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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2 - 150-160

150화 마법소녀 임새롬 - [1]

자려고 눕고서야 김형만 씨가 정확히 어떻게 죽었는지 기억이 났다. 자칫하면 남 앞에서 정신병자 헛소리를 할 뻔했단 것도 겨우 깨달았고.

환각 속 기억이 스며든 영향임을 어렵잖게 눈치챌 수 있었다.

기억이 침식됐단 생각에 등골이 오싹해졌다든가, 공포심이 들었다든가 뭐 그러지는 않았다.

내가 원래 나이토 상을 혐오했다고 우겨대는 성문영만 봐도 사람의 기억이 정확하거나 일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닌가?

이 와중에 환각을 통해 내게 섞인 기억은 타인이 아닌 또 다른 나 자신의 기억이다. 무의식중에 섞여버린 기억을 혼동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뭐, 조금 불안해지긴 했다. 어디까지나 약간.

*******

이번 방송국 습격 사건이며 강준치의 부산 차량 테러 사건(그놈의 참교육으로 못쓰게 된 차량이 백여 대는 된다던가? 중고로도 못 팔도록 압착시킨 탓에 어지간한 홍수보다 피해가 훨씬 심각하다고도)이 세간에 충격을 주긴 한 것 같다.

헌터 협회에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 경고하기를, 이번 사건 이후로 반(反) 각성자 시위가 여기저기서 열렸다고 한다. 각성자들이 심각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하지 않고 넘어가는 상황을 규탄하는 시위라고.

그따위 나치 행렬을 경찰들이 왜 진압하지 않는 건가, 하는 불만과 함께 불안감도 함께 느꼈다.

내 알기로 국내에서 이런 시위가 발생한 건 처음이다.

국내에서 각성자 반대 시위가 일어나도 얼음 능력자 따위를 쫓아내기 위한 시위였지 헌터를 할 만큼 강력한 각성자를 상대로 시위를 벌이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다. 강력한 각성자가 주변에 있으면 근처에 게이트도 잘 열리지 않으니까, 근처 주민들이 강력한 각성자의 존재를 반기면 반겼지 위협으로 받아들인 적은 딱히 없었거든.

물론 강력한 각성자들의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해외에선 이 비슷한 반 각성자 시위가 여러 번 열리긴 했는데······.

해외사례를 봐도 정작 그런 시위의 피해자는 늘 강력한 각성자가 아니라 나약한 얼음 능력자들이었다.

얼음 능력자들도 일반인들쯤 제압할 수 있을 만치 우월하긴 하지만, 그래도 신체강화자며 역장 외골격 능력자와 달리 소총만 들어도 제압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하니까. 정말 중범죄를 저지르고도 흐지부지 넘어간 각성자는 내버려 두고 이웃집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얼음 능력자나 린치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다.

수용시설에 전화해서 다들 조심하라 알렸다. 박미형 씨에게도 특별히 신경써달라고 당부한 다음에는 옆에서 운전하던 여동생 년에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조심해. 괜히 시위 현장 근처에서 기웃거리다 말려들지 말고, 어?"

여동생은 운전대를 붙잡은 채 성의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

여동생에게 약속한 대로 차를 사줬다. 포르쉐는 아니고, 쓸데없이 이름이 길고 화려한 차였다. 이 차를 사준 보답으로 드라이브를 시켜주겠다길래 조수석에 탑승한 바였다.

그런 제안씩이나 할 만큼 여동생이 내게 나긋나긋하게 굴고 있긴 한데, 정말 우리 사이가 호전된 것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잘나가고 돈도 많다는 게 확실해진 오빠한테 잘 보이려고 이러는 건지 정말 고마워서 이러는 건지 구분이 안 되니까.

"운전에만 집중하지 말고 똑바로 들어, 이년아. 시위하는 나치 새끼들이 너 두들겨 패면서 죄책감이라도 느낄 것 같냐? 근처에도 다가가지 마. 알겠어?"

"뭔 그런 걱정을 다 하고 그래? 나 얼레기라고 패려다가도 오빠 이름 대면 알아서 겁먹을 건데!"

그런 식으로 여동생과 쓸데없는 시간을 보내던 중이었다.

전화가 걸려왔길래 받았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김극 형이죠?」

"인천 만세. 누구?"

여동생이 운전에 집중하다 말고 날 등신처럼 쳐다보았지만 무시했다.

「저 정진영 형이랑 같이 다니는 짐꾼인데요! 형이랑 같은 학원 출신이기도 한데, 혹시 지금 도와주실 수······」

내 도움을 바라길래 바로 공간이동 했다. 몇 번 공간이동 하니 바로 전화에서 말한 장소에 이르렀다.

낯선 얼굴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다리뼈가 부러졌는지 쓰러진 채 일어나질 못하는 젊은 청년들과······ 그 사이에서 한 놈의 멱살을 쥐고 있는 정진영 형.

"정진영 형?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내가 물었더니 그제야 정진영은 멱살을 쥐고 있던 청년을 내려놓았다. 날 보고서 당혹감과 분노가 반반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고.

"이 짐꾼 새끼들이······ 날 무시해도 정도가 있지······ 날 아주 좆같이 대하잖아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치거나 피 흘리며 쓰러진 청년들을 보며 생각했다.

보아하니 정진영의 팀원들 같은데, 정진영이 이렇게 만든 건가? '좆같이 대한다'는 이유로?

쓰러진 그들을 공간이동으로 병원에 옮겨준 다음에야 물어보았다.

"그래서, 뭘 좆같이 대했단 건데요?"

"이 짐꾼 새끼들이, 내가 저번에 방송국 습격할 때 불러도 안 나오더니! 불렀는데 왜 안 나왔냐고 따지니까······"

워낙 횡설수설해서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대충 이런 느낌이었다. 방송국 습격 당시 A급 헌터들은 자기네가 거느린 팀원들도 불렀다.

정진영도 당시 팀원들을 불렀지만 오지 않았다.

그래서 화가 난 정진영이 오늘 팀원들을 따로 불러서 화를 내니, 적반하장으로 왜 이런 일로 부르고 화내냐고 따지고 들길래 참지 못한 정진영이 폭력을 행사했단 것이다.

다 듣고 난 나는 이마에 손을 짚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정진영 형? 왜 화났는진 알겠는데 이러면 안 되죠."

"내가 잘못한 거예요?"

"잘못했지 그럼."

내 말에 정진영은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더니 버럭 소리 질렀다.

"좆도 없는 비각성 쓰레기들이, 누구 덕에 짐꾼 노릇이라도 하면서 먹고 사는지 모르고 나한테 깝치는데 내가 잘못했다고요? 한 주 먹거리도 안 되는 것들이 지 안 때릴 거라 믿고 대드는 거 손봐줬는데 내가 잘못했다고!"

"형?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네. 심호흡부터 해요. 심호흡부터, 응?"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요! 비각성 쓰레기들이 나한테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냐?"

이 형한테 뺨이라도 한 대 때렸다간 평생 말 섞기도 어려워질 것임을 안다. 그래서 짜증 나는 것도 참고 최대한 조용히 말했다.

"그래도 진정하라니까. 정 화 못 참겠으면 집에 가요. 응? 헌트웹 악질이나 쓸 단어 좀 그만 쓰고······."

내가 몇 번 달랬더니 그제야 정진영 형은 미안하다며 읊조리더니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나마 아직 정진영에게 얻어맞지 않아서 멀쩡했던, 날 부른 비각성자 헌터를 보았다.

"저 형이 원래 저랬어요? 지시 안 들으면 주먹부터 들고?"

그에게 물었더니, 비각성자 헌터는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말 안 듣는다고 직접 팬 건 이번에 처음인데, 쌓인 게 터진 거긴 해요. 원래 저 형이랑 우리 사이가 안 좋았거든요."

말을 들어보니 대충 이런 식이었다.

정진영 형이 원래 내 팀원으로 일할 때도 그랬지만, 원체 다른 헌터들보다 나이도 많고 사교성도 없는 데다 본인부터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보니 열등감이 많았다. 열등감 많은 사람이 그렇듯 평범한 지적에도 격하게 반응했고.

평소에도 정진영은 자기네 팀원들이 리더인 자신이 하자는 대로 안 하고 반대로 뭘 가르치려 한다든가(사실 나나 내 밑에서 일하던 정진영이나 평범한 A급 헌터와 평범한 짐꾼처럼 일한 적이 없다. 그래서 헌터 일을 새로 배워야 하긴 했을 것이다), 자꾸 지시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단 사실에 무시당한 이유로 불만이 많았는데 이번에 제대로 터졌단 것이다.

"갑인 자기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화내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좀 어이가 없긴 해요. 김극 형 밑에서 헌터 일 배워놓고 아랫사람들한테 왜 저따구로 구는지 모르겠어."

"내 밑에서 일한 게 왜요?"

"김극 형은 업계에서 팀원들 잘해주기로 유명하잖아요?"

"유명한가?"

"유명하죠 엄청! 팀원들한테 이것저것 과할 만치 챙겨주고 위험한 일도 안 시키려 한다고 짐꾼들 사이에 칭송이 자자한데요.

정진영이 그런 김극 형 팀원이었다는 말 듣고 그럼 그 밑에서 배운 게 있을 테니까 대충 비슷하게 굴겠다, 뭐 이런 생각에 학원에서 그 밑에서 일할 생각 있냐 소개해주니까 냉큼 들어간 건데. 생각이랑 달라서 너무······."

분개하는 그 헌터도 최대한 달래서 집에 보냈다. 그러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정진영 그 형이 뭐라고 했던가. 자기 팀원들을 비각성 쓰레기라 불렀지 아마?

헌트웹이 아니라 현실에서 저 단어를 들으니 영 싸했다. 속으로 저 비슷하게 비각성 찌꺼기니 뭐니 읊조리곤 하는 내가 듣기에도 그랬으니, 다른 사람들이 듣기엔 어땠을지 가늠이 안 될 지경이다.

하여간 정진영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한심하게 여겨지기보단 걱정이 더욱 들었다. 저 형의 원래 성격이 어땠는지 아는 만큼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얼마나 뒤틀렸는지도 알 수 있으니까. 그때 받은 충격이 그만큼 심각했단 것도 대충 가늠이 된다.

내가 더 신경 써줘야 했던 걸까?

그리고 이젠 각성했겠다 돈까지 많아 상대적으로 여유로울 정진영 형의 상태가 저 꼴이라면, 그보다 못한 내 옛 팀원과 그 가족들의 상태는 또 어떨까······.

문득 든 걱정에 다시 한번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락을 돌렸다. 내 헌터 팀원이었던 이종호에게 전화해서 별일 없냐, 혹시 힘들거나 돈 모자라면 연락하라고 당부한 다음 팀원들의 유족에게도 전화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와중에 임형택 씨의 유족, 그러니까 그 아저씨의 마누라에겐 여전히 연락이 되지 않는 점이 날 답답하게 했다. 임형택 씨의 아파트에 찾아가도 맨날 없더라니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길래 연락도 안 받는지 모를 일이다.

집에 돌아와 TV나 봤다. 지상파 3사 중에 두 곳은 헌터들의 습격을 받아 반쯤 제대로 된 방송이 되지 않는 중이지만 딱 한 곳은 멀쩡했는데, 그 한 곳에서 이런 방송을 하는 중이었다.

「각성자 헌터들에게 정신과 상담을 받게 해야 합니다. 나라에서 의무적으로 받게 해야해요」

TV 화면 속, 정신과 교수의 말에 사회자가 물었다.

「각성자 헌터들에게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있죠 물론! 애초에 환경 자체가 험악한 데다가, 각성자들은 애초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각성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각성할 만큼 스트레스에 노출된 사람들인 만큼 그냥 넘어가선 안 되는 거죠」

「하지만 각성자라고 다 스트레스를 받아야 각성하는 건 아닐 텐데요? 각성자 중에 역장 외골격만이 유일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각성하는 게 아닌지······」

「그건 그렇긴 한데, 사실 다른 능력들도 다 비슷합니다. 예컨대 빙정 능력를 보세요. 추위를 느껴야 각성하는 거지만, 스스로 얼음 욕조에 들어가거나 냉탕에 들어가는 방식으론 각성하기 어렵습니다. 최대한 춥게 해도 그래요」

「그건 어째설까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환경이니까요. 자기 발바닥을 본인이 간지럽히면 간지럽지 않듯 뇌가 다 본인 의지로 비롯된 일임을 인지하는 겁니다. 언제든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단 것도요.

반대로 그냥 날씨가 추워서 떨어야 할 때는 빙정 능력에 각성할 확률이 높은데, 그렇듯 본인 의지와 상관없는 상황에서 각성할 가능성이 높은 거죠. 본인이 어쩔 수 없는 환경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각성할 확률이 커지는 겁니다.

그리고 극한상황임을 인지했을 때 특히 각성할 확률이 높다는데요. 바람을 느껴야 하는 게 각성 트리거인 풍정 능력만 봐도, 밧줄 튼튼하게 묶고 행하는 번지점프보단 윙슈트로 죽음을 무릅쓴 비행을 할 때 더 각성할 확률이 높죠. 그보단 아예 죽음의 공포를 제대로 느낄 투신 자살을 할 때 더욱 각성할 가능성이 높고요」

「그게 증명된 사실입니까? 역장 날붙이 능력자나 열선 능력자는 각각 칼 휘두르거나 활이나 침 같은 뭘 쏘고 찌를 때 각성한다는데 이건 스트레스와 무관하지 않나······.」

「통계만 놓고 보면 그렇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역장 날붙이 능력자나 열선 능력자는 확실히 예외인지라, 상대적으로 성격이 온화하다는 조사 결과도 있고요」

「아, 그런 조사도······」

「하여간 각성자들과 스트레스가 무관하진 않다는 걸 말씀드렸습니다. 이렇듯 각성한 시점에 남들보다 스트레스를 민감하게 받는 사람이 아닌가, 의심해야 하지 않나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중화기를 들려주고 스트레스로 가득 찬 극한상황에 몰아넣은 게 소위 A급 헌터들 아닙니까? 그러니 남들보다 더욱 정신과 치료를 받게 해도 모자랄 마당에 정신과 다닌 기록이 있으면 몸값을 깎는다니요」

「맞는 말씀인데 정신과 다니면 몸값 깎는 건 국제기준이라서요. 가뜩이나 재정이 고갈되어 헌터 줄 돈을 아껴야 할 지자체로선 선뜻 지금 방식을 바꾸기가······」

내가 듣기엔 다 헛소리였다. 게이트가 열린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각성자 관련 연구도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상황 아닌가. 그래서 웬 사이비들이 각성자 센터에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마당인데, 저 정신과 의사란 사람도 비슷하게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또한 저 방송의 의도 또한 의심스러웠다.

헌터들의 정신건강을 걱정해주는 척하면서 각성자들이 죄 정신병자라는 세간의 편견을 증폭시키려는 것일지도······.

이젠 대놓고 각성자들을 모욕했다간 용 한 마리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 아닌가? 그러니 덜 노골적인 방식으로 은근하게 우리의 평판을 깎아내리려고 저따위 방송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웠다.

기분이 좋지 않아 채널을 돌리니 뉴스였다.

또 각성자 관련 방송이기도 했다. 아나운서가 말했다.

「다음 소식입니다. 부천시 원미구에서 마법소녀가 활동한다는 황당한 소식인데요」

현실에서 마법소녀가 활동한다니? 애기버섯 활동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심지어 그 마법소녀가 괴수를 처치하기도 한다는 믿지 못할 소식입니다」

그리고 화면이 바뀌어서는 웬 조그만 여자애를 보여주었는데, 말 그대로 만화영화 속 마법소녀처럼 차려입은 소녀였다.

그러나 난 그 소녀의 차림새보다는 그 옆모습, 그 얼굴을 보고 더욱 충격을 받았다.

저 기지배, 저거 혹시?

「미취학 아동으로 보이는 저 아동은······.」

임새롬이었다.

임형택 씨의 딸, 틀림없었다. 나와 몇 번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던 그 조그만 여자애가 뉴스에 나오고 있었다.

151화 마법소녀 임새롬 - [2]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한 장면이라도 놓칠세라 두 눈을 부릅뜨고 TV를 노려봤다.

또 다른 영상이 TV에 나왔다. 조그만 여자애가 괴수를 소탕하는 영상.

영상에서 마법소녀처럼 차려입은 여자애, 임새롬은 웬 장난감 요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여아용 애니메이션인 '달빛 소녀 디아나'의 굿즈였다.

애기버섯 활동을 위해 조사해봤기로, 달빛 소녀 디아나는 웬 초등학생 여자애가 아르테미스 여신의 가호를 받아 달빛 소녀가 되어 지상에서 날뛰는 괴수들을 무찌른다는 내용이다.

달빛 소녀 디아나는 평소엔 요술 지팡이로 달빛 광선을 쏘며 싸우는데, 강력한 괴수와 맞닥뜨리면 일종의 필살기로 요술 지팡이를 마법 활로 변형시켜 수백 미터 일대를 초토화하는 초강력 광선을 날려 괴수를 끝장낸다.

임형택 씨가 생전에 말하길, 딸내미에게 그 애니메이션의 굿즈인 요술 지팡이와 장난감 활을 사줬더니 활을 가지고 뽁뽁이 화살을 쏘며 놀다가 열선 능력에 각성했다던가?

지금 TV에 나오는 것은 활과 함께 사준 장난감인 요술 지팡이일 터였다.

마법소녀처럼 차려입은 임새롬이, 예의 마법소녀 장난감을 저 앞으로 겨누었다.

그 장난감 요술 지팡이에는 당연히 가늠자도, 조준경도 없었고 지팡이 끝에 달린 것이라곤 플라스틱 구슬이 전부였다. 조준에 도움이 될 요소라곤 전혀 없는 셈이다.

물론, 특출난 각성자인 임새롬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요술 지팡이의 플라스틱 구슬에서 시뻘겋고 굵은 열선, 요술 지팡이를 넘어 임새롬의 몸보다도 훨씬 크고 굵은 열선이 방출되었다. 이내 웅장하기까지 한 열선이 화면 절반을 잠식했다······.

곧이어 카메라가 열선의 목표물을 비추었으니, 일단의 데스클로 무리였다.

데스클로 중 한 마리는 역장체였던 듯했다. 열선에 닿았을 때 아주 잠시 버티긴 버텼으니까. 그러나 놈도 이내 열선에 삼켜진 다른 데스클로들과 함께 재가 되어 흔적도 없이 불타 사라져버렸다.

