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잠시간의 여유 (4)
며칠 뒤.
[다음 뉴스입니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던 관광지인 탑 검문소가 한시적으로 폐쇄됐다는 소식입니다. 탑 관리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내부 확장 공사를 진행하기 위함이라고 하는데요. 이를 박희민 기자가 취재하고 있습니다. 박희민 기자?]
정장 차림의 남자를 비추던 대형 스크린은.
어느새 키가 큰 여성 기자와 그녀의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높이 솟은 건물들을 보여 준다.
[네, 박희민 기자입니다. 현재 저는 탑의 전반적인 행정 처리를 담당하는 서울 용산구의 '탑 관리국' 앞에 와 있습니다.]
[박희민 기자, 주변에 사람이 많군요. 현장의 상황은 좀 어떤가요?]
[네, 갑작스러운 탑 검문소의 임시 폐쇄 소식에 적잖은 시민들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특히 탑을 관람하고자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들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기자의 말이 끝나자.
아나운서가 입을 뗀다.
[그것참 아쉬운 일이군요. 탑 관리국의 이후 공식 발표는 없었나요?]
[네, 탑 관리국은 검문소의 임시 폐쇄를 발표한 이후, 이렇다 할 입장을 내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탑 관리국을 비추던 화면이 바뀌더니.
고오오오-
하늘에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탑의 환영을 비춰 보인다.
[그 탓인지 일각에는 이번 이변과 탑 관리국의 행보가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풍문도 돌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군요. 자세한 소식 감사합니다, 박희민 기자.]
[네, 지금까지 TTN의 박희민....]
둥-
스크린에 빛을 쏘아 대던 빔 프로젝터가 꺼지자.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에 달린 수많은 화면을 올려다본다.
[Jaecy]
[brend]
[Adam]
.
.
.
"흠흠...."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은 남자가 화면들을 향해 허리를 수그린다.
"먼저 바쁜 일정 가운데에도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각국의 탑 관리장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은 그간 벌어진 이변들에 대해...."
[어떻게 된 일이죠?]
모니터 한쪽에서 날카로운 음성이 흘러나오자.
남자는 말을 멈추곤 제이시 관리장이 앉아 있는 화면으로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된 일이냐 하심은...."
[분명 얼마 전 킴의 정기 보고서에서는 어떠한 이상 조짐도 없다고 하지 않았나요?]
김중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가.
입가에 그려지는 의례적인 미소를 따라 함께 펴진다.
"이번에 생긴 하늘의 환영과 탑 주변에 발생한 '균열 현상'은 사전에 어떠한 징후도 없이 발생했습니다. 대처를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아뇨? 그 대처가 문제라는 거예요. 겨우 검문소를 임시 폐쇄 하는 정도로 되겠어요? 탑 주변을 완전히 군사작전 구역으로 만들고 강력히 통제를 해야죠!]
제이시 관리장의 발언이 끝나자.
김중후는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골빈 년 같으니. 평화에 찌들어 최소한의 생각조차 못 하는 건가? 탑 관광 수입이 얼마나 된다고. 어떻게든 탑의 보유권을 뺏어 가고 싶어서 억지 부리긴.'
현재 각국의 탑 관리장들이 탑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있다고는 허나.
탑의 전반적인 관리는 한국의 탑 관리국이 맡고 있는 상황.
제이시 관리장은 그러한 관리의 권한을 뺏어 오고자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그랬다간 사회에 대대적인 혼란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혹시 한국에 둠스데이가 펼쳐지길 원하시는 겁니까?"
[뭐라고요?!]
"지금껏 세계와 탑은 별개의 세상으로 서로의 경계선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도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지금 그러한 상식이 흔들리는 와중에 과한 액션을 취한다면 과연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김중후의 언성이 높아지자.
화면 속의 다른 관리장들이 하나둘 입을 연다.
[제이시 관리장, 일단 진정 좀 하지. 킴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검문소의 폐쇄는 올바른 결정이었어.]
[그러잖아도 하늘의 환영 때문에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 굳이 군사를 동원해서 이목을 끌기보단, 철저히 정보를 통제해야 되는 게 맞아.]
다른 관리장들의 발언 덕분일까.
[뭐... 그래요. 그건 그렇다고 치죠.]
잠시 말을 더듬던 제이시 관리장은 황급히 화제를 돌린다.
[그보다 현재 그 '균열 현상'에 어떠한 변화는 없나요?]
"균열이 생긴 이후, 아직까지 별다른 조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검문소 내부를 임시 공사 중이며, 국내 최정예 요원들을 투입해 둔 상황입니다."
[그래요! 내가 군사작전 구역이라고 말했던 게 바로 그거예요!]
손가락을 튕기는 제이시 관리장.
김중후는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년이 말한 건 대놓고 군사작전을 한다고 대중에게 선포하는 거고.... 됐다.'
"아무튼 현 상황은 최대한 은폐를 할 계획이며, 혹시나 미지의 상황이 발생하거든 각국의 탑 관리장분들께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 분, 계십니까?"
[질문할 건 없네만... 부디 이후에도 킴에게 질문할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군....]
[그건 나도 동의해. 종말의 탑은 지금처럼 재밌는 콘텐츠 정도로 남아 있어 줬으면 한다고.]
이권을 떠나 지금의 평화가 무너지는 걸 원하는 이가 있을까.
아마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럼 회의는 이것으로 마무리를...."
[그런데 킴, 전에 연락을 취하겠다던 요원과 연락은 닿았나요? 어째 계속 말이 없네요?]
"...."
제이시의 물음에 김중후 관리장이 쓴 미소를 짓는다.
몇십 분 뒤.
수많은 화면들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꺼지자.
"후우...."
김중후는 비로소 무거운 한숨을 토해 낸다.
'균열 현상만으로도 골치 아프지만, 역시나 사람 상대하는 게 제일 고역이군.'
하물며 그 사람이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김중후가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꺼내려던 그때.
똑똑-
"국장님, 회의 끝나셨으면 들어가도 될까요?"
바깥에서 여자의 음성이 들려온다.
음성으로 보아하니 이 차장인 모양이다.
"들어와."
"넵!"
회의실 안으로 들어온 이 차장이 손에 든 까만 봉투를 그에게 내민다.
"뭐야, 이건?"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이 입사 선물이라고 사 왔다는데, 꽤 유명한 곳에서 사 온 모양이에요."
"...유명한 곳?"
김중후를 보며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는 이 차장.
"인성 카페라고, 엄청 핫한 카페가 있거든요? 아마 국장님은 잘 모르실 수도 있는...."
"알아."
"...네?"
반문하는 이 차장을 보며 김중후가 픽 웃는다.
"딸이랑 같이 다녀왔었다, 딸이 마렌이라는 가수의 팬이라서."
"아아...."
"혹시 바다의 향기도 있나? 아니면 리뉴얼 카페라떼나."
"어어...."
국장이 너무도 상세히 메뉴를 꿰고 있는 탓일까.
이 차장이 어버버하다가 홀린 듯 컵을 내민다.
"네. 여, 여기요."
그녀가 바다의 향기가 담긴 용기를 내밀자.
김중후는 뚜껑을 열곤 안에서 흘러나오는 냄새를 음미한다.
"후우, 그래... 이 향기.... 치유되는군. 고맙다."
"앗, 넵! 별말씀을요!"
바다의 향기를 한 모금 삼킨 김중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린다.
'오랜만에 마셔도 여전하군.'
잔잔한 파도, 쓸쓸한 모래사장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이 바다의 풍미.
이러한 맛을 선보일 수 있는 건 단언컨대 인성 카페 외에는 존재하지 않을 터.
골치 아픈 현실 속에서 누릴 수 있는 잠시간의 휴식이란....
김중후는 거듭 바다의 향기를 마시며 찰나의 시간을 만끽한다.
* * *
21층, 나락의 감옥의 최심부에 자리하고 있는 간수장 블리거의 방.
누군가의 뼈와 가죽 따위가 전시품처럼 진열되어 있는 방 안으로.
콰아아아앙-
통렬한 폭발음이 공간을 뒤덮는다.
"어우...."
난 내지른 주먹을 거두곤 코를 틀어막았다.
'냄새 때문에 머리가 아프네.'
벽에 처박힌 누더기 골렘, 간수장 블리거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시체 썩는 냄새 때문에 없던 두통이 생길 지경이다.
'설마 손에 냄새가 밴... 아으!'
이따가 비누로 박박 씻어 내야겠는걸.
그건 그렇고 레벨이....
띠링-
[히든 보스: 나락의 간수장, 블리거를 성공적으로 소멸하셨습니다.]
[이는 있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업적의 달성 수가 3이 되어, 레벨이 1 상승합니다.]
[모든 업적들을 총합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특수 보상으로 '간수장의 열쇠', 칭호 '프리즌 브레이커'를 획득하였습니다.]
그렇지! 바로 이거지!
난 메시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이제 83레벨인가.'
근래 탑을 오가며 내가 달성한 업적은 총 5개였다.
20층의 퀘스트 보스, 뇌조 엘더.
21층의 퀘스트 보스, 나락의 간수장 블리거.
32층의 퀘스트 보스, 광기에 잠식된 광전사 커크스.
34층의 퀘스트 보스, 수수께끼의 오블리.
43층의 퀘스트 보스, 침몰한 재앙의 유령선, 헤르네스호까지.
모두 하나같이 공략자의 공격이 통하지 않는.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보스들이었다.
'뭐, 이제는 아니지만.'
[금제가 해금됩니다.]
[이후 76~80층의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오, 금제도 해금됐나.'
얼마 전에 82레벨을 달성함으로써 71~75층까지의 통행이 해금됐건만.
이제는 80층까지의 출입이 가능해진 모습이다.
난 상태창을 살폈다.
김인성
Lv: 83
근력: 75(+14)
체력: 59(+5)
지력: 51(+17)
민첩: 62(+36)
보너스 스탯: 2
고유 능력: 편의점 주인
파생 능력: 즉석식품 제조, 인증 마크, 묶음 무적(2단계), '느긋한' 만능 인테리어, 팝업 스토어, '영원한' 편의점 업그레이드(Lv2), 특제 우표, PB 업그레이드(2단계), 개발 매니저, 무인 점포
칭호: [기적의 생존자], [엘프들의 영원한 친우], [펜릴의 주인], [숙달된 요리사], [천공의 지배자를 공략한 자], [최초로 50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1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2층을 돌파한 자], [최초로 53층을 돌파한 자], [단신으로 여왕을 몰락시킨 자], [섭리를 지키는 자], [뇌조 학살자], [광기를 잠식시킨 자], [수수께끼를 괴멸시킨 자], [유령선의 진실을 파헤친 자], [프리즌 브레이커]....
특이 사항: 시스템, 업적 적립이 적용 중입니다.
'크으, 스탯 빵빵한 것 봐라.'
'최초로 60층을 돌파한 자'의 효과로 민첩 30이 부가로 더 붙었으며.
거기다가 보너스 스탯 21을 각각 체력과 지력에 10, 11씩 넣은 덕일까.
내 스텟은 한층 더 괴랄한 숫자를 자랑하는 중이었다.
'칭호는... 음, 이건 뭐 거의 칭호 수집가네.'
이번 원정으로 칭호를 더 수집했으니.
뭐, 당연한 건가.
생각해 보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클리어가 불가능한 보스들을 두들겨 팼으니....
'여러모로 수확이 많은 여정이긴 했어.'
물론 이것으로 원정을 끝낼 생각은 없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남은 기간 동안 최선을 다해 레벨을 올려야 할 터.
'그래도 일단은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쉴까....'
딱히 몸이 피곤한 건 아니었지만.
거듭된 여정으로 조금 정신이 지쳤으니 말이다.
'일단 돌아가자.'
* * *
종말의 탑 관리자들의 휴게실.
"이번에 특제 피자를 새로 개발해 봤는데, 먹어 볼 의향이 있나?"
어김없이 새로운 요리를 개발하여 휴게실을 방문한 유그드라실.
그가 피자가 들린 가지를 흔들어 보이려던 찰나.
"빌어먹을...."
"니미럴...."
"으으...."
얼굴이 거의 울상이 된 관리자들이 그의 시야에 포착된다.
"...휴게실이 아니라 초상집을 잘못 찾아왔나?"
한쪽에서 카드 패를 만지작거리던 블라디미르가.
유그드라실의 중얼거림을 듣곤 대답한다.
"이해하라고. 그도 그럴 게, 요즘 조커 카드가 미친 듯이 난동을 부리고 있거든."
"난동을?"
"그래. 클리어가 불가능한 보스들만 골라다가 개박살을 내 놓고 있다고."
201화 잠시간의 여유 (5)
블라디미르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내젓자.
유그드라실의 몸통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놈의 탑은 잠시도 조용할 날이 없군. 덕분에 지루할 일이 없으니 난 좋다만."
"어휴, 조커 카드가 네 층에 있는 세계수라도 분질렀어야 너도 공감을 할 텐데."
"아무튼, 그래서 다들 울상이었던 거였군. 난 또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다."
위아래로 가지를 흔들어 보이는 유그드라실에게.
블라디미르가 의아하다는 듯 묻는다.
"시말서 써야 되는 건 큰일도 아니라는.... 하긴, 지금 시말서 정도는 양호할지도?"
물론 본사에 시말서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문제이긴 하겠으나.
지금 종말의 탑에는 더 큰 일이 벌어진 상황이었으니.
"...확실히 연결된 거지?"
"그래. 확실하다. 이 종말의 탑은 다른 탑들과 이어졌어, 아직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지금 이 종말의 탑이 다른 많은 탑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건.
대부분의 관리자들이 인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니, 그만한 힘의 파동이 엮이고 엮였는데 모를 수가 있을까.
"망할... 좀 봐 달라고. 탑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또 뭘 하려고 그러는 건데?!"
"본사에서 나온 공고는 없나?"
"공고문? 공고문이라면 이미 내려왔었잖아?"
얼마 전.
[기간에 맞춰 등반자들의 세상과 탑 사이에 존재하던 경계선을 일부 허물고 통로를 만들어 둘 것.]
본사에서 내려온 방침에 따라 등반자의 세상에 균열을 만들어 뒀건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니긴 하다만, 그러고 보니 작업은 다 끝난 건가?"
"진작 다 끝냈지! 네가 농땡이 피우는 동안 말이야!"
"잘됐군."
"근데 사실 난 잘 모르겠다."
블라디미르가 유그드라실이 들고 온 피자를 집으며 말을 이어 간다.
"어쨌건 조커 카드는 탑 안팎을 오가잖아? 그럼 그놈이 다 틀어막으면 되는 것 아냐?"
"그것도 가능성이 높군."
"이래서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건데, 하여간 본사 것들은 현장 상황은 1도 모르면서 그냥 이래라 저래라 말만 많고 말이야."
투덜거리며 피자를 입에 가져가는 블라디미르.
피자를 씹는 그의 표정이 점점 녹빛으로 변한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었는데도 조금도 발전이 없는 거지....
블라디미르가 홀린 듯 피자를 보며 중얼거리던 중.
유그드라실이 묻는다.
"그보다, 내가 말하려던 건 다른 탑들과 관련된 공고문을 말하는 거다만."
"아아, 그거? 놀랍게도 전혀, 아무것도 없어."
"흠. 다른 탑들과 연결이 됐는데도 아무런 공고문이 없다니, 그것참 희한한 일이로군."
"본사에도 얼빠진 놈이 있는 걸지도 모르지. 그래서 우리 탑에만 공고문을 보내는 걸 빠뜨렸다든... 음...."
심각한 표정으로 피자를 노려보는 블라디미르와 달리.
유그드라실은 대화를 이어 나간다.
"본사에서 그런 실수를 할 리는 없을 테고, 뭔가 의도한 게 있을 것 같다."
"혹시 이 '맛없음'도 의도한 거야?"
"...음?"
유그드라실의 가지가 파르르 떨리자.
