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여동생 김선 - [3]
그대로 여동생을 이놈의 교도소에서 꺼내주려던 차였다.
여동생은 아직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짧은 시간 눈을 여러 번 껌벅거리고서야 입을 열었다.
"어······, 이래도 돼?"
"뭔 소리야. 네가 꺼내달라며."
"그건 맞는데! 확실히 꺼내주면 고맙겠는데, 이런 식으로 꺼내달란 게 아니라······."
"저번에 내가 어떻게 꺼내달라는 거냐고 물으니까, 네가 공간이동으로 꺼내달라며 본인 입으로 직접 말했던 것 같은데 아니냐?"
"그땐 그랬지만, 지금은 아니고······!"
계속 대화 나누기는 어려웠다. 고막을 울리는 비상벨 소리와 함께 웬 고함이 울려 퍼졌기 때문이다.
눈살을 찌푸리며 고함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교도관들이 일제히 이쪽을 바라보며 뭐라 외치고들 있는 게 아닌가.
왜들 난리인지는 내 주변에 널브러진 유리창 파편이며 통째로 뽑혀버린 철창만 봐도 알 만했지만, 그렇다고 이해해줄 의욕이 생겨난 것은 아니었다.
시끄럽고 짜증 났다. 참기 어려울 만큼.
"정신 나갔어요? 지금 당장―"
웬 교도관이 내게 다가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 순간, 이미 내가 느끼고 있던 짜증이 더욱 커졌다.
사실 이때 나는 그저 손을 휙 흔들어 놈을 뿌리치기만 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고서 으르렁거리며 초저주파라도 발산해주면 알아서 겁먹고 찌그러졌으리라.
하지만 지금 나는 고작 그러고서 만족하기 어려웠다.
그놈의 환각을 보고 나면, 환각에서 느낀 감정들이 현실에도 남아 잔류하기 때문에. 지금도 환각의 잔류물들이 내 머릿속에 남아서는 그때 느낀 울분이며 다른 감정들을 지금 내가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 감정들은 분출될 기회만 기다리며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중이었다.
"악―!"
나는 날 붙잡고 있던 교도관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대로 힘을 주자 그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 비명마저 듣기 싫었다.
교도관의 턱을 손등으로 툭 치니 피와 이빨들이 터져 나왔고 놈이 쓰러졌다. 나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내 몸에 손대는 찌꺼기 새끼, 시끄럽게 구는 찌꺼기 새끼 죽여버린다."
그제야 조용해졌지만 나는 만족하지 못했다. 폭행하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지는 게 아니라 더욱 흥분하게 되는 법.
나는 다음 화풀이 상대를 찾아 헤맸다.
"교도소장 어딨냐?"
내 물음에 한 교도관이 우물우물 되물었다.
"소장님은 왜······?"
"그 새끼 애미애비 곁으로 그 새끼랑 그 새끼 자식새끼들 몽땅 다 보내주게."
그러자 교도관이 움츠러든 채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것을 본 나는 화가 더 치밀어올랐지만, 이내 나름대로 침착하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생각해보니 교도소장 그놈보다 먼저 손봐줄 놈들이 따로 있었지.
내 여동생 년을 죽도록 괴롭힌 그년들 말이다.
이대로면 내 여동생이 그년들을 죽이고 자신도 따라 죽을 예정이었던가?
지금도 내 눈에는 본인이 만들어낸 얼음에 꽂혀 죽어버린 피투성이 여동생의 사진이 어른거린다.
그년들에게 원래 맞을 최후를 재현해줄 필요가 있겠다.
나는 여동생을 붙잡고서 공간이동 했다. 교도소 바깥이 아닌 내부 더 깊숙한 곳으로. 기억 속 여동생이 수감되어 있던 그 감방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거기 앉아있던 죄수들이 날 바라보며 기겁했다. 그리고 난 그 죄수들의 얼굴이 환각 속 사진에서 본 그년들과 다르단 걸 느끼고는 여동생에게 물었다.
"너 지내던 감방 여기 아니냐?"
"여기? 내 방 아닌데······."
"그럼 어딘데?"
여동생은 내가 그걸 왜 묻는지는 모르는 듯했지만, 어쨌건 겁먹은 표정으로나마 날 안내했다.
"여기가 너 지내던 곳이야?"
"어, 응······."
그리고 여동생이 안내한 제 감방에서, 나는 상황이 내 예상과는 다르단 것을 눈치챘다.
요즘 세상엔 어느 교도소든 수감자가 가득 찬 상황이라, 6인실에도 열 명 넘게 꾸역꾸역 채워놓았다던가? 그래서 수감자들로선 잘 때 누울 공간도 부족해서 다들 스트레스로 가득 찬 마당이라고.
내 여동생의 방은 그렇지 않았다.
내 여동생이 지내던 방은 독거방으로 보였다. 안에 있는 가구며 매트리스가 각각 하나씩인 걸 보니.
또한 내 여동생이 혼자 쓰는 독거방은 방금 내가 본 6인실만큼 넓었고, 전용 TV가 있었으며, 심지어 곧 출소할 예정이라 선물을 받은 건지 아니면 교도관이 빌려준 건지 몰라도 스마트폰까지 하나 충전 중이었다.
일찍이 수감 생활을 해본 적 있던 나는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특혜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정치인이며 재계 거물이 수감돼도 이런 대우를 받지는 못한다.
이 방을 대충 훑기만 해도 교도소장이 내가 준 뇌물과 경고를 허투루 넘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후로 국회의원이라도 방문해서 내 여동생을 5성 호텔 숙박객쯤으로 여기고 대우하도록 당부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개 공무원에 불과한 소장으로선 아무리 협박을 받았어도 대놓고 이런 특혜를 베풀기 어려웠을 것이요, 정치인들로선 내 여동생에게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경우 내가 또 어떤 난동을 부릴지 몰라 걱정했을 테니까.
그렇다면 이년은 왜 꺼내달라고 징징거렸나?
자세한 이유는 몰라도 환각 속 여동생과는 상당히 다른 이유로 그리 요청했을 터였다.
가뜩이나 스트레스로 가득 찬 수감자들 사이에서 샌드백 취급당했을 환각 속 내 여동생과 달리, 지금 내 여동생은 독거방에 누워 TV를 보던 중에 나에 대한 뉴스를 몇 번 봤으리라.
또한 교도관들이 자길 조심스레 대우하는 것이며, 마구잡이로 베풀어지는 특혜를 보며 눈치챈 바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제 오빠가 생각보다 훨씬 거물이란 사실을 알게 됐을 테지. 또한 아무리 특혜를 받더라도 결국엔 감방 생활이라 답답해 죽겠는데, 제 잘난 오라비라면 자길 더 일찍 꺼내줄 수도 있으리라 기대했을 테고.
순간 내가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그따위 약해빠진 생각을 떨쳐냈다.
실수는 무슨.
애초에 이년을 여기 가둬둔 것 자체가 잘못이었는데, 내가 난동 좀 부린들 문제가 있을 리가? 내가 아까 손목을 뭉개버린 교도관을 상대로든 다른 누구를 상대로든 미안할 게 전혀 없었다.
"그래서, 너 괴롭히던 년들은 따로 없냐?"
내가 혹시나 해서 물었더니, 여동생이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나 괴롭히는 년들이 있긴 있는데······."
"최근에도? 따로 혼자 지내는 널 왜 괴롭혔는데?"
그 대답을 곧 듣게 되었으니, 대충 이런 이유였다.
교도소에서는 내 여동생에게 이미 있는 독거방을 따로 준 게 아니라 6인실 하나를 통째로 비워서 독거방을 하나 새로 만들어 주어야 했는데, 그 탓에 이미 미어터지던 방들이 더 미어터지게 되었다나?
그래서 내 여동생이 매점 등에 갈 때마다 시비 걸고 괴롭히려는 년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와중에 내가 또 교도관을 폭행하는 꼴은 보기 싫은 걸까? 여동생이 그때마다 교도관들이 바로 제지했다며 열심히 부연했고 난 그 설명을 한 귀로 흘려넘겼다.
지금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이 가득 찼을 뿐이다.
이년을 죽이려던 씨발년들이 또 있었구나.
"너 괴롭히던 년, 누군데?"
"어······. 음, 박혜진?"
난 그 자리에서 가까이 있던 교도관을 잡아서는 그 이름을 대고 안내하라 지시했다.
그리하여 잠시 후, 난 한 6인실에 들어섰다. 박혜진이란 년도 보게 되었다.
"네가 박혜진이니?"
박혜진은 비각성자 찌꺼기 같았다. 표독해 보이는 데다 화장을 못 해서인지 못생긴 얼굴만 봐도 서울 종자인 게 분명했고.
박혜진은 이 갑작스러운 방문에 당황한 눈치면서도 따져댔다.
"누구예요? 누군데 남자가 안에 들어와선······?"
"나 이년 오빤데. 네가 얠 좀 괴롭혔다고 들었거든? 해명이 필요해서 그래."
일부러, 화를 가라앉힌 목소리로 그리 말했다. 그러자 내 여동생이 옆에서 '왜 이 새끼가 갑자기 사근사근하지' 하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박혜진이 말했다. 싸가지없게, 한 대 치고 싶은 표정과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그걸 왜 물어봐요?"
덕분에 화가 더욱 났지만,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내가 별 이유 없이 폭행하고서 만족할 만큼 사이코는 아니다.
