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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9 - 130-135

130화 종말, 베헤모스 - [4]

지난번 베헤모스 사태에서, 한국은 공군이 궤멸한 뒤 각성자 헌터의 절반과 군인 수만 명이 전사하고서야 베헤모스를 상대로 외피를 절반가량 벗겨냈으며 꼬리마저 절단함으로써 놈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은, 일찍이 그 막대한 손해를 입고서 이룬 것보다 큰 성과를 컵라면 몇 개 익기도 전에 이루어낼 상황이다.

나는 베헤모스의 몸 위로 기어오르는 데스클로들을 연달아 사살하며, 칼잡이들의 칼질과 거기 베이고 또 베여나가는 베헤모스의 꼬리를 살폈다.

보아하니 꼬리는 잘리기 거의 직전이었다.

좋아, 이대로면 가면 된다.

그 꼬리를 잘라봤자 자꾸 재생하는 데다 꼬리 자체가 등 위로 휘둘러지며 칼잡이들이 칼질에 집중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문제였지만, 심지어 자꾸만 그 꼬리 끝이 칼잡이들을 겨누며 열선을 방출하려는 것이 문제였지만, 베헤모스가 제 꼬리를 갉아 먹으려는 벌레들을 쓸어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 강대한 신이 우리 편이었기 때문에.

베헤모스가 또다시 칼잡이들을 향해 꼬리 끝을 겨누려는 가운데, 저 멀리서 날아온 거대한 건물이 그 꼬리에 부딪쳤다.

이십 층짜리 빌딩이었다. 베헤모스의 꼬리와 충돌한 빌딩은 산산조각이 나며 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리 한 차례 꼬리의 움직임을 방해하더니, 뒤이어 십오 층짜리 회사 건물이 날아왔다.

그 뒤에는 사 층짜리 상가 건물이, 그 뒤로는 삼십 층짜리 고층 아파트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단지 내 아파트를 통째로 공중에 띄웠는지 당장 공중에 떠오른 아파트가 십수 채였다.

강준치의 능력이라면 한 건물 전체에 역장을 씌움으로써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는 둔기로 만든 다음 연달아 내리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충돌할 때마다 충격으로 훼손될 역장을 아낄 겸, 어차피 지반째로 무너져서 이대론 사람이 쓸 수 없는 건물들이니 이번 기회에 모조리 철거하고자 죄다 소모해버리는 걸까?

그리 건물이 박살 날 때마다 사방에 튄 파편은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지려다 말고 매번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렸는데, 이 역시 강준치의 도움이 분명했다.

너무나도 든든했다. 소름이 끼칠 만큼 말이다.

잇따른 충격으로 베헤모스의 몸이 마구 요동쳤지만, 아직 그 누구도 그 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칼잡이들은 다들 발목에 끈을 달고 와서는, 베헤모스의 등을 역장 날붙이로 살짝 절단한 다음 그 상처 틈에 끈을 끼워둔 채였다. 베헤모스의 재생력으로 말미암아 상처가 복구되며 그 끈 역시 베헤모스의 등에 단단히 고정되었고.

이래저래 준비도 철저하겠다, 상황은 낙관적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한편 베헤모스는, 꼬리가 계속 타격받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조준을 해냈다.

기어이 그 꼬리 끝에서 붉은 열선이 뿜어졌다. 역장 날붙이를 휘두르던 칼잡이 둘이 통째로 광선에 휘말려선 불타 사라진 뒤, 누군가가 비명 질렀다.

"씨발!"

끔찍하고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만히 서서 애도나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공간이동 하여,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역장 날붙이 능력자 두 명을 더 데려와 이 장소에 투입했다.

이후로도 칼잡이들의 칼질은 쉬지 않았다. 그 뒤로도 또 한 명이 열선에 불타 당한 뒤에······.

"잘랐다!"

기어이, 베헤모스의 꼬리가 완전히 절단되었다. 한희가 외쳤다.

"김극 형!"

그 즉시 내가 공간이동 하여 휘두른 망치가 그 꼬리를 강타했다.

거대하기 그지없는 꼬리가 베헤모스의 몸에서 떨어져 내렸다.

"됐다, 씨발!"

굉음과 함께 칼잡이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사실상 확정된 승리를 자축하는 함성이었다.

베헤모스에겐 이제 등에 달라붙은 벌레들을 타격할 수단이 없다.

물론 아직 베헤모스에게는 공격수단이 여럿 남아있다. 그놈의 열선만 해도 꼬리 끝이 아니라 동공이며 주둥이 따위로도 발사할 수 있는 모양이니까.

또한 몸에 달라붙은 칼잡이들을 직접 타격할 순 없어도 몸을 뒹굴거나 해서 깔아뭉개길 시도할 수는 있으리라. 물론 큰 문제는 아니다. 그 정도는 내 공간이동으로 얼마든지 대응이 가능할 테니.

아마, 지금 자기 상황이 끔찍하다는 것을 베헤모스도 눈치챘을 터였다.

놈이 그 암울한 상황을 전환하기 위해, 지금까지와 다른 행동을 하리란 것쯤은 모두 예상하던 마당이었다.

"저놈 뭐 하려는······?"

베헤모스가 하늘에 떠다니는 수송기를 바라보았다.

뒤이어 베헤모스가 강준치를 태운 그 수송기를 향해 주둥이를 벌렸을 때, 그때까지는 아무도 그 이후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그 주둥이에서 열선이나 뿜어져 나오지 않을까 예상했다. 아니면 거대한 돌덩이라도.

틀렸다.

여전히 계속 날아와서는 이제 그 머리통을 타격하기 시작한 건물에 두들겨 맞으면서도, 베헤모스는 뭔가를 하기 위해 견디는 듯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주둥이에서 터져나온 것은 소리 없는 포효였다.

포효라지만 실제 소리나 초저주파가 그 주둥이에서 터져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은 선명했다.

「죽어」

나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죽어' 한 마디에 잠시 끔찍한 현기증을 느꼈다.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이런 일을 언제 겪었는지 떠올려보았다.

그래. 게이트가 열린 지역에 처음 진입해, 그 안에서 쏟아져나온 감정들을 처음 받아들였을 때 이런 현기증을 겪었지 아마.

추측건대 베헤모스는 그 비슷한 현상을 정령 특유의 정신파를 통해 일으킨 모양이었다. 그 정신파에 온갖 감정이며 생각을 가득 담아서 방출했으리라······.

듣도 보도 못한 공격이지만, 수천 년을 살아왔다는 정령이라면 아직 사람들이 파악하지 못한 공격 수단 한둘쯤은 당연히 가지고 있을 만하다.

한편 방금 그 정신적 포효는 날 향한 것이 아니었다. 수송기와 거기 탑승한 강준치를 향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그 포효에 정면으로 노출되었을 수송기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고개를 돌려 그쪽을 바라본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수송기가 수직 낙하하고 있었다. 전속력으로, 지상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와 함께 강준치가 공중에 띄워두었을 여러 건물까지 모조리 추락하여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보였다. 건물 한 채가 떨어질 대마다 굉음과 함께 돌가루가 요란하게 피어올랐지만 거기 신경 쓸 수는 없었다.

나는 급히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수송기 안에 진입하니, 수송기 조종사가 입에서 침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 강준치도 정신을 잃은 듯 축 늘어져 있는 게 아닌가.

조종사 먼저 붙잡고서 강준치마저 데리고 탈출하기 위해 공간이동 하려니, 강준치의 몸에 역장이 씌워져 있어 불가능했다.

하기야 제 집에 역장을 두르거나, 수송기에 역장을 두르거나 하는 일엔 따로 의식적인 집중이 필요하지만 원래 제 몸에 두른 역장을 유지하는 데는 그럴 필요가 없다. 기절하거나 잠든 와중에도 신체의 역장은 유지된다.

그 역장이 남아있다면 강준치까지 탈출시킬 필요는 없으리라.

그리 판단하고서 나는 조종사만 데리고서 공간이동 했다.

잠시 후, 우리 둘이 수송기를 빠져나왔을 때, 수송기가 지상에 내리꽂혔다.

수송기가 굉음을 내며 폭발했다. 화염이 솟구치는 가운데 나는 다시 그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치솟은 화염은 역장이 막아주리라 믿으며, 그 안에 진입하여 강준치를 찾아낸 다음 여전히 축 늘어진 그를 등에 업었다.

강준치와 함께 박살 난 수송기를 빠져나왔을 때였다.

잠시, 아주 잠시나마 내 몸이 굳었다.

베헤모스의 눈, 내 몸보다도 훨씬 큰 그 눈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놈과 눈을 마주쳤다는 생각에 순간 오한이 들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날 보는 게 아니라 강준치를, 그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영혼을 보고 있을 터였다.

베헤모스는 바로 그 태양을 삼키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 강렬한 힘마저 제 것으로 삼기 위해 포식하려는 것 같았다.

지금 제 등 위에서는 칼잡이들이 제 목마저 도려내고자 애쓰고 있을 텐데, 놈은 그 몸에서 일어나는 일마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베헤모스가 이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 또한 반사적으로 달렸다. 지진 속에서, 강준치를 등에 업은 채, 베헤모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죽어라 달렸다.

베헤모스는 날 쫓아 달려왔다. 물론 빽빽한 건물이 밀집한 서울은 베헤모스 같은 거대괴수가 마음껏 질주하기 좋은 환경이 아니어서, 놈은 달리던 중에 계속 이런저런 건물에 부딪히며 그것들을 넘어뜨려야 했다.

