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아카데미 이사 김극 - [1]
백담비를 집으로 돌려보낸 뒤, 헌트웹에 글 하나를 올렸다.
어제 일을 기념하기 위한 슬프고도 장엄한 글이었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를 애정하는 언니옵바야들, 급보!♡!
애기버섯이는 이제 애기 아니에양······ 닳고 닳은 숙녀예양······.
애기버섯이, 어제 다 커버렸어양······! ㅠ 이제 애기버섯이는 곰돌이 팬티를 입을 수도 없고 학교 수영복을 입을 수도 없게 된 거시에양 ㅠ
어느 날 광고판에 임산복을 입은 섹시한 미녀가 섹시한 속옷을 살♥짝 드러낸 채 섹시♡포즈를 잡고 있다면 그건 분명 애기버섯인 줄 아세양!
거기 달린 댓글들을 보니 즐거우면서도 아쉬웠다.
익명 : 우웩······.
Ⓐ 이해경 : 왜 이러는 거야 진짜
Ⓐ 러그소라게 : 형님 제발 그만!!
김형만 씨, 헌트웹 엘마야캐요가 살아있었다면 바로 이 안에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고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줬을 텐데. 이젠 내 뜻을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없다.
이 와중에 어쩐지 내 라운드걸의 댓글은 보이지 않길래, 백담비는 뭐 하고 있나 찾아봤더니 헌트웹의 또 다른 게시물에서 금방 찾을 수 있었다.
Ⓐ 5my지저스 : 짐꾼들 말 뒤지게 안 듣네. 주제 파악도 못 하고······.
자기는 2년 가까이 헌터 일을 했으니 베테랑 중의 베테랑 말 좀 존중해달라는데, 짐꾼 주제에 미친 건가? 2년 헌터 경력이라 해봤자 짐꾼들끼리 모여서 짐이나 나른 경력이잖아.
역장체든 오거든 제대로 된 괴수라곤 잡아본 적 없는 짐꾼들이 나한테 같은 헌터로 대우해달라고 하면 어이가 없는 걸 왜 모르는 거지?
정진영 형이 올린 글이었다. 보아하니 제 비각성자 팀원들과 트러블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들에 대한 불만과 혐오감을 토해내는 글이었는데······.
거기 달린 내 라운드걸의 댓글을 보며 나는 잠시 아연함을 느껴야 했다.
Ⓐ syberMagneto : 우으······. 비각성 쓰레기가 감히 맞먹으려 들면 가스실로 보내면 된다고 생각해······!
이건 또 뭐냐. 대체 뭐 하는 혼종인가?
분명 내 라운드걸은 비각성자 혐오 컨셉을 그만두겠다며 대신 귀여운 척을 시작하더니, 지금 보니 어째 귀여운 척을 계속하면서 비각성자 혐오까지 재개한 게 아닌가.
황당함에 이어 우울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왜 저러는지 이해하는 데서 나온 우울감이었다.
내 라운드걸이 잠시나마 비각성자 혐오를 그만뒀던 것은, 아마도 나와 함께 헌터 일을 하며 인정욕구를 충분히 해소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백담비는 나와 함께 여러 공을 세우면서 더는 계약금 먹튀니 얼레기니 비난을 듣지 않게 되었으니까. 헌트웹에서라도 잘 나가는 A급 헌터인 척, 비각성자들을 혐오하며 열등감을 해소할 이유가 사라졌던 것이리라.
그런데 지금 다시 그러는 것은?
그놈의 황금화살상 일로 말미암아 그녀의 내면에 다시 비각성자들에 대한 혐오감이 싹튼 듯했다. 사회자가 노골적으로 나이토 상이 비각성자인데도 공을 세워 대단하다느니 어쩌느니 추켜세워준 걸 그녀도 봤을 테니까.
그녀는 그놈의 시상식을 보며 여러모로 화가 났을 것이고 꼬왔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덕분에 지금 나는 그녀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녀가 느끼고 있을 혐오감과 그 이유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환각 속 테러리스트 김극은 비각성자들을 혐오했다. 단순히 혐오할 뿐만 아니라 그 혐오감을 현실에 표출하고 싶어 해서, 그 김극은 단순히 인터넷에 혐오글을 쓰는 걸 넘어 아예 비각성자들을 소월에 노예로 보내버리기까지 했다.
여러 차례 환각을 통해 그 김극의 생각과 기억을 전해 받으면서 나 또한 그 혐오감을 공유하는 중이지만, 지금까지 그 혐오감은 어렴풋한 선민의식의 형태로만 존재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혐오감의 이유를 이제는 나도 더 자세히 알게 된 것 같다.
그놈의 시상식을 보며 느낀 것들이 있다.
소위 일반인들······. 다시 말해 비각성 찌꺼기들이 세상을 보는 시선이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자신들이며, 이 세상과 국가 또한 마땅히 머릿수가 많은 자신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오만함.
평범한 자신들이 이룬 것은 노력과 의지의 성과요, 각성자들이 이룬 것은 그저 우연히 각성한 초능력 덕분에 불과하다는 관점.
평범한 자신들은 거기서 더 나아질 수 없으니, 평범하지 않은 초인들을 깎아내려서라도 자신들을 드높여야겠다는 저열함을 그 사회자와 관중에게서 보았다.
아, 젠장.
나는 심호흡했다. 화를 억누르기 위한 심호흡이었다.
당장은 내가 싹 다 때려 부수러 나섰다간 모양새가 좋지 않을 터라 넘어가겠지만, 다음 기회마저 놓치진 않을 것이다.
그놈의 방송국에 어떤 건수가 잡히는 순간, 지금 느낀 울분까지 실어 응징하러 나서리라.
뭐, 지금 당장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애기버섯은 더는 총각이 아니게 되었으며, 백담비는 나와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동시에 한층 더 맛이 간 마당이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크게 변하진 않았다.
요즘도 괴수들이 툭하면 게이트를 열고 튀어나오는 상황 아닌가. 그때마다 출동해야 하는 나나 내 라운드걸이나 끔찍하게 바쁘거니와, 우리 둘이 헌터로서 일하는 동안 꽁냥대기라도 했다간 팀원들에게 민폐일 터이므로 우리는 일하면서 적당히 사귀는 티만 낼 뿐 대놓고 연애질하진 않았다.
나든 백담비든, 이후로도 계속 서울에 튀어나온 괴수들을 죽이고 또 죽이다가 일과가 끝나고서야 함께 시간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하여 2월이 지나, 3월 2일이 되었다. 뭇 학교들이 신입생들을 받아들이는 시기다.
또한, 헌터 아카데미의 입학식 날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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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아카데미는 서울시 강서구에 세워졌다. 본디 그린벨트였던 구역에 아카데미 건물을 올린 것인데, 그래서인지 아카데미 주변은 온통 녹색이었고 그것부터 영 맘에 들지 않았다.
민가와 멀리 떨어진 아카데미 건물을 보니, 학교라기보단 군대 시설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탓이다.
그리고 난 이 맘에 들지 않는 학교의 이사였다. 김형만 씨가 실질적 협회장으로 일하실 때 힘을 써서 내게 이 자리를 넘겨준 바였다.
그래서인지 내가 학교에 발 디디니, 교직원 하나가 내게 달라붙어 상전 대우를 했다.
"아, 오셨습니까! 이리로······"
교직원이 안내하는 강당으로 가보니, 익숙한 얼굴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최용 씨? 바빠서 협회장 일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라더니 여긴 또 참석하셨네요?"
내가 반가움을 표시하니 최용 또한 씩 웃으며 대꾸했다.
"협회장씩이나 돼서 아예 손 놓고 있을 순 없으니까······ 그나저나 저보단 김극 씨가 온 게 의외인데요? 김극 씨도 저만큼 바쁘지 않나? 심지어 김극 씨는 아예 이사 직함도 달고서는 가끔 강사 노릇까지 할 예정이라 들었는데요. 그럴 시간이 됩니까?"
"짬이 없어도 내봐야죠?"
"어이구, 진짜 힘드시겠다. 얼마 안 되는 강의료 받자고 이렇게 무리하는 건 아니실 테고······ 역시 이놈의 학교에서 뭔 짓을 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뭐, 그렇죠."
"헌트웹에서 다들 걱정했던 것처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이 헌터 아카데미 설립과 그 교직원 내정자 목록이 발표되었을 때, 헌트웹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정부에서 아카데미랍시고 웬 세뇌 교육 시설을 세우려는 게 아니냔 것이었다.
이후에 만난 박주헌은 정부에서 어린 각성자들을 세뇌하려는 의도까진 없다고 해명했지만, 그렇다고 국가에서 어린 각성자들을 미리 길들이려 한다는 의도마저 부정하진 않았던가?
그리고 이제는 그 박주헌마저 없다. 이 헌터 아카데미의 유일한 각성자이자 헌터 출신 교사가 될 예정이었던 그는 베헤모스의 꼬리를 자르다 전사했다.
그리하여 웬 사이비며 군인 출신만 득시글거리게 된 이 학교에, 어린 동족들의 교육을 믿고 맡기란 말인가?
