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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8 - 125-130

125화 헌터 김극 - [3]

「강준치가 일단 생각은 해보겠다고 말했단 말입니까?」

"뭐 사실상 거절의 문구인 것 같긴 한데······."

「아예 무시하지 않은 게 어딥니까? 우리가 찾아갔을 땐 아예 말도 안 섞어주던데. 하여간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나중에 아주······」

팔자에도 없는 정부의 사절 노릇까지 한 마당이지만, 부탁받은 일을 마쳤다고 쉴 시간 따윈 없었다.

서울이며 그 인접 지역에 게이트가 열리는 일이 갈수록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인천과 서울 양쪽과 계약을 맺은 터라 특히 출동할 일이 많아졌다.

특정한 담당구역이 없는지라 광범위한 지역에서 일이 터질 때마다 출동하는 데다, 공간이동까지 가능한 내 경우가 특별한 것이긴 하지만, 요새 나는 하루에 여섯 번 출동한 적도 있다.

잘 나가는 격투기 선수가 일 년에 네 번 정도 경기를 치르면 매우 많이 싸운 것임을 고려하면, 목숨 건 사투를 하루에도 여러 번 치러야 하는 이 상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상황인지 알 수 있으리라.

그리고 출동할 때마다 나는 매번 수십, 혹은 일백 마리가 넘는 데스클로를 터뜨려 죽였던 것 같다.

이 와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날 포함한 헌터들이 그토록 죽여대는데도 한국에서 날뛰는 데스클로의 수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단 점이었다.

익명 : 애벌레 한 마리당 데스클로 두 마리씩 생산되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베헤모스 사태에서도 데스클로가 수만 마리는 죽었을 텐데, 왜 수가 안 줄어들어?

Ⓑ GoodHunter : 저 멀리 있는 괴수들도 베헤모스를 보고 모여드는 중이라던데? 산둥이랑 일본 쪽 괴수들만 해도 베헤모스와 같이 행동하려는지 한반도로 이동하는 중이라 하고.

Ⓑ GoodHunter : 그래서 지금 일본에선 오히려 게이트 열리는 일이 확 줄어들었다던데······.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을 만큼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는 괴수들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나조차 게이트 안에 있는 괴수들을 끄집어내는 일은 중단한 채, 현실에 기어 나온 괴수들부터 처리하기에 급급할 정도 아닌가.

그리고 괴수들의 수가 대폭 늘어난 만큼, 그 사이에 섞인 고위험 개체의 수 또한 대폭 늘었음이 체감되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을 만치 위험한 개체의 경우도······.

"저 새끼 저거 대체 뭐야?"

소래포구에서 게이트가 열렸다길래 급히 출동했더니, 평범한 데스클로들은 이미 다 헌터들이 처리한 가운데 한 마리 데스클로만이 남아 날뛰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데스클로는, 날뛰는 모습이 육안으로는 보이지도 않았다. 투명화 능력이라도 각성한 것은 아니었다.

"데스클로 역장체래요. 가속 능력까지 있는."

현장에 있던 헌터의 설명을 듣고서 나는 작게 욕설을 지껄였다. 그건 또 뭔 한희 같은 놈인가?

그 한희 같은 데스클로 역장체의 움직임은 내 정신적 그물망으로만 겨우 포착할 수 있을 만치 빨랐는데, 어디 부딪칠 염려도 없는지 속력을 줄이지도 않고 뛰어다니는 걸 보니 신경 가속도 있을 게 분명했다.

보통 수단으로는 도저히 죽일 수 없는 놈이다.

그러나 놈을 상대하자고 전술을 짜겠다며 보낼 시간도 없다. 그러는 동안에도 사람들이며 헌터들이 죽어 나갈 테니까.

헌터 일은 늘 이런 식이다.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니 그 어느 일보다 신중해야 하는데도,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더 많은 사람이 죽다 보니 그럴 수가 없다. 주먹구구식으로라도 최대한 빠르게 일을 처리해야 한다.

정부에서 왜 헌터들을 훈련도 제대로 시키지 않고 일단 현장 투입부터 시키고 보는지 싫어도 알 것 같다. 젠장.

"김극 왔습니다. 김극이 처리할 테니 안심하시고―"

내가 짧게 말한 순간 무전기에서 여러 명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내가 일종의 해결사로 통하는 모양이지? 사실 이번 일은 나도 자신이 없단 말은 목구멍 안으로 삼켜야 했다.

"담비 씨, 저기 물탱크 보이죠? 긴급상황이면 저기로 공간이동 할 테니까, 나 안 보이면······"

내 라운드걸은 이제 인천이 자기 담당 지역이 아닌데도 굳이 날 따라와 준 마당이었다.

그녀에게 짧게 지시를 내린 뒤,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와 함께 무전기에서 독특한 인천말이 울려 퍼졌고.

「김극? 빨리 와줘! 나 이러다 죽을 것 같애!」

응우옌의 목소리. 이미 여러 헌터가 죽은 가운데, 응우옌이 목숨 걸고 역장체를 유인하는 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자긴 유인하고 싶진 않은데 역장체가 일방적으로 쫓아와서 도망치는 중이라나? 가속 능력이 있는 역장체로선 같은 능력을 지닌 응우옌이 무엇보다 맛있는 먹잇감으로 보인 모양이지.

그리고 응우옌이 최대한 빠르게 달려도 역장체가 더욱 빨라서, 이대로면 따라잡힐 듯했다.

내가 무전기에 대고 말했다.

"응우옌? 역장 끌 준비해! 내가 지금 가서 공간이동 시켜줄 테니까!"

「알았어!」

그리하여 내가 공간이동 했을 때, 응우옌은 군말 없이 역장을 거둔 상태였으며 그 어깨에 손을 짚은 채 내가 외쳤다.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잖아!"

그러고서 응우옌을 멀리 공간이동 시켜준 다음, 나만 다시 방금 그 장소로 돌아왔다.

저 멀리에서 데스클로 역장체가 달려오는 중이었다. 날 향해 똑바로.

꿩 대신 닭이라고, 응우옌 대신 나라도 잡아먹으려는 걸까?

달려오는 역장체를 향해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겼다. '드르르륵―'

어둠을 가르고 뻗어나간 황금빛 선이 역장체를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역장체는 제 속도를 믿는지 계속 일직선으로 달려왔지만, 정신적 그물망으로 보정 받는 내 사격 솜씨 또한 초인적이다.

결국 기관포탄을 몇 발 얻어맞고서야 역장체가 회피 기동을 시도했다. 놈은 지그재그로 휙휙 번갈아 뛰면서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는데, 이쯤 되니 나도 맞히기가 어려워져서 한 발 겨우 맞혔을 뿐이었다.

여기까지 약 이 초 지났다. 그리고 약 삼 초 지났을 때는 놈과 나 사이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졌다.

평소라면 이쯤 해서 공간이동 하여 놈과 나 사이의 거리를 다시 벌렸을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 근처에도 사람이 여럿이었으니까. 날 놓친 놈이 주저 없이 딴 데로 달려 나가기라도 했다간 곧바로 여러 명이 죽는다.

그런 이유에서 역장체가 땅을 박차고 휙 도약했을 때도 난 그 자리에 서서 기관포탄을 쏟아냈으며, 쉬지 않고 화력을 쏟아낸 보람이 있어 기어이 놈의 역장이 깨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역장체는 바로 내 앞에 도달해있었다. 또한 놈의 공격 또한 이미 완료된 뒤였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내 양팔이 잘려 나가서는 땅에 떨어지고 있었다. 내 키가 조금만 더 작았다면 목이 잘려 나갔을 것이다.

이 순간 내게는 통증을 느낄 겨를도, 공포를 느낄 겨를도 없었다. 격투기에서 루틴을 짜놓고 움직이듯, 난 미리 계획한 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내가 공간이동 했다. 놈을 피해 멀리 이동하는 게 아니라, 놈에게 더욱 가까워지기 위한 공간이동이었다.

그러니까, 역장체의 등 위로 공간이동 했다.

손 대신 입으로, 놈의 등에 자라난 털을 붙잡고서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이번에는 어디로?

앞서 백담비에게 가리킨 바 있는 물탱크 안으로, 나는 역장체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우리 주변을 공기 대신 물이 가득 채우게 되었다.

그리고, 아······.

물이 가득 찬 물탱크 안에서 역장체가 발버둥 쳤다. 그 갈고리발톱이 물탱크를 자르지 못하도록, 내가 턱으로 단단히 붙잡은 채 놔주지 않았다.

그러고 있자니 우리 주변에 가득 찬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백담비, 내가 주문한 그대로였다.

나는 내 양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물과 함께 얼어붙는 것을, 데스클로도 그와 함께 갇혀 얼어붙는 것을 흐려지는 시야로 보았다.

내 의식 또한 흐려지는 가운데 나는 생각했다.

괜찮다. 아니, 솔직히 안 괜찮지만 그래도 괜찮다.