덕분에 내가 더욱 빨랐지만 안심할 수가 없었다. 가슴에 단 무전기가 경고했다.

「데스클로들이 한 방향으로 대거 이동 중!」

다른 괴수들 또한 나와 강준치를 노리기 시작했다.

베헤모스의 지시를 받아 저러는 건지, 아니면 놈들도 정신 잃은 신을 포식하고 싶어서 저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건 필사적으로 달렸다.

곧이어, 데스클로들이 물결을 이루어 내게 파도치는 것이 보였다.

물론 평범한 데스클로들은 나보다 빠르지 않다. 그러나 역장체들은 아니다. 가뜩이나 네 다리로 달리기 때문에 인간보다 월등히 빠른 그 짐승들은, 그 몸에 역장을 두르는 순간 치타가 굼벵이로 보일 만한 속도를 낸다.

과연 데스클로의 물결 사이에서 한 역장체가 스포츠카를 방불케 하는 속도로 내게 달려오더니 냉큼 도약했다.

나는 달리는 와중에도 반격해야 했다. 근처에 있던 교통안전 표지판을 들어 역장을 두른 채로 놈의 턱을 후려쳤다. '탁!'

나가떨어진 역장체의 숨통을 끊기 위해 일격을 가하려니, 또 한 마리 역장체가 질주해왔기에 그러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달렸다. 쉬지 않고 달리면서 외쳤다.

"강준치 확보했고, 지금 공간이동 불가능한 상황이니 지원 바람! 지원 바람!"

그리고 맨 먼저 내 지원 요청에 응한 것은 최용이었다.

거대한 그림자와 함께 지상에 내리꽂힌 불줄기가 내 시야를 잠식했다.

"그대로 계속 불 뿜어요! 우리 둘 다 휘말려도 상관없으니까!"

용의 불꽃이 괴수의 물결과 한 구역을 통째로 불사르는 가운데, 나는 계속 달렸다.

그리고 불 속에서도 살아남은 역장체 한 마리가 내게로 달려왔다.

놈 역시 내게 도약했지만, 이번에는 반대 방향에서 얼음 새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발톱에 단 고폭탄과 함께 놈과 충돌했다.

그 폭발에 나도, 강준치도 휘말렸지만 역장 능력자답게 견뎌낼 수 있었다. 내 라운드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계속 달렸다.

이후로는 몇 마리 괴수와 실랑이했으며 몇 번의 도움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어찌어찌 살아남아 한 상가구역에 도착했다.

"김극 씨? 이쪽으로!"

바로 그 상가구역의 도로에, 일단의 무리가 보였다.

헌터 라이플 여섯이 먼저 보였고 돌격소총 수십 개가 그 사람 다음으로 보였으며, 그 무기들을 든 헌터들이 마지막으로 눈에 담겼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정진영을 비롯한 신입 A급 헌터들과······ 그들을 수행하는 짐꾼들.

나와 눈이 마주친 정진영이 히죽 웃었다. 나는 웃음에도 그리 공포와 긴장감이 묻어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김극햄? 도우러 왔어요!"

그리고 또다시 데스클로들이 달려오는 가운데, '드르르르륵―' 소리가 중첩해서 났다.

헌터 라이플 여섯이 동시에 발사되는 소리였다. 그 총구에서 쏟아져나온 기관포탄들이, 그 뒤에 선 헌터들의 총알이 데스클로의 물결을 강타했다.

엄폐할 필요 없이 전력으로 쏟아내는 화력이었으므로 속 시원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강준치를 바닥에 내려놓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다수의 헌터들이 구성한 화망에 데스클로들이 속절없이 쓸려나가는 가운데, 무전기에서 또다시 경고가 전파됐다.

「데스클로 역장체 한 마리 그쪽으로 가는 중······ 가속 능력까지 지닌 것 같은데 주의 바람!」

나는 눈을 껌벅였다. 가속 능력? 또?

과연 저 멀리서, 한 살덩어리가 정신적 그물망을 찢어발기며 이쪽으로 질주해오고 있었다. 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인데도 놈과 우리 사이의 거리가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좁혀졌다.

사백 미터, 삼백 미터, 백 미터······.

양팔이 잘린 당시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느낀 추위도.

그리고 나는 교통안전 표지판을 움켜쥐었다. 야구 경기의 타자가 눈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공을 치기 위해 대기하듯, 나도 그렇게 했다. 타자가 일찍이 날아온 공을 쳐 내지 못했다고 해서 포기하지 않듯, 나도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순간, 육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여려 겹 정신적 그물망이 동시에 찢어졌다. 놈이 왔다!

수십 미터 앞의 정신적 그물망마저 찢어진 순간, 내 육감이 경고를 발하기도 전, 나는 표지판을 휘둘렀다. 아래에서 위로 힘껏.

무언가 맞은 감촉이 있었다!

쳐 날려진 데스클로 역장체는 그제야 그 모습이 드러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달려오다가 제대로 얻어맞았으니 몸에 가해진 충격이 클 텐데도 역장이 남아있는 걸로 보아 보통 강력한 놈이 아니었다. 놈이 공중에 높이 떠올라 바둥거리는 꼬락서니를 보고서도 위기감이 들었다.

"헌터 라이플 좀!"

나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정진영의 75kg짜리 헌터 라이플을 뺏어 들고서, 이미 기관포탄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던 그 총구를 저 위로 향했다.

황금빛 선이 추락하던 놈을 쉼 없이 타격하더니, 마침내 저 공중에서 놈이 터졌다. 더러운 폭죽처럼 놈이 폭발했다.

"뭐야?"

헌터 몇몇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지 못한 눈치였다. 상황 파악이 빠른 일부 인원과 얼마 전에 내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들어서 아는 정진영 정도가 이 상황을 알아차리고는 날 보며 치하했다.

"오늘은 컨디션 좋은가 봐요?"

나도 씩 웃어주려던 그때였다.

우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미 어두운 가운데 더욱 두꺼운 어둠을 까는 그림자.

베헤모스였다. 놈이 거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놈의 거대한 안면이 우리를 훑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데스클로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무작정 뒤돌려 달아나갔다간 맥없이 덮쳐지고 만다.

모두가 어쩔 줄 모르고 움찔움찔하는 가운데, 내가 입을 열었다.

"모두, 한 자리로 모여. 역장도 끄고 공간이동 할 준비······."

모두를 공간이동으로 옮긴 다음, 나 혼자서 강준치를 데리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판단하던 그때였다.

피곤에 찌든 한 남자의 목소리가 귀에 파고들었다.

"방금 뭐냐······ 나 지금 정신 잃었던 거냐?"

그 목소리의 주인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강준치? 일어났냐!"

뒤돌아보니 과연, 강준치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서 있었다.

강준치는 고개를 들어 베헤모스를 올려다보았다. 베헤모스는 막 앞발을 휘둘러 제 앞을 가로막은 건물을 넘어뜨린 마당이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던 그때, 놈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거대한 흙먼지 속에서 그 안광과 얼굴만이 드러난 채였다. 난 그 안면을 보고서 강준치가 겁을 먹고는 자길 공간이동으로 저 멀리 옮겨달라 조를 줄 알았다.

아니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강준치의 내면에도 공격성이 있다.

"저 기형 사자 새끼가······."

그리고 베헤모스가 도약했다. 도저히 이백 미터 몸으로 할 수 있으리라 믿기지 않는, 사자의 도약이었다.

누구도 그 도약을 막을 수 없을 듯했다. 그 뒤에 일어날 일도······.

이때 강준치가 한 행동은, 그저 한 손을 높이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그가 펼쳐져 있던 손을 움켜쥔 순간,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도약하던 중, 베헤모스가 갑작스럽게 땅바닥에 내리꽂혔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신의 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그 거대한 몸이 바닥에 고꾸라지더니 몸을 쉽게 일으키지 못했다.

이 비슷한 장면을 동영상에서 봤다. 강준치가 1km짜리 해양 괴수를 찍어눌러 죽였을 때, 그때도 이런 현상이 일어났음을 기억했다.

131화 종말, 베헤모스 - [5]

잠시 후, 고꾸라졌던 베헤모스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거대한 신의 망치가 연달아 그 머리를 두들겨 놈을 또다시 주저앉혔고.

그 신의 망치는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육안으로도 알 수 있었다. 투명한 그 망치가 워낙 빠르고 강하게 휘둘러지는지라 공기의 흔들림이며 충격파 따위가 선명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 현상이 보면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듯, 헌터들이 말을 주고받는 것이 들려왔다.

"지금 뭐냐? 준치 씨가 뭔가 하는 거 같은데, 각성체 몸엔 능력 직접 쓸 수 없지 않나?"

"역장 구조물이야. 적의 몸이 아니라 허공에 역장으로 뭔가를 만들어서는 휘두르는 건데······."

저렇게 웅성거릴 만하다. 강준치 혼자서만 남들과 완전히 다른 능력을 쓰는 듯한 상황이니까.

그러나 내 알기로, 강준치의 역장 능력은 내가 가진 역장 외골격과 같은 능력이다. 그저 그 출력이며 범용성 따위가 확연히 다를 뿐이다.

강준치의 역장이 지닌 특징은 크게 세 가지로, 다음과 같다.

1. 평소 강준치의 역장은 몸에 씌워져 있다. 이 역장은 의식을 잃었을 때도 유지되며, 여기까지는 평범한 역장 외골격 능력자와 별 차이가 없다.

