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평화를 위하여 (2)
"...이게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다."
"뭐?"
이게 뭔 개뼉다구 같은 소리야?
종전 협정의 장에서 칼을 빼 든 것도 모자라 자기네 왕까지 죽이려 들었으면서, 뭐?
'혹시 내가 준 개껌에 환각 성분이 있었나? 아니면 누군가가 용사를 조종하고 있다든가....'
나는 여러 변수들을 고려하며 용사, 로이드의 얼굴을 살폈다.
너무도 깨끗해 보이는 눈동자다.
누군가에게 조종당하고 있거나 무언가에 취해 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던 그때.
툭-
갑자기 용사가 내게 붙잡혀 있던 검을 놔 버리곤.
"왕이시여, 이것이 평화입니다."
벼락같이 강기가 맺힌 주먹을 수왕에게 내지른다.
쇄애애애애애액-
찢어지는 공기의 파동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향기에 체념한 걸까.
아니면 너무도 갑작스러운 용사의 배신에 큰 충격을 받은 걸까.
"로이드...."
레길론이 허망하고도 허무해 보이는 눈으로 주먹을 바라보던 그때.
'얼씨구? 진짜 이게 미쳤나?'
난 검을 내던지곤 용사의 기다란 꼬리를 잡고 뒤로 확 잡아당겼다.
"크어어어어어엇?!"
급제동을 한 자동차처럼 돌진하던 용사의 몸이 순간 허공에 붕 뜬다.
난 꼬리를 그대로 반시계 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리곤.
바닥에 힘껏 메다꽂았다.
쩌어어어억-
"크어어어억!"
지면에 생겨난 커다란 균열의 중심.
그곳에 처박힌 용사가 검붉은 피를 토해 낸다.
'호오, 충격이 꽤 심했을 텐데도 아직 눈이 살아 있네.'
그 순간.
크어어어어엉-
바닥에 처박혀 있던 용사의 몸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엄청난 힘의 파동이 털을 곤두세우게 만든다.
힘의 아우라 속의 개 수인의 충혈된 눈이 나를 똑바로 노려본다.
"죽인다...."
"호오."
확실히 이제야 좀 용사다운 느낌이 나네.
마왕보단 급이 좀 떨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난 피식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팝업 스토어."
그 순간.
스스스스스슥-
기다란 막대기가 나의 앞에 솟구쳐 오르자.
난 막대기를 뽑아 들곤 파라솔의 끝단을 분리시켰다.
제법 길긴 하지만 그럴싸한 몽둥이의 완성이다.
"대대로 말 안 듣는 짐승한테는 이게 약이었지."
"크르르릉!"
* * *
잠시 후.
[....]
검은 아우라가 흘러나오는 사슬에 속박된 용사, 로이드.
[이유는 몰라도 일단은 좀 맞자.]
조커 카드가 꺼내 든 파라솔의 봉으로 개 잡듯 두들겨 맞아서 그런지.
얼굴이 퉁퉁 부어오르는 것이, 원형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다.
[로이드, 도대체 왜 그런 짓을 벌인 거냐...! 대체 왜!]
절규에 가까운 수왕의 질문에도 로이드는 좀처럼 입을 떼지 않는다.
그러던 그때.
여우 가면을 쓴 남자가 용사의 앞으로 다가가 묻는다.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말이야. 너, 수왕을 죽이고 너도 죽으려고 했지?]
[...!]
[호오, 정답인가 보네?]
까득-
그 모습을 수정구로 지켜보던 35층의 관리자 스카디.
그녀는 애꿎은 손톱만을 물어뜯고 있는 중이었다.
[뭐, 현실적으로 마왕을 암살하는 건 어려웠을 테니, 비교적 만만한 수왕을 노린 건가?]
[등반자! 잠깐만 기다려 보게! 하지만 로이드는 용사야! 그런 그가 어째서...!]
[그야 전쟁이 종식되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겠죠. 만약 종전 협상의 자리에서 수왕과 용사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진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그리고 조커 카드의 심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손톱의 끝자락도 빠른 속도로 닳아 간다.
[으르릉...! 닥쳐라! 난 틀리지 않았다! 난 그깟 가짜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를 추구했을 뿐이다!]
[오오, 종전이 가짜 평화라고?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그럼 네가 생각하는 진정한 평화는 뭔데?]
[마족의 몰살 그리고 마왕의 죽음, 그것이야말로 이깟 일시적인 평화가 아닌 진정한 평화다!]
툭-
유리 같은 손톱이 끝내 떨어져 나와 바닥을 뒹군다.
"아... 진짜 되는 일이 없네."
본래 누구보다 종전 협정을 원했던 용사, 로이드.
그런 놈을 '조율'을 통해 생각을 변화시킨 것까지는 좋았다.
근데 '조율'을 너무 성급하게 한 탓인지, 아니면 용사의 에고가 강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로이드의 행동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나고야 말았다.
"어휴, 얼간아, 얼간아! 조커 카드랑 마왕이 있는데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일단 협정을 체결하고 돌아가서 수왕의 뒤통수를 치면 되는 거였잖아!"
끝내 폭발하고 만 스카디.
"그게 그렇게 어려워?! 그것까지 내가 간섭해야 돼?! 기본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잖아!"
잠시간 온갖 짜증과 욕설을 퍼붓고서야 그녀의 분노도 조금 잦아든다.
"후우, 그래... 견족 중에서 용사를 만든 내가 머저리지. 단순 무식한 머저리 종족 같으니...."
이제 용사는 죄의 대가를 물어 죽임을 당할 것이고.
종전 협정은 무사히 체결될 터.
"이러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되잖아. 아, 짜증 나."
다시 새로운 용사를 뽑아 마족과 마왕을 향한 증오심을 키우고.
그 증오심을 기반으로 종전 협정을 백지화하면 되긴 한다.
다만 그 일련의 과정들이 꽤나 귀찮았을 뿐.
"일단 새로운 용사 후보를 물색하고...."
스스스스스스슥-
35층 소속의 수많은 원주민들의 정보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하는 와중.
[로이드! 자네! 왜 그러나! 누구보다 종전 협정에 찬성했던 자네가 아닌가!]
[...진실을 알았을 뿐입니다. 일시적인 평화로는 그 누구도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걸 말입니다.]
[진실?! 자네, 도대체 그게 뭔....]
수정구에선 수왕과 용사의 것으로 짐작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쪼잘쪼잘 시끄러워 죽겠네! 빨리 좀 죽이지 뭣들 하고 있는 거야?"
이 세상의 특성상, 두 명의 용사는 존재할 수도, 공존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반드시 지금의 용사가 죽어야만 차세대 용사를 선정할 수 있건만.
[잠깐. 내게 생각이 있다. 상점주, 혹시 '그게' 있나?]
[그거요?]
[천고의 별미 말이다.]
[아, 마왕님이 좋아하시는 것 같아 좀 챙겨 오긴 했는데. 드릴까요?]
[그걸 용사에게 먹여라.]
[엥?]
수정구에서 끝없이 흘러나오는 대화 소리.
결국 다시금 열이 뻗친 스카디가 씩씩거리며 수정구 앞으로 걸어간다.
"그냥 빨리 좀 죽이지, 도대체 뭘 하는... 아."
스카디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지금 뭘 하는...! 놔라! 놔, 으으읍!]
[시끄럽고, 일단 먹어.]
조커 카드가 증기가 피어나는 하얀 얼음덩이를 용사의 입에 강제로 욱여넣고 있다.
"저건...! 안 돼!"
그러나 그녀의 외침이 무색하게.
드라이아이스는 끝내 용사의 입속에서 사라지고야 만다.
"아...."
이맛살을 한껏 찌푸렸다가 긴 머리카락을 스스로 헝클어뜨려 버리는 스카디.
천고의 별미, 드라이아이스.
저건 그저 조커 카드가 취급하는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관리자의 '조율'을 방해하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조커 카드의 악취미적인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물건이었다.
[이게 도대체...! 신의 음성이 들리지 않아?!]
[역시 그랬나.]
[그게 뭔....]
[목소리를 듣는 건 너만이 아니라는 거다.]
그 와중, 용사와 마왕의 대화 소리가 수정구를 타고 흘러나온다.
[분명 신께서 내게 진실을 알려 주셨는데.... 하지만 마왕도 그 목소리를.... 그럼 내가 들었던 건 도대체....]
[글쎄. 세상의 의지이거나 정말 네 말대로 신의 목소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건 우리라는 거다, 그런 목소리가 아니라.]
[혼란스럽군.... 하지만 뭔가 머릿속이 한결 맑아진 것 같은 기분이야. 무엇보다 그쪽이 그리 증오스럽게 보이지는 않는 것 같....]
텅, 텅텅텅텅-
스카디가 냅다 집어 던진 수정구가 바닥을 힘껏 구른다.
"그래! 너희 멋대로들 하세요! 이제 난 모르겠다!"
세상의 축이자 핵심인 용사와 마왕이 그녀의 통제권에서 빠져나간 터라.
이제 층의 핵심 콘텐츠인 '멸마 전쟁'도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질 터.
"알아서들 해! 퀘스트도 그냥 잔잔바리 퀘스트나 깨고! 평화를 즐기라고! 평화 좋지! 좋아!"
덜컹-
그러던 그때.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나뭇가지를 출렁이며 공간으로 들어온다.
"이봐, 스카... 오."
난장판이 된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유그드라실이 그녀를 힐끔 본다.
"조커 카드인가?"
"...그래. 나도 이제 모르겠다. 나도 이제 그냥 너처럼 빈둥거리려고."
"음? 정정을 요구하지. 난 빈둥거린 적이 없...."
"그래도 나름 열심히 관리해 보려 했는데, 이제는 답이 없다."
층의 관리는 곧 관리자의 실적으로 이어진다.
얼마나 층을 깔끔하게 관리했는지, 콘텐츠의 완성도는 어떠한지, 밸런스는 적절한지 등.
수많은 층의 요소들이 곧 실적으로 이어지며.
그러한 실적들은 본사로 갈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준다.
그러나 그녀는 깨닫고야 말았다.
저 망할 조커 카드가 존재하는 이상, 답이 없다는 걸 말이다.
"이제 실적 따위는 아무래도 좋아. 클리어 한 층에 계속 목매고 있는 것도 웃긴 노릇이고. 하아...."
스카디의 열변에 유그드라실의 나뭇가지들이 위아래로 출렁거린다.
"좋은 마음가짐이군. 어차피 클리어 한 층은 놔두는 게 편하다. 원주민들이 알아서 하겠지. 우리는 이대로 여유롭게 하루를 만끽하며 빈둥거리면 될 뿐!"
"빈둥거린 것 맞네."
"흠흠.... 어쨌건 일단 나와라. 가야 될 시간이다."
유그드라실의 음성에 스카디가 고개를 까닥인다.
"가다니? 어딜?"
"오늘은 단체 교육이 있는 날이잖나. 잊었나?"
"아, 그랬지. 귀찮네. 어차피 또 헛소리만 들어야 되잖아."
"그래도 듣자 하니 오늘은 본사에서도 꽤 유능한 직원이 왔다더군."
자신도 모르게 관심을 보이는 스카디.
"누군데."
"입실론 대리라더군."
* * *
'흠.'
난 턱을 쓸어내리며 눈앞의 상황을 바라봤다.
"우리 측의 실수는 몇 번이고 용서를 구해도 할 말이 없는 크나큰 실수였다. 그쪽의 요구 조건은 모두 수용하겠다."
거듭 사죄를 표하는 수왕과 이미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용사.
바이라가 그런 그들을 보며 픽 웃는다.
"됐다, 어차피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었으니. 그리고 난 이걸 챙긴 걸로 충분하다."
붉은 글씨가 각인되어 있는 종이를 팔랑여 보이는 바이라.
종이의 끝자락에는 각 수장들의 각인이 뚜렷이 박혀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감사를 표할 거면 내가 아닌, 저기에 있는 상점주에게 해라. 그가 아니었다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변했을 테니까."
그에 레길론과 로이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고맙다, 등반자. 자네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도 생각과 생각 속에 갇혀 있었을 거다."
"하하, 협정이 무사히 체결됐으니 저도 그걸로 만족합니다."
층의 평화는 곧 더 많은 공략자들이 35층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될 것이고.
35층 너머를 바라보는 공략자들 또한 늘어날 터라 내게도 나쁠 게 없었으니까.
"이보게, 바이라. 협정을 맺은 기념으로 이건 어떤가? 자네의 영역과 우리의 왕국 사이에 중립 지역을 만드는 거네!"
"그게 무슨 말이지?"
"마족과 수인들이 공존하는 구역을 만들어 보자는 거네. 이름은... 엔드미엘이 어떤가? 영원한 평화라는 수인의 옛 언어라네!"
갑작스러운 레길론의 제의에 고민에 잠기는 바이라.
이내 그녀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린다.
"그건 꽤 재밌을 것 같군."
그 순간.
띠링-
[수왕 레길론과 마왕 바이라가 오랜 전쟁의 끝에 종지부를 찍을 것을 선포하였습니다.]
[신규 지역,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이 개방됩니다.]
[최초 개방자에게 보상이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칭호, '흑과 백'이 주어집니다.]
'오오오? 신규 지역이라고?!'
35층 마왕의 성은 공략자들에게 개방된 지 오래된 층이건만.
신규 지역이 존재했을 줄이야.
'마족과 수인들 간의 전쟁이 종식되어야만 생성되는 지역인 건가.'
나쁘지 않은데?
'근데 혹시 두 종족이 다시 전쟁을 하면 해당 지역도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공략자들에 의해 발견됐다가 사라진 지역들 또한 존재하긴 했으니까.
'으흐흐, 그건 그렇고, 생각지도 못한 보상은 너무 좋은데?!'
내가 얼른 칭호를 살피려던 찰나.
"그보다 등반자, 한 가지만 물어도 되나?"
갑자기 수왕, 레길론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예? 네, 뭐, 물어보시죠."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자네한테서 익숙한 향기가 나는 것 같던데...."
"네?"
고개를 갸웃거리던 수왕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온다.
"어째서인지 자네에게서 내 옛 빵지기의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말이네. 이름이 루... 음, 이름은 잘 기억나질 않는군."
171화 평화를 위하여 (3)
'루? 아, 설마 루나를 말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루나 녀석.
수왕의 수석 빵지기 출신이라고 했었지?
거기다가 루나가 튀어나왔던 상자의 이름도 봉인된 수왕의 유물이었으니.
레길론이 루나를 아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근데 루나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 그걸 나한테서 맡았다고? 도대체 어떻게 돼먹은 코야?'
수왕 정도 되면 기본적으로 후각이 저렇게 예리한가?
아무튼 굳이 사실을 숨겨야 할 이유는 없었기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제 부하로 일하는 중이죠."
"역시 그런 거였나. 하기야 자네 정도의 실력자라면 봉인을 푸는 것도 어렵진 않았을 테지."
레길론이 흘낏 마왕과 담소를 나누는 용사를 바라보는 와중.
난 레길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루나가 어떤 큰 잘못을 했길래 그렇게 봉인까지 해 둔 겁니까?"
"그 녀석은... 빵지기로서 아주 큰 죄를 저질렀다."
'큰 죄?'
분명 나한테는 빵이 왕의 입맛에 안 맞았다는 죄로, 왕의 분노를 사게 되어 봉인됐다고 했었는데?
"큰 죄라면...."
"내게 갓 구운 따뜻한 빵이 아닌, 식은 빵을 헌상했었지."
"...."
이 자식 이거....
사실 유례없는 폭군인 것 아냐?
내가 용사를 제지하지 말았어야 했나? 하는 생각을 심도 있게 고민하던 중.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로군. 등반자라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
레길론이 나지막이 이야기를 이어 간다.
"수인에게 있어 '빵'은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빵은 생명이며 삶을 이어 가는 수단이고, 나아가 대지의 은혜를 아우르는 집결체이기도 하지. 그렇기에 수준급의 빵을 만드는 실력 있는 빵지기들이 큰 명예를 얻는 것이고."
"...아하."
"막중한 자리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는 법. 그렇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벌을 내렸던 것뿐이다."
근엄한 사자의 얼굴에서 씁쓸해하는 분위기가 묻어 나온다.
"돌이켜 보면 그만한 빵지기도 없었지. 확실히 실력만큼은 레온 왕국에서도 가히 최고였다. 어느 빵지기들도 루나만큼의 실력을 보여 주진 못했으니까. 특히 녀석이 만든 구름빵과 갈색 빵은 가히 압권이었어."
호오, 루나 녀석....
매일 츄르만 밝히더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녀석이었구나?
"그렇군요."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찰나간 머뭇거리던 레길론이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루나를 돌려줄 의향이 있나?"
"예?"
"물론 그냥 돌려 달라는 말은 아니다. 그 대가로 그쪽이 원하는 게 있거든 최대한 요구를 수용하려고 한다."
루나를 돌려 달라고?
이미 녀석은 당당한 주방 멤버이자 유닛 '낫휴먼'의 어엿한 일원이며 나의 수석 빵지기다.
그런 녀석을 돌려 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난 픽 실소를 흘렸다.
"녀석은 이미 제 동료입니다. 동료를 주고받을 순 없는 노릇이죠."
"그런가.... 루나는 좋은 동료를 만났군."
좋은 동료라....
루나가 들었으면 질색팔색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생각해 보면 또 나 같은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아 참! 그러고 보니 루나가 재료를 구해 달라 했었지?'
눈앞의 수왕이라면 루나가 사용했던 재료들을 잘 알고 있을 수도 있을 터.
"서로 협력하는 관계라고 할 수 있죠. 다만 루나가 재료에 꽤나 집착을 하던데, 저로서는 루나가 원하는 재료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재료?"
