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명계 공략 (2)
철컥, 철컥, 끼이이익-
예정된 다섯 개의 역을 지나.
명계역에 들어서는 수상 열차 모비딕.
반달 모양의 문이 스르륵 열리자.
"오오! 여기가 명계역이구나! 확실히 여기도 역 느낌이 나네!"
"혹시 역내 점포 같은 건 없나?"
"이 멍청아,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아?"
선구자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며 기차에서 내린다.
"...."
하지만 동료들과는 달리.
이지수는 다소 굳은 표정으로 명계역이라 적힌 표지판을 바라본다.
"대장,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슬며시 다가와 말을 거는 알터를 보며.
이지수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냥... 지나쳐 온 다른 역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어."
"아."
수상 열차 모비딕은 명계에 도착하기 전.
5개의 역을 지나친다.
물론 특급 표 소지자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으나....
[이번에 명계역까지 직행하는 녀석들은 너희밖에 없는 듯하니, 너희가 원한다면 다른 역들을 구경시켜 주마. 어떠냐?]
생각지도 않았던 열차장 카룬의 호의 덕에.
선구자들은 잠시간이나마 다섯 개의 역을 구경할 기회를 얻었었다.
[방랑자들의 숲]
[인고의 저울]
[고통의 수레]
[피의 축제]
[만월의 밤]
언뜻 어딘가의 지명을 지칭하는 듯한 5개의 역.
끝없이 숲을 방황하며 서로가 서로의 몸을 먹어 치운다거나.
저울에 올라간 죄의 무게가 가벼워질 때까지 계속하여 몸이 잘려 나가고 재생되길 반복한다거나.
그 외에도, 다른 역들 또한 그 실상은 지옥과 다름이 없었다.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곳이었어.'
이지수는 고개를 저으며 열차장 카룬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런 곳에서... 카르마를 벌어서 표를 사야 된다는 건가요?"
[그런 셈이지. 카르마는 단순한 화폐가 아니라 생전에 쌓았거나 쌓인 업을 정산한 금액이다. 생전에 그 업을 제대로 쌓지 못했으니, 이곳에서 그 대가를 치르는 거다.]
"아아, 근데 아까 보니 몇 번 열차를 탄 것 같은 영혼들도 있던 것 같던데요. 그건 어떻게 된...."
[명계에 상주하는 녀석들을 말하는 거냐? 그 녀석들은....]
회상은 거기까지였다.
어느새 열차에서 내린 카룬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가는 거냐?]
"네, 태워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녀석들 덕에 나도 간만에 심심하지 않게 시간을 보냈... 아, 그러고 보니 그 녀석이 있었군.]
말꼬리를 흐리더니 곰방대에 불을 붙이는 카룬.
"상점주요?"
[그래, 끝까지 이름도 안 가르쳐 준 그 고얀 녀석 말이다.]
"혹시 그가 어디로 갔는지 아시나요?"
[나야 모르지. 그건 내 일이 아니야.]
카룬이 곰방대를 문 채 연기만 빽빽 내뱉는 사이.
이지수의 옆에 있던 알터가 슬며시 말한다.
"근데 상점주는 뭘 하려고 여기에 온 걸까?"
"글쎄. 이곳만의 특산품을 사려고 왔다든가... 음, 모르겠네."
영혼 구원, 특산품, 특수한 아이템 등.
선구자들이 온갖 추측들을 펼치는 중, 카룬이 곰방대를 넣으며 말한다.
[흠흠, 잡설이 너무 길었구나. 아무튼 즐거운 여행들 해라.]
"감사해요."
다시금 열차에 오르는 카룬을 뒤로하고.
명계역을 벗어나는 선구자들.
"이제 어디로 가야 돼?"
"기다려 봐. 상점주가 알려 준 말대로라면...."
이지수가 꽃들이 화사하게 만발한 정원을 보며 말을 잇는다.
"레테의 정원이 나올 테니까."
"오오, 저게 망각의 정원인지 뭔지하는 그거야?"
"근데 진짜 저 안에 들어가면 기억이 없어지나?"
호기심을 드러내는 클랜원들에게 실비아가 소리친다.
"그건 원주민들 한정이고, 우리는 능력치의 일정 부분을 봉인당한다고! 이 얼간이들이, 홍염이 설명해 줄 때 뭘 들은 거야?!"
"아, 그게... 조금 착각했어. 아무튼 들어가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이봐, 홍염! 그냥 깔끔하게 태워 버리는 게 어때?"
정원을 불태운다.
굉장히 단순 무식하지만 정석적이고 깔끔한 방법일 터.
그러나 고개를 젓는 이지수.
"상점주가 정원은 놔두라고 했어."
"엥? 그럼 어떻게 여길 통과하라고?!"
이지수가 대답 대신 정원의 좌측으로 걸어가자.
클랜원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 뒤를 쫓았다.
몇십 분이나 걸었을까.
'분명 이 어딘가에 표식을 남겨 뒀다고 했었....'
이지수는 정원의 가장자리를 살피다가 몸을 움찔거렸다.
"저거... 원주민 아니야?"
하얀 예복을 입은 원주민들이 상점주가 말한 샛길의 입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어째서 원주민들이 저곳에 자리하고 있는 걸까.
'원주민들이 지키고 있다는 이야기는 없었는데.'
이미 원주민들도 그들의 존재를 인지한 듯하자.
이지수는 빠르게 결단을 내린다.
'일단 대화를 시도해 보고, 여의치 않다면... 힘으로라도 뚫어야겠지.'
원주민들과 척을 지는 행동은 최대한 삼가는 것이 좋으나.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다.
능력이 봉인당하는 것보단 차라리 싸우는 게 나을 테니까.
"전투 준...."
이지수가 검집에서 칼을 빼 들려던 그때.
[거기! 이곳의 통로를 이용하려고 온 겁니까?]
원주민들이 그들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어온다.
'적의는 느껴지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러나 상대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니 긴장을 늦춰선....
[공략자들이 이 통로를 이용하려거든 패를 보여 줘야만 합니다.]
"...?"
순간 모두의 얼굴에 물음표가 걸린다.
"저 원주민들... 우리가 공략자라는 걸 알고 있는데?"
"아! 상점주가 말해 줬나 봐! 크으, 이러면 이야기가 빠르겠는데?"
"근데 패를 보여 주라고 하잖아. 대체 무슨 패를 보여 달라는 거지?"
"설마...?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다른 걸 떠올려 보려고 해도.
'패'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반사적으로 머릿속을 스쳐 가는 그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설마 패라는 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지수는 스스로도 미심쩍어 몇 번이고 주저하다가.
골드-패를 꺼내어 그들의 앞에 내밀었다.
"이게 당신들이 말한 '패'가 맞을까?"
[잠시 확인을 좀 해 보겠습니다.]
이리저리 패를 돌려 가며 살피는 환신들.
패의 하단에 박힌 인증 마크를 확인한 뒤.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확실히 그분께서 발급하신 패가 맞군요.]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정중히 지하로 들어가는 입구로 안내하는 원주민들.
"...."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왜 원주민들이 상점주가 발급한 패를 보고 안내를 해 주는 건지.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투성이였으나.
선구자들은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오오, 여긴...."
짧은 계단을 지나 지하로 들어서자.
어두운 땅속이 아닌 커다란 홀이 그들을 맞이한다.
후우우웅-
"뭐랄까, 작은 우주를 보고 있는 것 같군."
"그러게 말이야."
몇몇 클랜원이 하늘을 헤엄치는 빛나는 별무리를 보며 중얼거리자.
앞에서 걷던 원주민들이 웃으며 말한다.
[저건 기억의 조각들입니다. 소중했으나 잊혀야 할 기억들이 산화하며 환한 빛을 내뿜는 것이죠.]
"오, 기억의 조각.... 그럼 저것도 기억의 조각 같은 건가요?"
알터의 손가락 끝.
홀의 중심에는 커다랗고도 반투명한 결정체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아, 저것에 닿지 않게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환신이 결정체를 보며 말을 이어 간다.
[저건 수많은 기억이 담겨 있는 기억의 결정체입니다. 자칫 잘못 건드렸다간 기억의 파도에 휘말려 스스로를 잃어버리실 수도 있으니 주의하시길.]
잠시 후.
[자, 이쪽으로 나가시면 됩니다.]
길의 끝자락에 위치한 계단을 올라가는 선구자들.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곤 나지막이 감탄사를 흘린다.
"와아...."
"아까 봤던 역들이랑 너무 차이가 나는 것 아냐?"
두리번거리며 여로의 광장의 정경을 바라보는 선구자들.
"영혼들만 오는 곳인 것치곤 꽤 평화로운 것 같은데?"
"그러게. 이 정도면 거의 '마을'급인 것 아냐?"
"오오, 저기 좀 봐! 먹을 것도 팔잖아? 근데 저건 우리도 먹을 수 있는 건가?"
당장이라도 탐색을 하길 원하는 클랜원들에게.
이지수가 딱 잘라 말한다.
"구경은 나중이야. 일단 단서의 파편 퀘스트를 받자."
"그치, 그게 중요하지."
어디까지나 그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60층의 공략이었던 만큼.
그들은 도보 뒤편의 골목 구석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수정구에서 영상과 더불어 음성이 흘러나온다.
[...참으로 착한 아이였지. 에르민은 이곳의 모든 영혼에게 사랑받았다. 착하고 다정한 그 아이를 싫어할 영혼은 없었을 테니까.]
땅-
망치를 들어 모루 위의 무기를 힘껏 내려치며 말을 잇는 노인.
[생전의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분명 그때도 사랑과 정이 많았던 아이였겠지.]
땅-
[그런데 그렇게....]
땅, 땅, 땅, 땅-
[그렇게... 소멸됐어야 할 아이가 아니라는 거다!]
끝내 모루에 올려져 있던 검이 망치질을 견디지 못하고 동강 나자.
여인이 바닥을 구르는 검신을 집어 노인에게 내밀며 말한다.
[어르신께서 원하신다면 저희 선구자들이 손녀의 복수를 해 드리겠습니다.]
[너희가... 손녀의 복수를 해 주겠다고?]
여인을 비롯하여 선구자들을 훑는 대장장이.
[입만 산 애송이들은 아닌가 보군.... 좋다. 놈이 손녀에게 했듯, 놈의 혼을 갈갈이 찢어 그 파편을 내게 가져와 줬으면 한다.]
그 순간.
[띠링-]
[단서의 파편이 담긴 정보를 입수하였습니다.]
[특수 퀘스트: '손녀를 죽인 악령에게 복수를!'이 발동됩니다.]
손녀를 죽인 악령에게 복수를!
설명: 생전에 그리고 명계에서마저도 손녀를 잃은 에드워드. 스스로의 영혼까지도 불태울 것만 같은 그의 분노를 잠재우자.
내용: 역행하는 숲에서 악령 '발보르'를 처리해야만 한다.
보상: ?
선구자들의 눈앞에 나타나는 단서의 파편 퀘스트 메시지!
모두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다시 묻지. 발보르는 천신들도 상대하기 어려워할 정도로 강하며, 영악하다. 그럼에도 가능하겠나?]
노인의 물음에 여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요. 저희 선구자들만 믿으세요.]
[고맙군.]
노인과 여인이 손을 탁 맞잡던 바로 그때.
콰아아아아아앙-
영상이 흘러나오던 수정구가 굉음과 함께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툭, 데구르르-
"...."
입실론이 바닥에 떨어진 수정구를 조심스럽게 집어.
조심스럽게 포세이돈의 앞에다 놓으려던 찰나.
"이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포세이돈의 포효가 도박장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이봐, 귀 안 먹었으니까 조용히 좀 말해."
"여긴 모두의 공간이지 네 영역이 아니라고."
주변 신들의 강한 이의 제기에도 불구하고.
포세이돈은 아랑곳하지 않고 목청을 높인다.
"이레귤러가 60층에서 난장을 칠 때도 참았다. 하지만 더 이상 눈 뜨고 봐 줄 수가 없군!"
포세이돈이 눈을 부라린 채 도박장의 직원들을 향해 일갈한다.
"놈들은 아무런 단서도, 정보도 없이 단서의 파편 퀘스트에 도달했다. 이래도 부정행위가 없었다고 할 텐가?!"
"이봐! 물고기! 시끄러우니까 좀 앉지."
토르의 한마디에 포세이돈의 눈이 뒤집힌다.
"지금 뭐라고 했나?"
"아직 결과가 나온 것도 아니니, 일단 잠자코 앉아서 지켜보라는 말이다."
"이 자식이...."
포세이돈이 냅다 삼지창을 들려다.
주변 신들의 눈초리를 보곤 더욱 직원에게 신경질을 낸다.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만, 저건 분명히 문제가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난 본사에 종말의 탑의 감사를 요청하는 바다!"
191화 명계 공략 (3)
혹여나 승패에 영향을 미치는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거나.
탑의 관리자나 층의 난이도 등, 탑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본사에선 직접 해당 탑에 감사 팀을 보낸다.
"감사를 하면 저 말도 안 되는 사태의 전말도 파악이 가능하겠지."
"이봐 물고기, 그 머리통도 물고기가 된 건가? 본사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잊은 건 아니겠지?"
토르의 말대로다.
주주들의 과한 간섭과 개입을 막고자.
주주들이 본사의 활동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행동은 금지시켜 놨으니까.
"물론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감사는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게 아니니 상관없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는 내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을 텐데? 너희 모두 정배에 걸었을 테니까."
지금 그들이 베팅한 게임은, [60층 개방 이후, 종말의 탑이 3달 안에 60층을 클리어 할 수 있는가?].
당연히 이 게임에서의 정배는 '3달 안에 공략할 수 없다'였다.
이미 종말의 탑보다 앞서 60층 공략을 시도했던 탑들의 공략 기간을 생각하면.
너무도 합리적인 수순이었으니까.
"다들 코인을 잃기는 싫겠지?"
포세이돈이 확신에 찬 눈으로 다른 신들을 훑던 중.
헤임달의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확실히 불미스러운 일로 코인을 잃는 건 불쾌한 일이지."
"역시! 헤임달, 뭘 좀 아는군!"
포세이돈이 그녀를 추켜세우며 속으로 쾌재를 부른다.
'그래! 네가 감사에 필요한 코인을 지불하면 딱 좋겠구나!'
주주가 본사에 감사를 의뢰하려거든.
3,000코인에 달하는 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다만, 취지는 알겠으나 감사에 필요한 코인은 누가 지불하는 거지?"
헤임달의 질문에 다른 신들이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뭐, 가장 불만이 큰 놈이 내면 되겠지. 근데 얼마나 드는데?"
"3,000코인이었나?"
"뭐야. 얼마 하지도 않잖아? 이봐, 포세이돈! 네가 이야기를 꺼냈으니 네가 의뢰하면 되겠네! 안 그래?"
"...음?"
순간, 포세이돈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든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당연히 너희도 그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난 상관없는데? 이번 판에 크게 베팅한 것도 아니고."
"푸흐흐, 어차피 잃어도 다른 판에서 복구하면 그만이네! 그게 도박의 묘미잖나?"
강력하게 종말의 탑의 감사를 주장하는 포세이돈의 의견과 달리.
대부분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일 뿐이었다.
"이, 이보게, 헤임달. 자네는 이번 판에 2,000코인을 넘게 걸지 않았나?"
"그런 작은 액수에 연연하지 않아서."
"...."
포세이돈의 수염이 잘게 흔들리던 중.
토르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이봐, 물고기! 그렇게 감사를 하고 싶거든 네 코인으로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설마 3,000코인을 지불할 여력조차 없는 건 아니겠지?"
"푸하하핳! 설마 그 정도겠어? 이보쇼, 물고기 양반! 아니지?"
"무, 물론이지!"
애써 껄껄 웃는 포세이돈에게.
토르의 한마디가 비수처럼 날아든다.
"그럼 네가 지불하면 되겠군."
"우, 웃기는 소리! 난 모두를 위한 의견을 제시한 것뿐이다!"
"물고기 네놈도 딱히 상관없다는 이야기군. 그럼 감사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로 끝내지. 집중하는 데 방해된다."
토르를 비롯한 다른 신들도 다시금 수정구로 시선을 돌리자.
포세이돈의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진다.
'저 썩을 것들, 갖고 있는 코인이 넉넉하다 이거냐?!'
분명 감사를 진행해도 이상하지 않을 사안이건만.
다들 주머니 속의 코인이 넉넉하니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 터.
'빌어먹을... 한 놈쯤은 넘어올 줄 알았건만.'
여유가 있었다면 그가 직접 감사를 요청했겠으나.
도박판에 들어가 있는 코인이 2,000.