「열선 능력은 헌터 시장에서도 고평가되는 능력으로······」

TV에서 아나운서가 지껄이는 동안 나는 내가 방금 본 장면을 곱씹었다. 내가 방금 대체 뭘 본 거냐?

국내 2위 헌터가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다.

헌터 일을 하며 데스클로의 몸이 폭발하거나 불타는 장면쯤은 여러 번 봤지만, 저런 식으로 괴수가 살아있던 흔적도 없이 통째로 불타 사라지는 장면은 처음 본다. 베헤모스가 박주헌을 비롯한 다른 각성자들을 열선으로 불태웠을 때를 제외하고는 저 비슷한 장면을 전혀 보지 못했다.

리기룡의 열선이 저 반의 반의 반이라도 됐으면 내 뇌는 진작 숯이 되었을 것이요 난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정말이지 리틀 베헤모스라 불러줘야 할 수준의 능력······.

아니, 지금 내가 감탄하고 자빠질 때가 아니다.

「당연하게도 해당 아동은 헌터 활동을 할 수 있는 나이가 결코 아닌데요. 해당 각성자 아동에게 헌터 활동을 대리시켜 금전적 이득을 꾀하는 어른의 이기심이 아닐까 의심스럽습니다. 그야말로 아동학대를 넘어선 (······)」

계속 상황을 해설하는 중인 TV를 껐다.

나는 공간이동 했다.

*******

맨 먼저 임형택 씨의 아파트에 갔다.

지금까지는 찾아갈 때마다 아무도 없어서 매번 허탕 치고 돌아왔을 뿐이지만, 이번에는 과감히 나섰다.

공간이동 하여 아파트 안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보인 장면에 입술을 깨물었고.

임형택 씨의 아내는 여기서 숙박하지 않을 뿐 드문드문 찾아오긴 했던 걸까?

아파트 안에는 택배 상자가 한가득 보였다.

그 택배 상자들의 내용물이었을, 집 곳곳에 짐처럼 쌓여있는 명품 가방들도······.

한데 모으면 백화점이라도 차릴 수 있을 만한 명품 가방들이었다. 그것을 보고서 내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주먹을 움켜쥔 채 공간이동 했다.

부천으로. 그놈의 마법소녀가 활동한다는 지역으로 향했다.

*******

작년에도 부천 원미구에 온 적이 있다.

특무대에서 각성자 헌터들까지 동원하여 부천 남작 김석희를 소탕하려 했을 때, 그때 한 번 와서는 아직 잘 사는 동네구나 하고 감탄한 바 있지 아마.

이제는 그때처럼 감탄하기 어려울 것 같다.

부천은 서울에 인접한 곳이요, 그 말은 곧 서울에 일어난 베헤모스 사태의 영향을 직격으로 겪었단 뜻이기도 하다.

우중충한 동네. 불 꺼진 가게와 이상야릇한 가게들이 눈에 담겼다. 이런 동네에는 늘 세트처럼 있는 건달들도 보였고.

그 건달들도 날 보았다.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건달들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내가 누구한테 시비 걸릴 몸뚱이는 아니니 당연한 일이다.

이 와중에 저 건달들은 날 알아본 걸까? 놈들이 서로에게 속삭이는 것이 들려왔다.

"저거 김극 아냐?"

"그런 거 같은데, 미친······"

그들이 내 눈치를 살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여기 왔다고 급히 연락한 걸까?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아는 얼굴이 여럿 섞여 있었다. 예전에 김석희 일당과 시비가 붙었을 때 본 각성자 몇 명과······. 부천 남작 김석희 본인.

김석희가 부하들을 데리고 날 만나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김석희가 날 보더니 헤벌쭉 웃었을 때 나는 황당함을 느꼈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극 아니야?"

"어, 그래. 오랜만······"

"잘 왔다, 새꺄! 나 만나러 온 거 맞지? 반가워 죽겠네 씨발!"

반어법인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김석희는 나한테 따라오라고 손짓하더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내게 어깨동무를 했고 어떻게 지내냐 사교적인 말을 걸어왔으며 웬 건물에 들어와서는 차까지 타 주려 하는 게 아닌가.

"뭐해? 커피 타와, 커피! 아니, 이런 건 내가 손수 타 줘야 하는 게 맞나? 기다려 봐. 내가 이번에 커피 내리는 기계 비싼 걸로 샀는데 한잔 끝장나게 내려줄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당황스러울 정도의 환대였다. 어째서?

김석희 이놈이 이렇게 날 반길 놈이 아닌데.

특무대에 잡혀가기 직전에도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내가 공간이동 시켜주겠단 제안을 마다했던 얼간이 아닌가. 그 정도로 날 싫어하던 놈이, 내 도움으로 목숨 좀 건졌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태도가 변했을 리는 없다.

커피에 독이라도 넣었나 해서 그가 타준 커피를 조심스레 홀짝일 때였다.

김석희가 부하들을 내보내더니, 방금과 달리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여긴 왜 왔냐? 정말 나랑 친목 다지러 온 건 아닐 테고······."

이래야 이놈이지, 하는 생각을 하며 내가 물었다.

"임새롬, 알고 있냐?"

"몰라. 누군데?"

"마법소녀랍시고 이상한 옷 입고 괴수 소탕하고 다닌다는 여자애, 정말 모르냐?"

"아, 걔? 나도 찾고 있는데 아직 못 찾았어."

"너도 그 여자앨 찾고 있다고? 왜?"

"그 애새끼 핑계로 특무대가 부천에 또 쳐들어왔으니까. 아동학대 당하는 각성자 여초딩 잡아서 학교로 돌려보내겠다나? 그래서 너는 그 애새끼 왜 찾는데?"

그 물음에 내가 대답했다.

"아는 사람 딸이라서."

"아······. 방금 그건 비하의 의미로 애새끼라 한 게 아니라······!"

"됐고, 아무튼 특무대도 걔 잡으러 부천 왔다고? 아동학대 당하는 꼬마애 구출하겠다는 이유로?"

"어. 그런데 물론 특무대가 서울 벗어난 핑계가 그거고, 진짜 목적은 날 잡는 거야."

"널?"

"그래. 저번에 특무대에서 나 하나 잡으려다 아주 그냥 엿을 처먹었지? 조직 대가리가 날아가지 않나, 헌터들 버스 시위 일어나질 않나······. 사건의 발단이 된 내가 아주 그냥 눈엣가시일 거 아냐? 마침 특무대 잔뜩 동원할 괜찮은 핑계 생겼을 때 나까지 잡으려는 거지 뭐."

이놈이 왜 나한테 친한 척했는지도 이제 알겠군.

또다시 특무대의 공격을 받을지 모를 상황에 특무대를 여러 번 박살 냈기로 이름 높은 내가 찾아온 것 아닌가. 그야말로 구세주처럼 반가웠으리라. 그리고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김극이 기꺼이 도우러 왔음을 과시하고자 일부러 날 환영했을 테지.

어디서 감히 날 이용하려 드냐며 따지고들 생각은 없었다. 인천 공작이 휘하 남작을 지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그래? 그럼, 특무대가 시비 걸면 나 불러라."

내 쪽에서 그런 제안을 하니 김석희가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정말로? 왜······"

"대신 임새롬 그 꼬맹이 찾으면 나한테 우선 연락하고. 순순히 협조해주면 나도 특무대랑 기꺼이 한따까리 해줄 테니까. 너도 빨리 그 애 부천에서 치우고 싶을 텐데 손해 볼 것 없는 제안 맞지?"

"그건 그런데, 나한테 너무 유리한 조건 아닌가 싶어서 오히려 의아할 지경인데······. 마법소녀 놀이하는 걔가 아는 사람 딸이라고?"

"어."

"그 아는 사람이랑 정확히 어떤 사인데?"

"내 전 헌터 팀원."

내 간략한 설명에 김석희가 뺨을 긁었다.

"A급 헌터의 전 팀원이면······. 짐꾼 말하는 건가?"

"비각성자 팀원이라 해라, 그냥."

"그래, 뭐. 아무튼 A급 헌터랑 그 팀원이면 잘 쳐줘도 편의점 사장이랑 알바생 정도의 관계 아닌가? 애초에 정식으로 고용하는 관계도 아니니까."

"그런데 뭐?"

"요즘엔 업계 분위기가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지만, 내 알기로 A급 헌터가 팀원들 가족을 신경을 써주고 뭐 그래야 할 관계는 절대 아닌데. 왜 그렇게까지······?"

의아해하는 건지 의심하는 건지 모를 김석희에게 내가 대답했다.

"임형택 그 아저씨가, 술 취할 때마다 나한테 자기 죽으면 딸 좀 챙겨달라고 부탁을 했어."

"술 취하면 그런 부탁을 했어? 맨정신으론 짐꾼 주제에 그런 부탁 하면 안 된다고 잘 알고 있던 모양인데."

"그리고 난 알겠다며 대답을 했고."

"그래서?"

"약속했으면 지켜야지, 당연히?"

내 말에 김석희가 날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상태로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더니, 뜬금없게도 내게 이렇게 물었다.

"너 저번에 내가 체면 좀 봐달라니까, 그딴 건 비각성자나 신경 쓰는 거지 각성자 리더는 체면 따위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하지 않았냐? 각성자가 위엄을 잃어서 부하들이 안 따르면 그냥 힘으로 제압해서 따르게 하라고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랬지. 그래서?"

"나한테 그리 말해놓고 지는 그렇게 안 하니까 그렇지. 나한테 그따구로 말하길래 본인부터 부하들 개좆같이 대하는 줄 알았더니······."

한숨을 푹 내쉬더니 김석희가 말을 이었다.

"하여간 너도 언행일치가 안 되는 놈이다, 진짜."

"왜 갑자기 비난이냐?"

"칭찬한 건데? 아무튼 애 하나 찾아서 데려와 주는 조건으로 특무대 상대로 지켜주겠다는 거면······. 거부할 이유가 없긴 하네."

김석희가 그리 중얼거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자는 것 같길래 내가 손을 마주 잡고 흔들자 그제야 김석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묘한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내가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너 벌크업 좀 했다. 베헤모스 사태 때 부천시에 괴수들 몰려왔을 때 네가 나서서 잡았다더니 그 덕인가?"

"아마도? 이후로도 괴수 잡아가며 경험치 꽤 벌었기도 하고."

"오······. 은퇴해놓고 헌터 노릇한 거야? 아무 이득 없이?"

"아무 이득이 없다고 하긴 좀 그렇네."

"그럼 무슨 이득이 있길래 공짜로 괴수를 다 잡았냐?"

내 물음에 김석희가 대답했다.

"척 보기에도 내가 조폭 새끼 같지? 하는 짓도 그렇고. 그런데 여기 주민들이 나랑 내 조직을 엄청나게 좋아하거든?"

"주민들이 너흴 좋아한다고?"

"그래.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좋아해. 그래서 가끔 특무대에서 나 잡으려고 사람 보낼 때마다 부천시 경찰이랑 주민들이 나서서 나한테 정보 알려주고 조직원들 숨겨주고 그랬는데······. 이게 뭐 때문일 거 같냐?"

"담배 팔면서 유동 인구 늘게 해줘서?"

"그것도 그런데, 다른 이유가 더 크지······. 부천시에서 기껏 계약한 A급 헌터는 PTSD 호소하며 계약금 받아먹곤 데스클로 한 마리 안 잡는 중이거든? 부천시 입장엔 가뜩이나 재정 고갈돼서 각성자 헌터 더 고용할 돈도 없는 중에 기껏 계약한 헌터가 그러니 환장할 지경이었는데······.

이 와중에 내가 가끔 헌터 일 해주니 여기 주민들 보기에 얼마나 고맙겠냐? 이제 여기 사람들은 시장 말보다 내 말을 더 잘 들을걸."

그러니까 괴수들을 잡아주니 주민들이 김석희를 지도자로 떠받드는 중이란 말인가?

감명 깊은 일이었다. 헌터로서 은퇴했던 김석희가 지금 다시 헌터 노릇을 하며 존경받는단 게 퍽 근사했기 때문에.

또한 이 모든 게 또 다른 세상의 방식을 연상케 했기 때문에.

그러니까, 소월 말이다.

소드 월드의 군주들도 괴수에게서 지켜주는 조건으로 양들의 지지를 받지 않던가? 지금 김석희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소월의 군주처럼 굶으로써, 민주적인 선거로 선발된 시장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노라 말하고 있었다.

소월의 군주, 진정한 부천 남작이 여기 있는 셈이었다. 계양구 변경백이던 시절 김석희를 볼 때도 소월을 겹쳐보곤 내심 호감을 느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도 더 소월의 군주다워졌을 줄은 미처 몰랐다.

"김석희? 이후로도 특무대가 기웃대면 나 불러도 된다."

내 충동적인 제안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김석희가 볼을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기회 될 때마다 조지고 싶을 만큼 특무대가 그리 싫나? 뭐 고마운 제안이긴 한데······."

*******

152화 마법소녀 임새롬 - [3]

헌트웹에 이쁜 말투로 글 하나를 올렸다.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 동료 마법소녀를 구하러 부천에 도~착~♡!

부천시에서 현재 활동 중이라는 마법소녀는, 세상에! 세상에!

일찍이 애기버섯이의 마법소녀 활동을 돕다가 베헤모스 그 씨발것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하신 임형택 씨(삼가 애도를 표합니다)의 외동딸인 달빛 소녀!

애기버섯이, 한국의 유일한 마법소녀인 줄 알았는데 또 다른 마법소녀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옛 마법소녀 도우미의 가족이라니 동지애가 싹트지 뭐예양?

애기버섯이 바로 숙녀의 증거인 섹시한 팬티를 다시 곰돌이 팬티로 갈아입고♡ 마법소녀 칭구를 만나러 부천에 왔어양!

내가 헌트웹에 올리는 글이면 늘 그렇듯 조회수가 실시간으로 폭증했다. 댓글도 수두룩하게 달렸고.

Ⓐ syberMagneto : 우으······ 이게 진짜 미쳤나······ 언제 만나면 낭독회 한번 해줘? 으아아앙······.

그러고서 사람들의 반응을 즐겼지만, 잠시뿐이었다.

평소처럼 사람들 괴로워하는 반응이나 즐기려고 올린 게 아니라, 내가 여기 왔음을 알리기 위해 올린 글이었다.

한희와 그 아비가 그랬듯 특무대에서도 헌트웹에 올라오는 글들을 예의주시한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 아닌가? 이제 수십 분 내로 내가 부천에 왔음이 특무대원 전체에게 전파될 것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에게 압박이 될 터였다.

뒤이어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이 우월한 능력으로도 부천 어딘가에 숨어있을 모녀를 찾아내기 쉽지 않으리란 건 분명했지만, 그래도 한 구획씩 더듬어나가던 중이었다.

그물망에 거슬리는 것이 포착됐다.

괴수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종류의.

그곳으로 공간이동 하니 과연, 헌터 활동하며 처음 보는 괴수가 거기 있었다.

배가 땅에 닿을 만치 기어 다니면서 머리도 뱀 비슷한 것이 딱 왕도마뱀처럼 생겼는데, 그런 주제에 포유류였다. 지구에선 진작 멸종된 초기 포유류가 저랬을까?

그 고대의 괴수는,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채 비둘기를 뜯어먹는 중이었다. 게이트 깊숙한 곳에 잠들어선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현실에 튀어나왔을 고대의 괴수가 무슨 동네 들개처럼 굴러다니는 상황이라니? 황당했다.

그러나 구경만 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다.

정신적 그물망이 위협을 경고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손을 뻗었다. 뻗은 손에 날 향해 뛰어들었던 또 다른 괴수가 잡혔다. 방금 그놈의 동족.

그대로 손에 힘을 주어 그 목을 졸라버린 다음, 비둘기를 뜯어먹던 놈마저 걷어차 죽이곤 생각했다.

이 정도면 사람 뼈가 굴러다니던 강화도 못지않게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긴 사람들의 생활영역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인데도 괴수들이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사람 사는 곳도 이렇다면 위험지역으로 설정된 곳엔 괴수가 얼마나 더 넘칠까?

괴수들을 잡아준단 이유만으로 김석희가 괜히 칭송받는 게 아니었다.

근처에 숨어있던 괴수들마저 찾아내어 한 마리씩 밟아 죽이고 머리통을 터뜨려 죽이던 중이었다.

등 뒤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누구예요? 근육 보니 신체강화자 같은데 여긴 왜······"

고개를 돌려보니 일단의 청년들이 거기 서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서는 그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아, 김극이다!"

부천이면 인천의 옛 영토인즉 이곳 사람들도 인천 사람이다. 고귀한 신분에 맞는 대우를 해주어야 하므로 나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예, 김극 맞습니다. 인천 만세!"

"와, 인천 만세 저거 진짜 하네······? 부천도 김극 씨랑 계약한 거예요?"

"그건 아닌데."

내 대답에 청년들은 안심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그렇죠? 그럴 돈이 어딨다고 김극 씨를 데려오겠어. 그래서 유명하고도 바쁘신 분이 여긴 왜 계세요?"

"임새롬이 찾으러요."

내가 그리 말했을 때 몇몇 청년의 얼굴이 굳었다.

"그 애는 왜 찾아요?"

불안감 가득한 반응. 차마 나한테 화낼 순 없어서 대놓고 표출하지 못했겠지만, 그 목소리에 숨겨진 신경질적인 반응 또한 포착했다. 인천 혈통인 줄 알았더니 실은 서울 종자들이었던 걸까?

"아는 사람 딸이라서요."

"아······."

나는 청년들의 손에 들린 소총을 보며 물었다.

"그쪽은 뭐예요. 헌터들?"

"뭐 비슷해요. 일단 헌터 면허도 있고 헌터 활동하고 있으니 뭐······"

"그럼 헌터 맞지. 비슷할 건 또 뭐래?"

"지자체에서 주는 돈이 아니라 주민들이 주는 돈 받고 일해서요? 정식 헌터라긴 뭐하네요."

주민들이 무슨 이유로 헌터들에게 돈을 주냐 물었더니, 부천 원미구의 정상화를 바라는 주민들이 따로 있다고 했다. 땅 주인이며 건물주 등이 돈을 모아서는 헌터들을 고용해 버려진 건물이며 하수구 등에 숨어든 괴수들을 청소하게 시킨다고.

"하지만 사냥 중에 역장체 같은 거 나타나면 어찌 대응합니까. 부천시 A급 헌터는 출동 못 하는 상황이라던데, 자체적으로 해결이 돼요?"

"그야 뭐, 석희 씨한테 도움을 구하거나······."

"그리고 또?"

내가 물었더니 대답이 없길래, 내가 먼저 저쪽에서 꺼리는 듯한 단어를 꺼냈다.