블라디미르는 얼른 뒷말을 덧붙인다.
"아니면 우리한테도 정보를 숨겨야 할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를 꾸미고 있다든가."
"으음, 그럼 결국 우리도 저 시간이 다 흐르기 전까지는 정확히 알 수 있는 게 없다는 소리로군."
테이블에 놓인 수정구는.
탑의 환영으로 가득한 하늘과 줄어드는 시간을 비추고 있었다.
"도대체 본사가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군. 정말 탑들 간에 전쟁이라도 벌이게 하려는 건가?"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높겠지. 후우... 어쩌겠어?! 그냥 마음 편히 먹으라고! 당일이 되면 알게 되겠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블라디미르를 보며.
유그드라실이 가지를 흔들어 보인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 다만, 나의 느긋한 일상에 지장이 갈까 봐 걱정한 것뿐이지."
"...."
블라디미르가 기가 찬다는 눈으로 유그드라실을 바라보던 그때.
"우오오오오!"
"간다, 간다! 드디어 간다!"
휴게실 한쪽에서 요란한 환호성이 울려온다.
"어이! 뭔데 그래?!"
"조커 카드가 탑을 나갔어! 내 층은 안전하다고!"
"크으! 내 층도! 이러면 새로운 보스를 만들 필요는 없겠어!"
조커 카드의 마수를 피한 층의 관리자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환호성을 지르자.
블라디미르가 혀를 차며 한마디를 던진다.
"그래도 미리 생각해 두는 게 좋을걸? 재난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거라고."
* * *
그 시각.
"으음...."
발리나가 소파에 앉은 채.
테이블에 놓인 커다란 눈동자들을 주시하고 있다.
끼긱-
눈동자들은 저마다 각각의 영상을 비추고 있었는데.
[아아아! X성 화이트! 어렵던 상황을 끝끝내 뒤집고 한타에서 대승리를 거둡니다!]
[이게 X성 화이트죠! 한타 하면 또 X성 화이트거든요!]
그 안에선 협곡을 무대로 한 게임방송이 송출되고 있었다.
"오오오! 과연, 오늘 밤에는 나도 마스터 이를...."
흥분한 발리나가 주먹을 불끈 쥐던 그때.
"발리나! 깡통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뭐 하고 있어?! 놀지 말고 와서 음식 만들어!"
주방에서 분신의 샤우팅이 울려온다.
씨익-
그러나 발리나의 입가에 걸리는 희미한 미소.
"흐흐흐...."
평소였다면 고분고분 분신의 명령을 따랐겠으나.
오늘만큼은 그녀에게는 빈둥거릴 수 있는 확실한 명분이 있었다.
"그럴 수는 없다."
"하, 저게 또 빠져 가지고...."
주방에서 걸어 나온 분신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발리나를 바라본다.
"그럴 수 없긴. 다른 애들은 다 일하고 있는 것 안 보여? 요즘 풀어 줬더니 군기가 좀 빠졌다?"
"그런 게 아니다. 난 요리, 설거지보다 더 막대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러니 난 작업에서 빠지는 것이 맞다."
"막대한 임무?"
"그렇다. 이걸 봐라."
발리나가 테이블에 놓인 눈동자들을 가리키자.
분신은 고개를 돌려 눈동자들을 살폈다.
끼긱-
눈동자는 탑 주변의 균열이나 탑 주변의 바리케이드를 보강 중인 군인들의 모습 따위를 비추고 있었다.
"보다시피 난 놀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여 철저한 경계 근무를 서고 있었을 뿐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명분을 활용한 완전범죄!
발리나가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주인이 시킨 일을 하는 건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주인의 세계를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흠...."
턱을 쓸어내리던 분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도 맞긴 하네."
"역시 나의 이 뜨거운 열정을 알아줄 것이라 생각...."
"그럼 감시는 교대로 하는 걸로 하자."
순간, 발리나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생긴다.
"그, 그게 무슨...."
"굳이 네가 계속 감시할 필요는 없잖아? 계속 보면 눈도 아플 거고, 우리들끼리 돌아가면서 지켜보자고. 그러면 되잖아? 그치?"
"크으읏...."
이건 변수다.
명분은 완벽했으나 이후 대처가 다소 미흡했다.
그러나 발리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 그래도 되긴 하지만, 내가 직접 보면서 관리하지 않으면 송출 영상이 불안정할 수...."
"너, 저번에 게임하면서도 잘만 했잖아?"
"...."
숨통을 조여드는 날카로운 질문들.
분신이 발리나의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드민다.
"너... 설마 지금 일하기 싫어서 농땡이 치려는 건 아니지? 에이, 설마 그런 거겠어? 그치?"
"허어억... 어, 으음...."
그러던 그때.
화아악, 덜컹-
어디선가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오더니.
"읏차!"
문을 열고 나온 주인이 가방을 소파 옆에 휙 던진다.
"나 왔다."
"오, 주인, 왔어?"
"그래. 근데 어째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무슨 일 있어?"
분신이 주인을 보며 씨익 웃는다.
"백구랑 루나는 당연하고, 깡통도 열심히 일을 하는 판국에 발리나만 일을 안 하려고 하더라고? 요새 식기세척기가 일을 대신해 줘서 그런가?"
"음? 그래?"
주인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걸려 가자.
발리나는 황급히 손을 휘저으며 변명한다.
"그, 그런 게 아니다! 난 정말 감시에 집중하고 있었을 뿐이다!"
"감시?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밖으로 나가 보면 안다!"
발리나는 황급히 주인을 이끌고 현관문을 나섰다.
"저걸 봐라!"
그녀의 손가락이 하늘을 가리키자.
주인이 고개를 쳐들곤 하늘을 바라본다.
고오오오오-
하늘을 가득 덮고 있는 탑의 환영들.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286:32]
당장이라도 핏물이 떨어질 것 같은 핏빛 문구까지.
"호오...."
"거기다 저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주인도 이걸 보면 날 칭찬할 수밖에 없을 거다!"
다시금 거실로 돌아가.
주인에게 커다란 눈동자를 보여 주는 발리나.
"저건... 균열이네."
"정확히 봤다! 주인도 봤으니 알겠지만, 저기서 어떠한 이변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난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저 균열을 지켜봤다!"
뒤이어 이 논쟁의 종지부를 찍고자.
발리나가 포효하듯 소리친다.
"요리도 중요하지만, 주인의 세계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주인이 갑자기 박수를 친다.
"오, 꽤나 울림이 있는 연설이었어."
"역시! 나의 진심을 느껴 준 건가?!"
"그래서, 뭐 때문에 둘이서 그러고 있었던 건데?"
"...."
한차례 분신이 그간 있었던 일을 간략히 설명해 주자.
주인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난 또, 뭐 때문에 그러나 했더니. 발리나."
"말해라, 주인! 난 뭐든 명령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
명분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주인은 그녀에게 탑의 감시를 명령할 터.
'그러면 기회를 봐서 틈틈이 게임 방송을....'
"균열을 지켜볼 필요는 없어."
"역시 주인이라면 그리 말할... 뭣?!"
"그래도 그 눈동자는 탑 주변에 놔두고, 계속 요리를 만들어. 이제 2주도 채 안 남았어."
"자, 잠깐!"
발리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주인을 향해 외친다.
"탑 주변에 균열이 생겼다! 그건 필시 보통 일이 아닐 거다! 그런데도 감시를 하지 말라는 건가?!"
"음, 보통 일이 아니긴 하지. 근데 괜찮아."
주인이 빙긋 웃으며 말한다.
"어차피 그 균열은 전쟁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아무런 반응도 안 할 거거든."
"그, 그게 무슨...."
"나도 본사 관리자한테 얼핏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는 몰라. 하지만 지금은 그 균열이 중요한 게 아냐. 진짜로 중요한 건... 탑이지."
쩌저적-
완벽한 명분이 깨져 나간다.
"허어억...."
주인이 뭐라뭐라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는다.
휘청거리던 발리나가 순간 테이블 위의 눈동자를 툭 건드린다.
그 순간.
[아아! 전국의 팬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X성 화이트가 끝끝내 소환사의 컵을 거머쥐는 이 역사적인 광경을!]
눈동자에서 웬 아나운서의 들뜬 음성이 흘러나온다.
"엥?"
"음?"
"허어억...!"
황급히 커다란 눈동자를 쾅 내리치는 발리나.
눈동자가 다시금 탑 주변의 광경을 비추었으나.
"이야, 이건 예상 못 했네."
"이, 이건 약간의 오해가...."
"잘 봤다, 너의 진심. 분신아, 창고에서 커피콩 자루 10개만 갖고 와 줄래? 아, 그리고 식기세척기도 좀 치우자."
이날.
집 안에는 온종일 커피 볶는 냄새가 솔솔 진동했다.
202화 잠시간의 여유 (6)
다음 날.
촤르륵, 촤르르륵-
발리나가 눈 밑이 퀭한 채로 주방에서 커피콩을 볶고 있다.
"콩... 콩... 커피 콩...."
"오, 벌써 10포대 다 볶았어? 분신아! 여기 다섯 포대 추가해라!"
"오케이!"
"크으으으윽!"
콩을 볶고 있는 그 모습이 조금은 불쌍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 네가 자초한 일이다, 이 녀석아.
"그래도 균열은 잘 탐색했으니 다섯 포대는 깎아 준다!"
"오오오오오!"
"다음부터 또 농땡이 부리면... 알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발리나.
난 피식 웃곤 주방에 길게 늘어선 대형 냉동고의 문을 하나씩 열어 봤다.
"호오."
깔끔하게 준비된 음식의 밑재료들이 한가득 쌓여 있다.
비단 이 냉동고뿐만이 아닌.
주방에 있는 모든 냉동고들마다 요리에 필요한 각각의 재료들이 얼려져 있었다.
"일단 재료들 위주로 준비해 봤어. 재료만 준비돼 있으면 조립하는 건 금방이니까, 시간에 맞춰서 완성하려고."
"그게 맞지. 잘했네!"
역시 내 분신이야.
일을 맡기면 이렇게 알아서 잘해 주잖아?
'이 정도 양이라면 2달 정돈 패 소지자들한테 판매가 가능하겠어.'
물론 냉동고에 있는 것 말고도.
편의점 2층에도 재고품을 한가득 쌓아 둔 상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물량으로 탑 안의 모든 인원을 커버하는 건 불가능해.'
그러니 지금껏 해 왔던 것처럼.
편의점의 룰에 따라 패-소지자들에게만 상품을 파는 게 가장 현실적일 터.
"근데 탑에서의 일정은 어땠어? 소득은 좀 있었어?"
분신의 물음에 난 냉동고를 닫으며 씨익 웃었다.
"일단 업적 5개를 적립했지."
"...5개나? 잠깐만. 그럼 몇 레벨이나 올린 거야?"
"지금은 83레벨이지."
분신이 고개를 갸우뚱 거린다.
"들어갈 때는 81레벨 아니었어? 근데 업적을 5개나 달성했는데... 83레벨?"
"어쩔 수 없어. 레벨이 올라갈수록 요구하는 업적의 양이 늘어나거든."
처음에는 1개의 업적만 요구했던 것이.
2, 3개에 이어 이제는 4개를 달성해야만 했다.
"워, 장난 아니네. 그럼 남은 시간 동안 레벨을 더 올리려고?"
"글쎄, 좀 고민이긴 해. 시간이 애매하거든."
아무리 층에 대한 정보와 보스들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들을 처리하는 데는 최소한의 시간이 걸리기 마련이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이 오기까지 이제 2주도 채 남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과연 몇 개의 업적이나 더 달성할 수 있을까?
'시간이 허락하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긴 해야겠지만....'
난 분신을 보며 빙긋 웃었다.
"일단 레벨이 올라가면서 얻은 걸 좀 테스트 해 볼까 해."
"테스트? 이미 다 해 보고 온 게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는데, 이게 인원이 좀 많아야 테스트가 될 것 같더라고. 겸사겸사 현장 분위기도 좀 둘러볼 겸, 잠깐 다녀올게!"
* * *
화아아악-
41층, 포탑의 나라.
평소였다면 그랜드 라인을 따라 늘어선 포탑들을 보며.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겼겠으나 지금은 테스트가 우선이다.
'커피는 이따가 즐기자.'
난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는 상품들이 빼곡히 들어 있긴 했으나.
그래도 걸어 다닐 정도의 공간은 있었다.
끼이익-
난 미리 갖다 놓은 나무 의자에 걸터앉은 채 생각했다.
'몬스터들이나 함정 같은 건 잘 캐치 했는데, 공략자들은 또 어떤 식으로 보이려나.'
기존에 테스트를 했을 때는 공략자들이 없었으나.
이번에는 공략자들이 있으니 무언가 변화가 있을 터!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금제 능력 개방."
그 순간.
띠링-
[금제 능력이 개방됩니다.]
[능력 목록에 금제 능력이 일시적으로 추가됩니다.]
[현재 사용하실 수 있는 금제 능력: '주시자의 시선']
나의 눈앞에 일련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금제 능력, 주시자의 시선.
83레벨을 달성함과 동시에 획득한 능력이다.
'특이하게 상태창에 안 뜬다는 게 조금 신기하긴 하지만.'
허나 뭐 어떤가?
능력만 잘 발동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을.
"주시자의 시선."
그 순간.
내 앞에 커다란 지도가 떠오른다.
지도 위에 떠오른 붉은 반점 그리고 푸른 반점들 따위를 보며.
난 피식 웃었다.
'일차적인 확인은 이걸로 끝이고, 이제 다른 테스트를 진행해 볼까.'
이 테스트 과정을 거쳐야만.
공략자들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팔아 먹을 수 있을 터이니 말이다.
* * *
어느새 편의점 주변으로 몰려든 공략자들.
그들은 유리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며 자신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다.
"크으! 포탑은 언제 봐도 장관이구만?! 봐도 봐도 질리지가 않는다니까?"
"또 얼빠진 소리하네. 지금 포탑이 중요해? 집중하라고!"
주변에 환상의 상점을 이용하기 위해 몰려든 공략자들이 이렇게도 많건만.
그놈의 포탑에 넋을 뺏기다니.
"알았어, 알았어. 근데... 하늘이 저 지랄이 났는데도 어째 사람들은 줄어들지가 않은 것 같다?"
"또 얼빠진 소리하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지. 지금 다들 공략을 멈춘 상태잖아?"
대부분의 클랜들이 정체 모를 대형 이벤트에 대비하기 위해 잠시 공략을 중단한 상황.
모두가 시간적 여유가 생겼으니.
환상의 상점에 공략자들이 몰리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겠는가?
"어떤 대형 이벤트가 발생할지 몰라. 그러니까 우리도 살 수 있을 때 최대한 사 둬야 한다고, 특히 오래 쟁여 두고 먹을 수 있는 걸로다가."
"아무렴, 알지, 알지. 근데...."
너스레를 떨며 주변을 살피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린다.
"우리 좀 위험한 것 아냐?"
"뭐가?"
"저것 좀 보라고."
환상의 상점의 오픈 시간을 본능적으로 느끼기라도 한 걸까.
척-
저마다 자신들의 패를 드높이 쳐들고 있는 패-오너들.
다만 평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패의 색들이 대부분 은빛을 띠고 있다는 것이었다.
"와... 뭐야? 언제 저렇게 실버-패 소지자들이 늘어난 거야?"
"이제 실버-패라고 안심할 수 없겠는데? 흠... 확실하게, 안전하게 상품을 사려면, 이제 골드-패는 있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근데 그러려면 공략을 해야 하잖아? 지금 상황에 어떻게 공략을 해?"
"아니, 지금 하자는 게 아니고, 저 뭔지 모를 이벤트가 끝나고 나면 그 뒤에 공략에 집중을 하자는 거지!"
저마다 대화를 나누며 편의점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공략자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좀처럼 환상의 상점은 열리지 않았다.
"슬슬 열 때가 지나지 않았나? 언제 여는 거야?"