당연하지만 절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랬다간 특무대 같은 반푼이들이나 득실거리게 될 뿐이다.
동족은 동족인데, 그렇다고 정말 동족 대우해주기엔 정신이 썩어빠진 반푼이들. 그런 각성자들이 다음 세대를 가득 채우리라 생각하기만 해도 부아가 치밀어서 참을 수가 없다.
"곧 입학식입니다! 두 귀빈께선 여기 앉아주시고······"
최용과 함께 입학식이 열릴 강당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는 여기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니, 이 많은 어른 중에 각성자라고는 나와 최용 둘뿐인 듯했다. 다시 말하지만 끔찍하게 맘에 들지 않았다.
좀 더 시간이 지나자 어린 각성자들이 하나둘씩 강당을 채우기 시작했다. 신입생과 편입생들이었다. 여기 입학하는 대가로 그 가족이 아파트 한 채씩 임대받을 예정인······.
그중에 아는 얼굴이 보였으니, 신미래였다. 그 모친이 함께였다.
내가 이놈의 아카데미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만든 모녀였다.
내가 반가운 마음에 그쪽을 쳐다보고 있자니 신미래의 모친도 이쪽을 발견했다. 고개 숙여 인사하는 그녀에게 나도 마주 인사해주었다.
이후로 열린 입학식은, 그 자체로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었다. 학교 입학식이면 늘 그렇듯 나치 행사 같았을 뿐이다.
전 헌터 협회장이었던 교장이 단상에 올랐다. 그가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끔찍한 연설을 줄줄 하기 시작했지만 난 참았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러 모인 여러분께, 저 또한 애국충정의 마음으로 진심 어린 존경을······"
연설 중에 저따위 나치 같은 소리를 지껄일 때도 난 참았다. 심지어 나는 국민의례를 할 때도 멀뚱멀뚱 앉아있었을 뿐 이런 나치 짓 따위 집어치우라며 소리 지르진 않았으니, 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자제력을 발휘한 셈이었다.
그리고 교장의 연설이며 국민의례를 비롯한 여러 절차가 끝난 뒤, 교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다 끝났습니다. 특별한 용무가 없으면 두 분께선 이제 돌아가 보셔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아, 그래? 김극 씨, 전 이만 가볼게요. 다음에 또 뵙시다!"
입학식 내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최용은 이만 떠나려는 듯했지만, 난 아니었다.
"이사님은? 특정 업무를 맡진 않으신 걸로 아는데. 돌아가시는 길을 차로 모셔다드릴 테니 슬슬······"
교직원이 나 또한 떠나라고 눈치를 줬지만 난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난 그저 손을 휘저어 귀찮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손짓한 다음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물론, 나도 바쁜 몸이라 고작 학교 행사에 오랜 시간을 잡아먹힐 수는 없긴 하다.
그래도 형식상으로만 이사 직함을 달고 있는 게 아니라 이 학교의 운영을 예의주시할 예정임을 보이기 위해,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던 중이었다.
"학부모님들? 먼저 떠나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학생들은 남겨두시고 먼저······"
교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학부모들이 강당을 나섰다.
그리하여 강당이 휑해지고, 여기엔 교직원들과 어린 학생들만 남은 가운데, 웬 중년 남성이 단상 위에 올랐다.
중년 남성이 마이크를 잡고 몇 번 헛기침 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두 주목."
그러나 그 한 마디에 바로 학생들이 조용해질 리는 없었다. 여전히 강당이 시끄러운 가운데, 중년 남성이 버럭 소리 질렀다.
"주목, 새끼들아. 주목!"
마이크 볼륨을 최대로 키운 걸까? 그 고함은 강당 전체에 메아리쳐서 쩌렁쩌렁 울렸다.
강당에 부자연스러운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짓이냐?
"좋게 말로 하면 안 듣지?"
어쩐지 교직원 복장이라기보단 군복에 가까워 보이는 차림인 중년 남성은, 아마도 군인 출신인 것으로 보였다. 그래서 지금 군인처럼 구는 것일까?
그리고 지금 그 비각성 찌꺼기는 학생들을 신교대 신병으로 대하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훈련소에 막 들어갔을 때 접했던 것과 비슷한 말과 행동을 보이는 걸 보니.
"너희 지금 놀러 온 게 아니다, 새끼들아. 응? 여긴 너희 원래 다니던 유치원이 아니고 일반 학교가 아니야. 너흰 이제 국가에 소속된 신분이야! 그걸 몰라? 모르면 제대로 알려줘?"
그리 윽박지르면서 중년 남성은 지휘봉인지 정신봉인지 모를 웬 막대기를 강연대에 대고 툭툭 쳤다.
그놈의 나무 막대기가 이 순간 내게는 각목에 겹쳐 보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학주가 내 뒤통수에 쳤던 그 각목 말이다.
놀랍게도 저 은퇴한 군바리는 내 인생에 더러운 기억을 남긴 두 가지 요소를 모조리 함유하고 있었다.
내게 소년원 신세를 지게 만든 학주며 내가 징역을 살게 만든 훈련소 조교를 합친 듯한 비각성 찌꺼기가 저기 있었다.
"알아들었으면 조용히 해라. 왜 조용히 해야 하는지 나한테 제대로 배우기 싫으면―억!"
그러니까 이 순간, 내가 공간이동 하여 그 비각성 찌꺼기의 뒤에 나타나서는 놈의 오금을 걷어차 자빠뜨린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었다.
121화 아카데미 이사 김극 - [2]
연단 위에서, 내가 말했다.
"여러분? 이놈 말 듣지 마세요."
마이크 없이도 내 목소리는 강당 전체에 울렸다. 내게 오금을 걷어차여 바닥에 엎어진 이 비각성 찌꺼기와 다르게 말이다.
나는 먼저 날 쳐다보는 어린 동족들을 보았다. 그들에게 말했다.
"이런 놈이 뭐라 소리 빽빽 지르든 무시해요. 내가 이런 놈들보다 높습니다."
여전히 일어나지 못하고 신음하는 중년 남자와, 당황하여 어안이 벙벙한 얼굴인 다른 강사며 선생 하나하나를 가리키며 내가 말을 이었다.
"이런 놈들이 여러분한테 새끼, 새끼 거릴 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려주겠습니다."
저를 두고 하는 말임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여전히 바닥에 엎어져 있던 중년 남자가 날 급히 쳐다보았다.
"이렇게 하세요. 이렇게."
뭐라 항의하려는 듯한 중년 남자의 안면을 걷어찼다.
"바로 이렇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신음하던 중년 남자는 한참이나 눈을 감고 부들거리더니, 겨우 눈을 떴을 때도 오른쪽 눈은 여전히 감긴 채였다. 내게 걷어차여서 실명됐을까? 그러면 좋겠다.
"뭐 하는 짓입니까!"
날 말리려는 듯 겁 없는 교직원 몇몇이 다가왔지만, 다가오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내가 살짝 발을 굴렀다. 어디까지나 살짝. 그러나 우리가 선 연단이 흔들리더니, 내가 충격을 준 연단 일부가 송두리째 꺼졌다.
연단이 무너지며 먼지가 피어오르는 가운데 교직원들은 다가오려다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나는 다시 학생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기하죠? 이렇게 내 힘이 센데, 내게 걷어차인 저놈 다리는 왜 아직 멀쩡한 걸까? 이상하지 않아요? 제가 힘 조절을 잘해서 그렇습니다.
신체강화 능력자든 역장 외골격 능력자든 힘 조절하는 노하우만 익히면 일상생활이 어렵지 않아요. 같은 각성자이자 선배 헌터인 저라면 그 노하우를 여러분에게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이놈은 그 노하우를 여러분에게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각성도 못 했는데?"
중년 남자는 여전히 끙끙대고 있을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만이 계속 말했다.
"어렵겠죠? 그러니까 무시하세요. 이놈이나 딴 놈들이나, 여러분을 가르칠 자격도 능력도 없으니까."
내가 단순히 꼭지가 돌아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 선생인지 강사인지 모를 놈들의 권위를 깔아뭉개야 했다.
이 중년 남자가 훈련소 조교처럼 굴기에 앞서 나와 최용을 쫓아내려 했던 것을 보면 이들은 내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내가 언짢게 볼 것을 알고 걱정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내가 보는 와중에 그리 소리를 빽빽 지른 것은, 그 정도는 괜찮으리라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따로 보는 눈이 없을 땐 뭔 짓을 저지를 것인가? 내 동족들에게 어떤 불합리한 대우를 할 것인가?
모르겠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없을 때도 안심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이 비각성 찌꺼기들이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도록, 그 권위며 위엄을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
"으······."
오른쪽 눈에서 피를 흘리며, 중년 남자가 두 팔과 한쪽 다리로 땅을 기었다. 내게 걷어차여 움직일 수 없게 된 다리를 내가 짓밟자 그 입에서 듣기 싫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다.
"시끄러. 학생들이 보잖아."
나를 보도록 그 몸을 뒤집어 준 다음, 그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하여 놈이 날 보게 만든 다음 공간이동 했다.
웬 아파트 옥상으로. 정확히는 이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부모들이 입주하게 된 아파트의 옥상에 공간이동 했다.