2. 내가 평범한 역장 외골격 능력자와 달리 내 신체뿐만 아니라 접촉 중인 사물에도 역장을 씌울 수 있듯, 강준치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강준치는 본인과 접촉하지 않은 사물에도 역장을 씌우고 움직일 수 있어서, 강준치의 능력은 거의 염동력으로 보인다.

다만 이 방식은 특정 대상에 직접 역장을 씌우는 것이므로, 각성자를 상대로는 쓰기 어려운 데다(여러 번 설명했듯 각성자의 신체에 직접 능력을 사용하긴 불가능한 까닭이다) 본인의 신체가 아닌 다른 대상에 씌운 역장을 유지하려거든 의식을 해야 한다나?

잠들었을 때나 방금처럼 기절했을 때는 신체 이외에 씌운 역장은 모조리 해제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평소에도 방에 역장을 씌우면 역장 날붙이 능력자를 포함한 그 누구도 침입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지만, 수면 중일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굳이 지하공동까지 들어가서 제 안전을 도모하려는 것은 잠잘 때 암살당할 일이 두려운 까닭이라고.

3. 강준치는 단순히 사물에 역장을 씌울 뿐만 아니라, 아예 허공에 역장으로 이루어진 구조체를 생성할 수 있다.

정진영 형은 제 역장을 특정한 형태로 구성하여 신체를 대신하고 있지 않은가? 강준치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셈이다.

그것이 바로 '역장 구조물'이다. 정진영 형이 역장으로 된 팔다리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듯, 강준치 또한 그리 만들어진 역장 구조물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각성자의 신체에 역장을 씌우는 게 아니라 별개의 공간에 역장을 생성하는 것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만들어진 역장을 통해서는 각성자의 신체에도 얼마든지 영향을 줄 수 있다.

동영상에서 거대화 개체가 분명했던 1km짜리 해양 괴수를 찍어 죽인 방법이 바로 그것이요, 지금 베헤모스를 타격하는 방식 또한 그것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강준치가 역장 구조물을 통한 공격방식을 애용하지 않는 것은, 그리 만들어진 역장 구조물이 충돌 따위로 손상을 입을 때마다 역장이 크게 소모되는 데다······.

무엇보다 집중력이 크게 필요한 까닭이라나? 그림을 그릴 때만 해도 보고 그리거나 대고 그리는 게 쉽지 처음부터 새로 그리는 것은 까다로운 것처럼, 역장으로 새로운 구조물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 자체가 어려운 일인 모양이다.

그래서 역장 구조물을 유지하는 동안 강준치는 다른 행동을 거의 할 수 없다. 주변에 데스클로들이 접근하지 못할 역장 벽을 치거나, 주변 벽 등에 역장을 둘러 자신을 보호하는 일도 불가능해진다.

"아, 씨. 욕 나오게 단단하네······. 이거 죽일 수 있는 거 맞나?"

그 말은 곧, 지금 저 신의 망치로 베헤모스를 두들기는 데 집중하고 있는 강준치를 다른 헌터들이 보호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또 한 번 보이지 않는 망치가 베헤모스의 머리를 두들긴 순간, 사방으로 정신파가 퍼졌다.

이번에는 괴수들에게 보낸 정신파가 분명했다. 내 정신적 그물망으로 감지한 사실을 주변에 알렸다.

"괴수들 더 몰려온다. 이번엔 오거까지 둘 섞여 있으니 모두 대비해!"

심지어 게이트까지 바로 저 앞에 열리기 시작했는데, 베헤모스가 더 수월한 병력 동원을 위해 여는 것이 분명했다.

저걸 보니 지금까지 서울 곳곳에 과다할 만치 게이트가 열린 것도 실은 베헤모스의 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지경이었다.

물론 놈을 죽이면 이제는 그것도 끝이다. 이번 사냥을 마치는 것으로 많은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온다!"

곧이어 괴수들의 물결이 들이닥쳤다. 잠시 공간이동 하여 내 헌터 라이플을 들고 온 뒤, 나 역시 놈들을 향해 쏘고 또 쏘았다. 이 상황에 짐꾼들은 지원사격을 하거나, 저 멀리 누군가에게 지원을 요청하느라 애를 썼다.

"지원 바람! 지원 바람!"

사방에 데스클로들이 달리고 총알이 빗발치는 사냥터 한복판에서, 평범한 군인들은 이곳에 도우러 오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리라.

그러나 헌터라면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A급 헌터, 몸에 단단한 역장을 두르고 그 근육이 강철과 같아진 헌터들이라면.

곧이어 재빠른 지원이 도착했으니, 응우옌이었다. 가속 능력자답게 무지막지한 속도로 달려온 녀석이 특유의 대사를 읊었다.

"불렀지?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잖―"

"늦었어! 그런데 잘 왔다!"

내가 바쁜 와중에도 씩 웃어주었더니 응우옌도 따라 웃었다. 녀석도 나와 함께 헌터 라이플을 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그 시선은 두 초월적 존재를 향한 채였다.

그러니까, 강준치와 베헤모스를.

이제 베헤모스는 바닥에 엎어진 채 아예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었는데, 강준치가 별 효과가 없는 망치질에 짜증이 났는지 아예 베헤모스를 찍어눌러 그 움직임을 틀어막는 중이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응우옌이 감탄사를 흘렸다.

"이게 S급이구나? 대단하네······!"

그리고 이렇게 대치 상황을 이어나가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무척 낙관적인 일이었다. 지금도 베헤모스의 목 위에는 칼잡이들이 붙어있으며, 그 목을 향해 열심히 칼질하고 있을 테니까.

슬슬 베헤모스의 목에서 일어나는 출혈이 멀리서도 보였다.

베헤모스도 슬슬 위험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강준치에게 억눌린 채로도 몸을 흔들려 애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백 미터짜리 괴수의 몸에서 나오는 힘은 과연 막강한 것이어서, 강준치도 그 시도를 완전히 틀어막지는 못하고 가끔 베헤모스의 몸이 들썩이게 해야 했다.

베헤모스가 몸을 네 번째로 들썩였을 때, 기어이 그 노력이 효과를 발휘했다.

베헤모스의 몸에서 한 각성자가 떨어져 내렸다. 단순히 떨어질 뿐만 아니라 베헤모스의 발버둥에 휘말렸다간 어떤 꼴이 될지 몰랐다.

"으아아악!"

그 비명이 들린 즉시 내가 공간이동 했다.

추락하려던 한 칼잡이를 붙잡고서 지상으로 공간이동 하니, 비명 지르다 말고 칼잡이가 겨우 안도했다.

"아! 악······ 아, 아? 김극?"

그러다가 날 보고선 흠칫하는 것이 특무대인 것 같았지만, 나에게나 그에게나 지금 중요한 사실은 아닐 터였다. 칼잡이가 우물우물 말했다.

"고맙······"

"괜찮냐? 상태 안 좋아 보이는데, 딴 인원이랑 교체할래?"

"아니, 아니······. 저 위로 도로 보내줘."

그 말대로 해주었다. 특무대로 추정되는 칼잡이를 다시 베헤모스의 등 위로 올려주니, 그 자리의 다른 칼잡이들 또한 필사적이었다.

다들 땀을 뻘뻘 흘리며 베헤모스의 목을 도려내고 잘라내는 것이, 힘든 와중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알 만했다.

나만 다시 공간이동 하여 지상으로 돌아왔다. 다시 헌터들과 함께 강준치를 향해 밀려오는 괴수들을 사살했다.

이후로 오거 세 마리가 동시에 돌격해왔을 때는, 내가 공간이동으로 뛰쳐나가 가장 큼직한 개체의 목구멍에 헌터 라이플을 쑤셔 넣고 그 머리를 터뜨려 죽였으며 나머지 두 마리는 다른 헌터들이 알아서 사살했다.

이해경이 외쳤다.

"김극 오빠, 멋지다!"

그리고 내가 씩 웃던 그때, 나는 섬뜩한 전조를 느꼈다.

베헤모스의 눈이 붉게 빛났다. 열선과 같은 붉은빛.

또다시 그놈의 열선을 방출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눈으로 그러려거든 고개 전체가 돌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열선을 방출하기 전에 동공에 붉은빛이 번뜩이면서 미리 전조 현상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확실히 눈으로 그러는 것은 꼬리로 그러는 것만큼 위협적이지 못했다.

나는 정신적 그물망을 통해 베헤모스의 눈이 닿는 궤적을 파악한 다음, 그 궤적에 닿은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공간이동 했다.

역장이 있어서 공간이동 시킬 수 없는 놈을 저 멀리 휙 던져버린 다음 나머지 인원들을 붙잡고 공간이동 하니, 던져진 놈에게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씹, 뭐야!"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베헤모스의 눈에서 방출된 열선이 방금 그 헌터들이 있던 곳을 통째로 녹여 버렸기 때문에. 욕설하다 말고 그 역장 외골격 능력자는 내게 더듬더듬 감사해야 했다.

이후로도 베헤모스가 헌터들에게 열선을 쏘려고 시도할 때마다 내가 나섰다. 번번이 그 시도를 봉쇄했다.

그런 일이 몇 번이고 반복되니, 베헤모스도 다른 헌터들을 태워죽이는 것은 포기한 듯했다.

이후로 놈의 열선은 강준치 한 명에게 집중되었다.

베헤모스의 눈에서 방출된 열선이, 강준치의 상반신에 쉼 없이 닿았다.