"어디 외출이라도 나간 것 아냐?"
"상점주가 나가는 것 본 사람?"
나지막한 말소리가 점차 아우성으로 변해 가려던 바로 그때.
딸랑-
마침내 익숙한 종소리가 공략자들의 귓가를 울린다.
그와 동시에.
척-
"이 순간만 기다렸다고!"
"대형 퀘스트고 나발이고 일단 먹어야 살지!"
"콜라! 콜라!"
잘 훈련받은 개처럼.
반사적으로 저마다 갖고 있는 패를 드높이 들어 보이는 공략자들.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방문해 주신 손님 여러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오오!"
보장된 행복을 약속하는 상점주의 말에 환호성이 터진다.
"오늘은 오픈하기에 앞서, 잠시 공지할 게 하나 있습니다."
"공지? 무슨 공지를 하려는 거지?"
"저번처럼 페스티벌을 열려는 것 아냐?"
"시국이 시국인데 뭔 얼어 죽을 페스티벌이여? 아마 대형 이벤트를 놓고 각 클랜장들이랑 회담을 하려는 게 아닐까?"
모두가 '공지'에 대해 의아함을 느끼는 와중.
상점주가 계속 말한다.
"그간 많은 분들께서 탐색을 하는 데 있어 많은 어려움을 겪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탐색? 뭐... 그건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지."
트랩이나 숨은 몬스터 따위를 찾는 수색 능력 보유자의 숫자가 드문 건 아니었다.
다만 수준급의 탐색 능력을 가진 공략자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을뿐더러.
그나마도 대부분 소속된 클랜이 있었다.
"근데 왜 갑자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탐색과 환상의 상점.
아무리 생각해도 두 단어에서 접점이라곤 찾아보기 어렵건만.
"하하하, 의아해하시는 분들이 많군요. 금일부터 저희 환상의 상점에서, '매핑' 서비스를 도입했습니다!"
"...매핑?"
모두가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을 짓자.
가면 밑으로 드러난 상점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뭐, 이런 겁니다."
상점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철커덕-
갑자기 편의점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소리야?"
"뭔가 쇠가 걸리는 소리 같은데.... 혹시 환상의 상점에서 장비도 취급하는 건가?!"
"바보 같은 소리 하긴. 탐색이라고 했잖아."
"탐색이랑 관련된 장비 같은 걸 수도 있... 어어? 저, 저게 뭐야?!"
갑자기 한 공략자가 편의점 2층 부근을 가리키며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해당 방향으로 쏠린다.
"뭐야, 평범한 기둥 아니야?"
"그러게? 저거랑 탐색이랑 무슨...."
편의점의 지붕 위로 커다란 두 개의 봉이 솟구친다.
그리고 그 사이에.
홱, 홱홱-
커다란 눈동자 하나가 걸린 채.
주변을 살피듯 좌우로 데구르르 움직이고 있었다.
"...."
"저, 저건 또 뭐야?"
"내, 내가 그걸 어떻게 알...."
"어어어... 우, 움직인다."
천천히 반달 모양을 그리는 눈동자.
마치 눈웃음을 짓는 듯하다.
"상점주의 특이한 인테리어 같은 거겠지. 저번 클랜 아지트도 그렇고, 특수한 건물도 만드는 걸 보...."
그러던 그때.
홱-
눈동자가 홱 시선을 돌려 그들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자.
"허어어억!"
"X발... 지릴 뻔했다...."
"나도...."
시선을 마주친 공략자들은 제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하하하!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저게 바로 저희 환상의 상점이 새롭게 선보이는 서비스, '매핑'입니다!"
"저게... 서비스라고?"
아무리 좋게 봐도 눈동자이건만.
도대체 어떻게 저게 서비스라는 건지.
"그간 기습, 야습, 불의의 습격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받으셨습니까? 그러나 저희 '매핑 서비스'와 함께라면, 단언컨대 편안히 숙면을 취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오, 뭔가 대단하긴 한데.... 근데 그 서비스보다는 그냥 클랜 아지트를 더 팔아 주면 안 되나요?"
"그래, 클랜 아지트가 지리긴 하더라!"
각종 하우징 시스템을 갖춘 건 물론.
기습을 받을 확률이 급격히 낮아지는 클랜 아지트.
겨우 3개의 클랜밖에 받지 못한 아지트는 여전히 공략자들에게 있어.
엄청나게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러나.
"그건 특별! 한정! 아이템이라서요."
질문을 던진 공략자에게 웃어 보이며.
딱 잘라 말하는 상점주.
"아아...."
"다음에 열릴 페스티벌을 기대해 주시죠."
"그런데 상점주! 매핑 서비스라는 게 정확히 뭡니까?!"
상점주가 질문이 날아온 방향을 보며 씨익 웃는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자, 일단 다들 패를 꺼내 보시겠습니까? 우드, 브론즈, 등급은 상관없으니 다들 꺼내 보세요!"
"...."
공략자들은 영문도 모른 채 패를 흔들어 보이며.
자신들끼리 낮게 속삭인다.
-이게 뭐 하는 짓이래?
-몰라. 그래도 상점주가 까라니까 까야지 뭐.
-혹시 저 대형 이벤트랑 뭔가 이어져 있는 것 아냐?
-에이, 설마.
"다들 패를 꺼내 드셨군요. 좋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매핑 서비스를 소개하죠!"
따악-
상점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스슥-
"우와앗!"
"이, 이건...."
돌연 패 위로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203화 잠시간의 여유 (7)
"지도 아냐?"
"잠깐만! 그럼 이 점들은 우리인 거고?"
어리둥절해하는 표정으로 초록색의 홀로그램을 바라보는 공략자들.
그러나 그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기까진.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푸른 점들이 우리고, 노란 점은 원주민들인 거네?"
"거기다가 주변 지형지물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인근에 위치한 하플링들의 마을은 물론이요.
마을 인근의 둔덕과 숲 그리고 그랜드 라인과 포탑들까지.
이보다 더 정교한 지도가 존재할까 싶을 정도다.
"어이, 이것 좀 봐!"
"이 지도... 우리 움직임에 맞춰져 있는 것 같은데?"
"뭐? 진짜? 어어... 그러네?! 이건 완전 미니 맵이잖아?!"
모두가 패 위에 떠오른 홀로그램만 뚫어져라 바라보던 중.
상점주의 목소리가 울린다.
"환상의 상점의 새로운 서비스, 매핑 서비스는 좀 마음에 드십니까?"
"마음에 들고 자시고, 이런 게 있으면 수색이나 정찰이 얼마나 편해지는데! 근데 이거... 혹시 함정 탐지도...?"
싱긋 웃으며 대답하는 상점주.
"물론 매핑 시스템에 포함된 서비스입니다."
"허어...."
사전에 적의 위치나 함정의 유무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생존과 활동에 있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모를 리 없었다.
"기존의 지도들은 전부 걸레짝이 될지도 모르겠군...."
"정찰대나 수색대의 부담도 덜어 줄 수 있을 거고. 이건 정말이지... 할 말이 없군."
클랜장들이 진지한 눈으로 미니 맵을 바라보던 그때.
"그런데 말이네, 상점주! 궁금한 게 있네!"
한쪽에서 중년의 남자가 워해머를 흔들어 보인다.
망치 클랜의 클랜장 무라단이었다.
"네, 물어보시죠."
"이 서비스가 굉장하다는 건 알겠네만, 이 매핑 서비스는 몇 층까지 사용할 수 있는 건가?"
"오, 무라단! 그건 나도 궁금했는데 잘 물어봤다!"
대부분이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매 층마다 상황이 달라지고 환경이 달라진다.
막말로 41층에서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던 매핑 서비스가 42층에선 작동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좋은 질문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드리자면 현재 80, 아니 공략된 층까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니 부담 없이 사용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 그런가!"
무라단의 질문을 시작으로.
"적과 아군도 명확히 식별이 가능한가요?"
"그건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이 알아야죠."
질문.
"혹시 이걸로 숨겨진 지역을 발견한다거나 특수한 아이템을 찾는 것도...?"
"지원하지 않는 서비스입니다만, 나름의 도움을 받을 순 있겠죠?"
그리고 또 질문.
"상점주! 콜라파요, 사이다파요?!"
심지어 잡다한 질문까지.
곳곳에서 질문 폭탄이 쏟아진다.
"흠...."
그 와중, 홀로그램을 유심히 바라보던 무라단.
"음?"
그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홀로그램 좌측 하단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버튼.
그에는.
[유료 지원 서비스]
다소 의미심장한 문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대체...."
버튼의 활용도를 물어보고 싶으나.
주변 상황이 워낙 번잡하다.
"흠! 눌러 보면 알겠지!"
무라단은 대뜸 굵은 손가락을 들어 버튼을 눌러 본다.
그 순간.
촤라라라락-
[원격 배달 - 100골드]
[미니 맵 2배 확장(기간제) - 500골드]
[경보 알림 서비스(기간제) - 500골드]
.
.
.
몇 가지 항목이 담겨 있는 창이 그의 앞에 펼쳐졌다.
"경보 알림... 서비스? 원격 배달?"
* * *
몇 시간 뒤.
"자자, 서둘러!"
환상의 상점에서 산 상품들을 바삐 아공간 주머니에 넣는 남자들.
"대장! 다 챙겼습니다!"
"좋다! 오늘은 아지트에서 파티를 즐긴다!"
무라단이 껄껄 웃으며 소리치자.
망치 클랜원들은 곧 있을 행복한 시간을 기대하며 활짝 미소를 짓는다.
망치 클랜이 편의점 앞을 뜨려던 그때.
"무라단."
누군가가 무라단의 앞에 선다.
"오, 홍염, 오랜만이군! 다른 녀석들도... 에잉, 저 녀석은 아직도 살아 있었나? 쓸데없이 명줄이 질기군."
무라단이 성녀를 향해 장난스레 농담을 던지자.
"내가 뒈지는 것보다 네가 길거리에서 객사하는 게 더 빠를걸?"
"오?! 길에서 객사라...? 참으로 평화로운 죽음이로군! 그것도 좋을지도?"
"지랄하네. 노망났어?"
역시나 욕설을 퍼부으며 그가 원하던 반응을 보여 주는 실비아.
"크하하하하!"
무라단은 만족스럽게 웃으면서도.
눈으로는 선구자들을 쓱 훑어본다.
"그건 그렇고... 못 본 사이에 더 강해졌군."
선구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달라진 장비만 봐도 사이즈가 나왔으니 말이다.
"저번 페스티벌 때문에 조금 무리하긴 했지."
"...."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건... 아직도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건가. 정말 대단하군....'
높은 층을 공략할수록 사망할 확률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갈 것이건만.
무라단은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 갔나? 61층? 62층?"
선구자들이 60층 공략에 성공했다는 건.
정상급 공략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정보였다.
"60층에서 멈췄어. 일단 당장 신경 써야 할 게 있으니까."
이지수가 슬쩍 고개를 들어 탑들의 환영이 들어찬 하늘을 가리키자.
무라단이 껄껄 웃는다.
"그런가. 의외로군! 네 녀석들이라면 그런 건 신경 안 쓸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무튼 어쩐 일이냐!"
"혹시 저것에 대해 뭔가 알아낸 건 없나 해서. 갖고 있는 정보가 있으면 교환할래? 이럴 때가 아니면 서로 얼굴 보기 쉽지 않잖아?"
이지수가 환상의 상점을 가리키며 웃자.
무라단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말이 맞다. 환상의 상점이 아니라면 이렇게 얼굴 볼 일도 없었겠지."
애당초 서로가 가는 층이 다르고 지향하는 방향이 다른 그들이 이렇게 모일 수 있는 건.
환상의 상점의 덕이었으니.
"아무튼 정보라면... 없다."
딱 잘라 말하는 무라단.
"흠, 그래?"
이지수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그를 보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갔다.
"그나마 있는 단서라곤 탑의 환영과 시간이 전부인데 뭘 알아낼까."
"그렇긴 하지."
"그러는 너희는 뭐 좀 얻은 정보 같은 건 없는 거냐?"
이지수가 잠시 입을 다문다.
[조만간 큰 변화가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전쟁이라든가요.]
상점주로부터 넌지시 들은 단서가 있긴 했으나.
[괜히 혼란만 가중할 수가 있으니 일단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외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상점주와의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우리도 별달리 얻은 정보는 없어."
"그런가...."
잠시 말이 없던 무라단이 이내 껄껄 웃는다.
"술이나 한잔하며 기다리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겠나? 저번에 드라고니아에서 구한 좋은 술이 있는데, 그걸 맥주랑 섞어 마시면...."
"아니. 할 일이 있어서."
"할 일? 쩝, 그냥 마시기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될 것을...."
한껏 섭섭해하는 티를 내며 투덜거리는 무라단에게.
이지수가 조용히 미소 짓는다.
"진짜로 할 일이 있어. 클랜의 체계를 좀 뜯어고쳐야 될 것 같아."
그녀의 말이 끝나자.
눈을 휘둥그렇게 뜬 무라단이 이지수만 들을 수 있게 작게 속닥거린다.
"그건 또 무슨 벼락 맞을 소리냐? 갑자기 조직 내부를 개편하겠다고?"
조직의 재편성 자체는 드문 일이 아니다.
클랜의 규율을 위반하거나 인간성을 상실한 것 같은 행동을 했다거나, 클랜 내의 혁명을 노렸다거나.
가지각색의 이유들로 클랜이 와해되거나 집안싸움이 일어나는 경우도 많았으니 말이다.
"혹시 저 입 거친 녀석이 반항기에 접어들기라도 한 거냐?"
무라단이 힐끔 실비아를 보며 소곤거리자.
이지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냐. 이제 정찰조의 활용도가 애매해질 수도 있으니까 일단 지금의 체제를 유지할지 아니면 변화를 줄지 고민이야."
"아, 그 뜻이었나!"
그제야 이지수의 의도를 이해한 무라단이 씨익 웃는다.
"확실히 이제 정찰대의 역할이 애매해지긴 했다만, 갑작스러운 변화는 큰 혼란을 야기하는 법이다."
"알아."
"그런가. 크하하하! 그건 그렇고, 너도 가입한 모양이군!"
이지수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지. 그런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을 리 없잖아?"
상점주가 선보인 매핑 서비스.
해당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선.
매달 1,000의 공헌도와 100골드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단언컨대! 매핑 서비스에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그것도 그렇군. 얼간이가 아니고서야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무라단이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다.
갑자기 손뼉을 탁 친다.
"아! 홍염, 혹시 하단의 버튼을 봤나?"
"무슨 버튼?"
"크하하하하! 시야가 많이 좁아졌군!"
무라단이 골드-패로 홀로그램을 띄워 보인 뒤.
미니 맵 좌측 하단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인다.
"유료 지원... 서비스?"
"크하하하! 몰랐던 모양이군!"
"뭔가 희한한 게 많네? 혹시 사용해 봤어?"
"물론이다! 그리고 역시나 상점주는 미친놈이라는 결론을 내렸지."
이지수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뭔데 그래?"
"보면 안다! 어이!"
무라단이 자신의 클랜원들을 보며 손을 까딱거린다.
"누가 원격 배달 좀 써 봐라!"
"제가 하겠습니다!"
한 망치 클랜원이 패 위에 뜬 홀로그램을 이리저리 조작하자.
스스슥-
갑자기 그의 발 앞에 붉은 원이 생긴다.
"...저건 뭐야?"
"보고 있어라."
무라단이 말을 끝마친 지 겨우 몇 초나 지났을까.
휘이이이이잉, 타아악-
무언가가 붉은 원 위로 정확히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저건... 박스잖아?"
"크하하하! 내용물을 보면 깜짝 놀랄 거다!"
이지수를 필두로 박스 안을 살펴보는 선구자들.
"이건...."
참치 통조림, 비누 그리고 음료수.
오직 환상의 상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상품들이 박스 안에 담겨 있다.