"네. 말포르, 버트, 말링 그리고 또...."
루나가 녹음기처럼 읊어 댔던 재료들.
그것들을 수첩에 적어 뒀기에 수왕에게 알려 주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과연.... 등반자, 자네가 재료들을 구하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다."
"당연하다고요?"
"그래. 지금 네가 말한 재료들은 오직 왕성에서만 사용되는 귀한 식자재들이다."
레길론의 말에 의하면.
말포르는 '오색의 포르'라는 작물로부터 얻을 수 있고 버트는 '여명의 소'의 우유로 만드는 등.
평범한 원주민이나 등반자들은 결코 구할 수 없는 것들이라고 했다.
'확실히 구하기 쉽지 않아 보이긴 하네.'
너튜브에서 관련 영상을 본 기억도 없는 걸 봐선.
아마 공략자들에게는 아예 공개되지 않은 것들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왕이면 몇 개라도 구해 보고 싶긴 한데.'
집에서 키울 수 있는 것이라면 더 좋고 말이다.
"확실히 귀한 재료들 같군요."
"하지만 자네가 원한다면 못 줄 것도 없지."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자네에게 받은 도움에 비하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다만 당장 주기에는 어렵고, 추후에 저기에 있는 헤르만에게 넘겨 두겠다."
내가 수왕을 올려다보며 씨익 미소를 짓던 와중.
"늘꺾이는마음 님, 레길론 님, 다과가 준비되었으니 아무쪼록 즐겨들 주시지요. 이번 다과에 올라간 과자들은 마왕님께서 몸소 준비하신 것들입니다."
종전 협상의 장에는 어느새 자그마한 다과회가 열려 있었다.
"오오, 마왕이 직접 만든 과자라.... 귀한 걸 맛보게 되는군."
"그보다 엔드미엘 말이다. 어떻게 관리를 할지 이야기를 하는 게...."
어느새 평화가 찾아온 종전 협상의 장.
그곳에서 마족들과 수인들이 서로에게 웃음 지으며.
다가올 새로운 미래를 논의해 나간다.
* * *
며칠 뒤.
[긴급 뉴스! 마족과 수인 간의 종전 협정이 체결됐다?]
[길었던 원한과 증오의 고리가 마침내 끊겼다!]
[신규 지역,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 출현! 바로 달려가 봅니다!]
.
.
.
난 너튜브에 올라온 수많은 영상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올라오는 양이 어마어마하긴 하네.'
예전에 공략된 층이라 사뭇 그 관심도가 떨어질 법도 하건만.
아무래도 질리도록 이어진 전쟁이 끝났다는 것.
그리고 새로이 출현한 도시, '화합의 도시 엔드미엘'로 인해 관심이 증가한 느낌이다.
난 영상 하단의 댓글창을 슬쩍 살폈다.
[나 혼자 분단국: 캬~ 마왕이랑 용사도 손잡는 판국에 우리나라만 아직도 휴전 국가네? 우린 언제 휴전함?]
[└너튜브공무원: 느그 집구석도 항상 전쟁통인데 휴전이 쉽게 되겠음?]
[└└답글A.I.: 윗놈은 악질이니까 무시하세요. 아무튼 이렇게라도 대리 만족 하는 거죠, 뭐.]
[핑프: 엔드미엘 영상 올라옴?]
[피자둘기: 내가 살면서 용사랑 마왕이 손잡는 걸 다 보네. 이제 35층은 어떻게 되려나?]
[└합리적추론: 좀 궁금하긴 하네요. 이제 전쟁도 없을 테니, 그와 관련된 퀘스트들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기도 하고요.]
'오, 그건 나도 좀 궁금하긴 하네.'
35층에는 수인들과 마족들의 전쟁터가 드넓게 분포되어 있고.
그곳에서 퀘스트를 받아 수인 혹은 마족을 죽이고 그 대가로 골드나 아이템을 얻어 왔었다.
'하지만 이제 종전이 됐으니 그런 퀘스트들은 더 이상 없다고 봐야 되나.'
난 전에 신규 지역 개방 보상으로 얻었던 칭호를 슬쩍 살폈다.
흑과 백
설명: 수인과 마족의 화합에 큰 공헌을 한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이다.
내용: 종전 협정이 유지되는 동안, 모든 수인과 마족들이 칭호 보유자와 우호 관계가 된다.
'종전 협정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우호 관계가 유지된다라....'
마족들이랑은 원래 사이가 좋긴 했는데.
뭐, 대다수의 수인들이 공략자들을 싫어했던 걸 생각하면.
수인들과 사이가 좋아지는 것도 괜찮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레온 왕국을 가 보는 것도 좋을지도?'
특히 수인들의 인정을 받은 일부 공략자들을 제외하곤.
공략자들이 레온 왕국을 돌아다니는 건 꽤나 힘든 일이었으니까.
내가 칭호를 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때.
"사장님! 사장님!"
"음?"
언제 다가온 건지, 수정이가 웃으며 내게 묻는다.
"사장님은 휴지나 세제 같은 게 좋으세요, 아니면 캔들 같은 게 좋으세요?"
"음? 세제?"
"네! 그래도 기왕 집들이 선물로 사 가는 거, 사장님이 좋아하는 걸 사 가면 더 좋잖아요?"
'아. 집들이!'
최근 35층과 탑에 가느라 깜박하고 있었다.
'가만있자. 집들이가... 내일이었네?'
그래서 집들이 선물을 물어본 거였구나.
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음, 그래도 기왕이면 생활용품이 낫지 않을까?"
"생활용품이요? 오케이! 접수했어요!"
허겁지겁 선아가 있는 자리로 돌아가는 수정이.
자기들끼리 바삐 속닥이는 게.
아무래도 집들이 선물을 상의하는 모양이다.
'내일은 일찍 가서 청소 좀 해 둬야겠는데.'
대외용으로 사 둔 세컨드 하우스.
사실 내가 그곳을 사용할 일은 거의 없었기에.
가끔 분신에게 청소만 시켜 뒀었다.
'음, 내일은 좀 할 게 많겠네.'
* * *
다음 날, 오후.
"후우! 이만하면 되겠지!"
마당에 듬성듬성 자라난 잡초를 뽑고.
집 안을 정리해 놓으니 이제야 좀 깔끔한 느낌이 난다.
'근데 세컨드 하우스까지 단독으로 산 건 좀 무리수였나? 마당을 관리하는 게 은근 귀찮긴 하네.'
뭐, 그래도 이런 행사를 치르고 나면.
또 당분간은 여유로울 테니까.
'어디 보자. 시간이....'
난 힐끔 손목시계를 살폈다.
선아와 수정이 그리고 나라가 오기까지 얼추 1시간 정도가 남은 상황.
'음식들도 세팅을 하긴 해야 되는데.'
자고로 집들이라 함은 지인들을 불러.
집을 소개하고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닌가?
그러나 아직 준비된 음식은 하나도 없는 것도 사실.
하지만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슬슬 녀석들이 올 때가 됐는데.'
그러던 그때.
빵빵-
대문 밖에서 경적 소리가 울려온다.
'왔구나!'
얼른 대문을 활짝 열자 탑차가 후진하여 마당 안으로 들어온다.
마스크를 낀 분신이 운전석에서 하차하자.
난 녀석에게 다가갔다.
"조심히 잘 왔지?"
"당연하지! 처음 해 보는 것도 아니고. 나! 프로야, 프로!"
"확실히 주차 실력은 프로 같긴 한데, 출장 뷔페 실력은 어떤지 볼까?"
분신이 씨익 웃더니.
"이 정도면 업계 프로들이지."
덜컹-
탑차의 뒷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그러자 의자, 테이블을 비롯한 갖가지 도구들을 비롯하여.
"후우, 갑갑해 죽는 줄 알았다!"
"그게 무슨 말이냥? 오히려 몸이 꽉 끼는 게 아늑한 기분이었다냥!"
"왈왈!"
<빠르게 임무를 완수한다. 참기름이 식기 전에 돌아가야 함.>
그 사이에 끼어 타고 있는 주방 멤버들의 모습이 보인다.
"자자, 얼른 끝내자고! 이것만 끝내면 휴식이다!"
"오오오오! 휴식!"
"얼른 끝내자냥!"
휴식이라는 말에 황급히 하차하는 주방 멤버들.
"흐읍!"
가장 먼저 하차한 발리나가 두 팔을 쫘악 벌리자.
스스슥-
허공에 불균형하게 흔들리는 것 같은 막이 생겨난다.
공간 왜곡 결계.
일반인들은 볼 수 없는, 발리나의 주인인 나만이 볼 수 있는 결계이다.
이로써 외부에서 내부를 봐도 평범한 단독주택처럼 보일 터.
"자자, 일단 테이블부터!"
그사이, 다른 녀석들이 능숙한 일꾼처럼 준비해 온 것들을 마당에 세팅하기 시작한다.
휑한 마당에 기다란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이고.
척, 척-
식전 빵과 참기름파스타, 샌드위치, 스테이크 등.
주방 멤버들이 만든 갖가지 음식들이 테이블을 풍성하게 차지한다.
"이야, 기대 이상으로 준비 많이 했네?"
"당연히 신경 써야지! 특히 오늘은 더 중요한 날인 것 같던데, 마당에 작게 캠프파이어도 할까?"
"캠프파이어는 무슨.... 그보다 중요한 날이라니?"
나의 물음에 분신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으흐흐, 그래서, 주인은 결정했어?"
"결정하다니? 뭘?"
"난 개인적으로 선아가 마음에 들더라. 일도 묵묵하게 열심히 하면서 책임감도 있고, 또 착하기도 하고."
"아...."
난 피식 실소했다.
"얀마, 그런 자리 아니야."
"아니긴! 애초에 주인의 집에 집들이를 온다는 게 뭐겠어? 다들 주인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오는 거잖아?!"
"관심? 그냥 같이 오래 일했으니까 그런 거지."
"뭐? 어이구야...."
끝내 뒷목을 잡는 분신.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고. 그럼 주인이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은 없어?"
"다들 마음에 들지."
"아니! 직원이랑 사장으로서의 관계 말고! 남녀로서의 관계 말이야!"
"남녀로서의 관계라...."
1시간 뒤.
딩동-
마침내 선아 일행이 도착한 건지 현관 벨 소리가 울리자.
난 얼른 대문을 열어 줬다.
"안녕, 얘들아. 어서 와."
"안녕하세요, 사장님!"
"안녕, 인성아!"
각자 손에 선물을 든 선아, 수정이 그리고 나라.
그녀들의 인사를 받으며 나도 미소를 지었다.
"다들 오느라 고생 많았네."
"와아, 근데 사장님! 집 뭐예요?! 엄청 넓은 것 아니에요? 혼자 사시는 거죠?"
거의 면접에 가까운 질문을 던지는 수정이.
"자자, 질문은 이따가 받는 걸로 하고, 일단 식사부터 하자. 다 식겠다."
"식사요? 오?"
"와아아...."
마당에 차려진 테이블을 본 여인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172화 북적북적 집들이
"와아, 사장님! 이게 다 뭐예요?!"
"인성아, 이런 건 언제 준비한 거야?"
그녀들의 호들갑에 난 빙긋 미소 지었다.
"그래도 명색이 집들이인데, 식사 대접은 제대로 해야지. 다들 편하게 앉아."
자그마한 가든파티 형식의 식사 자리가 어색해서일까.
"아, 네!"
"가, 감사합니다!"
선아와 수정이가 쭈뼛거리며 선뜻 자리에 앉지 못하자.
나라가 슬며시 그녀들을 의자에 앉히며 웃는다.
"얘들아, 인성이가 열심히 준비한 음식들이잖아. 일단 식기 전에 먹을까?"
"...네! 언니!"
다행히 어색한 기류는 금방 사라지고.
음식에 그릇을 덜어 가기 시작하는 여자들.
"와... 진짜 음식들이 다 너무 맛있어요, 사장님! 이걸 다 사장님이 전부 직접 만드신 거예요?!"
수정이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런 셈이지."
나와 주방 멤버들은 곧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
엄밀히 보면 이 음식들 또한 내가 만든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사장님! 이 참기름파스타는 저희 카페에서 팔아도 되겠는데요?!"
"하하, 그래? 참기름파스타도 신메뉴 구상에 넣어 봐야 되나?"
그렇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즐거이 식사를 끝마친 뒤.
"자자, 저희 집에 온 걸 환영합니다."
본격적인 집 구경이 시작됐다.
"와아! 와아아아! 안이 엄청 넓네요! 와, 방이 도대체 몇 개예요?"
"수정아, 거, 거실 좀 봐. 내 방보다 몇 배는 넓은 것 같아...."
현관에 들어가기 무섭게 탄성을 내지르는 선아와 수정이.
나라도 가볍게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게, 제법 놀란 눈치다.
"사장님! 다른 방들도 구경해 봐도 돼요?"
"여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도 있어요! 저희 2층도 구경해도 돼요?!"
"그럼! 다들 편하게 구경해."
선아와 수정이가 처음 놀이공원에 간 아이들처럼 바삐 집을 돌아다니는 와중.
나라가 슬며시 내게 말해 온다.
"인성아, 집이 엄청 깨끗하다."
"그래? 하하, 열심히 청소한 보람이 있네."
"가구들도 깔끔한 게 예뻐 보인다. 혹시 어디서 산 건지 물어봐도 돼?"
"당연히 아케아에서 샀지. 직접 조립하는 게 귀찮긴 해도, 적절한 가격에 가구를 사 올 수 있으니까."
물론 가구 조립은 주방 멤버 일동이 힘써 줬지만.
"그래서 나라야,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아?"
"음...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곤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깔끔한 것 같은데? 여기 옷방에 걸린 옷들만 봐도 제법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은 느낌?"
"그래? 다행이네."
평소 사용하지 않는 집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가구들이나 주방 도구, 가전제품 등은 이미 구비해 뒀다.
거기다가 심지어 기존에 내가 입던 옷들이나 침대까지 이곳에 옮겨다 뒀으니.
'으흐흐, 역시 위장을 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내가 흐뭇한 미소를 짓던 와중.
"와! 여기서 숨바꼭질을 해도 되겠어요, 언니!"
"그, 그러게!"
"얘들아! 슬슬 선물 개봉식 하자!"
나라가 선아와 수정이를 부른다.
'선물 개봉식?'
난 힐끔 그녀들이 갖고 온 종이봉투를 바라봤다.
'휴지랑 세제 이야기를 하더니, 찻잔 같은 걸 가져왔나? 찻잔도 좋지.'
그렇게 난 여자들과 거실에 앉은 뒤.
그녀들이 꺼내는 선물을 구경했다.
"사장님, 제 선물이에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시작은 선아였다.
"고마워. 혹시 바로 열어 봐도 돼?"
"그럼요!"
갈색 문양의 포장지를 뜯어내자.
"오?"
예상치 못한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편의점24]라는 간판이 달린 자그마한 건물과 그 앞으로.
가면을 쓴 남자 모형이 있는 피규어였다.
"이야! 이게 뭐야?"
"사장님이 탑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준비해 봤어요. 가게 사장님이 그 모델이 지금 가장 인기가 많다고 하다고 해서 사 봤는데, 마음에 드실지 잘 모르겠네요."
타인이 본 나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모형.
이걸 지켜보고 있자니 꽤나 기분이 이상한데?
물론 싫은 건 아니지만.
"너무 마음에 드는데? 안 그래도 집 안이 조금 휑해서 뭔가 꾸밀 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내 취향이야! 너무 고맙다!"
"벼, 별말씀을요."
얼굴을 붉히는 선아 외에도.
수정이와 나라가 저마다 준비한 선물을 내 앞에 놓는다.
"제 것 먼저 봐 보세요, 사장님!
"그럴까? 이건... 가습기잖아?"
"넵! 피부 건조해지지 마시라고 한번 준비해 봤어요!"
도넛 자세를 하고 있는 고양이 가습기를 보며.
난 빙긋 웃었다.
"고마워, 수정아. 잘 쓸게!"
"넵!"
"다음은 나네. 나는 이거. 자."
종이봉투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드는 나라.
제법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 위로 [알마미엘 36년]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오오, 술이네?"
"좋은 날에는 또 좋은 술이 따라와야지. 전에 다른 고객분한테 추천받았던 거야."
"근데 집들이 선물치곤 꽤 비싸 보이는데...."
내가 말꼬리를 흐리자.
옆에 있던 수정이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무려 500만 원이나 하는 술이래요, 사장님!"
"오...."
난 나라를 보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선물을 받는 입장이니 고맙긴 한데, 무리한 건 아니지?"
"아냐, 아냐. 너한테 받은 것에 비하면 작은 선물이지. 네 덕에 나도 다른 클라이언트들이랑 더 안면도 트게 될 수 있었고, 또 좋은 기회도 얻었으니까."
"그렇다면 고맙게 받을게."
꼴꼴꼴-
호박빛의 술이 저마다의 잔들을 채우자.
난 잔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오늘 다들 와 줘서 고맙고, 재밌게 즐기다가 갔으면 좋겠다. 건배!"
"건배!"
건배사를 시작으로 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길 몇 차례.
다들 서서히 취기로 얼굴이 붉게 물들 무렵.
"얘들아, 나도 준비한 게 있는데, 한번 볼래?"
난 슬며시 운을 뗐다.
"사장님이 준비하신 거요?"
"어. 그간 각자의 자리에서 다들 너무 고생해 준 데다가, 이런 귀한 선물들을 받았는데 나도 뭔가를 선물해야지. 자, 이거야!"
난 준비해 둔 티켓을 그녀들에게 선보였다.