정말로 죽을 상황인지 주마등이 스친다. 그럭저럭 행복했던 유년기의 기억에 이어 조그마했던 초등학교 시절의 나, 얌전했던 중학교 시절 나와 감방에 갇힌 나, 옥타곤에 우뚝 선 내가 연달아 머리를 스친다. 그립거나 그립지 않은 풍경들.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곧 출소할 여동생은 내가 남긴 재산을 물려받고 삼시세끼 김밥에 금가루를 뿌려 먹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처리하려던 여러 일들은 다른 이들의 몫으로 넘기고, 난 이만 명예롭게 쉬어도 되지 않나······.

······완전히 흐려졌던 의식이 다시 떠오르더니,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이 들어요?"

내 라운드걸의 목소리였다. 난 살며시 웃으며 대답했다.

"예, 인천 만세."

"이 와중에도······? 정말 미친 사람······"

온몸의 감각이 선명하지 않은 와중에도 백담비가 날 와락 끌어안은 감촉만은 느낄 수 있었다.

한편 저 뒤에서 응우옌이 이로써 서로 목숨 한 번씩 구해줬으니 이제 우리가 의형제라고 주장하는 목소리도 들려왔지만, 그건 대충 흘려 넘겼다.

*******

그토록 고생한 보람이 있어서, 이번 일이 오늘 기사로도 나왔다.

"무법자 김극" 헌터로선 이상적 (······)

헌터 김극, 죽음의 위기를 넘기고 눈 뜨자마자 한 말 "인천 만세"

헌터 김극이 심각한 부상을 입고도 괴수에게 달라붙어서는 기어이 죽였다는 기사였다. 더 나아가 그 투혼을 찬양하는 내용이더라.

굳이 날 시민들의 구세주라며 치켜세우려는 건 아닐 테고, 다른 헌터들에게 이런 식으로 근성 좀 발휘해보라고 부담 주려는 게 아닌가 싶은 기사였다.

요새 게이트가 너무 열리는 나머지 헌터들의 부담이 심한 만큼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다니까. 현재 헌터 대표쯤 되는 김극처럼 열심히 좀 해보라고 요구하려는 모양이다.

그래도 역시 날 향한 칭송은 기분이 좋은지라, 계속 읽다 말고 난 눈살을 찌푸렸다.

내 기사 아래에서 나이토 상의 기사를 발견한 것이다. 읽어보니 나이토 상이 경상도의 뭔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내용이었다.

거기까지는 별로 특이할 게 없었지만, 그 기사에 달린 악플을 보고서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비회원131 : 나이토 상 저 쪽바린 왜 자꾸 빨아주냐?

- 찬성 81 반대 234

날 선 비난에 찬성이 81개······. 반대가 훨씬 많긴 하지만, 찬성도 상당히 많았다. 어째서?

나이토 상은 짜증이 나도록 모범적으로 처신하는 놈 아닌가. 왜 갑자기 비난 세력이 잔뜩 생겨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모르는 동안 저놈이 뭔 실수라도 했나?

그런 의문이 들어 직접 검색해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놈의 황금화살상이 문제였던 모양이군.

당시 나이토 상이 대상을 수상한 게 맘에 안 든 사람들이 상당했던 것 같다. 마땅히 백담비가 받아야 할 상을 뺏어갔다는 이유는 아니고, 다른 이유이기는 했다.

비회원134 : 나이토 상 저 새끼, 서울에 베헤모스 튀어나왔을 때 코빼기도 안 보였죠? 평소 방송에선 누구보다 한국 위하는 척하더니 다 구라였죠?

Happy22 : 그런 놈이 김극 석장실 다 제치고 한국 헌터 중에 1등? 방송국에 친일 매국노 새끼들만 모였나

베헤모스 사태에서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각성자들이 죄 출동한 가운데, 나이토 상은 출동하지 않았기에 몇 달 전부터 밉보였던 것 같다.

사실 인천과 계약한 헌터인 나이토 상이 서울에서 일어난 사태에 출동할 이유가 없거니와 애초에 정부에서 그를 부르지도 않았으니 그 일로 비난받을 이유가 없긴 한데, 비난하는 사람들로선 그리 세세한 건 따지지 않는 것 같다.

그저 딴 외국인 헌터들이 다 출동하는데 저 홀로 출동하지 않은 일본인이, 이번에 상까지 받으니까 화가 난 모양이지?

화난 사람이 꽤 많은지, 심지어 나이토 상 안티카페까지 설립돼있는 게 아닌가. 무심결에 가입할 뻔했지만, 그건 너무 추한 짓인 것 같아 관뒀다.

이후로도 계속 쉬던 중이었다.

전화가 걸려왔길래 받았다.

「저 정진영인데, 김극햄? 이번에도 정말 고생했습니다! 요새 정말 죽어나죠?」

"예. 이번엔 정말 죽을 뻔했네요."

「어휴, 김극 씨는 진짜 쉬어야 돼요. 인천에서 활동할 때도 출동 횟수가 혼자 말이 안 되는 수준이었는데 서울과 계약하더니 이젠 아주 그냥······」

"그래도 뭐 견딜 만합니다."

「그래도 그렇지, 김극햄 사냥 좀 쉬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말인데······」

그리 운을 떼길래 뭔 말을 하려는지 들어보았다.

그리고 그 말을 다 듣고 난 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A급 신입들이 파업 시위 중이라고요?"

「예. 그리고 김극햄도 쉴 겸 파업에 동참 좀 해주시면······.」

*******

126화 헌터 김극 - [4]

난데없는 헌터 파업의 배경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우선 저번 시위에서도 말한 바 있듯, 신입들로서는 자신들이 맺은 헌터 계약이 불만이다.

기존 헌터 계약과 달리 신입 헌터들이 맺은 계약은 출동할 때마다 돈을 추가로 받는 게 아니라 출동비가 포함된 계약금을 미리 당겨 받는 식인데, 그게 요즘은 최악의 계약으로 통한다고 한다.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계속해서 화폐가치가 요동치는 중 아닌가. 그러니 미리 받은 계약금을 은행에 고스란히 넣어두기만 해도 그 가치가 마구 줄어드는 셈이라 여러모로 다들 불안한 모양이다.

이 와중에 외국인 각성자들에게는 달러로 계약금을 지급했다던가? 그러니 이 상황에는 신입들만이 유독 돈을 덜 받고 일하게 된 셈이다.

"선배 헌터들이 받는 출동비? 그건 국제 시세대로 주는 거라고 들었는데. 원화 가치 변동하면 그만큼 조정돼서 돈 더 받을 수 있는 거죠?"

신입 헌터 이해경의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그렇긴 해. 그래서, 출동비 받는 쪽으로 계약조건 변경하고 싶은 건가?"

"맞는데, 그것만은 아니고요······!"

그리고 두 번째 불만으로는, 신입들이 헌터 일을 하게 된 지금 환경이 너무나도 가혹하단 점이었다.

"우리 지금 사흘에 한 번꼴로 출동하고 있어요. 심하면 이틀에 한 번 출동해야 하고요. 이게 말이 돼요?"

그 한 번 한 번의 출동이 목숨 건 사투임을 고려하면, 정말로 불합리한 상황이 맞았다.

"그건······ 확실히 심하네."

"그리고 원래는 한 구역에 담당 헌터가 여러 명 있어서 게이트 열렸다고 반드시 출동해야 하는 게 아니라 몇 명 쉬고 한둘 출동하는 식이었잖아요?"

"그랬지 아마?"

"요새는 아녜요. 분명 계약대로면 일정 기간 몇 번 이상 출동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데도, 요새는 게이트 열리기만 하면 무조건 출동하라고 공무원들이 눈치 주는 것이······"

"요샌 게이트 열릴 때마다 괴수들이 쏟아져나오다시피 해서 그런가? A급 한둘로는 커버가 안 되니까 가용 인원 매번 총동원 하려는 건가 보지."

"그런가 보죠? 위기인 건 알겠는데 심해도 심해요."

이해경이 투덜거리는 가운데 또 다른 신입이 내게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김극 형은 요새 몇 번 출동해요? 이상하게 우리들이 출동할 때마다 김극 형은 현장에 반드시 있던데."

"평균적으론 하루 두세 번? 요새는 특히 바빠져서 하루에 서너 번씩 출동하기도······."

내가 그리 대답한 순간, 모두가 크게 뜬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탄식했다.

"미쳤네."

그리고 정진영이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오늘 김극햄 왜 데스클로한테 죽을 뻔했지 알겠네."

"뭐요? 왜?"

"김극햄 저격총탄도 손으로 잡아내잖아요. 아무리 가속 달려있어도 그보단 느릴 게 분명한 데스클로한테 당하는 건 이상하다 싶었는데. 보니까 너무 많이 출동해서 피로가 쌓인 탓 아닌가?"

정진영이 그리 말하자 주변 헌터들이 맞네, 분명하네 말을 주고받는 걸 보며 나는 아연해졌다. 아주 자기들 상황에 끼어맞추고들 잇군그래.