그리고 강준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견뎠다. 견디면서 계속하여 베헤모스를 그 힘으로 억눌렀다.

두 초월적 존재의 힘겨루기가 계속되었다. 그리고 힘겨루기 끝에, 한쪽의 열세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베헤모스의 눈에서도 연달아 방출된 열선마저도, 점차 약해지는 것이 눈에 보였다.

베헤모스의 몸과 영혼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거대한 괴수가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이 눈에 보였다.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그것이 보였을 것이다.

응우옌이 기대감이 물씬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드디어!"

인천시에서 태업하는 외노자 헌터로 악명 높았던 응우옌 이놈이, 대체 무슨 이유로 이 위험한 작전에 참여했는지 알고 있다.

사냥이 끝나면 얻을 전리품이 탐났으니까.

사슴을 잡으면 사슴 가죽과 고기를 얻을 수 있듯, 강력한 괴수를 잡으면 무엇보다 값진 것을 얻을 수 있는 법.

베헤모스의 죽음과 함께, 놈의 영혼이 그 몸 밖으로 빠져나올 것이다.

원래라면 강준치가 그 대부분의 영혼을 흡수해야 마땅하겠지만, 이번에 강준치가 차지할 몫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영적 성장이 끝났으니까.

평소 강준치는 괴수를 잡고도 별다른 정신적 희열을 느껴본 적 없다곤 하는데, 그것은 영적 성장이 끝난 각성자들의 특징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영혼은 강준치가 아닌 그 주변 다른 각성자들에게 흡수될 것이다. 베헤모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그 죽음에 이바지했거나 그 시체 가까이에 있을 각성자들의 몸에.

짐승 한 마리를 혼자서 다 먹을 수 없듯, 저 거대한 괴수의 몸에서 빠져나올 강대한 영혼을 한두 명이 독차지할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이 흡수할 영혼은 막대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 느끼기에도 내 기여가 컸던 만큼, 내가 흡수할 영혼 또한 대단히 막대할 것이다.

그 달콤한 수확의 순간이 기다려지지 않는다는 말은, 차마 빈말로도 하기 어렵다.

132화 종말, 베헤모스 - [6]

여러모로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중이었다.

아까부터 근처 하늘을 맴돌던 용이 이쪽으로 날아오더니 내 앞에 착륙했다. 용이 인간 형태로 돌아왔다.

최용이 내게 말을 걸었다.

"슬슬 준비해야죠? 좀만 더 있으면 베헤모스 저놈 죽을 것 같은데."

"준비해야죠, 물론."

"그런데 말입니다. 저 위에서 칼질하는 놈들, 대부분 특무대 놈들이겠죠?"

"아마?"

"그럼 좀······ 거시기하지 않습니까?"

"좀 거시기하다뇨?"

"왜, 이대로면 특무대 놈들도 베헤모스 영혼 왕창 흡수할 것 아닙니까? 대충 얼마나 강해질지 모르겠지만 한두 명은 엄청나게 세질 수도 있을 텐데요.

특히 한희란 놈은 거기서 좀만 더 성장해도 보통 위험한 수준이 아니겠던데······.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은근히 속삭이는 목소리, 내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막자니, 어떻게요."

"에이, 알잖아요?"

히죽거리는 모습을 보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 만했다.

베헤모스가 기어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그 위에서 칼질하던 특무대원들이 그 영혼을 양껏 흡수하지 못하도록 몰아내자는 게 분명했다. 베헤모스의 몸에서 쫓아내 버리자는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심한 짓을 하자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잘 모르겠는데······."

"아, 씨! 굳이 제 입으로 설명해야 해요?"

"아뇨, 됐어요."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봐요! 지금 우리가 안 움직이면 두고두고 후환이 될 거라니까?"

완곡히 거절해도 계속 졸라댈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기가 막혔다. 물불 안 가리고 날뛰는 줄 알았던 내가 상대적으로 정상인이라니?

최용 저 미친놈, 괜히 테러리스트 김극을 상대로 형님 노릇 하던 작자가 아니었다.

기어이 날 설득하려는 눈치인 최용에게 내가 말했다.

"협회장님?"

"예?"

"베헤모스가 아직 안 잡혔잖아요. 그놈 잡으려면 특무대 친구들이 남아서 끝까지 칼질해야겠고."

사냥도 끝나지 않았건만 괜히 허튼짓하지 말자는 것이었는데, 최용 저 양반. 집요해도 너무 집요했다.

"그럼 기회 보다가 베헤모스 죽기 직전에 내쫓죠? 보니까 준치 씨가 김극 씨랑 친한 것 같던데. 준치 씨 도움받으면 쉽지 않나?"

"강준치 걘 그냥 최대한 빨리 집에 가서 쉬고 싶을걸요?"

"그래도 부탁이라도 해봐야······."

"뭘 말하고 싶은진 알겠는데, 특무대 조지는 건 사냥 끝나고 의논하죠. 예? 사냥 다 끝나고 나서요."

"아니, 사냥 끝나기 전에 뭔가 해야 한다니까?"

나는 슬슬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사냥감이 잡히기 직전에 다른 부족에서 온 사냥꾼들을 몰아내고 사냥감을 독점하자니?

불쾌했다. 하이에나 짓을 하자는 것도, 처음으로 사냥에 나선 사냥꾼들이 사냥의 성과를 얻지 못하도록 방해하자는 것도.

헌터든 특무대든, 사냥에 나서서 피땀을 흘렸다면 마땅히 그 성과를 얻어야 한다. 어떻게 이 당연한 일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따위 생각을 품은 하이에나가 최용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었단 사실이다.

사냥꾼이 고기를 얻지 못하게 방해하고 싶은 하이에나는 저쪽에도 있었다.

「김극 헌터? 빨리 와주세요. 급한 일입니다!」

갑작스럽게 터진 무전이었다. 그 무전을 최용도 들은 듯, 그가 급히 말했다.

"가지 마세요."

"예?"

"분명 베헤모스 잡히려는 거 보이니까 누군가가 수작 부리는 거야. 국안부에서 저러는지 특무대에서 저러는진 모르겠지만, 정부 기관이랑 툭하면 부딪치는 김극 씨가 베헤모스 영혼 흡수해서 체급 더 오르지 못하게 막으려고······."

평소 같으면 뭔 개소리냐는 핀잔을 했으련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런 의심이 들었기 때문에.

무전기 대신 전화기를 들어 근처 공무원에게 연락을 취했다.

"뭔 일인데 날 불러요?"

「공간이동으로 이쪽에 와주시면 자세한 설명을―」

"나 지금 공간이동 남발해서 피곤하거든요? 몇 번 더 못 쓸 것 같으니까 공간이동 아껴야 해. 내 도움 필요한 장소 있으면 장소부터 말해요. 정신적 그물망으로 더듬어보고 거기로 직접 갈 테니까."

내가 딱 잘라 말했더니, 우물쭈물하는 설명이 이어지다가 마지막으로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연락하겠단 말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내가 한숨 쉬는 가운데 최용이 물었다.

"맞죠?"

"그런 것 같은데, 일단 베헤모스한테 가기나 합시다."

최용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내가 죽어가는 베헤모스의 등 위에 올라섰을 때였다.

내 등장과 함께, 베헤모스의 등 위에 있던 칼잡이들의 눈길이 내게 쏠렸다.

날 보는 그들의 표정이 어땠느냐면, 당황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긴장한 것 같기도 했다.

하여간 환영하는 눈길은 아니었다. 결코.

"김극? 여긴 왜 올라와?"

한 칼잽이, 아마도 특무대원일 듯한 남자의 물음에 내가 되물었다.

"내가 여기 오면 안 되나?"

"지금은 안 되니까 일단 물러가라!"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날 쫓아내려는 건가? 어째서?

보아하니 저들은 무슨 지령을 받은 것 같았다. 김극이 베헤모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가까운 곳에 있지 못하게 막으라는 지시.

"안 꺼지겠다면 어쩔 건데?"

뒤이어 등 뒤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시킨 거냐? 새 국안부 장관이? 아니면 특무대장 자리에서 쫓겨난 뒤로 은근슬쩍 배후실세 노릇하고 있다는 한희석 그 씹새가?"

뒤돌아보았더니 용 모습의 최용이 거기 있었다.

용 모습으로는 말을 못 하는 줄 알았더니 다 방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용의 배에 사람의 입만 하나 생겨나서는 나불거리는 꼴을 보니 기괴했다.

한편 최용의 등장으로 이 자리의 긴장은 더욱 커졌다. 이대로면 정말 싸움이 터질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특무대원 중에 한 남자가 나섰다.

"그만."

누가 나섰나 하고 쳐다봤더니, 아까 베헤모스의 등에서 추락할 뻔했는데 내가 구해준 녀석이었다. 그 기특한 녀석이 계속 말했다.

"지금 쌈박질할 때가 아니잖아. 아니야?"

그리고 또 한 명의 특무대원이 거들었다.

"그렇죠. 베헤모스도 아직 안 죽었는데 벌써 사람들끼리 치고받지 맙시다. 그게 맞죠, 김극 형?"

내가 고개를 끄덕였더니 한희가 작게 웃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저 녀석이 선배들 눈치 보던 일이 아직도 기억에 선명하건만, 이제는 모두에게 제 의견을 말할 뿐만 아니라 나와 친한 척까지 대놓고 하다니? 이제는 한희의 입지가 바뀐 걸까?