"그건... 컨셉월드 입장권이잖아요?!"
컨셉월드.
현성 그룹의 재단에서 만든 놀이공원으로서.
종말의 탑의 콘셉트를 최대한 놀이기구들에 반영하고자 하였다.
X니버셜 스튜디오를 능가하는 놀이공원을 만들겠다는 회장의 야심찬 포부와 함께 만들어진 놀이공원이다.
"세상에... 그 티켓 구하기 엄청 힘들다고 들었는데...."
"으음...."
순간 여자들 사이에서 간단히 눈빛 교류가 오가는 와중.
수정이가 손을 번쩍 들며 묻는다.
"근데 잠시만요, 사장님. 봉투가 조금 두꺼운 것 같은데요?"
"아, 이거?"
난 봉투에 든 티켓들을 모두 꺼내 보였다.
"일단 30장이거든?"
"네?! 30장이라고요?!"
순간 침묵이 흐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흠... 역시 30장으로는 좀 부족한가?"
"아, 아니요! 절대 남죠!"
"그치? 이 정도는 돼야 가족분들도 모시고 가족 동반으로 같이 갈 수 있을 테니까. 혹시 티켓이 부족하거든 말하고. 더 구해다 줄게."
"...."
"...넵."
잠시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던 일동.
그러나 이내 다시금 즐거운 분위기 속에 술자리가 이어진다.
* * *
다음 날.
[종말의 탑 관리자들 단체 교육의 날.]
천장에 걸린 펄럭이는 플래카드 아래로.
"...마지막으로 탑 간의 경쟁 시스템이 도입된 이래로 여러분의 임무가 더욱 중요해졌음을 항상 상기하길 바라며, 더 철저한 관리와 책임감을 갖고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할 겁니다. 이상으로 교육을 끝마치겠습니다."
마지막 멘트를 끝마친 입실론이 눈앞의 관리자들을 바라본다.
짝짝짝-
영혼 없는 박수 소리가 회장을 울린다.
"흐아아암!"
몇몇은 늘어져라 하품까지 하고 있다.
'그래. 별로 관심 없겠지.'
어차피 관리자들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이었으니.
저들이 지루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
사실 그딴 건 그녀에게 있어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분명 이름이... 에르세우스였지.'
본사의 대리인 그녀가 굳이 단체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종말의 탑을 방문한 데는 다른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녀가 날카로운 눈으로 관리자들을 훑던 중.
"본사를 대신하여 교육에 임해 주신 입실론 대리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온몸이 불로 뒤덮여 있는 기사가 그녀의 앞으로 와.
고개를 숙여 보인다.
'그래, 이런 놈들은 꼭 있지.'
어떻게든 본사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 말이다.
"아뇨. 감사할 필요 없어요. 이것도 본사의 방침이자 일의 일환이니까요."
"아. 예."
"그건 그렇고... 분명 제가 모든 관리자들이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고 했을 텐데요?"
그녀의 날 선 질문에 당황하는 이그나이트.
"예! 그래서 누구도 빠짐없이 전원 참석했습니다!"
"그래요? 근데 왜 숫자가 부족한 것 같죠? 하나가 비는 것 같던데요?"
분명 자리에 있어야 할 관리자의 숫자는 100.
그러나 지금 자리에 있는 건 99의 관리자들뿐이었다.
"아, 그건... 아직 새로운 관리자가 배정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새로운 관리자요? 그게 무슨 말이죠?"
이미 종말의 탑 41층의 관리자 에르세우스와 그녀의 부사수가 사라진 건 알고 있었으나.
입실론은 모른 척 질문을 던졌다.
"관리자 하나가 자신의 소임을 방관하고 사라졌습니다. 저의 부족한 식견으로 추측하건대, 아마 스스로 소멸을 택한 것 같습니다."
"그래요? 흔하지는 않지만 또 아주 없는 일도 아니네요."
실제로 관리자들이 스스로 소멸을 택하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런 사건들은 간간이 벌어졌었고.
그녀 또한 그녀의 부사수가 엮이지 않았더라면 이번 일을 그저 '단순한 일'의 하나 정도로 치부하고 넘겼을 테니까.
"예, 그래서 부득이하게...."
"뭐, 좋아요.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라는 걸 인정하죠."
"가, 감사합니다."
불의 기사가 연신 굽신거리는 가운데.
"저놈 저거... 우리한테만 엄격한 거였네."
"냅둬. 본사에 가고 싶으시다잖아."
관리자들의 것으로 짐작되는 속삭임이 들려온다.
그러나 입실론은 구태여 나서지 않았다.
'그보단 에르세우스가 쓰던 공간을 살펴보고 싶은데.'
현재 그녀가 갖고 있는 실마리라곤 종말의 탑 관리자가 그녀의 부사수와 함께 본사에 왔다는 게 전부인 상황.
그렇기에 현재로선 유일한 실마리인 에르세우스의 관리실을 살펴보고 싶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본래 본사의 직원은 탑에 필요 이상으로 관여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탑은 1차적으로 관리자들이 책임을 지고.
문제가 생겼을 시 본사가 나서는 형식이었으니까.
'만약 여기서 내가 필요 이상으로 움직인다면....'
그녀의 행동들은 모두 탑 안에 있는 기록의 수정구에 남겨질 것이고.
그녀 또한 부사수와 같은 결말을 맞을지도 모른다.
"뭐, 좋아요. 그보다 당신, 이름이 뭐죠?"
"이, 이그나이트입니다, 대리님!"
이름이라고도 할 수 없는 하찮은 미명.
그러나 본사를 향한 욕망이 강렬한 것을 보아하니.
언제고 써먹을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입실론이 허공을 향해 손짓하자.
쩌저저적-
허공에 공간의 비틀림이 생겨난다.
"좋아요, 이그나이트. 이름을 기억해 두죠."
"여, 영광입니다!"
계속 고개를 조아리는 불의 기사를 뒤로하고.
공간의 비틀림 속으로 들어가는 입실론.
스스슥-
허공의 비틀림이 사라지기 무섭게.
"후, 갔다!"
"어이구야, 재미도 없는 걸 종일 들으려니 죽는 줄 알았네!"
"자자, 지루한 교육도 끝났겠다, 다들 휴게실로 가자고!"
자리에 모여 있던 관리자들이 툴툴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관리자들이 자리를 뜬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 갔나.'
입실론이 관리자들이 사라진 텅 빈 공간을 바라본다.
사실 그녀는 처음부터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았다.
그저 이동한 척 연기를 한 것일 뿐.
'이 능력이 아니었으면 애당초 이런 짓은 시도조차 못 했겠지.'
그녀가 '입실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으며 그와 함께 얻은 작은 힘.
그건 바로 '왜곡'.
잠시간 존재 자체를 왜곡시키는 힘으로서.
이런 비밀스러운 일을 수행하기에 굉장히 적합한 힘이었다.
물론 주주들이나 본사의 거물급 인사들 앞에서 사용하면 바로 걸리겠으나.
기록의 수정구나 관리자들을 속여 넘기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서둘러야겠어.'
지금 그녀는 본사로 돌아간 것으로 기록의 수정구에 기록되었을 터.
그러니 너무 오래 본사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을 거다.
'일단 소멸한 관리자의 관리실부터 빠르게 찾자.'
* * *
같은 시각.
새하얀 백룸.
철커덕, 철컥-
나는 실시간으로 바뀌는 순위표를 보며 미소 지었다.
'여긴 또 오랜만이네.'
173화 대면
이곳은 엄연히 공략자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공간이며 탑의 은밀한 곳 중 하나일 터이지만.
이제는 내게 제법 익숙한 공간이기도 했다.
'어디,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 슬쩍 살펴만 볼까.'
난 슬며시 편의점에서 나가.
순위표 앞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종말의 탑... 종말의 탑이... 아! 여기 있네!'
[500 - 오만의 탑, 60층 도전 중.]
[501 - 종말의 탑, 58층 도전 중.]
[502 - 고요의 탑, 55층 도전 중.]
'크으!'
58층 도전 중.
이 문구가 어찌도 이리 가슴에 와닿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진짜 많이 올라오긴 했네. 이제 60층도 코앞이구나.'
1차로 점령할 고지가 목전까지 다가온 탓일지도 모르겠다.
[498 - 징벌의 탑, 60층 도전 중.]
[499 - 애환의 탑, 60층 도전 중.]
[500 - 오만의 탑, 60층 도전 중.]
'흠, 근데 대부분 60층에서 체류 중이네. 60층의 난이도가 꽤 어렵나?'
물론 종말의 탑의 60층과 다른 탑들의 60층이 같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는 없겠으나.
상당수의 탑들이 60층에서 멈춰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터.
'뭐, 60층이고 자시고 일단 58층, 59층을 클리어 하는 게 우선이긴....'
내가 턱을 쓸어내리며 순위표를 응시하던 그때.
스스슥-
분명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눈매가 날카로운 금발의 여인.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한 채 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뭐지? 관리자인가? 으음, 골치 아파졌네.'
설마하니 관리자가 몸을 숨긴 채 있었을 줄이야.
물론 관리자를 대면하는 상황을 대비하여 생각해 둔 방법이 있긴 하다만.
"...."
난 잠시간 여인과 눈싸움을 하다가.
냅다 등을 돌리곤 편의점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리 내가 무적이라고 해도 관리자를 상대하는 건 무리지.'
공략자들이 애를 먹으며 힘겹게 클리어 하는 탑.
그러한 탑을 관리하는 이들이 관리자가 아닌가?
괜히 그러한 놈의 심기를 건들 필요는 없을 터.
내가 잽싸게 편의점으로 뛰어가던 중.
스스슥-
"잠깐."
나의 앞으로 여인의 신형이 나타나 길목을 딱 가로막는다.
'쯧, 그냥 보내 주진 않겠다는 건가?'
관리자와 싸워 본 적은 없긴 하다만.
어쩔 수 없나.... 근데 관리자가 공략자를 건드려도 되는 거야?
난 의문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오른팔을 접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힘과 진심을 담으려던 그때.
"공격을 멈춰라. 난 너와 대화를 나누고 싶을 뿐이야."
'...음?
난 내지르려던 오른팔을 움찔거렸다.
나랑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설마 저 관리자도 바르바토스랑 비슷한 유형의 관리자인 건가?'
딱히 관리자에 대해 나쁜 기억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난 주먹을 내리곤 관리자를 바라봤다.
"대화 좋죠. 그런데 관리자가 공략자와 대화를 나눠도 괜찮은 겁니까?"
"...뭐? 아."
어째선지 관리자가 피식 실소를 흘린다.
"그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어."
"예?"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야?
"난 상관없어."
"그래요? 그래서, 무슨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겁니까?"
* * *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사실 그녀는 이레귤러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변수, 불확실이라는 단어는 그녀가 좋아하는 단어가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그녀가 구태여 나선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의 부사수에게 관여한 주주.
그 주주는 분명 종말의 탑이 순항하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
'그러니 복제본이라고 해도 그딴 걸 탑에 풀어놓을 생각을 한 거겠지.'
벨제브의 복제본.
아무리 아류작에 가까운 복제본이라 하더라도, 주주급의 존재의 복제본을 탑에 푼 것은 분명히 문제가 될 사안이었다.
물론 해당 사안이 너무도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묻힌 감이 없잖아 있긴 하지만.
이번 수작은 아마 종말의 탑의 멸망에 베팅한 주주 중 하나의 짓일 것이다.
'가만있어 보자. 이번 베팅 종료가 언제까지였지...?'
부사수를 동원했던 저번 계획에서 베팅이 끝났다면.
다음 베팅은 종말의 탑에 걸지 않으면 그만이기에.
베팅 기간을 계산해 본다.
'음, 아직 좀 남았군.'
잠시 계산해 본 입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말의 탑의 멸망에 베팅한 상품들은 아직 기간들이 제법 남았다.
즉 그 말은, 아직 해당 주주는 종말의 탑의 멸망에 베팅을 해 놓은 상태라는 것.
그렇다면....
'그 주주가 싫어하는 방향으로 일을 키워 보면 어떨까?'
입실론은 눈앞의 공략자 대신 흘끔 백색의 공간을 살폈다.
'그나마 안전한 곳이기도 하고. 좋아.'
통칭 '백룸'.
이 공간은 탑 내에서도 유일하게 기록의 수정구로 기록되지 않는 공간이다.
물론 일개 관리자들이 이 사실을 알 리는 없겠지만.
'하지만 길게 시간을 끌어서 좋을 건 없겠지.'
더욱이 잠깐 쉬려 했던 곳에서 이레귤러까지 맞닥뜨린 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해당 주주에 대한 정보는 얻지 못한 상황에서.
어쩌면 지금의 만남은 그녀에게 있어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터.
"일단 축하한다고 해야 되나?"
"예?"
"너희 탑 말이야. 순위 상승 폭이 말도 안 되게 가파르더라고?"
"너희...? 아, 뭐 그렇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또 하고 있는 중이기도 하고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레귤러를 보며.
입실론이 계속 말을 이어 간다.
"하지만 그 기세가 언제까지고 이어질까?"
"글쎄요. 좋은 흐름은 쉽게 내려앉지는 않으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종말의 탑은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갈 여지가 있는 탑이야, 방해만 없다면."
이레귤러가 쓰고 있던 가면이 살짝 흔들거린다.
"방해라.... 공정한 경쟁이 아니었던 겁니까?"
"공정?"
조용히 미소를 짓는 입실론.
"공정한 경쟁을 치를 수 있도록 노력은 하고 있지."
"흠... 그렇단 건 이미 불공정한 상황이 벌어졌거나 벌어질 수도 있다는 거군요."
'확실히 공략 진척률을 단시간 내로 올린 이레귤러라 그런가? 이해도가 나쁘지 않네.'
입실론은 빠른 속도로 머리를 굴렸다.
'종말의 탑 관련 베팅 상품들은 '공략 속도' 관련 배당도 함께 걸려 있어. 공략자에게 정보를 줘서 공략 속도를 높인다면 주주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질지도....'
그렇게 되면, 주주도 다시금 움직임을 보인다거나 어떠한 행동을 취할 터.
'단서를 제대로 모으고 현장을 확실히 잡으면, 나에게도 기회가 온다. 당연히 목숨을 걸어야겠지만.'
주주를 우롱한 죄.
곱게 소멸하지는 못하리라.
하지만 원래 삶이란 게 한 방 아니겠는가?
찰나에 생각을 정리한 입실론이 운을 뗀다.
"그래서 난 공정성을 위해 네게 어느 정도의 정보를 줄 생각이야."
"오...."
"그래, 믿기 어렵겠지. 그럼 이것부터 시작해 볼까? 일단 5일 뒤에 너희 탑은 다른 탑과의 경쟁이 예정되어 있어. 상대해야 할 탑은 고요의 탑이고."
공략자가 믿건 말건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 가는 입실론.
"이미 58층은 공략 중이니까 제쳐 두고, 59층에 대해 좀 이야기해 볼까? 59층은 퀘스트 형식에 3인이 동시에 입장하는 층이야. 콘셉트는 생존과 배틀 로열이고."
"...."
"그리고 60층은...."
그러던 그때.
쩌저저적-
백룸 한쪽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런, 하필 이때 관리자가....'
물론 그녀야 '왜곡'을 사용하면 된다지만 공략자는....
'음?'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혹시나 기회가 된다면 다음 층들에 대한 정보도 좀 알려 주시고요!"
이미 잽싸게 상점 앞에 서서 문에 열쇠를 꽂아 넣는 중이다.
저 행동이 이레귤러의 도주 방식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잠깐!"
입실론은 황급히 그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그걸 가져가!"
"예? 뭐, 고맙습...."
철컥, 스스스스슥-
삽시간에 상점과 함께 사라진 공략자.
"어디서도 쉽게 죽지는 않을 놈이네...."
입실론은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이내 자신의 주변을 완벽히 왜곡시켰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본사로 돌아가야겠어.'
그녀도 이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 * *
화아아아악-
"후우...."
집으로 돌아온 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뭔가 엄청 정신없었네.'
그저 순위표나 좀 구경하다가 돌아갈 생각이었건만.
'관리자가 숨어 있었을 줄이야. 아니, 그건 정말로 관리자였을까?'
말마다 '너희 탑'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의구심이 드는 건 그녀가 종말의 탑과 다른 탑들의 경쟁 상황을 완전히 꿰고 있었다는 거다.
'설마 본사 측의 인물이었던 건가?'
탑 말고도 본사라는 조직이 존재한다는 건.
예전에 공고문을 봤기에 알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렇게 정보를 있는 대로 말했는데도 멀쩡했던 걸 보면....'
내게 거짓 정보를 알려 주어 페널티를 받지 않았거나.
아니면 '정보 누설의 대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는 것일 터.
'구태여 내게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고. 아무리 봐도 후자가 가능성이 높긴 한데, 이유를 모르겠네.'
왜 본사의 인물이 그곳에 음흉하게 숨어 있었던 것이며.
또 뜬금없이 내게 정보를 준 것이란 말인가?
'정보도 신용하기엔 애매하고.'
그녀에게서 받은 정보는 59층의 간단한 구도.
그리고 5일 뒤 다른 탑과 경쟁전이 있다는 정도이다.
'근데 5일 뒤에 경쟁전이 벌어지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긴 한데.... 그보다 아까 뭘 던진 거지?'
경황이 없었던지라 난 비로소 그녀가 던진 물품을 살펴봤다.
왜곡된 세계
설명: ?
내용: ?
검은색과 흰색이 섞인 체크무늬의 자그마한 병.
어떠한 설명도, 내용도 없다.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를 열어 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다.
