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나이토 상 - [5]
그렇게 모여든 기자든 인터넷 방송인이든 모조리 쫓아낸 뒤, 개선장군처럼 호텔로 복귀했을 때였다.
헌터들도 지금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들 모두가 문 바로 앞에 대기 중이었다.
나이토 상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김극 씨가 대신 나서게 해서요. 제가 처리했어야 하는 건데, 괜히 김극 씨가······."
내가 어깨를 으쓱했다.
"미안할 게 있나? 내가 알아서 공간이동 한 건데."
"하여간 거듭 사죄드립니다. 감사도요. 그런데······. 그러셔도 괜찮겠어요?"
"그러셔도 괜찮겠느냐니? 왜요, 쟤네가 돌아가서 날 대상으로 좆같은 기사라도 쓸까 봐?"
"예. 여러모로 걱정되네요. 괜한 김극 씨한테 표적을 돌리지 않을지······."
난 걱정하지 말라며 씩 웃었다.
앞서 생각했듯 그래 주면 오히려 좋을 터였다. 나이토 상 이슈를 덮는 동시에 내가 제대로 난장을 피울 명분이 생길 것 아닌가.
그러나 다음 날 아침에도, 점심에도 내 관련 기사가 하나도 올라오지 않자 나는 실망했다.
어제일 정도면 나무위키 '김극/논란' 항목에 몇 줄 추가될 수준 아니었느냐 내가 물으니, 헌터 하나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사이버 렉카고 뭐고 물어뜯을 사람을 가리는 거죠, 뭐. 안 그래도 제가 어제 걱정돼서 하꼬 방송인들 카톡방 잠입해선 상황 어떻게 돌아가나 살펴봤거든요? 그런데 여기 보세요······."
그가 내민 카톡방 대화 기록들을 본 나는 혀를 찼다.
어제 일을 가지고 영세하는 인터넷 방송인들이 대충 이런 말들을 나누는 중이더라.
'김극 건드릴 생각하지 마라. 죽는다. 진짜. 김극 그 양반, 폭행 전과 2범답게 화나면 일단 손부터 나가는데 게이트 열리기 전이면 감방에 가두기라도 했지 이젠 사회적으로 제지할 수단도 없다.
강준치가 사람 조져도 경찰들은 멀뚱멀뚱 구경만 하는 거 알지? 김극도 마찬가지다. 김극이 애새끼들 다 보는 앞에서 교사 폭행하고 국회의사당 돔 무너뜨려도 헌터 일 멀쩡히 계속하는 거 보고 느끼는 거 없냐?'
'일본이든 미국이든 거물 각성자한테 시비 걸었다가 골로 간 렉카들 손가락 발가락으로 다 못 센다. 장난 아니라 진짜 위험해'
'각성자 헌터쯤 되면 개인이 아니라 작은 군대라고 봐야 한다. 지휘관부터 병사들까지 일심동체로 행동하는 군대라서 더 무섭고.
진짜 군대와는 달리 각성자 개인의 사소한 목적으로도 군대 수준 전력 전체가 움직이는데, 찍히면 뭐 반항도 못 하고 그냥 죽는 거야. 그리고 김극은 공간이동 하는 군대인 걸 명심해라'······.
이후로는 각성자가 특권계층이 다 됐다느니, 각성자 무서워서 어디 세상 살 수가 없다느니 헛소리들을 하는 걸 보고 나는 어제 놈들을 제대로 두들겨주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만만한 각성자 하나 물어뜯으려고 괴수들이 날뛰는 현장까지 온 놈들이 저따위 소리들을 지껄이나?
결국 상황 자체는 달라진 게 없었다. 나는 어제 그랬듯, 아침에도 넋 나간 얼굴인 나이토 상을 보며 물었다.
"오늘은 어쩔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오늘은 쉴 건가?"
내 말에 나이토 상은 정신을 퍼뜩 차렸다. 그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뇨, 아뇨! 그럴 수는······."
"쉬고 싶음 말해요. 나도 같이 쉴 거니 오늘치 돈은 안 받으려니까."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마운데, 괜찮습니다. 아무리 심란해도 일은 해야죠."
"정 사냥 나설 거면 어떻게 긍정적인 생각이라도 해봐요. 그렇게 세상 망한 표정 짓고 있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이요?"
"왜, 아직 상황이 절망적인 수준은 아니잖아? 사실 증거랍시고 나온 영상만 봐도,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기 아주 어려운 거지 아예 못 할 정돈 아니었지 않나?"
"뭐, 그렇긴 한데······."
"봐요, 결국 그쪽이 베헤모스 사태 전에 각성했단 확정적인 증거는 없는 거잖아. 저쪽에서 아무리 수상해도 끝까지 잡아떼면 뭐 어쩔 건데? 그리고 끝까지 버틸 수 있게 내가 도와줄게요."
그러고서 나는 이후로도 말을 얼마든지 맞춰줄 거라고, 어제처럼 이상한 놈들이 몰려와 달라붙으면 죄다 쫓아주겠다고 말했다.
그러고서 나는 이후로도 말을 얼마든지 맞춰줄 거라고, 어제처럼 이상한 놈들이 몰려와 달라붙으면 죄다 쫓아주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헌트웹에서의 여론조작까지 도와줄 수 있다고 제안하니, 그제야 나이토 상이 작게나마 웃었다.
"몇 번이고 말씀드리는 거지만······. 고맙습니다, 정말. 말 좀 맞춰주시길 바랐지 이렇게까지 나서주실 줄은 몰랐는데요."
"고맙단 말 좀 남발하지 맙시다. 일 년 가까이 같이 목숨 걸고 일했던 처지에 그러기 있나? 아무튼, 오늘도 사냥할 거면 준비해요."
그리하여 모두 총기를 점검하고 탄약을 챙기는 등 일 나갈 준비를 할 때였다.
나이토 상의 업무용 스마트폰에 전화가 왔다.
나이토 상은 그게 언론사의 연락인 줄 알았는지 움찔했지만, 입술을 깨물고는 기어이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언론사의 전화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통화하는 나이토 상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는 걸 보니.
"어제 저희 호텔에 왔던 기자랑 방송인들, 죄다 고블린들한테 붙잡힌 것 같다고요? 그리고 구할 생각 하지 말고 당분간 얌전히 있으라?"
이건 또 무슨 일인가, 하고 내가 물어보니 통화를 마친 나이토 상이 얼빠진 얼굴로 설명했다.
"어제 우리 호텔에 사람들 몰려왔잖습니까? 그 사람들, 돌아가는 길에 고블린들한테 싹 다 잡혔단 것 같은데요······?"
그 말에 여기 모인 헌터들은 탄식하지 않았다. 그저 비웃었을 뿐이다.
"인과응보네."
"싹 다 뒤졌으면 좋겠다, 그냥."
"그래서, 지자체에서도 우리 보고 나서지 말라 했다구요? 지자체에서 그 인간들 조지려고 그런 말 한 건 아닐 테고. 고블린들이 뭐 인질극이라도 벌이는 중인가?"
마지막 물음에 나이토 상이 대답했다.
"그렇다는 것 같은데······?"
"예?"
*******
지자체에서 상황 설명을 위한 영상 하나를 보내줬다.
공중에서 촬영한 영상이었는데, 거기 담긴 장면은 여기 모인 베테랑 헌터들이 보기에도 충격적이었다.
"고블린들이 뭐 이리 많아? 무장 상태는 뭐 이리 좋고······."
영상에 담긴 것은 군대였다. 고블린들의 군대.
몬스터 군대 하면 생각나는 흑요석 창이며 돌도끼 따위로 무장한 군대가 아니라, 현대식 총화기로 무장한 군대였다.
영상의 고블린들은 아무리 봐도 수백에서 수천은 되어 보였는데, 졸병쯤 될 조그만 개체들까지 모두 소총을 들고 있었으며 무리 중에 전차 역할을 할 오거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오거가 원래 저리 흔한 괴수가 아닌데, 고블린들이 대폭 늘면서 오거 또한 대폭 늘어난 걸까?
그러나 지금은 그 오거들의 수마저도 딱히 눈길을 잡아끌 요소가 아니었으니, 놈들이 든 무기가 더 큰 문제였다.
오거 중에 유독 덩치가 큰 몇 놈은, 아예 헌터 라이플을 들고 있는 게 아닌가.
영상을 보며 헌터 하나가 얼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아쇠에 손가락이 들어가긴 하나?"
몇 번을 다시 봐도 A급 헌터들이 쓰는 그 헌터 라이플이 분명했다. 이름만 라이플이지 실은 기관포인 물건. 베헤모스 사태에서 전사한 각성자 헌터들이 많았는데, 그때 노획한 물건임을 유추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야말로 군대였다. 화력에서든, 규모에서든 간에.
이동에 쓸 차량이 없다지만 그마저도 저들에겐 문제가 없을 터였다. 왜, 저놈들은 평소엔 게이트 안에서 이동할 것 아닌가? 기동성 면에서도 딱히 아쉬울 것 없이 안전한 게이트 안에서 이 지역 저 지역을 옮겨 다니며 대규모 약탈에 나설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고블린들의 야영지 사이사이, 기둥에 묶여있는 인간들이 눈에 띄었다.
어제 본 얼굴들도 기둥에 묶여있었지만, 근처 주민인 듯한 아줌마 아저씨며 노인들도 여럿 묶여있었는데, 보아하니 일부러 잘 보이는 위치에 묶어둔 것 같았다.
"폭격을 경계하는 걸까요?"
"고블린들이 폭격이 뭔진 아나?"
"그야 알겠죠? 고블린 중에 베헤모스 사태를 경험한 놈들이 많다고 하니까. 그때 전투기가 휙휙 항공 폭탄 떨어뜨리고 전차며 박격포들이 포탄 떨어뜨리는 상황을 목격했을 놈들이 많을 거 아녜요. 그러니까 자기네 머리 위에 포탄 떨어지는 걸 막으려고 인질을 잡은 게 아닌가······."
이 상황에 왜 나서지 말라는지도 알 만했다. 일개 헌터들이 나설 규모의 일이 아니니까. 지자체보다 큰 국가기관이 나서야 할 상황에 민간인 용병들이 알아서 뭘 하도록 내버려 둘 리가.
그러나 나는 '일개' 헌터가 아니다.
"그쪽 공무원이 제가 팀에 합류한 거 알아요?"
내 물음에 나이토 상이 대답했다.
"글쎄요? 따로 말은 안 했으니까 모를지도······."
"보니까 나 있는 줄 모르고서 나서지 말라고 한 거 같은데? 나섭시다, 그럼."
헌터 하나가 눈을 크게 떴다.
"예?"
그 기괴한 표정을 보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만했다. 왜 괜히 나서려 드냐고, 지금 사로잡힌 놈들이 뭐가 이뻐서 구하려 나서자는 것이냐 묻고 싶은 것이리라.
그러나 나이토 상의 생각은 또 달라 보이는 것이, 내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이해하는 눈치였다. 지금 이 상황이 지금 자신을 둘러싼 논란을 덮기 좋다는 것도.
지금 상황은 딱 봐도 심각해 보였고 TV를 켜보자 예상대로 지금 상황에 대한 뉴스 속보가 나왔다. 지금 경상도에 예상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으니 해당 지역에 출입하지 말란 속보였다.
괴수가 도시를 휩쓰는 일쯤 딱히 놀랍지도 않게 된 세상이지만, 이 정도면 국가적 주목을 받기 충분한 상황이다.
아무리 봐도 국군이 나서야 할 상황인데, 여기 모인 헌터들끼리 해결해내면 얼마나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그 활약에 비해 나이토 상을 둘러싼 논란은 얼마나 하찮아 보일 것인가?
"여러분만 동의하면, 저는······."
결국 나이토 상이 결정을 내렸다. 그가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자신들이 나설 수 있으며, 여기 김극이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김극 씨? 공무원이 바꿔 달라고······."
그가 내민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스마트폰 너머 공무원이 내게 물었다.
「인질들, 구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가능하지."
「지금 저놈들 규모가 말이 안 되는 수준인데, 괜히 건드렸다가 벌집 건드린 셈 되는 거 아니고요? 감당이 되는 겁니까?」
"당연히 되지."
머리 굳은 공무원들은 이래서 문제다. 세상이 이토록 달라졌는데, 자꾸만 게이트가 열리기 전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내게는 계산이 선다. 강력하게 성장한 각성자로서, 모두에게 가진 힘을 과시하기 적합한 상황이라는 계산이.
*******
공중에 뜬 헬기에서 저 아래 상황을 살폈다. 원시적인 군사 야영지가 저기 있었다.
야영지에는 인간의 화기로 무장한 회색 영장류들이 우글거렸다. 고블린들······. 그리고 그들에게 붙잡힌 인간들도.
그리고 내가 탑승한 헬기를 본 고블린들은 대뜸 총질하는 게 아니라 한가득 쌓인 쌀가마니며 통조림 따윌 가리키며 고래고래 소리 질렀는데, 보아하니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인질과 식량을 교환하자고 요구하려는 걸까?
물론 그따위 요구에 응해선 안 된다. 그랬다간 저놈들의 수가 훨씬 더 불어날 테니까. 아예 포격을 퍼부어 인질째로 몰살하는 한이 있더라도 여기서 일망타진하는 게 낫다.
물론 내가 있는 지금은, 그럴 필요도 없다.
저 아래로 정신적 그물망을 펼쳤다. 인질들의 위치를, 내가 공간이동 할 좌표를 미리 파악했다.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내가 괴수 사냥에 나서기에 앞서 민간인들부터 우선 구하듯, 이번에도 그러기 위한 준비였다.
한편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다른 헌터들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토 상을 비롯한 헌터들이 야영지로 접근하더니······.
저 아래에서 총성이 울렸다.
나이토 상과 그가 이끄는 헌터 팀이 먼저 사격을 개시했다. 고블린들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듯 바로 반격에 나섰고. 고블린들은 쉬다 말고 부랴부랴 무장한 채 뛰쳐나가는 것이 당장 일어난 싸움에 정신이 팔린 모양새였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공간이동 했다.
기둥에 묶인 양들 앞으로. 기자와 인터넷 방송인, 근처 주민들이 붙잡힌 곳에 연달아 공간이동 했다. 그들을 옭아매던 기둥을 우악스럽게 뽑아내고는 기둥째로 모두와 함께 공간이동 했다. 연달아, 최대한 빠르게 그렇게 했다.
연속적인 공간이동을 마치니 살짝 어지러워졌지만 상관없었다. 정신적 그물망을 펼쳐 내가 미처 구해내지 못한 양이 없음을 확인한 다음, 방금 구출해낸 양들을 보았다.
그중에는 어제 내가 검지로 들어 올렸던 인터넷 방송인도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녀석에게 웃어주니 녀석은 웃지 않고 눈을 부릅떴다.
보아하니 상황 파악도 안 되는 모양이군. 멍청한 새끼. 저 회색 원숭이들이 더 낫겠네.
"이 양반들 잘 지키고 있어라?"
내 지시에 성문영과 내 헌터 팀원들이 대답했다. 내가 연락하니 부리나케 달려온 그들.
"알겠으니 걱정 마요!"
나는 엄지를 들어보인 다음, 헌터 라이플을 들고 공간이동 했다.
한창 무기를 챙기랴 총질하랴 바쁘던 고블린들의 한 가운데로. 놈들의 사이에 이동하며 헌터 라이플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어디로 총구를 겨눌까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이, 사방에 온통 괴수들뿐이었다.
그야말로 넘쳐나는 표적들. 시야를 가득 채운 사냥감들······.
마침내 헌터 라이플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기서 쏟아져나온 탄환들이 황금빛으로 번뜩였고, 황금빛 궤적에 닿은 살덩이들이 갈려 나가기 시작했다. 큰 고블린이고 작은 고블린이고 요란하게 터져나갔다.
원숭이 울음소리들이 비명처럼 울려 퍼졌다.
비로소 놈들이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 나는 고블린들 사이에 사냥개처럼 섞인 데스클로를, 내게 헌터 라이플을 겨누는 오거들을 보았다.
그리고 사방에서는 북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옛 문화를 따라 하려는 걸까? 고블린들이 어디선가 구해와 두드리는 전투의 북소리였다. 북소리의 박자에 맞추어 내 심장도 뛰었다.
나는 오늘도 옥타곤에 서 있다.
141화 나이토 상 - [6]
「여러분, 보입니까? 총성이고 고함이고 너무 커서 잘 들릴지 모르겠네요. 하여간 보이긴 보이죠? 김극 헌터가 인질을 모두 구출해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젠 김극 씨가 직접 전장 중심에 돌입해선 헌터 라이플을 난사 중인데······!」
귀에 낀 이어폰에서 링 아나운서의 말이 울렸다.
나이토 상의 목소리였다. 시선을 끄는 자기네 임무를 마쳤으니,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하여 지금 상황을 모두에게 공개하려는 것이다.
「현재 김극 씨가 든 게 75kg 헌터 라이플이죠? 저거에 맞으면 황소도 터집니다. 고블린 따위는 정말 말 그대로 갈려버리네요! 아, 고블린들도 반격합니다. 일제히 김극 씨를 향해 쏩니다! 김극 씨 하나한테 수백 수천 놈이 다 함께 쏴요! 한 사람에게 이 정도 총알이 빗발치는 광경은 태어나서 처음 봅니다!」
나이토 상이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춘 순간, 그 목소리를 대신하여 괴수들의 고함과 총성이 귀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총성보다 빠른 납탄들은, 내 시야를 잠식할 만치 수두룩하게 날아와서는 내 온몸과 헌터 라이플을 두들겼다.
그러고는 맥없이 튕겨 나갔다.
역장에 총알이 맞아 튕기는 소리는 정말로 맥없다. 내 몸에 부딪힌 총알이든, 내 헌터 라이플에 부딪힌 총알이든 죄다 역장에 충돌해서는 '틱' 하는 소리를 내며 제 생을 마칠 뿐이다.
「김극 씨 몸은 역장 외골격에 감싸였으니 총알 맞아도 끄떡없는 거야 당연하다 쳐도 그 손에 들린 헌터 라이플은 왜 계속 멀쩡하냐고요? 김극 씨가 제 신체뿐만 아니라 손에 닿은 사물에도 역장 외골격을 감쌀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보입니까? 김극 씨 몸이든 헌터 라이플이든―」
사방의 고음에 링 아나운서의 말이 파묻힌다는 것과 연달아 안면을 두들기는 총알들 탓에 시야가 반쯤 가려져서 불편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불편할 뿐이었다.
정신적 그물망이 눈 역할을 대신해주고 있거니와 아무 데나 쏴도 반드시 웬 괴수가 터져 죽을 지경이니. 또한, 주변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내가 내 절친의 말을 놓칠 리 없기도 했다.