베헤모스가 지나간 여파인지 아니면 부실 공사를 했는지 몰라도 아파트는 살짝 기울어져 있었는데, 아파트 이름만은 근사하게도 알파벳으로 'The Hope'라 적혀있어서 어이가 없었다. 이런 아파트마저 탐이 나서 제 새끼들을 이딴 곳에 들여보냈단 말인가?
한편 난 아파트 난간에 서 있었으며, 중년 남자의 발은 난간 너머 공중에 떠올라 있었다.
내 얼굴을 멍하니 쳐다보다 말고, 중년 남자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갔다. 그리 상황 파악할 시간을 조금 준 다음, 내가 그 턱을 쥔 손을 놓았다.
중력이 그 몸을 끌어당기기 시작한 순간, 중년 남자는 눈을 크게 떴다. 크게 뜬 그 눈으로 못 믿겠다는 듯 날 바라보는 그에게 말해줬다.
"뒤져라, 씹새끼."
그리고 처절한 비명이 그 입에서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바닥에 닿기 직전, 난 공간이동 하여 그를 낚아챈 다음 또 다시 공간이동했다.
이번에는 강당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그가 다시 강당으로 복귀했을 때도 중년 남자는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듯 떨어질 때와 마찬가지로 비명 지르고 있었다. 꼴사납고 가축 같은, 비각성 찌꺼기가 지를 만한 비명이었다.
"이 찌꺼기들 말은 무시하세요. 여러분한테 씨발, 새끼 거리면 참지 말고 절 불러요. 알겠죠?"
그 비명이 그치길 기다렸다가, 내가 말했다.
"이놈들이 또 여러분한테 욕하면 이렇게 만들어 주겠습니다. 바로 이렇게요. 알겠습니까?"
그리고 잠시 후였다.
내가 만들어낸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해서인지, 아니면 그저 무섭게 굴던 선생 하나가 볼썽사납게 비명 지르다가 벌벌 떠는 꼴이 우스워서인지 몰라도 어린 학생 한 명이 웃었다.
그러자 그 옆에 있던 어린 학생이, 그 주변에 있던 학생들이 웃더니 이내 여기 모인 학생 대부분이 웃기 시작했다.
폭소였다. 듣는 나조차 기분이 좋아지는 순진한 웃음소리. 한편 그 웃음을 비웃음쯤으로 여긴 듯 교직원들의 얼굴이 굳어지는 가운데 내가 계속 말했다.
"어른이라고 겁먹지 마세요. 여러분이 훨씬 강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놈이 소리를 지르면 무시해요. 매를 들면 뺏어서 부숴버리세요. 그리고 비겁하게 학교에서 쫓아내겠다느니 특무대를 부르겠다느니 협박을 하면······ 나중에라도 절 부르세요. 알겠죠?"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도 그 순간, 학생 몇 명이 "예!" 하고 소리 높여 호응한 것을 나는 똑똑히 들었다.
"자, 해산! 다들 엄마 아빠한테 돌아갑시다. 이상한 놈들이랑 헤어져서 가족끼리 오붓한 시간 보내야죠?"
내 말에 따라 학생들이 해산했다. 교직원들의 통제 따윈 받지 않은 채 그저 무질서하게, 내 어린 동족들은 서로를 밀치고 잡아당기고 넘어뜨리며 신나게 강당 밖으로 달려 나갔다.
모름지기 어린애들은 저래야 하는 법이다. 내가 만족스레 웃는 동안, 그제야 내게 말을 걸 엄두가 난 듯 교직원들이 내게 엉거주춤 다가와서는 우물쭈물 따졌다.
"진짜······ 뭐 하는······ 짓입니까!"
이놈들은 딱 봐도 서울 종자에 비각성 찌꺼기라, 대꾸할 가치가 없어서 무시하려다 말았다.
내가 친히 입을 열어 반박해주었다. 이놈으로선 평생의 영광인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작년까지 유치원 다니다 온 애들도 있는 곳에서 새끼, 새끼 거리는 건 뭐 하는 짓이고?"
"미리 군기 잡으려고 그런 것 아닙니까! 걔네들 상대로 우리가 매를 들어서 통제할 수가 없으니까, 어른보다 힘센 애들이 선생들 말 듣게 하려면 미리 권위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는데······!"
"아, 선생들 말 듣게 하려고 그런 거야? 군대처럼 굴면서?"
"그래야 뭔가 가르칠 시도를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난 여기 모인 교직원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이 중에 헌터 출신 있나? 헌터 면허 있거나 역장체라도 한둘 잡아본 사람 있어?"
그리 물었더니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대체 뭘 가르치겠단 거지······?"
이 말뜻을 다들 알아들었을 것이었다. 너희는 헌터가 아니다. 각성자도 아니다.
그러니 너희는 미래의 헌터들에게 뭘 가르칠 자격이 없다. 내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야, 이 새끼야! 내가 군 생활하면서 몇십 년이나 애들 관리했는지 알―"
딱 봐도 군인 출신으로 보이는 노인네가 버럭 소리 지르길래 그 배를 손등으로 툭 하고 쳤더니, 놈은 고꾸라진 채 거품을 물고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군인 행세를 하려면 베헤모스 앞에서 해야지? 애새끼들 앞이 아니라."
그제야 다시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한 젊은 교사 하나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는데, 대충 이런 의미일 것이었다. '어떻게 그리 주저 없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
나는 다른 교직원들과 마찬가지로 얼어붙어 있던, 앞서 날 안내한 바 있는 교직원에게 지시했다.
"안내해요. 애들 지낼 곳 좀 둘러봅시다."
"예?"
"기숙사로 안내하라고.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할 예정이라던데, 뭔 교도소를 만들어놨는지 구경이나 하게."
내 요구에 따라 교직원이 날 데리고 기숙사로 향했다.
그리하여 난 기숙사 방에 TV며 에어컨 따위가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혀를 찼다.
이 와중에 교무실에는 그런 물건들이 있으면 다 때려 부숴버리겠다, 뭐 그런 생각으로 교무실에도 쳐들어가고는 살짝 실망했다.
교무실에도 에어컨이며 TV 따위가 없긴 마찬가지여서, '학생들 묵을 곳은 저따위인데 너희 지낼 곳은 이토록 호화스러운 게 말이 되냐'며 트집 잡을 수가 없었던 탓이다.
학교 건물 자체는 근사했지만, 보다시피 그 내용물은 형편없었다. 시설이든 교사든 간에.
이걸 보니 각성자들을 통제할 교사랍시고 군인이며 사이비 출신 따윌 배치한 이유를 알겠다. 단순히 그네들이 애들을 잘 통제할 수 있으리라 믿어서가 아니라, 예산 문제도 컸던 모양이다.
나라 자체가 워낙 가난한 상황이니까, 학교 짓고 학부모들 줄 아파트까지 짓고 나니 제대로 된 선생을 고용하는 데 쓸 예산이 없었던 모양이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원래 이 학교에서 강사 노릇 할 예정이던 박주헌이 살아있었으면 뭔가 달라졌을까?
학생들과 같은 각성자인 박주헌이라면 힘으로 녀석들을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건장한 체육 교사는 별 대단한 위협 없이 학생들을 통제할 수 있듯 굳이 비각성 찌꺼기들이 군기를 잡겠답시고 설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제 박주헌은 없다. 동족들을 챙겨줄 어른이라곤 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 사장님? 저 김극인데요. 서울까지 배달되죠?"
나는 바로 한 업체에 연락했다.
각성자 수용시설에 남기로 한 얼음 능력자들을 위해 거기에 온갖 설비를 들여놓을 때 연이 닿은 업체였는데, 애들이 지낼 기숙사에 내 돈으로 에어컨에 TV에 플스에 인원수만큼 컴퓨터까지 설치하고는 인터넷 회선까지 깔아놓도록 주문하고서야 내가 만족할 때였다.
"저기에······!"
한 교직원이 내게 달려왔다. 경찰들이며 특무대원 하나와 함께.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특무대원은 날 알아보고서는 흠칫했다. 그러곤 나와 거리를 벌린 채 내게 접근하지 않자 경찰들도, 교직원들도 당황해서 독촉했다.
"뭐합니까!"
내 눈치를 살피는 특무대원을 보자니, 어디선가 이 비슷한 광경을 접했던 것이 기억났다. 언제 봤더라?
아, 그래. 강준치가 참교육 영상을 찍을 때. 신고받고 출동한 경찰들이 저랬었지 아마······.
덕분에 더욱 유쾌해진 기분으로 학교를 떠날 수 있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카톡방에 한 글을 작성했다.
학부모들이 보게 하기 위한 글이었다.
[김극]
김극입니다. 여러분 자녀가 다니게 된 헌터 아카데미의 이사이며 특별강사이기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학교의 강사 하나가 이곳을 해병대 캠프인 줄 아는지 학생들에게 욕설하고 윽박지르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제가 참지 못하고 엄히 훈계하여 더는 그러지 못하도록 경고했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 생각보다 교사들의 질이 좋지 않은 데다 저는 다른 직업에 전념하느라 바빠 학교에 상주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니 부탁드리건대, 학생들과 꾸준히 연락을 취하며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학생이 불합리한 일을 겪었거든 제게 연락해주십시오. 가능하면 몰래 말입니다.