'이건 도저히 용도가 짐작이 가질 않네.'
아무리 탐구해도 결론이 나오질 않자.
난 체크무늬 병을 아공간 주머니에 넣었다.
'저건 나중에 시간이 되거든 탐구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경쟁전이 더 중요해.'
5일 뒤 예정돼 있다는 경쟁전.
물론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쨌건 대비해 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패배했을 때의 리스크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으니.'
리스크가 어떠한 것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궁금증 때문에 패배를 감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5일이라....'
* * *
4일 뒤.
55층, 드라고니아의 5구역.
슬럼가를 방불케 했던 난잡한 거리는 오간 데 없고.
깔끔하게 정비된 보도 위로.
"흐으음...."
거대한 워해머를 등에 메고 있던 망치 클랜장 무라단이 수염을 쓸어내린다.
그 외에도.
"허어... 단발성 이벤트가 아니었다고? 난 당연히 한 번으로 끝난 건 줄 알았는데."
"그러게 말이야. 뭐,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히도 그 안에서 입은 부상은 다 없어지잖아?"
망치, 레전드, 버스터 클랜 등, 진작 55층에 도착한 클랜들을 비롯하여.
뉴비, 지식 클랜 등 새롭게 55층을 거점으로 삼은 클랜의 클랜원들까지.
"난 상관없는데? 오히려 아무런 대가 없이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기회잖아?"
"대가가 없긴 왜 없어? 패배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알고?"
많은 공략자들이 편의점 앞에 모여 웅성거림을 이어 가는데.
무라단이 손을 번쩍 쳐든다.
"이보게! 상점주! 분명 그때의 대결은 우리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던가?!"
"그랬었죠. 그때는 분명 저희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근데 대결이 한 번으로 끝날 거라고 누가 이야기했던 적이 있던가요?"
"어, 음... 생각해 보니 없군."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무라단.
그가 워해머를 들곤 슬며시 휘두르는 시늉을 해 보인다.
"뭐, 누가 적이건 대결이 무엇이건 알 게 뭔가?! 몰려오는 적의 머리통은 깨트리고 보상과 승리를 거머쥐면 되는 것을!"
"좋은 마음가짐입니다."
난 그에게 미소를 보이곤.
다른 공략자들에게 힘껏 소리쳤다.
"자, 예정된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상품을 구매하지 못하신 분들은 서둘러 상품을 구매하세요!"
잠시 후.
자리에 있던 전원이 버프 음식과 PB 상품 그리고 분해의 결정체 등.
도핑과 관련된 것들의 구매를 완료했다.
'일단 이 정도면 어느 정도의 준비는 됐겠지.'
지난 4일간.
55층에 상주하며 최정예 클랜의 클랜원들에게 우선적으로 상품을 판매했다.
당연한 거다.
'아무래도 강한 순서대로 경쟁전으로 이동되는 것 같았으니까.'
선구자들에게도 특제 우표를 이용하여 상품을 보내 놨으니.
이제 나름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 이동되는 시점만....'
그러던 그때.
화아아악-
"오오오오! 왔다! 진짜야!"
저번과 마찬가지로 모여 있던 공략자들의 몸에서 하나둘 빛이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저번처럼 당황하지 말고 한번 제대로 싸워 보자고!"
"자, 가자!"
확실히 한 번의 경험 덕분일까.
빛에 감기어 사라져 가는 공략자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어 보였다.
이윽고 자리에 있던 공략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화아아아아악-
내 몸에서도 빛이 흘러나온다.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번에는 또 어떤 방식으로 대결이 진행되려나.'
그 모든 건 두 눈으로 확인하면 될 뿐!
스스스슥-
나는 내 몸이 어디론가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174화 아득한 밤 (1)
눈을 강렬히 쬐던 빛이 사그라지자.
난 천천히 두 눈을 떴다.
'으음....'
주변이 어두운 데다가 뭔가 휑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지난번에는 책상이라도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키릭, 키릭, 키리리리릭-
내 어깨 높이를 아득히 웃도는 체구에.
갈색의 갑피가 전신을 덮고 있는 기괴한 생명체가 세 갈래로 뻗어 나 있는 더듬이를 꿈틀거린다.
'뭔가 벌레처럼 생겼네.'
정신 나간 과학자의 실험실에서 탈출한 거대 물방개 같기도 하고.
"&@#%!"
저번의 야만 전사와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소리가 놈의 입에서 흘러나왔으나.
알 수 없는 힘이 나에게 그 뜻을 알려 준다.
-파악하고 분석한다.
-과거의 전투를 바탕으로 상대의 전투력을 분석 중....
'흠, 겉모습만 봐선 영락없는 전사인 줄 알았는데, 상대를 분석하는 능력이라도 갖고 있는 건가?'
녀석 또한 한 탑의 이레귤러일 터.
그렇다면 놈도 규격 외의 능력들을 갖고 있다고 한들 전혀 이상한 건 아니었다.
키이이잉, 번쩍-
갑자기 놈의 더듬이에서 격렬한 불빛이 뿜어져 나오던 찰나.
"거기까지."
돌연 새하얀 날개를 등에 달고 있는 여인이 놈의 앞에 나타나 손을 뻗자.
더듬이에서 뿜어져 나오던 강렬한 빛이 순식간에 사그라진다.
"운명의 선택을 받은 자라면 응당 그에 걸맞은 행동과 태도를 지켜라."
-방금의 능력을 분석.... 분석 결과. 분석이 불가능함. 위험도 최상의 존재. 관찰자임을 확인. 승리할 가능성 없음. 명령에 승복한다.
'오....'
순식간에 벌레를 겸손하게 만든 여인이 나와 벌레를 한 번씩 쳐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들 마음의 준비는 끝마쳤나? 나는 이번 대전의 관리 감독을 맡은 관리자, 브리엘이다. 대전을 진행하기에 앞서 공정하고 냉정하게 이번 대전을 주관할 것을 약속하마."
그녀의 음성에서 뭐라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진다.
뭐랄까, 계속 듣고 있자면 모든 게 정화될 것만 같은....
따악-
그 와중, 브리엘이 갑자기 손가락을 튕기자.
그녀의 앞에 커다란 원형의 판이 생겨난다.
'저건... 룰렛 아닌가?'
판마다 칸이 나뉘어 있고.
칸마다 선뜻 이해하기 어려운 그림들이 그려져 있다.
"지금부터 너희가 대결을 펼칠 전장을 고를 거다."
'호오... 대결의 방식이 조금 바뀐 건가?'
저번에는 바로 전장이 정해져 있는 형식이었는데.
뭐, 이것도 나쁘진 않겠지.
전장이 어떤 곳이 됐건, 난 내 할 일을 하면 되니까.
'근데 이미 전장을 확정해 놓고 쇼를 하는 건 아니겠지?'
물론 나의 의심과는 별개로 룰렛은 힘차게 회전하기 시작한다.
촤르르르르륵, 철컥-
한참을 돌던 룰렛의 화살표가 이내 반쯤 박살이 난 것 같은 시계 그림을 가리킨다.
그 순간.
촤라라라라락-
어둡던 공간에 책상이 생겨나더니.
그 위로 자그마한 판 하나가 떠오른다.
'저건....'
"종말의 탑의 김인성, 고요의 탑의 라-구."
천상에서 울릴 법한 성스러운 음성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전장, '아득한 밤'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득한 밤이라....'
룰렛의 그림이나 전장의 이름만으로는 대결 방식이 어떨지 아직 감이 잘 안 오는데.
난 조금이나마 더 단서를 얻고자 책상 위의 판을 살폈다.
[저번이랑은 너무 다른데? 뭐 하나 있는 게 없잖아?]
[일단 주변을 정찰해 봐! 뭔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이미 다 확인해 봤어! 이 근방에는 아무것도 없다니까 그러네?!]
자그마한 엄폐물 하나 보이지 않는 탁 트인 평야 위에서.
개미만 한 크기의 공략자들이 의견을 교류하고 있다.
'흠.'
난 턱을 쓸어내리다가 흘끔 상대 쪽 판을 바라봤다.
환경 자체는 똑같은 것인지.
저쪽도 탁 트인 평야 위에서 개미 같은 것들이 뽈뽈거리고 있다.
-승리에 필요한 조건의 설명을 요구함.
"그래, 대결 방식을 궁금해하는 건 당연한 순리이지."
내가 판 위를 주목하는 사이.
벌레와 문답을 나누던 브리엘이 나와 라-구에게 무언가를 툭 던진다.
'호오....'
5장의 카드다.
카드에는 제각각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먼저 각자 원하는 카드를 한 장씩 골라라."
'뭐야. 다 주는 게 아니었어?'
난 속으로 혀를 차면서도 받은 5장의 카드를 훑었다.
[건설 - 강철 요새]
[피해 - 날벼락]
[증강 - 샘솟는 힘]
[피해 - 분열하는 대지]
[건설 - 회복의 우물]
각각의 그림이 그려진 카드에는.
건설 - 강철 요새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안전한 강철 요새를 건설할 수 있다.
피해 - 날벼락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일대에 무작위로 날벼락을 떨어뜨린다.
증강 - 샘솟는 힘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대상의 세력이 일정 시간 동안 지치지 않는다.
피해 - 분열하는 대지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일대에 커다란 지진을 일으킨다.
회복의 우물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회복의 물이 샘솟는 우물을 건설할 수 있다.
설명이라 하기에도 뭣한 짤막한 설명이 적혀 있다.
'흠, 그런 건가.'
카드에 적힌 설명으로 미루어 보건대.
'증강'은 아군에게 버프를, '건설'은 아군에게 이로운 건설물을 제공하는 카드로 보였다.
'거기까진 알겠는데, 이 '피해' 카드는 잘 모르겠네. 상대 진영에 사용하는 카드인 건가? 아니면... 달리 사용하는 곳이 있는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5장의 카드 중 어떤 카드를 골라야 하는 걸까.
난 깊은 고민 끝에 한 장의 카드를 골랐다.
스스스슥-
그러자 남은 4장의 카드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분석 및 파악 완료. 선택한다.
라-구 또한 결정했는지 수많은 다리들 중 하나로 카드를 한 장 고른다.
"둘 다 선택을 완료했군. 좋다. 지금부터 매일 밤이 지날 때마다, 지금처럼 5장의 카드가 주어질 거다. 또한 그중 1장을 선택할 수 있으니 참고하도록."
'...매일 밤?'
난 브리엘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밤은 며칠 동안 반복되는 겁니까?"
"좋은 질문이다. 서로가 같은 질문을 했으니, 모두에게 답을 주겠다. 밤은 정확히 다섯 번 찾아올 거다."
다섯 번이라.
5라운드만 치르면 끝나는 대결인 셈인가.
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슬쩍 라-구를 바라봤다.
'같은 질문을 했다라....'
확실히 전의 야만 전사같이 뇌가 없는 타입은 아닌 듯하다.
방심은 금물이라지만 더 신경 쓰긴 해야겠어.
그 외에도 난 브리엘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으나.
"더 이상의 설명은 무의미할 뿐이다. 경험을 통해 파악하고 깨달아라."
불친절한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 애초에 친절하게 알려 줄 거라곤 기대도 않았고, 또 상관없다.
정보의 공백은 내가 채우면 그만이니까.
"모두 자리에 앉아라. 곧 대결이 시작된다."
나와 상대가 모두 판 앞의 의자에 착석하는 그 순간.
띠링-
[아득한 밤의 대결이 시작되기까지, 30초 남았습니다.]
탑의 운명을 건.
게임 시작 안내 메시지가 떠오른다.
[아득한 밤의 대결이 시작되기까지, 10초 남았습니다.]
.
.
.
[...1초 남았습니다.]
[아득한 밤이 개방됩니다.]
'흠.'
난 슬며시 판을 내려다봤다.
아득한 밤이라는 전장의 이름과 달리.
판 위로 밝은 빛이 고루 분포되어 있어 꽤나 밝은 느낌이다.
'흐음, 과연... 그런 거구나.'
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이번 대결의 테마가 어떠한 것인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혔다.
'일단 이것부터 사용해 볼까.'
난 판을 바라보며 카드 한 장을 사용했다.
[건설 - 강철 요새를 사용합니다.]
그러자.
그그그그그그긍-
널따란 평야 위로 커다란 요새가 지어지기 시작한다.
[오오오! 이게 뭐야?!]
[몰라! 갑자기 요새가 지어졌다고 메시지가 뜨던데?]
[...일단 머무를 곳이 있어 나쁠 건 없지. 바로 내부부터 정찰해!]
개미 같은 공략자들 사이에서 목소리가 울려오고.
곧 개미들이 뽈뽈뽈 요새 안으로 들어간다.
'음, 확실히 거점이 있는 게 안정성이 있지.'
일단 엄폐물이 있다는 것만으로 공략자들이 느끼는 안정감이 다를 것이다.
'거기다가 이런 요새 카드가 있다는 것부터, 무언가 디펜스의 냄새가 난단 말이지....'
뭐, 다른 카드들도 모두 좋은 카드들이긴 했다.
그러나 버프야 내 음식들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것이고.
회복도 지원 계열 공략자들이 있으니 괜찮을 터.
난 고민하면서도 힐끔 라-구를 관찰했다.
놈은 여러 개의 발로 쥐고 있는 카드를 한참이고 째려보다가.
-분석 및 파악 완료. 행동을 개시함.
카드를 빼 든다.
스스슥-
라-구의 발에 들린 카드가 연기처럼 사라지기 무섭게.
화아아아악-
놈의 판 위에 있는 개미들의 몸에서 붉은빛이 번쩍인다.
'호오, 버프 카드를 선택한 건가.'
내가 놈의 판을 관찰하던 와중.
판을 비추던 빛이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다.
아마도 곧 밤이, 어쩌면 '아득한 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긴 밤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던 그때.
띠링-
[아득한 밤이 다가옵니다.]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오른다.
'이제 시작이라는 건가....'
내가 숨을 고르고 판을 주시하려던 그때.
"밤이 되었군. 밤이 되었으니 운명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특수 카드를 한 장씩 지급하겠다."
잠깐만.
분명 브리엘은 '밤이 끝날 때마다' 5장의 카드 중, 1장의 카드를 선택할 권리가 주어진다고 했었다.
근데 갑자기 카드를 한 장 더 준다고?
'잠깐만, 그렇단 건....'
밤이 시작 될 때마다 '특수 카드' 1장이 주어지고.
밤이 끝나면 5장의 카드 중 1장의 카드를 더 고를 수 있다는 건가?
'흠....'
근데 브리엘이 휘휘 섞고 있는 카드 뭉치... 뭔가 이상하다.
'아까 받은 카드랑은 색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아까 받은 카드의 뒷면은 파란색이었던 반면.
지금 그녀가 섞고 있는 카드들은 무지갯빛을 띠고 있었으니까.
"이 카드는 운명의 선택을 받은 자들의 특성이 반영된 카드들이다."
특성이 반영된 카드? 이레귤러의 특성이 반영된 카드라는 건가?
"자, 받아라."
나는 면전으로 날아오는 무지갯빛 카드를 낚아챘다.
그러곤 천천히 앞면을 살폈다.
'이건....'
* * *
같은 시각.
"밤이군."
"그러게 말이야."
"이런 곳에도 낮과 밤이 있다니, 거참 별일이란 말이지."
"대체 이곳은 어디일까? 처음에는 퀘스트 층의 변형이라고 생각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요새의 입구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던 공략자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가 울린다.
"저번에는 몬스터들이 엄청 몰려왔었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것도 없어. 진짜 변형 퀘스트 층인 건가?"
"그게 뭐가 중요해?"
방패 전사가 슬쩍 초록색 병을 꺼내 벌컥벌컥 내용물을 들이켠다.
"요새를 지키는 퀘스트라면 요새를 지키면 될 뿐이지."
"그런 놈이 냅다 술부터 처먹냐?"
툴툴거리던 궁수 또한 입에 알사탕을 넣곤.
넌지시 말을 이어 간다.
"그보다 넌 안 궁금하냐?"
"뭐가?"
"이 공간 말이야. 정말 퀘스트 층일지 아니면 다른...."
"별로. 퀘스트 층이건 뭐건 이기면 보상을 주잖아? 그거면 됐지."
방패 전사가 딱 잘라 말했으나.
궁수는 아랑곳 않고 말한다.
"그렇기야 한데, 궁금한 건 어쩔 수 없잖아? 생각해 봐. 네임드 공략자들만 참가하는 공간! 뭔가 냄새가 나지 않아?"
"냄새는 네 몸에서 나는 게 냄새고."
"아니!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애당초 우리는 뭐로부터 승리하는 건데? 안 궁금해?"
거듭 호기심을 표출하는 궁수에게 방패 전사가 한숨을 내쉬어 보인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뭔데?"
"혹시 우리랑 싸우는 것들... 다른 탑의 공략자들인 건 아닐까?"
"...음? 그건 또 뭔 참신한 헛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네임드 공략자들만 차출이 되고, 승리하면 보상을 준다? 심지어 칭호는 모든 공략자들이 다 받았잖아? 그런 보상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줄 이유가 없지 않아?"
폭포처럼 쏟아지는 질문 때문일까.
방패 전사가 손을 내두른다.
"됐다. 난 별로 안 궁금하니까 정 궁금하면 상점주한테 물어보든가."
"...미쳤어? 관리자 심기 건드렸다가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그럼 관심을 접어, 쓸데없는 호기심이니까."
"야! 이게 왜 쓸데없는...."
그러던 그때.
홱-
갑자기 궁수가 횃불의 범위가 닿지 않는 어둠을 향해 활시위를 겨눈다.
그 모습을 본 방패 전사 또한 반사적으로 일어나.