심지어 지금 특무대원 몇 명은 한희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방금 내가 구해준 녀석이 그리 말했을 땐 다들 눈살을 찌푸릴 뿐이더니, 한희가 그리 말하자 특무대원들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오른 게 아닌가.

물론 모두가 한희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니어서, 이 와중에 시비를 걸어오는 특무대원이 계속 있었다.

"최용 당신. 경상도에서 헌터 노릇하지 않았나?"

"그런데?"

"경상도면 특무대 활동 범위가 아닌데? 경상도에서 일하며 우리랑 충돌할 일도 없었을 거고. 대체 뭔 원한으로 자꾸 지랄인 건지 모르겠네······?"

그 말에 최용이 발끈한 듯, 그 주둥이에서 불이 일렁였다. 특무대원들은 이미 들고 있던 칼을 움켜쥐던 그때였다.

베헤모스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러고는······.

'구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베헤모스가 고개를 높이 들어 울부짖었다.

소리와 정신파가 합쳐진 포효였다. 우리와 대치하고 있던 칼잡이들도, 이 와중에 여전히 베헤모스의 목에 칼질하고 있던 칼잡이들도, 심지어 최용마저도 잠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그나마 나는 조금 현기증이 날 뿐 멀쩡할 수 있었다. 덕분에 정신을 잃어 날갯짓을 멈추고는 저 아래로 추락할 뻔했던 최용을 붙잡아 베헤모스의 등 위에 올려둘 수 있었다.

"정신 차려!"

최용도 겨우 정신을 차리고는 겨우 등 위로 기어오르던 그때였다.

내가 느끼고 있던 현기증이 강해졌다. 내 머릿속에 온갖 감정들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억울함, 분노, 공포······.

베헤모스는, 저 거대한 괴수는 죽어가는 지금 자신이 수천 년 넘게 거주했던 아스트랄계로 돌아갈 수 있길 원했다. 게이트 안으로 돌아가서는 그곳에서 아늑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나는 베헤모스가 죽어가며 느끼고 있을 그 모든 감정들을 느꼈고, 놈의 머리를 채운 슬픔마저 느꼈지만, 잠시뿐이었다.

다른 지성체들을 마구잡이로 살해해온 베헤모스가 자신의 최후에 슬퍼할 자격이 없다는 감정적 문제가 아니라, 당장 저 멀리 있는 헌터들마저 휘청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역시 베헤모스가 정신적으로 포효한 여파일 터였다.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헌터들도 여럿 있었는데, 놈의 포효에 잘 버티는 것은 단순히 정신력 문제가 아니라 게이트에서 흘러나온 감정에 얼마나 익숙한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았다. 정신과에 가면 처방전에 몇 줄 적힐 게 분명한 정진영이 다른 누구보다 잘 버티고 있는 걸 보니.

그렇다면 제 근처에 게이트 열리는 일이 거의 없었을 강준치는?

아까 그랬듯, 아예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었다.

또한 약해진 헌터들의 화망을 뚫고서, 데스클로 한 마리가 강준치에게 도약하고 있었다.

눈을 부릅뜬 내가 그 앞으로 공간이동 했다.

데스클로가 내리친 갈고리발톱이 내 어깻죽지를 반쯤 파고든 것과 내가 휘두른 주먹이 그 데스클로의 머리통을 터뜨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놈의 죽음과 동시에 그 발톱에 깃든 역장 날붙이 또한 사라져서 내 어깨는 더 잘리지 않고 무사할 수 있었다.

한편 강준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날 보며 더듬더듬 중얼거리는 걸 보니.

"김극? 나 구해준······"

"내가 참전해달라고 조른 건데 책임지는 게 당연하지!"

내가 그리 허세를 부리던 순간, 나는 베헤모스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 달리 이번에는 착각이 아닌 것 같았다. 수백 년에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생물을 집어삼키며 그 몸집을 부풀려왔을 저 거대한 괴수는, 마지막 순간 나를 원망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적수를 해치우려던 시도가 기어이 가로막히니 울화통이 터진 것인가?

그렇다면 내겐 오히려 좋다. 그 영혼이 내게 더욱 많이 흡수될 테니까.

그 포효를 끝으로, 베헤모스는 미동조차 없이 축 늘어졌다. 잠시 후면 그 숨이 멎을 것 같았다.

이 와중에 강준치와 마찬가지로 포효에 몸이 굳어있던 듯, 응우옌이 눈을 부릅떴다.

"어?"

그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베헤모스가 죽는 순간 그 시체 가까이 있어야 영혼을 더 많이 흡수할 수 있을 텐데, 이대로는 늦을 것 같다고 생각한 걸까?

응우옌이 냅다 달리며 외쳤다.

"안 돼, 안 돼!"

가속 능력자답게 응우옌이 빠른 속도로 질주했다. 그러고는 베헤모스를 향해 도약했지만, 그 도약력이 모자랐다.

도약하다 말고 베헤모스의 몸에 닿지 못한 채 떨어질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내가 공간이동 했다. 응우옌이 있는 허공으로 공간이동 해서, 그대로 바닥에 곤두박질칠 예정이었던 응우옌을 잡아 휙 던지고는 다시 공간이동 했다.

그리하여 내가 베헤모스 등 위로 공간이동 했을 때, 내게 던져진 응우옌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으며 그 손목을 내가 붙잡아 베헤모스의 몸 위로 끌어 당겨주고는 말했다.

"내가 반드시 온다고 했잖아?"

응우옌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상황을 알아차린 듯 환희했다.

"브라더!"

날 끌어안으려는 응우옌을 밀쳐내며 생각해보니, 이놈만 도와주고 만족할 게 아니었다.

최용이 했던 경고를 생각해보았다. 이대로면 특무대원들이 강화될 것 같아 불안하다고?

그렇다면 헌터들도 덩달아 강화하면 그만이지.

"담비 씨? 일루 와요!"

그리 생각한 즉시 나는 내 라운드걸에게 공간이동 했다. 그녀를 베헤모스의 몸 위로 공간이동 시킨 다음 만족했다. 그녀는 정령 능력자인 만큼 같은 정령이었던 베헤모스의 힘을 더욱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원래는 이럴 생각이 없었다. 내 지인들을 득 보게 하자고 이러다간 가장 고생한 특무대원들의 몫을 빼앗는 꼴이 될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마찬가지로 고생한 날 쫓겨내려는 특무대원들을 보며 내심 화가 났다. 보복하기로 마음먹었고.

추측컨대 나는 한 번에 흡수할 수 있는 영혼의 최대치를 흡수할 예정이라, 이런다고 내 몫이 줄어들 것 같지도 않았다······.

뒤이어 정진영을 비롯한 신입 A급 헌터 몇 명도 베헤모스의 몸 위로 옮겨버렸을 때였다.

"아······!"

조그만 동족 신미래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내 정신적 그물망은 예전에 볼 수 없던 것들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 일어나는 현상이 내 정신적 그물망엔 확연히 보였다.

베헤모스의 몸에서, 놈의 목에 난 상처에서 그 영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사냥이 끝나고, 사냥감의 고기를 분배할 시간이 당도한 것이다.

그리고 한 사냥감의 죽음에 여러 각성자가 관여했을 때, 그 영혼이 어찌 분배될지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우선 거리가 중요하다. 사냥감이 죽음을 맞이한 순간, 거기 가까이 있으면 가까이 있을수록 더 많은 영혼을 차지할 수 있다.

또한 모두의 인식 또한 중요하다. 사냥에 참여한 다른 이들의 인식, 사냥꾼 본인의 인식, 그리고 사냥당한 사냥감의 인식 말이다.

사냥에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한 모두의 인식이 영혼의 분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아스트랄계는 여러 생물의 감정과 인식이 축적된 곳 아닌가. 그리고 각성자란 그곳에서 힘을 받은 자들이라, 각성자들이 겪는 일들 또한 으레 감정과 인식에 큰 영향을 받는 법이다.

곧이어 베헤모스의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들은 차례차례 이 장소의 사냥꾼들에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날 향해 쏟아진 영혼이 가장 많았다.

저번에도 그랬지만 이번에도 내가 베헤모스에게 여러 차례 짜증을 선사했으니까. 놈이 죽어가며 내게 느낀 분노가 이번 영혼의 분배에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정신적 그물망으로 파악하건대, 베헤모스의 목에 칼질하여 그 죽음에 직접 관여한 칼잡이 개개인이 흡수하는 영혼보다도 내가 흡수하는 영혼이 훨씬 많았다······.

희열,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고 앞으로도 느낄 수 없을 법한 희열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웠다.

*******

「속보입니다. 베헤모스가······」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게 되어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마침내 서울에 도사린 위험이 드디어 제거되었다는······」

「베헤모스의 죽음이 확정된 지금, 전 세계에서 한국에 축하의 메시지가······」

*******

133화 여동생 김선 - [1]

Ⓐ BabyBerserker : (더는 애기가 아닌) 애기버섯 아장아장 귀엽게 등장♡~♥!

언니 옵바야들, 모두 수고했어양!

베헤모스 그 씨발놈을 기어이 언니 옵바야들의 우정과 사랑의 힘으로 물리쳤군양?!?

애기버섯이도 얍삐얍삐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땀 뻘뻘 흘리던 언니 옵바야들을 도우려고 앙증맞게 노력했는데양!