그리고 혹시 여러분의 자녀가 불합리한 상황에 참지 않거든, 학교에서는 그 학부모인 여러분을 예의 아파트에서 쫓아낼 거라고 위협할지 모릅니다.
그런 상황이 닥쳐도 바로 제게 연락하세요. 아카데미 이사로서 학교에 계속 남아 있도록 수를 써볼 것이며, 정 안 되면 새 아파트를 사서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손해보지 않게 막을 것입니다.
이상 헌터 김극이었습니다.
이후로 반나절이 흘렀다.
이번 사건은 수백 명이 목격한 데다 증거까지 여럿 생긴 게 문제였던 걸까?
각성자 관련 사건이 늘 그렇듯 이번 사건은 뉴스에 나오진 않았지만, 인터넷 기사로는 여럿 나왔다.
*******
122화 아카데미 이사 김극 - [3]
이번 사건을 다룬 인터넷 기사를 보고 나니 맨 먼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들 사이에 용사가 있었군.
당시 숨 막히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 학생 누군가가 영상을 촬영했던 모양이다. 그 영상을 웬 인터넷 신문사에서 입수해서는 기사에 실은 모양이고.
군인 출신 강사가 떠드는 애들을 상대로 윽박지르는 부분부터 내가 그놈을 엄히 꾸짖고는 학생들을 해산시키는 장면까지가 영상에 실려있었다. 앞부분을 자르고 내가 날뛰는 부분만 편집해서 올렸다면 내가 신문사에 친히 방문했으련만, 영상 전체를 고스란히 올린 게 맘에 들어 그러지 않기로 했다.
거기에 내가 학부모들에게 전한 메시지까지 첨부되어서는,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사만 봐도 제법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 심지어 강사 얼굴이 모자이크도 되지 않고 나온 걸 보면, 신문사가 해외에 있어 정부 눈치를 보지 않는 걸까?
한편 날것 그대로의 상황이 기사로 올라온 덕인지, 거기 실린 댓글 반응 또한 팽팽하기 그지없었다.
비회원134 : 대체 언제 헌터들한테 면책특권 주어진 거냐? 김극 저 새끼 저거 국회에 테러했을 때도 어물쩍 넘어가더니, 이번에도 조용한 거 보면 또 그냥 넘어가려나 보네?
비회원136 : 국회의사당 지붕을 깨부숴도 넘어가고~ 선생 반병신을 만들어도 넘어가고~ 누구는 제 새끼 먹일 분유를 훔쳐도 상습범이라며 징역을 살게 하는데 ,나라 꼴이 이게 뭐냐. 이게 법치국가냐?
Yok1974 : 김극 저 새끼 한 번 봐주니까 자꾸 저러는데 또 봐주지 말고 이번에야말로 깜방 보내라. 본보기 보일 수 있게 반항하면 바로 총살하고
이렇게 현실 파악하지 못하는 비각성 찌꺼기가 여럿이요, 나름대로 현실을 파악한 듯한 사람도 여럿이었다.
비회원142 : Yok1974 아재요. 아재가 직접 김극 공간이동 하는 거 쫓아가서 감옥에 잡아넣든 총살하든 하고 김극이 잡던 괴수들도 대신 잡으쇼. 현재 서울에서도 게이트 열릴 때마다 김극 혼자 괴수 삼사 할쯤 잡는 거 모르나?
비회원144 : 헌터들 버스 시위할 때 장관이며 의원들 나와 항복 선언했을 때부터 이렇게 되는 건 필연이었지. 민주주의고 뭐고 결국 권력은 힘에서 나오는 건데, 힘겨루기에서 한 번 밀린 이상 이후로도 쭉 이런 식인 건 어쩔 수 없어
ㄴ 비회원145 : 그때 항복 선언 안 했으면 내전이었는데? 시위 멤버에 강준치가 포함돼 있던 이상 그때 시위 인원 싹 다 죽여버렸어도 베헤모스 더 일찍 튀어나와서 나라 망했음
ㄴ 비회원144 : 그러니 어쩔 수 없단 거지. 애초에 김극 저 인간 분노조절장애 수준으로 뭔가 화나는 상황 닥치면 절대 참으려 하질 않고, 인터뷰에서 제 학원이며 지랑 친하다는 시의원 기회 될 때마다 언급해주고 챙겨주는 거 보면 보통 제 울타리를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닌데······.
저번엔 김극 저 양반이 수백억 써서 얼음 능력자들 전용 아파트까지 지었던가? 그거 보면 국내 각성자 전체를 제 울타리로 생각하는 모양이니 앞으로도 이런 일 자주 있을 거다
이 상황을 해외에 비교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회원147 : 중국이었으면 김극 저 새끼 S급 보내 조지든 자는 중에 전술핵 터뜨리든 해서 바로 죽였다 ㅅㅂ
비회원148 : 미국 포함 다른 국가였으면 김극한테 밉보인 정치인이랑 선생들 싹 다 머리 몸통 분리돼서 대가리는 장롱 안에 있고 몸통은 침대에 누워있었을 건데?
이 와중에 법치니 뭐니 잡다한 건 신경 쓰지 않고 날 적극 지지하는 인천 시민까지, 그야말로 별의별 반응이 다 모여있더라.
비회원198 : 사이다 ㅎㄷㄷ
Laharl : 애초에 서울 종자들이 인천 남아 김극한테 개긴 게 잘못이다. 인천 만세!
저 댓글에 좋아요를 눌러주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인터넷 기사를 보고서 이번 사건을 알고 연락한 걸까?
「김극 씨?」
"어, 진영이 형?"
수화기 너머 정진영이 빠르게 외쳤다.
「기사 봤구요, 김극햄 행동 적극 지지해요!」
"어, 정말 감사······"
「저 학교 다닐 적 선생도 저랬는데! 감히 김극햄 보는 중에 주제도 모르고 저러는 거 조져주니 제가 다 속이 시원하거든요? 혹시 누가 뭐라고 해도 신경 쓰지 마시고―」
살짝 웃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 전화를 끊으니, 또 다른 누군가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극 씨?」
"아, 최용 씨. 기사 보고 연락하신 거죠?"
「그래요! 아, 진짜. 내가 너무 일찍 떠났어. 그 상황에 직접 동참했어야 하는데!」
"아서요. 협회장씩이나 되는 분이 저처럼 경거망동하면 쓰나?"
「그래도요! 내가 영상 보고 뭘 어떻게 느꼈는지 알아요?」
"글쎄요? 김극 이 새끼 전과 2범일 만하네, 뭐 이렇게 생각하셨나?"
「그게 아니라, 대리만족을 넘어서 감격을 했어요. 감격을! 예전부터 김극 씨가 이렇게 A급 헌터들 대신해서 나서주시는 거 볼 때마다 제가 얼마나 전율을 느끼는지 압니까?」
"뭔 전율씩이나······"
「거짓말 아니라 나 지금 그 영상 서른 번째 돌려보는 중입니다. 아, 지금 또 다 보고 재생 또 눌러서 이제 서른한 번째로 다시 봐요······」
그러면서 최용은 협회장으로서 내 행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고, 혹시 이번 일로 특무대가 출동하거든 아무런 부담 없이 자길 부르라고 말했다.
내가 부르는 즉시 협회 소속 헌터들을 이끌고 출동해주겠단 것이었는데, 나로선 그리 폐 끼칠 맘이 없어서 그럴 생각은 없으면서도 대충 알았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또 전화가 걸려왔으니, 발신자 이름을 보고서 나는 흠칫했다.
조심스레 전화를 받았더니, 과연 박미형 씨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와 나를 속으로 한숨 쉬게 했다.
「김극 씨, 또 깽판 쳤다면서요? 저번에는 국회의사당에서 의원들 잡아다가 협박하더니 이번엔 학교에서······!」
"국회에서 학교로 스케일이 작아졌는데, 그럼 뭐 괜찮은 거 아닌가요?"
내가 별생각 없이 말했더니 박미형 씨가 화를 냈다.
「괜찮기는요! 내가 왜 연락했는지 알아요?」
"혼내려고요?"
「그게 아니라, 우리 당 영감님들이 나한테 직접 전화 걸어서 어떻게 좀 해보래요! 내가 김극 씨랑 친하니까 컨트롤 좀 해보라는 거지. 이렇게 넘어가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이런 식이면 나라 꼴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수를 쓸 텐데, 그 전에 어떻게 좀 해보라고 소리를 빽빽 지르던데요?」
"나 때문에 욕보셨네. 미안해요."
「나한테 미안할 게 아니라, 김극 씨가 걱정이 돼서 이래요」
"걱정이 되다뇨? 나라에서 뭔가 수 쓸까 봐요?"
「그것도 걱정인데, 김극 씨 정신건강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아서 그렇죠? 경찰서를 뒤집어 엎었다느니 의원들을 납치했다느니 순 성질대로 날뛰었단 소식이 요새 자꾸 들려오는데······ 김극 씨 성격 불같은 거야 나도 잘 알 지만, 나랑 같이 대한각성연대 활동할 때만 해도 성격이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땐 같이 활동하는 분들한테 폐 안 끼치려고 참았던 거죠. 이젠 아니구요."