「―끄떡도 없습니다! 다들 보이죠? 보여요? 이 장면이 보면서도 믿어집니까!」
지금 스마트폰을 들어 채팅방 반응을 볼 수가 없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쉬움을 분노로 바꾸어 헌터 라이플을 계속해서 쏴 갈겼다.
언제 봐도 속이 시원하다. 시야에 닿은 괴수들이 족족 피와 살로 분해되는 장면은.
계속해서 수많은 괴수들의 모습과 놈들의 피와 살, 그리고 놈들이 쏘아대는 총알들이 함께 뒤섞여 내 시야에 가득 찼다.
쏘고 또 쏴도 괴수들이 여전히 들끓었는데, 예전 같으면 위기감을 느꼈을 그 사실이 지금은 그저 기껍게 느껴질 뿐이다.
내가 총구를 조금씩 옆으로 움직일 때마다 그 부근의 고블린들은 형체도 남지 않은 채 터져나갔다.
이 와중에도 놈들이 내게 맞서 화력을 집중하는 것이 나름 대단했지만, 슬슬 놈들의 고함이 비명에 가까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원숭이 안면들에 떠오른 당혹과 공포의 표정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기야 놈들로선 날 향해 다 같이 쏘면서도 막막하리라. 역장 외골격 능력자를 상대하는 군인들은 죽어라 쏴서 깨뜨려야 할 저 역장이 얼마나 단단한 역장인지, 어느 정도 화력을 퍼부어야 파괴될지 알 수 없다.
반대로 나는 얼마나 쏘면 저 득실거리는 원숭이들이 전부 터져버릴지 가늠할 수 있다.
이 헌터 라이플은 분당 800발 이상을 쏟아낸다. 그러니 십 분 이상은 걸리지 않으리라.
고함과 비명이 계속 함께 섞여 울렸다.
탄창 일부를 비움으로써 또 한 구역의 고블린들을 통째로 갈아 없앴다. 그사이에 섞여서는 엉거주춤한 자세로나마 내게 헌터 라이플을 겨누던 오거 한 마리도, 내가 잠시 총구를 향하니 그 머리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뒤였다.
계속해서 날아온 총알들이 내 시야를 완전히 가리던 그때였다.
정신적 그물망에 한 살덩어리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제야 비로소 신경이 곤두섰다.
데스클로······. 고블린들이 어떻게 사로잡아 길들인 듯한 놈이 일직선으로 뛰어와 내게 도약했다. 시야가 가려진 틈의 기습일까?
저 갈고리발톱에 닿았다간 지금 나조차 찢어질 테지만, 내가 그쪽에 총구를 겨눌 필요는 없었다.
날 향해 도약했던 데스클로는, 한 번의 총성과 함께 고꾸라져 바닥에 시뻘건 피를 흘렸다.
총알이 날아온 곳을 보니 이곳과 가까운 건물 뒤에서 나이토 상이 소총을 겨눈 채였다. 저 총으로 데스클로가 도약한 걸 정확히 쏴 맞힌 모양이지?
언제 봐도 훌륭한 솜씨였다. 단순히 신경가속 덕에 조준할 시간이 많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 깎아내릴 수 없는.
나이토 상이 날 지원하기 위해, 온갖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 가까이 접근하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음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치하의 의미로 씩 웃어 보인 뒤, 성문영과 내 팀원들 앞에 공간이동 했다. 내 팀원들이 미리 탄창을 채워둔 헌터 라이플로 바꿔 들고서 전장에 복귀하여 계속해서 쏴 갈겼다.
그리고 북소리가 멈췄다. 거세게 뛰던 내 심장 소리도, 사방에서 울리던 성난 고함도 멈췄다.
이젠 그저 내 헌터 라이플이 드르륵거리는 소리와 괴수들의 비명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계속해서 헌터 라이플 총구를 옆으로 향하자니, 곧 총구의 궤적에 닿아 갈릴 운명인 고블린들이 발악했다.
내 총구가 향할 예정이던 고블린 소대가 바위 뒤로 엄폐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다. 내 위치를 옮기면 될 뿐.
그 고블린 소대가 엄폐한 바위 위로 공간이동 하며 총구를 내리자, 계속해서 발사된 기관포탄들이 바위 뒤에 숨어있던 놈들을 모조리 찢어발겼다.
그리고 나는 내가 올라탄 바위째로 공간이동 하여 원래 장소로 복귀했다.
발아래 생겨난 바위 덕에 시야가 높아진 채였다. 바위 위에서 계속해서 쏴 갈기며 주변을 둘러보니, 내가 벌써 절반쯤 해치웠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와중에 포효가 울려 퍼졌다. 초저주파 섞인 포효, 고블린들이 움찔하는 가운데 한 덩치 큰 괴수가 앞으로 나서서 또다시 포효했다.
사 미터급 오거. 이 무리에서 본 놈 중엔 제일 큰 놈이다.
이놈이 여기 대장인가?
놈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의미가 통했는지 어땠는지는 몰라도 놈이 내게 달려들었다. 놈에게 헌터 라이플의 총구를 향했지만, 내 사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놈이 계속해서 달려왔다.
역장체로군. 하지만 상관없다. 척 보기에도 예전에 싸워본 퉁퉁이보다 못하니까.
덩치 큰 오거가 내게 기어이 달려와 주먹을 날렸을 때, 난 들고 있던 헌터 라이플을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저 한 손으로 놈이 뻗어온 팔을 쭉 잡아당겼을 뿐이다.
그리고 오거는 그 괴력으로도 내가 한 손으로 잡아당기는 힘을 당해내지 못했다. 놈은 그대로 뒤로 날아가 엎어졌다.
"구오오오오오오오오―" 고통의 표현인지 굴욕의 표현인지 모를 포효를 내지르며 오거가 일어서려 할 때, 나는 헌터 라이플을 거꾸로 잡고서 그 몸체로 놈을 내리쳤다.
한 번 내리쳤을 때 일어서려던 오거의 시도가 좌절되며 역장이 깨졌다. 두 번째에 놈의 머리통이 완전히 으깨져선 지저분한 내용물이 흘러나왔고.
희열이 머리를 채우는 와중에도 실시간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나름 대장 격으로 보이던 오거가 쓰러졌는데도 고블린들은 더욱 겁을 먹었을 뿐, 아직 달아나지 않았다.
방금 그놈이 대장이 아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차원문이 붉게 일렁이더니, 그 안에서 새까만 안광 두 개가 드러났다.
곧이어 게이트에서 걸어 나온 화염 정령을 보았다.
마치 판타지 마왕의 등장 같았다. 생물 같지도 않은 화염의 몸체를 가진 이족보행 괴물이라니? 원래는 고블린이었던 개체일 것이다.
놈의 등장과 함께 그 주변 고블린들의 총기가 일제히 터져나갔지만, 고블린들은 그저 일제히 환호했다.
「화정입니다. 화염 정령이요! 제가 알기론 화정을 상대할 땐 김극 씨도 매번 고생해가며 해치워야 했는데요! 이거 위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에 화정을 해치울 때마다 함께 했던 백담비 씨도 지금 없는데 과연 상대가 가능할지 어떨지······!」
링 아나운서가 확실히 일을 잘하는군. 적을 저토록 띄워주는 솜씨를 보니.
내가 무전기에 대고 물었다.
"망치도 준비해놨지?"
무전기 너머 성문영이 대답했다.
「암요!」
난 살짝 웃고서 빠르게 좌표를 세 개 설정한 다음, 설정된 좌표로 연달아 공간이동 했다.
첫 번째 공간이동으로 성문영이 꺼내둔 망치를 챙긴 뒤, 두 번째 공간이동으로 상공에 이동했다.
그리고 낙하했다. 예전에 이럴 때보다도 훨씬, 훨씬 큰 가속이 실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지막 공간이동을 강행했다. 망치를 내리찍으며.
공간이동과 함께 완전히 내리친 망치가 화정을 관통하고서 그 아래 바닥을 내리친 순간, 거센 충격이 저 아래 지반과 내 몸을 두들겼다.
그리고 폭발이 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폭발은 아니지만 일어난 일은 대충 비슷했으니 그리 표현해도 될 것이다. 사방으로 퍼져나간 충격파가 정령의 불꽃을 비롯한 모든 것을 휩쓸고, 거대한 크레이터가 생겨나며 폭발적으로 솟구친 흙먼지가 수십 미터 반경을 가렸다.
이 충격으로 내 역장이 깨졌지만 정작 몸에 가해진 충격은 견딜 만했다. 통증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베헤모스가 거대화 개체였던 만큼 놈의 영혼을 흡수한 이후 신체강화 능력이 다른 능력에 비해 독보적으로 성장한 까닭이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것도요! 」
흙먼지가 가라앉은 후, 주변을 보니 불씨조차 보이지 않았다.
꺼진 불도 다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방금 오거를 쓰러뜨렸을 때보다 더 큰 희열이 머릿속에 차올랐으니.
그리고 방금 그놈이 확실히 대장이었던 듯, 그제야 동요가 원숭이들 사이에 퍼져나갔다. 그리고 대장 잃은 졸개들은 전의를 잃는 법.
고블린들이 도주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게이트로 달아나는 놈들을 쫓아 대기하고 있던 헌터들이 달려 나갔다.
당연히, 도망치는 사냥감들을 추격하는 일 또한 헌터가 할 일 중 하나다.
나도 놈들을 쫓아 공간이동 했다. 한 손으로 헌터 라이플을 들고 쏘면서 다른 손으로 스마트폰을 보자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 여단 규모 병력이 한 명한테 궤멸해버렸는데 이게 말이 되나?
- 고블린이 아니라 인간 병력이 여기 있었어도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은데, 이거 한국 큰일 난 거 아닌가;
시청자들의 경악이며 반응을 즐기던 중이었다.
채팅창에 올라온 소식 하나를 보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 나이토 상 총 맞았다 ㅅㅂ
고블린들을 쫓다가 놈들의 반격에 당한 건가? 나는 급히 공간이동 했으며, 나이토 상을 병원으로 이송시켰다.
다행히 그 목숨에 지장이 없음을 확인하고서 생각했다. 이번에 놀라운 공을 세운 데다 방송 분위기도 충분히 달아올랐겠다, 나이토 상이 부상까지 입었으니 이제 그를 둘러싼 쓸데없는 논란은 잦아들리라고.
그러나 내 예상이 틀렸다.
왜냐하면 내가 급히 병원에 이송시켜준 나이토 상은 사실 어깨에 총알을 맞았을 뿐 딱히 목숨이 위태롭진 않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숨기고 카메라맨을 시켜 자기가 중상이라느니 목숨이 위태롭다느니 공지를 올려둔 다음(더 큰 동정여론을 끌어내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VIP 환자실에서 피자를 먹다가 인터넷 방송인들에게 들켰기 때문에.
그리하여 다시 들끓고 일어난 논란 속에서, 나이토 상이 자기는 실제 중상을 입었지만 치유 능력자에게 치료받아 금세 나았을 뿐이라고 해명하다가 병원 내 이력을 보니 거짓이었음이 바로 들통났기 때문에.
부모의 명예와 영혼과 존엄을 모두 걸고 맹세하건대 난 일찍이 나이토 상을 딱 한 번 추하다고 생각해봤을 뿐이지만, 그랬던 나조차도 지금은 그에게서 심각한 수준의 추잡함을 느껴야 했다.
*******
결국 나이토 상을 둘러싼 논란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는데, 그가 작정하고 한 거짓말이 들통나버림으로써 그의 사기꾼 이미지가 더욱 강해진 탓이었다.
이렇게 쉽게 거짓말하는 놈이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겠느냐며 나이토 상의 예전 행적을 파헤치려는 시도도 더욱 늘어났는데, 그리하여 요샌 그가 예전부터 각성자였음을 증명하는 증거 영상들이 계속해서 발굴되는 중이었다. 또한 나이토 상이 그 모든 증거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는 증거도.
Ⓐ syberMagneto : 우으······. 사매는 이 상황에 공감성 수치를 느껴······ 이젠 나이토 상이 할복해도 이 수치 씻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해? 사매 토가 나와. 우윽, 욱, 우웩! 우웨에엑 ㅠ
내 라운드걸이 헌트웹 하는 꼴을 보면 나도 공감성 수치를 느끼곤 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까?
그러나 추악한 내 라운드걸 이외에 다른 헌트웹 유저들의 반응도 크게 다를 것 없었으니, 다들 어이가 없는 눈치더라.
Ⓐ 5my지저스 : 아니, 기껏 김극 형이 한때 같이 일한 동료랍시고 열심히 감싸주고 역대급 활약에도 끼워줘선 논란 잠재울 공까지 세우게 해줬는데 마지막에 대체 뭔 짓이야?
정진영 형이 그런 글을 올렸길래, 전화해서 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다. 한때 같이 일한 사이인데 너무한 것 아니냐고. 그리 싫어할 이유가 없지 않으냐고 캐물었을 때였다.
「그게, 요새 나이토 상 잘 나가던 거 보면 기분 나쁘잖아요」
"기분 나쁘다니 왜요?"
「베헤모스 처음 나타났을 때는 코빼기도 안 보인 놈이, 상대적으로 훨씬 안전했던 토벌전에 참여했다고 다른 헌터들보다 훨씬 주목받고 이득 보는 거요」
아, 인터넷의 흔한 트집인 줄 알았더니 진짜 이렇게 생각하고 분개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군. 심지어 억울함이 북받치는 목소리로 그리 말하길래, 나는 더 따지지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내게 기자들이 찾아왔다. 이번 일에 대해 물으러 온 기자들이었는데, 평소 인터뷰할 때보다 그 수가 많았다.
하기야 TV에도 한동안 내 얼굴이 계속 나왔던 마당이다. 나라에서 나섰어야 할 이 사태를 나와 소수 인원이 해결한 상황 아닌가.
"김극 씨? 나라에서 두 번째로 강력한 각성자로서 그 사실에 부끄럽지 않은 공적을 세우셨는데요! 한 말씀······"
기자들의 질문 대부분은 이번 내 활약에 대한 공치사 비슷한 것이었지만, 마지막엔 나이토 상에 관한 질문을 하는 기자도 한 명 있었다.
Q. 나이토 상의 거듭된 거짓말로 그에 대한 의혹이 더욱 강해진 마당이다. 심지어 그가 본인이 밝힌 시점보다 훨씬 전부터 각성자였으며, 그 사실을 예전부터 그가 인지하고 숨겼다는 정황증거가 늘어나는 상황인데 어찌 생각하는지?
성질 같아선 그따위 질문을 한 기자를 벽에 확 처박아버렸으련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난 그저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나이토 상, 그 친구가 언제부터 각성자였는지 정확히 모릅니다. 그리고 사실 별 관심도 없어요."
Q. 그 이유는 어째서인가? 진실과 상관없이 전우이기 때문에 차마 내버릴 수 없기 때문인가?
"전우라서 어차피 감싸줄 예정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각성자인지 여부가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나이토 상은 예전부터 각성자였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일본에서부터 그랬을지 모르고, 한국에 왔을 때부터 그랬을지도 모르죠. 저와 함께 일할 때부터 그랬을지도요.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카메라와 마이크가 날 향한 가운데, 난 숨을 고르고 계속해서 말했다.
이번에는 그를 감싸기 위해 꾸며낸 것이 아닌, 진실한 생각에서 우러나온 말을 했다.
"그가 각성자든 아니든, 나이토 상은 헌터로서 몸 바쳐 일했습니다. 땀뿐만 아니라 피까지 흘리면서, 목숨 걸고 싸우며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대부분 거짓말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행동만은 진짜였어요. 그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난 나이토 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동족임을 알아보고 그를 높이 평가하곤 했지만, 만에 하나 내가 나이토 상이 동족임을 알아보지 못하고 속으로 헐뜯을 만큼 어리석었을지라도 그가 헌터로서 보인 헌신만은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설령 내가 그를 동족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더라도, 그가 나와 함께 인천을 탈환한 동료임은 인정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각성 찌꺼기인 나이토 상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이런 논란 속에서 그를 감싸주긴 했을 것이다.
그것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말로.
*******
142화 인천시장 박미형 - [1]
이후로도 나이토 상을 둘러싼 논란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나이토 상이 예전부터 각성자였다는 추측도 점점 더 확신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는 나이토 상이 웬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한참 뒤에 나오는 CCTV 영상이 여럿 발굴되었다.
나이토 상은 베헤모스 사태 이전에도 사냥을 그토록 많이 했는데 어째서 영혼의 크기가 그토록 보잘것없었나 싶더라니, 그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여러 CCTV 영상을 보건대, 나이토 상이 종종 게이트에 들어가 장시간 격렬하게 움직임으로써 기껏 괴수를 죽여 흡수한 영혼을 소모해버리는(게이트 안에서의 움직임은 칼로리 대신 영혼을 소모한다) '영적 다이어트'를 했던 것 같다나?
제 영혼의 크기를 최대한 일반인 수준으로 유지함으로써 게이트 안에서 관측할 때 각성자임이 드러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모양이다.
거듭된 논란 속에서, 나이토 상은 결국 비난에 반박하길 포기했다.
저번 방송에서는 요새 맘고생을 너무 한 탓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꾀병을 부리고 말았다며 울면서 하소연하더라니, 그런 감성팔이가 먹히지 않자 급히 방송을 중단하고는 이후로 스트리머 노릇을 아예 그만두고서 조용히 헌터 일에만 매진하고 있다.
그와 함께 나이토 상이 인터뷰 요청을 더는 받아주지 않으니, 날 향한 인터뷰가 늘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 친구 의혹 관련 인터뷰였다.
그리고 난 기자며 인터넷 방송인들이 관련 인터뷰를 신청할 때마다 무조건 감싸길 반복했다. '나이토 상은 늘 진솔한 친구라서 일부러 속이려고 거짓말했을 리 없다'든가 '설령 거짓말을 했더라도 딱히 큰 잘못은 아니다'든가 말하면서 옹호 의견만을 거듭 밝힌 것이었다.
그 탓에 나마저 덩달아 욕 좀 먹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기로 했다.
익명 : 김극 저 양반이 의리 하나는 진짜 대단하네? 뭔 의혹이 튀어나오건 끝까지 영혼의 실드를 쳐주는 게 보면서 감탄이 절로 나와;;
ㄴ Ⓐ BabyBerserker : 애기버섯이와 나이토 상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쭉 절친이었으니까양!
ㄴ Ⓐ syberMagneto : ???
뭐, 이런 식으로 업계 평판에는 나름 도움이 되기도 하고······.
이 와중에 의외인 것은, 이전에 분명 나이토 상이 광고 따낸 걸 싫어하던 최용마저 내 편을 들어 나이토 상을 감쌌단 사실이다. 최용이 말하길, 헌터가 딱히 범죄도 아닌 일로 계약에 불이익을 당하는 전례가 생기도록 내버려 둬선 안 된다나?