화를 터뜨리기 더욱 적합한 상황이 필요하다. 화내고, 폭행하고, 그보다 더한 짓을 하기에 마땅한 상황이.
그리고 과연, 박혜진은 내 기대만큼 골 빈 년이었다.
그년은 지금 상황을 학부모가 자녀 괴롭힌 년에게 항의하러 온 상황쯤으로 이해하는 게 분명했다. 그 태도만 봐도 이 상황을 그저 짜증스럽고 귀찮게만 여기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나는 더욱 만만해 보이도록, 애써 학부모 같은 말투를 흉내 내어 물었다.
"여동생이 괴롭힘을 당했으면 말야, 오빠로서 이유가 뭔지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그걸 이 안에서 왜 물어보냐니까? 꼬추 달린 새끼가 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기어들어 와서······."
"그래서 왜 그랬냐구. 내가 물어보잖아, 응?"
슬쩍 교도관을 보니, 그는 지금 내가 대충 뭘 하려는지 예상한 듯 박혜진에게 필사적인 눈짓으로 닥치라고 신호하고 있었지만 박혜진은 알아먹지 못했다.
박혜진은 기어이 더욱 짜증 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좆같아서 그랬는데요."
"그래? 왜 좆같았는데?"
"아, 씨. 뭘 자꾸 캐물어 봐? 좆같이 생긴 새끼가······."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나는 양손을 뻗었다. 왼손으론 박혜진의 머리통을 붙잡았다. 오른손으로는 엄지와 검지, 중지로 그년의 코를 쥐고서 별 힘도 주지 않고 잡아당겼고.
그러자 그년의 코가 있었던 자리에서 피가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입에서는 비명도.
이후로 내가 뭘 어떻게 했는지, 또 어디 신체를 뜯어냈고 짓밟았는지는 굳이 설명하고 싶지 않다. 그걸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내가 너무 천박한 인간으로 보일까 봐 걱정되는 까닭이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감히 나와 내 여동생을 상대로 그따위로 군 비각성 찌꺼기를 상대로는 충분히 그래도 되었단 사실이다.
그러니 뒤늦게 죄책감을 가질 필요 따윈 없다. 정말로, 전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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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내 여동생을 '탈옥' 시켜주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고 말았다.
한편 감옥 안에서 제 오빠가 날뛰는 이유를 모르겠는지 내내 겁먹은 표정이었던 내 여동생은, 내가 본인을 웬 호텔에 데려다주고는 특실까지 잡아주고서야 그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나 진짜 여기서 지내면 돼?"
"어. 너도 나랑 같은 집에서 살긴 좀 민망할 거 아니냐?"
"그래도, 여기 계속 있다 보면 경찰이 나 잡으러 오는 거 아닌가······."
"절대 안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라. 혹시 진짜 오면 전화 한 통 해. 그럼 내가 바로 공간이동 해서 올 테니까. 알겠냐?"
그렇게 탈옥하고도 아무 문제가 없으리란 사실, 이제부터 정말 자유란 사실을 몇 번이고 말해주고서야 내 여동생은 비로소 안도한 듯했다.
"정말 이래 줄 줄은 몰랐는데. 너무 고맙······."
작게 중얼거리면서 내 여동생이 웃었다. 나도 따라 웃었다.
그리고 과연, 이후로도 별문제는 없었다. 경찰이든 특무대든 쳐들어와 나나 내 여동생에게 수갑을 채우려고 실랑이를 벌이는 일 따윈 없었고, 심지어 이번 탈옥 사건이 뉴스에 나오지도 않았다.
하기야 국회의원들을 상대로 납치 협박했을 때도 무사히 넘어간 마당 아닌가. 고작 싸가지없는 죄수 한 마리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꼴로 만들어줬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단 말인가?
다만 정부 고관들이 보는 내 위험 등급이 한두 단계는 더 올라갔을 것 같다.
여동생을 곧 출소시켜준다고 국회의원이 직접 말해줬는데도 내가 그리 굴었단 점에서, 이번 내 행위는 정부에서 내민 화해의 악수에 순순히 손잡아 주기 싫어 일부러 깽판을 친 것으로 해석되는 모양이다.
「여동생이 당장 내보내달라고 징징거려서 꺼내준 거라고? 그래, 알겠어. 아무튼 정식으로 출소한 걸로 알아서 처리해둘 테니까 그리 알고······」
상황 파악을 하려는지 내게 전화를 건 엄근오의 목소리에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와 대화하는 내내 그 목소리가 피곤하게만 들렸는데, 이번 일로 여러모로 마음고생을 한 모양이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가 환각 따윌 보고서 그 상황에 다른 상황을 겹쳐보고서는 흥분해서 날뛰었다고 설명할 수야 없는 일이니까.
그런 식으로 정신과 상담을 받아야 할 필요를 보였다간 내 몸값이 깎이기나 할 텐데, 내가 어찌 그럴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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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화 나이토 상 - [1]
최용은 휴대전화 너머 상대방이 알려주는 정보를 들었다.
"그래요? 김극 그 양반이 그랬다고. 이미 여동생 출소시켜주겠단 제안까지 했는데 다 무시하고서······."
진지한 얼굴로 듣다 말고 저도 모르게 웃었다. 만족감에서 우러나온 웃음이었다.
"그거 정말······ 멋지네."
전화를 마치고 방금 들은 일을 곱씹어보았다.
그 양반이 왜 그런 짓을 벌였을까. 베헤모스 토벌이 끝날 즈음 정부에서 부린 유치한 수작질에 대한 보복일까? 아니면 결코 정부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과격한 의사표시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쪽이건 짜릿하다.
대리만족으로 분비된 도파민이 그 머리를 가득 채운다. 동종업계 종사자가 보여준 '활약'에서 느낀 대리만족이다.
헌트웹에서 특무대며 정부기관을 상대로 보여준 그 남자의 행동을 접했을 때부터 자신도 그럴 수 있길 원했다. 그리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정말 그러는 중이고.
그날 김극이 베헤모스 토벌 당시 특무대를 상대로 보여준 우유부단한 모습은 살짝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생각해보면 그날 베헤모스가 포효할 때, 자신이 그 등에서 떨어질 뻔했던 것을 김극 그 양반이 잡아줘서 그 등에 남아있을 수 있었지 아마?
그 도움 덕에 최용은 놈의 죽음과 가까운 위치에서 남들보다 많은 영혼을 흡수했고 지금 그 덕을 보고 있다.
보라, 그 어느 때보다 심신에 힘이 넘쳐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야말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힘이다. 이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고 있다.
단순히 괴수들을 상대로만 용의 불꽃을 뿜을 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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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의 교도소에서 내가 벌인 일에 찝찝함 따윌 느낀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날 이후로는 얌전하게 지냈다.
부모의 명예를 걸고 그날 내가 잘못했다고 여기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나는 손목을 뭉갠 교도관에게 보상까지 했다.
그 교도관에게 치유 능력자를 찾아가 모든 부상을 완치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물가상승을 감안해도 당장 은퇴까지 할 수 있을 만한 금액을 건넸다.
몇 번이고 말하는 바이지만 그날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해서 보상한 게 아니었다. 따로 돈 쓸 곳이 없어서 내 관대함이나 보일 겸 그런 것이었다.
내가 잘못했다기엔, 애초에 비각성 찌꺼기가 감히 각성자의 신체에 손을 대고도 살아남으리라 믿은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인데다······.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애초에 증거도 없이 내 여동생을 잡아 가둔 일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짓거리 아닌가. 얼음 능력자란 이유로 잡아 가둔다니? 그게 곧 나치 짓거리가 아니면 뭔가.
그러니 그 교도소는 나치수용소요, 거기 교도관들은 나치 부역자였으므로 내가 거기 있던 모두를 때려죽인들 아무 죄가 되지 않았다. 데스클로 똥이 된 내 부모의 명예와 영혼과 존엄을 모두 걸고 그리 믿는다.
따라서 자숙하자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냥 왠지 날뛰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후로 몇 달간 헌터 일에만 집중했다.
요새 게이트가 열리는 일이 확 줄어든 덕분에, 서울에서도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했던 일을 비로소 할 수 있게 되었다. 게이트 내에 틀어박힌 괴수들을 공간이동으로 끄집어내어 사살했다. 이제는 비교적 덩치가 있는 오거 따위도 끄집어내선 손수 망치로 때려죽일 수 있게 된 만큼
그리고 5월, 나는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의 절반을 베헤모스 사태 피해자들에게 기부했다.
그러면서 딱히 아까움을 느끼지는 않았다. 내가 돈 욕심은 딱히 없는 게, 이미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요즘 세상에 돈이 딱히 강력한 무기가 아님을 알고 있다.
내가 몸값을 신경 쓰는 것도, 몸값이 곧 헌터들의 자존심이요 헌트웹에서의 전투력이기 때문이지 돈을 더 원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이 험하면 험할수록 금력보단 권력이, 권력보단 직접적인 폭력이 더 강한 힘을 발휘하는 법 아닌가.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각성자로서 내가 왜 돈에 얽매여야 한단 말인가? 권력이 있으면 돈은 자연스레 따라오듯 폭력을 가지고 있어도 마찬가지인 법인데 어째서?
그 거금을 기부한 뒤,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던 중이었다.
"참혹한 피해를 당한 인천 시민들과 앞으로 인천 시민이 될 사람들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기부할 수 있었습니다. 인천 만세."
"인천 만세!"