「단순히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내 보기엔 김극 씨가 요새 안 좋은 일을 너무 겪어서 맘에 울화가 쌓여서 화를 주체 못 하는 것 같거든. 심리상담사라도 좀 만나보는 게 어때요?」
물론, 정부에서 내 몸값 깎을 핑계를 주기 싫어서라도 그럴 수야 없는 일이었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했다.
"내가 우리 여사님 체면을 봐서라도 당분간은 자숙 좀 할게요. 그럼 됐죠?"
「그래 주면 나도 면이 서지. 고마워요. 그래도 역시 저보단 김극 씨가 더욱 걱정이 되니까, 내 말대로 정신 상담을 받아보든 화를 가라앉히려 노력해보든 해요. 응?」
"알았어요, 알았어."
「말로만 그러지 말구! 그래서, 이번엔 또 어떤 상황이었어요? 기사 봤고 상황 설명도 들었으니 대충 어떤 상황이었는지 알긴 아는데······」
박미형 씨의 물음에 나는 헌트웹에 웬 글이 올라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헌터 아카데미 교직원을 그따위로 채운 정부의 의도며 학교 분위기 따위가 영 맘에 들지 않아 도저히 참기가 어려웠다고 말이다.
내 설명을 다 듣고 난 박미형 씨가 중얼거렸다.
「중국 따라 하는 거네」
"중국이요?"
「중국 쪽 각성자 교육시설이 딱 그런 식이래요. 처음엔 군인 출신 교직원들이 어린 각성자들 상대로 막 압박하고 무섭게 굴다가, 선생 말 잘 따르고 규칙에 순종할 때마다 점점 풀어주는 거지······ 여러 설비가 부족했던 기숙사에 에어컨이며 컴퓨터며 상점 순으로 채워 넣어주고」
어쩐지 기숙사 방에 중고 TV조차 넣어주지 않은 것은 국가에 충성심을 갖게 해야 할 마당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싶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또한 내가 부족했던 묾건들을 사비로 모조리 채워 넣어 줌으로써 그 의도를 망친 모양이지?
박미형 씨가 계속 설명했다.
「그렇게 학생들끼리 서로 규칙 잘 지키는지 감시하고 통제하게 하면서, 상점 높은 일부 인원은 소년선봉대 가입시켜 빨간 스카프 매게 하고선 여러 특권 주는 식인데······. 이게 꽤 효과가 좋다나요?」
"하기야 중국에도 그런 시설 있단 말은 진작 들었는데. 들어보니 방식도 고스란히 베꼈나 봅니다?"
「아마도요. 하기야 세상에서 유일한 각성자 통제 성공사례가 중국에만 있으니까 그걸 참고하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래도 방식이 참······.」
"왜요, 여사님 보기에도 영 맘에 안 들긴 하나 봐?"
내가 그리 농담하듯 물었을 때였다. 박미형 씨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침묵이 조금 흐른 끝에 이렇게 말했다.
「어디 가서 말하면 안 돼요? 솔직히······ 이번엔 잘한 것 같긴 해」
이 말은 나로서도 조금 의외였다. 나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정말요?"
「정말로요. 내가 대한각성연대 활동할 때 있잖아. 얼음 능력자들한테 툭하면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죠?」
"당신들은 평범한 사람들보다 훨씬 잘난 사람들이다. 그러니 기죽지 마라······ 뭐 이렇게 말씀하고 다니셨죠 아마? 얼음 능력자들이 동네 사람들 눈치 보고 그러니까, 움츠러들지 말라고 그리 말씀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단순히 주눅 들지 말라고 그리 말하고 다닌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리 믿고 말했어요」
나는 잠시 그 말뜻을 이해해보려 애썼다.
그러니까, 정말 얼음 능력자들이 일반인보다 잘났다고 생각해서 그리 말했단 말인가?
내가 입 다문 가운데 박미형 씨가 말을 이었다.
「내가 해리포터 볼 때도 마법사들한테 몰입했던 사람이야. 그리고 통제를 해도 잘난 마법사가 머글을 통제해야지. 어떻게 못난 머글이 마법사를 통제하나? 대한각성연대에서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활동했던 건데······」
그러더니 박미형 씨는 자기가 하도 얼음 능력자로서 핍박을 받아서 일종의 방어기제로 마음가짐이 그리된 건지 아니면 정말 해리포터를 너무 감명 깊게 읽어서 그리된 건지 몰라도 하여튼 진심으로 그리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정부의 각성제 통제 시도가 맘에 들지 않는 것도 늘 진심이었어요. 못난 사람들이 잘난 사람들을 통제하려는 거니까 말이야. 내가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각성자 우월주의자로 몰릴 테니까 함부로 말 못 하는 건데······」
"저는 절대 말 안 하죠."
「알아요, 알아. 아무튼 이것도 남들한텐 함부로 말 못 하겠지만, 이번 김극 씨 행동에도 깊이 공감하거든요? 역시 계속 이러면 문제가 생길 테니 차마 잘했다고 칭찬은 못해주겠지만······」
그러나 그 말이 내겐 그 어느 말보다도 강력한 지지 선언으로, 달콤한 칭찬으로 들렸다.
그리하여 박미형 씨와의 통화마저 끝났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내가 선생 한쪽 눈을 실명시키고 훈련소 조교 다리를 분질렀을 때는 거만한 판사와 교도관들이 날 모욕할 뿐이었지만, 심지어 그 당시엔 이미 내 부모 노릇을 포기했던 연놈도 날 에둘러 비난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내 동족들도, 내 동료와 내 모친보다 더 모친 같은 사람도 날 지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사실들이 내 내면에 살짝 남아있던, 계속 이러면 큰일 나는 것 아닌가 싶던 겁쟁이 같은 생각을 날려주었다. 그 빈자리에 자신감을 채워 넣어주었다.
나는 초인이다.
강준치가 그렇듯, 나는 법 위에 있다.
내가 국회의사당 돔을 부숴버리든 국회의원을 납치해서 협박하든, 선생을 실명시키고 다리를 분질러버리든 비각성 찌꺼기들은 날 잡아 벌하지 못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와 강준치뿐만 아니라 내 모든 동족들이 이런 특권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름지기 각성자라면, 자신이 동의한 적 없고 동의할 이유도 없는 법에 구속되어선 안 된다.
지난번에 직접 다녀온 소월을 떠올렸다. 아무런 법도 통제도 없는 소월에서, 각성자들은 아무런 문제 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다.
마땅히, 한국에서도 그래야 할 것이다.
내가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무엇을 목표로 행동해야 할지 대강 감이 잡히는 것 같다.
속으로 이런저런 망상인지 생각인지 모를 것들을 떠올리던 중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가보니 내 라운드걸이었다. 백담비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케이크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박미형 씨한테 혼났죠? 그리고 이번에 거하게 사고 치시느라 맘고생 좀 하셨을 테니까, 위로해드리려고······."
놀러 오는 핑계 한번 그럴듯하군. 난 씩 웃으며 그녀를 집에 들여보냈으며, 며칠 전 더 크고 튼튼한 침대를 사뒀음에 보람을 느꼈다.
모든 일이 완벽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정말로.
*******
123화 헌터 김극 - [1]
앞서 봤다시피 내 이번 행동에 대한 일반 대중의 반응은 엇갈렸지만(의외로 날 지지하는 목소리도 꽤 컸다. 인천 바깥에도 내 팬이 많아서일까?), 헌트웹 반응은 일관적이었다.
오로지 칭송, 칭송만이 이번 내 행동에 뒤따랐다.
Ⓐ 5my지저스 : 김극햄은 신이야!
Ⓐ 러그소라게 : 김극 교정펀치! 김극 교정킥!
커뮤니티 사이트들의 반응은 으레 그렇지만, 헌트웹의 분위기도 점점 일반 대중의 반응과는 괴리되는 게 느껴진다. 지난 일 년간 여러 일을 겪으면서 각성자 헌터들끼리 똘똘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일 것이다.
일반 대중의 절반 가량이 비난했던 내 행동은, 헌트웹에서는 그저 일방적으로 찬양받을 뿐이었다.
김극이 정부의 어린 각성자 세뇌 음모를 깨부쉈다느니, 오직 김극만이 어린 각성자 후배들을 위해줬다느니 하는 찬양의 목소리들······. 솔직히 말하자면 저 칭찬 세례에 취할 것 같다.
그 칭찬들을 정독한 덕분에 더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내 라운드걸과 침대에 누워 TV를 보던 중이었다.
별생각 없이 켜둔 뉴스에 저도 모르게 내 정신이 쏠렸다.
「중국 당국에서 (······) 혼란스러운 대만 상황에 개입을 선언했다는 소식입니다」
외국 상황이구나, 하고 넘길 수 없는 뉴스였다. 다름 아닌 각성자 관련 뉴스였기 때문이다.
왜, 대만은 군과 각성자들이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나라를 장악했기로 유명한 나라 아닌가.