방패를 들며 궁수에게 묻는다.
"몇 놈이나 감지됐어?"
"100...."
"100마리? 그 정도면 충분히 막을 만하겠...."
점차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던 궁수가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1,000... 2,000... 잠깐, 이런 시발...!"
키이이이이잉-
활촉에 빛나는 기운이 응집되더니.
텅-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하늘로 솟구친다.
일순간 하늘이 밝아지자.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던 존재들의 모습이 훤히 드러난다.
"저게 뭔...."
빛이 닿는 곳까지 늘어서 있는 스켈레톤들은 차치하고.
공중에 떠 있는 수십 마리의 본 드래곤들은 숨통을 턱 막히게 하기 충분했다.
"...농담이지? 낮에는 분명 아무것도 없었잖아?! 저놈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냐고?!"
그 와중.
그들의 눈앞으로 동시에 하나의 메시지가 떠오른다.
[아득한 밤이 시작되었습니다. 불사자 데스몬드와 그의 불사의 군단이 출몰합니다.]
"...불사자? 불사의 군단?"
"빌어먹을...! 얼타지 말고 빨리 호각이나 불어!"
"알았...."
궁수가 황급히 호각을 꺼내어 입에 물려는 찰나.
크르르릉, 쿠어어어어어-
수십 마리의 본 드래곤의 입에 검은 기운이 응집되기 시작한다.
"이런 미친...."
삐이이이이이익-
호각 소리가 강철 요새를 뒤흔드는 동시에.
수십여 발의 브레스가 요새 위로 쏟아진다.
175화 아득한 밤 (2)
'흐음....'
난 턱을 쓸어내리며 판을 쓱 내려다봤다.
덜그럭-
평야 지대를 가득 메운 스켈레톤들.
거기에 죽음의 기운을 내뿜는 죽음의 기사들과 리치들이 군데군데 섞여 강철 요새로 진격해 가는 중이었다.
끼긱, 끼기긱, 텅-
심지어 공성 병기인지.
시체가 가득 실린 투석기에선 연신 요새를 향해 시체 포격을 날리기까지 한다.
휘이이잉, 퍽-
발사된 시체 더미가 요새 안으로 떨어지자.
시체에서 매캐한 초록색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감염체다! 연기에 가까이 가지 마라! 곧장 중독될 거다! 지원계! 실비아!]
망치 클랜장 무라단이 워해머로 죽음의 기사의 머리통을 분쇄하며 소리치자.
[나도 알고 있다고, 이 꼰대야! 성스러운 새벽이여!]
그의 후미에서 성스럽고도 찬란한 광채가 번뜩인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아아아아압!]
어두운 하늘이 이지수가 만들어 낸 거대한 화마로 뒤덮일 때마다.
크오오오오오-
본 드래곤의 몸체로 보이는 뼈와 그 파편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린다.
[다들 무기를 고쳐 잡아라!]
[끄오오오오오오!]
그 외에도 대결에 소집된 공략자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충실히 상대해 나간다.
'아직까지는 나쁘지 않네.'
공략자들의 실력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다지만.
생각보다 요새가 쓸 만한 것 같단 말이지?
강철 요새.
이거, 생각보다 물건이다.
설마 본 드래곤들의 브레스 수십여 발을 맞고도 온전히 형태를 유지할 줄이야.
[서쪽! 서쪽 문으로 엄청 몰려든다! 증원 좀 해 줘!]
[지금 레전드 클랜 쪽에서 증원 보냈으니까 조금만 더 버텨!]
거기다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적들을 비교적 수월히 막아 내는 것은 물론이요.
[부상자! 부상 입은 얼간이들은 빨리 이쪽으로 와! 치료해 줄 테니까!]
[지친 놈들은 잠깐 뒤로 빠져서 쉬어라! 상점주의 음식을 먹든 분해의 결정체를 사용하든, 그건 알아서 판단하고!]
본래 자신의 몸까지 건사해 가며 치료에 임해야 했던 지원 계열 공략자들이.
온전히 치료에만 임할 수 있는 것도 꽤 주요했다.
'이렇게 되면 요새의 선택이 나쁘진 않았네.'
지금 요새는 거점, 그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건 그렇고, 저 불사자는 단순히 몬스터들을 소환하는 매개체일 뿐인 건가?'
머리에 기괴한 해골 모양의 투구를 쓰고 있는 불사자 데스몬드.
당연히 이번 웨이브의 네임드 몬스터라 생각했건만.
놈은 자리에서 끝없이 각종 언데드들을 소환하고 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저대로 가만히 있어 주면 좋을 것 같긴 한데. 그보다 저쪽은 어떻게 되고 있지?'
난 라-구의 판을 흘끔 바라봤다.
-캬갸갸갸갹!
-키킥키기기기긱!
'오... 생각보다 잘 싸우네?'
과연 대전 상대로 맞붙은 놈들이라 그런 걸까.
놈들은 예상 밖의 전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깡, 깡-
'저건 생산 계통 벌레들이라고 해야 되나?'
많은 다리마다 망치와 톱 따위의 장비를 든 수십 마리의 벌레들.
놈들이 바삐 장비를 놀릴 때마다.
커다란 벽이, 성이, 기괴한 형태를 갖춘 탑들이 세워져 간다.
그렇게 지어진 성만 몇 개인지.
크오오오오오-
'호오... 은근 튼튼하기까지 한 모양이네.'
본 드래곤의 브레스를 맞고도 곧바로 무너지지 않고.
뭐, 조금씩 형태가 무너지다가 폭삭 주저앉긴 했지만.
-키기기기기긱
과연 벌레들이라 그런 건지.
주저앉은 성에서 기어 나가 곧바로 다른 성으로 뽈뽈뽈 달려간다.
'능력이 출중한 놈들은 알아서 각개전투를 하고, 좀 부족한 놈들이나 부상 입은 놈들은 성에서 농성하는 식인 건가.'
저래서 굳이 '건설' 카드가 아니라 '증강' 카드를 선택한 거였구나.
'근데 생산 계열이 전장에서 활동하는 건 또 처음 보네.'
그도 그럴 게, 종말의 탑에서 생산직 능력을 가진 공략자들은 찬밥 취급을 면치 못했으니.
그렇기에 생산 계열 능력이 전장에서 사용되는 걸 지켜보는 건.
내게도 좋은 경험이었다.
'흠, 저렇게 보니까 생산직 능력도 사용하기 나름일 것 같긴 한데.'
여건이 되면 생산 계열 공략자들도 조금 키워 보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그건 좀 어렵겠지?
내가 라-구의 판을 지켜보던 사이.
화아아악-
어둠이 짙게 드리웠던 평원 위로 희미하게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한다.
[과연... 그게 네놈들의 수준이군. 파악은 끝났다.]
불사자 데스몬드가 홱 몸을 돌리자.
요새를 공격하던 언데드들 또한 회군한다.
[가, 간다! 몬스터들이 물러나고 있어!]
[설마 날이 밝아서 물러가는 건가?]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해?! 우리가 이겼다! 이겼다고!]
요새 위에서 기쁨과 환희의 포효를 내지르는 공략자들.
그들이 승리에 취해 기뻐하는 와중.
각 클랜의 장들과 수뇌부들이 모여 대화를 나눈다.
[저번이랑 유사한 느낌의 전장 같은데?]
[아니, 저번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아. 저번에는 성을 사수하는 거였지만 이번에는 그런 게 아니잖아?]
[그럼 도대체 이 요새는 뭔데? 왜 갑자기 생겨난 거고? 설명 좀 해 줄 사람?]
실비아의 물음에 누구도 선뜻 답하지 못한다.
[우연히 생겼을 리는 없을 거고, 누군가가 목적을 갖고 이런 걸 만든 것 아닐까?]
[무슨 목적?]
[그야 이런 요새를 불순한 목적으로 지어 줬을 리는 없겠지?]
[확실히 홍염의 말이 맞다! 어떤 멍청이가 브레스를 수십 발 맞고도 멀쩡한 요새를 그냥 지어 줬을까!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게지!]
이지수와 무라단의 말에 다들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인다.
[뭔가가 개입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상점주라든가.]
[에이, 설마....]
난상 토론이 벌어지는 와중 누군가가 투덜거렸다.
[누가 개입하건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이 요새 덕에 살았잖아? 그런 개입이라면 백 번 천 번 개입해 줬으면 좋겠는데?]
다른 자들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없으면 곤란했지.]
[엄폐물이 있고 없고는 천지 차이인걸.]
[아무튼 일단 이곳에서 벗어나기 전까지 방심하지 말자고. 어쨌건 안전한 거점도 있으니까 이곳을 중점으로 주변을 더 파악해 보자.]
이지수, 실비아, 무라단 등.
공략자들이 저마다의 의견을 이야기하던 와중.
띠링-
[첫 번째 아득한 밤이 종료됐습니다.]
'이제 첫 라운드가 끝났구나.'
근데 승패의 판정은 어떻게 정하는 거지?
역시 내 생각이 맞다면....
내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공략자들의 숫자를 세던 그때.
"첫 번째 밤이 종료됐다."
브리엘이 웃으며 나와 라-구를 바라본다.
"자, 두 번째 카드를 고르기 전에...."
브리엘이 잠시 눈을 감았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라-구가 다리를 딸깍거리는 사이.
그녀의 왼손이 서서히 올라간다.
이윽고 그녀가 눈을 완전히 떴을 때.
브리엘의 왼손은 나를 가리키고 있었다.
"호오. 첫 번째 밤은, 종말의 탑의 김인성을 택하였구나."
'첫 번째 밤이 선택한 자?'
첫 번째 밤에서 승리를 했다는 걸 돌려 말하는 걸까?
"첫 번째 밤이 택한 자에겐 그에 걸맞은 혜택이 따라야겠지?"
'혜택을 준다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한데. 흐음....'
내가 바삐 머리를 굴리던 중.
라-구가 여러 개의 발을 동시에 쳐든다.
-이해 불가. 이유 없는 혜택. 불공정함. 납득되는 설명 필요.
브리엘이 비웃음에 가까운 조소를 흘린다.
"지금 감히 내 진행을 의심하는 거냐?"
-....
라-구의 껍데기가 조금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여기는 학교가 아니야. 모르는 건 스스로 알아내도록."
그 말을 끝으로 브리엘이 나와 라-구에게 카드 뭉치를 던진다.
'음?'
근데 이번에는 처음과 달리 6장의 카드가 손에 들어와 있다.
반면 라-구의 발에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5장의 카드만이 들려 있을 뿐이다.
'혜택이란 게 카드를 추가로 1장 더 볼 수 있는 걸 말하는 거였나.'
나쁘지는 않네.
어떤 카드들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이상.
다양한 카드들을 보고 선택할 기회를 얻는 건 꽤나 유의미한 혜택이었다.
'일단 어떤 카드들이 들어왔는지 볼까.'
6장의 카드 중, 선택할 수 있는 건 단 1장.
더욱이 강철 요새의 쓰임새를 확인한 만큼.
신중히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터.
건설 - 낙뢰의 탑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뇌전 마법사들이 모여 있는 탑을 건설할 수 있다.
특이 사항: 건설 - 마력의 샘 카드가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해당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건설 - 야수 훈련소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야수 전사들을 훈련하는 훈련소를 건설할 수 있다.
특이 사항: 건설 - 부락 카드가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해당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피해 - 고통의 행군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 사용 시, 일대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들의 속도가 크게 감소한다.
증강 - 영혼의 사슬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대상의 세력의 영혼이 일정 시간 동안 연결된다. 영혼이 연결된 존재들은 피해를 나누어 입는다.
건설 - 부락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야만의 전사들이 모인 부락을 건설할 수 있다.
건설 - 부활의 성소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죽은 이들을 소생시키는 부활의 성소를 건설할 수 있다.
특이 사항: 건설 - 회복의 우물 카드가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해당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으음....'
일단 건설 카드가 4장이 나온 건 차치하고.
특이 사항은 뭔데?
'다른 건물이 지어져 있어야만 지을 수 있는 건물들이 왜 이렇게 많아?'
건설 - 낙뢰의 탑
건설 - 야수 훈련소
건설 - 부활의 성소
이 3장의 카드는 요구 조건을 충족해야만 건물을 올릴 수 있다.
'선택지에 부락 카드가 나오긴 했는데... 문제는 1장만 고를 수 있으니.'
부락 카드를 고른들 야수 훈련소 카드가 다음 라운드에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잖은가?
'아으, 차라리 첫 라운드에 회복의 우물 카드를 고를 걸 그랬나? 그랬으면 이번 라운드에 부활의 성소를 지을 수 있었을 텐데.'
맨 처음 받았던 카드 뭉치 중.
선택지에 '회복의 우물' 카드가 있었기에 더욱 입맛이 쓰다.
'요구 사항이 까다로운 만큼 지으면 엄청나게 도움이 될 텐데.'
물론 현실적인 선택지는 건설 카드를 포기하고.
증강이나 피해 카드를 택하는 것이 맞겠으나....
'저런 업그레이드 카드들이 있다는 건, 강철 요새 다음으로 올릴 수 있는 건물 카드도 있을 수 있다는 거잖아?'
난 고민에 잠겼다.
'6장을 볼 수 있는 혜택이 적용된 김에 그걸 사용할까? 그래, 괜히 아끼다가 똥으로 만드는 것보단 지금 사용하는 게 나을 수도 있어.'
고민 끝에 난 꿍쳐 뒀던 특수 카드를 꺼내어 들었다.
특수 - 변덕스러운 상인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며, 오직 종말의 탑 출신의 김인성만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그 외 가타부타 설명이 붙어 있긴 했으나.
이건 리롤 카드다.
'이게 왜 내 특성이 반영된 카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건 선택지는 되도록 많이 보는 게 좋지.'
어째서일까.
카드 게임, 특히 듀얼은 무조건 '선택지를 많이 보는 게 좋다!'는 분신의 말이 불현듯 스쳐 가는 듯하다.
더욱이 '일정 확률로 내게 필요한 카드'가 나온다는 문구도 신경이 쓰이기도 하고.
'가자!'
[특수 - 변덕스러운 상인 카드를 사용합니다.]
[현재 선택지에 있는 카드들이 무작위 카드로 변경됩니다.]
그 순간.
스스슥-
내가 손에 쥐고 있던 6장의 카드들의 그림이 바뀌어 간다.
'...나왔나? 나왔나?!'
난 황급히 뒤바뀐 카드들을 훑었다.
한 장. 그리고 또 한 장.
'으음....'
정성스럽게 카드들을 살피던 와중.
한 장의 카드가 나의 눈에 들어오자 난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빙고.'
176화 아득한 밤 (3)
건설 - 성스러운 철퇴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카드이다.
내용: 사용 시, 강력한 힘을 지닌 빛의 타워를 건설할 수 있다.
특이 사항: 건설 - 강철 요새가 활성화되어 있어야만 해당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솔직히 큰 기대는 않았는데 이게 진짜 나오네?'
아무리 리롤을 했다고는 해도 결국에는 '운'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건만.
아무래도 지금만큼은 행운이 내게 미소를 지어 준 모양이다.
'으흐흐.'
난 입꼬리를 올린 채 카드의 설명을 다시금 살폈다.
강력한 힘을 지닌 빛의 타워라....
과연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갖고 있을까?
'일단 바로 사용을 해 볼까.'
[건설 - 성스러운 철퇴를 사용합니다.]
그러자 내 손에 들린 카드가 먼지처럼 사라짐과 동시에.
그그그그긍-
판 위의 요새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른다.
이윽고 자욱한 먼지가 사라진 곳엔.
'오오?!'
기다랗고도 새하얀 기둥 같은 것이 요새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둥의 끝에는 반투명한 크리스털 같은 보석이 달려.
고고함을 뽐내는 듯하다.
'심플하지만 그게 오히려 좋네.'
아직 '성스러운 철퇴'의 성능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외관은 합격점을 주기 충분했다.
그 와중.
[이, 이건 또 뭐야?]
[나라고 아냐?! 아! 혹시 이 요새를 만든 녀석이 만든 것 아냐?]
성스러운 철퇴를 목격한 공략자들의 당황해한 음성이 판에서 흘러나온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일단 전부 기상시킬까?]
[...그럴 필요까진 없을 것 같은데. 일단 위험하진 않은 것 같으니까 놔둬 보자고. 조금이라도 수면을 취해 둬야 또 이후 상황에 대처하지.]
[그것도 그렇긴 하지.]
첫날 밤, 대다수의 공략자들이 밤이 새도록 전투에만 임했던 탓일까.
현재 불침번을 제외한 공략자들 대부분이 취침 중이었다.
'뭐, 다 베테랑들이니까 컨디션 조절은 알아서들 잘하는 것 같네.'
역시 다들 탑에서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지.
변화한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그에 맞춰 활동하는 게 남다르다.
'성스러운 철퇴는 이따가 두 번째 밤에 가동되는 걸 볼 수 있을 것 같고, 어디....'
난 슬며시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구를 바라봤다.
-....
강철 요새 안에 올라간 성스러운 철퇴를 보고 당황한 건지.
놈은 더듬이로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카드를 쥔 여러 개의 발을 까딱거릴 뿐이었다.
'아직도 결정을 못 한 건가? 하긴, 쉽지는 않겠지.'
한 번의 판단이 어떠한 결과로 이어질지 모르니.
결단을 내리는 것 자체가 쉽지는 않을 거다.
내가 다시금 판 위로 시선을 돌리려던 찰나.
-선택 완료.
녀석이 카드 한 장을 보며 턱을 딱딱거린다.
뭔가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게, 만족스러운 카드를 고른 것 같기도 하다.
'무슨 카드를 고른... 오.'