"특제 우표를 쓴 거야?"
"특제 우표가 아니라, 유료 서비스를 이용한 거다. 아무튼 이건 맛보기일 뿐이다! 진짜로 대단한 건 따로 있지!"
무라단이 자신만만하게 콧수염을 실룩이자.
실비아가 그의 면전에 한마디를 던진다.
"어차피 상점주 능력이잖아? 그만 좀 뻗대고 뭔지 알려 줘 봐."
"거, 하여간 그놈의 입은.... 잘 보고 있어라! 시작해라!"
무라단의 지시가 떨어지자.
망치 클랜원이 다시금 홀로그램을 조작한다.
"이번에는 또 뭘 하는...."
스으윽-
갑자기 그들의 앞으로 커다란 봉 같은 것이 생겨나 솟구쳐 오르자.
모두가 의아해하는 눈빛으로 봉을 바라본다.
"저건 또 뭐야.... 이봐 무라단, 저것도 유료 서비스야? 그냥 평범한 봉일 뿐이잖아?"
"크흠! 끈덕지게 좀 지켜보고 있어라!"
"딱히 지켜본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진...."
그러던 그때.
펄럭-
"오?"
봉 끝에 달려 있던 꽃잎 같은 것이 활짝 펼쳐지는 게 아닌가?
"저건... 파라솔 아냐?"
"근데 크기는 또 왜 저래?!"
운동장 하나는 족히 덮을 정도로 그 면적이 넓었던 탓일까.
선구자들을 비롯한 여러 공략자들이 벙쪄 대형 파라솔을 올려다보던 그때.
띠링-
그들의 눈앞에 일련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환상의 쉼터의 영역에 진입하였습니다.]
[피로감이 대폭 감소합니다.]
[회복력이 대폭 증가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저주에 면역 상태가 됩니다.]
[일정 시간 동안 중독에 면역 상태가 됩니다.]
.
.
.
끝도 없이 떠오르는 메시지를 보며.
이지수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이건 거의... 버프 상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겠어."
204화 잠시간의 여유 (8)
"자, 살 것도 다 샀으니 슬슬 돌아가자고!"
"크으읏, 다른 건 몰라도 휴지는 꼭 샀어야 하는데."
"상점주! 다음에 또 올게!"
환상의 상점에서의 목적을 전부 이룬 걸까.
공략자들이 환히 웃으며 하나둘 자리를 뜬다.
난 떠나가는 공략자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제 좀 한가해졌네.'
물론 모든 공략자들이 떠난 건 아니다.
"엄마, 통화 카드 시간이 다 됐거든? 다음에 또 전화할게!"
"상점주! 혹시 3분만 더...."
미처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한 자들도 있었고.
"어우, 취했나? 하늘에 탑들이 보이는데?"
"그게 정상이야. 더 추태 부리기 전에 얼른 돌아가자고."
거나하게 술에 취한 몇몇 공략자들도 편의점 주변을 어슬렁거렸으니.
아무튼 아까의 소란이 거짓말인 것처럼 편의점 주변은 한산했다.
'다들 눈이 제대로 돌아간 모양이야.'
무라단과 이지수가 유료 서비스를 사용한 걸 목도한 이후.
[환상의... 쉼터? 이런 게 있었어?]
[매핑 서비스에 붙어있 는 유료 서비스라던데?]
[잠깐만, 무슨 부가 능력이.... 다들 냉동 그만 처먹고 전부 집합해!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다들 매핑 서비스와 부가 서비스의 효과를 시험하겠다며 전부 자리를 떴으니 말이다.
딸랑-
난 편의점으로 들어가 카운터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어디... 정상적으로 작동이 되나 볼까.'
공략자들에게는 따로 알리지 않았지만.
사실 매핑 서비스에는 부가적인 기능이 존재했다.
그건 바로....
내가 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까딱거리자.
사사사사삭-
눈앞으로 수많은 홀로그램들이 떠오른다.
[근데 상점주는 도대체 왜 자꾸 이런 특이한 혜택을 주는 걸까? 솔직히 득이 되는 게 뭐가 있다고?]
[다들 내일부턴 매핑 서비스를 활용해서 전투를 치를 거니까 알아 둬. 이제 대형 이벤트까지 얼마 안 남았으니, 미리 익숙해지자고!]
홀로그램에는.
다양한 클랜, 공략자들의 모습이 자리하고 있었다.
'오, 잘되네!'
매핑 서비스를 사용하는 공략자들의 모습을 CCTV 보듯 확인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금제 능력, '주시자의 시선'에 붙은 능력 중 하나였다.
'이제 이걸로 얼추 현장의 상황도 파악할 수 있겠....'
[일단 좀 씻자고.]
[물 좀 끓여 줘!]
'어이쿠.'
난 황급히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홀로그램을 꺼 버렸다.
'흠흠... 이런 건 주의해야겠네.'
어디까지나 이 능력의 주된 용처는 전쟁이 펼쳐질 현장이 될 테니까.
'그보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이제 예정된 시간까지는 채 며칠도 남지 않은 상황.
준비할 수 있는 만큼 준비는 해 두었다.
'진짜 돈, 시간 엄청나게 투자했지.'
일단 바깥에서 상품 종류를 막론하고.
사들일 수 있는 것들은 거의 모두 사서 쟁여 놨다.
어디 그뿐인가?
주방 멤버들의 땀으로 만들어진 수많은 버프 요리들은.
아무리 보관해도 음식이 썩지 않는 편의점 2층에 보관 중인 상태였다.
'거기다가 레벨까지....'
빡센 일정이었지만 잘 소화했다.
이제 남은 건, 그날이 오는 걸 기다리는....
그러던 그때.
딸랑-
갑자기 문에서 종소리가 울려오자.
난 아무렇지 않게 홀로그램들을 전부 치워 버리곤 문을 응시했다.
"장사는 다 끝난 건가?"
키는 짤막할지 몰라도 표정만큼은 누구보다 근엄한 하플링이 내게 미소 지어 보인다.
포탑의 나라의 총사령관, 거스였다.
"장사는 아까 끝났죠. 그래도 거스에게 판매할 술이랑 위스키초콜릿은 남겨 놨습니다."
"그것참 기쁜 말이군. 하지만 오늘은 이걸로 한잔 어떤가?"
거스가 품에서 조심스레 황금색의 기다란 병을 꺼내어 보인다.
"오, 엘드라고 아닌가요?"
엘드라고라면 이미 집에서 자체적으로 제작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거스의 성의를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런 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거스가 씨익 입꼬리를 올린다.
"미리 말해 두겠다만, 이건 그냥 엘드라고가 아니야. 100년은 넘게 숙성시킨 엘드라고다!"
"오오! 그럼 안주는 제가 준비하죠."
내가 아공간 주머니에서 안주를 고르는 사이.
거스는 소주잔 두 개를 꺼내어 하나를 내게 내민다.
"일단, 먼저 목부터 적시자고."
꼴꼴꼴-
호박빛의 액체가 병을 타고 흘러나와 잔에 가득 들어찬다.
"호오, 원래 엘드라고는 반투명한 게 아니었습니까?"
"원래는 그렇지. 하지만 이렇게 숙성될수록 점점 황금색의 빛을 띠게 되지. 참고로 이것도 완벽하게 숙성된 건 아냐."
오, 그럼 나도 나중에 한번 숙성해 볼까?
근데 숙성에도 장인의 비법 같은 게 필요하려나.
"그렇군요. 근데 희석하지 않아도 되는 겁니까?"
전에 엘드라고를 마시려거든 반드시 물에 희석을 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거스가 껄껄 웃으며 말한다.
"당연히 희석한 걸 갖고 왔지."
"희석한 게 이 정도 빛깔이라.... 대단하군요."
"자자, 일단 한잔하지."
챙-
난 가볍게 거스와 건배를 하곤.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오!'
엘드라고가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자.
목이 화끈하게 타는 듯한 느낌이 든다.
'숙성해서 그런가? 뭔가 도수가 엄청나게 올라간 느낌이네.'
하지만 이 느낌도 썩 괜찮았다.
무엇보다 입안 가득 퍼져 나가는 풍부한 과일 향, 산뜻한 나무 냄새 등.
다채로운 향기가 주는 즐거움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올 정도다.
"...좋군요. 제가 만든 거랑은 느낌이 많이 다르네요. 향도 더 풍부하고 맛도 깊고 심오하고요."
"아무래도 장인이 만든 거니 다를 수밖에."
"기회가 된다면 숙성 방식 같은 건 저도 좀 배우고 싶군요."
"자네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지."
챙-
술잔이 비워져 갈 때마다.
포탑의 나라의 정세라든가 그랜드 라인에서 일어난 일, 그간의 근황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오간다.
"...난 아무리 게이트에서 온갖 잡다한 괴물들이 나온다고 해도, 이 나라를... 하플링들을 사랑한다."
심지어 취기 때문일까.
제정신이었다면 다소 내뱉기 힘들었을 발언도 흘러나온다.
"아무리 살아가기 험난하다 하더라도, 이곳은 나의 고향이자 지켜야 할 집이니까."
"좋은 마음가짐이군요."
거스의 심경은 십분 이해한다.
공략자들한테야 그저 지나쳐 갈 하나의 층일지 몰라도.
원주민들에게 층은 곧 삶의 터전이니.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예?"
어째서인지 말하기를 주저하던 거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혹시 이 포탑의 나라에 위기가 닥치거든, 도와줄 수 있겠나?"
거스의 물음에 난 의아함을 느끼며 되물었다.
"게이트는 잠잠하지 않습니까?"
사실 게이트가 잠잠하기보단.
업그레이드된 포탑들의 화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게이트를 말하는 게 아니야."
"그럼... 아."
난 그제야 거스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하곤 씁쓸히 웃었다.
'하긴... 신경이 쓰이는 건 우리만이 아니겠지.'
느닷없이 하늘에 탑들의 환영과 시간이 나타났는데.
당연히 원주민들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을 터.
"아마 거스도 다른 공략자들에게 들어서 아실 거라 생각하지만, 아직 환영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잘 알고 있네. 다만, 그저 힘이 되는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야."
"...."
나는 말없이 거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술잔을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그런 불상사가 없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친구의 위기를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고맙군."
챙-
* * *
며칠 뒤.
"와씨... 미쳤네."
주변을 둘러보던 동현이 혀를 내두른다.
하늘에 떠 있던 시간이 계속 줄어들어.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02:19]
어느덧 두 시간가량밖에 남지 않은 탓일까.
"와, 이제 얼마 안 남았어!"
"그런데 진짜 별일... 없겠지?"
"탑 관리국에서 신경 쓸 것 없다고 했잖아. 별일 있겠어?"
탑 주변은 직관을 하기 위해 나온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통제에 따라 질서를 지켜 주십쇼!"
"거기! 선 넘으시면 안 됩니다!"
경찰과 의경, 군인들까지 동원되어 현장의 질서를 정리하려 했으나.
워낙 사람이 많이 몰려들어 애를 먹는 모습이다.
"직관은... 좀 무리수였나?"
동현이 친구들을 보며 머쓱하게 웃자.
옆에 있던 한성과 재준이 곧바로 면박을 준다.
"아으, 그러니까 그냥 술집에서 구경하자고 했잖아. 시원하게 맥주 한잔 조지면서 봤으면 얼마나 좋았게요?!"
"인성이가 승리자네. 걔는 카페에서 에어컨 바람 쐬면서 TV로 보고 있을 것 아냐?"
카페 일이 많다며 오늘 이 파티에 참석하지 못한 인성이.
그러나 지금 그들은 누구보다 그런 인성을 부러워하는 중이었다.
"아직 안 늦었다. 지금이라도 튀는 게 어때?"
"튀긴 뭘 튀어? 남자가 칼을 빼 들었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지!"
"얀마! 호박도 호박 나름이지!"
탈주를 제안하는 두 친구와 달리.
동현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다.
"날이면 날마다 이런 진귀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줄 알아? 우리는 지금 역사의 한 장면이 될지도 모르는 장소에 와 있는 거라고! 저것 좀 봐!"
동현이가 가리킨 곳에선 한국의 방송사는 물론이요.
세계 각국에서 모여든 기자들이 현장 인터뷰를 따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세계도 주목하는 역사의 현장! 우리도 역사의 일부가 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떨리지 않냐?"
"가슴은 모르겠고, 내 황금 같은 연차를 생각하면 주먹이 떨리는데."
그렇게 그들이 장난 섞인 농담을 던지는 사이.
시간이 무심히 흐른다.
"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00:10]
어느덧 남은 시간이 10분으로 줄어들자.
소란스럽던 현장의 분위기도 조금씩 고요해져 간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00:00:10]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10초까지 떨어지자.
"5!"
"4!"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카운트다운 하기 시작한다.
"2!"
"1!"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00:00:00]
그리고 마침내 도래한 그 순간.
스스스슥-
[운명의 뒤틀림은 이미 시작됐다.]
하늘에 떠 있던 문구가 서서히 형체를 뒤바꾼다.
"오오! 뭔가 시작되려나 본데?!"
현장의 모든 사람이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누군가의 외침이 짧은 침묵을 깨부순다.
"뭐야.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 * *
55층, 드라고니아.
[운명의 뒤틀림은 이미 시작됐다.]
"이제 이벤트 시작한다! 뭔지 몰라도, 다들 단단히 준비해!"
"후우... 떨리는구만."
편의점 앞에 진을 치고 있던 공략자들이 달라진 하늘의 문구를 보며 소리친다.
'...이제 시작이구나.'
어디서 어떠한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남은 시간 동안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남은 건, 저 문구의 이면에 자리하고 있을 무언가의 실체를 목도하는 것뿐!
"어? 어어어?!"
그러던 그때.
공략자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이, 이건...."
대다수... 아니.
자리에 있던 모든 이의 몸이 빛에 휘감기고 있다.
"당황하지 마! 어디로 이동되든 간에...!"
"오옷!"
빛에 휘감긴 공략자들이 삽시간에 자리에서 사라진다.
그리고.
화아아악-
내 몸에서도 빛이 흘러나오자.
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무슨 전쟁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이긴다!'
205화 뒤틀린 황천 (1)
시야를 가리던 빛이 천천히 사그라지자.
난 천천히 두 눈을 떴다.
'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커다란 원형 테이블이었다.
-또 새로운 전장에 온 건가?
-재미있겠군.
테이블 너머에 드리운 어둠에서 여러 음성들이 울려온다.
'숫자가 꽤 되는 것 같은데. 적어도 30... 아니, 그보다 더 많나.'
내가 얼핏 느껴지는 기척들에 그 수를 가늠하던 그때.
짝-
박수 소리와 더불어 테이블 주변에 넘실거리던 어둠이 사라진다.
'와....'
빛 아래로 드러난 존재들.
로브를 뚫고 나올 정도로 한껏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존재부터.
비늘을 덕지덕지 달고 있는 생선 같은 놈이라든가.
저마다 개성 넘치는 외모를 가진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이레귤러들인가....'
비록 말 한 마디 해 보지 않았지만 느껴진다.
저놈들은 모두 전에 상대했던 이레귤러들과 엇비슷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으니까.
'근데 저번이랑은 조금 다르네.'
[모순의 탑의 탐그루]
[아집의 탑의 노리]
이번에는 어째선지 저마다 머리 위에 소속된 탑과 이름이 붙어 있었으니까.
'뭐, 알기 쉬워서 편하긴 한데, 도대체 몇 놈이야? 하나, 둘....'
난 셈을 끝마치곤 혀를 내둘렀다.
'나까지 포함해서 50명인가.'
무슨 놈의 이레귤러들이 이렇게도 많은 건지.
"...."
나를 비롯하여 서로가 서로를 탐색하던 중.
검은 로브를 눌러쓴 놈의 머리에서 음산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클클클, 재밌군. 이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그 뒤틀림... 내가 뭉개 주겠다."