그리고 중국 공산당이, 주변국에 각성자 정권이 들어서는 걸 두고 보기 싫어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주변국의 각성자들이 자신들의 힘으로 정권을 뒤집을 수 있음을 차례차례 증명하다 보면, 중국의 각성자들 또한 자극을 받아서는 한층 대담해지고 불순해질 수 있다는 이유라나?
그래서 중국은 예전부터 한국과 일본 등에 각성자 통제 노하우를 전수하는 등 주변국의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해오곤 했다.
그러나 당장 중국도 여력이 없어 해외에 힘을 직접 투사하지는 못했는데, 이번에야말로 대만에 직접 나서려는 모양이었다. 군사력 투사, 어쩌고 하는 말이 뉴스에서 나오는 걸 보면 아예 군대까지 보내려는 모양이지?
그러니 나 또한 긴장해야 했다. 중국에서 대만에 개입할 수 있거든 한국에 개입하지 못할 이유는 또 없을 테니까.
계속해서 뉴스를 보자니, 또다시 놀랄 만한 소식이 들려왔다.
「중국 공산당은 자국의 가장 유명한 각성자, 훠선을 군 병력과 함께 대만에 보낼 계획이었으나 (······)」
그 이름을 듣고서 나와 백담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백담비가 물었다.
"훠선이면 중국에 그 S급 맞죠? 화정 능력자인?"
"맞아요. 공산당에 과잉 충성하는 그 씨발놈······."
그러나 이어진 뉴스를 보니, 공산당의 지시에 가까웠던 권유를 훠선 쪽에서 거절했다고 했다.
훠선의 인터뷰가 TV에 흘러나왔다.
「대만엔 갈 생각이 없습니다. 제 능력은 괴수를 불태우라고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을 불태우라고 내려준 게 아니라요」
"의외네요. 훠선 저놈, 각성한 지 하루 만에 자발적으로 공산당에 충성 맹세한 놈으로 유명하잖아요? 그런 사람이 공산당 지시에 거부를 또 하네?"
백담비의 말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중국 공산당이 훠선 저놈의 충성 선언을 근거로 다른 S급한테도 충성 맹세를 시키고, 궁극적으론 중국 전체 각성자 장악에 성공한 거라던데."
"공산당에 충성은 해도 살인은 싫은 건가?"
"그게 아니라 사람 죽이며 더러운 일 하긴 싫은 거 아닐까요? 훠선 저놈으로선 히어로 이미지를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
"히어로 이미지요?"
"왜, 훠선 저놈. 소방관 시절에 화재 진압하다 불 속에서 화염 정령으로 각성한 만큼 아주 영웅적인 이미지가 있지 않습니까? 본인도 그 영웅 이미지가 맘에 들어서 공산당에 적극 협조하는 것 같던데요.
이 와중에 사실상의 대만 침공에 가담하면 중국 내에선 칭찬받을지 몰라도 전 세계적으론 영웅 이미지가 벗겨질 테니까. 그게 싫어서 대만 침공에 가담하길 거부한 게 아닌가 싶은······"
"아무튼 의외네요. 중국 각성자가 공산당 말 거부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이번 일로 공산당과 훠선 사이에 어떤 관계 균열이 생길까요?"
백담비의 말에 내가 조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내면에 떠오른 생각을 입 밖에 꺼냈다.
"아마 별 변화 없을 거예요."
"뭘 근거로요?"
"직감이요. 내 예언가로서의 직감이 그리 말해."
내 신비로운 말에 백담비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놈의 직감, 믿을 만한 거 맞아요?"
"내 예언가의 직감은 빗나간 적이 없어요."
"빗나간 적 없다니? 저번에 소월에서 강준치 만나러 갔을 때만 해도······"
이때까지만 해도 난 마음을 놓고 있었다.
헌터로서도 각성자로서도 잘 나가고 있으니 그저 하던 대로 행동하면 될 거라고, 이쁜 내 라운드걸과 노닥거리기만 해도 충분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었다. 내가 허리케인에 다가가지 않아도 허리케인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법.
늦은 시간,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극 씨 맞습니까?」
"맞는데, 왜요?"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만 지금부터 사실상 긴급상황이라 생각하고 움직여주십시오」
"이유는?"
내 물음에 수화기 너머 공무원이 빠르게 설명했다.
「베헤모스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인천으로 향하고 있어요!」
그 말과 함께 나도, 백담비도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공간이동 하여 공무원이 말한 장소로 향했다. 그랬더니 사실상 긴급상황이란 설명이 거짓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근처 주민들은 이미 다들 군경의 안내에 따라 피난하기 바쁜 모습들이었다.
헌터 라이플을 챙겨 든 나는 피난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든 싸울 준비를 했다.
그리고 역시 서울보다는 인천의 피난 준비가 미흡했다. 차가 막히거나 어딘가에 사고가 나서 피난 행렬이 멈추는 일이 자주 있어서, 그때마다 내가 직접 나서곤 했다.
멈춰 있던 차 몇 대를 내가 통째로 공간이동으로 옮겨주니, 피난 행렬이 가속화되었다.
내 도움을 받은 차 안에서, 한 인천 시민이 내게 말을 걸었다.
"김극 헌터? 팬인데 도와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뭘요. 인천 만세."
"그런데 말입니다. 요새 성질 좀 죽이면 안 돼요? 가뜩이나 나라 상황 안 좋은데 김극 씨가 정부랑 기싸움 할 때마다 맘이 안 좋거든······"
"노력해볼게. 어서 피난이나 가요!"
정말이지 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바삐 움직였던 것 같다.
그대로 새벽에도 계속 움직이자니, 무전기에서 희열 가득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헤모스가 멈췄습니다!」
그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구나, 생각했더니 그렇지 않았다.
겨우 긴급상황이 종료된 뒤, 국안부에서 날 불렀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거부하지 않고 호출에 응했더니 국안부의 새 장관을 비롯한 여러 공무원들이 모여있었다.
나도 자리 잡았더니 회의가 시작되었다. 한 공무원이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한 브리핑을 했다.
"베헤모스가 이동한 방향을 보면 아마, 인천 각성 능력자 새보금터를 향해 나아가던 것으로 추정―"
"인천 각성자 새보금터?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 말하는 거지?"
"―그렇게도 부릅니다. 아무튼 베헤모스는 그 시설의 빙정 능력자들을 노리고 움직이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정령은 정령 능력자들을 우선적으로 포식하길 원하는 법이니까 말압니다."
"그놈의 시설이 일종의 등대처럼 작용했다 이거지. 그래서?"
"최우선 조치로, 예의 시설에 수용 중이던 빙정 능력자들을 각지로 흩어지게 했습니다. 빙정 능력자들이 너무 한곳에 밀집돼 있어서 먹음직한 사냥감으로 보인 것 같으니까요. 그랬더니 일단 베헤모스의 이동은 멈췄지만,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왜 베헤모스가 멈췄는데도 안심할 수 없는지는 알 만했다. 강준치와 대치하는 와중에도 베헤모스가 움직인 사실 자체가 전례 없는 일 아닌가.
한 국안부 공무원이 투덜거렸다.
"베헤모스 그놈, 원래 강준치 무서워서 한 자리에서 꿈쩍도 안 하던 놈 아니야? 왜 지금 강준치도 돌아왔는데 다시 움직이는 거야?"
"베헤모스도 학습한 거겠죠? 강준치가 생각보다 영역방위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걸 말입니다. 여전히 강준치가 있는 곳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기는 꺼리는 눈치지만, 이젠 차라리 강준치와 거리가 떨어진 곳에 게이트를 열고 튀어나오려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즉 이런 말인가? 강준치가 자리 잡은 장소만 아니면 베헤모스는 한국 어디로든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예. 이제 재생도 얼추 마친 모양이니까. 언제 어디서든······."
다음 순간, 웬 공무원이 전화를 받더니 여기 있는 모두에게 외쳤다.
"베헤모스가 다시 움직인다고 합니다!"
이 자리의 모두가 눈을 부릅떴다.
"또 어디로?"
"이번엔 특정한 사냥감을 향해 움직이는 것은 아니고, 그저 강준치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려는 것 같다는―"
밤 동안 나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피곤했던 걸까? 나이 든 공무원 하나가 힘이 빠진 듯 의자에 등을 기대더니 중얼거렸다.
"나라 망했구만, 진짜······."
"그래서 이제 어쩔 겁니까. 게이트 내부상황 감시는 이미 똑바로 하고 있겠고, 또 뭔가 조치한 거 없어요?"
"일단 사태 진압을 위해 강준치와 연락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시도'하고 있다? 그 말인즉 아직 연락이 안 됐다, 이겁니까? 아직도!"
"강준치 쪽에서 연락을 철저히 거부하는 중입니다. 아무리 전화한들 안 받아요. 카톡이든 메시지든 마찬가집니다."