내가 음속을 넘는 총탄을 손으로 붙잡는 건 훈련을 거듭해서 어찌어찌 가능해진 것이고, 데스클로는 그 속도며 날아오는 궤적 등이 총알과 확연히 달라서 당한 건데······ 하고 설명하려다 말았다. 피로 탓에 당했다고 설정하는 편이 더욱 근사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업 중이라고 했는데 언제부터 그런 거야?"

내 물음에 이해경이 당당하게 대답했다.

"아직 반나절도 안 지났어요. 파업 선언도 당장엔 안 했고요."

"파업 선언도 아직 안 했다고? 그럼 아직 파업 안 한 셈 아닌가?"

"예. 솔직히 좀 쫄려서······."

하기야 신입들끼리만 파업했다간 동종업계 종사자들에게도 욕을 푸짐하게 얻어먹을 만하다. 저들이 파업하는 동안 나머지가 더 일해야 하니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굳이 나를 불렀는지도 모르겠다. 현 헌터업계에서 제일 명망 있는 게 바로 나니까. 내가 동참하는 것만으로 모두를 감싸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굳이 부른 모양이지.

"하지만 대뜸 파업부터 하는 건 너무 이른 것 같기도 한데. 조율은 좀 해봤어?"

"저번에 시위에도 나서봤고, 담당 공무원한테 상황 설명해봤는데 상황이 상황이니 양해해달란 대답만 돌아온 만큼 이 정도면 다 해본 거 아닐까요?"

"그래도 그렇지, 파업은 일종의 필살기인데. 벌써 그러는 건······."

"너무 급해보인단 건 알지만, 그래도 이대로면 우리가 먼저 죽을 판이니 해볼 만하다고 봐요."

정진영이 그리 말한 뒤, 이해경이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살피더니 입을 열었다.

"오빠, 맘이 안 내키시나 봐요?"

나는 좀 뜸 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좀, 그렇긴 하네."

확실히 저놈의 파업이 끔찍하게 맘에 안 들긴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혐오감이 다 들 정도다.

헌터가 괴수를 잡지 않겠다니, 그게 말이 되나?

저번에도 말했듯 헌터 김극은 인천 공작 김극보다 우선이다. 나름의 근거가 있는 생각이다.

비각성 찌꺼기들은 양이요 그들을 지배하고 통치해야 할 각성자들은 양치기다. 그리고 양치기가 자기 양들을 잘 돌보든, 마구 학대하고 도살하든, 굶겨 죽이든 그건 양치기의 마음이다. 양들은 어디까지나 양치기의 재산에 불과하니까. 양치기는 뭐든 하고 싶은 걸 해도 된다.

그래도 양치기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 그건 바로 양들을 노리려는 곰이며 늑대를 물리치는 일이다.

그렇듯 맹수들에게서 지켜주지 않고 그저 양을 도축하기만 한다면, 그건 양치기가 아니라 그저 곰과 늑대와 같은 맹수에 불과하단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니 괴수 사냥을 거부하는 특무대는 데스클로에 불과한 것이요, 헌터들이 모든 비각성 찌거기들의 위에 설 자격이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구구절절한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긴 어려웠다. 이 모든 게 좋게 말해서 신념일 뿐, 평범하게 말하면 혼자만의 개똥철학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부끄러움도 없이 내 사냥을 방해하다가 나한테 두들겨 맞은 김석희를 상대로는 개똥철학이든 소똥철학이든 얼마든지 씨불여도 됐다. 그놈은 내 자비로 목숨을 건진 패배자일 뿐이니까.

하지만 후배들을 상대로 개똥철학 나불거리며 훈계하는 건? 내가 생각해도 추했다.

"괴수 안 잡고 뻗대는 건 특무대나 할 일이잖아. 헌터가 할 일이 아니라."

그래서 최대한 간추려 말했더니, 다들 납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말을 이었다.

"파업하느니 차라리 국회의사당에 쳐들어가지?"

"시위를 또 하자고요?"

"시위 말고 협박을 해야지."

"협박이요?"

"그래. 국회의원 대여섯 잡아다가 협박하자. 당장 상황 개선 안 되면 다 죽을 줄 알라고 으르렁거리는 거지."

"농담해요?"

헛웃음을 짓는 신입에게 내가 진지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농담 아니야. 나 저번에도 해봤는데 나름 효과가 있었어."

"저번에도 해봤다니 언제요?"

"저번에 국회의사당에서. 그때 내가 국회의사당 돔만 부순 게 아니거든?"

그때 내가 정확히 뭘 했는지 설명해줬더니, 날 바라보는 모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그러고도 무사했어요?"

"지금 나 멀쩡히 싸돌아다니는 거 보면 그런가 보지? 그래서 어쩔래. 지금 쳐들어갈까? 그럴 거면 내가 힘껏 도와줄 수 있는데."

"그건 좀······."

내 예상대로 다들 이 제안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과격한 제안이나 던져놓고 더 돕길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휴대전화를 들어 이 일에 도움이 될 만한 간첩에게 연락했다.

"석장실? 시간 되냐?"

석장실, 그 간첩 놈은 내가 먼저 연락한 사실에 놀란 눈치였다.

「어, 김극 형? 시간 되긴 하는데 무슨 일로······」

"요새도 윗분들이랑 연락하고 지내나?"

「아니, 요새는 안 해. 진짜」

"그래도 연락처는 남아있지? 잠시 좀 와줄 수 있나?"

수십 분 후, 석장실이 우물쭈물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소월에 다녀온 이후로 그와 말 섞는 건 오랜만이다. 나 또한 여러모로 어색했지만, 그래도 모른 척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니까, 지금 불만 폭발하기 직전이니 그러기 전에 윗분들한테 상황 전달해달라 이거지?"

"최대한 빨리."

그리고 과연 석장실의 인맥은 남아있어서,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알고 지내던 관계자들과 연락이 됐다.

또한 석장실이 여기저기 전화를 돌리는 동안 나 또한 최근 알게 된 의원들에게 연락을 돌리니, 비로소 신입들은 내가 진지하게 자기네를 도우려는 것임을 깨달은 듯했다.

그제야 다들 내게 감탄하는 시선을 보내더니, 진심이 실린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감사를 표하는 것 아닌가.

"정말 고맙습니다!"

이렇게 도와줘서 고맙다고, 괜히 불러내서 미안하다고 연거푸 말하고서 떠나가는 신입들을 배웅한 뒤였다.

나는 다른 신입들과 함께 헤어지려던 정진영을 붙잡고서 말을 걸었다.

"진영이 형. 요새 많이 힘들어요?"

내가 딱히 대단한 걸 묻진 않았건만, 정진영은 매우 동요한 눈치였다. 그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잠시 후에 그가 되물었다.

"티가 나요?"

"티가 나요. 같이 1년이나 지냈는데 못 알아볼까 봐? 그래서, 뭐가 그리 힘든 거예요?"

"모든 게요."

"모든 게?"

"실은 헌터 일, 그냥 다 때려치고 싶어······."

지금까진 짐꾼 일만 하다가 직접 헌터 노릇을 해보니 생각보다 더 힘든 걸까? 하기야 요새 환경이 베테랑들이 보기에도 끔찍하단 걸 생각해 보면 이해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그럼 그만두지 그래요. 혹시 계약금 반환해야 하는 것 때문에 못 그만두는 거면, 내게 계약 맺어보라고 권한 책임이 있는 만큼 내가 대신 내줄 수······"

"아니, 아녜요. 고마운데 안 그래 줘도 돼요. 계약금 때문에 못 그만두는 게 아니니까."

금전 때문에 그만두지 못하는 게 아니라면 어째서?

조금 생각해 보니, 왜 때려치우고 싶은데 그러지 못하는지 알 만했다.

정진영으로선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울 것이었다. 저 양반이 각성한 뒤로 으스댄 게 있으니까.

지금까지 신입들 대표인 양 나서댔던 걸 보면 1년 동안 헌터 일을 해본 선배라며 같은 A급 신입들한테도 잘난 척을 잔뜩 했을 것이요, 현실과 헌트웹에서 성문영을 상대로도 우월감을 잔뜩 표출했는데 힘들다고 갑자기 그만두었다간 비웃음거리가 될 것 아닌가.

그게 두려워 선뜻 그만두지 못하는 모양이지? 어쩌면 파업하는 걸 넘어 정말 모양새 좋게 헌터 일을 그만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문제라면 내가 도와주기 어려웠다. 어쩔 수 없이 말로나마 위로하며, 정 힘들면 연락하라고 내가 당부하니 정진영이 어색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정말."

"고맙긴? 아직 제대로 도운 게 하나도 없는데."

"그래도요. 나 신경 쓰고 도와주려는 건 김극햄밖에 없네. 가족들도 하나도 못 도와주는 상황인데. 밥상머리에서 내가 그만두고 싶다고 투정부리니 기겁해서 뜯어말리는 거 보고 기가 차서 원······.

그렇듯 정진영마저 돌려보낸 뒤, 석장실과 어색하게 시선을 교환하고서 귀가했다.

그러곤 침대에 누워 축 늘어졌다.

피곤하다. 여러모로 머리가 복잡하기도 하다.

오늘 내가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같은 각성자로서 동족을 챙기는 게 우선이었는지, 아니면 신념 있는 헌터로서 모두를 계도하는 게 우선이었는지 당최.