"마법소녀한테 도움을 구하거나?"

서울 종자들도 쪽팔린 걸 아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입 다문 채 생각했다.

어떻게 돌아가는 구조인지 대강 파악이 된다.

지자체에서 사실상 헌터 고용을 포기한 지금, 이곳의 주민들은 자체적으로 헌터를 고용하여 괴수들을 제거하고 있다.

물론 주민들이 헌터들에게 주는 돈은 국제기준대로 주는 돈이 아니요, 지자체에서 정부 지원을 받아다가 주는 돈도 아닌 만큼 여러모로 적다. 그러니 제대로 된 A급 헌터를 고용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 부천엔 A급 헌터를 할 수 있을 만치 강력하지만 A급 헌터로서 계약할 수 없는 각성자가 둘 있으니, 바로 수배범인 김석희와 미성년자인 임새롬이다.

그리고 임새롬의 경우, 실제 A급 헌터가 받는 돈에 미치지 못하는 돈을 받고서도 A급 헌터 노릇을 할 이유가 충분하다. 어차피 나이가 나이인 만큼 당장 A급 헌터 계약을 맺을 수 없으니 정상가보다 낮은 돈이라도 받는 게 이득이니까.

돈 벌고 싶은 학생들이 넘쳐나는 방학 기간이면 최저임금 미만으로도 학생 알바를 쉽게 구할 수 있듯, 이곳 주민들은 일종의 불법 A급 헌터 느낌으로 임새롬을 고용한 모양이다.

하여간 개판이다.

나라에 돈이 없어서 헌터들 출동비를 동결해야겠다느니 어쩌느니 말하던 국안부 장관의 말이 헛소리가 아니었음을 새삼 알겠다.

이후로도 정신적 그물망으로 임새롬을 찾고자 시도했다. 그러다가 포착된 괴수들을 겸사겸사 제거하던 중이었다.

김석희의 조직원 하나가 전화를 걸어 내게 소식을 전했다.

「김극 씨, 찾았습니다!」

"임새롬을?"

「마법소녀 걔 말고, 그 모친이요!」

아, 그 여자.

곧장 전화에서 말한 장소로 공간이동 했다.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성미란. 임형택 씨의 아내이자 임새롬의 모친. 고교 졸업하고서 아르바이트나 하다가 돈 많은 아저씨가 꼬시자 대뜸 결혼해버린, 나이도 어리거니와 사회생활 경험이라곤 거의 없어 철없는 여자이기도 했다.

김석희의 조직원들에게 붙잡혀 초조해하고 있던 그녀는, 날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김극 씨!"

내가 자길 도와주러 온 줄 안 걸까? 나는 황당함을 느끼면서도 손을 휘저어 조직원들을 내보냈다.

둘만 남은 가운데, 나는 성미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둘만 남은 가운데, 나는 성미란을 바라보며 말했다.

"형수님? 뉴스 보고 왔는데, 상황 설명해봐."

내 추궁에 대한 성미란의 한 마디는 이러했다.

"어······ 왜 반말해요?"

그것만으로도 쉽지 않으리란 걸 알 수 있었다.

*******

"형수님, 설명해요. 막 초등학교 들어간 딸내미, 학교도 안 보내고 지금 뭐 하는 거야?"

내 물음에 성미란은 똑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게 따졌다.

"그걸 왜 물어봐요? 왜 오지랖이야 진짜. 경찰도 아니면서······"

"불만이면 헌터 협회 간부로서 무면허 헌터 행위 단속 중이라 치자. 그래서 대체 뭐 하는 짓인데?"

이번 추궁에도 대답이 없었다. 입을 꾹 다문 그녀에게 윽박질렀다.

"명품 가방 잔뜩 사려고 딸 팔고 있는 거야, 지금?"

그랬더니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내가 명품 가방 잔뜩 산 거 어떻게 알아요?"

"직접 보고 왔으니까."

"내 집에 들어왔다고요? 멋대로?"

"그래서, 명품 사려고 딸 파는 거 맞지?"

"누구 맘대로 남의 집에 들어와? 지금 장난해!"

"딸 그따위로 입혀놓고 대체 뭐 하고 자빠졌냐니까?"

"대체 뭐 하려고 침입 시도한 거야!"

나는 한숨 쉬었다. 말 돌리려고 이러는 건지, 정말 화가 나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봐줄 이유는 없다.

내가 입을 열었다.

"불만이면 경찰에 신고해. 김극 씨발 놈이 무단침입했으니 어서 두들겨 패고 잡아가서 징역도 시키라 하라고."

이 여자도 뉴스를 봤다면 요새 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알긴 알 것이다. 그러고도 감옥에 있지 않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도 대충 알 테고.

그 사실을 되새겨주며, 초저주파 가득 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봤자 안 잡아갈 거 알지? 그럼 닥쳐."

그제야 성미란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계속 물었다.

"또 묻겠는데, 대체 딸 가지고 뭐 하는 짓이야? 생활비가 부족해? 그럼 도와줄 테니 나한테 연락하라고 했잖아."

"생활비는······ 안 부족해요."

"그럼 뭐가 문젠데?"

"당장 먹고 살 순 있어도 미래가······ 나중이 불안하잖아요? 제가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남편이 벌어둔 돈이 꽤 있긴 한데 요새 물가가 계속 오르는 상황이니까. 이 돈만 믿고 살 순 없으니······."

"그래서 미래가 불안한데 명품이나 잔뜩 사셨다?"

"그거 저 사치하려고 산 거 아녜요."

"그럼 불우이웃돕기 벼룩시장에 내놓으려고 샀어?"

"그게 아니라, 재테크예요."

"재테크?"

"예. 재테크. 현금만 갖고 있으면 물가상승 때문에 가치가 막 줄어들잖아요? 재산 보존하려면 차라리 현물을 사두는 게 나은데, 그런 목적으로 명품 거래가 좋아요."

그 말이 순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았다. 당장 그 몸에 걸친 명품 따윈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도 어처구니가 없긴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알고 사는 건 맞아? 내가 명품 거래 잘 아는 건 아니지만, 명품이면 전용 종이백에 고이 담아서 거래하지 뭔 택배 상자로 마구 주문하는 물건이 아닐 텐데?"

"그야 중고니까 그렇겠죠? 없는 살림에 급전 구하려고 명품 파는 사람들이니까 그냥 대충 거래하는 것일 테고······."

방금까진 그놈의 명품이 재테크 대상으로 삼을 만치 귀한 재산이라더니 이젠 또 대충 거래할 만한 물건이란다. 이걸 보면 진짜 명품을 사는 건지 짝퉁을 명품이라 속아 사 모으는 건지도 모르겠다.

물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그래서, 노후대책이며 재테크 할 돈을 모으기 위해 딸을 헌터 시키고 있다?"

"마법소녀인데······."

"돈 받고 활동하는 마법소녀가 어딨어. 아, 있을 수 있나? 하기야 여덟 살짜리 딸한테 헌터 시키는 엄마도 있는데······."

내가 소위 꼽을 주던 그때였다. 성미란이 눈을 질끈 감더니 내게 물었다.

"지금 돈 벌지 않으면 또 언제 벌어요?"

"커서 벌라고 해. 커서!"

"새롬이 다 컸을 때 괴수 한 마리도 안 남아있으면 어떡해요! 요새 센 괴수 잡겠다고 드론인지 뭔지 개발도 거의 다 됐다던데, 나중 가면 괴수 잡는 데 각성자들 필요 없어지면 어떡하고요? 새롬이 커서도 저 능력으로 돈 벌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잖아요! 헌터 시장이 지금 고점일 수 있다던데······!"

"그래서 벌 수 있을 때 벌게 해야겠다 이거야?"

"예! 그게 새롬이한테도 나아요! 지금 잠시 벌어두면 평생 걱정 없이 살 거 아니에요?"

"형수님?"

"당장 굶어 죽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멀리서 안전하게 레이저나 쏘는 게 뭐 그리 위험하다고 뉴스까지······!"

"형수님."

"뭐요!"

"헌터 노릇이 그리 안전한 거 같으면 본인도 총 들고 헌터 하지, 왜 딸만 괴수 잡게 시키고 자긴 가만히 있어?"

이 말에도 기어이 대꾸가 나왔다. 성미란은 내 시선을 피하더니, 우물쭈물 말했다.

"그야······ 걔는 좋아서 하는 거니까요."

"뭐?"

"새롬이는 지가 좋아서 마법소녀 하는 거라고요! 난 안 좋아하니까 가만히 있는 거고!"

이게 뭔 헛소리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해하기도 포기했거니와 곱씹을 가치도 느끼지 못한 나는 그저 이마에 손을 짚었을 뿐이다.

이 미친년을 어떻게 손 봐줘야 작고한 임형택 씨에게 부끄럽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저녁이었다. 어두운 가운데, 내 눈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붉은빛을 감지했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린 나는, 창밖으로 보인 장면에 두 눈을 부릅떴다.

열선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저기 저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시작된 열선이었다. 멀리서도 보일만치 굵고 붉은 열선이 대각선을 그리며 지상을 강타하고 있었다. 1km는 넘을 거리를 뻗어나가서는 지상의 한 지점을 타격하고 있었다.

일순 베헤모스를 떠올린 것은 내가 너무 예민한 탓이 아닐 것이다.

"저거 새롬이, 맞지?"

내 물음에 성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밖에 조직원들이 대기 중인 걸 확인한 뒤, 성미란이 도망치지 못하게 잘 잡아두라고 당부한 다음 공간이동 했다.

*******

153화 마법소녀 임새롬 - [4]

내가 막 아파트 옥상으로 공간이동 했을 때, 신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잡았네! 방금 그놈 몇 미터급이었습니까?"

"삼 미터급? 잘 쳐줘도 사 미터급은 안 될······"

성인 남성들의 목소리. 방금 오거를 잡았다느니, 그 크기가 어쨌다느니 하는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남자들을 보았다. 다들 움직이기 편한 복장에 총 한 자루씩을 들고 있었다. 저들도 헌터일까? 주민들 돈 받고 활동한다는?

그리고 헌터들 사이에 임새롬이 있었다. 헌터인지 마법소녀인지 모를 그 꼬맹이 말이다.

TV 화면이 아니라 눈앞에서 직접 본 그 마법소녀 차림은······ 지 엄마가 벼룩시장에서 천 원 주고 집어온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척 보기에도 볼품없고 초라했다.

만화 캐릭터의 비현실적 옷을 억지로 현실에 구현한 한계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저질 원단을 써서 만든 싸구려 옷인 까닭일까?

옷에 달린 쓸데없이 많은 프릴이며 플라스틱 보석, 반짝이 따위는 그 옷을 조금도 화려하게 보이게 하지 못했다. 딱 봐도 내구력 없는 옷을 지나치게 오래 입어 생겼을 얼룩이며 해진 흔적 탓에 더욱 볼품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따위 옷을 입은 임새롬의 얼굴을 보았다.

뉴스에서 미취학 아동이라 잘못 발표한 게 이해되는 얼굴이었다. 나이보다도 어려 보이는 조그만 얼굴, 조그만 입과 조그만 코 위에 달린······.

그 반짝이는 눈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 옷은 물론이요 손에 든 마법소녀 요술봉마저 손때가 잔뜩 묻어서는 낡은 흔적이 역력한 가운데, 오직 임새롬의 눈만은 무척이나 생기가 넘치는 게 아닌가.

그 넘쳐나는 생기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두워진 중에 험한 일을 하는데 어찌 저럴 수 있나?

그 반짝이는 눈을 유심히 살피던 중이었다.

"저거, 누구······"

"김극 같은데?"

"진짜? 진짜 김극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헌터들이 날 관찰하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친 헌터가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 김극입니까······?"

"그럼 가짜 김극도 있나?"

"김극 헌터가 여긴 왜?"

"뉴스 보고서."

내 말 한마디에 헌터들의 얼굴이 굳었다.

내 말에 위협을 느낀 듯, 한 중년 헌터가 앞으로 나와 임새롬을 가리고 섰다. 그러곤 손에 든 총을 움켜쥐는 것이 그걸 이쪽에 겨눠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등하는 것 같았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뭔 짓을 하든 날 조금이라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비각성 찌꺼기 주제에.

그리고 임새롬도 날 보았다.

"어?"

임새롬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 꼬맹이가 휙 움직여 제 앞의 남자를 지나쳤다.

헌터들이 기겁하여 그 꼬마를 제지하려 했다.

"아, 새롬아! 다가가면 안 돼! 저 사람―"

날 뭐라 소개하려는 걸까? 궁금했지만 들을 순 없게 되었다.

임새롬이 먼저 이렇게 외쳤기 때문이다.

"김극 오빠다!"

그 목소리만 들어도 반가운 기색임을 눈치챌 수 있었을 것이다. 헌터 하나가 낭패감 가득한 목소리로 임새롬에게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어! 울 아빠랑 같이 일했어요! 나랑 만날 때마다 용돈 줬어!"

함박웃음을 지은 채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정말 반가운 것 같았다. 나도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우리 새롬이! 오빠가 또 용돈 줄까?"

"아니? 이제 나도 돈 많이 버니까······ 이번엔 내가 용돈 줄게!"

진지한 얼굴로 그리 말하면서 파우치를 꺼내는 걸 보니 정말 내게 용돈을 주려는 것 같았다.

"됐어, 됐어!"

내가 허겁지겁 말리는 가운데, 나와 저 꼬마가 이 정도로 친한 사이일 줄은 몰랐는지 헌터들의 얼굴이 더욱 썩어들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헌터들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했다. 임새롬에게 들리지 않는 거리에서 말을 나눠야 했다.

헌터 하나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애 데려가려고 왔습니까?"

그리고 내가 대답했다.

"그럼 같이 마법소녀 놀이하러 왔을까?"

"경찰도 아니면서 무슨 권리로······"

저놈의 경찰 타령은 왜 불법행위 하는 놈들이 매번 지껄이는 걸까?

또다시 헌터 협회 간부로서, 어쩌고 윽박질러 준 다음 내가 물었다.

"너흰 또 뭐 하는 사람들인데 애 따라다니는 거야?"

"애 다치지 않게 지키는 역할이죠. 데스클로 역장체만 해도 평범한 데스클로들을 여럿 거느리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런 자잘한 놈들은 우리가 쏴 죽여야······"

"아, A급 헌터 따라다니는 비각성 헌터들이라 이거지. 이제 보니 새롬이, A급 헌터로서 나이 빼고 갖출 거 다 갖췄네?"

"새롬이는 A급 헌터가 아니라 마법소녀······"

개소리하는 턱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임새롬이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성이 오가거나 주먹질이 오가면 저 조그만 녀석도 내가 놀러 온 게 아님을 눈치챌 것이다. 그러고는 분위기 험악하게 만드는 날 악당으로 단정 짓고 쫓아내려 들지도 모른다.

날 쫓아내는 데 손에 든 요술봉과 그걸로 뿜어내는 열선이 도움 되리라 생각할지도 모르고······.

저 꼬맹이가 내게 살인광선을 쏠지 모른단 게 말도 안 되는 걱정은 아닐 터였다. 미국만 봐도 어린이가 총기를 사람에게 쏘는 사고가 빈번하지 않던가?

그리고 임새롬의 열선은 총알 한 발 발사하기보다 훨씬 쉽다. 권총처럼 슬라이드를 당기고 총구를 겨눈 다음 방아쇠를 당기는 과정조차 필요 없다. 그냥 손가락이든 요술봉이든 대충 겨누는 시늉만 하면 괴수 하나 흔적도 없이 녹여 버리는 열선이 발사된다.

그 열선의 위력은 척 보기에도 어지간한 미사일 이상이므로, 여덟 살 어린이에게 미사일 무제한 발사 스위치가 주어진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다.

아니, 무조건 명중하는 유도미사일 발사 스위치라 표현해야 더 정확할까? 이 꼬맹이의 열선은 베헤모스의 그것이 그랬듯 조준 보정 능력까지 딸렸다니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태연한 척하면서도 긴장감이 절로 든다.

지금까지 헌터 일을 하며 열선이 번쩍일 때마다 끔찍한 꼴을 봤던 만큼 도저히 맘을 놓을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헌터 아카데미에서 각성자 아이들을 통제해야 한다며 군기를 잡으려던 비각성 찌꺼기들의 심정을 이해할 지경이다. 젠장.

계속해서 헌터들을 노려보던 중이었다.

헌터 하나가 전화를 받고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더니, 다른 헌터들에게 말했다.

"아, 데스클로 한 무리 나타났는데 이번에도 지원 부탁한다고······. 데스클로면 너무 빨라서 쏘기 좋은 곳으로 유인하기도 어려우니까 우리가 직접 와야 할 것 같다는데요?"

그리고 내가 끼어들었다.

"데스클로들 나타났다고? 어디?"

그 장소를 들은 뒤, 나는 눈앞의 헌터에게서 K-2 한 정을 뺏어 들었다. 괴수가 나타났다는데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 혼자 그 장소로 가서 해결하고 돌아오는 게 이상적이겠지만, 그러느라 잠시 자리를 비웠다간 이놈들이 임새롬과 함께 튀어버리든 아니면 애한테 나에 관한 이상한 말을 속삭이든 할 것 같았다.

잠깐의 고민 끝에 나는 임새롬과 함께 공간이동 했다. 저놈들과 임새롬을 내버려두기 싫어서. 그리고 이 순진한 마법소녀에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변의 어른들은 이 애한테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입히고 마법소녀라 불러가며 현실을 속이려 들었겠지만, 이 모든 상황이 덜 심각한 척하려 했겠지만 나라도 현실을 알려줄 작정이었다.

시야가 바뀌었다.

한 상가 건물 사이 골목,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지는 데스클로 무리가 보였다.

이제 저놈들을 내가 모조리 쏴죽일 작정이었다. 임새롬에게 귀 먹먹하게 만드는 총성과 데스클로들의 비명을 들려주고, 피와 내장을 흩뿌리는 시체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K-2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을 때, 임새롬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이얍!"

그 꼬맹이가 내민 요술봉에서 열선이 방출되었다.

아까처럼 굵은 열선이 아니라 가느다란 열선이었다. 가느다란 만큼 광선 여러 발이 연달아 발사되어서는 혼자서도 화망을 이룰 지경인······.

내 빗나가지 않는 총알 세례와 역시 빗나가지 않는 마법소녀의 광선 세례에 노출된 데스클로들은 순식간에 피를 흘리며 널브러졌다. 그리고 임새롬이 우쭐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달빛 소녀 새롬이, 승리!"