"강준치 그 인간 묵고 있는 호텔 문을 따서라도 연락을 했어야지! 그 후에 지랄발광하겠지만, 그래도······"
"이미 시도했는데 안 됩니다. 강준치가 자신이 묵고 있는 호텔 방 전체를 역장으로 감싸놨어요. 역장 너머론 소리 전달이 안 되는지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고, 특무대원을 불러다 역장 날붙이로 벽을 감싼 역장을 잠시 잘라내도 순식간에 복구되어선, 어떻게 내부에 상황 전달할 방법이······"
강준치가 어째 지하공동에서 나와 호텔 방에 묵고 있더라니, 나름 철저하게 자신의 안전을 신경 써둔 걸까?
이쯤 되니 날 여기 왜 불렀는지 알 만했다.
과연 국안부 장관이 날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김극 씨? 강준치 씨와 유일하게 친분이 있는 줄로 아는데. 이런 부탁드리기 심히 죄송스럽지만, 어떻게 좀 나서주시면······?"
저 국안부 장관이 서울 종자이며 비각성 찌꺼기란 사실, 그리고 내가 이런 용무로 찾아가면 강준치가 질색하리란 사실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았다.
난 바로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공간이동 했다.
*******
강준치의 호텔 방에 가보니 이미 특무대원들이 여럿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내 등장에 긴장한 눈치였지만, 여전히 난 저놈들이 싫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특무대원들 싹 다 물려요. 강준치가 저 칼잽이들 끔찍하게 싫어하니까 빨리!"
그리 외치고서 나는 강준치가 묵는 호텔 방 안으로 공간이동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공간이동을 위한 좌표설정 자체가 불가능했다. 역장 외골격 능력자를 공간이동 시킬 수 없듯, 역장 안으로도 침투할 수 없는 걸까?
Ⓐ BabyBerserker : 강준치? 깨어있으면 대답 좀
어쩔 수 없이 헌트웹 메시지라도 보내봤더니, 답장이 돌아왔다.
Ⓢ Kang : ? 애기버섯 컨셉 어디 감?
다행히 깨어있었다!
지금 좀 만날 수 있겠느냐 물었더니, 그러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또 호텔 방 안으로 공간이동 했더니, 이번에는 성공했다.
공간이동 하여 마주하게 된 강준치에게 내가 급히 물었다.
"강준치? 지금 상황 알아?"
강준치는 잠옷 차림과 졸린 표정으로 내게 되물었다.
"대충은. 그런데 왜?"
상황을 알면서도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던 말인가? 기가 찼지만 지금 비난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지금 준치 네가 직접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그래 줄 수 있어?"
"아, 씨······. 내가?"
"그래. 베헤모스가 너만은 경계하니까. 네가 움직여야 그놈이 안 기어 나올 거야."
"씨발, 귀찮게······."
그리고 다행히, 강준치는 이 요구마저 거절하지는 않았다.
강준치는 욕설이며 온갖 불만을 입에 담으면서도 옷을 차려입고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보아하니 순순히 상황 진정을 위해 나서주려는 듯했다.
그러나 잠시 후, 강준치가 차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것을 보면서도 난 안심할 수 없었다.
그놈의 베헤모스, 찢어 죽여야 할 베헤모스.
이제 그놈이 재생을 마쳤으며, 언제 또 한국에 기어 나올지 모른단 말인가? 그때 겪은 일이 언제 또 닥칠지 모른다고?
베헤모스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난 지금도 몸서리치곤 한다. 그때 내 몸의 절반은 불타 사라졌던 데다, 내 각성자 동료 또한 절반은 그때 죽었다.
제기랄, 고작 강사 하나 두들겨놓고 이상한 뽕에 취해있을 때가 아니었다.
*******
124화 헌터 김극 - [2]
수십 분 뒤, 강준치가 베헤모스의 진로를 가로막자 베헤모스의 이동은 완전히 멈췄다.
그러나 여전히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베헤모스를 따라다니던 괴수 떼로선, 원하던 약탈에 나설 수 없게 되자 인내심이 바닥난 걸까?
베헤모스가 멈춘 그 부근에 수십 개 게이트가 열렸다. 거기서 튀어나온 괴수들의 물결은 또다시, 나를 비롯한 여러 헌터들이 숨돌릴 틈 없는 새벽을 보내게 했다.
"죽겠네, 진짜······."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코스피며 외신 반응 따위가 전 세계에서 지금 한국의 상황을 어찌 보고 있는지 체감케 해주었다.
암울하게 보는 모양이었다. 끔찍하게.
장담컨대, 김정은이 갑자기 5년 내로 한반도 적화통일을 이루겠노라 선언했어도 지금 이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베헤모스 사태를 거치고도 정부에서 억누르고 억누른 덕에 한 봉지 1,300원에 불과했던 라면값도 하루아침에 2,500원이 되었으며, 그마저도 사재기에 싹 다 팔려나가서는 어느 마트에서도 라면 봉지를 쉬이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일찍이 호주를 초토화함으로써 그 위험성을 증명한 바 있는 베헤모스가 한국의 영역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이 정도는 결코 아니었는데.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상황이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여러 요인이 있을 터였다.
우선 베헤모스로 인한 피해가 생각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 그리고 국군의 능력만으론 놈을 물리치기가 불가능에 가까움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히 베헤모스를 막아낼 줄 알았던 강준치가 정부와 생각보다도 더 큰 불화를 겪고 있으며, 그로 인해 정부에서 그를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드러난 게 두 번째 이유일 것이다.
아마 두 번째 이유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하기야 지금 강준치가 한국에 돌아왔음에도 다들 안심할 수 없을 만하다.
대놓고 한국인들 다 죽으라며 영상까지 남긴 채 소월로 떠나버렸던 남자 아닌가. 지금도 강준치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공무원들의 전화 한 통 받지 않는 중인데, 어떻게 그를 믿으라며 사람들을 안심시킬 수 있단 말인가?
결론은 강준치였다. 강준치 단 한 사람의 행동에 모든 것이 달려있었다. 물가며 국가방위며 사람들의 생명이며, 그야말로 중요한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 국회의원들이 단체로 날 찾아와서는 이런 부탁을 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강준치 그 사람을 만나서 약속 좀 받아줄 수 없겠습니까?"
"뭔 약속이요?"
"또 베헤모스가 한국에 기어 나왔을 때, 그때는 기꺼이 나서주겠단 약속 말입니다. 현재는 그래 주리란 보장마저 없는 마당이라······."
퍽 우스운 일이었다. 한 명 한 명이 국민 수십만 명을 대표한다는 국회의원들이, 민주시민들의 노력이며 애국심 따위를 믿으려는 게 아니라 단 한 명의 초인에 의지하려는 것은.
비꼬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으며, 최선을 다해보겠다고 말한 다음 강준치의 숙소에 찾아갈 준비를 했다.
한편 나는 신체강화자라, 내 집을 떠나가며 속닥거리는 국회의원 나리들의 대화 내용도 엿들을 수 있었다.
"김극 저 양반, 의외로 순순히 말 따라주네요?"
"이것도 괴수 잡는 일이라 그런 거 아닌가? 김극 저 양반이 괴수 잡는 거 하나는 몸도 안 사리고 아주 진심이야."
그 말이 옳다. 내게 괴수를 잡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테러리스트 김극도, 인천 공작 김극도 헌터 김극에 우선할 수는 없다.
내가 어떤 환각을 보든, 어떤 불합리한 일을 겪든 그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
강준치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내가 왜 찾아왔는지 짐작하는 눈치였다.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귀찮아 죽겠다는 표정을 짓는 걸 보니.
이 시점에 이미 설득하기 어려우리란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국회의원들이 부탁한 내용을 전했더니, 강준치의 표정에는 귀찮음뿐만 아니라 짜증스러움이 더해졌다.
"나 보고 베헤모스 상대로 같이 싸워주겠단 약속을 해달라고······."
"해줄 거냐?"
내 물음에 강준치가 즉답했다.
"아니? 싫어."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그 대답이 저리 빠르게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베헤모스도 네 상대는 아니지 않나? 저번에 뭔 영상 보니까 너 혼자 1km짜리 심해괴수도 단번에 쥐포 만들어서 죽여버리던데."
"그 물고긴 순 물근육이었어. 물속이라 그만큼 크게 자랄 수 있던 거라 덩치만큼 세진 않았지. 열선으로 사람 크기 표적도 정확히 타격하는 베헤모스랑 비교가 되나?"
"그래서, 베헤모스는 만만하지 않으니 상대하기 싫다 이거야?"
내가 도발해봤더니, 전혀 통하질 않았다.
"어. 무서워서 싸우기 싫네."
그렇다면 뭐 어쩔 건데? 하는 심보가 가득한 대답이었다.
"야. 대체 네가 무서울 게 뭐 있다고······?"
"나 돈 많아. 돈 많이 벌었으니 이제 평생 모바일 게임만 하고 살아도 충분한데, 내가 왜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 미리 말해두겠는데, 난 데스클로 이상으로 위험한 놈이랑은 싸우기 싫어."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러고 있단 사실이 저 발언에 얼마나 진심이 담겼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이놈을 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나로선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가 입 다문 사이, 강준치가 계속 투덜거렸다.
"애초에 내가 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네. 대체 누굴 위해서?"
그 질문에 대답하기도 어려웠다. 새삼 생각해 보니, 강준치가 신경 쓸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베헤모스가 쳐들어오면 휩쓸릴지 모를 가족을 위해서? 강준치는 고아였다.