작고 어린 애기버섯이의 손은 너무 자그마해서 이 손으로 도움을 주려 해도 귀엽기만 하지 별 도움이 안 될까 봐 애기버섯이는 걱정이 돼서 힝힝 울었는데 ㅠ

다 끝나고서 언니 옵바야들의 말을 들어보니 애기버섯이도 충분히 도움이 된 것 같아 기뻐양!

다시 말하지만 모두 정말 고생했어양!!!

애기버섯이의 필살 애교에 도우러 와준 강준치 옵바야도, 애기버섯이가 잉잉 울며 도와달라고 외치니까 도와주러 온 언니 옵바야들도, 여기저기에서 각자의 임무를 수행한 언니 옵바야들도 모두 너무너무 장하고 자랑스러워양!

이번 달 애기버섯 용돈이 부족해서 언니 봅바야들 나눠줄 칭찬 스티커는 못 샀거든양? 그러니까 그 대신······ 애기버섯이 뽀뽀 쪽!

이잉, 다들 애기버섯이 쳐다보지 마양! 부끄러워양 헤헤······!

이쁜 말투로 글을 올리고서 거기 달린 댓글을 느긋한 자세로 감상했다.

Ⓢ Kang : 우웩······.

Ⓐ syberMagneto : 우으······. 우리 사랑스러운 애기버섯이도 수고했고 사랑스럽지 않은 나머지 모두도 수고했어!

Ⓐ 5my지저스 : 이번에도 김극햄 덕 크게 봤습니다!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을지?

익명 : 변함없이 정신건강에 해로운 글이긴 한데, 애기버섯이가 쌍욕 하는 건 첨 보네? 써놓고 퇴고를 안 했나?

익명 : 베헤모스가 그만큼 좆같은 거지. 그놈한테 몇 명이 죽었는데 미화할 맘이 들겠나

내가 올린 글 말고도 헌트웹에 온통 베헤모스 관련 이야기가 가득했다.

그날 죽은 헌터들을 애도하는 글이며, 승리를 자축하는 글이며, 그날 참전한 대가로 받은 돈을 자랑하는 글이며······.

심지어는 그날 자신이 대폭 강해졌음을 자랑하는 글도 여럿 보였는데, 이런 내용이었다.

Ⓐ lIlIli : 나 그날 헌터 라이플 들고 평범한 데스클로들이나 죽어라 잡았는데 베헤모스 그놈 죽자마자 희열 느껴지더니 능력 대폭 세졌더라. 좋긴 정말 좋은데 이거 뭐냐?

그날 베헤모스의 몸에서 빠져나간 영혼이 많아도 너무 많았던 까닭일까? 베헤모스의 죽음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던 헌터 중에도 그 영혼을 흡수한 인원이 여럿 있었던 모양이다.

그 글에는 고생도 안 하고 꿀이나 빨았는데 몸값만 잔뜩 오르게 생겼다며 비꼬는 댓글이 많았지만, 내 보기엔 아니었다.

그날 베헤모스의 영혼을 흡수하려거든 베헤모스에게서 삼백 미터 이상 떨어져서 싸우면 안 되었거든. 설령 데스클로들만 처치했더라도 가장 위험한 곳에서 싸웠단 셈이니, 그 정도면 가치 있는 전리품을 얻을 자격이 충분했다.

그 밖에도 헌트웹엔 이번 일 얘기뿐이었다. 온통 베헤모스, 강준치······. 그도 아니면 김극 이야기뿐.

물론, 지금 헌트웹만 이 화제에 관심인 것은 아니었다.

여느 사이트들, 심지어 외국 사이트들마저 한국에서 베헤모스가 쓰러진 일을 다루고 있다.

한국의 한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기사를 봤다.

그날 영상이 첨부된 기사였다. 아파트가 날아다니고, 그 아파트보다 굵은 열선이 어두운 도시를 관통하는 영상 말이다.

그 기사와 영상을 다 본 다음 기사에 달린 댓글까지 봤다. 그리고 사람들의 달라진 반응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준치는 나라 버리고 떠나버린 매국노 취급이었던가?

그 탈주로 인한 결과가 끔찍했던 만큼, 강준치는 병역을 피해 해외로 달아난 가수들을 아득히 능가하는 반역자 취급을 받고 있었다.

베헤모스 토벌에 앞서, 언론에서 기껏 강준치의 위업에 대한 특집을 편성해 방송해도 좋은 반응이 없었던 걸 기억했다.

강준치가 이번에 한국을 돕기로 했다는 기사에는, '위병이 초소 버리고 탈영해서 북한군이 쳐들어와 기지가 초토화되었으면 위병이 은근슬쩍 복귀하여 다시 싸우려 해도 총살해야 한다'는 논리로 강준치를 사형시키란 댓글이나 잔뜩 달렸던 게 기억난다.

그나마 온화한 반응으로는 강준치를 아예 사형에 처하진 말고 서울 감옥에나 가두란 댓글이 달렸던 것 같은데(일단 베헤모스는 막아야 하지 않느냔 논리였던가?)······.

이제는 아니었다.

강준치를 사형시키라느니 감금하라느니 요구하는 댓글 따윈 거의 보이지 않더라. 그저 칭송하는 댓글 아니면 국내에서 세계 최초로 거대 괴수를 처치하는 위업을 달성했다며 국뽕에 취한 댓글만 잔뜩 보일 뿐이었다.

드디어 비각성 찌꺼기들이 제 분수를 알게 된 모양이군.

하기야 아직도 비각성 찌꺼기들이 예전처럼 건방지게 굴 수는 없으리라. 자기네 머릿수만 믿고 초인들을 자기네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으리란 사고관이 이번에 깨졌을 테지.

그도 그럴 것이, 이번 베헤모스 토벌에서 촬영된 영상만 봐도 지금까지의 세계관이 달라질 법했다.

내가 생각해도 그날의 광경은 압도적이었던 것이다.

거대한 탑과 같은 건축물들이 종이비행기처럼 가볍게 날아다니고, 이백 미터짜리 괴수가 지진과 함께 질주하는······.

너무나도 거대한 에너지들이 사방에서 충돌하던 그 광경을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이 지난들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일찍이 베헤모스 그놈이 날뛰는 광경을 목격했던 나마저도 이번에 또다시 압도되었는데, 그 광경을 처음 봤을 다른 이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철갑선을 처음 본 조선 백성들만큼 놀라지 않았을까?

지금까지도 동영상 따위로 강준치의 압도적인 능력이 공개된 적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사람들로선 이번 일만큼 와닿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기야 세상 사람들은 인천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무관심한 법이니까.

이번 일은 인천에서 가까운 서울에서 벌어진 일인데다, 유튜브 영상 따위가 아니라 뉴스에서도 그 모든 광경을 모두에게 보여주었으니 일반인들도 세상이 어찌 변했는지 이번 기회에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으리라. 각성자들의 힘과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이제야말로 제대로 체감할 수 있었을 테고.

심지어 이번에는 국군의 존재감마저 희미했다.

저번 베헤모스 사태에서는 공군이 실시간으로 격추되며 현장에 비장미를 더한 데다 여기저기서 군인들이 목숨 바쳐 괴수들의 물결을 막아내는 등 그 존재감이 선명했는데, 이번엔 아니었거든.

이번에는 그저 헌터, 그것도 각성자 헌터들만이 그 존재감을 제대로 발휘했다.

그날 강준치가 제 신력(神力)을 발휘하는 가운데, 무언가 제 역할을 해낸 것은 우리뿐이었다.

그날 우리만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리만이 그날 괴수들에게서 살아있는 신을 지켜냈으며, 우리가 직접 그 거대한 괴수를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날 국군은, 한 국가의 가장 강대한 무력은 초인들이 활약하는 동안 덩달아 촬영된 배경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모든 사실이 너무나도 감미롭게 느껴진다.

그 밖에도 여러 기사를 찾아 읽던 중이었다. 한 기사의 제목이 내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 두 번째 "S급" 헌터 탄생 징조 (······)

제목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 얘기로군.

홀린 듯이 기사를 클릭해보니 과연, 헌터 김극이 베헤모스를 토벌한 뒤 각성자 심사를 받아보니 그 모든 수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한바 그 능력이 S급의 절반에 도달했단 내용이더라.

그리고 그 기사대로였다. 그날 내가 받아들이고 흡수한 힘은 그토록 강대한 것이었다.

그날 그 장소의 다른 헌터들이며 특무대원들 또한 대폭 강해진 모양이지만, 나만큼 성장한 경우는 없었다. 기껏해야 정령 능력자이기에 놈의 힘을 남들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었던 백담비 정도가 나만큼 돋보일 만치 성장했을까?

이 정도로도 꽤 만족스럽지만, 그러나 아직 충분히 강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여기서 두 배 강해지면 나 또한 S급이라지만, 그날 충돌한 에너지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지금의 나조차 초라하게 느껴질 지경이니까.

아직은 여러모로 부족하다. 너무, 너무 부족하다······.

이후로도 한창 이런저런 기사를 읽던 중에 전화가 걸려왔다.

「김극 헌터?」

"엄근오 의원?"

「이번에도 크게 활약했다매요? 특무대원들 베헤모스 몸 위로 옮기는 일도 담당했고. 현장에서 강준치 그 사람 죽을 뻔한 걸 두 번이나 직접 막아냈다던데 아주 장합니다그려」

"내가 고생 좀 했지. 그래서 왜 전화한 거야?"

엄근오는 내게서 반말을 들은 즉시 자신도 반말을 시작했다.