한편 나는 방금 본 장면에 멍해 있다가 문득 물었다.

"방금 그거 달빛소녀 디아나 기술 맞지? 문라이트 개틀링······."

내가 알아봐 준 것이 기쁜지 임새롬은 바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맞아요! 오빠도 그거 봤어?"

"나무위키로 대충······?"

여아용 애니메이션답게 달빛 소녀 디아나는 박력 있는 액션과 실전적인 전투 신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거기서 디아나는 몰려다니는 괴수 떼를 상대할 때마다 일 분에 팔십 줄기 광선을 발사하는 문라이트 개틀링을 사용하는데, 애니메이션 장난감을 갖고 놀다 각성한 영향인지 이 애도 그 비슷한 짓을 할 수 있는 듯했다.

하여간 대단한 재능에 여러모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정말로.

애초에 열선 능력은 헌터 시장에서 놀라운 가치를 지닌 능력 아닌가. 나이 든 한의사 김형만 씨조차 열선 하나만으로도 A급 헌터로 활동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손가락에 가늠자 반지를 끼고 조준씩이나 해야 했던 김형만 씨와 달리 이 꼬맹이는 그럴 필요조차 없다. 이 애가 어느 정도 재능을 지녔는지는 따로 말할 필요조차 없으리라.

아주 잠깐이지만, 확실히 이 능력을 썩히기는 아깝단 생각이 들었다. 주변에 어른들이 달라붙어 마법소녀 옷까지 입힌 이유를 알겠단 생각도 잠시나마.

물론, 그놈의 옷을 계속 입게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신적 그물망에 한 사족보행 짐승의 접근이 포착되었다. 따로 확인할 것도 없이 데스클로였다.

난 놈의 접근을 다 알면서 내버려두다가, 놈이 저 앞까지 다가와 도약했을 때야 총구를 돌려 방아쇠를 당겼다.

'탕!' 소리와 함께 데스클로가 바로 우리 뒤에서 쓰러져 널브러졌다.

내가 그 몸을 짓밟자 배가 터져서는 지저분한 내용물을 흩뿌렸다. 총성에도 아랑곳하지 않던 임새롬이 그제야 눈살을 찌푸렸다.

"윽, 징그러!"

그리고 나는 그 심심한 반응에 실망했다. 난 이 아이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그 가느다란 어깨가 덜덜 떨리길 바랐다. 끔찍한 것을 보고서 눈을 감고 울길 바랐다.

그러나 이 아이는 그러지 않았다. 답답함을 느낀 내가 물었다.

"할 말은 그것뿐이야?"

"어, 많이 징그럽다?"

"방금 죽을 뻔했잖아. 그런데 드는 생각 없어?"

임새롬이 조금 생각하더니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안 죽었으니 됐다!"

"위험했잖아, 응?"

내가 내리깐 목소리에 굳은 얼굴로 그리 말했더니, 임새롬도 표정을 엄숙하게 바꿨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마법소녀는 원래 위험한 일이야! 그리고 마법소녀가 위험한 일 안 하면 선량한 시민들이 죽는데 그게 더 안 좋잖아요?"

세상 심각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는데, 그게 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어서 반박하기 어려운 탓에 더욱 당황스러웠다.

하여간 자기가 좋아서 마법소녀 노릇한다는 모친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정말로 이 일에 보람을 느끼는 것 같았으니까.

하기야 나 같아도 저럴 것 같긴 했다. 왜 안 저러겠는가?

만화영화에 심취한 어린애에게 만화영화 비슷한 초능력이 생긴 데다, 그 초능력은 실제 강력할 뿐만 아니라 상업적 가치까지 있어서 그 능력을 쓸 때마다 주변 어른들이 눈을 반짝인다.

TV 속 마법소녀가 괴수를 처치하면 시민들이 갈채를 보내듯 현실에서도 괴수를 처치하면 어른들이 환호해줄 것이요, 괴수를 쓰러뜨릴 때마다 그 영혼을 흡수하여 정신적 희열까지 느껴질 것이다.

더 나아가 돈을 벌 수 있어 주머니가 풍족해지는 데다 옆에서 모친까지 힘내라고 응원할 테니, 이 모든 일이 당연히도 즐거울 터였다.

그리고 나는 그 즐거운 일을 집어치우라고 설득해야 했다. 대체 어떻게?

내가 짓밟아 터뜨린 데스클로 시체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런 징그러운 시체 봐도 괜찮아? 앞으로도 계속 봐야 할 텐데······"

트라우마를 심어줄 겸 내가 그리 겁줬더니, 임새롬은 또 한 번 눈살을 찌푸릴 뿐 이번에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징그러운데, 안 불쌍하니까 됐어!"

"안 불쌍하다고? 왜?"

"울 아빠도 이놈한테 죽었대."

임형택 씨가 웬 데스클로한테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이 아이도 아는 것 같았다. 임새롬이 말을 이었다.

"내가 이놈들 안 없애면 다른 아빠들도 죽어······."

그 말엔 또 어찌 반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너 없어도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할 거라고? 거짓말이었다. 여기 어른들에겐 이 꼬맹이가 필요했다. 윤리적으로 어떻든 간에.

"일단······ 쉬러 가자."

또다시 막막함을 느낀 나는 임새롬의 손을 붙잡고 현장을 벗어나기로 했다. 임새롬이 따졌다.

"아저씨들한테 안 가요? 일 시마이 하고서 다 같이 밥 먹구 헤어져야 하는데?"

칭얼거리는 임새롬의 말을 대충 상대하며 공간이동 했다.

앞서 잠시 머물렀던 김석희의 아지트로. 거기 조직원들이 임새롬의 모친을 잡아두고 있을 터였다.

그러나 내가 공간이동 했을 때, 그곳에 성미란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김석희의 조직원들, 그리고······.

"너희 뭐냐?"

아마도 그녀의 실종에 관련된 듯 보이는 특무대원들이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을 뿐이다.

154화 마법소녀 임새롬 - [5]

"너희 뭐냐니까. 여긴 왜 왔어?"

내가 계속 윽박질렀더니, 특무대원들은 난처한 기색이었다.

"왜 왔냐니? 일하러 왔지 그럼."

그리 말하는 특무대원을 보았다.

베헤모스의 등 위에서 보았던 얼굴이군. 다른 한 명의 특무대원도 마찬가지인 것이, 둘 다 당시 베헤모스의 힘을 흡수해서는 급격한 영적 성장을 이룬 각성자가 분명했다.

그렇다면 전우로군.

하기야 내가 여기 있음을 광고한 마당에 어중이떠중이 둘을 보내진 않았으리라. 저들이 그때 정확히 얼마나 성장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건 쉽지도 달갑지도 않은 싸움을 치러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일하러 왔다니, 무슨 일?"

내 물음에 특무대원이 대답했다.

"너도 뉴스 보고 왔다매? 그 마법소녀 일이지 뭐. 웬 미친 아줌마가 딸한테 대리 헌터 시키고 돈 챙기고 있다잖아. 당연히 특무대에서 나설 일 아닌가?"

"음······."

"하여간 할 일 하러 온 건데 왜 그리 눈 부라리는지 모르겠다. 김극 당신이 특무대 싫어하는 건 당연히 잘 아는데, 그래도 그렇지 이번엔 마땅히 우리한테 시비 걸 이유가 없지 않나?"

놀랍게도 정론이었다. 이번 일은 특무대에서 헌터들과 으르렁거리는 일이 아니요, 특무대에서 뭔 개짓거리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내가 주먹부터 날릴 명분이 마땅히 없다.

그래도 일단 생각난 것을 물어보았다.

"마법소녀가 아니라 김석희 잡으러 온 건 아니고?"

"김석희? 누구······ 아, 여기서 담배 농사짓는다는 그 친구? 그 친구를 왜 잡아."

"특무대에서 자기 잡고 싶어 안달 났다고 본인이 주장하던데?"

"그건 그냥 그 친구 피해망상 아닌가? 담배 좀 팔게 내버려 두면 알아서 괴수도 잡고 그러는데 특무대에서 뭐하러 잡아?"

"그럼 여긴 왜 남아있는데."

"너 오면 붙잡고 있으란 지시 받아서······."

내가 말없이 싸울 준비를 했더니 특무대원이 움찔했다. 그가 말했다.

"그런데 그러긴 아프고 피곤하니까 이만 꺼질게. 됐지?"

알아서 떠나겠다니, 그걸 말릴 이유는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떠나기 전에 이거 대답하고 가라."

"뭘 대답해?"

"성미란 그 아줌마 어디 갔냐? 너희가 잡아갔냐?"

어지간히도 나와 싸우기 싫은지 순순히 대답이 나왔다.

"그 아줌만 아까 잡아갔는데······ 지금 차 태워서 본부 데려가는 중일걸?"

무슨 차에 태웠냐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그 역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로 나와 싸우기 싫은 모양이지.

특무대원 둘이 결국 떠나간 뒤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뻗었다.

수 킬로미터 바깥에서 달리는 차 한 대를 발견했다······ 의자에 앉는 자세를 취하며 공간이동 하자 나는 달리던 관용차의 뒷좌석에 엉덩이를 붙이게 되었다.

성미란은, 달리는 차량의 뒷좌석에서 특무대원 옆에 앉아있었다. 끌려가는 처지답게 세상 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가 소리쳤다.

"도와줘요!"

그 말과 함께 차 안의 공무원들이 모두 나를 발견하고 기겁했지만,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시한폭탄을 보듯 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복장을 보니 다들 특무대원이어도 각성자가 아니라 비각성 찌꺼기에 불과했다.

지금도 보라, 차 안에 난입한 날 상대로 항의 한마디 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내가 주먹이라도 휘두를까 봐 다들 입 다문 채 긴장하고 있을 뿐이다. 눈길을 줄 가치조차 없는 양들이었다.

나는 성미란을 보며 물었다.

"도와달라니, 어떻게?"

"이것들이 저 잡아가려 하잖아요! 아동학대가 어떻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그래? 그럼 도와줄게. 그런데 그 전에 하나 약속해."

"뭘 약속해요?"

"내가 당신 도와주고 감싸주는 대가로 당신은 딸내미 마법소녀 일 바로 그만두게 해야 돼. 마법소녀 일 그만두게 하곤 학교나 보내야 하고. 알겠어?"

"그런 말은 나중에 하고요! 일단 공간이동부터······!"

일단 급한 상황부터 넘기려는 태도를 보니 짜증이 솟구쳤다. 내가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생각할 때 이 상황을 해결할 가장 쉬운 방법은 댁은 대충 교도소 들어가게 내버려 두고 딸만 거둬서 돌보는 거야."

"예?"

"그러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야. 임형택 씨가 자기 죽고 나서 딸만 걱정한 게 아니라 댁도 걱정했거든? 이 철딱서니 없는 여자가 자기 죽고 대체 어찌 살아갈지 몰라서 전전긍긍했단 말이지.

그걸 기억해서 지금 바쁜 시간 쪼개서 지금 이러고 있는데, 사실 이미 생활비로 쓰라고 부조금도 과하게 내서 해줄 거 다 해준 판에 굳이 여기서 뭔가 더 해줄 의무까진 없다고 보거든? 그러니까 대답부터 해. 마법소녀 그만두게 하겠다고 약속할 거야, 말 거야?"

"마법소녀는 새롬이가 원해서 하는 거라니까요!"

"애가 하고 싶어도 부모인 당신이 못 하게 막아야 할 거 아냐? 그게 교육자로서의 의무 아닌가?"

내 말에 반박하고 싶은지 성미란이 입술을 우물거렸다. 그러다 겨우 뭔가 생각을 짜냈는지 이렇게 소리치는 게 아닌가.

"김극 씨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내가 왜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헌터 아카데미 동영상 봤어요! 교사가 군기 잡으려 하니까 바로 두들겨 패버리고선 학생들한테 막 나가라고 선동하드만! 각성자 애들 통제하려던 그 교사들은 바로 패버렸으면서! 나한테는 각성자 애를 통제하라고······!"

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 말하려던 그때였다.

차가 멈췄다. 그리고 차 앞을 한 남자가 가로막고 있는 게 보였다.

"한희?"

저 녀석도 이번 일에 나섰던 걸까? 그리고 지금은 지원 요청에 응해 도우러 온 거고?

이걸 보니 김석희가 특무대에서 여기 온 게 마법소녀는 핑계일 뿐이라던 주장은 순 헛소리였음을 확실히 알 만했다.

특무대에서 마법소녀를 어지간히도 중요하게 여겼음이 분명하다. 최대 전력을 대뜸 여기 보낼 줄이야?

그 마법소녀 꼬마를 특무대에서 그리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도 알 만하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강력한 각성자, 그것도 통제하기 딱 좋아 보이는 어린 각성자라니? 어린 각성자들을 미리 말 잘 듣게 통제해야 한다고 믿는 정부기관에서 환장할 만한 존재다.

심지어 그 어리고 강력한 각성자가 열선 능력자라는 사실도 눈이 뒤집힐 만한 점이다.

열선 능력자는 국가에서 가장 기껍게 여기는 각성자니까. 수십 수백억짜리 미사일을 아무 손실 없이 날리는 것과 다름없는 화력만으로도 매력적인데, 정령 능력자나 역장 외골격 능력자와 달리 열선 능력자는 딱히 총알을 흘리거나 막아낼 능력이 없다. 그러니 혹시 사고 치거나 반항적이라면 총 든 특수부대를 보내서 제압할 만하다.

그야말로 화력은 출중하여 유용한데 나라에서 통제하기도 어렵지 않은 셈이다. 유용하게 쓰다가 말을 안 들으면 언제든 치울 수 있는 도구쯤 될까?

아마 특무대에서는 이번에 임새롬과 그 모친인 성미란을 확보하여 임새롬을 통제하길 원했을 것이다. 지금부터 미리 교육하고 통제하여 나라에서 말 잘 드는 각성자를 하나 장만하길 원했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막아야 한단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린 동족이 그따위로 통제받으며 크게 내버려 둘 순 없으니까.

또 한편으론······. 그게 차라리 낫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여덟 살부터 괴수나 잡으며 크는 것보단 차라리 나라의 통제라도 받는 편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내가 각성자들은 마땅히 괴수들을 해치워야 한다고 믿는 게 사실이다. 소월의 각성자들은 비각성 찌꺼기 따위의 통제를 받지 않으므로 어리든 다 컸든 각성자라면 누구한테 통제받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그리 믿는 동시에, 난 요새 각성한 정진영 형에게 A급 헌터 노릇을 하도록 권했던 걸 후회하고 있다. 그 형이 헌터 생활을 계속하며 얼마나 망가졌는지 봤으니까.

방송에서 주장했듯 정신병자가 주로 각성한다는 이유는 아닐 것이다. 각성한 적 없는 비각성자 헌터들도 성격이 지랄맞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살벌한 환경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 채 괴수들과 총질하다 보면 자연스레 그리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임새롬······. 그 애의 출중한 능력을 썩히기는 아깝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계속 그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내가 여기 오기 전에 따로 조사해봤기로 그 애는 지금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는 상황이다. 쓸데없는 학교 수업이나 받느니 돈이나 미리 버는 게 인생에 이롭단 제 모친의 판단으로, 괴수들을 상대로 매일 마법소녀 놀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괴수들을 해치우며 근처 주민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소월의 각성자다운 장한 일이긴 한데······.

모르겠다. 혼란스럽다.

머리가 복잡해져선 눈을 감았다 뜨던 중이었다. 웬 당황한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어 날 현실로 끄집어냈다.

"예? 김극이랑 싸우라구요? 정말?"

고개를 들어보니 한희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나는 청력 또한 초월적인 신체강화자라, 그 스마트폰 너머 상대방의 목소리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럼 앞으로도 쭉 피하기만 할 거야, 인마? 이기든 지든 일단 한번 붙어봐! 짱깨들 오기 전에 데이터 수집이든 국내 인원으로 자체 해결이 되는지 파악이든 해봐야 할 것 아니야?」

"저번에도 그렇고, 지금까진 함부로 충돌하지 말고 피하라고 하셨으면서······."

「그거야 딴 각성자들 앞에서 네가 쳐 발리기라도 했다간 큰일이 나니까 그런 거고! 지금은 옆에 딴 각성자 놈들 없을 텐데 지든 이기든 뭔 상관이냐? 닥치고 일단 붙어! 혹시 죽일 수 있을 것 같으면 콱 죽여버리고!」

누군가의 노성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통화를 마친 한희는 난처한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내가 물었다.

"방금 그거 누구냐. 새 특무대장이야?"

"아뇨."

"그럼 네 아빠?"

한희석 그놈이 맞는 것 같았다. 한희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리는 걸 보니.

답답해진 내가 계속해서 물었다.

"네 아빠는 특무대장 쫓겨났으면서 대체 뭔 권한으로 자꾸 명령질을 하는 거냐?"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넌 왜 자꾸 들을 필요도 없는 그놈 말을 듣는 거고? 그놈 말을 듣는 게 너한테 대체 뭐가 이로워서?"

한희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고 입 다문 가운데, 다른 비각성자 특무대원들도 무슨 지시를 받은 것 같았다.

놈들이 주변에 카메라를 세팅하는 게 보였다. 데이터 수집인지 뭔지를 하기 위해 저러는 걸까? 그리고 한희는 고작 그따위 목적을 위해 나와 한 판 싸워야 하는 거고?

여기가 소월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강력한 각성자에게 짐처럼 달라붙은 비각성 찌꺼기 부모가 여기 또 있었단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한희석 그놈 말에 복종하는 게 효심이 아니라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라면 내가 그놈 콱 실종시켜 줄까' 하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려다 그만두었다.

주변에 보는 눈이며 듣는 귀가 있는 중에 그런 제안을 하긴 뭐 했기 때문에.

그리고 한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더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칼집째로 휙 집어던져 내팽개치고는 땅을 박찼기 때문에.

한희가 내게 달려든 순간, 저 앞에 뭔가 폭발하기라도 한 듯 흙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으며 시야에서 한희가 사라졌다.

내 초인적인 동체시력으로도 놈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없었다. 정신적 그물망이 간신히 그가 어떻게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려주었을 뿐이다.

그 모든 것이 저번에 봤을 때보다도 훨씬, 훨씬 빨랐다.

하기야 한희 저놈도 베헤모스가 죽었을 때 그 몸 위에 있었던 만큼 그 힘을 흡수했을 것이다. 놈의 죽음에 큰 기여를 한 만큼 남들보다 큰 영적 성장을 이뤘을 테고.

정신적 그물망이 놈이 내 등 뒤에서 달려들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속도도 무지막지하게 빨랐기에 나는 흠칫하는 한편 생각했다.