그 일 관련으로 최용과 전화 통화를 하던 중이었다.
나이토 상에 관해 대화하다 말고, 최용이 문득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게이트 열리는 빈도 확 줄었죠?」
"확실히요. 원래 잔뜩 모여있던 괴수들이 여기저기 흩어지거나 멀리 떠나는 중이기도 하고, 안 떠나고 남은 놈들은 헌터들이 직접 조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괴수 수 줄이는 일에 김극 씨 혼자서 다른 A급들 백 명 몫을 혼자서 하고 있는데······. 적당히 해요, 적당히」
"괜찮아요, 안 힘들어. 나 신체강화자라 피로회복 빠른 거 모르나?"
「김극 씨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괴수들 들끓을 때도 문제가 허다했지만 괴수 수 적어져도 문제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래요. 김극 씨가 게이트 안에 처박힌 괴수들까지 죄다 끄집어내서 죽이는 거 보면 슬슬 걱정이 돼」
나는 대화하다 말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 소리인가.
"그게 왜요?"
"그게 왜요?"
「요샌 나라에서 각성자 헌터들 대하는 게 작년보다 훨씬 나아졌죠? 신입들이 돈 덜 받고 혹사당한다며 징징거리니까 돈 더 주고, 헌터들이 단체행동 나서도 경고 하나 없는 게 당장 나라 사정이 안 좋아서였잖아?
수도에 괴수가 들끓고 그게 경제에도 끔찍한 악영향을 미치니까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잔 마인드였단 말야. 그런데 이 상황이 슬슬 정리되면 분명 예전 버릇이 나올 거거든?」
"예전 버릇이라 하면······."
「알잖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국안부며 공무원들이 뭔 짓을 했는지」
"별 트집 다 잡아가며 A급 헌터들 몸값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지랄한다든가, A급 헌터들 모이기만 해도 특무대원 보내서 감시한다든가?"
「그랬죠! 게다가 실적 안 좋은 A급에겐 심리상담사라도 보내서 케어해주는 게 아니라 구급콜 따위로 어떻게든 더 부려 먹으려고 하기도 했지? 내 알기로 김극 씨는 실적 최고였는데도 한 번 당한 걸로 아는데······.
그런 식으로 국가에서 우리한테 온갖 개짓거리들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요샌 덜 그랬던 게, 김극 씨가 총대 메고 딴 헌터들이랑 같이 항의해서 나아진 덕도 크겠지만······ 분명히 당장 나라 상황이 급한 까닭도 있었을 거거든요? 그런데 이대로 나라 사정 좋아지면 분명 예전처럼 돌아갈 거란 말이죠」
그래서 내게 뭘 요구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헌터 일을 너무 열심히 해서 문제라면, 슬슬 태업이라도 하란 건가?
말도 안 되는 요구라 생각하면서도 그 비슷한 얘기를 언제 들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언제였던가?
아, 그래. 강준치가 그 비슷한 말을 저번에 했던 것 같다.
베헤모스 토벌에 참여해달라고 내가 요청했을 때, 강준치는 베헤모스가 사라지면 나나 자기나 정부의 눈엣가시로 전락할 것 아니겠느냐며 따졌지 아마.
힘 있는 각성자들이 죄다 토사구팽부터 걱정하는 걸 보면 정부에서 얼마나 각성자 인심 장악에 실패했는지 알 만하다. 다들 지금까지 보고 겪은 게 있어서 이런 반응들을 보인다. 다들 정부가 앞으로도 자기넬 잘해주리라고 신뢰하질 않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 우려가 사실이라 할지라도, 헌터 일을 설렁설렁할 맘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내가 어떻게 그런단 말인가?
당장 괴수 수가 꽤 줄었다 하더라도 작년에 비하면 훨씬 넘쳐나는 상황이라, 지금도 정진영을 비롯한 신입들은 죽는 소릴 하는 중인데다······. 특무대가 아니고 헌터가 되어선 괴수를 대충 잡자는 게 말이 되나?
결국 최용의 말에도 내 행동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난 매일같이 사냥에 전념했으며, 게이트가 열릴 때마다 민간인을 구출했고 뛰쳐나온 괴수들의 절반쯤을 나 혼자 해치우길 반복했다.
그러면서 별다른 사고도 치지 않은 채 헌터 일에만 전념한 보람이 있었으니, 국회의원 선거가 열렸다.
그리고 현 인천시장님이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면서, 인천시장 재보궐선거 또한 같이 열렸다.
박미형 씨가 이번 인천시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리고 박미형 여사님의 선거 유세에는 알바생과 같은 당 아줌마 아저씨들만 참여하지 않았다.
대한각성연대 시절 사람들이며 얼음 능력자들이 박미형 씨의 선거운동을 도와준 데다······.
말할 것도 없이, 나 또한 구경만 하지 않았다. 내가 이 행사를 얼마나 오래 기다려왔단 말인가?
"존경하는 인천 시민 여러부우우운! 기호 2버어어어언―! 박미형 씨에게 여러분의 신성한 한 표씩 부탁드립니다! 인천을 다시 위대하게! 아니, 인천은 늘 위대했지만 지금보다 더욱 위대하게―!"
내가 길가에서 포효했다. 애기버섯 티셔츠를 입은 채 사냥에 쓰는 망치를 높이 들고서 그리 외치다 보면 사람들이 잔뜩 몰려들곤 했다.
"김극 형, 인천 만세 외쳐주세요!"
"물론 요청 안 해도 외칠 겁니다! 인천 만세―!"
"옆에 계신 분이 바로 그 박미형 시의원님인가요? 세뇌 능력자로 유명하신?"
"세뇌 능력자는 아니신데 박미형 시의원님은 맞습니다! 이분 사무실 번호 알려드릴까요?"
"김극 헌터, 박미형 씨에게 세뇌 조종당하는 중이라면 당근을 흔들어주세요!"
"공간이동으로 바로 당근 가져오고 싶은데 근처 마트에서 야채를 안 팔아서······!"
내가 한마디 할 때마다 사람들이 일제히 폭소하며 카메라 셔터를 번쩍였다. 그걸 보니 진지한 정치활동에 대한 호응이라기보단 웃기고 잘나가는 유명인을 대하는 느낌이었지만 뭐,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내가 그리 외쳐대고 옆에서 박미형 씨가 빨개진 얼굴로 "이 사람이 진짜 미쳤나 봐······" 하고 중얼거릴 때마다 길가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사탕에 달라붙는 개미 떼처럼 모여들었단 사실, 그리고 모여든 사람들의 반응이 결코 나쁘지 않았단 사실이다.
"박미형 씨를 뽑으면 그 세뇌 능력으로 김극 헌터를 조종해 인천을 더욱 안전하게 해줄 건가요?"
"그런 능력이 없어도, 노력해보겠습니다······!"
"박미형 씨의 세뇌빔으로 베헤모스를 조종할 순 없었나요? 아니면 사실 이미 베헤모스를 조종해서 신성한 인천 땅에 쓰레기매립장을 지은 서울을 징벌한 거라든가?"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게 그런 능력은 없습니다! 혹시라도 큰일 날 질문은 안 돼요!"
그런 식으로 박미형 씨의 선거운동을 앞장서서 도우면서, 박미형 씨와 그분의 선거 유세를 돕는 인원들을 공간이동으로 이곳저곳 옮겨가며 같은 일을 반복했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으며, 재보궐선거인즉 사람들의 관심이 덜해야 할 이번 선거에 괴상한 수준의 관심이 쏠렸다는 사실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 인기와 박미형 씨의 인지도(사실, 여기에도 내 기여가 상당했다)에 힘입어, 박미형 씨의 인천시장 당선은 거의 당연시되던 중이었다.
이 와중에 기꺼운 일만 있는 건 아니었다.
"박미형 그 사람이 원래 뭐하던 사람인 줄 아십니까? 얼음 능력자들 박해당하는 일 막겠답시고 근처 주민들 다 싫어하는 얼음 능력자 인권운동이나 하던 사람입니다! 그 사람 당선되면 인천에 냉동고 더 늘어날 게 뻔한데, 주민 여러분이 정말 그걸 원합니까!"
인기에서든 지명도에서든 박미형 씨와 상대가 되지 않았던 상대방 인천시장 후보가 저따위 네거티브 공세를 펼치는 게 아닌가. 연설 한 번으로 나와 박미형 씨, 그리고 선거 유세를 돕던 얼음 능력자 전원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딱 봐도 서울 종자 같은데, 제가 난입해서 마이크 뺏고 한마디 할까요?"
내가 그리 말했지만 사람 좋은 박미형 씨는 그저 날 뜯어말릴 뿐이었다.
"아서요! 딱 봐도 질 것 같으니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려고 저러는 거니까 내버려 둬도 돼요. 그리고 저 사람 서울 종자가 아니라 고향부터 인천이에요."
"그렇담 저놈 피에 서울 종자의 더러운 피가 섞였나 보네요. 그럼 서울 종자 맞네."
뭐, 여기까지는 나도 투덜거리며 넘어갈 수 있었다.
왜냐하면 결국 반전 없이 박미형 씨가 인천시장에 당선되었으니까. 박미형 씨가 인천시장으로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정신적 지배자로 거듭난 그 날, 박미형 씨가 펑펑 울면서 내게 고맙다고 연거푸 말했으며 여기까지는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다음 날 내가 엄근오 의원을 만났을 때, 그가 더는 금배지를 달고 있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만난 엄근오 의원은 우울한 얼굴이었다. 세상사 근심을 다 짊어진 얼굴로, 그가 내게 말했다.
"정말 면목이 없어······."
처음 그 말은 들었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이 새끼가 이젠 처음부터 반말이네.'
"국회의원이 시민한테 그리 반말 찍찍해도 돼?"
내가 그리 따졌더니 엄근오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나? 그런데 난 이제 그래도 돼."
그러면서 엄근오는 더는 자기가 국회의원이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이번엔 낙선됐느냐고 물어보니 아예 출마조차 하지 않았다고.
"왜?"
"금배지 달고서 무력감만 잔뜩 느꼈으니까. 그래서 더 안 하려고 때려쳤어. 그리고······ 미안해."
뭘 미안하다는 건지 알 만했다.
"각성자 차별금지법, 같은 의원들 상대로 어떻게 설득 좀 해보겠다더니 결국 실패한 거 말하는 건가?"
그놈의 법은 이후로 본회의 투표에 부쳐지지도 못했다. 내 물음에 엄근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 애써봤어. 그런데 결국 실패했고. 내가 그놈의 법 만들어야 한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미친놈 진정시킬 수 있다니까 우리 어르신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
'말이 좋아서 각성자 차별금지법이지 각성자들한테 무제한 살인 면허 주자는 법 아니냐? 미국 꼴 보면서도 그런 법 만들잔 게 말이 되나?'"
그 말을 들으며 새삼 분노하진 않았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실망하긴 했기 때문에, 내 입에서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진 않았다.
"그래. 그리고 또 공간이동 하는 양아치 하나 무섭다고 법 제정하는 게 말이 되냐고도 하셨나?"
"그런 말은 직접 안 했지만 뭐······ 대충 그리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하여간 미안해. 진심으로."
나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물었다.
"그래서, 이제 저번에 하려던 의원 납치 협박 또 하면 되는 건가?"
143화 인천시장 박미형 - [2]
"내가 그러지 말라고 애원하면 안 할 건가?"
"하겠지?"
"그래도 그러지 마. 제발."
나는 엄근오 의원, 아니 이제 의원이 아니게 된 엄근오를 바라봤다.
"내가 안 무서워서 법 하나 안 만들겠다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무섭게 만들어야 그놈의 법이 생기는 것 아닌가?"
"아니, 아니야. 국회에서도 자네 엄청나게 무서워해! 저번에 고블린들? 그것들 뭉쳐 생긴 군대를 자네 혼자서 쳐부수는 거 보고 국회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자네 얘기했는지 자넨 모를걸?
애초에 각성자들 본격적으로 뭉치게 된 시발점이 자네고 이후로도 자네 체급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 걸 뻔히 아는데 의원이든 누구든 자넬 무슨 수로 무시하겠어? 자네한테 납치 협박당했던 의원들이 저 미친 새끼 내버려 둘 거냐며 하소연해도 그냥 내버려 둔 거 보면 모르나?"
"하지만 법 하나 만들란 말은 씹고?"
"그건 일종의 신념? 자존심? 뭐 그런 문제야. 힘센 개인한테 협박 좀 당했다고 법 하나 대뜸 만들 순 없는 거라고.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런 식으로는 나라 꼴이 남아나질 않게 돼. 정말 한국이 소월처럼 되는 걸 보고 싶은 건가?"
엄근오로서는 그게 어떤 섬뜩한 경고처럼 느껴지길 바랐겠지만, 내가 느끼기엔 아니었다.
"소월처럼? 안 될 것 없지."
"뭐?"
"내가 직접 소월 다녀와서 잘 알지. 충분히 살 만하던데?"
엄근오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듯 날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기야. 북한이든 아프리카든 윗대가리들은 잘 먹고 잘살지? 소월에선 각성자들이 그렇고······. 그래도 묻겠는데, 자네 인천을 사랑하지. 응?"
난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냐는 의미를 담아 엄근오를 쳐다보았다.
엄근오가 계속 말했다.
"인천에 거액의 기부도 하고 초고층 아파트도 짓고 하는 걸 보면 말로만 인천 만세 외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애향심이 투철한 것 같은데······. 정말 인천이 소월처럼 되는 걸 보고 싶은 건가?
평범한 사람들은 죽든 살든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다들 각성자들 눈치만 보고. 각성자들은 제 입에 쌀이랑 고기 넣을 수만 있으면 제 주변 꼬락서니가 어떤지 조금도 신경 안 쓰는······. 그딴 풍경이 자네 고향에도 펼쳐지길 진지하게 원해?"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래서, 좆같고 화나도 그냥 참으라고?"
"누가 참으랬나? 저번처럼 또 버스 시위를 하든 뭘 하든 자네 맘대로 해! 난 그냥······ 선을 넘지 말라는 거지. 그리고 이번에 보니 자네, 아주 정상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나라에 영향을 끼치는 것 같던데."
"내가 뭘 했는데?"
"박미형 씨가 시장 됐잖아. 난 이게 자네 같은 각성자들 보기엔 아주 좋은 신호라고 보거든? 정치집단으로서 유의미하지 않은 줄 알았던 각성자가 민주적 선거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증거란 말이지."
그러더니 엄근오는 뜬금없이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다. 나같은 각성자의 사회적 영향력이 증명된 셈 아니냐고. 앞으로도 각성자들이 정계에 진출할 기회가 많을 것이며, 그러다 보면 나라는 점차 변할 게 아니냐고 말했다.
"의원들을 납치해서 협박까지 하지 않더라도 이대로면 나라는 점차 바뀔 테니까 조금만 인내할 수 없냐,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
"지금 혹시 전술핵 생산될 때까지 시간 벌이하려고 그런 말 하는 건 아니지?"
내가 그리 물었더니, 한참 목소리를 높이다 말고 엄근오가 당황했다.
"전술핵? 그 얘길 갑자기 왜?"
"한국에서 만들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닌가?"
"진짜 그런 계획이 있더라도 내가 말할 것 같나?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물어봐도······?"
"요새 TV에서 핵 관련 다큐멘터리 반복해서 방송하드만. 핵폭발 이후 방사능 대부분이 제거돼서 생각보다 잔류하는 방사능이 많지 않다느니. 히로시마든 나가사키든 금세 복구됐다느니.
설명하는 것만 들어서는 핵이 대충 유기농 폭탄쯤 되는 것 같던데? 핵폭탄이 워낙에 친환경적인 물건이라 혹시 집에서 터져도 인체에 무해 할 것 같은 그런 느낌이더라. 나라에서 그 물건들 장만하기 전에 미리 너무 걱정할 것 없다고 광고하려는 게 아닌가 싶은······."
엄근오가 반박하려다가 말고 입을 다물었다. 무심결에 말실수할 걸 걱정한 걸까?
그리고 나는 다시 한번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의원 관뒀으면 이제 뭐할 거야. 의원 일 하면서 돈 많이 벌었으니 이제 먹고살려고 일할 필요까진 없나?"
"금배지 달고서 번 것보단 돈 나간 게 많지 무슨. 그전에 벌어둔 돈도 요즘 물가 생각하면 영 부족해서 생계 꾸리려면 이제부터라도 새로 일 찾아야 돼."
"당장 마땅히 할 일 없는 거면 협회 쪽에 한 자리 소개해줘? 전직 의원 나리겠다, 나랑 안면 좀 튼 사이라고도 밝히면 그것만으로도 괜찮은 자리로 골라서 줄 텐데."
이건 내 우월감을 담아 적선하듯 말한 게 아니라, 정말 저쪽을 생각해서 그리 말한 것이었다. 워낙에 먹고 살기 어려운 시대 아닌가. 챙겨줄 여력이 있을 때 누구든 챙겨줘야 한다.
엄근오는 아마 내 말투만 들어도 대충 그 사실을 알아챘을 것이다. 그가 어색하게 웃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제안은 고마운데 됐어. 무슨 염치로 내가······."
*******
엄근오와 만난 뒤에도 정치인과 함께였다.
단상 위에 선 박미형 씨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여러분이 도와주신 덕에 부족한 제가 이토록 과분한 위치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이 박미형이, 진심 어린 감사를 담아 여러분께 허리를 숙여······"
박미형 씨가 한 문장씩 말할 때마다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손뼉을 쳤다.
박미형 씨의 시장당선 축하연이었다. 나는 물론이고 백담비도 상석에 당당하게 앉았는데, 그녀도 우리와 다른 장소에서 박미형 씨를 위해 열심히 선거 유세를 했던 만큼 이 자리에 앉을 자격이 충분했다.
나는 이 자리에 선 박미형 씨와 다른 얼음 능력자들을 보았다.
척 보기에도 즐거워 보였다. 여러모로 행복해 보였고.
나도 씩 웃으며 연회를 즐기던 중이었다.
나는 이 자리에 가족 대신 내 헌터 팀원들을 데려왔는데, 성문영이 다가와서는 내게 말을 걸었다.
"정진영은 안 왔어요?"
"마땅히 부를 핑계가 없더라. 그런데 그 형은 왜?"
"안 보이니 좋아서요. 안 왔다니 잘됐네? 그 씹새끼."
"그 형을 왜 그리 싫어해?"
"인간 자체가 혐오스럽잖아요. 그 새끼가 헌트웹에서 나이토 상 물어뜯는 거 못 봤어요? 나이토 상이랑 정진영 그 새끼가 딱히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이토 상이 걔한테 친절하게 대해주긴 했잖아. 그런데도 이슈 좀 생겼다고 물어뜯어?"
"하기야 보기 좋진 않더라."