수중에 있는 코인은 그나마 조금 회수하여 1,000을 웃도는 정도였다.
그리고 만약 이번 도박에서 패배할 시.
1,000코인이 그대로 증발하게 된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가.'
저번과 마찬가지로 직원을 유혹하여 탑에 개입시키는 방법도 있겠으나.
시간이 필요하다.
"이봐, 넥타르!"
"위위위위대하신 분이여, 여여여여기, 네네네네넥타르이, 입니다."
"...."
포세이돈이 입안에 넥타르를 털어 넣은 뒤.
'이렇게 된 이상 60층은 버리고 다음 도박을 준비해야 되나.'
깊은 고민에 잠긴다.
* * *
며칠 뒤.
본사 내부.
"그러니까 네 말을 정리하자면, 포세이돈 님이 본사의 감사를 요청하셨다가 흐지부지됐다는 거지?"
"그그그렇습니다! 제제가 또또똑히 드드들었습...."
"알았어."
손을 들어 부사수의 말을 제지하는 입실론.
그녀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다른 주주들은 별 반응이 없었는데, 포세이돈만 격한 반응을 보였다라....'
납득은 된다.
포세이돈이 수중에 갖고 있는 코인이 넉넉하지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그게 본사에 감사를 신청할 여력조차 없을 정도인 줄은 몰랐지만.'
그녀가 알 수 있는 건, 포세이돈이 게임에 건 코인의 액수뿐.
포세이돈이 직접 소지하고 있는 코인의 액수까지 뚜렷이 알기에는 어려웠다.
'수중에 3,000코인조차 없다는 건가.'
입실론이 손가락으로 긴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생각한다.
'어쩌면 종말의 탑에 개입했던 건 포세이돈이 아닐까?'
넉넉하지 못한 코인 그리고 종말의 탑이 관련된 게임에 여러 차례 베팅을 했다?
범행의 동기는 충분하지 않은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가능성은 있겠어.'
이제껏 백지장에 가까웠던 그녀의 의심 목록에.
처음으로 '포세이돈'이라는 이름이 새겨진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해. 포세이돈이 게임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어야 해.'
증거가 없는 발언은 의미 없는 메아리에 불과할 뿐.
'이레귤러가 도움이 됐네.'
물론 그가 '난 60층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행동할 때는 뒷목이 아려 왔으나.
결과적으로 도움이 됐으니 봐주기로 했다.
'일단 포세이돈을 예의 주시 하면서 다른 주주들의 움직임을 살피는 게, 지금으로선 제일 괜찮겠어.'
입실론이 입가에 미소를 그리던 찰나.
그녀의 부사수가 더듬으며 말한다.
"저저저, 이이입실론 님."
"왜."
"그그근데, 조조종말의 탑의 이이레귤러는 어어떻게 정보를 아, 알았던 거거, 걸까요?"
픽 웃는 입실론.
"모르지. 단순한 우연이었거나, 아니면 관리자가 소멸을 각오하고 알려 준 걸 수도 있고."
"그그그렇군요! 아, 그그리고 이이입실론 님, 60층을 클리어 한 타, 탑의 수가 이, 일정치를 너, 넘어가면 어, 어떻게 되는 거거, 겁니까?"
"...."
입실론이 조금 놀라 부사수를 바라본다.
"그건 네가 알 수 있는 사안이 아닐 텐데. 어디서 들었어?"
"우우연히 위윗분들이 마, 말씀하시는 걸 드들었습니다!"
"아아, 뭐 상관없겠지."
어차피 시기의 차이만 있다 뿐이지, 결국 부사수도 알게 될 내용.
조금 일찍 알려 줘도 상관없을 터.
"지금 60층을 돌파한 탑이 총 몇 개지?"
"어어어, 으으으으음... 초초총 449개이고, 60층을 고, 공략 중인 타탑의 개수는...."
"공략 중인 탑의 개수는 중요하지 않아. 아무튼 60층을 돌파한 탑의 숫자가 450개가 되거든, 커다란 변화가 생길 거야."
"벼벼, 변화라 하심은...."
입실론은 대답 대신 파일을 하나 꺼내 부사수의 앞에 툭 던졌다.
"직접 읽어 봐.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멍청이는 아니잖아?"
"가가감사합니다!"
주섬주섬 파일을 열어 내용을 살펴보는 부사수.
페이지를 한 장씩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오오옷! 이이, 이건!"
그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이이, 이렇게 회획기적인 층은 처처음 봅니다! 부부분명 주주주님들도 조, 좋아하실 겁니다!"
"변화를 주려면 그 정도는 줘야지. 아. 참고로 그 안건, 내가 구상한 거야."
"오오, 오오오오오옷! 여여역시 이입실론 님이십니다!"
파일을 책상에 툭 던지곤, 물개 박수를 치는 부사수.
그가 대충 던져 둔 파일의 겉면에는.
[다중 차원의 특수 층]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 *
"주문하신 마왕의 와플이랑 애플티 나왔습니다!"
"거신 떡볶이도 지금 나가요!"
60층에서의 원정에서 복귀하여.
간만에 찾은 인성 카페는 여전히 활기가 넘친다.
'조금은 사람이 줄어들 법도 한데, 인기가 식지를 않네.'
같은 맛, 같은 메뉴에 물린 사람들이 다른 선택지를 찾아 나설 법도 하건만.
오늘도 여전히 인성 카페 안팎으로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수정아, 애들 몇이랑 같이 2층 청소 좀 해 줄래?"
"네, 언니!"
"그리고 호준이 너는 냉장고에서 바다의 향기 원액 좀 가져오고."
선아를 필두로 열심히 일하는 친구들을 보며.
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선아야! 먼저 들어가 볼게! 고생들 해!"
"아, 네! 사장님 들어가세요!"
이젠 선아가 알아서 다 하니 카페에선 할 게 없네.
난 카페에서 나가 차에 올랐다.
'그건 그렇고... 아으, 고민이네. 금제가 해금됐다는 게 설마 그런 거였을 줄이야.'
난 며칠 전 해금된 금제 메시지를 떠올렸다.
[금제가 해금됩니다.]
[이후 66~70층의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그렇단 건, 전에는 65층까지만 이동할 수 있었다는 건데....'
과거의 기억들을 되짚어 보니.
어째 뭔가 낯익은 층들을 꽤나 자주 봤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럼 이제 70층까지 이동이 가능해졌다는 거니까, 금제를 더 풀면 75, 80층까지도 이동할 수 있게 되는 거려나.'
도대체 왜 나한테 이런 금제가 걸려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금제를 계속 풀어 나가야 한다는 거다.
'70층에서 더 못 올라가면 그것도 문제니까. 흠, 그러려면 역시 업적을 달성해야 되는데.'
업적을 달성하여 레벨이 상승했더니.
금제가 풀렸던 걸 기억한다.
다만 문제는....
업적 적립
설명: 위대해지기 위해선 위대한 업적들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내용: 능력, 편의점 주인의 보유자는 80레벨 이후부터 업적 적립을 이용하여 레벨을 올릴 수 있다.
특이 사항: 다음 레벨인 82레벨 달성에 필요한 업적의 개수, 2
'업적을 2개나 달성해야 한단 말이지.'
81레벨 달성에 필요했던 업적은 1개였건만.
그럼 83레벨을 달성하려면 설마 3개의 업적이 필요한 건가?
'근데 업적을 달성하는 명확한 기준은 뭘까?'
역행자를 처리했을 때 업적의 개수가 올랐던 걸 생각하면.
강한 몬스터를 처리하면 업적이 오르는 것 같긴 한데....
'하지만 강하다는 기준도 너무 애매하잖아? 음, 뚜렷한 기준 같은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으음. 아, 모르겠다! 일단 돌아가서 생각하자!'
자동차 핸들에 손을 뻗었다.
* * *
같은 시각.
"으으음...."
식기세척기의 버튼을 꾹꾹 누르며 침음하는 발리나.
"흐으으으음...."
"무슨 일이냥? 표정이 꼭 썩은 호박 같다냥!"
옆에서 몰래 훔친 츄르를 까먹던 루나의 물음에.
발리나의 표정에 씁쓸함이 묻어 나온다.
"그냥... 짧았던 휴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휴가냥? 우리가 언제 휴가를 즐겼냥?!"
"답답하긴!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그게 곧 휴가다!"
주인이 탑 공략에 나선다고 자리를 비운 이후.
시작된 행복한 시간.
냉장고 안의 모든 것을 자유로이 꺼낼 수 있었으며, 새벽이 넘도록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잔소리 하나 없던... 아아, 달콤했던 그 순간이여!
"자유... 그것은 왜 잃고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는 것인가!"
"그림에 심취하더니 헛소리가 늘었다냥!"
"다시 주인이 탑에 장기 체류 하는 그 순간을 위하...."
발리나가 주먹을 쥔 손을 번쩍 하늘로 들어 보이려던 찰나.
"장기 체류가 뭐?"
도대체 언제 돌아왔는지.
주인이 빙글빙글 웃으며 발리나를 바라보고 있다.
"허어어어억!"
"내가 없는 사이에 꽤 즐겼나 보네."
"그, 그건... 다 지나간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
"며칠밖에 안 지났는데?"
이번에는 주인의 시선이 루나가 들고 있는 츄르로 향한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냥!"
"츄르 꺼내 먹는 게 꽤 자유로워졌네? 며칠 사이에 익숙해졌나 보다."
"이, 이건... 냐아아아앙!"
한바탕 집 안에서 소란이 벌어진 뒤.
주방 멤버 일동이 주인의 앞으로 모인다.
"흠흠, 다들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고생들 많았다. 특히 날 대신하여 카페와 갤러리 관리까지 겸한 분신에게 다들 박수!"
짝짝짝-
"그 외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고생한 너희를 위해, 내가 이번에 특별한 걸 하나 준비했다!"
<대형 참기름인지?>
"츄르냥?!"
"신형 컴퓨터인가!"
저마다 각기 원하는 바를 말하며 눈을 반짝이자.
주인이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다 데려갈 수는 없고, 한 녀석만 같이 탑에 들어갈까 해서."
192화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1)
"헥헥?!"
"탑에... 가는 건가."
"그래. 물론 분신은 내 자리를 대신해야 되니까 어렵고, 나머지 중에서 정하면 되겠는데?"
백구와 발리나 그리고 루나와 깡통이 서로를 보며 숙덕거린다.
"누가 갈 거냥? 나다 싶으면 빨리빨리 손을 들라냥!"
"아직도 주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건가? 너보고 따라오라는 말을 돌려 표현하는 거다."
<헛소리 감지. 차단 모드로 전환함.>
"왈왈!"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깡통을 바라보던 중.
주인이 웃으며 말한다.
"아, 이번에 깡통도 제외야."
"엥?"
"깡통은 강화랑 분해 때문에 많이 갔었잖아?"
주인의 말이 끝나자.
남은 주방 멤버들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얼레? 어째 너희, 별로 가기 싫어하는 눈치다? 전에는 다시 탑에 가 보고 싶다 하지 않았어?"
"그, 그렇긴 하지만, 난 요즘 정말 바쁘다. 이제야 겨우 골드 등급을 달성했단 말이다! 시즌이 끝나기까지 2개월...! 이 안에 등급을 더 끌어올려야 한다!"
발리나의 간곡한 호소가 끝나기 무섭게.
루나가 치고 들어온다.
"나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냥!"
"너는 또 왜?"
"새로 산 놀이기구들을 시험해 봐야 한다냥!"
"놀이기구?"
주인의 물음에 루나가 자랑스레 창고용 방으로 가.
문을 활짝 열어 보인다.
"이걸 보라냥!"
그 안에는 딱 봐도 가격이 범상치 않을 것 같은 고급스러운 캣 타워와 휠 따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오오, 멋진데?"
"그렇냥? 역시 보는 눈이 있다냥! 발리나랑 같이 고민하다가 산 건데... 읍읍!"
발리나가 황급히 루나의 입을 틀어막는다.
그러나 이미 늦은 듯했다.
"그렇구나! 어쩐지 못 보던 물건들이 보인다더니, 너희가 구매한 거였구나?!"
"주인! 오해의 소지가 있다! 저건 구매한 게 아니다! 양배추 마켓에서 나눔을 받은 거다!"
"그게 무슨 소리냥? 분명 제값을... 읍!"
슬며시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발리나.
이미 주인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걸려 있자.
발리나는 빠르게 머리를 돌린다.
'이건 이미 글렀다.'
그렇다면 재빠른 손절만이 그녀의 자유 시간을 보장할 수 있으리라.
"나,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다 루나가 시킨 거다!"
"냥?! 그게 무슨 말이냥! 주인이 없을 때 양껏 질러야 한다고 한 건... 읍읍읍!"
황급히 루나의 입을 틀어막는 발리나.
그리고 그런 발리나에게 맹렬한 냥냥 펀치를 날리는 루나.
"호오... 내가 없을 때 꽤나 재밌게 보냈네. 재밌게 놀았으면 또 일을 해야지."
꿀꺽-
"좋아, 판결을 내리겠다!"
음산한 미소를 짓는 주인을 보며.
루나와 발리나가 동시에 침을 삼킨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발리나는 그림을 8점 그렸고 루나는 3점을 그렸으니까, 루나가 가는 걸로 한다!"
"크흐흐흐!"
"냐아아아아앙!"
승자의 환호성과 패자의 절규가 하모니를 이루고.
"헥."
백구는 가만히 그 둘을 지켜보다가 고개를 젓곤.
앞발로 창문을 열어젖힌다.
"야, 어디 가려고!"
"왈왈왈!"
"음? 이 시간에 만날 친구가 있어? 그래, 다녀와."
백구가 나가자.
다시금 주인이 시선을 돌려 그들을 바라본다.
"자, 결정에 불만 없지?"
"억울하다냥! 난 빵도 만든다냥! 저 근육 무식쟁이보다 두 배는 넘게 더 일했... 으으읍!"
"아주 현명하고도 올바른 결정이다! 난 주인의 결정에 지지를 보낸다!"
"이번엔 루나가 가고, 다음에는 발리나가 가면 되잖아? 그치?"
"...."
* * *
며칠 뒤.
35층, 마왕의 성의 외곽에 위치한 포털의 주변.
수많은 공략자들이 포털 이용을 위해 기다리는 가운데.
몇몇 공략자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크으, 사람 많은 것 좀 봐라."
"그러게. 어마어마하구만. 슬슬 인기가 꺼질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엔드미엘이 개방된 지도 벌써 몇 달은 되지 않았어?"
35층의 신규 지역,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수왕 레길론과 마왕 바이라의 갑작스러운 평화협정으로 생겨난 새로운 지역이기도 했다.
"뭐, 기회의 땅이니까. 이번 기회에 수인들이랑 친해져서 새로운 퀘스트를 받을 수도 있는 거고. 레온 왕국까지 개척하려는 녀석들도 꽤 되는 것 같더라고?"
사실 레온 왕국에 공략자가 발을 들이는 건.
굉장히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게, 대다수의 공략자들이 마왕의 성에 거주하였고.
마왕군이 주는 퀘스트들을 수행하며 수인들과 척을 졌으니 말이다.
"이야! 용감한 거야? 아니면 간땡이가 부었나? 아무리 평화조약을 맺었다고 해도, 적대감이 한순간에 사라지진 않을 텐데."
"그렇긴 한데, 솔직히 고마운 일이긴 해. 그런 놈들이 앞에서 이것저것 해 주니까 우리도 새로운 지역을 가 보고 하는 거지."
누군가의 발자취는 새로운 지도가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지도가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아무튼 일단 엔드미엘에 가거든... 알지?"
"크흐흐, 물론이지!"
이번에 그들이 가고자 하는 곳은.
엔드미엘에서도 제일가는 빵집 '오색조당'이었다.
"거기가 진짜 역대급이라던데."
"듣자 하니 수왕이 직접 방문까지 했다던데? 왕이 직접 갈 정도면 검증은 끝난...."
그러던 그때.
"...음? 어이! 저기 좀 봐!"
동료 중 한 명이 눈을 부릅뜬 채 어딘가를 가리킨다.
"왜 뭔데 그... 어엉?!"
"사, 상점주잖아?"
마족들의 호위를 받으며 인파를 뚫고 포털로 나아가는 남자.
그의 얼굴을 덮고 있는 여우 가면은 분명 상점주의 것이 분명해 보였다.
"상점주도 엔드미엘에 가려는 건가?"
"근데... 짝퉁 아니야?"
"짝퉁이라고?"
"그래, 언제부터 상점주가 어깨에 고양이를 태우고 다녔다고 그래?"
과연 동료의 말대로다.
회색빛의 털을 가진 고양이가 남자의 어깨에 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상점주가 아니면 마족들이 저렇게 정중히 대할 사람이 있나?"