인터뷰라기보다는 칭송에 가까운 질문들 사이에서 한껏 즐기던 나는, 웬 기자의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요새 마츠모토 씨를 두고 생긴 논란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마츠모토 씨? 나이토 상이요?"
"예. 아시다시피 요새 나이토 상이 실은 각성자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불거지고 있습니다. 함께 일해보신 김극 헌터께서 보시기엔 어떤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이 정말 각성자일까요?"
잠시 인천 공작 김극과 헌터 김극이 갈등했다.
꼴 보기 싫고 역겹기까지 한 나이토 상을 엿 먹일 대답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각성자 아닌 것 같은데요? 딱 보면 아니란 걸 알지."
아무리 그래도 같이 싸운 동료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수 없다는 헌터 김극의 말에 기자가 다시 요청했다.
"그렇다기엔 비각성자가 보여주기 어려운 행동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같이 일한 동료라고 너무 감싸주려고만 하지 마시고! 그러다 나중에 진실 밝혀지면 괜히 함께 비난받을 수 있습니다. 솔직한 의견을······"
저 말에는 헌터 김극도, 인천 공작 김극도 모두 긁혔다.
"감싸주긴 뭘 감싸줘, 씹새끼가. 각성자 아니라는 게 왜 두둔이냐? 그럼 각성자가 욕인가, 처맞고 싶어?"
내가 그리 으르렁거린 순간 인터뷰장에 고요가 깔렸다. 내 협박과 초저주파가 만들어낸 고요.
보복성 기사가 나오리란 걱정 따윈 하지 않았다. 내가 날뛸 명분이 생겨날 걸 걱정한 정부 기관에서 알아서 검열해줄 것인데다, 평소 소식 접하는 게 빠른 언론사에서도 내가 어떤 성격인지 알고 알아서 몸 사릴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나이토 상이 각성자인지 비각성자인지 따지는 논란이 있는 걸까? 나이토 상 그놈, 저번 베헤모스 토벌전에 참전까지 했는데도 여전히 안티들에게 공격당하는 중이라고?
혹시나 해서 그 안티카페에 들어가 보니, 여전히 활동하는 유저가 상당했다.
새로 올라온 글 하나를 클릭해서 보았더니 이런 내용이더라.
Park1994 : 나이토 상 판단력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오지 않음?
헌터 절반 죽어 나갈 게 뻔한 베헤모스 사태에선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강준치 참전해서 쉽게 이길 거 보이니까 바로 참전 ㅎㄷㄷ
덕분에 겨우 데스클로 몇 마리 잡아놓고 CF까지 찍는 거 보니 나도 인생 저렇게 살아야겠단 생각이 절로 드네?
나이토 상을 혐오하는 나마저도 그 글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하여간 한심한 인간들. 그놈이 베헤모스 사태에 참가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더니, 참가한 후에는 또 저런 논리로 비난하다니?
나와 같은 현명한 남자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실이지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실수했음이 드러나면 그 사실을 순순히 인정하고 반성하는 게 아니라 꿋꿋하게 잘못을 이어나가길 선택한다. 나이토 상을 욕하던 놈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지.
그런데 CF는 또 뭐냐. 나이토 상 그놈 CF까지 찍었나?
인터뷰하던 중에 구글에 검색해보니, 정말이었다.
「전장을 내달리는 기사처럼! 어려운 시대를 질주하는 남자들의 스프링―썬!」
나이토 상이 웬 CF를 찍은 모양이었다.
웬 승용차 광고였는데, 베헤모스와 데스클로들이 쫓아오는 가운데 광고 속 차량이 시원하게 질주하여 그 모든 괴수들의 추격을 뿌리치는 영상이 꽤 볼 만했다.
나이토 상, 그 역겨운 비각성 찌꺼기가 도주에 성공한 뒤 차문을 열고 나와 땀을 닦고 씩 웃는 장면에선 구역질이 나올 뻔했지만 하여튼.
그리고 의외로, 하필이면 나이토 상이 그놈의 광고를 찍은 데 불만을 가진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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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yberMagneto : 우으······ 베헤모스 토벌 때 나이토 상은 있는지 없는지 구별도 안 될 수준이었는데 왜 광고는 저놈이 찍어? 저 광고 찍은 놈들 싹 다 가스실 안 보내면 사매 슬퍼져서 울 거야. 우으, 으. 으아아앙······.
헌트웹에 올라온 내 라운드걸의 추악한 글이었는데, 놀랍게도 동조하는 댓글이 꽤 달려있었다.
Ⓐ 이해경 : 확실히 베헤모스 사태에 두 번 모두 참여해서 큰 공 세운 김극 오빠며 주력을 담당한 강준치 씨 내버려 두고 왜 하필 나이토 상이 광고를 맡아?
익명 : 참전할 의무 없는 외국인인데도 마지막 작전에나마 참전한 게 좋게 보여서?
Ⓐ 5my지저스 : 외국인인데도 참전한 게 돋보이는 거라면 인천 외노자 헌터 응우옌한테 광고 줘야 하지 않나? 응우옌 그 외노자, 베헤모스 사태 두 번 모두 참여했는데. 중상 입은 김극햄도 구해주고 강준치 씨한테 달려드는 괴수들 상대로 헌터 라이플도 쏘고 하면서 공도 여럿 세웠고
대충 그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나이토 상이 베헤모스 토벌 작전에 참여한 건 물론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광고를 찍을 만한 일까진 아니란 식이었다.
직접 표현하진 않아도 다들 내심 불만이 많아 보이기도 했는데, 왜냐하면 헌터가 광고에 출연한 건 지금 나이토 상의 경우가 최초였기 때문이다.
국내 헌터로선 가장 유명한 나마저도 어딘가에서 광고 제안을 받아본 적 없음을 고려하면 나이토 상 저놈이 광고에 출연한 게 얼마나 기이한 일인지 알 수 있으리라.
한편 최용은 이 상황에 특히 불만이 가득해보였다.
Ⓐ Dragon : 나이토 상이 광고를 찍는데 그보다 유명한 김극이나 강준치 씨가 왜 광고를 못 받냐구?
Ⓐ Dragon : 간단해. 그들이 각성자 헌터이기 때문이야
Ⓐ syberMagneto : 우으······ 각성자 헌터면 광고 못 받아? 왜?
Ⓐ Dragon : 정부에서 못 그러게 탄압하니까.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에선 기업에서 각성자들 고용 못 하게 정부에서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거 알지?
Ⓐ Dragon : 미국이며 유럽에선 기업에서 각성자 고용해서 각성자들 초능력으로 이런저런 실험도 하고 시설도 지키게 하고 하는데, 한국에선 무조건 지자체랑 계약해서 괴수랑 싸우며 돈 벌어야 하잖아? 그 탓에 각성자들 돈벌이가 확 한정돼버리는 거지
익명 : 그렇긴 한데, 미국에서 잘 나가는 각성자들은 게이트 열려도 괴수는 안 잡고 온종일 웬 기업 건물이나 지키고 있던데 그 꼴 보기 안 좋잖아. 그런 상황 방지하려는 거 아닌가?
Ⓐ syberMagneto : 비각성 쓰레기는 가스실에서 울부짖을 때 말곤 입 다물면 안 돼? 우으······.
Ⓐ Dragon :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이유는 국가에서 기업과 각성자들의 연계를 막으려는 까닭이야
Ⓐ Dragon : 예컨대 삼성이 김극이랑 강준치를 고용하면? 웬 삼성 PMC를 조직해서 잘 나가는 각성자 헌터들을 소속시키면?
Ⓐ Dragon : 한국은 그날부터 삼성 공화국에서 삼성 왕국이 되겠지. 그런 식으로 기업이 각성자를 고용했다간 사실상 사설 군대를 소유하는 셈이라며 틀어막는 거야. 기업이 지닌 금력과 영향력에 각성자들의 무력이 합쳐지는 것을 경계해서
Ⓐ Dragon : 그래서 각성자 헌터들은 CF도 못 찍는 거지. 기업에서 광고비라며 사실상 금전 후원을 할 수 있는 셈이니까, 그런 우회적인 시도마저 정부에서 다 틀어막는 거야
Ⓐ 5my지저스 : 그래서 나이토 상처럼 비각성자 아니면 앞으로도 우린 영영 광고 같은 데 출연 못 하는 겁니까?
Ⓐ Dragon : 그런 거지. 아마 우리가 웬 음료수 광고라도 찍었다간 다음 날에 회사랑 헌터 집에 특무대가 방문할걸?
Ⓐ 러그소라게 : 각성자가 그런 광고에 출연할 수 없다는 법이 정말 있어요?
Ⓐ Dragon : 그런 법은 없지. 그런 법이 없는데도 있는 것처럼 구니까 더욱 화가 나는 거고
Ⓐ Dragon : 잊지 마. 나라에선 우리가 편하고 안전하게 돈 벌도록 허락해줄 생각이 없어.
Ⓐ Dragon : 한국 헌터들은 이 상황에 특히 더 화내야 돼. 정부 개짓거리로 위험한 일 연속으로 터져서 한국에서 헌터 일하기가 훨씬 위험해졌는데, 국제 시세대로 저기 유럽 헌터들이랑 비슷한 돈 받는 게 정말 공평한 건가?
Ⓐ Dragon : 은퇴한 뒤 따로 기업 경비 노릇도 못 하고 평소 광고도 못 찍는 게 말이 되나? 유럽 헌터들보다 한국 헌터들이 훨씬 더 많이 죽고 더 많이 다치는데 특권은 덜 주어지는 게 말이 돼?