사사사사삭-
돌연 놈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 같은 것이 튀어나오더니.
순식간에 테이블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이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해보자는 건가?"
"좋다, 서로 죽여 보자고!"
그에 다른 이레귤러들도 일어나 전투에 참여하려던 바로 그때.
"하아...."
테이블 주변을 서성이던.
피부가 창백하다 못해 새하얗게 질린 남자가 가볍게 그림자를 낚아챈다.
우드득, 우득-
그러곤 종이를 뭉개듯 그림자를 뭉개 공으로 만들며 작게 한숨을 내쉰다.
"뭔 능력인가 했더니, 이건 즉사야? 어휴, 조커 카드가 하나도 아니고 50이나 된다니.... 이건 재앙이야, 재앙."
"...."
로브를 눌러쓴 존재가 남자를 노려봤으나.
남자는 모든 게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간단히 소개하겠다. 이번 대전의 관리 감독을 맡은 관리자, 블라디미르다. 뭐, 다들 그간의 경험이 있으니 대충 어떤 상황인지는 알 거고...."
블라디미르가 심드렁하게 말을 이어 간다.
"다차원 전장, 뒤틀린 황천에 온 걸 환영한다."
'뒤틀린... 황천?'
저번에 치렀던 영원의 전장이나 아득한 밤과 비슷한 전장인 건가?
차이가 있다면 이번에는 이레귤러들의 숫자가 많은 것뿐이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궁금하겠지?"
딱-
블라디미르가 손가락을 튕기자.
테이블 위로 거대한 판이 생겨난다.
'저건....'
나는 판을 빠르게 훑었다.
각 이레귤러의 앞에 자리하고 있는 탑을 빼닮은 모형 50개.
그리고 탑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들과 엄청난 숫자의 난쟁이들.
'전쟁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 했더니....'
전쟁 그리고 50개의 탑과 수많은 공략자들.
이것들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거점 점령전인 건가.'
각 탑의 공략자들이 힘을 합쳐.
상대 탑의 공략자들을 몰아내고 탑을 점령하는 것이 규칙이리라.
'하지만 탑의 숫자가 너무 많지 않나?'
하나의 탑이 다른 49개의 탑을 무너뜨린다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는데....
"음."
내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하던 중.
"크륵, 저 숫자는 뭐지?"
몸에 비늘이 가득한 생선을 닮은 이레귤러가 관리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숫자라면 저걸 말하는 건가?'
탑의 모형 위에는 숫자와 더불어 탑의 이름이 붙어 있었다.
[153 - 모순의 탑]
[171 - 난제의 탑]
[178 - 고난의 탑]
.
.
.
[450 - 종말의 탑]
"오, 좋은 질문이야. 간단히 답하자면, 숫자는 탑의 강함의 정도를 나타낸다. 숫자가 낮을수록 강한 셈인거지. 뭐, 숫자가 절대적인 건 아니지만."
'강함의 정도는 무슨! 아무리 봐도 저건 탑의 등수잖아?!'
전에 새하얀 공간에서 봤던 등수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긴 했으나.
저 숫자는 탑의 등수를 나타내는 게 분명했다.
'가만있자. 분명 153등쯤이면... 70층에서 75층 사이였었나?'
음. 살짝 느낌이 싸한걸.
"아무튼 저 탑들은 실제로 너희가 활동하고 있는 탑들이다."
"잠깐만, 그렇단 건 설마...."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블라디미르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탑을 멸망시키면 된다. 간단하지?"
"...."
일순간 정적이 흐르고.
난 속으로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50개의 탑의 공략자들을 한데 풀어놓고 싸우게 하겠다는 거네. 그렇다면....'
모두가 서로의 눈치만을 바라보던 중.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든 탑을 멸망시켜야 하는 겁니까?"
"아, 그럴 필요는 없어."
블라디미르가 손가락 3개를 펴 보인다.
"3개의 탑이 멸망하거든 그것으로 끝이다. 아, 참고로 두 달 내로 3개의 탑이 멸망하지 않으면 이번 대전에 참전한 모두가 멸망하니까, 그건 알아 두고."
블라디미르가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판에서 떨어지기 무섭게.
스윽-
모든 이레귤러의 시선이 나를 비롯하여.
가장 등수가 낮은 다른 두 이레귤러에게로 쏠린다.
시선들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도 명확했다.
'뭐, 가장 약할 것 같은 놈부터 노리는 게 당연한 거지.'
그러나 탑의 등수가 그 탑의 절대적인 강함을 대변하는 건 아니다.
변수는 언제 어디서든 생기기 마련.
난 흘끔 다른 이레귤러들을 살폈다.
"규칙 따위는 상관없다. 압도적인 힘으로 파괴하고 부수면 그만."
"3개가 아니라 전부 몰살하면 되는 것 아닌가?"
심드렁하게 전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는 놈들이 몇.
"이봐,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않겠어? 멸망해야 할 탑이 3개뿐이라면, 굳이 엇비슷한 우리끼리 싸워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어?"
"네놈과 손이라도 잡으라는 건가?"
"한시적인 동맹을 맺자는 거지.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빠르게 동맹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는 놈들이 또 몇.
그 외에도 별생각이 없어 보이거나.
침묵에 잠겨 있는 놈들도 많았다.
'흠, 어쩔까.'
솔직히 모두가 나를 먹잇감으로 보는 상황이니 동맹 제의는 어려울 테고....
난 고민하다가 다시금 판을 내려다봤다.
'일단 다행인 건 탑들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다는 건가.'
메마른 사막 같은 땅 위로.
탑들이 일정 간격을 두고 제각기 서 있다.
'지리적으로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종말의 탑은 네모난 판에서도 가장자리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적어도 수십 곳에서 한 번에 공격받을 일은 없겠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지만.
[258 - 이치의 탑]
[312 - 배도의 탑]
바로 양옆에 붙어 있는 이웃사촌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문제다.
'뭐, 당연히 공격을 해 올 거라고 상정해야겠지. 그건 그렇고... 저게 꽤 신경 쓰이네.'
탑 주변의 땅들.
특히 개중에서도 '뒤틀린 숭배자들의 신전'이라든가 '오염된 대지' 등등.
지명이 붙어 있는 땅들이 존재했는데.
오염된 대지
설명: 타락한 신념과 이념이 모이고 고여 오염되어 버린 땅이다. 자칫 잘못 들어갔다간 정신이 오염될 수도 있다.
내용: 해당 지역을 점령할 시, 3시간마다 100포인트를 획득할 수 있다.
뒤틀린 숭배자들의 신전
설명: 타락한 신을 숭배하는 뒤틀린 자들이 모여 있는 신전이다.
내용: 해당 신전을 점령할 시, 해당 탑에 소속된 모든 인원의 이동속도가 소폭 상승한다.
'내용란'에 붙어 있는 포인트나 버프는 그냥 넘어갈 만한 것들이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치고받고 싸우는 전쟁터인 줄 알았더니.'
버프야 즉시 전력감이고.
당연히 포인트도 그 쓰임새가 있을 터.
'그렇다면....'
내가 턱을 쓸어내리며 고민을 거듭하던 그때.
"이봐. 어이, 어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놈은 또 뭐야?'
온몸이 다이아 같은 광물로 덮인 작은 다이아 골렘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근데 참 뭔가 무식하게도 생겼네.
"뭐지?"
나의 짤막한 물음에 놈이 답한다.
"다른 놈들은 죄다 협력자를 구하고 있는데, 우리끼리라도 협력해야하지 않겠나?"
"협력?"
난 놈의 머리 위를 살폈다.
[고행의 탑의 단드단]
'가만있자, 고행의 탑이라면 순위가....'
난 판을 내려다봤다.
[445 - 고행의 탑]
탑 주변에는 놈과 흡사하게 생긴 다이아 골렘들이 한가득하다.
다 떼어다가 팔면 돈이 좀 되겠는걸?
그건 그렇고... 종말의 탑 다음으로 가장 순위가 낮은 탑이었네.
뭐, 그러니까 나한테 말을 걸어온 거겠지만.
"그렇다! 우리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건 너도 느꼈을 거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럴 때일수록 비슷한 입장에 놓인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거다!"
협력이라.
협력하면 좋긴 하지.
근데....
"바보랑 손잡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뭣?!"
"네 탑이랑 내 탑의 위치는 보고 제안한 거지?"
고행의 탑은, 판에서도 남서쪽 부근에 자리 잡은 반면.
종말의 탑은 북동쪽의 끝단에 위치해 있다.
"위치? 그게 뭐가 중요하지?"
"...."
이놈은 글러 먹었다.
아니, 애당초 저런 머리로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지?
모자란 머리를 뒷받침할 정도로 사기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건가?
"동맹은 생각을 좀 해 보자고, 일단 이 대전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부터 알아야 되니까."
"크루루룸! 좋다!"
그러던 그때.
띠링-
[뒤틀린 황천이 시작되기까지, 30초 남았습니다.]
탑들의 운명과 미래를 건.
안내 메시지가 모두의 앞에 떠오른다.
[뒤틀린 황천이 시작되기까지, 10초 남았습니다.]
.
.
.
[...1초 남았습니다.]
[뒤틀린 황천이 개방됩니다.]
그 순간.
[우리의 왕께서 명령하셨다! 저기 보이는 탑을 멸망시킨다!]
[우오오오오!]
배도의 탑에 자리 잡고 있던 엄청난 숫자의 기사단이 종말의 탑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위대하신 분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보이는 건 모두 죽이고 죽여라.]
[크흐흐흐....]
이치의 탑에서도 엄청난 숫자의 요정들이 하늘을 날아올라.
종말의 탑으로 쇄도한다.
"호오...."
시작부터 협공인 건가.
난 고개를 돌려 두 탑의 이레귤러들을 응시했다.
"3개만 멸망시키면 된다고 했지?"
"그래. 오, 늘꺾이는마음? 얼굴도 특이하지만 이름도 특이하군."
"너희 탑의 마지막이니 잘 지켜보고 있으라고! 푸하하하핳!"
비웃음을 던지는 두 이레귤러를 보며.
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멍청한 놈들."
"...뭣?"
"작전은 무난했는데, 다른 놈들을 너무 믿는 것 아냐? 이건 전쟁이라고."
그래, 이건 전쟁이다.
조금이라도 약점을 보이면 곧바로 그 약점을 물어뜯을 놈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그리고 그 말인즉슨.
"오? 탑 주변이 텅텅 비었네?"
"이러면 또 들어가 줘야지!"
곧바로 다른 탑들의 공략자들이 배도의 탑과 이치의 탑으로 공격을 들어간다.
"어엇?"
"이, 이런...."
206화 뒤틀린 황천 (2)
몰려오는 적들 때문일까.
"크으읏...."
결국 군세를 물리는 이레귤러들.
난 그런 그들을 보며 픽 웃었다.
"적이 한둘도 아닌데, 신중하게 움직여야지. 뭐, 알아서 멸망해 주면 더 좋고."
"으음...."
다른 놈들이 바보라 가만히 있는 줄 아나.
지금 이 상황은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이나 마찬가지다.
누구 하나가 툭 건들기만 해도 균형이 끊어지는 고무줄 말이다.
'확실히 이번 대전은 쉽지가 않네.... 아군이 하나라도 있으면 좋긴 하겠는데.'
나 같아도 우리 탑과 동맹을 맺을 것 같진 않단 말이지.
'그렇다면....'
나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일단 이 팽팽한 균형을 조금이나마 무너뜨려 볼까.'
몇시간 뒤.
금방이고 전란의 불씨가 퍼져 나갈 것 같았던 상황은 금세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어어? 비워? 비운다고? 내가 옆에 있는데 이걸?"
"크읏...."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는 즉시 서로의 목덜미를 뜯으려고 안달인지라.
아무리 등수가 높은 탑이라고 해도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으흐흐, 그렇다면 난 이 틈에 오염된 대지를 점령해 볼까. 이 인원만 움직이는 정도론 다른 이레귤러들도 굳이 견제하려고 하진 않겠지.'
난 힐끔 판을 바라봤다.
종말의 탑, 바로 앞에 위치하고 있는 오염의 대지.
그 위로.
반짝, 반짝-
내가 꽂아 놓은 노란색 깃발이 반짝거리고 있다.
* * *
몇십 분 전.
이지수가 슬며시 주변을 살핀다.
"일단 이 근방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니까?!"
"뒤지긴 뭘 뒤져! 네 눈깔은 장식이야? 저것들이 안 보여? 딱 봐도 탑들이잖아! 그리고 아까 미니 맵에 탐지된 그 엄청난 숫자의 적들 못 봤어?!"
"다들 조용! 일단 그룹을 나눈다! 싸울 놈, 안 싸울 놈 그리고 못 싸우는 놈! 알아서 나눠 봐! 엉?! 지금 어느 클랜 소속인지가 뭐가 중요해!"
엄청난 숫자의 공략자들.
그러나 대부분은 이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며 말다툼을 벌이는 모습이다.
'당장 서로 협력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이네.'
당연한 거다.
손발 한 번 맞춰 본 적 없는 타인과 어떻게 하루아침에 협력을 논할까.
이지수가 고민에 잠겨 있던 그때.
"대장!"
탑에 대한 조사를 나갔던 알터가 돌아왔다.
"어때? 뭔가 얻은 정보가 있어?"
"어, 음... 진짜 생긴 게 영락없는 탑이라 들어가 보려 했거든? 근데 안 들어가지더라."
"그것 말고 특이한 점은 없었고?"
알터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것 말고는 딱히? 아, 종말의 탑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정도?"
"음...."
고민을 거듭하는 이지수.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이벤트의 핵심은 우리의 탑을 지켜 내야 하는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주변에 적들이 너무도 많다는 거다.
이지수는 골드-패를 꺼내어 매핑 서비스를 작동했다.
그러자.
스윽-
패 위로 홀로그램이 떠오른다.
'적이 몇인지 가늠조차 되질 않아....'
종말의 탑 외 일정 거리마다 자리하고 있는 탑 지형 주변으로.
무수히 많은 붉은 원들이 자리하고 있다.
"음, 저게 다 적들인 거지?"
옆에서 홀로그램을 보던 알터가 침을 삼키며 묻자.
이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고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지만."
"그래도 저게 다 몇이야?!"
호들갑을 떠는 알터에게 이지수가 나지막이 말한다.
"아무래도 이번 이벤트는... 다른 탑들의 공략자들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 같아."
"저, 전쟁?"
"그래, 전쟁."
상점주가 슬쩍 언급해 줬던 키워드, 전쟁.
그게 어떠한 의미였던 건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하지만 저 많은 숫자를 상대로 승리할 수 있을까?'
저들 또한 공략자들.
필시 어떠한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난 어떻게 해야 되지?'
탑 하나하나가 작은 왕국이라고 봐야 할 터.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적을 베고 불태워야 하는 걸까?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으니 뭘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저들과 협상이라도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이렇게 탑을 지키고만 있으면 되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러던 그때.
파칭-
갑자기 전방의 허공에 커다랗고 노란 깃발이 떠오른다.
'저건....'
어째서일까.
분명 처음 보는 깃발이건만.
깃발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 것만 같았다.
[선구자들만 출전하여 오염된 땅을 점령할 것.]
분명 깃발에 내포된 뜻은 그러했다.
'하지만 누가 저런 걸... 아, 그런 건가.'
그녀는 전에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실비아, 알터, 클랜원들한테 전해, 이동할 준비 하라고."
"...홍염, 진짜 가려고? 함정일지도 모르는데?"
실비아의 우려와 달리.
이지수는 싱긋 미소를 짓는다.
"기억 안 나? 영원의 전장이나 아득한 밤에서 어땠는지?"
"그게 뭔... 아."
실비아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선구자들을 향해 소리친다.
"알았어. 야, 이 새끼들아! 출전 준비다!"
* * *
몇 시간 뒤.
"흠...."
이레귤러들이 모여 있는 회장을 쓱 살피는 블라디미르.