소월이 그립다. 소월에서 본 각성자들은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가 소월이었다면 이런 복잡한 문제는 단순하게······.

한창

Ⓐ 러그소라게 : 고마워요

Ⓐ BabyBerserker : 고맙다니 뭐가양?

Ⓐ 러그소라게 : 덕분에 욕 안 먹을 수 있게 됐잖아요? 우리 파업했으면 국민들이랑 선배 헌터 양쪽한테 욕 뒤지게 먹었을 건데.

Ⓐ 러그소라게 : 사람들은 수백억 받는 놈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파업하는 거냐며 욕했을 테고 우리 빠진 만큼 일 더 해야 할 선배들은 신입들이 미쳤다고 욕했을 테니까. 김극 형이 우리 최대한 커버쳐주려고 최대한 노력한 거 알겠어요

그리 말하는 걸 보니 파업하려던 모두가 정말 그러길 원해서 참여한 건 아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뭔가?

혹시 이번 일은 최용이 사주한 게 아닌가 의심스럽다. 최용은 협회를 통하지 않고 계약한 신입들을 언짢게 보는 눈치였던 데다, 그들을 욕받이로 만들어 헌터들의 파업이 통하는지 통하지 않는지 시험해 볼 만하니까. 당장 환경을 개선해야 하는 것도 사실인 만큼 최용이 따로 이번 일을 지시했던 걸지도······.

그리고 계속 머릿속 복잡해지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반길 만한 일이 하나 생겼다.

*******

그날 저녁, 강준치에게서 헌트웹 메시지가 왔다. 저번에 베헤모스와의 전투에 참전해줄 수 있느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 Kang : 김극? 맘 정했어

Ⓢ Kang : 한번 참전해볼게

Ⓐ BabyBerserker : 진짜로양?

Ⓢ Kang : 딱 한 번이야. 그마저도 쫄린다 싶으면 몸 사릴 거니까 죽을 때까지 싸울 거란 기대는 하지 말고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게든, 나머지 한국인들에게든.

강준치는 사실상 살아있는 신이며, 신의 내키지 않는 도움마저 미천한 지상인들에게는 기적과 같은 도움이 되는 법이었다.

과연, 내가 이 소식을 전했더니 열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걸로 많은 게 나아질 겁니다. 정말로 많은 게요!」

그와 함께 그날 뉴스는 강준치가 한 약속으로 도배되었다. 한국에 무슨 일이 터지면 강준치가 나서기로 했다는 뉴스였다.

*******

127화 종말, 베헤모스 - [1]

강준치를 찾으러 소월에 갔을 때의 일이다.

나와 백담비는 본격적인 탐색에 나서기 전, 소월인 영주 우소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대량의 철물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우소리가 우리의 탐색에 협조해주기로 한 바였는데, 내가 방문하니 우소리가 악수를 청했다.

'아, 김극! 이번엔 내 땅에서 다시 만나는군?'

그리고 나는 그와 악수했다.

서로 손에 힘을 준 악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단순히 반갑다고 인사하자는 게 아니라, 서로의 악력을 비교하여 서로의 힘과 우열을 가늠하기 위한 절차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더 강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소리는 꽤나 놀란 눈치더니, 이후로는 내게 제 영지와 궁성을 자유로이 활보해도 좋다고 제안했다(나중에 알게 되었기로, 이건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게 판명 난 각성자 손님에게만 하는 예우였다).

한편 나는 평소 소월인 영주와 그 영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는지라, 그 제안대로 우소리의 영지를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그의 영지가 어찌 운영되고 돌아가는지, 누가 그 영지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하는지 등을 주로 살펴보았다.

그러고서 품은 의문을 우소리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우소리 당신, 영주로서의 일은 딱히 하지 않고 종일 노는 것 같은데. 온갖 영지 운영에 관한 결정은 아랫것들이 대신 내리는 모양이고······ 그래도 문제가 없는 건가?'

'내가 일 안 한다고 문제가 왜 생기나? 일이야 당연히 아랫것들이 하는 건데.'

'그러다가 아랫것들이 실세랍시고 지나치게 설치게 되면?'

'귀찮으면 내버려 두겠고, 정 거슬리면 치워버리겠지?'

'거슬리는 아랫것들을 싹 다 치우자니, 그 아랫것들이 이제 자기들이 없으면 영지 일이 안 돌아간다고 협박하면 어쩔 거고?'

내 물음에 우소리는 조금도 고민하는 기색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영지 일이 안 돌아가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설령 영지 운영에 차질이 생겨도 어차피 나 먹을 밥은 충분히 나올 테고, 그거면 충분한데······.'

나는 우소리의 그 말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영지를 대신 다스리는 아랫것들이 얼마나 유능한지, 그들이 중요한 실무를 맡아 영지 운영에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심지어 영지가 얼마나 잘 운영되는지조차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그 발언 말이다.

영지 운영에 중요한 아랫것들마저 영주 본인이 치우려거든 그냥 방 청소하듯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아예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상대적으로 왕권이 강했던 조선의 왕들도 그리 굴지는 못했다.

조선의 왕들마저 신하들의 집단행동을 무시하진 못했지 않은가. 왕의 권력이 얼마나 강력하든, 결국 실무는 신하들이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권력은 왕뿐만 아니라 신하들에게도 분배되었으며, 혹여 나라에 악영향이 생기기라도 하면 왕의 권위 또한 실추되었고 그 권력에도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조선에서는 왕의 잘못이 아니라 웬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나라에 문제가 생겨도 왕이 직접 반성해야 했는데, 재이설이니 뭐니 하는 유교 논리가 아니더라도 마땅히 신경 쓰긴 해야 했을 것이다. 왕의 힘과 영향력은 곧 국력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나라의 문제가 곧 왕의 문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월에서는 아니었다.

혼자서 군대를 상대할 수 있는 초인 영주란 영지의 나머지 모든 것보다 중요하고 강력한 것이어서, 영주 본인이 무능한지 그 휘하 부하들이 유능한지는 그 땅의 권력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신하들이 그 땅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맡았는가? 각성자 영주에겐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랫것들은 소월의 영주에게 그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못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각성자 영주의 재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또한 영지의 상황 또한 소월의 영주에겐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각성자 영주들의 힘은 개인이 지닌 초능력에서 나오는 것이지, 영지의 병력이며 규모 따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주가 고려해야 할 정치 상황 따위는 전혀 없었다. 소월의 각성자들이 여러 세력의 이해관계를 고려하고, 제 처신을 결정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소월에서, 각성자들은 백성이며 신하들을 비롯한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기네 마음대로 하면 될 뿐이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란 말인가?

그리고 또 하나 인상 깊은 일이 있었으니, 우소리의 궁성에선 얼음 능력자가 유독 대접받았다는 사실이다.

우소리 다음으로 좋은 음식을 먹고 있는 남자가 하나 보이길래, 누군지 물어보니 우소리가 이렇게 대답했다.

'아, 저놈? 얼음 능력자인데. 남자인 게 영 맘에 안 들어. 그래서 저번에 자네 땅에 가서 여자로 하나 새로 구하려고 했지만 실패해버렸지.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여름에 시원하게 지내려면 계속 저놈 대접해주는 수밖에······.'

얼음 능력자들은 양들의 능력으론 잡아 올 수 없으므로 영주가 직접 나서서 잡아 와야 자신의 궁성에 배치해둘 수 있었는데, 그렇듯 얼음 능력자는 유독 대체하기 어려운 재산으로 통했다(소월도 지구와 같은 기후이긴 하지만, 얼음 능력자들의 비율이 훨씬 낮았다. 각성도 유전의 영향을 상당히 받는데, 소월에서 빙정 능력에 각성할 유전자의 소유자들은 세대가 지날수록 꾸준히 죽어 나가 그 수가 줄었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우소리의 영지에서 유일하게, 얼음 능력자만이 양을 넘어선 대우를 받았다.

죄인 아니면 예비죄인 취급받는 한국의 얼음 능력자들보다도, 소월의 얼음 능력자들이 훨씬 대우받는 셈이다.

그렇듯 소월에서 보고 겪은 일들은 여전히 내 기억에 선명하다.

또한 지금 날 둘러싼 이 모든 복잡하고 짜증 나는 일들을 보다 보면, 자연스레 이런 생각이 들곤 한다.

한국도 소월처럼 변한다면, 모든 일이 말끔하게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

「기쁜 소식입니다. 강준치가 (······)」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TV에선 강준치가 한국의 일에 나서기로 약조한 일을 떠벌여댔다.

한국 땅에 또다시 베헤모스가 나오더라도 무기력하게 당하지 않을 것이며, 이제 한국에 희망이 있으리란 내용을 모든 방송사에서 적극적으로 설파했다.

「강준치, 그 남자의 힘은 수폭보다도 훨씬 강력하단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것만으로도 부족한지 TV에서는 웬 강준치 특집까지 편성해서는 강준치의 지난 업적과 그 초자연적 능력의 강대함 따위를 방송해댔는데, 난 그걸 보며 저게 누구를 대상으로 한 방송인지 의아해졌다.