골치 아파 죽겠는데 이러는 게 차라리 낫다고.

155화 마법소녀 임새롬 - [6]

내 등 뒤, 저 멀리 십여 미터 바깥에서 한희의 어깨가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 팔도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허리를 회전시키며 뒤돌아 찼다.

그리하여 막 주먹을 뻗으려던 한희의 안면에 내 발이 명중했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한희가 저 멀리 뒤로 날려지자 이 상황을 카메라로 찍고 있던 비각성 찌꺼기들이 탄식했다. 설마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이는데 반격할 줄은 몰랐던 걸까?

"아······!"

한편 나는 방금 내게 걷어차인 한희의 반응을 살폈다. 그리고 실망했다.

한 대 맞아놓고도 분해 보이지 않는 얼굴, 전의라곤 전혀 없는 얼굴이 거기 있었다. 하기야 제 아비에게 강요당해 억지로 싸우는 것이니 의욕이 없을 만하다.

또한 날 보는 한희의 얼굴엔 약간의 억울함도 섞여 있었는데, 아마 이런 의문을 품고 있을 것이었다. '왜 공간이동으로 자리를 안 벗어나고 굳이 싸우려 들지?'

그 의문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이 상황을 벗어날 가장 편한 방법은 내가 성미란을 데리고 공간이동 하는 것이니까.

단지 내게 그럴 생각이 없을 뿐이다.

왜냐하면 나도 슬슬 답답하고 짜증이 나니까.

내가 각성한 이후로 별짓을 다 했지만, 지금까지 내 손으로 죽인 사람이라곤 수용시설에 쳐들어온 소월인 딱 한 명밖에 없다.

그런데 혼자서 다섯 명이나 손수 담근 놈이, 다른 특무대원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후로도 몇 명 더 담근 듯한 놈이 뭐 그리 심약하다고 아비 말을 저리 잘 듣는단 말인가?

대충 짐작 가는 이유가 있긴 한데, 그 이유를 들먹이며 본격적으로 설득하기 전에 누가 더 우위인지 보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저놈이 칼을 들지 않은 이상 제대로 된 승부라고 보긴 어렵겠지만 하여튼.

내가 손을 까닥였다.

도발한 보람도 없이 한희는 한숨을 푹 쉬더니 땅을 박찼다.

그 모습이 또다시 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나는 겉으론 담담하게 굴면서도 내심으론 기겁했다.

방금 등 뒤에서의 기습은 정신적 그물망으로 그 움직임을 완벽히 포착하고 반격할 수 있을 만큼 느렸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방금은 예열이 안 되었던 것이고 지금은 겨우 몸이 풀린 걸까? 아니면 방금은 의욕이 없어서 아주 대충 움직였다가 한 대 얻어맞고 나니 더 빠르게 움직이기로 결심한 걸까? 빨라도 너무 빨라서 정신적 그물망으로도 그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포착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일찍이 가속 능력을 지닌 데스클로들을 상대할 때 깨달은 사실이지만, 가속 능력자를 상대로 그 동작을 보고 판단하면 늦다. 미리 동작을 예측하고 대응해야 한다. 어떻게?

예의 괴수들을 상대하며 나름 대응책을 세워둔 게 있다.

사방에 뻗어있던 정신적 그물망을 이쪽으로 당겨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멀리 뻗은 그물망들을 접어서 내 주변의 그물망에 '겹쳤다'.

여러 겹 겹쳐져서 층계를 이룬 그물망에 한희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여러 개의 그물망에서 동시에 그 움직임을 파악하고 알려주니, 뇌에 실시간으로 주입되는 정보들은 더욱 생생하고 더욱 정확해졌다. 신경계가 몇 배로 고통스럽지만 뭐, 감수할 만한 일이다.

제 위치를 들키지 않으려는 듯, 이동을 거듭하던 한희가 다시 공격해왔다.

등 뒤의 기습을 반복하기는 너무 식상하다고 여긴 걸까? 이번엔 왼쪽에서의 공격이었다.

이번에도 주먹이었다. 가속이 실린 주먹질, 미리 기다리고 있던 나는 마주 뻗은 손으로 그 주먹을 감싸 쥐는 데 성공했다.

그대로 팔을 휘둘러서는 그 몸 전체를 휙 집어 던졌다.

가속 능력자라도 날려지는 속도마저 빠르진 않다. 그제야 당황한 한희 표정과 지금 장면을 촬영하던 비각성 찌꺼기들의 반응이 연달아 눈에 담겼다.

"아, 또······!"

당최 어떻게 막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반응들이다.

내가 이미 저격총탄까지 잡아낸 적이 있는데도 왜들 저리 놀라는지는 알 만하다. 어쨌건 내게 가속 능력 따윈 없으니까. 한 각성자가 최대 세 종의 능력을 지닐 수 있다고 알려진 마당에 초인적 반응속도까지 보여주니 기겁할 만도 하다.

그들의 놀란 반응을 나름 즐길 만하지만, 느긋하게 감상이나 하고 있을 겨를은 없다.

저 멀리 날려져서 바닥에 쓰러진 한희는, 또 한 번 나가떨어졌다고 무기력하게 누워있지 않았다.

가속 능력자답게 한희는 반격하는 속도 또한 어처구니없이 빠르다.

넘어진 한희가 벌떡 일어나는 것도, 벌떡 일어나자마자 내게 돌격해오는 것도 거의 한순간에 일어났다.

내가 여럿 겹쳐둔 그물망이 그의 접근을 경고하더니······.

위기감을 느낀 내가 공간이동 했을 때, 한희는 이미 내가 있던 자리에 도달하여 팔꿈치로 가격하던 중이었다.

그 뒤로 공간이동 했던 내가 한희의 등을 걷어찼다. 한희가 또다시 저 앞으로 날아갔고 구경꾼들은 이젠 아예 비명을 질러댔다.

"뭐야!"

한편 나는 반격에도 성공해놓고서도 가슴이 콩닥거렸다. 예상보다 더 빨랐고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 손에 길쭉한 칼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면 나도 상처 없이 반격하진 못했을 것이요, 관찰 데이터를 주기 싫어 쓰지 않으려던 공간이동도 써버리고 말았다.

경기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느낀 낭패감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는 씩 웃었고, 땅을 굴렀던 한희가 일어나도록 기다려줬으며, 여유를 과시하기 위해 팔짱까지 꼈다.

그제야 날 향한 한희의 얼굴이 달라졌다.

그 눈빛에 비로소 표독함이 떠올랐다. 좀 근사하게 포장해주자면 전의나 살기라고 불러도 될 감정이다.

하기야 저놈도 자존심이 있고 제 능력에 자부심이 있을 텐데, 열 받았을 것이다. 그 표독함으로 제 아비나 어떻게 하란 생각이 들긴 하는데 하여튼.

방금보다 더 어려운 싸움이 예상되던 그때였다.

"그만, 그만!"

믿고 있던 특무대원이 내내 밀리는 모습만 보여주니 더 싸우게 내버려 둘 수 없다고 여긴 걸까? 내내 카메라만 붙잡고 있던 특무대원들이 그제야 끼어들어서는 한희를 제지했다.

"이쯤 싸웠으면 됐죠! 안 그래요?"

나나 한희나 둘 다 역장 능력자답게 피 흘리긴커녕 먼지 하나 몸에 묻지 않은 만큼, 내가 일방적으로 두들겼을 때 중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긴 했다.

속으로 가속 능력자 대응 훈련을 더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가 말했다.

"판정으로만 따지면 내가 점수 더 딴 것 같은데, 그럼 대충 이겼다 치고 전리품 가져가도 되지?"

지켜보던 특무대원들이 딱히 '그래도 된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감히 '안 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모두를 무시한 채, 나는 차 안에 들어가 성미란을 보았다.

"그래서, 딸내미 마법소녀 그만두게 한다고 약속할 거야?"

내 물음에 성미란이 대답했다.

"예, 마법소녀 그만두게 할 거예요······."

이제야 정신을 차렸나보군. 내가 씩 웃으며 성미란과 함께 공간이동 하기 위해 그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차였다.

성미란이 말했다.

"그런데 이젠 안 도와주셔도 돼요! 공간이동으로 저 안 꺼내주셔도 되고······"

불과 몇 분 전에는 여기서 탈출시켜 달라더니 갑자기 무슨 소린가?

잠시 생각해봤더니 순식간에 상황 파악이 끝났다.

"형수님, 특무대에서 새롬이 자기네한테 맡기면 뭐 혜택 주겠다고 했어?"

물어도 대답이 없길래 더 구체적으로 물었다.

"새롬이 자기네 기관에 맡겨주면 형수님한테도 이것저것 챙겨주겠대? 그래서 생각이 변한 거야?"

그제야 성미란이 움찔하는 걸 보니 옳은 추측인 듯했다.

내가 한희와 실랑이하는 동안 차 안에서 특무대원들이 급히 설득에 나섰던 모양이다. 아동학대로 교도소에 처넣기는커녕 이것저것 주겠다고.

아까는 잡혀가서 옥살이하게 될 줄 알고 내게 도와달라 했지만 그게 오해였음을 알게 됐거니와 뭔가 혜택까지 약속받은 지금은 또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지?

한편 차 안의 다른 특무대원들은 불안한 표정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다.

내가 갑자기 뭔 헛소리냐 따지면서 다 뒤집어엎으려 들까 봐 걱정하는 모양인데, 그 걱정은 괜한 걱정이 아니었다. 확실히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주먹질하고픈 충동이 느껴졌으니까.

결국 임새롬은 정부 기관 아래에서 통제받으며 자라나리란 말인가? 역시 맘에 들지 않았다.

특무대원 개개인에 대한 혐오감이 사라졌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특무대 조직 자체를 향한 반감이며 정부의 각성자 통제 시도에 대한 혐오······, 그리고 이 모든 게 소월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소월의 각성자가 어떻게 자라나야 할지 내가 직접 가르침을 베풀어야겠단 생각도······.

뒤이어 그 모든 게 망상에 불과하단 생각도 함께 떠올랐다. 그놈의 망상이 내 어린 동족을 위한 것이 아니란 생각도.

내가 평소에 소월을 이상으로 생각하긴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거나 소월의 풍경을 한국에 구현하려 들지 않는 것은 내 동족들이 그걸 반기지 않으리란 걸 아는 까닭이다.

소월에 조금 있더니 진절머리를 치며 한국으로 돌아온 강준치는 따로 볼 것도 없다. 머릿속이 비각성자에 대한 혐오감이며 차별의식으로 가득 찬 내 라운드걸마저도 소월을 겪고 와선 그곳이 끔찍한 곳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그놈의 소월을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결과도 알고 있다.

테러리스트 김극, 환각 속 내가 군인 각성자들을 노예들과 함께 소월로 보냈을 때, 그들은 소월의 당당한 각성자로 거듭나는 게 아니라 결국 견디지 못하고 한국에 귀환했음을 기억했다. 환각 속 내가 몰락한 이유였다······.

머릿속에서 헌터 김극과 테러리스트 김극이 잠시 싸웠다.

그리고 결국에는, 헌터 김극이 이겼다.

"그래? 그럼 난 간다. 형수님?"

"예?"

"잘 지내요."

헌터 김극은 동료였던 임형택 씨의 딸에게 제 망상이나 실현할 순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하여 동료의 아내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더니, 성미란은 어색해하면서도 나름의 작별 인사를 해왔다.

"예, 김극 씨도요."

*******

그로부터 나흘 뒤, 헌트웹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놀랍게도 마법소녀 관련 글이었다.

익명 : 특무대 새끼들 진짜 등신이냐?

특무대에서 부천 마법소녀 잡아 왔더니 바로 탈출했다는데?

그 글을 보니 지난 나흘간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았다.

특무대에서 임새롬을 데려와 서울시 각성자 센터에 넣었더니, 일주일도 안 돼 탈출했다.

마법소녀 임새롬은 탈옥수처럼 은밀하게 빠져나간 것도 아니라 했다. 자길 가로막는 문이며 벽 따윌 모조리 열선으로 녹여 버리고 태워버리며 당당하게 시설을 빠져나가서는 알아서 택시를 잡아타선 부천으로 복귀했다고.

그리하여 마법소녀 활동을 재개했단 내용까지 보고서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 GangStar☆ : 8살짜리 고집 왤케 세;

기뻐해야 하는지 탄식해야 하는지 모를 기분으로, 나는 공간이동 했다.

다시 부천에 가서는 마법소녀를 찾아내는 데 성공했다.

"김극?"

자칭 마법소녀 도우미들,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A급 헌터 임새롬을 따라다니는 비각성자 헌터들이 날 보고 경계했지만 임새롬은 아니었다.

임새롬은 이번에도 요술봉 하나를 쥔 채 날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김극 오빠!"

그리고 난 저번보다 누더기가 된 임새롬의 마법소녀 복장(각성자 센터에서 탈출하는 동안 실랑이가 있었던 걸까?)을 보며 혀를 찼다.

"그새 옷이 더 해졌네. 엄마가 새 옷 안 사주냐? 가방 살 돈은 있으면서 딸 새 옷 사줄 돈은 없대?"

내 물음에 임새롬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옷 살 돈은 많은데 이 옷은 새로 못 사요. 이제 안 팔아."

"중고로 사면 되지 않나? 아니면 새로 주문 제작하든가."

그리고 또다시 도리도리. 임새롬이 쓸데없이 비장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나를 훈계했다.

"이건 아빠가 사준 거라 그런 식으로 막 갈아치우면 안 돼! 우품? 우유품? 뭐 그런 거야!"

음, 아버지가 데스클로 똥이 되었을 때 조금도 슬픔을 느끼지 못한 나는 저 애가 임형택 씨의 죽음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공감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돌렸다.

"그래서, 그리 계속하고 싶을 만큼 마법소녀 일이 좋아? 막 즐겁고 그래?"

"아니? 일 시마이 치고 돈 받고 밥값 뽐빠이 해서 뭐 먹을 때나 좋지, 평소엔 아무 때나 부르니까 많이 힘들지!"

"힘든데 왜 계속해?"

"힘들어도 계속하니까 마법소녀인 건데?"

강준치에게 저 여아가 지닌 괴수 척결 의지의 10%라도 있었다면 이미 한국은 괴수 하나 없이 평화로운 청정지대가 되어 만국의 우러름을 샀을 것이다.

난 또다시 반박할 수 없음을 느끼며 물었다.

"요즘도 달빛 소녀 디아나 보니?"

"아뇨? 만화 도중에 끊겼어요. 보고 싶어도 더 못 봐."

"하기야 3기 26화까지 진행하고서 도중에 방영 중단됐지. 게이트 열린 후로 스튜디오 상황이 계속 나빠지더니 저번에 결국 파산해서······. 초은하 성단포식 대괴수 전쟁이 막 시작돼서 본격적으로 재밌어질 예정이었는데 아쉽게 됐어."

"오빠 만화 안 봤다고 안 했어?"

"나무위키에서 본 거야. 그래서 달빛 소녀도 더는 방영 안 되는데 왜 굳이 마법소녀 노릇을 계속하는 거야?"

"달빛 소녀 디아나는 더는 활동을 안 하니까 이제 세상을 지키는 건 어린이 시청자였던 내 몫이죠."

"아, 그거. 마지막 편이 돼버린 3기 26화 마지막에 어린이 시청자들한테 방영 종료 선언하면서 나온 나레이션······."

"만화 안 본다고 안 했······"

"이것도 나무위키."

임새롬이 의심으로 가득 찬 시선을 내게 보냈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나는, 이토록 의지로 가득 찬 아이를 설득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나보다 더 나은 교육자인 센터 강사들은 물론, 나보다 더 단호하고 억압적이었을 그 모친이며 특무대원들도 이 아이의 마법소녀 복귀를 끝내 막지 못했는데 나라고 별수 있을까?

내가 계속 따라다니면서 간섭할 수도 없는 이상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이 분명해진 이상 도움을 주려거든 다른 방식으로 주어야 할 터였다.

나는 임새롬과 작별한 뒤, 김석희의 아지트에 공간이동 했다.

"아, 김극!"

특무대가 부천을 떠난 게 내 덕이라 여기는지 과할 만치 반가워 하는 부천 남작에게 몇 가지 부탁을 했다.

이곳의 영주로서 여기서 활동하는 마법소녀의 편의를 봐달란 부탁, 그리고 그 모친이 재테크랍시고 이상한 걸 사들일 때 부하들을 시켜 그러지 못하게 막아달란 부탁이었다.

그리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마치고선 다시 인천으로 복귀했다.

이후로도 부천 마법소녀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다.

마법소녀가 무슨 괴수를 해치웠다느니, 그 주변 시민들의 반응이 어쨌다느니 하는······. 그야말로 만화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소식들 말이다.

*******

156화 특무대원 강준만 - [1]

"김극, 그냥 뭐 또라이죠."

"제가 설명받은 바로도 그렇더군요. 가장 신경 써야 할 인물이라고."

"하기야 본국에서도 대강이나마 '한국 요주의 각성자' 목록 전달받고 오셨겠죠? 거기서 뭐라 설명했을지 모르겠지만 크게 틀린 내용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알죠?"

"의도며 행동이 누가 봐도 분명한 친구니까······. 각성하기 전에도 선생이며 조교가 부조리하게 군다고 대뜸 주먹 휘둘러서 폭력 전과 2범 된 친군데요. 각성한 이후로도 그때랑 행동 원리가 크게 달라지질 않았어요.

자기가 보기에 부조리한 것 같으면 바로 무력 행사에 나서는데, 주먹 휘두를 상대를 전혀 가리질 않습니다. 특무대가 범죄자 제압하는 과정이 불합리하다고 바로 정부기관인 특무대 상대로 싸우질 않나. 자기가 부르짖던 법 통과 안 됐다고 국회의원도 납치해서 협박하질 않나······.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게이트 열리기 전이면 지 알통 볼록한 맛에 살아가는 그런 친군 바로 차가운 철창 안에 가두면 되었는데 이젠 그럴 수도 없게 됐단 겁니다."

"그야 공간이동자니까요."

"단순히 그런 이유는 아니긴 한데······. 왜, 김극 같은 친구면 공간이동 없어도 알아서 교도소 벽 부수고 뛰쳐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초인 범죄자들은 굳이 잡아넣으려 들지 말고 현장에서 살처분해야죠."

"지금까지 그런 방침이었는데. 바로 그게 문제가 되는 바람에······."

"그 관련 일로 김극 그 사람이 버스 시위 일으켰다고 듣긴 했죠. 그렇듯 이래저래 저지른 일이 많은데도 지금까지 김극 그 사람 내버려 둔 이유가 있습니까? 치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이유 말입니다."

