끄러지며 이내 바닥에 처박히는 입실론.
"크흑...."
"푸하하하하! 그 힘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야, 본사까지 들고 갈수나 있을지 모르겠구나!"
명백한 비웃음이 들려오는 와중에도.
입실론은 꿋꿋이 일어나 삼지창에 천을 칭칭 두른다.
이윽고 포장 작업을 끝마친 그녀가 포세이돈에게 고개를 숙인다.
"바쁘신 와중에 실례했습니다.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입실론과 그녀의 부사수가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뜨자.
포세이돈이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놀리는 보람이 없는 년이군."
* * *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압수한 후.
본사로 돌아온 입실론과 그녀의 부사수.
"후우...."
입실론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오자.
부사수가 호들갑을 떤다.
"저저저정말 크크큰일 나는 줄 아알았습니다!"
"그러게. 그래도 좋게 마무리돼서 다행이네."
신들의 무기는 곧 신들의 일부이다.
그렇기에 막말로 포세이돈이 무기를 압수하러 온 그들을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았건만.
다행히 상황은 무사히 종료됐다.
"저저희는 매, 매번 이런 이일을 해야 하는 거거, 겁니까?"
"아니. 이번 경우는 조금 특수한 상황이었지. 애초에 주주의 무기를 압수하는 경우가 엄청 드문 일이니까."
보통의 주주들은 보유한 코인이 바닥나거든 도박장의 출입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지.
저렇게 코인을 모두 베팅하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다.
"그그그런 겁니까?"
"그래. 저런 경우가 그런 거야, 유희를 즐기다가 유희 자체에 매몰된 경우.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불멸자라고 해도 모든 게 완벽하지 않으니까."
"며며, 명심하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한 건 알아봤어?"
입실론의 물음에 부사수가 그녀에게 서류를 내민다.
"여, 여기 포세이돈 주, 주주님께서 베베베팅하신 게임 리, 리스트입니다."
"흐음...."
빠르게 서류를 훑던 그녀의 시선이 이내.
서류의 가장 하단으로 향한다.
"이건...."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는 입실론.
"주주들 중에 정상이 없는 건 알았지만, 이건 완전 미친놈이었네."
"헉. 이이이이입실론 님, 누, 누가 듣기라도 하면...."
"이곳엔 우리 둘밖에 없는데 무슨 상관이야? 그보다 너도 이걸 봤을 것 아냐. 이게 제정신인 놈이 할 수 있는 판단 같아?!"
입실론이 서류를 흔들어 보이자.
[종말의 탑의 네임드 공략자 이지수의 사망 여부]
-배당률 생존 1.04 / 사망 10.1
[주주, 포세이돈의 배당 현황: '사망'에 200코인 베팅]
서류 끝단에 적혀 있던 문구가 크게 펄럭거린다.
"갖고 있던 걸 모두 역배에 때려 박았잖아!"
"그그, 그게 무무문제가 되되는 겁니까?"
"...."
모자란 녀석의 입에서 모자란 소리가 나오니.
이제는 딱히 화도 나지 않는다.
"정말 극한까지 내몰리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걸 수도 있겠지. 근데 네가 본 포세이돈 주주는 어땠어?"
"어, 음... 으으음...."
"그는 도박을 좋아하지만 스스로를 궁지에 내몰 정도의 주주는 아니야."
그래.
그는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을 할 정도로 강단 있는 주주가 아니다.
분명 뭔가 노림수가 있기에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이미 그녀는 전의 사건의 배후자로 포세이돈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더 의심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그, 그렇다는 말씀은...."
"뭐, 개입을 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의심일 뿐이니까."
"여여역시 그렇겠지요?"
웃고 있는 그녀의 입과 달리.
그녀의 눈은 차갑기 짝이 없었다.
'이미 포세이돈은 뒤가 없어. 아마 높은 확률로 게임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아.'
물론 그녀는 이 가설을 윗선에도, 심지어 부사수에게도 알릴 생각이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이걸 말해?'
해당 사안이 상부에 보고되는 순간.
이 안건은 윗선에 넘겨지게 될 게 뻔했고 그 부산물은 상부의 것이 될 터.
당연히 그녀에게 기회가 올 리가 없었다.
"아무튼 일단 가서 그 삼지창부터 제출하고 와."
"아아아, 알겠습니다!"
부사수가 잘 포장된 삼지창을 들고 허겁지겁 자리를 뜨자.
입실론의 눈가가 게슴츠레해진다.
'포세이돈의 개입 여부를 파악하려면 나도 준비를 좀 해야겠네.'