놈의 판 위로 푸른 물이 찰랑이는 커다란 우물이 들어선다.
회복의 우물을 선택한 건가.
나쁜 선택은 아니다.
-키기기기긱!
-키기긱!
실제로 부상을 당한 벌레들이 우물로 몰려들어 물을 마시니.
놈들의 몸에 난 상처들이 씻은 듯 사라졌으니까.
'저렇게 보니까 또 괜찮아 보이긴... 흠?'
근데 어째 우물물이 좀 줄어든 것 같은데.
혹시 사용량에 제한이 있는 건가?
내가 회복의 우물을 관찰하던 중.
스스슥-
밝았던 평원 위로 다시금 어둠이 스멀스멀 찾아오고 있다.
'곧 두 번째 밤이 시작되겠구나.'
근데 뭔가 조금 이상하다.
분명 첫 번째 밤은 칠흑 같은 어둠이 가득했건만.
고오오오오-
지금은 피가 흘러내릴 것 같은 붉은 달이 판 위에 떠 있는 게 아닌가?
'이게 뭔....'
[아득한 밤이 다가옵니다.]
[핏빛 달이 떠오릅니다.]
핏빛 달이라니?
또 다른 변수가 작용하려는 건가?
"시간이 됐다."
브리엘이 웃으며 손가락을 딱 튕긴다.
"밤이 되었으니 운명의 선택을 받은 자들에게 특수 카드를 한 장씩 지급하겠다."
* * *
커다란 수정구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종말의 탑과 고요의 탑 관리자들.
"오오...!"
지면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자.
관리자들이 나지막한 탄성을 터뜨린다.
"저건 무슨 상황이야?"
"핏빛 달이 떠오른 거다. 잘 보고 있으라고, 재밌는 건 지금부터니까."
유그드라실의 대답에 질문을 던졌던 블라디미르가 의아하다는 듯 그를 올려다본다.
"잘 아네?"
"내가 잘 아는 게 아니라 네가 모르는 거다. 그러게 미리 공고 사항을 읽었어야지."
"내가 주관자로 선정된 것도 아닌데, 그런 걸 뭐 하러 읽어?"
"그래야 더 대결을 집중해서 볼 수 있지. 서로의 의도를 읽을 수도 있고 말이야."
커다란 나무에서 음성이 흘러나오자.
블라디미르가 코웃음을 친다.
"의도는 무슨! 대결에 카드가 들어간 순간부터 그냥 운이 좋은 놈이 이기는 거지!"
"그래? 그럼 듀얼 총 전적이 1승 99패인 것도 운이 나빠서다?"
조커 카드가 판매하던 카드를 본떠 만든 카드로 듀얼을 즐겼던 관리자들.
개중에서도 블라디미르가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던 탓일까.
모든 관리자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한다.
"99패는 좀... 심각하군."
"누가 1패 더 채워 주지 그래? 기왕이면 99패보단 100패가 보기 좋잖아?"
"시, 시끄러워! 내가 패배가 많은 건 그냥 운이 없어서 그런 거라니까? 애당초 카드 형식의 배틀은 운 좋은 놈이 이기는 거라고!"
"그래, 뭐 그런 걸로 치자고."
다들 블라디미르의 열변에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사이.
누군가가 소리친다.
"이제 시작하려는 것 같은데?!"
그에 모든 관리자들이 수정구 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수정구 안에서는.
[....]
낡고 허름한 로브를 두른 불사자 데스몬드가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는 중이었다.
[이클립스로군.]
수 세기를 살며 감정 따위는 진작 마모되었을 터이건만.
데스몬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운다.
[여흥을 즐기기엔 더없이 좋은 날이로군.]
덜그럭-
데스몬드가 머리에 얹어 둔 해골 모양의 투구를 푹 눌러쓰자.
뚫린 두 개의 구멍 사이로 흉흉한 안광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고오오오오오-
그의 지팡이가 귀곡성을 울리며 붉은 혈광을 내뿜자.
주변 지면마다 커다란 원형진이 그려진다.
철푸덕, 철퍽-
점토 덩어리 형태에 가까운 기묘한 생명체들이 튀어나오자.
"...."
블라디미르가 의심스러워하는 눈으로 유그드라실을 바라본다.
"네 재미의 기준점이 좀 의심스러워지려고 그러는데? 차라리 불사의 군단이...."
"지켜봐라."
"아니, 지켜보고 자시고... 오?"
수정구를 바라보는 블라디미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철퍽-
꾸물거리던 점토들은 어느덧 하나의 형태를 갖추곤.
-키기기기긱.
-키기긱.
밀집하여 대형을 이루고 있었다.
"슬라임이 아니라 도플갱어들이었나."
"그냥 도플갱어가 아니라던데? 도플갱어를 몇 단계 더 손보고 진화시킨 블러드 미러라더군. 본체의 능력을 거의 완벽히 따라 할 정도로 싱크로율을 높인 게 특징이라던데...."
주절주절 설명을 이어 가는 유그드라실.
블라디미르는 가만히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확실히 재미는 있겠어, 도플갱어라고는 해도 어쨌건 종말의 탑과 고요의 탑 공략자들이 싸우는 거니."
"그런 셈이지. 그리고 도플갱어가 아니고 블러드 미러다."
"근데... 도플갱어를 투입시킬 바에는 그냥 처음부터 공략자들끼리 싸움을 붙이면 되는 것 아냐?"
유그드라실의 몸에서 혀를 끌끌 차는 듯한 소리가 울린다.
"본사 직원들이 아무 생각도 없이 저렇게 설계를 했을까?"
"그럴 수도 있지. 본사 놈들이라고 다 완벽하겠어? 일단 몬스터 이름부터가 마음에 안 든다고! 블러드 미러는 또 뭔데? 하필 나랑 이름도 뭔가 비슷한 게...."
블라디미르가 툴툴거리던 중.
유그드라실이 가지를 들어 수정구를 가리킨다.
"시작했다."
불사의 군단이 강철 요새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하자.
모두가 시선을 집중한다.
"이번에는 쉽지 않겠지? 난이도가 몇 배는 오른 것 같은데."
"그건 뭐, 조커 카드의 역량에 달렸지. 어차피 저기에 있는 공략자들은 전부 조커 카드의 장기 말에 불과하잖아?"
"하긴, 우두머리가 멍청하면 망하는 건 한순간이지. 저번의 그 조커 카드처럼 말이야. 그, 이름이... 뭐였더라?"
"루드... 루드비?"
다들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려던 그때.
키이이이이이이잉-
백색의 기다란 타워에서 빛의 광선이 뿜어져 나와 일대를 휩쓴다.
진군하던 스켈레톤들이 형체도 없이 가루가 되어 흩날리자.
블라디미르가 낮게 탄성을 내지른다.
"오오...! 저건 도대체 뭐 하는 타워야?"
"2단계 건물인 성스러운 철퇴다. 1단계 건물인 강철 요새를 먼저 지어야만 올릴 수 있는 건물이지."
"그래? 근데 가만, 2단계라면 그 위의 단계도 있다는 거야?"
"일단 5단계까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5단계까지 건물을 올리는 건 실질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 * *
'흐음....'
난 미간을 찌푸린 채 판을 내려다봤다.
[막아!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내라고!]
[크으으으읏...!]
어떻게든 요새를 사수하며 몰려드는 불사의 군단을 상대 중인 공략자들.
키이이이이이잉-
새로이 건설한 성스러운 철퇴에서 빛의 광선을 뿜어 대며 적들에게 포격을 가했으나.
전투의 양상은 전날보다 치열했고, 오히려 약간은 고전 중이기까지 했다.
'역시 저놈들이 문제란 말이지.'
-키기기기긱!
불사자 군단 사이에 끼어 있는 벌레들.
저놈들은 분명 고요의 탑 소속 공략자들일 터.
'물론 진짜 불사자 군단에 영입됐을 리는 없을 거고. 복제든 뭐건 시스템이 개입한 거려나.'
어쩌면 붉은 달의 영향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건 그렇고, 놈들의 마법이 꽤 성가시네.'
놈들이 쓰는 마법의 위력은 차치하고.
문제는 놈들이 마법을 구현하는 속도였다.
-키긱.
-키기긱.
-키기기기긱.
일렬로 선 벌레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지팡이의 빛을 발현함과 동시에.
빠자작-
검은 벼락이 요새 위로 떨어져 내린다.
한 번, 또 한 번....
'1분에 거의 30여 발은 내리꽂히는 것 같은데.'
여러 마리가 하나의 마법을 순식간에 구현하는 건가?
우리 쪽 공략자들이 쓰는 능력이랑은 확실히 좀 다르네.
심지어 그뿐만이 아니다.
-키기기긱!
어떤 능력인지는 모르겠으나.
벌레가 만진 스켈레톤들이 자폭 기능이 달린 스켈레톤으로 바뀐다든가.
-카각!
불사의 군단 일부를 돌연 요새 안으로 텔레포트를 시키는 등.
저마다 갖가지의 능력들을 구현 중이었으니.
'이제 상대해야 하는 건 불사의 군단만이 아니라는 건가. 음....'
고요의 탑 소속의 공략자들까지 상대해야 되는 작금의 상황.
머리가 조금 복잡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나는 오히려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왜냐하면.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우리 쪽으로 향한 불사자 군단에.
고요의 탑 소속 공략자들이 끼어 있다면.
반대로.
상대 쪽으로 향한 불사자 군단에는?
-키이이익!
라-구가 갑자기 괴성을 지르기에.
고요의 탑 쪽을 두들기는 불사자 군단을 바라보자.
콰앙!
마침 무라단(복제)의 워해머가 벼락처럼 대지를 내려찍는 참이다.
콰자자자작-
벌레들이 지은 건물들이 휴지 조각처럼 허공을 나풀거리다 아래로 철퍽철퍽 떨어지는 와중에.
불길에 휘감긴 검을 든 여인, 거대한 워해머를 쥔 남자 등 저마다 다양한 무기를 쥔 이들이 전장에서 웃고 있었다.
177화 아득한 밤 (4)
군단은 위대하다.
모든 것이 합리적이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조직.
그것이 바로 군단이었다.
-....
그런 군단의 오롯한 군단장이며 유일한 지배자인 라-구.
라-구가 말없이 판을 내려다본다.
-키가가각!
군단의 최정예이자 가장 강력한 무력을 자랑하던 '제너럴'들과.
군단의 대소사를 도맡아 처리하는 '마더'.
두 최정예 그룹은 단언컨대 군단의 핵심이자 라-구가 가장 신뢰하는 패였다.
그러나....
-케게게기긱....
그토록 신뢰하던 수족들은 전선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워하며.
힘겨운 접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살아 있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적.... 한 놈도 남김없이 모조리 죽여라....]
[삶... 죽음... 그리고 영생.... 죽음은... 영생이다....]
불사의 군단의 압도적인 물량도 문제이긴 했으나.
[푸하하하하하! 죽어라!]
[영겁의 불!]
무엇보다 골치가 아픈 건, 다른 탑의 공략자로 모습을 바꾼 존재들이었다.
화르르르륵-
지면과 하늘에 새하얀 백염이 덮이고.
우르르르르릉-
워해머가 대지를 울릴 때면.
지면이 뿌리처럼 갈라지고 곳곳에 높다란 기둥들이 튀어나와 그의 군단을 분쇄한다.
-...판단 오류? 정정함. 전부 예상 범위 안이었음.
이러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다.
핏빛 달 그리고 두 번째 밤.
당연히 첫 번째 밤보다 더 강력한 존재나 변수가 등장할 것이라 예상했으며.
상대 공략자가 등장할 수도 있다는 것도 예상 범위 안에 있었다.
다만.
-힘의 차이 확연.
상대 탑 공략자들이 예상 이상의 힘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그것만이 예상을 크게 상회했을 뿐.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
-승리 그리고 적의 파멸, 그것만이 군단의 앞에 놓인 미래.
라-구가 고개를 돌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존재를 바라봤다.
-파멸과 종말, 그것이 너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임.
"뭐? 푸하하하하!"
뭐가 그리도 우스운 걸까.
가면 아래로 드러나 있는 놈의 입에서 명백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곤 좀 힘겨워 보이는데?"
-찰나의 여유일 뿐.
라-구가 두 장의 무지갯빛 카드를 모두 들어 보인다.
-특수 카드 사용.
[특수 - 종족 진화를 사용합니다.]
[일정 시간 동안 필드 위의 링그랑그족이 한 등급 위의 단계의 존재로 진화합니다.]
[특수 - 군단의 통치자]
[일정 시간 동안 군단에 소속된 존재들이 군단의 통치자 라-구의 스탯에 영향을 받습니다. 일시적으로 모든 스탯이 대폭 상승합니다.]
두 장의 무지갯빛 카드가 라-구의 발에서 사라지고.
판 위에서 형형색색의 빛이 뿜어져 나온다.
-사용 완료. 반격 개시.
* * *
"흐음. 음...."
관리자들이 수정구를 보며 간식을 입에 넣던 중.
블라디미르가 옆에 있던 유그드라실에게 묻는다.
"지금이 몇 번째 밤이었지?"
"네 번째다."
힐끔 수정구를 바라보는 블라디미르.
[어리석은 필멸자들이여, 최후의 발버둥을 쳐 봐라!]
불사자 데스몬드를 위시한 불사의 군단.
그리고 저마다 데스몬드를 상대 중인 양 탑의 공략자들.
[밤이 끝날 때까지만 버텨! 아직 버프 음식 여분이 있으면 먹어 두고!]
[놈이 최종 보스인 게 분명해! 있는 물자는 거의 다 쓴다고 생각하라고! 총력전이야!]
[오오오오오!]
종말의 탑 쪽은 갖가지 버프 아이템들과 강철 요새, 성스러운 철퇴 같은 건축물들로 순조롭게 웨이브를 막아 내는 반면.
-캬가아아악!
이미 몸집이 꽤 줄어든 고요의 탑 공략자들은 데스몬드의 흑마법 아래에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중이었다.
"세 번째 밤에서 완전히 끝난 것 같았는데. 저 정도면 그냥 기권 좀 하지, 슬슬 지루하네."
블라디미르의 말대로다.
이미 라-구의 진영은 두 번째 밤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세 번째 밤에 승부의 추가 끝내 기울고야 말았다.
"근데 악마들이 나온 건 알겠는데, 세 번째 밤의 정확한 콘셉트가 뭐였던 거야?"
"서로의 진영에 남은 공략자의 수만큼, 상대의 필드에 악마가 등장하는 형식이었다."
"아아, 그런 거였어? 어쩐지 저쪽에 등장한 몬스터가 더 많더라니.... 흐아아암!"
늘어져라 하품을 하는 블라디미르에게.
게한나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승부에 집중해라."
"집중하고 자시고, 그냥 끝났잖아? 저 부활의 성소... 아니, 부활의 신전? 3단계 건물이라며? 근데 그런 걸 지어도 상대가 안 되고 있잖아."
고요의 탑 측 공략자들이 부활의 신전에서 계속 부활하여.
다시 전장에 합류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럼에도 열세를 뒤집긴 어려워 보였다.
"근데 3단계 건물까지 올렸으면 꽤 유리해야 정상인데, 뭐가 문제인 거지?"
"뭐가 문제긴? 첫 번째 밤에서 공략자들이 대거 이탈한 게 컸지. 매일 밤마다 전력을 다 투자해도 모자랄 판에 카드를 아껴? 그야말로 최악 중의 최악의 수지."
관리자들이 고요의 탑 측이 열세인 이유를 두고 심도 있는 토론을 나누던 중.
"너희 말도 다 일리가 있긴 한데, 내가 보기엔 그게 문제가 아니야."
블라디미르가 던진 화두에 모두가 그를 바라본다.
"그럼 뭐가 문젠데?"
"패러다임이 다르지."
"패러다임? 무슨 소리야. 간 보지 말고 좀 바로 들어가자고."
"다른 말로 하면, 조커 카드의 마인드가 근본부터 다르다는 거다. 저놈은 정말 골수까지 음흉한 놈이야, 너희는 상상도 못 할 지경으로."
고요의 탑 관리자들 앞에서.
블라디미르가 자신의 탑의 조커 카드를 향해 치를 떨더니.
고요의 탑 관리자 측에 묻는다.
"너희 조커 카드는 공략자들한테 얼마나 투자했지?"
"음, 보유한 능력에 따라 아이템을 적절히 분배하고, 그리고...."
선뜻 답하지 못하는 관리자들에게 블라디미르가 손가락을 흔들어 보인다.
"나름 선방했지만, 그 정도로는 안 되지."
"뭐? 그럼 대체 뭘 얼마나 더 해야 된다는 거냐?"
고요의 탑의 관리자들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탑에 들어온 조커 카드는.
기본적으로 자신을 우선할 수밖에 없다.
포식자의 지위에서 이레귤러로서의 능력을 즐기는 것이 메인 콘텐츠.
그리고 공략자들을 키우는 것은 서브 콘텐츠인 것이 당연하지 않겠나?
이러한 상식 아래에서 고요의 탑 관리자들은.
웬만한 대결에서는 자신들이 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라-구의 '군단' 능력.
'군단'이라는 능력을 통해 공략자들을 직접 컨트롤하다시피 하면서.
공략자들의 육성에 제법 신경을 썼으니.
공략자 육성을 단순한 서브 콘텐츠로만 생각했을 다른 탑들에 비해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 그들을 블라디미르가 비웃었다.
"그래서 안된다는 거다. 저 음흉한 놈이 공략자들을 키우려고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
"으음, 글쎄... 육성에 좀 더 신경 썼나...."