음, 작고 귀여운 애기버섯이가 끼어들어서 한마디 하기에는 너무 험악한 자리로군. 그래서 같이 어울릴 엄두를 못 내고 얌전히 구경이나 하던 중이었다.
Ⓐ 5my지저스 : 그런데 나이토 상이 비각성자 헌터란 이유로 최초로 광고를 받은 거면, 나중에라도 각성자인 게 드러나면 문제가 되는 건가?
137화 나이토 상 - [2]
익명 : 나이토 상이 사실 각성자였다고 드러나도 별문제 없지 않나? 애초에 각성자가 광고 찍으면 안 된단 법은 없다매
Ⓐ 5my지저스 : 아니, 문제 될 수도 있지. 나이토 상이 왜 유명한지 생각해보라고
익명 : 헌터로서의 실력이며 성과가 훌륭해서 아님?
Ⓐ 5my지저스 : 정확히는 '비각성자 헌터인데도' 실력과 성과가 상당해서 유명한 거지. 단순히 나이토 상보다 괴수 잘 잡고 성과 뛰어난 헌터는 꽤 있지 않나?
Ⓐ 러그소라게 : 하기야 A급 헌터면 어지간해선 나이토 상보다 능력 면에서든 성과 면에서든 우월할 수밖에 없죠?
Ⓐ 5my지저스 : 그렇지. 그런데 어지간한 A급 헌터들보다 나이토 상이 유명한 건 결국 비각성자의 몸으로 그 모든 능력을 보였기 때문 아니야?
Ⓐ 5my지저스 : 그러니까 청각장애인이 작곡가로서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들을 여럿 작곡해내서 그보다 실력 뛰어난 다른 작곡가들보다도 더욱 높은 평가를 받은 셈인데······.
5my지저스 이 양반, 정진영 형 아니었나? 이 형이 집요하게 나이토 상을 물어뜯는 걸 보며 난 약간의 황당함을 느꼈다.
이 형이 나이토 상을 원래 저리 싫어했던가? 나이토 상이 몇 달 전까진 우리와 함께 일했던 걸 생각하면 잘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하기야 뭐, 이 상황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나이토 상은 헌트웹에서 유일하게 B 배지를 발급받을 만큼 이 사이트에서도 명망 있는 헌터였는데, 지금은 모두에게 뒷담이나 듣는 상황 아닌가? 얼마 전까지 동료였던 누군가라도 분위기에 따라 다 같이 공격하는 게 인간 사회의 생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익명 : 그러니까 나이토 상이 각성자인 게 드러나면, 그건 청각장애인 작곡가가 사실 청력 멀쩡했단 게 드러나는 셈이다?
Ⓐ Dragon : 하기야 그렇겠네. 황금화살상? 그 시상식 보니까 비각성자 가산점으로 특별히 나이토 상한테 대상 줬단 뉘앙스더만. 이 와중에 사실 각성자였다고 밝혀지면 이미지 손상이 심각하겠어
Ⓐ Dragon : 그렇게 이미지 확 나빠지면 이번에 찍은 광고에도 악영향을 줄 테니 배상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 Dragon : 어쩌면 지금 헌터 계약에도 문제가 생길지도······. 나이토 상이 이번에 경상도랑 1년 180억짜리 계약 맺은 것도 순수하게 그 실력만 보고 계약한 게 아니라 지자체에서 지역 복구 노력 홍보하기 위해 유명세를 보고 계약한 거니까
그렇듯 나이토 상이 모두에게 공격당하는 이 상황에 내 심정이 어떻냐면, 음, 복잡미묘했다.
비각성 찌꺼기 주제에 잘난 척하던 그놈이 뒷담 당하는 것은 확실히 꼬시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 그놈이랑 같이 일했던 정진영 형이며 그와 어울리던 헌트웹의 다른 사람들이 그놈을 공격하는 것은? 좀 별로였다. 의리도 없이 저게 무슨 짓인가······.
결국 글 한 줄 적지 않고서 상황을 관망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전화가 와서 받았다.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채고선 살짝 흠칫했고.
「김극 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저 마츠모토입니다!」
나이토 상이었다. 이젠 경상도에서 일하는 저놈이 나한테 전화를 왜?
"나야 뭐 잘 지내는데. 그쪽은?"
「저야 물론 한국 와선 늘 잘 지내죠? 아무튼 헌터 일로 연락을 드렸는데요! 김극 씨, 혹시 며칠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헌터 일이라길래 무슨 일인지 들어보니 확실히, 내가 필요할 만한 일이었다.
"내일 가죠."
「정말입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극 씨! 요새 너무 바쁘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시간 내주시니 너무 감사하네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
헌트웹에서 나이토 상이 뒷담 당하는 걸 보며 놈에게 약간이나마 동정심을 느끼기는 했다.
그러나 그 동정심은, 헌터 노릇하기 위해 경상도까지 내려와 놈을 마주한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이토 상! 여기 봐줘요!"
"오빠 너무 잘생겼다!"
저 새끼 저거, 꼴 보기 싫어 죽겠네 진짜.
이제 안티카페마저 있을 정도로 많은 '까'를 거느린 나이토 상은, 여전히 그보다 훨씬 많은 '빠'를 거느리고 있었다.
인천 탈환 프로젝트며 황금화살상 수상 등으로 작년보다도 훨씬 유명해진 덕일까? 나이토 상의 얼굴을 보겠다고 몰려온 팬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보고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요새 인터넷에서 공격당하는 걸 보고 내가 잠시 착각했을 뿐, 딱히 불쌍한 처지에 놓인 놈은 아니었던 셈이다.
물론 헌터 일 관련이라면, 아무리 꼴 보기 싫은 저놈 면상이라도 참아내야 한다.
팔짱을 낀 채 나이토 상의 팬 미팅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중이었다.
"자, 여러분? 오늘의 헌팅이 시작되었는데요! 본격적인 사냥을 개시하기 전에 특별 게스트를 한 분 모셨습니다. 다들 익숙한 얼굴일걸요? 베헤모스가 처음 서울을 초토화했을 때 놈을 격퇴한 장본인! 인천 탈환 프로젝트의 주역! 강준치를 제외하면 한국 헌터 1위······"
겸허한 소개 문구와 함께 카메라가 날 향하더니, 나이토 상이 계속 말했다.
"······김극 헌터입니다! 작년에는 쭉 같이 일했는데, 이렇게 같이 일하는 건 반년만이죠?"
내가 슬쩍 채팅창을 보았더니, 나도 유명해진 게 새삼 실감 났다.
- 김극 ㅎㄷㄷ 업적들 쫙 늘어놓으니 거물인 거 실감 나네
- 아무리 친분이 있어도 왜 하필 김극을 데려왔지?
- 김극 데려오면 안 될 이유가 있음? 국내 1위인데
- 실력이야 당연 최고긴 한데 김극 저 양반, 존나 바쁘고 몸값도 존나 비싸잖아? 이번에 강력한 A급이 필요했으면 석장실을 데려오는 게 낫지 않았나? 석장실도 충분히 강력한데 김극보다 덜 바쁘고 몸값도 덜 비싸니까
- 그러게. 석장실로도 충분한데 왜 굳이 김극을?
- 석장실 데려왔다간 각성자인 거 들킬까 봐 그런 거 아님? 정령은 각성자 여부 꿰뚫어 볼 수 있잖어ㅋ
- 백담비만 해도 얼음 정령이라 각성자였음 진작 들통났을 건데 지랄 ㄴㄴ 일 년 가까이 같이 일하면서 친분 있으니까 데려온 건데 이상한 해석 좀 하지 마라 제발
채팅창에서도 그놈의 각성자 논란이 자꾸 튀어나오는 모양이군. 반박할 가치조차 없을 만큼 어이가 없었다. 저 혐오스러운 찌꺼기 놈이 각성자라니? 각성자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눈살을 찌푸리자니 나이토 상의 역겨운 목소리가 계속 울려 퍼졌다.
"알다시피 이번 상황은 저희 팀끼리 어떻게 해보기가 어려워서요! A급 헌터가 필요했는데, 그중에서도 강력하고 친분이 있기도 한 김극 씨를 특별히 모셔왔습니다. 모두 열렬한 박수 부탁드려요!"
그러자 여기 모인 헌터들도, 채팅방에서도 손뼉이며 손뼉 이모티콘 따위로 날 환영했다.
현실과 가상 양쪽에서 울려 퍼지는 손뼉 속에서 나는 살짝 웃었다.
뭐, 역시 이 상황 자체는 맘에 들었다. 제 분수도 모르고 나대던 비각성 찌꺼기가, 정말 어려운 상황에 부닥치자 결국엔 각성자를 모셔와 의지하는 상황이라니?
그렇듯 기분이 좋아졌기에 나는 나이토 상이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 역겨운 손을 기꺼이 마주 잡아줄 수 있었다.
우리가 악수하자 카메라가 번뜩였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또한 나이토 상의 방송도.
*******
스마트폰을 들어 나이토 상의 방송을 시청했다. 이번에는 생방송이었다.
「알다시피 경상도는 지금 공격받고 있습니다」
스마트폰 너머 나이토 상이 계속 말했다.