「약속 지킬 거라고 전화한 거야. 여동생분 머지않아 꺼내줄 거라고······.」

"그년 꺼내주는 건 나한테 아무 보상이 안 된다고 이미 반만 번쯤 말했다."

「보상이 되든 안 되든 꺼내줄 거니까 그리 알아. 아무튼 정말 고생했고······」

슬슬 전화를 끊으려는 눈치길래 내가 물었다.

"잠시만. 뭐 하나 좀 따져보자."

「따져보자니, 뭘?」

"그날 상황 다 끝나가던 즈음에, 나한테 웬 무전이 왔거든? 나한테 급히 도우러 오란 무전이었는데······."

그날 내 위치를 베헤모스에게서 먼 곳으로 옮기려던 수작, 그리고 특무대원들까지 동원해 내 영적 성장을 막으려던 일을 항의했더니 엄근오는 전혀 그런 일을 전해 듣지 못한 눈치였다.

「그런 일이 있었다고? 난 모르는 일이야. 그게 무슨······」

"따로 논의된 적이 정말 없는 일이었나?"

「물론 법이고 뭐고 싹 다 무시하고 사람 패고 다니는 당신 체급 커지는 걸 좋아할 사람이 없긴 한데.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런 일을 주장하나?」

"그러잔 주장 못 할 이유라도 있나?"

「당연히 있지. 저번 베헤모스 사태에서 인명피해며 재산 피해가 얼마나 막심했는데. 당장 베헤모스 그놈 처치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마당에 누가 괜한 수작질을 하자고 주장할 수 있었겠어?

그랬다가 일 잘못되면 책임 다 뒤집어쓸 게 분명한 데다, 어찌어찌 작전 성공하더라도 피 잔뜩 흘리고 고생했을 당신이 보상마저 뺏기면 눈에 아주 핏발이 서선 보복하려 들 게 뻔한데 누가 어떻게······」

"그런데 막상 작전 진행되는 걸 보니, 수작 좀 부려도 될 것 같았다 이건가?"

「뭐······ 그러지 않았을까? 문외한인 내 눈에도 생각보다 훨씬 일이 잘 풀리는 게 눈에 보였거든. 아무리 강준치가 도와준다 한들 이번 피해도 끔찍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더군.

물론 이번에도 사람들이 여럿 죽긴 죽었지만, 각오한 정도는 아니었다고 해야 하나? 심지어 베헤모스도 훨씬 빨리 처치될 것 같으니, 그제야 우리 테러리스트 양반 거기서 더 체급 못 오르게 방해해야겠다는 생각에 웬 놈이 부랴부랴 움직인 게 아닌가······」

그리 해명하더니, 엄근오는 감정이 실린 목소리로 사과 아닌 사과를 했다.

「하여간 내가 다 공감성 수치를 느끼게 되는구만. 수작을 부려도 뭐 그리 수준 떨어지게······? 민망해 죽겠네, 정말. 아무튼 정부 기관에서 합심해서 수작 부린 건 절대 아니라고 알아줘요. 정말 나라에서 작정했으면 그보단 훨씬 수준 있게 수작 부렸을 거야 아마」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그날 그 무전은 정부 기관의 제대로 된 수작질이라기엔 너무나도 유치찬란했으니까.

그 수작질은 유치했을 뿐만 아니라 준비조차 미흡해서, 내가 조금 추궁하니 바로 얼버무리며 그놈의 수작질을 그만두려 하지 않았던가.

초등학생들 장난 전화도 아니고 그게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아무튼 마지막으로 말하는 거지만, 정말 고생했고 앞으로도 나라 위해 힘써줘요. 여동생이랑 재회할 준비나 하고, 응?」

통화를 마친 뒤에도 그날 있었던 일을 곱씹어보았다. 어쭙잖은 속임수와 수작들······.

그 일을 떠올리니 처음엔 짜증이, 그다음엔 황당함이, 마지막으론 씁쓸함이 느껴졌다.

나라가 갈수록 무능해지리라는 엄근오 의원의 말이 떠올랐다. 또한 나라에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고 예산마저 없으면 한심한 짓을 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그 말을 증명하듯 그 수작은 한심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처량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그럴까?

134화 여동생 김선 - [2]

앞으로도 이 나라는 더욱 가난해지고 더욱 처량해질까······.

생각만큼 신나거나 즐겁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조금 울적해지기까지 해서, 나는 기분 전환할 겸 다시 헌트웹이나 켰다.

그러고는 헌트웹에 올라온 게시물에서 내 이름 두 글자를 발견했다.

헐레벌떡 클릭해보니 웬 질문 글이었다.

Line : 김극 요새 얼마나 잘 나가요?

Line : 한국에서 그 위상이 정확히 어느 정도고요?

아니, 누구길래 이딴 걸 묻지? 이젠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알아내겠다고 질문씩이나······.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형편없는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익명 : 핑프도 이 정도 핑프는 첨 봐서 당황스럽네;;

Line : 핑프가 뭐예요?

익명 : 너 씨발련아 너! 인터넷 하면서 핑프 소리 많이 들었을 거 같은데 정말 이번에 처음 들어보는 단어임?

Line : 제가 인터넷을 오랜만에 해서요

Line : 그래서 TV 뉴스로만 접했을 때 김극도 잘 나가는 거 같긴 한데, 정확히 얼마나 잘 나가는진 알 수가 없어서······.

이 와중에 자세히 대답해주는 얼간이가 있기는 있다.

나이토 상, 그 비각성자 찌꺼기다.

Ⓑ GoodHunter : 김극 씨 얼마나 잘 나가시느냐면, 그야 뭐 언터처블급이지?

Line : 언터처블급이요?

Ⓑ GoodHunter : 그야 김극 씨가 지금까지 세운 공적부터가 엄청나니까.

Ⓑ GoodHunter : 내가 김극 씨랑 인천 탈환 프로젝트 진행할 때부터 느낀 거지만, 김극 씨가 좀 말도 안 되게 성실하시거든? 딴 헌터들은 한 달에 한두 번 할까 말까인 괴수 사냥을 무슨 직장인들 출근하는 것처럼 진행하셨지. 그래서 결국 인천 지역 전체에 퍼져있던 괴수들 몽땅 쓸어내셨으니 이것만 해도 보통 위업이 아닌데

Ⓑ GoodHunter : 그리 인천 탈환 프로젝트 진행하면서도 도중에 게이트 열릴 때마다 빠짐없이 출동하시는 것도 놀라웠는데, 심지어 서울에서는 더 바삐 활동하신 모양이지?

Ⓑ GoodHunter : 김극 씨가 베헤모스 사태 두 번 모두 빠짐없이 참전하셨는데, 만약 김극 씨가 둘 중 한 번이라도 빠졌으면 서울이 초토화됐을 거라더군

그 구구절절한 설명을 보니 이런 생각이 절로 들었다. 어떻게 이 비각성 찌꺼기는 내 칭찬을 해도 밉상일까? 그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비각성자의 영혼이 내 심기를 거스르는 까닭일까?

Line : 정말 그 정도예요?

익명 : 그 정도 맞음. 그리고 언터처블인 이유가 또 있는데, 김극 그 양반 업적만 대단한 게 아니라 뭐 어떻게 손댈 방법도 없으니······.

Line : 손댈 방법이 없다구요? 어째서?

익명 : 가뜩이나 공간이동 능력자라 어떻게 공권력으로 제압할 방법도 마땅히 없던 사람이 이젠 S급 절반 수준이 돼버렸으니까. 이젠 진짜 언터처블 돼버렸지?

익명 : 원래도 김극이 사람 폭행해서 불구 만들어도 경찰이든 검찰이든 못 본 척해야 했는데. 이젠 그보다 더한 짓을 해도 그냥 넘겨야 할걸?

이후로도 김극이 뭘 했다느니, 대한민국에서 대충 어느 정도 위치라느니 하는 온갖 댓글이 달렸고 난 그것들을 쭉 감상하다가 컴퓨터를 껐다.

오늘은 쉬는 날이지만, 해야 할 일이 여럿 있었다.

*******

베헤모스 사태 이후, 괴수들의 출몰 빈도가 눈에 띄게 줄었다.

베헤모스가 두 번째로 게이트를 열고 튀어나왔을 때 덩달아 튀어나온 괴수들도 잔뜩 죽었거니와, 무엇보다 그 거대 괴수의 죽음이 여전히 게이트 안에 우글거리는 놈들을 움츠러들게 한 것 같았다.

자잘한 괴수들로선 대충 이런 생각을 하는 중이리라. 그토록 강대했던 베헤모스마저 저 바깥에서 죽을 정도라면 그보다 못한 자신들은?

덕분에 놀랍게도, 서울에서 게이트는 이틀 연속으로 열리지 않았다.

정말이지 오랜만의 평화였다. 덕분에 나도 그동안 바빠서 하지 못했던 일들을 여럿 진행할 수 있었다.

맨 먼저 성문영과 내 팀원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 베헤모스 사태 참전에 대한 보너스였다.

굳이 잘난 체할 것도 없이 팀원들의 계좌에 송금하니, 그 금액을 확인한 듯 성문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정말 이만큼 줘도 돼요? 팀원들한테 베푸시는 건 좋은데, 그래도 정도가 있지. 인심을 써도 너무 과하게 쓰는 것 아닌가······」

"과해도 돼. 나 돈 많아."

이번 사태에서는 내 팀원들이 딱히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진 않았던 것 같지만 뭐, 그래도 그 위험한 곳에 따라와 준 게 어딘가. 부하들을 아끼는 공작으로서 기꺼이 베풀었다.