"음... 그것도 그렇긴 하네. 혹시 새로 길들인 펫 같은 건가?"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주변의 모든 공략자들이 상점주를 보며 수군거리던 그때.
스스슥-
상점주가 삽시간에 포털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린다.
* * *
스스슥-
포털을 나선 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오오! 여기가 엔드미엘이구나! 직접 와 보는 건 처음이네.'
과연 마족과 수인들의 화합을 상징하는 도시라 그런가.
뭔가 마족의 건물이랑 수인들의 건물들이 뒤섞인 게,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다.
"답답하군! 반죽은 그런 식으로 다루는 게 아니다! 좀 더 진심을 담아! 맛있어지라는 마음을 담으라는 거다!"
"크으윽...."
한 빵집에서 함께 일하는 수인과 마족이라거나.
"흐으읍!"
"대, 대단해!"
"이 정도 건물을 세우는 건 우스운 일이지."
두 종족이 더불어 건물을 올리는 등.
과거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모습들이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마족과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다니... 미, 믿을 수가 없다냥...."
탑에 들어오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거의 털에 물이 묻은 것처럼 질색팔색하더니.
연신 두 눈을 비비며 '이게 정말이냥?'을 연발하는 루나를 보고.
난 피식 미소 지었다.
"거봐, 오길 잘했지?"
"흠흠. 썩 나쁘지만은 않다냥!"
말은 그렇게 해도 네 수염은 꽤 정직한 것 같은데?
난 잔뜩 씰룩이는 루나의 수염을 보며 생각했다.
'음, 괜찮겠지?'
사실 오늘은 수왕, 레길론을 만나러 왔다.
정확히는 그에게 받을 걸 받으러 온 거지만.
'그냥 헤르만 편에 넘겨주면 편했을 것 같긴 한데.'
본래 마왕의 집사인 헤르만의 편에 재료들을 넘겨주기로 사전에 구두 약속을 했건만.
[한 번도 엔드미엘에 간 적이 없다고?! 그것참 슬픈 이야기군. 협정의 중심에 있었던 자네만큼은 꼭 한번 엔드미엘을 방문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아, 이렇게 하지! 전에 약속했던 재료들 말이네! 엔드미엘에서 직접 주는 건 어떤가?]
수왕의 갑작스러운 제의로 약속이 조금 변경되었다.
'뭐, 나도 한번쯤은 와 보고 싶긴 했으니까 상관은 없지만.'
루나가 괜찮을지 모르겠네.
"진짜 괜찮겠어?"
"뭘 말하는 거냥?"
"수왕 말이야. 좀 있으면 만나게 될 텐데 괜찮겠어?"
과거, 수왕에게 식은 빵을 헌상한 죄로 봉인을 당한 이력이 있는 만큼.
수왕을 보거든 적대감을 보여도 이상하지 않을 터.
"상관없다냥!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식은 빵을 헌상한 게 맞는 것 같다냥! 큰 죄를 저지른 건 나였다냥!"
"오...."
수왕도 그렇고 루나도 그렇고.
도대체 식은 빵이 뭐라고 저러는 건지.
난 모르겠다.
"음, 그래. 너만 괜찮으면 상관없지. 아, 이따가 재료들이 오거든 잘 살펴봐. 구해 달라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것들이잖아?"
말포르, 버트, 말링 등등.
루나가 매일 노래처럼 재료들의 이름을 불러 댄 터라.
이제는 거의 외워 버렸다.
"걱정 마라냥! 전직 수석 빵지기의 눈을 믿어라냥!"
"그래, 네가 잘 감별해 봐. 그건 그렇고, 헤르만."
"예, 늘꺾이는마음 님."
오늘 마족들과 더불어 나의 안내인 역으로 따라온 헤르만.
마왕성의 늙은 총관이 고개를 살짝 수그려 보인다.
"오랜만에 마왕성에서 나온 것 아냐? 기왕 나온 거, 구경도 좀 하고 그러지 그래?"
"전 오직 늘꺾이는마음 님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입니다. 물론 필요치 않으시겠지만, 이 늙은이의 작은 고집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신변의 보호라....
난 피식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보단 이 녀석의 신변을 더 우선해 줘."
"그 고양이를 말입니까?"
"내 수석 빵지기야."
"과연... 알겠습니다."
한창 헤르만과 대화를 나누던 바로 그때.
"오오, 늘꺾이는마음! 자네로군!"
길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부진 체격의 사자 수인인 수왕, 레길론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오, 때맞춰 잘 왔네. 용사도 같이 온 건가. 근데 저건 뭐야?'
엄청난 크기의 보따리를 든 용사, 로이드.
그가 보따리에서 미친 속도로 빵을 끄집어낼 때마다.
우물우물-
"...음! 굽기가 살짝 아쉽군. 하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아. 더 성장할 가능성이 엿보인다."
빵들은 수왕의 평가와 함께 순식간에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음?! 이 촉촉함, 부드러움...! 로이드, 이 빵집의 이름이 뭐지?"
"다글링의 촉촉한 베이커리입니다."
"그곳에 발바닥 1개를 하사하도록!"
아....
도대체 뭘 하는 건가 했더니.
이세계 구르메 가이드였냐.
난 헤르만이 준비한 의자에 앉아 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발바닥이라는 것도 구르메 가이드의 별과 비슷한 점수 기준인 건가. 그보다... 엄청나게 먹긴 하네.'
그 커다랗던 보따리가 순식간에 줄어들었으니 말이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미안하다. 이것 또한 왕이 해야 할 주요한 업무라서 말이지."
빵을 먹어 치우는 게 왕의 주요한 업무라....
"괜찮습니다. 눈앞에서 먹방을 지켜보는 것 같아 괜찮았거든요."
"먹... 방?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아무튼 자네도 잘 지냈나?"
"꽤나 바쁜 일상을 보내는 중입니다."
최근까지 60층에 있기도 했거니와.
아직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도 진행 중에 있으니 말이다.
"그런가. 하긴, 자네가 취급하는 물건들은 하나같이 특별하고 유별나니 바쁠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이 엔드미엘 말이다. 어떤 것 같나?!"
"굉장히 공을 들여 만든 도시 같더군요. 하지만 무엇보다 생각 이상으로 마족과 수인의 융합이 잘되고 있는 것 같아 놀랐습니다."
"크하하핳! 미친 듯이 싸웠던 만큼, 서로를 잘 파악하고 있어 그런 걸지도 모르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레길론.
"저도 지금의 평화가 계속 유지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물론이지! 나와 로이드, 바이라 그리고 나아가 수인과 마족 모두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겠지. 노력 없이 평화는 결코 유지할 수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으려던 레길론의 눈이 순간 휘둥그레진다.
킁킁-
한참 코를 씰룩거리던 레길론이 씁쓸해하는 눈으로 날 보며 말한다.
"자네를 만날 때마다, 그 녀석의 익숙한 냄새가 나는군."
"여전히 후각이 예리하시군요."
"특히나 녀석의 냄새는 더더욱 기억에 남을 수밖에. 전에도 말했듯 녀석의 솜씨는 가히 최고였다. 지금도 루나만 한 빵지기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고 있으니까."
움찔-
품속에 쑤셔 넣은 루나의 움찔거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가만히 있어.
난 작게 속삭이곤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열심히 빵지기를 물색하시는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아직까지 이렇다 할 소득은 없지만 말이야."
수왕이 푹 한숨을 내쉬자.
옆에 있던 개 수인 용사, 로이드가 위로하듯 말한다.
"왕이시여, 어차피 그 빵지기는 구시대의 유물일 뿐입니다."
움찔-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한 만큼, 더 압도적인 실력을 가진 빵지기들이 곳곳에서 탄생할 겁니다."
"흠."
갈기털을 쓸어내리는 수왕.
"확실히 자네 말도 일리가 있군. 분명 녀석은 대단한 빵지기였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거스를 순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녀석의 빵이 식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움찔움찔-
"과거의 유산에 계속 미련을 갖고 있는 것 또한 어리석은 일이겠지! 낡은 정신으로 만든 빵은 그 맛도 낡아 빠졌을 테니...."
품속에서 루나가 중얼거린다.
"내 빵이 식었던 것은 사실이다냥.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그 순간.
냐아아아앙-
내 품속에 숨어 있던 루나가 하늘 높이 뛰어오르더니.
"내 빵이 맛없다고 하는 건 참을 수 없다냥! 하지만 내 빵은 식어도 맛있는 빵이다냥!"
퍼어어억-
냅다 수왕의 얼굴에 펀치를 날린다.
193화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2)
"흠!"
그러나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루나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 내는 수왕.
"놔라냥! 이것 놔라냥!"
"오늘은 익숙한 냄새가 더욱 진동한다 싶더니, 생각지도 못한 손님이 있었군."
레길론의 야수 같은 눈빛이 날 주시한다.
"상점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대답 여하에 따라 수인과 마족 간의 평화협정에 영향이 갈지도 모르는 상황.
그러나 난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것 참 미안하게 됐습니다. 저희 집 고양이가 워낙 말썽꾸러기라서요."
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용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왕이 공격을 받으셨다. 그런데도 겨우 사과만으로...."
움찔-
내 눈빛을 받은 용사가 몸을 크게 움찔거린다.
저번에 몽둥이질을 당했던 게 떠오르기라도 한 건가?
"로이드, 그쯤 하지."
"하지만 왕이시여...."
용사를 제지하는 수왕.
그가 단호히 말한다.
"좋은 날 좋은 자리에서 사소한 문제 따위로 분란을 일으킬 필요 없다는 거다."
"...예."
용사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자.
수왕이 루나를 내려다보며 말한다.
"다만, 한 가지 용납할 수 없는 게 있다. 수석 빵지기였던 자가 그 손을 함부로 놀리다니. 오직 그 손은 빵을 만들 때만 사용해야 한다는 걸 잊은 거냐?"
"흥! 흥이다냥! 내 빵 맛도 모르는 바보한테 그런 참견은 듣고 싶지 않다냥!"
루나가 다시금 앞발을 들어 올리려던 찰나.
난 녀석의 뒷덜미를 잡았다.
"뭐, 뭐냥! 놔라냥! 이것...."
"자자, 그쯤 하자고."
어차피 오늘은 약속받은 재료를 받으러 온 것일 뿐.
굳이 필요 이상으로 분란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난 웃으며 수왕을 바라봤다.
"전에 루나를 만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아 대면을 시켜 드리려 한 건데, 참 아쉽게 됐습니다."
"나도 그리 생각한다. 아무래도 내가 기억하던 레온 왕국 최고의 빵지기는 죽은 모양이다."
수왕의 나지막한 읊조림이 끝나자.
루나가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저게 무슨 말이냥?"
"음, 너 퇴물이래."
"냥?!"
다시금 발버둥 치며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루나.
난 녀석을 꽉 붙든 채 수왕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뭐,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루나는 이제 제 식솔인 만큼, 녀석을 자극하는 건 적당히 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슬며시 주먹을 말아 쥐자.
사사사사삭-
수왕을 비롯한 주변 모든 수인들의 털이 바짝 곤두섰고.
용사는 검집에 손을 올린 채, 식은땀까지 흘린다.
"...협박하는 건가?"
힘겹게 입을 뗀 수왕의 물음에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저 부탁일 뿐입니다. 식솔이 욕을 먹으면 저도 기분이 좋진 않아서요."
"...루나가 자네의 부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군. 사죄하지."
레길론의 사과로 상황은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흠흠, 그보다 전에 말했던 재료들을 갖고 왔는데, 한번 보는 게 어떤가?"
"좋군요."
"그것들을 가져와라!"
수왕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척, 척-
듬직한 체구의 곰 수인 몇이 둘러메고 있던 커다란 자루를 내려놓는다.
"열어 보겠나?"
첫 번째 자루를 열어젖히자.
"오?!"
오색의 빛을 머금은 곡물의 알갱이가 우수수 흘러나온다.
난 루나를 보며 물었다.
"어때? 네가 찾던 게 맞는 것 같아?"
"오오오옷! 이거다냥! 바로 이거다냥! 이게 말포르다냥!"
두 손으로 오색의 알갱이를 어루만지는 루나의 얼굴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 얼른 다음 것도 봐야겠다냥!"
뒤이어 푼 두 번째 가죽 자루에선.
노을 진 하늘처럼 노랗고도 붉은 벽돌 모양의 고체 덩어리들이 쏟아져 나온다.
"...."
벽돌의 끝부분을 조금 떼어 내어 맛을 보는 루나.
신중하게 맛을 음미하는 녀석의 모습은 전문가의 그것과 같아 보였다.
"오오옷! 버트가 맞다냥! 이게 버트다냥!"
"그래?"
겉보기엔 색깔만 다르지 버터랑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난 루나를 따라 벽돌 귀퉁이를 조금 떼어 내어 입에 털어 넣었다.
'와....'
이제야 알겠다.
왜 루나가 바깥 세계의 재료들을 쓰레기라고 칭했는지.
부드러운 정도는 말할 것도 없고.
풍미와 감칠맛까지도 그 깊이가 차원이 다르다.
"오오옷! 이것 보라냥! 이게 말링이다냥!"
그 외에도 길쭉한 통 모양의 식물이라거나.
커피콩과 흡사한 형태의 씨앗 따위가 가죽 자루에서 쏟아져 나올 때마다.
루나의 수염이 기쁨의 물결을 따라 춤을 춘다.
'녀석.'
겨우 빵 재료만으로도 저렇게 좋아하다니.
"이제 네가 원하던 빵을 만들 수 있겠네."
"그렇다냥! 이제 쓰레기 재료들과는 안녕이다냥!"
"좋아, 그럼 일단 이 재료들은 아공간에 넣...."
그러던 그때.
"쿠어어어엉! 왕이여! 저 귀한 재료들을 마구 퍼 주다니! 난 동의 못한다!"
얼굴에 기다란 흉터가 나 있는 곰 수인이 수왕에게 소리친다.
"봄바르, 그게 무슨 말이지?"
"귀한 재료는 귀하게 사용돼야 한다! 저놈은 귀한 재료를 다룰 실력이 없다! 재료를 버릴 뿐이다!"
곰 수인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자.
수왕이 멋쩍어하며 내게 말한다.
"내 수석 빵지기가 제법 거친 면이 있으나, 나쁜 뜻은 없으니 오해는 말았으면 한다."
딱히 상관은 없다.
나야 받을 재료만 받으면 그걸로 족하거든.
근데....
"흥! 왕궁에 인재가 없나 보냥?"
루나의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내 수발이나 들던 봄바르가 수석 빵지기냥? 레온 왕국의 빵 역사도 끝났다냥!"
"쿠어어어어! 오만하다! 네가 벌을 받는 동안 난 날마다 발전했고 시대는 계속 바뀐다! 발전하지 않으면 시간에 휩쓸려 사라질 뿐! 루나, 넌 퇴물이다! 퇴물인 네놈이 쓰기엔 아까운 재료들이다! 진정으로 빵을 아낀다면 재료를 포기해라!"
"흥, 못 본 사이에 헛소리만 늘었다냥? 혓바닥만 길어졌다냥!"
(전) 수석 빵지기와 (현) 수석 빵지기의 격렬한 말다툼이 이어진다.
그리고 끝내....
"쿠어어어어! 안 되겠군! 말보다 빵으로 보여 주겠다!"
"흥, 해 봐라냥!"
지들 멋대로 대결을 벌이려 하는 게 아닌가?
(전) 수석 빵지기 VS (현) 수석 빵지기라.
그건 나도 좀 궁금한데?
과연 수인들의 제빵 기술은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었을까?
"주인."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루나가 동그란 눈으로 날 올려다본다.
"음?"
"해도 되냥?"
"상관은 없는데, 이길 수 있겠어? 할 거라면 진심으로 짓밟아야 돼."
루나는 내 주방의 제빵 담당.
어디서 맞고 다니는 꼴은 내가 지켜볼 수 없다.
"걱정 마라냥! 내 빵은 세계 최고다냥!"
엄청난 자신감 선보이는 루나.
확실히 녀석이 만든 빵이 엄청 맛있긴 하지.
바깥에서는 물론이고, 탑 안에서도 루나가 만든 빵보다 맛있는 빵을 맛본 적이 없었으니까.
"근데 상대도 동의를 해야... 오."
수왕도 지금의 상황에 암묵적으로 동의를 한 것인지.
날 보며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래? 그럼 해 봐."
"고맙다냥!"
루나가 봄바르의 앞으로 걸어가는 사이.
마왕성의 집사, 헤르만이 나와 수왕을 보며 웃는다.