"그게, 김극 이 친구 능력 구성 딱 보면 아시겠지만 그러기도 어렵습니다. 미사일도 막아내는 역장 외골격에 신체 절반 불타 사라져도 칼로리만 보충하면 순식간에 재생 끝나는 신체강화 능력자인 것만 봐도 답이 없어보이는데, 그렇듯 이족보행 하는 탱크가 공간이동까지 가능한 것 아닙니까?"

"궁지에 몰아넣어도 일단 숨만 붙어있으면 바로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겠지요."

"그래요. 어떻게 제거할 방법도 마땅치 않은데, 한 번 그러려다 실패하기라도 하면 아주 그냥 큰일이 나지 않겠습니까."

"큰일이 날 거란 말씀은, 자칫 암살을 실패했다간 그 잘난 공간이동으로 헌터에서 테러리스트로 전직할까 봐서?"

"그것도 우려되긴 하는데, 김극 이 친구가 국내 각성자들 사이에서 위상이 대충 마틴 루터 킹쯤 됩니다. 각성자 범죄자 즉결처분 관련으로 버스 시위를 주도하지 않나, 빙정 능력자들 재산까지 잔뜩 써가며 도우며 예전에 하던 인권운동 쭉 이어나가질 않나.

여러모로 한국 각성자 사회에 이름값이 엄청난 친구예요. 심지어 협회 간부이기까지 해서 함부로 건드리기도 어려운데, 그리고 또······ 강준치 아시죠?"

"강준치, 물론 잘 알죠. 저나 그 사람이나 같은 S급으로 묶이지만, 영상자료 보니 강준치 그 사람한텐 S 한두 개 더 붙여줘야 하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던데."

"강준치 그 친구랑 김극 이 친구가 또 친해요. 김극이 주도한 버스 시위에 강준치가 도우러 오기도 했고요. 그러니까 대책 없이 건드렸다간······."

"그러니까 요는 이건가요. 원체 죽이기도 어려울 각성자인데, 인맥이며 영향력까지 막대해서 함부로 건드리기 어렵다?"

"뭐, 그렇죠. 그러니 혹시라도 김극 이 친구 처리하려거든 기회 봐서 단번에 그래야지, 한 번 실패라도 했다간 감당이 안 될 겁니다."

"'혹시라도 김극 이 친구 처리하려거든?' 말씀하신 것만 들으면 당장엔 처리할 계획이 없다는 것 같은데······."

"그게, 요주의 인물을 미화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씀 드리긴 좀 꺼림직하긴 하지만, 그래도 순 패악질만 부리는 친구는 또 아니에요. 김극 이 친구가 과 못지않게 공도 큰 친구다 이 말입니다."

"국회의원 납치 협박하는 범죄자를 내버려 둘 공이 있습니까?"

"김극 이 친구가 사람 상대로만 들이받는 게 아니라서요. 괴수 상대로도 앞뒤 안 가리고 들이받는데, 그런 식으로 고위험 괴수들 처리해가며 세운 업적이 한둘이 아닌 데다 성실하기도 또 말도 안 되게 성실해서는······ 혼자서 인천 내 괴수 모조리 처리해버리더니 현재 수도 정상화에도 독보적으로 지대한 공을 세우고 있어요."

"하기야 김극 그 사람 괴수 사살기록 보고서는 0을 실수로 몇 개 더 넣었나 싶더군요."

"예. 그러니까 아무튼 당장 처리해야겠다 생각하실 것까진 없고 그냥 뭐······ 압박감만 주시면 됩니다."

"압박감이요."

"그래요, 압박감. 일단 S급께서 한국에 와계시기만 해도 무서울 것 없이 행동하던 각성자들 행동이 위축되지 않겠습니까? 김극도 일단 분노조절장애까진 아니라니까 나름대로 행동을 자제할 것 같은데······."

"아무튼 김극 그 사람 관련 방침은 잘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최용은요?"

"아, 최용이요?"

"예. 그 사람도 요주의 인물 목록에 있던데."

"최용 그놈이 진짜 악질이죠. 인터넷에서 혐오팔이 하며 인기 얻은 놈이 힘에 지위까지 얻어버린 개자식. 그놈은 이미 다 계획이······."

*******

내가 평소에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헌터 일을 하느라 여유가 없긴 하지만, 그래도 아예 비는 시간이 없는 건 아니다.

던파 레이드를 비롯해 각성자 수용시설 방문이며 헌터 협회 간부로서의 활동까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름대로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편이다.

헌터 아카데미 이사 노릇 또한 내가 비는 시간에 주로 하는 일 중 하나다.

이사 노릇이라 한들 별것 없다. 아무 때나 툭하면 헌터 아카데미에 방문해서는 이것저것 확인한다. 수업이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요새 학생들 대우는 어떤지, 나 없는 사이에 강사들이 학생들 상대로 패악질을 부리진 않았는지······.

오늘도 헌터 아카데미에 예고 없이 찾아와서는 특별강사 수업을 참관했다.

그 특별강사는 현직 특무대원이었는데, 당연히도 각성자였다. 헌터 출신 각성자를 교사 노릇 시킬 돈은 없다 보니 특무대원을 각성자 강사랍시고 보내선 강의를 시킨 것이다.

고등학생들, 그러니까 곧 졸업해서 바로 헌터 일을 시작할 학생들을 상대로 한 강의였다.

강의랍시고 어떤 헛소리를 할지 몰라 걱정되긴 했다. 요새는 일부 특무대원들도 괴수 사냥에 동참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실제 헌터들보단 못한 면이 많을 테니까.

혹시 틀린 말을 하면 지적할 생각으로 팔짱 낀 채 수업을 참관했다.

"······그래서 비각성자 팀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지. 역장체 데스클로들이 평범한 데스클로들과 함께 다니는데, 평범한 데스클로들도 각성자의 초고밀도 근육이며 역장 외골격을 쉽게 찢어버리거든? 비각성자 팀원들이 화망을 이루어서 자잘한 데스클로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차단해야······"

그런데 막상 그 강의를 들어보니 상당히 괜찮은 것 아닌가. 이내 팔짱을 풀고 진지하게 강의를 듣던 중이었다.

강의를 듣다 말고, 웬 학생 하나가 이렇게 묻는 것 아닌가.

"선생님, 특무대원 아니에요?"

의심으로 가득 찬 목소리. '특무대원 주제에 뭘 안다고 헌터 관련 강의를 하느냐?'는 지적이 분명했다.

보아하니 저 학생도 헌트웹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특무대원들을 헌터 할 자신이 없어 공무원을 선택한 패배자 집단 취급하는 것은 딱 헌트웹의 정서니까.

"그런데 왜? 요샌 특무대도 괴수 잡아. 나도 꽤 잡아봤고."

특무대원이 반박했더니 학생이 캐물었다.

"가장 센 놈 뭐 잡아봤는데요?"

"글쎄, 가장 센 놈이면······ 베헤모스?"

특무대원의 대답에 질문을 꺼낸 학생이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그 표정을 보아하니 '귀여운 애기버섯이여, 저 말이 사실이에요?' 하고 묻고 싶은 것 같길래 내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베헤모스 등 뒤에서 저 친구가 열심히 칼질했지. 작전 시작부터 쭉 칼질했으니 베헤모스 죽음에 저 친구 지분이 적지 않을걸?"

그제야 학생들이 오, 하고 감탄하는 가운데 특무대원이 슬쩍 날 바라보았다.

그 복잡한 표정을 보니 내가 편들어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특무대를 싫어하기로 악명 높은 만큼 망신 주거나 골탕 먹이기라도 할 줄 알았나 보지?

그렇듯 내가 예상 밖의 행동을 해서일까, 강의가 끝난 뒤 특무대원이 슬쩍 내게 다가왔다. 어색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고.

"방금 고마웠다."

"뭐 그딴 걸로 감사씩이나? 하여간 강의 내용 좋더라."

"어, 괜찮았나?"

"확실히. 내가 현역 헌터로서 듣기에도 지적할 게 딱히 없던데? 내가 헌터 시작하기 전에 저런 강의 들었으면 시행착오가 확 줄었을 것 같기도······."

내가 칭찬까지 해주니 그제야 특무대원이 웃었다.

"이거 내가 다 미안해지네? 내가 베헤모스가 죽기 전에, 너 영혼 흡수 방해하려고 여기서 꺼지라고 막 소리쳤던 걸로 기억하는데······."

"나도 그때 보복으로 정진영이며 다른 헌터들 등 위로 올려놔서 너희 경험치 뺏어 먹었으니 됐어. 하여간 강의 진짜 괜찮던데. 박주헌이가 전직 헌터로서 괴수 사냥 노하우 전수해줬던 거냐?"

"아니? 특무대에서 괴수 잡기 시작한 건 그 선배 죽은 지 한참 지나서니까 그건 아니고······."

"그럼 누가 노하우 전수해줬는데?"

딱히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은가?

"어······ 있어. 외부 초빙 인사가."

그런데도 어쩐지 우물쭈물 대답해서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딱히 큰일도 아니고 하니 딱히 캐묻지 않고 좋게 헤어진 바였다.

교실을 나오니 나이 든 학생 하나가 날 붙잡고는 말을 걸었다.

"김극 형! 내년부터 지자체랑 헌터 계약 맺는 것만으로도 군 복무 갈음하는 법이요! 그거 형이 주도해서 만들었다는데 맞아요?"

"내가 주도해서 만들었다기보단, 내가 협회에서 그 관련으로 여러 번 목소리 냈더니 그런 법 만들어지긴 했어. 그게 왜?"

"고마워서요! 군 생활하기 싫다고 특무대 들어가면 의무복무기간 길다니까, 그냥 군 복무 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형 덕분에······!"

내가 목소리를 낸 후로 만들어진 법이긴 해도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더 많은 각성자 헌터 수급이 절실해진 만큼 정부로선 더 원활한 각성자 헌터 수급을 위해 알아서 예의 법을 마련했으리라고 설명했지만, 학생은 다시 한번 내게 고맙다고 말했다.

"각성자들이 입대하면 여러모로 힘든 일이 있다는데, 덕분에 큰 걱정을 덜었거든요? 고마워요, 진짜!"

확실히 강화도에서 각성자 병사들이 받는 처우를 보고서 주장한 법이긴 했다. 그 수혜자가 여기 있는 모양이지?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져서 웃었다. 학생도 덩달아 마주 웃었고.

이럴 때마다 소소한 보람을 느낀다. 내가 굳이 과격하게 굴지 않고도 내 동족들을 챙겨냈다는 보람이다.

어쩌면 이런 식으로 구는 것이야말로 내 동족들을 위한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기도 한다.

테러리스트 김극의 기억이 내 머릿속을 침식하는 중에 그에 대한 경계심이 커진 데다, 마법소녀 임새롬 일로 한 번 타협해본 이후로 종종 하는 생각이다.

혁명가들은 흔히들 타협을 죄악시하곤 하지만, 인간끼리 살아가며 타협하지 않고 매번 강대강으로 대치하는 것보다 피곤한 일이 또 없으니까. 사실 이러는 게 옳은 걸지도······.

집에 돌아오는 길에 게이트 경보가 울렸으므로 급히 출동했다. 또다시 괴수들을 상대로 망치를 내리찍고 헌터 라이플을 쏴 갈기고서 집에 돌아와 헌트웹을 켰다.

그리고 헌트웹에 올라온 글 하나를 보고서 눈을 껌벅였다.

친애하는 협회장, 최용이 올린 글이었다.

Ⓐ Dragon : 다들 Justice1994 기억하냐?

이름은 강준만이고, 각성자 경찰로서 박봉 받으며 괴수들 잡던 친구였지. 이후로 특무대로 소속 바꿨다가 특무대 나와선 A급 헌터 계약맺고 헌터 일 하다가······ 결국 베헤모스 사태에서 전사자 명단에 이름 올린 친군데!

강준만 살아있는 거 확인했다. 어디 있는지도 파악했고.

특무대에 잡혀 있는 것 같으니까 다들 또 한따까리 할 준비해라. 알겠지?

157화 특무대원 강준만 - [2]

그 글을 본 순간 '또?' 하고 생각한 것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또 특무대와 맞붙자니? 방송국에 쳐들어가서는 특무대와 아웅다웅한 지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그러잔 말인가?

그리고 강준만이 살아있다니, 그건 또 무슨?

강준만, 그 친구의 목이 절반쯤 잘린 걸 목격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나도 그중 하나고.

그래서 저번에 최용 왈, 강준만이 베헤모스 사태 이후에 글을 올린 걸 목격했다고 주장했을 때도 믿는 사람이 딱히 없었던 걸로 안다.

이미 유통기한 지나버린 떡밥을 다시 뿌리는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뭔 핑계를 대서라도 특무대와 또 실랑이하고 싶은 건가? 그게 아니면······.

스크롤을 내리니 첨부된 사진이 여러 장 있었다. 그걸 보니 최용이 갑자기 제 망상으로 지껄이는 것은 아님을 알 만했다.

Ⓐ Dragon : 봐라, 이거 마스크로 하관 가리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강준만 아니냐? 그 옆에 있는 새낀 특무대원 아니고?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사진이 여러 장이었는데, 사진의 주인공은 내가 봐도 강준만이 분명했다.

사진에서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 내가 보기에도 강준만 같았다. 강준만의 양옆에서 비닐봉지를 들고 걸어가는 남자들은 특무대원들이 확실했고.

확실히 수상해 보이는 사진이긴 했다.

그렇다면 정말 최용의 주장대로인 건가? 특무대원들이 강준만을 잡아두고 있다는 주장도 사실인 것이고?

내 의문과는 상관없이, 그 글에 달린 댓글을 보면 반응이 여러모로 엇갈렸다.

Ⓐ 5my지저스 : 특무대 씹새끼들 이젠 헌터 잡아서 감금까지 하나 보네? 당장 쳐들어가서 반쯤 죽여버립시다!

정진영 형과 같은 최용의 열렬한 지지자가 우선 눈에 띄었다.

익명 : 강준만 저 사람 확실히 살아있긴 했나 보네. 우연히 닮은 사람이라기엔 하필이면 특무대원이랑 함께인 게 너무 공교로우니까. 그런데 특무대에서 굳이 잡아 가둘 이유가 있나?

Ⓐ 러그소라게 : 강준만 저 사람 버스 시위 사건 때 김극 도움으로 의무복무기간 남았는데도 특무대 관두고 헌터 전직했잖아. 멋대로 조직 나간 게 밉보인 거 아닌가?

상황의 진위를 따지려 드는 중립도 여럿이었고, 무엇보다······.

익명 : 또 특무대랑 맞짱 뜨자니 최용 진짜 모친상 당했냐? 작고하신 모친께서 저승길 동무 좀 넉넉하게 보내달라고 꿈에 나와 부탁하심?

익명 : 노조도 이따위로 자주 난동 부리면 회사 망한다

익명 : 피곤해 죽겠네 ㅅㅂ 최용 저 새낀 헌터 협회장이 아니라 뭔 조폭 행동대장이냐? 괴수랑 싸우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뭐 자꾸 특무대랑 뜨재

내가 방금 예상했듯 피곤과 부담감을 호소하는 의견들이 유독 많았다.

저번 방송국 습격 이후로 존재감을 드러낸 최용 반대파들일 것이다.

헌트웹 익명만 보면 비각성 쓰레기를 가스실로 보내주겠다며 달려드는 내 라운드걸조차 지금은 잠잠한 것이, 저들 중 몇몇은 각성자 헌터 같았다. 어쩌면 저번 방송국 습격에 참여한 인원조차 지금은 부정적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중국의 개입이 확실해진 가운데, 국내 각성자들의 난동이 괜한 빌미를 줄지 모른다며 걱정하는 의견도 소수 있었다.

익명 : 지금은 좀 수그려야 하지 않나? 김극햄이 리기룡 너무 쉽게 때려잡아서 다들 심각성을 못 느끼는 것 같은데, 리기룡이 특무대복 입고 나온 것 자체가 정부에서 보내는 노골적인 압박 아니야?

익명 : 국내 각성자들 난동을 정부 여력으로 제압하기 어려우면 짱깨 각성자라도 데려와서 진압하고 말겠다는······.

익명 : 확실히 특무대에서 일부러 리기룡 보여준 것 같긴 해. 다 큰 아들놈이 자꾸 부모인 자기 두들겨 패면 가만히 처맞고만 있는 게 아니라 옆집 깡패라도 데려오고 말겠다는? 뭐 그런 느낌으로 보여준 거지

그런 의견들에는 모조리 시비가 걸렸다.

특무대와의 잦은 충돌에 피로감을 호소하는 의견엔 '특무대에서 너 잡아가면 다른 헌터들한테 도와달란 말 하지 말라'는 핀잔이, 중국의 개입을 걱정하는 의견엔 '짱깨에 벌벌 떠는 조선족'이란 욕이 달렸다.

그렇듯 잡음이 가득하다는 것 자체가 최용의 이번 지령이 무리수란 사실을 증명했다. 방송국 습격 때는 지금보다 훨씬 일사불란했고 반대의견도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아니니까.

그래서 내 의견은 어떻냐면, 복잡했다.

강준만이 정말 특무대에 붙잡혀 있다면······ 말할 것도 없이 쳐들어가든 주먹을 휘두르든 해서 구해내야 한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역시, 특무대와 또 싸우잔 것은 부담스럽다.

불과 오전에도 특무대원과 나름대로 정답게 이야기 나누고 온 마당 아닌가? 강준만을 잡아간 것이 확실한 것도 아닌데 바로 한 판 붙자는 것은 좀······.

*******

그리하여 다음 날 오전.

헌터 협회장 최용이 강준만 구출 작전에 나설 A급 헌터들을 소집했을 때, 나는 꺼림직함을 느끼면서도 일단 소집에 응했다.

약속장소에 향하니 A급 헌터들과 그 팀원들이 모여있었다. 이런 자리에 빠지질 않는 정진영 형부터······ 내 라운드걸까지.

나는 백담비에게 다가가 급히 물었다.

"여긴 왜 왔어요?"

백담비는 날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이렇게 되물었다.

"오히려 저번에 방송국 때려 부술 때 절 왜 안 불렀는지 묻고 싶은데요. 저번에 새롬이 도울 때도 저 불렀으면 좋았잖아요. 왜 자꾸 절 빼놓으시는지······."

"새롬이 일이야 돕는 사람 많다고 딱히 도움 될 일이 아니었고! 방송국 건이야 아는 사람 불러서 같이 할 만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안 불렀죠?"