"이 새끼가, 동맹을 맺기로 해 놓고 뒤통수를 쳐?!"
"푸흐흐, 재밌는 농담이다. 그걸 믿다니. 너, 멍청하다. 빨리 죽어라. 멍청한 놈은 빨리 죽는다."
"이, 이 새끼가!"
'관리 감독은 귀찮지만 얼간이들을 지켜보는 맛은 있네.'
뒤틀어진 동맹 관계에 포효하는 이레귤러를 보는 재미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가장 재밌는 것이라면 역시....
"음...."
"흐으음...."
판을 두고 고뇌하는 이레귤러들을 지켜보는 것이리라.
'생각과 판단이 눈으로 보인다는 게 또 재밌긴 하네.'
아직도 이번 대전의 진행 방식을 눈치채지 못하고 고뇌하는 이레귤러들이 있는가 하면.
[고난의 탑이 무너진 전사의 사당을 점령하였습니다. 3시간 뒤 점령이 완료됩니다.]
[종언의 탑이 이름 없는 무덤을 점령하였습니다. 3시간 뒤 점령이 완료됩니다.]
.
.
.
대전의 의도를 이해하고 곧장 행동에 옮긴 이레귤러들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종말의 탑이 뒤틀린 숭배자들의 신전을 점령하였습니다.]
[종말의 탑이 오염된 대지를 점령하였습니다.]
[종말의 탑이 오염된 대지를 추가로 점령하였습니다.]
종말의 탑이 그러했다.
'저 영악한 놈.... 벌써 중립지대를 3개나 점령한 건가.'
포인트와 버프를 주는 중립지대.
본래 저 중립지대는 하나의 탑이 저리 쉽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점령까지 일정 시간이 필요하여.
바로 양옆에 위치한 탑들이 점령을 견제하는 것이 정배이건만.
'쯧쯧, 다른 탑들의 눈치를 저렇게 보고 있으니 견제가 될 리가 없지. 그래서 저놈이 더 대단한 거겠다만....'
블라디미르는 의자에 앉아 있는 조커 카드를 바라봤다.
"...."
가면을 쓴 채 유심히 판을 보고 있는 조커 카드.
놈의 입가에 걸린 미소를 보자.
블라디미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저 악랄한 것.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오.'
쿠구구구구궁-
종말의 탑 옆으로 자그마한 나무 두 개가 들어선다.
'수호의 탑을 짓지 않고 배급의 나무를 건설한 건가. 포인트가 부족했나?'
수호의 탑을 설치하는 데 드는 포인트는 600포인트.
배급의 나무의 설치 비용은 300포인트다.
'하지만 두 그루면 비용은 똑같았을 텐데. 흠, 설마 장기전을 바라보겠다는 건가.'
이번 대전에는 탑에 소속된 공략자들이 모두 참전한다.
그 말인즉슨.
하루에 소모되는 식량이 엄청나게 많다는 거다.
'하지만 배급의 나무가 있으면 식량의 소모도 어느 정도 해결이 되지.'
역시 조커 카드 저놈은 성격이 더럽다.
'다른 탑들이 알아서 자멸하는 걸 기다리겠다는 거군.'
제아무리 공략자라고 한들 갖고 있는 식량은 언제고 소진되기 마련.
그렇다면 당연히 다른 이가 갖고 있는 식량에 눈독을 들일 것이고.
그것은 곧 내전이 발발할 수밖에 없단 걸 의미했다.
'하지만 과연 다른 이레귤러들이 가만히 있을까?'
중립지대의 중요성을 깨달은 이레귤러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면.
조커 카드가 지금 점령한 중립지대를 계속 지키는 건 어려울 것이다.
"이대로 놔둘 수만은 없지. 멸망하는 건 네놈이다!"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판 위, 정확히는 이치의 탑과 종말의 탑 사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꼭 공략자들을 상대해야 할 필요는 없지! 멀리서 포격을 가하면 그만!"
[마르카고스, 아르라카나....]
엄청난 숫자의 요정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자.
거대한 원형의 진이 종말의 탑이 위치한 방향으로 그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원형진이 사라질 무렵.
쩌적, 쩌저저저적-
종말의 탑 주변으로 엄청난 눈보라가 불어닥치기 시작한다.
"푸헤헤헤, 이런 공격을 사용할 줄은 몰랐겠지? 요술은 우리 루나 페어리 종족 고유의 요술이라고!"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가 조커 카드를 비웃는다.
"그러게 적당히 해 먹어야지. 누구를 바보, 등신으로 알고 있어! 탑과 함께 얼어 죽으라고!"
삽시간에 종말의 탑 주변으로 쌓여 가는 눈이 어느덧 공략자들의 키를 넘어.
모든 것을 뒤덮어 버린다.
그러한 눈보라 때문일까.
틱-
[종말의 탑 HP: ?/?]
감춰져 있었던 굵다란 HP 바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오... 저게 다 닳으면 끝인 거구나."
"응, 이미 끝났어. 한번 얼어 버린 건 절대로 해동되지 않거든. 푸헤헤헤, 넌 가만히 앉은 채로 네 탑이 무너지는 꼴이나 지켜보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조커 카드의 주변을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가 포르르 날아다니며 티배깅을 한다.
"...."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는 조커 카드.
블라디미르는 그런 그와 종말의 탑을 보며 생각했다.
'요술 하나하나의 위력은 그리 강하지 않을지 몰라도, 종족 단위로 시전하니 느낌이 다르긴 하군.'
확실히 저건 조금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조기에 대응을 했다면 모를까, 이미 요술이 상당히 진행됐어. 종말의 탑도, 바깥 세계도... 끝이군.'
탑의 HP가 깎이는 정도에 따라.
각 탑의 바깥 세계에도 영향이 생긴다.
즉, 탑의 멸망은 곧 바깥 세계의 멸망과 마찬가지인 셈!
'딱히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다. 다만 공략자들 간의 격차가 발목을 잡았을 뿐이지.'
조금은 조커 카드를 동정한다.
놈의 악랄한 계획을 공략자들이 따라 주지 못한 셈이었으니까.
'그래도 네 녀석의 최후 정도는 내가 지켜봐 주... 음?'
블라디미르가 두 눈을 부릅떴다.
'저 녀석... 왜 웃고 있는 거지?'
조커 카드의 입가에 걸린 그것.
그것은 명백한 미소, 그것도 조롱에 가까운 미소였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조커 카드가 웃으며 말한다.
"더 강한 걸 가져와야 할 거야."
"뭐, 뭣? 아아! 드디어 머리가 완전히 돌아 버린 모양이구나?"
"우리 손님들은 골드가 많거든. 부가 서비스 정도는 쉽게 이용할 정도로 말이야."
'골드가 많다고?'
도대체 저게 무슨 헛소리인 걸까.
정말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의 말대로 막바지에 몰려 머리가 돌아 버리기라도 한 걸까?
그러던 그때.
퐁-
종말의 탑 주변으로 자그마한 우산이 펼쳐지더니.
퐁, 포로로로롱-
곧 수십, 수백 개가 족히 넘는 우산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저, 저건!'
블라디미르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분명 그는 저것을 수정구의 영상에서 본 기억이 있었다.
'저 악랄한 놈이 사용하던 파라솔이잖아?! 근데 어떻게 저걸 공략자들이...? 아니, 그보다 몇 개야?!'
207화 뒤틀린 황천 (3)
관리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파라솔 하나하나의 크기가 크다고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퐁, 퐁-
계속 펼쳐지고 또 겹쳐진 파라솔이 곧 일대를 뒤덮는 거대한 우산처럼 변하자.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쩌적, 쩌저저저적-
눈발의 영향이 미치는 모든 공간이 삽시간에 얼어붙는 가운데.
[이렇게 겨울을 맞이하니 나름 또 운치가 있는데?]
[이 환상의 쉼터라는 거, 끝내주는데? 빙결도 그렇고, 어지간한 상태 이상은 전부 면역이 되잖아?! 이런 서비스가 겨우 100골드라니.]
[이봐! 누가 차 좀 가져와!]
파라솔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잠시간의 여유를 만끽하는 종말의 탑의 공략자들.
마치 겨울의 휴양지에 온 것처럼.
여유롭고 또 편안한 모습이다.
"이, 이이익! 저건 뭐야!"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가 그 작은 몸을 부르르 떨더니.
홱 몸을 돌려 블라디미르에게 소리친다.
"이봐, 관리자 형씨! 저건 이레귤러의 능력이지?! 저게 평범한 공략자의 능력일 리 없잖아? 그렇지?!"
"그래, 분명 저건 종말의 탑 소속 이레귤러의 능력이 맞다."
관리자의 사실 증명까지 더해지자.
요정의 입가에 승리를 확신하는 미소가 그려진다.
"그럼 저건 반칙인 것 아냐?! 이번 대전에서 우리의 능력은 제한된다고 했었잖아!"
"그랬지."
"그럼 이건 룰을 어긴 거잖아! 맞지? 맞지?! 그럼 실격패 처리 해야 되는 것 아냐?"
확신에 찬 루나 페어리에게.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저어 보인다.
"아무 문제 없다."
"그렇지! 그렇게 말할... 엥?"
루나 페어리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아무 문제가 없다니! 저건 이레귤러의 능력이잖아! 능력을 사용했잖아!"
"그 말은 내 판단에 불만이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는 건가?"
블라디미르의 눈이 붉게 물들자.
루나 페어리가 몸을 움찔거린다.
"아니, 항의는 아닌데... 아이씨...."
그녀가 애써 짜증과 분노를 삭이던 중.
검은 로브를 두른 이레귤러의 입에서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클클클, 멍청하긴."
"...뭐?"
"능력은 다양하다. 아마도 저건 사전에 공략자들에게 나눠 준 설치물 같은 거겠지."
나름 일리 있는 추측에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실제로 조각상, 그림 등.
각종 물체를 설치하여 탑 공략을 진행하는 이레귤러도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쩌라고? 누가 네 조언을 구했어?!"
"클클클, 끝까지 멍청하군. 차라리 자비를 구걸했다면 조금은 동정했을 것을."
"이 자식이 뭐라는...."
순간, 판을 내려다보던 루나 페어리가 눈을 부릅뜬다.
몇 개의 탑에서 공략자들이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분의... 지엄한 명령이 떨어졌다.... 전진....]
[돌격! 앞으로!]
[취르르르륵!]
그들이 돌격하는 방향은 다름 아닌 이치의 탑이 위치한 곳이었다.
"자, 잠깐! 지금 너희 뭐 하는 거야?!"
"클클, 뭘 하냐니? 분명 관리자는 3개의 탑만 멸망시키면 된다고 했다. 설마 그것마저 까먹은 건가?"
"아니, 근데 왜 우리 탑 쪽으로 오냐고! 분명 서로 공격 안 하기로 했잖아!"
루나 페어리의 고함에 이레귤러들이 픽 웃는다.
"그랬지. 하지만 방금의 공격으로 너희의 탑은 동맹을 맺을 가치가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거기다가 지금 너희 공략자들, 꽤나 힘이 빠졌잖아?"
확실히 광범위한 빙결 요술을 오래 지속한 탓인지.
이치의 탑의 공략자들은 꽤나 지친 모습이었다.
"클클, 동맹은 서로에게 원하는 게 있을 때 하는 거다. 하지만 이제는 네게 원하는 게 없지. 아, 하나가 있긴 하군. 부디 우리를 위해 멸망해 주지 않겠나?"
"이 개 같은 새끼들이...."
* * *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죽이고... 파괴해라.... 그분의 명령을... 준엄히 이행하라....]
[공격! 공격!]
나는 판을 내려다봤다.
'끝났네.'
전쟁은 불과 몇 시간 만에 속전속결로 끝이 났다.
여러 탑들의 합공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루나 페어리들.
그리고 요정들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탑은....
쾅, 콰아아앙-
다른 탑의 공략자들의 집중포화를 받는 중이었다.
온갖 마법과 공격 따위가 탑에 작렬할 때마다.
[이치의 탑 HP: 4,850/?]
[이치의 탑 HP: 3,250/?]
HP 바가 미친 듯한 속도로 줄어든다.
"...그만! 그만! 그만하라고!"
끝내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가 대전의 규칙을 어기려는 듯.
손에 쥔 영롱한 지팡이를 휘두르려고 한다.
그러나.
"적어도 한 탑의 조커 카드라면 그 최후를 끝까지 지켜보고 함께해라."
"닥쳐! 닥쳐! 닥쳐! 누가 그딴 규칙에 동의하기라도 했... 읍읍!"
그마저도 관리자의 무형의 힘에 제지를 당한 건지.
자리에서 꼼짝을 못 하는 루나 페어리.
관리자가 그런 놈을 보며 피식 웃는다.
"꼴사납군. 그건 그것대로 재미있지만. 오, 이제 첫 탈락자가 나왔군."
과연 관리자의 말대로다.
[이치의 탑 HP: 0/?]
어느새 이치의 탑의 HP는 0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콰직, 콰자자작, 우르르르릉-
이치의 탑 곳곳에 금이 감과 더불어.
탑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이 빌어먹을 새끼들! 너희라고 무사할 것 같아?!"
탑이 무너진 영향 때문일까.
괴성을 지르는 루나 페어리의 몸 또한 서서히 먼지로 변해 간다.
"결국 순서만 다를 뿐이지, 너희도 다 이렇게 될 거다! 전부 죽어! 죽어! 죽...."
악에 찬 외마디 저주를 끝으로, 먼지가 허공을 흩날리자.
"클클클...."
"...."
나를 비롯한 모든 이레귤러들이 서로를 바라본다.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누가 다음 먹잇감으로 적합한지 간을 보고 있는 건가.'
앞으로 멸망해야 할 탑은 총 2개.
그러나 자칫 잘못 움직였다간 이치의 탑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사실상, 이 대전에서 동맹은 의미가 없어.'
서로가 서로의 멸망을 바라고 있는데 어떻게 동맹이 성립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다른 놈들이 알아서 자멸해 줄 것 같진 않고. 처음 세운 계획대로 밀고 나가는 게 좋겠어.'
판에 존재하는 중립지대를 계속 점령하고.
그것으로 포인트와 버프를 모은다.
그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었다.
'소강상태에선 그게 최선이지. 흠, 근데 그건 그렇고....'
난 다시금 판을 쓱 훑었다.
'왜 가운데에 있는 중립지대만 능력이 감춰져 있는 걸까.'
모든 중립지대들에 그 지역명과 내용이 적혀 있는 반면.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
설명: 이름을 잃은 이들이 묻힌 무덤이다.
내용: ?
판의 정중앙에 위치한 중립지대에는 이렇다 할 내용이 없었다.
'저런 걸 그냥 뒀을 리는 없을 테고.... 알려 줄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물어나 볼까.'
내가 슬쩍 관리자에게 다가가려던 바로 그때.
띠링-
[이치의 탑이 영원한 안식에 접어들었습니다.]
[대전 종료까지 남은 탑의 개수: 2개]
내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오, 그래도 이번 대전은 꽤 친절하네. 이런 것도 알려....'
그러나 추가로 떠오른 메시지에 난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이치의 탑의 잔재가 현현할 탑을 선정 중입니다.]
'탑의 잔재가 현현할 탑을 선정 중이라고...? 이게 무슨 소리야?'
비단 의아함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는지.
모든 이레귤러가 설명을 요구하듯 관리자를 바라본다.
"시작됐나."
관리자, 블라디미르가 창백한 미소를 흘리며 계속 말한다.
"탑이 멸망하거든 해당 탑의 잔재가 자신들을 멸망시킨 탑, 아니 정확히는 해당 세계에 현현하게 된다."
"...."
"다들 이해하지 못했나. 친절하게 말해 주자면, 너희의 고향에 이변이 발생한다는 거다."
'우리의 고향이라면 바깥 세계를 말하는 것 같은데. 현실에 생긴 균열이랑 연관이 있는 건가?'