"허허허. 기왕 일이 이렇게 된 거, 두 분께서 공정한 심사를 맡으시는 건 어떻습니까?"
"좋은 생각이군요. 하지만 둘은 조금 부족한 감이 있으니 헤르만도 참여하시죠. 거기 용사까지 포함해서요."
"...."
수왕과 용사 그리고 헤르만과 나.
뜻하지 않게 제법 웅장한 심사진이 꾸려지지 않았는가?
"서로의 상황을 떠나 객관적인 평가를 약속할까요?"
"당연히 그래야지. 맛있는 빵이 곧 정의다."
"좋습니다. 아, 참."
난 수왕을 보며 슬며시 웃었다.
"그래도 명색이 수석 빵지기들의 대결인데, 그냥 승패가 결정 나면 재미가 덜하지 않을까요?"
"과연! 그것도 그렇군."
"그래서 말인데 저희끼리 간단한 내기라도 하지 않겠습니까?"
"...내기?"
* * *
어느새 준비된 테이블 위로 재료들이 가득 쌓여 있다.
"내가 먼저 시작하지!"
쿠어어어어-
포효와 함께 테이블을 쾅 내려치는 봄바르.
테이블에 놓여 있던 오색의 곡물들이 하늘 위로 튀어 오른다.
그 순간.
"오오...."
봄바르의 무수히 많은 팔들이 말포르를 낚아챈다.
사사사사삭-
곧 삽시간에 테이블 한쪽에 말포르의 껍질로 보이는 것들이 수북이 쌓여 간다.
'저것도 능력... 아니, 잔상이구나.'
엄청난 속도 때문에 팔이 여러 개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놀라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콰작-
그 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삽시간에 알맹이를 가루로 만들어 버린다.
'이야, 밑준비 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준비 작업이 끝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았다.
"쿠어어어! 시작해라!"
거기다가 다른 곰 수인들과의 체계적인 합도 놀라웠다.
반죽을 둥글게 빚는 곰 수인부터.
반죽을 어루만져 급속 발효를 하는 곰 수인까지.
마치 서로가 한 몸인 것처럼 어우러져 빵을 완성해 나간다.
'과연 저쪽도 정예 주방 멤버들인 건가.'
음, 상대가 만만찮은 것 같은데.
루나는 괜찮은 건가?
난 힐끔 루나를 살폈다.
"...."
봄바르의 제빵 과정을 유심히 지켜보는 녀석의 눈에는.
짙은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괜찮아 보이네.'
일단 계속 지켜보도록 할까.
잠시 후.
덜커덕-
간이 화덕에서 빵이 놓인 판을 꺼내는 봄바르.
얼마나 집중을 했던지 털 곳곳이 젖어 있다.
봄바르가 자신 있게 판을 들고 심사진 앞으로 다가온다.
"완성이다! 궁극의 빵, 회오리 빵이다!"
"호오...."
난 판 위에 놓인 빵을 내려다봤다.
'뭘 만드나 했더니 페이스트리였나.'
둥근 회오리 모양의 빵.
그 위에 무언가를 발랐는지 윤기가 반질거린다.
"수천 번 반죽을 돌려 탄력과 찰기를 더했고, 우리 곰족의 비전 꿀, 로열 봉봉으로 향과 달콤함을 더했다. 먹어라!"
"허허, 좋은 냄새군요. 마왕님의 간식과도 비견될 정도로 좋은 향기입니다. 끝나지 않을 영원한 아름다움, 그러나 한순간에 사라질 덧없음을 보는 것 같습니다."
어이, 헤르만.
아직 먹지도 않았는데 칭찬이 너무 후한 것 아냐?
"외관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맛'이죠."
"먹어라. 그리고 느껴라, 레온 왕국의 수석 빵지기의 힘을!"
꽤 자신만만하네.
어디, 그 자신감만큼 실력이 뒷받침되는지, 한번 먹어 볼까.
난 페이스트리를 덥석 물었다.
"음...."
이건 생각 이상인데?
겉은 이를 감싸며 뭉갤 정도로 바삭한데.
속에선 또 결을 따라 부드러움과 촉촉함이 느껴진다.
'거기다가 비전 꿀로 마무리한 게 임팩트 있어.'
달지만 자극적이지 않다.
그래서 오히려 빵의 풍미를 몇 단계 더 올려 준다.
패도적인 제빵 과정과 달리.
철저한 계산과 계산이 거듭되어 치밀하게 완성된 빵이다.
'이 정도면 루나가 만들던 구름빵과도 견줄 만한 정도인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그 이상....'
당장 카페의 신제품으로 내놓아도 좋을 정도의 완성도다.
"한 층 한 층 치밀하게 더해진 풍미가 재밌었습니다. 그 어떤 '맛없음'도 허용하지 않는... 그야말로 제왕의 빵이라는 말이 어울리겠군요."
"역시 왕국의 수석 빵지기다운 빵이었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고의 빵이었다."
거기다가 쏟아지는 심사진의 극찬.
그리고.
팟-
[9]
전원 내가 나눠 준 숫자 9가 적힌 팻말을 들어 보인다.
10점 만점에 9점.
나도 9점이 적힌 팻말을 들 수밖에 없었다.
'이거... 루나가 이길 수 있으려나?'
처음에는 루나의 승리를 의심치 않았으나.
이런 빵을 맛보고 나니 조금은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승패를 떠나 루나의 '빵지기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
난 흘끔 루나를 살폈다.
바삭-
녀석은 봄바르가 만든 빵을 먹어 보고 있었다.
"과연, 잘 알았다냥. 맛있는 빵이다냥."
"쿠오오오오오! 이제 알겠나! 네놈이 도태되는 동안 빵지기는 진화를 거듭했다! 지금이라도 너의 패배를 인정해라"
승리를 확신하는 봄바르의 도발이 루나의 면전에 작렬한다!
그러나.
"현 왕국의 수석 빵지기의 수준이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냥."
"그렇다! 이게 나의...."
"한심해서 한숨이 나온다냥."
"쿠오?!"
194화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3)
루나가 푹 한숨을 내쉬자.
봄바르는 당황하여 말까지 더듬거린다.
"내 빵이... 한심하다고?!"
"그래도 조금은 기대를 했다냥. 내가 오랜 기간 봉인되어 있는 동안, 수인들의 제빵 기술이 얼마나 늘었을지 말이다냥. 그런데...."
다시금 푹 한숨을 내쉬는 루나.
"오히려 전보다 실력이 퇴보했다냥. 이렇다 할 특색도, 감동도 없었다냥. 오직 재료에만 의존하다 못해 재료에 삼켜진 빵이었다냥. 실망이 크다냥."
쿠오오오!
끝도 없이 흘러나오는 신랄한 비판 때문일까.
곰 수인의 입에서 분노에 찬 포효가 터져 나온다.
"그럼 네가 만들어 봐라! 나보다 더 나은 빵을 만들어 증명해 보란 말이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다냥."
두 발을 앞으로 쭉 내뻗는 루나.
"냐아아아아앙!"
그 순간.
눈부신 빛무리가 번쩍였다가 사라지고.
두둥-
[따끈따끈 냥냥 베이커리]라는 간판이 붙은 벽돌집이 모습을 드러낸다.
냥, 냥-
말포르가 담긴 포대와 버트 등, 각종 재료를 들고.
따끈따끈 냥냥 베이커리 안으로 들어가는 고양이들.
'시작하는구나!'
베이커리 안에 불이 들어옴으로써.
본격적인 제빵이 시작됐음을 알린다.
'으음, 잘해야 할 텐데.'
솔직히 봄바르의 회오리 빵은 꽤나 충격이었다.
이제껏 내가 먹었던 그 어떤 빵들보다도 단연코 맛있었으니까.
'심지어 루나가 만들었던 빵보다 맛있었어.'
루나가 바깥 세계에서 선보였던 빵들도 맛있었으나.
봄바르의 회오리 빵에 비하면 급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루나도 탑의 소재로 제빵을 하는 거니까.'
자칭 쓰레기 같은 재료들로도 압도적인 빵을 만들어 냈었으니.
탑 소재의 재료들로는 분명 그보다 더 엄청난 빵을 만들어 낼 수 있을 터!
"여기선 잘 보이지 않는데, 가까이 가서 보실까요?"
"그게 좋겠군."
나를 비롯한 심사원 일동은 베이커리에 바짝 붙어 내부를 관찰했다.
냥, 냥-
하얀 케이프를 입은 고양이들이 바쁜 손짓으로 빵을 만들고 있다.
"우리는 최고의 빵기지들이다냥! 오늘은 무식한 곰 녀석을 혼내 준다냥!"
섬세하게 버트와 말포르를 섞어 덩어리를 만들고 있는 고양이들.
바쁜 발놀림을 따라 덩어리는 윤기 나는 반죽이 되어 갔고.
마치 하나의 예술 작품을 닮아 가며 정교한 모양과 질감을 갖추어 간다.
"비켜라냥! 내가 굽겠다냥!"
몸소 나서 화덕 앞에서 둥근 반죽이 황금색으로 구워지도록 기다리는 루나의 모습에선.
여느 전문가가 내뿜을 법한 포스가 느껴진다.
"허...."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왕의 입에서 낮은 탄성이 흘러나온다.
"솜씨가 전혀 녹슬지 않았군."
"왕이시여, 빵을 만드는 속도만큼은 봄바르 못지않을 정도로 빠른 것 같습니다."
"확실히 예전보다도 빨라진 것 같군. 예전에는 저렇게 빠르지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용사와 수왕의 대화를 들은 난 속으로 웃었다.
그럴 수밖에 없지.
매일 카페에 납품할 엄청난 수의 빵을 만들다 보면.
싫어도 단련이 될 수밖에 없거든.
"분명 오랜 시간 봉인을 당했을 터인데도 재료를 다루는 저 섬세한 손길은...."
루나가 생각 이상으로 빵을 잘 만들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수왕이 굳은 표정으로 내게 묻는다.
"상점주, 혹시 자네도 저명한 빵지기인 건가? 그래서 루나와 함께 특훈을 했다든가, 아니면...."
"예? 푸하하하! 그럴 리가요? 전 평범한 상점주일 뿐, 저건 루나의 순수한 실력입니다."
"음... 그런가."
복잡한 표정으로 루나를 바라보던 레길론이 끝내 등을 돌려 버리고 만다.
"꽤나 충격을 받으신 모양입니다."
"충격이라.... 그럴지도 모르죠."
헤르만의 말에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원래 남의 손에 들린 빵이 더 탐스러워 보이는 법이죠. 하물며 그게 원래 자기 것이었다면 더더욱 말이죠."
"허허허."
"아무튼 일단 저희도 자리로 돌아가서 기다릴까요?"
다시금 심사진의 자리로 돌아가 몇 분이나 기다렸을까.
덜컹-
따끈따끈 냥냥 베이커리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오래 기다렸다냥! 완성이다냥!"
루나와 베이커리 고양이 일동이 커다란 쟁반을 든 채 밖으로 나온다.
그러곤 쟁반을 심사진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고양이 일동.
"오오, 이건...."
헤르만이 쟁반 위에 놓여 있는 빵을 보곤 감탄을 금치 못한다.
"대담하군요! 설마 똑같은 회오리 빵을 준비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일부러 대전 상대와 같은 빵을 만드신 이유가 있는 겁니까?"
헤르만의 물음에 루나가 수염을 씰룩거린다.
"한심한 후배 녀석에게 한 수 가르쳐 주려는 거다냥!"
"오오, 과연...!"
그러나 감탄하는 헤르만과 달리.
수왕은 말없이 자기 몫의 빵을 집더니 코를 벌름거린다.
"냄새는 나쁘지 않군.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맛이다! 오직 맛만이 전부일 뿐!"
레길론이 포효하며 '루나표' 회오리 빵을 덥석 잡는다.
"네 빵을 평가해 주마!"
* * *
먼저 손가락 끝으로 빵의 질감을 섬세하게 느끼는 레길론.
'갓 구운 것치곤 표면이 꽤 견고하군. 그러면서도 부드러워.'
언뜻 바삭하면서도 견고한 외관이지만 손에 쥐니.
부드러우면서도 표면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굽기의 정도는... 완벽하다.'
역시 전직 수석 빵지기 출신답게.
수준급의 솜씨다.
'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맛!'
입을 쩍 벌리곤 빵을 덥석 베어 무는 레길론.
바삭, 바사삭-
날카로운 이빨이 크런치 한 표면을 파고들자.
푹신한 식감과 더불어 고소한 향미가 코끝을 감싼다.
'버트의 풍미를 극대화했다. 솜씨는 여전하군....'
하지만 무엇보다 대단한 건....
'터무니없을 정도로 재료의 조화가 훌륭하다.'
봄바르의 빵은 계산적이며 강렬했었다.
저마다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는 재료들을 한 겹, 한 겹 쌓아 올려 궁극의 맛을 추구했다.
그러나 이 빵은 그와는 결이 달랐다.
달콤하면서도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하나의 맛이 다른 맛을 찍어 눌러 삼켜 버리는 것이 아닌.
맛과 맛이 맞물리고 맞물려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확실히 둘 다 수석 빵지기라는 자리에 걸맞은 실력들을 갖고 있군.'
봄바르 그리고 루나.
둘 다 수석 빵지기라는 타이틀을 달았고, 또 달고 있는 만큼.
두 빵지기의 실력은 수준급이라는 말도 부족할 정도로 완벽에 가까웠다.
'하지만....'
두 빵지기가 만든 빵에는 한 가지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그건 바로....
"결정했다."
"저도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럼 점수를 공개하죠."
팟-
[10]
10점 만점에 10점.
누구 하나 빠짐없이 10점이 적힌 팻말을 들자.
"쿠오오오! 왕이시여! 전 납득할 수 없습니다!"
봄바르가 득달같이 항의한다.
"그래, 이해하기 어렵겠지."
수왕 또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네 빵도, 루나가 만든 빵도 완벽했다. 다만, 루나가 만든 빵은 완벽이라는 벽을 넘어섰다."
"벽을 넘어섰다... 는 겁니까?"
"그렇다. 말포르, 말링, 버트... 모두 자기주장이 강한 재료들. 그렇기에 자칫 잘못 다뤘다간 그 균형이 어그러져 쓰레기만도 못한 결과물이 나온다."
봄바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수왕이 계속 말을 잇는다.
"네가 만든 빵은 그 균형을 완벽히 충족시킨 궁극의 빵이었다."
"쿠오오.... 그런데 어째서...."
"루나의 빵은 단순히 재료의 균형을 맞춘 것을 넘어, 재료들의 완벽한 조화를 이뤄 냈다. 그야말로 지고의 빵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말이다."
봄바르에게 루나가 만든 빵을 내민다.
"직접 먹어 봐라."
"...."
말없이 빵을 덥석 물어뜯는 봄바르.
"...!"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얼어붙은 채 자리에서 움직이질 못하는 봄바르.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이런 차이가...."
자리에서 중얼거림을 반복하던 곰 수인이 돌연.
루나의 앞으로 다가간다.
"쿠오오오! 좋은 승부였다. 이번 승부로 나의 부족한 면을 알게 되었다!"
"이제 알았냥? 내 빵은 굉장하다냥!"
"그 말대로다! 네 빵은 굉장하다! 부디 내게 그 기술을 전수해 줄 생각이 없나?!"
바닥에 납작 엎드린 봄바르.
그리고 그런 봄바르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루나.
"흠, 흠이다냥!"
"그게 무슨...."
"너무 둔탁해 보여서 탈락이다냥!"
쿠오오오오오오-
봄바르와 루나가 대화를 나누는 와중.
"...."
수왕은 말없이 빵을 한입 더 베어 물며 눈을 감았다.
아하하하하-
한 폭의 그림이 펼쳐지는 듯하다.
손과 손을 맞잡은 이들이....
아하하하하하하핳-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 핀 수인과 마족이 서로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말이다.
천천히 두 눈을 뜨는 레길론.
"괘씸하군."
"맛이 괘씸하다는 거냥?"
"완벽한 맛의 조화였다. 어떤 재료 하나 튀는 것 없이 각각의 자리에서 각자의 맛을 고수하고 있다. 마치 왕국의 백성들처럼, 평범한 마족들처럼 말이다."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을 이어 갔다.
"궁극의 맛과 도시의 이념까지 담은 빵이라.... 그야말로 지고의 빵이었다."
"냐냐냐냥! 이제 알았냥? 내 빵은 맛있다냥! 특히 식어도 맛있다냥!"
우쭐거리는 루나에게 수왕이 살짝 고개를 숙인다.
"사과하마."
"냥?"
"역시 넌 최고의 수석 빵지기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만, 혹시 왕국으로 복귀할 생각은 없나?"