"괴수 사냥은 뭐 지인 불러서 같이 즐길 만한 일인가요."

"아니, 사람이랑 치고받는 게 괴수 잡는 거랑 같나?"

"뭐, 무슨 심정으로 안 불렀는진 알겠어요. 그래도 불러주면 좋겠어······. 나도 이젠 제대로 된 A급인데, 이런 일에 참여 못 하면 오히려 그게 더 소외감 느껴지지 않겠어요?"

"참여 못 한다고 소외감 느끼기엔, 딱 봐도 지금은 사람이 적지 않아요?"

내가 그리 지적했더니, 백담비는 여기 모인 인원을 둘러보고는 순순히 사실을 인정했다.

"하기야 그렇네요. 저번 방송국 습격보다 확실히 사람이 확 적네······?"

'강준만 구출' 자체가 저번 '출동비 동결 저지'보다 모두한테 와닿는 목적이 아닌데다, 잦은 충돌에 부담감을 느낀 탓에 사람이 별로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최용도 여기 모인 인원들을 둘러보더니 불만이 상당한 듯했다. 인원 한 명 한 명을 유심히 살피는 것이 정확히 누구누구가 안 왔는지 체크하려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최용이 그 불만을 직접 말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약속 시간이 지나 슬슬 행동에 나설 때가 되자, 최용이 담담한 얼굴로 모두의 앞에 섰다.

"모두 이렇게 모여줘서 고맙습니다. 여기 부른 이유 다들 알고 계시지요? 우린 강준만 그 불쌍한 친구 구하러 모였습니다!"

최용이 연설 비슷한 것을 시작했다.

"강준만이 누군지 잘 모르시는 분들이 계실 텐데, 진짜진짜 불쌍한 친굽니다. 게이트 열리고 각성자들 생겨났을 때 경찰에서 각성자들 특채한 거 기억하시죠?

요즘이야 역장 외골격 가지고 경찰 되면 호구등신 취급받지만, 당시엔 멋모르고 경찰 됐다가 의무복무기간에 묶인 각성자들 있었잖아요. 강준만도 그중 하납니다.

그 친구, 경찰 돼선 혹사당했습니다. 뭔 데스클로 나타났다고 주민신고 들어오면 각성자란 이유로 그 친구가 매번 출동해야 했어요. 경찰 월급 받고 괴수 잡느라 대가 없는 개고생을 했단 말입니다.

그 친구가 경상도에서 일하던 경찰이거든요? 경상도에서 헌터 하던 저랑 마주칠 일이 많아서는 그때 친해졌죠. 서로 하소연도 하고, 누가 더 힘들다며 말도 주고받고······.

그 친구가 나중엔 월급 좀 더 올려받겠다고 특무대로 소속 바꿨는데······. 특무대가 김석희 즉결처형하려던 그때 김극 씨가 막아낸 거 다들 기억하시죠?

나중에 김극 씨가 강준만 그 친구에게도 여러모로 힘써줬습니다. 버스 시위 성공한 후에 김극 씨가 강준만도 사건 관련자 목록에 이름 넣어서는 그 친구가 의무복무기간 남았는데도 특무대에서 나오게 도와줬어요!"

최용이 말하면서 내게 손짓하길래 나는 순순히 나와 그 옆에 섰다. 그 체면을 세워줘야 했다.

"그렇게 강준만은 헌터 일을 시작했는데요. 이후로도 저와 연락을 자주 주고받았습니다. 그 친구가 경찰로서 데스클로는 잔뜩 잡아봤지만 A급 헌터 노릇은 또 처음이라 적응하기 어려워했거든요?

제가 친구이자 선배 헌터로서 이것저것 헌터 노하우도 전수해주고, 계약도 봐주면서 개인적인 도움을 많이 줬죠. 그때마다 고마워하던 그 친구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말을 계속 들어보니 최용이 개인적으로 강준만을 신경 쓰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기야 예전에도 강준만이 살아있는 것 같다며 신경을 쓰곤 했으니까······.

"그런데 특무대 이 새끼들이, 그 친구가 특무대 때려치우니까 강준만을 간악한 박쥐 새끼쯤으로 여긴 걸까요? 제가 올린 사진 보면 아시겠지만 현재 강준만은 특무대와 함께 있습니다. 좋아서 특무대와 같이 있을 린 없으니 억류된 게 분명하고요!"

그리 말하면서 표정이 험악하게 변한 최용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여기 여러분을 모은 목적을 말씀드립니다. 저는 제 친구이자 동료 헌터를 구하러 여러분을 여기 불러 모았습니다. 부름에 응해주신 점, 도우러 와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여기 온 헌터 하나가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겁니까? 아무리 그래도 강준만이 잡혀 있는 게 확실한 건 아니잖아요. 따로 특무대에 문의는 해봤어요?"

"해봤죠. 해봤는데 제대로 된 대답이 없더군요? 뭔가를 숨기는 거죠. 숨기는 것 자체가 뭔가 있다는 확실한 증거고요."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은 이때 첫 번째로 불안감을 느꼈을 것이다. 결국 별다른 증거는 없다는 소리 아닌가.

그래도 여기 모일 정도면 다들 최용의 열렬한 지지자 아니면 최소한 단체행동에 의의를 두는 사람들이라, 다들 별말 없이 최용을 따라 버스에 탑승해서는 특무대 본부에 도착했다.

당연히 특무대에서도 헌터들의 행동을 파악하여 대비하고 있었다.

특무대 본부 앞을 지키고 있는 특무대 인원이 상당했다. 최용이 앞으로 나가 요구했다.

"켕기는 것 없으면 들어가게 비켜! 직접 들어가서 감금 시설 같은 거 없는지 확인할 테니까!"

그에 대한 특무대원의 대답은 단호했다.

"미쳤나? 경찰도 아니고 헌터가 뭔 권한으로 수사를 하겠다는 거냐?"

썩 꺼지란 말이었다. 최용은 뒤돌아서더니 피식 웃고는 우리한테 말했다.

"보세요. 직접 확인해보겠다니까 들여보내 주지도 않네. 보여주면 안 될 게 저 안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 아닙니까?"

글쎄, 뭔가를 숨기기 위해 들여 보내주지 않는 것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워 보였다.

앞서 특무대와 헌터들은 여러 번 치고받은 사이 아닌가? 특무대로서는 헌터들을 얌전히 자기네 본부에 들여 보내주는 것 자체를 굴욕적인 항복 선언이라 여길 게 분명했다. 중요한 정부 기관이기도 한 만큼 함부로 들여보내 줄 수 없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되었고.

그러나 최용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걸까?

"저번보단 인원이 적지만 뭐, 핵심 멤버들은 다 있으니까······ 게다가 이게 누구야. 지금은 백담비 씨도 참여해주셨네요? 어디 보자, 담비 씨가 국내 최고 빙정 능력자니까 저 안에 눈보라 일으키면 다들 못 견디고 뛰쳐나오겠죠? 그때 우리가 입구 지키고 서 있다가 한꺼번에 때려잡으면······"

최용이 그리 말하는 걸 듣고 나뿐만 아니라 여러 헌터들의 얼굴이 굳었다. 작전까지 즉석에서 세우는 걸 보니 기어이 싸우려는 게 분명해 보였다.

이 순간 나는 갈등했다. 대체 어찌 처신해야 하나?

객관적으로 볼 때, 나는 최용보다 강력한 각성자일 뿐만 아니라 협회장인 최용보다 더욱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각성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앞서 최용이 강준치에게 비난당한 일로 그 입지에 타격을 입었듯 내가 그 의견에 대놓고 반기를 들어도 최용은 지도자로서의 위엄에 상처를 입는다.

그건 안 될 일이다. 방식이야 어쨌건 각성자들을 위해 총대 메고 노력하는 친구에게 망신 주고 싶지는 않다.

그 체면에 손상을 입히지 않고 반대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한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기 전에 제가 따로 나서보죠."

모두가 나를 바라보았다. 최용도 이쪽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치켜떴다.

"예?"

"제가 공간이동 능력자 아닙니까? 저 혼자 침투해서 강준만 그 친구 찾아보겠단 말입니다."

이게 모두에게 나을 터였다. 여기 모인 헌터들에게든, 저 안에 틀어박힌 특무대원들에게든 간에.

과연 내가 그리 말했을 때, 여기 모인 헌터들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감을 분명히 보았다.

158화 특무대원 강준만 - [3]

최용도 지금 분위기를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애써 태연한 얼굴로, 그러나 못마땅한 기색을 제대로 감추지는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세요 그럼."

최용의 동의가 떨어진 동시에 나는 공간이동 했다.

특무대 본부의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화장실 칸으로 공간이동 하여 문을 잠근 다음, 정신적 그물망을 뻗어 건물 전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사실 공간이동으로 직접 들어올 것도 없이 건물 바깥에서 정신적 그물망으로 내부를 더듬어도 되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내가 직접 나서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중임을 헌터 모두에게 보일 필요가 있었으니까.

강준만을 발견한 것은 그로부터 약 이십여 분 후였다.

정신적 그물망이 포착해낸 강준만의 얼굴에 나는 눈을 여러 차례 껌벅였다. 내가 아는 그 각성자가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말로 강준만이 여기 있었단 말인가? 헌트웹에 올라온 그게 합성사진 따위가 아니었다고?

긴가민가하면서도 공간이동 하여 그 앞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내 눈에 강준만과 그 주변에 앉은 특무대원들이 담겼을 때, 내가 놀란 것은 단순히 살아있는 강준만을 내 눈으로 보아서가 아니었다.

그 주변 특무대원들이 강준만을 감시하거나 억류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심지어 강준만은 특무대 복장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물론, 나를 발견한 특무대원들과 강준만이 더욱 놀랐을 것이다.

자리에 앉아있던 특무대원들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뭐야!"

그리고 내가 말했다.

"진정해, 어?"

"지금 진정하게 생겼―"

그리 외친 것치고는 특무대원 모두가 빠르게 진정했다. 그들은 본부에 침입해온 내게 칼을 휘두르지도, 총구를 들이대지도 않았다.

특무대원들도 대충 상황을 파악해서는 나 혼자 침투해온 것이 여러모로 낫다는 사실을 아는 걸지도 몰랐다. 석장실이 그랬듯 헌터들 중 특무대에 상황을 전해주는 누군가가 있는 걸지도.

"강준만 씨. 이게 무슨 상황인지 설명할 수 있어요? 분명 목 잘린 걸 봤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겁니까?"

내 물음에 강준만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강준만이 살아난 비결은 별것 없었다.

베헤모스 사태 당시, 강준만이 데스클로에게 당해 목이 반쯤 잘렸을 때, 그가 목 안에 필사적인 의지로 생성해낸 역장 외골격이 목 내부에서 경동맥 역할을 하여 죽지 않았단 것이다.

"당시엔 그리 만들어낸 역장 외골격을 유지하느라 움직일 수가 없었죠. 다들 제가 시체인 줄 알았을 겁니다. 나중에 제게 숨이 붙어있는 걸 눈치챈 간호사가 치유 능력자를 데려온 덕에 겨우 살았어요."

강준만의 설명에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건 대단한데, 멀쩡히 잘 살아있으면서 헌터들한텐 왜 비밀로 한 겁니까? 특무대에 왜 있는 거고요? 최용 씨 증언대로면 강준만 씨가 베헤모스 사태 끝나고 헌트웹에 생존 신고 글 올렸다가 지우기까지 한 모양이던데."

강준만은 이번에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입을 우물거리는 강준만과 그가 입은 특무대 복장을 번갈아 쳐다보곤 계속 물었다.

"그 이후로 최용 씨가, 강준만 씨 살아있으면서 왜 안 나타나는질 쭉 신경 쓴 모양이거든요? 그때 헌트웹에 글 올리고 지운 게, 특무대에서 강준만 씨 살아있단 걸 은폐하려 시도한 증거라고 여기는 중이라고요."

"아······."

"강준만 씨 의무복무기간 남았는데 편법으로 특무대 때려쳤다며 특무대원들이 도로 잡아 온 겁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주변의 특무대원들이 기겁하는 가운데 강준만도 기겁했다. 그가 손을 마구 휘저었다.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상당한 시간을 뜸 들인 끝에 강준만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날 이후로······ 헌터 복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왜요?"

"난 그때 정말 죽을 뻔했어요. 목이 반쯤 잘렸을 때 이미 피를 잔뜩 쏟아내선 갈수록 추워지고 있었고요. 언제든 정신 잃을 것 같은데, 죽음의 공포만으로 겨우 정신줄 붙잡아선 어찌어찌 역장으로 생명 유지만 해냈고······.

목을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겨우 만들어낸 역장이 깨질까 봐, 사람들한테 도와달라 소리도 못 지르고 이대로 죽는구나, 생각하며 벌벌 떨고만 있었는데······!"

말이 길었지만 무슨 소리인지 요약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강준만은 당시 장시간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 했다. 그 트라우마로 말미암아 더는 헌터 생활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단 것이리라.

비웃을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학원 수강생이던 시절 신체강화자 트레이너였던 양태자를 떠올렸다. 그도 사냥 도중 겁먹었고 이후로 헌터 생활을 포기했다.

그렇듯 흔한 일이다. 맘 꺾인 각성자가 헌터를 하려다 말고 다른 직업을 찾아보는 것은.

"그래서 특무대에 다시 들어간 겁니까?"

"예. 헌터 생활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받았던 계약금을 반환해야 했고, 물가는 자꾸 폭등하는 중이었으니까요. 먹고살려면 뭔 일이든 해야 했으니까······."

"무슨 말인진 알겠습니다. 다 이해하는데, 대체 살아있단 걸 왜 숨긴 겁니까?"

"당시엔 도저히 사실을 밝힐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고요?"

"그게, 베헤모스 사태 끝나고서 특무대가 여러모로 죽일 놈들 취급받지 않았습니까? 서울이 그 지경이 됐는데 끝까지 출동 안 했다고 말입니다. 김극 씨만 해도 인터뷰에서 특무대는 데스클로라며 앞으로 시비 붙는 족족 반 죽여버릴 거라 공언하기도 했고요.

게다가 제가 특무대 그만두고 헌터 시작한 것도 김극 씨 덕분이고 이후론 최용 형 도움이 컸는데, 제가 뭔 낯짝으로 헌터 그만두고 다시 특무대 들어갔다고 밝히겠습니까? 제가 대체 어떻게······."

"그래서 아예 살아있단 사실 자체를 비밀로 했어요?"

"예, 면목 없게도······. 저 살아있다고 밝히면 그래서 뭐 하는 중인지 확인하려 들까 봐······."

"부끄러움이고 뭐고 특무대 일이 비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나? 특무대원이면 싸돌아다니면서 각성자 범죄 단속하고 헌터들한테 윽박지르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살아있는 걸 대체 어떻게 숨길 수 있었어요?"

내 질문에 옆에 있던 특무대원이 설명했다.

"준만 씨는 그런 일이 아니라 특무대에 괴수 사냥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을 했으니까."

"괴수 사냥하는 법? 아, 그럼 특무대원들에게 괴수 사냥 노하우 전수한 게······."

특무대원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숨을 쉬곤 물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어서까지 비밀로 유지한 이유는 또 뭡니까. 헌터들이 강준만 씨 구하겠다고 쳐들어온 마당에 슬슬 밝힐 때가 되지 않았어요?"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강준만의 말에 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했는데?"

이번에도 그 옆의 특무대원이 설명했다.

"입 열지 말고 조용히 있으란 지시가 있었어. 강준만은 해명하지 말고 입 다물고, 특무대원들도 입 단속한 채 헌터들이랑 대치하라는."

"그걸 나한텐 설명해도 되나?"

"안 될 게 뭐 있어, 씨발. 이젠 특무대장도 아닌 새끼가 내린 지시인데! 그딴 명령 따르느라 헌터들한테 또 얻어터지란 거야, 뭐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특무대원들의 이런 반발을 보면 한희석 그놈한테 어떤 대단한 카리스마가 있어서 특무대원들이 그 지시를 따르는 게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놈이 여전히 특무대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강준만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슬슬 밝힐 때가 됐단 말씀도 옳고요."

"그럼?"

"제가 헌터들 앞에 나서서 해명하죠. 억지로 끌려온 게 아니라고 밝혀서 다들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나름 결심하고서 그리 말하는 것 같길래, 내가 말했다.

"그럴 거면 내가 강준만 씨 동의 없이 찾아내자마자 강제로 데려간 걸로 합시다. 다른 사람들도 그리 입 맞춰줄 수 있나?"

주변의 특무대원들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역장 끄시고······"

그리하여 잠시 후, 나는 강준만과 함께 헌터들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정말 강준만이 살아있었음에 경악한 헌터들 앞에서, 강준만이 지금까지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최용의 첫말은 이러했다.

"강준만 이 박쥐 새끼가."

분노로 가득 찬 목소리, 그가 저리 화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예전부터 생사를 신경 쓰던 지인을 구출하겠다며 반대도 무릅쓰고 헌터들을 여기까지 데려왔건만, 결국 최용이 주장하던 특무대 납치설은 억측이었음이 강준만 본인 입으로 밝혀진 것이다.

결국 증거 없이 행동하다가 헌터들을 고생시켰단 게 밝혀진 지금, 최용의 지도자로서의 체면은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헌트웹에서 이번 일이 일주일은 족히 조롱당할 것이다······.

그리고 최용이 화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닌 듯했다.

"기껏 헌터 데뷔시켰더니 특무대에 들어가? 역겨운 배신자 새끼가······."

특무대에 들어갔어도 이후로 각성자 헌터들을 핍박한 게 아니라 딴 각성자들에게 괴수 사냥법을 가르쳤단 점에서 내가 보기엔 비난할 일이 전혀 아니었는데. 최용이 보기엔 그마저 화가 날 이유인 듯했다.

"특무대에 괴수 사냥 노하우를 가르쳤다고? 나한테 배운 그걸 특무대에 전수했어? 그걸 자랑이라고 지껄이냐 새끼야!"

용의 분노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배신당하고 망신까지 당한 용의 분노였다.

"넌 죽었다, 개새끼야."

이때 최용이 강준만을 두들겨 패려 했다면, 멱살 쥐고 뺨이라도 몇 대 때렸다면 나는 잠자코 지켜봤을 것이다. 설령 특무대에 들어간 일을 용서받진 못하더라도 최소한 이제 살아있단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게 될 테니까.

그러나 최용의 행동은 내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다들 비켜!"

최용이 그리 소리치더니 그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왜소했던 최용의 몸이 부풀어 오르면서 주변 헌터들이 황급히 물러났다.