"보기 좋지 않은 걸 넘어 혐오스럽죠! 나이토 상을 존나게 싫어하던 김극 형도 일단 같이 일한 사이랍시고 열심히 감싸주는데, 정진영 그 새끼는 진짜······."
"내가 나이토 상을 싫어하긴 왜 싫어해? 난 그런 적 없어."
"형 진짜 시장님한테 세뇌당했어요? 기억 조작은 그 여파인가?"
나는 헛기침 하고서 말했다.
"헌트웹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그러고 보니 넌 헌트웹 계정 뭐냐? 정진영 그 형 계정은 이제 아는데 네 계정은 아직······."
"아, 난 익명으로 활동했고 애초에 요샌 헌트웹 잘 안 해요. 얼마 전에 끊었어."
"학원에선 네가 헌트웹 한다고 떠벌리고 다니지 않았냐? 나한테 헌트웹 추천한 것도 너인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랑은 분위기가 달라졌으니까 문제죠. 요샌 헌트웹에서 뭔 이슈 생겼을 때 익명으로 소신 발언하면 욕먹어요. 헌터 업계에 별 기여도 안 하는 짐꾼 새끼가 어찌 감히 입을 여냐 이거지."
"그건 좀 뭐하긴 한데, 헌트웹에서 각성자 우대하고 비각성자 무시하는 건 예전부터 그러지 않았나?"
"그래도 그렇지 그런 분위기가 예전보다 너무 심해졌어요. 이젠 비각성자면 함부로 말을 못 해. 왜, 사이버매그니토 같은 사이코 있잖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병먹금 해야 할 미친놈 취급이었는데. 이제는 아주 그냥 네임드가 다 됐드만?"
나는 백담비를 슬쩍 보았다. 쿨한 표정으로 커피를 홀짝이던 그녀가 우리 얘길 들었는지 움찔하는 걸 보고서 물었다.
"사이버매그니토한테 언제 욕먹은 적 있나?"
"얼마 전에요! 내가 익명으로 의견 하나 쓰니까 사이버매그니토 그씨발놈이 비각성 쓰레기는 가스실에서 비명 지를 때 말곤 입 닥치라나? 그런데 이제 그 새끼가 그따위로 발언하면 사람들이 무시를 하는 게 아니라 추천 잔뜩 박아주는 게, 사이트 자체에 정떨어져서 진짜······."
백담비의 동공과 어깨와 손이 모두 떨리는 것을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이제 다시 반성하려는 건가 했더니 아니었다.
나는 흔들리던 백담비의 눈에 이내 어떤 굳은 의지가 깃드는 걸 보고 경악했다. 보아하니 대강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성문영도 이제 헌트웹 안 한다니까, 이제 지인 몰라보고 욕할 걱정 없이 막 욕해도 되는 거겠지?'
성문영이 중얼거렸다.
"갈수록 먹고살기 어려워져서 그런가? 요샌 어느 커뮤를 가도 피곤해요. 중간이 없고 순 극단적인 새끼들만 목소리 존나 큰 게······."
하기야 그 말은 사실이다. 요새 모든 커뮤니티가 그렇지만, 헌트웹의 분위기는 예전보다 더욱 살벌해졌다.
지난 일 년 있었던 여러 일들 때문일까?
헌트웹의 각성자들은 이제 피해의식으로 똘똘 뭉쳤다. 나라에서 어떤 발표를 하면, 이젠 그러려니 하고 그냥 넘길 수 있는 분위기가 결코 아니다.
연회가 끝난 뒤, 집에 돌아와 뉴스를 보면서도 그 사실을 실감했다.
*******
집에서 TV를 켜니 바로 충격적인 소식을 보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다시 한번 들먹이며, 결코 타국의 영토를 침략한 것이 아니었음을 강조······」
중국이 대만 침공에 성공했다.
정확히 설명하자면, 쿠데타를 일으킨 뒤 대만을 통치 중이었던 군부와 각성자 집단을 궤멸시키는 데 성공했다.
중국 공산당에서 대만 상황에 개입할 것을 선언한 뒤, 불과 4개월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중국에선 군함으로 대만을 포위한 채 병력을 투입했다는데, 투입한 병력 중에 S급 각성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만에 투입되기를 거부한 훠선이 아니라 다른 S급(물 능력자라던가? 성별은 여자라고 알고 있다)을 대만에 보냈으며, 그 S급 각성자는 투입된 즉시 공산당이 지정한 쿠데타 세력의 주요인원 절반 이상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고. 덕분에 순식간에 점령이 끝났다는 모양이다.
이 상황에 반중 정서나 대만의 운명보다 피부에 와닿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중국에서, 각성자들이 장악한 나라에 개입하는 선례가 생겼단 사실이다.
그리고 또 무시할 수 없는 뉴스가 방송되었는데, 고소득자 누진세율이 대폭 증가하리란 발표였다.
십억 이상 소득자들의 소득세율은 원래 43%였지만 게이트가 열린 뒤로는 꾸준히 올랐으며, 이제는 65%로 상승할 예정이라고.
그 뉴스를 보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별 감흥이 없을 터였다. 아무리 세금을 많이 내더라도 일단 저만큼 벌어보는 게 소원일 사람이 많을 테니까.
하지만 상대적으로 고소득자에 속하는 우리 헌터들, 그중에서도 각성자 헌터들의 반응은 무덤덤할 수가 없었다.
「이 씨발 새끼들, 지금 헌터들 겨냥해서 저따위로 세금 올리겠단 거 맞죠?」
최용의 전화에 내가 호응했다.
"어쩌면요?"
「올해에도 작년보다 세금 잔뜩 올랐잖아! 이번에 종합소득세 낼 때 손발이 벌벌 떨렸는데, 여기서 더 올리겠다고? 미쳤나?」
여기까지는 불평불만을 내뱉더라도 다들 참고 넘길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며칠 뒤, 국안부에서 한 가지 발표를 했을 때는 아니었다.
국안부에서 협회에 전달하길, 헌터들의 출동비 동결이 결정된 것이다.
헌터들에게 주는 돈은 국제 시세에 맞춰 지급하는 것이 관례이며, 국내 물가가 계속 상승 중임을 고려하면 출동비 또한 계속 올라야 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다고.
"여러분이 만족할 만큼 돈을 지급하려 해도 그럴 돈이 없습니다. 헌터 분들 만족스러울 만큼 예산을 짜내려면 경제전문가가 아니라 흥선대원군이 나서야 해요."
그렇듯 나라에서는 나라 재정이 고갈돼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나라 사정은 급격하게 악화했는데 헌터들에게 지급해야 할 돈은 꾸준히 늘기만 했으니까. 이제 슬슬 한계가 온 것일지도.
하지만 헌터 협회장, 최용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일찍이 괴수들의 수가 줄면 나라에서 본격적으로 헌터들을 박대하리라 예견했던 그는, 이 또한 토사구팽의 일종으로 이해했다.
Ⓐ Dragon : 괴수들 수가 충분히 줄었으니 나라에서 슬슬 헌터들 막 대해도 되겠다고 판단한 거야. 이건 그 전조인 거지
최용은 절대 타협해선 안 된다고 주장했다. 한 번 굽혀주기 시작하면 내내 굽히게 되는 법이라고. 또다시 각성자 헌터들이 뭉쳐서 강경대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또 한 번의 충돌이 예상되는 가운데, 그 예상은 곧 현실이 되었다.
*******
144화 특무대원 리기룡 - [1]
헌터들의 첫 행동은 항의였다.
협회 차원에서 항의서한을 발송했다. 헌터들이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결정임을 단호한 어투로 국안부에 전달한 것이다.
그리고 협회장 최용은, 기자들을 불러놓고 기자회견을 했다. 나도 협회 간부 중 하나로서 기자들과 함께 최용의 성난 목소리를 들었다.
"한국 정부는 이따위로 뻔뻔하게 굴어선 안 됩니다."
첫 말부터 심히 공격적이었다. 이후 나온 말들도 마찬가지였고.
"헌터들에게 돈을 제대로 주지 못하겠다고요? 나라가 어려워서? 헌터들 줄 돈 부족한 나라들이 여럿 있긴 있죠. 태국, 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 게이트가 열리기 전부터 한국보다 가난했던 나라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돈을 미끼로 삼아 그곳의 각성자들을 한국에 데려왔습니다. 한국보다 가난해선 헌터 제도를 운영할 수 없는 나라에 브로커를 보내선 국제기준대로 돈 주겠다며 각성자들을 꼬드겨서 데려왔죠.
그랬다간 그 나라에 괴수와 맞서 싸울 각성자 수가 줄어들 거란 사실은 당장 자국 상황이 우선이란 이유로 외면하면서요."
맞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한국에 데려온 외국인 각성자들이 많다. 그들 외국인 각성자들이 없으면 지방엔 각성자 헌터를 배치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리고 그곳 각성자들이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한국으로 떠났듯, 한국의 각성자들도 더 나은 대우를 받기 위해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협회에선 한국보다 돈 더 쳐주겠다는 외국을 우선으로 계약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신입 각성자가 헌터 데뷔를 하고 싶어 하면, 여러 나라에서 가장 좋은 제안을 한 곳으로 보낼 겁니다. 일본으로든 미국으로든 보낼 겁니다."
국안부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수첩에 뭔가 열심히 적다 말고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방금 그게 흘려넘기기 어려운 발언이었던 걸까?
다들 심각한 얼굴로 최용을 바라보았다. 최용이 계속 말했다.
"물론 협회 차원에서 그랬다간 나라에서 두고 보지 않을 걸 압니다. 각성자 인력 해외유출을 막겠다며 별별 조치를 다 할 것도 압니다. 협회에는 온갖 압박을 가하고, 해외로 떠나려는 각성자들은 군 복무를 안 했다느니 뭔 사유가 있다느니 하면서 마음대로 못 떠나게 막겠죠.
왜, 지금까지 한국에 각성자들을 빼앗긴 나라들도 그랬지 않습니까? 베트남은 아예 각성자들의 이민을 엄금하던데······. 그래도 한국은 어떻게든 베트남에서 각성자들을 꼬드겨 데려오더군요?
지금까지 한국에서 타국을 상대로 그래놓고 한국의 각성자들은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남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소위 내로남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최용이 거기까지 발언했을 때, 참지 못한 공무원 하나가 소리 질렀다. "나라 사정이 이토록 어려운데 돈 좀 덜 받게 되었다고 이럴 수 있는 거냐?" 최용이 대답했다.
"나라 사정이 이토록 어려워진 건, 일찍이 정부에서 자복했듯 국가 관료들의 잘못과 무능 탓입니다. 몸 바쳐 괴수들 막아낸 헌터들 잘못이 아니라!
국가에서 강준치의 호텔에 도청기를 심을 때 우린 우리의 의무를 다 했습니다. 우리 잘못이 아닌 이유로 나라가 어려운 사정을 굳이 이해할 의무도, 박한 대우를 감내할 의무도 없습니다!"
방금 발언에는 나도 조금 감탄했다. 질문에 대답한 것이었으니 어디 적어둔 내용을 읊은 것도 아닐 텐데, 그런 것치곤 꽤 적절한 반박이었지 않은가?
방금 발언에는 나도 조금 감탄했다. 질문에 대답한 것이었으니 어디 적어둔 내용을 읊은 것도 아닐 텐데, 그런 것치곤 꽤 적절한 반박이었지 않은가?
본인도 그리 느낀 듯, 최용이 히죽 웃더니 말을 끝맺었다.
"애초에 피 흘리고 목숨 바쳐서 싸우는 건 우리 헌터들인데, 따로 희생을 해도 일반 국민들이 해야지 왜 우리 헌터들한테 더 희생하라 합니까? 그게 말이 돼요?"
아, 이건 사족 같다. 우리 말고 일반 국민들이 희생해야 한단 발언 자체가 상당히 안 좋게 들리니까.
그래도 대충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전해져서, 이 자리에 모여있던 헌터들은 일제히 손뼉을 쳤다. 나도 그렇게 했고.
기자회견이 끝난 뒤, 헌터들은 최용에게 다가가 칭찬의 말을 건넸다.
"협회장님, 말 진짜 잘하신다!"
"뉴스 보고 콱 막혔던 속이 협회장님 말씀 듣고 시원하게 뚫렸어요!"
최용이 흡족한 얼굴로 그 모든 칭송을 듣는 가운데, 나도 기꺼이 한마디 했다.
"개쩔었습니다, 협회장님!"
내가 그리 말했을 때, 다른 헌터들이 칭찬했을 때보다 최용이 더욱 만족스레 웃은 것은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하여간 이 자리의 헌터들이 느꼈듯, 꽤 성공적인 기자회견인 것 같았다. 헌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다 했거니와 정부를 상대로 위협 비슷한 말도 해냈으니까.
"기사 언제 나오려나? 진짜 기대된다."
한 헌터의 말에 내가 조언했다.
"너무 기대하진 마요. 내가 대한각성연대 시절에 기자회견 해도 기사 한 줄 안 나온 적 허다해서 잘 아는데, 정부에서 맘만 먹으면 인터넷 짜라시 하나 못 나오게 막을 수 있어."
"그렇죠? 하기야······."
그러나 내 걱정과 달리 기사가 나오긴 나왔다.
그리고 그 기사를 보았을 때, 나든 최용이든 다른 헌터들이든 그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기사들이 많이 나오긴 나왔는데, 모두 이런 식이었다.
"정부는 이따위로 굴지 말라 (······)" 협회장 폭언
헌터를 대우해주지 않는 한국은 태국, 라오스, 베트남 수준 국가? 협회장 "최용" 막말
헌터 협회의 협박, 한국이 돈을 제대로 쳐주지 않는다면 헌터들 모조리 해외로 보낼 것 (······)
'당신에겐 애국심도 없느냐' 현장 공무원 분노의 일갈
"나라 위기에 인내할 생각 전혀 없어" 협회장 발언 논란
편향적인 걸 넘어 악의적인 편집들. 언론이 누구 편인지 확실한 기사들······.
앞선 기자회견에서 최용이 발언한 전체 내용 따윈 어느 기사에도 실리지 않았으며, 그 일부만이 편집되어 기사에 활용될 뿐이었다. 기자회견에서 발언 자격도 없이 무례하게 소리쳤을 뿐인 공무원은 국민을 위해 일갈한 애국자로 둔갑했다.
이 와중에 나 역시 사족이라 느낀 마지막 발언이 특히 집요하게 물어뜯겼다.
"헌터들 대신 일반 국민들이 희생해야" 협회장 망언
협회장 "헌터 말고 국민들이 희생하라"는 발언에 헌터들 손뼉, 어찌 이럴 수 있나 (······)
분노와 함께 황당함이, 황당함과 함께 막막함이 느껴졌다.
이 느낌을 대한각성연대 활동할 적 느껴본 적이 있다. 아무도 편을 들어주지 않는 막막함. 수천만 한국인들 사이에서 고립된 느낌······.
그러나 그때와는 명백히 달라진 것이 있으니, 혹시 기자에게 밉보일까 두려워 일찍이 기사 한 줄 써주지 않은 기자가 뻔뻔하게 다시 얼굴을 내비쳐도 일단 와주면 밥이라도 사주곤 했던 대한각성연대와 달리 헌터 협회에는 이런 상황에 조용히 분을 삭일 점잖은 사람들이 없단 사실이다.
"이거, 씨발, 우리 보고 싸우잔 거 맞지?"
최용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그런 것 같은데······?"
"싸움 걸면 받아줘야지, 당연히."
그리하여 우리의 첫 항의 시위 대상이 정해졌다.
이제 우리는 이따위 기사를 써낸 언론사들에 쳐들어가기로 했다. 원래는 국회 앞에 쳐들어가서 농성할 계획이었는데 표적이 바뀐 것이었다.
"최근에 쉬는 헌터들 누구누구 있지? 그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지정된 언론사 가서 다 뒤집어 엎어버리라고 해. 거느린 짐꾼들도 같이 데려가라 하고!"
최용이 협회 회원들에게 시위하러 갈 언론사를 지정해주었고 나도 내 임무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최용이 내게 말했다.
"김극 씨는 예비대로 남아있어요!"
"예비대요?"
"우리가 이렇게 단체행동 나서면 국가에서 구경만 하는 게 아니라 특무대를 보내서 맞붙일 거 아닙니까? 김극 씨는 그때 나서줘야 해요!"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가만히, 상황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언론사를 상대로 한 시위 첫날, 각지의 언론사에 헌터들이 쳐들어가 회사 물건들을 죄다 깨부수거나 직원들이 출근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등 난장을 피웠으며, 그에 맞서 경찰들이 진압에 나섰다.
각지에서 헌터들과 전경들이 맞붙었다. 그 결과는······.
뭐, 볼 것도 없이 헌터들의 압승이었다. 헌터 시위대에 섞인 신체강화자며 역장 외골격 능력자 한둘이면 경찰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으니까. 경찰들이 수십 명씩 몰려오든 수백 명이 올려오든, 그들의 체격이 얼마나 건장하든 각성자들은 그들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 수 있었다.
시위에 나선 헌터들은 전경들의 헬멧이며 방패 따윌 압수해선 깡통처럼 찌그러뜨린 뒤, 그 사진을 찍어서는 헌트웹에 자랑하곤 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화가 나는 사실은, 이번 시위 관련 기사도 기어이 나왔단 것이다. 그 기사들 또한 끔찍하게 편향적이었고.
그 기사들이 헌터들을 어찌 묘사했는지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도 않다. '폭도'가 가장 얌전한 표현이었단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역시 예상한 일이었지만 새삼 화가 났다. 그리고 실망감도.
언론이 편향적인 것은 이미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사실을 다시금 실감할 때마다 새삼 울분과 갑갑함이 느껴지곤 한다.
내가 학교 다닐 적에 배웠던 언론의 공정성이니 다양성이니 하는 것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그리고 저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 자기네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왜 그놈의 의무를 지켜야 하는 것일까?
"이 기레기 새끼들은 또 어떻게 기사를 써낸 거야? 가서 소리만 지르지 말고 다 엎어버리라고 내가 말 안 했어?"
최용의 물음에 정진영이 대답했다.
"서울 언론사들 상대로는 소리만 빽빽 질렀을걸요? 서울 쪽 언론사들은 특무대가 지키고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특무대가 가로막았다고? 물론 예상한 바였다.
슬슬 내가 나설 때인가, 하고 물었더니 최용은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하긴 하겠지만, 가장 중요할 때 나서란 것이었다.
"특무대에서도 좆밥들이 있고 좆밥 아닌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번엔 서울 쪽 언론사들에 몰려가서 다 엎어버릴 건데, 또 특무대들이 기레기들 지키러 올 테고 그중 좆밥 아닌 놈들 상대하러 김극 씨가 나서줘요!"
내게는 그리 점잖게 말했던 최용은, 나머지 헌터들에게는 용의 분노를 담아 이렇게 명령했다.