「베헤모스 사태로 서울 헌터들이 대거 전사하면서, 그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지방 헌터들이 대거 서울로 올라가지 않았습니까? 이 와중에 외국인 각성자를 데려오는 비용은 대폭 증가했으니, 지방은 예전보다 더 각성자가 부족해진 상황인데요.
경상도만 해도 최용 씨와 같은 강력한 A급 헌터들이 서울에 가버린 뒤로 게이트 열리는 빈도가 확 늘었는데······」
카메라가 경상도의 평범한 논밭을 비추었다.
그 논밭 사이에서 일렁이는 자줏빛, 실시간으로 커지는 중인 게이트가 보였다.
「······이 지역을 지키는 헌터들이 줄어든 공백을 노리고, 괴수들이 더 열심히 침공해오는 거죠. 하여간 지긋지긋합니다. 서울을 틀어막으면 지방을 노리고. 지방을 막으면 서울을 노리고. 괴수들은 게이트 안에서 이동하니까 길목을 차단해서 못 이동하게 막을 수도 없는 게······」
한편 나는 저 사냥 현장에서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장소에 남아 방송을 보는 중이었다.
내가 당장 저 사냥에 참여할 수는 없는 게, 내가 저기 있다간 게이트 안의 괴수들이 날 보고 겁먹어서 뛰쳐나오지 않을 거라나?
그러니까 게이트가 열려도 어지간해선 지켜보기만 하다가 결정적인 상황에 와달라는 게 나이토 상의 요청이었다.
마침내 게이트가 완전히 열렸다.
그 안에서 뭔 괴수들이 나오나 지켜봤더니, 고블린들이었다.
크고 작은 원숭이들. 큰놈이든 작은놈이든, 모두 K-1 소총 혹은 K-2 소총으로 무장했다.
이것도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 생긴 변화 중 하나였다. 베헤모스 사태에 군인들이 워낙 많이 죽으면서 주인 잃은 총기가 길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졌거든.
국군이 회수하지 못한 그 총기들이 다 어디로 갔겠는가? 이 험난한 시대에 법을 무시해서라도 돌격소총으로 무장하고 싶은 민간인들 아니면 폭력배들, 그리고 괴수들이 죄다 주워감으로써 군용소총이 여기저기 무분별하게 풀려버렸다.
그리하여 작년까지는 고블린들이 애지중지하며 비장의 무기쯤으로 써먹었던 돌격소총이, 이제는 고블린이면 누구나 평범하게 들고 다니는 무기로 전락한 모양이다.
「사격 개시!」
이윽고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고블린들을 향해 헌터들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게이트에서 일차로 튀어나온 고블린들이 순식간에 대부분 쓰러졌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마주 사격하여 반격했다.
그렇듯 고블린들도 총기로 무장한 상황인 만큼 헌터들도 긴장할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방탄복과 군용헬멧 따위로 택티컬하게 무장한 나이토 상은, 엄폐한 채 쉬지 않고 사격했다. 모두에게 지시 내리는 동시에 그럴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보기에도 꽤 대단해 보였다.
불과 십여 초 뒤, 나머지 고블린마저 모조리 쓰러졌다.
그러나 여전히 게이트는 열려있었다. 그 안에서, 더 강력한 괴수가 빠져나와 현장의 헌터들을 움츠러들게 했다.
「오거다!」
맞다. 오거였다. 대충 삼 미터급.
오거치곤 덩치가 좀 작긴 하지만 그래도 고위험 괴수였다. 강화된 그 신체에 소총탄을 쏴 맞힌들 치명상으로 이어지진 않으므로 어지간하면 A급 헌터들이 맡아서 처치하는 괴수다.
"도우러 갈까?"
내가 급히 물었지만 무전기 너머 나이토 상이 곧바로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더 대화 나눌 여유도 없이 오거가 도약했다. 한 번 뛸 때마다 그 거체가 수 미터씩 솟구치며 헌터들과의 거리가 좁혀졌는데, 오거들은 으레 저런 식으로 삼차원 기동을 한다. 그래서 무반동총이며 대전차 로켓 따위로 맞히기가 끔찍하게 어렵다.
그러나 우리의 B급 헌터에겐 아닌 걸까?
이 상황을 미리 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나이토 상은 옆에 있던 헌터의 도움을 받아 무반동총을 순식간에 견착하고, 또 다시 도약한 오거에게 겨누더니······.
무반동총의 총구에서 연기가 확 피어올랐다.
그리고, 명중했다!
오거의 몸에서도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높이 도약했던 오거가 공중에서 추락했다. 몇 번 버둥거리던 오거는 이후로 움직이지 못했고. 보아하니 몸통에 정통으로 명중한 것 같았다.
하지만 저걸 어떻게? 딱 봐도 총으로도 쏴 맞히기 어려워 보였는데. 저걸 어찌 딱 한 발 쏴서 맞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저놈 실력이 저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나와 함께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진행할 적에는 저런 고위험 괴수들이 나타나면 내가 맡아서 처리하곤 했으니까.
그러나 나 같은 각성자 없이 비각성자 헌터들끼리 활동할 때는 고위험 괴수도 저런 식으로 자기가 알아서 처리했던 모양이지?
저놈이 괜히 인기가 있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저도 모르게 하고서는 혐오감에 몸서리쳤다.
「와, 이번엔 내가 봐도 개쩔었다. 그쵸? 이거 다시 해보라면 못할―」
상황이 다 끝난 뒤, 나이토 상이 카메라에 대고 자기 활약을 과시하던 중이었다.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게이트 안에서 뭔가 또 튀어나온 게 아니라, 이번엔 그 반대였다.
수풀에서 남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당신 누굽니까? 여기 게이트 열려서 위험해요. 당장 떠나―」
민간인으로 보이는 남자였는데, 아까 나이토 상이 팬 미팅 할 때 그 얼굴이 섞여 있던 것을 기억했다.
그 남자가 땅을 박찼다. 그는 아직 열려있는 게이트를 향해 질주하더니······.
「뭐해? 막아!」
헌터들이 기겁하여 소리친 보람도 없이, 기어이 남자는 게이트 안으로 몸을 넣고 말았다.
남자가 게이트를 빠져나온 것은 그로부터 2분 정도 흐른 후였다.
게이트에 들어간 여파인지 현기증을 느끼는 듯한 남자는,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웃고 있었다.
헤벌쭉 웃는 얼굴로 남자가 외쳤다.
「나이토 상, 각성자다!」
「야! 안 닥쳐!」
헌터 하나가 멱살을 잡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자는 멱살 잡힌 와중에도 계속해서 고함질렀다.
「나이토 상 각성자다! 내가 봤어! 게이트 안에서 나이토 상 보니까 그 영혼이 존나 크고 밝게 반짝였거든? 딱 봐도 각성자―」
그 순간 방송 채팅창이 거의 폭발했다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러모로 당황한 표정이었던 나이토 상은, 억지로 지은 게 분명한 미소를 머금은 채 카메라를 대고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음 방송에서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다음 방송에서요. 알겠죠?」
138화 나이토 상 - [3]
그리고 방송이 종료되었다. 나는 얼빠진 채 스마트폰의 검은 화면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나이토 상이 각성자라고? 정말? 그것은 말이 안 되는······.
방금 그게 자작극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문득 들었다. 스트리머들은 원래 자극적인 전개를 좋아하지 않는가? 가뜩이나 요새 자신을 둘러싼 논란이 불편하니까, 짜고 칠 배우 하나를 섭외해서는 고의로 만들어낸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수작질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저놈이 각성자일 수는 없으니까. 그 내면에서 우러나온 천박함만 봐도 놈이 비각성 찌꺼기임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토 상의 유튜브 채널에 공지가 올라왔으니, 이런 내용이었다.
'당장 사냥을 계속해야 했기 때문에 해명하느라 따로 시간을 쓸 수 없어 방송을 중단했을 뿐, 이번 사냥이 끝나는 대로 모두한테 납득이 갈 만한 해명을 해 보이겠습니다.'
그것을 본 나는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다. 정말 각성자가 아니라면 그저 오해라고 한 줄 적으면 끝일 텐데 그러지 않는다니?
납득을 시키겠다느니 해명을 하겠다느니 하면서 길고 구구절절하게 말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가지 사실, 그러니까 나이토 상이 각성자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렇다면 정말로 각성자였단 말인가? 그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실······.
아니, 아니다. 생각해보니 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예상하고 있었다.
나이토 상이 각성자임을 증명하는 증거가 많아도 너무 많았지 않은가?
생각해보면 난 나이토 상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앞으로 우리가 절친한 사이가 되리란 걸 직감했던 것 같다. 그에게서 놀라운 호감이며 고귀한 품성을 느꼈던 것도 같고.
지금 와선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지만, 난 나이토 상을 상대로 겉으로는 툴툴거리더라도 속으로는 늘 녀석을 아꼈다. 지금까지 내가 나이토 상에 대해 나쁘게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도 하다.
그 모든 것이 나이토 상이 각성자란 증거요, 난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아채고 녀석을 좋게 여겼던 셈이다.
하여간 내가 괜히 예언가가 아니다. 내 직감이 빗나가는 일은 결코 없다는 사실이 또 한 번 증명되고 말았으니.
*******
「김극 씨? 현장 상황 파악하려고 보시던 방송이 갑작스럽게 중단돼서 당황하셨을 텐데, 도움이 필요하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 일단 대기해주십시오. 사냥과 관련 없는 일로 혼란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무전기 너머 나이토 상의 말이었다. 그리고 난 저 친구를 상대로 늘 그랬듯 배려심부터 발휘했다.