그렇다면 친구들을 위해서? 석장실마저 스파이였음이 판명된 지금, 강준치 주변에 친한 사람이라곤 나 하나뿐이었다······.
강준치가 말했다.
"난 말이야. 한국에서 자꾸 나한테 뭐 해달라고 요구할 때마다 이런 느낌이 들어."
"뭔 느낌?"
"왜 있잖아? 웬 고아 새끼가 자수성가해서 이름 알려지니까, 지금까지 어려울 때 도와준 적 없는 친척들이 달라붙어선 자기 가정이 어렵다느니 자식 대학등록금 좀 지원해달라느니 하며 매달리는 느낌? 지금까지 나한테 뭐 해준 것도 없는 놈들이 저러니 기가 차.
애초에 내가 왜 한국을 위해 나서야 하는지 모르겠네. 지금 한국만 어려운 것도 아닌데. 아프리카에 베헤모스보다 체급이 몇 단계는 높을 거라고 추정되는 놈 있잖아? 벌써 아프리카인 절반 가까이 죽였다는 그 거대괴수 이름이······."
"케찰코아틀."
"그래, 그놈. 호주에서 베헤모스한테 죽은 사람보다 훨씬 많은 아프리카인이 그놈한테 죽었는데, 뭐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단 이유로 국제사회에선 아무 관심도 안 주지 아마? 미국에 도널드는 식량 자급할 능력도 안 되는 치들이 확 줄어든 건 긍정적으로 바라볼 일이라며 망언이나 하질 않나. 한국에서도 아프리카인들을 구하기 위해 날 파견하려 한 적은 전혀 없고 말이지."
"그래서,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싸울 이유가 없듯 한국인들을 위해 싸울 필요도 없다. 이 말 하고 싶은 게 맞나?"
"맞아. 딱 그거야. 내가 대체 왜? 어디까지나 싹 다 남일 뿐인데."
솔직히 말해, 나도 그 심정을 이해했다. 국가에 소속감을 느끼는 건 나치나 할 짓 아닌가.
나 또한 애국심이 없기로는 강준치와 마찬가지여서, 국경으로 울타리를 쳐놓고는 편들 놈 편들지 않을 놈 가르는 건 역겨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한편 인천에 강렬한 애향심을 느끼는 나와 달리, 강준치는 한국 땅의 그 어디에도 소속감 따윈 느끼지 않는 듯했다.
"고아 새끼가 군대 끌려가선 최저임금도 못 받고 2년 가까이 날려 먹었어. 세금도 꼬박꼬박 내라는 대로 냈지. 국민의 의무랍시고 요구 일은 이미 다 했단 말이야."
"······."
"국가에서 나한테 해준 것보다 더 많은 걸 난 이미 했어. 여기서 뭔가 더 할 의무? 나한테 없어."
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사실상의 동의로 받아들인 걸까? 강준치가 씩 웃더니 계속 말했다.
"애초에 말이야, 베헤모스 그놈 죽이면 우리로선 좋을 게 하나도 없지 않나? 베헤모스 그놈이 살아있어야 우리한테 이득인데. 너든, 나든······."
그건 또 뭔 소리냐고 물어보니 강준치는 이렇게 설명했다.
"봐봐, 내가 소월에서 돌아온 이후론 지하에서 나와 멀쩡한 호텔에 묵고 있잖아. 이게 나름대로 자신감이 생겨서거든?"
"뭔 자신감?"
"나라에서 날 바로 죽이려 들진 않으리란 자신감······. 베헤모스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니 그런 자신감이 들더라구? 베헤모스가 일으킨 참상을 직접 보니 예상보다 훨씬 심했는데, 이걸 또 겪기 싫어서라도 베헤모스를 억제할 날 바로 담그려 들진 않을 거다, 뭐 이런 생각이 들었지."
그런 자신감이 생겼는데도 호텔 방에 역장까지 두르면서 처박혀 있던 거냐, 하고 굳이 묻지는 않았다. 이놈의 과한 조심성은 이미 잘 아는 것 아닌가.
내가 잠자코 듣는 가운데 강준치만 계속 말했다.
"그리고 너도······ 베헤모스가 나왔을 때 보여준 활약도 그렇고, 요새 서울에 게이트 잔뜩 열릴 때마다 괴수 30%는 너 혼자 쓸어 버린다며? 그 활약 때문에라도 정부에서 널 당장 죽이긴 부담스러울 텐데, 이렇게 괴수 잔뜩 몰린 것도 베헤모스 때문이지 아마······.
이 와중에 베헤모스가 죽으면? 이제 너나 나나 정부 입장엔 그냥 힘센 골칫거리가 되는 거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너와 날 죽이기 위한 논의가 시작될 건데, 베헤모스 그놈을 대체 왜 죽여?"
"강준치."
"응? 대체 왜 죽여야 하냐구······."
나는 조금 생각을 가다듬은 끝에 대답했다.
"헌터가 뻔히 보이는 괴수 내버려 두는 건 말이 안 되니까. 그리고······."
"그리고?"
"베헤모스, 그 씹새끼가 내 친구 절반은 죽였으니까. 이제 내가 그 새낄 죽여서 놈이 흡수한 내 친구들 영혼을 해방해야 해."
내가 그리 대답한 순간, 강준치의 안면근육이 꿈틀거린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리고 바로 지금, 강준치가 애써 태연한 척하려 하는 와중에도 그 한쪽 눈썹은 치켜 올라간 채였다.
내가 사람들이 잔뜩 죽었으니 복수해야겠단 말에 신경 쓰는 걸까?
하기야, 저놈이 소월에서 돌아와 서울의 참상을 보았을 때 그 표정 변화가 어땠는지 기억한다.
그때 느낀 죄책감이 아직 남아있는 것일지도······.
"아무튼 생각해봐. 알겠어?"
내 말에 강준치가 건성으로 손을 휘저었다.
"그래, 그래. 생각해 볼 테니까 이만 가라. 응?"
그리 축객령을 받고서 귀가하는 길, 나는 속으로 강준치를 욕했으며 그리 욕하면서도 계속 그에게 부탁해야만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무력함과 우울감을 동시에 느꼈다.
하여간 강준치, 저 한심한 새끼.
강준치가 조금만 더 적극적인 성격이었다면, 조금만 더 과감했다면 모든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다. 정부든 베헤모스든, 모든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나아졌을 것이다.
내 알기로, 강준치가 원래 저런 성격은 아니었다.
지금부터 약 십 년 전, 지금보다 어리고 젊었던 강준치는 제 앞날을 개척하기 위한 의지로 충만한 사내였다.
어미가 집 나간 가운데 아비가 사망한 소년 시절, 강준치는 부모 없이 홀로 살아남을 길을 찾아내야 했다.
당시 강준치는 그렇게 했다. 고교만 졸업하고서 바로 용접 일을 배웠다.
이후로 군에 끌려가 몸이 망가져서는 더는 용접일로 생계를 꾸릴 수 없게 되었을 때도, 강준치는 절망한 채 축 늘어져 있지 않았다.
가방끈도 짧은 강준치가, 제대로 해본 적도 없는 공부에 매진하여 1년 만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것은 지금 내가 생각해도 감히 따라 할 수 없는 놀라운 업적으로 느껴진다.
그랬던 강준치가 지금은 왜 이 지경이 됐는지도 대강 알고 있다. 그 모든 노력이 철저하게 꺾였기 때문이리라.
강준치가 기껏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익힌 기술은, 예상치 못한 군 복무와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무의미하게 되었다.
치열한 노력으로 1년 만에 합격하여 시작한 공무원 생활에서는, 조직사회의 불합리함과 원래도 자길 괴롭혔던 사수의 배신이나 겪었을 뿐이다.
그리고 강준치가 그 처참한 처지에서 벗어난 것은 그의 노력 덕이 아니었다.
당시 강준치를 구원한 것은―각성자들을 질투하는 비각성 찌꺼기들의 표현을 빌리자면―제 노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각성이요, 제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힘이었다.
노력에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일이 반복되면 어떤 사람이든 꺾이기 마련인데, 아마 강준치 또한 그리 꺾이고 꺾이면서 무기력함을 학습했을 것이다. 그와 함께 제 인생에 중요한 것은 노력이며 의지가 아님을 배웠으리라.
그렇듯 의욕 없는 마당에, 심지어 이미 배부르기까지 한 마당에 뭔가 애쓸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이리라.
그런데도, 여전히 난 강준치가 이번만큼은 나서줄지 모른다는 기대가 든다.
왜냐하면 강준치는 어디까지나 소시민이니까.
강준치가 한국인을 갯강구로 생각하든 어쩌든, 자기가 소월로 떠난 뒤 수많은 한국인이 죽은 상황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강준치가 평소에나 병적으로 조심하는 성격일 뿐, 막상 중요한 상황에는 어이가 없을 만치 충동적으로 군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다. 화났다고 대뜸 소월로 떠나버리거나 참교육 영상 따윌 찍는 기행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렇듯 강준치가 느끼고 있을 죄책감이며 그 충동적인 성격을 생각할 때, 어쩌면 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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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헌터 김극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