* * *
작은 소동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다.
난 어깨에 올라탄 루나를 힐끔 보며 물었다.
"후우, 이만하면 충분히 먹어 보지 않았어?"
"아직이다냥. 빵의 길에는 끝이 없다냥!"
"...너도 참 대단하다."
며칠간 엔드미엘에 체류하며.
마족, 수인이 운영하는 빵집은 거의 다 돌아본 것 같건만.
빵을 향한 녀석의 열정은 아직도 불타는 듯했다.
"그럼 딱 세 곳만 더 들러 보고 돌아가자."
"알았다냥! 그보다 재료들은 잘 챙겼냥?!"
"당연하지."
말포르, 말링, 버트 등.
수왕에게서 받기로 했던 물품들은 모두 받아 아공간에 잘 넣어 뒀다.
'으흐흐, 거기다가 루나가 이긴 덕에 이후에도 재료들을 계속 공급 받기로 해 뒀으니.'
이로써 빵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월등한 품질의 재료들을 계속 구하는 데 지장이 없을 터.
'정말 완벽한 일정이었어!'
마음 같아선 레온 왕국도 둘러보고 싶긴 한데.
그러려면 시간이 엄청 들겠지.
'편의점은 계속 운영해야 하니까.'
이제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도 서서히 끝나 가는 상황.
그에 대한 정산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많단 말이지.
"그보다 루나, 수왕의 제의를 거절해도 괜찮겠어?"
"상관없다냥. 봄바르가 만든 빵이나 먹으며 후회하라고 하라냥!"
이런 차가운 고양이 같으니.
물론 네가 고민했어도 내가 거절했을 거지만.
"그래, 그 곰돌이 녀석 빵도 나쁘지 않더라. 그보다 다음 가게는 어디야?"
"해골이 운영한다는 쁘띠쁘띠 본 베이커리다냥! 마족 출신인데도 솜씨가 아주 뛰어나다는 말을 들었다냥!"
"오...."
내가 루나와 대화하며 엔드미엘의 거리를 걷던 그때.
[역행자의 의지를 잇는 3인의 마령 공략에 성공하였습니다.]
[퀘스트, '영혼의 순환을 위하여'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였습니다.]
[최초로 60층, 명계를 클리어 하였습니다.]
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르는 게 아닌가?
195화 정산하겠습니다 (1)
'오오, 뭐야! 60층 공략에 성공했다고?!'
가만있자....
얼추 한 달 정도인가?
예상했던 것에 비해 조금 느렸네.
'못해도 3주 정도면 클리어 할 줄 알았더니.'
파훼하기 어려운 관문들도 거의 자동문 수준으로 만들어 준 건 기본이요.
능력을 봉인하는 족쇄도 깨부숴 준 데다가, 층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주지 않았던가?
'뭐, 그래도 클리어 했으면 됐다.'
난 고개를 들어 지그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꼭 지금의 내 기분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로써 마침내 60층 공략까지 끝마쳤구나!'
관리자, 바르바토스에게서 2년 내로 60층까지 공략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
탑 공략에 착수했던 게 엊그제 같건만.
'얼추 1년 반 정도 걸린 건가.'
길면 길고, 또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난 픽 실소를 흘렸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언제 60층까지 올라가나 생각했었는데, 참....'
뭔가 기분이 묘하다.
그러나 싱숭생숭한 이 감정도 잠시뿐.
난 최대한 차분히 생각을 이어 갔다.
'이제 이걸로 종말의 탑은 완전히 안전해진 걸까?'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 유지인 걸까?
또 일정 시간 내로 더 높은 층을 공략해야 되는 건 아닐까?
여러 상황과 가정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래도 해야 할 건 하나겠지.'
계속 탑을 공략하여 꼭대기를 밟는 것.
그것이 1순위 덕목이 아니겠는가?
내가 깊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안 갈 거냥?"
루나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음?"
"늦으면 전부 매진될 거다냥! 저걸 보라냥!"
과연 루나의 말대로다.
뼈다귀로 치장한 쁘띠쁘띠 본 베이커리 앞에는 공략자들 외에도.
수인과 마족들이 기다란 줄을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언제 저렇게 늘어났대?"
"유명한 곳은 다 저렇다냥! 인성 카페도 그렇잖냥?"
"쉿. 탑에 들어오면 바깥 세계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었지?"
"냥! 깜박했다냥.... 주의하겠다냥."
앞발로 입을 꽉 틀어막는 루나를 보며.
난 피식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잠깐만, 가기 전에 보상만 확인하고."
난 클리어 메시지에 이어 떠오른 메시지를 빠르게 확인했다.
[명계에 드리웠던 암운을 무사히 걷어 내어 다음과 같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칭호 '최초로 60층을 돌파한 자'가 주어집니다.]
[최초로 60층을 돌파한 이들에게 보상이 주어지며, 보상은 활약 여부에 따라 차등 지급 됩니다.]
[보상으로 변화와 미지의 상자가 지급됩니다.]
최초로 60층을 돌파한 자
설명: 명계에 드리운 암운을 걷어 내어 최초로 60층을 공략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이다.
내용: 이 칭호를 보유할 시, 민첩이 30 상승한다.
'오오! 민첩을 30이나 준다고? 크으, 확실히 층 앞자리 숫자가 6이라 그런가? 스탯 주는 게 남다르네!'
칭호의 효과에 스탯 30이 붙어 있는 경우는 처음이었던 만큼.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어디 보자. 상자는 또 뭘까.'
난 칭호에 이어 보상으로 주어진 붉은 상자를 살펴봤다.
변화와 미지의 상자
설명: 미지의 가능성이 담겨 있는 상자이다.
내용: ??
제한 사항: 아직 변화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 개봉할 수 없다.
'엥?'
이게 무슨 소리야??
아직 변화의 때가 도래하지 않아서 사용을 못 한다니?
'설마 특정 기믹을 수행해야만 개봉할 수가 있는 건가?'
근데 변화의 때라는 게 도대체 뭔데?
적어도 작은 단서라도 있어야 뭐라도 추측을 해 보겠는데.
이건 뭐 사막 한가운데서 바늘 찾는 꼴이 아닌가?
'음... 됐다. 일단 이건 쟁여 놓자. 변화의 때인지 뭔지가 오거든 쓸데가 있겠지.'
난 상자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은 뒤.
루나와 함께 베이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주인이 탑에서 복귀한 지도 며칠이 흘렀다.
위이이이잉-
"크읏...!"
오늘도 어김없이 식기세척기를 돌리는 발리나.
커피콩을 볶는 것은 기본이요.
주방 청소, 빨래 등등, 집 안의 모든 일들은 여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팡, 팡-
발리나가 젖은 수건들을 빨래 건조대에 널며 한숨을 내쉰다.
"이런 건 용아병들을 시켜도 될 텐데...."
주인이 부리는 용아병들을 주방에 조금만 투입해도.
지금보다 근무 환경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건만.
-용아병? 용아병들은 편의점 잡일을 처리하는 데 써야 돼서. 식기세척기 사 줬잖아? 그게 네 후임이라니까?
-아, 그래! 조만간 새로운 후임을 하나 더 데리고 올게. 탈수기라고, 꽤 요긴할 거야.
-일단 난 약속이 있어서 나가야 되니까, 일 열심히 하고 있어.
몇 시간 전, 주인이 했던 멘트들을 떠올리며.
수건을 든 손을 바르르 떠는 발리나.
"후우, 과하게 흥분했군."
그녀는 다시금 수건을 접으며 TV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오늘도 종말의 탑에서 벌어진 특이한 이슈들을 모아 보는 시간! '6시 내 종말'의 MC 오하영입니다!]
[안녕하세요! MC 박지석입니다.]
'등반자들, 아니 인간들도 참 별나단 말이지.'
탑이고 바깥 세계고 환경만 다르다 뿐이지.
결국 살아간다는 건 똑같건만.
[...먼저 이번 주 이슈 랭킹 10위, '빈 집인 줄 알았더니 마녀가 살고 있었다'부터 만나 보시죠.]
'흠....'
붉은 피를 뒤집어쓴 것 같은 마녀가 등반자를 뒤쫓는 장면을 보며.
발리나는 심드렁하게 하품을 한다.
"별것 없어 보이는데, 저런 게 나보다 높은 층에 있다니."
그녀가 있었던 차원 회랑이 53층이었건만.
겨우 피나 뚝뚝 흘리는 늙은 노파 따위가 56층의 보스라니.
타닥, 타다닥-
괜히 자존심이 긁힌 건지.
수건을 접는 발리나의 손놀림이 빨라진다.
[자, 이어서 이슈 랭킹 9위, '오싹오싹 항아리 깨기!' 나오는 건 보물일까요? 아니면 꽝?!]
[이슈 랭킹 8위, '끝나지 않는 아득한 밤!' 상위 공략자들만이 초대되는 수상쩍은 공간! 과연 이곳에서 무슨 일이 펼쳐졌던 걸까요?]
.
.
.
[...이슈 랭킹 3위! 종족과 갈등 그리고 이념마저 초월했다! '용사와 마왕이 한 팀이라면?'이 한 단계 내려왔군요!]
[절대로 섞일 수 없는 두 종족의 화합이라니. 언제고 우리도 통일이 되겠죠?]
[하하하! 그 간절한 염원을 담아 이슈 랭킹 2위!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경쟁하고 포인트를 벌어 아지트를 획득하라! 한동안 요지부동의 1위였지만 이번 주, 2위로 내려갔죠.]
TV속의 두 MC가 활짝 웃는다.
[저도 포인트를 모아서 집을 사고 싶네요. 신용카드 포인트로는 안 될까요?]
[하하하, 포인트도 필요 없는 세계에선 누구나 건물주가 될 수 있죠. 대망의 1위! '선구자들의 60층, 명계 공략 영상'입니다!]
[지석 씨, 집은 사후 세계에서 장만하라는 건가요?]
[하하하, 선행을 베풀면 사후 세계에서라도 좋은 장소에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호호호, 대망의 1위를 영상으로 만나 보시죠!]
화면에서 곧 백색과 흑색의 기운이 소용돌이치는 일대를 비춰 준다.
이미 한바탕 치열한 전투를 치른 건지.
바닥 곳곳에 깊은 자국이 남아 있었고.
선구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툭-
이지수의 눈썹에 매달려 있던 핏방울이 툭 바닥에 떨어진다.
[...끝이다.]
이지수가 바닥에 누워 있는 세 명의 노인을 바라보며 말하자.
[클클클....]
[어리석은 것들.... 영원한 속박을, 끝없는 윤회의 사슬을 끊을 기회를 스스로 마다하다니.... 쿨럭....]
[환생은... 저주인 것을.]
저마다 비틀린 미소를 짓는 노인들.
[그래서 멀쩡한 영혼들을 악령으로 만들었나?]
[클클클... 우리가 악령을 만든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을 구원해 준 것뿐이지.]
[반복되는 영원한 흐름 속에서 빼내어 준 거다.]
[어리석은 것... 네년은 끝까지 이해하지 못할 게다. 역행자님의 위대한 가르침을... 위대하신 그분의 뜻을 말이다!]
이지수가 무심한 표정으로 노인들을 내려다본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딱히 이해하고 싶지도 않아. 난 그저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야.]
화르르르륵-
이지수의 머리에서부터 뻗어 나온 새하얀 백염이.
순식간에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크어어어! 역행자시여!]
[당신의 뜻을 따르던 마령들이 이곳에 있었나이다!]
[저희를 기억하소서!]
키아아아아아아-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치솟는 백염 속에서 일렁거리고.
세 줄기의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가 사그라진다.
그 순간.
[아아아아아....]
소용돌이 속에서 새하얀 연기들이 흘러나오며.
무수히 많은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언니... 고마... 워.... 정말 고....]
[우리는 다시....]
[....]
물끄러미 혼령들을 바라보는 이지수의 등을 보여 주던 화면에서.
어느덧 두 MC가 다시금 모습을 드러낸다.
[참 안타까운 광경이었죠. 죽어서도 누군가에게 이용당한다면 참 괴로울 것 같아요.]
[먼 길을 가실 이들의 앞길에 평화만이 있길 바랍니다. 하하, 그래도 선구자들이 해방을 시켜 줬으니 이제 안심해도 될 것 같군요. 아 참, 그리고 하영 씨! 오늘은 놀랍게도 0위도 있다는 것, 알고 계시나요?]
[네?! 0위요?]
놀라는 여자 MC에게 남자 MC가 고개를 끄덕인다.
[영상에서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았지만, 60층의 원주민들 대부분이 상점주에 대해 이야기한 사실, 알고 계시나요?]
[네에에?! 아뇨! 전 전혀 몰랐어요!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최초로 60층에 진입한 건 선구자들 아닌가요?!]
[그렇죠! 그래서 이번 영상이 상점주가 사실 관리자라고 주장하는 '관리자파'의 주장에 더 설득력을....]
둥-
리모컨으로 TV를 꺼 버린 발리나.
그녀가 작게 중얼거린다.
"관리자는 무슨...."
또 한동안 인터넷과 각종 언론 매체들에서 주인의 소식을 엄청나게 쏟아 낼 듯하다.
* * *
며칠 뒤.
41층, 포탑의 나라.
하플링들이 거니는 대로변의 한쪽에 자리한 편의점 주변으로 수많은 공략자들이 몰려 있다.
"젠장, 진짜 열심히 사냥했는데...."
"난 반복 퀘스트만 미친 듯이 했다고!"
"멍청하긴! 반복 퀘스트는 별로 점수를 안 준다고! 공략하지 않은 층을 공략해야 점수를 많이 받지!"
오늘이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의 마감 날인 만큼.
모두가 클랜이 벌어들인 점수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솔직히 3위권은 바라지도 않았어. 그냥 참여하는 데 의의를 두는 거지."
"하긴, 솔직히 1등은 무조건 선구자들이잖아?"
"그러고 보니 2, 3등은 어디야? 막판까지 엄청나게 바뀌는 것 같았는데."
그 말대로다.
클랜 아지트를 얻을 수 있는 클랜 순위는 3등까지.
1등이야 선구자들이 알 박기를 했으니 제외한다고 치더라도.
2등, 3등은 도전할 만한 자리인 것도 명백한 사실!
그렇기에 수많은 클랜들이 2, 3등을 노리고자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점수를 올리고자.
공략을 진행한 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정보였다.
"잠깐만. 어디... 오!"
공략자들이 한창 대화를 나누던 그때.
딸랑-
경쾌한 종소리와 더불어 편의점 안에서 상점주가 걸어 나온다.
"오오! 나왔다!"
"상점주!"
공략자들의 환호성에 부응하듯.
편의점의 간판 위에 현수막을 거는 상점주.
펄럭-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정산의 날]
196화 정산하겠습니다 (2)
정확히 고정된 현수막이 바람을 따라 한껏 펄럭거리자.
상점주는 비로소 등을 돌려 공략자들을 바라본다.
"오늘도 환상의 상점을 찾아 주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오오오오!
"오늘은 여러분이 그토록 기다렸을,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의 막이 내리는 날이죠. 다들 그간 공헌도는 많이 모으셨나요?"
"말도 말라고! 엄청 굴렀다고!"
"다음 층으로 나아가려고 얼마나 개고생한 줄 알아?!"
그러나 투덜거리는 입과 달리.
"클랜 아지트를 얻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래도 우리 클랜원들도 많이 성장했다. 단합력도 더 좋아졌고."
"우리 클랜도 원래 각자도생하는 클랜이었는데 이번 페스티벌 덕분에 처음으로 한데 모였었어."
"클랜 아지트까지 얻었다면 좋았겠지만,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페스티벌 중간까지는 꽤 할 만했잖아? 끗발이 딸려서 밀려나긴 했지만."
대부분의 얼굴에는 만족감이 느껴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자! 대화는 거기까지들 하시고, 이쪽을 주목해 주실까요?"
상점주의 말을 따라 편의점 쪽을 바라보는 공략자들.
"이번 페스티벌에 정말 많은 클랜들이 참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치열한 경쟁을 거듭한 끝에 3개의 클랜이 1위부터 3위의 자리를 각각 차지했죠!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보상을 수여하겠습니다! 3위! 저니맨 클랜!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그러나.
잠잠-
앞으로 나오는 이들이 없자.
공략자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숙덕거린다.
"뭐야. 설마 안 온 거야?"
"설마 어디서 전멸이라도 한 것 아냐?"
"에이... 조금 늦는 거겠지."
숙덕거림이 웅성거림으로 변해 가려던 찰나.
한 공략자가 자신의 실버-패를 흔들며 묻는다.
"상점주! 만약 저니맨 클랜이 참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럴 경우 기권으로 간주하여 보상이 다음 순위의 클랜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오오...."