"그리고, 너희들? 특무대가 막든 말든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더 수도 많고 실력도 훨씬 좋으니까! 이번에는 특무대가 가로막아도 그 앞에서 소리만 지르지 말고 그냥 돌파해버려! 뚫어버리란 말이야!"
그리하여 시위 이틀째, 지방 언론사는 여전히 헌터들에게 시달리는 가운데 서울 언론사들 앞에서 헌터들과 특무대 간의 충돌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충돌은, 내 예상보다 훨씬 치열했던 것 같다. 다쳐서 병원에 실려 간 헌터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물론 다치기는 특무대원들도 마찬가지여서, 양쪽에서 피를 흘리는 가운데 갈수록 충돌이 거세졌고 분위기가 험악해진 모양이다.
그리하여 시위 사흘째, 병원에 실려 온 헌터들 앞에서 최용의 눈이 뒤집혔다.
"어느 새끼 짓이냐······?"
오늘도 시위에 나섰던 그 헌터는 한쪽 손목이 통째로 잘려 나갔고, 끔찍한 고통 속에서 기절했으며, 같이 시위하러 나섰던 다른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손목이 잘렸을 뿐 정신은 온전했던 헌터 하나가 씹어 내뱉듯이 말했다.
"한희요. 특무대원 중에 가속이랑 역장 외골격이랑 역장 날붙이 다 가진 새끼. 그놈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휙 달려오더니 모두 이렇게······"
"아, 그 새끼······."
한희, 그 친구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나도 알고 최용도 안다. 최용이 화내려다 말고 신음하던 중에 내가 물었다.
"이제야말로 내가 나서야 하는 거 맞죠?"
그제야 최용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네요. 부탁드릴 수?"
"물론."
그리고 나를 포함해, 대기하고 있던 인원들이 일제히 협회를 나섰다.
동종업계 종사자의 끔찍한 부상에 복수하러 나선 헌터들. 다들 며칠 전보다 훨씬 화가 났고 더욱 흥분한 상태였다. 처음 기사가 나왔을 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사태가 커지리란 걸 알 수 있었다.
*******
145화 특무대원 리기룡 - [2]
차 안에서 스마트폰을 봤다. 이번에 또다시 올라온 기사 하나를 읽었다.
[수백억 몸값 헌터들, "우린 아직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제목만 봐도 헌터들을 비난하는 기사였고 내용을 읽어보니 실제로 그랬다.
평범한 사람들의 수입은 게이트가 열리기 전과 거의 변화가 없는 수준인데 헌터들의 수입만이 계속해서 상승했다든가, 요새 지자체 재정으로는 각성자 헌터 한 명 고용하기도 벅찰 지경이라든가······.
당연히도 거기 달린 댓글들 또한 험악했는데, 잘나신 '평범한' 분들께서 비꼬고 화내고 아주 난리가 났더라.
York1994 : 7급인 내 월급은 게이트 열리기 전이나 지금이나 삼백이 안 되는데 헌터들은 한 번 출동할 때마다 내 연봉보다 많은 돈을 챙겼구나······.
익명192 : 아주 그냥 귀족들 납셨어~
익명194 : 평범한 사람들 죽어라 일하고도 쌀 몇 킬로 사기도 벅찬 마당에 저러는 게 맞나?
거기까지 읽으니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범한 대다수는 우리들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사실, 불과 몇 달 전에 헌터들의 절반이 죽어 나갔는데도 그런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다.
새로 달린 댓글을 보기 위해 새로고침을 눌렀을 때였다. 어?
'없는 페이지'라고 나온다. 방금까지 읽고 있던 기사가 삭제된 것 같다.
혹시나 해서 다른 기사들도 찾아봤더니 역시나 모두 삭제됐다. 여러 언론사에서 기사를 모두 내렸다.
헌터들의 반응을 보고 이제야 다들 기겁한 걸까? 아니면 정부가 이제야 지침을 내린 걸까?
어느 쪽이건 다들 기겁할 만하다. 지금 헌터들의 반응은 내가 보기에도 과열됐으니까.
슬쩍 정진영을 봤다. 저 형은 버스에 헌터 라이플을 들고 올라탔는데, 저 흉악한 물건으로 대체 뭘 어쩌려는 건지 모르겠다. 특무대를 상대로 시원하게 쏴 갈기려는 걸까?
그랬다간 정말 내전 시작일지도······.
스마트폰을 들어 헌트웹을 켰다.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범인에게 메시지를 보냈고.
Ⓐ BabyBerserker : 대체 왜 그런 거예양?
Ⓐ BabyBerserker : 이건 선을 넘었잖아양. 헌터들 난동부리는 걸 제압하고 싶으면 코라도 때려서 뭉개버릴 일이지, 아예 손목 싹둑 잘라버리는 건 대체 뭐예양?
Ⓐ BabyBerserker : 원래라면 대충 헌터들이랑 특무대원들이랑 옥신각신하다가 끝났을 일이 정말 피를 봐야 끝날 일이 돼버렸잖아양
한희도 지금 헌트웹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걸까?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돌아왔다.
Ⓐ 한민족의얼은恨 : 죄송해요. 하지만 지시받은 대로 한 거예요
Ⓐ BabyBerserker : 시켰다고? 누가?
이쁜 말투도 잊고 급히 추궁했더니, 다음 답장은 조금 시간이 지난 끝에 돌아왔다.
Ⓐ 한민족의얼은恨 : 아버지가요
새삼 놀라진 않았다. 한희석이 특무대에서 쫓겨난 뒤로도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말은 저번에 최용에게서 들었으니까.
Ⓐ BabyBerserker : 이제 와서 그 양반 말을 왜 들어양 대체?
Ⓐ 한민족의얼은恨 : 그래도 나름 적당히 조절한 거였어요. 아버지 지시는 손목만 자르란 게 아니었는데 난 손목만 잘랐으니까
Ⓐ BabyBerserker : 손목만 자르란 게 아니었다고? 그럼 뭘 더 자르라 했던 건데?
Ⓐ 한민족의얼은恨 : 손목보다 훨씬 위에 있는 거······.
Ⓐ 한민족의얼은恨 : 형도 당분간은 몸 좀 사려요. 울 아버지도 다 계산이 있어서 저한테 그러라고 시킨 거니까
그 메시지를 끝으로 대화가 중단됐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치유 능력자한테 가면 신체 일부쯤 쉽게 복구할 수 있게 된 세상이라지만, 그래도 신체 일부가 절단되는 일은 여전히 충격적이다. 동료들의 손목이 죄 잘렸다면 더욱.
그렇듯 이미 피를 보았으니, 이젠 그저 실랑이 좀 벌이다가 끝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백담비도, 내 헌터 팀원들도 이 자리에 부르지 않았다. 험하고 지저분할 일에 그들을 왜 부른단 말인가?
"김극 씨는 팀원들 안 데려와요?"
한 헌터의 말에 내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걔네를 왜 불러요? 보스가 돼서는 업무 외 일로 부르면 안 돼."
"그래도 그렇지 이건 헌터들 모두의 일 아닙니까? 누가 빠지고 그러면 안 되잖아요? 부르지 그냥!"
"걔네를 왜 부르냐니까. 별 도움도 안 될 건데."
"별 도움이 안 되더라도 머릿수 늘려서 위압감 조성하는 데 의미가······"
"위압감?"
나는 고개를 돌려 자꾸 따져대는 헌터를 바라보았다.
나와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내 표정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헌터가 입 다문 가운데, 내가 물었다.
"나 하나면 충분하지 않나?"
헌터가 잠시 후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하기야······."
하여간 여러모로 맘에 들지 않았다. 이 상황이며 분위기도. 그리고 곧 있을 특무대와의 충돌도.
최용이며 다른 헌터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난 예전만큼 특무대를 혐오하지 않는다. 베헤모스를 토벌할 때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던가? 이후로는 그들도 동족임을 인정하게 된 마당이다.
예전이면 모를까, 이제 그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라니 영······.
"왔다. 다들 내릴 준비해!"
최용의 고함과 함께 버스가 멈췄다.
저 앞에 큼지막한 방송국이 있었다. 헌터들의 항의를 두고 '수백억 몸값 귀족들의 분노' 어쩌고 하는 뉴스를 송출한 방송국이었다. 그따위 소리를 감히 아홉 시 뉴스로 내보냈단 점에서 우리들의 공격목표이기도 했다.
방송국 앞에는 특무대원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특무대원들 앞에는 또······. 국회의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고.
국회의원들은 우리가 버스에서 내리기 무섭게 달려와서는 허겁지겁 외쳐댔다.
"싸우지 마요! 싸우지 마!"
"거기 헌터님, 헌터 라이플 내려놔요! 다들 무기 내려놓고 얘기 좀 합시다!"
국회의원씩이나 돼서 진상 민원인을 상대하는 일선 공무원처럼 저러는 걸 보며 실소든 비웃음이든 나올 법도 하건만, 이 자리의 누구도 웃지 않았다.
나도 웃지 않았다. 그저 분위기를 살피며 이런 생각이나 했을 뿐이다. '의원들도 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나 본데.'
하기야 언론을 시켜 나팔을 불 때만 해도 저들은 대충 여론전만 좀 벌이고 말 생각이었으리라. 그러나 뉴스에서 욕 좀 먹었다고 최용이 대뜸 언론사를 공격하려 들 줄은, 그걸 막으러 나선 특무대원이 대뜸 헌터들의 손목을 자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테지.
그야말로 양쪽에서 급발진을 거듭한 상황이다. 그 결과 수도 한복판에서 정부 기관과 민간 무력 단체가 한바탕 맞붙을 상황이고.
이대로면 정말 내전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이요, 그 결과 나라를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를 상황이지만 당장 기껍지는 않다. 어째서?
이 상황에 어떤 기대를 품기에는 너무 뜻밖의 상황이기도 하거니와······.
방금 한희가 했던 경고가 기억난다. 제 아비 한희석이 다 계산이 있어서 자신에게 과격한 행동을 지시했단 말.
그놈의 계산이 대체 뭘까. 그리고 뭔 흉계를 꾸몄다 하더라도 다 믿는 구석이 있어야 계획을 실행하든 말든 할 수 있는 법인데, 그놈에게 믿는 구석이 있다면 그건 또 뭘까?
한국에 내전 위기를 만들어서까지 그놈이 원할 상황이란 대체······.
얼마 전에 본 뉴스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우리 애들 손목 자른 그 씹새끼······ 한희 그 씨발 새끼는 어딨냐? 안 보이는데, 숨었냐?"
최용이 으르렁거리는 가운데, 한 의원이 그 손목을 붙잡고는 애걸복걸했다.
"제발 진정하시고, 예? 협회장님! 우리 밥 먹으면서 이야기합시다. 제가 저기 호텔에 예약 잡아놨으니까 모두 가서······!"
이 와중에 한 의원은 딱 봐도 신체강화자일 게 분명한 헌터의 팔뚝을 붙잡고서 놓아주질 않았고(신체강화자는 팔 좀 휘저으면 바로 뿌리칠 수 있겠지만 그랬다간 의원이 다칠까 봐 가만히 있는 모양새였다) 또 한 의원은 정진영이 든 헌터 라이플의 총구 앞에서 어깨를 떨면서도 그 무기 좀 내려놓으라고 소리를 마구 질러댔다.
내게도 한 의원이 달라붙어서는 "아이고, 김극 씨. 제가 인천 간석동 살았는데······" 하면서 억지로 친한 척을 해대는 것이, 짜증보단 동정심이 더 느껴질 정도였다.
그야말로 현 상황이 내전으로 치닫지 않게 하려는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국민 수십만 명의 의지를 대변한다는 의원들이, 이 순간은 정말로 자기네를 뽑아준 국민의 의지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노력이 효과가 있어서, 헌터들도 특무대원들도 당장엔 무력 행사에 나서지 않고 서로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 순간 나는 일부 헌터와 특무대원들의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스쳐 지나간 것을 분명히 보았다.
어쩌면 상황이 싱겁게 끝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특무대원 하나가 입을 열었다.
"네가 협회장이었냐? 키 존나 작네. 학창 시절에 고생 좀 했겠다? 무슨 난쟁이마냥 왜소한 게, 이딴 새끼가 헌터 협회장? 막 이런 생각이······."
갑작스러운 도발. 모두를 말리려던 의원들은 물론 헌터들과 특무대원들의 얼굴에도 당혹감이 떠올랐다.
최용이 울컥했다.
"뭐, 새끼야?"
노성이 터져 나오더니 최용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순식간에 거대한 용의 모습이 된 최용이 방금 그리 말한 특무대원을 노려보았다. 이 모습 앞에서도 그따위로 말할 수 있겠냐는 양.
그리고 특무대원은 계속 말했다.
"아, 이 도마뱀 새끼 기억난다. 이 도마뱀 새끼가 김극한테 베헤모스 등에서 고생하는 특무대원들 뒤통수치자고 꼬셨던 걸로 아는데······?"
그 옆에서 다른 특무대원 하나가 속삭였다. "닥쳐, 새꺄!" 그러나 그 특무대원은 닥치지 않았다.
"야! 이 기회에 묻겠는데 너 그때 왜 굳이 김극한테 같이 하자고 꼬신 거냐? 그때 베헤모스 등 위에서 다들 칼이나 들고 있었지 헌터 라이플 같은 건 안 들고 있었거든? 네가 혼자 휙 날아와서 불 뿜었으면 거기 있던 애들은 반격할 방법도 없어서 그놈의 뒤치기 성공했을 건데. 왜 굳이 김극한테 같이 하자고 한 거야?"
저놈도 어떤 지시를 받은 걸까? 상황을 어떻게든 격하게 만들라는?
"혼자 그러긴 쫄렸냐? 혼자 그랬다간 좆될 것 같으니까 힘센 형님한테 책임 분산하길 원했어? 하기야 지금도 지 혼자 욕먹어놓고 김극이며 다른 헌터들 잔뜩 끌고 와선―"
그리고 내가 공간이동 했다. 그 특무대원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또 다른 장소로 공간이동 하여 세 번의 싸대기와 한 번의 주먹질과 또 한 번의 공간이동을 거친 다음 원래 장소로 복귀했다.
방금 그 특무대원 없이 나 홀로 복귀하자 특무대원들의 눈이 커졌다. 그들이 날 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기혁이 어디 놓고 왔어!"
"병원에."
의원 하나가 넋 나간 얼굴로 날 쳐다보았지만, 나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바였다. 그놈이 계속 떠들게 내버려 뒀다간 최용 저 양반이 정말 불이라도 뿜을지 몰랐으니까.
결국 분위기가 더욱 험악해진 가운데, 발소리가 '쿠웅쿠웅' 울리기 시작했다.
아니, 발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차라리 코끼리나 이족보행 하는 굴삭기가 다가오는 소리라고 표현하면 더욱 정확했을 것이다.
"뭐야?"
다들 그쪽에 시선을 돌렸다. 웅장한 발소리는 방송국 안에서 들려왔으며 갈수록 크게 울렸다.
그리고 이내 발소리의 주인이 방송국에서 걸어나왔다.
근육질 남자였다. 신체강화자인 게 확실한.
특무대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몸집이 너무 커서 맞는 옷이 없었던 걸까? 단추를 하나도 채우지 못했다. 그래서 공무원 복장을 하고 있는데도 퍽 야만적으로 보였다.
"안녕?"
그 근육질 남자가 인사한 순간 긴장감이 흘렀다. 신체강화자는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살가죽 안에 들어찬 근육의 질이며 밀도가 달라져선 그 몸뚱이의 질량이 대폭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 무게만 재어봐도 대충 얼마나 강력한 신체강화자인지 가늠할 수 있는데, 저 남자가 낸 발소리는 내가 역장 없이 걸을 때 내는 발소리와 얼추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나와 비슷한 수준의 신체강화자란 말인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국내에 그 정도로 강력한 각성자가 있었다면 내가 모를 리가 없다.
국외에서 온 게 아니고서야, 내가 저 정도 각성자를 처음 볼 리가······.
"리기룡! 내가 나오지 말랬잖아!"
한 특무대원의 입에서 그 남자의 이름이 불린 순간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중국에서 온 모양이군.
저 정도 수준의 각성자는 단순히 돈만 잔뜩 준다고 마음대로 부를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아마 한국에서 꼬시길 성공했다기보단 중국에서 보내줬을 가능성이 더욱 클 것이다.
다시 한번, 얼마 전에 본 뉴스가 떠올랐다. 중국에서 대만에 각성자를 파견했느니 어쩌느니 하는 뉴스가.
그리고 근육질 신체강화자, 리기룡이 우리를 훑더니 날 바라보며 시선을 고정했다. 그가 어눌한 인천말로 말했다.
"네가 김극이야?"
"그런데?"
리기룡이 특무대복을 벗어 던졌다. 그리고 다시금 말했다.
"이 개씨발놈. 맞짱, 뜨자. 어?"
146화 특무대원 리기룡 - [3]
"맞짱 뜨자고?"
내가 물었더니 리기룡은 했던 말을 반복했다.
"이 개씨발놈, 맞짱 뜨자. 어? 내가 이기면 다 꺼지는 걸로 하고."
다시 들어도 어눌한 인천말. 비속어를 섞었는데도 구어체 같지 않고 어색했다. 어쩌면 인천말을 전혀 모르는데 누가 써준 대사를 읊는 것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맞짱 뜨긴 뭘 떠? 허튼짓 말고 들어가!"
국회의원 하나가 외쳐보았지만 리기룡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무시했다기보다는 그게 무슨 말인지, 자기한테 하는 말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역시 중국에서 온 모양이지?
"어쩔까요. 저랑 일 대 일로 뜨자는데 받아줘요?"
최용의 체면을 생각해서 내가 물었더니, 용 모습의 최용이 거대한 용의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결정되었다. 대표끼리 결투 한 번 하기로.
내가 앞으로 나섰다. 내 말도 못 알아듣겠지만 제스처는 알아들으리라 생각해서 손을 까닥였더니, 과연 리기룡은 그 뜻을 알아들었다.
리기룡 역시 앞으로 나와서는 깍지 낀 손을 뚝뚝 꺾었다.
깍지를 푼 리기룡이 자세를 잡았다. 복싱의 준비 자세. 나름 수련한 폼이 났지만 새삼 놀랄 것은 없었다. 신체강화자들은 으레 격투기를 익히는 과정에서 각성하는 법 아닌가.
그래봤자 아마추어고, UFC 파이터 출신인 내 상대는 안 된다.
나도 적당히 자세를 잡았더니 주변 헌터들이 물러났다.
한편 이 와중에도 사태 진정을 포기하지 않은 걸까? 의원들은 우리에게 달라붙으려 했지만, 특무대원들이 알아서 그들을 멀리 떼어냈다.
"휘말리면 다치는 걸로 안 끝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충분히 거리를 벌렸을 때, 나와 리기룡 모두 그 사실을 확인한 순간, 리기룡이 먼저 달려들었다.