그리고 현재 팀원뿐만 아니라, 이전 팀원과 그 가족들의 상황에도 신경을 썼다.

이종호와 전사한 팀원들의 가족에게 연락해서는 요새 생활이 어떤지,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지 물어보고는 생활고를 겪게 되면 주저 없이 연락하시란 당부를 했다.

제일 걱정이 됐던 임형택 씨의 마누라와 연락이 되지 않은 게 문제이긴 했다. 직접 그 아파트에 방문해도 안에 사람이 없길래 살짝 신경이 쓰였지만, 어쩔 수 없이 다음 일정으로 향했다.

내가 짓고 있는 초고층 아파트 공사 현장에 찾아가 공사 진척을 확인했다.

공사에 별다른 문제가 없으며 앞으로 반년쯤 뒤에 완공될 것 같다는 것까지 확인하고는, 아파트 앞 각성자 수용시설에 방문했다.

베헤모스 유인작전에 참여했던 얼음 능력자들은 이미 시설에 복귀한 마당이었다.

"그날 이후로 뭐 바뀐 거 있어요? 주민들 눈길이 달라졌다든가, 아니면 공무원들이 뭐 이것저것 챙겨준다든가······. 뭐 그런 식으로 대우가 달라진 게 있나?"

내가 그리 물어보니, 시설의 얼음 능력자들을 대표해 최세희 씨가 대답했다.

"딱히요?"

"정말 전혀 없어요? 이미 주기로 한 보상금에 생필품 이외에도 뭔가 더 특혜가 주어졌다든가······."

그러나 딱히 주어진 특혜 따윈 없다는 대답에 내가 인상을 구길 때, 최세희 씨가 말했다.

"사실 그날 저희보단 군인들이 더 위험한 일을 했지요? 죽기도 많이 죽었고요. 그러니 보상해줘야 한다면 군인들부터 먼저 챙겨주는 게 순서일 텐데, 그날 괴수들 상대로 총 쏜 군인들이며 전사자 유족들도 보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더군요. 이 와중에 우리한테만 뭔가 해주길 바라기는······."

"당연히 군인들한테도 보상 주고 그 쪽한테도 뭔가 줘야죠!"

"그래 주면 좋겠지만 뭐, 지금 나라 사정에 그럴 능력이 되나요?"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오만상을 찌푸렸다.

젠장, 저들은 지금 이 상황에 저리 달관하고 넘어가선 안 됐다. 기껏 참여할 의무도 없는 작전에 참여해놓고 정작 원하던 것을 받지 못한 마당 아닌가.

여기 얼음 능력자들은 명예와 인정을 바라서 이번 미끼 노릇을 자처했지만, 내 보기에 별 성과는 없었다. 뉴스에서는 얼음 능력자들이 작전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주 짤막하게 언급하고 넘어갈 뿐이었으니까.

얼음 능력자들의 괴수 꾀어내는 능력이 그토록 뛰어나다는 게 자세히 광고되지 않아 다행이라 여겨야 할지, 아니면 기껏 위험한 작전에 자원했건만 조명도 해주지 않았음에 분노를 느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라에서 그 헌신에 보상해주지 않았다면, 인천 공작이라도 대신 그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 자리에서, 그날 작전에 참여한 얼음 능력자들에게 현재 건설 중인 초고층 아파트가 완공되면 한 채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으며 그에 따른 내 동족들의 반응을 즐겼다.

"정말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진심이냐 묻는 말에 진심이라고 대답해주고는 쿨하게 시설을 나섰다.

그렇듯 인천 공작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한 뒤,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가기 싫은 곳, 갈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곤 하지만 그래도 가야 하는 곳이었다.

그러니까, 내 여동생이 갇힌 교도소 말이다.

거기까지 가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 내가 너무 바빴기 때문에, 또한 앞서 말했듯 그년을 면회하러 갈 때마다 내 기분이 상하곤 했기 때문에 몇 번 면회하러 가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를지도 몰랐다.

이번 면회에서는 녀석에게 말해줄 기쁜 소식이 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그년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었다.

*******

철창 너머 여동생과 마주했다. 초조한 얼굴의 여동생은, 내가 가져온 음식 따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여동생은 회 몇 점을 입에 넣긴 했는데, 내가 음식을 챙겨 온 성의를 무시할 수 없을 뿐이지 정말 먹고 싶어서 먹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째서?

뒤이어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자마자 나는 면회하러 온 것을 후회했다.

"오빠? 살려줘."

"뭐?"

"제발, 나 여기서 꺼내줘······."

저번에도 했던 그 말이로군.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은 걸 참아야 했다. 몇 달 일찍 나오고 싶어서 저따위 부탁을 한단 말인가?

이 이기적인 년. 왜 자꾸 그따위 부탁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자꾸 비싼 선물 사달라고 졸라대는 애새끼에겐 이미 챙긴 선물마저 순순히 내주기 싫듯, 나도 '곧 출소시켜주기로 국회의원 나리께서 약조하셨다'는 말도 하기 싫어졌다.

짜증을 담아 녀석을 물끄러미 쳐다볼 때였다.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동생이 계속 말했다.

"나 이대론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응?"

그 말이 어떤 트리거였던 모양이다.

다음 순간, 나는 현기증과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감각에 휩싸였다.

미래의 환각이 시작되었다.

*******

환각 속 여동생이 애원한다.

'오빠? 살려줘.'

감정을 잔뜩 실은, 구구절절한 애원이다.

'뭐?'

'부탁이니까 나 좀 여기서 꺼내줘. 이대론 죽을 것 같단 말이야······ 응? 제발······.'

그리고 환각 속 내 대답은 이렇다.

'그냥 죽지 그래?'

내가 그리 쏘아붙이자 여동생이 울먹인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해?'

그러나 그 울먹거림, 그 눈물은 환각 속 내 심장을 움직이지 못한다.

아주 약간, 아주 약간의 불편함은 느끼게 했지만 그뿐이다. 그 불편함마저도 이내 짜증으로 화해서는 내 목소리를 날카롭게 벼려낸다.

'너야말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냐? 어떻게 그리 뻔뻔해? 나 요새 헌터 일 하는 거 알지?'

'어, 알아······.'

'덕분에 겨우 먹고 살 만해졌는데,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은 여동생 년 탈옥시켜서 수배범 되고 면허 취소되라고? 미쳤냐?'

여동생이 몇 달 뒤에 출소할 예정임을 떠올리니 분노는 더욱 커진다. 고작 몇 달 더 일찍 나오자고 그따위 부탁을 한단 말인가?

나는 속에 담아둔 분노와 원망들을 기관총처럼 쏘아낸다.

'네가 나한테 뭔 좆같은 짓들을 했는지 내가 벌써 잊었을 것 같냐! 나 수학여행 갔을 때······'

내가 그쪽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잔뜩 말한 뒤에는 이런 말도 덧붙인다.

내가 인권단체에 들어가 구명운동 좀 했답시고 갑자기 널 아끼기로 결심한 게 결코 아니라고. 넌 여전히 내게 역겹고 짜증 나는 깡마른 돼지에 불과하다고 윽박지른다.

나중에 또 '탈옥시켜달라'는 말로 날 불편하게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동이다.

그리 한바탕 험한 말들을 쏟아내고서야 면회를 마치고 교도소를 나선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도 찜찜한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여동생이 더는 그리 졸라대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닫는다.

죽은 여동생은 무리한 부탁 따윈 할 수 없다.

전화를 통해 내 여동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서, 난 멍하니 수화기만 붙잡고 있다. 아직 현실감이 들지 않는 가운데 내가 묻는다.

「걔가 죽었다니, 어째서요? 몇 달 뒤면 출소할 예정이었는데······?」

내 질문에 수화기 너머 교도관은 변변한 대답을 내놓지 않는다. 그는 우물거리며,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길 피하려 애쓴다.

그 태도를 보니 제대로 된 설명을 듣기 어려우리란 걸 알 만하다.

나는 바로 여동생이 갇혀있던 교도소로 향한다.

그곳 교도관들은 날 깊이 들여보내 주려 하지 않지만 상관없다. 비각성 찌꺼기들 따위가 공간이동 능력자를 막을 순 없는 법······.

나는 교도소 깊숙이 공간이동 하여, 경찰들이 촬영해둔 자료를 강탈해서 본다. 내 여동생은 왜, 어떻게 죽었나?

내 여동생은, 함께 호실을 쓰던 수감자들을 죽이고 자신도 죽였다.

본인의 얼음 능력으로 감방 수감자들의 폐를 모조리 얼려버린 뒤엔,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로 굵고 뾰족한 송곳을 만들어 제 심장마저 꿰뚫어 죽었다.

그 설명이며 사진만 봐도 내 여동생이 갇혀있는 동안 무슨 일을 겪었는지,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또다시 공간이동 하여 여동생이 갇혀있던 호실에 향한다.

그곳 벽에는 피로 쓰인 글자가 남아있다. '씨발.'

진짜 씨발이다.

*******

환각에서 빠져나온 즉시 나는 손을 뻗었다.

내 앞을 가로막던 철창을 모조리 뽑아버린 뒤, 눈앞의 유리 벽을 향해 주먹을 쑤셔 박자 유리는 곧바로 와장창 깨졌다.

여동생이 눈을 부릅뜨고 놀라는 가운데,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서 내가 말했다.

"그래, 나가자."

135화 여동생 김선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