모두의 시선이 지식 클랜 쪽으로 쏠리려던 중.
상점주의 목소리가 다시금 모두를 주목시킨다.
"먼저 2등부터 수상하도록 하죠. 망치 클랜! 앞으로 나와 주시겠습니까?!"
"우하하하하하! 지금 나간다!"
커다란 워해머를 붕붕 흔들어 대며 상점주에게 나아가는 무라단과.
그 뒤를 따르는 망치 클랜원들.
"먼저 2등을 달성하신 걸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다! 푸하하하!"
"망치 클랜은 총 공헌도 7,240으로 2위를 달성하였습니다. 3위인 저니맨 클랜과 불과 300점 차이밖에 나지 않을 정도로 박빙이었고요."
상점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무라단이 껄껄 웃으며 소리친다.
"선구자들도 아니고, 다른 녀석들한테 져서야 쓰나!"
"그렇게 많은 공헌도를 올린 비결이 있으실까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는 무라단.
"눈을 뜨면 잠에 드는 그 순간까지 공략에만 매진했지! 푸하하하핳!"
"어쩐지 다들 눈이 시뻘건 게 이유가 있었군요.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2등을 달성한 망치 클랜의 클랜원들에게는 각각 특제 우표, 강화권&분해권을 10장씩! 그리고 클랜 아지트 중짜를 수여하겠습니다!"
"오오!"
"클랜 아지트는 클랜을 대표하는 클랜장에게 수여하겠습니다."
상점주가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를 꺼내어 무라단에게 내민다.
"자, 받으시죠."
"...음?"
상점주의 손을 쓱 내려다보더니.
두 눈을 비비곤 게슴츠레한 눈으로 상점주와 물건을 번갈아 쳐다보는 무라단.
"이건 돌이 아닌가?!"
표면이 반짝이는 매끈한 검은 돌.
그 모양새가 제법 예쁘긴 했으나 클랜 아지트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분명 전에는 모래성 같은 아지트를...."
"아아, 그건 모델하우스였습니다. 이것도 외관만 다르지 사용 방법은 똑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죠!"
갑자기 주먹을 꽉 쥐는 상점주.
그의 손 틈으로 검은 연기가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화아아아아악-
삽시간에 높이 뻗어 오르며 하나의 형태로 변모한다.
"이, 이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피어난 꽃이 이러할까.
빛나는 하늘 아래에 피어난 커다랗고도 검은 꽃을 보며.
무라단이 입을 떡 벌린다.
"이게 망치 클랜의 클랜 아지트...."
"네, 메인 하우스: 블랙 로즈입니다. 주 소재는 킹 쉘의 대형 진주, 어둠서리꽃이며, 기타 부재료로...."
한창 상점주가 클랜 아지트에 대해 설명을 이어 나가던 중.
"설명은 됐다! 일단 바로 내부를 보고 싶다!"
흥분한 무라단이 콧김을 내뿜으며 클랜 아지트로 돌격한다.
"이런, 여전히 성격이 급하시군요. 다른 클랜원분들도 구경하러 가시죠."
"오오오오!"
머뭇거리던 망치 클랜원들까지 클랜장의 뒤를 쫓자.
"미쳤군. 크기 좀 봐! 못해도 200명은 넘게 수용하겠는데?"
"아까 돌 못 봤어? 갖고 다니기에도 편하겠어."
"이 얼간이들아! 그것도 그거지만 클랜 아지트의 핵심은 버프라고, 버프! 저 아지트에서 쉬면 얼마나 많은 버프가 걸리는지 알아? 휴식부터 해서 스탯 버프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공략자들 사이에서 부러움에 찬 음성이 흘러나온다.
"근데 2등의 클랜 아지트가 저 정도면 도대체 1등 보상은 얼마나 좋을까?"
모두의 시선이 선구자들이 서 있는 방향으로 향한다.
"부럽군...."
"그래도 저 미친 녀석들은 받을 만하지. 바로 얼마 전에 60층 공략도 성공했다며?"
"어떻게 저렇게 빠른 속도로 공략할 수 있는 거지? 뭔가 비법 같은 게 있나?"
공략자들이 수군거리던 그때.
"다음으로 1등의 수상이 있겠습니다! 선구자들, 나와 주시겠습니까?"
상점주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다.
저벅-
홍염, 이지수를 필두로 성녀, 자연의 수호자, 빙결마제 등.
하나하나가 거물급인 대형 클랜의 등장에.
모두가 위축된 듯 숨을 죽인다.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상점주와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이지수.
"60층 공략에 성공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고마워."
살며시 웃던 이지수가 슬쩍 목소리를 낮춘다.
"근데 60층에 뭘 한 거야?"
"네? 뭘 하다니요?"
모르는 척 되묻는 상점주를 보며.
이지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어 보인다.
"그냥 물어봤어."
"하하, 다음에는 좀 더 재밌는 농담을 준비해 오시면 좋겠군요. 아무튼 1등 달성을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10,000점을 넘길 줄은 몰랐습니다. 어떻게 한 겁니까?!"
능글맞은 그의 모습에 이지수는 작게 웃으며 말한다.
"아무래도 60층 공략에 성공한 게 컸던 것 같아. 한 번도 공략되지 않았던 층이라 그런지 몰라도, 공헌도가 더 많이 오르는 것 같더라고."
"과연!"
"1등 보상이 클랜 아지트 대짜였지?"
"네. 1등을 달성한 선구자들의 클랜원들 또한 각각 특제 우표, 강화권&분해권을 10장씩! 그리고 클랜 아지트 대짜를 수여하겠습니다!"
이번에도 주머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드는 상점주.
"자, 받으시죠!"
"이건...."
이지수가 상점주의 손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주사위네?"
주사위라 하기엔 그 사이즈가 주먹만 했으나.
정육면체에 숫자가 1부터 6까지 적혀 있으니 주사위라 봐도 좋을 터.
"네, 메인 하우스: 룰렛 하우스입니다. 주 소재는 골드 드래곤의 비늘과 베히모스의 뼈 그리고...."
하나하나 나열되는 재료들의 이름을 들은 이지수가 입을 떡 벌린다.
"다 네임드급들이잖아?"
"하하, 1등 보상인데 그 정도는 돼야죠. 아무튼 그 주사위를 굴려 보시겠습니까?"
"그래."
이지수가 주사위를 바닥에 던지자.
[6]이 적힌 주사위의 표면이 하늘을 바라본다.
그 순간.
촤라라라라라락-
주사위의 표면이 펼쳐지며 그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다.
"으음.... 어? 와아...."
빛이 사그라진 자리.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건 바다, 아니.
정확히는 바다의 일부를 큐브 형태로 조각내어.
그대로 가져온 것 같은 구조물이었다.
"...."
천천히 구조물의 앞으로 다가가는 이지수.
"...바다 냄새가 나네."
쏴아아아아-
시원하면서도 청량한 향이 가슴을 뚫어 주는 것 같다.
눈을 감으니 정말 바다와 인접한 도시로 온 듯한 기분까지 든다.
"냄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냄새를 차단하는 기능도 있으니 참고하시길."
"근데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만약 다른 숫자가 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그녀의 물음에 상점주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정말 좋은 질문입니다! 나온 숫자에 따라 각기 다른 콘셉트의 아지트들이 출현하죠. 1은 시원함이 콘셉트인 얼음성, 2는 창공을 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창공의 비상. 그리고 숫자 3이 나오면...."
"난 좀 쉬고 싶은데. 먼저 들어가도 돼?"
이지수의 옆에 서 있던 실비아가 묻자.
상점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일단 들어가서 마저 대화를 나누죠."
문으로 보이는 소라 껍데기를 젖히고 아지트에 들어서자.
"와아!"
"이건 미쳤는데?!"
선구자들의 입에서 연신 탄성이 터져 나온다.
"잠깐만. 저건 진짜 살아 있는 거야?"
"움직이는 걸 보니 그런 것 같은데?"
유유히 벽과 천장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이 만들어 낸 물결을 따라.
각종 해양식물들이 살랑살랑 흔들거린다.
"진짜 바닷속에 들어온 것 같아...."
"하하, 바다가 콘셉트인 아쿠아리움입니다! 아, 진짜 물고기들은 아니니까 잡아 볼 생각은 마시고요. 천장 부서집니다."
상점주의 가벼운 농담에 선구자들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린다.
"하지만 단순히 외관의 콘셉트만 다르다면 아쉽겠죠."
"뭐, 뭐가 더 있어?"
"주사위를 굴려 보시겠습니까?"
다시금 이지수가 주사위를 굴리고, 숫자 [1]이 뜨자.
화아아악-
일순간 바다였던 공간이 삽시간에 얼어붙는다.
그리고.
[아쿠아리움이 서리 궁전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하우징 시스템이 일부 변화합니다.]
[버프, '산호초의 빛'이 '서릿길'로 변경됩니다.]
[버프, '흐르는 물결'이 '서리의 은총'으로 변경됩니다.]
[버프, '조용한 평화'가 '냉정한 휴식'으로 변경됩니다.]
.
.
.
"...버프가 바뀌었어?"
"잠깐만! 버프의 효과도 달라졌는데?!"
당황한 선구자들을 보며.
상점주가 고개를 끄덕인다.
"각 콘셉트의 아지트마다 각기 다른 버프 효과가 있습니다. 해당 버프들은 직접 사용하며 확인해 보시길."
"와...."
이건 말이 하나의 아지트이지.
실질적으로 6개의 아지트나 다름이 없잖은가?
* * *
"진짜 1등 하길 잘했다!"
"그러니까! 이게 무라단 그 양반 손에 들어가 봤어 봐! 배 아파서 잠도 못 잤을걸?"
"와! 이 얼음 침대는 딱딱하게 생겼는데 엄청 푹신하네! 누워 봐!"
신이 난 선구자들이 아지트 내부를 돌아다니며.
구조를 둘러본다.
'음, 만족해하는 것 같네.'
난 그런 그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다들 입가에 미소가 만연한 게.
어지간히도 좋은 모양이다.
'일단 선구자들은 구경하게 놔두고, 페스티벌을 마무리하러 가 볼까.'
잠시 후.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저니맨 클랜에도 클랜 아지트의 지급을 완료한 뒤.
난 공략자들을 쓱 훑어봤다.
'이제 참가상을 나눠 줘 볼까.'
이번 페스티벌에 참가한 모든 공략자들에게 참가상을 지급하기로 약속했었으니.
바로 그때.
우르르르르르릉-
갑자기 지면에서 몸을 뒤흔드는 것 같은 강렬한 진동이 인다.
'이게 뭔....'
다행히 진동의 순간은 짧았다.
"뭐, 뭐야?! 지진이었나?"
"갑자기? 혹시 게이트에서 뭐가 나온 것 아냐?"
그러나 그랜드 라인에 자리하고 있는 포탑들은 잠잠했다.
아무래도 몬스터들의 출현 때문은 아닌 듯하다.
"이게 대체.... 허억! 저, 저것 좀 봐."
"뭐? 뭘 보라는... 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홀린 듯 하늘을 올려다보는 공략자들.
도대체 하늘에 뭐가 있기에 저리 당황들을 한 건지.
나도 그들을 따라 고개를 쳐들었다.
'...저건 뭐야?'
분명 맑았던 하늘이건만.
고오오오오오오-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탑의 환영들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틱, 틱-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719:59]
그 뜻을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197화 잠시간의 여유 (1)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
당장이라도 선명한 피가 흘러내릴 듯한 붉은 문구.
참으로 불길하기 짝이 없다.
"혹시 41층에 뭔가 대규모 퀘스트가 출현하려는 건가?"
"오?! 진짜 그런 걸지도 모르겠는데? 저 시간이 다 지나면 게이트에서 엄청나게 강한 몬스터들이 나온다든가."
당혹감에서 벗어난 몇몇 공략자들이 자신이 생각한 추측들을 이야기한다.
대부분은 41층에 등장할 새로운 대형 퀘스트의 전조 현상이 아니냐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으나.
나는 생각이 달랐다.
'아냐, 저런 게 그냥 평범한 퀘스트를 알리는 문구일 리가 없잖아.'
심지어 전에 다른 탑의 공략자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을 때조차.
별다른 전조 현상도 없지 않았던가?
"...."
틱, 틱-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718:40]
난 문구 옆에 자리한 채.
줄어드는 시간을 보며 생각했다.
'남은 기간은 한 달.... 일단 최대한 정보를 모으는 게 급선무겠어.'
* * *
며칠 뒤.
[...지석 씨, 이번 일은 유례가 없던 일이지 않나요? 이 프로그램을 몇 년간 다뤘지만, 저런 현상은 처음 보는 것 같아요.]
[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특히 이번 현상이 더욱 특이한 건, 해당 문구가 한 층에 국한된 게 아닌 모든 층에 출현했다는 겁니다.]
켜진 TV 속에서 두 남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 이 문구가 의미하는 바가 뭘까요?]
[운명을 뒤집을 정도로 강력한 보스 몬스터가 나오지 않을까요?]
[에이, 지석 씨. 지금껏 나왔던 보스들도 강력했는데, 더 강력한 게 나오면 안 되죠!]
[하하, 그럼 하영 씨가 상상한 걸 들어 볼까요?]
[호호호, 상상은 시청자 여러분에게 맡기려고요! 시청자 퀴즈 나갑니다! 이번에 탑에 등장한 문구가 뭘 의미하는 걸까요? 그 결과를 예상하여 방송국에 보내 주세요! 정답을 맞히신 다섯 분께 푸짐한....]
둥-
"후우...."
TV를 끈 주인의 입에서 짙은 한숨이 흘러나오자.
거실 한쪽에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던 주방 멤버들이 캔버스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다.
"뭔가 답답한 게 있는 것 같은데?"
분신의 나지막한 읊조림에 발리나가 붓을 내려놓곤.
분신에게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아직 멀었군."
"뭐가?"
"저 한숨은 답답해서 내쉬는 한숨이 아니다. 우리에게 더 일거리를 안겨 줄 게 없을지, 고민하는 한숨이 분명하다."
"헥?!"
단호히 의견을 피력하는 발리나.
그리고 그런 발리나에게 눈을 동그랗게 떠 보이는 백구.
<더 많은 일에는 더 많은 참기름이 따라옴. 일해라, 살덩이들.>
"흠,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가만, 그건 그렇고...."
주인의 등을 바라보던 분신이 시선을 돌려 발리나를 바라본다.
"요즘 자꾸 말이 짧아지는 것 같다?"
"그, 그건...."
"내가 다른 건 풀어 줘도, 위계질서만큼은 확실히 하자고 했었지?"
"크윽...."
이 상황을 모면하고자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발리나.
"음?!"
그녀의 시선이 거실 한쪽에 자리한 벽돌집으로 향한다.
[따끈따끈 냥냥 베이커리]
베이커리 안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따라.
냥냥냥-
고양이들의 경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온다.
"선배의 말이 맞다. 위계질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발리나가 분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곤.
베이커리 문을 쾅쾅 두들긴다.
"흠흠! 어이, 루나! 잠깐 밖으로 나와 봐라! 루나!"
끼이이익-
루나가 옆구리에 조리용 모자를 낀 채로 나와.
발리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일이냥? 난 지금 굉장히 바쁘다냥!"
"바쁘다고?"
발리나의 눈이 날카롭게 빛난다.
"그렇다냥! 지금 아주 중요한 작업을 하는 중이다냥! 방해하지 말라냥!"
"방해하지... 말라고?"
"드디어 내가 원하던 궁극의 빵을 만들 수 있게 됐다냥! 잊은 거냥?"
말포르, 말링, 버트 등등.
얼마 전 주인이 루나가 그토록 구해 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재료들을 공수해 왔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건 발리나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선배님의 말씀을 들었겠지? 위계질서의 중요성을 말이다!"
"그러냥?"
"그러냥이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나를 깍듯하게 선배 대우를...."
"발리나."
주인의 나지막한 음성이 울려오자.
발리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다.
"으, 음?! 왜 그러나?"
"루나는 신제품 만드는 중이니까, 적당히 괴롭혀."
"크으읏...."
신분 상승을 꿈꾸던 발리나의 야망은 오늘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루나! 완성됐어?"
"그렇다냥! 말포르와 바깥의 다른 재료들을 섞어 만들어 봤다냥!"
"음? 잠깐. 재료들은 다 구해 왔잖아? 근데도 굳이 바깥의 재료를 섞은 이유가 있어?"
턱수염을 씰룩거리는 루나.
"이곳의 재료들은 쓰레기가 맞다냥."
"그래. 그건 나도 인정...."
"하지만 그간 이 세상의 재료들로 빵을 만들며 깨달은 게 있다냥!"