갑작스러운 기습이었다. 원투라도 칠 듯하더니 갑자기 하체를 확 낮춰서는 태클을 걸어오는 게 아닌가. 이 역시 제대로 연습한 티가 나서 신속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엔 느려도 너무 느렸다.
달려오던 리기룡의 옆구리에 내 킥이 작렬한 순간, 쇳덩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강하게 났다. 그리고 충격파도 터져서는 주변 바닥을 긁어댔다.
"읍―"
달려오다 말고 리기룡이 거세게 밀려났다. 그에 따라 놈의 발에 닿은 아스팔트가 갈려 나가서는 불똥과 가루가 마구 튀었다. 놈이 신고 있던 신발은 이미 형체도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 뒤였다.
졸지에 맨발이 되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기룡이 내게 다시 달려들었다. 그 두꺼운 발바닥이 땅을 두들길 때마다 쿵, 쿵 울리는 소리가 났다.
여유롭게, 놈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원투 펀치로군. 왼손 잽 다음에는 오른손 스트레이트가 내 시야를 잠식했다.
역시 느렸다.
리기룡의 오른손을 쳐내며 뻗어나간 내 왼손이 그 안면을 강타한 순간, 또다시 충격파가 퍼지면서 놈의 코에서 피가 흘러나왔을 때, 특무대원들의 신음과 헌터들의 환호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김극! 씨발, 김극!"
그러나 이 일격에도 리기룡은 휘청거리지 않았다. 하기야 신체강화자는 회복이 빠른 법,
리기룡이 곧바로 주먹을 날려오는 걸 보며 나는 안심했다. 힘조절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으니까. 덕분에 전력으로 그 배와 얼굴을 연달아 두들겨줄 수 있었다.
"김극! 김극―!"
리기룡은 그리 내게 몇 번 얻어맞아 얼굴에서 피를 줄줄 흘리더니, 슬슬 격투 경기하듯 싸우면 내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이해한 듯했다.
리기룡이 주먹질을 하다 말고 내 어깨를 붙잡았다. 날 세게 잡아당기면서 박치기를 했다.
이번에도 순순히 당해주지 않았다. 나 역시 단단한 머리로 맞섰다.
우리 둘의 머리가 서로 충돌한 순간,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쇠로 만든 공성추 두 개를 전력으로 충돌시키면 방금과 같은 소리가 났을 것이다. 머리보단 고막이 더 아플 지경이었지만 참았다.
나뿐만 아니라 놈도 참았다. 놈이 다시 한번 박치기를 날렸고 나 역시 머리를 부딪쳤다.
이번에도 끔찍한 소리와 함께 충격파가 요란하게 터졌다. 그리고 우리가 또 한 번 서로를 향해 박치기하자 놈의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왔으며 내 역장 외골격이 깨졌다.
전력상 큰 손실은 아니었다. 이제 내 역장 외골격보단 신체강화의 성장 수준이 훨씬 커졌으니까. 역장쯤 깨진들 전투에 큰 지장이 없다.
그러나 놈으로선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리기룡과 눈을 마주쳤을 때, 난 그 눈이 붉게 이글거린다는 느낌을 받았다. 눈이 충혈된 건가, 아니면 저게 말로만 듣던 살기인 건가 생각했지만 둘 다 아니었다.
열선이었다. 그 눈에서 뿜어져 나온 열선이 내 시야를 붉게 물들이더니 내 안구에 닿아버렸다.
"뭐야, 씨발!"
"장난해!"
헌터들의 고함을 들어보니 지금 내 꼴이 끔찍하리란 것을 짐작할 만했다. 하기야 내 안구가 완전히 불타버렸으니까.
저놈이 처음부터 노린 게 이것이었으리라. 역장이 깨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비장의 무기로 치명적인 일격을 날린 모양이지? 내 시야를 앗아가려고.
이때 난 그가 비릿한 웃음이라도 짓고 있을 줄 잘았다. 싸움에서 밀리다가 꺼낸 비장의 무기로 상대방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면 도파민이 분비될 만하니까.
그러나 아니었다. 내 정신적 그물망에 포착된 그의 표정은 아까와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기습을 성공시켰다는 희열도, 비겁한 짓을 했다는 부끄러움도 그 얼굴에서 느껴지지 않았다. 꽉 다문 입과 굳은 안면근육. 여전히 전의로 가득 찬 얼굴.
무덤덤하기까지 한 그 표정에서는 경찰의 그것이 연상됐다.
경찰은 나이프를 든 강도를 상대로 '비겁하게' 총을 쓴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강도 하나를 상대로 정정당당하게 일 대 일 승부를 하는 게 아니라 여러 경찰이 협공하면서도 부끄러운 짓이라 느끼지 않는다. 경찰은 그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느낄 뿐이다.
중국에서 왔을 저 친구의 태도가 딱 그것이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란 태도.
다만 내 눈을 태워버리고선 이제 비로소 자기가 이길 수 있게 되었다 판단했는지 살짝 웃기는 했다.
그러나 그 판단이 틀렸다. 놈이 내 어깨를 밀어내고 펀치를 날렸을 때, 고개를 살짝 젖혀피하고는 카운터 한 방 먹이는 것으로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
"와!"
그제야 그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어떻게?' 하는 얼굴이군. 내 정보를 알려줬을 특무대와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안 되었던 모양이지? 아니면 특무대에서도 내가 더는 시야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단 사실을 몰랐거나.
그 대가를 크게 치르게 해주자니, 놈의 눈에서 어떤 힘이 이글거리는 것이 정신적 그물망으로 느껴졌다. 이제는 이런 것도 보였다.
그리고 저쪽에서 주먹질만 할 게 아니라면 나도 그럴 필요가 없을 터였다.
그 턱에 어퍼컷을 날리자 놈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졌다. 방출된 놈의 열선이 공중을 갈랐다.
그 턱에 어퍼컷을 날리자 놈의 고개가 뒤로 휙 젖혀졌다. 방출된 놈의 열선이 공중을 갈랐다.
그리고 놈의 턱과 내 주먹이 닿은 순간, 나는 공간이동 했다.
저 높은 하늘로. 내 주먹에 닿아있던 리기룡도 함께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우리 둘의 낙하가 시작되었다. 그제야 리기룡은 이 난데없는 상황에 당황하더니 내 팔뚝을 세게 붙잡았다.
나 홀로 공간이동 하여 지상으로 이동하지 못하게 붙잡으려는 걸까? 아니면 그저 공중에서 불안해서 뭐라도 붙잡으려는 시도?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날 붙잡느라 한쪽 팔이 자유롭지 않게 될 뿐이니까.
양다리로 놈의 하체를 붙잡고서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하여 내가 위, 놈이 아래에 있게 하고는 파운딩을 시작했다. 놈을 깔아뭉갠 채 연달아 주먹을 내리쳐 그 못생긴 얼굴을 더욱 일그러지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놈의 눈에 또다시 힘이 모였을 때, 열선의 징조가 보인 순간 나는 놈과 함께 지상으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놈의 등이 땅에 충돌했으며 그 머리가 크게 젖혀지면서 또다시 방출된 열선은 내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지상과 충돌한 그 순간, 나는 내 온몸의 무게를 온전히 실어 주먹을 내리꽂았다.
전력으로 날린 주먹질이었다. 그 주먹질이 놈의 몸 내부에 닿았다는 것을, 그 아래 지반에도 닿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땅이 흔들리면서 리기룡의 입에서 피가 쏟아져나왔다. 내장 조각으로 보이는 무언가도 그 입에서 빠져나왔다. 일반인이었으면 바로 응급실로 보내고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을 중상이다.
그러나 초재생능력도 있는 모양이다. 리기룡의 안면에 의식이 돌아오더니, 그가 다시 내게 주먹을 날렸다.
아주 쉽게 그 주먹을 쳐내고 다시 그 얼굴을 두들기며 생각했다. 도저히 저 투지의 이유를 이해할 수 없다고.
나와 이 친구 간엔 아무런 원한이 없다. 오늘 처음 본 사이 아닌가.
그렇다면 날 때려눕히면 얻을 보상이 탐나서 이 정도로 열심인 건가?
하지만 이 친구 수준의 각성자라면 거금을 쉽게 벌 수단쯤은 많을 텐데. 승산을 장담할 수 없는 UFC 출신 각성자와 굳이 싸우느니보다는 헌터 라이플 들고 괴수들을 향해 쏴갈기는 편이 더욱 확실하고 안전하게 돈을 벌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렇다면 왜 이렇게 열심인가?
모르겠다. 물어볼 수도 없다.
리기룡이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내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또 박치기 하려는 것 같길래, 내 팔꿈치로 그 목을 내리찍어 주었다.
리기룡이 크게 움찔하고는 이번에야말로 뻗었다. 축 늘어지더니, 다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만, 그만!"
내가 아예 놈을 죽일 게 걱정됐는지 특무대원들이 몰려들어서는 리기룡을 끌고 갔다. 나는 내 공간이동으로 병원으로 옮겨줄까 제안하려다 말고 분위기를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김극! 김극―!"
헌터들의 환호 속에서, 그리고 의원이며 특무대원들의 신음 속에서 정진영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내 두 눈이 재생을 마친 상태였다. 희열로 가득 찬 얼굴로 정지영이 내게 말했다.
"김극햄 지금 상처 하나 없는 거 알아요? 방금 그 새끼는 아주 그냥 반송장이 다 됐는데! 김극햄은 샤워 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은 것마냥 깨끗한 게 아주 그냥!"
난 내 라운드걸을 본받아 쿨하고도 담담하게 대답했다.
"난 역장 두르고 싸워서 그래요."
"역장 벗겨진 뒤에도 아주 그냥 쨉이 안 되던데요! 김극햄은 공간이동 안 쓰고 싸워주는데 저 새끼는 비겁하게 열선이나 싸질렀는데도 상대가 전혀······!"
정진영에게 사람들 앞에서 호들갑 좀 그만 떨라고 한마디 해줄까 했다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헌터들도 정진영 비슷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왜들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난 저들의 대표로 나섰으며, 그 전에도 국내 헌터들의 아이콘쯤 되었다. 자기네 대표이자 상징이 특무대를 상대로 거둔 압도적 승리에 희열을 느끼는 중일 테지.
그렇다면 담담히, 이 칭송의 분위기를 즐기기로 했다.
한동안 그들의 표정과 반응을 즐긴 다음에는, 특무대원들을 바라봤다. 자기네 대표의 패배로 잔뜩 긴장한 그들을.
보아하니 특무대원들도 자기네 새 멤버가 이 정도로 압도적으로 밀릴 줄은 몰랐던 것 같다. 경악과 불안이 섞인 얼굴로 날 쳐다보는 그들에게 내가 말했다.
"내가 이겼는데 이제 가지?"
"뭐?"
"내가 지면 헌터들 물러나기로 했는데, 내가 이겼으니 그 반대여야 하는 거 아닌가?"
내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질 게 뻔한 싸움을 굳이 하지 않고 약속을 지키는 척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해서인지 특무대원들은 내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잘된 일이었다. 저기 특무대원중에는 베헤모스의 등 위에서 함께 한 친구들도 있었으니까.
"꺼져라, 등신들아! 썩 꺼져!"
헌터들이 야유하는 가운데, 특무대원들은 자기네끼리 속닥거리더니 이내 모두 차에 탑승했다.
그리고 특무대원들을 태운 차량이 '두고 보자'는 뻔한 말도 없이 출발했을 때, 방송국 건물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방송국 사람들이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모양이다. 자기네를 지켜줘야 했을 특무대원들이 떠나가는 걸 보며 경악한 모양이고.
"기레기 새끼들 이제 뒤졌다, 진짜."
그리고 헌터들이 방송국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각목이니 야구방망이니 하는 물건들을 움켜잡고서 전력 질주했다.
"거기 헌터님! 잠시―"
의원 하나가 그마저 말리려는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지만, 어느새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최용이 그 말을 끊고 윽박질렀다.
"방금 그 새끼 뭐였는지 해명부터 해야 할 거야. 의원님, 방금 그 새끼 아무리 봐도 짱깨 아니면 조선족으로 보였는데 뭐야? 어디서 뭐 하러 데려왔어?"
147화 특무대원 리기룡 - [4]
"나도 잘······ 그걸 왜 묻는······?"
의원들이 당황하는 가운데 최용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시치미 떼지 마, 씹새끼들아! 짱깨들한테 나라 팔아먹은 게 아니고서야 방금 그 짱깨 새끼가 여기 왜 있어? 딱 봐도 동학농민군 진압하려고 청군 모셔온 상황이구만!"
국회의원들을 향한 쌍욕에 주변 헌터들은 당황한 눈치면서도 굳이 말리지는 않았다.
하기야 다들 얼마 전 뉴스를 봤을 것이다. 중국에서 대만에 S급 각성자를 파견했듯 한국에도 고급 각성자를 파견한 게 아닌가 의심하고 있을 테고.
"그러니까 그걸 왜 우리한테 묻습니까? 해외 각성자 초빙해오는 게 의원들 직무도 아니고······"
"똑바로, 말해―!"
최용의 머리가 부풀어 올랐다. 그 왜소한 어깨 사이에서 길쭉한 용의 목과 거대한 용의 머리가 솟아 나왔다.
거대한 용의 머리가 의원들의 바로 코앞에서 포효했다. 기겁한 의원들이 뒷걸음질 치다가 그 등이 벽에 부딪혀서는 신음했다.
물론 욕하면서 윽박지른다고 의원들의 입에서 '나라를 팔아먹은 비밀' 따위가 술술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그 사실에 최용이 분개한 것 같았다.
"이 새끼들 잘 잡아둬. 알겠냐!"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최용이 몇몇 헌터에게 그리 명령하더니, 씩씩거리며 방송국 안에 들어갔다.
나도 헌터들에게 붙잡힌 의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 안에 들어섰다.
방송국 안은 이미 헌터들에게 점령당한 뒤였다. 내 알기로 방송국은 적대국이며 쿠데타 세력이 가장 먼저 점령하는 주요시설 중 하나라 일부러 내부를 복잡하게 만들어둔다던데, 지금 보니 그리 설계한 보람이 전혀 없었다.
헌터들의 전진이 잠긴 문이며 벽에 가로막힐 때마다 성난 신체강화자와 역장 외골격 능력자들이 죄 때려 부수고 지나갔다.
헌터 라이플을 들고서 벽으로 돌격하는 정진영 형을 보았다.
저 형도 나처럼 물건에 역장 외골격을 씌울 수 있다. 정진영 형이 역장 두른 헌터 라이플을 공성추처럼 찍어버리자 칸막이벽이 송두리째 붕괴해버렸다.
방송국 직원들의 비명과 헌터들의 함성이 섞여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나는 생각했다.
원래는 참 순한 형이었는데. 지금은 하기 싫어도 다른 헌터들에게 잘 보이려고 억지로 저러는 걸까?
문득 든 걱정에 내가 정진영 형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벽 하나 부수고서 씩씩거리다 말고, 정진영 형이 대답했다.
"아뇨, 아주 신나 죽겠어요! 특무대고 기레기고 싹 다 죽여버려야 해."
"음······."
"뭐, 국민 대다수가 먹고살기 어려운 마당에 헌터들만 돈을 왕창 받아? 당연히 우리만 왕창 받아야지 그럼! 데스클로든 베헤모스든 튀어나왔을 때 싸우는 게 우리고 죽어 나가는 것도 우린데,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는 새끼들이 감히······!"
말 한마디 한마디에 감정이 뚝뚝 묻어나왔다. 그걸 보니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었다. 주변 헌터들의 호응을 보면 다들 그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하기야 뭐, 당연한 일이었다. 정진영 저 형은 헌터들이 가장 많이 죽어 나갔던 베헤모스의 1차 침공 때 나이토 상이 참전하지 않았는데도 홀로 광고를 찍었다며 분개했지 않은가?
그렇듯 헌터들은 자신들이 남들보다 위험한 일을 했는데도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피해의식이 있다. 그래서 우리와 달리 위험한 일을 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의 비난이며 지적에는 발작적으로 대응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정진영 형과 같은 각성자 헌터뿐만 아니라 비각성자 헌터들······, 소위 짐꾼들도 성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헌터들이 방송국 직원들의 등에 총구를 겨눈 채 한 장소로 몰거나 이 물건 저 물건을 때려 부수는 것이 보였다.
방송국 직원들로선 물건이라도 집어 던지며 반항할 수 없을 듯했다. 비각성자 헌터들은 평소 사냥에서 쓰던 소총을 들고 왔으니까. 표정만 봐도 다들 흉흉한 것이, 누가 저항이라도 하면 바로 쏴버릴 듯했다.
그러고 보면 이번 출동비 동결은 각성자 헌터들보다 비각성자 헌터들에게 더욱 치명적이라던가? 거액의 계약금을 받는 각성자 헌터들과 달리 비각성자 헌터들의 수입은 출동비와 괴수 사살 포상금뿐이니까.
심지어 갈수록 경기가 나빠지고 실업자들이 폭증하는 마당 아닌가. 아무리 봐도 헌터 일을 하기엔 너무 점잖았던 임형택 씨며 정진영 형이 그랬듯, 살아갈 돈을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 업계에 뛰어드는 생계형 헌터들이 그 어느 때보다 넘쳐난다고 들었다.
그리고 공급이 늘면 그 가격은 떨어지기 마련이라, 헌터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와 상관없이 비각성자 헌터들의 몸값은 앞으로 폭락할 일만 남았기에 다들 걱정하고 있었다. 협회에서는 헌터들이 얼마나 늘어나든 이 일의 위험성이 끔찍한 만큼, 지자체에서 헌터들에게 지급하는 돈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나야 한다고 주장해왔고.
각성자 헌터든, 비각성자 헌터든 모두 공감하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위험한 일을 하는 헌터들이야말로 남들보다 더 큰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것.
이 와중에 언론에서 민감한 부분을 건드렸으니 어쩌겠는가?
가뜩이나 거칠고 사람 한둘 죽어 나가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헌터들이 나라 사정 힘든 중에 저들만 호강하려는 공공의 적 취급을 받고 말았으니, 간디가 살아 돌아와도 비폭력 시위 따윌 기대할 수는 없게 되었다.
가만히 지켜보자니, 여기저기서 헌터들의 손에 붙잡혀 방송국 직원들이 끌려왔다.
헌터들은 직원의 나이나 성별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방송국에 있던 모두의 머리채를 붙잡아 질질 끌고 와서는 한곳에 꿇어 앉혔는데, 간혹 누가 울거나 말을 해서 시끄럽게 굴기라도 하면 바로 개머리판으로 후려쳐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러나 잡아 온 방송국 사람 중에 주요 인물이 없는 걸까?
"대표이사 사장? 그 새끼 어딨냐!"