그 모든 건 국민과 해외를 안심시키려는 시도일까? 그게 아니면 강준치가 갑자기 변심하여 이미 한 약속을 번복하기 어렵게 만들기 위한 시도일까?

하지만 그리 방송만 거듭한다고 해서 한국의 상황이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강준치의 약속과 함께 여러 지표에는 긍정적인 영향이 있었다는 모양이지만, 그뿐이었다.

서울과 그 부근에는 자꾸만 게이트가 여기저기 열렸으며, 그때마다 전장을 연상케 하는 규모의 괴수들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헌터와 군인, 민간인 모두가 큰 피해를 입곤 했다.

무너진 서울 복구? 이 상황에 할 수 있을 리가.

당연히도 해외에선 여전히 한국의 상황을 좋지 않게 전망했으며, 정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면 한 봉짓값은 이제 3200원이 된 데다 그 가격에도 동네 편의점에서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일종의 암시장이라 불러야 할 되팔이들에게서 그보다 훨씬 비싼 값에 사야 했다.

이 모든 상황은 당연히, 베헤모스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놈의 존재를 더는 참아주기 어렵게 된 걸가?

국안부 공무원이 날 찾아와 말했다.

"일본 쪽 게이트 안에서 누군가가 베헤모스의 정신파를 들었다더군요. 게이트 안에 있는 괴수들에게, 베헤모스 자신이 있는 곳으로 올 것을 권하는 정신파였다고 합니다."

"그 정신파에 담긴 뜻을 거기 있던 사람이 어떻게 알아들었답니까?"

"거기 있던 일본인이 그 정신파에 담긴 언어를 이해할 순 없었어도 그 정신파가 퍼진 순간 게이트 안에 가만히 있던 괴수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걸 봤다고 하더군요."

이로써 베헤모스가 해외의 괴수들마저 자기가 있는 한국으로 끌어들인다는 주장에 근거 하나가 추가된 셈이었다.

물론, 새삼 놀라지는 않았다. 애초에 베헤모스의 짓이 아니라면 한국 내 괴수들의 수가 전혀 줄지 않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공무원이 계속 말했다.

"그러니까, 베헤모스가 남아있는 한 이 상황은 영영 끝나지 않을 겁니다. 설령 헌터 분들이 한국에 몰려온 괴수들마저 싹 다 쓸어낸들 마찬가지일 겁니다. 베헤모스 그놈이 한국 땅을 떠나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크고 위험한 시한폭탄이 계속 땅에 묻혀 있는 셈일 테니까요."

왜 자꾸 다 아는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인천 출신이 하는 말이므로) 참고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국안부 공무원이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이 모든 상황에 근거해 여쭙겠습니다. 나라에서 직접 베헤모스 토벌을 벌이는 걸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베헤모스가 나오면 당연히 나라에서 나서야 하는 일 아닌가."

"아, 죄송합니다. 표현이 잘못됐군요. 베헤모스가 나오길 기다렸다가 나오면 토벌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럼?"

내 물음에 공무원이 대답했다.

"베헤모스가 나오길 직접 유도해서 토벌하는 일에 대해 말하는 겁니다.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베헤모스와의 전투를 우리 쪽에서 일으키는 거지요."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애초에 베헤모스가 안 나오게 막는 것이 기존 방침 아니었습니까? 베헤모스와 싸워 이긴들 얻는 게 없으니까. 아예 안 싸우는 게 이득이란 입장이었을 텐데······."

내 말에 공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 말씀이 옳지만, 여전히 놈과 싸울 때의 피해를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젠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게이트 안에 묻어두고 없는 셈 치기엔 그 거대괴수는 너무 큰 불안 요소예요."

공무원이 말하길, 베헤모스와 놈을 추종하는 괴수들이 게이트 너머에 도사리는 이상 서울 복구를 비롯해 나라에서 진행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또한 앞으로도 강준치만 믿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고도.

"언제 또 강준치가 변심할지 알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언제 또 무슨 이유로 그가 해외나 소월로 떠나버릴지도 알 수 없는 일이고 말입니다."

심지어 강준치가 혼자 술 마시다 자빠져 급사하기라도 하면 끝장인 상황이므로, 예상할 수 없고 대비할 수도 없는 상황이 닥치기 전에 강준치가 도움을 약속한 지금 베헤모스를 직접 제거하잔 것이었다.

"강준치의 약조 효력이 남아있을 때, 베헤모스가 특정 장소에 나오길 유도해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제거하길 원합니다. 그러기 전에 김극 씨에게 의견을 여쭙는 것이고요."

공무원의 말에 내가 물었다.

"강준치만 동의하면 됐지 제 의견은 왜 물어봅니까?"

"베헤모스를 상대하려거든 강준치가 물론 중요하지만, 그다음으로 중요한 게 김극 씨 아니겠습니까? 이전 베헤모스 사태에서 보여주신 것도 있겠다, 다른 각성자 헌터들의 의견을 규합하는 데에도 김극 씨가 필요한······"

"그게 아니라, 저한텐 딱히 물어볼 필요도 없단 겁니다. 베헤모스 그놈 또 튀어나오면 나야 당연히 또 싸울 일이지, 뭔 의견씩이나?"

공무원이 반색했고, 내게 허리를 숙여 감사했으며, 이번 내 발언을 공식적으로 발표해도 되겠냐 묻길래 그러라고 대답했다.

「헌터 김극이 베헤모스가 또 출현할 경우 무조건적인 참전을 약속 (······)」

그러자 그날 저녁 TV에서 이번 내 발언을 대대적으로 발표했는데, 나는 그걸 보면서 조금 놀랐다.

내가 국회의사당 지붕을 무너뜨리고 강사 하나 폭행해서 반병신을 만든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건만, 벌써 날 광고탑으로 써먹으려 들다니? 정말로 나라 상황을 안정시키려고 별짓을 다 하는 모양이지.

그리고 베헤모스가 튀어나올 경우, 내가 무조건 참전하리란 발언은 딱히 허세가 아니었다.

이대로는 상황이 계속 악화할 뿐이니 차라리 베헤모스와의 일전을 불사하자는 그 결정을 도박이라 불러야 할지 결단이라 불러야 할지는 긴가민가하다.

그러나 일단 그 제안 자체는 맘에 들었다.

괴수 하나를 처치함으로써 이 상황을 해결하자니? 명쾌하고도 근사한 일 아닌가. 그야말로 헌터가 할 일이요, 각성자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역시, 이 와중에도 거슬리는 일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놈의 베헤모스를 어떻게 유인할 겁니까?"

내가 그리 물었더니 공무원이 대답했다.

「저번에 보셨잖습니까? 베헤모스가 각성자 수용시설을 향해 이동했지요. 그걸 보면 베헤모스도 특정 각성자들에게 이끌린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라······」

예상한 대답이었지만, 동시에 한숨이 절로 나오는 대답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다음 날 나는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로 향했다. 소위 냉동고에 말이다.

*******

128화 종말, 베헤모스 - [2]

인천 각성자 수용시설은 혐오시설이다.

자연스레 그 주변에는 주민이 적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그 앞에 초고층 아파트를 세우면서 근처에 주민이 점차 늘었다.

그리고 몇 달 전에는? 베헤모스 사태로 집 잃은 서울 난민들이 대거 이주해오면서 사람이 대폭 늘었다.

그러니까 저기 저놈들은 전부 서울 종자일 것이다. 틀림없다.

각성자 수용시설을 둘러싼 인파를 보며, 나는 그리 추측했다.

저 인파가 왜 수용시설 앞에 모였으며, 어째서 서울 종자인지는 그들이 든 피켓만 봐도 알 만했다.

'베헤모스 꾀어내는 위험시설 철거하라!'

'얼음 능력자들 시설 복귀 반대!'

'소수 각성자들이 우선인가? 다수 주민들이 우선인가!'

지겨울 만치 자주 본, 수용시설 혐오 시위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단순히 얼음 능력자들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시설을 드나드는 얼음 능력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지난번 베헤모스를 피해 각지로 흩어진 얼음 능력자들이 다시 시설로 복귀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기 모인 인파는 그 얼음 능력자들이 시설로 다시 들어가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 이대로 시설을 떠나 노숙이라도 하며 살길 바라는 걸까?

"물러나요! 물러나!"

그나마 시에서 배치해준 경찰들이 시위꾼들을 몰아내려 애쓰고 있었지만, 요즘 세상에 경찰들에게 뭔가를 기대해선 안 된다. 머릿수에서든 의욕에서든 여기 모인 인파에 너무 밀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나는 얼음 능력자 아줌마 하나를 보았다. 대한각성연대 시절부터 봤던 아줌마.

그 아줌마는 시설로 들어가려다 해코지를 당할까 봐 무서운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을 본 순간, 내 온몸이 더워졌다.

답답할 만치 온몸이 더워진 가운데 내가 저기 모인 인파를 향해 다가갔다.