큰 깨달음을 얻기라도 한 걸까.
바깥 세계의 재료들을 바라보는 루나의 눈에는 온화함이 가득하다.
"재료도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냥! 이곳의 재료들은 쓰레기들이지만 재밌는 것도 많았다냥! 그리고 이게 그 결과물이다냥!"
루나가 동그란 알 모양의 빵들이 담긴 쟁반을 들고 나오자.
모두가 쟁반 위를 응시한다.
"오오...."
"오, 이건 처음 보는 빵인데?"
"냐냐냐냥! 그건 알 빵이다냥!"
황갈색을 띤 알 모양의 빵들이 쟁반 위를 굴러다니고 있다.
"호오... 찹쌀떡에서 영감을 받은 거야?"
"냐냥! 일단 먹어 보라냥!"
자신만만하게 빵을 권하는 루나.
<참기름 빵도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함.>
"그런 게 가능하겠냥?!"
"일단 먹어 보자고."
깡통을 제외한 모두가 알 빵을 집어 든다.
"어디, 맛은...."
바삭-
"오?!"
* * *
다음 날, 아침.
"와...."
인성 카페의 오픈 준비에 한창이던 수정이가 창밖을 보곤 감탄한다.
"수정아, 무슨 일 있어?"
"아뇨, 언니. 오늘도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얘는... 늘 보는 광경이잖아?"
"그렇긴 한데, 그냥 볼 때마다 놀라워서요."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반증하듯.
인성 카페를 찾는 사람들은 여전히 많았다.
아니, 오히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 수가 늘어나는 것 같다.
"오늘도 엄청 바쁘겠네요. 아 참, 그리고 언니! 어제 그 할아버지! 도대체 뭐였어요?!"
"할아버지? 아아, 그분?"
선아가 모호한 미소를 짓는다.
"좀 이상한 분이긴 했지."
"그냥 이상한 정도가 아니었어요! 전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았다니까요? 저 이름도 기억하고 있어요. 김덕수였나? 완전 별꼴이었어요!"
전날, 마감 시간에 찾아온 한 노인.
그는 다짜고짜 사장님을 찾더니.
[젊은 사람이 벌써 성공에 취해서야 쓰나! 계속 정진하고 정진해야지! 발전하지 않으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계속해서 메뉴를 연구해야 이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게다!]
신메뉴를 내지 않는다며 온갖 훈계를 늘어놓지 않았던가?!
"좀 유별난 사람이긴 했어."
"언니, 언니! 거기다가 너스타에 댓글 달린 것 봤어요? 진짜 제가 다 짜증이 나더라고요."
수정이가 핸드폰을 들어 선아에게 보여 준다.
[도대체 인성 카페 신메뉴 언제 나옴?]
[그래도 예전에는 분기별로 하나씩 나왔는데, 지금은 사장이 돈맛을 보더니 초심 잃은 듯. 갤러리인지 뭔지 운영하지 말고 메뉴나 개발해 주지.]
[응, 꼬우면 가지 마~ 안 그래도 경쟁 치열해서 이용하기 빡신데, 개꿀이죠??]
[└└인성 카페 사장 어서 오고!]
[아니, 다들 뭐가 그리 불만임? 인성 카페만큼 꾸준히 제 맛을 지키는 가게가 얼마나 된다고?]
인성 카페 너스타 계정에 달린 수많은 댓글들.
선아는 댓글란을 쓱 보더니 옅은 미소를 짓는다.
"대부분은 다 좋은 댓글들만 달아 주셨네."
"알죠, 아는데, 그냥 안 좋은 글들도 보이니까 기분이 안 좋아서요. 지금 메뉴들도 전부 사장님이 고심해서 개발한 메뉴들인데, 그건 알지도 못하면서...."
수정이의 입술이 툭 튀어나오자.
선아는 조용히 그녀를 다독인다.
"댓글은 그냥 하나의 의견일 뿐이야. 그러니 댓글을 신경 쓰기보단 눈앞의 손님들을 봐. 인성 카페를 사랑해 주시는 손님들이 저렇게 많잖아?"
"...그쵸."
"우리는 그런 손님들을 상대로 열심히 일하면 될 뿐이야, 신메뉴 같은 건 사장님이 결정하실 일이고. 그러니 수정이가 너무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
선아의 다독임이 먹혀든 걸까.
수정이가 콧김을 훅 내뿜더니 앞치마를 동여맨다.
"언니 말이 맞아요! 우리, 오늘도 열심히 일해요!"
"그래, 오늘도 다들 힘내서 일해 보자! 파이팅!"
의기투합한 직원들이 다시금 오픈 준비에 매진하던 중.
"얘들아, 좋은 아침!"
입구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간다.
"좋은 아침이에요, 사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얘들아, 내가 이번에 신메뉴로다가 새로운 빵을 갖고 와 봤거든? 다들 한번 먹어 볼래?"
"네?"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수정이.
선아가 그런 그녀에게 그것 보라는 듯 웃어 보인다.
* * *
같은 시각.
검고도 넓은 공간 위로.
사사사삭-
새하얀 선과 선이 뿌리처럼 얽혀 간다.
선의 끝에는 저마다 자그마한 탑의 모형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쿠구구궁-
새하얀 선들이 각 탑의 모형과 연결되자.
까만 정장을 입은 남자가 직원들에게 소리친다.
"좋아, 이걸로 얼추 된 것 같네. 수고들 했어. 다들 숨 좀 돌리라고."
상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입실론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우, 겨우 끝났나.'
비단 지친 건 그녀만이 아니었던 건지.
이름을 부여받은 다른 직원들 또한 지친 기색들이 역력하다.
'...쉽지 않은 일이었어.'
이 정도로 커다란 규모의 작업을 해 본 게 얼마 만이던가.
그녀가 겨우 한숨 돌리려던 그때.
"이제 겨우 쉴 수 있겠어! 이봐, 입실론. 일도 다 끝났는데 한잔 어떠나?"
그녀와 마찬가지로 대리 칭호를 달고 있는 동료가 말을 걸어온다.
"난 됐어."
"낭만 없는 소리를 하는군. 고된 일 뒤에 마시는 한잔이 얼마나 감미로운지 모르...."
"그런 실없는 말을 할 여유가 있는 걸 보니, 대충 일했나 보네."
입실론 말에 두꺼운 뿔 두 개를 달고 있는 동료가 발끈한다.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연결한 탑이 몇 개인 줄 알고 하는 소리인 건가?"
"알 게 뭐야. 난 그냥 쉬고 싶다고."
손을 휘적거리는 입실론을 보며.
동료가 혀를 끌끌 찬다.
"뭐, 확실히 이번 회차가 유독 더 일거리가 많긴 했지. 뭔가 새로운 시도가 많다고 해야 되나?"
"...."
"탑과 탑의 대결도 그렇고, 이번에 시도하는 것도 완전히 새로운 거잖나?"
동료의 말이 맞다.
기존에는 그냥 가장 먼저 100층까지 공략하는 탑이 나오면 그걸로 끝이었으니까.
"...오래 해 먹긴 했지. 하지만 어쩌겠어, 주주들이 계속 새로운 걸 원하니."
새로운 변화, 새로운 시스템.
주주들은 언제나 새로운 변화를 갈망한다.
당연한 거다.
그들에게 있어 무료함보다 괴로운 건 없을 터이니.
"근데 말이네. 이게 과연 균형적으로 올바른지 난 잘 모르겠군."
"당연히 수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싫다면 별수 없지, 오늘 밤은 혼자 적시는 수밖에."
동료가 손을 흔들며 자리를 뜨자.
입실론은 선과 선으로 연결된 탑들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이 사실을 그 이레귤러에게 알려 주는 편이 좋을까?'
198화 잠시간의 여유 (2)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입실론.
저번에 이레귤러에게 60층에 대한 모든 정보를 줬다가.
그 녀석이 벌인 행동들로 인해 자칫 본사에 감사 요청까지 들어올 뻔하지 않았던가?
'층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면 나라도 그렇게 했을 것 같긴 하다만....'
딱히 이레귤러의 행동이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주시하는 도박꾼들의 눈동자가 너무 많을 뿐.
'그래도 그 덕에 의심 목록에 포세이돈을 넣긴 했지만. 으음, 이번에도 이레귤러에게 대량의 정보를 푸는 게 맞으려나.'
손가락으로 톡톡 관자놀이를 건들길 몇 차례.
마침내 입실론이 결단을 내린다.
'...귀띔 정도만 해 주는 걸로 하자.'
이번 정보는 누설됐다는 게 알려지거든 '탑의 관리자가 그랬습니다.'라고 무마할 수 있는 정도의 정보가 아니다.
이번 정보는 탑에도 공지가 가지 않았으니까.
'그보다 포세이돈이 뭔가 움직임을 보이면 좋겠는데. 일단 어디에 베팅을 했는지 확인을 해야겠어.'
주주가 어떤 항목에 얼마만큼 코인을 베팅했는지 정돈.
직원으로서 확인하는 게 가능하니까.
'다만, 그 전에 급한 일부터 끝낼까.'
사사삭-
한순간.
그녀의 몸이 자리에서 녹아내리듯 사라져 버린다.
* * *
55층, 드라고니아의 5위계.
판자촌을 연상케 했던 낡고 허름한 거리는 오간 데 없고.
이제는 번영한 마을과 더불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한 용인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다.
"이번에 드라고니아 아카데미에서 신입생을 모집한다던데, 나도 도전해 볼까?"
"...괜찮으려나? 우리는 5위계잖아."
"아냐! 모그 님이 위계와 상관없이 배우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잖아!"
"그, 그럼 우리도 한번 시도라도 해 볼까?"
저마다 바라보고 있는 미래가 다르긴 해도.
시선의 끝마다 자리하고 있는 미래의 모습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쭈와아아압-
난 얼음 컵에 담긴 콜라를 삼키며 눈앞의 정경을 바라봤다.
'좋네, 좋아. 확실히 드라고니아는 날이 갈수록 살기 좋아지고 있구나. 확실히 모그가 난 녀석이긴 하단 말이지.'
55층을 '마을'로 만들어 보이겠다던.
모그의 굳은 의지가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사실 이 정도만 돼도 거의 마을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물론 죽음의 대지는 드넓으며 악령들이 계속 들끓는다지만.
적어도 드라고니아 자체는 마을에 비견될 정도로 안전했으니 말이다.
'다른 일도 이렇게 평화롭게 마무리되면 좋겠는데 말이지....'
난 힐끔 하늘을 올려다봤다.
고오오오-
여전히 하늘에 자리하고 있는 무수히 많은 탑의 환영들.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551:38]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시간은 지금도 무심히 흘러가는 중이었다.
'후우, 자그마한 단서라도 있으면 참 좋겠는데.'
요 며칠간 탑과 바깥을 오가며.
이번 현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다만, 얻은 것이라곤 자칭 인터넷 탐정들이 쏟아 낸 가설들과 추측들뿐이었지만.
'저 시간이 다 지나는 것만 기다려야 되나....'
내가 가면을 매만지고 한 모금 더 콜라를 삼키려던 그때.
"아니, 이게 맞다니까?! 일단 최대한 물자를 챙겨 놓은 다음에 안전한 곳으로 가는 게 가장 확실하다고!"
"아직 무슨 일이 터진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러니까 미리 준비해야지! 일이 터지고 나서 준비하면 늦는다고!"
상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다 샀으면 볼일들 보러 가지, 저 녀석들은 왜 아직도 여기에 있는 거야?'
방금 전까지 공략자들에게 상품을 판매한 터라.
이제 좀 여유롭게 사색에 잠길 생각이었건만.
"저렇게 모든 층에 떡하니 경고를 보낼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죽을 때가 돼서야, 아, 네 말이 맞았구나! 할래?"
"내 참, 넌 너무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탈이야."
일부 공략자들이 자리에 남아 열띤 토론을 벌이는 중이었다.
'뭐, 저들도 당황스럽겠지.'
지금껏 이런 현상이 탑에서 벌어진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비단 저들만이 아니라.
[여, 여긴 시작의 마을이에요. 저, 저는 오늘 처음 들어왔는데 저, 저건 도대체 뭘까요?]
[장담합니다! 저건 보스 몬스터의 출현을 암시하는 시간이에요! 제 예측은 틀린 적이 없거든요!]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까요....]
아래층에 상주하고 있는 공략자들 또한 작금의 상황에 불안해하고 있는 것도.
너튜브로 봤고 말이다.
'솔직히 쫄리는 게 정상이고.'
공포는 무지에서 오기 마련이고.
나도 정보가 없어서 좀 쫄리거든.
그러던 그때.
"자자, 다들 진정하고 저길 좀 보라고."
한 공략자가 슬며시 손을 들어 날 가리킨다.
"상점주가 저렇게 여유롭게 있다는 건 뭐겠어? 큰 이벤트이긴 해도 목숨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라는 걸 반증하는 것 아니겠어?!"
"오오, 그럴듯한데?"
아니, 그냥 생각 중인데 왜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건데?
"진짜 저 문구가 탑에 지각변동을 일으킬 대위기를 암시하는 문구라면! 과연 상점주가 저렇게 여유롭게 있을까? 선구자들이나 다른 여타의 클랜들을 불러다가 대책을 세우려고 하지 않겠어?"
그래, 그 생각도 안 해 본 건 아니야.
근데 나도 정보가 있어야 대책을 세우든가 하지.
"염병! 상점주는 관리자니까 그런 거지! 솔직히 우리가 죽건 말건 관리자니까 아무 상관 없는 거잖아?!"
"오오, 그것도 일리가 있어!"
난 추측과 헛소리가 난무하는 현장을 힐끗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좀 그럴듯한 추측이 나오나 했더니.'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사태가 공략자들 사이에서도 큰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다 다들 공략을 포기하면 곤란한데.'
작금의 사태로 인해.
현재 대부분의 클랜들은 공략을 멈추고 사태를 관망하는 자세로 전환했다.
-우리는 계속 공략할게. 사태가 변해도 공략을 해야 된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았잖아?
다만 이지수를 비롯한 선구자들만큼은 계속 공략을 진행하겠다고 해서.
오히려 내가 뜯어말렸지만.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 그게 도대체 뭔지....'
내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바로 그때.
띠링-
[왜곡된 세계가 활성화됩니다.]
갑자기 나의 눈앞에 메시지가 떠오른다.
'이건....'
분명 저번에 내게 여러 층의 정보를 줬던 관리자의 아이템이 알아서 작동한 것일 터.
그렇단 건, 혹시 이번에도 그 관리자가 정보를 주려고 오려는 걸까
'왜 이렇게까지 정보를 주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왜곡된 존재의 초대에 응하시겠습니까?]
난 메시지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런 혜택을 마다할 이유는 없지.
[초대에 응하였습니다.]
[.다니합용작 가계세 된곡왜]
촤르르르르륵-
전과 마찬가지로 멀쩡하던 세상이 뒤집어지기 시작한다.
거리를 거니는 용인들, 대화를 나누는 공략자들.
그리고 새로이 지어진 용인들의 거주지와 각종 건물들까지.
모든 것이 거꾸로 뒤집힌다.
저벅-
그리고 이 혼란 속에서도 유일하게 똑바로 서서.
걸어오는 금발의 여자에게 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저번에 주신 정보 덕에 60층 공략을 수월히 진행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 공략법이 꽤나 무식하고 저돌적이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어."
저돌적이라....
난 그냥 최단기 코스로 직진한 것뿐인데?
"아무튼 이제 너희 탑은 안전해졌어."
"호오...."
"잠시간은 말이야."
뒷말을 덧붙이는 관리자.
난 그녀를 보다가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간이라.... 또 뭔가가 있나 보군요. 예를 들면 저 하늘의 문구라든가요."
"맞아. 살아남지 못한다면 멸망하겠지."
명백한 관리자의 오피셜이 흘러나오자.
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이야, 60층까지 공략하면 좀 여유가 생길 줄 알았더니, 또 뭐가 있는 건데?'
분명 바르바토스는 60층까지만 공략하면 괜찮을 거라 했건만.
이게 본사 직원과 탑의 관리자가 갖고 있는 정보의 차이인 건가?
"...혹시 대형 퀘스트 같은 겁니까?"
"대형 퀘스트? 음,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
"특정 몬스터를 토벌하는 겁니까? 아니면 어떤 특정한 퀘스트를 수행해야 한다거나...."
"글쎄."
어랍쇼?
어째 60층에 대한 정보를 비롯하여 아낌없이 정보를 줬던 전과 달리.
이번에는 꽤나 말을 아끼는 모습이다.
'그래, 사실 저게 정상이지.'