"난 신경 쓸 것 없고 일단 심호흡부터 해요. 흥분한 채로 총질하다간 실수해서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
「예, 정말 죄송······」
"죄송할 것 없다니까? 일단 사냥이나 계속해요. 못 하겠으면 좀 쉬고. 알겠어?"
고맙다는 말이 무전기에서 울린 뒤, 한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이토 상이 오늘치 사냥을 마치고 복귀했다. 그가 면목이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요청했다.
"단둘이 얘기 좀 나눌 수 있을까요?"
바람대로 단둘이서 차 안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자니, 나이토 상의 입에서 나온 첫 말부터 충격적이었다.
"김극 씨도 예전부터 알고 계셨지요? 제가 각성자란 사실 말입니다······. "
그 질문으로 말미암아 저 친구가 최근에 각성했을지 모른단 추측마저 빗나가버렸다. 꽤 예전에 각성했던 모양이지?
그 질문으로 말미암아 저 친구가 최근에 각성했을지 모른단 추측마저 빗나가버렸다. 꽤 예전에 각성했던 모양이지?
물론 그 역시 내가 다 예상한 일이라 새삼 놀랄 필요는 없었지만, 나는 어째선지 다시 한번 충격을 받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하기야, 담비 씨가 말해주지 않았을 리가 없죠."
"정확히는 무슨 능력······."
"신경가속이요. 뭔 능력인지 아시지요? 몸은 딱히 빨라지지 않는데 사고속도만 빨라지는 거죠."
"예전에 게이트 안에서 봤을 땐 딱히 각성자인 티가 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번엔 왜······?"
"원래는 그랬는데, 베헤모스전에 참전하고 나니 영혼이 확 부풀어 오른 것 같더군요. 게이트 안에서 보면 일반인들과 확 다른 게 티가 날 정도로요."
어지간한 각성자라면 영적 성장을 이루고 나면 기뻐하는 법이건만, 어째 나이토 상은 그 반대였다. 침통하고 근심이 가득해보이는 얼굴.
내가 물었다.
"그래서 나랑 단둘이 얘기하자는 게 혹시, 말 좀 맞춰달라고 요청하려는 겁니까?"
"예, 면목 없지만······."
나이토 상은 자신이 몇 달 전 베헤모스 토벌작전 중에 각성했노라 해명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때 그 사실을 바로 밝혀야 옳았겠지만, 본인도 각성했음을 깨달은 게 늦었던 데다 자신의 비각성자 헌터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사라지면 방송에 악영향이 갈 게 두려워 숨겼노라 주장할 생각이라고.
그 겁많은 결정에는 기꺼이 사죄하겠지만 예전부터 각성해놓고 비각성자인 척한 것은 결코 아니라며 해명할 계획이라나?
"그러니까 나 보고 입 맞춰달라는 게, 내가 그쪽이랑 같이 인천 탈환 프로젝트 진행할 적에는 각성자인 느낌이 전혀 없었다고 말해달라 이거요?"
"정확합니다. 그래 주실 수······?"
"그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지."
내가 흔쾌히 대답하자 나이토 상은 안도의 한숨인지 체념의 한숨인지 모를 숨을 깊게 내쉬었다.
"감사드립니다. 진심으로요. 사실 진작 감사를 드렸어야 하는데. 다 알면서 입도 뻥끗 안 해주셨으니까 말입니다. 백담비 씨도 그렇고······."
"고맙긴? 뭐 이 정도로. 아무튼 입 맞추는 거 말고도 내가 더 도와줄 거 있으면 얼마든지 말해요."
"아니, 괜찮습니다. 아무튼 말씀만으로도 정말 고맙군요. 저희가 같이 일할 당시 두 분께서 절 썩 좋아하지 않는 눈치였던 걸 고려하면 더욱 그래요.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놈의 비밀을 끝까지 지켜준 셈이니까 말입니다."
"썩 좋아하지 않긴 왜 안 좋아해? 일 년이나 같이 일했으니 정 좀 쌓일 만한데. 담비 씨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내 경우는 그래요."
나이토 상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정말이라면 의외네요. 솔직히 말하자면 여전히 절 싫어하시는 줄 알았는데."
"이 사람이 참 눈치가 없네. 아무튼 공지로 곧 해명한다고 말 안 했나? 해명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사람들이 수상하게 여길 텐데 빨리 공지글이나 올려봐요."
나이토 상은 그 말대로 했다. 빠르게 공지글 하나와 해명영상 하나를 촬영해서 올렸는데, 방금 나와 말을 맞췄듯 베헤모스 토벌 당시에 각성했으며 그 사실에 사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나이토 상이 왜 몇 주 전, 혹은 며칠 전에 각성했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미 몇 달이나 지난 베헤모스 토벌 작전에서 각성했다고 주장하려는지 그 이유를 곧 알게 되었다.
- 하기야 베헤모스 사태에서 각성한 사람 많다더라. 워낙 위급하고 스트레스 넘치는 상황에선 평상시보다 각성할 확률이 대폭 커진다던가
- 그런데 각성해놓고 모를 수가 있음? 각성할 때 온갖 환영을 보게 된다던데
- 베헤모스가 정신파 퍼뜨리면서 거기 있던 사람들 싹 다 환영을 보거나 어지러움을 느꼈으니 각성 증상이랑 구분이 안 될 만도 하지?
- 몇 달 전에 각성해놓고 지금껏 숨긴 건 좀 어이없긴 한데, 확실히 늦게 깨달았다면 뭐 그러려니 해야······.
- 진작 깨달았으면서 숨긴 거면 뭐 어떰? 남 나라 지켜주려다 각성한 건데 감히 그거 갖고 비난할 수 있나?
채팅창을 보아하니 베헤모스와의 전투에서 각성했단 사실이 일종의 면죄부로 작용하는 느낌이었다.
몇 달 전에 각성한 사실을 왜 지금 밝히냐고 따지는 사람들조차 너무 강하게 비난하지는 못하는 것이, 베헤모스 사태는 요새 한국의 쾌거요 승리한 성전쯤으로 여겨지는 상황 아닌가.
그 성전에 참전하여 발생한 일에 너무 큰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나도 모르는 사이 생겨나 있었다.
- 남의 나라 지켜주려다 방송 아이덴티티 사라졌는데 욕먹을까 봐 이도 저도 못 한 거 불쌍하긴 불쌍하네 진짜
그리하여 팬들끼리 좀 당황스럽고 충격스럽지만 일단 넘어가잔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걸 보며, 나는 나이토 상이 내 생각보다 더 계산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매사에 남들 반응을 고려해서,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가며 헌터 겸 스트리머 생활을 해온 모양이지?
저걸 보니 나이토 상이 왜 지금까지 각성자임을 숨겼는지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러는 게 자신에게 유리하다 생각해서 숨겼으리라. 비각성자인데도 각성자 못지않게 잘 싸우는 컨셉이 자신의 유명세에 도움 되리라 생각해서.
백담비가 왜 그토록 나이토 상을 혐오했는지도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그 속 좁은 가시나가 헌트웹에서 뒷담 좀 들었다고 내내 원한을 품은 줄 알았더니 그보다 더한 이유가 있었던 모양인데.
얼음 능력자로서 모든 일에 손해를 보며 살아온 그녀, 그 능력이 빈약하여 제대로 된 각성자 헌터로 대우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비각성자 헌터로 행세하지도 못한 채 어디에도 섞이지 못했던 그녀가, 각성자인데도 그 사실을 숨기고 일반인 이상의 대우를 받아온 나이토 상에게 어떤 심정을 느꼈는지는 알 만하다.
또한 그녀는 아이돌 출신으로서 사람들의 관심과 인정을 갈구하던 마당 아닌가. 이 와중에 나이토 상은 그놈의 비각성자 행세로 그녀가 원하던 모든 것을 얻어냈으니 그 또한 화가 났으리라.
심지어 그 비각성자 시늉이 계속된바 백담비가 애타게 원하던 상마저 빼앗겼으니, 그녀가 느꼈을 울분이며 혐오감은 나의 그것보다도 훨씬 구체적이고도 강렬한 것이리라.
그런데 왜 지금까지 진실을 밝히지 않았을까. 사람들한테 말하지 않는 건 그렇다 치고 내게도 말하지 않은 건 대체 어째서?
직접 내 라운드걸에게 전화해서 물어보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사실이 제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까발려요? 같이 일하는 헌터 약점이나 까발리는 게 제 평판에 무슨 도움이 된다고······」
하기야 백담비가 헌터로서 지닌 평판은 박미형 씨의 도움을 받고서야 겨우 팀을 구할 수 있었을 만치 최악이었지 아마?
심지어 그녀는 각성자로서 대폭 성장한 지금도 김극 버스에 얹혀서 성장했단 식으로 온갖 음해를 받는 마당이다. 이미 좋지 않은 평판을 더 낮출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익명으로 까발릴 수도 있지 않았나?"
「익명이 뭔 소용이겠어요? 정령 수준의 능력자가 희소하고, 그 주변에 정령 능력자라곤 저밖에 없으니 누가 까발렸는지 뻔히 보일 텐데」
"저한텐 왜 말 안 했는데요?"
「김극 씨도 나이토 상 싫어하는데, 제가 그 사실 알려주면 남들한테 대뜸 까발릴까 봐요. 김극 씨가 그리 까발려도 옆에서 제가 알려준 게 뻔할 테니까 그냥 입 다물었죠. 그리고, 뭐······」
"그리고 뭐요?"