헌터들이 직원들을 상대로 소리 지르던 중에 프로펠러 소리가 났다.
창문을 보니 헬기 한 대가 날아가고 있었다. 딱 봐도 그 안에 주요 인물이 탑승했을 터였다.
"김극 형!"
내가 바로 공간이동 했다.
그리고 과연, 헬기 안에 있던 정장 차림의 중년들을 보니 언젠가 TV에서 본 적 있는 사람들이었다.
조종사는 내버려 둔 채 그들만 데리고 방송국 안으로 공간이동 하니, 헌터들이 눈을 빛냈다.
"오!"
잡혀 온 방송국 주요 인물들 주변으로 헌터들이 몰려들었다. 최용도 이쪽에 다가와서는 히죽 웃었다.
"아, 이 새끼는 기자회견 와선 내가 기사 잘 써달라고 봉투까지 쥐여 줬더니 입 싹 씻고 기사 좆같이 쓴 친구고······. 이 새끼는 대표이사 사장이고. 잡히면 좆될 걸 알고 튀려다 결국 잡혔네?"
그 웃음에 각오는 됐냐, 하는 의미가 담겼으리란 건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다른 헌터들의 표정도 최용의 것과 비슷했다. 다들 둘 중 하나였다. 그 안면근육이 잔뜩 굳었거나 아니면 실실거리거나.
"뭘 눈 똑바로 뜨고 있어? 눈 안 깔―"
헌터 하나가 잡혀 온 기자의 무릎을 발길질해서 꿇어 앉혔을 때였다.
방금까지 이를 악물고 있던 대표이사 사장이 입을 열었다.
"너희가 무슨 갱단이냐! 헌터가 아니라 멕시코 카르텔이라도 돼?"
"이 새끼 뭐래냐?"
최용이 비웃었지만 대표이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외쳤다.
"왜 화났는진 알겠는데! 자기네한테 거슬리는 언론인 사살하는 멕시코 카르텔도 아니고 이러는 게 맞느냔 말이다, 어? 최용 당신은 헌터들 대표하는 협회장이란 사람이 자중할 줄은 모르고 일개 깡패처럼 구는 게 맞는 처신이야!"
이 와중에 가르치려는 태도가 헌터들을 더욱 열받게 했음은 분명한 일이었다. 최용이 실소를 지으며 목을 좌우로 흔들었다.
내가 입을 열었다.
"멕시코 카르텔이 그러는데, 우린 그러면 안 되나?"
"그럼 이래도 되겠나! 민주주의 나라에서―"
"멕시코 카르텔이 그래도 되면 당연히 우리도 그래도 되는 거지. 그러면 왜 안 돼? 우리가 더 막강하고 더 중요한데. 당연히 그럴 권리가 있는 것 아닌가?"
"뭐?"
"갱단 찌끄레기며 정부 관료들보다 우리 눈치를 더 살펴야 한단 걸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마땅히 이래야 하는 거 아니냐구?"
내 말에 대표이사는 뭐라 반박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주변 헌터들의 호응이며 맞장구에 묻혀 무슨 소리였는지 들리지 않게 되었다.
최용이 계속 소리 지르던 헌터들을 한 손을 들어 조용히 시켰다. 그리고 제 앞에 선 대표이사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너희가 펜대 좆대로 놀린 탓에 우리 애들 손모가지가 잘렸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
"그게 왜 우리 책임―"
뭐라 말하려던 대표이사 사장의 배를 한 헌터가 걷어찼다. 끅끅거리는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 최용이 계속 윽박질렀다.
"어떻게 책임질 거냐구, 응? 좆같은 기레기 새끼들이, 똥찌꺼기 같은 기사나 싸 갈겨선 우리 애들 손모가지가 잘렸는데!"
보아하니 한희가 손목을 자른 책임도 여기 기자들에게 전가하기로 작정한 것 같았다. 하기야 그러는 편이 한희를 잡아 벌주기보단 더욱 쉽거니와, 애초에 그놈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일어날 일이 아니었으니까······.
"여기 씨발놈의 데스클로 상대로 싸운 놈이 몇 명이고 개씨발놈의 베헤모스 상대로 싸운 사람이 몇 명인데! 대체 뭔 낯짝으로 사회에 좆도 기여 안 하는 기레기 새끼들이 펜을 놀려선 우리 애들 손모가지가 잘리게 만들었냔 말이다. 대답 안 하냐?"
대표이사는 여전히 컥컥거리느라, 그 주변 사람들은 겁을 먹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가운데 최용이 말했다.
"아무 말 안 하는 거 보니 죄 인정한 거 맞지? 펜이 칼보다 강하다니까 칼로 지은 죄보다 큰 죄를 지은 셈인데······. 죄지은 벌 받을 준비 됐냐?"
헌터 하나가 정글도를 가져왔다.
날을 제대로 세운 것 같지도 않은, 철물점에서 방금 사 온 티가 나는 정글도였다.
그 정글도가 대표이사의 손목을 내리쳤다. 손이 잘려 나간 순간 그 입에서 튀어나온 비명은 처절했고, 그 옆에 있던 기자 또한 같은 꼴을 당하고서 비슷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 옆, 그 옆에 있던 방송국 사람들의 비명은 더욱 컸다. 아마도 앞서 두 사람의 손목을 자르느라 칼날이 더욱 무뎌져서 그들의 손목을 자를 땐 더 여러 번 내리쳐야 했던 탓일 것이다.
잘려 나간 손들은 헌터들이 창밖으로 던져버렸다.
붙잡혀서 무릎 꿇려있던 방송국 직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끔찍한 꼴을 보고서 항의하거나 비명 지르던 직원들은 헌터들의 발길질에 두들겨 맞아 강제로 입 다물게 될 뿐이었다.
이 지저분하고 피비린내 나는 현장 한가운데에서, 내가 내내 담담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거 너무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냥 두들겨 패고 말지 복수한답시고 손목까지 자르는 건 쓸데없이 잔인하기만 한 짓거리 아닌가 싶기도 했고.
그러나 그리 생각하는 동시에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고 일종의 희열마저 느껴졌으니, 내 머릿속에는 내가 당한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헌터 직무 수행 평가에서 암석 정령을 맞닥뜨렸을 때, 기자들이 날 얼마나 불합리하게 물어뜯었는지 기억했다.
동료들을 지키고자 무기를 챙기러 잠시 현장을 이탈했던 나를 동료들을 버린 비겁자라 모욕한 걸 기억했고, 그로써 내 몸값을 대폭 낮추는 데 일조한 것을 기억했다.
그놈의 기사들이 아니었다면 내 성격이며 사고방식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은 아니었을 것······.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한 생각을 떨쳐낸 뒤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놈들은 내 라운드걸에게 그놈의 황금화살상을 주어야 했다고.
그놈의 시상식을 연 방송사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난 그때 분명히, 백담비에게 그놈의 상을 주라고 말했다. 저들은 그 말을 무시했다.
그 대가를 지금 치러야 할 것이다.
*******
방송국을 나오니 공무원들이 초조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국안부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분명했다. 새로 뽑힌 국안부 장관도 그중에 보였으니까.
그리고 국안부 장관이든, 다른 공무원들이든 지금 방송국에서 일어난 일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확히는 그 역시 신경 쓰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에 집중하는 중일 것이다.
나와 최용 등 헌터들의 대표가 앞으로 나서자 국안부 장관이 말했다.
"의원분들 붙잡아두고 계시다던데, 일종의 인질극을 하고 계신 것 맞습니까? 지금 생겨난 의문에 대답하라는······"
최용이 말을 받았다.
"알면서 왜 묻나?"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줄 알겠는데, 오해입니다."
"오해라. 돈 주고도 못 데려올 짱깨 각성자가 특무대에 떡 하니 생겨났는데 대체 어떤 오해가?"
"아까 실려 간 그 친구가 중국에서 데려온 각성자는 맞습니다. 그런데 헌터 통제, 뭐 이런 걸 하려고 데려온 각성자가 아니구요."
"오, 그럼 괴수 잡으라고 데려왔나 봐?"
최용이 그리 비꼴 때였다.
국안부 장관은, 뻔뻔한 건지 아니면 정말 그리 생각하는 건지 모를 담담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예, 그러려고 데려온 게 맞습니다. 베헤모스가 말입니다. 죽기 전 일본에 정신파를 방출해선 거기 있던 괴수들을 한반도로 불러 모았는데······.
지금도 그 부름을 받은 일본 괴수들이 여기로 오고 있는 중인데요. 그중에 베헤모스보다 한두 체급 낮을 뿐인 놈도 한 마리 있단 걸 아십니까?"
148화 특무대원 리기룡 - [5]
난 방금 들은 정보를 곱씹었다. 베헤모스보다 조금 약한 괴수가 올 예정이라고?
나름 경악스러운 소식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경악하기엔 너무 뜬금없는 소식이기도 했다.
최용도 놀랐다기보단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이런 질문을 했다.
"그런 괴물이 와서 또 괴수 대결전이 펼쳐질 예정이었는데, 그 전에 헌터들 대우를 낮출 거란 발표를 했다고?"
"타이밍이 적절하지 않았단 자각은 하고 있습니다. 다만 발표를 더 미룰 수가 없던 일이었던지라······."
"애초에 그놈의 괴수 온다는 소식, 협회에는 알리지도 않은 것 같은데······?"
"최대한 보안을 유지하는 중이라 그렇습니다."
"그걸 왜 비밀로 유지해?"
"아시다시피 한국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으니까요.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는 자그마한 소식에도 라면값이 요동치는 수준인데, 이 와중에 또 그런 괴수가 오리란 소식을 대대적으로 공표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괴수 놈 오면 협회에 부랴부랴 연락할 예정이었다?"
"아니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번엔 베헤모스를 토벌할 때처럼 가용한 군과 헌터들을 모조리 동원할 생각이 없어요. 국가 간 협조를 통해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처리할 예정입니다."
"국가 간 협조? 최대한 빠르고 조용히?"
"예. 특무대 및 국군, 그리고 자국 헌터 중에는 작전에 꼭 필요한 일부 인원과 방금 지적하셨듯 중국과 일본에서 빌린 각성자 전력을 동원할 예정이었습니다."
중국에서 빌린 각성자 전력이라면 리기룡을 말하는 걸까?
"협회는 패싱하고?"
"자국 헌터들을 무시해서가 아니라 존중하기 때문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헌터 여러분이 베헤모스 사태로 입은 피해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헌터 여러분께 더 부담을 드릴 수도 없거니와, 자국의 능력으로만 감당하기엔 또 너무 큰일이라 해외의 협조가 필수······."
그러나 그 기나긴 설명으로도 괴수를 잡기 위해 데려왔다는 중국인이 하필이면 특무대복을 입고 있었던 점, 헌터들 시위에 그 중국인이 막으러 나선 점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또 이 와중에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그따위 해명을 한 국안부 장관이 너무 담담한 표정이란 점이었다.
변명이 어설픈 거야 급조한 변명이라 그럴 수 있다. 그런데 급조한 변명을 하면서 당당한 것은 대체 어째서인가?
따로 믿는 바라도 있는 건가, 하는 의문이 문득 들었다.
혹시 옆에 데려온 공무원 중에 중국에서 데려온 S급 각성자라도 있나 살펴보았다. 그 정도 전력이 옆에 있다면 자신감에 가득 차 헌터들 상대로 대놓고 헛소리를 지껄일 만하니까.
그러나 그 옆에 중국 출신 각성자는 따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그래서 그 짱깨놈이 왜 괴수는 안 잡고 김극 눈에 열선이나 쏜 건데?"
과연 납득이 안 된 듯, 최용이 캐묻자 국안부 장관은 여전히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건 저도 잘······ 그리 나선 당사자 아니면 특무대에 물어봐야······. 그런데 중국에서 각성자 데려온 이유를 굳이 해명해야 합니까?"
"그럼 해명 안 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나? 의원들 돌려받기 싫어?"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협회에 동의를 구한 바 있는데요."
"언제!"
최용이 고함질렀고 국안부 장관이 말했다. 그리고 나는 그 자신감의 이유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강준치 씨에게 동의를 구한 바입니다."
강준치, 그 이름 석 자가 나온 순간 최용의 얼굴이 굳었다. 그 주변 헌터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고.
베헤모스 토벌 당시 모두 그 남자의 힘을 목격한 마당 아닌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강준치의 이름은 전제군주정에서 왕의 이름 수준의 무게감이 있었다.
"협회에 동의를 구했다면서 강준치가 왜 나와?"
최용이 따졌지만 옆에 있던 헌터가 지적했다.
"강준치도 협회 간부예요. 각성위원회 위원장이요."
각성위원회는 대체 뭐 하는 곳인지 그 단체를 만든 김형만 씨도 모르고 부위원장인 나도 모르고 위원장인 강준치도 모르는 신비의 단체지만, 실질적으로 협회에서 맡은 일이라곤 전혀 없는 단체지만 그래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단체다.
왜냐하면 방금 말했듯 나와 강준치가 각각 부위원장과 위원장을 맡고 있는 곳이니까. 때로는 맡은 업무보다는 사람 그 자체가 더욱 중요시될 수 있는 법.
그리고 강준치의 허락이 있었다면, 그것은 곧 왕의 허락이 있었단 것과 같은 의미였다.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는지 최용이 스마트폰을 들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준치 씨? 나 최용인데······"
통화 상대방인 강준치의 목소리 또한 모두에게 들렸다.
「최용인데 뭐?」
전화기에서 울리는 강준치의 목소리가 험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강준치는 화가 난 것 같았는데, 그래서 최용도 당황한 가운데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묻고 싶은 거? 나부터 뭣 좀 물어보자」
"예? 예, 물어보십―"
그리고 스마트폰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한국의 유일신이 내지르는 고함이었다.
「최용 너 이 깡패 건달 새끼야. 너 씨발, 원래는 헌트웹에서도 존재감 없던 놈이 협회장 되더니 왜 이리 나대는 거야? 네가 협회장 된 뒤론 헌터들이 맨날 파업을 하네 어디 쳐들어가네 뭘 쳐부수네 이런 소식만 쭉 들리는데 요새 헌트웹 분위기 보면서 내가 다 조마조마해 죽겠다!」
"조마조마하다니, 그건 또 무슨―"
「나한테도 불똥 튈 것 같으니까, 등신 새끼야! 아주 그냥 나라에서 각성자들 탄압해야 할 이유를 두 발로 뛰면서 알려주고 있는데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여기가 콩고도 아니고 사람 손목은 또 왜 잘라?」
뉴스에 나오지도 않았을 그 상황을 강준치가 또 어떻게 아나 했더니,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그가 지금 그토록 화난 이유도 함께.
「손목 잘라놓고서 그 사진은 또 헌트웹에 왜 올린 거냐? 내가 헌트웹에서 똥짤 보면 경찰이랑 흥신소 다 동원해서 기어이 범인 찾아내선 참교육하는 거 모르냐? 지금 밥 먹다가 네가 아까 올린 사진 보고 속버려서는 협회 쳐들어가서 다 뒤집어엎어야 하나 고민 중이거든?」
아까 기자들 손목을 자른 뒤, 최용이 그걸 또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해서는 헌트웹에 자랑스레 올린 모양이었다.
그러는 행동이 새삼 이상한 일은 아니다. 멕시코 갱단은 사람을 죽여놓고 그 목을 늘어놓고 IS는 사람을 죽인 다음 그 사진을 SNS에 올려 과시하는 법.
스마트폰 너머 강준치가 계속 성을 냈다.
「하여간 하는 짓이 협회장이 아니라 무슨 조폭 새낀데, 김형······ 아, 씨. 이름이 기억 안 나네. 하여간 엘마야캐요 그 아재가 협회장 돼야 했는데, 뭐 이런 깡패 새끼가 협회장 되어선 완장질을 이따위로 역겹게······」
이렇게 냅다 욕을 먹으니 화가 치밀어오른 걸까? 최용이 버럭 소리질렀다.
"김형만 씨가 협회장 됐어도 지금 상황 가만히 안 두고 봤어!"
「그 아재가 그 난리를 쳤으면 나도 불만 없었지? 한의대 나온 사람이니까 나보단 머리 좋을 테니 어련히 다 생각이 있겠지 하고 넘겼을 테니까.
그런데 너 같은 새끼가 날뛰는 건 도저히 그런 식으로 못 넘기겠다. 대가리가 텅텅 비어서는, 웬 과격한 짓 한 다음 헌트웹에 올려서 도파민 얻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 같은 엠생 새끼가. 이러다 중국에서 한국 상황 돕겠다고 S급 한둘 파견하는 거 아닌가 불안할 지경이네」
나는 슬쩍 국안부 장관을 보았다.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속으론 웃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헌터 협회장이란 사람이 모두의 앞에서 왕의 노여움을 사서는 제지까지 당한 상황 아닌가?
"지금 짱깨들 올 거 무섭다고 나한테 욕하는 거냐?"
「어, 그런데? 나 데스클로도 무서워서 어지간해선 짱박혀있는 새끼거든? 근데 최용 넌 데스클로보다 안 무서우니까 막 대해도 되겠다」
최용의 몸이 분노로 덜덜 떨렸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 만큼 대뜸 분노를 표출할 순 없을 터였다.
과연 최용은 한참이나 심호흡하며 진정하려 노력하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내 욕은 이쯤 하고. 그래서 짱깨 각성자들 오라고 동의했다는 건 뭡니까?"
「내가 그것도 일일이 해명해야 하나?」
강준치 대신 설명한 것은 장관이었다.
"혹시 이번에 또 나서주실 의향이 있느냐고 강준치 씨에게 여쭸더니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러면 다른 각성자를 해외에서 데려올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괜찮겠느냐 여쭸더니 그러라고 하셨고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더는 화내는 헌터도, 따지고 드는 헌터도 없었다. 강준치를 상대로는, 그리고 강준치가 동의한 일에는 그럴 수야 없는 일이다.
그리고 지금 뭔가 따지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오직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섰다.
"최용 씨? 나 전화 좀 바꿔줘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강준치가 신음했다.
「방금 그거 김극이냐? 음, 나 걔한테도 지랄하긴 어려운데······」
국안부 장관의 표정이 살짝 굳은 가운데, 내가 스마트폰을 받아들었다.
"준치?"
그리고 강준치가 말했다.
「어, 김극. 너도 나한테 뭐라 하려는 것 같은데, 서로 얼굴 붉히기 전에 나부터 말 좀 하자. 내가 이제 데스클로보다 위험한 상대랑은 싸울 생각 없다고 말했던 것 기억하지?」
"그래."
「그럼 나 보고 더 나서라 요구하면 안 되는 것도 알지? 네가 저번에 내 목숨 세 번이나 구해줬으니 뭐 부탁하면 들어줄 거긴 한데 그래도 또 싸우란 건 좀······」
최용과 달리 내 체면은 봐주려는 것이 느껴졌다. 그 사실에 감사해야 하는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중국에서 온 그놈이 내 눈에 열선 쏴서 죽이려 들던데. 딱 봐도 각성자 조지러 온 놈이 날뛰는 건 괜찮고?"