내가 생각을 이어 가던 중.
블라디미르가 이치의 탑을 멸망시켰던 이레귤러들을 보며 씨익 웃어 보인다.
"그리고 그 이변은, 탑이 멸망하는 데 있어 가장 크게 원한을 산 이레귤러의 고향에 현현하지."
"클클클, 죽은 놈이 최후까지 발악한다는 건가. 하지만 고향 따윈 탑에 들어온 순간부터 버린 지 오래다."
"바깥 따위 알 게 뭐야? 탑에 이변이 생기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어."
대부분의 이레귤러들이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난 속으로 혀를 찼다.
'멍청한 소리들 하네.'
일단 바깥에 문제가 생기거든 탑에 들어오는 공략자들이 없어지게 될 터.
그래, 그거야 최상위 공략자들로 어떻게 틀어막는다고 쳐.
'평생 탑에서 살 것도 아니고, 당연히 바깥도 중요... 아, 쟤네는 애초에 바깥을 버리고 들어와서 상관없나.'
"너희의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원혼의 의견이지."
블라디미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퐁-
유령 같은 형태의 무언가가 허공에 떠오른다.
'저건....'
[뭐, 뭐야, 이건...? 나 죽은 게 아니었어?]
분명 먼지가 된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였다.
그런 놈을 보며 블라디미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넌 죽었다. 그러니 패배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마지막 권리를 사용해라."
[패배자만이 사용할 수 있는 권리? 그게 뭔데?]
"네가 선택한 탑에 재앙을 내릴 수 있다."
저건 또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멸망한 탑에게 물귀신처럼 끌고 갈 탑을 고를 기회를 주겠다는 건가?
'뭐, 조금 희한한 시스템이긴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이야기네.'
솔직히 난 공격을 받은 피해자였고.
이치의 탑을 직접 멸망시키진 않았으니까.
[푸헤헤헤헤, 그래? 그럼 누굴 골라 볼까. 응?! 누가 좋을까! 그래, 네놈이 좋겠어!]
날카로운 눈으로 이레귤러들을 훑어보는 루나 페어리.
이윽고 놈의 고사리 같은 손이 이레귤러 하나를 정확히 지목한다.
'뭐야. 나잖아?'
[가장 약한 탑이면 약한 탑답게 나한테 멸망했어야지. 내 계획을 망가뜨려?!]
"...."
[어차피 너도 조만간 끝일 것 같은데, 같이 불행해지자고? 푸헤헤헤!]
기괴한 웃음소리를 끝으로.
이치의 탑의 이레귤러의 원혼이 사라졌다.
[이치의 탑이 대전자 선택을 완료하였습니다.]
[해당 대전자의 세계에 이변이 출현합니다.]
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곤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엮이는 요정들마다 다 이러는 건지.... 이러다 요정 혐오에 걸리겠네.'
앞으로 요정들은 상종도 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크게 걱정되지는 않네.
'발리나도 있고, 백구, 분신도 있으니 알아서들 잘 대처해 주겠지.'
* * *
같은 시각.
탑 관리국, 회의실.
"...이미 각 기관의 여러 전문가들을 초빙하여 실험을 진행 중에 있습니다."
관리국장, 김중후가 한쪽에 달린 수많은 화면을 보며 말하자.
화면 안의 한 여인이 묻는다.
[아직 균열의 활동이라든가, 전조 증상은 없나요?]
"네, 아직 이렇다 할 변화는 발견하지 못한 상황입니다."
김중후가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한다.
'그래도 오늘 회의는 비교적 원활하군.'
평소 툭하면 이견을 제의한답시고 귀찮게만 굴던 이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무튼 이상 없다는 거죠?]
그러나 한쪽 화면에서 다소 경박한 음성이 흘러나오자.
김중후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사무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습니다, 장 쓰쉔 관리장님."
[뭐, 이상이 생겨도 어쩌겠어요? 김중후 관리장을 필두로 한국에서 알아서 잘 대응해 주겠죠.]
머리에 참깨 같은 반점 여러 개를 붙인 채.
비열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 쓰쉔 관리장.
[참 이럴 때마다 드는 생각인데, 탑이 한국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예? 그게 무슨...."
[하하하, 농담입니다. 지리적으로 돕기 참 좋다는 거죠.]
"...."
그의 농담 같지도 않은 발언에 김중후의 얼굴이 굳었지만.
중국은 중국. 다른 관리장들은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다.
그러던 그때.
삐- 삐-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뭐죠?!]
[균열이 활동하려는 것 같습니다.]
순식간에 스크린의 화면들이 바뀌었다.
[전원 위치로!]
[위치로!]
군인들이 다급히 움직이는 것이 보인다.
'흥....'
장 쓰쉔은 스크린을 보면서 용정차를 한 모금 마셨다.
탑이 한국에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생략했던 뒷말은.
'유사시에는 핵 하나로 세계의 안위를 지킬 수 있으니 말이지.'
개방된 균열에서는 어떤 재앙이 나올까?
한국을 모르모트 삼아 중국은 재앙을 극복하고, 더욱 강해지고, 세계를 손에 넣을 것이다.
자, 어떤 놈인지 정체를 보여 다오!
스크린을 뚫어져라 주시하는 중.
갑자기 휴대폰이 울린다.
"무슨 일인가?"
[쓰쉔 님! 베이징이...! 베이징이...!]
화들짝 놀라 스크린을 다시 들여다보는데.
둥-
스크린이 하나씩 베이징의 화면으로 바뀌어 간다.
스크린은 엄청난 눈발이 쏟아지고 있는 도시와.
반팔과 반바지를 입은 사람들이 황급히 대피를 하고 있는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오, 세상에....]
[저건....]
각국의 관리장들이 놀라는 가운데.
스크린 속에서 기자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속보입니다. 여긴 지금 베이징 상공입니다. 막바지 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려야 할 이곳에는 지금, 엄청난 한파와 폭설이 불어닥치고 있습니다!]
208화 뒤틀린 황천 (4)
[김 기자, 현장의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불과 몇십 분 전까지만 하더라도 햇빛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찾던 이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엄청난 눈보라로 인해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무엇보다 갑작스럽게 떨어진 기온으로 인해....]
치이이익-
[김 기자. 김 기자? 현장과의 통신 상황이 원활하지 않은 점, 시청자분들의 양해를 구하겠습니다. 현장과의 연결이 재개되는 대로 속보를 이어서 보도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뉴스....]
뉴스에 나온 영상의 방영 시간은 고작 30초 남짓이었건만.
회의실 안에는 묘한 침묵만이 맴돈다.
그러던 중, 몇몇 국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야말로... 역대급 기상이변이군.]
[그러게 말이네.... 나도 저런 건 처음 봤어.]
물론 전에도 기상이변이 벌어진 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물이 귀한 지역에 홍수가 발생할 정도로 엄청난 폭우가 쏟아진다거나.
눈이 내리지 않는 지역에 느닷없이 폭설이 내린 경우도 있었으니까.
[아니, 애당초 저게 정말 기상이변이 맞긴 한 건가?]
[....]
Adam 국장의 물음에 누구 하나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다.
꽝꽝 얼어붙은 건물들, 불과 몇십 분도 안 되어 1층 높이가 넘게 쌓인 눈.
영화에서나 보던 빙하기가 찾아온 것 같은 현장의 모습.
그 모든 상황들이 지금껏 그들이 접했던 그 어떤 '기상이변'보다 최악이었으니 말이다.
[Adam, 균열의 활동과 연관이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단순한 기상이변일지도 모르지.]
[뭐?! 저게 단순한 기상이변이라고?!]
쓰쉔 국장의 고함이 회의실을 울린다.
[저게 어딜 봐서 기상이변이라는 건데! 저건 균열의 활동으로 생긴 영향이라고! 당장 한국에 핵을 쏴야 돼! 핵을 쏴야 된다고!]
[이보게, 쓰쉔 국장. 일단 진정하고....]
[진정?! 지금 내가 진정을 하게 생겼어?!]
그러던 그때.
쓰쉔의 화면에서 다른 이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국장님! 지금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이런 빌어먹을!]
이내 쓰쉔을 비추던 화면이 어두워지자.
"...."
잠시간 회의실은 침묵에 잠긴다.
[흠흠, 이건 정말... 상정 외의 상황이군.]
[그러게 말이야. 난 탑에서 서식하는 몬스터 같은 게 나올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만약 균열에서 나오는 게 생명체가 아니라 저런 재앙이라면... 우리가 대처할 방법이 있는 건가?]
모두가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하는 중.
김중후 국장이 입을 뗀다.
"여러분이 어떤 걸 걱정하시는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균열과 저 기상이변이 연관성이 있는지, 균열에서 무엇이 나오는지, 저희는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하게 아는 게 없습니다. 그저 단순한 기상이변일 수도 있는 거고요."
[하긴... 저것보다 규모가 작긴 해도 중국의 기상이변 발생은 꽤 흔한 일이었지.]
김중후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중국의 상황은 안타깝지만, 일단 균열의 상태를 살피는 게 우선일 듯합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회의실을 뜬 김중후는 곧바로 현장으로 이동한다.
빠르게 검문 절차를 밟고 검문소를 통과한 김중후.
그는 바로 현장의 총책임자를 만났다.
"오, 김 국장님, 오셨습니까."
검문소의 총책임자인 이 준장을 대면한 김중후가 곧바로 묻는다.
"균열이 활동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라...."
나이가 지긋한 준장이 쓴웃음을 짓는다.
"어떻고 자시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예?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준장.
"현장에 있던 병사의 증언에 의하면, 한 균열에서 빛 같은 게 쏘아져 나와 순식간에 하늘로 사라졌답디다. 그게 전부입니다. 참 애달픈 일이지요. 그래도 이쪽은 나름대로 최선의 준비를 했는데, 환영식조차 하지 못했으니 말입니다."
"...균열에서 나올 '무엇'과의 전투를 고대하신 모양입니다."
"허허, 그럼요! 제가 언제 또 사람이 아닌 무엇과 싸워 보겠습니까?"
전투광인 준장을 보며 김중후는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게 전투가 좋으면 탑에 들어가면 될 것을. 아무튼... 이걸 다행이라 생각해야 할지, 불운이라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군.'
균열이 활동했음에도 이렇다 할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에 감사해야 할지.
아니면 균열이 활동했다는 것에 한탄해야 하는 건지.
"여기까지 오신 건, CCTV를 확인하기 위함이겠지요? 일단 영상에 잡힌 걸 같이 보시지요. 국장님이 원하시는 걸 얻을 수도 있을지 모르니 말입니다. 허허."
"...저도 그러길 기원하겠습니다."
김중후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소장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쇄애애애액-
공중을 비행하는 발리나.
그녀는 곧 번듯한 단독주택의 마당에 착지한다.
그리고 그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어떻게 됐어?"
분신이 다짜고짜 그녀에게 묻는다.
"음, 그야말로 예상 밖의 상황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
"그렇다."
발리나의 말은 이러했다.
그녀가 균열의 활동을 감지하고 곧바로 탑 부근으로 이동했지만.
이미 균열에서 나왔을 무언가가 중국의 상공으로 순간 이동을 했다고 한다.
"흠, 그래도 어떻게 잘 추적은 했나 보네?"
"막대한 기운을 추적하는 것 정돈 쉬운 일이다."
"그것의 정체는 봤어?"
발리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눈 모양의 결정체였다. 다만, 막대한 기운을 품은 일종의 기운... 아니, 원한 덩어리라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몬스터가 아니었구나. 하긴, 몬스터였다면 네가 진작 처리했겠지."
지금이야 주방의 천덕꾸러기라고 해도.
'태초의 혼돈'이라는 그녀의 이명이 어디로 가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보다 상황은 좀 어떤가?"
힐끔 TV 쪽을 응시하는 분신.
[현재 여기 상해에도 많은 폭설이 쏟아지고 있는....]
"뭐, 보다시피 저런 상황이지. 난리도 아니야."
"오."
심드렁하게 뉴스를 보는 발리나를 보며.
분신이 슬쩍 묻는다.
"별 감흥이 없나 보네."
"난 저것보다 수많은 죽음들을 봐 왔고, 또 죽음을 선사했다. 가끔 느끼는 거지만 인간들은 똑똑하나 너무 나약하다. 고작 환경이 저렇게 변했다고...."
"그래, 그래."
분신은 구시렁거리는 발리나를 놔두고.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보다 주인은 괜찮을지 모르겠네."
"...?"
발리나가 기가 차다는 듯 분신을 바라본다.
"지금 그 괴물을... 아니, 주인을 걱정하는 건가?"
"주인의 신변이 걱정이라기보단, 그냥 상황이 좀 걱정된다는 거지. 뭔가 주인이 뜻한 대로 일이 잘 안 풀려서 균열이 활동한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 봤거든. 물론 그냥 활동한 걸 수도 있겠지만."
잠시 손가락으로 미간을 톡톡 두드리는 분신.
그의 시선이 곧 발리나에게로 향한다.
"발리나."
"왜, 왜 그러지?"
무언가 불안감을 직감한 걸까.
발리나가 말을 더듬거린다.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비상대기 하자."
"...!"
발리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간다.
"자, 잠깐! 분명 할당된 음식을 다 만들고 나면 휴가를 준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긴 한데, 상황이 이런 상황이잖아?"
"그, 그럼 다른 선배들의 휴가도 압수를 해야 공평한 것 아닌가!"
발리나가 황급히 집 안을 살핀다.
그러나 다들 어디로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다들 어디로 간...."
"아."
멋쩍게 웃는 분신.
"뭐, 백구는 새로운 여자 친구 만들러 나갔고, 루나도 다른 빵집 구경한다고 나갔고, 깡통은... 저기 있네."
대형 참기름 통을 끌어안은 채.
참기름이 가득 담긴 대야에서 유유히 떠다니는 깡통.
<행복의 시작은 참기름이다. 그렇다면 참기름은 신인가?>
스스로 자문자답하며 주어진 휴가를 한껏 만끽 중인 모습이다.
"다들 쉬고 있는데 나만 추가 근무를 하라니...."
"긴급사태니까 이번만 고생 좀 하자고, 주인이 돌아오면 너만 따로 추가로 휴가를 달라고 내가 이야기를 할 테니까. 오케이?"
"크으읏... 알았다."
* * *
일주일 뒤.
"흠...."
블라디미르가 슬며시 대전장을 훑는다.
'고요하군.'
현재 대전장은 고착 상태에 빠져 있었다.
"동맹을 맺자고? 내가 너의 뭘 믿고?"
"동맹 좋지. 대신 이렇게 하자고. 우리 쪽 공략자들을 너희 탑 근처에 주둔하게끔 말이야."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니 동맹을 맺는 탑들도 없었으며.
그렇다고 선뜻 다른 탑을 치지도 못한다.
-내가 공략자들을 움직였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어쩌지?
-혹시나 내가 지목당하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아질 것 같은데....
모두가 조커 카드의 세상에 벌어진 이변을 수정구로 목도한 이후.
특히 더 조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긴, 당연한 거겠지.'
그러나 이 불안정한 평화는 찰나의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슬슬 갖고 있는 식량들이 바닥날 시점이군.'
이번 대전은 각 탑에 소속된 모든 공략자가 동원된 대전이다.
아무리 식량을 많이 갖고 있다고 한들.
식량의 소모 속도는 감당할 수 없고, 결국....
"흠흠...."
슬슬 눈치를 보며 중립지대로 공략자를 보내는 이레귤러들을 보며.
블라디미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으나 싫으나 중립지대를 점령할 수밖에 없지.'
선택하는 시기의 차이만이 있을 뿐.
이 대전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선 반드시 중립지대를 점령해야 한다.
그러나 중립지대의 숫자는 제한적이며, 그와 반대로 탑의 숫자는 상대적으로 많다.
"어이!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뭘 하긴? 빈 땅을 먹었을 뿐이다."