「사람이 의리가 있지. 아무리 싫어도 같이 목숨 걸고 싸워온 처지에 대뜸 약점 까발리는 게 말이 되나요. 제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요?」
백담비가 그리 말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의리라니? 추악하기 그지없는 내 라운드걸의 내면에도 그런 것이 존재했단 말인가?
"예. 그리 보였는데······."
「아, 화나. 어이가 없네? 사냥 끝나고 돌아와서 밤에 두고 봐요」
실실 웃으며 통화를 종료한 다음, 나이토 상 해명방송의 채팅을 다시 확인했다.
내 표정이 다시 굳었다.
- 베헤모스 토벌 참가했다가 각성했다고? 암만 봐도 그보다 훨씬 전에 각성한 것 같은데 ㅋㅋ
- 신경가속 능력 특징이 우월한 반사신경으로 놀라운 사격 명중률이며 말도 안 되는 상황판단력, 곡예에 가까운 행동을 거듭해서 보이는 건데 이것들은 예전 나이토 상의 특징과도 정확히 부합하지 않나?
- 믿을 게 하나도 없지. 이 새끼가 이미 한 번 구라쳤다고 밝혔는데, 구라쟁이가 어디 구라를 딱 한 번만 치고 말았을까?
- 기다려라 이 구라쟁이 새끼. 예전 방송 싹 뒤져서 이 새끼 또 구라친 거 밝혀낸다
이번 해명으로 기존 팬들은 대충 덮고 넘어가는 분위기인 한편, 안티들은 당연히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베헤모스 토벌에 참여해서 각성해놓고 숨겼단 사실은 크게 비난하기 힘드니까, 그때 각성했단 주장 자체가 거짓임을 밝혀내려는 듯했다.
한편 나이토 상도 채팅창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는 듯, 스마트폰을 노려보는 그 표정이 심각했다. 내가 다가가서 물어보았다.
"괜찮겠어요?"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는데?"
내 말에 나이토 상이 억지로 지은 게 분명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안 괜찮아도 뭐 별수 있겠습니까? 사냥이 우선인걸요. 방송이랑 제 이미지는 나중에 신경 쓸 문제고요."
뭐, 그건 맞는 말이었다. 가뜩이나 사냥 한번 제대로 해보겠다고 비싼 돈 들여 나까지 초빙해온 마당 아닌가.
게다가 다들 목숨 걸고 하는 사냥인데, 방송이 나락 갈 것 같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사유로 중단할 수야 없다. 나이토 상도 방송인이기 전에 헌터인즉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사냥이 계속되었다.
*******
139화 나이토 상 - [4]
고블린은 수가 많다. 그리고 너무나 쉽게 번식한다. 식량이고 사냥감이고 찾아보기 어려운 소드 월드에서조차 고블린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었을 정도다.
그 놀라운 번식력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고블린들의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희미했던 것은 놈들이 데스클로와의 생존경쟁에 밀린 탓인데, 베헤모스 사태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는 모양이다.
사태 당시 고블린들이 사방에 널린 괴수와 인간의 시체를 식량으로 확보해서, 그리고 바닥에 나뒹굴던 총기로 무장하여 데스클로들과의 싸움을 대등하게 이어나갈 수 있게 돼서 고블린들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재 경상도에 내려온 고블린들의 수는 최소 수천에서 수만에 달한다고 추측되는 상황이다. 게이트에 처박힌 괴수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낼 수 있는 나조차 일일이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 규모다.
"고블린들이 평소엔 소규모 단위로 나뉘어서 약탈에 나서긴 하죠. 원래 대군이 다 함께 움직였다간 보급이 안 되니 따로따로 흩어져서 움직이는 법이니까요. 현재 우리가 그 소규모 고블린 부대를 소탕하는 중인데, 계속 이럴 순 없습니다."
"어째서?"
"이미 근처 군부대에서 시도해본 일이거든요. 군부대에서 여러 차례 소규모 무리를 해치우길 반복하니 고블린들이 작정하고 기다렸는지 게이트에서 말도 안 되는 규모가 쏟아져나와선 또 한 번 작전에 나선 부대를 전멸시켰다나요?"
그리고 헌터들이 군부대의 작전을 반복하는 중인 지금도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필요한 것이라고.
"그러니까, 또 고블린들이 감당 안 되는 규모로 튀어나오면 그때야말로 내가 나서야 한단 거 아뇨?"
"그렇죠? 그땐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듯 나는 결정적인 상황에 나서는 것이 임무였으므로, 자잘한 일에 나서선 안 됐다.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전력이 함부로 나서서 그 존재가 노출되었다간 고블린들이 지레 겁먹고 숨어버릴 테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나이토 상이 사냥하는 동안, 인터넷 방송으로 헌터들의 활동이나 지켜보았다.
화면 속, 나이토 상은 언제나처럼 베테랑다운 솜씨로 괴수들을 소탕하고 또 소탕했다. 팀을 이끌고 고블린들과 총격전을 벌이면서 그 혼자 절반 이상의 고블린을 사살했다.
감탄이 절로 나올 상황이지만, 나이토 상이 그리 활약해도 시청자들 사이에선 예전과 같은 열렬한 반응이 나오지 않았다.
- 신경가속이 좋긴 좋네? 총격전에서도 독보적이구만
- FPS로 치면 혼자 핵 쓰고 총 쏘는 셈이니까
보다시피 이제 나이토 상이 활약하면 사람들의 칭송은 나이토 상 개인을 향하지 않았다. 그들의 칭송과 관심은 나이토 상이 각성한 능력을 향할 뿐이었다.
또한 그들의 반응들은 예전보다 영 심드렁해 보이는 게, 나이토 상이 아무리 잘 싸운들 신경가속 각성자로서 저 정도는 당연하지 않으냔 식이었다.
나이토 상이 비각성자이기에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던 그의 모든 활약은, 그가 각성자임이 밝혀진 지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으로 전락했다.
어떻게 그토록 반응이 달라질 수 있는지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 어려웠다.
예나 지금이나 나이토 상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그가 각성자인지 비각성자인지 여부로 반응이 저토록 확 달라진단 말인가? 예전 자기네 기억을 새로 덮어씌우기라도 했나? 뻔뻔한 인간들 같으니.
울컥한 채 계속 방송을 보던 중이었다.
- 어?
- 지금 큰일 난 거 아닌가?
나이토 상과 헌터들이 또 한 무리 고블린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중에, 그 뒤쪽 게이트에서 기어 나오는 큼지막한 덩어리가 화면에 잡혔다.
보아하니 또 오거였다. 이번에도 삼 미터급.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는 중에 저 정도 괴수에게 덮쳐졌다간 끝장이다. 신경가속 능력이고 뭐고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다.
「김극 씨!」
무전기에서 날 부른 것과 내가 공간이동 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인천 만세!"
헌터들을 덮치기 직전이던 오거 옆에 공간이동 한 뒤, 도약하느라 공중에 떠 있던 오거의 발목을 붙잡고 땅바닥에 강하게 내리쳤다.
딱 한 번 내리쳤을 뿐인데, 그 한 번에 오거의 머리통이 으깨졌다.
시체가 된 오거를 크게 휘두르며 또다시 공간이동 했다. 헌터들과 총격전을 벌이던 고블린들 앞으로 이동한 동시에 이미 휘두르고 있던 오거를 휙 내던졌다. 그 투척에 고블린들의 절반이 휘말려서는 깔리거나 날려져서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 활약하고서 슬쩍 채팅방 반응을 보니, 나로선 흡족해야 하는지 화를 내야 할지 모를 반응이 교차하는 중이더라.
- 이게 진짜 A급이구만······.
- 나이토 상은 이런 거 못 하니까 차라리 비각성자인 척하기로 마음먹었나 보지?
뒤이어 죽다 살아난 헌터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구해주신 건 고마운데, 이제 작전계획 수정 좀 크게 해야겠는데요."
"어째서?"
"게이트 안에 고블린들이 남아서 상황 지켜보고 있었을 것 아닙니까? 놈들이 무리에 돌아가서 이쪽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더라고 다른 고블린들한테 보고하면 저놈들 행동 방식이 확 달라질 테니까 말입니다."
"돌아가서 보고 못 하게 하면 되지."
"어떻게요? 게이트에 처박힌 놈들을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아."
내게 말하다 말고 헌터가 입을 다물었다. 날 보고서야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떠올린 모양이군.
난 씩 하고 웃어주고는 게이트 안에 진입했다. 몇몇 헌터들과 함께.
헌터 하나가 한곳을 가리키며 정신적으로 외쳤다.
「저기! 저기에 고블린들 달아납니다!」
게이트 내부, 자줏빛 공간에서 고블린으로 보이는 실루엣들이 움직였다. 놈들은 이대로 무리로 돌아가려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게이트에 들어왔는데도 고블린들이 달리는 속도는 딱히 변하지 않았는데, 그걸 보니 우리에게 따라잡힐 일을 걱정하진 않는 것 같았다. 게이트 안에서는 일종의 무적 상태임을 인지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놈들의 인식이 틀렸다.
내가 공간이동 하여 순식간에 고블린들을 따라잡은 뒤, 놈들의 머리통에 손을 올렸다.
이대로 움켜쥐거나 붙잡는 건 불가능하지만 상관없다.