「뭐? 그거 미친 새끼네. 그 미친 새낀 중국으로 돌려보내라고 해, 그럼. 네 말 안 들을 것 같으면 내가 직접 말할까?」
국안부 장관이 한숨 쉬는 가운데 내가 말했다.
"그럴 필욘 없을 것 같네."
「그래? 그럼 최용 그 새끼 다시 바꿔줘. 의원들 붙잡아선 인질극 벌이고 있다던데, 그 짓거리 빨리 집어치우라고 해야지」
최용에게 전화를 바꿔주었고 그가 여전히 불만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최용입니다. 잡아둔 의원들 풀어주라고요? 왜요?"
「그럼 이대로 쿠데타라도 일으킬 거야 뭐야? 너 같은 새끼가 쿠데타 실패해도 큰일이지만 성공하면 더 큰일 아니냐? 너 주제에 지금 정부보다 잘할 순 있어? 대충 대만처럼 중국 개입할 상황만 만들어 주고 끝 아니냐구?」
국안부 장관이 살짝 반색하는 듯하던 그때였다.
"정부 의원들이나 신경 써주고, 민주주의의 수호자 납셨네요."
「민주주의? 이게 민주주의는 맞나?」
강준치가 코웃음 치더니 말을 이었다.
「나라에서 민간협회 폭동 하나 해결을 못 해서서는, 집에 처박혀 있던 나 한 사람한테 애걸복걸하는 게 뭔 놈의 민주주의······?」
보아하니 이미 다른 의원들이 강준치한테 전화해서 뭔가 부탁을 하긴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토록 정부에 협조하기 싫어하던 강준치가 이번엔 기어이 정부 편을 들 만큼 이번 사태가 지나치게 과격했던 모양이고.
그 말을 끝으로 강준치와의 통화가 종료되었다. 그리고 지엄하신 강준치의 명령에 따라 억류된 의원들이 풀려날 때, 나는 저 공무원들이 승리감을 즐기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아저씨들 어딜 가?"
내 말에 돌아갈 준비를 하는 듯하던 국안부 장관이 당황했다.
"예?"
"그러고 보니 이번 시위 목적은 헌터들 출동비 관련이었는데. 장관에 의원들까지 모여있으니 여기서 뭔가 결정하고 돌아가야지?"
장관의 얼굴에 낭패감이 살짝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마도 강준치의 지지를 받아 나름 당당하게 나섰을 그는, 나한테도 그의 지지를 근거로 강하게 나서긴 어렵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방금 강준치가 내 체면을 봐주려는 걸 봤을 테니까.
방금 당한 굴욕에 정신이 아찔해졌는지 최용이 뒤로 물러난 가운데 내가 앞으로 나섰다. 다른 헌터들도 그 옆에 늘어선 가운데, 장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마침 너무 민감한 결정을 성급히 발표했다 생각하던 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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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화 특무대원 리기룡 - [6]
"일찍이 말씀드렸다시피 헌터 여러분을 온전히 만족시켜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여러분 줄 돈 아껴서 그 돈으로 의원들이 룸살롱이라도 가려고 그러는 게 아니에요. 현재 나라에 돈이 없습니다.
라오스든 캄보디아든 헌터 제도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그럴 돈이 없어서 못 하는 거잖습니까? 한국이 그보단 사정이 낫지만, 그래도 돈이 없긴 마찬가집니다.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고 있고요. 유감스럽게도 그 사실은 어떻게 바꿀 수가 없습니다."
국안부 장관의 말에 한 헌터가 외쳤다. 그럼 라오스나 캄보디아처럼 각성자들이 해외 유출되는 걸 막을 생각하지 말라고.
장관이 대답했다.
"예. 걱정하시는 조치가 없으리란 걸 이 자리에서 약속드립니다. 국내에서의 대우에 불만족해 해외 진출을 노리는 헌터 분들께 아무런 불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또 다른 헌터가 따졌다. 왜 그런 결정을 업계와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발표했느냐?
이번에도 장관이 대답했다.
"예전에는 헌터 협회가 국안부 산하 조직이나 다름없었잖습니까? 그래서 예전에는 협회와 본 기관 간에 의견을 조율하는 절차가 딱히 필요하지 않았던 데다······. 협회 인원들이 물갈이된 이후로는 원래 그 자리에서 저희와 연락을 담당하던 사람들이 싹 갈려 나간 탓에 국안부와 협회 간에 서로 이야기할 창구가 사라졌습니다.
이번 기회에 그 창구를 복구할 것이며, 앞으로는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헌터 여러분과의 의견 조율을 먼저 하리라고 약속드립니다."
마지막으로 한 헌터가 '그래서 동결하겠다던 출동비는 어쩔 거냐'고 물으니, 국안부 장관은 앞으로 출동비를 만족스럽게 올려주리란 장담은 도저히 할 수 없지만 최소한 동결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또한 헌터 여러분이 세운 성과에 따라 감세를 비롯해 여러 이득을 드리는 식으로 간접적인 보상을 준비······"
그 모든 발언에 거기 모인 헌터들이 아주 만족한 것 같진 않았지만, 적어도 크게 화가 난 것 같진 않았다. 일단 장관이 말하는 바가 나름대로 진솔할 것 같았거니와 일단 굽혀주긴 하는 것 같았으니까.
심지어 장관은 말로만 굽히는 게 아니라 실제 무릎을 헌터들 앞에서 굽혔다.
모든 질답을 마친 장관은, 헌터들 앞에 무릎 꿇고 큰절을 한 채 이렇게 말했다.
"작금의 열악한 상황에 희생하시는 헌터 여러분이 여러 불만을 품으신 걸 알고 있습니다. 따로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깊이 사죄드립니다."
기분 탓인지 실제 누가 손뼉 쳤던 것인지 몰라도, 그때 작게나마 손뼉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그리하여 헌터들의 시위가 끝났다. 강준치의 제지로, 그리고 장관의 항복 및 사죄로.
"모두 고생했습니다!"
"김극 형, 특무대랑 싸우느라 눈알 녹아내리질 않나 마지막에 장관 붙잡고 말 꺼내지 않나 이번에도 가장 수고했······"
차 타고 돌아가는 길에 뒷좌석에서 헌트웹을 봤다.
이번 일 관련 글이 여럿 올라와 있었는데, 그중 하나를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익명 : 최용 이 새끼 ← RPG에서 탱커 시키면 파티 말아먹을 새끼 아니냐?
이 새끼 하자는 대로 따라가다간 다들 길 잃은 양이 돼버리는데?
협회 목적이 '출동비 동결 항의' → '특무대 조지기' → '기레기 척결' 이 순으로 삼단변화를 거쳤는데 이 정도면 원래 목적이 변질된 수준을 넘어 최용이 젊은 치매를 앓아서는 뭘 하려던 건지 실시간으로 까먹었다고 봐야 하지 않나?
김극햄이 집 가려는 의원이랑 장관들 붙잡고 출동비 얘기 꺼내기 전엔 다들 원래 목적 까먹고 있었잖아.
자칫하면 특무대랑 싸우고 방송국 때려 부수느라 기껏 모인 헌터들 에너지 다 낭비해선 자르든 말든 좆도 상관없는 손목 몇 개 잘라놓고 헌터들이 이겼다며 자축하고 끝날 뻔했네
엘마야캐요 형님······. 그리워해야겠지?
대충 이 비슷한 글이 여러 개 올라와 있었는데, 죄다 최용의 지도력을 의심하거나 비난하는 글이었다.
돈도 한 푼 안 주면서 시위 나오라고 강권하길래 내심 불만이었는데 뜬금없이 방송국이나 공격하자길래 어이가 없었다느니, 헌트웹에 최용이 자꾸 공포 분위기를 만들려는 게 눈에 보여서 아니꼬웠는데 강준치가 제대로 욕해줘서 속이 시원했다느니.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최용을 결사옹위하는 일치단결 분위기였는데, 갑자기 다들 태도가 변한 걸까?
아니, 다들 갑자기 생각이 바뀌었다기보단 불만이 있어도 말했다간 비난당할까 봐 잠자코 있던 불만 세력이 이번 일로 최용의 권위가 깎인 일을 틈타 들고 일어났다고 보는 게 옳으리라.
어떤 이유에서건 한순간에 변해버린 헌트웹 분위기를 보면서 혀를 찼다.
이래서 민주주의는 역겨운 것이다. 이따위 정치질 따위가 없는 소월이 괜히 지구보다 우월한 게 아니고.
그리고 저 앞 조수석에서, 최용 또한 스마트폰을 들고 헌트웹을 보고 있던 모양이다. 더없이 우울한 목소리로 내게 묻는 걸 보니.
"김극 씨도 이번에 제가 협회장 노릇 거지같이 했다고 생각해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잠시 속으로 말을 골랐다.
"뭐, 불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죠?"
내 말에 최용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 하기야 주변 사람 끌어들이기도 싫었는지 여친인 백담비 씨랑 짐꾼들도 시위할 때 안 데려왔더라."
"그래도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최용이 고개를 돌려 날 바라보았다.
"정말요?"
"진심으로."
"제가 아니라 엘마야캐요······ 김형만 씨가 협회장이 돼야 했다는 건 또 어떻게 생각하고요?"
"김형만 씨가 협회장이었으면 물론 더 잘했을지도 모르죠. 그 아저씨가 사실상 협회장 노릇 하실 때도 잘했으니까. 이번에도 대뜸 폭력시위부터 하자는 게 아니라 헌터들 서명 모아서 여기저기 항의부터 하고 뭐 그러셨을 것 같은데······ 뭐 이런 말 한다고 소용이 있나?"
잠시 뜸 들이고서, 내가 말을 이었다.
"김형만 씨는 나라에서 죽였잖아? 그럼 당연히 나라에선 더 과격한 지도자인 최용 씨를 감당해야 하는 거지."
"김형만 씨를 나라에서 목 잘라서 죽였다고요?"
"그랬잖아요? 목 잘라서······."
'특무대를 시켜······' 하고 내가 부연하려 할 때 최용이 말했다.
"아, 뭔 말인지 알겠다. 하기야 정부가 그 개짓거리 안 했으면 데스클로들이 베헤모스 따라 우르르 몰려나올 일도 없었을 거고 김형만 씨 목도 몸통에 얌전히 붙어있겠네.
아무튼 이건 마지막으로 묻는 건데, 제가 괜히 정부를 자극하기만 한다고 봐요? 각성자들 억압하고 통제할 명분이나 주는 거라고 강준치가 그러던데······."
그 질문에 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아뇨."
"아니라니, 왜요?"
"내가 최용 씨가 하는 행동을 다 좋게 보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제가 옆에서 막 지적하거나 불만 표시하진 않잖아요? 그게 다 방금 말씀드렸듯 필요한 일이라 믿기 때문이거든요."
"필요한 일이요."
"예. 필요한 일."
최용이 날 뻔히 바라보는 가운데 내가 계속 말했다.
"장담하는데 최용 씨가 아무것도 안 했어도 나라에선 우릴 억압하고 통제했을 겁니다. 우리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단 최용 씨가 과격하게라도 구는 게 훨씬 낫다고 믿기 때문에 지지하는 거고요."
내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최용이 웃었다. 내 위로가 진솔한 발언으로 들리게 하고자 일부러 비난을 살짝씩 섞었는데, 그래서 더 진솔하게 느껴졌을까?
부디 그렇길 바랐다. 최용 저 친구가 이번 일로 기죽으면 안 되니까. 그랬다간 비각성 찌꺼기들이나 즐거워 할 것 아닌가?
난 각성자들이 지금보다 얌전했던 미래를 알고 있다. 그 미래가 지금보다 우울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 사실이 이 모든 과격함에 정당성을 준다······.
최용이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더니 문득 말했다.
"어이쿠, 강준치 이 양반 봐라. 그놈의 참교육 다시 시작했네?"
"그거 다시 시작했다고요? 베헤모스 사태 이후론 그 짓거리 중단하지 않나?"
"그러니까요. 사고 치곤 자중하려는지 가만히 있더니 슬슬 다시 시동 거나 보네? 이 양반은 나한테 혐짤 올리지 말라고 뭐라 하더니 대체 뭐 하는 짓······"
*******
집에 돌아와서 인터넷을 켜보니, 최용의 말이 사실이었다.
강준치가 다시 영상을 올렸다. 시민을 고문하고선 참교육이라 주장하는 그 영상을.
베헤모스가 쓰러진 뒤 강준치는 부산에 돌아갔으므로 영상의 배경 또한 부산이었는데, 알다시피 부산은 지저분한 운전 문화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평소 강준치가 그 사실에 불만이 있었던 걸까?
'부산 운전문화 교정'이란 제목의 영상에서, 강준치는 경차 하나를 운전했다. 낡고 빨간 경차.
남들이 얕볼 만한 그런 차를 운전하다가, 다른 운전자가 빵빵거리거나 갑자기 끼어들거나 하면 그놈의 '참교육'이 시작되는 것이었다.
'이 새끼가 운전면허 시간에 배운 게 없나? 지가 교통법규 어겨놓고 나한테 빵빵거려? 미쳤어!'
감히 강준치를 몰라본 운전자의 손발톱이 그렇게 뽑혔다. 그리고 그 운전자가 탔던 차량은, 폐차 압축 장치에 넣은 것처럼 강준치의 역장에 압착돼버렸다.
요즘 세상엔 새로 사기 어려워서 가정의 중요한 재산으로 취급되는 차(나이토 상이 차 광고를 찍은 게 괜히 그토록 화제가 되었던 게 아니다)를 그리 잃었으니, 어쩌면 손발톱이 뽑힌 것보다 그게 더 고통스러울지도 몰랐다.
내친김에 강준치는 불법주차까지 단속하기 시작했다. 돌아다니면서 불법주차 차량들을 역장으로 '압착'하며 돌아다녔다.
'지금 뭐 하는 짓입니까? 그만 해요!'
출동한 경찰이 용감하게 저지에 나섰지만, 그는 감히 최강의 각성자에게 소리 지른 대가를 치렀다.
강준치가 적반하장으로 성냈다.
'넌 경찰이 돼선 불법주차 단속 안 하고 방치하다가 나한테 성내냐? 죽고 싶어!'
불운한 경찰의 손발톱마저 뽑혀 나가는 것으로 영상이 끝났다.
오랜만의 복귀 영상이라 예전보다 세게 나갈 필요를 느낀 까닭일까? 어째 예전 영상들보다도 스케일이 훨씬 커졌단 느낌이 든다.
하여간 미친 친구 같으니.
왜 갑자기 이 짓거리를 다시 시작했는지 대충 알 것 같긴 했다.
강준치로서는 갈수록 각성자들이 과격하게 구는 분위기 속에서 자신 또한 더 과격하게 굴어도 되리라 판단했을지 모른다. 웬일로 정부 편을 들어 그들이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들었으니, 정부에 제거될 걱정이 줄었으므로 더 과격하게 굴어도 되리란 자신감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이번에 정부 편을 든 탓에 헌터들에게 욕먹을 게 걱정되니 다시 반항아 이미지를 회복하기 위해 그런 걸지도······.
어느 쪽이건 참 쓸데없는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정부에서 자길 제거할까 봐 걱정돼서 집에 처박혀 지낸단 놈이, 자꾸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하는 건 대체 뭐 하는 건가?
하여간 최용이든 강준치든, 정진영이든 내 라운드걸이든 내 주변 각성자들은 다들 정신이 병들어서는 정신과 상담이 필요한 사람들뿐이다.
정신이 밝고 건강한 사람은 나뿐임을 새삼 실감했다. 비각성 찌꺼기들 사이에서 동족들을 지킬 사람 또한 나뿐이란 것도······.
계속 쉬고 있자니 전화가 걸려왔다. 정진영의 전화였다.
「김극햄, 방금 헌트웹에 올라온 글 봤어요?」
"뭔 글이요?"
「외신 기자가 올린 글이요! 그게 번역돼서 올라왔는데······!」
뭔 글인가 해서 봤더니 나도 조금 놀랐다.
헌트웹에 올라온 사진의 주인공은 최용이었다. 용으로 변한.
변신 능력자인 최용은 베헤모스가 죽을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 힘을 흡수하여 가장 크게 성장한 각성자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가 변신할 수 있는 크기 또한 대폭 늘었다.
그리하여 괴수 영화의 최종 보스를 할 수 있을 만치 거대하고 시꺼먼 용 한 마리가, 웬 방송국 건물 옥상에 올라 있었다.
반쯤 녹아내린 방송국 건물이었다. 용암이며 쇳물 같은 게 줄줄 흘러내리는. 최용이 용의 화염으로 그리 만들었으리란 점은 따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그걸 보니 절로 감탄이 나왔다. 최용 저 양반이 다 끝나고 얌전히 집에 돌아간 줄 알았더니, 따로 가서 저런 짓을 벌였구나.
그리고 외신 기자가 최용이 한 일을 찍어서 올린 듯했는데, 헌트웹 사람들이 그걸 보고 '멋지다'느니 '괴수영화 같다'느니 하며 칭송하는 중이었다.
그 기사에 최용도 댓글을 달았다.
Ⓐ Dragon : 생각해보니까 우리 작정하고 욕한 방송국이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만 조진 걸론 성이 안 차더라구?
그래서 휙 날아가선 나머지 하나도 손봐줬다! 강준치 씨가 손목 자르는 건 혐짤이라며 질색하길래 그냥 건물 자체를 통째로 태워버렸는데 이건 혐짤 아닌 거 인정?
나는 다시 한번 최용이 녹여 버린 방송국 건물을 보았다. 콘크리트는 물론 철근까지 녹아 내려서는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 현실감이 없을 만치 근사했다.
곧이어 강준치에게서 헌트웹 메시지가 왔다.
Ⓢ Kang : 최용 저 새끼 저거 S급이었냐? 건물 통째로 녹이는 화력 뭐냐
Ⓢ Kang : 한 짓 보니 쫄리는데;
그 반응을 보며, 계속해서 사진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웃었다.
생각해보면, 이번 일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이번 헌터 폭동은 시민들의 의지나 그들의 의지를 대변한 정부가 아니라 단 한 명의 초인에 의해 제지되었으며, 헌터들을 향한 대중의 여론과는 상관없이 거기 모인 장관과 의원들은 강경했던 뜻을 굽혀야 했다.
감히 각성자를 모욕했던 언론은 응징당했으며, 앞으로 언론은 정부의 눈치를 보듯 각성자들의 눈치를 보고 기사를 작성할 것이다.
보다시피, 조금씩이지만 한국은 나아지고 있다.
이상향과도 같은 소월을 향해 차근차근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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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화 마법소녀 임새롬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