정보 누설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당연히 페널티가 존재할 것이며, 그녀도 그 제약을 받을 터.
"혹시나 제약 때문이라면 더 말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추측을...."
"뭐?"
어째서일까.
관리자가 시원스러울 정도로 깔깔 웃는다.
"공략자가 내 걱정을 해 준다니, 이건 또 신선하네."
"...."
뭣?
그래도 이쪽은 나름대로 정보를 받은 게 고마워서 신경을 써 준 건데.
"아무튼 이번 이벤트는 혼자의 힘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울 거야. 그러니 최대한 준비해 두는 게 좋겠지."
"당연히 철저히 준비해야죠. 근데 뭘 대비하여 준비하라는 겁니까?"
나의 물음에 관리자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포개어져 있던 입술을 천천히 뗀다.
"전쟁."
"...."
"탑들 간에 큰 격돌이 벌어질 거야."
탑들 간의 격돌이라고?
"그거라면 이미 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영원의 전장 그리고 아득한 밤.
난 이미 각각의 전장에서 다른 탑의 이레귤러들과 격돌한 적이 있지 않은가?
"아, 그거? 그건 시험용이었어."
"예?"
그게 간단한 몸풀기였다고?
패배하면 탑 공략에 큰 영향이 가는 디메리트를 줬으면서?
"주주들의 반응이 어떤...."
갑자기 말을 끊곤 날카로운 눈으로 날 째려보는 관리자.
"필요 이상으로 말하게 하지 마."
"...?"
지가 멋대로 말해 놓고 남 탓은....
근데 주주는 또 뭔데?
본사가 끝판왕인 줄 알았는데, 그 위에 또 뭔가 있는 거였어?
"아무튼 이번에는 양상이 좀 많이 다를 거야. 일대일 구도가 아니라 많은 수의 탑들이 참전할 거거든."
"...."
많은 수의 탑들이... 참전한다고?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숫자의 탑들이 연관되어 있기에 저런 말을 하는 걸까.
"...몇 개의 탑이 참여하는 겁니까?"
"450개. 정확히는 60층까지 공략한 탑들만 참가하는 거지만."
"...."
난 순간 할 말을 잃었다.
'450개? 그게 가능한 건가?'
"다시 말하지만 충분히 대비하는 게 좋을 거야."
"...."
* * *
관리자와의 대화를 끝마친 뒤.
난 곧장 집으로 돌아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전쟁, 전쟁이라....'
물론 다른 탑과의 전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다.
두 번의 전투를 치르고도 경각심을 갖지 않을 바보는 없을 테니까.
'무식할 정도로 많은 숫자의 탑들이 참여하는 건 예상 밖이었지만.'
이번 이벤트에 참전하는 탑이 450개.
거기다가 참전하는 조건이 60층 공략에 성공한 탑들이라는 건....
'최상위권을 달리던 탑들도 모두 참전한다는 이야기겠지.'
전에 백룸의 게시판에서 봤던.
70층대, 심지어 80층대를 공략하던 최상위 탑들.
그 탑들도 이번 이벤트에 참여한다라....
'도대체 어떤 정신 나간 놈이 밸런스를 이따위로 짠 거야?!'
당연히 더 높은 층을 공략한 탑의 공략자들의 레벨과 스펙이 다른 탑들보다 압도적으로 높을 터.
이게 게임이었다면.
밸런스 조절 실패로 엄청나게 욕을 먹었으리라.
"하아, 머리 아프네...."
탑들 간의 전쟁.
그 전쟁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 건지.
좀 더 상세한 정보가 있으면 좋으련만.
[나머지는 네가 경험하면서 알아내.]
관리자에게서 얻은 정보는.
탑들 간의 대규모 전쟁이 예고되어 있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아으, 이제 좀 여유롭게 탑 공략에만 집중하면 될 줄 알았는데.'
난 미간을 꾹꾹 누르다가.
소파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좋게 생각하자. 그래도 아직 나름대로 준비할 시간은 있잖아?'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이 찾아오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3주.
솔직히 짧디짧은 시간이지만.
이대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떻게 준비를 해야 되지?'
난 고민 끝에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것도 예측이 되지 않는 상황.
이럴 때는 차라리....
'내 레벨을 올리는 게 최선이야.'
199화 잠시간의 여유 (3)
레벨을 올려 새로운 능력을 얻거나 능력을 강화한다.
이것이 지금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일 터.
'다만 업적 달성이 문제긴 한데.'
그 부분도 나름대로 생각한 바가 있다.
'일단 탑으로 갈 준비를 하자.'
내가 아공간에 필수품 몇 가지를 쑤셔 넣던 찰나.
분신이 슬며시 내 앞으로 다가온다.
"오늘은 장사하러 가는 게 아닌가 보네?"
"업적을 좀 달성해 보려고."
"업적? 아아, 레벨 올리러 가는 거구나?"
이미 주방 멤버들에게는 관리자가 준 정보를 전달해 놓은 덕인지.
분신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잇는다.
"근데 괜찮은 거야?"
"음?"
"아니, 업적을 달성하는 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닐 것 같아서."
난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그래도 몇 가지 생각한 게 있긴 해."
"오오, 그게 뭔데?"
"시간이 남는다면 미개척지도 뚫어 보고 싶긴 한데 그건 어려울 듯하고, 일단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보스들을 토벌해 보게."
"클리어가 불가능한 보스?"
21층에 자리하고 있는 나락의 간수장, 블리거라든가.
23층의 비탄의 공주, 알리샤 등등.
클리어가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보스들은 탑에 은근히 자리하고 있다.
"그래. 층에 존재하면서 계속 층의 안위를 위협하지만 죽일 수는 없는 보스들, 그런 놈들을 한번 처리해 보려고."
"어, 음... 죽일 수가 없는데, 그게 가능하려나.... 주인의 힘이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자문자답하던 분신이 흘낏 날 바라본다.
"괜찮은 생각인 것 같긴 한데, 문제는 주인이 그런 보스들이 있는 층에 떨어져야 하는 것 아냐?"
"뭐, 운도 필요하긴 한데, 괜찮아."
난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런 층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반복할 거니까."
"뭐를?"
"뭐겠어?"
* * *
잠시 후.
"아으, 또 아니네.... 다시!"
화아아아악-
"다시!"
몇 번이고 문을 열고 빛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주인을 보며.
주방 멤버들이 소곤거린다.
-주인은 왜 자꾸 저런다냥? 술래잡기라도 하고 있는 거냥?
-쉿! 저건 우리를 시험하는 게 틀림없다! 자리를 비운 사이에 우리가 농땡이를 피우는지 확인하는 거지.
-헥?!
-오옷! 또 들어간다냥!
다시금 문으로 사라진 주인.
그러나 이번에는 시간이 흘러도 닫힌 문이 좀처럼 열리지 않는다.
"이제 진짜로 간 것 아니냥?"
루나의 물음에 발리나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단호히 고개를 젓는다.
"절대로 방심하지 마라. 전에 내가 그렇게 당한 적이 있다."
"왈왈왈!"
"...루나, 선배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지?"
"요령이 없으니 그런 거라고 한다냥!"
"...."
다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도 문을 계속 주시하는 주방 멤버들.
"왈왈!"
"이 정도면 안심해도 된다고 한다냥!"
"오오오! 그렇다면...!"
스윽-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주방 멤버들.
그들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걸려 간다.
"맞다냥! 휴가다냥!"
"오오옷!"
"왈왈왈왈!"
주인의 부재.
그것은 곧 휴가를 알리는 알람이자 달콤한 자유의 향기나 다름이 없....
"자자, 다들 주목."
그러나 방에서 나온 분신이 그들을 부른다.
"아앗...."
"어이, 깡 씨! 너도 충전 그만하고 그만 일어나."
분신이 참기름이 가득 담긴 대야를 흔들자.
철커덕, 철컥-
참기름 위에 떠 있던 검은 상자의 모양새가 바뀌더니.
후우웅, 띠링-
<충전 완료. T-9999, 가동 시작.>
참기름 범벅이 된 깡통이 주방 멤버들 옆에 도열한다.
"누가 깡통한테 수건 좀 가져다주고. 흠흠, 아무튼 전부 모였으니 주인의 지시 사항을 전달할게."
"그게 무슨 소리냥? 일일 임무만 끝내면 휴가, 휴식 보장이 아니었냥?"
루나가 질문을 던지곤 발리나에게 작게 소곤거린다.
"이렇게 말하면 되냥?"
척-
말없이 엄지를 추켜세우는 발리나.
"나도 그러고 싶은데, 상황이 많이 달라졌어. 다들 주인이 말했던 것 기억하지?"
"헥?"
"뭘 말했었냥?"
분신이 작게 웃는다.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조만간 탑에서 대형 이벤트가 벌어진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주인도 지금 저렇게 바삐 움직이는 거고."
"오옷! 기억났다냥!"
"그래서 당분간은 우리도 거기에 맞춰서 준비를 하기로 했어!"
주방 멤버들에게 씨익 웃어 보이는 분신.
"당분간 그림 그리는 건 중지야. 카페에서 팔 음식도 절반 정도만 만들 거고."
"그, 그게 정말이냥?!"
<흔들리는 눈동자 확인. 정교한 농간이 분명함.>
"대신 일을 줄인 만큼, 우리는 탑에서 쓸 버프 음식을 대량으로 만든다!"
분신의 말이 끝나자.
"역시는 역시나다냥!"
"예상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질 않는군...."
주방 멤버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런데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손을 드는 발리나.
"아무리 우리가 음식을 많이 만들어도, 탑 안의 모든 등반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도 그렇겠지?"
"그럼 우리가 행하는 노력에 의미가 있는 건가?"
발리나의 진지한 표정을 바라보던 분신이 천천히 입을 뗀다.
"그 의미는 주인이 부여하기 나름이겠지. 결국 버프 음식을 어떻게 활용할지 결정하는 건 주인의 몫이니까."
"...."
"대신 노력하면 주말은 무조건 휴식을 보장하기로 했는데, 어때?"
발리나의 눈이 번뜩인다.
"방금 그 의미가 생겼다."
"좋아! 그럼 다들 시작해 보자고!"
* * *
주인이 탑에 들어간 지도 어느덧 일주일이 흘렀다.
"협곡 수영장 파티 굿즈 컬렉션입니다! 구경하고 가세요!"
"어스름 늑대 패키지 세트 완판입니다!"
수많은 부스들과 갖가지 상품들.
그리고 코스프레를 한 코스어들까지.
'크흐흐흐....'
발리나는 활기가 넘치는 현장을 보며 흐뭇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만족스러운 휴가로군.'
오늘은 주말 휴가 날을 맞아.
그녀가 즐겨 하던 게임의 굿즈 판매 현장에 왔다.
'이제는 바깥도 제법 익숙해졌나.'
인식 저해 마법의 효과 덕에 정체를 들킬 일은 없을 터.
거기다가 그녀가 바깥 세계에서 살면서 느낀 건.
인간들은 생각 이상으로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 거였다.
'뭐, 내게는 더 없이 좋은 환경... 으음?!'
커다란 그리폰 모양의 패널을 본 발리나가 눈을 부릅뜬다.
'저, 저건 그리폰 라이더가 아닌가!'
협곡에서도 그녀가 주로 사용하던 영웅의 패널.
굉장히 탐난다.
"이봐, 저기에 놓인 저 패널, 얼마지?!"
"아, 저거요? 저건 파는 게 아니고 전시용...."
"그래서, 얼마면 되지?!"
지갑에서 거침없이 돈다발을 꺼내어 흔들어 보이는 발리나.
"이 정도면 되나?!"
"예? 아, 아뇨, 손님. 저건 파는 게 아닌...."
"말이 안 통하는 걸 봐선 돈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그럼 돈을 더 주겠다!"
"자, 잠깐만요!"
몇 분 뒤.
"흐흐흐...."
옆구리에 패널을 끼운 발리나가 흐뭇해하는 미소를 짓는다.
고된 주방에서 벗어나 누리는 찰나의 휴식은 어찌도 이리 달콤한 건지.
'아아, 이게 행복인가.'
별게 행복인가.
손에 잡힌 것에 만족하며 즐기면 그것이 행복인 것을.
'한정 스킨 세트 쿠폰을 구매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오늘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를 하고....'
그녀가 현장에서 발길을 돌리려 하던 바로 그때.
"와, 엄마! 저것 좀 봐! 하늘에 탑들이 가득 떠 있어!"
"얘도 참, 그게 무슨... 어머, 정말이네?"
옆에서 걷던 모자가 하늘을 올려다본다.
비단 그녀들만이 아니다.
"저게 뭐야?"
"저건 영상에 떴던 것 아냐? 탑에 기이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그거?"
"근데 그게 왜...."
다른 사람들 또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자.
발리나도 슬며시 고개를 쳐들었다.
고오오오오-
하늘에 자리하고 있는 수많은 탑의 환영들.
그리고.
틱, 틱-
[피할 수 없는 운명의 뒤틀림까지 372:12]
환영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의미 불명의 문구와 시간까지.
그녀는 분명 저 장면을 본 기억이 있었다.
'분명 탑 안에 나타난 현상이었던가. 그런데... 저게 왜 바깥 세계에도 나타난 거지?'
지금껏 탑과 바깥 세계가 완벽히 분리되어 있다는 건.
그녀 또한 알고 있는 정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경계가 허물어진 것만 같잖은가?
'흠, 상관없겠지.'
지금이야 커피콩이나 볶는 신세라지만.
한때는 혼돈계에서 군림하던 '태초의 혼돈'이 바로 그녀가 아니던가!
그저 하늘에 환상이 나타난 정도로 호들갑을 떠는 것도 우스운 일!
'난 그저 오늘의 휴가를 즐길....'
그러던 그때.
번뜩-
[지금껏 그래 왔으니 아마 그럴 일은 거의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바깥에 뭔가 탑과 관련된 현상이 발생하거든 탑으로 가 봐. 뭘 하지는 말고 관찰만 하라고, 관찰만.]
불현듯 주인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으으음...!'
솔직히 모른 척 넘어가도 될 명령이긴 하다.
탑에 가 봐야 뭐가 달라지겠는가?
그러나 분명 주인 녀석이 탑에서 돌아오거든 그녀를 추궁할 터.
"크으읏...."
'하필 이 좋은 날에...! 이 좋은 날에!'
두 눈을 질끈 감은 발리나.
그녀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잠깐만 보고 오면 되겠지.'
하늘을 보며 놀라워하는 인파 속으로 들어간 발리나.
그녀의 신형이 곧 지워지듯 사라진다.
* * *
'흠....'
허공에 뜬 채로 정면에 위치한 종말의 탑을 바라보는 발리나.
"와아...."
"야, 잠깐만, 사진 찍을 게 아니라 대피해야 하는 것 아냐?"
종말의 탑 주변에 설치된 검문소 인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별 이상은 없는 것 같군.'
탑 주변을 둘러봐도 딱히 무언가 이상 현상이라고 할 만한 상황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정도로 했으면 주인에게 욕먹을 일은 없겠지.'
물론 주인은 잘했다며 포상으로 커피콩 몇 포대를 더 볶으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흠, 조금만 더 살펴볼까.'
예전이었다면 모를까.
반강제로 이 세계에 정착하여 다양한 문물의 맛을 봐 버린 이상.
지금은 주인의 세계의 안전을 바라는 입장이 돼 버렸으니.
스슥-
검문소 안쪽까지 들어가 탑 주변을 자세히 살펴보는 발리나.
그러던 그때.
'...음?'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반복한다! 이건 실제 상황이다!"
"1중대장은 검문소 관람객들의 안전 복귀를 유도해라! 그리고 2중대장은...."
얼룩덜룩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다급히 어딘가로 뛰어가고 있다.
'흐음. 뭔가 냄새가 나는군.'
그녀는 슬며시 군인들의 뒤를 쫓았다.
탑과 검문소 사이.
탑에 들어가고자 하는 이들과 관계자 외에는 들어갈 수 없는 출입 지대까지 이동한 군인들.
"1소대 정렬! 언제든 발포할 준비를 해 둬라!"
누구 할 것 없이 어깨에 총을 견착하곤.
숨죽인 채 전방을 바라본다.
"다시금 명령을 하달하겠다. 설령 적이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건 가족의 모습을 하고 있건, 주저하지 말고 발포해라!"
도대체 저들은 무엇에 그리도 겁을 먹은 걸까.
발리나의 시선이 총구가 겨누어진 방향으로 향한다.
'오....'
분명 이 바깥 세계와 탑은 철저하게 분리되었건만.
쩌적, 쩌저적-
지금은 어째서인지 탑 주변으로 자그마한 균열들이 생겨나 있는 게 아닌가?
200화 잠시간의 여유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