포효 한 번이면 저 비각성 찌꺼기들을 단번에 쫓아낼 수 있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놈들의 다리뼈가 부러지도록 발길질을 했다. 손에 잡힌 머리통을 으스러지기 직전까지 움켜쥔 채 흔들었으며, 그대로 놈들이 모인 쪽에 휙 집어 던졌고, 놈들이 볼링공과 볼링핀처럼 여기저기 날아다니고 튕기게 했다.

그러길 몇 분 지나니, 수용시설 앞에 남아있는 서울 종자며 비각성 찌꺼기가 하나도 없게 되었을 때였다.

"김극 씨?"

슬쩍 고개를 돌리니 얼음 능력자 아줌마가 내 눈치를 살피고 있더라.

겁먹은 표정이로군. 동족을 불안하게 해선 안 된다.

나는 애써 웃어준 다음 수용시설로 앞장서서 들어갔다.

한편 수용시설 바깥 상황을 신경 쓰는 듯, 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은 한곳에 모여있었다.

내가 들어가자 얼음 능력자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방금 그 인파를 쫓아줘서 고맙다고 내게 말해야 하는지, 아니면 너무했다고 말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듯한 그들에게 내가 먼저 물었다.

"여러분? 여러분이 베헤모스 낚을 미끼 역할을 자처했다던데. 사실입니까?"

그러자 최세희 씨가 대답했다.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박미형 아줌마와 함께 활동했던, 수용시설의 거주민 중 하나인 얼음 능력자 아가씨다.

"맞아요. 우리가 자처했어요."

나는 미간을 좁혔다. 공무원의 해명이 사실이었다고?

"혹시 강압을 받았으면 내게 말해요."

"강압 받은 게 아니라, 우리끼리 다 얘기 나눠보고 결정한 거예요. 빠질 사람은 다 빠지기로 했고요."

"그러면 누구누구가 이번에 미끼 노릇하기로 동의했는데요?"

내가 그리 묻자 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이 하나둘씩 손을 들었는데, 그들의 면면을 본 내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빠진 분이 하나도 안 보이는데요? 오히려 못 보던 얼굴이 일곱이나······."

"그걸 다 알아봐요?"

"다 알아보죠. 아무튼 한 명도 안 빠지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한데. 진짜 자원한 거 맞습니까? 가미카제 특공대에 자원자 받은 식이라면······."

내가 추궁했더니 이번에도 결코 강압 받은 게 아니란 대답이 돌아왔다. 이번 작전에 자원하는 대신 나라에서 돈과 몇 주 치 식료품을 주기로 했으며, 그 보상이 탐나서라도 빠질 사람은 없으리란 설명이었다.

"단순 보상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려는 거라면 싹 다 빠져요. 그놈의 돈이며 쌀이랑 라면 내가 대신 줄게."

내가 그리 말했더니, 선뜻 빠지겠다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번에도 최세희 씨가 모두를 대표해 대답했다.

"단순 보상이 탐나서 미끼 노릇 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럼 또 뭔 이유가 있는데요?"

"우린 이번 일로 사회에 이바지하길 원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난 생각했다. 이 여자가 미쳤나?

"다들 각지로 흩어져서 세뇌시설 다녀왔던 겁니까? 갑자기 뭔 나치당원 같은 소리를······."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회에 기여하고 그 공로를 한국에 인정받길 원해요. 더 나아가 그 공적으로 사회에 제대로 녹아들 수 있길 바라는 거고요."

"아, 그러니까. 이번에 나서서 얼음 능력자들 이미지를 좋게 해보겠다?"

"맞아요."

그리고 나는 한숨 쉬었다.

"나는 그런다고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어요. 내가 인생 경험이 많지는 않은데, 그래도 아는 사실이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 생각보다 훨씬 더 못돼처먹었단 겁니다."

"김극 씨."

"이번에 얼음 능력자들이 베헤모스 토벌에 가담한다고 해서 전 국민이 감동하고, 얼음 능력자들을 이웃으로 인정해주고······. 뭐 이러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아닐까 의심돼요.

베헤모스도 꼬드길 만큼 얼음 능력자들이 군침 나오는 괴수 미끼인 게 증명됐으니 절대 주변에 못 살게 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 취급이 더 나빠질 수도 있지 않나?"

"뭐, 그럴 수도 있을 거 같긴 해요."

"그렇다면요?"

내 물음에 최세희 씨가 대답했다.

"그래도 징징거리기 전에 뭔가 시도해보긴 해봐야죠. 안 그래요?"

기어이 자신들이 사회에 도움 되는 구성원임을 증명해보겠노라고 저러는 듯했다. 자신들에게 당당히 사회를 활보할 권리가 있음을 보이겠노라고.

나로선 그놈의 시도 따윈 집어치우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애써 참았다.

평범한 절대다수는 당연히 가진 그놈의 권리를 새삼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반박하고 싶은 것도 겨우 참았다. 내가 강제로 그들의 뜻을 꺾을 수야 없는 일이었다.

결국 그들의 뜻대로, 그리고 정부의 뜻대로 그놈의 베헤모스 유인작전이 진행되었다.

*******

베헤모스 유인작전과 함께, 토벌 작전 또한 준비되기 시작했다.

협회에도 공문이 내려와 작전에 나설 헌터들을 모집했으며, 헌트웹도 베헤모스 토벌 관련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익명 : 강준치 vs 베헤모스 매치 실화냐? 가슴이 웅장해진다······!

저런 식으로 들뜬 반응을 보이는 헌터는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헌트웹의 상당수는 베헤모스 사태를 경험한 사람들 아닌가. 민간인으로서 경험했든, 헌터로서 경험했든 간에. 그날의 기억은 모두에게 악몽이 되었을 터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도 그랬다.

Ⓐ 러그소라게 : 국내 유명 헌터들은 다 참가한다네? 강준치는 물론 김극, 최용, 석장실······. 한국 헌터 올스타 모여서 베헤모스 레이드 예정 ㅎㄷㄷ

익명 : 저번 베헤모스 사태에서도 유명 헌터들 죄다 참가했는데 절반이나 죽었잖아

대부분이 불안감을 표시하는 가운데, 심지어 강준치마저 영 불안한 눈치였다.

Ⓢ Kang : 아니, 미쳤나 진짜?

Ⓢ Kang : 일 터지면 나서주겠다고 했더니 직접 일을 만들어서 날 동원하려 드네?

Ⓢ Kang : 하여간 호의를 베풀면 그걸 또 악착같이 이용해먹으려 드는 갯강구 버러지들······.

강준치에게서 온 메시지를 읽으며, 내 옆에 앉은 국회의원에게 말했다.

"강준치는 이번 작전 영 떨떠름한 모양인데?"

그러자 엄근오 의원이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그 양반이 빠지겠단 소릴 합니까?"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요. 아무튼 김극 씨? 흔쾌히 나서주겠다고 해서 고맙습니다. 그에 대한 보상으로 말인데······."

"내 여동생, 이번에야말로 조기 출소시켜주겠단 그거?"

"예, 그거요."

"그건 나한테 전혀 보상이 안 된다니까? 집어치우고. 그 못생긴 년 말고 파릇파릇한 신입 헌터들이나 챙겨주면 좋겠는데."

"파릇파릇한 신입 헌터들이면, 저번에 파업할 뻔했다는?"

"그래. 걔네들 요구사항은 어떻게 됐어?"

내가 그리 물으니 엄근오 의원이 한참이나 설명했다.

그 설명을 다 듣고서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출동비는 이제부터라도 지급하겠다. 그러나 헌터들이 이삼일마다 출동해야 하는 현 상황은 개선이 어렵다?"

내가 자꾸 반말하는 게 불만인 걸까? 은근슬쩍 엄근오의 말도 짧아졌다.

"당장 투입할 수 있는 각성자 헌터들이 적어도 너무 적으니까. 헌터들 덜 혹사하겠다고 현장에서 빼내면 사람들이 더 죽어 나갈 테고."

"무능하네."

내가 그리 쏘아붙였더니, 엄근오가 날 노려보다 말고 한숨을 쉬었다.

"이것도 애쓴 거야. 갑자기 추가 예산 편성하기가 어디 쉽나? 심지어 각성자 헌터들 줘야 할 돈이 수천만 원도 아니고 최소 억 단위인데."

"그나마 돈이라도 더 주기로 한 것은 최소한 각성자들을 금전적으론 만족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있기 때문 아닌가? 그거 갖고 생색내봤자······."

심지어 각성자들을 험하게 다루는 중국에서도 각성자 헌터들에게 돈은 충분히 지급한다고 알고 있다. 각성자들을 돈으로 만족시켜주지 않았다간 그들은 괴수는 잡지 않고 범죄며 반란 따위에 힘을 쓸 테니까.

그렇듯 사회 유지를 위해 다른 나라에서도 다 하는 일을 해놓고 뭘 그리 애썼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는데, 엄근오는 달리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말 애쓴 게 맞아. 없는 예산 쥐어짜고 절차 반쯤 무시해가며 겨우겨우 추가 예산 편성한 건데······. 그걸 보고 무능하다고?"

"무능하지 그럼."