그대로 또 한 번 공간이동 하니, 나와 도주하던 고블린들은 다 함께 게이트 바깥으로 이동했다.
"쏴!"
갑작스레 시야가 바뀌어서 당황하는 중이던 고블린들은, 그대로 헌터들의 사격에 벌집이 되었다.
이 와중에 한 놈은 얼음 정령인 듯 총알에 맞고도 죽는 게 아니라 얼음 파편이 튈 뿐이었지만 상관없었다. 내가 주먹을 내리치자 그 머리부터 가랑이까지 가루가 되어 으깨졌으니까.
- 김극 진짜 역대 최고액수 받을 만하네······.
흘긋 방송 채팅을 보던 중에 게이트에서 헌터들이 빠져나왔다.
헌터들이 일제히 날 쳐다보았다. 그리 쳐다보는 이유를 알지 못한 내가 물었다.
"왜들 날 쳐다봐요? 잘생겨서?"
"그게 아니라, 게이트 안에서 김극 씨 바라보니 놀라워서요······."
"놀랍다니 뭐가?"
"게이트 안에서 김극 씨 영혼 보니까, 막 태양 같은 게 빛나더군요? 눈부실 지경이라 똑바로 바라보기도 어려운 게, 게이트 안에서 강준치 씨 볼 때랑 거의 비슷한 느낌······."
내 영혼이 그 정도로 성장한 건가. 흐뭇함을 감춘 채 담담한 척 대꾸했다.
"내가 강준치보다 가까이 있으니까 그리 느꼈겠지."
"그런가요? 아무튼 강준치보단 못할지 몰라도 정말 엄청나던데요. 도망치는 고블린들 못 잡았으면 큰일 났겠고요. 정신 나간 괴물이 있다면서 무리에 전파라도 했다간 작전 다 망쳤을 뻔······."
헌터들이 내게 떠들던 중에 나는 나이토 상을 보았다.
방금 게이트 안에서 그의 영혼을 보았건대, 그 영혼이 부풀어 올랐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예전과 달리 선명하게 빛나는 그 영혼은 분명히 각성자의 그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앞서 게이트에 뛰쳐들어간 안티 팬이 주장했듯 크고 밝게 반짝이는 수준은 결코 아니어서, 나나 다른 각성자 헌터들에 비하면 초라할 뿐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비각성자인 척 헌터 노릇을 하기로 맘먹은 걸까?
모르겠다. 하여간 비난할 맘까진 들진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로선 아닌 모양이다.
*******
이후로도 나이토 상과 헌터들은 여기저기 움직이며 경상도에 들끓는 고블린들을 제거했다.
내가 정신적 그물망으로 어느 위치에 고블린들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면, 나이토 상이 헌터들을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그때마다 목숨 건 총격전이 이어졌다. 나이토 상이 가장 맨 앞에서 싸우며 모두를 이끌었으며, 헌터 몇 명은 크고 작은 총상을 입고 병원에 실려 갔지만 아직 사상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듯 순조로운 사냥이 이어지던 중에, 문제는 역시나 외부에서 생겨났다.
"마츠모토 씨? 이것 좀 봐요!"
한 헌터의 호들갑이었다. 나이토 상이 그가 내민 스마트폰을 보고 신음했다.
"くそ······."
욕설일 게 분명한 일본어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뭔 일인지 싶어 인터넷을 뒤져본 나도 상황을 금세 눈치챘다.
인터넷에 웬 영상이 올라왔는데, 나이토 상의 예전 사냥 영상이었다.
나이토 상이 베헤모스 사태 전에도 각성자였다는 증거······.
나도 함께했던 사냥이었다.
인천 탈환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당시, 헌터들이 고블린을 추격하다가 놈들이 쏜 총알에 맞을 뻔한 일이 있다.
그때 내가 헌터들 앞에 공간이동 하여 대신 총알을 맞아주는 희생정신을 발휘했는데, 그 장면은 나이토 상의 유튜브 영상으로 올라오지 않았다.
당시 나로서는 몸 바쳐 동료들을 지켜낸 그 거룩한 장면이 모두에게 공개되지 않아 불쾌했음을 기억했다(물론 그때도 나이토 상을 원망하진 않았다. 그저 사정이 있었겠거니 여기고 아쉬워했을 뿐이다).
당시에는 영상을 찍어놓고 저장하질 못했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올리지 못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때 그 영상, 아마도 라이브 방송으로 송출된 것을 누가 저장했던 듯한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그 영상에서는 프레임 단위로 상황을 쪼개어 분석했다.
영상 속, 나이토 상은 고블린을 향해 방아쇠를 누르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내가 공간이동 하여 총에 맞을 뻔한 헌터들의 앞을 가로막은 순간, 나이토 상의 손가락에서 힘이 풀렸다.
내 공간이동을 곧바로 인지하고 방아쇠를 누르려다 중단한 것이다!
방아쇠 한 번 누르는 동작은 '딸깍'하고 끝난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방아쇠를 완전히 누를 뻔했다가 돌발상황이 일어났다고 해서 도중에 멈추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상 속 나이토 상은 그렇게 했다.
- 아, 저거 그때······. 어쩐지 나이토 상 유튜브 채널엔 그때 영상이 안 올라오더라니 들킬까 봐 일부러 안 올린 거였구나?
유감스럽게도 저 추측이 맞는 듯했다.
지금 보니 당시 나이토 상은 영상을 저장하지 못해 올리지 않은 게 아니라, 일부러 올리지 않았던 게 확실했다.
자신이 그토록 기민하다 못해 초인적인 반응을 보이는 장면을 남겼다간 각성자라는 증거가 될 테니까.
"아, 진짜 왜 이렇게까지······?"
나이토 상은 여전히 스마트폰을 노려보며 신음하는 중이었다. 나는 나이토 상을 슬쩍 보며 생각했다.
나이토 상 저 친구, 사기꾼인 줄은 진작 알았지만 여러모로 적극적인 사기꾼이었구나. 각성자임을 들키지 않으려고 영상 삭제를 비롯해 별짓을 다 했던 모양이지?
언제나 나이토 상을 좋게 생각해온 나마저도 약간 '추하다'는 감상을 느낄 정도였는데, 안티 팬들이 어찌 느꼈을지는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날 저녁, 하루치 사냥을 마친 헌터들이 호텔에서 쉬던 중이었다.
호텔 앞에 한 무리 사람들이 몰려왔다.
"나이토 상은 진실을 밝혀라!"
말할 것도 없이 안티 팬들이었다. 거기에 이런 논란마다 끼어들려는 인터넷 방송인들이며 기자들까지.
헌터들은 대응하지 않으려는 듯 호텔에 처박혀 나오지 않았지만, 저들은 강제로라도 문을 따고 들어오려는 듯한 기색이었다.
보다 못한 내가 나섰다.
"어? 김극!"
내가 공간이동 하여 그들 앞에 나타나니,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먹잇감을 발견한 얼굴들. 그중 하나가 내게 마이크를 들이대며 물었다.
"김극 형! 형은 진작 다 알고 계셨죠? 영상에 형도 나왔는데!"
억지로 친한 척하는 투에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누가 형이냐? 비각성 찌꺼기가 어딜 감히.
"몰랐는데? 지금도 딱히 모르겠고."
"영상 안 봤어요? 거기서 나이토 상이······"
"영상 봤지. 그런데 그 정도 반사신경이면 일반인들도 가능한 것 아닌가? 확실한 증거인지는 잘 모르겠던데."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하니 남자는 답답한 듯했다. 협박 비슷하게 시도하는 걸 보니.
"형은 정확히 몰라도, 백담비 씨? 그 누나는 정령이니까 진작 알았을 것 같은데요? 형이 제대로 말 안 해주시면 그 누나한테 찾아가서 물어봐야······"
놈이 그리 말한 순간, 난 놈이 들이대고 있던 마이크를 한 손으로 잡아 으깼으며 내 손바닥에서 부품과 스파크가 튀었다.
놈이 눈을 크게 떴다. 다물고 있던 놈의 주둥이에 내 검지를 집어넣었다.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꿰인 물고기처럼, 내가 검지를 들어 올리자 놈의 몸이 통째로 들어 올려졌다. 검지가 제 입천장을 파고드는 것이 아픈지 몸을 버둥거리는 놈을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담비 씨한테 뭔 등신 같은 질문 하는 순간 넌 나한테 죽어."
내가 과격하게 구는 것 같아도 최대한 화를 참는 중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몇 놈 뼈라도 부러뜨렸다간 이 일에 연관된 나이토 상에게 피해가 갈 수 있으니까.
"내 말 알아들었냐?"
내가 묻자 놈이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놈을 내려놓은 뒤, 경악한 얼굴로 날 쳐다보며 스마트폰이며 카메라를 들이대는 중인 나머지 놈들에게 내가 윽박질렀다.
"여기 남아서 나이토 상한테 등신 같은 질문 해도 나한테 죽고. 열심히 사냥하고 쉬려는 헌터들한테 달라붙어서 쫑알쫑알 귀찮게 해도 나한테 죽는다. 이것도 알아들었지?"
이 협박에 저들이 겁을 먹을까, 아니면 오히려 화가 나서 나에 대한 논란이나 일으키려 할까?
어느 쪽이건 좋다. 나에 대한 논란이 크게 터져서 이번 논란을 덮을 수 있으면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그리 판단한 나는 그 자리에서 계속 윽박질렀다.
"알아들었으면 꺼져라, 어서."
140화 나이토 상 - [5]