이제부터 그녀가 행할 일은 도박에 가까웠으며.
그것은 포세이돈이 벌이는 일과 다를 바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기회를 잡으려면... 도박을 해야겠지.'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고뇌에 잠긴다.
* * *
약 2주 뒤.
[새로운 환경, 새로운 인연 그리고 새로운 인생! 제2의 인생을 구가하고 싶으십니까? 여러분의 새로운 도전을 저희가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어려워 마시고 도전하세요! 언제나 기회의 문은 여러분께 열려 있습니다.
(해당 광고는 탑 관리국이 함께합니다.)]
연이어 TV에서 흘러나오는 광고를 보며.
분신이 나지막이 말한다.
"요즘 공익광고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 같네."
"최대한 사람들을 탑으로 유입시켜야 하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 그래도 강제로 차출하는 것보단 저게 낫긴 해."
"그래도 뭔가 조금 입맛이 쓴 것 같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탑 공략에 필요한 소모품이라는 사실도 모르고 막 들어갈 것 아냐?"
소모품이라....
보는 관점에 따라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긴 하겠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가는 게, 저 사람들 입장에선 행복할걸. 무궁무진하게 펼쳐진 모험의 세계 그리고 위험하지만 낭만 넘치는 삶이랑 시한부 공략 인생, 둘 중 택한다면 뭘 택할래?"
"어, 음... 아무래도 전자가 낫지."
"그래, 그런 거야."
진실은 올바르다.
그러나 진실의 무게를 온전히 짊어질 수 있는 이가 몇이나 될까.
"사실 제일 좋은 건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사는 거지. 마음만큼은 제일 편하잖아? 저 녀석을 보라고."
난 참기름 풀을 유유히 떠다니는 깡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어 보이는 게 좋아 보이잖아?"
"하긴... 그것도 그러네."
끼릭-
우리의 대화를 들은 걸까.
깡통이 상반신만 벌떡 일으킨다.
<진실의 무게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중요한 건?"
<대형 참기름이 다 떨어졌다. 가볍다. 대형 참기름을 더 줄 것을 요구함.>
대형 참기름 통을 흔들어 젖히는 깡통을 보며.
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그보다, 얀마! 쉬는 시간 다 끝났어! 얼른 일어나! 다른 녀석들 다 일하고 있는 것 안 보여?"
길었던 휴가 기간이 지난 지금.
주방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크으윽... 벌써 휴가가 끝나다니...."
"헥헥!"
"이번에 정말 많은 빵들을 맛보고 왔다냥! 참 알찬 시간이었다냥!"
격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발리나와 달리.
백구와 루나는 휴가에 대한 미련이 사라진 것 같은 모습이다.
"아참, 너희 이따가 그림도 그려야 하는 건 알지? 요즘 낫휴먼 그림이 콜렉터들 사이에서 불티나게 팔리고 있어서 계속 공급을 해 줘야 하거든."
"냥?!"
"그리고 발리나는 균열에서 이상 현상 발생하거든 바로 보고하고."
"크으윽!"
녀석들... 저렇게 격하게 좋아하니 나도 기쁘네.
'그건 그렇고....'
난 CCTV 화면처럼 틀어진 영상을 바라봤다.
영상 속엔 한창 61층을 공략 중인 선구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고민이네.'
이제 원하는 층에 방문할 수 있게 된 만큼.
61층에 가서 선구자들의 공략을 도와주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내가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게 맞는 걸까?'
시련은 성장을 낳고 성장은 곧 탑의 체급으로 이어진다.
'그냥 빠르게 클리어만 하면 되는 거면 주저 없이 도와주겠는데.'
문제는 이후 또 다른 탑들과의 대전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지금까지 봤을 때, 전장에서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건 공략자들이란 말이지.'
배의 키는 내가 잡고 있다고 하더라도.
공략자들이 내 결정을 뒷받침하지 못하면 배가 침몰하는 구조다.
'음, 성장을 위해선 방관하는 게 맞는 것도 같고....'
난 잠시간 고민하다가 이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 당장 급하게 클리어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지켜보자. 감당하기 어려울 때 나서면 되겠지.'
난 손을 탁탁 털곤.
문 앞에 섰다.
촤르르르르륵-
어김없이 펼쳐지는 다양한 층들을 보며.
난 생각했다.
'어디, 오늘은 몇 층으로 가 볼까.... 오랜만에 한번 무작위로 떨어져 봐?'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난 이내 열쇠를 문고리에 넣곤 힘껏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220화 각자의 계획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