엄근오가 날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보다가 한숨 쉬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리 느낀다면······ 각오해."

"뭘?

"앞으로 더 무능해질 테니까."

어이가 없어서 나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나?"

"협박이 아니라 담담한 사실을 말하는 거야. 일본에 풍정 능력자가 연쇄살인 벌이고 다니니까, 일본에서 일정 높이 이상 자살 금지 조치한 거 알고 있나? 이미 인터넷 여기저기서 비웃음 받고 있던데······."

"아주 그냥 천치 새끼가 내놓은 대책이라며 큰 웃음 주고 있지 아마."

"그 대책 내놓은 사람, 천치 아니야. 도쿄대 수석 졸업한 사람이고 농림성 차관 시절에 보여준 업적만 봐도 보통 똑똑한 사람이 아닌데······."

"그리 똑똑한 사람이 그따위 헛소릴 대책이랍시고 내놓나?"

"마땅한 방법도 없고 이것저것 시도해볼 예산도 없는데 가만히 있을 순 없었으니까. 수단·방법 다 막힌 상황엔 수재든 엘리트든, 그런 식으로 중학생도 안 낼 헛소리를 대책이랍시고 내놓게 되는 거지."

"그래서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마땅한 해결책이 없는 상황에 돈까지 없으면 당연히 무능해진단 말이야. 그리고 방금 말했듯, 이 나라는 앞으로 계속 더 무능해질 거야. 왜냐하면 나랏돈이 계속 줄어들기만 하지 늘어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대로는 나라가 계속 더 가난해질 테니까."

주변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우릴 태운 차량이 질주하는 가운데 도시는 갈수록 어두워졌고, 인기척은 갈수록 드물어졌다. 본격적인 작전에 앞서 사람들을 소개한 것이었다.

"이 나라가 앞으로도 계속 헌터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줘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이미 불만 많은 헌터들에게 돈도 제대로 못 주게 되면 충돌이 얼마나 잦아질까······."

"이 나라가 앞으로도 계속 헌터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줘서 만족시킬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도 이미 불만 많은 헌터들에게 돈도 제대로 못 주게 되면 충돌이 얼마나 잦아질까······."

혼자서 중얼거리다 말고, 엄근오가 휴대전화를 켰다.

시간을 확인한 모양이었다. 그가 날 보며 말했다.

"슬슬 시간 됐네. 김극 헌터? 고생해요."

목숨 걸고 싸울 헌터에게 예를 표하려는지, 이번엔 존댓말이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백담비가 게이트를 열었을 것이다.

강준치는 그 게이트를 통과해서는 아예 소월로 떠나버렸을 것이며, 베헤모스는 이전에도 경험한 바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수용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서울의 한 시설에 집결한 마당일 것이다. 이미 베헤모스가 무너뜨린 구역에 놈이 다시 튀어나오도록 유도하여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그 몸을 바쳐 미끼 노릇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와중에 헌터들이 전장이 될 장소로 이동하고 있다.

거대한 날짐승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용으로 변한 최용이다.

그 밖에 여러 각성자들을 태운 수송기가 여기저기 보였으며, 골목길에 주저앉아 있던 응우옌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응우옌이 하얀 치열을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응우옌 저놈도 이번 작전에 자원했다지 아마. 한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본인의 목적을 위해서라지만, 그래도 날 (상상 속에서) 죽이려 한 일은 슬슬 용서해줘야 할 것이다.

바이크 한 대도 우리 옆을 스쳐 질주했다.

나이토 상. 저 비각성 찌꺼기 놈이 이번에는 기어이 베헤모스전에 참여하려는 모양이지? 별 도움도 안 될 텐데 욕먹기 싫다고 굳이 끼려는 걸 보니 역겨워 죽겠다······.

"아······."

뇌에 스며든 온갖 감정들에 고통을 느낀 듯, 엄근오가 신음했다.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부산물들······.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린 게이트 너머에서 베헤모스의 추한 암석질 낯짝이 드러난 그때, 나는 공간이동 했다.

*******

129화 종말, 베헤모스 - [3]

강적과의 싸움을 앞둔 지금, 강준치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하나뿐이다. '빨리 끝났으면 좋겠네.'

뒤이어 이런 생각도 든다. '빨리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 쉬고 싶네.'

이른 나이에 산업전선에 뛰어들었을 적부터 툭하면 속으로 읊조렸던 생각들.

그리고 그때 그랬듯,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 피곤해 죽겠다.

아무것도 이루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식사하는 것도, 식사하기 위해 음식에 독을 타지 않았을 만한 가게를 물색하는 것도 너무나 피로하다.

그나마 모바일 게임이 취미라 스마트폰을 붙잡고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그마저도 장시간 집중해서 할 만큼 즐겁지는 않아서 대부분은 웹서핑이나 찍은 영상편집이나 하며 시간을 죽일 뿐이다.

그렇듯 모든 일이 피곤하고 짜증 나는 와중에, 불청객들이 자꾸만 찾아와 무언가를 요청한다.

염치도 없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불청객들이다.

예전에는 한 친척이 찾아와서 금전적이고 정치적인 도움을 요청했다. 군대 갈 적 이쪽이 맡긴 짐을 모조리 내다 버린 친척이었는데, 웬 시의원 선거에 나가고 싶으니 도와달라나?

무슨 낯짝으로 그따위 요청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손발톱을 모조리 뽑아주고서 내쫓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비슷한 일이 이후로도 여러 번 일어났고 그때마다 비슷한 생각을 반복했다.

대체 무슨 염치로, 내게 해준 것 없는 것들이 어떤 도움을 요구한단 말인가?

그리고 나는 지금 왜, 날 도와준 적 없는 자들의 도움에 응해 이러고 있단 말인가?

상황에 휘말리고 휘말려서 저도 모르게 이렇게 되었음을 인지하고 있다.

맹세컨대 자신은 단 한 번의 폭풍도 원하지 않았지만, 이쪽에서 폭풍을 향해 다가가지 않아도 폭풍이 이쪽으로 다가온다.

굵직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준치? 슬슬 시간 됐어."

김극이다. 헌트웹에서부터 눈여겨본 각성자 헌터. 그 근육질 몸은 언제 봐도 소름이 끼칠 만치 우락부락하다. 저따위 모습을 하고서 애기버섯이니 뭐니 하고 논다니······.

평소엔 반쯤 미친놈처럼 구는 주제에 헌터로서의 직업의식은 또 어이가 없을 만치 투철한 놈이다. 정부를 대신해 이쪽에 베헤모스 토벌을 직접 부탁하러 오기까지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그와 동시에 속에 울화가 가득한 놈이기도 하다. 이쪽과는 덩치며 생김새가 전혀 다른데도 여러모로 이쪽과 공감대가 많다는 걸 말 좀 섞으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보다 맘에 드는 점은, 평소에 저놈이 하는 짓을 보면 석장실처럼 정부의 끄나풀일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단 사실이다.

"지금부터 공간이동 해야 하거든? 몸에 두른 역장 끄고······."

그래서 그의 '무리한' 요청에도 응할 수 있었다.

그 손을 붙잡으니, 공간이동이 시작되었다.

*******

나는 강준치를 데리고서 공간이동 하여 게이트를 나섰다.

지구에 돌아와서도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연달아, 최대 거리로 공간이동을 거듭했다.

강준치를 최대한 빨리 목적지로 옮겨야 했다. 베헤모스가 함정임을 눈치채기 전에, 뭔가 대응할 틈이 없도록 강준치를 놈 앞에 데려다 놔야 했다.

"왔다."

우리가 마지막 공간이동을 마쳤을 때는, 일정한 박자로 땅이 울리고 있었다.

거대한 괴수가 일으키는 지진······.

멀리서도 베헤모스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하기야 못 볼 수가 없다. 산 하나가 통째로 움직이는 셈 아닌가.

그 몸에 두른 두꺼운 암석 외피 탓에 베헤모스의 움직임은 여전히 굼떴지만, 그래도 지금은 제법 급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놈이 일으키는 지진의 박자가 예전에 느낀 것보다 빨랐고 내 심장 또한 더욱 빠르게 뛰었다. '쿵, 쿵―'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베헤모스가, 서울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미 자신이 무너뜨린 도시에 다시 한번 지진을 일으키고 있었다.

유인작전이 성공했음을 이로써 알 수 있었다.

며칠에 걸쳐 주민들을 소개하면서 그들이 비운 자리에 군인들을 배치했다. 베헤모스가 게이트 안에서 영혼들을 관측할 때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이도록, 도시의 머릿수를 똑같이 유지했다.

베헤모스가 이 모든 게 함정임을 눈치채지 못하게 숨겨야 했다.

그래서 미끼 역할을 맡은 얼음 능력자들도 미리 준비한 차량에 탑승해 부리나케 멀리 달아나는 게 아니라, 베헤모스가 보기에 자연스럽고도 쫓을 만한 속도로 달아나고 있을 것이었다.

지금 베헤모스는 달아나는 그들을 쫓아 추격하고 있으리라.

"강준치? 부탁한다."