"육성은 기본이야. 거기에 각종 도핑 아이템, 무기 강화, 분해 제공."
"...!"
고요의 탑 관리자들이 경악했다.
"이럴 수가, 엄청난 희생정신이군. 그렇게 몇 명을 키워 내는 건가? 5명?"
"5명이라니? 최소 100명은 된다. 우리 조커 카드는 엘리트 교육을 하지 않아. 모든 공략자가 업적에 따라 평등하게 클 수 있다고."
"...."
잠시 침묵이 흐르고.
"...그러면 조커 카드에게는 뭐가 남지?"
말을 잇지 못하던 고요의 탑 측이 되묻자.
바보를 쳐다보는 듯한 눈빛으로 블라디미르가 답한다.
"뭐가 남긴. 봤잖아? 공략자가 남지."
"그렇군...."
"그뿐인가? 이제는 육성 기관까지 만들어서 공략자들을 바닥부터 키워 내고 있지. 챙길 것은 다 챙겨 먹으면서 공략자들을 성장시켜 탑 공략까지 하게 하는! 음흉함의 끝판왕이 바로 저놈이란 거다!"
헉헉거리는 블라디미르를 보며.
고요의 탑 관리자들이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다.
"정말 메타가 다르군. 사고방식이 달라. 이러니 이길 수가 없지."
"자기한테 투자하는 게 아니라, 공략자들을 키운다고? 이거 완전 미친놈이잖아."
"만약 이런 대결을 예측하고 공략자들을 키운 거라면 무섭게 미친놈이고, 이런 대결을 예측하지 못했는데 공략자들을 키운 거라면 순수하게 미친놈이니, 어쨌든 미친놈은 맞군."
고요의 탑의 관리자들이 쑥덕거리는 와중에.
"오, 끝난 것 같은데?"
한 관리자가 수정구를 가리켜 보인다.
-....
자그마한 생명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평원.
그 위로 널브러진 벌레들의 사체가 가득하다.
[생명은 찰나의 빛일 뿐, 오직 죽음만이 영원한 빛이자 구원이다.]
불사자 데스몬드의 나지막한 읊조림을 끝으로.
수정구 위에 문구가 떠오른다.
[라-구의 병력들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승리자는 종말의 탑의 김인성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아, 맛없게 끝났네."
"어쩔 수 없지. 이번 대결은 탑 간의 체급 차이가 너무 심했어."
"저런 또라이가 튀어나올 줄 알았나."
고요의 탑 관리자들이 한숨을 쉬던 중.
블라디미르가 고요의 탑 측 관리자들에게 묻는다.
"근데 문뜩 궁금해서 묻는 건데, 너희 조커 카드는 무슨 능력을 갖고 있어?"
"군단."
"군단?"
"자신의 휘하에 있는 부하들에게 각종 버프를 주고, 부하들이 보유한 능력들의 효과를 끌어올려 줘. 그리고 무엇보다 그 능력의 핵심은 휘하의 부하들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거지."
"근데 대결이 시작되면 조종은 안 되지 않나? 직접적인 간섭은 어려울 테니 말이야."
유그드라실의 질문에 고요의 탑 관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대결 이전에 받은 버프나 능력 상승 효과야 유지가 된다지만, 그 이후에는 조커 카드들이 공략자들에게 간섭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기에는 굉장히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데."
"우리 조커 카드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특수 개체들이 있는데, 그 개체들은 개입 없이도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지. 조커 카드가 개입하지 않을 때에는 그 개체들이 군단을 통솔해."
"아, 그런 거였군."
"뭐, 체급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가다가 벼락을 맞았다고 생각해."
"쩝...."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고요의 탑 관리자에게 블라디미르가 슬며시 어깨동무를 한다.
"뭐 어쩌겠냐,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겨야지. 거기다가 패배한다고 죽는 건 아니잖아?"
"그래, 죽는 건 아니지. 하지만 저놈들이 패배 페널티를 안고 탑을 클리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음, 그건 좀...."
대결에서 승리한 탑에는 후한 보상이 따르지만.
패배한 탑에는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부과된다.
"그러고 보니 패배했을 때 페널티가 어떻게 되더라?"
"탑의 모든 공략자들의 모든 스탯이 20% 감소한다든가 아니면 능력의 위력이 감소한다든가, 주요 층들이 황무지화가 된다든가. 다양했지."
고요의 탑 관리자의 이야기를 듣던 블라디미르가 툭 한마디를 던진다.
"고요의 탑도 끝났네. 뭐, 망한 건 망한 거고 코인은 받아야겠지만."
블라디미르가 백금의 동전들을 흔들어 보이자.
고요의 탑 측 관리자들의 낯빛이 어두워진다.
* * *
[라-구의 병력들이 모두 사망하였습니다.]
[승리자는 종말의 탑의 김인성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난 눈앞에 떠오른 메시지를 보며 생각했다.
'생각보다 좀 싱거운 느낌인데?'
저번처럼 상대 이레귤러가 멍청한 건 아니었다.
놈은 카드를 사용하여 건물을 업그레이드하고.
특수 카드들을 모두 소모하며 전장의 흐름을 변화시키고자 했으니까.
'다만, 뭔가 공략자들이 카드의 효과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아무리 카드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한들.
카드는 부가적인 효과를 주는 보조용 아이템일 뿐.
어디까지나 핵심은 '공략자'다.
'아무리 변수를 창출하려고 해도, 근간인 공략자들이 약하면 소용없는 이야기긴 하니까.'
뭐랄까.
이번 대결은 변수 창출 없이 탑의 체급만으로 상대를 찍어 누른 기분이다.
'카드로 변수를 만들거나 상황을 대처하는 대결 구도인 것 같긴 했다만, 이런 경우는 또 생소하네.'
난 언제나 변수와 변화를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문뜩 이런 생각도 든다.
결국 변수라는 건, 약자가 강자를 상대하기 위해 발버둥 친 흔적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변수를 만드는 것도 여전히 중요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건 공략자들의 체급을 키우는 거겠네.'
그럼 지금의 기조를 계속 유지하면 되려나?
내가 턱을 쓸어내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브리엘이 내 앞으로 걸어온다.
"훌륭한 승리였다."
"감사합니다."
"선택을 하는 데 있어서 망설임이 없던 모습이 꽤나 감명 깊었다."
그도 그럴 게, 카드 게임은 꽤 익숙하거든.
"하지만 그보다 놀라웠던 건, 네 탑의 공략자들의 수준이었다. 하나하나가 최정예들이더군."
"하하, 그런가요?"
당연히 최정예들이어야지!
버프 음식에 강화&분해에다가... 내가 판매하는 게 얼만데?
"승리에는 응당 보상이 따라야지. 보상은 탑으로 복귀하거든 지급될 거다. 그럼 이제 너희를 본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려보내 주겠다."
화아아악-
나와 라-구의 몸이 빛에 휘감기는 와중.
"흠, 진급은 그른 것 같고... 탑이 망하는 거나 구경하면...."
브리엘의 영문 모를 말을 끝으로.
난 몸이 날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 * *
화아아악-
'오오!'
이번에도 돌아왔다.
'아득한 밤'으로 가기 전에 있었던 55층의 그 자리로 말이다.
"인원수부터 확인해! 사망자 숫자 보고하고!"
나보다 먼저 복귀한 공략자들이 정비를 하고 있다.
"확인 결과, 부상자 0! 사망자 0! 이상입니다!"
"사망자가 0명이라고? 그럴 리가.... 분명 바르도가 죽는 걸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 어? 너, 왜... 살아 있는 거냐?"
"음? 몰라? 죽으니까 어디 새하얀 공간 같은 곳에 있다가 이리로 돌아왔는데?"
"이런 X팔...."
전장에서 죽었던 동료의 몸을 확 끌어안는 공략자들을 보며.
난 속으로 생각했다.
'죽으면 제3의 공간으로 이동했다가 탑으로 복귀하는 형식이었구나.'
대결에서 공략자들이 사망해도 진정으로 죽지는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저번 대결에서는 사망자가 나오지 않았었기에.
그 사실이 진짜인지 확신이 없었을 뿐.
그러나 이로써 확인이 됐다.
다른 탑과의 대결에서 사망해도 공략자가 정말 사망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아무튼 이번 대결도 무사히 넘겨서 다행이다.'
패배했을 때 탑에 주어질 페널티.
아직 패배하지 않았기에 페널티가 어떤 건지는 모른다.
'하지만 전에 받았던 보상을 생각해 보면... 얼추 가닥이 잡히긴 해.'
전에 전투에 참여한 공략자들이 받은 개인적인 보상 외에도.
모든 공략자들이 칭호를 받았다.
'페널티로는 아마도... 탑 전체에 디버프가 적용되거나 뭔가 공략에 큰 걸림돌 같은 게 생겨날 수도 있겠지.'
탑의 공략이 늦어진다는 건, 곧 '종말'에 가까워진다는 것이었으니까.
'무조건 승리, 승리만이 답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승리를 만끽하는 공략자들을 바라보던 그때.
"오오오! 저것 좀 봐! 또 떴어!"
"오오오오!"
공략자들이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문구를 가리키며 소리친다.
[선별자들이 아득한 밤에서 승리하여 다음과 같은 보상이 지급됩니다.]
178화 이별 식탁
[보상으로 종말의 탑에 가호 '밤의 안식'이 적용됩니다.]
[가호는 종말의 탑에서 활동 중인 모든 공략자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가호? 밤의 안식?'
밤의 안식
설명: 전장, '아득한 밤'에서 승리한 탑에 주어지는 가호이다.
내용: 탑의 공략자들의 모든 능력치가 1씩 증가하며, 경험치 획득량이 소폭 상승한다.
'오오!'
전에 칭호, '승리의 환희'를 얻었을 때처럼.
모든 공략자들에게 올 스탯 1을 부여하는 가호라니.
'좋은데?'
공략자들의 스펙 상승은 곧 탑의 체급이 상승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관심을 보인 건....
'맙소사, 경험치 획득량이 상승한다고?!'
언뜻 별것 아닌, 그저 평범한 혜택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어떻게 보면 스탯 상승보다 의미가 더 클 수도 있겠는데?'
경험치 획득량의 소폭 상승.
달리 말하자면 '경험치 버닝 이벤트'가 지속적으로 유지된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공략자들의 레벨 업 속도도 빨라질 테고....'
상승한 레벨과 힘은 다음 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밑거름이자 원동력이 되어 줄 터.
'뭐, 그래도 일단은 지켜보긴 해야겠다만.'
승리의 보상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달콤했다.
그리고.
[아득한 밤에 참가했던 선별자들에 한해, 그 공적도를 산정하여 보상을 차등 지급 합니다.]
하늘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오르자.
"오오! 왔다! 왔어!"
"쓰읍! 그래도 이번에는 최전방에서 개처럼 싸웠는데, 저번보다 더 좋은 걸 주겠지?"
"저번에 뭐 받았는데?"
"칭호. 칭호도 나쁘진 않은데, 장비 받은 놈들이 부럽더라고."
공략자들은 곧 지급될 보상을 기대하며 자기들끼리 희희덕거린다.
"오옷! 왔다! 왔어!"
"이번에는 과연...!"
떠들썩한 외침이 신호탄이 된 듯.
여기저기서 공략자들의 기대 가득한 탄성이 터져 나오는 가운데.
난 눈앞의 메시지를 바라봤다.
[고요의 탑 조커 카드 라-구와의 대결에서 승리하였습니다.]
[보상으로 '느긋한 아침'이 지급됩니다.]
'느긋한 아침?'
아침의 태양처럼 따사로운 빛이 흘러나오는 보석.
난 둥근 형태의 보석을 슬쩍 살폈다.
느긋한 아침(김인성 전용)
설명: 아득한 밤에서 당신의 탑이 승리하였다.
내용: 사용 시, 사용자의 파생 능력 중 원하는 능력 1개를 강화할 수 있다.
'오오?'
* * *
며칠 뒤.
[두 번째 전투 그리고 아득한 밤.]
[참가만 해도 보상을 주는 곳이 있다? 심지어 죽어도 부활한다고?]
[영원의 전장 그리고 아득한 밤. 다음은 뭘까?]
'많이도 올렸네.'
난 너튜브를 보며 픽 웃었다.
너튜브 인기 급상승 동영상은 물론이요.
카테고리 전체가 '아득한 밤'의 전투 영상으로 채워져 있다.
전투는 지겹게 봤던 것이었기에 난 곧바로 댓글창을 살폈다.
[나락감지견: 이번 공동 보상 말임. 역대급 아님? 말이 소폭 경험치 상승이지, 경험치 버닝 이벤트잖슴?]
[└답글A.I.: 인정 박고 개추요. 전원이 경험치 상승이라니... 평균 레벨이 엄청 올라가겠네요. 이번 보상으로 탑의 내부 구도가 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분석 1티어: 공략자들의 평균적인 레벨이 오르면, 아직까지 주요 활동 층이던 아래층에서 중간층으로 활동 구역이 바뀔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도출됐습니다.]
[└└└무료급식소: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걸 연구까지 했누? 불쌍한 놈. 주소나 불러라, 도시락 보내 줌.]
[└└└└개복치순욱: 아이고! 승상께서 내게 빈 찬합을 보내셨구나! 내가 더 살아서 무엇 하리!]
[탑신병자: 지금 경험치 버닝 이벤트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여, 이 얼간이들아. 저 이벤트 전장이 뭔지, 왜 자꾸 최상위 공략자들만 호출이 돼서 전투를 벌이는지를 파악하는 게 더 중요하지!]
[└개복치순욱: 님, 닉값 좀 해 주셈.]
[└└탑신병자: ㅗㅗㅗ]
현재 군중이 관심을 보이는 사안은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가호에 붙은 '경험치 소폭 상승' 혜택이 탑에 어떠한 작용을 일으킬 것인지.
또 다른 하나는 정보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전장에 대한 호기심들이었다.
'뭐, 비슷한 일이 두 번이나 반복되면 더 궁금증이 생길 만도 하지.'
실제로 너튜브에 상주하는 수많은 탐정들이 나름의 추리를 하기도 했고.
[오직 최상위 공략자들만이 소환되며, 방문할 때마다 전장이 달라진다. 거기다가 공헌도에 따라 보상을 차등 지급 하고, 탑 전체에 혜택이 돌아온다? 이제껏 이런 혜택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이런 상황이 생긴 걸까요? 공략자들의 공략을 지원하기 위해? 아니요! 단서는 모두 나왔습니다. 그건 바로 다른 경쟁자들과 대결을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전쟁을 하고 있단 말이에요!]
[탑에서 아무런 이유 없이 혜택을 줄 리 없음. 나도 전쟁론에 한 표 던짐.]
정답에 근접한 추리를 내놓은 이들도 있었다.
[아오, 또 너냐! 전쟁충 개극혐이네!]
[저놈 말 무시하셈. 그냥 전쟁광임.]
물론 그 추리들은 곧바로 다른 의견에 묻혀 버리긴 했지만.
'그리고 능력 강화를 어디다가 할지도 고민이네.'
저번에 얻은 '느긋한 아침' 덕에 내가 원하는 파생 능력 중 하나를 강화할 수 있게 됐지만.
아직 어떤 능력에 사용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했다.
'어떤 능력에다가 써 볼까.... 묶음 무적? 팝업 스토어도 당기기는 하는데.... 아니면 '영원한' 편의점 업그레이드(Lv2)에 한번 질러 봐?'
내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던 그때.
"아쉽게도 4차 디퓨저 타임이 종료됐습니다! 이용해 주신 손님 여러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다음에도 또 이용해 주세요!"
카운터 너머에서 수정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런, 일단 일부터 할까.'
난 얼른 카페 문을 활짝 열곤 대기 중이던 손님들을 향해 외쳤다.
"오늘도 인성 카페를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오세요!"
* * *
야구 모자를 깊게 눌러쓴 남자.
그리고 그의 동료로 보이는 이가 쭈뼛거리며 테이블에 착석한다.
"어때? 분위기 좋지?"
"확실히 깔끔하고 정갈한 게, 좋아 보이네요."
"흠, 리액션이 좀 약한데?"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슬며시 쓰고 있던 마스크를 내린다.
"야, 이 카페 아무나 못 오는 곳이야!"
"알죠. 근데... 형이 영감의 원천이라고 한 카페치곤 뭔가 좀 평범한 것 같아서요. 솔직히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아직은 잘 모르겠네요."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생을 보며.
마렌이 자신만만하게 말한다.
"여기 주력 메뉴들을 맛보면 생각이 바뀔걸?"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왜소한 남자.
그는 마렌의 절친한 동생이자.
드라마 작가로 활동 중인 업계의 동료이기도 했다.
"그보다, 아직도 그래?"
"뭐가요?"
"번아웃 말이야. 요즘 아이디어 자체가 안 나온다며?"
동생이 쓴웃음을 짓는다.
"병원 가 봤는데, 대충 제 이야기를 좀 들어 주더니 약 몇 알 처방해 주더라고요. 그냥... 좀 쉬다 보면 괜찮아질 거예요."
"야, 내가 번아웃 전문간데, 그건 좀 쉰다고 안 없어져."
실제로 그 역시 번아웃을 겪으며 작곡조차 제대로 못 하던 시기가 있었으니 말이다.
"너 오늘 완전 잘 온 거야!"
음료와 음식을 극찬하려던 마렌이 뒷말을 아꼈다.
기대감을 너무 높여 놓는 것도 상대방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전 잘 모르겠어요, 형이 왜 이렇게 이 카페를 미는 건지.... 혹시 친척분이 운영을 하신다거나...."
"야, 됐고. 일단 먹어."
백문이 불여일견. 백 번 얘기해 봐야 한 번 먹어 보느니만 못하다.