"거기 옆에 있는 우리 탑 안 보여? 거긴 내가 먹으려고 했다고!"
"먼저 차지한 쪽이 임자 아닌가?"
"뭐!"
'흠, 길어 봤자 3일 정도겠어.'
이미 중립지대를 두고 대치하는 탑들도 속속 나오는 상황이니.
불안정한 평화는 한순간에 무너지리라.
'그에 반해 저 영악한 놈은....'
힐끔 조커 카드의 영역을 살펴보는 블라디미르.
'이 상황에서 중립지대를 3개나 더 먹은 건가.'
주변의 이레귤러들이 어버버하는 사이.
주변의 중립지대를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다니.
'보통 저렇게 독점을 하면 공격을 들어갈 법도 하건만....'
이치의 탑이 어떤 방식으로 무너졌는지 다들 지켜본 탓일까.
선뜻 종말의 탑을 공격하고자 하는 이레귤러들이 없었다.
'이미 기세와 흐름을 타 버렸군.'
거기다가 조커 카드가 더욱 무서운 건....
"자자! 이게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잘나가는 샌드위치라는 건데, 한번 먹어 보든가!"
"샌드... 위치? 오오! 이, 이 맛은!"
"혹시 다른 건 또 없나?"
자신의 상품으로 주변 이레귤러들에게 호감작까지 하고 있다는 거다.
"저, 관리자님... 저래도 되는 겁니까?"
"...."
물론 일부 이레귤러들이 이의를 제기하긴 했지만....
"규정상... 문제는 없다."
다른 이레귤러들을 공격하는 게 아닌지라 규정에도 문제가 없었다.
'저 영악한 놈.... 빠르게 중립지대를 먹어 공략자들을 강화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이레귤러들까지 유혹하다니....'
아니, 애당초 적한테 호감작을 하다니.
제정신인가 싶긴 하지만, 그간 조커 카드가 보였던 행보는 미친놈의 그것과 다름이 없지 않았던가?
'하지만 의문이 들긴 하는군.'
과연 조커 카드의 호감작이 이 대전에 영향을 미칠까? 하는 궁금증이 든다.
"오, 이거 맛있군. 혹시 더 없나?!"
"더 있지. 근데 조건이 있어."
"조건이라고?"
"내가 점령한 중립지대는 건들지 않는 거야. 불가침조약을 맺자는 거지. 어차피 2개의 탑만 남았고, 너도 중립지대를 제법 먹었잖아? 나도 너희 중립지대를 건들지 않을 테니, 너도 내가 점령한 곳을 놔두는 거지."
"서로 공격을 하지 말자는 건가? 뭐, 그 정도야 별것 아닌 조건이군."
블라디미르는 이 광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악랄한 놈이다. 똑똑한 나 말고 다른 머저리들은 저놈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지만, 이 몸만은 알 수 있지.'
저놈은 지금 자신이 '음식' 관련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돌려 알린 거다.
조만간 보급 문제들이 생길 것인데.
음식 관련 능력을 가진 자신에게 까불면 답도 없다고 간접적으로 압박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놈... 이번만은 제 꾀에 넘어갔구나!'
보급에서 큰 우위를 갖고 있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하면 다른 탑들이 연합할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거다.
'적어도 몇 놈은 조커 카드의 의중을 간파했겠지. 옳거니!'
그의 생각이 적중했는지.
몇몇 이레귤러가 조커 카드의 앞으로 다가간다.
그리고.
"이것 말이야.... 제법 맛있던데... 더 없나?"
"...?"
209화 뒤틀린 황천 (5)
블라디미르는 조커 카드 앞에 선 이레귤러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더 없냐고?"
"취르르르. 그렇다. 지금껏 이렇게 혀를 자극하는 음식은 먹어 본 적이 없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한다. 보석, 각종 귀한 재화... 원하는 걸 말해 봐라."
앞다투어 재구매 의사를 내비치는 이레귤러들.
"이 갈치깡... 이 자그마한 막대기를 삼켰을 때, 난 고향의 환상을 봤다. 드넓은 사해... 가족들과 함께 누볐던 그때의 향기가 느껴지더군."
"이봐, 그... 아까 나한테 줬던 미끌미끌한 액체가 담긴 통의 이름이 뭐야?"
"아, 그거? 린스인데? 나중에 한번 써 보...."
"아주 맛있었다! 아주 내 취향이었어!"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블라디미르가 속으로 생각한다.
'저놈들... 단체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건가?'
탑의 운명, 세계의 미래.
나아가 수많은 목숨을 책임지고 대표하는 놈들이 그깟 음식과 물건에 눈이 돌아가다니!
"못 줄 것도 없지. 너도 나와 불가침조약을 맺는다면 말이야."
"취르르르... 너 말고도 공격할 놈들은 많다. 좋다."
"서로 침략하지 말자는 거지? 난 상관없긴 한데, 그걸로 괜찮겠어?"
결국 미끼에 걸려든 이레귤러들 대다수가 조커 카드와 불가침조약을 체결.
다들 품에 무언가를 안은 채 자리로 돌아간다.
그리고 들려오는 이레귤러들의 목소리.
-지금껏 탑을 오르면서 많은 음식들을 먹어 봤지만, 이런 건 또 처음이군.
-당분간 저놈은 살려 두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어. 죽이면 더 이상 이런 걸 못 먹는다는 거잖아?
-이 파운드케이크라는 것... 끝내주는군.
아, 이건 완전히 글러 먹었다.
이미 호의적인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상.
종말의 탑이 멸망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아졌다고 봐야 할 터.
'뭐... 상관없나.'
조커 카드의 행동이 다소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사실 그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어차피 이제 2개의 탑만 더 멸망하면 되는 상황이니까.
'저 악랄한 놈이 또 무슨 짓거리를 할지 궁금하기도 하....'
그러던 그때.
천천히 그의 앞으로 걸어오는 조커 카드.
가면 밑의 입가에는 그 특유의 미소가 걸려 있다.
"무슨 일이지?"
"아, 대전을 관리한다고 고생이 많으신 것 같아 자그마한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제법 두툼한 보따리를 내미는 조커 카드.
"...."
선물이라니! 선물이라니!
세상의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대전의 주관자에게 선물을 줄 생각을 할까.
'이 악랄한 놈... 이레귤러들에 이어 이제는 나까지 포섭하겠다는 거냐!'
그 수작이 너무도 눈에 보여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선물이라고?"
"아, 혹시 대전 규칙에 어긋난다면 도로 가져가겠습니다."
"...."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블라디미르는 엄청난 고뇌에 빠졌다.
'저걸 받아도 규칙상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 몸이! 명색이 관리자이자 대전의 주관자가! 이레귤러의 선물을 받아도 되는 건가?'
선물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게 딱히 잘못인가? 받는다고 한들 아무런 문제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궁금하다!'
'내가 저걸 들고 가면, 유그드라실의 맛대가리 없는 녹색 피자의 퀄리티를 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무엇보다 다른 놈들이 환장하는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받아도 상관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 갈등하며 고민을 반복한다.
그리고....
철커덕-
'탑 안에서 공략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건 어렵잖아. 하지만 여긴 대전 장소! 지금이 아니면 내가 언제 또 조커 카드의 음식을 맛보겠어?'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란 생각이 끝내.
생각의 추를 한쪽으로 기울게 만든다.
"흠흠, 준비한 걸 굳이 도로 가져갈 필요는 없고, 그... 구석에 놔둬라."
"예? 아아! 하하, 그럼 이건 저기 구석에 놔두겠습니다."
과연 눈치가 빠른 놈이라 그런지.
그가 원하는 부위를 정확히 긁어 준다.
이윽고 조커 카드가 보따리를 구석에 놓고 자리를 뜨자.
스윽-
슬며시 팔을 휘두르는 블라디미르.
그 순간, 보따리 밑에서 늑대의 형상을 한 그림자가.
쩌어억-
그 아가리를 벌려 삽시간에 보따리를 삼켜 버린다.
"크흐흐...."
블라디미르가 허공을 보며 흡족해하는 미소를 짓는다.
'악랄하긴 해도 예의를 아는 놈이군.'
물론 이 '선물'이 대전에 영향을 주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러나.
'좋다, 이걸로 T-9999 건은 봐주도록 하지.'
조커 카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조금은 온화해졌다.
* * *
'오.'
구석에 놔둔 선물 보따리가 삽시간에 사라지자.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걸 진짜로 받네.'
솔직히 안 받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게, 대전을 주관하는 관리자는 누구보다 중립을 지켜야 할 존재.
그런데 그런 관리자가 선물을 받다니.
'그냥 겸사겸사 던져 본 건데, 으흐흐....'
물론 선물로 인해.
갑자기 관리자가 종말의 탑을 편애한다든가 하는 상황은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선물을 받은 이상, 아주 조금은 이쪽을 신경 쓸 수밖에 없겠지.'
관리자의 조각 같은 관심.
그것은 행여나 있을 불합리한 상황이나 부조리한 일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상당수의 이레귤러들과 불가침조약을 맺었다곤 허나.
언제든 뒤통수를 맞을 수도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걸로도 충분해.'
다른 탑들의 견제나 연합 공격이 들어올 확률을 조금이나마 낮춘 것.
지금은 그것에 만족한다.
'이러면 저기까지 진출하는 데 큰 부담은 없을 테고....'
난 턱에 손을 괸 채, 판의 정중앙을 내려다봤다.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
설명: 이름을 잃은 이들이 묻힌 무덤이다.
내용: ?
'전쟁도 전쟁이지만, 저긴 꼭 점령하고 싶단 말이지.'
판 위에 존재하는 다양한 중립지대들.
그중 지명이나 명칭 그리고 그 내용마저 똑같은 중립지대들이 상당수였다.
그러나 저 '이름 없는 이들의 무덤'은 달랐다.
'저기만 지역이 하나밖에 없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야.'
그저 다른 탑들을 멸망시키면 종료되는 이 대전에서.
저런 지역이 존재하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터!
'뭔가 엄청난 혜택이 있다든가 히든 피스라든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뭔가가 있겠지. 좋아. 일단 공략자들을 계속 전진시켜 볼까.'
물론 막무가내로 전진시키는 건 아니다.
이 대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탑.
탑 주변에 전력의 대부분을 배치하는 건 기본이다.
'그래서 중립지대를 많이 먹는 게 쉽진 않지만....'
난 자그마한 선구자들을 보며 씨익 웃었다.
'믿을 만한 칼이 있다는 게, 이럴 때 참 좋단 말이지.'
* * *
5일 뒤.
판에서 공략자들의 목소리가 울려온다.
[크윽... 이제 식량이 얼마 안 남았어....]
[이제 어쩌지? 혹시 갖고 있는 음식 없어?]
[나도 바닥이야. 갖고 온 건 진작 다 썼다고.]
대부분 바닥난 식량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비단 하나의 탑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게 아니었다.
[크르륵... 배고프다.]
[먹을 게 필요하다.]
곳곳에서 부족한 식량을 호소하는 공략자들.
반면 사전에 중립지대를 점령하고 배급의 나무를 설치한 곳들에선.
[맛은 그럭저럭이지만 그래도 이 나무 덕에 어떻게 버틸 수 있군.]
[그러게 말이야. 근데 도대체 이곳에서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걸까?]
비교적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으으음...."
상황이 여기까지 치달은 탓일까.
몇몇 이레귤러들은 판을 내려다보며 고민에 잠긴다.
"이대로 가다간 전부 굶어 죽겠군...."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나."
"역시 방법은 그것뿐인가...."
모두의 시선이 중립지대로 향한다.
중립지대를 점령하여 포인트를 획득해 건설물을 올리거든.
식량난을 해결하면서도 여러 부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레귤러들도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
"으음...."
다만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이레귤러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섣불리 움직이긴 어렵겠지.'
움직인 탑은 곧장 다른 탑들의 표적이 되기 쉽상.
이미 이치의 탑이라는 전례도 있지 않은가?
그러던 중.
"어이."
온몸이 창날처럼 덮여 있는 이레귤러가 바로 옆에 있던 이레귤러를 보며 말한다.
"중립지대 하나만 양보해 줘. 그쪽은 많이 점령했잖아? 오염된 대지 하나만 우리 쪽에 주는 게 어때?"
"뭐? 그러면 우리도 식량이 부족해진다고!"
"넌 이미 획득한 포인트로 배급의 나무를 충분히 건설했다. 중립지대를 하나 떼어 준다고 한들 식량이 부족하진 않을 거라고 본다."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네.'
중립지대를 양보하거든 다른 탑들도 포인트를 획득하여.
배급의 나무를 건설하는 게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멸망해야만 하는 이 상황에서 그런 양보 정신을 발휘할 존재가 있을까.
"포인트로 배급의 나무만 지어야 하는 줄 알아?! 축복의 샘이나 파수꾼의 집 등 지어야 할 게 얼마나 많은데!"
"그런가.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전쟁이다."
"...뭐? 미쳤군. 이치의 탑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보고도 그런 소리를...."
"어차피 손을 놓고 있다간 자멸할 뿐이다. 그렇다면 공격만이 해답이 되겠지."
비단 이러한 현상은 한 곳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었다.
"중립지대를 다 뱉어 내거나 멸망하거나, 선택해라."
"별 헛소리를 다 듣겠군."
중립지대를 가진 이레귤러.
그렇지 못한 이레귤러들이 곳곳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끝내.
[거룩하신 이의 신탁이 내려왔다. 모두 돌격!]
[전부 죽이고 죽여라! 언제나 그랬듯, 승리는 우리 것이다!]
짧았던 평화의 시간이 끝났다.
뿌우우우우우-
곳곳에서 울려오는 뿔피리와 북소리.
중립지대를 사이에 두고 치솟는 불길.
각종 능력들이 번갯불 튀듯 판에서 튀어 오른다.
"오, 공격을 해? 그렇다면 당연히 공격해 줘야지."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이득을 취하고자 움직이는 이레귤러와.
"뭐? 공격을 간다고? 그렇다면 우리도 공격해야지!"
그런 이레귤러의 뒤통수를 치고자 움직이는 이레귤러들.
'다들 뒤통수를 후리려고 혈안이 됐네.'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로 인해.
판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해 갔다.
'뭐, 당연한 거겠지, 이 대전의 특성상 결국 벌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니.'
그저 시기의 차이만이 있을 뿐.
결국 벌어졌을 일이다.
'그리고 이제 곧 나한테도 오겠지.'
지금 이 판에서 가장 중립지대를 많이 점령한 탑은 누구인가? 하고 물었을 때.
난 자신 있게 손을 들 수 있을 정도로 중립지대들을 점령한 상황이었다.
'어디 보자. 음....'
내가 턱을 쓸어내리며 판의 정세를 주시하던 중.
"어흠, 어흠! 거... 음... 어이! 어이!"
양쪽에 뿔이 돋아난 투구를 두른 이레귤러가.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며 내게 손짓한다.
'그래, 슬슬 올 때가 됐지.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이놈아.'
난 씨익 웃으며 입을 열었다.
"뭐지?"
"미리 말해 두겠는데, 딱히 네 녀석에게 원한 같은 게 있는 건 아냐. 다만...."
사전에 뿌려 뒀던 각종 음식들 때문일까.
놈이 머쓱해하며 선뜻 주제를 꺼내지 못하자.
"식량이 필요한 거지?"
"어, 음... 뭐, 그런 셈이지."
'예상대로군. 이제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중요해.'
난 잠시 고민하는 척 눈을 감았다.
사실 이미 결정은 내려져 있지만.
눈을 뜨고 상대방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좋아, 줄 수 있어. 하지만 이건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는 걸 알아 둬."
내 말에 상대방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었다.
"무슨 뜻이지?"
"마침 나에게 여유가 조금 있으니 네게 식량을 지원해 주지. 하지만 앞으로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너도 나를 도와줘야 해. 불가침을 넘은 동맹 관계라고 생각하면 돼. 어때?"
210화 뒤틀린 황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