강준치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한 수송기에 탑승했다. 그 몸에 데스클로의 갈고리발톱이 닿지 않도록 준비한 수송기였다.

강준치를 태운 수송기가 이륙했다.

수송기가 충분한 높이로 떠오르고, 그 위치에서는 베헤모스의 몸 전체가 담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신의 이적이 시작되었다.

신이 임한 첫 번째 증거로, 거대한 재해가 그쳤다.

아무런 전조 없이, 갑작스럽게 지진이 멈췄다. 베헤모스의 전진이 멈췄기 때문이었다.

위기감을 느끼고 스스로 멈춘 걸까?

아닌 것 같았다.

가공할 힘,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베헤모스의 거대한 몸 전체에 작용하기 시작했으므로 멈춘 것이었다. 멀리서 볼 때, 옴짝달싹 못 하고 굳어버린 베헤모스는 어떤 석상처럼 보였다.

신이 임한 두 번째 증거로, 거대한 우상물이 조각났다.

베헤모스의 외피를 구성하고 있던 암석들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손들이 그 암석들을 단단히 붙잡아서는, 베헤모스의 몸에서 떼어내어 멀리 치워버리고 있었다.

각성자는 각성자의 신체에 직접 능력을 사용할 수 없는 법인데 어떻게? 저 암석들은 베헤모스가 제 몸집 이상으로 덕지덕지 붙인 것이라 신체의 일부로 취급되지 않는 걸까?

베헤모스의 몸에 수백 년 이상 달라붙어서는 단단한 덩어리를 이루고 있던 거대한 암석들이 차례차례 공중에 떠올랐고, 다른 곳으로 옮겨졌으며, 잘게 부서져 고운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나는 지금 일어나는 일을 직접 보면서도 내 눈을 의심했다. 이게 환상이나 뭐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나 환상보다도 더 환상 같은 장면이었다.

요새는 강준치를 내심 한심하게 여기고 있던 나조차 지금은 전율을 느껴야 했다.

현대 문물의 힘으로 지금 이 현상을 재현하려면 몇천 대의 기계가 필요할까? 그리 많은 기계와 인원을 준비하고도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단 한 명의 각성자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리고 시간은, 단 3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어쩌면 2분도 필요하지 않았을지도.

베헤모스가 알몸이 되기까지는 순식간이었다.

결코 3분이 되지 못한 시간이 지나, 베헤모스는 그 외피를 이루고 있던 모든 암석을 잃고 그 본래의 신체만이 남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베헤모스는 정령의 암석 조종 능력을 활용해 암석을 뺏기지 않고자 저항한 것 같았지만, 그 저항은 결국 소용이 없었던 것 같았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면 일 분도 되지 않아 알몸이 되고 말았을까?

"베헤모스의 장갑이 벗겨졌다. 다들 준비해!"

한편 베헤모스의 영혼을 보는 그 눈은, 누구보다 크고 이글거리는 영혼을 지닌 강준치의 위치를 빠르게 포착해냈을 것이다.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붉게 빛나더니······.

바로 그 열선, 그 붉고 굵고 끔찍한 열선이 방출되어 도시의 어둠을 갈랐다. 내 눈에도 그 열선이 발하는 붉은 빛이 가득 담겨서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떠야 했다.

그리고 내가 눈을 떴을 때, 열선은 여전히 계속 방출되고 있었다. 무엇을 향해서?

강준치가 탄 수송기를 향해서.

수송기는 열선에 통째로 삼켜졌다. 그 기체의 모습이 붉은 광선에 가려져 하나도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고.

십여 초가 지나서야 열선의 방출이 멈췄다.

그리하여 드러난 수송기를 보았다.

강준치를 태운 수송기는 여전히 하늘에 떠 있었다. 그 장갑에는 녹아내린 흔적도, 그을린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열선을 맞기 전과 아무 차이가 없이 멀쩡했다.

강준치의 역장이 수송기 전체를 감싸 보호했으리라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열선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던 듯, 무전으로 강준치의 하소연이 들려왔다.

「눈에 시뻘건 빛이 가득 차서인지 역장이 너무 빠르게 잔뜩 소모돼서인지는 모르겠는데, 머리가 막 어지럽네? 이거 계속 처맞으면 위험하겠는데······」

한편 필사의 일격이 적에게 별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것을 확인한 베헤모스는,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을 상대하는 경찰이나 군인이 그러듯 전의를 잃고 후퇴하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 이적이 더욱 빨랐다.

베헤모스의 등 뒤, 그 너머에 이글거리는 게이트와 베헤모스 사이 땅이 꺼졌다.

해자? 깊고 길쭉한 구덩이?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온몸의 외피가 벗겨진 뒤에도 여전히 이백 미터가 넘는, 베헤모스의 그 거체가 통째로 파묻힐 만치 깊고 넓은 땅이 파였단 사실이다.

베헤모스가 게이트로 후퇴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조치일 것이다.

그리고 뒤를 돌아본 베헤모스는, 세상이 울리도록 으르렁거렸다.

돌아가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아니면 알몸이 되는 굴욕에 전의가 솟았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놈은 본격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베헤모스가 머리를 들어 길게 포효했다. 그 포효가 어떤 신호였던 걸까?

서울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게이트가 열리기 시작했다. 또한, 베헤모스가 만들어낸 거대한 게이트 앞 꺼진 땅에도 도로 흙이 솟구쳐서는 괴수들이 달릴 만한 다리가 생성되었다.

베헤모스가 제 부하 아닌 부하들을 불러내려는 것이 분명했다.

한편 이쪽 병력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나 또한 타이밍을 엿보다가, 신호에 응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은 역장 잠시 해제하고. 다 해제했나? 좋아. 그럼 갑니다······"

나는 한희를 비롯한 역장 날붙이 능력자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베헤모스의 눈에 띄지 않으려는지 검은 옷을 입고 있는지라 한희 말고 또 누가 특무대원인지는 알기 어려웠지만, 상관없었다.

괴수를 상대로 싸운다면 특무대원이라도 데스클로가 아닌 전우인 법.

나는 그 모두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베헤모스의 등 위로. 거기 달라붙은 암석 대부분이 떨어져 나간 그 꼬리 앞으로 단번에 도달했다.

한희가 길쭉하기 그지없는 칼을 뽑아 들고 외쳤다.

"꼬리부터 잘라요! 꼬리부터······!"

꼬리 다음은 목이었다. 맨 먼저 포대를 없애 무력화한 다음, 숨통마저 끊어버릴 예정이었다.

그 과정에 최대한 방해를 받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딱 보기에도 어려울 듯했다.

베헤모스의 꼬리 끝이 이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몸에 달라붙은 벌레들부터 태워버리려는 게 분명했다.

순간 온몸이 재가 되어버린 박주헌이 떠올라 흠칫했지만, 뒤이어 베헤모스의 꼬리가 부자연스러운 방향으로 꺾이는 걸 보며 나는 겨우 안도했다.

강준치의 역장이 베헤모스의 꼬리에 작용하고 있었다. 그 꼬리를 직접 통제하려고, 꼬리 끝에 붙은 암석만은 아직 떼어내지 않고 남긴 듯했다······.

베헤모스도 그 사실을 눈치챈 걸까?

아마도 놈의 의지에 반응한 듯, 그 꼬리 끝에 붙어있던 암석들이 일제히 떨어져 내렸다. 각성 능력은 각성자의 신체에 직접 작용하기 어려우니, 원래 신체만 남기고 모조리 떼어내려는 것 같았다.

베헤모스로선 고작 그런 의도였겠지만, 놈의 등 위에 있던 우리에게는 그마저도 재앙이었다. 그 꼬리 끝에 붙어있던 거대한 암석들이 우리 머리 위로 마구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으니까.

"피해!"

한희가 외치는 가운데, 나는 한희 이외 나머지 인원들과 공간이동 했다.

수십 초 뒤에 복귀해서는 다시 작전을 재개했다. 그 몸에 올라선 모두가 그 꼬리를 향해 칼질하는 가운데, 저 아래에서는 게이트에서 나온 괴수들이 질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중에는 데스클로가 가장 많았다. 징그러울 만치 지상에 들끓는, 물결을 이룬 데스클로들.

그리고 데스클로는 그 발톱에 역장을 씌워 벽에 박아넣는 방식으로, 건물이며 절벽을 너무나 쉽게 등반하는 놈들이다.

데스클로들이 베헤모스의 몸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보며 나는 눈을 부릅떴다.

우리를 노리려는 건가? 베헤모스의 몸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베헤모스를 따라 움직일 뿐 그 부하는 아닌 데스클로들이, 베헤모스를 위해 움직이는 듯한 그 모습은 나를 잠시 당황하게 했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망치를 내려놓고 공간이동 하여 헌터 라이플을 가져왔다.

미사일조차 쉬이 튕겨낼 베헤모스의 신체에도 발톱을 박아넣으며, 데스클로들은 너무나 쉽게 그 몸을 타고 오르고 있었다.

나는 이쪽으로 기어오르는 놈들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베헤모스의 몸으로, 피와 살점이 튀기 시작했다.

*******

130화 종말, 베헤모스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