십여 초 후, 변신을 마치고서 집채만 한 용이 된 최용이 강준만을 내려다보았다.

파충류의 눈, 그 차가운 동공이 강준만을 향할 때만 해도 난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용의 주둥이가 벌려지더니, 그 안에서 가스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마침내 용의 목구멍에서 시뻘건 것이 일렁이더니······.

그 주둥이에서 시뻘건 불줄기가 뿜어져 나왔을 때, 나는 강준만을 붙잡고 공간이동 했다.

강준만을 특무대 본부 안으로 옮겼다. 방금 자신이 죽을 뻔한 상황이 실감이 나지 않는지 멍하니 있는 강준만에게 경고했다.

"여기서 나오지 마요! 알겠어?"

그러고는 나 혼자 헌터들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방금 강준만이 있던 자리의 콘크리트가 녹아내린 채였지만, 그러고도 용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는지 최용의 눈과 주둥이에서 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파충류의 눈이 이쪽을 향했다. 여전히 이글거리는 눈이 이렇게 묻는 듯했다. '왜 방해했냐?'

그러나 아직 적과 아군을 가릴 정신은 남아있는 걸까. 최용은 내게서 길쭉한 목을 돌려 특무대 본부를 바라보았다.

뭐 하려고 쳐다보는 건가? 내가 고함 질렀다.

"왜 아직도 변신 안 푸는 겁니까? 상황 끝났으니 이제 변신 풀어!"

그러자 용의 가슴팍에 사람의 얼굴이 생겨났다. 그 입이 말했다.

"상황 끝나긴 개뿔."

최용이 홰를 쳤다. 공중으로 떠오른 최용의 몸이 갈수록 커졌다. 집채만 한 크기에서 그보다 더한 크기로······.

방송국을 반쯤 녹여 버렸던 그때 수준으로 커지려는 듯한 최용을 보며, 나는 그가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눈치챘다. 용으로 변한 상태에서는 호르몬인지 뭔지가 달라져서 조절이 잘 안 된단 사실도 함께 떠올랐다.

"멈춰!"

내가 소리쳤지만 최용은 멈추지 않았다. 그 눈은 여전히 강준만이 들어간 특무대 본부를 향해있었을 뿐이다.

최용의 체면이고 뭐고 막아야 했다.

내가 최용의 발을 붙잡았다. 녹아내린 바닥의 틈새를 한 손으로 단단히 붙잡고서, 위로 솟구치려던 최용의 발을 힘주어 끌어내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땅이 살짝 울렸다.

용이 곤두박질쳤다.

159화 특무대원 강준만 - [4]

추락한 최용이 흙먼지 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손을 놓고 뒷걸음질 친 다음 최용을 지켜보았다.

높은 데서 추락한 게 아닌 만큼 그럭저럭 멀쩡한 것 같았다. 몸통은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채, 최용의 길쭉한 목만 움직여 날 노려보는 게 아닌가.

"괜찮―"

치유 능력자를 불러줄까, 하고 물어볼 수는 없었다.

최용이 변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건물을 덮을 만치 거대했던 두 날개가 줄어들고 목은 짧아졌으며, 뒷다리는 굵고 길어졌다.

용인(龍人)의 형태로 변한 최용이 두 발로 몸을 일으켰다.

최용의 가슴팍에 돋아난 사람의 입이 말했다.

"이 배신자 새끼가."

그러더니 최용이 내게 앞발을 뻗어왔다. 헌터 라이플을 쥐고 쏠 수 있을 만큼 사람 손에 가까운 앞발이었다······ 큰 질량에 붙들리면 공간이동 할 수 없게 되는 데다 최용의 불꽃은 콘크리트 건물마저 녹일 만큼 강력하다. 최용이 날 붙잡고 불을 뿜는 것은 저 친구가 날 살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 하나다.

내가 기겁하여 뒤로 펄쩍 뛰어 피했더니, 최용의 주먹은 땅에 처박혀 콘크리트 가루를 흩날렸다.

애꿎은 바닥을 때리느라 그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고 통증을 느낀 최용은 더욱 화가 난 것 같았다. 포효인지 뭔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면서 내게 달려드는 걸 보니.

"이게 뭔 씨―"

최용의 덩치가 덩치인지라 그가 날뛸 때마다 휘날리는 헌터가 한둘이 아니었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헌터들마저 그 펄럭거리는 날개에 닿아 넘어지면서 욕설을 지껄여댔다.

그 탓에 함부로 이리저리 피하기도 어려웠다. 그랬다간 휩쓸리는 헌터가 늘어날 테니까. 그래서 난 그 자리에 서서 날아온 최용의 주먹을 쳐서 튕겨내며 외쳤다.

"들어봐, 이 인간아! 특무대원들 말 들어보니까! 일부러 해명 안 하고 우리 쳐들어오게 내버려두고 있었다는데! 이거 딱 봐도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거 아냐?"

그러나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주먹이 튕겨나가 더욱 화가 난 최용이 또다시 주먹을 뻗어왔을 때, 나는 마주 주먹을 뻗으려다 말았다.

힘 싸움을 벌이면 무조건 내가 이긴다. 변신 능력도 신체를 강력하게 만들어주긴 하지만 근육의 질이며 골밀도 등에서 신체강화자보단 한참 못하다.

본인도 그걸 알 텐데도 내게 덤벼드는 걸 보면, 최용 저 친구가 지금 이성적인 사고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화가 나서 저러는 것임을 알 만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화가 풀리게 몇 대 맞아주자, 하는 생각으로 가만히 서 있을 때였다.

내게 날아오던 최용의 주먹이 멈췄다. 그리고 여름인데도 주변이 몹시 추워지더니,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 멈춰, 새끼야!"

백담비였다. 쿨한 컨셉마저 때려치운 채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최용의 몸이 굳어버린 것도 그녀가 능력을 발휘한 게 분명했다. 주변에 물도 없건만, 공기 중의 습기를 모아 그 신체를 얼려버린 모양이었다. 내 라운드걸의 능력 범위가 얼마나 확대되었는지, 얼마나 각성자로서 강력해졌는지 알 만했다.

물론 최용은 금세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지만, 다른 각성자들도 최용이 날뛰게 내버려두진 않았다.

저 앞에서 길길이 날뛰는 각성자가 또 하나.

"최용 너 이 새끼, 벌집 만들어줄까, 어!"

정진영도 흥분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러댔는데, 저 형은 단체 행동 할 때마다 헌터 라이플을 가져오는 미치광이답게 이번에도 챙겨온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최용에게 겨눈 채였다.

주변의 다른 각성자들도 한 마디씩 보태고들 있었다.

"정신 차려, 인간아!"

"미쳤냐!"

절반쯤은 자신에게 고성을 질러대고 나머지 절반은 불안한 얼굴로 자신을 지켜보는 상황에 최용은 결국 더 이상의 난동을 포기했다. 그가 날 원망스레 노려보더니, 다시 서양 용의 형태로 변해 어디론가 날아버가버렸다.

사람을 불러 모은 장본인이 사라져버린 만큼 단체행동도 중단되었다.

"김극 씨? 사태 수습하느라 욕봤습니다. 최용 저 미친 새끼가 진짜······"

다들 해산하며 내게 한 마디씩 건네는 가운데, 백담비도 내게 투덜거렸다.

"저번에 왜 저 안 불렀는지 이제야 알겠네요. 뭐 저딴 또라이가 협회장 직함 달고 있어?"

결국 그날의 단체행동은 어떤 소득은커녕 어수선한 분위기만 남긴 채 끝났다. 나 역시 하릴없이 집에 돌아와야 했다.

*******

당연히도 헌트웹엔 이번 일이 화제였다. 최용의 난동이며 내 대응 등이 게시판을 뜨겁게 달궈댔다.

그리고 최용이 글 하나를 올렸다.

Ⓐ Dragon : 협회장입니다. 우선 사과의 말씀 올리며······.

그 글을 다 읽고 나니 바로 댓글 반응이 예상되었다. 이거 욕 더 먹겠구만.

최용의 글은 앞부분은 자신이 변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 탓에 너무 흥분해서 날뛰었다는 변명 겸 사과였지만, 뒷부분은 자기변호를 넘어선 다른 헌터들에 대한 비난이었다.

Ⓐ Dragon : 중공의 개입이 확실시된 지금 아닙니까?

특무대가 중공의 지원을 받아 날뛰기 전에 특무대의 힘을 미리 꺾어놨어야 했습니다.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보단 각개격파하는 편이 쉬울 것인 만큼, 이번 기회에 특무대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면 이후 중공의 위협에도 수월히 대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비록 설명이 부족하긴 했지만 특무대를 누구보다 혐오하는 김극 씨와 다른 헌터 분들이라면 제 뜻을 어련히 이해해주리라 믿었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했군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실망스럽습니다. 배신당한 기분 (······)

음, 그때 최용의 행동을 보면 저런 계산이 있었던 같진 않은데.

제 주장이 억측이었음이 드러나 망신당하게 되니 공포 분위기를 조성해 제 권위를 다시 올릴 겸 강준만을 살해하려다(강준치에게 비난당해 망신당한 뒤, 방송국을 홀로 반파함으로써 권위를 회복한 경험대로 행동했을 것이다) 내게 저지당하고는 흥분했다거나,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감정대로 행동했다는 추측이 더욱 그럴듯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 사실을 지적할 만큼 내가 의리 없는 놈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입 다물고 있어줄 의리가 없었단 사실이다.

Ⓐ syberMagneto : 우으······. 사매 동료 헌터 구하러 간다길래 차 타고 갔는데 완전 시간 낭비여서 기름값 아까워죽겠어. 하지만 사매는 용서할래. 협회장님, 엄마 죽은 슬픔에 날뛴 거 맞지? 이번에 쓴 기름값은 최용 엄마 부조금 낸 셈 칠 거야. 최용 엄마 죽어서 불쌍하니까 사매 울어. 우으, 으, 으아아앙······!

Ⓐ 5my지저스 : 최용 저 도마뱀 새끼는 작년에 특무대랑 싸울 때며 버스 시위 때 코빼기도 안 보인 새끼가 대체 뭔 자격으로 김극햄한테 실망스럽다느니 배신자라느니 지껄이는 거냐?

Ⓐ 5my지저스 : 지금까지 김극햄이 몸소 행동해서 잔뜩 기죽여놓은 특무대 상대로 편히 날뛰는 주제에

거기 달린 댓글을 보니 헌트웹 여포 둘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이번에 화가 난 분위기였다.

Ⓢ Kang : 어휴······.

익명 : 엘마야캐요 성님, 그립읍니다 정말

그렇듯 최용을 성토하는 댓글들을 보며 생각했다.

좋지 않다. 정말로 나쁜 상황이다.

최용 저 친구의 지도력이 저토록 의심받는 상황이라니?

이번 일로 단번에 최용이 그 권위를 상실하진 않을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각성자들 사이에선 본인의 강력함이야말로 가장 큰 권위 아닌가? 최용이 아무리 지도력에 큰 흠결을 보였다 한들 그는 나 다음으로 강력한 각성자인 만큼 따르는 헌터들이 여전히 꽤 있을 것이다.

문제는 최용이 자신보다 강력한 각성자인 나와 충돌했다는 것이다. 그가 국내 1, 2위 각성자 모두와 사이가 벌어졌다고 인식된다면 그 문제는 심각하다. 그리 되면 최용은 앞서 말한 힘의 논리에 따라 지도자가 아닌 패배자에 불과하게 된다.

Ⓐ BabyBerserker : 김극입니다.

이번 사태에 사죄의 말씀을 드리는 바입니다. 저와 최용 씨 모두 흥분하여 서투르게 행동했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

부랴부랴 이쁜 말투조차 포기한 채 글을 적었더니, 최용 똥 치운 김극이 왜 사과하냐느니 최용 그놈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이라느니 하는 댓글만 잔뜩 달릴 뿐이어서 나는 다시 한번 한숨 쉬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좋지 않다. 정말로.

나는 특무대에서 헌터들 상대로 전력 면에서 불리한데도 기어이 충돌하려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렇듯 일을 키우려 했다는 사실이 암시하는 것은 분명······.

계속 댓글을 보던 중에 헌트웹에 글 하나가 새로 올라왔다. 내가 걱정하던 상황이 현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익명 : (속보) 중국 S급 국내 떴다

웬 링크가 달려있었다. 보니까 생방송 뉴스 링크길래 클릭해서 보았다.

그 말대로 중국의 S급 각성자가 막 김해공항에 발 디딘 듯했다.

생방속 화면 속, 국내 기자들은 물론 외신 기자들까지 몰려들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가운데, 그 사이로 걸어오는 여자를 보았다.

중국의 S급 각성자, 리슈란(李秀蘭)이었다. 물 능력자. 대만을 홀로 점령했기로 유명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자리인 만큼 화장까지 했음에도 딱히 미녀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분위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어떤 용도에 충실한 물건에서 볼 수 있는 기능미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녀의 깔끔한 단발과 단호하기 그지없는 표정, 보디빌더나 신체강화자의 그것처럼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분명하게 자리 잡은 잔근육 등이 합쳐져서 어떤 품위 비슷한 것을 이루고 있었다.

그녀에게 몰려든 외신 기자들이 거침없는 질문을 쏟아냈다.

「대만을 함락시킨 장본인으로 유명한데요. 덕분에 대만은 이제 중공의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까?」

첫 질문부터 예민하기 그지없었는데, 리슈란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예」

「하나의 중국이 이루어졌을 뿐이기 때문입니까?」

「글쎄요」

「그게 아니면 뭡니까?」

기자의 물음에 리슈란이 대답했다.

「필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필요한 일이라뇨? 자세한 설명을······」

「저는 게이트가 열리기 전 대만이 어땠는진 잘 모릅니다. 그러나 게이트가 열린 후의 대만이라면 직접 가봐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간 대만은, 군부와 각성자에게 지배되는 그곳은 소월이었습니다」

「소월이라 표현하심은 그곳이 중세 봉건제 같았단 겁니까?」

「소월의 지배체제를 중세 봉건제와 비교하는 사람이 많더군요. 아닙니다. 중세 봉건제를 포함한 지구의 그 어느 체제도 소월보다 우월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씀인지」

「중세 유럽의 영주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명을 받들어 백성들을 다스리는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동양의 왕과 황제들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라 주장했고요.

그 대부분은 자기네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이었지요. 그런데 그리 기만하는 것보다 나쁜 게 뭔지 아십니까? 그런 최소한의 기만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소월의 각성자 군주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백성을 위한다고, 신의 뜻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통치를 위한 최소한의 기만조차 하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정통성도 주장하지 않고, 백성을 위한다는 척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소월의 군주들로선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위정자들은 혼자 힘으로 전쟁할 수도 없고 나라를 다스릴 수도 없습니다.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기에 아랫사람들을 신경 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모든 힘을 지닌 각성자 군주들은? 사람들을 위하겠다며 입에 발린 말을 할 필요도, 실제 사람들을 위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지구의 노예만도 못한 가축으로서 살아갑니다.

대만을 지배하던 군벌과 각성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대만의 평범한 사람들의 눈치를 볼 필요도, 그들을 위할 필요도 전혀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 군벌들이 근처 농민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는 게 아니라 그냥 필요할 때마다 약탈해버리듯 그들도 대만인들을 그리 대우했을 뿐입니다」

내 표정이 굳어지는 가운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들을 제거했을 때, 대만인들은 자기네 지도자를 중국인에게 잃었다며 항의하지 않았습니다. 조금도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중국에 포함되는 것을 얼마나 기뻐했을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소월에서 살아가는 것보단 낫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는 대만을 침공한 게 아니라 소월에서 사람들을 해방한 것이며, 그 일에 부끄러움을 느낄 이유를 전혀 느끼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다른 외신 기자의 다음 질문 또한 예민한 것을 건드렸다.

「리슈란 씨가 S급이 된 것은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한 결과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 의혹에 해명하실 생각이 있습니까?」

저건 또 무슨 의혹인지 안다. 리슈란이 중국의 빙정 능력자 셋을 살해하여 S급에 도달했단 설이 있지 아마. 영 헛된 의혹은 아닌 걸로 안다.

정령 능력자도 희소하고 S급 각성자도 희소한즉, S급 정령 능력자는 말도 안 되게 희소해야 정상인 법이다. 그런데 중국엔 S급 수준의 화정 능력자에 이어 S급 수준의 수정 능력자인 리슈란까지 생겨났다.

그리고 리슈란이 S급이라며 세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당시 중국의 S급 빙정 능력자 셋이 거의 동시에 시체로 발견되었단 사실은 어떤 의혹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중국 공산당이 쓸모없고 위협적이기만 한 각성자들을 제거할 겸, 당에 충성하는 각성자를 성장시키로 결정했단 의혹 말이다.

그에 대한 리슈란의 대답은, 이번에도 단호했다.

「제가 받는 지시와 제 행동을 누설할 이유가 없는 만큼 정확한 답변은 삼가겠습니다. 하지만 굳이 말씀드리자면······」

「굳이 말씀하자면?」

「필요하면 그보다 더 험한 일이라도 했을 겁니다」

「예?」

「더 많은 사람에게 이로운 일이고 그러라는 지시를 받았다면, 더한 일이라도 기꺼이 했으리란 말입니다. 알겠습니까?」

그 말로 끝이었다. 사실상 자신이 무고한 사람 셋을 살해했노란 인정에 카메라 셔터가 더욱 번뜩이는 가운데, 리슈란은 카메라를 흘긋 보더니 계속 걸었다.

그러면서 리슈란이 '한국의 무법자들에게 경고한다'느니 '이제 내가 왔으니 긴장하라' 따위 발언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인터뷰를 본 사람들은 다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부터가 그랬으니까.

익명 : 특무대에서 이년 오기 전에 최대한 일 키우려 했던 거구만? 좆될 뻔했네 진짜

거기 달린 댓글들을 대충 보다가 컴퓨터를 껐다.

까치인지 까마귀인지 모를 기괴한 새 울음소리가 울렸다. 창밖을 보았더니 웬 괴조(怪鳥)가 나뭇가지에 앉아 울고 있었다.

내 알기로 저건 일본에 주로 출몰하는 괴수인데, 베헤모스가 일본의 괴수들을 불렀다더니 그 여파가 여기에도 미친 듯했다.

또 한 번의 거창한 사냥이 있으리란 것을 짐작할 만했다. 그 사냥에 대비하려면 당장엔 각성자들끼리의 다툼이 아니라 헌터 일에나 집중해야 했고.

헌터 라이플을 손보며 그리 생각했다.

*******

160화 괴조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