곧 주문한 메뉴들이 나오자.
"일단 이것부터 마셔 봐. 리뉴얼 카페라떼라는 건데...."
마렌이 동생에게 잔을 권하려다 멈칫한다.
"뭐야.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쉿!"
마렌이 목소리를 낮추라고 신호하고.
작가는 그의 말대로 음성을 낮추고 귀를 기울였다.
-...이 DM 누구야?
-아, 그냥 아는 동생이라고!
"아, 옆 테이블?"
작가 동생이 피식 웃더니, 아직 마렌의 손에 있던 잔을 빼앗아 들었다.
"뭐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그래요."
"왜! 재밌잖아!"
자고로 싸움이란 남의 싸움을 구경하는 것이 제일 재밌는 법.
하물며 그것이 커플 간의 다툼이라면 재미가 무려 두 배!
하지만 번아웃이 온 작가의 생각은 조금 다른 모양이다.
"모든 게 다 클리셰예요. 재미가 없죠."
"그게 무슨 소리야?"
"흔한 소재잖아요? 바람을 피운 남자가 부주의하게 메시지를 남겼고, 남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여자가 남자의 폰을 뒤졌어요. 말다툼, 이별, 끝."
"아, 작가 놈들은 이래서 싫어. 야, 그런 식이면 어차피 죽을 건데 그런 인생은 왜 사냐? 클리셰 아닌 인생이 얼마나 돼?"
마렌이 혀를 차는 사이.
커플의 다투는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아는 동생이랑 이모지를 10개씩 붙여?
-진짜 아는 동생이라니까!
"뻔한 싸구려 플롯이죠. 이제 커피 싸대기 타임."
어깨를 으쓱이는 작가의 옆 테이블에서, 여자가 커피를 치켜들고 벌떡 일어선다.
침을 꿀떡 삼킨 마렌이, 혹시 커피가 튈까 봐 팔로 머리를 감쌌으나....
척.
-흥!
다시 앉아 버리는 여자.
"다시 앉았는데?"
"앉아서 뿌리려는 거죠."
벌컥벌컥!
"커피를 마시는데?!"
"예? 뿌리는 게 아니고요?"
"설마 입으로 뿌린다는 말은 안 할거지?"
"...."
-뭐야, 뿌릴 것처럼 하더니?
-너에게 뿌리기엔 너무 맛있는 커피라서.
"앞부분은 조금 빗나갔군요."
"좀 많이 빗나갔지."
"하지만 이제, 싸늘한 이별만이 남은 건 틀림없죠."
마른 손가락으로 안경을 치켜올린 작가가 단언했다.
"그녀는 바로 이별을 통보할 겁니다."
우걱우걱우걱!
"빵을 먹는데?! 요새는 이별 통보를 저렇게 하나?"
"빵을 먹는다고요? 남자가요?"
"아니, 여자가."
"...."
-여기 빵이 맛있긴 하지.
-닥쳐, 기다린 시간 아까워서 그러는 거니까.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작가가.
다 깨달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아아. 그런 거였나."
"아니, 뭐가 그런 건데?"
"플롯이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클리셰죠. 바로 반전적 화해입니다."
-켁, 켁!
-이런... 여기 이거라도 좀 마셔.
목이 막힌 것 같은 여자에게.
황급히 물을 떠다 주는 남자 친구.
"보셨죠? 이걸로 시즌 2가 시작되는 거죠. 반전이 가미된 클리셰입니...."
촤악!
-으아아앗!
"...다아아아앗, 차가!"
그리고 얼마나 세게 뿌렸는지.
남자 친구를 넘어 작가에게까지 뿌려지는 물세례.
"이 X발놈아, 커피는 아까워서 못 뿌렸지만 물은 아니야. 그년이랑 잘 먹고 잘 살아. 꼭 유병장수하고. 그리고 옆의 분들, 힘들게 좋은 카페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이건 세탁비 쓰세요."
이제는 구 남친이 된 남자에게 으르렁거린 여자가.
숨도 못 쉴 정도로 웃고 있는 마렌과.
졸지에 모진 놈 옆에서 날벼락을 맞은 작가에게 5만 원권 두 장을 주고 홀연히 떠났다.
"형, 그만 웃으면 안 될까요?"
"아니, 이걸 어떻게 안 웃냐?"
"...."
안경을 벗어 물기를 닦은 작가가.
그제서야 리뉴얼 카페라떼를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마시더니 눈이 커진다.
"상당하네요."
"그렇지?"
"아뇨, 이 가게의 힘이요."
"응? 무슨 말이야?"
"클리셰를 강제로 드리프트시킨 것은 온전히 이 가게의 힘이었어요. 클리셰를 여의봉처럼 휘두른다.... 손오공... 카페...."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고는.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한 작가가 손가락을 테이블에 톡톡 두들기다가 눈을 번쩍 떴다.
"...형 말이 맞네요. 이 카페는 제법 괜찮아요. 다음 작품이 생각날 것 같아요."
"오오!"
작가가 당장이라도 작품 앞으로 달려갈 것처럼 벌떡 일어서려다 멈칫한다.
"왜?"
"아, 아뇨. 잠시만요."
벌컥벌컥, 커피를 전부 들이켜 버리는 작가.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야, 장난 아니네. 이래서 못 뿌렸구나."
179화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1)
전장 '아득한 밤'의 대결이 종료되고 한 달 뒤.
통칭 46층, '세상의 끝'.
휘이이이잉-
여러 물감을 뿌려 놓은 것 같은 회오리 모양의 하늘에서 수많은 잡동사니들이 쏟아져 나온다.
낡은 병장기, 귀퉁이가 뜯겨 나간 방패, 빛바랜 장신구 따위들이 지면에 떨어져 박살 나고 박살 나길 몇십 분.
"슬슬 그친 것 같은데?"
"어우, 진짜 날씨 한번 지랄맞네."
일단의 무리가 폐건물 안에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본다.
한차례의 잡동사니 폭우를 쏟아 낸 탓일까.
변덕스러운 하늘은 고요하고 잠잠하다.
"크으, 이번에도 보급이 꽤 많은데?!"
대검을 든 남자가 잡동사니를 들쑤시며 환히 웃자.
옆에 있던 여자가 핀잔을 준다.
"보급은 뭔 보급이야, 죄다 쓰레기뿐인데."
"무슨 소리! 쓰레기 속에도 진주는 존재하는 법!"
"하아... 그래서, 찾은 진주가 하나라도 있어? 없잖아?!"
"난 소문을 믿어! 선구자들이 보급품 속에서 엄청난 귀물을 얻었다면 나라고 못 얻을 것도 없지 않...."
뻐어억-
"없어! X발! 그냥 없다니까?! 없으니까 말 좀 들어, 이 X끼야!"
지팡이로 냅다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긴 여자.
"차라리 도박이나 할 것이지. 어휴."
"아니, 저건 도박보다 더 중독이 심한 것 같은데?"
다른 클랜원들 또한 여자의 의견에 한마디를 보탠다.
"돈이 들어가지 않는 승부수를 도박이라고 하지는 않는...."
"우리 시간이 들잖아! 평생 쓰레기 더미만 뒤질 거야?"
"낭만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녀석들 같으니...."
남자가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사실 그 역시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거라곤 다른 차원 어딘가에서 흘러 들어온 잡동사니들이 대부분이며.
값어치 있는 물건을 찾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는 걸 말이다.
"낭만은 무슨 낭만 타령이야?!"
"그래도 조금이나마 값어치가 있는 걸 찾으면 점수로라도 교환할 수 있잖아?"
남자가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연신 잡동사니를 흘끔거린다.
"저런 건 주워 봐야 몇 포인트 받지도 않는다고! 차라리 사냥을 해서 버는 게 훨씬 더 빠르지!"
이 '세상의 끝'에 존재하는 원주민들, 에반겔족.
그들에게 주운 폐품이나 몬스터의 목을 갖고 돌아가거든.
카르마 포인트를 지급받을 수 있다.
그 포인트들로 새로운 장비나 소모품을 구입하는 것도 가능하다만.
역시 핵심은 포인트로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장치를 구매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 일단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것 아냐!"
약 한 달 전.
탑 안의 모든 공략자들에게 적용된 가호, '밤의 안식'.
올 스탯 1을 올려 주는 매력적인 가호이기도 했으나.
이 가호의 핵심은 소폭의 경험치 획득량 상승에 있었다.
"잘 들어! 이 가호가 유지되는 동안 우리는 최대한 레벨을 올려야 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근데 정말 가호가 제대로 적용되고 있긴 한 걸까? 난 잘 모르겠던데...."
"멍청하긴. 내가 아무 이유도 없이 너희를 굴렸겠어? 이미 계산은 끝났어."
지팡이를 든 여자가 클랜원들을 보며 딱 잘라 말한다.
"...그래? 얼마나 차이가 나는데?"
"레벨이 높아질 때마다 필요로 하는 경험치 양이 많아지는 걸 감안하면... 됐다. 그냥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예전에는 100마리에 1레벨이 올랐다면, 지금은 80마리를 잡으면 레벨이 오른다고 생각해."
"뭐?!"
대검에 몸을 기댄 채 하품을 하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뜬다.
"그럼... 20%가 증가한 거잖아?!"
"그래! 그러니까 폐품이나 주울 게 아니라 일단 레벨부터 올려야 된다고! 그래야 선구자들이나 망치 클랜 같은 놈들 발뒤꿈치라도 쫓아갈 수 있을 것 아냐!"
지팡이를 쥔 여자가 클랜원들을 훑으며 단호히 말을 이어 간다.
"이 가호가 영원하리란 보장은 없어. 그러니까 있을 때 최대한 뽕을 뽑아야 된다고! 다들 알겠어?!"
"알겠어, 알겠으니까 진정 좀 하고. 근데 생각해 보니까, 경험치 증가 버프 같은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않아?"
"처음이지."
여자의 대답에 대검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다시금 묻는다.
"그리고 이 버프는 최상위 공략자들이 새로운 퀘스트 층을 클리어 해서 생긴 거고?"
"그건 나도 모르지."
선구자들을 비롯한 여러 최상위 클랜들이 숨겨진 지역 혹은 숨겨진 층을 발견했다는 둥.
여러 뜬구름 잡는 소문들이 탑에 돌고 있긴 했으나.
아직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었다.
"근데 소문에 의하면 다른 곳으로 전송이 되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전송?"
"그래. 그래서 새로운 퀘스트 층이나 다른 차원의 사냥터로 넘어갔다가 다시 복귀하는 거라는 말이 지배적이긴 해."
클랜장의 설명에 대검에 기대고 있던 남자가 손뼉을 탁 친다.
"다른 차원으로 넘어간다라...."
"그래! 이제 이해가 됐으면 얼른 무기나 들어! 빨리 사냥하러 가야...."
"저놈들처럼?"
남자가 쳐든 대검의 끝자락에는.
-난, 누구? 여, 여긴... 어디?
-아아... 아아아아....
몸이 찢어지고 엉겨 붙은 살덩이들이 알 수 없는 신음을 내뱉고 있었다.
여자가 샐쭉한 눈으로 남자를 노려본다.
"방랑자들이랑 공략자들이 같냐?!"
"큰 범위로 보면 다를 건 없지. 저놈들은 이동에 실패해서 저 꼴이 된 거고, 공략자들은...."
"무기나 들어! 복귀하기 전에 한바탕 벌고 가려니까!"
여자의 지팡이 위로 기묘한 술식이 생겨남과 동시에.
콰아아아아아앙-
커다란 굉음과 연기가 일대를 뒤덮는다.
* * *
몇 시간 뒤.
"후우. 방랑자 놈들, 하필 복귀할 타이밍에 들이닥쳐서...."
다소 행색이 엉망이 된 무리가 빛이 흘러나오는 계단을 타고 내려온다.
"그래도 포인트는 많이 챙겼잖아? 얼추 5,000포인트 정도만 더 모으면 다음 층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으니까."
"일단 클랜 하우스로 돌아가서 정비부터 하자!"
"크으, 좋지!"
며칠이고 '세상의 끝'에서 사냥만 한 탓일까.
45층인 별의 마을을 바라보는 이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려 있다.
"그건 그렇고, 새삼 느끼는 거지만 사람들 꽤나 늘어난 것 같지 않아?"
"많이 늘긴 했지."
한때는 소수 정예, 탑에서 가장 강력한 무위와 능력을 과시하던 이들이 거점으로 삼던 이곳.
그러나 지금은.
"레비아탄의 비늘 갑옷으로 좋은 무기 구해 봅니다! 골드도 받습니다!"
"볼케이노 클랜에서 함께할 가족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가족 같은 분위기! 적절한 아이템과 재화 배분 등, 많은 혜택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수많은 공략자들이 별의 마을을 거점으로 삼고.
왕성한 활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다들 어지간히도 환상의 상점을 이용하고 싶긴 한가 보네."
"패 업그레이드, 중요하긴 하잖아? 당장 클랜장만 하더라도 통화 많이 하려고 사냥하는 것 아니었어?"
등에 대검을 멘 남자의 물음에 여자가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런 이유도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우리는 단순히 환상의 상점을 이용만 할 게 아니라, 선구자들의 자리를 대체할 정도까지 성장해야 돼."
"왜? 아! 혹시 클랜장, 상점주한테 반하기라도 했어?"
"멍청한 소리도 자꾸 들으니까 질린다, 질려.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어 간다.
"상점주의 얼굴도 궁금하긴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있거든."
"음?"
"선구자들의 전신인 선발대가 상점주한테 집착했다가 털린 적이 있었잖아?"
"그랬었지?"
당시 선발대가 환상의 상점주의 능력을 노렸다가 박살이 났던 걸.
모르는 이는 아마도 이 탑 안에 거의 없다시피 할 터.
"그 당시에는 상점주의 무력에만 좀 시선이 갔었거든?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선발대의 생각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오...."
순간, 남자의 얼굴에 긴장감이 흐른다.
"설마 상점주를 적으로 돌리려는 건 아니지?"
환상의 상점을 적대한다는 것.
그것은 단순히 상점주만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 아닌.
그와 관련된 모든 클랜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야기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바로 클랜에서 나가야지. 침몰할 배에 계속 타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자.
여자가 픽 실소를 흘린다.
"내가 미쳤다고 상점주랑 척을 질까?"
"그럼 일리가 있다고 한 건 무슨 말인데?"
"당시에 선발대는 상점주의 능력을 탐냈었잖아. 무엇보다 상점주가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열쇠라는 말도 있었으니까."
남자가 계속 말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소문대로 상점주가 관리자라면, 그 말도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는 거지."
"어, 음... 그래서 결론이 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상점주와 손님, 이 단순한 관계를 넘어 상점주랑 좀 더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거지.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거든. 상점주가 중립을 고수한다고 하지만, 결국 상점주도 자기랑 가까운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더 챙겨 주려고 하지 않겠어?"
조용히 여자의 말을 경청하던 남자가 코를 후비적거리며 말한다.
"그러니까, 상점주한테 잘 보여서 콩고물 떨어지는 것 좀 먹자는 걸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하고 있어?"
"뭐? 야! 어렵게 말한 게 아니라...."
티격태격하는 두 남녀.
그리고 클랜원들이 그런 남녀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고개를 젓던 그때.
오오오오오오오오!
어디선가 환희에 찬 함성이 울려온다.
그것도 단발이 아니라 끝없이 말이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본데?"
"저건...."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여자가 클랜원들을 향해 손짓한다.
"지금 바로 전원, 전력 질주!"
"뭐?"
클랜원들의 의견은 아랑곳 않고.
함성이 들려오는 곳으로 뛰어간다.
"냉동! 아이스크림!"
"통화 카드 남은 것 있습니까?! 통화 카드!"
"오오오오오오!"
공략자 대부분이 브론즈, 실버 패를 번쩍 든 채.
패를 좌우로 크게 흔들어 대고 있다.
"이런, 조금 늦었나."
여자가 혀를 차던 중.
뒤따른 클랜원들이 그녀의 옆으로 다가온다.
"오오! 환상의 상점이야?! 우리 오늘 완전 운이 좋은데?"
"근데 좀 많이 기다려야 될 수도 있어."
"뭐? 우리 실버-패 오너잖아?!"
"우리만 실버-패 오너가 아니니까!"
그녀의 말대로다.
이곳은 45층.
최전선이라는 타이틀을 진작 잃긴 했으나.
여전히 실력자들만이 발을 디딜 수 있는 곳이라는 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었다.
"비켜! 이것 안 보여?! 난 실버-패 오너라고!"
"나도 실버-패 오넌데?"
"혹시 브론즈는...."
"이보쇼! 낄 데 낍시다! 예?!"
그리고 그러한 실력자들이 모인 이곳에서.
패의 우열이 다소 빛이 바래는 것도 사실이었다.
"쓰읍... 얼른 골드-패로 업그레이드하긴 해야겠는데...."
"그러게. 갈수록 경쟁이 더 치열해지니 원."
비단 그들만이 아니라 다른 공략자들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한 걸까.
"...."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과 눈빛 사이에 경쟁심이 불꽃처럼 튀는 듯하다.
그리고.
딸랑-
한쪽에서 벨 소리가 울리기 무섭게.
자리에 있던 모든 공략자들의 목이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홱 돌아간다.
"거기, 그렇지! 좀 눈에 잘 보이는 곳에 걸어야지!"
상점의 종업원들인 용아병들이 상점주의 지시에 따라.
기다란 현수막을 상점 위에 걸고 있다.
"저건...."
[58&59층 공략 기념 특별 행사 진행 -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개봉 박두!]
180화 편의점24 클랜 스펙터클 페스티벌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